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8/16)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7/1~5, 기말고사.

7/6, 2학년 교내 수학 경시대회

7/13, 여름 방학 수학 심화반 신청, 기숙사 등록

7/15 방학식

가죽 노트에 적어 넣은 주요 일정은 그게 전부였다.

짧았던 여행은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애초에 언제 어디를 누구와 다녀왔다는 일기를 기록하기 위한 캘린더가 아니었다. 그리고 금요일 밤에 부산을, 권태오와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내 일상의 어느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적지 않았다. 적지 않으니 없었던 일처럼 생각됐다. 나는 캘린더 속의 세계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7월이다. 7월은 시험의 달이었다. 이번 학기의 시작을 잘 견딘 만큼 끝까지 나는 잘 해내야만 했다.

정돈되지 못한 생각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부유하는 상념들은 좌우 간격을 벌려 놓은 책상 위에 시험지가 놓이는 순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시험이 좋다. 시험을 치르는 시간이 좋다. 특히나 아직 오늘 하루가 지루해지지 않은 1교시는 최고였다.

시험지 넘기는 소리와 지문 위를 스치는 샤프의 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백색 소음이었고, 문제 풀이에만 집중하는 순간에는 나와 시험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청각적 이미지, 병렬식 구조, 운율 형성, 의인법….’

지문 속의 시에서 필요한 포인트만 짚어 낸 뒤 나는 두 문제를 동시에 풀어 냈다.

이어지는 5일 동안의 시험 기간에는 특별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둘째 날도 셋째날도 첫날과 같았다. 시험지를 받고, 답을 찾아내고, 번호 위에 마킹할 뿐이었다.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을 마친 뒤 ‘아아’ 크게 탄식하는 아이들 속에 앉아 있자니 그제야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전 과목 시험을 통틀어 확실히 틀렸다고 생각되는 문제는 세 개였다. 그 외에는, 마킹 실수를 하지 않은 이상은 틀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됐다.

7월 6일 토요일에는 2학년 교내 수학 경시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풀이를 위한 백지 노트와 샤프, 컴퓨터용 사인펜을 챙겨 들고 나는 이름표가 붙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40번까지의 문제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의 긴긴 시험이 이어졌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무렵 몇몇 아이들이 수신호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시험지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10분 즈음 더 지나자, 절반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웠다. 나는 백색 노트 위에 샤프를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시간을 다 채우며 자리를 보존한 끝에, 감시관 역할을 하던 선생님이 답안지를 걷어 갔다. 내 시험지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시선을 나는 모르는 척했다.

시험을 마치자마자 몇몇 아이들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대화는 나눠 본 적 없는 남자애들이 ‘답 좀 불러 줘’ 하며 뻔뻔하게 내 이름을 불러 댔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맨 앞자리에 앉은 무리를 향해 턱짓했다.

“야야, 박민아가 답 읽어 준대. 떠들 거면 나가고 있을 거면 조용히 좀 해라.”

그렇게 채점이 시작됐다. 따로 빗금을 그릴 것 없이 나는 문제지를 눈으로만 훑으면서 박민아가 읽어 주는 답을 들었다.

“…….”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통, 시험지, 노트를 두 팔로 안아 들고 책상 사이를 가로지르는데, 뒤통수에 대고 심학반 애들 서넛이 내 이름을 말하는 것도 같았다. 나를 부르기보다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기에, 무시하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가 유독 널널하고 공기는 평소보다 맑은 듯한 토요일의 학교에는 나를 부를 사람이 몇 없었다.

“우신아!”

개중 하나가 장세라였다. 크로스백을 챙겨 메고 다가오는 장세라를 나는 선 채로 기다렸다. 그러고 보면 오늘도 교복을 입고 온 건 나뿐이었다. 주말이라는 이유로 다들 사복 차림새였다. 장세라도 마찬가지였다.

“나, 오늘 시험은 하나밖에 안 틀렸어. 우신이 너도 잘 봤지? 너 민아랑 답 다 똑같아? 혹시 백 점이야?”

오늘따라 장세라는 신나 보였다. 얼굴 위로 드물게 불그스름한 홍조까지 띠면서 물어오는 말에, 나는 엉거주춤 쥐고 있던 필통을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네가 더 잘 쳤어.”

“어? 진짜…? 이번엔 내가 너를 이긴 거네!”

장세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쁨을 못 감추어 하얀 치열까지 드러낸 미소에 나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응. 축하해.”

“…아, 으응. 저….”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나는 등을 돌려 버렸다. 같이 가자고 말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했다. 내 속마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분위기를 읽은 건지 장세라는 더는 날 쫓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들른 곳은 도서관 열람실이었다. 다섯 자리 있는 PC존으로 다가가서, 첫 번째 컴퓨터를 켜고는 채홍 고등학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 게시판에 공지 글로 올라온 파일을 다운 받았다.

한 시간 전에 올라온 파일을, 같은 컴퓨터로 벌써 여러 사람이 확인했는지 다운로드 된 파일명이 ‘2차_지필_전과목_답안지(3).zip’였다. 이미 압축 풀린 파일이 있으면 그걸 열까 하다가, 나는 새로 받은 파일을 두 번 클릭했다.

학교 안에 사이버 빌런이 있어서, 도서관 컴퓨터 안에 가짜 답안지 파일을 넣어 둔다는 소문을 들어서였다. …아마도 강건우가 나를 놀리려고 지어 낸 말 같긴 하지만.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고 채점의 시간이 이어졌다. 가방 안에 챙겨 둔 시험지를 모두 꺼내 들고 나는 한 장 한 장 점수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국어, 1에 1, 2에 2, 3에 4, 4에 3….’

그러다 문득 빨간 색연필을 멈춰 세웠다. 시험을 치는 동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 구절이 그제야 보였다.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1)

나는 색연필을 고쳐 쥐었다.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그리고 글자 위에 새빨갛게 줄을 그었다. 나도 모르게 두 번 곱씹어 읽은 구절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벅벅 그어서 지워 버리고 싶어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계산해 본 결과 기말 시험 총점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수학에서 두 문제를 틀렸다. 그 외엔 모두 만점이었다. 평균 점수는 99.5. 이번에도 전교 등수에는 큰 변동이 없지 싶었다.

기숙사로 돌아와 휴대폰을 충전하고 손을 씻는데, 아니나 다를까 강건우가 문자를 여러 통 보내 왔다.

강건우

[이번에도전교1등!!!!!]

[우쉰아추카한다앜!!!!!]

입술을 살짝 비틀며 나는 그 문자를 천천히 읽었다. 그러고는 이응 두 개를 눌러 답장하려다가, 신경 써 ‘고마워’ 세 글자를 입력했다. 지난주에 이찬희 생일 파티에 불참한 일 때문에, 강건우는 아직도 토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상냥하게 구는 것이 맞다. 사정도 설명해 주지 않을 거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으니까.

섬세한 한편으로 털털한 강건우는 즉시 ‘ㅋ’을 가득 넣은 답장을 보내왔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강건우는 이번 시험의 전교 1등이 세 명이라는 새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강건우

[공신우신, 박민아, 윤다정]

줄지어 선 이름을 확인하면서 나는 교복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셋.’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운이 좋았던 거라고. 따지자면 개중 내가 꼴찌라고.

세 명 다 전체 문제에서 총 5점을 잃었다. 아마도 2점 문제 하나, 3점 문제 하나겠지. 다른 두 사람은 마킹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 시간이 모자랐을 수도 있지만, 나는 마킹도 똑바로 했고 시간도 남아돌았다.

그러니 내가 틀린 두 문제는 정말로 몰라서 틀린 거였다. 게다가 원래라면 한 문제를 더 틀렸어야 했는데, 찍어서 맞추기도 했다.

‘그럼 3등이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침대 자리에 풀썩 등을 눕히자, 피로감과 함께 잊고 있던 고민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7월 13일, 여름 방학 클래스인 수학 심화반 신청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교무실에는 나 이외에도 벌써 학생들이 많았다. 특히나, 심화반 담당인 곽 쌤 주변에는 3학년이 여럿 줄을 지어 서 있었다.

“…….”

나는 마른침을 소리 없이 꿀꺽 삼켰다. ‘곽 쌤’을 상대하기에 앞서 약간의 각오가 필요해서였다. 곽 쌤으로 말하자면 마은 쌤과 함께 우리 학년을 전담하는 수학 쌤인데, 1학년 지필고사에 미적분 응용문제를 집어넣은 장본인이었다.

‘학교에서 안 배웠다고 우는 소리 하지 마라. 수학은 예습이 기본인 과목이야. 미리 공부해서 맞힌 애들이 버젓이 있는데, 어디 공부도 안 한 놈들이 찡찡거려?’

그 말에 나는 몹시 서먹했었다. 학원을 못 다니는 나로서는 고학년 수학을 예습한다는 게, 노력의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미리 적어 온 신청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청서 속 내 이름과 교복 명찰을 확인하더니, 곽 쌤이 ‘아아’ 하고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래, 우신이구나. 드디어 네가 날 다 찾아오고, 아주 감개가 무량해?”

“…네?”

대뜸 건네 온 말에 나는 얼떨떨하니 되물었다. 웃는 얼굴을 마주 보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자니, 절로 쭈뼛거리게 됐다.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내게, 곽 쌤이 말했다.

“심화반 수업 듣기 시작하면, 앞으로 내가 내준 문제는 나한테 물으러 와. 마흔 쌤한테 찰싹 붙어서는, 선생님 줄타기하는 거도 아니고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마흔 쌤’이라는 별칭에 그제야 날 선 분위기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교무실 안에도 은근한 서열이 존재했다. 어느 사회든지 머릿수가 많다 보면 따돌려지는 사람이 꼭 하나는 있게 마련이었다. 학생인 나한테 대놓고 ‘마흔 쌤’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니, 여기에서 서열 위에 있는 게 곽 쌤이고 따돌려지는 사람이 마은 쌤인 듯했다.

‘이런 거까지 알고 싶진 않은데….’

속뜻을 못 알아챈 척, 나는 허리를 펴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 거 아닌데. 곽 쌤 자리에는 매일 3학년 선배들이 많잖아요. 바빠 보이셔서요. 마은 쌤이 기초부터 잘 알려 주시기도 하고요.”

그러자 곽 쌤이 피식 새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팔뚝을 토닥토닥 다독이는가 싶더니, ‘암만 연상 취향이래도 정도가 있는 것’이라면서 재미없는 농담을 해 댔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가져온 파일을 고쳐 들었다.

그제야, 곽 쌤이 제 자리 컴퓨터로 고개를 돌렸다.

“기숙사도 신청할 거지? 같이 제출해.”

“아, 네.”

파일을 열고 나는 유인물을 꺼냈다. 심화반 수업은 방학식 2주 뒤에 시작됐지만, 그 전부터 자습을 빙자한 공부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심화반이라는 명목으로 기숙사에 머물겠다고 신청하면, 방학 4주 동안 기숙사 1인실에서 머무르며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름과 학번이 적힌 종이를 선뜻 내밀지 못했다. 잠깐이나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려서, 고장 난 듯 멈춘 채 시간을 보냈다.

“이우신?”

곽 쌤이 나를 채근하고,

“왜. 뭐가 잘못됐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된 내게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할 때까지.

아이들의 신난 얼굴도 무어라 떠들어 대는 목소리도 전부 남의 것 같았다. 전교 1등 자리를 고수하고 공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공주윤이 다가와 어깨를 치며 음료수를 주고 강건우가 엄청난 시청률을 자랑한다는 드라마 남자 배우의 발연기를 구경해도, 이찬희가 내게 자그마치 세 번째 편지를 건네주는 순간에도, 내 피부 밖의 모든 것이 남의 것 같았다.

아니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당연하게도 남의 것이었다.

“우신아, 내가 준 편지 왜 안 봐?”

책상 귀퉁이에 고스란히 올려 둔 카드 엽서를 손끝으로 퉁기며 이찬희가 물었다. 나는 조금 멍한 나머지 굼뜬 동작으로 카드를 집어 들었다. 벌써 2교시가 지나도록 그 자리에 놓곤, 잊어버린 편지였다.

내용은 전과 같이 단순했다. 방학 동안 놀러 갈 멤버를 구한다는 말이, 희한하게도 강건우의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방학 시작하자마자 넷이 같이 놀러 가는 거야. 어때? 좋지? 태오도 한동안은 훈련 빠질 수 있다고 그랬어. 우신이 너도 하루쯤은 공부 안 하는 날 있을 거 아냐.”

조잘조잘 신난 듯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허황된 소리에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없어, 그런 날…. 나 시간 없어. 방학 동안 수학 심화반 수업도 들어야 하고….”

“어어? 심화반 수업은 어차피 몇 주 있다 시작하잖아. 그래도 시간이 없어? 하루도 안 돼?”

“하루도 안 돼.”

단호한 거절을 듣고 이찬희는 낙담한 듯 보였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강건우까지 합세해서는 이찬희네 별장이 얼마나 ‘끝내주게 멋진’ 곳인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무조건 우리 넷은 함께다, 넷이 아니라 셋이나 둘이 가면 너무 지루할 거다, 읊어 대는 소리에 나는 화자는 원치 않았을 힌트를 얻고야 말았다.

‘뭐야. 셋이나 둘이면 권태오도 안 갈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나는 조금 시들해졌다. ‘생각해 볼게’라는 만능 대답으로 집행을 유예시켜 놓고는,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당장 방학식이 내일로 다가올 때까지 이찬희에게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나를 포기하고 여름 계획을 짜는가 싶던 이찬희는, 그러나 뜻밖의 순간에 나를 아주 뜻밖의 장소로 데려갔다. 학기 초반에 그랬듯이 내 팔뚝을 잡고는 질질 끌고 걸어서, 구름다리 통로로 데려가 세워 놓은 것이었다.

얘는 내가 이 장소에서 저를 울렸었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우신아. 내가 자꾸 같이 놀자고 해서 화났어?”

이찬희가 묻는 말에,

“화 안 났어.”

나는 적당히 상냥한 목소리로 적당히 에두르는 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 만에 이찬희는 내 말문을 막아 놓았다.

“나 너 좋아해, 우신아. 네가 좋아서,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나 일부러 여기서 우는 척했던 거야.”

“뭐?”

“나 너 좋아한다고.”

아니 그거 말고… 방금 뭐라고, 엄청 이상한 소리 하지 않았나?

분명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울었다’고. 구조는 단순하지만 내용은 복잡한 문장에 실소가 나왔다. 그 외에는,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서 나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상체가 앞뒤로 조금씩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네가 좋아, 우신아.”

이찬희는 아무래도 웃는 얼굴로, 호의를 담은 태도를 취하면서 나를 이상하게 만드는 데에 소질이 있다.

“…왜냐면, 너랑 태오랑 엄청 닮았거든.”

“…….”

“그런데 넌, 태오랑은 또 달라. 네가 태오보다 더 상냥해. 더 착하고, 더 다정하고…. 안 그런 척하면서 나한테 계속 잘해 주잖아. 지금도 봐. 나랑 놀기 싫다면서 따라와서 이런 이야기나 들어주고 있고.”

“…….”

“그치? 우신아. 너는 나 안 싫어하지?”

머릿속이 표백되는 느낌이었다. 이찬희가 건네는 모든 말들이 이상하게 들렸다. 내가 그를 위해 축구공을 대신 맞았던 날, 양호실에서 느꼈던 그 위화감. 그 위화감이 이제는 이찬희를 떠나 권태오에게까지 번져 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모습들이 있었다. 언제나 이찬희와 함께 있던 권태오, 이찬희의 부탁 때문에 내게 잘해 주던 권태오, 이찬희에게서 멀리 떨어지라며 내게 경고를 하던 권태오.

그래 놓고는, 저와는 아무 짝에도 상관없는 돈을 찾아 주겠다고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던 권태오. 전부 포기하고 죽어 버리고만 싶던 나를 낯선 동네로 끌고 가던 권태오. 손바닥에 땀이 차도록 내 손을 잡고 기어코 돈 가방이 든 집까지 쳐들어가던 권태오.

“권태오가… 너를, 싫어해?”

어안이 벙벙해진 채 내가 묻자,

“응. 되게 싫어해.”

이찬희가 대답했다. 웃음기 없는 표정에, 목소리는 씁쓰레했다.

“권태오가 왜? 걔… 다정하잖아.”

“다정해? 다정하다고, 태오가?”

내 질문에 이찬희는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눈물이 날 때까지, 그 애는 정말이지 마구 웃어 댔다. 평소 헤실헤실 보기 좋게 뺨을 올리고 ‘헤헤’ 웃는 그 웃음이 아니었다. 툭 건드리면 나자빠질 것처럼 큭큭거리는 웃음은 악동 같았다.

검지 끝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찬희가 말했다.

“권태오가 다정했으면, 그건 네가 이우신이라서야.”

나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러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개중에 이찬희에게 말해도 좋을 내용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됐다.

이내 이찬희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같이 가자, 별장. 응? 너는 거기서 공부만 해도 돼…. 나 태오랑 요즘 사이가 안 좋아. 그런데 태오가 널 많이 좋아해서… 너도 간다고 하면 분명 와 줄 테니까… 그래서 그래. 나도 너 많이 좋아하고 잘 지내고 싶고…. 너도 우리 둘이랑 잘 지내서 나쁠 거 없잖아. 그럼 모두에게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

동화 구연처럼 들리는 긴긴 변명을 하나하나 지적해 줄 만큼 나는 상냥한 선생님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서 공부만 해도 된다고?”

다만 그렇게 되물었다. 내 질문에, 이찬희의 갈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을 뿜었다.

“응. 방도 따로 쓸 거야. 일주일이든 이주일이든 있다 올 건데 남자 넷이 붙어 잘 순 없잖아?”

내 손을 잡은, 그 애의 손가락을 쳐다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찬희는 소리 내어 대답해 달라는 듯 고개를 뻗으며 제 입술을 벙긋거려 보였다.

‘소년’이라는 글자를 빚어 놓은 듯한 얼굴에 재단이라도 한 듯 잔머리조차 없는 이마 라인, 인형처럼 커다란 눈, 언제나 웃음 짓는 입술과 귀여운 콧방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목구비를 나는 낱낱이 살폈다. 눈과 코와 입술을 외우면 이찬희가 어떤 애인지 알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갈게.”

그제야, 이찬희가 내 손을 놔주었다. 그 애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떠나간 뒤에도 나는 내게 매달리던 손아귀의 감각을 느꼈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양, 벌벌 떨며 억세게 나를 잡아 쥐던 감각을.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여름 방학 첫날,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마친 뒤 샴푸와 칫솔을 지퍼 백에 넣고, 미리 싸 둔 검은 캐리어 바깥 주머니에 챙겼다. 검은 청바지와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고, 잠옷과 충전기까지 챙기자 기숙사 방 안에는 더는 내 짐이 남지 않았다.

1학기 내내 머물러, 그래도 ‘내 방’이라고 생각하며 지내 온 공간이었다. 어질러진 상태로 떠나기엔 마음에 걸려 대충이라도 바닥을 청소했다. 침대 아래에서 먼저 짐을 뺀 룸메이트가 두고 간 후드 티를 발견했는데, 찾으러 올 거라고 기대되진 않았으나 일단 그 애 책상에 올려놨다. 침대 위 이불들은 각을 맞춰 접어서 한데 모아 놓고, 창문을 단단히 잠그고 커튼은 활짝 걷었다. 그러고 나니 후련하게 기숙사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털털 끌며 들른 곳은 조심이가 있는 개집이었다. 앞으로 며칠간 돌봐 주지 못할 테니 걱정도 되고, 또 많이 보고플 것 같아서였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인사도 해 두고, 미리 사 둔 개껌 한 봉지를 경비실에 맡길 생각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대신 주시라고 그럼 되겠지.’

간식 봉지에 적힌 열량을 읽으며 도착한 개집 앞에는 뜻밖의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검은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백색 민소매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반바지를 입은, 권태오가 보였다.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자세가 엉거주춤하니 영 불편해 보였다. 아마도 허벅지 근육 때문인 것 같았다.

개집 안의 조심이에게 무어라 말하면서, 권태오는 조심이의 개밥 그릇에 사료를 붓고 있었다. 봉지 안에 남은 한 알까지 탈탈 털어 내는 게, 거의 고봉밥을 연상케 하는 양이었다.

질질 끌던 캐리어를 멈춰 세우고 나는 그 모습을 구경했다.

굵은 팔꿈치에 U자 모양으로 꿰맨 흉터가 남아 있어서,

‘언제 다친 거지….’

괜한 궁금증을 품을 따름이었다.

그때 권태오가 나를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조심이를 보는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우신, 일찍 나왔네.”

권태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짐을 다 가져갈 짐이야? 별장에 웬만한 생필품은 다 있는데.”

이번에도, 그저 고개 한 번 끄덕이고는 말았다.

권태오는 그런 나를 몇 초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제 짐 가방을 챙겨 드는데, 태도에서 불만스러운 마음이 읽히는 듯했다.

내 캐리어에 비해 권태오의 가방은 몹시 가벼워 보였다. 속이 덜 찬 듯 구겨진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멘 그를 따라, 나는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세 발짝도 걷기 전에 권태오는 멈추어 섰다.

홱 뒤를 돌아 날 보더니, 권태오가 말했다.

“그것까지 가져가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기도 잠시, 나는 품 안의 개껌 봉지를 후다닥 등 뒤로 숨겼다.

“…….”

권태오는 그런 나를 빤히 살피는 듯하다,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며 우리는 교문 앞까지 나란히 걸어 내려갔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움직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해진 집합 시간은 9시였는데, 이찬희를 태운 차는 8시 20분의 교문 앞을 벌써 지키고 있었다. 뒷좌석의 문을 밀어 열며 이찬희가 ‘우신아’ 하고 나를 불렀다.

이찬희의 어깨 너머로 개구쟁이 같은 강건우도 얼굴을 내밀었다. 강건우는 평소의 두 배로 기운이 넘쳐 보였다.

“이우시이이인, 드디어 너랑 놀러를 가 보는구나!”

그러면서 차에서 뛰어내려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까지 정신이 빠질 것 같았다.

이찬희는 권태오와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인사할 뿐, 내 캐리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를 시켜 짐을 트렁크에 실어 달라고 할 뿐이었다. 척척 움직이는 기사를 따라 나는 엉거주춤 내 짐을 함께 옮겼다.

커다란 트렁크 안에는 이미 짐 가방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놀 생각에 들뜬 강건우가 꾸려 온 짐이 이미 잔뜩이었다.

“형이 게임기는 물론이고, 어? 고기까지 다 사 왔다 이거 아니냐. 먹다가 배 터질 준비 해라!”

제 가슴팍을 퍽퍽 치면서 강건우가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라며 떵떵거리는 강건우를 향해 나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해 주었다. 덕분에 교과서 하나까지 전부 챙겨 온 내 짐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우리를 태운 하얀 차는 뒷좌석이 아주 넓고 깨끗했다. 차에 대해 관심 많은 강건우는 서버 밴이 제 드림 카라며 떠들어 댔고, 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나야 그렇구나, 비싼 차겠거니 할 뿐이었다.

짐을 챙기느라 늦게 잔 탓에 나는 벌써 조금 피곤했다. 창문 밖을 쳐다보며 반은 졸고 반은 들려오는 대화를 듣기만 하는데, 맞은편에 앉은 권태오의 태도도 딱 나와 같았다. 수다 떠는 말소리로 침묵을 없애는 건 강건우와 이찬희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둘이, 전에 비해 훨씬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긴 이찬희도 강건우도 딱히 누구와 못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강건우는 전부터 이찬희에게 관심이 많았고, 이찬희는 강건우가 무얼 하자고 제안할 때마다 거절한 적이 없었다.

둘이 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3학년이 되면 바쁜 나를 빼고 둘이서만 놀게 될 수도 있겠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나는 두 배로 피로해졌다.

차로 두 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별장은, 강건우 말마따나 ‘끝내주게 좋았다’. 돌담 놓인 정원에 꽃이 펴 있었고 2층 건물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수영장이 야외에 하나, 실내에도 하나 있다고 했다.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아무데나 막 돌아다녀도 돼.”

이찬희가 앞서 걸으며 하는 말에 나는 괜히 아쉽다고 생각했다. 이게 내 건물이었으면 펜션으로 활용해서 손님을 열 팀은 더 받았을 텐데.

수영장부터 구경하겠다고 뛰어가는 강건우를 쳐다보다가, 나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약속했던 대로 2층에는 혼자 묵기 좋은 방이 여럿 있었다. 어디에 짐을 놔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제일 깔끔해 보이는 방에 캐리어를 밀어 넣었다.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임자지.’

창문 밖으로 언덕길 아래의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담겼다. 맑은 새소리부터 커다랗고 파란 수영장, 푸른 나무가 우거진 낮은 산의 산책로, 돌담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한국적이면서도 내가 살던 세상 같진 않았다.

“어.”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문고리를 잡고 선 권태오가 보였다. ‘왜’ 하고 입 모양만 움직여 묻자, 권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도로 모습을 감췄다. 뒤이어 하나씩 문을 열었다가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생각이 비슷했는지, 권태오도 방을 먼저 정하려는 모양이었다.

창밖 풍경을 구경하길 그만두고, 나는 캐리어를 열었다. 챙겨 든 건 문제집과 노트, 그리고 낡은 노트북이었다.

방 안에도 책상이 있긴 하지만 스툴 의자가 불편해 보여서, 공부 거리를 한 아름 안고 복도로 나섰다. 그때쯤엔 권태오도 방을 정해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1층 식탁에서 공부할까 생각했지만 그럼 애들이 불편할 거 같았다. 소파 자리는 너무 푹신해서 공부를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2층 구석, 테라스 옆에 놓인 책상 위에 짐을 올려놓았다. 고개만 돌려도 1층, 거실이 한 눈에 내려다보여 혼자만의 공간은 못 됐다. 책상 폭까지 좁은지라 불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의자에 푹신한 등받이가 붙어 있어서, 방 안의 자리보단 훨씬 나았다.

“뭐해, 이우신? 너 설마 첫날부터 공부하게?”

스톱워치 배터리를 확인하는데, 강건우가 뛰어 올라왔다. 잠깐 수영장을 보고만 온다더니 벌써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응.”

내가 대꾸하자 강건우의 낯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괜히 미안해지려는데, 그 뒤로 올라오는 이찬희가 보였다. 어깨에 멘 튜브는 그 색만 봐도 신이 날 정도로 밝았다.

“…공부만 해도 된다며. 나는 수영 못 해. 수영복도 안 가져왔고.”

변명하듯 꺼낸 말에 이찬희가 ‘그래, 그래’ 하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굴리던 강건우도 이찬희의 만류에 금세 그를 따라갔다.

“대신 태오 꼬셔서 데리고 가자. 얼른, 얼른.”

해맑은 음성에 이어서 도란도란, 권태오의 무뚝뚝한 응답이 섞인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뭘 하든지 관심을 끄기 위해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경제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우신아.”

멀리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려운 문제를 풀 방법을 막 찾아낸 참이었다. 집중력을 흩트리기 싫은 마음에 못 들은 척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터벅터벅 올라오는 발소리까지 무시하긴 어려웠다.

결국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건 한 장을 어깨에 걸친 권태오가 보였다.

“…아.”

폭이 벙벙한 바지에 까만 워터레깅스. 입은 건 그게 다였다. 그 바람에 권태오가 아니라 권태오의 가슴과 눈이 마주칠 거 같았다. 나는 당황했고, 권태오는… 전부터 느낀 거지만 자기 몸을 드러내는 데에 서슴없었다.

당황해서 목으로 열이 올랐다.

“많이 더워?”

다행히 권태오는 둔감한 편 같았다. 화끈해진 내 이마를 살피더니, 그 애는 얼른 복도의 에어컨으로 향했다. ‘삑삑’ 소리가 여러 번 울린 끝에 찬 바람이 불어왔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권태오가 물었고,

“응.”

내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우신아’ 하는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탐구 노트를 복습하다 손을 움찔 멈추고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고 계단 밑을 내려다보자, 1층 중앙에 선 권태오가 보였다.

“…카페 다녀올 건데, 뭐 사다 줘?”

권태오는 참 희한한 남자애였다. 무뚝뚝한 표정에 불퉁한 목소리로 상냥한 말을 한다는 게, 모순적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그 애가 보이면 그것마저 매력적이었다.

“아니, 나는… 괜찮아.”

고개를 내저어 보인 뒤 나는 탐구 노트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권태오는 한참 아무 소리 없이 이쪽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별장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우신아.”

세 번째로 나를 찾아온 사람은 강건우였다. 눈을 돌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가 권태오는 아님에 조금 안도했고, 한편으로는 그가 권태오가 아니라서 많이 아쉬웠다.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모르게 됐다.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자, 강건우가 말했다.

“너 진짜 밖에 한 번도 안 나올 거야? 우리 편의점 갔다 올 건데. 같이 안 갈래?”

“아…, 난 여기 있을게.”

“어어…, 알겠어.”

20분쯤 지난 뒤에 강건우가 돌아왔다. 툭툭 내 어깨를 치더니, 노트 위에 소라빵 다섯 개를 와르르 쏟아냈다. 조금 놀라 홱 고개를 들자 삐뚜름하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강건우가 보였다.

“먹고 해.”

“아…, 고마워.”

그러자 강건우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거리다가, 내 머리를 탈탈 털듯 만지고는 다시 떠났다.

점심을 지나 오후가 되도록, 나는 내내 공부만 했다. 창문 밖이 전에 비해 어두워진 듯했다. 노트와 책을 정리하면서 살피자, 플로우 조명이 켜진 1층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커다란 튜브를 띄워 놓은 채 이찬희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무어라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심드렁하니 대답하는 표정이 익숙해서, 전화 상대가 누군지도 뻔한 일이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 연락해 오는 제 어머니겠지. 그런 이찬희 옆으로 헤엄치며 다가가는 강건우가 보였다. 웃는 얼굴에서 즐거움이 쏟아지는 거 같았다.

권태오는 야외용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액정 위에 둔 엄지가 반복적으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의 빛깔이 바뀌는 걸 보면 갤러리를 훑어보고 있는 듯했다.

‘저기에서도 창문 안의 내 자리가 이렇게 잘 보일까?’

아주 잠깐 그게 궁금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수영장으로 단 한 번도 나가지 않고 공부만 하며 버텼다간 우정 여행이 절교 여행이 될 게 뻔했다. 아마 다음 방학부터는 이찬희도 굳이 나를 초대하지 않을 거 같았다.

7월이 된 뒤로 3주간, 나는 저 애들과 딱히 무얼 한 기억이 없었다. 급식을 먹을 때도 영단어 노트를 옆에 뒀고 대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늘도… 이찬희의 제안이 내 사정과 맞아떨어지기에 이곳까지 왔을 뿐이지 사실상 불청객이었다.

‘불청객….’

그때 권태오가 휴대폰을 쥔 팔을 움직였다. 순간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확실친 않았다. 내가 먼저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난생처음,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속에 피어오른 이상한 기분은 결국 바깥으로 퍼져 나가 분위기가 됐다. 해가 저물도록 놀고 돌아온 세 사람이 바비큐 이야기를 시작할 즈음, 나는 노트와 책을 정리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2층으로 제일 먼저 뛰어 올라온 건 다시, 강건우였다.

야외에서 고기를 잔뜩 구워 먹자며 신난 강건우를 쳐다보다가, 나는 얼떨떨하니 대답했다.

“…어, 나는 속이 안 좋아서… 그냥 방에 가서 일찍 잘게.”

“…….”

강건우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웃음 짓던 얼굴을 조금 굳히고는,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아니, 뭐… 알겠어.”

실망감이 역력한 태도에 나는 입 안이 씁쓸해졌다. 애초에 공부만 하겠다는 내 말을, 강건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막상 데려오면 같이 놀겠거니… 어쩌면 그렇게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강건우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이우신 너, 근데 내일도 그럴 거냐?”

“뭐가?”

“아니. 그러고만 있을 거면 여기까지 왜 온 건가 싶어서.”

그 말에 심장이 작게 철렁했다.

“…난 너랑 놀려고 온 건데. 쫌 서운하다, 솔직히.”

그러더니 강건우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씩씩거리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책이며 노트, 문제집을 고쳐 안으며 나는 호화롭기 짝이 없는 별장 내부를 몇 초간 바라만 봤다. 이 공간이 아직 낯설고 모든 놀이가 남 일 같은 사람은, 확실히 불청객이 맞았다.

마음 같아선 강건우를 쫓아 나가고 싶었다. 서운해하지 말라고 팔에 매달리고, ‘건우 형’이라고 서너 번 불러 주면 강건우는 금세 화를 풀 거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캐리어를 세워 둔 방으로 돌아갔다. 도무지 그럴 기분도 기운도 나질 않았다. 터덜터덜 들어가 방 안 침대에 눕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종일 문제집만 들여다본 눈알이 저릿했다.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으로 어둠이 밀려드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때, 다시 누군가 날 찾아왔다. 노크 두 번을 마치고 멋대로 문을 연 손님은 권태오였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권태오를 올려다봤다. 샤워를 마쳤는지 그 애 몸에서, 안 어울리게 과일 향기가 났다.

‘청포도 냄새….’

멍하니 누워만 있는 내 옆으로 권태오가 다가왔다. 그 애가 풀썩 앉자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 내 몸도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기울었다.

“이거.”

권태오가 툭, 시트 위에 갈색 약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파란 포장지에 분홍색 위장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소화제야. 속 안 좋다며.”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탄식했다. 내 속은 아주 멀쩡했다. 속이 안 좋기는커녕 오히려 배가 고픈 상태였다.

방심한 탓에 고스란히 내보인 반응에, 권태오도 그걸 알아챈 듯했다. 눈살을 살짝 구기며 권태오가 불쑥 물었다.

“야, 이우신.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 애 목소리는 더는 상냥하지 않았다. 말끝이 사나워졌고 언성은 보다 커졌다.

“너, 약속 왜 안 지켜. 나 쌩까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 안 나?”

“기억나지….”

“근데 왜 배신을 하냐고.”

와르르 쏟아지는 말들을 이해하고 감당하느라 나는 조금 벅찼다. 덩치는 커다랗고, 외형만 보면 대학생 형처럼 느껴지는 권태오가 하는 말은 꼭 초등학생 투정 같았다. …’배신’이라니, 내 태도가 데면데면해서 배신감을 느꼈다는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어영부영 끼여 다닌 건데….’

내 일, 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내 딴에는 그게 최대였는데….

권태오에겐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얼마나 했던 건지, 나를 내려다보는 권태오의 눈빛에서 불꽃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왜 같이 왔어? 왜 여기까지 와서, 너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혼자 있어?”

목소리에도 중력이 있다면 권태오가 뱉은 말은 내 얼굴로 와르르 떨어졌을 거였다. 너무 가까이, 붙어 앉은 권태오의 존재가 과분하게 느껴졌다. 침대 구석에 꼼짝없이 누운 것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덫에 걸려 갇힌 듯이 생각됐다.

숨이 답답해져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권태오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왔다. 세게 당겨 저를 보게 하려는 줄 알고, 눈을 감고 움찔하는 순간 큰 손이 내 뺨을 만졌다.

그리고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내 뺨에 제 손바닥을 대고, 가만있을 뿐이었다. 들숨, 날숨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방 안으로 한 뼘 두 뼘 스미던 밤도 어느새 완연해졌다.

천천히, 나는 고개를 돌려 권태오를 마주 봤다. 깊이 허리 숙인 권태오의 몸이 지붕처럼 내 위에 존재했다.

‘우신아.’

다시 나를 그렇게 부를까 봐, 나는 무슨 말이든 먼저 해야만 했다.

“네 돈 돌려줄게.”

그러자 밤보다 짙은 침묵이 닥쳐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을 듯 말 듯하던 권태오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한 번 뱉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말이란 게 있었다. 비밀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내 통장에 들어온, 팔백만 원. 그거 네 돈이잖아. …그냥 돌려줄게, 은행이랑 계좌번호 알려 줘. 지금 당장 보내 줄게.”

“…….”

권태오의 까만 눈동자는 어둠 안에서도 묘하게 빛났다. 두 눈이 좌로, 우로 움직이며 내 눈동자를 살폈고,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입술을 노려봤다. 권태오는 나를, 나는 그를 관찰하며 고요했다.

나는 정말, 몹시, 아주 속상했다…. 권태오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어떻게 알았어?”

한참 침묵한 끝에 권태오가 물었다. 나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 뺨에 닿은 권태오의 손을 떼어 주려다가, 오히려 오른손을 붙들리고야 말았다.

“…그 가방에 팔백만 원이나 들어 있을 리 없으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생각조차 미뤄 왔던 이야기를 꺼내자니 머릿속이 혼미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사백이었어, 안에 든 돈. …사백 때문에 울고불고 그런 게 쪽팔려서, 그게 전 재산이라는 게 부끄러워서, 너한테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한 거야. 팔백이라고….”

그 날, 그 밤, 코끝을 붉힌 채 나를 내려다보는 권태오의 유독 멋져 보이던 모습이 나를 비겁하게 만들었다. 혼자 바라보며 몰래 좋아하기만 1년을 넘게 했다. 그런 권태오에게 차마, 내 치부를 전부 보일 수가 없었다.

‘가난하다’는 말은 단순했지만 ‘전 재산이 사백만 원’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그 말을 듣고 권태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너무 두려웠다. 권태오가 내게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나를 마주하고 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혹여 나를 되새기듯 기억할 때마다, ‘사백만 원’을 함께 떠올릴까 봐 그게 너무 싫었다.

그런데 권태오가 내게 줬다…, 팔백만 원을. 평가당하는 게 무서워서, 덜 나빠 보이고 싶다는 마지막 자존심에 내뱉었던 내 거짓말을 권태오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팔백만 원이라니. 그런 큰돈을 어떻게 갖고 있었길래, 도대체 왜 나한테 무턱대고 줘 버린 건지….

꿈처럼 흘린 하루, 이틀이 지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내 비겁한 거짓말이 나에게로 돌아왔다는 걸.

권태오를 마주하고 권태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주 그를 되새기듯 기억할 때마다, 나는 팔백만 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돈, 그게, 한두 푼이 아닌데, 아무리 너네 집이 잘산다 해도 어떻게…, 어떻게 그걸 나한테….”

내 목소리는 지나치게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권태오의 친절이 아니라 그 친절을 그저 친절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상황이, 수십 수백 배로 나를 구차하게 만들었다.

“그 돈을… 무슨 정신으로 나한테 입금한 거냐고… 갚지 않아도 진짜 괜찮은 거냐고…, 너, 나 때문에 큰일 나는 건 아니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물어보고 싶은데, 그러고 나면 진짜 갚아야 되니까, …그래서 그것도 못 하겠어서….”

더운 숨을 뱉으며 나는 잡혔던 손을 떨쳐 냈다.

“그 돈 때문에 정신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나… 나 시험 망쳤단 말이야.”

놀란 듯, 죄지은 듯, 당황한 듯 내 말을 듣던 권태오가 눈썹을 구겼다. 그러고는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이번에도 전교 1등이잖아.”

“기말고사 이야기가 아니야. …경시대회.”

권태오에겐 이상한 힘이 있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정확히 1절의 1소절인데, 해도 되는 말도 정확히 1절의 1소절까지인데, 그가 ‘왜’냐고 물으면 나는 2절까지도 3절까지도 외우게 됐다.

그래서 나는 권태오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권태오가 바라는 것처럼 ‘태오야’라고 그를 부르고 유독 덥던 부산에서의 밤처럼 손을 잡았다가는, 해선 안 될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늘어놓고 끝에는 그 친절에 매달리게 될 것 같았다.

지금도 꼭 그랬다. 입을 꽉 다물고 터져 나오려는 말을 참는 내 턱을 권태오가 검지 끝마디로 두들기며,

“우신아.”

그러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세라도 하나밖에 안 틀렸대.”

내겐 권태오를 초등학생 같다고 평가할 자격이 없었다. 나야말로 받아쓰기에서 낙제한 초등학생이 됐다. 울컥 눈시울이 달아오르더니 빠르게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박민아는 만점이야…. 걔랑 같은 코디 수업 듣는 애들은 전부 만점, 아니면 한두 개 틀렸다더라. 나…, 나 다섯 문제나 틀렸어.”

어차피 상벌과 내신을 앞세워 수시에 올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수능까지 길게 보고 오래 달릴 각오도 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이 어디로 단기 유학을 다녀오건, 얼마나 비싼 학원을 다니건, 어떤 학생부를 만들어 내건 나는 내 페이스만 조절하며 노력하면 될 일이라고도 마음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교내 대회 시험의 두 페이지가 통째로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제일 수가 있어?

그게 씨발 너무 좆같고, 속상하고, 분했다.

…분해. 분했다…. 공부는 내가 제일 잘하는데. 머리도 내가 제일 좋은데. 내가 제일 절박하고 내가 제일 노력하는데. 정공법으로는 나를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던 애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정답을 불러 가며 채점해 대는 모습이, 시험지를 손에 쥐고 떠나는 날 보면서 ‘이우신’ 그러고는 시시덕대던 목소리가, 그리고 내 사정을 조금도 모르는 채 나를 이겼다고 자랑하던 장세라의 천진난만한 미소까지….

그 모든 게 나를 처참하게 만들었다.

“…심화반에 겨우 들면 뭐 해? 대회 성적이 40퍼나 반영되는데. 장학생이 안 돼서…, 한 달 기숙사비 사십만 원을 내라고 그러는데….”

채홍고에 입학한 이후 성적 우수 장학금을 놓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학 쌤에게 사정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애초에 내가 못해서 떨어진 걸, ‘그 애들은 장학금 안 받아도 되잖아요’ 같은 소리를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장학금을 대신해서 교육청에서 보내 온 기초 생활비를 10만 원, 평소 후원을 받아 오던 연두 장학 재단에서 지원금으로 30만 원을 받긴 했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생활비일 뿐이었다. 무턱대고 기숙사비에 들이붓자니, 다른 돈을 당겨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 나 돈이 있긴 한데….’

…그때 생각난 게 팔백만 원이었다. 기숙사 신청서를 손에 쥐고 교무실 중앙에 멍하니 서 있는 순간에, 입금 문자가 생각났다. 권태오가 보내 주었던, 팔백만 원이 목구멍에 걸렸다. 거짓말도 정직하게 하느라고 은행명으로 얼렁뚱땅 보내 주었던, 낭떠러지에 내몰린 나에게 동아줄처럼 내려왔던 그 팔백만 원.

“…그 돈을 쓸까 말까 천 번 만 번 고민했어.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네가 준 돈을 내 돈인 척 써도 될까 고민을 하는 내가 버러지 같고 네가 빚쟁이 같고…,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러고 보니 권태오 앞에서 우는 게 세 번째다. 올해 들어 딱 세 번째 우는 건데, 왜 그게 모두 권태오 앞인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권태오는 이렇게 물었다.

“…방학 기숙사 등록, 안 한 거야?”

나는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안 했어….”

“그럼, 그래서….”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집 아니면 갈 데가 없는데, 집에는… 아버지가 다시 올까 봐 무서워서…. 그런데 이찬희가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별장에서 있어도 된다잖아. 그래서… 빌붙으려고 왔어. 나, 갈 데가… 없어….”

그러자 권태오가 실소했다. 이가 보이도록 웃는 그 애 얼굴이 몹시 화나 보였다.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 섰고 두 눈동자는 전보다 더 까매 보였다.

입을 꾹 다물고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등줄기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감각을 느끼면서, 꿈이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가로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너네랑 안 놀았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내 사정이, 너무 급급해서, 나밖에는 못 보겠어서…. 너희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나는 모르겠어서….”

울음이라는 건 가장 과시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내 눈물에도 조금은 그런 성질이 있었다. 나 좀 알아 달라고, 이만큼이나 슬프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나오는 게.

“모르겠다고, 정말….”

이 말을 입 밖으로 뱉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태오야.”

정말이지 아무것도, 나는 모르겠다.

“권태오 너를 일방적으로 좋아할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아.”

검지로 눈물을 훔치는 동작에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 두 손가락이 얼굴보다 더 젖어서, 물로 물을 닦는 격이었다.

끝내 팔백만 원 중 단 1원도 쓰지 못했다. 그때는 그 돈이 너무나 필요해서, 절박해서, 나중에 갚으면 되겠거니 생각해서 받았지만 도저히 그 돈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쩌면 권태오의 말마따나, 상황이 나아진 뒤 내가 그 돈을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상황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나아질 수 있는 종류의 단순한 생채기가 아니었다. 내 가난은 2년, 아니면 2년, 아니…, 어쩌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까지 지속될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돌려줄 때의 팔백만 원은 내겐 여전히 무거운 돈이겠지. 하지만 권태오에겐 그렇지 않을 거다.

그래서 이자라는 게 있는 거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얼 빌려줄 때는… 더 간절한 사람이 덜 간절한 사람에게 응당 이자를 주어야 했다.

권태오가 내게 바란 이자는 딱 하나였다. ‘태오야’라고 계속 그를 다정하게 불러 줄 것.

그런데 나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너도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너랑 어쩌면 사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무 초라해서 미칠 거 같아….”

내 가난이 나만의 것일 때가 더 좋았다. 그러면 나 혼자 초라하면 그만이니까. 혼자인 건 생각보다 견딜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가난이 권태오의 문제가 되고, 권태오의 옆에서 초라할 나 자신을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끝내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닌데, 나라고, 나라고 나로 태어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모든 게 창피했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채홍고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당했었다. 가난이라는 게 창피했던 적도 부끄러웠던 적도 없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이젠 알았다. 그때의 나는 뭘 몰랐었다는 걸. 누구를 마음 깊이 좋아하고 그로부터 순전한 호의를 받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혼자가 괜찮았다는 걸.

“…우신아.”

…다정한 권태오 옆에서 내가 얼마만큼 초라해질 수 있는지. 그 다정이 아플 만큼 센 포옹으로 닥쳐 올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뛸 수 있는지.

“…울지 마.”

권태오가 말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이우신. 울지 마.”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금방이라도 열릴 듯한 그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내 동작은 너무 굼떠서,

“…널 좋아해.”

권태오가 말을 뱉은 뒤에야 그의 입술에 가닿았다.

눈물 젖은 입술로 충동적으로 그의 입을 가로막은 채,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피부에 닿는 더운 숨이 누구 것인지 모르겠고 낮은 침음이 내 목에서 흘러나온 건지 권태오가 흘린 건지도 모르는 순간에, 나는 권태오가 내게 벌을 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태오야’라고 그를 불러 주지 않았기 때문에, 권태오도 대답하지 않기로 한 말을 끝내 뱉고야 말았다고.

…나한테 벌을 주는 거라고. 그래서 나를… 부수려고 하고 있다고.

“…….”

닿았던 입술을 떼어 내자마자, 내 뒤통수가 침대 벽에 가닿았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냈고 권태오의 손은 내 두 뺨을 붙들었다. 물고기라도 낚아채려는 양 빠르고 거친 동작이었다.

“좋아해, 우신아.”

나는 눈시울이, 권태오는 온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만….”

허둥지둥 손을 뻗어 입술을 막아 봤지만,

“네가 좋아, 이우신. 널 좋아해.”

내 손바닥에 제 입술을 뭉개 가며 뱉은 말들을 모두 막아 내긴 역부족이었다. 나는 거의 기절할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 것 같고 뇌는, 지워지고 없는 듯했다.

“…흑, 그만 말해.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좋아해…, 울지 마.”

“그만 말해….”

“네가 그만 울면, 그럼 그만 말할게. …울지 마.”

더운 호흡이 내 손바닥에 고이는 듯했다. 손금 위에 입술을 문지르고, 손바닥 안에 코끝이 눌리도록 고개를 묻고, 권태오가 얼굴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엉거주춤 그 입을 막아 쥔 채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동작들을 바라만 봤다.

‘울지 마’, 납작하게 뭉개진 목소리로 권태오가 속삭였다. 너무 작고 한숨 같은 소리여서, 그 음성이 내 손의 땀샘으로 스미는 기분이 들었다. 그 바람에 온몸의 피부가 뜨거워졌다.

나는 권태오의 입을, 권태오는 내 두 뺨을, 막고 닦고 문질러 댔다. 나는 그의 고백을 막으려 했고 권태오는 내 눈물을 멈추려 했다. 그리고 우린 둘 다 실패했다. 좋아한다는 버거운 말도 쓰라리게 아픈 눈물도 멈추질 않았다.

“…내가 그 돈, 안 갚아도 된다고 말했잖아. …그 말 진심이었어. 그건 그냥…, 내가 모아 뒀던 대회 상금이야.”

“뭐…?”

“쉿. 쉿. 나도 말 좀 하자.”

권태오가 내 얼굴을 고쳐 쥐었다. 엄지손가락을 와이퍼 삼아 내 눈물을 벅벅 닦아 내는데, 그 손길에 나는 도리어 볼이 아팠다.

삐질삐질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손을 거뒀다. 엉거주춤 가슴팍 앞에 모아 쥔 두 손처럼, 내 온몸이 그저 그렇게 의미 없이 구겨져 있었다.

“아무도 내가 그 돈 모아 둔 거 몰라. 너한테 쓴 줄은 더더욱 모르고. …어차피 안 쓸 돈이었어. 나중에 허세나 좀 부리려고 모아 놨던 거지. 그래서 너한테 준 거고.”

나에 비해 권태오는, 눈빛부터 모든 동작에 기백이라는 게 넘쳐흘렀다. 두 손으로 내 뺨을 꽉 쥐고 온몸으로 도주로를 막은 채 그가 나를 달랬다.

“경시대회, 다섯 개나 틀리게 해서 미안.”

그 말에 나는 울컥했다.

“너 때문에 틀린 거 아니야.”

“그래, 그래. 아무튼 내가 미안하다고. 나는 기말 수학도 다섯 문제 맞았는데…, 이런 말해도 네 기분이 딱히 좋아지진 않겠지?”

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권태오의 말이 맞았다. 그의 수학 점수가 어쨌건 내 기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점수를, 내 기분을 달래어 주겠다고 읊어 대는 일은 달랐다.

그런 권태오가 예뻤다….

“우신아. 시험 존나 망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 내가 준 팔백으로 수업료든지 기숙사비든지 다 내고 다녀. 나는… 내가 모은 상금이 네 장학금으로 쓰이면 좋겠어.”

생각도 못한 말에 얼이 빠지는 듯했다. 너무 커다란 손으로,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권태오는 너무 듣기 좋은 소리를 내게 했다. 이 순간의 모든 게, 권태오의 모든 게 내겐 너무했다.

“…남은 방학 동안에는, 갈 데 없으면 훈련소 기숙사로 와. 거기 내 방에서 같이 지내자. 훈련소 방은 침대도 크고 시설 되게 좋아. 엄마 데려오는 놈도 있고, 여친 데려오는 놈도 있어서 너 정도는 재워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걸.”

“…왜?”

마음만큼 울렁거리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태오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건데? 왜 나한테 잘해 주는 건데?”

“나는 네가 너로 태어나서 너무 좋으니까.”

돌아온 즉답에 숨이 턱 막혔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나는 가슴이 떨리고 방패가 다 부서지고 옷이 다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게 권태오는 폭풍처럼 몰아쳐 왔다.

“네 이름이 이우신인 거도, 네 눈 코 입이 그렇게 생긴 거도, 생긴 거랑 다르게 급식 두 그릇씩 먹는 거도, 개좆같은 애비 밑에서 혼자 잘 큰 거도, 나랑 같은 학교 다니고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는 거도, 네가 그냥,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어리둥절한 머리로 어영부영 들었던 말이 있었다. 권태오가 다정했다면 그건 내가 이우신이어서 그런 거라고, 그 특별하고 멋진 애가 내게만 유달리 다정하게 구는 거라던 말.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마련이었다. ‘만에 하나’, 그러고는 몰래 떠올린 망상이 있었다. 권태오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면 그때는, 내가 그 다정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해답은 뻔했다. 버러지가 되건 거지가 되건 초라해지건 참지 못하고 나는 그 다정에 온몸을 파묻고야 말 거였다.

“…….”

심장 소리가 너무 커져서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내 가슴을 마구 차며 쿵쾅거리면서, 내게 무어라 질러 대는 소리가 있었다. 네 자존심이 죽었다고, 쪽팔리는 줄도 모르고 구차해진 줄도 모르고 좋아하느냐고….

그리고, 응.

쪽팔리지도 않고 구차한 줄도 모르고 좋았다. 온몸을 시뻘겋게 붉혀서 어둠 안에서 거의 보이지도 않게 된 권태오가, 뭣 때문인지 나를 따라 눈물 줄을 뺨에 만든 권태오가, 주먹으로 제 뺨을 때리다시피 문지르더니,

“난, 나는 그러니까… 아, 씨발.”

분을 못 감추고 제 머리를 내 어깨에, 감추듯이 푹 파묻는 권태오가….

“난 이우신 너처럼 말 잘 못해. 그냥 네가 좋아. 네가 이우신인 게 좋아. 그게 다야.”

나는 권태오가 너무 좋았다. 그냥 권태오가, 권태오인 게… 그게 다였다.

들은 고백을 곧이곧대로 돌려줄 순 없어 입이 말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손을 들어, 나는 권태오의 뒤통수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새카맣고 짧은 머리카락이 의외로 부드러웠다.

“아니야, 너… 되게 말 잘해….”

어색하게 달래는 내 목소리에 권태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래?”

“응.”

정말이었다. 권태오는 말을 무척 잘했다. 그러니 오늘 들은 말들을, 나는 두 번 다시 못 잊을 것이다.

“우신아.”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금 속이 울렁거렸다. 아래턱이 빳빳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눈물을 참는데, 울음을 누르려는 목울대에서 이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바람에 권태오가 내 손 안에서 머리를 빼냈다. 벌떡 고개를 추켜들더니 나를 보는 권태오의 시선이 매서웠다. 눈물로 가득 차 두 눈이 흐려진 와중에도 그 맹렬한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 왜 또 울어. 그만 울자, 응?”

“…응.”

“이우신. 그만….”

“흑, …응.”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날 보며 권태오는 길게 한숨 쉬고, 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한 번이라도 눈을 깜빡였다간 겨우 그친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낮은 침음 끝에 권태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잇새로 어딘지 고통스러운 사람 같은,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내가 노력해 봤는데, 고민도 해 봤는데, 근데 못 참겠어. 다른 일은 다 참겠는데 너한테는 그게 잘 안 돼. 그러니까… 나는 말할 테니까 …대답, 참고 싶고 미루고 싶으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그 순간 권태오의 표정을 똑바로 보고 싶었다. 눈빛은 어떤지 두 뺨은 무슨 색인지 날 따라 또 우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욕심을 못 이겨 눈을 깜빡이자, 뭉친 눈물이 후드득 볼을 타고 떨어졌다.

“우리, 사귈까?”

백 번 천 번을 참아낸 상상이,

“나랑 사귀자.”

재난처럼 내 현실에 닥쳐왔다.

머릿속이 텅 빈 채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제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권태오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알 수 없게 됐다.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도통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나는 그저 침묵했다. 권태오의 말마따나 참고, 미루고, 견디는 일이 이제 내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 내게 권태오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끝이 닿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권태오가 말했다.

“예비 번호.”

“…….”

“너 대학 입학하면, 그때 사귈 사람. 그거, 1번 나 할래. 예비 번호 1번 표, 그거 나 줘.”

어쩌면 권태오는 답안지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조차도 가지지 못한 나에 대한 답안지…. 그러니 저렇게 서슴없이 용기 내어, 도무지 내 입으론 염치가 없어 못 뱉던 말을 먼저 해 주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긴긴 침묵 끝에 나는 이불 끝자락을 집어 들었다. 눈물을 닦는 척 눅눅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푹신한 이불에 눈물을 묻히며 내가 말했다.

“…요즘 세상에 어느 대학에서 예비 번호 표 같은 걸 준다고 그래.”

“아 좀, 진짜…. 말 잘하고 귀여운 새끼….”

“…….”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 허탈함이 남았다. 북받쳤던 감정이 식고 나니 왜 실소가 나는 건지 의문이었다. 피식거리며 작게 웃다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권태오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태오야. 너 진짜로 괜찮은 거야? 네 돈, 진짜로… 나중에 줘도, 내가 써 버려도… 괜찮은 거야? 아무 용도도 없이 돈을 모아 놓진 않았을 거 아냐.”

“용도?”

내 딴에는 걱정해서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권태오는 어째선지 후련한 얼굴로, 이를 보이며 웃어 보였다.

“있긴 했는데, 이제 필요 없게 됐어.”

“왜?”

“이제 네가 있으니까.”

이해하기 힘든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뭘 어쨌길래, 팔백만 원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단 걸까.

고민하는 내 손목을, 권태오가 고쳐 잡았다. 누가 유도 선수 아니랄까 봐 팔목을 옭아매는 동작이 서슴없었다. 그가 힘을 주어 당기자, 맥없이 벽에 처박혀 있던 내 상체가 번쩍 세워졌다.

“이우신.”

“어… 응?”

말없이, 권태오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1’이라고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권태오가 웃었다.

천진난만한 미소에, 처음으로 권태오가 소년 같았다.

“등록금. 나 벌써 낸 거다.”

권태오는 아마 모를 거다. 그 쉬운 수학 시험을 다섯 문제밖에 못 맞힌 바보니까. 예비 1번 등록금은커녕, 내 쪽에서 장학금을 주며 모셔 와도 모자라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양심이란 것을 저버렸다. 그리고 권태오의 손을 잡았다.

권태오가 내민 손 하나로, 내게 절벽 같던 내일에 계단이 놓였다.

나는 문득 권태오는 몇 ㎏까지 들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공주윤을 번쩍 들어 엎어 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나를 들쳐 업는 것도 손쉬울 게 뻔했다. 그러니 권태오가 금방이라도 번쩍 들어 올릴 것처럼 내 어깨를 잡고,

“일어나. 같이 나가서 고기 좀 먹자.”

그럴 적에는 회유형 문장이 명령이 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현명했다.

“아…. 알겠어, 가자….”

눈물을 펑펑 쏟은 탓인지 나는 조금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가벼운 점퍼 하나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설 때까지도 권태오는 잡은 어깨를 놓아주질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작은 짐승이 된 기분을 느꼈다. 커다란 어미가 내 목을 물고 옮기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저기…, 이거 놔줘.”

그러자 권태오가 진한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권태오는 계단을 눈짓했다.

눈짓에 담긴 의미를 알고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아마도 권태오의 눈으로 보기에는 내가, 계단도 똑바로 못 내려갈 정도로 비실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니 놔 달라고 뿌리치자니 하필이면 한참을 울고, 비틀비틀 나선 뒤라 행동과 말이 맞질 않았다.

결국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부축을 받으며 건물 밖을 나섰다. 운동화를 꺼내 신으려는 내게, 권태오는 신발장 안에 구비된 남는 슬리퍼를 꺼내 주었다. 직접 신겨 주기라도 할 것처럼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나는 얼른 손을 뻗어 낚아채듯 슬리퍼를 받아야 했다.

슬리퍼 안에 발을 쏙 집어넣자니 문득 조금 전 대화가 떠올랐다.

“…태오야, 근데 있잖아.”

“어.”

“너 수학 진짜 다섯 개 맞혔어?”

“…….”

말없이 권태오는 문을 열고 나섰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커다란 뒷모습을 쫓아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낮은 조명등이 켜진 밤의 정원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예뻤다. 언젠가 이런 집에서 살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을까. 꼭 매매가 아니어도 되는데, 전셋집만 있어도 난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돌길을 따라 걷자,

“어, 뭐야! 이우신, 우씨…!”

볼멘소리가 와락 내게로 닥쳐왔다. 저 멀리, 아직 불조차 올리지 않은 바비큐 그릴과 라탄 의자, 야외용 테이블, 그리고 성난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강건우가 보였다.

“내가 말할 땐 안 먹는다고 했으면서!”

화난 얼굴로 뛰어오는 강건우를 보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러고 보니 권태오를 따라 내려오기만 했을 뿐이지, 아직 건우에게 뭐라고 사과할지 생각하질 못한 채였다.

당황한 채 ‘어어’ 소리만 내는 내 눈앞을, 권태오의 어깨가 불쑥 가로막았다. 꼭 그만큼 커다란 목소리도 함께였다.

“이우신 경시대회 망했대. 그래서 기분 안 좋았던 거래.”

“뭐?”

강건우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나도 ‘아’ 하고 탄식했다.

“이우신이 망하기는 왜 망해? 경시대회 문제가 그렇게 어렵게 나옴? 짱세라도 한 개밖에 안 틀렸다던데?”

“코디 딸린 애들이 다 휩쓴 거지 뭐겠냐.”

권태오가 뱉어 놓은 무심한 대답을 끝으로 작은 적막이 감돌았다.

나는 입을 벙긋거릴 뿐 이미 튀어나온 이야기를 부정하지도 만류하지도 않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버지, 팔백만 원, 권태오, 그리고 경시대회… 모든 일이 당사자인 나에게는 하나로 직결되어 있었기에, 몰랐다. 개중 하나만 떼어 내어 공유할 수도 있다는 걸.

힐끔 권태오를 올려다볼 적엔 그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돌덩이처럼 커다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이제 됐지?’ 라는 것처럼.

…그러게, 이제 된 거 같네.

“뭐야? 뭐야?”

강건우의 반응은 반 박자 늦었다. 그리고 무진 요란했다.

“아니, 야. 이우신! 아니…, 너 뭐야! 그런 거면 이 형님한테 말을 했어야지! 아, 미친 거 아냐? 너 씨발 그래서 속 안 좋았던 거야? 존나 빡치는데? 있어 봐, 존나 학교 홈페이지에 글 써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아냐, 그럴 거 없어. 어차피 상벌로 수시 입학은 어렵다고 생각했었고….”

“야! 착한 척하지 마!”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강건우가 표정을 왕창 구겼다. 눈살부터 콧잔등, 이마, 입술 가릴 것 없이 잔뜩 찡그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죽이고 툴툴거렸다.

“씨….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

그 바람에 나는 몹시 머쓱해졌다. 왜인지 전에도, 강건우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 듯했다. 그땐 뭐라고 변명했더라….

“그냥… 놀러 와서 다들 기분 좋은데 이런 이야기….”

“아, 착한 척하지 말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강건우는 불같은 한편 심플하고, 또 착했다. 녀석은 나를 대신해서 ‘교내 비리’라느니 ‘걔네 상장을 다 압수해야 한다’라느니 소리 지르며 펄펄 뛰었다. 강건우의 손에 붙들려 나는 테이블 자리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라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뒤에도 화두는 경시대회에서 떠나질 않았다. 대화가 사그라들만 하면 이찬희가 몇 마디 보태는 바람에 강건우는 도무지 진정하질 못했다.

떠들썩한 와중에도 나는 권태오를 힐끔거렸다. 당연하다는 듯 바비큐 그릴 앞에 선 권태오는 불을 피우더니, 팩에 든 고기를 잔뜩 굽기 시작했다. 집게를 쥔 손이 능숙하게 움직이고 무표정한 얼굴로 붉은 열기가 비치는 모습에 자꾸 눈이 갔다.

그제야 나는 강건우가 왜 그렇게 토라졌던 건지 이유를 알았다. 잔뜩 신이 난 강건우가 챙겨 왔다는 고기는, 도저히 나 없이는 다 못 먹을 만큼 많았다. 10인분도 아니고 20인분은 되어 보였다. 칼집을 낸 삼겹살이 구워지는 동안 통마늘과 버섯도 노릇노릇하게 익어갔다.

“내가 진짜, 홈페이지에 항소문 올릴 거야. 두고 봐.”

궁시렁거리면서 강건우가 감자를 썰기 시작했다. 완제품 키트를 그저 냄비에 넣고 끓였을 뿐인 된장찌개를 구경하면서,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와, 강건우 요리 잘하네. 장가가도 되겠다.”

“뭐? 푸하하! 장가는 무슨 장가야, 존나 웃겨 이우신. 장가가도 되면은 뭐, 나 받아 줄 사람은 어딨냐?”

“어? 으음….”

평소 나누던 농담대로라면 ‘이 형님한테 와’ 해 주어야 하는데, 왠지 오늘따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고기 잘 굽는 예비 번호 1번이 맞은편에 서 있어서 그런가….

머쓱하니 웃기만 하는 내가 비운 오디오를, 이찬희가 채웠다.

“건우는 결혼이 일찍 하고 싶은가봐?”

“엉. 난 대학 졸업하자마자 존나 고속으로! 바로 결혼식 올릴 거야! 애는 하나만 따악 낳아서 잘 키우는 게 꿈이거든.”

된장찌개를 휘휘 젓는 강건우를 향해, 권태오와 내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결혼해 줄 여친도 없잖아.”

“애는 뭐 너 혼자 낳냐.”

그러고는 내심 당황해서 권태오와 눈을 맞췄다.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강건우가 식식거렸다. ‘그러는 너는’, ‘너는’ 하며 강건우는 나와 권태오를 번갈아 가며 손가락질했다.

그 순간 나는 왠지 찌릿한 기분을 느꼈다. 권태오의 장래 계획이 어찌 되건 지금 그 이야기를 들어서는,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아, 나? 나야 모르지, 나는 대학 입학하면 더 바쁠 거 같은데….”

“어느 과로 갈 건데? 너 한국대 가려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 나 경영학과.”

권태오가 큼직하게 썰어 올린 고기 접시가 테이블에 내려왔다. 강건우와 나는 거의 동시에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집었다. 그러자 불에 달궈진 집게가 강건우의 젓가락을 ‘탁’, 그러고는 내 젓가락을 ‘툭’ 쳤다.

“더럽게 침 묻히지 말고 기다려. 덜어 줄게.”

강건우와 나란히 접시를 내밀고 기다리자 삼겹살과 버섯, 마늘이 하사되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다시금 젓가락을 들었다.

두 볼 가득 고기 두 줄을 욱여넣었을 무렵, 이찬희가 불쑥 물었다.

“왜 경영학과야?”

왜냐니? 묻는 대신 나는 입 안을 가득 채운 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대답하긴커녕 목소리가 나올 구석도 없이 꽉 찬 입을 빨리 비우려 턱을 움직이는데, 이찬희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별건 아니고. 내가 듣기로는, 경영학과는 경영할 게 있는 집 자식들이 가는 거랬거든.”

“어?”

뜨거운 고기를 꿀꺽 삼켰지만, 들은 말에 뭐라 대꾸해야 할까 알 수 없게 됐다.

‘…그러게. 왜 경영학과 가려고 했더라?’

아주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계획해 본 적은 없었다. 매일매일 바쁘고 숨이 차서, 우선은 가장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가장 좋은 학과로 가야겠다 생각한 게 시초였으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절박하게 공부했지만 꿈 자체는 막연했다.

안정되고 평안한 삶.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이었다. 그래서 취직이 잘 되는 학과로 진학하고, 졸업 후에도 열심히 스펙을 쌓고, 그래서 취직을 잘 하면, 안정적인 기업에서 정직원으로 일하며 월급을 벌면서 살면 딱 좋을 거 같았다.

눈을 끔벅이며 ‘으음’ 소리만 낼 뿐 나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너무 길고 세세했다. 내 진로며 꿈에 대해서는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상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날 보며 이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공부도 치열해서 장학금 따기가 진짜 힘들대. 입학하고 4년 내내 공부만 해야 될 거래.”

“음,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랬더니 이찬희가 이를 보이며 웃는다. 만화 캐릭터처럼 ‘헤헤’, 그러고는 명랑한 목소리를 낸다.

“큰이모한테 물어봤어!”

…그게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 태오네 엄마! 난 큰이모라고 부르거든. 내 친구가 경영학과 가고 싶어 한다고, 어떠냐고 물어봤지.”

“그래?”

내심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찬희가 나를 ‘친구’라 말하면서 내 진로에 대해 다른 어른에게 상담을 해 봤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대상이 권태오네 어머니라는 것도 놀라웠다.

내 시선이 절로 권태오에게 향했다. 먹어 치우는 속도를 구워지는 속도가 못 따라잡는 탓에, 벌써 두 번째 고기로 불판을 막 채운 참이었다.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권태오는 집게를 바비큐 그릴 옆면에 걸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무어라, 이찬희가 말한 ‘큰이모’나 진학 상담에 대해선 말을 얹지 않았다.

나는 괜히 콜라 한 캔을 들이켰다.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이야기에 왠지 머리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쥐구멍만 한 문 같은 게, 두개골에서 딸칵 열리는 듯했다.

‘나는 그냥… 탈출이 하고 싶어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에 대한 질문은 그랬다. ‘그냥’. 그래서 중학교 때 정한 목표 학과를 고수하며, 곧이곧대로 직진하는 내가 이상하다면 이상할 것이고 어리숙하다면 어리숙할 것이었다. 내게는 인생 지표는커녕 진로 계획을 잡아 줄 어른도 없었다.

그러자니 공주윤이 생각났다. 나는 늘 공주윤을 부러워했었다. 하기 싫다는 수학 과외를 억지로라도 붙들고 시켜 주는 엄마가 있는 공주윤이, 솔직히 많이 부러웠다. 장세라도, 박민아도, 다른 아이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 애들에겐 원하건 원치 않건 양 어깨에 기대를 얹는 부모가 있었다. 그 존재가 나는 막연히, 못내 부러웠다.

“…그럼 어느 과가 상대적으로 괜찮은데?”

괜히 파채를 뒤적이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이찬희가 눈을 깜빡였다.

“나야 모르지?”

“…아까는 큰이모한테….”

불쑥, 내 접시 위로 고기 덩어리가 산처럼 내려왔다. 갓 구워진 삼겹살 세 줄이 통째로 놓인 접시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가위가 다가왔다. 싹둑싹둑 고기를 잘라 주는 권태오를, 나는 놀란 채 올려다봤다.

“내가.”

그리고 권태오가 말했다. 툭 던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

“내가 물어볼게. 엄마한테.”

거의 열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기세에, 나는 두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고마워.”

대화 주제는 재빨리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야. 근데 찬찬은 왜 다리털도 안 나고, 몸에 점도 없냐? 얼굴에 점 없으면 귀신이라던데 찬찬은 몸에도 점이 없어.”

이찬희의 팔뚝을 쿡쿡 건드리며 강건우가 말했다. 나는 부추와 버섯을 넣어 돌돌 만 삼겹살 한 줄을 입 안에 욱여넣으며 대꾸했다.

“개히 놀히지 조 마.”

“너는 입에 든 거나 삼키고 말하세요. 존나 다람쥐냐?”

쌓인 고기를 먹어 치우는 사람은 이제 나뿐이었다. 강건우가 늘어놓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듣느라 다들 그에게 집중할 뿐, 내가 점령하다시피 한 고기 불판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시선은 가장 먼저 권태오의 접시로 향했다. 닭가슴살 소시지 두 개를 꼬챙이에 꿰어 먹어 치운 권태오의 접시 위에는, 한 입 베어 물고는 내려놓은 녹색 고추가 보였다.

‘매운 거 잘 못 먹는구나. 의외네.’

그리고 이찬희의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깻잎 한 장이 올라가 있는 접시에는 고기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기름이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은 접시가 썰렁하게만 보였다.

“…그랬더니 새끼가, 존나 화나서 앞문으로 나가더니 갑자기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야!”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나는 강건우의 말을 들으며 ‘하하’ 웃었다. 그러면서 내 접시 위의 아직 따끈한 고기 여러 점을 집어다가 이찬희의 접시에 올렸다.

“아 왜, 딱 이런 말투였다니까? ‘어이어이 1반! 느네 어두메 자식들이냐아!’”

체육 선생의 말투를 흉내 내는 강건우가 너무 웃겼다.  큰소리로 와르르 웃어 대는데, 뺨으로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웃다 말고 힐끔 돌아봤을 때 이찬희가 보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 나는 그냥 웃고는 말았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들떴고 배는 부른 밤, 푹신한 침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수마가 쏟아졌다. 타지에 와 남의 별장 방 하나를 차지했단 것도 잊고 나는 뻔뻔한 너구리처럼 곯아떨어졌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 잠든 나를 깨운 것은 노크 소리였다.

‘똑똑’, 방 안을 가로지르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언제 잠들었나 생각하며 눈가를 문지르는데,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별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헉. 우신아, 벌써 자고 있었어? 깨워서 미안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이찬희가 가장 먼저 보였고, 복도의 밝은 불빛이 두 번째로 내 두 눈을 강타했다. 눈살을 퍽 구기며 나는 문고리를 쥐고 자세를 바로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그러자 쑥, 문틈 새로 이찬희의 손이 들어왔다. 나는 내 품 안에 안기듯 떨어지는 천 조각을 엉거주춤 받아 들었다.

고개 숙여 살펴보니 까맣고 폭신한 안대였다.

“이거 받아, 수면 안대야. 이 방은 커튼이 얇아서 아침에 엄청 눈부시거든.”

“그렇구나. 고마워.”

“뭘. 원래 태오가 쓰던 건데, 하하. 너한테 이 방을 뺏길 줄 누가 알았겠어?”

그 바람에 나는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어쩐지, 캐리어를 먼저 가져다 놓고 있자니 권태오가 불쑥 이 방 문을 열었었다. …여기가 원래 권태오 방이었구나. 말을 하지. 그럼 비켜 줬을 텐데.

조금은 머쓱해져 목덜미만 매만지는데,

“있지.”

이찬희가 말했다.

“나 잘했지?”

“어…?”

“내 말 듣길 잘했잖아. 그렇지?”

고개를 조금 들어 나는 이찬희를 올려다봤다. 이찬희는 앉아 있을 때는 마냥 순하고 귀여워 보이는데, 일어선 채 마주 볼 때면 문득문득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아마도 길쭉한 다리와 큰 키 때문일 것이었다. 착해 보이는 얼굴과 반짝이는 눈망울도, 그가 날 올려다보느냐 내려다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닿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에 나는 다소 얼떨떨했다.

“뭐… 그래. 그러네.”

“그래?”

“어, 그래.”

도대체 뭐가 그렇단 건지 둔한 머리로 생각을 더듬어 가면서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찬희가 웃었다.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입술이 꾹 다물린 채 포물선을 그렸다.

“그럼 잘 자, 우신아.”

“어…, 너도.”

기쁜 듯 밝은 얼굴로 돌아서는 이찬희를, 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문을 도로 닫으려다 멈추고는 다시금,

“저기, 찬희야.”

그렇게 불러 세운 건 순 충동적인 일이었다.

“너 혹시… 알고 있었어? 경시대회 일.”

그러자 이찬희가 활짝 웃었다. 대답하는 대신에 그 애는 ‘잘 자’ 하고 했던 인사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제 방 문을 열고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 아니다 돌아온 말은 없었지만, 나는 이미 답을 들은 셈이었다.

묵묵히 돌아온 침대에는 아직 내 온기가 남아 있었다. 중앙 자리에 털썩 몸을 눕히자 그제야, 이 침대가 다른 방 침대에 비해 유독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게, 말을 하지.’

나는 폭신폭신한 안대를 눈 위에 얹었다. 다시금 잠을 청하려 노력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이 침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권태오의 침대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강건우에게 내가 그리 좋은 친구가 못 된다는 사실에 미안하고 울적해져서 그랬고, ‘나 잘했지’ 그렇게 묻던 이찬희가 신문을 물어 온 커다란 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했다.

그런데, 뭐라 그럴까. 그 신문에 내 지인의 부고 소식이 있어도 칭찬을 원할 것 같은…. 이 위화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사전을 뒤져 봐야겠다.

여행 이틀째 되던 날에 나는 가져온 문제집 하나를 다 풀었다. 아침 일찍 권태오는 근처 산책로를 달리러 나갔고 강건우와 이찬희는 튜브를 들고 수영장으로 나섰는데, 오후가 되자마자 세 사람 모두 쫄딱 젖은 채 불쾌한 얼굴로 별장으로 돌아왔다.

“밖에 비 와.”

머리를 푸르르 털며 강건우가 말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자 정말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소나기가 그치지 않자 아이들은 뿔이 났다. 반면 나는 조금 즐거웠다. 이찬희가 마지못해 물을 채운 스파 욕조를, 어쩌면 내가 제일 오래 이용한 것 같았다.

“우신이는 반신욕을 더 좋아하는구나?”

속옷이 쫄딱 젖은 채 나온 날 보며 이찬희가 말했다. 샤워 가운에 몸을 파묻은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사실은 욕조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그 날 안 참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지고 그치면 좋을 텐데, 어정쩡하니 보슬보슬 내리는 바람에 강건우는 종일 희망 고문을 당해야 했다. 우리들은 하루 종일 실내에서 뒹굴며 먹기만 했다. 강건우가 챙겨 온 간식거리와 고기는 이미 해치운 지 오래여서, 배달시킨 치킨이며 피자로 속을 채웠다. 나로서는 드물게 배고프지 않은 날이었다.

닷새째 되는 아침이 되어서야 별장 휴가가 끝났다. 정원 밖으로 하얀 서버 밴이 도착한 걸 확인하고는 하나둘씩 짐을 내렸다.

강건우는 나를 ‘지독한 놈’이라고 부르면서, ‘어쩜 마지막까지 수영장에 발목 한 번 안 담그냐’며 투덜거렸다. 이찬희는 날씨가 궂은 바람에 속상하게 되었다며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소매치기라도 되는 양 내 캐리어를 빼앗듯이 집어 드는 건 권태오였다.

“너, 그래서 이렇게 짐이 많았구나.”

혼잣말하듯 아주 작게 중얼거리더니, 권태오는 내 실내화와 교복, 교과서, 노트와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달팽이의 등딱지 집과도 다름없는 캐리어를 번쩍 들었다.

새하얀 서버 밴은 채홍고 교문 앞에 멈추어 섰다. 권태오와 나를 내려 주기 위해서였다.

각자 기숙사로 들어가는 거냐는 강건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말았다. ‘각자’는 못 들은 셈 치기로 했다. 어차피 강건우가 기숙사까지 놀러 오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었다.

캐리어를 내리기 위해 트렁크 문을 여는데, 뒷좌석 시트 위로 동그랗게 내민 이찬희의 얼굴이 보였다. 내 캐리어 위를 뒤덮은 강건우의 가방을 위로 들어 주면서, 이찬희가 말했다.

“나, 놀러가도 되지?”

“어?”

“태오 방.”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음’ 하고 나는 작게 침음했다. 안대를 가져다주던 밤의 대화며 대답 대신 보이던 미소로 미루어, 이찬희가 내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구나 생각했었다.

오늘 권태오를 따라 교문 앞에서 내리겠다고 말할 적에도 이찬희는 그 밤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권태오와 부쩍 ‘친해졌다’는 거야 뻔한 사실이었다. 멍하니 붙어 앉아 해외 드라마를 볼 적에 강건우도 질투 난다고 펄펄 뛰면서,

‘네 진짜 베프는 나야, ‘그럼이만갑오개혁’!’

저만이 아는 내 게임 닉네임을 부르며 요란법석을 떨었었다. 하하 웃으며 장단을 맞추면서 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권태오는 내가 강건우와 친한 시간보다 더욱 오래 이찬희의 ‘베프’였음에도 불구, 이찬희는 농담으로라도 그에게 새 친구가 생긴 일을 두고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찬희는 나를 좋아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투정을 부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상하게 굴더니, 요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내게 살가웠다. 왜 그러는 것인지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찬희는 권태오의 새 친구가 된 나를 좋아하며, 나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는 것.

오늘부로 권태오의 방에서 묵는 것도 따지자면 비밀까진 아니었다. 권태오를 잘 알고 내 사정마저 알게 된 이찬희가 그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은근하게 아는 척을 해 올 줄은, 또 몰랐던 일이었다.

“음, 나야 모르지.”

천천히 입을 열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찬희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나보다 5㎝는 더 큰 그의 형이 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이렇게 자잘하게 간섭인지 관심인지 모를 말을 건네 오면서 내 일의 일부가 되는 이찬희가, 조금은 어린애 같았다.

“권태오 방이니까 권태오한테 물어봐.”

“어차피 네가 괜찮다고 하면 돼, 우신아.”

그러더니, 캐리어를 꺼내는 내 손등 위를 이찬희의 손이 슬쩍 덮었다. 그 손의 온도에 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이렇게 차가워?’

깜짝 놀란 나에 비해 이찬희는 여유로운 얼굴을 달고 있었다. 방싯방싯 미소 지으며 그가 말했다.

“나 따돌리지 않을 거지?”

따돌리다니… 그게 얘가 나한테 할 소리인가? 어리둥절한 채 나는 그 애의 손을 잡아 쥐었다. 한 번 꽉 세게 쥐었다가 놓아주고는, 내 캐리어를 잡아 내렸다.

“어.”

그러고는 캐리어 밑 바퀴를 스니커즈 앞코로 툭 찼다. 왼쪽 바퀴 하나가 고장 나서는 제멋대로 브레이크가 걸려 대는 통에, 가끔 이렇게 차 줘야 제대로 굴러갔다.

교문 앞으로 캐리어를 끌고 올라갈 즈음 하얀 밴은 이미 출발한 뒤였다. 차도를 바라보는 내게 권태오가 손을 뻗어 왔다. 손을 잡고 걷자는 줄 알고 나는 조금 움찔했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권태오가 잡은 건 내 손이 아닌 캐리어 손잡이였다.

“가자.”

그러고는 앞장서는 등이 오늘따라 커다랬다. 거처 없는 나에 비해 단단하고 또 든든해 보이는 권태오를 쫓아, 잣나무 산책로를 느릿느릿 올랐다. 유난히 축축하던 밤에 속삭인 약속처럼, 권태오의 기숙사 방에서 신세를 질 차례였다.

나는 괜스레 마음이 울렁거렸다.

기숙사 건물에도 운동부 학생들이 머무르는 층이 따로 있어 막연히 그곳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권태오를 따라가 맞닥뜨린 건물은 보다 본격적인 ‘훈련소’였다. 채홍관 바로 뒤편에 자리한 2층 건물은 갈색 벽돌로 지어져 있어 교내의 어느 건물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1층의 작은 로비에는 트로피며 상장, 액자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모든 복도와 방이 중앙 계단으로 통하는 심플한 구조였다. 나중에 혼자 내려오거든 액자 속 사진에서 권태오의 모습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계단을 올랐다.

권태오의 방은 2층 왼편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자리해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방은 1인실이었고, 몹시 쾌적했다. 전국 대회를 휩쓴 유도부 에이스가 쓰는 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권태오는 더블베드 침대 옆에 내 캐리어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여기서 묵으면 돼.”

“응. 근데 담당 선생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나중에 만나면 말하지 뭐.”

그 바람에 내 눈썹이 삐뚤어졌다. 암만 그래도 유도부원들의 공간에 타인인 나를 들여놓은 셈인데,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워도 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권태오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진중한 남자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권태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했다. 그야 1년 하고도 반을 채우도록 지켜본 바가 있어 내적 친밀감이라는 게 아주 높기는 했다. 혼자서 유추하고 관찰해 낸 사실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적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권태오는 본의 아니게 나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데도 그랬다.

권태오에 대해 내가 얻은 정보라는 것들은 대체로 이찬희가 말하고, 권태오가 ‘그래’ 하고는 마는 식으로 전해졌다.

그 이야기 전부를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찬희가 아는 권태오와 내가 아는 권태오가 많이 다를 수도 있었다.

요즘은 그런 확신마저 들었다. 둘 중에, 따지자면 내 눈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확신. 내가 아는 권태오는 조심이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의외로 충동적인 구석이 있고, 본성이 아주 다정하고 순하며, …나를 좋아한다.

생각에 잠긴 날 두고 권태오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밤 10시 이후 외출 금지지만 아무도 안 지키는 규율이니 너도 어겨도 된다거나, 아침 점심으로 급식이 나오는데 같이 먹어도 된다거나, 1층 샤워실은 더러우니 쓰지 말고 방 안의 작은 샤워 부스를 쓰라거나… 긴긴 말을 마치며 권태오는 내게 기숙사 방 열쇠를 내밀었다.

“이걸 나한테 줘 버리면, 태오 너는 어떻게 다니려고 그래?”

“…….”

그러자 권태오가 제 턱을 매만졌다. 몇 초간 생각에 잠긴 듯 까만 눈동자가 바닥으로 향하더니, 이내 느릿느릿 입술이 열렸다.

“너 나랑 같이 사는 줄 알고 따라온 거야?”

“…….”

이번에, 침묵은 내 몫이 됐다. 솔직히 말해 당연히 같이 사는 줄 알았다.

내 반응을 확인한 권태오는 금세 귀를 붉혔다. 그제야 나는 권태오가 아직 제 짐을 조금도 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깨에 걸린 짐 가방을 내려놓지 않은 건 물론이고 방 안에도, 기초적인 세안 도구나 저지 한 벌이 걸려 있을 뿐 생활감이 느껴질 만한 소품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귓불로 오르는 열을 느끼며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올라오는 길에, 복도에 걸린 훈련 일정표 봤어. 7월 27일부터 2주간, 괄호 열고, 지옥 캠핑 훈련, 괄호 닫고. 새벽 6시에 기상해서 밤 11시에 끝나는 일정이던데, 그걸 집에서 다니겠단 말이야?”

“어. 원래도 집에서 잘 다녔어. 지옥 훈련이다 뭐다… 그래 봤자 별로 힘들지도 않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나는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함께 지낼 거라 착각한 게 부끄럽기는 하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열여덟 살의 여름은 청소년 선수인 권태오에게 아주 중요한 성장기였다. 2주나 되는 훈련 기간을 불청객인 나로 인해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때문에 불편해서 피하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나, 하루 종일 심화반 자습실에 있을 테고… 잠버릇도 거의 없어. 널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서 넌 괜찮다고? 나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게?”

안 괜찮을 게 뭐 있나?

“부산에서도 같이 잤잖아.”

“그때는 이우신 네가 나를 찬 뒤였잖아.”

“…찬 적 없어. 기억을 날조하지 마. 나는 네 대답을 유보했을 뿐이야.”

조금 길어지나 싶던 언쟁은 그렇게 멈췄다. 내 말을 끝으로 권태오가 입을 다물더니, 괜스레 천장을 올려다본 것이었다. 그를 따라 유난히 높은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나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어쩌면 권태오는, 날조니 유보니 하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말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게 분명했다. 그런 권태오가 나는 조금 귀여웠다.

“태오야, 걱정하지 마.”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나는 주먹으로 권태오의 팔뚝을 툭 쳤다.

“안 잡아먹을게.”

그러자 권태오의 피부가, 목덜미부터 이마까지 단숨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튼 코치한테 말하고 오겠다’며 부랴부랴 나서는 동작이 재빠르다 못해 조금은 허둥지둥했다. 드물게 당황하고 열 오른 권태오를 구경한 다음, 나는 캐리어의 짐을 풀었다.

권태오를 귀여워하는 여유를 만끽하는 건 딱 그 순간이 끝이었다. 작년 여름 내내 입고 다녔던 이너 티셔츠에 체육복 반바지로 탈복하고, 방 안의 작은 욕실에 내 세안도구를 올려다 놓고, 가볍게 세수를 마치자마자 내 컨디션은 그야말로 꺾여 버렸다.

처음엔 방 안이 덥다 싶더니 몸에서 열이 올랐다. 팔도 다리도 저렸고 손과 발이, 그리고 머리가 아주 무겁게 느껴졌다. 익숙한 몸살 기운에 나는 절로 신음했다.

암만 피곤해도, 코치의 허락을 맡고 돌아올 권태오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몸이라는 게 아주 건방져서, 예의 바른 객이고픈 내 마음을 따라 주질 않았다. 너무 지친 바람에 나는 주인 없는 침대에 멋대로 앉았고, 이내 풀썩 상체를 눕혔다.

‘태오가 돌아와서 깨워 주겠지….’

이대로 잠깐만, 20분만 자고 일어나야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땐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야를 반쯤 가린 하얀 실루엣을 바라보길 한참, 나는 그게 물수건의 귀퉁이라는 걸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인영이 손을 뻗어 왔다. 큰 손은 내 이마에 놓인 미지근한 수건을 치우더니, 차게 적신 새 수건으로 갈아 주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린 채 나는 권태오를 살폈다. 덤덤한 얼굴로 권태오는 제 손등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간호에 익숙한 듯 보이는 느린 손짓이며 걱정 어린 눈길, 그리고 시원한 손의 온도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유도 선수 중에도 너 같은 사람 있어. 큰 경기 치르고 나면 쓰러져 버리는 사람.”

“…아.”

그제야 나는 목소리를 냈다. 잠깐 졸았을 뿐인데 목구멍 깊숙이서 쉰 소리가 섞여 나왔다.

“내가 그래서 아픈 거였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그럼 뭔 줄 알았어.”

권태오가 피식 웃으며 왼팔을 길게 뻗었다. 가슴 위로 내려앉는 이불의 감촉이 보송보송했다. 코치에게 허락만 맡겠다더니, 새 이불까지 구해 온 모양이었다.

“몰라. …너 때문인가 했지.”

“내가 뭐라고 네가 아프기까지 해.”

농담처럼 건네 온 말에 나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자기가 뭐냐니. 권태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권태오가 얼마나 큰 사람인데, 나한테.

“손… 시원해서 좋다.”

대신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찬희도 손이, 차갑던데. 걔는 요즘 왜 그렇게… 자꾸 뭐에 질려 있는 거 같지? …걔가 나 좋아한대, 태오야. 너 긴장해야 돼.”

덧붙인 농담이 잇새로 나간 건지 아닌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웃지 않는 권태오의 얼굴을 보면, 아마도 내 말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눈을 감고 나는 권태오의 손등에 볼을 기댔다.

비몽사몽간에 나는 갖가지 꿈을 꿨다. 꿈속의 이우신은 열여덟이 아닌 스무 살 성인이었다.

어른인 채로도 나는 채홍고에 등교했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쳤다. 모든 문제의 답은 내가 풀어 내리자마자 즉시 채점됐는데, 1번부터 31번에 이르기까지 전부 오답이었다. 창문 밖에서 빨간 색연필로 그인 빗금이 빗방울이 되어 내렸다.

그래도 꿈속의 나는 여유로웠다. 어째선지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멀쩡한 직장에 취직해서는, 뺏어 갔던 돈 사백만 원을 돌려줬기 때문이었다.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아버지를 쳐다보는 내 옆에 권태오가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받은 돈을 전부 갚았다. 맛있고 비싼 걸 사 줄 테니 먹으러 가자, 파스타 좋아하냐고 묻자,

“나 사실 우유 못 먹어.”

꿈속 권태오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럼 토마토 파스타 먹자. 조개 든 것도 먹고, 아니다. 사실은 나도 양식 별로 안 좋아해. 고기나 먹으러 가자, 나 돈 있으니까.

그랬더니 권태오가 웃음소리를 냈다.

“바보야. 잠이나 마저 자.”

그 말에 꿈벅꿈벅 눈을 뜨자 낯설고도 높은 천장이 보였다. 멀리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는 와중에 나는 옥혜 씨에게 연락했다. 아버지가 훔쳐 간 돈을 갚았고, 취직도 했고, 나는 이제 왕창 틀려도 괜찮은 그저 그런 애가 됐으니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자 했다.

휴대폰 액정을 몇 번 더듬거리던 손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나는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지진이 났다. ‘우웅’, ‘우웅’ 하더니 푹신한 땅이 울렸다. 짧은 머리칼이 다 젖도록 거친 세수를 마치고 나온 권태오가 땅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저는 어… 친구인데요. 우신이가 지금 자고 있어서요.”

머쓱한 얼굴로 중얼중얼 대화하는 권태오가 둘로 보였다가, 하나로 보였다가 했다. 권태오를 둘러싼 배경도 도서관 복도였다가, 비 오는 운동장이었다가, 오후의 기숙사 방이 됐다.

“…네, 상태가 좀…, 네.”

권태오는 굵은 어깨에 수건 한 장을 두르고, 커다란 손에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휴대폰을 움켜쥔 채, 어딘지 불편하고 어색한 기색으로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요? 학교, 아…, 그쪽 기숙사가 아니라 채홍관이라고 산책로 따라 오시면 나오는 커다란 건물 있거든요? …예, 거기 뒤에 있는…. …예, 선수용 훈련솝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랑, 왜 전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권태오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예의 차려 가며 존댓말을 하느라 반 톤 정도 올라간 어조도 평소보다 상냥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사라지는 추세라지만 전화번호부라도, 온종일 읽어 주면 좋겠다. 아…. 아니다. 이왕 읽어 주는 거라면 시집이 좋겠어. 이왕이면 목이 쉬도록 긴 시를 골라야지….

“우신아.”

골똘해진 나를 뜨뜻미지근한 손이 흔들고 있었다. 졸린 기운에 무거운 눈꺼풀을 반만 들어 올리자, 권태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사람이 나를 만지고 있었다. 살결은 부들부들하고 작은 주름이 많이 진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가, 귀에 닿았다가, 다시 어깨를 두드렸다.

“우신아, 잠깐 일어나 봐. 죽 가져왔어.”

친근한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인가 보다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분주한 기색이 도통, 내 옆에서 가시질 않았다. 다시 눈을 뜨자 서랍형 협탁 위에 내려놓은 은박지색 도시락 통이 보였다. 차례차례 연두색의 셔츠, 반지 하나 끼지 않은 손가락, 못 본 새에 한결 부드러워진 머리카락이, 그리고 옥혜 씨가 보였다.

“왜 왔어요? 여기까지.”

놀란 바람에 나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축 늘어졌던 상체를 엉거주춤 일으키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는 저녁을 알리고 있었고, 방의 주인인 권태오는 창가에 선 채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방 침대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채였다.

오직 옥혜 씨만이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았다. 권태오의 방, 권태오, 나, 그리고 옥혜 씨라니. 한 번도 합쳐 본 적 없는 조합에 나는 얼떨떨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내 반응에도 옥혜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높이가 낮은 의자에 앉은 탓에 평소보다 더 작아 보이는 모습으로, 옥혜 씨는 가져온 가방을 열고 보온 도시락을 꺼냈다.

“우신이 네가… 문자했잖니.”

“제가요?”

나도 모르게 권태오의 눈치를 자꾸 살폈더니 옥혜 씨에게도 전염된 모양이었다. 연신 나를 살피던 옥혜 씨도 이제는 권태오를 힐끔힐끔 살피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권태오가 괜히 창문 밖을 내다보길 시작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른인 옥혜 씨는 그러나 나와 달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잔열이 남은 내 이마를 쓰다듬듯 만져 주었다.

“그래,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괜히 놀라게 했네…. 그럼… 죽 꼭 먹고, 약도 가져왔으니까 한 포 먹고 푹 자. 알았지?”

“네….”

내 대답은 한 박자 늦게 새어 나왔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지? 그러니까, 1년은 족히 넘었는데… 그런데 옥혜 씨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여유 있는 미소만 따지자면 오히려 더 좋아진 것도 같았다.

여전한 옥혜 씨를 따라 나까지 열여섯 살의 겨울로 돌아간 듯 착각이 일었다. 요즘은 가정부라고 막 대하지 않는다…고 그랬던가, 헬퍼를 찾는 부잣집 도련님이 있어서 그 집에 취직했다고 그랬던가, 연봉까지 안정적으로 챙겨 주는 일을 하게 됐다고 그랬던가….

‘그러니까 걱정 말고 용돈 받아. 너 필요한 데에 써.’

그런데 그 돈, 나 잃어버렸는데.

그 생각을 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목구멍이 턱하고 막히는 듯했다. 진작 계좌에 넣어 뒀어야 하는 건데, 그 사백만 원을, 급할 때 5만 원 권 한 장을 꺼내 쓰더라도 다음 달에 다시 채워 넣으면서 꿋꿋이 지켜온 그 사백만 원을, 아버지한테 뜯겼는데….

그러고 보니 옥혜 씨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설마 방금 꿈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현실이었나? 나, 옥혜 씨한테 문자 한 걸까? 뭐라고 보낸 거지? 아버지가 훔쳐 간 돈을 돌려줬다고, 그런 헛소리를 보낸 건 아니겠지?

열 기운 때문인지 머릿속이 펄펄 끓는 느낌이었다. 생각이 내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 만큼 몸은 더했다. 손을 뻗어 옥혜 씨를 잡을 수도 없었고 입을 열어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조차 없었다.

우두커니 굳어 있는 날 보며 옥혜 씨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일하다 급하게 나와서 바빠. 미안한데, 얼른 가 봐야겠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옥혜 씨는 내 눈치를 살폈다. 자리를 털며 일어서더니,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권태오를 보고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를 두 번 도닥였다.

“우신아, 몸조리 잘하고. 힘든 일 있으면… 엄마한테 꼭 연락해. 알았지?”

순식간에 목구멍이 매워졌다.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나는 억지로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 끄덕. 두 번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네.”

애써 대답하면서 나는 걱정됐다. 아파서 그런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건데, 옥혜 씨가 보기에는 내 표정이 너무 매정할 것 같았다.

뻣뻣하고 더운 방 안에서 옥혜 씨만이 물고기처럼 유연했다. 웃으며 제 가방을 챙겨 든 옥혜 씨는 지갑을 꺼내더니 권태오에게 다가갔다.

“자, 이건 친구 용돈하렴. 나중에 우리 우신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훈련도 힘내고. 응?”

권태오가 정말이지 아주아주 크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 앞에 서자 대한민국 평균 아줌마 키래도 무방할 덩치의 옥혜 씨는 아주아주 작아 보였다. 그렇게나 조그만 몸으로 그렇게나 작은 손으로, 옥혜 씨는 권태오의 커다란 오른손을 잡더니 그 안에 오만 원 두 장을 쥐여 주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만 싶었다.

‘왜 또 돈을 줘요? 전에 준 돈 한 푼도 못 쓰고 남겨 놨다가 무슨 사달이 났는데, 지금. 왜 엄마 흉내를 내고 그래요? 옥혜 씨 우리 엄마 아닌 거, 나한테 엄마 없는 거 권태오도 다 아는데.’

울렁거리는 말을 볼 안으로 씹어 삼키는 나를, 권태오가 잠깐 살폈다. 시선이 스치는 순간 권태오가 넙죽, 높다란 곳에 달린 머리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선뜻 용돈을 받아 챙겼다. 권태오가 태연한 만큼이나 나는 왠지 망연해졌다.

옥혜 씨는 그렇게 떠났다. 권태오는 몇 번이고 인사하며 옥혜 씨를 배웅해 주었다. 반면에 나는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잘 가라고도 못했고 고맙다고도 못했다. 온몸에 진이 빠져서는, 물 먹은 솜 인형처럼 널브러져 누워 있기만 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옥혜 씨가 다녀갔다는 사실 자체가 꿈보다도 더욱 꿈같은데, 내 옆에는 보온 도시락이 놓였고 방문을 닫는 권태오의 손에는 오만 원 권 지폐 두 장이 들려 있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모르는 척해 줘서.”

“고맙긴 뭘. 얼른 죽부터 먹어.”

미적미적 느리기만 한 나에 비해 권태오는 재빨랐다.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와, 그는 나 대신 도시락통의 뚜껑을 열었다. 방금 만든 티가 역력한 닭죽이 따끈따끈한 김을 뿜어냈다. 권태오가 숟갈을 쥐여 주기에, 나는 아주 천천히 한 입 두 입 닭죽을 떠먹었다.

생각해 보면 권태오의 말마따나, 나는 긴장이 풀리면 앓아눕길 자주 해 왔다. 중학생 때부터 그랬다. 시험기간이 지나고 성적표를 확인한 밤이면 여지없이 열이 오르고 몸살이 나서, 거실의 매트리스 침대에 뭉개져 누워 있곤 했었다. 그럴 때면 옥혜 씨가 시장에서 닭을 반 마리만 사다가 삶아서, 백숙도 아니고 죽도 아닌 뭔가를 만들어 줬었다.

좋은 집에서 좋게 좋게 일한다더니, 그새 옥혜 씨의 요리 솜씨가 더 좋아진 듯했다. 뜨거운 것도 안 느껴질 만큼, 열 때문에 들뜬 혓바닥으로도 느껴질 만큼, 닭죽은 아주 많이 맛있었다.

깊고도 넓은 도시락통을 싹싹 비울 때까지 권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내겐 선물 같았다. 너 엄마 없지 않냐고, 방금 다녀간 사람 누구냐고…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권태오가 내겐 선물이나 진배없었다. 아버지의 내연녀였던 사람이라고 소개하자니 내 마음도 아팠고, 옥혜 씨의 마음도 아플 텐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참 고마웠다.

대신에 권태오는 나쁜 손버릇을 선보였다. 제 것이 아닌 도시락 가방 안을 마구 뒤적거린 것이었다. 그 속에는 약국에서 급히 사 온 듯 아직 가격표가 붙어 있는 감기약이 두 종류, 그리고 직사각형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청소년기, 학업… 뭐라고 적힌 거지.’

‘30스틱’이라 쓰인 걸 보니 진액 종류의 영양제인 듯했다.

‘…그런 건 비쌀 텐데….’

박스 옆면에 쓰인 좁쌀만 한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대신해서, 권태오가 약 상자를 협탁 중앙에 떡하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물과 감기약 두 알을 건네주었다.

어릴 적에 부모한테도 못 받아 본 간호를, 이제 와 권태오에게 받자니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오글거리는 기분을 애써 누르면서, 나는 억지로 알약을 삼켰다.

그제야 가출했던 정신이 슬금슬금 돌아오는 듯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 넘기면서, 나는 뒤늦게 부끄러웠다.

“미안…. 침대에서 땀 냄새 나겠다.”

“원래 여기 침대에선 땀내밖에 안 나.”

그러더니 권태오가 내 손을 가져갔다. 오른손 위에, 조금 전 받은 지폐 두 장을 올리더니 주먹 모양이 되게끔 손가락을 접어 놓았다.

“이거 너 해.”

“…너한테 주신 거잖아.”

“너한테 주신 거지.”

“…….”

그 바람에 내 입술은 새 부리처럼 튀어나왔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아랫입술을 툭 내민 채 나는 노란 지폐 두 장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약인지 홍삼액인지 무언지가 든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구석 자리로 몸을 비키자, 권태오가 내 뜻을 알아채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왔다.

그대로 우린 한참을 누워 있기만 했다. 나는 배가 불렀고, 십만 원이 생겼고, 온몸이 묘하게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휴대폰을 확인할 용기가 났다.

왼손으로 이불을 긁어쥐고, 오른손으로 휴대폰 액정을 두어 번 두들겼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문자를 보냈는지, 쓸데없는 소리로 옥혜 씨를 걱정하게 만든 건 아닌지 확인할 차례였다.

심호흡을 두 번 한 뒤 문자함을 열자, 두 달 전 옥혜 씨가 보내왔던 안부 문자가 보였다. 이어진 스크롤은 짧았다. 나는 화면 위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미끄러뜨렸다.

[ㅇ엄마]

[보고싶퍼요]

나는 휴대폰 옆면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급하게 두 번, 세 번 누르는 바람에 화면 안에 빛이 들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더 건드린 뒤에야 액정 가득 통신사 마크가 떠오르더니 기기가 종료됐다.

베개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숨죽이는 나를, 권태오는 책망하지 않았다.

“내가 문자를 보냈나 봐.”

“응.”

“…내가 엄마 보고 싶다고, 문자했나 봐.”

문득 나는 아주 억울했다. 가난 말고는 그 무엇도 날 두렵게 하지 못했었는데, 요즘은 내가 나 같지가 않았다. 처음엔 권태오와 마주 서는 게 무서웠고, 나중엔 권태오의 눈으로 본 내가 어떤 사람일지 걱정되어 무서웠고, 오늘은 권태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날까 봐 그게 무서웠다.

저금통에 첫 동전을 집어넣은 애처럼 나는 불안했다. 내가 저축한 애정이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지 매순간 궁금했다. 할 수만 있다면 권태오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서, ‘좋아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 기울이고 싶었다.

멍하니 허튼 생각을 늘리는 내게,

“무슨 생각해.”

권태오가 물었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애꿎은 천장만 노려봤다. 너 때문에 무섭다고 말하면 권태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지만, 구태여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걱정스러웠다. 보통의 열여덟 살 남자애라면 이런 날에는 울기도 하고 그럴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보통의 열여덟 살 남자애와 거리가 조금 멀었고, 닭죽 한 그릇을 먹었다고 눈물을 흘리진 못했다. 온 얼굴이 보송보송하다 못해 건조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이런 내가, 권태오의 눈에 무심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무서웠다. 울면 울보라고 생각할까 봐 무섭고, 안 울면 매정하다고 생각할까 봐 무섭다. 세상천지 기댈 데 하나 없는 가난한 애로 기억되는 건 싫은데, 독하고 뻔뻔한 애로 기억되기는 더 싫다.

결국에 나는 둘 중 하나일 텐데, 그게 이우신인데 말이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이불 안에 뭉개고 있던 몸도 괜스레 뒤척거렸다. 한참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권태오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너 아직 나 좋아해?”

그러자 내 저금통이 대답했다.

“어. 좋아해.”

명쾌한 답을 내놓더니, 권태오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서로를 마주 보자니, 그와 내 무릎이 맞닿았다.

이 순간에는 내 콧김마저 신경 쓰였다. 덜 내린 열 때문에 날숨이 식식 소리를 내는데, 권태오가 듣기에 그게 우스울까 봐 조금 멋쩍었다. 애써 숨을 죽이며, 내가 말했다.

“아직도 나랑 사귀고 싶어?”

“어. 사귀고 싶어.”

권태오는 참 신기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은 없으면서, 내가 질문하면 그게 무어건 누구보다 빨리 대답해 오는 점이 그랬다.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얼굴로, 어지간해선 미동조차 안 보이는 눈동자 너머로,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참 궁금했다.

권태오의 머리를 열어 보는 대신에, 나는 내 머리를 열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이 끝도 없는 두려움을 한 올이라도 떨칠 수 있을 터였다. 매일매일 저금통을 흔들며 감상에 잠기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태오야. 나는 수시에 올인할 수는 없는 입장이거든?”

“응.”

“수능까지 쳐서 정시로 입학할 각오하고 길게 보고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너도 알지? 입시 끝나려면 1년 하고도 반이나 남았단 거야. 나… 앞으로 1년 하고도 반 동안이나, 공부하느라 너랑 놀러 가지도 못할 거고, 고3 되면 더 바쁠 거야.”

“응.”

“너… 지금 나, 보이지. 너한테 엄청 큰 돈, 사실 사백만 원이었는데 팔백이나 받아 놓곤 돌려주지도 않고, 그걸 다, 그냥 홀라당 받아먹고…. 오늘 너한테 주신 용돈도 내가 가지고…. 그리고 지금은, 봐 봐. 네 침대까지 차지했잖아.”

“응.”

“나는 앞으로도 이럴 거야. 내 처지가 이것밖에 안 돼…. 아마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너한테… 너한테 제대로 된 무얼 못 해 줄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그래도…, 그래도 계속… 나랑 사귀고 싶을 거 같아?”

“응.”

긴긴 말을 마치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베개에 얼굴 반절을 묻은 채 권태오의 눈, 코, 그리고 입을 훑어보았다. 살면서 봐 온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기고 남자다운 권태오의 이목구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째 맹해 보였다. 뭘 줘도 생각 없이 받아먹는 조심이를 볼 때의 기분이 딱 이랬었는데….

“너는 ‘응’ 말고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묻자,

“있어.”

권태오가 대답했다.

“뭔데? 말해 봐.”

“이우신, 너 되게 건방져.”

“뭐?”

뜻밖의 지적에 당황한 건 나였다. 권태오가 누운 자세를 고쳤다.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누르며 그가 상체를 움직이자, 커다란 그림자가 내 정수리를 다 덮었다.

놀라 눈만 깜빡이는 나를 향해 권태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딱딱한 이마를 내 이마에 콩 부딪쳤다.

“왜, 왜 이래…?”

거북이처럼 이불 안으로 목을 집어넣으며 내가 물었고,

“야. 나는 뭐 놀고먹는 놈팡이인 줄 알아? 나도 아주 바쁜 몸이야, 이거 왜 이래?”

권태오가 말했다. 끓는 듯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와 거친 말투는 화난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권태오는 거짓말을 참 못했다. 지금도 도리 없이, 왼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 웃는 낯이었다.

“이우신, 공부 잘한다고 유세 좀 떨지 마.”

까만 눈동자 안에 비친 내 얼굴이 달덩이 같았다. 검정에도 온도가 있다면 날 보는 동공의 검정은 아주 뜨거웠다.

“네가 공부로 전교 1등이면 나는 유도로 전국 1등이야. 네가 나한테 해 주긴 뭘 해 준다고… 웃기지 마. 나야말로 바빠서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을러놓는데, 눈빛은 거짓말을 못했다. 좌우로 일렁이는 두 눈동자에 불안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큰 애정이 어렸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좋아해….”

역시, 나는…

“좋아해, 태오야.”

권태오가 너무 좋다.

“…….”

이마를 구기고 눈썹을 찌푸린 채 권태오는 멈춰 버렸다. 화난 척 말을 쏟아내던 입술도 그대로 정지했다. 성난 듯 나를 깔아보는 눈에서 왠지 모를 원망이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권태오가 뒤로 물러났다. 베갯잇에 얼굴 반쪽을 감추며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얼굴로 몰려드는 열 기운이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붉게 달아오른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으니까.

한참 말을 솎아내는 듯하더니, 권태오가 말했다.

“…그럼, 손잡게 해 줘.”

나는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권태오가 불쑥 이불 안으로 손을 뻗어왔다. 와락 움켜쥐는 손의 악력이 무척 강해서, 나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착한 아이처럼 권태오가 도로 몸을 눕혔다. 덩치 커다란 상체를 구부정하게 굽히고서, 나를 마주 보는 얼굴이 참 귀여웠다.

그리고 아주 이상했다. 비몽사몽간에 옥혜 씨에게 난생처음 ‘엄마’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그땐 안 나던 눈물이 왜인지 지금 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내 표정이 아주 웃기게 됐다. 코끝이 빨개진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나는 권태오를 노려봤다.

권태오의 얼굴도 꼭 나만큼 이상했다. 가까이 맞댄 내 얼굴의 눈, 코, 입을 살피느라 무심하던 눈동자가 아주 바빴다.

“우신아, 너 수능 치고 대학 붙는 날까지 내가 기다릴게.”

“응.”

“그게 진짜 내 한계야. 재수는 죽어도 안 돼. 너 존나 열심히 해야 돼.”

“당연하지.”

“그리고, 너 기다리는 동안에 나도 이자는 받아야 되겠어.”

“응. 얼마?”

그러자 권태오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가끔 뽀뽀 정도는 하게 해 줘.”

…이게 본론이었구나. 나는 조금 허탈해져 웃었다.

“태오야, 이자는 정확하게 정해야지. ‘가끔’이 얼마만큼이야?”

그러자 권태오의 눈동자가 멈췄다. 시선을 내 입술에 고정시킨 바람에 눈이 반쯤 감겼다. 까맣고 짧은 속눈썹이 한 개 두 개, 아주 잘 보였다.

몇 초간 고민한 끝에 권태오가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너무 적지 않아?”

“…….”

그러자 잡힌 손이 아파왔다. 꽉 움켜쥐는 악력에 웃음이 나려는 걸,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야 했다.

“그럼 3일에….”

권태오가 중얼거렸다.

“…이틀에, 아니 하루에….”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열 번.”

떳떳하게 제안해 왔다.

“하루에 열 번? 너무 많잖아. 열 번을 언제 다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 씨’ 하며 짜증을 부린다. 내가 저를 놀리고 있는 줄을 이제야 알아챈 눈치였다.

“그럼 언제, 얼마만큼 해야 적당한 건데? 네가 말해 봐, 이우신.”

그런 권태오가 너무 귀여워서,

“지금….”

속삭이고는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꽉 잡힌 손에 마주 힘을 주며 완전히 눈을 감아 버리자, 머뭇거리는 기척이 피부에 닿을 것처럼 선명해졌다. 뜨끈한 숨결이 인중에 닿는 듯하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다가왔다. 통통하고 말랑한 감촉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입꼬리를 올리자 내 입술이 절로 가늘어졌다. 팽팽하게 얇아지는 입술 위로 권태오가 ‘꾹’, 벨 누르듯 제 입술을 세게 맞붙였다. 뒤통수가 베갯잇에 푹 파묻힐 정도로 거센 입맞춤이었다.

더운 밤이었다.

습관이라는 게 휴대폰 알람보다도 정확했다. 오전 6시 반이 되자마자 두 눈이 자동으로 번쩍 뜨였다.

‘여기가 어디지.’

퉁퉁 부은 눈을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도 잠깐이었다. 욕실 안에서는 방의 주인이 씻고 있는 듯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베개에는 물에 젖은 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열 기운으로 펄펄 끓던 몸의 온도는 미적지근했다. 몸살 기운도 많이 가라앉은 채였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길게 켜는 것으로 정신을 추스르고는 오늘의 할 일을 떠올렸다. 벌써 닷새나 빼먹은 심화반 자율 학습부터 따라잡아야 했다. 문자 그대로 ‘자율 학습’이다 보니 따로 수업은 안 한다지만, 독서실의 좋은 자리를 꿰차기엔 이미 늦은 때였다.

그래도 장세라가 알려 준 정보에 의하면, 어제까지도 3학년들 열댓 명만 출석 도장을 찍었을 뿐이랬다. 2학년들이 게으른 덕분에 괜찮은 구석 자리가 두 개 남아 있다 그랬으니, 그 자리는 꼭 잡아야 했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샤워는 다녀와서 해도 늦지 않았다. 7시가 되기 전에 독서실에 가서, 빈자리에 가방부터 두고 와야겠다 싶었다.

욕실을 못 쓰는 대신, 급한 대로 물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아 낸 다음 방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숙소 복도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아래층에서 웅성웅성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멀찍이서 덩치 큰 남자애들이 반쯤 헐벗은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 운동부 숙소에 들어왔다는 게 번쩍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커다란 남자애였다. 중앙 계단으로 바삐 향하면서 나는 그게 공주윤이라는 걸 한발 늦게 알아보았다.

평소에도 아주 깔끔하진 않던 공주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모습이 유별났다. 새벽 기상의 버거움을 한눈에 보여 주려는 양, 뒤집어진 머리칼은 집 없는 까치에게 내줘도 될 것 같았고 하얀 티셔츠는 반쯤 말려 올라간 데다, 오른팔로 배를 벅벅 긁고 있었다.

팔자걸음으로 털레털레 움직이는 공주윤의 추리닝 바지 앞섶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흐아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는 입맛을 ‘쩝’ 다시는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려는 순간에,

“…….”

갈색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안녕, 주윤아?”

“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리는 공주윤은 아직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비몽사몽 졸음이 서린 눈을 잠깐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사타구니를 한 번 힐긋거린 다음, 아차 싶어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어. 공신. 안녕…. 아니, 어?”

도망자처럼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내 등 뒤로,

“아악! 너 뭐야, 씨발 왜 여기 있냐고! 뭐야아!”

찢어져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반대편에서 다른 누군가가 ‘발기찬 아침’이라며 공주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운동부 숙소에서의 첫날 아침은 그렇게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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