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4/16)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5월의 햇볕이 스미는 복도, 걷어붙인 팔뚝에는 빛을 받아 흰색으로 위장한 솜털이 보였다. 멀리 교실 근처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내달리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소등한 채 문을 잠가 놓은 진학 자료실 앞은 조용하기만 했다.

“저기, 우신아.”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괜히 무릎이 뻐근했다. 어디든 가서 앉고 싶었고, 책을 펴고 고개를 숙이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거… 받아 주지 않을래?”

손톱 위 반달마저 이쁘장한 손을 모아 내민 하늘색 편지지를 외면할 수만 있다면, 수학 시험을 백 번 쳐도 좋을 것 같았다.

멀리서 와르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쉬는 시간을 틈타 내기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 중 하나가 골이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이게 뭔데?”

긴 침묵 끝에 내가 물었다. 보통 아무도 없는 복도를 굳이 찾아다가, 사람을 불러내어 단둘이 마주 보고서는, 부끄러운 얼굴로 건넨 편지는 러브레터일 가능성이 컸다. 강건우 말로는 ‘죽을 쑬래도 눈치가 없다’는 나도 그 정도 연애 도식은 알았다.

문제는 내게 편지를 내미는 사람이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이라는 부분이었고, 새파란 이름표에 박힌 이름이 이찬희란 점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당황한 탓에 내 입 밖으로 뻣뻣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들었더라면 화난 줄 착각할 수준이었다.

그러자 이찬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럴 적에 그의 얼굴 근육은 나보다 몇 곱절로 유연해 보였다.

“편진데… 우신이 너한테 주려고 쓴 거야. 아무래도 전에, 나 때문에 네가 기분이 많이 상했던 거 같아서.”

듣던 중 간지러운 소리에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싶어졌다. 얼굴을 아주 세게 벅벅 문지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나보다 큰 남자애가 수줍은 양 꼼지락거리는 동작이 소름 끼쳐서 그렇지, 이찬희의 말 자체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찬희 때문에 내 기분이 많이 상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나를 신경 써 편지까지 적어 온 모습은 의외였지만, 아무튼 간에 좋은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 제스처였다.

‘이왕이면 잘 지내보라고… 강건우가 그랬었지.’

중학생 때 죽을 만큼 아팠다고도 들었다. 타인의 속사정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듣기란 어색하고 또 싫은 일이었다. 누굴 동정할 처지가 아닌 주제에 과분한 연민을 갖게 되는 게 나로서는 더욱이 불편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꿀꺽 삼킨 다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하늘색 편지지는 반으로 접은 엽서형으로 종이가 빳빳했고, 정중앙에는 웃는 얼굴의 갈색 푸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건넨 것을 받았으니 용건은 끝난 듯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내 발목을 이찬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붙들었다. …얘는 눈이 왜 이렇게 크고 강아지처럼 생겨서. 기대로 가득 찬 시선에서 물리적인 힘마저 느껴졌다.

‘하아….’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키면서 나는 편지를 펼쳤다. 친하지도 않은 나를, 고심하며 불러낸 만큼이나 진중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 것 같았다.

‘우신아, 전에는 진짜진짜 미안해!!!

나 용서해 줄 거지? >//^//<)??

희희‘^’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초딩인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너무 힘겨운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어 내렸다. 말문이 턱 막히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상하로 눌린 듯 납작하고 동글동글한 글씨를 그저 바라만 보는데, 이찬희가 말했다.

“답장은 안 써 줘도 돼.”

“…….”

답장이라니. 이찬희 눈에는 내가 그런 걸 써 줄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야?

이쯤 되니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참지 못하고 나는 소리 내어 ‘하하’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내 반응을 긍정적인 호응으로 읽었는지 이찬희의 낯도 덩달아 밝아졌다. 머쓱하니 입가를 닦으며 웃음기를 숨기는 나에 비해, 활짝 웃는 이찬희는 부끄러움일랑 모르는 드라마 속 십 대 그 자체였다.

“그럼 우리, 이제 화해한 거다?”

이찬희가 큰소리로 외쳤다. 정갈한 아랫니를 보이며 웃자 나는 그의 빨간 혀까지 볼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귀족 도련님 같은 얼굴에, 웃음이 걸리니 조명이 켜진 듯 환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 그래.”

어영부영 대답한 뒤에 나는 귀여운 편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러자 이찬희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고?”

“응!”

하여간 이찬희는 운도 참 좋았다. 한 주… 아니, 하다못해 이틀 전에라도 내게 이런 편지를 건넸더라면 그가 보는 앞에서 돌려주고, 사과도 화해도 거절했을 터였다. 그러나 분주하던 시험 기간이 끝나고 ‘올백 공신’이라 불리며 숨통에 바람이 트인 오늘 같은 날에는, 이찬희의 악수마저 사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충 손을 맞잡자 이찬희는 어깨가 흔들거릴 정도로 크게, 내 손을 붕붕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급발진했다.

“있지, 우신아! 이따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나 점심은 강건우랑 먹는데.”

“강건우? 그럼 건우도 불러서 같이 먹자고 하자!”

이찬희의 화법이 나는 제법 웃겼다. 굳이 따지자면 강건우에게 이찬희가 허락을 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선의 베풀 듯 본인이 ‘부르자’고 하니 주객전도였다.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찬희와 밥을 먹는 게 좋아서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평소 이찬희의 점심 상대가 늘 권태오라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내 생각을 읽었더라면 소심한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겠지만….

‘권태오랑 같이 먹는 건가, 그럼….’

나는 남몰래 두근거렸다.

점심 한 번 먹는다고 권태오와 친해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무뚝뚝한 얼굴에 속을 알기 힘든 권태오가, 난데없이 이찬희와 나란히 선 강건우와 나를 어떤 눈길로 쳐다볼지 그게 궁금했다.

3교시에 걸친 내 호기심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강건우와 내 사이로 얼레벌레 끼어든 이찬희를 데리고 급식실로 향하면서도, 식판 가득 동그랑땡과 라자냐 두 덩어리를 퍼 담고서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우리는 세 명이었다.

권태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권태는 어디 가고 우리랑 밥 먹어?”

내심 간지러워하던 부분을 긁어 준 건 강건우였다. 권태오와 친하지 않기로는 나와 매한가지인데, ‘권태’라고 별명을 불러 대는 넉살 좋은 성격이 오늘따라 고맙게 생각됐다.

급식실을 힐끔힐끔 살피던 눈길을 식판으로 돌려놓고, 나는 관심 없는 척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 태오 오늘 경기 나갔어!”

이찬희의 대답은 발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같이 밥 먹을 친구가 없었는데 다행이야. 나… 너희랑 되게 친해지고 싶었거든!”

‘아하….’

그러니까 대타가 필요했단 소리인가. 구운 방울토마토 세 개를 씹던 턱에서 대번에 힘이 쭉 빠졌다.

“에이! 너희라니. 나는 쏙 빼놓고 이우신이랑 친해지고 싶었겠지!”

“하하, 아니야. 건우 너랑도 친해지고 싶었어….”

말없이, 나는 입 안의 방울토마토를 씹어 으깼다. 툭툭 터지는 씨의 식감을 느끼면서 구경하자니 강건우와 이찬희는 제법 잘 어울렸다. 둘이 노는 모습이야 따로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털털하고 성격 좋은 강건우와 교내에 모르는 동급생이 없다는 이찬희가 서로 못 친해진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싶었다.

킥킥 웃어 가며 이찬희와 농담하는 강건우가 내 눈에는 순진하게만 보였다. 강건우는 성격 좋은 놈이지만 또 그만큼이나 단순해서, 사람 말을 들을 때 속뜻을 유추해 낼 줄을 몰랐다. 아마 국어 점수도 듣기 평가에서 다 까먹을 것이었다.

‘권태오가 없다고 이찬희가 밥 먹을 친구 하나 없을까….’

교실 안의 여자애들만 생각해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찬, 찬아… 애칭으로 불러 가며, 쉬는 시간만 되면 이찬희를 중심으로 인형 놀이가 펼쳐지곤 했다. 이찬희의 머리를 빗겨 주거나 앞머리 롤을 말아 주면서, ‘찬희는 여드름도 하나 없네’, ‘큐티클까지 정리된 남자애는 처음 봐’ 그러면서 좋아하는 티를 못 감추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당장 코앞의 장세라만 해도 그랬다. 어느샌가 우리 자리로 찾아와서는, 이찬희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찬!”

그럴 적에 장세라는 표정이 아주 밝았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성적을 많이 올렸지, 참. 장세라가 전교… 5등이던가? 4등이던가? 아무튼 등수 표에 찍힌 이름을 본 기억이 났다.

“언제부터 너네 셋이 밥을 같이 먹었어?”

대뜸 취조를 시작하며 장세라는 두 팔꿈치를 빈 식탁 자리에 대고 상체를 살짝 당겼다. 따로 식판은 들고 있질 않았고, 대신에 한 손에 딸기맛 요거트를 든 채였다. 눈꼬리가 길게 빠진 두 눈은 왜인지 날 향해 고정된 상태였다.

대충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자 그제야 장세라가 웃었다. ‘잘 먹는다’고 속닥거리는 장세라를 앞에 놓고, 나는 동그랑땡 두 개를 입에 넣었다. 흰 쌀밥을 숟갈로 퍼 먹고, 된장국도 세 숟갈 떠먹었다.

“짱세라, 너 그거 알아? 이우신 오늘 러브레터 받았거든.”

나와 장세라를 번갈아 쳐다보던 강건우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저질 농담에 나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아야야’ 하며 죽는 소리 내는 강건우를 보며 이찬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 뭐야아.”

말꼬리를 늘리면서, 이찬희도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나와 장세라를 반복해 쳐다봤다.

“건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잖아. 세라 오해하겠다.”

“오해?”

장세라의 웃는 낯이 대번에 어색해졌다.

“내가 무슨 오해를 한다고 그래? 요즘 누가 러브레터 같은 걸 쓰니? 거짓말 좀 하지 마, 강건우.”

“거짓말 아니야. 진짜 받았거든. 그지, 우신아?”

매달리듯 내 팔뚝을 끌어안는 강건우를, 나는 대충 밀어 떼어 냈다.

“밥 먹는데 말 시키지 마.”

“…뭔데, 진짜야? 누가? 누구한테 편지 받았는데?”

장세라가 물었다. 목소리는 취조실에 들어선 형사처럼 낮았다.

입 안의 음식에만 집중하는 나 대신 강건우가 ‘우리 반 애’라고 뭉뚱그린 답을 내놓았다. 왜인지 그의 말투며 이찬희의 얄궂은 미소가 장세라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내 장세라가 나를 쏘아보았다. 두 눈동자에 맹렬한 빛이 서려서, 나는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뭐가 그래서야.”

내가 말했고,

“…그래서, 받았어?”

장세라는 이제 웃지 않았다.

장세라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는 식당 티슈로 입을 닦았다. 불편하고 어색한 농담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간만에 맛있는 메뉴가 나왔는데 식사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받았어.”

“…….”

“그런데 러브레터 아니야.”

“…그럼?”

나는 이찬희를 손가락질했다. 그제야 이찬희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둥절한 장세라를 가운데 놓고, 강건우는 ‘쟤야, 쟤가 편지 줬어’ 하며 장난질을 마쳤다.

그러자 장세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너넨 이런 게 재밌어?”

그러더니 ‘흥’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콧김을 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요거트를 깜빡 두고 가길래 ‘장세라’ 하며 이름을 불렀더니 금세 멈추어 선다.

“이거 가져가야지.”

물기 젖은 요거트를 내밀자 장세라는 어깨를 끌어 올렸다가,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기운 없는 소리로.

“너 먹어….”

중얼거리더니 떠나 버렸다.

무어라 웃으며 농담 나누는 강건우와 이찬희가 나는 이제 재미없었다. 그들이 소년처럼 킥킥거릴수록 나는 왠지 늙는 기분이었다.

젤리처럼 물렁해진 요거트 속 딸기를 씹으면서, 쓸데없이 길어진 식사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수업을 위해 화학실로 향하는 길에도 이찬희는 나와 함께했다. 뜬금없이 강건우와 내 사이에 섞인 이찬희를, 평소 그와 다니던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운하다는 투로 ‘뭐야아’ 하고 농담하는 여자애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찬희와 강건우를 보고 있자니, 나는 두 마리 개 사이의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찬희는 모난 구석 한 점 없이 집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자이언트 말티즈 같았고, 강건우는 주말마다 네 시간씩 산책하는 행복한 보더콜리 같았다. 둘은 이리저리 짖어 대며 잘 어울렸다. 친화력 전투라도 하는 것처럼 우다다다 말과 호의를 쏟아 냈고, 관심사를 공유했으며 목적도 끝도 없는 대화를 나눴다.

종례를 마칠 즈음 이찬희와 강건우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게임, 영화, 여자 아이돌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이 나는 내심 거슬렸다. 둘이 절친이 되든 뭘 하든 상관없지만, 굳이 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건 다른 문제였다.

탐구 영역 마무리 노트를 작성하는 내 옆자리와 맞은편 앞자리에 각각 앉아,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을 보는 두 사람의 옆모습을 나는 힐끔 바라봤다. 이찬희는 귓불까지 붉어진 채 신나 보였다. 아마 권태오와 둘이 있을 때도 저런 얼굴이겠지.

저렇게 걱정 없이 웃긴 동영상이나 보며 놀았던 게 언제인지 나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했어. 가자.”

문득 이찬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노트를 덮었다. ‘진짜 오래 기다렸다’며 강건우가 투정을 했다. 누가 기다려 달라고 그랬나, 요 앞까지 나가는 것뿐인데 그걸 같이 걷겠다고 기다린 녀석이 황당했다. 나를 기다려 주는 강건우를 기다려 주겠다며 어영부영 같이 앉아 있는 이찬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캘린더와 스톱워치, 필통과 문제집, 필기 노트를 순서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웃긴 이야기를 이어 가며 농담하느라 바쁜 강건우와 이찬희를 두고, 먼저 교실 문으로 다가간 건 나였다. 오늘따라 산만하고 피곤했다. 도서관은 생략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씻고 10분만 누워 있고 싶었다.

딴생각을 하며 드르륵, 교실 문을 열자마자 굵은 어깨에 소리 없이 이마를 부딪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추켜들자 딱딱하게 굳은 턱과 곧은 콧대가, 그리고 너무 높은 곳에 있다고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권태오였다.

놀란 나머지 나는 물러서는 것도 까먹었다. 문짝 하나만큼의 폭을 두고 우두커니 선 채 쳐다만 보는데, 권태오가 먼저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허공에 뻗은 손은 문을 열 선수를 뺏겨 엉거주춤한 채였다.

“어! 태오야.”

10초처럼 느껴지는 1초의 정적을 깨고, 이찬희가 웃음소리를 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권태오는 나를, 그리고 내 뒤로 다가오며 그의 팔뚝을 잡아당기는 이찬희를 쳐다봤다.

“여기까지 왜 왔어? 먼저 차에 가 있지.”

“…….”

입을 다문 채 권태오가 이찬희를, 강건우를, 마지막으로 나를 한 차례씩 훑어보았다. 눈동자 외에는 전신의 그 무엇도 꿈쩍조차 하지 않아서, 잠깐이나마 그는 살아 있는 석상 같았다.

“이리 나와.”

이내 권태오가 말했다. 목소리에도 무게가 있다면 그의 말은 ‘쿵’ 소리를 내며 내 발등을 찧었을 거였다.

불쑥 팔을 뻗어, 권태오는 나와 이찬희 사이에 손을 넣었다. 내 어깨에 그의 손등이 스치듯 닿았고, 이찬희의 팔뚝은 손아귀에 단단히 붙잡혀 끌려 나갔다. 애교 많은 이찬희를 어린 동생 다루듯 아끼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에 나는 무진 당황스러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권태오는 그대로 이찬희를 끌고 복도를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그를 쫓느라 이찬희는 두 발을 허둥지둥 움직여야 했다.

“우신아, 그럼 내일 봐! 내일도 같이 놀자. 알겠지?”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해맑기만 했다. 멍하니 복도를 내다보며, 나는 어영부영 대꾸했다.

“아, 그래. …내일 보자.”

그러자 권태오가 잠시 멈추어 섰다. 그는 이찬희를 제 앞으로 당겨 밀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애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던 나는 괜스레 몸이 굳고야 말았다.

그러더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인사하지도 나를 쳐다보지도 심지어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권태오는 돌아서 떠나 버렸다.

멀리서 권태오가 뭐라고 물은 건지, ‘우리 화해했어!’ 하고 명랑하게 대답하는 이찬희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뭐냐, 괜히 민망하게?”

중얼거리며 툭툭, 강건우가 내 어깨를 쳤다. 우리도 이제 가자… 하며 앞서 걷는 강건우를 나는 조용히 뒤따랐다. 멋쩍은 기분에 괜스레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멀리 공주윤이 보였다. 새파란 테두리를 가진 노란 경기장 위에서, 그는 남색 유도복을 걸친 채 팔을 붕붕 흔들어 댔다.

채홍관 안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학생들과 외부 손님들이 가득 차 있었다. 관중석 두 번째 열에 구겨지듯 섞여 앉은 내 주변에도 사람이 많았다. 바로 옆에는 강건우가, 그 옆자리에는 이찬희가 있었고 뒷줄 가득 권태오를 보러 온 여자애들이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공주윤이 인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공신! 공신!”

그가 요란하게 소리 지르기 전까지는.

“공주 응원하러 와 준 거야앙?”

관중석 바로 앞까지 와서 건들거리는 얼굴이 한층 더 날라리처럼 보였다. 교내 행사일이라 별수 없이 참석한 걸 알면서도 아양을 떨며 웃어 댄다. 나와는 온도부터가 다른 애교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 이찬희가 밝은 소리로, ‘공주 안녕’ 하고는 그의 농담을 받아 주었다.

긴 팔을 흔드는 이찬희를 따라, 나도 오른손을 살짝 들어 흔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놓인 종이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줄노트 낱장을 뜯은 다음 세로로 두 번 접어 만든 영어 단어장이었다.

타교 세 군데와 맞붙는 1, 2학년 유도부 친선 경기를 앞두고서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물론 내게는 남 일이므로, 영단어 스무 개쯤 외우고서 적당히 박수나 치고 교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단어 두어 개를 외우고 나는 단어장을 꼬깃꼬깃 접어야만 했다. 유도복 허리끈을 둘러 묶으며, 권태오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태오야, 오늘도 이길 거지?”

상체를 앞으로 힘껏 숙이며 이찬희가 말했다. ‘태오야,’ ‘태오야’ 하고 뒷자리 여자애들까지 한 마디씩 말을 보태자 권태오 선수의 팬 미팅 현장이라도 된 것 같았다. 뭐가 재밌는지 웃어 대는 강건우를 구조물처럼 옆에 두고, 나는 어색하게 마른침만 연신 삼켰다.

근래 들어 학교생활이 통째로 이런 식이었다. 어디서부터 바뀌기 시작한 건지 종잡을 새 없이 나는 이찬희에게 휘말려 버렸다. 알고 보니 급식을 같이 먹자던 이찬희의 권유는 단발성이 아니었고, 강건우는 벌써부터 이찬희를 ‘찬찬찬’이라고 부르며 좋아하고 있었다. 한 반인데 떨어져 지내기도 애매한지라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급식 시간이며 방과 후 남는 시간에는 이따금 권태오까지 섞여 넷이서 어울리고는 했다.

‘…아니지.’

우리들의 ‘집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뭐랄까… 이찬희를 가운데 교집합으로 두고 이찬희와 어울리는 권태오가 있다. 또 이찬희와 어울리는 강건우도 있다.

그 언저리에 단무지처럼 낀 게 나였다. 나는 이찬희와도 완전히 어울리지 못했고, 권태오와는 절대로 친해질 수가 없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목례로 인사 정도는 하게 되었지만, 그런 것은 복도를 오갈 적에 선생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찬희와 강건우가 이것저것 경기며 유도부며 다른 학교 선수에 대해 질문을 퍼붓는 바람에, 권태오가 눈썹을 찡그렸다. 잘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좌로 기울인 채 그가 관중석 펜스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맨 앞줄에 앉은 유도부 후배들이 권태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에 ‘어’, 대충 대답해 주더니 권태오는 눈동자를 살짝 위로 올렸다. 어쩌다 보니 그보다 높은 위치, 정면 자리에 앉게 돼서 나는 퍽 서먹했다.

“뭐.”

권태오가 물었고,

“오늘 재밌는 경기 있냐고오.”

이찬희가 웃으며 말끝을 늘렸다.

“오늘? 별로 볼만한 경기는 없을걸.”

벌어진 유도복 앞섶을 대충 여미면서 말하는 권태오는 지루해 보였다. 그는 나나 강건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을 말하면서, 잘하는 선수가 오지 않아서 아쉽게 되었다고 입맛을 다셨다.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요 며칠 같이 밥을 먹어 봤다고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권태오를 가까이에 둔 채로도 나는 딴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사냥을 준비하는 육식 동물이 혀를 날름거릴 때 저런 모습이었는데… 하고.

심판과 선생들의 지시로 권태오는 채홍고 유도부 선수들 위치로 돌아갔다. 애국가가 나오고 형식적인 오픈식이 시작됐다. 그사이, 뒷줄의 여자애들은 어느 학교의 누가 제일 잘 생겼는지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채홍고 권태오지.’

표정을 굳힌 채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앞줄에서는 조금 더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조금 전 권태오에게 각진 인사를 건넨 남자애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채홍’ 글자가 박힌 남색 져지를 입은 것이나 덩치로 보아 오늘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는 유도부 1학년인 듯했다.

“권태 선배 플백이야? 아니지?”

“아닐걸. 키 더 크면 혹시 모른다던데.”

“헐. 플백 가면 경기 뜰 사람이 없겠다.”

플백이 도대체 뭐지…. 눈으로는 경기장 중앙에 걸린 국기를 담으면서 나는 그들 말의 문맥을 유추해 보았다. ‘키’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어울리는 주제는 응당 몸무게였다. 지금은 ‘플백’이 아니지만 키가 더 크면 ‘플백’이 될 거라는 건, 그게 일종의 수치라는 뜻이겠지. 권태오는 운동선수니까, 선수에게 매기는 수치라는 건 체급을 뜻하는 걸 테고.

‘아, 플러스 백? ‘+100’이라고?’

그러니까 저 애들이 지금, 권태오 몸무게가 100이 넘냐 아니냐를 놓고 수다 떨고 있는 거야? …뒷줄의 여자애들이랑 크게 다르지도 않네.

나는 조금 시들해졌다.

“지금도 맞는 체급 찾으려고 대학생이랑도 경기한대. 울 학교에도 그 뭐야, 얼마 전에 나간 선배들이랑… 지금은 공주윤밖에 없잖아.”

듣자하니 조금 이상했다. 권태오는 ‘권태 선배’인데 공주윤은 그냥 공주윤이다. 반짝 든 의문을 풀어내기도 전에 남자애들은 와르르 말을 쏟아 내며 나를 재미없게 만들었다. 공주윤이 체육관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봤다는 둥, 질 나쁜 친구들과 술을 먹는 사고를 치다 걸린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둥… 아직까지도 제명당하지 않고 유도부에 남아 있는 이유가, 공주윤이 없으면 채홍고에는 권태오를 상대할 선수가 없어서라는 말까지 들려왔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권태 선배 덕에 남아 있는 거네.”

‘우와….’

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엄청나게 찌질해….’

1학년 선수들의 경기가 시작됐지만 나는 어쩌다 들은 이야기에 조금 더 머물러 있었다. 운동을 하는 남자애들은 좀 더, 털털하고 쿨하고 서로 간에 동료애가 넘칠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충격이었다.

‘지들은 관중석에 앉아서 구경이나 할 뿐이면서, 실력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남을 헐뜯고 비방하다니….’

한심한 뒤통수들을 길에 떨어진 밤톨 보듯 흘긴 다음 시선을 들자 멀리, 소문의 주인공들이 보였다. 치열한 경기장의 열기 속에 유도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단단한 실루엣을 자랑하며 함께였다.

‘둘이서만 인종이 다른 것 같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권태오와 공주윤은 무척 친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선 채 권태오는 눈으로는 경기를 좇으면서도 입술을 움직여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공주윤은 아예 몸을 권태오에게 튼 채였다.

대다수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려 있는 덕에 마음 놓고 권태오를 관찰할 기회였다. 재차 육식 동물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기억났다. 공주윤이 나서길 좋아하는 호랑이라면, 권태오는 조용히 다가오는 곰 같았다.

그러자 문득 단군 신화가 떠올랐다. 호랑이 하나와 곰 하나가 동굴 안에 함께 지내며,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만 먹으며 백 일을 버티면 사람이 된다던 그 신화. 공주윤은 인내심이 없어서, 신화 속 호랑이처럼 때를 못 기다리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갈 터였다.

반면 권태오는… 백 일쯤이야 굶고도 버티며 살아남겠거니 싶었다.

‘가만. 그 곰 여자이지 않았나? 그러면 웅녀가 되는 건데….’

생각이 거기에 닿자 ‘풉’ 하고는 웃음이 났다. 소리 내어 하하 웃어 버리자 강건우가 ‘뭐야’ 하며 놀란 소리를 냈다. 거의 소스라치다시피 하는 강건우를 보면서도 나는 웃음을 그치질 못했다.

웅녀 권태오라니.

“찬, 이우신 미쳤나 봐. 갑자기 존나 웃어.”

“하학, 학, 그게 아니고….”

“소름 끼쳐! 야 그만 웃어!”

“하하학….”

“이 새끼 웃음소리 존나 이상해.”

근처 몇몇 애들의 시선이 몰리는 바람에 나는 강건우의 어깨에 얼굴을 숨겨야 했다. 그러고도 웃음이 그치질 않아서, ‘웅녀가…’ 하고 웃긴 이야기를 전해 주려다가 다시 혼자 웃었다.

“아, 뭔데? 나도 좀 알자, 웅이 뭐?”

“하하, 하하….”

나중에는 앞자리의 밤톨 녀석들이 조용히 하라며 우리를 흘겨보았다. 못생긴 얼굴들을 보고 나니까 그제야 웃음이 가셨다.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아, 미안’ 하고 사과하는 나를, 강건우는 ‘징그럽다’고 평가했다.

강건우와 이찬희가 떠드는 소리들을 들으며 두어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1학년 경기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뒤이어 2학년 선수들의 친선 경기가 시작됐다. 따로 학년별 소개는 없었지만, 표정만 봐도 비장한 정도가 다른 데다 자세며 태도가 한결 곧은 것이 짧다면 짧은 1년 터울이래도 티가 났다.

선수 얼굴로 줄도 세우고 남들 뒷담도 해 가면서 딴청을 부리던 관중들의 집중력도 부쩍 상승했다.

“공주 오늘 왜 저래? 컨디션 존나 좋은가 보다….”

앞자리 남자애들이 작은 말로 중얼거렸다. 그들 말마따나,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경기장 위의 공주윤은 컨디션이 존나, 아 아니 무척 좋아 보였다.

저게 잘하고 있는 건지 못하고 있는 건지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거라지만, 꼭 저만큼 덩치 큰 타교 선수를 잡고 이리 엉켰다가, 저리 넘겼다가, 어깨를 대고 멈추어 숨을 고르다가 했다.

유효, …유효, …유효.

유도부 1학년들이 중얼중얼 점수를 매기기에 그런가 보다 싶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바닥에 닿는 횟수는 각자 비등비등했고, 얻은 점수도 비등비등해 보였다.

적어도 공주윤보다는 상대가 더 쩔쩔매고 있단 점, 그거 하나는 분명했다.

반면 공주윤은 장난스러웠다. 경기 내내 웃고 있었다.

이내 공주윤이 고개를 숙이더니 와락, 상대의 팔뚝 밑으로 제 몸을 접다시피 하며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두 손으로 상대의 팔을 잡고 들쳐 올렸다. 거구의 선수가 ‘억’ 하며 붕 뜨더니, 등 전체가 바닥을 쓸다시피 하며 나가떨어졌다.

‘와’ 하는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조금 놀란 채 경기장 위의 공주윤을 내려다봤다.

“이겼네.”

1학년들이 중얼거렸다.

“꼭 저렇게 장난을 쳐야 해? 우리 이미지 우스워지게.”

한쪽에서는 구시렁대는 말도 들렸는데 어딘지 질투가 섞인 문장이었다. 왼편에서는 다리를 꼬고 앉은 여학생들이 박수 치고 있었다.

소란한 와중에 공주윤이 제 어깨 위로 양손을 탈탈 털어 보였다. 언뜻 긴 머리를 넘기는 동작 같았다. 근육 우람한 팔뚝 때문에 굉장히 우스워 보였지만.

‘역시… 미친놈이야.’

팔랑거리며 경기장을 돌아다니던 공주윤은 심판의 경고를 받은 뒤에야 상대 선수와 마주 보고 섰다. 건성건성 인사하는 공주윤을 보며 나는 왠지 불안했다. 저런 식으로 적을 만들고 다니다니… 공주윤의 충동적인 행동들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공주윤 때문에 나는 무척 곤란했다. 남의 사춘기야 신경 쓸 바는 아니라지만, 그러고서 우리 자리로 뛰어 올라오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봤냐, 봤어?”

공주윤이 떵떵거리며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 이기는 거 보여 준다고!”

흥분한 공주윤의 언성은 평소보다 두 배로 커서, 관중석뿐만 아니라 경기장 안의 모든 사람이 그의 외침을 들을 수 있지 싶었다.

더운 콧김을 내쉬는 공주윤을, 나는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러자 공주윤이 폭소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됐다, 됐어’… 그러더니 앞줄에 앉은 1학년의 뒤통수를 ‘탁’ 치고 떠나 버렸다. 난데없이 머리를 맞은 남자애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공주윤은 킬킬거리며 사라진 뒤였다.

이어지는 경기는 물론 훌륭했지만, 어째선지 공주윤의 경기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다들 한 풀씩 김이 빠진 얼굴로 턱을 괴거나 몰래 휴대폰을 하면서 경기를 관람했다.

마침내 등장한 마지막 선수는 권태오였다. 모두가 기대하며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을 전부 돌려받기에는, 경기는 터무니없이 짧았다.

심판의 신호와 거의 동시에 상대 선수가 권태오의 배 밑으로 파고들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를 이용해 아래로 그를 끌어당기려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었다. 권태오가 그의 팔뚝 밑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제 어깨 뒤로 넘겨 버리기 전까지는.

그 흔한 힘을 겨루는 과정조차 없었다.

“컥!”

돼지 멱 눌리는 비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자빠진 상대의 배에 옆구리를 기대어 눕힌 채, 권태오는 팔뚝으로 그의 윗가슴을 짓눌렀다. 상대방이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애쓰다가, 이내 경기장 바닥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상태였다.

기권 신호를 알아보고 심판이 신호하자마자 권태오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 준 다음, 마주 서서 인사하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동작이 너무 날쌔서 덩치와 안 어울린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경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뭐야. 이게 다야?”

그게 다였다.

몹시 가뿐한 기색인 권태오에 비해 상대 선수는 고통으로 온몸이 시뻘건 상태였다. 마주 서서 악수를 나눌 무렵에 그 빨강의 이름은 수치심 같았다.

모든 경기를 마친 권태오는 곧장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거 봐, 내가 볼만한 경기는 없을 거라 했지.”

그 순간 나는 무얼 발견했다. 짙은 체취를 풍기는 권태오의 붉게 달아오른 가슴팍 중앙에 작은 점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형제나 친구처럼,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점이 신기했다. 그 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는 플라스틱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집중해서 경기를 본 탓인가 조금 몽롱해진 채 눈을 굴릴 적에, 멀리 있는 공주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쯤 비운 생수병을 손에 들고 선 공주윤은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을 흔들어 인사할 수도 없었고 평소처럼 아는 척 묵례를 꾸벅할 수도 없었다. 왠지 지금은,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권태오가 힐끔 내 시선을 좇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공주윤은 등을 보이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이내 권태오가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나는 지은 죄도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딴생각에 잠긴 척 입술을 다물고 관중석의 빈자리를 눈에 담을 적에,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나는 권태오를 좋아하지만, 나와 가까이 있지 않고 먼발치에서 아주 남으로서 존재하는 권태오를 좋아한다는 걸.

이를테면 나는, 오늘의 권태오는 싫었다.

이찬희가 종알거리는 재미없는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권태오가 싫었다. 무조건 이찬희를 가장 먼저 쳐다보는 권태오가. 이찬희에게만 말을 걸고, 이찬희가 하자는 대로 하고 가자는 대로 가고 먹자는 대로 먹는 권태오가.

이찬희를 좋아하는 권태오가….

‘넌 아마 사람이 못 될 거야.’

무어라 떠들어 대는 애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생각했다.

‘아마 넌, 사람이 못 될 거야. 동굴 밖에서 이찬희가 불러 대면 곰인 채로 뛰쳐나가 버릴 테니까….’

나는 곰과 같은 권태오가 더는 재밌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온 학교의 잔디를 제초하는 바람에, 풀 냄새가 온 학교를 뒤덮은 일요일.

“안녕.”

권태오를 마주하자마자 나는 등 뒤를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내 뒤에 이찬희가 서 있나 싶어서였다.

“아, 응. …안녕.”

어색하게 대답하는 나를 두고, 권태오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주말 교문 앞은 평일의 풍경과 달리 텅 비어 있었고, 나나 권태오나 걸어갈 길은 하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권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끔힐끔 살필 적에 권태오는 평소와 달리 사복 차림이었다. 색은 까맣고 캡은 아주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고, 메이커 로고가 박힌 져지는 권태오의 몸에 딱 맞았다. 트레이닝복 바지는 한쪽 다리에만 흰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왜 교문에서 들어와?”

갑자기, 권태오가 말했다.

“어?”

“기숙사 살잖아, 너.”

훅훅 들어오는 게 말이 아니라 주먹처럼 느껴졌다. 내게 관심을 보이고 먼저 말을 거는 권태오가 낯설었고, 그러면서도 반가웠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그에게 친한 척을 할 뻔했다. 권태오를 둘러싼 수많은, 정어리 같은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이우신, 정신 차려.’

혼미한 기분을 감추면서 나는 손에 들린 택배 박스를 흔들어 보였다. 집개손가락에는 박스를 뜯을 커터 칼도 쥔 채였다.

“…이거. 택배 좀 받아 오느라고. 지난 주말에 여학생들 택배가 다섯 갠가 분실당해 가지고… 한동안 주말 택배는 위탁함에 못 둬서 경비실에서 받아 와야 하거든. 저기, 교문 앞에 경비실.”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늘어놓고 나니 좀 부끄러웠다.

권태오는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말이 없었다. 그 흔한, ‘그래?’ 하는 리액션조차 보여 주질 않았다. 잘생긴 얼굴은 뻣뻣해 보일 정도로 무표정했고, 두 눈은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이찬희랑 있을 땐 안 그러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따라 걷다가 이내 아차 싶었다. 권태오 입장에서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이찬희가 아니니까… 당연히 다르게 구는 거겠지.

‘내가 자기 따라가는 줄… 오해하진 않겠지?’

도서관과 학교 건물로 향하는 갈림길로 가지 않고, 권태오가 향하는 길대로 따라 걷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스레 조금 불안해졌다가, 이내 그 생각마저 털어 냈다. 권태오는 어차피 내 행선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을 터였다.

나란히 정보관을 지나 걸을 때쯤 ‘컹’, ‘컹’ 개 짖는 소리가 나를 구제해 주었다. 혹시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더 반가워하며 조심이의 개집으로 달려갔다.

“안녕, 형아 기다렸어? …너 밥은 왜 또 안 먹었어?”

그러고는 그 앞에 천천히 쭈그려 앉아 택배 상자를 내려놓았다. 얼른 받아 온 상자를 열려는데, 박스 테이핑이 집요하리만큼 두껍고 끈적끈적한 데다 조심이가 방해하는 탓에 잘 되지 않았다. 커터 칼 무서운 줄 모르는 개가, 내 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더니 마구 부비며 턱과 손을 핥아 댔다.

“아, 잠깐 비켜 봐. 베이겠다….”

그 바람에 엉거주춤 칼을 손안에 감춘 채 큰 개와 실랑이를 해야 했다. 그때 어깨 너머에서,

“씁!”

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놀라 돌아보자 권태오가 개를 향해 손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심아! 저리 비켜.”

‘…어.’

그러자 조심이가 고개를 빼내고 헥헥거리더니, 권태오를 향해 쫄랑쫄랑 다가갔다. 조심이의 머리 위, 까만 얼룩무늬를 만지는 권태오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모습을 끔벅끔벅 지켜보다가, 내가 물었다.

“너도 얘를 조심이라고 불러?”

“뭐?”

“아, 그거… 내가 붙인 이름이거든. 저기 팻말이 ‘개조심’이라서, 성이 개고 이름이 조심이라고….”

그러자 권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제 트레이닝복 바지에 침을 묻히며 달려드는 조심이를 손으로 밀어내면서는, 표정이 무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권태오는 10초가 지나서야 해 주었다.

“…다른 애들이 그렇게 부르길래.”

“아…, 그래? 나만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조심이를 부르는 애들이 많은 만큼 불리는 이름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애들이, ‘조심이’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는 조심이는 개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실망스러운 얼굴로 개집 주변을 맴돌다가 떠나가는 1학년들을 여러 번 본 적 있었다.

그래서 ‘조심아’라고 부를 때는, 내가 특별히 좋아서 따르는 줄 알았다. 남들도 다 조심이라고 부른다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딱히 나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구나.

“이 배신자 녀석.”

조심이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밀었다가, 이내 탈탈 털어 주었다. 그런 내 무릎 밑으로 권태오의 손이 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권태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택배 상자와 커터 칼을 제멋대로 가져가더니, 권태오가 내 택배를 뜯기 시작했다.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오는 건 평소 내가 싫어하던 행동이었다. 가방이나 필통을 멋대로 열어 보는 강건우에게 화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싫지가 않았다. 그저 놀라웠다. 굽힌 무릎을 모으는 것도 힘든지 엉성한 자세로 나를 따라 앉은 권태오가, 내 택배를 진지한 얼굴로 뜯더니 뒤적거리는 권태오가, 나는 신기했다.

끈끈하게 똘똘 뭉친 테이프를, 날이 잘 들지도 않는 커터 칼로 뜯어내더니 권태오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아…, 조심이 간식.”

작은 상자 안에는 개 간식이 가득했다. 후기를 쓰면 증정품이 있다기에 신청해서 받은 강아지 쿠키도 있었고, 하얀 스틱에 주황색 닭고기가 달라붙은 개껌, 기회가 되면 써 보려고 같이 산 귀청소용 약… 그리고 권태오의 손에 들린 것은, 강아지 전용 우유였다. 포장지에 ‘피부에 좋아요’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권태오의 손에 들린 우유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이게 뭐냐면….”

꽉 잠긴 마개를 돌려 열자 조심이가 킁킁거리며 고개를 들이댔다. 재촉하는 녀석을 달래면서, 사료 알이 가득 담긴 밥그릇에 우유를 졸졸 부어 주었다.

권태오는 내가 하는 동작들을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아주 민망해졌다. 어떤 말이든 해서 이 정적을 없애고만 싶었다.

“그…, 음…. 조심이가 요즘 밥을 잘 안 먹어. 사료가 맛이 없어서 그런 건지 날씨가 너무 더워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래서 가끔 우유 말아 주거든. 개가 먹어도 되는 우유로.”

“코코볼처럼?”

“응, 코코볼처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심이가 와구와구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권태오는 다리가 뻐근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려나?’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나는 박스 안의 간식을 하나하나 살폈다. 호박이 그려진 쿠키, 소간을 말렸다고 적혀 있는 아주 이상하게 생긴 간식들. 그러는 동안에도 권태오는 내 뒤에 서 있었다.

“…너 코코볼 좋아해?”

용기 내어 내가 물었다. 그랬더니 권태오가.

“응.”

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응’ 이라고. 코코볼, 좋아한다고….

조심이는 모든 간식을 하나씩,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맛봤다. 꼬리를 흔들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 조심이가 신나 보여서, 하마터면 나까지도 신이 날 뻔했다.

권태오는 한참 뒤, 8시를 알리는 종이 칠 때에서야 자리를 떴다.

‘혹시 지각한 건 아니겠지?’

운동부 애들은 매일 8시 정각부터 칼같이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하던데….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가는 권태오를 지켜보면서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다. 저렇게 걸어가도 되니까 저러는 거겠지. 오늘 훈련은 좀 다른가 보다… 생각에 잠겨 커다랗고 넓은 어깨를 눈에 담는데, 권태오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권태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잣나무 오르막길로 사라져 버렸다.

“휴….”

주먹으로 가슴 중앙을 꾹 누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쭈그리고 있던 무릎 뒤에 땀이 고인 것도 같았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권태오가, 전처럼 나를 불편해하진 않는 듯했다. 조금은… 친해진 것도 같았다. 내일 보자는 인사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나눠 본 것 중 제일 긴 대화도 나눴다.

착각하지 말고 오버하지 말자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기분은 별수 없이 좋아졌다.

권태오는 내 기분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애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유독 내게만 불친절하고 무뚝뚝했었다. 강건우랑도 부쩍 잘 지내면서, 내게는 대화할 기회조차 열어 주지 않았다. 이찬희를 중심으로 다 같이 수다를 떨다가도, 내가 말을 하면 그 즉시 권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은 자리를 떠 버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타이밍이 만들어 낸 우연이고 내 착각이었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 권태오는 친절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나한테 우산을 줬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쪽지로나마 먼저 해 주었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 운동장에서는 이온 음료도 줬고… 오늘도 상자를 대신 뜯어 준 걸 보면, 사실 권태오는 상냥한 성격인지도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리감에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권태오가 매일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권태오의 행동 하나,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걸까?

‘이거 봐, 지금도… 자꾸 생각하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래 열여덟 남자애들은 하루하루가 다른 법이었다. 강건우만 해도 1교시 땐 더워서 짜증 난다고 소리를 지르고, 2교시 땐 추워서 짜증 난다고 교무실까지 가 에어컨 리모컨을 훔쳐오곤 했다.

권태오도 그냥, 남자애일 뿐이다. 무심해서 변덕스러운, 그런 남자애.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택배 박스와 커터 칼을 챙겼다. 말린 닭고기가 듬성듬성 붙어 있는 커다란 우유 껌을 개집 안에 던져 넣자, 조심이는 뒤도 보지 않고 개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일까지 꼭꼭 아껴서 씹어 먹어. 알겠지?”

나에게도 내일까지, 아껴서 되새김질할 기억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수요일에는 작문 시험을 쳤다. 그런데 목요일이 되니 대뜸 교무실로 호출을 당했다.

그 바람에 나는 조금 불안했다. 마은 쌤도 아니고 국어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는데, 그럴 용무가 딱히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험에 관한 걸 텐데, 어제 시험은 잘 친 것 같은데….’

골똘해진 채 교무실로 들어가자 국어 쌤이 ‘어어’ 하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국어 쌤으로 말하자면 채홍고 정교사 중 제일 젊었고 눈이 엄청나게 큰 여자 쌤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른 학교에서 일하다가 채홍고 교감의 러브 콜을 받고 옮겨 왔는데, 이전 학교에서는 별명이 ‘왕따 쌤’이었다고 했다. 학생들 수학여행비로 회식하고 여행 다니는 교사 모임을 지적했다가 찍혔다나 뭐라나….

우리 또래 애들 앞에서 어떤 어른이건 왕따가 아닐 수 있을까. 나이를 꼬집어 마흔 쌤이라 불리는 마은 쌤도 그랬고, ‘이동하’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도 못된 별명을 꼬리표처럼 붙인 국어 쌤도 그랬다.

“우신아. 이리 와서 앉아 봐.”

앞에 놓인 스툴을 ‘탁탁’ 두드리며 국어 쌤이 말했다. 다가가 자리에 앉자, 아니나 다를까 국어 쌤은 작문 시험지를 꺼냈다. 심드렁한 척 표정을 관리하면서 나는 내 시험지에 매겨진 점수를 확인했다.

A+였다.

‘뭐야.’

점수를 확인하고 나니 김이 쭉 빠졌다. 힘줬던 어깨를 끌어 내리고 멀뚱멀뚱 앉은 내게, 국어 쌤은 초코 과자 두어 개와 뚱뚱한 요구르트를 건네주었다.

“선생님이 우신이 네 시험지를 봤는데 글이 너무 좋더라고. 우신이 네가 지금 1반이랬지?”

“네.”

채홍고에서 1반부터 3반까지는 암묵적으로 이과나 마찬가지였다. 개중에서도 나는 3학년 때 배울 심화 수학까지 정해 둔 학생 중 하나였다.

“흐음…, 혹시 백일장은 나가 볼 생각 없니?”

뜬금없는 제의와 함께 국어 쌤은 듣기 좋은 말을 줄줄 이었다. 문예부 애들보다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느니, 1학년 때 교내 대회에 제출했던 시도 너무 좋아서 아직도 기억을 한다느니… 줄줄 이어지는 영양가 없는 칭찬을 나는 귀에 담지 않았다.

대신에 질문했다.

“백일장이 언제인데요?”

“다음 주 금요일이야. 어때? 생각 있니?”

돌아온 답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금요일에 수학 경시대회 있어요. 교내 대회 상벌이 필요해서 백일장은 못 나갈 거 같아요.”

“아…, 그러니? 그래, 우신이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건 알아.”

“네. 그 뒤에는 과제할 것도 많고요. 그러고 나면 금방 2차 지필이에요.”

그러니까 나중에라도 백일장을 나갈 일은 없을 거란 의미였다. 지금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한국대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도움이 될 만한 행사가 아니라면 무엇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글 쓰는 데엔 별로 관심이 없나 보구나?”

국어 쌤이 말했다. 두 눈에 실망스러운 기색을 비치시는 걸 보니 내가 작문 시험을 잘 치긴 했나 보다 생각됐다.

“그런 건 아니에요. 소설도 좋아하고 시도 좋아해요. 선생님 수업도 정말 좋아하고요.”

“어머. 그래?”

“그런데 좋아하는 거만 하고 살 순 없잖아요.”

아무튼 칭찬은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하면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받은 과자를 주머니에 챙기고 돌아서려는 내게 국어 쌤은 뚱뚱한 요구르트 두 개를 더 내밀었다.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먹어.”

해야 할 말을 다 했는데도, 내 입술은 왜인지 삐죽거렸다. 국어 쌤의 얼굴과 A+를 받은 작문 시험지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한 개 더 주세요.”

그렇게 요구르트 네 개가 생겼다. 하나는 내가 먹었고 하나는 강건우, 하나는 이찬희, 남은 하나는 권태오에게 건네줬다.

“어, 땡큐.”

손의 온도 때문에 미지근해진 요구르트를 권태오는 흔쾌히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주말 드라마 속 신인 배우의 발연기를 흉내 내는 강건우를 쳐다보며 하하 웃었다.

‘그래,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지.’

애들 사이에 섞여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쫓는다고 필요한 걸 놓칠 필요는 없다…. 글을 쓰고 싶으면 아주 나중에, 성공한 어른이 된 다음 혼자 원고지에 끄적거려도 될 일이다. 그러나 입시는 지금 해야만 하는 당장의 일이다.

그 외의 것들은 대체품으로 만족하면 될 일이었다.

요즘은 학교생활이 간만에 재밌었다. 몰려다니는 무리가 생겼는데 그 안에 권태오가 있기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방과 후마다 권태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 됐다.

다른 애들이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닐 적에는 왜 저러는 걸까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알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서로 친하면, 자연스레 모여 다니게 된다는 걸.

요구르트 병의 녹색 비닐 뚜껑을 검지로 쿡, 쑤시는 권태오의 옆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사람마다 타고난 팔자가 있다’는 말. 그런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지 않기 위해 ‘팔자’라는 말로 핑계를 대곤 했으니까.

엄마는 남자 운이 없는 제 팔자를 탓하면서도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떠났다. 엄마가 말하는 ‘남자 운이 없다’는 문장 안의 ‘남자’는 젊은 나이에 덜컥 임신해서 낳은 아들인 날 뜻하는 거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제 팔자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할 팔자라고 했다. 사주에 방랑벽이 있다고 말이다. 그래선지 아버지에겐 책임감도 없고 줏대도 없고 직업도 없었다. 여기가 미국이었더라면 그런 아버지를 집시라고 불렀겠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런 아버지는 씨발 새끼일 뿐이었다.

씨발 새끼인 아버지는 제 아들이 학교는 잘 다니는지 끼니는 잘 챙기는지, 하물며 작년에 바꾼 휴대폰 번호가 뭔지도 아직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해에 서너 번 서울에 들를 때마다 아버지는 내 학년을 틀리게 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팔자가 싫었다. 내게 있어 ‘팔자’라는 건, 어른들이 각자 겪는 인과응보를 외면하고자 오용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처음으로 내 팔자가 참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보름도 못 지내는 팔자.’

사주를 보면 그렇게 찍혀 나오지 않을까… 나답지 않은 추측마저 하게 됐다. 미리 도착해 예습이나 할 요량으로 찾아온 화학실 앞, 문고리를 잡고서 내 뒷담을 듣자니 그러했다.

“요즘 우신이랑 재밌어 보여, 너.”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웃음기 섞인 발랄한 말투,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거나 아주 미세한 영향만을 남겨 둔 채 지나가 버린 듯 높은 어조…. 이찬희였다.

교내에는 나로서는 헷갈릴 수가 없는 목소리가 딱 둘 있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다 같이 잘 지내면 좋잖아.”

하나는 이찬희였고,

“갑자기 무슨 변덕이 분 거야, 이찬희.”

남은 한 사람은 권태오였다.

“왜 나한테 이우신이랑 친하게 지내라 마라 하느냐고.”

굵고 낮은 목소리에서 끓는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 먹었다. 눈알이 건조해지다 못해 쓰라릴 때까지 가만히 선 채, 들은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문맥은 뻔했다. 이찬희가 권태오에게 나와 잘 지내 달라 종용했고, 권태오는 그런 상황이 싫은 눈치였다.

갑자기 코코볼이 생각났다. 대뜸 내게 ‘안녕’ 하고 먼저 인사해 오던 권태오가, 그리고 일요일의 아침 공기가 생각났다. 상냥하게 구는 권태오 덕분에 좋으면서도 혼란스럽던 내 마음도 생각났다. 알고 보면 친절한 애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좋아했었다.

이찬희가 부탁해서 그런 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우신이는 부모님도 이혼했고, 학교도 장학금으로 겨우 다니는 거 같고. 친구도 건우밖에 없잖아.”

“동정하는 거네.”

“그렇게 말하지 마, 태오야. 우신이가 들으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일순 발뒤꿈치가 들썩였다. 방음이 잘 되질 않는 미닫이문을 박차듯 열고 싶었다. 그리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속상하진 않다고. 다만, 기분 좆같을 뿐이라고.

정말로, 기분이 좆같았다.

‘좆같애.’

좆같은데… 열 받고, 분하고, 짜증스럽고, 숨어서 남 뒷이야기나 하는 이찬희의 면전에 대고 욕이라도 퍼붓고, 권태오에게도 더는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그 모든 건 상상으로 그칠 뿐이었다.

귓가로 벙벙대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분한 와중에도 나는 그들 사이로 달려들지 못했다.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 최대한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책과 노트를 꽉 끌어안고 복도 반대편으로 도망치듯 걸었다.

답답한 내 행동의 이유야 뻔했다. 그래도 권태오가 좋아서였다. 이찬희가 시켜서 내게 잘해 줄 뿐이래도, 그렇게 얻은 가짜 우정이며 가짜 평화일 뿐이래도, 나는 그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권태오가 좋으니까.

‘동정하는 거네.’

그래, 권태오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가장한 친절은 알량한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 복도에 매달린 창틀 하나마저 부내를 풍기는 값비싼 사립 채홍고에서, 나는 이미 동정의 값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권태오는 역시 친절했다. 동정표로 건넨 다정이 그 정도라니 보통 친절한 게 아니었다. 친구 부탁으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놈과 마음에도 없는 우정을 다질 정도라면, 아주 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라도 권태오랑 어울리고 싶어 했던가. 이유를 불문하고 나한테 좀 잘해 줬으면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이찬희한테 보이는 다정의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나한테, 그래 줬으면 했던 거 같다.

이유가 있으면 좋았을 거다. 원인이 있으면 해결 방안도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유가 없다. 권태오가 좋은데, 권태오가 좋은 이유가 없다. ‘그냥’이었다. 그냥… 비 맞지 말라고 하나뿐인 우산을 덥석 건네주던 권태오가,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을 때마다 사소한 다정으로 날 붙드는 권태오가, 완벽한 껍데기를 갖고도 때로 지독하게 세상 모든 것에 무심해 보이는 권태오가… 그냥 좋았다. 내게 있어 권태오는 지나치게 매력적인 미해결 문제였다.

그래서 이 처참한 기분조차도 권태오를 좋아하는 마음을 죽여 놓지 못했다. 일순 하늘이 컴컴해 보였다. 크게 낙담해서 심장이 뛰는 속도마저 느려진 것 같았다. 손발이 다 저릿했다.

그런데도 나는 권태오를 위해서, 그 애는 원하지도 않을 변명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후우….”

답답한 숨을 연거푸 내쉬며 둘러본 사방은 어느새 야외였다. 도망자처럼 정신없이 걷다 보니 바깥까지 뛰쳐나온 것이었다.

넓은 운동장을 산책하는 여자애들이 보였다. 축구공을 차거나 농구공을 두들기는 남자애들도 보였다. 하늘은 검지 않고 오히려 높고 푸르렀다. 풀냄새, 꽃냄새, 여름 냄새가 풍겼다.

눈앞의 풍경은 청춘 영화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불 꺼진 객석에 혼자 앉은 관객이었다. 교내의 멋진 정원도 넓은 운동장도 따듯한 햇볕조차도 내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텁텁한 입을 헹구기 위해 나는 개수대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헹구다가, 결국 얼굴을 다 적시며 세수했다.

찝찝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기분이어서 쉽게 씻기질 않았다.

교복 소매로 물기를 닦으면서 나는 창문을 확인했다. 안에 비해 밖이 밝은지라, 복도 창문으로 내 얼굴이 훤히 비쳤다. 달걀귀신처럼 흰 얼굴에서는 성난 기분을 읽을 수 없었다. 내 표정은 차라리 따분해 보였다.

“우신아, 뭐 하고 있어?”

물방울이 튄 노트를 털어 내는데 누군가 내 침묵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슬리퍼를 신고 나온 장세라가 보였다.

“갈증이 나서.”

적당히 대꾸하자, 장세라가 ‘갈증이 나서…’ 하고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러더니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저럴까 싶을 만큼 진한 웃음이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에 쳐다만 보는데, 장세라가 머쓱한 듯 귀 옆머리를 넘겼다.

“아니, 보통 남자애들은 그렇게 말 안 하잖아. ‘목말라서’, ‘물 마셔’… 뭐 이렇게 말하지. 우신이 너는 좀 달라서…. 아, 칭찬이야, 칭찬!”

변명하듯 말하면서 장세라가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휘휘 흔들었다. 작은 얼굴에 붉은 홍조기가 돌았다.

너는 남들과 달라… 그렇게 포장하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에는 좋게 들리지 않았다. 장세라가 드러내고자 하는 호의가 무언지야 나도 알았다. 알지만, 내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나 그렇게 다르지 않아.”

내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웃음기 섞인 이찬희의 목소리를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이혼했고, 학교도 장학금으로 겨우 다니고, 친구도 강건우 하나뿐이라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게 특별하고 다르다는 걸까.

“나 그렇게… 막 다르지 않다고, 별로.”

내게 유별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더 잘한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괜찮았고 또 당당했다. 그런데 이찬희고 권태오고 간에, 도대체 왜 남들은 나를 다르게 취급하는 걸까.

선선한 바람이 내 귓가에 매달린 물기를 말렸다. 시원한 감촉에 눈을 내리감았다.

“어! 짱쎄!”

그러자 세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입을 벌린 채 날 쳐다보던 장세라의 어깨가 팔딱 움직일 정도로 큰 목소리, 강건우였다.

“얼굴은 또 왜 그렇게 빨개? 짱쎄 너, 혹시? 이우신 앞에서만 안 짱 쎄?”

“…미친. 뭐라는 거야?”

강건우가 끼어들자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분위기에 색깔이 있다면 나는 무색, 장세라는 분홍, 강건우는 무지개일 것이었다. 어떤 상황이건 누구 앞에서건 강건우는 거침없이 농담하며 웃길 줄을 알았다.

그런 강건우를 손가락질하며, 장세라가 말했다.

“우신아, 이거 봐. 이게 보통 남자애의 어휘력이야.”

그 말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고자질하듯 말하는 장세라의 태도를, 강건우는 즉시 복제해 냈다. 다리를 배배 꼬며 서더니 장세라를 마주 손가락질하며, 듣기 거슬릴 정도로 높은 목소리를 내는 식이었다.

“우시나앙, 이거 봐앙. 이게 보통 남자애드르으….”

“아, 강건우! 이 또라이 새끼야. 그만 안 해?”

장세라가 버럭 윽박을 질렀다. 화를 내며 펄펄 뛰다가도 내 눈치를 살피는 장세라가, 조금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떨떠름하니 선 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덜미로 흐르는 개수대 물을 마저 닦아 낼 뿐이었다. 어느새 소매가 물에 젖어 축축했다.

장세라는 머뭇거리며 손을 제 치마 주머니에 넣었는데, 무얼 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두 손을 등 뒤로 감추더니 떠나 버렸다.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장세라의 뒤로, 강건우가 들으라는 듯 폭소했다.

못된 초등학생 같은 강건우의 태도에 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러고는 참았던 말을 꺼냈다.

“강건우. 장세라 좀 그만 놀려.”

“어? 왜, 왜, 왜? 쟤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만 놀리래? 우신이 너 장세라 좋아하냐? 너네 쌍방이었어?”

작은 악마처럼 킬킬거리는 강건우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듯했다. 팔짝팔짝 뛰면서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팔뚝을 잡고 앞뒤로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뻐근한 어깨를 뒤로 빼내며 나는 강건우의 손을 뿌리쳤다.

“안 좋아해.”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꾹꾹 누르듯 말했다.

“그러니까 괜히 자극하지 말아 줘. 너 때문에 등 떠밀려서 장세라가 자기 마음 들킨 거 알면, 그래서 억지로 고백이라도 하면… 내가 불편해질 건 생각 안 해?”

구태여 뱉을 예정이 없던 말이었다. 그냥 속으로만 몇 번 떠올렸다가 지워 버리곤 하던 근심이었다.

“장세라는 어차피 나한테 고백할 생각 없어. 내가 자기 안 좋아하는 거, 뻔히 아니까. 그러니까 장난치지 마. 걔 기분은 안중에도 없이, 네 마음대로 굴지 말라고.”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평정한 척 멀쩡한 척 무심한 척, 상황이 허락했기에 그런 척 연기했을 뿐이지 나도 결국은 기분에 휘둘리는 십 대 남자애였다.

“어, 어…. 알았어.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고… 그냥 재밌어서 놀린 건데. 미안하다.”

멋쩍은 듯 대답하는 강건우의 반응에 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계획에 없던 말을 아무렇게나 뱉어 버린 게 후회됐다.

뺨은 이찬희에게 맞고, 기분은 권태오 때문에 상해서는, 괜히 강건우에게 분풀이를 해 버린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내 고개는 땅으로 향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던 강건우는 한발 늦게 기분이 상한 듯, 삐딱하게 섰던 자세를 고쳤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야, 이우신.”

“…응.”

“너, 알고 있으면서 왜 말 안 했냐?”

눈을 위로 추켜 뜨고 살펴본 강건우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목소리마저도 상한 심기를 드러내듯 데면데면한 채였다. 웃지 않는 강건우를 보는 게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농담하고 무언가를 흉내 내고 기분 좋던 강건우인데, 지금의 그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장세라가 너 좋아하는 거 알면서 왜 말 안했냐고, 나한테.”

강건우가 내게 말했다. 몰아붙이는 듯한 말투에 나는 괜스레 발뒤꿈치가 근질거렸다.

“어…, 그건 장세라 일이니까.”

“그게 왜 장세라 일이야? 걔가 너 좋아하면 그건 네 일이지. 내가 너 알아채라고 존나 나댄 거잖아. ‘별 관심 없다’, ‘안 사귈 거다’. 네가 그렇게 말만 했어도 내가 그랬겠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머뭇거렸다. 괜한 분을 섞어 싫은 소리를 꺼낸 건 나인데, 강건우가 받아치니까 이제는 할 말이 없었다.

네 말이 맞아, 건우야, 미안해. …그렇게 말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이우신.”

강건우가 말했다.

“우리 친구 맞지?”

눈썹 끝을 내리고서 그렇게 묻는 강건우를 마주 본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입술은 소리 없이 벙긋거리고 두 눈은 멍하니 깜빡일 뿐이었다.

우리 ‘친구’… 우리 친구 맞지… 강건우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온 순간 두통이 일었다. 두개골 안에서 생각의 주머니가 팽창하는 듯했다. 좀 전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정돈되지 못한 상념들이 이리저리 엉겨 붙었다.

이찬희의 부탁으로 인해 내게 상냥했던 권태오가. 그런 줄도 모르고 좋다고, 잠들 때도 일어날 때도 설레었던 바보 같은 이우신이….

“…어, 야. 우신아, 왜 그래.”

문득 강건우가 표정을 고쳤다. 찌푸렸던 눈살이 다림질이라도 한 듯 활짝 펴졌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며 강건우는 내 앞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그러더니 고개 숙여,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너 울어?”

강건우가 물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뭐? 아니.”

이상한 질문을 받는 바람에 생각의 흐름이 뚝 끊겼다. 강건우의 반응이 예사롭지는 않기에, 손을 들어 두 뺨을 문질러 닦았지만 눈물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두 눈도 건조했으면 건조했지 운 흔적 따위는 없었다.

아마도 강건우가 보기에 내 표정이, 그만큼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얼른 표정을 고치고서 나는 똑바로 섰다.

“건우야. 기분 상하게 말해서 미안해.”

“어? 어, 그래. 왜… 왜 갑자기 그러냐. 괜찮아, 임마.”

“…있잖아, 건우야.”

“어, …왜?”

한풀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강건우가 대답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물자 강건우의 두 눈이 맹렬하게 내 입술을 노려봤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가,

‘이미 늦었나. 그냥 강건우랑 가끔 피시방이나 가고, 그럴 때가 더 재밌었던 것 같은데.’

…재차 다물었다.

“아, 뭔데에!”

강건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구르는 키 큰 강건우의 팔뚝을, 나는 토닥토닥 두들겼다.

“너 이찬희랑… 벌써 많이 친해진 거지?”

“어? 응. 그렇지. 찬찬찬이랑 많이 친해졌지! 권태랑도 뭐, 쫌이지만 친해졌다고 볼 수 있겠지. 왜? 이 형의 친화력이 부럽냐?”

그러더니 으스댄다.

나는 강건우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예리한가 싶다가도 단순한데, 멍청한 건 또 아니었다. 그냥 천성이 밝은 거였다. 강건우는 기준점이 따듯한 양지에 있는 사람이라서, 뜨겁게 화를 내다가도 금세 가라앉아 헤실거렸다. 서운할 때는 차갑게 가라앉은 듯하다가도 이내 따듯해져 괜찮다고 인사했다.

“…됐어, 그럼.”

나는 못내 강건우가 부러웠다. 내 기준점의 온도도 강건우 같았더라면 사는 게 좀 더 편했을 텐데,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강건우를 좋아했다.

강건우가 이찬희와 친해졌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권태오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는 은근히, 유도부 에이스와 친구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강건우였다.

이제 와서 다시 떨어져 지내자고 말할 자격이 내겐 없었다. 나야 자발적 아싸 생활로 돌아가면 그만이라지만 강건우는 반 회장이었다. 내 기분 하나 때문에 불편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강건우에게 너무한 일이었다.

“화학실이나 가자…, 늦겠다.”

맥 빠진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나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강건우는 황당하다는 듯 쿵쿵거리는 발소리로 내 뒤를 쫓았다.

“아, 이우신. 너 진짜 왜 그래. 갑자기 이찬희 얘기는 왜 하는 건데. 어?”

“됐어. 이것도 말 안 할래.”

“너 삐졌냐? 지금 삐진 거야, 그지? 참나, 지는 존나 나한테 잔소리 해 놓고, 어? 이 형님이 몇 마디 거들었다고 놀라 버렸냐? 응?”

말을 거든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닌데….

“야, 야아, 야아아!”

강건우의 외침을 들으면서 나는 그냥 걸었다.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강건우가, 그냥 전처럼 둥글둥글하니 바보 같아지길 바라면서.

제가 건넨 질문에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기를 원하면서.

내 일상은 납작해졌다. 매 순간 생기 넘치는 얼굴로 감정을 쏟아내는 남자애들 사이에 끼여서, 나는 종이 인형이었다. 이렇다 할 기분을 느낄 필요 없고 표정을 가꿀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런 종이 인형.

강건우와 이찬희에 이어 권태오와 같은 무리에 끼게 된 연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자, 그밖에 다른 무엇조차 깊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무료하고 납작하고 지루했다.

마음은 붕 뜬 채, 몸은 적당한 모양새로 세 사람 사이에 끼여 지내는 동안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한 주 만에 나는 멀쩡한 척 행세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가끔 강건우가 내 어깨를 툭 쳐도,

“기말 공부하느라 밤새서 그래. 졸려.”

공부벌레다운 답안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하여간 벌써부터 유난’이라며 혀를 내두르고 몇 마디 농담하고 나면, 화제는 다시 이찬희가 구매한 새로운 게임기로 넘어가고는 했다.

물에 떨군 기름처럼 둥둥 뜬 나를 벌컥 가라앉힌 건 뜻밖에 날아든 공이었다. 비유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로, ‘공’이었다.

그 공은 대뜸 우리에게로 날아왔다. 급식에는 스파게티가 나온 날, 강건우와 겨루기라도 하는 양 밥을 세 그릇씩 먹은 점심시간, 훈련을 위해 채홍관으로 가는 권태오를 배웅한답시고 넷이서 잣나무길을 산책하듯 걷던 와중이었다.

강건우는 새로 익힌 성대모사를 선보이고 있었고, 이찬희는 그를 보며 웃기 바빴다. 배웅이라는 핑계가 무색하게도, 정작 권태오는 가장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눈앞에 막 펼쳐진 운동장 풍경을 구경하는 건 열의 중앙에 낀 나뿐이었다. 그 바람에, 누군가 뻥 걷어찬 공이 날아오는 걸 발견한 것도 나뿐이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이찬희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대단한 정의감에 사로잡혀서도, 선의나 호의로 포장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공이 날아오는데 거기에 사람 머리가 있으니까. 엉겁결에 그랬다.

그러나 내 반사 신경보다는 누군가 힘을 다해 찬 공이 더 빨랐다. 이찬희를 옆으로 당기는 동시에 내 상체는 앞으로 훅 쏠렸고, 축구공은 내 얼굴을 쳤다.

일순 ‘퍽’ 소리가 울렸다. 얼굴 오른편을 강타한 공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한쪽으로는 공이, 한쪽으로는 내 머리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잠깐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팠다. 무지하게 많이 아팠다.

그 순간에는 공에 맞은 얼굴보다도 바짝 당겨진 목의 통증이 더욱 컸다. 휘청일 새도 없이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러나 주저앉은 엉덩이며 힘이 풀린 상체는 딱딱한 운동장 바닥의 흙이 아닌, 단단한 품 안으로 떨어져 안겼다.

“아… 윽.”

양다리를 완전히 뻗어 버린 다음에야 신음 소리가 나왔다. 골 안이 깨질 듯이 울리고 눈앞이 시뻘겋게 번져 보였다. 아파. 아팠다.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못 감추면서, 나는 두 손으로 눈두덩이와 머리를 되는대로 감쌌다.

“아…, 씨발 새끼야!”

“괜찮아?”

굵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나는 멀리 운동장에서 들려왔고, 하나는 내 귓가에 바짝 붙은 채였다.

“개새끼야, 공을 어디다 차는 거야?”

저 멀리서 울려 대는, 성난 목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공을 찬 놈을 향해 펄펄 뛰며 윽박을 지르는데,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살필 수가 없었다. 눈이 너무 아파서 똑바로 떠지지가 않아서였다.

골 안이 웅웅 울리고 꽉 감은 눈꺼풀 사이로는 눈물이 삐질삐질 흘렀다. 이러다 실명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알이 아릿했고, 또 뜨거웠다. 허둥지둥하는 인기척과 ‘우신아, 괜찮아?’ 하는 목소리들이 뒤엉켰다.

이내, 다가온 손이 내 얼굴을 붙들었다. 뺨에 닿는 손바닥의 감촉이 까슬까슬하고 딱딱했다.

“눈 좀 보자.”

“아, 아파…, 아파….”

“눈 떠 봐.”

단단한 목소리에 나는 눈살을 움찔움찔 찡그렸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억지로 치우고 눈을 뜨려는데, 경직이라도 된 것인지 눈꺼풀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눈물은 자꾸만, 아픈 오른쪽 눈에서만 줄줄 흘러나왔다.

그나마 덜 아픈 반대쪽 눈부터 살살 떴다. 그러자 권태오가 보였다. 나를 받쳐 안은 채 권태오는 뒤로 넘어진 자세였고, 두 손으로 내 두 뺨을 콱 쥔 채였다. 가끔씩 훔쳐만 보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외꺼풀 눈동자 안에, 잘 보면 내 얼굴이 비칠 것만 같았다.

놀란 바람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권태오랑 같이 넘어졌나? 우리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까지 가까웠나?

“놔, 놔줘….”

“눈.”

“…이거 좀, 놔줘.”

나 좀 놔 달라고, 재차 부탁하듯 말해도 권태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제대로 뜨질 못하는 내 오른쪽 눈을, 권태오가 제멋대로 건드렸다. 상태가 어떤지 걱정스럽기는 해서, 나는 그 손길까지 거부하진 않았다.

그가 엄지와 검지로 살짝 벌리자 그제야 눈이 떠졌다. 파르르 떨리는 느낌과 함께 고여 있던 눈물이 뜨겁게 뺨을 적셨다.

“…….”

이내 권태오는 탄식하듯 더운 한숨을 훅 쉬었다. 아픈 와중에도 콧등에 닿는 그의 입김이 간지러웠다. 내 턱을 잡고는 이리저리, 얼굴 곳곳을 살피는 눈동자는 그저 새카맸다. 조금은 화난 것도 같았다.

운동선수니까 부상에 익숙하겠거니 생각했다. 뭐라고 진단이라도 내려 줄 줄 알고 내맡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권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내 얼굴을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왜, 표정…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쓱, 권태오의 엄지손가락이 내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잠깐의 침묵을 못 견디고 다가온 건 강건우였다.

“아, 뭐 하는데? 양호실부터 데려가야지. 야, 우신아. 일어날 수 있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권태오의 다리 사이에 자빠져 있던 몸을 얼른 일으켰다. 그러자 눈알 위로 아지랑이가 훅 피어올랐다. 어지럼증에 두 손으로 이마를 짚자, 강건우가 나를 부축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알아서 걸을게.”

비틀비틀 일어난 내 무릎을 강건우가 탁탁 털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넘어지고 부딪친 충격보다도, 강건우가 털어 대듯 치는 손길이 더 아팠다.

그리고 이찬희가 보였다. 우두커니 멈추어 선 채 이찬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였다. 이찬희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고, 아무런 동작도 보이지 않았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란 목을 뻗은 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서 나를 볼 뿐이었다. 언제고 가지각색의 감정으로 넘실거리던 큰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나는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야! 사람 다니는지는 보고 공을 차야 할 거 아냐?”

강건우가 귀청 떨어지게 큰 소리를 내지르다가, ‘어어’ 하며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다.

“…쟤네 왜 지들끼리 싸우냐?”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 살피자 운동장 정중앙에 우르르 모여든 무리가 보였다. 대다수 어영부영 모여든 구경꾼이었고 중요한 건 무리 중앙에 선 두 사람이었다.

체육복을 입은 남자애 하나가 흙바닥 위에 넘어져 있고, 덩치 큰 놈이 그를 발로 걷어차고, 또 밟고 있었다.

공주윤이었다.

“…뭐 하는 거야?”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당황스럽기는 강건우도 매한가지인지, ‘허’ 한숨 쉬며 제 이마를 문질러댔다.

“몰라. 지들끼리 싸움 났나 본데…. 아니, 저럴 게 아니라 여기 와서 사과를 해야지!”

“됐어, 그냥 갈래.”

눈알에 쏠렸던 더운 통증이 점차 피부로 번져 가는 듯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공에 맞는 사고야 달에 한 번씩은 있는 흔한 일이었다. 조그마한 여자애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같은 남자끼리 축구공 좀 맞았다고 울고불고 야단을 떤 것 같아 솔직히 좀 쪽팔렸다.

주춤거리며 왔던 길을 돌아가는 내 팔뚝을 큰 손이 덜컥 붙들었다.

“어디 가.”

고개를 들자 그림자가 훅 끼쳤다. 잣나무 잎새마저 파고드는 햇볕으로 온 사방이 쨍쨍한데, 권태오의 옆에만 서면 유독 그늘이었다.

“나 양호실….”

목소리가 신음하듯 흘러나왔다. 눈은 아프고, 기분은 쪽팔리고, 권태오를 마주 보기는 조금은 무섭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넘어져도 하필 권태오를 깔고 앉은 것마저도 창피했다.

빨리 사라지고픈 마음에 권태오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를 뒤로 밀어내고, 다가온 강건우까지 밀쳤다.

“…쪽팔리니까 야단 떨지 좀 마.”

그러고는 돌아서 걸었다. 사실 발목도 조금 아팠는데, 절뚝거렸다가는 더 시선이 몰릴 것 같아 티 내지 않고 저벅저벅 움직였다. ‘야아’ 하며 강건우가 내 뒤로 쫓아왔고 권태오도 조용히 따라붙었다.

“우신아. 어떻게 해 줄까?”

그리고 대뜸, 이찬희가 내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붙어 선 적이 있던가 싶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대고서 거의 귓속말에 가깝게 속삭인 소리였다. 그 바람에 목덜미의 솜털이 오스스 서는 듯했다.

몽롱한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조용했으면 좋겠어. 아무도 안 따라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대답하자.

“그래, 그럼.”

그러더니 이찬희가 돌아섰다. 강건우와 권태오를 두 팔로 붙들고, 무어라 말하는 이찬희를 멍하니 쳐다보다 나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혼자서 허둥지둥 잣나무 길을 완전히 벗어나자 정말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무서운 얼굴로 나를 살피던 권태오도,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던 강건우도 없었다.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얼굴의 통증 때문에 머릿속은 아직도 멍하기만 했다. 오늘의 통증과 옛날 일의 기억들이 한데 뒤엉키며 떠올랐다.

‘어디서 이런 등신 같은 게 나왔을까?’

끌끌 혀를 차며 나를 괄시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열네 살 즈음인가, 길가에서 제 자식을 구박하는 남자를 말리려다 심부름 중이던 소주병을 다 깨먹고 돌아온 날 그런 말을 들었었다.

여러모로 나는 아버지와 달랐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쓸데없는 동정심이 많아서 문제라고 했다. 그 쓸데없는 동정심을 남들이 베풀어 준 덕에 먹고 사는 주제에 웃기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나서서는….’

보는 눈이 없게 되어서야 마음 편히 절뚝거리는 내 옆으로, 이찬희가 다가왔다. 두 사람을 떼어 놓고는 나를 찾아 달려왔는지 숨을 헉헉거리는 채였다.

이찬희는 말없이 내 팔뚝을 붙들어 쥐었다. 부축해 주려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사양하기에는 힘에 부쳐 그 애에게 기대다시피 하며 양호실로 향하는데, 왠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우신아, 많이 아파? 괜찮아?”

그렇게 묻는 사람치고, 이찬희의 표정에는 걱정 한 올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신나 보였다.

“아까 나 지켜 주려고 그런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몸이 나간 거야.”

겨우 도착한 양호실은 텅 비어 있었다. 환자도 없었고 선생님도 없었다. 문이 열려 있듯이 창문도 열려 있는 채였다.

교내에서 가장 무방비한 공간의 중앙 침대에 걸터앉아 나는 숨을 골랐다. 이찬희도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허억’, ‘허억’ 숨을 골랐다. 나를 쫓아 달려오고, 부축해 주며 걷느라 이마 위로 땀방울까지 흘리고 있었다.

“…우신아, 아까 말이야. 네가 안 막았으면 내가 맞았을 거야. 머리 위로 쐐액 하고 뭐가 지나가더라.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

“어…, 그래.”

고통으로 얼얼하고 눈물로 희미하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오묘하게 흐려 보이던 이찬희의 얼굴도 이제는 아주 잘 보였다.

이찬희는 웃고 있었다.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채, 그 애는 웃고 있었다.

‘공 맞은 건 난데… 왜 얘가 울지?’

이내 훌쩍훌쩍 소리까지 내는 이찬희를, 나는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웃다가 울다가 하는 이찬희는 내 정신머리로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그렇잖아도 얼굴이 다 아픈데, 공도 안 맞았고 넘어지지도 않았으면서 놀랐다는 이유만으로 우는 이찬희를 달래 주고 싶진 않았다. 괜찮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말해 주기도 이상했고, 그냥 이 어색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 주었으면 바랄 뿐이었다.

얼마간 혼자서 울음 짓던 이찬희는 어느 순간 눈물을 그쳤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눈물 자국을 닦아 내면서, 이찬희가 내게 물었다.

“날 왜 그렇게 봐?”

두어 번 눈물을 훔쳐 냈을 뿐인데 이찬희의 얼굴은 대번에 멀쩡해졌다. 표정이라 부를 것도 없었고 감정이라고 읽어 내릴 무엇도 없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평소보다 반 톤 내려간 음성으로 건네 오는 질문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속으로는, ‘어라’ 싶었다. 뭔가 이상했다. 대화의 흐름이라고 해야 할지 이찬희의 표정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간에 분명히 무언가가, 영 이상했다.

그러나 의구심에 붙일 이름을 몰라서, 나는 그 점을 따질 수도 없었다. 관성적으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아, 미안. 그냥… 네가 울길래.”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가끔 말이야, 우신이 너 은근히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어?”

“네가 너무 빤히 봐서 나 부끄러울 때가 있다고.”

그러더니 다시, 이찬희는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며 고개를 돌리고 웃더니 잠깐 동안 양호실에 놓인 바퀴 달린 의자를 쳐다보았다. 초점을 어디 둔 건지 멍해 보이는 눈길이었다.

이내 이찬희는 의자 위에 털썩 몸을 앉혔다. 헐떡이는 숨도 북받쳤던 울음도 말끔하게 정돈된 얼굴은 다시금 새하얬다.

“우신이 네가 보기엔, 내가 한심하지? 맨날 별것도 아닌 일에 울기나 하고….”

또 시작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조금 지루해졌다. 고작해야 몇 주 전 일일 뿐인데 부쩍 옛날처럼 느껴지는, 구름다리에서의 말다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손을 들어 나는 얼얼한 이마를 꾹 눌렀다.

“아냐, 별로 한심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 성격이 좀… 부럽기는 해.”

“부럽다고? 하하, 우신이 네가 날 부러워해? 왜?”

“어…, 되게 순수하구나 싶어서. 다들 널 좋아하기도 하고….”

“하하하.”

칭찬도 아니고 비난도 아닌 말에, 이찬희가 웃었다. 아랫니가 보이도록 입을 열고 크게 웃었다. 그 바람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피부 위로 따끔따끔, 통증처럼 느끼던 위화감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이찬희가 원래 이렇게 웃었던가? 이렇게 크게 웃고, 이렇게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던가? 뭔가 이상했다….

“아니야, 우신아. 나는 네가 부러운데?”

“…내가?”

이찬희의 언성이 전과 달리 컸다. 거의 소리치듯 말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응. 너는 뭐든 알아서 잘하잖아. 그 점이 되게 자유로워 보이거든. 난 맨날 엄마가 귀찮게 굴어. 밥은 먹었냐, 몸은 어떠냐, 지금 어디냐고 막 전화하고. 진짜 성가셔 죽겠어. 집에 잘 들어갔다고 말해 주는 메신저 이모지도 하나 샀다니까?”

“아…. 그래….”

“그 바람에 내가 좀 응석받이인 거 같아. 우신이 너는 되게, 어른스러운데. 그런 점이 나는 참 부러워.”

와르르 쏟아지는 말이 너무 빨랐다.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 끼어들어 무어라고 말을 할 수도, 맥락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난 태오가 챙겨 주지 않았으면 아마, 출석 점수도 다 못 채웠을 거야.”

“…그렇구나.”

벙찐 채 그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는 뚝 끊겼다.

제 이야기를 마친 것에 만족한 듯, 이찬희는 교사용 의자에 등을 푹 기대고 앉았다. 바닥을 툭, 치는 그 애의 하얀 스니커즈를 나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제자리에서 이찬희의 몸이 의자와 함께 매끄럽게 좌로 돌아갔다가, 천천히 우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펼쳐졌다 굽혀지는 무릎으로 인해 그의 다리가 늘어났다가 줄어들길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입 안은 대번에 씁쓸해졌다. 나라고 어른스럽고 싶어서 어른스러운 게 아니었다. 나라고 열심히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혼자 크고 싶어서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

용을 쓰며 열심히, 혼자 커서는, 누구 말마따나 ‘장학금 받으면서 겨우’ 들어온 학교에서 이찬희에게 갈 공이나 대신 맞아 줄 계획 따윈 세운 적이 없었다.

“…….”

그러고 보면 이찬희에겐 내가 참 웃긴 놈일 것 같았다. 제대로 된 부모 없이 혼자 커서는 이 비싼 고등학교에 기어들어 와서, 아등바등 성적에 매달리는 나를 동정하던 이찬희였다. 오죽하면 제 친구인 권태오에게 좀 잘해 주라고 부탁까지 했을까.

그랬더니 그, 예의 ‘불쌍한 이우신’이 날아오는 공까지 막아 줬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전래동화에 빗대자면 은혜 갚은 까치. 소설에 빗대자면 에드거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 그쯤 될까?

‘얘한테는 내가, 도대체 얼마나 우스울까….’

이찬희와 나의 대화는 거기에서 그쳤다. 자리를 비웠던 양호 선생님이 벌컥 문을 열며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쌤한테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러면서 양호실 문을 가리키기에, 나는 그제야 ‘비상시 연락망’이라는 메모지가 붙은 걸 발견했다. 이찬희에게 정신이 쏠린 나머지 양호실의 그 무얼 살필 새가 없던 탓이었다.

이내 선생님은 내 앞에 마주 앉아, 아픈 눈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렇게 심하게 맞았냐’고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나는 눈보다도 골이 더 아팠다. 너무 심하다, 학폭위를 열어야 할 수준이다… 하며 선생님이 오버하는 만큼 내 심장은 차분해졌다.

‘학폭위는 무슨….’

그런 데에 불러올 부모도 없는데요.

뒤늦게 손거울을 통해 살펴본 내 몰골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 반쪽에는 벌써 도넛 모양 멍울이 져 있었고, 오른쪽 눈은 실핏줄이 죄 터져 흰자위에 빨간 실 같은 핏줄 자국이 가득했다.

‘으, 징그러워….’

이런 눈을 하고서는 권태오 앞에서 질질 짰다니.

딴생각에 잠겨 쪽팔려하는 내 귀와 머리를 양호쌤은 유심히, 오래도록 살폈다.

“음, 우신아.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기는 하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서 진단은 받아 보는 게 좋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를 맞은 거잖아? …선생님이 외출증 끊어 줄 테니까, 병원부터 다녀오자.”

다음 수업이 뭐더라… 국어였던 것 같다. 국어 쌤의 성향을 떠올려 보면, 그나마 빠져도 괜찮은 수업이었다. 오늘 치 수업 범위인 시 두 편 정도야 나중에 찾아가 여쭤보면 기본 필기쯤은 보여 주실 터였다.

평소 같았더라면 어디가 아프건 말건 일단 교실로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쑥덕거리면서 내 상처를 힐끔거릴 반 애들의 표정과 눈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가 쏠렸다.

“찬희, 너는 먼저 교실로 돌아가고.”

외출증을 엮은 종이 뭉치를 꺼내면서 양호 선생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찬희는 아직도 선생님 의자에 앉은 채,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얼른 가 달라는 뜻을 담아 나는 이찬희에게 손짓했다.

“저도 우신이랑 같이 병원 다녀오면 안 돼요? 우신이 저 지켜 주려다가 공에 맞은 거란 말이에요.”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도 이찬희는 나를 무시했다. 그 뻔뻔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찬희가 종알종알 건넨 말에 양호 선생이 의외라는 듯 나와 이찬희를 각각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서로 다른 타입인 두 학생이, 공도 대신 맞아 주는 친구 사이라니 미심쩍어하는 눈짓이었다.

“…그랬어? 진짜?”

선생이 묻는 말에 이찬희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럴 적에 눈썹 끝은 아래를 향했고 눈동자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묻어났다.

“네에, 유도부 애들이 축구하다가 공을 세게 차 가지고…, 저한테 온 공을 우신이가 대신 맞았어요. 그치, 우신아? 나 지켜 주려다가 그런 거잖아.”

아니라고 말해 봐야 듣지 않는구나…. 피로감에 못 이겨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러자 이찬희가 웃었다.

한참 더 무용담을 늘어놓던 이찬희는 끝끝내 양호 선생님에게 쫓겨났다. ‘병원’란에 서명된 외출증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나도 조금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출하는 김에 문제집도 두어 권 사 와야겠다 싶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서려는 내 등을, 양호 선생님이 느리게 토닥거렸다. 다정한 조언도 뒤따랐다.

“우신아. 앞으로는 대신 맞지 말고 너부터 피해. 네 머리라고 돌로 된 건 아니잖아.”

“…대신 맞으려고 맞은 게 아니에요.”

무겁게 느껴지는 손발을 움직여 나는 양호실을 나섰다. 시간은 수업 종이 울리고도 한참이나 지나 있었고, 복도며 운동장을 맴돌던 소란스러운 발들은 각자 교실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양호실 문 옆에는 키 큰 남자애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흙 알갱이가 잔뜩 묻은 회색 운동화, 굵은 장딴지가 훤히 보이는 체육복 반바지, 땀과 물로 젖은 흰 티셔츠. 열이 올라 붉은 팔뚝과 목덜미, 잔뜩 찌푸린 눈썹과 성나 보이는 눈매까지… 발끝에 머무르던 시선을 얼굴로 옮기자니 자연스레 고개가 위로 들렸다.

내 시선이 얼굴에 닿자마자.

“어! 야, 공신. 많이 다쳤….”

공주윤도 나를 발견했다.

“아, 이 씨발… 너 눈이 왜 그래?”

성큼성큼 다가오는 공주윤을 보며 나는 다소 뻣뻣해졌다. 허리춤에 열이 오르고 양발가락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망감인지 위기감인지 모를, 묘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얼핏 보인 실루엣을 잠깐이나마 권태오라고 착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 당장은, 공주윤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실핏줄이 터졌대.”

느릿느릿 대답하는데 대뜸 공주윤이 내 턱을 부여잡았다. 제 고개 앞으로 잡아당기며 훑어보는 눈길에 못다 푼 성질이 남아 있었다. 공에 맞은 눈보다도, 공주윤이 당기는 손길이 더 아팠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나 병원에 가야 돼서…. 너도 교실로 들어가. 수업 종 쳤잖아.”

“걱정돼서 와 줬더니 뭐라고?”

공주윤의 눈동자가 좌로, 우로 움직이며 내 두 눈을 살폈다.

‘누가 내 걱정을 해 달랬나….’

불퉁하게도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공주윤을 싫어하진 않았다. 따지자면 좋아하는 축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하지만 터놓고 말해, 이런 식으로 공주윤과 엮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이, 성질 불같고 때론 지나치게 솔직한 남자애가 어디 가서 담배를 피우건 술을 먹건, 다른 누구와 어울리건 그런 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주윤이 나를 걱정한다면, 또 그 이유로 하여금 다른 학생을 때려눕히고 걷어차 댄다면, 그 바람에 가뜩이나 안 좋은 평판이 악화되고 운동부 생활에 지장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별수 없이 내가 알아야 하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별로 안 아파.”

선을 그어 놓고자 나는 뒤로 한발 물러섰다. 본드라도 발랐는지 재차 따라붙는 큰 손도 애써 떨쳐 냈다.

그러자 공주윤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별로 안 아픈데 병원은 왜 가는 건데?”

“머리를 맞았으니까 기본적인 검사는 하러… 아, 됐어. 됐으니까 너도 네 교실로 가.”

너무 피곤해….

눈을 내리깔고 나는 주머니 속 지갑을 찾아 꺼냈다. 양호 쌤의 서명이 적힌 외출증을 집어넣고 안에 든 현금도 확인했다. 병원까지 전철을 타고 가야 하나… 멍하니 생각하는 내 정신을, 공주윤은 난데없는 말로 헤쳐 놓았다.

“이우신 너는… 내가 존나 아류 같냐?”

대뜸 닥쳐 온 말에 나는 괜스레 뺨이 얼얼해졌다.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자, 성난 공주윤의 얼굴이 낯설었다.

“내가 존나 우스워 보이냐고.”

“…왜 그런 말을 해?”

당황한 바람에 내 목소리는 반 톤 정도 높게 나갔다.

“그게 아니면, 왜 갑자기 씨발 권태오랑 붙어 다녀.”

공주윤이 말했다. 한 자 한 자, 감정을 꽉꽉 억눌러 찍어 내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이제 거의 멍해졌다.

‘…권태오? 권태오가 여기서 왜 나오지?’

강건우나 이찬희도 아니고, 왜 권태오랑 붙어 다니냐니. 한 다리도 아니고 두 다리 건너서 겨우 같이 지내는 게 권태오였다. 나로서는, 붙어 다닌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게 권태오였다.

“권태오가… 왜?”

내가 권태오랑 뭘 어쨌다는 거야? 미심쩍은 마음에 내 표정도 조금은 일그러졌다. 그러나 내가 뭘 얼마나 황당해하고 이상해하고 억울해하건, 공주윤의 표정에 실린 감정의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할 터였다.

“이우신 네가, 그 새끼를… 씨발 내가 봤어.”

나는 조금 황망해졌다.

…아, 나는 이런 거 못 견디는데. 나한테 이렇게 화내는 거, 강압적으로 구는 거, 나는 못 견디는데.

“네가 그 새끼 보는 눈. 내가 봤다고.”

공주윤은 내 반응을 살필 정신도 없어 보였다. ‘미친놈’, ‘미친놈’… 공주윤을 볼 때면 매번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그랬지, 정말로 미쳤다는 말로 그를 욕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주윤은 정말 미친놈 같았다.

“강건우까지는, 그래 그러려니 해. 네가 하하호호 아주 씨발, 친구라고 붙어 다니든 말든 강건우 그 새끼는 나랑은 존나 타입이 다르니까. 아 뭐, 저런 새끼랑 친해졌구나 그렇구나 이해하겠다고.”

그러고 보면 4월 초에 강건우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공주윤이 질투를 한다고, 내가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이유를 들어 저를 싫어한다고 그랬었다.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내저었었다. 칠렐레팔렐레 뭐든지 가뿐한 공주윤이 구태여 친구 사이에 질투 같은 걸 할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근데 권태오는 아니잖아.”

“…….”

“권태오는… 씨발, 권태오한테 너 존나 이상해. 이상하다고, 씨발 놈아. 이상한 표정이나 짓고, 이상하게 굴잖아. 계집애처럼.”

난데없이 혐오감마저 묻어나는 말을 하면서, 공주윤은 정작 본인이 나에게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공주윤보다도 내가 알았다, 공주윤이 이상하다는 걸. 장세라만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알았던 것 같다.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문자를 보내면 답장 좀 해.”

창백해진 내 어깨를 공주윤의 검지가 쿡, 찌르듯이 건드렸다.

“그거 한 통 보낸다고 한 시간이 걸려 두 시간이 걸려? 밥 먹고 존나 공부만 하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10초면 보내잖아, 어차피 이응 두 개잖아.”

쿡, 쿡… 시비라도 거는 양 건드리는 손길에 나는 주춤주춤 흔들거렸다. 공주니 공신이니, 비슷하게 붙인 별명으로 가려졌던 서열이 대뜸 본색을 드러냈다. 키가 190에 달하고 성격이 불같은 공주윤은 약한 놈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려먹는 알파 메일이었고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니 공주윤이 화를 내면서 몰아붙일 적에,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은 굴복인지도 몰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을 것이었다.

입을 다문 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가만히 쳐다만 보는 내 반응이, 공주윤은 몹시 싫은 기색이었다. 제 성질을 못 이기는 핏줄이 꿈틀, 관자놀이 위에 솟아 있었다.

“뭘 봐. 씨발, 대답 안 해? …대답해.”

솥뚜껑 같은 손이 내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대답하라고.”

얼떨떨한 상태로 나는 공주윤을 올려다봤다. 아마 공주윤이 보기에는 지금 내 꼴이 아주 이상할 거였다. 어쩌면 기괴할지도 몰랐다. 공에 맞아 눈은 퉁퉁 부었고 얼굴 절반이 벌겋게 부었는데,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잊으려고, 최대한 무표정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얼굴이.

공주윤의 거친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내가 말했다.

“주윤아.”

천천히 이름을 부르자 공주윤이 움찔했다. 커다란 몸이 돌처럼 응어리져 굳는 게 분위기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티 나….”

내 목소리는 남의 것처럼 새어 나갔다.

“그러니까… 하지 않았으면 해, 내 걱정.”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조용했고, 공주윤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얼마 못 가, 성질 급한 공주윤이 반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를 잡힌 탓에 나는 닥쳐오는 땀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너저분한 십 대 남자 냄새를 피할 수 없었다.

“왜?”

코가 닿도록 가까이 얼굴을 대고서 공주윤이 물었다.

“왜 하지 마?”

길게 찢어진 모양새의 눈매가 오늘따라 날카로웠다. 웃을 때면 개구진 모양새로 휘어져서, 몇몇 노는 여자애들이 ‘웃음’ 이모티콘 같다고 놀리던 눈이었다. 그런 눈이 오늘은 진지했다. 좌로, 우로, 내 두 눈동자를 살피느라 바삐 떨리고 있었다.

공주윤은 당장이라도 내 이마에 제 머리를 들이받을 것 같기도, 울분을 터뜨리며 소리를 지를 것 같기도 했다.

날것인 채 밀려오는 감정에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면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되는데…. 너 그런 말은 듣기 싫잖아.”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그렇게 말했다.

상황을 쉽게 무마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대충 달래고 말 것 같았으면, 알겠다고 얘기하고 미안하다며 웃어 주고, 앞으론 문자에 재깍 답장하겠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쉬운 길을, 나는 도무지 갈 수가 없었다.

알기 때문이었다. 알기 때문에 진솔하고 싶었다. …나는 이미 아니까. 좋아하는 애한테는 대충 둘러댄 거짓말도, 못 받아 주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절대로 듣기 싫다는 걸. 그런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진다는 걸. 나도 아니까.

나도 권태오를 생각할 땐 그러니까….

“…….”

공주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나를 던지듯이 놓아주었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는 사이, 공주윤이 두 걸음 천천히 뒤로 걸었다. 힘 빠진 손이 주먹이 되는가 싶더니, 복도 벽면에 선 캐비닛을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과격한 동작에 나는 헛숨을 들이 삼켰다. 눈이 움찔 감겼다.

쾅, 쾅… 두 번 더 내리치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캐비닛 문짝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공주윤의 주먹을 살피려 나는 그를 바라봤지만, 녀석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걸어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성큼성큼 걷는 화난 발소리는 금세 들리지 않게 됐다.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하던 공주윤이 사라진 복도는 전보다 몇 배로 넓고 허전해 보였다.

심장이 자꾸 벌렁거렸다.

쿵, 쿵, 쿵… 내 심장도 누군가 주먹으로, 으깨 버릴 듯 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달리 유의미한 진단을 내려 주진 않았다. 겉보기엔 문제가 없다는 소견은 양호실에서 들은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멍을 가라앉히는 연고 하나를 처방해 줬을 뿐이었다.

정 걱정이 되거든 정밀 검진을 받고 가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학교에서 빠져나온 뒤로는 두통도 없었고 눈에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하니, 굳이 시간이 많이 드는 검사는 필요 없지 싶었다. …실비 보험도 없고 말이었다.

‘대학 가면 하나 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 복도를 걷는데, 휴대폰이 ‘우웅’ 울렸다.

2학년 5반 공주윤

[꽁신님 공주가화내서삐졋음?]

[씨발넘이라그래서미안ㅋㅋ]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문자를, 나는 멈추어 선 채 쳐다봤다. 키패드 위에 엄지를 가져다 대고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ㅇㅇ.]

꾹, 꾹 자음 두 개를 눌러 보냈다.

2학년 5반 공주윤

[ㅋㅋ]

답장은 3초도 지나지 않아 날아왔다. 멍하니 그 문자를 눈에 담으면서도 나는 낄낄거리며 웃는 공주윤의 얼굴은 떠올릴 수 없었다. 캐비닛을 내리치던 주먹이 자꾸 생각났다. 분을 못 이겨 나를 노려보던 공주윤에게서 풍기던, 아지랑이 같은 열기도 생각났다.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회상하자니 눈알 뒤편이 저린 느낌이었다.

‘‘아류’ 같냐니….’

그런 단어를 공주윤이 저 혼자서 떠올렸을 리가 없었다. 괄호가 끼면 곱셈 문제도 잘 못 푸는 공주윤은 바보였다. 그 바보한테 누가 권태오를 엮어 아류라는 소리를 했을까….

그래서 공주윤이 화가 났나 보다. 몇 곱절로 흥분해서는 달려든 이유가 그건가 보다. 나도 공주윤을 아류라고 취급해서,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권태오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서….

‘전혀 그렇지 않은데….’

당황한 바람에 그 점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한 게 후회됐다. 그래도 깊이 고민하지는 않기로 했다. 의식적으로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장세라도 공주윤도… 나는 좋았다. 그러면서도 싫었다. 그냥 장세라, 그냥 공주윤은 좋았지만, 나를 좋아하는 그 애들은 싫었다. 그걸 티 내는 게 싫었다. 종종거리면서 초조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감정을 못 숨기는 건… 평소의 그 애들답지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남의 모습은 별로 예쁘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툭하면 표정부터 망가지고 멋대로 불안해하고 제 손발을 주체하지 못하고는 해서, 아주 못나지고는 했다.

그렇게 내비친 감정들에 보답해 주지 못하는 내가 나쁜 사람 같았다. 어느 시점부턴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싫었다. 권태오가 보기에 내가 그런 모습일까 봐. 예쁘지도 멋지지도 않은 나를, 망가졌고 불안하고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나를, 권태오에게 벌써 들켰을까 봐.

2인분. 1인분의 부모조차 없는 주제에, 자그마치 두 사람에게 호의를 얻다니 정말이지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권태오만 생각했다.

권태오만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씨발 놈 맞지, 뭐.’

그거 하나는 공주윤이 옳았다.

씨발 놈…. 그가 그렇게 부른다면 그게 내 자리였다. 어른이 될 때까지는 내 자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씨발 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나는 갈 데가 없으니까.

문득 룸메이트가 생각났다. 언제까지 저러나 두고 보자 싶던 녀석은, 아직도 밤마다 여친에게 전화를 해댔다. 남사스러울 정도로 간지러운 애칭을 섞어가며, 자기야, 애기야, 여보야…. 그런 말로 나를 부를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런 말로 내가 부를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씨발 놈이든 뭐든지. 그거면 됐다. 나에게는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날 좋아하는 공주윤도 장세라도, 내가 좋아하는 권태오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아무도 아니다.

‘누구도, 아무도, 아니야….’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시뻘겋게 멍든 얼굴로 나선 병원 문 밖은 온통 축축했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발목이 묶였다.

그렇잖아도 기분 심란한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유독 운이 없는 것 같다.

‘옛날에는 소나기를 이렇게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 하고는 깨달았다.

‘예전에도 비는 자주 왔지, 참. 이제는… 우산을 챙겨 주던 옥혜 씨가 없는 거지….’

병원 로비의 전자시계를 확인하고, 5교시 과목이 뭐더라 생각해 보았다. 비를 맞고 우선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체육복 차림으로 수업을 들어야겠다.

계획을 세우자마자 주머니에 휴대폰을 깊이 집어넣었다.

“얘!”

그때 낯선 행인이 나를 불렀다.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 묶고,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커피와 제 우산의 손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접이식 우산 하나를 든 여자였다. 언뜻 대학생처럼 보였다.

“…저요?”

내가 묻자, 여자가 침음하더니 길 건너로 살짝 목을 뺐다. 무얼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손에 들린 작은 우산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거 쓰고 가. 남는 우산이야, 너 줄게.”

“아….”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는 행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재차 살펴봐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잠시간 눈을 굴리며 고민해 볼 적엔, 그냥 오지랖이 넓은 사람 같았다. …얼굴에 진 멍 때문에 내가 불쌍해 보였나 보다.

“감사합니다.”

동정이냐 친절이냐를 가리며 호의를 거절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고로, 나는 넙죽 우산을 받아 들었다. ‘남는 우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게, 빳빳하게 잘 접힌 우산 손잡이에는 가격표가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내게 우산을 건네준 사람은 그대로 제 갈 길을 떠나 버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는 우산을 펼쳐 썼다. 그러고는 비 내리는 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조금만 참자.’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만 있으면 2차 지필 시험이니까 조금만 참자고. 그러고 나면 여름 방학이니까.

이번 기말고사는 특히 수학이 중요했다. 여름 심화 수학반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간 성적이 20%, 기말 성적이 40%, 수학 경시 대회 점수가 40% 반영되는 심화 수학반에 들고 나면, 방학 동안에도 기숙사 A동에서 묵을 수 있었다.

에어컨 빵빵하고 시설도 좋은 A동에서 공부 잘하는 3학년들이랑 머무르면서 한 달 동안 조용히 공부만 하기… 이보다 더 완벽한 여름 방학 계획은 없을 것이다. 따로 학원이나 인강을 찾을 필요 없이, 3학년 경제 수학도 같이 배울 수 있고 말이다.

방학 동안에는 어차피 권태오를 만날 일도 없을 거고, 이찬희랑 엮일 일도 없을 거고… 40일이면 두 사람과 멀어지기 충분한 시간 같았다.

개학 후에 이찬희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놀리길 바라면서, 나는 내 진로와 공부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그럼 될 거야. 오늘 일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오늘, 비 맞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비는 맞지 않아서,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나의 완벽한 계획은 아주 조금 덜 완벽하게 됐다. 기말고사 목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의 영향인지 내벽 공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2학년 기숙사 건물의 수도관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지난 이틀간 외부인이 찾아와 벽을 헐지 않는 방식으로 수리를 해 보려 애썼지만, 잘 되진 않았다. 결국은 ‘젖으면 안 되는 짐’을 모두 챙겨 나흘간 방을 빼 달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떨어졌다.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나는 무진 답답해졌다. 등하교에 한 시간씩 걸리는데다 집의 에어컨도 고장 난 지 오래라서, 잘못하다가는 컨디션을 망치기 십상이지 싶었다.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에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명찰을 잠시 빼놓았다. 3학년 여자 선배들 사이에 섞여서, 다 같이 기숙사 담당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2차 지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이러시는 게 어딨냐며 따박따박 대열에 섞여 따지자, 선생님은 별수 없이 우리 손을 들어 주었다.

“그래, 그래. 너네 속상한 거 선생님도 다 알아. 아는데…. 그럼 일단은, 하루만. 오늘 하루 젖는 짐만 우선 빼놓자. 기숙사 이불은 됐고, 옷가지만 좀 빼놔 봐.”

공사 일정을 최대한 줄이고 맞춰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에야, 임시로 친해졌던 누나들과 흩어졌다.

‘짐을 빼야 하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서는 나를 보며,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넌 눈탱이가 왜 밤탱이가 됐어? 친구랑 싸우기라도 했니?”

“…….”

같은 질문을 나는 하루에도 오십 번씩 받아야 했다. 일곱 번은 매 수업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이 ‘어머어머’ 하며 건넨 소리였고, 마흔세 번은 강건우가 지껄이는 농담이었다.

“이우신 존나 싸움 고수 같애.”

강건우는 내 눈가에 맺힌 멍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여러 방식으로 호전되는 정도나 상태를 표현하길 좋아했다. ‘11대1로 싸우다 온 것 같다’고도, ‘숨겨진 재야의 고수 같다’고도, ‘딸기 도넛을 눈으로 먹은 것 같다’고도 했다.

녀석에게 놀림 받은 장세라가 왜 그렇게 펄펄 뛰었는지 마음 깊이 이해하면서, 한편으론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눈가 멍울은 도넛 모양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뻘건 딸기색이다가, 어느 날 보라색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연두색이 되었다. 뺨 위로 번지는 바람에 안색이 나빠 보인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점차 흐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눈알 흰자위의 터진 자국은 그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권태오와 함께 걸을 적에 어느 쪽 방향에 서야 하나 괜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 날, 축구공에 맞고 쓰러진 나를 볼 적에… 평소와 달리 조금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내 눈을 살폈던 권태오였다. 그러니 오늘 만나거든 눈이 다 나았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걱정해 줬던 거 고마워.’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덧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늘 그래 왔듯이 오늘도 권태오는 내 예상을 비껴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실 앞에서 만난 권태오는 사복 차림이었고, 어째선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강건우가 까불면서 건넨 인사에도 ‘어’ 하는 짧은 답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대회 가야 돼. 밥만 같이 먹고 출발할 거야.”

성큼성큼 급식실로 들어가는 권태오의 뒤를, 강건우가 ‘어어’ 하며 쫓았다. 그 뒤를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지어 쫓으면서 나는 권태오의 등을 힐끔거렸다. 하얀 티셔츠 위로 도드라지는 등줄기 근육이 신기한 것과는 별개로,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될까 고민하는 내게 이찬희가 붙어 섰다.

“신경 쓰지 마.”

그러더니 귓속말했다.

“태오, 큰 대회 가기 전에는 원래 예민해.”

…그렇구나.

식판을 받아 자리에 앉은 뒤에도 서먹한 기류는 가시지를 않았다. 대회 때문에 권태오의 심기가 나쁘다면, 그걸 풀어 주어야 할 사람은 이찬희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이찬희까지 말없이 표정을 굳히고만 있었다.

그 바람에 강건우만 안쓰럽게 됐다.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는 체질인 강건우는 애써 농담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지은 죄도 없이 혼자 노력하는 게 조금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조심이 말이야. 어제 귀 청소 성공했어.”

강건우도 도울 겸, 권태오의 생각을 환기시킬 공통 화제를 꺼내 보려 내가 말했다. 강건우가 ‘오오’ 하고 크게 반응해 왔다.

“그, 까맣고 큰 개 말하는 거지? 와, 어떻게 귀까지 다 후벼 줬냐? 이 정도면 학교에서 너한테 걔 줘야 함.”

“…귀가 워낙 커서 별로 안 어렵더라. 물티슈에 약 묻혀서 닦아만 줬어. 조심이도 시원한지 얌전하더라고.”

속닥거리며 시선을 들자 권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따로 이렇다 할 표정은 없었지만, 딱딱하게 얼었던 입매가 부드러워진 채였다.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요즘은 밥도 잘 먹어. 건강한 거 같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러자 권태오가 웃는 것도 같았다. 무어라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데, 그보다 먼저 튀어나온 목소리는 이찬희의 것이었다.

“걱정이라니? 태오가 왜 개를 걱정한단 말이야?”

나는 조금 놀라고야 말았다. 권태오의 표정이며 기분을 살피느라, 아주 잠깐이나마 이찬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 어…. 개를 좋아하는 거 같길래.”

“아닌데. 태오는 개 무지 싫어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찬희가 건넨 말이, 찬물처럼 식탁 자리에 끼얹어졌다.

“전에 키우던 개도 너무 짖어서, 버릇없다고 파양했어. 태오는 개 싫어해. 안 그래, 태오야?”

‘…뭐?’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인 이야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람이 입이 있으면 말하듯이 개도 목이 있으니 짖는 게 아니던가. 달리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짖어서’, 파양을 했다니….

한편으로 나는 조심이를 다루던 권태오를 기억했다. ‘쓰읍’ 하고 경고하던 숨소리나, 큰 개의 머리를 아무렇잖게 탈탈 털고 쓰다듬어 주던 손길에는 분명 부드러운 애정이 스며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했다, 권태오는 개를 좋아한다고.

“응? 태오야. 너 조심이라는 개 알아? 그 개 좋아해?”

이찬희가 웃으며 묻는 말에 내 시선도 권태오에게로 향했다. 입맛이 떨어진 듯 권태오는 숟갈을 툭 내려놓더니, 한숨 쉬듯 말했다.

“안 좋아해.”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른손에 덜렁 들린 식판 위의 반찬 하나조차 먹질 않아서, 아직 모든 음식이 새것 같은 상태였다.

“…버스 출발할 시간이라서 안 되겠다. 먼저 가 볼게.”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전개에 얼어붙은 건 나와 강건우뿐이었다. 이찬희는 ‘으응’ 하며 손을 흔들며 권태오를 보내 주었다. ‘파이팅’ 하고 응원의 말까지 건넸다.

나는 처음으로, 이찬희가 권태오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거라고, 그날 조심이 앞에서 권태오는 분명, 개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게 아니라면 그 날 권태오가 나와 함께 멈추어 시간을 보낸 이유가, 달리 없었으니까.

‘…그냥 장단 맞춰 주려고 그런 걸까? 이찬희가 나랑 친하게 지내래서, 그렇게까지 연기를 해 준 걸까? 싫어하는 개를 만져 주고… 애초에 이름까지 알고 지낸다고?’

위화감에 사로잡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권태오가 왜? 왜 그렇게까지 해?’

식탁 위의 대화는 금세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

“그건 그렇고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소식이니까 둘 다 긴장해.”

말끝을 늘리며, 이찬희가 제 주머니에서 무얼 꺼내어 나와 강건우에게 나란히 내밀었다. 빳빳한 카드형 엽서였다. 하트 모양 스티커가 붙은 엽서는 입체형으로, 내용은 단순했다.

‘오늘 저녁! 이찬희의 열여덟 번째 생일 파티에 초대합니다!^0^ (n/4)’

…진짜 초딩인가.

이제는 이런 유난법석에 당황할 마음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꼭 와야 한다며 이찬희는 나와 강건우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나는 그런 이찬희가 싫지도 밉지도 않았다.

네 사람만 불러들이는 생일 파티의 일원이 나라는 점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축구공을 대신 맞은 사건 이후로 이찬희는 나를 전과 다르게 대했으니까. 이제는 강건우보다도, 심지어는 권태오보다도 내게 자주 붙어 있고는 했다.

‘정말 좋아.’

‘엄청 행복해.’

‘마음에 들어.’

입만 열면 이찬희는 그런 말들을 쏟아냈다. 주어는 각기 달랐지만 표현은 늘 긍정적이었다. 권태오가 왜 이찬희와 잘 지내는 건지, 나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좋은 말만 하고 좋은 표정만 짓고 좋은 행동만 하는 이찬희에게는 흠이 없었다. 마주할 땐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하고 싫다가도, 돌아서면 싫은 마음이 길게 가질 못했다.

그 바람에, 나는 이찬희의 초대장을 거절하질 못했다.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할 거고, 권태오는 분명 1등 상을 타 올 테니 그것도 같이 축하해 주자는데… 두 조건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결국 7교시를 마치자마자 내 주머니에는 생일파티 초대장이, 오른손에는 옷가지를 욱여넣은 캐리어가 들렸다.

탈탈탈 소리 나는 캐리어 바퀴를 질질 끌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찬희 집이 엄청 부자라고 그랬는데…, 뭘 사 줘야 적당할까.’

주최자인 이찬희야, 말로는 빈손으로 와도 된다고 했다. 혹시라도 괜히 선물을 준비할까 봐 일부러 당일에 초대장을 준 거라고도 했다.

초대받은 당사자로서는 암만 그래도 완전히 빈손으로 갈 순 없었다. 강건우 성격을 생각하면 분명 뭐든지 선물을 챙겨 갈 테고…. 이찬희 성격을 생각하면, 겨울이 되고 내 생일이 오면 베풀기 좋아하는 그 태도로 선물을 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잘 지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그러니 뭐라도 선물을 사야 했다. 생활비 카드에 남은 돈을 확인한 다음, 나는 근방 백화점에 들렀다. 강건우에게 문자해서 살짝 물어보니, 게임 칩을 줄 생각이라고 했다.

‘게임 칩? 그게 얼마지.’

휴대폰으로 이름을 검색해 찾아보니 걱정과 달리 비싼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전부 품절 상태였다. 원가는 4만 원대인데, 사려면 물량이 풀릴 때 줄 서서 구해야 하는 희소성 있는 게임이었다.

‘으음….’

침음하며 나는 백화점 5층을 혼자 돌아다녔다. 한참을 헤매다 멈춰 선 매장에는, 학교에서 종종 본 것 같은 브랜드의 스포츠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대가 만만한 건 세일 중인 상품이지만 필시 지난해에 나온 걸 터였다. …이찬희는 필통도 한 주에 한 번 바꾸는 변덕쟁이였다.

신상으로 보이는 상품들을 조용히 눈으로 좇았다. 가방이나 운동화는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나마 캡 모자가 6만 원대였다.

이찬희가 좋아할 만한 하늘색 모자를 가만히 보다가, 나는 검정색 모자를 집어 들었다.

‘…….’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얼른 계산했다.

그러고는 키치한 문구류를 파는 매장으로 들어갔다. 편지지와 적당히 크기가 맞는 선물 상자를 고른 다음, 쪼르르 진열된 외제 샤프도 구경했다. 그러고 보면 수학 쌤에게 받은 재작년도 수능 샤프가 얼마 전에 고장 났다. 아직 그만큼 부드러운 샤프를 못 찾은 상태였다.

샘플 스티커가 붙은 샤프를 진열대에 붙은 종이에 대고 몇 번 써 보다가 내려놓았다. 필감이 아주 부드럽고 좋았지만, 딱 그만큼 비쌌다.

한가한 시간대 매장 직원은 친절했다. 내 손에 들린 종이 백을 보더니 ‘포장해 드릴까요’ 물어오기에, 나는 넙죽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친구 선물할 건가 봐요?”

“네. 생일이라서요.”

“하하, 귀여워.”

직원은 상자 안에 모자를 예쁘게 접어 넣고, 빈 공간은 보라색 얇은 종이를 와락와락 구겨 넣어 채워 주었다. 뚜껑 위에 리본까지 묶어 준 덕분에 급하게 준비한 선물이 꽤나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아 나섰을 때 시간은 벌써 4시였다. 모이기로 한 저녁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았지만, 나는 여유롭지 못했다. 이찬희의 집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집에 들러야 했다. 기숙사에서 챙겨온 짐 가방을 생일 파티장까지 끌고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우산도. …오늘 돌려줘야지.’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싱숭생숭했다. 받은 지 1년이 흘러 버린, 그 날 이후 한 번도 쓰지 않고 고이 모셔 두었던 장우산을 돌려주면 권태오가 뭐라고 할지가 궁금했다. ‘아 맞다’ 하고 기억해 낸다면 좋겠는데, 그 애의 오묘한 친절을 생각해 보면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아 맞다’ 하고 장단을 맞춰 줄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그걸 꼭 돌려주고 싶었다. 고마웠다고… 그 날 못했던 인사도 하고 싶었다.

녹음해 둔 수업 내용을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서, 느릿느릿 지하철을 탔다. 역에서 내려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또 여덟 정거장을 지나야 했다. 그러고도 오르막길을 조금 더 걸어야, 대다수 불이 꺼진 채인 낡은 아파트가 올려다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아파트 복도에 주민들이 각각 내놓은 개흙 묻은 작업 운동화, 덜 채운 음식물 쓰레기통, 시트가 반쯤 벗겨진 유아용 자전거를 지났다. 그러고 나면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었다.

“…….”

문이… 벌써 열려 있다.

조용히, 나는 벌어진 문 틈새로 손을 넣었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신발장은 텅 빈 상태 그대로였다. 대신 시커먼 운동화 발자국이 장판 위에 가득했다.

“…아버지?”

어리둥절한 채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잔뜩 어질러진 작은 거실이 보였다. 낡은 액자와 잔돈을 넣곤 하던 조그만 항아리, 분무기나 지난해의 달력 같은 것이 중구난방 흩어진 채였다.

꼭 도둑이라도 든 것 같았다.

놀란 마음에 멈추어 서 있는데, 집 안에 하나 있는 방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도망치기보다 나는 문을 열고 그 방으로 뛰어들기를 택했다. 위험한 짓이란 건 알았지만 별수 없었다.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

돈이 있었다, 그 방 안에. 돈 가방이 있었다. 겨울날에 옥혜 씨랑 ‘안녕’ 하고 인사할 때, 나에게 용돈이라며 안겨 주고 갔던 돈 가방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문을 열자마자 나는 익숙하면서 낯선 남자를 마주했다. 나이를 먹고 술을 처먹고 담배 쩐내를 풍겨도 시장 바닥만 가면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곤 하던 아버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숱 많은 머리칼에는 군데군데 흰 머리가 브릿지처럼 자랐고 정돈되지 못한 표정은 흥분에 물든 채, 두 팔 안에 검은 가방을 안은 아버지가.

“어, 우신아.”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조금도 진지하지 못한 태도였다. 그 바람에 내 뒷머리로 열이 훅 올랐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그거 내려놔요.”

“아, 우신아. 아버지가 돈이 좀 필요해서. 이거 좀 갖다 쓸게.”

…지금 뭐라는 거야?

얼떨떨한 얼굴로 나는 아버지를 바라만 봤다. 담배 냄새를 풍기며 웃는 얼굴로 아버지는 품에 안은 가방의 지퍼를 찍 잠갔다. 안에 든 것을, 떠나기 전 옥혜 씨가 인출해다가 봉투에 담아서, 꼭꼭 넣어 준 돈을 벌써 확인한 눈치였다.

고동색 눈알에 욕망이 그득그득했다.

“그거 당신 돈 아니에요.”

“뭐? ‘당신’?”

“네. …당신 돈 아니라고요, 내 돈이에요. 나한테 필요한 돈이에요. 이리 주세요.”

‘이리 주세요’, 침착한 척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낯짝에 걸린 언제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자마자 벌써 깨달았다. 결국은 돈을 뺏길 것임을. 열여덟 어린애인 내 말 같은 건 절대로 귀담아들어 주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옆으로 밀쳤다. 쿵 소리를 내며 서랍장에 등을 부딪쳤다가, 나는 그에게로 맞붙었다. 허둥지둥 팔을 뻗어 짐 가방을 움켜쥐고는 뒤로 빼내려는데, 아버지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문지방 위로 나자빠졌다.

“아니, 이 새끼가!”

“돌려… 달라고요! 내놔요!”

“어딜 애비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애비? 당신이 내 아버지가 맞기는 해? 도대체 세상 어느 아버지가, 고등학생인 아들 전 재산을 훔쳐 가려고 해?

“이우신이! 네 아버지 얼굴도 못 알아봐? 요즘 덜 맞았지, 네가!”

‘요즘’이라니. 씨…발 내가,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맞은 게 벌써 4년도 더 된 일인데 ‘요즘’이랜다. 손버릇 더러운 씨발 놈이 그나마 폭력을 덜 쓰는 인간 된 게, 옥혜 씨를 만나고서 바뀐 게 도대체 언제 적 일인데….

아버지에게는 시간 감각이 없다. 내게는 하루하루가 귀중하고 모자란데, 욜로 인생을 사는 이 남자에게는, 이 끔찍한 주정뱅이에게는.

“네 엄마 돈 꽁쳐 둔 걸, 아버지가 모를 것 같았어?”

“그거 엄마 돈 아니에요! 옥혜 씨가 준 돈이라고요!”

바락바락 열이 올라 나는 소리를 질렀다. 엎치락뒤치락하며 가방 끈을 움켜쥐는데,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옥혜 씨’ 같은 소리하네. 옥혜가 네 친구냐? 그리고, 걔가 너한테 돈을 왜 줘? 네 아버지 애인이 준 돈이면 새끼야, 그게 너한테 준 돈이겠어? 내 돈이지, 내 돈!”

“아냐, 나한테 주고 간 거라고…! 돌려줘요!”

광견병에 걸린 개랑 싸워도 이렇게까지 치졸하고 난잡하진 않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남자와 필사적으로 뒤엉키면서, 지폐 뭉치가 든 가방을 쥐고 싸우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씨발, 내놓으라고, 제발!”

울컥 화가 나 지른 소리를 끝으로 나는 패배했다. 어릴 적엔, 고등학생쯤 되면 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이리저리 여행 다니고 길바닥에서 굴러먹고, 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느라 주먹만 잘 쓰는 아버지를 나는 이길 수가 없었다. 얼마 못 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가방을 껴안고 발라당 쓰러진 내게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해댔다. 제 분을 못 이겨 여러 차례, 혼자 바닥에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도 발로 내 어깨며 배를 차 대는 그가 끔찍했다.

모든 게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결국 나는 가방을 빼앗겼다. 아버지는 돈이 든 가방을 얻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활짝 열린 채 삐걱대는 현관문을 멍하니 볼 뿐 나는 그를 쫓지 않았다.

아버지란 사람이 기어코 폭력으로 나를 떨쳐 놓았다는 게 그저 얼떨떨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아버지인데, 자괴감을 느끼는 건 나였다.

작게 기침하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헐레벌떡, 아파트 복도의 두툼한 시멘트 난간으로 뛰어갔다. 밖을 내려다보자 저 멀리 길 위로, 허둥지둥 뛰며 도망치는 아버지가 보였다.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는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대로 차에 치어 버렸으면 좋겠어.’

난간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죽었으면. 죽었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 트럭에 아주 세게 치여서, 날아가서,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으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그래서 내 앞으로 사망 보험금이나 왕창 떨어졌으면.

그러나 쌩쌩 달리는 차를 피해 그는 무사히 길을 건넜다. 아버지의 엉성한 뒷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턱에 고였던 식은땀이 난간 밖으로 뚝 떨어졌다.

무거운 몸을 돌려,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에는 지난해 봄에 남겼던 메모가 먼지 쌓인 채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기숙사로 들어가느라 짐 뺐어요.

폰 번호 바뀌었으니까 서울 오시면 연락 주세요.’

전화번호 열한 자리를 꾹꾹 눌러 적어 둔, 오래된 쪽지를 응시하며 걷다가 바닥 턱에 발이 걸렸다. 나는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으….”

온몸이 저릿저릿 아팠다. 육체의 고통은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자존심이 주는 고통에 비하면 까진 무릎이고 아픈 얼굴이고 발에 차인 배고 얻어맞은 등이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였다.

하지만 이 기분은, 나를 낳은 사람에게 두 번째 버려진 이 기분은, 곰팡이 핀 노란 장판 바닥 위에 넘어져서는 일어나지 못하는 지금 이 기분은.

‘이걸…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어질러진 집, 무더운 여름의 공기, 끈적이며 뺨에 들러붙는 장판의 감촉, 터진 입 안에서 나는 피 맛, 온 세상에 나 혼자 남은 듯한 기분… 이 순간을 내가 잊을 수가 있을까? 극복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지난날이 될까?

나는 돌연 무서웠고, 몹시 억울했으며, 아주 슬펐다.

“…….”

그러고는 덤덤해졌다.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발장의 메모지부터 구겨 손에 쥐었다. 쓰레기통을 찾아 걷다가, 부엌 싱크대로 걸어갔다. 두어 개의 냄비와 프라이팬이 든 싱크대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팔을 넣고 아무렇게나 뒤적거리며 찾아낸 건 쓰레기 봉투였다.

50리터 봉투를 손에 들고 메모지를 넣었다. 집 안 곳곳에 널브러지고 깨지고 망가진 물건들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장판 위에 버려진 것들만 어찌어찌 욱여넣었을 뿐인데 쓰레기봉투 하나가 금세 가득 찼다.

같은 동작을 나는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했다. 큼직한 쓰레기봉투 네 개를 줄지어 문 앞에 내놓고 나니 더러워졌던 집이 조금은 썰렁하게 보였다. 그게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청소를 해도 깨끗해지지 않고 썰렁해지는 게.

터덜터덜 걷다가, 장판 위에 떨어진 내 휴대폰을 주웠다. 그 옆으로 길쭉한 핏자국이, 그새 말라붙어 갈색으로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정신없이 얻어맞을 적에 내 입술에서 흐른 핏자국이었다.

혀끝으로 볼 안의 터진 상처를 훑으면서 나는 핏자국 위로 발을 뻗었다. 양말 신은 발바닥으로 꾹꾹 문질러 닦아 내자 그 자국은 모기 한 마리를 쳐 죽인 자국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됐다.

떨어졌던 휴대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나 버린 채였다. 부재중 전화가 잔뜩 걸려 온 화면은 이내 어둑해졌다. 배터리가 없어 절전 모드에 접어든 거였다.

‘2학년 1반 강건우, 2학년 1반 강건우, 2학년 1반 이찬희, 2학년 1반 이찬희, 2학년 1반 이찬희….’

최대한 정 없이, 딱딱하게 저장해 둔 이름들을 나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강건우나 오늘 생일 파티를 기대했을 이찬희에 대해서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을 하기에도 바빴다.

‘이제 어떡하지?’

돈을 도둑맞았다. 진작 통장에 넣어 뒀어야 하는 건데… 혹시 하고 남겨 둔 게 잘못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옥혜 씨가 다녀갈지도 모른다고, 줬던 돈을 가져가야만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옥혜 씨의 친절을 불신한 내 잘못이었다. 혹여 내게 잘해 준 일이 후회되거든 구태여 말하지 않고 그저 돈만 가져가 주었으면 해서, 재작년엔 옥혜 씨 옷이 있던 자리에 돈 가방을 둔, 내 잘못이었다.

낡아 빠진 아파트에, 특히나 우리 집에 도둑이 들 거라곤 생각조차 못한 내 잘못이었다. 나를 낳은 아버지라는 인간이 도둑 새끼인 걸 못 알아본 게 잘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돈까지 훔쳐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게 잘못이었고, 언젠가는 집에 와서 나를 찾겠거니 하고 빌어먹을 쪽지나 남겨 둔 게 잘못이었다.

결국 내 잘못이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이 집을 안전한 공간이라고 믿었다니.

큰일 났다. 정말로 큰일이 났다. 이건 엄마가 집을 나갔을 때보다, 아버지가 방랑 생활을 시작했던 가을보다, 옥혜 씨가 나를 떠난 재작년의 겨울보다 더 큰일이었다. 이제는, 나한테, 돈이 없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친구가 하나둘 생길 때마다, 공짜 문제집을 안아 들고 복도를 걸을 때마다, 강건우며 장세라가 사 주는 간식들로 배를 채울 때마다, 책상에 앉아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여차하면 그 돈으로 메꾸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생각으로 버티고 살았다. 그런데 그 돈이 없다. 내 안전벨트, 내 에어백…. 내 마지막 자존심이 없어졌다.

이제 나는 뭐로 버텨야 하지? 이제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목전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를 망치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한다.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 다음 학기 수업료를 낼 수가 없다.

시험을 잘 치면 되지… 그런 속 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 자신을 믿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거듭 최악을 상상했다.

기숙사비까지 합해서 그게 오백, 얼마더라? 2학기부터는 더 오른다고 그랬는데…. 재단에서 주는 저소득층 장학금은 고작해야 90만 원이다. 90만 원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라다.

‘못 해도 사백만 원이 더 필요한데…. 2학기 개학하자마자, 수업료를 첫 주에 내야 하는데…, 담임한테 말해서 잘 미루면 일주일까지는 봐줄지도 몰라. 이번 시험 망치면 그럼, 방학 동안 알바를 해야 되는 건가? 치킨집 서빙이라도 하고 편의점이라도 뛰어야 하나? 사백만 원을, 내가 다 벌 수는 있을까? 그렇게 일하면 나, 공부는 언제 하지?’

한국대는 어떻게 가지?

이 집에선 무슨 수로 탈출하지?

대체 언제쯤 괜찮아지지?

머릿속의 걱정이 너무 크니까 심장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가만히 선 채로 나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휴대폰 액정에 불이 켜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을 움직여, 발신자를 확인했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누구도, 아무도, 뭐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게 단숨에 무색해졌다.

[권태오]

액정에 뜬 세 글자 이름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가만히 읽어 내리는데 그 이름이 이제는 내 이름보다 더 익숙했다. 많이 불러 보지도 못한 주제에, 너무 자주 생각해서 그러했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나는 통화 버튼을 밀어 눌렀다. 멈춘 것 같던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휴대폰에 대고 중얼거리듯 말하자,

―어디야, 이우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권태오의 휴대폰으로 이찬희가 걸어 온 건 아닐까 생각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진짜 권태오였다. 심지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그가 침묵하자 수화기 너머가 완전히 조용해지기까지 했다.

“…어. 나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몸이?

그러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휴대폰에 귀를 바짝 붙인 채 나는 따끔거리는 볼의 상처를 혀로 훑었다. 자꾸만 피 맛이 났다.

침묵 끝에 들려온 권태오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비릿했다.

―이찬희가 건 전화는 왜 안 받았어?

“…….”

―스무 통 넘게 건 거 같던데.

‘아’ 하고 나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맞아, 권태오는 이런 애지. 신기루 같은 애지, 내 앞에만 서면. 사람 모습으로, 형체 있는 존재로, 웃고 안고 보듬는 상대는 이찬희뿐이지.

나는 이찬희가 아니지.

“잤어.”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거짓말했다.

―…잤다고?

“어. 잤어.”

바보 같은 변명을 권태오가 믿어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믿어 주든 불신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지어내건 사실보다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잠깐 나와라. 이야기 좀 하자. 지금 집이지? 주소 좀 찍어 보내.

“…왜?”

―내가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문자로 보내.

“…….”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입 한 번 벙긋조차 하지 못했다. 휴대폰에 대고,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내 동작을 보았을 리 없건만 권태오는 그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56초…. 1분을 채우지 못한 통화 기록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권태오가 나를 찾아온단다, 내가… 아프다고, 잤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여기로 오겠다고, 주소를 찍어 보내라고….

나는 허둥지둥 움직였다. 화장실로 들어가 살펴본 거울 속엔 누가 봐도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미성숙한 남자애 하나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세면대에 고개를 처박고 일단 세수했다.

땀과 먼지, 신발 자국이 묻은 티셔츠는 벗어 버렸다. 집안에는 여름옷이 별로 없었고, 캐리어에는 교복과 학교 체육복, 그리고 잠옷만 들어 있었다. 애초에 나한테는 여벌옷이 별로 없었다.

별수 없이 그나마 얇은 소재의 긴팔 후드를 꺼내 입었다. 그러자마자 등줄기에 땀이 고이도록 더워졌지만,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려면 캡이 달린 모자도 눌러써야 했다.

그리고 권태오에게 문자했다. 집 주소를 알려 줄 생각은 물론 없었다.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구태여 보여 줄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포털 사이트를 열고는 ‘편의점’을 검색해서, 가장 가까운 곳의 지도를 캡처하고 그 이미지를 권태오에게 전송했다.

스니커즈를 구겨 신고 집을 나서려다, 나는 캐리어 옆에 떨어져 있는 선물 상자를 발견했다. 조용히 주워 드는데 그 상자의 존재가 정말이지 갈비뼈가 아플 정도로 낯설었다.

이찬희에게 주려고 산, 마음 같아선 당장 가져가서 환불하고 싶은, 6만 원짜리 선물… 권태오를 통해서 줘야겠다. 고작 한 학기, 아니 반 학기 같이 어울렸을 뿐이지만 생일 선물 정도는 챙겨 주어야 할 관계니까.

…파티 못 가서 미안하다고 둘러대고, 선물이나 주고 떨어져야겠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엮이지 말아야겠다. 이제는 방심하고 살 여유가 없으니까, 하하호호 친구 놀이에 어울리며 시간 낭비할 새가 없으니까.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괜찮은 척 연기하면 된다.

저린 무릎을 움직여 나는 아파트에서 벗어났다. 한 손에는 선물 상자를, 남는 손에는 휴대폰 하나를 꼭 쥔 채 편의점을 찾아 골목길에 접어들자, 이상하게도 권태오가 보였다.

‘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채홍동에서 이 동네까지는 전철과 버스로 한 시간이 걸렸다. 택시를 타고 온다 해도 40분은 걸려야 했다. 그러니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나여야만 했다. 미리 편의점에서 기다리면서 열도 식히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대뜸 등장한 권태오를 보자니 계획이 일그러졌다.

오늘따라 권태오는 유도 선수처럼은 보이질 않았다. 늘 트레이닝복 차림새에, 교복을 입을 때도 셔츠 위에 저지라도 걸치고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새까만 머리칼에는 왁스를 바른 건지, 옆머리는 꾹 누르고 뒷머리는 결을 살려 넘긴 채였다. 하얀 반팔 티셔츠는 팔뚝 소매 중앙에만 명품 브랜드를 상징하는 로고가 붙어 있었다. 밴딩이 골반에 위치하는 슬랙스 바지는 정장 느낌이 났고, 긴 다리가 꼭 모델 같았다.

‘이건 반칙이잖아….’

후드 깊이 고개를 감추며 나는 무방비해졌다.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불필요할 정도로 멋지고 깔끔한 얼굴로, 권태오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모든 게 과했다. 키는 너무 컸고, 표정은 너무 무뚝뚝했고…

“이우신.”

목소리는 너무 차가웠다.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지금이라도 이찬희한테서 떨어져. 친구 노릇도 이제 그만둬.”

고개 숙여 얼굴을 숨긴 채 나는 후드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긴소매 옷 안으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선물 상자를 쥔 손은 너무 부끄럽게 생각돼서, 나는 차라리 손목째로 잘라서 그 손을 버리고 싶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그의 심중조차 추측하지 못하는 나에 비해 권태오는 준비된 상태였다. 미리 생각해 둔 게 분명한 말들을, 계획적으로 일러 놓는 것이었다.

“이찬희랑 그만 엮이라고, 앞으로는. 걔는 너랑 어울리지가 않는 사람이야. 이제 그만 붙어 다녀.”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말을 듣는데 가슴 안이 텅 비었다. 힐난하는 어조로 몰아붙일 적에 권태오가 원하는 건 내가 상처 받고, 적당히 나가떨어지는 것. 그게 전부일 터였다. 과연 그의 말들은 너무나 효과적으로 나를 상처 입혔다.

나는 적당히 나가떨어질 수 있었다.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이었더라면 그랬을 거였다. 적당히 표정을 지어내고 적당히 괜찮은 척 행동하면서, 그렇구나 하고는 나가떨어졌을 거였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오늘만, 지금만, 허튼 기대를 끝까지 못 버리고 허둥지둥 권태오를 만나러 나온 구닥다리 편의점 앞만 아니었더라면.

“이거 너 가져.”

고개는 땅을 향해 떨어뜨린 채 나는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뭐?”

그러자 권태오의 발이 보였다. 신발도, 정장 구두는 아닌데… 저걸 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돈 많고 멋 부리기 좋아하는 애들이 가끔씩 신던, 그런 신발이었다. 그런 신발조차 권태오의 발에 잘 어울렸다.

그 발이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이거, 이찬희 생일 선물. 너 가지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감정을 꽉꽉 눌러 담은 목소리는 남의 것처럼 낮았다.

“…어차피 이찬희는 이런 모자 쓰지도 않을 거고 너한테 빌려주기나 하겠지 생각하면서… 너 좋아하는 검은색으로 샀으니까. 네 거니까, 너 가지라고.”

“이우신.”

권태오의 신발이 말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의 얼굴보다도 발을 더 자주 봤다. 저, 발끝조차도 나를 무시하고 싫어하고 떠미는데, 저 발끝조차도 나는 좋았다.

너무 좋아했다.

“그놈의 ‘이우신’, ‘이우신’, 그만 좀… 아, 씨발, 그렇게 부르면 뭐, 어쩌라는 거야?”

선물 상자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부끄러운 손을 감추기 위해 나는 그 상자를 길바닥에 내던지고야 말았다. 비싼 모자와 편지가 든 상자가 배수구 위로 나뒹굴었다.

“이찬희 생일이든 말든 나더러,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어? 너는 내가, 아프다는데, 몸이, 몸이 안 좋았다고 그러는데, 내가 너한테 내 걱정이라도 해 달래? 사람이 몸이 안 좋았다고, 그래서 잤다고, 그러면 최소한, 화내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허전해진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쥔 채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반 고아가 돼도 아빠가 없어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줌마랑 살아도 안 울었는데, 돈을 도둑맞아도 발길질에 처맞아도 안 울었는데, 그런데 눈물이 났다.

벼랑 끝에 서서 발뒤꿈치 밑이 휑한 채 버티는 나를 떠미는 손길이 너무 아파서 나는 울었다.

“너는 이찬희가 그렇게 좋아? 걔가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해? 주변 사람들, 나 같은 건, 이찬희한테 붙은 벌레, 그 정도로 보일 만큼… 멋대로 동정하고, 멋대로 상처 주고, 멋대로 불러낼 만큼… 너는 이찬희가 그렇게….”

억눌린 울음에서 ‘악’ 하는 이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이찬희는? 이찬희도 널 그만큼 생각하기는 해? 아닐걸, 내가 볼 때는 아니야. 어차피 이찬희보다 내가….”

흥건해진 두 뺨을 주먹으로 벅벅 문질러 닦고, 숨기면서, 나는 엉엉 울었다.

엉엉 울면서 고백했다.

“내가 너를, 더,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는데. 좋아하는데, 너는 왜….”

두 손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데, 주체되지 않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데, 후련하긴커녕 숨이 막혔다.

“…이우신.”

끅끅거리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권태오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고 이대로 죽고 싶었다. 그럼 권태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데.

“흑, 윽….”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거 권태오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도…, 아직 열여덟 살이야….”

비틀거리며 나는 그렇게 애원했다.

“나도…, 너네들이랑 동갑이라고…. 너넨 아직…, 아직 어리잖아. 너네 멋대로 행동하잖아. 나도 그래, 나도… 나도 어른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 좀 봐주면 안 돼?

“근데 왜 나만…, 왜 나만….”

나 좀, 진짜 한 번만 애처럼 봐주면 안 될까?

“태오야….”

눈물 젖은 시야로 빛이 번졌다. 편의점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본주의 백열등의 하얀 빛, 골목길 어귀에서 깜빡거리는 가난한 주황색의 가로등 빛줄기, 그 가운데에 선 권태오는 누군가 엄지로 문질러 지워 낸 그림처럼 형체가 흐릿했다.

“씨발.”

대뜸 흐릿하게 덩어리진 권태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세 발짝 만에 그는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깜빡이자 고였던 눈물이 두 줄기로 후드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선명해진 시야 가득, 권태오의 얼굴이 보였다. 목과 두 뺨이 열기로 달아오른 채 눈썹을 구긴, 깊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고 목덜미엔 핏대까지 세운, 권태오가 보였다.

“이우신. 너는 왜….”

권태오의 손이 내 어깨에 닿으려다 가시는 듯하더니, 대뜸 후드 끈이 달린 멱살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 손아귀 힘에 끌려가며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데, 권태오가 붙들고 있으니 쓰러지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이상한 자세가 됐다.

“잘 참고 있는 나를, 왜 자꾸 건드려?”

그러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벌어진 입이 돌연 권태오의 입술로 가로막혔다.

젖은 숨을 뿜어내는 콧대가 내 코 옆으로 너무 바짝 붙어서, 눌린 코뼈가 아렸다. 커다란 입 안 가득 빨린 입술이 따끔거렸고, 질겅거리며 씹어대는 아랫입술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읍…, 윽.”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나는 권태오의 팔을 치고 어깨를 때렸다. 외설적인 소리를 내며 입 안으로 밀려오는 혀를 참아 낼 수가 없었다. 목을 억지로 뒤로 빼며 거부하자 그가 내 멱살을 놓아주더니, 두 손으로 양 뺨을 움켜쥐고 재차 달려들었다.

캡 모자가 뒤로 벗겨졌고 두 발이 허공에 뜨다시피 했다. 머리만 잡혔을 뿐인데, 팔과 다리를 버둥거려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더듬대는 내 손끝이 권태오의 턱에 닿았다. 눈물이 손금 새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 순간에는 내 눈물을 묻힌, 권태오가 우는 것 같았다.

‘왜?’

팔다리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바로 뜨려 해 봐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태오, 너는, 왜….’

훌쩍훌쩍 울면서 맛본 권태오의 혀는 말랑했고, 아주 컸다. 입천장까지 밀려들어오는 게걸스러운 키스에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눈을 감으면 까맸고, 뜨면 온 세상이 새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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