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허상
의식이 혼탁했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지글거리는 폐와 부르튼 엉덩이, 그리고 난자당하고 있는 구멍뿐이었다.
정사는 밤새 지속되었다. 유진은 몇 번이고 저항하고 발버둥 치며 건호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째선지 울부짖는 목소리를 듣고 다른 부대원이 들어와 말려 주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옥이었다. 알파 페로몬을 퍼부으며 자신을 범하는 건호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리를 벌리고 신음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괴로운 와중에도 남근이 깊이 파고들 때마다 몸은 절정에 올랐다. 아득한 쾌락이 근육을 지배하고 머리를 녹였다.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알파가 내리붓는 쾌락이 달아 온몸에 희열이 올랐다.
구멍이 온통 정액으로 가득 차서 틈새를 비집고 나올 즈음,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몸이 경련할 정도로 과민해졌을 즈음. 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
주변이 고요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안구를 굴렸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건호는 보이지 않았다. 뻑뻑해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벽에 매달린 모니터는 암전된 상태였다.
기절했었나. 새벽 다섯 시에 이른 시계가 어렴풋이 보였다. 옅은 호흡을 반복하던 유진은 움찔, 몸을 떨었다. 엉덩이 사이에서 질척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더듬거리듯 만져 보니 정액이었다. 돌연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정액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를 감싸 쥔 유진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러자 퉁퉁 부은 볼기가 벌어지며 끔찍한 통증이 밀어닥쳤다.
“아흑! 읏…….”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고통에 유진은 바르작거리며 흐느꼈다. 구멍을 벌려 정액을 빼내야 이 따끔거리는 열감이 조금이나마 사라질 것 같은데, 도저히 엉덩이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건호는 이 상태로 절 두고 나간 것인가. 구멍 속에 제 정액을 한가득 채우고, 혼절한 유진을 홀로 두고서.
“……흣, 윽.”
점점 열기가 올랐다. 머리가 어지럽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기도가 바싹 말라 쉭쉭거렸다. 또다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유진은 한 손으로 침대보를 그러쥐고 다른 한 손을 내렸다.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엉덩이의 열기가 느껴졌다. 지금은 반쯤 감각이 마비되었지만, 건드리면 참혹한 고통이 엄습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유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볼기에 손이 안 닿도록 움직여 구멍을 툭 건드렸다. 엉덩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부어 있는 주름이 찌릿 울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흑―….”
손에서 힘이 절로 빠졌다. 크게 헐떡인 유진은 이내 눈썹에 힘을 주고 구멍을 벌렸다. 욱신거리는 주름이 벌어지고 내벽이 손가락에 눌렸다. 상처를 헤집는 것만 같은 자극이 척추를 쭈뼛 세웠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려 더욱 벌리자 내부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꿀렁꿀렁 나오기 시작했다.
“아, 흐으…. 읏―.”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내린 정액이 침대 시트를 적셨다. 미미한 알파 향이 코를 찔렀다. 농도 짙은 액체가 내벽 사이를 빠져나가는 느낌이 낯설어 몸에 힘을 주자, 울컥거리며 정액이 더욱 흘렀다.
잔뜩 주름 잡힌 미간 골을 타고 땀이 뚝뚝 흘렀다. 유진은 몸을 굴려 침대에 엎어진 채 손가락을 움직였다. 투둑, 툭. 벌어진 구멍 사이로 흰 액체가 떨어지고 내벽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으으, 흐윽. 아….”
전신이 바들바들 떨릴 때까지 손가락을 움직인 끝에 정액이 모두 빠져나갔다. 유진은 그대로 침대에 무너져 숨을 몰아쉬었다. 정액으로 흥건해진 손가락이 파르르 경련했다.
페로몬으로 녹아내린 폐부가 호흡을 방해했다. 밤새도록 혹사당한 구멍과 엉덩이가 지독하게 아팠다. 어지러운 시야가 돌아오지 않아 제대로 사고를 이어가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래서였다.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으, 흑. 아으….”
흉통이 심장을 그러쥐었다. 유진은 가슴께를 누르고 이마를 침대에 박았다. 베개를 움켜쥔 주먹이 희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미션이 아니더라도,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이 몸을 범하는구나.
오메가를 보는 듯하던 눈이 착각이 아니었구나.
너무 늦었다.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나도 늦었다. 믿고 싶지 않았기에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보이고 있었는데도 못 본 척을 했다.
“……끄, 으윽…. 흐….”
억눌린 신음은 모조리 침대에 먹혔다. 비탄에 잠긴 눈물이 시트를 적시고 얼룩을 남겼다. 유진은 쏟아지는 울음을 막지 못했다. 여태까지 제 안에 끝없이 담고 또 담았던 감정의 물길이 결국에 댐을 부순 것처럼,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 몸이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무언가가 달랐을까. 희미한 물음은 흘러내리는 눈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기절하듯 잠든 유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액을 빼낸 덕분인지 전류처럼 오르던 자극감은 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엉덩이를 휘감던 열기가 전신으로 옮겨붙은 상태였다.
기도를 드나드는 공기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메마른 입술을 축인 유진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가 침대에 눌리자마자 새된 신음이 터졌다. 그대로 고꾸라져 안면으로 침대에 떨어졌다.
“으으…. 흑.”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은 한참 흐느적거린 끝에 억지로 침대를 밀어냈다. 시트에 눌렸던 뺨이 떨어지자 눈매에 말라붙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소금기가 느껴지는 알갱이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겨우 내려섰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몸을 잠식한 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개골 내부가 웅웅 울렸다. 안압이 높아진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숨을 골랐다. 한참 그렇게 호흡을 다스리자 조금씩이나마 현기증이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부어오른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뜬 유진은 방문을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까. 건호는 물론 다른 부대원들조차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제 엉덩이를 때리고 페로몬을 휘둘렀던 그들의 손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방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태까지도 잘 버텨냈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며 삐걱거리는 팔다리를 움직였다.
유진은 샤워를 마치자마자 1층으로 향했다.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어 계단을 조심히 내리고 곧장 부엌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에서는 어렴풋이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일까. ……건호일까?
혀가 버석거렸다. 유진은 부족한 타액을 모아 삼킨 후 구두 밑창으로 바닥을 밀어냈다.
천태운은 저택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저곳에 있는 것은 아마 부하일 것이다. 긴장할 이유가 없는데 거실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심장이 조여들고 폐부가 비틀렸다. 목울대로 침을 넘겨보아도 맥동은 계속해서 빨라지기만 했다.
부대장이 부대원을 꺼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유진은 자리에 우뚝 섰다. 양손을 활짝 펼친 후, 뺨을 내려쳤다. 짜악!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거실에서 펄럭이던 소리가 멈추었다.
“대장?”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승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연갈색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건호가 아니었다. 유진은 내심 안도하며 뺨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제 일어났어요? 신제원이 아침에 찾아갔다가 대장 열이 펄펄 끓어서 몸만 닦아놓고 나왔다고 하던데.”
“……제원이가?”
전혀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샤워할 때 엉덩이가 깨끗했던 것도 같다. 새벽에 깼을 때는 내부의 정액만 긁어내고 곧장 기절했으니 아마 둔부가 온통 정액으로 범벅이었으리라. 그곳을 벌려 정사의 흔적을 닦았을 제원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유진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남의 정액을 닦아 줄 정도의 부하가 어제는 왜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유진이 상념에 빠진 사이, 승일이 가까이 다가섰다. 창백한 유진의 안색을 훑어보고 손을 뻗었다. 얼굴을 향해 큼지막한 손이 다가왔다. 유진이 바싹 얼어붙었다.
“아직 열나는 것 같은데. 엉덩이 많이 맞았어요?”
이마에 손길이 닿았다. 돌연 시야가 암전했다. 이마를 감싼 체온이 돌변하여 목뒤를 짓누르고 알파 페로몬을 퍼부었다. 희열로 비틀리던 건호의 입술이 번쩍이며 뇌리를 파고들었다.
“……―!”
발작하듯 유진이 승일의 손을 쳐냈다. 찰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
“…….”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숨을 몰아쉬던 유진의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조소하던 건호의 모습이 사라지고, 놀란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승일이 선명해졌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이성이 돌아왔다.
“……미안.”
유진은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물끄러미 보던 승일이 입을 열었다.
“대장, 아무래도 가서 쉬는 게 낫겠다. 방에 가서 엉덩이 까놓고 있어요. 약은 없어도 물수건이라도 올려 줄게.”
“됐어….”
“고집 그만 부리고. 이러다가 넘어지겠네.”
피식 웃은 승일이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바닥을 향해 반쯤 기울었던 몸이 도로 세워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흐물거리는 유진이 재미있는지, 승일은 눈을 길게 좁히며 따끈한 목선을 살살 쓸어 올렸다.
“흣.”
부드러운 살결이 지문 아래 찰싹 감겼다. 슬쩍 문지르자 유진의 눈꺼풀이 파들거렸다. 열감과 뒤섞인 감각이 머리를 흩뜨렸다. 승일의 입매에 긴 미소가 걸렸다.
“데려다줄게요.”
허리를 숙인 승일이 유진을 번쩍 들었다.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긴 유진이 당황하며 팔을 퍼덕거렸다. 그러자 승일이 혼내듯 볼기를 툭 건드렸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픔이 올랐다.
“백, 승일! 흑―….”
“냄새 좋네.”
승일이 머리카락 사이로 코를 들이밀었다. 간지러운 숨결이 두피를 긁었다. 유진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래 봐야 벗어나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 버둥거리는 꼴이라, 승일은 소리 내어 너털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유진의 저항은 사그라들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탓에 현기증이 강해진 탓이었다. 수그러드는 머리통을 보며 흡족하게 웃은 승일은 바지 위로 유진의 따끈한 볼기를 어루만졌다. 유진은 움찔움찔 몸을 떨면서도 그 손을 떨쳐내지 못했다.
“백승일.”
2층에 다다랐을 때, 거친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울렸다. 숨을 헐떡이고 있던 유진이 눈꺼풀을 들었다. 복도 끝에 건호가 서 있었다. 그는 승일과 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빠르게 걸어와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손바닥을 보자마자 몸이 굳었다. 유진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건호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무슨 상황이냐? 이건.”
“뭐기는, 대장이 아파 보여서 방에 도로 데려다 놓으려고 올라왔는데.”
날 선 눈매가 유진에게 향했다. 발긋하게 열이 오른 뺨과 축축한 이마를 훑고 내려가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진득하게 보았다. 유진은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잡혀 있는 손목이 잘게 떨렸다.
“줘. 내가 할 테니까.”
강제적으로 끌려간 유진이 건호의 품에 안겼다. 묵직한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유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엉덩이 근처를 받쳐 든 손길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건호는 딱딱하게 굳은 몸을 추켜 안고 승일을 돌아보았다. 살벌하게 날을 세운 눈빛이 경고의 의미를 내뿜었다. 재밌다는 듯 웃은 승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러던가. 대신 제대로 눕히고 물수건이나 해드려. 아픈 사람 상대로 또 정신 못 차리고 개새끼처럼 허리 흔들지 말고.”
“쓸데없는 소리.”
건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복도를 내딛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안긴 탓에 맞닿은 건호의 몸이 바위처럼 느껴졌다. 유진은 차게 식은 손을 말아 쥐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각진 하관이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왔다.
뭔가, 무언가라도 말을. 입술을 달싹인 유진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신제원은?”
앞을 향해 있던 눈동자가 내려왔다.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입을 꾹 다물자, 파리한 안색을 훑어본 건호가 느지막이 답했다.
“방에 있습니다. 중위님 깨실 때까지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
희미한 대답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깔렸다. 유진은 적막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숨을 골랐다. 달음박질치는 심장이 조금 가라앉고 나니 또 현기증이 올랐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흘러내렸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아마 몸살 기운 같았다.
유진은 힘없이 머리를 툭 내렸다. 열 기운이 더욱 심해져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기우는 머리통을 내려다본 건호는 흘러내리는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 흑. 짧은 신음이 바들거리며 올라 건호의 뺨을 간질였다.
입꼬리를 비튼 건호는 유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으, 흣…….”
몸이 침대에 내려졌다. 유진은 건호가 덮어 주는 이불을 쥐고 눈을 가물거렸다. 시야가 너울처럼 일렁였다. 열이 점점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중위님.”
건호가 손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바닥이 얼굴로 다가왔다. 유진은 파드득 고개를 피했다. 이마를 짚으려던 손길은 허공을 헤집고 그대로 멈추었다.
“…….”
몸이 경직되었다. 혹여 페로몬이라도 느껴질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색색거리자 건호의 눈매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중위님.”
“…….”
“물수건 가지고 오겠습니다.”
가까워졌던 손이 도로 멀어졌다. 유진은 건호가 방을 나설 때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다가,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숨을 토해내며 눈꺼풀을 들었다. 긴장으로 바짝 수축했던 근육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문득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어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 정도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반응이 과했다. 특히나 승일에게서 건호를 겹쳐 본 것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건호에게는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물어본 것이 없다. 지하실 열쇠나 정조대의 건이나, 물어보려고 할 때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제 상태를 보아서는 그게 가능하기는 할지 의문이 들었다. 손 하나에 꼼짝도 못 할 정도로 경직되는 정신머리로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유진은 목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상체를 세우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신음이 절로 나와 미간을 찡그렸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열기가 근육을 갉아 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억지로 세웠다. 위태롭게나마 균형이 잡히자마자 문을 향해 걸었다. 더 늦추면 이제 정말로 물어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만약 실로 건호가 모든 일의 주범이라면 받아들이리라. 그를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왜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화는 나눠 보리라. 그게 부대장으로서 내보일 수 있는 책무이자 의지였다.
겨우 문까지 도달한 유진은 문고리를 돌렸다. 소음 없이 방문이 열렸다. 고작 몇 걸음밖에 안 걸었는데 벌써 숨이 찼다. 아무리 열이 있다지만 형편없는 체력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벽을 짚고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잦아들자 희미하게 대화 소리가 들렸다.
“왜, 또.”
“중위님 상태는 어때.”
“아직 열은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건호와 제원의 목소리였다. 유진은 나서려던 발을 물렸다.
“어제도 알아서 하겠다고 해놓고 이 사달을 냈잖아, 이건호.”
“미션은 성공시켰어. 뭐가 문제야?”
“중위님이 저렇게 앓아누우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미션. 그러고 보니 보상이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해 보지 않았다.
유진은 흘끗 벽에 달린 금고를 보았다. 생각난 김에 지금 확인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괜히 방치했다가 또 분실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뜨거운 호흡을 뱉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귀를 파고든 음성이 발길을 잡아챘다.
“혼자 고결한 낯짝 하고는…. 네가 러트 사기 친 거 모를 것 같아?”
뭐라고? 제 귀를 의심한 유진이 다시 문을 돌아보았다.
“그 발정제 먹은 새끼 본 적이 있어. 그때 나던 특유의 냄새도 말이야. 지독해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더군.”
“화제 돌리지 마.”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박주건한테 알랑방귀 뀌고 다닌 보람이 제법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서도 백승일 그놈한테 매번 밀리는 거 한심하지도 않냐?”
건호가 제원의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쳤다. 성큼 다가오는 발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유진은 황급히 침대로 되돌아가 몸을 눕혔다. 이불을 덮자마자 문이 열리고 건호가 들어왔다.
느릿한 눈길이 유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등허리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부디 그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표정을 추스르자, 옆구리에 대야를 낀 건호가 침대 옆에 다가섰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물수건이 이마 위로 올랐다. 들끓는 이마에 비해 수건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움찔거린 유진이 시선을 들었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내리깔렸다.
“중간중간 들어와서 갈아 드리겠습니다. 주무세요.”
유진이 느리게 끄덕였다. 건호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는 유진을 길게 응시하더니, 입매를 기울이며 방을 나섰다. 달칵. 짧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윽.”
기다렸다는 듯 두통이 올랐다. 지끈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뇌가 날붙이로 난자당하는 느낌이었다. 유진은 옆으로 몸을 굴리고 이마를 그러쥐었다. 축축한 물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러트로 사기를 쳤다. 확신에 차 있던 건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돌았다. 제원이 발정제를 먹어서 러트를 일으켰다.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는 대화였다.
박주건은 자신이 발정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천태운 또한 그 말이 맞는다는 듯한 암시를 흘렸다. 둘 다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건호가 제원을 추궁하는 듯이 말할 이유가 없다.
제원이 일으켰던 러트가 발정제로 인한 것이라면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유진은 오메가 발정제를 먹고 이틀 앞서서 히트를 터뜨렸고, 제원 역시 발정제를 통해 두 번의 러트를 일으켰다.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대체 박주건에게 알랑방귀를 뀐다는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제원이 나서서 주건에게 발정제를 받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알 수 없다.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믿고 있었던 사실들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유진은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내면 깊은 곳을 단단히 받치고 있던 신뢰에 균열이 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도 선득하고 낯설었다. 마치 온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띠리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길게 이어지는 소음이 고막을 푹푹 쑤셨다. 유진은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간신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
-밤새 섹스를 즐긴 것치고는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유진은 입술을 경련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커먼 감정이 이성을 오염시켰다. 석고처럼 굳은 머리가 파스스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이런 정신으로 대화해 봐야 주건에게 휩쓸리기만 할 것이 뻔했다.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하, 왜 입 다물고 있어. 뭐라도 말 좀 해봐. 기분은 좀 어때?
“……무슨 기분.”
-말했잖아, 나는 발정제를 먹이지 않았다고. 네가 저 셋 중에 가장 신뢰하던 놈이 신제원이었지, 분명?
목구멍 안에 독이 들어찼다. 식도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유진은 쓴 물을 타액과 함께 겨우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에 계속 갇혀 있었어. 네가 주지 않은 이상 알파 발정제 따위, 가질 방법이 없어.”
-글쎄. 원래 소지하고 있었다면 저택까지 갖고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여태까지라면 망설임 없이 내뱉었을 말이 목구멍에 탁 걸려 나오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어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비정상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수화기를 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요즘은 신뢰하는 사이에 서로를 속이고 구멍을 범하기도 하나 보지?
“……그만해.”
-무슨 일이 있어도 믿는다더니 왜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 행세야. 지금도 말할 수 있겠어? 네 부하들을 누구보다 신뢰한다고.
“그만, 하라고.”
유리 파편처럼 조각난 감정이 심장을 푹 찔렀다. 아득한 고통이 혈액이 되어 목을 타고 올랐다. 인지할 새도 없이 뺨이 젖어 들었다. 뚝뚝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고여 침대로 추락했다.
고통의 원인은 주건의 저열한 조롱이 아니었다. 동료를 향한 신뢰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것이 느껴져서, 여태까지의 추억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비참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주건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멀어져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수화기가 바닥과 충돌했다가 튕겨 올랐다. 유진의 어깨가 둥글게 말렸다. 젖어가는 얼굴은 침대를 향해 수그러들었다.
‘눈은 뜨라고 있는 겁니다, 중위. 귀는 들으라고 있는 거고.’
천태운의 말이 맞았다. 유진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다. 명확한 진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도 가능성을 운운하며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제 더는 회피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고통스러웠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유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마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렴풋이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진은 다리를 재촉해 태운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 태운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가 돌아오는 주기는 늘 불규칙적이었고, 마지막으로 본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아마 당분간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파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어 태운의 방문을 열었다. 어둠에 잠긴 방에 들어서 간신히 소파에 몸을 내렸다.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열기가 오르는 피부 위로 태운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기다림은 길었다. 몇십 분 같기도 했고, 몇 시간 같기도 했다. 어쩌면 며칠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열이 계속해서 오르는 바람에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의식을 실타래처럼 가닥가닥 놓쳤다가 되찾기를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 감각은 엉망으로 뒤집혔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차게 식은 손에서 경련이 차츰 잦아들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달칵거리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유진은 무릎에 처박고 있던 이마를 들었다. 탁한 어둠을 가르고 거대한 인영이 들어섰다. 역광이 비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묵직한 걸음이 바닥을 짓누르며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유진의 눈동자도 점점 더 위로 향했다.
“읏.”
뺨을 슬쩍 문지른 손길이 턱을 감쌌다. 그리고 소금기가 꺼끌하게 남은 볼을 문질렀다. 단단한 엄지는 안구를 찌를 듯이 다가와 속눈썹을 간질였다. 뭉친 채로 굳어 있던 속눈썹이 부드럽게 풀리며 손톱에 살살 긁혔다.
천태운이다. 얼굴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진은 바싹 마른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속눈썹 사이사이를 문지르던 엄지가 눈두덩이로 올랐다. 야트막한 압박감이 눈꺼풀을 안구에 눌러 비볐다. 두툼하게 부기가 오른 눈꺼풀이 이리저리 눌리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유진은 남은 한쪽 눈으로 태운을 올려다보았다. 묵직하게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친 듯했다.
“그날, 정조대를 했던 날.”
안구를 압박하는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부기를 다스리는 듯한, 혹은 시력을 앗아가려는 듯한 지배감이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얇은 눈꺼풀을 뚫고 알파의 기운이 파고들었다. 뻑뻑했던 눈알이 점차 뜨겁게 달아올랐다. 꼭 눈물이 나오기 직전처럼 습기와 열기를 머금었다.
슬프기 때문이 아니다. 페로몬 때문이다. …천태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미련과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간신히 질문을 끝마칠 수 있었다.
“……나를 범한 것이 누구입니까.”
늦게나마 이제는 알아야 했다.
유진은 고요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감정을 억누르고 공기를 살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보이지 않던 안광이 얼핏 시야를 스쳤다.
태운의 동공이 먹이를 앞둔 포식자의 것처럼 가늘어졌다. 곧 뺨을 감싼 손에서 알파 페로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맞닿은 부위로부터 신경이 화륵 타오르며 열기를 올렸다. 크게 흠칫거린 유진이 입술을 물었다.
뺨을 문지르던 손이 천천히 내려 목덜미를 감쌌다. 알파 향도 더욱 강해졌다. 현기증이 불쑥 치솟았다.
“으흑.”
잠시 가라앉았던 열 기운이 뇌리를 쾅쾅 울렸다. 유진이 크게 휘청거리자, 태운은 무너지는 몸을 받치고 뒷머리를 감쌌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길이 두피를 간질였다. 흐트러지는 흑발 사이사이로 질척한 페로몬이 감겼다.
이미 정상이 아닌 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형편없이 녹아내렸다. 뒤가 따끔하게 부어오르고 애액을 흘리는 것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헐떡이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태운이 중얼거렸다.
“열이 나는군요.”
“…아픈 사람과, 하는 건…. 싫습니까.”
눈썹을 들썩인 태운이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휙 끌려간 몸이 단단한 상체와 부딪혔다. 유진은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운의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헐떡였다. 숨이 가빠질수록 폐를 타고 들어오는 향기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졌다.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품에 안은 채, 태운은 뜨끈한 몸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척추 선을 타고 느리게 내려간 손길이 엉덩이를 덮었다. 얄팍한 바지 아래로 볼기가 짓뭉개졌다. 돌연 통증이 벼락처럼 올라 유진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아윽―!”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불구하고 손길은 더욱 강해졌다. 거센 악력이 살집을 이리저리 누르고 꼬집었다. 지난밤 겪었던 스팽의 고통이 낱낱이 드러났다. 엉덩이 살이 도려내지는 것만 같아 도저히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앞의 어깨에 매달렸다.
“으흑, 아윽! 흐으…!”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처럼 오르내린 손길은 점차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꼬리뼈를 뭉근하게 문지르고 구멍 위로 내려앉았다. 도톰하게 부푼 구멍은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달큼한 냄새가 났다. 태운은 눈을 기울이며 바지 위로 구멍을 살살 긁었다. 움츠러든 어깨가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처럼 파들파들 흔들렸다.
“읏, 흐!”
“여태까지처럼 수동적으로 굴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겁니다.”
볼기가 다시금 터질 듯이 쥐어 잡혔다. 통증이 척추를 역류했으나 엉덩이는 페로몬에 녹아내렸다. 상반된 두 자극이 휘몰아치며 허리를 울렸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과도한 열감이었다.
유진은 쏟아지는 페로몬을 속절없이 흡수했다. 혈관이 팽창하고 그 틈을 타 알파 향이 녹아내렸다. 태운은 손톱을 더욱 바짝 세워 주름 사이사이를 덧그렸다. 애액을 윤활액 삼은 손길이 구멍을 스칠 때마다 날카로운 열감이 발작하듯 올랐다.
“으흑…!”
감전당하듯 파드득, 튄 몸이 태운의 손 사이로 주륵 흘러내렸다. 유진은 소파에 엎어진 채 어깨를 들썩였다. 불타는 듯한 엉덩이를 더듬더듬 만져 보자 축축하게 젖은 천이 느껴졌다. 볼기는 바지 위로 슬쩍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전류가 올랐다.
눈을 질끈 감은 유진이 허공에서 주먹을 와락 쥐었다. 창백한 손을 향해 태운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자신 있습니까?”
“읏, 무, 슨 자신….”
“남창처럼 구멍을 벌릴 자신 말입니다.”
태운이 탐스러운 둔덕을 뭉근히 문질렀다. 쓰다듬는 것에 가까운 접촉이었지만 유진은 볼 안쪽을 와득 씹으며 몸을 떨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 위로 사포질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볼기를 한 차례 훑은 손가락이 다시 구멍을 건드렸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부어오른 구멍이 움칠거렸다. 태운은 그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찔꺽. 바지 위로 스며 나온 애액이 손가락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아, 으흐….”
“옷 벗고 엎드려서 구멍 벌리세요. 중위.”
살살 문지르던 손가락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실처럼 길게 늘어진 애액이 툭 끊겼다. 벌름거리던 구멍이 파르르 떨렸다. 바득, 소리가 나도록 소파 가죽에 손톱을 세운 유진은, 이내 창백한 손으로 옷가지를 하나둘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제복 사이로 울긋불긋한 나신이 드러났다. 애액으로 젖은 바지가 내려가고 얇은 속옷마저 떨어져 나가자 시뻘겋게 부르튼 엉덩이가 드러났다. 얇고 기다란 생채기부터 둔덕 전체를 뒤덮은 부기까지, 그야말로 적나라한 탐욕의 흔적이었다.
외설적인 그 모습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짙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태운은 유진이 그 이상 움직이지 않자 나직이 채근했다.
“구멍 벌리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워하는 눈빛에 반해 목소리는 냉랭한 명령조였다.
‘기어오르는 것을 안 좋아한다고 방금 말했을 텐데.’
불현듯 처음 그에게 범해졌던 날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발작하듯 숨을 삼킨 유진은 다급히 양손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차마 엉덩이를 건드리지 못했다. 터질 듯이 부어오른 부위를 만지는 것이 두려워, 경련하는 손이 차마 구멍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헤집었다.
“하 중위.”
“흐윽…….”
두렵다. 이대로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질 일이 두려웠다. 분명 쾌락에 짓눌려 또 제 의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치부를 벌리고 남근을 받으며 끝없는 절정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득한 시선이 뒷덜미에 내리꽂혀 결심을 종용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유진은 구멍 근처의 볼기에 손가락을 대고 양쪽으로 벌렸다.
“아, 으!”
상처가 비틀리며 구멍이 가로로 벌어졌다. 붉은 속살이 빠끔 모습을 내보이고 투명한 애액을 방울방울 흘렸다.
유진은 눈물을 머금고 신음을 억눌렀다. 눌린 볼기가 너무도 아팠다. 그런데도 알파 향에 취한 몸은 계속해서 달아올랐다. 통통하게 발기한 성기가 아랫배를 톡톡 두드렸다. 그것이 지독하게 수치스러웠다.
유진이 열망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태운은 느긋하게 바지 버클을 풀었다.
“구멍.”
“벌, 흑…. 벌리고 있잖습니까….”
“더 벌려. 손가락 쑤셔서, 안쪽까지 다 보일 정도로.”
“……!”
유진이 붉어진 눈으로 홱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장 후회했다. 소파에 납작 엎드려 있는 자세로는 저를 깔아보고 있는 태운이 까마득하도록 거대하게 느껴졌다.
맹수의 눈이 나신을 훑어내렸다. 갈퀴로 긁어내리는 듯한 오싹함이 허리를 타고 올랐다. 유진은 얼어붙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태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엉덩이 사이로 어마어마한 양의 알파 페로몬이 쏟아져 내렸다.
“허억―…!”
용암 같은 페로몬이 주름을 녹이고 내벽으로 번졌다. 애액을 찔끔찔끔 흘리던 점막이 작열감에 휩싸이며 급속도로 부어올랐다. 아득한 가려움이 내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아! 흑, 아, 흐읏!”
무형의 바늘들이 점막을 긁으며 돌아다녔다. 생채기가 길게 나고 피 같은 애액이 스몄다. 그 사이로 독처럼 알파 페로몬이 파고들었다. 살점이 모두 녹아내리고 지독한 열감만이 남았다.
“아, 아아――!”
가려웠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구멍 근처를 긁었다. 하지만 아무리 겉을 긁어도 가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갈증을 찾아 더 깊은 곳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래 봐야 주름 근처를 이곳저곳 문지르며 자극감을 더할 뿐이었다.
분홍빛이었던 구멍이 점점 붉게 익어갔다. 주름은 틈을 내보이며 애액을 질질 흘렸다. 이성과 수치심은 순식간에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었다. 가려움이 극에 달해 유진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태운은 페로몬을 조금 더 방출했다.
“어흑―, 아으…! 힉!”
화르륵 타오른 기도가 조여들었다. 왈칵 흐른 애액이 회음부를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인지할 새도 없었다. 의지를 배반하고 슬금슬금 움직인 손가락이 주름을 비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흐…! 아, 흑!”
유진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소리치는 이성과는 달리 점막은 침입을 반기며 희열을 머금었다. 벌레가 좀먹는 듯하던 가려움이 아주 미미하게나마 해소되고 대신 쾌락이 들이닥쳤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주었다.
푹. 주름 사이로 양손의 중지가 절반가량 밀려들었다.
“아아―…!”
“벌려.”
나직한 명령이 전신을 울렸다. 유진은 파들거리는 손가락을 양쪽으로 힘주어 벌렸다. 토실한 구멍이 비틀리며 길게 틈을 내보였다. 뻐끔거리며 열리는 구멍의 안으로 붉은 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윽. 흐으, 읏!”
내부에 고여 있던 애액이 주륵, 흘러나와 달큼한 향기를 방 안 가득 채웠다. 태운은 벌름거리는 구멍을 내려다보며 오메가 냄새를 음미했다. 텁텁한 연초나 난교장의 오메가들과 비교되지 않는 달콤함이 혀를 적셨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 맛이었다.
태운은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애액으로 흥건한 점막은 질척하고 뜨거웠다. 손끝으로 점막을 비벼 올리니 유진이 파득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 으…!”
녹진한 구멍은 저항감 하나 없이 손가락을 쭙쭙 빨아먹으며 찐득한 애액을 머금었다. 내부를 가늠하듯 문질러 본 태운은 금방 손가락을 빼냈다. 숨을 멈춘 채 떨고 있던 유진이 탄식을 흘렸다.
“가만.”
“으, 흣…?”
태운은 말랑한 볼기를 손 안 가득 쥐고 바짝 벌렸다. 하얀 손가락을 머금은 구멍이 빠끔거리며 더욱 크게 틈을 보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내벽은 비좁고 축축했다. 점막을 벌름거리며 움칠거리는 것이, 어서 성기를 먹여달라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입매를 기울인 태운이 구멍 위로 성기를 올렸다. 찐득한 점막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귀두 표면을 야금야금 빨았다. 화들짝 놀란 유진이 구멍을 벌리고 있던 손가락을 빼냈다. 태운은 기다렸다는 듯 볼깃살을 틀어쥐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푸욱―! 구멍이 동그랗게 밀려나며 그 사이로 거대한 남근이 밀려들었다.
“아아―! 흑, 아윽…!”
구멍은 빠듯했다. 애액으로 녹진하게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꽉 조여든 내벽이 침입을 거부하듯 귀두 앞을 꽉 막았다. 그곳을 툭툭 두드리자, 꿈틀거리는 내벽이 성기 표면에 매달려 애원했다.
이 이상은 안 된다고, 더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으흑. 아, 으윽….”
달뜬 신음 역시 살랑거리며 귀를 간질였다. 태운은 제 것에 비해 한없이 작은 비부를 내려다보다가, 엄지 끝으로 볼기에 난 생채기를 힘주어 문질렀다. 아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른 유진이 고개를 다급하게 흔들었다.
“열어.”
“흐으, 자, 잠시만….”
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거대한 페로몬의 파도가 밀어치듯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유진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허공으로 퍼드득 튀어 올랐다.
“――! 아아, 힉……!”
용암이 내벽 사이를 흘러내렸다. 고통과 유사한 열락이 신경을 장악했다. 공기로 전해지는 페로몬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내벽을 좀먹던 가려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대신 아득한 쾌락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유진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소파를 긁었다. 내벽으로 주입당하는 페로몬이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태운은 더욱 뜨끈해진 볼기를 주무르며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구멍을 가르고 남은 기둥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아, 아아…! 히윽, 아, 아―!”
뜨거운 구멍이 점점 더 벌어졌다. 찢어질 듯한 통증은 알파 향과 만나 쾌락으로 승화되었다. 주름진 내벽이 귀두에 길게 긁히고 눈앞이 번쩍이는 전율이 허리를 울렸다.
유진은 파들파들 손을 앞으로 뻗었다. 허공을 헤집는 손끝은 그 어떤 것에도 닿지 못했다. 볼기를 밀쳐내고 뿌리가 부욱, 파고들었다. 섬광과도 같은 절정이 내벽을 찢어발기며 고통과 두려움을 소멸시켰다.
그저 쾌락뿐이었다.
“아으흑―! 아으, 아! 흐으……!”
감전당한 것처럼 파득파득 튕기던 나신이 사정했다. 정액이 소파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 주인의 감각에 동조한 구멍이 쫄깃하게 조여들며 남근을 빨았다. 질척한 점막을 귀두에 비벼대며 오메가 페로몬을 듬뿍 묻혔다.
“후….”
나직이 숨을 흘린 태운은 천천히 페로몬을 줄였다. 성기에 꿰인 채 들썩이던 나신이 몸을 떨었다. 꿈틀거리던 구멍이 조금씩 말캉하게 감기고, 사정감에 파르르 들썩이던 하얀 성기도 쿠퍼액을 주륵 흘리며 가라앉았다.
애액으로 질척해진 내부는 아까보다 훨씬 찐득하고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배로 뜨거웠다. 갓 쪄낸 떡처럼 들러붙는 점막이 달큼하기 그지없었다.
뿌리를 씹는 구멍을 나른하게 내려다보던 태운은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흑! 으흐…, 앗, 아!”
통통한 구멍 사이로 굵은 살덩이가 드나들었다. 깊이 쑤실 때마다 내부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고, 주륵 뽑아내면 기둥 표면이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어 번들거렸다. 고통스러워하던 목소리가 금방 달뜬 신음으로 바뀌었다.
태운은 다시금 스팽의 흔적이 남은 볼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송곳처럼 파고드는 통증에 유진이 파드득 엉덩이를 뺐다. 하지만 한 걸음도 도망치지 못하고 도로 주욱 끌려갔다. 홍조로 뜨끈해진 뺨이 소파와 맞부딪혔다.
“윽흐, 아! 아으흑…!”
철썩철썩, 볼기가 태운의 골반과 맞부딪치고 남근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갈고리로 살점을 뜯어내듯 푹푹 흉기가 밀어닥쳤다. 눈앞이 점멸했다. 짙은 쾌락의 너울이 아랫배를 물들이고 사고를 점령했다.
부욱. 두툼한 귀두가 전립선을 짓뭉개듯 압박하며 파고들었다. 깊은 곳의 여린 내벽이 꼬집혔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금 사정감이 올랐다.
“으흐, 아…! 흐읏!”
유진은 도리질을 했다. 절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덜덜 떨며 소파를 쥐어뜯었다. 그러자 태운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철썩―! 매서운 손길이 볼기를 후려쳤다. 잠시 잊고 있던 아픔이 머릿속에 번쩍였다. 발작하듯 튕겨 오른 나신이 비명을 질렀다.
“아으흑―…! 아, 아아…!”
묽은 정액이 이리저리 튀기며 쏟아졌다. 절정감과 통증이 뒤섞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붉게 녹은 구멍은 고통을 호소하며 기둥에 엉겼다. 안 그래도 붉었던 볼기가 숫제 핏빛으로 물들어 도톰하게 올라붙었다.
태운이 먹음직스러운 살집을 주무르며 양쪽으로 벌렸다. 교접부가 비틀리며 애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움찔, 움찔. 절정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술렁임이 성기 끄트머리를 머금은 채 경련했다.
오동통한 구멍이 흐느끼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태운은 잠시 거두었던 페로몬을 다시 개방했다.
“허윽, 아―! 히윽!”
두 차례의 절정을 겪은 오메가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자극이었다. 감전당한 것처럼 사지를 튕긴 유진이 고개를 젖혔다. 지독한 절정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본능적으로 세운 손톱이 소파의 가죽 위로 긴 상처를 남겼다.
“――……! 으, 아―.”
절정감이 수 초 동안 이어졌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이었다. 유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경련했다. 발발거리는 성기가 허벅지 사이에서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액은 나오지 않았다.
이 이상은 안 된다. 버틸 수 없었다. 절정으로 용해된 뇌가 너울 치며 울었다.
제발 그만, 이제 그만.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이 덜덜 떨며 뒤로 향했다. 필사적인 마음이 태운의 허벅지를 긁었다. 위기감을 감지한 몸은 진득한 오메가 향기를 팍, 튀기며 알파에게 달라붙었다.
“아으, 아, 으―…!”
왈칵. 귀두를 삼킨 구멍이 꿀 같은 농도의 애액을 뿜었다. 알파에게도 자극이 갈 정도로 농축된 페로몬이 성기를 감쌌다. 미간을 꿈틀거린 태운이 성기를 완전히 뽑았다. 녹진해진 구멍이 빠끔거리며 음탕한 내부를 드러냈다.
그 잠깐의 공백마저도 버티기 힘든지 유진이 소리 내어 흐느꼈다. 생채기로 가득한 엉덩이를 활짝 벌리고서는, 구멍 안을 긁어 제대로 사정시켜달라 애원했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살을 내보였다.
태운은 다시 자그마한 구멍 위로 귀두를 눌렀다. 말캉한 구멍이 동그랗게 벌어지며 귀두를 삼켰다.
“으흐윽…!”
느린 삽입이 이어졌다.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쫘악 갈라지며 남근을 머금었다. 다급한 신음이 소파를 두드리고 기둥을 빨았다. 태운은 애액으로 축축한 회음부를 엄지로 누르며 퍽 쑤셔 박았다. 덜컹 뛰어오른 유진이 고개를 확 젖혔다.
들썩이는 골반을 틀어쥔 태운이 거세게 들이박기 시작했다.
“하윽! 아, 아읏! 흐윽, 아…!”
흉기가 불도저처럼 안을 들이박으며 내벽을 갈랐다. 흉곽이 짓눌릴 정도로 쿵 박아 올린 귀두가 단박에 구멍 끄트머리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구멍을 활짝 열었다. 부욱, 긁힌 내벽에서 끔찍한 열감이 올랐다. 절절 끓는 점막을 기둥이 폭력적으로 비벼 올렸다.
유진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정했다. 파들파들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 물 같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뒤를 파고드는 압박감은 더욱 강해졌다. 배 속 깊은 곳이 망치질을 당하듯 쿵쿵 내몰렸다.
“흐아! 아, 힉! 아으…!”
태운은 절정하는 나신을 계속해서 범했다. 내벽이 쾌락을 터질 듯이 머금을 때까지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유진은 생각의 파편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랫배를 탁탁 두드리는 하얀 성기는 몇 번이고 달큼한 정액을 쏟아냈다.
쾌락에 지배당한 오메가의 눈에서 초점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스팽의 고통이 소멸되고 대신 알파의 압도적인 지배감만이 신체를 물들였을 즈음. 연이은 사정을 감당하지 못한 성기가 오줌 같은 묽은 정액을 찔끔찔끔 내뱉을 지경이 되어서야, 태운은 내벽의 깊은 곳에 사정했다.
“으흐아―…! 아, 아―!”
“윽.”
꽈아악. 질척한 내벽이 기둥을 강하게 조였다. 눈을 찌푸린 태운이 더욱 깊이 삽입하며 정액을 탁탁 흘려 넣었다. 마킹의 의지를 담은 알파의 정액이 내벽 사이를 타고 흘렀다. 오메가의 몸이 그것을 꿀꺽꿀꺽 삼키며 태운의 향기로 물들어갔다.
“으, 아으…….”
바들바들 경련하던 나신이 축 늘어졌다. 오물거리던 구멍도 조금씩 힘이 풀리며 뿌리에 부드럽게 감겼다. 태운은 유진의 몸을 잡아 돌렸다. 구멍 안에서 성기가 빙글 돌아가며 내벽을 긁었다.
“히윽, 흐!”
내내 소파에 박혀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뺨과 눈매가 온통 눈물로 범벅이었다. 여전히 절정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파들파들 경련하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렸다. 혼탁한 눈동자가 쾌락으로 가득했다.
“……흐, 으…….”
내벽이 정액으로부터 알파 페로몬을 흡수하면서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마 이대로 구멍을 막고 있으면 저 혼자서 다시 절정에 오를 터였다. 하지만 태운은 구멍을 해방하지 않았다. 대신 유진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삽입이 깊어졌다. 괴롭게 흐느낀 유진이 가슴을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통통하게 부푼 유두가 허공에서 바들거렸다. 농밀하게 익은 과육의 향기가 태운의 코를 자극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두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달뜬 호흡을 흘려내던 유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태운의 시선이 가느스름해졌다.
“…대, 답을…….”
그 사이로 나온 말은 예상을 벗어난 내용이었다.
태운은 피식 웃으며 잇새로 돌기를 가볍게 깨물었다. 괴로운 듯 눈썹을 무너뜨린 유진이 허리를 비틀었다. 태운은 움칠거리는 볼기를 그러쥐고, 조금 빠진 뿌리를 다시 삽입했다.
“아으흑―…! 아!”
구멍이 벌어지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유진이 파들파들 떨었다. 한껏 벌어지는 눈을 응시하며 태운이 나직이 속삭였다.
“……―원입니다.”
기나긴 절정은 한참 만에 물러갔다. 전신을 경련한 유진이 눈을 가물거렸다. 미소를 지은 태운이 손끝으로 팽팽한 구멍을 더듬었다. 달아오른 점막이 지문에 몸체를 들이대며 애교를 부렸다. 애달프게 움찔대는 점막을 간질이듯 쓰다듬으며, 태운은 재차 말했다.
“그날 당신을 범한 건 신제원입니다.”
“…….”
흐릿하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할딱이던 숨소리도 멎었다. 태운은 거뭇하게 침잠하는 눈을 직시하며 성기를 푹 쑤셔 박았다.
“하윽――!”
허공으로 튕긴 발끝이 소파를 밀었다. 유진은 등허리를 들고 위로 도망쳤다. 하지만 맥없는 저항은 금방 제지되었다. 오금이 붙잡히고 훤히 드러난 볼기 사이로 흉기가 드나들었다.
꾸직, 꾸직. 내부에서 알파의 정액과 애액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알파 향을 지독하게 머금은 액체가 귀두에 밀려 내벽 곳곳에 펴 발렸다. 점막이 온통 불타는 절정에 잠식되었다.
“아! 아―…!”
한순간 돌아왔던 이성이 산산이 조각나며 먼지처럼 흩어졌다. 맑아졌던 눈 또한 절정감에 흠뻑 취해 물렁하게 풀렸다.
퍼억! 거센 삽입이 부어오른 점막을 찢어발겼다. 허리가 낭창하게 휘고 손발이 오므라들었다. 흐으윽, 히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목울대를 비틀고 흘러나왔다. 허공으로 통통 튕기는 성기가 고통스럽게 발발거리며 묽은 액체를 흘렸다.
“……으, 흑. 아―….”
고통스러운 절정이 길게 이어졌다. 유진은 자지러지며 엉덩이를 높이 들었다. 팔다리가 공기를 헤집고 구멍은 수축하며 남근을 꽉꽉 씹었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신체가 멍한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후―….”
의식을 잃은 몸이 추락하듯 소파에 무너졌다. 성기가 주륵 빠져나갔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알파 페로몬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정액이었다.
태운은 검은 눈으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발긋한 나신이 제 향기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달착지근하던 오메가 향기는 가라앉고 그 대신 알파의 소유욕이 들어찼다. 그것이 느껴지는지 유진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움찔거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흐으…….”
바르작거린 유진이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가쁜 숨을 헐떡이고 더듬더듬 주변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보채듯 흐느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기색이었다.
태운은 손을 뻗어 유진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유진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미미한 페로몬이 공기와 함께 기도로 빨려 들어갔다. 태운은 제 냄새를 급하게 맡는 유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흐….”
유진은 뺨을 손바닥에 힘껏 누르고 향기를 맡았다. 할딱이며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썹을 무너뜨리며 몸을 잘게 떨더니, 태운의 손이 습기로 축축해질 즈음에야 진정하기 시작했다. 괴롭게 찌푸려져 있던 미간에서도 조금씩 힘이 풀렸다.
한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태운은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유진을 안아 옮겼다. 늘어지는 몸을 침대에 내리자 움직임을 느낀 유진이 작게 신음했다.
“자요.”
낮게 중얼거린 태운이 눈두덩이 위로 손바닥을 눌렀다. 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경련했지만, 태운이 다시 조금 페로몬을 흘려 주자 몸에서 힘을 풀었다. 가쁘던 호흡도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태운은 지친 듯 감긴 눈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소금기가 묻은 손바닥은 재킷에 쓸려 건조함을 되찾았다.
***
“씨발!”
격한 욕설이 복도를 날카롭게 울렸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거센 발걸음이 고요한 복도를 쿵쿵 울리더니, 다시금 저급한 욕지기가 공기를 울렸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승일이 얼굴을 내밀었다.
“시끄러워…. 이 시간에 뭐야, 이건호.”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문지른 승일이 반쯤 감긴 눈을 떴다. 흘끗 돌아본 건호는 혀를 강하게 차며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설명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재차 묻는 대신 복도를 둘러보니 활짝 열려 있는 천태운의 방문이 보였다.
뒤이어 낯익은 냄새가 느껴졌다. 마킹 당한 오메가의 냄새였다. 이 저택에 오메가라고는 한 명밖에 없으니 왜 건호가 이 새벽에 길길이 뛰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승일은 가라앉은 눈으로 방문을 응시했다. 어둑한 방 안쪽은 그림자에 싸여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독한 알파 향 사이로 미미하게 섞여드는 달큼한 향기는 저곳에 유진이 있음을 짐작게 했다.
달칵. 옆의 방문이 열렸다. 잠기운 하나 없는 모습으로 나온 제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의 상황을 둘러보다가 천태운의 방에 눈을 고정했다. 삭막한 공기가 복도를 떠돌았다.
“…….”
열린 방문과 그 안으로 얼핏 보이는 어둑한 내부, 그리고 복도를 적신 마킹 페로몬을 따라 느릿한 시선이 흘러내렸다. 그 누구도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느끼는 바는 동일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셋은 몸을 돌렸다. 건호는 욕실로, 승일은 1층으로, 그리고 제원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극우성 알파의 마킹 흔적이 일렁이는 방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 수 있는 알파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오메가가 깨어나 저 방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 이후의 일도 말이다.
***
유진은 여덟 시를 채 넘기지 않은 시각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닦아내듯 몇 번 눈을 깜빡이니 어둑한 방의 모습이 머리에 들어왔다. 태운은 방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적막만이 가득한 방에서 홀로 누워 색색거리던 유진은 돌연 찾아드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윽―….”
득달같이 달려든 통증이 하반신을 중심으로 퍼졌다. 망치로 두드리고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듯한 아픔이었다. 신음을 삼키며 이불을 밀어내자 울혈과 손자국으로 가득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어제의 일을 증명하는 난잡한 광경이었다. 정신이 대번에 또렷하게 돌아왔다.
이를 악문 유진은 조심히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눌린 엉덩이가 둔탁한 통증을 호소했다. 찌릿찌릿한 아픔이 볼기를 적셨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참을 만했다.
두어 번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태운은 보이지 않았다. 저택을 뜬 모양이었다.
“하아….”
탄식하듯 숨을 토한 유진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체력이 그야말로 바닥을 기었다.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렸고 흉기를 담았던 구멍은 아픔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어제 몸에 들끓었던 열 기운이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손을 뒤로 돌려 더듬더듬 엉덩이를 건드려 보았다. 무언가 미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액인가 싶었지만 아닌 것 같았다. 끈적하고 기름진 것이, 연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천태운이 발라 주었을까. 찝찝한 손끝을 내려다보던 유진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이로써 두 번이 되었다. 정보를 대가로 다리를 벌린 것이 말이다. 충동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가 남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욕실에 발을 들이자 불현듯 제 위에서 신음하던 태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
유진은 고개를 비틀었다. 거울에 자신의 나신이 비쳐 보였다. 몸을 뒤덮었던 정액과 애액은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도 비교적 깨끗했다. 다만 온몸에서 태운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바로 곁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간밤의 정사는 지독하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무섭도록 몰아치는 쾌락에 울며 발버둥을 쳤었다. 그 탓일까, 죽을 것만 같았던 가슴의 고통이 조금은 사그라든 것 같았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다.
유진은 보송한 피부를 매만지다가 샤워기를 틀었다.
‘그날 당신을 범한 건 신제원입니다.’
나른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찬물과 함께 정수리로 떨어졌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냉수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막연한 믿음이었으나 태운이 거짓말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제원이 주건과 손을 잡았고 정조대를 벗겨 미션을 실패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지하실 열쇠는 건호가 쥐고 있다. 지하실에 있던 오메가 발정제도 뜯겨 있다.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건호는 억제제도 분실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숨기는 것일까?
‘이번에는 그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하시죠. 누가 이 구멍을 채웠는지.’
플래시백처럼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고 구멍을 범하던 건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스럽게 우는 유진을 억누르고 제국군 제복의 벨트로 엉덩이를 후려치며 즐겁다는 듯 웃던 그의 눈빛이 똑똑히 기억났다.
시린 물줄기가 뺨을 가로질러 턱에 맺혔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과 충돌하여 산산이 부서졌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처음 그가 유진을 강제로 범했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으나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내린 탓에 그가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일이 러트를 일으키는 모습을 지척에서 보았으니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애초에 유진의 역량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건 형질의 문제였다.
“……―.”
차게 식은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문질렀다. 정조대 사건의 범인은 제원이다. 그리고 알파용 발정제를 복용해 유진의 눈을 가렸던 것 또한 제원이다. 적어도 그 두 개만큼은 확실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유진은 한기 스민 손을 움직여 몸을 닦았다. 마킹이 지독하게 남은 피부를 문지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둔부의 끈적임을 닦아냈다. 바디 워시의 향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알파의 향기를 닦고 또 닦았다.
피부가 다 부르트도록 닦아내도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향기가 맥동하는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심장 박동이 한 번씩 크게 울릴 때마다 관통된 부위로부터 시뻘건 혈액이 울컥울컥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만큼 요동치는 가슴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유진은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물로 길었던 샤워를 마쳤다.
***
부하들은 모두 거실에 모여 있었다. 계단을 내려선 유진은 가만히 공기를 살폈다. 셋 모두 조용했으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벌써 오전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으니 아마 냄새만으로도 태운의 방문을 알아차렸을 테다.
“대장.”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서자 승일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제원과 건호의 시선도 따라 올랐다. 제원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건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눈빛은 차마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막 관계한 오메가가 다른 알파에게 마킹당한 박탈감. 그 정도는 본능에 기인한 바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건호가 표출하는 분노는 명백히 그 이상이었다.
유진은 그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신제원 따라와.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기길래? 저도 같이 듣고 싶은데요, 대장.”
“너희는 여기에 있어.”
건호의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다. 알파의 노기를 느낀 몸이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약해진 신체는 민감하게 반응해 솜털을 바짝 세웠다. 바지에 갇힌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올라와, 신제원.”
발등을 타고 오르는 두려움은 애써 억눌렀지만,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유진은 먼저 방에 돌아와 앉았다. 따라오겠다던 제원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적막한 공간에 홀로 앉아 있으니 시시각각 몸이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툭툭. 손끝의 거스러미를 건드리자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맺혔다. 붉게 맺히는 핏방울을 흐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피멍과 생채기로 뒤덮인 엉덩이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고 제원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찻잔 두 개와 티포트가 들려 있었다. 저걸 준비하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유진은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르는 제원을 응시했다. 담갈색의 맑은 액체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찻잔에 반쯤 담겼다. 제원은 그것을 유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은은한 향기가 공기를 타고 올라 코를 간질였다. 찻잔을 내려다본 유진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라벤더차였다.
“……처리하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드셔도 괜찮습니다.”
왜? 라는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유진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향기로 가득한 찻물이 입술을 두드리고 혀를 적셨다. 상황과 맞지 않게 고급스러운 향은 퍼석한 입안을 축이고 식도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질이 좋은 차였다.
몇 번 더 입을 축인 후 조용히 찻잔을 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구나.”
“…….”
“왜 그랬어.”
유진은 건조한 시선으로 제원을 보았다. 처음 만났던 날 이래로 단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 없는 든든한 아군의 눈빛이 조명 아래 반짝였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재차 물었다.
“왜 그런 거냐.”
“…….”
“박주건이 안전이나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어? 협조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나? 아니면, 정권이 뒤바뀌었을 때 좋은 자리를 보장하기라도 한 건가?”
유진은 간절한 마음으로 생각나는 가능성을 줄지어 뱉었다. 그중 하나라도 정답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원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두 답이 아니었다.
“왜……. 변한 거야.”
제원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선명했다. 한창 오메가인 유진에 대한 핍박이 제국군 내부에 만연해, 안면이 없는 이라도 유진을 보자마자 소문의 오메가 중위임을 알아차리고 비웃으며 지나가던 시기였다.
그때 제원은 고지식하게도 유진을 까마득한 상관처럼 대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던 유진의 부대에도 거리낌 없이 들어와 누구보다 열심히 명령에 따랐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흔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바뀌게 만들었을까.
유진은 용솟음치는 고통을 막기 위해 볼 안쪽을 콰득 씹었다. 비린 쇠 맛이 향긋한 꽃향기를 뒤덮었다. 꼭 유진이 이상적인 바람에 잠겨 있는 사이 몸집을 부풀린 잔혹한 현실 같았다.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찻잔이 탁한 연기를 뿜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를 지나, 유진은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얄팍한 기대가 경계심 저변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제원의 눈을 마주하자 금방 푸스스 식어 사라졌다.
“중위님을 처음 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진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영락없는 알파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