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날은 빠르게 지났다. 태운의 품에 안겨 잠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청운 부대원과의 대면이 다가왔다. 그간 유진은 여태까지 중 가장 안정된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정상적인 노팅은 오메가에게도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제국 상황이 상황인지라 태운은 곁에 계속 붙어 있지 못했고 유진은 병실에 홀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몸에서 풍기는 태운의 향기가 아득한 충족감을 주는 덕분이었다.
그 감각은 태운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더욱 강해졌다. 그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흐물거려, 도저히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버티면 태운은 피식 웃으며 속삭이고는 했다.
“눈 붙여요. 어디 안 갑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받고 있으면 눈이 절로 감겨, 속절없이 수마에 휩쓸리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다행히도 낮 동안은 노팅의 주인을 향한 갈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밤에라도 태운과 함께 있기 때문이리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하들을 만난다는 긴장감 탓에 유독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다가 태운이 제게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양의 페로몬을 느껴버리고 만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단순히 밤을 함께 지내는 덕분이 아니라, 이렇게 밤마다 페로몬을 들이붓기 때문에 낮 동안 멀쩡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괜히 가슴 속이 술렁여 좀체 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유진은 양 뺨을 내리치고 숨을 골랐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제 곧 부대원들이 올 시간이다.
“후우…….”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호흡해도 맥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렵지도 않았다. 문밖에는 태운이 붙여놓고 간 제국군이 둘이나 있고, 유진은 현재 노팅된 상태였으니 그들의 페로몬에 휘둘릴 일도 없다. 그러니 정말 괜찮았다.
“중위님. 손님이 왔습니다.”
“들여보내 주세요.”
문이 열렸다. 뒤이어 단정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유진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을 눈에 담자마자 묵직한 감정이 목구멍을 채웠다.
유진은 제원과 승일, 건호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퇴원한 지 오래되었다더니 확실히 건강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다만 그들 모두 제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아마도 아직 처분이 결정되지 않아 휴직 중인 듯했다.
승일은 그답지 않게 조금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무표정한 건호에게서는 이글거리는 감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제원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그들의 속내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택에서 느껴졌던 기이한 환상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것은 환상이자 신기루였다. 저택이라는 밀실의 공간이 만들어낸 지옥이었을 뿐이다. 유진의 제 몸에 원인을 두고 자책할 이유 따위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다들 잘 지냈어?”
“…….”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누가 보아도 멀쑥한 그들은 너무나도 잘 지낸 것처럼 보였고, 약간 야윈 유진은 병원복을 입은 채 병실에 앉아 있었다. 그 완벽한 대비가 기이한 적막을 낳았다.
유진은 지독한 쓴맛을 혀로 억눌렀다. 겉치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망가졌다. 속이 욱신거리며 아팠지만, 몸을 물들인 알파 향을 들이켜며 안정감을 찾았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관계를 정리하기에는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어. 지난 몇 달간 서로 못 볼 꼴도 많이 보고 고생을 했으니까. 너희 얼굴도 제대로 보고 싶었고. 아마 너희도 할 말이 많이 있겠지. 그래도 오늘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대장.”
“내가 오메가인 건 죄가 아니야.”
움찔한 승일이 눈길을 보냈다. 유진은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주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알파인 것도 죄가 아니지.”
“…….”
“오메가가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리는 것도, 알파가 오메가의 페로몬에 흥분하는 것도 죄가 아니야. 서로의 발정에 이끌려 이성을 놓아버리는 것 또한 죄가 아니다.”
건호의 무표정에도 조금씩 균열이 갔다. 그가 내보이는 감정이 후회인지, 자책감인지, 혹은 반발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캐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감정을 겪든 유진이 감당할 책임은 없었다.
본래는 그마저도 모두 제 의무라고 생각했다. 부대원들의 불안함을 감당하고 포용해 안정시키는 것이 부대장이 된 도리라고 여겼다. 유진은 늘 류진모를 닮고자 했고, 누군가가 제게 실망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저택에서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망가지고 깨어지고,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나 완벽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유진은 아등바등 움켜쥐고 있던 것을 조금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벌인 짓은 죄다.”
제원의 눈빛에 선득한 기운이 스쳤다. 유진은 이불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태운의 향기가 느껴졌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생각한 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를 원망할 생각은 없어. 그곳은 비정상적인 공간이었고, 비정상적인 사고를 강요당하는 공간이었지. 애초에 오메가와 알파가 억제제도 없이 동떨어졌는데 모든 것이 정상이길 바라는 건 무리였던 걸지도 몰라.”
“대장.”
“하지만 이제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겠다.”
“……!”
“중위님.”
유진은 눈에 힘을 주었다. 몇 년이고 동고동락하며 관계를 맺어왔던 이들을 제 손으로 도려내는 것이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게 유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후회 또한 남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대로 청운 부대에 남아도 좋고, 다른 부대로 이적해도 좋다. 다만 청운 부대는 내 손을 떠나게 될 거야.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부디, 이번에는 좋은 상관을 만나 실력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어.”
“제국군을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소립니까.”
“글쎄.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 대장―….”
승일의 눈이 일그러졌다. 이제야 그가 머금은 죄책감이 조금 보였다. 건호나 제원의 심중은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 제원은 가라앉은 낯으로 침묵했고, 건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속이 쓰렸다. 그들 모두 훌륭한 제국군이었다. 상황을 이렇게 몰아붙인 박주건이 원망스러웠고, 참담한 결말이 슬펐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할 말은 여기까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 불이익 없이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잠깐, 대장.”
드르륵. 닫혀 있던 병실 문이 열렸다. 부대원들은 물론 유진도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는 태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졸지에 네 쌍의 시선을 받게 된 태운이 슬쩍 눈을 접었다.
“면회 끝입니다. 이제 나가시죠.”
“아직 얘기가 덜 끝났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판단은 당신들의 몫이 아닙니다.”
여상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두드렸다.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을 쥐었다. 태운의 얼굴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올랐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자 바람 새듯 웃으며 태운이 다가왔다. 묵직한 손길이 목덜미를 감싸 온기를 나눠 주었다.
“나가세요. 꼴사납게 끌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국군이 발을 들였다. 입술을 짓씹은 승일이 유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서릿발처럼 선득한 눈빛으로 태운이 나직이 턱짓했다. 복도에 있던 제국군이 병실로 성큼 들어왔다.
“……그간 감사했어요, 대장.”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승일은 제 옆에 선 제국군을 흘끗 보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건호는 날 선 눈으로 태운과 유진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휙 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제원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유진의 목선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시선을 느낀 유진이 흠칫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태운은 동그란 정수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아랫배에 푹 눌린 얼굴이 달큼한 호흡을 뱉었다. 미묘한 눈빛을 쏘아내던 제원도 느지막이 방을 나섰다.
마침내 병실이 고요해졌다.
“……이제, 괜찮습니다.”
유진이 태운을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태운은 젖어 있지 않는 뺨을 응시하며 나직이 물었다.
“복귀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손등으로 볼을 비비던 유진이 멈칫했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고 있었습니까. ……애초에,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겁니까?”
“당신이 저들을 만나는데 혼자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왜죠?”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흘끗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빤히 쳐다보는 눈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추궁하는 듯한 눈빛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현재 제국군에 알파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나는 오메가와 알파의 차이에 대해 무지했고……. 차라리 내가 나가면 제국군 입장에서는 분란이 가라앉을 테니 훨씬 나을 겁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어쩌고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기다리고 있는데요.”
유진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태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태운이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자, 한숨을 흘리며 손끝을 말아 쥐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것이야 노팅 때문이라고 해도 저 남자가 이렇게까지 관여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 죄책감을 느낍니까?”
느긋하던 태운이 입술 끝을 움칠 굳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내가 당신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고……. 애초에 저택에 와 준 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겠죠. 당신이 없었다면 제국은 지금쯤 휘청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공로가 지대했음을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만, 당신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방주의 정체를 알지도 못했을 테고, 임 대령과 황 중령이 배신자임을 알아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모두 당신이 그 사방이 막힌 저택 안에서 알아낸 정보죠.”
“…….”
유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운의 말은 모두 옳았다. 유진이 제국군에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유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유진은 이번 일로 인해 극도의 고통을 맛보았고, 또다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동료를 못 믿는다는 치명적인 결점은 제국군에 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알파를 마주했을 때 이전처럼 멀쩡하게 반응할 자신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성적으로 반응해버린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류진모 대령님이 당신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
“당분간 몸보신하면서 외출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심신을 회복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침대에 걸터앉은 태운이 툭툭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뺨을 문질렀다. 하얗게 질린 뺨이 이리저리 눌리며 알파 향을 흡수했다. 울렁이던 가슴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이게 정말 노팅만의 효과인지 의문이었다. 유진은 옅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기댔다.
부드러운 손길이 슥슥 눈매를 문지르고 귓불을 어루만졌다. 간지러운 접촉이 지속될수록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문득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진은 풀어진 눈으로 태운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죄책감은 없는 것치고는―.”
귓바퀴를 건드린 손이 목뒤를 감싸 부드럽게 당겼다. 유진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는 흑색의 눈동자에 유진의 얼굴이 비쳤다. 무덤덤하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거울처럼 비친 표정이 한없이 녹진했다. 꼭 햇볕 아래 녹아내린 동물 같았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
“그 누구도, 다시는 당신에게 거짓말하지 못할 겁니다.”
유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태운을 보았다. 태운은 그를 조용히 품에 끌어당겨 페로몬으로 품었다. 동요하는 민낯은 단단한 가슴팍에 푹 파묻혀 가려졌다. 유진은 익숙한 체취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 숨을 들이마시자 요동치던 심장이 편안하게 이완되었다.
자그마한 파동은 고통스러운 물결을 만들어냈다가, 이내 잔잔한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유진은 약 한 시간 후 얕은 잠에 들었다. 밤새 자지 못하고 뒤척이더니, 긴장이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맥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말간 얼굴이 편안하게 풀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운은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제국군이 다가섰다.
“말씀하신 대로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국군이 길을 안내했다. 짧은 걸음 끝에 도착한 곳은 병원 내의 휴게실이었다. 안에는 청운 부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영문 모를 기분으로 갇혀 있었을 그들은 태운을 보자마자 눈에 날을 세웠다. 태운은 그들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유진이 의식불명으로 있었던 일주일, 그리고 회복에 전념하던 일주일. 약 2주일가량 그들은 자택에서 대기 명령을 받았다. 유진의 상태는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나 아마 길게 이어진 대기 탓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 터였다.
유진은 저들이 벌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유진에게 있어서 청운 부대가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고려해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태운에게는 그들을 봐줄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로 붙잡아둔 겁니까.”
“따로 전달 사항이 있어서요. 어차피 일도 없으니 한가하지 않습니까.”
태운이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으로 건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 발끈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탓이었다. 태운은 그들을 한 명씩 차례로 둘러보았다.
다들 그랬지만 백승일의 표정이 유독 좋지 못했다. 그는 유진의 수척한 안색을 보고 다소 놀란 듯했다. 아까 태운의 압박에 밀려 사죄조차 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 그의 양심을 자극하고 있을 터였다.
이건호는 저택 내에서 누구보다도 유진에 대한 강한 집착을 표했었다. 막 구출되었을 때도 당장 유진의 병실에 쳐들어가겠다며 난리를 피운 덕에 현재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제국군 내에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현실감이 되돌아온 건지,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유진의 앞에서 날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태운은 마지막으로 신제원을 보았다.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직후 그의 과거를 조사해 보았는데,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결과가 나왔다.
그가 관계하던 오메가들은 모두 자의로 쾌락을 좇는 자들이었으나, 신제원이 사용한 알파용 발정제는 국내에 알려지지도 않은 종류였다. 추후 미국의 일부 주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약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오메가의 히트를 강제적으로 유발하는 만큼 윤리적인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신제원은 청운 부대 내에서도 공로가 뛰어나 차후 진급 대상으로 고려되고 있던 자다. 제국의 인증을 받지 않은 발정제를 국내에서 사용했으니 징계감이긴 했지만 그래 봐야 벌금과 강제 휴직 정도로 끝날 터였다.
그렇게 둘 수야 없다. 유진이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신제원이다. 박주건의 집에서 회수한 영상에는 태운이 마지막으로 저택을 뜬 이후의 일들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고, 태운은 그 잠깐의 외출 동안 유진에게 벌어진 지옥을 낱낱이 눈에 담았다.
백승일은 유희와 쾌락을 좇으며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았다. 이건호는 집착과 투기로 이성을 놓은 채 상관을 소유물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것은 신제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조작하고 유진이 저를 신뢰하도록 만든 후 배신함으로써 정신을 무너뜨렸다. 마치 한 명의 오메가를 제 입맛대로 맞추어 포식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가 평소 불법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국군으로서의 인성과 자질에 부합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그저, 태운의 독단일 뿐이었다.
“청운 부대는 해산합니다.”
“…뭐라고요?”
“대장 뜻입니까?”
“아뇨. 내 결정입니다.”
승일이 대번에 눈에 날을 세웠다.
“그 결정에 우리가 따라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불만이라면 그쪽 상관에게 표하세요. 하 중위가 부대장직을 내려놓았으니 류진모 대령께 직접 따지면 되겠습니다. 그가 당신들을 만나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류진모에게는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사정은 알렸다. 유진을 자식처럼 여기는 류진모가 청운 부대원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류진모의 지위가 더욱 상승했으니 결과적으로 부대원들의 미래가 순탄하지 않을 것임은 명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칠 수는 없다. 박주건이야 제국을 상대로 한 반역자였으니 지금 당장은 제국법에 따른 절차를 밟도록 둘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충분히 제 뜻대로 주무르고 희롱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저택 안에서 유진에게 그랬듯 말이다.
“당신들의 다음 근무처는 내가 따로 정해뒀습니다. 차후에 통지서가 도착할 테니 확인해 보도록 하세요.”
“당신은 내 상관이 아닙니다. 그 결정권은 당신에게 있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류진모 대령님께 말씀하세요. 나는 그에게서 모든 권한을 전해 받은 상태입니다.”
“……근무처가 어딥니까?”
태운은 승일을 길게 응시했다. 같은 대한제국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유진을 만나 사죄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일말의 희망이 그의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 태운은 그런 그의 마지막 기회조차 단호하게 박탈했다.
“제라드 공화국입니다.”
승일의 눈이 흠칫 굳었다. 제라드 공화국이라면 타국과 전쟁이 한창인 국가였다. 대한제국과 우호국인 탓에 종종 제국군을 파견했으나 전쟁에 휘말려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지원자가 흔치 않았다.
그런 나라에 보낸다는 의미는 지나치게 뚜렷했다. 유진을 대신해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뜻이다. 아마도 최소 5년은 귀국하지 못할 테고, 유진을 만나 사죄하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다시는 그의 얼굴에 믿음직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승일은 주먹을 쥐고 고개를 떨궜다. 수그러드는 정수리를 내리깔듯 본 태운은 눈길을 돌렸다.
“당신들의 근무처는 다른 곳입니다.”
“…어딥니까.”
“이건호 당신은 이제트 왕국으로 갑니다. 추후 10년 동안 그곳에서 주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이제트?”
건호는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제트 왕국은 오메가의 권위가 알파와 베타를 압도하는 곳이다. 왕권이 남아 있는 나라인 만큼 왕국법에 따른 복종은 절대적이다. 따라서 오메가에 대한 경의를 무시할 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처벌하기로 유명했다. 듣기로는 국내의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지하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듯했다.
물론 우호 국가에서 보낸 제국군을 자국민처럼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으나, 다혈질적인 성격의 이건호가 제국조차 두둔할 수 없을 정도의 무례를 저지른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태운이 느릿하게 시선을 굴렸다. 신제원은 조용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살벌했다. 그간 그가 억누르고 감추던 민낯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태운에게 이빨을 세웠다. 공들여 만든 오메가를 강탈한 이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아마도 저대로 둔다면 여태 그랬듯 가만히 때를 기다리다가, 유진이 틈을 보인 순간 본의를 드러내 달려들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태운은 그에게 가장 강한 죗값을 물기로 했다. 여태까지 해온 짓과 앞으로 할 짓까지 한데 모아 그 죄의 경중을 따졌다. 유진이 흘렸던 눈물까지도 모두, 그에게 부과할 생각이었다.
“신제원. 당신이 갈 곳은 베라움 제국입니다.”
승일과 건호가 경악하며 제원을 돌아보았다. 제원은 서슬 퍼런 눈으로 태운을 노려보았다.
베라움 제국은 고질적인 내전이 근 수십 년간 이어지고 있는 나라로, 내전의 이유는 알파에 대한 혐오였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 대한제국에서 발생한 폭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점이라면 훨씬 폭력적이고 위세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일국의 정권과 비등할 정도로 강력해진 반란군은 알파가 눈에 보이면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끌고 온 뒤 고문했다. 육체적인 고문과 페로몬을 사용한 능욕도 서슴지 않았다. 반란군의 핵심 인물은 오메가였고, 따라서 인질로 붙잡힌 알파가 반란군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방주를 처음 개발해낸 것이 그들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도 돌고 있을 정도니, 그야말로 현대에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악하고 비인간적인 집단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만큼 베라움 제국은 전 세계의 경계를 받았다. 따라서 조력이라는 명목하에 각 나라에서는 필수적으로 인력을 보내게 되어 있었다. 어느 국가에게나 자국민은 소중한 법이니 일반적으로는 베타 군인을 파병했다. 이번에 위임 기간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한제국군 역시 베타였다.
“상부에서 그것을 허용하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최근 베라움 제국에서 방주를 무력화하는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래 알파의 신체 능력이 베타보다 월등하니, 운이 좋으면 신무기와 함께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 내전을 끝내고 올 수도 있겠죠.”
“천태운 대위님.”
“이미 상부에는 말을 전해두었습니다. 결정하는 건 그들이지만, 당신이 건드린 사람이 현재 제국군의 실질적인 권위를 독점하는 류진모 대령의 부하임을 인지하면 좋겠군요.”
“내가 만들었습니다.”
제원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날선 페로몬을 뿜어내며 안광을 번뜩였다.
“당신이 손에 넣은 그 오메가, 내가 만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서 채간다고 해도 그는 내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글쎄요.”
태운은 피식 웃었다. 지친 낯으로 잠들었던 하얀 얼굴을 떠올리고, 또 그가 저택에서 아득바득 달려들던 사나운 기세도 떠올렸다. 한 사람의 내부에 공존하는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양극적인 모습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제국의 인정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신 생각만큼 연약하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이거든.”
그리고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태운은 시커먼 눈으로 제원을 내려다보았다. 알파라는 태생을 통해 쌓아온 어리석은 권위욕이 그의 동공 아래로 괴물처럼 일렁였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자만이었다. 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간을 물건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아마 베라움 제국의 반란군에게 유용하게 작용하겠죠. 당신에게 적합한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베라움 제국에서도 더 강한 인력이 필요함을 피력하고 있다. 신무기 개발이 긍정적이라면 베타 파병을 고집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류진모와 김 대령이 강하게 추천한다면 신제원은 정말로 그곳으로 보내질 것이다.
현명한 신제원은 아마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태운은 몸을 돌렸다. 휴게실을 나서는 그를 누구 하나 붙잡지 못했다. 각자의 미래를 눈앞에 그리며 주먹을 쥐었다. 죄인들에게는 과분한 호사임에도,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 최소 몇 년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백골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없으리라고 유진이 부여해 준 희망을 태운이 완벽하게 앗아갔다.
그러나 충분치 않다. 태운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저들은 물론, 현재 철창에 갇힌 박주건조차도 충분한 죗값을 치르지 못했다. 박주건은 손에 넣었다가 코앞에서 빼앗긴 유진을 부르짖으며 벽에 이마를 박아대고 있다고 들었으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결코 누구 하나 편히 생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얼굴을 굳힌 태운은 발을 돌려 병원을 빠져나갔다.
***
“윽, 씨발…….”
거칠게 중얼거린 주건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종일 돌덩이를 실어나른 어깨와 팔이 단단하게 뭉쳐 욱신거렸다. 볼품없는 황토색 죄수복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이따위 거적때기를 입기 위해서 여태껏 그 고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모멸감이 차올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국군에게 구속되어 끌려온 뒤 처벌은 지나치게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변명거리를 준비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철창에 갇혀 있는 사이 자택이나 휴대폰 등에서 무명과의 접촉 내역이 발각되었고, 그대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주건은 총상을 입은 허벅지의 부상을 핑계로 처벌을 미루고자 했다. 하지만 제국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발달한 의학으로 부상을 재빨리 처치한 뒤 곧바로 노역장에 보냈다. 그 덕에 지금 이 꼴이었다.
“좆같은 하유진…!”
챙강! 팔을 휘두르자 쇠로 된 컵이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부실한 음식을 내려다보며 씨근덕대도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극우성 알파의 품에 안겨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꼴을 떠올리면 속에서 용암이 차올랐다. 숟가락으로 식탁을 찍으며 이를 악물었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무명은 몰라도 하유진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분명 그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 천태운이 그 저택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고고하게 굴던 하유진도 별수 없다. 천박한 오메가로 태어났으니 알파에게 홀랑 넘어가 몸을 내맡긴 것이다. 그 괘씸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바닥에 짓눌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제 밑에서 앙앙대며 비는 꼴을 눈에 넣어야 이 분노가 풀릴 것이다.
주건은 독기 서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범죄자들만 모아 놓은 형무소답게 감시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면 분명 탈출구가 생길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서 유진이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 테다.
주건은 식판에 남은 오물을 모조리 버린 후 거친 걸음으로 배급소를 빠져나왔다. 감시관의 위치를 살피고 슬쩍 몸을 돌려 건물 그늘에 들어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라이터와 담배 몇 개비가 만져졌다. 어제 몸집이 작은 녀석 하나를 위협해 빼앗은 물건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잇새에 문 후 불을 붙였다. 알싸한 연기가 기도를 뚫고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유진의 발정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렸다. 안 그래도 쓴 향기가 더욱 쓰게 느껴졌다.
“씹, 숨겨올 거면 연초라도 가져올 것이지….”
“연초라면 이거?”
멈칫한 주건이 옆을 돌아보았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남자가 손끝으로 두툼한 연초를 돌리고 있었다. 다급히 그의 어깨 너머를 살펴보자 다행히 감시관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주건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갔다.
“이봐…!”
“내 거랑 교환하자. 난 저거 너무 달아서 별로거든.”
담배를 문 남자가 연초를 퉁 튕겼다. 그것을 받아낸 주건이 가늘어진 시선으로 남자를 훑어보았다. 방금까지 제가 물고 있던 담배를 태연하게 빨아대는 남자는 유난히 하얗고 예쁘장했다. 황토색의 칙칙한 죄수복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묘한 눈빛을 머금은 주건이 연초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너, 오메가냐?”
“설마. 그럼 여기에 없었겠지.”
“그 얼굴을 가만히 놔뒀을 것 같지 않은데.”
“상부상조하는 사이지. 나는 좆 빨고, 저쪽은 그런 거 구해 주고.”
남자가 연초를 눈짓했다. 그럼 그렇지. 주건은 달큼한 향기 나는 연기를 빨아 마시며 남자를 진득하게 훑어보았다. 베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다. 특히나 뽀얀 목덜미가 입맛을 돋우었다. 이런 곳에 갇혀 있지만 않았더라면 한 번쯤 돈을 들이밀고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입천장을 훑으며 연초를 음미하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 제국군이었다면서? 소위?”
“중위다.”
“대단한걸.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여기 끌려오기 전까지 계속 매음굴에 살았거든. 높으신 분들 얘기는 꼭 딴 세상 같네.”
“……뭘 하다가 잡혀 왔는데?”
“대기업 회장이랬던가? 하도 좆같이 굴길래 성기를 아작 냈더니 여기로 보내지던데.”
“창놈이군.”
“남창이지.”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맞장구쳤다. 주건은 연초를 빨며 그의 옆얼굴을 길게 훑어보았다. 낯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욕정을 해소하기에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의 뒤를 봐주고 있는 놈이 대단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주건은 새초롬하게 쳐다보는 남자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몇 호실이냐?”
“관심 있어? 안됐지만 난 금방 나갈 거라서.”
출소인가.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 주건은 거의 다 탄 연초를 바닥에 떨어뜨려 밟았다. 이럴 시간에 탈출 방법이나 궁리할 것을 그랬다. 작게 혀를 차며 신발을 흙바닥에 비비자 남자가 흘리듯이 덧붙였다.
“구멍 다 헐 정도로 바친 보람이 있지.”
“변호사라도 선임해 준 모양이지?”
“음―….”
남자가 눈을 갸름하게 좁혔다. 요사스러운 눈빛이 주건을 위아래로 훑었다. 미간을 좁힌 주건이 걸음을 멈추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당신……. 제국군이었다고 했지?”
“그런데?”
“여기에 갇힌 시점에서 이미 복귀는 글렀을 거고.”
남 일을 말하듯 태연자약한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다. 주건은 눈썹을 치켜뜨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 자그마한 체구는 얼마든지 짓누르고 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구멍을 채워 주면 제 위치를 깨달을 것이다.
허공에 늘어진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때 입꼬리를 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와 함께 야살스러운 혀가 드러났다.
“협력하지 않을래?”
“……협력이라니?”
“오늘 밤 여길 탈출할 예정이거든.”
퍼뜩 정신을 차린 주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식겁하며 다시 남자를 내려다보자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면 발정제 제조에 손을 대려고 하고 있거든. 내 뒤 봐주던 남자가 운영하는 클럽에서 장사도 하고. 제국군이었다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테니까 도움이 되지 않겠어?”
주건은 입을 다물었다. 어째 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발정제라면 억제제와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지나치게 공교로운 유혹이 아닌가.
“너야 네가 뒷구멍을 댔으니 물장사시키려 데려간다고 해도, 나는 왜?”
“시치미 떼지 마. 아까부터 날 먹고 싶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잖아? 제국군이었으면 힘도 어느 정도 있을 거고. 매음굴에서 일하다 보면 돈 안 내고 폭력을 휘두르는 놈들이 꼭 있거든. 눈 돌아서 납치하려고 하는 놈들도 있고.”
“나를 경호원 삼겠다? 네놈 뒷배가 그걸 두고 보겠어?”
“여기서는 어쩔 수 없으니 성욕 처리를 했던 거고. 밖에 나가면 널린 게 창부인데 뭐하러 베타를 안겠어? 나는 내 살길 찾아서 제안했을 뿐이야. ……뭐, 근데 당신이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마지막으로 담배를 빤 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연기에 휩싸이는 얼굴이 음탕하게 눈웃음을 지은 후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걸음에 미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건은 눈매를 찌푸리고 따라붙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떻게 탈출할 생각인지 말이나 들어 보지.”
남자가 예쁘장하게 웃었다.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2주 넘게 금욕한 탓인지 하반신이 묵직해졌다. 이런 놈이라면 오메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박을 맛이 날 것 같았다.
주건은 입맛을 다시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나 신은 아직 저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밤이 되었다. 새벽이 깊을수록 경비는 삼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탈출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주건은 남자가 시킨 대로 자정을 넘겼을 즈음 그가 준 알약을 삼켰다. 씁쓸한 약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약을 먹으면 복통이 시작될 거야. 상당한 고통이 있을 테니 아마 감시관들도 속겠지. 응급차를 타면 내가 데리러 갈게. 그때까지 잘 참고 있어.’
기분 탓인지 벌써부터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주건은 아랫배를 슬슬 문지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불법 발정제나 만들며 살아갈 앞날이 조금 수치스럽긴 했으나, 그것만큼 돈을 잘 버는 사업도 없다. 류진모의 밑에서 일하며 질리도록 본 사실이었다.
일단 돈을 모으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 새로운 신분을 사는 것도 일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유진을 납치할 것이다. 해외의 시골로 도주하면 천태운이라고 해도 별수 없을 것이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으윽―……!”
일순 찌릿 울리는 복통이 일었다. 주건은 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시작인가. 비린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떠올렸지만, 벼락처럼 내리친 통증이 내장을 헤집으면서 곧 사고가 희게 번졌다.
“아악―! 아윽, 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시야와 이성이 완전히 날아갔다. 몸이 쓰러지며 바닥을 요란하게 뒹굴었다. 하지만 그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복통이 배를 난도질했다.
소란을 들은 감시관들이 달려와 주건을 일으켰다.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응급차를 불렀다. 주건은 저를 태우는 차를 흐린 눈으로 살펴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로 아플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차는 한참 달렸다. 주건은 배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구르며 짐승처럼 헐떡였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이윽고 차량이 멈추었다. 주건은 헉헉대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데리러 온 건가? 도착한 건가? 이제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인가?
비록 통증은 끔찍했으나 입꼬리가 올랐다. 주건은 문을 열고 차에 오르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괘씸한 오메가를 굴복시키기 위해 새 게임판을 깔 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자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랜만입니다, 박 중위.”
“……!”
주건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했다. 여상하게 떨어지는 저 음성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시야는 아직 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체구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만은 인지할 수 있었다.
오싹한 직감이 허리를 타고 올랐다.
“아, 이제는 중위가 아니죠. 입에 붙어서 그만.”
“……천, 태운……?”
“격조했습니다. 배는 좀 많이 아픕니까? 그러게, 남이 주는 걸 그렇게 덥석 받아먹으면 안 되지.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씨발, 천태운……?!”
주건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자마자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이 올라 곧바로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무너졌다. 태운은 꿈틀거리는 몸을 내리깔듯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비틀린 입매가 소름 끼칠 정도로 즐거운 기색이었다.
“연기를 좀 잘하죠? 내가 일부러 실력 있는 배우를 데리고 왔거든. 당신이 속은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으흑! 내게, 무슨 짓을……!”
“그거 압니까? 의외로 베타도 암시장에서 잘 팔립니다. 오메가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정복감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고.”
태운이 바닥에 무릎을 내렸다. 바닥을 긁으며 고통스럽게 흐느끼던 주건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태운을 가득 담았다. 고통 탓에 밀려 나온 눈물이 뺨을 가로질렀지만, 태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살 부리지 마세요. 앞으로 겪을 일에 비하면 예사 수준인데 벌써 질질 짜면 안 되지.”
“으으, 아으윽…!”
“생식 능력을 잃어가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무, 슨…―?!”
주건의 낯이 창백해졌다. 비정상적인 이 고통이 생식 능력을 앗아가는 과정이란 말인가.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혀를 짓이기고 오장육부를 헤집었다. 악을 지르며 손을 뻗자 태운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아른거리던 증오스러운 얼굴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눈을 뜨면 아마 배 위일 겁니다. 계속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한 모양이니 다행이네요.”
“아악! 천태운―……!”
“시장 환경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척박한 모양이니 현명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어떻게 아양을 떨어야 잘 먹히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자존심만 조금 굽히면 예쁨받을 수도 있겠고.”
“개, 같은, 씨발! 하유―.”
퍽―! 구둣발이 복부를 강타했다. 일순 시야가 번쩍이며 날아가고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주건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바닥에서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을 태운이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혀도 자르라고 시킬까….”
작은 중얼거림이 의식을 잃어가는 뇌리에 파고들었다. 주건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어깨를 떨었다.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여 어떻게든 태운을 붙들려고 바르작거렸지만, 얼마 안 가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태운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차량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매매 상인들이 주건을 차량에서 끌어내고 현장을 조작했다. 미리 준비한 시체 세 구가 응급차에 실리고, 불붙은 차량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박주건은 형무소에서 도주하기 위해 복통을 연기했다. 협력자가 응급차를 위조하여 주건을 데려갔지만 밤중에 산길을 내달리다가 미끄러져 추락했고, 차량에 불이 붙는 바람에 주건과 협력자 모두 사망했다. 동이 트자마자 그러한 기사가 뜰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자의 비참한 최후에 의구심을 갖는 이는 없으리라.
활활 타오르는 차량을 가만히 눈에 담던 태운은 몸을 돌렸다. 홀로 끙끙대며 자고 있을 유진의 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노팅이 좋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차트를 훑어본 의사가 눈을 맞췄다. 유진은 움찔하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노팅 후 벌써 일주일, 냄새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텐데 괜히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마치 정사 장면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수면은 이제 문제없으신 것 같고…. 요즘도 악몽을 꾸십니까?”
“……가끔, 나흘에 한 번 정도 꿉니다.”
“외람되지만 혹 노팅하신 알파 분께서 없는 날입니까.”
“……맞습니다.”
정곡을 찔릴수록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쥐어 말고 고개를 숙이자 의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환자 분과 알파 분의 신뢰 관계가 좋은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효과를 미친다면 노팅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
“참고하시라는 뜻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직 환자 분의 마음이 불안정한 듯해, 마음을 기댈 만한 보호자의 곁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퇴원하시는데 머무를 곳은 정하셨습니까?”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낮에는 밖에 나가서 햇빛도 쐬고, 가능하다면 몸을 많이 움직이세요. 특히 새벽이 되기 전에 취침하고 아침에 기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어떤 방식으로라도 패턴을 유지하는 것에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복잡한 기분으로 상담실을 나섰다. 의사가 마치 자식을 보는 것처럼 푸근한 미소를 보인 탓에 괜히 수치심이 배가되었다. 달아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발을 돌려 병실로 향했다. 오늘은 류진모와의 외출을 기약한 날이다. 오랜만에 나갈 채비를 해야만 했다.
류진모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유진은 그의 차에 올라 병원을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은 그리운 느낌이 났다. 인도를 거니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얼굴을 눈에 담으니 지난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왜 의사가 밖에 나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산한 거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류진모와 종종 함께 식사하고는 했던 한식집이었다. 묘한 감정을 품으며 자리에 앉자 식사가 들여지기 시작했다. 아마 류진모가 미리 주문해둔 모양이었다.
“안색이 좋아졌구나. 요즘 잠자리는 괜찮고?”
“잘 자고 있어요.”
“저번 주까지만 해도 얼굴이 다 질려가서 걱정했었다.”
“대령님이 훨씬 큰일이지 않습니까.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거의 다 마무리되고 있어. 천 대위가 고생해 준 덕에 잔당도 모두 잡았고, 방주를 공급하던 해외 조직의 정체도 밝혀내서 해당 국가에 협조를 요청해둔 상태다.”
생각보다 많이 진척되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류진모가 갈비 한 점을 집어 밥 위에 올려 주었다. 유진은 뒤늦게 고기와 쌀밥을 차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서둘러 모조리 씹어 넘긴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제국군 내부에서 별도로 이력 조사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명 쪽은 벌써 거기까지 나갔습니까.”
“그래. 두 가지가 겹쳐서 정신이 없지만, 그럴 만한 시기였던 거지. 언젠가는 해야 했던 일이다.”
“…혹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자도 있습니까?”
“무명 내통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 정도까지는 없다만, 해외로 발령가게 된 이들은 있지. 최 대령이라던가.”
“최 대령이 해외를……?”
이번에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 대령은 평생 한자리에 발 뻗고 누웠으면 누웠지, 결코 자의로 해외까지 나갈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권리와 권력을 만끽하고자 하는 탐욕이 상당히 강한 자였다. 그런 그에게 해외 발령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을 테다.
유진의 의문을 이해하는 듯 류진모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대답은 해주지 않고, 다시 소고기를 집어 유진의 숟가락 위에 올렸다. 유진은 고소한 향이 풍기는 고기를 내려다보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육즙이 혀를 달큼하게 적셨다.
생각해 보면 제국군으로 돌아갈지조차 불명확한 이에게 자세한 내부 사정을 말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입원했을 동안에야 휴직을 인정받았지만, 퇴원이 며칠 안 남았으니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유진은 천천히 고기를 씹어서 삼켰다. 괜히 입안이 텁텁해졌다.
“죄송합니다, 대령님. 제가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무모한 짓을 벌이는 것만 아니라면 네가 뭘 하든 괜찮다. 오히려 충분히 쉬다가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원한다면 포상 휴가를 내도록 말을 전할 수도 있어.”
“……아닙니다. 이 이상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어요.”
젓가락을 쥔 손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불안정하게 떨리던 목소리도 차츰 적막으로 스몄다. 어두워지는 안색을 가만히 바라보던 류진모가 문득 입을 열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유진아.”
“…….”
“나는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지지해 줄 거다. 과거의 네가 제국군이 되길 원했기에 수긍했을 뿐이고, 이번에는 다른 것을 선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등을 밀어줄 생각이야.”
유진이 눈매를 움찔거렸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물을 들이켜자 잔잔하게 웃던 류진모가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너를 기다리는 건 천태운 대위겠지.”
순간 물이 기도로 넘어갔다. 쿨럭이며 컵을 내린 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네가 그놈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을 땐 다소 걱정이 됐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놈인 것 같아 다행이군 싶어.”
껄껄거리며 웃은 류진모는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면서도 하나씩 유진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었다. 유진은 그것을 망연하게 바라보며 계속해서 제 귀를 의심했다. 맞게 들은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쌀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찬이 수북하게 쌓이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어 하나둘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며 기계적으로 쌀알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류진모가 보이지 않게 미소를 흘렸다.
***
류진모와의 외출은 금방 끝났다. 유진의 건강을 염려한 류진모가 한강 근처만 가볍게 드라이브한 뒤 병원에 데려다준 탓이었다. 오랜만에 한강의 야경을 구경한 터라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유진은 흐물거리는 몸으로 병실에 돌아왔다.
병실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유진은 바로 불을 켜려다가, 달빛 아래로 비친 인영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천태운이 병실 한쪽의 소파에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
유진은 조용히 소파로 걸어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잠든 태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꽉 감긴 눈이나 짙은 눈썹에 짙은 피로가 고여 있었다. 이제 보니 그가 앉아 있는 소파와 테이블에 서류가 한가득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어 대강 훑어보았다. 암시장 사건의 보고서였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행히 사건은 종결되었고 피해자들은 무사히 회복 중인 것 같았다. 유진은 보고서를 제자리에 내려두고 다른 종이를 들었다.
“……?”
어두워서 잘못 읽은 걸까. 유진은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뜨고 다시 글자를 읽어보았다.
[승급 추천서 - 하유진 중위]
아무래도 제대로 읽은 게 맞는 듯했다.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달싹이는 사이, 허리에 팔이 감기고 훅 끌려갔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종이를 떨어뜨리며 아래를 보았다. 태운이 유진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왜 그러고 서 있습니까……. 사람 놀라게.”
잠기운이 가득한 호흡이 니트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허리가 찌르르 울리며 녹진하게 풀렸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태운의 어깨를 짚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태운은 코끝을 배꼽 근처에 누르고 얼굴을 비볐다. 나른한 알파 향이 조금씩 흘러나올 때마다 몸이 오싹오싹했다.
“언제, 읏. 언제 일어났습니까.”
“방금이요. 당신 냄새가 나서.”
“…….”
“언제 돌아온 겁니까.”
“저도 방금 왔습니다.”
태운이 나직이 숨을 뱉어내고 허리를 놓아주었다. 유진은 두어 걸음 물러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나 거뭇한 눈매가 어둠 탓인지 유독 도드라졌다.
“……피곤해 보입니다.”
“잠을 좀 못 자서…. 금방 끝낼 테니 잘 준비 하고 누우세요. 이것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목소리도 조금 잠긴 듯했다. 이 정도로 흐트러진 태운은 처음 보는지라, 유진은 좀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자 서류를 읽어내리던 태운이 흘끗 눈을 들었다.
“어디 아픕니까?”
“아뇨….”
“이리 와보세요.”
“괜찮습니다.”
“또 말 지지리 안 듣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꼭 골치 아픈 애를 보는 듯했다. 기껏 걱정해 주었건만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은 눈썹을 삐죽이 올리고 태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태운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보고 뺨을 슬슬 문질렀다.
“열은 없고. 얼른 옷 갈아입고 오세요. 늦게 자면 의사 선생님한테 혼납니다.”
“…….”
역시나 영락없는 애 취급이었다.
유진은 홱 몸을 돌려 환자복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잘못 들은 것이리라 세뇌하며 머리를 채웠던 염려를 발끝으로 툭툭 밀어 떨어뜨렸다.
금방 끝날 것이라는 말과 달리 태운은 유진이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눕고서도 한참 동안 서류를 붙들고 있었다. 급한 일인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에 유진도 가만히 그를 구경했다.
늘 여유롭게 웃기만 하던 얼굴이 지금은 잔뜩 상해 있었다. 저택에서조차 본 적 없던 모습이기에 낯설었지만, 낮에는 일에 시달리고 밤에는 유진에게 페로몬을 주느라 제대로 자지 못할 테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류를 읽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까 보았던 추천서가 떠올랐다.
승급 추천서. 유진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편애받고 싶지 않다는 유진의 의지 탓에 류진모로부터는 받은 적이 없었고, 직속 상관이 아닌 이가 오메가에게 추천서를 넣을 리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명과 내부 숙청의 일로 정신도 없을 텐데 그 와중에 추천서라니. 영문 모를 일이었다.
‘너를 기다리는 건 천태운 대위겠지.’
유진은 이불에 몸을 묻었다. 제국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속내를 유일하게 밝힌 상대가 천태운이었는데, 정작 그는 유진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토록 바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대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다. 오메가인 유진을 그 누가 반기고 그 누가 기다리겠는가. 돌아가지 않아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돌발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져, 유진은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 올렸다. 그때 인기척이 다가오더니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따뜻한 체온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태운이 머리카락 사이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여기까지 가져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일이 너무 밀려서.”
“……가져와도 됩니다. 도움을 받는 쪽은 저니까요.”
“삐친 건 풀렸습니까?”
“안 삐쳤습니다.”
태운이 낮게 웃으며 페로몬을 풀었다. 비록 노팅은 많이 약해졌지만, 익숙한 알파 향이 전신을 감싸자 금방 긴장이 풀리고 노곤해졌다. 유진은 작게 숨을 흘려냈다. 이 단단한 안정감에 너무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허리를 당기는 손길도,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도, 제 뒤에서 느릿하게 흐르는 숨소리까지도. 모든 것이 그의 향기를 유진에게 깊이 묻히고야 말았다.
천태운은 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진이 유린당하는 것을 방관했고, 직접 범하기도 했다.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적어도 유진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악인에 가까웠음은 부정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피임제를 주사하지 않았더라면, 피임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도록 권하지 않았더라면. 유진은 아마 그 지옥 속에서 실제로 임신했을 수도 있었을 테고, 혹은 임신할 것이 두려워 공포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부하들이 모두 유진을 속이는 와중에도 악역을 자처한 태운만큼은 단 한 번도 유진을 속인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천 대위님. 추천서를 봤습니다.”
“이런.”
태운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많은 서류 중에서 하필 또 그걸 봤습니까.”
“왜 제가 복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안 갈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해두겠는데 내 추천서의 효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래 봐야 나도 대위인데 뭘 하겠습니까. 이미 내부에서 그런 의견이 나오고 있고,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한 것 같아 써 본 것뿐입니다.”
유진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토록 보수적인 집단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오메가의 승급을 논하고 있다? 그것도 초반에 제압당해 무명의 손아귀에 갇혀 있었던 자신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자 몸이 주욱 끌려가 품에 푹 안겼다. 유진은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눈만 굴려 태운을 돌아보았다.
“내 신용도가 꽤 바닥인 모양입니다.”
“…당신 문제가 아닙니다.”
“알아요. 여태 겪은 게 있으니 쉽사리 믿기 어려운 거겠지.”
토닥, 토닥. 가벼운 손길이 아랫배를 두드렸다. 묘한 안정감이 들어 유진은 눈꼬리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그들이 날 진급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예. 물론입니다.”
“…….”
“모든 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 중위. 하지만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잔잔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유진은 몸을 돌려 태운을 마주 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맺혀 있었지만,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웃음 저변에 깔린 진중함이 페로몬을 타고 담뿍 느껴졌다.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뾰족하게 모를 세웠다. 유진 본인조차도 무엇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지 알 수가 없는데, 확신에 찬 모습이 얄궂게 느껴졌다. 유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만약 내가 후회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위직을 내려놓고 기둥서방이라도 할까요.”
“뭐라고요?”
유진이 질색하자 태운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금 허리를 끌어당겨 유진을 품에 안았다. 단단한 온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유진은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어처구니없는 마음과는 달리 숨을 들이켤수록 그의 향기가 폐를 적셔 몸이 나른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진심입니다. 기둥서방 말고, 보장하겠다는 쪽 말입니다.”
“……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등줄기를 타고 따스한 온기가 오르내렸다. 유진은 슬쩍 눈을 들었다. 알파의 동공이 갸름하게 좁아졌다.
“지금이야 대위일 뿐이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는 말 안 했습니다. 나는 지금 제국군의 머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수 있겠습니까? 그 머리를 치우고 내가 자리를 차지해야지.”
“진심입니까?”
“나는 늘 진심입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어지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고.”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그게 그런 뜻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유진은 속으로 탄식하며 태운을 바라보았다. 탐욕스러운 포식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제 아래에 정복시킬 것처럼 번들거리다가, 일순 다정한 온기를 품으며 얼굴을 부드럽게 훑어내렸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온기가 지독하게 가슴 속을 울렸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유진은 심장을 두드리는 낯선 감정에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뒤통수를 감싼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품으로 당겼다. 알싸한 향기가 폐부를 조였다. 혈관을 확장시키고 맥동을 가파르게 몰아붙였다.
“푹 쉬고, 마음 편히 결정하세요.”
희미한 의식 사이로 수마가 파고들었다. 그때 절감했다. 이미 제 마음은 한 곳을 향해 활강을 준비하고 있음을 말이다.
***
선택은 힘겨웠으나 한번 결정을 내리고 나니 모든 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류진모는 조금 더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정했으니 가능하면 빨리 돌아가서 제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불안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사정은 감추었다고 하더라도 청운 부대가 무명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전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트집 잡혔는데 이번에는 과연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복귀한 첫날 유진이 마주한 것은, 경멸하는 시선이 아닌 경외감 서린 수백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장내는 제국군과 제국민으로 가득했다. 분명 전달 사항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길이 어째 이상하다 싶더니 도착한 곳은 무대 앞이었다. 유진은 망연한 눈으로 태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전달 사항이 맞긴 합니다. 표창식과 함께 주어져서 그렇지.”
“……천태운.”
“어서 가세요.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등이 가볍게 밀렸다. 유진은 날 선 눈으로 태운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탁 흘렸다. 큰 사건이 종결되었으니 표창식은 예정된 일이었다.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었으니, 어련히 짐작하지 못한 제 탓이다.
유진은 단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소위가 되었을 때, 중위로 진급했을 때, 그리고 청운 부대장이 되었을 때 모두 저 단상 위에 올랐다. 그 때문에 언젠가의 악몽 속에서도 이 장소가 나왔다. 여러모로 속이 쓰린 공간이었다.
“하 중위.”
태운이 채근했다. 한숨을 몰아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대로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이 술렁였다. 그것 자체는 익숙한 반응이었으나, 얼굴에 따갑도록 날아드는 선망의 시선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널찍한 무대를 가로질러 단상 위에 오르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유진 중위.”
“예.”
“그대는 이번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큰 공로를 이루었다.”
같은 장소, 같은 장면. 그러나 유진에게 와 닿는 사내의 시선은 조금도 매섭지 않았다. 유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팍에 큼지막한 은장을 매단 그는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입꼬리를 들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을 중심부까지 파고들어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이 제국군의 표상이라 할 수 있었네. 무명 조직을 무너뜨리고 제압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바, 이 표창을 수여하고자 한다.”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 환영받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이게 정말로 현실인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유진은 고개를 숙여 표창을 받으며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무대 옆쪽에 서 있던 태운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집중하세요.’
입 모양으로 말한 그가 눈짓했다. 유진은 다시 앞을 향해 눈을 굴렸다. 끝난 줄 알았는데 사내는 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 사건의 위중함과 그대의 공로를 고려한바, 특진을 인정하여 그대를 대위로 승급하도록 하겠다.”
“……―!”
고개를 번쩍 든 유진이 홉뜬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별 모양으로 반짝이는 은색의 배지가 들려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사내가 유진의 가슴팍에 배지를 달아 주었다. 나란히 붙은 세 개의 별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망연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유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내가 건네는 진급장을 받았다. 손끝이 차게 식어 잘게 경련했다.
그 순간 찢어질 듯한 박수갈채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존경스럽습니다, 대위님―!”
“멋져요, 군인님!”
“꺄아―! 축하드려요!”
환호성이 어찌나 큰지 등이 온통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유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유진이 무대를 가로지를 때까지도 박수와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무대 옆으로 빠지자마자 유진이 창백한 낯으로 태운을 붙들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해놓았기에 이런 상황이….”
“거짓말 안 한다고 했잖습니까. 당신이 무명 제압에 주었던 도움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중에게는 자연스럽게 알려졌고.”
“그것, 만으로…….”
“그거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었는지, 앞으로 제국에서 몸소 실감해 보도록 하세요.”
속살거린 태운은 옆을 지나쳐 무대로 향했다. 단상에 오르는 그를 보며 유진은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이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태까지 유진에게 있어서 표창식은 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자리였다.
고개를 숙였다. 반듯하게 매달린 은색의 별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심장이 울컥거렸다. 가슴께를 꾸욱 누르며 고개를 떨궜다.
천태운이 맞았다. 그는 늘 옳았다. 이 자리에 되돌아온 것을, 후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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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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