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단 하루만이라도
별이가 네댓 살만 되어도 도도하게 굴 거라는 태국영의 예언은,반은 맞았 고 반은 틀렸다. 그의 예언대로 녀석은 더 이상 여은태의 등에 얹혀서 놀지도 않았고, 변이한 태국영의 몸에 친근하게 머리를 비비지도 않았다.
다만 그 시기가 태국영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와 버렸는데,만 세 살이 되 던 해의 대보름을 겪고 길냥이 몸집만 하게 커 버린 직후부터 그렇게 아웃사 이더 기질을뽐내기 시작했던 거였다.
세 살 태은경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갓난아기 태 영도였다. 어느 날 갑자 기 제 영역에 불쑥 나타나버린 작은 아기가 이승도의 애정을 엄청나게 벳어갔 기 때문이었다.
아직 동생이라는 개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태은경은 그런 태영도가 늘 못마땅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아기를 물어다가 정원의 풀숲에 몰래 숨겨 둔 적도 있었는데, 그때 태은경은 처음으로 이승도에게 크게 혼이 났다.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받았던 보살핌은 네 동생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며,네 가 노상 내 품에 안겨있던 그때 이경 오빠는 함께 너를 예뻐해 주었다고, 이승 도는 차분한 말투로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아직 자기중심적 인 사고밖에 못 하는 태은경은 그 말을 완전히 공감할 수 는 없었지만,어쨌건 그 작은 아기가 홀로는 살아가지 못할 연약한 생명체인 것만은 이해했다. 그리고 제가 애정을 나눠 갖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승도에게 또 혼이 날 거라는 것도.
그다음부터 태은경은 동생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저 작고 귀여워서 요망하 기 그지 없는 아기가 제 영 역을 더 럽히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였다. 그것을 핑계로 혼풀을 내줄 심산이었다.
그렇게 꽁한 마음으로 아기를 스토킹하느라 태은경은 종일 바빴다. 아기가
멍청하게 손짓 발짓 하는 걸 보려고 요람 위에 올라가 모빌을 툭툭 흔들어 주 었고,배밀이를 시작하면서 혼자 일어나 앉아보겠다며 만용을 부리다가 기우 뚱 엎어질라치면 머리로 몸을 받쳐주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고 잘난 체 도 해 주었다. 엄마 다음으로 누나라는 말부터 배운 녀석이 누나, 누나 하면 서 매달려 오면 침 묻은손을 어디 갖다 대냐고 혼내면서 손수건을 물어 와 손을 닦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심술 아닌 심술을 부리느라 태은경이 제 할 일도 못 할 만큼 바빠져 버리자,반대로 이승도는 꽤 빠르게 여유를 찾았다. 제일 어린 아기 둘 이만 두어도 투닥투닥 잘 놀았기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태영도가 태은경 만 큼 엄마 집착이 심하지 않은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 었다.
야외 풀에서 태국영과 함께 느긋하게 수영을 즐긴 이승도는 선 베드에 길 게 누워 책을 읽었다. 영문 원서로 된 추리소설이 었다. 만삭 때만 빼고 그간 꾸준히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단어와 문장도 착실히 암기했던 이승도는 이제 전문적인 소재가 아닌 소설책 한 권은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말은 아직 서툴렀다. 듣거나 읽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즉각 되었는데, 말을 하기 전에는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뱉어내느라 늘 두어 박자가 느렸다.
“올해 해외여행은 LA로 가 볼까. 우리 승도 일취월장한 영어 실력도 뽐내 볼겸.”
나란히 선 베드에 누워 있던 태국영이 말했다. 이승도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그럴까. 좀 어버버하긴 하겠지만 나 좀 자신 있어. ”
“이여 - 멋지다,우리 승도. ”
태국영이 과장되게 감탄하며 책을 뺏어 들었다. 막 범인이 밝혀질 찰나였 던 터라 이승도는 도로 뺏어오려 안간힘을 썼지만,얄밉게 팔을 이리저리 빼 며 피하는 그의 손에 닿기는 힘들었다.
“야,범인이 누군지만 보자. ”
“나 이거 봐서 내용 아는데,그냥 내가 알려줄까? ”
“안 돼. 스포하면 죽어. ”
이승도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스포일러를 강력 거부했다. 태국영은 실
실 눈가를 접으며 가슴까지 덮어 놓은 대형 타월 끝을 살짝 집어 올렸다.
“책이야 나중에 읽으면 되고. 옆에서 심심함에 몸부림치며 뒹굴거리는 서 방님 생각도 좀 해 주지? ”
“너도 같이 책보고 있었잖아.”
“나는 한참 전에다 읽었는데?”
태국영은 원서로 된 약학 전문 서적을 발로 툭 차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승도 자신이 보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지루하며 두꺼운 책이 었다. 이승도 는 허탈하게 실소했다.
“잘났네. 우리 마누라.”
“그럼. 네 마누라 잘난 거 하루 이틀인가. ”
태국영은 이승도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승도를 안 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파라솔 아래에 있었지만 한여름이라 그의 몸은 평소 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냥 내 발로 걸을게. 민망하게 이게 뭐야. ”
“민망할 거 뭐 있어. 우리 금슬 좋은 거 이 집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데. ”
“금슬은 금슬이고 난 인어공주가 아니 니까 내 발로 좀 걷고 싶어. ”
버둥거 려 봐야 꿈쩍도 안 하니까 말로 설득했다. 태국영은 흠,하며 별 거 부 없이 이승도를 내려주었다.
“앗,뜨!”
야외 풀장에서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는돌길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정점에 걸린 한여름의 태양 볕에 한껏 달아올라 미친 듯이 이글댔다. 맨발로 내려섰 다가 깜짝 놀란 이승도는 얼른 길에서 벗어나 잔디로 옮겨갔다.
“그러게 우리 승도 발 데일까봐 애지중지 안아서 데려가 주려고 했던 건데.
태국영은 애석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발바닥도 철근으로 되어 있는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돌길을 밟고 있었다. 이승도는 듣는 둥 마는 둥 먼저 잔디 를 밟으며 앞장섰다.
“근데 지금 몇 시지. 은태랑 이경이 수업 끝날 때 안 됐나? ”
곧장 따라붙은 그가 잠깐 귀를 기울이더 니 대답했다.
“아직 안끝났네.”
“오늘 오전 마지막수업이 뭐였지? 수학이었나?”
“천문학.”
“아,천문학.”
현관으로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발 빠르게 다가와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이 미 몸은 바싹 말라 있었으므로 이승도는 부드럽게 거절하고 가장 가까운 욕실 로 갔다. 가볍게 몸을 씻어낸 뒤 편한운동복을 입고 나오자 때마침 수업이 끝 난 아이들이 뛰어왔다.
“선생님,우리 다음 달에 별똥별 보러 가자. ”
“별똥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태이경이 얼른 말을 보됐다.
“응. 오늘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팔월에 날이 맑으면 유성우를 볼 수 있 다고요. 별똥별이 엄청 많이 떨어진대요. ”
“그렇구나. 그럼 공기 맑고 탁 트인 곳이 좋겠네? ”
“태 가 선산 있잖아. 거기 가자. 산 정상에서 보면 하늘이랑 더 가까우니까 더 잘 보일 거야.”
“응응. 이젠 에어컨 나오는 오두막도 있으니까괜찮잖아요. ”
아이들은 이미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들뜬 마음으로 모든 계획을 머릿속 에 그려놓은 듯했다. 어차피 안 될 이유야 없지만 안 된다고 했다가는 아주 큰 일 날 분위기 였다. 이승도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다 같이 가서 물놀이도 하고, 바비큐도 하고, 별똥별도 보자. ”
“소원도 빌고!”
힘껏 소리치는 태이경의 두 눈이 반짝반짝했다.
“별똥별 멸어질 때 다들 소원 빌잖아요. 우리도 소원 빌고 와요. ”
“그래. 우리 이경이 하자는 거 다 해 줘야지. ”
?싸!”
신이 난 태이경은 훌쩍 뛰어서 여은태의 등에 업혔다.
“형아,우리도 점심 먹기 전까지 수영하고 오자. ”
“응. 가자.”
바닥을 박차고 된 여은태는 순식간에 변이를 마쳤다. 별똥별이 지나간 듯 화려한 은빛 물결이 긴 잔상을 남겼다. 태이경을 태운 커다란 짐승은 고용인 들이 열어주는 현관문 바깥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녀석들도 참.”
웃으며 고개를 저은 이승도는 2층 부부 침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 는 아기 방으로 가 보았다. 예전 태은경이 갓난아기 때 쓰던 그 방이 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람 안에 들어가 있던 별이가 훌쩍 뛰어 내려와곧장 달려왔다. 이승도는 녀석을 안아 들고 둥개둥개 얼러주며 물었다.
“우리 별이 뭐해? 동생 재워주고 있었어? ”
[응. 귀찮아 죽겠지만 어쩔 수 없잖아. 쪼그만 게 토닥토닥 해 줘야만 자니 까.]
“그랬구나. 그래도 우리 별이가 동생 잘 돌봐줘서 참 예쁘고 보기 좋다. ”
[돌봐주는 거 아니야. 재가 자꾸 엄마 귀찮게 하니까 그거 못 하게 하려고 감시하는 거야.]
태은경은 흥 하며 뾰족하게 대답했다. 녀석이 동생을 은근히 귀여워하는 건 이 집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데, 아이의 이상한 허세인지 자존심인지 하여 간 표현법이 참 특이했다. 꼭 좋아하는 여자애 고무줄 끊고 다니는 심술궂은 사내아이 같다고나 할까.
“야. 년 저맘때 더 했어,마. ”
태국영이 혀를차며 끼어들었다.
“먹고 싸고 씻는 거 전부 제 엄마 손 아니면 거부했던 주제에 동생 단속은 얼어 죽을.”
태은경은 못마땅하게 태국영을 흘겨보다 픽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받아
치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럴 수가 없으니 그저 무시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
“영도 코 자니까 우리는 점심 먹기 전까지 옆방에 가서 놀까? ”
[응. 뭐 하고?]
“글쎄. 별이 뭐하고 싶어?”
[음… 잠깐. 별이 생각 중이야. ]
녀석이 앞발로 귀 뒤를 긁으며 잠시 고민하는 동안 이승도는 옆방으로 건 너가 태국영의 팔을 베고 침대에 누웠다. 녀석은 가슴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 더니 그냥 그대로 사지를 쭉 펴며 엎어졌다.
[쉬는 게 좋겠어. 육아는 꽤 힘들어. ]
작게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은 꽤 진지했다. 이승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 을 애써 삼키며 매우 지친 티를 팍팍 내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별이가 이렇게 영도잘봐주 지 않았으면 아마 내가 매일 지쳐서 힘들었을 텐데. ”
[내가 도와줘야 엄마가 쉬니까. ]
“고마워. 별이 한숨 자게 자장자장 해줄까? ”
[응. 자장자장 해줘.]
녀 석 이 엎드린 자세로 쭉 기 지 개를 켜 더 니 눈을 감았다. 이승도는 아기 의 매끄러운 털을 고루고루 쓰다듬어주며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따끈따끈한 체 온을 가슴과 배에 나눠주는 녀석은 선선한 에어컨 바람에 기분 좋게 취해서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옆방에서 태영도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금방 다시 눈을 떴다. 괜찮다고,내가 가보겠다고 이승도가 몸을 일으켰지만 녀석이 점잖게 앞발로 71슴을눌러다시 눕게 했다.
[아냐. 엄마는 영도 뱃속에 넣어두고 있을 때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지금 은 좀 편해야 돼.]
“하지만 우리 별이도 피곤하잖아? ”
[내가 볼 거 아니야. 지금은 이경 오빠가 해야 돼. 애가 깼는데 물놀이는 얼 어 죽을. 얼른다녀올게.]
녀석은 창턱으로 뛰어올라 손잡이를 내리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날렵하
게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남겨진 이승도는 태국영과 눈을 맞추며 기가 막힌 얼굴에 미소를 덧씌웠다.
“우리 딸 진짜 무지네. ”
태국영도 픽 웃었다.
“그럼. 누구 딸인데.”
성장이 빠른 만큼 언어도 잘 깨우쳤고 사리분별도 또래에 비해 현격하게 좋은 편이었다. 이승도에게 집착하는 것은 여전해서 종종 이승도 몰래 태국영 과 으르렁거 리며 신경전을 하곤 했지만,사이가 좋지 않을 뿐 서로 싫어할 정 도는 아니었다.
-오빠들. 영도 깼으니까 같이 가서 어화둥둥 해줘.
-어? 아,그래. 알았어. 얼른 물 샤워만 하고 금방 갈게. 그때까지 별이가 좀 봐줄래?
-알겠어. 나 엄마 품에서 좀 자고 싶으니까 얼른 와야 돼.
- 금방 갈게!
그리고 자기 엄마라면 저리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탓에 얼떨결에 애들이 애 를 키우는 형국이 되었고, 그 뜻하지 않았던 구도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태국영 본인이 되었다. 태영도가 기저귀를 떼고 저 혼자 집안을 활보할 수 있 을 때까지는 이런 어부지리가 계속될 전망이 었다. 언젠가는 다시 이승도 쟁탈 전으로 대립 양상을 띠게 되겠지만,그건 뭐 그때 가서 생각할문제였다.
태은경은 오빠들에게 얼른 애보기를 떠넘기고 이승도의 품에 안착했다. 그 리고 이승도의 쓰다듦 몇 번에 다시 콜콜 잠이 들었다. 힘들었던 이승도를 위 해 육아를 떠안고 있는 아기는,정말 농담이 아니고 몹시도 피로했다.
태국영과 이승도는 좌식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둘 다 오 른손엔 조각도를 들었지만 왼손에 들린 것은 달랐다. 이승도는 비누를,태국 영은 나무를 깎고 있었다.
목공의 달인이 된 태국영이 조각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에는 꽤 간단하고 어이없는 계기가 있었다. 때는작년, 오두막에 걸려 있는 시계를 고풍스런 느 낌의 것으로 바꾸자며 이승도가 사진 하나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사진 속에 는 멋스러운 양각 문양이 들어가 있는 괘종시계가 있었다.
부품들이야 시중에서 구하면 되겠지만,문제는 겉의 판을 수놓고 있는 조 각 장식들이 었다. 이승도가 원하는 것을 안겨주려면 따로 주문 의뢰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가전제품을 제외한 것들은 모두 직접 만들어 보자며 계획을 세웠었기에,태 국영은 그날로 조각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훗날 큰 산장을 지으면 그 안을 채울 7]구들은 거의 대형 사이즈가 될 것인데, 무늬도 없이 밋밋한 것들 만 놓기에는 영 미관상 좋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물론 원로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었다. 사직서 폭탄도 통하지 않아 잠시 시 들해 있던 그들은 작정하고 단체로 잠수를 탔고,태호연은 업무가 제대로 돌 아가지 않는다며 어떻게 해결을좀 하라고 닦달을 해 댔다. 그래서 그때껏 잘 버티던 태국영도 도리 없이 협상안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승도는 태영도를 가진 초기였다. 그래서 태국영은 제 셋째 아기가 대략 한두 살 정도가 되어 부모의 부재를 이해할 수 있을 때쯤 본격적으로 가 업에 몸을 담겠다고 각서를 써 주었고, 원로들이 그제야 제자리로 복귀하면 서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아,난 영 글렀나 봐. 물고기는커녕 붕어빵으로도 안 보이네. ”
이승도는 완성된 비누 조각품을 바라보며 쓰게 혀를 찼다. 태국영은 힐긋 눈을 들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승도의 자기 비판은 정확했다. 물고기를 조각해 보겠다더 니 붕어빵인지 나뭇잎인지조차 구분이 불가능한 덩어리를 만들어 버렸다. 정말 저 정도로 손 재주가 없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게 관두라니까. 괜히 손만 다쳐. ”
“몰라. 너 나무 깎는 거 좀 멋있어 보여서 나도 좀 배우고 싶었는데, 진짜
관둬야 할까봐.
이승도는 뚱하게 중얼거리며 비누 조각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굴렸다. 그리 고 막 고개를 들어 태국영의 조각품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이승도는 눈을 크 게 뜨며 불쑥 상체를 테이블 위로 가져왔다.
“와. 꽃사슴이야?”
태국영 의 손 안에는 손바닥만 한 사슴이 한 마리 있었다. 배와 다리 쪽은 아직 깎기 전이라 뭉텅이로 있었지만 그 위의 머리와뿔,목, 등 라인에서부 터 짧은 꼬리까지 완벽한 형태를 이룬상태였다.
“응. 꽃사슴. 페인팅해서 반점까지 넣어보려고. ”
“귀엽다. 나중에 너 더 능숙해지면 커다랗게 사슴 한쌍조각해서 테라스 에 놔두자. 진짜멋질 것같아.”
이승도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원로들 복장 터지게 태국 영의 취미를 전문적인 단계까지 계발시키는 것은 이렇듯 이승도의 부추김이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국영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까짓거해보지 뭐.”
“응. 멋지다,태국영. 완전 섹시해.”
“말로만?”
태국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이승도는 몸을 더 가까이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쪽 소리와함께 고개를 뒤로 무르는데, 태국영이 목덜미 를 잡아 다시 끌어왔다.
“어 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야. ”
내리뜬 눈이 반짝 빛났다. 이승도는 웃으며 입을 살짝 벌렸다. 촉촉한 입술 이 다시 닿자마자 깊이 맞물렸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혀를 가볍게 빨 자 태국영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기 며 더 고개를 꺾 었다.
그때.
“아.”
이승도의 목에서 짧은 울림이 일었다. 태국영은 멈칫 미간을 좁히며 입술
을 뗐다. 그의 시선이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태국영은 쯧 혀를 차며 이승도의 손목을 잡아 끌어왔다. 작업대 위에 널린 조각도를 잘못 짚었나 보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피가 방울방울 흐르는 이승도의 약지를 길게 핥아 올렸다.
“넌 앞으로 조각 금지야. ”
이건 조각하다 벤 게 아니라 키스하다 벤 건데.
뜬금없는 금지령이 조금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어차피 너무 실력이 꽝이라 다시 조각도를 들 생각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 였다. 이승도는 알았다고 대답하 려고 했다. 갑자기 안으로 태은경이 미친 듯이 뛰어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 이다.
다급한 기척에 둘이 시선이 녀석에게 날아갔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녀석은 작게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애가 왜 저러나 싶어서 이승도가 막 자리 에서 일어나려는데,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피 나는 손가락과 태국영을 번갈 아노려보던 녀석이 먼저 움직였다.
“별一”
뭐라 제지할 사이도 없었다. 태은경은 전에 없이 빠르게 뛰어와 태국영에 게 달려들었다. 작은 것이 눈빛 하나만큼은 무시무시했다.
태국영은 이게 뭔가 싶었으나 일단 팔을 들어 목을 막았다. 태은경이 처음 부터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 었다. 팔뚝으로 작은 이빨이 살짝 박혀 들어왔다.
태국영은 무심결에 근육에 힘을 주었다. 녀석의 여린 이빨은 그대로 끝이 부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앙칼지게 다시 이를 세웠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눈동자에 어설프지만 독한 분기가 녹아 있었다.
태국영의 눈가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팔을 휘둘러 녀석을 날려버리 려던 마지막 순간에 이성을 되찾고 멈칫했다. 이승도가 다급히 목소리를 터뜨 린 것은 그 직후였다.
“은경아,안 돼! ”
하지만 태은경은 태국영의 팔을 끈질기게 물고 있었다. 이승도는 너무 당혹 스러워서 얼른 팔을 뻗어 녀석을 끌어왔다. 태은경은 그제야 입을 벌렸고 태
국영의 피부에는 작은 실금만 생겼다. 그조차 금방 아무는 것을,녀석은 분한 듯이 쳐다보았다.
“별이 얘기 좀하자.”
이승도 역시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아기를 안고 무작정 가장 가까운 방으로 옮겨갔다.
“별이,너 방금-”
소파에 아기를 올려 두고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이승도가 따끔하게 한 마디를 꺼내려는 때였다. 이승도는 말을 다 잇지 못했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 렸다.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이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진 눈 물이 소파 위로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이승도는 처음 보았다. 칭얼대고 떼를 쓰고 화를 낼 때에도 단 한 번도 눈 물을보인 적이 없었던 녀석이었다. 너무 서럽게 소리도 없이 울고 있으니 무 슨 말을 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머리가공황에 빠진 것처럼 어지러웠다. 입술은 바짝 얼어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별이는,이제 바깥에 있어.]
녀석이 끅끅 목을 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짧은 순간에 어마어마하게 고인 눈물이 녀석의 눈가를 흠뻑 적셨다.
[별이는, 이제 엄마가 피가 나도. ]
발톱이 나온 앞발이 분한 듯 소파의 가죽을 찢어냈다.
[다시는, 낫게 못 해. 엄마가 다쳐도,엄마가 죽어도,다시는. ]
그리고 녀석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아기답게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별이는 이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다시는 낫게 해주지 못한단 말이야!]
그저 조금 베었을뿐이다. 꿰멜 것도 없이 금방 ??물상처였다. 그런데도 그 게 그렇게 속상하고, 제 몸처럼 낫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분했던 모양이었다.
패닉에 빠져 있던 이승도는 녀석의 긴 울음을목도하며 느리게 평정을 되
찾았다.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이 저리게 목덜미를 긁어 왔다.
여태껏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작은 아기에 게 이토록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줄은.
녀석이 배 속에 있을 때 저를 품은 모체의 심장이 정지하고, 숨이 끊어지 던 그 기억을,함께 죽어가던 그 느낌을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그저 작게 벤 상처에서 조금 흘러나온 피 냄새에 기겁하고 달려올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도 든든한 산처럼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아빠에게 바로 이를 세울 정도로.
“은경아.”
이승도는 조심히 아기를 들어 품에 안았다. 녀석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이승도는 건드리면 부서질 듯 연약한 것을 대하 듯 천천히 녀석의 몸을 쓸어내렸다.
“별이.”
그리고 아기가 저를 올려다볼 때까지,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애칭을 불 렸다. 녀석은 한참을 끅끅대다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승 도는 녀석의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우리 별이가 걱정해주는 건 잘 알고, 정말 고마워. 그런데 이거 진짜 별거 아니야. 봐,이제 피도 안 나지? ”
이승도는 작게 상처 난 손가락을 녀석의 눈앞에 가져가 보여주었다. 녀석 은 고집스럽게 눈물 젖은 눈으로 벤 자국을 노려보았다.
[피가 났어.]
“이제 멈췄어.”
[나는 금방 낫지만,엄마는 잘 안 나아. ]
“맞아. 우리 별이는 눈 깜빡하면 낫겠지만,나는 며칠은 걸릴 거야. ”
[그러니까다치면 안 돼. 엄마는 피가 나면 오래 아파. ]
“내가 약한 인간이라 별이는 화가 나? ”
당황한 듯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야. 엄마가 약해서 화가 난 게 아니야. 별이는 엄마를 다치게 한 아빠
한테 화가 난 거야.]
“아빠도 일부러 다치게 하지는 않았어. 아빠는 우리 별이만큼 내가 다치는 걸 싫어해. 아까도 미안해서 곧바로 핥아줬는걸. ”
태은경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더 조심하지 않 은 아빠에게 계속 화를 내고 싶은 거 였다. 이승도는 작은 한숨을 삼키며 녀석 을추슬러 안았다.
“우리 별이 눈에 아빠는 굉장히 태산 같고 완벽해 보이겠지만,아빠도 가끔 은실수라는 걸 해.”
“아빠도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어. 아빠뿐만 아니라 그 누구 라도. 별이는 그걸 이해해 줘야 해. ”
소소한 상처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것이었다. 제가 다시 취직을 하 게 되면 더 그랬다. 어린 짐승들의 발톱 자국이건 뭐건 아마 심심찮게 생채기 를 달고 돌아올 터였다. 그때마다 이 아이가 사색이 돼서 이렇게 펑펑 울어 버 리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 었다.
이승도는 시간과 공을 들여 아이를 차분히 설득했다. 태국영이 자신을 얼마 나 사랑하는지, 그가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었는지,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차근차근 끄집어내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태은경의 날 선 신경은 차츰 무디게 허물어졌다. 녀석 역시 그것만큼은 각 인처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별이도 알아. 아빠가울었어.]
전투 의지를 모두 상실하자 태은경은 작은 목소리로 인정했다.
[엄마가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아빠는 오늘의 별이보다 더 서럽게 울 었어.]
“그것도 기억하네?”
태은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 였다. 이승도는 그제야 작게 웃으며 아이의 정 수리에 뻠을 비볐다. 그리고 아빠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고,화낸 거 미안하다고 사과하자고 차분하게 타일렀다. 녀석은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떨
어뜨리고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이승도는 녀석을 바닥에 내려두었고, 녀석은 공연히 바닥만 긁다가 천천히 걸음을옮겼다. 팔짱을 끼고서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태국영을향해서 였다.
[아빠가 실수한 건 맞지만, 별이가 이해해 주지 못했어. 그냥 화만 냈어야 했는데 물어서 미안해,아빠.]
녀석이 꾸벅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사과를 하면서도 비난을 살짝 끼워 넣 는 패기가 아주 당돌하기 그지 없었다. 태국영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인상 을 긋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도의 눈빛이 매우 간절해 어쩔 수 없이 그 불온 한 사과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봐주지만,다음엔 국물도 없어. ”
물론 그도 영 심기가 불편했기에 고운 말로 끝내지는 않았다. 태은경은 듣 는 둥 마는 둥 돌아서 서 이승도에게로 돌아갔다. 안락하고 따스한 체온을 찾 아 안기는 모습은 그냥 영락없이 어린애에 불과했다. 원 없이 울어버리고 기 력이 빠졌는지, 녀석은금세 잠이 들었다.
에휴.
이승도는 한숨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바깥에서 이게 뭔 난리인가 싶어 기웃대던 아이들이 어설픈 미소로 맞아주었다. 태이경의 등에 업힌 태영도도 눈만 끔뻑끔뻑했다.
“별이 좀 토닥토닥 해 주고 보자. ”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이승도는 침실로 가 침대에 누웠다. 열 이 끓던 아기는 금방 정상 체온을 되찾았지만 눈가는 여전히 축축했다. 그 모 습이 안타까워 몇 번이고 손으로 흠쳐내고 있을 때 뒤에서 길게 누워 지켜보 던 태국영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야,농담아니야.”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태국영은 한쪽 눈썹을 숙 올리며 가볍게 턱짓을 했다.
“그거 또 달려들면 말로 안 끝내.
“…때리려고?”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이^지.”
하지만,하고 반론하려 했으나 태국영이 먼저 차갑게 선수를 쳤다.
“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겠지만,이건 굉장히 근본적인 문제야. 자기 영역의 우두머리를 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심하면 둘 중 하나가 죽 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옴이 될 수도 있어. 욱한다고 제멋대로 이빨 세울 때 마다 네가그렇게 말로 타이르고 넘어가면 저 애는 그걸 학습하게 될 거야. 그 리고 성체가 된 이후로도 그 관념이 머리에 박혀 있는상태면,최악의 경우에 는 네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그림을 보게 될지도 몰라. ”
“그 애는 제가 빌려 쓰고 있는 영역의 우두머리를 무는 것이 어떤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
태국영의 단호함을 비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록 대체로 무뚝뚝한 아빠 였지만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는 굉장히 충실한 편이었다.
“네 판단을 존중할게.”
이승도는 말했다.
“네가 감정적인 문제로 섣부르게 아이들을 대하지 않는다는 거, 믿고 있어. 꼭 필요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렇게 해. ”
태국영은 제 부모를 물어 죽이고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인간들의 세계 에서는 패륜으로 낙인찍혀 매장당할 일이었으나 그의 가솔들은 그에게 복종 을 맹세했다. 태국영도 태은경도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널 믿는 만큼 별이도 믿고 싶어. 아이 가 깨고 나면 더 진지하게,더 깊이 이야기를 나눠 볼게. 아까처럼 격앙된 상 태가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라면 별이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딸 똑똑하니까. 그렇지,국영아?”
길게 다리를 꼰 채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태국영이 그제야 흐리게 웃었 다. 그의 손등이 뺨을 한차례 쓸고 떨어져 나갔다.
“그래야지. 누구 딸인데.
아이를 언급하며 짓는 그의 미소에서 애정이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라고,이
승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며칠 전부터 온라인에서 페르세우스유성우 얘기가 심심찮게 보였다. 아이 들이 잔뜩 흥분해서 별똥별 여행 노래를 부르던 게 매년 8월마다 쏟아진다는 그 유성우 때문이 었던 거 였다.
지식도 관심도 없었던 분야라 잘 몰랐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유성우 관측 을 기대하고 있었다. 고층건물이 빼곡한 도심을 벗어나 탁 트인 곳으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도 많은 듯했다.
이승도 역시 아침 일찍부터 나들이 준비를 했다. 짐을 싸는 것이 익숙해진 여은태와 태이경은 이제 어른의 도움 없이도 뚝딱 배낭을 싸서 일찌감치 로비 로 내다 놓았다.
이미 필요한 것들 대부분은 가져다 둔 터라 신경 써서 챙길 것은 별로 없었 다. 다만 태영도가 태어난 뒤 처음으로 가는 1박 여행이라 갓난아기 짐에 특 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그 조그만 애한테 필요한 것이 어찌나 많은지, 다 챙 겨 놓고 보니 저와 태국영의 개인 짐보다 더 부피가 커서 깜짝 놀랐다.
“자, 이렇게 말아서 봉투에 모아 오시면 되는 거예요. 잘 아셨죠? 한 번 해 보세요들.”
그리고 이승도와 태국영은 오늘 처음으로 일회용 기저귀 가는 법을 유모에 게 전수받았다. 집에서 쓰는 천 기저귀는 유모와 고용인들이 알아서 갈아 주 고 빨아 주고 삶아주기까지 해서 그 둘이 신경 쓸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역시 승도 군은 정말 손재주가 없네요. ”
유모는 신랄하게 혀를 찼다. 이승도는 시무룩한 눈으로 제가 방금 돌돌 말 아서 뭉쳐 놓은 기저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평가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이상 한 덩어리가 거기에 있었다.
“그냥가주님이 하세요. 새 기저귀 채우기 전에는물로 대강씻겨 주시고
잘 말려주신 다음 요거를 발라주는 거예요.
유모는 태국영에게 튜브형 크림까지 건넨 뒤 태영도를 데려와 실제로도 한 번 해보라고 시켰다. 태국영은 잠자코 아기를 눕히고 기저귀를 풀어냈다. 조 금 전에 갈아주었던 터라 기저귀는 보송보송 깨끗했다. 물티슈로 먼저 닦아 낸 태국영이 씻기는 건 생략하자고 말했고, 유모는 고개를 끄덕 였다.
“이렇게 채우는 거 맞지.”
새 기저귀의 허리를 적당히 조이는 걸로 기저귀 갈기 미션은끝이 났다. 유 모는 완벽하다며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맛있는 거 많이 챙겼으니까 잘 드시고,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 세요.”
“그럴게요. 유모도 오늘 내일 푹 쉬어요. ”
“호호호. 안 그래도 오전에 대청소만 한 번 하고 다들 느긋하게 노닥거 릴 참이에요.”
유모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온종일 집안일을 살피느라 바쁜 그녀에 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가족 여행을 계획해야 할 듯했다.
일행은 유모의 마중을 받으며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운전석에는 태성문이 앉았다. 얼마 전 신영애에게 세 번째로 차이고 또 잠시 이별 중인 그는 조금 침울해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그는 ‘출발합니다.’라고 말한 뒤 부드럽게 액셀을 밟아 저택을 빠져나갔다. 연초에 태국영이 가족 여행 전용으로 구입한 미니버스는 안이 리무진처럼 넓 고 좌석 이동이 편해 공간 활용성이 좋았다. 어른둘과사내아이 둘,어린 아 기 둘이 불편함 없이 넉넉하게 앉을수 있었다.
출근 시간 러시아워가 지난 도로는 대체로 한산했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면 서 정체는 완전히 없어졌고 과속 없이 예상보다 이르게 선산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미니버스는 완만하게 터서 잘 다져놓은산길을 올라 오두막 앞에서 멈 춰 섰다.
“자,은태랑 이경이는 각자 짐을 실내에 잘풀어 두기. ”
이승도가 말하자 여은태와 태이경은 ‘넵 ! ’ 하며 배낭을 메고 후다닥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영도를 한 팔에 안은 태국영도 짐 가방 여러 개를 다 른 쪽 어깨에 짊어진 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성문씨.”
트렁크에서 나머지 짐을 내리고 있던 태성문이 ‘네’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승도는 태은경을 추슬러 안으며 그에게 말했다.
“혹시 볼일 있으시면 가셔도 좋아요. ”
태성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만.”
“저랑 국영이도 놀러 나왔고, 저택의 고용인들도 덩달아 휴가를 받았으니 까 성문 씨도 개인적인 시간 가지시는 게 어멸까 해서요. ”
“괜찮습니다.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
다른 건 모르겠고 그가 왜 같은 상대에게 세 번이나 차였는지는 알겠다. 한 숨을 삼킨 이승도는 더 노골적으로 풀어 말해 주기로 했다.
“아마 성문 씨가 더 잘 아시겠지만 영애는 로맨티스트 기질이 아주 많아요.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지만 그래서 더 작은 이벤트에 섬세하게 신경 쓰고, 소소하게 감동하는 경향이 있죠. 아마 영애도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낭만적 인 밤하늘을 보고 싶을 거예요. ”
태성문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답지 않게 조금 소심하게 말 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영애 양과 헤어진 상태입니다. ”
“두 분 또다시 만날 거 다들 알아요. 성문 씨도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또다 시 만나고 싶어 하고 있고요. ”
“가보세요. 차는 가져가셨다가 내일 오후에 다시 가져오시면 돼요. ”
태성문은 조금 갈등하는 듯 말이 없다가 시선을 돌렸다. 문 옆에 기대서 있 는 태국영이 짧게 손사래를 쳤다. 허락의 의미였다. 태성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내일 정오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
“네.내일 봐요.”
태성문은 곧장 차를 몰아 산길을 내려갔다. 태국영이 다가와 태성문이 내려
둔 짐들을 한 번에 들었다. 이승도는 그의 곁에 서서 혀를 찼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성문 씨 눈치는 되게 빠른데 왜 연애에는 그렇게 센 스가 없을까.”
“저게 쌈질은 잘하고 제 상사 커버나 잘하지,연애 스킬은 영 꽝이라 그래. 오늘처럼 떠먹여 줘야겨우받아처먹지. ”
“영애도 계속 떠먹여 주다가 지치는 거겠지? ”
“정확히 말하자면 빡치는 거지. 신영애 성격이 어디 보통이냐. 그 정도로 참아주는 게 도리어 신기할 정도야. ”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뜻일 거다. 신영애 성격에 정말 마음에 차지 않으면 벌써 떠나갔을 터였다. 일 년 내로 국수 먹겠다고송재희와 시시덕거렸었는 데,이 연애가 이토록 길게 늘어질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뭐가됐건 신경 꺼. 지들 연애 지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
남의 연애사에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 태국영은 그쯤에서 화제를 덮고 한 손을 내밀었다. 이승도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함께 오두막으로 걸어 들어 갔다.
바비큐로 저녁을 마친 뒤 산을 올랐다. 태국영과 여은태는 각자 둘씩 등에 태우고서도 가로등 하나 없이 컴컴한 숲을 가볍게 헤치며 금방 정상에 다다랐 다.
정상에 다다른 태국영은 도로 인간으로 변이해서 운동복 바지만 하나 간단 히 입은 뒤 늘 나무기둥에 묶어놓는 보따리들을 가져왔다. 이곳에 올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는 대형 돗자리와 매트였다.
네온사인 하나 없는 아랫마을은 이른 저녁부터 하나둘 불이 꺼졌고,밤이 무르익자 고요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듬성듬성 논밭을 비추는 가로등도 조도
가 낮아서 그 어둠에 곧 잡아먹힐 듯했다.
“별은커녕 달도 안 보인다. 별똥별은 볼 수 있으려나. ”
이승도는 조금 실망한 듯 말했다. 다 함께 아무렇게나 뒤엉킨 채 매트 위에 서 뒹굴며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이런 날이 별똥별 보기 좋은날이랬어요. 날씨는맑고, 구름도 없고,달도 없고,사방은 깜깜하고.”
태이경이 얼른 대꾸했다. 이승도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녀석의 머리 를쓰다듬으며 ‘그래?’했다.
“응. 구름 없이 맑은 날,아주 깜깜한 데서 제일 잘 보인대요. 오늘 늦은 밤 부터 새벽까지 엄청 쏟아진다고 하니까좀 더 기다려 봐요. ”
“그러자.”
기다림은 다소 지루했다. 태영도는 일찌감치 잠이 들어서 태국영의 품에 안 겨 있었고, 태은경도 이승도의 가슴 옆에서 딱 달라붙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엎어졌다.
느리고 긴 빛의 꼬리가 결점 없는 암흑을 가른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되었 을 때쯤이었다. 잘 시간이 지나 졸린 눈을 간헐적으로 비비고 있던 여은태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왔다!]
“저기, 저기!”
태이경도 하늘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이승도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고개 를 한껏 꺾어 올렸다.
뭔가 순식간에 지나간 듯싶었지만 분명 제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큰 소리 에 깜짝놀라잠에서 깬 태은경도 여은태의 등에 올라타서 갤러리에 합류했 다.
두 번째유성은 몇 분 뒤에떨어졌다. 다들 말도없이북쪽 하늘을 노려보 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제자리에 서 풀쩍풀쩍 뛰며 얼른 소원을 빌자고 난리를 피웠다.
“영도야, 너도 소원 빌어, 얼른.
억지로 깨워져서 태이경의 품에 안긴 태영도는 별똥별 따위엔 조금도 관 심 없었다. 할 줄 아는 말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코 잔다는 말은 알아서, 녀석 은 연신 ‘엉아,코오. "하고중얼대다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이승도는 등 뒤로 넓게 팔을 짚고 앉아 있는 태국영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 다. 밤하늘에 홀린 듯이 빠져있는 아이들과달리 그의 눈동자는 정제수처럼 차분하고 맑았다.
“소원 빌고 있어?”
이승도가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그런 유치한 짓을 왜 하냐 고 할 줄 알았던 태국영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도는 멀거니 눈을 끔 뻑이다 그의 뺨 옆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진짜?”
W ? ”
■?*.
“무슨 소원?”
“우리 승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
담담하게 돌아온 대답에 이승도는 잠시 말을 잃고 그의 옆얼굴만 빤히 응 시했다. 고개를 꺾어 올린 채 두 눈 가득 하늘을 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은 언 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이마에서 코,인중, 입술과 턱까지 떨어지는 라인은 유 성우의 꼬리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가 불쑥 고개를 돌렸다. 의도치 않게 입술이 스쳤다. 그가 한 치 앞에서 물끄러미 굽어보며 물었다.
“너는?”
이승도는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비밀 ”
그의 미간이 슬쩍 일그러졌다.
“뭐야, 그게. 나는 대답해 줬잖아. 뭔데?”
“비밀이라니까.”
“와. 치사해. 난 얘기해 줬잖아. ”
“원래 세상은 가끔 불공평한 법이야. ”
이승도는 농담으로 넘기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단단한 뼈에 붙어 있는 그의 매끈한 근육들이 뜨끈뜨끈한 체온을 건네주었다. 후텁지근한 날이 었지만 맨살 닿는 그 느낌은 그 어느 때보다 감미로웠다.
“사랑해,태국영.”
이승도는 작게 속삭였다. 태국영은 허탈하게 웃으며 한 팔로 어깨를 감아왔 다. 그의 손이 뺨과 머리를 스친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스킨십이었 다.
관자놀이 근처에 몇 번의 입맞춤이 내렸다. 소박하지만무엇보다간절한 염 원을 생명처럼 불어넣는 입맞춤이었다.
어찐지 눈가가 시리다. 검게 물든 천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이승도 는 드문드문 떨어지는 별똥별을 올려다보며 맘속으로 빌고,또 빌었다.
부디 단 하루만이라도 태국영보다 오래 살게 해 달라고.
단 한 순간도 그가 홀로 남겨 졌음에 절망하지 않도록.
Hidden Track #01. 환상의 부녀
혼인식 이후 이승도가 종가 모임에 간 것은 단 한 번이었다. 태영도가 태어 나기 한 해 전이었으니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이승도는 왠지 모르게 조금 긴 장한 상태로 그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사실 그날 특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가서 아는 얼굴들과 인사 를 나눴고, 핑거 푸드 몇 개를 집어 먹었고, 내 국영이는 정말 왕따였구나 체 감하면서 다른 짐승들만 원 없이 구경한 게 다였다.
“어휴, 어느 집 아들내미가 이렇게 맵시가 좋을까. 이렇게 잘 입혀놓으니 인물이 그냥 훤하네요. ”
유모는 신경 써서 차려 입힌 이승도를 칭찬하며 본인의 센스도 함께 자찬 했다. 간만에 넥타이와 베스트까지 겸비한 정장 풀 세트를 장착한 이승도는 멋쩍게 웃었다.
“저는 여전히 좀 어색하네요. ”
“안 입어 버릇 하니 그래요. 출근할 때도 웬 청바지에 셔츠 같은 것만줄창 입고 말이야.”
“동물원 일이 거의 몸 쓰는 게 많아서요. 나이가 드니까 이제 정장 입고는 불편해서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
유모는 혀를 차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이승도의 허리를 쳤다.
“그러 게 가주님 말씀대로 함께 같은 회사 다니 면 좀 좋아요? 가주님 이 어 련히 편하고 좋은 자리 줄 텐데. ”
“제가 어울리는 자리가 없으니까요. 할 줄 아는 건 짐승들 돌보고 치료해주 는 게 전분데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괜히 능력도 없는 낙하산 앉혔다고 국영이 욕이나 먹이지.”
“아니 누가 감히 우리 가주님을 욕해요. ”
우리 가주 세계 최고라고 굳게 믿는 유모는 눈을 치켜뜨며 살벌하게 미간
을 좁혔다.
“우리 가주님은요,낙하산 하나가 아니라 열댓 앉혀도 되는분이에요. 취직 도 못 하는 애 공으로 월급이나 주려고 데려다 놓는 것도 아닌데,안 될 게 뭐 가 있어요? 우리 가주님이 그러시겠다는데 누가토를 달아! ”
“그,렇죠. 암요. 그렇고말고요.”
이승도는 얼른 맞장구를 쳐 주었다. 농담으로라도 아니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분위기 였다. 유모는 새침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넥타이핀을 바로 잡아주었 다. 그리고 진열장을 열어 작은 반지케이스 하나를 집어 들며 태국영을 불렀 다. 막 최종 간택된 셔츠를 입은 태국영이 소매 단추를 채우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유모가 결연하게 케이스를 건네며 말했다.
“자. 나눠 끼세요. ”
마치 축성을 내리는 신부처럼 경건하고 거룩한 태도였다. 태국영은 심드렁 하게 목을 긁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자 한 쌍의 반지가 날카 롭게 빛을 튕겨냈다. 스퀘어 컷의 큼직한 청 다이아가 박힌 백금 링이었다.
“이거 꼭 해야돼? 거추장스럽게.”
“당연히 하셔야죠. 한순간이라도 빼셨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각오하시 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유모의 분노게이지가 맥스 치로 솟았을 때의 참극을 보 게 되실 테니까요.”
일족 모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액세서 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치장하 는 것에 특별한 흥미가 없다면 말이다. 태국영은 치장에 흥미만 없는 게 아니 라 날짐승처 럼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 수준을 선호했기에 유모의 집착을 고분 고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단호한 유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태국영은 부질 없게도 한 번 더 반항했다.
“그래도 너무 과하잖아. 도대체 몇 캐럿이야, 이게. ”
“과하다니요! 이게 어디가요! 어딜 봐서요! ”
유모가 갑자기 흥분해서 고함을 쳤다. 태국영조차 움칫 턱을 당길 정도였
“양메이는 결혼 예물로 무려 삼십오 캐럿의 팬시 비비드급 핑크 다이아몬 드 반지를 받았다구요! 분명 이번에 초대객으로 오면서도 그 반지를 끼고 오 겠지요! 제가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두 분이 홈그라운드에서 밀리는 걸 볼 성싶으십니까? ”
유모는 손가락으로 본인의 두 눈을 찌를 듯이 가리 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관자놀이에는 푸른 핏줄이 선데다 눈까지 희번덕거리니 호러가 따로 없다. 도 저히 말로 어떻게 구슬릴 수 있는상태가 아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제가 지난 몇 년 간 보석 경매를 얼마나 눈 에 불을 켜고 주시했는데요! 양메이의 핑크 다이아에 버금가는 보석을 꼭 얻 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
이승도는 유모의 열성적 인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잠자코 제 몫의 반지 를 빼서 손가락에 끼웠다.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반지의 심리적 무게는 거의 1톤급이었다.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양메이가 나빴네.”
태국영도 똑같은 판단을 한 듯싶었다.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은 그는 유모 가 더 열을 내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이경이랑 은경이도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나? ”
아이들을 언급하자 유모는 그제야 한 김 열을 식히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예. 이제 모셔와야죠. 가주님 베스트랑 재킷마저 입으시면요. ”
태국영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성장을 마쳤다. 그리고 군소리 없이 넥 타이핀과 커프스까지 다 한 다음 이승도를 데리고 아래층의 티 룸으로 피신했 다.
“자오 그 새끼는 진짜도움이 안 돼. 어지간히 좀 하지. 삼십오 캐럿이 다 뭐냐.”
태국영은 소파 끝에 걸터앉아 한탄처 럼 중얼거 렸다. 옷이 구겨지 면 또 대차 게 한 소리 듣고 갈아입힐 게 빤해서 눕지도 못하는 그였다. 이승도는 쓰게 웃 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세상을 다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니까 그런 거라도 대신 준 거겠지.
태국영은 눈을 내리깔며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나도 그렇게 물적 공세를 퍼부으면 좀 더 예쁨 받으려나? ”
“고맙지만 나는 사양할게. 보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
“다행이네. 우리 취향이 같아서.”
“그건 아닐 것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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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영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승도는 그의 베스트 안으로 한 손을 집어넣으며 눈가를 접었다.
“나는우리 국영이 슈트 차림을완전 좋아하거든. 넌 질색하지만.”
손끝에 닿는 드레스셔츠의 부드러운 질감이 작게 꿈틀거 렸다. 단단하게 올 라붙은 그의 가슴 근육이 쓸어내리는 방향을 따라 충실하게 반응하고 있는 거 였다.
“그거라면 나도 잘 알지. 내가 자진해서 슈트를 입는 날은 모두 너 때문이 니까.”
태국영의 눈동자에도 묘하고 ^릇한 기색이 어른거렸다. 노골적으로 보낸 사인을 잘 알아들은 모양이 었다. 그는 더 바싹 붙어 앉으며 한 팔로 허 리를 감 아갔다. 그의 입술이 뺨을 스치고 귓가에 닿았다.
“갈아입을 옷 가져갈게. 오늘도 맘껏 더럽혀 봐. ”
은밀한 속삭임이 달콤하게 고막을 울렸다. 이승도는 작게 웃으며 그의 뺨 에 길게 얼굴을 비볐다.
“이거 엄청 비싼옷일 텐데.”
“우리 승도 하룻밤 몸값에 비하면 낌값이지. ”
“고마워 죽겠네. 다잡은 물고기 비싸게 쳐 주고. ”
태국영은 짧고 강한 포응을 끝으로 몸을 떼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까의 지 긋지긋한 기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자오가 이해되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승도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하고 물 었으나 태국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따라 일어난 그가 뒤에
서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밀었다.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 뒤뚱뒤뚱 티 룸을 나가던 이승도가 아,하며 고개를 꺾어 올렸다.
“은태도 지금쯤 준비 다 했겠지? 전화해볼까?”
“그럴 필요 없어.”
태국영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개 대문 지났거든. 곧 들어올 거야. ”
작년에 태국영의 도움으로 성년식을 무사히 치른 여은태는 본가로 돌아갔 다. 정식으로 종주 직을 승계 받아 분가할 때까지, 여은태는 여제운이 새로 지 어준 별채에서 친위대와 함께 머물 예정이었다.
“은태야!”
태국영의 말대로 여은태는 금방 현관을 지나 들어왔다. 감색 정장을 멀끔하 게 갖춰 입은 녀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선생님!”
이승도는 달려가서 녀석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와,우리 은태 완전 멋지다. ”
여은태는 몸을 구부려서 이승도를 꽉 마주 안았다. 이제 그렇게 몸을 숙여 주지 않으면 눈높이를 맞출 수도 없을 만큼 녀석은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지 만 응석을 부리며 뺨을 비비는 행동은 여전히 어린애처럼 살갑고 귀여웠다. 이승도는 매끄러운 은발을 손가락으로 마구 흩어놓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보고 싶었어.”
“응,선생님. 나도,나도.”
집을 떠나며 여은태는 주말마다 꼭 찾아오겠다며 눈가를 붉혔었지만, 현실 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가업 교육이다 종주 교육이다 해서 살인적인 스케 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겨우 시간을 내서 달에 한두 번 은 놀러 왔지만 그마저도 친위대의 등쌀에 못 이겨서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 나야만 했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만난 줄 알겠네. 너 네 삼 주 전에도 봤거든. ”
태국영은 고까운 눈으로 쯧쯧 혀를 찼지만 이승도와 여은태는 귓등으로도
안들었다. 멋지다,예쁘다,그간 어떻게 지냈냐,아주 저들끼리 신이 났다. 너 무 비비적대서 진심으로 짜증이 나려고 할 때쯤 다행히 2층에서 태이경이 헐 레벌떡 뛰어내려왔다.
“형아!”
이승도는 둘의 상봉을 위해 얼른 옆으로 비켜났다. 태이경은 훌쩍 뛰어서 여은태의 품에 안겼다. 두 다리로 허리를 동동 매고 몸을 들썩이는 아이를,여 은태는 능숙하게 둥개둥개 흔들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경이 잘 지냈어? 형아 많이 보고 싶었어? ”
“응. 완전 보고 싶었어. 저번 주에 왠지 놀러 올 거 같았는데 안 와서 조금 섭섭했어.”
“미안. 오늘 하루 풀로 뺀다고 저번 주는 내내 바빴네. ”
“그랬구나아.”
진짜 놀고들 있다니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영상 통화까지 하면서,그날 있었던 일들 죄다 시시콜 콜 다 공유하면서,무슨 연락두절이 된 것처럼 새삼스럽게 저러는 이유를 태 국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이경이 옷골라 입는중이었나 보네? ”
“응. 셔츠는 이거로 했는데 바지를 아직 못 정했어. 형아가 같이 골라주라.
“그러자. 선생님,우리 올라갔다 올게. ”
“그래. 별이랑셋이 예쁘게 다차려입고 내려와. 여기서 기다릴게.”
여은태는 태이경을 비행기 태우며 2층으로 올라갔다. 익히 알고 있는 드레 스 룸으로 들어서자 태은경이 한창 유모와 실랑이 중인 광경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모 혼자 안달복달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 딱 오늘만요. 예?”
“싫다고 몇 번 말해. ”
유모는 양손에 프릴이 가득한 드레스를 들고 있었는데,태은경은 시선 한
번 안 주고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난 절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 따위 안 입을 거니까 다른 거 내놔. 어차 피 유모도 내가 이럴 줄 알고 다른 거 준비해 놨잖아. ”
“아뇨! 절대 아니거든요?”
“다아니까 버티지 마. ”
표정 관리 못 하고 부들부들 떠는 유모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던 여은태는 조금늦게 태은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별이 안녕.”
“응. 오랜만.”
태은경은 심드렁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반가운 기색은 그다지 찾 아볼 수 없었다. 여은태는 부스러기 시절 제 목덜미를 꼭 쥐고 즐거워하던 녀 석을 그리워하며 속으로 쓴 눈물을 삼켰다.
“아무튼 유모,난 이딴 거 입고 아무 데도 안 나갈 거니까 다른 옷을 내놓던 지 그냥 포기해. 맘 정해지면 다시 부르고. ”
태은경은 저 혼자 쿨하게 통보한 뒤 드레스 룸을 나갔다. 남겨 진 유모는 넋 을 잃고 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후다닥 사라졌다. 여은태는 태이경 의 몸을 툭툭 튕겨주며 중얼거렸다.
“선생님 찬스를 쓰려나 보네. ”
“응. 별이가 엄마 말은 잘 들으니까. ”
“하지만 실패하겠지.”
“응. 엄마는 우리가 싫어하는 건 절대 강요하지 않으니까. ”
둘은 시선을 맞추며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그랬듯 유모와 태은 경의 대립은 오늘도 태은경의 승리로 끝이 날 전망이었다.
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모의 전략이 완전히 성공한 것도 아니 었다.
“아.정말 싫다.”
태은경은 결국 입고야 만 프릴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스커트를 뚱하게 내려
다보며 중얼거 렸다. 비록 유모가 고대했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은 아니 었지 만, 유모도 태은경도 한 발씩 물러나서 겨우 성사된 타협안이었다. 중간에서 그 타협안을 이끌어낸 이승도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모가우리 행복하게 지내라고 매일매일 애써 주잖아. 딱 하루만우리 별 이도 유모 행복하게 해 주자. ”
“칫. 진짜 하루만이야.”
유모는 물론 성에 차지 않았으나 딱히 뾰족한수가 없어 그냥 이 정도로 만 족하기로 했다. 저 고집 꺾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 보려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가 없었다. 자오추안의 외아들이 그렇게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제 소중 한 아가씨가 혹여 미모에서 밀리고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어휴. 머리는 저렇게 선머슴처 럼 잘라 놓고.
유모는 쓰게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쇼트커트에 특별할 것 없는 투피스 차림이었지만, 그렇다고 제 아빠를 쏙 빼닮은 저 미모가 어디 가 는게 아니었다.
“여벌 옷 몇 벌 챙겨 드릴 테니 혹시 뭐 묻히면 갈아입으세요. ”
유모는 꼼꼼하게 슈트케이스도 챙겨 주었다. 워낙 집안을 악동처럼 뛰어다 니며 수시로 옷을 더럽히는 태은경이라 다들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현관 밖까지 배웅을 나온 유모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가씨,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
이승도의 손을 꼭 잡은 채 차에 오른 태은경은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체 유모가 뭐라는 거야?’라고 물었다. 이승도는 그냥 웃기만 했다.
자오추안은 올해 변이에 성공한 아들을 데리고 거의 세계 일주를 돌다시 피 하고 있었다. 헌데 하필이면 종가 모임 날짜와 겹쳐서 한국을 방문해 있는
탓에 종가에서 예의상 그를 초대했는데,그는 무슨 생각인지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라는 답변을 예상했는데 말이다.
“그냥 이들 자랑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
영이 작게 속삭였다. 연회장에 일찌감치 나타나 여기저기 아들을 소개하는 자오추안을 보니 이 데면데면한 자리에 왜 굳이 나타난 건지 자연히 의문이 풀렸다. 연희는 혀를 차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그렇게 안 봤는데 영락없는 팔불출이군. ”
자오추안의 곁에 서 있는 양메이는 딱히 이 자리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여 전히 화장기 없이 수수한 모습이 었고,그 유명한 결혼반지만 이질적으로 튀 는 차림새였다.
그녀는 간혹 손목시계를 바라보거나 연회장 입구를 힐긋거렸다. 딱 봐도 누 군가를 기다리는 눈치 였다.
“태 가주가 왔군.”
충호가 콧등을 껑긋거 리며 말하는 순간 동시에 기척을 감지한 자오추안도 양메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담담한 얼굴로 지루함을 숨기고 있던 양메이의 얼 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자오추안과 함께 연회장을 가로질러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태국영과 이승도를 선두로 한 무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승도 씨.”
양메이가 가장 먼저 반갑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넨 것은 이승도였다. 이 승도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메이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한 번 찾아뵌다 해 놓고 계속 시간이 안 맞아 여기까지 왔네 요.,,
“이렇게 봤으면 됐죠, 뭘.”
태국영과 자오추안이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악수만 나누고 끝낸 것에 비
해 그 둘의 인사는 제법 정겹고 길게 이어졌다. 양메이는 멀뚱하게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들을 먼저 소개했다.
〔인사해, 멍. 전에 말했던 엄마 한국 친구야.〕
자오멍은 미리 외워둔 인사말을 기계적으로 뽑아냈다.
“안녕하세요. 자오밍입니다.”
이승도는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 었다.
“그래. 네가 멍이구나. 만나서 반가워.”
알아듣질 못하는 아이는 엄마를 올려다보았고,양메이가 부드럽게 통역을 해 주었다. 이승도 역시 태이경과 태은경을 차례로 소개해 주었다. 살갑게 인 사를 나눈 태이경과 달리 태은경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안녕.”
자오멍은 건성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이는 태은경을 빤히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앤 뭐야. 이상해.〕
〔밍.〕
양메이가 짧게 주의를 주었지만 자오멍의 탐탁잖은 표정은 그대로였다. 눈 앞의 성체 남자둘이야 어른이니까그렇다 치지만,여자애의 실체까지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건 당연히 경계심으로 이어졌다.
물론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오는 대로 말을 해버린 거기도 했다. 그러나 영어와 중국어를 조기교육으로 배우고 있는 태은경은 그 간단한 말을 무리 없이 알아듣고 곧장 받아쳤다.
〔여간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아니네.〕
자오멍의 깊은 눈매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뭐야, 너. 우리 말할 줄 알아?〕
대답해 줄 의무 따위 없었다. 태은경은 저와 비슷한 덩치의 하얀 새끼사자 를 무심하게 한 번 흘겨보고는 이승도의 손을 다시 잡으며 고개를 올렸다.
“엄마. 우리 원표 삼촌한테 가자.”
“어,응?”
“나 진우랑 인사할래.”
태은경은 이원표와 그의 아들을 가리켜 보이며 팔을 잡아끌었다. 애들 둘
이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는 몰랐지만,서로에게 느낀 첫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승도는 돌린 말로 양메이에게 양 해를 구했다.
“하하… 애들이 둘다살가운성격이 아니네요. ”
“뭐, 둘다아직 어리니까요. 인사나눌분들많을 텐데 어서 가보세요. 이 따 또 얘기해요.”
양메이도 대강 포장해서 덮어버렸다. 떠밀듯 보내주는 말에 기꺼이 자리를 떠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이승도는 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태 국영이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한 손을 아래로 내리자 태은경이 이무지게 손 을 휘둘러 하이파이브를 한 것이 었다.
이승도는 찜찜하게 콧등을 찡그렸다. 평소에 그다지 다정하지 못한 부녀가 모처 럼 한뜻을 보인 것을 마냥 달가워할 수는 없었던 것이 었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지만,태은경이 벌써부터 태국영을 능가하는 괴팍한 면모 가 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아가씨,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어찐지 유모의 배웅 말이 뇌리를 떠돌았다.
이겼구나.
뭐가 뭔지는 몰라도 태국영이 칭찬할 정도면 어쨌든 기 싸움에서 태은경 이 이긴 것만은 확실했다. 별로 안 기뻤다.
“원표삼촌안녕. 진우안녕.”
태은경은 자오멍을 대할 때와는 완전 다른 태도로 이원표와 이진우에게 손 을 흔들었다. 태초부터 이원표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녀석이라 딱히 이상 할 것은 없었다. 이진우는 ‘누나’ 하면서 스스럼 없이 태은경의 품에 안겨 물었 다.
“누나아. 영도는 안 왔어? ”
“개는 아직 너무 쪼꼬매서 이런 데 못 온대. ”
“응. 영도 보고 싶다. ”
“삼촌이랑 놀러 와. 영도도 진우 보고 싶대. ”
이진우는 응응, 하며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아빠보다 엄마를 더 많이 닮아 선이 곱고 통통한 뺨이 사랑스러웠다.
그래. 자고로 사내애란 이래야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성격의 오빠들과 동생을 둔 탓에 어린 태은경은 그렇 게 속으로 편협한 생각을 했다. 요 귀여운 것을 놔두고 인사말부터 싸가지 말 아먹은 티를 팍팍 내는 저런 놈 따위와 말 섞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형아.”
태이경이 팔을 당겨 부르자 여은태는 다정하게 등허리를 숙여 주었다.
“뒤통수 따끔따끔 안 해?”
여은태는 피식 웃었다.
“안그래도 이러다뚫리겠다 싶어. ”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오멍이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 었다. 아무래도 둘이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하던 이승도의 바람은 쉽게 성사 되지 않을 듯싶었다.
남강우는 어김없이 술판을 벌였고 그의 테이블에 앉는 멤버들은 거의 변화 가 없었다. 술을 즐기는 이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보통 영원한은따 태국영이 있는 한 누구도 그 자리 에 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재희는 태교 잘하고 있어요? 건강은 괜찮고요?”
이승도의 질문에 남강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네. 재희가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집에만콕틀어박혀 있는 거지, 재희 도 뱃속 아기도 꽤 건강합니다. ”
“영상 통화할 때 보니까 살이 별로 안 꼈던데. ”
걱정스럽게 말하자 이승도의 옆에 앉아 있던 태은경이 불쑥 끼어들어 설명 해주었다.
“전에 오빠랑 놀러 갔을 때 보니까 이모 뱃속 아기가 많이 안 먹더라. 되게
가날픈 여자애라나 봐.
이승도는 아아?,하며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확실히 성별 구분이 되나 보네요. ”
“네. 워낙 애가 느리게 자라다 보니까 이제야 정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
이제 곧 딸 둘의 아빠가 될 남강우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대체로 차 가운 인상인데 저렇게 웃으니 참 좋아 보였다.
이승도는 태은경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별이 처음으로 여동생 생기겠네? ”
“응. 연주 언니도 있고, 오빠들도 있고, 영도도 있으니까콩이만 태어나면 완벽해.”
“별이 신나 보인다.”
“완전 신나. 분명 귀여울 거야. 콩이 나오면 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삼촌. ”
“그래. 고맙다.”
남강우가 눈웃음을 지으며 대꾸했을 때였다. 일찌감치 고개를 들고 있던 태 국영의 시선을 따라 한 여자가 다가와 작게 말을 건넸다.
“승도 씨. 잠깐 제게도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
양메이였다. 이승도는 도란도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 하고 일어나 그녀와 따로 테이블을 잡았다. 사람들의 이목에서 가장 먼 구석 자리였다. 아들을 허벅지에 앉힌 양메이가 뒤늦은사과를 건넸다.
“아까 우리 아이가 은경이에게 말실수를 좀 했어요. 다들 보는 앞이라 일 단 넘어가긴 했는데, 그래도 사과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요놈 성격이 보통 아니라.”
양메이는 아이의 콧등을 검지로 톡 누르며 빙긋 웃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들에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던 아기가 고개를 들었다. 예쁘게 웃는 엄 마를 보자 덩달아 따라 웃는 얼굴이 참 예쁘고 귀여웠다. 이렇게만 보면 마냥 천사 같았다. 이승도 역시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희 애도 막온순하진 않아서…… 눈치를 보아하니 은경이도
한 소리한 것같던데요,뭘.
“별말은 아니 었어요. 근데 둘이 짧게 투닥거리는 걸 보니 딱 추안과 태국
영 씨 어린 버전 같긴 하더군요. ”
“아쉽게도 저희 바람과는 다르게 말이에요. ”
“그러니까요.”
밉지 않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아, 하며 말을 이 었다.
“은경이 중국어 배우나 봐요. 아까 깜짝 놀랐어요. ”
“아,그게. …애가 아기 때부터 종종 오빠들 수업하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네 살 때부터 저도 뭐 배우겠다고 조르더 라고요. 그래서 원하는 과목 고르라 고 했더니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선생님 붙여 줬어요. ”
이승도는 그럴싸하게 둘러댔지만 태은경이 외국어를 배우겠다고 결심하게 된 정황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툭하면 해외여행이랍시고 몇 날 며칠 이승 도를 데리고 사라져 버 리는 아빠가 못마땅했던 태은경은 변이를 해낸 해에 자 기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태국영은 당연히 ‘말도 안통하는 게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쩔 거 냐’고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건 태은경도 잘 알 고 있었지만 모자란 애 취급을 받은 것은 못내 분했다. 그래서 아이는 그날부 터 다소 이르게 외국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던 거였다.
찔리는 게 조금 있는 이승도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양메이 는 그 어설픈 미소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기특하다며 고개를 끄덕 였다.
“학구열이 있는 아이군요. 우리 애는 공부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그저 온종일 에너지만 넘쳐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기 일쑤고. ”
“개구쟁이네요. 건강하면 됐죠,뭘. 공부야차차 해도 되니까요. ”
그다지 친분도 없었고,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지만 생각보다 어색함 이 없었다. 이승도는 물 흐르듯 편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조금 기 이하다 여겼 다. 그 이유가 뭘까, 뇌리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하던 이승도는 곧 깨달았다.
양메이가 이 자리를 매우 편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나른하 게 풀려 있으니 저도 덩달아 몸에서 긴장이 빠지는 거였다.
“메이 씨는 이렇게 다른 나라 모임에도 종종 가 보셨나 봐요. ”
신기해서 말을 꺼내자 양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이번에 처음이에요. 헌데 그건 왜요? ”
“아……되게 낯섦 없이 편해 보이셔서.”
“제가 그랬나요?”
양메이는 본인이 물어 놓고 곧장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인정했다.
“그러네요.”
그녀는 묘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으로 잔 두 개를 채웠다. 이승도 는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아 가볍게 건배를 했다. 달콤한 술로 입술을 축인 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사실, 중국 종가 모임에도 아예 가질 않아요. 결혼한 해 딱 한 번 얼 굴만 비치러 갔던 게 다예요. ”
“불편한 상대가 있나요?”
“너무 많아서 탈이죠. 뒤에서는 온갖 천박한 말로 저를 욕하면서 앞에서는 속내 감추고 웃는 얼굴들, 지긋지긋해요. 추안은 그냥 깔아뭉개라는데 저는 그런 에너지를끌어올릴 의지조차생기질 않더라고요. ”
양메이의 눈가에 매달린 미소는 나이에 맞지 않게 조금 노쇠해 보였다. 험 한 땅을 맨발로 걸어온 이들이 벼랑 끝을 안식 삼아 사는 것처럼,뭔가 달관 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저는 원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꽤 사교적인 성격이었어요. 새 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처음 보는 외국인 들과 스스럼 없이 술도 마시고요. ”
“이 자리가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네요. ”
“그런가 봐요. 여기 있는 누구도 내게 아첨하지 않고,뒤에서 날 천박하고 악독한 계집이라고 욕하지도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저는 그저 ‘낯선 인간’ 양 메이일 뿐이잖아요.”
이승도는 그녀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잠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면서,이 승도는 양메이가 사실은 외로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저 낯설기만 한’ 존재가 되어야만 편안함을 느끼는 여자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불안과공포를 느끼게 마련인데 말이다. 이승도는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저 조금 애석했다.
“한국의 종가모임은 꽤 편한 분위기네요. ”
양메이가 말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사내애들 둘이 연회장 안을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대략 열 살 남짓 되 어 보였다.
“중국은 다른가요?”
“좀 엄숙하달까. 아무래도 종주인 추안 성격이 워낙 격식을 따지다 보니. ”
앞뒤 꽉 막힌 남잔가 보다. 이승도는 그렇게 떠올렸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때 저편에서 과당, 하고 테이블 넘어지는 소리가들렸다. ‘잘 놀다가 갑자기 싸우네요. ’ 양메이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승도 역시 좀 전까지 뛰어놀던 아이 둘이 치고받고 뒹구는 걸 웃는 눈으로 바라보 았다.
사건은, 정말 그렇게 사소한 불씨로 시작되 었다.
두 아이가 씩씩대며 개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 누구도 그쪽에 큰 신경을 쏟 지 않았다. 치기 어린 꼬마 둘이 싸움이 붙는 게 그리 이상할 일도,끼어들 일 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이!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머저리? 머저리라고?”
“그래,이 머저리 새끼 뒈져 버려! ”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별거 아니 었지만 둘은 점점 치 열해졌고,그 애들은 곧 전력을 다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체격이 큰 아이가 좀 작은 아이를 들어서 냄다 던져 버렸는데, 작은 불씨는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불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다 나란히 앉아 묵묵히 잔을 기울이고 있던 태국영과 자오추안이 동시 에 자리를 박차고 튀어갔다. 양메이의 다리에 앉아 있던 자오멍도 본능적으 로 엄마를 끌어안으며 보호하려 애썼다.
이승도는 제 쪽으로 날아오는 아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쩌지,이걸 어째, 뭐 그런 생각을 대강 떠올렸을 때 눈앞으로 시커먼 그림자
가 덮어왔다.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 왔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배에 얼굴 을 묻은 채 잔뜩 얼어붙었다. 곁눈으로 뭔가 허연 것이 아른거 리고, 붉은 방울 이 하나 또르르 눈가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피다.
???아아. 피였다.
이승도는 그게 제 피가 아니길 바랐다. 제 몸 걱정 때문이 아니라 이 자리 에 제 피에 민감한 이들이 너무많았기 때문이었다. 차마 확인하기가무서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였다.
살얼음 같은 정적이 깔렸다. 바람 소리 하나 없는 완벽한 정적을,신영애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가볍게 부서뜨렸다.
“오,마이,갓.”
대박 사건, 신영애는 무알코올 칵테일이 든 잔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 며 눈매를 가름하게 좁혔다. 그녀의 밝은 눈이 피맺힌 이승도의 이마와 양메 이의 다리를 빠르게 훑었다. 태국영과 자오추안은 정말 감탄이 나올 만큼 빨 랐지만,그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것과 동시에 그 많은 파편들을 다 막지는 못 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폭탄 두 개에 불꽃을 달아 놓는 업적을 달성해 버 린 사내아이는 사색이 돼서 주저앉아 있었다. 테이블을 쪼개고 식기들을 박 살낸 채로.
“피할까요.”
태현리가나직이 중얼거렸다. 신영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애들싸움인데 어른들이 나서지는一”
“자오 종주는 잘 모르지만 우리 가주님은 그러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
태현리는 냉정하게 지적했고 긴장감은 더 짙어졌다. 그때였다.
〔이 자식이! 감히 우리 엄마를!〕
다행히 가장 먼저 액션을 취한 것은 양메이의 아들, 자오밍이었다. 눈앞에 서 엄마의 피를 본 아이는 눈을 뒤집고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
기 시작했다.
공격을 당한사내아이도 얼떨결에 몇 대 맞다가곧이어 반격을 했다. 타고 난 피는 자오멍이 월등하게 우월했으나 체격 차가 워낙 심하다 보니 순식간 에 난타전이 되었다.
“강우 삼촌.”
그때 그 꼴을 가만히 노려보던 태은경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남강우 는응? 하며 고개를 내렸다. 태은경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어떻게 보 면 좀 하얗게 질려있는 듯도 싶었다.
“울 엄마다친 거, 언제나아?”
남강우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냥 스친 정도니까 아마 피는 금방 멎을 거고.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르지. ”
“울 엄마 다치게 한놈 어디를 어떻게 패야 그 기간동안 아프게 할수 있
어?”
너무나 난해한 질문이었다. 재생력이 있는 제 일족은 어디를 어떻게 패도 치명상이 아닌 한 반나절이면 다 낫기 때문이 었다. 남강우는 그래서 이승도 의 저 작은 출혈이 완전히 몇는 시간을 계산해서 태은경에게 성실한 답변을 주기로 했다.
“심장을 딱 반만 작살내면 얼추 계산이 맞아 떨어지긴 하겠네. 하지만 기술 이 아주 좋아야 돼.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거든. ”
“그렇구나. 딱 반만.”
태은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시선을 던졌다. 이승도는 태국영도 모자라 여은태와 태이경의 걱정스런 시선 집중속에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나 하나도 안 아픈데.
태국영은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이승도의 피맺힌 이마를 할고 있 었다. 굉장히 열은 받는데 애를상대로 화는못 내겠고,뭐 그런 상태인 듯했 다.
그래. 애들싸옴이다.
애들 싸움.
태은경은 그런 그에게 눈빛으로 강렬한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태국영이 눈 씹을 꿈틀대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태은경은 살짝 고갯짓을 해 보 였다.
과연 알아들었을까?
태은경은 반신반의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다행히 무언으로 건넨 제 의지를 정확히 간파했는지, 태국영은 응급처치를 핑계로 이승도를 데리고서 연회장 을 나갔다. 둘의 기척이 룸으로 향하고 있음을 감지한 순간 태은경은 두 주먹 을 하얗게 움켜쥐었다.
“심장을,딱 반만.”
그리고 번개같이 튀어 나갔다. 태은경은 서로 피 튀기면서 악착같이 싸우 던 두 사내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이 자오밍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집 어 던졌다. 자오멍은 크게 뜬 눈으로 허공을 날았다. 정말 길게,날았다.
자오추안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서 자오멍을 받아냈다. 순간적으로 뭔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자오멍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태은경은 사건의 발단이 된 놈의 목을 한 손으로 짓누른 채 가슴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자오멍을 상대로 잘도 받아치던 사내아이는 몸을 움직여보려 애썼지만 이번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급소인 목이 눌려서 숨을 깔딱이며 다리를 버둥거 리는 것이 다였다.
아이의 부친이 그제야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끼어들었지만,자오멍을 안은 자오추안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애들 싸옴에 어른이 끼면 안 되지, 새끼야. 나도 가만있었는데.〕
그가 살벌한 낯짝으로 침을 뱉듯 말했다. 양메이는 잠시 갈등하다 적당히 순화해서 통역해 주었다. 그리고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라고 애매한목소리 로 덧붙였다. 아이의 부친은 부들부들 멸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태은경은 마음껏 사내아이를 펠 수 있었다. 사내아이가 발버둥을 치 면서 태은경의 팔에 죽죽 생채기를 냈지만 그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태은경 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로 아이의 가슴만 노리고 있었다.
대단한 절제력 이다.
자오추안은 감탄하며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보통의 아이들은 피 냄새 앞에 서 흥분해 날뛰는 게 보통인데,심지어 제 아들인 자오밍도 그러했는데, 저 여 아는 그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소름 끼치게 냉정했다. 목표는 분명 했고 공략은 흐트러짐 없이 아이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거 굉장한데.
자오추안이 속으로 거듭 탄복하고 있을 때였다. 지속적으로 때려 붓는 주먹 질에 아이의 늑골이 기어이 부스러졌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충격을 받아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애들싸움이잖아. 애들싸옴이 왜 이래.〕
자오추안의 품에 안겨 크게 뜬 눈으로 싸음판을 담고 있던 자오멍 이 얼떨 떨하게 중얼거렸다. 자오멍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내아이는 저보다 두 배 는 컸고 태은경의 체구는 딱 자오밍 자신만 했다. 저렇게 압도적 인 격차를 보 이는 건 말이 안 됐다.
“반만. 딱 반만.”
자오멍은 태은경이 계속 입 안으로 씹고 있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한마디의 정체를 몸서리쳐지도록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냉정한 눈 으로 피를 뒤집어쓴 그 소악마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 랐다.
어느 모로 보나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자오멍을 평생 따라다닐 깊은 각인 이었다.
태국영은 룸에서 이승도의 이마를 티슈로 누르며 연신 연회장의 기척들을 홈쳐 듣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태 은경이 착실히 돌려준 것만은 확실했다.
일을 끝내자마자 태은경은 남강우에게 배정된 룸을 빌려 들어갔다. 피 묻
은 몸을 씻고 엉망이 된 옷도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묻힐 걸 대 비해서 챙겨준 옷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유모 역시 몰랐을 터다.
_태국영이 딸내미 하나는잘 키웠네.
남의 자식 칭찬 안 하기로 유명한 자오추안이 그렇게 감탄 섞어 말할 정도 면 정말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듯싶었다.
-형은 왜 애한테 그런 걸 가르치고 그래.
-여은태 군. 나 별로 한 거 없다. 물어보니까 대답해준 것뿐이야.
-별이는 아직 애란 말이야. 저러다 조절 못 해서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
고.
-흐음. 아닐걸. 우리 은경 양이 지금 완전 빡이 돌아 계시지만,그 눈빛을 좀 기억해 보라고. 완벽하게 이성적이었어. 아주크게 될 녀석이야.
아무렴. 크게 될 놈이다.
태국영은 난생처음 딸 키운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의 눈길이 자꾸만 먼 곳으로 떠밀려가는 듯해서 걱정스런 마음에 입을 열었다.
“나좀 우울한데,국영아.”
태국영의 눈동자에 완전히 선명한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응? 하고 물었다. “내가아무리 약한 인간이라지만, 이렇게 별거 아닌 상처에 다들 이 정도 로 걱정하면 진짜 부담스러워. ”
태국영은 그제야 후련하게 웃으며 이승도의 곁에 앉았다.
“그건 어쩔 수 없어. 말 그대로 네가 인간이기 때문이니까. 이 별거 아닌 상 처도 며칠은 가잖아. ”
“그래도 그렇지. 고작 이 정도에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
“무슨 큰일.”
“네가 애 궁둥이라도 때릴까봐 걱정했거든. ”
차라리 나한테 궁둥이 몇 대 맞는 게 백 배는 나았을걸.
태국영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능청스럽게 눈가를 접었다.
“내가 설마 애를 상대로 그럴까. ”
“그러게. 멍이는 괜찮으려나? 아까보니까 엄청 심하게 싸우던데. ”
“개는 지금 자오 품에 안겨서 양메이랑 회장 나가고 있어. 다 끝났으니까 걱정 마.”
혹 그 뒤의 상황을 더 캐묻기 전에 태국영은 얼른 마무리를 지 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태성문이 봉투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연고랑 밴드 사왔습니다.”
“응.두고 가.”
태성문이 나가고 태국영은 이승도의 이마에 직접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 여 주었다. 조금 벤 것뿐이라금방 아물고 사라질 것이었다.
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리 조각이 박히기라도 했다면 정말 미친 듯이 화가 났을 거다. 애가 안 되면 애 아빠라도 그 자리에서 흠씬 조져놔야 분이 조금 풀렸을 터였다.
- 어땠어,강우 삼촌? 딱 그 정도 맞아?
잽싸게 씻고서 옷을 갈아입은 태은경은 연회장에 복귀하자마자 남강우를 찾아 묻고 있었다.
?퍼펙트.
남강우는 드물게 매우 후한 점수를 주었다. 휴우,태은경이 작게 한숨을 지 었다.
-다들 엄마한텐 비밀이야. 영애 이모,나중에라도 엄마한테 말해 주면 안 돼.
-어련히 알아서 할까.
태은경을 몹시 예뻐하는 신영애도 기꺼이 은폐의 공범이 되어 주었다. 이 제 내려가도 될 듯싶긴 한데,막상 이 렇게 조용한 곳에 둘이 있다 보니 그냥 노닥노닥 뒹굴면서 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안 돼. 애들 먼저 보내더라도 일단 내려는 가야지. ”
물끄러미 건네는 시선을 제대로 읽은 모양이었다. 이승도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태국영의 양 볼을 두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태국영은 혀를 찼다.
“와. 우리 승도 귀신이네.”
“우리 국영이 맘을 내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겠어.
이승도는 먼저 일어나 아이를 일으키듯 태국영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잠깐만. 밴드 새 거로 갈고. ”
태국영은 그대로 나가려는 이승도를 세워 놓고 밴드를 떼어냈다. 출혈은 이
미 멎었지만 이 달콤한 피 냄새를 주변에 흘리고 싶지 않았다. 아마 자오추안 도 그런 이유로 곧장 자리를 뜬 것일 터였다. 거즈로 다시 깨끗하게 닦은 다 음 연고를 바르고 새 밴드를 붙이니 좀 더 멀끔해졌다.
둘은 팔짱을 끼고 룸을 나가 다시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소동이 일어난 곳 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사고를 친 애들이나 그 부모들도 진즉 사라진 뒤 였다.
“다들 날 쳐다보는 것 같은데,느낌 탓이겠지? ”
이승도는 좀 멋쩍게 목을 긁으며 물었고, 태국영은 시치미를 딱 땐 채 당연 히 느낌 탓일 거라고 둘러댔다.
“엄마,이제 안아파?”
태은경이 달려와 걱정스런 눈으로 올려보며 물었다. 아이가 입은 옷이 바뀌 어 있었지만 그런가보다 했다. 보나마나 또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뭘 뒤집어썼 을 거다. 이럴 걸 대비해서 유모도 여벌 옷을챙겨준 거였다.
“응. 금방 다 나았어. 별이 걱정 많이 했어? ”
“피가 났잖아. 난 엄마 피나는 거 너무 무서워. ”
“이런. 무서웠구나. 그런데 봐. 이제 되게 멀쩡해 보이지? ”
이승도는 무릎을 굽혀 앉아 이마를 보여주었다. 태은경은 심각한 눈으로 밴 드 위를 살살 쓸어보더 니 고개를 끄덕 였다.
“다치지 마. 별이 속상해.”
“그래. 우리 별이 생각해서 더 조심할게. ”
“응. 약속.”
새끼손가락을 굳게 거는 둘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던 신영애가 여은 태에게 속닥거 렸다.
“재는 어찜 저렇게 가증 떠는 것도 예쁘니. ”
“별이는 원래 뭘 해도 예쁘지.”
“은태 형 말이 맞아. 우리 별이는 아기 때부터 안 예쁜 날이 없었어. ”
남강우는 말을 잃은 채로 팔불출 셋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직전에 저보 다 다섯 살이나 위인 애를 반 죽여 놓는 걸 모두 지켜보고도 이놈들은 그새 다 까먹었단 말인가, 팔불출 수치가 높으면 붕어가 되는 건가,뭐 대강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던 도중, 그의 시선에 어떤 장면이 포착되었다.
이승도가 가뿐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친숙한 이들이 모두 모여 있 는 곳이니 당연했다. 남강우의 눈을 끈 것은 그런 이승도 뒤로 보이는 태국영 태은경 부녀 였다. 태국영은 한손을 내렸고,태은경은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힘차게 태국영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날리고 있었다. 그저 기가막힐 따름이었 다.
애나 어른이나 자알 한다. 잘들 해.
이래서 씨도둑질 못 한다는 말이 있는 건가 보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하 는 생각이나 하는 짓이나, 둘이 참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Hidden Track # 02.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태은경의 활약에 크게 탄복한 자오추안은 긴 여행을 끝내고 중국으로 돌아 가자마자 태국영에게 선물을 하나 보내 왔다. 제목도 없는 낡고 얇은 책 한 권 에 편지랄 것도 없는 메모 한 장이 끼워 있었다.
『나름 어릴 적 내 보물 1호였다. 잘 활용해라.』
이새끼가 뭐래.
태국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선물이람시고 보낸 것이 잔뜩 낡아서 고물상도 안사갈 법한고서 한 권이니, 이게 날 엿 먹이나 싶었던 것이었다. 태국영은 끈으로 엮인 고서를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었고, 한동안 잊고 살았다.
잊힌 채 먼지만 쌓여가던 그 고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태호연 때문이었 다. 중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그가 전화를 걸어서 ‘자오가 굉장히 귀한 걸 줬다 며.’하고 속삭이고 바로 끊어버렸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한참을 생각하던 도중 표지도 안 넘겨본 고서가 떠올랐다.
마침 토요일이라 집에 있었던 태국영은 바로 서재에 가 고서를 펼쳐 보았 다. 그리고 왜 그게 자오추안의 어릴 적 보물이었는지 첫 장부터 감이 왔다. 태국영은 흥미롭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장안에서내로라하는 그 기생 두 연놈은 공통점이 많았다. 첫째로는 둘 다 미모가 특출하지 않은 등대였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둘 다 제왕에게 제 처 음을 바친 이후 색에 환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었다.
우리 제왕은 다들 알다시피 여자라면 환장을 하고 비 역질도 마다치 않는 호색한이다. 게다가 인간의 외피를 두르고 있을 때에도 양물 만큼은 늘 짐승 의 것으로 남겨 두는 엽색가였다.
고 연놈들이 우리 제왕에게 첫날밤을 바치던 날 교성과울음이 종가를 그 득그득 울려 퍼졌다는데,이틀 밤낮을 그리 정액을 받아내고 나온 뒤 둘은 자
진하여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권력이고 재물이고 다 뒤로 제쳐 두고 그저 창 기가 되어 더 많은 짐승들을 가랑이에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비역질에 흥미가 없어 계집아이를 찾았는데, 고년은 맹랑하게도 돌 기 없는 자지는 먹지 않는다고 새침을 떨어댔다. 몹시 비위가 상했으나 요분 질 하나로 장안을 휩쓸었다던 고 계집을 그냥 두고 갈 수 있나.
도리 없이 한참의 시도 끝에 엽색가 제왕처럼 돌기 돋은 자지를 만들 수 있 었다. 그러자 글쎄 비싸게 옷고름 하나 안풀고 지켜보던 고 계집이 그 순간 속치마까지 한 번에 들춰 올리며 벌렁 드러눕더라.
이미 밀액으로 범벅이 된 음부를 훤히 드러낸 채 ‘서방님 어서요. ’하고 말하 는데,참으로 기가차 ‘넌 처음 만난사내도 서방이냐. ’ 물었더니 ‘그 훌륭한 물건을 갖고 있는 이들 모두가 제 서방이랍니다. ’하고 맹랑하게 답을 하는 것 이었다.
어찐지 괘씹하여 나는 젖가슴도 주물러주지 않고 그대로 쑤셔 넣었다. 헌 데 벌을주려던 내 맘과는달리 고 계집은자지러지며 뒤로 넘어가는 것이 아 닌가.
자존심 상하게도 저자 역시 그 조임에 홀려 미친 듯이 허리를움직이게 되 었다. 마치 바늘구멍에 쑤셔 넣는듯이 조였는데,신묘하게도 고 계집은상처 하나 없이 내 양!?을 잘도 빨아먹었다. 심지어 파정의 순간부터 더 부풀어 오 른 자지를 떡 주무르듯 쥐어짜내며 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그리 좋으냐’ 물었더니 고 계집은 ‘서방님이 최고여요. ’ 하며 엉엉 울었다. 오늘 밤새 안아 달라 교태를 부리기에 나도 정신없이 그 가랑이에 홀려 밤을 꼴딱지새웠다.
아,짐승 놈들이 왜 고년에 그리 환장을 하는지 내 그날 절감하였다. 그리 고 비역질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저자는 남창으로 유명한 사내놈까지 찾게 되었다. 하는 짓은 고 계집과 비슷했으나 고 사내놈이 훨씬 더 허리를 잘 흔들 고 잘 조이며 온갖 낯 뜨거운 방법으로 저자를 후렸다.
참고로, 동족의 암컷과 교접을 할 때 돌기를 꺼내면 귀싸대기를 맞으니 피 해야 한다. 육신은 더 튼튼한데 굉장히 아파하며 받아먹질 못한다. 이것은 등
대를 품을 때에만 접할 수 있는 황홀경이다. 저자는 그 요분질 맛을 잊지 못 해 현재까지…….』
태국영은 전문서적을 탐독하듯 신중하게 정독을 끝냈다. 자오추안의 보물 1호는 허름한 모양새와 달리 굉장히 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포르노 잡지에 비디오에 온갖 음란물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과거에는 이런 음서들이 시중 에 돌지도 못했다. 특히나 제왕의 엽색까지 운운했으니,이 저자가 만약 잡혔 다면 그 자리에서 참수를 당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책 속의 종주라는 놈,기발한데?
성기만 변이를 안 한 상태로 섹스를 하다니,기상천외했다. 세 번이나 반복 해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은 태국영은 아주 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승도가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바로 내려가 지 않고 힐긋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좆만 형태를 남겨두면 박히는 쪽이 그렇게 환장을 한단 말이지.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단지 이승도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가문제였다. 한참 고심하던 태국영은 지레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그것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짐승의 좆은 이승도에게 안 좋은 기 억이니 까.
태국영은 조금 아쉬워하며 서재를 나왔다.
하늘이 높고 푸르렸다. 잠자리가 유유히 허공을 날고,선선한 바람이 풀잎 향기를 머금고 날아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단풍이 붉게 드는 계절이었 다.
버석하게 마른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비쳐 내려왔다. 눈이 부셨으나 시선 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세차게 불었다. 가물가물 흔들리던 나뭇잎들이 나뭇 가지에서 손을 놓치고 저 멀리로 떠내려갔다. 이승도는 나른한 몸을 조금 뒤
척여 옆으로 돌아누웠다. 뺨에 닿는 털의 느낌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선선한 공기 속으로 그의 숨결이 흩어지고 있었다. 느리고 긴 호흡을 따라 서 그의 옆구리도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몸통을 베고 있는 이승도 도 덩달아 느리게 움직였다.
이승도는 그의 배를 살살 쓰다듬어보았다. 간지러운지,종긋 선 두 귀가 파 닥파닥움직이다 말았다. 그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짐승의 모습일 때 경계심이 강하 게 돋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본능 저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저 스스로에 대 한 위험성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거였다.
하지만 태영도가 태어난 이후부터 태국영은 눈에 띄게 견고해졌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그 아이가 태국영에게 전에 비할 바 없는 안정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제가 무슨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도 아니고 말이야.
이승도는 속으로 혀를 차며 힐긋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옆으로 누운 그의 다리 사이로 짧은 털에 뒤덮여 있는 생식기 끝이 얼핏 보였다. 몸체가 커서 생 식기도 엄청나게 클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몸 안에 들어가 있다 가 소변을 보거나 교미를 할 때만 길게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태국영이 첫 발정이 왔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보았던 게 다라 서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저 불그스름한살덩어리 가 제 여 린 살을 무참히 찢던 기 억뿐이 었다.
이승도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췄다. 그날의 상처를 털어낸 지는 오래되었지 만,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핑크빛으로 변하는 건 아니 었다.
부서뜨리자. 묻어버리자. 가루가 되고 썩어서 흙과한몸이 될 때까지.
구태여 과거 일을 들출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눈앞에 이 렇듯 실체가 존재 하는 것을.
이승도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태국영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헤 매고 있었다. 눈앞에서 삭삭 손을 흔들어 봐도 미동도 없었다. 이승도는 극도 로 소리를 죽이며 포개져 있는 그의 뒷다리 중 위에 놓인 다리를 조금씩 밀어
냈다. 잠결에 발끝을 조금 털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다리 사이에 거의 숨겨져 있던 생식기가 반쯤 드러나자 이승도는 눈을 둥 그렇게 떴다. 생각보다 컸고,생각보다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짧은 털이 촘촘 하게 덮여 있어서 그런지 흉물스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 끝에서 나오는 거겠지?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고개를 바짝 내렸다. 생식기 끝으로 어렴풋이 붉은 요도가 보이는 듯했다.
발정이 오면 표범처럼 뾰족하고 징그러운 게 튀어나오게 되는 걸까.
살짝 만져서 자극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제가 생각한 모양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나면 천 년 묵었던 정도 식을 것 같아서였다. 인간 남자의 성기도 그리 예쁜 모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 가 아는 표범의 생식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도 궁금한데.
심각하게 미간을좁히며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뒷발이 얼굴 앞으로 휙 다가와 멈췄다.
[뭐 하냐,너.]
헉.
이승도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얼어붙었다.
[벌건 대낮에 너무 대놓고 성추행이잖아. ]
“???아니,난 그냥,좀 궁금해서.”
[서방님 좆이 궁금하면 그냥 다리만 벌려. 자는 틈에 그렇게 몰래 씹어 먹 을 것처럼 노려보지 말고. ]
이승도는 뒤늦게 조금 여유를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줘도안 먹거든?”
[금방이라도 입에 물 것 같던데. ]
“아니거든.”
[우리 승도가 오늘따라 말귀를 못 알아듣네. ]
태국영은 작게 웃었다. 다음 순간 그는 멀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팔목
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알몸으로 비스듬히 누운 그의 몸에 엎어진 이승도는 총체적인 민망함에 계속 눈을 피했다.
“자는 서방님 자극해 놓고 왜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고 그래. ”
태국영이 뻠을 깨물며 허리띠 안에 들어가 있는 셔츠 밑단을 끌어 올렸다. 차가운 바람이 등허 리 안으로 흑 불어 들어왔다. 오소소 돋은 소름 위를 그의 뜨거운 체온이 쓸어내렸다.
“제대로 올라타 봐,승도야.”
귓가에 노골적인 유혹이 뿌려졌다. 한순간 눈앞이 까닿게 물들 만큼 매혹적 인 목소리였다. 이승도는 작게 숨을 뱉어내며 그의 가슴에 두 손을 짚었다. 그 리고 막 그의 배 위로 올라가려던 순간,기적적으로 정신이 들었다.
온 사방이 뚫려 있었다. 군중들처 럼 둘러싼 나무 사이로 햇살이 치맛자락처 럼 흔들리는 숲이 었다. 이승도는 뒤늦게야 제가 지금 선산에 놀러 와 있고,자 연을 이불 삼아 낮잠을 자던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설마,여기서?”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태국영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이승도는 그렇게 담담할 수 없었 다. 야외 섹스라는 것은 너무큰 벽이었다.
“내려가서 해. 여기는 좀, 그래.”
“괜찮다니까. 서방님 감 좋아. 누가 산에 들어올 리도 없지만,들어온다 해 도금방알수있어. 이리 와.”
태국영은 부드럽게 이승도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서 좀 더 끌어올렸다. 그리고 굉장히 느긋하면서도 희한할 만큼 빠르게 셔츠 단추를 툭툭 끌러냈다.
이승도는 밀어내지도,받아주지도 못한 어정껑한 상태로 어깨만 움찔거 렸 다. 어쩌지,어쩌지,속으로 갈등하는 것부터 사실 게임은 끝난 거였다. 이승 도는 태국영이 작정하고 흘리는 관능에 여전히 면역이 없었고 한번 얽혀들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 었다.
태국영의 손이 셔츠 목깃을 잡아 뒤로 당겼다. 팔이 저절로 움직여 옷을 벗 기는 그를 도왔다. 이게 아닌데,안 되는데,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의 손길과 그의 뜨거움을 기 억하는 몸은 착실하게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 고 있었다. 그저 젖꼭지를 빨리고 허리 뒤쪽이 만져진 것만으로 그의 성기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구멍에서 울컥 점액질이 쏟아져 나왔다. 그 느낌이 선득하 게 꼬리뼈를 울렸다.
“잠깐,국영아-”
벗고,다 벗고.
마지막 남은 이성이 옷은 지켜야 한다고 발버둥을 쳤다. 오두막으로 내려 갈 때 벌거벗고 내려가야 되면 아무리 보는 이가 없더라도 창피해서 미쳐버 릴 것이었다.
태국영이 허리띠를 잡아 뺐고, 이승도가 단추와 지퍼를 내리고 팬티까지 한 번에 벗어 옆에 놓아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홀딱 벗으니 좀 안심이 되었 다.
이승도는 그의 몸 위로 엎드렸다. 뜨거운 체향과 강렬한 체온이 신경을 자 극했다.
“엉덩이 좀들어봐.”
그가 속삭였다. 이승도는 허벅지를 넓게 벌리며 엉덩이를 띄웠다. 둔부를 부드럽게 주무르던 그의 손이 미끈대는 구멍을 쓸었다.
“이렇게 젖어 놓고 빼긴 왜 빼. ”
뺀 건 그 전이지만 이승도는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턱을 깨물며 팔 을잡아당겼다. 당기는 대로몸을 일으킨 그의 눈가에 보석처럼 예쁜웃음이 맺혔다. 말없이 오고 가는 사인이 그를 기쁘게 하는 거 였다.
“깔리고 싶어?”
그가 물었고, 이승도는 그대로 매트 위에 드러누웠다. 공기가 푹신하게 들 어가 있는 터라등이 배길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순 없었다. 거칠게 놀다 보면 이 질긴 천도 찢어질지 몰 랐다. 딱히 상관없었다. 그때가 되면 그가 알아서 다치지 않게 체위를 바꿔줄 테니까.
‘우리 승도도 정상위 참 좋아해.
태국영이 입술을 붙이며 중얼거 렸다. 이승도는 굽혀 올린 다리를 양옆으로 넓게 벌려 그의 허리를 담았다.
“네 딱딱한몸에 깔린 채로세게 박히면 미치게 좋거든. ”
“아,음탕하기 짝이 없어라.”
그는 굉장히 만족스럽게 웃으며 프리컴으로 미끈대는 귀두로 온갖 군데를 문질렀다. 금방이라도 꿰뚫고 들어올 것 같은 긴장감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어쩌면 어서 꽉 채워주길 바라는 기대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는 서방님 좆 구경 할 때부터 알아봤지. 까딱하면 세울 뻔했잖아. ”
느린 마찰이 이 어졌다. 그의 귀두가 스칠 때마다 구멍이 빠끔 열렸다 닫혔 다. 그는 애를 태우듯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즐겼다.
음담패설은 섹스의 전주로 꽤 훌륭한 도구였고, 이승도 역시 그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또 다른 너와 많이 친해졌으 니 자연히 거기도 궁금해졌다고. 고양잇과동물들처럼 네 성기에도돌기가 있 을까,그런 사소한 것까지.
“막가시처럼 뾰족한그런 건 없지만돌기 같은 건 있어. 교미할 때 암컷의 몸 안에 성기를 꽉 고정해서 정액이 빠져나오지 않게 해. ”
태국영은 가슴을 맞댄 채 느리게 비볐다. 작게 솟아오른 젖꼭지가 탄탄한 근육 위에서 점점 더 단단하게 뭉쳤다. 달콤하고 저렸다. 이승도는 앓는 소리 를 내며 그의 등에 손끝을 세웠다.
조금 벌어진 입술을 그의 혀끝이 농밀하게 쓸어내렸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진탕처 럼 탁하면서도 초콜릿처 럼 달콤했다. 그가 물었다.
“한번 경험해 볼래?”
이승도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키웠다. 그가 껑긋대듯 눈웃음을 쳤다.
“이 상태로도가능한데.”
이승도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말을 해도 될까 몇 번 을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그거,안 징그러워?”
그가 목 안으로 낮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상태로 불분명한 발음을
흘렸다.
“네가 아는 그 표범 좆이 아니래도 그러네. 그냥 뭐, 지금보다좀 커지고 거 기에 구슬 같은 것들이 더 박혀 있다고 보면 될걸. ”
그럼 다치지 않을까,그때처럼.
이승도가굳이 말로 꺼내지 않은 걱정을, 태국영은 간단히 불식시켜 주었 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승도야. 사랑에 빠진 등대는 신기할 정도로 짐승들 을 잘 품거든. 그거에 미치면 웬만해선 못 빠져나오니까 그렇게 피바람들이 불었던 거야.”
그러니까 결론은,태국영도 그걸 경험해 보고 싶단 소리였다. 지금의 그는 과거의 망령이 남긴 흉터를 곱씹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받아주는 게 좋지 아닐까.
“아……!”
예고 없이,그가 갑자기 몸을 벌리고 들어왔다. 생각이 흩어졌다. 충분히 젖 은 내벽은 빠듯하게 통로를 내주며 꾸역꾸역 그의 성기를 삼켰다.
말초 신경이 일제히 삐걱대는 비명을 질렀다. 짧은 고통 뒤에 강렬하게 터 지는 만족감이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이승도는 툭 발기해 올라온 성기를 그의 아랫배에 붙이며 엉덩이를 비틀었 다. 점막을 꽉 채우는 그의 것이 조금 물러났다가 느리게 끝까지 박혀 들어왔 다.
머리가 얼얼하다. 날카로운 고통만큼 예리한 쾌감이 꼬리뼈를 타고 올라왔 다. 하지만 조금 더 강렬해야 했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에 감싸여 뼈까지 흐물거 리고 싶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저으며좀 더 세게,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를 한가득 품은 아랫배가 부들부들 떨렸다. 얼른 혼이 빠질 만큼 뒤엉키고 싶었다.
“기분 좋을 거야.”
하지만 태국영은 계속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미끼를 던졌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우연히 고서 읽다가 발견한 건데,그거에 맛들인 등
대들도 매일 밤 환장하면서 다리를 벌렸다더라.
“…그렇게 좋대?”
“응.우리 승도첨이니까쌀때만살짝키워볼게. ”
그가 노리고 있는 진짜 흑심이 드러났다.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것보다 받 는쪽이 환장을한다는 대목에 훨씬 더 혹했던 모양이었다. 이승도 역시 기대 섞인 호기심이 피어났다.
“알았어. 해.”
어차피 몸 안에 들어간상태이니 모양이 흉측하게 변해도 크게 상관없다 싶었다. 딱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은 아니었지만,어찌 되었든 이승도 는 지금 그가 거칠게 박아주길 바랐고 그 미치게 좋다는 경험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승낙해 버렸다.
?얼르,,
안달이 나서 재촉하자 그제야 태국영은 강하게 허리를 튕겨 올렸다. 벌거벗 은 몸 위로 입술이 마구잡이로 옮겨 다녔다. 화끈한 전류가 꼬챙이처럼 몸을 관통했다. 이승도는 턱을 젖혀 들며 그의 어깨를 긁었다.
목에 붉은 자국들을 매달아 놓은 그가 귓불을 깨물었다. 습한 숨결이 귓구 멍을 쑤시고 들어오는 순간 비부를 꽉 채운 것도 끝까지 들어왔다. 아주 깊은 점막, 그곳에 자리한 극한의 성감대를 강하게 짓이겼다.
온몸에 경련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근육들이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 었다. 그가 이를 세워 쇄골을 잘근잘근 씹었다. 갈비뼈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더듬고 젖꼭지를 비틀었다.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쉽게 달아올라 정점에 이르렸을 때, 이승도는 크게 목을 열어 신음을 내질렀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그런 것은 너무사소하 게 느껴졌다. 아니,아예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무자비하게 내벽 을 여러 각도로 자극해 오는 그의 움직임에 절정의 환희는 너무 쉽게 왔다.
“흐一옷!”
잔뜩 부풀어서 흔들리던 성기가 희뿌연 액을 쏟아냈다. 이승도는 토정을 하 는 와중에도 풍랑에 휘말린 듯 거칠게 흔들렸다. 태국영은 쉬지 않고 몰아붙
였고,이승도는 급기야 울음 섞인 교성을 내질렀다.
허리가붕 떠올라그의 손 위에 얹혔다. 높게 들린 엉덩이 사이로 그의 단 단한 아랫배가 멍울멍울 흔들렸다. 태국영 이 고개를 내려 눈가를 핥아갔다. 짭짤한 눈물이 그의 혀끝에 녹아들었다.
“으,응… 아……!”
쉴 틈 없이 끈질기게 몰아붙이며 그가 귓바퀴를 씹었다. 그의 입술 안에서 부드러운 연골이 아무렇게나 접혔고, 귓구멍 안으로 뾰족하게 세운 혀가 깊 이 들락거렸다. 마치 아랫구멍을쑤시고 있는그의 성기처럼 능란하고음란 한움직임이 었다.
이승도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비틀었으나 그의 손이 턱을 잡아 고정했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 마,울음 섞어 애원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잘게 끊기는 그의 탁한 신음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고막을 후려쳤다. 은밀 한 액체가 부대끼며 찌걱이는 소리도 지나치게 선명했다.
“느껴봐,승도야.”
관능적인 목소리는 끝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이승도는 다급히 숨을 헐떡 였 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호흡이 가빴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이 목덜미로 옮겨 가콱틀어쥐었다. 짐승의 이빨처럼 손끝이 살갗을 깊이 눌렀다. 그가세게 허 리를 밀어올렸다.
퍽,젖은살이 세차게 부딪쳤다. 쉴 새 없이 난타당한 엉덩이로 그의 단단 한 아랫배가 바짝 밀착했다.
그의 미간이 짧게 일그러졌다. 종아리로 감은 허리도 딱딱하게 수축했다.
“아……!”
이승도는 눈을 크게 떴다. 피막처럼 얇게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록 흘러내렸다. 깊은 곳까지 점막을 쑤시고 들어온 그의 성기가 한계까 지 벌어졌다고 생각했던 내벽을 찢을 듯이 더욱더 벌리고 있었다. 엄청난 압 박감에 일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뜨겁고 버거웠다. 감각이 모두 그곳으로 몰린 듯했다. 포근하게 젖은 내부 가 그 안을 채운 것을 민감하게 씹어대고 있었다. 숨도 못 쉬고 입만 벌리고
있던 이승도는, 제 성기가순식간에 부풀어 다시금 왈칵 정액을쏟아내는 것 도 인지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전신이 덜덜거렸다. 고통스러웠고,그 고통 을 압살할 만큼 거대한 황홀경 이 신경을 태우고 있었다.
“숨,쉬어.”
태국영도 아,하며 자꾸만 목을 울렸다. 인공호흡을 하듯 태국영이 고개를 꺾어 키스했다.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이승도는 막혀 있던 숨 한 자락 을 힘겹게 쏟아냈다. 그 뒤로,어린애 같은울음이 터졌다.
“승도야.”
간헐적으로 허리를 떨며 길게 절정을 탐닉하던 태국영은 조금 당황한 낯으 로 이승도를 내려다보았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허리를 꽉 조인 허벅지를 무서 울 정도로 떨면서,정말 엉엉 울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나 싶어 무심결에 한 손으로 이승도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이 승도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에 미친 듯이 비벼대며 그 어느 때보다 달콤 한 비음을 흘렸다. 완전히 넋이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상해, 이거 이상해.
이승도는 애처 럼 울고 있었지만 몸뚱이는 창기처 럼 음란한 율동을 보였다. 돌기가 돋아 더 크게 부푼 성기를 꽉 문 내벽이 미친 것처럼 울렁거 렸다. 마 치 마지막 정액 한 방울까지 모조리 쥐어짜낼 듯 게걸스러웠다.
밀착해 있는 몸도 불안정하게 덜컥거 렸다. 작은 스침조차 큰 자극으로 치환 되는 듯했다. 늘씬하고 단단한 허리가 이리저리 비틀리며 어쩔 줄을몰라 했 다. 이승도는 울며 그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등을 받쳐 조금 일으켜 주었고,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이승도는 바르르 떨며 또 희멀건 액을 쏟아냈 다.
“거봐. 기분좋을거랬지.”
태국영은 만족스럽게 중얼대며 잇자국 난 자리를 할짝거 렸다. 이승도는 여 전히 대답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돌기가 수그러들고 성기도 작아지자 엉덩이
를흔들었다. 한 번 더 해,한 번만,헐떡이며 조르는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러 웠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해.”
이승도는 대놓고 졸랐고,태국영은 기꺼이 성기를 부풀렸다. 혹시 몰라서 미리 몇 번 좆 키우기를 해본 게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
태국영은돌기가 난 성기로 이승도의 구멍 안을 느리게 훑어냈다. 더 커지 고 빡빡해진 내부가 고스란히 머리를 태웠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들이 내벽 을 긁을 때마다 제 등골도 오싹오싹했다.
흐윽,으응, 이승도는 야외라는 것도 잊은 채 음탕하게 소리를 질렀다. 눈 물 젖은 눈동자는 정신없이 움직이며 제 위에 올라탄 남자를 할듯이 훑어보 고 있었다. 엉덩이 사이를 거칠게 쑤셔대는 짐승의 음경도 간간이 시선에 담 았다.
어떻게 생겼건 뭐가 중요해.
이승도는 생각했다. 이렇게 정신을못차릴 만큼좋은데,저것이 설사표범 의 생식기와똑같이 생겼더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윽,옷! 아……!”
주체할수 없는 신음이 비명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짐승의 좆으로 쑤셔대 는그 역시 짐승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야만적인 허리 놀림은단한순간도 멈 추지 않았다. 매끈한 것에 익숙한 내벽은 거친 긁힘에 무력하게 굴복했다.
온몸이 그를 위해 요사스런 울음을 흘리는 듯했다. 이승도는 태국영이 체위 를 조금 바꿀라 치는 순간에도 기겁하며 매달렸다. 계속하라고 조르고,더 세 게 긁어달라고 애원했다. 허리에 감긴 다리는 매달리듯 집착적으로 조여 댔 다.
어디 안 가,그가 말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않았다. 이승도는 마약중독 자처럼 탁 풀린 눈을 흐트러뜨리며 거듭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야 다리에 힘 을 풀었다. 그리고 허벅지를 양옆으로 크게 열었다.
태국영은 무언의 사인을 알아듣고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경련이 올 정도 로 넓게 열린 사타구니가 만족스럽게 떨렸다. 이승도는 제 얼굴 옆을 짚은 태
국영의 팔을 계속 긁었고, 눈물로 흥건하게 젖은 얼굴을문질렀고,베어 먹을 듯이 이로 씹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성이 완전하게 날아간 상태였다. 태국영은 빨갛게 부푼 구멍이 흐늘흐늘 정액으로 절여질 때까지 마음껏 이승도를 탐했다. 평소 같았 으면 끝물에 눈치를 살피며 씻자고 청했을 이승도가 지금은 지치지 않고 다리 를 벌리고 있었다. 온몸에 낭자한 붉은 자국을 매달고 천박하게 비음을 내고 있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훨씬 더 황홀한 경험이었다.
앞으로는 이승도가 먼저 몸이 달아서 그 짓 하자고 허리를 동동거 리는 모 습도 볼 수 있으려나.
태국영은 거친 날숨을 내뱉으며 상상했다. 그리고 그 꿈같은 날은 생각보 다 빨리 왔다.
“국영아.”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에 태국영은 바로 잠에서 깼다. 반쯤 커튼을 열어둔 창문으로 힘을 잃어가는 보름달의 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왜, 승도야. 무슨 일 있어?”
아픈 아이들을 돌보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이승도가 침대 곁에 서 있었다. 초조한 얼굴이었다. 태국영은 어리둥절하게 상체를 세웠다. 이승 도는 다짜고짜 팔을 끌었다.
“나가자.”
이승도는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은 상태였다. 태국영은 떠밀리다시피 드레 스 룸으로 끌려가옷을 입게 되었다. 반팔 셔츠의 단추를 꿰며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묻자 이승도는 대답 대신 가볍게 품에 안겨 왔다. 태국영은 펄펄 끓는 몸 을 반사적으로 끌어 안았다.
어디가 아프냐,그렇게 물으려는 직전에 깨달았다. 허벅지에 닿는 이승도
의 중심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태국영은 상황에 안 맞게 질끈 눈을 한 번 감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승도는 열 오른 얼굴을목에 비비며 까치발을 동동거 렸다.
“빨? ”
이승도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맘껏 흐트러지지 못했다. 분명 태국영이 알아서 잘 차단해 줄 거라고 믿고 있으면서도,계속 신경이 쓰이고 다른 데에 정신을 팔았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달아 급해 하면서도 굳이 나가자고 졸라 대는 것이었다.
“알았어.”
태국영은 얼른 단추를 마저 꿰고 이승도를 한쪽 어깨에 짊어졌다. 빠르게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석 에 앉은 태국영은 가장 가까운 호텔로 차를 몰았다. 주택지를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승도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더못 참겠어.”
불평하는 목소리는 가날프게 떨리고 있었다. 태국영은 어쩔 수 없이 네온사 인들 사이 에서 모텔 간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카운터 에 앉은 남자는 조금 이상한 눈으로 둘을 올려다보긴 했으나 말없이 방 키를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둘은 급하게 엉켜 들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목 을 두 팔로 안아 힘껏 끌어당겼고,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를 한 팔로 세게 당 겼다. 치아가 딱 부딪칠 만큼 허겁지겁 입술을 찾았다.
벽에 기대 허벅지를 내주자 이승도는 그 위에 발정 난 짐승처럼 정신없이 사타구니를 비볐다. 태국영은 한손으로 이승도의 바지 단추를 끌러냈고, 이 승도는 허리가 풀리자마자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내려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태국영은 할딱이는 입 안에서 타액을 빨아먹으며 이승도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구멍 주변은 이미 밀액이 흥건했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 기만 했는데 이승도는 파르르 몸을 떨며 달콤하게 목을 울렸다. 아주 좋은 소 리였다. 내벽을 긁은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냥 해.
이승도는 학학 숨을 내쉬며 더 몸을 붙였다.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음탕한 열기가 드글드글 끓고 있었다. 태국영은 덩달아 입이 바싹 말라 혀로 입술을 할았다.
태국영은 아랫도리만 벗은 이승도를 안아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매트리스 위로 가볍게 떨어뜨리자 이승도는 몸을 돌려 짐승의 교미 자세를 취했다. 머 리는 앞으로 잔뜩 숙이고 엉덩이만높게 들었다.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젖 은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거해 줘.”
노골적인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태국영은 바지 앞섶만 풀어헤친 채 로 이승도의 등에 올라탔다. 돌기 돋은 성기로 고환을 긁어주자 이승도는 허 리를 바르르 떨며 간드러진 신음을 쏟아냈다. 둔부 전체가 움찔움찔 떨리며 기대감을 보였다.
우리 승도 좋아 죽네.
짓궂게 속삭여도 이승도는 정신을 놓은 것처럼 엉덩이만 흔들었다. 태국영 은 큰 몸으로 이승도의 등허 리를 덮으며 곧장 성기 끝으로 구멍을 쑤시고 들 어갔다.
“아아... 아!,,
즈윽,즈윽,질척이는 소리와함께 구멍이 활짝 열렸다. 전희도 없이 시작 된 삽입이지만 빠듯하면서도 유연하게 받아먹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탄력 이었다.
오돌토돌한 성기 표면이 내벽을 긁고 들어가자 이승도는 자지러지게 목을 울렸다. 초반부터 짙은 교성이 터졌다.
“윽,옷… 홋, 아……!”
머리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환희의 창이 빛살처럼 척추를 꿰뚫고 있 었다.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일 때마다 단단한 돌기들이 짜릿하게 여린 점막 을 짓이기는 게 선득하게 느껴졌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태국영은 한 손으로 이승도의 턱을 받쳐 들었다. 어 린애처 럼 안절부절못하 는 이승도는 눈가와 입가 모두 엉망으로 번들거 리고 있었다. 그는 새빨간 혀
를 내밀어 눈물과 타액을 할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손으로는 젖꼭지 를 살짝 비볐더 니 이승도는 그대로 매트리스에 정액을 쏟아냈다.
“응, 으응… 흐으……!”
이승도는 생명수를 찾은 환자처럼 태국영의 입술에 매달렸다. 타액을 줄줄 흘리면서도 또 열심히 빨아먹고 있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성기가 수그러들 자마자 퍽퍽 허리를 움직였다.
삽입할 때마다 구멍은 저절로 조여들었다. 앞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이승 도는 두 손으로 시트를 꼭 쥐었지만 몸은 제멋대로 흔들리다 풀썩 허물어졌 다.
태국영은 그 불덩이 같은 몸을 안아 뒤집었다. 그 순간 이승도는 비명과 닮 은 신음을 길게 뽑아냈다. 집착적으로 돌기를 문 점막이 휘돌며 미친 듯이 요 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흔들며 허공만 헤집던 손으로 그 의 등에 매달렸다.
대화는 완전히 단절되 었다. 태국영은 짐승처 럼 야만적으로 이승도를 깔아 뭉겠고,이승도는숨이 넘어갈듯깔딱이며 낯뜨거운 소리를 아낌없이 흩뿌 렸다.
절정을 몇 차례고 지나쳤지만 열기는 식을 기미가 없었다. 이승도는 목이 쉴 만큼 울고 나서야 그의 정액을 받을 수 있었다. 한계까지 부풀어 내벽을 꽉 고정하는 그의 것은, 나락처 럼 새카만 황홀감을 주었다.
하얀 어둠이 후두두 눈앞을 어지럽혔다. 천박한 교미에 걸맞게 양옆으로 활 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아랫배가 경련하고 있었다.
태국영이 목을 물었다. 그조차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피를 빨아먹었다. 조 금 따끔했던 것 외에 통증은 없었다. 그저 끝까지 박아 넣고도 모자란 듯 자꾸 만 아랫배를 미는 그의 움직임 때문에, 둥글게 부푼 성기가 자꾸만 내벽을 뭉 개 올리는 느낌에 흠뻑 취해 있었다.
“하악… 하아……
짙은 숨결이 흩어졌다. 긴 절정이 머물고 간 자리는 몽롱한 향기로 가득했 다. 그의 매혹적 인 향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이승도는 최음제를 흡입하듯 그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절정이 지나갔음에도 또 흥분이 찾아왔다. 이승도는 갈라진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목에 뺨을 비볐다. 태국영도 숨을 몰아쉬며 이승도의 관자 놀이에 입술을 붙였다.
좋았어? 그가 물었다.
무서울 정도로 좋았어. 이승도가 대답했다.
이승도는 힘 빠져서 덜덜거 리는 팔로 그의 등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태국영 이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휘었다. 땀과 애액으로 축축한 그의 손 이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아아,이승도는금방또 헐떡이며 제 입술을 할았다. 갈증이 여전한 얼굴이 었다. 색에 완전히 취한두 눈에는 여전히 농밀한음욕이 탐욕스럽게 떠돌고 있었다.
태국영은 다시금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승도는 달콤하게 목을 울리며 그의 엉덩이를움켜쥐고 바짝끌어왔다. 더 깊이,더 세게,무엇을주문해도 그는 착실히 들어주었다.
새벽이 하얗게 물들고동이 틀 때까지, 둘은 그렇게 발정 난 짐승처럼 지치 지 않고 뒹굴었다. 정액으로 엉망인 시트처럼 둘의 꼴도 만만치 않게 엉망이 었다.
갈급했던 갈증을 겨우 다 채운 뒤에야 이승도는 정신을 차렸다. 땀과 체액 으로 범벅이 된 몸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뼈까지 흐물흐물 녹아내린 듯했다. 몇 번이나 쏟아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저 미친 듯이 뒹굴었던 기억뿐이 었다.
“너무좋아.”
이승도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앞섶만 풀어헤친 그의 셔츠 안을 더듬었다.
이 근사한근육이 제 위에서 야성적으로움직이던 그 모양이 선명하게 뇌리 를 채우고 있었다. 이 몸뚱이가 어떻게 움직였는지,그의 허리가 어떤 움직임 을 보이며 얼마나 달콤하게 안을 쑤셔댔는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낸 지금도 그 음탕한 기 억들은 머 리를 떠나지 않았다.
“역사는 훌륭한 자산이지. 그렇지 않아?
태국영이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이승도는 탁 풀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 았다.
“아무래도 너 너무 위험한 걸 발견한 것 같아. ”
“ ? <?,,
그의 한쪽 눈썹이 희미하게 꺾여 올라갔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서도 날짐 승의 관능적 인 교미의 흔적을 발견하는 스스로가 무서웠다. 이승도는 제 의심 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걸 느꼈다.
“섹스에 미친 인간처럼 요 며칠 너만 보면 자꾸 그 짓만 떠올라. 보름 다가 와서 애들은 시름시름 힘이 없어져 가는데,벗기고 싶고 다리 벌리고 싶고 너 한테 박히면서 엉망으로 울고 싶어져. 나 미쳤나 봐. ”
솔직하게 털어놓은 진심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으나 태국영은 기분이 째졌 다.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은 걸 왜 진즉 안 했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마주 본 채 누워 있던 태국영은 몸을 일으켜서 이승도의 위에 올라탔다. 손 하나 까딱 못 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이승도는 조건반사처럼 다리를 벌리고 입술을 핥 았다.
태국영은 풀어 놓은 지퍼 밖으로 성기를 꺼내 이승도의 아랫배에 느리게 문질렀다. 질퍽질퍽하게 젖은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우리 승도 미치면 나도 같이 미치지 뭐. ”
태국영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그렇게 좋냐고 한손으로 가볍게 주무르며 묻자 이승도는 허탈한 미소를 엷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요물이야.”
인간의 성기나 짐승의 성기나 그리 아름답지 못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이 승도는 저 돌기 가득하고 불그스름한 것이 지나치게 좋았다. 저 볼록한 것들 이 안을 헤집으면 금방 이성이 날아가서 짐승처럼 울게 된다.
저 짐승의 좆은 상대까지 짐승으로 만드는 모양이 었다.
“그래. 너도 같이 미치면 되지.”
이승도는 포기한 듯 작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질릴 때까지 짐승처럼 놀아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 부사이에 침대 위에서 좀 막 나가면 어떠냐 싶었다. 이승도는 힘 풀린 다리 를 매트 위에 넓게 벌리며 말했다.
“핥아줘.”
태국영은 뜬금없는 요구에 눈매를 키웠다가 이내 웃으며 청을 받아들였다. 그가 찢어진 소맷자락을 걷어붙이며 막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
갑자기 들어온 제지에 태국영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승도는 말 대신 검지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빙빙 그려 보였다. 태국영의 눈빛이 미묘해졌 다.
“변이를 하라고?”
W ? ”
■?*.
“변이해서 핥아달라고?”
재차 묻는 말에 이승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전개는 태 국영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이거 설마,아예 그 상태로 박히고 싶다는 건 가,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곱씹고 있을 때였다. 그를 눈치 첸 이승도가 흐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아무리 섹스에 미쳤어도 그건 좀 아니야. 그냥 네가새끼 돌보듯이 여기저기 핥아주면 기분 좋을 것 같아서 그래. ”
아,그럼 그렇지.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태국영에게 이승도가 작게 뒷말을 붙였다.
“아니 면 뭐,우리 국영이 하는 거에 따라 더 진하게 놀아줄 수도 있고? ”
태국영은 그답지 않게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승도는 두 눈을 질끈 감 은 채 대놓고 웃음을 홀렸다. 놀림당한 게 확실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나 조금 어이가 없기는 했다. 장난으로 던진 말에 괜한상상을 해 버린 스스로에 게 말이다.
태국영은 곧장 변이했다. 거대한 그림자에 갇힌 이승도는 편안히 사지를 늘 어뜨린 채 젖은 눈만 깜빡였다. 정염이 하얗게 탈색된 눈동자였다. 태국영은
성애의 흔적만을 흠뻑 묻히고 있는눈가부터 길게 핥아올렸다.
“간지러워.”
눈매를 가늘게 접고 바람 같은 미소를 흘리는 입가, 붉은 울혈이 가득한 목 과 어깨,정액으로 얼룩덜룩한 배까지 조심조심 꼼꼼하게 할고 나자 이승도 는 자진해서 몸을 뒤집었다. 아까같은 교미 자세처럼 엉덩이만 높이 쳐든 채 였다.
글쎄,딱히 이 상태로 박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시험에 든 기분이었다. 태국영은 가볍게 뇌리를 스친 번뇌를 쉽게 털어냈다. 정액과 애액으로 범벅인 비부를 성실하게 할았고,불그스름하게 부 푼 구멍도 쪼듯이 혀끝으로 할짝거렸다. 상기된 피부는 금세 말끔하게 변해 열게 번들거렸다.
“아,좋다……
나른하게 중얼거 린 이승도는 옆자리를 두드렸다. 후회가 퍽 만족스러웠는 지 발갛게 핀 뺨이 고왔다. 태국영은 버릇처 럼 모로 누웠다가 자세를 교정당 했다. 인간처럼 배를완전히 보이며 드러눕는 이상한자세였다. 이승도는꾸 물꾸물 기어 올라오더니 배 위에 길게 엎드렸다.
“예쁜 우리 국영이.”
이승도는 어릇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밤새 머 리를 풀어헤치고 잘 논 요부 같은 얼굴이었다. 태국영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발톱을 잘 갈무리한 앞발로 이승도의 등을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네 국영이가그렇게 예뻐?】
장난처 럼 묻자 이승도는 웃으며 주둥이 옆에 입을 맞췄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이승도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물을 보듯 반짝반짝 예쁜 눈이 었다.
태국영은 그 농밀한 눈동자에 담긴 짐승을 기분 좋게 올려다보았다. 이승도 가 그렇게 무수히 예쁘다고 하니,이제는 제 눈에도 저 괴물이 조금은 마음에 드는 것같았다.
“앞으로 더 예뻐해 줄게.”
다음에는 이 모습으로도 조금 더 진하게 놀아 보자.
이승도는 콧잔등에 턱을 비비며 은밀하게 뒷말을 속삭였다. 태국영은 의심
스런 눈초리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면밀하게 뜯어보아도 이번 것은 장난 같 아 보이지 않았다.
【진심이야?】
W ? ”
■?*.
돌아오는 대답도 망설임 없이 담백했다.
“이제 넌 네 안의 괴물도 가뿐하게 이길 수 있으니까. ”
그렇지? 하고 묻는 말에 태국영은 한동안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묘 했다. 기쁘다거나 아리다거나 그런 간단한 표현으로는 지금 이렇게 잔잔하게 요동치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맞아. 다시는 지지 않을 거야. 】
태국영은 다짐하듯 고백을 이어 붙였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목소리였 다.
【행복하게 해 줄게. 】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했던 것은 미처 떨 쳐내지 못했던 긴 울음의 기억 때문이었다.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아니,사람답게나마살 수 있게 해 주려면,내가 죽어야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때의 처절함만큼은 참 질기게도 저를 물고 놓아주지를 않아서.
【사랑해,승도야. 】
사랑해,그는 나지막이 뇌까렸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을 빤히 올려다보 는 채로,그렇게 몇 번이고.
“응.나도 사랑해.”
이승도는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태국영의 눈가도 그를 따라 곱게 접혔다. 청량한 손길이 태국영의 정수리를 덮었다. 코와 코가 맞닿았다.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해 줄게.
달콤한 속삭임을 품은 숨결을, 태국영은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천 년 묵은 빙하도 흐물흐물 녹여버릴 만큼 따뜻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전신으로 뻗어 나 가고 있었다.
Hidden Track # 03. What a wonderful world
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나 싶다.
이승도는 첫눈과 함께 독감에 제대로 폭격을 맞았다. 고열은 해열제 처방으 로 어느 정도 잡았지만 두통과몸살은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기침을 하 도 해서 목이 쉬었고, 열은 내렸다고 하는데 눈과 목은 물론 머리 전체가 델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엄마 어떡해. 많이 아프지? 어떡해.”
태영도는 작은 손으로 얼음 주머니를 든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거동조차 힘들 만큼 몸이 안 좋은 상태를 처음 목격한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 릴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금방 나을 거라고 달래 보아도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도통 듣질 않았다. 말만 안 했지 태이경도 태은경도 곁에서 내리 발만동동 구르고 있었 고, 심지어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말에 여은태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있는 참 이었다.
“아빠,엄마 낫게 하는 약은 없어요? ”
팔짱을 끼고서 곁에 앉아 있던 태국영은 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태국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더니, 잠 시 뒤 도톰한새 이불을 가져왔다. 그거로 뭐 하려고, 라는 세 아이의 시선을 담담하게 튕겨낸 그는 이불로 이승도를 돌돌 감아 어깨에 짊어졌다.
“너희들이 자꾸 곁을 알짱거리니까 얘가 너희 신경 쓰느라 더 안 낫는 것 같아. 난 승도 나을 때까지 선산에 올라가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
“아,하지만一”
“감기는 무조건 잘 먹고 아무 걱정 없이 잘 쉬어야 돼. 지금 승도한테 너희
는 조금도 도움이 안 돼. 잠자코 여기 있어. 전화도 하지 말고. 다 나으면 알아 서 다시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
태국영은 아이들에게 매달릴 여지를 주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가 유모를 찾 았다. 얼른 달려온유모에게 태국영이 빠르게 지시했다.
“나 지금 선산에 갈거니까유모는 얘 먹을거리 챙겨서 뒤따라와. 운전이 랑 짐 드는 건 여은태 시키고. 애들 하나도 달고 오지 마. ”
“네,가주님.”
그는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태성문은 승차감이 가장 좋은 세단을 골 라 뒷좌석을 평판처럼 펴 놓은 채 시동까지 걸어둔상태였다.
“천천히 운전해.”
“예.”
태국영은 이승도를 안은 채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 자 이승도는 살짝 눈을 떠서 버석하게 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안 그래도 좀 조용한 데로 가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 싶던 참이 었 는데.”
“짜식들이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는 걸 모르니까. 가서 유모 가 해 주는 거 잘 먹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내가 열심히 간호 해줄게.”
태국영은 습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다정한 스킨십에 괜 히 눈가가껑했다. 아프니까감상적이 되는모양이었다.
“국영이 뽀뽀.”
베개로 허벅지를 내준 태국영이 깊이 상체를 구부려서 입을 맞췄다. 다른 때 같았으면 능청스럽게 키스로 이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담백하게 위로 하듯 건네는 입맞춤이 다였다.
“예전 생각나네. 나 별이 가졌을 때 감기몸살 엄청 심하게 왔었는데. 그때 이후로첨인 것 같아. 그치.”
“응. 그 뒤로 너 한 번도 안 아팠는데. ”
“이번에 이렇게 크게 앓았으니까 앞으로 몇 년은 또 끄떡 없겠다.
“그래야지.”
말하다 보니 건조한 입술이 금방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혀 로 입술을 축이자 헐어버린 입술이 따끔거려 인상을 찌푸렸다. 태국영은 호주 머니에서 스틱형 립밤을 꺼내 손수 발라주었다.
“침 바르지 말라니까. 더 아파.”
“응.자꾸까먹어.”
“좀자. 눈뜨면 너 좋아하는 나무 냄새 가득한 집에 있을 거니까. ”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눈을 감은 이승도는 금세 정신을 놓았다. 깊이 잠이 들어서도 뜨거운 숨을 내쉬며 작게 할딱였다. 태영도가 들고 있던 얼음 주머 니를 하나 챙겨오기는 했는데, 뜨끈한 이마 위에서 금방 녹아 버려서 진즉 쓸 모가 없어졌다.
눈길이 아니더라도 이승도의 몸 상태가 최악이었기에 어차피 속도를 내기 는 힘들었다. 태성문은 제일 바깥차선만 타며 내리 서행만 했고,세 시간이 나 걸려서야 겨우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국영은 탈 때와 마찬가지로 이승도를 이불로 꽁꽁싸서 어깨에 짊어지고 내렸다.
“좀 있으면 여은태 올 거야. 이 차는 여기에 두고 개 오면 같이 돌아가. ”
“네.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없어. 유모가 알아서 다 챙겨올 거야. ”
태국영은 자물쇠도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냉동고처 럼 싸늘했다. 보일러를 세게 틀어 두고 누에고치처럼 돌돌 만 이승도를 안은 채 침대에 앉 았다.
태국영은 감격해 줄 이 없는 테라스의 눈 내린 풍경을 바라보며 실내 온도 가충분히 올라가길 기다렸다. 집을 너무 대충 지었는지 본가처럼 금방 따뜻 해지지 않아 새삼 불만이 생겼다. 아무래도 훗날로 미뤄뒀던 산장 건설을 조 금 일찍 시작해야 될 것 같았다.
공기가 충분히 훈훈해져서 이승도를 침대에 편히 눕혔을 즈음 유모가 도착 했다. 유모는 급한 대로 저택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죽과 기본 식재료들,과일 만 간단히 챙겨 온상태였다.
“선생님 괜찮아지면 문자라도 줘. 걱정되니까.”
여은태는곤히 자고 있는 이승도를 내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쪼마난 게 응 석만 부리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어느새 눈높이는 비슷해졌고 제법 의젓해 지기까지 했다.
“알았으니까성문이 데리고 가. 승도 좀 쉬게. ”
“응. 꼭 연락 줘.”
여은태는 마지막으로 신신당부를 하고 오두막을 나갔다. 태국영은 유모가 가져온 아이스박스에서 얼음 주머니를 꺼내 이승도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차라리 추워하면 안아주기라도 할 텐데, 몸에서 열이 나니 자꾸만 차가운 것만 찾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중환자실에서나 쓸 법한 아이스 매트를 깔아 주고 양쪽 겨드랑이에 꽝꽝 언 아이스 팩도 끼워 주자 그제야숨소리가 조금 편안해졌다.
참 별거 아닌데.
작은 상처도 이 런 독감도 제게는 너무나 하찮은 것인데 고작 이 정도로 이 승도는 이렇게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뚱이는 왜 이렇게나 약해 빠졌 을까, 태국영은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뻗어 이승도의 렘을 쓸어내렸다.
“국영아.”
이승도가 실눈을 뜨고서 중얼거 렸다. 눈가가 열 기운에 붉었다. 태국영은 얼른상체를 숙이며 응, 하고 대답했다.
“미안.”
아픈 것도 미안하고, 걱정 끼치는 것도 미안하고,그냥 다 미안하다는 뜻일 거다. 미안해하는 그 마음조차 탐탁지 않았다. 태국영은 한 손으로 이승도의 두 눈을 덮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그런 소리 말고 그냥 자. ”
“응.좀더 잘게.”
깊은 밤이 몰려오고 하얗게 새벽이 번질 때까지 태국영은묵묵히 아이스
팩을 갈아주었다. 동이 터서 출근 시간이 되자 이승도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 늘도 결근이냐는 전화를 대신 받은 그는 아픈 직원이 고작 사흘 출근 못 한
게 못마땅하면 그냥 해고를 하라며 드물게 화를 내고 끊어 버렸다.
이승도가 깨나면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유모의 말마따나 그 얼마 안 되는 월급이나 받으라고 직장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어떤 작은 거 라도 이승도의 삶에 활력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 다.
“추워.”
열이 내리자 이승도는 몸을 움츠리며 작게 떨기 시작했다. 태국영은 차가 운 것들을 모조리 치워 버리고 곁에 누웠다. 뜨끈뜨끈한 체온이 닿자 이승도 는 아기 새처럼 품 안을 파고 들어왔다. 태국영은 이승도를 끌어안고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고마워,국영아.”
이승도가 몽롱한 잠결에 중얼거 렸다. 고맙기는, 태국영은 작게 대꾸를 하 며 척박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승도는 대강 정신을 차리자마자 해고 통보를 확인했다. 어차피 닷새가 넘 도록 무단결근 수준이 었기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 었지만,그래도 2년 가까 이 다닌 직장에서 이렇게 매정하게 이별을 통보 받으니 마음이 좋지는 않았 다.
“다부질없다.”
이승도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휴대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다시 털썩 몸을 뉘었다. 독한 기운은 대부분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머리도 멍멍한상태였다.
“일어나서 죽 먹어. ”
고개를 들자 태국영이 주방에서 쟁반을 들고나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
른 코를 훌쩍이며 맛있는 냄새를 맡았던 터라 이승도는 얼른 다시 몸을 일으 켜 앉았다. 태국영은 바닥에 둔 베드트레이를 침대 위로 올리며 말했다.
“유모가 닭죽이랑 전복죽 끓여 왔어. 둘 다 먹든지 더 맛있는 것만 먹든지.,
죽 그릇 두 개와 푹 익은 깍두기,그리고 시원한 동치미가 차례로 상에 올 랐다. 마침 목이 탔던 이승도는 동치미부터 한 숟갈 떠먹 었다. 새콤하고 시원 한 국물이 깔깔한 입 안을 달래주는 느낌 이 었다.
재료가 풍부하게 들어간 죽들도 간이 삼삼하면서 고소했다. 이승도는 천천 히 수저를 놀려서 반찬까지 깨끗이 비웠다. 역시 유모 손맛은 병중 환자도 벌 떡 일으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태국영은 빈 그릇들과 베드트레이를 치우고 치약 묻힌 칫솔까지 물려주었 다. 앓아누워 있는 동안 화장실을 갈 때 빼고는 모조리 침대 위에서 해결했다. 양치도 세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충실한 간병인처럼 묵묵히 세숫대야에 물 을 떠다 날랐다.
“이제 괜찮아. 걸을수 있어.”
이승도는 칫솔을 문 채 욕실로 갔다.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 어 있는 걸 보니 유모가 방금 왔다 간 모양이 었다. 세수까지 말끔히 하고 나 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보송보송하고 포근했다. 씻는 동 안 태국영이 새 시트를 씌워 놓은 거였다.
세탁실에서 나온 태국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더 해야 하나 찾는 눈 치였다. 안 어울리게 성실하고 기특한 면이 있는 남자였다.
“귀여운 우리 국영이.”
속마음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태국영은 ‘얘가 뭐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승도는 이불을 들추며 손짓했다.
“생체 난로야,이리들어오렴.”
태국영은 픽 웃으면서도 잠자코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둘 다 잠옷 바지 차 림이라 맨살이 고스란히 닿았다. 팔베개를 해준 그가 깊이 몸을 품어주었다. 선득하게 떨어진 체온은 뜨끈한 그의 품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 렸다.
이승도는 노글노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애들한테 전화해 줬어?”
“유모 갈 때 말해 뒀어. 한 이삼 일 더 쉬면 완전히 나을 거 같으니까 그때
내려가겠다고. 곧 애들도 소식 들을 거야. “우리 꼬맹이들 걱정 많이 하겠다. ”
“네 걱정이나하시지. 밥도못 먹어서 수액 맞으면서 내리 빌빌거렸던 주제 에.”
이승도는 실없이 웃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옷을 입은 헐벗은 나무 가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 리고 있었다.
“눈 많이 왔나 봐.”
“어젯밤에 미친듯이 내렸어.”
“아쉽다. 이런 날은산꼭대기에서 내려다봐야하는데. ”
“다 나으면 데리고 올라가 줄게. ”
W ? ”
■?*.
잠귀신이 라도 붙은 듯 또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한숨 더 자고 나면 몸이 더 가뿐해져 있을 것 같아서,이승도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맨손체조를 하며 힘차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도 오래 누워 있어서 삭신 이 좀 쑤시는 것 외에는 특별히 이상이 느껴지는 부위는 없었다. 열도 완전히 내렸고 두통과 인후통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 이제 정말살 것 같네. ”
이승도는 후련하게 가슴을 펴며 중얼거 렸다. 한 번 크게 앓고 났으니 또 앞 으로 몇 년 간은 잔병 치 레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거 였다. 아무런 근거 도 없었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깍지 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현관이 열리 고 태국영이 큼지막한 아이스박스 하나를 어깨에 짊어진 채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물었다.
“바로 먹을 거지?”
“응. 식탁에 놔 줘. ”
태국영은 곧장 주방으로 가서 아이스박스 안에 든 것들을 식탁에 올려 두 었다. 태성문이 핫팩으로 중무장을 시켜서 배달해 온음식들이었다. 겹겹이 포장을 한 상태 인데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거지. ”
가장 반가운 것은 주인아저씨의 얼굴을 꼭 빼닮은 용구네의 엠블럼이 었다. 예전 동물원을 다닐 때는 퇴근길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꼭들렀던 맛집이었 다. 태국영이 비닐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뭉치는 동안 이승도는 순식간에 포장 을해체했다.
가장 먼저 젓가락이 간 것은 오돌뼈였다. 매콤달콤한 맛이 그간 심심한 음 식만 먹었던 입 안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승도는 너무 맛있어서 소리 없이 몸을 흔들었고, 태국영은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맛있냐.”
“완전.”
“죽 먹던 속에 매운 것만 먹으면 또 탈 나. 아 해.”
태국영은 잘 뭉친 주먹밥 하나를 이승도의 입술에 붙였다. 그걸 또 냉큼 받 아먹은 이승도는 다시 신이 나서 애처럼 몸을 흔들었다. 유모의 정성 들인 진 수성찬이 최고지만,역시 가끔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는 이렇게 자극적인 걸 먹어줘야 했다.
태국영은 주먹밥을 다 뭉쳐 두고 나머지 포장도 뜯어준 다음에야 제 몫의 식사를 챙겼다. 이것저것 조리해야 먹을 수 있는 이승도에 비해 제 식사 준비 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침에 유모가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간 고깃덩 이를 꺼 내서 자르기만 하면 되었다. 굽는 건 못해도 자르는 건 잘하는 터라뚝딱 잘 라 식탁으로 가져왔다.
그새 오돌뼈를 다 골라 먹은 이승도는 다음으로 떡볶이를 열심히 조지고 있었다. 빨간 떡볶이가 아닌 크림소스로 볶은 하얀 떡볶이 였다. 매운 음식과 느끼한 음식의 궁합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태국영은 한입 크기로 썰어 놓은 고기를 아드득 아드득 뼈째 씹으며 조금 신기한 눈으로 이승도를 구경했다. 무슨 처음 일탈하는 애 마냥 저렇게 잘 먹
는 걸 또 언제 본 적이 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언젠가본 적도 있는 것 같고.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던 태국영의 눈가가 어느 순간 작게 굳었다.
설마.
그는 식사도 멈추고 가까운 과거를 살살이 돌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의심스 런 정황은 단 하나도 긁어낼 수 없었다.
아니겠지.
배란 주기만큼은 꼼꼼하게 챙겼다.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태국영 은 조금 불안한 눈으로 지 켜보다가,이승도가 금방 수저를 놓는 걸 보고서 야 안도했다.
넉넉히 4인분 정도를사왔는데 거의 반절이 남았다. 미친 애처럼 잘 먹었 다뿐이지,이 정도면 그냥 과식을 한 정도에 불과했다.
이승도는 남은 음식들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어 냉동실에 넣어 두고 양 치를 하며 일회용 용기들을 대강 씻어두었다. 그동안 식사를 마친 태국영도 양치를 한 뒤 피가 흥건한 접시들을 개수대에 가져다 두었다.
예전에는 주변에서 다 알아서 해 주니 뭘 치워야 된다는 생각조차 못 하던 남자가 많이도 발전했다. 이렇게 종종 단둘이 오두막에 놀러 올 때마다 이거 해라,저거 해라 시키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기 전에 제가 잘 알아서 하고 있었다.
“우리 국영이 다 컸구나. ”
이승도는 태국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그늘 없이 맑고 화사했다. 컨디션이 좋아지니 마냥 기쁜 기색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 를 두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며 작게 웃었다.
“농담하는 거 보면 확실히 다 낫긴 했나 보네. ”
“응. 되게 가뿐하고 좋아. ”
다행이네,그가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걱정 많이 했냐물으니 그는 고개 를 끄덕였다.
“난 치명상을 입어도 네 품에 안기면 금방 낫는데, 고작 감기 걸린 너는 내
가 아무리 품어도 안 나으니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무력감이 제법 좆같거
이승도는 그의 머 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주며 고개를 저 었다.
“한 게 왜 없어. 아픈 와중에도 감동할 만큼 정성스럽게 간호해 줬잖아. ” “할수 있는 게 고작그런 것뿐이니까. ”
“고작이 아냐. 아픈 애인 위해서 세숫물 양칫물까지 침대로 갖다주는 다정 한 남자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줄 알아? ”
태국영은 그냥 이승도의 콧등만 살짝 할고 말았다.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 각하는 모양인지 조금 멋쩍은 기색이 었다.
귀여워라.
어찜 이리 하는 짓마다 다 예쁜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보 듯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이승도는 태국영의 목을 끌어안은 채 좌우 로 몸을 흔들거 렸다.
“우리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내려가자. ”
“그래.”
“홀딱 벗고 우리 국영이 품에 안겨서 눈 구경해야지. ”
“홀딱 벗는 순간부터 눈 구경할 틈이 없을 텐데. ”
“환자를 상대로 세우겠다고?”
“다 나았잖아. 그래도 어제까지는 환자였으니까 다정하고 부드럽게 안아 줄게.”
태국영은 이승도의 티셔츠 아래 손을 넣어 곧은 등허리를 쓸어 올렸다. 이 승도는 나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조금 더 바짝 밀착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건 별론데. ”
“어제까지 환자였던 주제에 거칠게 다뤄 달라고? ”
“다나았잖아.”
또 한마디도 안 진다. 태국영은 예쁘게 눈꼬리를 접었다.
“이래야우리 승도지.”
이승도가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다 보니 마치 블루스를 추는 느낌이었다.
이승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음악 틀까? "하고 물었다. 태국영은 대답 대신 자연스럽게 테라스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통으로 짜서 넣은 큼직한 유리창과 테라스로 나가는 유리문 안쪽으로 오후 의 햇살이 환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흔들의자 한쌍과동 그란 티 테이블이 따뜻한 빛을 머금고 반들거렸고,음향 기기들은 그 반대편 구석에 자리해 있었다.
오디오도 있었지만 이승도는 어렵게 구해 온 축음기를 훨씬 더 애용했다. 판이 긁히며 나오는 그 특유의 소리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해서 좋았다.
이승도는 LP판을 새로 고르지 않고 축음기 바늘을 판 위로 올렸다. 마지막 으로 들었던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기 억나지는 않지만, 그때에도 매우 행복한 풍경을 걷고 있었을 거다. 안 좋은 기억이 단 하나도 없는 이 작은 나무집이 간직하고 있었던 그 풍경을 끌어오고 싶었다.
전주도 없이 노래가 불쑥 흘러나왔다. 이것조차 아날로그의 묘한 매력이었 다. 블루지한 감성이 강한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따뜻한 나무집을 촛불처 럼 아련히 메웠다.
그 노래를 들으며,이승도는 원했던 대로 가까운 과거의 따뜻했던 기억들 을 재생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이곳을 찾았었다.
낙엽도 다 떨어지고 황량하게 헐벗은 나뭇가지가 곧 다가올 한파를 기다리 고 있었다. 빈약해져 버린 나무들은 볼품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이 충 만하고 따뜻했었던 기 억만은 또렷했다.
바싹 마른 가지들을 주워와 오두막 앞에 모닥불을 피웠었다. 호일에 감싼 고구마를 그 안에 넣고, 그의 품에 안긴 채 긴 막대로 불을 헤집으며 별거 없 는 하루를 보냈었다.
따끈한 불이 일렁 이는 마당에서 몸을 겹쳤다. 태국영은 바비큐 테이블에 흰 천을 깔아 저를 눕혔고,선 자세에서 제 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 그때 뜨거웠어. ”
회상에 아련히 젖은 이승도가 말했다. 태국영은 신기하게도 그 말을 제대
로 알아듣고서 입술 끝을 올렸다. “우린지금도 뜨겁지.”
그의 눈동자가 낮게 일렁였다. 이렇게 크게 앓은 직후만 아니었다면 당장 에 눈밭으로 끌고 가깔아 버릴 기세였다. 함박눈이 펑펑 오는 날 야외에서 그 에게 안기는 것도 꽤 좋을 듯했다.
너무 뜨거워서 문제야.
이승도는 작게 속삭이며 그의 몸에 더 밀착했다. 상체가 맞닿고,은근한 열 기를 품은 중심부가 닿았다. 어제까지 환자였던 이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 우 불온했다. 그 불온함이 지극히 기뻤다.
먼 훗날, 이 오두막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갖춘 산장 안에서도 그는 그런 눈으로 저를 내려다볼 것만 같았다. 귀하디귀한 것을 음미하듯 핥아 내리는, 그런 눈으로.
이승도는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태국영을 올려다보며 작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And I think to myself / 그럼 난 생각해요
What a wonderful world /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서 가만히 감상하던 그도 감미로운 저음을 곡조에 포개었다.
Yes, I think to myself / 네,난 생각해요
What a wonderful world /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둘은 짧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리고 이끌리듯 입술을 마주 댔다. 맛을 보듯 닿았다 떨어지길 몇 번,곧 깊이 얽혀들었다. 서로에게 익숙한 타액이 한데 뒤엉켜 서로의 입 안으로 흘렀다.
소담스런 눈송이가 다시금 총총 창밖을 채운다. 하얗게 눈이 더 쌓이면 그
보다 더 순결한 제 연인을 태우고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테다. 눈부신 석양 이 눈밭에 튕겨 올라오고, 아를 격려하듯 터뜨려주는 찬사가 또 그 찬란한 빛 을 가를 것이었다.
나른한 오후를 장식하는 빛 가루가 이승도의 머리 위에 백색의 띠를 둘렀 다. 태국영은 달콤한 입 안을 느리게 음미하며 축음기 바늘을 다시 판에 올렸 다.
남자 가수가 또다시 낭만적으로 노랫말을 읊는다.
What a wonderful world.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지를.
[BL] 백야 (광야 외전) 2 (완결)
지은이:텐시엘 펴낸이:유철종
펴낸곳 : (주)북큐브네트웍스 [R/비하인드/은설/로맨스토리/판무스토리/ 세이렌]
전화: 1588-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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