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1년은 노래를 배우듯이 흘러갔다. 첫 소절은 낯설고도 어려워 익히는 데에 한참이 걸리는 반면, 반복되는 후렴구는 숨 쉬듯이 익숙해진 탓에 재빠르게 흘러 지나는 식이었다. 나와 권태오의 열여덟 살도 꼭 그랬다. 더 좋고, 더 친숙한 2학기가 더 빨라서 아쉬웠다.
우리에게도 성탄절이 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숨 가쁘게 달린 끝에, 함께 맞이하는 성탄절이었다. 권태오가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불러 대는 노래가 듣기에 참 좋은 성탄절이었다. 그리고 성탄절은, 처음으로 단둘이 학교 밖에서 만나, 영화관에 가고, 맛있는 저녁을 먹는, 첫 데이트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직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엠티인지 오티인지 하는 걸 다닌다니까…, 우리도 예비 남친 사이의 예비 데이트라는 걸 해 보는 셈이었다.
나는 약속된 시간인 오전 11시보다 40분 일찍 기숙사를 나섰다. 가진 것 중 제일 깔끔한 스웨터에 청바지를 꺼내 입었고, 두꺼운 양말과 검은 목도리로 발목도 목덜미도 꼼꼼히 가렸다. 유행이 지난 패딩 점퍼를 걸쳐 입고 서 있자니, 내 복장을 속마음으로라도 지적할 권태오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극장에 도착하고 보니 10시 반이었다. 먼저 영화표를 사 두려 상영 시간표를 올려다보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내 뒤에 붙어 선 것이 느껴졌다. 어지간해선 감춰지지 않는 인기척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권태오가 보였다.
“…왔어?”
턱 끝까지 오는 회색 폴라넥 스웨터에 검은 코트를 걸친 권태오가 나는 왠지 낯설었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꼼지락거리는데, 권태오는 제 손안의 포토 티켓 두 장을 흔들어 보였다.
“영화는… 내가 보여 주기로 했잖아.”
조금 부루퉁해져 내가 말했고,
“실물 티켓이 갖고 싶어서 먼저 좀 뽑았다, 불만 있냐.”
권태오가 내 정수리에 손을 대고는 좌로, 우로 쓰다듬었다. 흔들거리며 그를 노려보다가 나는 웃고 말았다.
“이따 밥은 내가 살게.”
그러자 권태오가 ‘엉’ 대답하더니, 내 손을 잡아 제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영부영 그에게 붙들린 채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대로 권태오는 7층의 게임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리저리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기가 많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추억의 게임기 두어 가지뿐이었다. 다행히 권태오도 신식 게임기는 낯선 듯 굴었다. 그는 잔돈 얼마를 털어 펀치 머신의 신기록을 세웠고, 나는 인형 뽑기 기계를 살펴보았다.
“뭐 뽑아 줄까?”
새하얀 백열전구의 빛을 받은 인형들은 아기자기하니 작고 귀여웠다. 빨간색 보타이를 맨 클래식한 펭귄 인형으로 절로 시선이 가 았다. 여름 방학 땐가, 장세라와 함께 들렀던 디자인 문구점 방석에서 보았던 펭귄 캐릭터였다. 이름이, 펭구르르였나, 뗑구르르였나… 이름도 되게 귀엽고 웃겼는데.
“저거? 펭귄 갖고 싶어?”
“아. 아냐, 어차피 안 뽑힐 거 같아. 별로 갖고 싶지도 않고….”
패딩 주머니 속, 내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떤 게 그때였다. 02로 시작되는 낯선 번호로부터 온 전화에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평소 같았더라면, 특히나 권태오가 옆에 있는 와중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받지 않았을 거였다.
“나 잠깐만, 전화 좀….”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이상했다. 자릿수가 묘하게 짧은 번호를 보자마자 나는 나쁜 직감에 통화 버튼을 밀어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즐겁던 데이트가 끝났다.
한국주택공사 직원이라며 스스로를 소개한,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이런저런 말들을 속사포로 늘어놓았다. 2분 남짓한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나는,
“뭐라고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세 문장밖엔 말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은 뒤에는 내가 방금 받은 것이 보이스 피싱 전화는 아닐까 생각했고, 상대가 순전히 내 걱정만 했을 뿐 금전적인 요구는 무엇도 하지 않았음에 절망해야 했다.
“태오야.”
그리고 나는 권태오의 손을 잡았다. 전화를 받는 내내 나를 따라 표정이 굳었다가, 낯빛이 질렸다가, 이내 걱정으로 볼을 붉히는 권태오의 손을, 나는 생명줄 쥐듯 움켜쥐었다.
“나… 집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집에…, 저기, 나….”
“우신아. 왜 그래?”
내 낯짝이 그리 두껍지는 못한 탓에,
“나랑 같이 가 줘….”
짧은 부탁을 하기까지 온몸을 바르르 서너 번은 떨어야만 했다.
그 뒤로는 권태오가 나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그와 나는 두 손을 꽉 맞잡고 택시를 탔다. 유년기가 녹아든 달동네, 임대 아파트로 돌아가는 동안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전 같았더라면 권태오에게 내가 사는 집의 꼬락서니를 보이는 게 부끄러웠겠지만, 지금은 그런 면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버지.”
짐 가방을 챙겨 든 내 아버지를 붙잡는 게 먼저였다.
반년이었다. 고작 반년 못 본 새에 아버지의 머리칼은 놀랍도록 백발이 되어 있었다. 얼굴에도 구석구석 검버섯인지 점인지 모를 것이 얼룩져 피어올랐고, 몸매는 전에 비해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비루하게 변해 버린 외형이 병이라도 얻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향해 연민 따위가 생기지는 않았다. 살이 빠졌건 머리가 죄 샜건 간에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였다.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는 버릇을 아직 못 고친 걸 보면 그랬고, 제멋대로 임대 아파트 보증금을 빼 버린 걸 보면 더더욱 그랬다.
“이게 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의 손에서 짐 가방을 털어내듯 빼앗으며, 나는 말했다.
“…여기 보증금 그걸 뺀다고, 돈이 뭐 얼마나 나온다고 이 집까지 없애려고 하시는 건데요? 그래서 짐까지 다 빼 버리면, 그 돈 갖고 어딜 갈 건데요?”
나는 이제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았다. 그를 보면 이제는 밉지도 싫지도 않고, 그저 숨이 턱 막혔다.
직업도 없는 주제에, 멀쩡한 상판에 꼬여 드는 여자들에게 철새처럼 이리저리 빌붙어 가며 어중이떠중이 살아온 주제에, 이젠 젊지도 멋지지도 잘생기지도 않았고 어디서 병이라도 옮은 사람처럼 눈알이 퀭한 주제에, 앞으로 살 집은 도대체 무슨 수로 구할 거고, 여생은 어디에서 보낼 생각이길래….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해요.”
신음하듯 흘린 소리에 아버지는 피식 실소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는 그가 나는 이제 낯설었다.
“우신아, 아버지가 방법을 찾아서 그래. 돈 벌 방법을 다아 찾아왔다니까. 딱 한 달만 기다려. 한 달이면 돼. 어? 지금 당장은 돈 구백이지만 이걸로, 아버지가….”
“제가 진짜로 그딴 방법이 궁금해서 여쭤본 거 같으세요?”
이제는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가짜 상황극이었으면 싶었다. 아버지의 몸 어딘가에 초미니 카메라가 숨겨져 있고, 그는 내 친부모가 아니라 연기자일 뿐이었으면, 이 연극이 끝나고 나면 다시금 말끔하니 젊은 시절의 그 자신으로 돌아왔으면, 퇴근 후에는 제대로 된 집으로 돌아가 남들만큼 말짱한 삶을 살았으면 바랐다.
그리고 그 인생에 이우신이라는 아들은 없었으면 싶었다.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인 채로, 평범하게 잘살았으면…. 하나 있는 부모에게 내가 바라는 점이 그랬다.
“씨발….”
주먹을 말아 쥐고 나는 한 차례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그런 나를 비껴, 내 등 뒤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찬물을 맞은 듯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태오….’
권태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때리고, 버리고, 돈을 갈취하고, 이제는 국가에서 제공한 집까지 털어 가려는 아버지 앞에 선 나를, 권태오가 보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구토처럼 튀어나오려는 애원을 억지로 삼켰다. 이 순간에는 권태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내 옆에 없었더라면, 1년만 나를 기다려 줄 수는 없는 거냐며 아버지 바짓가랑이라도 부여잡았을 테니까. 1년만, 딱 1년만 아빠 행세를 해 줄 수 없는 거냐고, 내 인생도 잠깐만 살펴봐 달라고 매달렸을 테니까.
권태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권태오가 내 자존심을 대신해서, 다행이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보증금 갖고 가시든지 말든지 상관없어요.”
갖은 힘을 다 끌어다 쓰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대신에 약속 하나 해 주세요. 지금 나가시면요,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잠깐, 엉거주춤하니 짝다리를 짚고 선 채 머뭇거렸다.
“…이제 제 인생에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평생… 두 번 다신 안 볼 거예요. 내 삶에서 빠져 주세요. 이대로… 그냥, 평생 사라져 주세요.”
이내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한 발, 내게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내 손에 들린 제 짐 가방을 들고 나섰다.
“…….”
문 앞에서 권태오가 한 차례 그를 막아섰다. 아버지는 저보다도 10㎝는 더 큰 권태오에겐 차마 큰 소리를 내질 못했다. 그가 내는 헛기침 소리에,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내저었다.
돌덩이처럼 세게 말아 쥔 주먹 위로 핏발을 세운 채, 권태오가 나를 봤다.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보내 줘… 그렇게 말했다. 목구멍 밖으로 차마 나오지 않은 말을 권태오는 어떻게든 들어주었다.
반 발자국, 권태오가 비켜 주자 아버지는 후다닥 뛰쳐나갔다.
덩그러니 거실 중앙에 선 채 나는 스트레스로 뇌세포가 타닥타닥 죽는 것을 느꼈다. 나를 버리기 전에 아버지가, 고민을 10초는 했을까? 아니, 9초도, 8초도 안 된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못난 자식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나치게 못난 부모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도대체 뭐에 홀려서…, 뭐에 미쳐서, 저렇게….’
황당하고 황망한 마음에 나는 두 발에 힘을 잔뜩 줬다. 똑바로 서 있으려 노력했다. 권태오가 보는 앞에서, 저런 몰골의 아버지에게 버려졌다고 해서 쓰러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쓴 결과 나는 아주 천천히 거실 한편에 깔린 매트리스로 가 몸을 앉혔다. 그제야 권태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오는 그의 발을 내려다보며 나는 웃었다.
“데이트치고는 너무 썰렁하다, 그치….”
웃어 주었으면 하고 꺼낸 농담에, 말수 적은 태오는 대답 대신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의 팔 안에 휘감기듯 안겼다. 돌처럼 딱딱하고 불처럼 뜨거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가 달려가서, 잡아 올까?”
권태오가 말했다. 목소리에서 펄펄 끓는 증오가 느껴졌다. 허탈감만 느끼는 날 대신해서, 권태오는 내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다.
“잡아 와서 네 앞에서 무릎 꿇게 하고, 훔쳐 간 돈 전부 다 토해 내게 할까?”
“…….”
대답 대신,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권태오가 더운 콧김을 세게 내쉬었다.
“싫어? 그럼 어떡할까. 너한테 사과할 때까지 세게 패 줄까? 울면서 오줌 지릴 때까지, 두 번 다시 못 일어설 때까지, 네 속이 다 풀릴 때까지 때려 줄까?”
“…….”
이번에도 나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 줘?”
권태오가 내 두 손을 잡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그의 손안에서, 내 손은 무서울 정도로 세게 떨리고 있었다.
“말만 해. 우신아, 나한테 말만 해.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될까? 어떻게 해 줄까. 어떻게 해 주면 안 울 거야?”
나는 두 눈동자를 좌우로 바삐 굴렸다. 어떻게 해 주면 되냐니, 나는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주머니에 구멍이 나는 한이 있어도 옷만큼은 멀끔하게 입고 다니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조금 전 행색은 조금도 그 답지가 않았다. 꼴을 보아하니 보증금 구백만 원도, 지금 빼냈기에 쓰겠다며 가져가기나 한 것이지 여차하면 압류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외지고 범죄자 많은 달동네라 할지라도, 보증금 900에 월세 20으로 살 수 있는 임대 아파트는 귀하디귀한 것이었다. 아버지 형편에 여기, 이 조그만 아파트는 그 인생에 오직 하나 있는 성취래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 집까지 내놔야 할 정도라면…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친 게 분명했다.
내 인생이 참 이렇다. 그렇잖아도 가진 것 없이 낭떠러지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라는 존재가 자꾸만 날더러 떠나라고, 꺼지라고, 내려앉으라고 윽박을 질러 댄다. 오죽하면 그런 나를 남들이 더 불쌍하게 여길 지경이었다. 학생은 괜찮은 거냐며 한국주택공사 직원이 전화를 주질 않나….
나는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거듭 밀려오는 나쁜 생각을 구석으로 꾸역꾸역 밀어 눌렀다.
그러고는 애써, 당장 뱉을 수 있는 가장 침착하고 이우신다운 말을 꺼냈다.
“미안해, 태오야. …혹시 모르니까 내 짐도 미리 챙겨 둬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럼.”
그러자 권태오가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제 두 팔을 걷어붙였다.
“뭐부터 챙기면 돼?”
“…도와주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떨떨하게 묻는 내게,
“그럼 도와줘야지!”
권태오가 소리를 크게 질렀다.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안 도와주면, 그럼? 그럼 씨발 너 이렇게 놔두고 혼자 가 버릴까?”
“아니….”
성난 권태오가 내지른 외침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입술이 절로 구겨졌다. 입꼬리가 밑으로 쑥 내려가고, 두 입술이 얇아지고,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가지 마. 나… 나 놓지 마.”
형편없이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자,
“하…, 씨. 이우신…. 우신아.”
권태오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의 어깨에 머리가 밀려, 나는 매트리스 위로 풀썩 넘어졌다. 권태오는 나를 와락 안아 주었다. 따듯하고 커다란 품 안에 안긴 순간 반사적으로 그의 상체를 두 팔로 껴안았다가, 나는 천천히 포옹을 풀어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권태오가 필요했지만, 그가 안겨 주는 위로가 너무나 간절했지만, 그런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문득 걱정됐다. 무거울까 봐, 내가. 부담이 될까 봐, 짐처럼 느껴질까 봐….
두 팔의 힘을 풀고 두 손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자, 곰팡이가 슨 천장이 올려다보였다. 이 집에서 지낼 적에는 저 천장이 내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쫓겨날 판국이 되니 이젠 올려다볼 천장마저 없단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멍하니 천장의 얼룩을 보는 내 턱을 권태오가 붙잡았다. 그러고는 시야 가득 제 얼굴만이 가득하도록 가까이 다가왔다.
“나 봐, 우신아. 나를 봐.”
나를 살피는 권태오의 눈동자는 불처럼 뜨거웠고 바다처럼 깊었다. 눈동자 속에서 흐르는 애정이 내 뺨 위로 후드득후드득,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가로줄을 그리며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자 지체 없이 권태오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힘이 풀린 다리를 양방향으로 축 늘어뜨린 채, 나는 그를 안지도 놓지도 못하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권태오는 그런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내 갈비뼈가 휘어 버리고 그의 팔 자국이 온몸에 영원히 남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강한 포옹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욕망 없이 위로만이 담긴 입맞춤이, 그저 입술을 뭉개며 반복됐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권태오도 나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서늘한 집안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가 코끝에 스밀 즈음에야,
“영화값….”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예매 환불은 하고 왔어야 하는 건데.”
그러자 권태오가 웃었다.
“이제야 좀 이우신 같다.”
권태오는 기어코 나를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제 코트를 벗어 내 몸 위에 덮어 주더니, 집 안을 이리저리 누비며 챙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코딱지만 한 집 안이, 권태오가 돌아다니니 더욱 작게 느껴졌다.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던 충격이 가시고 나니 나는 괜찮아졌다. 아주 괜찮지만은 않았지만 어딘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한테는 아버지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지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메모를 남기던 순간보다 훨씬 나았다.
“집이 왜 이렇게 깨끗해?”
이리저리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권태오가 말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난여름에 내가 미쳐서는, 코피를 줄줄 흘리며 갖은 물건들을 전부 내다 버렸다고 말해 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간 권태오가 정말로 내 아버지를 쫓아 나가 살인자가 될 거 같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옷가지를 챙기고,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내놓자며 한데 묶었다. 따로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다 보니 챙긴 짐도 단출했다. 무턱대고 버리기에는 다시 사기 아쉬운 생필품이나 몇 가지 챙겼을 뿐이었다.
혼자 했더라면 두 시간은 족히 걸렸을 정리가, 권태오가 도와주니 20분 만에 끝났다. 최종적으로 현관문 앞에 내놓은 짐은 종이 박스 하나와 가방 한 개뿐이었다.
“가구 같은 건 안 옮겨?”
“응…. 가져다 둘 곳도 없고… 나중에 중고 마켓에나 내놓지, 뭐.”
“그래, 그럼… 저 우산은?”
삼선 슬리퍼가 놓여 있을 뿐인 휑뎅그렁한 신발장을 가리키며 권태오가 말했다. ‘우산’이라는 말에 감전된 듯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현관문과 신발장 사이 틈새에, 곧게 끼워 놓은 검정색 우산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걸 잊고 있었나 생각될 정도로 크게 밀려드는 기억에서는 봄비에 젖은 운동장에서 풍기던 무른 진흙 냄새가 났다.
당황스러운 기분을 못 감추며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 그…, 저 우산은….”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권태오가 내 우산을 가져왔다. 아니지…, 따지자면 내가 줄곧 갖고 있던 그 자신의 우산이었다.
2년 만에 제 주인의 손에 들린 우산은 상태가 무척 좋았다. 받침살을 기준으로 한 칸 한 칸, 원단을 곧게 접어 돌돌 말아 보관했기 때문이었다. 권태오가 묶음끈을 풀고 손잡이의 버튼을 꾹 누르자, ‘팡’ 소리를 내며 펼쳐진 우산에는 조금의 녹도 슬어 있질 않았다.
꼭 어제 받은 것처럼 새 것인 우산을 돌려 보다, 권태오가 웃었다.
“버리고 갈 건 아니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커다랗고 검은 우산을 빙빙 돌리며 웃는 권태오가, 너무나 소년다워서였다. ‘한국 중고등 유도 연맹’이란 글자가 쓰인, 제 것임이 뻔한 우산을 권태오는 모르는 척 가볍게 접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그 바람에 내 기분은 아주 이상해졌다. 가끔 꺼내어 되새김질하고는 넣어 놓던 기억이 나의 오늘과 합쳐진 순간이었다.
“당연히… 가지고 가야지.”
겨우 대답할 적엔 내 목소리마저 별나게 들렸다.
권태오는 활짝 웃더니 내 손에 제 우산을 쥐여 주었다. 커다랗고 검은 우산을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전과 같이 한 칸 한 칸 반듯하게 접었다. 그러고는 짐 박스의 가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뒤늦게 나는 허기를 느꼈다. 두 뺨에도 덩달아 열이 올랐다.
‘밥은 내가 사 주겠다고… 큰소리 떵떵 쳐 놨는데….’
데이트를 하자고 먼저 제안한 건 나였는데, 내 사정 때문에 권태오는 영화도 보지 못했고 맛있는 밥도 먹질 못했다.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을 열어 살피자, 언제 샀던 건지 기억나지도 않는 라면 봉지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는 봉지 겉면에 쓰인 유통 기한을 확인했다.
‘12월 29일까지.’
아슬아슬하게 며칠 남은 상태였다.
“태오야. 집에 라면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먹을래? 한 봉지밖에 없긴 한데 이거라도 끓여 줄게. 아니면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냐. 나 라면 좋아해. 내가 끓여 줄게.”
큰 소리로 대답하며 권태오가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찬장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 이게 ‘한 봉지’구나.”
라면 다섯 개가 든 커다란 봉지 하나를 꺼내 들더니, 권태오는 조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통 기한을 힐끔 살폈다. 그러고는 하나 있는 양은냄비를 꺼내고 물을 부었다.
“넌 저리 가서 앉아 있어.”
권태오가 나를 뒤로 가볍게 밀쳤다. 그 바람에 나는 휘청거리며 네다섯 발짝 뒤로 물러나야 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가스레인지 앞에 서기도 잠시,
“우신아. 불이 안 켜지는데…. 가스 벌써 끊긴 거 아냐?”
권태오가 말했다.
“비켜 봐.”
한숨 쉬며 나는 그 옆으로 스르르 다가가 섰다. 오래된 콩기름통 옆의 작은 라이터를 쥐고는 불을 켠 다음,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맨 끝까지 홱 돌렸다. 새어 나온 가스를 타고 불이 화륵 붙었다가, 이내 적당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게 고장이 나서… 이렇게 켜면 돼.”
“…….”
말없이, 권태오는 고장 난 가스레인지 불 위에 냄비를 올렸다. 나는 기웃거리며 라면 봉지를 뜯는 권태오를 살폈다.
“아, 이우신. 저리 가 있어. 내가 끓여 줄게.”
급한 손길로 생라면 두 개를 꺼내어 겹쳐 쥐더니, 권태오는 콰직 소리가 나도록 면을 반으로 부쉈다. 네 조각이 난 면발이 그대로 뜨거운 냄비에 입수했다.
면발 결의 역방향으로 박살 난 라면의 모습이 못내 충격적이었다.
“뭐야, 태오야? 어떻게 부순 거야? 라면을 이렇게 깨부수는 애가 어딨어?”
“그럼 어떻게 쪼개는데, 너는?”
“아니 보통… 결 따라 쪼개지 않아?”
내 말에 권태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맛만 있으면 그만이지… 구시렁대는 소리가 귀여워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고, 나는 커다란 손으로 스프를 탈탈 털어 넣는 권태오를 구경했다.
“태오야, 좀 저어 가면서 끓여.”
“저리 가 있으라고 했다.”
한 번만 더 간섭했다가는 맥도 못 추겠구나 싶어, 나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조그만 반상을 꺼내어 궁한 대로 물티슈로 슥슥 문질러 닦고, 싱크대 물로 헹궈 낸 수저도 가져다 놓았다.
패스트푸드답게 라면은 금방 완성됐다. 권태오는 작은 그릇 하나를 가져오더니 라면을 아주 약간 덜어 냈다. 그러고는 몇 젓가락 얹은 작은 그릇은 제 앞에 놓고, 냄비는 통째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피식 웃음 지었다.
“너는 도대체 내가 뭐가 좋다고 이러고 있어?”
그리고 한숨 쉬듯 물었다.
“돈도 없지, 시간도 없지, 먹기나 많이 먹는데… 내가 뭐가 그렇게 좋아?”
그러자 권태오가 실눈을 뜨곤 나를 노려봤다.
“하나하나 말하자면 오늘 내로 안 끝날 텐데, 진짜 대답해 줘?”
뜨겁게 끓다 못해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두 눈을 슬금슬금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말해 본 거야. 이해가 안 돼서…. 왜 네가 나랑 이러고 있나….”
“취향 존중 좀 해 줘라.”
투덜거리며 대답하고는, 그가 ‘어서 먹어’ 하며 젓가락 두 짝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나는 꼬불꼬불한 라면을 젓가락 끝으로 건져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꼬불꼬불한 면을 ‘후’ 불자, 권태오도 식사를 시작했다.
후루룩 소리 내어 라면을 먹는 권태오를 나는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정말로, 너 같은 애가 왜 나를 좋아해 주는지 모르겠어….’
사실은 작년까지만 해도, 너를 다 잊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네 커다란 몸에서 나는 살 냄새, 아무렇게나 서 있던 두 발의 각도, 나를 비추던 네 눈동자의 검은색, 네가 뱉는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네가 뱉은 한숨 소리까지도 머릿속에 조각 새기듯 남기면서도… 나는 다 잊고 싶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네 기억에 상처를 입을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이제는… 태오야,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네가 없으면 내겐 온통 상처만이 남을 것 같았다.
“우신아.”
덩그러니 내 젓가락에 들린 면발에 대고 권태오가 ‘후우’ 입김을 불었다.
“…얼른 먹어. 별로 안 뜨거워.”
그가 식혀준 라면을 나는 묵묵히 입에 넣었다. 권태오가 끓여 준 라면은 아주 맛있었다. 내게 남은 것들이 무엇이고 나를 버린 이가 누구인지 망각해도 좋을 만큼, 딱 그만큼 맛있었다.
12월의 마지막 주는 몹시 추웠다. 부쩍 닥쳐온 추위를 느낄 때엔 세상의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임대 아파트에서 챙겨 온 짐 박스를 기숙사 방 침대 밑에 집어넣고 지쳐 바닥에 앉은 밤에는, 어서 자라 어른이 되라고 시간이 나를 떠미는 듯했다.
시간의 장점은 재촉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흘러간다는 것이고, 단점은 붙잡아 놓고자 하여도 방도가 없단 거였다. 소매 밑으로 스민 칼바람이 팔뚝까지 시리게 만드는 겨울, 시간은 내게 잔혹했다.
무난하게 장학생 자격으로 들어간 수학 심화반, 겨울 방학 내내 몸 비비게 된 기숙사 방, 남은 1년간의 입시 공부며 수시 원서를 넣을 학과와 면접 준비, 여차하면 내 동아줄이 되어 줄 권태오의 팔백만 원에 이르기까지 A부터 Z까지 세워 둔 계획에서 ‘내일’이 빠졌다. 그 바람에 나의 방학은 다른 아이들의 나날에 비해 숨 가빴고 또 고달팠다.
거리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가게마다 미니 트리를 세워 둔 월말, 나는 바빴다. 너무 바빠서 권태오를 다시 만날 틈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 지원금을 더 받을 수 있을지 여러 기관이며 단체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리고 몇 군데는 찾아가 직접 묻고 다녀야 했다.
‘달라진 건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청춘 드라마의 악역을 자처하며 나를 버렸음에도 내 삶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이다. 자기 최면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나는 문득 청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만나 묻고 싶어졌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아역 배우가 노을빛 아래 눈물 훔치며 ‘파이팅’을 외치면, 다음 화에는 부쩍 성장한 어른 배우가 명품 넥타이를 매는 모습이 나오던데, 도대체 한 화 사이에 뭘 어떻게 했느냐고 말이다. ‘독하게 살았다’고? ‘노력했다’고? 그래 다 알겠는데, 그래서 독하게 뭘 어떻게 노력해서 멀끔한 사회인이 된 거냐고.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갈 재주는 없는 관계로, 나는 내 해답을 직접 찾아야만 했다.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구질구질하고 퍽퍽했다.
―이번 정류장은 ‘연두 어린이 재단 청소년 복지 종합 센터’입니다.
낡은 스니커즈 안에 고인 냉기가 주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몸서리치며, 나는 마을버스 하차 벨을 눌렀다.
평소 생활 지원금을 받아 온 재단이 여기였다. 벌써 5년째 꼬박꼬박 돈을 받아 쓰면서도,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센터 방문이 드문 편이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내 살 길을 알아서 찾아 나가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오랜만의 상담에 센터 담당 선생님은 기쁘게 나를 반겼다.
“추운데 목도리도 안 하고 왔어?”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 숙이며 상담실로 향했다.
날 가장 솔직하게 만드는 사람이 권태오라면, 날 별수 없이 발가벗겨 놓는 것은 돈이었다. 더 많은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나는 내 안에 든 말들을 낱낱이 파헤쳐 늘어놓아야 했다. 센터 선생님은 내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좋은 결과를 끌어내자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됐다.
“지금 사는 곳은 딱히 문제가 없거든요. 보호 시설이나 그룹 홈은 필요 없어요.”
애초에 먹고, 자고, 살기 위해 기숙사가 있는 채홍고에 입학한 나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그만이었다. 짐 박스와 가방이 늘어나 기숙사 방이 조금 좁아졌을 뿐이었다. 집으로 갈 일이야 원래부터 잘 없었으니 없어진들 아쉽지 않았다. 그간 월세를 꼬박꼬박 생활 지원금에서 빼서 내느라 오히려 부담이었는데 잘 됐다.
‘돈 굳었지, 뭐.’
그 돈으로 다음 달부터는 문제집을 마음 놓고 더 사든지, 하다못해 나 때문에 애달파하며 걱정하는 권태오에게 든든한 밥이라도 사 줄 수 있을 거였다.
“아버지가 없어진 것도 별로 큰일 같지는 않아요.”
평소 통화 한 번 안 하며 살던 못난 아버지 따위, 없어진들 그립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물며 서운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보증금은?”
센터 선생님이 물었다. 입술을 다물며 나는 코코아가 든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선생님의 눈길이 힘 들어간 내 손에 잠시 머물렀다.
“음, 계속 문의하고 있긴 한데요…, 잘 풀릴 거 같진 않아요.”
내 상담을 전담하는 직원이 생기고 또 그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으로 전화를 해대는 게 나였다. 구질구질한 사정을 자잘하게 풀어 설명하고, 보증금의 일부라도 내 계좌로 빼 줄 수는 없겠냐고 문의해 놓은 상태였다.
긴긴 대화 끝에 센터 선생님은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답을 내주었다.
“우신이는 우리 재단 장학생이기도 하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원금은 쭉 나갈 거야. 내년부터 추가 지급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 대신에 심리 검사 수업이랑 치료 상담에 최소한 3회는 참여를 해 줘야 해. 그리고…, 으음….”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센터 절차상 방치 학대로 아버지를 신고해야 하는데…, 혹시, 그건 어떻게 생각하니?”
조심스럽게 물어 온 질문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손쉽게 대답했다.
“으음…, 그래.”
내 대꾸에 당황한 듯 센터 선생님이 제 눈썹 위를 펜 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이내 몇 가지 서류를 가져오더니 내 앞에 차례로 펼쳐 놓았다.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빈칸의 답을 채워 넣으면서, 내가 말했다.
“선생님. 꼭 장학금 말고 지원금으로 부탁드릴게요. 장학금은 중복 수령이 안 되더라고요. 학교 수업료가 더 비싸서… 그건 학교에서 받는 게 이득이라서요.”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확답을 듣고 나니 철 가루가 붙은 듯 텁텁하고 쓰라리던 속이 조금 낫는 듯했다.
“우신아, 정말 괜찮겠어?”
서명을 모두 마치고 돌려준 서류를 받으면서 센터 선생님이 물었다. 질문의 함의를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암만 삶에 도움이 안 되는 부모라 할지라도 제 부모를 흔쾌히 신고하는 아이는 없는 법이었다. 그랬다가 정말로 부모가 절 버릴까 봐, 그대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거나 도망을 쳐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선생님도 혹시나 내가 후회하거나 돌아설까 봐, 그 점을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네, 괜찮아요.”
아버지를 신고하는 게 당연히 옳은 경우임을 이해할 정도로 나는 똑똑했고, 이성적이었다. 경찰 신고 기록을 남겨 놓는 건 나중을 위한 증거 수집이기도 했다. 나는 어른이 되자마자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 과정이 질척해진다면 법적인 도움이 필요할 텐데, 지금 피해 기록을 남겨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였다.
차라리 없는 게 나은 부모라고 자조적으로나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정말로 없는 게 나은 부모였다. 아주 버려지고 나니까 오히려 돈이 생겼다. 웃긴 일이었다.
“여러모로 아버지가 저를 버려서 잘됐어요.”
심드렁하니 중얼거리면서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상담실에서 걸어 나와 센터 로비에 설 적엔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웠다. 그 때문인지 들어올 적엔 살펴볼 여유가 없어 있는 줄도 몰랐던, 로비 중앙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미술 장학생의 수채화 그림들이 떼거지로 걸려 있었는데, 오늘은 나무 액자에 담긴 유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건 뭐예요?”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어딘지 전문적이고 값비싼 느낌이 들어 그렇게 물었다. 그새 종이 가방 안에 무얼 챙겨 나온 선생님이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상냥한 설명까지 곁들여 주었다.
“이 그림 그리신 작가님께서 이번에 우리 재단에 큰돈을 후원해 주셨거든. 작품도 한 점 선물해 주셔서 여기에 걸어 뒀어. 정말 예쁘지? 건물 분위기가 확 밝아지는 거 같지 않아?”
세상의 예쁜 색이란 색은 다 갖다 발라 놓은 추상화가 지닌 의미일랑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감상이라곤 한 문장뿐이었다.
“여기랑은 안 어울려요.”
“응? 왜?”
“너무 슬퍼 보여서요.”
내 말에 센터 선생님의 눈썹이 팔(八)자 모양으로 기울어졌다. 내 말을 어떤, ‘작중 소품에 빗대어 겨우 내비친 화자의 본심’ 따위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우신아, 이럴 땐 속 편하게 힘들어해도 괜찮아. 암만 그래도 네 나이 대 애가 이런 상황에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
애틋해하는 표정을 보자니 나는 억울해졌다. 동서남북 모든 게 밝고 예쁠 수만은 없는 건데, 의도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색은 전부 배제한 그 그림이 내 눈에는 위선적으로 보였다. 그림이 슬퍼 보인다고 말한 건 정말로, 내 눈에는 그 그림이 슬퍼 보여서 그런 것뿐이었다.
“아뇨, 전 진짜 괜찮은데요.”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아버지의 부재 따위가 내 인생에 뭐 대수일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상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나섰다. 유리문을 밀어 여는 내 손에 선생님은 종이 가방을 쥐여 주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뜨개질로 만든 연두색 목도리가 보였다. 눈으로 훑어도 보드랍고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연두색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색깔 따위를 가릴 처지가 아닌 관계로, 나는 센터 직원, 혹은 봉사자가 떠 주었을 털실 목도리를 얼른 목에 둘렀다. 그러고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직 환승 되려나…?’
퇴근 시간이라 붐비는 버스를 탈 때는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할 무렵에는 속이 보글보글 끓었다. 번지르르한 교문, 겨울에도 예쁘게 다듬어진 잔디 정원, 한눈에 고급스러운 본관 건물과 예쁘장하게 정돈된 산책로를 보자니 갑작스러운 회의감이 나를 덮쳤다.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정말 이런 상태로 이 학교를 다녀도 되나? 내가 이런 곳에 어울리기나 할까? 괜히 욕심을 부리는 걸까, 다른 가난한 집 애들처럼 공장으로 통하거나 일찍 취직할 수 있는 학교로 진학했으면 좀 나았을까.
의대니 뭐니…,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내 성적을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마은 쌤도 모르겠고, 작문 시험 답안지가 참 좋았다며 글을 써도 되겠다던 국어 쌤도 모르겠다. 전교 1등 몇 번 했다고 선생님들이 괜한 바람만 내게 불어넣은 건 아닐까 그것조차 모르겠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는 수백 명의 학생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입시 교육을 마치고 대학을 보내고 나면, 그것으로 선생님들이 맡은 일은 끝나는 셈이었다. 내가 겪게 될 나중 일 따위, 내가 겪고 있는 오늘의 문제 따위, 누구에게도 그따위 걸 책임질 의무는 없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나. 너무 기대에 차 있었나….’
산책로를 터벅터벅 오를 적엔 목에 두른 연두색 목도리가 더는 부드럽지 않았다. 전처럼 따듯하지도 않았고 포근하지도 않았다. 꼭 주홍 글씨로 목을 죄는 느낌이었다. 연두 어린이 재단이니 청소년 방치 학대니, 이 학교의 그 누구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신경 쓰느라 나는 추웠다.
‘씨발….’
나는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두들겼다.
‘내가 뭐 어때서.’
벌건 수치심으로 떠오른 울적한 의심들을, 찰싹 때려 몰아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한데 모아, 머릿속 상자 안에 집어넣고는 뚜껑을 두 발로 쾅쾅 눌러 밟았다.
내 마음의 방은 딱 그만큼 좁았다. 제멋대로 넘실거리는, 제철이 아닌 무거운 옷들을 펼쳐 놓을 공간 따위는 없었다. 의심이며 고민이며 한데에 쑤셔 넣어 숨겨야만 가까스로 발 디딜 곳 생기는 작은 방이었다.
가난은 나를 그렇게 옹졸하게 만들었다.
권태오
[학교 왔어?
저녁같이먹자]
그리고 권태오는 나를 열여덟 살 소년으로 만들어 놓았다.
“…….”
휴대폰을 웅웅 울리는 메시지를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권태오가 보내 온 문자가 오늘만 해도 서른 개는 되는 거 같았다. 어제도 스물세 통, 그제도 스물한 통…. ‘바빠서’, ‘정리할 일이 좀 있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피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권태오가 보내오는 메시지는 늘어나고 있었다.
권태오는 1점짜리 문법 문제다. 요구하는 바가 명확하고 별다른 풀이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3점짜리 독해 문제인데, 권태오는 혼자서 쉽다.
답이 입력되길 기다리는 빈칸 위로 나는 엄지를 붙였다. 추위에 꽁꽁 언 탓인지 휴대폰이 내 손가락을 인지하지 못하는 통에, 한 자를 입력하려면 두세 번씩 액정을 두들겨야 했다.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나는 오답을 입력했다.
[밖에서 밥 먹고 왔어.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잘래.
미안해. 내일은 꼭 보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자 한숨이 뿌연 입김으로 뿜어져 나왔다.
요 며칠 그를 못 만났다고 굶어 죽을 것처럼 강렬한 허기가 졌지만, 지금은 권태오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 권태오를 만나면 그야말로 닻처럼, 쇠고랑처럼, 해묵은 저주처럼 그의 발목을 붙들고 내리누를 것만 같았다.
딱 그만큼 나는 권태오에게 매달리고 싶었고, 한편으론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공신’, 이우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힘을 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내 패턴을 잃어서는 안 됐다. 자기 연민에 매몰당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아침에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방학 동안 머무르게 된 수학 심화반 기숙사는 혼자 한 방을 독차지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밤새도록 전등을 켜 놓은 채 공부하고, 오전 5시 3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깨자마자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창문을 활짝 열어 방을 환기하고, 양치를 마친 다음 조심이를 만나러 갔다. 요즘 들어 조심이는 한결 얌전해져서, 개집 앞을 나서도 함부로 달리지 않았고 돌아올 때도 발걸음이 점잖았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더 오래 산책하자’는 양 고집스레 줄을 당겼었는데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조심이도, 사람으로만 태어났더라면 아주 똑똑한 모범생이었지 싶었다.
30분의 아침 산책을 마치고 개집 앞에 바래다주면 조심이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곤 했다. 날이 추워지다 보니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스러워서, 담요 하나를 가져다 넣어 준 뒤로 조심이는 개집 안에서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조심아, 나 갔다올게.”
조심이의 머리 위를 털어내듯 만져주면서, 나는 질문할 줄 모르는 개에게 내 멋대로 대답을 했다.
“태오는 방학 동안 많이 바빠서 같이 산책을 못 한대. 나중에, 저녁에 내가 데려올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러면 조심이는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가벼운 콧김 소리를 들려주었다.
오전에는 수학 심화반 수업을 듣고 점심은 이찬희, 그리고 강건우와 같이 먹었다. 나는 기숙사 급식을 먹었고 두 사람은 도시락을 가져왔다. 둘이 언제부터인가 부쩍 친해져서는, 아침부터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고는 하는데 강건우의 말을 들어 보면 나흘 중 하루는 피시방에 출석 도장을 찍는 듯했다.
그래도 매일 학교에 나오는 게 어디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았다. 두 사람 덕분에 학기 때와 방학 때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아서 한편으론 좋기도 했다.
“아, 밥 다 식었어. 나 이거 좀 데워 올게.”
제 도시락을 덥석 들고 강건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자레인지가 있는 매점으로 향하는 그를 힐끔 살핀 다음, 나는 책가방을 열었다.
“자.”
가방에서 꺼내어 내민 것은 줄 노트였다. 대뜸 건네 보인 노트에 이찬희는 그러잖아도 둥그런 눈을 더욱 크게 떠 보였다. 손 뻗어 받질 않고 쳐다만 보는 녀석을 향해 나는 노트를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없는 시간 쪼개서 만들어 본 거니까 받아. 일주일 치 공부 노트야….”
그러자 이찬희가 ‘어어’ 하고는 그답잖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두 손 뻗어 노트를 받아 가더니, 곧장 첫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내가 무얼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그 바람에 괜스레 머쓱해져, 나는 숟갈을 다시 들곤 메추리알 장조림을 뒤적거렸다.
“아…, 쓰던 노트라서 앞 페이지에 영어 필기가 있는데 그건 네가 찢어 내 줘…. 거기 뒷장에… 그냥 내가 찾아본 걸 좀 정리해 놨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영문법이 정리된 필기를 슥 넘기는 이찬희의 반응을 나는 힐긋 살폈다. 노트 뒷장을 펼쳐 놓고 이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게 기분이 상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주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순전히 당황한 것 같았다.
이찬희의 눈동자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훑어 내리는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 기초 커뮤니케이션
1) 커뮤니케이션의 정의
-보편적인 언어적 상징과 그 의미
-보편적인 비언어적 상징과 그 의미
2) 기초 심리학이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대인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3) 커뮤니케이션 능력
-예시 문항을 통해 이해하기
자필로 또박또박 적어 내린 목차를 훑어 내리고는, 이찬희는 다음 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남은 페이지의 절반은 스크랩 자료로 채워 놓았고 절반은 요점만 축약하여 직접 그려 넣은 표와 필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크랩 자료는 자율 학습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쉽게 모았다. 맨 뒷장에는 내가 느꼈던 그의 태도나 말하기 방식의 문제점을 정리해 두었는데, 이 항목을 정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
사실은, 만들어 놓고도 줄까 말까 고민해 온 노트였다.
‘…엄마는 이렇게 잘만 하던데…. 친구도 잘 사귀고, 잘 놀고 잘 지내던데. 왜 난 그게 잘 안 될까? …왜 내 의도대로 되지가 않지?’
그런 말을 내게 털어놓은 건 이찬희였지만, 단순한 투정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잠자코 들어 주길 바라며 제 걱정을 토로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이성적으로는 맞는 일이래도 감성적으로는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그러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나름대로 내놓은 해결책이 이찬희는 싫을 수도 있었다. 두툼하니 본래의 두 배 두께로 불어난 노트는 그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날 위해서 준비해 준 거야? 고마워.”
그런데도 선뜻 고맙다고 말하는 이찬희의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또 저런다.’
나는 미간을 살짝 웅크렸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네 성격 이상하다고 지적한 건데, 기분 나쁘지 않아?”
젓가락을 한 짝씩 양손에 쥐고 배추김치를 찢으며 그렇게 물었다. 이찬희는 대답 없이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선을 들어, 나는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강건우는 보이지 않았다. 도시락을 데워 온다는 건 순 핑계고, 매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 올 게 뻔했다.
듣는 이가 없는 틈을 타 내가 말했다.
“너무 감정적으로 구는 것도 좋진 않지만, 너무 계산적으로 구는 것도 안 좋아 보여.”
“으음….”
그제야 이찬희가 침음을 냈다. 받은 노트의 표지를 덮곤, 검지 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툭, 툭… 조용한 식탁 위를 울렸다.
“싫진 않은데…, 나한테 이러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서 좀… 뭐라고 할까? 하하, 모르겠네.”
그러더니 웃었다.
요즘 들어, 이찬희의 미소를 볼 때마다 내가 가진 의문이 있었다. 서로 없던 일인 척 다 잊은 척 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권태오네 집에서 나눴던 대화가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가리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하기로 결정 내렸다.
“가만 보면 애들이 참 멍청한 거 같아. 네 연기에 속아 넘어가다니….”
그러자 이찬희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평가가 너무 매정하잖아! 내가 뭐, 어디가 어때서? 그럼 강건우도 멍청한 거게?”
“건우…?”
그대로 말문이 막혀 나는 침묵했다.
“…….”
“…….”
이찬희도 제 입 주변을 손끝으로 가린 채 조용했다.
대화가 끊긴 틈을 타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밥 두 숟갈과 만둣국을 번갈아 떠먹는 날 보더니, 이찬희는 제 도시락에 든 미트볼을 내 식판에 옮기려 했다. 습관적으로 내 그릇으로 다가온 그의 반찬을 나는 숟가락으로 가로막았다.
“음!”
입 안이 가득 찬 탓에, 눈썹을 찡그리며 신경질적인 소리만 짧게 냈다.
“어, 왜? 안 먹게? 이거 맛있는 건데….”
이찬희가 아쉬운 듯 허공에 멈춘 미트볼을 다시금 제 도시락에 옮겨 놓았다. 나는 열심히 턱을 움직여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너 다 먹어. 괜히 음식 앞에서 깨작깨작… 맨날 배고파서 기운 없는 주제에 그러지 좀 마.”
그렇게 으르고 나니 내가 너무 잔소리쟁이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놈의 보호자도 아니고….’
그 바람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이찬희가 두 눈을, 더는 커질 수 없을 만치 크게 뜨고는 나를 쳐다봐서 더욱 그랬다.
손끝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는 헛기침했다.
“…아무튼 간에 그 노트, 도움이 됐으면 해서 만들어 온 거니까 성의 봐준다 생각하고 읽어 보기나 해. 사람 심리라는 것도 결국 학습적인 거랬어. 나중에도 정 답답하면 뭐, 병원을 다니든지…, 그런 건 스무 살 돼서 네 마음대로 해. 성인이 상담 좀 다닌다고 의사가 부모님한테 연락하진 않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자니 내심 ‘와’ 하고 작은 탄성을 뱉게 됐다. 내가 이찬희의 얼굴에 대고 ‘병원을 다니든지’라는 말을 진심으로 읊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강건우와 처음 갔던 피시방에서 그 성격을 비아냥거리며 의사를 만나야 한다느니 구시렁거렸던 게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노트를 제 가방 안에 넣으며 이찬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좀 전과는 달리 어딘지, 흐뭇하고 또 기쁜 듯한 미소였다.
“알았어, 우신아. 네 말대로 할게.”
…내 말을 똑바로 듣긴 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만둣국 그릇에 숟갈을 툭 내려놓고, 나는 그의 도시락을 턱짓했다. 그제야 이찬희가 제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영 무얼 먹는 꼴을 보이질 않던 녀석이 신경 쓰여서, 나는 그의 식사를 아주 진중히 지켜봤다.
그리고 말했다.
“찬희야, 앞으로는… 내 일에 오버하면서 끼어들지 말았으면 해.”
“응.”
“소란 피우는 거, 괜한 싸움 만드는 거, 불필요한 이목 끄는 행동들. 네 의도가 어찌 됐건 간에 나는 그런 건 딱 질색이야.”
“응.”
하여간 대답은 잘했다. 심드렁하니 주먹으로 뺨을 괴고 있자니 저 멀리, 피자 빵을 두 팔 가득 껴안고 급식실로 돌아오는 강건우가 보였다. 손에 들린 도시락이 덜렁덜렁,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 짓는데, 이찬희가 날 향해 고개를 가까이 숙이며 말했다.
“우신아, 근데 있잖아….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네가 더 이상해.”
“으음….”
이번에 침음하는 건 내 몫이었다.
연두색 목도리에 고개를 깊이 묻은 채 나는 잣나무 산책로를 걸었다. 멀리 보이는 채홍관이 가까워질수록 권태오와의 거리도 좁혀지고 있었다. 전에는 그 얼굴을 한번 훔쳐보자고 기꺼이 올랐던 언덕길이 오늘은 왜인지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내 체중이나 체력에는 변함이 없으니, 아마도 마음이 그때보다 더 무거워진 탓인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꼭 보자고 약속했으니까….’
내 왼쪽에서는 강건우가, 오른쪽에서는 이찬희가 무어라 재밌는 이야길 해대고 있었다. ‘하하’ 하고 가식적인 웃음소리로 동참할 뿐 나는 그들 이야기를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는데, …걔가….”
“아니, 그게…. …때…, …한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귓구멍 안으로 문장이 똑바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멍한 표정을 감추느라 연두색 목도리를 연거푸 고쳐 맬 따름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채홍관에서부터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는 곽성중이 보였다. 두 눈이 우리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 보이기에, 혹시 시비라도 걸어올까 싶어 나도 그를 직시했다.
그러나 의외로 녀석은 말없이 웃는 얼굴로 우리 세 사람을 지나쳤다. 왼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든 채였다.
나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산책로를 마저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근방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끊겼던 이야기를 뒤이어야 할 강건우의 목소리도 이찬희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자, 나와 다를 바 없이 몸을 돌려 뒤를 살피는 강건우의 뒤통수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곽성중을 쫓아 뛰어 내려가는 이찬희가 보였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지 알아채기도 전에, 이찬희가 긴 팔을 뻗어 곽성중의 패딩 점퍼를 쥐어뜯을 듯이 붙잡았다.
“야!”
성큼성큼 걷던 곽성중의 몸이 우리를 향해 홱 돌았다.
“아. 뭐야, 이찬희. 왜?”
킬킬거리며 웃는 낯으로 곽성중이 물었다. 의아해하거나 당황해할 법도 한데, 조금도 그런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찬희가 저를 잡을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즐거운 기색이었다.
“너… 그거 뭐야?”
이찬희가 말했다.
나는 움찔 놀라고야 말았다. 느릿느릿 빠져나온 이찬희의 음성이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며 나와 강건우가 쌍둥이 그림자처럼 그들 뒤로 다가갔다.
“이거? 내 친구네 학교 졸업 앨범인데, ‘은허 초등학교’라고 있어. 이게 왜?”
곽성중이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러고는 팔 안에 든 두꺼운 양장 앨범을 펼쳐 보였다. 1반, 2반… 즐거운 듯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더니, 미리 접어놓은 5반 개인 사진에서 그가 손을 멈췄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이 학교를 권태오도 다녔더라고?”
뒤통수도 창백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이찬희의 뒤통수가 딱 그랬다. 길쭉길쭉한 몸에 달린 동그란 뒤통수가, 유난히 창백하게 질려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유추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답에 도달했다. 하필이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가져다 내밀다니, 곽성중의 의도가 몹시 뻔했다. 그가 가리킨 앨범 안에 권태오의 사진이 들어 있다면, 응당 이찬희의 사진도 있을 거였다. …아니, 이혁의 사진이 있을 것이었다.
‘하….’
걸어 온 시비를 알아차리고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강건우의 반응은 나보다 몇 초 더 느렸다. 그러나 강렬했다.
“야! 곽성중… 이 씨발, 개새끼야! 뭔데 시비야?”
강건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옆얼굴의 콧잔등 선이 일그러져 보일 지경으로 인상을 쓴 채였다.
일순,
‘그럼 그렇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아는 걸 강건우가 모를 리가 없지.’
어쩐지 전부터 이찬희와 잘 다닌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점심을 같이 먹었던 날부터 똥강아지들처럼 서로 잘 어울리긴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우정이 조금 달라 보였다. 여름을 기점으로 강건우가, 뭐랄까…. 이찬희의 기분을 배려해 주고 그에 맞춰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 듯했다.
그 사실을 지금 깨닫다니, 역시 나는 덜떨어진 친구인 게 분명했다. 강건우가 여전히 나를 친구라고 여겨 준다면 말이지만….
“왜 네가 더 난리냐?”
곽성중이 킥킥거리며 이찬희와 강건우를 번갈아 살폈다. 나는 잔뜩 구겨진 미간을 검지 끝으로 꾹꾹 내리눌렀다. 곽성중을 상대하고 싶진 않았지만, 싸움이 나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약점이라도 쥔 듯 낄낄거리는 ‘그 일’은 범죄였고 이찬희는 피해자였다. 내 상식선에서는 도무지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얘들아.”
대번에 살벌해진 분위기를 풀어 내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무어라 중재를 하기도 전에, 곽성중이 보란 듯 접어 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그 속에는 사립 초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리본 타이를 목에 묶은 통통한 남자애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야, 근데 씨발, 너 어릴 때 사진 보니까 개역겹더라.”
곽성중이 지껄인 말에 이찬희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졸업 앨범 속의 ‘이혁’은 지금의 이찬희와 동일인물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달랐다. 눈 코 입이 귀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볼살이 통통해서 얼굴 전체가 둥그스름했고, 눈매도 더 작고 흐려 보였다.
그래도 이찬희라는 걸 알고 봐서 그런지 내 눈에는 어디서 만난 적 있는 사이처럼 익숙해 보였다.
“하하. 돼지 새끼, 너 이 살을 다 어떻게 뺐냐? 설마 지방 흡입함?”
손가락으로 쿡, 쿡 사진 속 이혁을 두들기며 곽성중이 아무렇게나 지껄여 댔다. 이찬희는 흥분한 숨을 식식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 열을 내는 건 강건우였다.
“이 씹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가리 안 싸물어? 뒤지고 싶냐?”
“그만해.”
얼른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나는 강건우의 가슴팍을 뒤로 밀었다. 한 손으로는 곽성중의 손에 들린 졸업 앨범을 붙잡아 쥐었다.
“곽성중, 너도 그만해. 이거 내놔. 뭘 어떻게 알고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놀려도 될 일이 아니란 것쯤은 너도 알 거 아냐?”
앨범을 빼앗아 보려 세게 당겼지만 곽성중은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앨범을 쥔 내 팔을 거칠게 쳐 내고는, 주먹으로 나를 밀어 치워 버렸다.
“너나 끼어들지 마, 아주 가지가지…. 뭘 얼마나 받아 처먹었길래 보디가드 노릇이야?”
퍽 소리 나게 밀린 탓에 나는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서너 발짝 물러서며 겨우 바로 서는데, 지나가듯 곽성중이 뱉은 말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하여간 거지새끼.”
고개를 들자 웃는 낯의 곽성중이 보였다. 그는 더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이찬희의 반응을 살피며 구겨진 앨범을 고쳐 쥘 뿐이었다.
숨을 한 번, 두 번… 들숨 없이 날숨만 내쉰 끝에 내 머릿속이 빨간색이 됐다.
나는 곽성중의 흉통을 향해 온 힘으로 달려들었다.
“악!”
쿵 소리를 내며 곽성중이 나자빠졌고, 그와 동시에 나도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팔과 무릎이 충격으로 얼얼했다. 그러나 아파할 새 없이 나는 곽성중의 배를 깔고 올라탔다.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는 어버버 벙긋거리는 입을 주먹으로 세게 갈겼다.
“억…, 헉, 씨발!”
곽성중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토해냈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뇌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정말로 터져 버렸다. 열 대, 백 대, 천 대를 얻어맞으면서도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가만히 웅크리고 납작하게 기다렸는데, 결국은,
펑.
터져 나온 분노가 좁은 머리 밖으로 흘렀다.
“야, 어…, 우신아!”
무어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한 대, 뺨을 처맞은 곽성중이 팔을 휘둘러 내 턱을 세게 갈겼다. 피부가 찢어질 듯한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곽성중은 팔을 올려 제 얼굴을 막고, 내 주먹을 쳐 내길 반복했지만 나는 놈이 때리는 대로 얼굴이며 어깨며 가슴이며 가릴 것 없이 다 맞았다. 맷집으로 버티면서 그저 주먹만 계속 휘둘렀다.
이런 건 이제 아프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패던 거에 비하면 이런 건 정말이지 아프지도 않았다.
“이…, 이 씨발, 또라이 새끼!”
“헉…, 헉….”
뒤엉켜 싸우는 동안 강건우가 뭐라 소리를 지르고, 곽성중이 침을 뱉듯 욕을 해대고, 이찬희가 이상한 신음성을 낸 것도 같았다. 그 속에서 나는 그저 미쳐 있었다. 미친놈처럼 놈을 때리고, 놈에게 맞고, 달려들었다. 내가 때리고 나를 때리는 게 곽성중인지, 아버지인지, 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우신!”
곽성중과 나를 떼어 놓으려 강건우가 여러 번 우리를 밀고 당겼지만 소용없었다. 내 팔뚝을 붙들어 쥐는 그를 억지로 떨쳐 놓고, 나는 얼얼한 주먹을 곽성중의 더러운 입에 갈겼다.
패악으로 부린 내 성질이 먹혀든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맞는 것에만 익숙했지 때리는 건 서투른 탓에 나는 곽성중보다 먼저 지쳤고, 금세 놈에게 멱살을 잡혀 거꾸로 제압당했다.
“윽!”
다듬어진 산책로 위에 사지를 주체 못 하는 채 나자빠진 순간에는 온몸이 다 아팠다.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습관적으로 팔을 들어 머리부터 막았다. 시야가 단숨에 껌껌해졌고, 익숙한 통증이 내게 밀려들었다. 잔뜩 얻어맞은 곽성중이 화를 섞어 내리찍는 주먹이 매서웠다.
“이, 씨발… 좆도 아닌 새끼가….”
헉헉거리는 숨소리, 정돈되지 않은 증오, 그보다 큰 혐오감을 느끼며 나는 맞고 또 맞았다.
‘난 왜….’
거창한 삶 같은 건 바란 적도 없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살고 싶단 욕심 따위는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자꾸 깎아 놓았다. 망치로 때리고 송곳으로 후벼 파고, 아파 죽겠는데, 힘들고 서러운데 사포로 나를 갈아 놓았다. 그저 내버려 두질 않고 자꾸만 시달리게 했다.
내가 그렇게나 못난 돌이었나….
‘난 왜 이럴까….’
내리꽂히던 주먹이 그친 틈을 타 나는 얼른 팔을 내렸다. 제 풀에 지친 곽성중이 헐떡거리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허억…, 윽….”
재차 놈을 밀치려는데 불쑥,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크고 강한 손길이 곽성중과 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나를 들어 올렸다.
문자 그대로 ‘들어’, ‘올렸다’. 두 발이 일순 허공에 붕 떴다. 힘이 풀린 다리에 휑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커다란 품 안에 온몸이 쑥 들어갔다. 거칠게 몰아치던 주먹질보다도, 거대한 포옹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등줄기가 쭈뼛 서고 온몸에 진땀이 흐르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얼어붙었다.
‘태오야.’
속으로나 그렇게 부를 뿐이지 나는 내 상체를 끌어안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태어나 본 것 중에 제일, 권태오의 얼굴이, 표정이, 정말로 무서웠다.
“태, 오야….”
가까스로 입을 열자마자 권태오는 나를 뒤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나보다 더 겁에 질려 그를 올려다보는 곽성중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몸집으로 권태오가 그의 목을 잡아 누르자 조금 전, 우리끼리 벌인 개싸움은 아주 우습게 느껴졌다.
“컥!”
단번에 나자빠지며 곽성중이 신음성을 냈다.
“아, 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듣자마자 나는 허둥지둥 소리 질렀다.
“하지 마!”
그러고는 성난 권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땀 묻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그의 상체가, 겨울바람의 영향 따위는 받지 않는 듯 한여름 해처럼 뜨끈했다. 온 힘을 다해 나는 권태오를 뒤로, 뒤로 당겼다.
“그만…, 그만! 때리지 마, 태오야! 너는 운동선수잖아, 너는 끼어들면 안 되잖아! 너까지 때리면 집단 폭행이야, 상황 복잡해져!”
이성적으로 내지른 말에 권태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목에는 핏줄을 세우고 이마 위에 신경질이 만들어 낸 금이 간, 그의 검은 눈동자에 내가 빤히 담겼다. 그걸 아는 놈이 상황 복잡해지게 주먹 싸움을 했느냐고, 나를 힐난하는 듯했다.
“내… 말… 들어. 놔 줘, 태오야…. 너는 안 돼. 사고 치면….”
헉헉거리며 부탁할 적에 나는 아래턱으로 축축한 무어가 흐르는 감촉을 느꼈다. 침을 흘렸나 하고 주먹으로 문질러 닦고 보니 시뻘건 액체가 묻어났다. 피였다.
뒤늦게, 입술이 팽팽하게 붓는 느낌과 아릿하게 찢어진 살의 고통이 느껴졌다.
“아, 으….”
신음하며 나는 권태오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시야가 확 트였다. 나자빠진 채 눈물까지 흘려 대는 곽성중이, 오만상을 찡그린 채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강건우가, 두 눈이 새빨개진 채 입술을 멍하니 벌린 이찬희가, 그리고 저 멀리, 성난 얼굴로 달려 내려오는 유도부 코치 선생이 보였다.
“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현실 감각이 밀려들었다.
싸웠다…, 평생 안 그랬으면서. 내내 잘 참았으면서, 하필이면 학교 안에서, 하필이면 같은 반 학생과….
“씨…발….”
울상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깊이 숙이는데, 거친 손이 내게로 뻗어왔다. 뺨과 귀를 붙들어 쥐는 손길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하, 씨발….”
권태오가 앵무새처럼 내가 뱉은 한숨과 욕을 반복했다. 이걸로 두 번째, 엉망진창으로 쥐어 터진 얼굴을 그의 손에 내맡긴 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교무실에는 근무 중인 선생님이 많지 않았다. 서너 명의 선생님이 남아 보충 수업 시험 문제를 만들다가, 유도부 코치에게 붙들린 채 끌려 들어온 우리를 보고는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 우신아!”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하필 마은 쌤이 계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내 앞으로 다가온 선생님의 손이 내 턱을 움켜쥐었다.
“얼굴 꼴이 이게 뭐니!”
“아, 아파요….”
움찔 눈살을 구기며 나는 통증에 신음했다. 쓸데없이 허여멀건 피부라는 게 이럴 때는 단점이면서 또 장점이었다. 곽성중에게 맞은 얼굴에 벌써 보라색 멍 자국이 생겨 있었다.
선생님들이 무어라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나와 곽성중을 나란히 세워 두길 얼마쯤 지났을까, 학생 주임 선생님이 도착했다. 학주까지 오고 나니 ‘정말로 사고를 쳤구나’ 실감이 났다.
“학교 안에서 싸웠다니까, 학폭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넘겨야….”
“…암만 그래도 그렇죠, 우신이는… 안 그러던 애가 도대체….”
“애들 입시가 걸린 문제인데, 제 생각엔… 당장은 본 사람도 없고….”
웅성웅성, 이마를 짚고 턱을 매만지고 팔짱을 껴 가며 선생님들이 논의를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꿈쩍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심각한 얼굴의 마은 쌤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선을 돌려 권태오가 있는 문 쪽을 살필 용기도 나지 않았다.
앞으로 모아 쥔 두 손 안에 식은땀이 찼고 머리 위로 김이 오르는 듯했다. 이렇게 창피하고 부끄럽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런 일로 부끄럽기로는 난생처음이었다.
이내 학주 쌤이 우리 앞으로 의자를 끌며 다가왔다. 풀썩 자리에 몸을 앉히더니, 곽성중과 나를 훑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먼저 시작했어?”
“이우신이 먼저 쳤어요!”
곽성중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에요! 쟤가 먼저 우신이를 때렸어요, 밀쳐서 넘어뜨리는 걸 제가 봤어요!”
그 뒤로 이찬희의 목소리가 경주마처럼 끼어들었다.
“보긴 뭘 봤다고…, 하, 친구라고 편드는 거예요. 이 새…, 아니, 이우신이 먼저 달려들었다고요!”
“목격자가 둘이나 있어요. 건우야, 네가 말해 봐. 너도 봤지? 곽성중이 먼저 우신이 때렸잖아. 그치?”
이찬희와 곽성중이 앞다투어 말을 토해냈다. 기염이라 불러도 마뜩잖을 만치 맹렬한 기세였다. 이찬희의 손에 팔뚝이 잡힌 강건우가 무어라, ‘어어’ 하고는 거짓말에 동참하려는 순간, 학주 쌤이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우신이 네가 말해 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왜 싸운 거야?”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기로 결정 내렸다.
“죄송합니다.”
두 손을 꽉 모아 쥔 채 허리 숙여 사과하자, 정수리 너머에서 ‘끄응’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말했다.
“곽성중이 먼저 밀쳤는데, 때린 건 제가 먼저 때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도대체 왜….”
“거지새끼라고 그래서요.”
교무실 바닥을 빤히 노려보길 한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네 졸업 앨범이니 이혁의 사진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야 했다. 거지새끼인 이우신은 공공연한 일이었지만 뚱뚱했던 이혁은, 모르긴 몰라도 이찬희가 매일 밥을 굶다시피 하며 숨겨 온 비밀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팽팽 도는 머리로는 선생님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까를 생각했다.
키는 엇비슷해도 곽성중에 비해 나는 덩치가 작은 편이었다. 서로 간에 나눈 주먹의 합은 비슷했지만 얼굴을 더 많이 맞은 건 절대적으로 나였고, 무엇보다도 입술이며 코에서 피까지 흘렸다. 보통 사람들은 피를 흘린 쪽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내가 불쌍하겠지….’
생각을 정돈하느라 잠시간 뜸을 들인 끝에, 내가 말했다.
“곽성중이 자꾸 저를 괴롭혀서요…. 저한테 축구공을 찬다든가 시험 문제도, 몇 개 틀리라고 교실에서 뭐라 그러고…. 장학금 받는 것도…, 애들한테 동냥 받고 학교 다니는 거지라고… 자꾸…. 제가 너무 예민해져서 못 참았어요. …죄송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마은 쌤이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와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나니 속이 뜨끔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과 그걸 기반으로 불쌍한 척,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건 다른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발 넘어갔으면, 이대로 넘어갔으면… 바람 끝에, 학주 쌤이 마른세수를 했다.
“안 되겠어. 따로 상담 좀 하자. 곽성중, 이리 와 자리에 앉아. …이우신, 너는 상담실에 들어가 있어.”
당장 학폭위 소리가 안 나온 것에 그나마 안심하면서, 나는 터덜터덜 움직였다. 교무실 밖을 나설 적엔 세 사람이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지만, 바로 옆의 상담실 안까지 들어선 건 권태오뿐이었다.
뒤따라온 강건우의 어깨를 뒤로 밀어 복도로 내보내고는, 권태오가 문을 쿵 소리 나게 닫았다. 문 밖에서 ‘야, 뭐야’ 하는 외침이 들렸지만 권태오도 나도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권태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알고 있었어?”
“뭘…?”
긴장이 풀린 나머지 나는 지쳐 버렸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어서, 상담실의 원형 테이블 앞 나무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앉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귀로만 들었더라면 주먹다짐을 한 게 내가 아닌 권태오인 줄 알았을 거였다. 볼에는 멍울을, 입술엔 피딱지를 단 건 나지만 더운 숨을 삭이느라 헐떡대는 건 권태오였기 때문이었다.
“그 새끼가 뒤에서, 너…. 거지라고 욕하고 다니는 거. 알고 있었냐고.”
“나 거지 맞는데, 뭐.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나 내 침착함은 권태오의 분을 식히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더욱 붉게 달아오르고 이마 위에는 울퉁불퉁 핏줄이 도드라졌다.
“너…, 씨발 안 괜찮을 거면서 왜 거짓말했어?”
권태오가 물었다.
“내가 언…제….”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권태오는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한 발짝은 남들의 한 발짝과는 달랐다.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오자 나는 목덜미가 저릿할 정도로 고개를 높이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봐야 했다.
“사람이, 씨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걱정돼서 기껏 전화하면 맨날 괜찮다고만 하고, 문자를 해도 못 만난다고 바쁘다고만 하고…. 저딴 새끼 말에 빡돌아서 덤빌 만큼 몰려 있었으면서, 왜 날 안 만났어?”
나는 놀라고야 말았다. 권태오가 나라는 사람을 너무나 정확하게 읽어 내린 점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매섭게 화내는 그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더욱 놀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성질을 부리거나 진심으로 욕설을 뱉은 적도 없었다. 권태오를 짝사랑하던 1학년 시절에나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내게 화내는 그를 상상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화난 권태오는 그 시절 나의 상상 속 권태오보다 훨씬, 많이 무서웠다.
“그래 봤자 사흘이었잖아.”
나는 조금 주눅 든 채 말했다.
“사흘 아니야. 5일이었어.”
권태오의 대답은 매섭게도 빨랐다. 이럴 땐 5일이 아니라 닷새라고 말해야 한다…고, 알려 줄까 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혼쭐이 나지 싶었다.
“후우….”
무거운 숨소리가 권태오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숨결에도 무게가 있다면 그 한숨은 내 정수리 위로 퍽 소리 나게 떨어졌을 거였다.
나는 차라리 그 한숨에 세게 맞고 기절하고 싶었다. 나에게 화내는 권태오를 보느니 그편이 훨씬 나을 성 싶었다.
“이우신. 너는 머리가 벌써 어른이라서 잘 못 느끼나 본데, 나는 대가리가 아직 애새끼야. 하루가 씨…발 개같이 길단 말이야.”
“…….”
“뭔 말인지 알아먹어? 지난 5일이 나한테는 5년 같았다고.”
“미안해.”
나는 얼른 사과했다. 조금이라도 그의 화를 풀어 보려 냉큼 뱉은 말의 효과는 내가 바란 것 이상이었다. 권태오의 구겨진 눈썹이 펴지는가 싶더니, 성화로 번들거리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다정해졌다.
“우신아.”
그러고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너는 내가, 네가 힘들어하면 달래 주지도 않을, 그런 못된 새끼로 보여?”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 나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자 권태오의 가슴팍이 들숨으로 크게 부풀었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럼 왜 날 못 믿어? 왜 안 만나 준 건데.”
말끝을 내리며 권태오가 물었고,
“너를 믿어서 일부러 안 만난 거야.”
나는 즉답했다.
“태오 네가… 내 불쌍한 점까지 다 좋아해 줄 걸 알아서… 그게 싫어서 안 만났어. 나는 네가… 네가 좋아하는 내가, 그냥 이우신이었으면 좋겠어. 가난한 이우신, 불쌍한 이우신, 그런 거 말고….”
“우신아.”
“일부러 피해서 정말 미안해.”
윗니로 입술을 눌러 씹었다가, 알싸한 통증에 신음하며 나는 입을 벌렸다. 혀끝으로 훑어 낸 앞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고통으로 미간을 구긴 채 나는 열 오른 콧김을 두어 번 뿜어냈다.
“미안해.”
그리고 세 번째 사과했다. 나를 좋아하는 권태오에게, 그걸로도 충분한 권태오에게.
나는 그가 내 가난까지 좋아해 주지 않았으면 바랐다. 그건 권태오에게 새겨선 안 될 얼룩처럼 느껴졌다. 나는 권태오에게 얼룩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널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
문득 손이 만든 큼직한 그림자가 내 시야를 가렸다. 이내 권태오가 내 귓불을 문지르며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귀에 손의 온기가 전해지자, 감전되는 듯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두 무릎이 절로 서로 달라붙었다. 움찔거리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권태오가 내 시선을 따라 제 몸을 내렸다.
이내 권태오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명화 속 기사들이 그러듯이 무릎 꿇고 앉아, 그가 말했다.
“가난한 이우신, 불쌍한 이우신, 내 눈에는 그런 건 안 보여.”
“…그럼?”
“너는, 정말 어려워. 어려운 이우신이야.”
“…….”
“그리고 너무 예뻐. 예쁜 이우신.”
“…….”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니까, 똑똑한 이우신.”
“그만…. 그만 말해.”
막을 새도 없이 쏟아진 말들에 나는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뒤늦게 들은 말을 부정하는 내 얼굴을, 권태오의 두 손이 와락 움켜쥐었다. 입술과 뺨의 상처를 피해 귀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게끔 각도까지 맞춰 놓았다.
권태오의 검은 눈동자 때문에 나는 속이 다 울렁거렸다. 두 눈동자에 담긴 애정의 온도가 너무 높아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지금도 네가 너무 예뻐.”
권태오가 속삭였다.
“병신 천치처럼 네 문자 하나에 매달리는 주제에 내가 널 불쌍하게 여길 수가 있겠어? 네가 뭐가 불쌍하냐? 너, 정말 하나도 안 불쌍해. 네 옆에 이러고 있는 내가 더 불쌍해.”
나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벙긋거렸다. 울고 싶기도 했고 웃고 싶기도 했다. 1점짜리 권태오가 뱉어내는 100점짜리 문장들이 너무 벅차서, 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무능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우신아, 너는 대단한 이우신이야.”
너무나 무능해서, 권태오가 속삭이는 달콤한 말에 매료되고야 말았다.
“이우신, 네가 날 구한 거야. 네가 없는, 좆같은 옛날로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럼 다신 못 버틸 거 같아.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다고. 알아들어? 너 말고는 이제 아무도 안 보여. 엄마도, 이찬희도, 유도도….”
“유도까지 안 보이면 어떡해….”
“그래, 유도는 좀 보인다. 됐냐?”
“응….”
손등으로 턱을 문질러 닦으며 끄덕이자, 권태오가 피식 웃었다. 새는 듯한 웃음이 그의 뺨에 우물을 만들었다. 조그맣게 팬 볼우물에 나는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권태오는 더는 웃지 않았다. 무어라 똑똑히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꼭, 어른 같았다. 그 앞에서 마구잡이로 타일러진 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너…를, …구했어?”
더듬거리며 내가 물었다.
“응.”
권태오는 빠른 답을 들려주었다. 그 대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구할 필요가… 애초에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찬희 옆의 권태오를 나는 이제 달리 봤다. 한때 이찬희의 다정한 조연이던 권태오는 이제 내 앞에 없었다. 차라리 그는 사랑받는 어린 강아지 옆의, 너무 몸집이 일찍 커 버린 애교 없는 늑대에 가까웠다.
내가 권태오에게 해 준 거라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뿐이었다. 그를 혼내지 않고 탓하지도 않고,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 준 게 고작이었다. 고작 그까짓 일로 권태오는 이제 내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만 쳐다보았고 날 버팀목 삼았다.
“태오야.”
애써 불러 보아도 권태오는 ‘응’ 하는 듣기 좋은 대답 소리를 들려주질 않았다. 다만 엄지를 와이퍼 삼아 내 두 뺨을 좌로 우로 닦아 주었다. 흘린 줄도 몰랐던 눈물방울이 권태오의 엄지를 타고 닦여 나갔다.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자 권태오가 나를 따라 웃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 나는 그의 짧은 머리칼을 그저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권태오는 나를 닦아 내고 나는 권태오를 쓰다듬으면서 시간을 보낸 듯했다. 찰나 같기도 하고 영겁 같기도 한 침묵을 부순 건 노크 소리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입으로 낸 소리였다. 나는 권태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정리해 주었고, 권태오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찬희가 상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우신아, 태오야. 얼른 나와. 지금 나가자. 울 엄마가 곧 올 거야. 내가 불렀어.”
그 말에 내 모든 걱정이 후드득 발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학주 쌤이 나의, 연락도 되지 않는 부모를 부르려 할까 봐 내심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안심해서인지 힘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권태오가 나를 부축했다. 정확히는 내 어깨를 무 뽑듯이 잡아들었다. 덜렁 발뒤꿈치가 들리는 느낌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총을 주자, 권태오가 느릿하게 나를 놔주었다.
“나오래도? 아, 얼른. 가자고오.”
이찬희가 이미 열린 문을 퉁퉁 두들겼다.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복도로 걸어 나갔다.
“너네 어머니…가 오신다는데, 너도 가 버려도 괜찮은 거야?”
어리둥절해져 묻자,
“아니, 안 돼.”
이찬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근데 도망갈래.”
그러더니 언제 떨어진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연두색 목도리를 내게 돌려주었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걸 받아 목에 두르자마자, 목도리는 개 목줄이 됐다. 강건우며 이찬희며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나와 권태오를 붙잡고는 교무실 반대 방향으로 잡아끌었다.
“쉿, 쉿, 빨리.”
후다닥 내달리는 두 사람을 따라, 나는 홀린 듯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찬희네 어머니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교무실에, 그리고 곽성중에게 떨어질 불똥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 폭격의 현장에 섞여 있고 싶진 않았다.
정신없이 교문 밖까지 내달리고 나니 숨이 찼다. 목도리 안에서 열기가 펄펄 끓는 듯했다.
“콜록…, 하아….”
잔기침을 뱉으며 숨을 고르는데, 권태오가 내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조금 전 뛰쳐나왔던 길을 뒤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단숨에 저만치 멀어져 놓고는,
“잠깐 기다려!”
그러더니 산책로 방향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채 권태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내 팔짱을 누군가 잡아 꼈다. 내 어깨가 위로 들리도록 저를 향해 붙들어 당기는 이찬희를, 나는 굳이 떼어 내지 않았다.
피곤한 나머지 그럴 힘조차 나질 않았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하하, 우신아아.”
헤실거리는 이찬희의 미소가 가진 의미가 너무나 분명했다.
‘내 일에 오버하면서 끼어들지 말았으면 해. …소란 피우는 거, 괜한 싸움 만드는 거, 불필요한 이목 끄는 행동들. 네 의도가 어찌 됐건 간에 나는 그런 건 딱 질색이야.’
그렇게 말해 놓고는 20분도 지나지 않아 이찬희 일에 끼어든 나였다. 확실히 오버했다. 대놓고 소란을 피웠고, 괜한 싸움을 만들었으며, 이목을 톡톡히 끌었다. 오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찬희가 나를 놀렸다.
“우신아, 이런 걸 사자성어로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거지?”
그 말에 나는 곧장 눈을 좁혔다.
“그거 사자성어 아니야.”
답답하게 목을 죄는 목도리를 풀어 내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때가 오기만을 노렸다는 듯, 강건우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야, 아주 똑똑하신 이우신 씨.”
그러더니 내 팔뚝을 가볍게 툭, 쳤다.
“그럼 그건 뭐라고 그러냐? 기분이, 일단은 좆같은 건데… 매정하게 구는 새끼 때문에 존나 짜증 나는 거. 그런 거는 뭐라고 그래?”
“어…, ‘섭섭하다’?”
“그거보다 더 쎈 표현 없어?”
나는 연신 눈을 끔벅거렸다. 몇 초간 고민한 끝에, 적절한 표현이 생각났다.
“‘야속하다’.”
“그래, 이 야속한 새끼야.”
그러자 강건우가 곧바로 그 말을 내게 돌려주었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이 아주 맹렬해서,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찢어진 자국이 눌리는 바람에 인상을 쓰며 다시 벌렸다.
“많이 아프냐?”
“조금….”
매운 음식을 먹은 사람처럼 ‘쓰읍’ 소리 내며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사실은 강건우에게,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렇게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내가 내 비밀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듯이, 강건우도 어련히 알아서 그랬겠지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런 성격은 아니었고 강건우의 털털함은 나보다 더했다.
“하, 오늘 진짜 이상한 날이다.”
털레털레 다가와 내 옆으로 붙어 서더니, 쉬운 말로 오늘의 사건을 일축시킬 정도였다.
“하하, 그러게…, 진짜 이상하긴 하다….”
사건의 원흉인 주제에 나도 남 일처럼 말해 보았다.
“우신아, 이거 입어. 춥다.”
불쑥, 강건우와 나 사이를 가르며 다가온 권태오가 말했다. 그 바람에 강건우만 뿔이 났다.
“아까부터 왜 사람을 밀고 그러냐?”
투정하는 강건우를 완전히 등진 채, 권태오는 ‘채홍’ 두 글자가 박힌 패딩 코트를 펼쳐 보였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채홍관까지 왕복하려면 족히 5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번개처럼 돌아온 권태오가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라?”
놀라 묻는 나에게 권태오는 제 패딩 코트를 덥석 입혔다. 그의 체취가 풍기는 패딩 코트는 내겐 너무 컸다. 단숨에 어깨가 두 배로 넓어진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이우신, 너 진짜 쪼그맣다.”
권태오가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이찬희며 강건우며 가릴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비틀었다.
“야…, 나 남자 평균 키는 훨씬 넘어. 네가 너무 큰 거거든….”
아쉽게도 내 반론은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다. 권태오는 패딩 코트의 지퍼를 찍 끌어 올려 잠가 주더니, 풀어헤쳤던 연두색 목도리까지 내 목에 둘둘 감아 끝을 묶어 주었다. 아주 꽉꽉 매 주는 바람에 나는 없던 턱살이 생긴 기분이었다.
“하, 춥긴 춥다….”
“그러게. 오늘 진짜 춥다.”
말로는 ‘춥다’, ‘추워’, 그러면서도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만 헤어지고 집에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털레털레, 정처 없이 걸어서는 학교에서 한참은 더 떨어진 공원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대단한 개그라도 된다는 양 나누면서 볼이 빨개진 채 떠들어 대니 겨울바람도 더는 소매 안을 침범하지 못했다. 오히려 바람이 불 때마다 패딩 코트 속에서 권태오의 체취가 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뜨끈한 마실 것 좀 사 올게.”
멀리 보이는 편의점을 향해 강건우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무어라 농담하면서, 이찬희도 뒤를 쫓아 사라졌다.
“흠….”
공원 벤치에 앉아 멀리, 편의점 유리벽 너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옛날에도 이런 적 있어.”
“옛날에도 뭘?”
권태오가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앞에서 뒤로, 결대로 쓰다듬어 만져 주었다. 코로 ‘흥’ 한숨을 쉬며 나는 그의 팔뚝에 가볍게 상체를 기댔다.
“옛날에도… 으음…,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자기 아들을 막 혼내고 있는 거야. 애는 싫다고 안 간다는데, 아저씨는 아빠 말 들으라고 막…. 그래서 왜 때리냐고 끼어든 적 있어. 아빠 술심부름하느라 소주병을 갖고 있었는데, 내가 그 아저씨를 그걸로 때렸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소란 부렸더니 애 데리고 도망치더라. 봉고차에 태워서 부랴부랴 가 버리던데? 그게 다야. 병 깨먹었다고 아버지한테 혼이나 났지, 뭐.”
말하고 보니 시시껄렁한 얘기였다. 심드렁하니 입김을 후 내쉬는데, 권태오의 시선이 와닿는 거리가 아주 짧았다. 지나치다 싶게 가까운 얼굴을 피해 보려, 나는 목도리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는 날 보며 권태오가 웃었다.
“너 가만 보면, 안 그런 척하면서 되게 착해.”
“오지랖이 넓은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피곤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나 모를 일이었다. 오늘처럼 나선다고 누가 날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펄펄 뛰고 열 내 봐야 나만 피곤할 뿐인데 말이었다.
그래도 몸부터 튀어 나가는 건 나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처럼 곽성중이 시비를 걸어올 때도 그랬고, 운동장에서 날아오는 축구공을 볼 때에도 그랬고, 벌써 5년 전이던 중1 시절 소주병을 흔들어 댄 날도 꼭 그랬다.
“그 애 얼굴은 기억 안 나고?”
그렇게 묻는 권태오의 코끝이 딸기처럼 새빨갰다. 그에게 패딩 코트를 돌려주려, 지퍼를 찍 내리며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옛날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
그러자 권태오가 내가 내린 지퍼를 도로 찍, 위로 올렸다.
“우신이 너는 아무것도 안 까먹을 줄 알았어. 태어나자마자 본 의사 얼굴도 기억할 거 같았어.”
“…그렇지도 않아.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뭐.”
고집쟁이 권태오에게 옷을 돌려주길 포기하고, 나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쌀쌀한 겨울의 냄새가 청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걔는 너 기억할걸.”
어느새 불쑥, 내 옆으로 다가온 이찬희가 내 허벅지 위에 유자차가 든 유리병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뜨끈한 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땡큐’ 가볍게 인사하자, 이찬희가 씩 웃었다. 엄마 얼굴이니 봉고차니 개인적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은 탓에, 나는 아주 약간 부끄러웠다.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이찬희는 내 일화에 대한 제 감상을 늘어놓았다.
“걔는 너 기억할 거야, 우신아. 다시 만났다면 말이야, 너를 보자마자 알아봤을 거야.”
“에이…, 설마.”
그대로 멋쩍게 웃는 내 손안에 쥔 유자차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병을 단숨에 빼앗아 쥐더니, 권태오가 뚜껑을 대신 열어 준 것이었다. 나는 귓불이 화륵 타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렇게나 쓸데없는 친절이라니….
“야, 왜 그래…. 나도 열 수 있어.”
그러자 권태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 병도 깨먹을까 봐 따 준 거니까 오해하지 마.”
그 바람에 나는 두 배로 빨개져야 했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고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권태오는 벌써, 소주병을 들고 낯선 어른을 때리는 나를 상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바싹 마른 목을 달콤한 유자차로 축이는 내 옆으로, 이찬희가 붙어 앉았다. 우리는 셋이 바짝 붙어 앉은 채, 이 추운 날 굳이 아이스크림을 사 온 강건우를 구경했다.
“하, 차가, 하, 차가워….”
“바보 아니냐, 진짜?”
‘허어’, ‘하아’, 새하얀 입김을 뿜어가며 강건우는 청개구리처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동작이며 표정이 몹시 웃겨서, 나는 입술이 당기는 것도 잊고 하하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우리는 퉁퉁 튀는 강건우만큼이나 두서없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화제는 기어코 전교 2등을 해낸 장세라였다가, 곽성중의 그 이상한 성격이었다가, 권태오의 유도 경기 경험담으로 옮겨갔다.
“경기장에 서면 어떤 느낌이냐? 나 같으면 존나 불알까지 떨릴 듯.”
강건우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보라색으로 질린 입술을 손가락질하며 이찬희가 킥킥거렸다.
“넌 경기가 아니라 아이스크림 때문에 떠는 거잖아.”
“어? 씨발 어떻게 알았음? 내 방울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냐?”
상스러운 농담에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도 권태오는 홀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난 솔직히 경기할 때보다 계체 시간이 제일 떨려.”
그 말에 ‘어’ 하고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수업 시간도 아닌데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나! 나 그거 뭔지 알아. ‘계체’는 불교 용어인데, 계의 본체를 이르는 말이야. 계라는 잘못된 일을 막는다는 뜻인데….”
중얼중얼 이전에 공부한 내용을 읊는 내 얼굴을, 권태오의 두 눈이 끔벅끔벅 당황한 듯 바라봤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내 말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계체’는 그냥… 몸무게 잰다는 뜻인데?”
“뭐?”
몇 초간 들은 말을 곱씹던 끝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사전에는 그런 단어 없었는데….’
듣고 보니 지난 11월에 오래도록 품었던 의문이 싹 가셨다. 유도가 종교적인 운동도 아닌데 왜 경기 전후로 불교 의식을 치르느냐고, 혼자서 품었던 불만이 우스워진 순간이었다.
“아하하….”
지난날 진지했고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 웃겨서, 나는 배가 당기도록 킥킥거렸다.
“또, 또. 징그럽게 웃는다.”
강건우가 그런 날 흘겨보며 지적했다. 이찬희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권태오마저 동의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이우신. 나는 네가 제일 어려워.”
매정한 평가를 받고도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학학… 강건우가 ‘징그럽다’고 칭한 웃음소리를 내며 나는 권태오의 어깨에 고개를 숨겼다. 경기 일정표를 띄워 놓고는 계체가 뭔지 몰라 헛공부를 해댄 날 안다면 권태오도 웃을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더 크게 웃음이 났다.
“진짜 웃겨, 이우신!”
긴 웃음이 전염성이라도 가진 듯 강건우에게 옮기 시작했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 막대를 휘두르며 강건우가 나를 따라 웃자, 이찬희도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권태오가 ‘후…’ 한숨을 쉬는 바람에, 그것마저 웃겨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어 댔다.
“야!”
즐거운 순간을 방해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어느 아저씨였다. 걸음걸이만 보아도 술에 취해 보이는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다 소리를 쳤다.
“공원은 뭐 너희들만 쓰냐?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갖춰야지, 어딜…, 엉?”
삿대질이 아무렇게나 우리에게로 향했다. 한 번 두 번 허공에서 까딱이는 손가락을, 강건우는 싸늘해진 얼굴로 흘겨보았다. 권태오나 이찬희의 반응도 그와 다르진 않았다. 그러나 술에 취한 아저씨는 우리의 웃음소리보다 제 목소리가 더 큰 줄을 모르는 듯했다.
“부모가 오냐오냐 키워 주니까 말이야, 어? 요즘 애들은 예절이 없어, 예절이!”
취기로 붉어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저씨를 향해 나는 얼른 목소리를 냈다.
“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은 뒤에야 그는 ‘하여간에’, ‘어잉…’ 하는 의미 없는 말을 한숨과 함께 푹푹 내쉬며 다시금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고 또 휘청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우리는 목을 빼고 지켜봤다.
“…방금 뭐냐?”
강건우가 홱,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너는 그걸 왜 사과를 해 주고 그러냐?”
“그냥…, 몰라? 시끄럽잖아.”
그러자 픽, 강건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머쓱하니 미소 지으며 나는 입꼬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내 얼굴 보고 불량 학생인 줄 안 거 아냐?”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해 보려 농담하자,
“풉….”
권태오가 웃기 시작했다.
“어? 어어? 권태 웃는다!”
신난 듯 강건우가 외쳐도 한 번 터진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내 얼굴이 불량 학생 같단 말이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건우는 뒷짐을 떡하니 지더니,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조금 전 지나간 아저씨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부우모가 오오냐 오냐 키워 주니깐 말이햐아!”
“아하하!”
웃음이 풍선처럼, 그야말로 ‘빵’ 하고 터져 나왔다.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거리낌 없이 웃어댄 끝에 나는 피딱지 앉은 입술이 아팠고, 권태오마저 볼이 아린 듯 주먹으로 문질문질 눌러댔다.
“하여간 어른들은 웃긴다니까.”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12월의 마지막 해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