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손잡고 싶어요 (13/16)

손잡고 싶어요

세 살이 된 조심이는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그러잖아도 얌전하던 녀석이 이젠 무심해지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1학년 신입생들이 제 집 앞에 진을 치고 성가시게 굴어도, 턱을 숙인 채 콧김만 내쉴 지경이었다. 길을 오가며 ‘개가 달려들까 봐 무섭다’느니 ‘철창에 넣어 둬야 하는 거 아니냐’며 쌉소리를 지껄이던 녀석들도 더는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서 목덜미 털을 파헤치고 심장사상충 예방약을 발라 주어도 놈은 심드렁했다. 보이는 반응이라곤 싫어 죽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것. 그게 다였다.

나는 정말이지 개가 콧방귀를 ‘흥’ 뀌는 순간을 좋아한다. 조심이의 콧방귀는 더욱 우습고 귀여웠다. 한때는 제대로 달릴 줄도 모르는 똥강아지였던 주제에, 이제는 저도 햇수로 3학년이다, 이거지.

성견이 된 조심이는 아주 우람했다. 잔디 광장에서 배를 까고 뒹구는 녀석을 경비 아저씨도 쉬이 들지 못할 정도였다. 몇 번인가 채홍관까지 올라와 도움을 구하길래 훈련 도중 내려가서 놈을 들어 옮겨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체감하기로 조심이 몸무게가 30㎏은 거뜬히 넘어 버린 듯했다.

원래는 입도 짧고 사료도 잘 먹지 않아 말라빠진 놈이었는데, 이우신이 락토프리인지 락스프리인지 뭔 놈의 우유를 사료에 말아 주지를 않나 닭가슴살을 사다가 두 덩이씩 먹이질 않나, 사료를 다 비울 때마다 칭찬을 퍼부은 결과 조심이는 말라깽이 강아지에서 근육 덩어리 멧돼지가 됐다.

덩치가 커진 놈을 볼 때마다 나는 천둥이를 떠올리곤 했다. 그래도 전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순전히 이우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늑대 새끼를 잘못 주워 온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무늬만 보면 조심이는 진도 호구의 피가 섞인 믹스견 같은데, 몸집을 보자니 진돗개치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사람 손을 영 타질 않는 점까지도, 야생종이라 그런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런 내 걱정이 하등 쓸데없음을 증명하는 게 이우신이었다. 저 멀리서 이우신이 하얀 얼굴을 쏙 내밀어 보이며,

“조심아.”

그럴 때면 조심이의 꼬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은혜도 모르는 개놈의 새끼…. 나를 기쁘게 반겨 준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이우신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제자리에서 휘릭휘릭 점프로 공중 부양을 하고 끼애앵 꿔애앵 우는 소리를 흘려 가며 난리 블루스를 춰 댄다. 살다 살다 개한테까지 차별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어? 태오도 같이 있었네? 좋은 아침.”

…뭐, 상대가 이우신이라면 어쩔 수 없지. 내게도 꼬리가 있었더라면 이우신 때문에 마구 흔들다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낮이면 이우신이 걸어 내려간 학교 본관 방향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이우신이 걸어 올라간 언덕길 위 기숙사 건물을 쳐다보며 엎드려 잠자던 조심이였다. 나는 녀석의 마음을 십분이고 백분이고 이해했다. 이우신이 오죽 이뻐야지 말이다.

3학년이 된 이우신은 작년보다 더 예뻐졌다. 열여덟 살 이우신과 열아홉 살 이우신은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내 장래 애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더 예뻐졌다.

1학년 시절 신입생 대표로서 선서문을 읽어 내리던 이우신은 3학년이 되어 재학생 대표로서 환영사를 읽어 내렸었다. 그런 놈을 쳐다보며 꺅꺅거리던 1학년 여자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배’, ‘오빠’… 그렇게 불리는 이우신을 생각하면 나는 위액이 끓는 기분이 들었다. 보글보글 열기가 배를 채우고, 왠지 꼴렸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조심이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저보다 머리가 큰 개를 와락 안아 주고 쓰다듬으며 웃는 얼굴이, 뒤지게 이뻐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야…, 너는 왜 이렇게 귀여워?”

이마를 구기며 내가 묻자, 이우신이 곧은 눈썹을 살짝 웅크렸다.

“뭐?”

“왜 이렇게 예쁘냐고. 어?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왜 화를 내고 그래….”

황당하다는 양 중얼거리기도 잠시, 이우신이 피식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터뜨리는 그 웃음조차 보기 좋았다. 가지런하고 하얀 이가 드러나자 입술의 색이 더욱 빨개 보였다. 무표정할 땐 보는 사람 기분 싱숭생숭하게 만들더니, 웃을 때면 돌팔매질로 내 가슴을 갈기는 거 같았다.

“너, 그렇게 웃지 마.”

내가 큰 소리로 말해도 이우신은 뺨을 동그랗게 만들며 웃기만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의 미소를 흘겨보다가, 나도 피식 웃고는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우신이 쇠기둥에 묶인 조심이의 목줄을 풀어 쥐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걷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따라 잔디 광장에 가서는 조심이와 서너 바퀴쯤 달렸다. 텃밭의 덜 익은 딸기를 먹으려는 조심이를 끌어당기느라 애를 먹고, 신나 펄쩍거리는 놈을 두어 번 팔로 밀어내며 거칠게 놀아 주었다.

그러다 조심이가 지쳐 숨을 헥헥거릴 때쯤이면 잣나무길 아래에서 헤어졌다.

“훈련 힘내. 이따 점심 때 보자.”

이우신이 그렇게 인사했다. 나는 이우신의 조그만 머리통을 손으로 쓱쓱 빗듯이 쓰다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고는 채홍관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성큼성큼 산책로 돌길을 뛰어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리드 줄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이우신이 보였다. 그게 우리의 매일 아침 일과였다.

3학년이 되고, 미성년의 마지막 해에 접어들어 우리의 세상은 급격히 좁아졌다. 땅속의 매미들이 딱 이런 꼴이지 싶었다. 다닥다닥 모여 붙어 볕 뜰 날만을 기다리는 점에서 그랬다.

요즘따라 ‘죽겠다’고 엄살 부리는 놈들이 개미 떼만큼 많아졌다. 교실마다 수능 디데이를 세는 캘린더가 걸렸음은 물론이었다. 몇몇 녀석들은 메신저 프로필에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로 시작하는 글귀가 적힌 낡은 이미지를 장난삼아 올려놓곤 했다.

웃긴 시라는 생각에 문학소년 이우신에게 보여 줬다가 코웃음 소리를 들은 게 엊그제 일이었다.

“권태 너는 좋겠다! 수능을 치긴 치냐? 벌써 스카우트 제의 들어왔다던데 진짜야?”

입시 걱정에 울상인 놈들은 채홍관에도 많았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뛰는 내내 궁시렁궁시렁,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답답한 기분을 권태오는 모르겠지.”

나는 무표정으로 대응했다.

‘모르기는, 씨발….’

사실, 그 답답한 기분을 나는 존나 잘 알았다. 너무 잘 알아서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전부 다 이우신 때문이었다. 이우신에게 그놈의 수능이 존나게 중요해서, 이우신이 수능을 치고 한국대에 입학하는 그 날까지 나는 내 허벅지나 퍽퍽 치면서 갖은 충동을 참아 내야 했다.

겨울 내내 뭔 놈의 목도리도 연두색으로 매고 다녀서는 그게 목도리인지 꽃받침인지도 모르게 하던 녀석이었다.

은근히 눈물이 많아서 내 앞에서 훌쩍훌쩍 낑낑거릴 때면 와그작 소리가 나게 입에 넣어 씹고 빨고 싶었다.

더울 때면 입술을 벌리고는 ‘하…’ 소리를 내는데, 아랫입술 안쪽 면이 새빨간 게 그것도 속살이라고 촉촉하니 야해 보였다.

날씨가 좀 쌀쌀하다 싶으면 귓불부터 붉어지는데 워낙에 하얗다 보니 살갗이 분홍색이었다. 핥으면 복숭아맛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씨발… 기다림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우신이랑 손잡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부둥켜안고 싶고 섹스하고 싶은 한은, 나야말로 학교라는 교도소에 갇혀 독방 쓰는 죄수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린지 모르겠네….’

온몸에 펄펄 끓는 듯한 힘을 빼내느라 내 훈련은 다른 선수들이 뛰는 양의 두 배였다. 평소 같았더라면 죽겠다 싶어 경기장 바닥에 뻗어 버렸을 강도 높은 훈련도 요즘은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내 애를 먹어 온 체급 조절도 신기할 정도로 잘됐다. 식단 조절을 빡빡하게 하지 않아도 체중이 더는 100㎏을 넘지 않게 된 거였다. 그만큼 트레이닝을 뛰어 대니 장딴지며 팔뚝만 더 딱딱해졌다.

“권태 요새 폼 미쳤네….”

오전 훈련을 마치고 유도복을 벗어 던지자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이니 ‘헐’이니 감탄하는 말들을 못 들은 척 눅눅한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헐떡거리며 땀 좀 식히겠다는데, 몇몇 놈들이 마른 수건을 내게 던졌다.

“빨리 닦고 옷 좀 입어. 여자애들도 있는데.”

구시렁거리는 말에 대답하려는데, 나보다도 ‘여자애들’이 더 빨랐다. 청색 도복을 두른 여자 선수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지른 거였다.

“아아!”

마치 원망하는 유령이 내는 소리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받은 수건으로 목과 팔뚝 밑을 닦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철문을 지나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무어라 외치는 말이 들려왔다.

“야, 네가 뭔데 권태한테 옷을 입으라 마라야? 더운데 땀 좀 말리게 놔둬!”

“우리도 눈 있고 입 있어요, 선배!”

웅성대는 소리를 남일처럼 들으면서 나는 심드렁했다.

‘이우신도 저러면 좀 좋을까.’

어찌 된 게 이우신은 눈이 없는 거 같다. 사내새끼들 벗은 몸에 세상 심드렁한 여자 선수들조차 나를 구경하니 마니 하는데, 이우신 그 도도한 구미호만이 내게 무심했다.

아니지, 오히려 제 얼굴만 보고 살아서 나 멋진 줄을 모르는 것도 같았다. 하긴 외모에 무관심한 척, 교과서만 보고 사는 척해 봤자 저도 세수할 땐 거울을 볼 텐데, 아침저녁으로 보는 얼굴이 그렇게 생기셨으면 남의 얼굴이야 금칠을 하건 똥칠을 하건 알 바가 아니겠지.

사정이야 납득은 간다지만 서운한 건 별수 없었다.

‘언제는 눈물 찔찔 흘리면서 좋아한다더니….’

누가 당장 벗고 뒹굴기를 하자 그랬나, 서로 대딸을 쳐 주자고 그랬나, 하다못해 키스라도 원 없이 해 봤으면 나도 투정하지 않고 잘 참았을 거였다. 그런데 이우신은 해도 너무했다. 아니, 아니지. ‘안 해도 너무 안 했다’.

‘손 정도는 잡아 줄 수 있는 거잖아?’

제 얼굴 볼 생각에 안 쓰던 샤워 코롱까지 써 가며 빡빡 씻고, 바디 로션을 치덕치덕 발라 땀 냄새를 지우고 채홍관을 나서는 내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꼿꼿하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이우신이었다.

“교복 입었네?”

“어.”

“밥 먹고 어디 가…?”

“아니.”

여자애들 말로는 교복 입으면 더 멋있다길래, 관심 좀 끌어 보겠다고 티셔츠 위에 겹쳐 입은 셔츠가 갑갑했다. 단추 두 개를 풀어 버리고는 칼라를 정리하는데, 이우신의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야야야, 우신아! 어제 보어스 페어 월드컵 봤냐?”

우리 사이로 끼어든 강건우와 금세 철썩 달라붙어서는, 저 멀리 급식실을 향해 앞서 걷는 식이었다.

강건우 저 자식을 이우신한테서 떼 놓을 방법이 없는 게 한이었다. 작년 여름에 사이가 좀 멀어졌나 싶더니, 이번 학기 들어 다시금 철썩 붙어서는 절친이자 베프가 된 두 사람이었다. 강건우가 징그러운 농담을 해대면 이우신은 받아 주기 일쑤였다.

“한국 팀이 이겨 가꼬 형님이 오늘 쫌 기분이 좋그든요? 밥 먹고 쪼꼬 아이스크림 사 줄까요, 우리 우쉬니? 우쉬니 쪼꼬 아이스크림 안 먹을 꼬야? 그럼 빠나나우유 사 줄까요? 빠나나우유 먹을 꼬야?”

강건우가 입으로 똥을 싸댔다. 이우신은 저딴 농담이 뭐가 웃긴지 좋다고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사 줄 거면 바나나우유.”

“빠나나우유?”

“네. 우신이 빠나나우유 사 주세요, 건우 형.”

아주 씨발 학예회를 하고 자빠졌네….

눈을 가늘게 뜨고 이우신의 뒤통수만 노려보는데, 이찬희가 픽 웃음소리를 냈다. 닭 쫓던 개 구경하듯 날 보는 이찬희를 향해 ‘뭐’ 하고 입 모양으로만 을러놓자, ‘그냥’ 하더니 이우신의 왼편으로 쭈르르 달려갔다.

올해 들어 이찬희와 나는 꽤 멀어졌고, 그 덕분에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 놈은 이제 내게 제 분을 풀거나 감정싸움을 걸어오지 않았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런지 나도 이찬희가 100% 밉지 많았다. 98% 밉고 2%는 꼴 보기 싫다고나 할까.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편이다.

그래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악마 새끼가 나를 놀리는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다. 그러니 저렇게, 이우신의 팔짱을 나 보란 듯 꼭 끼고 걷는 거였다.

‘기다란 새끼가 염치도 없지.’

기린이 조랑말한테 기대는 꼴이었다.

“우신아아. 나 다리 부러지면 업어 줄 거야?”

“아니. 무거워서 못 업어.”

처음엔 서먹한 듯 굴던 이우신도 이제는 이찬희를 뿌리치지 않고 그러려니 내버려 두고는 말았다. 그게, 내가 꼴이 받는 이유였다.

‘왜 나만 안 돼?’

이우신이 그어 놓는 선의 기준이 나에게만 너무 박했다. 저보다 큰 강건우가 장난질을 벌이며 제 무릎에 앉아도 그러려니, 이찬희가 손깍지를 끼건 팔짱을 끼건 그러려니, 가끔은 셋이서 남극 펭귄 무리처럼 다닥다닥 붙어 부둥켜안고 다닐 때도 그러려니 하는 주제에, 나만 안 된단다.

내가 손을 잡으면 ‘싹’ 소리가 나도록 재빨리 빼냈다. 내가 팔뚝을 잡아끌면 콧숨을 한 번 ‘후’ 내쉬고는 몸의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문득 껴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서 팔 뻗으며 다가갈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후다닥 강건우 뒤로 숨어 버리기도 셀 수 없이 자주 했다.

“아, 왜?”

이우신이 두 개 빼내서는 내게 하나 건네는 식판을 받으면서,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난 안 되는데. 왜 나랑 안 하는 걸 저 새끼들이랑 하고 난리야.”

문제의 ‘저 새끼들’은 칠렐레팔렐레, 좋은 자리를 잡겠다고 벌써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반면에 이우신은 눈이 맑고 똑똑해서, 따박따박 말대꾸를 어찌나 잘하는지….

“태오야, 너는 아무랑도 손 안 잡잖아. 아무 무릎에나 앉거나 누굴 앉히지도 않고, 남의 팔짱은커녕 네 두 팔로도 팔짱 끼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네가 나랑 손을 잡고 걸어 다녀 봐. 그럼 너무 특별해 보일 거 아니야.”

맞는 말만 우후죽순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빌어먹을….’

나도 한국인이고 한국어가 모국어인데 왜 이우신이 쓰는 언어는 고급 레벨 같지? 저기요, 세종대왕님. 못 배워 먹은 백성도 잘 쓰라고 만드신 게 한국어 아니에요? 근데도 이우신이랑 나랑 레벨 차이가 존나게 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결국 긴 한숨만 푹 내쉬며 말꼬투리나 잡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나는 팔짱 끼면 불편해. 팔뚝 밑으로 손이 안 끼워져.”

사실대로 중얼거리며 직접 팔짱을 껴 보였다. 두 팔을 교차시키자 팔꿈치가 남들보다 높이 떴다. 어깨와 팔뚝의 근육 때문이었다. 오른손에는 식판을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왼손마저 꽉 닫힌 팔뚝과 가슴 사이 틈으로는 끼워 넣기가 어려웠다.

자세를 취하며 보여 주자 이우신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나비를 발견한 길고양이처럼 눈동자가 까맣게 커지는가 싶더니, 내 팔뚝 근육 위를 손끝으로 꾹 건드렸다. 울룩불룩 도드라진 핏줄을 누르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오….”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내는 소리라는 게 나지막한 감탄사였다. 빠르게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 이우신이 손끝 마디로 누를 때마다, 내 팔뚝의 핏줄이 쑤욱 살 안으로 들어갔다가, 손을 떼면 다시금 밖으로 쏘옥 윤곽을 드러냈다.

이내 이우신은 시선을 숙이더니 제 팔을 들어 보였다. 하얀 팔뚝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관찰하는가 싶더니, 제 핏줄을 찾아 꾹 눌러 보였다. 이우신의 탄탄한 팔뚝은 근육의 울퉁불퉁한 윤곽일랑 없이 그저 하얗게 직선이었다. 그나마 보이는 핏줄마저도 푸르스름하니, 불투명한 피부 밑에서 색깔만 겨우 드러낼 뿐이었다.

“…….”

제 핏줄을 찾아낸 이우신이 왼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러더니 입술을 조금 내밀면서 파란 핏줄 위를 꾹 눌렀다.

‘아 씨발. 돌았나?’

너무 귀여워서 나는 팔뚝이고 나발이고 온몸의 핏줄이 터질 거만 같았다.

‘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날 앞에 두고 이우신은 금세 표정을 고쳤다. ‘흠’ 하고는 식판을 고쳐 들고, 계란말이를 퍼 주는 영양사에게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저는 이렇다 할 생각 없이 보인 행동이며 표정에, 내 속에서 피 대신 용암이 흐르는 줄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무척 억울했다. 대머리 빡빡 민 스님이래도 이우신만큼 성욕 없어 보이진 않을 거였다. 석상 천 개를 줄지어 놔도 이우신만큼 무심한 얼굴을 한 건 없을 터였다.

‘섹스하고 싶다!’

라고 소리 지르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그러면서 눈을 부라릴 것 같은 게 이우신이었다.

도대체 내가 저와 무얼 얼마만큼 하고 싶은지 알기나 할까. 당장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 약간의 원망을 자아냈다.

“너 기다리느라 내가 얼마나 죽을 맛인지 너는 모르지.”

투정하듯 말하며 나는 이우신의 어깨를 괜히 ‘톡’ 건드렸다. 그러자 이우신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좌우로 느릿느릿 일렁이며 내 두 눈을 살피는가 싶더니, 까만 속눈썹을 드리우며 다시금 바닥을 향했다.

하여간… 존나 뽀얀 여우 같은 게.

“정 기다리기 힘들면 잠깐만 안 좋아해도….”

저 혼자 무얼 생각해 낸 듯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아니.”

제 말을 제가 끊으면서 을러댔다.

“안 좋아하기만 해 봐, 내가 권태오 너 가만 안 둘 거야. 계속 좋아해 줘. 계속 기다려 줘야 돼. 힘들어도 어쩔 수 없어. 알겠어?”

그러더니 갑자기 폭설 같은 말을 쏟아냈다. 웅성웅성 시끄러운 급식실 소음 안에서도, 작은 목소리로 꾸중하듯 말하는 소리는 또박또박하니 내 귓가로 쏙쏙 들어왔다.

나는 실소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갑자기 혼나야 하는 거냐?”

그러자 이우신이 한숨을 푹 내쉬며 옆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계란말이가 산처럼 소복하게 쌓인 식판에, 이번엔 파전이 다섯 장씩 가득가득 쌓였다.

“…….”

저 할 말만 콸콸 쏟아 낸 주제에, 이우신은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는 양 입술을 살짝 비틀며 눈썹을 구겼다. 탐탁잖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가 싶더니, 구겼던 미간을 서서히 폈다.

새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이우신이 못마땅하다는 듯 지적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제가 어떤 눈빛을 하며 사르르 미소 짓는지, 전혀 모르는 이우신이 좋아서 웃음이 났다.

“얘 밥 좀 많이 주세요.”

대신에 급식실 직원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고봉밥이 놓인 이우신의 식판 위에, 쌀밥으로 만든 산이 생겼다.

개학 이후 채홍관 안을 기웃거리는 신입생들이 많아졌다. 월요일, 화요일에는 훈련 경기를 관전할 수 있게 온종일 문을 개방해 두곤 하는데, 이틀 내내 점심시간마다 관중석이 절반 이상 채워져 있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중 대다수가 유도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선수를 구경하러 왔단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선수가 나라는 거였고….

“권태오!”

“꺄악!”

“권태 선배애! 파이티잉!”

하필 월요일은 전원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아다리’로 불리던 훈련이 ‘전원 경기’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갖게 된 데는 다 그럴 만한 역사가 있었다. 여름 방학 내내 채홍관을 들락날락대던 이우신이 어느 날 코치에게 어원을 물은 게 씨발점… 아니, ‘시발점’이었다. 발정 난 황소 같은 유도부 새끼들과 달리 얼굴은 새하얗고 태도는 얌전한 이우신을, 코치는 꽤 이뻐했다. 코치가 신나 설명해 주기를, 정확히는 ‘소우아타리(そう-あたり)’라고 일본어에서 변형된 거라든가 뭐 그랬다.

그랬더니 이우신이 또랑또랑 눈을 반짝거리면서 오른손을 들고, 새 질문을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요, 코치님. 꼭 일어를 가져다 써야 하나요?’

그 말에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코치는 새 학기 훈련 일정표에 ‘전원 경기’ 네 글자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전원 경기의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다. 이우신이 이 경기 이름을 고쳐 놓는 데에 한몫했다는 것. 그 외에 이 훈련에 좋은 점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 개인적으로 ‘전원 경기’라는 이름보다는 ‘토 나올 때까지 패대기치기 경기’라고 불러야 된다고 생각한다.

전원 경기는 문자 그대로 전원과 붙는 경기였다. 씨이발…. 3학년 선수를 경기장마다 한 명씩 세워 놓고 같은 체급의 1, 2학년 선수 전원과 겨루게 하는 식이었다. 처음 서너 판은 손쉬워도 다섯, 여섯, 일곱 판을 넘어가다 보면 입 안에서 ‘개새끼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중간에 져 버리면 끝날 일이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 선수가 3학년을 이겼다며 으스대는 꼴을 보느니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버티는 게 나았다.

내 경우는 다른 3학년들보다 좀 더 좆같이 됐다. 청소년 국대 권태오랑 겨뤄 본답시고 패기 가득한 놈들이 욕심으로 눈을 빛내며 하나씩 하나씩 맞은편에 서는데, 엎어 치고, 엎어 치고, 또 엎어 치다 보면 살이 떡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원숭이처럼 ‘와아악’, 까마귀처럼 ‘꺄아악’ 소리를 질러 대니, 관중석의 응원이 내게는 신경을 긁는 손톱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 났다.

‘시끄러워 죽겠네….’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고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펄떡거린다. 맥박이 북소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하아, 씨발….”

이게 다, 빌어먹을 동영상 때문이었다.

중학생부 여자 청소년 국가 대표까지 정해진 게 지난달의 일이었다. 한국유도협회에서 동영상 사이트 ‘레드 데이즈’에 뭔 놈의 공식 채널을 하나 파서는, 지난해 11월에 참여했던 신산체육경기장에서의 대회 영상을 업로드했다. 개중 내가 치른 결승전이 담긴 3분 20초짜리 영상의 제목은 ‘서울 유도 간판선수 권태오’였다.

처음에는 나조차도 내 영상이 올라갔다는 걸 모를 정도로 잠잠했고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조회 수가 2만으로 오르더니 이내 초 단위로 잘려 무슨 놈의 카페며 커뮤니티에 떠돌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권태오 팬클럽’이 생겼는데, 딱히 도움이 될 만한 활동은 하지 않고 그냥 목소리만 좀 클 뿐이었다.

그 바람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국 유도의 미래’라는 달콤한 소리를 붙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내 껍데기에 더 관심이 많은 듯했다.

그러니 별것 아닌 기술을 걸어도 ‘와아’, ‘꺄아’ 하는 소리가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거였다.

“아, 씨발!”

거친 숨을 내뱉으며 후배 선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놀란 놈이 파드득 뒷걸음질을 치기 전에 그대로 번쩍 들어서는 경기장 바닥에 메다꽂았다.

“권태오! 텐션 조절 안 해?”

호루라기를 목에 건 코치가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이! 진정해야지! 국제 경기는 이것보다 더해. 집중력 흐트러지지 말고 연습에만 집중한다 생각해. 이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코치는 그렇게 말했지만, 글쎄. 내가 신경 쓰는 건 한데 모여 앉은 신입생 여자애들이나 원숭이 같은 몸매로 동경의 시선을 보내는 남자애들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좋은 자리를 다 뺏기는 바람에 저 멀리, 가장 뒤쪽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를 구경하는 내 장래 남친, 이우신이었다.

“하아, 씨…발 알겠어요.”

“숨 고르고. 손목 상태는?”

“아, 알겠다고요.”

이마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다음 허공에 대고 털어 냈다. 축축하고 뜨거운 몸을 돌려 경기장 한편에 서자, 코치가 다시금 호루라기를 ‘삑’ 불었다. 다음 상대가 긴장한 얼굴로 성큼성큼 맞은편에 섰다.

‘삑’,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땀과 짜증과 분노로 뒤범벅이 된 나와 보송보송하니 기운 넘치는 상대가 맞붙었다.

그와 동시에,

“꺄아악!”

의미 없는 응원 소리가 쏟아졌다.

눈썹을 찡그린 채 관중석을 올려다보자 저 멀리, 혼자 앉아 있는 이우신이 보였다. 왼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화면 위를 문지르길 한창이었다. 제자리에선 내가 잘 보이지 않으니까 휴대폰 카메라로 확대해서 살펴보는 듯했다.

원래는 맨 첫 줄이 이우신 자리인데…. 훈련 경기를 하는 날이면 존나 귀엽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기술을 걸거나 상대 어깨가 경기장 바닥에 닿을 때마다 혼잣말로 ‘1점, 1점, 2점’ 중얼거리는 게 진짜 듣기 좋았는데.

‘아…. 개빡치네.’

내가 누군지, 경기 흐름은 또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멀리 밀려나서는, 부표처럼 덩그러니 앉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심하지도 않은 새끼가 왜 후배들한테 좋은 자리를 다 뺏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자리라고 말을 왜 못 하냐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리자 나란히 허리끈을 쥐고 힘을 겨루던 상대가,

“네? 뭐, 뭐라고요…?”

엉거주춤 물어왔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놈의 어깨에 턱을 걸었다. 대놓고 몸을 기대며 쉬기를 10초쯤 했을까, 놈이 뒤늦게 ‘어’ 하더니 성질이 오르는지 발을 굴러 왔다. 왼발, 오른발, 거는 족족 피해 주며 상대의 어깨에 더욱 깊이 몸을 기댔다.

“아, 이….”

버둥거리며 걸어오는 잔기술을 피하길 한참, 헐떡거리는 상대를 가볍게 넘어뜨렸다. 체중을 실어 누르기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도 좀 쉬어야지.’

숨을 고르며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자 상대도 내 생각을 읽은 듯했다. 내가 저와의 경기를 기회 삼아 휴식을 취한다는 게 수치스러운지, 놈은 머리꼭지까지 새빨개졌다. 경기를 시원스럽게 마치지 않으니 터져 나오던 비명 소리도 잠시나마 그쳤다.

‘이제 좀 조용하네.’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고 나는 허리끈을 다시 묶었다. 엉거주춤 자세를 취하는 후배 선수를 흘긋 살피는데, 그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에 앉은 이우신이 보였다.

전과 달리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이우신은 양손 검지로 엑스 자를 만들고는, 제 입술 앞에 대고 있었다.

‘심술부리지 마.’

그렇게 달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피식 웃음 짓고는 표정을 고쳤다.

다시금 죽을힘을 쥐어짜 내어 경기하자 전원 경기는 금세 끝이 났다. 헐떡헐떡 숨을 고르며, 나는 경기장 바닥에 나자빠진 마지막 선수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쑥 들어 일으켜주었다.

“후우….”

마주 보고 선 채 가볍게 허리 숙여 인사까지 마치고 보니, 다른 조는 아직도 서너 명씩 상대 선수가 남아 있었다. 보란 듯 이우신을 향해 턱을 들자, 이우신이 제 옆자리에 놓았던 책과 노트를 슬그머니 치워 보였다.

올라오라는 신호를 알아채고 나는 얼른 걸음을 움직였다. 내게로 모여드는 수많은 시선을 무시한 채, 관중석 펜스를 휙 넘었다.

곧장 이우신에게 향하려는데,

“저….”

웬 여자애 하나가 친구들에게 등이 떠밀려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조끼의 명찰이 노란 걸 보니 1학년이었다.

“저기… 선배님….”

언제 봤다고 내가 네 선배야. 뭔 놈의 대학교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고 내가 뭘 했다고 너한테 선배님이야?

“이거… 받아 주세요. 저, 저는 그럼, 저기, 어…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조그만 상자를 반강제로 내 손에 건네주고는 우다다 도망을 쳐 버렸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여자애의 뒤를 그 친구들도 웃으면서 따랐다.

눈살을 찌푸리며 나는 손에 쥔 상자를 내려다 봤다. 분홍색 홍학이 그려진 포장지에 하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무어라 좁쌀만 한 글씨로 적어 넣은 응원 문구를 쳐다보다가, 나는 힐끔 이우신이 앉은 자리를 살폈다.

“…….”

“……”

이우신이 나를,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나는 괜히 속이 뜨끔거렸다. 내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죄진 것도 아닌데… 별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가 나는 이우신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버릴 거야.”

냉정하게 선을 긋고자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이우신이 뭔 놈의 인간 말종 쓰레기를 다 보겠다는 듯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저 조그만 애가 용기 내서 너한테 준 건데, 그걸 그냥 버린다고…? 한 시간 전부터 너만 쳐다보면서 기다리다가 전해 준 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

밀려드는 잔소리에 못 이겨 리본 끝을 잡아당겼다. 포장지를 툭툭 긁다가, 답답한 마음에 쫙쫙 뜯어내자 투명한 케이스에 담긴 마카롱이 보였다. 다섯 개를 나란히 세워 포장해 두었는데, 울룩불룩한 표면이며 초콜릿이며 설탕 가루가 엉성하게 뭉쳐 발린 게 손으로 만든 티가 났다.

가운데 꽂힌 마카롱을 하나 집어 올리자, 하트 모양이 드러났다. 나는 잠깐 침묵하며 이우신을 힐긋 살폈다. 마카롱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고는, 이우신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나는 단 거 싫어.”

“너 먹고 힘내라고 준 걸 나를 주면 어떡해…. 나중에 맛있게 잘 먹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게?”

“내가 그런 것까지 대답해 줘야 해? 아는 애도 아닌데.”

“걔는 너 알 거 아냐.”

이쯤 되니 조금 전 받았던 열이 다시 오르는 듯했다. 이게 지금, 내가 마카롱을 받은 거보다 나한테 마카롱을 준 애를 더 걱정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 되는 상황인가? 얘가 내 애인… 아니, 장래 애인이 될 사람 맞긴 한가?

나는 이우신한테 누가 초콜릿이나 마카롱을 준다고 생각하면 배알이 꼬이고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 같은데 이우신은 그런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잖아도 장세라랑 붙어 다니면서 지들끼리 알 수 없는 농담을 나누는 꼬라지를 볼 때마다 짜증 나던 참이었다.

언제 한 번은 장세라의 문자를 받고 한참을 웃어 대길래 나도 보여 달라고 살폈더니,

3학년 4반 장세라

[corn/s]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암호가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그렇게 물었더니 이우신은 ‘하하학’ 소리 내어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초당옥수수.’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뭐냐고. 무슨 의미인 거야? 그게 왜 초당옥수수인 거야? 어디가 웃긴 건데?

나는 아직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초당옥수수 숨은 뜻’, ‘초당옥수수 고백’, ‘초당옥수수 애정 표현’ 따위로 인터넷에 여러 차례 검색도 했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결과는 얻지 못했다. 나로서는 참 빡치는 일이었다.

‘뭐? 너 먹고 힘내라고 준 거라고? 나중에 잘 먹었냐고 물어보면 어쩔 거냐고? 내가 왜 그걸 고민해야 하고, 왜 그 이야길 이우신한테 들어야 하지?’

서서히 열이 오르더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매일매일 돌 것 같은데 이우신은 내가 저 보는 앞에서 여자애한테 마카롱을 받아도 괜찮다니…. 난 이 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전원 경기 마지막 판보다 더 불공평한 경기였다.

“너는 질투도 안 하냐?”

퉁명스럽게 묻자,

“내가 질투를 왜 하겠어.”

이우신이 즉답했다.

그 소리에 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거 같았다. 부글부글 화도 났다. 두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이우신이 내 손에 들린 마카롱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만큼 너를 생각해 줄 사람은 또 없는데.”

속삭임 끝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두 뺨을 동그랗게 올리면서 웃어 보이더니, 이우신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

한 번, 두 번… 토닥토닥 두드리는 손길을 따라 머리꼭대기까지 솟았던 화가 가슴으로, 배 밑으로, 이내 발치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얼른 씻고 와…, 점심시간 다 가기 전에.”

이우신이 소곤거렸다. 금방 화내고 금방 웃어 보이는 쉬운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얼른 씻어야 하는데?”

“그래야 뽀뽀를 할 거 아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릎에 놓였던 마카롱 상자가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1분만 기다려.”

나는 허둥지둥 떨어진 설탕 덩어리 간식을 쓸어 담고는, 후다닥 뒷문을 찾아 뛰어나갔다. ‘이리 와’, ‘저리 가’ 훈련당하는 똥개래도 상관없었다. 이우신이 대놓고 하하 웃음을 터뜨려도 별수 없었다.

타닥, 타닥,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아마도 내, 근래 들어 ‘미친놈 같다’ 평을 듣는 폼은 이렇게 만들어진 거겠지…. 이우신의 조련으로 심장이 너무 튼튼해져서, 저 입술이 뱉는 말 한 마디면 곧 죽을 것처럼 늘어진 근육도 돌처럼 굳어 버리니 말이다.

사방 천지 싫은 것, 지겨운 것, 귀찮은 것뿐이던 학교가 이우신 하나로 돌연변이가 됐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짜증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내 성질이 더러워서 별수 없다지만, 저 멀리 본관을 찾아가면 이우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 성질마저도 헤벌쭉 펴지기 마련이었다.

3학년 들어 교실 배치가 참 좆같이 됐다. 운동 특기생을 모아 놓은 5반만 뚝 떼다가 채홍관과 가까운 별관에 집어넣은 탓에 3학년 1반, 이우신의 교실로 찾아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구름다리를 넘고 중앙 계단을 한 층 올라, 2학년 교실을 지나는 내내 애새끼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걷자 나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모네의 기적처럼 좌우로 쫙쫙 갈라진 길로 나는 걸음을 움직였다.

“와, 진짜 크다….”

“저 형이 권태오야? 유도 선수?”

웅성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3층 복도 맨 끝 교실을 찾아 들어가면,

“우신아.”

구석 자리에 앉은 이우신이 보였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우르르 내게 쏠렸다. 눈길들이 옷깃에 들러붙는 도깨비풀 같다고 느끼면서 나는 이우신에게 직진했다. 문제집에 고개를 묻고 있는 이우신의 머리를 만지려는데, 이찬희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태오, 왔어?”

이우신의 옆자리에 책상을 딱 붙여 앉은 녀석을, 나는 심드렁하니 내려다봤다. 그러자 이찬희가 한 손을 제 입가에 대더니 속닥속닥 말했다.

“야. 나한테도 아는 척 좀 해 봐. 애들이 너랑 싸웠냐고 수군거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데 누가 그딴 소릴 해.”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말을 따라 읊으면서, 이찬희는 검지로 이우신을 가리켰다.

“…찾아오기는 하지?”

그러더니 씩 웃는 얼굴이 하여간에 악마 새끼였다. 전에 비해 덜 나쁜 악마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런들 이찬희가 좋아지진 않았다. 놈은 내게 있어 그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친해진 친구일 뿐이었으므로.

나는 느릿느릿 구겨지는 미간을 펼 줄을 몰랐다.

‘교감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돼?’

빌어먹을 반 배정에 들어간 입김이 내 눈에는 뻔히 보였다. 이우신과 이찬희가, 두 학년 연속 같은 반이 됐다. 거기까지야 우연으로라도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어! 권태 또 왔네?”

하지만 강건우까지 묶어 트리오가 고스란히 옮겨진 것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제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다고 이찬희가 우는 소리를 작은 이모에게 흘렸을 거고, 작은 이모는 그 소리를 권주원 씨한테 흘렸겠지. 같은 말이 내, 외숙부인지 삼촌인지 아무튼 교감 쌤에게도 전해졌을 거였다.

‘아무리 교감이래도, 그런 건 월권행위 아닌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따지고픈 마음이 굴뚝같아도 별수 없었다. 곽성중과 이우신이 싸운 일을 조용히 덮어 주고, 곽성중의 부모를 설득해서 그를 먼 학교로 전학 보내 준 것도 바로 그 교감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이찬희네 어머니가 걔네 부모를 이 동네에서 못 살게끔 몰아붙였다고도 전해 듣긴 했다. 곽성중네 부모가 어떤 사람이건 작은이모의 성질을 이겨 내진 못했을 게 뻔했다. ‘혁 군 사건’ 일이 걸린 이상에야, 이찬희를 위협하는 동창생을 가만히 두고 볼 이모가 아니었다.

“…….”

나는 힐긋 시선을 내려 이우신을 살폈다. 저를 찾아 내가 들어오건 말건, 제 머리카락을 집게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건 말건 문제 풀이에 집중하는 이우신은 어딜 봐도 말짱하기만 했다.

…어떻게 이우신은, 이찬희가 거머리처럼 철썩 달라붙어 다녀도 이렇게나 괜찮고 멀쩡한 걸까.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이찬희가 이우신을 어떻게 구워삶았냐는 뜻이 아니다. 이우신이 이찬희를 어떻게 구워삶아 길들인 건지, 나는 그게 의문스러웠다.

이찬희가 어떤 놈인지는 내가 잘 알았다. 놈은 때때로 귀신처럼 굴 때가 있고, 고만고만 잘 지내는가 싶다가도 수가 틀리면 제멋대로 날뛰고는 했다. 이찬희는 저를 오냐오냐 살펴 주는 어른들과 제 시종 노릇이나 하는 내 옆에 붙어 자란 독버섯이었다.

그런 놈이, 어째 이우신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노루궁뎅이 버섯인 척 굴었다. 오죽하면 평소 존나 싫어할 만한 타입인 강건우를 먼저 제 친구로 만들었을까.

“…….”

눈썹을 꿈틀 들어 올린 채 이찬희의 웃는 낯을 쳐다보다가, 나는 이우신의 앞자리에 털썩 몸을 앉혔다.

“아, 또야?”

강건우가 소리를 꽥 질렀다.

“어째 3년 연속! 아, 나도 자리에 좀 앉자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놈을 향해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강건우가 씩씩거리는가 싶더니, 요란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찬희를 끌고 매점으로 떠나 버렸다.

둘이 남게 되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이우신을 쳐다봤다. 두툼한 집게로 이면지 뒷면을 뭉쳐 놓고는, 그 위에 수학 문제를 풀어 내리는 손이 느릿했다. 그러나 풀이는 신속했다. 천천히 숫자 위를 샤프로 긁적이는가 싶더니, 대뜸 답을 내놓고 문제지의 오지선다에 체크하는 식이었다.

“태오야.”

그러더니 시선은 문제집에 고정한 채 말이 없었다. 대신에, 오른손을 분주히 움직여 이면지 귀퉁이에 글자를 적어 내렸다.

‘나 보고 싶어서 왔어?’

나는 씩 미소 지었다. 이우신의 필통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어, 그 옆자리에 거꾸로 글씨를 적었다.

‘어. 자꾸 보고 싶었어.’

삐뚤삐뚤 거꾸로 적은 글씨를 보며 이우신이 작게 웃었다.

‘아침 훈련은 잘했어?’

‘어. 오늘 훈련: 100점.’

그러자 이우신의 손이 느려졌다. 글자는 빠른 속도로, 반듯반듯하게 적어 내리던 손이, 작은 그림을 그려 넣을 적엔 속도도 느렸고 그려 내는 선도 엉성하니 구불구불했다. 한참을 꾸불거리며 곰 캐릭터를 그리는가 싶더니, 숫자 9를 닮은 두 팔을 그려 내고는, 그 안에 반달인지 마늘인지 모를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저게 도대체 뭐인가… 하고 가만히 쳐다보는데, 그 옆에 조그만 글자가 적혔다.

‘<-권태오’

나는 피식 웃고는 볼펜을 움직여 그 옆에 여우를 그려 넣었다. 거꾸로 그려야 하는 페널티를 지닌 탓에 내 그림도 이우신의 못생긴 그림만큼 구불구불했다. 마무리로 여우 옆에 화살표를 찍 그은 다음,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우신->’

그러자 이우신이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아주 작게 웃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그의 광대가 봉긋 솟은 게 살짝 엿보였다. 동그랗고 흰 게 꼭 찹쌀떡 같다. 필통에 손을 넣는가 싶더니, 이우신이 빨간 볼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여우와 곰 사이에 무얼 끄적 그려 넣었다.

그때 수업 시작 5분 전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손을 뻗어, 나는 이면지 귀퉁이를 찍 뜯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난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 진짜, 얼굴 들기 전에 경고라도 하든지, 좀 그래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예쁜 걸 봐서 벌렁거리는 내 마음을 좆도 모르는 이우신은 투정을 해 댔다.

“아, 왜 찢고 그래…. 내 거야, 이리 줘.”

“이제 아니야. 내 거야.”

나는 그의 그림과 글자를 훔쳐 주머니에 넣었다. 이우신이 ‘줘’ 하고 내 팔을 잡아당겼지만, 약해 빠진 두 손으로 어떻게 달려들건 내 몸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우신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 달라니까….”

진지한 얼굴로 내 주머니를 열어 보려 매달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조금 더 즐기고 싶어서였다.

“야야, 권태오가 이우신 삥 뜯는다.”

그러던 중 눈치 없는 몇몇 놈들이 우리를 보며 킥킥거렸다.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듣고, 이우신이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아니야, 그런 거.”

이우신이 진지하게 변명하는 사이 나는 복도로 내뺐다. 등 뒤로 내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 들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 거야.’

방과 후에 학교 밖에서 만나거든 잔뜩 화난 채 ‘야! 안 내놔?’ 소리치는 이우신을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도둑질밖엔 답이 없었다. 어떻게 안 훔칠 수가 있을까, 이우신이 우리 이름 가운데에, 빨간 하트를 그려 넣었는데….

5월 체육 대회는 여러모로 신나는 이벤트였다. 체육 특기생이면서도 나는 한 번도 체육 대회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3학년이 되어서야 체육 대회 날짜와 경기 일정이 겹치지 않게 된 덕분이었다.

“야야! 잘 들어, 우리 반은 1등 못하면 그냥 뒤지는 거야. 알겠어?”

같은 반의 시커먼 놈들이, 열의에 가득 차서는 ‘다 발라 버려’ 소리를 질러 댔다.

체육 특기생을 몰아넣은 반이라면 체육 대회 1등이야 언뜻 당연할 것 같지만, 갖가지 대회며 훈련 일정이 겹친다는 이유로 수업도 잘 참여하지 않는 선수들이 체육 대회 하루를 꼬박 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바람에 인원수가 모자라 단체 경기마다 기권 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도부 선수 전원이 일정 없이 노는 몸이었다. 승기를 거머쥐기에 딱 좋은 때란 의미였다.

개중에서도 공주윤과 나는 필승 카드로 취급됐다. 3학년에 둘 있는 -100㎏급 선수로서 피지컬이 남다르단 이유에서였다. 학급회장이 받아 온 참여 종목 명단의 모든 칸에 공주윤과 내 이름을 집어넣을 지경이었다. 패기는 좋았으나 ‘특기생은 최대 세 종목까지 참여 가능하다’는 교칙으로 인해 그대로 이뤄지진 못했다.

결국 공주윤과 나는 각각 다른 경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럼 종목 여섯 개는 일단 1등이고.”

내가 중얼거렸고,

“남은 거 뭐, 줄다리기, 박 깨기. 이런 건 멸치라도 할 수 있잖아?”

공주윤이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린 채 구시렁거렸다.

“엄청 재수 없는데 너네가 그러니까 할 말이 없다….”

결국 학급 회장이 알아서 이름들을 기입했다. 그 결과 공주윤은 계주, 높이뛰기, 그리고 축구에 이름을 실었다. 나는 팔씨름 대회, 씨름, ‘친구 찾기 레이스’에 참여하게 됐다. 씨름 종목에 공주윤이 아닌 내 이름을 적은 일을 두고, 회장은 녀석에게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사과를 했다.

“그게… 너도 잘할 거 아는데, 아무래도 권태가 국대니까.”

나는 인상을 퍽 찌푸렸다.

“사람 좀스럽게 만들지 마.”

그러자 공주윤이 킬킬거리며 에너지바 봉지를 찍 뜯었다. 체급 조절을 하느라고 밥도 못 먹는 놈의 사정이 남 일 같지 않아 대신해 을러 놓고는, 나는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근데 ‘친구 찾기 레이스’가 뭐냐.”

반 회장이 엉거주춤, 나와 공주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쪽지에 쓰인 단어 보고 해당되는 사람 데리고 가는 건데… 사람이야 아무나 대충 골라도 되고 빨리 달리는 게 중요해. 권태 네가 잘할 거 같아서….”

“어, 그러든지.”

그리고 나는 이우신을 생각했다. 허여멀건 그 샌님이 참여할 만한 종목은 뭘까, 궁금해서 머리를 굴렸지만 도통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군중 속에 섞여 배구를 하거나 콩주머니를 줍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그 생각에 픽 웃음 짓자, 한참 쭈뼛거리던 반 회장이 얼른 자리를 떠났다.

“맛대가리 더럽게 없네.”

손안의 에너지바를 콱 구기며 공주윤이 중얼거렸다. 나는 놈에게 그나마 먹을 만한 프로틴바를 추천해 주는 것으로 망상의 나래를 끊어 냈다.

이우신이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건 깨달아도 깨달아도 끝이 없다. 배구? 콩주머니? 지랄하네. 이우신은 계주 경기의 4번 주자였다. 심지어는 2년 내내 계주 4번 주자로 나서,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없는 에이스라 했다.

하기야 부산에서의 밤만 떠올려 봐도 이우신은 꽤 빨랐었다. 제 손등을 다 덮는 긴팔 후드티를 입고도, 나비 같은 얼굴로 벌처럼 내달리던 뒷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체육복을 챙겨 입고 달리는 순간에는, 그보다 두 배로 더 빨랐다.

“워….”

1/4바퀴 가까이 뒤지고 있던 1반의 마지막 주자로, 그는 배턴을 넘겨받자마자 총알처럼 뛰었다. 단정하니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칼이 단숨에 뒤로 젖혀지고 가만히 책상에만 앉아 있던 두 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휙휙 움직였다. 자세, 보폭, 호흡 무엇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육상 선수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와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이우신은 3등이었다가 2등이 되고, 이내 1등이 됐다. 역전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거리를 벌려 놓으며 결승선의 띠를 끊어 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짝짝 치는 나를, 반 아이들이 배신자 보듯 흘겨보았다.

“야, 권태! 우리가 졌는데 좋아하면 어떡해!”

여자애들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나는 웃었다.

저 멀리,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흙바닥에 주저앉은 이우신과 그 옆으로 두 팔 뻗고 달려가는 강건우가 보였다. ‘만세, 만세’ 소리 지르는 강건우 옆에서 이우신이 ‘하하학’ 웃고, 간발의 차로 1등을 내어 준 공주윤은 어째선지 ‘반칙’이라며 펄펄 뛰고 화를 냈다.

“아, 이 새끼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니까요? 반칙이라고요, 반칙!”

씨름판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이우신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여간 등수 매기는 건 뭐든지 잘하지.’

나중에 ‘권태오랑 애정 행각 벌이기’ 대회라도 열면 새초롬하니 도도하기만 한 이우신도 좀 변할까 모르겠다. 눈에 불을 켜고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달려들겠지.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씨름 대회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결승전까지 곧장 해치우며 대여섯 명과 줄지어 붙는 점이 전원 경기와 닮아 있었는데, 너무 시시해서 유도부 후배들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체육복 티셔츠를 팔뚝 위로 말아 올리고, 반바지 위에 샅바를 묶은 채 모래사장 밖으로 걸어 나갈 적에 이우신이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귀엽게도, 오늘은 강건우와 이찬희가 함께 있어 다른 새끼들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내가 저를 보고 웃었듯이 이우신도 나를 보며 웃었다.

“여기서도 1등이네, 태오는.”

“아, 그렇게 웃지 마.”

허벅지를 가로질러 묶은 샅바를 풀기 전에 나는 한참 숨 고르는 척 시늉해야 했다. 사타구니에 바짝 붙여 숨긴 살덩어리가 단단해지는 게, 열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여자애들이 건네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팔씨름 테이블로 향했더니, 내 맞은편 자리에 하얀 여우가 앉아 있어서였다. 눈은 새카맣고 얼굴은 뽀얀 놈이, 털도 잘 보이지 않는 마른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날 보고 있었다.

“장난치지 말고 비켜.”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바닥에 던지며 내가 말했다.

“…내 상대가 너인가 본데?”

그러자 흰 여우, 아니 이우신이 대답했다.

황당한 마음에 나는 테이블에 붙은 번호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비뽑기로 받아 온 예선전 표에 적힌 숫자 4를 들어 보여 주자, 이우신이 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마찬가지로 4가 적힌 표를 꺼내 흔들었다.

나는 웃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너네 반 남자애들 다 죽었냐? 네가 여길 왜 나와.”

그러면서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자, 이우신도 제 오른팔을 곧게 들었다.

“원래 계주만 나가려고 했는데, 회장이 우리 반 인원이 적어서 안 된다고…. 하나 더 나가라고 그래서.”

“흠.”

그대로 손을 맞잡자, 심판으로 선 체육 선생님이 휘슬을 ‘삐’ 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우신은 내 손을 꽉 쥐고 온 힘을 다해 끙끙거렸다.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가, 손목의 방향을 틀었다가 하며 열심히였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힘을 다 준 거야?’

얼굴이 빨개지도록 끙끙거리길 한참, 이우신이 허탈해진 듯 한숨을 내쉬며 할딱거렸다. 야속하다는 듯 나를 노려봐도 달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밀리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더 세게 밀어 봐, 우신아.”

“하아…. 세게 민 거야. 아…, 손 아파.”

후우후우 숨을 몰아쉬는가 싶더니 이우신이 다시금 내 손을 꽉 맞잡아 왔다. 누가 볼까 싶어 교내에서는 손끝만 스쳐도 후다닥 도망치던 이우신이, 수많은 애새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나 용을 쓰며 내 손을 잡아 주다니 감지덕지했다.

“하아, 씨….”

제풀에 제가 지친 듯 숨을 헉헉거리면서도 이우신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곧게 세운 채 버틸 뿐인 내 손을 고쳐 쥐고는, 손바닥 가득 땀이 고이도록 끙끙거리며 다시 밀기 시작했다.

‘아, 거참…. 도도하신 선비님께서 이리도 찾아 주시니 권태오 손바닥 인생에 길이 남을 영광입니다.’

날 이겨 보겠다며 열심히인 이우신이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속으로 농담 따 먹기나 하는 건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학학 달아오른 숨을 뱉으며 이우신이 재차 힘을 준 순간, 나는 내 팔을 뒤로 휙 눕혔다. 손등으로 가볍게 책상을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탁’ 하는 경쾌한 타격음 대신 내 손등은 폭신한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혔다.

고개를 들자, 토끼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채 날 보는 이우신이 보였다. 시선을 내리자 내 손등을 감싸 쥔 이우신의 왼손이 보였다. 내가 저를 이길 수 없게, 테이블에 손등이 닿기 전에 급히 가로막은 것이었다.

“헉…, 뭐야?”

한참 구경하던 아이들이 언성을 키웠다.

“1반 승! 이우신이 이겼다!”

“야, 권태! 장난하냐? 이건 아니지!”

기뻐하는 목소리와 원망하는 말들이 이리저리 섞였다. 나는 방심하고 있다가 넘어갔다며 그럴싸한 거짓말을 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가온 심판 선생님을 향해 이우신이 외쳤다.

“선생님. 권태오 손등 아직 안 닿았어요. 제가 잡았어요.”

테이블 위에 서로가 서로를 잡은 모양새로 놓인 세 개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선생님이 ‘허어’ 오묘한 숨소리를 냈다. 이우신이 나를 향해 얼른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속닥거렸다.

“너 왜 그래, 진짜…. 나 어차피 다음 판 가더라도 못 이길 텐데.”

“내가 널 어떻게 이겨, 우신아.”

웃으며 건넨 말에 이우신이 눈썹을 찌푸렸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진 기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인상을 쓰는 듯했다.

테이블 가까이 고개를 뻗은 채 우리는 한참 서로의 눈만 쳐다봤다. 권태오가 졌네, 그건 아니네 싸움을 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 틈으로, 이우신의 작은 속삭임이 뚜렷하게 내 귀를 사로잡았다.

“나 너 말고 다른 애랑 손잡고 싶지 않아.”

탁.

이우신의 손이 뒤로 넘어가며 손등이 테이블을 쳤다. 상체가 뒤로 홱 쏠린 채 이우신이 놀란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는 즐거운 듯 웃는 이우신을 흘겨보았다. 저렇게 신이 나 웃어 대는 이유는 뻔했다. 보나 마나, 내 얼굴이 이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삑’, 선생님의 휘슬 소리를 끝으로 우리는 맞잡은 손을 놓아야 했다.

“예선전 4번, 5반 승.”

예선 경기를 마치자마자 이우신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힘내라는 응원조차 해 주질 않고 그늘 자리를 향해 떠났다. 나는 그런 이우신이 조금도 야속하지 않았다. 맞잡았던 오른손을 꽉 말아 쥔 채 손바닥의 온도를 가두어 보려는 하얀 주먹이 보기 좋았다.

이우신이 떠나고 나니 체육 대회가 더는 재밌지 않았다. 얼굴 벌겋게 붉히며 나를 이겨 보겠다고 달려드는 결승전 상대는 손바닥이 딱딱하고 축축해서 기분 나빴다.

“권태! 단체 종목은 중복 참여해도 카운트 안 센대!”

네가 빠지면 섭섭하다느니, 한 번만 더 도와 달라느니 하는 말에 등 떠밀려 참가한 줄다리기도 시시하긴 마찬가지였다. 수비수가 다리를 다쳤다며 긴급 투입된 축구는 일방적으로 공주윤의 놀이터였다.

눈으로만 공을 좇으며 나는 멀찍이 그늘 자리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강건우와 나란히 붙어 앉아 단어장에 시선을 고정한 이우신이 보였다. 하얀 종아리를 길게 뻗고 나무 그늘에 몸을 기댄 이우신에 비하면 축구 경기는 지루하기까지 했다.

‘빨리… 경기고 나발이고 이우신 옆에 앉아 있고 싶다.’

초조함 반, 지루함 반으로 나는 마지막 출전 종목인 ‘친구 찾기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다. 멀리 낚싯줄에 걸린 쪽지를 뜯어다가, 안에 적힌 설명과 일치하는 사람을 데려오면 된다며 심판 선생님이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뇌어 주었다.

나는 운동화 발끝을 흙바닥에 댄 채 좌로, 우로 발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멀리서 선생님이 신호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탕’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총성과 동시에 짧은 거리를 달려, 허공에 붕 뜬 낚싯줄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쪽지 하나를 뜯어내고 주위를 둘러볼 적에 다른 놈들은 낚싯줄에 손이 닿질 않아 허둥지둥 점프하기 바빴다.

‘또 이기겠네.’

여유를 느끼며 나는 쪽지를 열어 보았다.

‘Prettiest’

아니, 씨발! 이걸 영어로 적어 놓는 게 어딨어?

당황해 쪽지를 쥔 채 한 번, 두 번, 세 번을 연거푸 읽어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피…, 프알이티티이스트? 프레틱이에스트? 프리이티… 프리티! 씨발. 예쁘다는 뜻!

“이우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이 놀라 쳐다보건 말건 곧바로 나무 그늘 자리를 살피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왼손에는 하늘색 쭈쭈바를 쥔 이우신이 보였다. 그를 향해 나는 곧장 질주했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자 이우신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먹다 만 쭈쭈바를 단어장 위에 내려놓은 이우신의 손을 나는 와락 움켜쥐었다. 더운 내 손바닥에 비해 이우신의 물기 어린 손은 차갑고, 작고, 보드라웠다.

그대로 나는 결승선을 살폈다. 어느새 다른 녀석들도 운동장 곳곳에 흩어져서는, 친구를 찾아 달려오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내가 선 곳이 결승선에서 가장 멀었다. 지금 질주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썹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내 팔이 확 앞으로 당겨졌다.

“뭐 해!”

소리를 바락 지르더니, 이우신은 내 손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나도 그를 쫓아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운동장이 무척 환하게 느껴졌다. 이우신의 하얀 목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고, 검은 생머리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사진처럼 정지했던 장면이 확 지나간 순간, 이우신과 나는 결승선을 지났다. 내달린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우리는 열댓 걸음은 더 움직여야 했다. 헉헉거리며 허리에 걸린 줄을 빼내는 우리에게 심판 선생이 다가왔다.

나는 손바닥에 꽉 쥐고 있던 쪽지를 펴 심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심판은 당황한 듯 잠시간 말이 없다가, 물끄러미 이우신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삑!

휘슬을 불었다.

이것으로 출전한 종목은 전부 다 1등이었다. 체육 대회 전체 1등 반이 되었음을 알고 같은 반 아이들이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숨을 깊게 고르는 내게로, 이우신이 고개를 뻗어왔다.

“태오야, 하…, 뭐라고 적혀 있었어?”

헐떡헐떡 숨을 고르며 그가 물었다.

저 멀리,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강건우며 이찬희가 보였다. 다른 놈들도 ‘와아’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손안에 든 쪽지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와락 구긴 뒤 입에 넣었다.

“어어?”

이우신이 놀라 소리를 쳤다.

“야! 너 뭐 해!”

그대로 입 안의 쪽지를 우물우물 씹자, 이우신은 경악하며 내 두 뺨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저를 보게끔 끌어 내리며 그는 소리 질렀다.

“뭐야? 그걸 왜 먹어? 빨리 뱉어, 이 바보야!”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열심히 종이를 짓씹었다. 이우신이 내 입을 벌리려 턱과 볼을 잡고 이리저리 당겨 댔다. 입술을 앙다물고 우물우물 질긴 종이를 먹었다.

“뱉으라고!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지지야, 지지!”

그대로 입 안의 침과 함께, 나는 종이를 꿀꺽 삼켰다. 어금니에 들러붙은 조각까지 꿀꺽꿀꺽 삼켜 낸 뒤, 텅 빈 입을 ‘아’ 벌려 보여 주었다. 사라진 쪽지를 찾아 내 입 안을 들여다보던 이우신이 황당하다는 듯 ‘하아’ 한숨 소리를 냈다.

그가 내 팔뚝을 주먹으로 콩콩 때리는 동안, 심판 선생만이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기말 지필고사를 앞두고 나는 몹시 긴장 상태였다. 시험이야 OMR 카드에 ‘떴(3)-다(2) 떴(1)-다(2) 비(3)-행(3)-기(3)’ 음계를 찍어 내는 나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우신에게는 몹시도 중요했다.

‘전국 고3이 다 이우신 같았으면 지구가 냉동됐겠는데….’

그 왜, 킬리만자로… 아니,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그러지 않나? 간절히 바라는 놈들이 많아지면 뭐가 우주에 반사돼서, 날씨가 추워진다던가 뭐 그런 거 말이다. 만일 이우신이 수백 명이었더라면 북극곰의 터전이 좀 더 넓어졌을 것이다.

공부를 향한 이우신의 열정은 그 정도였다. 북극의 바닷물까지 전부 얼려 버릴 정도로 그는 맹목적이었다. 내내 공부에 열중하는 이우신 때문에 나까지 체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이우신은 집중력이 대단했다. 아니지. 대단한 수준을 넘어서서 한번 문제집을 펼치면 바깥의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자습실 제자리에 앉아 꼼짝 않고 문제를 풀어 내릴 때면, 내가 제 앞에 앉건 뒤에 서서 문제집을 내려다보건, 하다못해 필통을 몰래 훔쳐 가도 못 알아챘다.

[23:09]

스톱워치의 줄어드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는 가져온 뚱땡이 바나나우유와 소라빵을 슬그머니 이우신의 책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몇몇 여자애들이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지만, 뭐가 좋은지 웃고만 있을 뿐 이우신이 알아챌 만한 소리는 내지 않았다.

다시 이우신의 가방을 닫고,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메시지를 하나 적어 보냈다.

구미호

[가방]

전송 버튼을 꾹 누르자 교과서 위에 놓인 이우신의 휴대폰 액정이 잠시 밝아졌다가, 이내 꺼졌다. 메시지 도착 표시만 화면 위로 떠올랐을 뿐 알림 소리도 진동도 없었다. 짧은 메시지 하나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놈들이 한 트럭인데, 이우신은 한편에 치워 둔 휴대폰을 쳐다볼 기색조차 보이질 않았다. 하여간에 모범생이었다.

자습실 담당 교사가 날 쫓아내기 전에,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밖으로 나서서는 휴게실에 앉아 휴대폰을 열고, 지금으로부터 23분이 지나가면 저녁 8시라는 걸 확인했다.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고 앉아 있자 몇몇 녀석들이 알은체를 해 왔다.

“권태, 여기서 뭐 해?”

“숨 쉬어.”

“태오야, 이거 마실래?”

“땡큐.”

“선배, 훈련 잘 마치셨어요?”

“어.”

이리저리 오가는 말들에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검지로 툭툭 액정을 두들겼다. 한 시간은 족히 지난 듯 느껴지는데, 화면 안에 비친 시간은 7시 55분이었다.

“어! 권태! 여기 있었네? 야, 축하한다!”

그때, 뜬금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한다’는 말에 고개를 들자 유도부 동급생이 군밤 같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몸무게가 60㎏ 미만인 선수인 건 분명했다. 신입생 시절에 -60㎏ 체급이던 놈들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66㎏, -73㎏으로 체급도 올라가게 마련인데 이놈만은 키도 몸무게도 변함이 없어서, 현재 3학년엔 -60㎏ 체급이 이놈 하나였다. 그래도 별명도 ‘마육십’일 지경이었다. ‘마백’인 나와는 경합 한 번 붙어 본 적 없는 선수라,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친밀감이 없었다.

이름은… 강준한인지 강진환인지 아무튼 둘 중 하나인데, 정확히 기억나지가 않았다.

‘왜 갑자기 친한 척이지?’

그를 보는 내 표정도 딱 기분만큼 심드렁했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데, 놈이 혼자 웃어 보였다.

“코치한테 들었어. 너 스카우트 될 거라며?”

내게서 표정을 끌어내려 한 거라면 성공적이었다. 내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마육십의 어깨 너머로 이우신이 보였다. 휴게실 밖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얼굴에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두 팔 안에 뚱땡이 바나나우유와 소라빵을 안아 든 채였다.

이내 이우신이 나를 발견했다. 고개를 홱 돌려 유리문 너머를 살펴보더니,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끌어 올렸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개처럼, 등줄기로 소름이 오스스 돋는 것을 느꼈다.

이우신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아무튼 축하해, 태오야. 하하…, 부럽다, 야.”

마육십이 말했다. 순간 성질이 솟았다.

“입 닥쳐, 이 씨발….”

“어?”

버럭 튀어나온 욕설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 냈다. 그도 그럴 게 스카우트고 축하고 나발이고, 이우신한테도 아직 말 안 한 걸, 어디서 주워듣고는 축하하니 마니 여기서 떠들어 대는 건지 짜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멋대로 친한 척 들러붙는 인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눈앞의 마육십이 그랬고, 곽성중이 그랬으며. 빌어먹을 이혁을 골탕 먹여 주겠다며 나인 척 가장한 문자를 보냈던 씹새끼들이 딱 그랬다.

이마를 구긴 채 마육십을 노려보자, 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 몸을 반쯤 굽히며 말했다.

“어… 왜 화를 내고 그래. 나는 그냥….”

“아, 씨발 좀!”

그냥 입 좀 닥치고 나가라는 신호를 담아 나는 휴게실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끓어 넘치는 성질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를, 이우신이 놀란 눈을 하고서 쳐다봤다. 이내 밝고 똘똘한 시선이 마육십의 뒤통수에 가닿았다.

입 안이 떨떠름해진 채 나는 마육십을 노려봤다.

“너랑 말할 기분 아니니까 저리 꺼져, 강준한.”

“…내 이름 강준한 아닌데….”

“좀.”

눈살을 퍽 찌푸리며 나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했다.

“꺼지라고.”

그러자 마육십이 어영부영하며 뒤로 물러섰다. 꼴에, 이우신에게 퉁 소리가 나게 부딪치기까지 했다. 저 씨발 놈이 진짜….

“아….”

이우신이 제자리에서 크게 흔들리더니 팔에 들린 소라빵을 떨어뜨렸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저를 잡아 패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마육십이 허둥지둥하며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성큼성큼 이우신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발치에 얼른 쪼그려 앉아 떨어진 소라빵을 주웠다. 비닐 포장지 위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 내는데, 이우신이 그런 내 두 손을 감싸 잡았다.

“태오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성난 동물 달래는 투로 이우신이 말했다. 나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 이야기를 제발 못 들었기만을 바랐다.

“쟤가 방금 뭘 축하한다고 그런 거야?”

그러나 이우신은 귀가 아주 밝은 편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저 새끼가 뭘 잘못 알고 말한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화를 내?”

하필이면 눈치도 존나 빠른 편이었고,

“왜 그러는데… 응? 네 일이면… 나도 궁금해.”

추궁해 올 때면 매우 귀여운 편이었다.

맞붙기 전부터 나는 패배할 걸 알았다. 그래서 오래 버티기를 포기했다. 최대한 덤덤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느릿느릿 말할 뿐이었다.

“별거 아냐. 그냥… 대학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와서. 좀….”

“어?”

이우신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미소 하나만 걸려도 그 얼굴은 보름달처럼 동그스름하니 반짝거렸다.

“뭐야…, 축하할 일 맞잖아!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대학 스카우트면 그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거야? 어떤 조건인데? 어느 대학이야?”

“그런 셈…이긴 한데, 아직 정확한 건 아니야. 사전 스카우트는 불법이기도 하고 이건 그냥, 거기 교수가 이야기만 꺼내 놓은 거라서.”

“어디 교수길래 너한테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해?”

“…….”

내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렸다. 침묵만 할 뿐 도무지 혓바닥을 움직이지 못하는 내 얼굴을, 이우신의 두 눈이 가만히 살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듯하더니 이내 내 손을 놓아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권태오, 너 왜 그래?”

나는 두 눈을 꽉 내리감았다. 이럴까 봐서, 일부러 말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 건데 소문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흘러 나간 건지 원망스러웠다. 누구보다 이우신에게 먼저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고 싶지 않았었다.

이왕이면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 2학기 중간 지필고사까지… 아니, 아니다. 사실은 이우신의 입시가 다 끝난 다음에 말해 주려고 했었다.

“한국대학교야.”

느릿느릿 다섯 글자를 뱉는데 혓바닥 돌기가 가시처럼 느껴졌다.

“…….”

이번에 당황한 듯 입술을 다문 쪽은 이우신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우신이 좀 바보였으면 싶었다. 그랬더라면… 젠장,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말로는 ‘사전 스카우트는 불법’이라고 해 뒀지만, 운동선수 세계에서 언질로라도 스카우트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면 확정이나 다름없단 걸 이우신이 모를 리 없었다.

애초에 젊은 국대 유도 선수들은 죄 한국대 출신이었고, 유도 좀 한다는 청소년 선수들도 죄다 한국대에 가길 원했다.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선수로서 내 컨디션은 지난여름을 기준으로 쭉쭉 좋아지다가 근래는 완벽한 수준이었다. 몸무게 유지도 잘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경기 밸런스가 잘 잡혔다. ‘99% 승률의 귀재’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로 지역 스포츠 신문을 장식하기도 했었다.

“한국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이우신이 되물었다.

“…….”

나는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야 기쁜 일이었다. 국가 대표 선수가 될 길을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로 밟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우신이랑 같은 대학에 다닐 거라 생각하니 싫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진 않았다. 이우신이 얼마나 간절한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한국대학교를, 시험도 안 치고 스카우트를 받아 입학하게 된 게 하필 나일 게 뭐란 말인가….

무어라 속상한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안색을 살피는데,

“축하해.”

이우신이 웃었다.

“와, 태오야. 진짜 잘됐다. 거기 유도학과가 정통이라는 건 나도 들어서 알아. 나중에 수시 원서를 넣게 되면 너랑 같은 날에 면접을 보게 되려나 생각했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확정된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태오 네가 전국 1등인데 그럼, 1등 대학에서 너 말고 누굴 입학시키겠어?”

나는 정말이지 이우신이 조금만 바보였으면 좋겠다.

“정말 축하해, 태오야.”

조금만 덜 착했으면 좋겠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조금만 덜 노력파였으면,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었다.

권주원 씨가 자주 하던 말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고 그랬던가. 내게는 불길한 걱정이 딱 그랬다. 내가 걱정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이우신은 광인이 됐다. 남들은 미치면 머리에 꽃이나 달고 칠렐레팔렐레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춘다는데, 이우신은 미쳐도 공부에 미쳤다.

내가 잠재적 한국대 합격생임을 발각당한 날 이후로 이우신은 변했다. 아니, 이걸 ‘변했다’고 해야 할까, ‘강화됐다’고 해야 할까. 이우신은 공부밖에 하지 않았다. 전과 같이, 전보다 훨씬 더.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했다. 기말고사 기간 나흘 동안, 나는 이우신이 휴식하는 모습이라고는 본 적이 없었다.

“우신아, 잠깐 바람 좀 쐬자.”

그런 말을 해도 고개를 내젓고는 문제집에 고개를 묻었다.

“…2주기, 옥텟 규칙을 만족하는 원소를 찾으시오…, C, N, O, F. 중심원자여야 하니까 F는 탈락, 이때 보기 ‘나’의 Y가 수소를 세 개 잡았으니까….”

내 귀로는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따위로 들려오는 과학 문제 풀이를 중얼중얼 읊어 내리는 이우신에게선 인간미가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는 마치 문제를 푸는 것밖에는 입력된 기능이 없는 인공 지능 로봇처럼 보였다.

“야아…. 적당히 해, 어?”

강건우마저 그런 소릴 할 지경이었다.

이우신의 눈 아래에 푸르스름한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하품을 두어 번 하고 손끝으로 꾹꾹 문질러 닦아 내도 그 푸른색은 지워지질 않았다. 이우신이 무리를 할수록 나는 무서웠다. 저러다 코피를 쏟을까 봐 그랬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코피라도 흘려서 30분만 쉬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결국 나도, 강건우도, 심지어는 이찬희조차 폭주 기관차처럼 공부하는 이우신을 막아내지 못했다.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을 앞둔 날 밤에는, 이우신은 자정이 넘어서야 자습실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내내 휴게실의 플라스틱 의자 자리를 지키다가 이우신을 쫓아 나섰다.

옆으로 다가가 묵직한 가방을 대신 들어 주자, 이우신이 졸음 가득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올려다봤다.

“너, 눈이 빨갛다.”

“으응, 조금 쓰라려.”

“문지르지 마.”

눈가를 만지려는 손을 붙잡아 떼어 내고 보니, 이우신의 손날은 온통 얼룩덜룩하니 지저분했다. 볼펜 잉크가 잔뜩 묻어서는, 엄지로 문질러 보아도 잘 지워지질 않았다. 아쉬운 대로 손을 꼭 맞잡고 들여다보니, 이우신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흰자위마저 붉은빛으로 탁했다.

“완전 충혈됐네. 너무 무리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무리를 안 해….”

건성건성 대답하는 이우신이 야속했다. 요 며칠간 내가 제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 보여서 조금 미웠다.

그리고 많이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치 입단속 좀 단단히 해 두는 건데…. 자랑하길 좋아하는 코치인 걸 알면서도, 당연히 예비 스카우트야 비밀로 함구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리 와.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가자.”

기숙사를 향해 걸어 오르는 길 중앙에서, 나는 이우신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한 손으로 벤치를 가리키자 이우신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 피곤해. 방에 들어가서 잘 거야.”

“뻥 좀 치지 마. 들어가서 복습할 거잖아, 너.”

“…….”

이래서 내가 이우신에게 빠져서는 못 헤어 나오지 싶었다. 한 번 지적을 받으면 두 번 거짓말하진 않는다는 것…. 이우신은 그런 점이 예뻤다.

조용히 벤치 앞으로 잡아끌고, 힘주어 양어깨를 내리누르자 이우신이 풀썩 벤치에 떨어지다시피 하며 앉았다. 기다란 다리를 쭉 뻗더니 한숨을 푹 내쉬는 동작에서 체념이 느껴졌다. 나는 선 채로 이우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늘고 숱 많은 머리칼의 감촉이 보들보들했다. 벌써 하루가 완전히 저물었는데도 어찌 된 게 이우신의 머리칼에서는 아침에나 풍길 법한 비누 향이 났다.

“우신아.”

…너무 무리하지 마. 요즘 들어 매일 하던 잔소리를 꺼내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보다 이우신이 ‘아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게 더 빨랐다. 대뜸 내지른 소리로 내 입을 가로막더니, 이우신이 얼굴을 홱 들었다.

예쁘장한 눈 코 입을 갑자기 맞닥뜨린 탓에 나는 온몸의 근육이 움찔 수축하는 걸 느꼈다.

“그만. 태오야. 그만 잔소리해. 자습실도 그만 따라다니고, 너는 네 할 일을 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

“너 때문에 입시를 망칠 수는 없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조금 망연자실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픽 새는 바람 소리를 내며,

“…뭐?”

그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이우신은 제 입술을 꾹 짓씹었다. 어둠 안에서도 하얗게 발광하는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너 때문에, 요즘… 공부가 잘 안 된단 말이야. 집중이 잘 안 돼, 네가 자꾸….”

두 뺨과 콧잔등이 불그스름해진 채 이우신이 말했다.

“네가 자꾸, 나를 찾아오니까… 자꾸 쳐다보고, 걱정하고, 그러니까 집중이 안 돼. 태오 너랑 있는 게 너무 재밌어. 그런데 네가 그렇게, 자습실에 죽치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해?”

잠깐이나마 발치로 떨어졌던 심장이 이제는 머리로 솟았다. 골 안에서 콩닥콩닥 어찌나 간지럽게 뛰어 대는지, 생각도 기분도 널을 뛰는 듯했다.

“…내가 그렇게 신경 쓰여?”

멍하니 그렇게 질문하자,

“당연히 신경 쓰이지!”

이우신이 더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네 생각밖에 안 나….”

속상해 죽겠다는 투로 말하는데 그런 이우신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우신이 있을 거라고 1학년의 내게 말한다면, 나는 아마 ‘뻥치시네’ 네 글자로 일갈했을 거였다.

“나 진짜 한국대 가야 돼, 진짜… 의예대 갈 거란 말이야.”

“어? 지난번에는 경영학과 간댔잖아. 왜 갑자기 예대가 됐어? 너 그림 그려?”

“‘예술대학’ 할 때 그 예대 말고… 의예대. 의대 예비 대학 같은 과인데… 아무튼, 나 거기 갈 거야.”

예비 대학이 대체 뭐냐고 물을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닫았다. 머뭇머뭇 제 아랫입술을 깨무는 이우신의 얼굴을 보아하니 지금은 바보 티를 낼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다 너 때문이야. 대학 가면, 너랑…. 너한테 시간….”

거듭 입술을 깨물어 가며 이우신이 말했다.

“…운동선수는 스무 살 때부터 전성기라며…. 의예대 가면… 2년 동안은 경영학과보다 덜 바쁘댔어. 그래서, 나 거기 가서, 대학 다니면서 네 경기도 보러 가고 싶고…. 태오 너랑 연….”

한 마디 한 마디, 부끄러운 기운이 넘실넘실 배어 나왔다.

“…연애도 하고 싶어.”

이우신의 입에 혀 대신 작은 하트가 들어 있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뱉는 말들이 전부 달콤할 순 없었다.

“나는 꼭 태오… 너랑 같은 대학 가고 싶어…. 너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면 널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적당히 하라고 말하지 마.”

참자.

참아, 잠깐만 참자.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닌 거 같으니까… 10초만 참자. 10, 9….

“8….”

나도 모르게 숫자를 외자, 이우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살폈다.

“뭐라고…?”

카운트다운을 하던 것도 잊고 나는 이우신의 뺨을 두 손으로 콱 잡았다. 고개를 푹 숙여, 그의 새빨간 입술에 내 입술을 맞붙였다. 깜짝 놀란 이우신의 뺨이 내 손안에서 움직거렸다. 꽉 쥔 주먹이 내 어깨를 마구 갈겼다.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떼어 낸 다음,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불 꺼진 건물들과 띄엄띄엄 길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만이 전부일 뿐,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개미 똥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이우신도 꼭 나처럼 좌로, 우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는 서로의 잇새를 마구 핥았다.

숨결마저 달짝지근한 이우신의 입 안으로 혀를 비집어 넣고,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혀끝으로 건드렸다. 그러면 이우신이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더 크게 열었다. 나는 더욱 깊이 혓바닥을 집어넣어 보드라운 이우신의 볼 안쪽 살을 이리저리 맛봤다. 점차 흥건해져 입술 안에 고이는 침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헐떡헐떡 뜨거운 콧김을 내쉬는 이우신은 아주 귀엽고 야했다.

입술을 둥글게 모으며 가볍게 빨아 당기면, ‘츕’ 하는 막대 사탕 빠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쪽, 쪽… 나는 이우신의 아랫입술을 내 입 안에 넣다시피 하며 세게 빨았다. 그러자 작게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뜨고 살피자, 눈살이 찌그러지도록 꽉 감은 이우신의 눈이 먼저 보였다.

‘귀여워….’

빤히 관찰하며 다시금 아랫입술을 세게 빨자, 이우신의 발이 흙바닥을 긁어내리며 흠칫 움직였다. 한 번 더 ‘츕’ 빨자 날씬한 두 다리가 서로 꽉 맞붙고, 혓바닥을 밀어 넣자 ‘응’ 하는 야한 콧소리가 새어 나왔다.

“…….”

두 눈을 꽉 감고 나는 이우신의 입술 위에 꾹 도장을 찍었다. 두 손 안에 잡힌 보드라운 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색, 색… 새어 나오는 숨결에서도 열기가 넘실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가 내쉰 이산화탄소를 다시 들이마시며 버텼다. 맞댄 입술을 떼어 내기가, 박힌 못을 빼내는 듯 아주 힘겨웠다.

떨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코끝을 바짝 붙인 채 나는 말했다.

“앞으론 자습실 앞에서 안 얼쩡거릴게. 너무 재밌게 해서 너 방해하지 않을게.”

“응….”

“손잡자고 자꾸 조르지 않을게. 매일 정해진 시간에만…, 널 보러 갈게.”

“응….”

“아침에 조심이 산책할 때, 점심시간에 밥 먹을 때, 석식시간에 밥 먹을 때, 그리고 너 자습실에서 나올 때 배웅까지… 하루에 네 번으로 줄일게. 그럼 되겠어?”

이번에 이우신은 ‘응’ 하는 착한 아이 같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릴 뿐이었다.

나로서는 하루 네 번이 최소한으로 줄인 거였다. 고민하고 또 배려해서 인내심을 끌어다 써 말한 건데, 이우신에게는 하루 네 번도 많은 걸까 생각하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매일 전원 경기를 뛰고 말지, 이 귀여운 얼굴을 하루에 네 번도 못 보면 학교는 왜 다니며 살기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길어지는 생각에 혀를 콱 씹고 싶을 때쯤, 이우신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주아주아주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쉬는 시간에도 보러 와….”

그 바람에 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콧김을 내쉬고야 말았다. 사랑스러운 입술에 마구 키스하고 싶은 걸 참아 내느라 몹시 힘겨웠다.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보글보글 끓는 듯한 욕구를 견디는데, 이우신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제 가방의 앞주머니를 열었다.

“대신에, 내가… 이거라도 만들어 줄게.”

그러더니 영단어를 적어 놓은 작은 수첩을 꺼냈다. 가로로 기다란 형체의 수첩 뒷장을 세 장 찢어 내더니, 그 위에 볼펜으로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집중하는가 싶더니, 완성된 종이 세 장을 내 손에 쥐여 주는 얼굴이 발그레했다.

“자….”

우물쭈물하며 건네 온 종이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우신 이용권.

쿠폰 옆면을 찢어 이우신을 자유 이용 가능.

재사용 불가, 30분 후 효력 말소’

아! 못 참아, 못 참아.

나는 발그레한 이우신의 두 뺨을 양손으로 콱 붙들었다. 그러고는 열을 셀 것도 없이 곧바로 입을 맞췄다.

“하아, 우신아.”

“아, 읍….”

입술을 문지르며 마구 쪽쪽 빨고, 핥고, 살짝살짝 깨물었다. 흥분으로 등줄기가 다 더워지려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이우신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었고 나도 굽혔던 허리를 홱 폈다.

웡, 웡, 웡….

멀리서 들려오는 개 소리를 듣기도 잠시, 우리는 눈을 마주치곤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이가 너 데리고 빨리 오래.”

이우신의 손을 잡고,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가는 이 없고 지켜보는 이도 없자, 이우신은 맞잡은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드라운 손바닥에 힘을 주어 나를 더욱 세게 잡아 주었다.

왼발, 오른발, 이우신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 밤, 하늘 위에 걸린 달이 높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쏴아아…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문득 나는 이렇게나 기분 좋은 밤길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따위를 가만히 듣는 시간도 처음,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 오는 이우신의 콧노래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 저 멀리 목줄이 팽팽해지도록 몸을 내민 채 우리를 반기는 조심이를 보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기도 처음이었다.

이우신과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나서, 내 열아홉은 온통 처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3주간의 여름 방학은 원정 훈련과 경기로 인해 지옥 불에서 생살을 지지는 것 같았다. 물론 성과는 좋다 못해 우수했지만, 그런들 이우신을 못 만나는 고통을 보상해 줄 정도는 되질 못했다.

20일간 떠나 있었던 서울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이우신을 찾아 수학 심화반 자습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있어야 할 예쁜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시금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고, 심화반 기숙사 방 안도 주인 없이 비어 있기에 두 번의 실망감을 끌어안고 조심이가 있는 개집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리고 저 멀리, 채홍관 방향에서 계주 4번 주자의 실력을 뽐내며 달려오는 이우신이 보였다.

“권태오!”

거의 화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이우신은 내게로 뛰어왔다. 이번에야말로, 조심이와 함께 내 꼬리가 붕붕 허공을 가르는 듯했다.

“너 왜… 체육관에도 없고…, 버스에도…, 숙소에도 없고… 하아, 어딜 그렇게…!”

이우신의 입을 나는 손바닥으로 콱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손을 떼 낸 다음, 이우신의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에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오가는 누군가가 볼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동시에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보인 바보 같은 동작에 이우신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에겐 비밀이 많이 생겼다. 단둘이 만날 때마다 이우신과 나 사이에는 비밀 천지였다. 그가 내 손을 가져가, 뜨뜻미지근한 손금 위에 제 입술을 맞춘 것도 그렇게 비밀이 됐다.

이우신이 예쁘다는 것쯤이야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얼마나 반듯한 사람인가 하는 것 또한,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컴퍼스를 몇 바퀴를 돌리건 이우신의 뒤통수만큼 예쁜 원을 만들 순 없을 거였고, 자로 대고 줄을 그어도 이우신만큼 곧진 못할 거였다.

그렇게나 말끔한 뒷모습으로 이우신은 각진 어깨와 날씬한 몸, 길쭉한 다리를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백색 셔츠는 이우신의 몸에 딱 맞아 허리선을 천이 타고 흐르는 것처럼 보였고, 길게 뻗은 다리와 엉덩이를 감싼 정장 바지는 ‘핏이 좋다’는 말의 뜻을 십분 이해하게 만들었다. 길게 뻗은 팔과 가파르게 가늘어지는 허리 사이에 빈 공간이 이상하게 야해 보였다.

교복 차림일 때와는 전혀 달랐다. 키도 더 자라고 살도 더 찔 줄 알고 벙벙하게 맞췄다던 교복 셔츠에 남의 것을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헐렁한 바지를 입었을 때와는, 온몸의 결이 달랐다.

그렇게 예쁜 뒷모습은 난생처음이라 멍 때리며 쳐다만 보는데, 이우신은 전신 거울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가 싶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위아래로 저보다 5㎝는 더 큰 이찬희의 옷을 빌려 입었음에도 불구,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서 날 때부터 입고 태어난 날개옷처럼 보였다.

“조금 이상한가?”

이우신이 말했다. 조심이도 아닌데 왜 개소리를 내는 건지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입꼬리를 딱딱하게 굳히며 이우신은 손안에 쥔 넥타이를 목덜미 뒤로 넘겨 둘렀다. 셔츠 칼라 밑으로 집어넣고는 앞으로 길게 빼 보았다가, 이내 풀어 버리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역시 너무 안 어울려.”

그와 동시에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그냥 좀 매라!”

“잘 어울린다니까?”

소파 자리에 나란히 붙어 앉은, 강건우와 이찬희가 내지른 소리였다. 나는 그들을 힐긋 살핀 다음 이우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이우신은 완벽했다. 학교가 아닌 그 어디에서 이우신을 만났더라도 나는 첫눈에 이우신에게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유도 대회 경기장에서 맞닥뜨리지 않은 게 천운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문제가 딱 하나 있다면, 저 예쁜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리기가 벌써 30분째란 점이었다.

3학년 2학기의 시간은 1학기보다 훨씬 빨리 흘러갔다. 나는 아시안 청소년 유도 선수권대회에 출전했고, 이우신은 대수능 모의고사와 중간 지필고사를 봤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한국대학교 수시 원서를 접수했다.

나야 뭐 합격이 구두로건 상벌로건 내정된 바 있어 1차든지 2차든지 합격이 놀랍지는 않았다. 이우신도 교과 점수를 100% 본다는 수시 1차에 쉽게 합격했다. 뒷구르기를 하며 보더래도 당연한 결과였다. 깎아 먹은 점수라는 게 없는, 입학한 뒤로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이우신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나는 내 입시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면서도 이우신의 수시 정보는 심사 기준부터 퍼센티지까지 전부 알았다. 한국대 의예과의 수시 2차 심사 기준은 학생부 50, 면접 30, 서류 20이라고 했다. 학생부와 서류는 이미 제출했고, 남은 것은 내일의 면접뿐이었다.

면접장에서 입을 옷이 마땅찮다고, 교복을 입고 가야 할까 셔츠를 한 벌이라도 사야 할까 대화하던 게 오늘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이찬희에게 붙들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학교 마치고 우리 집으로 가자! 정장 바지랑 셔츠, 또 뭐가 필요해? 내가 빌려줄게!’

팔팔 뛰는 이찬희의, 친절인지 강요인지 모를 것에 휩쓸려 이우신은 녀석의 집까지 끌려오게 됐다. 나와 강건우가 따라붙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침 이찬희네 부모님도 부부끼리 여행을 가서 집이 비어 있었다. 몇 주간 사이가 안 좋았지만 화해의 의미로 대만 여행을 떠났다나 뭐라나….

‘드디어 우신이를 우리 집에 데려와 보네.’

지난 생일의 앙금이 느껴지는 말을 뱉으면서도 이찬희는 웃는 낯이었다. 녀석이 드레스 룸의 문을 벌컥 열었고, 이우신은 가만히 커다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용도 서랍과 행거가 줄지어 섰고 옷과 시계, 운동화로 가득 채운 방을 살피는 표정이 조금 질린 듯 보였었다.

이찬희야 생일 따위의 기념일이며, 아버지 사업장 파티가 있는 날, 제 어머니와 데이트를 하는 날에 갖가지 옷을 차려입는 녀석이었다. 작은 이모가 놈을 꾸미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랐다.

이우신을 세워 놓고 행거를 끌어당기는 이찬희가 언젠가의 작은이모와 닮아 보였다. 신이 난 얼굴로, 놈은 인형 놀이를 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쟤는 왜 저렇게 이우신을 좋아하지?’

문득 그런 점이 궁금했다. 이우신이야 알면 알수록 좋아할 수밖에 없는 애였다. 첫사랑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사람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 이우신이 이찬희의 타입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아니지….’

이찬희의 타입이 어떤 타입인지 나는 모른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자니 그랬다. 나는 이찬희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또 낯설었다. 내가 이찬희에 대해서 잘 모르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벌써 6년 넘게 알고 지내는데도, 함께 보낸 시간이 반드시 그를 향한 이해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게 나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조금 골똘해진 채 앉은 내 앞으로 이우신이 걸어오기까진 그랬다.

“진짜 잘 어울려, 우신아!”

강건우가 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우신은 냉정하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냐, 안 어울려. 이건 너무… 어른 흉내 내는 거 같아서 좀…. 넥타이가 역시 나랑은 안 맞는 거 같아.”

“에이,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그냥 매고 가, 그래도 면접인데.”

“근데 뭐… 본인이 싫다면 강요할 순 없는 거지.”

이찬희와 강건우가 번갈아 말했다. 도통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에, 이우신은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손안에 들린 남색 넥타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금 제 목 아래에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태오야, 네 생각은 어때?”

나는 생각을 거칠 것도 없이 즉답했다.

“예뻐.”

진짜, 엄청나게, 아주.

“어…, 태오야, 네 말은 그러니까 넥타이를… 한 게 더 예쁜 거 같아?”

“아니.”

“그럼 안 한 게 더 예쁜 거 같아?”

“음…, 아니.”

“그럼 뭐가….”

그러더니 이우신이 눈치를 살펴 입을 다물었다. 나를 노려보는 두 눈동자에 약간의 책망과 부끄러움이 실려 있었다. 그 표정마저 정말이지 너무 예뻐서, 나는 갈증이 났다.

“다른 걸로 다시 매볼게.”

이우신이 조용히 옷장 앞으로 돌아섰다. 불그스름한 귓불이 딸기우유 맛 사탕처럼 보였다. 입에 넣고 핥으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했다.

‘아, 목말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향한 곳은 곧장 부엌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이온 음료 페트병과 과일 주스 유리병을 챙겨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이우신은 생각을 굳힌 듯, 넥타이는 저 멀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하얀 셔츠 깃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온음료 절반을 두 모금에 나누어 들이켠 다음, 나는 과일주스를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찬희가 힐끔, 제 앞에 놓인 주스 병을 응시했다.

“…….”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이찬희가 좋아하는 사과 주스를 챙겨 온 거였다.

‘이건 뭐 씨발 노예도 아니고….’

일순 정돈되지 않는, 어수선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착잡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며 1인용 소파로 가 앉자마자, 이찬희는 병뚜껑을 열더니 이우신에게 주스를 건넸다.

“우신아, 이거 마셔.”

“어…. 난 괜찮아.”

티셔츠 위에 겹쳐 입었던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어 내리면서, 이우신이 대답했다. 옷을 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이우신을 향해 이찬희는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그 옷 너 가져도 돼. 나보다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어? 아니야. 빌려주는 거로도 충분해. 꼭 세탁해서 돌려줄게.”

반으로 접은 셔츠를 제 왼팔에 걸고는, 이우신이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소파 팔걸이에 놓인 이온음료 페트병을 들더니,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넥타이는….”

내가 조용히 입을 열자, 이우신은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면접에 말끔한 셔츠에 바지면 됐지, 넥타이는 아무래도 남의 것 같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제출한 서류에 쓰여 있을 텐데… 멋 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덧붙이기를, 교복이 조금만 더 깨끗했더라면 그냥 그걸 입었을 거라고 했다. 그 점이 몹시 이우신다웠다.

그래도 나는 긴긴 말을 늘어놓고 싶었다. 그놈의 서류를 얼마만큼 잘 적었든지 널 다 집어넣진 못했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무슨 글을 얼마만큼 예쁘게 적어 넣어도 어떻게 이우신이라는 사람이 읽히겠느냐고. 그런 글이 있었더라면 나도 공부를 열심히 했을 거라고. 문제마다 이우신 네가 걸려 있었더라면, 나야말로 진짜 모범생이었을 거라고….

결국 이찬희의 집을 나설 무렵 이우신의 손에 들린 종이 가방에는 정장 셔츠와 바지만이 들어 있었다. 이찬희는 벨트와 시계를 골라 주지 못한 일을 두고 열 번은 더 ‘아쉽다아’ 소리를 해댔다. 오죽했으면 그 철부지 강건우가 그만하라며 말릴 지경이었다.

늦게 앉게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이우신과 함께 나도 나섰다. 작년 봄까지만 하더라도 작은 이모네가 집을 비울 때면 이찬희가 제 집에, 제 방에서 잘 있는지, 잘 자는지 확인하는 유모가 되던 게 나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미련 없이 날 내보내는 놈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 새끼 진심인가….’

진짜 독립 비슷한 걸 하려고 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놈에게도 나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어쩌면, 놈과 나 사이에 처음 있는 좋은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선뜻 기뻐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이찬희를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오래된 불신 때문에 나는 미간을 구겼다가, 슬그머니 폈다. 이우신이 내 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가자, 얼른. 교문 닫히겠어….”

“응.”

성큼성큼, 길고 높은 울타리가 쳐진 길을 이우신과 함께 걸었다.

“내일 한국대 같이 갈까?”

미련 넘치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주먹으로 내 팔뚝을 툭 쳤다. 하필 내일은, 아시안 청소년 유도대회 우승자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큼직한 잡지사에서 나온다는 걸 미룰 수는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내 실없는 말이, 적어도 이우신의 긴장을 푸는 데엔 도움이 된 듯했다. 줄곧 구기고 있던 미간을 느릿느릿 펴더니 이우신이 제 안에 고여 있던 목소리를 냈다.

“태오야. 내일… 나 잘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얼른 대답했다.

2학기 들어 진로 상담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매일같이 면접 연습을 하고, 얼굴이 호감형이니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을 서로 다른 선생님들 입을 통해 듣던 이우신이었다. 그러니 이우신은 잘해낼 게 분명했다. 이우신보다 더 면접에 특화된 사람도 없을 거였다.

“네가 교수들한테 오줌을 갈기지 않는 이상에야 어떤 미친놈이 널 떨어뜨리겠어?”

“뭐?”

내 말에, 이우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저를 위로해 주려고 농담한 줄로 착각했는지 ‘고마워’ 듣기 좋은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콧김만 세게 내쉬었다.

“나는 진심이야. 너는 잘할 거고, 아주 잘될 거야.”

“하하. 그래, 그래….”

이우신이 확신 없이 웃음만 흘리더라도, 나는 알았다. 면접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저 얼굴로 지어 보이는 순순한 미소며 입을 열어 내어 보이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대학생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는 자리라 할지라도 이우신은 합격할 것임을.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다.

이우신은 내 예상을 수백만 번 비껴가는 사람이었고, 내 기대를 언제고 충족시키다 못해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한국대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이우신은 최고조의 흥분 상태였다. 교문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던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오더니, 차마 손은 잡지 못하고 제 어깨에 멘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태오야.”

그러고는 눈시울이 새빨개진 채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제 불운이 도움이 되는 날이 있었다고, 그게 오늘이라고. 면접관들이 가정사를 물어 왔는데, 단점인 줄 알았던 이야기를 읊어 놓았더니 자기가 특별해지더라고….

“비루한 거지새끼에서, 개천에서 난 용이 되더라….”

그러면서 이우신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긴긴 이야기 끝에 우리는 기숙사 건물의 후문 아래,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자두 씨앗 같은 무늬가 오돌토돌 올라온 이우신의 아래턱을 엄지로 누르고, 나는 그 애의 벌어진 입술을 잡아먹었다.

그날, 어리숙한 흥분에 차올라 벅찬 듯 이우신은 여러 말을 했고 보여 주지 않던 표정을 보여 주었다. 감동한 것도 같았고 억울한 것도 같았고 후련한 것도 같았다.

그런 이우신이 나는 좋았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얘를 좋아할 순 없을 거야’ 그러다가도, 오늘은 오늘의 이우신이 더더욱 좋았다.

결국 이우신과 나를 이어 놓는 건 청춘의 달콤함이나 어린 마음의 유치한 애정, 해맑은 장난질 따위가 아니었다.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 기어코 내일로 넘어가고야 마는 열여덟, 그리고 열아홉의 지겨운 나날이 우리들의 공통점이자 공감대였다.

우리의 삶이 사막이었다면 억지로 발을 끌며 질질 기어 온 자국이 남았을 거였다. 이우신과 내가 만나 손을 잡으면 기다란 곡선이 도형을 이뤘을 거였다.

씁쓰레한 눈물 맛이 나는 입술을 빨면서 나는 그 도형의 모양을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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