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결심
아스틴 펠로데는 입술을 비튼 채 사절을 쳐다보았다.
“이혼…?”
“그렇습니다. 본국 스칼라이는 두 분의 이혼을 정중하게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봄날의 햇볕이 따스하던 아침, 그녀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남편과 이혼을 하라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시댁에서 보내온 전갈이었다.
“어디, 이유나 들어 봅시다.”
“본국에서는 왕족과 귀족의 사이에 3년간 후계가 태어나지 않으면 혼인 무효 선언이 가능합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굳었지만 일단 침착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게 이유라는 건가?”
“굳이 핵심을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내-참. 여기는 ‘랑기에 제국’이요. 이 집안의 주인은 ‘나’고. 따라서 우리 결혼은 ‘제국 가정법’의 보호를 받지. 해서 그런 이유로 이혼을 요청할 순 없을 텐데요.”
“하지만 ‘스칼라이’는 만법에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왕자님의 결혼은 스칼라이 법에 따라야 하지요.”
사절이 구변 좋게 맞받아쳤다.
아스틴은 심장 속의 혈관 몇 가닥이 꼬여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빙빙 돌리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 어째 한번 해 보자는 투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지였다.
그녀는 남대륙 중북부 지방 최대 영토를 지닌 펠로데의 주인이자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다.
그런데 이건 뭐 명령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동부의 대국인 스칼라이의 왕실이라고 해도 이런 중대사는 얼굴도 모르는 사절 따위를 보내 요청할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남편이었다면 우선은 진정하시고 한번 대화를 깊이 나눠 보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는 다짜고짜 법을 들이대기 전에 가족 간의 예를 지키는 먼저니까.
하지만 그간 결혼 생활에 일언반구도 없던 시댁에서 이럴 것은 무엇인가.
순간 사절의 모가지를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녀는 일단 속마음을 숨겼다.
“이 사실, 부군께서는 알고 계시는 건가?”
“미리 전갈을 드렸습니다만. 아직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아스틴은 그제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던하던 연녹색 눈동자의 안쪽으로 희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 * *
그들의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인 의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선제 아르카디우스5세가 2황후에게 독살된 후, 황태자와 2공주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십여 년간의 쟁탈전은 결국 태자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펠로데는 그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최고의 직책을 보장받았다. 최고 자문관, 즉 섭정(攝政)의 직위였다.
행정 대부분을 황제와 공동으로 결정하며, 황제는 그녀의 의사와 조언을 반드시 존중해야 했다. 가히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문제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군주의 치세가 신하에게 빚을 진 형세가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신하의 입장에도 공이 있으면 상을 바라는 것이 응당한 일이니 갈등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황제는 한때 같은 배를 탔던 아군이었단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펠로데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남서쪽에 있는 친모와 아내의 집안들을 비롯하여 그를 지지하는 모든 귀족을 규합해서 말이다.
결국 그녀는 가문을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동쪽으로 이웃하고 있는 대국 스칼라이의 태자, 길리어드 반타블랙슨과 정략결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내란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던 스칼라이는 500년에 걸친 평화 조약과 온건한 경제 교류를 조건으로 그런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혼은 가문의 실권자인 그녀와 태자, 두 사람에 의해 직접 진행되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문제 될 수 있는 일들을 합의하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까지 꼼꼼하게 의논했다. 해서 형식적으로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혼하라고? 그것도 아이가 없다는 게 이유라니.
아스틴은 코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애초에 이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 스칼라이 왕실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비난하고 있는 거였다. 아내로서 남편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 손가락질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비난은 마땅치 않았다. 그저 아이가 없었다 뿐이지 그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고 부부로서 가야 할 곳에는 가고, 대화해야 할 때는 대화하고, 그럭저럭 잘살고 있었다.
물론 보통의 부부들처럼 내밀한 관계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업무에 치이다 보면 남편이 성에 있기는 한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부부의 문제였다. 나이프로 케이크를 자르듯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따질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 이런 방식으로 섣부르게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이혼까지 들먹여 가며 법적으로 말할 문제는 더욱 아니란 말이다.
결과적으로 속셈은 뻔했다.
그녀는 시부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적법한 계승자였던 아들을 구슬려 거의 팔아 넘기다시피 펠로데로 장가보내고 대신 국왕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뱀 같은 성격에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을 테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압박을 하는 것이겠지.
아스틴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이제 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었다.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은 마른 얼굴에 고독이 두드러지는 인상, 가르마를 탄 흑발의 머리가 조금 덥수룩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펠로데 공작부군,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은 그렇게 그녀의 책상 앞에 다다른 후에야 마치 참고 있었던 듯한 숨을 깊이 내쉬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애써 아닌 척하는 것 같았지만, 헐떡이는 호흡을 고르려 헛기침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평소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잘난 얼굴이 그날따라 걱정과 염려로 안절부절못했다.
“잠깐 실례하겠소.”
아스틴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후에야 길리어드는 사절을 향해 돌아섰다. 이후 들려오는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매우 거칠고 냉혹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려!”
“왕자님. 이미 한 달 전에 들으셨겠지만, 스칼라이의 모든 백성이 왕자님의 귀환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왕 전하와 공주님께서는 전하께서 한낱 귀족의 부군으로 지내시는 것보다도 좀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불거리는 소리에 그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어라 내뱉으려다가도 보는 눈이 있어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사절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길리어드가 갑자기 아스틴에게 돌아섰다.
고독해 보이는 청람색 눈동자가 그녀를 훑어 내렸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를 불안해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주인이신 공작의 생각은 어떤가, 나와 이혼하고 싶소?”
“글쎄, 아내로서 부군께 여쭈지요. 이것이 합당한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스틴은 위엄을 갖추면서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집안의 주인이 그녀라지만 남편은 한때 태자이자 섭정으로, 대국의 권세 있는 왕자였다.
당대의 예법에 따라, 급이 높은 배우자를 맞이할 경우 군주들은 당연히 배우자에게 존대를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점잖기 그지없던 사람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그의 입장이 중요했다. 비록 계약에 따라 왕위를 포기하고 펠로데로 왔다 하더라도 남편은 이력만큼이나 스칼라이 핵심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 나라의 대신과 장군들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아직도 그의 조언을 구하려고 했으니까.
애초에 이런 상황에선 남편의 행동만큼 중요한 것이 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한 달 전에 이런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서 자신에게 한번 언질을 주지 않았던 속마음이 궁금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사절을 향해 돌아섰다.
왕자는 195센티가 넘는 거대한 체구에 어깨가 떡 벌어진 강골이다. 오늘따라 어깨에 걸친 기다란 사냥 코트 때문인지 평소에도 근엄해 보이는 기운이 한층 더 위압적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가자, 그제야 사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번들거리던 입술에서 무어라 변명이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길리어드가 커다란 손으로 사절의 굵직한 목을 닭 모가지 비틀 듯 잡아 올리고는 허공으로 번쩍 들어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썩 꺼져라. 돌아가서- 내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그대로 전해! 아내에게 한 번 더 이따위 전갈을 보낸다면 그리 바라시는 대로 당장 귀환하여 그놈의 왕좌는 통째로 파낸 뒤 갈아 버리고, 왕관은 부러뜨려서 우리 침실의 벽난로에 장작으로 쓰겠다고.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알겠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이성이라도 잃은 듯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스틴은 속으로 그 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다.’ 남편의 말은 어쩌면 사실이니까.
남편은 전사들의 나라인 스칼라이에서 명군 중의 명군으로, 특히 무용(武勇)만으로는 대륙의 정상급에 군림한다고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현재 펠로데에는 5천이 넘는 기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의 검을 받아 내기라도 할 수 있는 기사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태자 시절에는 친히 원정을 나가 수 개의 나라들을 정복하는 위업도 세웠고, 수만에 달하는 반역자들에 홀로 맞서 적군 전체를 학살했던 일도 있었다.
믿기지 않는 무용담은 펠로데에 와서도 이어졌다. 특히 2년 전 그녀를 대신해 출전한 전장에서 북대륙 이방 민족의 왕과 그의 충복이었던 스톰 와이번을 단 일격에 쓰러뜨렸다는 일화는 아직도 전설로 회자 되고 있었다.
그 비정상적인 강인함을 두고 어떤 이들은 그가 금술을 썼다느니 태어날 때부터 드래곤의 저주를 받았다느니 불온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지만, 아스틴은 근거 없는 소문은 싫어했기 때문에 그 말을 다 새겨듣진 않았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이제야 진정이 되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놀랄 일이 일어나다니. 세상 참 많이 살아 봐야 아는 일이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다시 돌아왔다.
“미안해요. 놀랐겠군.”
“……딱히는요.”
“부디 오해는 말아 줘요. 당신도 알다시피 워낙 복잡한 집안이라- 그저,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앞으로 더는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요. 약속하지.”
이어지는 나긋한 목소리에 그녀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말을 아껴야 했다. 집안의 주인이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문회든 심문이든 전후 사정을 조사하고 난 다음에 할 일이지, 함부로 다그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약속하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의심하거나 오해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아스틴은 부러 의연히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그런 얼굴이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이런 일엔 딱히 관심조차 없다는 듯 비정한 표정에, 길리어드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키다 시선을 내리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만 나가 보겠소.”
아스틴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날따라 남편의 뒷모습이 매우 쓸쓸해 보였다.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어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굳어 있던 마음속에서 그제야 걱정이란 놈이 축축하게 가슴을 적셔왔다.
* * *
그날의 오후, 한 마법사가 아스틴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시리스 바르도라고 하는데, 공작의 최고 고문이자 제 1가신이었다.
그날따라 차림새가 마치 폭풍에 휩쓸린 듯한 모습이었다. 초유의 소식에 외지 시찰을 멈추고 다급히 돌아온 탓이다.
“공작님!”
마침 아스틴은 휴식 시간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차와 쫄깃한 과일 절임을 먹으며 유유하게 보내던 평소와는 달리, 책상에 앉아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르첼에게 들었습니다. 오늘 스칼라이에서 사절을 보냈다면서요?”
“그래.”
심드렁한 어투에 시리스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럼 그게 정말입니까? 이혼해 달라고 했다는 말이?”
“어. 그렇게 환장할 일은 오랜만이었어.”
“예? 뭐, 그런 정신 나간 경우가 있답니까. 대체 펠로데 가를 뭐로 보고요? 부군께서는요, 그분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답 대신 사절의 모가지를 잡고 문밖으로 던져 버리셨네. 당신도 알지?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고 조용한 분이라도, 할 때는 확실히 하신다는 거. 사실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닐까 걱정했어.”
“그건… 그렇긴 하죠. 아무튼, 다행입니다.”
마법사는 그제야 안도하고는 옆으로 다가갔다. 매무새를 여미며 흘끗 표정을 살폈는데, 공작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무언가를 깊이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이쯤이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뭐를.”
“뭐긴요, ‘후계자’ 말이죠.”
아스틴은 눈썹을 비틀었다. 표정에 노기가 어렸다. 가뜩이나 아침의 일 때문에 가슴에 돌멩이가 찬 듯 답답한데 너까지 그러기냐는 의미였다.
시리스가 그런 뜻이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송구합니다만, 사실 그 나라에서 슬슬 그런 말이 나오는 건 무리도 아닙니다.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요즘 제국에서 맴도는, 부군과 관련한 험담을 말입니다.”
그 말에 아스틴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의 결혼 이후 황제는 화살의 방향을 부군에게 돌리고 있었다.
내부 분열을 노리는 것이었는데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자질이나 실력을 두고 뭐라 할 수는 없었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남편을 더러 고자가 아니냐는 말을 비꼬아서 모욕했는데, 결혼한 지도 3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하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조롱은 나체로 거리 한복판에 던져지는 형벌만큼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부군의 대처다. 그는 치욕스레 생각하기는커녕 갖은 시비도 자연스럽게 넘겼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다 답답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스틴이 생각하기에 남편은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강인하면서 자제력이 뛰어나 조용하면서도 인내심이 깊고, 자기 의견을 표출하는 것보다는 들어 주는 걸 더 좋아하고 이득 없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평소 생활에도 그런 성격이 드러났다. 남편은 수많은 무용담이 무색할 정도로 정치적인 일이라던가 경제권 같은 것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부군으로서 의무에 충실하며 취미를 즐기고 지냈다. 그래, 성에 있기는 한 것인지 걱정을 샀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이 호구는 아니지만.
어쨌든.
왠지 착잡하고 초조해지는 마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책상을 까닥까닥 두드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아스틴은 그동안 자신이 이런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사실 어떤 군주도 배우자가 고자나 석녀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걸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다.
군주가 권력을 상징한다면 집안의 안주인은 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계자라.
급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부부는 아노르인의 고귀한 혈통이다.
아노르인.
오래전 지상을 용과 마물의 지배로부터 구해낸 신성한 종족.
인간족 중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자들.
신성한 힘과 함께 노화 없이 이어지는 긴 수명, 그리고 거인족에 필적하는 강인한 육체를 가진 종족이었다.
그러니 좀 더 미룬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디 아이가 원한다고 생기는 존재였던가. 후계자를 잉태하는 일은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인정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와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어차피 잉태란 그들 부부가 싫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물론 남편을 아끼는 아내로서 결코 자존심에 상처를 내거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해서 잘 말해 보자고 생각했다.
이건 바로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그리고, 절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었다.
* * *
하필이면 그날 오후는 빨리 지나갔다. 오전의 일로 정체되어 있던 업무가 쏟아져서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마지막 서류에 서명하고 보내야 할 서신에 밀랍 도장을 찍은 후, 아스틴은 하인을 내보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평소라면 곧바로 침실로 들어갔겠지만 그날은 오랜만에 남편의 서재로 향했다.
남편의 서재는 안채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다.
그녀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문을 마주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최고급 흑단문의 표면에 두 자루의 검을 짊어진 검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펠로데의 부군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날따라 검독수리의 눈매가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위엄 있는 남편은 부군으로서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늦은 밤까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무기를 손질했다.
참 왕족답게 고고하고 품격 있는 취미였다. 그래서 아스틴은 그간 이 시간대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타국에서 장가 와 하루 종일 고생하는데 당연히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시간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이런 대화를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초조했다.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참 곤란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일지도 몰랐다.
아스틴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여보,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그런데 안이 조용했다. 이어 몇 번이나 더 문을 두드렸지만, 그래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외출이라도 했나? 그게 아니라면 안에서 잠이라도 든 걸까. 그렇다면 다른 날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지.
아스틴은 그렇게 발걸음을 돌렸다가도, 다시 돌아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잠이 든 거라면, 깨워서 침실로 모셔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그녀는 문고리를 조심스레 붙잡고 살짝 비틀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육중한 흑단나무문이 쉽게 열렸다.
“길리어드? 안에 있어요?”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스틴은 조심스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재는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서기라도 한 듯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서재에 들어온 것이 얼마만의 일이더라, 아무튼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사방을 꽉 메우고 있는 책장과 장식을 지나자 정면에 커다란 창이 나타났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비스듬히 내려진 벨벳 커튼이 바람에 따라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스틴은 빛의 방향을 따라 흘끗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놓인 마호가니 책상에서 마침내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반쯤 엎드려 있는 모습에,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런데 희미하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잠이 든 것치곤 다소 거칠었다.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그 모습을 관찰했다.
그 무렵 바람이 세게 불어오더니 커튼이 펄럭이며 책상 위에 얹혀 있던 랜턴의 불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빛의 각도가 변하며 아래를 비추었는데, 무심코 그에 따라 시선을 내린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추슬렀다.
그 물체는 옷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드레스.
설마 하는 생각에 아스틴은 한 손을 들어 덥석 길리어드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듯 길리어드가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틴…… 당신이 여기는 어, 어떻게.”
평소의 점잖던 시선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아스틴은 경직된 남편에게서 드레스를 빼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펴 보았다. 조밀하게 짜여 있는 은사(銀絲) 드레스의 중심부, 붉은 장미 레이스 장식 주변으로 무언가가 잔뜩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얗고, 끈적거리고, 비릿한 향을 내는 액체.
그것은… 정액이었다.
그렇게 매우 길고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
* * *
펠로데의 아침은 홀에서의 활기찬 조찬으로 시작된다.
정원에서 입구로 통하는 길고 긴 백색 계단을 지나, 10m가 넘는 두 마리 검독수리 동상이 지키고 있는 입구를 지나면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가 길게 마주 보고 있는 화려한 복도가 나타난다.
그 끝에 널따란 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팔십여 개나 되는 길고 고급스러운 자단나무 탁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열해 있었다.
수많은 가신과 기사가 널찍한 탁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아침을 먹었다.
그 사이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이 주변을 부지런하게 오가며 시중을 들었는데, 다소 떠들썩한 광경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펠로데의 번영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다음날의 아침, 그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장면에 약간의 균열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공작의 표정 때문일 테다.
최고 상석, 오늘 공작은 마치 숙취에서 덜 깨어난 사람처럼 찻잔을 최대한 천천히 젓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심드렁하니 허공을 쳐다보면서 말이다.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 마치 나이프라도 씹어 먹을 듯 심상치가 않았다. 사소한 말실수에도 당장에 목이 날아갈 분위기였다.
가신들은 공작의 기분을 이해했다. 비록 함구령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제 스칼라이 사절과 공작 부처 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다.
분명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문제이자 국가적인 문제였다. 두 나라가 세계에 지닌 입지가 상당했던 만큼 국제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런데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조찬에 빠지지 않았던 공작 부군이 오늘은 홀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거야 평소라면 별일도 아니겠지만, 공작의 표정을 보면 또 아니라고 생각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양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자리를 비웠다. 그게 무슨 일이든 일단은 괜히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가 책을 잡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작은 인정이 있고 처우에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공평무사한 영주였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나이 든 가신이 자리를 비우자, 커다란 식탁에는 공작 혼자만 남았다.
아스틴은 그제야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슬쩍 손을 치웠다.
가려진 얼굴 안에서 이미 절반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드러났다.
“후훗….”
매끈한 입술이 그제야 균형을 맞추어 호를 그렸다.
아스틴은 입술을 빨아들이듯 깨물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웃기 시작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하인이 그런 모습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떠올렸다.
하인과 눈이 마주치자 아스틴은 다급히 입가에 힘을 주었지만, 웃음은 피식피식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왔다.
자꾸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던 탓이다.
아내의 드레스에 흥건히 자위하고 있던 서른네 살 먹은 사내의 모습이라니. 아무튼, 눈치 빠른 가신들이 피해 주어서 참 다행이었다. 군주가 채신없이 웃음을 흘리고 다니면 아무래도 체면의 문제가 있었으니까.
한편으로 안도가 되었다.
무릇 건장한 사내라면 잉태에 필요한 정액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하고 적절할 때 그것을 배출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남편은 이제껏 자신을 안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간엔 자신에게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고 있었다.
섭섭한 마음은 들었지만,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딱히 자신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고, 더더욱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 남편은 따로 애인을 사귀고 있거나 매춘부를 만나러 다닌 적도 없었다. 남색에 취미가 있는 건 더더욱 아닐 터였다. 아마도. 하루 대부분을 주로 사내들과 보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걱정했다. 어쩌면 남편은 그 부분의 건강이 정말로 나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제의 조롱이 그저 단순한 놀림이 아닐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때의 파장이었다. 그녀야 일단은 이해한다고 쳐도 집안의 어른들은 달랐다. 대(大) 펠로데 가문의 공작 부군이 불능(不能)이라니, 집안 망신이라며 손가락질을 할 게 뻔했다.
아스틴이 아무리 일가의 주인이라고 해도 연륜이 높은 그들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건강 상태를 증명해 줘야 했는데, 만일 걱정이 사실이라면 펠로데는 후계자를 얻기 위한 다른 방법을 고려해야 했다.
안 그래도 요사이 그런 말들이 서서히 나오고 있었던 것이라 그녀는 남편에게는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정신 나간 군주가 배우자에게 당신 혹시, 불능이 아니냐고 묻겠냔 말이다. 자칫하면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그러니 다행이었다. 대체 몇 번을 한 건지 드레스가 그렇게 끈적하고 축축했던 걸 보면, 그 부분은 틀림없이 건강하다는 것일 테다.
아무튼, 그녀는 웃음을 멈추며 다시금 남편을 떠올려 보았다.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안심이 되었지만 새삼 또 다른 걱정이 들었다.
어젯밤 남편은 침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듣자니 아직까지 기사단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인데, 물론 그녀는 찾아가서 어제의 일을 해명하라고 하거나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남편은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성격이 점잖고 품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상당한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 텐데, 그 이상의 굴욕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혼란스럽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자신의 드레스라니. 괜찮아질만 하면 고개를 드는 민망함에 시간을 좀 두고 만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소라면 천편일률적이던 하루가 조금은 흥미롭게 지나갔다.
보통 해가 저물고 나서야 집무실을 벗어났던 아스틴은 좀 더 일찍 안채로 들었다. 이번엔 서재를 찾지 않고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잠옷 드레스로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시계를 바라보니 그래도 여덟 시가 넘어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펠로데의 부군들은 가법에 따라 평생 기사단에서 복무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남편도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기사단에서 복무했다.
보통 그의 업무는 저녁 6시에 끝난다. 아마 오늘은 연회라던가 야간 훈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못해도 지금쯤 안채로 들어와야 할 텐데, 약속이라도 생긴 걸까? 그래도 그런 경우엔 늘 미리 언질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니면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밀려드는 걱정에 아스틴은 팔짱을 끼고는 초조히 침실의 여기저기를 서성였다.
그러면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순간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고, 사실 그것보다는 민망한 느낌이 더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드레스만 챙겨 황급히 밖으로 나왔었다. 서재의 문까지 잘 닫아 주었는데 그게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대처가 조금 미숙했던 거였을까? 그랬다면 유감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남편의 등짝이라도 내리치며 ‘이 양반이 미쳤나, 밤중에 이게 무슨 무례야?’라고 한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랬다가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라도 난다면 어쩐단 말인가.
어릴 때부터 왕족으로서의 교육을 받아온 남편은 고지식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다정함 속에 은근히 고집스럽고 거친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도 어제처럼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는 확실히 세우는 성격이었다.
새삼 놀라서 완전히 굳어 있던 모습이 떠오르자,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애초에 대상이 충격이지 그런 행동을 죄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융통성을 발휘해서 모르는 척하고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예의였을 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놈의 드레스였다. 수많은 옷 중에 하필이면 그 드레스에 그러고 있을 것은 뭐란 말인가.
그 옷은 지난달 제도(帝都) 최고의 드레스 장인으로부터 직접 의뢰하여 제작한 것으로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남편 본인이 주었던 선물이었다. 평소에 입기에는 화려하기도 하고 아까워 몇 번 입지도 않았던 옷이다.
당연히 버릴 수는 없어 하녀에게 가져가 세척하라고 명령했는데, 물론 세탁이야 되겠지만 앞으로 그걸 입은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 줄 수 있을지.
괜스레 밀려드는 묘한 기분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실룩였다. 그래서 침대에 앉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쿡쿡 웃다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는데, 혹시 남편이 들어올까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몹시 철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정각을 벗어나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아스틴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서 익숙한 인영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달리 그럴듯한 행동이 떠오르지 않아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옆으로 내리고는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평소 남편에게만은 다정한 표정을 지으려 주의를 기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웃고 있는 얼굴이 더 이상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오셨어요.”
낮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길리어드가 문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시간이면 잠들어 있을 아내가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지 하루하고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부부처럼 어색했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길리어드였다. 그는 코트의 버클을 풀며 마치 지나가는 듯 애써 태연하고 느긋하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 아직 안 자고 있었군. 오늘은 피곤하지 않나? 어서 자요. 내일은 우리, 사냥을 가야 하잖소.”
“그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데 부군께서야 말로 오늘은 종일 바쁘셨던 모양이지요? 평소보다도 더 뵈기가 힘들더군요. 아침까지 거르시고 말이죠.”
“딱히 바쁜 일은 없었소만. 그리고 아침은… 내 집무실에서 먹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러면 일단, 침대에 올라오세요.”
그제야 길리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꿋꿋하게 걸어와 외투를 벗었다. 근처의 궤에서 편한 튜닉과 바지를 꺼내어 갈아입고는 커다란 침대를 바라보았는데, 묵묵하게 올라오던 평소와는 다르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등을 돌린 채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여보?”
마치 굳어 버린 듯한 모습에 아스틴은 한 번 더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어정쩡히 기어 침대 끄트머리로 향했다. 옆자리에 걸터앉아 다시금 시선을 맞추었는데,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반대로 돌려 버렸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아스틴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넘어가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져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남편의 얼굴이 그날따라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마치 잔뜩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늘 점잖고 근엄하던 남자가 이런 모습이라니, 참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마치 상처를 입은 듯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아스틴은 그제야 이 일이 그냥 웃고 넘어갈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도, 일단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금 숨이 막힐 것 같은 고요가 시작되었다.
마치 세상이 끝난 듯한 정적은 벽시계의 분침이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윽고 길리어드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아스틴… 어젯밤 그 일은 ‘사고’였소.”
“‘사고’…요?”
“그래요, ‘사고’. 자꾸 이런 말 하는 게 미안하지만…… 부디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그저, 분명 이건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당신은 매일 늦게 들어와서 그냥 자 버리니까… 내가 그걸 깨울 수도 없잖소. 하지만 그렇다고 아침이나 새벽에는 우리 둘 다 바쁘니, 하지만, 나는 아직 한창이고,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듯한 설명의 끝에 길리어드가 다시금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는지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시인을 했던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자제력이 부족해서 그만, 무례를 저질렀소. 부디 제발, 용서해 줘요.”
애절해 보이는 얼굴이 만일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그러겠다는 모습이었다. 아스틴은 조금 구차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정말 ‘사고’였다면 어쩔 수 없지요. 뭐 그건 그렇고,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그런 게 아닌데요.”
“그러면?”
“어제 아침의 일 말이에요. 아버님께서 제게 보내신 전갈. 사실은 좀, 신경이 쓰여서요.”
그제야 길리어드가 그녀의 얼굴을 바로 마주 보았다. 아스틴의 표정은 이제 머리가 아프다는 듯 시름으로 가득했다.
길리어드의 미간이 서서히 굳었다. 이윽고 그는 예의 진중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아스틴, 내 말했다시피 그런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사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부왕께서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자기 아들들의 영혼 같은 건 스스럼없이 팔아 버릴 사람이야. 분명 무슨 목적이 있어 그런 말을 하신 모양인데, 신경 쓰지 말아요. 게다가 황제께서 당신을 대놓고 반역자로 치부하는 판국에… 나는 당신이 아직 아이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소.”
“그래도 제가 집안일에 소홀할 수는 없죠. 또 요즘 주변에 맴도는 소문을 생각하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스틴은 부러 목소리를 조금 더 나긋하게 해서 물었다. 남편의 건강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은 조금 가벼웠지만, 그래도 이런 말은 조심해서 꺼내야 했다.
그러자 다소 격앙되어 있던 길리어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가라앉더니 마치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의미는 이해했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혹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건가? 나와의, 사이에서?”
“조금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요. 하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니까.”
아스틴은 이번에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왜인지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문제는 조금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새삼 이제 와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그렇게 건강했음에도 홀로 육욕을 처리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그에게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자신에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유야 무엇이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런 거라면 이제부터는 어떻게든 그녀가 그를 설득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지, 압박한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니었다.
길리어드의 눈동자가 다시금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고하고 담담하던 평소와는 달리 쳐다보는 시선이 마치 한 줄기 번개처럼 강렬했다.
그렇게 또 얼마가 지났을까, 아스틴은 그의 청람색 눈동자가 조금은 촉촉하게 젖어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감격한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왜 이러지, 그렇게 싫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내 말에 부담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저, 길리어드-제 말은,”
“몰랐소. 당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줄은. 난 당신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시겠죠. 사실 그간엔 저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여보, 혹시 제 말이 부담되신다면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 천천히 이야기 해 보고-”
“아, 아니야. 내가 감히 어떻게 반대할까. 무엇보다 당신이 가장 어렵게 결정했을 텐데. 하지만… 괜찮겠소? 내가 걱정되는 건, 당신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겠지만 어쨌든 잉태는 고생이라는 거야. 아무리 내가 함께한다고 해도 당신에겐 무리가 될 텐데. 그렇다고 그걸 대신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상황이 이런 만큼 우리 가문에도 후계자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라는 것은 때로는 부부를, 그리고 가족을 이어 주는 끈이 되기도 하니까요. 어쨌든 그런 이유를 떠나서, 저는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아스틴은 그렇게 연설을 마무리했다. 조용히 그 말을 경청하던 길리어드가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그나마 이해하는 것 같더니 또 왜 이러는지. 설득을 위해 한참 생각해서 준비한 말이었는데,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렇다면 노력해 봅시다. 내가 신경 쓰지. 우리 집안의 미래를 위해서.”
아스틴은 그제야 안심해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점잖은 사람 같으니라고. 든든한 것이 펠로데의 안주인다웠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해요.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니까요.”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녀는 침대 머리맡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길리어드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안색이 조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째서인지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벌써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깨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만 눈을 감으려던 무렵이었다. 커다란 손이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더니 목을 들고는 베개를 바로 해 주었다.
아스틴은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정말 술이라도 먹고 왔나, 생전 안 하던 짓이었던 터다.
“뭐 하시는 거지요?”
“잠자리를 바로 해 주려고. 잘 때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일어날 때 더 피곤한 법이니까.”
그가 조곤히 대답했다. 아스틴은 잠시간 길리어드를 훑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묵묵하고 근엄하던 남편이 할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길리어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튜닉의 목 단추를 풀어 내리고는 침대의 반대쪽으로 올라왔다. 말없이 베개에 머리를 대는 모습에 아스틴은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누웠다. 분명, 내가 뭔가 착각한 거겠지. 그럴 거야.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침실을 밝히던 등불이 완전히 꺼졌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한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조금 더 끌어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단단한 팔이 허리를 은근히 끌어안아 왔다.
아스틴은 우선 그것을 치웠다. 오늘따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잠을 설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말없이 이불을 붙잡고 끌어올리려던 무렵, 길리어드가 좀 더 세게 허리를 끌어 안아 왔다. 더 단단하고 더 따스하게.
때로, 어떤 선택은 변화를 동반하게 되는 법이다.
* * *
그날의 새벽은 유난히 밤울새의 울음이 짙었다. 동시에 벽난로의 불꽃도 서서히 식어갔는데, 희미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아스틴은 무심코 눈을 떠올렸다.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녀는 몇 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그것을 쓰다듬었다. 촉감이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는 정면을 곧게 쳐다보았다.
뚜렷하기 짝이 없는 흉근에 이어 강철처럼 튼튼한 쇄골과 굵직한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었다. 길리어드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는 얼굴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런데 그녀가 나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옅게 신음하더니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왜 이래…….’
탄탄한 가슴에 이마가 닿으면서 훅 사내의 향취가 느껴졌다. 잠시 경직되어 있던 아스틴은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눈을 뜨더니 특유의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날따라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도 차가워 보이는 청람색 눈동자가 참 애절하게 보였다. 마치 세상의 온갖 슬픔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잘 잤소? 새벽엔 꽤 쌀쌀하던데, 그러고보면 아직 봄은 봄인 모양이야.”
다정스레 묻는 목소리가 사뭇 은근했다.
이 양반이 왜 이러지? 그녀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금 불편했다. 진실로 그렇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일종의 괴리감이었다.
이건 평소의 근엄하던 남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스틴은 결코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무심코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죠? 한번 않던 행동을 다 하시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인데. 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이러는 거니까.”
“뭐…가요?”
길리어드가 조금은 심통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어제, 당신이 나한테 그랬잖아. ‘아이를 갖자’라고.”
“…그래서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아이를 가질 만큼 가깝게 된 사이란 거잖소. 그러니… 내가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감히 당신의 남편으로서.”
아스틴은 그제야 이해가 되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래도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점잖고, 과묵하던 사람이 맞는 걸까.
다른 누군가가 남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왕족으로서 품위가 느껴지는, 특유의 근엄한 기백은 그대로였으니까.
그래도 뭐랄까, 겉에 쓰고 있던 허물을 몇 겹이나 벗어 버린 듯한 느낌이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왠지 남세스럽다는 생각에 아스틴은 그만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길리어드가 팔을 붙잡더니 입가에 살며시 입술을 맞추어 왔다.
다정스레 스치는 입술에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참, 왜 이래요?”
“그냥,”
길리어드가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조금 내민 채 속상한 표정을 지었는데, 참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스틴은 말을 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의 태도가 무례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모닝 키스야 부부간에 문제 될 게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고 해명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길리어드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무룩하던 입술을 열었다.
“여보, 이만 준비합시다.”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실망한 표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스틴은 그런 얼굴이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 * *
펠로데 성에서 말을 타고 북쪽으로 몇 시간을 달리면 거대한 숲이 나타난다.
‘올드배로우’ 라고 불리는데, 남대륙의 중부에서 시작해서 북동쪽으로 뻗어 나가 동부의 미스트리스 삼림까지 이어지는 중북부 최대의 삼림지대였다. 수목이 곧고 울창한 만큼 자원이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그만큼 많은 야수와 마물의 서식지로 악명이 높았다.
숲의 동쪽, 물끄러미 수풀을 바라보는 아스틴의 시선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반년쯤 전부터 영지 곳곳에서 마물의 수가 갑자기 증가한다는 보고가 들려왔던 터다. 그중에서도 올드배로우는 악명이 높아 인근의 도시나 마을까지 피해를 호소할 정도였다.
개중에는 변종이라고 불리는 개체도 있었는데 그들은 일반적인 마물보다도 매우 강력하고 위험해서 상급 기사들조차도 두려워했다.
“검은 가고일이라고 했나?”
“보고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밤중에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검은 가고일은 몸집이 성인만 한 야금류 마물로 단일 개체로는 딱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나 무리를 지으면 경우가 달라졌다. 한번 떴다 하면 마을 하나가 없어져 버릴 만큼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에 무리가 꼬인다 싶으면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했다.
아스틴은 잠시 하늘을 살피던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급 시종 무관 두 사람이 다급히 활을 가지고 왔다. 무려 길이가 그녀보다도 크고 전신이 하얗게 물들어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빛나는 활이었다.
그것은 용족 사냥을 위해서 특수제작된 명궁이었다. 신성한 백단나무와 거인의 머리카락을 재료로 만들었는데, 그랬던 만큼 화살도 전체가 강철로 되어 있었고 하나하나가 창처럼 길고 두꺼웠다.
아스틴은 그 활을 한 손으로 들어 세운 후 아래쪽에 달린 앵커로 바닥에 박아 넣고는 어깨와 팔꿈치를 감싸는 보호용 갑주를 매었다.
“3시 방향으로 몰이꾼들을 보내도록 해. 그런데, 부군께서는?”
“아마 서편에서 숲을 수색하고 계실 겁니다. 변종이 출몰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아마… 위험하진 않으실 겁니다.”
“알겠어. 모쪼록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아스틴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활시위를 잡았다.
이후 몰이꾼들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굶주린 사냥개들이 풀려났고, 여기저기서 사냥개들을 따라 가고일 떼를 쫓는 험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그렇게 싸한 느낌이 짙어질 무렵 동쪽 하늘의 어딘가에서 마치 여인이 흐느끼는 듯한 불길한 울음이 들려왔다. 웃는 듯하면서도 우는 듯 기묘한 소리였다.
그리고 세찬 뿔피리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가고일 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하늘은 삽시간에 가고일 떼로 빽빽이 들어찼다. 마치 거대한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울음은 이제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바뀌어 들렸다. 섬짓한 불쾌감에 나이 어린 기사들은 겁에 질렸을 정도였다.
심드렁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틴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화살은 지면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듯 날아가 가장 근접해 있던 가고일의 눈알을 뚫고 지나갔다.
그 한 마리를 시작으로 근처에 있던 가고일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잡히는 개체마다 하나같이 급소인 눈알이나 심장을 맞고 떨어졌다.
백발백중,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함.
옆에서 곁을 지키는 수석 시종 무관과 몇몇 상급 기사들은 그런 장면이 워낙 익숙하였기에 덤덤했지만, 뒤에 서 있던 수많은 기사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경의에 찬 시선을 보냈다.
펠로데 가는 원래 용잡이를 전문으로 하던 궁수 가문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대대로 명궁들을 많이 배출했다.
물론 명성과는 반대로 아스틴은 선조들처럼 대단한 궁사는 아니었다. 선조에 비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재능이 없는 수준이었다.
사실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딱히 무(武)에 재능도, 관심도 없었다. 같은 종족 여인들에 비하면 체력도 평균 이하에 속했다.
그 때문에 오래전 황실 기사단에 복무할 때도 내내 비난을 받았지만, 신경은 쓰지 않았다.
무릇 세상은 힘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것들로 지배되는 법이다.
그래도 그녀는 선조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다는 사실에는 감사했다. 그나마 체면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지금처럼. 가문의 군주로서 기본은 보여줄 수 있는 셈이다.
사정없이 날아드는 화살 세례에 가고일 떼는 결국 겁을 먹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격하려고 해도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전에 화살이 날아들었던 탓이다.
혼란이 시작되는 틈을 타 잠시 상황을 살피던 아스틴은 다시금 활시위를 당겼다. 이윽고 화살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수의 가고일 사이에서 가장 작은 가고일의 귀를 관통해서 지나갔다. 보통의 가고일보다 열 배는 작은 놈으로 성인 남성의 머리만 한 크기였다. 무리의 수장이었는데, 귓가에 나 있는 한 오라기 금색 털이 그 증거였다.
수장을 잃은 가고일 떼는 마치 시력을 잃은 양 혼돈에 휩싸였다.
아스틴은 멈추지 않고 사냥을 이어갔다. 화살은 뒤이어 수장의 근처에 있던 서열 2, 3, 4, 5위의 가고일을 잇따라 정확하게 맞추어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무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가고일은 비행시 수장을 비롯해 서열이 높은 개체들의 지시를 따라 방향을 정하는 습성이 있었던 탓이다.
그즈음 화살통이 비었다. 시종무관들이 화살통을 교체하는 동안, 그녀는 틈을 타서 팔의 근육을 풀었다. 무직하니 뻐근한 어깨를 돌리고 있을 무렵, 곁에 있던 수석 시종 무관이 말을 걸어왔다.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넘긴 거구의 사내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눈매가 상당히 날카롭고 표정이 굳어 있어 냉철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이름은 마르첼 나이트문트. 그녀의 수석 시종 무관이자 사촌 오빠였다.
“공작님, 들으셨습니까? 오늘 부군을 모시는 기사들은 저녁에 연회를 벌인다더군요.”
“그래?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이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아마 공작님의 결정이 십분 반영되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소문이 났나 보네. 시리스인가?”
마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부군의 기분이 꽤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듣자니 요즘 부쩍 침울해하시던 분이 오늘 아침에는 농담까지 하셨다고 하던데. 듀랜트 윈터너는 그걸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더군요.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뜰 거라면서요.”
사실 주인의 잉태와 출산은 가문의 내에서만 비밀리에 다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 정도 대가문의 주인이 부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겠다, 라는 결정을 내리면 가신들은 좀 더 군주 부부를 보호하고 그에 따른 나름의 준비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과정이 모름지기 태어날 아이의 혈통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 무렵 화살통이 다시금 채워졌다. 아스틴은 자연스레 다음 화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뭐, 흔히 그렇지만 이런 시기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일이 필요한 법이야. 게다가 그분은 점잖기도 하고, 인품도 그만하면 나쁘진 않은 편이니까. 아마 좋은 아버지가 되겠지. 그런데, 대체 상상이 안 되네. 그렇게까지 좋아하셨단 말이야?”
“무릇 부군들께는 후계자의 탄생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이틀 전엔 그런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 때문에 다들 걱정했습니다만, 이번 공작님의 결정으로 한시름 놓은 분위깁니다.”
그녀는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상 초유의 이혼 요구 사건.
아스틴은 스칼라이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려고 했지만, 남편의 체면을 보아서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사실 그때 가장 불쾌했을 사람은 남편이었다. 세상에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은 이혼을 아버지란 자가 아내에게 강요하는데, 어떤 남편들이 유쾌하게 받아들일까.
그녀는 새삼 남편과 국왕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현 국왕은 남편의 계부다. 선왕이 죽고 원래는 태자였던 남편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지만, 결혼으로 인해 남편이 왕위를 포기해야 하자 국서였던 계부가 물려받은 것이었다.
원래는 선왕의 막내딸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지만 그녀가 성년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되었다. 그런 경우 스칼라이는 왕의 배우자에게 왕위를 상속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들 부자 관계가 딱히 좋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대외적으로야 숨기고 있을 뿐이지 둘은 서로 원수에 가까운 관계였다.
괜히 계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스틴이 아는 것만으로도 참 여러 가지 일화가 있었는데, 그래도 성격이 점잖은 남편이 대부분 참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아버지를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모왕의 유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아이를 갖자는 말에 남편이 그렇게 기뻐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애초에 그쪽에서 쉽게 이혼을 꺼내는 건 그들의 관계가 우습게 보여서일 테니까.
마르첼이 다시금 물어왔다.
“그런데 정말로 부군께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아이를 가지자’라고 말입니다.”
“뭐 비슷한 의미로 말하긴 했지. 그게 어째서?”
“듀랜트가 그러더군요. 스칼라이에서 여인이 사내에게 아이를 낳자고 말하는 건, 문자 뜻 말고도 좀 독특한 의미가 있다고요.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뭐였더라, 앞으로 계속 당신과만 잠자리를 갖겠다- 그런 의미였었나?”
마르첼이 근처에 있던 다른 시종 무관과 잠깐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입술이 조금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비슷합니다만, 그보단 좀 더 저속한 뜻이던데요. 굳이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날 좀 더 거칠게 다루어 달라는 뜻이라던가. 뭐 그런 말에 가깝겠지요.”
“참 내, 아무튼 딱딱한 나라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혹의 언어치고는 참 완곡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사실 남편도 그렇지만 스칼라이 사람들은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전사들의 나라라 불리는 만큼 사람들이 워낙 호전적이라 한마디 잘못했다가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 간의 사이에서 그 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같은 말이라도 남자가 여자에게 할 때와 여자가 남자에게 할 때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녀는 결혼 전부터도 기본적인 어법의 예절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녀 간의 사이에서 나누는 은밀한 사담 같은 것은 예외였다. 해서 신혼 때는 종종 혼란을 빚었던 것이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단어가 남편을 당혹 시킨 적도 있었고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 그녀를 황당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3년 전의 일이다. 해서 아스틴은 품위 있는 남편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속이야 알 수 없지만.
사냥한 가고일의 수가 어느덧 세 자리를 넘어갈 무렵이었다.
멀리 서쪽에서 콰앙 하는 폭음이 연이어 들리더니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백 미터 정도 앞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성인 열 명이 팔을 벌리고 둘러싸도 모자를 듯한 거목이 뿌리째 날아가며, 그 위로 20m는 될 법한 크기의 야수가 처박혔다.
상체는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하고 하체는 마치 말라붙은 고목처럼 보이는 야수였다. 바로 변종이었는데 완전히 숨이 끊어졌는데도 전신에서 푸른빛의 번개를 방출하며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뒤이어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몇몇 기사들의 인영이 드러났다. 하나같이 키가 크고 표정 없이 무뚝뚝한 얼굴들로, 십 대에서 삼십 대에 이르는 청년들이었다.
“죽었습니다. 전하.”
한 기사가 야수의 상태를 살피더니 입술을 열었다.
이윽고 먼지가 완전히 걷히더니 길리어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예의 위엄이 가득한 표정으로 흘끗 야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까닥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근엄하고 품위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군주의 부군에 걸맞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저 사람이 바로 자신의 남편이다.
스칼라이의 전(前)태자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란 말이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스틴은 활시위를 놓고는 팔짱을 꼈다.
평소와 다름없는 저 얼굴을 보자 새삼 아침의 일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던 터다.
‘내가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속상하다는 듯 시무룩해 보이던 서른네 살 아저씨의 모습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사실 그녀가 아는 남편은 부군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무척 중시해서 쉽게 자신을 풀어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유가 참 궁금했다.
설마 아직도 ‘드레스’ 사건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아스틴은 결국 의도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대처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그 무렵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머지않은 거리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은 가고일 두 마리가 맹렬히 날아들고 있었다.
흔히 극도의 공포에 빠진 가고일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돌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때는 급소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사냥이 보다 간단해졌다.
아스틴은 두 마리의 가고일을 한 번에 쏘아 떨어뜨린 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즈음이면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해도 괜찮을 듯했다.
이후 그녀의 지시에 따라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제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사냥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가고일은 아무렇게나 쏜 화살에도 맞아 픽픽 떨어졌고, 그렇게 떨어진 개체들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갔다.
아스틴은 마지막 한 마리가 땅에 떨어졌을 무렵에야 활을 내렸다. 그리고는 마르첼에게 마무리를 지시한 후 돌아서 기지개를 켰다.
팔꿈치에 매고 있던 갑주에 손이 닿았는데, 은근한 열기에 손바닥이 뜨거울 정도였다. 어느새 햇빛에 달구어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흘끗 주변의 지면을 쳐다보았다. 하얀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수풀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었다. 아무튼, 늦봄의 태양이 무서운 법이다. 그녀는 그만 휴식을 명령했다.
* * *
하인들이 근처에 있던 호숫가에 야영지를 꾸렸다.
기사들이 땀에 절어 있는 사냥복을 벗고 몸을 식히는 가운데, 그녀도 그만 옷을 갈아입었다.
고불거리는 칠흑의 머리카락을 가죽끈으로 높이 묶고, 소매가 짧고 몸에 딱 맞추어 활동하기 편한 면사 원피스를 입었다. 평평한 가죽신까지 신자 영락없이 쉬고 있는 사냥꾼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천막에서 낮잠을 즐기겠지만, 그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손수 간식을 챙겨 바구니에 넣고는 마르첼에게 언질을 준 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름 아니라 남편을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무릇 조사와 잠입의 기본은 상대방의 경계부터 푸는 것이다.
물론 남편과 대화를 하는 데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만, 사실 지금까진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 따로 그를 찾아갔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빈손으로 덜렁 가서 대화를 청하는 것만큼 수상해 보이는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스틴은 길리어드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천막에서 서쪽, 호숫가에 좀 더 가까운 곳에 군데군데 거목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야트막한 공터가 있었다. 하인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았는데 부군을 섬기는 기사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었다.
‘어라? 공작이잖아. 여긴 무슨 일이지?’
‘희한한 일이네, 평소엔 거의 들여다보지도 않던 분이. 그럼 그 말이 진짜야? 공작이 왕자님께 그런 말을 했다는 게?’
‘그렇다니까. 아니면 굳이 여기까지 왜 오셨겠어?’
‘난 그냥 소문인 줄 알았지. 어제만도 본국에서 그런 사절이 왔다 갔잖아.’
아스틴의 등장에 소리 없는 혼란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속삭이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중년 아낙네들도 아니고, 무슨 말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아스틴은 조금은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길리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 근처의 모닥불 앞에서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드러누워 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 밖으로 삐죽 튀어나오는 백발에 아스틴은 그에게로 다가가 모자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사내가 귀찮다는 듯 신음하더니 모자를 치웠다. 씨근거리며 잠시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사내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그의 이름은 듀랜트 윈터너였다. 길리어드의 시종 무관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젖형제였다.
“공작! 어…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부군께서는 어디 계시지?”
“조금 전까진 여기 계셨는데- 아, 아마 요 오솔길 아래쪽 호숫가에서 멱을 감고 계실 겁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그분께 드릴 간식을 가지고 왔어. 그런데- 이 자두는 자네가 딴 거야? 많이도 땄네.”
아스틴은 괜한 질문을 피하려고 부러 그의 허리 근처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가리켰다. 속이 제법 깊은 등나무 바구니에 새빨갛게 잘 익은 자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듀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침 근처에 야생 자두나무가 있더라고요. 왕자님께서 채집을 명하셨습니다만. 참, 자두를 좋아하셨죠? 좀 드세요. 공작이 드신다고 하면, 아마 왕자님도 괜찮다고 하실 겁니다.”
그가 어디 담을 자루가 없나 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허둥거리는 모습에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남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그를 깨우지도 않았을 거였다.
“됐어.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쉬라고.”
아스틴은 그만 일어나서 오솔길을 내려갔다.
듀랜트는 그런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당혹해하던 얼굴에서 저도 모르게 옅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작이 언제 한번 자신의 주인을 먼저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스칼라이식으로 표현하자면 군주치고는 ‘유약한’ 사람이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행동이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 * *
아스틴은 주변의 경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숲속은 아주 조용했다. 짙은 적막에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선들선들 불어오는 봄바람 사이로, 그저 희미하게 새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오솔길의 끝에 도달했을 무렵, 싱그러운 풀 향기가 특유의 물 냄새로 바뀌더니 마치 색칠한 것처럼 파란 호수의 전경이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멈추어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색감이 마치 하늘을 그대로 담아 놓은 것 같았다. 청명하고 깨끗한 수면 아래, 오색 빛을 띠는 자그마한 송사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무렵 어디선가 허밍이 들려왔다. 아스틴은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길리어드였다. 그는 수풀 너머 평평한 바위에 앉아 부츠의 끈을 풀어 내리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락이 꽤 구성진 것이 그녀가 알기로 동부 사람들의 오래된 민요였다.
아스틴은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기고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기사 티머시의 아내가 잠이 들었네
무슨 잠이 그리도 깊은지
아침이 와도, 다음 날 아침이 와도
그다음, 다음 날 아침이 와도 눈을 뜨지 않았지
‘용이 저주를 걸었다.’
누군가가 용을 잡아 오라 했다네
그래서 티머시는 길을 떠났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깊은 동굴 속, 잠든 용을 깨워
심장에 검을 박아 넣고, 날개를 꺾어 버리려 했겠지
하지만 검은 부러지고 말았네
방패는 쇳물이 되고, 갑옷은 종이처럼 찢어졌지
티머시는 용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네
가련한 기사는 용잡이가 아니었으니까
푸른 꽃 피는 백단나무숲
얼음이 녹더라도, 꽃은 피지 않는 땅
부인은 아직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네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면서
귀여운 부인, 왜 그렇게 창백한가요?
입술은 겨울처럼, 피부는 눈처럼 하얗게 변해서.
눈물은 왜 얼어 버렸나요.
하지만 부인은 대답하지 않을 거라네
그녀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테니까
깨어나지 않을 테니까
매우 슬픈 노래였지만 음색이 다정스러워 참으로 아름답게 들렸다.
주변에 있던 사냥개들이 꼬리를 슬렁슬렁 흔들었다. 이윽고 그중 한 마리가 길리어드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무릎에 턱 하니 제 주둥이를 올렸다.
쓰다듬어 달라는 듯 끼잉거리는 모습에 길리어드가 미소를 지었다. 신발을 치워 놓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러자 나머지 사냥개들이 연이어 그에게로 와르르 몰려들었다.
아스틴은 새삼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고독해 보이던 표정의 안쪽에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다정함이 느껴졌던 터다.
세상에 저 사람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던 걸까? 남편은 웃을 줄 모르는 냉혈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통 근엄한 기백은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다니. 목 언저리가 다 따끔했다. 물론 남편이라고 해서 저렇게 웃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무렵 사냥개들을 훑어 낸 길리어드가 훌렁 셔츠를 벗었다.
이윽고 조각한 듯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떡 벌어진 어깨에서부터 매끈한 허리에 이어, 느슨하게 풀리어 있는 허리띠 사이로 보이는 장골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근육의 군집들이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었다. 마치 아주 실력이 뛰어난 장인이 조각한 것 같았다.
아스틴은 그날따라 물씬 체온이 달았다. 사실 그런 모습은 거의 밤마다 보았던 것이라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입술을 쓸어내렸다. 마치 끓어오르는 주전자라도 된 것처럼 호흡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어디에 씐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이럴까. 알 수 없이 은근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튼 계속 숨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스틴은 손바닥을 저어 얼굴을 식히고는 헛기침을 해서 호흡을 몇 번 다듬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라앉힌 후,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길리어드. 저예요.”
“아스틴? 당신이 여긴 무슨 일로.”
길리어드가 조금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나무를 살펴보았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냐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차분히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간식을 좀 가지고 왔어요. 씻으신 후에,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그러나 길리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부러 옆으로 돌아섰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발랄하게 보이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이렇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터다.
그녀는 묵묵히 길리어드가 앉아 있던 바위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깔개를 꺼내어 그 위에 앉았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이만 시선을 거두고는 호수로 들어가 철벅철벅 상반신을 물에 씻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틴은 다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몸을 훑어 내리다 또다시 눈이 마주했는데, 길리어드가 할 말이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하며 바구니에서 수건을 꺼내었다.
이윽고 길리어드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스틴은 조심스레 수건을 내밀고는 간식을 꺼내었다. 그날의 간식은 건과일이 첨가된 고급스러운 비스킷과 한빙석으로 차게 식힌 적포도주였다.
길리어드가 포도주병의 마개를 빼더니 병째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말없이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을 보니 마침 그도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시원하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긴 하다만, 아스틴은 한편으론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건 다름이 아니다. 혹시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면서 소소한 변화에 대한 이유라던가 의도 같은 것을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아침의 일이 떠올랐던 탓이다.
속상한 듯 시무룩하던 모습에 아스틴은 그래, 일단 괜한 질문은 삼가기로 했다.
사실 기분 좋은 일이 있냐고 묻거나, 왜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냐고 묻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 사람의 성격이 점잖고 묵묵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만큼 그도 남편으로서 공작 부군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쓰는 사내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남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펠로데 가의 공작들은 대대로 배우자를 극히 아끼고 사랑해 왔다.
‘한 명의 배우자만 사랑하고 아낀다.’
그것이 일종의 가법이었다.
심지어 역대 최고의 공작이라고 칭송되었던 그녀의 조모는 애부가(愛夫家)를 넘어서 공부가(恐夫家)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을 정도였다.
남부의 아노르인으로 노예 출신의 검투사였던 조부는 남쪽 거인들의 도시 샨시르에서 생애 단 한 번의 패배도 경험하지 않았던 전사 중의 전사였다고 한다.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남부로 여행을 갔던 조모가 그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노예상인에게 돈을 주고 석방해서 데려왔다고 했다.
조부는 부군이 된 이후에는 충직하게 공작을 보필해 기사단을 이끌며 올드배로우 숲에서부터 남부의 백색산맥에 이르기까지 명성을 드높였다. 그때 기사단의 위세가 황실 기사단은 물론이고 남부 거인 도시들을 위협할 정도였다.
대단한 정치가였던 조모는 그 틈을 타서 황실을 압박해 펠로데의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하게 하는 법안들은 여럿 통과시켰다. 그중에는 펠로데의 보증 없이는 황태자를 옹립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강력한 법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가문의 위세는 사실 그때부터 보다 노골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부친은 그녀에게 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무릇 집안에는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며 늘 할아버지 같은 사내를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교했다.
물론 아스틴은 조부의 능력이 대단했다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조모의 사랑이 지나친 점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신께서는 어찌나 부군을 사랑하셨는지 심지어는 기사단의 정문에 남편의 전신상을 황금으로 만들어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제국에서는 황제를 제외한 사람의 황금상을 세우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펠로데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렇게 오만하고 경솔한 행위는 커다란 흠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무리 부군이라지만 한낱 노예 출신에게 황금상이라니, 정도라는게 있었다.
그래서 가신과 친척들이 단식을 해가며 뜯어말리고 어떻게 절충한 것이 아다만트로 안을 채우고 겉에는 청동을 입히는 것이었다.
계속된 반대의 끝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분이 아다만트는 황금이 아니니 상관없지 않으냐는 기적의 논리를 내세웠는데, 어느 친척이 목숨을 건 투쟁을 해서 절충을 한 셈이다.
그 때문에 그로부터 팔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부의 동상은 주기적으로 청동을 입혀야 하는 보수를 받고 있었다. 사실 아다만트가 황금보다 더 문제라면 문제였지 덜 하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아스틴은 그 비용이 좀 아까웠다. 지금도 이런데 후손들에게는 더 그렇게 생각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아직도 기사단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지금 기사단의 단장인 그녀의 외삼촌이 이런 속마음을 듣게 되면 노발대발해서 기사단 전체를 파업시킬지도 몰랐다.
그분을 포함해 몇몇 친인척 노인들은 아예 남편에게 대놓고 조부를 본받으라는 말을 하곤 했으니까.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하는 주제에 남편에게는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었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하면 아스틴은 남편에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모국을 떠나 이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인데 괜한 질문을 해서 부담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아침에 좀 더 부드럽게 대처할걸. 내심 후회가 되었다.
무릇 사람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외적인 무언가보다는 행동과 말과 인품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애정이다.
보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천하절색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면 욕정은 생길 수 있을지언정 애정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아스틴은 이럴 때면 아직 자신에게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병을 내려놓았다. 아스틴은 재빨리 도기를 받아 치우고는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이제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는데, 아스틴은 그날따라 대화 한마디 없는 묵묵함이 새삼 답답해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막한 걸까.
마침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 한 줄기가 이마 앞으로 삐죽하게 흘러 눈을 가렸다.
그 순간이었다. 비스킷을 반쯤 물고 있던 길리어드가 그 모습을 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살짝이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참 그답지 않은 눈웃음이었다. 아스틴은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이 사람이 아침부터 진짜 왜 이러지. 이제는 당혹을 넘어서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지나친 선물은 조심하라는 옛말처럼, 경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살며시 눈썹을 찌푸리며 길리어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대답 대신 조금 더 은근히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리고는 비스킷을 완전히 삼킨 후에야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신경 써 줘서. 사실 내가 챙겨야 하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늘 같이 와서 고생해 주시니까. 어쨌든, 과자는 너무 달지 않으셨나요?”
아스틴은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 그냥 느낌이었나? 설마, 아니겠지.
그 순간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길리어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깝게. 지긋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애절해 보였다. 마치, 뭔가를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잠깐만 실례하겠소.”
그렇게 그가 쪽, 입술을 맞추어 왔다. 갑작스런 행동에 아스틴은 순간 움찔 몸을 떨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잠시 입술이 떨어졌지만, 그의 입술은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격정적으로 부딪혀 왔다.
턱에 이어 목 아래로 그리고 마침내는 쇄골까지, 쪽쪽 입술을 맞추며 핥아 내리는 모습이 참 격정적이라, 어떻게 반응해 주어야 하나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물론 이곳은 자신의 숲이니 남편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망설이던 아스틴이 조심스레 목덜미를 쓰다듬으려던 순간이었다. 멀찍이서 기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몇몇이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는데,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그를 밀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기사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길리어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정리할 것도 있고, 이제 오후 업무를 해야 할 시간이라- 아마 마르첼이 기다릴 거예요. 당신께서도 사냥은 슬슬 이쯤에서 마무리하세요. 듣자니, 오늘 수하들과 연회도 있으신 모양인데. 먼저 성으로 돌아가세요.”
이후 아스틴은 모르는 척 바구니를 챙기고는 자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길리어드가 긴 팔로 허리를 껴안더니 바싹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품에 안기어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길리어드가 약간 입술을 내밀더니 조금은 퉁명스레 속삭였다.
“나는… 조금 더 숲에 머무르고 싶어요. 희귀한 유니콘을 발견했거든. 그것도 제 발로 걸어왔단 말이야.”
못마땅한 목소리가 평소의 남편답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대체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못 들은 것으로 하자고 생각하며 어느새 가슴 부분까지 풀어져 있던 옷의 끈을 고쳐 매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니콘이라고? 얼씨구, 이 사람이 정말.
코웃음이 나왔다.
단정하게 끈을 고쳐 맨 후, 그녀는 단호하게 길리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춘 채로 경고했다.
“길리어드, 제 ‘숲’에 ‘유니콘’은 살고 있지 않아요. 당신께서도 이미 잘 아시겠지만 말이지요.”
그 말에 길리어드의 눈썹이 조금 흩트려지더니, 동시에 팔도 느슨해졌다.
실망한 표정이 신경은 쓰였지만 아스틴은 틈을 타서 간신히 그를 떼어 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고 했는데, 길리어드가 또다시 끌어안아 왔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원망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이를 지그시 물더니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살짝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사자나 늑대가 고기를 앞두고 포식을 참기 어렵다는 듯 흘리는 애끓는 울음이었다.
아니, 정말. 아스틴은 꾹 그의 쇄골을 눌러 밀어내며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애교요, 스칼라이식의.”
조금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길리어드는 그제야 팔을 완전히 풀었다.
아스틴은 표정을 굳힌 채 한동안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어라 입술을 열었다가도, 더 말하지 말자고 생각하고는 그 길로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왔다.
혹여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까 억지로라도 표정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눈썹이 자꾸만 가운데로 모이며 비틀어졌다. 참, 남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 * *
흔히 그렇듯 사냥이 끝나면 해체의 시간이 왔다. 하인들이 예리한 고기 칼과 톱으로 죽은 가고일을 도축하여 가죽이나 송곳니와 같이 팔 수 있는 부위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숲은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버려지는 부위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찼다. 아스틴은 틈을 타 기사들을 데리고 인근에 있는 숲지기의 초소들을 정찰하며 보고를 들었다.
어느덧 일이 마무리되었을 무렵에는 석양이 기울고 있었다. 숲 전체를 불태우려는 듯 짙은 노을의 뒤로, 어스름이 마치 좀먹듯 스멀스멀 뒤를 따라 잠식해 왔다.
마치 수천 개의 촛불이 꺼지는 듯한 모습에 아스틴은 새삼 피로감을 느꼈다. 이만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까마득히 먼 곳에서 알 수 없는 하울링이 들려왔다. 동료들을 부르는 듯한 아련한 울음이었다. 잠시 미간을 굳히고 있던 아스틴은 일단 오늘의 일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무튼, 요즘 같은 시절에는 이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성으로 돌아왔다. 시리스에게서 몇 가지의 짤막한 보고를 들은 후, 곧바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땀과 먼지로 몸이 범벅이었던 터라 찝찝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콸콸 뜨거운 온수가 파이프를 타고 탕으로 쏟아졌다. 그녀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향유가 섞인 액체 유액을 온몸에 바르고 해면으로 벅벅 몸을 문지른 후 물로 헹구어 냈다. 머리까지 깨끗이 감고 나서야 탕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을 맴돌자 그제야 들러붙어 있던 피곤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오늘의 일을 되새겨 보았다. 혹 실수한 일은 없는지 한번 더 검토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꼼꼼하고 세심하게 기억을 훑어 나갈 무렵, 남편과의 일이 떠올랐다.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그녀는 슬며시 귀를 쓰다듬었다.
“스칼라이식, 애교라.”
항간에 스칼라이 남자는 잠자리에서 짐승 울음소리를 내어 여자를 흥분시킨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그녀는 그저 제국에서 외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근거 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모국인 스칼라이는 국왕에서부터 말단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힘을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중시하는 나라였다. 해서 남녀노소 신분고저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에게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했다.
훈련의 과정에는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을 단련시키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둘의 상관관계야 이미 수많은 학자가 밝혀낸 일이다.
그런 만큼 다들 워낙 군살이 없고 호전적인 성격의 사람들이라, 짐승처럼 거칠다는 말을 우회해서 표현한 거겠지. 아스틴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니 아까 남편의 행동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애교라고? 그냥 장난일 테다. 남편답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 이제야 일련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는 열심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거였다.
당대의 관습에 따라 가문의 주인이 아이를 갖자고 결정하면, 그에 맞춰 노력하는 것은 안사람들의 일이었다. 특히 부군들의 경우에는 군주가 거북하게 느끼지 않도록 먼저 분위기를 잡고, 기분에 맞추어 요청하고 뜻에 따르는 것이 예의였다.
군주를 피하거나, 기다리는 등의 수동적인 행동은 매우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분노한 군주가 죄를 묻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다 남편은 급으로만 따지자면 자신보다 높았다. 결혼 계약에 따라 그가 펠로데로 장가 오게 되어 그렇지 자신은 귀족이고, 그는 왕족이었다. 그러니 잉태를 결정하는 건 자신이라도 어디서 어떻게 시킬지는 거의 그에게 달린 셈이다. 해서 그가 언제 어디서 관계를 시도해 온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또한, 그와 자신의 종족적인 특성이나 나이를 떠올려 보면 마치 달아 있는 것처럼 애절하던 모습도 이해가 되었다.
아노르인은 고귀한 만큼이나 성욕도 활발하고 정력도 센 종족이니까. 특히 남편의 경우, 2년이나 정욕을 홀로 처리하고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자제한 일이었다.
“‘당신은 매일 늦게 들어와서 그냥 자 버리니까….’라.”
아스틴은 어젯밤 해명하듯 중얼거리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그간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는 건데, 이해는 되었다.
요 몇 년간 자신은 씻고 먹고 일하고 자는 단순한 생활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잠자리를 떠올릴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남편을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선택하고 성심껏 섬기겠다고 받아들인 사람인데, 어떻게 거부할까.
사실 숲에서도 그랬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수하들이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부했지만 그래도 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다시금 마음먹는 일이었지만, 아스틴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은 마음은 정말 없었다.
아무튼 저렇게 달아 있는 모습을 보면 오늘 밤에도,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텐데.
문득 내일의 일정이 떠올랐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계가 언제였더라. 새삼 그 억세던 근육질의 몸이 떠오르자 걱정이 되었다.
잠자리는 곧 체력전인데, 자신이 그를 버텨 낼 수 있을지. 아마… 사냥을 괜히 나간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집안의 주인이 되어서 그렇게 무방비로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스틴은 입술을 쓱 쓸어내렸다.
* * *
아스틴이 침실로 들어왔을 때 길리어드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작은 단검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묵묵하고 점잖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까의 일로 언짢아하진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의외였다.
“부군, 저녁엔 수하분들과 연회가 있다 하지 않으셨나요?”
“취소했소. 요즘 기강이 흐트러진 것 같아, 지금 야간 훈련을 하고 있을 거요.”
“그렇군요. 그럼….”
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 테이블에 시선이 닿았다. 끄트머리에 익숙한 등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었는데 웬 자두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들어요. 숲에서 발견했소.”
여전히 단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길리어드가 말해왔다.
역시 그건 듀랜트가 가지고 있던 바구니였다. 채집을 명령했다더니 설마 자신에게 주려고 그랬던 걸까?
머뭇거리던 아스틴은 우선 고맙다고 하며 자두를 하나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새콤달콤한 특유의 향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탐스럽게 익은 만큼이나 달고 시원했다.
하나를 먹은 후, 그녀는 씨를 벽난로에 던져 넣고는 곧바로 다른 하나를 집었다.
아스틴은 자두를 좋아했다. 식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두만큼은 좋은 농장을 봐두었다가 철만 되면 왕창 사들여서는 식사 시간마다 한 알씩은 먹었고, 쉬는 시간에도 절여 놓은 것을 조금씩 먹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녀가 열심히 자두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길리어드가 단검을 내려놓고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검을 손질하던 손도 멈추었는데, 붉은 자두를 오물거리고 있는 아스틴의 입술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붉고 촉촉하게 보였던 탓이다.
처음에는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이윽고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아스틴은 지금 옅은 회백색의 잠옷 드레스 차림이었다. 목욕 후의 물기 때문에 홑겹의 드레스가 조금 촉촉하게 젖어 안쪽의 나신이 비치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실룩이던 그는 이윽고 뭔가를 참기 힘든 듯,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먼저 자도록 해요. 난 서재에서 책이나 좀 읽다가 잘 테니까. 그리고 부탁하겠는데, 갑자기 들어오지 말아요. 나 같은 사람도 놀란단 말이야.”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아스틴은 자두를 내려놓고는 물었다.
“어쩜,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전 그때 분명히 노크했어요. 당신을 부르기까지 했다고요. 그리고 문을 잠가 놓으셨어야죠.”
“그건, 그거야 당신은 이제껏 서재로 들어온 적이 없었으니까….”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길리어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해 못 할 일이야.”
이후 그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금 단검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지못해 단검을 닦기 시작했는데, 깊이 실망한 얼굴이었다.
아스틴은 먹던 자두를 내려놓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두 맛이 떨어지는 일은 흔치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던 터다.
아무튼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아까부터 은근히 몸을 훑어 내리는 시선은 눈치채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다시금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마치 힘을 내려는 듯 그 자리에서 몇 개를 더 먹어치운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아들이다가 전체를 머금었는데, 입맞춤은 자두의 향과 즙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부드럽고 깊게 이어졌다.
이후 입술을 떼어 낸 그녀는 길리어드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가르릉거리는 울음을 내어 주었다.
“애교예요, 스칼라이식의.”
그 말에 길리어드의 청람색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지금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스틴은 시선을 곧게 마주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밤, 제 숲에서 사냥을 계속하셔도 좋아요. 혹시 모르죠, 유니콘이 있을지도…?”
길리어드는 그래도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언가에 취한 듯 눈빛이 약간 풀려 몽롱한 모습이었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소파랑 침대. 어디가 좋겠소.”
아스틴은 길리어드의 허벅지에 앉으며 턱 하니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의 마른 뺨이 실룩거렸다. 벅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진정하고 있다는 듯이. 이윽고 그가 겨우 한 마디를 토해 냈다.
“당신은… 정말 거칠군.”
* * *
거칠다는 표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스칼라이에서 사내가 여인에게 할 때는 일종의 매혹적이라는 표현이 되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러한 단어가 고착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언어와 문화라는 건 나라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아스틴은 조심스레 상체를 기울이면서 팔로 굵은 목을 휘감았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드레스의 끈을 잡아당겼다. 옷의 위쪽 부분이 스르륵 풀리며 풍만한 가슴이 출렁 흘러내렸다.
순간 등 뒤에서 후끈 느껴지는 벽난로의 온기에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 벗기진 말아요. 난로 때문에 지금도 등이 뜨거우니까.”
“알겠소. 나도 그게 좋아요.”
끈을 풀어 내리던 길리어드가 그즈음에서 멈추더니 살며시 등을 쓸어내리다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턱 근처에 입술을 대었다.
입술은 턱선 아래쪽을 빨아들이듯 입을 맞추다가 이내 목의 힘줄이 돋아난 곳을 핥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입맞춤에 아스틴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촉촉한 혀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기분 좋게 이어지던 입술이 쇄골에 닿자 갑자기 지끈거리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길리어드가 덥석 자신의 쇄골을 깨무는 게 아닌가. 부드러이 입을 맞추다가도 한 번, 또 한 번 덥석덥석 깨무는 게 참 독특한 행동이었다. 아스틴은 결국 몸을 떼어 내고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길리어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스칼라이식이야.”
“하지만 예전에는 이러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그때는… 그냥 참았소. 당신이 날 이상한 놈이라고 오해할 것 같아서.”
“흠, 지금은 왜 마음이 바뀌셨는데요?”
한동안 망설이고 있던 길리어드가 마지못해 입술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 내 체면은 바닥을 기고 있을 텐데, 숨길 것도 없으니까.”
길리어드가 대답했다. 조금은 망설이고 있으면서도 이제는 이판사판이라는 표정이었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아스틴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그럼, 이건 펠로데식 입맞춤이에요.”
그리고 다시금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곤 쑥 혀를 집어넣고 천천히 그의 혀를 찾아 포개었다.
잠시 몸을 움찔거리던 길리어드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마주하듯 부드럽게 옭아매어 왔다. 삼키려는 듯 살짝 빨아들였다가도 놓는 것이 마치 호흡하듯 자연스러웠다.
입맞춤은 호흡이 힘들 정도로 격렬하고 촘촘하게 이어졌다.
절절하게 이어지는 혀들의 움직임 사이로, 길리어드가 뭔가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끙, 하고 신음을 내었다. 이윽고 팔에 힘을 주더니 자신의 품으로 조금 더 깊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쇄골에 얼굴을 파묻었다. 깨무는 듯한 애무가 쇄골을 지나 드디어 유두에 닿았다.
“읏….”
꼭지의 얇은 피부를 자극하는 느낌이 거칠고 격렬했다.
아스틴은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허리를 조금 뒤로 젖히며 가랑이를 좀 더 밀착시켰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치마 안쪽으로 들어왔다. 늘씬한 허벅지를 쓸어 올리듯 쓰다듬다, 엉덩이를 한 번 지그시 움켜쥐고는 허리를 안았다.
다소 강렬하면서도 약간은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손짓에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자신의 가슴으로 확 끌어안았다.
길리어드는 풍만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한참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처음에는 묵묵하던 숨결이 서서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떼어 내고는 그녀를 채로 들어 옆자리에 앉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는데, 아스틴은 다급히 행동을 막았다.
“자, 잠깐만. 여보, 당신은 왕족이에요. 제 앞에서 이렇게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어쩌면 고리타분한 말이었지만 아스틴은 이런 부분에서는 선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그 말에 길리어드가 볼살을 실룩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걸 따지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본인도 그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간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스틴은 자제하고 있는 길리어드의 뒤로 야수와 같은 거대한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쿵쿵 심장이 마치 제어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뛰고 있었다. 어째서 이다지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인지. 이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입술을 열었다.
“아스틴, 내 사과를 받아 줘요.”
“예? 무얼 잘못하셨다고요.”
“뭐가 되었든, 난 지금 당신한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예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 안 그렇소?”
“참,”
“아무튼, 난 당신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아. 그러니까….”
그가 발목을 잡더니 소파의 등받이로 밀어붙였다.
어휴, 더 말해 봤자 통제가 될 것 같지가 않다. 아스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대한 덩치가 노련하게 치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치마가 함께 말려 올라가며 시야를 가렸다. 해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손짓을 느낄 수가 있었다.
커다란 손이 장골을 슬며시 쓰다듬더니 천천히 허벅지를 붙잡으며 다리 사이를 열어젖혔다. 조심스레 사타구니를 매만지다가 질문의 입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가락 하나가 깊은 곳으로 쑥 들어오더니 마치 탐색하듯 이리저리 내부의 주름을 비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딘가에서 멈추어 꾹 자극을 주었다.
“으음….”
아스틴은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이 남자가 정말, 이렇게 거칠게 자극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녀는 허리를 살짝 틀었다. 그러한 반응에 손가락의 움직임이 순간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면서도 내막의 주름을 천천히 긁어내렸는데 움직임이 느릿하면서도 상당히 집요했다.
섬세한 자극에 불쾌하던 이물감이 쾌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체온이 서서히 올라가며 전신의 긴장이 풀어져 노곤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내문이 촉촉해지고, 한껏 파고들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릿해졌을 즈음이었다. 길리어드가 한쪽 팔에 하나씩 허벅지를 끼고는 손으로 살며시 장골을 감싸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쪽, 처음에는 허벅지의 안쪽에 입술을 맞추었다가 점차 아래로 내려가더니 음핵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마치 혀를 굴리듯 부드럽게 빨아들이다가 앞니로 살짝 자극을 주었다.
“…짓궂게 굴지 말아요.”
따끔한 자극에 아스틴은 눈살을 찌푸리며 찰싹 어깨를 때렸다. 그러나 길리어드는 되레 장골을 붙든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 그녀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동시에 입맞춤이 더 거칠어졌다.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러운 혀가 질문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꼼질꼼질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게 자극하고 빨아들이는 느낌에서 설명하지 못할 이물감을 받았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혀는 손가락보다 더 부드럽고 예리한 느낌을 주었다.
노골적이고 격한 자극에, 잠시간 길리어드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슬며시 발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발목을 덥석 붙잡았다. 아스틴은 풀려나기 위해 무심코 발목을 흔들었지만,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찌나 힘이 셌던지 마치 강철로 만들어진 형틀에 묶인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입술은 더욱 격렬해졌다.
“흐…읏….”
그녀는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늘어지듯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입술을 떼어 내면서 말했다.
“아스틴, 더 저항해요.”
“네?”
“할 수 있으면 더 거칠게. 날 차도 좋고 때려도 좋소. 오늘은 용서하지.”
“여보,”
“그럴수록 제압하는 맛이 있어. 더… 흥분되거든.”
외설에 가까울 정도로 노골적인 언행에 비교해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정말, 점잖게 야성적인 발언이었다.
그 말에 맥이 빠져 버린 아스틴은 되레 힘을 풀었다. 대신 팔짱을 끼고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입맞춤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전의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거칠어,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이어졌다.
내부의 물을 받아 마시려는 듯 깊고 깊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결국 그녀는 마치 달구어진 버터처럼 달아오르다 마침내는 녹녹하게 퍼져 버렸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몸을 일으키더니 바지의 끈을 풀어 내렸다.
거뭇하고 커다란 그것이 적나라하게 아스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미 잔뜩 자극을 받아 지나칠 정도로 우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그녀의 다리 사이에 가져다 댔다. 기둥의 아래쪽으로 잠시간 음핵을 문지르다가 매끄럽게 내부로 들어왔다.
기둥은 삽시간에 그녀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스틴은 눈매를 살짝 떨며 길리어드를 올려보았다. 정말, 얼마만의 자극인지. 낯선 이물감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날것의 느낌이 아주 거칠고 자극적이었다. 마치 다른 생명체가 들어와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뺨이 팽팽 부푸는 느낌이 났다. 입술 사이에서 자연스레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스틴…?”
그 무렵 길리어드가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도 그는 멍청하거나 경험이 없는 사내가 아니었다. 기분이 좋다느니 황홀하다느니 얼빠진 표정을 짓지 않고 묵묵하고 지긋하고 은근한 시선으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달래듯이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척추의 끝부분을 다독이듯 쓰다듬어 주었다.
“여보…. 조금만 천천히… 부드럽게 해 줘요.”
아스틴은 여전히 신음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이물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터다. 어느새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기분도 몽롱하고 호흡도 올라가, 발음도 흐트러졌다.
약간은 취한 듯한 목소리가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뇌쇄적이고 색기가 짙다 못해 점철되어 있었다. 그에 훅 흥분이 되었던지 길리어드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가 몇 번 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열었다.
“…아픈 건가? 그렇다면 말해요. 내려갈게요.”
“아니야. 그렇게 아프진 않은데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배가 좀… 뻐근해서 그래요.”
아스틴은 손을 뻗었다. 사실, 조금 걱정도 되었다. 오랜만의 결합이었던 만큼 알 수 없는 불안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내 손 놓지 말고, 계속 잡아 줘야 해요.”
“…알았소.”
길리어드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이윽고 허리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느긋하고 부드러웠지만, 아스틴은 그래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기둥은 필요 이상으로 크고 뻣뻣했다. 워낙 무골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굵기야 당연히 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고 탄력적이기 그지없어 스스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길리어드는 과연 부군답게 아주 능숙했다. 한 번 삽입할 때마다 자극점을 정확히 파고드는데, 그 때문에 아스틴은 한번 한번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귀 끝이 빳빳이 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길리어드가 잠시 멈추더니 허리에 힘을 주며 내부를 휘저었다. 순간, 기둥에 도드라져 있던 혈관이 내부의 주름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귀두의 끝이 자극점을 콕콕 거칠게 건드렸다.
“흐읏…….”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젖혔다. 신경이 찌릿하더니 척주가 뻣뻣해졌던 탓이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멈추어서는, 귓가에 입을 맞추더니 살며시 속삭였다.
“정말 괜찮은 건가? 참는 건 미덕이 아니야. 무리가 된다면, 말해야 해.”
나긋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뛰는 심장에 더더욱 채찍질을 가하는 것 같았다.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뛰어오르는 박동에 그녀는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기댈 만한 곳이 필요했다.
아스틴은 무심코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도톰한 입술을 빨아들이며 몇 번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탐색하듯 혀 속을 핥으며 몸을 조금 더 밀착시켰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듯 한 번, 두 번 지그시 물듯 자극을 주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허리 뒤로 손을 넣어 살며시 등을 쓸어 주었는데, 그쯤에야 아스틴은 진정이 되었다.
“아스틴, 계속… 날 안고 있어요.”
길리어드가 속삭였다.
동시에 천천히 움직이던 허리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격렬해지는 삽입에 아스틴은 뱃속이 미친 듯이 달구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또다시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잠시 멈추더니 다시금 입술을 맞추어 왔다. 달콤하게 얽혀드는 혀의 느낌에 아스틴은 훅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허리에 힘이 풀리었다.
움직임은 다시금 격렬해졌다.
그것은 마치 본색을 드러내는 야수처럼 거칠고 사납게 그녀를 휘저어갔다. 강렬한 느낌에 아스틴은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보인 것이다.
길리어드가 다시금 입술을 맞추어 왔다. 몇 번 더 맞추더니, 눈가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계속된 격렬함의 끝에, 길리어드가 손을 꽉 잡으면서 자신을 한껏 안으로 밀어붙였다.
그와 동시에 내부에 있던 기둥이 마치 그물에 사로잡힌 물고기처럼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아스틴은 이윽고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주룩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후, 참고 있던 숨을 깊이 내쉬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마치 밧줄에 꽁꽁 묶여 있다 겨우 풀려난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전신이 펑퍼짐하게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리를 모은 채 소파 옆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는데, 떨어져 나갔던 길리어드가 다가와서는 조심스레 허벅지를 열었다. 그러더니 수건을 들고는 다리 사이로 흘러나온 정액을 닦아 냈다.
말없이 안쪽의 입구에 이어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닦아 주는 모습이 상당히 진중했다. 차분하고 점잖아서,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스틴은 그에 이어 물끄러미 그의 상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튼튼한 어깨와 탄탄하고 늘씬한 허리, 그리고 마치 철상처럼 무직해 보이는 하체에 이르기까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몸은 마치 인체의 미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 같았다. 군살도 하나 없고 근육이 불필요하게 두껍지도 않았다. 경이로울 정도의 완벽함에 무언가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평소엔 그런 몸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어 그저 존경스럽다는 느낌이 들곤 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남아 있던 여운이 다시금 그녀의 색욕에 불을 당겼던 터다. 동시에 가슴과 엉덩이가 한껏 자극을 받아 팽팽하게 후끈거렸다.
“으음….”
아스틴은 이마를 짚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길리어드가 고개를 들더니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가 천천히 일어나 그녀를 다정히 안아 들었다. 부드럽게 침대에 누이고는 손수 베개를 받쳐주었다. 살며시 다리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입맞춤을 이어갔다.
기분 좋은 입술이 목과 어깨, 쇄골을 핥더니 이내 유방과 배로 이어졌다. 그러다 배를 살짝 깨물었는데, 아스틴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그만 좀 물어요. 이제 사냥은 끝나지 않았나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살며시 입술을 내밀었다. 심통한 표정에 반해 목소리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나긋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좋은 거 아니오? 당신, 지금 웃고 있잖소.”
그 말에 아스틴은 눈을 잠시 찌푸리고 있었다.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면 색스럽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지금 상황으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내의 몸을 깨무는 남편이라니. 제국인인 그녀에게는 이런 무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틴은 이윽고 반쯤 몸을 일으켜서는 그의 왼쪽 어깨를 꽉 물었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길리어드는 되레 좋아하는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아스틴, 좀 더 세게 해요. 하려면 자국을 남겨 줘야지.”
그러면서 살며시 끌어안고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말없이 어깨를 물고 있던 아스틴은 왠지 김이 샌다는 생각에 그만 입술을 떼어 내고는 베개 위로 털썩 몸을 누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길리어드가 답지 않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몇 번의 입맞춤에 이어 이번에는 그녀의 허리 밑에 살며시 손을 집어넣더니 그대로 끌어안듯 삽입을 시도해 왔다.
아스틴은 다리에 힘을 풀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나 자신이나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밤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몸짓은 체력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되었다. 몸과 몸이 얽혀들며 배어 나온 땀에 침대의 시트가 촉촉하게 젖었고, 신음은 서서히 격한 교성으로 변해갔다.
물론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열정적인 밤에도 끝은 있었다.
새벽을 앞두고 하늘이 짙은 청람색에서 파란 바닷빛으로 물들 무렵에야 아스틴은 가쁘게 내달리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을 떠올리려 눈에 힘을 주었다. 내닫는 말처럼 뛰는 심장에 비교해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힘없이 처지고 있었다. 대체 얼마만의 관계였을까, 적당히 조절하려고 했는데 그녀도 한창이었던 만큼 완급 조절이 쉽지 않았던 터다.
그 무렵 맞은편에서 바라보고 있던 길리어드와 시선이 마주했다. 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지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관계 내내 더 많이 움직인 쪽은 바로 길리어드였다. 그런데 지치지도 않았는지, 묵묵하고 고고한 시선에 아스틴은 입술을 슬며시 비틀었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은근히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이마를 가슴에 기대게 했다. 탄탄하고 두툼한 가슴 근육 아래 힘차게 뛰는 박동이 들려왔다.
“지쳤군. 괜찮소?”
“그야… 오늘은 아침부터 일이 많았잖아요.”
“그랬지. 아무튼 내가 적당히 했어야 하는데, 너무 채신없게 굴었던 모양이군…. 미안해요. 나도 오랜만이라. 다음부턴 더 다정하게 하겠소.”
“괜찮아요.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라니. 이건 당연한 거야. 건강한 잉태를 위해서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해.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나의 의무고.”
아스틴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협도 아니고 폭언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조금은 불안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걸까. 무언가를 망설이듯 대답 없는 시선에 길리어드가 어째서인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살며시 눈을 감으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앞으로 노력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