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너희들이 찾는 그곳에,나는 언제나 있어 (24/25)

   9. 너희들이 찾는 그곳에,나는 언제나 있어

   「특별히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그가 땀 젖은 목덜미를 건성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간헐적으로 찌푸려지 는 미간조차 근사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승도는 비현실적이다 싶은 그의 얼굴이 조금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가볍게 찔러 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뭐 해.」

   「…그냥. 너 안 같아서.」

   벌써 몇 달이나 지났는데 그가 뒤집어쓴 인간의 외피는 여전히 익숙해지 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뻔질나게 찾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굉장 히 드물게 나타났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많아 봐야 두 번이었다. 그마저도 말 거는 법도 없이 제가 공부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사라질 뿐이었다.

   공부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강렬하진 않 아도 끈질긴 시선이 자꾸만 신경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인사 도 없이 가 버리고 나면,이승도는 그냥 또 허공만 바라보며 두어 시간을 의 미 없이 소각해 버리곤 했다.

   무엇도 바라지 않는 그와 무엇도 해주지 않는 자신, 둘 중 누가 더 어리석 고 바보 같은 걸까.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공허했다. 쓰고 텁텁한 어떤 감정이 자꾸만 어른거리 는데 손을 쥐어 잡으려 들면 먼지처 럼 흩어져 사라져 버 렸다. 이승도는 그 감 정의 정체를 알고 싶기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난 네가 성체가 되어서도 대보름 때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재회 후, 그래도 보름날은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매달 하루는 그와 지냈다. 의지와달리 몸이 뜨거워져서 조금불편해하는 건 봤지만 이렇게 식

은땀까지 흘리는 모습은 처음이 었다.

   이승도는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와.」

   더 이상 ‘진심이냐’ ‘정말이냐’ 물을 필요는 없었다. 달에 한 번씩 관대하게 구는 이승도에게 태국영도 이제는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곁에 누웠고, 이승도는 베드 테이블을 끌어와 책을 꺼내 올렸다.

「자. 책 보면서 너도 종종 봐 줄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태국영은 눈을 감았지만 그대로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이승도는 약속한 대로 간간이 손을 뻗어 몸을 만져 왔다. 공기를 움켜 쥐듯 담백하고 사심 없는 손길이 었다.

「너도 참…….」

   이승도가 작게 중얼거 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어왔다. 태국영은 그 짧은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너도 참 가엾다. 너도 참 불쌍해. 이렇게 다 커서까지 불완전하다니.

   태국영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불만으로 느끼지 않았다. 아니,도리어 퍽 만 족스러 웠다.

   홀로도 완벽한 것은 필시 날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결핍은 투쟁심을 꺾 고, 모험을 피해 익숙한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자신은 화려하게 날아가기보 다 초라하더 라도 낮은 곳에 머물고 싶었다.

   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의 폐허를 채워줄 것이 바로 그 초라하고 낮은 곳에 있기 에.

   태국영은 가만히 이승도의 손길을 느꼈다. 맨정신으로 그가 주는 청량한 치 유를 음미했다. 육신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질 때마다 그 반동으로 마음이 들 끓었다.

   영원히 소실되어 버리길 바랐던, 간절함이다.

   의지하고 집착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비우려 애썼다. 숨은 아주 긴 간격으 로 느리게 쉬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통증은 더 짧고 날카롭게 전신을 저며 왔다. 신음을 흘려

보낼 정도는 아니 었으나 거친 숨소리와 저절로 간헐적인 떨림을 보이는 근육 들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이승도는 베드 트레이를 완전히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고열은 태 국영의 머리와 심장,관절 부위를 집중적으로 갉아먹고 있었다. 다른 데에 한 눈팔지 않고 태국영만 돌보았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어느 한 군데를 열심히 쓰다듬고 있으면 다른 부위가 반발하듯이 비정상적인 흐름을 보였기 때문이 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겉옷을 벗고 태국영의 옆에 드러누워 불덩이 같은 몸을 끌어안았다. 최대한 많은 부위가 접촉할 수 있게 살을 붙였다. 그제야 태국영의 숨결이 한결 안정적인 흐름을 되찾았다.

   아픈 것도 나쁘지 않네.

   살만해진 태국영은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내내 어지럽게 깨어 있던 정신이 서서히 늪으로끌려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태국영은 거부하지 않 고 그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일생 처음으로 맞는, 완벽하게 안락한 수면의 바다가 그를 풍만하게 끌어안 아주었다.

   “후우……

   이승도는 달력을 보며 아주 긴 한숨을 지 었다.

   “에효……

   송재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승도가 먼저 운을 뗐다.

   “한달도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찰떡 한쌍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둘은 다시금 꺼질 듯이 한숨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둘 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재희야. 다시 말하지만 그냥 집에 있어도 돼. 은태는 어디까지나 내가돌 봐주는 애니까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어. ”

   또 신세 지는 것이 미안해서 말을 꺼내 보았지만 송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에게 빚을 졌고 은혜를 입은 그녀로서는 그 정도 수고쯤 아무것도 아니 었 다.

   “거 참 미안해할 거 없다니까요. 국영 오빠에 애들 셋까지 오빠 혼자 어떻 게 다 돌봐요. 어차피 저랑 강우 오빠도 어디 여행갈 때 연주 맡기니까 그냥 서로서로 돕는다 치면 되죠. ”

   송재희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더 말을 해도 어차피 듣지 않을 분위기였 다. 이승도는 그냥 고마운 마음으로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 일 있으면 언제든 연주 맡기러 와. 내 아이처럼 잘 돌봐줄게. ”

   “당연하죠. 안 그래도 오빠 믿고 우리 신혼여행 완전 오래 다녀오기로 정 한걸요.”

   살림은 진즉 합쳤지만 송재희와 남강우는 돌아오는 봄에 드디 어 식을 올리 게 되었다. 그간 남강우가 가주 승계를 받느라 이래저래 정신이 없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5월의 신부가 되는 게 소소한 꿈이었다던 송재희도 혼인을 미루 는 것에 동의를 했었다. 이제 곧 새신부가 될 송재희의 얼굴은 노상 기대와 설 램으로 봄꽃처 럼 화사한 미소가 어 려 있었다.

   “아,일정 잡혔어? 어디로,몇 박으로? ”

   “우리 십오 박 일정으로 서유럽 가기로 했어요. 이탈리아랑 프랑스만 해도 갈 데가 엄청 많더라고요. 로마,피렌체,밀라노, 모나코랑 니스 해변,파리까 지 실컷 돌아다니다 오게요. ”

   “그래,잘했다. 유럽은 한 번 가면 오래 있어야 된다더라. 워낙 볼거리가 많 아서 막 급하게 다니면 제대로 못 본다고. 대학생들은 방학 시즌에 한두 달씩 배낭여행 가고 그런대. ”

   “맞아요. 더 여유롭게 있다 오고 싶지만 강우 오빠도 그 정도로 오래는 자 리를 못 비우고 연주도 있고 해서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래도 앞으로 틈틈이 휴가 받을 때마다 해외여행 데려가 준다고 오빠가 약속해 줘서 완전 신나요. ”

   송재희는 불끈 쥔 두 주먹을 얼굴 양옆에 흔들며 발까지 콩콩거 렸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소녀 같았다.

   “신혼여행 좋지요. 친애하는승도 님, 저도 결혼하면 또 휴가주실 거지요?

   태성문이 불쑥 몸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왔다. 당연한 거 아니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승도의 옆에서 송재희가 반짝 눈을 빛냈다.

   “어머나! 성문 씨 결혼 계획 발표……? ”

   “아닙니다.”

   태성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도 여지를 남겼다.

   “그래도 언젠가는 하겠지만요. ”

   “성문 씨 영애 언니한테 푹 빠졌나 보네. 벌써 결혼 생각까지 하시구. ”

   “…그런 거 아닙니다.”

   송재희와 이승도는 동시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야유했다. 지난번 태성문이 한 달이나 휴가를 받았다는 첩보를 입수한 신영애는 제멋대로 여행 가방을 꾸 려서 동참했다고 한다. ‘어머나우연히 이런 데서 다 만나네. 호호호호.’하는 그녀의 말을 순진하게 믿어 버린 태성문은 동행하자는 제안을 선뜻 수락했 고,그 여행 도중 둘은 좀 이상한 구도의 연인 사이 비슷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짝사랑하다 혼자 실연당한 태준호는 깊은 시름에 잠겼었다고 한다. 조증보다 심각할 만큼 말 많던 남자가 1시간 동안이나 비련의 주인공처 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관했었다.

   “다들 오해하고 계신데 저희 아직 그렇게 깊은 사이 아닙 니다. 제가 이래 봬도 꽤 고지식해서.”

   태성문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영애 양은 물론 아름답고 멋지지만,제가 아직 영애 4法을 잘 감당할수 있 는 그릇인지 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 주십시 오.”

   “아… 예,뭐…… 그런데 아직도 영애 양이라고 부르세요? 영애는 성문아,

성문아, 하던데.

   아무리 연애 초기라지만 연인 사이에 오가는 호칭으로는 좀 삭막한 게 아 닌가 싶었다. 그러자 태성문이 토라진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너라고 부를게,한마디 했다가바로 귀싸대기 맞았습니다. 아무리 연인 사 이가 되었다고 한들 어린놈이 맞먹으려고 든다고. ”

   “손이 아주매우시더군요.”

   짧은 순간 차가운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이승도와 송재희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역시 웃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무언으로 합의를 본 뒤,송재희가 얼른 말을 돌렸다.

   “우리 그만 내려가요. 지금쯤 준비 다 됐을 것 같은데. ”

   이승도는 냉큼 그래,하며 그녀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이어 진 계단 난간이 반짝반짝 점멸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함께 달려 있 는 꼬마전구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집안 곳곳엔 장식 품이 가득했다. 모두 아이들이 직접 달아놓은 것들이었다.

   분수대 옆에는 광장에나 있을 법한 대형 트리도 있었다. 원뿔 모양의 단순 한 모양이었지만,밤이 되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발산해서 꽤 장관을 연출했다. 정원의 헐벗은 나무들에도 예쁜 등이 걸려 있었다. 이 또한 아이들 의 작품이었다.

   정원을 지나 들어선 별채는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인 듯했다. 이번에도 파티 플래너를 자처한 신영애가 두 남자와 두 사내아이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신영애는 크리스마스답게 리본과 흰 털 장식이 달린 빨간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끈 나시 스타일의 옷이라 가슴골이 언뜻 드러나고 치마도 꽤 짧 았지만 이상하게 아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굉장히 섹시하고 아름다웠다.

   [트리!]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태은경이었다. 드레스는 질색하던 녀석이 산타 모자 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걸 보면 이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녀석이 흰 방

울을 달랑거리며 바짓단을 물고서 끌어당겼다. 이승도는 응,하며 따라가 주 었다.

   [별이 트리!]

   안내를 따라간 곳에는 미니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승도 자신의 무릎까 지도 오지 않는,작고 앙증맞은 크기였다. 귀여움에 하,숨을들이켠 이승도 는 쪼그리고 앉아 트리 꼭대기의 장식품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이거 별이야?”

   [별이! 별이 트리! ]

   언뜻 보면 고양인지 표범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 장식품이 었지만 상관없었 다. 올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 들고 오는 신영애가 이번에는 이 작은 아기에게 도 조그만 트리와 장식품들을 선물해 준 모양이 었다.

   “이모가 줬구나? 별이 거라고?”

   [응! 별이 트리.]

   “고맙습니다 했어?”

   [했어. 이케.]

   태은경은 배운 것을 잊지 않고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었다. 이승도는 잘했다 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한 손에 안아 들었다.

   “아빠는 어디에 있나?”

   구석에 있는 그가 보였지만 이승도는 모르는 척 물었다. 어떤 질문을 받아 서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을 태은경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 었다. 이번에도 녀 석은 신중하게 코를 쿵쿵거리며 둘러보더니 곧장 태국영이 있는 방향으로 앞 발을 뻗었다.

   [아빠 저기.]

   “오,저기 있었구나. 아빠 뭐 하고 있는지 가 보자. ”

   [별이 알아. 꽃 붙여.]

   이승도는 얼떨떨하게 눈을 키웠다. 놀지 말고 와서 도우라는 신영애의 말 에 군소리 없이 따라간 태국영과 남강우는 나란히 등을 보인 채 앉아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녀석의 말대로 둘은 정말 대형 가랜드에 꽃 을 붙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미 완성된 가랜드 하나와 리스 두 개 가놓여 있는 상태였다.

   “이쁘지? 애들이 온실에서 꽃 따오고,여기 남자들이 꽃잎 하나하나 수작업 으로 붙인 거야.”

   신영애는 팔짱을 낀 채 싱긋 웃었다.

   “야. 다음부터는 그냥 완제품을 사. 이게 무슨 짓이야. ”

   남강우가 찡그린 얼굴로 투덜거 렸다. 그 옆의 태국영은 그저 묵묵히 핀셋으 로 꽃잎을 집어 글루 건으로 붙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애들한테 어릴 때부터 이렇게 아빠가 직접 파티도 꾸며 주고 그러는 걸 보 여 줘야 되는 거야. 그래야사랑받는다는 느낌도 많이 받고 정신머리도 건강 하게 크지.”

   신영애의 말에 이승도는 크게 동의했다.

   “그건 그래. 뭐든 같이 하는 게 좋긴 하더라. 이경이 공부할 때 우리도 공부 하고,놀 때 같이 놀고 하니까 이경이도 아빠를 훨씬 친밀하게 느끼는 것 같 아.,,

   “그치? 역시 좋은 부모들은 뭘 안다니까. 태국영도 군소리 없이 0?무지게 잘하고 있는데 오빠 혼자만 꿍얼대고 있다구. ”

   남강우는 어처구니없다는듯 허, 웃더니 태국영을짧게 노려보았다. 저건 왜 안 어울리게 저렇게 열심인가 싶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국영은 여전히 주어진 일거리에 심취해 있었다.

   핀셋과 글루 건을 양손에 각각 든 그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흰 가운만 입 혀 놓으면 마치 대단한 연구에 골몰해 있는 과학자처럼 보일 법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랜드의 ‘Merry Chrisdnas’ 문구를 꽃잎으로 장식하고 있 는 것에 불과했다. 이승도는 그의 곁에 바싹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재밌어?”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들어

건넸다.

   “네가뜯어. 내가붙일게.”

   “응.같이해.”

   어 린 짐승은 물론 다 큰 짐승과도 잘 놀아주는 이승도는 선뜻 장미를 받아

들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때 마침 파티룸 구석에 놓아둔 요람 안 에서 남연주가 크게 울어서, 남강우는 아기를 돌본다는 핑계로 송재희와 얼 른 자리를 떴다.

   이승도는꽃잎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조심 떼어내며 제안했다.

   “국영아. 내년부터 애들 조형 미술 시작한다고 하던데,우리도 같이 배워 볼까?”

   “너 한다고 하면.”

   대답은 고민 없이 빨랐다. 역시나 뭔가 만드는 게 의외로 취미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도 같이 수업 듣자. 요즘처럼 시간 많을 때 그런 취미 하 나 배워두면 나쁠 거 없지. 나중에 우리 나이 들면 볕 좋은 날 테라스에서 나 란히 이젤 놓고 그림도 그리고,소소한 소품 같은 거 같이 만들 수도 있고. ”

   “좋지.”

   태국영은 달콤하게 눈가를 접으며 대답했다. 둘만의 여유롭고 평온한 미래 를 그리는 것은 늘 즐겁고 행복하다는 듯이.

   그가 뻠을 내밀었다. 시선은 여전히 가랜드에 고정한 채다. 이승도는 귀여 운 아기를 대하듯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승도야.”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이승도는 움찔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웠고 커튼

사이로 정원 등만 어슴푸레 들어오고 있었다. 이승도는 잠긴 목소리로 응? 하 며 잠 덜 깬 눈을들었다. 태국영이 짙은 어둠처럼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말 했다.

   “눈와. 엄청 많이.”

   이른새벽에 갑자기 깨워서 눈 소식을 전하니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태국영

이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굳이 저를 깨웠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었다. 이승도는 군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응. 많이 와?”

   “지금도 되게 많이 쌓였어.”

   태국영이 창가로 가 커튼을 반쯤 걷어냈다. 그의 뒤로 탐스러운 눈송이가 쉼 없이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이번 겨울을 처음 장식하는 함박눈이었다.

   “나가자.”

   그가 말했다. 이승도는 대답도 듣지 않고 손부터 내미는 그를 따라 얼떨결 에 방을 나섰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도중 먹먹했던 머리가 차츰 맑아졌다. 그리고 그가 서랍장에서 안전띠를 꺼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승도는 잠시 떠 올리지 못하고 있던 것을 되찾았다.

   「여기 눈 많이 오면 더 예쁘대. 나중에 눈 펑펑 오는 날 다시 오자.」

   거대하고 아름다웠던 짐승이 선산의 정상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가 장담했던 대로 노을 젖은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지만,이승 도의 눈에는 제게 등을 내준 그 짐승이 몇 배는 더 아름답게 들어왔던 날이었 다.

   이승도는 무릎까지 오는 패딩 점퍼에 모자와장갑까지 완전무장?을 했다. 그 에 비해 태국영은 청바지에 셔츠,라이더 재킷의 가벼운차림이었다. 그는돌 아올 때 입을옷들만 간단히 챙겨 넣은 가방을 멨고,주방으로 가간식거리도 챙겼다.

   “가는 길에 휴게소 들러서 우동 먹을래? ”

   운전석에 앉은 그가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따뜻한 국물 좋지.”

   이승도는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동이 트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시동 버튼 을 누른 태국영은 예열 없이 곧장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돌렸다. 끼이이익,타 이어가 길게 마찰하며 주차장에 가득 고인 정적을 부쉈다.

   “좀 더 자 둬. 휴게소 들어가면서 깨워줄게. ”

   “괜찮아. 잠이야 갔다 와서 자도 되고, 설레서 잠 다 깼어. 운전하는 거 심 심할 텐데 말동무나 해 주지 뭐. ”

   “좋을대로.”

   태국영은 느리게 차를 몰았다. 금세 새하얗게 뒤덮이는 전면유리를 와이퍼 가 열심히 밀어냈다. 이승도는 온장고에서 챙겨온 율무차를 마시며 창밖을 구 경했다.

   무르익은새벽에도 도로는 행인들이 제법 있었다. 우산도 없이 함께 눈을 맞으며 길을 지나는 젊은 커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젊은게 좋긴 좋네.”

   무심코중얼거린 말에 태국영이 피식 웃었다.

   “너도 회춘했잖아. 별이 덕에.”

   “몸은 젊어졌는데 마인드는 여전히 노땅인가 봐. 눈이고 비고 안에서 보는 게 제일 좋은 걸 보면. ”

   그 말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가 아,했다.

   “임시 오두막 하나 지어 둔다고 했잖아. 그거 건설 다 끝났대. 기본 집기들 은 채워 놨다고 하니까 불 피워 두고 잠깐 안에서 구경하고 가든지. ”

   “아,그거 벌써다됐어?”

   “응. 어차피 부술 거니까작게 지었거든.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

   “좋다. 그럼 들렀다 가자. 따뜻한 차 많이 챙겨오길 잘했네. ”

   첫 소풍 때 텐트를 쳤던 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그보다 작은 공터가 하 나 더 있었다. 과거에 별장이 있었다던 자리 였다. 그곳을 보자마자 이승도는 아예 여기에 텃밭을 따로 만들고 아래쪽 큰 공터에는 주거 공간을 더 여유롭 게 짓자고 말했었다. 태국영은 물론 그때도 좋을 대로 하라고 답했다. 그리고 앞으로 종종 놀러 올 것을 대비해서 그 작은 공터에 임시 오두막을 하나 지 어 두기로 했었다.

   황량했던 터에 오도카니 자리를잡았다는 나무집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 했다. 설렘을 동반한 궁금증이 었다. 태국영 그 자신은 아무렇게나 훌렁훌렁

벗고 다니며 주변을 너저분하게 만들기 일쑤였지만 제가 머무는 공간에는 꽤 엄격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나무만 엮은 집 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을 거 였다.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오자 눈발이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아침나절 중으로 그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 로산길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거의 가루처럼 흩날리기만 했다. 나무 위에 얹 힌 눈들이 바람을 타고 은하수처 럼 흘렀다.

   태국영은 산길을 올라 오두막으로 차를 몰았다. 첫 소풍 이후 차가 올라갈 수 있게 완만한 경사로 길을 다져놨더 니 이동이 훨씬 편해졌다. 물론 저 혼자 서야 그냥 초입에 차를 세워두고 훌쩍훌쩍 뛰어 올라가는 것이 더 빠르겠지 만 말이다.

   “와아……진짜 예쁘네.”

   보조석에서 내린 이승도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작긴 뭐가작아. 엄청 큰데.”

   아담한 오두막 두 개가 짧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연결이 되어 있었다. 하얗 게 머리가 센 세모꼴 지붕 아래는 다락방처 럼 보이는 작은 창이 있었고,그 아 래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이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응. 밤에 불 환하게 밝혀두면 훨씬 운치 있을 것 같아. ”

   “지금도 어두운데 뭘. 기다려 봐. 안에 들어가서 난방이랑 조명 켜놓고 나 올게. 안에 궁금하면 너도 같이 들어가서 구경해도 되고. ”

   이승도는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집 구경은 이따가 동트는 거 보고 나서. ”

   “그래.”

   태국영은 짐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컴컴했던 창이 따뜻한 빛깔 로 환해졌다. 창문뿐만이 아니라 처마 아래에도 전구를 달아 놓았는지 지붕에 도 불이 들어왔다. 마치 어릴 적 급우들과주고받았던 크리스마스카드에 담 겨 있던 그림처 럼 아름다운 풍경이 었다.

   태국영은 변이를 끝낸 상태로 안전띠를 물고 나왔다. 그가 지나온 소복한 눈 바닥 위로 커다란 발자국이 힘 있게 찍혔다.

   이승도는 그가 건네는 안전띠를 받아 들고 그의 머 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낮 게 고개를 숙인 그의 눈시울이 기분 좋게 가늘어졌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 고 편안해진 모습이 었다.

   [단단히 매.]

   그는 늘 했던 경고를 이번에도 잊지 않았다. 이승도는 능숙함을 뽐내며 그 의 몸에 띠를 둘러 고정하고 폭신한 안장도 꽉 조여 떴다. 그리고 몸을 낮춰주 는 그의 등에 올라 본인의 허리와 허벅지에도 띠를 둘러 단단히 동여맸다.

   [간다.]

   W ? ”

   ■?*.

   이승도는 그의 등에 바짝 엎드렸다. 그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 갔다. 눈길이라 그런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여유를 두고 산을 올랐다.

   가느다란 눈발은 정상에 올랐을 때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안전장치를 풀 고 내려온 이승도는 지난번 나무에 묶어두고 간 커다란 짐 가방을 가져왔다. 종종 있을 야영을 위해 접이식 매트와 도톰한 담요까지 방수 자루에 넣어 뒀 더니 짐이 줄어서 오가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

   바닥에 매트를 깔자 태국영이 그 위로 올라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이승도 는 패딩 점퍼를 벗어서 자루에 넣어두고, 그의 배와 옆구리 쪽에 등을 딱 붙이 고 누워서 담요를 덮었다. 그의 몸이 원체 뜨끈뜨끈해서 그렇게만 해도 딱히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앞발을 베고 있는 얼굴은 태국영이 간간이 턱 아래로 쓸어주며 따끈한 체온을 전해 주었다.

   동이 튼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새카떴던 하늘에 점점 희뿌옇게 여명 이 번지고, 곧 붉은 띠가 먼 곳의 낮은산등성이를 뒤덮었다. 다채로운 붉은 빛이 농도 다른 빛깔로 멀리멀리 뻗어 나갔다.

   일출을 가리는 고층빌딩 이 없어 눈이 시 원했다. 도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눈 쌓인 허름한 집들과 작물 없는 농 경지를 붉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아아아.

   느린 바람이 불어와 눈가루가 허공을 날았다. 그 작은 결정들도 금빛을 머

금고 반짝거렸다.

   “이십 년쯤 뒤에는 저 풍경도 변해 있겠지? ”

   따뜻한 온기에 휘감긴 채 느긋이 먼 곳을 바라보던 이승도가 문득 입을 열 어 물었다. 태국영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곳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고 밤에는 네온사인이 반짝이게 될 날 이 올지도 몰랐다. 현재는 절대농지로 묶여 있는 땅이 많지만 이 인근에도 언 제 신도시가생길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저 한산한농경지들은 모두 투기 지 역이 되어 들썩이게 될 거였다.

   “좀아깝네. 이렇게 예쁜데.”

   이승도는 완전히 몸을 돌려 그를 크게 끌어안았다.

   “그래도 괜찮아. 무엇을 보느냐보다 누구랑 보느냐가 더 중요한 거니까. ” 태국영은 모로 누우며 이승도를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왔다. 웃음기를 띠고서 빤히 올려다보는눈동자 안에 거친 짐승의 눈알이 비쳤다. 원초적 야 만성을 내면 깊숙한곳에 은닉해 둔 짐승이었다.

   “우리 국영이는 아직 한참 젊으니까 향후 사십 년 정도는 오늘처럼 너끈히 날 등에 태우고 올라오겠지? ”

   [낌이지.]

   “그래. 년 괜찮겠지만 내가 걱정이다. 사십 년 뒤면 나는 완전 할아버지가 돼 있을 텐데. 얼굴에 주름도 많이 지고 손등에는 검버섯도 피어 있겠지. ” [산책하듯이 살살 걸어서 오가면 돼. 그리고 넌 할아버지가 돼도 고울 거야. 아무리 늙어도 지금처럼 예뻐해 줄 테니까 걱정 마. ]

   이승도는 어이 없다는 듯 짧게 실소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 어차피 수십 년 된 부부는 의리로산다더라. ”

   [끈기 없는 인간 놈들이나 그렇지. ]

   “…저기요,나도그인간놈중하나랍니다. ”

   [그럼 넌의리로살던지.]

   의리건 사랑이건 같이 살아 준다면 마다할 거 있나.

   태국영은 태평하게 생각했다. 물론 백발 할아버지를 상대로 툭하면 권태기 냐며 투덜거릴 미래의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채로 말이다.

   대보름 이틀 전부터 저택에는 전시처럼 긴장감이 돌았다. 저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의외로 고용인들에게 너그럽게 굴던 태국영이 내내 날이 서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릇 하나 잘못 깼다가 고용인 한 명이 불벼락을 맞고 별채로 쫓겨난 이후 다들 발소리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꽤 안전지대에 있는 유모조차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완전한 안전지 대에 있는 이승도도 죽을 맛이 었다. 다들 조마조마하게 눈치 를 살피는 게 너무 빤히 보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디 보자. 우리 국영이 또 열나네. ”

   그래서 이승도는 까탈스런 아기를 돌보듯 열심히 태국영의 수발을 들었다. 똑같이 예민해져 있는 태은경을 가슴 띠로 둘러맨 채다. 태국영은 얼음을 가 득 채운 욕조에 아예 들어앉아 있었다. 이마를 더듬는 손길에 가는 눈을 한 그 가 곁눈질로 옆 탕을 노려보며 중얼거 렸다.

   “아…… 저 새끼는 도대체 얼마나 쳐 크려고 저 지랄이야. ”

   아이들 앞에서 험한 말을 하면 항상 주의를 줬었지만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성질머리에 여은태를 담장 밖으로 안 던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 이 참고 있는 거 였다.

   [내가 뭐 이러고 싶어서 이래?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안 되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따가운 눈초리를 받은 여은태도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녀석 역시 일찌감

치 변이를 해서 얼음물에 들어가 있는상태였다.

   “둘다 쉬. 싸우지 마.”

   또 싸움으로 번질 기세에 이승도가 점잖게 끼어들어 말렸다. 그러나 신경 이 곤두서 있는 둘은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 렸다.

   [어린애가 많이 클 거 같으면 좀 칭찬도 해 주고 그럴 것이지. 어른이 돼서 그게 할 소리냐? 자기한테 영향 준다고 계속 구박이나 하고 말이야. 진짜 서 러워서 원.]

   “더부살이하는 처지에 민폐까지 끼치고 있으면서 서러울 게 뭐냐. ”

   [난 선생님 따라온 거야! 선생님이 날 키워주기로 했으니까! 이럴 거면 뭐 하러 나까지 데려왔어? 그냥 그때 버리지! ]

   “승도 아니었으면 진즉 버렸다. ”

   [아 씨. 나 진짜 집 나간다! ]

   “나가. 누가 말려?”

   허리에 양손을 짚고서 돌아가는 꼬라지를 빤히 주시하던 이승도도 결국 터 졌다.

   “이 자식들, 둘 다 조용히 못 해? !”

   울화섞인 고함은 욕조 안에서 유독 쩌렁쩌렁 울렸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쌈박질을 하던 둘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여은태와 한 탕에 앉 아 있던 태이경도 숨죽인 채 눈만 낌뻑였다.

   이승도는 울분이 올라 귀까지 벌게져 있었다. 그 상태로 정말 미친 듯이 화 를 냈다.

“아프다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너희들은 내 말이 우스워? 도대체 오늘만 몇 번째야! 너희들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나는 안 보

여?”

   오죽하면 밥 먹을 때도 싸워서 먹은 게 다 체했다. 아기 상태가 제일 심각 했기에 아기는 계속 윗옷을 벗은 채로 안고 있어야 했고,태이경도 시름시름 앓는 상태라 수시로 업어 줘야 했다.

   그 와중에도 이놈 달래랴 저놈 달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땀 없는 체질인데도 체력이 부치니 계속 식은땀이 났고, 찜찜해서 씻고 싶은데 툭하

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이니 맘 편히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아픈투정도 적당히들 해야지. 내가 너희들처럼 체력이 남아도는줄알아?

   태국영과 여은태는 입이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나 저렇게 머 리끝까지 화가 난 이승도를 처음 본 여은태는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 쩔 줄을 몰라 했다.

   “태국영 너,애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시비를 걸어? 내가 키워주는 애가 꼴 보기 싫으면 그냥 나를 내쫓아. 왜 눈칫밥 먹고 사는 애를 서럽게 만들어?”

   “…야, 말이 그렇단 거지. 내가 뭐 진짜로……. ”

   “닥쳐.”

   이승도는 싸늘하게 말허리를 씹어 먹었다. 태국영은 찍 입을 다물며 고개 를 꾸벅 숙였다.

   “은태 너도 그래. 국영이가 시비 걸면 기다렸다는 듯족족 다 받아쳐 가면 서 왜 싸우고 있어. 너 그거 즐기니? 아프고 짜증 나니까그거로 스트레스 푸 는 거야? 중간에서 매번 땀 빼면서 말리는 나는 보이지도 않고? ”

   […미안, 선생님. 내가 잘못했어.]

   여은태는 현명하게 변명을 빼고 사과만 했다. 이승도는 끓는 한숨을 지으 며 이마를 쓸어내렸다.

   “경고하는데,한 번만 더 싸우면 너희 둘 다 버리고 내가 이 집을 나갈 거 야. 그렇게들알아.”

   이승도는 찬바람을 쌩 날리며 욕실을 나왔다. 우선 화를 식히고 열도 식혀 야 했지만,일단땀이 뒤엉켜 있는몸부터 좀 씻어야할 것 같았다. 여기저기 죄 끈적여서 불쾌지수가 말도 못했다. 그래서 더 화를 못 참은 걸지도 몰랐다.

   다른 욕실로 간 이승도는 하의를 벗고 가슴 띠도 풀어냈다. 그리고 놀란 듯 이 계속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던 태은경을 내려두며 다정하게 일렀다.

   “잠깐이면 돼. 씻고 다시 안아 줄게. ”

   [으응.]

   태은경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도 샤워 부스까지 졸졸 따라왔다. 이승도는 녀 석을 그냥 내버려 두고 레버를 올렸다. 천장에서 미지근한 물이 시원하게 쏟

아졌다.

   세수를 하고,머리를 감고, 몸까지 깨끗이 씻어낸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나와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래 자리를 비울 생각은 없 었다.

   둘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저뿐이 었으니까.

   그 생각이 들자 뒤늦게 조금 미안해졌다. 제가 아무리 체력이 달린다 한들 수시로 고통스러운 몸뚱이를 계속 감내해야 하는 둘보다는 덜 괴로울 텐데.

   이승도는 부스 밖으로 나와 빠르게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도 대강 털어내기 만 하고 바로 욕실을 나왔다. 가슴 끈으로 다시 안은 태은경 이 앞발을 꼼지락 거리다가 빠끔 입을 벌렸다.

   [별이 안싸워.]

   이승도는 그제야 맥 풀린 미소를 지었다.

   “응. 별이 착하네. 이제 화 안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지?”

   [정말?]

   “정말.”

속?]

   어지간히 겁을 먹 었던 모양이 었다. 태은경은 앞발로 가슴을 톡톡 치면서 굳 은 약속의 증거를 바라고 있었다. 미안한 맘이 더 짙어졌다. 이 어린애까지 중 간에서 눈치를 보게 만든 스스로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승도는 녀석의 발가 락 사이에 새끼손가락을 살짝 끼워 넣고 살살 흔들어 주었다.

   “응.약속. 화내서 미안.”

   [별이 괜찮아.]

   “다 컸네,우리 별이.”

   이승도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결전의 욕실 문을 열었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수시로 얼음을 채워 주기 위해 대기해 있는 고용인 둘이 반갑게 눈 으로만 인사했다. 어지간히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승도는 안으로 들어가 여은태의 정수리부터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느 낌이 데일 듯 뜨겁고 축축했다. 열을 재워 주고 태국영의 이마도 마찬가지로 한 차례 보듬어준 뒤 의자에 앉았다.

   “한숨자고 와.”

   태국영이 넌지시 건넨 말에 이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누우면 못 일어나. 느낌이 그래.”

   [못 일어나도 괜찮으니까 좀 자,선생님. 아프면 알아서 선생님한테 가서 몸 비비다가 다시 오고 그럼 되니까. 그러다 진짜 쓰러지겠어. ]

   “이따 재희 온다니까 그때 잠깐 잘게. ”

   일찍이 참사가 찾아온 저택의 소식을 전해 들은 송재희는 지금 한참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을 시각이었다. 하필이면 인계를끝낸 전 대 남 가의 가주가 오늘 지방으로 이주를 하는 날이라 마지막으로 배웅을 간 것이었다. 도착해 서 식사만 함께하고 곧장 올라온다고 했으니,대략 네다섯 시간은 걸리지 않 을까 싶었다.

   몸이 열 개는 아니어도 딱 두 개로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양쪽에 둘씩 넉넉하게 끼고서 모두가 행복할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태은경이 태 어나기 전까지 셋은 어찌저찌 커버를 했는데, 작은 녀석 하나가 더 늘었다고 이 렇게나 차이가 컸다.

   이걸 혼자서 해 보겠다고 송재희의 도움을 마다하려 했던 스스로를 생각하 면 등골이 서늘했다. 아마 홀로 버티다가 결국 전화를 걸어서 제발 도와달라 고 꼴사나운 부탁을 했을 거 였다.

   게다가 아직 이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대망의 디데이는 아직 이틀이나 남았 다. 이승도는 가슴 깊은 곳에서 긴 한숨을 끌어올렸다.

   송재희가 도착한 건 그로부터 세 시간 후였다. 예상보다 이른 등장에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이승도는 눈물마저 핑 돌았다. 남연주를 안고 온 송재희도 오

빠 얼굴이 반쪽이 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라고,괜찮다고, 이제라도 왔으 니 됐다고 대답하며 가볍게 포옹하자 그녀는 눈물을 찔끔 보였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들 하시나. ”

   아직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남강우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꾸할 기력도 없었던 이승도는 얼른 앞장서서 아기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요람에 태은경을 내려두며 물었다.

   “별이. 연주 언니랑둘이 잠깐까꿍 하고 있을 수 있지? ”

   [응. 까꿍. 별이 좋아.]

   송재희도 ‘딸,별이 잘 부탁해. ’ 하며 남연주를 그 안에 두었다. 태은경이 바 짝 세운 꼬리를 팍팍 흔들며 남연주의 가슴에 머리를 통통 부딪쳐 인사했다.

   [언니 까꿍.]

   “벼리 까꿍.,,

   남연주는 이번에도 의젓하게 앉아 태은경을 아무지게 쓰다듬어 주었다. 달 이 차는 시기가 되면 이승도의 곁에 딱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태은경도 남연 주의 다리 위에서 동그마니 몸을 말고 고롱고롱 목을 울렸다. 작은 몸에는 그 무게도 조금 불편할 법도 한데 불평 한 번 없는 것도 참 신기했다. 송재희도 그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팔불출처 럼 헤벌쭉 웃었다.

   “연주 되게 기특하지 않아요? 쬐끄만 주제에 그래도 등대라고 별이 잘 보 는거보면. 어구,착하다.”

   “그러게. 연주가 늘 별이랑 잘 놀아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

   “또래 친구라고는 별이 하나라 더 애착이 가나 봐요. 요즘은 한 일주일만 지나도 별이네 집 놀러 가자고 떼를쓴다니까요. 오늘도 별이 보러 간다니까 애가 내내 차 안에서 궁둥이를 썰룩썰룩. 어찌나 좋아하던지. ”

   “별이도 오늘 연주 언니 온다니까 되게 좋아했어. ”

   아기 둘이 뒤 엉 켜 노는 것을 잠시간 바라보다 방에서 나왔다. 아마 한 시 간 정도는 요람 안에 있는 장난감들로 잘 놀 테니 큰 걱정 하나는 덜었다.

   이승도는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장소로 송재희를 안내했다. 태국영과 여은

태가 얼음물에 틀어박혀 있는 그 욕실이었다.

   “어우. 냄새 진짜 진하네요.”

   송재희는 안에 들어서자마자콧등을 껑그리며 중얼거렸다. 욕탕 턱에 뒷머 리를 기대고 있던 태국영이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코끝만 수면 밖으로 삐죽 내밀고 있던 여은태도 스윽 머리를세우더니 앞발을흔들어 보였다.

   [누나 안녕.]

   “응,안녕.”

   “안녕,누나. 연주는 별이랑 있어요? ”

   태이경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응. 연주한테 별이 맡겨놓고 왔어. 이경이 너는좀 괜찮아? ”

   “저야 뭐 참을 만해요. 형아랑 아빠가 걱정이죠. ”

   송재희는 다가가서 여은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대강 들었어. 너 오빠랑 엄청 싸웠다며? ”

   [???지금은 안싸워.]

   여은태는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며 이승도의 눈치를 살폈다. 태국영이 나 저나 아까 왕창 깨진 이후로는 싸움은커녕 말 한마디 안 섞고 있는 상태였 다.

   [누나. 정말 정말 미안한데 선생님 조금 자고 오라고 하면 안 될까? ]

   “아,그래. 오빠 좀 쉬다가 오세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 ”

   이승도는 송재희가 건넨 선의를 염치 불고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빈말이 라도 거절하기에는 심신이 너무 지쳤다.

   “응.정말딱한시간만눈좀붙이고올게. ”

   “두 시간도 괜찮아요.”

   “고마워.”

   이승도는 태국영의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부드럽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얌전히 있어. 금방올게.”

   “푹 쉬다 와.”

   태국영과 아이들의 이마에 차례로 입맞춤을 해준 뒤 욕탕에서 나왔다. 대 강 물로 몸을 씻어낸 이승도는 운동복 바지만 입고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탄

력 있는 매트리스가 그 어느 때보다 물컹하게 육신을 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승도는 10초도 안 되어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남연주와 놀던 태은경이 배가 고파지자 곁에 와서 알짱거 렸다는데, 잠귀가 예민한 편임에도 이승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송재희가 빠르게 달려와서 아기 를 안고 나가는 소리도 마찬가지도 듣지 못했다. 어지간히 기절 수준의 숙면 이었다.

   잠에서 깬 것은 해가 완전히 넘어가서 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렸을 때였다. 이승도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벌떡 몸을 세웠다. 황급히 벽시계를 올려다보 자 벌써 세 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다.

   “아,미쳐.”

   이승도는 사이드테이블에 개켜 있는 셔츠를 입으며 단번에 침대 밖으로 튀 어 나갔다. 다급한 맘에 벌컥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승도는 멍하니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아,오빠 깨셨어요? 더 주무셔도 되는데. ”

   욕실의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구도는 같은데 탕 사이에 못 보던 접이식 간 이침대가자리해 있었다. 송재희는 그 접이식 침대에 엎드려서 과자를까먹 고 있었다.

   왜 저 생각을못했을까,이승도는어이없는맘으로한탄하며 뒤늦게 더듬 더듬 대답했다.

   “어,그래.…별일 없었고?”

   “네. 자꾸 내려가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들어서 아프면 알아서 오라고 했더 니 좀 편해졌어요. 이거 강우 오빠가 바로 나가서 사다준 침댄데,탕사이에 딱 맞게 들어가는 게 진짜 좋아요. 국영 오빠가 오면 저기로 뒹굴, 은태나 이 경이가 오면 저기로 뒹굴, 이러니까 일어설 일도 없구. ”

   완전 대박 아이템을 건졌다면서, 송재희는 엄지를 치켜들고 싱글싱글 웃었 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친구를잘사귀어야 된다는말이 있는모양이었다. 몸 과 마음이 편해지고 신영애의 대범함까지 야금야금 배워가는 모습을 보니 기 쁘고 대견했다.

   “너도 이제 가서 좀 쉬어. 이 셋은 이제 내가 맡을게. ”

   “그 전에 오빠 식사부터 하셔야 되지 않아요? 저녁도 안 먹고 쭉 잤는데. ”

   아,그랬다. 그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점심은 체하고 저녁 은 거른 채로 잠만 잤다. 곧 재개될 고된 노동을 견디려면 일단 뭐라도 좀 먹 고 기운을 차려야 했다.

   “너희들은 식사다 했고?”

   “이미 한상가득다 먹었어. 너 다녀와. 또체하지 말고천천히 꼭꼭씹어 먹고.”

   태국영이 당부하듯 말했다. 송재희는 안타깝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휴. 체하셨구나. 어쩐지 유모님이 오빠깨면 준다고 열심히 죽 쒀 놓으 시던데. 어서 내려가 보세요.”

   “응. 다녀올게.”

   이승도는 1층으로 내려가 유모를 찾았다. 제가 깼다는 소식을 미 리 전해 들 은 유모는 한창 주방에서 죽을 데우고 있었다. 식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평소와 달리 소박한 식사가 올라왔다. 전복과 채소를 듬룩 넣은 보앙죽과 단 호박 찜,심심한 누룽지탕이 전부였다.

   얹히지 않게 천천히 식사를 했고 후식으로는 배를 끓여서 우려낸 차도 마 셨다. 위에 부담이 없는 것들만 먹어서인지 아까처럼 더부룩한불쾌감은 느껴 지지 않았다.

   이승도는 양치와 세면을 하고 도로 올라갔다. 그러나 욕실은 벌써 정리되 고 있는 참이 었다. 파우더 룸에서 막 물기를 닦고 나온 태국영이 간단히 상황 을 설명해주었다.

   “다들 패밀리 침대로 갔어. 재희 왔으니까 편하게 누워서 분담해. ”

   “아……그렇지.”

   이제 손이 많아졌으니 더 이상 욕실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거였다. 피로 때 문에 그런 간단한 논리적 사고도 하지 못한 스스로가 조금 어 이 없었다. 태국 영이 가까이에서 내 려다보며 두 손으로 머 리를 숙숙 문질러 왔다.

   “맘마꼭꼭씹어서 잘먹었어?

   다정한 스킨십에 어깨가 하늘하늘 녹아내렸다.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에 짧게 이마를 붙였다 떼었다.

   “응. 유모가 속 편한 음식들로만 준비해 줘서. 깨끗이 다 먹고 왔어. ”

   “잘했어. 어부바해줄까?”

   지나치게 달콤하게 구는 것이, 아까 일로 여간 미안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나 이제 화 다 풀렸으니까 그만하고, 일단 가자. 다들 기다릴 텐데. ”

   태국영이 어깨를 감싸 왔다. 이승도는 그의 허리에 한 팔을 감아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재희한테 고마워서 뭐라도 보답해 주고 싶은데, 좋은 거 없을까? ”

   “재희 반짝이는 거 좋아하잖아. ”

   “아,보석. 그래,예전에 은태랑 이경이 브로치 보고눈이 반짝반짝했었지. ”

   “곧 결혼도 할 테니까 티아라나 하나 해 주지, 뭐. ”

   좋은 아이디어였다. 이승도는 다들 모여 있는 방으로 가서 송재희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남강우에게 등허리를 지압 받고 있던 송재희는 벌떡 일 어 나 고개를 끄덕 였다.

   “티아라좋아요! 다음 주에 드레스 고르기로 했는데 그때 사진 찍어서 보 내 드릴게요.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걸로. 예쁜 걸로! ”

   될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괜한 고생을 떠맡겼다는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승도는 송재희와 조금 거리를 두며 모로 누웠다. 태국 영이 등 뒤로,여은태가 앞으로 와 몸을 찰싹 붙였다. 여즉 남연주와 잘 놀던 태은경까지 여은태의 몸 위로 올라와 바짝 달라붙었다.

   “이경이는 연주가 맡는 거야? ”

   이승도는 웃으며 물었다. 남연주를 둥개둥개 얼려주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 던 태이경이 싱긋 웃었다.

   “연주 재워줄 겸해서요.”

   아기 등대까지 힘을 합쳐주니 이렇게 안정적일 수가 없었다. 매년 이 정도 만 돼도 정말 살 것 같았다. 이승도는 상태가 가장 안 좋은 여은태의 머리와

배를 계속 쓰다듬어주었고, 송재희도 간간이 녀석의 네 발을 주무르며 보듬어 주었다.

   “은태 참 예쁘다. 성년식까지 치르고 나면 얼마나 멋져질지 벌써부터 궁금 하네.”

   송재희는손안에서 매끄럽게 흐르는 털을 신기한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빛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도 그렇고,커다래도 둔해 보이지 않는 몸 도 그렇고, 어디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다 선생님 이랑 누나 덕분이지 뭐. 선생님 만나기 전까지는 뼈가 드러날 정 도로 비쩍 마르고 털도 핏물에 엉겨있어서 되게 꼬질꼬질했거든. 관절도 다 뒤틀려 있었고. 선생님 잘 만나서 미운 오리가 백조 됐지. ]

   “그래. 늦게라도 오빠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많이 많이 커. 오빠랑 누나가 열심히 응원해 줄게.”

   [응. 고마워,누나.]

   “고마우면 나중에 강우 오빠랑 국영 오빠 모두 은퇴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뒤에 연주좀잘돌봐 줘. ”

   송재희가 내비친 사심도 내비친 사심에 여은태는 크게 고개를 끄덕 였다.

   [당연하지. 내가 선생님이랑누나한테 은혜 입은 게 얼만데. 연주랑 이경이 는 내가무슨 일이 있어도 눈에 불을 켜고 지켜줄 거야. 선생님이나 누나나 또 아기 낳으면 그 애들도 내가 다 지 켜줄게. 그건 걱정 마. ]

   “응. 완전 든든하다.”

   여은태는 눈가를 곱게 접었다. 눈시울에 촘촘히 박힌 은빛 속눈썹이 눈동자 를거의다 덮었다.

   [그리고 별이도 있잖아. 누가 연주 괴롭히면 별이가 가만 안 놔둘걸?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별이가 아주 혼줄을 내줄 거야. ]

   “그러네. 은태도 있고 별이도 있고,이경이까지 있는데 누나가 괜한 걱정 을 했네.”

   [응응.]

   물론 송재희는 이 아이들이 커서 어련히 잘할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늘 깔려 있는 불안감을 완벽하게 멸칠 수가 없 었다. 오늘 시아버지를 지방까지 배웅한 뒤라서 더더욱 그랬다.

   겁이 났다,막연히.

   송재희 자신의 참혹했던 과거가, 등대라는 남연주의 정체성이 혹 남연주에 게 어느 날 칼이 되어 꽂히지 않을까 하는. 지금은 태국영과 남강우가 두려워 서 쥐새끼들처럼 숨어 있는 잔악한 씨들이 먼 훗날 그 본색을 드러내 아기를 상처 입히지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의지 강한 여은태의 곧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걱정들이 정말 봄날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싸우기도 하고,삐치기도 하 고,잠깐 관계들이 소원해질 수도 있겠지만 여은태는 아이들의 중간에서 구심 점을 잘 잡아줄 거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이 런. 오빠 또 잠들었나봐. 은태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한숨 자. ”

   송재희가 작게 속삭였다. 어찐지 배를 쓰다듬어주던 손이 오래 멈춰 있다 했다. 여은태는 힐긋 뒤를 돌아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나 잠귀가 밝 은 사람이 바로 앞에서 떠드는데도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만큼 심 신이 지쳐 있었다는 증거 였다.

   이승도에게 팔베개를 해준 태국영도, 제 몸 위에서 이승도에게 찰싹붙어있 는 태은경도 모두 꿈나라로 떠났다. 등대 둘 사이에 행복하게 끼어 있는 여은 태도 눈을 감았다. 여은태에게도 오늘은 고단한 하루였다. 안락하고 평온한 잠이 급격하게 몸을 덮어왔다.

   자정이 지나자 진동이 느껴졌다. 송재희가 남강우와 함께 다른 방으로 데려 간 여은태가 자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자해를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정월 대 보름의 악몽 같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승도는 태은경을 한시도 품에서 떼 놓지 않았지만 녀석은 내리 고열에

시달리며 할딱였다. 이 녀석도 많이 크려고 그러는 거라고,태국영이 위로 아 닌 위로를 했다.

   클 때마다 이렇게 아프다면 조금 덜 커도 좋으련만.

   “아빠는 괜찮아요?”

   태이경이 걱정스럽게 얼굴을 흐리며 물었다. 이승도를 뒤에서 끌어안고 지 그시 눈을 감고 있는 태국영이 웅얼대듯 대답했다.

   “별로 ”

   “아빠나 형아나슈퍼문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처럼 이렇게 아프 지도 않구.”

   대보름 때만큼은 태이경도 슈퍼문을 맞아 왔다. 작년에는 이승도를 믿고서 건너뛰었지만 올해는 다들 상태가 심각해서 자진해서 팔을 걷어붙였다. 단지 거북하다는 이유만으로 저까지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 었다.

   “참을 만해. 꼬맹이한테 동정 받을 정도는 아니야. ”

   태국영은 축축한이마를 쓸어내리려다 멈칫했다. 이승도가 먼저 정성스럽 게 땀을 흠쳐갔기 때문이었다. 청량하고 시원한 느낌이 신경 줄을 뒤흔들었 다. 긴 날숨을 뱉어내는 태국영에게 이승도는 뺨을 맞대며 혼잣말처럼 물었 다.

   “감기몸살 같은 느낌일까.”

   태국영이나 여은태가 어떤 식으로 아픈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스스로가 가끔 싫었다. 한 번이라도 그 고통을 가져와 제 몸에 뿌려보고 싶었다. 호기심 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더 깊이 공감해 주고 더 깊이 안아주고 싶은 마 음에서 였다.

   “인간으로살아본 적이 없어서 비교는잘못 하겠지만, 아마독감, 몸살,관 절염 정도가 한 번에 온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데. ”

   “???지독하네.”

   “지독하지. 그래도 난 성장이 멈췄으니까 성장통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성장통은 어떤 느낌이야?

   “초강력 탈수기에 맨몸뚱이로 들어간 느낌? ”

   온몸이 쥐어 짜이고 관절이 뒤틀린다.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피 한 방울 까지 다 모공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느낌도 있었던 듯했다.

   정확히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당시에는 영겁처럼 느껴져서 영원히 기억에 사무칠 줄 알았는데 벌써 가물가물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몇 해 전 이야기에 불과한데도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태국영은 제가 스스로 뜯 어내지 않았음에도 죽은 피부 조직처럼 탈락해 버린 그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아빠아…….]

   태은경이 잠꼬대처럼 태국영을 불렀다. 보통 녀석이 찾거나 부르는 건 이승 도지, 제가 아니 었다. 좀체 없는 일에 태국영은 매트리스를 팔꿈치로 짚고 상 체만 일으켜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왜,마.”

   하지만 녀석은 불러 놓고 말이 없었다. 그저 힘없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올 려다보다가 다시 이승도의 품에 머리를 박았다.

   [엄마아. 별이 아파?]

   “그래,별이 많이 아프지. 조금만 참자.”

   [아니이…….]

   녀석이 느리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숙여 아기와 눈을 맞추었 다. 제가 더 세심하게 귀 기울여주어야 할 다른 의미가 있는지 찾고 싶어서다.

   [별이 달라. 은태 오빠달라. 어…… 그리고, 그러나? 아니이…… 그런데? 응,그런데. 아파?]

   아직 접속사가많이 햇갈리는 녀석이 횡설수설했다. 곁에 앉아서 함께 듣 고 있던 태이경이 주먹을 다른손에 탁 치며 말했다.

   “별이가 다르게 생겨서 많이 아픈 거냐고 묻는 것 같아요. 다르게 생긴 은 태 형아도 많이 아파하니깐. ”

   “아아. 그런 질문이었구나.”

   이승도는 고개를 주억이며 작게 웃어 보였다.

   “아까 아빠가 말했지? 많이 많이 크려고 많이 아픈 거래. 우리 별이가 나

나 이경이처럼 생기지 않아서가아니라. 一아참. 우리 별이,아빠 변이한 거 몇 번 봤지? 아빠도 다르게 생겼지만 지금은 참을 만하다고 하네. 우리 별이 도 아빠만큼 다 크면 안 아프게 될 거야. ”

   [다 크면?]

   “응.다 크면.”

   할딱할딱움직이는 배를 정성스레 쓰다듬어 주며 차분하게 대답해 주니 녀 석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것 같았다. 그때 태국영이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어 리둥절한 시선들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위로 쭉 펴 며 뻣뻣한 몸을 조금 풀더 니 뒤를 돌았다.

   사아악.

   매끄러운 털이 바람을 스치는 소리 같은 것이 잠시 들렸을 뿐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찰나에 태국영은 변이를 마치고 어슬렁 걸어왔다. 침대 곁 에 선 그가고개를 내려 태은경의 머리를 길게 한 번 핥아올렸다.

   [딱이만큼만 크면 돼.]

   태은경은 동그랗게 뜬 눈을 꽉꽉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아빠다. 별이 아빠.]

   마치 오늘 처음 만난 듯한 반응이었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방금 전까지 누 워 있던 자리로 가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나 아까부터 여기에 있었거든. ]

   [응. 아빠아.]

   이승도는 소리 없이 웃으며 태국영을 향해 돌아누웠다. 잘했어,입 모양으 로 칭찬하자 그는 심드렁한 눈을 돌리며 앞발에 고개를 올렸다. 태국영과 이 승도의 몸이 붙은 사이로 쏙 들어가 자리를 잡은 태은경은 사지를 앞뒤로 쭉 펴고서 늘어졌다.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듯한 자세였다.

   [별이 엄마. 아빠. 다 있어.]

   나 계속 있었다니까.

   [별이 아빠 있어.]

   천지 분간 못 하는 부스러기다. 몇 해만 지나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어수

룩함이었다. 언젠가 이 녀석도 변이를 배우고 상대를 낱낱이 꿰뚫어볼 수 있 는 눈이 트일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갓난아기 때 이렇듯 기뻐하며 아빠를 찾 았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할지도 몰랐다.

   [너희들이 찾는 그곳에,나는 언제나 있어. ]

   그래도 그것만은 기억해야 했다. 비록 이승도가 바라는 아버지상이 되어주 지는 못해도,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저는 항상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거라는 걸.

   _? _?,? .

   노크를 했음에도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 굳이 청력을 돋워보지 않아도 안 에서는 한창 통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못 들은 건지 들었으면서도 짜증 나 서 대답을 안 하는 건지 조금 애매했다.

   태호연은 다 큰 딸 방을 그냥 불쑥 들어가도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금 노크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응답이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제야 태호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태현리는 역시 휴대폰을 들 고 있었고, 드물게도 그 무뚝뚝한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핑계를 왜 대. 바쁘니까바쁘다고 하지. …그래,하루도못 내. 나 다음 주에는 출장도 잡혀 있어. ……그걸 알아서 뭐 하게. ”

   태호연은 조금 갈등하다가 태현리 몰래 귀를 종긋 세웠다. 통화 상대가 누 구인지 영 궁금해서 못 살겠다.

   《그냥 가까운 데면 찾아가서 얼굴이나 좀 보려고 그러지.》

   “출장이 장난이야? 너 만나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게? 시끄럽고,나 지금 추 계 워크숍 준비해야 될 게 태산같이 쌓여 있으니까 끊어. ”

   《현리야, 잠一》

   상대가 초조하게 말을 붙였지만 태현리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

대폰을 침대 위로 가볍게 내동댕이친 태현리가 의자를 돌려 태호연을 바라보 았다.

   “왜요,아빠.”

   홈쳐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놈팽이 일까 곰곰이 고민하고 있던 태 호연은 아,하며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국영이한테 전화 왔다. 다음 달에 가문 단합대회나 하라는데. 인간 제외 남녀 불문 만십팔 세 이상 모두 의무 참석. ”

   소리 없이 운석이 떨어진 느낌이다. 태현리는 조금 망연자실한 느낌으로 물 끄러미 태호연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 대꾸해야 할지 분 간이 안 가는 얼굴이었다.

   “이주일 뒤가 회사 워크숍인데요. ”

   “…그러게.”

   “게다가 십팔 세 이상 전원이 면 아직 은퇴 못 한 원로님들도 다 와야 된다 는 말이네요.”

   “그렇지.”

   태현리는 기가 막혔다. 꼬장도 이런 개꼬장이 따로 없었다.

   “누굴 엿 먹이는 거예요?”

   태현리의 질문에 태호연은 잠시 관자놀이를 긁적이다 애매하게 대답했다.

   “너는아닐걸?”

   “제가 아니면 의무 참석 연령대로 봐서는 원로님들이겠네요. 사직서 폭탄 이 더 심해진 모양이죠? ”

   “응. 조형 미술인지 뭔지 배우다가 뻘 받아서 본격적으로 목공까지 손대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 어마어마하게 돌았거든. 원로들이 빡칠 만하지. 올해 내 로 회사에 들어앉히 려고 작정한 것 같아. ”

   그 소문은 태호연이 냈다. 사명감을 가진 듯 아주 열심히 퍼뜨린 결과가 이 런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가주님께서 원로님들을 엿 먹이려는데 덩달아 저까

지 엿 먹는 상황이라 이거네요.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까?”

   태현리는 짧고 깊은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알겠어요.”

   태호연은 조금 전 그 놈팽이는 누구냐 캐물어 볼까 하다가 관뒀다. 안 그래 도 요즘 아침 별 보면서 출근해서 밤 별 보면서 퇴근하느라 피로가 쌓일 대 로 쌓인 딸내미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호연이 나가자 태현리는 책상 위의 간이 책꽂이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월 간 스케줄 표를 찾아 펼쳤다. 아직 3월도 다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4월 기록 표에 적힌 양은 어마어마했다.

   원래도 그녀의 다이어 리는 꽤 촘촘한 편이었다. 그러나 예전과 지금은 기록 된 스케줄의 성질이 전혀 달랐다. 온통 해외여행 일정에 방문할 맛집이나 쇼 핑 거리,박물관등에 관한 정보가 전부였던 그녀의 다이어리는 이제 사무적 인 일정만이 깨알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뭐,이 정도쯤이야.”

   태현리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까짓 거 못 들어줄 게 무어란 말인가.

   태국영은 아마 멋지게 복수했다고 흐뭇해하고 있을 테지만,사실 태현리는 애초에 태국영을 물 먹일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그의 본신이 궁금하긴 했 으나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집을 찾아갈 정도도 아니 었다. 단지 그때의 일은 지금을 위한 작은 반석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태국영에게서 가족 소풍에 관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이것이 절호 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태현리는 태국영이 치를 떠는 태준호를 일부러 그에 게 보내 화를 돋웠다. 그런 식으로 밉보이면 반드시 보복이 들어올 거라는 걸 태현리는 매우 잘 알았고, 그 보복의 수법이 태국영의 뇌리에서 어떤 의식의 흐름을 거쳐 탄생할지조차 잘 알았다.

   태현리는 실제로 여행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무료함을 소각시 키 려는

발버둥에 더 가까웠다. 가문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업에 소모됨을 한탄하 며 괴로워하지만,그녀는 그것이 부러웠다.

   출가와 동시에 타 가문에 편입되어 버리는 족보 체계 때문에 여자들은 가 업을 배울 의무가 없었다. 일을 하고 싶다 해도 너무나 당연하게 ‘어차피 그만 둘 거 결혼 후 네 남편 가문의 가업에 뛰어들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 뻔했 다.

   하지만 태현리는 태일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언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아니,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남편의 가업 같은 것에는관심이 없었다. 제가 태어난 가문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싶을 뿐이었다.

   이 것은 매우 장기적 인 대계 였다. 태국영 의 뒤끝 긴 짜증은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불러왔고 그녀는 이례적으로 태일에 입사하게 되었다. 딱 하나 걱정했 던 것은 이 성격에 말단 영업직을 받게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태국영 은본사 경영지원 핵심부서에 넣어주었다.

   일말의 양심은 있거나 아니면 태현리 자신이 그 정도로 똑똑하다고 생각했 기 때문일 거 였다. 둘 중 뭐가 됐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제가 그토록 바라 던 일을 하게 된 것이 었다.

   작전 성공. 내 목표는 가주님 바로 아래의 CEO.

   태현리는 콧노래를 흥얼거 리며 ‘가문 단합대회’라고 적어둔 뒤 세부 스케 줄 표를 짜기 시작했다.

   “왜지.”

   태국영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작업대 옆에 앉아 팔을 괴고 구경하던 이승도가 ‘뭐가? ’ 하며 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 ”

   태국영은 팔짱을 끼고서 작업대만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꽤 만족스런 흐름을 보여서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기를 동반한 불쾌감이 몰려 온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음? 이상하네. 내가 봐도 완전 깨끗이 잘 됐는데.

   이승도는 의아한 눈으로 태국영이 만들고 있던 수납함을 뜯어보았다. 그냥

직사각형의 단순한 함이었지만 초보치고는 마감도 굉장히 깔끔하게 되어가 고 있던 참이 었다. 아직 조립 전인 뚜껑도 꽤 순조롭게 완성이 되고 있었다.

   “그렇지? 뭐이상한거 없지?”

   태국영의 거듭된 물음에 이승도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응. 너 지금 완전 잘하고 있어. 우리 국영이 목공에 재능 있나 봐. 나중에 우리 살게 될 집 가구들은 네가 다 만들 수 있겠는데? ”

   태국영은 기이한 느낌을 떨쳐버리려 크게 어깨를 돌렸다. 제가 봐도 수납함 은 어디 한군데 흠 잡을 곳 없는상태였다. 접합 부분도 정확히 들어맞았고 못이 박힌 자리의 이질감도 없었으며 페인팅과 코팅까지 매끄럽게 잘 되었다.

   “한번 해보지 뭐. 너 테라스에 놓고 싶다던 흔들의자도 너끈히 만들 수 있 을 때까지.”

   “응. 이 정도 속도면 일 년도 안 돼서 거의 전문가 되겠다. 나도 그때까지 원목 가구 책자들 많이 볼게. 내가 디자인해 주는 대로 네가 만들고,그걸로 우리 집 가득 채우면 진짜 좋겠어. ”

   “그래. 진짜 한 일 년 열심히 파볼게. 네가 원하는 것들 전부 정확히 만들 어줄수있을 때까지. ”

   “멋지다,태국영. 방금 완전 스위트 했어. ”

   “나야 늘 스위트 하지.”

   원로들이 들었으면 까무러칠 대사들이 었지만 둘에게는 그저 깨가 쏟아지 는 미래 설계였다. 이승도의 뺨 키스를 기분 좋게 받은 태국영은 다시 전동 공 구를 들어 뚜껑을 마저 조립했다. 이미 치수를 꼼꼼하게 재서 재단해 둔 목재 들은 그의 손 안에서 완벽하게 합을 맞췄고,함 위에서 남거나 모자람 없이 딱 들어맞았다.

   이승도는 완벽하다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건 다음에 선산 갈 때 오두막에 갖다 두자. 예쁘게 잘 어울릴 것 같아. ”

   “그러지 뭐. 내일부터는 뭐 만들까? ”

   초보가 시도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이승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벽난로 앞에 있는 티 테이블 바끌까? 그거 디자인이 좀 모던한 스타일이 라 오두막이랑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았거든. ”

   “어렵지 않지. 수납공간도 필요해?”

   “서랍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고,그냥 테이블 밑판에 난간 같은 거 세워 두 면안에 잡지나책 같은거 조금둘수 있지 않을까싶어. ”

   그거야 매우 쉬웠다. 그냥 나무 재단해서 하부 판자에 박아 넣기만 하면 되 니까.

   태국영은 완성된 수납함을 구석에 놓아두고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을 마치고 씻자마자 들어왔는데 시간은 훌쩍 흘러 벌써 점심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끝이야?]

   볕 드는 창턱에서 달콤하게 낮잠을 자던 태은경이 곁을 폴짝거리며 뛰어다

녔다. 이승도는 녀석을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 끄,,

O ? E ?

   [별이 배고파. 맘마 먹을래.]

   “그래. 맘마 먹으러 가자. ”

   이제 제법 문장을 잘 조립하기 시작한 녀석은,두 손 위에 올리면 몸이 삐 져나올 만큼 또 훌쩍 커 버렸다. 아기들은 왜 이렇게 빨리 자랄까,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작업실에서 나가 곧장 식당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 되어가던 참이라 고용인 들은 주방과 식당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가까운 응 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마침 미술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왔 다.

   “엄마,이거 봐요! 형아가 이거 그렸어,이거! ”

   요란하게 소리를 치는 태이경의 손에는 8절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이 승도는 스케치북을 받아 들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흰 도화지 안에는 이승도

자신이 태은경과 코를 맞대고 부드럽게 웃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색채감 없 는 데생이었지만 연필 하나로 그은 무수한 선들이 섬세하고 매끄러운 질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은태가 그린 거야?”

   “응. 나흘이나 걸려서 완성한 거야. 어때, 선생님. 맘에 들어?”

   “완전 맘에 들어. 빈말이 아니고 진짜잘 그렸다. 별이, 이거 누구야? ”

   이승도는 테이블 위에서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있던 태은경에게 그림을 보 여주었다. 그러자 그 똘망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앞발로 저와 이승 도를차례로 가리키며 ‘이거 별이,이거 엄마. ’하고 대답했다. 이승도는 가늘 게 눈을 접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도 알아볼 정도면 사진이랑 다름없는 거지. 진짜 신기하다. 나 다른 그림들도 봐도 돼?”

   여은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마음껏 봐. 아직 인물화는 몇 장 없지만. ”

   이승도는 스케치북의 제일 첫 장부터 차근차근 구경했다. 과일바구니부터 시작한 그림들은 잡동사니들과 석고상 몇 개를 거쳤고,그 뒤로 인물화가 본 격적으로 등장했다. 첫 인물화는온실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태이경이었 다.

   햇빛에 반짝이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져 있고, 통통한 입술은 작게 벌어져 있었다. 얼굴 옆에 놓인 작은손까지 흑백사진처럼 선명하고 깨 끗했다.

   “어쩌지. 우리 은태 화가 시켜야 되나? ”

   이승도는 꽤 진지하고 심각하게 중얼거 렸다. 이 정도면 역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팔불출 같은 생각으로 고심하고 있는 이승도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함께 구경하던 태국영이 픽 웃었다.

   “화가는 무슨. 재도 가업이나 이을 팔잔데. ”

“그래도 너무 잘 그렸는데? 이 재능을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취미로 계속 그리면 되지. 제 돈으로 가끔 전시회나 열면서. ”

   현실에 부딪혀 꿈을 꺾게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여은태 본인도 특별히 화 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냥 지금처 럼 막 그리고 싶은 걸 다 화 폭에 담는 것이 즐거울 뿐이라고.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었다. 녀석의 미래는 녀석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것 이니 말이다.

   이승도는 다음 장을 넘겼고, 신기한 듯 앞발로 종이를 자꾸만 내리치던 태 은경이 꼬리를 일자로 바짝 세우며 말했다.

   [또 별이!]

   “오,그래. 별이 거울 보고 있네. ”

   [응. 거울 보는 별이. ]

   그때 식사준비가 끝났다는 전갈이 왔다. 이승도는 스케치북을 덮어서 여은 태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제까지 은태가 그린 것들,하나도 버리지 말고 선생님 줄래? 잘 보관해 뒀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돌려줄 테니까. ”

   “그러지 뭐. 그런데 앞으로 그릴 것들까지 다 보관하면 너무 많지 않을까? ”

   “많으면 어때. 이것도 앨범처럼 네가성장하고 있다는증거인데. ”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훌쩍훌쩍 커 버리는 아이들이고,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 었다. 사진들은 물론 이런 그림들 조차 어느 하나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우리 아트 룸에 이경이랑 내가 다 그린 스케치북 몇 개 있는데,이 따 그거 줄게.”

   여은태는 그렇게 대답하며,별생각 없이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스케치북들 을 떠올려 보았다. 거기에는 지금처 럼 완성도가 높은 그림들보다 서툴고 어설 픈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인간으로 변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그려 진 것들이었다. 원뿔이나 작은 공처럼 단순하기 그지없어서 다시 볼 가치조 차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어수룩함 속에 깃들어 있는 설렘을, 여은태 자신은 알아 볼 수 있을 터 였다. 손을 쓰는 게 어색하고 뻣뻣하지만 진정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바로 그 서툰 그림들이 간직하고 있는 거 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아무렇게나 버려둔 스케치북들이 몹시도 귀하게 여겨졌다. 먼지만 받아마실 정도로 하찮아진 그것들에게 반짝이는 소생의 기 회를 준 것은 이승도였다.

   나의 선생님은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은가.

   모든 쓸모없어진 것들을 귀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진짜 다정하고 현명해. 너무 좋다,선생님 만나서. ”

   여은태는 새삼 행복감에 젖어 이승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사람을 만 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참 많은 날들을 겪었으면서도 새삼 이렇게 감동하고 만다.

   “선생님도 좋아. 이렇게 예쁘고 착한은태 만나서. ”

   어설프게 뒤엉켜서 뒤뚱뒤뚱 걸으면서도 이승도는 귀찮은 내색 없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은태의 머리칼을부드럽게 흩어 놓으며 말을 이었 다.

   “우리 은태 아니었으면 나랑국영이 사이는 여전히 냉각기에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절망 끝에서 나를 찾아와준 건 내게도 아주 큰 행운이었 어.,,

   “정말 내가 선생님한테 도움이 됐어? ”

   “그럼. 당연하지.”

   “다행이다. 나름 미운 짓 안 하려고 열심히 노력은 했는데,그래도 항상 내 가 선생님 힘들게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거든. ”

   “미안할게 뭐 있어. 가족인데.”

   가족.

   여은태는 빙그레 웃으며 이승도의 어깨 위로 빵을 비볐다. 이제는 고개를 숙여야 이렇게 어깨에 닿을 수 있을 만큼 커버렸지만 이 다정함 앞에서는 언 제나 어 린애가 되는 기분이 었다.

언젠가 이승도는 ‘별이가 너무 빨리 크는 것 같아서 아쉽다’고 했었다. 그때 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지금은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은

태 자신도 제가 너무 빨리 크는 것이 서운했다.

   그저 언제까지고 어린애로 남아 이렇게 응석을 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사랑해,선생님.”

   여은태는 아쉬움을 애써 떨어내며 웃었다. 이승도 역시 햇살처럼 따스한 미 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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