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
양메이로부터 자오 가의 인장이 찍힌 한 장의 편지가 왔다. 반듯하고 깨끗 한 필체의 한글이 편지지의 반을 채우고 있었다. 시작은 평범한 안부 인사였 고,그다음으로는 형식적인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성의 없는 사과나마 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 이렇게 직접 펜을 들 었습니다. 승도 씨만 괜찮으시다면,태어날 아기가 함께 여행이 가능해졌을 즈음 직접 한국으로 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릴게요. 혹 또 모르지요. 우리의 아 이들이 홋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요. 승도 씨의 둘째 딸과 제 아기는 나이도 얼추 비슷할 테니까 아기 때 얼굴을 익혀 두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친구라…….
이승도는 서로를 소 닭 보듯 보던 태국영과 자오추안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우뚱했다.
이경이라면 모를까,우리 까다로운 숙녀분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이승도는 비관적으로 전망하며 그녀의 편지를 앨범에 꽂아 두고 테라스로 향했다. 시들했던 장마도 깔끔하게 물러가고 이글대는 태양이 기세 좋게 지상 을 비추고 있었다. 습한 기운이 완전히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랜만에 태국영 과 함께 실외를 뛰놀고 있었다.
미닫이 유리문을 막 열고 나갔을 때였다.
“으아아아! 아빠,별이 다쳐요! ”
태이경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승도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얼 른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말고 뛰기나 해,꼬맹이. ”
[꼬맹이 아니라니까!]
거멓고 동그랗고 작은 무언가가 허공을 날아 풀장 위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한 아이와 한 마리가 흥분한 들소들처럼 뛰어올랐다.
여은태는 태은경이 수면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물었고,허공에서 몸을 돌려 충돌의 충격을 제 몸으로 받아냈다. 크게 솟아오른 파도가 풀장 밖으로 세차게 물살을 떠밀 었다.
태은경과 함께 물에 빠진 여은태는 바닥을 짚고 곧장 수면을 뚫고 나왔다. 햇살 가득한 허공에 에메랄드빛 물살이 작두처럼 솟아올랐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여은태가 몸을 푸르르 털어 물기를 날리며 툴툴거 렸다.
[이러다 애 잡겠네. 쪼꼬미를 그렇게 막 다루는 아빠가 어딨어? ]
“네가못잡으면 내가잡아. 불만이면 그냥 너희끼리 놀든지. ”
태국영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그가 그 정도 계산도 못 할 만큼 허술한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잠깐 가슴 이 철렁 내려앉았던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선생님. 방금 봤지? 내가 별이 멋지게 구하는 거. ]
여은태는 위풍당당 별이의 목덜미를 문 채로 태국영이 아니라 이승도에게 다가왔다. 이승도는 빙긋 웃으며 아기를 받아들었다.
“응. 봤어. 은태 엄청 멋있더라.”
[이경이 대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완전 누워서 떡 먹기였 어.]
여은태는 콧대를 치 켜들며 밉지 않게 잘난 척을 했다. 태국영은 저 자식 말 바뀌는 거 보라며 실소를 터뜨렸다.
“별이,아빠랑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밌어? ”
이승도는 쫄딱 젖은 아기를 얼굴 앞까지 달랑 들어 올린 채 물었다. 아기 는 작은 꼬리를 양옆으로 착착 흔들며 목을 울렸다.
[재밌어. 별이 좋아.]
그럼 됐다. 아기도 신나 있으니 태국영 에게 좀 더 살살 놀아주라고 괜한 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엄마. 놀자. 같이. 같이.]
“그래. 내가 별로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아빠 옆에서 열심히 박수 쳐 줄게.
[박수. 박수. 이케.]
녀석이 앞발을 탁탁 맞부딪쳤다.
“아구. 우리 별이 박수도 배웠네.”
이승도는 똘똘하다고 크게 칭찬해주며 아기를 태국영에게 데려다주었다. 태국영이 목덜미를 잡자 녀석이 반사적으로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웅크렸다. 제법 익숙한 쿵짝이었다.
“자,이번엔어느 방향일까.”
태국영이 긴장감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바싹 몸을 낮추는 순 간이었다. 태국영이 크게 팔을 휘둘러 태은경을 던졌다. 작고 귀여운 별이 공 은 분수대를 넘어갈 듯 허공을 높이 날았고,여은태는 이번에도 번개처럼 뛰 어가 녀석을 물었다.
감탄이 나올 만큼 참 잘 던지고 잘 받는다. 평소에는 틈만 나면 아옹다옹하 지만 이럴 때만 보면 태국영과 여은태의 호흡은 환상의 커플처럼 찰떡같았다.
태국영이 그렇게 놀이를 빙자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아이들과 즐기는 동안 이승도는 태이경을 등에 업은 채 캐디처럼 과장되게 환호해 주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어차피 닿지 않을 거라 태이경 역시 그저 응원에만 열중했다.
“여러분! 한시간 뒤에 선생님들오실 시간이에요! 들어 와서 씻고간식들 드세요!”
유모가 나와서 소리쳤다. 정말이지 화살처럼 시간이 빠르게 지나 있었다.
한 번의 실수 없이 태은경을 잘 받은 여은태가 기세등등하게 꼬리를 치켜세 운 채 앞장서 걸었다.
[별이,오빠든든하지?]
이승도의 머리 위에 배를 깔고 늘어져 있던 태은경은새초롬하게 꼬리만 착착 흔들 뿐이 었다. 원래 이승도 아니 면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녀석이라 다 들 이 침묵은 익숙했다. 여은태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며 태이경을 등에 태웠 다.
[선생님. 난 이경이랑 같이 씻을게. ]
“응. 뽀송뽀송 말리고 식당으로 와. ”
여은태는 힘차게 1층 욕실로 뛰어갔다. 이승도는 태은경을 머리에 얹은 채 태국영과 부부 욕실로 갔다. 태국영이 홀로 샤워를 하는 동안 이승도는 아기 몸에 거품을 내어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물 위에 가만히 놓아두자 녀석은 열심히 네 발을움직여 헤엄을 치기 시작 했다. 갓난아기 때는 발바닥에 물만 닿아도 잔뜩 긴장하더 니만, 지금은 일취 월장해서 잠영도 곧잘 하는 녀석이었다.
[별이 잘해.]
물속을 유연하게 헤치고 와 가슴팍에 딱 달라붙은 녀석이 뽐내듯 눈을 빛 냈다.
“그럼, 그럼. 우리 별이다잘하지.”
녀석이 수영하고 노는 동안 거품은 자연히 다 씻겨나갔다. 이승도는 깨끗 한 물로 아기를 거듭 행구고 큰 타월로 감싸 파우더 룸으로 이동했다. 태국영 은 먼저 와서 바지만 입은 채 머 리를 탈탈 털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양메이가 뭐래?”
편지 얘기 였다. 이승도는 아기를 화장대에 내려둔 뒤 먼저 옷을 입으며 대 답했다.
“그냥 별거 없었어. 나중에 한국에 한 번 들어오겠대. ”
“여긴 왜.”
“얼굴 보고 제대로 사과하고 싶다고. ”
“쓸데없고 불필요한 짓을 참 정성스럽게 하네. ”
태국영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젖은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리 고 선반에 깔끔하게 개켜 있는 다른 수건을 가져와 이승도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아기 먼저 돌봐주느라 바빠서 제 몸 챙기는 건 늘 뒷전이다.
“그리고 메이 씨 아기랑 별이가 나중에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대. ”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손이 뚝 및었다. 그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들 었다는 표정으로 거울을 응시하며 물었다.
“아들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응. 아들. 거의 확실하대.”
쯧,그가 혀를 찼다.
“자오 아들이 별이처럼 완벽하게 태어나지 않는 이상,둘은 아예 만나지 않 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아. ”
이승도는 힐긋 시선을 들었다. 거울 위에서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이야?”
“우리처럼 힘에 민감한종족은 없어.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수컷이 암컷보 다 힘이 센 게 당연하고. 그런데 요 부스러기는 웬만한수컷들은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클 거란 말이야. 황제 안 부럽게 자랄 자오 아이 가 저보다 신체적으로 월등한 여자애를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이승도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상태로 느리게 고개 를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자격지심 같은 게 생길 수도 있겠네. ”
“생길 수도 있는 게 아니라,최악의 상황으로는죽이지 못해서 안달할걸. ” 이승도는 눈을 크게 뜨며 헤어드라이 어를 다급히 꼈다. 하지만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국영이 먼저 미심쩍다는 얼굴로 중얼거 렸다.
“헌데 양메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
그리고 한 번 눈동자를 굴린 그가 아,하며 턱을 젖혀 들었다.
“징조가 있나 보네.”
태국영은 혼자 북 치고 장구도 쳤다. 이승도는 아예 뒤를 돌아 캐물었다.
“뭔데? 무슨 징조?”
“아무래도 양메이 뱃속에 든 아기도 황제감인 모양이야. ”
“어… 그러니까,별이 같은?”
그렇지, 하며 태국영이 고개를끄덕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양메이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겠지. ”
“그럼 나중에 둘이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태국영은 대답을 보류하고 잠시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 태국영 자신이 제 또래의,저와 동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여자를 만났
다고 치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싸워보고 싶을 것같은데.”
이승도는 엥?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태국영은 당연한 거 아니겠냐며 어깨 를으쪽했다.
“원래 이쪽 세계 사내놈들이 그렇게 철이 없어. 나도 그렇고. 아마 한 판 붙 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
그 또한 희망찬 미래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 였다.
“둘이 만나면 결과는둘중하나지. 피 터지게 싸우는 절친이 되거나, 피 터 지게 싸우는 앙숙이 되거나. 뭐가 됐든 별이 입장에선 아마 진절머리가 날 거 야.,,
보송보송 말린 태은경을 가슴에 안으며 이승도는 하염 없이 걱정이 쌓였다. 아기의 미래에 관한 걱정이었다.
“그럼 우리 별이는 남자애들이랑은 친구 되기 힘들다는 거네. 원수나 안 지 면다행인 거고.”
“뭐,여 가꼬맹이처럼 별종도 더러 있으니까. ”
“아. 그렇지. 은태는 남자앤데도 별이 엄청 예뻐하니까! ”
처음으로 들은 긍정적 예측에 이승도의 얼굴이 밝아졌다. 태국영은 이승도 의 기분 좋은상태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괜히 여기서 ‘그런데 그렇게 흔 하지는 않아.’라고 덧붙여서 시름을 얹어줄 필요는 없었다.
“애들 식당에 도착한 것 같아. 우리도 내려가자.”
“응. 우리 별이,맘마 먹자? ”
[맘마!]
이승도를 에스코트해서 내려가는 태국영은, 당연히 그때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제 딸이 자오추안의 아이와 오묘하면서도 기이한 사이가 될 줄은.
그의 예측이 맞아 멸어진 것은 부수적으로 덧붙였던 말뿐이었다. 태은경이
자오추안의 아들을 대면할 때마다 진절머리를 내게 될 거라는 거.
이승도는 하루에 한두 번씩 짐승들을둘러보았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 나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혹은 둘 다 온실과 우리를 돌았다. 이상 징후를 보 이는 아이가 없는지 미리 알아내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중요했다. 한정적인 공간에서 갇혀 생활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답답함 이라든지,무서운 맹수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늘 걱정 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개들의 산책은 보통 이승도와 태이경이 짬이 날 때마다 시켜주었다. 산책이 라기보다는 그냥 저택과 먼 정원에 풀어놓고 뛰어놀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태국영의 냄새에 질색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제법 잘 놀았다.
고양이들은 노상 평온했다. 녀석들 역시 초기에만 예민했고 이제는 온실 안 이 온통 저들 세상인 양 굴었다. 고용인들이 청소를 하러 들어가면 미친 듯이 도망치던 녀석들이 지금은 청소기를 돌리건 물걸레를 밀건 아무 데나 널브러 져 있어서 방해가 될 정도란다.
문제는 영웅이였다. 동물원에서도 골칫덩어리 원숭이였던 영웅이는 꽤 길 게 적응을 못 했고 툭하면 우울해했다. 달래도 보고 외면도 해 보고 별수를 다 썼지만 소용없었다. 아마 때마침 동물원에서 암컷 원숭이 하나 더 데려가 지 않겠냐며 연락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속을 썩이고 있었을 터였다.
조심히 녀석을 데려와 천천히 합사를 시도했는데 다행히 둘 다 서로를 마 음에 들어 했다. 아마 두 녀석 모두 소심한 성격에 왜소한 체구였고 집단 속에 서 괴로워하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합사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어서 이제는 원승이 우리도 별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이승도는 그날도 오전 영어회화 수업 전 짬을 내서 온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호에게 뜻밖의 이야기를듣게 되었다.
“응? 큰 짐승? 은태가 아닌 게 확실해? ”
일호는 의젓하게 궁둥이를 붙이고 앉은 자세로 차분히 대답했다.
[그 늑대 같은 애는 아냐. 그 애보다 훨씬 크고 온몸이 새까떴어. 선생님의
작은아기처럼. 그 아기 아빠맞지? ]
일호는 이승도 자신이 제 아기라며 소개해 준 태은경을 기 억하고 있었고,
그 아기의 외형으로 말미암아 추리를 할 만큼 영리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 다.
“얘들아 미안. 선생님 이따 오후에 또 올게. ”
이승도는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금 당장 태국영과 이야기를 나눠 야만 했다.
저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깜찍한 짓을 했단 말인가.
조금 서운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승도는 한달음에 저택으로 돌아 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태국영은 평소와 달리 제꺽 나타나지 않았다.
태국영은 프로 도청꾼이었다. 분명 제 목소리를 홈쳐 듣고 미적거리고 있 는 게 분명했다. 협박이 필요한 순간이 었다.
“일 분 안에 안 나타나면 이번 주 데이트 취소야. ”
효과는 대단했다. 그는 1분 아니라 10초도 안 돼서 피트니스 룸에서 설렁설 렁 걸어 나왔다. 언짢은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달려가 그를 강하게 부둥켜 안았다.
“아구 예뻐. 우리 국영이 진짜 예뻐 죽겠네. ”
엉덩이를 팡팡 치며 올려다보자 태국영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 맥락에 안 맞는 애 취급은. ”
“애기 아니었어? 응석 많은애정결핍 어리광쟁이. ”
그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아가 취급 하려면 젖부터 물리고 해. ”
“안타깝지만 젖은 안 나오고, 대신 이걸로 할까. ”
이승도는 태국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키스했다. 그의 눈이 언뜻 웃는 듯했다. 강한 힘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불꽃처럼 뜨겁고 짧게 머물다 간 키 스 끝에서 이승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했어,국영아. 그리고 고마워.”
“고마울 거까지야. 내 새끼 내가 케어한 건데. ”
“그래도 싫고 거북한 거 마다하고 해준 거니까. ”
“싫은건 아니야. 단지 좀.”
태국영은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 렸다. 깊은 눈빛이 한 번 바닥을 향했다
가 잠시 뒤 돌아왔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아무튼 그래. ”
“무서운 거지?”
묘사할말을찾지 못해 포기해 버린 태국영 대신, 이승도가 그의 깊숙한곳 을 파헤쳤다.
“좋은 기 억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미움 받고 방치된 기 억뿐인데다가, 그런 너를 마주해서 내가 과거를 또 떠올리게 될까 봐. ”
“그때 널 미워했던 내 감정이 조금이라도 되살아날까무섭잖아. 이제야조 금씩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고 있는데, 그게 망가질까봐. ”
“하지만 너도 이제는 알고 있어. 홍콩에서 내가 짐승의 모습을 한 너를 조 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으니까. 알고는 있지만 아직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나의 승도는 정말로 괜찮을까,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참고 있는 것은 아 닐까,그런 생각들 때문에 여전히 겁을 내는 거고. ”
겁이 났던 걸까.
이승도가 차분히 늘어놓는 진단을 귀담아들으며 태국영은 담담하게 생각했 다.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지켜야 된다는 집착과 열망 은 자연적으로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근원적인 공포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를 묻히고 있던 모든 것을 분쇄했다. 부모와 가솔들을 몰살시켰 고 그들이 살던 부지도 갈아엎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그들의 아기 였다. 만 약 이승도가 태이경을 보며 본인이 당했던 참극만을 기 억했더라면, 그는 망설 임 없이 아기의 숨통도 끊어놓았을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들춰내기보다 깊이 묻어두려 했
다. 이승도를 좀먹던 짐승도 영영 떠나보낼 생각이 었다.
하지만 이승도가 애써 봉인해 둔 핏빛 기 억들을 깨려 한다. 파내고 헤집고 이제 고이 장례까지 치 러주자 말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승도가.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피폐했던 그가 말이다.
[왜애. 놔. 엄마.]
“쉿. 별아,지금은 방해하면 안 돼. ”
“그래. 엄마 아빠 얘기 중이니깐조금만참자. ”
응접실로 돌아 나오는 코너에 숨어있는 아이들의 숙덕거림이 귓전을 스쳤 다. 복잡한상념들이 먼지처럼 날아갔다.
태국영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짧게 호흡을 멈추며 이승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리둥절한 감정을 드러낼 사이도 없었던 이승도를 어깨에 짊어 진 채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한가지 약속해줄게 있어.”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그가 말했다. 이승도는 영문을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든.”
“다가오지 말고 보기만 해. ”
아.
이승도는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멍하게 풀렸던 얼굴에 이내 환한 웃음 이 어렸다.
“응. 그럴게.”
태국영은 이승도를 침대 곁에 앉혀 두고 크게 물러섰다. 뒤를 돌아 고개를 두어 번 꺾은 그의 몸이 삽시간에 부풀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이 있던 자리에 바윗부리처 럼 솟아난 짐승을 바라보며 작 게 입을 벌렸다. 거대해진 몸집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전해져 오고 있었 다. 마치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한 입자로 조각조각 일렁이고 있는 느낌이었
뒤돌아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몸체는 천장 등의 불빛을 하얗
게 튕길 만큼 매끄러웠고, 느리게 움직이는근육들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밤에 잠긴 호수처 럼 새카만 눈동자가 미동을 반복했다. 이승도는 그가 자신 의 내부를살살이 해부하고 있음을눈치챘다. 동공의 떨림이나 체온의 변화, 심지어 솜털의 움직임까지 아주 미세한 것들을 죄 흠쳐가고 있었다.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집중해서 노려본들 의심쩍은 구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거다.
“예쁘다. 손이 근질거릴 만큼.”
이승도는 그가 진심으로 반가웠고, 당장에라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느라 애쓰고 있는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직전에 그에게 한 약속이 없었더라 면 아마 바로 그에게 뛰어가 기쁘게 끌어안았을 터였다.
관찰의 시선을 거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돼. 내가 이 모습으로 네 앞에 서는 게 익숙해질 때까지는. ]
이승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응.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
태국영은 뭔가 조금 멋쩍은 듯 앞발 하나를 들어 할짝거 렸다. 돌아온 대답 은 물론 없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강렬한 태양 빛이 지평선 뒤로 저물며 숨어 있던 보름 달이 흐리게 윤곽을 드러냈다. 석양이 성큼성큼 대지를 밟아오기도 전에 이승 도는 잠자리 준비를 마쳐 놓았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은 모두 고용인들이 다 알아서 해 주는 터라 이승도가 할 일이라고는 그저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몇 번 겪어봤 다고 나름 요령이 생겨서 피로만 잘 견디면 되었다.
이승도는 일찌감치 아이들을 모아 패밀리 침대에 앉았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보름날마다 별이는 물론 두 사내아이까지 함께 돌봐야 하는 터라 침 대는 맞춤 제작을 한 대형 사이즈였다.
이승도는 침대 헤드에 쿠션을 놓고 등을 기댄 채 영미권 아동들이 읽는 영 어 원문 동화책을 읽 었다. 단어만 달달 외우는 것보다 쉬운 책 한 권을 수백 번 읽어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는 것이 더 좋다면서 태국영이 추천한 방법이었 다.
단순한 문법과 표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만학도에게는 그것조차 조금 버거 웠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나란히 앉은 태국영에게 틈틈이 물어보았고, 그 는 의외로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며 공부를 도와주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 창가에 이젤을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이들이 침대로 올라왔다. 양옆에서 다리를 하나씩 끌어안는 녀석들의 몸이 뜨끈뜨끈했다. 태은경은 이미 침대 위에 올랐을 때부터 몸 여기저기를 타고 놀고 있었는데,오빠들이 오자 곁에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이제 별이는 우리가 막 좋은가봐. 그치,형아. ”
“응. 먼저 부르지 않아도 이렇게 다가오고 말이야. 나중에 더 친해지면 막 업고 돌아다녀 야지.”
“나두. 막 목말도 태워줄래.”
둘은 태은경을 바라보며 속닥거 렸다. 그러자 이승도처 럼 독어 동화책을 읽 고 있던 태국영이 픽 웃으며 중얼거 렸다.
“꿈 깨라,애송이들. 저 부스러기가 한 네댓 살만 돼도 저 혼자 놀려고 할 테니까. 그냥 맹한 아기 상태인 지금을 충분히 즐겨 둬. 나중에 후회하지 말 고.”
저주 같은 예언에 여은태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정말 밉상, 밉상,저런 밉상이 또 있을까.
“그걸 어떻게 장담해?”
“딱보면 척이지. 갓난아기 주제에 벌써부터 도도하잖아. ”
“나도 한 도도함 해. 그래도 이경이랑 종일 같이 놀고 별이도 예뻐하잖아.v “도도는 개뿔이. 승도 집에 눌러살게 된 첫날부터 툭하면 꼬리 치면서 아양
이나 떨던 게.”
분하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여은태는 뚱하게 뺨을 껑그렸다.
“내가 뭐 아무한테나 그러나. 선생님이 좋으니까 예쁨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그치. 은태는 처음부터 얼마나 예뼜는데. ”
자연스럽게 중재하며 끼어든 이승도가 한손을 뻗어 여은태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고개를 든 녀석은 눈동자가 안 보일 만큼 짙은 미소를 띠 었다.
결 좋은 은발과 그 미소는 찬란한 빛깔로 참 잘 어울렸다.
“우리 은태는 어찜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날까. 머리랑눈은 커서도 이 색 으로 쭉가는건가?”
혼잣말처 럼 던진 의문에 태국영이 답했다.
“지가 굳이 안 하는 거지. 너랑 이경이가 하도 예쁘다고 칭찬하니까. ”
“아,조절이 가능해? 그럼 너도 막 금색 눈은색 눈 할 수 있어? ”
“넌 내가 무슨 만능 변신 괴물인 줄 아냐. 이 꼬맹이야 원래 이 색이니까 이 게 되는 거고. 나는 원래 눈도 털도 다 까마니까 그렇게는 안 돼. 모발의 색소 를 조절하는 건 은근히 까다로워서 본신에서 더 짙게는 해도 엷게는 못 하거
드 ”
“그렇구나.”
이승도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 이자 다음은 여은태가 궁금한 걸 물었다.
“별이는 인간으로 변해도 엄청나게 예쁘겠지? 언제쯤 될 거 같아? 다 같이 소풍도 가고 싶은데. ”
“기다릴 거 뭐 있어. 지금이라도 나가려면 나갈수야 있지. ”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여은태와 태이경은 물론, 이승도까지 태국영을 바 라보았다.
“우리 가문 애들이 성년식을 치르는 선산이 있어. 좀 작긴 하지만 태일 사 유지라 허락 받지 못한 인간들은 못 들어와. 별이는 이동장 같은 데에 넣어서
태국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허’하고 짧게 실소했다.
“이 자식 봐라. 너 지금 아빠를 쳤어? ”
[나빠. 아빠나빠.]
여은태는 너무 고소해서 배를 뒤집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이경도 두 손으 로 입을 막은 채 큭큭거렸다. 이승도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아기와 눈을 맞췄 다.
“별이 아빠 때리면 안돼.”
세모꼴이 었던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 이승도를 바라보았다.
[안돼?]
“응. 안 돼. 별이도 아빠를 때리면 안 되고, 아빠도 별이 때리면 안 돼. 다음 에 또그러면혼나. 절대 안돼.”
[안돼. 아빠안 때려.]
“아빠미안해요,하자. 고개 이렇게 예쁘게 숙이면서. 잘못했을 때는사과 를 하는 거니까.”
이승도는 태은경의 정수리를 다정하게 누르며 설명했다. 열심히 귀담아들 은 녀석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국영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 를 숙였다.
[아빠 미안해요.]
굳이 여기서 예전 같았으면 다리 하나는 부러졌을 거라는둥의 사실에 입 각한 으름장을 놓았다가는 이승도에게 등짝만 후려 맞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아기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 미안.’을 반복하고 있기까지 했다. 쯧, 태국 영은 혀를 차며 녀석의 콧잔등을 누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여은태가 몸을 일으키더 니 나지막이 꿍얼거 렸다.
“아…… 신호가 온다. 매월 겪지만 매번 너무 싫어. ”
그리고 마법처럼 순식간에 모습이 변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짐승 곁 으로 찢어발겨진 옷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여은태는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이승도의 다리 곁에 길게 배를 깔고 엎드렸다. 밤새 이렇게 두 앞발로 이 승도의 다리를 꼭 끌어안고 있어야 이 거지 같은 밤을 무사히 보낼 수가 있었
“그런데 은태는 보름날마다 왜 항상 이 모습으로 변해?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
갑자기 든 궁금증이 었다. 여은태는 상황에 따라 짐승으로도 있고 인간으로 도 있지만 보름 때는 꼭 짐승으로 변했다. 이제까지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 겼는데,단 한 번도 인간의 모습으로 보름밤을 나는 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응? 그야 당연히 짐승으로 변해 있을 때가 덜 아프니까 그렇지. ]
여은태는 매우 간단하게 대답했다.
“덜 아파?”
[응. 평소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데 보름 때는 굉장히 다르더라구. ]
그 말에 이승도는 태국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태국영이 영문 모를 눈빛을 했다. 이승도가 물었다.
“그럼 너는?”
이상한 질문에 태국영은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나 뭐?”
“너도 이러고 있으면 더 아픈 거 아냐? ”
아마도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맥을 짚은 태국영이 찡그리듯 웃었 다.
“우리 승도,내가 무슨 자라나는 성장기 청소년인 줄 아나. 이 꼬맹이야 한 창 자랄 때니까 차이가 확 느껴지는 거고,이 몸은 이미 다 자라셨거든요. 정 월 대보름 정도가 아니면 별 차이 없이 그냥 몸 쑤시고 열나고 짜증 터지고 그정도가다야.”
“그럼 대보름 때는 어떤데?”
자연스런 질문이 이어졌다. 유수와같이 흘러나오던 태국영의 목소리가 멎 었다. 이승도는 무구한 얼굴에 그저 궁금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의도했건 아 니건 이건 정체되어 있는 저를조금 더 압박해 올 덫이 될 거였다. 하지만 태 국영은 그걸 알면서도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좀 다르지. 성장통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
짐승일 때와 인간일 때 힘의 차이가 현격히 다르듯이 치유력 또한 그렇다.
치명적 인 부싱■을 입 었을 때도 저희 일족은 가장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래야 가장 빠르게 낫기 때문이다.
치명상을 넘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상황이라면 아예 변이조차 할수가 없 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버리면 치유력 역시 바닥을 기 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결국 치유력에 달렸다. 기혈이 틀어지고 몸이 부서지는 것을 치 유력이 따라갈 수 있다면 시기가 어떻건 모습이 어떻건 상관이 없다.
“그래. 그 정도로 아프구나. ”
이승도는 그냥 그렇게만 말하며 태국영의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기만 했 다. 손가락 사이로 뭉쳤다가 퍼지길 반복하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좋았다.
동정이나 안쓰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태국영에게 그 감정의 실체는 크게 상관없었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끌어안아주는 듯한 이승도의 온기는 늘 작은 갈증마저도 해소해주니까.
[아빠,아파?]
태국영은 힐긋 시선을 내렸다. 보름 때면 이승도의 몸에서 떨어지질 않는 태은경이 제 어깨에 올라와 머리를 쓰담쓰담해 주고 있었다. 바로 직전에는 앙칼지게 귀싸대기를 날려 놓고, 그래도 제 아빠가 아프다니 걱정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 아직 부스러기에 불과하니까 이러는 거겠지만.
이 바닥 놈들 키워 놔 봐야 다 소용없다. 저를 낳아준 이가 등대라 엄마 의 존도가 높으니 커서도 좀 덜 하긴 하겠지만,그렇다고 애교 많은 딸내미가 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너보단 안아파.”
태국영은 덤덤한 표정과 작은 목소리로 아기를 안심시켰다. 단지 그것만으 로도 이승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태국영이 아 이들의 앞에서 다정한 보호자처럼 보인 순간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승도는 나란히 앉아 있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 다. 등 뒤로 그가 팔을 넣어 어깨를 감쌌다. 고단하지만 따뜻한 보름밤이 될 것같았다.
9월이 되니 기온이 뚝 떨어져서 이제 한낮에도 에어컨을 결 일이 없었다. 창문을 모조리 열고 있으면 자연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닥쳐서 조금 춥게 느 껴질 정도였다.
날이 선선해지자 아이들은 월초부터 소풍 소풍 노래를 불렀다. 달이 더 날 씬해지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차피 아이들도 그렇게 원하고 갓난아기야 계속 품어주면 되니까 크게 상관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도는 지금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아예 노숙을 할 것은 아니지 만 밤늦게까지 놀다가 올 계획이고 다들 물에 들어갈 분위기였다. 옷가지 몇 벌 정도는 직접 챙겨야 했다. 유모는 아침이 끝나자마자 피크닉 음식들을 요 리하며 바비큐에 쓸 식재료들도 함께 준비했고, 태국영은 텐트와 기타 공구들 을 챙겼다.
모종삽, 목장갑, 토치,랜턴, 도끼…….
“도끼?”
일찍 옷가방 준비를 끝낸 이승도가 태국영 옆을 기웃거 리다가 큼지막하게 눈을 떴다. 입을 활짝 열리고 있는 대형 스포츠 백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도끼 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도끼로 뭐하려고?”
“장작 패야지. 모닥불 피운다며.”
태국영은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엷게 미간을 껑그렸다.
“꼬맹이들이 어디서 본 것들만 많아 가지고, 바비큐에 모닥불 파티까지 뭐 하는 짓들이야.”
투덜대면서도 쪼그리고 앉아서 빠진 건 없나 다시 살펴보는 태국영이 몹시
도 귀여웠다. 이승도는 등 뒤에서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이구,좋은아빠납셨네. 기특해라.”
“난 좋은 아빠보다 좋은 남편 타이틀이 더 탐나서 이 짓거 리를 하고 있는 중이거든? 네가 애들을 부추겼잖아. 말리지는 못할망정. ”
이승도는 기분 좋게 눈가를 접으며 그의 어깨에 뻗을 눌렀다.
“나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수학여행 갔다 오면 캠프파이어랑 레크리에이 션 얘기를 제일 많이 했어. 그런데 한 번도 부럽다고 안 했다? 부럽다고 말하 면 더 속상할 거 같아서. ”
쪼그린 무릎에 양팔을 얹고 동상처 럼 가만히 듣던 태국영은 잠시 뒤 작은 한숨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맘 약해지게.”
그 이후로 그는 더 불평하지 않았다. 챙겨야 할 물품 리스트를 보며 함께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이승도는 ‘휴지’ 항목에 주목했다.
“아참. 거기 화장실은 있어?”
“애들 성년식이 길면 하루를 꼬박 새우는데 당연히 있지. ”
“화장실만 달랑 있는 거야? 오두막 같은 것도 없이? ”
“응. 지금은.”
이승도는 문득 지난번에도 그가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별장 이 없느냐는 태이경의 질문에도 태국영은 ‘지금은’하고 말했었다.
“예전에는 집도 있었다는 소리야? ”
태국영은 유모가 미리 비닐에 포장해 둔 휴지 한묶음을 가방에 던져 넣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우리 가문 애들이 성년식을 하는 장소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은퇴한 가주가 여생을 보내다 묻히는 장소였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으리으리한 주 택이랑 별장까지 있었지.”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지금은 내가 다 밀어버려서 없지만. ”
자금력이 어느 정도 되는 가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 가문의 명의로 크고
작은 산 하나씩을 사유지로 가지고 있었다. 세대교체를 끝내고 물러난 전 대 의 가주가 평온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는 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태 가는 가문 내에서 성년식을 치르는 것이 전통이라 성년식이 있을 때마 다 전 대 가주의 거처를 빌려 쓰며 인사를 올리고 식사도 함께했다고 한다. 쓸 데없이 고리타분한 전통이었다. 물론 태국영이 부지를 죄 갈아엎은 이유에 전 통 파괴라는 대의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흔적을 지워버 리고 싶었을 뿐이 었다. 혐오스러운 제 피가 오래 머물 러 있던 자리들은 전부 다.
“그럼 나중에 우리도 늙으면 거기로 가? ”
이승도는 알면서도 더 묻지 않고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의외 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산 생활 괜찮겠어?”
“노숙하는 것도 아니고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
“고용인을 둬도 여러모로 불편하고 적적할 거야. 주변은 온통 논, 밭,산뿐 이고 시내로 나가 봐야 볼 것도 하나 없으니까. 누구 만나러 서울이라도 가려 면 편도로 최소 한 시간 반은 잡아야 되고. ”
“나도그정도는 알아.”
뭣 모르고 덤비는 어린애를 달래듯 하는 말에 이승도는 그의 미간을 손가 락으로 툭 밀었다.
“애들 다 독립하고 나면 그냥 산이든 해변이든 너랑 둘이 알콩달콩 깨나 볶 으면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묻는 거야. ”
그러나 그는 다시금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나뿐일 거야.”
“괜찮아. 그때의 너한테도 나뿐일 테니까. ”
이승도 역시 진지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눈가를 접었다. 따뜻하게 전송한 진 심을 맨몸으로 끌어안은 태국영은 픽 웃으며 이승도의 머리칼을 한 번 흐트러 뜨렸다.
“그럼 우리 승도 모시고살 예쁜 집 지어둬야겠네.
“어떤 집으로?”
“고급 산장이나 리조트 같은 느낌이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
“어,산장 좋다. 비나 눈 오는 날에는 벽난로에 불 피워 두고 둘이 차 마시 면서 바깥 풍경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아. 가구든 소품이든 약간 앤티크한 것들 로 해서 고풍스럽고 따뜻한 분위기로 채우면 진짜 멋지겠어. ”
가볍게 물었을 뿐인데도 워너비 하우스의 풍경이 줄줄 나왔다. 태국영은 부 드럽게 웃으며 이승도를 굽어보았다. 짙은 설렘과 열은 흥분으로 눈을 빛내 는 모양이 아주 보기 좋았다. 10년, 20년 후에도 복작복작 아이들 집 근처에 서 살고 싶어 할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한적한 노년을 꿈꾸고 있었던 모양이 다.
사실 태국영은 그렇게 하자고 했어도 들어줄 생각이 었다. 이승도에게 이 세 상에 피붙이라고는 아이들뿐이 었으니까. 고독과 허무가 몸에 배어 있는 그가 아이들에게 짙은 애착을 보이는 것으로 채우려 든다면,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해줄까.
“짬짬이 원하는 집 그림 같은 거 그려 봐. 내가 최대한 비슷하게 지어 줄게.
그러나 역시 저에게만 집중해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태국영은 도깨비 방 망이를 든 것처 럼 말했고, 이승도는 의욕을 보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인테리어도 직접 구상해 보자. 가구며 가전이며 스푼 하나까지 직 접 골라야지.”
“이번 주 내로 책자들 구해다 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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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그렇게 깨 볶는 미래를 그리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 다. 유모가 코디해 준 피크닉 차림으로 아이들이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사내 아이 둘이 목청 높여서 이것 좀 보라고 난리를 쳐 대서, 이승도는 몸을 돌렸 다. 그리고 그 순간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태국영조차 실없이 웃어버렸다.
“별이 드레스 입었어! 완전, 완전 귀여움! ”
태이경이 머리 위에 번쩍 들고나온 태은경은 연신 쿵쿵거리기 바빴다. 제
몸을 감싼 이상한 천 쪼가리의 정체가 영 낯설고 어색한 듯했다.
녀석은동화에 나올 법한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스에 자수까 지 들어간, 굉장히 화려하고 예쁜옷이었다. 게다가중세시대에 유행했을 법 한 선 캡 스타일의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아,세상에. 유모가 별이 드레스 언제쯤에나 입혀 보나손가락만 계속 빨 더니만,이렇게 이르게 입혀버릴 줄은꿈에도몰랐네. ”
이승도는 태이경이 데려다준 아기를 두 손으로 비행기를 태우며 연신 싱글 벙글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태국영은 이 치욕적인 순간을 미래의 태은경에 게 남겨줘야 한다며 열심히 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지금까지도 꿀벌 샷으로 고통으로 받고 있는 여은태는 치를 떨었다.
“또 저 짓이네! 이런 악마 같으니! ”
녀석은 휴대폰을 날려버리려고 나래차기를 했지만,태국영은 물론 가볍게 피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네 사진은승도가 찍었어. ”
“선생님은 찍기만 했지 그걸로 나 괴롭히진 않았거든? ”
“그리고 너도 방금 전까지 충분히 웃고 있었고. 같이 즐긴 주제에 카메라 들었다고 나를 악마 취급해? ”
옳은 말에 여은태는 말문이 막혔다. 그저 고까운 눈으로 노려보다 쳇 하며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뭔 놈의 게 말싸음까지 잘하고 난리다. 신은 역시 불 공평했다.
[드레스으.]
태은경은 이승도의 품에 안겨서도 자꾸만 불편한지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앞발로는 자꾸만 모자를 긁어 댔다.
“왜,별이 싫어?”
[싫어.]
대답은 매우 응골차고 거침없었다. 뚱하게 눈꺼풀이 굳어 있는 녀석은 결 국 모자를 끌어내려서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도 모자라 오랜만에 한껏 세운 발톱으로 드레스를 찢어발겼다. 몸이 자유로워지자 그제야 예쁘고 고운 눈으
로 이승도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적잖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아아. 제가 밤을 지새우며 직접 자수를 놓은 혼신의 드레스가……! ”
갓난아기에게 늘 상처받는 유모가 이마를 짚으며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 매 우 익숙해진 태이경은 이번에도 영차 하며 대수롭지 않게 그녀를 받쳐주었다.
“그래. 편한 게 제일 좋지. 어차피 옷은 나중에 크면 입어야 되니까. ”
이승도는 무조건 아기 편이었다. 제 눈에는 한없이 예쁘고 귀엽지만 정작 아기가 싫어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은태의 꿀벌 옷이나 기타 다른 동물들의 옷도 다시 보고 싶었지만 한 번 도 권하지 않았다. 녀석이 극도로 혐오감을 드러낼 만큼 싫어했기 때문이었 다.
이승도는 녀석을 어깨 위에 올려 두고는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했다. 빠뜨 린 것 없이 꼼꼼하게 리스트를 체크하는 동안 유모도 고용인들과 함께 아이스 박스들을 내왔다.
“박스 겉면에 찾기 쉽게 내용물 써서 붙여 놨으니 뭐든 찾기는 쉬울 거예 요. 저기 빨간 거는 승도 군 전용 간식들이에요. 크로켓이랑 고기파이 등등 많 이 넣어 놨으니 불에 잘 데워서 드세요. 저기 자루에 담긴 건 고구마랑 감자 고,고기는 뭐 아시다시피 오늘 도착한 생소고기고. 승도 군은 양념 바른 꼬치 도 좋아하니까 그것도 넣었고, 승도 군 좋아하는 과일이랑 와인도 챙겼고,
뭐,그렇습니다. 잘들 다녀오시고요.”
유모는 시름시름 앓듯이 대강 설명해주고 터덜터덜 사라졌다. 아무래도 첫 드레스 갈기갈기 의 여파가 꽤 오래가는 듯했다.
“그런데 짐꾼은 왜 아직 안 와. ”
태국영이 손목시계를 힐긋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별이를 담아 갈 크로스 백을 막 메고 있던 이승도가 ‘무슨 짐꾼? ’하고 물었다.
“바비큐 하자며. 거기 화로며 테이블이며 아무것도 없어. 부피가 꽤 커서 나 혼자 질질 끌고 가면 보기 흉하니까 짐꾼 하나 보내달라고 해 뒀거든. 성문 이는 휴가 중이 니까. ”
태국영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벙하니 입을 벌렸다.
맹세컨대 바비큐라고 해 봐이^ 그냥 휴대용 가스버너에 불판 올려서 고기랑 소 시지 같은 거나 구우면 됐지,하고 생각했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스케일 뻥 튀기에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정작 일을 키우는 건 너 같은데.
-라고 차마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때마침 그 짐꾼이 도착했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 짐꾼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은 태국영은 흙 퍼 먹은 마냥 사납 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아,염병할. 태현리,지금 나 엿 먹이는 거지? ”
이승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현리가 직접 오기라도 했어? ”
“차라리 직접 오는게 낫지.”
맛집은 물론 바비큐에도 조예가 깊으시다는 그 아리따운 여성분에게 태국 영은 성능 좋은 화로 세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여행 일정을 꼼꼼 하게 짜주어서 나름 신뢰가 깊었던 이승도는 태국영의 이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현관이 열리고 커다란 스탠드 화로를 짊어진 채 나타난 짐꾼을 보자마자,애석하게도 그의 기분을 단박에 이해하게 되었다.
“하하하하! 이 태준호, 고기 굽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신 건 또 어떻게 아시 고!”
그 정도로 징글징글하게 얻어맞아 놓고도 태준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등장 했다. 이승도 역시 확신했다. 이건 필시 태현리가 태국영을 엿 먹이려는 게 분 명하다고.
태국영이 변이를 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쳐들어와서는 한 번만 구경해 보자고, 딱 제가 투시만 할 수 있을 만큼 경계만 풀어달라고 찾아왔을 때부터 알아봤다. 정말 간 하나는 국보급으로 큰 여자였다.
그때 단칼에 거절당하고 쫓겨난 걸로 꽁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럴 성격 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승도가 알쏭달쏭해 하고 있을 때,태국영은 미치고 팔딱 뛰겠다는 심경 을 대놓고 드러내며 너 부른 적 없다고 일갈했다. 물론 간도 크고 눈치도 없
는 태준호는 가주님의 은혜를 부르짖으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른쪽 어깨에 다른 짐들도 일부 짊어졌다.
“갈 길이 머시니 어서 나가시지요. 제가또 지난겨울에 깡패 집단들 데리 고 관광버스 운전을 기똥차게 해내지 않았겠습니까. ”
태준호는 주렁주렁 짐을 매단 어깨를 으스댔다. 태국영이 입술을 비틀며 비 웃었다.
“지랄하네. 쌈질 벌이기도 전에 낭떠러지 추락사로 세상 하직할까봐 다들 불안했다더라.”
“에이,소문을 이상하게 들으셨군요. 국도 곡선 구간에서 제가 아슬아슬하 게 핸들 꺾을 때마다 스릴 넘 진다고 다들 좋아했었습니 다. ”
태국영은 한심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짧은 한숨을 지었다.
“진짭니다.”
태준호는 입꼬리를 쭈욱 내리며 결백을 주장했다. 더 말 섞기가 싫어진 태 국영은 그냥 대꾸 없이 뒤를 돌아 가장 무거운 아이스박스들을 어깨에 둘러멨 다.
“꼬맹이 넌 옷 가방이랑 공구 가방 들고,이경이는 세면도구 든 가방 들어. ”
는?”
이승도가 물었다. 태국영은 턱짓으로 태은경을 가리켜 보였다.
“넌개 챙겨 넣은가방들고.”
이승도는 그래도 제가 어른인데 어 린아이들에게 짐을 맡기는 게 영 내키 지 않았지만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약한 개체인 게 사실이라 또 딱히 할 말도 없었다. 태이경조차 쌀 한 가마니는 너끈하게 등에 메고 뛰어다닐 수 있을 정 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왜 인간일까.
이승도는 조금 이상한 한탄을 하며 아기를 크로스백 안에 넣었다. 유모가 특별히 극세사로 만들어 준 터라 보들보들 촉감이 좋은 가방이었다. 어차피 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이승도는 지퍼를 반 렘 정도 열 어 주었다. 그 사이로 아기가 쏙 고개를 내밀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승도를
올려다보았다.
[소풍!]
“그래,소풍.
이승도는 아기 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앞서 걷는 태국영의 뒤를 따랐 다. 아기는 연신 소풍, 소풍,하며 들뜬 목소리를 내며 가방 안에서 콩콩 궁둥 이를 실룩거렸다.
날씨는 매우 맑고 선선했다. 습함 없이 쨍하게 내려오는 햇살이 발끝에 영 롱하게 차이는 아침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즐거운 소풍이 될 것 같았다.
“우리 별이 삼촌 보고 싶어쪄요? 그래쪄요?”
태준호는 양어깨에 바리바리 짐을 실은상태에서 아기에게 연신 찝쩍거렸 다. 내내 시큰둥하게 무시하던 태은경은 자꾸만 말을 걸어서 짜증이 났는지 가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 렸다.
“우리 별이 부끄러워용? 삼촌이 너무 좋은가봐용? ”
제멋대로 해석하는 능력도 참 대단했다. 이승도는 허허로운 실소를 지었다. 즐거운 건 둘째 치고 꽤 시끄러운 소풍이 될 것 같았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계곡물에서도 아이들은잘놀았다. 물이 얕고 거친바 위가 많아 집에서처 럼 막 던지 면서 놀지는 못했지만 물고기들을 따라다니 며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나 보였다. 혹시 떠내려가진 않을까 걱정했던 태은경도 무리 없이 헤엄을 치며 놀았다. 자그마한 몸이지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 이 참으로 옹골찼다.
파라솔 그늘 아래 에어 매트를 깔고 누운 이승도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 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태국영의 팔 을 베고 그의 체온에 푹 감싸여 있는 상태였다.
[엄마인났어.]
멍한 시야로 아기의 작은 몸이 불쑥 침범했다. 머리맡에 선 녀석은 뺨에 머
리를 콩콩 부딪치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태국영이 말했다.
“때마침 잘 깼네. 애들 배고프다고 해서 좀 아까준호랑 쉼터에 먼저 내려 보냈어. 지금 숯에 불붙여서 식사준비 중일 거야. ”
“아……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야? 그냥 같이 내려가게 깨우지 그랬어. ”
“점심시간은 아니고,너무 격렬히 놀더니 금방 배고파해서. 그리고 넌 너 무달게 자더라. 깨우기 미안하게.”
이승도는 잠 덜 깬 머리를손목으로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어깨까지 덮 여 있던 얇은 담요가 허벅지로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잠들기 전까지는 그냥 선선했던 정도라 굳이 덮지 않았는데,아마도 자는 도중 체온이 떨어져서 태 국영이 도중에 덮어준 듯했다.
“가자. 벌써고기 올렸네.”
먼저 일어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승도는 한 손으로 아기를 감싸 품에 안 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아 단번에 몸을 세웠다.
[맘마?]
“응,별이도 배고프지? 오빠들이 먼저 맘마 준비하고 있대. 맛난 거 먹자. ”
[맘마!]
녀석은 신나서 목에 머리를 비볐다. 귀여운 궁둥이를 둥개둥개 얼려주며 공 터로 내려가자 태준호가 화로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에서는 깨끗하게 비어 있 는 접시를 든 채 군침을 흘리는 두 남자아이가 있었다.
두툼하게 썬 소고기 덩어리들이 숯불 위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중이었다. 한 일이라고는 그늘에서 노골노골 쉬다가 잠을 잔 것뿐인데 고기 냄새를 맡으 니 허기가 졌다.
“어서오십쇼!”
머 릿수건에 앞치마까지 제대로 두른 태준호가 손님을 맞듯 크게 소리쳤다. 마치 얼마 전 태국영과의 데이트에서 ‘이랏샤이마세! ’를 외치던 일본식 선술 집의 종업원을 보는 느낌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태준호는 겉만 살짝 익힌 고기를 집게로 집어 아이들의 접시에 툭툭 잘라
주었다. 꽤 노련하고 능숙한 솜씨였다. 고기 굽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큰소 리친 게 마냥 허풍은 아닌 듯했다.
아이들이 접시를 들고 평판테이블로 뛰어가며 얼른 오라고 재촉했다. 이승 도는 아이들이 앉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태은경을 테이블 위에 내려주었다. 빳빳한 테이블보 위로 기본 세팅은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얼음을 채운 통에 와인이 들어가 있었고,접시와 식기도 가지런히 놓였고,그 외 물컵 같은자잘 한 것들도 각자 자리에 있었다.
“어디 보자. 유모님이 승도 님 점심거리라고주신 게 어디 있더라. _아,이 거!”
태준호는 아이스박스 하나를 찾아 그 안에서 지퍼 백들을 꺼냈다. 된장찌개 와 양념 고기 등등 차례로 불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유모가 특별히 적어둔 요 리법을 보며 뚝배기에 알밥까지 어려움 없이 만들었다. 꼬치를 해치운 뒤 알 밥을 받으러 온 이승도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와,요리할 일이 없을 텐데 준호 씨 잘하시네요. ”
이미 재료 손질에 준비까지 다 마친 상태로 유모가 싸준 터라 요리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수고해 주는 것이 고마워서 건넨 인사치레에 가까 운 말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태준호는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 자랑에 더해서 태국영의 속까지 긁는 기 염을 토했다.
“제가 은근히 장기가 많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주 형님의 오른팔 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옆에서 제가 먹을 생고기를 약간만 구워서 접시에 올리고 있던 태국영이 그 순간 싸늘하게 눈을 치 떴다.
“뭐가 어쩌고 어째? 누가 내 오른팔이라고? ”
“그야 당연히 저죠. 그러니까 두분만의 여행에도 데려가시고 가족 나들이 에도 데려오신 거 아닙니까? ”
“내가 오늘 태어나서 가장 모욕적인 말을 들어버리네. ” 닥치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태준호는 늘 그랬듯 눈치가 없었다.
“차갑게 대하셔도 속으로는 절 가장 많이 아끼는 거 다 압니다. 형님도 참, 부끄러움 많으시긴.”
“정말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너 같은놈이 내 오른팔이랍시고 으쓱대는 꼴이. 너,경고하는데,어디 가서 그딴 소리 하다가 걸리면 뒤진다. ”
“후후후. 계속 이렇게 촌데레처럼 구시면,저도 비장의 무기 꺼내 듭니다? ’
비장의 무기?
태국영이 한쪽 눈썹을 칼처럼 날카롭게 올렸다. 어쩐지 매우 불길한 기운 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이승도는 알밥 뚝배기를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뭔가 말려야 할 분위기 같은데 위화감 없이 끼어들 수 있는 구멍이 좀체 안 보였다.
난감한 마음으로 무슨 핑계를 들어서 둘을 찢어놓을까 궁리하던 이승도의 눈에 때마침 거멓게 타들어 가는 고기가 보였다. 태국영은 오버 쿡은커녕 다 익힌 고기도 입에 잘 안 대는 까다로운 남자였다.
이 핑계가좋겠다.
이승도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만약준호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방금 네가 경건하게 씨불인,너한테 만 좋은 헛소리를 내가 받아들일 일은 절대 없을 거야. ”
태준호가 느물느물 웃으며 태국영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왕린한테 그러셨다면서요. 제가 그 얘기 듣고 감동 백만 그람 받지 않았겠 습니까. 제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 다니며 다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마십쇼. 제가 비밀이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으 니까요.”
그때 죽일 걸 그랬다.
태국영은 혈압이 용솟음치는 뒷목을 잡았다. 진심으로 후회 중이었다. 그 때 그냥 저 새끼의 목을 따 버렸어야 했다고.
“아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잖아. ”
태국영은 허공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 렸다. 지금은 이승도에 아이들
까지 있어서 좀 그렇지만 이후 기회는 만들려면 얼마든 만들 수 있었다. 하루 날 잡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면 그 누구도 모를 거다.
설사 누군가 눈치를 챈다고 하더라도 감히 제게 와서 따져 묻지는 않을 거 다. 증거를 남기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절정 수위까지 오른 분노로 태국영은 고요히 이성을 잃어갔다. 뭔가 심상찮 은 분위기를 감지한 이승도가 무작정 끼어들려는데, 머리 위에 찰싹 엎드려 있던 태은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사냥.]
응?
이승도는 눈을 한껏 올려 아기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자 녀석 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사냥가. 아빠.]
“아빠가 사냥을 간다고?”
[응. 이러케. 막.]
태은경은 발톱을 꺼내 허공을 삭삭 그어 보였다. 그러니까 대강 뜻을 때려 맞춰 보자면 아빠가 사냥을 갈 분위기 라고 느낀 듯했다.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흠. 여긴 사냥할만한 것이 마땅히 없는데요. 여긴 우리 영역이라큰 날짐 승들은 다 떠났고 기껏 해야 다람쥐 정도만 남아 있거든요. ”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친절히 설명하는 태준호를, 이승도는 자못 안타깝 고 한심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어떻게 자라면 저 지경으로 둔할 수가 있는가. 이승도는 대체로 온화한 성품에 걸맞지 않게 난폭한 생각을 떠올렸다.
너 말이야,너! 그 사냥감이 너라고! 이 멍청아!
“자기 명줄줄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형이네. ”
여은태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이 송곳처럼 귓구멍을 찔렀다. 그랬다.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 었다.
아니, 그렇다고 설마 정말 죽이진 않겠지?
이승도는 불안불안 의문을 떠올렸다가 금방 부정적이 되었다. 진짜 설마 화
나게 했다고 죽이지는 않겠지만,굉장히 아프게는 할수 있었다. 태국영은 그 럴 능력도 의지도 있는 남자였다.
이승도는 자연스럽게 끼어듦을 포기하고 태국영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테 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음산한 표정으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태 국영의 의식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안돼.”
태국영은 대답 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비딱하게 비대칭을 이룬 얼굴로 빤히 바라봐 왔다. 그의 침묵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혼나.”
[혼나. 아빠혼나.]
“진짜화낼 거야.”
머리에서 테이블로 폴짝 뛰어내린 태은경이 그 말에는 눈을 둥그렇게 뜨 고 올려다보았다. 저한테 한 말인가 싶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시선이 제게 와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안심한 녀석은 다시 떠들었다.
[엄마 화나. 별이 화내.]
그리고 배가 덜 찼는지 맥락 없이 맘마 타령을 해댔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서 잠깐 도망가고 싶었던 태이경은 접시를 들고 얼른 태준호에게 달려갔다. 태준호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성실하게 구운 고기를 접시에 올려주었다. 제 목숨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제 임무에 충실 하고 있는 남자였다. 참 쓸데없는 부분에서만 성실한 게 문제였다.
아저씨 지금 고기나 굽고 있을 때가 아닌데…….
태이경은 안쓰러운 눈길로 그를 일별하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별아,이거 같이 먹자. 방금구운 거라따끈따끈해. ”
태은경은 이승도와 태이경을 번갈아서 보다가 결국 태이경에게 쪼르르 달 려갔다. 녀석은잘게 잘라서 건넨 고기를 야무지게 잘 씹어 먹었다. 그동안 이 승도는 가만히 태국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집 나간 그의 이성을 살살 꼬셔서 데려오고 있었다.
“참아. 눈치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 ”
어설픈 미소와 함께 건넨 말에 태국영은 싸늘히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 경우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어.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로, 저 정도
면 완벽하게 사형감이고. ”
“거 참. 그러지 말래도. 기분 좋게 놀러 나와서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 어. 나름 우리 도와주겠다고 수발까지 들고 있는데. 국영아, 응?”
태국영은 길게 한숨을 지으며 깊이 눈을 감았다 떴다. 거의 진심이 될 뻔했 던 암살 계획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허나 그 반동인지, 제가 태준호라면 이를 가는 걸 잘 알면서도 이런 판을 만든 태현리에게 새삼 분이 치밀었다.
그 자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사내놈들 대하듯 어떻게 후려 펠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뒤끝 하면 뒤지 지 않는 태국영은 뭔가 교묘하고 짜증 나게 괴롭힐 방법이 없을까 골몰했다.
현리가 가장 진저리를 치는 게 뭘까.
싫어하는 것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아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태현리는 며칠 전 쌀국수를 먹고 싶다며 베트남에 갔다. 녀석이 가장 즐겨 하 는 거라면 두말할 것 없이 맛집을 찾아 그냥훌쩍 여행을 가는 거였다. 물처 럼 흐르던 생각 끝에 태국영은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라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일을 시키자.
여행이고 나발이고 짬도 안 날 정도로 회사에서 굴리면 되는 거였다. 태현 리는 가업에 몸을 담을 의무는 없었지만, 가주가특별히 명령한다면 못 시킬 것도 없었다. 태현리는 자신의 여유작작한 삶이 망가지는 것을 가장 끔찍해 할 것이었다.
너 한 번 제대로 일에 치여서 굴러 봐라.
태국영은 제 복수 계획이 완벽하다고 자찬했다. 본인이 태현리의 큰 그림 속 덫에 걸렸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때 테이블 위에 느슨하게 올려둔 팔뚝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힐긋 내려다 본 곳에는 태은경 이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며 신선한 핏기가 흐르는 고기 한 점을 물고 있었다.
“뭐.왜.”
영문을 몰라 묻자 녀석이 앞발만 깡충깡충 뛰었다. 그 모1法을 가만히 내려
다보던 태국영은 손가락으로 그 자신을 가리 키 며 물었다.
“나 먹으라고?”
[응.]
이게 무슨 상황인가 멀뚱하게 있는 태국영의 옆구리를 이승도가 쿡 찔렀다. 애가 주는 건데 빨리 안 받아먹고 뭐 하냐며.
그래서 태국영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쳤고 그 순간 녀석이 폴 짝 뛰었다. 태국영은 녀석의 입에서 어렵지 않게 고기를 물어 가져왔다. 몇 번 씹어서 삼키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녀석이 뿌듯하게 꼬리를 세웠다.
[맛있어. 기분 좋아.]
제 딴에는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 아빠를 좀 풀어주려고 한 것 같았다. 녀석 이 하이파이브 하자며 앞발 하나를 치 켜들었고 태국영은 고 자그마한 발바닥 에 제 손을 짝 부딪쳤다.
[하이, 파이브!]
이승도는 기특하고 예쁘다며 녀석을 안고 좋아 죽으려고 했고, 태국영 역 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흐름을 가만히 주시하던 여은태도 냉 큼 기회를 잡았다.
“선생님. 고기 내가구워 볼까? ”
뜬금없는 말에 이승도는 눈을 크게 떴다.
“은태 네가?”
“응. 보니까 별로 안 어려운 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노는데 저기 혼자만 계속 일하는 거 놔두기도 좀 그래서. 밥 먹여서 내려보내고 내가 해볼 게.,,
여은태가 싱긋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의 의미를 단번 에 깨달은 이승도는 크게 감탄하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좋은 방법이……!
어떻게 하면 태국영과 태준호가부딪치는 걸 미연에 방지할수 있을까고 민했던 것이 단번에 풀렸다. 역시 눈치도 빠르고 하는 짓도 예쁘고 처세술도
좋은 녀석이었다. 이승도는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생님도 같이할게! 나 혼자 몇 년 살아서 그런 거 좀 할 줄 알거든.
“좋았어.”
허락이 떨어지자 여은태는 얼른 일어나 태준호에게 달려갔다. 이제 식사하 고 가셔도 좋다고 전하자 태준호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우리 가주님을 위해서 라면 이 정도 노동력 봉사는 어쩌고저쩌고했다.
코끼리도 이 정도면 눈치를 챘겠다. 진짜복장이 터질노릇이었다. 여은태 는 이를 꽉 다문 채로 환히 웃어 보였다.
“아니. 진짜,가실 시간이에요. 선생님이 직접,태국영한테 고기를구워서 먹여주고 싶대요.”
그제야 태준호는 감명 깊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런 깊은 뜻이 숨어 있다면 야 더 제가 끼어서는 안 되는 게 맞았다.
“그래. 그럼 두 분의 알콩달콩 오붓한 시간을 위해 눈치껏 빠져 드려야겠 네.,,
그의 입에서 눈치껏 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저 어이없을뿐이었다. 하 지만 여은태는 목적을 이룬 것으로 만족하며 후련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태국 영이 화나면 얼마나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여은태에게 있어,저 태준호라는 남자의 존재는 매우 심각한 불안요소였다. 저 남자를 이 자리에서 제거할 수 만 있다면 얼마든지 귀찮음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잘했어,은태야.
이승도가 무언으로 뜻을 전하며 짧게 윙크를 해 보였다. 여은태도 햇살이 부서지듯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가 가득한 산으로 노을이 번져 내려왔 다. 배부르게 먹고 한참을 뛰어놀다 또 배부르게 먹고 쉬고 있던 참이 었다.
여은태는 석양에 젖은 숲을 길게 바라보다 변이를 했다. 이렇게 좋은 풍경 을 마냥 앉아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이경을 등에 태운 녀석이 태은경에 게도 함께 숲 구경을 하겠느냐 물었다. 늘 그랬듯 녀석은 금방 대답하지 않고 이승도를 돌아보았다. 이승도는 아기의 엉덩이를 격려하듯 톡톡 두드리며 오 빠들이랑 다녀오라고 말했다. 태이경이 녀석을 안았고 둘을 태운 여은태가 빠 르게 비탈을 올라 사라졌다.
남겨진 둘은 모닥불을 준비했다. 얕게 구덩이를 파서 터를 만들고, 태국영 이 오후에 한가득 패둔 장작들과 나뭇가지들을 그 안에 넣어 불을 지 폈다.
눈이 매울 만큼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태국영은 이승도를 뒤에 밀어두 고 마저 불을 키웠다.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에어 매트들을 올려 두는 것으로 캠프파이 어 준비는 대강 끝이 났다.
이승도는 매트 위에 태국영과 나란히 앉아 모닥불을 응시했다. 짙어지는 어 둠을 살라 먹으며 불길의 빛깔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여기가 예전에 집 있던 자리 맞지? ”
갑작스런 질문에도 태국영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응. 지금은 애들 단합대회 같은 거 올 때 운동장으로 쓰고 있어. ”
“단합대회도 해?”
“그냥 노는 거지,뭐.”
“모여서 뭐하는 건데?”
“보통 씨름이나 격투기 같은 거. 그냥 그때그때 지들끼리 하고 싶은 거. ”
“너도 같이?”
“이년 전쯤한번 구경은와봤는데 재미없어서 금방내려갔어. ”
그렇구나,하며 이승도는 다시금 공터를 휘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 이곳 은 화장실 말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부지 였다. 메마른 흙만 바람에 이 끌려 이리저리 떠돌던 광활한곳이었지만,지금은 텐트와스탠드 화로,그리 고 모닥불까지 자리해 있었다.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따뜻하고 정감 가는 풍 경이 되었다.
“생각보다 되게 넓어서 놀랐어. 덕분에 공간 제약 없이 예쁜 집 만들수 있
겠다.”
“예쁜 집 좋지.”
다소 영혼 없는 대답이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이승도가살 고 싶어 하는 집이라면 어떤 형태이건 전혀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모양은 생각 안 해 봤는데,테라스를 길게 빼서 바비큐 용 품들 뒀으면 좋겠어. 비 올 때나 눈 올 때 오늘처럼 둘이 불 피워서 이것저것 구워 먹으면 되게 좋을 것 같아. 뭔가 운치도 있을 것 같고. ”
“그럼 차앙을 테라스보다 길게 빼야겠네. ”
“응. 나무집이니까 우드 테라스로. 그리고 난 채식도 좋아하니까 텃밭도 크 게 만들래.”
“쉽지 않을 텐데.”
“상추처럼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차차 늘려 나가면 되지.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따서 씻어 먹으면 좋잖아. ”
“그래. 하고 싶은 건 다 해.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같이 공부하면서 도와줄 테 니까. 다른 건 몰라도 밭은 기가 막히게 갈아줄게. ”
참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구석이 많단 말이야.
이승도는 웃으며 말했다.
“둘이 밀짚모자 쓰고 텃밭 잡초나 뽑고 있으면 웃기겠다. ”
“난 그래도 멋질걸.”
“그래. 우리 국영이는몸빼바지만 입혀 놔도 근사하겠지. ”
태국영은 픽 웃으며 이승도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평온하고 편안한표정이었다. 과거의 끔찍했던 고요와는완전히 다른, 이 적적한안락 함이 참 좋았다. 이승도는 가만가만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애들이 좀 늦네.”
해가 완전히 떨어졌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석양 진 풍경이 꽤 좋대. 서울처럼 고층빌딩이 없 어서 노을이 쫙 퍼지는 게 한눈에 보이거든. 아마 녀석들 그런 건 거의 처음
볼 테니까,넋이 나가서 구경하다가 지금까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겠 지.,,
“진작 말하지. 그럼 나도 올라가봤을 텐데. ”
조금 아쉬운 듯한 말투였다. 태국영은 그런 이승도를 빤히 올려다보다 손 을 뻗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럽고 모양 좋은 손가락들이 뺨을 어루만졌 다. 올려다보는 시선은 따스하고 안온했다.
“산길이 좀 험해. 산책로는 딱 여기까지라 저 위부터는 네가 걸어서 올라가 기엔 좀 힘들 거야.”
그렇구나,하며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태국영이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다음에는 둘만 오자. 그땐 내가 너를 태우고 저 끝까지 데려다줄게. 꼬맹 이가우리 아이들을 데려가준 것처럼. ”
이승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간 몇 번 멀찍이에서 구경만 시켜 주며 손도 못 대게 하던 그가 자진해서 꺼낸 말들이 그저 놀라웠다.
“하지만 애들과 달리 너는 안장 같은 게 하나 필요할 거야. 내 몸에 묶고, 네 몸에도 묶고,절대 떨어지지 않게. 떨어져도 내가 다시 잘 받겠지만 그래 도혹시 모르니까.”
“???정말?”
“응. 정말.”
태국영은 어린애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승도는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냉큼 제 새끼손가락을 꽉 얽어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가 버리고 망 가뜨려 놓은 그 짐승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후회와 고통으로 점철된 그의 멍울 진 과거를 보듬어줄 날이 멀지 않았다 는기대감에.
“고마워,국영아.”
“별^?을.”
이승도가 웃었다. 태국영도 얼굴에도 미소가 어 렸다. 불 그림자가 짙게 일
렁여, 몹시도 아름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