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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먹은 별이, 반짝 (7/16)

물 먹은 별이, 반짝

쓰레기처럼 쌓인 옷더미를 발끝으로 걷어 냈다. 운동화를 신은 채 남의 집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미안하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질 않았다. 주인이 자리 비운 집의 꼬락서니는 딱 그 정도로 지저분했다.

흙발로 우두커니 선 채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한편에는 꽃무늬 이불이 구겨져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저게 벽돌인지 전자 기기인지 알기 힘든 노트북, 구석에는 일회용 식기들과 남성용 속옷이 굴러다녔다. 너저분한 생활감만 두드러질 뿐이었다.

가족, 친구, 지인. 방 안에는 집주인 이외에는 사람의 흔적일랑 없었다. 심지어는 자식의 사진 한 장 없었다. 그 점이 아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였더라면 아들 사진을, 돌잔치부터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액자 수십 개에 넣어 줄을 세워 뒀을 터였다.

“태오야….”

그때 철제 현관문이 작게 열렸다. 망을 보던 녀석이 문틈 새로 눈동자만 살그머니 비춰 왔다.

“…다 뒤졌어? 밖에 사람들이… 다니는데….”

나는 검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 대꾸했다.

“어. 다 훔쳤어.”

난생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빈집 털이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홍길동 흉내를 내게 된 사정을 설명하자면 어제, 그러니까 6월 29일로 돌아가야 했다.

6월 29일은 이찬희의 생일날이었다. 이제껏 이찬희의 생일에는 이 씨네 가족들, 그리고 권 씨네 모자가 함께했다. 나로 말하자면 권 씨네 모자 중 자였다. 말인즉슨 이찬희의 생일이 다른 아이들의 생일과 얼마나 다른지, 나는 아주 잘 알았다.

녀석의 생일에 대한 이모의 집착에는 거의 한이 서린 수준이었다. 열네 번째 생일을 챙겨 주지 못했었기에, 아픈 마음에 그런 것이라고 엄마는 이모를 두둔했다.

그래도 나는 이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섭섭하고 서글퍼서 생일을 챙겨 줄 수야 있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남들 두 배로 화려한 생일 파티를 여는 건 여러모로 과했다. 그렇게 지적하고 싶은 걸 4년 내내 참고 지냈는데, 올해 들어 생일의 규칙을 바꾸려 든 게 다름 아닌 이찬희였다. 이번 생일은 ‘친구들’과 보내겠다고 선언한 거였다.

‘친구’ 뒤에 ‘들’이 붙은 데에 움찔한 건 나뿐이었다. 엄마는 기뻐하며 용돈을 안겨 주었고 이모는 아주 걱정하며 집으로 초대하라고, 파티상을 차려 놓겠다고 했다.

이찬희가 말한 ‘친구들’이라는 건 당연하게도 나와 이우신, 그리고 강건우였다.

‘오늘 저녁! 이찬희의 열여덟 번째 생일 파티에 초대합니다!^0^ (n/4)’

초대장까지 준비하며 신난 이찬희를 말리느라 나는 놈과 다퉈야 했다. 그냥 평소처럼 지내자고 화내는 게 나였고, 다른 친구도 만들라고 할 땐 언제고 왜 지랄이냐고 쏴붙이는 게 이찬희였다.

아무래도 이찬희가 미친 거 같다. 원래도 미친놈이기는 했지만, 근래 들어 더더욱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놈의 또라이 추가 이우신을 향해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다 들렸다. 이우신은 왜 그렇게 생겨서… 왜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서… 왜 착하기까지 해서… 나를 꼬신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이찬희까지 감아 놓은 걸 도도한 그놈이 알까 모르겠다.

당연히 모르겠지. 이우신이 신경 쓰는 건 어려운 수학 문제, 읽기도 힘들게 긴 영단어, 한자가 줄줄 섞인 복잡한 시뿐이다. 그 외의 것들에는 존나 무심하고 도도했다. 이찬희가 뻐꾸기 새끼처럼 지 둥지에 파고들어서 뺙뺙거리는데, 이우신은 강건우가 눈치 보며 밀려나는 줄도 모르고서,

ㅇㅅㅇ=3

딱 이런 표정으로 한숨 한 번 쉬고 말았다. 무심하고 귀여운 새끼.

아무튼 이우신과 강건우를 저녁 파티에 초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이찬희와 아침부터 싸웠다. 이찬희의 속내를 도통 알 수 없어서 나는 기분이 나빴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도, 짜증으로 부글부글 끓는 속은 무엇으로도 식혀지지 않,

“조심이 말이야. 어제 귀 청소 성공했어.”

…기는 시발.

이우신이 속닥거리는 말에 기분이 금방 흐물흐물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염라대왕도 화를 못 낼걸. 나란히 식판을 놓고 앉은 자리에서, 거의 열 개에 가까워 보이는 동그랑땡을 탑처럼 반찬 칸에 쌓아 놓은 이우신 앞에서는.

조심이 근황을 조잘거리는 이우신이 잠시나마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보여서, 착각인 걸 알면서도 웃음이 났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뇌가 터질 것처럼 화났었는데, 몇 마디 말에 속절없이 풀린다는 게.

“태오가 왜 개를 걱정한단 말이야?”

그리고 심장이 철렁했다.

잠깐이지만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찬희가 바로 옆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야 말았다. 즐겁고 평화로운 기분에 금방 심취해서, 그 똥개의 주인이 나라고 말할 뻔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개를 가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아, 어…. 개를 좋아하는 거 같길래.”

“아닌데. 태오는 개 무지 싫어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찬희가 건넨 말에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전에 키우던 개도 너무 짖어서, 버릇없다고 파양했어. 태오는 개 싫어해. 안 그래, 태오야?”

온몸이 파란색이 된 거 같았다. 핏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지옥에 앉은 것 같다. 어떻게 잊었을까, 천둥이를… 잠깐이라도 잊고, 어떻게 웃었지, 내가….

“응? 태오야. 너 조심이라는 개 알아? 그 개 좋아해?”

좋아한다고 말하면, 조심이도 보내 버리려고?

“안 좋아해.”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심이는… 안 된다. 그 개는, 천둥이처럼 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털 결이 곱지도 않고 성격이 착하지도 않고, 똥오줌 못 가리는 사고뭉치에, 무엇보다도 이우신이 좋아하는 개다.

이우신이… 좋아하는 개다, 조심이는. 조심이를 천둥이처럼 만들 수는 없었다. 이우신에게까지 천둥이를 만들 순 없었다.

그러고는, 모르겠다.

대회 경기를 무슨 정신으로 치렀는지도 모르겠다.

유도부 뒤풀이는 생략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되게 이상했다. 큰 집이, 넓은 정원이, 깨끗한 신발장이 이상했다. 꼬리치며 달려오는 천둥이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벌써 4년이나 된 일인데, 문득 돌아서면 이렇게 이상하고는 했다.

받아 온 상장을 거실 책장의 트로피들 사이에 놓고, 준비된 종이 가방을 챙겼다. 의자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멍하니 샤워하고, 머리를 말렸다. 엄마가 골라 둔 옷으로 갈아입고 종이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찬희가 갖고 싶어 하던 태블릿 PC였다.

그리고 이찬희네 집으로 갔다. 엄마도 이모도 없는 집 안에는 해맑은 얼굴의 강건우가 있었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이찬희는 즐거워 보였다. 이우신은 없었다.

6시가 지나고 7시가 되어도 이우신은 오지 않았다. 강건우가 두어 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오겠지,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리는 케이크를 먹었다.

그러다 테이블 아래, 남는 자리 의자에 놓인 휴대폰을 발견했다. 이찬희의 휴대폰이었다. ‘이우신’ 세 글자를 띄워 놓고, 받지도 않는 이를 향해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가 너무 좋아하길래 그런 거야.”

내가 뭐라고 그 점을 지적하기도 전에 이찬희가 말했다.

“태오 네가…. 네가 걔 앞에서만 다르길래. 비도 맞고, 웃기도 하고, 나한테 갑자기 화내고… 안 하던 짓을 하길래. 그래서 친구 만들어 주려고 그런 거야.”

갑자기 시작된 말에 강건우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케이크를 양 볼 가득 욱여넣은 채 녀석이 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짓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찬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몰랐다.

“권태오. 네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먼저 말 건 게 언제인지 기억나?”

이찬희가 물었다.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이우신이 오건 말건 괜찮은 척 웃던 얼굴이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 이야기에 웃은 건? …운 건? …화낸 건?”

내가 이렇게 멍청했던가? 뭐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입도 벙긋 못하고 눈도 깜빡 못하고서 서 있는데, 이찬희는 혼잣말을 줄줄 이었다.

“정말 오래됐어. 나 말고 다른 누구 앞에서도 똑같아. 나는 그게 네 성격인 줄 알았어. 무뚝뚝하고 말없고 표정 없고, 그게 권태오구나 했어. 근데 아니었어. 이우신 보면서 너, 웃었잖아.”

이찬희는 늘 이런 식이다.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할 말을 장전해 놓았다가, 총알 쏘듯이 나한테 툭툭 갈겨 놓고는 했다.

“너 보고도 자주 웃잖아.”

변명하듯 겨우 한 마디 뱉어 놓아도,

“남들 보라고 그러는 척하는 거지. 내가 남들 보라고 착한 척하듯이, 너도 남들 보라고 즐거운 척하는 거잖아.”

이찬희는 곧장 내 말을 엎었다.

“…….”

왜 할 말이 없나 했는데 이제 알겠다. 단순하고 명료한 이찬희의 말들을 못 알아들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놈의 말이 다 맞다는 걸, 나는 알았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태오야. 나는 그냥, 그래서… 새 친구를 만들려고 그런 거뿐이야. 너나, 나나, 우신이랑 친해지면….”

“내가 네 옆에서 못 벗어나니까?”

“…윈윈이니까.”

뒷말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찬희는 내 말에 놀랐고 나는 이찬희가 한 말에 놀랐다. ‘못 벗어난다’는 내 말은 벗어나고 싶다는 본심을 뻔히 드러내고 있었다. ‘윈윈’이라는 이찬희의 말은 이우신을 전략적인 이득으로 보고 있음을 뜻했다.

“안 돼.”

마주 다물었던 입을 먼저 연 것은 나였다.

“…이우신은 안 돼. 걔는 사람이야, 천둥이나 조심이처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개가 아니라고.”

소리치듯 말한 다음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그 후회가 못내 익숙했다. 나는 늘 후회한다. 못 참고 속에 담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이찬희의 낯이 ‘천둥이’라는 이름에 급격히 어두워진 순간에,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태오야.”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이찬희는 나를 말렸다. 한 박자 늦게 놈의 손을 떨치며 나는 자리를 박찼다. ‘윈윈’이라고? 서로 좋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그 ‘서로’에 이우신의 의견은 필요하지 않은 거야? 이우신의 입장은, 생각은, 기분은, 마음은? 개를 입양해도 씨발 그딴 마인드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대로 현관문으로 나서는 나를, 강건우가 잠깐 잡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중에 설명해 달라며 강건우는 내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주었다. 고맙다고 대답한 다음, 미안하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내 집만큼 익숙한 이찬희의 집에서 떠났다.

솔직한 말로 기억력이 나쁜 나인데, 이상하게도 이우신에 대한 것은 전부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지어는 복도를 걸으며 한 번 훑어 내렸을 뿐인 백 문항 조사지의 백 가지 답변마저 뇌리에 또렷했다. 덕분에 이우신이 사는 동네까지 택시를 타고 찾아갈 수 있었다.

택시에서 하차한 다음에야 나는 내 행동이 스토커나 다름없단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이제 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 지금, 당장이 아니고서는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우신에게 전화했다. 이 시간 이 순간이 아니고서는 용기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좋아하는 애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나나 이찬희와는 더는 엮이지 말라고, 하루 중 가장 좋으면서 또 그만큼 짧은 시간인 점심시간의 만남도 그만두자고 말할 용기를.

긴팔 후드에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나온 이우신이, 나는 고마웠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 술술 나왔다.

“…이찬희랑 그만 엮이라고, 앞으로는. 걔는 너랑 어울리지가 않는 사람이야. 이제 그만 붙어 다녀.”

걔는… 파리지옥 같은 새끼야. 너까지 괜히 걸려들지 마…. 나도 이찬희도 좆같은 새끼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멀리 떨어져서 알아서 잘 지내.

그렇게 말하는 내게 이우신은 이상한 말을 쏟아 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녀석이 내게 화를 냈다.

엉엉 울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내가 너를, 더,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는데. 좋아하는데, 너는 왜….”

두 손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 이우신을 나는 두 번째 보았다. 실핏줄이 다 터지도록 세게 공을 맞았던 때보다, 이우신은 지금 더 아파 보였다. 슬퍼 보였고, 어려 보였고, 약해 보였다.

“…이우신.”

그 이름을 말하는 게 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는 모른다. 그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았던 지난 1년을 너는 모른다. 이름을 붙이면 더 좋아질까 봐, 나중에 떠올리며 구체적으로 그리워하게 될까 봐, 그래서 매일 아침 8시에 운동장을 스무 바퀴씩 돌면서 저 멀리 산책로의 너를 봤다는 걸, 그 거리감이 딱 좋았다는 걸, 너는 몰라도 된다.

“나도…, 아직 열여덟 살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할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몇 번이나 널 생각하고 예뻐하고 궁금해했는지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태오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우신. 너는 왜….”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비틀거리며 선 이우신의 어깨를 움켜쥐려다 나는 손을 거뒀다. 온몸의 피가 펄펄 끓고 맥박이 요동치듯 쿵쿵거려서, 그대로 잡았다간 그 애를 부러뜨릴 것 같았다. 그래서 후드 옷자락을 와락 구겨 잡았다.

힘주지 않아도 이우신은 내게로 홱 끌려왔다. 캡 모자 밑으로 마침내 주황색 가로등 빛이 스몄다. 눈물로 흠뻑 젖은 뺨이 반짝거렸다. 까만 눈동자가 참아 내지 못한 감정으로 넘실거렸다.

이우신이 나를 좋아해.

이우신이 나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그만두겠다는데 너는 왜, 왜 자꾸 좋아지게 해. 왜 더 알고 싶고, 갖고 싶고, 잡고 싶게 해….

“잘 참고 있는 나를, 왜 자꾸 건드려?”

간신히 참았는데. 잘 참고 있었는데. 겨우 괜찮다고 날 속이고 눈 꽉 감았는데.

왜 이우신은, 씨발 왜 이렇게….

왜 이렇게 예쁠까.

첫 키스에서는 괴상한 맛이 났다. 내 눈물은 썼고, 이우신의 숨은 달았다.

6월 말의 밤공기는 후덥지근했다. 편의점 밖, 꽃은 없고 말라붙은 잡초가 듬성듬성 자란 화단에 앉아 이우신은 말이 없었다. 나도 멀리서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빛만 괜히 노려볼 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입술이 얼얼했고 혓바닥에서는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밍밍한 맛이 나는 이 침이 내 침이 아닌 것 같고, 혓바닥을 원래 어디 뒀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내 입이 내 입이 아닌 것 같았다.

딸꾹질을 하느라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이우신은 젖은 숨을 삭이다가, 다시 ‘훌쩍’ 하고는 목을 떨었다. 얌전한 자세로 모아 오므린 스니커즈 위로 눈물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풀벌레 우는 소리와 이우신이 훌쩍이는 소리가 섞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내 둘 중 하나가 울음을 멈췄다.

“…다 운 거야?”

찌르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인처럼 푹 숙였던 머리를 겨우 들고는 애써 뺨을 닦아 내는데, 얼굴이 씨발… 온통 상한 채였다.

좀 전에는 내가 미쳤었나 보다. 권태오 등신 새끼. 경고를 해 줄 생각에 마음만 급했다.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이우신이라서, 내가 미처 몰랐다. 마음이 진정된 뒤 다시 살펴본 이우신의 얼굴에는 온통 생채기가 가득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오른쪽 눈의 상처는 다시금 빨갛게 터져 있었다. 물렁하게 부어오른 게 잘못하면 염증이 생기지 싶었다. 평소보다 유독 빨간 입술 왼쪽에도 핏기가 어려 있었다.

단순히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쳐서 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어떤….”

어떤 씨발 새끼가, 너를 때린 거야?

그렇게 물으려다 겨우 입을 다물었다. 맞고 온 걸 자랑하는 남자는 없는 법이었다.

“…왜 운 거야?”

대신에 그렇게 물었다. 그 편이 대답하기에 더 쉬울 거 같았다.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이우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참자, 더 기다리자 하는데, 야속한 입술이 그대로 꾹 닫혔다. 퉁퉁 부은 아랫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볼록했다.

기다리다 못해 내 머릿속이 활화산처럼 끓을 즈음에야, 이우신이 말했다.

“그게… 내 돈, 이. 돈이 없어져서…. 도둑맞아서….”

“도둑? 그 도둑이 너를 이렇게 때린 거야?”

“응….”

그럼 도둑이 아니라 강도잖아?

후덥지근한 한숨을 깊게 뱉은 다음, 나는 이우신을 일으켰다.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기진맥진한 몸이 아주 잠깐 비틀거렸다. 빈혈인가 싶어서 계속 잡고 서 있는데, 이우신이 천천히 내 손을 떨쳐냈다.

“경찰에 신고하러 가자.”

내가 말했고,

“안 돼.”

이우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 아버지야, 돈 훔쳐 간 게….”

“…….”

어렵게 꺼내 온 말인 만큼 나 역시도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확히는, 비속어를 섞지 않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뺏긴 돈이, 얼만데?”

화를 꽉꽉 눌러 삼키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작정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게, 이보다 더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꾹 다물 때마다 내가 씹어 댄 아랫입술이 아주 야해 보인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얼마냐고, 응? 네 아버지가 뺏어 간 돈. 한두 푼이 아니니까 네가 이러고 운 거 아니야?”

“그… 파, 팔백만 원….”

“뭐?”

오늘이 무슨 날이긴 한 모양이었다. 아침에는 답답했고, 점심때는 화가 났고, 오후에는 머릿속이 복잡했고 좀 전까진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좋았는데, 이젠 황당했다. 이렇게까지 다이내믹한 감정을 몰아서 느껴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팔백이라고.”

“응….”

“하….”

팔백이라니. 팔백만 원이라니. 도둑맞았다길래 어디 카페에서 노트북이라도 잃어버렸나 생각했었다. 범인이 아버지라길래 그럼 뭐, 저금통이라도 뺏어 간 건가 했는데, 팔십도 아니고 팔백이랜다. 이백만 보태면 천만 원인 돈이었다. 생각보다 더 큰 돈이었다.

값을 알고 나니 이우신이 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렇잖아도 이혼 가정이라서 부모가 하나밖에 없을 텐데, 그나마 있는 게 아버지인 모양인데… 그런데 그 아버지가 ‘돈을 훔쳐서 가 버렸다’.

들은 말은 적었지만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은 뻔했다. 최악의 경우는 그 아버지가 이우신과 진작부터 같이 살지 않았다는 거였고, 차악의 경우는 앞으로는 같이 살지 않겠다고 이우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의미였다.

아니 씨발 그렇다고 쳐도, 자식을 버릴 적에는 돈을 주고 가야지 뺏어 가는 게 인간이 할 짓인가?

그리고 이우신은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팔백만 원을 통째로 도둑맞은 거지? 애를 때리고 훔쳐 갔다면 그 돈이 지폐였다는 거 아냐? 학교에서 제일로 똑똑한 올 백 공신이, 그 큰 돈을 왜 은행에 넣어 두질 않은 거야?

내가 생각을 늘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들을, 당사자인 이우신이 안 해 봤을 리 없었다.

“가자.”

“…어?”

그래서 나는 범생이 이우신이라면 세우지 못 했을 계획을 말했다.

“돈 찾으러 가자고. 너네 아버지, 지금 어디 있어? 당장 가서 도로 뺏어 오자.”

그러자 이우신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내가 참 싫었다. 이런 순간에 이우신을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하고 또 그래서 꼴리는 내가 싫었다.

“같이… 같이 가 줄 거야?”

젖은 속눈썹이 뭉쳐서 평소보다 짙어 보이고, 처량한 눈동자가 나를 구세주 보듯 올려다보는데, 속절없이 그게 좋다니.

“그래. 같이 가 줄게.”

그러자 이우신의 낯에 빛이 들었다. 곧 죽을 것처럼 위태롭게 울던 얼굴에서 슬픔이 가시는 듯했다. 그 자리를 아주 작은 희망이 채웠다.

고개 숙인 채 이우신은 휴대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메시지함과 사진 갤러리, 전화 기록들을 뒤적거리며 엄지를 바삐 움직였다. 소매 밑으로 비치는 손목에도 빨갛게 맞은 자국이 나 있었다.

“…….”

속으로 화를 삭이고 또 삭였다. 참을 인을 천 번쯤 되뇌다 보니 시커멓던 시야가 차츰 넓어졌다. 배수구 옆에 떨어지고 구겨진 선물 상자가 그제야 보였다. 제법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주워, 허벅지에 대고는 흙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리본을 쭉 당겨 풀어 버렸다.

이우신이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이거 내 거라며.”

픽 웃으면서 뚜껑을 열자 내용물은 짧은 캡이 달린 모자였다. 중앙에는 북극곰 마크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고, 색깔은 내가 좋아하는 검정이었다. 모자를 꺼내어 내 머리에 눌러쓰자 이우신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든 채 시선을 마주치자, 멍하니 나를 보던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옛날에 저장해 둔 주소가 있긴 해. 그런데 아버지가 여기로… 갔을지는 모르겠어.”

이우신의 목소리는 무뚝뚝했고 표정은 덤덤했지만, 나는 딱 그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산 가져다줄 엄마도 없던 놈인데 제 아버지 사는 곳도 옛날에나 알았다면은, …그게 고아랑 다를 게 뭐지?

아,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고아한테는 최소한 자식새끼 돈 뺏으러 올 부모가 없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나는 이우신이 내밀어 보이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보내 온 문자 안의 주소지를 확인하는데, 처음 다섯 글자가 ‘부산광역시’였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곧장 내 폰을 열고, 기차 어플을 켰다. 마침 40분 뒤 출발하는 부산행 티켓이 있길래 그대로 두 자리를 예약했다. 성큼성큼 큰길로 걸어가 택시를 잡자, 이우신은 다소 허둥지둥하며 나를 따라왔다.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울역으로 향하는 내내 이우신은 말이 없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조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 애의 모든 게 평소답지 않았다. 차라리 내 뺨을 치고 왜 키스를 한 거냐고 따져 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우신은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미터기를 쳐다보더니,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중에 갚아.”

돈을 찾아 뒤적대는 것 같기에 내가 말했다. 을러 놓듯 뱉은 말은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이대로 택시를 타고 부산까지 가야 한다고 해도 이우신에게 그 돈을 받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이우신은 조금 안심한 듯 보였다. ‘응’,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꾸하더니,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생각보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우리는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야 했다. 빨리, 빨리. 외치는 나를 쫓아 이우신은 생각보다 잘 뛰었다. 플랫폼에 내려가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출발 직전의 KTX에 올랐다.

특실 칸까지 앞장서 들어가서는, 창가 자리에 이우신을 앉혔다. 좌석에 풀썩 몸을 앉히더니 이우신은 지친 얼굴로 숨을 헥헥거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긴팔 후드 탓인가, 목덜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돈만…, 찾으면, 하아….”

“숨 좀 고르고 말해.”

“…꼭, 갚을게…, 티켓값.”

“그래.”

나는 즉답했다. 그래야 이우신이 조금이라도 편해 하는 것 같아서였다.

기차 어플로 살펴볼 적에, 금요일 밤에 부산으로 출발하는 열차에는 남은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붙어 있는 자리라고는 특실에 둘뿐이길래, 이우신이랑 따로 앉기 싫어서 특실로 예약한 게 나였다.

애초에 당장 부산으로 가자는 계획부터 내 것이었다. 택시를 잡던 순간부터 모든 걸 나 좋을 대로 해치웠다. 그러니 이우신은 내게 무엇도 갚을 필요가 없었다.

창문 밖을 살피는 듯하다가 이우신이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20분이 지난 뒤에야 이뤄 낸 쾌거였다.

다시 10분쯤 더 지났을 때는 갑자기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다른 승객들을 배려한 듯 작게 속삭이는,

“고마워.”

세 글자에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그리고 20분이 더 지났을 때, 이우신이 잠들었다.

지친 얼굴을 푹 숙이더니 움직이지 않는 이우신을, 나는 조용히 살펴보았다. 눈썹까지 가려지도록 깊이 눌러쓴 모자부터 살살 벗겼다. 땀에 젖어 말라붙은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떼어 주고, 불빛 아래에 비치는 눈두덩이와 코와 입과 턱과 뺨을 관찰했다.

그냥 한두 대 맞은 게 아니었다. 단정하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씨…발 왜, 아버지라는 인간이 지 새끼 얼굴을 패고 지랄이야. 진짜 좆같은 새끼. 부산에 있기만 해 봐라…. 아니지, 제발 부산에 있어 줘라. 호로 새끼. 애비고 나발이고 너는 내 손에 뒤졌다.

선수 생활에 지장이 간다 해도 상관없었다. 소년원에 가도 괜찮으니까 이우신이 맞은 만큼만, 아니 딱 그 두 배만 패 주고 싶었다.

부산역에 도착하기까지 세 시간 사십 분이 걸렸다. 세 시간 사십 분 동안, 나는 이우신의 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잘 자는가 싶다가도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이우신은 작게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그 애의 마른 무릎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꽉 잡지 않고, 그저 손을 올려놓듯이 살짝.

“…….”

그렇게만 해 주어도 이우신은 떨지 않았다. 좌석 깊숙이 뒤통수를 기대고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새근새근 곤한 잠을 잤다.

부산역에 도착하자 밤 11시였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자를 눌러쓰는 이우신과 나는 함께 플랫폼에 내렸다. 여행 온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이리저리 흩어지는데, 우리들은 잠시 동안 멈추어 서 있었다.

긴팔 후드 소매를 주먹 안으로 움켜쥐면서, 이우신이 중얼거렸다.

“우리 진짜 부산 온 거네.”

“…어.”

덤덤한 척 나는 걸음을 움직였다. 이우신은 나를 숙달된 가이드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쭐레쭐레 내가 걷는 대로 따라오면서, 다섯 발짝 이상 멀어지지 않으려 했다.

뒤를 따라오는 이우신을 몇 번씩 힐끔힐끔 돌아보다가,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이우신의 후드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주먹을 소매 안으로 쑥 넣어 숨겼다. 누가 보았더라면 손이 아니라 놀란 거북인 줄 알았을 거였다.

“…잡고 걸을게.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응….”

이우신의 손 대신 옷소매를 꽉 잡고 걸었다. 내게도 부산역이 낯설다는 건 절대 비밀이었다.

솔직히 말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내가 부산에… 오다니. 누구한테도 말 안 하고, 아무런 허락도 안 받고….’

지역이 바뀌었을 뿐 밤하늘의 빛이며 오가는 사람들의 생김새, 넓은 도로를 지나는 차들과 건물의 행렬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두 발은 달에 도착한 우주인처럼 가벼웠다.

난생처음 해 보는 일탈에, 이우신이 함께였다.

심야 택시 뒷좌석에서는 인위적인 민트 향기가 풍겼다. 독한 방향제 냄새 탓에 코끝이 살짝 매웠다.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셔츠에 묻은 땀을 식히는 바람에, 너무 추운 것도 같았다.

조수석 등을 쳐다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해 봐도 답은 없었다. 무작정 시작한 여행이었다. 솔직히 흥분했고 다분히 충동적으로 꿴 첫 단추였다. 두 번째 단추를 어떻게 채워야 좋을지 그림이 그려질 리 없었다.

혀끝으로 입천장만 괜스레 두들기는데, 문득 손등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옆자리에 앉은 이우신이 내 손등을 만지고 있었다. 아니지. ‘건드린다’는 말이 더 걸맞게, 검지 끝으로 아주 살살 두들겼다.

‘왜?’

입모양으로 물으며 살폈더니 이우신이 까만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창밖을 좀 보라는 신호 같았다. 그렇잖아도 새하얀 얼굴에 걱정 어린 표정이 더해지자 거의 창백해 보였다.

이우신을 따라 살펴본 창문 밖 풍경은 굉장히 음산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도시 중심이었던 것 같은데, 대뜸 산골짜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로등도 별로 없었고 휙휙 지나는 나무에서는 음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이내 택시는 조그맣고 낡아 보이는 터널로 진입했다.

나는 눈썹에 힘을 주었다.

“저기요, 기사님. 맞게 가고 계시는 겁니까?”

큰소리로 내가 물었고,

“야아.”

당황한 이우신이 내 팔뚝을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상체를 숙였다. 시트를 덮은 뒷목 쿠션보다 앞으로 고개를 뻗고 두리번두리번, 터널 안 풍경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가 허허 웃었다.

“부산은 처음 왔나 보네.”

특유의 사투리 억양으로 아저씨가 말했다.

“네. 근데 이 길 맞아요? 왜 갑자기 산으로 갑니까? 지금 이상한 데로 들어가는 거 같은데?”

“이 길 맞다니까. 다아 지름길이 있지요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듯 흥얼거리며 말한다. 그 바람에 미심쩍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러나 걱정은 거기까지였다.

‘…여차하면 이 아저씨 하나 정도는 내가 때려눕힐 수 있겠지.’

조수석에 부착된 면허증을 힐끔 살핀 다음, 나는 다시 뒷좌석에 등을 붙였다. 그런 날 보는 이우신의 눈길이 어째선지 매서웠다. 눈으로도 한숨을 쉴 수 있다면 ‘하아아아’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수상쩍은 기사 아저씨의 말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울퉁불퉁하고 어두운 길을 아무렇게나 가로질렀더니 정말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심지어 도착 시간이 예상했던 것 보다 20분이나 더 빨랐다.

‘잘하면 이우신네 아빠보다 빨리 왔겠는데…?’

돈을 찾을 생각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택시에서 내려 살펴본 동네의 첫인상은 ‘전봇대 줄이 많다’는 거였다. 그게 첫인상일 정도로, 달리 뭐 별거 없는 원룸 빌라촌이었다. 서울과 다른 점이라고는 오르막길이 많다는 것 정도였다. 쓰레기봉투가 얼기설기 묶인 채 갓길에 마구잡이로 내놓아져 있었고, 몇몇 건물은 폐건물인지 불이 다 꺼져 있고 창문도 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우신을 향해 오른손을 쓱 뻗었다. 그랬더니 이우신의 손이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

“…….”

맞잡은 손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나는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그러고는 묵묵히 골목길을 걸었다. 차로 진입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길목을, 이우신이 쥔 휴대폰 속 길 찾기 어플이 안내했다.

그렇게 10여 분쯤 걸었을까, 이우신이 갑자기 잡은 손을 당겼다.

“어…, 반대로 왔나 봐. 갑자기 나침반 표시가 반대로 도네….”

고개 한 번 끄덕이고는,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미안. 한 블록 지나친 거 같아.”

5분쯤 지났을 때 이우신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음’ 하고는 다시 뒤돌아, 왔던 블록을 걸어 올라갔다.

“아, 잠시만, 여기가 아니라, 사잇길로 들어가야 했다는데….”

“너 길치냐?”

“…….”

못 참고 묻자마자 입술이 꾹 닫힌다. 한 마디 더 하고픈 걸 꿀꺽 삼키고는, 나는 이우신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뺏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잡은 손을 빼내려 했다. 쑥, 빠져나가려는 하얀 손을 나는 더 세게 고쳐 잡았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우신의 손을 꽉 잡은 채, 반대 손으로 툭, 툭 휴대폰 화면을 두들겼다. 내가 길 찾기 어플을 다시 켜는 동안 이우신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러네. 대각선 길목으로 들어가라는데… 여기 다른 길이 어딨다는 거지?”

한 발, 두 발,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화살표가 우리를 따라 한 칸, 두 칸 천천히 움직였다.

대각선으로 걸어가라는 알림이 뜨자마자 발을 멈추자, 그제야 숨어 있던 길이 보였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깔끔한 대각선 길목은 아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드러난, ‘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좁은 틈새였다.

내가 앞장서서 몸을 비집고 들어서자 이우신도 게걸음을 하며 따라 들어왔다.

…어째 요즘은, 하루에 한 번씩 후회하는 거 같다. ‘조심이한테 진작 ‘권태오 꺼’ 이름표를 붙여 둘걸’이라든가, ‘당황했다고 표정 굳히고 도망가지 말걸’이라든가, ‘유당 불내증 무시하고 요구르트 받아먹지 말걸’이라든가… ‘좁은 길로 들어오지 말고 빙 돌아 걸을걸’이라든가….

‘와…, 여기서 끼면 너무 쪽팔릴 거 같은데….’

이 동네는 무슨 난쟁이 동네인가? 가뜩이나 좁은 길의 너비가 더욱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숨을 내쉬어 흉통을 줄이고, 조심스럽게 옆으로 움직였다. 차마 이우신에게 ‘나 낄 거 같으니까 다시 돌아가자’고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괜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억지로 길목을 빠져나왔을 때는, 셔츠 가슴팍을 팍팍 털어내야 했다.

등짝과 가슴, 엉덩이에 빌어먹을 시멘트 가루가 잔뜩 묻었다.

“낄 뻔했다, 그지.”

퍽퍽 몸을 털면서 옆을 보는데, 말끔한 상태의 이우신이 보였다. 나를 따라 후드 상판을 툭툭 털어 내도 그뿐이었다. 호리호리한 이우신의 몸에는 시멘트 가루는커녕 흙알갱이 하나도 묻어 있질 않았다.

‘흠….’ 애써 헛기침을 하고는 나는 다시 앞장섰다.

이제는 하다 하다, 옷을 터느라 이우신의 손을 놓은 게 후회됐다. 잡았던 손을 한 번 놨더니, 도무지 어떻게 다시 잡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힐끔 돌아 이우신을 살피자 나 자신이 더 알량한 놈 같았다. 선비 같은 이우신은 벌써 두 손을 후드 주머니 안에 넣은 채였다.

허튼 생각을 질질 끌며 마침내 도착한 곳은 3층 빌라였다. 1층은 통째로 사무실인지 창고인지, 따로 달린 간판은 없고 유리문 너머로 ‘전자 담배’라 적힌 갈색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우신이 가진 주소지는 건물명까지만 쓰였을 뿐이라서, 우리는 도둑놈의 새끼가 정확히 몇 호에 사는지 몰랐다. 무턱대고 하나씩 벨을 눌러 봐야 하나 생각하는데, 이우신이 건물 안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그러더니 우편함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201호, 202호… 뭘 찾는 건가 하고 지켜보다가 나는 한 발 늦게 깨달았다. 우편물에 쓰인 이름을 보면 되는 거였구나.

“…찾았어. 반지하층.”

전기 요금 청구서를 들어 보이며 이우신이 안색을 밝혔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우리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일단 벨부터 누르고 보려는 나를, 하얀 손이 붙잡았다.

“태오야, 잠시만.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계획을 먼저 세워야지….”

너무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숨결이 다 느껴졌다. 날숨이면 전부 이산화탄소일 텐데 왜 달콤하고 지랄이지….

“…안에 그 새, 아니 너네 아버지가 있으면, 내가 제압할 테니까 네가 돈을 챙겨.”

“아버지가 없으면?”

“없으면, 일단 집 안 수색부터 시작하자.”

“…그랬는데 돈이 없으면?”

“그럼 범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우신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반듯한 미간을 종이처럼 구긴 채 침음하는 소리가 낮았다. 망설임은 그러나 길지 않았다. 근육 바보가 내놓은 계획이 탐탁지는 않으나 저도 달리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한 뒤, 벨을 한 번 눌렀다. ‘딩동’, ‘딩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간 기다려 본 끝에 문을 퉁퉁 두들겨도 보았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귀를 붙이고 다시금 벨을 눌러 보았지만, 누구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우리가 더 빨리 온 건가…, 아직 그 씹새끼는 안 왔나 보다.

죽치고 앉아 있자니 반지하층 복도는 너무 더웠기에, 이우신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빌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면서 살펴보니 이우신의 얼굴은 거의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얇은 옷을 입은 나도 더운데, 가을 옷을 입은 이우신은 오죽 더울까 싶었다.

“안에 다른 옷은 안 입었어?”

“응.”

저를 걱정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우신이 대충 대답했다. 나는 도무지 이우신이 게으름을 피우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지친 얼굴로 이우신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빌라 근처를 열심히 둘러보더니 반지하 방 창문을 찾아낸 것이었다.

‘태오야’ 부르는 듣기 좋은 소리에 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이우신을 쫓았다. 이우신은 창문 앞, 야트막한 턱 밑으로 발을 내리더니 몸을 웅크리고, 창문을 밀어 보였다.

드르륵, 창이 열렸다.

“어…!”

내가 이우신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자 공기가 두 배로 뜨끈해졌다. 숨결이 닿고 자시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창문 앞의 방범창이 더 중요했다.

외부인을 막는 용도의 방범창은, 달려 있긴 했지만 거의 무쓸모해 보였다. 도대체 언제 설치된 건지 아주 녹슬고 더럽고 낡은 채였다. 심지어는 딱딱한 벌레 시체가 하나도 아니고 서넛 죽어 있었다.

휘휘, 내가 손짓하자 이우신이 멀찍이 몸을 비켰다. 벽에 두 손을 딛고 일어나, 나는 힘껏 방범창을 걷어찼다. 발길질 세 번 만에 창이 삐걱거리며 떨어져나갔다. 이우신은 허둥지둥하며 오가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허리 숙여 두 손으로 창틀을 쥐고는 살짝 당겼다가, 세게 밀어 뽑아냈다. 쑥,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면서 방범창이 통째로 빠졌다. 그와 동시에 이우신이 내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

힐끔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놀란 듯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이깟 일로 앞으로 고꾸라지기라도 할까 봐 나를 잡아 줬다는 게 황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피식 웃었다. 그러자 하얀 손이 얼른 나를 떠났다.

나는 방범창을 쥔 채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보았다. 밖으로 빼내자니 벽돌 틈새가 너무 좁아서 문제였다. 별수 없이, 집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나, 여기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

다음으로는 이우신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채홍고 전교 1등과 유도부 청소년 선수가, 잡도둑 2인조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적어도 전교 1등은 몰랐을 거였다.

창문 앞으로 다가서는 이우신을 보며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웬만하면 뭐든지 내가 앞장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은 너무 크고 두꺼워서, 쥐구멍만 한 창문으로 몸을 넣었다가는 세 번째 후회를 할 게 분명했다. 이번에야말로 119를 부르게 될 것 같았다.

“…조심해.”

별수 없이 나는 이우신을 응원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 와중에 이우신이 조심조심 창문 안으로 두 발을 넣었다. 컴컴한 반지하 집 안으로 날씬한 종아리에 이어 허벅지와 골반까지 들어가는 걸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내 이우신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두운 집 안으로 팔짝 뛰어내린 것이었다.

나는 창문을 향해 얼른 몸을 숙였다.

“이우신. 괜찮아?”

“어…, 콜록! 으, 큼, 크흠…. 응, 괜찮아. 안에 아무도 없는 거 같아.”

기침하면서, 이우신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얼른 빌라 안으로 들어가, 반지하 방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우신이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신발장 안으로 몸을 집어넣자마자 나는 얼어붙었다. 집 안 꼴이 그야말로 쓰레기장이었다. 냄새가 지독하게 역해서, 차라리 복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무슨 놈의 집 안에 초파리가 펄펄 들끓었다. 스릴러 영화를 보면, 꼭 이런 집에 시체가 있던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이우신은 나보다는 덜 놀란 눈치였다. 연신 기침하며 옷소매로 코를 막고, 성큼성큼 스니커즈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반면 나는 얼이 빠졌다.

…어떻게 이우신의 아버지란 사람이, 이렇게 더럽고 추잡할 수가 있지? 차라리 이우신 혼자 알에서 태어났다는 게 더 믿을 법하겠다….

“이우신. 이제 뭘 찾으면 돼? 잃어버린 돈, 어디에 넣어 뒀어?”

“까만 가방…인데, 하얀 마크 그려진… 짝퉁 스포츠 가방이야. 영어로 마이키라고 적혀 있어.”

부끄러운 듯 느릿느릿 대답하면서 이우신은 거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러운 부엌을 둘러본 다음, 곰팡이인지 물때인지 모를 것이 이끼처럼 피어오른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쓰레기처럼 쌓인 옷더미를 발끝으로 걷어 냈다. 운동화를 신은 채 남의 집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미안하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질 않았다. 주인이 자리 비운 집의 꼬락서니는 딱 그 정도로 지저분했다.

‘하, 냄새….’

짜증은 딱 거기까지였다. 쓰레기가 잔뜩 쌓인 방의 중앙에 까만 가방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MIKE라는 하얀 글씨도 새겨져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저게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말로는 수색을 하자고 했던 나였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집 안에 가방이 없길 바랐다. 돈을 들고 우리보다도 먼저 부산에 도착했다면 그 정도로 급하게 찾을 행선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행선지로 돈을 가지고 가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입을 다물고 나는 방문 밖을 내다보았다. 이우신은 정신없이 서랍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얼른 문을 닫고, 나는 가방을 열어 보았다.

“아….”

아니나 다를까 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통장 두 개가 들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지폐라고는 천 원 한 장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진짜 씨발 새끼.’

좁은 폭으로 문을 열고 힐긋 내다보았다. 3단 서랍장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이우신은 종이 더미를 살피고 있었다. 영수증 뭉치와 청구서 내역을 훑는 모습이, 평소의 그 애답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우신이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야 할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는데.

“이우신.”

입을 열고, 큰소리로 부르자 놀란 몸이 파드득 뛰었다. 보던 것을 서랍 안에 집어넣고, 나를 돌아보는 눈길이 삐뚜름했다. 오른쪽 눈두덩이가 부어서였다.

“너는 밖에 좀 나가 있어.”

“어?”

“불안해서 안 되겠어. 누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너는 나가서 망 좀 봐.”

“아, 아냐, 여기 냄새나니까 네가 밖에….”

“내가 나가면 그게 더 눈에 띄지.”

그러자 이우신이 집 안을 둘러보았다. 망설이는 녀석을 향해, ‘얼른’ 하고 나는 일부러 조금 강한 목소리를 냈다. 명령하듯 뱉은 소리에 이우신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응, 알았어.”

터덜터덜, 복도로 나가 계단을 오르는 이우신을 확인한 다음, 나는 현관문을 단단히 닫았다. 그리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무표정하려 노력했지만 속이 다 뒤집혔다.

…텅 빈 가방을 어떻게 보여 줘. 그랬다간 애가 또 울 것 같은데….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부릴 수 있는 여유는 딱 거기까지였다.

후다닥 몸을 움직이며, 나는 뱀 허물처럼 흐물거리는 가방 안에 수건과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팔백 만원이 이 정도 부피일까? …존나 모르겠다. 애초에 만 원 권은 아니었을 테고, 오만 원 권이면… 의외로 부피가 그렇게 크진 않을 것 같았다.

고민을 마치고 지퍼를 찍 잠그자마자,

“태오야….”

철제 현관문이 작게 열렸다. 망을 보던 녀석이 문틈 새로 눈동자만 살그머니 비춰 왔다.

“…다 뒤졌어? 밖에 사람들이… 다니는데….”

나는 검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 대꾸했다.

“어. 다 훔쳤어.”

난생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빈집 털이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훔친 물건은 짝퉁 마이키 가방이 전부였다.

내 어깨에 걸린 마이키 가방을 보자마자 이우신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게나 밝게 설레어 하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전교 1등을 하고 올 백 점의 신화를 세운 당일 보았던 이우신의 표정보다, 지금이 더 밝았다.

그 바람에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빈 가방을 들킬까 봐 긴장이 되어서… 그 이유일 게 틀림없었다.

“정말? 태오야, 정말로 다 찾은 거야?”

까만 두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고 입술 끝은 호를 그렸다.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을 적에 내가 보고파 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희망에 차서 이우신이 밝게 웃는 얼굴.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반지하를 빠르게 벗어나는 내 뒤로 이우신이 저벅저벅 따라왔다.

“돈은 얼마나 있었어? 태오야. 안에 돈이 그대로 있었어?”

“어.”

“봉투…. 봉투째로, 그대로 있는 거야? 정말로?”

“어.”

하필 연기에는 소질이 개를 줄래도 없는 게 문제였다. 누구에게든 거짓말을 하면 꼭 들키는 게 나였다. 그래서 일부러 짧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우신은 그런 내 태도는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빨리 걷는 내 팔뚝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손바닥을 적신 땀의 느낌과 뜨거운 온도를 못 견뎌 나는 터덜터덜 내리막길을 걷던 발을 멈추어야 했다.

조용히 돌아보자,

“다행이다….”

이우신이 웃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이우신은 똑바로 걷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는가 싶더니, 하하 웃는 것도 같았고 후우 한숨 쉬는 것도 같았다.

똑똑한 이우신은 감정을 빨리 정리하는 편이었다. 손바닥으로 볼과 이마를 싹싹 문질러 마른세수를 하고는, 잠시나마 헤실헤실 허물어뜨렸던 표정을 고쳐 보였다.

“이제 이리 줘, 내가 들게.”

한결 차분해진 낯으로 손을 뻗어 오기에,

“아니지.”

나는 어깨를 잽싸게 틀었다.

“지금 바로 은행 가서 입금해야지. 들긴 뭘 들어? 야, 너는… 돈 덩어리를 이렇게 보관한 게 문제야. 애초에… 그러니까, 이번엔… 어? 일단은, 어. 일단 입금하러 가자. 빨리.”

“아, 아…. 그래, 그러자. 우리, 빨리 도망부터… 빨리 가자.”

오늘따라 정신없는 이우신이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얼빠진 채 횡설수설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평소답지 않은 내 말투에 대해 캐묻지 않으니까 말이었다.

이내 이우신은 혼미백산하며 움직였다. 돈 가방이 그대로 있었다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 급한 일일 터였다. 훔쳐 온 돈을 집 안에 그대로 둔 도둑이, 멀리 떠났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제 아버지가 곧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지 이우신은 나보다도 앞장서 뛰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뒷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재빨랐다. 뒤통수는 작았고 팔랑거리는 후드 티의 소매는 늘어난 채였다. 쳐다보며 터덜터덜 걷자니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서글퍼졌다.

절박한 이우신을 따라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숨이 막힐 때까지 달렸다. 눈가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휙휙 번지도록 열심히 달렸다. 등줄기로 땀이 흐를 때까지, 내리막길을 내달린 반동으로 몸이 휘청거릴 때까지, 허벅지 근육이 찌르르 당길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참았던 숨을 헐떡거리며 멈추어 선 곳은 대로에 위치한 은행 앞이었다. 지점 내부는 블라인드가 내려간 데다 컴컴했지만, ATM기가 들어 있는 작은 공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며 이우신은 도통 상체를 바로 세울 줄을 몰랐다. 언제나 정갈하던 얼굴이 왕창 구겨졌고 턱 밑으로는 온통 땀범벅이었다.

범생이 이우신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려 준 끝에, 내가 말했다.

“넌 밖에 있어.”

“허억…, 헉…, 왜. 왜?”

“돈 없어진 거 알면, 너네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부터 하지 않겠어? 그럼 수사한다고 근처 CCTV부터 뒤져 볼 거 아냐. 여기 안에도 카메라 있을 걸. 너는 얼굴 때문에 들킬 거고.”

모자를 눌러쓰고 표정을 감춘 채 열심히 말했다. 혹시라도 속아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아래턱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몇 초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우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내가 입을 열었다.

“가방에 통장도 두 개 들어 있더라. 돈 다 거기 넣으면 되지? 비밀번호 뭐야?”

“…0908이야. 둘 중에… 하늘색 통장에 넣어 줘. 꼭 좀 부탁할게.”

“그래. 너는 저기, 편의점 가서 약이나 사고 있어.”

그러면서 길 건너편에 놓인 24시 편의점을 턱짓했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환한 건물이기도 했다. 당연히 움직일 줄 알았던 이우신은 뜻밖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게로 반 발짝 다가왔다.

“…무슨 약? 태오 너 어디 다쳤어?”

“뭐? 네 얼굴에 바를 약 말이야!”

진짜 정신 빠졌나? 눈이 퉁퉁 부어서는, 저 아픈 줄도 모르고 누가 누굴 걱정해?

그 바람에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이우신은 엉덩이 맞은 강아지처럼 우물쭈물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러더니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응’ 하더니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갔다.

이우신이 청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는 모습을 나는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잽싸게 은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ATM기 앞에 서자마자 뒤진 것은 마이키 가방이 아닌 내 지갑이었다. 나는 지갑을 얼른 벌리고는, 잘 보이지 않는 안쪽 자리에 끼워 놓은 카드를 꺼냈다. 4년 전,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 만들어 준 용돈 카드였다.

사용감이 전혀 없어 거의 새것 같은 카드를 기기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불안감에 왼다리를 달달 떨면서, 이우신의 통장을 꺼내 첫 페이지에 찍힌 계좌 번호를 순서대로 눌렀다.

―입금하실, 금액을, 입력하세요.

기기가 시키는 대로, 나는 숫자 패드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8,

0…

0, 0…

0, 0, 0…

그러고는 ‘확인’을 꾹 눌렀다.

“…….”

…중학교 시절부터, 대회에서 탄 상금. 그것들을 전부 모아 둔 돈이었다. 엄마를 포함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계좌 안에,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 왔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모아서 천만 원을 채우면, 그땐 집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독립 자금으로 쓰고자 했었다.

“후우….”

나에게는 나중을 위한 부적 같은 돈이었다.

하지만 이우신에게는 오늘 당장 필요한 돈이다.

마지막으로 입금자명을 은행 이름으로 고쳤다. 거래 내역을 살펴본 다음, 최종적으로 ‘확인’을 누르자 팔백만 원이 내 통장에서 쑥 빠져나갔다. 거래는 그렇게 끝났다. 섭섭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쉬웠다.

남의 걸 뺏는 것만 떨릴 줄 알았지, 내 걸 주는 게 이렇게 떨릴 일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나는 유리문 밖을 둘러보았다. 오가는 사람은 아예 없었고 이우신은 저 멀리, 편의점 안을 걷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이 이우신이었다. 전교 1등을 속이기 위해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기기 안에 하늘색 통장을 넣고, 잔액을 확인했다.

[8백 74만 8천 50원]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자 미지근한 한숨이 기다랗게 새어 나왔다. 평생 살면서 이렇게까지 떨리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제 이우신이 안 울겠지….’

통장을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고, 가방 속에 든 수건과 더러운 옷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거리로 나섰다.

가벼워진 가방만큼이나 내 심장도 걸음을 따라 흔들거렸다.

편의점 문을 당겨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쳤다. 얼굴의 열기를 식히며 성큼성큼 들어서는 나를, 알바생이 힐긋 쳐다보더니 이내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있어야 할 이우신이 안 보여서였다.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는 알바생을 다시 한번 살핀 다음, 급하게 두리번거렸지만 반듯하고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몇 발짝을 뛰다시피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그제야 가판대 사이에 쭈그려 앉은 남자애가 보였다.

동그란 머리 위로 후드 모자를 눌러쓰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뒷모습이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천천히 다가가, 나는 이우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딱딱한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우신. 왜 그래? 괜찮아?”

“아. …응. 괜찮아….”

나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이우신은 다시금 제 손 안의 휴대폰을 살폈다. 손가락 살이 노래질 정도로 꽉 쥔 휴대폰 화면 안에는 메시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Web발신]

2020/06/20 지우은행

입금 8,000,000 원

잔액 8,748,050 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입금 내역 문자를 갓 확인하고는 주저앉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서울에서부터 내 손에 잡혀서 이리저리 끌려다닌 이우신이었다. 나까지 조금 피곤할 정도인데 이우신은 다리 힘이 다 빠질 만도 했다. 돈 때문에 많이 걱정했고 엉엉 울기까지 했었으니까.

천천히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 주어도 이우신은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두 뺨 위의 불그스름한 자국이 얼룩처럼 보여서, 그것까지 문질러 닦아 주려다 나는 손을 거뒀다.

대신에 이우신의 손에 들린 연고를 빼앗아 들었다. 약품 코너로 걸어 들어가 뿌리는 파스와 근육통에 붙이는 밴드까지 집어 들고 계산대에 올렸다.

“봉투 드릴까요?”

알바생이 묻자,

“아뇨. 들고 갈게요.”

이우신이 얼른 다가와 바코드를 찍은 물건들을 제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캥거루처럼 배를 부풀린 이우신 대신, 나는 결제를 마쳤다. 그 바람에 이우신은 조금 시무룩해진 듯 보였다.

기운 없는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꼴을 보기가 나는 아주 힘들었다. 뭐라도 좀 먹이고 싶어 함께 편의점을 나서긴 했지만, 근방에는 마땅히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나는 고기만두에 밀면, 수육이 잔뜩 들어간 돼지 국밥, 조개구이와 관자, 회와 매운탕을 먹는 이우신이 보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길어지는 생각은 금세 접어야 했다. 우린 놀러 나온 게 아니었고, 지금의 이우신은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결국 두 블록 건너에 있는 버거 가게로 향했다. 새벽에도 불이 환한 프랜차이즈 지점 안에는 대단한 부산 음식 대신에,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키오스크 기기 네 대가 서 있었다.

“나한테 수고비는 줄 거지? 햄버거는 네가 사 줘.”

애써 뻔뻔하게 소리 내어 말하자,

“…응. 알겠어.”

이우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키오스크 화면 앞에 서서, 나는 햄버거 세트 두 개, 밀크셰이크 하나, 너겟 한 박스, 후라이 닭다리 네 개, 에그타르트 다섯 개, 그리고 닭가슴살 샐러드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는 이우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오 너… 저녁도 안 먹고… 온 거였어?”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작았다. 웃음이 나려는 걸 참으면서, 나는 화면 속 샐러드 사진을 가리켰다.

“이거만 내 거고. 나머지는 네가 다 먹어야 돼. 너 존나 많이 먹잖아.”

“…그러지 말고 네 것도 많이 담아. 내가 사는 건데….”

“체중 조절 중이라서.”

“…플백 안 되려고?”

“오. 그런 말도 다 알아?”

그러자 이우신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위아래로 살피는가 싶더니, 작은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그러더니 키오스크 앞으로 다가와 장바구니 속 밀크셰이크를 삭제했다. 돈 아깝다고 안 먹으려는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데, 이우신은 딸기셰이크를 새로 담았다.

딸기맛이 더 좋았구나. 아…, 진짜 왜 이렇게 귀엽지?

이우신이 제 카드를 찾아 후드 주머니와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동안, 나는 슬쩍 ‘포장’ 버튼을 눌렀다. 이우신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겨우 찾아낸 카드를 리더기에 넣었다가 뺐다가 긁어 보았다가 하며 분주했다.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가장 시원한 자리에 앉았다.

“연고 줘 봐.”

손을 툭 내밀자, 이우신이 캥거루 주머니 안에서 편의점에서 사 온 연고를 꺼냈다. 나는 매장용 물티슈에 검지 끝을 박박 문질러 닦고 연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이우신이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약 발라 달라고 가만히 얼굴을 대는 걸 보면, 저도 제 미모가 자산인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살살 연고를 얹어 주려는데, 내 손이 다가가자 이우신의 눈가가 크게 움찔거렸다.

“그냥 눈 감고 있어.”

그러자 얌전히 눈이 감긴다. 모범생이라 그런가, 말도 참 잘 듣네. 덕분에 이우신의 까만 속눈썹과 좁은 콧방울, 흐릿한 인중 모양까지 빤히 볼 수 있었다. 매일 지켜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자세히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자세히 보니 참 이상했다. 어디로 보나 분명 남자 얼굴이었다. 티끌 없이 하얗고 반듯하기는 해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백 퍼센트 좆 달린 남자 얼굴인데, 객관적으로 되게 잘생겼는데… 근데 왜 예쁘지?

‘공신’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데다 전교 1등을 안 놓치는 이우신이었다. 장세라는 대놓고 이우신을 따라다녔고, 장세라와의 의리를 지키느라 좋은 티를 못 내는 여자애들도 많다고 들었다. 그런 이우신을 질투하는 남자애들도 딱 그만큼 많았다.

남학생은 뒷담화를 안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람은 누구나 남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그 바람에 이우신도 여러 입에 오르내렸다. 기생오라비 같다고 욕하는 놈들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근데 그런 놈들조차, 이우신 얼굴을 두고 여자 같다거나 예쁘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이건… 내 문제인가? 나만 얘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가?

‘예쁘다.’

그리고 이우신과 눈이 마주쳤다.

“…….”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빼냈다. 눈꺼풀 위를 만지던 검지도 떼어 내고, 뺨을 잡은 손바닥까지 완전히 거뒀다.

“…다 발랐어.”

“아, 어. 고마워….”

이우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게서 상체를 틀어 돌리고는, 빈 테이블에 눈길을 두고 침묵했다.

편의점에 들른 이후로 이우신의 표정이며 반응이 좀 이상했다. 멍하니 쪼그려 앉아 있을 적엔 잃어버렸던 돈을 찾은 기쁨에 긴장이 풀려 그러나 보다 생각했었는데, 어째 아직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혹시 내 돈으로 채워 준 걸 알아챈 걸까… 잠시 의심을 해 보았다. 아냐, 괜찮겠지. 애초에 은행 이름으로 입금했고… 아, 씨…. 일부러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 어차피 현금 입금이면 뭐라고 보냈어도 되는 거였네?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 그게 내 이름이든 은행 이름이든 상관없는 거지….

묵묵히 생각을 해 보아도 그 외에는, 팔백이 누구 돈인지 이우신이 당장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또, 생각해 보면 내가 이찬희를 들먹이며 이혼 운운했을 적에 ‘아, 씨발’ 하고는 화를 냈던 이우신이었다. 내 돈을 보낸 걸 알고도 가만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평생 숨길 수 없으리란 건 안다. 언젠가는 이우신이 제 아버지를 만나긴 만날 거고, 돈의 출처에 대해서도 추측하게 될 거였다. 그때는 불처럼 화를 내겠지. 나한테 뭐라고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그건 나중에 감당하면 될 일이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니까. 오늘은 덜 힘드니까. 내 앞에서 그만 울게 할 수만 있으면 그걸로도….

“아, 미안.”

생각에 잠긴 내게 이우신이 대뜸 말했다. 멍한 얼굴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끔벅거리는 눈짓이 느릿했다.

“피곤해서 잠깐… 졸았네. 좀 허탈하기도 하고….”

“아, 그래?”

“응.”

연고 발린 상처를 피해 눈을 비비는 이우신을 보며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방귀 뀐 놈이 찔린다더니, 혼자 지레 뜨끔해서는 걱정한 게 민망했다.

너겟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주말이잖아.”

“어? 어….”

“…근처에서 자고 가자.”

마침 타이밍도 내 편이었다. 이우신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햄버거가 나온 것이었다.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나는 카운터에 놓인 큼직한 종이 백 두 개를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앞장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새벽 1시, 밤공기는 좀 전처럼 덥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해진 듯했다. 바람을 느끼며 걷는 내 뒤로 이우신이 따라붙었다.

자고 가자는 말은 문자 그대로 ‘잔다’ 그리고 ‘간다’일 뿐이다. 나한테는 어? 못된, 그런 흑심 같은 건 없다. 그냥, 이우신이 너무 지쳐 보여서. 이대로 기차나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긴 힘들어 보여서 그런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박업소가 다닥다닥 붙은, 조금 음흉… 아니 음산해 보이는 길목이 나왔다. 모텔들은 간판부터가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패스하고, 호텔이라 이름 붙은 건물로 들어갔다.

로비 카운터에 서서 벨을 누르자, 안경을 끼고 나온 직원이 민증을 달라고 말해 왔다. 발급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증을 건네주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생년을 보고는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여행 온 고딩이라고도 설명했지만,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숙박이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미간을 찡그린 채 나는 이우신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가장 가까운 다른 호텔로 들어가 마찬가지로 2인실을 요구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내 민증과 이우신을 번갈아 살피더니, 부모님께 전화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눈썹을 구기면서 다시 이우신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왔다. 두 번의 거절을 당하고 나니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머쓱해져 있었다.

“햄버거 다 식겠네, 진짜…. 하… 오늘 뭐지? 원정 훈련 나왔을 땐 애들이랑 방 잘만 잡았는데.”

괜히 투덜거리며 앞서 걷는데, 이우신이 조용히 말했다.

“아마 내 얼굴 때문에 그런 걸 거야.”

“네 얼굴이 왜. 뭐가 어때서.”

“…가출 청소년 같은가 보지.”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누구에게 맞은 게 분명한 얼굴, 계절에 맞지 않게 후줄근한 옷, 어깨에는 빈 가방을 멘 이우신이 초라해 보였다. …씨발.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원래는, 존나 도도하고 똑똑한 앤데….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우신이 금방이라도 ‘됐어’ 그러고는 다 포기해 버릴 것 같았다. 내 손을 뿌리칠 것 같았고,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말하고 도망칠 것만 같았다.

그것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곧 죽으래도 죽고 말지, 이 상태로 미적미적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장 샤워가 절실했고, 배도 고팠고, 다리도 저렸다. 이우신의 컨디션은 나보다 더 나쁠 거였다. 기차에서도 끙끙거리면서 곯아떨어진 놈이었다.

“그래도 한 번만. 한 군데만 더 들르자.”

힘주어 말하며 나는 이우신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이우신이 머뭇거리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 없는 이우신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하며 나는 새로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부탁이라도 해 보지 뭐. 그런 기분으로 씩씩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요. 오늘 묵고 내일 아침에 체크아웃할 거예요.”

카운터 앞에 서 말하자, 역시나 직원이 민증을 요구해 왔다. 앞선 두 호텔과 달리 이번 호텔은 카운터 직원이 여자였고, 목소리가 친절했다. 나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 요구받은 민증과 함께 학생증까지 내놓았다.

“저기요. 저희 두 번이나 까이고 여기 온 거거든요. 아무 방이든 상관없어요. 동생이 많이 지쳐서요.”

‘동생’이라는 내 거짓말에, 이우신은 모자를 눌러쓰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나는 이우신의 손을 꽉 잡고 내 옆으로 당겼다. 왠지 이번에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카운터 직원이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꺼내 든 거였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나는 볼펜을 집어 들었다. 빈칸마다 이름, 전화번호, 주소지를 채워 넣었다. 결제하고 키를 받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802호에 도착해 방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 너머로 창밖 아경이 보였다. 벽을 더듬어 홀더에 카드 키를 끼워 넣자, 방 안 전등이 환하게 켜졌다. 그렇게 멋들어지게 큰 방은 못 됐지만, 조명이 은은했고 더블베드 매트리스는 깨끗했다.

이 정도면 합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카펫 깔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종이 백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이우신은 다소 미적대며 신발장에 서 있었다.

“먼저 씻어.”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양말에서 냄새가 날 거 같아서, 이우신이 보기 전에 빨리 벗어서 어디 버리든지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우신은 대답 없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투명한 유리창으로 된 욕실 벽이 보였다.

‘돌겠네, 진짜….’

어른들은 프라이버시도 수치심도 없나? 안에서 똥 싸면 아주 똥구멍까지 다 보이겠네.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꾹 참으며 나는 표정을 고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흠’ 하고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야. 남자들끼리 무슨…. 내외하지 말고 얼른 씻어, 안 훔쳐볼 거니까.”

“아, 어. …그냥 좀. 이상해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이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니커즈를 가지런히 벗고는 방 안으로 들어오며 팔을 엑스자로 내리는 걸 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이내 헐렁한 후드 티가 걷히며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아니, 야!”

나는 이우신을 향해 달려갔다. 허둥지둥하며, 팔이 꼬인 이우신을 그대로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서 벗어!”

“…….”

이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눈빛에 담긴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방금 남자들끼리 어쩌고 웅앵거린 게 누구지?’

네, 저요. 권태오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나는 테라스 앞으로 향했다. 부산이면 어디서든지 바다가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공사 중이라 덜 지어진 건물의 단면과, 불이 켜진 호텔 간판들이 보일 뿐이었다. 운치라고는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바깥만 쳐다봤다. 도무지 뒤로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아주 잠깐이지만 배꼽이랑… 좀 빨간 자국 같은 거도 옆구리에 있었고, 갈비뼈 윤곽이랑, 그… 분홍색.

“…….”

등 뒤에서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더웠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도, 너무 더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그쳤다.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급하게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울렸다. 테라스 창을 통해 방 안의 모습이 힐끔 비쳤다. 거의 기다시피 엉거주춤한 자세의 흰 인영이 목욕 가운을 꺼내 입는 게 보였다.

“…이제 뒤돌아도 돼?”

“어, 어어…, 잠시만. …응. 이제 됐어.”

허락을 받아 몸을 돌리자, 가운을 뚤뚤 말아 입은 이우신이 보였다. 앞을 어찌나 꼼꼼하게 여미셨는지 젖꼭지는커녕 쇄골조차 안 보였다. 하여간에 선비님이라니까….

옆으로 비켜서는 이우신을 확인한 다음, 나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살갗에 들러붙는 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고, 허리 벨트를 풀며 성큼성큼 욕실로 향하다가 아차 싶었다.

“…….”

조용히 돌아보자 내게서 등을 돌린 이우신이 보였다. 테라스 밖의 풍경을 보며 돌아선 채였다. 볼 것 없는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뒤통수가 동그랬다. 귀가 붉었다. …아주 더운 사람처럼.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유리문을 닫고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차가운 물로 샤워했다. 몸을 대충 닦고 가운을 걸치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는 안 부끄러워야 정상이었다. 고추 덜렁대는 놈들이랑 줄지어 서서 샤워실을 이용하는 게 내게는 일상이었다. 몸에 콤플렉스가 있는 거도 아니고, 자랑을 씨발 했으면 했지 절대로 아무것도 안 부끄러운데, 근데 이우신이… 저러고 돌아서서 있으니까….

‘미치겠네….’

허둥지둥 욕실을 나서려는데 문득 세면대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영 얼간이 같았다. 젖은 머리칼은 삐죽거리는 데다 눈은 멍하니 풀렸고 표정은 그야말로 바보 같았다.

찬물로 얼굴을 재차 헹궜다. 이리저리 삐친 짧은 머리도 꾹꾹 눌러 정돈했다.

정신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서자, 어느새 커피 테이블에 앉은 이우신이 보였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감자튀김과 치킨 너겟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햄버거 두 개를 나란히 올려다 놓고, 여분 종이컵에 케첩까지 짜 놓은 채 이우신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샐러드 옆에 놓인 플라스틱 포크와 오리엔탈 소스 통까지 모든 것이 가지런했다.

“야.”

젖은 수건을 구석에 던지면서, 나는 평화로운 테이블에 폭탄을 던졌다.

“너랑 나 어젯밤에, 키스한 거다.”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고 이우신의 얼굴에는 금이 갔다. …제기랄.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닌데… 아니, 아니지. 이렇게… 계속 말하고 싶기는 했다. 그러니까 내가 실수한 게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언제, 여기가 아니면 도대체 어디에서 기회를 찾겠는가.

심장이 쿵쿵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이우신 너 나 좋아한다며. 내가 대답하면, 나랑 사귀는 거지?”

“아니.”

그리고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딸기셰이크를 집어 드는 이우신의 얼굴은 언제 놀랐냐는 듯 무심해진 상태였다.

정갈하고 말끔한 목소리로 이우신이 답했다.

“대답하지 마. 안 궁금하니까.”

“…뭐?”

그 바람에 나는 아주 민망해졌다. 많이 놀라웠고, 조금은 화도 났다. 잘 참고 있던 사람한테 엉엉 울면서 고백한 게 누구인데… 좋아한다고, ‘태오야’… 그럴 때는 언제고 이우신은 냉동 인간 공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샤워하는 사이에 누가 이우신을 다른 로봇으로 바꿔치기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왜…? 왜 안 궁금한데?”

성큼성큼 다가가며 묻자,

“어차피 너랑은 안 사귈 거니까.”

이우신이 어서 먹으라는 듯 샐러드를 손가락질했다. 그 태도가 너무 어른스럽고 자연스러워서, 나는 얼결에 맞은편 자리 의자에 몸을 앉혔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나니 더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말이라는 걸 계획하고 뱉은 경험이 적은 나였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빨개진 나를 두고, 이우신은 묵묵히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더니 제 입에 넣었다.

감자튀김을 하나, 둘, 세 개째 집어먹더니 이우신이 말했다.

“나는 게이일 시간이 없어.”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야. 남자 좋아해서 게이면 그냥 게이인 거지. 거기에 시간이 왜 들어?”

“남들과 다르다는 건 그런 거야. 남들과 다르면, 품이 들어.”

이내 붉은 줄이 그인 빨대 끝이 이우신의 입술 새로 들어갔다. 딸기셰이크를 한 번에 절반 가까이 흡입한 다음 내려놓고, 버거를 집어 드는 손길이 여상스러웠다.

설명을 기다리는 내게 이우신은 친절했다.

“…나는 자주 그래 왔어. 그래서 알아. 다른 점을 숨기면서 살려면 노력이 필요해. 남들이 하기 싫은 건 하지 않을 때, 나는 반드시 그걸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어. 가난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바람에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이우신처럼 말끔한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고 가득 놓인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내 기분을 정리하여 정갈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우신과 나의 차이는 그렇게 확연했다.

가난하고, 성적 장학생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던 이우신은 똑똑했다. 그에 비해 나는 멍청하고 어리숙해서, 어렴풋이 알던 사실을 본인에게 들은 것만으로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아랫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고는 가장 궁금한 질문을 겨우 꺼냈다.

“그래서. 이제 나 안 좋아한다고?”

“아니.”

이우신의 대답은 아주 빨랐다.

“…권태오, 나 너 좋아해.”

“…….”

“네가 나한테 못되게 말해도… 이찬희 부탁 때문에 잘해 주는 거래도… 그래도 좋더라.”

꾸밈없이 솔직한 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놀란 내 눈길을 이우신은 피하지 않았다. 덤덤한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새카만 두 눈동자에는 다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우신은 어떻게 저런 얼굴로, 그런 말을, 이렇게 웃으면서 할 수가 있지? 나는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갈비뼈가 탈 거 같은데….

말없는 나를 두고, 이우신의 얄미운 입술이 느릿느릿 열렸다.

“태오야. 하지만… 널 좋아해서 내가 게이가 되고, 너를 보느라 떨리는 감정을 정돈하고, 네가 날 싫어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매일 아침 너를 볼 수 있을까 운동장을 찾아가고… 그러면, 시간이 들어. 나는 그런 데에 쓸 시간이 없어.”

이…게 지금… 거절하는 거야 유혹하는 거야?

이우신이 한 마디 한 마디 제 생각을 정돈해 말할 때마다 나는 함락당했다. 백기가 있었더라면 팔이 빠져라 흔들었을 거였다. 차라리 몇 번이고 엎어치기를 당하고 말지, 조곤조곤 건네 오는 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날 좋아해서 게이가 됐다’, ‘나를 보느라 떨렸다’, ‘내가 싫어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매일 아침 나를 보고 싶어서 운동장을 찾아왔다’… 이우신의 말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나는, 그런 이우신을 훔쳐보느라 가슴이 떨리고 온종일 전전긍긍했고 아침마다 운동장을 달렸는데….

그런데 내 대답은 듣고 싶지 않다고? 연애할 시간 같은 건 없다고? 게이는 안 될 거라고? 이게 씨발 말이야 똥이야? 로맨틱하게 말하면 다야? 예쁘게 생기면 다냐고?

서러운 와중에도 나는 ‘씨발’이란 생각밖엔 못했다. 그 외에는 도대체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장 난 기계가 된 것 같았다. 차라리 말 말고 주먹으로 싸우고 싶었다. 기분으로는 왕창, 어떤 말이든 행동이든 저질러 버리고 싶은데, 내 기분을 토로하고 이우신을 몰아붙이고 싶은데, 그런데….

그런데 이우신이, 얼굴이, 표정이, 목소리가….

“…그래도, 날 좋아한다며.”

마침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이우신은 말끔한 눈으로 그런 날 본다. 투정하는 어린애 내려다보듯이,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묻은 얼굴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애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

“사랑의 대부분은 짝사랑에서 그친대. 유명한 축구선수나 연예인 보듯이, 그렇게… 혼자 좋아하다 그치는 거지.”

“그래도, 이우신. 나는….”

“태오야.”

정돈되지 못한 감정을 분출하며 시근덕거리는 나를 이우신이 달랬다. 그러고는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부터 시험 기간이야.”

벌어졌던 내 입술이 딱 다물렸다.

“나는 이번 시험, 잘 쳐야 돼. 난…, 난 공부가 제일 중요해. 내년이면 고3이잖아. 네가 아니라 그 누가 됐건 간에, 연애고 뭐고 할 여유 같은 게 없어.”

…강건우가 그랬었다. 이우신이 문제 풀이를 그렇게 잘 해 준다고. 가르쳐 주는 말들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서 시험지를 받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그 말이 딱 맞았다. 이우신은, 절대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던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는 절로 고개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말없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포크를 집어 들고는, 양상추를 푹 찔렀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풀을 입에 넣는 나를 이우신이 아주 조용히 살폈다. 그러더니 저도 햄버거 포장지를 벗긴다.

“천천히.”

소스 없이 샐러드를 먹어 치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두 마디였다.

“…천천히 먹어.”

그게 다였다.

푹신한 침대에 이우신이 누울 때까지 나는 침묵 안에 있었다. 한편에 놓인 이우신의 후드 주머니를 뒤적여 뿌리는 것과 붙이는 것, 두 가지로 구매한 파스를 들었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이우신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냥 누워 있어.”

이우신의 종아리 밑에 수건을 깔고 스프레이 파스를 뿌렸다. 내겐 익숙한 파스 냄새에, 이우신은 작게 기침했다.

“가만있어. 내일 못 걷기 싫으면.”

몇 차례 발가락을 꿈틀거렸지만 그뿐, 이우신은 두 손을 가운 허리끈 위에 둔 채 조용해졌다. 꼼꼼히 파스를 뿌리고 밴드까지 무릎과 종아리 뒤편에 붙여 주고 고개를 들자,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돈 찾아 준 거 고마워….”

한참의 침묵 끝에 이우신이 속삭였다. 팔뚝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꼭 갚을게. 나중에… 내가 꼭 갚을게.”

색색 숨소리가 반, 목소리가 반이었다. 나는 딱딱한 발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갚긴 뭘 갚아. 어차피 네 돈이잖아.”

“…그래도 갚을게. 네가 찾아 줬으니까….”

수건을 들어 종아리를 닦아 주어도 이우신은 얌전했다. 가운 자락이 무릎 위로 올라간 줄도 모르는 걸 보면 엄청나게 졸린 모양이었다. 눈꺼풀조차 무거운지 파들파들 떨어 가며 겨우 뜬 채 버티기에, 어찌 됐건 호텔 방을 잡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까진 무릎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며 내가 말했다.

“이우신.”

“응.”

“정 고마우면 부탁 하나만 하자.”

“응.”

“아니다. 두 개. 부탁 두 개.”

“응….”

같은 말만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는 이우신이지만 상관없었다. 그 왜, 잠결에 들은 말은 머릿속에 남는다지 않던가. 그래서 대회가 있기 전날이면 ‘나는 할 수 있다’고 자기 암시를 거는 선수들도 많았다.

그 효과를 믿고, 나는 주문을 외듯 말했다.

“하나. 너 나 대하는 거 말이야. 내일 됐다고 다시 쌩까지 말기.”

“…내가 언제 쌩을 깠다고 그래….”

“오늘처럼 ‘태오야’라고 계속 불러. 알겠지?”

“알겠어….”

그러고는 잠시간 조용하다가,

“두 번째는?”

이우신이 물었다. 반쯤 잠든 와중에도 꼼꼼히 따지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두 번째는….”

사실은, 부산에 온 김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바닷가를 같이 걷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파도에 발 담그고 서서 너무 넓고 끝도 없어 보이는 수평선을 쳐다보면서, 같이 작아지자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너도, 우리 안의 고민도, 전부 다 별것 아닌 좁쌀처럼 느끼자고….

“아니다. 다음에 말할게. 그냥 자라, 우신아.”

우신아.

처음으로 그렇게 불러 보았다. 그러자 우신이가, 웃는 것도 같았다. 작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린 얼굴이 어리숙했다. 색색 잠든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해지는 게, 나는 왠지 안타까웠다.

잠든 이우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방 안의 불을 모두 끈 다음 이우신의 옆자리에 천천히 누웠다. 매트리스가 살짝 기울어져도 이우신은 깨지 않았다. 색, 색, 숨소리가 곤히 들려왔다.

이우신을 향해 돌아누운 채 나는 몸을 되도록 웅크렸다. 커다란 몸을 구기고는, 딱딱하고 살 없는 어깨에 내 이마를 붙였다. 그 바람에 숨결이 닿는 듯도 했다.

“…우신아.”

최대한 작게 소리 내어 나는 혼잣말을 했다.

“못되게 말했던 거 미안해. 우리 집도 이혼했어, 나 어릴 때…. 이제 나한테는 별거 아닌 일이라서,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숨소리가 새근새근, 균일하게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손가락을 건드리자 잠든 이의 손이 살짝 안으로 말렸다.

“이찬희가 부탁해서 너한테 잘해 준 거 아니야.”

나는 작게 심호흡했다. 이 말이 네 무의식에 자리 잡았으면 바라면서.

“이찬희가 안 볼 때만… 너한테 잘해 준 거야.”

큼직한 손을 살며시 얹자, 이우신의 하얀 손은 이불을 덮은 듯 가려졌다.

“나 너 안 싫어해.”

너도 알겠지만.

‘나도 너 좋아해.’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그날 꿈속에서 바다에 갔다.

습관이 무서운 거라더니 타지에서도 눈이 번쩍 뜨였다. 5시 59분에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6시 정각 알람이 이우신을 깨우기 전에 꺼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지로 여러 번 두들겨도 새카만 액정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충전 안 하고 잤지, 참….’

꺼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옆자리에 누운 이우신을 살폈다.

하여간에 …구미호.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자는 모양새가, 정말이지 더도 덜도 말고 딱 구미호다. 사람이 어떻게 이러고 잘 수가 있냐? 밤새 누구 간 빼먹어 놓고 모르는 척,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 이거?

내가 생각해도 내 생각이 웃겨서 혼자 피식거리다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혼자 실실대고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호텔 방 스탠드 근처의 휴대폰 코드를 찾았다. 밤새 어떤 연락이 쌓였을까 추측하자니 몸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지만 별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예매하려면 폰을 충전시켜야 했다.

내 휴대폰에 8핀 코드를 끼우고, 협탁 근처에 놓인 이우신의 폰에도 C타입 충전 선을 끼워 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새근새근 잠든 이우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구경하고, 카드 키를 뽑아 들고 방을 나섰다.

나도 옷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이우신도, 어제의 그 더운 후드를 또 입게 둘 순 없었다. 새 옷을 사다 줄 생각으로 야심차게 나섰건만 근방에는 문을 연 가게가 한 군데도 없었다. 새벽 6시니 당연한 일이었다.

별수 없이 근방에서 제일 큰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가판대를 열심히 둘러본 결과, 모텔이며 호텔 근처 매장이랍시고 기본 속옷과 흰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무지 흰 티셔츠 두 장과 남성용 팬티 두 장, 1.5리터 생수 한 병을 샀다.

편의점 봉투를 손에 쥐고 돌아간 호텔 방 안에는 어느 새 깔끔해진 이우신이 있었다. 진짜 존나 구미호….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나는 이우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새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는 조금 젖어 있었지만 차분했고 청바지에 그, 빌어먹을 가을용 후드를 다시 입은 모습이었다.

지난날의 피로가 느껴지는 구석이라고는 팅팅 부은 눈두덩이뿐이었다. 마카롱처럼 부은 눈을 구경하면서, 나는 구해 온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이거 입어.”

사실 팬티도 사 왔는데… 건네주기 되게 애매하게 됐다. 벌써 바지를 챙겨 입은 녀석에게 그거 벗고 이걸로 다시 입으라고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이우신에게 M사이즈 티셔츠가 조금 낀다는 점이었다. 내 눈에는 하도 작고 말라 보이길래 S를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집어 온 M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L사이즈를 사 올 걸 그랬다.

땀내 나는 셔츠를 벗어 던지고 나는 XXL사이즈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욕실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훌렁훌렁 상의를 갈아입는데, 이우신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제 몸에 너무 딱 맞는 티셔츠 어깨를 꼬집어 늘리는 녀석의 귀가 붉었다. 저놈의 귀는 어째 틈만 나면 빨개지는 것 같다. 신호등 적신호처럼 말이다. 내가 볼 때마다 빨개졌다가, 다시 하얘졌나 싶다가도, 금세 또 빨개져 있곤 했다.

우리는 생수 한 병을 번갈아 마셨다. 병 입구에 입술을 안 대려고 노력하느라 턱 밑으로 흘린 물을 닦으면서, 이우신이 말했다.

“돌아가는 표는 내가 살게.”

“내가 벌써 예매했는데?”

그러자 이우신이 나를 흘겨본다. 띵띵 부은 눈으로 쳐다봐 봤자 한 개도 안 무섭다고 말해 주려다가, 나는 그냥 웃고는 말았다.

나란히 흰 티셔츠를 입은 채 우리는 호텔에서 함께 나섰다. 내가 체크아웃을 마치는 동안 이우신은 로비에 세워진 작고 투박한 석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거 손으로 직접 깎아서 만든 걸까?”

그런 게 도대체 왜 궁금하지?

이우신의 의견에 따라 돌아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배고프지 않냐고 묻는 나에게 이우신은 ‘기차역에서 아무거나 먹자’는 서운한 답을 해 주었다.

‘하긴 너는 배가 안 고프겠지, 어제 부산 사람 간을 여덟 개는 빼먹고 들어왔으니까.’

터벅터벅 길을 걷다 만난 출입구를 통해 아무렇게나 들어간 지하철 풍경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울에 비해 부산 지하철은 노선이 조금 적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여 있었지만 말이다.

‘요샌 어딜 가도 다 이런가?’

생각하며 손잡이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데, 문득 다음 역을 알리는 전철 방송에서 ‘끼룩, 끼룩, 끼룩…’ 하는 새 소리가 퍼져 나왔다.

“야, 방금 그거 뭐냐?”

웃음이 나 킥킥거리며 목소리를 내자, 이우신도 나를 따라 웃었다. 단내가 나도록 다물고 있던 입에서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갈매기 소리인가 봐….”

이우신이 속닥거렸고,

“어. 갈매기 소리.”

나는 웃음소리를 애써 줄였다. 전철 방송으로나마, 전자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들었으니 됐다 싶었다.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연 가게를 찾아 헤맸다. 그러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덩치 큰 사람을 처음 보는지 내 몸을 위아래로 살피다가, 이우신의 얼굴에 가 꽂히는 시선에 신경이 쓰였다.

“태오야, 이쪽.”

정작 이우신은 남들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아르바이트생이 부지런히 출근한 도넛 체인점을 향해 움직이기 바빴다. 체인점에서 우리는 패밀리 박스 하나를 샀고, 호떡 가게에도 잠깐 들러 씨앗 호떡을 두 컵 샀다. 안 그런 척하더니 이우신도 배가 고팠는지, 산 음식들은 플랫폼에서 전부 먹어 치웠다.

설탕 가루가 묻은 손을 탈탈 털면서 나는 이우신을 살폈다. 다 먹은 호떡 종이컵을 입에 문 채, 이우신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컵을 치워 주려고 다가갔다가 보게 된 화면 안에 새벽의 입금 문자가 떠 있길래 조금 주춤했다.

기차는 제시간대에 도착했고, 우리는 정해진 자리에 탑승했다. 나는 이번에도 이우신을 창가에 앉혔다.

미련 없이 부산역을 떠나는 기차는 몹시 빨랐다. 창밖의 풍경도 금세 변했다. 그 모든 게 아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어차피, 다음 주 시험이 연애보다 중요하시다는 공부의 신을 데리고 놀러 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휴대폰을 가만히 쳐다보는 이우신을 힐끔 살피다가, 나도 미뤄 왔던 폭격을 받을 준비를 했다. 휴대폰을 열고는 알림 창을 내린 것이었다. 이찬희, 이모, 엄마… 나를 독촉하는 문자가 가득 쌓여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 휴대폰 속 알림창의 개수는 많지 않았다.

문자가 여러 통 와 있긴 했지만 발신인은 모두 강건우였다.

강건우

[권태이우신만나러갓음?]

[우쉰이머함? 같이잇음?]

[이우신먼일있음? ㄱㅊ?]

[권태5555555]

[이우신만낫냐고요형님]

[ㅇㅇㅅㅁㄴㄴㄱㅇㅎㄴ]

[ㅇㅇㅅㅁㄴㄴㄱ]

[ㅇㅇㅅㅁㄴ?]

[ㅇㅇㅅㅁㄴ?]

[ㅇㅇㅅㅁㄴ?]

[ㅇㅇㅅㅁㄴ?]

[ㅇㅇㅅㅁㄴ?]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황당해져 쌓인 메시지를 훑어보는 와중에, 새로운 ‘…’ 표시가 떴다. 이내 새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도착했다.

[ㅇㅇㅅㅁㄴ?]

미친 새끼 맞네.

[ㅇㅇ.]

작게 한숨을 쉬며 답장하자,

[ㄱㅊ?]

강건우는 즉석으로 새 문자를 보내 왔다.

[ㅇㅇ.]

그렇게 답장을 보내 준 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금세 입력 중 표시를 보여 줄 줄 알았건만 휴대폰 너머의 강건우는 한참 고요했다. 이제 된 건가 생각하며 액정에서 손을 떼어 내는데,

[나찬찬찬네서잣음ㅋㅋ]

덜컥 새 문자가 도착했다.

‘…이찬희 집에서, 잤다고?’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여상스럽게 납득하면서 나는 휴대폰을 내렸다.

그러나 왠지 모를 찝찝함이 자꾸 입 안을 맴돌았다. 씨앗 호떡 때문인가. 아니다, 진짜로 기분이 좀 찝찝하다.

내가 자리를 뜬 다음 이찬희가 강건우를 붙들기 시작했을까? …아니다, 오지랖 넓고 붙임성 좋은 강건우가 자진해서 남았을 가능성도 컸다.

이찬희와 강건우라니… 붙어 다니는 걸 몇 주째 보기는 해 왔지만 그 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째선지 이찬희에게도 강건우에게도, 관계에 있어 진짜 목적이 될 만한 주인공은 이우신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둘이. …이찬희 성격에, 중요한 이야기는 아마 하지 않았을 거다. 저를 걱정하는 어른들 앞에서까지 벽을 치고 다니는 놈이 이찬희였다. 그런 애가, 강건우한테 제 속내를 쉽게 말했을 리 없었다.

‘…그냥 혼자 있기 싫어서 자고 자라 그런 거겠지.’

생각을 그렇게 마치는데,

“…아침 훈련 놓쳤겠네.”

이우신이 말했다. 대뜸 다가온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제법 큰 힘을 갖고 있었다. 멀리 떠났던 생각이 쑥 기차 좌석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이우신의 옆얼굴이 보였다. 얼굴의 방향도 시선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말만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루 정돈 놓쳐도 괜찮아.”

한 박자 늦게 대답해 주자,

“으응….”

이우신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2분 정도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

“…운동하는 거 말이야, 많이 힘들어?”

“그냥 참고 하는 거지.”

“아.”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이우신은 입을 다물고 창밖의 구름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대화가 끝났나 생각하는데, 녀석이 또 말했다.

“…그러면 너는 유도 선수가 되려는 거야?”

“지금도 선수야.”

“아, 응. 알아.”

그리고 또 조용해졌다.

“저기, 태오야.”

이우신이 입을 열었고,

“손잡고 가자.”

나는 덥석 이우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왠지 웃음이 나서 피식거리며 맞잡은 손을 이우신은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반대로 중앙 통로만 쳐다봤다.

노래를 듣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기차에서의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이 따끈따끈했다.

새로 깨달은 건데, 나는 서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이우신이랑 헤어져서 너무 허전한 거든지.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안녕’ 하고는 쏙 사라진 이우신 때문에 나는 체중이 두 배로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느릿느릿 걸어 택시에 타자마자 왠지 후회됐다. 이렇게 허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같이 있자고 할 걸 그랬다.

이상한 기분이 사라지니까 나는 더 이상해졌다. 마냥 예쁘고, 긴장되는데, 근데 편하고… 그런 기분. 그게 사라지니까 정말 이상했다.

후회하기엔 그러나 이미 늦었다. 딴생각에 빠진 나를, 서울의 택시는 참 빨리도 집 앞까지 데려다 놓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괜히 택시 기사를 원망했다. 아저씨 돈 벌기 싫으신가? 가끔은 빙빙 돌아서 서행해도 괜찮을 텐데….

이리저리 불만을 속으로 굴리며 돌아온 집 안은 조용했다. 속상해하는 엄마라거나 화난 이모, 입술을 삐죽거리며 토라진 이찬희는, 없었다. 내가 짐작하고 또 걱정한 소란은 조금도 일어나 있질 않았다.

조금은 멍한 상태로 거실로 걸어 들어가자 어머니가 보였다. 바지 정장 차림인 채 소파 위를 가로지르며 누워 있는 어머니가 제법 낯설었다. 아마도 너무 간만에 봐서 그런 것 같았다.

천천히 다가가 살펴보니 눈두덩이와 이마 위에 올린 베이지색 물수건이 보였다. 손가락을 대고 겉면을 만져 보니 수건의 온도가 뜨끈했다. 나는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새 수건을 차갑게 적셔 와 새로 올려 주려는데,

“왔니, 아들….”

엄마가 말했다. 지친 눈을 감고 말로만 전해 온 인사에, 나는 보이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았다. 가져온 수건을 얼른 갈아 주고, 외박 사실을 들키기 전에 방으로 올라갔다.

‘엄마한테도, 이모한테도… 말 안 했구나.’

긴장이 풀리고 나니 생각이 곱절로 많아졌다. 아무튼 엄마가 모르니까,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헛웃음이 났다. 나 부산까지 다녀왔는데, 밤새 길 걸어 다니고, 빈집도 털어 보고, 전 재산을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다 꼬라박고… 그 애랑 외박까지 했는데. 엄마는 모르는구나….

지친 몸을 풀썩 침대에 눕히고는, 쓸데없이 배터리가 남아도는 휴대폰을 들었다. 다시 한번 문자 기록을 살폈다. 부재중 전화 기록도 살펴보았다. 혹시 기차에서는 와이파이가 좀 덜 터졌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빵빵하게 터지는 내 방 와이파이를 통해 확인해 보아도, 이찬희가 보내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

‘…왜 이러지, 갑자기.’

녀석이 침묵하니까 나는 오히려 긴장됐다. 이 새끼 지금, 화났을 텐데. 아닌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우신을 좋아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자기 입장에서는 왜….

‘‘윈윈’이라고….’

왜 그런 소릴 한 거야?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자리를 바꿨다. 이찬희가 변했고, 이우신은 나를 배신했다.

나를 ‘태오야’라고 불렀으면서, 나한테 울면서 고백하고 내 첫 키스를 가져갔으면서, 한 침대에서 잔 다음 날 손까지 잡고 돌아왔으면서.

…약속했으면서. 쌩까지 않기로 했으면서.

이우신이 나를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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