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저택
투박한 손길이 머리 위로 닿았다. 류진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했구나.’
그의 칭찬은 늘 짧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 군더더기 없는 나지막한 울림을 좋아했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도록 단련했고, 밤새워 공부했다. 세간은 유진을 천재라고 칭송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쏟아붓는 시간만큼의 결과가 나올 뿐이었다.
그것을 아는 류진모는 늘 결과가 아닌 과정을 칭찬해 주었다. 알아주는 것이 그 한 명뿐이더라도 유진에게는 충분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가 아끼는 이 제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해왔다. 목숨을 바칠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목숨이 류진모를 해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눈앞에 내걸린 류진모의 시체를 멍하니 응시하며 유진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헉…!”
기도를 타고 밀려드는 공기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어디지 여기?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유진은 읏, 하고 신음을 삼켰다. 어깨에서 오르는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깨 부근의 제복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유진은 조심스레 천을 벌려 안쪽을 살폈다. 상처를 감싼 피딱지가 느껴졌고, 탄환은 이미 제거된 듯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통증은 있었으나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본래 방주 탄환이라는 것 자체에 살상력은 없으니 말이다.
…방주 탄환?
눈을 좁히던 유진은 뒤늦게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에 사색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섰다.
“박주건!”
시체처럼 픽픽 쓰러지던 동료들, 부하들. 그 위를 밟고 의기양양하게 웃던 박주건이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지 않은 손발을 확인한 유진은 방을 박차고 나왔다. 이상하게도, 문조차 잠겨있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로 내디딘 유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는 텅 비어 서늘한 공기만 가득했다. 구속도 없고 감시하는 이도 없다. 상식을 벗어나는 상황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유진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웅성거리는 듯 낮은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니까, 우선―.”
“…부터 ……야지―.”
한 명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은 유진은 텅 비어 있는 권총집을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야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 남겨두었을 리가 없었다.
“…―우선 대장부터…….”
대장? 귀를 스친 단어에 유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금씩 걸음을 옮길수록 희미하던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모르겠으니까 일단―.”
“그냥 다 뒤져. 어딘가에는 있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신제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던 남자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둘 모두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승일.”
“어, 대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승일과 제원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건호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조금 굽혔던 자세를 바로 하며 유진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상황이야?”
“사실 우리가 모략해서 대장을 납치해 왔어.”
“헛소리하지 말고.”
재미없긴. 툴툴거리는 승일을 훑어본 유진은 피로 젖은 그의 옆구리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건들거리며 서 있던 승일은 옆구리를 파고드는 유진의 머리통에 놀라 팔꿈치를 위로 한껏 치켜올렸다.
“얼마나 다쳤어.”
“좀 스친 것뿐이야.”
“백승일, 말투.”
“스친 것뿐입니다, 중위님.”
너덜거리는 제복을 잡아 넓게 벌리자 딱딱하게 굳은 피딱지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꿈틀거리는 시뻘건 환부는 다행히 출혈이 멎은 상태였지만, 가벼운 상처라고 치부할 정도도 아니었다.
“처치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승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다. 상처 자체보다는 염증이 문제였다.
경직된 얼굴로 허리를 세우는 유진에게 제원이 보고했다.
“눈 뜨자마자 이건호와 함께 둘러보았지만, 저희를 제외한 인물은 찾지 못했습니다.”
유진은 박주건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았다. 특별히 신경을 써 주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청운 부대원을 제외한 모두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예감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 조로 나뉘어서 한 번 더 수색하자. 백승일은 신제원과, 나는 이건호와 돈다.”
“엑―.”
“네.”
제원이 얼굴을 찌푸리는 승일을 이끌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뒤늦게 건호의 몸을 훑어보았다. 제복이 조금 더럽혀졌을 뿐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멀쩡하니까 그만 쳐다보세요.”
퉁명스럽게 말한 건호가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건호의 뒷모습까지 훑어 부상이 없음을 확인한 유진은 빠른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건호가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
처음 방을 나섰을 때 느꼈던 대로 이곳은 저택이었다. 상당히 넓고 고풍스러운 가구로 들어찬 내부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창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창문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았다. 있던 것을 콘크리트로 덮은 것인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적어도 내부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가서 확인해 본다는 발상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없는 것은 창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입문이 있었을 법한 공간은 벽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벽을 두드려 콘크리트라는 것을 확인한 유진과 건호는 발걸음을 돌렸다.
저택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있었는데, 그대로 복사해서 찍어 넣은 것처럼 죄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구조가 다른 곳은 유진과 부대원들이 각자 깨어난 방이었다. 벽걸이 모니터와 연결되지 않는 전화기, 그리고 벽에 있는 붙박이 금고는 다른 방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모니터는 전원 버튼을 찾을 수가 없었고 금고는 아무리 용을 써도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다시 방을 나섰다.
유진은 건호와 함께 건물의 절반을 돌고, 마주친 제원과 승일을 데리고 다시 한번 저택을 둘러보았다. 바닥이나 벽 등을 두드려가며 꼼꼼하게 살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누군가를 가두고자 하는 목적이 명백한 공간이었다.
“유진 중위님.”
제원의 부름에 유진이 발을 돌렸다. 제원은 1층 구석의 벽 앞에 서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땐 일반적인 벽처럼 보이는 공간이었지만 가느다란 틈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열쇠 구멍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도 있었다.
“문손잡이는 없고.”
뒤따라온 건호가 팔꿈치를 세워 벽을 쿵 들이박았다. 벽은 잘게 진동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젓가락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니…. 잠시만.”
바닥에 무릎을 내린 유진이 바닥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나무 바닥이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지하실인가요?”
승일도 옆에 쭈그려 앉아 냄새를 킁 맡았다. 깊은 지하에서 날 법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뭘 위한 공간인지는 몰라도 출입문일 가능성은 적었다. 맥이 빠졌는지 승일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유진은 몸을 일으키며 굳은 손끝을 움직여 보았다. 뻐근하게 뭉친 몸이 저릿저릿했다. 체내에 아직 약물 기운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기도를 얼릴 정도로 시린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박주건의 짓이었다.
“박주건의 목적이 뭘까요.”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제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밀폐된 저택에는 신제원, 이건호, 백승일, 그리고 유진밖에 없었다.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승일이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손발은 자유로웠고, 저택은 미친 듯이 추웠으나 부엌에는 음식이 있었고 정수기에서 물도 나오며 침구도 있었다.
사로잡은 적군을 이렇게 방치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박주건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방에 전화기가 있는 이유가 있겠지.”
“전화기? 전화기가 있었어요?”
“우리가 깨어난 방에 있었잖아.”
“아, 그랬나.”
뒷머리를 긁적인 승일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가 드러났다. 유진은 승일의 옆에 몸을 내렸다.
“벗어 봐. 대충이라도 처치하자.”
“됐어요.”
“백승일.”
승일은 한숨을 내쉬며 제복 단추를 툭툭 풀었다. 너덜거리는 남색 재킷과 셔츠가 벌어지며 피딱지가 엉겨 붙은 상처가 드러났다. 유진은 부엌에서 받아온 물을 상처에 흘렸다. 승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빠르게 상처를 씻어내고 셔츠로 환부를 꽉 동여맨 유진은 피로 젖은 재킷을 갈무리하며 일어섰다. 창백한 낯으로 숨을 뱉은 승일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대장. 방에서 약은 안 나왔지?”
“항생제라면 없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억제제 말이야.”
멀리서 벽을 둘러보던 건호와 제원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다 알파고 대장은 오메가인데.”
“…….”
“금방 나갈 수 있다면야 다행이겠지만.”
승일에게 모였던 시선이 이번에는 유진에게 쏠렸다. 유진은 말없이 숨을 들이켰다.
이례적인 오메가, 벽을 뚫은 천재. 유진이 그토록 유명세를 펼쳤던 이유 중 하나는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는 오메가의 몸으로 그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부하들은 뚜렷한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오메가를 보았다. 유진은 차게 식은 손끝을 말아 쥐며 입을 열었다.
“그건―.”
“왜 이런 구석에 박혀 있습니까.”
별안간 뒤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에 전원이 벼락처럼 몸을 일으켰다.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은 상대가 저벅저벅 가까워졌다. 유진은 허리춤을 짚었다가 빈 권총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누구냐.”
한 발 앞으로 나선 제원이 나지막이 물었다. 건호와 승일 역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유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림자 너머를 훑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인영이 낯익었다.
설마. 중얼거리는 유진을 건호가 흘끗 보았다.
“하유진 중위, 오랜만입니다.”
어둠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우뚝 섰다. 짙은 남색의 제복 위로 은빛 샛별 세 개가 반짝거렸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공기를 느끼며 유진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천태운 대위님.”
아는 얼굴이었다. 유진은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태운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천태운 대위는 유진과 직접적인 연이 없었다. 그의 상관인 김 대령이 류진모와 친분이 있어 스치듯 얼굴을 마주한 적이 몇 번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인물 됨됨이나 성격을 감히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태연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은 그가 무던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인 것 같지 않았다.
유진은 이미 저택에 부대원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지금 저기에 서 있는 존재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천태운이 제국군을 배신했다.
“김 대령님의 짓입니까.”
“그 뻣뻣한 노인네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잔꾀입니다.”
“그럼 당신의 독단 행동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천태운 대위님.”
서슬 퍼런 목소리에 태운이 슬쩍 웃었다.
“글쎄, 어떨까요.”
불길한 예감이 뒷덜미를 뾰족하게 잡아당겼다. 유진은 발목을 타고 스멀스멀 오르는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천태운은 제국군 내에서도 유망한 인재다. 극우성 알파가 선천적으로 지니는 뛰어난 신체 능력 이외에도 두뇌 회전과 판단력이 뛰어나, 유진과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박주건이 제국군을 배신하고 내통하는 것과 천태운이 배신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대위님이 얻는 게 뭡니까. 이미 단단하게 깔린 대로가 있지 않습니까.”
“만사는 보기 나름이라고, 오히려 그 때문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운의 눈이 가느다랗게 휘었다. 도발하거나 몰아붙인다고 효과를 볼 만한 인물이 아니다. 머리를 차분하게 식히는 유진의 앞으로 건호가 슬쩍 나섰다. 승일이나 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진을 보호하듯 둘러싼 셋을 묘한 눈으로 훑어본 태운이 피식 웃었다.
“뭐가 웃깁니까.”
건호가 불쾌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웃음을 머금은 시선이 건호의 얼굴에 슬쩍 닿았다가 다시 유진에게 향했다.
“탐색은 다 마쳤습니까?”
“…….”
“방에 켜지지 않는 모니터가 있었을 텐데.”
제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살기를 툭툭 털어내며 태운이 구두코를 돌렸다.
“지금쯤 켜지지 않았겠습니까.”
근처의 계단을 흘끗 본 태운이 고개를 기울였다. 깊은 흑색의 눈동자와 유진의 눈이 마주쳤다.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여유와 무게감이 페로몬에 짓눌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손끝을 움찔거리는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태운이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올 때와 마찬가지로 느긋한 걸음이 계단을 올랐다.
“…중위님.”
“따라가자.”
짧게 말한 유진은 바닥에 딱 붙은 신발창을 떼어내 그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라 기다란 복도를 제집처럼 서슴없이 가로지른 태운은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 까딱이는 눈짓에 유진은 그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먼저 느껴지고, 다음으로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빛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린 유진은 이내 눈을 홉떴다. 까맣게 죽어 있던 모니터에 빛이 발하고 있었다.
유진이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자 건호와 제원, 그리고 옆구리를 감싸 쥔 승일이 뒤를 이었다. 유진은 방 중앙에 우뚝 서서 모니터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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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Ω는 자위하여 사정」
- 성공 시: 난방
- 제한 시간: 24:00:00
당신은 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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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을 의심할 만한 내용의 문장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특수 탄환의 약물이 환각이라도 일으키는가 싶었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고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부대원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타이머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24에서 멈추어 있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선 태운이 입을 열었다.
“여기, 누가 있던 방입니까?”
유진이 깨어난 방이었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제원은 자신이 깨어났던 방으로 향했다. 건호도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들의 방에도 동일한 화면이 떠올라 있었지만, 마지막 문장이 달랐다. Ω가 아닌 α라고 쓰여 있었다.
승일의 방도, 유일하게 비어 있었지만 동일한 구조를 가진 나머지 한 개의 방도 상황은 똑같았다.
“그건 내 방입니다.”
태운이 손을 슬쩍 들었다. 모니터로부터 겨우 시선을 떼어낸 유진이 고개를 비틀었다.
“무슨 말입니까.”
“나도 저 게임의 참가자라는 소립니다.”
…게임? 유진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유진은 말릴 새도 없이 성큼 걸어가 태운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정돈되지 않은 거친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튀어 나갔다.
“게임이라고 했습니까?”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 이성을 뒤덮었다.
감히 속단하고 싶지 않았지만 높은 확률로, 청운 부대원을 제외한 부하들이 모두 죽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작일 뿐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제국군의 대부분이 알파였고 류진모 역시도 알파다.
악몽 속에서 목격했던 처참한 광경이 머리를 잠식했다. 셔츠 깃을 움켜잡은 주먹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당신은 이게 재밌습니까? 사람 목숨으로 장난질하는 게 재밌냐고.”
“진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중위.”
“시답잖은 수작 집어치우고 탈출구를 말해. 당신이 들어왔으니 나갈 방법도 있겠지.”
“하유진 중위.”
“당신이라고 한들 네 명을 상대로―.”
폭발적인 페로몬이 유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숨통을 틀어막고 전신을 짓눌렀다. 일순 시야가 하얗게 날아간 유진은 크게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대장―!”
승일이 뛰어와 유진을 보호하듯 페로몬을 마주 펼쳤다. 기도를 조이던 압박감은 옅어졌지만, 본능적으로 쏟아져 나온 공포감이 말초 신경을 파고들었다. 허억. 벅찬 숨을 몰아쉰 유진이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상황 파악하세요.”
“…….”
“소문을 익히 들어 머리 좋은 거 알고 있습니다. 저 화면이 뜻하는 바가 뭔지 모르겠습니까?”
눈을 벌겋게 물들인 유진이 간신히 태운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깔아보듯 고개만 까딱 숙인 태운이 조용히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세게 기침을 토해냈다.
“켈록, 흐, 윽―.”
“이게 무슨 짓입니까!”
페로몬을 감지하고 급히 되돌아온 건호와 제원이 태운을 둘러쌌다. 태운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현명한 판단 내리실 거라고 믿습니다, 하 중위. 부하들을 모조리 위험한 상황에 밀어 넣고 싶은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조롱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섰다. 곧이어 방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도 났다. 저택 내에 서늘한 정적이 내렸다. 유진은 알레르기 반응처럼 열기가 오르는 팔뚝을 감쌌다. 아직도 경련이 남아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페로몬을 이용한 제압이라니,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법한 일이다.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천태운은 정직당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곳은 고립된 저택이다. 그 누가 어떤 짓을 벌여도 밖에 알릴 수 없었고, 제재할 사람도 없다. 아까처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 오메가가 알파를 이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짓을 써도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인 한계였다.
“대장, 괜찮아?”
“괜찮습니까?”
한참 움직이지 않자 부대원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진은 상념을 털어내고 건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자 몸에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어쨌든 천태운에 관한 것은 뒷일이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펴 본 유진이 제원을 보았다.
“너는 백승일을 부축해서 내려가. 거실로 자리를 옮기자. 번갈아 불침번을 서면서 승일을 간호하는 걸로 하고.”
“괜찮은데….”
유진은 손을 뻗어 승일의 이마를 짚었다.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좋지 않은 징후다.
“건호는 방에서 침구를 챙겨서 내려와. 난 수건과 물을 챙길 테니까.”
“중위님. 저건….”
타이머를 띄운 모니터는 여전히 환했다. 유진은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천태운에게 찾아갈 테니까 우선 자리부터 옮겨. 여긴 퇴로가 없고 좁아서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제원이 승일의 어깨를 부축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열이 점점 오르는지 승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렸다. 유진은 승일에게 다가서며 눈을 맞췄다.
“아까 고마웠다.”
승일이 작게 피식 웃었고, 이내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침구를 챙겨 든 건호 역시 방을 나섰다. 유진은 여전히 경련하는 손으로 이마를 한 번 문지른 후 방을 돌아보았다. 어둑한 방 내부에 모니터의 빛만 희미하게 번졌다.
“…….”
알싸한 페로몬 향이 미미하게 남은 방은 문이 탁 닫히며 고요해졌다.
***
밤이 깊어질수록 한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승일은 세 겹으로 덮은 이불로도 모자랐는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의식도 거의 희미해졌다.
난방이 안 들어오니 당연히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유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물수건을 만들어 땀이 송글송글 맺힌 승일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셔츠를 벌려 환부를 살피고 있자 건호가 다가왔다.
“교대하겠습니다.”
“잠깐만.”
피로 물든 수건을 갈무리하고 자리를 비켜 주자 건호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물수건을 집어 드는 건호와 소파에 누워 색색거리는 승일, 그리고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눈을 붙이고 있는 제원을 훑어본 유진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나마 부대원들의 숨소리라도 들렸던 1층과 달리 2층은 적막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카펫을 밟고 태운의 방으로 향했다. 춥지도 않은지 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평화로운 낯을 보니 식도로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천 대위님.”
억누르고자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렸다. 고개를 든 태운이 눈을 기울였다.
“부하는 괜찮습니까?”
“안 괜찮습니다.”
“유감이네요.”
그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배신자에게 바라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부하가 앓고 있다. 저대로 두면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수도 있다.
여전히 체내 깊은 곳에 스민 공포는 다 빠져나가지 않았다. 태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까의 기억이 떠오르며 손끝이 떨렸다. 그렇지만 유진은 주먹을 쥐고 방에 들어섰다. 주건이 뜻을 갖고 이곳에 가둔 이상 태운도 유진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소리 없이 심호흡한 유진이 입을 열었다.
“약이 필요합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당신이 박주건과 내통하고 있다면 그에게 전달해 주세요. 이곳에서 죽게 만드는 건 본의가 아닐 것 아닙니까.”
태운이 손짓했다. 유진은 턱에 힘을 주고 그에게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차가워졌지만, 신체를 압도하는 알파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살리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지척에 서자 태운이 다시금 손짓했다. 유진은 떨리는 숨을 삼키고 더욱 가까이 섰다. 손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태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툭툭. 묵직한 손길이 유진의 가슴께에 달린 별 모양의 배지를 두드렸다.
“자존심도 좀 내려놓고.”
“……대가라는 게 뭡니까.”
“당신한테 더 중요한 게 뭔지 경중을 따져서 선택하세요.”
넥타이를 쓸고 올라온 손길이 목덜미에 스쳤다. 흠칫한 유진이 뒤로 물러섰다. 태운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읽던 책을 들었다. 건조한 소리를 내며 종이가 팔랑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
태운은 다시 독서를 시작했다. 한참 자리에 서서 노려보아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유진은 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깨물고 몸을 돌렸다. 배신자에게 기대하기에는 지나친 관용이었을까. 그러나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진은 참담한 심정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침구가 푹 눌리며 차가운 공기가 훅 솟았다. 그것이 지독하도록 추웠다. 온몸에 깊게 스민 한기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뱉자 연기처럼 허연 입김이 피어올랐다. 승일을 신경 쓰느라 잊고 있던 근육통도 다시 슬그머니 올라 신경을 쿡쿡 자극했다. 유진은 그대로 몸을 기울여 침대에 누웠다.
침착하고자 애를 썼지만, 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박주건….”
증오스러운 이름을 혀 위로 굴리자 차게 식은 몸을 타고 조금씩 분노가 밀려 올랐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중무장한 적들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걸어 들어오던 주건의 얼굴까지도.
배신감으로 조여든 근육이 잘게 떨렸다. 함께 적을 쫓던 동료가 사실은 그들의 내통자였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유진은 손바닥 아래로 닿는 침대보를 그러쥐었다.
주건이 손을 잡은 무리는 ‘무명’이라는 조직으로, 오메가와 알파가, 정확하게는 알파가 온갖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하는 현 상황에 반감을 품은 민간인을 이용해 세력을 넓히고 있는 범죄 집단이었다.
규모가 비교적 작고 위험도도 낮다고 판명된 무명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삼 개월 전부터였다. 그들이 ‘방주’를 얻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방주’는 페로몬을 가진 알파와 오메가에게만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약물로, 아무리 대단한 장정이더라도 방주를 담은 특수 탄환에 스치기만 하면 기절하듯 쓰러졌다. 베타에게만 통하지 않는 독극물이라는 의미에서 베타의 방주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그것이 만약 정말 국내에 밀반입되었다면 단순한 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일개 조직이 방주를 밀반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류진모는 괜한 공포감이 조성될 것을 우려하여 유진에게 무명의 뒤를 캐낼 것을 부탁했다.
유진은 동기이자 오랜 기간 류진모의 밑에서 함께 지낸 박주건과 함께 무명의 뒤를 쫓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그들의 뒤를 칠 기회를 잡았다. 철저한 계획 아래 성공 확률은 10할에 달했다.
하지만 실행 당일, 잠입한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특수 탄환으로 무장한 무명 조직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급하게 할 일이 있다던 주건은 그들의 선두에 서서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유진에게 웃어 보였다.
박주건은 베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때때로 미약하게나마 알파에 대한 열등감을 내보일 때가 있었다. 그 일말의 가능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이다.
띠리리링―. 상념을 가르고 벨 소리가 울렸다. 움찔한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협탁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하게 진동하며 울려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연결되지 않던 그 전화기였다.
굳은 얼굴로 협탁 앞에 선 유진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투박한 수화기가 본체에서 떨어지자마자 벨 소리가 멎었다. 얼어붙은 숨을 뱉으며 수화기에 귀를 댔다.
-좋은 밤이네, 하유진.
짧은 말이었지만, 유진은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겨우 눌러놓았던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며 머리를 벌겋게 물들였다.
“박주건…!”
움켜잡은 수화기에서 빠드득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수화기 너머로 주건이 낮게 웃었다.
-새로운 집은 마음에 들어?
“무슨 속셈이야.”
-꽤 안락하지 않아? 신경 많이 썼는데.
주건의 목소리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입을 일자로 다문 유진은 방을 가로질러 문밖을 내다보았다. 복도는 여전히 고요했다. 위로 올라오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벨 소리를 눈치챈 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다시 문을 닫고 돌아온 유진이 침대에 내려두었던 수화기를 들었다.
-정권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어. 너희를 시작으로.
“박주건.”
-류진모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아?
주먹을 와락 쥔 유진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하하,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오메가 주제에 콧대만 높아서. 덧붙이는 작은 중얼거림이 그의 진심이라는 걸 지금은 알았다. 유진은 침잠하는 눈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목적이 뭐야. 천태운은 왜 여기에 있는 거고.”
-너랑 네 부대원들은 특별히 신경 써 주겠다고 했잖아. 고맙지 않아? 좀 춥기는 해도 무덤보다야 훨씬 쾌적할 텐데.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 내 부하들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똑똑하신 하유진 중위가 왜 멍청하게 굴까.
이야기가 계속 겉도는 기분이었다. 입씨름을 해봐야 시간 낭비다. 미간을 찌푸린 유진은 주건이 유도하고 있는 질문을 입에 담았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시야가 좁네. 고개 들어 봐. 네 앞에 정답이 있잖아.
“됐으니까 원하는 걸―.”
말을 멈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화면이 시야를 채웠다. ‘오메가의 자위.’ 외면하고자 했던 문장이 시야에 틀어박혔다.
“……나보고 자위를 하라고?”
-다 봤으면서 뭘 모르는 척일까.
“저게 네가 원하는 거라고?”
-밖에, 아마 이름이 백승일이었나?
유진이 숨을 들이켰다. 기분 나쁜 목소리로 박주건이 속삭였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열이라도 나나 보지?
“…….”
-이런 한겨울에 난방도 안 들어오다니, 박복하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 주건이 피식 웃었다. 유진은 경직된 눈을 굴려 화면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성공 시 난방. 경악스러운 첫 문장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은 내용이었다.
-재미있지 않아? 꼭 게임 속의 퀘스트 같잖아.
“박주건!”
-왕 게임이라고, 성실한 하 중위님은 아시려나? 늘 훈련하느라 바쁘셨으니 모를 수도 있겠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쉬이. 진정하고 들어 봐.
유진은 다급히 화면을 마저 훑어보았다.
[제한 시간: 17:23:09]
타이머의 남은 시간은 처음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너는 그냥 저 화면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그럼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벽에 달린 금고 보이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우편함이니까 미션을 완료하면 잊지 말고 꼭 확인하도록 하고.
뱀의 혓바닥처럼 살랑거리는 음성이 귓구멍을 파고들어 고막을 진득하게 쓸었다. 선악과를 맛보라고 속삭이는 듯한 질척한 유혹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알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네가 그렇게 아끼는 놈들이니까 어렵지는 않겠지?
“무슨―.”
-오늘 할 말은 여기까지.
“잠깐, 박주건!”
-부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길 바라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다시 불통된 전화기는 무슨 짓을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아연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 보던 유진은 침대에 털썩 앉으며 얼얼한 머리를 감쌌다.
이제야 박주건이 원하는 바를 알았다. 그는 유진이, 더 나아가 유진과 청운 부대원들이 망가지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택에 가두는 쓸데없는 짓을 한 이유가 설명되었다. 태운이 말했던 자존심이나 선택 따위의 말들도 바로 저것을 지칭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천태운은 뭘 위해서 이곳에 온 거지?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어낸 유진은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와 천태운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생략하고 바로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텅 빈 방이 드러났다.
“…―!”
유진은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예상대로 태운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방에 있었는데 대체 언제 나간 것인지조차 짐작되지 않았다. 누군가 한 명은 태운을 감시하고 있었어야 했다. 이래서야 부대장 이름을 달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유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지친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 돌아오자 물수건을 갈고 있는 건호가 보였다. 고개를 털어내고 승일에게 다가섰다.
“좀 어때.”
“악화했습니다.”
이불 사이로 보이는 승일의 얼굴이 파리했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유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젖히고 상처를 살폈다. 상처 주변이 벌겋게 익어 열을 내뿜었다.
“으….”
고통스러운지 승일이 작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이마를 짚어 보자 아까보다 훨씬 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가정하던 최악의 상황이다. 염증이 돌고 있었다. 출혈 다음으로 위험한 것이 감염이다. 방주까지 맞았던 몸이니 면역 체계도 엉망일 것이 뻔했다.
유진은 독처럼 쓴 타액을 삼켰다. 제안을 빙자한 협박을, 거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잠금장치 없는 문을 막을 것부터 찾았다. 바로 옆에 있는 원목 서랍장을 문 쪽으로 밀어 보았지만, 안에 무엇이 들은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늘어진 눈으로 서랍장을 보던 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방의 한구석에 놓인 원형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무게감이나 크기, 높이도 적당해 보였다.
질질 끌고 온 테이블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문고리 아래쪽에 기대어놓자 적당한 무게감으로 문을 눌러 주었다. 안정감은 조금 떨어졌지만 힘주어 밀지 않는 이상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문을 훑어본 유진은 다시 서랍장 앞에 섰다.
오메가는 알파보다 힘이 약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오메가이기 이전에 군인이다. 가구 하나 못 움직일 정도로 약했다면 제국군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 가구가 비어 있는 서랍장이었다면 말이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서랍을 드륵, 열었다. 그리고 곧장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서랍 안에는 반듯하게 개어진 제국군 제복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두 유진이 입는 사이즈였다. 거칠게 서랍을 닫은 유진은 이마를 짚고 숨을 한참 고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한 시간: 16:45:3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고 심호흡했다. 그래 봐야 자위다. 누굴 해하라는 것도, 배신하라는 것도 아니다. 최악에 치달은 상황에 비하면 별게 아니었다.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며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지이익, 벌어지는 앞섶 사이로 브리프가 드러났다.
“…….”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을까. 박주건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당장 급한 불을 끄고자 더한 불행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변명처럼 밀려들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대장―!’
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속옷 밖으로 성기를 꺼내 쥐었다.
“으, 흣.”
반나절이 넘도록 저택 내의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었던 손은 얼음장 같았다. 움찔거린 유진은 뻑뻑한 손가락을 굽혀 말랑한 기둥을 감쌌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하반신을 맴돌았다.
승일이 무성욕자 아니냐며 놀릴 정도로 성생활에 무관심한 유진이었다. 자위한 기억 따위, 너무 까마득해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유진은 볼 안쪽을 짓씹으며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읏, 흐으….”
찌릿찌릿한 성감이 허리를 타고 올랐다. 예민한 피부에 닿는 손이 너무 차가워 기분 좋다기보다는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선가 보고 있을 박주건의 존재도 머리 한구석에서 계속 유진의 이성을 자극했다.
스윽, 슥. 억지로 움직이는 손안에서 성기가 미미할 정도로 조금씩 힘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말랑한 느낌이 더 강했다. 손에 더 힘을 주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
초조한 기색으로 입술을 씹은 유진은 막아두었던 페로몬을 조금씩 개방했다. 진하고 달콤한 향기가 건조한 공기를 적시고 퍼져 나갔다. 이성의 벽을 억지로 허물기 시작하자 몸에서 긴장감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유진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기둥을 훑고 올라온 손에 귀두가 스치는 순간, 찌릿한 쾌감이 훅 치고 올랐다.
“아…!”
아까와는 명확히 다른 느낌이었다. 페로몬이 풀릴수록 감각이 배로 예민해졌다. 온 신경이 하반신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흣, 으―.”
마찰되는 손과 성기도 점점 따뜻해졌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유진이 기둥에 손가락을 감고 마사지하듯 문질러 올렸다. 뜨끈한 압박감이 성감을 자극하며 쾌락을 흘려보냈다. 늘어져 있던 성기가 부풀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탁, 탁. 기둥을 쓸고 귀두를 문지르며 오르내리는 손길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 끝에서 조금씩 미끈한 쿠퍼액이 나오고, 한층 더 진해진 페로몬이 공기를 끈적하게 물들였다.
“으읏, 흣, 아…!”
쾌감이 오를수록 전신으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유진은 허벅지를 좁히며 몸을 떨었다. 내벽을 적시기 시작하는 애액이 느껴졌다. 구멍에 힘을 주어 막아 보고자 했지만, 건조한 주름을 촉촉하게 적신 애액은 엉덩이 골을 따라 아래로 주욱 흘러내렸다.
“아, 흐읏!”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질척하게 차오른 본능이 뒷구멍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으흣, 으―.”
귀두를 흥건하게 적신 쿠퍼액이 기둥을 타고 흘렀다. 찔꺽, 찔꺽. 손바닥이 쿠퍼액을 펴 바르듯 오르내릴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본능적인 욕망은 채찍질하듯 손을 강제로 움직였다. 침대를 움켜잡은 유진이 고개를 젖혔다.
“아, 흑! 으, 앗…!”
엉덩이 골 사이가 미끄럽고 간지러웠다. 깃털로 간질이는 듯하던 감각은 점점 더 심해지며 강한 자극을 요구했다. 뾰족하게 치솟은 본능이 유진의 손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틈을 파고든 손끝이 주름을 스치자마자 찌릿한 쾌감이 전류처럼 올랐다.
“으!”
말랑하게 풀린 구멍이 조금 벌어지며 애액을 왈칵 쏟아냈다. 끈적한 액체가 손가락을 질척하게 적셨다. 유진은 젖은 숨을 몰아쉬며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반쯤 내려간 브리프 너머로 다리 사이가 보였다.
“……흣―.”
이건, 이건 아니야. 머릿속에 빨간 등이 켜졌다. 유진은 이성을 다잡으며 바들거리는 손을 끌 어 올렸다. 손끝에 긁힌 구멍이 다시금 찌르르 울렸다.
“읏…!”
울컥 터지는 쾌감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달고 강했다. 유진은 손으로 기둥을 강하게 조이며 성기를 흔들고 문질렀다. 찌를 듯이 오르는 자극이 척추를 역류해 머리를 적셨다. 막지 못한 신음이 연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흥분한 몸으로부터 쏟아지는 진한 페로몬이 공기를 탁하게 물들였다.
“아, 흑, 으읏―….”
금방이다. 조금만 더 하면 끝이다. 손발이 저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에 연달아 스치는 귀두가 붉게 달아오르고,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구멍이 녹아내렸다. 아, 아…! 유진은 고개를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사정감이 코앞으로 밀려들었다.
아찔하게 오르는 쾌락에 잠식되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건조한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파드득 몸을 떤 유진이 눈을 떴다.
“중위님. 계세요?”
제원의 목소리였다. 얼어붙은 유진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당황으로 굳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중위님?”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딱 붙어 있던 입술을 찢어내듯 열어 다급히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깼는데 안 계셔서 확인차 올라왔습니다.”
“…괜찮으니 내려가 봐. 생각 정리하는 중이니까.”
머뭇거리는 기척이 얄팍한 문 너머로 느껴졌다. 들렸을까. 들었을까. 유진은 성기에서 손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을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 있던 유진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급한 숨을 들이마셨다.
들키는 줄 알았다. 순간 문을 막아둔 테이블이 나뭇가지처럼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나뭇가지가 힘없이 밀려나고, 성기를 드러내 자위하는 이 모습을 들켰다면…….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극에 달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던 사정감이 치솟아 오르며 전신을 덮쳤다.
“아흐, 으흑―!”
유진은 성기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젖혔다. 사고를 지배한 짙은 쾌락이 혈관을 타고 퍼져 통제권을 빼앗았다. 투둑, 툭. 파들파들 흔들리는 성기 끝에서 정액이 쏟아졌다. 온몸이 사정감으로 발발 떨렸다.
“흐윽…―.”
엉덩이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가, 가라앉는 사정감과 함께 천천히 풀렸다. 유진은 열기로 젖은 시선을 내렸다. 정액 방울을 매단 성기가 손안에서 움찔거렸다. 엉덩이 사이는 질척하게 젖어 몸을 들썩일 때마다 미끄덩거렸고,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속옷은 축축했다.
띠링. 옆에서 작은 소리가 흘렀다. 고개를 든 유진은 화면을 가득 채운 [성공]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정액으로 젖은 손이 잘게 떨렸다.
기다렸다는 듯 따스한 난방이 돌기 시작했다. 박주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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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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