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파제 (16/22)

방파제

태운은 먼지와 빈 탄창이 굴러다니는 바닥을 딛고 섰다. 폐허가 된 건물은 퀴퀴하고 음습했다. 과연, 불법 조직의 임시 거처라고 여길 법한 모양새였다.

류진모가 태운에게 맡긴 조사는 유진과 청운 부대가 급습을 시도했다가 역으로 납치를 당했던 건물의 탐색이었다. 태운 역시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와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낡고 금 간 내부를 흥미롭게 훑어보았다. 거의 창고에 가까운 곳이었다. 사건 직후에는 화재 탓에 재로 뒤덮여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내부의 윤곽은 보일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방주 탄환을 사용했다고 했던가. 방주는 귀한 약물이다. 아무리 무명이라고 해도 그리 손쉽게 다량을 들여올 수 없었을 것이다. 청운 부대원을 제외하고서라도 이곳에 투입된 제국군은 서른 명에 달했을 텐데,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시작하세요.”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건물 곳곳으로 흩어졌다. 태운은 유진이 습격을 받았다던 위치를 중심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잘 보니 벽 이곳저곳에 동그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도 방주 탄환의 흔적인 듯했다.

이미 수차례 수색을 진행했던 장소인 만큼 유의미한 단서가 남아 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류진모는 이곳의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야생적인 직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역시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는 하유진과 똑 닮았다.

달그락. 무언가 구두에 걸렸다. 내려다보니 다 깨어진 유리 조각이었다. 그대로 지나치려던 태운은 묘한 기시감이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것 없는 깨어진 유리병의 잔해였지만, 저 원통형의 모양새가 어째 눈에 익었다.

“…….”

일순 벽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태운은 벽에 다가서 무너진 균열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멘트 가루가 우수수 쏟아지고, 갈라진 틈새가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에서 비치는 반짝임이 더욱 확실해졌다.

태운은 틈새로 손을 밀어 넣어 물체를 꺼냈다. 일반적인 탄환과 완전히 다르게 생긴, 기다란 모양새의 금속이 손끝에 딸려 나왔다. 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 대위.”

태운은 금속을 감싸 쥐고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뒤를 돌아보자 류진모가 잔해를 비집고 걸어오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볼일이 끝나서 와봤네.”

“이제 막 시작한 참입니다.”

“난 신경 쓰지 말아. 잠깐 들렀을 뿐이니.”

주름 잡힌 눈매가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미 몇 번이고 방문했을 터인데, 류진모는 마치 처음 온 것처럼 짙은 회한을 표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태운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탄환이 바지 한쪽에 묵직한 무게감을 더했다.

“방주의 후유증은 그리 크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척추 가까운 곳을 맞으면 평생 불구로 살기도 한다지.”

“들었습니다. 운이 안 좋은 케이스죠.”

“운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라네. 누군가는 운 좋게 알파로 태어나 이득을 취하고, 누군가는 오메가로 태어나 평생 차별을 당하는 것처럼 말이야. ……미련해서는, 열정에 정신이 팔려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니 좀체 눈을 뗄 수가 없어.”

태운은 그의 옆얼굴을 훑었다. 류진모와 유진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루머가 있지만, 가장 지배적인 것은 고아인 유진을 류진모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영 헛소문만은 아닌지 착잡하게 말하는 류진모는 아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기는 한 건지, 살아 있다면 왜 여태까지 감감무소식인지. 고문이라도 받고 있지는 않은지……. 제국의 일이 걸리면 손발이 다 잘려 나가도 입도 벙긋하지 않을 녀석인 걸 알아서 더 걱정이 된다네.”

“그가 살아 있다고 보십니까.”

“……정말 그네들 말대로 배신이라도 한 게 아닌 이상……. 어렵다고 봐야겠지.”

“그럼 왜 이곳을 다시 찾으셨습니까. 상부에서는 이미 사건을 일단락하지 않았습니까.”

나직한 발소리가 건물 이곳저곳을 울렸다. 태운의 부하들이 건물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망가진 가구들을 뒤집어엎으며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형식적이었던 상부의 수색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류진모가 고개를 들었다.

“내 부하는 정이 많지만, 형편없지는 않네. 호랑이 굴에서 살아 나오지는 못할지언정 벌벌 떨다가 맥없이 죽을 놈이 아니야. 목숨을 잃더라도 호랑이의 가죽을 반절은 벗겨놓겠지. 없는 정보라도 만들어내서 그 호랑이의 가죽을 마저 벗겨놓아야, 내 부하의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류진모는 가라앉은 눈으로 태운을 보았다.

“그러니 자네도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길 바라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찾은 보석이야말로 자네가 추구하는 바가 아닌가.”

태운은 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들었다.

“보석 말씀이십니까.”

“지금의 상부는 주어지는 것을 탐욕스럽게 삼키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썩은 물을 헤쳐나가는 것이 자네의 역할이지. 세상은 바뀌어야 하네.”

“무명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탐욕적인 놈일수록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는 법, 무명이 불평등을 간판으로 내세운 것만으로도 이미 그 문제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현실에 안주하면 제국은 결국 언젠가 한계를 맞이할 거네.”

“알파인 제가 제국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자네는 그들과 달라. 유진이 그들과 달랐듯이 말이야.”

“…….”

“자네 스스로도 알 거라 생각하네.”

류진모는 느지막이 건물을 떠났다. 단단하고 지친 등이 차를 타고 멀찍이 사라졌다. 그를 배웅한 태운은 피식 웃었다. 저 정도면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호랑이인 수준이다. 제 자식을 끔찍이 여기는 산 호랑이 말이다.

태운은 건물로 돌아가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매끈하고 둥근 탄환이 손끝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을 즐기며 손가락을 굴리고 있자,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불명)

속행하도록.]

건물로 향하던 걸음을 다시 돌려 구석으로 향했다. 화면을 툭툭 건드려 전화를 걸자 신호음만 한참 가다가 뚝 하고 끊겼다. 태운은 표정 없이 재차 시도했다. 이번에도 전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발신이 이어지자 격한 숨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되었다.

-헉, 씨발. 작작 좀 하시죠.

“섹스하고 있습니까? 아직 근무 시간일 텐데요.”

-관심 끄라는 소립니다.

주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보아하니 어딘가의 화장실인 모양이었다. 설마 제국군 건물로 오메가를 부를 정도로 머리가 없지는 않겠지만, 제복을 입고 화장실에서 떡 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유진이 지을 표정이 선연했다.

피식 웃음을 흘리자 주건이 목소리를 깔았다.

-뭐가 우습습니까.

“적당히 즐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유흥은 빠질수록 멍청해지는 법입니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교장에 잘도 드나드는 것 같은데 아랫도리는 멀쩡하십니까?

“당신 것보다야 안녕하십니다.”

-…뭐라고―.

높아지는 언성을 끊어내듯 통화를 종료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박주건이 향락에 빠지는 날인 듯했다. 밤새 허리를 흔드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따라서 오늘은 저택에 주어지는 미션도 없을 것이다.

태운은 류진모가 애지중지하는 오메가 중위를 떠올려 보았다. 마지막으로 저택에서 나왔을 때 상태가 영 좋지 않았으니 아마 이번에 돌아갈 즈음이면 확연히 달라져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진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제 발로 걸어왔으면서도 불안해하는 듯한 눈빛은 퍽 귀여웠고, 의식을 잃은 채 저를 찾던 몸짓은 하유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한계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유진의 눈매에 비쳐 보인 절망이 차마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선명했다.

“천 대위님?”

누군가 태운을 불렀다. 태운은 애처롭던 애원을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현장으로 돌아간 태운은 밤이 늦어 더 이상 수색을 진행할 수 없을 즈음 자리를 마무리했다. 집까지 갖고 돌아온 탄환은 책상 한구석에 놓고 나왔다. 저택에 도착할 즈음에는 새벽이 깊어 있었다. 저택 역시 기묘한 침묵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태운은 제 방에 돌아갔다. 주인 없는 방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하얀 얼굴을 눈에 담으니 문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운은 눈을 기울였다.

역시 귀여웠다. 산란하는 사고가 맥없이 밀려날 정도로 말이다.

***

시간을 돌이켜 같은 날 정오, 수화기를 손에 쥔 채 기절했던 유진은 정오가 한참 지났을 무렵 눈을 떴다. 지독한 피로감이 전우처럼 함께한 채였다.

언제 의식을 잃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어제 미션이 시작되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열 시간이 넘도록 내리 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며칠 밤을 샌 것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특히 어깨와 손목은 말이 아니었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괴성을 질렀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건조한 공기가 기도를 가를 때마다 종이에 베이는 것만 같았다. 목이 지독하게 말랐다. 하지만 물을 마시러 1층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진은 참혹했던 기억을 억지로 의식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아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자는 사이 손에서 빠져나간 수화기가 바닥 근처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네처럼 흔들리는 그것을 도로 주워서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

어둑한 안색을 추스른 유진은 경련하는 손으로 이불을 몸에 두르고, 욕실로 향했다.

하루는 빛과 같은 속도로 지났다. 유진이 거실로 내려가자 부대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평소처럼 유진에게 인사하고, 함께 식사도 했다. 손목과 무릎에 남은 생채기가 아니었다면 어제의 일이 악몽이었으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차라리 악몽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유진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방에서 지냈다. 누군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지 않을까 했지만 예상외로 조용했다. 유진의 상태가 온전치 못한 탓일 수도 있고, 혹은 어제의 일을 후회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후자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주건 역시 조용했다. 아무래도 눈에 띄게 가라앉은 유진의 모습을 퍽 즐기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유진은 홀로 적막 속에 잠길 수 있었다. 저택에 갇히기 전, 누구보다 든든했던 부하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밤이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탁한 방 안의 공기 사이로 먼지를 나풀나풀 날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진은 시선을 내렸다. 낱장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흩어진 채 시야를 채웠다. 연고, 방주, 밀수입. 조각난 단어들이 텅 빈 종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모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휘갈겨 쓴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이름 두 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진은 불안정한 눈으로 글씨를 내려다보다가 펜을 툭 내렸다.

주건이 했던 말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막연한 추측일 뿐, 근거라 칭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도박을 걸기로 했다. 박주건처럼 지위도 높지 않은 이를 무명이 섭외할 이유가 이것 말고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박주건은 방주를 찾아도 그것이 방주라 생각지도 못할 것이라 말했다. 제법 그럴싸한 가설인 것 같았다.

유진은 종이를 한데 모아 정리한 뒤 태운의 방으로 향했다.

저번에도 그랬듯 태운이 돌아오리라는 확신은 없다. 다만 유진이 찾았을 때 그는 항상 저택에 돌아왔고, 오늘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천태운은 정말 돌아왔다. 새벽에 접어든 시각, 방문을 열고 들어와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어쩐지 조금 입매를 휜 채로 손을 뻗어 뺨을 쥐었다. 큼지막한 손이 뺨과 턱선을 모조리 감싸 위로 살짝 당겼다.

유진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던 눈을 들어 태운을 마주했다. 짐승처럼 가늘어진 동공이 묘한 이채를 띠었다.

“기다렸습니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말해 보세요.”

“방주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눈매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던 엄지가 멈추었다. 태운이 바람 새듯 웃었다.

“흥미로운데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도 진심입니다, 중위. 어떻게 하면 사방이 막힌 이 저택 안에서 방주의 정체를 알았을까…. 심히 흥미로워서.”

“임 대령입니까? 아니면 황 중령?”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유진이 태운의 손을 강하게 떨쳐냈다. 태운은 붉어지는 손을 흘끗 훑고 다시 유진을 보았다. 흐릿하던 얼굴이 어느새 칼을 문 것처럼 사나워져 있었다.

“박주건은 이 방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박주건이 ‘구멍 벌리고 앙앙거려서 고작 연고나 얻는 신세’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몸을 판 대가로 연고 따위를 얻은 기억이 없는데, 그가 그런 착각을 할 이유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묘한 표정을 지은 태운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곧장 따라붙은 유진이 손을 뻗었다. 미약한 체력을 끌어모아 넥타이를 움켜쥐고 당기자, 주륵 끌려 내려온 태운의 얼굴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그에게 당신 이야기를 하자마자 격노해서 미션을 내렸습니다. 보상조차 없는 미션을요. 당신, 박주건과 사이가 틀어진 것 아닙니까?”

태운이 다시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길이 뒷덜미를 감싸 쥐고 귓불을 살살 쓰다듬었다. 유진의 눈매가 흠칫 떨리더니, 넥타이를 끌어당긴 손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태운은 겁을 먹은 소동물을 달래듯 두피를 간질이고 꿈틀거리는 눈시울을 묵직하게 눌렀다.

“원하는 게 뭡니까.”

“…….”

“가시를 세워서 푹푹 찔러대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푸석해진 뺨을 쓸고 내려간 손길이 다시 목울대를 건드렸다. 알파의 향기를 과도하게 머금었던 듯,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울긋불긋한 울혈이 올라와 있었다. 그 위를 검지 끝으로 비비자 유진이 입술을 물었다. 그 입술마저도 평소보다 붉게 부은 상태였다.

“대답.”

“…….”

하얀 잇새로 빠져나간 입술이 통 튀어나왔다. 말랑하고 달큼한 살덩이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달싹이는 턱을 톡톡 두드리고, 시선을 맞추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점차 독기가 빠져나갔다.

한참 망설이던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 방에,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신이 머무르는 동안만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태운은 수그러든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유진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흔들리는 호흡을 뱉었다. 마킹이 많이 옅어졌는지 달큼한 향내가 풍겼다. 잡힌 얼굴을 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의식을 잃고 낑낑거리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유진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저택을 비운 동안 분명 또 미션이 주어졌을 텐데 이 작은 체구로 알파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었을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아마 많이 지쳤을 테고, 그렇기에 제게 찾아온 것이리라.

태운은 턱을 놓아주고 하얗게 질린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대가 없이 두는 건 하루뿐입니다.”

“……그럼….”

“잘 준비하고 누우세요. 나는 오늘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습니다.”

태운이 넥타이를 풀어내며 등을 보였다. 정말로 받아들여 줄 줄 몰랐던 듯, 유진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다가 태운이 뭐 하냐는 눈빛으로 돌아보자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답답하도록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있던 재킷을 벗고 소파 귀퉁이에 자리했다.

“…….”

금방이라도 소파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몸이 다람쥐처럼 둥글게 말렸다. 태운은 구겨진 넥타이를 대강 책상 위에 던져두고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놀란 듯 올려다보는 유진을 번쩍 들어 안았다.

“천 대위님…!”

“얌전히 있어요.”

엉덩이를 받쳐 든 태운이 단 몇 걸음 만에 침대에 도착했다. 유진은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지고 손에 쥐고 있던 재킷마저 빼앗겼다.

“소파에서 잘 거면 왜 여기 있습니까?”

“……그건….”

“내 방이니 내 말대로 하세요, 하 중위.”

말문을 잃은 유진의 옆으로 태운이 몸을 눕혔다. 곧 방의 조명도 완전히 꺼지고 머리맡의 등만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유진은 등을 돌리고 누운 태운을 망연하게 응시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그의 체취가 선명히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켜 보았다. 두통에 도망치며 몇 번이고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질리도록 맡은 냄새가 났다.

호흡을 반복할수록 그 익숙한 냄새가 폐를 가득 물들였다. 기이하게도 몸에서 힘이 조금씩 풀렸다. 곧 수마가 해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항은 잠깐뿐이었다. 여태껏 어떻게 눈을 뜨고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졸렸다. 천근 같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직되었던 호흡도 느슨하게 풀렸다.

“…….”

등을 보이고 있던 태운이 몸을 돌렸다. 세상모르고 잠든 유진이 가슴팍을 느리게 들썩이고 있었다. 태운은 느릿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불긋한 눈매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섹스할 때 이외로는 처음 보는 유진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남아 있는 조명도 완전히 끄자 완전한 암흑이 방을 짙게 물들였다.

***

꿈을 꾸었다. 처음 류진모의 뒤를 따라 군학교에 입학했을 때, 박주건과 처음 만나 함께 목표를 향해 노력했을 때, 그리고 수많은 풍파를 뚫고 청운 부대를 이루었을 때의 일들이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진은 익숙한 그 장면들을 한 걸음 뒤에 서서 가만히 응시했다. 제법 오래된 기억도 있었지만, 전혀 흐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은 듯 선명한 부대원들의 얼굴이 시야에 틀어박혔다.

이제는 보지 못할 모습이다. 신뢰로 가득 찬 저 눈빛을 이제는 받을 일이 없으리라. 살랑이던 봄바람이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뺨을 긁고 생채기를 냈다.

상처가 난 곳은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팠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내려다보자 투명한 액체가 손등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수면 위로 공기 방울이 떠오르듯, 아주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

천태운의 방이 시야를 채웠다. 한 박자 늦게 지난밤의 기억도 돌아왔다.

유진은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쪼르륵. 물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아 있는 태운이 보였다.

“잘 잤습니까.”

“……예.”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방에는 은은하게 홍차 향이 났다. 유진은 말없이 소파에 몸을 내렸다. 그러자 곧바로 찻잔이 앞에 내밀어졌다. 국화차였다.

“왜 당신 것과 다릅니까?”

“주는 대로 마시세요.”

캐물을 기운조차 없다. 한숨을 삼킨 유진은 텁텁한 입안으로 차를 흘려 넣었다. 따끈한 액체가 들어가니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신문을 읽는 태운을 구경하며 유진은 느릿하게 차 한 잔을 다 비웠다. 신문에 쓰인 언어는 의외로 한글이었다.

빈 찻잔을 도로 테이블에 내렸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니 머리가 한결 개운해졌다. 적어도 몸만큼은 살 것 같았다. 참혹하던 감정들도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숨은 쉴 수 있을 정도였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결국에는 모두 주건의 말대로 되었다. 견고하던 신뢰가 부질없이 깨어졌다. 처참할 정도로 말이다.

“……천 대위님. 당신 말이… 모두 맞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쓴맛을 넘기며 겨우 한 말이 무색하게도, 태운은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았다. 흥미가 없다는 듯 신문에 눈을 박은 채 성의 없이 답했다. 그 반응을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허탈해져 뒷말은 그대로 삼켰다.

저 남자에게 유진이 겪은 일이나 배신감 따위는 알 바가 아닌지도 모른다. 기실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박주건이었다. 정말로 천태운은 이곳에서 뭘 하는 걸까. 몇 번을 물어도 온전한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의문은 풀릴 일이 없다.

문득 태운이 신문을 내렸다. 팔을 뻗기에 뭘 하나 싶어 지켜보자, 티포트를 끌어와 유진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역시나 국화차였다. 유진은 말없이 그것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부하들의 일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찰나의 평화를 만끽한 유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거실로 내려가니 부대원들은 아직 태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제와 다름없어 보였다. 어제 태운과 몸을 섞지 않은 덕이었다. 하지만 들키는 것 정도야 시간문제다.

우선 부대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짐짓 태연한 것처럼 자리에 앉은 그들은, 유진이 태운의 감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호전적으로 반응했다.

“천태운이 지금 저택에 있어요?”

“신경 쓸 필요 없어. 앞으로 그의 감시는 내가 도맡을 거니까.”

“안 됩니다.”

단호한 어조가 유진의 말을 잘랐다. 말없이 제원을 응시하니 그가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중위님께서 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또렷이 기억이 났다. 저택에 갇힌 초반, 이와 비슷한 말을 제원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걱정해 주는 것이라 여겼던 말의 속내를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오메가’가 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결정은 내가 내린다. 너희들은 따르면 돼.”

“중위님.”

“회의는 여기까지다.”

말을 끝마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등으로 살벌하게 꽂히는 눈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태운이 저택이 있음을 안 탓인지, 섣불리 유진에게 페로몬을 흘리는 이는 없었다.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어제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다가 미션이 떠오르는 순간 돌변했을 것이다.

유진은 힘없는 걸음으로 계단 난간을 짚고 섰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부엌에서 태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조한 시선을 던지자 태운이 눈을 기울이며 걸어왔다.

“괜찮겠습니까? 고압적인 상관은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엿듣고 있었습니까.”

“들렸을 뿐입니다.”

태운의 손에는 전기 포트가 들려 있었다. 그놈의 차. 한 시라도 입에서 떼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가. 눈을 강하게 감았다가 뜬 유진은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상황은 최악에 치달았다. 저들이 지금 유진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것도 결국에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페로몬으로 몸을 제압하고 범할 수 있으니까 불만족스러워도 가만히 두는 것일 테다.

만약 유진이 오메가이기 때문에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이라면, 거리를 두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비록 이 비좁은 철창 안에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으나 적어도 지금은 태운이 있다. 그의 방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자그마한 안식으로 다가왔다.

태운이 가까이 다가섰다. 그에게서 은은한 홍차 향이 났다. 이제는 그 향기가 그의 페로몬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은근한 손길이 귓불을 문지르고 귓바퀴를 손 아래 가두었다. 순간 혈관이 크게 팽창했다가 수축했다. 유진은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복으로 말끔하게 감추어진 태운의 하반신이 시야를 채웠다.

“알고… 있습니다.”

감정 위로 덧대고 굳혔던 벽에 균열이 일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두려움이 태운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고집스러운 이성에 의해 구석까지 몰리고 몰린 불안정한 감정이, 바들바들 떨며 숨을 죽였다.

불쌍한 오메가. 강인하기에 애처로웠다.

태운은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제게 당겼다. 희게 질린 얼굴이 가슴팍에 툭 기대어졌다. 셔츠 사이로 파고든 눈썹이 바들거리며 조금씩 아래로 기울었다.

“올라가죠.”

정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게 들린 것은 분명 너무 지친 탓이리라. 유진은 눈을 감았다.

***

“흐윽, 아, 아…―!”

꾸직. 내부를 가득 채운 정액이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이미 벅찰 만큼 정액으로 가득한 내벽을 벌리고 뿌리가 더욱 깊이 쑤셔 박혔다. 발작하듯 허리를 튕긴 유진이 절정했다. 남근을 질겅질겅 씹으며 하얀 성기를 통통 튕겼다.

그래 봐야 한계치 이상으로 혹사당한 나신은 쿠퍼액조차 내뱉지 못했다. 끝나지 않는 마른 절정에 시달리며 허공으로 엉덩이를 들었다. 조여드는 볼깃살을 밀치고 살덩이가 빠르게 드나들었다. 흐으윽! 고통스럽게 신음한 유진이 몸을 들썩였다.

“정신 차리세요, 중위.”

“으, 아―.”

“아직 안 끝났습니다.”

깊이 틀어박혔던 귀두가 점막 사이로 빠져나가 전립선 근처를 퍽퍽 쳐올렸다. 말랑하게 부푼 살점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이내 정통으로 짓이겨졌다. 농축된 알파 향이 내벽을 꿰뚫고 파고들었다.

“히윽, 아아…! 아흑!”

부어오른 점막이 기둥을 미친 듯이 씹었다. 가래떡 같은 성기는 파들거리며 절정감을 내뿜었다. 쫀득한 감촉을 즐기며 느리게 움직이던 태운이 흘끗 뒤를 보았다. 닫힌 방문 너머로 서성이는 알파의 기운이 느껴졌다.

전에 한 번 당한 것이 있으니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테다. 하지만 제 오메가를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도 없으니 저기서 신음이나 훔쳐 듣고 있는 거겠지. 알파만큼이나 형질에 휘둘리는 존재는 없다. 오메가도 그렇지만 같은 알파끼리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힘의 차이에 굴복하는 모습이 역시나 짐승이지 않은가.

“흐아으, 힉! 으!”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유진이 혼자서 절정에 올랐다. 더 사정할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면서, 구멍에 정액과 남근을 품은 것만으로도 자지러지며 울었다. 터질 듯이 부푼 구멍은 본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슬쩍 허리를 움직이니 벌어진 볼기가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태운은 고개를 숙여 말랑한 목덜미를 물었다. 이로 짓씹어 상처를 내고 혀로 핥자 유진이 죽을 듯이 흐느꼈다.

“하 중위.”

“으흑, 아! 아, 으흣…!”

“버티세요.”

쾌락으로 물든 눈이 허공을 떠돌았다. 벌써 정사가 시작된 지 몇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태운은 유진에게 세 차례 정액을 먹였고, 유진은 수도 없이 절정에 이르렀다. 태운의 말을 알아들을 정신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태운은 눈물로 젖은 뺨을 문지르며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오메가를 집어삼킨 열기가 귓바퀴에서 건조한 입술로 옮겨갔다. 태운의 눈매가 검게 일렁였다.

“버텨.”

하얀 볼기 깊은 곳에 네 번째 사정액이 쏟아졌다. 유진이 펄떡 튕겨 오르며 침대를 긁었다. 사지를 뒤흔들고 고개를 젖혔다. 꾸물거리는 내벽 깊숙이 뿌리를 밀어 넣자,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벌벌 경련했다.

“아, 아…….”

텅 빈 성기를 통통 튕기던 유진은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의식을 잃은 몸이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내벽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남근을 잘근잘근 씹었다. 태운은 완전히 감긴 눈을 진득하게 응시하다가 유진에게서 몸을 물렸다. 구멍에서 성기가 빠져나가고 질척한 액체가 꿀렁꿀렁 빠져나왔다.

방문 밖으로는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졌다. 태운은 벌름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적당히 액체를 빼낸 뒤, 곁에 몸을 눕혔다. 흠칫거린 유진이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달큼한 냄새가 막 사정한 태운의 하반신을 자극했다.

낮게 혀를 찬 태운은 유진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향기가 풀풀 나는 뒷덜미에 코를 박으니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제 향기로 범벅이 된 볼기 사이로 다시 부푼 성기를 끼워 넣고, 달착지근한 향기를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짙은 밤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

다음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진은 종일 태운의 방에 머물렀다. 태운은 유진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문이나 서적을 뒤적이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유진에게도 차를 타서 내밀기도 했다. 확인해 볼 것도 없이 역시나 국화차였다.

방의 주인이 그러한 태도를 고수하니 유진 또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현 상황을 망각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유진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운은 방을 뜨지 않았다. 입에 달고 사는 차나 커피도 모두 방 안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나는 듯했다.

“왜 그걸 입고 있습니까.”

막 욕실을 나온 유진에게 태운이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유진은 어깨를 움찔 떨고 옆을 돌아보았다. 복도에 기대어 선 태운이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진은 어색한 손짓으로 어깨에 걸친 와이셔츠를 매만졌다. 무어라 변명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오가 지났을 때부터 씻지 못한 몸이 찝찝해졌다. 그렇지만 방을 뜨는 것이 불안했다. 태운이 저택에 있었으니 섣불리 손을 댈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겪은 바가 있어 두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침 태운은 등을 돌린 채 차를 타고 있었고, 유진의 눈에는 옷장이 보였다. 태운의 향기가 스민 셔츠를 훔치듯이 들고 욕실로 향한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다행히 복도와 욕실에는 누구도 없었다. 다급한 손짓으로 샤워를 마친 것까지는 좋았지만, 갈아입을 옷을 안 들고 왔다는 사실을 다 씻고 나서야 깨달았다. 가져온 것이라고는 태운의 셔츠뿐이었다.

유진은 알파 향이 풍기는 셔츠를 들고 한참 고민했다.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으면 언제 누가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별수 없으니 이것이라도 걸치고 방에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돌아가자마자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으면 될 것이다.

결정한 유진은 어깨에 셔츠를 걸치고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섰다. 누군가와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태운의 방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욕실을 나서자마자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복도에 서서 유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읏.”

가느다란 시선이 몸을 오르내렸다. 유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태운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태운이 느릿하게 따라왔다. 목덜미까지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걸음을 재촉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태운이 손목을 잡아채 벽에 밀어붙였다. 유진은 당황하며 태운을 올려다보았다.

“대위―.”

“보기 좋네요. 내 냄새를 맡고 싶었습니까?”

“…오해입니다.”

“어제 그렇게 뒷구멍으로 먹어놓고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맛있게 먹네요. 좆물이 그렇게 좋습니까?’

스치듯 지나간 기억이 귓가에 음습하게 속삭였다. 등허리를 타고 전율이 찌르르 올랐다. 유진은 움찔 떨며 손목을 비틀었다. 낮게 웃은 태운이 손을 놓아주고 대신 젖은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방 밖에 볼일이 있으면 먼저 말하고 나가세요. 이런 천 쪼가리로는 효과도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손을 떨쳐낸 유진이 침대로 걸어갔다. 물기 맺힌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거칠게 털어내며 등을 돌렸다. 태운은 불긋해진 목덜미를 훑어본 후 흘끗 문을 돌아보았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유진은 눈치채지 못한 듯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태운은 조금씩 감추어지기 시작하는 그의 맨살을 눈에 담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시금 고요한 평화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자그마한 안식은 밤이 깊으면서 종식되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흐윽…….”

태운의 어깨를 짚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차례 페로몬으로 녹여놓은 덕에 하얀 가슴이 봉긋하게 부풀어 유두를 세우고 있었다. 태운은 그 말랑한 돌기를 손끝으로 굴리며 시선을 내렸다. 둔덕 사이로는 아직 귀두밖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삼켜요.”

“으흑, 잠, 시만….”

“아직도 부족합니까?”

볼기를 벌린 손끝이 교접부에 닿았다. 고작 성기 끄트머리를 물고 바들거리던 구멍이 와락 수축했다. 유진은 일순 쾌감이 올라 파르르 떨었지만, 곧 사색이 되어 태운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하, 할 테니까. 넣을 겁니다…!”

“아까도 그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정말로, 정말 하겠습니다….”

단단한 손길이 벌어진 구멍을 뭉근하게 비볐다. 좀처럼 성기를 먹지 못하기에 이미 이곳에 알파 향을 잔뜩 먹여 주었던 터라, 따끈하고 말캉한 감촉이 퍽 달큼했다. 겁을 먹은 유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통통하게 부은 입술이 붉게 익었다.

틈새로 새어 나온 애액을 구멍 전체에 느리게 펴 바른 후, 태운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얼어붙어 있던 몸이 황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으, 흣.”

작게 흐느낀 유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구멍을 벌린 귀두의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생경한 감각에 눈매를 경련하니 태운이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강제적으로 태운의 몸 위에 올라탄 지 벌써 삼십 분, 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내몰려 저항할 때마다 태운은 폭력적인 페로몬을 퍼부었고, 그 덕에 내벽은 뜨거운 작열감에 따끔거리고 있었다.

긁고 싶다고 외치는 아랫배의 열망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몸을 내려 성기를 삼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벌리는 것보다 수십 배는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평소에도 거북하게 느껴지는 성기가 더욱 거대하게 다가왔다. 귀두를 넣었을 뿐인데 벌써 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열띤 호흡을 뱉으며 유진은 눈썹을 비틀었다. 머뭇거림을 감지하자마자 볼기를 주무르던 손이 다시 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유진은 눈을 와락 감고 억지로 몸을 아래로 내렸다.

“흐으윽, 아으―!”

구멍 사이로 굵은 기둥이 파고들었다. 선홍빛 구멍이 오물오물 남근을 삼키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태운은 손끝으로 구멍 근처의 여린 살을 문지르며 낮게 숨을 흘렸다. 꿈틀거리는 내벽의 감촉이 훨씬 더 잘 느껴졌다.

“더.”

“으으, 흑…!”

꿀처럼 농밀한 향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반쯤 삽입된 기둥을 따라서도 질척한 애액이 흘렀다. 유진은 저를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금 더 엉덩이를 내렸다. 구멍이 팽팽하게 늘어나며 가장 굵은 부분이 주름을 벌렸다.

찌릿. 날 선 통증이 구멍을 울렸다. 파드득 놀란 유진이 태운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찢, 찢어질 것 같… 으흑!”

“안 찢어집니다.”

“더 이상은, 아! 흐으, 안 들어가….”

“들어간다고 말했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제자리에서 떨었다. 뽀얀 볼기를 놓고 구멍 근처를 살살 긁어도 마찬가지였다.

태운은 굵은 부분을 앞두고 멈춰선 구멍을 훑어보며 유진의 꼬리뼈를 짚었다. 볼록하게 만져지는 뼈를 둥글리다가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허공에서 버티고 있던 엉덩이가 강제적으로 내려갔다. 구멍에 걸려 있던 굵은 부분이 부욱, 파고들었다.

“아힉…―!”

일순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연약한 점막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번개처럼 올랐다가 느리게 사그라들었다. 유진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짙은 시선이 얼굴 위를 오르내리며 다음 행동을 촉구했다.

아직 다 삽입된 게 아니었다. 극우성 알파의 성기는 끔찍하도록 길고 두꺼웠다. 유진은 한 손을 뒤로 돌려 교접부를 더듬거렸다. 구멍 밖으로 남아 있는 뿌리 부근이 손끝에 만져졌다.

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미심장한 손길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구멍이 활짝 벌어지고 주름이 비틀렸다. 뒤이을 행동을 알아차린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푸욱―! 붙잡힌 엉덩이가 주륵 끌려 내려갔다. 동시에 두꺼운 살덩이가 내벽을 뚫고 올랐다. 점막이 거세게 긁히며 배 속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갔다.

“아아아―! 흐윽…―!”

다리에 힘이 풀렸다. 태운의 몸 위로 주저앉자 엉덩이가 태운의 하반신에 꾸욱 눌렸다. 괴로울 정도로 삽입이 깊어졌다. 깊은 곳이 전에 없을 정도로 벌어지며 꾸물꾸물 귀두가 들어찼다.

투둑. 물총처럼 쏟아진 정액이 태운의 제복을 적셨다. 한 방울은 태운의 입술 근처에 튀었다. 쾌감으로 일그러진 유진의 시선이 제 정액을 좇아 태운의 하관까지 다다랐다. 달착지근한 향기를 들이마신 태운은 혀를 내어 그 액체를 훑었다.

반투명한 정액이 붉은 혀에 빨려 들어갔다. 유진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비리게 웃은 태운이 경련하는 볼기를 잡아 주욱 끌어 올렸다가 탁 놓았다. 중력을 못 이긴 나신이 성기를 빨아들이며 태운의 위로 엎어졌다.

“하윽…! 아, 으!”

“허락도 없이 싸지르기나 하고…. 버릇을 다시 들여야겠습니다.”

“으흑! 하으, 윽!”

퍽, 퍽! 기둥의 가장 굵은 부분이 고의적으로 구멍을 집요하게 드나들었다. 팽팽하게 늘어났다가 좁아지고,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하는 구멍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파들거리던 유진은 태운의 위로 완전히 무너져 달착지근하게 흐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구멍이 절정하며 지독한 향기를 뱉었다.

제 어깨에 매달린 채 자지러지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태운은 옅게 웃었다.

“이번만 봐준다.”

낮은 중얼거림은 유진의 귀에 닿을 길 없이 쾌락에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다.

방을 울리던 교성은 그로부터 한참 후, 유진이 의식을 잃으면서 잦아들었다. 태운은 죽은 듯이 잠든 유진을 침대 한가운데에 올려두고 조용히 나갈 채비를 마쳤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잡은 후 침대에 걸터앉자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작게 앓는 소리도 흘렸다.

자지러지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눈매가 온통 붉었다. 내일 일어나면 붕어 눈이 되어 있을 테니 봐 줄 만할 것 같았다.

베개에 푹 박혀 있는 얼굴을 들어 주름 잡힌 미간을 문질렀다. 깊었던 골이 조금씩 매끈해지더니, 이번에는 명란처럼 부푼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페로몬을 슬쩍 흘리며 입꼬리를 비비자 경련이 조금 사그라들고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푹 늘어졌다.

마킹은 다른 알파에 대한 경계의 목적도 있었지만, 제 오메가를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중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옅었다. 툭 건드리면 완전히 멈출 것만 같았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태운은 시선을 내렸다. 속에 고뇌와 절망을 담은 것치고 잠든 얼굴은 한없이 말갛고 깨끗했다.

슬쩍 뺨을 손에 쥐었다. 움찔한 유진이 얼굴을 기대었다. 손을 꾸물꾸물 움직여 팔목을 붙들기도 했다. 제 손에 매달린 유진을 내려다보며 태운은 한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기다려 주지 않는 시계가 분침을 열심히 움직이며 이성을 일깨웠다.

짙은 파란으로 일렁이던 눈은 금방 다시 사무적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구멍 잘 보전하고 있으세요.”

“…….”

“당신의 몸은 당신 스스로가 지켜야 할 겁니다.”

유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태운은 한참 만에 눈길을 떼어내고 일어섰다. 새벽이 깊은 탓인지 복도를 서성이던 인기척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태운은 조용히 방을 나와 저택을 떴다.

좁은 길을 지날수록 밖에서 휘몰아치는 한파가 선명해졌다. 출구 근처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무명 조직원이 다가와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눈썹을 들썩인 태운은 그의 옆자리에 몸을 내렸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볼일이 끝나서 말이네.”

차가 느린 속도로 차고를 빠져나갔다. 태운은 검게 선팅되어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과 앞 좌석을 가리는 칸막이를 훑어보았다. 동참한 지 벌써 일 년은 지났는데 여전히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극우성 알파라는 태운의 형질 때문이리라.

시커먼 풍경을 보고 있으니 암흑 속을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운은 느릿하게 시선을 굴렸다. 검은 차창 위로 발긋하던 유진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달큼한 체온이 손끝에서 아른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일렁이던 온기가 말이다.

미묘한 눈으로 손끝을 문지르던 그때, 옆자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부 상황은 어떤가?”

“갇힌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축처럼 헐떡이고 있을 뿐입니다.”

“하유진은?”

“망가질 것이라 생각해서 박주건의 요구를 들어준 것 아니었습니까?”

묵직하던 사내의 눈매에 못마땅함이 깃들었다.

“관용을 베푼 거다. 류진모나 되는 인물의 근처에 협력자를 심기란 쉽지 않으니. 나는 애초에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얍삽하고 멍청한 게, 위에서 내려오는 말만 없었다면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짓거리를….”

“관용을 베풀 만한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하기에는 대우가 썩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선득한 시선이 태운에게 굴러왔다.

“박주건이 그러던가?”

“무거운 입은 아니지 않습니까.”

“천박한 놈….”

혀를 찬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살을 다 도려낼 듯하던 눈길도 떨어져 나갔다. 피식 웃은 태운이 다시 차창을 응시했다. 어떻게 만들었을지 모를 정도로 시커먼 창문이 저택에서 멀어져가는 길을 암흑으로 가렸다.

하유진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대단하던가. 이 정도로 무명을 경계하게 만드는 유진도 심상치 않은 인물이다.

태운은 제 향기를 풍기며 잠들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적막을 실은 차량은 빠른 속도로 저택에서 멀어져갔다.

동이 틀 즈음 태운은 제국군으로 복귀했다. 출근 시간을 훨씬 앞선 시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건물에는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는 군인들로 가득했다. 태운은 휴대폰 전원을 켜며 제 사무실로 향했다. 검은 화면에 빛이 돌아오자마자 저택에 있는 동안 놓쳤던 보고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문득 눈이 시려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낮에는 제 방에서 돌아다니는 유진을 지켜보고 밤에는 그가 기절하도록 몰아붙인 덕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나마 저택에 돌아간 첫날 달큼한 몸을 품에 안고 잠깐 눈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눈이 피로할 만도 했다.

불현듯, 정말 밤새 저를 안 건드릴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알몸에 태운의 셔츠를 입고 당황하던 눈빛도 떠올랐다. 하유진답지 않은 순진한 반응이었다. 무의식중에 입꼬리가 들렸다.

“천 대위님.”

상념을 가르고 노크가 울렸다. 태운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웠다.

“네.”

“말씀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

두툼한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올려졌다. 태운은 다시 나가려는 부하를 잡아 짧게 말했다.

“임 대령과 황 중령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까.”

“정리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눈치 빠른 부하는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태운은 검지 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임 대령과 황 중령이라면 모두 무역과 관련된 인물이다. 어째서 유진은 그들을 의심했을까. 단순히 방주의 밀수입을 토대로 추측한 것이리라 여기기에는 타깃이 지나치게 세밀하고 확정적이었다.

짐승처럼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그 저택 안에서 하유진은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지 짐작되지 않았다. 태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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