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이 내일인가요? (15/16)

오늘이 내일인가요?

‘끝나기는 개뿔이!’

내 몸이 그렇게 외쳐 댔다. 3년간 하루 평균 수면 시간 네 시간, 이틀에 한 번 꼴로 날을 새며 공부하고, 아플 때 병원에 가지 않고 힘들 때 침대에 누워 쉬지 않은 자기 학대의 죗값을 혹독히 치를 시간이라고 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아픈 적이야 많았다. 지필고사가 끝날 때마다 자잘하게 몸살을 앓아 온 나였다. 그런데 이번 몸살은 이전과는 정도가 사뭇 달랐다. 팔다리가 쑤시고 정신은 나른하며, 온몸에 기운이 없고 이불 안에 누워 있어도 오한이 났다.

수능을 마치자마자 미뤄 뒀던 피로가 몇 곱절로 불어나 나를 덮쳤다. 독감 시즌인 줄도 모르고서 한겨울에 운동장에서 엉엉 울어 댄 탓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았다. 숙소 방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열이 펄펄 끓는 바람에, 권태오를 놀라게 한 게 벌써 보름 전 일이었다.

‘이우신, 너 왜 그래. …우신아? 우신아, 일어나 봐.’

연거푸 내 이름을 불러 가며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드리다가, 권태오는 정신이 몽롱한 나를 번쩍 들어 제 등에 업어 주었다. 그러고는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나는 신발조차 신지 않고, 땅 한 번 밟지 않으며 응급실 침대에 눕혀졌다.

급한 대로 열부터 내리고, 해가 뜰 무렵에야 제대로 받은 진료 결과는 독감이었다. 올 겨울 유행하는 지독한 플루에 걸렸다면서 의사는 내게 주사 두 대와 5일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학교 수업은 출석만 겨우 하는 수준으로 챙겼다. 수업 시작 전에 얼굴만 비추고는,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양호실이나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거나 멍하니 뻗어 있곤 했다. 어차피 교과서상 남은 진도도, 필요한 수업이나 숙제도 없는 탓에 선생님들은 나를 흔쾌히 보내 주었다.

“이우신만 편애하는 게 어딨어요?”

박민아며 그 애를 둘러싼 무리가 볼멘소리를 내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미리 제출해 둔 병원 진단서가 있었고, 내 이마에 손등만 올려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에 대한 편애가 아주 없느냐면 그렇진 않을 듯했다. 수능 가채점 이후, 그러잖아도 상냥하던 선생님들이 내게 곱절로 다정해진 상태였다. 자세한 점수야 수능 성적표가 발급되어야 알겠지만, 가채점 결과만 보자면 나는 전 과목 중에서 딱 한 문제를 틀렸다. 졸업생 가운데 전교 1등인 거야 당연하고 한국대 합격이 보장되었단 점이, 나의 편의를 봐주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쳤을 거였다.

생활 흐름이 단순해진 나에 비해, 권태오의 시간표는 무척 복잡해졌다. 그는 나의 우렁각시였다. 나를 대신해 조심이의 아침 산책을 도맡아 주는 건 물론이며 7시 40분에 날 찾아와서는, 구태여 교실 앞까지 바래다주고 제 훈련을 하러 갔다.

오전 수업의 출석 도장만 찍고 기숙사로 돌아가 뻗어 있노라면, 권태오가 점심을 알리며 방에 박혀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가져온 도시락이며 죽 따위를 먹여 주었다. 그런 식으로 저녁 훈련을 마칠 때까지, 적어도 여덟 번은 나를 확인하러 들르는 듯했다.

도통 떨어지지 않는 독감 기운에 시달리며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도, 깨어날 때면 전신이 반듯하게 눕혀진 채 이마 위에 물수건이 올려져 있곤 했다.

멍하니 시선을 굴리면 침대 옆 바닥에 앉은 권태오가 보였다.

“태…오야, 뭐해?”

잔뜩 쉰 탓에 내 목소리는 모래 구덩이에 빠진 좀비가 내는 음성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가다듬는데, 권태오가 침대 매트리스 위에 제 턱을 올렸다.

“그냥. 네가 존나 훙훙거리길래.”

이해하기 힘든 소리에 나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내가 언제… 훙훙거렸다고 그래.”

“지금도 그러는데? ‘후웅’, ‘후웅’…. 피리 소리 나.”

“뭔 소리야….”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잠하니 조용해진 방 안을, 이상한 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꽉 막힌 내 콧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는 숨소리가,

후웅….

그랬다.

“…….”

그 바람에 내 얼굴이 두 배로 뜨거워졌다. 힘없는 손을 움직여 나는 이마에 놓인 젖은 수건을 끌어내려 얼굴 전체를 덮어 버렸다. 달아오른 눈 코 입을 가리려는 시도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끝이 났다.

홱, 권태오가 젖은 수건을 치워 버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뻗으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침대 매트리스 위로 올라온 그의 상체 그림자에 덮여, 나는 시야가 깜깜해졌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입술에 담긴 함의를 알고, 나는 손을 들어 입을 텁 가로막았다.

“안 돼…, 나… 감기 환자야. 너한테 옮기면 어떡하려고 그래….”

입으로 내쉬는 숨이 반, 목소리가 반이었다. 학학거리며 건넨 충고에 권태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다부진 이마에 금이 생기더니,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 태어나서 한 번도 감기에 걸려 본 적 없어.”

“…진짜?”

“응.”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권태오가 말했다.

“걸리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데, 네가 가르쳐 줘.”

그러고는 높다란 콧대가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새 부리처럼 오뚝한 코끝이 뭉개지는 감각에, 나는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머뭇머뭇 망설이다 손을 거두자, 권태오가 느릿하게 입술을 맞대왔다.

쪽 소리가 나는 키스는 살포시 내려앉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숨쉬기가 어려워, 조금만 혀를 섞어도 헐떡헐떡 가슴팍이 바빠지는 나를 배려하느라 권태오는 입술을 맞댔다가, 떼어 냈다가, 다시 입술을 맞대며 혀를 밀어 넣길 반복했다.

촉촉하고 따끈한 혓바닥의 감촉에 나는 몹시 더워졌다. 이불 안이 후끈해지고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그만….”

학, 학…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나는 그의 가슴을 뒤로 밀었다. 그리고 놀랐다. 딱 한 번, 머리를 기대느라 감촉을 느껴 보았을 뿐인 권태오의 가슴 근육은 손바닥으로 꾹 누르자 당황스러울 정도로 보드랍고 말랑하게 들어갔다.

“…….”

엉거주춤 얹은 손을 그대로 펼치고는 멍하니 쓰다듬자, 권태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이라매.”

“키스…, 키스만… 그만이라고….”

꾹, 꾹, 말랑말랑 움직이는 가슴을 이리저리 누르다가, 나는 뒤늦게 부끄러웠다. 이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파고들어 가자, 권태오가 웃음소리를 키웠다.

“왜? 더 만져도 돼.”

“아냐, 이상해….”

“힘주면 엄청 딱딱해지는데, 안 만지게?”

유혹적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깐 웃었다. 그러고는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 퓨즈가 뚝 끊겼다.

‘더워….’

내 머릿속 뇌가 끓는 듯했다. 맥박이 눈알 뒤편에서 통, 통, 뛰는 게 느껴졌다. 보글보글 열이 넘치는가 싶더니, 이내 머리가 통째로 무거워졌다.

“…우신아?”

침대 매트리스에 고개를 파묻고 고꾸라진 채 나는 작게 기침했다.

“콜록, 컥…. 하아, 으….”

달콤한 키스에 속아, 잊고 있던 열 기운이 다시금 나를 덮쳤다. 이불을 홱 걷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권태오는 나보다 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제 가방을 열어 시럽형 해열제를 꺼내더니 플라스틱 스푼에 조심스레 따랐다. 입술 앞으로 다가오는 분홍색 시럽을 나는 온 힘을 다해 노려보았다.

“맛없어, 이거….”

끙끙거리며 투정하자, 권태오가 혀를 찼다.

“화나게 하지 말고 약 먹어.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해, 어? 너 또 쓰러지면, 그땐 내가 심장 마비가 올 거 같으니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더는 약 투정을 할 수 없게 됐다. 밤새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으며 열을 내린 날 이후로, 권태오는 나를 과보호하기 시작했다. 분리 불안이라는 건 개만 걸리는 건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권태오는 조심이보다도 의젓하지 못했다.

‘내가 쓰러진다고 죽을 것까지야….’

속으로는 말대꾸를 하면서도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만일 지난밤의 나처럼 권태오가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야말로 심장 마비에 걸려 죽지 싶어서였다.

벌어진 잇새로 스푼이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해열제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뒷맛이 떨떠름한 약을 억지로 꿀꺽 삼켜 내자, 권태오가 내 뺨을 칭찬하듯 톡톡 두들겼다.

“그런데… 태오야.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 속설이 있어….”

“…….”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잠시, 그가 ‘콜록콜록’ 과장된 기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콜록! 컥컥! 콜록! 나도 열난다. 너한테 옮았어.”

그러고는 내 품 안으로 커다란 머리를 집어넣을 듯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봐.”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손을 들어 이마를 짚자, 권태오는 두 눈을 감고 내 손바닥 가득 제 얼굴을 기대어 왔다. 사랑스러운 모습을 오래도록 보기 위해 나는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줬다.

“응, 우리 태오 열 난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면 나는 내 부모가 미웠다. 왜 나를 사랑해 주질 않았냐고 원망하고 싶어졌다. 사랑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사랑을 주는 방법도 알 수 없는 나였다. 지금 내가 권태오를 잘 사랑해 주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불안한 순간마다 나는 권태오에게 채점을 요구했다.

“태오야….”

더듬더듬 두 뺨을 만지며 내가 그렇게 속삭일 때, 권태오가 대답해 주면 50점, 웃어 주면 70점, 입을 맞추면 100점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100점을 받았다.

학교생활이 아주 간만에,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수능 성적표 발급일에 접어들어, 내가 전국에 하나 있는 수능 만점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컨디션이 따라 주질 않는 바람에 가채점표만 확인하고는 ‘한 문제 틀렸구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풀이도 마킹도 똑바로 해 놓고는 가채점표에 번호를 잘못 기입했다. 수능 성적표가 알려 준 나의 종합 평균 점수는 100이었고, 모든 과목이 1등급이었다.

그리고 당일 점심시간에, 학교로 취재팀이 찾아왔다. 카메라와 마이크 장비를 챙겨 들고 찾아온 기자와 서너 명의 스태프들은 이미 교장 선생님에게는 허락을 받았다며, 아주 짧게 인터뷰에 응해 줄 수 없겠냐 말을 걸어왔다.

책상에 앉아 강건우의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며 놀던 나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인터뷰요? 무슨 인터뷰요…?”

“아아, 별 건 없어요! 수능 만점자 소감 인터뷰를 가볍게 따 가려고 하거든요? 학생, 우리 공중파 뉴스예요. 몇 마디 질문에 대답만 해 주면 돼요. 선물도 줄 거고 감사비도 지급할 거예요.”

얼떨떨하니 고개를 들고 보니 복도 가득, 기자와 카메라, 그리고 나를 구경하는 아이들이 득시글했다. 강건우가 내 손안의 게임기를 얼른 빼내더니, 굴러다니던 교과서 하나를 쥐여 주었다. 작위적인 연출 시도를 거부하며 나는 받은 책을 도로 강건우에게 돌려주었다.

“응해줄 거죠? 10분도 안 걸릴 거예요.”

당연히 응할 거라 확신하며 말해오는 태도가 싫을 뿐, 짧은 인터뷰를 구태여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머쓱하니 손으로 머리칼을 내리누른 다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9시 뉴스 띠지를 두른 마이크가 내 입 앞에 놓였다.

“채홍고등학교 이우신 학생, 올해 유일무이한 수능 만점자가 된 소감이 어떠세요? 평소 수능 공부는 어떻게 해 오셨나요?”

맞닥뜨린 질문은 무척 단순해서,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곤 쉽게 대답했다.

“그냥… ‘만점이구나’…. 공부는 교과서 위주로 했어요. 따로 학원은 안 다녔고요…, 인터넷 강의 같은 거 보고….”

“인터넷 강의는 어느 걸…?”

“KSB, 한국 교육방송 것만 봤는데요.”

그러자 기자가 ‘잠깐, 잠깐’ 소리 내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왼손 끝으로 오른쪽 손바닥을 쿡쿡 찌르는 수신호의 의미는 ‘끊어 가자’인 듯했다. 기자의 신호에 맞추어 카메라맨이 촬영을 잠시 멈췄다.

이내 기자가 의자에 앉은 날 향해 상체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이우신 학생?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네? 긴장 안 했는데요….”

“에이, 긴장 안 했는데 그렇게 뻔한 말만 해요? 학원 상호명이든 뭐든 다 말해도 돼요. 알아서 삐 처리 나갈 거니까. 내가 괜히 아까워서 그래, 여기서 한 마디만 보태도 장학금이 쏟아져 나올 텐데….”

장학금이라는 말에 두 눈이 반짝 뜨였다.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올려다보자 기자가 몇 마디 설명을 덧붙였다. 올해 수능 만점자가 한 사람뿐이라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거라거나, 재작년도 만점자는 학원 홍보를 제대로 해 주고 1억 넘게 받았다거나….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로서는 써먹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는 정말 학원을 안 다녔어요.”

괜스레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자, 기자가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정말로? 정말 혼자 공부했어요?”

“네. 제가 좀, 음…. 사정이 좀 있어서….”

기사는 ‘사정’하고 내 말을 따라 읊었다. 무얼 생각하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리기도 잠시,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건드리는 손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럼 조금만 더 웃으면서, 다시 인터뷰할게요. 이우신 학생 외모 때문에 여기저기서 난리 나겠는데요?”

“…….”

넌지시 건네 온 칭찬을 애써 못 알아들은 척 넘기고 나니, 전과 같은 인터뷰가 반복됐다. 나는 웃음 짓긴커녕 얼굴 근육을 바짝 굳힌 채 했던 말을 반복했다. 방송국 카메라에 내가 담기는데, 자연스러운 미소 따위가 지어질 리 없었다.

10분이면 끝날 거라더니, 몇 번이고 다시 찍어 대는 탓에 30분에 걸쳐 인터뷰를 마쳤다. 긴장한 탓에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볼살을 꾹꾹 누르면서 나는 장비를 챙기는 카메라맨이며 녹화된 화면을 확인하는 기자를 구경했다. 그들 중 누군가 문득, 목을 뻗더니 내 뒤를 기웃기웃 살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런데 저기 학생, 연예인 누구 닮았다는 말 들어 본 적 없어요? 닮은꼴 프로그램 나가도 되겠는데.”

홱 뒤를 돌아보자, 과자 봉지를 안아 들고 교실 뒷문에 선 이찬희가 보였다. 눈을 끔벅거리며 기자를 쳐다볼 뿐, 이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매점에 다녀왔더니 ‘9시 뉴스’ 스티커를 붙인 방송국 카메라가 대뜸 놓여 있는데, 선뜻 말이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찬희와 닮았다는 ‘연예인 누구’, 그게 누구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아니 뭐, 정확히 무슨 노래를 부른 어느 그룹의 누구인지까지는 관심이 없어 잘 몰랐지만, 6년 전쯤에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아이돌 가수가 하나 있었다. 혁 군 납치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랬던가, 그랬었다.

‘하….’

내심 한숨을 내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뒷문으로 가, 이찬희의 팔에 들린 과자를 건네받았다.

“얜 그런 거 싫어해요.”

얼른 그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강건우가 따라붙으며 탐탁지 않은 듯 콧김을 흥 내쉬었다. 우르르 도망치는 우리들 뒤로, 카메라맨이 과장된 웃음소리를 냈다.

“칭찬한 건데 뭘 도망가고 그래? 누가 보면 보모인 줄 알겠어.”

그 말에 나는 속이 뜨끔했다.

‘보모’. 언젠가 이찬희를 챙기는 권태오를 볼 적에 그와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던 게 다름 아닌 나였다. 이제는 그 비아냥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크게 싫진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이찬희의 손을 꽉 쥐고 사람 없는 곳을 찾아 앞장서 걸어갈 적에, 누군가의 상냥한 조연이 되는 것이 더는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안 닮았어, 찬희야. 아무도 너랑 비슷하지 않아.”

다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아마도 내 세계가, 그만큼 넓어지고 있는 듯했다.

권태오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름 아닌 체력이었다. 손을 달달 떠는 이찬희를 비어 있는 양호실로 데려가 달래어 주고, 강건우와 게임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가까스로 기분이 나아졌을 무렵에 나는 대뜸 지치고야 말았다.

풀썩 양호실의 빈 침대에 드러눕자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러 댔다.

“인터뷰 같은 거, 안 한다고 할걸….”

뒤늦게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때였다. 9시 뉴스에는 두 눈은 퉁퉁 붓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힌 채 로봇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말하는 내 모습이 방송될 것이고, 나는 그 화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렸다.

기진맥진한 나를 부축하다시피 하며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게 강건우였다. 저에게 어깨동무를 하게 하면서 나를 데리고 걸어 나갈 적에, 강건우는 대놓고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야, 너 진짜 뜨끈거려. 이제까지는 어떻게 멀쩡했냐?”

“몰라. 힘들어…. 졸려….”

“그렇게 자 놓고 또 졸려?”

“응….”

터덜터덜 기숙사로 향하는 내내 강건우는 탐탁잖은 듯 거친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 저에게 기댄 채 걷는 내가 무거워서는 아닌 듯했다. 다리에 힘을 주며 자립하려 할 때마다, 내 허리를 옭아맨 손에 힘을 주는 걸 보면 그랬다.

몽롱한 정신으로 느릿느릿 걷는 내게, 강건우가 말했다.

“이우신 너 말이야,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너 되게, 사람 짜증 나게 하기는 해.”

“응. 맞아.”

“아, 씨.”

얌전히 인정했더니 강건우는 대뜸 짜증을 냈다.

“2학년 때 프린세스 윤이 너한테 미쳐 갖고, 나 존나 싫어한 거 알긴 하지? 복도 지나갈 때마다 어깨로 존나 쳐서 한동안 나도 개빡쳤었는데….”

“…….”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몰랐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만히 침묵하길 선택하자 강건우는 저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그 기분이 뭔지 알 거 같긴 해. 네가 권태랑만 붙어 다니니까 왜 이렇게 짜증이 나냐? 원래는 나만 네 친구 같았는데…. 이 개 같은 기분은 대체 뭐야?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어?”

“…….”

“내가 속 시원하게 어깨빵이라도 갈겨 봤으면 또 몰라. 어깨가 없어 가지고 권태한테는 가까이 붙지도 못하겠다, 이 야속한 새끼야.”

“…….”

투정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는 건우 너야.”

“흥! 말로만 그러지.”

그러면서도 강건우는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렸다. 내 입으로 강건우를 친구라고 부르는 게 처음이라는 건, 말하는 사람인 나도 알았고 내내 그 지칭을 요구해 온 강건우는 더욱 잘 알 터였다. 힐끔 옆얼굴을 살펴보자, 강건우가 콧구멍을 거세게 벌렁거렸다. 웃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한테 태오랑 건우 너는 조금… 달라.”

더는 강건우에게 아쉬움이나 소외감을 안겨 주는 친구이고 싶지 않았다.

“저… 건우야. 너는 혹시 남자가 남자랑 사귀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뭐? 남자끼리?”

말꼬리를 잡으며 강건우는 내 얼굴을 훑어 내렸다. ‘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쳐다보길 한참, 녀석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대번에 우리 사이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어깨동무 중인 자세도,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친 강건우의 손도 단숨에 어색해졌다.

5분 거리의 기숙사 정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체감상 10분은 더 걸린 것 같았다. 그제야, 강건우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뭐… 남자끼리도…, 그래…. 그럴 수 있지. 서로 좋아하면 지들끼리 사귀든지 말든지. 내가 그거에 대해 뭐, 생각을 해야 하냐? 나 그렇게 편견 있는 사람 아니다.”

몹시도 강건우다운 대답이었다. 매사 대충인 듯 털털했고, 생각 없어 보여도 알고 보면 상냥하고 세심했다.

가만히 속을 쓸어내리며, 나는 미소 지었다.

“응. 그러니까… 애인이랑 친구 사이는 다른 거니까.”

“그래…. 그렇지.”

제 턱을 매만지며 뚱하니 입술을 내밀고 있던 강건우도 나를 따라 웃었다. ‘들어가, 새끼야’ 하며 어깨를 미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나는 기숙사 문을 열었다.

“하여간에 이상해, 이우신!”

괜스레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강건우는 본관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뛰어 내려갔다. 작아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웃음 끝에 콜록, 잔기침이 따라붙었다.

감기 기운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보다는 9시 뉴스에 내 인터뷰가 30초 동안 실리는 게 더 빨랐다. 한국대학교에서 수시 합격 소식을 알려 오는 것보다도, 전화가 쇄도하는 게 좀 더 빨랐다는 의미였다.

세차게 몰려드는 전화의 용건은 모두 똑같았다. 수능 만점 장학금을 지원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제야, 나는 장학금에 대해 지나가듯 언급하던 기자를 떠올렸다.

나로서는 한 마디 두 마디 말을 보탤 필요도 없었다. 연두 어린이 재단 홈페이지 한 자리에 내 이름 세 글자가 걸려 있는 걸 어떻게 찾았는지, 뉴스 아나운서가 그 정보를 한 줄 간략히 읽어 내리면 그만이었다. 생활 지원금과 장학금으로 공부해 온 가난한 소시민이라는 타이틀 하나가 갖가지 장학금을 불러다 놨다.

얼떨떨한 상태로 나는 걸려 온 전화와 밀려든 메일을 확인했다. 채홍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1천만 원, 연두 어린이 재단에서 2천만 원, 교육방송사 KSB에서 5백만 원, SS상호저축은행에서 나를 제1회 장학생으로 삼아, 6년간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겠다며 연락해 왔다.

얼굴이며 성적, 경제 사정이 팔린 값은 내 생각보다 비쌌다. 얼떨떨하니 휴대폰을 움켜쥔 채, 나는 상냥한 직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갖가지 장학금 수령 안내를 받았다.

오늘날에야 안 사실이지만, 유명 브랜드 학원을 다녔을 경우 수능 만점자 장학금으로 최소 3천만 원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수능 만점을 받을 줄 알았더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학원을 다녔을 텐데….’

타임머신이 없다는 게 꽤나 아쉬웠다.

고등학교 동문회며 연두 어린이 재단에서 보내온 장학금이야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기쁘게 수령했지만, SS상호저축은행이라는 이름은 낯설고도 이질적이어서 조금은 머뭇거리게 됐다.

“이미 다른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서요…, 중복 수령이 가능한 건지 잘….”

휴대폰이 달아오르도록 긴긴 통화를 나눌 적에, 맞은편의 직원은 연신 ‘괜찮다’는 말로 나를 달랬다. 매 학기 나오는 지원금이니 여느 장학금과는 분류가 달라 중복 수령이 가능하다고도 말해 왔고, 올해 처음으로 시작하는 장학 지원 사업이니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도 했다.

‘거절하지 말아 달라’니 이상한 소리였다. 이쪽에서는 과분하다 못해 불안한 마음까지 드는지라 머뭇거리는 판국인데 말이었다.

혹시 사기는 아닐까 의심까지 해 보았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보내 주겠단 보이스 피싱 수법이 있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너무 큰 행운이 남의 것 같기에 나로서는 조사를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그야말로 클린했다. SS상호저축은행은 신산시에 본점을 두고 시작한 제2금융권 은행이었다. 멀끔한 홈페이지도 갖추고 있었고, 포털 사이트 기사를 통해 장학 지원을 시작했다는 뉴스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9시 뉴스에 얼굴이 실리고, 몇몇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름이 다 팔린 게 나였다. 나만큼 가난하고 또 나만큼 수능을 잘 치는 학생이 또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지원금을 줘야만 한다면, 이왕이면 더 불쌍하고 더 유명한 학생에게 주고 싶겠지…. 그러니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이상하지 않았다.

생각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세상이 나를 칭찬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덜컥, 큰돈이 계좌를 채웠다. 인터넷 뱅킹을 열고 하나둘 입금된 내역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돈이 달아날까 봐 걱정되는 사람처럼 후다닥 계좌 이체 버튼을 눌렀다.

가장 먼저, 권태오에게 빌린 돈을 갚고자 했다. 그러나 이체 한도에 걸리는 바람에 오백만 원을 송금하고 나니 더는 거래가 불가능하게 됐다. 한 번도 오백만 원 이상을 송금해 본 적이 없는지라, ‘이체 한도’라는 게 1회 이체 한도인지 하루 이체 한도인지 몰랐던 탓에 나는 팔백만 원을 받아 놓고 오백만 원만 대뜸 돌려준 이상한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아, 이게 왜… 어플로는 변경이 안 되고 난리야?’

나머지 삼백만 원을 송금할 방법을 찾아보려다 포기하고는, 나는 입술을 꾹 씹었다. 별수 없이 권태오에게 궁색한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태오야. 500 먼저 보냈어.

자정 지나서 마저 돌려줄게...

사실 네 돈 아까워서 못 썼어.

마음이라도 풍족하게 해 줘서

정말 많이 고마워.]

한참을 적었다가, 지웠다가 하며 만들어 낸 문자였다. ‘전송’ 버튼을 꾹 누르고 나니 밀린 숙제 하나를 해치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통장에 남은 금액을 확인했다. 3천 8백만 원이라는 숫자가 몹시도 또렷했다. 그중 권태오에게 보내 줄 잔금이 삼백만 원, 옥혜 씨에게 돌려줄 돈이 사백만 원이었다. 도합 칠백을 뺀다 해도, 3천 1백만 원이 내 돈이었다.

세상이 내게 건넨 칭찬의 값이, 3천 1백만 원이나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대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명목으로 매 학기 장학금이 들어오게 됐다.

내 삶의 가장 큰 걱정인 가난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순간이었다. 한국대 근처 자취방을 찾기 시작하면 3천만 원은 보증금으로 묶여 버릴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청년 임대 주택이나 생활비 지원 사업을 헐레벌떡 찾을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됐다.

‘3천 1백….’

뱅킹 어플 안에 찍힌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갑을 찾아 벌려 보니 안에 든 현금이 정확히 6만 원이었다. 교통카드와 현금 6만 원을 쥐고서, 무척 오랜만에 교문 밖을 나섰다.

12월의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찾아간 곳은 8월의 더운 날 방석을 사려고 들렀던 커다란 문구점이었다. 이리저리 벽면에 걸린 상품을 둘러보다가, 나는 곧장 반려동물 코너로 직진했다.

문구점 밖으로 나설 무렵엔 내 손안에 대형견용 리드 줄이 쥐여져 있었다. 굵기도 굵고 길이도 5m나 되는 데다가, 길이 조절이 가능한 아주 비싼 리드 줄이었다. 현금을 털어 구입한 줄을 생명줄처럼 움켜쥔 채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언덕길을 뛰어오르자 저 멀리, 오가는 이 없어 고요한 학교를 홀로 지키는 검은 개가 보였다.

“조심아!”

뛰어가 빌어먹게 짧은 목줄을 풀어 주고, 대신에 조심이의 목걸이에 새로 산 리드 줄의 후크를 걸었다. 그 순간에 나는 원을 푸는 기분이었다. 진작 사다 주지 못했던 게 못내 미안했다.

“조심아, 오구….”

좋아라 팔짝팔짝 뛰는 녀석의 앞발에 맞아 가며, 나는 웃었다. 두 팔 벌려 안아 줄 적에 조심이의 털이 차가웠다. 겨울 한파가 코앞이고 녀석에게는 플라스틱 개집밖에 없으니, 겉털이 차가운 게 당연했다.

“…조심아.”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너 형이랑 같이 졸업할래? 형이랑…, 형이랑 같이 살래?”

개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끝을 떨었다.

“형이… 아주 큰 집에 데려가 주진 못하겠지만, 너를 한 자리에 묶어 두고 밖에만 두진 않을게. 형이랑 같이 가면… 집 안에서 같이 사는 거야. 이불 위에 올라와도 돼. 오가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지 않아도 돼.”

내내 꿈에 그리듯 상상이나 해 보았을 뿐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야기였다. 조심이에게 건네는 제안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읊어 내리는 다짐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어때? 조심아. 형이랑 같이 살자…. 그럴래?”

그러자 조심이가 ‘헥헥’ 입김을 뿜어내며 내 아래턱을 핥았다. 녀석의 머리를 와락 안아 주며, 나는 팔팔 넘치는 기운을 느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조심이의 리드 줄을 고쳐 쥐고는, 녀석과 함께 걸었다.

그러나, 언제 독감에 걸렸었냐는 듯 넘치던 기운은 난생처음 방문한 동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고야 말았다.

조심이를 입양하기에 앞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준비를 해치우고자 들른 병원이었다. 의사는 상냥했고 직원들은 커다란 조심이의 덩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아서 좋았다. 사정을 설명하고 우선은 어디 아픈 곳이 없는지 그것만 살펴 주십사 부탁하자, 의사는 선뜻 나를 반겼다.

“학생이 착한 일을 하네요.”

그러더니 조심이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고개를 한 방향으로 기울였다.

“상태가 아주 좋은데요? 정말 학교에 묶어 두고 키운 개가 맞아요? 근육도 딴딴하고…, 피부병도 없고. 얘 진드기 퇴치 목걸이까지 걸고 있는데?”

“진드…기 퇴치 목걸이요? 그게 뭔데요?”

“지금 얘가 걸고 있는 거요.”

황당하다는 듯 의사가 조심이의 목을 어루만졌다. 기다란 털을 위로, 아래로 헤집자 드러난 목에는 둔하게 생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런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거야 알기는 알았지만, 진드기 감염을 예방하고자 누군가 신경 써 걸어준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당황한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의사는 인식 칩 검사를 해보자고 말해왔다.

“혹시 주인이 있는 개인데, 학생이 뭘 착각한 걸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조심이에게 주인이 있다면 그건 잘된 일인데,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지 모를 일이었다.

머뭇거리면서 나는 검사에 응했다. 인식 칩 검사라는 건 아주 간단하게 진행됐다. 마트 계산대에서 볼 법한 바코드 리더기와 비슷하게 생긴 도구를 꺼내더니, 조심이의 목덜미 살을 여기저기 만져가며 꾹꾹 눌러 찍어보는 식이었다.

‘인식 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태연하게 생각하는 나를 향해, 의사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놓았다.

“얘, 인식 칩이 이미 심겨져 있네요. 등록일은… 2년 전이고요.”

“네?”

깜짝 놀라 나는 제자리에서 거의 튀어 오를 뻔했다. 2년 전이면 조심이가 등장한 시기와 얼추 비슷했다.

들은 말을 소화해 내지 못해 얼어붙은 나에게, 수의사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누군가 옛날에 잃어버린 개일 수도 있고, 정말로 유기한 개일 수도 있으며, 교내의 선생님이나 경비원이 제 개를 묶어 놓고 방치한 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식이었다. 하나같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와중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제가 키우면 안 되는 건가요?”

조용히 질문하자, 수의사는 하얀 가운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나를 순 어린애 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칩에 등록된 번호를 알려 드릴 테니까, 한번 연락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걱정과 충격에 빠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순수한 얼굴로 헥헥 웃어 대는 조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얼른 내 휴대폰을 꺼내어 새 연락처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공, 일, 공에….”

“네.”

“삼, …오, 육….”

“네, 네….”

“…구, 공, 공이요.”

“…….”

열한 자리 번호를 입력한 화면을, 나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걱정으로 야단스럽던 머릿속이 대번에 차분해지고, 나를 떠났던 침착한 이성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꾹 누르자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여보세요’ 네 글자를 말해 왔다. 나는 허탈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태오야….”

맥이 빠져 버려 의자에 털썩 앉는 나를, 수의사가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심이만이 순전히 행복한 오후였다.

고등학교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날은 참으로 시시했다. 성탄절을 앞둔 이브는 3년 동안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내 달팽이 껍데기 노릇을 한 캐리어를 빼는 날이었다. 학교 안에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기숙사는 진작에 반쯤 비어 있어서, 아주 조용했다.

“우신아, 짐은 이게 다야?”

다정하게 묻는 말에 나는 기숙사 건물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홱 돌아보자, 자동차 트렁크 문 앞에 선 옥혜 씨가 보였다. 곰팡이 핀 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챙겨 끌고 나왔던 캐리어가 옥혜 씨의 작은 차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네. 그게 전부예요.”

“책이나, 노트 같은 건?”

“다….”

개구멍이라는 학생 커뮤니티에 올려서 비싼 값에 팔았어요. 수능 만점자 노트라고 했더니 내년이면 3학년 되는 애들이 덥석덥석 사 가던데요.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았다.

구태여 나를 추궁하는 대신 옥혜 씨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쭈뼛거리지 않고자 노력하면서 옥혜 씨의 차에 탔다. 용기 내어 전화를 걸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를 데리러 와 준 옥혜 씨였다.

“옥혜 씨.”

그런 옥혜 씨에게, 나는 오래 삼켜 온 사정을 설명했다.

“저, 예전에 주시고 갔던 용돈…, 그거 이제 갚을게요. 제가 돈이 생겼거든요. 장학금을 많이 받았어요. 나중에 돌려드리려고 남겨 뒀었는데…, 늦어서 죄송해요.”

“…어른이 준 용돈을 갚는 애가 어디 있니.”

“…….”

어떤 경로를 통했건 옥혜 씨는 이미 내 사정을 아는 듯했다. 달동네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차도를 향해 운전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익숙한 듯 낯선 옥혜 씨의 옆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품 안의 가방을 고쳐 안으며,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옥혜 씨, 아버지가….”

구질구질한 사정을 풀어내려는 내 목소리를,

“우신아.”

옥혜 씨가 끊어 놓았다.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부터 내저었다. 대답 소리는 한숨과 함께 섞여 나왔다.

“아니요. 두 번 다신 보지 않겠다고… 말해 뒀어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고요.”

“그래, 그러면 됐어.”

그러자 대화가 끝났다. 구체적인 그 무엇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대화였다.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가방을 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내심 해이해져서는, 차 안에서 깜빡 존 것도 같았다. 멍하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 주차장 안이었다.

뒤통수 너머로 트렁크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차에서 내리자, 내 캐리어를 끙끙거리며 끌어 내리는 옥혜 씨가 보였다.

“제가 들게요.”

얼른 옆으로 다가가,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묵직한 옷상자도 어깨에 걸쳐 들었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옥혜 씨의 집은 아주 작은 아파트였다. 혹여 옥혜 씨에게 동거인이 있진 않을까, 나는 함부로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걱정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신발장에는 플랫 슈즈만 두 켤레 놓여 있었고, 베란다에선 빨랫줄에 널어 둔 작은 사이즈 블라우스가 마르고 있었다. 작은 거실 한편에, 조그만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옥혜 씨 이외 다른 누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신아, 이쪽.”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풀 줄기에 한눈이 팔린 나를 옥혜 씨가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서 무거운 짐을 옮기며 들어선 곳은 용도가 모호한 작은 방이었다. 무얼 잔뜩 쌓아 두었다가 치웠는지, 바닥과 벽지에 가구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그만 방 안에 구비된 것이라곤 하얀색 철제 책장 하나와 책상, 식탁 의자뿐이었다. 방 한 귀퉁이에 접어 놓은 겨울 이불도 여러 장 보였다. 나를 재울 준비를 이미 마친 듯한 행색이었다. 조금 전 전화를 걸어 ‘오늘 기숙사에서 나가는데, 짐 들고 갈 곳이 없어요’ 하고 솔직한 말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학교까지, 한 시간 만에 나를 데리러 온 옥혜 씨였다. 책장이며 이불은 도대체 어떻게 미리 알고 준비한 걸까….

얼굴을 굳힌 채 나는 캐리어와 짐 박스를 내려놓았다. 조용히 책상 자리를 바라보는 내게, 옥혜 씨가 말했다.

“의자는 나중에 사다 줄게. 우선 며칠만 이렇게 방을 쓰면….”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내 질문에 옥혜 씨의 입이 멈췄다.

“아버지 사고 쳤죠? 옥혜 씨한테 찾아오던가요? 그래서 만났어요?”

걱정으로 얼룩진 탓에 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앞으로는 옥혜 씨 앞에서 순순하게, 착하게, 정 많게 굴어 보겠다고 다짐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옥혜 씨한테 돈 받았다고 그래서, 괜히 말해서…. 아버지가 뭐라고 그래요? 옥혜 씨 찾아와서 돈 달라고 그랬어요? 혹시, 때렸….”

“아냐, 우신아!”

머릿속을 부유하는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다가, 나는 흠칫 멈췄다. 부들부들 떨리는 내 주먹을 옥혜 씨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내 고개가 천천히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사과하자, 옥혜 씨는 내 손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었다.

“우신아. 너네 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천천히, 옥혜 씨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반 발짝 가까이 다가서자 두 팔이 느릿느릿 내 어깨를 만졌다. 사고 친 강아지 달래듯이, 놀란 아이 어르듯이 두드리는 손길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그럼요?”

다만 그렇게 물었고,

“너 때문이지.”

확신 어린 답을 들었다.

“앞으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우신아, 너만 괜찮다면 내가….”

소리치듯 시작된 옥혜 씨의 말은 끝을 바로 맺질 못했다. 화장기 없는 입술이 느릿느릿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할 뿐이었다. 빠르게 젖어 들어가는 옥혜 씨의 눈을 나는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내 눈시울도 꼭 옥혜 씨만큼 달아올랐다.

“내가… 앞으로는….”

용기 내어 다시금 목소리를 내는 옥혜 씨 앞에서, 나는 조금 건방져지기로 마음먹었다.

“네.”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그렇게 대답해 버리자, 옥혜 씨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입가에 주름이 짙어지도록 웃어 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옥혜 씨의 눈가를 닦아 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나는 옥혜 씨를 따라 웃기를 택했다.

불안을 겨우 식혀 놓은 뒤에야, 옥혜 씨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른의 사정’ 따위는 없다고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옥혜 씨의 이야기는 달랐다. 나는 몰랐던 사정을 많이 알게 됐다.

이를테면, 옥혜 씨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연두 어린이 재단에 연락해서 내 근황을 살펴봤단 것, 지난겨울 나와 상담을 마치고서 센터 선생님이 먼저 옥혜 씨에게 전화를 해 줬다는 것, 임대 아파트며 아버지 일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참견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면서 옥혜 씨는 내게 사과했다. 사는 게 바빠서 나를 못 돌봐 줬다고도 했고 미안하다고도 했다.

“정말 미안해, 우신아.”

내게 사과해야 할 수많은 어른 가운데 옥혜 씨만이 멀쩡한데, 사과마저도 옥혜 씨 입에서 나온다는 게 나는 참 이상했다.

12월은 그렇게, 정리를 미뤄 왔던 계절 옷을 버리는 달이 됐다. 옥혜 씨의 조언에 따라 나는 성인이 되기 닷새 전에, 청소년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실종 신고했다. 그래야 만에 하나 아버지가 사고를 쳤다거나 해서 그를 찾는 사람이 찾아온대도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딱 잡아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5년이 지나도록 아버지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법적으로도, 그리고 내 안에서도 죽은 사람이라고 사망 처리할 수 있었다.

옥혜 씨가 나서서 이렇게 하자, 저러는 게 어떨까… 조언을 건네주어서 나는 참 고마웠다. 나 혼자서는, 임대 아파트를 팔아넘기고 떠난 아버지에게 버려진 아들로 남을 뿐이지, 내가 먼저 아버지를 버릴 방도는 떠올리지 못했을 거였다.

경찰은 여러 가지 질문을 건넸지만, 나는 뭐라 해 줄 말을 찾질 못했다.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을 많이 하기도 처음이었다.

신고 접수를 마치고 옥혜 씨의 아파트로 돌아와서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출근하는 옥혜 씨를 배웅한 다음 나는 작은 집을 청소했다.

그러면서 왜인지,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에는, 나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확신 어린 추측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비이성적인 얼굴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수능 만점자라고 9시 뉴스까지 탄 나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 번호도 그대로이고 학교도 그대로이니, 아버지가 만나러 오길 원한다면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아들이 나였다. 장학금을 받았다고 기사도 났고, 의예대 진학이 확정되기도 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런 자식에게서 돈을 뜯어내러 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나 옥혜 씨를 찾아오는 불청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아파트 현관문 벨을 띵동띵동 눌러 대는 권태오가 있을 뿐이었다.

―추워 죽겠다. 문 좀 열어 줘. 너네 어머니한테는 문자로 허락 받았으니깐, 얼른.

인터폰을 통해 외치는 말에, 나는 하마터면 놀라 기절할 뻔했다.

“뭐야? 태오 너 옥혜 씨랑 문자도 해?”

벌컥 문을 열며 말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권태오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하다 싶던 권태오가, 옥혜 씨를 ‘어머니’라 부르면서 따른다는 게 못내 신기했다.

선물이라며 무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권태오는 가져온 종이 가방들을 작은 아파트의 거실에 내려놓았다. 안에는 플라스틱 용기로 포장된 요리와, 작은 선물로 추정되는 갈색 상자가 들어 있었다. 잠시간 창문 밖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그는 곧장 내 짐이 놓인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짐 박스조차 풀지 않아 별것 없는 방 안이, 권태오가 들어서자 가득 찬 듯 느껴졌다. 겨울 이불을 바닥에 깔아 놓고는 다리 위를 덮고, 나란히 붙어 앉자 온몸이 따듯해졌다.

“오늘 경찰서 갔다 왔어.”

입술의 튼 자국을 살짝 잡아당기며 내가 말했다.

“알아. 다 듣고 온 거야.”

권태오가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입술에서 떼어 놓았다. 퍼석퍼석하게 마른 아랫입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두 입술을 잇새로 말아 넣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권태오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얼굴이 못나 보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닫았던 입을 열었다.

“나 조금, 징그럽지…. 암만 그래도 아버진데, 없어도 너무 멀쩡하니까….”

이불을 감싸 쥐며 조용히 속삭일 적에 나는 두려웠다. 기숙사에서 짐을 빼 올 적엔 학교가 지루하고 시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도 없는 신세가 되어 옥혜 씨의, 그러잖아도 조그마한 아파트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나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권태오가 좋아한 내 모습이 학교 밖에서도 여전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같은 색 명찰을 달고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 학생일 때의 나를 더 좋아했던 거라면 어떡할까…, 그런 걱정에 속이 탔다.

나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내 옆으로, 권태오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이우신. 너는 하나도 안 징그러워.”

확신을 주다 못해 딴딴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권태오가 말했다.

“너는 존나 존경스럽고 뒤지게 사랑스러워.”

그 말에 멈췄던 심장이 뛰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웃음을 터뜨리게 됐다. 권태오의 손을 꽉 맞잡아 쥐고는,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욕 좀 하지 마….”

그러자 권태오가 나를 따라 웃었다.

이어, 그는 방 안을 눈동자만 굴려 둘러보았다. 그리고 무얼 물으려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선뜻 말을 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에, 나는 웃음 지었다.

“나 여기서 안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한국대까진 왔다 갔다 하기에 너무 멀기도 하고… 나는 너랑 같이 살기로 했잖아.”

그제야 권태오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둘이 같이 살아야지.”

권태오가 제 손을 척 내밀기에,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겹쳤다. 뭉툭한 손톱이 내 손바닥 위의 손금을 간질간질 긁어내렸다.

“간지러워….”

작게 웃으며 나는 두 무릎을 세우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아직도 채홍고 기숙사 방 안에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어쩌면 나야말로 푸른색 유도복을 입고 미성숙한 시절에 머무르는 권태오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큰일이었다. 내게 있어 권태오는 영원히 내일 더 자라는 나무여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십 대 시절에 머무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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