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엉킨 신뢰
쿵쿵쿵. 건물 전체를 울리는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귓바퀴를 두드렸다. 어지러운 향수 냄새와 어느 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뒤섞인 음란한 페로몬이 공기를 지독하게 적셨다.
태운은 바 테이블에 기대앉아 유리잔을 둥글게 기울였다. 얼마 남지 않은 양주가 녹아내리는 얼음과 만나며 희석되었다. 진한 호박색의 액체가 레몬색으로 바뀌어 갔다.
“또 왔네요?”
살랑살랑 걸어온 남자가 태운의 옆자리에 앉았다. 태운이 시선을 던지자, 그는 요사스럽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같이 안 놀래?”
“글쎄.”
“비싸게 굴지 말고. 저번에도 구경만 하다가 갔잖아. 비어 있는 구멍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 것 아니야? 오늘은 프리니까 내가 만족시켜 줄게.”
남자는 오메가 페로몬을 은근히 흘리며 태운에게 달라붙었다. 싸구려 향수 냄새와 닮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피식 웃은 태운은 자신의 옆구리에 비비적대는 머리통을 잡아 떨어뜨렸다.
“다른 놈 잡아서 놀아.”
“에이, 여기 다른 놈이 어디 있어.”
“저번에 그놈, 정신없이 박아대던데. 구멍은 안 헐거워졌나?”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본 태운이 입꼬리를 들었다. 멈칫한 남자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처럼 구멍 좁은 놈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다들 나보고 명기라고 한다고. 한번 확인해 볼래?”
“구멍 맛이 별로였으니 오늘 안 온 거겠지.”
“뭐야?”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태운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정말 그냥 가려고?”
“오늘 갈 곳이 있어서.”
“어디?”
태운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늘게 휜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진짜 명기가 있는 곳.”
짙은 눈동자가 남자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혀로 핥는 듯한 진득한 눈빛에 움찔거린 남자는 곧 태운의 말을 이해하고 불만스러운 낯을 했다.
“씨발, 나도 명기라고.”
길게 웃은 태운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뺨을 붉힌 남자는 괜스레 투덜거린 후 다른 알파를 물색하기 위해 클럽 깊숙이 사라졌다.
며칠 만에 돌아온 저택은 고요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1층은 불도 켜지 않아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태운은 어두컴컴한 내부를 훑어보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2층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우뚝 멈추었다.
오메가 냄새가 났다.
“흐음.”
히트는 아니었다. 정사에 이끌려 나온 페로몬이었다. 태운은 공기 중에 희미하게 흐르는 냄새를 음미하며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유진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달콤한 향기는 짙어졌다.
방문 앞에 서자 문틈으로 찔끔찔끔 새 나오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닫혀 있는 문과 주변의 복도를 한 번 훑어본 태운은 문고리를 돌렸다. 지독한 정사의 냄새와 함께,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몸이 보였다.
“흐, 으으…….”
기절한 나신이 움찔거리며 앓는 신음을 흘렸다. 침구 위로 흩어진 흑발은 잘게 경련했고, 벌어진 볼기 사이로는 희멀건 정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정액의 주인은 방에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버려진 정조대만이 오메가 냄새를 풀풀 풍겼다.
환하게 반짝이는 모니터까지 훑어본 태운은 다시 문을 닫았다.
“타이밍이 좋군.”
피식 웃은 태운은 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중위님.”
유진은 눈을 떴다. 부어오른 눈두덩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뻑뻑한 눈을 굴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야를 가렸던 안대도, 손목을 휘감았던 구속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유진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시선을 조금 틀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환한 모니터 위로 선명한 [실패]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잔혹하도록 새빨간 글씨가 기다렸다는 듯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곧 반짝이던 모니터도 암전되었다.
“…….”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기억이 머리를 적셨다. 감히 욱신거린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열감이 아래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유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중위님.”
침대 곁에 서 있던 제원이 손을 뻗었다.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유진은 그의 손이 닿기 직전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눌린 엉덩이와 아랫도리가 찌르듯이 아팠지만, 숨을 삼키고 손을 뻗어 제원의 셔츠 깃을 당겼다. 살짝 비틀거린 제원이 주욱 끌려왔다.
“……무슨 생각이야, 신제원.”
잔뜩 쉰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혼몽하고 어지러운 머릿속에, 정조대의 잠금을 풀고 카테터를 뽑아내던 손길만이 선명히 떠올랐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제원의 입술에 고정했다.
하지만 제원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에서 눈을 떼어내자, 조금 벌어진 눈으로 유진의 몰골을 훑고 있는 제원이 보였다. 엉망이 된 나신을 따라 그의 눈길이 오르내렸다. 마치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무표정하던 유진은 서서히 미간을 좁히다가 조금 시선을 내렸다. 제원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열쇠가 보였다. 정조대 열쇠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탐색하듯 제원의 낯빛을 훑던 유진은, 이윽고 주먹에서 힘을 툭 풀었다.
동이 텄다. 기상한 부대원들은 모두 1층에 모였다. 유난히 조용하던 제원은 유진의 낯을 살폈다. 평소보다 조금 부은 얼굴이 유독 어둑해 보였다.
“성공한 거 아니었어? 왜 실패가 뜬 거예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일이 물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미션 종료가 말 그대로 코앞이지 않았던가.
유진은 건호와 승일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이상한 기색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원에게 시선을 돌리자, 제원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역시나 그의 표정에서도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진은 식도를 타고 오르는 위액을 겨우 삼켰다.
어젯밤, 누군가가 유진을 범했다. 손발을 제압한 채 뒤를 범하고 정조대를 벗겼다. 성공까지 얼마 남지 않았던 미션은 실패했고, 내내 안대를 쓰고 있던 유진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유진은 상대가 제원이리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정조대의 잠금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른 새벽, 제원은 열쇠를 들고 찾아와 기절해 있던 유진을 깨웠다.
과연, 간밤의 알파는 정말 제원이었을까?
“…….”
의구심은 부대원들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몇 시간 동안 몇 배로 부풀었다. 유진을 이곳에 처박은 것은 박주건이다. 유진을 뒤흔들기 위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굳은 눈을 굴렸다. 거실 한구석에 서서 회의를 구경하고 있던 태운이 시선을 느끼고 입매를 기울였다.
“아침부터 성실하네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었던 태운이 어느 순간 저택에 와 있었다.
유진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저를 깨운 제원을 방으로 돌려보낸 후, 몸을 씻고자 억지로 욕실로 향하던 길에 태운과 마주쳤다.
사실 그때의 기억은 혼잡해 잘 나지 않았다. 폭력적이었던 정사의 여파로 혼몽한 상태에서 태운을 조우한 순간,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숨도 못 쉬고 절정을 반복했던 기억이 벌레처럼 기어올라 척수를 빨아먹은 탓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몰아치는 기억을 억지로 깊은 곳에 밀어 넣고 잠갔다.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소름 끼치는 감각도 잘 다스린 덕에 이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날의 일이 아니었다.
히트 억제제를 건 미션을 누군가 방해했고, 마침 그날 밤 태운이 저택에 돌아왔다.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중위님.”
낮은 부름이 유진을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눈앞을 스치는 장면들을 옅은 숨과 함께 흘리며 손가락을 말아 쥐자,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구경하던 태운이 비식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에서 유진은 억지로 눈을 떼어냈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그래.”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션 실패가 뜬 만큼 감출 수는 없었다. 착잡한 마음을 내리누른 유진이 말문을 열었다.
말할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사자인 유진조차도 페로몬에 절어졌던 터라 기억이 흐릿했고,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니 설명할 것은 더더욱 없었다. 지난밤 누군가 찾아왔고, 눈을 가렸으며, 정조대를 풀었다. 그뿐이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해졌다. 각자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색하게 굳은 공기 속에서 말을 마친 유진은 새벽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다. 깨어난 순간 이미 전신이 페로몬으로 압도된 상태였던 탓에 감각 기관은 마비되어 있었다. 상대는 목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았다. 명백히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만약 상대가 천태운이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슬그머니 피어올랐지만 유진은 그것을 고요하게 눌렀다.
“정조대를 풀었다고?”
중얼거린 승일이 홱 고개를 돌려 제원을 보았다.
“열쇠는 네가 갖고 있었잖아.”
얼굴을 굳힌 제원은 곧장 유진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왜 어제 바로 대장한테 가지 않았지? 미션 시간 얼마 안 남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위님께서 주무시고 계셨어. 지난밤 한숨도 못 자신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던 거고.”
“차라리 시간 맞춰서 정조대 뽑아 주고 다시 자게 하는 게 낫지 않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승일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제원을 몰아붙였고, 그럴수록 제원의 눈매는 점점 더 딱딱해졌다. 유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손을 들었다.
“그만해. 내가 어젯밤에 잠들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신제원은 오늘 아침 정조대를 풀어 주려고 내 방에 찾아왔어. 그리고 열쇠를 쥔 게 본인뿐인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벌였을 정도로 생각이 짧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유진은 오늘 새벽 눈을 떴을 때부터 하염없이 머리를 굴렸다. 무엇이 정답이라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 유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 이것이었다.
조금 구시렁거린 승일은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관망하듯 지켜보고 있던 건호가 고요히 물었다.
“그럼 누구라는 겁니까?”
결과가 있으니 범인도 분명히 있다. 건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지만, 유진은 섣불리 답하는 대신 말을 줄였다.
함부로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서로 단단하게 뭉쳐도 버티기 힘든 이 상황에 불신과 균열이라는 돌을 던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한정적인 공간과 정보 속에서 감히 누군가를 배신자로 재단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대신, 유진은 모든 진실을 손에 쥐고 있을 인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 이 저택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말이다.
***
2층은 적막했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다다른 방문 앞에서 유진은 짧게 호흡을 골랐다. 만연하던 혼란이 억지로 가라앉혀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흔들리던 시선도 제자리를 되찾았다.
똑똑. 짧은 노크 후 벌컥 방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태운이 보였다. 그는 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었다.
“이 정도면 노크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문에 자물쇠라도 달지 그랬습니까.”
딱딱한 어조로 말한 유진이 걸어가 맞은편에 앉았다. 옅게 웃은 태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테이블 위에는 김 오르는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증기처럼 술렁이며 찻잔 내부를 돌아다니는 황적색의 액체가 얽매두었던 이성을 간지럽혔다. 유진은 턱에 힘을 주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유감이네요, 좋은 찻잎인데. 그럼 무슨 일로 왔습니까.”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조대 말입니까?”
직설적인 발언이 돌직구로 날아들었다. 일순 동요한 유진은 말을 고르는 척 침묵했지만, 태운의 눈빛이 능선처럼 기울었다.
“초 쳐서 미안하지만 난 모르는 일입니다.”
“…말장난을 하자고 온 것이 아닙니다.”
“중위가 믿든 안 믿든 내 대답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럴 시간에 쉬는 게 어떻습니까? 아직 페로몬 조절도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예?”
흠칫 놀란 유진이 제 몸을 확인했다. 그제야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간밤의 거칠었던 정사 탓이었다.
유진은 다급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통제에서 벗어난 페로몬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벽을 쌓듯 체외에 막을 하나 덧씌웠다. 그제야 동파된 수도관처럼 졸졸 새고 있던 페로몬이 조금씩 옅어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을까. 부하들 앞에서도 이러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무슨 말 말입니까.”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고.”
더 이상 페로몬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두세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태운은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매단 채 유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유진은 낮은 한숨을 삼켰다. 마음을 단단히 굳힌 뒤 찾아왔는데도 태운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태운은 그 이상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유진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했다.
했던 말. 유진은 그의 말을 곱씹듯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짚이는 바는 없었다. 적어도 오늘 그와 말을 섞은 기억은 없으니 그가 저택을 뜨기 전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택을 뜨기 전이라면 역시 그날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튀어 올랐다. 유진은 감정을 억누르고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불쾌한 장면만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언가 머리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보상은 정보입니다. 당신이 묻는 질문 하나에 답해 드리죠.’
그와의 폭력적인 정사 직후, 정신을 반쯤 놓은 유진에게 태운이 그리 말했던 것도 같았다. 눈을 홉뜬 유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보를 주는 겁니까?”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태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입을 달싹이던 유진은 테이블을 응시했다. 희망보다는 의심이 앞섰다. 어쩌면 주건처럼 거짓된 정보를 진실처럼 건네주며 유진을 뒤흔들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보라고는 먼지 한 톨도 없는 이곳에서 태운의 말은 밑져야 본전이었다.
유진은 혼란을 빠르게 몰아내고 상황을 정리했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까지 차례로 나열하고 또 솎아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우고 있던 정조대 사건은 밀리고 밀려 언제 혼란을 야기했냐는 듯 먼지처럼 구석에 처박혔다.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싶습니다.”
길지 않았던 침묵 끝에, 유진은 가장 필요한 정보를 입에 담았다. 그러자 태운이 피식 웃었다.
“나더러 당신이 도망치게 놔두라는 겁니까?”
“원하는 것을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질문에 답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유진은 더 캐묻는 대신 방향을 틀었다.
“그럼 바깥 상황에 대해 알려 주십시오.”
“정권 말입니까?”
“예.”
“정권은 아직 멀쩡합니다. 짐작하지 않았습니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태운은 원하던 답을 선뜻 내주었다. 너무 간결해서 자신이 맞게 들은 것인지 다시 한번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탄식한 유진이 눈을 감았다. 까만 눈꺼풀 아래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던 동료들과 류진모 대령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끔찍하던 혈향과 인자한 얼굴이 뒤섞이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직은 정권이 무사하구나. 다행이었다.
“그럼 류 대령님도 무사하신 겁니까?”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 예외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정권이 무사하다면 류진모 또한 무사할 것이다. 유진은 애써 사고를 긍정적으로 돌렸다. 비록 류진모가 부하들을 앞세우고 자신 홀로 뒷방에서 몸을 보전하는 위인은 아니었으나, 대령쯤 되는 사람이 무사하지 못하다면 빈말로도 정권이 멀쩡한 상태라고 칭하지는 못할 것이다.
“…….”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삐죽이 피어오른 두려움은 언젠가의 악몽을 상기시켰다.
주건의 계략에 빠져 무명의 공격을 받았던 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유진의 직속 부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대령을 따르는 동료인 만큼 적어도 몇 번은 얼굴을 맞대었던 이들이었다. 방주 탄환을 맞은 그들이 볏짚 인형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무너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류진모가 그리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유진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태운이 자선가처럼 관대한 어조로 물었다.
“알고 싶습니까?”
“…알고 싶습니다.”
“알려 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그에 상응하면 대가를 치른다면.”
“대가요?”
“네. 대가.”
태운의 눈매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유진은, 비로소 그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희게 질린 유진이 대번에 날을 세워 태운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저택에 온 목적이 이거였습니까.”
“내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알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많지 않습니까?”
“천 대위님.”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하지만 태운은 치기 어린 학생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머리 잘 굴리세요, 하유진 중위. 벌레처럼 하찮게 죽고 싶진 않을 것 아닙니까.”
“어떤 식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당신처럼 간신배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군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은 뜨라고 있는 겁니다, 중위. 귀는 들으라고 있는 거고.”
성큼성큼 멀어지는 유진의 등허리를 훑어보며 태운이 나직이 말했다.
“모르는 것 같아서.”
“…….”
유진은 방을 나섰다. 거세게 문을 닫고 고요한 복도에 우뚝 서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격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요동쳤던 혈액이 뒤늦게 혈관을 비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아.”
하루 만에 지나치게 많은 일이 몰아닥쳤다. 당장이라도 들끓는 온갖 감정이 목구멍을 헤집고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유진은 참았다. 혀뿌리로 목을 틀어막고 들썩이는 어깨를 바닥을 향해 끌어내렸다.
침착해야 했다. 이성을 유지해야만 했고, 감정에 휩쓸려 옳지 못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됐다. 그것이 제 밑에 부하를 둔 상관의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조금씩 힘에 겨웠다.
유진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된 훈련과 단련으로 굳은살이 붙었던 손바닥은 조금씩 말랑해지고 있었다. 단단하던 신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근육이 붙기 어려운 오메가의 몸이다. 노력의 성과가 조금씩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 손으로 이룬 것들이, 하나씩―.
“…아.”
그러고 보니 승일에게 알파용 억제제를 건네주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는 그게 대수인가 싶었다. 그것보다는, 부대원과 대화를 하여 이 답답한 속을 조금 풀고 싶었다.
유진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 방으로 향했다. 서랍장 위에 던져두었던 억제제는 과장 조금 보태서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곧장 승일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은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끝에 유진은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희미했지만, 건호와 승일의 목소리였다.
“……한데, 궁금하잖아. 오늘만 해도….”
“……네가 ……냐.”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대화를 방해하게 될까 싶어 유진은 슬그머니 발을 멈추었다.
“…니까, 신제원이….”
하지만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마자 곧바로 다리를 옮겼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거실의 한쪽 구석, 지하실의 문 앞쪽에 마주 서 있는 승일과 건호가 보였다. 발소리를 들은 둘이 유진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대장?”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승일이 물었다. 건호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유진은 발언에 신중을 기했다.
“무슨 이야기 중이지?”
“시답잖은 얘기하고 있었지. 신제원이 아직 정조대를 안 돌려놨다더라고. 지하실 구경이나 다시 한번 할까 해서.”
그러고 보니 아침에 제원에게 건네주었던 지하실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않았다. 유진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왜 그렇게 놀랐어, 대장. 얼굴이 흰데?”
비죽 웃은 승일이 손을 뻗었다. 가벼운 손길이 간질이듯 뺨에 닿았다. 한숨을 흘린 유진이 승일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불안감에 마음이 앞섰다. 안 그래도 회의에서 승일이 제원을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제원이 없는 자리에서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 좋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상관인 유진보다 더욱 제원과 돈독한 것이 그들일지도 모르는데.
유진은 짧은 후회를 삼켰다.
“따라와, 백승일. 줄 게 있어.”
“저한테요?”
“그래. 네 방으로 가자.”
유쾌한 듯 웃는 승일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건호에게 대화 상대를 뺏어가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건호는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다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다시금 잡념을 털어낸 유진은 지친 걸음을 옮겼다.
***
잘그락. 쇠가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제원은 손안에서 정조대를 굴렸다. 물로 한 번 씻어내긴 했지만, 온종일 유진의 성기에 박혀 있었던 카테터로부터는 여전히 달착지근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 막대 위로 제원의 시선이 길게 오르내렸다.
이것을 품은 유진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을 내보였다. 홀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모습도, 제 손에 매달린 채 휘청거리며 애원하던 모습도 방금 본 것처럼 눈앞에 선연했다. 발발 경련하며 손바닥 아래에서 꿈틀거리던 성기의 감촉까지도 말이다.
금속을 응시하던 눈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널찍한 테이블 위에 정조대 열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것을 들고 아침에 유진을 찾아갔을 때, 동요하며 혼란스러워하던 유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또한 낯선 모습이었다.
제국군에서 유진은 당당했고, 겁이 없었으며, 거침없이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약한 소리 하는 일 없이 홀로 해결했다. 그는 늘 자신감이 있었고, 그 자신감에 훨씬 웃도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타인으로부터 본인이 오메가임을 각인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
제원은 몸을 일으켰다. 정조대를 말아 쥐고 열쇠도 챙겨 방을 나서자 불쾌한 냄새가 훅 느껴졌다. 태운이 계단 난간에 기대어서 구경이라도 하듯 1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절제되지 않은 페로몬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어떠한 목적도 지니지 않는 일상적인 페로몬이었으나, 같은 알파에게 있어서는 신경을 자극하는 극우성의 냄새였다.
기척을 느낀 태운이 고개를 들었다. 입을 다문 제원은 방어하는 페로몬을 두르고 걸음을 옮겼다.
“왜 돌아온 겁니까.”
“내가 와야 좋은 것 아닙니까? 잘 감시해서 탈출로를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운의 눈이 제원의 손에 닿았다. 요란한 모양새의 정조대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시선을 느낀 제원이 그것을 감추듯 손을 말아 쥐었다.
“중위님이 목적입니까?”
“뭐.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냄새가 좀 좋았어야지.”
제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둘 모두 페로몬을 펼친 상태에서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태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알파는 넷인데 오메가가 하나뿐이라 속이 좀 타겠어요.”
“오메가가 아니라 중위님입니다.”
“가장 먼저 그를 오메가 취급한 게 당신 아니었습니까?”
멀쑥하던 제원의 낯이 조금 비틀렸다.
“당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나는 주제 파악 좀 하라고 위협한 것밖에 없습니다. 좆 달린 짐승 눈이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당신처럼 말입니까?”
“물론이죠.”
불쑥, 태운이 상체를 기울였다. 드리운 그림자와 함께 진득한 우성 알파 향이 주변을 적셨다. 제원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자, 태운이 느릿하게 시선을 흘렸다.
“그러려고 내가 온 거니까.”
사나운 시선이 맞부딪혔다. 수면 아래 잠재워져 있던 제원의 페로몬이 조금씩 짙어지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듯 두 알파의 향이 충돌했다. 건조하던 공기가 점점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복도를 적셨다.
그때 근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승일의 방이었으나 모습을 드러낸 건 유진이었다. 흠칫한 제원이 곧장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놀란 유진은 이미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빠르게 다가온 유진이 제원을 감싸듯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순 밀려드는 짙은 페로몬에 숨이 턱 막혔지만, 유진은 물러서는 대신 제원의 가슴팍을 뒤로 살짝 밀었다. 그제야 태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중위님,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백승일에게 건네줄 게 있었어. 너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죄송합니다.”
유진은 태운에게 눈을 고정했다. 방에서 나온 순간 스치듯이 보았던 시퍼런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느긋한 미소만이 그의 얼굴에 만연했다. 주변에 일렁이는 페로몬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숨을 참듯 삼킨 유진이 입을 열었다.
“제 부하에게 무슨 일이십니까, 천 대위님.”
“먼저 말을 건 것은 그쪽입니다.”
태운이 흘끗 눈짓했다. 의중을 파악하듯 그를 주시하던 유진이 제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원은 유진의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낯을 훑으며 유진은 느리게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위님은 들어가세요.”
“뭐…. 그러죠.”
태운은 순순히 발을 옮겼다. 그가 유진과 제원을 스쳐 지나가 제 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유진은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억지로 멈추었던 숨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옅은 현기증이 일었다.
“윽.”
기도를 파고드는 알파 향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예민해진 감각은 그 향기를 배로 진하게 받아들였다. 점막이 후끈 달아오르며 숨통이 조여들었다. 유진은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중위님. 괜찮으십니까?”
한 걸음 다가온 제원이 부축하듯 유진의 팔뚝을 잡았다. 소름 돋은 피부가 거센 악력으로 감싸였다. 파드득 몸을 떤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문득, 간밤의 알파가 떠올랐다.
“중위님?”
유진은 힘이 풀리려는 무릎을 억지로 고정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내려가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중위님.”
아직 주변을 맴돌고 있는 알파 페로몬이 덜컥 가까워졌다. 몸을 짓누르고 뒤를 파고들던 감각이 폐부를 쥐어짰다.
유진은 잡힌 팔을 비틀었다. 하지만 살갗 위로 달라붙은 손바닥의 악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맞닿은 부위로부터 스며드는 체향이 공기 중에 잔재하던 것인지 제원이 주입하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벽을 짚고 팔에 힘을 주었다. 제원은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유진의 낯빛이 흑색으로 물들자 손에서 힘을 풀었다. 툭,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유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복도에 일렁이던 알파 페로몬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그럴수록 버거웠던 호흡도 점차 편해졌다.
유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원이 보였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한 번 훑고, 숨도 크게 고른 후, 몸을 똑바로 세웠다. 한 걸음 떨어져서 서자 조금 남아 있던 불안정한 감각도 옅어졌다.
기이한 정적을 가르듯 유진이 짤막하게 말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
제원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으나, 창백하게 질린 뺨을 보고는 이내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답했다.
“중위님 히트 말입니다. 회의 때 언급이 없으셔서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일단은 기다려. 당일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제 별로 안 남지 않았습니까.”
“별다른 방도가 없어, 박주건의 반응을 살피는 것 외에는. 만약 끝까지 접촉이 없다면 그냥 버텨야겠지.”
“……알겠습니다.”
제원은 할 말이 남은 표정으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유진은 작게 신음하며 저릿한 팔뚝을 감싸 쥐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제원의 등을 응시하고 있자, 그의 손에 들린 정조대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읏.”
이를 악문 유진은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제복 위로 달라붙은 두 명분의 페로몬이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듯했다.
***
“하, 씨발.”
차마 참지 못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현관문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온 주건은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탁탁. 오늘따라 라이터도 말을 듣지 않았다. 반쯤 씹은 담배와 라이터를 내던진 주건이 휴대폰을 끌어왔다.
스크롤을 주욱 올리자 수많은 오메가의 연락처가 줄을 지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에게 연락을 던진 후 고개를 젖혔다. 아무리 숨을 거칠게 쉬어 봐도 부글거리는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모든 계획은 순조로웠다. 무명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류진모 대령이 무명의 뒤를 캐고 있었으나 주건의 방해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류진모의 최측근인 주건이 정보를 빼내는데 무명의 뒤가 잡힐 리 없었다.
그 덕분에 공로를 인정받아 드디어 무명의 간부와 만날 자리를 얻었다. 여태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터라 옷차림은 물론 만나서 할 말까지도 완벽하게 준비해두었다. 값비싼 선물까지 사놨으니 이제 만날 일만 남았었다.
간부가 돌연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똘마니 굴리는 것도 아니고….”
잘 세팅했던 머리카락이 거친 손길에 헝클어졌다. 간부에게 주려고 했던 와인도 상자째로 거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씨근덕대던 주건은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현관으로 향했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옷 벗고 다리 벌려.”
남자를 질질 끌고 들어온 주건이 그를 소파에 떠밀었다. 유진과 닮은 얼굴이 슬쩍 주건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페로몬을 흥건하게 쏟아내며 옷을 차례로 벗었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달큼한 향기가 주건의 신경을 살살 어루만졌다.
얼굴에서 조금 힘을 푼 주건은 하얀 나신을 훑어보았다. 그 어떤 오메가도 완벽한 대체품이 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순간의 성욕과 스트레스를 발산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가장 기다리던 메인 디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제 스스로 구멍을 벌리고 박아 달라 애원하는 유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하반신이 뜨끈해졌다. 주건은 서둘러 앞섶을 풀고 성기를 박았다. 전희 없이 꿰뚫린 오메가가 달큼한 신음을 흘렸다. 주건은 자지러질 유진을 눈으로 그리며 안광을 빛냈다.
***
축축한 공기를 뚫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안개처럼 일렁이던 김도 차츰 가라앉아, 거울만이 뽀얗게 습기를 머금었다가 이내 물방울을 흘려냈다. 삽시간에 맑아지는 허공을 응시하며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샤워 볼로 벅벅 문지른 피부가 벌겋게 일어났다. 흡사 피부병에 걸린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부어오른 살갗이 따끔거리기까지 했으나 유진은 개의치 않고 손바닥으로 다시금 피부 위의 물기를 쓸어냈다.
벌써 하루가 지났건만 아직도 기도가 화끈거렸다. 두 알파가 본격적으로 쏟아내는 페로몬을 맞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자극이었다. 유진을 향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만약 그게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천태운의 페로몬은 특히 강했다.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의 아래에 깔렸던 기억들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제원을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이 없었더라면 아마 움직이지 못했을 테다.
“……후.”
불안정한 호흡을 다잡은 유진은 서둘러 물기를 털어냈다. 뾰족하게 돋은 소름을 억지로 누르고 문지르니 스산하던 한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물기가 걷히고 김이 사라질수록 난자당한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잇자국, 울혈, 알파 향을 이기지 못하고 생긴 불긋한 자국까지 뒤섞여 난잡한 꼴이었다.
유진은 낯선 모습의 제 몸에서 억지로 눈을 떼어내고 거울을 보았다. 흐렸던 거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다. 지친 표정의,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훤히 드러낸 창백한 남자가 유진과 눈을 맞추었다.
유진은 물기 맺힌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상대방도 똑같이 입을 다물고 눈을 맞춰왔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짙은 피로와 불안감이 보였다.
“괜찮아.”
힘 빠진 목소리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침을 삼킨 유진이 다시금 되뇌었다.
“괜찮을 거다.”
위태로운 거울 속의 남자를 응시하던 유진은 고개를 돌려 욕실을 나섰다.
걱정과는 달리 태운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태연자약한 낯으로 커피 향을 풍기며 저택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꼴이 자못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 그토록 분위기를 들쑤셨던 것을 떠올리면 속이 끓었지만 난리를 피우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유진은 설거지를 대강 끝내고 부엌을 나섰다. 계단 쪽을 향하면서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독어 신문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 테이블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꼴을 만들어 놓은 태운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감시 담당은 건호였다. 한쪽 눈썹을 들며 주변을 둘러보는 찰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 찾습니까?”
“……!”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랐다. 유진은 펄쩍 뛰려는 사지를 애써 다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태운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느릿한 시선이 얼굴 위를 오르내렸다. 물리적인 접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솜털이 바싹 솟았다.
유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태운은 씰룩이는 그의 미간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소동물처럼 움찔거리면 사냥하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건호는 어딨습니까?”
“내가 제법 편해졌나 봅니다. 이제 당신 부하 안부까지 내게 묻고.”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린 태운은 계단을 올랐다. 놀란 심장이 가슴팍 아래에서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억지로 숨을 삼켜 호흡을 다잡은 유진은 다리를 움직였다.
감시를 지속하고는 있다고 하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철통같은 감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주건과 한편인 태운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일이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그만큼 감시에 주력을 쏟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건호는 아마도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리라. 그래도 타박 정도는 하는 것이 좋을까. 유진이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문지르고 있으니 앞서가던 태운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두통이 있습니까?”
“……덕분에 말입니다. 약이라도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야, 내 방에 온다면 못 구해다 줄 것도 없죠.”
유진은 질색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괜히 같이 있다가 페이스에 말려들 것 같았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비틀거렸다. 뒤에서 쏘아진 페로몬이 무릎의 힘을 앗아간 탓이었다.
계단 난간을 움켜쥔 유진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천 대위님. 본위에 걸맞게 행동하세요. 부끄럽지 않습니까.”
태운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들썩였다.
“고작 그 정도로 부끄러울 거면 박주건과 손을 잡지도 못했습니다.”
차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진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태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묵직한 걸음이 다가왔다. 꽤 멀어졌던 거리가 단번에 줄어들고, 이윽고 한 계단 아래까지 가까워지자 태운의 숨결이 유진의 목덜미에 스몄다. 소름이 가시처럼 쭈뼛 서며 경계를 세웠다.
“내게 인간적인 감정을 바라지 마세요. 알파와 오메가는 짐승일 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국 인구의 20%가 오메가와 알파입니다.”
“‘발정기’를 겪는 ‘인간’이라니. 말하면서도 우습지 않습니까, 중위?”
이를 악문 유진은 경계하듯 뒷걸음질로 계단을 두 칸 올랐다. 그러자 태운은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던졌다. 단차로 인해 유진의 바지춤이 먹음직스럽게 코앞에 드러났다. 지독하도록 달큼한 향기가 코끝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입천장을 혀로 뭉근히 축이며 태운이 물었다.
“히트가 얼마나 남았죠?”
“……답할 이유 없습니다.”
“어떻게 대처할지는 정했습니까? 당신이 정해야 할 겁니다. 오메가의 발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알파는 없거든.”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믿어요. 나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과 사기는 능력이 부족한 놈이나 쓰는 수법이죠.”
“……내통은 사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태운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벌어졌던 단차가 줄어들며 다시 거리가 가까워졌다. 유진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흥미롭다는 듯 눈을 좁힌 태운이 나직이 속삭였다.
“중위는 이 제국이 얼마나 깨끗하다고 생각합니까? 중위 본인조차도 세상의 불합리함에 인생이 제법 어그러졌던데,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몇 걸음 가지 못해 등허리에 난간이 닿았다. 유진을 가두듯이 선 태운이 고개를 숙였다. 알싸한 체취가 내려앉았다. 그의 페로몬과 지독하게 닮은 냄새였다.
“나는 당장 어제도 매음굴 단속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무려 베타를 대상으로 한 업소였죠. 우습지 않습니까? 그네들이 페로몬을 맡아서 무엇에 쓰겠다고.”
태운이 손을 뻗었다. 잔뜩 경직된 눈매 위로 손끝에 닿았다. 맞닿은 부위로부터 전해지는 체온이 꼭 알파 향처럼 느껴졌다. 유진은 일그러진 눈으로 태운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새카만 눈동자를, 뱀과 같은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이 아득바득 지키겠다고 몸부림칠 만한 가치가 이 제국에 있습니까? 당장 천지에 널린 게 성매매인데 그것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오메가와 알파의 위로 베타를 군림시키겠다는 게 지금 당신들의 목적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남들 위에 서면 누구나 비틀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라면 지금 이대로 두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고속 승진은 할 수 있겠지. 고개 뻣뻣한 상부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는 재미도 좀 볼 수 있을 테고.”
“……당신은 대위 직급을 달 자격이 없습니다.”
옅게 웃은 태운이 손끝을 움직였다. 슬그머니 피어오른 알파 페로몬이 귓불을 건드리고 턱선을 두드렸다. 흠칫한 유진이 숨을 멈추었다.
스윽. 뺨을 문지른 손끝이 눈꼬리를 가볍게 비볐다. 발긋한 열기가 얼굴에서 시작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급히 헐떡인 유진이 태운의 손목을 붙들었지만, 귓바퀴를 문지르는 손길을 떼어낼 수는 없었다.
“조금 편하게 생각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불필요한 것도 좀 놓고. 그러지 않는 당신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나는.”
“천, 태운….”
“고집스럽고, 완강하고…. 그렇기에 박주건이 그토록 못 얻어서 난리를 피우는 거겠지. 이해는 됩니다. 원래 얻기 어려울수록 애간장이 타는 법이거든.”
뜨끈한 손바닥이 목덜미를 휘어 감았다. 목울대를 감싼 손에서 선득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유진은 황급히 숨을 들이켜며 뒤로 고개를 피했다. 다급한 몸짓 탓에 상체가 난간 밖으로 밀려났다. 체중이 쏠리면서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막을 새도 없이 몸이 계단 밖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그때 단단한 손길이 허리를 감싸 당겼다.
훅 끌려간 몸이 태운의 품에 맞부딪쳤다. 반쯤 기울었던 몸은 똑바로 세워지고 발이 다시 계단에 안착했다. 눈을 홉뜬 유진이 헐떡였다. 추락할 뻔한 탓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늘게 웃은 태운이 발긋해진 귓불을 살살 문질렀다.
“조심해야지. 하나뿐인 오메가를 잃으면 저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
“나중에―.”
태운의 손이 눈에 가까워졌다. 유진이 놀라 고개를 비틀자,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툭, 유진의 머리를 건드렸다. 바람 같은 손길이 머리카락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손끝에는 언제 튄 것인지 모를 주방 세제 거품이 달려 있었다.
“봅시다.”
백색의 도자기처럼 멀쑥한 얼굴을 훑은 태운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묵직한 발소리가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찍이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유진은 멈추고 있던 호흡을 토해냈다.
“하, 아….”
핏기 없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유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도 안 돼.”
고작해야 몇 초였다. 제발 기분 탓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욱신거리는 앞섶 아래로 미약하게나마 곤두선 제 것의 윤곽이 보였다. 유진은 아득함을 느끼며 볼 안쪽 살을 콰득 씹었다.
히트가 임박해서 그런 걸까? 삐거덕거리는 머리를 굴려 봐야 오메가의 신체 반응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앞섶을 내려 보던 유진은 굳은 채 서 있다가, 주변을 맴돌던 태운의 페로몬이 완전히 가시고 인기척이 다가올 즈음에야 놀라 고개를 홱 들었다. 계단 위에 선 건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짙은 눈길이 얼굴을 타고 내려가 식은땀으로 젖은 목덜미에 머물렀다. 유진은 퍼뜩 이성을 되찾았다.
“어디 갔다 왔어, 이건호.”
“신제원과 잠깐 있었습니다.”
‘신제원?’
멈칫한 유진은 이내 난간을 짚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자리를 비울 거면 내게 먼저 보고해. 임무 중의 기본이다, 이건호.”
“죄송합니다.”
“천태운은 방으로 돌아갔으니까 복도로 돌아가고.”
건호를 지나친 유진이 앞섶을 의식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재킷에 가려져 크게 티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이 꼴을 건호에게 들켰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곤혹스러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중위님.”
“왜?”
“……아닙니다.”
걸음을 멈춘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대처럼 선 건호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반신에 쏠렸던 신경이 서서히 머리로 되돌아왔다.
“……신제원이랑 무슨 일 있었어?”
“잠시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묵례한 건호는 태운의 방 앞으로 향했다. 유진은 미간에 골을 만들고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승일이라면 몰라도 건호가 저러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빤히 응시해도 건호는 시선에 답하지 않았다.
짧은 고민 끝에 유진은 제원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하고 문을 여니 무언가 종이에 정리하는 제원이 보였다. 그는 유진이 방에 들어오자 곧장 허리를 세워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건호와 있었다고 들었어. 그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아?”
“……시간은 괜찮습니다만.”
유진은 방문 너머에 있을 건호를 의식하며 제원에게 걸어갔다. 건호가 말하기 곤란한 화제였다면 자신의 히트에 대해서라도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등 뒤에서 험담할 인물들이 아니니 아마 저들끼리 짧은 회의라도 한 것인가 싶었다.
“이건호가 저와 있었다고 했습니까?”
“그래. 왜?”
“저는 계속 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따로 만난 기억은 없습니다.”
제원의 말에 방을 가로지르던 다리에 철근이 박힌 듯했다. 우뚝 멈추어 선 유진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제원이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방금 같이 있었다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이건호가….”
“그가 저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습니까?”
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창백한 낯으로 제원을 보다가, 겨우 고개를 돌려 방문을 쳐다보았다. 닫힌 방문 너머로 건호의 인영이 보이는 듯했다. 다시 제원을 돌아보자 그는 눈썹을 좁히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야말로 유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