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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4/22)

파란

하늘이 맑았다. 새하얀 구름 사이로 떠오른 해가 번화한 도시에 따사로운 빛을 내렸다. 빌딩 외벽의 유리와 부딪힌 햇살이 보석처럼 흩어지며 반짝거렸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았다. 어두침침한 저택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남색 재킷을 툭툭 당겨서 주름을 펴낸 태운은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태운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묵례하며 복잡한 길을 거침없이 나아간 태운은 회의실 문을 열었고, 막 개회를 앞둔 건조한 분위기가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 천 대위.”

“오랜만입니다, 대령님.”

문을 닫고 들어온 태운이 자리에 앉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갖가지 안건들이 차례로 제시되고, 적절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 이는 따로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 류진모 대령이었다.

류진모가 특히 아낀다고 소문이 자자한 오메가 중위, 그리고 그 오메가가 이끄는 청운 부대는 유명세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제국군의 핵심 인력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들이 제국군을 배신했다는 소문이 군 내부에서 만연했다.

평소라면 단순한 뜬소문 취급을 당했을 그것이 현재 눈덩이처럼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이유는 소문의 주인공인 청운 부대가 며칠 전 임무 도중에 증발해버린 탓이었다.

그들의 실종을 인지하자마자 류진모는 이를 보고하며 추가 인력을 보냈다. 하지만 도착한 곳에는 이미 까맣게 전소해버린 건물만 남아 있었다. 내부에는 고기 타는 냄새가 지독했고, 얼굴조차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시체가 가득했다. 열네 구의 시체 중에서 청운 부대의 유전자는 검출되지 않았다.

꺼림칙한 정황은 청운 부대를 향한 의심에 불을 지펴버렸다.

“제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만. 류 대령님께서 이으시겠습니까?”

“알겠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들이 하이에나처럼 눈을 번뜩였다. 류진모는 담담한 어투로 그간의 일에 대해 간략히 보고했지만,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그것이 아니었다.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 중위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소?”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말을 멈춘 류진모가 냉랭한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오히려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없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아끼던 부하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소? 류 대령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라 하는 편이 차라리 믿을 만하겠소만.”

신랄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꿰뚫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이들도 류진모를 흘끔거리며 침묵을 지켰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가운데,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종준 대령이 나지막이 말했다.

“대령씩이나 되는 자가 소문에 흔들려서야 부하들에게 본보기는 못 되겠군. 그렇지 않나, 최 대령?”

말문이 막혔는지 멈칫한 최 대령은 시선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오메가 따위를 데리고 들어와서 이 사달을 만드는지.”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내 친히 상부에 보고해 드리겠네. 최 대령의 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말이야. 법 위에 군대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크흠.”

헛기침하며 최 대령이 꼬리를 내렸다. 김 대령은 고개를 틀어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조용했다.

“할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네만. 천 대위.”

“예.”

태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곳곳에서 그를 삐죽하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천태운이라는 그럴듯한 패를 지닌 김 대령에게 대적할 만한 이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락방의 늙은이들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비소를 삼킨 태운이 허리를 세웠다.

“이로써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찮기 짝이 없는 이들이었다.

종료 선언을 하자마자 간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드륵, 의자를 밀고 일어선 김 대령은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는 류진모의 곁에 다가섰다.

“신경 쓰지 말게. 최 대령이 자네 질투하는 거야 늘 있던 일이 아닌가.”

툭툭,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자 류진모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나?”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럴 녀석이 아닌데….”

탁탁거리며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리는 손끝에서 불안감이 물씬 느껴졌다. 충직하다 못해 류진모의 명이라면 지옥 한복판으로도 달려 나갈 것 같던 유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근심이 깊어지는 듯했다.

심해까지 가라앉은 친우의 기색을 훑은 김 대령이 태운을 보았다.

“하 중위와는 아마 일면식이 있었지? 천 대위는 짐작 가는 바는 없나?”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 알지 못합니다.”

“그런가….”

류진모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본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행방불명되었으니, 미안함은 둘째치고 혹여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특히 하유진은 류진모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만큼 열정적이고 성실하며, 또 그만큼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이도 없었다. 그것을 모두 감내하고 류진모의 뒤를 따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틴 이가 하 중위다.

박복하기 그지없는 인생이다. 이제 겨우 세상에서 빛을 받기 시작하던 시점이 아니던가. 안타까움에 혀를 찬 김 대령은 도움이 되지 않을 위로 대신 화제를 돌렸다.

“오늘 회의가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가야지.”

묵직한 몸을 일으킨 류진모가 회의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온 태운은 회의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란 시선을 흘린 주건은 곧바로 류진모의 곁에 섰다.

“대령님.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부하의 앞에서까지 침울해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류진모는 애써 기운을 끌어 올려 앞으로 향했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비웃음이 만연한 눈빛을 흘린 주건은 김 대령에게 직각으로 인사하고 곧바로 류 대령의 뒤를 따랐다.

같잖은 모습이 꼭 싸구려 희극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유쾌함을 머금은 태운은 제 앞에서 걸어가는 김 대령을 보았다.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두 대령의 부하들이 이 지경인 데다 정작 유일하다시피 했던 희망인 하유진은 어둠에 잠식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신이 있다면 분명 선이 아닌 악의 편이리라.

***

뒤숭숭한 분위기 탓에 일정은 저녁 늦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태운은 느긋하게 연초를 태우며 소파에 늘어졌다. 피어오르는 탁한 연기가 천장에 작작하게 깔렸다. 어느 유명 오메가의 향을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던 알파용 연초는 퍽 마음에 들어, 최근 태운의 낙 중 하나였다.

싼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씁쓸함의 끝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것이 꼭 하유진에게서 느껴졌던 오메가 냄새와 비슷했다.

“후―.”

길게 이어진 탁한 기운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연초의 끄트머리에서 재가 흘러내렸다. 다시 한 모금 빨아들인 태운은 반쯤 줄어든 그것을 재떨이에 툭툭 털어냈다.

단 향을 남기고 먼지가 되는 꼴도 그 오메가를 닮았다.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이 입가에 매달렸다.

세상은 깨끗하지 않다.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이 추악하니 깨끗할 수가 없었다. 태운은 알파 중에서도 존경을 받아 마지않는 극우성 알파였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과는 뜻이 잘 맞았다.

오메가가 인간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작 해봐야 50년 남짓이다. 그들은 물건이었으며, 알파의 소유물이었다. 알파 앞에서는 끽소리도 하지 못하는 베타조차 오메가를 무시했다. 특히 남성 오메가는 인간이되 인간이지 못하고, 남자이되 남자이지 못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은 평등해졌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제국이 이토록 번영하고 안정화된 것에는 인권을 정립한 공이 컸다. 베타는 물론 오메가의 인권까지 알파와 평등하게 끌어올리고 인신매매를 금했다. 오메가 매음굴은 여전히 암암리에 존재했지만 그것을 법으로 인정하느냐 금하느냐의 차이는 컸다.

하지만 몇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인식이 고작 반세기 만에 뒤바뀔 수는 없었다. 다들 겉으로는 오메가를 존중해도 속으로는 그들을 비웃었다. 배려라는 이름의 차별을 했다. 그것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하유진이었다.

같은 우성이더라도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을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그동안 오메가가 알파에게 팔려 다니던 이유였고, 동시에 군대에 오메가가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유진은 그 벽을 깨부쉈다. 그리고 제국 내 모든 오메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이상자는 많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열등감에 휩싸이는 이도 많아지는 법이고, 박주건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동기로 입대해 같은 상사의 아래에서 몇 년을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박주건을 철석같이 믿어버린 유진의 무구함을 태운은 가히 가엽게 여겼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가루가 된 이 연초처럼 말이다.

***

유진은 거실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장이 헛헛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이 상태로 무언가를 먹었다면 필히 탈이 났을 것이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고, 미션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유진을 보며 주건이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사실 주건이 유진을 조롱하건 비난하건 상관은 없었다. 신뢰했던 동료에게서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지 누군가의 비틀린 감정을 마주하는 것은 유진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음식 문제는 해결해야만 했다. 확실한 안전 보장이 필요했다. 유진은 시선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짤막한 바늘이 숫자 9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오늘 천태운이 온다면 이제 슬슬 모습을 드러낼 법한 시간대였다. 그리고 유진은 그가 자신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를 건 채, 유진은 이전번에 그랬듯 거실에 홀로 앉아 시간을 죽였다.

“좋은 밤입니다.”

10시를 오 분 남겨놓았을 때, 등 뒤에서 여유로운 음성이 흘렀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흘린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날 기다렸습니까?”

“예. 기다렸습니다.”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뜬 태운이 피실 웃으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신장만큼이나 큼지막한 손이 소파 등받이를 가볍게 짚었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우연이네요. 나도거든.”

슬쩍 흘려낸 페로몬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간질였다. 고개를 비틀어 올린 유진은 태운의 낯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늘도 퇴근하고 오셨나 봅니다.”

“예. 오늘 하루는 편히 잘 쉬었습니까?”

“이미 다 보셨을 텐데요. 박주건이 저택 모습은 안 보여 줍니까?”

태운이 즐거운 듯한 눈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요. 오늘은 좀 바빴어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하 중위는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이 상황에서 없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대답도 따박따박 하고.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이미 한 번 당한 바가 있으니 태운도 순순히 넘어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자, 오히려 태운의 쪽에서 유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훅 다가온 숨결이 귓바퀴에 닿았다. 유진은 움찔거린 손에 힘을 주어 바짓단을 쥐어 잡았다.

“당신이 옳습니다. 분명 궁금한 게 많을 테지.”

“…….”

“자정에 내 방으로 오세요.”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며 파고들었다. 귀를 감싸 쥔 유진이 몸을 뒤로 물렸고, 태연하게 허리를 세운 태운이 눈썹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속셈입니까.”

“쉿. 부하들이 다 깨겠습니다.”

다들 멀쩡히 깨어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벌리자 태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듬직하고 믿을 만한 부대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상관처럼.”

“…천태운 대위님.”

유진의 눈이 서늘하게 식었다. 류진모에 대한 화제는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가볍게 웃은 태운은 유진의 뺨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럼.”

느긋한 발걸음이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유진은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단단하던 손끝의 감촉이 피부 위로 길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

자정이 되었다. 시계를 응시하고 있던 유진은 방을 나섰다.

태운의 방은 복도 가장자리에 있는 곳으로, 구조는 다른 방과 동일한데도 이상하게 유난히 넓고 삭막한 것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숨겨진 통로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몇 번이고 드나들며 탐색한 탓에 유진 본인의 방보다도 더 눈에 익었다.

심호흡한 후 방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태운이 보였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딱 맞추어 왔네요.”

방 안에는 태운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여유가 가득한 그 기색으로 보나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묻고 있는 모습으로 보나, 저 남자가 얼마나 경계심을 풀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유진은 경계할 필요도 없는 대상인 것이다. 분하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천태운이 그러고자 한다면 유진은 그에게 저항조차 할 수 없다.

그래도 그와 마주해야만 했다. 주먹을 쥔 유진은 태운에게 다가섰다.

“보장이 필요합니다.”

“뭐에 대한?”

“음식에 수를 쓰지 않겠다는 보장 말입니다.”

가느다란 눈길이 유진의 얼굴로 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긴장감이 오르내렸다. 유진은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그거야 중위가 박주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계속 밥을 먹지 않는다면 그쪽에도 좋을 것이 없을 겁니다. 아사한 시체를 보고 싶은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태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에 또 어떤 장치가 있을 줄 알고.”

“…무슨 말입니까.”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네요. 언제까지 거기에 서 있을 겁니까?”

태운이 문에 바짝 붙어 있는 유진을 향해 타이르듯 말했다. 가까이 오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겠다는 어투였다. 유진은 가라앉은 눈으로 태운을 응시하다가 바닥에 달라붙은 구두 밑창을 느리게 떼어냈다. 다가갈수록 알파의 체취가 진해져 발등을 타고 긴장감이 올랐다.

태운은 그런 유진을 가만히 구경했다. 딱딱하게 경직된 모양새가 허튼짓이라도 하면 곧장 도망갈 기세였다. 가시를 잔뜩 세운 모습이 꼭 겁먹은 고슴도치 같아, 웃음을 삼키며 유진을 올려 보았다. 페로몬을 슬쩍 흘려내 유진의 손등을 간질이니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하듯 쏘아보았다.

“―천태운 대위님.”

“힘 좀 풀어요, 하 중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힙니다.”

손을 거칠게 털어낸 유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알파 페로몬이 닿은 부위가 저려왔다. 유진은 손등을 뒤집어 바지에 꾸욱 내리눌렀다.

“음식은 먹어도 됩니다.”

“…보장이 필요합니다.”

“박주건은 당신이 미션을 어기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기 좋게 넘어간 게 당신이고.”

콧대를 꺾어놓고 싶었겠지. 나직한 중얼거림에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태운은 정사 직후의 배부른 사내처럼 눈을 좁히며 유진을 훑어보았다. 하얗고 단정한 것이, 쾌락에 굴복해 정액으로 흥건하게 젖으면 예쁘장할 얼굴이다. 저 불그스름한 입술 사이로 성기를 물려놓아도 분명 볼만할 것이다.

난잡한 상상 속의 얼굴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며 태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꽁꽁 감춰놓은 오메가 향이 일렁이듯 피어올랐다. 달착지근하고 진한 향기였다.

“그럼 이제 음식에는 수를 쓰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지금 있는 식재료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기미라도 봐 줄까요?”

짐짓 조롱하듯 말하자 유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하고 고지식한 반응이었다. 밖에서 보았던 유치한 신경전보다야 이쪽을 구경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소파를 툭툭 두드리며 태운이 입꼬리를 들었다.

“부하들과 엮인 소감은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죠?”

“…얘기는 끝난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얘기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태운이 강한 힘으로 유진을 끌어당겼다. 목석처럼 서 있던 몸이 반쯤 태운의 쪽으로 기울고, 비틀린 셔츠 사이로 핏빛 잇자국이 드러났다. 유진이 뒤늦게 목덜미를 감싸 쥐었지만 이미 태운은 비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피임약은 안 먹습니까?”

몸을 움찔 떤 유진이 딱딱하게 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필요할 텐데.”

“그럴 일 없습니다.”

“박주건에게 그렇게 뒤통수를 맞아놓고 깨달은 바가 없는 모양입니다.”

이를 악문 유진이 소파를 짚고 태운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하지만 손목을 감싸고도 한참 남는 큼지막한 손은 유진을 놔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어 당겼다. 태운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희미하던 그의 페로몬이 점점 더 짙어졌다.

“윽, 이거―.”

“구멍이 있으면 처박는 게 알파라는 종족의 천성입니다. 오메가의 천성이 알파의 좆을 먹는 것이듯 말입니다.”

“―그럴 일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태운은 한 손으로 유진의 엉덩이를 덮었다. 바지를 꿰뚫고 들어올 듯한 강한 악력이 말랑한 볼기를 터뜨릴 듯이 강하게 쥐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진이 사색이 되었다.

“천태운―!”

“기분 좋지 않았습니까? 안 좋았을 리가 없는데. 알파 향에 버티는 오메가는 없거든.”

“흑…!”

엉덩이 골을 느리게 쓸고 파고든 손끝이 바지 위로 구멍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을 타고 페로몬이 스며들었다. 긴 시간이 흘러 간신히 진정되었던 구멍 위로 다시금 알파 향이 달라붙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유진이 남은 한 손으로 태운의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구멍 위를 문지르는 손은 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흣. 그, 만….”

“피할 법도 한데 용케 내 방에 들어온 건 칭찬하겠습니다. 조금 건방진 것은 뭐, 개성이라고 치고.”

스윽, 슥. 단단한 손끝이 구멍을 쓸고 오르내릴수록 저린 감각이 아랫배를 타고 퍼졌다. 열을 머금기 시작한 구멍이 알파의 페로몬을 열심히 내부로 날랐다. 내벽이 급속도로 뜨거워지며 간지러운 감각에 휩싸였다.

“헉―.”

파드득 숨을 삼킨 유진이 소파를 강하게 쥐었다. 놀란 하반신에 힘이 꽉 들어갔다.

전류가 오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열감이 단숨에 구멍을 잠식했다. 페로몬을 옅게 흘리는 손끝이 바지 위로 오르내리는 것뿐인데도, 마치 알몸으로 짙은 페로몬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시야가 초점을 잃고 뿌옇게 흐려졌다. 태운의 팔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거의 얹어놓은 수준이었다.

주욱, 엉덩이 골을 길게 가르며 문지르는 힘이 구멍을 꾹꾹 눌러댔다. 흐, 윽. 신음을 간신히 삼키며 버티던 유진은 점점 무너지더니 이내 태운의 어깨 위로 달뜬 숨을 뱉었다. 붉게 물든 목덜미를 훑어보며 태운이 피식 웃었다.

“쑤셔 줄까?”

“……!”

충혈된 눈이 사나운 빛으로 태운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천 위로도 느껴질 정도로 통통하게 부어오른 구멍을 손톱으로 긁어 주니 맥없이 흩어지며 바들바들 떨었다. 단정하게 단추를 채워 올린 제복 너머로 오메가의 향이 흘러나왔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연초보다 훨씬 매혹적인 향이었다. 태운은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 골 사이를 뭉근히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가끔 이렇게 내 방에 와도 좋습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원하던 정보를 얻게 될지.”

“흐, 읏―.”

“베갯머리 송사도 마다하지 않겠고. 물론 지금처럼―.”

붙잡고 있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흐느적거리는 손목을 놓아주고 툭툭 셔츠 단추를 풀어내자 울긋불긋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혈향과 섞인 향기가 또 나름 매력적이라, 태운은 흩어지는 향을 들이마시며 볼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움찔거리던 구멍이 애액을 주륵 쏟아내며 바지를 적셨다.

“뻣뻣하게 서 있는 게 아니라 옷도 좀 벗고, 다리도 스스로 벌려야 구미가 당기겠지만.”

“천, 태운…!”

“정말로 안 쑤셔 줘도 되겠습니까? 여긴 이미 좆 받을 준비가 한창인 것 같은데.”

엉덩이 살이 주물리고 구멍이 눌릴 때마다 머릿속이 번쩍였다. 태운의 위로 녹아내리듯 엎어진 유진이 덜덜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통제되지 않는 페로몬이 줄줄 새어 태운에게 흘렀다. 태운은 그것을 폐부 깊숙이 빨아 마시며 탐스러운 볼기를 주무르고 젖은 구멍을 비볐다. 목 끝까지 치솟은 흥분감에 비하면 감질날 정도로 약한 자극이었다. 그 간극이 지독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유진이 팔다리를 바르작거리며 흐느끼자 태운이 아이를 달래듯 유진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손바닥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배 속 깊은 곳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질척한 애액이 구멍을 비집고 나와 천을 적셨다. 그 액체를 펴 바르듯 손가락이 오르내리며 구멍을 긁어댔다.

유진은 태운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만, 흐윽, 그만….”

“정말로?”

“으흑―…!”

애액에 스민 페로몬이 내벽을 벌겋게 물들였다. 유진은 필사적으로 본능을 거부하며 몸을 비틀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엉덩이가 들썩이며 알파의 시각을 자극했다. 하반신을 묵직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태운은 구멍을 괴롭히듯 손톱을 세워 젖은 부위를 긁어 주다가 엉덩이를 놓아주었다. 허우적거린 몸이 소파를 타고 주욱 미끄러져 내려갔다. 유진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무너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 흐윽, 흐….”

아랫배에 흠칫흠칫 힘이 들어갔다. 꿈틀거리는 내벽을 비집고 나온 애액이 구멍을 적셨다. 온몸에서 페로몬이 줄줄 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추스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소파를 붙들고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같은 인간을 이렇게나 다르게 만들 수가 있는가. 페로몬이 무엇이기에,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이기에.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자부심마저 짓뭉개고 숨통을 틀어쥐는 격렬한 본능은 유진의 것이 아니었다. 유전자 속에 뿌리 깊이 박힌 짐승의 포효에 불과했다.

흔들리는 눈을 간신히 들자 나른하게 풀린 시선과 마주쳤다. 내리깐 눈길이 유진의 몰골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흑…….”

태운과의 위치 차이가 선명히 뇌리에 파고드는 듯했다. 유진은 그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파들파들 흔들리는 어깨를 구경하며 태운은 손끝을 움직였다. 질척하게 달라붙은 애액이 미끈거리며 진한 향을 흘려냈다.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유혹이었다.

흘러넘치는 페로몬을 음미하듯 즐긴 태운은 손수건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유진은 여전히 소파 아래에 늘어져 있었고, 훤히 드러나 있는 목덜미에 바늘을 꽂아 내용물을 주입하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고개를 번쩍 든 유진이 제게서 멀어져가는 텅 빈 주사기를 보고 희게 질렸다.

“무슨 짓을….”

“음식은 먹어도 됩니다. 굶다가 박주건한테 질질 끌려가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잠깐, 천태운…!”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린 태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진이 황급히 팔을 뻗었지만, 한 걸음 물러서는 그에게는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바닥에 달라붙어 흐물거리는 몸을 내려다보며 태운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나를 감시해 봐야 별 소용은 없을 테니 차라리 그 시간에 부하들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는 게 현명할 겁니다. 하 중위.”

“방금 그건 대체―.”

“자리를 비켜 줄 테니 내 방에서 자위하든 뒤를 쑤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혹시 마음이 바뀌면 내게 말하고. 원하는 만큼 박아 줄 테니까.”

유진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근육을 조이면 엉덩이 사이가 지잉, 울리며 애액을 쏟아냈다.

유진이 걸음마를 떼는 새끼 사슴처럼 바르작거리는 사이, 방을 가로지른 태운은 문을 열고 나갔다. 막을 새도 없었다. 방에 홀로 남은 유진은 닫힌 문을 망연히 응시하다가 주먹을 쥐어 말을 듣지 않는 허벅지를 내리쳤다.

“제발, 좀….”

부어오른 구멍이 자극을 요구하며 젖어 들었다. 공기 중에 남은 천태운의 향은 계속해서 점막에 스며들며 열기를 부추겼다. 정체 모를 액체를 맞은 부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한 방울 맺힌 피가 주륵 흘러내리며 셔츠 깃을 적셨다.

“흐으―….”

이 몸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

겨우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밤새 애액을 질질 흘려대는 하반신을 추스르며 바르작거렸다. 질척하게 젖은 부위로부터 기어오른 열락의 벌레들이 성기를 긁어대고 신경을 갉아 먹으며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오메가라고, 쾌락을 좇는 짐승이라고.

그 기괴한 조롱이 유진을 비웃던 박주건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유진은 손톱이 다 흔들릴 정도로 침대보를 그러쥐며 버텼다. 뒤를 쑤시고자 울부짖는 본능을 짓뭉개며 밤을 지새웠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던 괴로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이나마 잦아들었고, 어느 순간 축축한 아침의 공기가 침구를 습하게 적셨다.

“…….”

지독한 피로감에 휩싸인 채 유진은 눈을 떴다. 버석하게 메마른 눈알이 뻐근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이 안구에 달라붙어 질질 끌릴 정도였다. 흐린 시야가 좀체 돌아오지 않아서 생수라도 들이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유진은 뻑뻑한 눈 대신 목이라도 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태운과의 일이 있은 지 대략 여섯 시간이 지났다. 미친 듯이 솟구치는 난잡한 욕망과 열기는 거의 가라앉았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부위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건조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낸 뒤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없는 정신을 끌어모아 질질 방문 앞으로 끌어놓았던 테이블과 그 위에 있던 잡동사니들이 발에 차였다. 혹여 제 페로몬에 이끌린 부하들이 방에 들어올까 임시방편으로 해놓은 조치였다.

그 와중에 또 문이 열리지 않도록 문고리 아래로 잘 기대어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느껴지는 풍경에 한숨이 다 나왔다. 테이블의 나뭇결을 느리게 훑던 유진의 눈이 가라앉았다.

밤새 몸을 잠식했던 그 끔찍한 열기는 과연 주입당한 무언가의 탓일까, 아니면 알파 페로몬의 탓일까. 단순히 페로몬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강했고 히트라고 하기에는 모자랐다. 히트는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마 히트가 제대로 왔다면 제 손으로 이 테이블을 밀쳐내고 알파에게 달라붙었으리라.

몸에서 나는 냄새를 다시 한번 확인한 유진은 테이블을 끌어 옆으로 치우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카펫을 딛고 방을 나서는 순간,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태운과 눈이 마주쳤다. 한 발 내민 자세 그대로 유진은 얼어붙었다.

어정쩡한 자세를 느리게 훑은 태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진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태운은 셔츠 위쪽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낸 느슨한 차림으로 한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사약처럼 시커먼 액체가 옅은 파장을 일으키며 찰랑거렸다.

경계심 어린 눈빛이 머그잔에 머무르자 태운이 눈을 기울였다.

“커피 좋아합니까?”

“…아뇨.”

“홍차는?”

유진이 입을 다물자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둘 다 싫어하는데 어째 잠을 못 잔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뭐, 중위가 방에 질질 흘려놓고 간 게 있어서 나도 일찍 잠들지는 못했습니다.”

흘리고 간 것? 미간을 찌푸린 유진이 시선을 들었다. 태운은 태연하게 눈을 마주하며 가느다랗게 웃었고, 이내 그 말뜻을 깨달은 유진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었다. 수치심으로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태운이 입 안의 사탕을 굴려 먹듯 응시했다.

“꽤나 달던데요.”

“……! 무슨 소리를―.”

“중위님?”

등 뒤로 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혀를 깨물 듯이 말을 멈추었다. 상기된 표정을 추스르는 사이에 코앞으로 다가온 태운이 유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미 봐 주겠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물론 그 뒤의 말도.”

속삭이는 호흡이 귓바퀴를 간질이고 떨어져 나갔다. 깃털로 건드리는 듯한 감각이 피부 위를 기어 다녔다. 본능적으로 꽉 조여든 긴장감이 아랫배를 물들였다. 유진은 억지로 힘을 준 눈으로 태운을 올려 보았다.

제법 매섭게 쏘아보는 오메가를 한 번, 경계 섞인 눈빛으로 성큼 다가오는 그의 부하를 한 번 훑어본 태운은 스치듯이 지나가 방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제원이 걸음을 재촉해 유진의 옆에 섰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속이 뜨겁게 들끓었다. 짙은 숨을 토해낸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침 차리자. 먹어도 괜찮으니까.”

태운이 유진을 속이고자 했다면, 같잖은 거짓이나 회유로 눈가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진실을 미끼 삼아 유진 스스로 걸어 들어오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마치 어제 유진에게 그랬듯 말이다.

저 남자는 박주건과 다르다.

굳게 닫힌 방문으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떼어낸 유진은 제원을 이끌고 1층으로 향했다.

***

태운의 말대로 식재료에는 이상이 없었다. 혹시 몰라 유진과 제원이 미리 한 번씩 맛을 보았지만 어떠한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간단한 음식을 차리는 사이, 승일과 건호도 내려와 식탁 앞에 앉았다.

식사는 고요했다. 이곳에서 겪은 일이 있으니 입맛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무던한 성격의 승일조차 신경이 안 쓰이지는 않는지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느렸다. 태운과의 마주침 이후로 계속 미묘한 기색을 풍기는 제원의 반응도 유진의 신경을 찔러댔다.

이대로 더 먹어도 속만 얹힐 것 같아 유진은 숟가락을 내렸다.

“오늘 천태운 감시는 내가 맡는다.”

제각기 흩어져 있던 시선이 유진에게 모였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제원이 반박했다.

“위험합니다.”

“이곳에서 위험하지 않은 건 없어.”

“하지만―.”

“내가 한다.”

단호한 어조로 끊어내자 제원의 눈매가 굳었다.

“중위님께서 하실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정해.”

“…중위님.”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는 소리가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아.”

제원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유진은 제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교대는 필요 없어. 오늘은 내가 계속 맡을 테니까, 제원이는 오늘 남아 있는 식재료로 가능한 한 많은 음식을 만들어두고 건호가 거들어. 아직은 불안한 감이 있으니 최대한 대비해놓는 게 좋겠어.”

“나는요, 대장?”

물끄러미 보고 있던 승일이 고개를 주욱 뺐다. 유진은 그의 낯을 훑어보며 답했다.

“몸 사리고 있다가 요리 끝나면 기미나 좀 봐.”

“엑. 너무한 거 아녜요?”

“―상처는 좀 어때.”

요란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던 승일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보여드릴까요?”

승일은 답도 듣지 않고 서슴없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버석거리며 벌어지는 천 사이로 거의 아물어가는 환부가 보였다. 피딱지도 거의 떨어져 분홍빛의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염증이 생겨 벌겋게 부어오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태까지 알파의 이 괴물 같은 회복력이 기이하다고 여겨왔으나, 지금만큼은 부대원 모두가 알파인 것이 이토록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묵직하던 가슴께가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기력 회복하고 내일부터 운동 좀 해둬. 체력 떨어졌을 테니까.”

“―네엡.”

승일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길게 대답했다. 회복의 흔적을 길게 훑어본 유진은 겨우 눈을 들었다. 제원이 여전히 유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제원은 식사를 재개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유진은 태연하게 가장하고 있던 낯에서 힘을 풀었다.

유진을 걱정해서 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유진 또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제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페로몬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극우성 알파에게 오메가가 붙는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정신 나간 짓이었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 녀석들을 두고 천태운은 무슨 말을. 슬그머니 풀리는 입매를 다잡았다. 뚝 떨어졌던 입맛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아, 유진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내내 말없이 식사하던 건호의 시선이 슬쩍 닿았지만, 느낄 새도 없이 금방 떨어져 나갔다.

***

식사가 끝나자마자 유진은 태운에게 붙었다. 이미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해 굳이 모습을 감추지 않았고, 그도 흘끗 옆눈으로 유진을 볼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일 지켜본 결과 태운의 일과는 단순했다.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커피나 차를 타서 마시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이곳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공복 상태를 그저 차로 때우는 것인가 싶었다.

햇빛을 쬐는 구렁이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는 손끝을 주시하고 있으면 그는 가끔 유진을 스치듯 보며 입꼬리를 휘고는 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반나절 정도 지났을 무렵, 유진은 뻐근한 목을 기울이며 한숨을 삼켰다. 부엌, 거실, 방. 커피, 홍차, 책. 질리도록 단순한 패턴에 오히려 조바심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가 싶어 슬쩍 보았더니 무려 불어로 된 서적이었다.

언젠가 그가 타국에서 유학을 했었다는 소문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야말로 엘리트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남자다.

유진이 흙탕물에서 난 이무기라면, 그는 대양에서 난 용이었다.

“읏.”

아침부터 계속 뻐근하던 눈이 한계에 치달았다. 가능하다면 눈알을 뽑아서 물에 한 시간은 담가두고 싶은 기분이었다. 건조하다 못해 열이 오르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유진은 강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빈 소파가 눈에 시야에 들어왔다.

“……어?”

방금까지만 해도 그곳에 앉아 있던 태운이 없었다. 당황한 탓에 눈을 크게 뜬 유진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걷는 소리는커녕 일어나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 어떻게.

자책은 뒷일이다. 유진은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천태운을 놓쳤다.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서.

발목을 타고 오른 자괴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누구 찾습니까?”

“……!”

반사적으로 몸을 홱 틀며 자세를 낮춘 유진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치떴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태운의 손에는 찻잎 통이 들려 있었다. 그가 즐겨 마시는 홍차의 한 종류였다.

차를 갖고 왔구나. 방에서.

“…아닙, 니다.”

비틀거리며 몸을 세운 유진이 길을 비켜 주었다. 바닥을 내리쳤다가 덜컹거리며 되돌아온 심장이 불안정한 박동을 쏟아냈다. 쿵쾅거리는 고동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울려댔다. 눈알은 그야말로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희게 질린 유진을 훑어본 태운은 찻잔을 꺼내고 통의 뚜껑을 열었다. 이제 보니 커피포트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시야가 좁아지다 못해 거의 콩알만 해졌던 모양이다.

쪼르륵. 컵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유진은 딱 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천 대위님. 어제 그건 뭐였습니까.”

반쯤 가벼워진 커피포트를 도로 내려놓은 태운이 아일랜드 식탁을 짚으며 몸을 돌렸다.

“어제 하 중위가 흘리고 간 것 말입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피임약은 먹었습니까?”

“대위님.”

“먹는 게 좋을 거라고, 내가 얘기했을 텐데.”

유진은 멈칫했다. 지척으로 다가온 태운이 묘한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길이 기묘한 오한을 낳았다. 꼭 덫에 먹잇감이 걸리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손끝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늘, 미션이 나옵니까?”

뱀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다가온 손길이 허리를 쓸고 올랐다. 유진의 턱이 움찔거리며 잘게 떨렸다.

“천 대위님. 오늘 미션이 나옵니까.”

“모르겠네요. 박주건의 관할이라.”

찌르르 돋아나는 소름을 몰고 올라온 손길이 어깨를 쓸고 목덜미를 감쌌다. 나른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셔츠 아래로 은밀하게 보이는 피부를 훑었다. 혀로 핥는 듯한 선명한 눈길에 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천―.”

팔뚝이 뒤로 훅 당겨졌다. 힘에 이끌린 몸이 비틀거리며 태운의 손길에서 빠져나갔다. 엉겁결에 두어 걸음 물러선 유진은 고개를 틀었다. 입가에 미소를 매단 승일이 유진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우리 대장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어깨를 안듯이 감싼 손이 유진을 조금 더 뒤로 물렸다. 당황한 기색의 유진과 승일을 번갈아 본 태운이 기묘한 기류를 감지하고 눈을 좁혔다.

“볼일은 하 중위 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승일이 유진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에 유진은 입술을 와득 깨물었다. 승일의 앞에서 어제의 일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장?”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잇새로 핏기가 가실 정도로 강하게 짓눌렸던 입술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혈색이 돌아오며 통통하게 부푸는 입술을 따라 태운의 시선이 붙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래요? 내 기우였나 봅니다.”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은 태운은 찻잔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경직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유진은 제 어깨에 오른 승일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맙다, 승일아.”

그리고 서둘러 태운의 뒤를 따랐다. 다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동그란 뒤통수를 응시하며 승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공기 중에 흐트러진 단 향이 침샘을 자극했다. 어쩐지 익숙한 향이었다.

결국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 태운은 그의 방에 얌전히 박혀 있었고, 유진은 그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제원과 교대했다.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나마 어지럽던 머리가 고요해졌다.

물기를 뚝뚝 흘리며 방으로 돌아오니 암전된 모니터가 시야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내뿜었다. 태운의 의미심장한 말이 시커먼 화면과 뒤엉켰다. 유진은 억지로 눈을 떼어내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무슨 일이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깨워 줄 것이다. 유진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잡히지 않는 수마 한 자락을 겨우겨우 잡아 양손으로 꼭 붙들고, 유진은 뜨거운 눈을 감았다.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인 몸은 우려한 것과는 달리 금방 의식을 잃고 늘어졌다.

***

온통 어두웠다. 습하고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쾌하고 찐득한 액체가 손가락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얄팍한 벽을 그대로 통과한 겨울바람은 낱장의 티셔츠를 뚫고 들어와 선득한 소름을 일으켰다.

‘아이는 어디 있나?’

‘안쪽 구석에 있습니다.’

깊은 기억 속의, 이제는 떠올리려고 해봐도 흐릿하게 형체만 둥실 떠오르는 그 낡고 허름한 집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비가 오는 날엔 비가 샜고,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면 연기로 자욱해질 정도로 작았다. 시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벽에는 사시사철 곰팡이가 펴, 물에 적신 신문지에서 날 법한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예? 하지만―.’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림자를 찾아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있던 아이는 양팔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흐, 흑.’

아이는 새어 나오는 흐느낌과 떨림을 삼키며 고개를 무릎에 처박았다. 천천히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시야로 바닥에 쭈그려 앉는 남자의 바짓단이 보였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가파른 호흡 소리가 좁고 더러운 집 내부를 가득 울렸지만, 그는 달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근처에 앉아 기다렸다.

고작해야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얼굴을 슬그머니 다리에서 떼어내며 눈을 굴려 눈앞의 사내를 살폈다.

남색의 빳빳한 제복을 입은 남자는 세월의 흔적을 안면 가득 머금고 있었다. 유난히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는 축 처져 본래의 나이보다 배는 더 들어 보였고,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서 오르내리는 은빛 배지가 누런 조명을 머금으며 반짝거렸다.

‘네가 네 어머니를 지켰구나. 그렇지?’

흠칫 몸을 떤 아이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틀었다. 노란색 장판이 눌어붙은 바닥에는 여전히 혈흔이 남아 있었다. 제국군으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늘어진 시체 두 구를 데려간 그곳에는 기이한 흰색의 테이프 자국만이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아이의 어미가 있던 자리였다.

흔들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오는 길에 확인한 사건 경위서를 회상했다. 어린 아들을 둔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 양측이 죽었다. 어미 쪽은 술에 취한 아비가 휘두른 병에 머리를 맞아 죽었고, 그 아비는 구석에 산처럼 쌓아둔 술병 위로 엎어지는 바람에 박살 난 유리 조각에 목이 꿰뚫려 죽었다.

그 아비를 떠민 것은 다름 아닌 아이였다.

이웃이나 집주인 등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의 부모는 모두 베타로, 베타 사이에서 태어난 오메가 아들로 인해 자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의처증이 심해진 남편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고 그게 극에 달한 날 둘 모두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답답한 숨을 내쉰 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제국군이에요?’

둥근 눈동자가 시선을 올려 남자를 보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눈빛이 도저히 아이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멈칫한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국군은…. 뭘…, 해요?’

순수한 물음이 비수가 되었다. 남자의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제국과 국민을 지킨다.’

대답하는 입이 썼다. 쓰다 못해 아렸다. 이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여덟 살의 아이에게 감히 지킨다고 답하는 것이 불경하게만 느껴졌다.

‘…지키는….’

작은 입으로 중얼거린 아이는 입을 다물고 손을 뻗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피로 물든 손이 꼼지락거리며 남자의 가슴팍에 닿았다. 톡, 톡. 살짝 건드리는 손길이 은빛 배지를 두드릴 때마다 붉은 혈흔이 묻었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입매를 굳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내가 뒤를 봐주마.’

‘…….’

‘나와 함께 하겠어?’

아이의 어미도, 아비도, 아이 본인의 삶조차 지켜내지 못한 제국이다. 저 눈이 언제 원망과 분노로 물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네.’

또렷이 답하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류진모와 하유진의 첫 만남이었다.

고아원에서 류진모의 지원을 받으며 자란 유진은 군학교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어 졸업하자마자 제국군에 입대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유진이 빠르게 승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류진모는 이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진을 보고는 했다. 너무 한 가지에 목을 매달지 말아라, 네 인생을 챙겨라. 동경하던 이의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대한 충족감을 맛보고 있던 유진의 귀에는 들어올 리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하나에만 몰두하다가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태산처럼 느껴졌던 류진모는 어느새 유진과 엇비슷한 눈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깊은 눈매에 고인 연륜 또한 훨씬 깊어졌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어.’

‘…어떤 것을 말입니까?’

‘…――.’

모자이크 처리한 것처럼 일그러진 그의 입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노이즈가 낀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대령님?’

입 부근에만 머무르던 일그러짐이 이내 그의 얼굴 전체로 퍼졌다. 류진모의 얼굴이 뻥 뚫린 것처럼 검게 물들며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유진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옷깃이 손끝을 스치듯 빠져나갔다.

탕―! 유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류진모의 심장에 박혔다. 슬로 모션처럼 느린 장면이 현실감 없이 눈앞에 펼쳐졌다.

총알이 관통한 가슴으로부터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대령님―!’

류진모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창백하게 질린 유진이 바닥에 꿇어앉아 류진모의 몸을 끌어당겼다. 철철 흐르는 피가 막을 새도 없이 도로를 적셨다. 유진은 그의 머리를 다급히 품에 안고 고개를 들었다.

‘누가, 누군가 구급차를……!’

한가한 평일의 거리였던 평화로운 광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황폐한 도시 곳곳에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고, 반파된 빌딩들이 시멘트 덩어리를 쏟아내며 철근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사람 하나 존재하지 않는 거리를 황망히 응시하던 유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무슨….’

저 멀찍이 제국군 건물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류진모를 내려놓은 유진은 그곳을 향해 달렸다. 공포로 조여든 폐부가 기도를 비틀었다. 심장이 달음박질치며 산소를 요구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발 전화를―…!’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간 유진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넘어질 뻔한 유진은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매끈한 바닥에 누군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

제원의 시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진이 뒷걸음질을 치자 종아리에 무언가가 닿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피로 범벅이 된 건호가 눈에 들어왔다. 기겁하며 고개를 든 곳에는 목이 매달린 승일의 시체가 괘종시계의 추처럼 허공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린 유진이 시선을 들었다. 처참한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내가 말할 때 순순히 듣지 그랬어.’

귀까지 찢어진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박주건이 웃었다.

‘하유진.’

“헉―!”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 유진이 눈을 번쩍 떴다. 수면 아래 잠겨 있다가 나온 것처럼 산소가 기도를 밀치듯 파고들었다. 눈앞이 핑 돌 정도의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차게 식은 사지가 통제되지 않고 덜덜 떨렸다.

“중위님?”

문이 열리고 제원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유진을 발견한 그가 놀란 얼굴로 발을 들였지만, 방 안에 자욱한 페로몬을 감지하고 입을 틀어막으며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신, 제원…?”

당황한 듯한 제원의 얼굴을 눈에 담자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였다. 꿈이었구나.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비틀어 모니터를 확인했다. 여전히 까맸다.

…다행이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안도감에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동료를 눈앞에서, 그것도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잃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분이었다.

***

찬물로 몇 번이고 세수한 끝에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조금 가라앉았다. 벌겋게 물들었던 눈매가 원래의 색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유진은 얼굴을 닦으며 욕실을 나섰다. 어둡기만 한 저택에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들었다.

제원은 간밤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유진 역시 입을 다물었지만 눈치가 빠른 승일은 대강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유진은 최대한 정신을 붙들고 참혹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찾아왔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식재료를 잘못 손질하거나 부대원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등 자잘한 실수가 이어졌다. 보다 못한 제원과 승일은 유진의 등을 떠밀었다. 유진은 발에 힘을 주어 버티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늘 일이….”

“내가 이건호랑 할 테니까 대장은 오늘 쉬어.”

유진은 불안한 눈으로 승일을 보다가 건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건호는 아무 말 없이 유진으로부터 고개를 틀었다.

“봐, 괜찮다잖아. 들어가세요.”

반강제적으로 유진을 방에 밀어 넣은 승일이 손을 산뜻하게 흔든 뒤 문을 닫았다. 덩그러니 선 유진은 눈만 깜빡이다가 한숨을 흘렸다. 승일이라면 몰라도 건호까지 저럴 정도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쉬는 것이 맞다.

고작 꿈 따위로 이 정도로 동요했다는 사실이 한심했다. 유진은 무거운 이마를 두드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눕혔다. 쉬어야지, 모처럼 받은 배려다. 이 기회에 기력을 회복하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유진은 좀처럼 휴식하지 못하고 방문 쪽을 흘끔거렸다. 눈앞에 부대원들이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불안감이 더 커졌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손끝이 차게 식었다.

“…하아.”

유진은 눈을 감고 쿵쿵, 불안정하게 울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괜찮다. 하나같이 우수한 부하들이었으니 승일의 말마따나 하루 정도는 쉬어도 이상 없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믿음직스러운 부대원 한 명 한 명을 떠올려 보았다.

편차 없이 안정적인 제원은 걱정이 되지 않았고, 승일은 유진이 있든 없든 한결같았다. 그게 장점이든 단점이든 말이다. 건호 역시도―.

“…….”

유진은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탁한 시야로 건조한 방의 풍경이 들어찼다. 건호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언제였던가.

건호는 과묵하지만 직설적인 성격이다. 언젠가 유진이 컨디션을 망쳐 임무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며 무뚝뚝하게 쏘아붙이고 휑하니 가버리고는 했다. 아까처럼 할 말을 삼키고 무시하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유진은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온 이후로 건호에게 가장 신경 쓰지 못했다. 발정제를 먹은 것은 건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승일을 신경 쓰느라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손끝으로 이불을 매만지던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벗어놓았던 재킷을 걸쳐 입고 문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절로 조급해졌다. 반성을 반복해도 사람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하며 문고리를 돌린 순간, 어둑하던 문에 빛이 환하게 비치며 그림자가 걷혔다. 돌처럼 굳은 유진은 문 끄트머리에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응시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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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와 α의 섹스」

- 성공 시: 알파용 억제제

- 실패 시: ???

- 제한 시간: 12:00:00

당신은 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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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불타오르는 듯하던 눈의 피로가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아무리 깜빡이고 고개를 흔들어보아도 화면 위로 떠오른 선명한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섹스. 큼지막한 단어가 시신경을 잔혹하게 파고들었다.

하늘 위를 유영하는 것처럼 흔들리던 정신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노크 소리에 되돌아왔다. 술렁이는 이성을 다잡은 유진이 일그러진 미간에서 힘을 풀어내고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난잡한 문장 대신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은 타이머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12시간. 굳은 혀를 굴려 중얼거리자 겨우 몸과 정신이 다시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동요의 기색을 완전히 감추고 난 뒤에야 유진은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원이 고개를 들었다.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야?”

“아닙니다.”

하복부를 꽉 틀어쥔 긴장감이 살짝 풀렸다. 유진은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아직 뇌리를 후려친 충격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만 했다. 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듣느냐 마느냐는 그 이후 결정할 문제다.

박주건. 유진은 이가 갈리는 분노를 주먹 속으로 말아 쥐었다.

건호와 승일은 각자의 방에 있었다. 다행히 둘 모두 화면을 제때 보았고,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을 바로 열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은 이번 미션의 상대와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에 과부하가 올 정도로 갈등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둘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답한 것이다.

유진은 미션의 강도가 너무 강해 공개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를 해산하고 개개인의 방에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답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미션은 주어졌는데 그것을 할 상대는 없고, 해결되는 것 없이 시간은 흘러만 갔다. 주건이 실수한 것이라고 여겨 허공을 향해 소리치고 전화기도 들어 보았으나 신호음은 연결되지 않았다.

흘러가는 타이머를 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던 유진은 불현듯 태운이 첫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 역시 이 게임의 참가자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세 명의 부대원 모두 알파가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유진은 곧장 태운을 찾아갔다.

“난 아닙니다.”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태운이 말했다. 낯을 굳힌 유진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제게 박주건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말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거스르지 말라고 한 기억은 없는데. 음식에 수작질 당하기 싫으면 그렇게 하라고 한 것뿐입니다.”

“말장난할 생각 없습니다.”

유진은 손을 뻗어 그가 읽는 책을 눌러 덮었다. 그제야 태운의 시선이 올랐다.

“다들 자신이 아니라고 하던가요?”

그는 태연하게 물었다. 마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어투였다. 순순히 책을 내려둔 태운이 양손에 손깍지를 끼며 유진을 응시했다. 조롱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의 반응에, 평정을 가장하던 유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아니면 안 되었다. 분명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수록, 정말 그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차게 식는 손을 누르며 막힌 목소리를 냈다.

“정말로 당신이 아닙니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당신 부하 중 하나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거겠지.”

숨을 훅 들이켠 유진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태운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누군가 거짓을 말한다면 그건 당신이겠죠.”

태운은 답하는 대신 묘한 기색으로 웃었다. 비소가 스미는 눈빛에 일순 마음이 요동쳤지만, 유진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거칠게 몸을 돌렸다.

“피임약은 먹었습니까?”

웃음기 어린 질문을 잘라내듯 쾅 문이 닫혔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태운은 공기 중에 흩어진 분노 섞인 페로몬을 음미했다. 웬만한 마약 이상으로 중독성 있는 향기였다. 연초의 대체제가 생기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남의 속을 긁어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남자였다. 박주건은 적대감을 온전히 드러내기라도 하지, 저 남자는 만사를 꿰뚫어 보는 초월자처럼 굴어서 상대하기가 벅찼다.

극우성의 알파 정도가 되면 다들 저렇게 괴이한 성격을 지니게 되는 걸까.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유진은 연결되지 않는 수화기를 들어 숫자 버튼을 눌러 보고, 전화선을 뺐다가 다시 껴 보는 등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면서 격앙된 감정을 다스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시야 끄트머리를 차지하는 서랍장이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문 유진은 서랍장 앞에 섰다. 가장 아래 칸을 열자 구석에 처박아둔 피임약이 도르륵 굴러 앞으로 밀려 나왔다. 그것을 눈에 담으니 속이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피임약이라니, 여태껏 손도 대 보지 않은 물건이었다.

분명 주건이나 태운의 수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을 사용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부하들이 아니라, 그 둘 때문이다. 부대원들은 아니었다.

문득 눈앞에서 태운의 비소가 아른거렸다. 유진은 경직된 손으로 약통에서 알약을 하나 꺼냈다. 먹는다고 하여 부작용이 있는 약도 아니다. 걱정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 보라며 천태운을 보며 비웃어 주면 되는 일이다.

긴 망설임 끝에 알약 하나를 물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억지로 감은 눈꺼풀 사이로 수마가 밀려오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지독한 피로에 떠밀려 겨우 잠들었던 의식이 떠오른 것은 원인 모를 답답함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어깨가 뻐근하고 팔이 저렸다. 무언가 거슬리는 감각이 피부 위에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으….”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틀어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숨구멍이 뜨거워 얼굴을 만져 보려고 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묶인 것 같았다.

잔잔하게 일렁이던 정신이 확 떠올랐다.

“헉…!”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방 안을 뒤덮은 강한 페로몬이었다. 강렬하고 거친 알파 페로몬이 온몸에 달라붙어 점막을 파고들기 위해 몸체를 비벼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당황해 숨을 몰아쉰 유진은 곧장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팔이 무언가에 걸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위를 보자 양 손목이 침대 머리에 넥타이로 묶여 있었다. 익숙한 모양새가 꼭 제복 넥타이 같았다.

제복…? 혼란스러운 머리로 중얼거리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페로몬이 밀려들어 혀를 적셨다. 황급히 입을 다문 유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아래쪽에, 유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건호야.”

짙게 가라앉은 시선이 유진의 몸을 길게 훑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가 만든 상황인 것 같아, 유진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단단히 묶인 넥타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호.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풀어.”

침묵하던 건호가 몸을 움직였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페로몬이 배로 강해졌다. 유진은 흠칫거리며 발로 침대를 밀었다. 하지만 묶여 있는 손목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건호…!”

바르작거리는 몸 위로 오른 건호가 유진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에게서 쏟아지는 페로몬이 맨살을 휘감으며 본격적으로 열감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색이 된 유진이 몸을 비틀며 건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 뭐 먹었어? 승일이랑 제원이는 어디 있어. 내 말 들리는 거야?”

점점 숨이 벅찼다. 머리가 얼얼하고 시야가 흐려졌다. 사고가 둔탁하게 굳어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파들거리는 몸을 내리누른 손길이 셔츠를 완전히 푼 뒤, 이번에는 바지로 향했다.

“흣―!”

단단한 손길이 앞섶을 스치고 올라 지퍼를 내렸다. 몸을 들썩인 유진이 다리로 건호를 밀어 보았지만, 그대로 발목이 잡혀 옆으로 벌어졌다. 솟구치는 수치심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건호…!”

버클마저 풀리자 브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호는 바르작거리는 저항을 손쉽게 누르며 바지를 끌어 내렸다. 사색이 된 유진이 몸부림을 쳤지만 바지와 속옷이 벗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윽, 하지…!”

“닳는 것도 아닌데, 피차 편하게 얌전히 있으시죠.”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일까?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는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순간적으로 유진의 몸에서 힘이 탁 풀리자, 남은 옷가지를 마저 벗겨낸 건호는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를 감싸 느리게 쓸었다. 흡, 숨을 삼킨 유진이 몸을 경직시키며 다리를 좁혔다.

“생각보다는 괜찮네.”

“…너, 러트 아니지.”

“러트인 것처럼 보이세요?”

맞닿은 피부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페로몬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피부로 스며들어 혈관을 파고든 그것은 단숨에 전신으로 돌며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거부하고자 하는 유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메가의 몸은 알파 향과 만나자마자 희열에 휩싸이며 그 열기를 빨아들였다.

“흐, 흐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파르르 떠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건호가 눈을 좁혔다.

“쓸데없는 저항하지 마세요. 어차피 못 이깁니다.”

“흐으, 흣, 이건호….”

경직되었던 몸에서 점점 힘이 풀렸다. 건호는 늘어지는 유진의 무릎을 잡아 양옆으로 벌렸다. 다리 근육이 파들거리며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맥을 추리지 못했다.

“중위님께 유감은 없습니다.”

“아, 으….”

“백승일 꼴 나기 싫은 것뿐이지.”

유진은 바들바들 떨며 건호를 보았다. 이제야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오늘 미션의 알파는 건호였다. 건호가 유진에게 거짓을 보고한 것이다.

거칠게 치솟는 호흡을 타고 혀가 아릴 정도로 짙은 알파 향이 밀려들었다. 목, 가슴, 아랫배를 타고 엉덩이까지 휩쓴 향은 액체처럼 피부를 적시고 그 아래의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내부의 한 신경을 장악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자극감을 눈덩이처럼 부풀려 나갔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미칠 듯한 가려움이 손끝 발끝으로 번져나갔다. 눈 앞을 가렸던 충격은 뜨거운 본능에 밀려 심연으로 빨려 들었다.

아, 안 돼. 유진은 주먹을 쥐고 허리를 들며 눈을 홉떴다. 안 돼, 제발, 안 돼. 누구에게 비는 것일지 모를 애원이 목 안에서 울렁거렸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유진을 응시하던 건호는 유진의 목덜미에 얼룩덜룩하게 남아 있는 희미한 잇자국을 발견하고 눈을 좁혔다.

머리채가 잡히고, 뒤로 꺾였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그 사이로 타액에 섞인 페로몬이 파고드는 순간, 이성과 신체를 이어 주던 가느다란 실이 끊어졌다.

“흐아―…!”

탁 풀린 오메가 페로몬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공기 입자를 모조리 씹어먹을 정도로 한가득 퍼진 알파 향을 밀어내고 달큼한 향이 파고들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농도 짙은 페로몬이었다.

멈칫한 건호는 고개를 숙여 유진의 목덜미를 입술로 훑어 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사탕을 폐로 빨아먹는 듯 진하고 유혹적인 향이 이성을 휘감았다.

“하.”

여태껏 상대했던 그 어떤 오메가보다도 농도 짙은 향기였다. 건호의 눈이 음험하게 가라앉았다. 잠잠하던 하반신이 단숨에 부풀어 앞섶을 찢을 듯이 발기했다. 건호가 흥분함에 따라 페로몬도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눈앞의 오메가를 집어삼켰다.

“아, 흑, 그만….”

유진이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떨었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빳빳하게 부푼 하얀 성기가 짙은 농도의 페로몬에 스칠 때마다 흠칫거리며 쿠퍼액을 머금었다. 훤히 드러난 유두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점점 봉긋하게 부풀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그 음란한 광경이 알파의 이성을 쥐어 잡았다.

건호는 늘어진 무릎을 한계까지 바짝 벌리고 볼기를 틀어쥐었다. 촘촘하게 잡혀 있던 주름이 가로로 길게 늘어나며 비틀린 틈으로 애액이 새어 나왔다. 그것을 윤활액 삼아 손끝으로 구멍을 문지르자 늘어져 있던 몸이 덜컹거리며 흐느꼈다.

“하지 마, 흑, 그만―.”

파르르 떨리는 나신을 쓸어보며 건호가 입매를 비틀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상 이상이었다.

발정제의 종류에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다. 병원에서 의료적인 목적으로 처방해 주는 발정제가 있는가 하면, 싸구려 재료들을 조합해서 만드는 탓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있었다. 실제로 매음굴에서 불법 발정제를 남용하다가 사망한 사건 현장도 심심찮게 보였다.

정체 모를 발정제를 먹고 앞뒤 분간 못 하는 짐승으로 돌변해 아우성치는 승일을 본 날, 건호는 절대로 저 꼴만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화면에 떠오른 ‘α’라는 문자를 눈에 담자마자 지금의 이 계획을 세웠다. 어디까지나 더러운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옷을 벗겨놓고 페로몬에 절여놓으니, 늘 단정하고 빳빳하기만 하던 상관이 그 어떤 오메가보다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상상 이상으로 구미가 당겨 놀라울 정도였다.

“후우―.”

단순하다. 제 아래에는 녹아내린 오메가가 있고, 자신의 역할은 그 구멍에 처박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었다.

건호는 움찔거리는 구멍을 문지르며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예민하게 반응한 점막이 꽉 조여들며 파들거렸다. 다른 손으로 볼기를 주무르며 벌리자 비틀린 주름 사이로 애액이 줄줄 샜다. 단 향이 농축된 액체가 주름을 적시고 손가락으로 흐르며 열기를 쏟아냈다.

“흐, 윽, 제발….”

녹진하게 풀린 몸은 건호를 밀어내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꾸물거리는 구멍은 점점 더 도톰하게 부어오르며 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건호는 쑤셔 달라 유혹하는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 흐으…!”

내부는 질척하고 좁았다. 하지만 그보다 말랑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건호는 꿈틀거리며 달라붙는 점막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흥건하게 젖은 점막은 살짝 건드려 주는 것만으로도 바짝 수축하며 열기를 머금었다.

흐물거리는 구멍에 손가락 하나로는 부족했다. 건호는 망설임 없이 중지까지 쑤셔 넣었고, 구멍이 늘어나는 감각에 유진이 주먹을 와락 쥐며 흔들렸다.

“흐윽―, 이, 건호…!”

내부로 들어온 손가락은 본격적으로 페로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삼킨 내벽이 급속도로 달아오르며 애액을 뿜어냈다. 극에 달한 가려움이 고통처럼 밀려와 아랫배 전체에 퍼져 나갔다.

덜컹 튀어 오른 몸이 경련하듯 뒤틀리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벌겋게 익은 구멍이 벌름거리며 흥건하게 젖었다. 건호는 손가락으로 유진의 내벽을 쑤시며 자신의 앞섶을 풀었다. 진동하는 오메가 냄새가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나게 부채질을 했다.

“아윽, 그만…! 아―!”

찔꺽, 찔꺽. 몇 번 드나들지도 않은 손가락이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손가락이 스친 곳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홧홧하게 부풀었고, 찌르는 듯한 강렬한 열감이 내벽을 타고 올랐다. 그저 구멍을 벌리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뜨거웠지만 그것만으로는 해소가 안 될 정도로 강한 가려움이 일었다.

“으으, 흑! 아, 흐으…!”

건호는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렸다. 찐득한 구멍이 유연하게 손가락을 삼켰다. 아아―! 벌어진 다리가 파르르 흔들리며 구멍을 조였다. 말랑한 점막이 손가락에 달라붙으며 은근히 비벼댔다. 그 모습을 보며 건호는 비소를 흘렸다.

비운의 육체다. 탐하겠다는 페로몬을 쏟아낸 것만으로도 이토록 녹아내리며 애액을 질질 흘려댄다. 그 때문에 과거 오메가들이 알파의 성노로 팔려 다니는 신세였던 것이고, 현대에 들어와서야 그러지 못 하도록 엄격한 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것도 다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하윽―!”

손가락 끝에 도톰한 살점이 스치자 내벽에 애액이 왈칵 쏟아졌다. 건호는 홍조가 잔뜩 오른 얼굴을 응시하며 손끝을 굴렸다. 잔뜩 경직된 그 자그마한 부위를 건드릴 때마다 유진이 흐느끼며 덜덜 떨었다. 전립선이었다.

질척해진 내부를 두어 번 쓸어 본 손가락은 미련 없이 빠져나갔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텅 빈 내벽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손가락이 닿았던 부위가 벌겋게 익으며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가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흐, 그만, 둬….”

하지만 건호의 눈은 유혹하듯 벌름거리는 분홍빛의 구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은근한 손길로 보드랍고 티 하나 없이 하얀 볼기를 지분거리며 성기를 꺼냈다. 튕기듯 나오는 페니스는 이미 흉흉하게 발기해 오메가를 범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건호는 벌어진 허벅지를 쥐고 꾸물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맞췄다.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지만 건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흘러나온 애액을 이끌고 엉덩이 골 사이를 오르내린 성기가 말랑한 볼기를 벌리고 구멍을 짓눌렀다. 유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일그러졌다.

“이건호―…!”

푸욱―! 젖은 내벽을 열고 귀두가 쑤셔 박혔다. 도톰하게 솟아 있던 구멍이 강제로 벌어지며 팽팽하게 늘어났다. 그 사이로 돌덩이처럼 단단한 성기가 밀려들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어마어마한 쾌락이 들이닥쳤다.

“아흑―! 아―!”

대가리를 들이민 성기가 내벽을 길게 가르고 파고들었다. 구멍이 점점 더 넓게 벌어졌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그보다 더한 열기가 내벽을 짓뭉갰다. 알파 페로몬의 응집체가 불기둥이 되어 배를 뚫었다.

“그마, 힉, 아으…!”

성기에 밀려 벌어지는 내벽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진은 몸을 벌벌 떨며 허우적거렸다. 눈을 가린 이것이 눈물인지 고통인지 쾌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건호는 경련하는 골반을 틀어쥐고 힘을 주었다. 퍽! 강한 타격감이 내벽을 찍어눌렀고, 벌어진 구멍 사이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듯 뿌리를 감추었다. 꾸우욱―. 둥근 귀두가 깊이 파고들며 몸체를 들이밀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내벽이 성기와 들러붙어 쏟아지는 페로몬을 있는 그대로 흡수했다.

순간 시야가 날아갔다. 유진은 영문도 모른 채 뇌를 찢어발기는 쾌락에 몸을 뒤틀며 구멍을 조였다.

“흐아, 아흐윽―!”

전기에 감전되는 것처럼, 순간적인 암전이 뇌를 지배했다. 성기를 삼킨 엉덩이가 미친 듯이 조여 물며 경련했다. 투둑. 질척한 정액이 유진의 아랫배를 적셨다.

헉, 헉. 할딱이는 나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경련했다. 건호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삽입만으로 절정하는 오메가라니, 음란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였다.

건호는 허공에서 경련하는 오금을 잡아 침대에 내리눌렀다. 자세가 바뀌며 성기가 내벽을 거세게 긁자 유진이 죽을 듯이 흐느끼며 덜덜 떨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은 뿌리를 삼킨 채 꾸물거렸다. 그 난잡한 광경을 응시하며 느린 허리 짓을 시작했다. 벌건 점막이 성기를 질척하게 물어대며 주욱, 끌려 나왔다.

“아으, 힉, 아…! 흐윽!”

“하……. 냄새, 씹….”

절정한 오메가로부터 머리가 띵할 정도로 짙은 유혹의 향이 피어올랐다. 정복욕을 이기지 못한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반쯤 빠졌던 성기가 구멍을 파고들어 예민한 점막을 퍽퍽 들이박았다. 유진이 자지러지며 고개를 젖혔다.

“윽, 하윽! 아아―!”

질펀하게 녹은 구멍이 성기를 삼킬수록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쫄깃한 내벽을 가르고 드나들던 건호는 귀두를 세워 아까 찾은 부위를 푹 쑤셔 올렸다. 흐물거리는 점막이 바짝 조여들며 쾌락을 빨아들였다.

“흐익, 아흐……―!”

뜨겁게 부푼 구멍을 성기가 파고들수록 단 향은 점점 더 진해졌고, 추삽질도 더욱 빨라졌다. 유진은 배 속을 헤집는 거대한 성기에 휘둘려 위아래로 흔들리며 고통스러운 열기에 잠식되었다.

건호는 찐득하게 달라붙는 구멍을 열고 전립선을 긁어댔다. 바들거리는 몸이 허리를 들어 올리며 파들파들 경련했다. 허공에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뚝뚝 떨어졌다. 척추를 긁고 오른 자극감이 폭죽처럼 터져 유진의 시야를 가렸다.

“아흑, 아, 안―…!”

구멍을 빠져나갔던 귀두가 재차 내벽을 거세게 열고 들어와 전립선을 짓이겼다. 허공으로 휘어 오른 허리가 발발 떨며 구멍을 꽈악 조였다. 큼지막한 손이 토실한 엉덩이를 쥐어 양쪽으로 바짝 벌렸고, 움칠거리는 둔덕 사이로 불그죽죽한 성기가 애액에 흥건하게 젖은 채 주륵, 뽑혀 나왔다.

“흐으, 흑…! 으흑….”

귀두를 머금은 구멍이 가련하게 흔들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것을 달래 주듯 얕게 허리를 움직이자 물이 찰박거리는 듯한 젖은 소리가 났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구멍이 살짝 벌어졌다가 오므라들기를 반복하며 귀두에 이리저리 쓸렸다.

“건호, 흑, 아으―.”

건호는 눈을 들었다. 울 듯이 일그러진 눈으로 유진이 바들거렸다. 홍조 오른 얼굴은 평소 보던 익숙한 낯이었지만, 그 아래 펼쳐진 적나라한 나신은 건호가 아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오메가이지 않은가.

특히 하얗고 부드러운 엉덩이와 그 사이로 귀두를 삼킨 구멍은, 그야말로 알파의 본성을 자극하는 음란한 모습이었다.

움찔거리는 구멍을 가르고 천천히 성기가 밀려들었다. 유진은 주먹을 와락 쥐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내벽이 살덩이에 짓눌려 밀리는 생경한 감각을 견뎠다. 통증을 짓누르고 머리를 잠식한 쾌락이 얼기설기 엮여 내벽의 통제권을 강탈했다. 엉덩이가 자신을 가득 채워 주는 상대의 뜨거운 욕망을 반기며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꾸우욱―. 건호의 하반신이 하얀 볼기를 납작하게 짓눌렀다. 뿌리 끝까지 삽입된 성기가 내벽을 제 모양대로 벌리며 페로몬을 흘려냈다. 유진이 발작하듯 몸을 떨며 구멍을 조였다.

“흐으, 흐아으―…!”

마치 제 자리를 찾은 듯한 짙은 정복감이 건호의 본능을 자극했다. 바르작거리며 꿈틀거리던 몸은 안광을 번뜩인 건호가 추삽질을 시작하자 다시금 녹아내리며 달뜬 신음을 쏟아냈다.

“흐아, 아, 아흑! 아, 아…!”

뒤섞인 두 페로몬 사이로 질퍽거리는 소리와 숨넘어가는 듯한 교성이 퍼져 나갔다. 건호는 강하게 씹고 빨아들이는 점막 사이로 성기를 퍽퍽 들이박았다. 둥근 귀두가 사정없이 전립선을 긁으며 밀려들었고, 유진은 더 이상 언어라고 할 법한 것을 내뱉지 못한 채 잔혹한 쾌락에 휩쓸리며 허리를 휘었다.

푸욱―! 구멍까지 빠졌던 귀두가 일직선으로 박아 들며 전립선을 짓뭉갰다. 번쩍이는 쾌락이 아득한 절정을 불러일으켰다.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히고 사정했다.

“아흐윽―! 아, 아―!”

“크윽.”

절정하는 엉덩이가 이리저리 튕겨 오르며 기둥을 씹어댔다. 끊어먹을 듯이 달라붙는 내벽의 조임에 버티지 못한 건호가 거칠게 성기를 뽑아냈다. 말랑한 구멍 밖으로 귀두가 뽑혀 나오자마자 진한 정액이 튀어 유진의 몸을 적셨다.

투둑, 툭. 뜨거운 액체가 꿈틀거리는 나신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흐, 흐으―….”

두 사람 몫의 정액이 질척하게 흘러 침대보를 적셨다. 까마득한 절정을 두 번이나 겪은 유진은 구멍에 남은 화끈한 열기에 바르작거리며 흐느꼈다. 하지만 곧 의식을 잃고 까무룩 무너져 내렸다.

건호는 그 모습을 두 눈 가득 담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

사정했는데도 성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찐득하게 감기는 내벽의 감각이 여전히 기둥 위로 남아 있었다. 침대에 눌린 하얀 볼기와 그 사이의 벌건 구멍을 뜨거운 눈으로 응시하던 건호는 유진의 손목을 묶은 넥타이를 풀어내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이 암전되었다.

[성공]

짧은 문구를 띄운 모니터 또한, 금방 암흑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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