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결혼기념일 여행(1)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듀랜트가 황급히 들어왔다. 그는 훌쩍이고 있는 로더릭의 모습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길리어드를 향해 외쳤다.
“전하, 들으셨습니까? 시종 무관 이야기 말입니다.”
“안 그래도 바르도 경이 전해 주더군.”
“…그런데 침착하시군요.”
길리어드는 묵묵히 지도책만 넘겼다. 그 대답 없는 모습에 듀랜트가 답답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길리어드는 아내를 이해했다. 그도 그렇다시피 대륙에는 나라마다 형식이 달라서 그렇지 부실(副室)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도 태자 시절에는 사방에서 자기 집안의 여인들을 데려가 달라는 청을 받았다. 별로 여체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자신이 떡하니 안채에 버티고 있는데 시침 시종 무관을 들인다니, 그가 태자였던 시절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테다.
내심은 화도 났지만, 아내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설리번 때문이었다. 모왕의 유언을 존중하여 그렇게 자비를 베풀고 매사에 한 발자국 물러나 응대해 주었는데, 이건 뭐 심심할 때마다 자신을 괴롭힐 방법을 연구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그간 미적지근하게 굴었던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후계자의 잉태와 생산은 언제까지나 부군이 맡아서 해야 할 의무였으니까. 잉태를 위해 군주를 설득하는 것도, 안심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게끔 해 주는 것도 자신의 책무였다.
그 점에 대해서 길리어드는 이제야 조금씩 후회가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아내에게 섣부르게 접근해 미움받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러니 위엄과 품위를 지켜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좀 시도를 해 보려고 하면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부군으로서 자신의 명예와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도 그녀의 피로가 회복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문득 어렵게 설리번 로렌스를 2국서로 봉했던 모왕이 떠오르자 아스틴이 걱정되었다.
자신에게는 말도 못 하고 피로해 보이던 표정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사실 시침 시종들은 군주들에게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을 ‘남편’에 준하는 가족으로 들이지 않고 ‘무관’이라는 직위로 받아들이는 것도 철저히 군주의 안전을 위해서다.
무릇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비롯하여 소실이란 성심을 다해 군주 부부에게 충성을 바치는 법이지만, 욕심을 가지는 이들이 있는 게 문제였다.
유약한 군주를 힘으로 협박해 겁을 주고 상하 관계를 바꾸어 버리거나, 정식 배우자를 모함해 쫓아내는 일은 예사였다. 심지어는 배우자를 죽여 버리고 군주를 감금한 뒤 나라를 탈취하는 일도 있었다.
그건 당장 몇 년 전만 해도 있었던 일들이라, 군주들은 늘 그것을 경계했다.
사실 부군이 있는 시점에서 그들의 역할은 부군이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대신할 존재일 뿐이다. 잔인하긴 하지만 필요한 건 막말로 상태 좋은 ‘정액’에 불과했으니 군주로서는 굳이 남편을 여럿 두어 입을 늘릴 필요도, 상속 문제에 골치를 앓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스틴이 걱정이었다. 미안하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하나 말도 못 하고 망설이던 표정이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대가문의 주인인 사람이 그렇게 연약해서야, 무릇 집안의 주인은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강인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길리어드는 불편하더라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모왕이나 누이들처럼 곁에 다가가는 것만도 두려운 존재였다면 아마 화도 좀 내 보고 원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나 매형들처럼 바가지라도 긁어 봤겠지.
하지만 아내는 뭐랄까, 참 토끼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야생 토끼도 아니고 몸이 하얗고 눈이 빨갛고 귀가 길쭉한 집토끼였다. 가끔 가만히 바라보면 정말 머리 양쪽으로 길쭉하게 귀가 솟아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명히 군주로서는 위엄 있고 강인한 면모도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 걱정도 되었다. 앞으로 공작으로서 지내야 할 날이 한참인데, 벌써 이런 일로 끙끙 앓고 있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럴수록 의연해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되어서 아내에게 차마 그런 압박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아내를 믿으면서도 지켜 주어야 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침실에 다른 수컷을 허락할 생각이 없다. 물론 정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집안을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어째서인지 밀려드는 씁쓸함에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듀랜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보내는 놈이 누구라던가. 알고 있나?”
“그건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에리크입니다.”
“에리크? 에리크 로렌스 말인가? 참, 그렇게 또 아들을 팔아넘기는군. 어떻게 그렇게도 변하지를 않는지, 명색이 명문가 출신에 국서까지 지냈던 자가. 천하기 짝이 없어.”
천하다. 그래, 길리어드가 생각하기에 설리번에게는 국서도, 국부의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사하신 후 1년이 지나자 모왕은 하는 수 없이 설리번을 2국서에 삼아야 했다. 백성들에게 아버지가 없을 수는 없다며 원로회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굳이 설리번이 아니더라도 국서의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굳이 그였던 것은 아마 로렌스 가문의 입김 때문이었을 테다. 게다가 그가 원래 모왕의 약혼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설리번 로렌스는 그때 이미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여럿 두고 있는 몸이었다. 물론 스칼라이에서 그것이 문제 될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후의 행보가 문제가 되었다. 그는 그 아들들을 궁으로 들여서 이리저리 챙겨 주며 모왕과 공주를 보필하라느니 어쩌라느니 빤히 눈에 보이는 정치질을 해 댔다. 심지어는 중직에 기용해 달라 모왕에게 청을 넣기도 했는데, 그건 국서의 신분으로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제 가문의 위세를 넓히려 부리는 정치적 수작이었으니까.
그러다 모왕의 노여움을 사 가문이 몰락의 코앞에까지 갔으니, 길리어드는 그때의 통쾌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제 주제도 모르고 계속 그렇게 굴다 가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면서, 이제는 남의 집 침실까지 노리다니.
물론 이유가 짐작은 되었다.
스칼라이에서 왕의 배우자는 계승자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공석을 대리해 군주가 될 수 있지만, 계승자가 성인이 되어 왕위를 물려받을 나이가 되면 자신의 자리를 바로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여동생인 프리실라가 왕위를 물려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냉정하고 현명한 그녀는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도 옹호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다.
결국 설리번은 후일에 대비해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서든 펠로데 내부에 영향력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인데, 아내가 그래도 로렌스 가문의 명성만큼은 외면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섭정 시절의 자신 또한 그 로렌스 가문의 명성 때문에 그들을 폐문할 수는 없었으니, 아내의 마음이 더더욱 이해되었다.
아무튼, 좋게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는 자였다.
애초에 그자 때문에 부친이 얼마나 고생하셨던가.
어린 시절, 길리어드는 부친을 위해 매번 모왕의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분의 집무가 끝나면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보러 가자고 졸라야 했다. 그러다 종종 노여움을 사서 혼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밀려나 모왕에게 외면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주라는 직책의 무게를 조금은 이해하는 지금은 그렇게 철없던 순수함에 웃음이 나지만, 어쨌든 그때 설리번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아버지를 떠올려 보면 아들로서는 아무래도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결국 그자는, 그저 아버지의 자리를 꿰찬 후부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자의 아들놈이 내 침실을 노리다니. 저승에 계실 아버지가 아시게 된다면, 참 씁쓸해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어디선가 들어온 바람을 따라 짙은 향기가 퍼져나갔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굳었을 정도로 짙은 화향(花香)이었다.
“뭐죠, 저게?”
듀랜트가 길리어드의 뒤쪽으로 나 있는 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창밖으로 나 있는 후원, 어떤 여자가 거대한 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있었다.
금백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대단한 미인으로 탄탄하고 늘씬한 체구에 어울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끌어안고 있는 것은 장미들을 촘촘히 엮어 만든 거대한 화환이었는데, 목에 걸기에는 너무도 거대해서 마치 거인들에게 어울릴 법한 크기였다.
그녀는 바로 거인족 기사 디안사 타르얀이었다.
화환에 파묻힌 듯 걷는 모습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어지간한 유혹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스칼라이 남자들에게도 가히 거친 것을 넘어서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니 사방에서 반응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몇몇은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노을이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인근에 있는 회랑으로 로더릭을 불러낸 디안사는 그에게 화환을 걸어 주었다.
로더릭은 독한 술에 취할 대로 취해서 정신이 반쯤은 몽롱했지만, 화환을 보자 술기운이 싹 가신 듯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크게 만들어 오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가게에 남은 장미들이 이것밖에 없었어. 다음에는 이것보다 더 크게 만들어 줄게. 근데, 얼굴은 괜찮아?”
“보면 모르겠냐.”
“미안해. 네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내 종족까지 들먹이니까 흥분했어. 아무튼 오해하진 말고 좀 들어 봐. 그 머리핀 준 사람 있지, 사실은 여자였단 말이야.”
“뭐…? 근데 왜-”
“그 사람은 아마 궁에서 일하는 귀부인인 것 같더라. 딸에게 생일 선물로 줄 활을 만들고 있다고 했어. 활시위 안에 섞어 넣을 머리카락을 찾고 있는 모양이던데, 너도 알잖아. 딸들한테 주는 선물에 강한 거인족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들어가면 행운이 따른다는 거 말이야. 일종의 부적이지. 그런데 사실 보통의 거인 여자를 찾는 건 쉽지만 ‘강한’ 거인 여자를 찾는 건 쉽지 않잖아. 하지만 내가 머리카락을 그냥 잘라 줄 수 있겠니? 그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막 나눠 주면 금방 대머리가 되는데. 마침 그 여자가 머리 장식을 하고 있던데, 들어 보니 유명한 공방 출신의 장인이 만든 거라더라. 그래서 그거라도 받은 거야. 일종의 물물 교환이지.”
줄줄 구차하게 늘어지는 변명에 울적해 있던 로더릭의 얼굴에 놀랍게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정말이냐?”
“거짓말이겠어? 이 내가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사정하는데. 그러지 말고 한번 봐주라. 어? 내가 네 앞에서 고개라도 조아릴까? 엎드려서 빌라면 빌게.”
디안사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모아 흔들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더릭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주지. 대신, 이번 한 번만이야.”
그 말에 디안사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마치 저절로 빛을 발하는 듯 찬연한 미소였다.
그 모습에 로더릭의 얼굴이 톡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디안사가 살며시 로더릭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회랑을 지나 기사들의 거처가 있는 성채로 사라져 버렸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은 부군의 집무실 맞은편에서 이루어졌다.
“-아무튼, 거칠다니까.”
창가에 기대어 쳐다보고 있던 듀랜트가 못 말리겠다는 듯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대륙에서 거인 여성들이라 하면 생명력과 활기의 대명사였다. 물론 여러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강인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 무렵, 무언가가 ‘탁’하는 소리를 냈다.
길리어드가 지도책을 덮고 있었다. 무심히 왕자의 얼굴을 살펴본 듀랜트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왕자의 인상이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굳어져 있었다.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는데, 시침 시종 무관이 들어온다는 말에도 그렇게 의연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건지.
“아무튼, 젊은것들이란….”
이윽고 마치 중얼거리는 듯한 혼잣말이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듀랜트는 대체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아스틴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침실에 들어왔다. 평소보다도 좀 더 늦은 퇴근이었지만 그녀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해 놓고 싶었다.
시리스가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먼저 잠들어 있을 길리어드가 침상의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가 속상한 듯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어째서인지 한마디 말도 없었는데 아스틴은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다가 말없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길리어드…? 저는, 먼저 잘게요. 그럼 푹 주무세요.”
그렇게 베개에 머리를 붙였을 무렵이었다. 커다란 손이 살며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아스틴은 그가 그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머리카락의 끝을 살며시 붙잡더니,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대체 뭐 하는 걸까. 그녀는 눈꺼풀을 떠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저, 여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냥 살펴보고 있어요. 혹시…나 모르게 누구한테 주지는 않았나 싶어.”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길리어드는 대신 지그시 눈을 감더니 머리카락을 놓고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커다란 등을 보면서 아스틴은 입술을 살며시 꼬고 있었다. 이 양반이 왜 이럴까, 혹여 시침 시종 무관이 온다는 말에 이제야 기분이 나쁜 건가 싶었어도 그렇게 할 거면 아까 만났을 때 화를 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는 길리어드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가벼운 사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입술을 조금 내민 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길리어드가 물었다.
“기분이 상했지, 아스틴?”
“…글쎄요.”
“그럼, 나도 때려 줘요. 세게.”
“예에?”
“왠지 그래야 나도 화환 하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스틴은 그제야 말의 의미를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아까 근처에 있었지. 자신만큼이나 귀가 밝으니 디안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테다.
그러니까 이건 부하에게는 그런 지시를 잘도 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화환 선물 한번 한 적 없지 않으냐는 말이었다.
이건 질투라고 보기도 어렵고 일종의 심술이었다.
아스틴은 문득 참 남세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선은 살며시 흔들어 일으켜서는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창밖을 가리켰다.
침실의 아래 거대한 정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침 장미 철이라서 분홍색, 붉은색, 백색, 흑색 장미들이 가리지 않고 종류별로 심겨 있었는데 잘 가꾸어진 모양이 거대하고 화사해서 마치 거대한 화환처럼 보였다.
“전부 다 당신 거예요.”
그래도 길리어드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어휴, 이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할 말이 없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불편할 텐데, 이런 사소한 요구라도 들어줄 수 있다면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물끄러미 장미를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였다.
“장미는 됐소. 그냥 구경하는 게 더 나으니까. 다만, 나는 그저- 당신이 또 한 번 내 등을 씻어주면 좋을 것 같아서.”
원하는 게 그거였구나, 아무튼 활력하고는. 아스틴은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서 주무세요. 그래야 목욕할 시간이 빨리 오지요.”
길리어드가 그제야 삐죽하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며시 팔을 뻗어 끌어안아 왔는데, 입꼬리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걸로 만족한다면 일단 다행이긴 하다만. 정말 괜찮은 걸까. 아스틴은 우선은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도하기로 했다.
* * *
그렇게 결혼기념일을 이틀 앞두었을 무렵, 스칼라이에서 보낸 시침 시종 무관이 도착했다.
그는 반삭에 가깝게 잘 잘라 넘긴 은발에 녹안과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지닌 스칼라이의 청년이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가 조금은 사나워 보이지만 행동 전반에 철저히 예의를 갖추고 있어 차갑게 보이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지식이 깊어 보이는 분위기가 사뭇 학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틴은 우선은 미소로 환영해 주었다.
“그래, 펠로데에 온 걸 환영하네.”
“저야말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말은- 아무튼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런데 자네 이름은?”
“에리크 로렌스입니다.”
“로렌스라…. 나도 자네의 가문 이야기는 익히 들었어. 상황이 녹록지 않을 텐데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꽤 난처할 테지? 그래… 혹, 바라는 것이 있나? 있다면 지금 하게.”
“감히 제가 무슨 청을 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그저 공작님의 무사한 잉태와 스칼라이와 펠로데의 안온한 국교를 바랄 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렇다는 듯 목소리가 나긋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러면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는데 행동 하나하나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절도가 있었다. 그런 모습에서는 또 흔히 무인들이 갖추고 있는 사납고 예리한 기백이 느껴졌다.
그게 괜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스틴이 알기로 눈앞의 청년은 본래 스칼라이 철군단의 서기관장이었다. 흔히 서기관장이란 주로 문서를 다루고 대부분의 일정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주인을 위해 여기저기 교섭을 하러 다녀야 하는 만큼 말이 서기관이지 참모와 내정관의 성격이 강한 직책이었다. 그녀가 황태자의 제 1서기관이었던 시절 그랬듯이 말이다.
어쨌거나 이 정도의 사내를 보내다니.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아스틴은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이제 곧 설리번 로렌스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온다.
문제는 역시 그의 가문이었다.
과거, 태자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로렌스 가문은 국부(國父)라는 이유로 죄를 면제받은 시아버지 당신을 제외한 대부분이 철저하게 정계의 중심에서 밀리어 주변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대부분은 칩거형을 받았는데, 일종의 구금으로 참 많이도 봐준 셈이었다.
그들이 자비를 받았던 건 언제까지나 남편의 관용이었다. 사실 남편은 로렌스 가문의 명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로렌스 가문은 방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노르인’ 가문으로, 왕의 손이라고 불릴 만큼 왕실에 충성해 왔으며 아직도 스칼라이 정계에는 그들과 발을 걸치지 않은 가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스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사려 깊게 말해 주어.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게. 자네가 앞으로 지낼 곳을 안내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사내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스틴은 옅게 고개를 흔들고는 그만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일단 시아버지 측의 요청을 받아 주었으니, 그녀는 우선 할 만큼은 한 셈이었다. 굳이 이 이상 세심하게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다. 아마 문밖에는 듀랜트와 집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길리어드와 만나게 되는 건 금방이겠지. 시침 시종 무관들이란 대대로 부군들의 관할이니 그래야 했다.
나머지는 그에게 맡겨 두면 될 테지만, 문득 마음 한쪽이 무직해졌다. 그녀는 일부러 깃펜을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그렇게 길리어드는 에리크 로렌스와 마주했다.
체격은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두 사람이었지만 용모가 주는 느낌은 확연하게 달랐다. 그에게 왕족 특유의 고독한 위엄이 있었다면 에리크에게는 조금 더 예리하지만 화사하고 귀족적인 기운이 흘러내렸다.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으니 두 사람을 형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 스칼라이 왕실은 엄격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왕실은 반타블랙슨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어머니를 두고 있어야만 왕족의 자격을 주었다. 그것은 다소 편협한 승계 방식이었지만 반타블랙슨만의 특별한 ‘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경우 그가 직접 잉태하는 것도 아니고 출산하는 것도 아니니, 아이가 그의 핏줄을 이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어머니의 경우 어쨌든 자신이 직접 낳는 것이었으니 반타블랙슨 가의 여성이 낳았다면 그 아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반타블랙슨 가문의 아이였다.
그런 면에서 에리크 로렌스는 반타블랙슨 가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니 길리어드와는 일종의 인척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형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길리어드에게 매우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마뜩잖은 계부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보자마자 에리크가 먼저 정중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으며 반쯤 엎드리듯 고개를 숙였다.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부러 그것이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 행동이었는데 왕족에게 보이는 스칼라이 특유의 예절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길리어드가 여유 있게 손을 뻗어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오랜만이군. 앉아라.”
길리어드는 딱히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군의 의무가 있고 에리크는 한때 그의 부하였다.
두 사람은 모왕의 가신으로서 함께 일했던 적도 있었고 길리어드가 동방 원정에 나설 때 함께 출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가족으로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상관과 부하라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에리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주의 가신으로서 그녀를 측근에서 보필했다. 험하게 대우할 수가 없었다.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던 길리어드는 조용히 물었다.
“프리실라는?”
“공주님은 잘 지내십니다. 무리 없이 계승자(繼承者)의 의무를 다하고 계십니다만. 참, 이번 남동부 서식지 원정이 끝나는 대로 전하를 한번 뵈러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겨울이 되기 전에는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프리실라는 길리어드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었다. 올해로 열여섯으로, 사실 길리어드에게 거의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지금은 어느 장군의 휘하에서 기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스칼라이에서 군주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문득 그 핼쑥하던 조그만 얼굴이 떠오르자 길리어드는 조금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러다 이윽고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이제 다른 가문의 사람인 나를 보러 올 필요까지야. 내가 그 애를 찾아가면 모를까, 후계자의 위엄에 흠집이 나는 일이다.”
그 말에 에리크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표정에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배우자가 첩실을 들이는 걸 용납하겠는가. 게다가 시침 시종 무관은 일반적으로 부군들의 휘하에 있었다. 속된 말로 노예라고 불릴 정도였다.
자연히 본부군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성격 포악한 부군들의 경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냥개를 패듯 때리는 일도 없지 않았는데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리는 자들도 없었다.
군주들은 부군이 무서워 그 모습을 보면서도 혹여나 자신에게도 화가 미치진 않을까 외면해 버리는 일도 많았고 말이다.
그리고 에리크 로렌스는 길리어드가 태자 시절 얼마나 가학적이었고 냉혹한 인간이었는지 알고 있다.
평소에는 말도 없이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병석에 누운 모왕을 대신해서 정무를 보거나 출정할 때는 거칠기 짝이 없었던 게 이 사내였다. 오죽하면 원로회가 그의 즉위를 걱정했고, 강인하고 야만적인 동방 민족도 그의 이름만 들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오줌을 지리다 못해 구토했으니까.
사실 모국에서야 신으로 섬겨졌지, 스칼라이 주변 소국들에는 악마도 그런 악마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대체 왜 이런 꼴이 되어있는지.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해 수모를 당하고 있을 사내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있던 에리크는 이윽고 예의 미소를 유지한 채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했습니다,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려는 듯 애절하면서도, 간곡한 목소리였다.
“그랬지. 적어도 네가 오기 전까지는.”
길리어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언짢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기에 에리크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아비와 집안의 장기 말이 되어 한때 상관이었던 사내의 뒤통수를 치는 저질스러운 입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역시 가문이었다. 어찌해서 아비가 왕의 자리에 앉았다고는 하나 지금 집안은 꺼져 가는 촛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스칼라이 장군들의 대다수는 태자를 팔아넘기듯 압박하여 펠로데로 보낸 국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사 아비가 국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만일 그때가 되면 가문은 보복을 당할 게 틀림없었다.
물론 새로운 국왕이 등극하여 가문 자체는 지켜 줄 테지만 국왕의 입지가 눈앞의 사내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젊은 국왕은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비의 그림자를 어떻게서든 벗어나려 할 거였다.
그러니 이렇게 보내진 것도 어떻게든 펠로데 가문과 연을 맺어 가문에 조금은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였다. 지금 공작의 권위는 스칼라이에서도 원로 이상의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그녀에게 공을 세워 집안의 안녕을 지키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
에리크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한때 충심을 바쳐서 전하와 모왕을 섬긴 저에게, 그리 매정하게 말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도 살다 살다 소실로 들어앉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다르지요. 이런 수치를 받고 계셔서는 아니 됩니다.”
“속사정도 모르면서 섣불리 말하지 마라. 그리고 사람이란, 결혼하고 나면 수치 같은 것은 싫더라도 참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소인이 들은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공작이 왕자님께 이런 식의 무시를 해서는 안 되지요.”
무시를 하는 게 누군데.
길리어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지금 이 집안의 주인을 모욕하는 거냐?”
“그런 의도로 들으셨다면 고개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는 그저 걱정되어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저는 다른 누군가의 안위보다도, 스칼라이의, 그리고 전하의 명예를 세워 드리기 위해 보내졌으니까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에리크는 우선 그렇게 자신을 낮추었다.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사태의 원인을 상기하는 물음이었다.
길리어드는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부군의 명예란 곧 후계자의 생산과 아이의 탄생에 있었다. 제아무리 자질이 훌륭하다고 해도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으면 명예는 먼지 쌓인 왕관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에리크를 바라보기만 했다. 감정 없이 덤덤한 청람색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조금은 서늘하면서도 잔잔하게 물들어 있었다.
속내를 간파하고 있다는 듯 다소 섬뜩한 침묵의 끝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이윽고 길리어드는 말없이 손을 까닥였다. 그만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에리크는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명예라.”
에리크가 떠난 후에야, 길리어드는 나지막이 입술을 열었다. 왕족으로서의 고고함과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듯 시선은 무직했지만, 사실 마음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눈꼬리가 조금씩 내려앉으며, 담담하던 인상이 약간은 허물어졌다.
정중하면서도 깍듯한 에리크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마음이 놓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했다.
아내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에리크를 믿을 수 없었다. 믿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세상에 소실로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그 깍듯한 모습에 더욱 신뢰가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아버님께서 설리번 로렌스 때문에 얼마나 불안해하셨던가.
남부 아노르인 명가의 후손이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평민 신분이 되었던 아버지는 국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늘 평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해서 내내 모왕이 원래의 약혼자였던 설리번을 총애하는 걸 염려했던 것이다.
모왕과의 사이에서 손을 스무 명 넘게 보았음에도 말이다.
자신에게 네가 강해져야 한다, 모왕의 다음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은 바로 너라며 엄격하게 교육하셨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의 팔자도 아버지와 딱히 다르지는 않았다. 그는 왕족이긴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으니까.
새삼 그는 이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물론 결혼한 지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입지를 다지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부군으로서 모자람 없이 의무를 수행했고 가문의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지.
역시 무언가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공허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아마 애정일 테다.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고, 사랑을 주려고 하지는 못할망정 기대한다는 건 결코 어른스러운 일도, 현명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쩌면 굳이 유난을 떨어 확인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주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는 일은 스스로에게만 힘든 일이다.
이해해야 했다.
아내는 바쁜 몸이었고 자신에게만 시선을 줄 수는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이도 아니고 이미 부부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 굳이 그렇게 피로감을 줄 필요가 없었다.
물론 부군의 권리를 들먹이며 아내에게 의무를 강요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지켜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현부(賢夫)의 행동이라고 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 그것, 하나였다.
그는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고작 이런 일 따위에 말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길리어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불안히 흔들리던 가슴 속의 추를 다잡는 듯 말이다. 그리고 한 번 더 모든 정신력을 짜내어 다짐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앞에 모자라지 않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성심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가문과 집안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부군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잡을수록 어딘가가 일그러졌다. 자꾸만 감정의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시큰거렸다. 문득 그는, 이 순간 아스틴의 다정한 시선과 손길이 참 절실해졌다.
* * *
펠로데의 동편 성채에는 평범한 경비 탑의 세 배 정도 되는 규모의 거대한 서고가 있다.
보유한 장서가 이천만 권이 넘고, 삼천 년이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제법 오래된 건물이었다. 황실에 못지않게 규모가 방대했고 매일매일 전 대륙에서 새로 발간된 책들이 모였다.
도서관 못지않은 규모에 맞지 않게 단지 ‘서고’라고 불렸던 이유는 공작 일가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대로 공작들은 특별히 감추어야 하는 구역을 제외하고는 성내의 기사들이나 가신에게 그곳을 개방해 주었다.
그날의 오후, 아스틴은 서고의 긴 회랑을 걷고 있었다. 품에 한 뭉치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가득 든 상자가 안겨 있었는데 근처에 따르는 하인은 없었다.
마침 내일의 일도 있고, 업무도 거의 끝마쳤던 터라 일찍 돌려보냈던 것이다.
3층의 어느 구석, 비어 있는 칸에 두루마리를 끼워 넣고 다른 것을 찾을 무렵이었다. 근처에 있던 거대한 사다리 위에서 익숙한 인영이 내려오고 있었다.
길리어드였다. 한 무더기의 책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표지의 제목만 보아도 대강 내용이 짐작되었다.
제왕학, 군단의 통솔에 대한 정론, 고대의 역사, 희귀 마물 도감, 고 검술 대가들의 훈련 방식 등등 하나같이 가죽이나 비단 표지를 덧씌운 두꺼운 책들이었다.
머리깨나 싸매야 할 정도로 무겁고 어려운 책들인데, 대체 뭐 하려고 저만큼 가지고 나온 걸까. 그것도 내일이 여행을 떠나는 날인데. 설마, 여행지에서 공부를 할 생각은 아닐 테고. 결국 아스틴은 그를 불렀다.
“길리어드! 여기예요!”
“아, 아스틴 당신이었소?”
“많기도 해라. 그걸 언제 다 보시려고요?”
“내가 읽을 건 아니고, 일종의 과제야…. 내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지도받고 있는 애들이 수학을 게을리할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과제를 줘야 그놈들이 잔꾀를 안 피우지.”
흐음,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길리어드는 부군으로서 의무의 하나로 젊은 기사들을 지도하곤 했는데 대상은 주로 그를 따라온 가신들이나 동부 출신의 기사들이었다. 문화며 언어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의 훈련 방식을 쉽게 이해했던 것이다.
“아무튼 자식 놈들이란, 믿을 수가 없어.”
길리어드가 말했다.
남편은 그들을 ‘자식’이라고 불렀다.
무릇 기사란 주군과의 계약 관계임과 동시에 오랫동안 서로 살펴주어야 했으니 그렇게 불리는 거였다.길리어드도 그만큼 그들을 아꼈는데, 예컨대 로더릭이 그런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들을 두고 무장(武裝) 개인으로서의 역량은 뛰어나더라도 아직 우두머리가 될 만한 기량은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하고는 했다.
물론 아스틴이 보기에 그들은 결코 실력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다들 펠로데의 상급 기사만큼이나 우수한 편이었고 1급 마물들을 마치 갓난아이인 양 다루는 실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무력 자체는 뛰어났다.
하지만 평가의 기준은 그저 신체적 능력만이 아닌 법이다.
기사급 무장에서 병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나아가서는 영주의 가신이 되거나 봉토의 군주가 되려면, 격투나 검술은 기본일 뿐, 사실은 익혀야 할 지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은 아무에게나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사실 전쟁을 비롯해 무력을 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자신보다도 남편이 훨씬 유능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곁에서 지켜본 결과, 그것은 언제까지나 철저한 수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스틴은 두 팔을 뻗었다.
“주세요. 같이 들어 드리지요.”
“고맙긴 하지만, 일은? 아직 업무가 끝날 시간이 아니잖아.”
“오늘은 일찍 마무리했어요. 내일 새벽에 떠나야 하니까 좀 쉬어 두려고요.”
잠시 머뭇거리던 길리어드가 자세를 낮추어 책 무더기를 보여 주었다.
아스틴은 그로부터 몇 권의 책을 받아 들고는 옆을 따라갔다.
서고에서 성채로 이어지는 길은 상당히 길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길리어드는 어째서인지 말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물론 조금 과묵한 성격이긴 하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마치 자신의 눈치를 보고 조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저 길리어드… 그 사람 만나 보셨나요? 에리크 로렌스 말이에요.”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으면서도 슬며시 분위기를 살폈다.
사실 시침 시종 무관의 문제로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자리를 공유할 일도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부군의 권리가 침해받을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이성과 감정은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분노나 슬픔이나 허무함과 같은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이해는 어쩌면 좀 더 위험하게 곪은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아스틴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싶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염려 말아요. 나는 당신이 부왕과 사이가 틀어지는 걸 바라진 않아.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이런 문제는, 잘 알잖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는 걸 말이야.”
목소리가 참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아스틴은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괜히 자신이 무안해졌다. 사실 이런 문제는 그녀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빌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스틴은 자책하듯 말했다.
“그렇게 이해하신다고만 할 일은 아니잖아요. 만일 당신이 이 집안의 주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실 건가요?”
그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틴은 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덤덤하게 구는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그 말에 길리어드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이윽고 우수에 젖은 듯한 청람색의 눈동자가 조금은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틴은 말없이 그런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가 나야 할 상황에서 참고 있는 것은 절대로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 무직하게 참고만 있는 것을 조금 꺼내어보고 싶었다. 나중에 큰 문제가 되는 것보다도 그게 더 나았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옅게 한숨을 쉬더니 입술을 열었다.
“당신, 지금 나더러 화를 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맞소?”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죠. 저라면 조금이라도 화는 날 것 같아요. 어쩌면 원망이라도 했겠지요.”
아스틴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사고를 친 주제에 되레 화를 내는 꼴이었지만 그녀는 참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했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였다.
길리어드는 내심 뜨끔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도 눈치가 빠른지.
하지만 감히 질투도 원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꼴불견이었으니까. 게다가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어 아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하게 왕자라거나 부군으로서가 아닌,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부러 무심히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이 집안 주인이었다면… 벌써 아이가 셋은 생겼을 거요. 애초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났겠지.”
속상하고 화가 난다는 말인데, 아스틴은 날카롭게 물었다.
“아이라뇨,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상관이 없다는 거지? 지금의 문제는 다름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일어났는데. 아무튼… 내가 이 집 주인이었다면 그랬을 거란 말이니까 오해하진 말아요.”
길리어드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째서인지 걸음이 조금 빨라졌기 때문에 아스틴은 총총 그 뒤를 쫓아가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의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녀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책으로 표지에는 파란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다소 화려한 글씨체의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유약을 섞은 검푸른색 잉크로 효과를 주어서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푸른 장미는 이슬을 흘리지 않는다. 2권>
아스틴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책의 제목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연애소설이다.
후작인 아내의 홀대를 견디다 못해 이혼을 선언한 백작가 차남 출신 기사가 아내와 서로를 이해하면서 끝끝내 사랑을 일구어나간다는 다소 뻔한 내용의 소설이었다.
평소 책을 즐겨 읽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책도 읽는구나.
이해되면서도, 의외였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황급히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혹해하는 시선에 그녀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있다가 다가가서는 주머니에 도로 그것을 꽂아 주었다.
“왜 그러세요?”
길리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얼어붙어 있는 모습에 그녀는 무엇 때문에 저러나 싶었다. 이윽고 그가 해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저… 흥미 삼아 읽었던 책이야.”
“물론 그러시겠죠.”
“내 말은-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그저 워낙 이 소설이 유명하다고 들어서 무슨 내용인가 하고-”
“오해하긴요, 우리가 뭐 애들도 아니고, 한가할 때면 찐한 연애소설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그럼, 당신도…?”
“제국인 중에 연애소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은 봤을 거예요. 아무튼-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전 참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평소 늘 어려운 책들만 읽으셔서 감히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 책 3권도 꼭 읽어 보세요. 3권은 더 재미있으니까.”
아스틴은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괜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려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리어드가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구할 수 없던데.”
“네?”
“절판되었다고 하더군. 제도의 서책상에 물어봤지만 더는 구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소.”
아스틴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지금 절판된 상황이었다. 내용에 첨가된 음란하고 노골적인 관계 묘사들 때문이다. 다소 가학적인 관계 묘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건 소설로서는 다소 뻔한 소재였지만 제국법으로는 엄격히 중죄로 다스리는 일이었다.
물론 제국은 스칼라이나 남부와 같은 지역에 비해 문화적으로 관대한 편이었기에 원래라면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책의 인기가 너무 대단했던 게 원인이었다.
심지어는 귀족 의회의 심기까지 거스르고 말았던 것이다.
황제는 그런 문제를 매우 성가시게 생각했다. 결국, 책의 주요 장면을 모조리 검열하고 증쇄를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참 그렇겠네요. 그럼- 제 것을 빌려드릴게요. 전 완결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뻔한 결말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가끔 생각나면 보곤 해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한동안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틴은 그가 체면과 욕망 사이에서 한참 고민했을 거라 짐작했다. 아무튼, 점잖으면서도 할 건 은근히 다한다니까. 아스틴은 부러 턱을 조금 젖힌 채 총총 그의 옆을 따라 걸어갔다.
* * *
그렇게 다음날의 새벽, 아스틴은 남아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집무실을 나섰다.
참 오랜만에 자리를 비우는 거였지만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은 미리 처리해 두었고, 임시적이긴 하지만 시리스와 마르첼이 자신을 대신해 정무를 맡아줄 테다.
홀을 지나 성문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하자 이미 길리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 입는 어두운 색감의 정장과 코트는 벗고 하얀 셔츠와 마바지에 얇은 로브를 덧입고 있었다.
아스틴은 그와 함께 마차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그런데 정말 거기로 괜찮겠어요?”
“난 괜찮아. 어차피 며칠 가지고는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좋아요. 그럼 갈까요?”
펠로데의 동쪽, 스칼라이와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드넓은 평야를 앞두고 울창한 숲과 계곡이 펼쳐진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십 미터는 가뿐하게 넘는 거목의 숲이었다. 바로 미스트리스 삼림지대로, 펠로데 북부에 있는 올드배로우 숲과 함께 남대륙 중북부의 허파라고 불렸다.
그 숲의 동쪽에는 지반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생긴 듯한 절벽이 있다.
그 절벽의 끄트머리에 거대한 고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은 이름하여 <이름 없는 성>이라고 불렸다. 오래전 인근을 다스리던 어느 영주의 소유였지만 펠로데 가가 영지를 흡수하면서 일종의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바뀌던 풍경이 멈출 무렵 아스틴은 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리어 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쪽 루셰드 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걷히면서 거대한 성채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칼처럼 뾰족한 꼭대기에서 아래로, 원래 백색이었을 하얀 석벽이 이끼와 바람의 흔적으로 인해 마치 염색한 듯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정체 모를 덩굴 식물들이 성의 반절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소 쓸쓸해 보이는 느낌을 아늑하게 바꾸어 주었다.
이미 하인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성에 내리자마자 방으로 향했다. 꼭대기에 있는 침실은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았지만 고급스러운 녹색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모든 가구가 햇빛에 물든 듯 따스한 색감이었다.
벽을 터서 만든 듯한 커다란 창밖으로 울창한 숲과 너머에 있는 아득할 정도로 광활한 은빛 억새 평야를 볼 수 있었다.
그런 광경은 마치 푸른 모래가 깔린 은색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아스틴은 겉옷을 벗어 근처에 두고는 커다란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뒤로 기대었는데, 등받이에 깔린 쿠션에서 잘 말린 풋풋한 햇빛 냄새가 스며 나왔다.
이어 들어온 길리어드가 방의 모습을 흘끗 살피더니 물었다.
“오랜만이지? 이렇게 마음 놓고 쉬는 건.”
“그러게요, 이런 호사라니…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대체 얼마만의 휴식일까. 사실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근교로 소풍을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휴가래 봤자 고작 며칠밖에 낼 수 없고, 멀리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용하기도 하고 다소 시골의 느낌이 나는 것이 그녀로서는 환영이었다. 무엇보다 여기저기서 서명을 부탁한다며 일거리를 안겨 주던 목소리들이 없어 마음이 편안했다.
그 무렵 때에 맞추어 하인이 오찬이 준비되었다고 말해 왔다.
그녀는 푹신하고 따스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시골식의 갓 구워낸 하얀 건포도 롤빵과 채소로 만들어진 신선한 샐러드를 먹었다. 왜인지 이런 곳에서는 식욕이 좀 더 왕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질 무렵, 포도주잔을 쥔 채 창가에 기대어 바깥 경치를 감상하고 있던 길리어드가 조용히 물었다.
“아스틴, 나는 좀 이따 잠시 주변을 산책할 생각인데. 괜찮다면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쉴 거면 더 쉬어도 되지만…”
“어머, 그거 좋겠네요. 마침 배도 부른데. 같이 가요.”
그녀는 부러 허리선이 들어가지 않은 풍덩 한 시스 원피스를 입고 숄 하나만 걸쳤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성의 입구로 나설 무렵이었다. 마침 듀랜트가 거대한 말을 데리고 나왔다.
한 오라기 털이 빠진 곳도 없는 늘씬한 흑마였다. 보통의 군마보다도 키가 반 배 정도 더 크고 우람해 보이는 근육질의 체형으로 사지가 늘씬하게 뻗어 있어 아름답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갈기에서부터 발굽까지 전신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한 오라기 잡티도 섞여 있지 않아 마치 청동으로 만든 동상 같았다.
그는 남편이 지닌 수많은 전투마 중에서도 가장 고고한 존재였다.
이름은 부케(Bukhe)였는데, 길리어드의 애마였다. 호전적인 칼페케 종 중에서도 왕실마라고 불리는 라스메헨 혈통을 개량하여 만들어 낸 명마 중의 명마로 보통의 전투마에 비해 십여 배가 넘는 마력(馬力)을 지니고 있었다. 외형이나 마력도 그렇지만 지능이 대단히 높아 주인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었고 인간의 예절이나 규칙 같은 것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아스틴은 새삼 남편의 취미를 떠올려 보았다.
그는 사치품 수집을 은근히 즐겼다. 술이나 무기 수집도 특히 말 수집을 아주 좋아했다. 스칼라이에 있을 때도 왕실에서 관리하는 마사를 제외하고 자신의 개인 마사를 운영했을 정도였다. 펠로데에 올 때는 자신의 마사를 통째로 떠서 가지고 왔는데 모여 있는 말들이 얼마나 귀한 말이던지 아스틴은 그것들만 모아도 작은 나라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부케는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아끼는 말이었다. 언젠가 마사를 구경 온 황제가 탐을 내다 못해 자신에게 팔아 달라고 하는 데도 스칼라이인은 형제를 팔지는 않는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을 정도로 아꼈다.
“자, 갑시다.”
“네?”
그녀가 부케의 목덜미를 쓸어 주고 있을 무렵, 뒤따라 나온 길리어드가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떠안듯 받치며 그대로 부케에 올랐다.
부케는 딱히 고삐로 방향을 조종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움직였다. 마치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천천히 움직였는데 체간을 거의 흔들지 않아 말을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살며시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고삐를 잡았다.
반쯤 그에게 안긴 채로 아스틴은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남편이 부케를 태워 주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사실 그는 부케에 좀처럼 누군가를 태운 적이 없다. 그만큼 아끼는 말이었으니까.
황공하면서도 조금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엊그제 자신이 이 집안의 주인이라면 자식을 벌써 셋은 낳았을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무거워지는 마음에 순간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녀는 일단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미스트리스 숲으로 들어갔다. 까마득히 자라 있는 거목들을 지나 부드럽고 평평한 흙길에 오르자 흔히 그렇듯 숲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상쾌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아스틴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도시에서 딱히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데도 숲속의 공기가 그녀의 가슴을 풋풋하게 채웠다.
“여기… 참 오랜만에 와 보네요. 결혼하기 몇 년 전이었나? 이후엔 처음이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종종 왔었소. 정찰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어머, 그럼 저도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당신은 평소엔 바쁘잖아. 그렇다고 휴일에는 쉬어야 하는데. 내가 가자고 조를 수도 없고.”
해명하는 듯한 목소리가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하면서도 토라진 듯 들렸다.
아스틴은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부터 한다는 말이 바빠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건데, 처음에는 순수하게 배려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째 그것에 조금은 원망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 보면 은근히 속에 담아 놓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든 할 줄 아는 사내이니 그럴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따지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괜히 좋은 분위기를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숲의 심부에 도착했다.
타 버린 숯처럼 새까만 흙길 위로 늙은 거목들이 뿌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치 동굴을 형성하고 있는 듯한 굵은 뿌리들을 지나자, 멀찍이서 들려오던 새소리와 여우나 늑대의 울음도 멎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간혹 부케가 내뱉는 옅은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슬며시 고삐를 놓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듯 좀 더 거세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손을 붙잡았다.
“바람이 조금 찬 것 같아서… 이렇게 안고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나지막한 속삭임이 아스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들은 숲길의 끝에 다다라서야 부케에서 내려섰다. 근처에 동굴이 있었는데 능소화 줄기가 치렁치렁 흘러내려 입구의 주변을 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케를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텁텁한 동굴을 빠져나가자 광활한 평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평원 위로, 하얀 은사로 만들어 놓은 듯한 억새들이 천천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 무렵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넘어가며 검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촤륵 붉은 비단을 펼친 듯한 경관의 끝으로, 이윽고 하늘이 완전한 감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무리 지어 빛나는 별들 사이로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거대한 억새밭이 은백색으로 빛났다.
경탄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어느 쓰러져 있는 고목의 앞, 여행자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은 흔적이 있었다.
길리어드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죽 가방에서 화염석이 든 병을 꺼냈다. 모닥불 자국에 화염석을 몇 개 던져 넣고 발화 가루를 뿌리자 매끄러운 암적색 표면이 주홍색 불꽃을 틔우며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무 기둥에 앉은 아스틴은 턱을 괸 채 주변의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따라 은백색 억새들이 고고히 흔들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수천 개의 별이 땅으로 떨어져 빛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경치도 경치였지만 마음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근 몇 년간은 무언가를 보고 감상에 젖을 일이 좀처럼 없었던 터라,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찻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아스틴은 찻잔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목제의 찻잔에서 향긋한 카모마일 향이 퍼져 나왔다. 그녀는 살며시 감싸고 있다가 이윽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이 혀끝에서부터 천천히 감돌았다.
“맛있네요. 이런 곳에서 마시니까 더 맛있게 느껴져요.”
어느새 찻잔이 비었다. 길리어드가 빈 잔을 발견하더니 찻주전자를 들고 채워 주었다.
아스틴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닥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요, 길리어드.”
“별거 아니야.”
길리어드가 덤덤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스틴은 불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용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자 복잡한 기억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적소에 맞추어 배열하는 듯했다.
“안 그래도 머리 식힐 곳이 필요했는데, 여기 오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녀는 몇 가지 필요 없는 것들을 태워 버리는 상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떠오르는 기억을 펼쳐 보았다.
이러저러한 추억의 사이로, 시야 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거의 12년 전의 일이다. 그녀가 열아홉, 9년간의 황실 제국 기사단 복무를 마치고 펠로데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아직 황태자의 가신으로 임용되지 않았던 때였고, 그녀가 황위 쟁탈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부친은 그녀에게 정찰대를 꾸려 펠로데의 동쪽을 순찰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후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는 남부의 루셰드 강에서부터 북부로 거슬러 올라오며 미스트리스, 그리고 올드배로우의 북동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구역을 순찰하며 산도적을 비롯해 마물들과 같은 위험 요소들을 추적하고 사냥했다.
그러던 도중 많은 이들을 만났다. 떠돌이 용병단도 있었고 나라를 등지고 여행 중인 기사도 있었고 남부로 향하는 정체 모를 순례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이웃하고 있는 스칼라이 정찰대도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바로 이곳이, 남편을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 * *
순찰자의 신세는 늘 굶주림과 피로로 가득했다. 소풍이나 사냥을 나온 게 아니었던 만큼 며칠 동안 오지에서 노숙해야 했고, 근처에 마을이 있다면 운이 좋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알아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당연히 부드럽고 고소한 송아지 고기라던가, 거위 깃털 이불이 있는 푹신한 침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느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르던 봄날의 일이다. 그날은 마침 가지고 다니던 딱딱한 하드택 조각도 떨어지고 말아 그녀는 마르첼이 막사를 짓는 동안 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평야 근처에서 사슴을 잡아 짊어지고 돌아가던 무렵이다. 웬 청년이 모닥불에 감자 몇 개와 버섯을 굽고 있었다.
큰 키에 검은 머리카락, 약간은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와 청록색 계열의 눈동자. 아스틴은 직감적으로 그가 아노르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물론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순찰 도중에 북부에서 남부로 여행을 떠나는 아노르인 여행자들을 몇 명이나 만났으니까.
‘안녕하세요, 감자 냄새 좋네요.’
‘그쪽이야말로, 토실한 놈을 잡으셨군요.’
그들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다소 냉정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남편은 아주 정중했다.
묵묵히 묵례하는 모습이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칼라이에서 오셨어요?’
‘그렇습니다만, 근처 도시의 정찰대를 맡고 있소.’
그렇게 형식적인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갔고, 그녀는 청년이 예의 스칼라이의 왕자라는 사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길리어드가 조심성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녀에게 관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칼라이의 젊은 왕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동부의 억새 평야 주변을 순찰하고 다닌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도 알려져 있던 일이었다.
흔히 레인저는 다른 나라 정찰대의 특징이나 흔적만큼은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법이다. 외교적인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좀 같이 드시겠어요? 우리가 먹기에는 조금 많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먼저 식사 하자고 청했던 사람은 그녀였다. 노상에서 먹는 퍽퍽한 짐승 고기가 질리기도 했고 버터를 잔뜩 칠해 굽고 있는 버섯과 감자가 상당히 맛있어 보였던 터다.
‘초대해 줘서 고맙지만, 나는 대접할 게 감자와 버섯밖에 없습니다만.’
‘잘됐네요. 안 그래도 감자를 본 지 오래되었거든요.’
그 말에 잠시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그렇다면 자신이 스튜라도 만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요리 솜씨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었다. 입맛의 차이인지 손맛의 차이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그의 요리는 참 독특했다.
아스틴은 딱히 까다롭지 않았던 터라 예의상 꾸역꾸역 한 그릇을 먹고 남은 고기들은 그에게서 버터와 소금을 빌려 직접 구워 먹었지만, 문제는 이후 합류했던 마르첼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그는 길리어드의 스튜를 맛보고는 자기가 발로 만들어도 낫겠다며 사흘간 욕을 해 댔었다.
지금도 왕자를 두고 간단한 스튜 하나 만들 줄 모른다며 투덜거렸는데, 그래서 간혹 남편과 함께 정찰이나 사냥을 나갈 때가 있더라도 절대 요리를 시키지는 않았다.
“길리어드, 혹시 기억해요? 우리 오래전에 여기서 한번 만났잖아요. 그때 당신이 여기서 스튜를 끓여 줬는데.”
혹시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스틴은 괜히 물어보고 싶었다.
그 말에 길리어드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었군. 벌써 10년도 전의 일인데.”
“지금 하는 말이지만 당신 같은 사람을 처음 보면 잊어버리긴 어렵죠.”
“그런가, 칭찬으로 듣겠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길리어드는 조금 무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괜히 더 언급하지 말자는 생각에 모닥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후 공식적인 석상에서 몇 번 더 만났었지만, 그때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근엄하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군주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그게 원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지켜야 할 예의가 있으니까.
그게 결혼 이후까지 이어졌다.
길리어드는 결코 외골수라던가 목석은 아니었지만, 지켜야 할 형식은 엄격하게 지키는 성격이었다. 그래야 서로의 위엄을 높이고 존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의 본모습은 그때 숲에서 보았던 그 청년의 모습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그래,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이 참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때로부터 별로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길리어드, 혹시 저한테 섭섭한 게 있지 않으세요?”
“섭섭한 거라니?”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늘 당신에게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합니다만, 어쩌면 당신의 시선에는 그저 제가 어리숙하고 한심한 아내일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는 부부이고, 저는 그 무게를 모르는 나이가 아닌데. 아무래도- 저는 그간 당신에게 해 준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길리어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아스틴은 미소 짓고 있다. 하지만 정감 있어 보이는 연녹색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촉촉이 물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모닥불의 불빛에 반사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젖어 있는 것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떨리고 심장이 가라앉았다.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혹여나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 아내에게 상처를 주기라도 한 걸까.
아스틴은 말을 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저를 훌륭한 공작이라 칭송하면서도 무서워해요. 사실 그런 모습들은 제가 만들어 낸 것이니까 후회해서도 안 되고 할 생각도 없어요. 하지만 가끔은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연약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당신도 이해하시겠지만요.”
생각해 보면 마치 개미의 군주와 같은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정해진 길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감히, 누가 원망을 하겠냐마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단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일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이후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한참 동안 길리어드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자신이 참 애절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리어드 저는 당신이 좋아요. 무직한 성격도, 다정한 모습도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가만히 저를 바라봐 주는 눈동자도 사랑스러워요. 그래서- 저를 잘 알지도 못하는 수백만의 사람이 바치는 충성보다도, 당신의 마음 하나가 소중해요. 사실 하나의 가정을 행복하게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수백만의 사람을 다스릴 그릇도 되지 못하는 법이지요. 그러니 누군가 내게 백성들과 당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바로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
“아스틴……”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당신도 저를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까.”
아스틴은 어째서인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는 생각에 입술을 꾹 다물고는 시선을 조금은 옆으로 돌렸다.
길리어드는 그 표정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참 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치 기묘한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특별한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머릿속에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런 고백이 낯설지는 않았다.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았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란 그저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 서로 행동할 때 단순한 감정에서 탈피해 진정한 의미를 찾는 법이다.
그러니 그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째서인지 그것이 그저 정략결혼의 상대에게 형식적으로 베푸는 친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하지만 그는 다정하고 친절한 부군이 되어야 했으므로 혼자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확실하지만 믿어야 했다.
아내는 당연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그저 바쁘기에 보아줄 시간이 없는 거라고.
3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함없는 관계에 실망하고, 모왕을 바라보며 전전긍긍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도 그는 견뎌야 했다.
그래서 이런 식의 확실한 고백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간에 주었던 어떤 선물보다도 감사한 일이었다.
펠로데로 장가온 3년 동안 보고, 듣고, 겪어왔던 모든 일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래,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단어와 문장 중에서도 가장 고결하면서도 다정한 문장으로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입술이 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틴……. 눈을 감아 봐요.”
그 말에 무심코 길리어드를 향해 시선을 돌린 아스틴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길리어드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기대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에서 시작된 온기가 아스틴의 입술로 잔잔히 퍼져나갔다.
카모마일의 달콤함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촉촉하면서도 깊고 깊은, 따뜻하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 * *
바람이 찬 기운을 몰고 오더니 까만 구름이 빽빽하게 하늘을 메웠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화염석의 불꽃이 꺼질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이 구름 속으로 숨으며 삽시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근처에 있던 부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밤의 숲은 몹시 어두웠지만, 부케는 묵묵히 달렸다. 그와 함께 휙휙 지나가는 배경의 사이로 어느새 빗방울이 실선을 그리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차츰 거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한동안 거세게 발굽을 놀리던 부케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기묘하게 비틀린 거목들의 사이를 지나자 오두막이 나타났는데 근처에 있는 숲지기 일가가 사용하는 임시 초소였다.
비가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아 그들은 밤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길리어드가 고삐를 놓자마자 부케는 알아서 근처에 있는 거대한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근처 숲지기의 집으로 침구를 빌리러 가는 동안 아스틴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천둥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빗줄기가 사나운 바람과 뒤섞여 폭풍처럼 거세어졌다.
문고리를 놓자마자 나무 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철커덕 저절로 닫히었고, 그녀는 이윽고 어둡지만 아늑한 오두막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아스틴은 입구에 놓여 있던 유리 랜턴을 들었다. 비록 작은데다 지저분한 먼지가 묻어 있는 싸구려 랜턴이었지만, 근처에 쓰러져 있던 낡은 의자를 피해 벽난로로 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빛을 비춰 주었다.
그녀는 길리어드가 맡기고 간 가방에서 화염석 병을 꺼내어 안에 들어 있던 화염석들을 모두 벽난로에 쏟았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온몸이 젖었던 터라 약간은 오한이 들었다. 부르르 몸을 떨면서 발화 가루 주머니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손이 젖어 있어 불꽃을 피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발화 가루 주머니는 젖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작은 화염석 하나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근처의 장작더미 위에 놓여 있던 부지깽이를 들고 화염석들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열심히 불꽃을 지폈다.
어느덧 벽난로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올 무렵, 길리어드가 돌아왔다. 침구가 젖지 않도록 품속에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머리카락과 코트에서 뚝뚝 물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코트를 벽난로 옆 나무 걸이에 걸어 놓고는 치마의 안주머니에서 모직 손수건을 꺼내어 젖은 머리와 쇄골의 주변을 닦아 주었다. 텁텁하고 시큼한 빗물과 풀의 향기가 느껴졌다.
“어쩜, 춥죠? 어서 몸 좀 녹여요.”
길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불을 쬐고 있었다. 젖은 몸이 서서히 마르던 찰나, 길리어드가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주먹만 한 하드택 한 조각을 꺼내어 조각조각 부수기 시작했다.
퍽퍽하긴 했지만 그래도 꿀이 섞여 있어 약간은 단맛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우선은 그것으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잠시간 정적이 찾아왔다. 따닥따닥 타오르는 화염석의 소리만이 희미한 열기와 함께 주변을 메웠다.
마지막 하드택 조각을 입에 집어넣은 길리어드가 일어나더니 돌아서서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불을 평평하게 털어 바닥에 깔고는 베개를 잘 털어 얹었다.
“아스틴, 다 먹었으면 이리 와요. 잘 준비합시다.”
“문에 빗장은 걸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아까 보니 여기는 튼튼해서 비가 새어 들어올 일도 없을 거고 바깥은 부케 녀석이 지키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요.”
그가 베개를 마저 털면서 말했다.
아스틴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처마 아래 부케의 거대한 마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거대한 소나무의 가지가 처마 위로 흐드러지듯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마치 지붕의 역할을 해 주고 있어 비를 맞을 일도 없을 테다.
아스틴은 이윽고 이불 위로 올라갔다. 투박한 마 이불이었다. 약간 군내가 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포근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자연스레 서로를 바라보고 누웠다. 자작자작 화염석 타는 소리와 맞물려 분위기가 노곤하면서도 은근한 고요에 휘감겼다.
그 무렵 벽난로 맞은편의 창밖으로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번개였다. 뒤따르듯 거센 천둥이 울리자 길리어드가 살며시 그녀를 끌어안아 왔다.
아스틴은 천둥이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
“번개 치는 날에는 왠지 이불 속이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런가? 나도 그래. 사실 바깥이 시끄러울 때는, 침실만큼이나 안전한 곳도 없는 법이니까.”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대화라도 하면 어느새 잠이 들기 마련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길리어드… 자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아직. 물어봐요.”
“그 책 말이에요…. 어떠셨나요?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만.”
“이제 3권까지 읽었소. 결말이 대충은 예상이 되는데 조금 안타깝더군. 난 꼭, 후작이 죽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던걸. 꼭 그녀가 희생돼야 하는 건가? 이해가 안 돼. 좀 진부했어요.”
“4권까지 읽어 보시면 될 거예요. 그런데, 3권 감상은 그게 전부인가요?”
길리어드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요? 전 좀 더 하실 말씀이 많을 줄 알았는데, 사실 3권 때문에 귀족 의회에서 출간물 검열 회의까지 열렸었다고요.”
그 말에 길리어드의 보기 좋은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장난치는 건가?”
“어차피 여기선 할 일도 없는걸요.”
아스틴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경계하듯 그 얼굴을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예의 그 야수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감싸 안고 확 끌어당겼다.
“그런 의미의 감상이라면 얼마든지. 하지만 이런 경우엔, 말보단 몸으로 전달하는 게 더 확실한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아스틴은 그에게 바싹 끌어안긴 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했는데, 길리어드는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건 격렬하게 달려들 듯했던 기운과는 사뭇 달랐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도 고개를 젓는다. 대신 다시금 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참 애달프고 슬프게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애절한 표정을 짓는 걸까. 굳이 분위기를 잡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 그런 표정까지 짓자 그녀는 새삼 그가 가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물론 아스틴은 사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길리어드의 뺨을 살며시 쓸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길리어드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아스틴.”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이윽고 격렬하게 입술을 섞었다. 부드러운 혀들이 거칠게 서로를 쓸어내리다 한 번 떨어졌고, 다시금 더 깊고 은근하게 서로를 얽어갔다.
그 호흡을 교환하듯 깊고 깊은 입맞춤의 끝에 길리어드가 그녀의 가슴을 붙잡았다.
제법 거친 손길에 아스틴은 무의식적으로 몸이 긴장했지만, 그가 불쾌하지 않게끔 몸에 힘을 풀었다. 거친 손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천천히 둥글게 움직이다가 유두를 따끔하게 자극했다. 손짓에 따라서 호흡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녀는 마치 뜨거운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흡을 가쁘게 하는 흥분과 함께 물씬 체온이 달아오르고, 이윽고 다른 손이 천천히 치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허벅지를 스치고 장골을 쓰다듬다가 살며시 다리 안쪽을 건드렸다.
그즈음 길리어드가 몸을 일으키더니 자연스레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한쪽 팔에 하나씩 다리를 끼고는 끌어당기며 치마 속으로 상체를 집어넣었다.
이윽고 쪽, 입술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손가락이 말캉한 돌기를 스치더니 내부로 들어가 천천히 안을 긁어내렸다. 아스틴은 고개를 반대로 젖히며 이불을 그러쥐고는 가슴 속에 물씬 차오르던 뜨거운 것을 천천히 토해내었다.
“으음…… 흐…읏….”
호흡이 신음이 되자 그가 다시금 음핵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탐식하듯 부드럽게 입술로 빨아들이더니 혀와 이로 적당히 자극을 준다. 이윽고 음핵의 주변에서 아래쪽으로, 말간 액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을 천천히 받아 마시듯 계속해서 입술을 맞추어갔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눈가가 떨리었다. 말캉이는 피막을 자극하는 물컹한 불쾌감이 이물감과 정복감의 중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으음….”
한참의 핥아내리던 길리어드가 상체를 들더니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올렸다. 그리고는 아스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훅 허리를 밀고 내부로 들어왔다.
“흣….”
과격한 침입에 아스틴은 몸이 떨렸다. 안을 파고드는 느낌이 지난번보다도 더욱 빡빡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허리에 힘을 주면서 반쯤 몸을 일으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길리어드가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며시 뺨을 쓸어내리더니 입술을 맞추어 온다. 그렇게 이어지는 몇 번의 입맞춤 끝에, 손을 뻗어왔다. 그녀가 깍지를 끼워 주자 그가 조금 더 깊이 허리를 밀고 들어왔다.
“응…… 흐읏….”
그렇게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리어드는 내부의 주름을 짓누르듯 조밀하고 촘촘하게 삽입을 반복했다. 그것은 격하고 강렬하고 미칠 듯한 느낌이었으면서도,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아무리 부드럽다고 해도 태생적으로 강건한 체구가 위에서 한참 내리누르는데 무리가 안 될 수가 없었다.
“흐읏… 으음…….”
무릇, 잉태를 위한 최적의 자세는 정상위다. 강하고 안정적으로 태내에 깊이 정액을 주입할 수 있어 생산의 확률을 높이면서도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안아 줄 수 있어 부부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해 주었다.
물론 그러한 자세에도 단점은 있었다. 삽입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여인들은 다리를 오래 열고 있어야 하고 사내의 몸이 강골일수록 하반신에 무리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건 아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이 비틀리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읏… 흐으…”
순간, 귀두가 내부의 깊은 곳을 쿡 찌르고 들어갔다.
아, 짧게 비명을 지른 그녀는 입술을 살며시 비틀면서 고개를 젖혔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천천히 허리를 멈추었다. 그는 여인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과 쾌락에 젖어 있는 모습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내는 관계에서 통증을 참고 있을 정도로 유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성교통이라면 흔히 일어나는 증상이지만 계속해서 무리를 안겨 준다면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무릇 관계에 있어 진정한 쾌락은 상대가 완전히 기쁨에 정복되어 웃음을 터뜨릴 때 느껴지는 법이다. 해서 길리어드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렇게 아랫입술을 깨문 채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은 되레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관계 시 아내에게 자꾸 기분을 묻는 답답한 짓거리는 지양해야 했으므로 무릇 품위 있고 현명한 남편들이란 표정을 보고 기분을 살펴야 하는 법이었다.
그는 어쨌거나 자신이 아내의 몸속에서 황홀함을 느끼는 만큼 아내도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으니까.
그는 둥글게 문지르고 있던 가슴에서 손을 떼어 내고는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곤조곤하게 물었다.
“아스틴… 여보, 나를 봐요.”
“으음… 왜요…?”
“지금 자꾸 허리를 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힘들게 하는 건가? 그래?”
그 말에 아스틴은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려던 게 아니다. 하지만 몸이 생각과는 자꾸만 반대로 움직인다는 걸 부인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이런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마지못해 입술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크기와 길이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 말에 길리어드의 미간이 굳었다. 그건 자신이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살며시 아스틴의 허리 뒤쪽으로 손을 넣어 척추 부분과 주변의 근육을 만지기 시작했다.
꾹꾹 누르면서도 마치 살결을 펴듯 미끈하게 문지르는 느낌에 아스틴은 허리에 자연스레 힘이 풀렸다. 그러자 내부를 파고드는 것이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흐으…….”
그렇게 기둥이 아랫배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길리어드의 목을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면서 베개 위로 털썩 머리를 누이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길리어드는 한참을 그렇게 허리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빳빳하게 긴장해서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리어 제 모습으로 돌아가자 조금은 해쓱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다시금 열기가 피어올랐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아스틴은 그런 느낌에 무심코 입술을 열었다.
“길리어드….”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그녀는 다시금 길리어드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입술을 몇 번 받아 주면서 그녀의 호흡을 살폈다.
“으음… 길리어드….”
달아올라 있던 신음이 살며시 가라앉을 무렵에야, 그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여 내부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허벅지를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몸을 덮어 내렸다.
이어지는 삽입에 아스틴은 다시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길리어드가 턱 근처에 이어 관자놀이 부분을 핥고 있었다. 마침내 귓불의 끝을 부드럽게 깨무는 입맞춤에 그녀는 다시금 이름을 불렀다.
“길리어드….”
이번에는 대답 없이 삽입이 이어졌다. 그렇게 거칠면서도 고고한 움직임의 끝에, 길리어드는 아스틴의 허리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는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아스틴은 균형을 잃지 않으려 바닥을 짚고는 허리를 좀 더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부러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 순간, 길리어드의 허리가 조금 더 격렬하게 움직이더니 내부의 끝까지 치달았다. 주륵, 흘러나오는 액질의 느낌에 아스틴은 그제야 깊숙이 참고 있던 숨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길리어드는 그녀의 호흡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서야 몸을 떼어 내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맞추어 주며 다독여 주는 걸 잊지는 않았다.
다정스러운 손길에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억센 자극에 몸이 무리를 받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약간은 한심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심결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쾌락으로 고무되어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길리어드가 피하듯 고개를 조금 돌렸다. 마찬가지로 아까처럼 눈썹을 지그시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왜 그러세요, 뭔가 불편하셨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길리어드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말씀하세요. 제가 혹… 무례하게 굴었나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스틴은 살며시 셔츠의 옷깃을 붙잡았다. 지긋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 더 짙게 물들었을 무렵에야 길리어드가 결국 입술을 열었다.
“자꾸… 무례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소.”
“무례한 생각이라니요?”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오늘따라 당신이 왜 이렇게 색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어.”
“하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러니 이렇게 했는데도 몸이 가라앉지가 않아.”
아스틴은 그제야 다시금 그의 하체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기둥은 아직도 우람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그의 손목을 잡고는 살며시 눈에서 떼어 내었다. 그리고는 우선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러면서 지그시 바라보았는데, 길리어드가 볼살을 실룩이더니 억지로 묵묵하게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가라앉히려는 듯 애쓰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해서 무엇이 하고 싶으신데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망설이듯 입가를 비틀었다. 침묵을 지키면서도 가만히 손등을 잡아 왔다. 이렇게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역시 그렇단 말이지. 아스틴은 부러 나지막하게 속삭여 주었다.
“길리어드, 오늘 밤엔 당신이 나의 왕이에요. 그리고 저는 시녀가 될게요.”
길리어드가 숨을 훅 들이쉬었다. 이윽고 청람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애절한 듯하면서도 내부의 무언가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강렬하고 거친 눈빛이었다.
마음이 그랬다. 아내를 향한 강렬한 욕구가 이윽고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마침내 길리어드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당기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물끄러미 하부를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입술을 열었다.
“가장 비천한 왕이 될 거요. 시녀의 허벅지 아래 절할 테니까.”
그 순간 와르르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툭툭, 길리어드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더니 벗어 던졌다. 이어 길고 굵은 팔로 슬며시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는 등 쪽에 묶여 있는 끈들을 완전히 풀어내었다. 끈의 일부는 풀리고 일부는 끈 채로 뜯기어 나갔다.
완전히 나체가 된 그녀는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길리어드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벽난로의 불꽃이 조금 더 짙게 타오르면서 천장 위로 비치는 그의 그림자도 짙게 물들었다. 그렇게 어두운 배경을 등에 지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란 몹시 거칠었다. 마치 사냥 직전에 있는 야수와 같았다.
“아스틴.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당신이 허락했으니까.”
그 말에 아스틴은 입술을 조금 실룩이다 예의 가르릉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길리어드가 숨을 한 번 더 크게 들이켜더니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는 자신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결합이 된 상태에서 홱 다리를 붙잡고 돌렸는데 상체는 그대로 두고 움직였던 탓에 그녀의 내부가 휩쓸렸다.
약간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격렬한 몸짓에 아스틴은 사선으로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그녀의 다리를 조금 더 벌리며 치골 주변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왔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흣….”
반응에 맞추듯 길리어드가 한 번 더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기둥이 자극되는 부분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더 깊고 자극적으로 마찰되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몸을 맞추던 길리어드는 어느 부분에 도달해서야 만족한 듯 살며시 그녀의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그리고, 쾌락에 젖어 애달픈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스틴….”
이윽고 혀가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다. 아스틴은 살며시 그것을 삼키듯 받아들였다. 그렇게 텁텁하면서도 끈적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한 번의 입맞춤 후, 입술을 떼어 낸 그녀는 다시금 길리어드를 바라보았다.
빗물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반짝이는 눈빛이 혹독할 정도로 거칠었다. 그러면서도 입가는 웃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짐승 같은 느낌이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사실 이것은 무례였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아내의 몸을 멋대로 다루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니까. 해서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아스틴은 왜인지 그 거칠기 짝이 없는 표정과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역설적으로 이해되는 게 있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사람 잡는 색기가 있다고 하더니 어쩌면 이런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할 점은 인정해야 했다. 결국, 그라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보다도, 더욱 가지고 싶을 정도로.
“길리어드…….”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 줘요. 당신을… 닮은 강한 아이를.”
말없이 그녀의 목 아래로 입술을 맞추고 있던 길리어드가 그 소리를 듣더니 끄응 신음을 흘렸다. 아내의 목소리가 이토록 색스럽게 들릴 수가 있는 걸까. 이윽고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이 그녀의 귓가에 스쳐 왔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듯 나지막하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내 생애 최고로 거친 여인이야.”
동시에 삽입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렇게, 미칠 듯한 흔들림의 사이로 흐느끼는 듯한 신음과 짐승 같은 울음이 이어졌다.
아스틴은 귀가 빳빳하게 서는 오싹함을 느끼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거세게 끌어안을수록 흔들림은 더욱 격하고 강하게 이어졌다. 어찌나 사납고 강하게 다루는지 가만히 있는데도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격렬한 마찰의 사이로 길리어드가 신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당신의 아이를… 내가 지켜 주겠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살과 피와 뼈를 바쳐서… 목숨이 다하고 난 다음에도.”
살과 피와 뼈를 바치겠다. 그것은 스칼라이에서 사내가 여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노골적인 구애였다.
그 더할 나위 없이 충성스러운 속삭임에 그녀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이…… 나의 왕이에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잠시 자신을 떼어 내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몸을 뒤집고 후면에서 다시금 침범했다. 자세는 익숙했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그가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쓸어 왔다. 배꼽 아래를 부러 꾹 누르는 손짓에 아스틴은 몸을 움찔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흐읏….”
그녀는 조금은 고개를 돌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달아오른 뺨을 맞대고는 다시금 입술을 맞추었다.
아스틴은 그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들의 입맞춤은 어느새 서로의 혓바닥을 아무렇지도 않게 얽고 빨고 핥아 내릴 정도로 끈적하고 노골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 순간 번쩍거리는 불빛과 함께 거대한 번개가 쳤다. 어딘가의 나무를 쓰러뜨린 것 같았는데, 희미하게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빗줄기도 더욱 거세어졌다. 그것은 세차고 세차게 이어져 내렸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락을 식혀 주려는 듯.
아스틴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격한 신음도 노골적인 열락의 기운도 빗소리가 감추어 줄 테니까. 그렇게 그날의 밤이 깊고 깊게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