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나무(…)
심화반 자율 학습을 마치고 자습실을 나설 때 시계는 오후 6시를 알리고 있었다. 점심으로는 매점에서 2+1 할인 판매중인 김치볶음밥 도시락 세 개와, 장세라가 ‘너 먹으라고 더 가져온 거’라며 건넨 샌드위치 반쪽과 삶은 계란 두 개와 딸기 요거트, 그리고 ‘샌드위치값’으로 사 달라길래 한 컵 구입한 딸기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어영부영 같이 마셨다. 그것 빼고는 따로 먹은 음식이 없어, 7시쯤 되니 허기가 졌다.
“우신아. 같이 저녁 먹으러 가지 않을래? 학교 앞에 맛있는 파스타 가게가 생겼대.”
웃으며 물어오는 장세라의 제안을,
“어…, 미안. 난 잘 모르겠어.”
불분명한 대답으로 사양한 건 순전히 권태오 생각에서였다.
‘혹시 저녁… 같이 먹을지도 모르니까.’
남은 방학 기간 동안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선 따로 나눈 말이 없었다. 권태오라면 밥 같이 먹을 친구쯤이야 유도부 안에 널렸겠거니 싶기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연히 나랑 먹겠거니 하는 자신감인지 오만인지 모를 기대감이 들었다.
직접 물어보자니 괜히 부담만 줄 것 같고, 쌩하니 먼저 저녁을 먹어 버리자니 아쉬웠다. 그래서 채홍관으로 향했다. 어쩔 계획인지 권태오를 살짝 훔쳐만 보고, 밥은 유도부원들과 먹으러 갈 분위기다 싶으면 혼자 편의점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 올라온 채홍관은 엄청나게 소란스러우면서 동시에 집중력이 들끓는 공간이었다. 오십 명은 넘어 보이는 선수들이 도복 차림으로 훈련에 열중이었다. 휘슬 소리에 맞추어 엎드린 선수들의 몸이, ‘삑’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삑’ 물결치듯 동시에 올라왔다가, ‘삑’ 다시 내려가길 반복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땀 냄새, 끙끙거리는 신음성과 열에 받쳐 내지르는 짧은 탄성이 한데 뒤엉켰다. 더운 기운이 밀려오매 나도 모르게 뺨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아 쥔 채 조심스럽게 실내를 둘러봤다. 흥미로운 분위기에 호기심이 솟는 것과는 별개로, 외부인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바깥에서 기다릴까 하던 차에 관중석에 앉은 여자애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사복 차림이었다.
유도복을 입고 바닥을 뒹구는 여자 선수들 근처에 앉아,
“파이팅! 열 번만 더!”
응원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 놓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벽을 따라 개미처럼 걸어가 관중석 자리에 앉자 멀리서 훈련에 열중하는 권태오가 보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 ‘파이팅’을 외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군중 속의 권태오를 보자니 문득 현실감이 솟았다. 마치 어제까지의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게 권태오와 나의 평균 거리였었다. 다른 누구와 섞여 같은 색 옷을 입고 같은 동작을 보이고 있어도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권태오와, 그와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혼자이길 선택한 나.
‘이 정도 거리감도 벅찬 때가 있었는데….’
가방을 고쳐 안으며 나는 구부정하게 앉았다. 주먹 위에 턱을 괸 채, 휘슬 소리에 맞추어 바닥 위로 엎드리는 인영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 누군가,
“야!”
짧은 외침으로 내 생각을 끊어 놓았다. 놀라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공주윤이 보였다. 그는 경기장과 관중석을 구분 지어 놓은 펜스를 뛰어넘으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성난 듯한 얼굴과 성큼성큼 다가오는 빠른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상체를 꼬부리고 앉은 탓에 관중석 두 줄 아래에 선 공주윤과 나의 시선 높이가 엇비슷했다. 공주윤은 다짜고짜 눈썹부터 거칠게 찌푸렸다. 그러고는 따지듯이 말했다.
“아침에 뭐야? 너 왜 우리 훈련소를 처돌아다녀!”
“아….”
나는 두 눈을 끔벅거릴 뿐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모르게 됐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는 거였다.
“나 태오 방에서 신세 지기로 했거든.”
“권태 방에서? 네가 왜?”
“어…, 기숙사 신청서를 안 냈는데 신청 기간이 지나 버렸어. 그래서 잘 곳이 필요해져서.”
머쓱하니 목덜미를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한 장학생이란 것쯤이야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약간의 눈치만 있다면 누구라도, 돈이 없어서 기숙사비를 못 냈나 보다 짐작할 터였다. 그런데 공주윤은 달랐다.
“뭐야. 씨발 잊을 게 따로 있지.”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맞아, 얘는 이런 애였지….’
‘흥’ 소리가 나도록 연신 콧김을 내쉬더니 공주윤은 찡그렸던 미간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그럼 방학 내내 우리 숙소에서 지내는 거냐’, ‘그냥 집에서 살면 되지 뭐가 문제냐’ 투정 같은 질문을 연이어 늘어놓았다.
반쯤 심문당하는 기분이 되어 나는 질문들에 성실히 답했다.
“응. 방학이 2주 조금 넘게 남았으니까… 개학하면 바로 기숙사 들어갈 거야. …나 수학 심화반 수업을 들어야 해서, 아침 일찍부터 다녀야 하는데 집은 멀고… 에어컨이 없어서 덥거든.”
따박따박 건넨 대꾸에 공주윤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페트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목이 끼인 채, 페트병 속의 얼음 덩어리가 좌로 우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말없이 한참 흔들던 손을 멈추더니 그가 말했다.
“그 방에서 지내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근데 네 멋대로 싸돌아다니지 마.”
앞말과 뒷말이 모순됐다고 지적해 줄까 하다 나는 구시렁대듯 말했다.
“자습실 가려고 나가던 길이었어.”
“새벽에 무슨 놈의 자습을 하러 가?”
“수학 심화반….”
“아, 됐고!”
공주윤이 손안에 쥔 페트병을 구겼다. 단단해 보이던 얼음이 슬러시처럼 바스러졌다.
“공동 샤워실은 쓰지 마라. 꼬라지 쪼금이라도 보여 봐. 진짜 죽는다, 너.”
“…어차피 쓸 생각도 없었는데….”
“그럼 됐고.”
열이 오르는지 박살 난 얼음 조각들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공주윤은 페트병을 멀리 있는 철제 휴지통을 향해 집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페트병이 휴지통 입구에 한 번 걸렸다가, ‘퉁’ 소리를 내며 골인했다.
나는 앉은 자세를 살짝 고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저기…, 주윤아. 너 1학년 때 들었던 수학 과외 말이야. 내가 숙제 대신 풀어주던 그거.”
“어엉?”
“그 선생님 과외는… 몇 회분으로 끊어 받으셔? 혹시 수업료 얼마였는지 알아?”
조심스럽게, 또 자연스럽게 묻고자 노력했지만 잘되진 않았다. 은근슬쩍 운을 띄운 내 말에 공주윤이 갈색 눈을 연거푸 서너 번 끔벅거렸다. 순간 아차 싶었다. 수업료가 얼마인지 알아 봤자 나로서는 코디네이터를 소개받을 방법이 없었다. 곧 2학년 2학기인데, 그 정도로 유명한 선생이라면 새 학생을 받을 여유도 없을 거였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곧장 후회됐다. 나는 얼른 경기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노골적으로 뜯어보던 공주윤이 한 박자 늦게 말했다.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어? 엄마가 억지로 시킨 건데.”
“아냐, 나는 그냥….”
“몰라, 새끼야. 돈지랄 낭비였던 거는 분명한데….”
“아…, 그래. 알겠어.”
그 말에 집중하지 않는 척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일부러 멀리 던졌다. 훈련을 마친 아이들이, 그대로 경기장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나자빠지고 대열에서 이탈한 소년들 틈새에서 권태오는 끄떡 않고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코치가 재차 휘슬을 불자, ‘삑’ 소리와 함께 권태오의 상체가 아래로 내려갔다. 팔꿈치를 굽히며 가슴이 바닥에 닿도록 내려갔다가, 재차 불린 휘슬 소리에 다시 올라오길 반복했다.
“왜.”
툭, 공주윤의 주먹이 내 어깨를 쳤다.
“어?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러니까 그게 지금 왜 궁금한데. 왜?”
거듭 어깨를 타격하는 손길에 나는 좌우로 흔들거렸다. 대답하지 않고 버티자 공주윤은 내 어깨를 두어 대 더, ‘퍽퍽’ 소리 나게 때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공주윤의 팔뚝을 힘껏 쳤다.
‘퍽’ 소리가 났지만 뒤로 밀리는 건 오히려 내 몸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니까.”
얼얼한 주먹을 손으로 감싸며 그렇게 말했다. 눈을 부라리며 저를 노려보는데도, 공주윤은 내가 우스운지 입꼬리를 올렸다.
“시시하기는.”
이죽거리며 한참 웃는가 싶더니, 공주윤이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야. 공주가 시험지 구해다 줄까?”
“어?”
느닷없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공주윤이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울 공신님, 공주가 시험지 구해다 줘? 어? 경시대회 씨발 좆 됐다면서.”
“…좆 된 정도는 아니야.”
그게 그새 소문이 났다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알았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건우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생각이 거기에 닿자 갑자기 모든 게 이해됐다. 강건우가 안 이상에야 어떤 일이든 비밀이 아닌 셈이었다. 내 일로 성난 녀석이 정말로 학교 홈페이지에 고발 글을 쓴 건 아닐까, 나는 잠시 걱정스러웠다.
‘에이, 그건 아니지….’
제아무리 강건우래도 그렇게 심한 바보짓을 할 녀석은 아니었다. 제 친구들이 수십 명 모여 있는 채팅방에 운을 띄워 소문을 만드는 게 차라리 강건우다웠다. 무얼 조작하거나 작정하는 데엔 소질 없는 강건우지만, 정의감 하나는 누구보다 넘치는 착한 애도 강건우였으니까.
덕분에 나는 아주 무안해졌다. 수학 경시대회를 망쳤다느니 ‘씨발 좆 됐다’느니 소문이 난 줄도 모르고서 코디네이터 수업료는 얼마였냐느니 그런 질문을 꺼냈으니, 공주윤을 똑바로 보기가 아주 민망했다.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뿐이야. 신경 쓰지 마.”
강하게 짚어 말해 두자 공주윤도 더는 나를 놀리지 않았다. 나는 경기장 바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경기장에 남은 선수는 몇 없었다. 먼저 나가떨어진 선수들이 구석 자리로 몸을 비키고 나니, 제 위치와 자세를 고수하는 소년들은 일곱 명뿐이었다. 휘슬 소리에 맞추어 권태오를 포함한 선수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팔꿈치 똑바로 당겨!”
‘삑’, 휘슬을 불며 코치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두 명이 쓰러지는 바람에, 남은 선수는 네 명으로 줄었다.
“신기하냐?”
웃음소리를 섞어 공주윤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들 엄청 열심히 하네. 매일 이런 분위기야?”
“엉. 보통은 팔굽혀펴기 2백 번, 버피 테스트로 몸 좀 풀고 경기하고… 자기 전에는 밸런스 트레이닝만. 근데 오늘은 코치가 뭔 바람이 불어 갖고… 배밀기 1등하면 저녁 훈련 빼 준대서 저 지랄들을 하고 있는 거고.”
“‘배밀기’? 저게 배밀기라는 동작이야?”
호기심을 못 감추고 그렇게 물었다. 자세는 팔굽혀펴기와 비슷한데, 엉덩이를 높이 든 채 허리와 배 힘으로 웨이브를 치듯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헤엄치듯 올라가는 운동이었다. 대열의 중앙에서 아무렇잖게 해치워 대는 권태오가 눈앞에 있으니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가 않았다. 반건조 오징어처럼 널브러진 다른 선수들과 섞여 있는데도 권태오가 보이는 동작은 몹시 쉽고 재밌어 보였다.
그만큼 빠르게 많이는 못 하겠지만 나도 할 수 있을 성싶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공주윤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너도 해 볼래? 공주가 가르쳐 줄까? 이리 내려와.”
저는 진작에 빠져나온 주제에, 공주윤이 낄낄거리며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어린애 같은 표정에 내 두 눈이 가늘어졌다.
‘하라고 하면 누가 못 할 줄 알고?’
체육 수행평가에서는 언제나 A+를 받아 온 나였다. 농구 골밑 슛도 1분에 9개를 넣었고, 배드민턴 하이클리어, 서브도 만점이었다. 라인댄스는 창의성 영역에서 조금 밀리는 바람에 실점했지만, 기본 스텝 점수를 다 채워 상대 평가로는 아무튼 A+였다. 유도부 애들처럼 근육질 선수는 아닐지라도, 배밀기든지 가슴밀기든지 열 번쯤은 거뜬하지 싶었다.
휘슬 소리에 맞추어 경기장 바닥에 엎드리는 선수들은 어느덧 셋으로 줄어 있었다. 땀방울을 떨어드리는 권태오를 훔쳐본 다음, 그들처럼 나도 구석 자리 바닥에 엎드렸다.
“다리 더 넓게 벌리고, 두 팔은 어깨너비로 좁혀.”
옆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채 공주윤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하자 내 시야에는 공주윤의 두꺼운 장딴지만 보이게 됐다.
“이제 엉덩이 뒤로 들었다가, 가슴과 배로 바닥을 쓸고 내려간 다음, 웨이브하면서 올라가면 돼.”
발끝과 두 손바닥으로 체중을 받치며 가슴부터 천천히 내려갔다. 바닥에 닿을 듯 말듯 배가 내려갔다가, 그대로 두 번 다시 올라가질 못했다.
“…….”
털썩, 매가리 없이 나는 바닥에 그대로 엎드렸다.
“으하하하!”
공주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해 놓고는 한 번을 제대로 못 했다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몰렸다.
‘아 씨….’
나는 다시 자세를 취해 보였다. 두 다리를 벌리고 엎드린 채 발끝으로 하체를 받치며 엉덩이를 위로 들고, 팔꿈치부터 천천히 굽혔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그러고는 가슴부터 내려가려는데, 도무지 곁눈질로 훔쳐봤던 선수들처럼 부드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체를 숙이자마자 두 팔이 후들거리고 어깨와 가슴이 무진 당겼다. 끙끙 소리 내며 버티다가 나는 고문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다시 경기장 바닥에 엎어졌다.
“야!”
그와 동시에, 버럭 외침 소리가 들렸다. 놀라 고개를 모로 돌리자,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권태오가 보였다. 그의 등 뒤로 어리둥절한 얼굴인 채 대열을 지키는 선수는 고작 두 명이었다. 두 명만 더 제치면 되는데, 권태오가 중도에 오래 버티기 대결을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왜, 왜…?”
시뻘겋게 익은 그의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목덜미는 흠뻑 젖어 번들거리고, 팔뚝에는 핏줄이 울룩불룩 도드라진 채 권태오는 내 옆으로 달려오더니, 엉거주춤 엎어진 나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그가 와락 움켜쥐자 내 팔뚝이 보잘것없는 나뭇가지처럼 붙들렸다.
“너 그만해.”
권태오가 말했다. 나는 그의 손바닥과 목소리의 온도에 어리둥절했다. 고개를 돌려 공주윤을 살피는데, 그 애는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돌린 자세가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등 뒤로 휘슬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남은 선수들이 경쟁하도록 내버려 둔 채, 권태오가 나를 끌고 나갔다. 큰 손에 덥석 붙들려 끌려 나가다시피 하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공주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는 뭐라 혼잣말을 할 뿐, 더는 나를 잡지 않았다.
권태오로 인해 나는 단숨에 채홍관 밖으로 내몰렸다. 쫓겨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뭘 그렇게 이상하게 했어? 너 따라 한 건데….”
황당한 마음에 목소리를 내자,
“아, 진짜….”
권태오가 짜증스럽게 이마를 구겼다. 훈련의 열기를 덮어쓴 그의 얼굴이 무척 화난 듯 보여서 나는 멋쩍어졌다.
“나는 그냥… 공주윤이 가르쳐 준다길래.”
“다신 그거 하지 마.”
“왜?”
“네가 하니까 이상해!”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권태오가 버럭 외쳤다. 그 바람에 나는 아주 황당했다. 뭐든지 처음 해 보면 똑바로 못할 수도 있는 거지, 자세 좀 틀렸다고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멀리서 볼 적엔 좀 유연한 팔굽혀펴기처럼 보여서, 재밌을 거 같아 따라 한 것뿐인데…. 직접 해 보니까 팔굽혀펴기보다 오히려 더 어렵기는 했다.
‘그래도 동작을 다시 익히면 가끔 할 만할 것 같은데….’
나는 괜스레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했어?”
“몰라, 씨발…. 아무튼 다시는 하지 마. 알겠어?”
윽박지르듯 권태오가 말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나는 억울해졌다. 이게 욕설까지 들을 일인가. 억울한 마음에 목소리가 불퉁하니 빠져나갔다.
“왜 욕을 하고 그래? 처음 해보는 자세면 좀 못할 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권태오가 내 앞으로 바짝 붙어 섰다. 채홍관 벽에 등을 붙이며 빤히 올려다볼 때, 나를 담는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거렸다.
내 귓가에 제 고개를 거의 붙이다시피 하며 권태오가 속삭였다.
“야해서 이상하다고….”
“…….”
잠시 동안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내 내 얼굴까지 권태오를 따라 빨간색이 됐다.
“미쳤어? 그냥 운동 좀 한 거 가지고…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네가 하니까…. 아, 진짜… 하지 마. 다신 그거 하지 마.”
“알겠어….”
주먹으로 권태오의 팔뚝을 두어 대 치고 뒤로 밀어내자, 그는 내 힘을 못 이기는 척 시늉하며 물러섰다. 삽시간에 달아오른 숨을 훅훅 내쉬며 나는 비척비척 걸었다. 1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색하고 야시시한 분위기에 팔뚝 위로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아서였다.
저로부터 도망가는 내 뒤를 권태오가 바짝 쫓았다. 나는 잰걸음으로 달리다시피 하는데, 덩치가 거대한 만큼 다리도 긴 권태오는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걸으면 그만이었다.
“진짜 다신 하지 마.”
권태오가 강조해 말했고,
“알겠다고….”
내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듣고 보니 정말로, 내 자세가 이상했던 것도 같아서였다. 엎드려서 엉덩이 좀 든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보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권태오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충격적이고, 억울하고, 왠지 부끄러웠다.
도망치듯 숙소로 향하는 내 뒤를 권태오는 몇 분간 더 쫓았다. 몇 분이면, 훈련소 숙소에 다다라 계단을 오르고 가장 구석진 방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권태오는 그 짧은 길을 정성껏 배웅했다. 내가 제 방으로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더니, 방문 안으로 나를 밀어 넣고는 땀 냄새를 풍기며 씩 웃어 보이는 얼굴이 환했다.
“여기서 좀만 기다리고 있어. 너 때문에 중간에 탈락해서 마무리 훈련까지 하고 와야 되니까…. 저녁 좀 늦게 먹어도 내 탓 하기 없기야.”
그러더니 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으며 나가 버렸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끔벅거리다, 한 박자 늦게 웃었다.
‘나랑 밥 먹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한 거였구나.’
방 안에 홀로 남아 웃다가 나는 괜히 눈썹을 구기며 표정을 지웠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창가에 붙어 서자, 채홍관을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권태오가 내려다보였다. 멀리서 뒷모습만 봐도 곰처럼 커다란 그의 발걸음이, 신난 동물처럼 가벼워 보였다.
심화반 자습실에 도둑이 들었다. 외부인인지 학생 중 하나인지 알 수 없는 이 도둑은 자습실이 비는 시간인 밤 11시 30분에서 새벽 6시 사이에 학생들의 물건을 죄 훔쳐 갔다. 특이점이 하나 있다면 캐비닛 자물쇠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아서, 중요하게 보관해 둔 물건들은 하나같이 멀쩡하고 책상과 의자 위에 대충 올려놓았던 담요와 방석만 전부 사라졌단 점이었다.
장세라로부터 ‘도둑이 들었다’는 메시지를 받아 읽으면서도 나는 내 방석은 멀쩡하겠거니 생각했다. 박민아나 그 친구 무리가 쓰는 방석은 기능성이니 무어니 하는 이름이 붙은 명품으로 전동 안마 기능까지 있어서, 도둑이 훔쳐 갔대도 놀랍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내 방석은 그야말로 방석일 뿐이었다. 천 원 샵에서 4천 원인가 5천 원을 주고 산 것을 2년 내내 바꾸지도 않고 썼으니 중고 중의 중고였다.
그러나 방심한 채 도착한 자습실에서 나를 반긴 것은 휑하니 딱딱한 몸체를 드러낸 의자였다. 닳고 닳아 가운데가 납작해진 내 방석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
황당한 마음에 괜스레 바닥을 훑어보는 내 옆으로, 장세라가 다가왔다.
“네 거도 없어졌지? 아…, 진짜 도둑이 다 훔쳐 갔나 봐.”
“남이 쓰던 걸 왜 훔쳐 가? 더럽게.”
딱딱한 의자에 풀썩 몸을 앉히자니 기분이 나빴다. 눈썹을 구긴 채 그 외 사라진 물건은 없는지 캐비닛을 확인하는 내게로, 장세라가 제 의자를 끌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속닥속닥 말했다.
“우신아. 너 방석 이야기 몰라? 수능 칠 때 이성이 쓰던 방석에 앉으면 성적 잘 나온다고 그러잖아….”
조심스럽게 건네 오는 말소리에 나는 너무 크게 코웃음 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 문지방 밟으면 귀신이 업혀 들어온다 그러고, 다리 떨면 복 나간다고 그러고, 아이 위를 넘어 다니지 말라는 거? 그런 건 다 지어 낸 이야기잖아.”
비과학적인 미신에는 나름의 의도와 해학이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문지방에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 다니라든가, 누군가 지켜보지 않을 때도 몸가짐을 바로 하라거나, 아이를 밟지 않게 주의하라거나… 곰곰이 따져 보면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성이 쓰던 방석에 앉으면 성적이 잘 나온다’는 미신으로는 어떠한 긍정적인 담의도 나눌 수 없었다. 그런 미신을 핑계로 대고 도둑질을 일삼으니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딴 미신을 지어 낸 거지? 애들은 그걸 또 믿는단 말이야?’
7년 대흉이 들어도 무당은 굶어 죽지 않는다더니, 옛말엔 틀린 게 없구나 생각됐다.
입을 다물고 책을 꺼내는 날 향해, 장세라는 포스트잇 하나를 내밀었다. 리본을 맨 곰돌이가 그려진 포스트잇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마 3학년이 범인일 거야. 공부 잘하는 애들이 쓰던 거라고 팔거나 돌려쓰는 거 옛날 유행인데... 작년에도 졸업한 선배들이 2학년들 거 훔쳐 갔었거든. 그러니까 괜히 선생님한테 말하거나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PS. 작년엔 속옷까지 훔쳤었대! :(」
신경 써 적어 준 쪽지 자체는 고마웠지만 그 내용은 내게 아무런 위안도 안겨 주지 못했다. 오늘 방석을 도둑맞은 건 아무튼 나였으며, 내일 방석을 훔칠 의향이 조금도 없는 것 또한 나였기 때문이었다. 내리사랑도 아니고 내리절도가 유행이라니 할 짓들도 참 없구나 싶었다.
‘이 정도로 상식 없는 수준인데 공부를 잘할 리가 있겠어?’
포스트잇을 책상 구석에 내려놓고 나는 문제집을 펼쳤다. 멍하니 시간을 버린다고 해서 사라진 방석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며, 이번 일로 시간까지 버린다면 더욱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문제집을 풀고 공부하는 것과는 별개로,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건우가 지나가는 말로 낡았다고 두 번인가 지적했던 그 방석은, 나름대로는 깨끗하게 오래 쓰던 물건이고 내 몸에 잘 맞아서 바꿀 의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실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들고 다니던, 내 손때가 묻은 물건을 누군가 악의적으로 훔쳐 갔다는 게 못내 불쾌했다.
결국은 자율 학습 시간이 끝나자마자 장세라와 학교 밖을 나서야 했다. 새 방석을 사기 위해서였다.
학교 근처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나에 비해 장세라는 제 집 앞을 드나들듯 길 안내를 척척 해냈다. 가장 먼저 유명하다는 편집 샵에 들렀지만 마음에 드는 방석이 없어서 다시 나와야 했다. 다음으로 들른 브랜드 문구점은 그보다는 괜찮은 곳이었다. 문구류부터 시작해서 담요와 실내화, 패브릭 포스터, 조화와 화분 장식물, 헤어 롤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품을 진열해놓아 물건의 종류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장세라가 다이어리 코너에서 한눈을 파는 동안 나는 벽면 한쪽을 차지한 반려견 용품에 시선이 팔렸다. 하얀색 강아지 마네킹에 목수건이며 예쁘게 생긴 리드 줄, 선글라스까지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열대 위에는 조심이가 쓸 수 있을 만한 사이즈의 상품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구석 자리 벽에 걸린 두꺼운 목줄이 쓸 만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목줄은 꽤나 길었다. 상품에 걸린 태그에는 ‘전체 길이 5M’이라 쓰여 있었고, 반으로 접어 쓰는 식으로 길이 조절도 가능해 보였다.
‘지금 조심이 개집에 걸린 목줄이 이거의 반도 안 되는 길이니까….’
이것 하나만 사다 줘도 조심이의 세계가 두 배로 커지는 셈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목줄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3만 9천 원이라는 가격표를 확인하고 도로 내려놓았다.
‘…비싸네….’
바로 옆의 짧고, 얇고, 가벼운 목줄은 2만 원밖에 안 하는데, 대형견용이라 그런지 큰 건 아무래도 비쌌다. 비싸도 너무 비쌌다.
나는 카드 안에 남은 잔금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팔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 한 푼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하고 귀한 돈이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벌려 보자 생활비 잔금이 얼마 남아 있긴 했다. 그래봐야 5만 2천 원이었다.
별수 없이 마음을 접어놓으며 나는 스포츠 용품 코너로 걸어갔다.
검정색 곰이 그려진 텀블러와 유명한 브랜드 마크가 새겨진 캡 모자를 지나치자 총 모양으로 생긴 마사지 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부산의 호텔에서 보냈던 밤이 생각났다. 익숙하다는 듯 내 종아리를 잡고 파스를 뿌려 주고, 근육을 만져 주던 권태오의 손도 절로 떠올랐다. 괜히 무릎이 저릿한 기분에 나는 제자리에서 두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런 거 주면 태오도 잘 쓸 텐데….’
대충 살펴도 비싸 보이기에 진열된 상품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30% 할인 중이라는 마크가 붙은 가격표를 확인했다. 할인해서 깎인 가격이 9만 9천 원이었다.
작게 콧김을 내쉰 다음에는 어떤 상품도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기웃거리던 눈길을 멈추고 나는 방석이 쌓여 있는 코너로 직진했다. 멜빵바지를 입은 펭귄 캐릭터가 새겨진 메모리폼 방석은 4만 원 대였고, 파란색 체크무늬에 디자인이 밋밋한 솜 방석은 만 천 원이었다.
메모리폼 방석 위의 펭귄을 두어 번 눌러 보다가, 나는 체크무늬 방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
짧은 순간 해괴망측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괴하고, 망측하면서도, 동시에 그럴싸한 생각이 뇌리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 남에게 말하기 쪽팔리는 일인가? (O)
* 그러나 돈이 되는가? (O)
* 쪽팔리는 것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O)
…고민 끝에, 나는 체크무늬 방석 세 장을 한 번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중학생들이 와르르 줄지어 서 있는 계산대로 향했다.
“벌써 다 골랐어?”
내 뒤로 장세라가 다소 허둥지둥하며 따라붙었다. 오로라가 그려진 마스킹 테이프와 금붕어 모양 젤리가 든 어항 모양 플라스틱 케이스, 조금 전 내가 마구 눌러 댔던 메모리폼 방석을 챙겨 든 채였다.
내가 장세라가 집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동안 장세라도 내 팔 안의 방석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물었다.
“왜 똑같은 걸 세 개나 사? 또 도둑맞을까 봐 그래?”
“아니.”
내 품 안의 방석을 주물주물 만지면서 나는 말했다.
“도둑놈한테서 구매할 정도로 절실한 거라면 말이야. 직거래로 판매하면 더 잘 사 가지 않겠어?”
“어, 응…. 그렇기는 하겠지?”
장세라가 어정쩡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답에 나는 만족했다. 고민할 것 없이 계산대 앞에 서, 지갑 안에 든 현금으로 방석 세 개를 결제했다. 종이 가방을 사겠냐는 말에 고개를 내젓고는 방석을 품에 안고 먼저 가게 밖을 나섰다.
활짝 열린 가게의 유리문을 피해 길가에 서서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앱 스토어를 실행하고는 ‘중고 거래’를 검색하자 그럴싸해 보이는 직거래 어플리케이션이 많이 보였다. 개중 별점이 가장 높은 것을 골라 ‘설치’ 버튼을 누를 때쯤, 장세라가 가게 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새 무얼 더 샀는지 두툼한 종이 가방을 든 장세라를 향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학교로 다시 갈 거야. 내일 보자.”
그러자 장세라가 ‘으음’도 ‘으응’도 아닌 침음을 냈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기에 잠시간 그 애를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만 보는 장세라를 향해 나는 다시금 인사했다.
“내일 봐.”
그러고는 왔던 길을 돌아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가게 서너 개를 지나쳤을 즈음, 장세라가 나를 쫓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우신아! 잠깐마안!”
천천히 돌아서자 트레이닝복 바지 무릎이 구겨지도록 뛰는 장세라가 보였다. 저러다 넘어지겠다 싶어 나는 그 애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짧은 거리를 단숨에 질주해 온 장세라는 숨 고를 틈도 없이 외쳤다.
“그거 내가 살게!”
난데없는 이야기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거’라고 해 봐야 내 팔 안에 들린 거라고는 남색 천지갑, 그리고 방금 구입해서 비닐 포장도 벗기지 않은 방석 세 개가 전부였다. 내가 품 안의 방석들을 고쳐 안자, 장세라는 볼을 붉혔다. 소리 지르며 달려온 게 뒤늦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네 방석, 응. 그거…, 내가 다 살게. 세 장 다 나한테 팔아. 다른 사람한테 주지 말고….”
“너도 미신 같은 걸 믿어?”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지. 아닌데…, 그래도… 우신이 네 거는 좀 다를 거 같아서. 그거 나 줘. 내가 쓸래.”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돈하며 장세라가 말했다. 이마 위에 조그마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더워 땀을 흘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름 볕에 목덜미가 따끔따끔했다.
“너는 아까 방석 샀잖아.”
티셔츠 속에 스몄던 가게 에어컨의 냉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장세라는 ‘끄으음’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럼 내 거랑, 네 방석이랑 바꾸자. 어때?”
아무리 그렇게 말한들 나는 장세라에게 내 방석을 줄 마음이 없었다. 돈을 받고 팔거나 더 비싼 방석과 교환하기는커녕 공짜로 선물하기에도, 내 방석은 너무 썰렁한 물건이었다.
진짜로 미신을 믿어서 이러는 걸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런들, 따지자면 문과반이면서 심화 수학반에 들어올 정도로 똑똑한 장세라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단순히 나를 좋아해서 내 물건을 남이 갖게 하고 싶지 않은 걸까 생각해 보았는데, 그런 거라면 더욱 문제였다. 그런 건 독점욕이니까 말이었다. 장세라에게 무엇도 내줄 수 없는 나로서는 그런 독점욕을 허락해선 안 됐다.
입을 다문 채 나는 품 안의 방석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얼마에 살 건데?”
가격대나 알아볼 심산으로 그렇게 묻자, 장세라가 제 입술을 내리 씹었다.
“으음…, 몰라. 얼마에 팔 거야?”
‘도움이 안 되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답했다.
“너한테는 안 팔 거야.”
“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세라가 소리쳤다.
“왜 나한테는 안 팔아?”
몹시 억울한 듯 튀어나온 외침에 나는 콧김을 푹 내쉬었다. 한숨으로 폐부를 꺼뜨리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장세라 너한테 파는 건, 좀…. 친구 사이에.”
여름의 대로변은 너무 더웠다. 온도를 가진 감정이 속에서 펄펄 끓어오르면, 그 김을 숨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장세라가 꼭 그랬다. ‘친구’ 하고는 내가 뱉은 지칭을 되뇌며 장세라가 웃었다.
순수한 얼굴을 보자니 나는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에두르듯 친구라고 칭한 말에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장세라가 솔직한 만큼 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호의의 이유를 눈치조차 못 채는 척 입 다물고 모르쇠 하는 못난 놈. 그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포지션이었다.
말없이 방석을 고쳐 안는 나를 향해 장세라가 말했다.
“그럼 그러지 말고, 우신아. 방석 말고…, 노트 필기나, 교과서 같은 거 팔아 봐. 1학년들이 은근히 그런 거 많이 사 간대.”
그러더니 불쑥 내 옆으로 다가왔다. 휴대폰 화면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 댈 기세이기에, 나는 엉겁결에 장세라에게 잘 보이게끔 액정 방향을 돌렸다. 화면 안의 ‘플리마켓’ 시작 화면을 바라보더니 장세라가 코웃음을 쳤다.
“이런 어플 쓰면 쌤들한테 바로 걸려. …너 개구멍 가입 안 했어?”
“그게 뭔데?”
두 눈을 끔벅거리는 나를 장세라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드물게 바보 보듯 응시하는 것도 잠시였다. 무얼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가 빈자리에 종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도 장세라를 따라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그늘에 들어오니 더운 볕의 기운이 훨씬 덜했다.
“‘개구멍’이라고, 채홍고 학생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야. 글은 2학년부터 올릴 수 있고, 가끔 못된 뒷담 같은 것도 올라오는 곳인데…. 재작년에 졸업한 유도부 오빠들이 만든 곳이거든?”
설명하는 내내 장세라는 왼손에는 제 휴대폰을, 오른손에는 내 휴대폰을 들고 메신저 창을 두드려 댔다. 이리저리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두 손을 보고 있자니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양손잡이인가 궁금할 정도였다.
“자, 여기. 여기서 파일 받고, 내가 보낸 것도 깔아서 설치하면 돼.”
장세라가 돌려준 내 휴대폰 화면 안에는 누군가 올려놓은 다운로드 링크가 떠 있었다. 뒤이어 ‘2학년 4반 장세라’가 보낸 파일이 도착했다.
‘Doghole.apk.’
이름만 봐도 몹시 수상쩍어서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누가 만든 어떤 프로그램인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깔았다가 휴대폰에 바이러스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바이러스 같은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장세라가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장세라가 시키는 대로 어플을 다운받았다. 공식 앱 스토어가 아닌 다른 경로로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내 휴대폰에는 ‘영어사전’, ‘모바일 뱅킹’, ‘인터넷 강의 바로가기’ 외에는 별다른 어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배경화면에 낯선 어플이 깔렸다.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자, 어플의 첫 페이지가 열렸다.
장세라는 아주 친절한 태도로 내게 개구멍 가입 방법을 알려 주었다. 나는 장세라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추천인 이름에 ‘장세라’를 기입했고, 알려 주는 코드로 계정 인증도 마쳤다.
그쯤에서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냐’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컴맹도 아니고 폰맹인 내게 개구멍에 대해 알려 주느라, 장세라는 타고 가야 할 버스를 두 대나 그냥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제 됐다. 거기 장터 게시판에 올리면 돼.”
“응, 고마워.”
영양가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장세라는 신나 보였다. 받은 도움이 있으니 나는 조용히 앉아 다음 버스가 오기를 같이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다. 종이 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에 오르면서 장세라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배웅하고는, 나는 학교를 향해 걸었다.
채홍관을 향해 느릿느릿 걷는 내내 나의 시선은 ‘개구멍’에 박혀 있었다. 장세라의 말마따나 개구멍은 음침하고 독특한 커뮤니티였다. 메인 화면에서부터 뒷담화가 ‘HOT' 표시를 단 채 반짝거렸고, 자전거 도둑 목격담을 구하는 글도 보였다.
천천히 살펴보니 게시판마다 글의 성향이 달랐다. ‘쌤들 중에 누가 제일 예쁘냐?’, ‘영양사 바꿔달라고 청원할 건데 싸인 좀 해줘ㅓㅓ.’, ‘영어단어 외우는데 하루에 몇 시간 투자해야 함??’, ‘좆같은 가사도우미 썰푼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서 걸음을 멈추고 화면의 밝기를 조금 낮췄다. 읽어 봐야 한숨만 나오는 다른 글들은 애써 무시하며 장터 게시판을 찾아 열었다.
손목시계, 지갑, 가죽 벨트,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게시판 안에는 여러 매물이 올라와 있었다. 개중 살아 있는 햄스터를 찍어 올린 사진이 있기에, 깜짝 놀라 눌러 보았다.
[참고로 판매안함ㅋㅋ 내햄톨이 귀여우니까 구경하라고^^777]
“…….”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스크롤을 슥슥 내렸다. 해바라기 씨를 욱여넣느라 오른쪽 볼이 잔뜩 늘어난 햄스터 사진을 여러 장 구경하느라, 3분은 더 지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장세라의 말과 달리 공부 노트나 교과서는 비인기 매물인 듯 보였다. 하기야 채홍고에는 입시 코디네이터들이 하나씩 붙은 애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애들이 뭐가 아쉽다고 남의 노트 필기를 구매하겠는가.
반면 수능 대박 난 선배가 썼었다는 샤프, 아이돌 지망생인 1학년이 맸다는 넥타이, 여학생/남학생이 썼다는 방석은 종류에 따라 가격대도 높았고 팔리기도 잘 팔렸다.
이내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대여섯 장 줄지어 묶인 방석들 가운데에, 도둑맞았던 내 방석 사진이 섞여 있었다. 가격이 10만 원으로 책정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이미 판매된 상품입니다’라는 안내였다.
“와, 이 도둑놈….”
말도 안 되는 값에 내 물건이 팔렸단 걸 알고 나니 짜증이 북받쳤다. 2년이나 깔고 앉은 꼬질꼬질한 방석을 10만 원이나 받고 팔다니 도둑도 이런 도둑이 없었다.
‘나한테 수수료라도 떼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는 훈련소 숙소로 걸어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새 면이 익숙해진 유도부 선수들이 ‘하이’ 하고 내게 인사했다. 가볍게 목례하며 나는 얼른 권태오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권태오가 방에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보따리장수처럼 가져온 방석 세 장의 포장을 전부 뜯어낸 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고 장터 게시판에 새 글을 적기 시작했다.
공부방 방석, 야간 학습 방석, 기말고사 방석… 방석의 이름부터 각각 다르게 지어 보았다.
“…….”
사실 시험 성적에 방석 따위가 뭐 대수겠는가. 고슴도치 가시밭만 아니면 뭘 깔고 앉든지 상관없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거지 엉덩이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나마 팔릴 만한 문구를 지어내어 붙이자니 스스로가 몹시 궁색하다고 생각됐다.
[사기 매물 거래하지 마세요. 2학년 전교 1등이 쓰던 방석 확실합니다. 학교에서 직거래하시면 만나서 본인 인증도 가능합니다.]
상세 설명까지 기재하고 나니 가격을 매길 차례였다. 아무리 그래도 방석 한 장에 10만 원을 매기는 건 너무 비양심적이었다. 고민 끝에, 3만 원으로 가격을 매겼다. 세 장 모두 팔리면 9만 원이었다.
‘그럼 마사지건 하나쯤은 살 수 있으니까….’
머뭇거리며 재차 고민하다가, 나는 숫자 3을 지우고 5를 입력했다. 세 장 모두 팔린다 치면 15만 원이었다.
‘…이러면 조심이 목줄까지 바꿔 줄 수 있는데.’
대충 살펴도 사진 속 방석은 새것 티가 역력했다. 이렇게 허술한 매물을 누가 사 갈까? 그냥 쪽만 팔리고 끝나는 게 아닐까? 근심하면서도 나는 ‘등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즉시, 가슴이 질러 대는 소리를 들었다. 따끔따끔 양심이 쑤시는 통에 아프다고 신음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만 천 원짜리 방석을 포장만 뜯어서 5만 원에 올리다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역시 3만 원으로 낮출까?’
한숨을 꾹 삼키며 수정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미 판매된 상품이라는 알림 창이 떴다.
“어?”
당황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나는 휴대폰 액정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찍어 올린 방석 세 장이 모두 한 번에 판매 처리되어 있었다.
‘뭐야. 벌써? …이게 진짜… 팔린 거야?’
판매 글의 조회 수는 여전히 1이었다. 말인즉슨 내가 게시 글을 올리자마자 누군가 확인하고는, 곧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는 뜻이었다. 아주 잠깐, 나는 장세라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흔들며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친구니까 너에겐 팔지 않겠다’는 내 말에 웃음 짓던 장세라였다. 굳이 익명 구매를 선택할 정도로 음습한 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괜히 벌렁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두 번, 세 번 게시 글을 확인했다. 3장 모두 5만 원에 판매됐다. 이대로 거래가 성사된다면 내겐 15만 원이 생기는 셈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장터 게시판의 공지글을 다시 살피려는데, 화면 맨 오른쪽 상단에 채팅방 무늬 알람이 떴다. ‘1:1’이라 쓰인 알람을 꾹 누르자 곧바로 대화방에 입장하게 되었다. 대충 지어 붙인 내 닉네임은 ‘당신’이었고, 나를 1:1 대화방으로 초대한 상대의 닉네임은 ‘thunder2’였다.
[thunder2: 본인맞음? 전교1등 ㅇㅇㅅ?]
[thunder2: 사칭이면 뒤질줄알아]
재빠르게 날아온 메시지에, 나는 ‘네’ 한 글자를 찍어 간단히 답을 보냈다.
[thunder2: 직거래?]
[당신: 게시 글에 가능하다고 써놨잖아요. 설명 제대로 읽으신 거 맞나요.]
[thunder2: 아니 나랑 직거래하자고ㅋㅋ]
[thunder2: 진짜돌겠네]
[thunder2: 직거래하자고 우신아]
‘우신아’라는 부름에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2학년 전교 1등이 쓰던 물건이라고 적어 놓긴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구매자가 콕 집어 내 이름을 불러오니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떨떠름한 기분을 꿀꺽 삼키고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메시지를 입력했다.
[당신: 친한 척은 하지 마세요. 언제가 좋으세요?]
[thunder2: 이우신맞네]
[thunder2: 오늘당장]
이렇게까지 말해 오는 걸 보면 어지간히 공부가 안 되나 보다 생각됐다. 하기야, 3학년이라면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은 급박한 시기였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요행을 바라기 마련이었다.
2학년 전교 1등이 누구인지 이름까지 알고, 방석 세 장을 기꺼이 15만 원에 사겠다는 상대가 신기한 것과 별개로, 아무튼 나는 돈이 필요했다. 한 번 직거래를 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컴퓨터용 사인펜이나 넥타이, 시험지를 팔아도 될 것 같았다. 가진 물건을 찔끔찔끔 판다는 게 궁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지갑이 궁한 것보다는 마음이 궁한 게 나은 일이었다.
[당신: 그럼 이따가 만나요. 저녁 먹고 8시쯤 채홍관 쪽에서 어떠세요.]
[thunder2: ㅇㅇ]
[thunder2: 다른놈들한테뭐더팔지마]
[thunder2: 이따보자]
채팅을 마친 다음 나는 방석 세 장을 내려다봤다. 주먹으로 여러 번 때려서 없는 사용감을 만들어 볼까 생각하다가,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싶어 얌전히 손을 거뒀다.
‘3장 팔면 15만 원이야.’
다시금 떠오른 생각에 나는 주먹을 퍽퍽 움직였다. 조금의 수고로 조심이의 세계도 넓혀 주고, 권태오에게 받은 은혜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다면 양심이 뭐 문제겠는가. 그에게 받은 돈으로 그에게 뭘 사 줄 순 없는데 내겐 그 돈밖에 없었다. 다정한 권태오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웃겠지만, 그런 건 내가 안 괜찮았다.
그 팔백만 원은 내 애정 저금통이자 새로운 자존심이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새 자존심. 나는 그 자존심을 최대한 아낄 것이었다. 최대한 아끼고 최대한 안 쓰면서 남은 1년 6개월을 버틸 것이었다.
그리고 권태오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것이었다. 네가 내게 베풀어 준 애정을 내가 이렇게나 아꼈다고 고백하면서….
“후우….”
붉어진 주먹을 거두며 나는 아주 약간 숨이 죽어 보이는 방석 세 장을 다시 겹쳤다. 남는 종이 가방을 찾아다가 그 안에 욱여넣고는, 챙겨 들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마침 유도부 저녁 훈련이 끝날 시간이었다. 권태오와 식사를 간단히 챙겨 먹은 다음, 채홍관 뒤에서 직거래를 마치면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지 싶었다.
채홍관에 도착해 문을 열자, 훈련하던 선수들 중 문과 가까이 선 두셋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선수들에게 나는 이제 ‘자주 채홍관을 드나드는 친구 1’에 지나지 않게 됐다.
관중석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권태오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경기장 바닥으로 막 내려 꽂은 다른 선수를 향해 손 내밀고 있었다. 땀범벅이 된 채 헉헉대는 권태오의 손을 잡고, 그에게 패배한 선수가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100㎏ 체급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권태오의 몸매는 남달랐다. 육감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게 큰 흉통과 급격하게 좁아지는 허리,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골반, 그 밑으로 뻗은 두 다리는 거인이 들고 다니는 몽둥이처럼 굵직하고 딱딱했다.
관중석에 앉아 그를 구경하자니,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권태한테는, 찬희랑 같이 있을 때만 인사할 수 있지 않아? 혼자 있을 땐 좀 무서워서… 괜히 주눅 든다니까.’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수다를 떨던 여자애들이 있었다.
‘찬희랑 같이 있으면 친근해 보이는데…, 뭣 모르고 고백했다가 차인 애들이 한둘이 아니랬던가….’
그러고 보면 나도 이찬희와 엮이기 전에는 차마 권태오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질 못했었다. 그 같은 남자애는 자기 밖의 누구, 혹은 무엇에게 관심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 아직도,
‘너, 나한테 우산 빌려줬던 거 혹시 기억나?’
그 쉬운 질문 하나를 못 건네는 게 나였다.
‘…그러고 보면 이찬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권태오가 자길 싫어한다고….’
구름다리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날숨을 푹 내쉬었다. 남들에게는 이찬희가 권태오의 진입 장벽을 낮춰 주는 친절한 친구인지 몰라도, 내겐 달랐다. 내가 볼 때 그 애는 언제나 못마땅한 아이 같아 보였다. 어째선지 몹시 서운한 듯 굴기도 하고, 괜히 성질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가도, 저를 따돌릴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스레 뺨을 긁적여도 이찬희에 대한 고민이 머리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 있을 때면 이찬희에게서도 권태오 못잖게 높은 벽이 느껴지곤 했었다.
‘태오가 정말로 찬희를 싫어한다면, 왜 둘이 같이 다니지?’
생각이 거기에 닿은 순간, 와르르 쏟아지는 함성이 내 귀를 때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두 팔 뻗어 기지개를 켜고, 유도복을 벗어 던지는 식으로 제각기 자유를 만끽하는 선수들이 보였다. 마지막 훈련을 막 마친 모양이었다.
“중도에 이탈하지 말고, 벌써 음식 다 시켜 놨으니까 재깍재깍 와라!”
“네에!”
코치의 외침에 선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단체로 회식이라도 하는 듯했다. 아차 싶어 나는 얼른 종이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가 있어야겠다….’
권태오랑 나랑, 당연히 같이 식사할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 게 실수였다. 민망한 거절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관중석 구석으로 걸어가 인파를 피했다. 권태오를 포함해 유도부 선수들이 전부 빠져나가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며 움직이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커다란 두 손이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도 그와 동시였다.
가지런한 앞니를 보이며 권태오가 웃고 있었다.
“뭘 그렇게 도둑처럼 움직여? 밥 먹으러 가야지.”
“어….”
놀라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나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권태오의 시선이 힐끔 내 손에 들린 종이 가방으로 향했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유도부끼리 회식하는 거 아니야? 그런 곳까지 내가 끼는 건, 좀….”
“좀 끼면 뭐 어때서. 이리 와.”
내 손목을 잡아끄는 권태오의 손에는 별반 힘이 실려 있질 않았다. 가볍게 쥐고 당기는 손길에는 그러나 거절하기 힘든 자력이 실린 듯했다. 나는 철가루처럼 후다닥 권태오의 등을 향해 따라붙었다.
나를 제 뒤에 세워 둔 채 권태오는 유도복의 허리끈을 풀었다. 도복 옷자락을 뒤로 홱 젖히자, 땀과 파스로 범벅이 된 맨 등이 한 번에 드러났다. 등줄기 양쪽으로 진흙을 모아 퍽퍽 얹은 듯 거친 윤곽의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고, 척추를 따라 누군가 손가락을 넣고 긁어 내린 듯 옴폭 파인 줄이 뚜렷했다.
벌어진 입을 못 다문 채 나는 그의 등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권태오는 흰 수건 한 장을 꺼내 제 목과 가슴, 등과 팔뚝 아래 땀을 훔쳐 내듯 닦았다. 그러고는 늘 메고 다니던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제 몸에 아무렇게나 칙칙 뿌리고, 흰 티셔츠 한 장을 가볍게 걸쳤다.
“이제 가자.”
성큼성큼 다가오는 권태오의 몸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그저 ‘크다’, ‘튼튼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등줄기 근육을 본 뒤에는 이상하게도 그 몸이 야하고 색스러웠다.
“…….”
입을 다문 채 나는 권태오에게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너도 같이 가도 된다니까? 응? 배 안 고파?”
부끄러워 떨어져 걸을 뿐인데 내 의도를 잘못 알아챈 듯 권태오가 내 옆으로 들러붙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채홍관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래 봐야 우리의 거리는 권태오가 건들건들 몇 발짝 움직이는 것으로 좁혀졌다.
“같이 가자. 이리 와.”
팔을 뻗어, 권태오가 내 왼쪽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제 몸 가까이 끌어당기는 손길에 나는 권태오의 팔에 감긴 인형처럼 쑥, 그에게로 밀려 들어갔다.
“붙지 마, 더워….”
괜히 그를 밀어내며 내가 말했다.
“그래 보여. 너 얼굴 되게 빨개.”
앞서 걷는 유도부 선수들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우리는 산책로를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권태오는 두 번 더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시늉을 한 끝에 나를 놓아주었다. 대신에 내 손에 들린, 방석 세 장만이 덜렁 들어간 종이 가방을 힐긋거렸다.
더운 밤공기를 가로질러 도착한 식당은 오리탕집이었다. 좌식 테이블이 줄지어 놓인 가게 안에는 코치를 포함한 선수들이 이미 여럿 앉아 있었다. 각 테이블마다 한두 명씩, 누구의 여자 친구나 누구의 친구가 섞인 채였다.
안심하면서 나는 권태오 맞은편에 앉았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우리 테이블로는 다가와 앉는 인원이 없었다. 권태오는 테이블에 세팅된 오리탕을 끓이기 시작했고, 나는 휴대폰을 열고 ‘개구멍’에 들어갔다.
1:1 채팅창을 열고는 얼른 메시지를 적었다.
[당신: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한 시간 정도 늦게 만날 수 있을까요? 9시나 10시쯤이요.]
그러나 thunder2로부터는 아무런 답장도 돌아오질 않았다. ‘읽음’ 표시가 생기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출발하진 않은 듯했다. 밤중에 학교 거래에 응했으니 기숙사에 사는 선배겠거니 생각됐다.
‘그럼 괜찮겠지….’
젓가락을 들고 나는 반찬으로 나온 당근 조각을 집었다. 오독오독 입에 넣고 씹는 동안, 아무도 외부인인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유도부 코치라는 선생님이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서더니,
“어어. 태오 친구? 많이 먹고 가! 비실비실해서 어디 쓰지도 못하게 생겼네.”
내 팔뚝을 툭 친 게 전부였다. 졸지에 ‘비실비실해서 어디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 된 나는 머쓱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권태오가 웃었다.
“다 익었네. 먹자.”
“응.”
그러고는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종일 힘든 훈련을 마친 권태오는 ‘와구와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빠른 속도로 탕 속의 고기를 먹어 치웠다. 오랜만에 맛보는 뜨거운 국물 맛에 나도 숟가락을 빨리 놀렸다.
오리탕 大자는 삽시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운동부 먹성이 익숙하다는 듯, 빨간 앞치마를 걸친 주방 직원이 걸어 나오더니 우리 앞의 냄비를 치우고 가득 찬 새 냄비를 올려 주었다.
“맛있어?”
권태오가 물었다. 뜨거운 오리 뼈를 움켜쥔 탓에 빨개진 손가락을 빨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리탕은 정말 맛있었다. 뼈에 붙은 오리고기는 푹 고아져 부드러웠고,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국물은 삼킬 때마다 목구멍을 뚫고 칼칼한 열기가 올라오는 게 시원했다. 숟갈을 바삐 움직이다 보니 테이블에 진작 세팅되어 있던 밥 네 공기 중 두 공기가 뚝딱 사라졌다.
새 탕이 끓는 동안 나는 반찬으로 나온 파전을 젓가락으로 길게 찢었다. 꾹꾹 눌러 종이 접듯이 반으로 접고는 간장을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파전을 먹는 내 앞의 밥그릇 두 개를, 권태오가 집어 들더니 제 옆으로 모아 쌓았다. 그러고는 새 밥공기 하나를 밀어 보내왔다.
반찬으로 가득 찬 입 안에 나는 뜨거운 오리탕 국물을 집어넣었다. 청양고추의 칼칼한 맛과 함께 파전이 술술 넘어갔다. 잘 익힌 탕 속 고기 여러 점을 밥그릇 뚜껑에 올려놓고 식혀 먹자, 주방 직원이 몇 번이고 오가며 싹싹 비운 반찬을 리필해 주었다.
하염없이 먹고, 또 먹은 끝에 두 번째 오리탕이 바닥을 드러냈다. 삼삼한 깍두기 세 개를 젓가락에 콕콕 찍어 입에 넣는 나를 보며, 권태오가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
뒤늦게 나는 민망해졌다. 쫄쫄 굶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먹어 대는 모습이 게걸스러웠을까 걱정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우리 테이블에는 오리 여러 마리의 뼈가 살점은 물론이며 물렁뼈도 남기지 않고 쌓여 있었다. 텅 빈 밥그릇은 탑을 이뤘고, 중간중간 목구멍을 뚫어 주는 용도로 콸콸 들이켜 비운 콜라 병이 세 개였다.
“야아, 권태 혼자 몇 인분을 먹은 거야?”
건너편 테이블의 선수들이 낄낄거리며 외쳤다. 물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나는 입 안의 밥을 꿀꺽 삼켰다. 권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주 머쓱했다.
‘내가 다 먹은 건데….’
그때 불쑥, 누군가 내 어깨를 퍽 소리 나게 쳤다. ‘아’ 소리 지르며 고개를 들자 공주윤이 보였다. 회색 츄리닝 바지 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입에는 이쑤시개를 문 채, 공주윤은 내 무릎 위로 무얼 던지듯이 건넸다.
“오다 주웠다.”
그리고 말했다.
“…어? 이게 뭔데?”
허벅지 위로 떨어진 물건은 다름 아닌 검정색 파일이었다. 번들번들한 가죽 파일의 책등에는 익숙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뭐긴 뭐야, 새끼야. 내 숙제지.”
파일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공주윤이 말했다. 재밌는 농담 한다는 듯 웃으며 그는 손을 뻗어 내 정수리를 움켜쥐다시피 하고는 탈탈 흔들었다.
“공주 숙제 후딱후딱 풀어 주세용, 공신님.”
그러고는 땀내 나는 운동화가 와글와글 모여 있는 신발장을 향해 걸어갔다. 쓰레기통을 향해 이쑤시개를 퉤 뱉더니, 그는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품 안의 검은 파일을 내려다보았다가, 이렇다 할 표정도 어떠한 말도 없이 나를 쳐다보는 권태오를 바라봤다.
“어, 나… 잠깐만….”
문을 손짓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날, 권태오는 잡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신발장으로 걸어가 내 신을 찾아 신고, 공주윤을 쫓아 나갔다.
가게 밖에는 진작 식사를 마친 선수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나 핫바 따위를 하나씩 입에 문 채 무어라 수다를 떠는 남자애들의 면면을 나는 정신없이 살폈다. 그러나 공주윤은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해산하는 분위기에 다들 이쪽, 또 저쪽으로 무리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기도 잠시였다. 나는 인적 드문 오르막길을 오르는 덩치 큰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주윤아.”
검은 파일을 움켜쥔 채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문제는 공주윤의 걸음걸이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거였다.
“주윤아, 잠깐 서 봐….”
헉헉거리며 뒤를 쫓는데 우리 사이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질 않았다. 성큼성큼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공주윤은 나로부터 도망치는 듯 보였다. 공주윤이 사는 집이 이런 후미지고 어둑어둑한 언덕길에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공주, 윤…. 주윤아!”
그렇게 한참을 쫓았을까,
“아, 씨발!”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공주윤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넌 포기라는 걸 모르냐? 어디까지 쫓아오려고 지랄이야?”
어두워져 가는 도로 위, 오르막길에 선 공주윤은 평소보다 더욱 커 보였다. 팔뚝엔 볕에 그을린 자국이 절취선처럼 남아 있었고 나를 쏘아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나는 거친 기침을 두어 번 뱉으며 팔을 뻗었다. 손에 들린 검은 파일을, 그에게로 돌려주려 내밀었다.
“이거…, 하아, 잠, …시만…, 하아….”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데 숨이 너무나 벅찼다. 헐떡거리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쁜 나를, 공주윤은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친 게 누구인데, 그는 가파른 언덕길을 내달려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냥 받아, 새끼야. 이제 와선 환불도 안 되는 걸 씨발 뭘 돌려줘? 어차피 공짜로 주는 거 아냐. 다 조건이 있는 거라고.”
“어…, 헉, 조건…. 조건이 뭔데?”
쿵쿵 뛰는 가슴 앞에 주먹을 말아 붙이며 나는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공주윤을 향해 고개를 올리자 땀방울이 뚝, 턱 맺혔다가 떨어졌다.
공주윤이 한 발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뒤에 선 가로등 불빛이 너무 강해서, 역광이 사방으로 번져 보였다.
“공주 소원 들어줘.”
“그러니까…, 네 소원이 뭔데?”
“숙제 받겠다고 먼저 말해.”
“하아, 헉…, 하아….”
손을 들어 연신 땀방울을 훔치는 날 향해 공주윤이 코웃음을 쳤다. ‘야’ 하며 내 머리를 툭 건드리더니, 땀에 젖은 앞머리를 제 손바닥으로 싹 문질러 걷어 올렸다.
“아니, 그거 뛰어왔다고 숨이 차? 너 존나 어디 아프냐?”
“하아, 아니야…. 밥 먹고 뛰었더니 힘들어서….”
앞머리 좀 걷었다고 시원해진 이마를 내놓은 채 나는 ‘후우’ 소리 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찌르르 당기던 옆구리 통증도, 지나치게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날 보며 공주윤은 혀를 쯧쯧 찼다. 나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비실비실한 새끼’라며 혼잣말도 했다. 그 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를 따라 공주윤의 입매가 시원하게 열렸다.
헐떡대느라 무릎을 손으로 쥐고 허리 숙인 나를 향해 공주윤이 말했다.
“내년에 중요한 대회가 있어. 나한테는 입시가 걸린, 그 뭐냐…, 네가 치는 수학 대회만큼 중요한, 뭐 그런 거야. 이해가 되냐?”
“응…. 그런데?”
“나 대회 나가는 날 응원하러 와.”
나는 땀에 젖어 미끌거리는 가죽 파일을 고쳐 쥐었다.
“그게 다야?”
되묻자마자 공주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갈게.”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쓰!”
공주윤이 짧게 환호했다. 좋은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애처럼 활짝 웃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즐거움은 그러나 잠시였다. 미간을 찡그리며 나는 땀 묻은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나로서는 하루를 쓰면 그만인 ‘조건’으로 얻기에는, 내 손안의 자료는 너무 비싼 과외 선생의 기출 시험지였다. 부잣집 아들에 남부러울 것 없이 막 구는 공주윤조차도 ‘돈지랄’이라고 칭했을 수준이었다.
“정말…, 정말로 그거면 돼?”
불안감을 못 이겨 내가 물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거래라고 생각됐다. 공주윤의 돈이 아닌 그의 부모님 돈으로 내는 과외비일 게 뻔하다 보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새끼야, 깊게 생각하지 마.”
공주윤의 손이 ‘딱’ 소리를 내며 내 이마 앞에서 검지와 엄지를 튕겼다. 순간 딱밤을 놓는 줄 알고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알겠어…, 알겠어.”
그러자 공주윤이 벌레 쫓듯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나는 마구 뛰어 올라왔던 길을 다시금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몇 발짝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고마워, 주윤아.”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주윤은 나를 쫓아오지 않고 저 멀리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내 쥐었지만 그뿐, 내가 떠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내리막길을 걷는 내 발걸음은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등 뒤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칙’, ‘칙’ 멀지 않게 들려올 정도였다. 반듯하게 걷는 게 이 순간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난데없는 추격전에 지친 다리는 좌우로 후들거렸고, 팔 안에 끌어안은 가죽 파일은 내 것이 아닌 위화감을 힘껏 뿜어내고 있었다.
‘마음이 궁색한 것보단… 지갑이 궁색한 게 나아.’
온종일 그렇게 되뇌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 마음도, 지갑도, 이우신이라는 사람 자체도 누구 앞에서 궁색하지 않았으면 했다.
낮의 열기가 가라앉은 밤공기는 차분했고 선선했다. 매미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심장은 일정한 박자로 뛰고, 간만에 맛있는 식사로 배가 무척 불렀으며, 기대한 적 없는 친절이 내 팔 안에 들려 있었다.
눈을 감고 두어 번 한숨을 쉰 끝에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땀방울과 먼지가 묻어 희미해진 액정에 지문을 묻힐 차례였다. 툭툭 엄지로 화면을 두들겨 개구멍에 접속했다.
그리고 ‘thunder2’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당신: 죄송합니다만 거래 파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한 번도 안 쓴 방석이고요. 원가 1만 1천 원인데, 그걸 5만 원에 판매하기가 영 그래서요. 사기 치려고 해서 죄송해요. 구매자님, 3학년이신 것 같은데 미신 같은 거에 의존하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시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럼 열공하세요.]
‘읽음’ 표시가 금세 떠올랐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거래 파기에 화가 났나 보다… 생각하면서 나는 한 결 가벼워진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저 멀리 권태오가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손에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조금 웃는 듯하다가, 이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더니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
이내 그는 벽인 척,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권태오와 마주 보는 담벼락 위의 길고양이를 발견했다. 고양이와 권태오는 눈싸움을 시작했다. 덩치 커다란 권태오가 무심한 얼굴로 길고양이를 노려보는 모습이, 심장 울렁거리게 사랑스러웠다.
발소리를 죽이며 작게 웃자마자 권태오가 나를 돌아봤다. 그제야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양이도 ‘애옹’ 소리 내며 달아났다.
“이거.”
허리 숙여 제 발치에 뒀던 종이 가방을 들더니, 권태오가 내게 건넸다. 나는 그 속에 든 방석 세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당에서 나 대신 챙겨 나와 준 모양이었다.
“응. 고마워.”
한눈에 봐도 수상한 종이 가방을 받아 드는 날 향해, 권태오는 달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명한 입시 코디네이터의 이니셜이 새겨진 파일을 나는 품 안 깊이 끌어안았다. 권태오가 수학 선생 이름을 알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에게 보이면서 자랑할 거리는 못 됐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권태오가 나에 대해 새로이 알 사실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노출할 수 있는 약점은 모두 보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 보니 또 숨기고픈 일이 생겼다.
앞으로 매일매일이 이럴 것이었다. 그의 옆에 붙어서 밥을 얻어먹고, 그가 베푸는 무얼 받고, 다른 누군가 선물한 호의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틸 것이었다. 매일 구차할 것이고 별수 없이 시무룩할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내 바람대로 궁색하지 않은 이우신이 될 수 없다면, 궁색하더라도 괜찮은 사람인 게 최선이었으니까. 나는 최선으로 괜찮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교문 앞으로 돌아오기까지, 권태오는 과묵했다. 그와 함께 밤을 걷다가 나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물었다.
“너무 배부르다…. 체할 거 같아. 산책이라도 좀 할까?”
“그래, 좋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산책로를 올랐다. 목적지는 정보관과 교사 전용 휴게소 사이에 놓인 커다란 개집이었다. 더운 여름 볕이 힘겨운지, 얼룩덜룩 호랑이 무늬 털을 늘어뜨린 큰 개가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는 털 덩어리 개의 윤곽이, 언뜻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먼지떨이 같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조심이를 향해 나는 뛰기 시작했다. 누운 채 귀만 쫑긋 세우고 날 보던 조심이도,
“조심아아.”
부르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바삐 달려가자마자 나는 조심이를 끌어안고 털이 풍성한 목을 마구 긁어 주었다. 이것저것 사다 먹이고, 산책을 시켜 주기도 벌써 반년째였다. 그새 조심이는 덩치가 더 커졌고 늘씬하던 목도 두툼해진 채였다.
신이 나 헥헥거리는 조심이의 목줄을 권태오가 풀어 쥐었다. 나는 종이 가방 안에서 방석 두 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개집 안의 먼지를 탈탈 손바닥으로 쓸어 낸 다음, 방석 두 장을 바닥에 깔아주었다.
조심이를 데리고 우리는 학교 산책로를 아주 크게 돌았다. 잔디밭을 달리고, 잣나무길을 올랐다. 채홍관 앞 운동장에 다다라 권태오는 조심이의 목줄을 놓아주었다. 조심이는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일 없이 근처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풀 냄새를 맡고, 흙을 파며 노는 개의 엉덩이가 좌우로 씰룩대는 게, 무척 신나 보였다.
즐거운 듯 헥헥거리는 조심이를 구경하면서 나는 벤치에 몸을 앉혔다. 가죽 파일이 내 허벅지 위에서 뜨끈뜨끈한 온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있잖아, 태오야. 어린 시절에는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거래….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흥분성 신경 전달 물질이 줄어들어서 시간의 흐름이 보다 짧게 느껴지게 된대.”
매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내 옆자리에 커다란 몸을 풀썩 앉히며, 권태오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대꾸했다.
“이 선생님, 한국말로 말해 주세요.”
“…우리 뇌가 변해서,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가 보다 짧게 느껴진다는 거야.”
벤치 위에 덩그러니 놓인 권태오의 오른쪽 손등 위에 나는 내 왼쪽 손바닥을 겹쳐 올렸다. 손이 닿은 줄도 모르는 척, 멀고 높은 여름밤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나도 어서 짧아지고 싶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고 어서 늙어 버리고 싶어. 하루하루가… 짧게, 그저 그렇게, 무던하게 넘어갔으면 좋겠어.”
내 손 밑에 놓여 있던 권태오의 손등이 손바닥이 됐다. 와락 움켜쥐는 악력이 거세고, 아프고, 또 그만큼 기분 좋았다.
유달리 더운 하루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보니, 온 세상 열기가 다 이 손바닥에서 나온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