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벌거벗은 나무(들) (10/16)

벌거벗은 나무(들)

이제 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이우신은 남자도 아니다.’

좆 달린 사내새끼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짓들을 이우신은 해 버리고야 만다. 몇 가지 예시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첫째, 아침부터 그 애는 말짱하니 이쁘기만 하다. 나는 이우신의 눈이 흐리멍덩한 꼴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어찌 된 게 잠에서 깨자마자 까만 눈알이 초롱초롱하니 반짝거린다.

재깍재깍 움직이는 몸은 또 얼마나 잽싼지, 침대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엉덩이를 뭉개며 뭉그적거리는 법이 없다. 알람 소리에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침대 위의 이불을 접는 것으로 아침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세수를 마치고, 치약 묻힌 칫솔을 입에 문다.

“태어야, 자 자허?”

치카치카 윗니 아랫니 꼼꼼하게 양치하면서 이우신은 반드시 창문 앞에서 하늘을 본다. 오래된 습관인지 버릇인지 본인은 이상한 줄을 모르는 눈치인데, 나로서는 저게 도대체 청소년기 남자애인지 디즈니 공주님인지 알 수가 없다.

정해진 루틴이 있는 건 운동선수뿐인 줄 알았는데 이우신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양치를 마치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고 나면, 그 애는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심이와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호기심을 못 이겨 도대체 매일 무슨 음악을 듣는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로맨틱한 팝송이나 클래식 첼로 연주를 상상한 내게 이우신은 딱 이우신 같은 대꾸를 내놓았다.

“미국 뉴스 채널을 들어. 공부도 되고 머리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그렇게, 내가 훈련 시간표대로 운동장을 달릴 때면 이우신은 영어 문장을 중얼거리면서 조심이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나야 운동선수로 개조된 몸이고 코치와 다른 선수들이 함께하니 그렇다 치지만은 도대체 저, 공부 로봇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부터 벌써 4년째 청소년 선수로 살다 보니 어렴풋이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운동은 가장 건강한 종류의 자기 학대였다. 하기 싫고, 고통스럽고, 역겨울 때 노력해야 퇴보하지 않는 게 선수의 삶이었다.

이런 말들은 ‘한 줄 명언’이랍시고 적어 내릴 때에나 쉬운 거지, 마음이든 몸이든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 와중에 노력을 한다는 게 토 나오게 힘들었다. 매니지먼트 없이 혼자 지내면 프로 선수래도 해이해지기 마련이었다.

‘남자 선수는 결혼을 빨리 해야 경기력이 좋아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결혼을 일찍 해서 좋은 아내를 매니저로 두라는 뜻이었다.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내게도, 스무 살이 되거든 일찍 연애해서 일찍 결혼하란 말을 하는 꼰대가 많았다. 슬럼프를 겪던 선수가 결혼 후 훌륭한 복귀 경기를 해낸 사례도 딱 그만큼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우신은 어지간한 선수들만큼 대단했다. 공부가 유도보다 쉬운지 어려운지야 나는 모르겠지만, 이우신은 혼자만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 낼 줄을 알았다. 감시하는 선생이 없고 응원하는 가족이 없어도 그 애는 자기만의 루틴대로 부지런했다.

공부가 아니라 다른 무얼 해도 그 애처럼 한다면 잘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저런 걸 타고났다고 하는 건가.’

갓난아기 시절에도 정해진 시간에만 울고 시간표에 맞추어 낮잠을 자고 계획적으로 뒤집기 연습을 한 건 아닐까 모르겠다. 어깨 들기 3회, 배 뒤집기 5회, 아장아장 걸음마 7회 1세트씩 하루 5세트 실시! …뭐 그렇게.

외형적으로 아주 뛰어나고 성격도… 착하고 귀엽고 성실하니 예쁘기 짝이 없는 이우신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로봇인지도 몰랐다. 아니, 로봇이 틀림없다. 저게 어떻게 사람이겠어?

이우신이라는 로봇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비가 아주 낮아서 비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이우신은 정말, 정말, 정말로 많이 먹었다.

‘넌 얼마나 먹어야 배가 불러?’

지난 학기에는 급식으로 감자옹심이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이우신은 알감자가 대여섯 개씩 들어있는 뜨끈한 수제비를 다섯 그릇 먹었다. 말라깽이 몸뚱이에 알감자가 스물다섯 개에서 서른 개는 들어갔단 의미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후식으로 매점에서 핫도그까지 하나 사먹으면서 이우신은 ‘으음’ 하고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황당한 대답을 꺼내 놨다.

‘모르겠는데.’

어떤 질문에건 척하면 척 답을 내놓던 이우신의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나는 마냥 신기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니고 얼마나 먹어야 배가 부르냐는, 유치원생도 3초 내로 대답할 법한 간단한 질문에 그 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한 끼에 3, 4인분은 거뜬하다고 첨언했다. 적어도 점심으로 밥을 두 그릇 이상 먹어 주지 않으면, 한두 시간만 지나도 배가 고프다고도 말했다. 어릴 적엔 어영부영 굶는 일도 많았고 부모가 따로 밥을 챙겨 주는 편도 아니어서,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팩으로 배를 채우고는 ‘덜 배고픈’ 상태가 ‘배부른’ 상태인 줄 착각하며 지냈다고 했다.

불쑥 이어진 이야기에 강건우는 물론이며 이찬희도 당황한 눈치였다. 정작 이우신은 덤덤하니 아무렇잖은 얼굴로 지나쳤지만, 어째선지 이우신의 유년기는 그도 아닌 내게 더 무거웠다.

그리고 그 아줌마. 이우신의 휴대폰에 ‘옥혜 씨’라는 이름 석 자로 저장되어 있는 그 아줌마는 내게는 힌트 같은 존재였다. 연신 울리는 전화를 대신해서 받고는 ‘아파서 자는 중’이라고 이우신의 상태를 전했던 날에, 허겁지겁 닭죽을 싸 왔던 그 아줌마는 이우신과는 눈도 코도 입술도 닮지 않았는데 묘하게 이우신과 닮은 사람이었다.

그분이 다녀간 뒤에 이우신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열제를 먹고 침대에 누워, 자다 깨다 하며 중얼중얼 늘어놓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옥혜 씨가 나한테 가르쳐 줬어, 배부르다는 기분이 뭔지. 옥혜 씨랑 둘이 살게 됐을 때 처음으로 포만감이 들었어. 옥혜 씨, 손이 엄청 큰 편이라서 밥이며 반찬이며 아주 많이 만드는 버릇이 있는데… 버리는 반찬이 없게 전부 먹어치우다 보니까 배가 부르더라.’

그때 이우신의 나이가 열네 살이랬다. 그러니 그가 연비 낮은 몸이라는 건 치명적이며 악독한 단점이었다. 하필이면 타고나기를 대식가이기까지 해서,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이우신은 배고파야 했다.

그 말을 들은 뒤로 나는 이우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체기를 느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이우신이었다. 급식으로 나오는 반찬이라면 갈치구이부터 연근조림까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기도 했다. 경양식 돈가스가 나온 날이면 식판을 들 때부터 웃는 낯이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배고팠던 다섯 살, 혹은 열세 살의 이우신을 상상하면 숨이 죄였다. 그 애를 평생 배부르게 하지 못한 부모라는 것들에게 화가 났다.

그런데 이우신을 보면, 그 애는 딱히 제 부모를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점이 내겐 크나큰 의문이었다.

우리 또래 애들이라면 누구든지 부모 탓을 하게 마련이었다. 부모가 키가 작아서, 부모가 가난해서, 부모가 쌍꺼풀이 없어서… 제가 타고나지 못한 것들의 원인을 부모에게서 찾았다. 하다못해, 제 부모가 제 방문을 노크 없이 열었다고 하루 종일 성질을 부리는 놈들도 있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엄마가 한숨 쉬는 주말마다, 작은이모와 친구가 되더니 한 발 두 발 이모에게 빠져들 때마다, 이따금씩 나에게 ‘너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내 아버지를 저주했다.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도 아버지 탓이었고 ‘엄마 권주원과 아들 권태오’의 2인 가정이 어느샌가 사라진 것도 아버지 탓이었고, 내 속에서 부글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아무튼 전부 아버지 탓이었다.

그런데 이우신은 달랐다. 내 아버지는 차라리 내 인생에서 흔적을 감추기라도 했지, 이우신의 아버지는 존재해서 더 문제인 못된 새끼였다. 그런데도 이우신은 제 아버지를 욕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옆에 저를 버려 놓고 간 어머니를 험담하지도 않았다.

가끔 옛날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 애는 옥혜 씨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우신은 그런 애였다. 그 애는 미운 감정들을 말하는 대신 제 인생에 오직 하나뿐인 제대로 된 어른을 자랑하길 좋아했다. 그런 점마저도 보통의 남자애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우신은 남자가 아니거나, 사람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내가 그 애한테 반한 것 아니겠는가. 또 그렇기에 이우신과 손끝만 닿아도 소름 돋게 좋고, 그 애 몸은 어떻게 생겼을지 괜한 호기심에 아랫배가 찌르르하고, 그 애를 웃게 할 수 있다면 돈이든 미래든 다 주고픈 게 분명했다.

이우신이 좋은 만큼 나는 이우신과의 생활이 좋았다. 낮마다 각자 공부와 훈련을 하고 밤이면 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나란히 붙어 누울 때면 심장이 병난 것처럼 뛰어 댔다. 그래서 좋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아니, 아니지. 지금도 정말 너무 좋기는 하다. 매일 아침 30분씩 일찍 일어나, 샤워실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서는 찬물을 끼얹어 가며 좆을 식혀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오, 씨발….’

이우신과 한 방에서 자고 깨고 같이 살자니 다 좋은데 자꾸만 발기를 해서 문제였다. 아침이면 텐트를 치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차마 이우신 옆에서는 이런 꼴을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열여덟 살인데, 혈기왕성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서 운동을 덜한 날은 좀도 쑤시고 좆도 쑤시게 마련인데…. 그렇다고 짝사랑하는 남자애가 자는 방에서 딸을 칠 수도 없고 아직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이우신에게 뭘 어쩌자고 들이댈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우신이 나를 덜 믿으면 또 몰랐다. 먼저 내 상태를 알아채고 질색팔색을 해 댄다면 나도 욕심이 덜 날 테고, 내 좆도 부끄러운 줄을 알고 수그러들 거 같았다. 그런데 이우신은 무방비했다. 그 애는 나를 너무 믿었다. 나도 날 못 믿겠는데, 놈은 나를 믿는다.

그러니 허벅지 살이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도 아무렇잖게 두 다리를 뻗고 자는 거였다.

오전 6시, 살갗이 뜨끈뜨끈하니 달아오르는 느낌에 눈을 뜨자마자 잠든 이우신이 보였다. 내 어깨에 바짝 붙은 이우신을 아주 살살 떼어 내고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색색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이우신의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그 밑으론 프리사이즈 반 티가 헐렁해 보이도록 가는 허리가 보였고, 체육복 바지 밑으로 햇볕 한 번 안 쬔 거같이 허옇고 뽀얀 허벅지가 보였다.

그놈의 허벅지, 유독 탱탱해 보이는 하얀 살 때문에 나는 갈증이 났다. 한 손에는 영단어를 적은 종이를 쥐고, 한 손은 주먹을 말아 입 앞에 붙이고 색색 자는 이우신은 아주 편안해 보이고 또 보송보송한데, 아침부터 나만 존나 빨개져서는 땀이 났다.

어찌 저찌 가려 주려고 에어컨을 켜고 이불을 덮어 주어도,

“으으…, 더워….”

이우신은 이불을 발끝으로 밀어내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잖아도 짧은 바지가 팽팽하게 말려 올라가서는, 이젠 허벅지 안쪽 살까지 훤히 보였다. 하얗고 마른 허벅다리는 손안에 쥐기 딱 좋게 생겼다. 속옷까지 말렸는지 동글동글한 엉덩이 살도 아주 조금, 엿보였다.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나는 죽을 맛이었다. 해소할 길 없는 성욕으로 사타구니가 뜨끈해졌다. 다리 사이에 달린 살덩이로 제멋대로 피가 쏠렸다. 하얀 허벅지를 빤히 노려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신을 차려 보겠다고 시선을 돌리자 잠든 이우신의 종아리가 보였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우신은 체모가 적은 편이었다. 다리털이, 자세히 보면 있기는 한데 이걸 털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민망하게 적고 옅었다.

“…….”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나는 손가락 끝마디로 이우신의 종아리를 건드렸다. 툭 손이 닿아도 이우신은 깨지 않았다. 색색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슬금슬금 빗어 내리듯이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살짝 힘주어 살을 누르자, 종아리 가운데가 말랑하게 들어갔다. 복숭아도 이것보단 단단할 거였다.

복숭아씨처럼 톡 튀어나온 발목뼈를 지나면 언제고 깨끗한 발이 있었다. 이우신은 외출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손을 씻고 발을 씻는 놈이었다. 그래선지 발바닥까지 뽀얬다. 올록볼록 튀어나온 발바닥 살은 불그스름한데, 쏙 들어간 발바닥 중앙은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로 새하얬다.

검지 끝으로 슬그머니 긁어 올리자, 놀란 듯 두 발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발가락 다섯 개가 안으로 꽉 말렸다.

짧게 밀어 깎은 손톱으로 나는 이우신의 발바닥을 한 번 더 긁었다.

“으, 응….”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이우신이 양 발가락을 꽉 구부렸다. 이내 왼쪽 발목 옆으로 오른쪽 발이 숨듯이, 꽈배기 말리듯 숨어들어 갔다. 배배 꼬이는 두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

‘하여간에 엉뚱한 놈. 지 엉덩이 깔고 앉은 방석을 판다고 글을 올리질 않나….’

생각이 거기에 닿자 조금은 현실감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적어도, 불끈거리는 사타구니를 무시하며 어기적어기적 욕실로 향할 정신머리는 돌아왔다.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 나는 훌러덩 옷을 벗었다. 샤워기 밑으로 가 냉수를 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맞았다.

‘닉네임도 도대체 뭔 생각으로 ‘당신’. 이 지랄로 짓질 않나….’

허탈한 웃음을 피식 뱉으며 나는 말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우신이 과연 알까 모르겠다, 빌어먹을 도둑놈의 새끼를 잡겠다고 지 엉덩이 깔고 앉은 방석을 내가 10만 원이나 주고 샀다는 걸. 직거래를 하자고 꼬드겨서, 현장에서 잡고 보니 3학년 일진이었다. 한 번만 더 심화반 물건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해 뒀다.

그 바람에 심화반에 내 여친이 있다고 소문까지 났지만, 이우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니까 상대가 나인 줄도 모르고서 그놈의 방석을 팔겠다고 채팅까지 해댄 게 아니겠는가.

혹시 또 이우신 물건이 올라올까 봐 ‘방석’, ‘공부’, ‘1등’ 따위로 키워드 알람을 설정해 뒀는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우신 본인이 제 방석을 팔 줄을 누가 알았을까…. 처음 그 글을 봤을 땐 무척 황당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구매’ 버튼을 누를 적엔 조금은 화까지 났었다.

직거래 현장에 출몰해서는 ‘너 정신 나갔냐’고 버럭 소리를 쳐 주고, 내가 구매해 둔 녀석의 닳디닳은 방석을 품에 안겨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녁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차라리 이우신이 제 방석의 행방도, ‘thunder2’가 ‘천둥이’를 적당히 변형해서 지은 내 닉네임인 것도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놈의 낡아 빠진 방석을 내 짐 가방 아주 깊은 곳에 숨겨 놓았고, ‘개구멍’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도둑놈에게서 네 방석을 10만 원 주고 샀다고 말하면 이우신은, 내 등짝을 100만 대쯤 때리고는 내게 10만 원을 쥐여 줄 사람이었다.

‘하, 미치겠네….’

샤워실 벽면을 두 팔로 짚고 나는 숨을 골랐다. 애국가를 3절까지 부르고 교가를 다섯 번 재창해도 도무지 한 번 선 좆이 시무룩해질 줄을 몰랐다.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지 이우신은 알고 있을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익명 사이트 닉네임을 ‘당신’ 따위로 짓는 문학 소년께서는 포르노를 본 적이나 있을까?

‘…에이, 알겠지. 저도 알긴 아니까 내 고백을 받아 줬겠지.’

정확히는 나중에 대답을 해 주겠노라고 고백 예약을 받아 준 거지만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사실상 약혼한 거나 마찬가지다. 남자들끼리는 어차피 결혼도 못 하니까, 따지자면 우리한테는 이게 약혼 아니겠는가.

물론 이우신한테 말해 본 적은 없었다. ‘우리 약혼한 거나 다름없는 사이지?’라는 질문은 물론이고, ‘너 섹스하는 방법은 아냐?’라고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제 그, 은밀하고 좀 그런 곳에 내가 거시기…, 그러니까 진짜 거시기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그런 말은 차마 뱉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다가는 똘망똘망한 이우신이 나를 힐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오야, 그런 언어적 표현도 일종의 성희롱이야.’

쌜쭉하니 그렇게 톡 뱉고는 나만 미친놈 만들 게 뻔하다. 누가 구미호 아니랄까 봐….

‘아, 이거 효과 있네.’

나를 꾸중하는 이우신을 생각하며 혼자 웃자니 발딱거리던 좆도 조금 식었다. 수건으로 얼른 몸을 닦고 나는 옷을 걸쳤다.

축축하니 머리카락이 젖은 채 욕실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잠에서 깬 이우신이 침대 위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태오야, 잘 잤어?”

그러고는 웃으며 내게 인사한다.

“…어.”

나는 그 애의 발을 너무 빤히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수건을 옮기는 척 엉거주춤 다리 사이를 가린 채 게걸음을 하며 신발장으로 다가갔다. 힐끔 돌아볼 적에 이우신은 창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나 아침 훈련 갔다 올게.”

“응, 태오야. 이따 봐.”

인사를 마치고는 후다닥 채홍관으로 향했다.

결국은 코치만 신이 났다. 내가 이, 빌어먹을 열기를 죽여 놓느라고 미친놈처럼 운동하는 줄도 모르고서,

“권태오 요즘 아주 이뻐, 으잉? 어쩐 일로 이렇게 열심이야?”

내 등을 퍽퍽 치며 칭찬하기 바빴다.

그 바람에 후배들이 ‘역시 권태 형’하며 눈을 반짝이고, 공주윤도 자극받은 듯 보다 힘주어 내 훈련 상대가 되어 주었다. 오해 아닌 오해를 받으면서 나는 미친놈처럼 운동했다.

‘안 그러면 씨발 사귀기도 전에 차이게 생겼는데 어쩌라고….’

경기장 바닥을 땀으로 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밤에도 힘이 안 빠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우신 옆에서는 밤새 잠도 오질 않고 그렇다고 딸을 칠 수도 없는데, 종일 속옷 안이 덥고 좁은 채 발정 난 개새끼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미친놈처럼 버피 테스트를 뛰었다. 더는 맞붙겠다는 놈이 없을 때까지 연습 경기를 뛴 다음 릴랙스 체조까지 마치고, 털썩 경기장 바닥에 앉아 정좌했다.

다 같이 묵상하는 5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이중인격자가 됐다. 뇌가 머리에 달린 인간 권태오가 되어, 뇌가 좆에 달린 발정 난 권태오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다.

‘오늘은 좀, 씨발 얌전히 잠 좀 자자. 딴생각 좀 하지 말고….’

마무리 정리까지 열의 넘치게 마치고는, 땀 냄새와 열 기운을 풀풀 풍기며 훈련소 숙소로 걸어 올라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녁 시간만 되면 예쁘장한 얼굴을 달고 관중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이우신이었지만 요즘은 달랐다. 심화반 수학 수업을 듣고 복습을 하느라, 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는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없어 아쉬운 것과 별개로 좋은 점도 있었다. 이우신 앞에서 시큼한 땀내를 풍기고 싶지 않아, 데오드란트와 스프레이 파스로 온몸을 떡칠하지 않아도 됐다. 먼저 숙소로 돌아가서 더러워진 훈련복은 세탁실에 던져 놓고, 땀범벅인 몸은 박박 문질러 씻어 내면 그만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이우신이나 그가 언제나 메고 다니는 학습지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곱게 접어 놓은 이불 앞으로 가, 나는 침대에 풀썩 고개를 파묻었다. 예전에는 파스 냄새나 풍기던 이불에서 이제는 이우신의 살 냄새가 났다. 뭔가 뜨끈하고, 보송보송하고, 야시시한 냄새….

사람 냄새가 이렇게나 좋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아니지….’

비단 냄새뿐만이 아니다. 그냥 그 애의 존재 자체가, 씨발 그냥, 너무….

“하….”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나는 이불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체력을 전부 쏟아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우신의 냄새를 맡으며 그 애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심장이 펄펄 뛰고 기분 좋은 긴장감이 머리털까지 좌르르 번졌다.

그리고,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식 웃음 지으며 나는 다리를 일으켰다. 같이 지낸 지 열흘이 넘어가는데도, 이우신은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손님처럼 노크를 했다.

똑똑.

연이어 두들기는 소리에 나는 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고는 웃으며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왜 이렇게 일찍….”

그리고 이찬희가 보였다.

문을 연 자세 그대로 나는 정지했다. 활기 넘치던 전신이 풍덩 찬물에 빠진 듯했다. 삽시간에, 추위. 그렇게밖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에워쌌다.

“태오야. 엄마가 이거 갖다주라고… 해서….”

이찬희도 내 표정의 이상을 알아챈 듯했다. 가져온 종이 가방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웃던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놈이 내 어깨 너머를 훔쳐보는 줄 알면서도 나는 문을 닫지 못했다. 이찬희는 천천히 눈을 굴려 내 방 안, 언제나 텅 비어 있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과 문제집들을, 그리고 신발장에 세워진 이우신의 캐리어를 바라봤다.

나는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그러나 이찬희는 아무렇잖게 입을 열었다. 종이 가방에 이어 반대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리면서, 녀석이 말했다.

“우신이는 아직 안 왔나 봐? 같이 먹으려고 간식도 가져왔는데.”

“…뭐?”

“우신이가 나더러 놀러 와도 된다고 그랬었거든.”

웃는 낯으로 건네 온 말에 나는 돌덩이가 됐다. 팔다리로 흐르던 피마저 단단하게 굳는 느낌이 들었다. 손발이 저릿했다.

‘알고 있었다고? 내가 이우신이랑 지내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그냥 둔 거지? 나중에 무슨 짓을 하려고….

“태오야. 뭘 그렇게까지 무섭게 쳐다보고 그래.”

이찬희의 지적에도 나는 도무지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단지 신음하듯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찬희.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이래? 뭘 어쩔 계획이야?”

“뭐가?”

“왜 자꾸, 이우신한테….”

터질 듯한 불안을 토해내기 앞서 나는 이찬희의 팔뚝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대로 방 안으로 잡아당기자 녀석이 반항 없이 터덜터덜 끌려왔다. 급습을 당한 듯 머릿속이 마비된 건 나인데, 도리어 이찬희는 나로부터 어떠한 위협이라도 당했다는 양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찍어 누르듯 말을 뱉었다.

“내가 경고했잖아. 이우신은 안 된다고. 걔는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잖아.”

위장 안에서 용암 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뱃속으로 스며들어 간 바람이 그것들을 굳혀 놓았다. 결국엔 삐죽삐죽 모난 조약돌이 되어 내 속을 이리저리 찔렀다.

“나한테 화났으면 그냥 나한테만 지랄해. 괜히 애먼 사람 잡지 말고.”

고통으로 말하는 나를 올려다보는 이찬희는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덤덤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거리며, 녀석이 말했다.

“태오야. 너는 내가… 내가 너를 벌주려고 천둥이한테 그런 거라고…, 그리고 우신이도 그렇게, 네게서 빼앗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왜?”

“왜냐면, 네가….”

“내가 뭘?”

나는 이런 순간들이 싫다. 분명 나는 이찬희를 보고 있고 이찬희는 날 보고 있고, 나는 녀석에게 말하고 있고 녀석도 내게 말하고 있는데, 도저히 서로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꺼림칙한 확신이 드는 순간이….

그래서 나는 이찬희가 싫다.

“네가….”

이찬희는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평생 원망할 테니까. 녀석이 납치를 당하고 넉 달 동안 실종되고 산 채로 흙더미에 파묻혀야 했던 건 전부 내 탓이니까.

“네가… 속으로는 나를 원망하잖아.”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턱에서 우드득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조마조마한 기분을 애써 삼키는 날 향해 이찬희가 한 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권태오, 너를 용서하지 못하는 게 지금 누구야? …우리 엄마? 큰이모? 나?”

이게 도대체 씨발 무슨 개소리지?

“지금, 오늘… 너 말고 다른 누가 그런 말을 해?”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찬희가 새로운 계획을 세워 온 게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했다. 내 정신을 빼놓으려고 대본을 지어 온 게 분명했다.

‘날 원망하지 않는다고? 내 탓이 아니라고? 아무도 날 벌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이제 와서 씨발 그럴 리가 없었다.

이찬희가 얼마나 악마 같은 새끼였는지 나는 알았다. 제 말 한 마디면 꼼짝도 못하는 부모를 갖고, 나는 물론이며 내 엄마까지도 제 입맛대로 휘두르던 녀석이었다. 놈이 갖고 싶다고 말하면 내 물건은 놈의 것이 됐다. 놈이 보기 싫다고 말하면 내 개도 남의 집 개가 됐다. 그렇게 놈은 내 집을 제 집으로 만들었고, 내 동생 천둥이를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만들었다.

“좆같은 소리하지 마.”

빠드득 이를 갈며 내가 말했다.

“너 일부러, 씨발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천둥이도, 조심이도, 이우신도 그래서 뺏으려고 하는 거잖아. 나를 존나 탓하잖아, …전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잖아.”

울분을 짓이기며 건넨 말끝에,

“누가 뭘 뺏는다는 거야?”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탁하게 번진 시야가 대번에 트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무어라 원인을 규정하기 힘든 압박감이 가슴 안에 차올랐다.

낡은 태엽을 억지로 감아 돌린 기계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바라면서도 거기에 누가 서 있을지야 이미 뻔히 알았다. 이우신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우신이 보였다. 덜 닫힌 문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당겨 열면서, 이우신은 이찬희를 쳐다보더니 날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의 내 표정이, 눈길이, 입매가 엉망진창으로 구겨졌음을 알면서도 나는 도저히 흘러넘치는 불안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이우신은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등 뒤로 방문을 닫으며, 그는 가장 먼저 사과했다.

“…미안해. 그런데 복도까지 너네들 대화 소리가 다 들려서. 문만 닫으려고 했는데….”

어깨에 멘 책가방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는 이우신의 동작이, 내 눈에는 아주 느릿했다. 다음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 두 눈이 현실을 왜곡하는 듯했다.

“너희 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누가 나를 빼앗는다 둥…. 천둥이는 또 누구고, 태오는…. 태오야.”

나와 이찬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우신은 한 발 두 발 우리 사이로 걸어왔다.

“네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그 애가 묻는 말에 나는 입술조차 벙긋할 수 없었다.

“우신아.”

무어라 입을 열어야 좋을지 모르는 나를 대신해서 이찬희가 그를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놀라는 것뿐이었다.

“내가 설명할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해 보일 지경으로 멀쩡한 얼굴로 입을 여는 이찬희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를 향해 의미 없이 손을 뻗으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말하지 마.”

이찬희의 팔뚝이 내 손에 붙잡혔다. 이찬희는 나를 힐긋 올려다보더니 다시 이우신을 바라봤다. 녀석은 가볍게 팔을 흔들어 내 손을 쳐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삐.

나는 귓가로 울리는 이명을 들었다. 이찬희가 내뱉는 말소리가 내 귀로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삐’로 시작해서는 그치지 않는 머리 안의 소음이 나를 대화로부터 단절시켰다. 이찬희의 입이 벙긋벙긋 움직이고, 이우신이 우두커니 서 있던 몸을 천천히 책상 앞으로 옮기더니 의자에 앉았다.

지금 이 광경이 꿈인지 무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찬희가 말을 하다니, 이혁 시절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 늘어놓다니…. 나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도무지 방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엄마도, 제 부모도 아닌 타인에게 제 이야기를 꺼내 놓는 이찬희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발 두 발 뒤로 움직이다가, 나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이우신이 무어라 나를 부른 것도 같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죄지은 사람처럼 급히 달아나는 나를, 이찬희도 이우신도 구태여 쫓지 않았다.

‘뺏길 거야.’

덜덜 떨리는 무릎으로 계단을 내려갈 적에는 내가 뛰고 있는지 굴러떨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또 뺏길 거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또 걸었다.

‘이우신까지… 이찬희한테.’

정처 없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이내 두 다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놈처럼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갈 곳이 없어 커다란 운동장의 원형을 따라 뛰었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타오르고 심장이 쿵, 쿵, 쿵… 거친 운동에 피를 뿜어내도록 팔과 다리를 힘껏 뻗으며 뛰고 또 뛰었다. 지친 폐가 힘껏 쥐어짠 걸레처럼 쪼그라들고, 다시금 들이쉰 숨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부푸는 것을 느꼈다.

“허억…, 허억….”

코로 공기를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고, 들이쉬고, 내뱉고, 들이쉬고, 내뱉고, 들이쉬고, 내뱉고, 들이쉬고…

“허억!”

밭은 숨을 내뱉으며 나는 운동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몇 바퀴를 몇 분 동안 달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앞으로 아지랑이가 지렁이처럼 구불구불 피어올랐다. 온몸이 금방이라도 불붙을 것처럼 뜨거웠다. 하늘의 색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멀리, 이찬희가 보였다. 숙소 건물 밖으로 나오는 이찬희는 혼자였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내 앞으로 녀석은 일자로 걸어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내가 물었다.

“전부 다 말했어.”

이찬희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녀석은 나를 지나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교문으로 향하는 그를 향해 나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이우신이, 뭐라고 해?”

더운 숨을 헐떡거리며 나는 좀비처럼 다리를 질질 끌었다. 종아리 근육이 저들끼리 달라붙고, 비틀려 댔다. 저릿저릿 통증에 가까운 쥐가 올랐다.

“야!”

절뚝거리며 저를 쫓는 나를, 이찬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우신이, 뭐라고 해?”

나는 같은 질문을 재차 던졌다. 그러자 이찬희가 두 발을 멈추어 세웠다. 나를 돌아보지는 않고 뒤통수만 보여 주는 채로, 이찬희가 말했다.

“올라가서 네가 물어봐.”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것처럼, 녀석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내리막길을 걸어 빠르게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쳐다봤다. 그 뒷모습이 후련한 사람 같기도 했고 거절당한 사람 같기도 했다. 나로서는 이찬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그리고 이우신이 그에게 보여 주었을 반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망칠…까.’

뒤돌아,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찌르르 비명을 지르는 종아리를 질질 끌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안 봐도 되는데.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나 내겐 갈 곳이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땀 냄새, 흙냄새, 늦여름의 달아오른 아스팔트 바닥 냄새를 전신에 묻힌 채로, 이우신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숙소 계단을 한 칸 두 칸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몸을 벌벌 떨었다. 복도를 지나 방으로 향하면서는 살짝 열린 문 틈새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서웠다. 방문을 열면 내 목을 매달길 기다리는 밧줄이 걸려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나는 문고리를 잡고 뒤로 당겼다. 고개는 그보다 늦게 들었다.

“…….”

이우신이 보였다.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우신은 뒷모습만 내게 보여 주었다. 등 뒤로 방문을 퉁 소리가 나게 닫아도 그 애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딜 다녀왔냐고 묻지 않았고 어서 오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이우신의 손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손등으로 턱을 닦는 그의 어깨가 아주 약하게 흔들거렸다.

그 애가 울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나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우신아.”

불쑥 크게 튀어나온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어떻게 해? 불쌍해서….”

젖은 음성이 칼이 되어 내 발등에 꽂혔다.

“동정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불쌍해서….”

이우신이 울고 있었다. 나에게만 다정하고 내 앞에서만 울음 짓던 이우신이 울고 있었다. 이찬희에게 녀석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동해서… 불쌍하다고, 동정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말을 했다.

‘아….’

망했다.

또 뺏길 거야.

이우신까지 뺏길 거야.

이우신마저 이찬희를 동정하면, 좋아하면, 연민하면….

멍하니 이우신의 뒤통수를 바라만 볼 뿐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왼손이 주춤주춤 문고리를 찾아 움켜쥐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마주하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저열한 불안감이 심장 밖으로 펄펄 끓어 넘쳤다. 단숨에 열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언제나 금메달을 놓치지 않고 미친놈처럼 1등 자리를 고수하지만 결국에는, 엄마는 이찬희를 사랑한다. 내 세상의 모든 게 이찬희의 것이 된다. 내게는 상이 아닌 벌이 주어진다. 결국은 그렇게 된다.

천천히, 날 향해 돌아서는 이우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이야기의 끝을 생각했다. 한 발 두 발 나를 향해 비틀비틀 다가오는 이우신을 내려다보면서는 닥쳐올 상실에 숨이 막혔다.

이제, 왜 그랬느냐고 묻겠지.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비난하겠지.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어째서 회피하면서 이찬희를 싫어하냐고 성을 내겠지.

나는 두려웠다. 내게 실망한 이우신을 보게 될까 봐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허둥지둥 변명했다.

“나….”

형편없이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 잇새로 새어 나갔다.

“나…도 아는…데, 내 잘못인 거 아는데….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때는 나도 모르고…,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건, 내가….”

그리고 이우신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두 팔 벌려 나를 안았다.

“…….”

나를 세게, 아주 세게 끌어안았다.

“태오야…. 왜 이렇게 몸을 떨어.”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멈추어 섰다. 두 손을 엉거주춤 허공에 멈춰 세우고서, 내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는 이우신에게 아주 단단히 붙들렸다. 순간 무척 어리둥절했다.

지금… 왜 나를 안아 주지?

“괜찮아….”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괜찮아, 태오야.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것도, 알아. 변명하지 않아도 돼.”

왜 이찬희가 아니라 날….

“…너도 어렸어. 너무 어렸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어떻게 그게 네 책임일 수가 있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이우신이 말했다. 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된, 이우신이 내게, 세상 사람 아무도 안 해 준 말을 했다.

“…….”

훌쩍,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이우신이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문질렀다. 더운 눈물이 티셔츠를 적시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숨이 할딱할딱 피부에 닿는 것도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고, 끝도 아니었다.

“사과하지 마.”

이우신이 울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닌 일에 사과하지 마.”

나는 꽤 멍청한 편이라서, 그제야 이우신이 동정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다. 그가 눈물짓고, 어떡하면 좋으냐고 연민을 못 감추고, 품에 안고 달래는 이가 나였다.

등허리를 문짝에 푹 기댄 채, 나는 힘없이 주르륵 몸의 높이를 낮췄다. 내 두 발이 얼음판 위에 선 것처럼 이우신의 두 발 사이로 미끄러졌다. 나는 한참 내려가고, 이우신은 곧게 서자 우리의 눈높이가 맞았다. 그대로, 이우신이 내게 입 맞췄다. 손끝으로 내 두 뺨을 간질이듯 매만지면서, 붉어진 내 두 눈과 시선을 맞추며 느릿느릿 입술을 문질렀다.

날 위해 눈물짓는 두 눈이, 내 안에 해묵은 상처를 봐 주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낫기를 기다렸으나 도무지 빨간 피가 굳질 않았던 상처에 마침내 공기가 통했다.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어. 꼴도 보기 싫다고….”

나는 이 빠진 어린애처럼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일을 이기적으로 고백했다.

“걔가 없어질 줄 모르고… 학교에서, 홧김에 그렇게 말했었어, 내가….”

그렇게 해도 이우신이 나를,

“태오야.”

변함없이 좋아해 주면서,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내게 필요한 처방을 내려 주길 바랐기 때문에….

이우신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똑똑했다. 이 순간에는, 그 점이 너무나 좋고 기뻤다. 이우신이 하는 말은 전부 정답일 테니까.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백 점짜리 답일 테니까.

그날 밤, 훈련소로 엄마가 찾아왔다. 잠시 내려올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종소리를 들은 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한참 나를 놓아주지 않고 울던 이우신을 달래어 떼어 놓고, 괜찮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고는 채홍관 뒤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때보다 피로하고 내 것 같지 않은 다리를 움직여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내 입술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바싹 말랐다.

익숙한 회색 차의 운전석 문에 기대어 선 엄마가 보였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어머니의 퀭한 눈이 느껴지는 듯했다.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설수록 엄마의 고개가 내 얼굴을 좇느라 위를 향했다.

늘 그렇듯 평일의 엄마는 아주 피로해 보였다. 회사에서 일을 마치자마자 학교로 온 게 분명했다.

‘작은이모한테서 연락이라도 받았나 보지.’

이찬희가 나를 만나러 다녀온 뒤로 시무룩해 보인다고, 기운이 없고 지쳐 있다고, 밥을 안 먹는다고… 여러 이유를 들어 이모는 엄마를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태오야.”

엄마가 한숨 쉬듯 나를 불렀다.

나는 숨이 막혔다. 엄마의 저 옷, 칼라까지 새하얀 셔츠에 반쯤 풀린 넥타이, 검은 정장 바지, 발 아파 보이는 구두만 보면 나는 숨이 막히고는 했다. 그런 복장일 적에 엄마의 두 눈동자에는 언제나 노곤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지쳐 보이는 얼굴로,

“요즘 찬희랑 왜 못 지내는 거니?”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도무지 어떤 대꾸도 내놓을 수가 없게 됐다.

“…권태오. 너 요즘 들어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듣기론 별장 휴가도 잘 다녀왔다며. 찬희가, 작은이모랑 엄마한테 얼마나 착하게 잘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나는 부쩍 자랐다. 엄마가 나보다 작아진 것은 이미 한참도 더 된 일이다. 내가 엄마를 보호자라고 여기지 않은 지도 딱 그만큼 오래됐다. 엄마는 작아진 만큼 약해졌다. 나로서는 뭐라고도 반박하고 공격할 수 없게끔 줄어들었다.

“너희들은 형제 같은 사이잖니.”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엄마가 이렇게 한탄할 때면 나는 그냥 들어 주면 된다. 잠깐 참고 넘어가면 된다.

“권태오. 대답 안 해? 무슨 말이든지 해 봐.”

그리고, 잘못했다고 말하면 된다. 앞으로는 말을 잘 듣겠노라는 뻔한 대답을 들려주면 그만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이찬희와 앞으로도 잘 지내고, 작은이모에게도 인사성 밝게 행동하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겠다고 말하면 된다.

“아니요.”

이제까지는 그렇게 해 왔었다. 내 편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줄 알았었다.

“나한테는… 형제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엄마한테도 자매 없는 거처럼, 나한테도 형제 같은 거 없잖아요. 권태오한테 가족은 권주원 씨, 하나뿐이잖아. 권주원 씨한테 자식이 권태오 하나뿐인 거처럼.”

한 자 한 자 게워 내듯 말했다. 말이 아니라 내 장기를 꺼내서는, 뒤집어 까 보이는 기분이었다. 딱 그만큼 무거운 진심이었다. 언제고 말하고 싶어 혓바닥이 들썩거렸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내뱉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가닿지 못했다.

“태오야.”

피곤하다는 듯 가볍게 손을 털더니, 엄마는 제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엄지와 검지로 양쪽 관자놀이까지 지압하는 모습에 나는 화가 났다.

“차라리 레즈비언이라고 나한테 말해요!”

그래서 그렇게 소리 질렀다.

“뭐?”

그제야 씨…발, 엄마가 날 똑바로 쳐다봤다. 말문이 막힌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피로감이 대번에 사라지고 다만 성화가 담긴 두 눈으로 나를 봤다. 증오하듯 노려보는 시선에 나는 뱃속이 첨벙거렸다.

“이럴 바엔 차라리, 엄마가 작은이모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하라고요. 그런 거면 언젠가는 끝날 거잖아. 불륜이면 언젠가는, 헤어질 거 아니냐고요.”

“권태오! 너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말이야?”

“아뇨. 아닌 거 알아요. 근데 엄마는 왜 하필, 씨발… 왜 이모랑 자매가 되어서는 헤어지지도 않아요?”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 좀… 내버려 둬요. 우리 좀 내버려 두라고.”

결국에 나는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다. 끝내 엄마를 상처 입혔다.

“내가 엄마한테, 권주원 하지 말라고 하면… 그럼 안 되는 거잖아. 그냥 내 엄마로만 살면 안 되냐고 하면… 그건 못된 짓인 거잖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내게 이런 마음이 있는 줄을 나조차도 몰랐었다.

“엄마는 왜 권태오 엄마가 아닐 때만 행복해 보이는 거냐고 말하면… 그건 너무 심한 말이잖아.”

“…….”

놀란 것도, 아픈 것도 같이 구겨진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주 억울했다.

‘그러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왜 나를 이렇게 키웠냐고 화내고 싶었다. 왜 날 낳아 준 사람을, 키워 준 사람을 비난하는 놈으로 만들었냐고… 난 잘못되지 않았는데 왜 그걸 증명하려면, 엄마가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그러니까 나는 이제, 할 말 없어요.”

수백 가지 문장을 애써 삼켜서 속이 쓰렸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충격받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비난도 힐난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엄마를 나는 한참이나 내려다보기만 했다.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기가 다 죽을 정도로 찌는 폭염 속에서도 매미들은 각자의 나무에 매달려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벌레가 내지르는 소리에 파묻혀, 엄마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태오 네가 언제부터 엄마한테 존댓말을 했지?”

엄마가 내게 물었다. 나는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가 훈련소 숙소로 돌아가면서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뒤를 살피면 그땐 내 엄마가 아닌 권주원이 서 있을 거 같아서였다. 나는 권주원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몇 번째 오르는 것인지 모를 숙소 계단을 한 칸 두 칸 밟는 내내 머리가 무거웠다. 미뤄 왔던 생각들이 무턱대고 들이닥쳐 머리를 가득 채워서, 너무 무거웠다. 한 대 세게 맞으면 목이 똑 떨어져서는, 꽃봉오리 떨구듯이 뚝 놓칠 것같이 무거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 무거운 돌머리를 같이 들어 줄 사람이 있었다.

“태오야.”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이우신에게로 직진했다. 침대 귀퉁이에 허리를 편 채 곧게 앉아, 이불을 정리해 두고 날 기다리던 이우신은 내 무게를 못 버티고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그래도 이우신은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리를 와락 껴안고, 구겨진 자세 그대로 납작해졌다.

나도 이우신과 함께 납작해졌다.

“태오야. 왜 그래? …목이 뜨거워.”

내 목덜미를 매만지는 서늘한 손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어루만지는 손길에 나는 큰 개가 된 것 같기도 했고, 어린아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이우신.”

내 세계는 오늘로 두 짝이 났다. 내가 알고 살아왔던 세계, 그리고 이우신으로.

“이우신….”

너 하나만, 너 하나만 나를 이렇게 대할 뿐인데, 너 말고는 내 모든 게 전과 같은데… 너 한 사람 때문에 내 모든 게 달라졌다.

기쁨, 슬픔, 원망, 구애… 개중 무언지도 모를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이우신의 마른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콧대가 눌리도록 얼굴을 처박고 파고들자, 이우신의 심장이 느껴졌다. 야트막한 흉통 밑에서 그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박동이 아주 거세서 내 뺨을 치는 수준이었다.

“미안해.”

늘씬한 허리 밑으로 두 팔을 넣어 그를 끌어안으며, 나는 말했다.

“…엄마한테 못 물어봤어, 경영학과는 어떤지.”

그러자 이우신이 ‘아’ 하고는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그건 내가 알아보면 되니까. 안 그래도 개학하면 진로 상담할 거잖아. 그때 선생님한테도 물어보려고 그랬어.”

이우신이 말할 때마다 그의 가슴팍이 위로, 아래로 움직거렸다. 콩콩 뛰는 심장을 느끼려 나는 이우신의 왼쪽 가슴에 뺨과 귀를 붙였다.

“우신아.”

나는 네가 걱정돼. …그렇게 말하고자 부른 이름이었다.

“태오야. 나는 괜찮아.”

그런데 이우신은 질문을 듣기 전에 답을 내놓았다.

“나는 네가 아니잖아. 나는 남이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마. 네가 날 지켜 줄 필요는 없어.”

빠르게 흘러나오는 말들에 나는 놀랐다. 쿵쿵거리며 내달리는 내 심장 박동이, 이우신에게도 전달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우신이 두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고, 삐죽삐죽 선 뒷머리를 짐승 갈기 다루듯 쓸어내리는 거겠지.

“나한테 필요한 건 보호자가 아니야….”

그러고는 이우신은 웃었다.

“그냥 너지. 권태오.”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내도록 잘 참았는데, 참는 것이 내 일과가 된 지 오래인데,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워서 못 참겠다. 뜨겁고, 서럽고, 좋아서 못 참겠다. 참지 못해서 나는 이우신에게 입을 맞췄다.

와락 두 뺨을 움켜쥐고 입술을 내리누르자 이우신이 놀란 듯 바짝 얼었다. 팽팽해졌던 입술의 살결이 이내 도톰한 원형으로 돌아왔다. 꾸욱, 입술을 맞대고는 도장 찍듯이 무게를 주었다가, 느릿느릿 문지르다가, 천천히 벌어진 잇새로 혀끝을 밀어 넣었다.

가지런한 앞니의 치열을 핥으면서 나는 이우신의 허리를 만졌다.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에 손을 대자 움찔거리며 바짝 굳는 근육이 느껴졌다.

“…….”

감았던 눈을 뜨고, 긴장한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에는 알았다, 똑똑한 이우신은 남자끼리 섹스하는 방법도 알고 있단 것을.

“…태오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이우신이 느릿느릿 두 팔을 아래로 내렸다. 제 엉덩이에 바짝 붙은 내 두 손을 잡고는, 느릿느릿 떼어 내는 그의 귓불은 벌게지다 못해 거의 보라색으로 보였다. 수치심인지 수줍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감정으로 부끄러워하는 이우신을 본 순간, 내 심장은 달리는 말발굽처럼 요란스러웠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나는 이우신의 두 손을 와락 맞잡았다. 그대로 손깍지를 끼며 시트 위에 내리누르자, 반쯤 일으켰던 이우신의 상체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김칫국 마시지 마.”

놀랍도록 쉽게 제압당한 이우신을 내려다보며, 나는 애써 멀쩡한 척 목소리를 냈다.

“떡칠 사람 생각도 않거든.”

“뭐?”

그러자 이우신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무슨, 아니…. 이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긴 한데….”

혼자 중얼중얼 말끝을 흐리더니, 이우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그랗게 솟은 뺨 위에 가로줄이 생기도록 환한 웃음이었다. 나도 이우신을 따라 웃었다.

이우신의 티셔츠에 묻은 내 눈물 자국은, 그가 모르는 척하자 내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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