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제 다 끝났어
둘째 날까지 이승도는 정말로 휴양에 집중했다. 거의 저택에서 놀고먹고 하 다가 가끔 심심하면 집 앞 해변에 나가는 게 대부분이 었다.
단 한 번 딩기요트를 타본 적이 있었다. 날이 잔뜩 흐렸지만 물결은 잔잔해 서 태국영은 꽤 먼 바다까지 쭉쭉 요트를 몰고 나갔다. 출발 직전에 짧게 배 운 것치고는 너무나 대담하고 노련한 운전이 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태국영이 곁에 있었지만,이승도는 언제 빠질지 모 튼다는 공포감에 내내 바짝 얼어 있었다. 특히 움직일 때보다 멈춰 섰을 때 그 공포는 정점을 찍었다. 태국영이 러더를 놓고 내려와 옆에 앉자마자 허겁 지겁 그를 부둥켜안았다.
태국영은 그 상황을 매우 즐기는 듯했지만 그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혼자서는 안절부절못하던 이승도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 었다. 이 승도는 태국영에게 엉겨 붙고 나서야 제대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 다.
해수면은 작은 조각으로 쪼개졌다가 포개지길 쉼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당 연히 얼마나 깊은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승도는 주저하다가 팔을 뻗어 물을 움켜쥐어 보았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적응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을 놓아주고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태국영이 대범하게 바다로 뛰어들어 유유히 요트 주 위를 수영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 룬 하루였다.
그리고 다음 날 밤, 드디어 제대로 된 외출을 했다. 저녁 후 샤워를 한 일행 은 차를 몰아 미리 정해둔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유명한 관광코스는 다 마
다하고 이승도가굳이 고층빌딩에 가서 야경을 보고 싶어 했기에 생긴 일정이 었다. 태국영은 스카이라운지 전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나서야 뜬금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홍콩 야경은 왜 궁금해? 서울이랑 크게 다른 것도 없어 보이는데. ”
“뭐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노래 못 들어 봤어? ”
별들이 소곤대는 흥콩의 밤거 리 一
이승도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노래 한 토막을 짧게 흥얼거렸다. 태국영은 멀 뚱히 눈을 낌뻑이다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나 되게 어렸을 때 들어본 적 있거든. 나름 유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 말 몰라?”
“그래? 성문이 넌 들어본적 있어?”
“전혀 모르겠습니다.”
태성문도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이승도는 처음으로 세대 차이라는 것을 느꼈다. 저 어릴 때는 코 찔찔이 친구들이 심심찮게 부르고 다녔는데 말이다. 물론 다들 그 한 구절밖에 몰랐다. 가수가 누구인지,실제로 있는 노래기는 한 지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때 태준호가 한 손을 번쩍 들며 끼 어들었다.
“저 압니다. 곡 제목은흥콩의 아가씨지요. 궁금하시면 제가一”
“넌 제발 몰라라.”
“아는데요?”
“그냥 닥치라는 말이야.”
“아,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태국영은 엘리베이터 벽에 한손을 짚으며 짧게 한숨을 지었다. 그래도 한 스무 번쯤 얻어맞고 나니 닥치랄 때 닥칠 정도는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난생처음 노이로제라는 걸 얻어 가게 됐을지도 몰랐다.
목표 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 문이 시원하게 열렸다. 태국영은 앞장서 걸으 며 태성문에게 지시했다.
‘가까이에 있되 방해하지는 말고.
“예. 당연히.”
태성문은 일부러 ‘두 분 좋은 시간을 방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라는 뒷말을
생략했다. 심심찮게 청각 테러를 당해야 했던 태국영의 평온을 위해서였다.
태성문은 요즘 그렇게 의식적으로 말을 줄여서 뱉어내고 있었다. 그 정도 만 해도 태국영은 다 알아들었고,그럴수록 태성문은 더 예쁨 받고 있었다.
“좋은 시간되십쇼!”
물론 태성문이 속 깊게 삼키는 말을 대부분 태준호가 해 버렸지만 말이다. 태국영은 대꾸하기도 귀찮은지 재빨리 손사래를 한 번 쳤다.
태성문과 태준호는 입구 근처의 테이블에 가 앉았고,이승도와 태국영은 창 문 옆의 로얄석에 앉았다. 서버가 메뉴판을 가져왔다. 태국영은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서버에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미리 주문해 둔 와인이 있을 텐데.〕
〔확인하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서버가 잠시 와인을 가지러 간 사이 이승도는 작게 박수를 쳤다. 태국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요 며칠 동안 생각한 건데,너 영어 발음 되게 섹시해. ”
태국영은 혀를 차며 웃다가 상체를 앞으로 가져왔다.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던 이승도는 바짝 다가온 그의 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승도 영어 가르쳐야겠다. 가끔 다리 좀 열어 달라고 꼬실 때 써 먹게.”
풍성한 속눈썹이 그의 눈 밑 살에 덤불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얘는 어디 서 이런 야한눈웃음을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영어 아니라 어디 오지의 원주 민 말로 속삭여도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승도는 그의 뺨을 검지로 쿡 찔러서 밀어내며 대꾸했다.
“돌아가면 정말 영어회화나공부해 볼까? ”
태국영은 진짜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한쪽 눈을 크게 떴다.
“응? 진짜로?”
“너도 통역 쓰면서 다니면 모르겠는데 나만 혼자못 알아들으니까 왠지 혼 자 왕따 당하는 기분이랄까. 딱히 그런 게 아니더라도 배워두면 언젠가 써먹 을 데가 있기도 할 테고. 네가 좀 가르쳐 줄래? ”
태국영은 곤란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비볐다.
“그냥 과외 붙여 줄게. 난 배우는 건 잘해도 선생질은 소질 없어. ”
“아. 그건 그렇지.”
태국영이 수업을 잘 못 따라오는 학생을 잘 달래가며 이끌어가 주는 장면 은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제 성질 못 이기고 뭘 벌써 까먹느냐는둥,너 돌머리냐는 둥 독설을 날리면 날렸지.
“단번에 납득하네? 기분 나쁘게.”
이승도가 할 말 없이 웃음으로 때우고 있을 때 서버가 와인을 들고 돌아왔 다. 병 와인을주문한손님들께 나오는 서비스라며 과일이 소량 담긴 접시도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와인은 직접 개봉하시겠습니까?〕
태국영은 턱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버가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돌려 딴 뒤 잔을 채우고 병 주둥이에 묻은 와인 방울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 내려놓 았다.
〔혹시 더 필요하신 안주가 있으십니까?〕
〔나중에.〕
이승도는 와인을 마실 때 안주를 잘 먹지 않았다. 먹더라도 반병 정도 마 신 뒤에 치즈나 과일 정도를 조금 집어 먹는 게 다였다. 저녁도 든든히 했으 니 아마 요깃거 리도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서버가 깍듯이 인사한 뒤 돌아갔다. 태국영이 와인 잔의 목을 살짝 쥐어 내 밀었다.
“건배사는 승도 맘대로.”
흠. 뭘로 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승도는 가볍게 잔을 부딪쳐 건배하며 말했다.
“우리의 다음여행을 위해.”
그 무난한 건배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태국영이 그림처럼 미소를 지었다.
홍콩의 밤은 휘황찬란했다. 제각기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고층빌딩들에 눈 이 부셨다.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마치 그 자체로 금광처럼 보 였다. 이승도가 기 억하는 짧은 노랫말처 럼 별들이 소곤대는 밤이 아니 었다. 어둠을 제물 삼아 너도나도 숨 가쁘고 치 열하게 빛을 발산하는 도시 였다.
취기가 기분 좋을 정도로 올랐을 무렵, 태국영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거 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흘 가까이 고요함 속에서 푹 쉬었으니 한 번쯤은 저 화 려함 속에 섞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태국영은 태성문과 태준호를 먼저 돌려보내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 고 목적지도 없이 잠들지 않는 도시를 달렸다.
이승도는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서울에도 이 런 눈부신 곳이 있느냐고. 태국영은 대답했다. 네가 가보지 못한 곳이 아직 참 많다고.
앞으로는 종종 밤 드라이브를 나가기로 약속했다. 반짝이는 곳을 구석구석 다 가 보고 한국의 바다들도 모조리 가보고 싶었다. 태국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승도 넌 어릴 때 어디 나들이도 안 가 봤어? ”
이승도는 그의 질문이 기뻤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제가 어머니 와 살던 때를 입에 담아본 적이 없던 그였다.
“응. 나가도 사람 별로 없고 되게 가까운곳만. 엄마는 걱정이 많았으니까. 특히 밤에는 거의 못 나갔어. 중학교 일학년 때였나,한 번은 친구들이 야시장 이라는 데를 같이 가자고 꼬드겨서 자는 척하다가 엄마 몰래 나간 적 있거든? 그날 엄청 맞았지.”
“우리 승도 때릴 데가 어딨다고. ”
“때려 봐야등짝인데 뭐.”
가진 용돈을 탈탈 털어 맛있는 걸 사 먹고, 이상한 야바위 같은 것도 하고, 그렇게 신나게 노는 동안 어머니는 그 근방을 울며 헤매었다. 지금처럼 너도 나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때가 아니라 그저 무작정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 던 시절이었다.
새벽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퀭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어 떤 말도 없이 하염없이 울며 손바닥으로 등을 때렸다. ?}플까봐 힘도 싣지 못 하고,그냥 투정부리는 것 마냥 때리고, 또 때리고, 그러다가끌어안고 또 엉 엉 울고.
“홍콩에도야시장 있다던데. 가볼래?”
태현리가 소개했던 관광지 중에는 야시장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때는 거 절했었다. 낯선 타인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며 걷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릴 때를 떠올린 직후여서 인지 마음이 동했다.
“그래. 갈래.”
태국영은 잠시 갓길에서 차를 멈춰서 휴대폰으로 지도를 살폈다.
“그리 안 머네. 한 이십 분이면 가겠어. ”
느긋하게 차를 몰며 풍경을 눈에 담을 시간을 주던 그는 목적지가 생기자 속도를 빨리했다. 번득이는 불빛들이 긴 잔상을 남기며 뒤편으로 사라져 갔 다.
태국영은 10분 만에 야시장을 찾아냈다. 그러나 차를 댈 곳이 마땅치가 않 아 멀찍이 아무렇게나 박아두고 걸어갔더니만 20분은 훌쩍 지나갔다.
“잡내들이 진동하네.”
태국영은 번쩍이는 간판들 아래를 지나치며 콧등을 비볐다. 이승도는 신기 한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바®다. 엄청나게 시끌벅적하다는 점을 제 외하면 어릴 적 제가 가 본 야시장과 완전히 달랐다. 그냥 간판이 화려한 재래 시장 같은 느낌이 었다. 이승도는 온갖 군데를 돌아다니며 망고 주스를 시작으 로 군것질거리를 사 먹었다.
“뷔페 왔냐.”
라고 태국영이 기가 막혀 웃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를 그득 채운
뒤엔 느긋하게 가게들을 구경했다. 옷과 잡화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딱히 살 게 없어서 구경만 하려 했는데 그게 맘처럼 안 됐다. 붙들고 늘어지는 걸 요령 좋게 거절하는 재주가 없다 보니 멈춰서는 족족 뭘 하나씩 사고 말았다. 덕분에 태국영의 양손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태국영은 들어야 할 물건이 많아지자 아예 큰 스포츠 백을 사 버렸다. 그리 고 그 안에 이승도가 거절 못 해 사 버리는 걸 바리바리 구겨 넣었다. 군소리 하나 없이 따라 오는 그가 고마웠다.
맘껏 활보하다 보니 어느덧 시장을 거의 다 돌았다. 마지막으로 여기만 보 고 가야지, 하며 코너를 돌아들어가려던 때였다.
“스톱.”
처음으로 제지가 들어왔다. 이승도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혹시 스포 츠 백이 다 찼나 싶어 돌아보았을 때였다. 태국영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뭐가 있어.”
이승도는 왠지 긴장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태국영은 신중하게 몇 번 숨을 들이켜더니 말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그래도 가 볼래? ”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이 안쪽에 있다는 소리 였다. 태국영이 가도 된다고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지만,어찐지 내키지가 않았다. 이승도는 단번 에고개를 저었다.
“아니. 돌아가자.”
이승도는 왔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국영도 막 뒤를 돌았다.
〔거기 형씨.〕
태국영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승도를 제 뒤로 끌어다 놓으며 반쯤 몸을 돌렸다. 남자 하나가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까닥하며 태국영을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되게 희미한 냄새네. 낯설기도 하고. 어디서 왔어?〕
광둥어를 썼던 그가 이번에는 영어로 물었다. 태국영은 짧게 ‘한국. ’하고 대 답했다. 아아?,고개를주억거리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계속 코끝을
찜긋거 리고 있었다. 태국영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남자는 자신을 꿰뚫어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남자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 는 약하고 병들어 있었다. 눈빛은 탁하고 몸에서는 썩어가는 고기의 상한 냄 새가 났다. 상대방의 전력을 가늠할능력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남자가물 었다.
〔여기온 거우연이야?〕
태국영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태호연이 제게 가져왔던 자오추안의 공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유통되어 흥콩과 대만으로 퍼졌다는 바로 그 약, 풀문.
〔너처럼 희미한 애들이 여길 오면 백발백중찾는 게 있거든.〕
태국영의 옆얼굴을 조마조마하게 올려다보던 이승도는,그의 두 눈이 싸늘 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고를 치진 않 겠지만 문득 불안감이 목덜미를 긁어내렸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시선만 움직여 내려다보았다.
가자,국영아.
입 모양으로 채근하자 태국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 니 고개를 끄덕 였다.
〔잘못봤어. 난아냐.〕
태국영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몸을돌렸다. 남자는 이상하다는듯이 ‘그래, 그럼.’ 하며 다시 코너를 돌아사라졌다. 이승도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서 몇 번 태국영에게 말을 붙였다. 그때마다 태국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꾸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넘 어가려고 했던 이승도는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남자는 뭐였어?”
“나한테 뭘 팔려고 했어.”
늘 그랬듯 태국영은 착실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팔아? 뭘?”
?약,’
이승도는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태국영을 비롯한 그의 일족은 슈퍼문을 제외한 약을 쓰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인간에 가까울 만 큼 약하게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약효가돌기 전에 그들의 피가 이질적인 성분 을모조리 분해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약? 약을 팔려고 했다고? ”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묻자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 였다.
“일종의 마약 같은 거야. 나도 말로만 들어서 자세히는 몰라. ”
“마약이 있어? 너희들한테도듣는?”
“그렇다나봐.”
이승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그 마약 같은 걸 팔려고 했지만 태국영은 거절했다. 싸움이 나지도 않 았고 원한이 생길 거리도 없었다. 그거면 됐다.
안심한 이승도는 그런 친구 사귀지 말라는 말로 화제를 끝맺었다. 태국영 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승도는 금세 깊이 잠들었다. 하지만 워낙 잠귀가 밝아 태국영은 완벽하 게 기척을 숨겨야만 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두 남자를 깨웠다.
“성문이 냄새 숨기고 승도 옆에 있어. ”
“어디 가십니까?”
“확인할 게 있어. 넉넉히 한 시간이면 될 거야. 만약승도가도중에 깨면 내 일 빌리기로 한 요트에 문제가 생겨서 나갔다고 해. ”
“네.”
“그리고 태준호. 수거할 게 있으니까 너는 따라와. ”
태준호가 뭔가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태국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먼저
선수를 쳤다.
“진지하게 경고하는데,나 지금 기분 좆같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묻 지 않는 이상 절대 한마디도 뱉지 마. 대가리 터지기 싫으면. ”
태준호는 긴장한 낯빛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 였다. 진짜다. 이번엔 진짜였 다. 주둥이 한번 잘못 놀렸다가 황천길 가는 티켓을 받게 될 거다.
“혹시 힘 써야 될 일이라면 저도 충분히 괜찮은데요. ”
요 며칠 태국영의 청각을 위해 필요한말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았던 태성 문이 뒤늦게 다른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그는 ‘수거할 게 있다’는 말을 듣자 마자 태국영이 무엇을 수거하겠다는 건지 눈치를 챘다. 또한 그는 이승도를 지켜주는 걸 매우 보람차 했으나 대기조보다는 현장에서 피 냄새를 맡으며 뛰 어노는 게 더 좋았다. 그러나 태국영은 고개를 저 었다.
“아니. 성문이 넌 연극을 시키기엔 너무 딱딱해.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어 를 못하고. 다 자기 알맞은 장소에 두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
태성문이 시무룩하게 네에,했을 때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목 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국영아. 어디 갔어.
이승도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태국영을 부르고 있었다. 오,맙소사. 그런 표 정으로 셋은 동시에 서로를 우왕좌왕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검지를 입술에 한 번 세워 보이고 위층으로 튀어 올라갔다. 이승도는 졸음이 남은 눈을 비비 고 있었다.
“어,승도야. 왜 깼어?”
찔리는 게 있을 때 태국영은 그특유의 표정이 있다. 뭐랄까, 남들은 절대 로 알아채지 못하는데 이승도만 알아차리는,그런 포인트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미친 듯이 환하고 다정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태국영의 얼굴을 빤 히 바라보던 이승도는 ‘얘 또 왜 이래.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뭐가 뭔지 먼저 떠봐야겠는데.
“몰라. 추워서 깼나 봐.”
“에어컨 줄여줄까?”
“아니. 네가제일 따뜻해. 이리 와.”
이승도는 얇은 이불을 펄럭 들춰서 옆자리를 훤히 내보였다. 태국영은 잠
시 멈칫했지만 얌전히 옆에 앉았다.
이것 봐라? 네가 지금 내가 옆에 누우라는데 멈칫했어?
의심은 더 깊어져 갔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허리에 양팔을둘러 안으며 그 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자고 뭐했어?”
“그냥 성문이랑 준호랑 대화좀 했어. ”
태국영은숨길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일단둘과 대화했다는건 확실 했다.
“무슨대화?”
그러자 역시 태국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거짓말 도 안 하고 잘 속여 넘길 수 있을까 그런 것 따위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 가려고? 홍콩에 왔다는 그 일본인 찾으러? 아님 그 약 파는 남자찾 아가려고? 가서 뭘 어쩌려고? ”
그때쯤에야 태국영은 이승도가 완전히 눈치를 챘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그를 속이려면 완벽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태국영은 고작 이런 일로 신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약 파는 애들 말이야.”
그래서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태국영은 그 약이 어떻게 제조가 된 건지 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막말로 제가 뭐 다 잡아 죽이려고 가는 건 아니다. 그냥 약을 회수하면서 이거 어디서 났냐,누가 만들었냐,조금 추궁하려는 것뿐이다. 물론상대방이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그 추궁의 강도가 달라질 수는 있다. 그 래도 되도록이면 점잖게 몇 대 후려치면서 끝내볼 생각이다.
“만약 협조적이지 않으면?”
사실은 죽일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태국영은 마음을 바꿨다.
“왕린한테 넘기지 뭐.”
“그 왕린이란 남자가 여기 종주야? ”
“현 종주 아들이야. 차기 종주로 유력하게 꼽히는 이들 중 하나고. 아직 현 종주가 팔팔해서 언제 종가전쟁이 시작될지는 모르지만. ”
“그럼 그냥 처음부터 그 남자한테 말해서 해결하라고 하면 안 돼? ”
이승도는 매우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니,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저 태국영이 그런 일에 애초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태호연이 이 일을 처음으로 내게 알려주던 날 그런 말을 남기고 갔어. 내 가 아무리 싫어해도,나는 태 가의 가주라고. ”
태국영은 짧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긁었다.
“승도야. 내가 해야 돼. 오늘 일이 없었다면 모르지만,나도 그냥 모른 척 할생각이었지만,내가그 현장을봤잖아. 그런데 나더러 왕린한테 떠넘기라 고 하면 그건 네 남자 능력 없다고 광고하는 꼴이야. ”
“금방 다녀올게. 너도 냄새 맡을 줄은 아니까 어느 정도 예상해볼 수 있잖 아. 개들 되게 약해.”
태국영이 의무감으로 마음을 정했다면 그걸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 래서도 안 되는 문제인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태국영이 현재 가주이고, 또한 그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올 거야?”
“넉넉히, 두 시간. 그 안에 돌아올게. ”
“나 안 자고 기다릴래. 그동안 내내 네 걱정 하고 있을 거야. ”
“그래.”
“약속안지키면 화낼 거고.”
“응. 꼭 올게.”
확답을 받고 나서야 이승도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에서 힘을 뺐다. 태국영 은 곧장 일어나지 않고 조금 더 애를 썼다. 개들이 얼마나 약한지, 내가 얼마 나 센지, 떼로 덤벼도 흥 콧방귀 한번 날리면 우수수 나자빠질 거라는 걸 꽤 공들여서 에두른 말로 안심시켜 주었다.
“되도록 일찍와.”
태국영은 응, 하고 대답했다. 그 역시 그러고 싶었다.
“자. 어떻게 하라고?”
태국영이 묻는 말에 태준호는 열심히 기억해 둔 스토리를 풀어 놓았다.
“그러니까 저는 냄새를 숨기고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저기 아지트로 가서 약을 좀 사겠다고 하는 겁니다. 자오추안이 격노한 바람에 중국 내에서는 더 약을살수 없게 되어서 금단증상에 시달리는놈처럼 손을 떨면서요. 그리고 그 약을 받아서 증거물로 잘 챙긴 다음 다 기절시키고 한 놈만 들쳐 메고 나 오면 되는 겁니다.”
“플랜 B 는.”
“약을 제조하는 장소를 직접 알아낼 수 있다면 적당히 캐물어 봐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다행히 머리가 아주돌은 아니네. ”
“저 똑똑합니다. 광둥어도 잘하잖습니까.”
“시끄럽고, 어서 들어가.”
태준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걸어갔다. 야시장이 열린 지역 주변을 살살이 뒤 져내서 찾은 놈들의 아지트를 향해서 였다. 워낙 희미한 냄새라 찾기가 까다로 워서 40분도 넘게 걸렸다. 이승도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태준호가 문을 두드렸다. 창문에 불이 환하게 밝혀 있는 만큼 반응은 빨랐 다.한 남자가 나와 누구냐고 물었다. 아까 본 그 얼굴이 아니 었다. 태준호는 혀 꼬인 발음으로 지금 당장 약을 사고 싶다고 했다. 얼핏 봐도 마약 중독자 같았다.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연기 하나는 기가 막혔다.
남자는 별 의심 없이 안으로 안내했다. 태국영은 안의 동향을 유심히 엿들 으며 기다렸다. 태준호가 중국어로 말을 걸었기에 그들은 중국어로 대화를 하 고 있었다. 알아듣는 데에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얼마나 필요해?
-최대한 많이. 중국에는 더 이상 파는 놈이 없어. 자오추안이 다 때려잡았
으니까.
-그래. 소문 들었어.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가진 건 너 혼자 아껴 써도 한 달 도 못 버틸 양인데.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다시 올게. 특별주문도 받아?
- 웃돈만 더 얹어주면.
-돈은 얼마든지 줄게. 최대한으로 많이 뽑아줘.
뭔가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났다. 잠시 뒤 태준호가 물었다.
-이게 다야? 적어도 너무 적은데. 혹시 여기서 만드는 거면 기다릴 수 있 어.
제법이었다. 꽤 자연스럽게 제조하는곳에 대해 묻고 있었다.
-맘 같아서는 여기서 되는대로 막 만들고 여기서 빨리 팔아치우면 우리 야 편하지만,알다시피 우리도 언제 단속될지 모르는몸이라. 자오추안처럼 갑자기 판매금지 때리고 잡으러 다니면 재빨리 튀어야 돼서 여기선 안 만들 어.
-그럼 내일 다시 한번 더 올까?
-내일… 그래. 최대한많이 만들어 두라고말해 놓을게. 대신 돈은두 배 야.
-그래. 풀문인데 그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지.
아. 저 새끼가 쓸데없는 소리를.
태국영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건 제가 미처 생각 못 한 변수였다. 태준호는 풀문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었고,저는 그 긴 스토리를 굳이 풀어 얘기해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풀문?
역시나 상대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풀문은 자오추안이 공식 문건을 위 해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이름이고,약쟁이들 사이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 고 있었다. 자오추안이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풀문은 놈들 사 이에서 금기어가 되기도 했다.
-이 새끼,자오추안이 보낸 놈이구나.
그리고 직후 무슨 소리가들렸다. 질긴 비닐이 터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 다. 태국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곧이어 들린 것은 예 상 밖으로, 태준호의 낮은 신음 소리 였다.
_이 새… 이거 뭐야 !
- 이 새끼 죽여 !
그 뒤로 뭔가 난장판이 됐다. 그리고 들려오는 것은 놈들의 광분한 고함뿐 이 었다. 태준호는 별 저항을 못 하고 있는 상태 인 듯했다.
태국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아무리 태준호를 쭉정이 취급해도 저런 놈들에게 린치를 당할 정도는 아니 었다. 그 혼자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는 판단하에 그를 들여보낸 것이기도 했다.
태국영은 더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튀어 나갔다. 잠겨 있는 문을 부수고 안 으로 들어가자 일단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지하에 있었다. 피 끓는 냄새 가 불길처럼 코를 찔렀다. 이 안의 모두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다다라 있는 것 이었다.
태국영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찾아 훌쩍 내려섰다. 가장 먼저 시야로 들 어온 것은 눈앞을 희뿌옇게 덮는 가루들이었다. 태국영은 그것이 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안개 같은 가루비 너 머 태준호가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째서 인지 한계까지 변이를 한 상태 였다. 그러고도 무력하게 나뒹굴고 있는 거였다.
〔저 새끼도 한패다!〕
태국영은 제게로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단번에 박살 냈다. 피가 폭죽처럼 튀어 흰 가루들을끌어안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는 몸을 날려 태 준호를 붙잡아 올렸다.
“태준호.야,이 새끼야. 너 왜 이래. ”
태준호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태국영이 그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쩍,뺨 을 때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음이 뒤를 따랐다. 태준호의 눈에 총기가 얼
핏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태국영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 였다.
〔죽여, 죽여!〕
광기에 사로잡힌 무리가 등 뒤를 덮쳤다. 태국영은 태준호를 바닥에 내려두 고 앉은 상태에서 몸만 틀어 돌아보았다.
“이 버러지 같은놈들이 감히. ”
그들은 태국영에게서 순간적으로 폭발해 나오는 살기에 머뭇거렸다. 당황 한듯 여기저기서 무슨 말이 튀어나왔다. 태국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화가 났다. 정확히 뭐에 화가 났는지 그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지 만,미친 듯이 화가 났다.
몸이 뜨거웠다. 그는 더러운 피가유혹하는 대로몸을 움직였다. 한남자가 태국영의 손에 꿰뚫린 채 벽에 처박혔다. 책장처럼 보이는 낡은 가구가 박살 나며 다시금뿌연 연기가사위를 격렬히 메웠다.
태국영은 더욱더 흥분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증오와 살 기가 그의 몸을 부풀렸다. 논리적인 생각이, 이성적인 판단이,조금도 남아 있 지 않았다.
-다죽여.
광분한 짐승이 그를 부추겼다.
-맹세했잖아, 태국영. 이 안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다 찢어 죽이겠다고.
그랬지. 맞아. 내가 그렇게 다짐했다.
생전에 누구였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잔인하게 찢어 죽이고 씹어 발겨서 쓰레기처럼 버려 주리라고 다짐했었다.
내 가여운 승도를,그렇게 소모품처럼 학대하고, 또한 학대하는 내 곁에 감 시 하나 없이 방치했던 그들을,모두, 그렇게 취급해 주겠다고.
태국영은 목소리를 잃은 짐승처 럼 포효했다. 그의 몸을 감싼 옷가지들이 잘 게 찢어져 사방에 흩날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는 제게 달려드는 것들을 자비 없이 잔 조각들로 도륙해 나갔다.
붉은 비가 너울거렸다. 피비린내가 천지를 집어삼켰다. 태국영은 사체를 찢 고 씹었다. 그는 피를 마셨지만 갈증이 났다. 뜨거운 살점을 이 발톱에 더 제
물로 던져주어야 했다.
예민하게 돋아난 신경 끝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로 날아 갔다. 그리고 막 심장을 꿰뚫으려던 때였다.
“형님… 승도 님께서 기다리시는……
놈이 이승도를찾는다. 저 말고도 그를 가여워했던 이다. 이것은죽이면 안 되는 거였다. 태국영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마지막 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태국영은 태준호를 물고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갔다. 달과 별이 흐릿한 눈으 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국영은 그를 그 자리에 놓았다.
그^음은.
뭘 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 광기를 부추기던 짐승이 지금은 만족 한 듯 아무 말도 없었다. 주변에서 바르작거 리는 것들은 하등 상대할 가치 없 는 미물들뿐이 었다.
그는 달렸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도못하면서. 그저 제가유일하게 기 억하는 향기를 찾아 헤매었다.
이승도는 연신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분명히 올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가슴 한구석에서 불 안함이 움텄다. 억지로 짓밟고 꺼뜨려도 자꾸만 살아나고 있었다.
“죽이진 않겠지.”
사실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가 종주조 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우려는 그를 상대해야 하 는이들이었다.
“또 원한을 남겨두면 안 되는데. ”
그래도 약속했으니까,태국영은 어떻게든 약속은 지키는 남자니까,누구도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거였다. 이승도는 길게 한숨을 지으며 장승처럼 창
가에 서 있는 태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성문 씨. 국영이가 왜 이렇게 늦을까요? ”
태성문이 잠시 멀거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놈들이 버티고 있나보죠.”
“죽이진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면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안죽이고 열심히 패고 계신가보죠. 걱정 마십쇼. 가주님은 기술이 아주 좋습니다. 죽이지 않고도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잘 조절하십니다. 성년식 때 겪어본 제가 제일 잘 압니다. ”
지금 이걸 말이라고…….
이승도는 대화의 의지가 꺾였다. 태성문은 대강의 눈치로 제가 원하던 답 을 주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아니 면 아마 왕린에게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고요. 가주님은 의심이 많으셔서 왕린이 확실히 족치는지 곁에서 두고 보고 싶으실 겁니다. 예,그쪽 이 더 가능성이 있겠네요. ”
그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였다. 이승도는 그냥 계속 침묵을 지켰고 태성문은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 폈다.
그때였다. 태성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가주님께서 돌아오고 계신…데……. ”
활기차게 포문을 열었던 그의 말끝이 석연찮게 흐려졌다. 이승도는 침대에 서 내려오며 영문을 모를 얼굴로 물었다.
“계신데요? 뭐요?”
“성문씨?”
재촉하듯 그의 팔을 붙들자 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태성문 은 뭔가혼란스러운 표정이었고,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그게,그러니까,가주님 모습이……
“……예. 모습이요? 왜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그렇지 않아요?”
태성문은 짧은 시간 극렬히 갈등했다. 그는 죽더라도 이승도를 지켜야 했 고,그건 그 상대가 누구이건 적용하는 의무였다. 하지만 지금 이쪽으로 빠르 게 다가오는 태국영이 지금의 제게 적인지 아닌지를 쉽게 판단할수가 없었 다.
준호 형이 없다. 준호 형이 피를 흘렸다.
그것 때문이 었다. 태국영은 불량한 가주였지만 그래도 제 가솔이 다치도록 내버 려두는 남자는 아니 었다. 그런데 지금 태국영은 혼자였고 그의 몸에서 나 는 피 냄새에는 태준호의 것도 열게 배어 있었다.
홍콩의 유력 가문들과 전면전이 벌어졌거나 태국영이 미친 게 아니라면,그 가 태준호의 피 냄새를 묻힌 채 홀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만약 태준호가 죽었 다면 그는 그 시체라도 물어 왔을 남자였다.
“일단,제 뒤에 계시지요.”
태준호는 이승도를 끌고 창문 반대편의 구석으로 가 등 뒤로 두었다. 쨍,창 문이 박살 나며 태국영이 등장했다. 등 뒤에서 이승도가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태국영은 거대하고 완벽한 짐승의 모습 이었으니까.
태성문은 긴장한 낯빛으로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가주님. 정신 제대로 박혀 계십니까. ”
태국영은 먼 꿈속에서 헤매듯 몽롱한 눈동자였다. 짧고 매끄러운 검은 털 은 핏물이 얼룩져 혼탁하게 번들거 렸고,그가 내뿜는 숨결은 거칠고 사나웠 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어딘가 정신머리 하나쯤 버려두고 온듯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습니다. ”
태성문은 그렇게 판단했다. 저뿐만이 아니라 이승도 역시 위험했다.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그는 이승도를 들쳐 메고 이 자리를 피해 볼까 싶었다. 그 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순간 이승도가 먼저 태국영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국영아. 왜 그래?”
침착한 목소리였다. 어째야 할지 갈등하는 태성문을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 낸 이승도가 다시 나직이 물었다.
“국영아. 어디 아파?”
그러자 넋이 나간 것처럼 바라만 보던 태국영이 입을 벌렸다.
[내가다죽였어… 이제 다끝났어, 승도야. ]
그 한마디로 태성문은 깊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적어도 이승도를 알아볼 정도면 제가 목숨 걸고 맞서 싸우며 버텨야 하는 상황만은 면했다는 소리였다.
도망을 치건 맞서 싸우건 제게는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뭐가 됐건 태국영 이 언젠가 정신이 돌아오면 제가 틀림없이 독박 쓰게 될 결말이었다.
“성문씨. 괜찮으니까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
“그건안 됩니다.”
태성문은 이승도의 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 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절대로 방심할 수 없었다. 저런 상태의 태국영을 눈앞 에 두고는.
“그래요,그럼.”
그렇게 대답하고 태국영에게 다가가려는 이승도를,태성문이 재빨리 잡아 챘다.
“안됩니다.”
“왜요?”
이승도는 정말로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태성문은 그런 그가 조금은 답답했 다.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가주님 지금 제정신 아니십니다. 무조건 거리를두 십시오. 당신께서 잘못됐다가는 다 죽습니다. ”
“국영이가 제정신이 아닌 건 저도 알아요. 그리고 재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서도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요. “…가주님을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
“제가몰라요? 국영이를요?”
이승도가 쓰게 웃었다.
“아뇨.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저는국영이랑 십삼 년을,단둘이, 밀실에 갇혀 서 살았어요. 국영이가 작은 짐승의 모습으로 안아 달라고 떼를 쓰던 가장 원 초적인 모습부터,너무 미안해서 그냥울기만 하던 모습까지 다 지켜본사람 이에요. 성문 씨,저를 믿으세요. 국영이는 저를 해치지 않아요. ”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그가 저주하고 또 저주했던 그의 피가 가장 더럽 게 끓었던 그날을 제외하고는,정말 그랬다.
작은 속악임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태성문은 차마 더 붙잡지 못했다. 이 승도는 천천히 다가가 태국영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다 끝났어?”
[다 끝났어.]
그는 탈력한 듯이 앞발에 머 리를 기대었다. 크게 오르내리는 등허리가 흐 린 달빛을 탁하게 반사했다. 이승도는 불쾌한 액체로 뒤덮인 그의 등을 조심 히 쓰다듬었다. 그가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만지지 말라니까,맘에도 없는 소 리를 잘도 한다.
“잘 견뎠어.”
태국영은 멍한 눈을 들었다. 이승도는 두통이 몰려오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 는 그의 미간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불안정하고 급박했던 그의 숨결이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너 되게 뜨거워. 많이 아프지?”
잠시 열렬히 고민하는듯했던 태국영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제 내가 안아줄게.”
태국영의 눈매가 크게 벌어졌다. 마치 귀를 의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 승도는 무슨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의 목덜미 쪽으로 두 팔을 넣어 커다란 몸 을 끌어안았다. 잠옷에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고 있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품 안에 갇힌 단단한근육이 짧게 경련하다 곧 돌덩이처럼 굳었
다.
“예쁘네,우리 국영이.”
마약 같은 거라고 했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게 어떤 환각 작용을 불러올수도 있다는 기본적 지식쯤은 알고 있었다. 태국영이 자진해서 그것 에 손을 댔을 리는 없겠지만 어떤 사고로 인해서 의지와 달리 흡입을 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밉지 않아?]
그가 물었다. 풀죽은 목소리였다.
“한때는 정말 미워했었고,한때는 너무 미워하는 척했었어. 그런데 사실, 늘알고 있었어.”
그런 그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이 말을 해줄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빨리 다가와서 정말 기뻤다.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를 얼마나 아껴주고 싶어 했는지. ”
그는 짧은 시간 머뭇거 리다가 고백했다.
[맞아. 잘해주고 싶었어.]
“알아.”
[많이 예뻐해 주고,많이 아껴주고 싶었어. ]
환각 속을 방황하는 태국영은 어 린애처 럼 순수한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능란하게 꾸며낸 가면을 뒤집어쓸 여력조차 없었던 지난날의 그가 눈앞에 있 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잘해 가고 있다고 안심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내 안 의 괴물이 튀어나와. 그 괴물이,내게는 전부인 너를 자꾸만 만신창이로 만들 어 버려.]
이승도는 태국영의 젖은 눈가에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네 의지가 아니었잖아. 국영아,넌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
[하지만 그 또한 나야. 그리고 그놈은 늘 나보다 강했어. 난 두려워, 승도야. 내가 영영 그 괴물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
“아니. 넌 반드시 이겨낼 거고,나와 매일 행복한 아침을 맞게 될 거야. ”
꿈일까.
태국영은 멍하니 의심했다. 꿈에서조차 목도해본 적 없는 찬란한 미래를 이 승도가 읊고 있었다.
“너랑 내가 한 지붕 아래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속삭이고, 너를 똑 닮은 예 쁜 딸도 태어나고, 가끔은 애들한테 정신 팔린 나한테 네가 삐치기도 하고,그 런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거야. ”
나를 닮은딸.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승도는 제 아기조차 두려워서 밀어내는 사람이지 않 나. 그래,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역시나꿈인 것이 틀림없었다.
[미안해,승도야.]
느리게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멎는다. 숨을 멈추고 굳어있던 이승도가 떨 리는 목소리로 ‘뭐가’하고 대꾸했다. 태국영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전부.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것까지,모두 다. ]
태국영은 지친 기색으로 이승도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저 멀리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했다. 전신을푹 감싸고 있는 가슴 저린 향기에 취해 그는 작게 뇌까렸다.
[미안해.]
이승도는 ‘그래. 그래/하고 다정하게 대꾸해주며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그 가 부디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게 해 달라고,그렇게 빌었다. 은폐해 둔 진심 들을 날 것으로 꺼내 보였던 이 순간이 내일의 그에게도 현실로 남아있기를.
이승도는 병자처럼 신열이 끓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의 콧등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태국영은 심지 없이 불꽃을올리는촛불처 럼 물렁하게 늘어져 있다가 크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정말 안 어울리지만,너무 귀여운 표정이었다. 꼭 첫사랑상대에게 도둑 키스를 당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이승도는 작게 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침대로 가자,국영아. 내가 자장자장 해줄게. 아픈 날엔 코 자야지. ”
그러자 태국영은 조금 충격 받은 듯했다. 멀거니 눈을 홉뜨고 있던 그가 확
인하듯 물었다.
[날안아주려고?]
“응.밤새 안아줄게. 이리와.”
한 손을 내밀며 먼저 침대로 가자 태국영은 잠깐 망설이다 따라왔다. 그가 곁에 눕자 큰 침대가꽉찼다. 커다란 그의 몸이 기어코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승도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크게 끌어안았다.
“잠 안 오면 깨워. 자장가라도 불러 줄게. 알았지?”
[…응.]
“그래. 이제다끝났어.”
이승도는 한참 그를 어루만져주며 ‘다 끝났어. ’ 한마디를 중얼거 렸다. 태풍 이 휩쓸고 간 자리에 둘만 오릇이 남은 기분이 었다.
이젠 어설픈 바느질로나마 봉합을 해둔 해묵은 상처들이 잘 아물 날만 기 다리면 될 것 같았다. 오랜 과제를끝냈다는 기분에 심적으로 탈력해 버린 이 승도는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승도야, 자?
태국영은 작게 속삭여 물었다. 이승도는 미동 없이 색색 고른 숨만 내뱉고 있었다. 태국영은 뒤늦게 미간을 찡그렸다. 소리 죽여 참고는 있었지만,그 따 뜻한 손길에 몸을 맡긴 순간부터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누가 폭죽 심을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약 기운이 빠르게 물러 가면서 오는 부작용이 었지만 그는 그걸 자각하지 못했다.
태국영은 이승도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제 몸 상 태가 이렇듯 정상적이지 않을 때 곁에 붙어있는 건 위험했다. 그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묵묵히 통증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괜찮으십니까.”
조심히 소리를 낮춘 말이 등 뒤에서 건너왔다. 태국영은 껑그린 눈으로 돌 아보았다. 가물가물하게 흔들리는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잔뜩 긴장 한 표정이 었다. 순간적으로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아 기 억을 더듬던 그는,
곧 그가 태성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넌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태성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야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
[뭐라는 거야.]
“다행입니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서 정말 다행입니다. ”
[무슨 말이냐니까.]
“정말몰라서 물으십니까? 지금 가주님 꼴을 보십시오. ”
그 말에 태국영은 지끈대는 이마를 짚으며 반사적으로 눈을 내려 제 꼴을 보았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뭐야. 내가 왜 이러고 있어.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그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태국영은 드물게 당황해서 빠르게 눈을 굴렸다.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고 쿨 쿨대는 이승도가 보였다.
[내가,이러고 승도를 찾아왔다고? ]
미치지 않고서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었지만,정황상 발을 뻘 구석은 없어 보였다.
“네. 그리고 준호 형은 도대체 어디다 버리셨습니까. 설마 죽은 건 아니죠?
[준호? …준호. 태준호.]
태국영은 태준호의 이름을 거듭 뇌까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어느 순 간봉인되었던 기억들이 물밀 듯이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수선하게 떠다 니는 기억의 조각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을 끝마치기까지 한참을 허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태국영은 폭발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빗발쳤다.
[왕린한테 지금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 태국영이 사납게 이를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이거보단 나을 거다.
왕린은 태성문에게 전화상으로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들은 순간부터 이건 필시 자이언트 엿 감이라고 예감했다. 어물쩍 넘어갈수 있는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슬쩍 ‘태국영 화 많이 났냐. ’라고 물었고 태성문은 지체 없이 ‘우주전쟁이라도 벌이실 기세’라고 답했다.
왕린은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등장했다. 제 소유의 저택이었지만 가시 밭길에 들어선 기분이 었다.
태국영은 화려하게 꾸민 1층 살롱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 팔은 등받이 에 두고 느슨히 다리를 꼰 채 미동도 없었다. 굳이 면밀히 살펴보지 않아도 전 신에서 ‘나 지금 열 받아 미칠 지경’이라는 기류가 흘렀다.
왕린은 태국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태국영은 눈동자만 움직여서 가만히 노 려보기만 했다.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저 얼굴 너머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짐 작할 수 없었다.
왕린은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대로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길어지는 침묵 은 왕린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안 보이는 침묵을 어떻게든 깨 보기 위해 왕린은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홀려보았다. 그제야 태국영이 입을 열었다.
“웃지 마.”
〔어. 그래.〕
한국어로 말은 못해도 알아듣긴 잘하는 왕린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러 나 태국영은 다시금 한참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왕린은 결 국 짜증스럽게 눈가를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오면서 일단 애들 보내 놓긴 했어. 네가 아예 갈아놓았다고 하더라도 어 디 가문 소속인지는 오늘 중으로 다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책임지고 아버 지 설득해서 다시는 그 약 못 팔게 할게.〕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약이나 팔고 그랬겠냐. 파는 놈들이나 사 는 놈들이나 진짜 죄 구질구질해서 봐줄 수가 없을 정도야. 그래서 아버지도 그것들 사는 꼬락서니가 한심하면서도 가엾다며 일단 두고 보고 계셨던 거고.
〔아니, 뭐 그렇다고 유야무야 덮어가면서 끝내겠다는 건 아니고. 부작용 이 그 지경으로 심하다는데 당연히 당장 단속 들어가야지. 그럼,그게 맞는 거 지.〕
〔……왜. 뭐.〕
동상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정말 무생물 같았다. 왕린은 미심쩍게 미간을 좁히며 몸을 슬쩍 오른쪽으로 기울여봤다. 태국영의 시선이 느리게 그를좇 아 왔다.
눈 뜨고 자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 었다. 왕린은 퍼지듯 소파 등받이에 체중 을 실으며 뒷목을 긁었다.
〔알았어. 중추적인 놈 몇 골라내서 제조법 어디서 딴 건지도추궁해서 알 려줄게.〕
〔네가 직접 족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는 하는데,여긴 한국이 아니라홍 콩이야. 어떤 이유에서건 남의 나라사내놈이 피 뿌리고 다니면 곱게 볼종주 하나도 없다. 너도 일본 가서 그 난장 피워봤으니 알 거 아냐. 그러니까 그 정 도는 우리 종가에서 하게 해 줘.〕
그게 서로서로 좋은 마무리 아니 겠냐고 왕린은 덧붙였다. 그게 현재 홍콩 종주를 대리해서 온 그로서 제안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말도 함께.
〔성문이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태국영이 꼰 다리를 풀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비로소 쌍방대화를 할 마음이 든 모양이 었다.
〔준호를 데리러 갔어. 내가 정신 줄 놓고 날뛰다가 그놈을 현장에 두고 왔 거든.〕
맥락을 짚을 수 없는 말이 었지만 왕린은 일단 잠자코 고개를 끄덕 였다. 태 국영이 손끝으로 등받이를 몇 번 툭툭 두드리다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만약 준호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방금 네가 경건하게 씨불인, 너한테만 좋은 헛소리를 내가 받아들일 일 은 절대 없을 거야.〕
왕린은 속으로 쓴 한숨을 삼켰다. 별로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만에 하나 태국영이 그의 유능한 수족을 하나 잃게 된다면 얌전히 있을 리가 만무 했다. 슈퍼문의 유사 약이 유통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심각한 분쟁 사항이었다.
〔그래. 나도 아니길 바란다.〕
왕린은 충분히 이해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였으니까.
〔나이제가도 되냐.〕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왕린은 마지막으로 진심을 다 해 짧은 사과를 내뱉었다.
〔미안하다. 내일 보자.〕
왕린이 사라지자 태국영은 상체를 깊이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억누를 수 없는 분이 자꾸만 차올라 몸이 뜨거 웠다. 저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아무리 약 폭탄을 뒤집어쓰고 착란 증세가 왔다고 해도, 그 모습을 하고서 여 길 기 어들어오면 안 되는 거 였다.
드드득,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태국영은 손가락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액정에 태성문의 이름이 떠 있었다. 태국영은 전화를 받았다.
《형님. 준호 형 찾았습니다.》
“상태는.”
《코까지 골면서 아주 푹 자고 있는 걸 밟아서 깨웠더니 멀쩡히 일어났습
니다. 이상 없는 것같습니다.》
《하하하하. 제가누굽니까. 이 태준호 몸뚱이 하나만큼은 강철 같습니다.
제 걱정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역시 겉으로는 구박하셔도 속으로는 엄청 저를 아끼고一》
태성문의 옆에서 조잘거리는 소리에 태국영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평 소처럼 헛소리 잘 지껄이는 걸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임이 분명했다.
태국영은 소파에 드러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혼잡해 위로 올라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선명하게 뇌리를 파고 들어오는 기 억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국영아,넌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어떤 얼굴로 이승도를 봐아=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국영아.
태국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난처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 았다. 아직 어떤 가면을 뒤집어쓰고 마주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그는 긴 한숨으로 잡념을 애써 털어내며 올라갔다. 이승도는 침대에 앉아 피로가 묻은 얼굴을 한 손으로 비비고 있었다. 그가 손짓했다. 태국영은 다가 가 곁에 앉았다.
“왜 깼어. 더자지 않고.”
태국영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려고 작정한 듯했다. 이승도는 그런 그 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의 볼을 한 손으로 꼬집어 흔들었다.
“이 요망한 얼굴.”
태국영은 모르는 척 멀뚱히 고개만 갸웃댔다. 남들은 이 런 무표정을 ‘속을 알수 없다’고 종종 표현하는데,왜 제 눈에는 이렇게 훤히 읽히는지 모르겠 다. 이승도는 꼬집은 자리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무심히 말했다.
“좀 아쉽네.”
“뭐가.”
“아까 너 되게 귀여웠는데. 어린애처럼 순수하고,솔직하고, 예뼜거든.
태국영은 잠시 눈가를 찌푸렸다가 금방 표정을 풀었다.
“그래서 뭐. 약좀더하고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네가 괴롭지만 않다면 그 상태로 좀 가도 괜찮겠다
싶었거든.”
태국영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승도는 마치 호접동을 꾸고 깬 것 같은 얼굴이 었다. 마치 정말로 그 순간이 너무나 짧아 안타까운 것처럼.
무섭지 않았어?
차마 묻지 못한 말이 가 닿았을까.
“안무서웠어.”
정말?
“정말.”
태국영은눈을 내리깔며 낮게 한숨지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나 쁜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하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은 쓰레기통에 처박아 둬도 될 것 같았다. 안도하는 순간 다소 경직되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태국영은 제가 긴장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국영아.”
W ? ”
■?*.
“은태가종종 이경이 태우고 달리면서 노는 것처럼,나도 너하고 그렇게 놀 고 싶어.”
좋다 싫다 가볍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태국영 자신에게는 그렇게 간단히 정의 내 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 었기 때문이 었다. 태국영은 대놓고 화제를 바꿔 주길 바라는 눈빛을 전송해 보았으나 이승도는 평소처럼 관대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모습의 너와도 친해지고 싶어. ”
이승도에게는 그간 미뤄놓았던 과제를 풀 절호의 기회였다. 자는 사이 몸 은 깨끗이 닦여 있었지만 아직 그의 촉감이 품 안에 가득 남아 있었다. 이 잔 향이 사라지기 전에 밀어붙여야 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머리를 끌어와 안았
“네가 어떤 모습이든,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 ”
태국영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이승도의 뒤로 넓게 난 창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밤 풍경은 절정으로 무르익어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 로 짙은 암흑 속에 하얀 달이 걸려 있다. 별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빛을 발하 는 그 달은, 그 어느 때보다 결점 없이 눈부셨다.
“천천히.”
한참 만에야 입을 열며, 태국영은 이승도를 마주 안았다. 이어지는 목소리 는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승도는 기쁘게 웃으며 그의 목에 뺨 을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