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디든 데례^줄게
공항에 내려 휴대폰을 켜자마자 이승도는 송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무 일도 없어요! 걱정 말고 얼른 즐기세요! ’ 다짜고짜무사함부터 알리는 송재 희는 굉장히 피로에 찌든 목소리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뭔 일이 있었구나 눈치를 첼 수밖에 없었다. 힘들었구나,왜,무슨 일 있었는 데,그렇게 묻자송재희는 잠시 얼버무리더니 짧게 털어놓았다.
《연주랑 잘 놀다가 밥 먹을 때가 되니 오빠를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작은 애가 어찌 그리 힘이 좋은지 전쟁 한판 치르고 겨우 연주랑붙여서 밥 먹이 고 방금 재운 참이에요.》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송재희는 괜찮다며 웃음을 터뜨 렸다. 신영애를 떠올리게 하는 시원시원한 웃음소리 였다.
《그래도 이젠 강우 오빠 보고도 캬악캬악 안 하고, 생각보다 일찍 제압이 됐어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영상통화 걸 테니까 이쪽은 정말 걱정하지 말아 요.》
“그래. 시간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전화해. ”
《네네. 앗,강우 오빠가 애들 깬 것 같대요! 저 가 볼게요,또 통화해요!》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이승도는 이미 끊어진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고 개를 들었다. 통화하는 동안 짐을 다 찾은 태국영은 배낭 두 개를 한 번에 어 깨에 걸쳐 메고,다른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붙들고 있었다. 혼자서도 수 십 킬로는 솜뭉치처럼 가뿐하게 메고 갈 남자였지만 캐리어까지 끌기에는 불 편할 게 분명했다.
“그거 이리 줘.”
이승도가 다가가 자연스레 손잡이를 가져오려 했을 때였다. 태국영이 발로 캐리어를 가볍게 차서 밀어냈다. 도르록 짧은 거리를 굴러간 그것은 한 남자
의 앞에 정확히 안착했다. “엇차. 잘 받았습니다.”
태준호가 캐리어를 가뿐하게 받아 어깨에 올렸다. 쌀밥 잘 먹는 머슴같이 씩씩한 모습이 었다.
“제가들겠습니다. 맡겨 주십쇼.”
태준호가 태성문과 함께 몰래 저를 경호하던 시기에는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어서 잘 몰랐는데,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쾌활한 남자였다. 엄청나게 에 너지가 넘쳤고 이루 표현할수 없을 만큼 말이 많았다. 사실 좋게 말해 쾌활 한 거지, 나쁘게 말하면 거의 조증에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 힘세. 동물원에서 다져진 막노동 경력도 있어. ”
이승도가 심드렁하게 항의하자 태국영이 한쪽 눈을 찌푸리듯 미소를 지 었 다.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쩌나. 내가 훨씬 더 센데. 나만큼은 아니지만 재들 도 너보다 세고. 그런데 이 조합에서 굳이 네가 왜 땀을 빼. ”
“그렇습니다. 지당한말씀이십니다. 원하신다면 제가두분마차에 태워서 직접 끌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차 안에서 흥콩의 야경을 보고 싶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이 태준호가 열과 성의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
“아… 그……
“그리고 날씨가 매우 덥고 습합니다. 제가 이렇게 세심하게 두 분 커플 모 자를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모자 없이 막 돌아다니시다가 화상이라도 입으 면안되니一”
“당장 닥쳐.”
태국영은 또 시작될 기미가 보이는 수다 폭풍을 싸늘하게 바스러뜨렸다. 태 준호는 찔끔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태성문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형은 왜 이렇게 말하다 욕먹고 말하다 처맞고를 반복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들이닥쳐서 온종일 말을 걸어 대다가 태국영 에게 대퇴부가 한 번 박살 나 놓고도 저 모양이 었다.
“바로 숙소로 가시겠습니까?”
태준호와 달리 태성문의 질문은 간단명료했다. 군더 더기 없는 담백함이 오
늘 유독 마음에 들었다. 태국영은 제가 그림자 하나는 잘 뽑았다고 속으로 자 찬하며 이승도를 돌아보았다.
“배 안 고파? 뭐 좀 먹고 갈래? ”
“아냐.기내식 먹었더니 아직생각없어. 너는?”
“나도 별로. 저 새끼 수다에 기 빨려서 일단 좀 씻고 쉬고 싶다. ”
어찌 보면 태준호는 정말 대단한 남자라고 할수 있었다. 어디 가서 기 빨 릴 일이 없는 태국영이 어지간히도 피로한 낯짝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승도는 애석한 눈으로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씨팔. 하필 그 많은 놈들 중에 저 새끼만 광둥어를 할 줄 아는 건 또 뭐야. , 그랬다. 심각한 성격 결함에도 불구하고 태준호가 이 여행에 동반하게 된 것은 순전히 광둥어 때문이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떼면 보통 다른 언어들도 공부하기 시작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태국영은 물론 배우지 않았다. 광둥어라 고 배웠을 리가 없었다.
「설마 개를 데려가려고? 아서라. 흥콩은 영어만 되도 크게 불편함 없이 다 닐 수 있는 나라야. 너 영어는 잘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태호연의 찜찜한 낯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준호는 진짜관둬.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내가 개 때문에 다시는 전쟁 하기 싫어졌을 정도야.」
말 안 들으면 두드려 패면 되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 었다.
“무식한 새끼들. 돌아가면 중국어 이전에 광둥어부터 의무교육 시키라고 해야지.”
불똥은 애먼 데로 튀었다. 얌전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태성문의 동공이 지진 난 듯흔들렸다.
“설마 저도 포함되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그냥승도 님 가드만 훌륭히 잘 해내면 되는 역할이니 말입니다. ”
태성문은 질문도 뭣도 아닌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도 어지간히 공부를 싫어
하는 족속이었다. 태국영은 힐긋 그를 일별하며 봐준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넌 그냥 승도나 잘 지켜. 어디 쓸데도 없는 공부한답시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가문 전체에 그 쓸데없는 공부를 의무적으로 시키겠다고 공언한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친척들의 불행이야 어찌 되었든 면책권을 받은 태 성문은 신이 나서 씨익 입꼬리를올렸다. 웃고 싶은데 체면 상참는 표정이 역 력했다. 그리고 그때 또 태준호가 겁 없이 끼어들었다.
“하하하하. 섭섭합니다. 제 유능함을 공유해야 한다니요. ”
형……지금은 진짜아니야.
태성문은 속으로 대단히 한심해하며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났다. 물론 태준호는 눈치 없이 더 이어갔다.
“하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지성을 쌓는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죠. 저희더러 무식한 새끼들이라고 이를 박박 가셨던 호연 형님도 그 연세에 광둥 어나 파게 생겼다니, 그거 구경하는 재미도?”
“닥치라고, 내가, 말을一”
태국영이 결국 폭발해서 짐을 내동댕이쳤다. 하와이안 셔츠 아래 뻗어 나 와 있는 매끈한 근육의 굴곡들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거리를 좁혀 서 휘갈길 기세였다. 오늘 가장 큰 위협을 직면한 태준호가 재빨리 튈 준비를 했다.
“국영아. 덥다. 일단가자.”
이승도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잡아 족치려던 태국 영이 멈칫 다시 뒤를 보았다.
이승도는 금세 끈적끈적해진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땀 없는 체질도 흥콩의 습한 공기 앞에서는 큰 쓸모가 없는 듯했다. 물론 말릴 의 도가 대부분이라는 걸 알지만,그래도 태국영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앞장서.”
“네.”
태성문이 듬직하게 길을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르며 이승도는,보기 드물 게 정말 특이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태성문이 어쩌면 가장 정상적인 축에 드 는 것이 아닐까 정말 진지하게 의문을 품게 되었다.
태현리가 잡아 준 스탠리 베이의 저택은 명품 브랜드 미셸의 오너 왕린의 소유였다. 태현리와는 홍콩에 들를 때마다 집을 통째로 빌려줄 정도로 친분 이 두터운 사이라고 했다. 휴양을 올 때가 아니면 거의 비어 있는 집이라 부 담 없이 써도 된다는 전언도 받았다.
이승도 일행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용인들이 완벽하게 준비를 마 친 채로 대기하고 있는상태였다. 먼지 한톨 없이 청소가 되어있는 것은물 론,허기를 부추기는 음식 냄새도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는 원하실 때 바로 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 말씀해 주 십시오. 미리 받은 메뉴 외에도특별히 원하시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시면 준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를 구사하는 요리사가 직접 나와 일행을 맞았다. 이승도는 지나치게 깍 듯한 이들의 태도에 조금 멋쩍어했지만 태국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했다.
일단은 씻고 내려와서 식사를 하겠다고 대답하는 태국영의 발음은 영어권 국가에서 사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동거 생활 초기에 서재에 틀어박혀서 영문 원서를 읽고 있는 걸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라서, 이제 이 정도는 그러려 니 하게 되었다.
이승도는 계단을 올라가며 태국영에게 속닥였다.
“국영아. 아무래도 왕린인지 뭔지 현리한테 사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아? 하 나부터 열까지 너무 과한 것 같은데. ”
“왕린은 원래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현리부터 찾아. 자기 뮤즈니 뭐니 워 낙 떠벌리고 다녀서 이젠 그런가 보다 할 정도지. 그래서 현리 눈독 들이는 사
내놈들이 왕린을 겁나 싫어해. 채갈까 봐. ”
“아,역시. 그 남자는 몇 살인데?”
“확실하진 않은데,아마 호적상으로 올해 서른 초반 정도? 실제로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 될 거야. 당연히 미혼이고.”
“현리는 별로관심이 없고?”
“개는 그냥 모두에게 무덤덤해. 딱히 연애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이고. ”
태현리가특별히 관심이 없다면 더 궁금해할 이유가 없었다. 이승도는 흥미 를 털어내며 안내 받은 침실로 들어섰다. 로비만큼이나 화려한 침실이었다.
“요란하네.”
세련되고 심플한 것을 선호하는 태국영의 첫 감상이 었다. 이승도는 그의 의 견에 일부 동의했지만 그것이 꼭 나쁜 의미로만은 아니 었다. 가끔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잠이 드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
“일단 씻자. 끈적끈적 난리 났어.”
하지만 느긋하게 방을 구경할 때는 아니 었다. 이승도는 눅눅해진 옷부터 벗 어 던졌다. 지난주에 한차례 태풍이 지나갔다지만 흥콩의 습도는 여전히 높았 다. 한국에서는 거의 장마철에나 느낄 수 있는 수준이 었다.
이승도는 태국영과 함께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 었다. 냉방이 풀로 돌아가고 있어서인지 다행히 미리 꺼내 둔 옷은 보송보송했다.
“고용인들은 교대로 두 명만 일층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별채에 있을 거래. 저녁가끝나면 모두돌아갈 거고. 부탁할 게 있으면 그 전에 미리 얘기해 달라 고했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태국영이 언질을 주었다. 다행이었다. 설마 나 흘 동안 이들과 다 같이 지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꽃장식 놓인 식탁이 보였다. 중앙의 화병을 중심으로 네 사람분의 식기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미리 내려와 있던 태성문과 태준 호가 얼른 좀 앉아달라는 듯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봐 왔다. 어지간히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특별히 먼저 먹어도 상관없다고 말해 둬야겠다며 자리에 앉 자 요리사와 주방 보조들이 움직 였다.
다기와 물이 차례로 등장했고 곧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이승도의 앞에 딤섬 과 채소 롤이 담긴 접시가놓였다. 나머지 세 남자는 애피타이저부터 살벌했 다. 핏빛이 섬뜩하게 도는 생간이 었다.
그걸 보며 든 생각인데, 품질 좋은 내장과 뼈, 고기만 대강 날로 썰어 주면 되는 남자들에게는 미술랭 어쩌고 자신을 소개한 요리사가 너무 과분한 게 아 닐까 싶었다. 이승도는 몸값 높은 요리사를 속으로만 가여워하며 포크로 채 소 롤부터 하나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특별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매 끼니 고급 한정식 집에서나 볼 법한 진 수성찬을 차려 주는 유모의 손맛에 완벽하게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 나 입 안을 감도는 상큼하고 삼삼한 소스는 굉장히 입에 잘 맞았다. 메인으로 나온 랍스터와 파스타,디저트까지 뭐 하나 나무랄 곳이 없는 요리들이었다.
이승도는 요리사에게 어설픈 발음으로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하고 감 사의 마음을 전했다. 요리사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게 미소를 지 었다.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저녁 때 또 뵙겠습니다.〕
이승도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갔다. 특별히 피로를 느끼 고 있진 않은데 이상하게 그냥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래도 되 는 날이었다.
시끄럽게 주위를 알짱거리는 사내아이들과 늘 제 품에만 있으려 드는 아이 들이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하지만 그저 짧은 나날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그 허전함은 금세 평온함으로 치환되었다.
여독이 쌓일 만한 거리가 아니 었음에도 몸이 축축 늘어졌다. 불쾌함 없이 나른함만 가볍게 몸을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적막에 가까운 평온을 맘 껏 누릴 생각이 었다. 태국영 역시 그 속내를 간파했는지 말없이 안고만 있었 다.
이승도는 태국영과 침대에 모로 누워 창밖을 구경했다. 새파란 하늘과 검푸 른 바다가 잔잔하게 몸을 맞대고 있었다. 수평선 근처에 뭉친 구름은 금방이 라도 바닷물에 녹아들 듯 보송보송했다. 눈이 시원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었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신기했다. 무수한 조각으로 번득이는 해수면을 용 감하게 가르는 세일링 요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깊이를 모르는 바다에 끌려 들 어갈 것 같은 그 공포를,저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 걸까.
예쁜 풍경을 한창 감상하던 이승도는 담담하게 중얼거 렸다.
“나 바다 처음 봐.”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는 걸 병적으로 꺼려 했던 어머니는 가족여행은커녕 학교 수학여행도 허락해 주지 않았었다. 그녀를 이해했지만 원망이 아주 없었 다면 거짓말이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급우들이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 기들을 나눌 때에는 너무 부럽고 화가 나서 괜히 눈물이 날 뻔도 했었다.
끔찍했던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디든 가 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한 철 머물다 간 꿈이었을 뿐이었다.
자유를 되찾고도 늘 정해진 노선만을 걸었다. 태국영이 금제를 걸었던 것 은 아니 었다. 그는 오히 려 지나가는 말로 가끔 바람도 좀 쐬고 오라고 권했던 적도 있었다. 그저 어머니의 심리적인 지병을 철 든 아들이 뒤늦게 상속받은 것뿐이었다.
“나도처음 봐.”
등 뒤에 누운 태국영이 대답했다. 의외였다.
“너 비행기 타봤잖아. 안에서 못 봤어?”
“나중에 너랑 같이 보려고 안봤어. ”
담담하게 돌려주는 대꾸가 가슴을 흔들었다. 미련할 정도로 하나만 바라봐 온 그의 진심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탓이 었다. 이승도는 허리에 감겨 있는 그 의 팔뚝을 쓰다듬어 올라가 그의 손등 위로 깍지를 꼈다.
“잘했어.”
손가락 사이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꽉 맞물려 서로를 조였다. 폭풍우를 함 께 견딘 동지들처럼 끈끈하고 애틋한 결합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멀리 나가자,국영아.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곳에
내 발길이 닿았을 때, 곁에는 늘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
“어디든 데려다줄게.”
나른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승도는 수평선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해 보려 했지만 뇌리를 채우는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였다. 직전의 대화와흡사 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과거의 한 토막이었다.
태국영의 숨결이 닿는 목덜미가 저리다. 아마 그 역시 둘 모두 고독하고 고 통스러웠던,그러나 절망 끝에 간신히 희망 한 조각을 발견했던 당시를 회상 하고 있는듯했다.
이승도는 돌아누워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몸을 한 팔 로 바짝 끌어가 깊이 안았다. 뜨끈한 체온에 온몸이 푹 젖어들었다. 심장박동 에 맞춰 그의 손바닥이 등을 도닥였다.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감정들이 득달같이 몰려오는 날이 있었다. 이승 도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온몸이 시 려 왔다. 보고 싶은 얼굴이 있는데,잘 기 억 이 나지 않았다. 그리움을 잊으려다소중한그 얼굴마저 함께 잊어버린 모양 이었다.
이승도는 물그릇에 손가락을 찍어 벽에 무수히 선을 그었다. 사람 얼굴,사 람 눈, 사람 코, 사람 입술, 아무리 닮게 그려 보려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됐다. 그림에는 재능도 없는데 재료까지 이렇게 조악하니 잘 될 리가 없었 다.
「시기가 조금 빨라질 것같아.」
등 뒤에서 태국영이 낮게 크르릉거렸다. 그는 오전부터 간헐적으로 피를 토 해내고 있었다. 시간 감각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한 시간에 한 번 정도에서 이제는 두세 번으로 늘었다.
「오늘일지도 모르겠어.」
이승도는 멍하니 물 그림만 그렸다. 수시로 덧그려 놓지 않으면 금방 증발 해 버리니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엄마 얼굴이 보 이지 않을까,덧없는 바람이지만 어쩌면 이 어설픈 그림이 꿈에서라도 완성되 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절대 손대지 마,승도야.」
- 희망.
얼마나 오랜만에 손에 넣어 본 감정인가.
「혹시 내가 도중에 죽더라도, 절대로 만지면 안 돼.」
벽을 쓸던 손가락이 멎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으면 느리게 백을 세. 확인은 그다음에 해도 충분하니 까.」
「……너 죽어?」
오랜만에 뱉어내는 목소리는 듣기 거슬릴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어쩌면.」
「약속했잖아.」
벽에서 떨어진 손이 바닥에 늘어졌다. 멸림이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전신으 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두려움이 어머니에 대한그리움마저 단숨 에 으스러뜨려 버렸다.
이승도는 천천히 돌아앉아 태국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턱에는 핏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피라기보다는 마치 내장의 한 조각처럼 물렁이는 덩어리였다.
「그래. 약속했었지.」
태국영은 피가 고여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한쪽 눈을 앞발로 숙숙 닦아냈 다. 그의 움직 임을 따라 이승도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 였다.
「노력해볼게.」
이승도는 곧 그가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 라,순수하게 육체적인 고통이 그의 몸을 지독하게 옭아매고 있는탓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의 뼈대도 어디 한 군데 정상적 인 곳 없이 뒤틀려 있
언제 저렇게 망가져 있었지.
이승도는 멍하니 생각했다.
「오늘이 그날이야? 네가 성체가 된다는 날?」
「잘 모르겠어. 그런데 왠지 그런 것 같아.」
아무리 시간 개념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빨리 다가온 느낌이었다. 이승도는 멍멍한 머리로 날을 계산해 보려다 포기했다. 어차피 계산해 본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살아아= 나도 여기서 나갈수 있는 거지?」
「응.」
「나,여기서 나가면 어디든 갈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보내줄게.」
태국영이 낮게 몸을 숙였다. 둥글게 구부러진 등에 일순 엄청난 경련이 스 치고 지나갔다. 그가 또 피를 토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계속되었 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출혈이 엄청났다.
이승도는 손끝을 움찔거 렸다. 기 뻐해야 하는 순간인데 왜 이런 마음이 드 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증오는 도리어 무뎌졌고 동정심마 저도 산산이 흩어졌다. 텅 빈 가슴은 황량하게 메말라 무엇도 채우지 못하는 듯했다.
헌데 이 순간,무언가끓어 넘치려는중이다. 증오도 동정도 무엇도 아닌, 공허를 닮은 괴이한 감정이 었다.
나는 저 애를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이승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공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안 에는 무언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만 했다. 격렬함이 있어야만 미치지 않고 버 틸 수가 있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유일한생존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쥐 어짜 보아도 이전에 저를 지탱해 주던 감정들은 난바다로 떠밀려간 듯 손에 닿지 않았다.
그래도 널 용서해 주지는 않을 거야.
간신히 움켜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래. 나는 네가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을 절대로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리와.」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싫든 좋든 우리는 지금 폭풍우 위에서 한배를 탔어.
「이리와,태국영.」
이승도는 처음으로 태국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국영의 흐린 눈이 이승도 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반드시 살아 나가게 해줄 거야.」
그건 거래였다. 그것뿐이라고, 이승도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반복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국영은 고개를 저 었다.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내가 널 또 짓밟을지도 몰라. 날 믿지 마,승도야. 나도 이제는 내 괴물 같은 피를 믿지 않으니까.」
그는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 스스로는 절대 다가오지 않을 터 였다. 그래서 이승도는 삐걱대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태국영이 경계하듯 등허리 를 세우며 소리쳤다. 제발,승도야,그러지 마. 그가 애원했다. 이승도는 무시 했다.
「아니. 난 네가 또 나를 짓밟는다고 해도,오늘 너를품을 거야.」
태국영이 이를 드러냈다. 그는 위협이 아니라 울부짖고 있었다. 무수한 날 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지새운 그였지만, 그토록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같이 살아서 나가자.」
이승도는 그의 몸 위에 제 몸을 덮어 눌렀다. 태국영은 섬뜩하게 이를 갈 며 몸을 크게 떨었다. 그의 척추를관통한 희열이 이승도의 심장까지 꿰뚫었 다.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 어디든 데려다줄게.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석 양에 젖은 바다였다. 이승도는 손목 안쪽으로 먹먹한 머리를 툭툭 치며 상체 를 일으켰다. 옆을 보았지만 태국영은 없었다. 온기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는 방금 전까지 곁을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국영아?”
조용히 부르자 태국영은 잠시 뒤 방문이 아닌 창문을 열고 등장했다. 마치 제 집인 양운동복 바지 하나만 달랑 입은 차림새였다. 어찐지 일어났을 때 몸 이 뜨끈뜨끈하더라니,맨살로 열심히 품어준 모양이었다.
“젖먹이처럼 눈 뜨자마자서방님 찾고 그래. ”
그가 개구쟁이 소년처럼 눈웃음을 치며 곁에 앉았다.
“왜 창문으로 들어와? 밖에 나갔다 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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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림으로?”
“뭐 어때. 다들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데. ”
물론 해변을 활보하는 관광객들은 거의 수영복이나 래시가드를 입고 있으 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태국영이 저 없이 바다나 보겠다고 나갔을 거라 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얘는 쓸데없는 곳에서 예리하단 말이지.
태국영은 내심 속으로 혀를 찼다. 거짓말은 하기 싫고,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도 싫었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고민하는 그 짧은 사이 이승도의 표정에 는 본격적으로 의심이 깃들어갔다.
“모조리 털어놓지 않으면 혼난다. ”
“아,무서워라.”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린 태국영이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
쓱해 보였다.
“홍콩에 입국해 있다는 일본 애들이 누구인지 미리 들어둔 것뿐이야. ”
이승도의 눈매가 걱정스럽게 벌어졌다.
“설마 그중에 너랑 원수졌다는 그 가문도 있어? ”
“음. 그건 아니지만 워낙 다들사이가 안좋으니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 어. 알지? 나싸움짱잘하는거.”
태국영은 태성문의 표현을 빗대어 말했다. 이승도는 그래도 걱정이 앞섰다. 홍콩이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수가 없다면 마주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승도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근심이 었다.
“걱정할 거 없대도. 보아하니 성문이 혼자서도 충분히 엉덩이 맴매해서 보 낼 수 있는 애들뿐이니까. ”
이승도는 미간을 껑그리며 태국영의 귓불을 잡아 아래로 쭉 늘렸다.
“누가 강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왜 그렇게 쓸데없이 원한을 쌓고 다 녀.”
“불씨는 그쪽이 던졌어.”
“넌 그 불씨를 화마로 만들었지. ”
그런 문제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태국영은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며 얼 굴을 디밀었다. 어깻죽지에 람을 비비적대는 그를 내려 보자니 더 핀잔할 마 음이 사라졌다. 대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너 그것 말고 더 끝맺지 못한 원한 있어? ”
“맹세컨대,없어.”
즉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이승도는 짧게 한숨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착하게 살아,국영아. 그래야 맘 편히 오래 살지. ”
“우리 승도가 이렇게 계속 예뻐해 주면 계속착하게 살자신 있어. ”
이승도는 애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멀뚱히 그걸 내려다보던 태국영
은 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입술을 겹쳤다. 얼떨결에 벌어 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힘 있게 밀고 들어왔다.
세차게 빨린 혀가 열렬히 겹쳐졌다. 순식간에 목구멍 안쪽으로 타액이 고였 다. 다소 난폭하고 열정적이었던 키스는짧게 끝이 났다. 한 뼘 뒤로 물러난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어른들 약속은 이렇게 해야지. ”
평소 하는 짓은 딱 어린애인 주제에, 성애에 관련된 부분에서만큼은참으 로 어른스러운 남자였다. 어찜 이렇게 사람을 잘 녹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다시금 가볍 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가자, 국영아. 나 바다에 발 담가 볼래. ”
이승도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태국영은 싱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