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람은 거울 앞에서 (11/16)

사람은 거울 앞에서

2학기 개학일은 곧 ‘전공 탐색의 날’이었다. ‘전공 탐색의 날’이란 문자 그대로 대학 전공을 탐색하는 날로, 전교생이 담임, 혹은 희망 전공별로 지정된 선생에게 진학 상담을 받아야 했다.

“하아….”

상담실 문 앞에 줄지어 선 채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 방학이 즐거웠던 만큼이나 개학일은 별수 없이 끔찍했다. 권태오의 방에서 매일 밤 함께 잠들고 매일 아침 웃으며 눈을 뜨던 지난 방학을 떠올려 보면, 과거가 아니라 꿈을 회상하는 듯했다. 가방과 캐리어를 껴안고 2학기 기숙사 방으로 짐을 옮기던 날까지가 딱, 구름 위를 걷고 솜사탕에 안겨 살던 꿈결의 절취선이었다.

“이우신. 너 들어오래.”

반면 앞으로의 현실을 논해야 하는 오늘은, 대뜸 아스팔트 바닥으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래, 우신아. 일단 앉아.”

내가 선택한 상담 선생님은 지난해와 같이 오마은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이번 상담은 지난해와 달리 간단명료하질 못했다. 지난해, 1학년 2학기를 맞이할 적의 나는 망설임 없이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 대학으로 1지망했었다. 하지만 올해, 2학년 2학기를 맞이한 나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 확신 없는 상태였다.

“선생님. 저…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상담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시무룩하니 건넨 소리에도 마은 쌤은 놀라지 않았다. 달라진 내 태도에 당황한 기색조차 보이질 않고,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보다 더 갈팡질팡하며 장래를 고민하는 학생들을 진작에 만나 봤기 때문일 터였다.

비단,

‘경영학과는 경영할 게 있는 집 자식들이 가는 거랬거든.’

이찬희가 꺼낸 말에 기가 죽어서는 아니었다. 없는 집 자식인 일이야 생득적인 것이고 내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내려놓고 산 지 오래되었다.

문제는 그 말 한 마디에 흔들렸던 내 마음에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 노력했지만, 사실 그 ‘목표’라는 것이 내게는 간절하기만 할 뿐 소중하진 않았다는 걸.

그러한 고민들을 나는 되도록 담백하게 축약해서 전달했다.

“장래를 주관식으로 결정지은 게 문제인 듯해요. 옆에 두고 비교해 볼 다른 선택지가 있으면 결정에 확신이 들지 않을까요? 객관식으로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은 쌤은 내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어 주었다.

“우신아.”

먼저 내 이름을 부르고는,

“음….”

학생부 파일을 펼쳐 보였다. 당장 누구의 것을 펼쳐 어느 항목을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이우신’의 학생부는 A+ 성적과 장학금 내역, 그리고 빽빽하게 채워진 생활 기록부로 가득 차 있었다.

성적을 오래 확인할 것도 없이 수학 쌤이 말했다.

“선생님 생각에는 말이야,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대 의예과 수시를 노리는 것도 아주 괜찮을 것 같거든.”

그 말에 내 눈썹은 조금 삐뚜름해졌다. 여름 방학 내내 다른 길을 고민하고 또 찾아볼 적에, 나라고 의대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성적은 문제가 안 됐다.

“그런데요, 선생님. 의대는 소명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로서는 그 점이 문제였다. 그저 ‘돈을 잘 벌고 싶어서’ 의대에 가고, 안정적인 수입을 원하는 마음에 환자를 돌보는 건 도리에 어긋난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심각하게 꺼낸 말에 마은 쌤은 웃기 시작했다. ‘하하’ 소리 내어 웃더니, 두 눈이 하회탈처럼 휜 채로 나를 바라봤다. 난데없는 상황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금은 울컥, 화가 나기도 했다.

“왜 웃으세요?”

“아니…, 하하…. 오늘 의대 가겠다고 안 되는 고집부리는 애들만 열 명 만났는데, 정작 성적이 되는 애가 ‘소명 의식’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참 웃겨서.”

“…….”

“가끔 보면 우신이 너도 참, 헛똑똑이라니까.”

‘너도 어린애가 맞긴 했다’느니, ‘나 원 참’ 하고 어른들 한숨 쉬는 소리를 섞어 가며 마은 쌤은 한참을 더 웃었다. 그 바람에 나는 약간 짜증이 났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내 장래 진로 상담을 맡아 줄 어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서였다.

침묵하며 기다린 끝에, 마은 쌤으로부터 그럴싸한 변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너 정도면 알아서 양심 의사가 되지 않겠니? 우신아, 선생님도 영 정신 나간 애들한테는 의대까지 추천하지 않아. 어차피 갈 수 있는 애들도 몇 없고.”

“네.”

“흐음, 어디 보자…. 어쨌든 1지망 한국대는 변함없다, 그렇지?”

“네.”

“한국대 의예과에 들어가면 시스템이 굉장히 특이한데…. 2주 동안 한 과목 떼고, 시험 보고. 그걸 2년 내내 반복한다고 보면 돼. 문자 그대로 의대 본과에 대비해서 예비 공부를 하는 거지.”

“네.”

“그러고 3학년부터 실습 돌고… 뭐, 그건 나중에 커리큘럼에 따라 다르겠지? 한국대는 선생님이 알기로 병원이 서울에만 네 군데거든? 그 병원들을 로테이션 돌면서 실습 다닌다고 생각하면 돼.”

“네.”

이미 설명해 본 듯 줄줄 흘러나오는 정보들을 나는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상담실로 향하기 전에 진작 찾아본 내용이 대다수였지만, 원 출처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인터넷에 부유하는 글자와 이미 많은 학생들을 한국대에 입학시킨 선생님이 안내하는 말들은 그 무게가 달랐다.

한참을 더 의과 대학에 대해 설명하던 마은 쌤은 문득 말을 멈췄다. 학생부에 꽂혀 있던 시선을 들어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마티스 그림이 그려진 텀블러를 들고 찻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우신이 너는, 수능 끝나고 대학생이 되면 말이야. 술도 마시러 다니고 놀러 다니고, 연애도 하면서 쉬고 싶은 생각은 없니?”

생각지 못한 질문에 나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대뜸 ‘쉬고 싶은 생각은 없냐’니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말이었다.

대답 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마은 쌤이 시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는 선생님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영학과로 진학해서 대학 4년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내내 달리면, 그 생활을 네가 버텨 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침묵하는 내게, 마은 쌤은 일방적으로 말했다.

“의예과는 2학년까지는 비교적 널널하거든. 동아리 활동하고, 그때그때 시험공부하고… 장학금 따기도 경영학과만큼 어렵지는 않고 말이야.”

“…저더러 대학을, 놀기 위해 가라는 말씀이세요?”

“행복해지는 길을 가란 말이야.”

‘퉁’ 소리를 내며 텀블러가 책상 위에 놓였다.

“사실은 작년까지만 해도 네가 왜 경영학과를 고집할까 좀 궁금했었어.”

“돈 벌려고요….”

“의사가 되면 더 많이 벌 텐데?”

“…….”

나는 다시 침묵했다. 이제 마은 쌤은 장난스레 웃지 않았다. 진지한 눈길로 나를 살피기도 잠깐, 다시금 전과 같이 서류철을 열고 슥슥, 족히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대학별 입시 요강을 뒤적거렸다.

학교 선생님들에겐 그들만의, ‘사무적인 말투’가 있었다. 어린 학생을 다루다 보니 기본적으로는 상냥했지만 그뿐이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선생으로 일하면서 매해 학생들에게 뱉어 본 문장들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였다. 같은 말을 반복 재생하다 보면 감정의 고조가 사라졌다.

“아무튼 한국대다, 이거지? 경영학과 관련 자료는 요전에 너한테 뽑아 줬었고…, 의예과로 지원할 거면 수시 원서는 기회균형선발 전형으로 넣으면 되겠네. 자, 여기 의예과 자료도 우선 가져가.”

상냥하면서 심심한 태도로 건네준 종이를, 나는 두 손으로 받아 살폈다. 붉은 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은 ‘기회균형선발’이라는 글자 옆에는 괄호가 열린 다음, 저소득가구 다섯 글자가 쓰인 뒤, 괄호가 닫혀 있었다.

모집 정원은 2명이었다.

“선생님. 이 전형으로는 2명밖에 안 뽑는데…, 괜찮을까요? 일반 전형은 60명을 뽑잖아요.”

“너랑 비슷한 환경인 학생 중에, 너만큼 하는 애가 두 명이나 될 것 같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전해 듣기로 수시 일반 전형으로 한국대 의예과에 입학한 채홍고 선배가 작년에만 세 명이었다. 보내 본 선생님이 하는 말이니 어느 정도의 확신은 있을 거였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종이를 챙겨 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치고 나서려는 내 손안에, 마은 쌤은 커피 과자 대여섯 개를 쥐여 주었다. 과자 포장지가 부스럭거리도록 두 손을 맞잡고,

“우신아. 몇 달 안 남은 거 알지? 궁금한 거 있으면 교무실 찾아오고…. 곰곰이 잘 생각해 봐.”

응원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남기기도 잊지 않았다.

끄덕,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나는 상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제 차례를 기다리느라 복도에 줄지어 선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가 흩어졌다. 품 안의 입시 요강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리고 복도를 걷는 내 등 뒤로,

“이우신은 좋겠다….”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렸다.

“쟤 정도 성적이면 대학도 골라서 가겠지….”

칭찬인지 험담인지 모를 소리를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부러우면 너도 저소득 가구에서 태어나서 수학여행이고 수련회고 다 못 가고 공부만 하던지….’

그런 말을 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야, 그럼 너도 진작 공부 좀 하지 그랬냐?”

일부러 앞만 보며 걷던 내 걸음을 멈추어 세우는 손길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귓가를 울렸다. 불쑥 끼어든 커다란 존재감이 반가워 나는 미소 지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내 손목을 붙든 강건우가 이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그로부터 지적당한 남자애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뭐래, 강건…. 지는 맨날 게임이나 하면서. 너 어제도 접속 중이드만.”

“그래서 난 쓸데없는 소리를 안 하잖아. 어어? 가만. 내가 접속 중인 거 어떻게 알았냐, 너 이 새끼 오프라인으로 게임 때렸지?”

커다란 목소리로 강건우가 농담하듯 을러 놓자 복도에 선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몇 마디 더 농담이 얽힌 끝에 대화가 갈무리될 즈음에는, 개중 누가 나를 부러워한 녀석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어깨를 으쓱이며,

“별것도 아닌 게.”

중얼거리는 강건우를 향해 나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너도 상담 잘하고 와. 나 먼저 교실에 가 있을게.”

“어엉.”

그대로 강건우를 놓고 지나가려는데, 턱 하고 내 몸이 크게 흔들렸다. 팔이 세게 당겨진 바람에 놀라, 하마터면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칠 뻔했다. 움찔 어깨가 굳은 채로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내 팔뚝을 움켜쥔 이찬희가 웃고 있었다.

“우신아.”

“아…, 어.”

“이따가 급식… 넷이서 같이 먹을 거지?”

평안해 보이는 미소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찬희가 물었다. 내 팔뚝을, 살이 아리도록 세게 움켜쥔 사람이 그가 맞긴 한가 알면서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내가 누구랑 밥을 먹겠어?”

눈살을 좁히며 내가 대꾸했다.

교내 행사가 있는 날이면 급식 메뉴도 화려해지곤 했다. ‘전공 탐색의 날’이라는 명목하에 오늘의 급식 메뉴는 버섯매운탕에 돼지목살구이, 보쌈김치, 유산균 요구르트였다. 구태여 급식을 안 먹을 이유도, 같이 먹는 멤버를 바꿀 이유도 없었다.

그제야 이찬희가 나를 놓아주었다. 춘추복 차림이라 셔츠 소매가 길어 다행이었다. 하복 시즌이었더라면 반팔 소매 밑으로 시뻘건 손자국이 드러났을 터였다. 잡혔던 팔뚝이 딱 그만큼 아릿했다.

“미안.”

멋쩍은 듯 구겨진 팔뚝 소매를 펴 주며 이찬희가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강건우는 ‘뭐가’ 하며 나와 이찬희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됐어. 이따 보자.”

그렇게 말하고 지나쳐 걸을 뿐, 나는 이찬희에게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일뿐만이 아니라, 유도부 숙소에서 들었던 그의 옛날이야기에 대해서도 그랬다.

엄마들끼리 친해져서 만나게 된 두 사람, 처음부터 이찬희를 귀찮게 여겼던 권태오, 동급생들이 벌인 못된 장난, 그날따라 화가 나 있었던 권태오가 받지 않았던 마지막 전화, 넉 달간의 납치 사건과 기억 상실, 그리고… 그날 이후 ‘형제처럼’ 같이 지내게 되었다는 권태오의 사정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부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무엇 하나 쉽게 고치거나 바꾸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 일이었더라면 어떡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조차 어려웠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납치를 당했었다니 충격적이었다. 내 지식 안에서의 ‘납치’라는 건 추석 특선 영화에서나 다뤄지는 일이었다. 대체로 영화 속에서 납치를 당한 어린아이들은 마약상에게 잡혀 가서는, 도무지 한국의 어디라고도 생각되지 않는 제조실에서 노동하곤 했다. 혹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과정을 거쳐 장기매매에 이용당한다든지….

어쩌다 그 어린이가 주연급 캐릭터인 경우에는 주인공이 그 아이를 구하러 가기도 했다. 그런 경우 구출에 성공해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게 일반적인 시나리오였다.

나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다음에도 ‘나중에 저 애가 과연 잘 살았을까’ 하는 떨떠름한 고민을 하고는 했다.

이찬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해답을 알게 됐다.

‘아…, 이런 식으로 되는 거구나.’

흔적이 남을 뿐이지 살 사람은 잘사는구나 싶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불편한 일이지 삶에 대한 결격 사유가 되진 않았다.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어떤 것인지 나도 알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찬희의 문제와는 무척 다른 그림이긴 하지만, 내게도 가난이라는 남과 다른 불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선지 이찬희의 고백을 듣고도 나는 덤덤했었다.

‘음… 그랬구나.’

내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그 바람에 이찬희를 놀라게 한 것도 같았다. 한참이나 ‘나는’, 그리고 ‘태오는’을 주어로 긴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끝에, 그 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게 다야? 그래서… 태오랑 나랑 옛날에, 그랬었다는데… 너는 생각나는 게, 그게 전부야? 그거 말고는 나한테 할 말이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나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고요했다. 속눈썹을 적시도록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이찬희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저 그랬다.

그저 그렇기에, 그저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 지금은 괜찮잖아. 난 네가 아주 아팠었다고 들었어, 아파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거라고. …그거나 이거나 비슷한 것 같은데….’

죽을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뒤로 부모가 심하게 과보호했고, 집착했다….

이야기의 골조 자체는 진작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약한 사건과 연루되어 가해자가 존재한다는 점이야 분명 다르기는 했지만, 제삼자인 나로서는 그 사정에 큰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대뜸 이찬희가 아주 가여운 열네 살 소년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지켜 주어야 할 불쌍한 피해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누가 누굴 함부로 연민한다는 말인가. 객관적으로 지금의 이찬희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었다. 건강하니 키도 컸고, 얼굴도 이쁘장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도리어 내 사정을 알고는 별장의 방 하나를 내어 줄 정도로 여유로웠다.

누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건 나는 내 어깨에 지워진 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가난, 배고픔, 신경성 두통, 계절 돌듯이 찾아오는 몸살감기. 넷 중 무엇 하나는 반드시 나와 함께했다. 나는 내 처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런 주제에 남을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거지가 누굴 동냥한단 말이야?’

그런데 권태오는 달랐다. 권태오는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름이었다. 그 애를 생각할 때면 나는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 애 앞에만 서면 나는 멍청해졌다.

아마도 그래서겠지, 가난한 주제에 권태오를 동정한 건…. 친구가 실종된 네 달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열네 살 권태오가…,

‘나…도 아는…데, 내 잘못인 거 아는데….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울 것 같은 얼굴로 허둥지둥 변명하는 열여덟 살의 권태오가 나는 불쌍했다. 바위처럼 커다랗고 모자람 없이 완벽하게만 느껴지던, 먹이사슬 꼭대기에서 놀던 권태오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나보다야 낫고 또 멋있기만 하던 권태오가… 그 순간에는 달라 보였다. 아주 약해 보였고, 어려 보였으며, 슬프고 못나 보였다.

나는 멋진 권태오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 전신을 금방이라도 허물어뜨릴 것처럼 벌벌 떨며 두 눈동자를 정처 없이 흔들어 대는 권태오를 본 순간에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깊은 숨을 ‘후’ 내쉬며 복도를 걷다 보니 저 멀리 우르르 모여든 아이들이 보였다. 인파의 한가운데에 권태오가 서 있었다. 창틀에 허벅다리를 기댄 채,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며 수다 떠는 아이들을 쳐다봤다.

습관적으로 나는 캐비닛 방향으로 붙어 걸었다. 입시 요강 서류와 책을 품에 안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려는 순간, 권태오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나도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어디 가.”

이내 권태오는 저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를 가로질렀다. 내게로 달려오는 그를 보자니 현실감도 들지 않아, 나는 대답 없이 묵묵히 걸음을 빨리 했다.

“어디 가아.”

내게로 바짝 다가오며 권태오가 귓속말을 했다. 가까이 숙여 오는 얼굴에 닿으면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 방학 전후로 가장 많이 변한 게, 아무래도 권태오와 나의 관계일 것이었다.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날 보며 반가워하는 권태오의 얼굴일랑 꿈속에서도 마주하지 못했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권태 왜 저래?”

그러니 나를 쫓겠다고 걸음을 빨리하는 권태오를 향한 웅성거림도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오지 마.”

되도록 뒤를 살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나는 그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내 말에 권태오는 주위를 크게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누가 따라온다는 거냐고 묻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런 권태오가 귀여웠다. 별수 없이 실소가 났다.

내 웃음을 어떤 신호로 착각했는지, 권태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바람에 나는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아플 정도로 세게 팔뚝을 잡혔을 때도 뿌리치지는 않았는데, 권태오가 부드럽게 감싸온 손은 차마 복도에서 뻔뻔하게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먼저 작게 사과한 다음, 나는 살그머니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두 팔로 책을 껴안아 두 손을 감추며 걸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권태오를 응시했다.

“학교에서 손잡는 건 좀… 남자들끼리….”

“…….”

거절당한 제 손을 가만히 노려보던 권태오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느릿 걸어가며 나는 슬금, 복도 앞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같이 걷자는 신호임을 알았는지 권태오가 얼른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우리는 보는 눈이 적은 곳을 찾아 표류하기 시작했다.

“태오야, 있잖아. 비싼 하프를 살 수 있는데 바이올린을 선택한다면, 그건 미련한 연주자일까?”

에둘러 건넨 질문에 권태오가 왼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썹이 나는 조금 신기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권태오가 말했다.

“둘 중 더 좋아하는 걸 하면 되지.”

“…뭘 좋아하는지 아직 모르겠으면?”

내 되물음에 권태오의 얼굴이 자못 진지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심각하게 고심하는가 싶더니, 그는 세 발짝 걷기도 전에 답을 내놓았다.

“그럼 난 하프.”

뚝딱 내뱉는 말에 나는 왜인지 웃음이 났다. 만일 내가 도깨비였더라면 권태오는 내 요술 방망이였겠지. ‘금 나와라’ 하면 ‘뚝딱’, ‘은 나와라’ 해도 ‘뚝딱’ 답을 내놓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귀엽고 또 웃겨서,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실소를 비웃음으로 착각했는지 권태오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하프가 더 비싼 거라며. 나중에 바이올린 켜고 싶으면 하프 팔아서 사면 되잖아.”

심통 맞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내놓은 답이었다. 툭 던지듯 말해 놓고는, 본인도 머쓱한지 괜스레 검은 눈을 굴렸다. 높다란 곳에 달린 잘생긴 얼굴이 복도를 훑을 기세로 땅을 향하다가, 이내 날 담았다.

“…그럼 안 되는 거야?”

불안한 듯 덧붙이는 소리에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상상치도 못한 완벽한 대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돼. 그래도 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아 더는 오가는 아이들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날 향해 깊이 숙인 권태오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좌로 우로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너 되게 똑똑하다, 태오야.”

그러자 권태오가 두 발의 간격을 슬쩍 넓혔다. 더 만져 달라는 듯 키를 낮추는 몸짓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큭큭 웃음을 터뜨리자 권태오의 두 눈이 컴컴해졌다. 검은 동공이 넓어진 채 그는 내 두 눈을 보다가, 입술을 내려다봤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좁혀진 거리에 나는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 금방이라도 입 맞출 것 같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우리 주변의 소리를 전부 차단시켰다.

“…아.”

나는 의미 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자 사라졌던 공기와 소음이 대번에 우리 사이로 밀려들었다. 복도 멀찍이서 공 차는 아이들의 함성, 누구를 험담하는 빠른 말소리, 쉬는 시간을 끝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꼭 나만큼 놀란 얼굴로 권태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앞장서 성큼성큼 걷는 그의 뒤를, 나는 한 발짝의 거리를 남겨 놓고 쫓았다.

굵다란 권태오의 목덜미가 아주 붉었다.

평생 내게 사과해야 할 사람만 만나 보았지 내가 사과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러나 연애를 시작한…, 아니, ‘나중에 연애를 하기로 약속을 한’ 뒤부터는 달랐다. 이제 나는 죄인이었다. 매일매일 너무나 바쁘고 또 바쁘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의 일과는 물론이며 앞으로의 나날들이 하나하나 시험 일정에 맞추어 잡혀 있는, 나는 수험생이었다.

“미안해….”

그게 내 입버릇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내 앞에는 권태오가 있었다. 스톱워치 타이머를 맞춰 놓고 기출 문제를 55분 동안 내리 풀어 내렸는데, 마지막 문제에 답을 적고 고개를 들자 도대체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건지 모를 권태오가,

탁.

소리 나게 스톱워치 버튼을 눌러 준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비워, 잠깐이나마 텅 빈 저녁 시간대의 자율 학습실과 권태오는 투명한 수채화와 거친 유화처럼 서로 어울리질 못했다.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어?”

샤프를 내려놓고 물어도 권태오는 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잘생긴 미간을 힘껏 찌푸린 채, 내 공부 캘린더를 넘겨보기 바빴다. 팔랑팔랑 앞으로, 뒤로 몇 장을 넘기건 온통 빽빽한 일정으로 채워진 페이지뿐이었다.

“‘전국연합 학력 평가’, ‘수학 심화 테스트’? ‘기하’는 뭐고 ‘경제’는 또 뭐야? ‘영어 말하기 대회’. 한국말만 잘하면 됐지 아주 가지가지…. 그 뒤는 ‘중간 지필고사’… 이건 나도 알긴 하는데….”

하나둘, 별표가 그려진 일정들을 골라 읽는 그의 목소리엔 투정이 묻어났다.

“뭐가 이렇게 바빠?”

시험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전혀 몰랐다며 넌더리는 내는 권태오의 손에서, 나는 캘린더를 도로 빼앗았다.

잠깐 사이 구깃구깃해진 10월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내가 말했다.

“너도 바쁘면서, 뭘 그래….”

그러자 권태오의 눈썹이 왕창 구겨졌다.

“그러니까 하는 말 아냐.”

이내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평소 같았더라면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였다. 권태오는 꼭 나만큼 바빴다.

내가 공부로 전교 1등이면 저는 유도로 전국 1등이라 그랬던가, 나는 그 말을 곱씹어 상기하고 또 상기해야만 했다. 1학년 시절부터 어렴풋이 알긴 했었지만, 가까운 사이가 되고 자세히 알고 보니 권태오는 더욱 대단한 선수였다. 서울에서 열두 명의 청소년 선수를 뽑아 국가 대표와 함께하는 원정 훈련장으로 보내자면, 권태오의 이름이 그 명단의 맨 첫줄에 있을 정도였다.

“…내일 몇 시 버스라고 했지?”

나는 덤덤한 얼굴로 캘린더를 살폈다. 그러고는 노란 형광펜을 집어 들고, 내일 날짜로부터 직선을 정확히 세 번 그었다.

앞으로 3주간이었다. 3주간, 권태오를 포함한 열두 명의 청소년 선수들은 러시아에서 온 유소년 유도 국가 대표 선수단과 합동 및 원정 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새벽 5시 반.”

한숨처럼 소리 나는 콧김을 내쉬며, 권태오가 말했다.

“너는 쿨쿨 주무실 때 다녀올 예정이니까, 일어났는데 나 없다고 서운해하지 마.”

길게 뻗어 온 권태오의 손이 내 어깨로 향했다. 이내 딱딱하고 뜨거운 손바닥이 내 목덜미를 감싸더니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어린 고양이들은 뒷덜미를 잡아 주면 안정감을 느낀다던데,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 갔으면 좋겠다….’

그런 기분을 권태오에게 말로 풀어 낼 수는 없었다.

건너 건너 전해 듣기로는 이번 원정 훈련은 청소년 국가 대표 선발 대회를 목표로 했다. 체급별로 1등이 될 선수 한 명, 혹은 두 명만을 꼽아 모으기에 정원이 열두 명이었다. 원정 훈련 멤버에 들지 못한 바람에 뿔이 난 공주윤이 담배를 끊을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걸 본 적 있었다.

대회야 입후보만 하면 모두가 참가할 수 있다지만 원정 훈련은 결이 달랐다. 한 달 두 달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시간 두 시간마다 컨디션이 휙휙 변하는 게 청소년 선수였다. 개중 핵심이 될 선수만을 선별, 3주 내내 식단부터 훈련까지 관리하에 대회에 참가시키는 게 이번 원정의 목적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최소한 중요한 일정을 떠나는 권태오의 마음에 짐을 얹지는 말아야 했다.

“서운하기는 뭐가. 꼴랑 3주 없는 거 가지고 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권태오는 피식 웃고는 말았다.

“그래, 그래야 이우신답지.”

그러고는 내 목덜미를 안마하듯 두어 번 더 주무르다가 놓아주었다.

괜찮은 척 ‘잘 다녀 와’ 인사하며 권태오와 헤어지고 기숙사, 내 방으로 돌아온 밤에 나는 이우신답지 못했다. 공부 노트를 펼쳐 놓고는 3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느라 한 글자도 외우지 못했고, 수학 문제집을 펴 놓고는 습관적으로 문제를 풀어 내리면서도 한숨만 열댓 번을 더 쉬었다.

괜히 피곤해서 이런 거겠거니 생각하며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워도 상황은 비슷했다. 공부가 잘 안 될 뿐만 아니라 잠도 잘 안 오게 되어 버린 거였다. 가슴 위까지 이불을 덮고 두 손은 가지런히 배 위에 겹쳐 올리고는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꼴랑 3주라고….’

말로만 괜찮은 척, 평소 같았으면 쓰지도 않았을 표현까지 붙여 가며 다녀오라고 보냈을 뿐이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3주간 권태오와 헤어지는 게 그럼 안 괜찮으냐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 3주 동안 권태오를 못 만난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솔직히 말해 모르겠다.

이렇게나 답답한 무지라니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보니 금세 새벽 2시였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는 인터넷 강의를 찾았다. 그나마 머릿속에 들어올 법한 국어 시 영역 강의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강사가 하는 말이 아닌, 칠판에 잘못 그어진 분필 자국이 신경 쓰였다.

‘3주면 21일이야. 거의 한 달 가까운 날이지. 태오를 만나고서, 21일 동안 그 애를 못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부쩍 외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못 해도 닷새에 한 번은… 조심이 산책하는 척 운동장으로 올라가면 볼 수 있었는데….’

내일부터는 학교에 권태오가 없다. 아침 운동장을 훔쳐보아도 달리기하는 권태오를 볼 수 없고, 채홍관 관중석에 몰래 앉아도 훈련하는 권태오를 구경할 수가 없다. 복도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음 짓는 그 애를 만날 수 없다. 부루퉁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냉담한 사람처럼 서 있다가도, 남들 시선을 피해 손을 잡아 주면 코를 움찔거리며 웃음을 참아 누르는 권태오와 함께일 수 없게 된다.

“하아….”

이어폰을 귀에서 뽑아 버리고 나는 휴대폰을 두들겼다. 인터넷 창을 열고는 기억을 더듬어, 원정 훈련소며 대회장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신산.’

지역명을 검색하자 곧바로 대한민국 지도가 떴다. 서울에서 얼마나 먼 곳인가 찾아보니, 신산은 대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시였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나는 기차 사이트에 접속했다. 서울역에서 신산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검색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내렸다.

‘1시간 5분….’

가장 빠른 기차를 탈 경우 도착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1시간 5분인 거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괜찮은 것 같았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버스표도 검색해 보았다. 차가 정체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서울에서 신산 가는 버스는 도착까지 1시간 50분이 소요됐다. 그 정도라면, 정말로 보고 싶은 날에는 여차하면 버스를 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됐다.

‘두 시간이면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정말로 만나러 갈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 삼았다.

“…….”

그러고 나니 휴대폰을 통해 확인한 현재 시간이 4시 40분이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이불 안으로 몸을 구겨 넣기도 잠시,

‘미치겠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1시간 5분이든 1시간 50분이든,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벗어나, 잠옷 차림 위에 점퍼를 걸쳤다. 점퍼에 달린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살펴본 룸메이트의 침대 위는 그저 고요했다. ‘커엉’… 코고는 소리가 간간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2학기 들어 새로 만난 룸메이트는 소위 말하는 오타쿠였다. 나를 보자마자 자기가 좋아하는 히로인의 왕자님과 똑같이 생겼다며 삿대질을 해 대기에, 아무튼 ‘왕자님’이라니 칭찬이겠거니 생각했다.

‘어…, 응. 고마워.’

그렇게 인사한 뒤로 룸메이트는 나를 몹시 싫어했다. ‘히로인을 좋아한다’는 게 ‘히로인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아무튼 그 뒤로 룸메이트는 내게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걸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심 그를 최고의 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고 공부를 하건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서건 그 무엇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소설책을 머리맡에 놓고 쿨쿨 잠이나 잘 뿐이지, 룸메이트는 내가 방 밖으로 슬금슬금 나가는 줄도 몰랐다.

나는 곧장 기숙사 정문으로 향했다. 규칙상 사고가 생기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기숙사의 모든 문은 밤 11시 30분부터 새벽 5시까지 자동으로 잠금 상태였다. 그 바람에 나는 싸늘한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분을 멍청한 얼굴로 보낸 뒤에야 새벽 5시가 되어, 겨우 문이 열렸다.

채홍관으로 통하는 산책로를 향해 나는 뛰기 시작했다. 중간에 조심이가 나를 보고는 반가운 듯 컹컹 짖었지만 달래 줄 새가 없었다.

권태오는 아침 일찍 대절 버스를 타고 떠날 예정이었다. 5시 반에 출발한다 그랬으니, 어쩌면 벌써 버스에 탑승했을지도, 지금 달려간다 해도 못 만날지도 몰랐다. 불안한 마음에 두 다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헐떡거리며 내달려 도착한 채홍관 앞 운동장을, 아니나 다를까 여러 대의 버스가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버스는 아직 비어 있었고 운동장에도 기사 여러 명과 코치들이 서 있을 뿐이었다.

“하아…, 하….”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나는 좌우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라도 해 보려, 조용히 채홍관 가까이 다가갔다. 벌어진 문틈 새로,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 같았다.

―…국제적인 교류를 통하여, 어…, 학생 선수들이, 국제 감각을 익히고, 또, 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기를, 어…, 희망하는 바입니다.

나는 뒤늦게 추위를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땀이 비처럼 흐르는 여름이었는데, 가을 잠깐을 지나자마자 새벽바람이 금세 차가워졌다. 춘추복을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온 듯했다.

후드 점퍼를 꽁꽁 여며 상체를 감싼 채, 나는 채홍관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 나무 아래로 갔다. 그러고는 괜스레 후드 모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리 위로 푹 눌러쓰고는 후드 끈도 꽉 조여 턱 밑으로 묶었다.

인사할 새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얼굴 한 번을 보겠다며 잠옷 바람으로 찾아온 스스로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이게 무슨 바보짓이야….’

내 몰골이 이상하다 못해 수상쩍음을 알면서도 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3주나 못 볼 테니, 권태오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권태오가 알았더라면 이런 나를 놀리면서 으스대겠지만, 그런데도 상관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홍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서른 명쯤 되어 보이는 유도부 선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온 선수들과 합동 훈련을 한다더니, 과연 머리가 노랗고 피부가 흰 외국인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머리칼이 짧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태오다.’

권태오는 너무나 잘 보였다.

대절 버스로 향해 걷는 권태오를 나는 가만히 구경했다. 성큼성큼 움직이며 그는 코치와 무어라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선 나무 아래는 어둡기도 하고 또 버스와의 거리도 멀기 때문에, 춤을 추건 알몸으로 서 있건 저쪽에서는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버스에 오르는 줄에 서는 권태오를 쳐다보다가,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나중에… 가는 거 보러 왔었다고 문자 해야지….’

사진 한 장쯤 찍어 남길 생각이었다.

“어….”

그런데 휴대폰 카메라에 담긴 권태오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화면을 확대했더니, 멀뚱멀뚱 까만 두 눈동자로 나를 보던 권태오의 얼굴이 삽시간에 환해지고, 이내 대열에서 이탈해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어….”

단숨에 코앞까지 뛰어온 권태오를, 나는 놀라 올려다보았다. 몰래 찾아온 건 나인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당한 것도 나 같았다.

“이우신!”

권태오가 덥석, 내 턱 밑에 묶인 후드 끈을 붙잡아 쥐었다. 손힘을 못 이겨 엉거주춤 고개를 들어 보이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말했다.

“태오야. 나… 나는 겨울이 싫어. …해가 짧아지면 하루가 짧아서… 그래서 겨울이 싫어. 할 일을 덜 한 기분이 들어서….”

맥락 없이 던진 이야기에 권태오는 웃으며 답했다.

“나도 겨울은 싫어. 겨울에는 훈련이 더 빡세거든. 근육도 뻣뻣하니 경직돼서, 몸 푸는 데에 시간도 많이 들어. 다치기도 쉽고….”

“아, 맞아…. 태오 너, 팔꿈치에 흉터가 있던데… 그것도 겨울에 다친 거야?”

“아니.”

“…그럼?”

눈을 끔벅이며 묻는 말에 권태오는 시시한 농담으로 대꾸했다.

“여우한테 물렸어.”

입을 다물고 그를 흘겨보기도 잠깐, 나는 그를 따라 웃어 버렸다. 그러다가도 잠옷 차림이 부끄러워 고개를 내렸지만, 아래턱이 권태오의 엄지에 꾹 막히는 바람에 얼굴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나는 말했다.

“…겨울이면 좋은 점도 있기는 해. 붕어빵을 먹을 수 있잖아.”

“그래, 그렇네.”

“추워지기 전에… 올 겨울 첫 붕어빵 사먹기 전에 돌아오는 거지?”

“당연하지.”

누가 도깨비 방망이 아니랄까 봐, 권태오의 대답은 시원시원하니 빠르기만 했다. 나는 더운 한숨을 휴 내쉬었다.

“이우신.”

“응.”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올리자, 권태오가 나를 향해 반 발자국 더 가까이 붙어 섰다. 한결 가까워진 권태오의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쓴 얼굴이 막대 사탕처럼 둥그스름했다.

“너… 이러니까 진짜 귀여워.”

권태오가 속삭였다.

“…….”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귀엽다’는 칭찬과, 내 정수리를 덮은 후드 위에 내려앉는 입맞춤 중 무어에 더 놀라야 할지 모르게 됐다.

‘쪽’ 소리가 나게끔 뽀뽀를 남기더니, 권태오가 소곤거렸다.

“형아 갔다 올게, 우신아. 울지 말고 기다려.”

그러고는 제가 말한 말에 제가 부끄러워진 듯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권태오는 저를 기다리는 대절 버스에 와르르 올랐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귀를 움켜쥔 채 얼어 버렸다.

“…형아는 누가 형아라는 거야?”

황당한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운동장을 가득 채운 버스가 한 대 두 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마음 안의 걱정이 무게를 덜었다. 얼마나 먼 거리에 몇 주를 떨어져 있건 간에, 권태오는 권태오였고 나는 나였다. 3주가 지나야만 만날 수 있다면 그 시간 내내 필요한 만큼 그리워하면 그만이었다.

“하아아암….”

뒤늦게 밀려드는 졸음에 하품하며, 나는 달려왔던 길을 미적미적 돌아갔다.

권태오가 없는 학교의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으려 나는 매시간 노력했다. 그리고 특이점을 한 가지 알아챘다. 서로 먼 거리에 있으면 서로에게 소요하는 시간도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권태오가 옆에 없는 오늘에 이르러 나는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됐다.

권태오와 같이 있을 때면 단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각자 무얼 하건 괜찮았었다. 내가 공부에만 열중하고 그는 내 얼굴을 빤히 구경만 하고 있어도 괜찮았고, 권태오가 훈련 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관중석에 앉아 영단어를 힐긋거려도 괜찮았다. 그런데 각자 떨어진 위치에서 맡은 바 할 일들을 하니, 시간을 쪼개어 내지 않고서는 서로의 근황을 알 수 없었다.

권태오가 체중 감량과 훈련을 병행하느라 바쁜 만큼이나, 2학기 중간고사 공부에 집중하느라 나 역시 바빴다. 매일 드문드문 문자를 보내고, 기숙사로 향하는 잠깐 동안 전화를 했지만 그뿐이었다.

만일 나나 권태오 둘 중 하나가 여자였거나, 동성연애가 별것 아닌 일이었더라면 서로 간에 연락하기가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매정했다. 단체 원정 훈련을 나간 권태오와 룸메이트와 한방을 쓰는 내가 마음 편히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일과는 꼬박꼬박 겹치기까지 했다. 내가 중간고사 셋째 날 시험을 치는 동안, 권태오는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 1차 예선전에 참가했다. 자습실에 처박혀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권태오가 보내 온 문자는 반면 심드렁하다고 느껴질 만큼 가벼웠다.

권태오

[예선 1등.]

나는 꾹꾹, ‘몸조리 잘해’ 다섯 글자를 적어 답장을 보냈다.

권태오

[너도.]

덕분에 이리 울렁, 저리 울렁, 파도 속의 나룻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잠깐이나마 놓았던 샤프를 다시 쥐고, 나는 공부 노트로 손을 옮겼다.

‘너도.’

머릿속에서 권태오의 목소리가, 꼭 귓속말을 속삭이듯 뚜렷하게 울렸다.

중간고사 넷째 날, 마지막 시험까지 치르고 나니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오늘은 길게 전화할 수 있을까?’

제출했던 휴대폰을 돌려받자마자 새로 온 문자는 없을까 하고 메시지 함을 훑어보았지만, 권태오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체중 감량을 하면 예민해지게 마련이고, 유도부 훈련장에는 마초들만 가득할 테니 내게 문자할 새가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엄지 끝마디로 휴대폰 액정을 슥슥 문지르며 나는 근래 오간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힘이 날 만한 소식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잠깐, 갤러리를 열고는 어제 아침 찍었던 조심이의 사진을 골라냈다. 새 개껌을 입에 물고 나를 올려다보는 사진으로, 꼬리를 너무 빨리 흔들어 댄 통에 마치 꼬리 없는 개처럼 찍힌 사진이었다.

‘조심이가 너 보고 싶대.’

그렇게 메시지를 입력하려다, 손가락을 우뚝 멈췄다.

‘…아냐, 이런 말 보내면 부담스럽기만 하지.’

결국은 문자 없이 사진만 보내기로 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는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시험지를 정리했다. 가채점 결과 만점인 시험지들을 차곡차곡 파일 안에 챙겨 넣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책상을 똑똑 두들겼다.

고개를 들자, 따로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같은 반 남자애가 보였다.

“야. 너 어차피 대학 정시로 간다 그러지 않았었냐?”

…얘가 누구더라. 어디서 본 적은 있는 듯한데, 목소리만 익숙하지 얼굴은 낯설었다. 도통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서, 그의 명찰을 힐끔 살폈다. ‘곽성중’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고는 나는 침음했다. 이름을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져 침묵하는 내게로, 곽성중이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나는 시험지보다 먼저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감싸 가렸다.

곽성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능 쳐서 대학 갈 거면서 수시 점수는 왜 그렇게 득달같이 챙겨? 어차피 정시면 내신은 몇 개쯤 틀려도 상관없잖아?”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는 이번 시험을 죽 쑨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곽성중의 목소리가 왜 익숙했는지 알아차렸다.

몇 번인가 복도를 오갈 적에 뒤통수로 따라붙는 험담을 들은 일이 있었다. 생긴 게 기생오래비 같다는 놀림은 부지기수였고, 아직도 성적 장학금을 받고 다니냐는 이야기를 들으라는 듯 읊어 댈 때도 있었고, 진로 탐색의 날에도,

‘이우신은 좋겠다.’

복도에서 조롱하듯 구시렁거리던 목소리가 전부 곽성중의 것이었다. 그때마다 기분이 좋진 못했었지만 구태여 시시비비에 맞선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제 시험을 망쳤답시고 내게 분풀이를 하려고 들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잘할 수 있는 걸 일부러 못할 수는 없잖아.”

나는 덤덤하니 대답했다. ‘그럼, 성적이 전교 1등인데 수시 지원을 아예 안 할 거라 생각했냐’는 질문은 나까지 멍청해지는 듯해서 굳이 꺼내지 않았다.

내 대꾸에 녀석은 더욱 심기가 상한 듯 보였다. 인상을 구긴 놈의 얼굴을 나는 무표정하게 마주 봤다.

“아아, 맞다. 너 장학생이지?”

‘툭’, 소리가 나도록 곽성중이 중지로 내 필통을 건드렸다.

“1등 놓치면 학교도 못 다니지, 참.”

모로 틀어진 필통 안에서 컴퓨터용 사인펜이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거지….”

펜이 구르는 소리와 함께, 들릴 듯 말 듯 작은 음성이 섞여 들렸다. 제 할 말을 마친 곽성중은 홱, 앞으로 고개 돌렸다. 입을 다문 채 나는 그 뒷머리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뒤통수를 깡 소리 나게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최악의 악수였다.

그렇다고 말로 한 소리 해 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교생이 상담실에 들러, 지원할 수 있는 학과와 유지해야 할 성적에 대해 선별받은 게 얼마 전 일이기 때문이었다. 학생부로 가야 할지, 서류로 가야 할지, 수능으로 밀어붙여야 할지… 학생 한 명 한 명 디테일한 진학 상담을 거쳤다. 2학기 들어 초조해진 놈이 곽성중뿐만은 아니란 의미였다.

중간고사 성적으로 모두가 예민할 때에, 함부로 소란을 피워서 하등 좋을 게 없었다.

“어어?”

그때 불쑥, 문득 놀란 듯한 탄성이 들려왔다.

“성중이 이번에 너 전교 2등이야? 와, 축하해!”

“뭐…?”

곽성중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당황한 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톡’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돌아온 컴퓨터용 사인펜과 함께, 나는 어느샌가 내 책상에 걸터앉은 이찬희를 올려다봤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자리로 몰렸다.

“…아니. 내가 언제 그런 소리 했다고 그래?”

황당하다는 듯 곽성중이 묻는 말에,

“응? 아니야?”

이찬희가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그러고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아아…, 나는 그게 아니라… 네가 우신이한테 몇 개 틀려 달라고 그러길래… 성중이가 시험을 그만큼 잘 쳤구나 싶어서 그랬지. 우신이는 이번에도 1등일 테니까.”

맥락만 대충 훑으면 맞는 말 같았지만, 하나하나 따지며 듣자니 이상한 소리였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왜곡이 다른 녀석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자극적이란 점이었다.

“뭐야…, 곽성중. 일부러 틀려 달라는 소릴 했다고?”

큰 목소리로 대놓고 물어 오는 남자애가 있었고,

“아…,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나 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 치는 이찬희가 있었으며,

“대체 뭐라고 했으면 그렇게 잘못 들을 수가 있는 거야?”

농담하듯 호기심에 질문하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물 흐르듯 만들어진 대화의 장 가운데에서, 이찬희는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그러나 커다란 눈동자를 좌로, 우로 굴리며 곽성중을 바라볼 뿐, 그는 아무런 해명도 대신해 주질 않았다. 자연스레 아이들의 시선이 곽성중에게 향했다.

“아니 나는….”

곽성중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우신은 수시로 대학 갈 것도 아니라면서 자꾸 1등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전교 2등이냐고요.”

일 벌이길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소란해지자, 하나둘 말을 얹으며 저들끼리 한 마디 두 마디 대화를 시작했다.

“진짜 2등인 박민아도 가만있는데 왜 쟤가 지랄이야?”

누군가 외친 말에 박민아가 짜증스러운 듯 ‘아’ 소리를 내질렀다.

“야, 닥쳐라. 여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곽성중! 넌 왜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래?”

“근데 이우신 진짜 수시 안 넣어? 아니지 않아? 지가 뭘 안다고….”

이리저리 요란해진 와중에 나는 이찬희의 옆얼굴을 살폈다. 손등으로 뺨을 닦으며 그는 난색을 표하는 듯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려 보였다.

‘지금, 일부러….’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연 순간 교실 앞문이 벌컥 열렸다. 시험 전 제출했던 전자 기기의 두 번째 꾸러미를 안아 들고 돌아온 강건우는 웃는 낯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럽냐?”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좋아하는 게임에도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는 날이겠다, 강건우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큰 목소리로 그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다시금 곽성중에게 가 꽂혔다.

“성중아, 미안.”

이찬희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자, 곽성중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내 녀석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아. 씨발. 이찬희 진짜….”

“…….”

그리고 아주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왜 괴담 좋아하는 애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면 귀신이 지나간다는 뜻’이라고 농담하는지 알게 됐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싸늘해지자 그 온도가 딱, 귀신 치마폭이 이렇겠거니 생각될 정도로 차가웠다.

“아, 아니, 나는….”

곽성중이 다시금 입을 열었고,

“씨발?”

아이패드며 태블릿 PC가 가득 든 꾸러미를 교탁 위에 내려놓고 강건우가 소리를 쳤다.

“너 방금 씨발이랬냐? 야, 씨발은 네 인성이 씨발이에요. 뭔데? 어?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 지랄이야?”

“건우야, 아니야. 싸우지 마…. 내가 잘못해서 그래.”

재차 손사래 치는 이찬희의 손목을 나는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도저히 더는 멍청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하고 이리 나와.”

그러고는 이찬희의 손을 끌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황당하다는 듯 우리를 쳐다보는 강건우에게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 보인 다음, 오가는 시선이 적은 곳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패기 있게 이찬희를 끌고 나온 것치고 내게는 떠오르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은 익숙한 구름다리로 이찬희를 데려가 세워 놓았다.

“이찬희, 너… 대체 왜 그래? 왜 소란을 피우는 거야?”

황당한 마음을 터뜨리듯 내가 물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찬희가 입을 열었다.

“우신이 너는 왜 내가 안 불쌍해?”

“…뭐?”

이건 뭐 동문서답도 아니고, 동문서문이었다.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구름다리 난간에 기대어 붙였던 등허리를 떼어 내더니, 이찬희가 곧게 섰다. 구부정하던 자세를 바로 고치자 그와 내 눈높이가 보다 벌어졌다.

“이상하다. 왜 너는 날 불쌍하게 생각 안 하지? 너랑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약점까지 다 말했는데 불쌍해하지도 않고, 남들 앞에서 편까지 들어 줬는데 화만 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찬희가 말했다. 키는 커다래서는, 고양이처럼 구는 몸짓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너….”

내가 입을 열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어.”

이찬희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 짓도 안 당했어, 나. 넌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눈치니까 알려 줄게.”

심드렁한 얼굴로 이찬희는 홀로 구시렁거렸다.

“그냥…. 그냥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서 내가 도망을 안 쳤던 거뿐이야. 그 아저씬 딱히 아무 짓도 안 했어. 날 때리지도 않았고 가둬 놓지도 않았어. 가끔 구박이나 했지.”

‘그 아저씨’가 누구인지를 유추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 질문의 답안은, 지금은 징역을 살고 있다는 그 옛날의 납치범뿐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타인은 내가 처음임을.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 맨날 가요 프로그램이나 보고, 남자 아이돌이나 좋아하고…. 정신병자까지는 아닌데, 덜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두 눈을 잘게 깜빡거리며 이찬희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누구든지 나를 찾으러 올 거라고 생각해서 얌전히 기다렸어. 보통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엄마가 날 찾으러 왔거든. 그런데 안 오더라고. 날 못 찾더라고. 그렇게 며칠 정도 지나고 나니까,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어. 그냥… 엄마가 없으니까 그게 자유 같았어.”

그렇게 속삭이며 이찬희는 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진 채 나는 이찬희의 손끝을 바라봤다. 흰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짝 깎은 손톱이며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구레나룻이, 그제야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이찬희는 자랑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가 이랬어.”

보란 듯 제 이마 라인을 손끝으로 훑는가 싶더니, 그가 내 팔목을 잡아 제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교복 셔츠를 따라 벨트, 그리고 지퍼라인에 손끝이 닿자 나는 얼른 잡힌 팔을 빼냈다. 이찬희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말했다.

“여기도. 엄마가 다, 없애 줬어. 털이 없어야 깨끗하고 예쁘다고. 어릴 때부터 그랬어. 눈썹이 이상하면 뽑아 버리고, 뾰루지가 나면 병원을 다니고,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해.”

“저기, 이런 말은….”

“그런데 5학년 땐가? 엄마가 태오네 이모랑 놀러 다니느라 나를 덜 신경 쓰더라고. 그래서 태오랑 잘 지내야 했는데…, 태오가 나를 귀찮아하는 거야. 그래서 집에 안 돌아갔지. 그냥 아저씨랑 살았지.”

“그만 얘기해.”

“…네 달이나 지나서야 경찰한테 덜미를 잡히니까, 아저씨가 나를 산에 데려갔어.”

“이찬희….”

“막상 그 아저씨가 나를 묻으려니까, 야… 되게 살고 싶더라.”

“찬희야.”

내게로 쏟아지는, 내가 듣기에는 지나치게 비밀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막아 보려 나는 이찬희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움찔 놀랐다. 웃는 낯에 두 뺨이 발그레해서 마냥 따듯할 줄 알았는데, 이찬희의 손은 언젠가 그랬듯이 아주 차가웠다.

차가운 손을 나도 모르게 세게 움켜쥐었다가, 이찬희가 웃음 짓기에 얼른 놓았다.

내가 제 손을 놓자마자 이찬희는 역으로 내 손을 옭아매듯 붙들었다.

“우신아.”

그리고 말했다.

“네가 이야기 좀 잘해 줄래? 내가…. 내가 태오한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태오한테 말 좀 해 줘. 응?”

나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그의 말을 나는 도저히 끊어 놓을 수가 없었다. 웃는 듯 역삼각형을 그린 이찬희의 입 안에서, 빨간 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거 같길래, 마침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서, 다 같이 새롭게 잘 지냈으면 하고 그랬던 거라고. …천둥이도….”

말끝에, 이찬희는 소리 없이 두어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천둥이도 진짜, 무서워서…. …그래도 조심이는, 이번에는, 내가 참을게….”

못내 억울한 듯 이찬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예쁘장하니 귀염상이라고 느껴지던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내가 큐피드가 되어 주겠다는데, 너는 왜 화내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 엄마는 이렇게 잘만 하던데…. 친구도 잘 사귀고, 잘 놀고 잘 지내던데. 왜 난 그게 잘 안 될까?”

눈살을 찌푸리며 왼쪽 눈썹을 추켜올린 이찬희의 얼굴이 처음으로 내 또래 소년처럼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이인 양 나는 이찬희가 낯설었다.

“…너네 엄마도, 너처럼… 그래?”

그래서 목소리조차 어색하게 나갔다. 자연스럽지 못하게 쭈뼛거리는 내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이찬희는 웃어 보였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훨씬 나아. 나도 엄마처럼 되고 싶어. 그래서 노력하는데… 왜 내 의도대로 되지가 않지?”

이내 이찬희는 홀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술을 멈춘 이찬희의 손을, 나는 재차 낚아채듯 잡아 쥐었다. 마치 서로의 손이 발언권이라도 된 듯했다.

“근데, 찬희야. 그러면 좀 덜 외로워져?”

누구 앞에서든지 계산해서 그린 듯이 행동하고, 억지로 웃음 짓고 거짓말을 하고 살면 좀 덜 외로울까? 이찬희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나는 답을 알게 되었다.

“우신이 너도 내 말은 다 거짓말 같지? 너도 내 말, 안 믿을 거지?”

이번 질문은 꽤나 쉬웠다. 기출문제로 따지자면 1점짜리도 못 될 터였다.

“아니. 거짓말 안 같아.”

나는 가뿐하게 대답했고,

“너 울잖아, 거짓말할 땐.”

검산까지 내놓았다.

심드렁하니 내뱉은 대꾸에 이찬희는 반응하지 않았다. 놀란 듯 손을 들어 제 뺨이나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 습관적이고 연극적인 동작이 나는 슬슬 진절머리가 났다. 손을 들어 이찬희의 손목을 낚아채고, 그의 두 손을 수갑 채우듯 내 두 손으로 붙들어 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찬희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너도,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태오한테 할 말이 있거든 네가 직접 말해. 난 너네 둘 사이에 껴서 전령 역할이나 할 생각 없어. …큐피드 같은 것도 필요 없고.”

‘큐피드’라는 말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자 나는 애썼다. 권태오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어떤 마음들을 갖고 서로를 보고 있는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찬희가 안다는 사실이 무척 낯간지러웠다.

도리 없이 열 오르는 뺨을 식히느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숨을 정돈하고는, 지금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경고를 뱉었다.

“그러기 싫으면 앞으로는 독립하고 싶다든지 내가 부럽다든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응.”

그리고 선뜻 튀어나온 대답이 나를 놀래켰다.

바보처럼,

“어?”

멍하니 되물으며 고개를 들자 이찬희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금방이라도 이마로 박치기를 할 것처럼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서, 그는 두 눈동자를 환히 밝혀 놓았다. 활짝 웃는 미소가 해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응. 그럴게, 우신아!”

내 말을 도대체 이해하기는 한 건지, 영문 모를 호의로 가득 찬 그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너는 도대체 왜… 날 좋아해?’

문득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와 묻기에는 너무 늦은 질문이었다. 그 사실을 지적하기라도 하는 듯 이찬희는 내게 질문할 틈을 주질 않았다. 다만 내 손을 와락 잡고,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우신이 너, 배고프겠다.”

어깨가 당기도록 센 힘으로 나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권태오의 빈자리는 다른 어디에서보다 급식실에서 도드라졌다. 학교 안의 여러 무리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어떤 무리이건 궁극적으로는 ‘짝수’를 맞춘다는 거였다. 만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종국에는 둘둘씩 짝을 붙여서 커플을 만들어 내곤 하는데, 그 이유는 뻔했다. 홀수가 되면 누구 하나는, 떨어져 앉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림이 영 나쁘기 때문이었다.

권태오가 없어 세 사람이 된 우리들의 모습이 딱 그랬다. 식판 가득 고봉밥을 담아 들고 나는 식탁 자리에 먼저 앉았다. 그러자 이찬희가 웃음 지으며 내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옆에 앉아.”

내 옆자리를 턱짓하며 내가 말했다. 이찬희와 내가 짝을 지어 마주 앉아 버리면, 늦게 온 강건우가 마주 보는 사람 없이 혼자 앉아야 했다. 그보다는 가장 안쪽 자리인 내가 혼자 앉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이찬희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내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우신아, 내 반찬도 먹어.”

“너 먹어. 어차피 두 번 받아 올 거라서 괜찮아.”

내 대답을 깨끗하게 무시하면서, 이찬희가 제 식판의 반찬들을 내 그릇에 퍼올리기 시작했다.

한 발 늦게 식탁 자리를 찾아온 강건우는 앞자리를 비운 나와 이찬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찬희와 마주 보는 자리에 식판을 내렸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강건우를 올려다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녀석이 으스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내가 찬찬이랑 더 잘 지내니까 질투 나냐?”

느닷없는 소리에 나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뭐…. 잘 맞아서 친해지면 좋은 거지….”

“뭐야, 이우신.”

어리둥절하니 중얼거리자, 강건우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씨…, 너 요즘 마음에 안 들어!”

“…왜 화를 내고 그래?”

이내 강건우는 내게 토라진 듯 고개를 이리 홱, 저리 홱 돌리며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나 삐졌어’라고 심하게 자기 주장하는 그 애를 쳐다보면서 나는 한우사골곰탕에 딱 두 젓가락 든 당면을 건져 먹었다. 호로록… 면을 흡입하는 소리에 강건우는 더 성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강건우가 무어라 따지려는 순간,

“시험은 잘 쳤어?”

소매 단추를 단정하게 채운 팔이 쑥 다가오더니 딸기맛 요거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힐끔 시선을 들자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장세라가 보였다.

장세라는 요거트를 자릿세 삼아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매점에서 데워 온 듯 김이 나는 햄버거의 포장지를 뜯더니, 아예 합석해서 식사하기 시작했다.

“잘 먹을게.”

받은 요거트를 식판 옆으로 슬그머니 당기며 내가 말했다. 주는 음식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야, 장세라. 네 친구들 있는 데 가서 먹어. 이우신 앞에 앉아 주지 마!”

강건우가 괜한 성질을 부려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세라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웃는 얼굴로 나를 구경했다.

나는 곰탕에 찹쌀보리밥 반 그릇을 말았다. 뭉친 밥을 뜨거운 국물에 담근 다음 숟갈로 갈라놓으며 퍽퍽 쪼갠 다음, 크게 한 술 입에 넣고 젓가락을 들었다. 석박지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자 싱겁던 입 안이 단숨에 달큼해졌다. 가을무의 식감이 아삭아삭했다.

“우신이 먹방 해도 될 거 같지 않아?”

장세라가 활짝 미소 지으며 속삭였고,

“먹방이고 나발이고 절루 가라고.”

강건우는 오늘따라 심통 맞게 굴었다.

투닥거리는 말소리를 들으며 연근 반찬에 붙은 아몬드를 젓가락으로 떼어 먹자니, 오가는 시선들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뜸 착하게 굴기 시작한 이찬희, 어째선지 왕창 토라진 티를 못 감추는 강건우,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남이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장세라에 이르기까지… 이런 걸 두고 집단 독백이라고 말하는 건가 싶었다.

‘태오는 밥 잘 먹고 있으려나….’

나도 그 자리에 집중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도피할 곳은 권태오 생각뿐이었다.

[권태오]

밤마다 문자만 나누기를 닷새째에 걸려온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밀어 눌러 웅웅거리는 진동음부터 없앤 다음, 나는 자습실 밖으로 소리 없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태오야.”

복도로 빠져나가자마자 그렇게 부르자,

―하하.

권태오가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어…. 전화해도 돼? 선수들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입술을 슬쩍 비틀며 묻는 말에 권태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목소리로, 러시아 놈들만 잔뜩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간단히 서로의 근황을 보고했다. 어쩔까 고민한 끝에 나는 이찬희와의 대화는 우선 차치하고 중간고사에서도 1등 자리를 지켜 냈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룸메이트가 나를 히로인 왕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한편 권태오는 2차 선발 경기가 목전이라 아주 바쁘다고 했다. 휴대폰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옮겨 붙이며,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경기 날짜가 언제인데?”

―11월 18일.

그리고 긴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학력 평가날이네.”

―학력…, 너 그거 전에도 치지 않았어?

“그건 두 달 전, 9월 평가였잖아. 이번에는 11월 평가.”

―와, 진짜 바쁘네. …그거 치고 나면 그 뒤엔 또 뭐 없지?

“무슨 소리야, 기말고사 쳐야지. 태오 너도 기말은 쳐야 할 거 아니야.”

―아, 맞다. 그러네.

소시지처럼 이어지던 대화의 끝에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입 안에서 감도는 아쉬운 감정의 씁쓰레한 맛에 갈증이 났다. 하필이면, 예선전도 중간고사와 겹치더니 선발전까지 학력 평가와 날짜가 겹칠 게 뭐란 말인가.

내 생각을 알기라도 했는지 권태오가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너 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어. 신산에서 하는 경기라서 서울이랑은 멀기도 하고, 그 날 날씨도 엄청 춥다 그러고. 벌써 겨울 시작이랜다.

“응.”

-괜히 신경 쓰지 마, 이우신. 별로 중요한 경기도 아니니까.

“응.”

대답만 그렇게 할 뿐이지 나는 별수 없이 울적해졌다. 권태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신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이번 경기는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 및 국가 대표 2차 선발전’이었다. 이름이 장황하게 길고 ‘국가 대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만큼이나 몹시 중요해서, 대학교 교수들은 물론이며 현 국가 대표 선수촌에서도 직원들이 여럿 참관할 예정이었다. 올해 들어 제일 큰 경기라고도 했다. 물론 권태오가 아닌, 인터넷이 그렇게 말했었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내리누르며 나는 애써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경기 힘내. 준비 운동도 열심히 하고…, 다치지 말고. 마음으로 응원할게.”

―그것만 해 줘도 영광이야.

“영광은 무슨….”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무어라, 권태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상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급한 인사를 마치면서 권태오는 전화를 뚝 끊었다.

뜨끈해진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멍하니 멈추어 있기도 잠시, 나는 얼른 자습실의 내 자리로 돌아갔다. 파란 체크무늬 방석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고, ‘국가 대표 2차 선발전 일정표’를 검색했다.

얼마 동안 인터넷을 헤맨 끝에 한국유도협회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일정표가 담긴 PDF 파일을 내려 받을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열어 본 경기 일정표는 다음과 같았다.

09:30~ 계체 실시

11:30~ 개회식

01:00~ 대회 시작

18:30~ 결승 및 시상식

‘뭐야? 일정 설명이… 이게 다야? 자세한 대진표 같은 건 없는 건가?’

불친절한 시간표에 헛숨이 절로 들이켜졌다. 이래서야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결승식이 있고, 또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 뒤에 시상식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결승식’에는 권태오가 올라갈 것이고, 시상식의 가장 높은 단상 위에도 권태오가 설 텐데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계체’라는 게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시상식을 마친 뒤에도 ‘공식 계체’라는 것이 쓰인 걸로 보면 아주 중요한 일 같은데, 사전에 검색하니 불교 용어가 하나 나왔다.

계체

1. [명사] (불교) 계사별의 하나. 잘못된 일을 막고 나쁜 짓을 그치게 하는 힘을 지닌 계(戒)의 본체를 이른다.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뭘까?

호기심이 생겨 잠시 사전을 뒤적거렸다. 불교에서는 덕, 바른 행동, 도덕, 도덕의 규율, 계율을 합쳐 ‘계(戒)’라고 일컫는데, ‘계사별’이란 그러한 계(戒)를 넷으로 나눈 거였다. 계체 외에도 율법 그 자체를 뜻하는 계법, 이를 실천, 수행함을 뜻하는 계행, 그리고 계행에 따르는 차별을 이르는 계상이 있었다.

‘유도가 이렇게 불교적인 운동이었나?’

어리둥절한 상태로 나는 ‘계사별’ 네 가지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복습하기로 하고, 우선은 학력 평가 시간표를 꺼냈다.

마지막 시험인 4교시, 한국사 및 탐구 영역 답안지를 제출하는 시간은 정확히 16시 24분이었다.

학교에서 서울역까지는 택시를 타면 20분 거리이며, 서울역에서 신산역 가는 가장 빠른 기차는 도착까지 1시간 5분이 소요됐다. 신산역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시간을 더해 봐야 알겠지만, 18시 30분에 시작된다는 결승 및 시상식을 어쩌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승식이 얼마나 걸리는지, 시상식은 정확히 몇 분에 시작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엄지 위로 샤프를 돌리며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날 경기를 보러 가겠다고 미리 말해 놓고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권태오의 집중력만 떨구게 될 거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아예 말하지 않고 찾아갔다가 시간이 맞으면 응원을 해 주는 게 더 낫지 싶었다.

‘도움 주진 못할망정 방해가 된다면 큰일이니까….’

경기 중간에라도 도착한다면 관중석 뒷줄에 숨어서 결승전을 보고, 시상이 끝날 때쯤 연락해서 ‘나 여기 있다’고, 놀래켜 주며 축하도 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태오가… 반가워하겠지?’

학교에서 빠져나갈 시간이며 미리 예매해 둔 기차표, 도착해서 타야 하는 신산 시내버스 번호까지 한 줄 두 줄 계획을 적어 내리면서 나는 너무 기대하지 않고자 애썼다.

그러나 권태오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내 마음 안의 기대감도 내 뜻대로 짓눌리질 않았다. 그를 만나러 가겠다는 내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11월 학력 평가 당일, 4교시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는 OMR 카드를 걷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종례를 기다릴 새도 없이 가방을 챙겨 들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다.

“서울역으로 가 주세요.”

계획대로 역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끊어 두었던 KTX 기차에 올랐다. 급하게 구하다 보니 남은 표가 적었던 탓에, 영유아 동반 좌석에 앉아야 했지만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한 시간 동안 더 시끄러운 쪽이 무어냐를 굳이 꼽자면, 뒷자리의 어린아이 울음소리보다는 내 속이 초조하게 타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신산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미리 알아봐 둔 시내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버스가 문제였다. 시간에 맞추어 탑승한 버스는 내 예상과 달리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신산이라는 도시에 처음 와 본 탓에, ‘서울보다는 차가 덜 막히겠지’ 생각한 게 오판이었다.

‘신산실내체육관’이라는 정거장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한국유도협회 홈페이지를 몇 번이고 열어 보았다. 그러나 경기 일정표는 변함없이 불친절했다.

마침내 신산실내체육관 정거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릴 무렵에는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38분이나 늦은 때였다. 제발 천재지변이라도 생겨 경기 일정이 밀렸으면 기도하면서 허둥지둥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삼삼오오 무리 지은 사람들이 나와는 역방향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입술을 꾹 깨물며 도착한 경기장 안의 분위기는 무척 어수선했다. 실내의 공기가 실외보다 더 느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리저리 대열이 흐트러진 경기장 위에는 선수들이 보이지 않았고, 몇몇 스태프들이 허공에 걸린 태극기를 내리는 중이었다.

상을 받는 단상 위에는 이미 누군가가 뿌려 놓은 종이 가루들이 흩어져 있었다.

‘벌써… 시상식까지 끝났나 봐….’

늦었다. 너무 늦어 버렸다.

평생 안 해 본 지각을 했단 사실을 알자마자 ‘탁’ 하고 풀린 맥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뒤늦게 숨이 벅찼다.

‘태오…, 태오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나는 낯선 경기장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지독하게 넓고 또 커서는,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도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경기장 주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에 밖으로 나와 복도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동색 메달을 목에 걸고 낄낄거리며 나서는 무리가 보였다.

낯선 얼굴들을 훑어본 다음 나는 그들이 나왔던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선수 대기실로 통하는 복도는 넓고, 지저분했으며, 또 휑했다. 바닥 곳곳에 페트병과 젖은 수건, 누군가 마시고는 던져 놓은 종이컵이 굴러다녔다.

대기실을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나는 더욱 깊숙이 스며들었다. 타교 선수로 추측되는 남자들이 저들끼리 뭐라 대화를 하거나 통화를 하고 있을 뿐, 마지막 대기실을 확인할 때까지도 권태오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수상쩍은 듯 흘겨보는 눈초리만 몇 번 오갈 뿐이었다.

입술을 꽉 다물고 밖으로 나와, 나는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경기장 뒤편으로 달려가 주차장도 다시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권태오나 그의 코치, 그들을 싣고 갈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따라 입김이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가슴이 꽉 죄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미련하게 경기장 근처를 서성거렸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더 이상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

근방이 완전히 썰렁해진 뒤에는 다리가 아팠다. 저릿저릿한 무릎을 움직이며 돌아간 버스 정류장은 전보다 싸늘해진 채였다.

차게 식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가장 먼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서 대회 결과를 검색했다.

‘서울 유도의 심볼로 활약 중인 권태오 선수는 남자 고등부 7체급 중 -100㎏급에 출전하여, 지난 11월 13일부터 18일까지 신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 및 국가 대표 2차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중등부 시절 -90㎏급 선수로 활약해 온 권태오 선수는 지난해부터 -100㎏급에 출전하기 시작하여, 4월 27일부터 5월 1일까지 대한유도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유소년 유도선수권대회 파견 대표 선발전’, 6월 6일부터 8일까지 채홍체육종합회관에서 열린 ‘제54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모두 1위로 준수한 성적을 보여 왔다.’

기사문 중앙에, 권태오가 있었다. 메달을 목에 걸고 곧게 선 채 그는 무표정했다. 진중해 보이는 한편 무척 지쳐 보이는 얼굴 위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내 지문에 고인 땀자국이 액정 위에 묻었다.

‘국가 대표 선발전을 우수하게 마친 권태오 선수를 비롯한 청소년 선수단은 내년 8월 아시아 및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에 파견될 예정이다.’

문득 아랫입술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힘껏 씹어 대던 내 입술을 놓아주었다.

‘네가 하는 경기… 나도 꼭 보고 싶었는데.’

뜯어진 입술 살을 손끝으로 꾹 누를 때엔 내 감정도 함께 억눌리는 듯했다.

‘사실은 정말로…, 오늘은 정말로 널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20분쯤 홀로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타야 할 버스와는 반대 방향의 정거장에 머무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둔해진 머리를 뒤늦게 움직이며,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차선에 섰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바보처럼 군 죄로 거의 40분이 지나서야 신산역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자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좌석 아래 히터에서 빠져나오는 더운 바람 때문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쯤, 휴대폰이 울렸다.

[권태오]

나는 혀를 움직여 입천장에 꽉 붙였다. 그러고는 입 안에 고인 침을 두어 번 삼키며 목을 적셨다.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통화’ 버튼을 밀어 눌렀다.

―학력 평가는 잘 쳤어?

그러자 오늘 종일 듣고 팠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단숨에 뜨거워진 두 눈을 꽉 감으며, 나는 세 번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그럭저럭.”

―또 올백 맞은 거 아냐?

“아니. 한두 문제는 틀린 것 같아.”

―…와. 대단하네.

“뭔지도 모르면서 뭘 대단하대.”

대단하기는커녕 나는 오늘 바보였다. 태어난 이래 오늘만큼 스스로가 바보 같았던 날이 없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권태오는 ‘에이’ 하고는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튼 잘 한 거 아니야?

권태오가 물었고,

“맞아.”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잘한 거 맞아….”

꽁꽁 언 탓에 쉰 소리가 나려는 목을 두어 번 가다듬은 뒤,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태오 너는 오늘 경기 어땠어? 잘했어?”

―응. 그럭저럭.

“…대단하네, 권태오.”

―뭔지도 모르면서 뭘 대단하대.

들은 말을 따라 하면서 권태오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덧붙였다. 낮은 목소리에 약간의 피로감과 졸린 듯한 기운, 그리고 다정이 묻어났다.

“너… 이제 몇 주 째지? 나흘은 더 있다가 돌아온다고 그랬었나?”

―어. 나 보고 싶어도 딱 4일만 더 참아라.

“보고 싶기는….”

사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내내 셈해 와서, 4일 뒤면 학교에서 만날 수 있단 것쯤 진작 알았다. 모르는 척 권태오의 목소리로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 오자마자 나는 기말고사 준비로 바쁘겠다. 시험 마지막 날이 12월 24일이더라고. …그 다음 날은 성탄절이고.”

―어. 그래?

자꾸만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거듭 혀로 훑으면서, 나는 예사로운 척 말했다.

“우리 성탄절에는… 같이 시간 보낼까? 둘이… 영화 같은 거도 좀 보고….”

―어! 좋지! 완전 좋지. 씨발, 네가 웬일이냐? 아, 욕해서 미안. 너무 좋아서….

펄펄 뛰는 권태오의 목소리에 그제야 웃음이 났다. 버스 차창을 스쳐 지나는 낯선 지역의 낯선 건물들도 잠시나마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소리 내어 작게 웃다가, 나는 ‘그래’ 하고는 의미 없는 소리를 냈다. 권태오도 나를 따라,

―그래.

하고는 순전히 긍정했다.

―우신아, 나 이제 막 숙소 들어왔어. 하…, 빨리 씻고 밥부터 먹어야겠다.

“아. 으응, 그래.”

―하, 오늘 아침에 닭가슴살 한 조각 먹고 내내 굶었거든. 배고파 죽겠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 주려는데, 차창 밖 풍경이 익숙해졌다. 멀리 신산역이 보이기에 나는 급히 하차 벨을 두드렸다. 기사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거의 지나칠 뻔한 정거장에 버스를 멈춰 세웠다.

묵례로 사과의 뜻을 전하면서 나는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렸다.

―여보세요? 이우신?

“아…, 응.”

겨울의 시작이 될 거라더니 과연 바람이 차가웠다. 휴대폰을 고쳐 쥐며,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신산역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발을 멈췄다. 혹여 수화기를 통해 기차 안내 방송이라도 흘러들어 갔다간, 버젓하지 못한 내 기분까지 전부 들킬 것만 같았다.

“태오야. 미안한데 나… 시험지 채점도 해야 하고, 바빠서. 이만 끊을게.”

―아, 어어…. 그래. 나도 밥 먹으러 가야 돼.

대답소리를 끝으로 권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두들겨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 기록이 1초, 2초… 느릿느릿 길어지고 있었다. 권태오는 늘 그러듯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통화 종료 버튼에 엄지를 가져다 댔다.

“많이 보고 싶다, 태오야….”

그러고는 ‘꾹’, 붉은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뚝 끊겼다.

택시를 타는 사치를 벌일 순 없어, 사람이 공기보다 많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온 채홍동은 어둡고 차가운 공기로 나를 떨게 했다. 교문을 지나 터덜터덜 기숙사로 걸어 올라갈 무렵에는 온몸이 저릿저릿하니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책이 잔뜩 든 책가방을 종일 메고 다닌 바람에 어깨가 아팠다.

통금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기숙사 방에 도착하자, 밤이 깊은 때였다. 방전된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고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거냐’며 물어오는 이찬희와 강건우의 메시지에 얼렁뚱땅 둘러대는 답을 보냈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몸이 아팠다는 내 거짓말을, 두 사람은 쉽게 믿어 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싸한 답이었다. 아마 내일이 온대도 들킬 일은 없을 거였다.

‘내일 해 뜨면 진짜 아플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옷을 갈아입지도, 손과 발을 씻지도, 심지어는 양치질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대로 돌덩이 같은 피로가 전신을 내리눌렀다.

“야, 이우신. 일어나 봐.”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불현듯 느껴져, 나는 화들짝 놀라 깼다. 눈을 뜨자마자 룸메이트의 불만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옷도 못 갈아입고 깜빡 존 바람에, 교복 셔츠부터 바지까지 죄 구겨져 내 몰골은 엉망이었다.

룸메이트의 손에 내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어째선지 그는 위축된 얼굴이었고, 손에 들린 휴대폰은 ‘통화 중’ 상태였다.

“네 폰이 아까부터 자꾸 울리길래… 짜증 나서 내가 받았더니, 네 친구가 나한테 화내는데….”

“아, 어…. 뭐?”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흘기는 시선을 못 이겨, 나는 휴대폰을 얼른 건네받았다. 졸음에 취한 손으로 액정을 두들겨 확인한 현재 시간은 새벽 4시였고, 화면 중앙에는 ‘권태오’ 세 글자가 떠 있었다.

깜짝 놀라 쳐다만 보는데, 상단에 뜬 ‘부재중 통화 기록 18건’ 알림 문구가 뒤늦게 시야에 들어왔다.

“여보세요?”

놀란 마음에 부랴부랴 말하자,

―우신아!

반가운 듯 외치는 소리가 내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어, 태오야, 왜….”

입을 열자마자 나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잔뜩 갈라지고 쉰 소리가, 꼭 아픈 사람 것처럼 앓는 듯이 들렸다.

권태오도 내 이상을 알아차렸는지 심상찮게 언성을 낮췄다.

―뭐야, 어디 아파? 자고 있는데 내가 깨운 거지? 미안. 미안한데… 잠깐 나와 봐. 너네 기숙사 후문으로 좀 내려와 봐.

“후문…?”

어리둥절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머리가 죄 뒤집어진 채 신발을 구겨 신는 날 보며 룸메이트는 쯧쯧 혀를 차더니, 제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도 미뤄 놓고 나는 복도로 나섰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칼바람이 창문을 투둥투둥 두들기고 있었다.

“태오…야.”

혹시, 설마… 아니겠지… 기대감을 뭉개보려 의도적으로 펼쳤던 부정적인 생각들은 1층에 도착하자마자 첫눈처럼 사라졌다. 멀리, 후문의 유리벽 너머로 휴대폰을 귀에 붙인 키 큰 남자애가 보였다.

“너, 여기 왜 왔어?”

나도 모르게 언성 높여 그렇게 물었고,

―네가 보고 싶다며.

“네가 보고 싶다며.”

휴대폰과 유리문 너머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휴대폰을 두들겨 통화를 종료했다. 비척비척 걸어 문 앞에 다가가 서자, 바깥의 찬 공기가 문짝 밑으로 스며들어와 발이 시렸다.

당황한 탓에 나는 급한 대로 손으로 문질러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이 바보야…. 너 이렇게 원정 훈련 중에 막 탈출해도 돼?”

“안 되지.”

“기숙사 문 자동으로 잠겨서… 지금은 안 열린단 말이야. 5시는 돼야 열리는데….”

“알아.”

뭐가 그리 좋은지 권태오는 미워 보일 정도로 신난 표정이었다. 어찌나 설레어 보이는지 얇은 운동복 저지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새로도 그는 추운 것 같지도 않았다. 해말갛게 웃는 얼굴이 아주 어린 소년 같았다. 사방이 환해지는 느낌에 나는 권태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내 권태오가 오른손을 들더니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리 가까이 와 봐.”

“왜?”

시키는 대로 천천히 다가가, 나는 유리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권태오가 제 오른손을 유리문에 붙였다.

“손.”

개를 부리듯 명령하는 말에 피식 웃으며, 나는 그의 오른손이 닿은 유리문에 내 왼손을 겹쳐 올렸다. 그러자 권태오가 반대쪽 손도 들어 유리벽에 붙였다.

“이쪽 손.”

그의 왼손이 닿은 유리문에 나는 내 오른손을 겹치듯 맞댔다.

그대로 우리는 유리라는 게 무언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마임을 하듯 서로의 손바닥을 만지는 시늉했다. 손끝에 닿는 거라고는 차가운 유리벽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간질간질하니 부드럽고 따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벽에 눌린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태오가 말했다.

“입술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천천히 유리벽 가까이 얼굴을 기댔다. 창 위에 코끝을 붙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술을 살짝 댔다.

우리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췄다.

“딱 나흘만 더 참아, 우신아.”

찬 유리에 붙였던 입술을 떼어 내며, 권태오가 말했다. 나는 아주 짧게 침묵했다. 참아 보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틀린 말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정 지났으니까 이제 사흘이야….”

“어, 그래. 사흘 있다가 보자, 이 똑똑하고 귀여운 놈아.”

칭찬인지 힐난인지 모를 말에 나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나와 시선을 맞추며 함께 웃던 권태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납작한 무얼 꺼내더니, 기숙사 후문 밑의 틈으로 쑤욱 가져온 물건을 집어넣었다.

“이건 선물.”

그제야 나는 권태오가 왜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나를 불러냈는지 깨달았다. 정문은 커다란 문의 위도 아래도 단단히 막혀 있어 틈이 없는 반면, 후문은 보다 짜임새가 헐렁해서 문 아래로 4mm 간격의 벌어진 틈이 있었다. 금메달을 집어넣기에 충분히 넓은 틈이었다.

바닥 위를 쓸다시피하며 내 발끝에 다가와 부딪힌 메달을, 나는 허둥지둥 집어 들었다. 손으로 털고 입으로 ‘후’ 불어 먼지를 털어 내자 권태오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농담했다.

“이제 형아 갈게, 우신아.”

“야. 너 진짜… 나중에 나한테 한 대 맞을 줄 알아.”

웃음기를 싹 지우고 뱉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권태오는 큭큭거리며 웃기만 했다.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그는 왔던 길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산에서의 아침 훈련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자면 당장 기차를 타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나는 유리문에 이마를 기댄 채 권태오를 지켜봤다. 그런데 열심히 달려가던 권태오가 홱, 몸을 돌려 갔던 길을 거꾸로 뛰어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내게로 직진했다. 그러고는 유리문에 대고 제 이마를 맞댔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센 박치기에 내 어깨가 절로 움찔거렸다.

“이우신!”

얼굴이 새빨개진 채 권태오가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유리 위에 뽀얗게 입김이 서렸다. 내가 뱉은 숨도 그를 따라 더워져서 하얀 자국을 남겼다.

“응….”

색, 색… 하얀 숨결을 연신 그려 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또 올려다봤다. 날 훑어 내리는 권태오의 시선이 어찌나 맹렬한지, 내 속눈썹이 몇 개인지 세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는 권태오의 눈을 마주봤다.

“가, 얼른.”

한참 만에 내가 속삭였고,

“알겠어….”

권태오는 꾸중 들은 강아지처럼 머뭇머뭇 움직였다. 왼발, 오른발, 반 발짝씩 뒤로 물러서는 권태오를 나는 웃으며 배웅했다.

“…훈련 조심해서 하고, 태오야. 다치지 말고….”

“응.”

“이제 밥도 잘 챙겨 먹고. 준비 운동도 대충 하지 말고….”

“응.”

“얼른 가. 이러다가 들켜서 혼나겠다.”

“응.”

두어 발짝 힘겹게 물러서더니, 권태오가 말했다.

“형아 진짜로 간다, 우신아?”

“이 문 열리면 내 손에 죽어, 너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남겨 놓고 권태오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기숙사 밑 산책로로 달려 내려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커다란 뒷모습이 내 손가락보다 작아졌다. 입을 꽉 다문 채 나는 그 뒷모습이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바라봤다.

이내 권태오가 다녀간 흔적은 내 손에 들린 메달로만 남았다. ‘전국 청소년 유도 선수권 대회’, 양각으로 새겨진 글씨의 감촉이 오돌토돌했다. 나는 글씨를 손끝으로 문질러 닦고, 또 닦았다.

제 주인이 비밀 쪽지 남기듯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린, 가여운 메달을 나는 조심스럽게 목에 걸었다. 목덜미에 매달리는 메달의 무게가 꽤나 묵직했다. 메달을 옷깃 아래로 집어넣자 맨살에 닿는 찬 온도에 몸이 푸르르 떨렸다.

그래도 나는 이제 춥지 않았다.

나흘 뒤 오후 6시에, 권태오는 내 휴대폰을 울렸다. 화면 위에 떠오른 이름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주는 연락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에 전화를 받을 때에, 내 예상은 절반짜리 정답이었다.

―우신아, 지금…, 지금 와 줘.

평소라면 듣기 좋았을 이야기가 오늘은 불안을 싹틔웠다. 한 번도 들려 준 적 없던, 아주 화나고 슬픈 사람 같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심상찮은 음성에 걱정이 되어, 나는 풀던 문제집을 전부 덮어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후다닥 책을 덮고 달려 나가는 날 보며 자습실의 몇몇 아이들이 눈살을 구겼지만, 사과할 새가 없었다.

“태오야. 왜 그래? 지금 어디야? 누구랑 있어?”

허둥지둥 묻는 말에 권태오는 긴 한숨 소리를 돌려주었다. 아주 작게, ‘씨발’ 하는 욕설이 울린 것도 같았다.

“…태오야?”

두어 번 더,

“태오야.”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채홍동의 어느 주택가 번지수를 듣자마자, 전화가 뚝 끊겼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나는 교문 밖을 나섰다. 조금 전 들은 주소지를 지도 어플에 입력하고, 부랴부랴 뛰다가 숨이 벅차 걷다가 하며 20분쯤 다리를 움직였다. 조급한 마음을 체력이 따라 주질 않음에 처음에는 분했고, 나중에는 근방의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면서부터인가, 길목이 넉넉해지고 가로수의 종류가 변했다. 하얀 가지를 길게 뻗은 이름 모를 나무는 잎의 모양이 둥그렇게 다듬어진 상태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건물의 간격도 훨씬 넓어졌다. 번지수를 읽어 보면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만 같은데, 집집마다 울타리가 크게 둘러져 있고 정원이 넓은 탓에 한 집 앞을 지나치는 데에 한참씩 걸렸다.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도착한 곳은 근방의 여느 집에 뒤지지 않게 커다랗고 예쁜 2층집이었다. 하얀색 외벽에는 세월의 흔적 따윈 묻어 있질 않았고, 넓은 정원은 따듯하고 부유해 보였다. 곡선형 무늬를 가진 쇠창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는 머뭇거리며 벨을 눌렀다. 그러자 버저 소리가 크게 울림과 동시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맞아, 권태오는 이런 애였지….’

그가 남부럽지 않은 집 자식이라는 건 진작 알던 사실이었다. 잘 사는 애들만 모였다는 채홍고 안에서도 권태오는, 이찬희와 함께 부잣집 도련님으로 묶여 특별한 취급을 받았었다.

‘이미 알던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릴 적엔, 내 키가 줄어들고 손발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태….”

…오야. 똑바로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나는 와락 뻗쳐 온 두 팔에 홱 끌려갔다. 몸이 종잇장처럼, 거의 날려 들어가서는 권태오의 품에 와락 안겼다. 놀라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앞이 핑 도는 것도 아주 잠시였다.

“우신아….”

진한 포옹에서 이유 모를 피로감이 느껴졌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무거운 감정이 읽히는 듯했다. 나는 얼른 손을 올려, 권태오의 등을 토닥이고 쓸어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집 안의 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권태오의 어깨가 내 눈높이를 가로막아 쉽지 않았다.

그때,

왈, 왈!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권태오가 자물쇠처럼 나를 가둔 두 팔을 풀어 주었다. 그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갤러리처럼 넓은 복도 저편에 커다랗고 검은 개가 보였다. 나를 보고 두어 번 짖는가 싶던 개는 금세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는 조명의 불빛보다 노을빛의 지분이 높은 거실 중앙에 섰다. 검은 개의 목에는 ‘희망’이라 적힌 이름표 목걸이가 걸려 있고, 길게 늘어진 몸줄의 끝에 이찬희가 있었다.

“‘천둥이’야?”

내가 멍하니 물었다. 성난 듯, 슬픈 듯 보이는 권태오,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이찬희, 그리고 검은 개. 지금 상황에 떠오르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어 건넨 물음이었다. 눈을 맞추며 묻자, 이찬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곤혹스러운 듯 눈을 좁게 뜨고,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틀면서 그는 나와 권태오를 번갈아 살폈다. 그러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우신아.”

나는 그 부름이 일종의 구조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홱 몸을 돌려 팔을 벌리자, 이찬희에게 다가서던 권태오의 허리를 와락 붙잡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싸움을 시작할 것처럼, 거칠게 내쉬는 숨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태오야, 태오야.”

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화내지 마…. 잠시만. 진정 좀….”

“악마 같은 새끼!”

권태오가 버럭 내지른 소리가 거실을 크게 울렸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권태오가 자길 싫어한다는 이찬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저 새끼가…, 씨…발, 천둥이를 데려왔어. 내가 그렇게… 찾아다녀도 못 만났는데, 부탁을 백번 해도 어딨는지 안 알려 주더니, 엄마가… 저 씹새끼한테는 알려 줬대. 어떻게 천둥이를, 이렇게…, 쉽게….”

“태오야.”

두 손 뻗어, 나는 분한 듯 덜덜 떨리는 권태오의 주먹을 감쌌다.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이 어찌나 큰지 내 두 손을 덮어야 겨우 가려질 정도였다. 힘주어 꽉 감싸 쥐자, 권태오가 이찬희에게서 겨우 시선을 떼어 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나는 그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천둥이랑 인사는 했어?”

“…….”

그제야 권태오의 입술이 다물렸다.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전처럼 당장 사고를 칠 사람처럼 펄펄 날뛰지는 않았다.

옆으로 몸을 돌려, 나는 거실 바닥에 앉은 검은 개에게 손짓했다.

“천둥아. 안녕? 이리 온? 착하지….”

어떻게 말해야 내게로 와 줄지 알 수 없어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는데, 천둥이는 놀라울 정도로 손쉽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고 멀뚱멀뚱 나와 태오를 번갈아 살피기만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나는 다시 검은 개를 불렀다.

“희망아. 이리 와.”

그제야 천천히, 천둥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개의 머리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런 천둥이를 내려다볼 적에, 권태오의 눈동자에는 아주 복잡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천둥이가 부러웠다. 저렇게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되어 넘쳐흐를 것 같은 애정을 받는 개라니…. 다음 생에는 내가 그의 개로 태어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권태오가 느릿하게 무릎을 굽히자, 천둥이는 권태오에게 다가가더니 제 턱을 그의 어깨에 척 올렸다. 그러자 권태오가 웃음소리를 냈다. 커다란 손으로 다정하게, 천둥이의 굵은 목덜미를 잡더니 느릿느릿 주물러 주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규칙이 있는 듯했다.

한숨 돌리며, 나는 이찬희에게 손짓했다.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 줘.”

그러자 이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제집처럼 움직이는 걸음을 지켜보다가, 나는 권태오와 짧게 눈을 맞췄다. ‘잠시만’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고 이찬희를 따라 걸었다. 권태오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천둥이를 와락 껴안은 채 미동도 않았다.

이찬희를 쫓아 도착한 방은 포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침실이었다. 좁은 방은 아니었지만, 집의 규모에 비하자면 작은 방이라고 생각됐다. 침구는 밝은 하늘색이었고 커튼에는 노랑 물방울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의외네…. 태오 방이 이렇게 생겼다니.’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를 향해 이찬희가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여기 태오 방 아니야. 게스트 룸이야.”

그러더니 침대 위에 풀썩 앉는 동작이 퍽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 하고는, 행거에 걸린 카디건과 스웨터를 살폈다. 옷가지며 한편에 놓인 가방, 책상 위에 덮어 놓은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찬희의 물건이었다. 권태오와 그가 형제보다 더 형제처럼 지내 왔다던 이야기가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침실 구경을 그만두고, 내가 물었다. 간단한 질문에도 이찬희는 눈동자를 한참 이리저리 굴렸다.

“우신이 네가 그랬잖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그래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한 거뿐이야.”

“…그래서, 천둥이를 데려왔어? 어떻게 데려온 건데?”

“큰이모한테 물어보니까 알려 주던데.”

“…….”

심드렁한 대답에 나는 속이 갑갑해졌다.

이찬희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바로 그 점이 권태오를 화나게 한다는 걸. 어릴 적에 타의에 의해서 잃어버리고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소중한 개를, 다른 누구도 아닌 사건의 원흉인 사람이 손쉽게 찾아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심지어는 두 사람을 그토록 차별 대우하는 존재가, 이찬희의 엄마도 아닌 권태오 자신의 엄마라는 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에 대해서도.

“하아….”

말문이 막혀 한숨만 푹 내쉬는데, 이찬희가 부연 설명을 얹었다.

“태오네 외종사촌 할머니가 키웠대. 반나절만 같이 있고 싶댔더니 여기까지 바래다주셨어.”

“아니…, 그럼 완전히 데려온 것도 아니란 말이야?”

“앞으로 우리가 다시 키운다고 그러면 되지.”

입천장에 본드 칠을 한다 해도 지금만큼 턱이 딱 다물리진 않을 거였다. 무엇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된 날 두고, 이찬희가 이어 말했다.

“그 할머니 집보다 태오네 집이 훨씬 커. 애초에 태오네 엄마가 사 온 개였고…. 원래 태오 개였던 거잖아? 잘 설명해서 다시 받으면 되지.”

“너…, 너 그 이야길 태오한테 했어?”

“했어….”

권태오가 왜, 금방이라도 누구이건 무엇이건 부술 것처럼 화를 냈는지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상황 자체만으로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텐데,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서 개를 빼앗아 오자는 이야기를 했으니…. 이찬희를 한 대 패지 않고 참아 낸 것만으로도 그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천둥이를 중1 때 보냈다고 그랬으니까…, 벌써 4년은 그 할머니가 키우신 건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슬슬, 이찬희도 제가 잘못했다는 걸 느끼는 눈치였다. 그러니 우물쭈물 입을 다물고 바닥을 응시하더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랬잖아….”

작은 소리로 변명하는 것이었다.

“그래….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랬었지. 태오한테 할 말이 있으면 네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도 그랬었지. 그런데, 찬희야. 내가 말한 건 이런 뜻이 아니었어…!”

차근차근, 한 마디 두 마디 풀어 말하고자 노력했지만, 잘되진 않았다. 황당한 마음을 못 감추고 작게 외치자, 이찬희의 눈동자에 투정이 어렸다. 억울하다는 듯 대답하는 소리도 크게 튀어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태오가 천둥이를 그리워했잖아. 보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그래서 다시 받아 온 것뿐이야.”

“다시 받아 오다니…. 천둥이는 물건이 아니야. 살아 있는 동물이고, 태오한테는 아주 소중한 개야. 그걸 물건처럼… 네 마음대로 압수했다가, 네 마음대로 돌려놓는 것 자체가 기분 상하는 일이라는 걸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어.”

빠른 대답에 나는 입이 다물렸다. 이찬희처럼 내 말문을 쉽게 막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거였다. 이찬희처럼,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제가 뭘 잘못한 줄 모르는 사람도, 제 잘못에 저까지도 답답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오직 그뿐이었다.

“찬희야.”

그렇게 이름을 부르자 이찬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저에게 어떤, 듣기 싫은 잔소리나 지적을 할 거라 생각했는지 그는 드물게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태오가 원정 다녀왔을 때… 천둥이가 돌아와 있는 걸 보면 좋아할 줄 알았어. 서프라이즈 선물로 보여 주려고 그랬던 거야. 나는… 화해하고 싶어서 그런 거란 말이야. 사이가 나빠지기 전으로 상황을 돌려놓으려고 그런 거야.”

“사람 사이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어.”

이찬희가 입을 다물기가 무섭게, 내가 말했다.

“찬희야. 이미 지나간 일은 억지로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벌써 4년을 못 만난 개를, 벌써 남의 개가 된 애를 훔치듯이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태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어? 덥석 그 개를 빼앗아다 키우겠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개를 뺏겨 본 태오가 그러겠냐고.”

“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찬희가 불퉁하고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이찬희의 태도에 나는 화나지 않았다. 다만 허탈하고, 황당했고, 또 아주 조금, 그러니까… 딱 티끌만큼 이찬희가 불쌍했다. 내 눈앞의 이찬희는 제대로 된 친구 관계를 다질 수가 없는 애였다. 모두의 친구인 줄 알았던 이찬희에게는, 형제처럼 붙어 다니던 권태오조차 진짜 친구가 아니었다.

“너 친구 없지….”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아주 작게 속삭이듯 흘러나온 내 말에, 이찬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신이 네가 있잖아….”

나는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 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응.”

“그럼 태오한테 미안하다고 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말하자, 이찬희가 제 어깨를 위로 으쓱 움직였다.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더는 어떤 요구도 말해 주지 않자 ‘어’ 하고는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리고?”

“그게 다야.”

간단하게 말을 마치고 나니 나는 불안해졌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찬희가, 곧이곧대로 ‘미안’ 이라는 말만 툭 내뱉을 것 같아서였다. 진정성 없는 사과만큼 불타기 좋은 연료도 없는 법이었다.

나는 이찬희의 팔뚝을 얼른 움켜쥐었다. 똑바로 나를 보게끔 돌려세우고, 조금 더 자세하게 사과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밑으로 내려가서, 태오 눈을 똑바로 보고 미안하다고 말해. 정말 몰라서 그랬다고 말해. 그땐 천둥이가 진짜 무서웠다고 고백하고, 다 네 배려심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

“…태오도 알아, 내가 미안해하는 거….”

“아니.”

불퉁하니 어린애처럼 구는 이찬희의 양 팔뚝을, 나는 두 손으로 똑바로 움켜쥐었다. 나보다 키 큰 녀석을 동생 어르듯 다루자니 고개가 빳빳하고 어색한 기분이 속을 긁어 댔지만 별수 없었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네 생각이 어떤지.”

그렇게 이찬희를 내려 보냈다. 침실 문을 나서면서도 이찬희는 두어 번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그를 따라 내려가 주지 않았다. 사과의 말마저 내가 대신해 준다면 그때는 정말로, 이찬희의 형이나 부모가 된 기분을 느낄 것 같아서였다. 그랬다가는 속이 간지러워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샛노란 이불이 덮인 침대에 앉아, 나는 가만히 새 소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찬희가 다시 올라온 건가 싶어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검은 개가 순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주자 천둥이는 방 안으로 쭐레쭐레 들어왔다. 땅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고, 고개를 높이 들고 창문 밖을 살피기도 했다. 개에게도 표정이 있었더라면 저 얼굴은, ‘왠지 모를 반가움’, 그런 감정을 감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됐다.

이내 천둥이는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이불 위에 가만히 몸을 말고 눈을 깜빡거렸다. 순하고 착한 검은 개에게선 조심이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동작에 힘이 없는 걸 보면 조금 지친 것도 같아서, 나는 일부러라도 그 개를 건드리지 않았다. 가만히 옆으로 다가가 몸을 앉혔을 뿐이었다.

그러자 천둥이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벅지 위에 제 머리를 기댔다.

“…….”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조는 개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쫑긋 서 있던 검정색 귀가 뒤로 천천히 누웠다. 쓰다듬기를 기다리는 개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만져 주는 손길이 세상 무엇보다 익숙한, 사랑만 받으며 행복하게 지낸 개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너… 아주 착하구나.”

한 번, 두 번…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며 쓰다듬자, 개에게서 풍기는 따듯한 기운이 내게로 전이되는 듯했다.

“희망아. 태오 형이… 천둥이라고 불러도… 아는 척 좀 해 줘. 그럼 안 될까?”

꾸벅꾸벅 조는 천둥이의 머리를 만져 주면서도 나는 문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혹여라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거실로 뛰어나갈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2층 방 안으로는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질 않았다. 간간이 무어라 말하는 권태오나 이찬희의 목소리가 모호하게 울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달칵 열렸다. 얼른 고개를 들자 컴컴한 얼굴로 멍하니 선 권태오가 보였다. 문고리를 쥔 채 그는 가만히 천둥이와, 천둥이의 머리를 만져 주는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와.”

혹시… 허락을 기다리고 있나 싶어 해 본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권태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집이고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든 손님일 뿐인데, 권태오는 내 앞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 두 발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앉혔다.

그가 가까이 오자 천둥이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천둥아.”

권태오의 속삭임에 나는 발가락이 굽었다. 그렇게나 다정하고 애틋한 목소리라니… 역시 다음 생에는 권태오의 개로 태어나는 게 좋겠다.

이내 커다란 손이 천둥이의 머리에 닿았다. 검은 개의 보드라운 털과 귀가 손길의 방향대로 뉘어졌다. 개를 어루만지는 권태오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보여서,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깊이 숙여야 했다.

“천둥아….”

편안한 듯 몸을 길게 뻗고 조는 개의 이마에, 권태오는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나는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천둥이가 아주 잘 지냈나 봐. 조심이보다 훨씬 통통해.”

내 말에 권태오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를 웃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말했다.

“털도, 윤기가 자르르 흘러. 살다 살다 이렇게 때깔 고운 개는 처음 봐.”

“하하….”

한참 웃던 권태오가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북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 우는 그의 얼굴이, 미안할 정도로 보기에 예뻤다. 그러나 한 방울 눈물은 재빠르게 닦여 사라졌다. 못내 아쉬워 내려다보는 나를 향해, 권태오가 말했다.

“고마워.”

나는 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참을 그렇게, 잠든 개를 두 사람의 손이 어루만졌다. 천둥이의 목에 걸린 이름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권태오가 속삭였다.

“두 시간 뒤에… 다시 데리러 오실 거야, 할머니가.”

“응. 그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

“…….”

내 말에 권태오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며 침묵했다. 나는 권태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주름이 많고 미소가 예쁜 할머니가 환한 얼굴로 ‘희망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조용한 저녁을 보냈다.

권태오는 천둥이의 머리를, 나는 권태오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간 동안 오간 말이라곤 한 마디가 전부였다.

“우신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그리고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