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우리 연애하자 (22/25)

[BL] 백야 (광야 외 전) 2 (완결)

   7. 우리 연애하자

   대낮인데도 컴컴했다.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는 추적추적 흩날리는 비로 인 해 더욱 을씨년스러 웠다. 젖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은 조급함 없이 적 정속도를 지키고 있었다.

   태국영은 말없이 차를몰았다. 이승도는 도어에 팔을 관 채 내내 차창 밖 을 응시했고, 뒷좌석에 앉은 두 아이들도 오늘은 소란 없이 조용했다.

   라디오도 음악도 없는 고요 속에 문득 진동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승도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번쩍이는 액정이 영상통화를 알리고 있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아기 짐승의 얼굴이 두둥실 화면을 채웠다.

   《엄마아아.》

   “별이 안녕. 맘마 먹고잘잤어? ”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태은경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이승도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꼭 버려졌다가 다시 제 자리를찾아온 것 마냥,다시 잃어버릴까 봐무척 걱정이 되는모양이었다.

   태국영은 아기가 적어도 한살 정도는 채워야 부모의 부재를 서럽게 여기 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느 정도 사고가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무리에서 튕겨 져 나온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다고.

   “오늘은 밤에가.”

   《밤에. 밤에.》

“응. 연주 언니랑 저녁 먹고 요람에서 코 자고 있으면 깐 나타날 거야. ” 《짠나타나.》

   그래도 이 정도면 꽤나 의젓한 편인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고 있으면 금

방 나타날 거라고 약속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승도는 가 라앉은 분위기를 자각했다.

   “이경이,은태,배 안 고파? 휴게소라도 잠깐들를까? ”

   뒤를 돌아보며 묻자 둘 다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 더 말을 걸까 하다가 관뒀다. 처음이라 그런 거다. 두 번째, 세 번째는 마치 소풍 가듯이 가벼운 마 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차는 톨게이트를 지나고도 한참을 더 달렸다. 번잡하지 않은 시내를 지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젖은 풀잎들이 창백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다 왔어.”

   차가 멈추었다. 이승도는 선뜻 내리지 못하고 창밖을 응시했다. 블록으로 길을 내어 둔 비탈 위로 덩그러니 솟은 묘지가 보였다. 동그란 봉분을 생각했 는데 직사각형의 돌로 되어 있는모습이었다. 관리인에게 미리 언질을준 것 인지 급하게 설치된 듯한 캐노피가 하늘을 막아 빗물로부터 무덤을 지켜주고 있었다.

   먼저 내린 태국영이 보조석 문을 열었다. 아이들도 각자우산과 짐을든 채 그 뒤에 서 있었다. 멍하니 앉아만 있던 이승도는 그제야차에서 내려 태국 영의 곁에 섰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 리에 한 손을 감은 채 걸음을 이끌었다. 그가 장담했 던 대로 계단이며 풀 덮인 땅이며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이승도는 천 천히 걸어가 어머니의 묘지 앞에서 멈추었다.

   여은태가 재빨리 돗자리를 깔았다. 녀석은 태이경과 함께 유모가 바리바리 챙겨 준 술이며 음식들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태국영은 그 옆에서 향과 향로 를 준비했다. 둘 다 제사 같은 것은 한 번도 지내본 적이 없는 터라 격식 없 이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미리 얘기를 나눴었다.

   태국영이 먼저 향을 피워 향로에 꽂은 뒤 라이터를 내밀었다. 이승도는 돗 자리 위에 무릎을꿇고 앉아똑같이 향을 피웠다. 흐린 곡선으로 피어나는 연 기는 물 냄새와 더불어 진하게 코를 찔러 왔다.

   “나왔어,엄마.”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에도 의외로 담 담했다. 아마 그날 그렇게 한풀이하듯 목이 쉴 때까지 울어 두어서 그런 것 같

았다. 잘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어머니 앞에서 우는 얼굴은 보이기는 싫었 으니.

   “여기, 국영이. 그때 그 쪼그만 애가 이렇게 다 컸어. ”

   태국영은 인사 대신 술을 따라 작은 제사상 위로 올렸다. 이승도는 손짓으 로 아이들을 불렀다. 뭘 해야 하나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던 두 녀석이 냉 큼 양옆으로 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승도는 양팔로 아이들의 어깨 를 감싸며 말했다.

   “여기 작은 애는 이경이야. 엄마손자. 나랑 엄청 닮았지? ”

   “안녕하세요,할머니.”

   태이경은 배꼽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쪽은 이경이랑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은태고. 어른 될 때까지 내 가 잘 키워주기로 했어. ”

   “안녕하세요.”

   여은태도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두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향을 피 워 향로에 꽂았다. 태국영이 새 술잔에 술을 받아 이승도에게 건넸다.

   “작은 애는 너무 어려서 같이 못왔어. 되게 예쁘고 씩씩한 여자애야. ” 이승도는 묘지에 먼저 술을 뿌리고,다시 잔을 채워 한 번에 마셨다. 비리 고 독한 술이 목을 뜨뜻하게 지졌다.

   “엄마,나도 할머니께 술 따라 드릴까요? ”

   “그럴래?”

   태이경은 응,하며 술잔을 채워 어설프게 부었다. 이승도는 젓가락을 접시 위에 놓으며 말했다.

   “엄마가 뭘 좋아했는지 기억이 안 나. 늘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 줘서. 그래 서 무슨 음식을 가져와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어. 유모한테 그 말을 했더니 울먹이면서 그러더라고. 내가 좋아하는 걸 엄마도 좋아했을 거라고. 그러면 서 내가 잘 먹는 거랑 그 외 이것저것 다 만들어서 조금씩 싸 줬어. 그래도 엄 마한테 처음 상 올리는 건데 웬 건어물에 과일 같은 거나싸 가지 말라면서. ” 돗자리 위에 차려진 상은 일반적인 성묘 음식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유모

의 정성이 가득 담긴 진수성찬이 었다.

   “부디 엄마가 왔다 갔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영영 엄마를 못 보지만,엄마 라도 나를 보고 가면 참 좋을 것 같아. ”

   이승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큰절을 했다. 누구 앞에서 무릎 꿇어본 적 없 는 태국영도,그 뒤에 서 있던 아이들도 이승도를 따라 절을 올렸다.

   “보고 싶다,우리 엄마. ”

   건조하게 중얼거리는 이승도 대신, 태이경이 그 뒤에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승도에게도 엄마가 있었음은 너무나 당연한데,저는 이제껏 그 당연한 사실 을 까닿게 잊고 있었다.

   태이경은 엄마를 영영 볼수 없게 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저를 외면하던 엄마를 기다릴 때의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 니,비교할수조차 없었다.

   태이경은 어린 나이에 절망을 배웠다. 그리고 그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제 어미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찜 사진한 장도 없어서……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한번 이별하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설렘,기 대,실망,기쁨,슬픔, 그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고증발해 버린다.

   죽음이란 이렇게 남겨진 이를 공허하게 만드는 거였다. 들어줄수도,대답 해줄 수도 없는 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그 따뜻한품 대신 한줌 공기에 끌 어안겨야 하는 것.

   태이경은 슬픈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금 이승도의 곁에 앉았다. 그 리고 술을 가득가득 채운 술잔을 조심히 무덤에 뿌리며 간곡히 부탁했다.

   “할머니. 할머니도 우리 엄마가 많이 보고 싶으시겠지만,저도 그 마음 되 게 잘 알지만,그래도 엄마를 일찍 데려가주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즐겁고 행 복하게 잘 보살펴 드릴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구요. ”

   할머니 손자가 이렇게 법니다. 부디,부디.

   태이경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합장을 한 채 몇 번이고 그렇게 빌었다.

   본격적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더위를 끔찍해 하는 아이들 덕분에 에 어컨은 단 한 순간도 꺼지는 법 없이 돌아갔다. 추위를 많이 타는 이승도는 카 디건에 양말까지 갖춰 입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렵죠?”

   맞은편에 앉은 교수가 책을 덮으며 빙긋 웃었다. 이승도는 지친 듯이 펜을 놓았다.

   “네. 나이 들어서 공부하려니 머리가잘안돌아가네요. ”

   “그래도 꽤 잘 배우시는 걸요. 암기 력도 그 정도면 훌륭한 것이, 뇌는 아직 싱싱한 상태에 가깝습니다.”

   “흠.요놈 덕분일까요?”

   이승도는 책상 위에 동그마니 몸을 말고 있는 태은경의 머리를 톡 눌렀다. 태은경이 캬아 하고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이승 도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교수도 함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말년에 복이 참 많습니다. 찬바람 쌩쌩 날린다고 소문이 자자한 아기 씨 재롱부리는 것도 이렇게 눈앞에서 볼수 있고. ”

   이승도는 그런가요,하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교재들을 가방에 챙겨 넣은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킷 안에 손을 넣어 봉투 하나를 꺼내 내 밀었다.

   “이건 가주님께 전해주십시오.”

   …방금 전에 말년에 복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승도는 ‘하하…’ 어설프게 웃으며 사직서라고 큼지막하게 씌어 있는 봉투 를 받아들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태국영은 받자마자 늘 개봉 도 하지 않고 찢어버리는데,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이 교수는 매번 사람 좋게 허허 웃는 얼굴로 봉투를 두고 갔다.

   “그리고 이것도.”

   그리고 그가 배달해 오는 봉투들은 점점 늘어갔다. 오늘은 열세 개나 되었

다. 이승도는 봉투 무더기를 든 채로 그를 배웅했다. 교수가 나가자 유모가 쪼 르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세상에. 많기도 해라. 오늘은 몇 개래요? ”

   “교수님 것까지 열네 개네요.”

   “아무래도 노친네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본데요? ”

   태 가에 요즘 소문이 짜하다. 집에 틀어박혀서 가업은 나 몰라라 하는 태국 영을 끌어내기 위해 원로들이 제대로 담합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가장 가시 적인 저항으로는바로 이 ‘사직서 난’을꼽을수가 있었다.

   “유모. 보통 가주는 몇 살 즈음에 가업 승계를 마치지요? ”

   “보통 성년식 후 바로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가지요. 짧게는 이 년, 길게는 삼사 년 잡고 교육을 시 키다가 써먹을 만하다 싶으면 바로 실무진에 투입하 는 걸로 알고 있어요. 물론 실무진에 들어가서도 교육은 계속 병행해야 하고 요.,,

   “국영이가올해 만 스물셋이니까…… 딱 그즈음이긴 하네요. ”

   “에이,한참 지났죠. 가주님 머리도 좋으시니까 원래라면 한스무살 때부 터 회사에서 굴러다니고 계셨을 거예요. 다들 가주님을 워낙 무서워하니까차 일피일 미루다가 지금까지 온 거고요. ”

   “그런데 갑자기 왜들 이러시는 걸까요? 역시 나이 때문인가? ”

   “아닐 걸요? 승도 군 들어오고부터 우리 가주님 부쩍 착해지셨잖아요. 아무 리 개겨도 목숨은 보전할 게 뻔하니 노친네들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답니까.”

   이 사직서 뭉텅이는 그러니까 태국영이 착해진 대가라는 말이 렷다.

   “그래서 우리들사이에서 내기 판이 요즘 핫합니다. ”

   태성문이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이제 그 급작스런 출현에 놀랄 때는 지났다. 이승도는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내기요?”

   “가주님께서 얼마나 더 버티실지요. 저는 일 년에 걸었는데,승도 님도 끼 시겠습니까? 가장 가깝게 예측한 한놈한테 몰아주기거든요. 당첨되면 거의

로또입니다,로또.

   “아아뇨. 저는 됐어요.”

   웃으며 고개를 젓는 이승도 대신 그 옆에서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모 가 반응했다.

   “승도군. 취직 계획이 언제예요?”

   “…제 취직 계획이요?”

   “네. 별이 아기씨 좀돌보다가 나중에 동물원에 다시 취직할 거라고 하셨잖 아요.”

   “글쎄요…… 두 살 정도 되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

   유모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머 리를 굴렸다.

   가만있어 보자,지금 아기씨가 다섯 달이 다 되어가니까…….

   “저는 일 년 칠 개월! 저도 낄게요! 자,판돈이 얼만가요! ”

   유모가 기세 좋게 참전을 알렸다. 판돈이 크면 집문서라도 팔아버릴 기세였 다. 태성문은 그녀의 계산법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며 이 생각을 진즉 못 한 자 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어차피 승자는 유모님.

   태성문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판돈과 계좌번호를 알려주었다. 이제 점심 을 준비해야겠다며 주방으로 향하는 유모의 발걸음이 매우 흥겨워 보였다.

   이승도는 한숨처럼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고 있 을 태국영이 웬일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에 방문한 무리가 그에게 면담을 청한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은상태였다.

   “그런데 국영이는 아직도 얘기 중인가요? ”

   “예. 그쪽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핵폭탄급 재앙 이 몰아치고 있어서요. ”

   “상황이 많이 심각한 모양이죠? ”

   “흐음… 어느 정도까지 말씀드려도 될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

   태성문은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승도는 어차피 제가 캐물으면 태국영이 다 알려줄 거라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건 맞는 말이

었다. 태성문은 고개를 끄덕 였다.

   “자오추안이 결국 일본 종가랑 한 판 붙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게 우리 가 주님 일 때와는 완전히 급이 다르다네요. ”

   “이런,얼마나……

   “원체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보니까 부딪치면 무조건 전면전이 되는 바람 에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종가 측 쪽수가 많이 밀려서 여간 힘든 게 아니랍니다.”

   이승도는 난감하게 입술 안쪽을 씹 었다. 그 계기를 제가 만들어 준 게 아닐 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양메이의 눈빛 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생각이었다. 태국영도 말했었다. 자오추안이 제게 굳이 사건 조사 의 전권을 받아낸 것은 그게 가장 빠른 방법 이기 때문이 라고. 그게 없었더라 도 그는 분명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일본에 가 깽판을 놓았을 거라고.

   그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양메이가 그걸 절실하게 원하기 때문이었다. 제 가 과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아.터질분위기一”

   태성문이 깜짝 놀라 창가로 달려갔다. 그는 순식간에 커튼을 쳤고 다음 순 간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투명 커튼 뒤로 무언가 묵 직한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쿵,쿵, 하는 소리가 뒤를 이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뭐, 뭐예요? 뭐였어요?”

   얼떨떨하게 묻자 태성문은 반쯤 돌아서며 어깨를 으쪽해 보였다.

   “뭐겠습니까. 했던 얘기 또 하고,했던 얘기 또하던 가주님이 기어이 폭발 해서 던져버리신 겁니다. 두 시간 넘게 들어주셨으니 그래도 잘 참으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다 죽을 줄 알아! ”

   태성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처맞 기는 자오한테 처맞고 왜 저한테 와서 징징거리는 거냐고, 그는 미친 듯이 화

를 내고 있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좋게 좋게 얘기하니까 내가 개미 좆처럼 보여? 너넨 자 오추안만 무섭냐? 어디 오늘 미친개 떼러 왔다가 한마리 더 달고 가볼래? ”

   저 정도로 화가 머 리끝까지 치솟은 태국영은 실로 오랜만이 었다. 제 손목 에 남아 있던 남강우의 냄새를 여은태가 말끔하게 지워버렸을 때도 저 정도 로 화가 나 있지는 않았지 싶었다.

   “다 던졌나요?”

   “네.”

   하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어린 태이경조차 훌훌 뛰어넘어 다니는 높 이였다. 건장한 사내들이 저 정도로 잘못될 리가 없었다.

   “국영이 달래주러 가야겠네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위가 적잖이 난장판이 된 듯하니 그냥 여기서 기다리 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래요.”

   이승도는 고용인에게 따뜻한 레몬차를 부탁하고 티 룸으로 갔다. 티 테이 블 하나와 소파,붙박이 책장과 장식장이 전부인 작은 공간이 었다. 화려하고 큰 응접실들보다 이승도는 여기가 더 좋았다. 손님을 들일 일이 전혀 없는 곳 이라 지극히 개인적 인 장소처 럼 느껴지기 때문인 듯했다.

   자리에 앉기도 전,태성문이 먼저 발 빠르게 들어가 커튼부터 쳤다. 차를마 시며 테라스 너머 야외 풀장과 정원 풍경을볼수 있는 것이 이 티 룸의 큰장 점이었지만,그 여유를즐기려면 저 사내들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조금 기 다려야 할듯했다.

   이승도는 테이블 의자를 빼 앉았다. 졸랑졸랑 따라온 태은경이 허벅지에 폴 짝 올라앉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아기지만 아직도 두 손에 담길 만큼 자그마했다. 다리를 꼬아 주자 녀석은 허벅지 사이에서 안정 적으로 몸을 말았다.

   태국영이 내려온 것은 고용인이 가져다준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러닝셔츠는 온데간데없이 운동복 바지 하나만 달

랑 입은 차림새였다. 그는 지긋지긋하다고 중얼거리며 소파로 가 드러누웠다.

“달래준다더니 뭐해. 이리 오지 않고. ”

   그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최선을 다해서 기분을 풀어줄 생각이었 다. 이승도는 태은경을 머리 위에 올려 두고군소리 없이 그의 배 위에 앉았 다.

“고생했어. 심하게 싸운 건 아니지? ”

“너도 있고 애들도 있는 여기서 뭘 싸워. ”

“잘 참았어.”

“후회 중이야. 이렇게 거머리처럼 나올줄 알았으면 밖에서 보는 건데. ” 이승도는 태국영의 껑그린 미간을 검지로 꾹 눌러 짚었다.

“인상 쓰지 마. 잘생긴 얼굴 아깝게. ”

“난 인상 써도 잘생겼잖아.”

“안쓴게 더 낫다는말이지.”

   솔직히 태국영의 찌푸린 얼굴은 그 나름대로 섹시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고스란히 뱉어낼 생각은 없었다. 아기가 듣는 앞에서 은밀한 농담을 주고받 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저거 따라하는 거봐.”

   태국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태은경은 제 머리 위에서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제 이마를 앞발로꾹꾹눌러대는중이었다. 요즘 제 행동을 따라하는 데 재미를 붙인 녀석이다.

“우리 별이가아빠웃게 했네.”

[웃는다아.]

“아빠 머리 아파 보이는데 별이가 낫게 해줄까? ”

[아빠? 아파?]

“응. 아야.”

[아야. 안돼.]

“그치. 안 되지. 별이가 이케 머리 꾹꾹 해주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 ” 녀석은 한참 고개를 가곳거리다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태국영의 머리 위

로 뒤뚱뒤뚱 걸어가 앞발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이케?]

   “어어. 그르케. 잘하네,우리 별이.”

   [이케. 이케.]

   칭찬에 신이 난 녀석은 신명 나게 앞발질을 시작했다. 양발을 번갈아가며 힘차게 누르는 모습이 영락없이 고양잇과 짐승이 었다. 이승도는 소리 없는 웃 음을 터뜨리며 태국영의 몸 위로 쓰러졌다.

   “아.내 새끼지만 너무 귀여워.”

   대부분 무뚝뚝했던 태국영조차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도 저를 똑 닮은 아기의 예쁜 짓이 예쁘게 보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아예 태 국영의 몸 위에 길게 엎드려 턱을 괴었다.

   “별이 인간으로 변하면 어떤 모습일까? ”

   “나 같은 절세미녀가 되겠지.”

   “널 닮았겠지?”

   “뭐,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느낌상 그럴 것 같기는 해. ”

   “궁금하다. 빨리 보고 싶어. 한 열 살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으려나. ”

   “더 빠를 거야.”

   태국영의 대답에 이승도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어떻게 알아?”

   “네가 노상 곁에 붙어 있으니까. 갓난아기 때부터 등대 품에서 자란 아기 는 기혈이 뒤틀리기 전에 바로 잡히는 그 느낌에 매우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 변이도 더 쉽게 적응하지. ”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여은태도 제가 돌봐준 지 얼마 안 되어서 변이에 성공했었다. 잠시 고개를 주억거 리던 이승도는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너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줬으면 더 빨리 변할수 있었을까? ” “아마도.”

   “진짜 아쉽다. 어린이 태국영,청소년 태국영을 못 보고 지나친 게. 분명 엄

청나게 예뻤을 텐데.

   “별이가꼭 날닮아야겠네. 애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면. ”

   태국영은 거북함 없이 대꾸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마 위 로 내려온 제 머리칼을 흩어놓기까지 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미미하다면 한없이 미미한 그 변화의 증거가 괜히 가슴 찡하고 애틋했다.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느리게 전진해온 보람이 있었다.

   “사랑해,태국영. 넌 최고의 남자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이승도는 용기를 주듯 고백하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태국영 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연희는 요새 골머리가 아팠다. 연일 밀려드는 일본발 항의 서신에 마땅히 답변할 말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태국영이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 본인들끼리 잘 해결하시라 했고,다음에는 자오추안 도 때려잡을 놈 대강 때려잡고 나면 알아서 물러날 거니 방어를 잘하시라 했 고,또 그다음에는 무력으로 맞서는 것은 양쪽 다 출혈이 클 테니 좀 참아보시 라 했다.

   “아 염병. 이 짓도 진짜 더는못 해먹겠네. 알아서 꼬리를 내리건 박 터지 게 싸우고 패잔병이 되건 니들 꼴리는 대로 하라고 확 질러버려? ”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옆에서 그녀가 아끼는 화분에 엠플 영양제 를꽂고 있던 영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진작 그랬어야죠. 공들인 개소리에 뭐 그렇게 같이 정성을들이세요. ”

   “남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다.”

   “하지만 뭐,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깽판 놓으려고 작정 을 한 놈인데 태국영 하나 데려다 놓는다고 어디 해결이 될 일이랍니까. ”

   “해결이 되지.”

   “…에?”

   영은 의외의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희는 쯔쯔 혀 를 차며 손에 쥔 만년필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영아. 넌 그리도 정치를 모르니 천생 몸 쓰는 일만 해야겠다. ”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영은 뚱하게 볼을 부풀렸 다. 연희는 그런 영의 궁둥이를 찰싹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해 봐라. 그 심한 문전박대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태국영을 수시로 찾 아가 달달 볶고 있는 이유를. 며칠 전에는 태국영이 척추까지 부러뜨려서 담 장 밖에 내던졌고, 이제는 대문도 안 열어준다고 한다. 개들이 태국영 집 대 문 앞에서 거의 노숙 중이다. 왜 그러겠니? 태국영은 이미 끼어들지 않겠다 고 완강하게 거부를 한상태인데 뭘 얻겠다고? ”

   “글쎄요. 일단 당사자가 직접 가서 본인이 해결하겠다고 하면 자오추안에 게는 더 명분이 없어져서 아닙니까? 하지만 물러나라 한다고 얌전히 물러날 놈도 아니고, 괜히 일만 더 커지겠지요. 그래서 누이도 태국영이 가봐야 이 미 소용이 없다며 누차 회신을 보낸 거고요. ”

   “그래. 자오추안은 태국영이 끼어들어도 멈추지 않을 거다. 하지만 태국영 성격이 어떠니. 그것도 보통 아니게 개차반이다. 일단 손을 댄 것은끝장을 봐 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지. ”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쏘아 보내자 영은 빠르게 이해했다.

   “혹시,그걸 노리고 있다는 겁니까? ”

   “이제야 감이 오니?”

   연희는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깊이 기 대었다.

   “자오추안은 태국영이 아무리 좋은 말을 건네도 무시할 거고, 태국영은 그 에 화가 날 거다. 이미 피를 본 놈과 광기를 타고난 놈, 똑같이 개차반인 그 둘 이 폭력적인 무대에서 의견대립이 발생한다. 반드시 피가 뒤따를 것이다. 그 리고 주인공이 바뀐 무대에서 일본 종가는 유유히 퇴장할 수가 있게 되는 거 지. 태국영이 현해탄을 건너는 순간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

   “짜증 날 정도로 비열한그림이군요. ”

   “정치는 비열함도 겸비해야 하는 법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야.

   “흠. 헌데 그러면 태국영이 일본으로못 가게 우리가막아야하는 거 아닙 니까? 둘이 붙는다면 자칫 국가 대항전으로 번질 수도 있잖아요. ”

   “굳이 우리까지 나서서 들쑤실 필요 없다. 태국영은흔들리지 않을 테니. ”

   “설마태국영을 믿으십니까?”

   영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 리고 있었다. 연희는 어 린 동생을 바라보듯 따스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난 그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가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음은 조 금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지. ”

   태국영이 일본 종가와 마찰을 빚었던 2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 다. 당시 그는 여러모로 날카로운 상태였다. 짐승의 피가 짙을수록 광기도 짙 어지는 것은 당연한 섭리, 그는 저를 외면하는 등대의 주위를 맴돌며 그 광기 를 억누르는 데만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심신이 불안정하니 그 야말로 걸어 다니는 폭탄과 다를 바가 없었던 거다.

   “현명한 배우자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그의 곁에 있다. 태국영은 자오추 안이 제 영역을 직접적으로 침범하지 않는 이상 그를상대하려 들지도 않을 거야. 물론 생판 남의 일들에 간섭하면서까지 분란의 씨앗을 만들 리도 없고. ”

   태국영과 자오추안,둘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앙숙이라 말할 만큼 싫 어하지도 않았다. 서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자오추안 에게는 일본 종가와 맞붙는 것보다 태국영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더 부담스 러울 거고, 태국영 역시 자오 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처 지였다.

   “또한 태국영은 이 미 한 번 이승도 씨의 죽음을 겪 었다. 우습게 여겼던 원 한이 얼마나 지독한 칼이 되어 돌아오는지 뼈저리게 각인했지. 그는 두 번 다 시 그런 위험분자를 남겨두지 않을 거다. ”

   영은 납득했다는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승도가 윤봄이에게 심장이 뚫 려 숨을 거두었을 때, 태국영이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짐작도 하지 못 했었다.

   설마 그렇게 허무하게,망설임도 없이 제 생을 놓아버릴 거라고는.

   “그런데 누아 태 가와 자오 가 사이에 전쟁이 난다면 과연 어느 쪽이 승리

^?까요?”

   뜬금없는 궁금증이 든 영이 묻자 연희는 진지하게 관자놀이를 짚으며 생각 에 잠겼다. 머릿수로 따지자면 자오 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그리 쉽게 예측을 끝낼 일은 아니 었다. 태 가의 사내들은 우월한 전투 인자를 갖고 있었 고,그 정점에 선 태국영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글쎄. 내생각에……

   짧은 생각을 마친 연희가 입을 열었다. 영은 통찰력이 뛰어난 그녀를 집중 하며 바라보았다.

   “승자는 없을 것같구나.”

   둘 모두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을 것이다. 패자만이 남는 싸움이다. 그렇기 에 그들은 영원히 접점 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 둘 역시,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올여름 장마는 기세가 영 시들시들했다. 천둥 번개는 요란하게 치는데 정 작 빗줄기는스콜처럼 잠시 대지를 적시다다급히 물러갈뿐이었다. 찔끔찔 끔 내리다 마는 비에 뉴스는 연일 가뭄 소식을 전했다. 습도만 한없이 높아지 며 불쾌지수도 덩달아 하늘을 찔렀다.

   습도를 낮추기 위해 제습기를 풀 가동하며 실내 에어컨 희망온도는 더욱 낮아졌고,이승도는 아예 겨울옷들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기모가 들어간 긴 팔 티셔츠와 긴 운동복 바지, 그리고 수면 양말까지 신어야 그나마 살 만했다. 물론 그보다 더 효과가 좋은 것이 있었다. 태국영과 맨살로 부대끼고 있는 거 다.

   이승도는 낮잠에 든 태은경을 요람에 뉘어두고 태국영이 미리 데워 놓은 침대로 갔다. 겉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자마자 엄청나게 안락한 온기가 맨살을 감싸 왔다. 이승도는 냉한 손을 그의 등허 리에 비 볐다. 선득한

기운에 놀란 근육들이 조건반사로 꿈틀거 렸다. 그 느낌이 그냥 참 좋았다.

   “따뜻해. 역시 넌 최고의 난로야. ”

   “공치사는 필요 없고 난방비나 내. ”

   이승도는 옜다 하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태국영이 불만스럽게 한쪽 눈을 찌푸렸다.

   “상한 미끼네. 이미 잡은물고기라고 너무 푸대접인데. ”

   “아닐걸?”

   “물고기가 그렇게 느낀다고 하면 그런 거지 뭘 토를 달아. 빨리 더 좋은 먹 이를 내놓으란 말이야. 자꾸 이러면 확 어항 밖으로 탈출하는 수가 있어. ”

   “우리 일등급 물고기 탈출하게 놔둘수는 없지. ”

   이승도는 정성스럽게 다시 입을 맞췄다. 마치 기도하듯이 애틋하게 입술을 빨자 태국영은 더 가까이 밀착하며 고개를 깊이 꺾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 를 열고 들어온 혀는 뱀처럼 요사스러운 동선으로 입 안을 유영했다.

   녹아내릴 것처럼 느리고 따뜻한 키스였다. 단전에서 움튼 미지근한 열기가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단단한 허벅지가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 다. 위도 아래도 틈 없이 꽉 맞물렸다.

   태국영의 손끝이 은근한 유혹을 담아 브리프 밴드를 문질렀다. 타액을 잔 뜩 묻힌 입술은 뺨으로 옮겨갔다. 이승도는 그의 머리카락 안에 손을 묻으며 고개를 젖혀 들었다. 그러자 창문을 향한 눈 안으로 절정에 다다른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랬다. 아직 대낮이었다. 두 사내아이들의 수업이 끝날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국영의 손이 브리프 밴드를 열고 그 안으로 침 입하려는 순간이었 다.

   “그 치들 이제완전히간 거?竹 어제오늘통안 보이네? ”

   이승도가 나른함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국영은 다분히 입을 틀어막으 려는 의도로 다시금 키스를 시도했으나 처참히 실패했다. 그는 이승도의 손 에 막힌 입술을 못마땅하게 비틀었다.

   “기껏 무드 좀잡아놨더니 이럴 때 꼭 그런 걸 물어야겠어?

   “무드는 애들 셋이 다 잘 때 얼마든지 잡아. ”

   “말은 잘하지. 툭하면 먼저 곯아떨어지기 일쑤면서. ”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수절시키는 줄 알아.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면 나

꽤 잘 맞춰주고 있는 거잖아. ”

   “그건 이삼십 년 산 부부들 이야기고. 애가 둘이나 있어서 실감을 못 하나 본데 우리 아직 신혼이거든? ”

   어안이 벙벙해 말을 잃었다. 태국영이 너무 당당하게 주장하니 극심한혼란 이 뇌리를 덮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20년, 30년 후면 제 나이 가 쉰 중반에서 예순 중반이 었다.

   넌 물론 그때에도 정력이 넘치겠지만 나는…….

   그건 네 개인적 견해냐 아니면 너희 종족 평균치냐묻기가왠지 겁이 났다. 종족 평균치라면 빠져나갈구멍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그 남자들은 어떻게 된 건데. 완전히 철수한 거야? ”

   태국영은 이승도가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 가 주기로 했다. 피곤하다고 칭얼대면서도 작정하고 들이대는 날엔 꼭 받아주 니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 었다. 현재로는 말이다.

   “양메이가 임신했어. 그 소식 듣자마자 자오추안은 중국으로 돌아갔고. 이 제 그 지긋지긋한 놈들도 다시는 안 올 거야. ”

   “잘 됐다. 그럼 이제 싸움도 끝난 거지? ”

   “응. 완전히. 약을 만든 놈들이건 팔았던 놈들이건 어찌나 잘 조져 놨는지 내 쪽에서도 뭐 더 할 게 없을 정도야. ”

   “일본 종가에서 사상자도 나왔다며. 그것도 합의 잘 됐대? ”

   “자오가 한발 물러섰어. 소문으로는 목숨값 어마어마하게 배상해 줬다고 해.,,

   “그게 돈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야? ”

   “물론 자오가 엄청난 배상금을 문 건 맞을 거야. 그런데 내 생각에도 돈으 로 막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어. 종가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시간,충성심과 인내,그리고 절제가 필요해. 그저 어디 힘없는 가문 하나 통째로 뿌리 뽑는

것보다 종가에서 한 명이 죽는 게 더 타격이 크지. 지금 그것 때문에 일본도 꽤 시끄러워. 명색이 종가가 타격을 입었는데 고작 돈만 받고 끝낸 거냐고. 하 지만 종가는 침묵하고 있지. 분명,뭔가가 있어. ”

   태국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의혹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면계약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

   흐름 상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추측이 었지만 태국영의 눈동자는 흥미롭게 ^?짝였다.

   “똑똑하네,우리 승도. 그래서 개들이 이면계약서를 썼다고 친다면,자오가 과연 뭘 더 얹어줬을까? ”

   “막대한 배상금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하게 갑부인 자오추안 씨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까그렇게 쉽게 내준 거고. 아마은밀하게 뒷거래를 해 야 했던 그 무언가도 자오추안 씨에게는 크게 필요가 없는 거였겠지.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굉장한 가치가 있어야 거래가 성립할 테니까……. ”

   이승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오추안에게는 버려도 상관없지만 일본 종가에게는 사상자조차 묻어둘 만 큼 필요한 것. 그게 과연 무엇일까.

   “네가 양메이와 나눴던 대화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 봐. ”

   열심히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이승도에게 태국영이 슬쩍 힌트를 주었다. 그는 이런 화제로 이승도와 대화하는 것이 꽤 즐거웠다. 언제까지나 이방인처 럼 굴던 그가 성큼 제 생활에 가까워져 온 기분이 었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등대……?”

   이승도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리는 말에 태국영은 만족스럽게 입술을 휘 었다. 아마 이 장면을 원로들이 보았다면 감격에 겨워 큰절을 올렸을지도 모 튼다. 물론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럼 제발 가주 구실 좀 하라는 닦달이 더 심해질 테니까.

   태국영은 아직 가업에 뛰어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승도가 다시 취직 을 하게 되면 낮 동안은 내내 집을 비울 테니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 이승도를 끌어안고 한량처럼 뒹굴며 놀고 싶었다.

   “설마 메이 씨가 그때 말했던 등대를 넘겨줬다는 거。竹 ”

   양메이가 말했었다. 만약 그 여자가 더 비참해질 방법이 있다면,자신은 망 설임 없이 떠밀어 버릴 거라고.

   “글쎄. 확실한 건 협상을 한 당사자들만이 알겠지. ”

   “일단 네 생각도 그렇다는 거지? ”

   “현재로서는 그 가설이 가장 유력한 건 사실이야. ”

   이번 일로 일본 종가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 었다. 그들에게 최선의 방법은 태국영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아마도 무수한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또한 저들 종가의 힘이 그리도 약한 것에 치욕스러 워하며,일찍이 씨가 말라버린 등대의 존재를 어느 때보다 처절하게 아쉬워했 을 것이고.

   “그런 표정지을 거 없어,승도야.”

   태국영은 망연히 말을 잃은 이승도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만약 이 추측이 모두 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너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 야. 이전에 말했듯이 자오추안은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을 선점하기 위해 내 동 의를 구한 것일 뿐이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다 벌어질 일이었어. ”

   “그럼 그 등대는 어떻게 돼?”

   능히 예측해 볼 수 있는 문제였으나 태국영은 고개를 저 었다. 알고는 있지 만 대답해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 었다. 이승도 역시 어느 정도 예측되는 바는 있었다. 그렇게 팔려가듯,아니, 팔려가 버린 등대가 어떤 삶을살게 될 것인 지 이미 직,간접적으로 겪어 봤으니 말이다.

   “잔인하네.”

   혼잣말처 럼 중얼거 리는 이승도를 물끄러미 바다보다,태국영은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승도는 눈을 들어 태국영을 올려다보았다. 태국영은 꽤 진지한 얼굴이 었 다.

   “승도야. 양메이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을 것 같아?

   “메이 씨가 말해줬잖아. 미라처럼 피와 내장들이 다 빠져나가 있던 상태라 고.”

   “설마 그게 다라고 생각해?”

   그가 재차 물었다. 이승도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들어온 질문에 멍해 졌다.

   “그게다가아니면?”

   “그게 다일 리가 없어. 나는 집단으로 취한 짐승 새끼들이 얼마나 추잡해 질 수 있는지 잘 알아. 너도 완전히 모르지는 않을 테고. ”

   소화 안 되는 음식을 천천히 씹어 넘기듯,태국영이 뱉어내는 말을 느리게 곱씹던 이승도의 얼굴에서 빠르게 혈색이 빠져나갔다. 양메이가 은폐해 둔 진 실을 바로 꿰뚫었던 태국영에 비해 이승도는 그런 쪽으로 전혀 감을 잡지 못 하고 있었다.

   “양메이의 어머니는 숱하게 윤간을 당했을 거야.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들 어주지 않았을 거고. 아마 놈들이 질릴 때까지 그렇게 매음굴의 창부처럼 취 급되면서,피를 빨리고 산 채로 내장이 도려졌겠지. 죽은 피는 맛이 없으니까.

   “양메이는충분히 너에게 힌트를 줬어. 다만 네가그녀의 말을순진하게 액 면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일 뿐. ”

   “승도야. 그래도 양메이의 원한이 과하다고 생각해? ”

   너무 그럴싸했다. 아니,분명 그랬을 거라고 확신할수 있었다. 이승도는 늦 게나마 양메이에게 완전히 공감해 버렸다.

   그 어떤 복수가 그 피맺힌 한을 다 씻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낮은 지대로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어가다 문득 정신을 차 렸다. 태국영이 그답지 않게 이토록 양메이의 편을 드는 이유를눈치챈 것이 었다.

   ‘아니.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승도는 태국영 의 뺨을 감싸며 이마를 맞대었다.

   “내게도 만약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면 내 손으로 직접 끝을 봤을 거야. 기 억하지? 나는 네가 네 가족들을 산 채로 도륙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봤어. 무 섭고 끔찍했지만 절대,단 한 순간도 외면하지 않았어. ”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기억해. ’ 그가 희미하 게 중얼거렸다.

   “네 방식이 과했다고 생각한 적,한 번도 없었어. ”

   그를 달래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말은 아니 었다. 이승도는 위선적으 로 양메이를 재단하려 했던 스스로를 크게 책망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 혈육들의 피를 뒤집어썼던 태국영에게도 상처를 줄 뻔했다.

   “그때 네가 먼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네 아버지는 나도 죽였을 거야. 더 이 상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

   태국영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부친은 등대에 대한 환상이 없는 남 자였다. 이승도의 어머니를 단칼에 죽이라 명한 것이 그 방증이었다. 아마무 사히 다 자란 제가 얌전히 그 밀실에서 나왔더라면, 그는분명 일말의 망설임 도 없이 이승도의 목숨마저 앗아갔을 것이었다.

   “난 한순간도,내가 너를 미워하던 그 순간에도,네 생애 전부가 나를 구축 으로 이뤄졌다는 것만큼은 의심해 본 적이 없어. ”

   담담하게 이어가는 진심에 태국영은 결점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꾸며 낸 것도,일그러진 것도 아닌,그런 완벽한 미소였다.

   “맞아. 그것만 알아주면 돼.”

   그것만이 자신의 정당성이다. 압도적 다수가 다른 잣대를들이밀어 제 사람 을 핍박하며 소수로 만들려 든다면,그 다수를 으깨버리면 되는 거였다. 제 좁 은 세상에서 진리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네가 원하고, 널 위한 일이라면,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어. ”

   또한 그게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 네가 나를 그토록 증오하더라도,피맺 힌 목소리로 선언한 것처럼 영원히 용서해주지 않더라도,그거 하나만큼은 알 아주길 바랐던 시절이.

   네가 없는 나는 공기 한 줌보다 미약하고 하찮음을.

   태은경은 굉장히 성장이 빠른 편이 었다. 신체적 인 부분은 비교 대상이 없 어 정확하지 않지만,정신적인 성숙도를 보면 그 개월 수의 다른 아기들에 비 해 압도적인 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승도가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아기에게 자아가 생기기 시작했다 는 점이었다. 거울 앞을 지나칠 때면 매번 깜짝깜짝놀라서 막 덤벼들다가 냄 새를 맡다가 다시 덤벼들기를 반복하던 아기가 지금은 그게 제 모습이라는 것 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이승도는 그게 참 신기하고 기뻐서,아기가 거울을 빤히 보고 있을 때면 항 상 같은 질문을 했다. 태은경은 깨끗한 거울의 표면을 앞발로 톡 치며 대답했 다.

   [별이.]

   아. 귀여워. ……아 귀여워 미치겠네!

   그간 숱하게 아기 짐승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귀 여운 생명체는 처음이었다. 이승도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아기 를 달랑 들어 품에 안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예쁘냐는둥,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쁘냐는 둥 노래처럼 흥얼거 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우리 선생님 신났네.”

   “그러게. 엄마 춤추는 거 처음 봐. ”

   이상한 리듬으로 덩실덩실 놀이방을 활보하는 이승도를 보며 여은태와 태 이경이 키득거렸다. 둘은 대형 전함의 프라모델을 함께 조립하고 있는중이었 다. 신영애가 작은 로봇 프라모델을 선물해 준 이후 이 집에는 일주일에 서너 개씩 다양한 크기와 모형의 프라모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늦은 변이로 인 해 유독 손을 쓰는 놀이를 좋아하던 여은태가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 었다.

   “우리 이경이도 예쁘고,우리 은태도 예쁘고. ”

   이승도는 아이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양쪽 번갈아 쪽쪽쪽 입을 맞췄다. 난 데없는 베이비키스 공세에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나서 경쟁하듯 입술을 내밀었 다. 이승도의 가슴에 안겨 고걸 빤히 올려다보던 태은경도 앞발과 주둥이를 쭉쭉들이밀었다.

   “와아, 나 별이랑 뽀뽀했어! ”

   “어,나도. 나도.”

   여은태는 이것이 기회다 싶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흠 칫 뒤로 물러난 태은경의 콧잔등에 도둑 입맞춤을 해 버렸다. 태은경은 잠시 어 리둥절해 하다가 눈가를 좁히 더 니 가차 없이 앞발을 휘둘렀다.

   “선생님. 이제 별이도 내가 친근해졌나봐. ”

   뺨을 후려 맞고도 여은태는 헛소리를 했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하며 이승도와 태이경이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다. 불신의 눈초리에도 여은태는 굴 하지 않고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냐. 하악 안 하고 도망도 안 가잖아. ”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태은경은 여은태를 유독 심하게 경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곁에만 다가가도 제 딴에는 협박한답시고 몸을 부풀리고 꼬리를 치켜 들며 하악질하기 바빴었다.

   “그러네. 우리 별이 이제 은태 오빠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화 안 내네? ”

   태은경은 별말 없이 새초롬하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총총 달려가 다시금 거울 앞에 섰다.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며 제 모습을 구경하는 것 에 재미를 들린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두 사 내아이 사이에 완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오,멋지다. 이제 이렇게 큰 것도뚝딱 조립해 버리네? ”

   박스를 개봉할 때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부품들이 제법 그럴싸한 모 형으로 맞춰져 있었다. 전함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꽤 근사 해보이기는 했다.

   “응. 형 아가 손재주가 좋아서 진짜 금방 해요. 이 것도 형 아가 거 의 다 한 거

   “이게 크기만 컸지 조립 난이도가높은 건 아니어서. 먹선 작업만좀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래도 내일이면 완성되겠지만. ”

   그렇구나,하며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나저나 이 속도로 가면 장식장이 금방 다 차겠네. 완성품 많아지면 분류 별로 나눠서 진열해 둬야겠다. ”

   “응. 장식장들은우리 키 나무 반대편 벽에 두자. 저렇게 붙여놓으니까좀 안 예쁜 것같아.”

   이승도는 여은태가 가리키는 뒤편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말대로 현재 프라 모델 장식장은 키 나무가 있는 벽의 구석에 놓여 있었다. 몇 개가 될지 모르 니 일단구석부터 시작해서 늘려가자며 유모가 저기에 둔 것이었다.

   “그래. 너 좋은곳에 둬.”

   선뜻 대답하며,이승도는물끄러미 키 나무를응시했다. 태이경이 아장아 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모가 만들었다는 성장 나무였다. 한 달에 한 번씩 키가 자란 만큼 기둥을 올리고,동시에 나뭇가지와 사진 열매도 주렁주렁 달 리고 있는 나무는 그새 참 많이도 자랐다.

   “우리 이경이랑은태,참 많이 컸네.”

   주렁주렁 매달린 태이경과 여은태의 사진들이 참 보기 좋았다. 특히 대보름 을 기점으로 쑥 커 버린 두 아이의 성장 모습이 한눈에 보여 더 좋은 것 같았 다.

   “응. 별이 거 되게 귀엽지 않아요? 완전 찍끄매.”

   태은경 의 성장 나무는 아직 한 뼘밖에 안 되는 크기 였다. 두 오빠들 사이 에 작게 움튼 모양이 나무라기보다는 새싹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작은 나무 도 언젠가는 태이경만큼, 여은태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커질 날이 올 거였다.

   이승도는 어찐지 기분이 묘해져서 다시금 태은경을 돌아보았다. 태은경은 거울 앞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모습을 구경 하다가 질리면 으레 뛰어와또 낌딱지처럼 붙어있던 녀석인데, 저렇게 쳐다보 기만 하고 있으니 영 이상했다. 이승도는 녀석에게 다가가물었다.

   “별이 왜 그러고 있어?”

   녀석이 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표정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어 쩐지 조금 침울해 보였다. 이승도는 무릎을 굽혀 앉아 조심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생각해?”

   녀석은 한참 손길만 느끼다가 작게 소리를 냈다.

   [달라.]

   “뭐가달라?”

   [별이가 달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승도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재차 무슨 말 이냐 물었지만 녀석은 그저 다르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발톱 숨긴 발로 가슴팍을 꼭 쥐고 있는 모양도 어째 평소와 다른 느낌이 었다. 난감하게 아기 를 부둥부둥 보듬어주고 있을 때였다.

   [짠. 별이 안녕. 은태 오빠야.]

   커다란은빛 짐승이 불쑥 옆으로 나타났다. 느리게 고개를돌린 태은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가 이렇게 생긴 거 별이가그새 까먹었을까봐 변신해 봤어. 어때? 너 랑 색깔도 털 길이도 다르지만 나름 예쁘지 않아? ]

   여은태는 마치 뽐내는 것처럼 치켜든 풍성한 꼬리를 작게 살랑거리며 곁 을 왔다 갔다 했다. 태은경의 시선이 녀석을 따라움직였다. 은빛 털이 천장 등을 받아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아기 짐승의 까만 눈동자에 한가득들어 차 있었다.

   [별이 오빠등에 타 볼래? 이경이가 그러는데,내 털이 되게 매끄럽고복슬 복슬 느낌이 좋대.]

   여은태가 바짝 붙어 앉아 등을 보였다. 태은경이 망설이듯이 앞발을 꼼질거 리는 걸 내려다보며, 이승도는 그제야조금 감이 왔다.

   “은태 오빠가 별이랑 더 친해지고 싶은가 보다. 한번 타 볼까? ”

   녀석이 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래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듯했다.

이승도는 괜찮다고 격려하며 조심히 아기를 여은태의 등에 올려놓았다. 긴장 한 듯 네 발을 쫙 편 채 안착한 녀석은 여은태가 꼬리로 등허리를 다정하게 누르자못 이기는 척 그대로 엎어졌다. 발톱 숨긴 네 발이 풍성한 털 속으로 쏙들어갔다.

   [오예! 내가 별이를 태웠어! 이경아,나가자! 우리 나가 놀자! ]

   여은태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왠지 조마조마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그 광 경을 지켜보고 있던 태이경이 훌쩍 허공으로 뛰며 환호했다.

   “좋았어!”

   여은태와 태이경은 괴성을 지르며 우다다 뛰어나갔다. 이승도는 테라스로 나가 아이들이 드넓은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다 휴대폰을 들었다. 비디오카메라가 없어도 언제든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더위라면 질색하는 녀석들이 한낮의 태양 볕 아래를 뛰놀고 있었다. 깊은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뭇잎들을 한가득 묻혀 나오고,분수대에 뛰어들어 쫄딱 젖어 나오기도 했다.

   [선생님, 별이가즐거운가 봐! ]

   여은태는 이승도의 앞에서 낮게 폴짝폴짝 뛰었다. 한껏 들떠서 재롱을 부리 는 와중에서도 혹여 아기가 떨어질까 잔뜩 무게 중심을 낮춘 채였다. 그런 녀 석의 등에 열심히 붙어 있는 태은경은 무언가 신기한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바빴다.

   “형아,더 높이 뛰어 봐! 별이 떨어지면 내가잡아줄게! ”

   [그러자. 너만 믿을게.]

   여은태는 빠르게 질주해 가더 니 훌쩍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길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렸다. 작은 물보라가 여은태를 중심으로 허공에 퍼져나갔다. 눈 이 부신 광경이었다.

   이승도는 그렇게 촬영한 동영상들을 모두 태국영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가문의 사내아이가 성년식을 치르게 되어 멀리 가 있는 그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다음번엔 제가 직접 제 아이를 태우고 높이 날아 볼까,그런 생각을 했으

면 좋겠다고, 이승도는 생각했다.

   유모는 이상한 직업병이 있었다. 무언가 ‘공식적인’이라는 단어가 끼면 반 드시 코디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병이었다. 계곡에서 피 묻은 몸을 대강 씻어 내고 나온 태국영은 바위 위에 얹어둔 슈트케이스를 내려다보며 포기의 한숨 을지었다.

   “저희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성년식을 마친 아들을 둘러 업은 남자가 말했다. 등에 업 힌 아이는 머 리부 터 발끝까지 피로 칠갑이 된 상태 였으나 속은 모두 멀껑하게 돌아와 있었다.

   태국영은 손사래로 대답을 대신하고 슈트케이스를 열어 새 옷을 꺼내 입었 다. 그래도 날이 더워 재킷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셔츠와슬랙스, 베스트까지 갖춰 입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태국영 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산길을 껑충껑충 내려가며 이승도에게 전화부터 걸었 다.

   《이제 끝났어?》

   “응.지금 내려가는중.”

   태국영은 문득 발을 멈추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수화부에서 흘러나오는 잡 음들을 유심히 귀담아듣다 물었다.

   “너 지금어디야? 집아니지?”

   《와, 역시 귀 참밝다니까.》

   “당연히 혼자 나간 건 아닐 거고? ”

   《응. 성문씨랑. 나지금어디게?》

   “그것까지 내가어떻게 알아. 어딘데.”

   태국영은 픽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W 호텔라운지.》

   “W 호텔? 거긴 왜? ”

   《응. 별이가 오늘 오빠들이랑 처음으로 열심히 뛰어놀아서 그런지 일찍 잠

이 들었더라고. 그래서 너 마중 나왔어. 좀 놀다가같이 들어가려고.》

   마중이라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제가 있는곳은 경기 지역이고 W호텔은 서울이 니까. 하지만 태국영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금방갈게.”

   《응. 뛰어와.》

   전화를 끊자마자 태국영은 산책로를 버리고 험한 비탈을 택했다.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직선으로 내려가는 방향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연약한 나뭇 가지와 풀잎들이 태풍에 휘말린 것처럼 휘날렸다. 급할 것은 없었지만 뭉그적 거릴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태국영은 어둠이 짙어지고 있는 고속도로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발레파 킹을 맡기고 곧장 라운지로 올라섰을 때, 그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온갖 음 식 냄새들속에 이승도 특유의 달큼한 체향이 섞여 있었다.

   체온이 조금 높다. 냄새도 짙 었다. 술을 조금 마신 모양이 었다.

   태국영은 입구에서 체크인 확인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그를 발견 한 이승도가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예상대로 음식 접시 옆에는 와 인 잔이 놓여 있었다.

   “어서 와. 수고했어.”

   태국영은 이승도의 잔으로 가볍게 목부터 축이며 웃어 보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행차를 다 하셨을까. ”

   “단둘이 데이트나 해 볼까하고. ”

   “감격해서 돌아가시겠네. 이제야 어항 관리 좀 해볼 생각이 들었나 봐. ”

   의외로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그가 이번에도 가벼운 투정을 보였다. 한 번 그가 대차게 토라진 이후부터, 절대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바 쁜 와중에도 열심히 신경을 썼던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간 어항 안 에서 얌전히 저를 기다려 주던 예쁜 물고기를 좀 더 살찌우고 예뻐해 줄 때였

   깨어 있는 시간 전부를 제 곁에 있어야 안심하던 작은 아기가 종종 혼자 집 안을 활보하기도 했고, 오늘은 여은태의 등에 올라타서 신나게 놀기도 했 다. 태은경이 그렇게 주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자투리 시간들 을 그에게 열중하는 데에 쓰고 싶었다.

   성장이 빠른 아기니 이제부터는 부모와 조금씩 떨어져 있는 법을 배워도 되는 시기 였다. 제가 눈앞에 없어도 언젠가는 돌아와 준다는 것을 학습하면 제게 쏟아붓는 집착도 점점 줄어들게 될 터였다.

   “늦었지만,우리 연애하자. 국영아.”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태국영은 새 잔에 와인을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 다. 술병 표면으로 피처럼 붉은술 방울이 흘러 그의 손가락사이로 스며들었 다. 뜬금없지만 이승도는 문득 그것을 할고 싶다고 생각했다.

   “같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들도 찾아다니고,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드 라이브도 하고, 여행도 가고. 틈만 나면 얽혀들고, 끌어안고,그렇게. ”

   다른 연인들이 지겹도록 하는 그런 일상을 그와 함께 영위해 볼 생각이었 다.

   “한 열흘 전쯤 처음 만나서 첫눈에 반한 연인들처럼. ”

   태국영은 냅킨으로 느리게 젖은 손을 닦아냈다. 그의 눈빛이 미묘했다. 복 잡하게 엉킨 듯하지만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시선이었다. 그가 말했다.

   “나야 언제나 첫 연애에 빠진 애송이처럼 굴고 있으니까크게 달라질 건 없 겠네. 소꿉장난하듯 이것저것 하는 것도,뭐, 네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될 거고.”

   잠시의 공백이 있었다. 그는 목이 조금 갑갑한듯 셔츠의 윗단추를 하나풀 어냈다. 와인보다 더 붉은 혀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흠쳤다.

   “그런데 승도야.”

   태국영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찍어 누르며 상체를 크게 내밀었다.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짙은 음영으로 일렁거 렸다.

   “호텔에서 만난 애인이 너무 예쁜 말을 하면서 노골적인 향기까지 풍기고

있으니 내가 지금 좀 참기 힘든데. 풋풋한 데이트는 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 ^?을까.”

   짧게 시선이 오고 갔다. 그리고 잠시 후둘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 다. 태국영이 엘리베이터를 잡았고 이승도가 버튼을 눌렀다. 유리벽 바깥에 펼쳐 있는 그림 같은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룸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입술을 겹쳤다. 축축한 혀가 한 쌍의 뱀처럼 얽혀들었다. 오고 가는숨결은 누가 더하다고 비교하기 힘들 만큼 가 쁘고 뜨거웠다.

   이승도는 태국영을 벽으로 떠밀며 온몸을 밀어붙였다. 그는 세차게 혀를 빨 아올렸고 하나처럼 뭉친 살덩이를 잇새로 잘근잘근 물기도 했다. 타액이 흘 러 한껏 벌린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셔츠 아래로 들어온 손이 옆구리를 스쳐 젖꼭지를 문질렀다. 매끈한 지문을 거울처럼 품은 젖꼭지는 금방 부풀어 올랐 다.

   이승도는 그의 허벅지를 매끈하게 감싼슬랙스 위에 아랫도리를 비비며 헐 떡였다. 태국영이 엉덩이를 양손으로 붙들어 흔들었다. 답답하게 갇힌 성기들 이 서로를 향해 단단하게 몸을 키웠다. 그가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왔을 때였 다.

   “벗지 마.”

   이승도가 헐떡이며 태국영의 손목을 낚아챘다. 태국영은 금세 빨갛게 부풀 어 있는 이승도의 입술을 노려보듯 응시하며 왜,하고 물었다. 탁하게 들끓는 음성이었다.

   “이대로 있어.”

   이승도는 작게 속삭이며 그의 베스트와 버클을 풀어내고,바지 단추와 지퍼 만 내려 둔 채 다시 그를 부둥켜안았다.

   “흐트러지는 거보고 싶어.”

   유모가 정성스럽게 다림질한옷이 구겨지고,어디는뜯어지기도 하고, 또 흘러내리기도 할 것이다. 정사의 흔적들도 적나라하게 남을 게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흥분으로 뇌가 뜨거워졌다. 이승도는 근사한 슈트 차림의 그

가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미치게 보고 싶었다.

   “나는다 벗겨도 돼.”

   이승도는 셔츠 밑단을 끌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대로 턱 끝을 잘근잘 근 물자 태국영 의 목울대가 작게 끄덕 였다. 그는 간지 러운 것처 럼 눈을 가늘 게 좁히며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난 찢어두는게 더 취향이라.”

   즈으윽,촘촘하게 엮인 섬유가 찢어졌다. 툭툭 실 끊어진 단추들이 바닥을 굴렀다. 태국영이 고개를 꺾어 내렸다. 입술이 닿는순간 다시금 깊이 얽혀들 었다. 목구멍 깊이 홀러 고이는 타액을 몇 번이고 삼키는 동안 러닝셔츠와 바 지는 금방 처참해졌다. 마치 난도질을 해 놓은 것처럼 엉망인 꼴로, 이승도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키스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었다. 그저 그것뿐으로 온몸이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말로 첫눈에 반해 불같은 사랑을 시작 한 연인들처럼,더 그에게 닿고 싶었고 더 은밀하게 태우고 싶었다.

   “잠,깐.”

   이승도는 애써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태국영은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자 연스레 이승도의 입술을 다시 빨려 했지만, 이승도는 얼른 고개를 비틀어 피 했다.

   태국영이 또 잔뜩 쉰 목소리로 ‘왜’하고 물었다. 이승도는 그대로 바닥에 무 릎을 꿇어앉아 단단한 그의 허벅 지를 부둥켜안았다.

   “가만있어.”

   풀어진 지퍼를 벌리자 그 사이로 크게 부풀어 올라온 팬티가 보였다. 이승 도는 그곳에 뺨을 비비며 짧고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너무 좋아,이승도는 속삭이듯 중얼거 렸다. 잔뜩 풀린 눈으로 팬티 위를 할 아 대며 축축하게 만들었다. 젖은 옷감은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의 윤곽을 더 뚜렷하게 만들었고, 이승도는 그 모양에 취해 다시금 입술을 벌렸다.

   고개를 꺾어 그의 기둥을 입술로 물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것은 혀를 움직 일 때마다 뚫고 나올 듯이 꿈틀거 렸다. 곧 그것이 뚫고 들어올 아래가 저 릿저

릿 울렸다. 진회색의 팬티가 흠뻑 젖어 검정색을 띠는 동안 제 아래도 물컹물 컹한 점액질이 채웠다. 이승도는 바닥에 무릎을 댄 다리를 넓게 벌리며 엉덩 이를 들썩거렸다.

   태국영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미간을 좁혔다. 이렇듯 노골적이고 자극적 인 육탄 공세를 받으면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진다. 대뜸 엎드려 구 멍을 내보이는 것보다는, 이렇듯 엉망인 꼴을 하고서 미친 것처럼 제 좆을 갈 구하는 쪽이 몇 배는 더 음란해 보였다.

   태국영은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손을 이승도의 머리카락 깊숙이 파묻었다. 이승도가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을 들었다. 열병을 앓듯 잔뜩 흐린 눈이었다.

   “국영아.”

   응,대답했다. 이승도가풀어져 있는 태국영의 버클을잡아 내렸다. 아주 약 한 힘이었지만 태국영은 그대로 함락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승도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걸어 허벅지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손을 가 져와 찢어진 바지 위로 이끌었다.

   “나 너무 젖었어.”

   속삭임 번지는 귓바퀴도 붉었다. 태국영은 열게 상기된 얼굴을 내려 이승도 의 목을물었다. 세찬 맥박이 뛰는 혈관 위에 이를세웠다. 흡혈귀처럼 깊이 빨아들이자 이승도가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구멍과 그 주변의 천 조각들은 은밀한 체액으로 흠책 젖 어 있었다. 미끈거리고 축축한 입구가작게 벌어졌다가 꽉 조이길 반복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대로 박아 넣어도 탐욕스럽게 삼켜줄 것 같았다.

   태국영은 작게 욕설을 깨물었다. 그는 팬티 안에서 성기를 꺼내 다짜고짜 그 구멍에 맞췄다. 굵은 귀두가 요동치는 내벽을 쿡 찔러 벌렸다.

   품에 안긴 몸뚱이 위로 짧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더욱더 매달 려 온다.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적극적으로 구멍을 연다.

   ?얼르,,

   이승도는 태국영의 두 뺨을 감싸 키스했다. 뜨거운 숨결이 혀와 함께 입 안

으로 흑 밀려들어오는 순간 태국영도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이승도는 두 눈을 꽉 감으며 입을 벌렸다. 아무리 젖었어도 처음은 늘 버거 웠다. 빠듯한 질감이 망설임 없이 내벽을 벌리고 들어왔다. 숨을 멈춘 목구멍 안으로 짧은 신음들이 튀었다.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태국영의 어깨에 손끝을 세웠다. 앞섶 풀린 베스트 가 손 안에서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는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셔츠 칼라를 한 손으로 잡아 뜯어내듯 벌렸 다. 단추 하나가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가 한쪽 어깨를 감싼 베스트와 셔츠 깃을 벌리며 탁한 목소리를 흘렸다.

   “씹고긁어 줘. 끊임없이 네 거라는자국을남겨. ”

   찰나로 끝날지라도 이승도가 남겨 주는 영 역표시를 원했다. 이승도는 꿰뚫 린 아랫도리를 떨면서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내보인 백옥 같은 살결을 힘껏 깨물었다. 탄력적인 피부에 잠시 머무는 잇자국을 열심히 빨고,그 위에 혀를 문질렀다.

   하아…… 그가 저 린 숨결 한 줌을 허공으로 쏘아 보냈다. 그리고 구멍 안 에 물려둔 성기를 단번에 빼서 곧장끝까지 박아 넣었다. 그의 골반이 엉덩이 아래를 강하게 때렸다.

   “아……!”

   눈앞이 번쩍하며 귓가에 소란스러운 불꽃이 튀었다. 날벌레들이 감전되어 죽듯이 이상한 소리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속절없이 몸이 덜컥댔 다. 이승도는 그의 구겨진 옷을 한 움큼 쥔 채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초반부터 빠르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밖 으로 흘러 그의 어깨에 작은 점을 만들었다. 바늘처럼 돋아난 감각들이 일제 히 기립했다. 두려울 정도로 오싹한 쾌감이 척추를 관통했다.

   이승도는 채집되듯 중심을 뚫려서 흔들리는 그대로 넝마가 된 제 셔츠 자 락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엉망이 된 옷 위로 미친 듯이 맨가슴을 비볐 다.

   “아,국영… 아……!

   그의 한 팔이 등허리를 받치며 크게 허리를 튕겼다. 연달아 퍽퍽 들어오는 그움직임에,깊숙이 숨어 있던 성감대가 그의 귀두를잡아먹고 환희의 비명 을 질렀다.

   이승도는 질끈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이 묽은 덩어리로 흔들렸다. 눈 동자를 찌르는 불빛들이 사이키 조명처럼 돌아갔다.

   그가사냥중인 맹수처럼 헐떡이며 귓불을 깨물었다. 그 따끔한감각, 귓구 멍을 파고드는 그의 신음 섞인 숨소리조차 등허리를 저릿저릿 후려쳤다.

   이승도는 그가 쉴 새 없이 몰아붙일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눈에 고여 있던 물기가속눈썹과 눈가로 퍼져갔다.

   시야가 돌아오자 역광에 물든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바닥에 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둠보다 더 짙은 눈동자가 선득하게 번들거리며 내려다보 고 있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마치 화가 난듯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빨랐던 리듬이 한 순간 속도를 늦췄다. 그는 귀두만 입구에서 아슬아슬 넣 었다 뺐다 반복하며 새빨갛게 혈관이 오른 입술을 움직 였다.

   “맨살에 닿게 해줄까?”

   그의 손끝이 찢겨진 셔츠의 경계를훑어 내리고 있었다. 이승도는 구겨진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

??"

   너덜너덜한상태로 몸에 걸쳐져 있던 것들은 금세 조각이 나 바닥을 뒹굴 었다. 이승도는 느리게 흔들리며 그의 품 안에서 홀로 알몸이 되었다. 비부를 농락하는 그의 성기는 음란하게 조명을 튕겨냈다.

   못 견디게 흥분이 차올랐다. 허겁지겁 그의 등을 껴안았다. 태국영은 그것 이 신호인 것처럼 다시금 강하게 아랫배를 쳐 올렸다. 바들거리며 허공을 헤 매던 다리가 허리를 감싸자 그의 목 안에서도 진한 신음이 타올랐다.

   태국영은 불편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타락적인 구도의 중심에서 잔뜩 달아올라 있는 이승도의 환상을 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가 흥분해 있는 만큼 제게도 그 불길이 고스란히 옮겨오고 있었다.

   태국영은 제 소매 단추만 이로 물어뜯었다. 뱉어낸 단추들이 아무렇게나 맨 바닥을 나뒹굴었다. 딱 맞게 조여 있던 소매가 풀리자 한결 나아졌다.

   태국영은 깊이 숨은 이승도의 성감대를 연신 들이박았다. 그때마다 탁 풀 린 소매가 나풀거리며 팔뚝을쓸고 내려왔다. 팔꿈치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 린 옷자락이 또 거슬려, 그는 소매 아래를 더 찢어냈다.

   그는 두 팔로 이승도의 상체를 감아 조였다. 구속당하듯 꼼짝없이 갇힌 몸 은 거친 움직임에 옴짝달싹 못 하고 움찔거리기만 했다.

   “으,홋,아…… 더,더……!”

   뿌리까지 먹일 때마다 이승도는 엉덩이를 비벼댔다. 허리띠와 지퍼에 긁혀 아플 텐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그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치환해 환희에 떨고 있었다.

   태국영은 한 손으로 이승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열기가 그곳에 잔뜩 몰렸 다. 보들보들했던 살갗이 거칠다. 지퍼가 문제였다. 그는 바지 섶을 통째로 뜯 어내 던졌다.

     w응 으으?.?홋 w

   촉감이 좋아지자 이승도는 요부처럼 엉덩이를 아랫배에 비벼댔다. 끝까지 넣어 얄게 들락거리는 것조차 못마땅한 것처럼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얼굴은 붉은 열꽃이 피어 있었다. 태국영은 그 탐스런 빛깔에 입술을 물었 다. 혀끝에 닿는 맛은 조금 짭짤했다. 태국영은 쾌감 섞 인 눈물을 낱낱이 빨아 먹었다.

   아,이승도가 날카롭게 목을 올렸다. 젖은 사타구니가 일순 크게 벌어졌다. 내벽이 흡착기처럼 성기를 쥐어짰다. 태국영은 음란한 점막을 여러 각도로 무 자비하게 들쑤셨다.

   사정은 갑작스러웠다. 이승도는 울먹이면서 어깨를 웅크렸고 온몸으로 태 국영을 감싸 안았다. 그대로 터져 나왔다. 이승도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젖혀 들었다. 어른어른 고인 눈물이 툭 떨어져 귓바퀴를 때렸다.

   성기를 가득 품은 내벽이 꽉 조여들자 태국영도 불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 다. 그는 딱딱하게 경직된 아랫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가장 깊은 곳에서 쏟

아져 나온 정액이 잔뜩 수축한 내부를 적셨다.

   단발적으로 몰아치는 절정은 날짐승의 숨결처럼 불규칙하고 뜨거웠다. 태 국영은 입술 안쪽을 씹으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흠뻑 젖은 속살이 토정하 는 성기를 더욱더 어릇한 질감으로 조이고 있었다.

   “아……

   태국영은 짧고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승도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젖먹이 아기처럼 허겁지겁 빨아 대는데도 이승도는 그저 간헐적으로 비음만 흘릴 뿐 반응하지 못했다.

   태국영은 공을 들여 이승도의 얼굴을 핥았다. 벌어진 입술 선을 꾹꾹 덧그 리며 할았고, 뜨끈한 뺨도 입술로 애무했다.

   허리를 휘어 감고 있던 다리가 풀썩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승도는 혼몽하 게 흐려진 눈빛으로 태국영을 올려다보았다. 섹스 도중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첫사랑에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일렁이는 눈동자에는 한없이 깊은 애정이,느리게 입맞춤을 찍어 내리는 입술 에는 눈물겨울 만큼 조심스러운 열정이 짙은 농도로 녹아 있었다.

   이승도는 그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도 축축했다. 제 눈물이, 타액이,땀이 옮겨간 것이었다. 태국영은 그 접촉에 더 고개를 들이밀었다. 길 이 잘 든 맹수가 갑옷도 벗고 급소도 모두 내어준 채 온순하게 제 전부를 맡 겨 왔다.

   “내 휴대폰……

   이승도는 잔뜩 갈라져서 나오는 제 목소리에 조금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조금 일찍 싸 버린 게 많이 아쉬웠지만 태국영은 가볍게 키스하고 천천히 허 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때, 이승도가 다시금 다리로 허리를 감아 왔다. 의아하게 눈을 들 자 이승도는 아직 열기가 남은 눈가를 녹을 듯이 접고 있었다.

   “한번도 진동 안 울렸지?”

   그랬나.

   태국영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체액이 비벼지는 음탕한 소리와 거

친 숨,신음,그런 것 외에 다른 잡소리는 나지 않았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럼 좀 더 느긋하게 들어가도 되겠다. ”

   이승도가 돌려 말한 것을 태국영이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태국영은 허 리를 감고 있는 이승도의 다리를 끌어와 벌렸다. 그가 허벅지 안쪽을 길게 쓸 고 내려와 비부를 매만졌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곳에 그의 손길을 척척하 게 묻어 왔다.

   그가 고개를 내려 키스했다. 폭풍처럼 사나웠던 열기가 한 풀 식은 뒤의 키 스는 솜사탕처럼 달았다.

   절정에 수차례 오른 이승도는 몹시 피로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 로 충만한상태였다.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는 데에만 집중한 시간들이었다.

   집에서는 아무리 태국영이 철저하게 소리를 막아도 무언가 불안했다. 심적 으로 방어적인 부분이 생기다 보니 마음껏 본능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근처에 가서 아무거나두 벌만사와. ”

   태국영은 침대 곁에 걸터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쪽으로 돌아 누운 채 그의 뒷모습을 묽게 풀린 눈으로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가 어깨 너 머고개를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동시에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 역시 오랜만에 개운하 고 만족스러운 얼굴이 었다. 속된 말로 완전 기분 째져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 어 오는 손길도 굉장히 다정하고 포근했다.

   그가 느끼는 행복이 곱절이 되어 전신을 아늑히 감싸 왔다. 이승도는 결심 했다. 태국영과의 연애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서 그 최상단에 ‘서울 호텔 투 어’를써 두어야겠다고.

   “그래? 잘했네. 삼십 분 뒤에 가지고 올라와. ”

   태국영이 드물게 칭찬의 말을 했다. 아무래도 태성문이 눈치 빠르게 새 옷

을 사 둔 모양이었다. 노상 표정 없는 얼굴이 꽉 막히고 무뚝뚝해 보이는데, 가만 살펴보면 그는 말솜씨며 행동이며 은근히 센스가 넘치는 구석들이 있었 다.

   “뭐,휴가?”

   태국영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잠시 태성문의 말을듣고 있던 그는 다시 금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성문이가 휴가 달라는데?”

   “???응?”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승도는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그걸 오해한 태국영이 ‘안 돼. 승도가 싫 대.’라고 큰일 날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제 의견을 물었던 모양이었다. 이승 도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누가 싫대! 아냐,가시라고 그래. 가시라고!”

   “가래. 한 일주일 놀다 와. ”

   “짜게 일주일이 뭐야. 그간 고생 많이 했는데 아예 한 달쯤 푹 쉬다 오라고 해.,,

   이승도가 참견하자 태국영은 바로 발을 바꿨다.

   “들었지? 한달 줄게.”

   수화부에서 무언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 는 청력은 없었지만, 이승도는 태성문이 사랑한다는 둥 형님밖에 없다는 둥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국영이 가차 없이 ‘꺼져.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 다.

   전화를 끊고 일어선 그는 여전히 부랑자 같은 차림이었다. 위아래 할 것 없 이 여기저기 구김이 가 있었고 희뿌연 액체들도 군데군데 흩뿌려진 채였다. 이승도는 뒤늦게야 조금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그 모습이 또 보기 좋아 멋쩍 게 웃었다.

   “너길에서 노숙한애 같아.”

   그는 베스트와 셔츠를 차례로 벗어 던지며 픽 웃었다.

   “노숙의 결과치고는 너무 황홀한데. ”

   “노숙 말고 앞으로는 종종 숙박 애용하자. 한…… 일,이주에 한 번 정도? ”

   “일주일에 한번.”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 태국영은 얼른 조정점을 제시했다. 이승도는 잠 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보름은 피해서. 잠은자지 말고 이렇게 쉬다 가는 걸로. ”

   슬랙스와 속옷까지 벗어 내린 그가 뭔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야.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어째 돈 없는 대딩 커플 같다. 막 알바해서 번 돈으로 대실만 잠깐 해서 다급하게 잉야잉야 하고 쫓기듯 나가는 거 같잖아. ” “가난한 대딩 커플은 이런 방못잡지. ”

   “뭐.그건 그렇지만.”

   태국영은 얇은 이불을 들춰서 이승도를 훌쩍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이 승도는 그의 목에 한 팔을 감으며 편안히 늘어졌다.

   “힘 좋은 애인 둬서 참 행복하네. ”

   “힘도 좋고 그 짓도 잘하는 애인이라고 해 줘. ”

   “힘도 좋고 그 짓도 잘하는 애인 둬서 미치도록 행복해. ”

   앵무새처 럼 따라해 주자 태국영은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칭찬에 기뻐하 는 어린애 같았다. 귀여운 것, 이승도는 속으로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따뜻한 물을 받아둔 욕조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힘 조절을 잘하는 손끝도 참 아무지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근육을 푼 다음에는 가볍게 샤워를 했고, 태성문이 옷을가져올동안소파 위에 뒤엉켜서 노닥거렸다.

   장난치듯 입맞춤이 오고 갔다. 태국영은 잔뜩 부은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가 한 대 얻어맞았고, 기왕 나온 거 하루 묵고 가는 게 어떠냐고 말을 꺼냈다 가 웃음 섞인 핀잔을 들었다.

   정확히 30분 뒤 태성문이 무늬 없는 감색 폴로 티 두 개와 베이지색 면바 지,그리고 속옷 두 개를 가져다주었다. 황송하게 태국영의 수발을 받아 손

안 대고 옷까지 다 입은 이승도는 태국영이 폴로 티에 막 목을 집어넣을 때 가만히 그를 불렀다.

   “국영아아.”

   그가 상의 밑단을 끌어내리며 돌아보았다. 뭔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한쪽 눈 씹을 삐죽 올리고 있었다.

   “뭐 그렇게 간드러지게 불러. 불안하게.”

   “이리와봐.”

   소파에 앉아 있던 이승도가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옷만 입으면 금방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태국영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 나 부르면 재깍 가는 것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 그는 군소리 없이 가서 이승도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이승도는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그의 머 리칼을 다정하게 흩어놓으며 물었다.

   “내가아까보내준 영상봤어?”

   “봤지. 그건 갑자기 왜.”

   “어땠어?”

   이건 또 무슨상황이려나.

   태국영은 곰곰이 생각하며 잠시 침묵했다. 분위기상 뭔가 이승도가 바라는 정답 같은 대답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뭔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승 도가 그의 이마를 살짝 때리며 생각을 방해했다.

   “뭐 이런 걸 머리를굴리고 있어. 그냥 감상이 어땠느냐고 물은 건데. ”

   “나야늘 우리 승도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해 줄까 고민하는 성실한 남자 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고민은성실이 아니라 가식이야. ”

   어물쩍 포장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태국영은 혀를 찼다.

   “감상이랄 게 뭐 있어.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뿌스러기가 제법 균형감이 좋 네, 뭐 그정도지.”

   역시나 제가 좀 과한 것을 바라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임에도 조금 실망했지만,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이해하기

   “그리고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어. 꼬맹이 큰 덩치에 낌처럼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려고 용을 쓰는 게 웃기더라고. 제 딴에는 되게 심각하 고 진지한 표정 짓는 것도 그렇고. ”

   “정말? 너도 그런 생각해? ”

   “당연히 내 새낀데 예쁠 땐 예쁘지. ”

   이승도는 빙그레 웃었다. 두피를 어루만지는 손끝에 다정함이 더 포개졌다. “응. 우리 별이 은태 털에 폭 파묻혀 있는데 너무 예쁘더라. 유모도 일 다 내팽개치고는 대포 카메라 들고 내내 뛰어다녔어. 집에 가면 사진들 보여 줄 게.,,

   뭐 굳이 다시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태국영은 현명하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중에는 은태가 이경이랑 별이를 같이 태워줬는데, 은태 기운 좋더라.

그 상태로도 막 펄펄 날아다녀서 깜짝 놀랐어. 제자리 도움닫기로 가장 높은 나무를 한 번에 뛰어넘더라. 원래 그 나이에도 그래? ”

   “당연한 걸 뭘 물어. 그 정도야 낌이지. ”

   “그럼 너는?”

   “나?”

   “응. 너.”

   “나야 십 층 정도까지는 무난히 뛰겠지. ”

   “너 지금 이 몸으로? ”

   “아니. 이 상태로 한 번에는 무리야. 교차로 밟을 곳이 있다면 모를까. ” 대화를 이어가면서 태국영은 자연히 깨달았다. 제가 유도심문에 걸려들었 고 이승도는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뭔가 계속 대화를 끌어갈 거라는 걸. 그래서 태국영은 그냥 자진납세 하고 빨리 끝내기로 마음을 먹 었다.

   “원하는게 어느쪽이야. 너야,별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승도는 얼핏 이해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태국영 은 알아듣기 쉽게 다시 살을 붙여 말했다.

   “너 지금 내 등에 태워달라고 떼쓰려고 이러잖아. 네가 타고 싶은 거냐고, 별이를 태우고 싶은 거냐고. ”

   눈치 하나는 귀신같다니까.

   이승도는 속으로 혀를 차며 오늘 종일 뇌리를 맴돌던 생각을 끄집어냈다.

   “사실 오늘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거든. ”

   “뭔데.”

   태국영은 심란한 얼굴이었다. 내키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딱 잘라 서 싫다고 하지도 않고 있었다. 또 다른 모습의 너와도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천천히’라고 여지를 남겼던 그였다. 그가 버거워하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조 절하고 있다고 저 자신은 생각하고 있지만,확신할 수는 없었다.

   “별이가 한참 동안 거울만 보고 있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자기는 다르 다고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서 거듭 물어도 다르다는 말만 반 복하고. 좀 난감해 하고 있는데 은태가 변이해서 애한테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니까그제야 뭔가 조금, ……안심? 안도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 그때부터 애들끼리 뛰어놀기 시작한 거고. ”

   “혼자 다르게 생긴 걸 깨닫고 소외감을 느꼈나보네. ”

   태국영은 간단히 진단했다. 태은경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누구보다 잘 이해 할수 있었다. 그 아이보다 더 차갑고혹독한상황에 방치되어 자란 기억이 있 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낯설게 느껴졌던 세계에서 저만 홀로 더욱더 낯설게 유리되어 있는그 기분.

   “그거참 좆같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좆같은 기분이다. 물론 제 아이는 극진한 사 랑과 보살핌 속에서 크고 있었지만,그래도 한번 생리적으로 움튼 불안함이 나 괴리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일단 나가자.”

   태국영은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확답은 없었으나 무언 가긍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이승도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거의 자정에 가까워져 있는상태였다. 이승도는 예민한 아기가 멜까 싶어 잔뜩 소리를 죽인 목소리로 제가 없는 동안 상황이 어땠느냐며 물었다. 유모 역시 소곤소곤 대답했다.

   “저녁을 드렸는데 승도 군만 찾았어요. 착하게 밥 먹고 자고 있으면 돌아 올 거라고 했는데도 계속 집안을 배회하면서 앵앵앵앵. 도련님이랑 은태 군 이 밥그릇들고 다니면서 겨우 먹였고, 빨리 곯아떨어지라고둘이서 또 열심 히 놀아주고, 그러다 보니 셋 다 아홉 시 전에 녹다운. 저만 빼고 해피엔딩이 었답니다.”

   유모는 저만 쏙 빼고 셋이 알콩달콩했던 아이들의 모습에 조금 토라진 듯 말을 맺었다. 하지만 서운함보다는 흐뭇한 맘이 더 큰 듯했다.

   “고마워요. 늦었는데 얼른 주무세요. ”

   “네. 두분도좋은밤되시길.”

   유모가 물러가고 둘도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이승도는 침실과 연결된 아 기방에서 별이를 데려와 침대에 누웠다. 그듬밤이라 특별히 열이 높다거나 하 지는 않았다.

   품이 그리웠던 아기는 조금 칭얼거리다 가슴에 코를 박고 잠이 들었다. 이 승도 역시 금세 꿈나라로 떠났다.

   태국영은곤히잠든둘을한참 지켜본 뒤몸을일으켰다. 집안에는 어떤소 음도 없었다. 그저 달콤하게 잠든 이들의 숨소리만 그득했다.

   그는 기척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아기의 코앞에 집게손가락을 느리게 갖 다 대었다. 촉촉한 코가 손끝에 닿았다. 녀석은 잠결에 앞발로 코를 흠치길 반 복하다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떴다.

   그 어떤 대화 없이 서로를 바라보길 수 초.

   태국영은 이승도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아기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평 소 같았으면 짜증을 내며 캬악거렸을 녀석이 웬일로 얌전했다. 말똥말똥 깜빡

이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짙은 호기심으로 반짝거 렸다.

   반항하면 그냥 관두려고 했더니만.

   역시 제 새끼라 그런지 낌새를 맡는 감은 매우 좋다. 태국영은 창문을 열 고 발코니로 나가 가볍게 도약했다. 허공을 날아 지붕에 내려앉는 그 짧은 찰 나에 그의 몸은 커다란 맹수로 변해 있었다. 아기는 태국영에게 목덜미를 물 린 채 눈을 댕그랗게 떴다.

   [우아.]

   드물게도 감탄사까지 터뜨렸다. 태국영은 경사가 완만한 지붕 가운데에 모 로 누워서 몸을 말고, 제 몸 위에 녀석을 가볍게 떨어뜨려 놓았다. 아기는 신 기한듯 빤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태국영의 몸 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탄탄하게 조인 근육 위에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꾹꾹 눌릴 때마다 조금 간 지러웠지만,태국영은 미동 없이 그냥숨만 쉬었다. 녀석은 여기저기 눌러보 고 만져보고 긁어보다 흥이 돋았는지 곧 졸랑졸랑 뛰기까지 했다. 앞발보다 작은 녀석이라 가슴 위에서 콩콩 뛰어도 공간이 크게 비좁아 보이지는 않았 다.

   [아빠. 아빠.]

   저를 부르는 의미가 아니었기에 태국영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녀석은 그저 저랑 똑 닮은 짐승이 제 아빠였다는 것을 새삼 상기해 낸 것이 기쁘고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태어날 때 이 모습으로 함께 해 줬던 건데.

   기억력이 불안정할 시기의 아이니 잠시 잊고 있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 다. 녀석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 수염 근처에서 코를 쿵쿵댔다.

   [아빠.]

   그건 좀 심하게 간지러웠다. 태국영은 꼬리로 녀석의 몸을 감아 가슴 근처 로 내렸다. 얌전히 이동한 아기는 그곳에서 또 한참 몸을 비비며 놀았다. 하지 만 금방 또 잠이 몰려오는지 느리게 눈을 끔백이며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아 기는 심장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곳에서 조그맣게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태국영은 녀석의 몸 위를 꼬리로 대강 덮어주었다. 여은태처럼 복슬복슬한

꼬리라면 더 훌륭한 이불 역할을 해주겠지만 녀석이 워낙 작아 이 정도만으로 도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었다.

   길어진 해가 성급하게 지평선 위로 머리를 내밀기 직전까지, 태국영은 그렇 게 말없이 아기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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