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하.면
개학 당일의 학교는 어느 때보다 더 어수선했다. 새 학기 분위기에 심취하고, 새 학년에는 아직 적응하지 못한, 열여덟 살 아이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데시벨이 높았다. 복도를 오가며 여러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며 설교하고, 닥쳐올 입시를 빌미로 겁을 주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청개구리들은 그럴수록 흥분하기 마련이었다.
2학년 1반. 새로운 교실에 들어서서 나는 가만히 분위기를 읽었다. 담임이 아직 오지 않은 교실은 번잡스러웠고 다들 어중이떠중이, 친한 친구 옆자리를 골라 좋을 대로 앉은 채였다. 나도 빈자리 중 하나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복도 방향의 창문 옆, 뒤에서 세 번째 책상이었다.
삐뚤어진 책걸상의 대열을 맞춘 뒤에는 주변을 둘러봤다. 교실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조금도 없었다.
문이과가 통합된 지 오래라지만 국어 중심이냐 수학 중심이냐를 두고 반은 별수 없이 갈리게 마련이었다. 나야 그럴수록 땡큐였다. 내가 집중해야 할 과목은 수학 중심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대 경영학과는 다른 학교들과 달리 문과 대학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문이과가 통합된 이래 가장 유연하게 변화해서, 자연계 학생이 지원하는 경우의 문도 만만찮게 넓은 편이었다. 경제 수학 내신 점수를 쌓으면 가산점이 붙어 유리했고 수능도 국어만큼이나 수학 점수를 크게 봤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내 성적은 무턱대고 문과로 빠지기엔 아쉬운 수준이었다. 이 성적을 유지할 자신도, 노력할 끈기도 있으니 차라리 자연계로 가는 게 낫지 싶었다. 최대 목표는 한국대 경영학과로 잡고, 만에 하나 미끄러지거나 마음이 바뀌더라도 취업에 유리한 이과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게….
그러자면 2학년 때부터 심화 수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2학년 반 배치를 위한 설문 조사지에도 최우선 과목은 수학으로, 기타 사항에는 3학년 때 들을 진로 선택 과목까지 꼼꼼히 적어 넣었었다.
그렇게 나는 1반이 되었다. 공주윤은 5반인가 6반인가 그랬다. 처음 반 배치도가 떴을 때 ‘공신,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반 다시 옮겨!’ 하며 내 가방을 잡는 시늉을 해 대던 공주윤이었다. 나도 공주윤과 떨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 집 입시 코디 시험지가, 정말 재밌고 유용했었는데….’
친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교실에 나는 금세 적응했다. 애초에 학교 안에 나와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으므로 간단했다. 수학의 정석 정도나 좀 그럴까.
‘하필 장세라도 없네.’
그렇게 생각했다가 나는 혼자 웃었다. 장세라와 같은 반이 됐다고 해도, 그 애는 내게 더는 책을 빌려주거나 문제 풀이법을 묻지 않을 것이었다. 1학년 마지막 지필 고사 성적표를 받은 날에 그 애가 어쩐 일로 분한 표정을 못 감추면서.
‘널 꼭 이기고 싶었는데.’
심란하게 속삭이던 걸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태로 1교시가 지났다. 2교시가 됐을 때에서야 누군가 내 자리로 찾아왔는데, 얼굴이 어딘지 익숙했다.
“이우신!”
나는 당당하게 내 이름을 외치며 걸어온 그의 얼굴을 멀뚱멀뚱 올려다봤다. 큰 키에 장난기 많아 보이는 미소를 걸친 입매, 쌍꺼풀이 한쪽에만 있어 비대칭인 눈까지, 찬찬히 살피면서도 그 애의 이름은 기억해 내질 못했다.
‘어’ 하고 내가 곤혹스러운 소리를 흘리자 그가 입을 쩍 벌렸다.
“와… 진심 상처받았다, 나 지금. 작년 내내 네 앞자리였잖아! 백날 천날 짱세라랑 프린세스 윤이 쳐들어와서 의자 다 뺏기고, 내 엉덩이 존나 홀쭉해졌는데!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냐?”
“아, 아아….”
“‘아아’? ‘아아’라고 하셨어요, 지금?”
기관총처럼 말을 쏘아붙이며,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제 블레이저 깃을 당겼다. 구겨졌던 가슴팍이 펴지자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강건우.’
그제야, 공주윤이 숙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매번 제 자리를 내주던 남자애가 기억났다. 활기차고 붙임성이 좋아서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되던 녀석이었다.
“이제 알아보겠냐?”
“아니, 그게… 너 키 되게 많이 컸다.”
위아래로 살피며 말하자, 강건우의 얼굴이 갑자기 사르르 풀렸다. 투정하듯 구겼던 이마를 활짝 편 채 그는 어깨를 떡하니 벌리며 핫, 핫, 핫…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어 댔다. 그러고는 방학 사이에 7.5㎝나 크는 바람에 성장통이 심해 잠도 잘 못 잤다는, 별로 궁금하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볼일 있어서 나 부른 거 아냐?”
새로 받은 교과서 표지에 이름을 적으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강건우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지금… 임시긴 한데 아무튼, 반 회장이거든? 그, 아까 제출한 유인물 있지. 학부모 총회 어쩌고… 그거 너, 보호자 사인 왜 한 칸밖에 안 되어 있냐? 담임이 다시 써 오라던데.”
“아, 난 부모님 이혼해서 아버지밖에 없어.”
아버지조차도 있다고 말하기 민망할 수준으로 두문불출해서, 유인물에 사인 같은 걸 해 줄 새가 없었다. 그래서 어지간한 유인물은 모두 내가 확인하고 대충 갈긴 필체로 아버지 사인을 흉내 내곤 했다.
상세한 사정이 담긴 뒷말까지는 붙일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줄인 앞말만 듣고도, 강건우가 민망한 듯 볼을 찡그렸기 때문이었다. 반듯하던 그의 이마가 단숨에 붉어졌고 장난치며 뻗었던 손도 꼼질꼼질 제 허리춤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할아버지나… 뭐, 아무튼 보호자 사인이면 된다던데?”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강건우가 말했다.
“…….”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어…. 그렇구나. 난, 어… 담임이 다 받아 오라고 그래 가지고….”
혼잣말하듯 주억거리는 모습이 몹시 민망하고 무안한 듯 보였다.
“담임도 내 사정 알고 있을 텐데, 깜빡했나 보네. 나중에 내가 다시 말씀드릴게.”
“응, 미안….”
‘아, 그래’ 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사과까지 듣고야 말았다. 예상보다 큰 반응에 괜히 나까지 멋쩍었다.
‘보기보다 속이 깊은 녀석이네….’
생각하며, 나는 조금 전 강건우가 그랬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하긴 네가 뭐가 미안해. 난 신경 안 써. 사실 부모님 둘 다 없는 게 더 나은 수준이라서.”
농담하듯 말을 덧붙이자 강건우도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저도 아버지 잔소리에 지칠 때면 그런 생각을 하긴 한다면서, 귓바퀴를 긁더니 웃기까지 했다. 대충 대화를 갈무리하려는데, ‘흑…’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인지 ‘윽’인지 애매한, 가느다란 소음에 나와 강건우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뒤로 움직였다. 울음소리의 정체는 내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남자애였다. 눈시울을 붉힌 채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충격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라…, 얘 어디서 본 적 있는데….’
키는 큰데 몸매는 모델처럼 마른 남자애를 나는 몇 초간 쳐다만 봤다. 유독 큰 눈동자가 또래보다 두 살쯤 어린 것 같은 인상을 줬다. 저 눈, 혼혈인가 싶을 만큼 색이 밝은 갈색 눈이… 분명 눈에 익은데, 강건우처럼 지난해 같은 반이었냐 하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 채 눈만 끔벅이는 나를 대신해서,
“뭐야? 이찬희 네가 왜 울어?”
강건우가 외쳤다.
그러자 ‘이찬희’가 손등으로 제 뺨의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동작이며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찬희라는 이름과 매우 잘 어울렸다.
“그냥, 나는…. 난 우신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슬퍼서….”
이찬희가 중얼중얼 말했다.
‘‘우신이’가?’
나는 무진 당황스러웠다.
나를 언제 봤다고 얘가 날 이름으로 부르지? …그 뒤에 이어진 말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여서, 어느 기출 시험 예문보다 난해하게 느껴졌다. 남이야 본인 가정 사정에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제가 슬플 건 또 뭐란 말인가?
그 바람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모르게 됐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
목소리가 불퉁하니 튀어 나갔다.
“뭐야, 이찬희 왜 우냐?”
그때 우르르,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남자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뒤따라 들어온 여자애들도 두셋, 서로의 팔짱을 낀 채 ‘뭐야, 뭐야’ 하며 관심을 쏟았다.
전후 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개중 누군가가 이찬희의 등을 두들겼다.
“차안, 왜 울어?”
이찬희는 저를 다감하게 달래는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괜찮아’ 하고 힘없는 목소리만 연거푸 흘리는, 키 크고 예쁘장한 남자애. 그런 그를 나는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목소리 큰 남자애가 불쑥 던진 축구공이 홱, 짧은 거리를 날았다. 두 팔로 공을 받아 낸 건 강건우였다.
“강건우, 이찬희 네가 울렸냐?”
그러자 강건우가 웃음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아’ 하고 외치며 그가 받은 공을 도로 던지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뒤로 뺐다.
“울리긴 뭘 울려, 임마! 갑자기 우는데 뭐 어떡하라고…. 그리고 나 때문 아니야!”
축구공을 재차 이리저리,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는 흐지부지 갈무리되는 듯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빨리 종식되길 기다리면서 나는 단어장을 펼쳤다.
“아니야, 우신이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딸깍’, 엄지로 누른 볼펜 뒤 꼭지에서 유독 큰 소리가 났다. 이찬희가 지나가듯 흘린 소리의 말꼬리를 무리 중 누군가가 물고 늘어졌다.
“어? 우신이가 누군데?”
질문이 내 뒤통수를 꾹 찌르는 느낌을 줬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는 조용히 영단어만 훑어보았다. 반응하지 않는 날 두고, 가십거리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우신…? 쟤가 왜?”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난해해진 상황을 끊어 놓은 건 사회 선생이었다.
“종 친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자리 앉고, 책 펴라!”
종결이 아닌 절단이라도 나는 당장의 불편한 시간을 넘길 수 있음에 안도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교과서를 펼치고, 예습하느라 다닥다닥 붙여 놓은 포스트잇을 전부 뜯어 한데 모았다.
“쟤는 왜 울고 있어? 너네 반 무슨 일 있니?”
하필 사회 선생의 오지랖이 넓은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인지 그 이유를 알 길 없이, 이찬희가 아직도 코를 훌쩍거리는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이우신이랑 싸웠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큰소리를 내는 놈이 교실에 하나쯤 있는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아,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잘못은 따지자면 이찬희에게 있었다. 코 먹는 소리를 내는 주제에 ‘저 괜찮아요’ 같은 소리를 하면 남들 듣기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줄을 정말 모르는 건지…. 그 점이 이상하다면 이상했고 순진하다면 순진했다.
“싸웠다고…? 이찬희랑 쟤가?”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회 선생의 눈길도 내게 닿았다. 몹시 의아하단 표정에, 나는 얼굴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안 싸웠습니다.”
“흠…, 그래그래. 친구끼리 싸우고 그러는 거 아냐. 아무튼 책 펴고! 자자! 뒤에 자는 애 좀 깨우고.”
엄지 위에 눕힌 펜이 서너 바퀴를 돌고 첫 수업의 진도가 막힘없이 나가는 동안에도 내 기분은 저 멀리 떠 있었고, 한편으론 깊은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하릴없이 싱숭생숭했다. 수업을 듣는 내내 심기가 자꾸만 따끔거려서, 필기를 두세 번 고쳐 적어야 했다.
수업이 끝나 갈 무렵에는 줄 노트 한가득, 선생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은 대사집이 완성되었다.
‘이찬희가 뭐 일부러 그랬겠어….’
생각을 환기하며 나는 혼자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일부러 그랬을 이유가 없어. 이찬희가 나를 알 리도 없고, 억하심정이 있을 리도 없으니까. 그런데 쟤를 진짜 어디서 봤더라… 하고.
문득 가난이 내 마음에 턱 하니 맺히는 날이면 외우던 말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
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은 나뿐이고, 그 외의 남들은 나를 나만큼 잘 알지도 못하고 내게 나만큼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일들이 조금은 가벼워지고는 했다.
당장 오늘 맞닥뜨린 모호한 신경전도 그랬다.
“좀 전에는 왜 그런 거야?”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찬희 자리 주변으로 몰려들어 흥미로운 이야깃거릴 찾아 대는 녀석들을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러다 말 테니까. 상황이 영 답답해지면 그때 나서서 오해를 정정해도 될 일이었다. 괜히 격양된 이찬희와 그를 아끼는 친구 무리에 엉거주춤 껴서 ‘그게 아니고…’, 그러고는 구구절절 내 사정을 풀어낼 이유가 없었다.
묵묵히 프린트물을 파일에 끼워 넣으며 나는 혼자가 되길 택했다. 일반적인 날이었더라면 그 누구도, 자발적 아웃사이더인 내게 다가오지 않아야 했다.
“이우신 있어?”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여상스러운 날은 못 되는 듯했다.
“이우신이 누구…, 아아, 걔? 잠시만.”
속닥거리는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섰다. 힐긋, 뒤를 돌아보니 교실 문밖에 선 장세라가 보였다. 장세라와 마주 보고 선 같은 반 여자애도 마침 나를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다.
장세라가 내 책상으로 다가오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 앞을 막아서자 복도 밖과 교실 안을 차단한 모양새가 됐다.
“왜 왔어? 나 이제 공주윤 숙제 안 해 주는데.”
눈을 끔벅거리며 그렇게 묻자, 커다랗던 장세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두어 번 반복하는 장세라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말했다.
“…너, 작년엔 나한테 국어 제일 좋아한다 그랬잖아.”
“응.”
“근데 왜 반 배치 설문지에는 수학이라고 쓴 거야? 내가 그날, 너한테 물어봤을 땐 분명….”
“어…, 국어 좋아하는 건 맞는데, 좋아하는 과목 따라 진로를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는 똑똑한 장세라가 조금은 바보 같았다. 좋아하는 과목은 좋아하는 과목이고 공부는 공부인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었다.
대학 입시의 문을 넓히기 위해서 경제 수학 점수와 수학 대회 상벌이 필요했고, 그러자면 2학년 때부터 심화 수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과목에 따른 나의 호불호는 학업 진로 결정에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너, 사람 갖고 놀리니?”
그러므로 나는 장세라가 왜 불쑥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래서 그렇게 물어봤더니, 장세라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늘 반듯하던 단발머리는 그녀의 손안에서 헝클어졌고 평소보다 붉은 입술이 윗니에 꾹 씹혔다.
“세라야, 여기서 뭐 해? 왜 그러는데?”
나는 문득 공주윤이 그리워졌다. 귀찮고 성가시기는 해도 공주윤이랑 있으면, 어지간해선 그와 내 대화에 다른 누가 끼어들지 않았었다. 그와 내가 대화하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공주윤이 내 옆자리에 버티고 앉아 쭈쭈바나 빨면서 휴대폰 게임을 할 때면, 구태여 그를 제치고 내게 다가오거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었다.
‘자발적 아싸라는 게 이렇게 되기 힘든 거였나?’
울 것처럼 비틀거리며 선 장세라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몇몇 여자애들이 이지가 서린 눈동자로 무얼 판단하는 듯 나를 힐긋거렸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야 말았다.
“아, 몰라. 짜증 나….”
그리 친하진 않았다지만 그나마 잘 지내던 장세라가 나를 노려보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내 교실 안의 아이들조차 내 뒤통수와 울먹이는 장세라를 보고, 저들끼리 무어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보통 내 이름이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시험 성적이 공개된 주에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어야 했다. 그런데 성적 때문도 공주윤의 유난 때문도 아닌 스캔들을 이유로, 이찬희를 울렸다느니 장세라가 까였다느니 하는 수군거림에 내 이름이 섞였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당황한 채 나는 쭈뼛거리기만 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장세라의 팔이라도 두들기며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엔 난 잘못하지 않았고, 도대체 왜 울먹거리는 건지 영문도 모르겠는데, 파악하지 못한 상황을 두고 ‘미안해’라고 말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저기.”
자존심을 반으로 접어 놓고 가까스로 입을 열자마자,
“잠깐 우신이 좀 빌려 갈게.”
불쑥 끼어든 팔이 장세라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괜찮지?”
그러더니 쑥, 내 손목을 잡고 복도 밖으로 끌어당겼다. 당기는 힘은 따지자면 약했고 어떤 강압도 스며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상황에서 대뜸 나를 건져 올린 그가, 다름 아닌 이찬희이기 때문이었다.
“…….”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나는 묵묵히 다리를 움직였다.
“찬희, 안녕?”
“안녕!”
복도를 지나는 몇몇 녀석들에게 인사하며, 이찬희는 나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옆에 붙어 서고 보니 이찬희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나는 몹시 심란했다.
“내가 구해 준 거 맞지?”
확인하는 묻는 목소리의 저의를 알 수 없어 그러했고,
“우리 둘이 이야기 좀 하자.”
내가 먼저 피한 대화의 장을 씩씩하게 펴내는 그가 무섭도록 낯설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그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로는 나 역시도 매한가지여서 그냥 넘어가기 찝찝하던 차였다. 이찬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왜 내 부모가 이혼했다는 게 그에게 울 만한 비극이었던 건지, 그 심경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찬희는 내 의문의 그 무엇도 풀어주질 않았다. 복도를 끝까지 가로질러, 본관과 별관을 잇는 2층의 구름다리까지 그를 따라간 보람일랑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신아. 너, 나 본 적 없어? 나는 너 만난 적이 있는데.”
두 눈은 가늘어지고 입매는 딱딱해진 얼굴이 대번에, 바로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 보였다. 투정하는 어린애처럼 건넨 소리에 나로서는 무진 얼떨떨할 뿐이었다. 오며 가며 복도에서나 마주쳤겠지, 만나기는 뭘 만났다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는 너 본 적 없어. 만난 적도 없는데.”
“…….”
이찬희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 움직이는가 싶더니 콱 구겨졌다. 한숨인지 마른침인지 할 말인지 모를 것을 꿀꺽 삼키더니, 이찬희는 내 오른손을 제 두 손으로 맞잡았다.
“우신아.”
그러고는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슬그머니 미소 짓는 것이었다.
“있지, 앞으로 교실에서는 부모님 이혼했다는 이야기,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애들이 너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불쌍하다고 속단할 수도 있으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이찬희와는 말을 나누는 것조차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단 뜻이었다.
“…….”
나를 동정하기라도 하는 듯이, 제 아랫사람 다루듯이 구는 태도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태도를 일컫는 표현을 배웠었는데. 뭐더라?’
현실 도피하듯 딴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부모님이 이혼하신 게 한두 해 된 일도 아니고 벌써 옛날 일이야. 아까 교실에서 말했다시피 난 아무렇지도 않고, 신경도 안 써.”
“네가 아무렇지 않아도 남들한테는 그게 대수로운 일이고, 신경 쓰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이찬희의 대답은 빨랐다.
도대체 남들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는 건지 의문인 와중에, 나는 이찬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독서 문제로 따지자면 ‘화자 이찬희의 심경을 추측하시오’, 객관식 서술형, 몹시 어려우니 3점 문제일 터였다.
“이찬희, 네가 그걸 왜… 그러니까, 너는 방금 왜 운 거야? 혹시 너네 부모님도….”
심란한 와중에도 나는 그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만약에 이찬희가 눈물지은 이유가 나라는 인물에게 공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경우라면 나도 그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우리 부모님은 사이 좋으셔!”
그러나 내 추측은 보기 좋게 묵살당했다.
“울 엄마도 아빠도 좋은 분이야, 나도 두 분을 엄청 사랑하고. 특히 울 엄마는 나 없으면 못 살거든. 그래서 이혼 같은 문제는 먼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부모님이 없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이야기 들으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싶고…, 그래서 눈물이 나서….”
그러고는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이는, 이찬희는 순진하고 귀여운 도련님이었다. 반면에 그를 올려다보는 내 얼굴은 더는 굳을 수 없을 만치 싸늘해졌다. 이찬희가 수줍은 얼굴로 중얼중얼 읊어 댄 소리는 나를,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에 빠뜨렸다.
그는 내 현실을 주말 드라마 보듯이 소비하고 있었고, 제 감정에 취해서는 내게 불쾌한 조언을 멋대로 늘어놓음으로써 나를 기만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지? ‘좆같다’는 욕설은 되도록 쓰지 말고… ‘기만당했다’? ‘불쾌하다’? ‘짜증 난다’?
‘아, 좆같다.’
씨…발 못해 먹겠네.
“이찬희. ‘애들’이 아니라 네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누굴 바보로 알고 이런 헛소리를 조언이랍시고 늘어 놔?
“네가 날 불쌍하다고 속단하고 있잖아, 지금. 아니야?”
다른 놈들은 그 귀여운 얼굴이며 조곤조곤한 말투에 그러려니 넘어갔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애들이 어쩌고 교실이 어쩌고, 핑계만 좋지 네가 하고자 하는 네 얘기고 네 생각일 뿐이잖아. 착한 척 오지랖 부리지 마. 난 너 같은 유형이 제일 싫어.”
언성 높이는 일 없이, 내가 말을 마쳤을 때 이찬희는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아 쥔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낙타나 라마처럼 아래로 늘어진 그의 긴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런 악의도 없어 보이는 그 태도가 나를 더 열받게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나 같은 유형이, 어떤 유형인데?”
그러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물쭈물 되묻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한숨 쉬고 싶은 것을 나는 꾹 눌러 참았다.
그에게 받은 만큼의 불쾌감만 돌려주고자 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먼저 건넨 건 이찬희니까, 나도 그에게 몇 마디 싫은 소릴 쏘아붙일 자격이 있었다.
“남의 기분보다 네 기분이 먼저인 이기적인 유형. 배려하는 척하면서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거. 그거 착한 거 아니야, 자기중심적인 거지.”
그러자 이찬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
속상한 기색을 못 감추는 이찬희를, 나는 달래 주지 않았다.
이찬희에게 내가 바라는 게 바로 이거였다. 내 상태나 기분이나 말투가 어떻건, 내가 그러듯이 그도 나를 방치했으면 싶었다. 내게 관심을 갖지 말고 내가 뱉는 말에 귀 기울이지도 말고, 내 현실을 제 멋진 세계와 비교하며 눈물짓지도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내 바람을 이찬희는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굵은 눈물을 재차 또르륵 흘려 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기, 우신아…. 내가…, 너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미치겠네, 진짜….’
“난 정말, 애들이 널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나는 걱정이 돼서.”
그런 변명을 하며 우는 사람을 바라보기가 나라고 즐거울 리 없었다. 그 사람이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착해 보이는 얼굴을 달고 있을 때의 곤혹감은 이루 빗댈 말조차 없었다.
하지만 교실의 수많은 녀석들이 그러했듯이 손쉽게 그를 달래 주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싶진 않았다. 이찬희가 사는 상냥한 세상은 저 내킬 때 울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는 퍽퍽한 세상은, 이미 버거운 문제로 가득 찬 데다 눈물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이찬희를 둘러싼 상냥한 조연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네 친구가 아니니까.”
조용히 눈물 훔치는 이찬희를 내버려 둔 채 나는 구름다리 통로를 먼저 떠났다. 이쯤 됐으니 뒤에서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욕을 할지언정, 앞으로는 날 내버려 두겠지…. 그런 기대를 하면서.
2학년 들어 자습실 자리 잡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1학년 때는 가장 안쪽 좋은 자리를 손쉽게 선점했고 두 학기 내내 잘 썼었는데 아쉽게 됐다. 학년이 오르고 ‘내년이면 수능’이란 압박감이 생기고 나니, 공부 안 하던 놈들도 우르르 몰려들어 자습실의 좋은 자리를 다 꿰차 버린 탓이었다.
자습실 오픈 공지를 늦게 본 죄로, 내가 도착했을 때 남은 자리는 출입문 바로 앞에 딱 하나였다. 그 자리라도 써 보려 잠깐 앉아는 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오가는 애들이 너무 많고 시스템 에어컨이 정수리 바로 위인 탓에 시끄럽고 추워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30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가방을 정리했다.
‘차라리 심화 학습반을 노려야 하나….’
심화 학습반, 줄임말로 심학반은 전교 등수 상위권 20명을 모은 동아리로, 개별 학습 공간이 곧 부실이었다. 작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심학반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 반 부실이 꽤 괜찮으니까, 웬만하면 신청해 두라던 담임의 말에 찾아간 적이야 있긴 했다. 담임의 말처럼 심학반 부실 자체는 아주 쾌적했다.
문제는, 나 이외의 열아홉 명이 같은 계열사 입시 코디의 제자란 점이었다. 전부 저들끼리 벌써 너무 친했다.
‘네가 이우신이야? 1등 이우신? 수학 한 개 틀린 거 진짜야? 너 중학교 어디 나왔어? 기숙사 살면 학원은 어떻게 다녀? 따로 과외 안 받는다는 거 뻥이지? 혹시, ‘교과서만 보고 만점 받았어요’, 뭐 그런 콘셉트? 어둠의 인강 같은 거 듣니? 링크 공유 가능?’
게다가 질문 세례를 우박처럼 쏟아 대는 통에 도망치듯 나와야만 했다.
그래서 되도록 심학반에는 들고 싶지 않았는데… 지필 고사 이후에도 자습실 자리가 마뜩잖으면, 그땐 별수 없겠거니 싶었다. 학교 바로 앞에도 독서실이 있긴 하지만 당연히 유상인 데다, 등록비가 너무 비싸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고민에 잠겨 터덜터덜 두 다리를 움직였다. 노란 봄꽃이 핀 화단을 지나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도서관 열람실에는 책장을 정리하는 부원 두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나는 일자형 책상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학습 목표가 쓰인 캘린더와 스톱워치를 정면에 세우고, 이면지 뭉치를 스테이플러로 찍어 만든 풀이 노트를 오른쪽에 깔고, 작년도 모의고사 수학 시험지를 꺼냈다.
1등급 커트라인이 무려 79점, 불수능도 아니고 불모의로 유명해진 전설의 시험지였다. 마지막 두 문제는 유형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 곱셈과 함수를 합쳐 일일이 계산해서 풀어내야 했다. 채점해 보니 85점이었다.
‘마지막 문제는 제대로 푼 게 아니니까 마이너스 3점, 마킹하는 시간이 빠졌으니까 마이너스 1점이라 치면… 아슬아슬했네. 1등급 못 받았을 수도 있겠다.’
답안지를 펼쳐 놓고 틀린 문제를 두 번씩 다시 풀었다. 그러고 나니 간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휴식할 겸, 영어 독해 문제를 두 페이지 더 풀었다.
저녁 7시면 적당히 배가 고프면서 공부에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었다. 모르는 단어를 옮겨 적고 탐구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내 어깨를, 낯선 손이 툭툭 두들긴 게 그때였다.
“저기.”
“아, 네?”
“우리 7시 반에 닫아야 해서….”
3학년 도서부원의 빨간 이름표를 확인한 다음, 나는 ‘네, 네’ 대답했다. 널브러진 시험지와 필기 노트를 부랴부랴 정리하는 나를, 낯선 선배가 머쓱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전엔 10시까지 열려 있길래….”
괜히 변명을 덧붙이자, ‘시험 기간에만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1차 지필 고사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은 시험 기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자습실에 빈자리가 생겼는지 보러 갈까? 아, 거기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피곤한데…. 그냥 기숙사에서 공부할까.’
2학년 들어 이사한 방의 새로운 룸메이트는 저녁마다 여자 친구와 전화를 해야 하는 놈이었다. 매일 최소 한 시간의 전화.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하기에, 나도 조건을 내걸었다. 평일에는 오전 5시 반에 진동 알람으로 기상할 것이며, 주말에는 새벽 2시까지 스탠드를 켜 놓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자 룸메이트는 흔쾌히 수면 안대를 구입했다. 그렇게 협상을 타결한 게 어제 일이었다.
지금쯤 내 룸메이트는 침대에 누워서 자깅, 여봉, 아가양 운운하며 갖은 아양을 다 부리고 있을 터였다.
“하아….”
기숙사 휴식실은 어떻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란 복도를 걷는데.
“이우신.”
굵은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톤은 낮고 분위기는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던져진 부름에 일순 속이 울렁거렸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키 큰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혹시 아닐 수도 있다고 나 자신을 가라앉히려 모르는 척했을 뿐 사실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진짜네.’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더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진짜였다. 진짜 권태오였다.
복도를 적신 노을빛이 그의 얼굴 절반을 비추고 있었다. 단단한 얼굴은 그림자가 진 탓에 더욱 입체적으로 보였다. 노을 지는 시간에 도서관에서, 다른 방해꾼 하나 없이, 교복을 입은 권태오와 마주치다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먼저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를 불러 세우다니… 이 상황의 모든 요소가 놀랍고 신기해서, 온몸이 뻣뻣해졌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뭐라 답할까 고민한 끝에 나는 그렇게 물었다.
권태오는 내가 침묵한 딱 그만큼의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속을 알기 어려운 까만 눈동자에 나를 담을 뿐이었다. 두 발짝 가까이 다가가면 내 정수리가 그의 턱에 닿을 것 같았다.
…혹시 키, 190도 넘는 게 아닐까?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큰 것 같네. …아, 맞다, 우산. 아직 못 돌려줬는데…. 그거, 겨울 동안 기숙사 짐을 빼놓느라 집에 가져다 놨는데. 혹시 지금 찾는 거면 어쩌지?
멍하니 길어지던 내 생각들을, 권태오가 한 마디 질문으로 끊어 놓았다.
“너 이찬희랑 같은 반이지?”
예상 못 한 발화에 나는 놀랐다.
“…어. 근데 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하나였다. ‘왜 권태오가 나한테 이찬희 이야길 묻지?’. 그 의문은 이내 조금 더 껄끄러운 모양새로 변했다.
“이찬희랑 너랑 혹시 싸웠냐?”
…‘왜 권태오가 나한테 이찬희랑 싸웠냐고 묻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어렵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지문의 뻔한 힌트를 놓친 기분이었다.
어쩐지, 이찬희가 낯익다고 생각했었다.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운동장에서, 딱 한 번 채홍관의 유도 경기장에서… 나는 이찬희를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이찬희와 함께 다니는 권태오를 바라봤었다.
기시감의 원인을 깨닫자 팔다리의 피가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뇌를 돌던 혈액도 물로 변해 버린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순 없었다. 내 머릿속은 백짓장이 됐다.
긴장하고 당황한 탓에 손끝에서 쥐가 났다.
“음…. 이찬희가 좀… 마음이 여리거든. 걔가 하는 말들이 오지랖 부린다고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워낙 착한 애라 뭘 모르고 그런 거니까.”
권태오의 말씨는 아주 부드러웠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말투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를 변호해 주는 그는 다정한 친구였다. 내 어깨를 움켜쥐고 바닥 위로 엎어 치는 잔인한 그의 모습을 수십 번 상상했었는데, 정작 권태오는 미소가 따듯한 소년이었다. 웃음 짓는 양쪽 볼에 보조개가 생기는… 그는, 내가 결단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찬희의, 다정한, 조연이었다….
“괜히 애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잘 좀 지내.”
“‘화풀이’?”
나는 격양되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어 표정을 감추는 건 물론이고 몸을 바르게 세우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찬희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자기한테, 화풀이를 했다고?”
현실성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힘입어 언성을 키웠다.
“걔도 권태오 너도, 지금… 사람 어이없게 이게 무슨…. 이찬희가 정확히 뭐라고 그랬는데? 아니, 너… 제대로 이야기를 듣고 오기는 한 거야?”
“어. 너네 부모님 이혼했다며.”
“…….”
그 순간 내 입술이 딱 다물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나는 우산… 이따, 어머니가 가지고 오기로 해서….’
3월에 한 거짓말이 생각날 게 뭐란 말인가.
몇 초 만에 속이 까맣게 타 버렸다. 어차피 권태오는 그날 내게 우산을 준 일이든 내가 지껄였던 변명이든 기억조차 못 할 터였다. 만에 하나 기억한다 해도, 내게 없는 게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권태오가 내 궁색한 변명의 진위를 알아챌 방도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부끄러웠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이고 지금 이 쪽팔리는 순간이고, 나는 다 잊고 싶었다. 커다란 몸에서 나는 냄새, 아무렇게나 선 두 발의 각도, 나를 비추는 눈동자의 빛, 낮은 음성으로 뱉는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면서도. 나는 다 잊고 싶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오늘의 기억에 상처를 입을까 봐.
차라리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내 말은…. 후, 아니다.”
한 박자 늦게, 권태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더는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부끄럽고 창피해서 맥이 다 빠졌다.
“아니…, 됐어. 뭔 말인지 알겠으니까….”
“그게 아니라, 이우신….”
“그만 말해. 내가 알겠다잖아.”
권태오의 멋진 모습들을 일방적으로 감상하며 상상한 것들은 그저 내 망상일 뿐이었다. 나와는 엮일 일이 전혀 없는 저 멀리의 권태오. 하이에나 같은 남자애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권태오. 실제 권태오가 내 상상과 아주 같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찬희를 변호하는 건… 반 아이들이 그러듯이 멋대로 나를 평가하고, 내게 조언하는 건…. 권태오는 그러면 안 됐다. 내가 봐온 권태오는, 내가 좋아하는 권태오는….
“이우신.”
“아, 씨발….”
나 얘 좋아하는구나….
깜짝 놀라 나는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 만큼이나 권태오도 놀란 표정이었다. 멋대로 튀어나온 ‘씨발’…, 두 글자 욕설이 메아리치듯 그와 나 사이에 맴돌았다.
욕…을 하다니. 올해 들어, 아니 고등학교 올라와서 한 번도 누구한테도, 누구 앞에서도 욕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욕을 하다니.
당황해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려는 내게로 권태오가 손을 뻗어 왔다. 녀석의 손이 내 팔뚝에 닿자마자, 나는 힘껏 팔을 휘저었다.
“놔.”
두 눈동자를 똑바로 추켜올리고 그를 보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됐다. 뱉고픈 말들이 입천장을 박박 긁어 댔지만 그중 무엇 하나 번듯하게 발음되질 않았다. 혀가 얼어붙은 듯했다.
‘그래 네 착한 친구랑 싸워서 미안하게 됐다’고 할까? 아니면 미친 척, ‘부모 이혼 안 한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잘난 척이야’? 그것도 아니면, ‘방금 욕한 건 실수였어’라고 변명해야 하나? 아니 사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왜 하필 너야?’
…왜 하필. 왜 하필 너야.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왜 하필 권태오 너여야 해?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왜 다른 말도 아닌 비난을 해야만 해?
개중 어떤 말도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표정을 지우고 가만히 선 채, 나는 권태오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권태오의 두 눈동자가 좌우로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그가 잡은 팔뚝을 놓아주자마자 나는 도망쳤다. 어깨에 멘 가방이 덜렁거리며 등을 쳐 대도 아랑곳 않고,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이깟 일로 눈물짓고 성낼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기숙사 입구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 숨을 헉헉 내쉴 때는, 다만 분할 뿐이었다.
‘짜증 나….’
짜증이 났다. 부모가 이혼한 게 뭐 대수냐고 말한 장본인은 바로 나인데, 같은 이야기를 권태오가 입에 담으니 완전히 다르다는 게.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울렁거린다는 게, 자존심에 금이 갔다는 게, 별수 없이 피부 위로 진땀이 흐르고 아랫배가 아파 오는 게, …나는 짜증났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알람을 끄고, 따듯한 물로 몸을 씻었다. 창문을 열고 양치하면서 어젯밤 자기 전에 정리해 둔 오답 노트를 읽었고, 교복을 챙겨 입고 가방을 맸다.
6시 10분, 룸메이트가 바닥에 던져 놓은 젖은 수건과 내 옷가지를 세탁망에 담아 들고 방을 나섰다. 전용 태그에 호수를 적어 세탁물 수거함에 집어넣은 뒤, 학교가 아닌 산책로로 향했다.
소나무가 일자로 선 산책로를 따라 언덕길을 내려가면 정보관과 교사 전용 휴게 공간이 있었는데, 내 목적지는 두 건물 사이에 놓인 플라스틱 개집이었다.
“조심아, 잘 잤어?”
상냥하게 목소리를 내며 나는 개집 앞으로 후다닥 다가갔다.
‘개 조 심’
세 글자가 새겨진 팻말 밑으로, 호랑이 무늬 얼룩을 가진 큰 개가 얼굴을 내밀었다.
겨울 방학 중순이던가, 교장인가 교감 선생님이 대뜸 강아지를 주워다 놓았었다. 그 바람에 경비 아저씨가 관리를 떠맡았는데, 개는 ‘관리’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방치된 상태였다. 어리고 작을 적에는 인기도 많았고 애들이 오가면서 빵이나 소시지를 던져 주기도 했는데, 크고 나니 털은 더러워지고 입가로는 언제나 침을 줄줄 흘려서 찾는 이가 없었다.
이름도 따로 없어서 ‘멍멍이’, ‘레오’, ‘똘똘이’, ‘호랑이’ 등 부르는 사람마다 다 달랐는데, 나는 녀석을 조심이라고 불렀다. 개집 팻말에 ‘개조심’ 세 글자가 이름처럼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개밥 그릇에는 언제 부어 준 건지 모를 사료가 채워져 있었고, 그 위에 파리가 앉아 있었다. 손을 휘휘 저어 파리를 내쫓으며 쪼그려 앉자, 조심이가 슬렁슬렁 다가왔다. 나는 가방을 열어 250ml 우유곽 하나를 꺼냈다.
“어제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 개는 유당불내증이 있대. 그래서, 락토프리 우유만 먹어야 한대.”
중얼중얼 알려 주면서 우유를 뜯어, 갈색 사료에 부어 주었다. 맛도 없어 보이고 영양도 모자라 보이는 불량 사료가 내심 거슬렸었는데, 그렇다고 간식을 사다 주자니 개 간식이 어째 사람 간식보다 비쌌다. 문제집 살 돈도 빠듯한 처지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다행스럽게도 조심이는 우유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킁킁 냄새를 맡더니, 우유에 적신 사료를 와작와작 먹기 시작했다. 커다란 밥그릇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착하다. 잘 먹네. 이제 산책 갈까?”
꼬리 치며 달려드는 조심이의 머리를 밀어내면서, 나는 개집 앞 기둥에 묶인 목줄을 풀어 손에 쥐었다. 조심이는 산책 매너가 좋은 편이었다. 속이 풀리도록 소나무길을 힘껏 달리게 해 주고 나면, 그 뒤부터는 부쩍 얌전해져서 나와 보폭을 맞추어 걷고는 했다.
큰 발로 터벅터벅 걷다가 문득 ‘헥’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보고는 하는데, 그 표정이 함박웃음 같아서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나는 여유를 되찾은 조심이와 함께 느릿느릿 숨을 고르며 걸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아침 산책로 공기가 상쾌했다. 딸기와 블루베리를 키우는 텃밭과 다목적 잔디 광장에 도착해서 조심이는 나무마다 오줌을 쌌고 잔디밭에 똥도 쌌다.
그렇게 7시가 될 때까지 조심이와 걸었다. 헥헥 웃는 조심이를 보자니 나까지 개운해졌다.
‘이거 봐, 난 튼튼해.’
그리고 자화자찬했다. 싫은 애가 생겨도 기분이 축 처져도 간간이 마음이 따끔거려도, 내 생활 리듬은 아무도 해치지 못한다고.
이찬희고 권태오고 간에, 어차피 타인일 뿐이었다. 그들로 인해 바뀐 것은 하나뿐이었다. 늘 걷던 잣나무길로는 오르지 않으리란 것. 잣나무길을 걸으면 바로 옆의 운동장이 훤히 보였는데, 평일 아침 7시마다 유도부 선수들이 운동장을 달리곤 했었다. 여러 차례, 조심이 산책을 빌미로 그 길을 오른 적이 있었다.
“…이제 그리로 안 갈 거야.”
조심이는 ‘헥헥’ 소리 내며 그리로 걷겠다고 버텼지만, 내가 ‘안 돼’ 하고 강경하게 손짓하자 이내 져 주었다.
“착하다, 조심이.”
어제 나는 권태오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권태오를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되도록 그를 보는 일을 삼갈 것이었다.
하루의 시간은 남들보다 내게 짧은 편이었다. 별세계 사람인 이찬희보다도, 아는 척 ‘이우신’ 하고 내 이름을 부르던 권태오보다도 귀한 게 바로 시간이었다. 공부하기에도 모자란 내 금쪽같은 시간을, 나를 싫어하는 놈들을 위해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조심이를 개집 자리에 되돌려 놓자 하나둘 교복 입은 아이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들 무리에 섞여 영단어 노트를 꺼내 쥔 채 등교했다.
교실에 도착해서는 그저 꿋꿋하게, 말없이 공부에만 집중했다. 덤덤하니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자 지난 며칠간 내게 관심을 보이는가 싶던 아이들도 흥미를 잃은 듯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공주윤이 찾아와서 슈크림빵을 내민 것만 빼면, 달리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낸 기억도 없는 수준이었다.
“꽁시이인. 나 과외 점수 존나 떨어져서 어제 엄마한테 처맞았어.”
투정하듯 말하면서, 공주윤이 내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빵 봉지를 뜯어 안에 든 스티커를 내 어깨에 붙였다.
“어차피 진짜 네 점수도 아니었잖아.”
그가 붙인 스티커를 떼어 내면서, 내가 대꾸했다. 반 배치도 갈라졌고 수학 숙제를 해 줄 필요도 없어진 마당에 나를 찾아온 그가 좀 신기했다.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다 싶었다.
공주윤은 서운하다는 투로 투덜거리며 몇 마디 더 일방적인 수다를 떨었다.
“근데 너네 반 분위기 왜 이렇게 좆같냐? 다른 반 애는 출입 금지 구역이라도 돼? 아아, 그건 아니라고? 그럼 이 씨발 놈이 뭘 자꾸 쳐다봐?”
뒷말은 내가 아닌, 칠판 앞에 선 무리에게 건넨 소리였다. 녀석들이 ‘그게 아니고’ 하며 구시렁거리다가 이내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놈들을 향해 뭐라 더 욕하는 공주윤의 팔뚝을, 나는 툭툭 쳤다.
“…네가 큰 소리로 떠드니까 쳐다본 거겠지. 좀 조용히 말해.”
어째 한 학년 올라갔다고 더 깡패가 된 것 같았다. 공주윤은 ‘편을 들어 줘도 지랄’이라며 이제는 내게도 욕을 했다. 씩씩거리는 녀석을 그러려니 내버려 둔 채 나는 펜을 들고 오늘의 학습 목표 한 줄을 지웠다.
“잘 쓰고 있네?”
공주윤은 그런 내 머리를 좌로, 우로 두어 번 흔들더니 다른 놈들과 함께 교실을 떠났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다음, 나는 빽빽한 일정으로 채운 가죽 노트를 덮었다.
마지막 수업인 7교시가 끝난 뒤에는 교무실에 들러야 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걸으면서 혹시 권태오가 지나가진 않을까 생각했다. 교무실 문을 열면서는 이 안에 권태오와 이찬희가 보란 듯이 서 있으면 어떡하나 아주 잠깐 긴장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얼굴을 외우고 있을 거란 사실이, 이렇게나 거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을 깜빡이며 교무실 안을 둘러보자니 창가 쪽 자리에서 손 흔드는 수학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스타 강사 출신으로, ‘오마은’이라는 이름에 올해 서른아홉인 나이를 합쳐 붙은 별명이 ‘마흔 쌤’이었다. 심학반 남자애들이 그렇게 부른 걸 시초로, 어느샌가 몇몇 선생님들까지 마은 쌤을 마흔 쌤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유치한 별명 대신 성함으로 부르는 학생이 나를 비롯해 몇 안 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 마은 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쌤이기도 했다. 거의 매일 교무실을 찾아와 문제 풀이를 여쭤봐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잘 알려 주시기도 했고, 입학 당시부터 장학금 관련 업무 담당을 맡은 분이라 내 사정도 잘 알았다.
“우신이 왔니?”
“네. 안녕하세요.”
말을 거는 선생님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 마은 쌤 맞은편 스툴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사인이 필요하다는 서류도 확인했다.
“우신이 경우가 워낙 특이해서 말이야. 매 학기마다 이렇게 서명을 해야 한다네?”
“네.”
선생님 말마따나 내 경우가, 다른 장학생에 비해 특이하기는 했다. 나는 어지간한 장학 대상에 전부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재단을 통해 기초 생활 장학금을 현금으로 받을 수도 있었고, 채홍고 자체의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중복 수령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매 학기마다 교무실에 불려 와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나는 늘 기초 생활 장학금을 포기하고 성적 우수 장학금을 선택했다. 생활 장학금이라 해 봤자 50만 원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성적 우수 장학금은 현찰은 안 준대도 한 학기 채홍고 수업료와 기숙사비, 급식비가 전부 공짜였다. 따지자면 이백만 원 가까이 이득이었다.
역시, 세상의 무어든지 동정의 값보다는 칭찬의 값이 더 후한 법이다.
“사이트 보니까 올해부턴 보충 수업료도 포함이라던데요.”
“그래, 맞어. 저녁 급식비도 포함하는 걸로 바뀌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 꼭 챙겨 먹고.”
“네.”
“요새 공부는 잘 하고 있지? 중간고사 준비는 하고 있어?”
“네.”
“수업 진도 따라가는 데는 문제없고?”
“네.”
서류 빈칸에 이름을 적고, 옆자리에 서명을 하고, 날짜를 기입했다. 종이를 건네자 선생님은 ‘음음’ 하고 두어 번 확인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은 쌤은 수업할 때는 범처럼 무서운 선생님이지만 개개인으로 마주하면 이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학생 차별하기로 유명하다며 싫어하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 차별의 혜택을 받는 쪽이었다.
하나, 공부를 잘한다.
둘, 집안이 어렵다.
나는 마은 쌤이 ‘잘해 주는’ 학생 유형 두 가지에 모두 포함됐으니까.
그래선지 선생님이 말했다.
“우신아,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해. 선생님이 알아봐 줄게.”
교실로 돌려보내기 전에 관례처럼 건넨 소리인 듯했지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 그럼 재작년도 3학년 모의고사 시험지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영어랑 수학이요.”
“몇 월 달 거?”
“있으신 거 전부 다요.”
“하하, 그래. 문제집도 좀 가져갈래? 교사용이긴 한데.”
“네. 감사합니다.”
“어느 과목으로 줄까?”
“전부 다요.”
교무실에서 나올 때는 들어갈 때보다 무게가 3㎏는 더 늘어난 채였다. 문제집 여섯 권에 시험지 세 뭉치를 안아 들고, 나는 기분 좋게 교실로 돌아갔다. 그새 종례를 마쳤는지 반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침 야간 학습도 없는 날이어서, 모두들 집이나 기숙사로 돌아간 듯했다.
내 자리로 가, 나도 늦게나마 가방을 챙겼다. 스톱워치를 끄고 캘린더를 접어 넣는데, 문득 머리 위로 커다란 백팩 그림자가 졌다.
얼굴을 들자 씩 웃는 소년의 시원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흰 이를 드러내며.
“우신아! 어디 갔다 이제 오냐?”
목소리를 쩌렁쩌렁 내는 녀석은 강건우였다.
“담임이 아까 종례했는데. 너 도망갔다고는 체크 안 했어, 내가 너 똥 싸러 갔다고 했거든.”
“어… 고맙다.”
문제집과 시험지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나는 그를 힐끔 살폈다. 며칠간 조용하다 싶더니 왜 친한 척이지…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가,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찬희 때문에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다. 강건우는 내게 잘못한 게 없는데….
“뭐 하다 지금 온 거야?”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강건우가 해맑게 물어 왔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는 거짓말했다.
“똥 싸고 왔어.”
“아하.”
그러고는 가방을 등에 멨다. 그럼 안녕, 인사하려 입을 열자 강건우가 반 발짝, 가까이 나에게로 붙어 섰다. 너무 가까운 탓에 퇴로를 막힌 기분마저 들었다.
“저기… 있잖아. 담임한테는 내가 말해 둬서, 너는 따로 말 안 해도 돼.”
“어? 뭘?”
“내가 말했다고, 너 가족 사항이 그렇다고. 담임도 이제 기억났는지 미안해하더라.”
‘아아’ 하고 나는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다. 맞아, 얘 반 회장인가 뭐 그랬지. 이찬희와의 어이없던 사건 때문에 나는 강건우를 잊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녀석은 내 일을 무척 신경 쓴 모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학급에 별 관심이 없고 평균 성적만 잘 뽑히면 그만이라는 류의 심드렁한 선생님이었다. 그런 담임이, 학생 중 하나가 한 부모 가정이라는 걸 까먹었다 해서 사과할 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더란 말은 강건우가 붙인 거짓말일 게 뻔했다.
녀석이 인기 많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웃어 보였다.
“그래. 고마워.”
“고맙긴!”
그러자 강건우가 내게로 더욱 바짝 붙어 왔다. 쫓기는 기분이 들어 나는 주춤주춤, 교실 문 밖까지 강건우를 바로 뒤에 매단 채 걸어야 했다.
“우신아, 근데 너 이제 뭐 해? 학원 가냐?”
“아니. 오늘은 도서관에서 공부할 거야. 자습실에 자리가 없어서….”
“나랑 피방 안 갈래?”
뜬금없는 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방금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분명 말했는데… 강건우는 ‘공부한다’는 말을 대충 에두른 핑계로 안 모양이었다. 나한테 피시방 가자는 놈은 고등학교 들어서 처음이었다.
“응? 가자 가자, 내가 쏠게. 요 앞에 새로 생긴 덴데, 메뉴도 존나 많고 컴퓨터 사양도 그냥 돌았어. 볶음밥 완전 맛있음!”
조잘거리는 강건우의 얼굴을 나는 빤히 바라봤다. 별달리 나와 친해질 이유도 목적도 없는 녀석은 그저 해맑았다. ‘가자’며 내 팔을 잡아끄는 놈을 뿌리칠까 하다가, 왜인지 힘이 빠져서 그를 따라 걸었다.
“강건우. 미리 말해 두는 건데, 나 되게 많이 먹어.”
“야, 참 나! 네가 먹어 봤자지! 빨랑빨랑 따라 와라!”
“…알겠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피시방 식사라고는 해도 밥을 사 준다는데 나쁠 건 없지 싶었다. 방과 후에 누구와 어울리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이제 공주윤도 없고….’
쉬는 시간에 공주윤이 다녀갔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안정감을 느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모조리 이찬희의 편인 것만 같은 반 애들 중에, 그나마 하나라도 내 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점수 때문이 아니라 사교성 좋은 성격 덕분에 반 회장이 된 강건우는 호감형 인간이었다. 나와 달리 목소리도 쾌활하고 성격도 밝아 보였다. 그와 내가 친구까진 될 수 없겠지만, 오늘 하루를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었다.
친구까지는 못 되더라도 교실 안에 나와 어느 정도 아는 애 하나만 있어도, 그 그림자에 묻혀서 올 한 해를 무던하게 지낼 수 있지 싶었다.
“오케이, 가는 거다? 거기 알바 누나도 완전 예뻐!”
강건우의 실없는 농담을 들으면서 나는 그를 따라 걸었다. 학교에서 빠져나가 도착한 피시방에는, 그가 말한 예쁜 알바 누나가 없었다. 대신에 수염 덥수룩한 대학생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건우 너 이상형이 참 독특하구나.”
안쪽 자리로 걸어 들어가면서 내가 말했다.
“아, 씨… 아니라고!”
“너의 사랑, 진심으로 응원할게.”
“아니라니까!”
소리 지르는 강건우를 뒤로한 채 나는 깨끗한 자리에 앉았다. 학교 바로 앞, 그저 피시방일 뿐이라지만 누굴 따라 놀러 나온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몇 달 만인가 세어 보려다 나는 그만뒀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났다. 간만에 즐거웠다. 옆자리 의자에 풀썩 몸을 앉힌 강건우가, ‘형님이 알려 준다’며 내 마우스를 까딱이는 걸 구경할 뿐인데도.
자리에 앉아 천천히 둘러본 피시방 내부는 피시방이라기보다 카페 같았다. 피시방에 온 게 너무 오랜만인 탓에, 나는 내가 모르는 새 전부 이렇게 고급지게 변한 건지, 이 동네 피시방만 유난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강건우가 회원 정보 입력을 마치고 마우스를 건네주자마자, 나는 모니터 속 음식 메뉴판을 먼저 열었다.
“아 근데 우신아, 너 이찬희랑 진짜 싸운 건 아니지?”
강건우가 중얼거렸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분위기 좀 이상한 거 갖고 애들이 유난인 거, 맞지? 하긴, 난 너나 이찬희나 누구랑 싸우는 거 상상도 안 된다. 특히 이찬희는… 존나 착하잖아. 오지랖이 좀 넓어서 그렇지.”
가만히 듣자 하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오지랖이 넓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한때 그놈의 넓은 오지랖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니 내가 맞았다. 옥혜 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미련한 어린애였다. 오죽하면 그 착한 옥혜 씨조차도 ‘너를 혼자 놔두고 내가 어딜 가겠니’ 한숨 쉴 지경이었다.
중학교 운동회 날에는 ‘여왕 피구’에 기사로 참여했다가 이름도 모르고 지내던 여자애를 대신해 공을 스무 대쯤 맞았고, 종교 권유를 하는 대학생과 시시비비가 붙은 낯선 사람을 구해 주려다 오히려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왜? 이찬희 정도면 괜찮지 않나….”
강건우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모니터 속 장바구니에 볶음밥, 짜파구리, 치즈 핫도그, 불만두, 밀크셰이크와 딸기 라떼를 넣으며 내가 대꾸했다.
“됐어. 나는 이찬희랑 엮일 생각이 없어. 걔도 이제는 내가 싫을걸.”
추가 옵션으로 볶음밥에는 계란프라이 2개, 짜파구리 맵기 4단계, 핫도그 사이드 메뉴 웨지 감자, 딸기 라떼 사이즈 업을 클릭했다. 서비스 쿠키로 초콜릿맛을 고를까 라즈베리맛을 고를까 고민하는 동안, 강건우는 제멋대로 수다를 떨어 댔다.
“너무 그러지 말고…. 이찬희 말이야, 앵간하면 걔랑 잘 지내는 게 편해. 너 권태오 알지? 그 왜, 키 존나 크고, 유도부에서 제일 유명한 애.”
알다마다…, 어제 걔한테 씨발이라고 욕까지 했지.
“걔가 이찬희를 조온나 싸고돌거든. 가만 보면 이찬희 보디가드나 변호사 같다니까?”
그래, 좀 그렇긴 하더라. 여차하면 나까지 팰 거 같던데….
“그래서 아무도 이찬희를 안 건드리는 거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걔네 둘이랑 척질 일이 누가 있겠어?”
그 바보가 지금 네 말을 듣고 있어요.
“둘이 뭐 초딩 때부터 친구라던데…. 1학년 땐 형제라는 말까지 돌았다니깐? 둘 다 집도 부자잖아. 권태오는 어머니가 한성 임원인가 뭐 그렇고, 이찬희는, 그 뭐야, 집안 대대로 존나 부자라던데.”
조상이 나라를 팔았나, 집안 대대로 존나 부자게….
별세계 이야기 듣는다 치고,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강건우가 대단하다는 투로 포장하는 그들 소식은, 나로서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일 뿐이어서 이렇다 할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권태오나 이찬희보다는 한성 임원이라는 걔네 어머니가 부러웠다.
그런 대기업 고위 임원은, 단순히 취직해서 노력하는 걸로는 못 되겠지? 대학은 어디 나오셨을까. 어떤 루트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가신 거지? 그럼 연봉은 얼마나 될까?
“우신이 너는 이찬희가 왜 싫어? 애가 착하고 순둥순둥하던데. 이 형님이 볼 땐 말이야, 걘 너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 보여. 눈 딱 감고 잘 지내보지 그래?”
“…이 동생이 볼 땐 말이야, 걘 내가 아니라 의사를 만나야 돼.”
길어지는 이야기를 듣다못해 내가 대꾸했다. 인성이 문제인지 정서가 문제인지 아무튼 뭐 하나는 잘못된 것 같으니까, 병원 상담이나 받았으면 좋겠다고. 농담으로 건넨 소리엔 진심이 절반 섞여 있었다.
내 말에 강건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몇 초간 당황한 듯 내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목을 위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피시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우리 이야길 듣는 귀가 있진 않은지 살피는 눈치였다.
이내 강건우가 나를 향해 고개 숙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걔한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어? 왜?”
“이찬희 걔, 진짜 환자거든…. 지병인가 뭔가가 있어서 한 번 죽다가 살아났대. 중딩 때, 아파서 학교도 거의 반년 쉬었다던가, 뭐 그래.”
“…….”
“그래서 권태오가 오냐오냐 싸고도는 거 아니겠냐.”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며칠간 이찬희를 볼 적에는 평생 유복하고 건강하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도 그럴 게, 마른 몸매이긴 해도 체격이 눈에 띄게 뒤처지는 편도 아니었고, 키만 보자면 나보다 조금 더 크기까지 했다. 체육 시간에 종종 벤치에 앉아 있는 것도 같았지만 크게 혈색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병상에 누운 이찬희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죽다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긴 한 건지, 거짓말을 들은 것처럼 어색할 지경이었다.
나는 갑자기 강건우가 미워졌다.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그것부터 말해 줬어야지, 내가 의사니 뭐니 실언하기 전에….
단숨에, 이찬희는 고난을 이겨 내고 살아남은 착한 천사가 됐다. 권태오는 약한 친구를 지켜 주는 의리 있는 보호자였다. 결국은 나만 나쁜 놈이었다.
‘아…. 의사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말걸….’
괜스레 속이 복잡해진 날 두고 강건우는 게임 고르기에 한창이었다. 모니터 하단의 시간을 바라보며 저녁 공부를 생각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귀를 헹궈 내서 들은 말을 지워 내고 싶어졌고, 30분이라도 게임을 해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싶어졌다.
“이거, 이거 하자! ‘보어스 페어’.”
강건우가 고른 게임은 하필이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FPS 게임이었다. 한 수 알려 주겠다며 신난 그의 옆얼굴을 힐끔 살핀 다음, 나는 천천히 게임에 접속했다. 로그인 자체도 간만에 하는지라 휴대폰 인증을 다시 거쳐야만 했다.
“아! 할아버지냐?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빨리 들어와, 이우신.”
1대1 경기 방을 만들어 놓고 킬킬거리며 날 기다리던 강건우는 접속한 내 캐릭터, ‘그럼이만갑오개혁’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너 범생이 아니었어?”
“응, 맞는데.”
모니터 속 내 캐릭터는 게임 출시 당일에만 한정으로 오픈됐던 핑크색 피부인 남자로, 키와 근육은 최대치였고 만우절 특집 오우거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머리에는 2년 전엔가 이벤트 상품으로 받은 토끼 귀 머리띠를 꼈고 복장은 라텍스 재질 바니 걸 유니폼이었다.
아이템마다 성별 제한이 걸린 게 벌써 몇 년 전 패치였다. 남캐에게 여캐 옷을 입힌 것은 그 바람에 고인물의 상징이 됐다. 즉, 옛날에 입혀 두고는 한 번도 갈아입히지 않았단 뜻이었다.
기가 죽은 듯 내 프로필을 살피는 강건우를, 나는 살짝 달래 주었다.
“전에 잠깐씩 하던 게임이야. 내 프로필 봐 봐. 아마 플레이 시간은 너보다 적을걸….”
“어…, 진짜네? 흠, 좋아. 한 판 붙자!”
그대로 나는 강건우의 캐릭터, ‘사랑하는울아버지’를 다섯 번 죽였다.
“…….”
“…….”
여섯 번째로 환생한 강건우의 캐릭터는 HP가 15밖에 남지 않은 내 캐릭터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나로서는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반항 없이 그가 날 죽이게 내버려 둔 다음, 환생 포인트인 탑에 소환되자마자 저격 총으로 무기를 바꿔 그의 머리를 쏴 죽였다.
―스코어, 7:1. 전투 종료까지 2분 남았습니다.
나는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캐릭터 환생에 소요되는 시간은 25초에서 30초 남짓이었다. 전투 종료까지 남은 시간이 120초이니, 아무리 빨리 죽여 봤자 강건우는 내 점수를 넘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강건우는 최선을 다해 나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수학에 약한 모양이었다.
내 캐릭터를 열심히 죽이는 강건우를 내버려 둔 채, 나는 알바생이 가져다준 음식들을 받았다.
“아악! 악! 야! 이우신 너 뭐야? 공부벌레 아니었어? 왜 게임도 잘해? …뭘 또 그렇게 많이 시켰어?”
“내가 후회하지 말라 그랬잖아.”
볶음밥을 우물우물 볼에 밀어 넣는 나를, 강건우는 괴물 보듯 응시했다. 숟갈을 입에 문 채 나는 변명했다.
“아, 이 게이만 자라는 거야.”
“뭐라고? 좀 이상하게 들리거든? 다 먹고 말해 줄래?”
“…나, 이 게임만 잘하는 거라고.”
강건우의 말이 맞았다. 그가 자신했던 것처럼, 피시방 볶음밥은 아주 맛있었다. 불만두도, 웨지 감자도, 핫도그도 맛있었다.
입가심으로 딸기 라떼를 흡입할 때까지도 강건우는 말이 없었다. 이깟 일로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만 ‘그럼이만갑오개혁’ 계정의 프로필을 뒤적거리면서, 지난해의 기록들을 구경 중이었다. 올해는 접속조차 한 적이 없어 랭크가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상위권 유저였었다.
강건우는 내 점수 하락을 나보다 더 아까워했다.
“와…, 힐러랑 탱커만 해서 점수 올린 거네?”
“응.”
“남자는 딜러지, 임마!”
…그 힐러에게 져 놓고는 말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멋진 무기나 스킬을 가진 딜러는 그 자체로 화려했고, 플레이하기도 가장 재밌었다. 재미로 따지자면 나도 딜러를 좋아했다. 하지만 딜러로 게임을 잘하려면, 첫째 조건으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했다. 에임을 연습한다거나, 게임 업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접속해서 기술을 익힌다든가… 그럴 여유가 내겐 없었다.
“예전에… 잘하는 딜러 유저랑 듀오해서 그만큼 올린 거야. 혼자 하더라도 팀 기술 미리 체크하고, 상대 팀 다음 진영 예상하고, 전략 오더만 잘 내리면 탱커나 힐러로도 충분히 점수 올릴 수 있고.”
그렇게 말하고 나니 머쓱해졌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딜러를 하는 강건우에게, 시간 효율을 따져가며 정공법만 쓰는 나는 지루한 플레이어일 터였다.
게임뿐만 아니라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지금, 당장을 즐기는 애들에게 내일, 나중, 미래를 준비하는 나는 상대적으로 따분한 놈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무얼 할 때 ‘져도 된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한번 잡은 책은 모르는 구석이 없게 달달 외워야 속이 풀렸고 이왕 시험을 칠 거면 만점을 받아야 의미 있었다. 보람이라는 건, 힘들고 지치고 눈물이 나도 꾸역꾸역 해내어 얻는 성취에 있었다.
과정을 즐겨 봐야 결과가 나쁘면 소용없는 일이다. 불나방처럼 당장의 재미만 쫓는 건 인생에 대한 민폐였다. 그 뒤에는, 혼자 남을 뿐이니까. 나는 혼자 남았다. 욜로 인생을 사느라 바쁜 아버지가 낳은 결과물로써.
그런 이우신을 ‘재미없다’고 말한다 해도 나는 강건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를 입에 넣으면서, 나는 푹신한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게임에 꽤 진심인 듯, 강건우는 한참 동안 내 경기 기록들을 살폈다.
“프린세스 윤이 왜 너한테 꽂혔는지 알겠다.”
그러더니 뚱딴지같은 소릴 했다.
“공주윤? …갑자기 걔가 왜?”
“아니다, 이참에 잘됐어! 우신아, 아니… 우신이 형. 저 버스 좀 태워 주시면 안 돼요?”
지금 보니 강건우에겐 나쁜 습관이 있었다. 상대가 하는 말을 깊이 듣지 않고 저 할 말만 두다다 쏴붙이는 식이었다.
‘그래서 공주윤이 뭐 어쨌다는 건지….’
어리둥절한 나를 내버려 둔 채 강건우는 모니터 속 메뉴판을 클릭하더니, 과자와 음료를 잔뜩 주문했다.
“우신이 형, 형아, 형님아!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대신 나랑 경쟁전 세 판만 뛰어 주라. 점수 쫌만 올려 보자, 제발, 응?”
어린애처럼 반짝거리는 강건우의 눈을 보며 나는 실소했다.
“쿠키는 시키지 마. 이거 맛없어.”
그러자 강건우가 ‘예에’ 하고 쾌재를 불렀다.
강건우의 부탁대로 나는 그와 정신없이 게임을 했다. 재미를 쫓는, 남자다운 딜러라더니 과연 강건우의 플레이는 엉망진창 쓰레기였다. 적진으로 무작정 달려들어서, 적도 죽이고 저도 죽어 버려서 팀에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건우야, 그렇게 상대를 한 명 죽이더라도 네가 죽어 버리면, 우리 팀에서 얻는 건 0이겠지?”
“엉? 뭐라고?”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건우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두어 번 같은 짓을 반복하게 내버려 둬서 상대팀이 그를 우습게 보고 덤비게 한 뒤, 그걸 역이용하면 그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게임 창 위에 ‘접속 세 시간 경과’ 알림이 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놀라 허공에 대고 기술을 날렸다. 벌써 밤 10시, 기숙사 통금 직전이었다.
“…나 이제 가 봐야 돼.”
머릿속이 하얘진 채 나는 게임을 후다닥 종료했다. 근방에는 강건우가 뜯어 놓고 내가 다 먹어 치운 과자 포장지며 음료수 캔이 나뒹굴었다.
‘큰일 났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당황했다. 너무 재밌게 놀아 버렸다. 잠깐이나마 시간 감각이 사라져서는 몇 시인 줄도 몰랐고, 밀린 공부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권태오에 관한 상념도 잊어버렸다.
정말,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떨떠름한 얼굴로 가방을 챙기는 나를 따라 강건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늘 게임에서 있었던 재밌는 일화를 추억하듯 종알거리면서, 내 등을 툭툭 쳤다.
“우신아, 내일 보자!”
“어? 어….”
상쾌한 얼굴로 떠나는 강건우의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반나절 만에 그와 무진 친해진 것 같았다. 그마저도 곤혹스러웠다.
‘…내가 왜 그랬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게임을 세 시간이나 해 버린 거지? 요즘 힘들다고 해이해졌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튼튼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생활 리듬이라는 게 대번에 박살난 기분이었다. 남들에겐 별일 아닌 일탈이겠지만 나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학교를 향해 뛰려다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지금 택시를 타고 간대도 타임 오버였다. 결국은 지각 기록을 남길 게 뻔했다. 기숙사 통금 시간을 어기면 벌점이 1점이다. 한 번만 더 실수해서 2점이 되면, 행실 점수로 반영되어 기록부에 남게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외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꼼수라도 써야지….’
휴대폰을 열어 5분 남은 시간을 확인한 다음, 담임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 담임은 사람이, 좋게 말하면 털털했고 나쁘게 말하면 섬세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식이어서 미리 말만 해 두면 어느 정도는 학생 변명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내일이면 하루가 늦었건 말건, 오늘 일자의 외박 허용증을 써 줄 터였다.
얼레벌레 벌점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새로운 문제가 남았다. 외박하겠다고 말했으니 진짜 외박을 해야 한단 문제였다. 기숙사로 갈 수 없게 된 내가, 밤새 묵을 곳이라면 집뿐이었다. 채홍동에서 전철을 40분 동안 타고, 내려서 버스를 한 번 더 탄 다음, 15분을 더 걸으면 나오는 집.
‘내일은… 조심이 아침 산책 못 해 주겠네….’
일탈한 죗값으로, 나는 인강을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을 꼬박 넘기는 시간을 멍하니 쓴 뒤에야, 길가 구석구석 수상한 낙서와 누군가 해 놓은 토와 대충 내다 놓은 쓰레기봉투들과, 낡은 아파트가 나왔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복도를 조용히 걸어 집에 도착하자, 온 집 안이 컴컴했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신발장 위에 놓인 메모지였다. 내 짐을 가지고 기숙사로 들어가니까, 급한 용무 생기면 전화하라는, 1학년 입사식 날 아침에 내가 남겨 둔 메모였다.
‘…1년. 이번엔 최장 기록이네.’
1년 동안 전화를 하기는커녕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은 아버지였다.
‘차라리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메모지에 묻은 먼지를 노려보다가 나는 거실의 불을 켰다.
“하아….”
지하철도 25분에 한 대 오가고, 그마저도 늦는 때가 더 많던 경기도 주현에 살 적에는 이곳 임대 아파트에 당첨된 게 기적 같았었다. 서울에서 살면 더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도 느꼈었다. 그런데 ‘좋은 학교’의 번지르르하니 예쁘고 따듯하고 깨끗한 기숙사에서 살다가 돌아오니, 이제는 이 집이 쥐덫처럼 느껴졌다.
좁은 거실에 소파 대용이자 침대 대용이면서 갖은 짐을 쌓아 두는 용도의 매트리스 하나가 덜렁 눕혀져 있었다. 그 위에 풀썩 몸을 눕히자 망각했던 피로가 확 밀려왔다.
‘졸려…, 샤워도 하고, 문제집 한 번 보고 자야 되는데….’
귀퉁이마다 곰팡이가 스민 천장을 쳐다보다가, 이내 휴대폰을 들었다. 강건우가 제멋대로 남긴 ‘건우 형아’ 연락처를 누르고는, 이름을 ‘2학년 1반 강건우’로 고쳐 놓았다.
그리고 쌓인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2학년 4반 장세라
[지난번엔 미안해. 내가 오버했어.
혹시 심학반 들어갈 생각 있어?
같이 신청하지 않을래?]
2학년 5반 공주윤
[자냐?]
옥혜 씨
[우신아 학교는.잘다니지
필요한건 혹시 없구?,,
감기.조심하고 잘 지내^^]
어째 받은 문자들에 죄, 아쉬운 소리밖에 해 줄 답이 없었다. 장세라에겐 전에는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 공주윤에겐 잠을 자건 깨어 있건 나는, 너나 네 무리에 섞여 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옥혜 씨에게도 할 말이 많았다.
‘아버지랑도 헤어진 마당에 옥혜 씨는 왜 날 아직 신경 써요? 나, 학교를 잘 못 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필요한 게 너무 많고 신경 쓸 문제도 생겨 버렸어요. 오늘은 정신까지 빠져 버려서 시간이나 버리고…. 중학생 때가 더 편하고 좋았어요….’
답장을 입력하려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학생 때가 더 좋았단 소리를 옥혜 씨에게 할 순 없었다. 그건 당신과 살던 때가 그립다는 소리였으니까.
결국 셋 중 어느 문자에도 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대신에, 오늘 외워야 할 몫의 영단어 노트를 꺼내 들었다. 한 줄, 두 줄 억지로 읽어 내리는데 눈알이 따끔따끔 쓰라렸다.
왜 뜬눈으로도 권태오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내 각막을 불로 지져서 그 애 그림자를 새겨 놓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감정 이입하지 말자…. 어차피 졸업하고 나면 볼 일 없을 애들이야. 이찬희도, 권태오도.’
1학년도 정신없이 빨리 지났었다. 배울 것도 외울 것도 많은 2학년은 그보다 더 쏜살같겠지. 정신 차리고 보면 3학년일 거고, 수능일 거고, 대학 입시 면접장일 거고… 그러다 보면 금방 어른이 돼서 오늘 있었던 일 같은 건, 권태오 같은 건, …잊고 싶은데, 잊고 싶은데.
그 날, 그 노을빛 안에서, 웃는 그 애 모습이 그래도 멋지긴 했다. 딱딱하고 무서운 줄만 알았는데, 고작 미소 쬐금 지었다고 소년이 될 일인가? 권태오한테 보조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깊게, 쏙 들어가는 뚜렷한 걸 이제까진 한 번도 못 봤었네…. 보조개를 볼우물이라고도 부른다던데, 그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게 예쁜 모양새였지….
‘볼우물은, 그럼… 볼에 생긴 우물이라는 뜻인가?’
나는 선잠에 빠져들었다. 낡은 집 안에서 언제나 들려오는, 냉장고 뒤인지 벽장 위인지 모를 곳에서 바람이 새는 건지 가구가 비틀리는 건지 모를 삐걱삐걱 소음을 들으면서. 권태오의 볼에 팬 우물을 떠올리면서.
4월은 도망자처럼 후다닥 흘러갔다. 월초에는 1차 지필 고사의 시험 범위를 체크하고 예습하느라 바빴고, 중순에는 선생들이 ‘학원에서 배웠을 테니 패스’라며 넘긴 부분들을 모아 나머지 공부를 했다.
“벌써 공부나 하고 유난이야?”
내 옆구리를 찌르며 그러지 말고 축구하러 가자고 조르던 강건우도,
“우신아, 국어 시험 범위 어디까지야?”
‘죽어’로 변질된 국어 교과서를 내밀며 우는 소리를 해 댔다.
바쁜 와중에도 학교는 연례행사들을 주최하며 우리들을 이리로 오라 저리로 가라 했다. 4.3 희생자의 날을 한 주 늦게 기념하며, 2학년 학생 전원을 대강당 시청각실로 불러들이는 식이었다.
약한 할로겐 조명이 듬성듬성 켜진 시청각실은 영화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작은 이벤트에도 쉽게 휩쓸리는 학생들은 언성이 평소보다 커졌으며 행동은 거칠어졌다. 몇몇 녀석들이 히어로 영화를 틀어 주면 안 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나는 가장 안쪽 구석자리, 벽면의 기둥으로 몸이 반쯤 가려지는 자리로 직진했다.
기둥 뒤에 오래된 노트북을 기대어 펼치고, 화면 밝기는 최대로 낮추었다. 나흘 뒤에는 연합학력평가가 있었다. 평소 실력대로 준비하면 된다는 게 담임의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상 범위의 인터넷 강의를 찾는 도중에, 내 옆자리 의자가 끽 소리를 냈다.
“나중에 쪽지 시험 칠 수도 있다는데, 안 볼 거야?”
풀썩 의자에 몸을 앉히며 강건우가 물었다. 그러는 저는, 매점에서 사 온 치즈 과자에 콜라 캔에, 빨대를 두 개나 챙겨 온 모습이었다. 나는 강건우의 근처에 자리 잡는 반 아이들 몇몇을 훑어보았다.
“중학생 때 다 배운 건데 뭐 하러 봐. …너 여기 앉게?”
“어? 어. 옆에 자리 있냐?”
있을 리가 있겠어? 그렇게 대꾸하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지우개에 묶어 둔 이어폰 줄을 풀었다. 맨 앞자리 선생에게 보이지 않게 왼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자, 강건우가 ‘얼마 만에 보는 유물이냐’며 내 이어폰을 폄하했다.
그러면서도 오른쪽 이어폰을 슥 가져가 제 귀에 꽂았다.
“아, 미친…. 노래 듣는 게 아니었어?”
“이리 줘, 몰래 볼 거야.”
“저기요, 이우신 씨. 보통은 야동 같은 걸 몰래 보지 않아요?”
“뭐? 이우신이 야동 본다고?”
뒷자리 녀석들이 고개를 뻗고 끼어들었다. 그 바람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입을 다문 채 나는 강건우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앗았다. 그와 친한 놈들 여럿이 거듭 노트북 화면을 힐긋거리면서, ‘뭐야, 인강이잖아’ 하고 실망한 탄식을 내뱉었다.
“…….”
대답 없이 화면 속 선생에게 집중하는데, 문득 시야 가득 큰 손이 들어왔다.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공주윤이 보였다. 눈빛은 부루퉁하고 굵은 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왜.”
내가 물었고,
“왜?”
공주윤이 되물었다.
이상한 대화에 말문이 막혀 나는 눈만 끔벅였다. 공주윤은 몇 초간 나를 내려다보더니, 콧방귀를 흥 뀌고는 저 멀리 친구들이 앉은 자리로 떠났다. 그를 쫓아 시선을 굴리니 딱 봐도 유도부일 게 분명한 남학생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공주윤을 향한 내 관심은 거기서 뚝 끊겼다. 나는 무의식중에 권태오의 실루엣을 찾기 시작했다. 어깨가 넓고 머리는 짧고, 목이 굵고 팔뚝은 돌처럼 커다란 뒷모습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지문 속의 힌트 찾듯 이리저리 눈 굴리는데, 강건우가 뜬금없이 귓속말했다.
“역시 프린세스 윤이, 날 존나 싫어하는 거 같아.”
“공주윤이 널? 왜?”
“왜겠냐? 공신은 공주 껀데, 새 친구 홀라당 사귀었다고 싫어하는 거지.”
황당한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강건우가 진지하게 속삭이는 두 문장은 모조리 틀려 있었다. 우선 나는 공주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건우 또한, 내게 있어 새 친구가 아니었다.
두 가지를 지적할까 하다 나는 또 관두었다. 첫 문장의 오류야 기분 나쁜 내용이었지만, 뒷말은 싫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야동 그만 보고 책도 좀 읽고 그래, 건우야…. 그런 거 대부분이 불법 촬영물이래. 이참에 도덕성도 좀 기르고….”
“아! 진짜 돌겠네.”
농담하며 웃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희미하던 할로겐 전등까지 모두 꺼지자 시청각실 내부는 컴컴해졌다. 곧이어,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4.3 사건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나는 인강에 집중했다. 한참 강의 내용을 좇던 중에, 강건우의 손끝이 쿡쿡 내 어깨를 건드렸다. 두 귀로 선생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면서 나는 눈길만 살짝 굴렸다.
강건우가 작게 손가락질하는 대각선 자리에는 이찬희가 앉아 있었다. 다큐멘터리 속 비극에 이입한 듯 그 애의 커다란 두 눈 가득 눈물이 담긴 채였다. 눈동자가 커서 그런지 눈물방울도 닭똥처럼 그렁그렁했다. 구슬처럼 반짝거리는 그 눈물에 나는 조금 질려 버렸다.
“야야, 이찬희 운다.”
몇몇 놈들이 키득거리며 그의 감수성을 놀림거리 삼았다. 노트북의 음량을 키우는 내 귓가로, 인터넷 강사의 윤리 해설과 함께 이찬희의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나 저런 일이 있었는 줄 처음 알았단 말이야.”
그러고는 기어코 눈물을 툭 떨어뜨린다.
이어폰을 꾹, 귓구멍 안에 밀어 넣었지만 이미 들린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러 의미로 이찬희는 놀라웠다. 그의 역사의식이 모자란 거야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처음 알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는지 그 당당함이 신기했다. 내게 있어 ‘모른다’는 건 부끄러워야 하는 일인데 말이었다.
‘…왜 형제라고 오해받았는지 알겠다.’
유도부 녀석들이 모여든 자리를 아무리 훑어도 안 보이던 권태오가 거기 있었다. 이찬희의 옆자리에 앉아 심드렁한 눈으로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왼손을 이찬희의 정수리에 얹고, 가볍게 털어 내면서….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나는 고개를 숙였다. 괜히 목덜미로 열이 올랐다. 나중에는 아예 책상 위로 엎드려 버렸다.
이찬희는 나와는 다른 행성 출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와 나는 다른 별 사람이라고. 나는 황폐화된 사막 별에서 태어나서 돌을 깎아 도구부터 만들어야 하고, 이찬희는 물과 식량이 풍족한 푸른 별에서 태어나서 부모가 물려준 우주선을 타고 여행 다닌다고.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하는 건 순전히 내게만 나쁜 일이다. 그러자면 권태오의 존재가, 마치 이찬희에게만 마땅히 주어진 보상처럼 느껴져서, 부럽다거나 질투가 난다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구차해지고야 마니까.
‘엮이지 말자.’
좋아하는 마음은 자유라던가. 하지만 공짜는 거기까지다. 마음을 유지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표현하는 데에는 자격이 필요하다. 내겐 그럴 여력도 자격도 없었다.
“강건우.”
두 주먹을 볼에 괴고 인강 선생을 노려보면서, 나는 괜히 녀석을 발로 건드렸다.
“끝나고 도서관 가서 공부하자.”
그러자 강건우가 ‘예에스’ 하며 내 어깨에 제 팔을 올렸다. 자기 국어 성적이 B+가 되면 게임을 또 같이 해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그게 올린 거야?’라고 물었다가, 나는 녀석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1차 지필 고사가 목전으로 다가오자 도서관 열람실은 자리싸움의 장이 됐다. 몇 주 사이 통성명을 하게 된 도서부원 선배의 말로는, ‘시험 기간마다 열람실을 찾는 학생 수가 많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붐비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믿고 싶지 않아도, 인파의 원흉은 나인 듯했다. 정확히는 나와 동반한 강건우 때문이었다. 국어 성적을 올릴 테니 게임을 같이 하잔 녀석에게, 꼴랑 B+로는 상을 줄 수 없으니 A라도 맞아 보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그럼 네 계정, 마스터까지 올려 줄게.’
그 바람에 강건우가 열의에 차올라서는, 나를 따라 도서관에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몹시 열심히인 강건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웃겼다. 어차피 유지도 못 할 게임 랭킹에 왜 집착하는 건지…. 결국 유의미한 건 그보다는 학교 성적일 텐데, 별것 아닌 오락을 좇느라 어부지리로 공부하는 모양새가 어린애 같았다.
“우신아, 이 시에서 말야. ‘샤갈 마을’이 어디길래 3월에 눈이 내려? 어느 나라냐?”
“…샤갈이 그린 그림 속 마을이라고. 마르크 샤갈. 국어 시간에 잤어?”
“아하. 그럼 그, 샤갈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러시아에서 태어난 프랑스 화가. 표현주의. 미술 시간에도 잤어?”
“어…. 그래서 내가 피부가 좋잖아.”
그렇게 하나둘 묻는 말에 대답해 주다 보니 강건우도 자신감이 붙었다. 문제는 그의 자신감은 기출문제지가 아닌, 친구들 앞에서 쩌렁쩌렁 빛을 발한다는 점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강건우의 친구 놈들이 도서관 열람실을 채웠다. 그 친구의 여친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자 열람실 자리 반이 찼다. 전교 1등이 공부하는 자리니까 이유가 있을 거라는 식으로 책을 가져온 애들도 뒤따라 늘어났다.
결국 시험 전날에는, 열람실 모든 자리마다 가방과 교과서, 후드 재킷이 놓였다.
쾌적하던 공간에 소음이 생긴 게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그나마 내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며칠 내내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와서, 닫는 시간까지 공부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저녁 7시를 넘어갈 즈음부터는 머리가 무겁고 피곤했다. 학기 초부터 소모적인 고민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근래 무리해서 공부한 탓인지는 불분명했다. 눈 밑이 따끔거리고 관자놀이가 다 저려서,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오자는 강건우의 말도 거절했다.
“뭐? 밥을 안 먹는다고? 네가?”
피시방에서 먹성을 들킨 뒤로 강건우는 나를 코끼리 보듯 하는 경향이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는 소리가 너무 커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야 했다.
‘아차’ 하고 강건우가 열람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아주 낮췄다.
“…나갔다 오는 길에 빵이라도 좀 사 올까?”
“응, 부탁할게.”
옆자리가 비자마자 나는 노트 위에 엎드렸다. 잘 생각까진 없었지만, 까무룩 꺼지는 정신을 굳이 붙들 마음도 없었다. 결국은 선잠을 자 버렸다.
두 팔은 책상 밑에 내려놓고 고개만 툭 뉘인 자세가 불편해서, 쪽잠은 짧았다.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애써 올리며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왼쪽 뺨을 노트 위에 댄 채 바라본 시계가 정확히 90도로 꺾여 보였다.
‘7시 50분….’
10분쯤은 더 자도 좋을 것 같았다.
새파란 음료수 캔을 발견한 건, 저린 목의 방향을 틀어 보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찬 기운을 풍기는 길쭉한 캔 위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함부로 말했던 거 미안해.’
졸린 눈을 깜빡이며 나는 메모를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읽었다. 두통으로 뇌가 둔해진 건지 쉬운 문장이 잘 이해되질 않았다. ‘이우신’ 세 글자가 적힌 교과서 위에 둔 걸 보면 분명 나한테 준 것 같은데, 캔 커피도 아니고 이온 음료에 난데없는 사과 쪽지라니.
‘함부로 말했던 거 미안해’라고? 육하원칙이 빠져 있잖아. 무슨 놈의 쪽지가 이렇게 불친절하고 대충이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왜 미안한 건지 풀어 쓸 정성이 없다면 적어도 누가 쓴 건지… 이름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아….’
그제야 장세라가 생각났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는 사과 메시지를 받아 놓고는 아직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줄 알았더니… 내심 신경이 쓰였나 보다.
엄지와 검지로 눈 주변을 꾹꾹 누르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함에서 ‘2학년 4반 장세라’를 찾고,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시험공부 힘내]
전송 버튼을 툭, 치고 나니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열람실의 공기도 전보다 텁텁하고 답답했다. 포스트잇을 뜯어낸 음료수를 손에 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서자 하늘은 남색으로 어둑어둑했다. 도서관 앞 쉼터로 향하려는데, 무의식중에 커다란 인영으로 눈길이 갔다. 정문 앞 벤치에 앉은 이는 마른 다리를 길쭉하게 뻗고 있었고, 그 앞을 막아 놓듯 선 남자는 키가 아주 컸고 어깨가 넓었다.
“어? 우신아, 안녕?”
멍하니 쳐다만 보는 내게, 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불쑥 인사했다. 그 바람에 나는 어깨를 퉁길 정도로 놀라고야 말았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머리, 반듯한 이마, 커다란 눈. 이찬희였다.
…뭐야, 왜 나한테 말을 걸지? 서로 무시하기로 한 게 아니었나?
“어…. 안녕.”
생각이 번잡한 와중에도 어영부영,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이찬희가 뺨을 올리며 웃었다. 방실방실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소였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구나? 여기가 집중이 잘 돼?”
“…….”
애매하게 거리를 두고 선 채 어색한 질문을 받자마자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이찬희와 함께 선 남자가 권태오라는 걸 늦게 알아본 탓이었다. 힐긋 고개만 돌려 나를 보는 얼굴빛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어느 누구도 아닌 나한테, 하필 권태오를 보디가드처럼 세워 두고 앉아서 말을 거는 이찬희라니…. 나는 그저 황당했다. 이찬희의 해맑은 얼굴을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지? 권태오한테 내 이야기를 못 들었나?
“우신아?”
이찬희 네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욕을 하고 그냥 가 버렸다고, 그런 이야기 할 만큼 친하잖아, 너네.
“저기, 우신아?”
멀쩡한 사람을 결손 가정의 분노조절장애 환자 취급할 수준이던데.
“우신아.”
“어.”
소리치듯 대답하자, 어느새 일어선 이찬희가 보였다. 눈썹 끝이 아래로 향한 채 그는 두어 걸음 내게로 다가오려다, 이내 권태오에게 팔뚝을 붙잡혔다.
그런데도 이찬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나였다. 저를 붙들고 선 권태오의 손을 이찬희는 느끼지조차 못하는 듯,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괜찮아? 너 되게 아파 보여.”
염려하는 목소리가 무진 착하게 들려왔다. 웬만하면 괜찮다고,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답했을 터였다. 이찬희의 친절을 내가 원했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하필 아파도 머리가 아파서, 그리고 이찬희의 말을 달갑게 받아 줄 수가 없어서, 나를 무슨, 가까이 해선 안 될 무엇 취급하는 권태오의 동작 때문에 나는 넋이 빠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아파 보인다’니. 듣자 하니 아픈 사람은 이찬희 너라던데….
‘중딩 때, 아파서 학교도 거의 반년 쉬었다던가, 뭐 그래.’
문득 강건우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바람에 나는 허탈해졌다. 권태오에게 이찬희는 죽다 살아난 유년기 친구였고, 당장 이찬희가 건네 온 말들에는 악의가 없었으며, 나는 그에게 더는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나만 손해였다. 나만 감정을 쓰니까.
“그냥 졸려서 그래.”
대충 대답해 준 다음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내리막길을 한참 걷다가 뒤를 살피자, 권태오의 오른팔 밑으로 파고드는 이찬희의 뒤통수가 보였다. 권태오가 워낙 큰 탓에, 이찬희의 머리는 주먹처럼 조그마했다.
오늘은 자기 전에 탐구 영역부터 재차 살펴보고, 마지막에 받은 화학 유인물도 외워야 하고, 그렇게 1차 지필을 치고 나면 다음 주엔 수능모의평가. 모의평가를 잘 쳐야 수학 경시대회에도 나갈 수 있을 테고…. 그러고 나면 2차 지필, 그러니까 기말고사 시즌이다.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최대한 시험을 잘 쳐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내 삶에 다른 생각을 끼울 자리는 없다. 그게 권태오에 대한 거라면 더욱더. 저렇게 커다랗고 태양 같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생각하며 나태해질 수는 없다.
그래도,
‘그렇게 착하면 오해나 좀 풀어 주지. 내가 너한테 화풀이한 거 아니라고… 좀 말해 주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별수 없었다.
지필 고사 첫날, 국어 시험의 난이도는 허무할 정도로 낮았다. 너무 쉽게 출제된 문제들을 훑어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 평가의 시험이 쉽다는 건 내겐 너무 불리한 일이었다. 문제가 어려워야 성적 분별력이 생기는 법인데, 이래서야 아무래도 등급 컷이 올라가지 싶었다.
틀린 문제가 1점이냐 3점이냐를 놓고 A+냐 A냐가 갈릴지도 모를 일이다. 성적 유지를 위해서는 한 문제라도 틀리지 않아야 했다. 남는 시간 동안 마킹된 답안과 시험지를 두 번 대조한 다음, 여유 있게 OMR 카드를 제출했다.
그러자 ‘아’ 하는 탄식과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어떡해, 다 못 풀었어!”
…‘다 못 풀었다’고?
소란스러운 외침에 두 귀가 쫑긋 섰다. 힐끔 살핀 교실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시험지에 머리를 박고 우는 여자애도 있었고, ‘배신’이라며 국어 선생을 욕하는 놈도 있었다.
다 못 풀 정도로 문제가 어렵지도 않았고, 배신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문에 함정이 있지도 않았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문제를 잘못 봤나 싶어 시험지를 급히 뒤적거렸지만, 모든 문제를 착실히 풀어냈고 답은 명확한 상태였다.
“저기, 우신아, 18번에 답이 뭐야? 네 답 좀 불러 주면 안 돼?”
이내 학구열 높은 여자애 여럿이 내 자리를 에워쌌다. 익숙한 요청에, 나는 책상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시험지를 들었다.
“1번에 3번, 2번에 1번, 3번에 2번, 4번부터 7번까지 쭉 5번.”
“쭉 5번이라고?”
“응. 4, 5, 6, 7번 문제 전부 5번.”
그러자 탄식 어린 외침이 섞여 들었다. 몇몇 남자애들도 제 시험지를 들고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떡해, 이상해서 고쳤는데!”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귀가 따가웠다. 번호 중복이 이상해서 고쳤으면, 그건 네가 답을 모른 거지….
“…5번에 1번, 6에 2, 7에 1, 8에 4.”
“천천히, 천천히 읽어 주라!”
이내 교실 안에는 번호를 읽어 내리는 내 목소리만 남았다. 순서대로 느릿느릿 읽어 내리며, 체크한 답을 재차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쉽고 명료한 문제들뿐이어서, 틀렸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8번 답이 왜 4냐’며 따지는 투로 다가온 애들에게 풀이까지 해 준 뒤에야, 물리학 필기 노트를 볼 시간이 났다.
둘째 날에도 첫 시험을 마치자마자 어제와 같은 요청이 쇄도했다. 쉬는 시간마다 인파가 몰려드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점심시간에 한 번에 다 읽어 주겠다며 전부 거절했다.
괜한 말로 주목도만 더 높였다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급식실에 들렀다가 돌아오자마자 시험지를 뭉쳐 든 반 애들의 눈길 수십이 달라붙어, 방금 먹은 돈가스를 토할 것 같았다.
“…….”
한숨 한 번 쉬고는 자리로 가 시험지를 꺼냈다.
“수학. 1에 4, 2에 2, 3에 1….”
“뭐? 3번 답이 왜 1이야?”
“…3에 1. 4에 2, 5에 5….”
답안을 모두 읽은 다음에는 눈썹 위를 긁적였다.
“마지막 문제는 정답이 두 개 같은데. 1번이랑 5번이… 풀이하면 둘 다 마이너스 1이거든. 내 생각엔 5번의 덧셈 뺄셈이 오타이거나 괄호를 빠뜨리셨거나…. 아니면 둘 다 답이 아닐 수도 있고,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고 나니 웅성웅성, 때 늦은 문제 풀이가 이어졌다. 할 말은 전부 마쳤기에 나는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곧장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 뒤를 강건우가 실실 웃으며 쫓았다.
시험 마지막 날에는 답을 읽어 주는 것조차 귀찮고 피곤해서, 시험지를 통째로 강건우에게 넘겼다.
“야야야! 집중 집중 집중! 2학년 1바아안! 모두 제자리 착석하고 시험지를 들어라! 지금부터 무려 이우신이 푼 영어 시험지! 황금 답안지 낭독이 있을 예정이다!”
강건우는 소리를 지르며 교탁 위에 올라가 섰다. 그러고는 우렁차게 답을 읽어 내렸다. 옆반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채점을 해 대는 통에, 며칠간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이는 듯했다.
담임의 짧은 종례까지 마치고 나니 1차 지필 고사가 전부 끝났다. 긴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챙기는데, 목덜미로 열이 올랐다. 나름 멀끔하던 컨디션이 단숨에 훅 꺾였다.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뭔지 원인은 불분명했지만, 머릿속으로 외부 소음이 따갑게 밀려드는 통에 토할 것만 같았다.
‘어지러워….’
낯빛으로 티가 났는지, 놀러 가자고 매달리던 강건우도 나를 금방 놓아주었다. 고집쟁이 강건우가 보기에도 내 모습이, 피시방이나 노래방, 오락실을 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숙사 가서 좀 쉬어야겠어.”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내 이마에 손을 턱 올렸다. 그러고는 눈썹 사이를 팍 구겼다.
“뜨끈뜨끈해! 야, 그러지 말고 보건실 가 봐, 쌤 퇴근하시기 전에! 아님 같이 가 줄까? 이 형님이 업어다 줘?”
“아냐, 됐어. 방에 가서 잘래.”
시끄러워서 머리가 아프다는 말로 녀석을 먼저 보내고, 복도를 채운 인파까지 전부 사라지길 기다렸다. 텅 빈 교실 공기에서 아직도 시험지 냄새가 났다. 학생들이 가득할 적엔 들리지도 않던 시계 초침 소리를 가만히 감상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손을 타면서 구겨진 내 시험지를 먼저 정리했다. 한 장 한 장 펼치고 절반으로 눌러 접어, 파일 안에 넣었다. 어제에 비해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본관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더워….’
사방팔방 모든 것이 너무나 요란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삐죽삐죽 땀이 흐를 정도였다.
한 발 두 발 모래주머니를 찬 사람처럼 걷는데, 잔디 광장 저편에 조심이가 보였다. 까만 호랑이 무늬를 가진 그 개는 나무에 뒷발을 올린 채 나오지도 않는 오줌 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개집 기둥에 묶여 있어야 할 목줄이 너덜너덜한 채 녀석의 발자취를 따라 끌려다녔다.
의아해져 주변을 살폈지만 조심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는 무리는 있었지만, ‘으엑, 쉬 싼다’, ‘더러워’ 하며 조심이를 욕하더니 그냥 가 버렸다.
…그럼 개가 쉬를 싸지. 자기들도 쉬는 쌀 거면서.
“조심아.”
텁텁한 목소리를 내며 나는 개를 향해 다가갔다. 어쩌다 줄이 풀려 개집에서 탈출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험 기간 동안 산책을 못 해 줬다. 큰 덩치로 작은 개집에 묶여 지내기가 조심이도 답답했겠지.
미안한 마음에, 나는 녀석을 살살 불렀다.
“조심아, 이리 와.”
그러자 조심이가 내게로 펄펄 날 듯 달려왔다. 며칠 못 봤다고 털이 더 떡지고 지저분해진 모습이었다. 손으로 녀석의 머리와 목을 털어 주는데, 조심이가 갑자기 도망치며 뛰기 시작했다. 목줄을 쥐는 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큰 개는 잣나무길로 펄쩍 뛰어갔다.
‘저 길로 올라가면 운동장이랑 채홍관이 나올 텐데….’
운동장에서 누가 축구나 야구라도 하고 있으면, 조심이가 공을 물려고 뛰어들다가 제가 다칠 수도, 다른 누굴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문득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떠 있던 ‘개 물림 사고’ 기사가 생각났다. 조심이처럼 덩치 큰 개는, 제가 다쳐도 문제였지만 누굴 다치게 해도 문제였다. 혹시 학부모가 학교에 전화라도 걸어 오면… 안락사 시키라고 항의라도 하면 어떡하지.
“조심아, 안 돼. …조심아! 이리 와!”
헉헉거리며 녀석을 따라 달렸지만 나는 금세 지쳐 버렸다. 후다닥 뛰어 올라간 조심이는 이내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속도로 놈을 따라잡기는 포기한 채, 나는 느릿느릿 걸었다. 팔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내 몸인데, 내가 주체할 수 없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커다란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조심이는 사고를 치기는커녕 벤치 주변의 풀 냄새를 맡고, 기쁜 듯한 얼굴로 다시 저 멀리 뛰어갔다가, 내 발치로 돌아와 헥헥거리길 반복했다.
허탈하고 힘들고 짜증스러워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헥헥 웃는 조심이를 내버려 둔 채 나는 그늘 아래 벤치에 주저앉았다.
‘아, 더워…. 왜 이렇게 덥고 어지럽지?’
바보 같은 개가 뭘 알겠나 싶어, 조심이에겐 미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좋다고 꼬리 흔들며, 녀석은 내 주변을 떠나지 않고 이리저리 뛰고, 마음껏 흙바닥을 뒹굴다가, 풀을 뜯거나 했다. 마음껏 놀고 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그 다음엔 살살 달래어 데려가서, 개집에 돌려놔야겠다.
지친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는 숨을 골랐다. 두통 때문에 눈알이 다 아팠다. 눈을 꾹 감고 몇 분쯤 있었을까, 천천히 눈꺼풀을 들자 헥헥 웃는 조심이가 아닌, 운동화를 신은 발이 보였다.
밑창은 하얗고 끈은 검정색인 운동화는 주인의 발 크기에 맞게 몹시 컸다. 꼭 거인 신발 같았다.
“이우신.”
고개를 올리자 순서대로 시야가 환해졌다. 눈이 부셔서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운동장 흙바닥이 하얀 색으로 보일 지경으로 볕이 쨍쨍한 탓이었다. 굵은 장딴지가 보이고 허벅지, 골반, 체격에 비해 폭이 좁은 것 같은 허리, 커다란 흉곽이 보였다.
“…안녕.”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자 권태오가 진한 눈썹을 올렸다. 땀방울이 뚝, 턱에서 떨어져 교복 바지를 적셨다.
대뜸 권태오가 내게 무얼 던졌다. 툭 건네듯이 가볍게 던진 것을 똑바로 잡지 못해서, 가슴팍에 퍽 소리 나게 맞고야 말았다. 허벅지 위로 떨어진 건 다름 아닌 음료수 캔이었다. 파란 이온 음료 캔에서 묻어 나온 차가운 물방울이 교복을 적셨다.
“어….”
얼얼한 가슴팍을 문지르며 음료 캔을 집어 들자,
“…그거 마시고 좀 있다 들어가.”
권태오가 말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심보가 삐뚤어졌다.
“내가 왜 네가 준 걸 마셔야 되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며 나는 음료 캔을 들었다. 권태오에게 돌려주지는 못하고, 다만 찬 캔을 이마에 댔다. 왜 권태오 앞에만 서면 평정이 날 떠나는 건지 미스터리였다.
온몸이 너무 뜨겁고 따가워서, 앉은 채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몸을 덮은 그늘 면이 더욱 커져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온 운동화가 보였다. 내 눈썹 위로, 따가운 햇살을 가리는 손도 보였다.
“저번에는 잘 마셨잖아.”
권태오가 말했다. 미끄러지듯 내 이마에 닿는 그의 손날이 음료 캔보다 차가웠다.
‘무슨 소리지. 내가 언제, 뭘 마셨다고….’
손이 만든 그림자로 인해 나는 권태오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힘없이 손에 쥔 음료 캔을 보는데, 차가운 알루미늄에 새겨진 글자가 새파랗게 하늘색이었다. 문득 도서관 열람실에 놓였던 음료와 불친절하던 사과 쪽지가 기억났다.
그럼 그 쪽지…도, 설마. 함부로 말해서 미안하다는 게, 권태오가 나한테…, 난, 그 쪽지 버린 거 같은데. 음료도 그냥, 반쯤 마시고 버렸는데. 권태오가 준 건지 모르고….
“나는, 장세라가 준 건 줄 알고….”
“‘장세라’.”
“어…, 4반 여자애인데….”
“누군지 알아.”
모호한 대화 끝에 아랫입술을 꾹 씹어 보았다. 약간 아릿한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꿈이 아니라면 권태오의 손에 이마를 대고, 애처럼 기대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리를 뒤로 빼며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 내자, 권태오도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저기.”
나는 생각 없이 입을 열었고,
“나 원래… 그렇게 욕 막하고 그러지 않아.”
며칠 내내 하고팠던 말을 툭 뱉었다.
“그것도 알아.”
권태오의 대답은 참 쉬웠다. 알기는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볼멘 투정을 꿀꺽 삼키는데,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10분 뒤면 운동부 뛰는 시간이야. 흙먼지 엄청 날릴 거야.”
“아…, 방해해서 미안.”
심장이 쿵쾅거리는 바람에 열이 더 오르는 듯했다. 땀이 나고 가슴팍이 축축해져서, 교복 셔츠가 살갗에 들러붙었다. 칼라를 움켜쥐고 의미 없이 펄럭펄럭 털어내며 나는 자리를 피했다.
권태오를 피해 주춤주춤 뒤로 걷자 조심이가 꼬리를 치며 따라붙었다. 해맑은 개의 목줄을 잡고 나는 비척비척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좀 있다 들어가라니까.”
그러자 낮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권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소심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나는 몇 초간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서 걸었다.
손안에 쥔 이온 음료 캔이 미끌미끌했다.
지친 마음으로 돌아온 기숙사 방은 고요했다. 룸메이트가 어질러 놓은 옷가지를 치워 주려다, 발로 밀어 그의 침대 밑으로 전부 쓸어 버렸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무거운 몸을 눕혔다.
거듭 징징거리는 휴대폰을 열자, 강건우가 야단법석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2학년 1반 강건우
[야야야야야야대박대박
하나빼고 다맞췃어 너]
학급 메신저를 열자 ‘1차_지필_전과목_답안지.zip’ 파일이 보였다. 내 답안을 제 시험지에 모두 받아 적어 간 강건우였다. 내 성적을 제 성적처럼 자랑스레 여기던 녀석이니 채점을 잘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한 문제는 틀렸다니, 미처 알아채지 못한 실수가 있었나 보다.
그럼 평균은 또 99점일 테고, 전 과목 A+였다.
‘그 정도면… 잘했네.’
침대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잘했어, 이우신.’
손안에 꽉 쥔 음료 캔이 이제는 미지근했다.
대뜸 찾아온 몸살에 대응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주말 이틀 내내 폭격처럼 쏟아지는 잠을 자면 그만이었다. 48시간 중 거의 30시간을 잠으로 채우자, 배가 몹시 고팠고 온몸의 피로는 가시고 없었다.
가뿐한 마음가짐으로, 새벽 5시 반에 기상한 월요일에는 다시 튼튼한 이우신만 남았다. 더운 물로 샤워하고, 필요한 공부 노트를 챙기고, 세탁물과 쓰레기를 정리해 각각 세탁실과 분리수거장에 내놓았다.
물티슈를 챙겨 조심이의 털을 대충이나마 닦아 준 다음 산책시키고, 이른 시간 등교한 학교 본관의 중앙 복도에는 커다란 전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1등부터 30등까지의 명단이 실린 등수 표 아래로 다가서서 나는 허리를 폈다.
2학년(일반 선택 종합)
등수 이름(반) 등급 종합평균
1 이우신(2-1) A+ 100
2 박민아(2-3) A+ 96.7
3 장세라(2-4) A+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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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에 위치한 이름을 한참 쳐다보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학 시험 마지막 문제.
‘거 봐, 내가 답이 두 개랬지?’
가방을 고쳐 메고, 나는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