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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안해,승도야 (21/25)

   6. 미안해,승도야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 느낌이 었다. 이승도는 마카오로 이동하기 전 꼼 꼼하게 싸둔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요트 밖을 내다보았다. 잔잔하게 물 결치는 바다가 아침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준비 다 됐지? 이제 출발하라고 할까? ”

   태국영이 선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이승도는 창가에서 물러나 침대에 걸터 앉았다.

   “응. 그런데 왕린 씨랑은 얘기 벌써 끝났어? ”

   “길어질 이유가 없으니까. 자,이건 왕린이 준 선물. ”

   이승도는 태국영이 가져온 선물의 정체보다 그들의 대화가 더 궁금했다.

   “얘기는 어떻게 됐는데?”

   “잠깐만. 가면서 얘기해 줄게. ”

   태국영이 선장에게 다녀오는 동안 이승도는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왕린 의 선물을살펴보았다. 총 두 개 종이 백이었고, 그중 하나엔 쿠키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요리사가 틈틈이 구워준 쿠키들을 남김 없이 먹어치웠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 같았다.

   이승도는 다른 종이 백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무게가 꽤나 묵직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유일하게 선물 포장된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다시 선실로 들 어온 태국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건 왕린이 별이한테 주는 선물. ”

   풀어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두꺼운 유리관 안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표범이 있었다. 꼬리를 꼿꼿이 위로 세우고 네 발로 야무지게 선 모양이 아주 귀여웠다.

     ;이거 별이야?”

“그렇다나봐.”

   이승도는 왕린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 아기방 장식장에 놓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깨지지 않게 옷들로 감싸 캐리어에 챙겨 넣고 있을 때, 태국영이 말했다.

   “그 일에 관련된 놈들 왕린이 다 긁어내서 취조를 했대. 다행히 제조법을 아는놈이 없어서 뿌리 뽑는 건 쉽게 될 것 같아. 문제는 개들한테 약을 넘긴 쪽인데,이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서 오늘 내로 생각해 보고 답해주겠다고 했어.”

“직접 만든 게 아니라 어디서 들여왔다는 말이지? ”

   “응. 규제가 생기기 전에 떨이로 왕창왕창 팔고 잠적할 생각이었대. 흥콩 애들은 그걸 들여와서 웃돈 얹어서 비싸게 팔아먹은 거고. ”

“그럼 제조자는 역시 제조법 몰래 빼내 갔다는 쪽이아다 ”

태국영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좀 애매하게 됐어. 빼내 간 건 와타나베 가문 쪽인데 엉뚱한 놈들이 그걸 입수해서 장난을 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야. 팔아넘긴 놈들에 대해서는 숨기는 게 아니라 진짜 아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더 추궁해도 나올 게 없을 거라고 그러네. 그래서 왕린이 일단 최근에 홍콩출 입이 잦았던 일본 애들 명단을 나한테 넘겨줬어. ”

“그중에 있는 건 확실해?”

   “그건 틀림없어. 우린 신분을 완벽히 속일 수도, 그 상태로 타국에 들어가 는 것도 불가능해. 만약 그게 성공한다 해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들킬 거고, 그건 침략과 다를 바 없는 행동으로 취급돼. 나 좀 죽여 달라고 비는 꼴이지. ” 이승도는 태국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찾을 거고, 찾으면 어떻게 할 거야? ”

   태국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린에게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한 것은 그 역 시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승도 넌 내가 어떻게 했음 좋겠어? “내 의견이 중요해?”

   “중요하지 않았다면 안 물있겠지. ”

   이승도는 태국영의 화법에 익숙했다.

   “가주는 원래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 건데? ”

   “무난하게 정석대로 가자면, 일본 종주한테 그 명단을 보내서 당장 색출해 내라고 닦달을 해야겠지. 그리고 보통 후처리도 그쪽에 맡기는 게 가장 깔끔 한방법이고.”

   “그럼 결정을 미룬 이유는 뭔데? ”

   태국영은 심문 기술이 늘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진한 미소를 띤 채로 살벌하게 말을 이 었다.

   “그렇게 얌전하게 마무리를 하기에는 내가좀 제대로 빡이 쳐서 말이야. 성 질 같아선 지금 당장 쳐들어가서 관련된 놈들 피로 폭죽을 터뜨려도 화가 안 풀릴 것같거든.”

   “…안그럴 거잖아. 내가싫어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 어떻게 해야 내 손을 안 쓰고도 분이 풀릴 만큼 야무지게 조져 놓을지. ”

   이승도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모르는 이들이 어 떻게 되건 큰 관심은 없었다. 태국영이 직접 피를 보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걸 만족시킬 방법이 하나 떠오르긴 하는데……. ”

   태국영은 뒷말을 흐리며 이승도의 허벅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그게 뭔데?”

   “지금 똑같이 놈들을 쫓고 있는 백사자 놈이 하나 있거든. 개한테 떠넘겨 주면 빚잔치 제대로 해 주긴 할 건데,문제는. ”

   “문제는?”

   “그 새끼가 그걸 너무 좋아할 게 분명하단 말이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인 데 이상하게 죽 쒀서 남 주는 기분이야. 아. 역시 안 내켜. ”

   백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이승도는 그 짧은 대 화에서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변에 관심이 없는 태국영이 특정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원한이 있거나,그와 성격이 비슷하거나.

   그리고 이승도는 그날 바로 문제의 백사자를 만날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해 둔 마카오의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게 누구야. 태국영 아냐?〕

   그렇게 그가 말을 걸어오기도 전에 태국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이미 돌아보 고 있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자오추안과 그의 심복들이 었다. 자오추안은 마 치 오래된 벗을 만난 듯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거 참 반가운우연이네. 여기서 너를 다 보게 되고.〕

   태국영은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우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씨도 안 먹힐 연극 집어치워.〕

〔여전히 건방지고.〕

〔국제적으로 건방을 떨고 다니는 너만 하려고.〕

   둘은 서로를 웃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승도는 중국어로도 유창하게 대화 하는 태국영도 매우 섹시하다고 생각하며 곁눈으로는 자오추안을 살폈다. 알 아들을 수 없는 짧은 대화였으나 둘 사이 에 오고 가는 분위기만 봐도 영 사이 가 좋지 않음은 확실했다. 아마도 이 남자가 태국영이 말했던 백사자인 것 같 았다.

   하지만 제가 앞서 했던 짐작은 틀렸다. 이 둘은 닮아서가 아니라 너무 달라 서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 었다.

   자오추안은 서구인의 피가 약간은 섞인 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피 부는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화려한 미모를 뽐내는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정력 이 느껴졌다. 무얼 하든 열렬히 불태울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른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가진 태국영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타입이었다.

〔아하. 이쪽이 그-〕

   시선을 느낀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이건 좀 닮았다. 상 대를 녹이려고 작정한 듯이 눈을 휘어 웃는 모습.

〔반가워요. 나는 자오추안, 중국의 종주입니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대강 인사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네. 이승도라고합니다.”

   얼떨결에 손을 내밀던 이승도는 태국영에게 손목이 붙들리고 나서야 정신

을 차렸다. 뺨에 꽂히는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네가 감히 한눈을 팔아? 나를 옆에 두고?

   …라고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승도는 뭔가 굉장히 억울했지만 해명 을 할 타이밍은 아닌지라 그냥 입을 다물어 버 렸다. 태국영은 그런 이승도를 빤히 내려다보며 자오추안에게 물었다.

   〔뭐 주워 처먹겠다고 바쁘신 몸 친히 움직여 여기까지 왔어?〕

   자오추안은 거 절당한 손을 호주머니 에 찔러 넣으며 시원시 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글쎄,이렇게 남을못 믿어서야. 우연이라니까그러네.〕

   〔약 파는 건 내전문이고.〕

   〔태국영이 약잘 파는 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최근에 특기 하나 더 만들었다며. 약 파는 새끼들도 참 잘 잡는다고 소문이 짜하게 났던데.〕 짐작했던 대로였다. 역시 홍콩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이 우연을 가장 한 필연의 전제조건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태국영은 이승도를 제 뒤로 끌어 다 놓으며 자오추안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홍콩이고 중국이고 헛소리를 이렇게 정성 들여 늘어놓는 게 유행이냐. 용 건만 간단히 해. 그래서 뭐.〕

   〔내가 아무리 발이 넓어도 왕린이 집구석 안에서 벌어지는 일까지는 알 길이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너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자오추안이 성큼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놈들이 누굴 불었어? 내가 짐작하는 개들 맞지?〕

   〔대답할 의무 없는데.〕

   〔왜 이럴까,우리 사이에. 적의 적은동지라는 말도 있잖아?〕

   아. 정말 넘겨주기 싫다.

   오는 길에 이미 결정을 내렸으면서도 태국영은 다시금 갈등했다. 피 냄새

맡고 신나서 달려온 자오추안의 면상을 대면하자니 마음을 바꾸고 싶은 생각 이 격렬히 머리를들고 있었다.

   태국영은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이승도는 멀뚱하게 눈을 깜빡이고만 있 었다. 눈이 마주치자 영문은 모르지만 빙긋 웃어 보인다. 알아들을 수는 없어 도 눈치가 제법 좋은 편이니 어떤 얘기가 오가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대강 짐 작하고 있을 터 였다.

   “왜. 얘기 길어질 것 같아? ”

   이승도가 묻는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마음의 갈피를 잡아주는 목소리였다. 태국영은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이제 만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이면 이 낯선 도시를 떠나 일상으로 복 귀해야만 했다. 아마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도의 곁에는 아이들이,제 곁에는 태 가의 원로들이 꼬여들 거 였다.

   1분 1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영은 오른편에 놓아둔 캐리어를 태준호에게 떠밀며 말했다.

   “준호야. 이 가방에 왕린이 준 명단 있어. 그거 자오한테 넘겨주고 네가 내 대신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설명해 줘. 난 이만 올라간다. ”

   “네.맡겨 주십쇼.”

   태국영은 이승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자오추안이 얼른 그의 뒤를 쫓으려 했다.

〔어, 잠깐. 야,태국-〕

〔잠시.〕

   자오추안의 앞을 태준호가 막아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지받아 본 경 험이 없는 자오추안은 불쾌한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이 새끼야. 건방지게 누구 앞을 가로막아.〕

   이런 개무시와 냉대가 하루 이틀이랴.

서 릿발 같은 눈빛 앞에서도 태준호는 넉살 좋게 웃을 줄 알았다. 〔가주님께서 제게 친히 대리 권한을주셨습니다. 제가설명해 드릴 테니

편하신 장소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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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이 새끼가-〕

   〔그리고그만 꺼져. 방금생각바뀌었으니까. 태준호,따라와. 저 새끼하 고 한마디도 섞지 말고.〕

   방법이 없어서 자오추안에게 맡기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승도가 원하 는 가장 평화로운 길을 가고 싶었을 뿐이 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놈을 제가 굳이 기쁘게 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제 가문에도 힘쓰고 싶 어 안달 난 놈이라면 쎄고 쨌다.

   〔너 이,당장 안 와!〕

   자오추안의 눈에서 살기가 튀었다. 그가 막 한판 벌일 기세로 태국영의 뒤 를 따라가려 할 때였다.

   〔추안.〕

   작고 점잖은 목소리가 불시에 끼어들었다. 태국영은 무심한 눈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무릎까지 오는 흰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무표정 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오추안의 아내였고, 또한 이승도와 같 은 등대였다.

   이 자오추안의 아내라면 뭔가 굉장히 화려한 미녀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렇지 않았다. 목덜미를 덮지 않는 쇼트커트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미인이 었 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밈 없는 모습에서 유일하게 튀는 것은 그녀의 약지 를 감싸고 있는 결혼반지였다.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핑크 다이아몬드 가 화려한 빛을 뿌렸다.

   〔지루하게 왜 그렇게 끌고 그래. 용건만 끝내고 돌아간다고 약속해 놓고 는.〕

   〔아니. 너도 방금봤듯이-〕

   〔좀.〕

   여자가 점잖게 타이르자 자오추안은 긴 한숨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제 마누라한테는 쪽도 못 쓴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태국영에게 악수를 청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태국영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짧게 악수를 받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 이가 안 그런 것 같아도 되게 격식 따지고 그래요. 혹시 그리 급한 일 이 없으시면 직접 알려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리 급합니다만.〕

   여자의 눈매가 둥그레졌다.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 었다. 그녀는 웃는 낯으 로 태국영의 뒤를 눈짓했다.

   〔저분 때문에?〕

   〔이런 일로 기다리게 하기 싫은사람이라.〕

   〔어머나. 로맨틱하네요.〕

   눈웃음은 상큼했다. 짧은 악수에서 느꼈듯 끈끈함 없이 매혹적 인 향기를 가 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목매고 매달릴 타입이 아니다. 자오추안이 갖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라고,태국영은 생각했다.

   〔태국영 씨 배우자분도 저를 슬슬 인지한 것 같군요. 저를 꽤 궁금해하는 눈치인데요?〕

   그 말에 태국영은 이승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자오추안을 뜯 어보느라 다른 데에 관심을 쏟지 않았던 이승도가 이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 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호감으로 들떠 있는 눈이었다. 대놓고 얘기를 해 보고 싶은 눈치 였다.

   태국영은 한숨처럼 혀를 차는 한편,여자의 처세술이 보통이 아님에 조금 감탄했다. 그녀는 직전의 불화에서 그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중재에 성공했 고, 쓸데없이 까다로운 자오추안에게 태국영 자신이 직접 설명할 계기를 만드 는 방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저 자오추안을 감당할 수 있을 테지.

   “승도야. 이리 와.”

   태국영이 손짓하자 이승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뭐라고 하 기도 전에 먼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一 아,한국말 모르실 텐데. 어쩌지?”

   난감하게 중얼거 리는 이승도의 말에 여자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한국말 잘해요. 결혼 전에 한국, 일본으로 출장 가는 게 일상이 었거

든요.”

   “아! 다행이네요. 전 이승도라고 해요. ”

   이승도는 눈동자가 파묻힐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기 뻐 보였다.

“제 이름은 양메이예요. 흔한 이름이죠. 그냥 메이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 “네,그래요.”

   지나치게,기삐 보였다. 태국영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이다 번득 뇌리 를 스친 생각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양메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짧 은 커트 머리,눈꼬리가 살짝 쳐진 큰 눈, 실핏줄이 보일 만큼 흰 피부.

   “여행 오셨다고 들었어요. 며칠 일정 인가요? ”

   “딱 일주일이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요. ”

   “아아. 아쉽네요.”

   전체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데도 그런 부분 부분이 묘하게 그녀를 연상시 켰다.

   “뭐,마지막 날로 마카오는 그리 나쁘지 않죠. 당연히 카지노에도 가실 테 죠? 게임 좀 할 줄 알아요? ”

   “아뇨, 저는 전혀 못 해요. ”

   “이런. 준 겜블러인 제가좀 가르쳐 드려야겠네. 저도 온 김에 게임 좀 하려 고 근처 카지노 호텔의 VIP룸을 잡아 놨는데,괜찮으시면 같이 하시겠어요? ” “그래도 될까요?”

   이승도는 동의를 구하듯이 태국영을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 였 다.

   “좋을대로 해.”

   그렇게 약속은 성사되었다.

   타지에서의 마지막 밤이 무르익어 있었다. 마카오의 밤은 겁이 날 정도로 찬란하게 번쩍였다. 고층 호텔들이 경쟁하듯 저마다의 빛깔을 강렬히 뿜어내

고 있었다. 몸을 던지면 재 한 줌 없이 불탈 듯한 열기 였다. 어느 모로 보나 저 와는 완전히 상충되는 성질들만 만발해 있는데,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래 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홍콩에 있는 동안 네 차례 영상통화를 받았다. 되도록이면 방해를 주지 않 으려고 버티고 버티던 송재희가 백기를 든 순간들이 었다. 버림받은 것처럼 우 는 태은경의 서러운 얼굴을 보며 얼른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아쉬움이 조금은 기이했다. 아마도 자신 은 태국영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연애하듯 오릇이 둘만 가지는 달콤한 시간에 매우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 었다.

   “화려한도시죠?”

   양메이가 부드럽게 말을 걸며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과업을 수행하듯 테이 블에 앉아 게임에 열중해 있던 그녀가 따라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놀랐 다. 이승도는 몸을돌려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네요. 호텔 내부도 금빛으로 번쩍번쩍해서 깜짝 놀랐어요. ”

   “일확천금을 바라고 몰려드는 인간들에게 딱 어울리는 색이지요. 한 잔 받 아요.”

   그녀가 여왕처럼 우아하게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온 남자가 이승도의 잔을 채웠다. 샴페인 병조차 황금색이었다.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막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마셔 보려는데 태성문이 끼어들어 잔을 가져갔다.

   “제가 먼저 마셔보겠습니다.”

   이승도는 조금 당황해서 양메이를 바라보았다. 직접 따라준 것과 마찬가지 인데 이러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양메이는 낯간 지러운 장면을 본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걱정도 많으셔. 독 안 탔어요. ”

   태성문은 아랑곳 않고 먼저 맛을 보았다. 혀로 꼼꼼하게 입 안을 훑어본 그 가 잔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양메이가 아닌 이승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홍콩에서 가주님께 있었던 일도 그렇고, 매사 조심해야 하는

   황이라.”

   카지노에 오기 전, 룸에서 태국영이 미리 언질을주었었다. 양메이가 태국 영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오추안에게 쓸데없는 면박을 주지 않았듯이,너 역시 그래야 한다고.

   중국은 가문 간의 권력 차에서 오는 불평등이 굉장히 심화되어 있는상태 라고 했다. 그래서 절대 권력을 가진 가문의 외아들로 자라 종주까지 이어받 은 자오추안이 그렇게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니 예 의상 건넬 수도 있는 ‘미안하다’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다고도 덧붙였 다.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막 자란 개차반 자오추안에게는 하찮게 취급해도 되는 상대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면서.

   “아니에요. 성문 씨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

   태국영이 태준호를 자신의 대리로 보낸 것에 자오추안이 강하게 불쾌함을 드러냈던 것이나,태성문이 샴페인을 권한 양메이가 아니라 제게 사과한 것 도 그런 맥락이 었다.

   “아르망디네요. 저도 이 샴페인 좋아해요. ”

   하지만 역시나 이 구도가 온전히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승도로서는 얼른 말을 돌리는 게 가장 편했다. 그러자 양메이가 콧등을 껑긋하며 대꾸했다.

   “원래 비싼 것들이 맛있는 게 많으니까. ”

   혼인식 때 처음 축하주로 마셨던 게 입에 잘 맞아서 가끔 유모에게 한 병 씩 부탁하곤 했었던 샴페인이었다. 가격 같은 것은잘몰랐다. 하지만이게 얼 마냐고 물으면 또 뭔가 촌스러워 보일 것 같아 그냥 관뒀다. 사실 태국영과 같 이 살면서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좀 이상하고.

   “중국의 등대들은 어떻게 살아요? ”

   그래서 이승도는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양메이는 묘한 웃음을 흘리 며 스치듯 말을 흘렸다.

   “사파리지 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이승도가 그녀 쪽으로 조금 고개 숙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그녀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로 못 죽여 안달이지만 쉽게 죽일 수는 없고, 어떻게든 더 강한 권력자 의 아성으로 이주하고 싶어서 온갖 술수를 쓰다가,그게 잘 안 되면 분풀이처 럼 피바람을 일으키고. 그렇게들 살아요. 사파리에 갇힌 짐승들처럼. ”

   이승도는 멍하니 할말을 잃어버렸다. 중국은 저희들처럼 말살음모가 있었 던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아직 남은 등대의 수가 스물 이상이라고 했다. 뭔가 유토피아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예상했던 것과는 전 혀 다른 대답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 처음 본 승도 씨가 그들보다 더 편하고 좋네요. ”

   돌아보며 눈을 맞추는 양메이는 씁쓸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이 땅의 가장큰 권력자에게 안긴 나를 시기나 질투 없이 봐주니까. ”

   “…제가 그랬나요.”

   “네.그랬어요.”

   솔직하게 대답해 준 그녀에게 이승도도 솔직해졌다.

   “사실은 메이 씨 웃는 얼굴이 조금, 제 어머니를 닮았어요. 아마 그래서 더 그랬을 거예요.”

   “제가승도 씨어머니를요?”

   “…아뇨. 전체적으로 보니 또 안 닮은 것 같네요. 그런데 아까는 이렇게 휘 어지는 눈이 잠깐 그렇게 보였어요. ”

   “돌아가셨다는 얘기네요. 승도 씨가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 고.”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아련하게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접 었던 양메이가 불쑥 폭탄을 던졌다.

   “제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정확히 말하면 살해당하신 거지만. ”

   이승도의 눈이 커졌다. 양메이는 잔잔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암투의 희생양이었어요. 등대 하나가작정하고 어머니를 모함했고, 그 여

자나 어머니를 마음에 품었던 남자들이 그녀의 말에 홀렸어요. 그리고 내 아 버지는 불행히도 힘 없는 인간 남자였고요. 참 손쉬운 먹잇감이었죠. ”

   “아버지는 너무나 무력하게 어머니가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어요. 아내 가 비참하게 죽는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고 나서야죽을 수 있었죠. 그걸 그 딸

이 또 지켜보아야했고요. ”

   “이런 얘기를 왜 저한테……

   부담스럽고 당혹스러워 중간에 끼어들었지만,양메이는 검지를 입술 앞에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세요,이유 없이 꺼낸 이야기가 아니니까. ’ 그녀 가 말했다. 이승도는 거절할 수가 없어 결국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러야 했는데, 두분 시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오더군요. 아버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찢겼고,어머니는 생전의 아름다 웠던 모습은온데간데없이 목내이처럼 되어 있었거든요. ”

   목내이가 뭐였더라.

   이승도는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를 곱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것을 눈치첸 양메이가 고민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미라요. 피와 내장을 전부 긁어내고 그냥 바짝 말려버린. ”

   다시금 이승도는 경악으로 말을 잃었다. 그쯤에서 ‘이 여자 도대체 뭐야. "하 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처참한 기 억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무 상관도 없는 저에게 늘어놓는 그녀의 저의를 좀체 알수 없었다.

   “놈들은 제 어머니의 피를 전부 빨아 마셨고 내장을 씹어 먹으며 파티를 즐 겼지요.”

   “…그걸,왜 먹……

   “등대의 피는 짐승들에게 마약과 같은 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에요. ”

   비위가 상해 얼굴을 찌푸리던 이승도는 불현듯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태국 영의 부친이 제 어머니의 피를할았던 장면이었다. 다부서져 있던 태국영의 어린 몸이 멀껑하게 치유되어 있던 것에 강한 의혹을 느낀 그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등대 여부를 확인해 본 것이었다.

   “당시 자오는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애송이였는데, 이상하게 나한테 관심 을 갖고 있는상태였어요. 난다 긴다하는중국의 미녀들, 그리고등대들이 주 변에 가득한데도요. 그리고 당시 종주였던 자오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고요.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그녀는 권력에 목매는 이들의 모습이 지긋지긋해서 혼자 늙어 죽을 생각이 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그때 결심했어요. 자오의 성역에 들어가반드시 그들에게 죗값을물겠다 고요.”

   가느다란샴페인 잔을 입술에 붙이는 양메이의 눈빛이 섬뜩했다. 피처럼 붉 은 광휘가그녀의 눈에 드리웠다. 능히 피를 보았고, 그 피의 맛을 알고 있는 육식동물의 눈동자였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승도는 반사적으로 제 팔을 쓸지 않기 위해 어깨에 힘을주었다. 그녀가말했다.

   “그때 연루된 이들은 추안이 자오 가의 권력을 승계 받은 이후 모조리 죽었 어요. 국보와도 같은 그 등대는 홀로 명줄을 보전했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 을 만큼 비참하게 살고 있답니다. 아마 앞으로 더 비참해질 방법이 있다면 나 는 망설임 없이 그 지옥으로 밀어 넣겠지요. ”

   “……저,메이 씨. 그러니까왜 제게 이런 얘기를하시는 건지, 저는아직 도 잘 모르겠는데요. ”

   용기를 내서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

   “승도 씨. 내 어머니의 시신에서 피가한방울도 없었다고 말씀드렸지요. ”

   “네.”

   “추안이 종주로 등극하고 나서부터는 아무리 동의를 구했다 한들 등대의 피를 할는 것조차 금지되었어요. 제가 그 행위를 극도로 혐오했으니까요. ”

   그제야 이 대화를 관통하는 맥을 잡았다. 등대의 피가 짐승들에게 마약처 럼 작용하듯이 슈퍼문의 유사 약도 마약과 비슷하다고 했다. 양메이는 제 어 머니를 죽였던 이들에게서 느꼈던 분노와 고통을 그들로 인해 강제적으로 되 살리게 된 것이 었다.

   “제가 이렇게 두 눈을 밝히고 있는 이상중국 땅에서 그런 저급한 약이 도 는 일은 용납할 수 없어요. 또한 후에 다시 들여오게 될지도 모르는 놈들 역 시 그냥 두지 않을 거고요. ”

   독기를 드러낸 양메이에게서 손을 대면 베일 듯이 차가운 박력이 흘렀다. 어떻게 이런 여인을두고서 제 어머니를 떠올렸던 건지 이해가 안갈 정도였 다.

   “그러니까승도 씨. 태 가주를 설득해 주세요. ”

   양메이는 성큼 가까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추안이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을 박멸할 수 있게, 부디 도와주세요. ”

   그녀는 몹시도 간절한 얼굴로 부탁했다. 영문을 모른 채로 들어야 했던 그 녀의 과거사는 이 청탁을 위한 반석이었던 거다. 무언가 비틀어진 복수심이라 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 었다. 하지만.

   그녀도 악몽을 꿀까.

   피의 복수를 끝내고도 여전히 뿌리 뽑히지 않은 과거에 찔려 괴로워하는 이가 또 하나 있었다. 태국영이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강해 보이는 그조차 숱 한 밤을 고통으로 보내지 않았나.

   이승도는 태국영의 상처를 투명하게 끌어안았듯,양메이의 절실함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로서 충분히 공감도 갔다.

   “그래요.”

   이승도는 마침내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가국영이한테 말해 볼게요. ……아니,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을 거 예요. 지금 이 대화를 모두 흠쳐 듣고 있을 테니까요. 자오추안 씨가 그렇듯이 요.,,

   양메이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룸에서 나와 호텔의 발코니까 지 나왔지만 그들의 예민한 귀를 까닿게 닫아 놓을 수 있는 거 리는 분명 아니 었다.

   양메이는 한 많은 여인처럼 엷은 미소를 지었다. 참 기이하게도,그 눈이 다 시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저,메이 씨.”

   이만 돌아가자며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돌아보며 ‘왜요? ’하고 물었다. 이승도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한가주의 배우자가 되려면 당신처럼 그렇게 강하고,때로는 냉혹해야하 나요?”

   양메이는 그 어떤 고민도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요?”

   “제가 메이 씨와는 달리 이쪽세계를 잘몰라서요. ”

   솔직하게 끄집어낸 대답을,그녀는 무리 없이 납득한 듯했다.

   “모두가 달라요. 자오추안과 태국영 씨 모두 한 가문의 가주지만, 보세요.

그 둘은 성향이 완전 반대잖아요? 당신도 나도 어떤 틀에 맞출 필요는 없지 요.,,

   이승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론적인 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 슴에 빨리 와 닿았다.

   “고마워요.”

   양메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뭐가요. 어딜 봐도 내가 고맙다고 해야 될 것 같은 상황인데요? ”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표정을 바꿨다.

   “혹시 내가승도 씨 어머니를 닮아서 그래요? 엄마가 조언해주는 것 같고, 뭐 그런 건가요?”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양메이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듯 깊이 한숨을 지었다.

   “승도 씨는 자기 얘기를 하는 것에 익숙해 보이지 않아요. 그건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니에요. 추안은 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니까 저는 모든 걸 다 얘기해요. 만약 태국영 씨가 당신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남자라는 믿 음이 있다면,승도 씨도 그렇게 해요. ”

   그녀가 검지로 꾸욱,이승도의 가슴을 누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야 여기가 안 곪아요.”

   발코니를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길게 응시했다. 반지를 제외한 그 어떤

장식품 하나 없는 민무늬의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그 자체로 당당하고 강해 보이는 여인이 었다.

   이승도는 물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불야성의 도시는 여전

히 숨 가쁘게 흘러가는 중이 었다.

「그래야 여기가 안 곪아요.」

   양메이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되게 뜬구름을 잡는 듯하면서도 의 외로 의표를 찌르는 말이 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이승도는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국 영이 목욕 가운의 허리띠를 느슨하게 동여매며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의아한 눈빛이었다.

   “기척 좀 하고 다녀. 깜짝 놀랐잖아. ”

   “왜 그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

   태국영은 젖은 머 리를 손으로 탈탈 털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했는데,뭐 더 남은 거라도 있어? ”

   양메이와 대화를 마치고 룸으로 돌아갔을 때는 예상대로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태국영은 왕린이 준 명단을 자오추안에게 넘겨주었고,자오추안은 태 국영에게 각서를 써 달라고요청하고 있는상태였다.

   태국영은 딱히 토 달지 않고 각서를 써 주었다. 물론 사건 조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살생에 관해서는 전혀 책임지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그 꼴은 뭐야. 왜 그러고 있는데? ”

   이승도는 눈알만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이상해?”

   “취했냐.”

   룸으로 돌아와서도 양메이와 신나게 술을 퍼붓더니만,그만 마시라고 슬쩍 말려 봐도 안 취했다고 계속 들이붓더니만, 이럴 줄 알았다. 태국영은 조선시 대 아낙마냥 얇은 이불을 쓰개치마처럼 폭 뒤집어쓰고 있는 이승도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밀었다.

   “됐다. 내일 일찍 나가야하니까그만 자자. ”

   그리고 옆으로 넘어가려는 그를 이승도가 다리로 턱 막았다. 왜,하며 돌아 보자 이승도가 이불을 벗어 던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냐. 자려고 한 거 아니고. 이러려고.”

   이승도는 천 쪼가리 한 장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팔을 뻗어 태 국영의 목덜미에 꽉 감았다. 태국영은 얼떨결에 이승도의 등허리를끌어안았 다. 술기운이 올라 따끈따끈한 몸이 촉촉하게 감겨 왔다.

   “우리 여행 와서 한 번도 안 했잖아. ”

   이승도는 태국영을 꽉 끌어안은 채 뒤로 드러누웠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허 벅지 사이로 태국영이 몸을 끼웠다. 그의 손끝이 뺨을 툭 건드리고 떨어져 나 갔다.

   “우리 승도 쉬고 싶대서 푹 쉬게 해주려고 했지. ”

   “아이고. 배려한번 끝내주네.”

   이승도는 태국영의 허리띠 매듭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느 슨하게 고정되어 있던 가운이 활짝 풀어졌다. 그는 앞섶 열린 가운을 벗어 아 래로 던졌다. 그 작은 움직 임을 따라 부드럽게 휘고 조이는 근육들의 모양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근사했다. 이승도는 손끝으로 그의 가슴에서 배까지 한 번 에 쓸어내리며 중얼거 렸다.

   “참 예쁘다…… 넌 왜 이렇게 쓸데없이 과하게 예쁘게 생겼냐. ”

   “우리 승도 잘 홀리라고 신이 빚어 줬나보지. ”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적이네.”

   태국영은 부드럽게 휜 입술을 이승도의 입술 위로 꾹 눌렀다. 타액이 섞이 지 않는 키스가 포근하게 이어졌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마주친 시선은 서로 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를 시작한 것은 이승도였다. 그는 느리게 혀를 내밀 어 탐스러운 입술을 핥았다. 태국영의 입술이 빗장 없이 열렸다. 혀끝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승도가 물었다.

   “오늘 별로 안 당겨?”

   “그럴 리가.”

   태국영이 느긋하게 웃으며 손목을 잡아끌어내렸다. 손등으로 단단하게 발 기한 살덩 이가 고스란히 닿아 왔다.

   “우리 승도가 이렇게 다리를 벌려주는데 내가 안 당길 리가 있어. ”

   이승도는 배시시 웃으며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을잡아 내렸다. 이끄는 대로 아랫도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던 그가 짐짓 놀란 눈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적시고 있었어? 야한생각많이 했나 보네. ”

   이승도는 몸이 단 사람처럼 허리를 비틀며 웃기만 했다. 미끈한 애액이 홀 러 금방 시트를 적셨다. 태국영은 기분 좋게 눈웃음을 치며 깊이 고개를 꺾었 다. 입술이 맞물리고 곧장 서로를 갈구하는 혀가 뒤엉켰다.

   이승도가 허벅지를 띄워 태국영의 허리를 감았다. 태국영의 목 안 깊은 곳 에서 기분 좋은 탄식이 끓었다. 달콤하게 성감을 고조시키는 목소리였다.

   이승도는 그의 목을 손바닥으로 쓸어내 렸다. 태국영이 턱을 조금 젖혀 들었 다. 이승도는 그 턱 끝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넣어 봐. 잘들어갈 것같아. ”

   “급히 먹으면 체하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태국영은 곧장 고간을 맞대 비볐다. 은밀하게 젖어 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 였다. 미끈거 리는 귀두가 스칠 때마다 구멍이 빠끔 벌어지며 애액이 흘러나왔다. 맑은 느낌이 아니라 끈끈하게 성기를 휘감 는 질감이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태국영이 멈칫 고개를 물렀다. 이승도는 더운 숨을 뱉어 내며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끝으로 구멍 안쪽을 한 번 훑 어내더니 눈가를 찌푸렸다.

   “안되겠는데.”

   그의 한마디에 이승도는 맥이 탁 풀려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낌새 없더니만,하필 오늘. ”

   태국영의 허리를 감았던 다리가 매트리스 위로 늘어졌다. 태국영은 매끈하

고 단단한 허 벅지를 한동안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영 아쉬운데. 콘돔 두세 개 끼고서 한 번 해볼까? ”

   “…그때처럼 찢어지면?”

   “찢어지면 뭐.”

   잠시 뒷말을 생각하던 태국영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되겠다.”

   아직 천지 분간도 못 하는 갓난아기가 있는상태였다. 이 상태로 덜컥 또 아기라도 들어서면 여럿 감당하기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만에 하나라도 가능 성이 있다면 멈추는 게 맞았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곁에 팔을 베고 누워 물었 다.

   “핥아줄까?”

   “아니. 그러다 백프로 사고 쳐.”

   “그건 그래. 나도 날 못 믿겠네.”

   “그냥좀세게 안아주라.”

   태국영은 주문대로 이승도를 끌어와 꽉 조여 안았다. 뼈가 부대낄 만큼 강 한 포옹이었다. 기분 좋은 압박감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이승도는 만족한 듯 긴 호흡을 뱉어내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묘한 향기가 신경 줄로 스며들 어왔다.

   “좋은 냄새……

   이승도는 어린 짐승처럼 태국영의 맨살 위를 쿵쿵거리며 물었다.

   “이거나유혹하는 냄새지?”

   W ? ”

   ■?*.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승도의 머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이거누가 또 맡아봤어?”

   “보름 주간에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새 나가긴 하지만,이렇게 노골적인 어필은 너밖에 몰라.”

   안 어울리게 되게 순정파라니까.

   이승도는 만족스럽게 눈가를 허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서는 무슨 냄새나?”

   “그냥 뭐,짐승들을 미치게 하는 냄새. ”

   이승도는 시도 때도 없이 이 어릇한 향기를 풀풀 풍기고 다녔었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등대라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 향기가 짙어지는 시기 가 불행하게도 보름과 겹치면 그날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떻게 참았어?”

   이승도가물었다. 마치 생각의 흐름을 고스란히 읽은 것처럼.

   “무슨 발정기 첨 겪은 애송이도 아니고. 참으려면 뭘 못 참겠어. ”

   “너 성체 되고 처음 같이 보름밤을 보낼 때, 새벽 내내 잠 못 이루고 일어났 다 누웠다 하던 거 나 아직 기 억하거든. ”

   허세가 부서지자 태국영은 순종적으로 인정했다.

   “난그때 막성체가 된 애송이였고, 넌 마침 가임기였고. 타이밍이 하필 좆 같았지.”

   그가 픽 실소했다.

   “괴로웠지만참는 것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어. 너 이경이 낳고 울던 거 생 각하면 백 년 끓던 피도 식어버렸으니까. ”

   말하는 와중에도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두피를 문지르는 손길이 나른하니 좋았다. 이마와뺨,콧등과 입술,여기저기 무작위로 떨어지는 입맞춤도좋았 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좋은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눈은 마음을 비치는 창이라고 했다. 기막히게 능숙한 가면을 뒤집어쓴 순간 에도 그는 저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열정과 갈망이 끓어 넘치는 것이 고 스란히 보여서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피해버릴 만큼, 그렇게 순수하고솔 직한 눈이었다.

   “국영아.”

   W ? ”

   ■?*.

   “나 뭐하나만 알아봐줄래?”

   태국영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냐 묻지도 않고 뭐든 다 들어줄 기세였

다. 이승도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나가,정말 딱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게 있었어. ”

   “그래. 뭔데.”

   “우리 엄마 말이야. 시신은 어떻게 됐을지 알고 싶어. ”

   태국영의 눈이 일순흔들렸다. 짧게 스쳐 지나간 감정의 격류를 가까이에 서 목격한 이승도는 순간이나마 그냥 묻어두는 게 좋았을까 생각했다. 하지 만 걱정과 달리,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려다줄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이승도의 눈매가 느리게 벌어졌다.

   “어딜 ?”

   “네 엄마가묻힌 곳.”

   이승도는 귀를 의심하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태국영은 뭔가 조금 이상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짙은 눈시울과 붉은 입술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 닌 이상한 곡선을 그렸다.

   “말했잖아. 어디든 가게 해 주겠다고. ”

   “언젠가 네가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성년식 이후 본가 재건축 하는 동안 있을 데도 없고, 그래서 떠돌이처 럼 돌아다니 면서 좀 알아봤지. 의외로 찾기 쉬웠어.”

   13년 전 실종되거나 사망한 수의사,그중에 이승도라는 이름의 16살 들 이 있는 여자를 중점적으로 찾다 보니 그녀의 종적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며칠째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동물병원도 문을 닫은 채라 이웃이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출동해 살펴보니 그녀는 목이 잘린 채로 화단에 묻혀 있었다 고 한다. 당시 엽기적인 살인으로 언론에서 꽤 떠들썩하게 다뤄서 기사들도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특집 방송까지 꾸며졌을 만큼 꽤 주목을 받았지만 당연 히 범인은 잡지 못했고, 그녀의 아들 이승도는 실종 시기가 누적되어 사망 선 고까지 이미 끝나 있는 상태였다.

   뉴스를 보고 달려온 친척이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갔다고만 되어 있었다. 친척이라는 자들의 신원은 명확지가 않았다. 아니,당시에는 분명히 존재했

던 이들이 었겠으나 그 일이 있은 뒤로 감쪽같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마지막 행적은 집을 팔고 얼마 안 되는 자산을 모두 현금화한 것이 었다. 이후로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용카드 한번 긁 은 적이 없었다. 추측해보건대 이승도 모자에게 생긴 변고를 정확히 파악한 그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어떤 불법적인 방법으로 신분을 바꾼 것 같았다.

   “네 친척이 살았다던 동네에 오래된 구멍가게가 있었는데,거기 주인인 노 부부가 꽤 자세히 기억을 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급하게 집을 팔고 쫓기듯이 사라져서 빚쟁이라도 붙었나 싶었었다고. ”

   태국영은 긴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놓았다.

   “그래도 장례는 제대로 치러 놓아서 무덤은 찾을 수 있었어. 형편이 여의 치 않았는데도 십오 년 치 관리비를 미리 내둔상태더라. ”

   “어차피 기간도 다 돼 가고,만료되면 연장하거나 이장해야 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랑 붙어 있는 것도 좀 그렇고, 터도 안 좋아 보여서 그냥 근처에 땅 사서 개인 묘지 설치하고 그리로 이장했어. 내 사유지라 내가 지정해 둔 관리 인 외에는 누구도 출입 못 해. 아마 지금 당장 가도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 을 거야.”

   “울지 마.”

   태국영은 한 손으로 이승도의 뒷머리를 꽉 움켜쥐고 끌어왔다. 이승도가 얼 굴을 묻은 가슴팍은 금세 뜨뜻한 물기로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참으려고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 보지만 맘처 럼 잘 안 되는 듯했다.

   “울지마,승도야.”

   품 안에서 떨리는 몸이 애처로웠다. 태국영은 더 세찬 힘으로 이승도의 몸 을 감쌌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이승도는 한참 뒤에야 꽉 막힌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 렸다.

   “국영아. 돌아가면 우리 같이 엄마 산소부터 가자. ”

   태국영은 응,하고 대답했다. 이승도는 빨갛게 변한 코를 그의 가슴에 더 깊

이 파묻었다. 말하길 잘했다. 제가 용기를 내니 태국영 역시 봉인해 둔 것들 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안해,승도야.”

   그가말했다. 더 빨리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너의 고통스런 기억 을 끄집어내는 것이 옳은 길일까 고민하면서, 비겁하게 자꾸만 다음으로 미루 다가 지금까지 와 버 렸다고.

   뒤늦게 사과하는 법을 배운 그에게,이승도는 고맙다고 말했다.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고, 그렇게 소중하게 보살펴줘서 고맙고, 이제 다 녹아 없어진 어머니의 뼈와살점들에게나마 인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렇게,용기 내서 사과해 줘서 고맙다고.

   이승도는 해묵은 그리움과 슬픔을 토해내듯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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