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감정의 이름
전신이 녹진했다. 잔잔한 온기가 허리를 휘감고 옅은 페로몬을 흘려냈다. 유진은 그 따스함에 파묻힌 채 조금씩 눈을 떴다. 너른 가슴팍이 보였다. 뒤이어 눈을 감고 있는 천태운의 얼굴도 보였다. 짙게 가라앉은 눈매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분명 잠들 때까지만 해도 집에 자신밖에 없었는데, 대체 언제 들어와서 침대 한구석을 차지한 것인지 영문 모를 일이다. 유독 태운을 상대로는 체내 경고음이 발휘되지 않았다. 그 이유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었다. 거의 수면제 급으로 작용하는 그의 페로몬 탓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푹 눌려 있는 얼굴을 비틀고 태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찰싹 달라붙어 있던 체온이 떨어지자 조금 오한이 들었지만, 늑장을 부릴 여유는 없었다. 오늘은 이른 출근을 해야 했다. 살갗에 달라붙는 허전함을 털어내려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그때 자는 줄 알았던 태운이 돌연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움찔한 유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운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유진의 등허리에 코를 묻고 있었다.
“왜… 벌써 일어납니까.”
“일찍 가 봐야 합니다.”
“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는데…….”
“오늘 9시 전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서류가 있습니다. ……그만하고 놔요.”
끈질기게 들러붙은 태운이 스멀스멀 페로몬을 흘렸다. 나른하면서도 오싹한 향기에 등줄기가 쭈뼛 섰다. 유진은 턱에 힘을 주고 배에 감긴 손깍지를 풀어냈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한지 좀체 떨어지지를 않았다.
“천태운……!”
유진이 미간에 힘을 주고 홱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척으로 태운의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눈을 감은 채 칭얼거리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는 잠기운 하나 없는 눈으로 뒷머리를 감싸 당겼다.
촉.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씻고 나와요. 아침 준비할 테니까.”
정수리를 가볍게 누른 태운이 먼저 침실을 나섰다. 묵직한 온기가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유진은 망연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뺨이 달아올랐다.
“예측할 수가 없어…….”
근래 몇 달 동안 비슷하게 이어진 생활이었으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분명 불쑥불쑥 벽을 깨고 들어오는 저 극우성 알파의 탓이리라. 유진은 그의 손길이 닿았던 뒷덜미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낮은 한숨을 흘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토스트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유진은 제복을 갖춰 입고 거실로 나갔다. 재킷을 의자에 걸쳐놓고 자리에 앉자 태운이 접시를 내려 주었다. 토스트에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컨, 아침으로는 나쁘지 않은 메뉴였다.
유진은 맞은편에 앉는 태운을 흘끗 보며 토스트를 집었다.
“잘 먹을게요.”
“당분간 이렇게 나가는 겁니까?”
“아뇨, 어제 퇴근하고 좀 일이 생겨서. 오늘 출근 시간 전에 정리해두려고 가는 겁니다.”
“부하가 사고를 친 모양이죠.”
적중이었다. 유진은 대답 없이 토스트 끄트머리를 물어 기계적으로 씹었다. 알 만하다는 듯 웃은 태운이 흰 우유를 따라 유진에게 내밀고 정작 자신은 커피를 홀짝였다. 질렸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동안 입도 대지 않더니, 슬슬 괜찮아지는 모양이었다.
마침 목이 퍽퍽했던 터라 우유를 꼴깍 마시고 이번에는 스크램블드에그를 씹었다. 야들야들한 게 맛 하나는 좋았다.
“대체 여긴 언제 온 겁니까?”
“어제 퇴근이 좀 늦어서요. 아마 두 시쯤?”
“왜 멀쩡한 집 놔두고 내 집에 오는 겁니까.”
“당신이 내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줬잖아요.”
“필요할 때 쓰라는 뜻이었지, 아예 내 집에 눌러살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언젠가 같이 살게 될 텐데.”
태운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품새가 하도 당당해 따지기도 기가 빨렸다. 말없이 빵을 씹자 태운이 눈을 기울였다.
“당신만 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동거할 수 있습니다만.”
“지금도 이미 하고 있는데 뭘 더 바랍니까.”
흘려내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태운은 이내 바람 새는 소리를 흘리며 커피를 머금었다. 어딘가 흡족한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유진은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 밑이 평소보다 조금 거뭇한 것 같았다. 새벽 두 시에 왔다면 아직 세 시간도 채 못 잤을 테니, 아까 그가 맥을 못 추던 모습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천태운은 소령이 된 이후 본격적으로 주요한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명을 받는 쪽에서 하는 쪽에 보다 가까워진 것이다. 일 중독인 유진조차도 대위의 업무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힘에 겨웠는데, 소령은 어떨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법했다.
실제로도 그는 늘 야근했다. 유진도 늦게 퇴근하는 편인데, 태운은 항상 그보다 더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도 늘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려 주었다. 이제는 유진이 아침을 먹고 그 앞을 태운이 지키는 이 풍경이 익숙해져 버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매일 밥 차려 줄 필요 없습니다. 원래 아침은 안 챙기는 편이라서요.”
“그러니까 내가 챙기는 겁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걱정해 주는 겁니까?”
테이블을 짚은 태운이 허리를 숙였다. 페로몬은 이제 갈무리한 상태였지만 그와 비슷한 체취가 훅 풍겨왔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달걀을 꿀꺽 삼키고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흘렸다.
“세 시간밖에 못 잔 사람한테 식사 대접받고도 멀쩡할 양심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게 되겠습니까.”
태운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면 키스라도 해주든가요.”
어째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저택에서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으니 태운이 눈썹을 들썩이며 입꼬리를 휘었다. 자다가 일어났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단한 극우성 알파였다.
유진은 남은 빵조각과 베이컨을 입에 밀어 넣은 뒤 우유와 함께 삼켰다. 그리고 접시를 개수대에 넣었다. 태운은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선 채 여상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뭐 필요합니까?”
고개를 기울인 태운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때를 놓치지 않은 유진이 그의 뒷덜미를 끌어와 입술을 겹쳤다. 은은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태운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키스하라면서요.”
“……그랬죠.”
“나갈 채비 하고 오겠습니다.”
귓불을 붉힌 유진은 빠른 속도로 방에 들어갔다. 양치하는 소리가 작게 들릴 때까지도 태운은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서 있다가, 이내 작게 웃으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미미하게 달큼한 맛이 느껴졌다.
유진은 태운의 마중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마치 보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운이 현관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혀를 섞는 통에, 출근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안에서 그의 페로몬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괜히 신경이 쓰여 혀로 입천장을 문질렀다. 하지만 다시 양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서 나던 커피 향기가 조금 아른거려, 유진은 사인을 마친 두툼한 서류를 미뤄두고 사무실을 나섰다.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의 커피는 천태운이 종종 마시는 것이라, 왠지 그의 향과 닮은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자 마주 오던 제국군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위님.”
“안녕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하자 그가 눈을 반짝였다. 아직 빳빳한 제복이나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아, 아마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무명 사건 이후 소문이 워낙 자자하게 퍼진 탓에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적응되지 않는 일이라 저런 눈빛을 받을 때마다 낯간지러웠다. 유진은 발을 재촉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최근 몇 달간 제국군의 분위기는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처음 대위로 진급했을 때도 놀라웠지만, 점점 더 놀랄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새롭게 입대하는 제국군 중 오메가나 베타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그들에게서 선망의 시선을 받는 일도 많아졌다.
물론 유진이라고 그때 이후로 손 놓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류진모로부터 워커홀릭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답게 끝없이 사건을 도맡았다. 퇴원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현장 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류진모는 물론 천태운까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일이 성공적으로 해결될 때마다 느껴지는 만족감은 그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유진은 대위가 된 이후로도 착실히 업적을 쌓아왔고, 안 그래도 언론의 이목을 받고 있었던 탓에 사건을 하나 해결할 때마다 기사가 났다. 일각에서는 제국의 아이돌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살갗 아래로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이제는 웬만한 일로는 목석처럼 굳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뒤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유진 대위님―! 팬입니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복도가 온통 쩌렁쩌렁 울렸다. 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당황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군학교 교복 차림을 보아하니 학생인 듯했다.
그는 생각보다 크게 나온 목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굴리다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그리고 제 친우들의 쪽으로 달려갔다. 유진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학생이 이곳에…? 아니, 그보다 팬이라니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지? 머릿속이 민망함으로 뒤엉켜 빙글빙글 돌았다.
“유명세가 대단한데, 하 대위.”
옆에서 류진모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걸어왔다. 사무실에 있던 이들도 하나둘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제야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괴상한 얼굴로 류진모를 보았다.
“왜 학생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오늘 현장 견학이 있다고 하던데, 이른 아침부터 다들 고생이구나.”
“견학……. 요즘에는 이런 층까지 올라옵니까?”
“널 보고 싶다고 졸라서 올라온 것 아니겠어. 너무 박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무슨 말씀을…….”
낯에 오른 열기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있으니 류진모가 잔잔하게 웃었다.
“학교로부터 몇 번 초청을 받지 않았어? 한 번쯤은 얼굴 비춰 주지 그러냐. 널 만나 보고 싶다는 학생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누군가를 가르칠 덕목이 되지 못합니다.”
“가르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자리에 참석해서 그들의 열의를 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역할은 충분한 거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겨우 얼굴이 식었다. 유진은 한시름을 덜고 손등을 떼어냈다.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었다. 천태운도 몇 번 언론에 사진이 찍히면서 만만치 않게 유명해졌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냐?”
“카페에 가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아, 그런 거라면 이걸 좀 가져가겠어?”
류진모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보니 그의 양손에는 국화차가 한가득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유진에게 네 개의 병 중 두 개를 들려 주고, 당황하는 유진에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에 천 소령이 선물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양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마침 너도 좋아하니 좀 가져가서 마셔라. 커피 마시지 말고.”
“……천태운 소령님이요?”
“카페인은 많이 마시면 안 좋아. 잠은 제대로 자는 거지? 요즘 무리하는 것 같던데 쉬엄쉬엄해라, 유진아.”
등을 가볍게 두드린 류진모가 눈을 접었다. 차마 그 선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유진은 어쩔 수 없이 국화차를 양손 가득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병에서는 태운의 체취가 느껴졌다. 코를 가져다 대고 맡지 않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정도였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던 걸까. 그는 유진이 류진모를 가족처럼 끔찍이 여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이 선물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왠지 간지러운 기분으로 차를 탔다. 은은한 황색의 찻물이 퍼져나갔다. 조심스럽게 한 입 머금은 유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입매를 기울이며 눈썹 끝을 내렸다.
언젠가 태운이 타 주었던 차와 같은 맛이 났다.
***
현장 견학은 아마 두어 시간이면 끝날 터였다. 하지만 유진도 졸업한 지 한참 지났으니 지금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쉽사리 사무실을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만약 아까처럼 또 학생이 목소리를 내어 외치기라도 한다면 쥐구멍에 숨고 싶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진은 거의 사무실에 틀어박힌 채 하루를 보냈다. 어차피 밀린 서류 작업이 많아 큰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금 국화차로 혀를 축이며 종일 일에 매진하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 보고서에 마침표를 찍은 후 시계를 보자 7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유진은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한창 러시아워인 터라 차가 조금 막혀, 집에 도착하니 8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거실 불을 켜고 둘러보았다. 천태운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돌아오지’ 않았다니.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 몸이 흠칫 떨렸다. 유진은 고개를 휘휘 젓고 옷가지를 벗었다. 슬슬 여름이 찾아오고 있는지 날이 더웠다. 재킷을 벗고 다닐 일도 그리 머지않았다. 그 정도로 오랜 기간 태운과 교류를 이어간 것이다.
“…….”
옷장을 열자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태운의 제복이 보였다. 유진은 묘한 기분으로 시선을 흘리며 재킷을 옷걸이에 걸었다. 반듯하게 각 잡힌 자신의 재킷이 별 세 개를 매단 채 태운의 것 옆에 나란히 걸렸다. 괜스레 단전 아래가 간지러웠다.
태운은 죄책감이 없다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유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걸핏하면 집에 찾아와 유진을 제 페로몬에 절여 놓듯이 했고,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밥 챙겨 먹었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든 병원 상담도 늘 그가 챙겼다. 저택에서 하도 형편없는 꼴을 보인 탓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으로 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일적인 부분으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놀랍게도 유진은 그런 그의 행동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고, 특히 저를 가만히 응시하며 뺨이나 머리카락 따위를 만져 줄 때는 미묘한 기분이 들어 심장이 부풀었다.
페로몬에 휘둘리는 것은 아닐까, 깊이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일하면서도 타인의 페로몬을 맡게 되는 경우는 제법 있었다. 물론 긴장하거나 피곤할 때 저도 모르게 흘리는 향이었기에 느낌은 확연히 다르긴 했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단 한 번도 태운을 상대로 했을 때처럼 반응한 적은 없었다.
태운이 페로몬을 흘려 주면 늘 편안했고, 몸이 따뜻해졌다. 그는 늘 그런 향기로 유진을 안아주었다. 무척 안락한 기분이었다.
유진은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커피를 타서 거실에 앉았다. 아직 잠이 오지 않았으니 메일이나 확인할 요량이었다. 태블릿을 꺼내 첨부된 보고서를 훑어내리자 시간은 빛처럼 지나갔다. 커피가 미지근해질 즈음, 천태운이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일을 합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은 태운이 등 뒤로 다가섰다. 유진이 뒤로 고개를 꺾자 태운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입술을 스치고 깊이 파고들어,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며 숨을 옅게 흘렸다.
알싸한 열기가 치열을 훑고 타액을 섞었다. 입안의 점막이 살짝 달아오르며 예민해졌다. 뭉근히 움직이는 혀의 돌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허물어지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태운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손에서 커피잔을 빼갔다. 유진이 소파에 축 늘어져 숨을 헐떡일 때는 이미 남은 커피가 모조리 그의 입으로 사라진 뒤였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유진이 중얼거렸다.
“새로 내려서 마시지 왜 그걸 마십니까. 다 식었는데.”
“이 시간에 이런 걸 마시면 나중에 잠 못 잡니다.”
머리를 가볍게 헝클인 태운이 지나쳐 갔다. 개수대에 컵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는 뒷모습이 시야를 채웠다. 유진은 젖은 입술을 혀로 핥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휩쓸리다 보면 그의 손에 온전히 넘어가 있을 것 같았다.
늘 그랬듯,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태블릿을 정리하고 침대 위에 자리하자 금방 태운이 돌아왔다. 늘 포마드로 올리는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이마를 덮은 상태였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그곳에 눈길을 두었다. 시선을 느낀 태운이 입매를 기울이며 침대에 올랐다.
“안 어울립니까?”
“…어울려서 늘 놀랍습니다.”
“다행이네요.”
검은 동공이 흡족한 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유진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유진은 몸에 힘을 풀어 태운에게 등을 기대고 그가 풀어 주는 잔잔한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별일 없었습니까?”
“군학교 학생들이 견학을 온 것 같았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나도 본 것 같네요. 마주쳤습니까?”
“…….”
“학생들이 많이 좋아했겠군요.”
흑발 아래로 유진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복숭아처럼 물드는 모양이 귀여워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자, 움찔거린 유진은 이내 뒷덜미까지 조금씩 붉혔다. 그리고 화제를 다급하게 돌렸다.
“류진모 대령님께 선물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차가 들어와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거, 저택에서 당신이 내게 타 주었던 것 아닙니까?”
“감이 좋네요. 그 브랜드 맞습니다.”
부드러운 손길이 옆구리를 오르내렸다. 이따금 페로몬을 조금 짙게 담아 잠옷 위로 문지르기도 했다. 저릿저릿한 열감이 순간적으로 오르기는 했지만, 흥분시키려는 목적의 페로몬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몸이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유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옆으로 굴렸다. 시선을 맞춘 태운이 손을 뻗었다. 단단한 엄지가 눈꼬리 근처를 가볍게 비볐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입맛에 맞으면 여기에도 가져다 두겠습니다. 커피 말고 그거나 마셔요.”
“커피 머신을 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실컷 사용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역시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씩 수마가 찾아오고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탓이었다.
태운은 유진의 숨소리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품에서 유진을 조금 떼어내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머리를 괴고 누워 유진의 가슴께를 약하게 토닥였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푸근한 향기가 전신을 감쌌다. 허공을 헤매던 속눈썹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잘 자요. 내일 봅시다.”
유진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까무룩 잠드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태운이 가볍게 웃었다. 어렴풋이 이마 위로 키스가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
잠들 때와 마찬가지로 태운의 품에 안긴 채 아침을 맞이한 유진은 어제보다는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국화차를 한 잔 타서 마시니 나른해졌다. 온몸에서 천태운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덕에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정오가 지나고 늦은 오후로 달려갈 때쯤 일이 터졌다.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기에 들였더니, 얼굴이 희게 질린 제국군이 한 명 들어온 것이다.
“대위님, 혹시 이번 주 일정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불법 발정제 거래 정보가 급히 들어왔는데, 현재 인력 대부분이 대울동 수사 쪽으로 배치된 터라……. 오늘부터 며칠간 잠복해야 하는데 일정이 되시는 분이 없습니다.”
유진은 총알처럼 줄줄이 말하는 그의 가슴팍을 훑어보았다. 우기훈 중위. 직접 대화한 적은 없지만 일면식이 있었다. 아마도 김 대령의 산하로, 올해 막 중위가 된 베타였을 것이다. 그는 벌써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지 머리카락과 제복이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제국군 규율상 현장 잠복을 하기 위해서는 중위 직급 이상의 인력이 최소 둘은 있어야 했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장치였는데 아무래도 지금 그조차 인원도 없는 모양이었다.
대울동이라면 태운이 전담하고 있는 인신매매 사건이다. 배후에 있는 조직의 꼬리조차 잡히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태운이 최근 새벽에 들어오는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워낙 큰 사건이라 김 대령 산하의 인력 대부분이 그쪽에 넘어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기훈은 그쪽에서 함께할 이를 찾다가 실패하고 결국 김 대령과 친한 류 대령의 쪽으로까지 오게 된 듯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상부에 보고했더니 그쪽도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지금 당장 출동해야 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우기훈은 죄지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본인도 얼토당토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진은 달력과 서류를 훑어보았다. 조금 빡빡하긴 하지만 당장 급한 일은 어제 마무리한 터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김 대령 산하라면 괜히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무명 사건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알고 있어, 가능하면 조력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퇴원한 이후 잠복 정도로 본격적인 임무에는 참여한 적 없었으나 이번 기회로 다시 손을 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같이 나가죠.”
“헉……! 감사합니다, 대위님!”
우기훈이 울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를 부드럽게 만류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은 앳된 얼굴을 보니 막 중위가 되었을 때의 기억도 났다. 별로 좋은 추억이 아니라, 빠르게 털어낸 후 차에 올랐다.
약 한 시간가량 도로를 달린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흥가 근처에 있는 골목길이었다. 아직은 날이 밝아 생각보다 음습하지 않았지만, 불법 거래가 새벽에만 이루어진다는 것도 다 옛말이다. 요즘에는 중고품 거래로 위장하며 대낮에 대놓고 접촉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기훈이 이렇게 서둘러 출동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일주일의 일정을 물은 것으로 보아서는 날짜 정보까지 들어온 건 아닌 것 같으니, 아마 거래가 발각될 때까지 철야로 이곳에 머무르게 될 듯했다. 유진은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나 빵 등을 사 올 요량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때 우기훈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대위님께서도 안 되시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유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대위님은 늘 바쁘시니 일정이 차 있으실 것 같았습니다.”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어서 과장되게 느껴지는 거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또 민망해졌다. 유진은 큼큼거리며 목을 풀고 시선을 전방에 두었다.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쓸데없이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의식하는 것은 유진뿐이었던 듯, 우기훈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늘 그렇게 겸손하시지만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해결 속도도 빠르시고 업무량도 많으셔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준이 아닙니다.”
“……과찬입니다.”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가시게 될 텐데 괜찮으십니까?”
“야근은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흘끗 유진을 쳐다본 우기훈이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닌 듯했다.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몸도 다 나은 지 오래됐습니다.”
“음……. 다행입니다.”
이런 뜻도 아닌 모양이다. 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며 우기훈의 의중을 살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의 질문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결국 작게 숨을 흘린 우기훈이 먼저 털어놓았다.
“사실은 소령님께 혼날까 봐 걱정되어서요.”
“……내가 천태운 소령님께요?”
“아, 아뇨. 제가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려서.”
우기훈이 천태운에게? 어째서? 감히 그 의미를 짐작할 수가 없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잠복 수사를 한다고 하여 자신이 천태운에게 ‘혼’이 날 이유도 없지만, 제 일에 충실했을 뿐인 우기훈이 그에게 혼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고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금방 풀렸다.
“천 소령님께서 대위님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소령님은 평소에도 무서우신데, 제 능력 부족으로 대위님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평소보다 더 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볼품없는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가 내 얘기를 합니까?”
“아,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차에 있으니 조금…. 환기가 안 되어서요.”
아. 유진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제야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으니 제게 배어 있는 천태운의 냄새가 베타인 그에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그의 냄새에 너무 익숙해진 제 탓도 있었다.
그나저나 천태운이 무섭다니, 의외인 일이다. 유진에게 있어서 천태운의 이미지는 세상을 홀로 사는 듯한 외모를 지니고서는 귀찮을 정도로 이것저것 챙겨 주는, 알고 보면 다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처음 저택에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태운에게서 느껴지는 선득한 중압감은 웬만한 강심장으로도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든 종류였다. 당시야 그에게서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내야 했으니 억지로라도 대면했지만, 그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묵직한 분위기가 불편해 최대한 마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극우성 알파의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천 소령님이 많이 엄격합니까?”
“으음, 네. 그런 편이십니다. 실수하면 가차 없으시고…. 언성을 높이신 적은 없지만 눈빛이 무서워지십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부하들도 많이 무서워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만큼 많이 챙기십니다. 특히 안전 문제로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서늘하게 혼내시는데, 당사자야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무섭겠지만 옆에서 보면 부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집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기울였다. 그의 입에서 듣는 천태운의 이야기가 재밌었다. 제게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슷한 점도 있어 막연하게 상상이 되었다.
우기훈은 천태운을 상당히 존경하는 듯했다. 존경하기에 그만큼 밉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고, 혼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어쩐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딱 저 즈음에 유진 역시 류진모를 실망시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었다.
유진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한때의 일이다. 이제는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 터라 웬만한 것으로는 불안해지지 않았다. 태운의 덕분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는 내 선택을 존중해 줍니다. 나도 누가 내 선택에 왈가왈부하도록 둘 성격이 아니고요.”
“건강한 교제를 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아닙니다.”
교제라. 누군가의 입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우기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태운은 분명 오늘도 유진의 집에 올 것이고, 그럼 텅 빈 집에서 홀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미리 연락하는 것이 옳다.
유진은 휴대폰을 들어 곧장 메시지를 작성했다. 엄지가 몇 번 화면 위를 배회한 끝에 온점을 찍었다.
[일 때문에 오늘부터 당분간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저는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겠습니다.”
“넵, 다녀오세요.”
차에서 내려서 몇 걸음 걸으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벌써 답장이 왔나 싶어 화면을 확인하자 역시나 태운이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입꼬리가 가벼워졌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유진은 짧게 알았다며 답장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어둑한 집에 홀로 개처럼 집을 지키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거래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만을 얻어낸 채 죽치고 대기하는 것이 다소 무식한 방법이긴 했으나 때로는 무식하게 돌진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간 유진은 우기훈과 교대하며 쪽잠을 청했다. 여전히 추가 인력은 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소 소위 이상의 인력이 필요했는데 아직 여유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진의 아래에도 최근 소위 부하가 하나 붙었으나 아직 배지의 광택도 사라지지 않은 이에게 잠복 임무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결국 둘이서 번갈아 감시를 이어간 지 벌써 나흘째, 체력은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유진은 진한 커피를 빨아 마시며 옆을 흘끗 보았다. 우기훈이 얼굴 위로 겉옷을 뒤집어쓴 채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둘째 날까지야 이런저런 이야기로 대화했다지만 어제부터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시간이 나면 체력을 보충하기에 바빴다.
마지막으로 교대한 건 한 시간 전, 세 시간이나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가 넘었으니 안 힘든 게 이상하긴 했다. 유진은 충혈된 눈으로 골목을 노려보았다.
무명 사건 이후 오메가를 이용한 매춘이나 인신매매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불법 발정제나 억제제 등의 거래는 오히려 늘어났다. 최근 응급실로 실려 오는 오메가와 알파의 수가 많아졌는데 대부분이 불법 발정제를 먹고 부작용을 일으킨 사례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발정제라고 하면 좋은 기억이 없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히트조차 억제제로 억누르는데, 어째서 그런 약까지 먹어가며 발정을 일으키는 것인지 유진으로는 감히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히트는 괴롭다. 이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거대한 갈증에 사고를 통째로 강탈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파를 향한 갈망을 멈출 수가 없다. 범해지면서도 더 범해지고 싶은 감각이 고통스러웠다.
“읏.”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애써 상념을 털어내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트라우마는 뇌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벌레처럼 이성을 갉아먹었다. 신음이 절로 새어 눈을 강하게 깜빡였다.
최근 들어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오랜만에 겪으니 숨이 가빠지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늘 천태운이 곁에 있었던가. 며칠 집에 안 돌아간 탓에 몸에 배어 있던 페로몬도 모조리 날아간 상태였다. 마킹도 노팅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문득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대위님…?”
유진의 신음을 들은 우기훈이 부스스 일어났다.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는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습니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요.”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교대할 테니 잠깐이라도 눈 붙이세요.”
“아직 교대한 지 한 시간밖에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낮 동안 그만큼 더 자면 됩니다.”
“……미안합니다.”
슬쩍 웃은 우기훈이 눈을 비빈 후 좌석 등받이를 세웠다. 유진은 미안한 기분으로 그를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조금 어지러운 게, 아무래도 그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버티고 있어 봐야 짐만 된다.
결국 유진은 등받이를 조금 뒤로 젖히고 뻐근한 눈을 감았다.
***
눈을 붙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돌연 몸이 위아래로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조금 뜨거웠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생각했더니 열이 나나 싶었다.
“하아, 윽.”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다. 바로 귓전에 대고 있는 것처럼 선명했고, 귓바퀴를 적시는 입김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리가 벌어졌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나직이 신음했다.
“조여……. 후우. 좋아요, 대장.”
“……으, 흣….”
“이렇게 연달아 싸고. 그렇게 느꼈어요?”
성기가 건드려졌다. 축축한 귀두를 감싼 엄지가 요도구를 문질렀다. 아, 아. 달뜬 신음이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엽기는. 나도 기분 좋아요. 구멍 더 조여 봐.”
“으으, 흑, 아……!”
“여기 쑤셔 줄 테니까.”
엉덩이가 잡혀 벌어졌다. 구멍이 찢어질 듯이 벌어졌다. 그 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살덩이가 주륵, 밀려들었다. 내벽이 벌어지고 단단한 열락이 하반신을 꿰뚫었다.
“아아――!”
눈이 번쩍 뜨였다. 바닥이 보였다. 바닥을 짚고 있는 자신의 손도 보였다. 엉덩이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마치 성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덜덜 떨며 뒤를 돌아보자 엉덩이에 바짝 붙어 있는 누군가의 하반신이 보였다.
뭐지? 대체 뭐지?
유진은 다급히 혼란을 삼켰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우기훈과 차에서 잠복하고 있었을 터다. 근데 이곳은 아무리 보아도 저택이었다. 왜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무려 반년 전에 탈출하지 않았던가.
“대장―….”
요동치는 시선 끝으로 승일이 보였다. 그는 탁하게 풀어진 눈으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기를 삼키고 있는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승일이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유진의 성기가 주물러졌다. 예민한 살갗이 비벼지자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아흑…! 그, 그만……!”
“아, 안쪽 움찔거려. 기분 좋아요?”
“흐윽, 아! 싫―.”
구멍을 긁으며 파고든 귀두가 전립선을 콱 찍어눌렀다. 쾌락점이 짓이겨지며 숨이 막혔다. 폭발적인 쾌락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막을 새도 없이 몸이 튕겨 올랐다.
“아으, 힉, 아! 흐아…!”
“거봐, 대장 여기 좋아하잖아. 더 비벼 줘요?”
“으흑, 시, 싫―.”
두툼한 귀두가 전립선을 둥글게 비볐다. 뜨거운 압박감이 민감한 살점을 스칠 때마다 시야가 아득해졌다. 유진은 바닥을 기며 승일에게서 도망쳤다. 구멍 사이로 기둥이 주륵 빠져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망치자마자 곧바로 붙잡혔다. 이번에는 건호가 유진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억눌렀다. 곧 제복 벨트가 허공을 갈랐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진은 볼기를 거세게 후려 맞았다.
“아악――!”
“어딜 도망가십니까, 중위님.”
“으흑, 아…! 건, 호―….”
“숫자 세셔야죠.”
짜악, 짝! 번쩍거리는 통증이 엉덩이를 쥐어짰다. 살갗이 다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유진은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울었다. 하반신이 불타오르는데 다시금 가죽이 매섭게 엉덩이를 내리쳤다.
“아으흑―…!”
그 순간 내벽이 울리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유진은 바들바들 떨며 사정했다. 묽은 정액이 줄줄 흘러 바닥을 적셨다. 오메가 냄새가 공기를 적시고 알파를 유혹했다. 턱을 꿈틀거린 건호가 곧바로 벌겋게 익은 볼깃살을 벌려 삽입했다.
“흐아, 아아…!”
유진은 발작하듯 사지를 비틀었다. 구멍이 차오르는 감각을 버틸 수가 없었다. 건호는 곧바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퍽, 퍽! 엉덩이를 가르고 두툼한 성기가 밀려들 때마다 진득한 쾌락이 밀려들어 허리가 벌벌 떨렸다.
유진은 또다시 도망치려고 했다. 바닥에 손톱을 박고 앞을 향해 기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구두코가 시야를 채웠다. 경련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중위님. 제 것을 드릴까요?”
제원이 바닥에 무릎을 내렸다. 개처럼 엎드린 채 범해지는 유진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턱 아래를 감싸 올렸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제원을 향해 들렸다.
“먹고 싶습니까?”
“으흑! 아, 아아…! 사, 살려….”
“구멍을 벌름거려서 제 것을 삼키겠습니까?”
푸욱! 구멍에 걸쳐졌던 귀두가 깊은 곳을 쳐올렸다. 사정없이 긁히는 전립선이 비명을 지르고, 관통당한 엉덩이는 애액을 왈칵 쏟았다. 그것을 윤활액 삼아 더욱 삽입이 깊어졌다. 지독한 절정이 혀를 물들였다.
“제게 애원하세요.”
몰아닥치는 쾌락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발정하는 몸이 알파의 향기를 탐하고자 이성을 휘발시켰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제원의 다리에 매달렸다. 비리게 웃은 제원이 턱 아래의 여린 피부를 간질였다.
“사실 이런 걸 좋아하시잖습니까.”
웃음기 섞인 음성이 귀를 물들였다. 아득하도록 멀어진 현실감이 몸을 절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유진은 발버둥 치다가 벼락같은 절정에 올랐다. 제원이 나직이 속삭였다.
‘중위님.’
“대위님……―!”
“헉.”
유진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빛과 함께 주변 풍경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골목길, 차, 그리고 우기훈. 유진이 헐떡이며 돌아보자 우기훈이 다급한 얼굴로 속삭였다.
“놈이 나타났습니다.”
빠른 속도로 이성이 돌아왔다.
유진은 재빨리 골목길을 살폈다.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하나는 거래상, 나머지 하나는 구매자로 보였다. 곧바로 제국군 측에 연락을 넣고 권총을 집어 들었다.
“주변에 민간인은.”
“이 근처에는 거주자가 없습니다. 따로 행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순 거래상이니 아마 비무장 상태이겠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셋 세면 나가서 제압하죠.”
우기훈 또한 권총을 챙겨 들고 눈빛을 굳혔다. 다행히 거래상은 현금을 세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유진은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벌컥 차 문을 열고 현장으로 들이닥쳤다.
“제국군이다! 모두 양손을 위로 들고 바닥에 엎드리도록!”
당황한 듯한 두 남자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우기훈이 총을 겨누고 있는 사이 유진은 빠르게 둘의 옷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총기의 윤곽은 보이지 않았고, 날붙이의 소지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서 벌벌 떠는 모습으로 봐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우기훈에게 눈짓한 뒤 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 뒤 가볍게 소지품을 검사했지만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곧 사이렌이 골목길을 울리기 시작했다. 호송차가 도착한 것이다.
유진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숨이 가빴다. 제압된 남자가 겁먹은 탓에 알파 향을 조금씩 흘렸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시야가 확 어그러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말아 쥐자 우기훈이 흘끗 눈길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차마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
구속한 남자들은 호송차에 실려 갔다. 그들이 거래하고 있던 불법 발정제 또한 연구소로 보내졌다. 성분 분석이 이루어지면 제조 공장의 위치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터였다.
유진과 우기훈은 제국군 건물로 돌아와 사건 보고서를 작성했다. 작업을 모두 마무리하자 오후 세 시였다. 함께 사무실을 나온 우기훈이 지친 한숨을 흘리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위님. 이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우 중위도 고생하셨습니다.”
“차 안 가져오셨으면 댁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우기훈의 눈빛에 염려가 섞였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연신 흘끔거리며 유진의 낯을 살폈었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가 싶어 손을 내려다보자, 여전히 잘게 경련하고 있는 손끝이 짐짓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를 집에 두고 왔던가. 기억이 가물거렸다. 어찌 되었든 이 상태로 운전을 하는 것은 무리인 듯해 우기훈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집 근처 역까지만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다음번에는 식사도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다행히 우기훈은 방금 사무실에서 쪽잠을 잔 덕에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유진은 힘없이 웃어 보인 후 그를 따랐다.
둘을 태운 차는 빠르게 유진의 동네로 향했다. 문득 천태운이 떠올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했다. 어두워진 화면으로 태운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몇 개 보였지만, 확인하기도 전에 전원이 나갔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게 어제 낮이었다. 잠복 중에는 연락을 못 하리라는 사실을 태운도 어련히 잘 알고 있겠으나 괜스레 마음이 걸렸다. 유진은 검게 변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 여기서 내려 주세요.”
“댁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잠깐 편의점에 들르려고 하니 괜찮습니다.”
주저하던 우기훈은 이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서 내리고 차창으로 고개를 숙이자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유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저 괜찮습니다, 우 중위.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밥 한 번 대접해 드릴 테니 꼭 연락 받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몇 번이고 망설이는 눈빛을 보내던 우기훈이 느지막이 출발했다. 그렇게까지 안색이 안 좋은가. 제 뺨을 문지르며 편의점에 들어선 유진은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발견하고 납득했다. 그야말로 귀신 몰골이었다. 우기훈이 그렇게까지 염려했던 이유가 있었다.
한숨을 몰아쉬며 편의점을 둘러보았다. 일찍 퇴근했으니 뭔가 먹고 자기는 해야 할 텐데, 입맛이 돌지 않았다. 결국 빵 한 봉지와 소화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봉지 필요하세요?”
“예.”
“2천 750원입니다.”
유진은 봉지에 담기는 빵을 흐리게 응시했다. 피곤했다. 생각할 것이 없어지니 머릿속이 다시 악몽으로 가득 찼다. 집에 가서 잠을 잘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이 상태로 자면 또 그 꿈을 이어서 꾸지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알바생이 건네는 봉지를 받아들고 서둘러 편의점을 나서던 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와 부딪혔다. 반동을 이기지 못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넘어진다.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상대방이 팔뚝을 붙들어 잡아 주었다.
“괜찮으세요?”
“아, 죄송합…….”
그에게서 알파 향이 났다. 유진은 얼어붙은 눈으로 상대를 올려보았다. 걱정스럽게 보는 낯선 행인의 얼굴이, 지하실에서 도망치는 자신을 붙들었던 제원의 것과 겹쳐 보였다.
“……!”
유진은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 정신없이 집을 향해 내달렸다. 신제원이 아니다. 백승일이나 이건호도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모두 악몽 때문이었다.
헐떡이며 달린 끝에 겨우 집에 도착했다. 유진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온몸을 적셨다. 입술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물줄기를 맞고 있다가, 머리가 강제적으로 식었을 즈음 수도를 잠갔다.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며 욕실을 울렸다. 선득한 공기가 살갗에 달라붙어 지네처럼 몸체를 비볐다.
“……천태운은.”
비척비척 일어난 유진이 욕실을 나섰다. 그러자 텅 비어 있는 거실이 보였다. 아직 네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가 벌써 퇴근했을 리가 없다. 뻐근한 눈알을 굴리자 현관 근처에 내팽개친 빵과 소화제가 보였다.
유진은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걸음을 옮겼다. 젖은 셔츠와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점점이 물방울이 맺혔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물이야 어차피 마를 것이다.
얼른 빵이나 쑤셔 넣고 자자. 유진은 바닥에서 빵 봉지와 소화제를 주워 소파에 앉았다. 퍽퍽한 빵을 우물거리니 여물을 먹는 기분이었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기분으로 입안에 밀어 넣고 소화제로 넘겼다.
텅 빈 집의 적막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
위액이 올라왔다.
유진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 앞에 도착하자마자 빵이 소화제와 함께 역류했다. 구역감으로 인한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나왔다. 유진은 모조리 게워내며 거센 기침을 토해냈다.
“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깊은 허탈함이 폐부를 채웠다. 유진은 변기 물을 내리고 양치한 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희미하게 천태운의 페로몬 향기가 났다. 고통스럽게 꿀렁거리던 윗배가 조금씩 편안하게 풀렸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한껏 묻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홀로 남은 집이 지독하게 두렵고 불안했다.
***
“하유진.”
낮은 울림이 귀를 두드렸다. 움찔한 유진이 옅은 숨을 흘렸다. 어깨가 살짝 흔들리고, 더 가까워진 부름이 귓바퀴를 문질렀다.
“유진아.”
“읏….”
“일어나 봐요.”
몸을 파르르 떤 유진이 조금씩 눈을 떴다. 어둑한 풍경 사이로 어렴풋이 태운의 얼굴이 보였다. 멍하니 색색거리고 있자, 태운이 몸을 끌어당겨 침대맡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 안색을 살펴보았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옷은 또 왜 이렇게 다 젖었고.”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당신 오늘 퇴근했다고 들어서 일찍 돌아왔습니다.”
따뜻한 체온이 얼굴을 감쌌다. 저도 모르게 옅은 숨을 흘리며 고개를 기대자, 태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들었는데.”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얼굴 위로 묵직한 눈길이 오르내렸다. 거뭇한 유진의 눈 밑을 깊이 훑어보던 태운은 이내 침대 위로 올라 유진을 품으로 당겼다. 너른 가슴팍으로 빨려 들어간 유진은 힘없이 늘어져 호흡했다.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태운의 페로몬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경직되어 있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몸을 꾸물거려 태운의 가슴팍에 얼굴을 편안히 기댔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귀를 두드리고, 단단한 온기가 전신의 긴장감을 풀어 주었다. 태운은 수그러든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등을 문질렀다. 척추 선을 따라 그의 손길이 오르내릴 때마다 배 속이 간지러워졌다.
그래서 유진은 문득 깨달았다. 지난 반년간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남자의 존재 덕분이었다.
“잠복 중에…… 악몽을 꿨습니다.”
“…고생했겠네요.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오히려 여태까지 이런 꿈을 꾸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할 것도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여태까지 내가 자면서 악몽을 꾼 적이 있습니까?”
유진은 고개를 들어 태운을 보았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하며 느릿하게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꾸 내 집으로 찾아오는 겁니까? 페로몬으로 안정시켜 주려고.”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반년이나.”
태운이 옅게 웃으며 유진의 손을 끌어왔다. 아직 조금 서늘한 손바닥에 키스하자, 유진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손금을 더듬어가듯 올라서 검지 끝을 가볍게 물었다. 뜨거운 혀가 지문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당신이 발정제 거래 현장에 잠복하러 갔다고 들었을 때 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 위험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당신에게 별것 아니라는 정도는. 그냥 내가 걱정돼서 그럽니다. 당신이 지금처럼 파랗게 질려서 힘들어할까 봐.”
“이건 일이 아니라 악몽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당신은 여전히 종종 꿉니다, 악몽.”
낮게 중얼거린 태운이 유진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체취를 마시는 것처럼 느릿하게 호흡했다. 유진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퇴원한 이후로는 악몽을 꾼 기억이 없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트라우마도 거의 사라졌으니 당연시하고 넘어갔었다. 근데 사실은 악몽을 꾸려고 할 때마다 태운이 페로몬으로 풀어 주었던 걸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온몸이 그의 향으로 흥건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 걸까.
무려 반년이다. 반년이나 태운은 유진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만약 그가 밤마다 유진이 악몽을 꾸는지 안 꾸는지 확인하고 있었다면 아마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것이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죄책감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입으로 직접 그렇다 답한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천태운.”
태운이 조소를 흘렸다. 늘 단단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눈빛이 죄책감에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엄지로 볼을 문지르고 올라 짙은 눈썹을 더듬자 태운이 나직이 숨을 토했다.
유진은 조금씩 페로몬을 풀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카락이 조금씩 풀어지며 이마를 덮었다. 평소보다 조금 어려진 얼굴이 유진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걱정과 후회가 뒤섞인 감정 아래로는, 그가 여태껏 감추고 있었을 고통이 엿보였다.
유진이 트라우마로 고생할 때마다, 그리고 밤중 악몽을 꾸며 흐느낄 때마다. 그가 짙은 회한을 맛보았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
“괜찮아요. 악몽 좀 꾸면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 불구덩이에 되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지금 밖에 있고, 날 꺼내 준 당신 앞에 있습니다.”
태운이 다시금 호흡을 흘렸다. 페로몬을 통해 괴로워하는 그의 감정이 전해졌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면서 늘 이렇게 자책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께가 저렸다.
유진은 조금 더 페로몬을 풀어 그의 페로몬 속으로 제 향기를 밀어 넣었다. 태운의 눈매가 작게 떨렸다.
“당신만 옆에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한 번 겪고 나니 아무래도 나는 당신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내 옆에 있으세요.”
태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통으로 일렁이던 눈매도 슬쩍 휘었다.
유진은 몸을 일으켜 태운을 마주 보고 앉았다. 목에 팔을 걸고 당기니 얼굴이 가까워졌다. 웃음기를 갈무리한 태운이 눈을 들었다. 유진이 슬쩍 입매를 기울였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 미안하면 평생 내 옆에서 속죄하며 살아요.”
“……후회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태운이 유진의 허리를 주욱 끌어당겼다. 족쇄처럼 등허리를 구속하고 뒷덜미를 감쌌다.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유진은 내리뜬 눈으로 태운을 응시했다.
“후회 안 합니다. 당신이 좋아졌으니까요.”
“후회할 겁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거든.”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느릿하게 웃은 태운이 입을 겹쳤다. 입술을 가볍게 핥아내고 떨어진 후, 숨결을 불어 넣듯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이제 늦었어요. 너는 못 도망가, 하유진. 극우성 알파의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느껴보는 게 좋을 겁니다.”
유진은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덩달아 나직이 웃은 태운이 유진을 휙 들어 침대에 눕혔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에는 훨씬 깊고 농밀한 키스가 입안을 헤집으며 알파 향을 흘려 넣었다.
“으우, 흐……!”
페로몬의 목적이 대번에 바뀌었다. 타액과 함께 넘어오는 향기가 기도를 불태우며 뜨겁게 적셨다. 하지만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흐름에 몸을 맡기면 기분 좋은 감각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유진은 팔을 들어 태운의 어깨를 쥐었다. 눈을 휜 태운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입천장을 간질이듯 훑었다. 꿀렁이며 흘러든 알파 향이 목구멍 너머로 듬뿍 넘어갔다. 한 자락 남아 있던 긴장감이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구겨진 제복은 하나둘 벗겨졌다. 빳빳해진 셔츠가 흘러내리고 물기 남은 바지도 속옷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운은 소름이 돋은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뾰족하게 선 유두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으, 흣…….”
“여기서 단맛이 납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런, 걸 알 리가…. 으흣…!”
“유감이네요.”
태운이 혀를 내어 유륜을 훑어내렸다. 붉은 혀에 짓눌린 살점이 납작해졌다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뜨거운 열기가 유두와 유륜을 휘어 감았다. 혀끝으로 돌기를 굴리기도 했다. 여린 피부가 페로몬으로 흥건하게 젖을수록 점점 간지러워졌다.
“아으, 흐! 거기, 흑. 그만…….”
입안에서 유두가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살점이 말랑해지자 더욱 빨기에 용이해졌다. 태운은 움찔거리는 돌기를 진득하게 핥으며 유륜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압박감이 가슴팍을 당기며 찌릿한 성감이 올랐다.
“흐읏―…!”
유진은 헐떡이며 시선을 내렸다. 태운의 입술 사이로 유두가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모습이 외설적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싫어요, 아읏―…! 그, 만…….”
흘끗 눈을 든 태운이 느리게 입을 떼어냈다. 통통해진 유두와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어 시선을 회피하자, 태운이 이번에는 반쯤 선 유진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뜨거운 점막이 성기를 휘감았다.
“헉……! 자, 잠깐, 아아…!”
기둥이 강하게 압박되며 혀로 문질러졌다. 눈앞에 폭죽이 번쩍번쩍 튀었다. 덜컹 튕긴 유진이 몸을 위로 피하려고 하자 양 볼기가 잡혀 위로 들렸다. 삽입이 더욱 깊어지고 성기가 모조리 태운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흑! 아, 제발, 흐읏…!”
그의 입은 질척하고 좁았다. 페로몬을 담은 타액이 귀두를 적시고 살갗을 뜨겁게 물들였다. 태운이 혀끝을 세워 요도구를 후벼 파듯 핥았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페로몬이 요도 사이로 밀려들었다.
“아, 흐아…! 천, 태운, 제발―….”
유진이 고개를 젖히고 발버둥 쳤다. 허리를 들썩여도 성기를 감싼 열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말랑하던 성기가 살집을 머금고 단단하게 섰다. 그런데도 태운은 거부감 없이 뿌리까지 삼키며 파들거리는 표면을 살살 핥아 올렸다. 낯선 감각이 등줄기를 헤집으며 선명한 쾌감을 이끌어냈다.
자극이 너무 강했다. 직접적으로 빨아들이는 압박감과 혀의 감촉, 그리고 타액에서 스미는 알파 향이 성감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유진은 헐떡이며 태운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으흑, 아! 아흣, 안, 돼, 그만―.”
귀두를 머금은 입술이 부드럽게 기둥을 삼켰다. 뿌리에 입술이 단단하게 감기며 알싸한 페로몬을 흘렸다. 화끈거리는 요도로 다시금 뜨거운 열락이 스며들었다. 허리가 절로 휘고 다리가 벌어졌다.
갈 것 같다. 강한 예감이 드는 순간, 엉덩이를 비집고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내벽을 가르고 삽입된 손끝이 전립선을 비벼 올렸다. 허리가 지잉 울리며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막을 새도 없이 몸이 튕겨 올랐다.
“아흑, 아, 아―…! 아으흑……!”
입안에 갇힌 성기가 정액을 쏟아냈다. 달큼한 향내가 혀를 잔뜩 적셨다. 태운은 꿀 같은 액체를 꿀꺽 삼키며 파들거리는 기둥을 혀로 감싸 눌렀다. 크게 움찔거린 귀두가 한 번 더 묽은 정액을 쏟은 뒤 늘어졌다.
요도 안의 정액을 모조리 빨아 삼킨 태운이 천천히 성기를 뱉었다. 유진이 바르르 떨며 눈을 들었다. 초점이 반쯤 풀려 있었다. 여전히 손가락을 물고 있는 구멍은 개폐를 반복하며 애액을 흘렸다.
한 번 절정한 덕에 구멍은 충분할 정도로 봉긋하게 부풀어 있었다. 선홍빛의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하나 더하자 주름이 부드럽게 늘어나며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으, 흐읏…….”
페로몬을 담아 내벽을 문지르니 유진이 눈썹을 무너뜨렸다. 민감한 점막은 손끝으로 살짝 간질여 주는 것만으로도 파르르 떨며 오메가 페로몬을 한껏 흘려냈다. 유진은 이제 태운의 앞에서 페로몬을 개방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다. 알파의 동공이 흡족하게 좁아졌다.
“여기. 그새 부었습니다.”
태운이 손가락을 굽혀 전립선을 톡톡 두드렸다. 볼록 솟은 살점을 손끝으로 꼬집듯이 비틀자, 덜컹거린 유진이 달뜬 신음을 뱉었다. 늘어졌던 성기도 조금씩 빳빳하게 머리를 세웠다. 달착지근한 향기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유혹적인 냄새였다.
나른히 호흡한 태운이 손가락을 빼냈다. 유진은 붉어진 눈으로 그가 바지춤을 푸는 모습을 응시했다. 지퍼가 내려가고 흉흉한 알파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강한 정욕의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폐가 화끈 달아올랐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성감이 올랐다. 유진은 바르작거리며 허리를 들었다. 구멍 위로 귀두가 달라붙었다. 맞닿은 점막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 아으…―!”
간지럽다. 내부까지 퍼진 작열감이 배 속을 달구었다. 다급히 헐떡인 유진이 팔을 뻗었다. 눈앞에 있는 너른 어깨에 손톱을 박은 채 다리를 벌렸다. 토실한 볼기가 벌어지고 꾸물거리는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태운은 망설임 없이 그 비부를 뚫고 제 욕망을 욱여넣었다.
“아윽, 흐으―! 앗, 아……!”
내벽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파고들었다. 촘촘하던 주름이 하나둘 팽팽하게 늘어났다. 내부가 애액으로 흥건했는데도 빠듯했다. 몇 번을 경험해도 배 속이 차오르는 느낌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으흐윽, 아…, 윽―.”
“벌려요, 아직 한참 남았어.”
“아윽, 거, 짓말….”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이 한계라는 듯 파들파들 경련했다. 그 아래로는 아직 반절이나 남은 기둥이 흉흉하게 핏줄을 세우고 있었다. 태운이 고개를 숙여 유진의 눈꼬리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고는 찔끔 맺힌 눈물을 혀로 핥고 가볍게 문질렀다.
괴롭게 헐떡이던 유진이 조금씩 몸에서 힘을 풀었다. 길을 꽉 막고 있던 내벽이 틈을 내보였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남근이 그 사이로 두툼한 귀두를 밀어붙였다. 좁은 점막이 벌어지며 기둥에 거세게 긁혔다.
“아흑, 아, 아으……!”
아래가 찢어질 듯이 늘어났다. 날카롭게 오르는 통증에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발끝으로 침대보를 밀었다. 하지만 삽입은 점점 더 깊어졌다. 두툼한 살덩이가 엉덩이를 깊이 갈랐다.
“으흐윽――!”
“하아…….”
이윽고 뿌리가 구멍을 밀치고 안착했다. 더없이 연약한 곳을 파고든 귀두는 점막을 제 형태대로 밀어내며 알파 향을 뿌렸다. 내벽이 그 향기를 흡수하면서 배 속은 견딜 수 없이 뜨거워졌다. 손톱으로 긁어내리고 싶은 지독한 작열감이었다. 구멍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흐, 흑! 태, 운, 아아…!”
태운은 저 혼자서 들썩이는 나신을 뜨거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이 왈칵거리며 애액을 머금었고, 통통해진 유두는 발긋한 몸체를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하반신이 대번에 묵직한 열을 품었다.
태운은 내벽 깊숙이 제 향기를 쑤셔 박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겁다는 듯 기둥을 간신히 물고 있던 점막이 찐득하게 늘어났다. 구멍은 저를 쓸고 나가는 자극을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벌겋게 부어올랐다.
“으흑! 아, 아흐! 아…!”
퍽, 퍽! 거센 추삽질이 점막을 짓이겼다. 유진은 자지러지며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볼깃살이 태운의 하반신에 납작하게 눌릴 때마다 귀두가 깊은 곳을 후려쳤다. 관통하듯 역류하는 쾌락이 뇌리를 집어삼켰다. 통증은 자취를 감추었다. 오로지 배 속을 긁어 주는 알파에 대한 짙은 충족감뿐이었다.
이런 감각은 느껴보지 못했다. 저택에서 몇 번이고 알파들에게 범해지고 절정을 강제당해도, 그저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신체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비록 아래를 헤집고 짓뭉개는 움직임은 한없이 거칠었지만, 내벽을 집어삼키는 열기가 숨도 못 쉴 만큼 버거웠지만, 이 몸을 채우는 쾌락과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제 의지로 몸을 열어 알파를 품는다는 전율이 척추를 물들였다.
그렇기에 태운의 눈이 다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메가의 신체를 사정없이 탐하면서도 그가 사랑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악몽의 이미지는 눈앞의 알파에 의해 완전히 뒤덮였다.
“흐아, 읏! 아, 아으―!”
단단한 기둥 표면에 연달아 쓸린 전립선이 사포질 당하는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갈리며 지독한 쾌락을 머금었다. 그게 꼭 태운이 제게 쏟아붓는 감정의 깊이 같았다. 희열과 닮은 절정감이 애액과 뒤엉켜 점막을 물들였다.
“아아, 아흐으윽――!”
절정이 몰아쳤다. 해일처럼 밀려와 온몸을 집어삼키고 근육을 녹여냈다. 유진은 허공으로 덜컹거리며 구멍을 조였다. 배 속을 채운 남근의 윤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안락한 기분이었다.
“윽……, 흐윽―….”
“유진아.”
벌벌 떨며 사정하자 태운이 낮게 중얼거렸다. 낯선 호칭 탓에 귀가 예민하게 섰다. 태운은 울컥울컥 사정하는 유진의 성기를 가볍게 쥐고 문질렀다. 민감한 부위가 지문에 눌려 비벼졌다.
“아, 아……! 만, 흑! 만지지…….”
“이렇게 야해서야……. 이걸 엎어놓고 흔들 수도 없고.”
찔꺽, 찔꺽. 내벽을 가르고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음탕한 소리가 흘렀다. 교접부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도르륵 흘러 엉덩이 골을 적셨다. 태운은 귀두를 세워 여전히 절정하고 있는 전립선을 둥글게 비볐다. 구멍이 와락 조여들며 기둥 표면을 야금야금 물었다.
“흐윽! 그, 만…! 잠깐, 흐윽―.”
말캉한 살점이 귀두에 밀려 이리저리 반죽되었다. 알파 향이 그곳을 꼬집듯이 튕기고 지날 때마다 사지가 파득파득 튀었다. 유진은 다급히 태운에게 매달리며 도리질했다. 하지만 아래를 파고드는 움직임은 더욱 강해졌다.
알파 페로몬이 주삿바늘처럼 끝을 예리하게 세워 전립선을 관통했다. 민감한 곳이 찢겨 나가는 듯해 일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고통은 금방 아득한 절정으로 바뀌었다. 전신이 쾌락의 전류에 감전당하는 것만 같았다.
“아아, 아으흑! 아, 아――!”
작살에 꿰인 나신이 발발 경련했다. 허공으로 통통 튕기던 성기는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묽은 정액을 투둑 흘렸다. 하지만 절정은 끊이지 않았다. 비리게 웃은 태운이 다시 구멍을 느릿하게 범했다.
“흐윽, 앗…! 태운, 흐으……!”
“그래, 나 여깄습니다.”
“아으흑……!”
헐떡이는 신음이 달게 흩어졌다. 태운은 그 향기를 음미하며 꾸물거리는 점막을 갈랐다. 깊은 곳에 귀두를 쑤셔 넣고 구멍까지 뽑아내기를 반복했다. 유진은 뿌리가 깊이 눌릴 때면 숨도 못 쉰 채 바들바들 떨다가, 성기가 빠져나가면 온몸을 비틀며 목울대를 젖혔다.
느린 삽입이 이어질수록 막 사정했던 뽀얀 성기는 살집을 되찾았다. 요도구 끄트머리로 쿠퍼액을 도륵도륵 흘렸고, 구멍은 기둥에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귀두를 구멍에 걸쳤다가 페로몬과 함께 주욱 삽입하니 유진이 다급히 흐느꼈다. 헐떡이는 소리에 물기가 어린 것을 보아 또 사정이 가까워진 듯했다.
태운은 전립선을 간질이듯 푹푹 쳐올리며 유진을 몰아붙였다.
“아으, 천, 태운, 흐윽!”
“가도 됩니다. 더 쌀 게 없을 때까지 싸게 해줄게요.”
“흐윽, 잠, 흐윽! 잠시―, 아으, 힉…!”
유진이 고개를 마구 저으며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태운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한동안 벌벌 떨며 흐느끼던 유진은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태운의 볼에 녹진하게 달라붙었다.
“왜, 흐윽…….”
“말해요. 듣고 있습니다.”
“왜, 노팅……. 안, 하는, 흑!”
“……노팅?”
태운이 제 귀를 의심하며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이 아직 절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속으로 비치는 열망만은 또렷했다.
유진은 움칠거리며 구멍을 조였다. 점막이 성기 뿌리에 엉겨 붙어 오물오물 씹었다. 찰싹 달라붙은 내벽은 기둥 표면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오메가 향기를 흘렸다. 마치, 이곳에 정액을 달라는 듯이.
태운은 체념하듯 웃었다. 이 사람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 순간 애써 억누르고 있던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나신을 덮쳤다. 파드득 튀어 오른 유진이 힉힉거리며 엉덩이를 들었다. 태운은 골반을 틀어쥐고 퍽 들이박았다. 구멍 깊이 파묻힌 뿌리가 두툼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아아흑, 아아――!”
“당, 신이…. 자초한 겁니다. 애써 참고 있었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한 태운이 유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혀가 뒤엉키고 달큼한 타액이 섞였다. 동시에 들끓는 정액이 내벽 사이로 쏟아졌다. 두 몸이 한 사람의 것처럼 깊이 얽혔다.
유진은 태운을 끌어안고 그의 숨결을 삼켰다. 타액을 섞고 진득한 눈빛을 받으며 다리를 벌렸다. 교접이 더욱 깊어지고 구멍이 고통스럽게 벌어졌다. 내부 점막은 온통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좋았다. 유진은 더욱 입을 벌려 태운의 호흡을 탐했다. 그의 눈이 온기로 풀어지는 것을 낱낱이 시야에 담았다. 무척 달콤하고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이 기분에 이름을 붙일 확신이 섰다. 유진은 벅차오르는 감정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건 사랑이었다.
깨어진 가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