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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 (10/22)

이변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분명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신체와 정신을 잇는 신경의 가닥가닥이 끊긴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위에 눌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통증이 오르기 시작했다. 지독한 몸살처럼 밀려드는 근육통에 끙끙대고 나서야 유진은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곧이어 눈이 떠졌다. 안구에 풀을 바른 것처럼 끈끈하게 들러붙는 눈꺼풀을 겨우겨우 움직여 다섯 번쯤 깜빡이니 드디어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무늬 하나 없는 건조한 천장이 또렷하게 보였다.

“…….”

통증에 열감이 더해졌다. 악귀처럼 휘몰아치는 작열감이 아니라, 여린 피부가 연달아 쓸려 남은 마찰열이었다. 약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저릿저릿한 열감은 콕 집어서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온갖 곳에서 느껴졌다. 핏기가 얼룩덜룩한 목덜미나 짓이겨진 유두, 거대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배 속을 뒤집어놓았던 원초적인 갈증만큼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흣.”

바들거리는 팔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둑한 방 안에 태운은 보이지 않았다. 멀찍이 테이블 위에 있는 차 세트만이 조명을 비춘 듯 선명히 보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유진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퉁퉁 부은 구멍 사이로 진한 정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엉덩이 골을 타고 흐른 액체는 침대 시트에 스몄다. 얼룩지는 순백색을 내려다본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건조한 뺨을 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손 하나 까딱할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기억이 잔혹하도록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제 유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통에 저항하기는커녕 곧바로 굴복하여 매달렸다. 상대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괴로움을 덜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원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페로몬을 흩뿌렸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정도로 향을 뿜어대는데 거부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제원을, 거기에 더해 건호까지. 모두 휘말리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태운에게 찾아가려고 한 것이다. 같잖은 수치심에 발목이 잡혀 질질 끌었던 시간이 독이 되었다. 저를 보던 제원과 건호의 눈빛이 눈앞을 스쳤다.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

결코 히트를 얕보지 않았다. 그러나 무지했다. 그건 결코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갈증에 몸부림치며 범해 달라 애원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이명처럼 낯설게 울려 퍼졌다.

‘제, 발, 히으…. 도, 도와―.’

“―윽.”

테이프에 녹음한 것처럼 지직거리는 음성이 귓바퀴에 대고 속살거렸다. 입술을 와득 깨문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진득한 목소리가 뇌수를 울렸다.

‘뭘 도와줄까요.’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리던 단단한 손길이 되살아났다. 유진은 다시 아래를 보았다. 흘러나온 정액은 완전히 시트에 스며 희미한 향만이 피어올랐다. 알파 페로몬이 모두 체내에 흡수된 탓이었다.

‘정신 잡으세요. 좆물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깊이 쑤셔 박힌 성기가 정액을 쏘아냈을 때, 갈증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여태껏 괴로워한 것이 거짓말처럼 숨통이 트였다. 그 해방감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아직도 그때 느낀 전율이 배 속 깊이 느껴졌다.

“…….”

자칫하면 좋지 못한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유진은 축축한 엉덩이를 대충 닦아내고 얇은 이불을 둘렀다. 그리고 욕실로 직행했다. 얼음처럼 투명한 욕실의 거울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눈에 담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샤워기 아래에 서자마자 바디 워시를 손바닥 넘치도록 짜내 피부에 문질렀다. 울혈 위에 덧씌워진 잇자국은 새하얀 거품에 가려졌다. 하지만 유진은 곧 신음하며 손을 멈추었다. 아래에서 새어 나온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리를 뱀처럼 감싸며 흐른 정액이 발목을 적셨다. 아킬레스건을 느릿하게 쓸고 지나간 액체는 발등을 적시다가 쏟아지는 물줄기에 희석되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구멍과 배수구를 길게 잇는 오욕의 흔적이 안구를 통과하여 뇌로 쑤셔 박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유진은 차게 식은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푹 밀어 넣었다.

“으흑….”

내부는 여전히 고여 있는 정액으로 질척했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지로 손가락을 벌렸다. 그러자 조금 열린 틈새로 남아 있던 정액이 투둑 떨어졌다.

습기로 가득한 욕실에 미미하게 알파 향이 번졌다. 정액으로 젖은 손가락도 화끈거렸다. 하지만 유진은 손가락을 굽혀 거침없이 내부의 정액을 긁어냈다. 예민해진 점막이 긁힐 때마다 기립근이 벌벌 떨렸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마침내 배 속이 텅 비고 내벽이 아우성을 칠 때쯤에야 유진은 손가락을 뽑아냈다.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물에 흘려보내고, 다시 바디 워시를 짰다. 진한 거품은 거듭 피부에 박박 문질러졌다.

몸속 깊이 스민 알파 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

히트는 말끔하게 진정되었다. 어제 그렇게 격렬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샤워까지 하고 돌아오니 그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같은 컨디션으로 회복되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던 알파 냄새가 잊을 만하면 올라와서 코를 찌르기는 했지만, 그 냄새로 인해 자극을 받는 일은 없었다. 속칭 마킹이라고 부르는 그 페로몬을 오메가 본인이 느끼기란 본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상태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거칠게 범해진 목은 부어 화끈거렸고, 뒤는 차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로 부어올랐다. 샤워 후 태운을 찾는다고 온 저택을 돌아다닌 탓에 더욱 그랬다.

역시나 태운은 저택에 남아 있지 않았다. 긴 시간 저택에 머물렀던 이유가 정말 유진의 히트였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유진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라도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부하들에게 매달려 정액을 구걸했을 것이다.

“…….”

유진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지독한 자괴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몸의 통제권을 강탈당한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공포스러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벌벌 떨렸다.

발정이라는 것이 그토록 끔찍한 것이었나. 의사와 상관없이 알파를 갈구하고 스스로 다리를 벌렸던 기억이 시뻘건 쇳물처럼 흘러내렸다. 발정한 오메가가 작정하고 페로몬을 들이부었으니 마주친 알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들던 건호와 제원의 모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유진은 다급히 고개를 털어냈다. 그들에게 죄는 없다. 제 착각으로 인해 대비책도 없이 히트를 맞이했으니 따지고 보면 제 책임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사과해야 옳았다. 시계를 확인하자 막 기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을 가로질러 문고리를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발바닥이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묵직했다. 그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평생 얼굴을 안 볼 수는 없다.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그나마 섹스는 천태운과 해서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부하들과 했다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유진은 심호흡했다. 깊이 날숨을 뱉은 뒤 표정을 추스르고 방문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마침 방에서 나오는 제원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흘러나오는 탄식을 막을 수 없었다. 충분히 마음을 굳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쏟아지며 미리 준비해둔 말들을 모조리 휩쓸고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청하게 머뭇거릴 동안 제원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너는?”

“괜찮습니다.”

바닥을 기며 제원의 발에 매달려 애원했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차마 맨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유진은 등 뒤로 문고리를 그러쥐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여태까지야 미션이나 알파 페로몬에 이끌려서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스스로 상대를 원해 몸부림쳤던 감각이 생생했다. 당시에는 갈증에 짓눌려 느껴지지 않았던 자괴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발치를 뜨겁게 적셨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상대의 표정을 확인하기가 어려워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그러자 제원도 입을 다물었다. 미묘한 기류가 길게 이어졌다. 침묵을 버티지 못한 유진은 토해내듯 말했다.

“미안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감정을 감추듯 헛기침을 하고 뒷말을 이었다.

“너랑 건호를 말려들게 만들었어. 당황스러웠을 텐데… 미안해.”

“…….”

“내가 날짜를 잘못 셌어.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착각을….”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 유진은 진정하기 위해 자신의 직위를 상기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말을 멈추자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제원이 물었다.

“원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이미 지났으니 됐어. 어떻게든 히트는 넘겼으니까.”

“…….”

“오늘까지는 네가 식사 담당이었지. 내일부터 내가 다시 맡을 테니까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평소처럼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려고 했지만 굳은 손은 움칠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은 소리 없이 한숨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계단을 향하는 유진의 등 뒤로 짙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유진에게는 보일 리 없는 눈빛이었다.

***

승일은 오늘도 역시 가장 늦게 거실로 내려왔다. 일찍 잠들었다던 그는 유진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는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덕분에 유진이 자신의 입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라면 어땠냐며 히죽거렸을 승일이 오늘따라 조용했다.

“냄새….”

툭 떨어진 목소리에 유진은 회의록에서 눈을 떼어냈다. 옆에 앉은 승일의 미간에 골이 깊었다.

유진은 타박하는 대신 엉덩이를 들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래도 승일의 낯에 어린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제원과 건호의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마킹 때문이었다.

마킹은 알파가 오메가를 자신의 냄새로 물들이는 것으로, 제 씨를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오메가를 다른 알파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다른 알파’들이 느끼기에 유쾌한 냄새일 리 없었다. 따라서 상대의 동의 없이 자행하지 않는 것이 도의였다. 오메가가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유진 역시도 마킹이라는 것이 있다고 지식으로써만 알고 있었다.

‘…임신이라니.’

유진은 얼굴을 굳혔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지만, 피임약을 먹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임신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우성 오메가와 극우성 알파가 발정기에 정사를 나누었으니 높은 확률로 임신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뒤늦게 손끝이 떨렸지만, 유진은 손가락을 말아 쥐어 동요를 감추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생각했던 날짜보다 이틀이 더 지난 상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신제원의 러트가 나보다 닷새 뒤라고 했으니까 오늘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면 나흘 뒤겠지. 알파용 억제제는, 승일이랑 건호가 하나씩 가지고 있지?”

“…….”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한층 어두워진 눈으로 제원을 보았다.

“긴급 억제제밖에 없지만, 상황이 급하니까 일단 그걸 사용하도록 하자. 승일이랑 건호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네.”

“그럼 둘 중 누가…….”

유진이 건호와 승일을 돌아보았다. 분명 시선이 느껴질 텐데 누구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한숨을 삼킨 유진은 펜을 내렸다.

“중요한 건 아니니 나중에 결정하도록 하고.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건호와 승일은 여전히 조용했다. 유진은 눈만 굴려 그들의 표정을 훑었다. 가까이 가자니 냄새가 신경 쓰여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입을 달싹이던 유진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척비척 멀어지는 어깨가 둥글게 내려가 유독 작아 보였다.

계단을 오르는 유진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승일은 숨을 후욱 길게 뱉어냈다. 폐에 남은 공기를 쥐어짜는 듯한 기세가 상당히 거칠었다. 그렇게 몇 번 흉통을 들썩인 승일은 인상을 구겼다.

“마킹도 정도가 있지. 대장이 말할 때마다 코가 아플 지경이야.”

“비위 좋던데, 신제원.”

“회의에 참여하는 건 부대원의 의무다.”

건호가 못마땅한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제원은 무시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 공기를 밀어내듯 입김을 불어대던 승일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냐.”

“방에.”

“대장한테 가는 거 아니지?”

얄쌍한 눈매가 제원에게 향했다. 소파에 눕듯이 늘어진 자세는 권태로웠지만, 옅은 색소의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제원은 웃음기 없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승일이 견제를 하고 있다. 여태까지 보인 적 없는 반응이었다.

주건은 오메가의 몸이 얼마나 쾌락에 나약한지 알려 주겠다고,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다리를 벌리게 만들겠다고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겠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아마 그것까지가 주건의 노림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천태운이 남긴 마킹은 그 이상의 작용을 했다. 던져주는 살코기를 차례대로 받아먹으며 동물원의 철창 속 맹수처럼 굴었을 수도 있는 알파들에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유일한 오메가를 통째로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천태운은 이것을 일부러 노린 것일까. 혹은 그저 히트에 이끌려 마킹한 것일까.

제원은 고개를 들어 2층을 보았다. 방에 들어갔는지 유진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을 자극했던 극우성 알파의 냄새도 이제 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손마디가 아주 느리게 풀려 허공에 늘어졌다.

***

방문을 닫자마자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유진은 잠시 눈을 감고 진정한 끝에 의자에 늘어지듯 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경직되었던 승모근이 뻐근하게 당겼다.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 막연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반감이 강했다.

유진은 손목을 끌어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바디 워시의 향으로 감추어지지 않은 알파 냄새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하게만 느껴졌다.

이 낯선 감각이 알파와의 관계로 안정기를 되찾은 오메가의 본능이니, 저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또한 본능이었다. 알고는 있는데 속이 답답했다.

“하아….”

여태껏 보지 못했던 부대원들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특히 임무 중을 제외하면 진지한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 승일의 서늘하던 눈빛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순간 쾌활하고 낙천적인 유진의 부하는 없었다. 알파는 알파였던 것이다.

‘당신이 정해야 할 겁니다. 오메가의 발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알파는 없거든.’

“…시끄러워.”

태운의 목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부질없는 도발이라 치부했던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귓가에서 웅성거렸다. 짜증스레 이마를 찡그린 유진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나 다시 욕실로 향했다.

텅 빈 욕실은 여전히 썰렁했다. 조급한 손길로 찬물을 틀어 머리 위로 뿌리자 수축한 피부가 모래알 같은 소름을 세웠다. 그 위를 뒤덮듯 바디 워시를 짜내 문질렀다. 어떤 것이 언제 생긴 것인지 구별하기 힘든 정사의 흔적들이 손바닥에 거칠게 쓸리고 닦였다.

아직 부어 있는 뒤로도 손가락을 넣었다. 민감한 내벽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혀를 짓씹고 마구잡이로 내부를 긁어댔다. 하지만 이미 다 긁어낸 정액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괜한 통증만 오를 뿐이었다.

결국 손가락을 뽑아낸 유진은 머리를 벽에 툭 기댔다. 얼음장 같은 물줄기가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 물을 맞고 서 있으니 둔탁한 사고가 느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약.”

작게 중얼거린 유진은 수도를 잠갔다. 큰 타월로 몸을 둘둘 말고 방에 돌아가 약통을 꺼내 들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가득 차 있던 피임약은 이제 절반쯤 줄어 있었다.

만약 이것이 바닥날 때까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땐 주건이 억제제뿐만 아니라 피임약까지 이용해서 미션을 낼지도 몰랐다. 끔찍했지만 가능성은 다분했다.

불안한 눈빛을 흘리던 유진은 알약 하나를 집어 억지로 삼켰다. 두툼한 이물감이 식도를 긁으며 내려갔다. 그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등 뒤에서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띠리링. 띠리리리링―.

“…….”

고막을 자극하는 요란한 소음이 쏟아졌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협탁에 놓인 전화기를 보았다. 그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만 있었는데도 벨 소리는 끈질기도록 멈추지 않았다.

선반까지 덜덜 울릴 정도로 착신음이 이어지자, 유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협탁 앞에 섰다. 일렁이는 눈이 전화기를 오롯이 담았다. 하지만 손끝은 움찔거릴 뿐 수화기를 향하지 않았다. 결국 무너지듯 쏟아진 몸은 침대 위로 시체처럼 늘어졌다.

전화를 받아서 무언가라도 힌트가 될 법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받고 싶지 않다.

유진은 베개에 얼굴을 박고 이불을 덮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침구를 축축하게 적셨다. 추위를 밀어내듯 이불을 끌어당기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난생처음 해보는 회피가 참을 수 없이 불안한데도 유진은 결국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던 벨 소리는 마침내 끊기고야 말았다.

***

짙은 어둠이 깔린 내부가 음산했다. 환기되지 않는 지하의 공기가 여전히 향로에서 내뿜어진 향의 입자를 머금고 있어, 깊이 들어갈수록 코가 얼얼했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질척한 냄새를 길게 뱉어내며 태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법으로 영업하는 경매장치고는 꽤나 호화로운 인테리어였다. 화려한 조명이나 고가의 미술 작품, 부드러운 카펫으로 도배된 내부가 제법 고급스럽다. 셔츠가 눅눅해질 정도로 습한 공기만 아니었다면 지하라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을 것이다.

구두코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선 태운에게 누군가 황급히 달려왔다.

“천 대위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생각난 김에 와봤습니다. 잔당이 도주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방금 진압 완료되었다고 연락 들어왔습니다.”

태운이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남자가 따라붙으며 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던 태운은 거대한 무대를 앞에 두고 멈추어 섰다. 고급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무대였다.

법으로 규제하고 단속해도 이런 불법 경매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주 고객층이 돈 있는 집안의 알파들인 만큼 거대한 수입이 보장된 탓이었다. 물론 그들의 경매 대상은 주로 오메가였다.

“피해자들은 어딨습니까?”

“임시 보호 조치했습니다만….”

남자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서렸다. 태운은 군말 없이 몸을 돌렸다.

“안내해 주세요.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불편한 낯으로 끄덕인 남자는 앞장섰다. 무대에서 벗어나 조금 걷자 제국군이 상당수 몰려 있는 작은 방이 나타났다. 위치로 보아 아마 대기실로 쓰인 장소 같았다.

태운은 문 앞을 지키는 이들에게 목례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번 경매의 피해자로 보이는 오메가들이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다수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하얗고 예쁘장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경매 직전에 구출된 것치고는 다들 표정이 담담했다. 정확히 말하면 표정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태운은 근처에 있는 오메가의 턱을 쥐어 들었다. 움찔거리며 눈을 올린 그는 몽롱한 눈빛으로 숨을 뱉었다. 그 숨결에서 유혹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턱을 쥔 손을 타고 달달한 향기가 느릿하게 기어올랐다.

눈을 가늘게 한 태운은 손을 툭 털어냈다.

“물건은 있었습니까?”

“아뇨….”

“잔당은?”

“소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책임감을 느꼈는지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는 베타였지만, 타인의 불행을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선한 사람이었다.

태운은 위로의 말 대신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남자는 조금 머뭇거린 끝에 애써 표정을 풀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방을 나섰다. 막 정리된 사건 현장이니 아마 할 일이 많을 터였다.

“응? 천 대위가 여긴 웬일인가?”

남자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대령이었다. 태운은 방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와 봤습니다. 현장 정리하러 오신 겁니까?”

“그래.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대기실을 둘러본 김 대령이 손짓했다.

“나와서 얘기하지.”

태운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대령을 따라 걷자 미로 같은 복도가 끝나고 창고로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대기실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느릿하던 걸음이 완전히 멈추고, 한숨과 함께 대령이 고개를 돌렸다. 주름진 눈매에 착잡한 감정이 스몄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짓이 아니야.”

“동일범의 소행 같습니다.”

“그래. 직접 움직이는 말단이야 꼬리 자르듯 갈아치워도 수법이 같으니 말이야. 믿을 수가 없네. 사람을 가축 다루듯이 저렇게….”

다시금 한숨을 흘린 김 대령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고아 출신이더군.”

“치료법은 아직입니까?”

“병원 쪽에서 힘쓰고 있다지만….”

뒷말은 뭉개지듯 나오지 않았다. 아직인 모양이었다. 태운은 김 대령의 애상을 관망하며 방금 보았던 오메가를 떠올렸다.

경매에 상품으로 나온 오메가들이 저런 식으로 조련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들은 마치 약이라도 한 것처럼 의식이 또렷하지 않았고, 알파가 근처에 오면 곧바로 페로몬을 풍겨 유혹했다. 반사 작용과도 같은 일관된 증상이었다.

현재 제국의 관심이 무명과 방주에 쏠린 탓에 큰 인력은 배치되지 않았지만, 김 대령은 이 사건에 상당한 힘을 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태운 역시 현장에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지난 사건에서 가까스로 도망쳤던 피해자 기억하나?”

“예.”

“며칠 전에 의식을 회복해서 짧게나마 진술 조사했으니 나중에 확인해 보도록 해.”

“뭔가 나왔습니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납치당해 억제제를 맞은 이후로 기억이 없다는 모양이야.”

김 대령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쏟는 관심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전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척되지 않는 사건보다는 당장 급한 방주에나 힘을 보태라는 압박도 상당한 듯했지만, 그 정도로 생각을 굽힐 김 대령이 아니었다.

근심 어린 눈으로 대기실 방향을 보던 대령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 한창 바쁠 때 아니던가? 무명 쪽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던데.”

“곧 그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네가 힘써야 한다. 내가 방주보다 여기에 신경 쓸 수 있는 건 네가 있기 때문이니까.”

태운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대령의 말을 곱씹었다. 힘써야 한다, 라. 주건이 빼돌리고 있는 정보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침통해하는 김 대령에게 공감하는 대신 태운은 유진의 모습을 회상했다. 히트에 정신을 잃고 나신으로 꿈틀거리던 꼴은 지루함이 대번에 가실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맡았던 페로몬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반신이 절로 꿈틀거렸다.

태운이 혀끝으로 입천장을 훑는 사이, 김 대령은 더욱 짙은 수심에 잠겼다.

“…류 대령이 안 되었지. 상부에서는 이미 단정 지어버렸어.”

“류진모 대령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변방의 살인사건에 배정되어서 자리를 지웠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대령급의 인물을 지방으로 보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 기실 청운 부대의 뒤를 캐기 위해 류진모를 내쫓았다는 소리였다. 이미 청운 부대는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아마도 류 대령을 멀리 보내놓고 사무실과 청운 부대원들의 자택을 뒤집어엎었겠지.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집을 싹 뒤집어엎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조소가 절로 나왔다.

“대령님은 배신자가 없다고 보십니까?”

“배신자야 있겠지. 안 그러면 이 정도로 난항을 겪을 리가 없어.”

“짐작 가는 자가 있습니까?”

“……글쎄.”

김 대령의 시선이 태운에게 향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측은함과 온정으로 가득했던 눈빛이 시퍼렇게 가라앉았다. 겉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을 긁어내는 듯한 감각이 직선으로 관통했다. 태운의 입매가 아주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테지.”

세월의 흔적이 밴 얼굴 아래로 군인의 칼날이 내비쳤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안광을 마주하며 태운은 눈으로 웃었다. 만만치 않은 사내였다.

***

현장을 벗어난 태운은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했다. 김 대령이 말했던 진술서부터 확인하려 했으나, 태운은 발을 돌려 주건에게 향했다.

주건은 텅 빈 사무실을 독차지하고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문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퍽 우스운 모양새라 유심히 훑어보며 방에 들어서자 주건이 흘끗 고개를 들었다.

“바빠 보입니다.”

“류 대령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어쩔 수 없습니다.”

으쓱이는 어깨에 자만심이 가득했다. 대령의 빈 자리를 일개 중위가, 그것도 고작 한 달 전에 겨우 승급한 중위가 채울 수 있을 리가 없으나 태운은 비소를 연초 대신 비스듬히 꼬나물고 책상 근처에 다가섰다.

두꺼운 서류를 차르륵 넘기며 주건이 물 흐르듯 물었다.

“하유진 구멍 맛은 어땠습니까?”

점심 메뉴를 묻는 듯한 어조였다. 피식 웃은 태운은 주건의 책상 끄트머리에 걸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단순 강도사건 보고서였다. 도로 제자리에 내려두었다.

“아직 내게서 냄새가 날 텐데. 안 느껴지나 봅니다.”

펜을 놀리던 손끝이 멈추었다. 흘러나오는 잉크를 버티지 못한 종이가 검은 원을 그렸다. 주건은 한 박자 늦게 작성을 마치고 펜촉을 떼어냈다. 제법 사나워진 눈매를 보며 태운이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좋지 않을 이유가 어딨겠습니까. 당신도 오메가를 제법 즐기는 모양이니 알 텐데요.”

“예…, 뭐.”

떨떠름하게 답한 주건은 서류철을 덮고 다음 종이를 끌어왔다. 슬쩍 보니 무명의 움직임에 관한 서류였다. 태운의 시선을 의식한 주건이 끌어왔던 종이를 도로 원위치시키고 다른 서류를 당겼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지켜보던 태운이 읊조렸다.

“베타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뭐라고요?”

“원초적인 욕망이 뒤섞인 섹스는 베타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외설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고자 오메가를 안는 당신의 노력은 치하할 만하다고 봅니다.”

“천 대위님.”

날을 세운 주건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내가 아니면 당신은 그 구멍 맛도 보지 못했을 겁니다.”

태운은 나른하게 웃었다. 오만과 고집이 뒤섞이는 얼굴을 흥미롭게 내려다보며, 그는 주건이 감추고자 했던 서류를 손바닥을 지그시 짚었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니 주건의 눈꼬리가 움찔 떨렸다.

“내가 못 먹을 오메가는 없습니다.”

“…….”

“내가 그러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느릿하게 오른 눈길이 품평하듯 주건의 얼굴을 훑었다. 평소라면 심기가 상하고도 남을 법한 행동이었으나 주건은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페로몬을 잘 느끼지 못하는 베타의 몸으로도 태운에게서 풍기는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짐승 주제에.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말이 부메랑이 되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이빨을 감춘 맹수처럼 느껴졌다. 경고음처럼 윙윙 울리는 본능이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했다. 펜을 힘주어 잡은 주건은 간신히 목울대로 침을 넘겼다.

꿀꺽. 생각보다 큰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입꼬리를 둥글게 올린 태운은 미련 없이 허리를 폈다.

“바쁜 것 같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으니 부디 몸조리했으면 좋겠군요. 고기라도 먹는 게 어떻습니까? 배가 차면 입도 조금은 무거워지지 않을까 하는데.”

“…….”

“그럼 수고하시죠.”

짤막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태운은 방을 나섰다. 벌건 눈으로 문을 노려보던 주건은 펜을 세워 책상에 내리찍었다. 빠득 소리가 나며 펜촉이 망가지고 몸체가 부러졌다. 터져 나온 잉크는 나뭇결을 물들였다.

“저 씨발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결코 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항시 배신의 기미를 감시하고 있을 무명에게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것을 저 알파도 알아야만 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거센 숨을 씩씩 뿜던 주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천태운이 건방진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사사로운 일에 일일이 반응할 때가 아니었다.

주건은 아까 밀어두었던 서류를 찾았다. 태운이 손바닥으로 짚었던 탓에 반듯했던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짜증이 절로 치밀어 올랐지만, 이성적으로 속을 다스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전국에서 모여든 조사 보고서가 옅은 바람을 일으키며 휘리릭 넘어갔다.

무명의 움직임이나 연계된 범죄 조직이라도 찾고자 하는 노력이 가상했으나, 실상 보고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실속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간혹 유의미한 정보도 섞여 있었다.

주건은 해당 내용을 유심히 읽으며 머리에 넣었다. 이 정보들이 치명타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 무명에게 전달할 요량이었다. 제아무리 뒷돈이 두둑한 조직이라고 해도 미꾸라지처럼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덴 주건의 이러한 협조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직도 간부를 만나보지 못했다. 최근 제국 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바람에 함부로 조직과 접촉하기 어렵기도 했고, 꼭 서열을 각인시키는 것처럼 자꾸만 멋대로 일정을 미루는 그들의 만행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기여했으면 그쪽도 이 이상으로 저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간부를 만나기만 한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딜을 할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진의 몸을 넘겨받는 것이다.

입꼬리를 찢듯이 올린 주건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상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불끈거려,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 유진의 꼴을 보고 싶었다. 이제 전화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한 유진은 그야말로 뛰지 못하는 사냥감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벌써 자정이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으로 인해 안압이 높아졌지만, 답답한 제복 재킷과 넥타이를 하나둘 벗어던질수록 미미했던 두통은 가시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건은 거실을 가로질러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환하게 불이 들어온 모니터 위로 저택의 상황이 여지없이 비쳤다. 굳이 찾을 것도 없이 유진은 자신의 방에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양새가 꼭 물에 빠진 쥐 같았다. 새벽에 그렇게 샤워를 하더니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광경이다. 킬킬거리고 웃은 주건은 캔 맥주를 따며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낮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올랐다. 상대는 여전히 물을 뚝뚝 흘리며 앉아 있는 유진이 아니라 제원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탄산을 머금은 액체가 식도를 가르고 흘러내렸다. 입안에는 고소한 맛이 기분 좋게 남았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되는대로 집어온 것치고 목 넘김이 좋았다. 목을 시원하게 적신 주건은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댔다.

“히트는 천 대위에게 뺏겼던데. 흔치 않은 기회 놓쳐서 어떡하나.”

-무슨 일로 전화했습니까.

“딱딱하게 굴지 말고 대화나 하자고. 요즘 그쪽 공기는 어때? 살벌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

알파끼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실로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발정 난 하유진이 부대원들 사이에서 제대로 돌려졌다면 조금 더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하나씩 자근자근 무너뜨리는 맛도 있으니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만 있으면 재미가 없다.

“그쪽 러트가 얼마 안 남았었지. 이왕 떡 치는 거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어야 더 꼴리지 않겠어? 예를 들면―.”

툭툭. 마우스를 두드리던 주건이 눈을 빛냈다.

“유사 히트라던가.”

-…….

“러트 페로몬에 휩쓸리면 간혹가다가 유발된다던데. 맛보고 싶지 않아? 멀쩡하다가 갑자기 발정 나면 하유진 얼굴도 꽤나 볼만할 것 같은데.”

-원한다고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아. 그래? 그럼 그냥 발정제나 먹이겠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재미없는 새끼.”

기분이 픽 식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주건은 맥주를 들이켰다. 요주의 인물이라 생각해서 기껏 끌어들였는데 영 반응이 적극적이지가 않다. 부하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진의 낯이야 볼만하겠지만 말이다.

캔을 절반쯤 비웠을 무렵, 이번에는 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천태운의 목적이 뭡니까?

“천태운?”

주건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기껏 퇴근까지 했는데 들리는 이름이 고까웠다.

“내가 그걸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 되는 자가 당신의 가능성만 보고 붙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네가 지금 그런 소리나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주건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잘못 생각했다. 오늘 이놈에게 전화하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유진에게 연락해 움찔거리는 꼴을 보며 웃기라도 할 것을 그랬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반찬거리로는 충분했을 것이다.

“날 도발해서 얻는 게 있나, 신제원?”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위험이나 희생 정도는 감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천태운 역시 마찬가지겠죠.

“…….”

분노로 열이 오르던 얼굴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건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화면 속의 제원을 주시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천태운은 주건이 간부와의 접촉에 실패해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주건이 그들과 연줄을 단단히 잡아야 그에게도 좋을 텐데, 주건이 번번이 기회를 놓칠 때마다 그는 늘 한 발짝 뒤에서 여유롭게 관조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태운이 주건에게 접촉했을 때부터 무명은 그의 존재를 아는 듯했다. 설마 일찍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간부가 주건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주건을 빼놓고 태운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제국군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주건이었다. 버리는 패로 사용한다면 천태운보다는 자신일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

과한 생각이다. 주건은 꺼림칙한 이물감을 애써 떨쳐냈다.

“그보다, 너는 전에 말했던 거나 똑바로 해. 마침 타이밍이 좋으니까 말이야. 내게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게 좋을 거다.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동요를 위협으로 감춘 주건은 전화를 툭 끊었다. 화면 너머로 제원이 수화기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멀끔한 얼굴에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알파라는 족속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었다.

“천태운….”

찜찜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다보던 주건은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위장으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시각, 방을 나선 제원은 계단을 반쯤 내려와 1층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유진과 승일의 목소리가 이따금 두런두런 들렸고, 거실에 앉아 있는 건호는 팔짱을 낀 채 부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제원은 다시 몸을 돌려 복도로 사라졌다.

***

단출하게 차린 식사는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설거지는 승일에게 맡기고 거실에 앉은 유진은 미리 정리해둔 회의 안건을 정독했다. 하지만 줄지은 글자는 퍼즐처럼 조각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온갖 상념이 뒤엉켜 사고를 방해했고 집중력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그날의 잔상이 보였다. 목을 범하고 뒤를 드나들던 성기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저속하게 속삭이던 태운의 발언마저 떠올랐다. 그에게 매달렸던 자신의 목소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기에 유진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런데 졸리지도 않았다. 대신 지독한 피로감이 단전 아래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대원들의 반응이 어제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늘 승일은 요리하는 도중 종종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건호의 눈빛은 아직 다소 거칠었지만 하루만 더 지나면 많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애써 경직된 손가락을 펴서 퍼석한 종이 끝을 매만졌다.

“다 끝났어요, 대장.”

젖은 손을 탈탈 털며 승일이 걸어왔다. 거실에 흩어져 있던 제원과 건호도 자리에 앉았다. 세 쌍의 눈이 유진에게 몰려들었다. 유독 입이 건조하게 느껴져 입술을 축여 보았지만 불편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문득 손에 들린 회의록이 무겁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크게 한 유진은 말문을 열었다.

“어제 했던 이야기 이어서 하면, 제원이의 러트가 이제 사흘밖에 안 남은 상태다.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간밤에 계획을 대강 잡아놨어. 우선 백승일. 네 긴급 억제제를 신제원에게 사용해도 될까?”

“별로 상관은 없는데. 이건호도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넌 저번에도 긴급 억제제를 썼으니까. 연달아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본래 긴급 억제제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물건이다. 즉효성이고 효과가 강한 만큼 부작용도 없다고 보기 힘들었다. 웬만하면 그 부담을 또 주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덧붙이려는데, 승일의 입꼬리가 묘하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못 본 척 눈을 피했다.

“러트 당일, 요리는 내가 모두 할게. 신제원은 그날 하루 방에만 있어. 백승일은 억제제 들고 방 안에, 이건호는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때맞춰서 식사는 들여보낼 테니까 하루만 참아 주면 고맙겠다.”

“알겠습니다.”

“이견 있는 사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포구의 정박 줄처럼 단단하게 조여들었던 하복부가 슬그머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해산을 고했다.

“다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중위님.”

제원과 건호가 차례로 자리를 떴다. 안도의 한숨을 흘린 유진은 흘끗 옆을 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묘해진 표정을 한 승일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볼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유진은 그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너 쓰라고 남긴 억제제인데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뭘요, 그런 걸로. 나는 정말 상관없어.”

“……혹시 아직도 냄새 많이 나?”

“냄새? 천태운 냄새?”

승일이 눈을 찡그렸다.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차 싶어 유진은 말을 멈추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 듯했다. 자신의 성급함을 탓하며 화제를 무르려는 찰나, 승일이 작게 손짓했다.

“맡아 볼게. 가까이 와 봐요.”

“…….”

유진은 군말 없이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끼익하며 가죽이 마찰되는 소리가 울리고, 곧 승일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긴장한 목선 위로 코가 닿았다. 순간 소름이 전류처럼 찌르르 올라 무릎 위에 놓인 손이 흠칫 떨렸다. 유진은 어깨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셔츠 깃이 비틀리며 목에 남은 울혈이 드러났다.

유진의 시야에서 벗어난 승일은 서늘한 눈으로 그 흔적을 내려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타인의 영역 표시가 코의 점막을 뚫고 들어왔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더 맡을 것도 없었다.

승일은 무표정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진이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심해?”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내일 되면 더 옅어지겠지.”

“…그래?”

유진의 눈썹 끝이 조금 내려갔다. 안색 역시 눈에 띄게 풀렸다.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기울인 승일은 몸을 일으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설마 대장이 그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네.”

“무슨 말?”

“내 러트를 상대해 주겠다는 말.”

혀를 씹을 뻔한 것을 간신히 막았다. 유진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긴급 억제제를 또 사용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대장이 해결해 준다는 뜻 아니었어?”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그게 그렇게 되는가.

황당함에 저절로 벌어지는 턱을 겨우 붙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승일이 눈꼬리를 휘며 싱글거렸다. 이죽대는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내내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것이 바보 같아졌다.

“안 해주려고?”

“그만 떠들고 올라가.”

“내 억제제는 신제원한테 줘버렸고. 나는 그냥 버텨요? 대장.”

“…….”

승일의 등을 밀던 유진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빙글 돌아선 승일이 응? 하며 재차 물었다. 유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웃음기 가득한 눈을 올려다보았다.

승일은 이미 한 차례 러트로 고생시킨 경험이 있다. 그때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지만, 히트를 몸소 겪은 후 다시 떠올려 보니 그때 승일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되어 척추가 쭈뼛 섰다.

눈 돌아가는 괴로움 속에서 방에 갇혀 몸부림치다가 유진을 덮쳤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겪어 보고 나니 차마 빈말로도 버티라고 대꾸할 수 없었다.

“……고려해 볼게.”

“진심이야?”

“그래.”

“나 이거 기억한다.”

입꼬리를 휜 승일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기분 좋은 보폭으로 계단을 올랐다. 멀어지는 등판을 응시하던 유진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제원의 러트에 대해 궁리했던 흔적이 수 장의 종이 위로 일렁이듯 떠올랐다.

“…….”

서류와 펜을 정리한 유진은 맨 마지막으로 거실을 떠났다. 부하들을 걱정하는 짙은 근심만이 텅 빈 거실을 맴돌다가, 지하실에서 스며 나온 냉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새벽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이 타일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늘도 역시 온몸이 벌게질 정도로 샤워 볼을 문지른 유진은 수도를 잠그고 팔뚝을 제 코에 눌렀다. 적어도 유진에게는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극우성인 것은 아닌지, 지난 며칠 동안 태운의 냄새는 끈질기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진은 저택에 갇힌 이후로 단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욕조까지 써가며 냄새를 빼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가 갈수록 조금씩이나마 짙은 페로몬의 영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진은 도화지에 흩뿌린 물감처럼 여전히 얼룩덜룩한 피부를 수건으로 문질렀다. 김이 빠르게 가라앉은 거울 너머를 보자 파리한 안색은 여전했지만 볼품없을 정도로 너덜거렸던 목덜미에는 딱지가 내린 상태였다. 아마 조금 있으면 그마저도 떨어지고 갈색으로 변한 울혈은 옅어질 것이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어두웠다. 몸이 조금씩 회복하는 사이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러 제원의 러트 날이 당도한 탓이었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승일은 자정부터 제원의 방에 상주했다. 여분의 이불을 질질 끌어다가 제운의 방바닥에 드러눕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엉켰지만, 오메가인 몸으로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없었다.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밤새 뒤척이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욕실로 나온 것이 대략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다. 제원도 승일도 아직 자고 있을 터였다. 오늘 유진의 역할은 최대한 제원에게서 떨어져 후방 지원을 하는 일이다. 그것이나마, 최대한 조력할 생각이었다.

체력 회복에 도움이 될 법한 식단을 생각하며 유진은 셔츠 단추를 잠갔다.

***

조심스럽게 시작된 하루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택은 고요했고, 평화로웠다.

언제 제원의 러트가 시작될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1층에만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유진은 여태까지의 회의록과 종종 적어두었던 메모, 달력을 모조리 들고 내려와 거실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곧장 부엌으로 향해 요리를 시작했다. 아침이니만큼 가볍게 준비한 식사는 금방 완성되었다.

유진은 세 명분의 음식을 가지런히 쟁반에 담아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돌아 얼굴을 내밀자 제원의 방문 앞에 앉아 있는 건호와 눈이 마주쳤다. 유진은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쟁반을 건네주며 슬쩍 방문을 살폈다.

“상황은 어때?”

“아직 전조 증상도 없습니다.”

문 너머는 조용했다. 이따금 승일과 제원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가져다줄 테니까.”

유진은 건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곧장 몸을 돌렸다. 괜히 제 체취로 제원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떨어져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계단을 절반쯤 내려오자 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갈등 섞인 눈빛으로 다시 계단 위를 보았다.

필요한 거라니, 제 입으로 한 말이지만 어불성설이다. 러트가 오는 알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

유진은 다시금 손목에 코를 묻었다. 폐가 풍선처럼 부풀 정도로 깊이 숨을 마셔 보아도 태운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알파가 느끼기에도 참지 못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이미 정한 일이다. 얇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헤집을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털어낸 유진은 손을 말아 쥐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시간은 숨 막히도록 더디게 흘렀다. 그나마 오전은 아침과 점심을 준비한다고 그럭저럭 바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점심 식사 후 설거지를 마치고 저녁밥의 재료 손질까지 끝내자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회의록을 정리하거나 체력을 단련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할 일이 없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시선이 절로 계단으로 향했다. 위층에 부대원들이 있음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저택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따금 그들을 확인하러 올라가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올라왔지만 이미 질리도록 확인한 서류들을 다시금 읽으며 억눌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후 4시를 넘기자 한계에 다다랐다.

“…….”

저택에 갇혔던 초반, 차라리 홀로 잡혀 왔다면 훨씬 나았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모욕과 조롱을 받더라도 자신 혼자 받는 것이 낫다고, 덜 괴로울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이라고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느끼게 되었을 공포감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임무를 함께 했던 동료 여럿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기절해 이곳에서 깨어났을 때, 만약 청운 부대원마저도 없었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초조한데,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진은 어지럽게 펼쳐놓은 회의록과 달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저녁이다.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이면 전조 증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염려스러운 마음이 뾰족하게 굳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자꾸 건조해지는 입을 생수로 축이고 있자, 공기를 타고 온 찬 기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냉기의 발원지는 지하실 문이었다.

“…….”

여태껏 저곳에서 꺼내 사용한 도구는 고작 두 개였다. 수십에 달하는 물건들이 아직도 저 아래에 남아 있었다. 승일이 사용했던 바이브레이터도, 제원이 사용했던 정조대도 모두 끔찍했는데 그보다 더한 것들이 아직 산처럼 남아 있다.

주건이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할지 알 수 없다. 만약 저택에서 계속 탈출하지 못한 채 수개월, 수년이 걸린다면 그동안 유진과 부대원들은 수도 없이 발정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때마다 주건에게서 받은 긴급 억제제로 상황을 모면해야 할까? 히트 사이클이 돌아올 때마다 유진은 누구와 몸을 섞게 될지 두려워하며 바닥을 기어야 하는 것일까?

문득, 암담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유진이 마른세수를 했을 때, 위층에서 큰 소리가 쿵 울렸다. 어깨를 움찔 떤 유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설마. 입안을 바싹 마르게 하는 긴장감이 손끝에서 온기를 앗아갔다. 유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소음은 더 들리지 않았다.

뭔가 물건이라도 떨어뜨렸던 걸까. 안도하며 한숨을 흘리자 다시금 소음이 들렸다.

쿵, 쿵―!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들렸다. 몸싸움하는 소리였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악 내려가,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도로 거실로 돌아와 양손을 맞잡았다.

제원의 러트가 시작되었다. 승일이 억제제를 놓기 위해 그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백지장 같은 두 손이 잘게 흔들렸다. 계단을 오르다가 복도에서 나뒹굴었던 자신의 모습이 제원의 얼굴과 겹쳐졌다. 앞으로 무너질 듯 고개를 숙인 유진은 주먹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달음박질치는 심장 박동이 속을 어지럽혔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목을 태우는 원초적인 정욕에 손발이 뒤틀릴 것이다. 그때의 괴로움이 떠올라 손이 차게 식었다.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자문하는 목소리가 굳은 뒷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괴로운 듯 눈매를 움츠린 유진은 답답함을 날숨과 함께 탁 토해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들릴 리 없는 초침 소리가 째깍거리며 폐부를 두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

유진은 손바닥에 눌렀던 이마를 떼어내고 머리를 들었다. 타박타박 걷는 발소리가 부엌 부근을 헤매는가 싶더니 곧 거실로 가까워졌다.

“끝났어요, 대장.”

한 손에 빈 주사기를 든 승일이 탄식하듯 웃었다. 맞잡은 두 손에서 힘이 풀렸다, 유진은 겨우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유진은 승일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랐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건호가 유진을 발견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등을 묵직하게 짚었다가 떼어낸 후, 문고리를 잡아 조금 밀어냈다.

방 내부는 생각보다 엉망이지 않았다. 중앙에 있던 테이블이 조금 삐뚤어지고 의자가 넘어갔을 뿐, 부서진 곳도 팬 곳도 없었다.

제원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로 덮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느리게 오르내리는 윤곽이 그가 잠들었음을 보여 주었다.

조금 더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자 찌르는 듯한 알파 페로몬이 얼굴을 덮쳤다. 유진은 흠칫하며 도로 몸을 물렸고, 건호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다시 닫았다.

“새벽에 환기해 놓겠습니다.”

“…내일 낮에 해도 충분하니까 오늘은 둘 다 가서 쉬어. 내려가서 저녁 챙기고.”

“대장도 고생했어요.”

건호와 승일 모두 얼굴이 수척했다. 쓰게 웃은 유진은 둘의 등을 밀어 1층으로 내려간 후 식사를 차려 주었다. 피로하긴 했는지 건호와 승일 모두 말없이 수저를 들어 밥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제원의 몫은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고, 정작 유진은 밥 한술 뜨지 않은 채 거실에 있는 제 물건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를 보자마자 온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엎어지듯 누웠다.

피곤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유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태어난 모양대로 사는 게 뭐 어떻다고.’

발정기 때 오메가는 알파를, 알파는 오메가를 필요로 한다. 발정기에 상대와 몸을 섞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구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바로 삼켜. 흘리면 이번엔 윗입에 처박을 거니까.’

천태운의 폭력적인 정사가 유진의 고통을 덜어냈듯 말이다.

침잠하는 눈으로 천장을 덧그리던 유진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쩌면 여태껏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망령처럼 떠도는 의심을 잠재우지 못한 채, 유진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

그 끝이 어떤 찝찝함을 낳았든, 제원의 러트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무사히 넘어갔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열 시간이 넘도록 긴장하고 있던 피로가 없지는 않았는지 부대원들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아침을 맞이했다.

반면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 기분으로 새벽같이 깨어난 유진은 피로한 눈빛으로 커피를 마시며 거실에 자리하고 있다가 하나둘 내려오는 부대원들을 반겼다. 목이 조금 걸걸한 느낌이 들었지만 최근 잠을 제대로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예사로운 수준이었다.

가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식도를 독약처럼 진한 커피로 축이고 있자 마지막으로 제원이 계단을 내려왔다. 늘 유진 다음으로 일어나고는 하던 그로서는 제법 늦은 기상이었다.

“몸은 좀 어때?”

짧게 손짓하자 제원이 근처로 다가왔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아래로 멀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코에 신경을 집중해 냄새를 살핀 유진은 안도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너희한테는 아직 천태운 냄새가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떨어져 있어.”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방에서 쉬어. 회의도 거를 테니까.”

“식사만 준비하고 올라가겠습니다.”

“내가 대신할 테니까 쉬라는 소리야.”

“어제도 중위님께서 도맡아 하셨잖습니까.”

“명령이다, 신제원.”

억제제로 넘긴다고 해도 피로감이 남는 발정기인데, 긴급 억제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호히 고개를 저은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원의 등을 밀었다. 무리를 시켰다가 아프기라도 했다간 약도 없는 이곳에서 고생할지도 몰랐다.

주춤거리는 등을 계단 근처까지 밀어 툭툭 두드리자 제원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하고. 주사제는 안 맞으면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어.”

“전에도 맞아 본 적 있으니 괜찮습니다.”

긴급 억제제를? 저도 모르게 반문할 뻔한 유진이 제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눈을 맞출 뿐이었다. 유진은 어색하게 눈을 옆으로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들어가서 쉬고 있어. 아침 준비되면 부를게.”

군말 없이 제원은 도로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유진은 난간을 툭툭 손끝으로 두드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긴급 억제제를 맞을 일은 거의 없다. 그만큼 의학은 발달했다. 유진만큼이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 제원이 주사제를 맞을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하지만 곧 유진은 생각을 고쳤다. 오히려 승일보다 제원이 경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러트가 왔다면 승일은 오히려 반길 것 같지 않은가. 이때다 싶어 무단결근하고 오메가를 찾아 떠날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유진은 건호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부엌으로 향했다.

***

유진은 근 일주일간 정신이 없었을 부대원들을 고려하여 휴식 시간을 주었다. 큰 소득이 없을 회의를 고집하는 대신 그간 소홀히 했던 신체 단련 매뉴얼을 던져 주었다. 승일은 그것을 보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건호와 제원은 제법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유진 역시 태운의 잔향을 모조리 내보낼 겸 방에 틀어박혀 몸을 풀었다. 땀을 쏙 빼도록 몸을 혹사하니 체내에 고여 있던 오염이 열과 함께 발산하여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근육을 고문하다시피 보내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몸을 시원하게 씻어낸 유진은 목에 수건을 걸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느른하게 풀린 팔다리가 묘한 피로감과 함께 잠기운을 북돋웠다. 하지만 유진은 오랜만의 수마를 반기는 대신 뻐근한 눈알을 억지로 굴렸다. 가루가 파스스 흩어지는 듯한 안구의 건조한 느낌과 함께 어수선한 테이블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방치된 사흘 치의 회의록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그간 회의를 걸렀으니 당연히 백지상태였다. 가장 첫 페이지는 제원의 러트가 있던 날의 몫이었다.

복잡한 눈으로 종이를 응시하던 유진은 달력을 꺼내 회의록 위에 올렸다. 슬슬 주건이 다시 손을 뻗을 시기였다. 히트와 러트가 연달아 지났고, 특히 제원의 러트는 억제제로 넘겼으니 당장 오늘 밤 모니터가 빛을 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번잡한 숨을 탁 토해낸 유진은 진중한 눈빛을 되찾았다.

비록 지난번에는 전화를 무시했다지만 그의 연락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주어지는 정보 하나 없이 저택에 갇힌 상황에서, 주건이나 천태운 어느 한쪽이라도 지속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제 손으로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거부하고 반항해도 결국 자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의 저열한 속내가 이 저택 곳곳에 스며 일렁였다. 음험하기 짝이 없었으나 전화가 또 온다면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쓴 타액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범도 아닌 것이 범 행세를 했다. 들썩이는 전화기를 건조하게 응시하던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좋은 저녁. 몸은 좀 어때, 하 중위?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그의 전화를 무시한 것이 오히려 그를 호기롭게 만들었을 터였다. 유진은 소리 없이 한숨을 흘리며 낮게 답했다.

“나쁘지 않아.”

-허세는. 부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박아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제법 볼만하던데.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애써 눌러두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유진은 뜨끈한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주건과 통화할 때면 감정적이지 않게 반응하려 노력했지만,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평소보다 배는 힘들게 느껴졌다.

-불쌍한 하유진. 진작 네 위치를 알았으면 좋았잖아. 요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대령급의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다고.

‘헛소리를….’

-네가 저택에서 발정이나 하면서 부하에게 앙앙거릴 동안 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던 유진은 비수처럼 날아든 주건의 뒷말에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한시가 급한 시국에 저택 하나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자신의 능력 부족 이외에 변명할 길이 없었다. 러트를 억제제로 넘길 수밖에 없었던 제원을 떠올리면 뼈가 아팠다.

-긴급 억제제를 썼던데. 다른 두 놈 멀쩡히 눈 뜨고 있을 때가 아니라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에서 쓰는 게 좋지 않았겠어?

“불필요한 고통을 줄 생각은 없어.”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네 안위나 챙겨. 오메가가 알파 걱정이라니, 그보다 헛된 짓이 어디 있을까.

“쓰라고 준 것이니 사용한 것뿐이다.”

-하하, 그래. 쓰라고 준 거지. 어떻게 쓰든 네 선택이고.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 소리가 흘렀다.

-난 널 위해서 말한 거야.

“…….”

-어쨌든 무사히 ‘잘’ 넘긴 것 축하하고. 친우의 성공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지.

“…무슨 뜻이야?”

-부디 네 마음에 쏙 들었으면 좋겠군.

“박주건. 무슨 소린지―.”

뚝. 전화가 끊겼다. 허탈한 눈으로 수화기를 내려다보던 유진은 그것을 협탁에 툭 던지듯이 돌려놓았다. 선물이라니. 또 무슨 꿍꿍이인지 차마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스멀스멀 오르는 편두통이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송곳으로 푹 찌르는 듯한 통증에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잇새로 신음을 짓씹고 버티자 문득, 두통약을 못 줄 것도 없다고 능청스럽게 말하던 천태운이 떠올랐다.

“하아…….”

머리가 더 아파왔다. 유진은 고개를 젖히며 앞으로의 일을 가늠해 보았다.

마킹 사건을 계기로 천태운을 향한 부대원들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졌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주건의 접촉은 온전히 그의 변덕에 달려 있으니 저택에 있을 때만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태운이 나았다.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 또한 그랬다.

이번 일만 놓고 보아도, 천태운이 제 냄새를 집요하게 맡지 않았더라면 유진은 히트가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방에 혼자 있을 때 히트가 왔을 것이고, 바닥에 쓰러져 바르작거리다가 몇십 분은 지난 후에야 부대원들에게 발견되었을 것이 뻔했다.

그때쯤이면 유진도 눈에 뵈는 것 없이 무작정 상대에게 다리를 벌렸을 것이다.

오싹함이 등을 타고 올랐다. 이성을 잃은 채 부대원들에게 박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복도에서 바닥을 기었던 것이 훨씬 나았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마무리는 결심했던 대로 천태운과 했으니 말이다.

“…….”

어차피 이미 한 번 몸을 섞은 사이다. 한 번이 두 번으로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천태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얼굴 위에 철판을 깔 듯 마음을 공고히 다잡고 있자 문이 똑똑 울렸다. 문이 곧장 열리지 않는 것을 봐서는 제원이었다.

“들어와.”

유진은 문틈으로 보이는 제원의 얼굴을 확인하며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걸쳤다. 더 이상 할 일도 없는데 습관처럼 제복을 답답하게 입고 있었다. 익숙한 손길 아래 셔츠의 윗단추가 두어 개 풀렸다.

“몸은 이제 괜찮지? 내일부터는 다시 복귀할 생각이니까 일찍 취침해.”

“…….”

“오래 걸릴 일이야?”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열두 시였다. 이렇게까지 시간이 흐른 줄 몰랐던 터라 유진은 내심 당황했다. 주건과의 통화가 생각보다 길었던 것인지, 아니면 상념에 잠겼던 시간이 길었던 것인지.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싶었다.

최근 들어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 잠이 안 오는 것도 그 탓인 것 같았다. 그나마 종일 몸을 움직여 근육을 혹사하면 조금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는 정도였다.

두통약이 아니라 수면제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제원은 여전히 방문 근처에 있었다. 왜 저러고 서 있나 싶어 눈을 좁히자 창백한 그의 안색이 보였다.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 다가섰다.

“신제원. 괜찮아?”

“…….”

“신제원!”

팔뚝을 잡아 흔들자 불덩이 같은 체온이 느껴졌다. 흠칫한 유진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어깨와 목을 더듬고 제원의 이마를 짚었다. 손을 델 정도로 뜨거웠다.

“이게 무슨…. 대체 언제부터 이랬어? 열이 이렇게―.”

“하, 아―….”

“……제원아?”

하아. 휘청거리던 제원이 탁한 숨을 깊이 토해냈다. 바닥을 향해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들렸다. 심해처럼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유진에게 닿았다. 혼탁한 눈빛에서 이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유진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번개처럼 달려든 손길이 손목을 붙들었다. 뜨겁기만 하던 체온에 페로몬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 설마―.”

“흐, 윽. 하아―….”

그럴 리가 없다. 이틀 전에 왔던 것이 벌써 또 올 리가 없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제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의 양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밀려든 페로몬이 피부를 적시고 기도를 파고들어 폐를 장악했다.

“흐윽!”

유진의 눈매가 붉게 물들더니 이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압도하듯 쏟아지는 선명한 향기가 온몸을 물들였다. 유진은 바늘처럼 우악스럽게 혈관을 찌르는 페로몬에 허리를 확 숙였다. 스멀스멀 스며드는 열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침범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무릎에서 힘이 풀리며 몸이 확 무너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제원이 유진의 몸을 받쳐 들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제원에게 러트가 왔다는 사실을.

“어, 째서…….”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진은 시체처럼 늘어져 그대로 제원의 품에 끌려 들어갔다. 맞닿는 피부로 열감이 고스란히 넘겨졌다. 고통스러워 몸부림쳤지만 소용은 없었다.

침대에 오른 제원은 유진의 옷가지를 찢듯이 벗겼다. 맨살이 드러나고 그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말캉한 감촉을 타고 짙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빗물처럼 고여 흐른 그것은 목울대까지 올라와 덜컥 숨통을 틀어쥐었다.

“으, 흐으…!”

방의 공기가 온통 알파 향으로 뒤덮였다.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피부를 억척스럽게 파고든 알파의 열망이 배 속을 헤집었다. 고통과 닮은 자극감은 오메가의 생존을 위한 발악을 일깨우기에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다.

지나친 페로몬에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던 폐는 최음 향을 맡은 듯 뭉근하게 녹아내렸고, 하반신은 경기를 일으키듯 달달 들썩이다가 이내 꽉 조여들기 시작했다. 이변을 알아차린 제원은 서슴없이 고개를 숙여 유두를 삼켰다. 민감한 돌기가 뜨겁고 축축한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싫어―….”

물컹한 혀가 유륜을 반죽하듯이 훑고 지나갔다. 점점 부어오르는 유두는 이따금 단단한 이에 긁히며 번쩍이는 쾌감에 짓눌렸다. 덜컹 튀어 오른 유진은 가슴팍으로 쏟아지는 제원의 흑발을 간신히 그러쥐었다.

“흐…, 으! 으흣….”

자극은 더욱 강해졌다. 혀로 훑기만 하던 움직임은 이제 유두를 삼킬 듯이 빨아들이며 타액을 적셨다. 넘칠 정도로 스미는 알파 페로몬은 유두를 팽창시켰다. 뜨거워서 아픈 것인지 기분이 좋은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높이 세웠다. 더 가까워진 만큼 유륜을 깨무는 애무도 깊어졌다. 강하게 씹힌 작은 살점이 통 튕기듯 이 사이를 빠져나갔다. 순간적으로 유두와 유륜이 거세게 긁히며 눈앞에 별이 튀었다.

“아아! 흑!”

견딜 수 없다는 듯 파들거리는 유두가 이내 팍, 하고 달큼한 페로몬을 쏟아냈다. 과즙처럼 흘러나오는 그것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다시금 입술이 벌어져 유륜을 삼켰다. 뜨거운 열락이 거침없이 빨려 알파의 입으로 흡수되고, 보답하듯 배로 늘어난 알파 향이 가슴 깊숙이 주입되었다.

“흐으으―……!”

두렵다. 유진은 고개를 젖히며 입을 벌렸다. 한계치 이상으로 부어오른 가슴이 느껴졌다. 마비된 것 같으면서도 극도의 민감함에 휩싸인 돌기가 움찔거렸다. 제원의 입술이 그곳을 건드릴 때마다 다리가 벌어지고 발끝이 말렸다.

그제야 유진은 허벅지 사이에서 흔들리는 제 성기가 사정 직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끝에 매달려 있던 쿠퍼액이 주륵, 흘러내리며 페로몬을 더했다. 민첩하게 알아차린 제원은 반대편 유두를 빨아들이며 한 손으로 볼기를 잡아 벌렸다. 말랑한 살집이 밀려나고 구멍이 움찔거리며 모습을 내보였다.

유진은 그가 구멍을 문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촉촉하게 젖은 주름 위로 퍼붓는 알파 향을 견디는 것으로도 한계였다. 오메가가 흥분하고 있음을 알자 알파의 눈에 정복욕이 번쩍였다. 구멍이 온통 붓도록 폭력적인 향기를 몰아치며 손가락을 세웠다.

애액이 가득 찬 내부로 굵은 손가락이 느리게 파고들었다.

“흑, 앗, 으흑!”

러트 알파의 페로몬은 거대했다. 그 향에 과할 정도로 노출된 나신은 이미 알파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꽉 다물려 좁다 싶은 내부는 통증 하나 없이 찐득하게 벌어졌고, 반기듯이 왈칵 흐르는 애액은 손가락을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제원은 그 몸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두 개의 손가락이 주름을 펴내며 푹 쑤셔 박혔다. 하윽―! 새된 신음이 튀어 오르고, 꾸물거리는 점막은 파르르 경련하며 알파를 향해 기었다.

제원은 마치 젖을 빠는 동물처럼 우물거리며 페로몬을 흡수하는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유진은 혼몽한 얼굴로 이따금 괴로운 신음을 흘렸지만, 정작 양쪽으로 벌어진 뽀얀 엉덩이는 비부를 들썩이며 더 큰 자극을 요구했다.

오메가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 제 것을 삼키고 제 페로몬으로 적셔지기를 갈망하고 있다.

러트로 뒤집힌 알파의 뇌는 그것만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이미 과할 정도로 붉게 익은 유두를 집어삼키며 구멍을 헤집었다. 쾌락의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는 내벽의 깊은 곳에 언젠가 유린한 바 있는 전립선이 만져졌다.

“아―…!”

반응은 격렬했다. 위협을 감지한 유진이 발로 침대보를 밀어내며 도망쳤다. 하지만 제원이 입 안에 있는 유두를 깨물자 전신에서 힘이 탁 풀렸다. 유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제원의 어깨를 잡았다.

“안, 안 돼….”

내벽 사이에 안착한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조금씩 굽어지기 시작했다. 제발. 미약한 애원은 흥분한 제원의 귀에 닿지 않았다.

움찔거리는 유륜을 머금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을 때, 제원의 손끝이 전립선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쾌락의 요충지인 민감한 부위가 송곳 같은 압박감에 사정없이 짓이겨졌다. 그리고 약물을 주사하듯 의도적으로 쏘아낸 러트 페로몬에 관통당했다.

머릿속이 어그러졌다. 직접적인 열락은 해일을 몰고 와 배 속을 난도질했다. 지독한 쾌감이 폐부를 쥐어짜고 내장을 점령했다. 유진은 뒤집히는 시야를 끝으로 절망했다.

러트에 이끌려, 유사 히트가 강제되었다.

“흐윽, 학, 아! 아으….”

들어본 적만 있었다. 러트 페로몬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오메가는 강제적으로 히트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러트에 잠식된 알파가 눈앞의 오메가를 제 것으로 갈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능력으로, 그야말로 수컷의 집착이 일궈내는 산물이었다.

유진도 겪을 뻔한 적이 있었다. 가장 처음, 발정제를 먹은 승일의 러트에 휘말려 그의 정액을 삼켰을 때다. 그땐 곧바로 속을 게워내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늦었다.

유진은 고통스러운 갈증에 내몰려 사지를 바르작거렸다.

“아, 힉, 흐으―!”

끔찍한 감각이었다. 기도가 타들어가고 입안은 바싹 말랐다. 엉덩이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부위가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진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내벽은 애액을 미친 듯이 뱉어내며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과하다고 생각되었던 페로몬이 이제는 부족했다. 손가락으로는 턱도 없었다.

“싫어―. 더, 흐윽, 더…!”

창백한 두 팔이 뻗어 올라 제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의지를 벗어난 입술이 다급히 언어를 쏟아냈다. 제 페로몬에 취해 히트까지 온 오메가를 사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원은 평소보다 두 배로 부푼 유두를 가볍게 꼬집으며 내벽을 갈랐다.

“으흐으…!”

손가락을 한 번 쑤셨다가 뺄 때마다 투명한 애액이 주륵 새어 나왔다.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양이 많아질수록 오메가 냄새는 코가 아릴 정도로 짙어졌다. 어느새 양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제원과 유진의 페로몬이 뒤엉키며 공기를 탁하게 물들였다.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벌리자 늘어난 구멍 사이로 붉은 속살이 보였다. 주름이 팽팽하게 펴지며 내부로 알파 향 섞인 공기가 밀려들었다. 달아오른 내벽이 소금에 비벼진 것처럼 찌릿찌릿 울렸다. 유진의 눈이 일그러졌다.

“가렵, 흐윽! 힘들, 어, 제발―….”

“하아…. 긁어 줄까요?”

“아아, 흑!”

유진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그걸 본 제원의 안광이 번들거리는 것도 몰랐다.

구멍을 긁으며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텅 빈 내부가 도로 맞물리면서 시뻘건 화마에 휩싸였다. 작열감이 통증처럼 올랐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른 유진은 허리를 휘고 제 엉덩이를 더듬거렸다.

간지럽다. 긁고 싶다. 내부를 마구 난도질하고 싶다.

눈물이 자꾸만 눈을 적셨다. 이미 흐릿해서 사물과 사람이 분간되지 않는 시야가 더욱 흐려졌다. 혼탁한 머리는 이성의 끄트머리도 찾지 못했고, 조절되지 않는 페로몬은 오메가 향기를 있는 그대로 개방한 채 알파에게 달려들었다.

제원은 허리를 세워 그 절경을 눈에 담았다. 위아래로 들썩이는 엉덩이와 젖은 구멍,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하얀 페니스가 수를 놓듯 침대 위에 흩어졌다.

‘내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걸작을 앞에 두고 지퍼를 내렸다. 흉흉한 성기를 꺼내고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가슴팍 위의 달큼한 열매를 포상처럼 씹었다. 그리고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힉, 아으아―!”

푸욱―. 말랑한 구멍이 강제로 열리고 흉기가 돌진했다. 주름이 펴지다 못해 찢어질 듯 벌어지며 거세게 긁혔다. 일순 통증으로 수축했던 내부는 곧 거침없이 쏟아지는 알파의 지배력에 취했다. 아득한 쾌락이 아랫배를 후려쳤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괴로움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대신 선명한 쾌락이 들어찼다. 쫙 펴진 손끝이 허공을 헤집고 허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죽을 것만 같이, 숨이 멎을 것만 같이….

기분이 좋았다.

“흐으윽, 아아―!”

절정이 솟구쳐올랐다. 전신을 한 바퀴 돈 열락이 발발 흔들리는 유진의 성기를 톡 건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정액이 요도를 긁으며 나왔다. 쾌감이 지나쳐 유진은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삽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제원은 절정하는 유진을 내려다보며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절반쯤 들어갔던 남근의 나머지 부분이 안쪽으로 부욱,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들었다.

분홍빛 구멍이 위태롭게 떨렸다. 그 사이로 굵은 기둥이 거침없이 들어갔다. 막 사정한 엉덩이는 힘겹게 파들거렸고, 질척한 내부는 귀두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마침내 뿌리가 구멍 깊이 박혔다. 더 이상의 인내는 러트의 알파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골반을 틀어쥔 제원은 단번에 성기를 뽑았다. 파드득 몸을 떤 유진이 제 골반을 고정한 손에 매달렸다.

예고 없이 흉포한 움직임이 구멍을 가르기 시작했다.

“흐아, 아! 흑! 으흐…!”

“큭, 후―.”

“아흐으―!”

찔꺽, 찔꺽. 뽀얀 볼기와 돌 같은 하반신이 망치질하듯 맞부딪칠 때마다 난잡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근은 전립선을 긁고 빠져나가 내벽이 제자리를 되찾기도 전에 도로 쑤셔 박혔다. 쾅쾅 들이받는 추삽질에 배려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욕정과 본능뿐이었다.

구멍 안을 채운 애액은 짙은 오메가 페로몬을 내어주고 날것의 러트 페로몬을 받았다. 흡수를 돕는 뜨거운 마찰열은 유진의 호흡을 앗아갔다.

퍼억―! 두툼한 귀두가 깊은 곳을 들이받았을 때 유진은 또 한 번 사정했다. 튀어 오른 정액이 공기 중에 유혹의 향기를 뱉어냈다. 뒤를 범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아아, 힉, 아흑! 앗, 아…!”

부푼 구멍이 기둥에 거칠게 쓸렸다. 내부는 쉴새 없이 긁히고 벌어지며 뿌리를 삼켰다. 배 속이 엉망으로 짓이겨지는 감각이 아프기는커녕 달콤했다. 왜 이렇게 좋은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을 만큼 좋았다.

유진은 상대에게 매달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매달려 흐느꼈다. 두툼한 귀두가 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깊이 처박혔다. 척추를 지배한 전율이 뇌수를 오염시켰다.

“히윽……!”

“큭―!”

크게 꿈틀거린 기둥이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푹 박혔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페로몬이 폭발하듯 터졌다. 유진은 발발 떨며 구멍을 조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바들바들 경련하던 유진의 성기 끝에서는 묽은 정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깊이 들어온 뿌리가 구멍을 난도질하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악――!”

“하아…….”

그 고통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내벽이 한계 이상으로 벌어지고, 기이할 정도로 부푼 성기가 점막을 밀치듯 더욱 깊이 들어오는 것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 히, 흑…!”

유진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제원을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극한의 통증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도 아랫배 위에 놓인 페니스는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냈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윽, 후우…. 중, 위님―.”

어렴풋이, 아주 흐릿하게. 제원의 얼굴 위로 떠오른 희열이 보였다. 동공을 꿰뚫고 들어온 잔상이 뇌리를 자극하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흐…….”

지나친 쾌락과 고통에 난자당한 몸은 빠른 속도로 의식을 잃었다. 노팅. 문득 떠오른 단어를 마지막으로 유진은 눈을 감았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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