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정찬회
그날의 집무실은 때아닌 침묵에 물들어 있었다.
아스틴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집무실에서는 기사단의 본부가 있는 서쪽 성채와 연무장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바라보자 어째서인지 가라앉아 있던 안색에 조금은 그늘이 졌다.
길리어드에게는 알았다며 괜찮다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사실 속마음까지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참, 대단도 하지.”
그 뒤쪽에서 왔다 갔다 심각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던 시리스 바르도가 입술을 열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세상에 어느 시댁이 친구까지 보내서 이혼을 강요한답니까. 아무리 계부라 해도 그렇지 같은 남자 아니랍니까? 참 너무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더군. 해서 서로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고 하던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각하, 그분은 당신의 남편입니다. 이 집안사람, 다름 아니라 펠로데의 공작 부군이라고요. 한밤중에 당신을 침대에 덩그러니 놔두고 마음대로 나가셔도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걱정도 안 되셨습니까?”
“알아. 안 그래도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그래도 나름대로는 날 신경 쓴 거야. 왜 그랬느냐고 물어봤더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더라. 할 수 있다면 조용히 자기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고 말이야.”
“참 다정도 하시지. 하지만 공작님. 부군께서는 펠로데 가문의 사람입니다. 비록 왕족이라 성이 바뀌지는 않을지언정 그분은 이 집안사람이라고요. 이젠 무력까지 써 가면서 사람을 못살게 하는데 그냥 둘 일이 아닙니다.”
“그래. 그냥 둘 일은 아니지.”
한두 번이면 그냥 사소한 집안 다툼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혼하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까탈스러운 시부의 막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었고, 이제는 한밤중에 불러내었다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그녀는 그냥 넘어갈 호구는 아니었다.
아스틴은 심장의 혈관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작 조사를 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워낙 극성맞은 국왕의 성격상 또 뭔가를 요구하려는 게 뻔한 일이라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남편에게 신경을 썼어야 했다. 성벽 건축 사업이니 뭐니 집안이 개판인데 영지를 윤택하게 해 보았자 뭐 하겠나. 남편 하나 못 챙기는 아내인데. 새삼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을 지경이었다.
문득 남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는 말은 집안과 집안끼리의 갈등으로 번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건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펠로데 가의 사람이 되었다지만 남편은 조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부친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사람을 시켜 부군에게 날붙이를 들이미는 행동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혹여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했냔 말이다. 아무리 남편이 강인하다고 해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스틴은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당신이 스칼라이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가서 뭐라고 할까요.”
“안부를 전하고 와. 더불어 대체 뭐가 필요해서 이러는 건지도 물어보고. 그래도 큰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얼토당토않은 요구만 아니라면, 들어주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근데 공작님. 또 하나 잊으셔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만, 오늘 저녁 정찬회에 참석하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그러면 이제 명확하게 해 두셔야지요. 부군의 입지를 말입니다. 스칼라이 국왕도 국왕이지만, 지금 우리의 적은 다름 아닌 ‘그분’이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스틴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문제가 하나 해결되었다 싶으면 다른 사건이 터지는 걸까. 물론 그런게 인생이긴 하지만, 전개 방식이 내키지는 않았다.
* * *
랑기에 황궁의 입구는 남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제국의 명성답게 사소한 조형물까지도 예술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문을 지나 두 황제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석상을 지나면 까마득히 높다란 계단의 위로 황금과 은, 보석 장식과 함께 명장들이 그려 놓은 벽화로 화려하게 치장된 긴 회랑이 나타난다.
구조는 펠로데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한층 화려하고 생기로 가득했다.
벽화는 하나같이 황실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었는데 시대별로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던 작품인 만큼 가치를 따질 수 없었다.
그 끝에 황좌가 자리하고 있는 대리석 홀이 있었다. 백색 대리석과 황금 유약을 써서 홀 전체가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고 얼굴이 비칠 만큼 반짝이는 홀이 그날따라 수많은 사람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거대한 대리석 식탁들이 놓였고, 그 좌우로 랑기에에서 권세 있는 제후와 귀족들이 모두 참석해 있던 탓이다.
남쪽의 샨시르와 동부의 스칼라이가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무릇 남대륙을 사실상 제패하고 있는 조직은 랑기에 제국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이 안정적이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제국은 수많은 제후의 연합체였다. 그래서 랑기에 황실은 늘 중심부 권력을 노리는 제후들로부터 맹주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제후들을 견제해 왔다.
계속된 집안싸움의 결과 황제들은 당연히 자신의 충성도를 확인하기 위한 각자만의 방식을 선택했는데 현 황제의 방식은 다름 아닌 정찬회였다.
사전 통보도 없이 불시에 열리는 정찬회에 모든 제후는 빠짐없이 참석해서 경의를 보여야 했다. 그것이 황제를 향한 충성의 의미였다.
흔히 늦은 오후부터 시작되는 정찬회는 길게 계속되어 다음날 새벽이나 되어서야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식사 시간은 잠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근의 테이블이나 홀 곳곳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흩어져 사담을 나누거나 술을 마셨다. 일종의 친목을 다지는 셈이다.
길고 긴 대리석 테이블의 최고 상석, 랑기에 황제 이오넬 페르디카스 2세는 섬세한 이목구비만와 예리한 인상을 지닌 삼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금발을 매끄럽게 쓸어 올리고 흰색 셔츠에 짙은 미색 바지, 그리고 화려한 수가 놓인 덧옷을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다소 예리하고 섬세해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조금은 뇌쇄적인 느낌의 얼굴에 비해 그는 성격이 거친데다 가학적이었다.
뭐 당대의 군주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섬찟할 정도로 냉혹한 분위기가 멀리서 봐도 보통 성격은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건 거인족인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핏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유유하게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주변에는 그가 특별히 초대한 사람들만 앉을 수 있었다.
황제와 비슷한 나이대에 전원이 사내였고 신분이 아주 높거나 특별한 능력을 갖춘 엘리트들이었다.
대단한 신분치고는 대화의 주제가 상당히 소박했는데, 주식(株式)이나, 말의 품종, 혹은 마차나 토지의 가격, 별장이나 노예를 비롯해서 토너먼트나 도박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얼마 전에 칼페케 종의 명마를 샀는데, 멍청한 마구간지기 놈이 그놈을 암말과 교배 붙이기 전에 거세시켜 버렸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놈도 같이 거세시켜 주었지.”
킬킬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근처에 있는 대리석 기둥, 아스틴은 반쯤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아노르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실룩였다. 오늘따라 도가 좀 지나친 것 같았던 터다.
제국에서는 스칼라이의 사내들을 마소(馬牛)와 같은 짐승으로 멸칭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칼페케 종은 주로 전투마로 사용되는데 스칼라이가 원산지였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는 스칼라이인은 남편이 유일했다.
펠로데의 공작 부군인 만큼 그의 자리는 황제의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족들은 없었다.
“……거세는 빠를수록 좋은 법입니다. 그 종은 거세 전에는 군마로 쓸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인데 시기를 놓치면 제압이 안 되니까요.”
“이봐, 길리어드. 그래도 명마인데 제 새끼는 보도록 해 줘야지. 나는 누구랑은 달리 자비로운 군주란 말이야.”
그 소리에 황제의 왼쪽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사내가 픽, 웃음을 흘렸다. 갈색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지닌 거구로 킬킬거리는 모습이 불쾌하게끔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리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웃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그건 무례였다.
아스틴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질 무렵, 낯익은 그림자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눈처럼 하얀 백발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자른 단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그레이스 펄린 백작으로 아스틴과는 오랜 친구였다.
신중하라는 듯, 그레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자기야, 아무리 잘생긴 남편이라지만 적당히 봐. 닳겠어.”
“오늘따라 폐하께서 기분이 꽤 좋으신 모양이군.”
“불꽃이 튀네. 아무튼, 저쪽은 참 한가해. 모이기만 하면 기 싸움을 벌이니까. 그런데 자기가 웬일이래? 평소에는 그러려니 했잖아.”
“나는 저 사람의 ‘아내’야. 그레이스.”
“누가 아니래? 그래도 참아. 저 양반 말투 더러운 거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그래도 전하께서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지. 우리 남편 같았으면 면전에서 쌍욕을 박았을 텐데 말이야.”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레이스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착잡하긴 하지만 저러는 의도를 알고 있으니 참는 게 옳았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떼고는 그레이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백작 부군께서는?”
“알잖아. 이런 곳 안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거. 엊저녁부터 아프다고 꾀를 쓰길래 그냥 두고 왔어.”
그레이스의 남편은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그리고 대개 이런 장소에서는 계급에 의한 허세가 흔한 법이다. 그러니 평민 출신들에게는 꺼려질 만한 곳인 것도 사실이었다.
아스틴은 팔짱을 낀 채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오기 싫다는 마음이야 이해한다만…. 그래도 설득해서 데려왔어야지. 사교의 장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당신, 나중에 후회한다.”
그레이스가 피식 웃었다.
“웃기시네. 우리 그이가 그런 걸로 삐지기라도 할까 봐? 우린 어젯밤에도 7번이나 했어. 당신들처럼 침상에서까지 ‘신성하고’, ‘고귀하신’ 분들은 아니라고. 아마, 지금쯤 침대에서 일어나 아들이랑 노느라 바쁠 거야. 아무튼, 제 아빠를 꼭 닮아선-”
그레이스가 능글능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7년 전에 이미 어엿한 후계자를 낳았던 것이다.
아스틴은 더 말해 봤자 뭐 하겠냐는 생각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농담은 계속되고 있었다.
“길리어드, 내가 명마를 왜 샀겠나? 줄줄이 새끼까지 낳게 하려고 한 거지. 어차피 죽을 때까지 부려 먹힐 미물인데 자식도 하나 없는 건 가혹한 짓이잖나. 그저 타기만 할 거라면 굳이 말이 아니라도 많을 텐데 말이야.”
웃음소리는 좀 더 커져갔다.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마침내 대놓고 폭소를 터뜨렸다. 마주 앉아있던 앉은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의 아노르인은 아주 야릇하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의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술을 열었다.
그는 페이들림 오르킬리아스 후작으로 남동부 제후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이자, 귀족 의회의 의장이었다.
지금의 사태를 염려하는 양 그의 목소리는 사뭇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했다.
“그래도 순순히 거세당한 것을 보니 그렇게 문제 있는 놈은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그놈이 날뛰어서 폐하의 마구간지기를 짓밟아 버렸다면 더 큰일이 생겼을 겁니다.”
“글쎄, 난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 것 같네. 고작 말 하나 못 길들이는 놈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차라리 죽이고 그놈의 말도 목을 쳐 버리는 게 낫지. 아니면…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시정마(始情馬)로 쓰거나.”
중재하려는 오르킬리아스의 행동에도 황제는 부러 즐기듯 모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자리하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스틴은 남편을 쳐다보았다.
길리어드는 대꾸조차 않고 있다. 그녀는 속이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속마음은 알았다. 저 자리에서 쉽게 불쾌하다는 내색을 해 버리면 그것은 그것대로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마음까지 평온할 리는 없을 테다.
게다가 태자 시절에는 일국의 신이라 추앙받을 정도로 대단하던 사람이 저런 꼴을 당하는 게 마뜩지는 않았다.
아스틴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던 때였다.
길리어드의 뺨이 실룩이더니, 이윽고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동시에 눈썹이 거칠게 일그러졌는데 표정이 놀랍도록 거칠게 변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좀 더 온순한 말을 사지 그러셨소.”
“뭐?”
“내 모국에서 그 종은 다섯 살 꼬마들도 탑니다만. 랑기에 사내들에게는 지나치게 호전적이지요. 아마 보통의 마구간지기가 다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답지 않은 길리어드의 대꾸에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늘상 무슨 말을 들어도 점잖고 조용히 있던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니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다 잇속은 차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근처에 공작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섣불리 무례하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대 황제와 제후의 관계에 절대적인 충성심이라는 것은 없었다. 특히나 펠로데의 공작 부군이라지만, 길리어드는 그 전에 스칼라이의 왕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만 그가 묵묵히 참았던 것은 부군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그것이 옳았다. 의도가 뻔한 모욕에 반응해 준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꼴도 없었으니까.
이윽고 길리어드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비소했다. 그건 그간의 고고하고 점잔빼는 듯한 모습과는 전혀 달라, 매우 차갑고 거칠어서 그야말로 짐승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언제 한번 제 마사에 방문하십시오. 저의 마구간지기가 다루는 방법을 잘 알려 줄 겁니다. 확실히 교배시키는 방법도요. 뭐, 좀 거칠긴 할 테지만 그래도 누구처럼 실패하지는 않겠지요.”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펠로데 가와 황가가 맹주의 실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도 어언 몇 세대를 내려오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황제가 펠로데 공작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거의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상 제국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중북부의 제후들은 그녀를 황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지금 길리어드는 고작 제후 하나 견제하지 못해 버거워하는 황제를 되레 비꼬는 것이었다.
아스틴은 속이 다 시원해졌다. 저 사람이 웬일일까,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휘, 그레이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자기야, 그래도 이만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저러다 애꿎은 사람들만 엄한 꼴 당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자리에 모여 있는 인물들은 그날 기분에 따라 따르는 시종들의 목을 잘랐다 붙였다 하는 인간들이다.
그 무렵 어떤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지날 때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는데, 다름 아닌 황후인 루시언과 황태자였다.
평소 황후는 서고와 궁성의 안채에서만 머물고 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황제가 정찬회를 열고 억지로 참석시킬 때에야 나타났는데, 그마저도 늘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황태자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상석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 폐하.”
“아, 펠로데 공작이군.”
“왜 그러시죠? 폐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루시언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들에게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 보고 싶은데…. 폐하께서는 지금 사교 대화 중이시니. 내가 감히 나설 수가 없지 않나.”
“저런, 다정하신 것에도 정도가 있죠. 언제까지 계속 서 계시려고요? 어디 봐요.”
루시언이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는 황태자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리던 황후가 단호하게 호흡을 들이쉬더니 아스틴을 따라갔다.
테이블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사실 전쟁 일보 직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이오넬과 길리어드, 그리고 그 모습을 염려하고 있는 귀족들의 시선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 듯 분위기가 아주 삭막했다. 그러한 와중에 황태자를 안고서 나타난 아스틴은 황제를 바로 마주하였는데 표정이 차분하고 친근해 보였다.
옆에 나타난 황후의 모습에 황제가 흘끗 시선을 돌렸다. 질문조차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황후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오넬, 이만 들어가 보려 해요. 아이가 좀 아픈 것 같은데….”
황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는 고개만 까닥거렸다. 그 허락에 황후가 안도하고는 아스틴에게서 황태자를 받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아스틴은 물러가지 않고 다정스레 이오넬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오넬 또한 예의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미소를 지었다. 편하게 대하는 태도가 마치 애인이나 아내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참 떼어 내려야 낼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으니까.
아스틴은 아홉 살부터 10년간 황실에서 살며 그와 함께 제국 기사단에서 복무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공작의 직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황태자의 서기관으로 일했다.
황태자가 선제의 노여움을 사서 북서부로 유배되었을 때에는 부친의 명령으로 그를 따라가서 몇 년간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
그와 함께 밭도 갈고 무도 키우고 돼지도 쳤던 것이다.
황제가 끝끝내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 함께 귀양지에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그래, 동지이자, 오빠이자, 상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각자 가문을 물려받고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 지금은 서로 정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사적 친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폐하,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조금 전까진. 그런데-인상이 안 좋은걸. 왜, ‘잔소리’라도 하려고?”
“설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저도 좀 듣고 싶어서요.”
“글쎄…. 지금 우리는 남자들만의 수준 높은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여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고상’한 ‘대화’지. 여기가 집무실도 아니고. 아내인 네가 낄 곳이 아니란 걸 알잖나.”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만 하시고, 제 부군을 놓아주시죠.”
“벌써? 아직 자정도 안 넘었는데. 어차피 자네들 부부는 이 시간엔 할 일도 없잖아.”
그 무렵 길리어드가 묵묵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뭐? 오늘따라 자네답지 않은데. 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뭐라고-”
“아내가 지친 모양입니다. 제가 눈치 없게 너무 오래 앉아 있었으니까요. 갑시다, 아스틴.”
그 말에 다른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점잖기만 하던 사람이 대거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테고 평소엔 거의 간섭조차 하지 않던 공작이 나서서 이런 식으로 남편의 편을 들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터다.
황제는 양손을 깍지 낀 채 잠시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그 역시 이러한 부부의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간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은 사뭇 의아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관계의 진전인가, 혹은 그저 체면을 지키기 위한 중재인가. 물론 오늘 자신의 발언이 약간 지나쳤다는 사실은 황제도 인정했다.
이윽고, 속을 알 수 없는 특유의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할 수 없지, 조심해서 가게나.”
* * *
두 사람은 홀 밖으로 이어져 있는 기나긴 회랑을 걸었다.
아스틴은 그의 옆을 따라갔다.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말없이 걷던 길리어드가 계단을 앞에 두고 멈추었다. 어째서인지 가로등이 없었지만 달빛이 대리석에 반사되어 주변이 하얗게 빛나는 장소였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도 누군가가 비추는 듯 반짝여 보였다.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모습에 아스틴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길리어드는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는데, 아스틴은 예의 조금 전의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사실 한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은 무례였으니까.
아무리 그녀가 가문의 주인이라고 해도 남편이 집안을 위해 사교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마음대로 그만 돌아가자느니 뭐라느니 할 권리는 없었다.
특히나 황제의 앞이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오기로 마음먹은 순간 차라리 한 소리 들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라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말을 들어도 각오하기로 했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가 참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스틴, 당신은 왜 내 팔을 안 잡는 거지?”
“네?”
“그간은 혹시 기분이 상할까 묻지는 않았는데, 지금이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묻는 거요.”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건 시종 무관들이 각하, 부축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래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그는 그런 것 치고는 참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길리어드는 아내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정말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 귀족들은 이런 모임에서 부부가 함께 걸을 때면 남편들은 아내에게 한 팔을 내어 주고 아내들은 남편의 팔을 반쯤 껴안고 다녔다.
아내처럼 그냥 옆을 따라 걷지는 않았던 것이다. 길리어드는 처음은 랑기에의 여자들은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건가 싶어 희한하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일종의 예절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내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매번 정찬회장을 보면 자신들 부부만 이런 식이었다. 물론 길리어드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지만, 내심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감히 걷는 걸 두고 이래라저래라 입을 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만큼은 물어봐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데리고 나와준 지금만큼은.
“처음에는 나를 생각해 주는 줄 알았지만, 사실 요즘엔, 당신이 나와 팔짱을 끼는건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혹시, 내가 오해를 했던 건가?”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전 그녀는 스칼라이에 사절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왕궁의 무도회에 참석했는데 그 나라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비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약하게 군다는 이유로 말이다.
사실 거리에서 지나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이유로 그 남자의 집안 여자들, 아내나 여동생, 누나, 어머니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는 게 스칼라이다. 아스틴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라의 문화가 그렇다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급적 피했던 것이다. 물론 주변에서는 이상하다며 수군거리고는 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길리어드, 그건 오해예요. 너무 큰 오해라고요. 저는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너무 좋은걸요. 원한다면 잡을게요. 그런데…… 괜찮아요?”
그 말에 길리어드는 안심해서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래? 이제 보니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였군. 나중에 내가 늙으면 지금 이야기를 꼭 해 줘요. 물론 나는 언제 그랬느냐고 모르는 척하겠지만.”
뜬금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에 아스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좀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얼굴로 이렇게 활짝 웃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뜨끔한 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여자들이 남자에게 빠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이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자, 내 팔 여기 있어요. 꽉 잡아도 좋아.”
아스틴은 의도는 십분 이해했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길리어드가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확실히 내가 당신한테 조금 무심했던 것 같아, 당분간 나를 철없고 눈치 없는 왕족이라고 생각해도 원망은 안 하겠소.”
아스틴은 그렇게 길리어드의 팔을 껴안았다.
그들은 높다란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 전 미소짓던 모습과는 달리, 그날따라 길리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차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차가 다그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출발할 즈음, 아스틴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신가요?”
“뭐가 말이지.”
아스틴은 정말 몰라서 그렇게 되묻는 건가 싶어 다시 물었다.
“아까 정찬회 말이에요.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당하고만 있지 마세요. 그 입 별난 거 참고 있을 필요도 없다고요.”
아까의 그 자리는 사실상 황제의 충성심 시험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공작 부군이다 보니 그는 내조의 이유로 사교 모임에 가야 할 일이 많았다. 작게는 카드 게임이나 골프, 당구, 사냥 시합에서 크게는 토너먼트, 심지어는 내기 도박까지.
사실 아스틴은 이제껏 길리어드가 황제의 비위를 참으로 많이도 맞추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조를 잘하는 것과 자존심을 갉아먹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상대방이 자극하는 이유가 뻔할수록 더더욱 그랬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대답했다.
“그래도 황제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이 나라의 주인이잖소. 그리고 나는 당신의 남편이니까… 참아야지. 예전에도 말했지만 의도가 있는 행동에 그대로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여보, 당신은 왕족이에요. 그리고 펠로데의 공작 부군이라고요.”
“알아요. 그래서 오늘은 한마디 했잖소. 당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황제께서도 꽤, 속앓이를 하실 거요.”
“네, 저도 똑똑히 들었어요. 속이 시원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이득 없는 싸움은 안 한다는 주의 아니셨나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는 이제 아버지가 되어야 하잖아. 그러니 앞으로는 너무 쉬이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건 맞는 말이었기에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어드는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나라의 태자의 직위에 있었던 만큼 정치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정국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는 아스틴의 마음을 이해한다. 한 가문의 군주로서 안사람이 모욕을 당하면 그것만큼 기분이 상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황제의 진짜 속셈을 알았다. 사실 정말로 이혼을 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일 터였다.
아내는 황제의 섭정이자 최고 자문관이다. 그리고 황제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그녀와 상의해야 했다.
그러니 위세 싸움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오넬 페르디카스는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지지하는 처가를 비롯한 남서부 제후들의 힘을 끌어들여 어떻게든 그녀를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쉽지가 않다. 자신과의 결혼으로 인해 황제로서는 중북부와 동부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여간 성가시지 않을 테다.
길리어드는 황제가 보통은 아닌 정치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괜히 자신을 붙잡아서 갈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아내가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군의 의무. 특히 자제력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자극을 참고 호구처럼 보이는 것이 때로는 본성을 드러내어 주변의 두려움을 사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물론, 오늘은 예외였지만.
아내가 듣고 있을 텐데도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스틴은 길리어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겠냐마는 그래도 이제는 방임하고 싶지가 않다. 어쩌면 그는 이런 자신을 참을성 없는 군주라고 염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때로 사람이란, 모욕을 참아서만은 안되는 법이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망설이다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셨어요, 정말. 앞으로는 당하고만 계시지 마세요.”
감히 그녀가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은 무례였다. 해서 그녀도 조금은 망설여졌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스틴은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있어 자신이 펠로데의 공작이 아니라 아내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을 해 주고 싶었다. 그가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었듯이 말이다.
묵묵하던 길리어드의 눈동자가 젖어 들어 갔다. 살며시 쓰다듬는 손짓이 부드럽고 따뜻했던 탓이다.
그건 참 낯선 모습이었다.
아내는 자신을 조금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배려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았다.
집안의 주인이라면 좀 강압적으로 행동하고 권세를 세우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집안 사람들에게만큼은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군주였다.
특히 강인한 전사들의 나라에서 신처럼 떠받들어졌던 남편에 대해서 그녀는 늘 품위를 지켜 발자국 물러나 바라보아 주었다. 경칭을 쓰거나 무릎을 꿇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배려를 결코 섭섭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길리어드는 아내에게 조금은 소탈한 행동을 바라고는 했다. 그것이 감히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손길이라니. 그건 마치 벽을 깨버리고 들어오는 듯한 행동이라, 그는 가슴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문득 아내에게도 감격을 나눠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추었다. 길리어드는 조금은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지.”
“말 안장이 풀려 수리가 필요합니다. 부군, 잠시 멈추겠습니다.”
마부가 쩔쩔매며 그렇게 말했다. 곧이어 뒤따르던 하인들이 말을 끄집어내고 수리를 시작했는데 아스틴은 틈을 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흔히 정찬회가 열리면 부부는 그날은 제도에서 머무르고 아침이 되면 펠로데 성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은 제도에 있는 그들 소유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근처에 숲이 있는 것 같은데 시종 무관 몇몇이 말에서 내려 서성거리듯 등불을 밝히고 있을 뿐 주변은 몹시 어두컴컴했다. 그나마 마차 안이 밝았던 건 달빛이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의를 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외진 거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문득 다리가 뻣뻣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래 앉아있었던 터다.
그 무렵 달칵이는 소리가 들렸다. 길리어드가 마차의 문을 잠갔던 것이다.
“…주변이 꽤 어둡군. 저택까진 좀 남았는데, 위험할지도 모르겠소.”
“그렇죠? 안에 랜턴이라도 켤까요?”
“나는 괜찮아. 다만… 걱정이군. 일찍 돌아가야 일찍 잘 수 있을 텐데.”
길리어드가 조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살며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니 이 사람이? 아스틴은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그 무렵, 옅은 어둠 사이로 나긋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은데, 아스틴, 잠시만-”
“길리어드, 여긴 마차예요. 우리한텐 다리도 못 뻗을 정도로 좁은 곳이라고요.”
최고 귀족의 마차인 만큼 완벽하게 푹신한 시트를 갖추고 내부가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어도 마차는 마차였다. 내부의 크기는 보통의 침대보다도 작았다. 그나마도 반으로 나누어져 있어 사실 다리를 놓을 곳도 부족했다.
사실 길리어드만큼이나 아스틴도 키가 큰 편이었다. 178센티에 달하는 신장에 오늘은 높은 구두까지 신어 다리조차 쉽게 뻗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냐는 듯 길리어드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있다가 다시금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럼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오면 되겠군.”
“네에?”
“날 깔고 앉으란 말이오. 지난번처럼.”
아스틴은 표정을 굳혔다.
이 남자가 정말,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는 건가. 물론 요즘 들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왕족의 위엄을 망각하는 것은 그녀가 용납이 안 되었다.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팔을 떼어 내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보 당신은… 왕족이에요. 품위를 지켜야죠.”
“그런 것 치곤 지난번엔 잘만 올라가던데. ‘만지기’도 잘하고.”
“그건, 그곳은 마차가 아니었잖아요….”
아스틴은 억지라 느끼면서도 다시금 길리어드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 희한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런 장소에서 흥분하는지. 지난번에도 숲에서 대뜸 달려들더니, 취향이야 자유롭지만 문제는 부담감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라는 거였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살며시 고개를 숙이더니 귓가를 살짝 물었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찰싹 때렸다.
“왜 이래, 정말?”
“애교요. 스칼라이 식의.”
이윽고 그가 차창의 커튼을 치며 쪽 입술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부딪히던 입술이 좀 더 거칠어지더니 천천히 아랫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스틴은 당황해서 몸을 조금 뒤로 빼어 냈지만 어느새 그의 탄탄한 팔이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길리어드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배 쪽으로 끌어안으며 다시금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끌려가고 말았다. 마치 갇히듯 품에 안기자 숨이 막혀 왔다. 가뜩이나 꼭 맞추어 입은 드레스가 더욱 조이는 것처럼 느껴져썬 것이다.
갑갑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틀면서 신음했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손을 움직였다. 바스락바스락 간질이듯 드레스의 뒷부분을 만지다가 홱 끈을 끊어 버렸다.
그에 드레스의 윗부분이 스륵 풀리며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듯 쏟아졌다.
한 팔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아스틴은 조금은 심드렁히 표정을 굳혔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지. 노력하겠다는 말은 이해했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노력을 하는 걸까?
말없이 가슴을 가리고 있던 그녀에게 길리어드가 살며시 다른 손을 붙들더니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벅지로 가져다 대었다.
“만져 봐요. 내 다리는… 마차의 시트보다 훨씬 안락하고 푹신하니까.”
그리고는 살며시 쓸어내리게 했다.
이 남자가 정말, 무어라 하려던 아스틴은 입술을 다물었다.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허벅지는 정말로 튼튼하고 단단했으니까. 강철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허벅지를 문지르게 하던 손이 조금씩 올라가더니 허리를 끌어안으라는 손짓으로 변했다.
아스틴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검지 손가락을 뻗어 꾸욱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움찔하더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길리어드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스틴은 잠시 놀라서 몸을 뒤로 빼어 냈다. 그 미소가, 마치 먹잇감을 독차지한 야수와 같이 냉혹하고 난폭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스틴,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
길리어드가 기어코 팔을 뻗더니 살며시 엉덩이를 감싸 안고는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
이후 씨근거리듯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아스틴은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도 그렇게 점잖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두툼한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탄탄한 느낌에 그녀도 물씬 끌어 올랐다.
결국 아스틴은 살며시 휘어 감듯 길리어드의 목을 껴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선 가슴만 허락할 거예요.”
* * *
길리어드가 숨을 훅 들이쉬더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더니 살며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풍만하게 솟은 둥근 부위를 따라가며 입을 맞추다가 조금씩 반대쪽의 유두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살며시 앞니로 자극을 주며 빨아들였다. 파고드는 입술에 그녀는 허리를 젖혀 자극을 줄여 보려고 했지만 그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가 언제까지나 힘을 철저하게 자제해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늑골 아래로 내려와 지그시 가슴의 한쪽을 감싸 쥐었다. 바깥 부분에서부터 둥글게 문질러 오다가 천천히 안쪽으로 향하는데 엄지손가락으로 슬며시 유두를 쓸어내린다.
물씬 밀려오는 흥분에 아스틴은 새삼 그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텁텁한 가죽 냄새와는 다르게 그에게서는 쾌청하고 달콤 쌉싸름한 백화향이 풍겨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남편은 완벽한 성장 차림이었다. 평소 조금은 덥수룩하던 머리카락을 멀끔하게 가르마를 타고 향유와 기름으로 완전히 쓸어 올렸다.
그래서일까 고독하게 잘생긴 얼굴이 원색적일 정도로 도드라져 보였다. 더불어 커다랗고 시원하게 뻗은 체형에 딱 맞는 흑색의 예복을 갖추어 입은 모습은 누가 봐도 한 나라의 왕족 그 자체였다.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가슴을 탐하고 있다니. 묘한 불쾌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살금살금 문질렀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배를 조금 앞으로 내밀며 그의 배에 기대었다. 단단한 근육이 몸에 닿자 물씬 체온이 달아올랐다. 그러한 반응에 길리어드가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가 다시금 입술을 맞추어 왔다.
아마 자극점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토닥였다. 그간 가슴이 참 고프긴 고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물론 불쾌하게 제 욕심만 채우려고 했다면 무례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늘은 넘어갈 생각이었다. 고요하고 은밀한 공간 속에서 이런 유혹을 받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어떤 사내들은 관계를 그저 침대 위에서 정상위로만 끝내면 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말하자면 그건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행위였다. 고집이 센 만큼 성욕이 풍부한 군주 아내들이 시시하다고 싫어한다면 다음에는 시도조차 어려워지니까. 해서 이렇게 흥분을 유발하는 집요한 시도는 오히려 독려를 해 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입술이 슬며시 아래쪽 부분으로 옮겨가더니 유방의 아래쪽을 건드렸다. 그리고 쪽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가슴을 깨물었다.
“…으음… 거기는-.”
그녀는 호흡을 깊게 들이쉬었다. 은근한 숨소리에 길리어드가 잠시 몇 번 더 입술을 맞추더니 조심스레 혀를 가져다 댄다.
느낌이 유독 강렬했다.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살며시 핥아 내리는 느낌에 아스틴은 일부러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슴 애무는 부부 성애의 기본이라지만, 여인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미묘한 불쾌감을 줄 수도 있는 행위였다.
만일 길리어드가 제멋대로 흥분해서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정이 뚝 떨어졌을 테다.
하지만 그는 흥분했다기보다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마치 무언가를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스틴은 조금 전 발견했던 야수 같은 미소를 떠올려 보았다. 평소엔 불순하기 그지없는 불균형을 두고 남세스럽다 생각할 테지만 그날따라 물씬 풍겨 대는 수컷의 향기가 그녀는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의외였다. 그렇게 점잖던 양반이 열심히 할 줄은 몰랐으니까.
“부군,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외침과 함께 거센 채찍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말들이 푸르릉 울음을 토하면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스틴은 왜인지 귓가가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길리어드가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 내고는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무직하면서도 은근한 표정으로.
이윽고 그가 팔에 은근히 힘을 주더니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날갯죽지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거칠면서도 느긋하게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이윽고 천천히 허리 아래쪽으로 내려오더니 치마를 슬며시 걷어 올렸다. 치마 속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더니 조금 더 자신과 가깝게 붙여 온다.
그 순간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마차가 덜컹거렸다.
돌부리 같은 것에 채인 모양이었다. 몸이 들썩이며 그녀의 다리 사이가 그의 아랫배와 조금 더 맞닿았다. 그녀는 부러 심드렁히 입술을 열었다.
“정말…… 튼튼한 의자로군요. 도무지 흔들리지가 않아요.”
“다행이군. 그러면 조금 더 편하게 앉아요.”
길리어드가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아 왔다. 아스틴은 부러 허벅지를 움직여 그의 아랫배를 감싸 안듯 몸을 붙였다. 그 은밀한 접촉에 길리어드가 그녀를 올려다보다 턱 근처에 입술을 맞추어 왔다.
몇 번 입맞춤의 끝에 깊이 마주해 왔다. 입술이 다시금 살포시 엮이고 혀가 천천히 입천장을 핥아 내렸다.
아스틴은 마치 감싸듯 그의 혀를 부드럽게 얽어매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조금 더 격해졌다.
“아스틴 머리 쓰다듬어 줘요.”
“네?”
“……아까처럼.”
그녀는 대답 대신 살며시 그의 목 뒤쪽으로 손을 넣고는 머리카락 사이로 두피를 간지럽히듯 만져 주었다. 평소에는 몰랐지만 남편의 머리카락은 꽤 억세면서도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 긁지 않도록 조심조심 만져 주고 있는데 길리어드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옅게 헛기침을 했다.
무언가가 짜릿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입술을 비틀어 미소를 짓는다.
“용서해 줘요. 내가, 조금 거칠어질지도 모르겠소.”
보아하니 완전히 흥분한 것 같은데, 고작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 그렇게 흥분할 일이던가?
어쨌든 아스틴은 하나를 배웠다. 동시에 그녀의 체온도 물씬 달아올랐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한 팔로 끌어안고는 얼굴을 가슴에 묻게 했다.
커다란 손이 치마 안으로 들어오더니 슬며시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가터벨트를 풀어 버리고 거들 속으로 들어왔다.
아스틴은 허리를 조금 굽혀 이마를 그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어느샌가 내문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피막이 있는 부분을 매끄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안쪽으로 들어와서는 내부를 천천히 휘저었다. 살며시 간질이는 손길에 아스틴은 그걸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몸이 뜨거워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길리어드가 고개를 들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턱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는데 입술을 맞추어 달라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결국 살며시 그의 아랫입술을 물어 주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길리어드가 다시금 확 끌어안고는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제 가슴을 쓰다듬게 했다.
아스틴은 두툼하고 탄탄한 그의 흉근을 쓰다듬으며 아랫배를 조금 더 가까이 맞대었다.
그 무렵 바지 안쪽에서 뻣뻣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기둥이 느껴졌다. 그것의 은근한 움직임에 아스틴은 다시금 심장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입맞춤을 잠시 멈추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쿵쿵 울리는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 정도로 흥분이 격해졌다.
그 순간, 듀랜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거의 도착했습니다만. 좀 세웠다가 갈까요.”
그에 길리어드는 아스틴을 꼭 끌어안았다가 후욱 숨을 한 번 내뱉으며 물었다.
“여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침대로 가요.”
아스틴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면서 말했다. 가슴이 이렇게 세게 뛰었던 적이 언제쯤이었더라, 참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길리어드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로 간신히 심장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마차가 조금 속도를 높이더니, 이윽고 어느 저택의 앞에 도착했다.
길리어드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아스틴은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것을 여미고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이만 문을 열겠다는 시종 무관의 목소리에 무심코 일어날 무렵이었다. 길리어드가 그녀를 저지했다. 직접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발을 붙잡고는 구두 한쪽을 벗겼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두 동강을 냈다.
“…오래 서 있느라 피곤했지? 그러니 이런 구두는 벗어요. 다른 걸로 갈아 신는 게 낫겠소.”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안아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초야 때의 행사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다.
아스틴은 공작으로서의 체면과 단단하고 강철 같은 몸이 주는 안정감의 사이에서 잠시 고뇌했다.
끓어오르는 욕정과, 이성 사이에서 그녀는 상황을 받쳐 줄 수 있는 답안을 떠올려야 했다. 그러다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체면도 체면이지만 주변 시선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육체적인 본능에 탐닉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어쨌거나 자신은 군주이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구두의 반대쪽을 벗겨 내고는 그것을 마차 안 어딘가에 던져 버렸다.
길리어드는 마치 작은 사슴을 안듯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아스틴은 그의 외투 밖으로 몸을 빼내어 입술을 맞추었다. 길리어드가 살포시 눈을 감으며 그것을 마주해 주었다.
부부는 정찬회로 인해 제국의 수도에 들를 때면 항상 제도에 있는 별장 저택에서 머물렀다.
그날따라 침실의 문은 다소 격하게 열렸다. 길리어드가 문을 발로 걷어차듯 열어젖히고는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뒤를 따라온 듀랜트가 잠시간 그 모습을 보더니 짤막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문을 꼼꼼하게 닫아 주었다.
방은 성의 침실보다는 작았지만 그래서 더 아늑했다.
타액을 빨아들이듯 집요하기 그지없는 입맞춤이 호흡이 힘들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아스틴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탐닉하던 와중 길리어드가 크라바트를 풀어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셔츠의 단추를 잡았다. 아스틴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은 옷 벗지 말고, 그대로 와요.”
그 말에 반쯤 단추를 풀고 있던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마치 덮치는 듯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 셔츠가 몸에 스치는 느낌이 좋거든요,”
이윽고 그가 한쪽 팔에 하나씩 허벅지를 끌어안고는 천천히 엎드리더니 허벅지 안쪽으로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은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내부를 빨아들였다.
아스틴은 반쯤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서 남자 셔츠 특유의 빳빳하고 사각거리는 느낌이 느껴지자 짜릿한 무언가가 아랫배에서 천천히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느껴졌다.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에 길리어드가 씨근거리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허벅지를 다시금 단단히도 틀어쥐더니 조금은 귀찮다는 듯 드레스를 한쪽으로 젖혀 냈다. 쫙 그것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스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를 꽉 채우는 기둥의 느낌에 그녀는 대답하듯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살며시 길리어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깊이 들어오세요. 오늘은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 말에 숨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랫배 내부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철저히 힘을 절제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한 번의 움직임이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내부의 주름을 절묘하게 건드리는 격한 쾌락에 아스틴은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길리어드의 눈매가 조금 떨렸다. 빡빡한 조임을 느꼈던 것이다. 입술이 조금 비틀리더니 그가 마치 달려들 듯 허리를 껴안고는 일으켜 세웠다. 아스틴은 어느새 그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아스틴은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입술을 맞추며 아랫배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벅지를 오므렸다가 놓으면서 기둥을 휘감듯 슬쩍 빨아들였다. 그녀의 몸짓은 이윽고 조금씩 격렬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위아래로 허리를 흔들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느낌이 무례할 정도로 격렬했지만 내부를 자극하는 방향이 꽤나 적절하게 맞추어져 있었기에 불쾌한 느낌은 없었다.
“아스틴…….”
길리어드가 자신을 불렀다. 무언가를 애절하게 바라는 듯한 목소리에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뺨을 쓸어주었다. 길리어드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다. 그리고는 마치 추앙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는 살며시 허리를 끌어안았다가도 이윽고 조심스레 가슴을 붙잡고 천천히 주무르며 그녀의 몸짓에 맞추었다. 아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게, 구속하듯 쓰다듬다가 다시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밤은 깊고 길게 이어졌다.
몇 차례의 사정(射精)이 있은 후에야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웠다.
아스틴은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자극이 자극이었던 만큼 몸이 노곤해서 표정에 절로 졸음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살며시 몸을 웅크렸다. 문득 차림새가 신경 쓰였는데, 사실 아직도 드레스를 벗지 않았던 것이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드레스는 반쯤 찢어졌고, 거의 벗겨진 상태였다.
꽤나 꼴불견일 테다.
헝클어진 모습에 길리어드가 살며시 드레스의 허리끈을 찾더니 그것을 떼어 내면서 옷을 벗겨 냈다. 그리고는 근처의 소파에 걸쳐 두고는 자신도 상의를 벗었다.
이윽고 그가 위스키 두 잔을 가져왔다. 한 잔은 그녀에게 내밀었는데, 아스틴은 그것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고는 다시 누웠다.
사실 피곤해서 잠이 안 올 정도로 그녀는 지쳐 있었다. 관계라는 게 이렇게 격렬한 거였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옆자리에 누운 길리어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도 이번에는 조금 노곤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그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그녀는 조금은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는 그걸 알까. 자신의 얼굴이 참 애절해 보인다는 걸 말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가 살며시 머리카락을 감싸 쥐더니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왔다.
“잘 자요, 아스틴.”
아스틴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에 길리어드가 손짓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소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쿵쿵 뛰어오르는 불규칙한 박동을 들을 수가 있었다.
다소 거친 소리였지만 어째서일까, 안도가 되었던 것은. 그건 참,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문제일 테다.
* * *
새벽녘 귓가에 들려오는 옅은 신음에 그녀는 잠에서 깨었다.
아스틴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는 슬며시 몸을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길리어드였다. 그는 구겨진 이불에 얼굴을 반쯤 박은 채로 곯아떨어져 있었는데, 일어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잠이 들었더라도 왕족답게 위엄을 갖추고 있던 얼굴이 그날따라 꽤 흐트러져 있었다. 물론 이 상태로도 근엄한 기백은 그대로였지만, 어찌 보면 순수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심술궂어 보여서 솔직한 성격이 드러난달까, 아무튼 의외였다.
한편으론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진중해진 모습이 그래도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싶었다.
아노르인은 적어도 삼십 대까지는 보통 인간과 다름없이 노화 현상을 보인다. 일종의 성장인 셈인데, 삼십대라면 물론 거인이나 수명이 긴 종족들에게는 딱히 많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십대나 이십대 아이들의 눈에서는 영락없이 아저씨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그래, 이제 거의 아저씨라 불려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시기인 셈이다.
그 무렵 머리카락 한 줌이 이마 앞으로 흘러내렸다. 아스틴은 조심스레 그것을 쓸어 올려 주었다. 평소에는 꽤 예민해서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잠을 깰 텐데, 오늘따라 반응이 없었다.
뭐, 어제의 일도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이렇게 풀어진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다.
문득 이대로 좀 더 같이 누워 있을까 하다가도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구겨져 있는 이불을 매끈하게 펴서 덮어 준 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남대륙인들은 물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풍부한 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수 기술이 아주 뛰어났는데 그랬던 만큼 무엇보다도 청결을 중시했다. 특히 귀족들의 경우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하루에 1-2회의 목욕은 필수라고 생각했다.
아스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녀는 온갖 유액과 향유를 넣어 만든 온탕을 즐겼다.
그렇게 그녀가 목욕탕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별장저택의 하인들은 이미 대리석 탕에 물을 채워 넣고 있었다. 콸콸 온수와 거품이 뜨겁게 쏟아져 내리는 탕 안으로 과실향이 도드라지는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스틴은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끌고 와 걸터앉았다. 우선 주엽나무 비누와 향유로 보글보글 거품을 내어 머리카락을 문지르고 난 후, 한번 행군 뒤에 복숭아 냄새가 감도는 유액으로 깨끗이 씻고 물기를 짜내었다.
그렇게 머리를 돌돌 말아 틀어 올릴 즈음이었다. 욕탕의 문이 열리더니 길리어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성에 있을 때 그들은 탕을 겹치게 쓴 적이 별로 없었다. 아스틴이 피부를 곱게 하기 위해 갖은 향유와 유액을 잔뜩 넣은 탕에 몸을 넣고 온욕을 하는 것을 즐겼다면 길리어드는 기사단에 있는 거대한 증기탕을 더욱 애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성향의 차이였다.
길리어드가 스륵 허리끈을 풀고는 바지를 내리더니 나무 의자에 앉아 물을 끼얹었다. 대충 유액을 묻히고 거품을 내더니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 증기탕에서 만나 같이 씻었을 때도 저런 식의 마무리로 끝을 냈었다.
몸은 깨끗이 씻더라도 탕은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탕에 오래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이다.
당대 무인(武人)들이라면 대부분 그랬다. 그들은 증기탕에서 땀을 흘리고 찬물로 등목을 해서 오염된 것들을 흘려보내는 게 더 장수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릇 무장이라면 육체를 가꾸고 장비나 무기를 관리하는 일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몸에서 향초나 유약의 향을 풍기고 다니는 건 정도가 아니라는 고정관념이었다.
가만 바라보던 아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집었다. 그리고는 길리어드의 뒤로 다가갔다. 군살 없이 매끈한 등이 어제 한껏 쓸어내렸던 강렬한 모습 그대로였다.
“잠깐만 앉아 봐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등을 앞에 두고 그녀는 척추를 중심으로 향유를 붓고는 해면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꼼꼼히 닦아 주다가, 살며시 그의 머리를 눌러 숙이면서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하도 등이 넓어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해야 했다. 이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모습에 아스틴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돌아앉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해면을 집었다.
“나도, 씻는 걸 도와주겠소.”
그리고는 유액 병을 꺼내더니 거품을 냈다. 조금은 투박한 행동에 아스틴은 아무래도 그에게 등을 맡기는 건 섬세함의 차원에서 미덥지가 못하였지만 그래도 등을 보여 주었다.
촤륵 따뜻한 물이 어깨 뒤로 흘러내렸다.
이후 커다란 손이 조심조심 목 언저리를 닦아 내다가 천천히 등 가운데를 쓸어내렸다. 날개 뼈 아래를 지나 둥근 늑골의 곡선 부분까지 내려가는 손짓에 아스틴은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허리를 끌어안더니 쇄골에 이어 가슴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잠시간 그렇게 부여잡고 있다가 살며시 유두를 건드렸는데 아스틴은 입술을 실룩였다.
“적당히 좀 만지세요. 어제 그렇게 하셨으면서.”
“걱정되어서 그렇지…. 보니까 자국이 남았던데.”
“그러니 입술을 좀, 적당히 대셨어야죠.”
“당신 가슴이 촉감이 좋으니까 그렇지. 예쁘고, 부드럽고… 크기도 내 손에 딱 들어오고.”
그것은 직설적인 것을 떠나 외설적인 수준의 발언이었다. 아스틴은 고개를 돌려 질린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길리어드가 살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조심스럽게 할 말 다 하는 모습이란.
아무튼 정말, 자극점을 잘 찾아서 애무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테다.
물론 그녀도 그의 흉근에 입술을 맞추고 실컷 문질러 댔으니 할 말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만 탕에나 들어가자 싶어 아스틴은 향유 병을 집었다.
“고개 숙여 보세요. 머리 감겨 드릴 테니까.”
그 말에 길리어드가 마지못해 가슴에서 손을 놓았다. 아스틴은 손에 잔뜩 향유 액을 묻힌 후에 그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 올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문질러 준 이후 거품을 깨끗이 씻어 내리고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었다.
온수로 한 번 더 헹구어 주고 수건으로 덮어 물기를 짜 줄 무렵이었다. 길리어드가 그녀를 덥석 안아 들더니 탕으로 데리고 갔다.
조심스레 몸을 담그면서 자연스레 허벅지에 앉힌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사실 체면이 있지 자신이 아이도 아니고 허벅지 위에 앉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놈의 말안장 같은 두꺼운 안정감을 신뢰하기로 했다.
길리어드가 슬며시 이마를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녀는 찰랑거리는 탕의 수면 위로 비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감은 채 미소짓고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 좋은지. 선물이라도 받은 양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점잖은 척하더니 은근히 할 말은 다 하고 해야 할 행동도 다 하는 것이, 아스틴은 이 정도면 우리 부부의 사이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길리어드의 목줄기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탕의 기운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길리어드가 허리를 천천히 끌어안아 왔다.
그러면서 입술을 머리 근처에 갖다 대는데 당연한 일이 뭐 그렇게 좋다고 이렇게 들러붙는지. 그 무렵,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스틴, 수도는 오랜만인데, 우리 구경이나 좀 하고 가는게 어떻겠소.”
“-그러죠. 그런데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 * *
아침 시간이었는데도 제도의 거리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스틴은 흘끗 차창을 바라보았다.
수도의 화려함은 그녀에게 쓸데없이 번잡하다는 느낌을 주곤 했다.
두서없이 질주하는 마차와 빼곡하게 거리를 메우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다소 뻔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길리어드는 아까부터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목적지를 알 수가 없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 표정이 거리의 풍경보다도 신기했던 탓이다.
어느덧 마차는 부티크가 늘어서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고위 귀족들과만 거래하는 전문 재단사들의 가게가 줄지어 있는 장소였다. 제국에는 이런 거리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지나친 호화로움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장소였다.
그들 부부도 제국 수도에 들러야 하는 일이 없을 때면 굳이 이곳을 찾지는 않았다. 재단사들을 성으로 부르면 되지 가게를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길리어드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팔을 내밀었다.
아스틴은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갈까요?”
잠시 망설이던 그가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부티크의 직원들이었다. 평소에는 이름 있는 귀족들이 나타나도 장인의 자존심이 있다며 본체만체하는 자들이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인 법이다.
공작도 공작이었지만, 부군인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은 스칼라이 왕족답게 물건을 구입하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칼라이는 대륙 화염석 생산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나라다. 내란과 마물들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왕가의 부는 궁성의 거대한 문을 아다만트로 만들 만큼 대단했다.
게다가 부군은 잦은 원정으로 쌓아올린 재화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사재(私財)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런 가게의 주인들은 그저 돈만 보고 움직이는 상인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입지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즈음 아스틴은 그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위치에서 서른 발자국쯤 걸어가면 그녀가 애용하는 재단사의 가게가 있었다. 명실상부 최고 드레스 명장이라 불리는 베니타 부인의 가게다.
아스틴은 옷을 사고 싶을 때면 부인을 성으로 불러들여 새로 나온 원단과 디자인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맞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남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가게를 지나쳐 버렸다. 아스틴은 무심코 물었다.
“어머, 드레스를 사 주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그랬소만,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요.”
“왜요, 드레스라면 저 가게만큼 잘 만드는 곳이 또 어디 있다고. 호, 혹시, 저 가게 스타일이 나한테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던가요?”
“잘 어울려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당신, 별로 안 입던데. 지난번에 선물한 것도 옷장에 보관만 했잖소. 혹시 몸에 불편했던 거 아닌가?”
그제야 아스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은 시선에 잠시 머뭇거리던 길리어드가 다른 가게의 창을 보더니 그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거의 처음 들르는 가게였다.
사실 불편한 게 아니라 아끼고 있었던 건데, 그녀는 오해를 바로잡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해명보다는 따라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자신들이 진짜 부부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그날 아스틴은 아낄 필요 없이 입을 수 있는 용도의 드레스를 서른 벌은 넘게 주문했다. 그것도 원단은 남편이 보기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것만으로 맞추기로 했다.
이참에 선물 받은 옷을 확실히 입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터다.
“덕분에 당분간 갈아입을 옷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그런데 당신은? 필요한 거 없어요?”
“딱히는, 그것보다 좀 앉읍시다.”
옷을 고른 건 자신이었지만 왜인지 지친 사람은 길리어드였다.
마침 근처에 어느 찻집의 테라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까지 잠시 기다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길리어드가 물어왔다.
“이제 곧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어떻게 보내는 게 낫겠소?”
평소엔 그저 저녁 성찬으로 끝났던 날이다. 아스틴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그럼, 여행이라도 갈까요.”
“가고 싶은 곳이라도?”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요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잖아요. 괜히 마음도 복잡하고… 여기 있으면 아무래도 내가 당신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게 되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틴은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하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장소를 고르는 건 당신께서 해 주셔야겠어요. 전 계속 바빠질 것 같아서. 어디를 선택하시든 불평 없이 따라갈 테니….”
“알겠소. 내가 적당한 장소를 알아볼게요.”
길리어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아스틴은 내심 안도했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잔잔해졌다.
대화에 갈등이 없는 것도 그렇고, 관계가 조금 더 발전한 것 같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였다.
문득 그녀는 마치 횃불을 얼굴 앞에 대고 있는 듯한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은근히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더는 문제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새삼 그녀는 지금쯤 스칼라이에 도착해 있을 시리스를 떠올랐다. 별일없이 잘 처리하고 와야 할 텐데.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