소설리스트

3권-11장. 단검과 배냇저고리와 철화(2) (11/25)

11장. 단검과 배냇저고리와 철화(2)

“이 사태에 대해서 로렌스 경의 조언을 구하고자 데리고 온 겁니다.”

시리스가 말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아스틴은 조금 당혹했다. 사실 그간엔 에리크를 보는 일도,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녀가 멀리했다기보다는 에리크 본인이 마주하는 것을 꺼리는 느낌이었다.

가끔 만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는데, 에리크도 그런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의무감으로 에리크를 신경 써 주려던 아스틴도 딱히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아이를 가지고 난 이후에는 집사와 하인들에게 맡겨 두고는 존재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다니.

예상은 되었다. 애초에 시리스가 에리크를 데리고 온 이유가 이런 상황을 위해서였을 테니까. 그것은 상당히 잔혹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아스틴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잘 지내고 있나?”

“온정을 베풀어 주셔서 문제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할 말이라는 게?”

“‘철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정보를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들어 볼 필요는 있었다. 말없이 에리크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근처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시리스가 지팡이를 들더니 휙 휘둘렀다.

방 안의 모든 문이 잠기더니 커튼이 절로 닫혔다.

“자네는 그 단어가 익숙한 모양이군.”

“-스칼라이 군의 상층부 인사라면 대부분은 알고 있는 단어입니다. 일종의 밀정들이지요. 선왕께서 조직한 집단으로, 전하를 섬기라는 이유로 만드셨습니다. 실제로 전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냈지요. 그야말로 뭐든지, 그 상대가 누구든 전하의 명에 반하는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처리하는 암살의 전문가들입니다.”

사실 에리크는 공작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밀고자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니까. 하지만 사실상 심문받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 얼버무리거나 감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공작과 부군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을지도 몰랐다.

우선 에리크는 공작의 통찰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들이 배신했다는 겁니다. 이건 벌써 5년 전의 일입니다만. 어떤 무지한 자가 감히 전하를 암살하려 했던 때가 있었지요. 철화의 수장 또한 함께 회유에 넘어가 가담했습니다. 그 사건은 아시다시피 참혹한 실패로 끝났고…. 사실 저는 그들이 모두 사형당한 줄 알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분명 그들 전부를 공개 사형에 처하셨거든요. 그리고 사지는 스칼라이 전역의 제후들에게 보내 경고하셨지요. 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자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 거지? 죽은 자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그에 대해서는 저도 모릅니다만. 아마 전하께서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스틴은 그의 이야기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의 몇 가지 부분을 대조해 보았다.

아직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고 어떠한 답이 도출된 것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어떤 결론에는 다다르게 되었다.

“자넨,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섭지 않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입을 다물고만 있겠습니까.”

“후환이 있을 텐데?”

“저는 언제까지나 두 분의 안위를 걱정할 뿐입니다.”

에리크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스틴은 시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리스, 당분간 로렌스 경을 자네의 별채에서 지내게 해. 부군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시리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 * *

길리어드는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에서야 나타났다.

아스틴은 그제야 몸을 완전히 말리고는 침대에 오르고 있었다. 집사가 제발 담요 좀 덮고 있으라며 수선을 피우고는 약을 가지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아까부터 몸이 뜨겁고 이마가 지끈거렸다. 자꾸만 미간이 굳고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뻣뻣했다.

사실 근 몇 년간 백병전을 치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레이스나 디안사와 같은 전사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길리어드가 무릎 근처에 앉아 그 모습을 살폈다. 그날따라 얼굴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그는 아스틴의 몸에 둘리어 있는 담요가 흘러내리자 그것을 다정하게 묶어 몸에 밀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는 한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은 와락 몸을 끌어안았다.

“나는… 당신한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안도하며 내뱉는 한숨이 마치 우는 것처럼 들렸다.

그 무렵 집사가 다시 들어와 쌉싸름하고 뜨거운 약차가 담긴 쟁반을 옆에 놓인 콘솔에 내려놓고는 돌아섰다. 그는 그것을 받아 아스틴에게로 내밀었다.

“얼른 먹어요.”

그녀는 걱정 가득한 시선을 부러 외면하듯 찻잔을 감싸 쥐기만 하고는 마시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담담히 입술을 열었다.

“아스틴, 이번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줘요.”

“무슨 문제 말이죠?”

“철화를 말하는 거야. 당신도… 에리크를 통해 들었을 거 아닌가. 좀 더 상황이 명확해지면 내가 말해 주려고 했는데… 당신이 먼저 알아냈더군.”

아스틴은 대답하지 않고 찻잔의 향을 맡았다. 몸을 진정시킨다며 주고 간 약의 맛이 어째서인지 매우 쓰고 불쾌한 향기를 풍기는 듯했다. 한 모금 입술을 대자 예상했던 대로 비릿하고 미끈거리는 희한한 느낌이 혓바닥을 구르면서 목구멍을 톡 찔렀다.

그녀는 꾸역꾸역 그것을 들이켜다가 잔의 밑바닥이 보이는 순간 내려놓고는 쟁반 위에 엎어 버렸다. 다행히도 그나마 효험은 좋았다.

길리어드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틴은 담담하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의 부하들이었다고 들었어요.”

“한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아니야.”

“정확히 어떤 자들이죠? 그들은.”

아스틴은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표정을 한껏 차분히 가라앉히며 물었지만, 길리어드는 어째서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심 답답했다. 사실 상황이 심각했다. 그 자리에 녹스턴 경이 함께 있었던 만큼 사태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커져 모든 가신이 적을 찾아내 보복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길리어드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답답하게 자신을 내려다만 보고 있는데, 아스틴은 침묵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오래되고 늙은 고목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해서 남편과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암살이라는 건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고 이미 마르첼을 통해 이후의 처리를 명해 놓은 상황이었기에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그가 나서게 하고 싶지 않았다. 휘말려들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됐어요. 당신은-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길리어드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느새 고개를 흔드는 아스틴의 모습에서, 답답함과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스틴의 손을 붙잡았다.

“아스틴, 이렇게 부탁하겠소. 난 당신의 남편이잖아….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죽을 뻔한 사람은 나예요. 그러니까 내 일이란 말이에요.”

길리어드가 한껏 실망한 채 시선을 내렸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함정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관여하지 말아요.”

게다가 만일 길리어드가 없었다면, 그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사건을 단순히 자신을 노린 단순한 암살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권력자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야 어디에든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자, 금방 이것이 계략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실 내내 궁금했다. 그들이 정녕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 자리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단검에 치명적인 독액을 발라 놓거나 혹은 그보다 더 노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책 정도는 지니고 있으니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었을 테지만, 생각을 깊게 해야 했다.

상대방은 감히 펠로데의 성역을 침범할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어쩌면, 철화와 길리어드의 관계를 알고 있을 정도로 강한 정보력도 보유하고 있을 터였다.

대륙에서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라면,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예측하기는 쉬웠다.

바로 그녀 자신이 아니라면, ‘그’ 인물이다.

그래서 아스틴은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렸다. 결국 이것은 자신에게서 남편을 떼어 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혹은 ‘경고’이거나.

“나는 괜찮아요. 정말.”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 쉽게 행동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렇게 누워 있는 판에 부군인 그가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틴은 말없이 길리어드의 왼쪽 가슴을 쓸었다.

“ 그러니까, 당신도 우선 진정해요.”

아주 굵은 뱀이 꿈틀꿈틀 제멋대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박동이 불규칙하게 느껴졌다.

길리어드는 그것을 따라 미친 듯이 날뛰는 마음속의 무언가를 억지로라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앞에서는 이만해야 할 것 같았다. 짧은 부정에서, 많은 것을 알아차렸던 터다.

그는 입술을 다물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고독하고 애절해 보이는 눈동자가 한참 그녀를 응시했다.

“다행이야. 정말 무사해서.”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은 미소를 지었는데, 아스틴은 그제야 안도하면서 자리에 눕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씁쓸한 듯 보이면서도 안락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저물어 가는 노을처럼 파르라니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길리어드가 말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천천히 침상 위로 뉘어 주었다.

“부디 당신의 자리를 지켜 줘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아스틴은 아랫배를 감싸 안듯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았는데,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호흡은 다소 불온했다. 그것은 매일 같은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길리어드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정제된 연약함.

길리어드는 조금은 떨리는 손을 뻗어 하얀 이마를 잠시간 쓰다듬었다.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표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었지만, 가슴 속만큼은 불안과 분노로 비틀리어 대체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 * *

침실을 벗어나는 길리어드의 표정은 싸늘히 굳어 있었다.

괴로운 기억이 흩뿌려진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을 자극해 왔다.

철화는 모왕이 귀족의 자제들로부터 엄격히 선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감정도 인격도 배제당한 채 철저히 그의 가축으로서 길러졌다. 왕자의 명령을 위해서는 설령 제 가족의 목이라도 망설임 없이 바칠 수 있는 존재로 말이다.

모왕은 강한 군주였지만 매사가 지나치게 비정했다. 정도를 모르는 비정함의 끝에 결국은 자신을 망쳐 버렸으니까.

하지만 길리어드에게 있어 인간은 결코 개나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왕의 사후,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짐승으로 자란 자들에게 인간의 삶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주인에게 버려진 사냥개처럼 끙끙 눈물을 흘리며 불안해하던 그 모습에, 그는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그리고 5년 전, 그렇게 걱정했던 무언가가 결국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처참한 결과로 나타났다.

철화는 누군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암살에 가담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들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났을 때 왕가를 향할 비난을 생각해야 했다. 결코 모왕의 명예에 먹칠이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결국, 그는 철화를 스칼라이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로 보내었던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다시는, 내 곁을 찾지 마라.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그는 참으로 몰랐다.

허탈감이 느껴졌다. 결국 자신이 자비와 관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낱 허울 좋은 자기만족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그래. 결국 아스틴을 해치려 했던 자들을 풀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자신인 셈이다.


 

서슬 퍼런 달빛을 등에 짊어진 채 홀의 계단을 내려갈 무렵이었다.

마주하듯 올라오는 존재가 있었다. 바우키스였다.

지난해의 추수 감사제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길리어드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혼탁한 눈동자에서 혐오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질적인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충격을 받았다. 한 나라의 왕족이자 태자로 태어났던 그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자신에게 묻어 있는 추악한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살게 되면 겉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아스틴의 말대로.

“…공작께서는?”

“막 잠들었습니다. 딱히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내일 하시죠.”

“그런데 곁에 있지 않고 어딜 가는 거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자들을 만나러 가는 건가? 자네가 남부에 풀어놓은 그 자들을?”

그 말에 길리어드는 멈추어 섰다.

바우키스가 꺼림칙했던 건 이런 점 때문이기도 했다.

대륙에서 소위 ‘현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그만큼 정보를 얻고 다루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다.

그는 바우키스가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튼, 마법사들은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이니까.

그건 당대 길리어드처럼 기사나 전사에 속하는 무장들이 흔히 가지는 편견이었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영역들을 다룬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왔던 것이다.

물론 길리어드는 편견에 휩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꺼림칙한 느낌을 거둘 수가 없었다.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굳이 지금과 같을 때는 아니지. 그리고 자네는 이제 태자가 아니야. 아직도 스스로가 스칼라이의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로 죄책감이나 다른 그 무엇도 느낄 필요가 없네. 비록 자네가 과거에 했던 짓이, 그리고 자네의 태생이 발목을 얽어맨다고 해도 그건 그저 속으로 참고 견뎌야 할 일이지. 나머지는 공작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야.”

길리어드는 표정을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누구에게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건 보통 사람이라면 다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바우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길리어드는 잠시 망설이다 화를 가라앉히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압니다. 저는 그저 왕좌를 버린 왕족에 불과하다는 걸요. 이미 버린 것을 후회하지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은 있지요. 무언가를 버리면서 후환을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걸 참으란 말이네.”

길리어드는 이제 목소리에 힘을 조금 주었다.

“바우키스, 저는 제가 당신이 못마땅해하는 만큼이나 부군의 자리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이런 저라고 해도, 그것 하나는 압니다. 내가 그녀의 사람으로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요.”

“복수에도 때가 있는 법이야.”

“압니다. 하지만 나는, 아내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없앨 겁니다. 그녀가 나를 칼이라고 불러 주는 한.”

길리어드는 그 말만 남긴 채 바우키스를 스쳐 지나갔다.


 

성문의 출구로 통하는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는 굽이를 그리고 있는 도로를 지나, 서문을 거쳐 성 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한 무리의 기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대부분은 칠흑 같은 코트로 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펠로데의 영토를 지날 때는 500명에 육박했다.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길리어드의 모습에 듀랜트가 입술을 열었다.

“조용히 잘 지내던 자들이, 갑자기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유 따위가 중요한가.”

“…그래도 혹시 모르지요.”

듀랜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화를 사지는 않기 위해 신중했다.

세상에 사냥개를 풀어놓고 그 자취까지 잊어버리는 주인은 없는 법이다.

그간 왕자는 철화들에게 자유롭게, 평온하게 살라 했으면서도 좀처럼 감시의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철화의 본거지와 현재의 족적을 주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

그런데도 그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아낸 게 없었다.

어쨌든, 듀랜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또 이렇게 피를 묻히고 짐을 지려는 행동이. 물론 자신이 그 행동을 두고 무어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 * *

달빛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시골길을 간간이 빛내고 있던 가옥의 불빛도 꺼질 즈음, 기사들은 루셰드 강의 어느 가느다란 지류에 도착했다.

그들의 행진은 지진을 일으키는 듯 거칠고 사나웠다. 하지만 말도 사람도 누구 하나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가 되었을 무렵, 그들은 드라스터를 지나 백색 산맥의 동쪽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흔히 시골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어느 밀밭의 울타리에 앉아 있던 까마귀 떼가 말발굽 소리에 일제히 날아올랐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구릉, 길리어드는 희미하게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을은 마치 비어 있는 것처럼 고요했지만, 그는 안에서 새어 나오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정경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잔잔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웃음, 행여나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부모들의 잔소리와 순진무구한 나무꾼 청년들의 대화, 우물 앞에서 빨래하는 처자들의 소담.

그것이 아마 철화가 일구어낸 작은 평온이었다. 언젠가 길리어드가 그렇게 살아가 달라고 부탁했던 그대로.

불편한 죄책감이 잠시간 그의 마음속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죄책감을 버려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이제는, 스칼라이의 태자가 아니라 펠로데의 공작 부군으로서.


 

두두두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기사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마을의 입구에 쌓아 놓은 건초 무더기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딸랑딸랑 종을 치는 소리와 방범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경고의 비명이 터져 나갔다.

이것은 그들의 잘잘못을 떠나 일종의 철화에 대한 선고였다. 그들에게 있어 대륙의 어디에서도 평온히 살아갈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길리어드는 그들의 뒤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었고, 이것이 실수에서 비롯되었는지 의도적인 일인지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과거가 감히 아내를 건드렸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르는 기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광장에 몰아넣었다.

사정없는 칼날과 주먹질, 발길질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관자놀이 부근이 피범벅이 된 농부가 어느 기사의 발에 어깨를 맞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한 청년이 기사들에게 정강이를 얻어맞고 쓰러지자 기사 중 하나는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워서는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이유 없이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그들을 향해 무너진 담벼락의 조각들을 던지면서 광장을 벗어나 어디론가로 도망쳤다.

기사들은 그들을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대신 데려온 사냥개를 풀었다.

개들은 잔인하고 용맹했다. 실제로 마물들의 고기를 먹여 가며 전투견으로 길러진 그들은 인간의 목덜미를 물어 살점을 뜯어내고 고기를 씹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다.

이윽고 자욱한 피비린내와 함께 마을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살인자들아!”

어디선가 절규 섞인 외침이 들려왔지만,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밤이 되었고, 시체를 뜯고 있던 붉은 눈의 사냥개들이 우우 달을 보고 울부짖는 시간이 찾아왔다.

따닥따닥 마을을 태우는 소리가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짐승의 절규처럼 불안하게 퍼져나갔다.

철화의 잔당들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시체가 즐비한 마을의 가운데서,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로부터 살아남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암살의 전문가라고 해서, 무적은 아닌 법이다.

결국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철화가 그렇게 전멸하고, 그 한 명이 길리어드의 앞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마을로부터 북쪽에 있는 어느 야트막한 구릉, 적어도 수백 년은 산 듯한 거대한 떡갈나무 아래에 기댄 채, 길리어드는 담담히 불꽃의 향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듀랜트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데려왔습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다리 한쪽이 잘려 나가고 손이 묶여 나타난 철화의 우두머리는 길리어드와 얼굴이 너무도 닮은 아노르인 청년이었다.

스칼라이는 국가적으로 판단해서 위험한 상황의 경우 왕족 본인보다는 대행을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청년에게는 이름조차 붙지 않았다.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간 상태였지만 그는 담담히 서서 길리어드를 마주했다.

서로 마주 보고서자 그들은 복장을 제외하고는 얼굴이 거의 똑같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청년은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너무도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길리어드는 덤덤히 물었다.

“ 왜 그랬나.”

“ 알잖소. 우리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이용한다는 걸.”

“ 나는,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 아니, 당신은 우리를 끝끝내 ‘버린’ 거야.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맞는 ‘복수’를 한 거지. 왕자. 당신이 우리를 처음 버렸을 때, 우리가 경고했지.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 나는-”

“ 우리는 당신의 ‘개’였지. 그리고 개들은 단순해. 전 주인에게서 버려지더라도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되면, 금방 잊어버리고 꼬리를 흔들지. 이전 주인의 모가지도 갖다 바칠 수 있을 만큼. 당신은 그러니까 우리 목줄을 손에서 놓지 말았어야 했소. 나는- 그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요.”

그리고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몰랐소. 그런데 당신이 제 발로 이렇게 찾아올 줄은-누구 말마따나 부군 자리가, 그렇게 아까운 모양이지?”

그 웃음은 광기에 가까웠다. 혐오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쳐다보던 길리어드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근처에 있던 기사가 들고 있던 쇠사슬을 사내의 목에 걸었다.

그 무렵, 사내가 몸에서 힘을 빼더니 무릎을 꿇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땅에 박았다.

그것은, 결코 에리크가 하였던 충성의 맹세는 아니었다.

사내의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이 툭 떨어졌다. 오래되고 낡은 스크롤이 덕지덕지 붙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채 말리기도 전에 사내는 그것을 이마로 깨트렸다. 곧이어 성인의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되는 불씨가 흘러나오더니 주변이 하얗게 타오르면서 엄청난 열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화염의 생령이었다.

이윽고 불길은 거대한 용의 혓바닥처럼 낼름거리며 삽시간에 사내의 전신을 잠식했다.

“뭐 해! 빨리 죽여!”

듀랜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기사들이 움직이기 전에 사내가 일어나더니 길리어드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왕자의 전신으로 옮겨붙었다. 이윽고 그를 집어삼키고 뒤에 있던 거대한 느티나무까지도 불태웠다.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왕자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듀랜트가 이번에는 의아하게도 그것을 제지했다.

“다가가지 마라!”

경악스러운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기사들은 움찔 멈추었다. 그리고는 망연하여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년은 온몸이 불꽃에 타오르고 있는데도 길리어드의 허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이윽고 청년이 뻐끔뻐끔 무어라 외쳤다. 그 목소리는 타오르는 불꽃을 통과해서 주변의 기사들에게도 들려왔다.


 

괴물. 너는 스칼라이의 수치이자, 재앙이다.


 

이후 기사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희미한 불꽃 속에서, 변함없이 일렁이는 왕자의 머리카락이 나타났던 것이다. 불꽃은 왕자의 전신을 잠식했지만, 피부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길리어드는 그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 덤덤히 불꽃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초간 그렇게 청년에게 안겨 있던 길리어드는 이윽고 그를 나무 기둥 아래로 밀쳐 냈다.

그 무렵 선연한 바람이 불어왔고, 이윽고 불길은 마치 모래처럼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타닥타닥 검은 가루가 반짝이며 흩날렸는데, 옷이 타면서 생긴 잿가루였다.

이윽고 왕자의 하얀 상반신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듀랜트가 다급히 달려와 자신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덮어 주었다.

“불을 꺼라.”

이윽고 길리어드가 말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홀려 있던 기사들은 그제야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몇몇은 그래도 길리어드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 * *

길리어드가 철화를 소탕하러 떠난 밤, 공작에게서 딱히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마르첼은 성의 경계를 열 배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아버지인 단장을 포함해 성내에 존재하는 모든 가신의 행적을 조사했고, 하인과 병사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자리를 옮기더라도 상급자에게 보고를 하도록 했다.

심지어 성내에 거주했거나 그랬던 적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들이 지난 한 달 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일일이 조사했는데, 그것은 필리시온 성소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사가 얼마나 엄격했는지 몇몇 가신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한 소란의 과정에 아스틴의 집무는 대부분 중지되었다.

그녀는 쌓여가는 일들을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한다는 의사들의 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여전히 잠은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떠나버린 길리어드의 행동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불안이 임신 초기 특유의 메스꺼움과 함께 밀려와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그녀는 간혹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평소에는 본 적도 없는 괴상한 장면들이 꿈속에 나타났다. 사지가 뒤틀린 채 상처를 입은 야수가 나타나 끙끙거리며 신음하기도 했다.

아스틴은 침실의 창가를 서성이면서 시간을 달랬다. 니콜라스 서머울프로부터 별일이 없을 거라는 보고를 들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것은 끝끝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일종의 체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갈등이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 보면 자연히 해결되는 법이다.

그래서 아스틴은 그를 의심하는 일보다도, 곰곰이 그의 표정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슬픔과 두려움에 물들어 있던 얼굴을. 그것은 단순히 아내가 죽을 뻔해서 그랬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아 애가 타는 표정이었다.

아마 뭔가를 숨기고 있는 모양인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면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또 그냥 넘길 수만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고뇌가 되었다.

신경을 써서 그런 걸까, 아랫배의 어딘가가 콕콕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무렵,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바우키스였다.

“바우키스, 당신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죠?”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바우키스는 딱히 걱정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줄 게 있어서. 무슨 검사가 그렇게도 엄격한지. 나한테도 그럴 줄은 몰랐어.”

“이런 상황에 예외를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참에 성소에 배치되는 병사들의 수를 더 많이 늘려야겠어요. 당분간은 주의해 주세요.”

“마뜩잖다만, 받아들여야겠지.”

“…미안해요, 일단은 그것보다도 제게 주실 거라는 게 뭐죠?”

예의 조금은 혼탁하면서도 깊은 빛을 띠는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스틴은 내심 그렇게 바라보는 눈빛이 꺼림칙했으면서도 담담히 그것을 마주하고 섰다.

바우키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몸이 식어가고 있구나.”

“아마 벽난로에 한빙석을 너무 많이 부었나 봐요. 그런데, 저는 지금 더워서 열이 날 지경이에요.”

“이제 조금씩 힘이 들 시기야. 그걸 그냥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쉴 수 있다면 쉬어.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쉬어야 해.”

이윽고 침대를 가리키는 손짓에 아스틴은 말없이 앉았다.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노르인 여자들은 태아에게 자신의 생기를 조금씩 빼앗긴다.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에는 통증도 따랐다.

일부는 그것을 두고 아홉 달 동안 뜨거운 불씨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표현할 정도였으니까.

촛불에 살짝만 그슬려도 피부가 따가운데, 몸속 내부를 지지는 느낌을 견뎌야 한다는 건 엄연히 심한 고통이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인족이나 다른 종족의 경우는 그것을 보고 참 유별을 떤다느니 신성하신 아노르인이니 어련하시겠냐며 비꼬았지만, 생물학적 특징이 그랬다.

이것은 흔히 아노르인 부부가 잉태를 고민하는 중대한 이유니까.

바우키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난 여전히 믿기지 않아. 내가 그토록 경고했건만, 네가 결국에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가지고 어려운 선택을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선택은 너의 자유겠지. 타인에게는 부부의 선택을 이래라저래라할 권리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실 이걸 너에게 주는 것도 망설여지지만, 그래. 어쨌든 선공작이 남겼던 유언대로 따라야 하겠지.”

바우키스가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그것은 백금으로 만든 고블릿이었다. 보통의 고블릿과는 다르게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잔의 입구를 따라 고대 아노르인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모든 생명은 나로 인해 끝나고, 나에게서 다시 시작된다.


 

문자의 아래, 화려한 부조가 도드라져 있었다.

용과 거인, 그리고 아노르인처럼 형상들이 둥그런 유리알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발아래, 수많은 인간과 짐승이 그것을 찬양하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데의 고블릿’이다. 대대로 펠로데의 공작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지. 네가 첫 아이를 가지게 되는 해 물려주라고 하셨다.”

유리알 속에서 푸른 불꽃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세 종족이 둘러싸고 있는 푸른 구슬 장식.

아스틴은 보자마자 정체를 알았다.

그것은 ‘잔향의 조각’이었다.

고대 아노르인 군주들은 대부분 저명한 마법사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힘으로 신비한 유물을 만들었는데, 지금 대륙에서는 그것을 두고 ‘잔향의 조각’이라고 불렀다.

그것에는 시간이나 공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한때는 수많은 조각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대부분은 파괴되거나 소실되어, 지금은 몇몇 아노르인 대가문만이 보관하고 있는 희귀한 보물이었다.

바우키스가 말했다.

“이 잔에는 소유자가 원하는 물체의 생명력을 빼내 가두어 두는 힘이 있다. 그것이 너의 생명이 될 수도 다른 누군가의 생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쪼록 유용하게 사용한다면 좋겠구나.”

하지만 아스틴은 딱히 전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하던 자들도 자신들의 파멸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거인족에게 이 대륙을 내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리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잔이라니. 인간치고는 다소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아버지의 의도를 알 것 같았으면서도,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근본적인 불쾌함에 좋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스틴은 잔을 근처의 콘솔에 내려놓고는 바우키스가 이어서 내미는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낡고 오래된 열쇠였는데 까마귀의 깃털을 형상화한 손잡이에서 푸르스름한 연녹색의 빛이 스며 나왔다.

“그건 뭐죠?”

“‘서약의 문’을 여는 열쇠. 너도 의미는 알고 있지?”

그녀는 말없이 열쇠를 받아들고는 내려다보았다. 수데의 고블릿이 가져다준 것이 낯선 불쾌감이었다면,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좀 더 직접적인 혐오를 안겨 주었다.

문득 무언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받혀 서서히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듯한 느낌에 아스틴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주변의 대기가 갑자기 어둠에 휩싸여 숨통을 조일 것 같은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 열쇠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날 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터다.

바우키스가 나지막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중하게 사용하렴. 절대 돌이킬 수 없으니까.”

* * *

길리어드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즈음에는 그놈의 사람 잡는 더위도 한결 저물고 창문을 열어 놓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던 터라, 아스틴은 편안하게 잠들 수가 있었다. 한빙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위적인 냉기보다도 바람이 주는 선선함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스틴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인영이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쯤 몸을 일으켜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길리어드였다. 예의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배냇저고리를 꿰매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왔으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하지, 경위 없는 행동에 그녀는 내심 실망했다. 하지만 그건 내일 이야기하자 싶어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반짇고리를 닫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는데, 아스틴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윽고 마치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듯, 조심스러운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쳐다보고 있던 길리어드가 살며시 베개를 잡더니 침대를 벗어나는 게 아닌가. 대체 이건 또 무슨 괴상한 짓인지. 아스틴은 결국 눈꺼풀을 떠올렸다.

“여보.”

그 목소리에 길리어드가 황급히 돌아서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굳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소파의 구석에 놓인 베개가 대신 말을 해 주고 있었으니까.

잠시간 머뭇거리던 길리어드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깰까 봐. 일단 여기에서 자려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고 일단 침대로 올라와요.”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아스틴은 우선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에 머뭇거리던 길리어드가 천천히 침대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베개를 빼어 들고는 자신의 옆에 놓았다.

그렇게나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고 했건만, 말 안 듣는 남편을 어떻게 제재를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우선 남편이 편안하게 눕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등을 돌렸다.

자신에게서 등을 보이는 모습에 길리어드가 다시금 상체를 일으켰다.

망설이다가 살며시 팔을 뻗더니 머리를 들어 올린다. 이런 상황에 팔베개라니, 아스틴은 결국 그를 향해 돌아누워서는 얼굴을 마주했다.

길리어드의 청람색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마치 아파보이는 듯 하면서도, 조금은 원망하는 눈동자였다.

이런 눈빛도 한두 번이지, 그녀는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미칠 노릇이었다.

“…제발, 길리어드.”

이윽고 길리어드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이마에서 콧등으로, 이어 입술 근처로. 그는 그녀의 입술이 따스하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계속 입술을 맞추었다.

이윽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스틴….”

자신을 보아달라며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스틴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들어 쿡, 그의 가슴에 못을 박듯 기대었다.

다소 과격한 행동에 길리어드는 입술을 살며시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팔을 놓지는 않았다. 살포시 감는 눈꺼풀이 옅게 떨렸다. 슬픔과 죄책감을, 억지로라도 잊어버리려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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