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잘해주고 싶었어
태국영은 사나운 짐승이었다. 천성부터 그랬다. 태어나자마자 피 냄새에 취 해 제 어미의 허벅다리를 물었다가 부친에게 머리가 깨졌다.
갓난아기 였던 태국영은 당연히 턱 없이 연약했다. 함몰된 머 리뼈가 금방 재 생되지 않아 몇 날 며칠 피를 흘렸다. 그는 그렇게 태초의 빛과 태초의 고통 을 함께 각인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몸은 수시로 부서 질 듯 아팠지만 보듬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는 그를 마치 양식장 속 물고기처 럼 대했고, 고용인들은 고용주의 까다로운 애완 물고기를 대하는 양 기계적이었다.
태국영은 그 혹독함 속에서 곪아갔다. 제가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왜 누 구도 저를 돌보아주지 않는지, 그 궁금함마저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육신의 아픔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가장 많이 활용했던 방법은 바로 감각 을 분산시 키는 것이 었다. 그중에서도 저택 안의 모든 소리를 엿듣는 것이 그 나마 시간을 소각시키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타국에 떨어진 어린애처 럼, 모르는 말들을 그저 듣고 또 들으며 뜻을 이해해 갔다.
집안은 노상 조용한 편이었지만 엿들을 수 있는 것은 많았다. 특히나 고용 인들의 숙덕거 림은 제게 온갖 정보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미처 깊이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 늘부서지면서도 착실하게 몸뚱이 가 자라나듯 그의 감각도 비정상적으로 깨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 게 태국영은 어렴풋이 제 상황을 인지해가기 시작했다.
「장기도 충분히 여물었고 재생력도 실험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올라왔다.
태국영의 밝은 귀로 부친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의 나이 다섯이었을
「좋은 기회이니 반드시 성공하도록 해. 이번에야말로 완벽해진 백신을 내 게 가져와. ……그래. 이미 포기한 자식이니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쓸데
없는 걱정 말고 연구에나 매진해.」
이 집안에 어린애는 저 하나뿐이었다. 이미 포기한 자식, 그건 태국영 그 자 신을 지칭하는 말이 었다.
어 린 짐승은 홀연 깨달았다.
‘나는 이미 무리에서 도태되었다. ’
-라고.
태어나서 줄곧 아프기만 한 아기,그들의 둥지를 오염시키는 성가신 핏덩 이, 후에 태어날 건강한 아이를 위해 기꺼이 버려야할 아이, 그것이 바로 제 게 붙은 꼬리표들이 었다.
태국영은 그를 호송해가는 차에서 창을 깨고 도망쳤다. 목적은 없었다. 그 저 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었다.
필사적으로 가장 안전할 것 같은 장소를 찾아 헤매던 중,그의 눈에 낯선 짐승들의 냄새가 가득한 집이 들어왔다. 생리적인 불쾌감으로 욕지기가 나올 정도였다.
태국영은 망설임 없이 그리로 뛰어 들어갔다. 제 몸에서 진동하는 병든 날 짐승의 냄새도 묻힐 거라 기대하며.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승도를 만났다. 그들로 인해 비참하게 끝났어야 할 생애가 기적적으로 소생의 기회를 얻었다. 제 전부를 걸어도 좋 을 애틋한 짝도 얻었다.
그러나 이승도는 그날 모든 것을 잃었다. 자유로이 하늘 아래를 거닐던 삶 은 부서졌고 달콤한 품을 내어주던 어머니도 잃었다.
이승도는 태국영 자신을 벌할 권리가 있었지만,그때는 너무 어려서 알지 못했다. 이승도가왜 저렇게 날카롭게 구는지, 왜 제가 엉겨 붙을라치면 계속 화만 내는지, 왜 아픈 저를 보듬어 안아주지 않는 건지,모두, 이해하지 못했
그래서 처음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이승도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고집 스럽게 등을 보이고 있었고, 저는 그런 이승도를돌려 앉히기 위해 갖은 패악 을 다 부렸다. 그를 할퀴고 물고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는 울음도 터뜨렸다. 그 래도 이승도는 꿈쩍을 안 했다.
?그러지 마.
어린 태국영이 또 이승도를 물었다. 이승도는 독하게 신음을 삼키며 팔을 휘둘렀다. 태국영은 그것만으로도 나가떨어질 만큼 작디작았다. 하지만 그대 로 포기할 정도로 근성이 없지도 않았다.
_하지 마. 승도가 싫어하잖아.
사회성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저밖에 모르던 꼬맹이는 제 이 목소리를 듣 지 못한다. 이승도가 작정하고 발로 찼으면 내장이 터졌을지도 모르는 작은 몸뚱이로 악바리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_그만하라고 했잖아!
관찰자로서 이 무대에 강제로 초대 당한 태국영이 사납게 일갈했다. 그러 자눈앞의 환영이 마블링처럼 뭉개졌다. 태국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지 금의 그는 실체가 없었기에 주저앉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탈력한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 이 무력감, 진저리가 쳐졌다.
「안녕하세요,도련님. 승도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태국영은 하,힘 없이실소했다. 이 제는 그것이 나올 차례 인가 보다. 지긋지긋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지.
태국영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환영은, 아니,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늘 그랬다. 무작위로 반복되는 과거의 기억들. 그것을 강제시청하며 고문대 에 오르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그래도 이때의 일만큼은 다시 저를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오늘은 괴로운 보름밤이네요. 부디 서로상처 입히지 말고 무사히 지나가 길 기원할게요. 자,승도군. 에너지를 비축해야하니 일단곰탕부터 한술뜨겠 어요?」
이때는 그러니까,유모가 밀실을 찾은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태국영 은 그녀가 꽤 좋았다. 그녀가 들락거 리기 시작하면서 이승도의 분위기가 많 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네에……잘 먹을게요.」
상냥한 보살펌을 받는 것이 많이 어색해 보였지만,그날도 이승도는 유모 가 가져온 음식들을 천천히 골고루 섭취했다. 전부 먹지는 못했지만 전부 맛 을 볼 정도는 되었다. 체중계를 챙겨온 유모는 이승도를 그 위에 달아보고 한 달 사이에 2킬로나 늘었다며 물개박수와 함께 기뻐했다. 태국영도 속으로만 ^?수를 쳤다.
유모가 사라지자 밀실은 다시금 정적으로 가득했다. 태국영은 벽 구석에 동 그마니 몸을 말고 앞발이며 뒷다리며 핥아대며 결의를 다졌다. 다시 돌아온 악몽 같은 밤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고통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지만 반 대로 의식은 더 또렷하게 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저 스스로를 제어할 정도는 되었다 이 말이다. 적어도 정신 줄을 놓고 이승도를 크게 상처 입힐 걱정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제 자만대로 그 날은 괜찮았다. 자해로 몸 안의 고통을 상쇄하며 보름밤을 버텨냈고, 긴 사투 끝에 폭주는 잦아들었다.
태국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승도에게 다가갔다. 이승도는 여느 날처럼 좁 은 침대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발등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것이 이승도와 저 사이에 허락된 거리였다. 이 승도가 베풀던 유일한 관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잠에서 깨어난 태국영은 유례없이 가뿐해진 몸을 자각했 다. 단언컨대 십칠 년 동안 그렇게 아침이 가뿐했던 순간은 그때가 처음이었 다. 이승도가 저를 작정하고 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 었다.
태국영은 곁눈으로 이승도를 흠쳐보았지만 이승도는 박제 당한 인형처 럼 여전히 생기도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뜯어보던 그의 밝은 눈에 이승도의 눈가가 들어왔다. 눈물 자국이 었다.
왜 울었지?
오랜 추론 끝에 태국영은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세웠다. 이승도가 밤새 저 를 안고 보듬으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몹시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기뻐해야 했지만 기분은 진탕에 빠 진듯했다.
이승도가 저를 동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용서할 생각은 없다는 것도. 그것조차 그가 제게 주는 징벌이었을까. 대강 그런 식의 추측을 했었을 것같았다.
좆같은 건 이승도의 동정 같은 게 아니 었다. 사실 그는 수도 없이 고민했었 다. 나한테 더 극심한 고통을 주려면 차라리 내가 깨 있을 때 나를 보듬어 주 는 게 어떻겠냐고. 그럼 나는 또다시 냉정해진 너를 보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상처받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스스로가 비참하고,그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이유 가 알량한 자존심 나부랭이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말로 형 용할 수 없이 참혹한 기분이었다.
두려움만 많아진 태국영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 돌아오는 보름에는 기절하 지 말고 기절한 척만 해보자고. 그럼 저를 감싸 안은 이승도의 온기를 오릇이 느낄 수도 있을 거라고.
설마,그 음흉한 계략이 그런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서 말이다.
-씨팔. 진짜좆같네.
강제로 시청 중인 태국영은 일순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넌더리가 날만큼 되살리기 싫은 기억이 이제 막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자조했다.
-멍청한새끼.
그다음 보름은 제 생애 최악의 밤이었다. 물론 그것은 이승도에게도 마찬가 지였다.
멀껑한 정신으로 있어 보자는 결심은 이뤄지지 않았다. 태국영은 또 정신 을 잃고 말았고 드물게도 꿈을 꿨다. 꿈속에서 이승도가 저를 만지고 있었다. 아주 기분 좋게,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황홀하게.
그런데 정작 이승도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꿈이라는 걸 그때 자각했다. 깨닫자마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어찐 지 지금 눈을 뜨면 그 안온한 품에 제가 안겨 있을 것만 같았다.
간절했었다. 그저 한순간에 그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깨고 싶어 몸부림을 쳤었다. 그 순간 기적을 가장한 재앙으로 정신이 번득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모든 감각이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돋아났다.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매혹적인 향기가 사방에 그득했다. 약에 취한듯 일링거리는 시 야로 이승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자신은 그토록 바라던 대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게,뭔지 몰랐다.
지독한향기에 그저 온몸이 떨려왔다. 뇌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태국영 은 성에 무지했으나 제가 매우 위험한 상태임은 인지했다. 그는 스스로 이승 도의 품에서 벗어나며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고통이 전신을 죄었다. 혈관이 지나는 자리가 모두 타는 듯이 뜨거웠다. 그 는 벽에 몸을 던지며 자해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튀고 피가 터졌다. 그 렇게 해서라도 다시 정신을 놓고 싶었다.
「태국영. …국영아. 괜찮아……?」
그런데 불행하게도,이승도는 제게 처음으로 선의를 보였다. 그것도 한 번 도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까지 그 달콤한 혀끝에 올라가며.
이승도가 다가왔다. 그것조차 처음이 었다. 제발 오지 말라고 악을 쓰는데 도 그가 제 등허리에 손을 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공포와 걱정으로 일렁거리는 이승도의 눈에 제가한가득들 어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승도는 이미 만신창 이가 되어서 쓰러진 뒤였다. 태국영은 제가 폭주를 못 이기고 이승도를 죽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살해보다 더한 짓이 었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이승도 의 가슴에 떨리는 머리를 기대 보았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겁이 났다. 태국영은 밀실 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악을 썼다. 승도가많이 아파,이러다죽을 것 같아, 누 가 좀 도와줘,수도 없이 울부짖었다. 감시 카메라조차 없는 밀실은 모든 소리 를 삼키고 그의 처절함도 분쇄해버 렸다.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았다니,그거참 멍청한 짓 아니냐. 내가 어떤 괴 물로 클 줄알고.
피눈물 섞 인 독기가 가슴 속에 질기게 딱리를 틀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피투성이 맨몸을 할고,또 할으며 다짐했다.
제가 만약 운 좋게 성년식을 버텨 낸다면,이 집안의 모든 이들을 잔인하게 찢어 죽이리라고. 풀 한 포기 남겨 두지 않고 싹 다 갈아 마셔버릴 거라고.
「세상에,도련님,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침 식사를 가져온 유모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처참한 이승도의 상태에 놀 란 그녀는 공황상태에 접어들어 있다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부 친을 설득해 의사를 데려오는 동안,태국영은 그저 망부석처럼 서서 백치처 럼 대답을 뇌까리고만 있었다.
「모르겠어.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승도를 공격할 리가 없는데.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유모가 데려온 의사가 말했다. 강간으로 인해 생식기와 항문에 열상이 심하 게 생겼지만 불구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몸에 난상처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 아도 된다고. 또 그는 2주 정도 후에 피검사를 한번 해보자고도 권했다.
아기가,생겼을지도 모른다면서.
이틀인지 사흘인지 이승도는 그냥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지난 보름 때 와 반대로 태국영은 자꾸만 차갑게 식는 이승도를 제 체온으로 녹여주며 참 많이도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차마 할 수 없을 만큼,그렇게 지독하게 미안해서.
「잘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승도야. 이제는 내가 숨만 쉬어도 네가 상처받는 것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아무리 발버둥을 쳐도,자꾸만 상처 입히고 만다. 이승도
의 생애에서 저라는 존재는 암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꾸만 깨닫고 만
그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아니,적어도 사람답게나마살게 해 주려면, 제
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소리 죽인 울음이 통곡보다 더 참혹하게 그를 침수시켰다.
태국영은 눈을 깜빡였다. 흩어져 있던 사고가 느리게 조각을 맞췄다. 시야 에 들어오는 천장 무늬가 익숙했다. 침실이었다.
“나 때문에 깼어?”
작게 소리를 죽인 목소리가 천둥처럼 뇌리를 찔렀다. 태국영은 동요 없이 눈을 들었다. 품에 작은 아기 짐승을 안은 이승도가 침대 곁에 서 있었다. 그 가 미안한듯 웃으며 허리를숙였다. 이마에 솜털 같은 키스가잠시 머물렀다.
“별이가 보채서 달래느라. 계속자.”
지옥 같은 꿈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온 현실도 꿈같았다. 태국영은 이것이 진 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멍한 상태에서 한참을 머무르다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나 잠깐 내려갔다 올게. ”
태국영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 려왔다. 이승도는 고개를 기옷해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승도는 제 꿈속을 투시하는 능 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뺨을살짝쓸어내리며 웃 었다.
“출출해서. 너도 뭐 간식 좀 갖다 줄까. ”
“음… 그럼 난과일 주스. 새벽에 깼더니 당 떨어지나 봐. ”
“그래. 어제 유모가수박상태 좋다고 콧노래를 부르더라. 수박 갈아서 갖 다 줄게.”
“고마워.”
별말씀을,하며 태국영은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 지르며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두통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날’의 꿈
을 꿀 때면 늘 있는 일이라 이상할 건 없었다.
그는 이승도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주방이 아닌 테라스로 나갔다. 테이블 에 둔 담뱃갑을 들어 담배 한 대를 빼 물었다.
해로운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몸에서 열이 끓기 시작했다. 지리 멸렬하게 뇌리를 으깨던 두통은 그 열기로 잠식당해 그제야 자취를 감추었다.
“저기요,아저씨. 연기 들어와.”
태국영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태이경의 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여은 태가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낮게 조도를 낮춰 둔 테라스의 조명 이 녀석의 화려한 은발 위에 황금 띠를 둘렀다.
“난 괜찮지만 이경이는 담배 연기 마시면 금방 열 난다구. 애 아빠가돼서 말이야. 애 방 옆에서 담배나 피우고 말이야. ”
“아,쥐콩만 한 새끼가 종알종알 잔소리는. 창문을 닫으면 되잖아. ”
“쥐콩이 나만 하냐? 콩 하나로 한 가족이 먹겠네. 그리고 창문 닫으면 덥 단말이야.”
“그럼 에어컨을 켜.”
“에어컨 바람이 어디 자연 바람만 해? ”
한마디를 안 진다. 태국영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바로 했다. 더 러 워서 끌 법도 하건만 꿋꿋하게 담배를 입꼬리에 걸친 채였다. 그래도 연기가 다른 곳을 향해 흘러가는 걸 보니 민폐를 자각하긴 한 모양이 었다. 여은태는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훌쩍 뛰어나왔다.
“거,고민이 많이 보이시오.”
태국영은 담배 문 입술로 픽 웃음을 터뜨렸다. 여은태가 파자마 반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터덜터덜 걸어와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덧붙였다.
“요새 이경이랑 중국 사극 보거든. 황제 하나놓고 여자들이 막싸우는데 나름 빅 재미가 있더라. ”
“왜. 너도 커서 여러 암컷 거느리는수컷이 되고 싶든? ”
“미쳤어? 성가시게. 내 거 하나만 있음 되지 뭐하러 여럿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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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내렸다.
나름 걱정돼서 물었다가 괜히 화풀이받이가 된 느낌이었지만 따져 물을 분 위기는 아니었다. 태국영이 진심으로 심사가 뒤틀렸을 때는 개기지 않는 것 이 장수의 지름길이었다. 여은태는무사히 태이경의 방으로돌아와침대에 다 시 몸을 뉘었다.
이경아. 형아 방금 심각하게 목숨의 위협을 느꼈어.
여은태는 태이경을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아직도 살기에 반응한 심장이 벌렁거 리고 있었다. 태이경은 세상모르게 잠든 상태에서도 우응 하고 품을 파 고 들어왔다.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 예쁜 아이를 오래 지켜보고 오래 지켜주려면 일단살아남아야 한다. 여 은태는 결심했다. 앞으로는 태국영의 은밀한 무언가를 보게 되더라도 절대 발 설하지 않기로 말이다.
태호연은 대체로 바빴다. 타고난 한량인 가주가 조금 더 놀겠다며 여전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 호적 나이로 52세인 그의 직함은부회장이었 고 태일 본사의 본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회장은 현재 태호연의 부친인 태 경필이었다.
한량 가주 덕분에 은퇴도 못 하고 있는 그는 가장 만만한 아들 태호연만 달 달볶아댔다. 태경필 뿐만이 아니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태 가의 원로들도 태 호연만 달달 볶았다. 태국영이 그럴싸하게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더했다.
“이것들이 다 뭐야?”
태국영은 반듯하게 각 잡힌 봉투 여러 개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물었 다. 봉투들에는 똑같이 辭職書(사직서)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그 글자들을 읽 지 못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태국영은 중국어와 영어만큼은 기막히게 잘했고 한자도 신조어가 아닌 이 상 다 읽을 줄 알았다. 슈퍼문의 가장큰 시장이 영어권 국가들과중국이기 때
문이 었다. 그래서 가주는 싫든 좋든 경영학과 약학은 명문대 전공자 수준까 지 배워야 했고,영어와 중국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해야만 했다.
성년식 후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그가 개인과외들을 모조리 거부해서 원로 들의 걱정을샀었지만,다행히 집에서 마냥 논 것만은 아니었다. 이승도가놀 아주지 않아서 시간이 남아돌았던 그는 주로 서재에서 살았고, 나름 좋은 가 주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해 왔다. 작년 태호연으로 인해 그 진실이 드러난 뒤 원로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감격해 했었다. 우리도 곧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며.
그러나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 승도와 사이가좋아지면서부터 태국영이 더 노는 데에 맛이 들렸기 때문이었 다.
태국영은 종일 바빴다. 이승도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은퇴하고 싶어서 미치기 직전인 노친네들의 발악이지. ”
태국영은 힐긋 봉투들을 내려다본 뒤 미련 없이 찢어발겼다. 태호연은 우수 수 떨어져 내리는 종잇조각들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자오추안이 보냈다는 공식 문건이나 내놔 봐. ”
심지어 태국영은 그 어떤 코멘트도 없이 화제를돌렸다. 가까운 미래에 ‘원 로들의 난’으로 번지게 될 소심한 태동은 이렇듯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태호 연은 속으로 혀를 차며 결재판 하나를 내밀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 쪽에서 문제가 생겼어. 이상한 약이 뒷골목에서 거 래가 되고 있대.”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일단 읽어 봐.”
태국영은 한쪽 눈썹을 슥 올리며 결재판을 열었다. 중국에서 날아왔다는 문 건은 총 4장으로,2장은 종주 자오추안이 직접 작성한 한문본이었고 2장은 번 역본이었다. 태국영은 자오추안의 친필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문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 일족 사이에서 암거래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풀문
full moon’이라는 약이 바로 그 암거래 품목이었다. 풀문은 태일의 슈퍼문처 럼 보름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 주지만 많은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으로 드 러났다. 환각이나 의식 퇴행, 재생력 감퇴 등이다. 드물게 성년의 날 겪는 극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에 격분한 자오추안은 종주의 권한으로 풀문의 거 래를 금지하고 그를 어 기는 자들을 엄벌에 처하기 시작했는데,문제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근절 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의 제조에 일본의 한 가문이 연루 되어 있어 국제적인 문제도 발발할 조짐이라고 한다.
탁.
태국영이 덮은 결재판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의 미간이 불쾌한 듯 희미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자오추안 이 새끼 지금 나한테 징징대고 있는 거?竹 ”
태호연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이 나왔다.
“넌 뭘 어떻게 읽으면 그런 식의 해석이 나오냐. ”
“그게 아님 뭔데. 내가 와타나베 가문 놈들을 제대로 안 족쳐서 지들이 지 금 피해가 막심하다 이러고 있잖아. ”
단언컨대 그게 요점이 아니었다. 뭐라말할수 없이 복잡한 심경으로,태호 연은 지난 태이경의 생일 파티에서 이승도와 짧게 나눈 담소를 회상했다.
「승도 씨는 아마존에 혼자 가서도 잘 살아남겠네.」
「제가? 왜요?」
「모든 동물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니까. 먹을 걸 사냥해 달라면 알아서 척 척물어올 테고,날물지말라고하면안물거 아닙니까.」
그러자 이승도는 조금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인간들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게 말이 안 통해서겠어요?」
과연 그랬다. 태호연은 이승도의 통찰력에 뒤늦게 감탄했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 하여 모두가 완전한 해독이 가능한 것이 아님을,그는 지금 여실히 느 끼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지. 그 약을 처음 들여온 게 일본어를 쓰고 있다더라 하는 것만 밝혀 진 상황인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고,짱구를 열심히 굴려본 결과 그게 와타나베 가 놈이 아닐까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거잖아. 그런데 개들로서는 슈 퍼문과 풀문의 성분이 얼추 비슷하다는 것까지는 분석해낼 수 있지만 핵심 성 분들이 어떻게 개발, 제조되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한테 공식적으 로 검증을 요청한 거야. 재작년에 태일에 산업스파이가 들어서 네가 직접 일 본까지 날아갔다는 걸 개들도 잘 아니까, 슈퍼문이든 풀문이든 제조하려면 어 느 정도 기술력이 있어야 하고,그게 단기간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와타나 베 가의 스파이가 제조 기술을 어느 정도 빼낸 상태여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그 공식 검증이 있어야 개도 직접 일본으로 튀어가서 조질 수가 있으니까. ” 태호연은 아주 길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태국영의 오해를 풀어주려 애썼다. 하지만 태국영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아냐. 형식적으로는 그런 내용인데 얘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고 있어. 내 가 그때 관련되어 있던 놈들 제대로 싹 뿌리를 뽑았으면 자기들 땅에서 이런 일 안 벌어졌다고. 그리고살짝 이런 낌새도 있네. ”
“뭔?”
“야. 안 그런 거 같아도 그렇다고 좀 해 줘. 네가 협조 좀 해 주면 내가 대 신 그 잔당들 다 부셔 줄게. 아님 너도 같이 껴도 되고.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게다가 딱 보니까 처음 그 약 들여온 놈 홧김에 죽인 것 같아. 아니,확실 히 죽였어. 제 성질 못 이기고 말이야. 그놈만 제대로족쳤어 봐. 와타나베건 뭐건 잡아도 벌써 잡았지. 그래 놓고 나한테 와서 찡찜대는 꼬라지라니 . ”
“이런 놈들생각하는 거야빤하지. 내가잘알아. ”
태국영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놀 랍게도 태호연은 설득당했다.
“하긴 자오추안도 현지에서 엄청난 폭군으로 통하니까. 성격은 개차반에
손버릇 안 좋고 제 마누라만 챙기는 것까지 어찜.
그렇게 너랑 똑같냐.
태호연은 태국영의 싸늘한 눈빛에 찔려 뒷말을 삼켰다. 물론 의미는 다 전 해졌을 테다.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자타 공인된 사실이니까.
태호연은 태국영이 방금 제 발언을 걸고넘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태국 영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제 주제 파악을 매우 잘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 새끼는 뭐 이런 걸로 길길이 날뛰고 그런대. 열 받아도 내가 받 을 일인데.”
역시 태국영은 태호연이 눈앞에서 자기 흉을 본 걸 관대히 넘어갔다. 태호 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원래 그놈 성격으로 보면 마약 정도야 그냥 코끝으로 무시할 것 같 은데 의외로 후폭풍이 무시무시한가봐. 지금 중국은 그 약을 판 놈이건 산 놈 이건 명줄 보존 못 하는 상태라고 하더라고. ”
태국영은 미심쩍게 고개를 꺾으며 자오추안을 떠올렸다. 그는 황자처 럼 자 라 황제처럼 살고 있는 남자였다. 워낙 성격적으로 하자가 많아서 웬만한 탈 선에는 눈 하나 깜짝 않을 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오추안이 원하는 방향으로 회신문 보내 줘. ”
하지만 그 분노의 근본을 파헤쳐 볼 만큼 가치 있는 상대는 아니 었다.
“슈퍼문은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있는 약이 아니야. 중국이건 일본이건 큰 제약회사들은 다 인간들 거라 슈퍼문을 제대로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는 기술 력이 없어. 게다가 지금은 동족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 고.”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예전에 유사 신약들이 일족들사이에서 활개를 쳤 을 거다. 태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왔던 결재판들을 챙겨 브리프 케이스 에 넣었다.
‘제수씨랑 여행 간다며?
“응. 흥콩으로. -그런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승도 싫어해.”
“아참. 이게 버릇이 돼 놔가지고.”
태호연이 잠시 입가를 긁으며 자책하는 시늉을 했다.
“나뿐 아니라 다들 호칭이 애매해서 난감해졌어. 특히나 노친네들이 그게 심해. 그래도 가주가 정한 배필인데 승도 씨,승도군,이러기가 영 찜찜하다 이거지.”
“난감할 게 뭐 있어. 승도 본인이 그걸 원하는데. ”
“고리타분한 노친네들한테 신세대들이 들이미는 변화는 가끔 비약적으로 받아들여지니까.”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 나가려던 태호연이 문 앞에서 아, 하며 몸을 돌렸다.
“어제 서류 받고 자오추안이랑 잠깐 통화했는데, 그 풀문이란 약 말이야. 홍콩이랑 대만 쪽에도 최근 흘러들어 간 것 같다더 라. ”
“그 베일에 싸인 일본 판매원은 대량으로 팔고서 튀었다며. 그게 어떻게 거 기까지 가?”
“길게 팔면 꼬리가 잡히니까 마지막으로 제조법 자체를 팔고 간 것 같대. ”
“지랄도참염병이다.”
“어쨌든 너 흥콩 간다니까 미리 알려주는 거야. 흥콩은 종가 권한이 우리 나 중국처럼 크지 않은데다가 종주가 이 일에 아직 관심이 없어서 막 팔고 다 닌다나봐.”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자오추안더 러 가서 족쳐 보라고 그래. 힘 못 써서 안 달난 것 같은데. 혹시 알아? 거기서 와타나베 이름이 튀어나올지. ”
“무슨 명분으로. 개들이 중국에 와서 약을 팔고 간 것도 아닌데. 아니,명분 은 둘째 치고 섣불리 들쑤셨다가 도리어 중국 애가 홍콩 애한테 제조법 넘긴 거면 어쩌게? 자오추안은 흥콩 종주한테 욕좆나게 처먹고 얼굴에 똥칠까지 하고서 그냥 빈손으로 가게 되는 거야. 하지만 너는 다르지. 너는 기술을 훔쳐 가서 짝퉁 약을 만들고 유통,판매까지 하는 놈들을 얼마든지 추궁할 권리가 있으니까.”
태국영은 여전히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
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주인 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이라 그리 이상하 다 여겨지지 않는 반응이긴 했다. 하지만 태국영의 대리로 태일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의 그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원래라면 이 모든 것은 태국영이 관리해야 할몫이었다. 태국영은 그 자신 이 앉은 자리에 조금 더 무게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너 자신이 싫더라도,너는 태 가의 주인이다,국영아. ”
태호연은 그렇게만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 렸다.
“꼬마신사님들 근사하네.”
어 린이 정장을 말끔하게 갖춰 입은 두 아이의 모습은 칭찬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예뼜다. 태이경은 웃으며 몸을 꼬았다. 멜빵 달린 반바지와 반 팔 셔츠를 입고 조끼까지 갖춰 입은 녀석은 아동복 모델처럼 앙증맞고 사랑스 러웠다.
반면 여은태는 웬 사립학교에 다니는 킹카 남학생 같았다. 간소하게 긴 바 지와 반팔 셔츠 차림이었는데, 셔츠 깃과 포켓에 세련되게 들어간 은사 수 문 양은 햇살에 반짝이는 녀석의 은발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호호호. 이게 다 제 덕분 아니겠어요? ”
아이들을 칭찬하는 것은 곧 유모의 패션 센스를 칭찬하는 것과 같았다. 유 모가 한 치는 높아진 것 같은 콧대를 치 켜들며 당당히 가슴을 내밀었다. 이승 도는 그에 열렬하게 동의했다.
“물론이죠. 유모 덕분에 우리 애들이 오늘 가장 빛날 거예요. ”
“당연한 칭찬 고마워요. 자,그럼 이제 포인트 아이템으로 마무리를 해 볼 까요?”
“뭐가더 있어요?”
“그간 가족같이 지낸 은태 군이 처음으로 종가모임에를 간다는데, 요런 거
빠질 수가 있나요.
유모는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벨벳 케이스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액세서리가 들어있을 법한 케이스였다. 그녀는 특별히 주문제작을 한 거라고 잔뜩 생색을 내며 뚜껑을 열었다.
브로치 두 개가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디자인 은 같았는데,큰쪽에는 검정색 보석이, 작은쪽에는 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 다. 유모는 큰 것을 여은태의 포켓에, 작은 것을 태이경의 조끼 칼라에 채워 주며 말했다.
“두 분이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자라고 있잖아요. 그래서 같은 디자인으로 한번 맞춰 봤어요. 어때요,예쁘지요?”
“이쁘다, 유뫼 나 이거 완전 맘에 들어! ”
태이경은 은색 브로치를 내려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신기한 듯이 제 것 과 태이경의 것을 번갈아 보던 여은태의 얼굴에도 점차 미소가 번져갔다.
이것이 바로 드라마에서나 보던 커플 아이템!
유모의 본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것은 제 알 바가 아니 었다. 여은태는 태 이경과 제가 친분이 매우 두텁다고 온 동네방네 알려줄 이 징표가 매우 흡족 했다.
작년에 태이경이 모임에 갔다가울고 왔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속이 쓰렸 던가.
‘나도 이번에 같이 가도 돼? ’하고 묻자 태국영이 ‘네가 가고 싶음 가는 거 지,그걸 왜 나한테 물어 봐? 네가 내 아들이냐? ’라고 어이없어할 때 여은태 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무조건 따라가서 태이경의 곁에서 눈에 불을 켜 고 있을 테다. 조금이라도 시비를 거는 꼬맹이들은 아주 혼줄을 내주고 단단 히 교육을 시킬 셈이었다.
“유모. 기왕 하는 거 넥타이도 맞춰 주면 안 돼? ”
여은태가 물었다. 검정색 타이를 한 저와 달리 태이경은 깜찍한 보타이 였 다. 유모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짚으며 잠시 생각하는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 다.
“뭐 어려울 것은 없지요. 타이는 디자인을 맞춰서 뽑은 건 없지만 그냥 도
련님께 은태 군 것과같은 기본형 타이를 해 드리면 되니까요. 도련님,어쩌실 래요?”
“응.형아가하고싶은대로해 줘. ”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위층으로 올라가는 유모의 옆으로 태국영이 내려왔다. 그는 넥타이가 조금 갑갑한지 매듭에 손가락을 넣어서 느슨히 늘리고 있었다. 재킷 없이 연한 광 택이 들어간 연회색 베스트와 슬랙스,흰 셔츠 차림이었다. 상의와하의 모두 딱 맞게 주문제작을 한 터 라 그가 걸을 때마다 근사한 남성 미를 자랑하는 곡 선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이승도는 완벽하게 갖춰 입은 그에게서 차가운 관능을 느꼈다. 물론 셔츠 앞섶만 풀어내도 그 차가움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변할 것이다.
“별이,오빠들이 더 예뻐,아빠가 더 예뻐? ”
이승도는 목덜미에 단단히 매달려 있던 아기에게 물었다. 매끄러운 털 뭉치 가 꼼지락거리며 한쪽 어깨로 옮겨 오더니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예뻐?]
단어를 햇갈렸는지,아니면 이것들이 뭐가 예쁘냐고 묻는 건지 조금 햇갈렸 다. 이승도는 녀석의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며 재차 물었다.
“우리 별이 예쁘지. 오빠들도 예쁘고, 아빠도 예쁘고. 별이 말고 누가 제일 예뻐?”
[엄마!]
“아니. 오빠들이 랑 아빠 중에. ”
[엄맘마!]
을 말자.
멋지 게 차려 입은 셋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 였다. 그때 태국영 이 다가와 섰 다. 그는 태은경의 콧잔등을 톡 누르며 입술을 휘었다.
“우리 승도가 제일 예쁘긴 하지. ”
[엄마 예뻐!]
태국영이 녀석의 앞에 검지를 내밀었다. 태은경이 그 검지에 아무지게 앞발
을 휘둘렀다. 나름 하이파이브였다. 그래도 아빠자식 사이니까 이런 사인 하 나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겠냐며,얼마 전 태국영이 변덕처럼 가르친 거였다. 드물게 의견일치를 보이는 부녀의 모습에 이승도는 그냥 웃고 말았다.
“타이 제대로 매. 유모가 불량해 보인다고 질색할 거야. ”
느슨히 늘어진 넥타이를 지적하자 태국영은 당당하게 턱을 들어 보였다.
“네가다시매 줘.”
“이리 와.”
태국영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섰다. 이승도는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매던 기억을 되살리면 어렵지 않게 매줄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방향이 햇갈려 여러 번 시도해 보다가 결국 백허그를 한상태로 자세를 바꾸고 나서야 ‘남의 넥타이 매 주기’ 미션에 성공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어깨너머로 예쁘게 매듭이 잡힌 걸 확인한 뒤 팔을 빼 려 했다. 그러나 그때 태국영이 손목을 잡아챘다. 이승도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그를올려다보았다. 태국영이 싱긋웃었다.
“뭐가그렇게 급해. 잠깐이러고 있어. 기분좋네.”
이승도는 힐긋 눈을 굴렸다. 아이들이 봐도 딱히 상관없는 포즈이긴 했지 만 역시나 조금 남세스럽긴 했다. 하지만 여은태와 태이경은 서로 멋지다 예 쁘다 칭찬해 주느라 이쪽에는 관심도 없었다. 태은경 역시 어깨에 0?슬아슬하 게 배를깔고늘어져서 그새 꾸벅꾸벅 조는상태였다. 이승도는 칼처럼 각진 셔츠 깃 위로 쭉 뻗어 있는 그의 목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고 치지 말고 잘 다녀와. 애들도 잘 챙겨주고. ”
“걱정되면 같이 가자니까.”
“다음 주에 여행 때문에 오래 집 비워야 하니까 오늘은 그냥 별이랑 놀아주 고 있을게.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진짜 같이 가자. ”
태국영은 쯔 혀를 찼다. 그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리 였다. 그래도 올 해는 이승도를 동반할생각에 나름즐거워했는데, 뜻이 정 그렇다니 더 권하 기도 뭐했다.
“아휴. 두분은 언제나 이렇게 깨가쏟아지시네. ”
위층에서 내려온 유모가 호호 웃었다. 이승도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물러났
다. 유모는 가져온 넥타이를 태이경의 목에 매 주었다.
그때 정문에서 손님들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남강우와 송재희였다. 송 재희 역시 불참 의사를 밝혔다. 천성이 심약한데다가 안 좋은 기 억들까지 겹 겹이 있어서 누구도 그녀의 결정을 다시 묻지 않았었다.
“오빠,죄송해요! 저희가 좀 늦었죠? ”
송재희가 열린 현관문 사이로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남연주는 남강우가 안 고 있는 상태였다. 이승도는 달려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녀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빈말이 아니라 딱 맞춰 왔어. 우리 애들 방금 막 준비 끝난 참이 거
드 ”
“아,다행이다. 늦은 줄 알고 기다릴까봐 더 빨리 밟으라고 막 닦달했거든
요.,,
“그러다 사고나.”
“에이. 어차피 사고 날 남자도 아니구. ”
송재희는 제법 간이 커진 소리를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새 살도 더 올라 고 보조개가 열게 패는 뺨이 통통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동그랗 게 뜨며 박수를 짝 쳤다.
“어머나! 이경이 너무 예쁘네? 은태는 엄청 멋지고! ”
두 아이는 동시에 어깨를 쫙 펴며 ‘엣햄’ 했다. 여은태가 포켓에 단 브로치 를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우리 넥타이랑 브로치도 같은 디자인으로 맞췄어. 어때, 이거? 예쁘지?”
“오!”
송재희는 눈을 빛내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찜 이렇게 세련되고 고급스런 디자인을 골랐냐며 흥미를 보였다. 마치 어디서 파는 건지 알면 당 장 하나 사고 싶다는 투였다.
이번엔 유모의 코가 으쓱해질 차례였다. 그녀는 제가 직접 디자이너와 상의 해서 특별 제작을 한 거라며 잘난 척을 한껏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크게 선심
쓰듯 원하는 디자인이 있다면 두 분 것도 의뢰해 드릴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송재희는 어린애처 럼 좋아하며 남강우에게 달려갔다.
“오빠,우리도 저런 거 커플로 맞춰요. ”
애교 넘치게 팔짱을 끼며 조르자 남강우는 좋을 대로 하라며 담담하게 고 개를 끄덕 였다. 왕관 모양이 좋을까, 날개 모양이 좋을까,행복한 고민에 빠져 드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던 태국영이 이승도의 등을쿡 찔렀다. 왜,하며 돌 아보자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승도는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재희처럼 팔짱 끼면서 비비적비비적 아양 떨어 주면 서방님이 섬도 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
이승도는 차마 대꾸할 의욕이 나지 않아 그냥 무시했다.
“개소리 그만 옮고 그만 나가지. ”
남강우의 차가운 제안에 태국영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가 손을 까닥해서 아이들을 불렀다. 여은태가 태이경을 목말 태운 채 그의 곁에 섰다.
“잘 다녀와요.”
아기를 넘겨받은 송재희가 남강우의 뺨에 입을 맞추며 배웅했다. 숱한 시선 이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데도 스스럼 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고행에 마침표를 찍은 이들 모두 변화하고 있었다. 곧 다가올 태풍을 무력 하게 바라보는 들꽃처 럼 위태롭게 느껴졌던 송재희는 날이 갈수록 싱그러운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소 헤매는듯했던 남 강우도 이제 애정을 담은 눈으로 그녀의 키스를 되돌릴 수 있는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흐뭇한광경이었다.
는?”
물론 다 큰 어리광쟁이는 그 꼴을 곱게 지켜만 보지 않았다. 그저 손을 흔 들어주는 것으로 배웅하려 했던 이승도는 대놓고 눈치를 주는 태국영의 꼬인 눈빛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잘 다녀와.”
이승도 역시 똑같이 뺨 키스를 했다. 태국영은 변덕스럽게 웃으며 뒤를 돌
“다녀오십시오.”
유모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깍듯이 배웅했다.
저택이 모처럼 고요했다. 시끌벅적한 소음의 주범이었던 두 사내아이가 집 을 비우고, 갓난아기 둘은 배부르게 먹고 꾸벅꾸벅 졸다가 요람에서 함께 잠 이 들었다. 썬 룸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늘어져 있던 송재희와 이승도마저도 달콤한 오수에 잠겼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기 시작할 즈음 유모는 고용인들과 함께 뜰로 나왔 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여름 이불이 초여름 햇볕에 바싹 말라 있었다. 건조기 에 돌리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하지만 공기가 좋은 날이면 유모는 이불들을 뜰로 가져와 햇볕 소독을 하곤 했다.
유모,,
태은경이 쓸 작은 침구들을 내려 팔뚝에 걸고 있던 그녀는 저를 부르는 소 리에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이승도가 아직 잠기운이 조금 남은 눈가 를손끝으로 비비며 서 있었다.
“네. 승도군. 말해요.”
“저랑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래요. 어디서요?”
“날이 좋으니 테라스로 가요. ”
“음료 준비해 갈게요. 뭐가 좋아요?”
“수박주스요.”
이승도는 요새 수박에 제대로 꽂혀 있었다. 디저트로도 먹고 간식으로도 먹 고 술안주 화채로도 먹고 빙수로도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수박을 찾았다. 그를 위해 직접 과수원까지 경 영하며 신선한 제철 과일을 들여오는 유모로서는 기 꺼운 집착이었다. 유모는 빙긋 웃으며 금방 가져다주겠노라 말하고 집 안으 로 사라졌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훈풍에 제대로 코끝을 담가 보기도 전에 유모가 돌 아왔다. 첨가물 없는 수박 주스를 두 병이나 든 채였다. 유모가 유리잔에 주스 를 따라 내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처음 아닌가요? ”
“뭐가요?”
“뭐긴요. 이렇게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걸 말하는 거죠. 같이 차한잔 하고 싶어도 가주님이 온종일 승도 군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시니 영 틈 이 안 나더라니까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도 그녀는 이승도의 안색을 면밀히 살폈다. 잡담이나 하자고 굳이 둘만의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특별하게 할 이야기 가있는 눈치였다.
지금은 귀신같이 귀가 밝은 태국영도,먼 곳의 이야기를 홈쳐 들을 수 있 는 사내아이들도 없었다. 태성문을 비롯한 경호원들도 오늘은 함께 자리를 비 웠다. 남은 것은 저택의 출입 가능 지역을 지켜보는 경비원들뿐이었다.
분명 우연히 아닐 터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이승도가굳이 집에 남겠다 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기, 사실, 유모. 요즘국영이가말이에요……. ”
“우리 가주님 이 무슨 잘못을 했어도 승도 군을 사랑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 아요!”
이래서 누구나 평소 행실이 중요한 법이다. 태국영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 간유모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 지레 변명부터 내뱉고 말았다. 이승도의 선 한 눈매가둥그렇게 벌어졌다. 그는 어리둥절하게 잠시 눈을 낌뻑이더니 짙 게 미소 지었다.
“아뇨. 국영이는 제가 뭐 불만을 품을 거리도 없이 요새 되게 착하게 굴어 요. 유모도 아시잖아요. ”
유모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게 아니면 뭔데요? ’하고 물었다. 이승도 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은 한참 만에 다시 열렸다. 눈 동자에는 그늘이 맺힌 채였다.
“개가 가끔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
“에? 우리 가주님이 악몽? 나쁜 꿈?”
“네. 제가 잠귀가 좀 밝잖아요. 자다가 옆이 뭔가 뜨끈뜨끈해서 보면 애가 딱딱하게 굳어서 못 알아들을 잠꼬대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저랑 관련된 악몽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
태국영은 아마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 테지만, 아니 었다.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던 초기부터 눈치를 채고 말았다. 그의 잠꼬대에서 유일하게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승도’뿐이 었다. 그는 꿈속에서 이 승도 자신을 보며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 였다.
“우리 가주님 성격에 악몽을 꾼다면야,승도 군과 관련된 일밖에 없을 것 같긴 하네요. 그래서 그게 고민인 거예요? ”
“네. 저는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국영이 혼자만 그렇게 과거에 얽매 어서 고통스러워하는 걸 곁에서 보기가 조금 힘드네요. 그게 더 일찍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 탓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요. ”
널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는 내 곁에서 평생 괴로워해. 그토록 저주처럼 퍼부었던 악담이 태국영을 옭아맨 것이 아닐까. 그의 발목 을 꽁꽁 묶어 버린 사슬의 주인이 이제는 되었다고 끊어내 주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왜 승도군 탓이에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제가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열네다섯 살 때부터 인가, 국영이는 자기 나름대로 저를 보호하려고 애썼어요. 물론 그 게 늘맘처럼 잘 되었던 건 아니었지만요. 그,이경이가생기던 그날도 그랬어 요. 국영이는 몸에 이상을 느꼈을 때부터 구석으로 도망쳤어요. 제가 그 애에 게 손을 댄 거예요. 값싼동정심을못 이기고요. ”
격렬한감정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은증 오를 택했었다. 그 작았던 아이에게 떠넘기기엔 과분한 죄목들을 얹어 놓고 오로지 그것만으로 삶의 의지를 불태웠었다.
유모는 차분히 말했다.
“악의로 둔갑하는 선의는 분명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날의 참극을 본 인 탓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계기가 뭐가 되었건 승도 군은 피해 자예요. 가주님을 비난하고 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요. ”
“네,알아요. 하지만 그 비난이 앞으로도,어쩌면 영원히,그를 고통 속에 가 두면 어쩌죠?”
“승도군.”
유모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붉어지는 석양이 그녀의 눈동자 위에 붉은광채 를 드리웠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그건 우리 가주님께서 의당 감당해야 할몫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냉랭한 말투와 목소리 였다. 늘 푸근하게 웃어주던 그녀 에게 서 좀체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승도 군은 그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였어요.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요. 불가항력이었건 뭐건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요. 피해 자가 관대함을 보였다고 해서 가해자의 죄가 씻겨나가는 것은 아니 에요. 나 는 우리 가주님께서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무척 자랑스럽네요. ”
“가주님은본인이 이성을 잃어서 승도 군을 다치게 했다는 걸 영원히 잊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실 테고요. ”
이승도는 말문이 막혀 그저 듣기만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제가 바 라던 대답은 아니 었다. 유모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도 군이 가주님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 이해해 요. 그 죄책감을 어떻게든 없애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요. 하지만 승도 군, 그 과정 에서 절대로 본인을 탓하지는 말아요. 승도 군이 처음부터 포용을 보였다 고 하더라도 가주님은 지금처럼 스스로를 벌했을 테니까요. ”
…그랬을까?
이승도는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때 네 잘못이 아니 었다고 다독여 주었더라도 너는 그렇게 미련하
게 스스로를 비난하며 살게 되었을까?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아요. ”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손이 따뜻한 체온에 감싸였다. 고개를 들자 유모가 부 드럽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뭐,정 신경 쓰인다면 어쩌겠어요? 끙끙 앓지 말고 그냥 하고 싶 은 대로 다 해 버려요. 이 집에서 승도군이 못할 게 뭐가 있답니까. ”
유모는 그 말을 끝으로 저녁를 준비해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승 도는 텅 빈 그녀의 자리를 바라보다가 조금 미지근해진 주스 잔을 매만졌다.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화였다.
이승도는 호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태국영에 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은짧게 울리다가 완전히 멎었다.
《응.》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제가관심을 줄 때면 그는늘 그렇게 대놓고 기분 좋은 티를 냈다.
“재밌게 놀고 있어?”
《왕따가 재밌을 게 뭐 있다고. 애들만 신났지.》
“애들 신났어? 잘 놀아?”
《아주 둘이 꼭 달라붙어서 신명 나게 연회장을 활보 중이야. 이경이가온 갖군데를 다 들쑤시면서 여 가 꼬맹이를 소개시켜주고 있어. 근데 둘만 신났 지 아무도 안 반가워해. 우리 아들 저런 거 보면 참 뻔뻔하다니까.》
“응? 왜아무도 안반겨 줘? ”
《여 가 꼬맹이가 자기 냄새를 꼭꼭 숨기고 있거든. 투시도 안 되고 냄새 도 안 나니까 애들이 잔뜩 얼어붙어서 미친 듯이 경계하고 있는 중.》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태가 냄새를 왜 숨겨?”
《쥐콩만 한 게 나 따라한답시고.》
여전히 모르겠다. 이승도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백거렸다. 의문을 눈치챈
태국영이 친절하게 부연했다.
《연회장 들어가기 전에 내가 냄새를 단단히 감췄더니 꼬맹이가 갑자기 쿵 쿵대면서 왜 갑자기 그러냐고 묻는 거야. 길게 풀어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그 냥 대충,멋진 남자라면 이 정도 지조와 절개는 있어 줘야 된다고 대답해 줬더 니 저러잖아. 단순하기는.》
한껏 어른인 척해도 역시 애는 애였다. 이승도는 그 복잡한 듯 단순한 머릿 속에서 끄집어낸 생각들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배우자라니,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
《장가 잘 들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우리 승도도 한 지조 하잖아?》
“그래서 나도 장가를 잘 갔다 이거?竹 ”
《태국영 정도면 배우자로 꽤 괜찮은 편 아니 었어?》
그의 표정이 눈앞에 그린 듯이 펼쳐졌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한 손은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손의 엄지와 검지, 중지로 휴대폰을 가볍게 들고 있을 거다. 눈가는 흐린 주름이 잡혀 있을 테고 붉고 도톰한 입술은 달콤 하게 휘어 있겠지.
풍성하게 늘어진 속눈썹 아래 오연하게 빛나고 있을 두 눈까지 생생했다. 이승도는 문득,먼 곳에서 목소리만 전송해 오는 그를 통째로 떠서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맞아. 태국영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신랑감이지. ”
《나도 아는데 우리 승도 입으로 들으니까살짝 부끄러워지려고 하네.》
“사랑해,태국영. 보고 싶으니까 일찍 들어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승도는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쩐지 더 대화를 나눴다가는감성적이 될 것 같아서였다. 지금 이 순간의 물렁한감 정을 조금이라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근데 말하고 나니 진짜 보고 싶네. ”
말이 씨가 된다더니,이 씨앗 성장 한번 빠르기도 하다. 이승도는 석1法을 담
아 더 붉어진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 탁. 탁.
한참 동안 태국영은 휴대폰을 한 손 안에서 돌려댔다. 짧은 통화 내내 나 사 빠진 것처 럼 싱글거 리던 그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표정 이 돌변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싸늘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태 가 일원들은 알게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만나자마자 붙임성 좋게 농담부터 걸었던 신영애도 접근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안 건드리는 게 신상에 좋다고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 는 오늘 조금 친해진 태현리에게 속닥속닥 물었다.
“재 갑자기 왜 저래?”
태현리는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가주님 심기가롤러코스터를 탈 때는 딴 거 없이 딱 하나뿐이죠. ”
“역시 그거지? 승도 오빠가 뭐라고 구박했나? ”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표정을 보니 뭔가 되게 찜찜하고 아리까리하고 의심 스러운 괴상한 무언가가 있어 보여요. ”
“…어느 종족 말이야,이게. 찜찜,아리까리,괴상, 뭐? ”
신영애가 소처럼 눈을 끔뻑이며 어이없어했다. 빙그레 웃는 태현리 대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내 주변을 맴돌던 태준호가 냉큼 끼어들었다.
“저는 압니다! 그거 잘 압니다! 태 가에 소속되어 있다면 가주님 심리를 잘 꿰어야 자고로 만수무강할 수 있거든요. 영애 양,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릴까 요? 부디 설명하게 해 주십시오! ”
신영애는 힐금 태준호를 일별하며 혀를 찼다. 저 푼수 새끼는 여전히 분위 기 파악이 꽝이다. 게다가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놈이 무슨가주심리를꿰 뚫을 수 있다는 건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어디 여자들 말하는데 끼어들어. 너 가.”
태준호는 군소리 없이 깨갱 뒤로 물러났다. 버림받고 비까지 맞은 강아지 몰골이었다. 그놈 참 배포도 없다며 속으로 혀를 차는 신영애 곁에서 여은태 는 태이경을 목말 태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귀가 밝아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었지만 여은태 역시 정확하 게 어떤 부분이 꼬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다 하더라도 함구하는 게 맞았 다.
그런데 보고 싶다는 말에 왜 저리 저기압이 됐지? 도리어 기분 째져야 정상
?1
여은태가 멀뚱하니 생각했을 때였다.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본 태국영이 입을 열었다.
“야,꼬맹이. 이리 와봐. ”
그러자 모두가 여은태를 쳐다보았다. 달려드는 시선의 흥수 속에서 여은태 의 고운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나 꼬맹이 아니거든? 왜 다들 나만 보고 난리야? 기분 나쁘게. ”
“너 맞으니까 잔말말고 와. ”
태국영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다들 그것 보라며 일제히 어깨를 으쓱였다. 여은태는 더욱더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심기 불 편한 태국영 의 비 위를 더 뒤틀리 게 하는 건 아무리 저 라도 부담스러 웠다. 여 은태는 태이경을 바닥에 내려준 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뭐 아는거 있으면 다털어놔. ”
곁에 서기도 전에 태국영이 다짜고짜 추궁했다. 숫제 협박조였다.
“꼬맹이 따위가 뭘 알겠어. 잘난 어른이 더 잘 알겠지. ”
오라는 대로 왔다고 네네 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었다. 어차피 아쉬운 것은 그였다. 여은태는 목을 긁으며 대놓고 딴청을 부렸다. 태국영은 완전히 몸을 틀어 정면으로 섰다. 속으로 움찔한 것이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알아, 몰라.”
“글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역시 꼬맹이 따위 가알아봤자지. 안그래? ”
이걸 그냥.
태국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여은태를 노려보았다. 여은태는 단단히 삐쳤는
지 꿈쩍을 안 했다.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지? ”
집? 웬 집? 벌써 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여은태가 고개를 가우뚱거 렸다. 태국영은 비웃듯이 입술을 뒤틀었다. 다정하게 꼬드길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가장 편하고 잘 먹히는 건 역시나 협박이 었다.
“이제 맘먹는 대로 변이도 가능한데 굳이 승도 옆에 딱 붙어있을 필요 있 나. 대보름 정도나찾아오면 충분할 거 같은데. 내 집에 다른 가문수컷 놈 냄 새 풀풀 풍기는 거 슬슬 짜증 나려고 그러거든. ”
“???이이,치사하게! 꼬맹이를상대로 툭하면 협박이냐! ”
“언제는 꼬맹이 아니라더니 이제 와말을 바꿔? ”
허를 찔린 여은태가 움찔 굳었다. 태국영은 비열한승리자의 미소를 지었 다.
“어쨌든 그래서,뭘 안다고? ”
여은태는 분한 듯이 씩씩거렸으나 더 버틸 방도가 없었다. 칼자루는 이미 그가 쥐고 있었고 아쉬운 건 이쪽이 되었다. 태국영은 제 영역에 기생하고 있 는 타 가문의 사내아이에게 당장에라도 축객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 다.
“내가 무슨 관심법이라도 쓰는 줄 알아? 뜬금없이 전화한 선생님 속내까 지 꿰뚫게? 짚이는 거라도 말해 줘야 범위를 좁혀 보지. ”
여은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왜 굳이 나한테 난리야? 유모나 재희 누나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걸. 지금 셋이 같이 있을 거 아냐. ”
태국영은 흠,하며 고개를 저 었다. 유모는 제게 충성을 다하지만 기본적으 로 이승도 편이었다.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이 없다면 이승도의 사적인 부분까 지 고해바칠 이가 아니었다. 송재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됐어. 가 봐.”
손사래를 치자 여은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 버렸다. 태국영은 고개를 기울
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호주머니 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량 식품 사 갈까?’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후 ‘나 다니던 동물원 근처 에’로 시작하는 장문의 답장이 왔다.
그제야 그의 차가운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승도는 심각한 고민이 있거 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욕부터 떨어지는 습성이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기 는 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깊이 파고들어볼 생각이 사라졌다.
이승도는 제 부속물이 아니다. 당연히 그만의 고민이, 그만의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어떤 소음도 없는곳에서, 태국영 자신이 보는눈도 없 는 그런 곳에서 홀로 고독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었다. 혹은 정반대로 숨 가쁘게 반짝이는 불야성을 활보해 보고 싶다든지.
“현리야.”
태국영의 부름에 태현리가 냉큼 다가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네. 하실 말씀이라도?”
“승도하고 여행지 상의할 때 뭐 특이사항 같은 거 있었어? 가령 좀 복작이 는 데를 가고 싶어 했다든가, 아니면 정말 적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쉬고 싶어 했다든가. ”
“숙박 예약해 놓으신 걸 보면 아실 테지만,엿새 중 나흘은 홍콩 스탠리 베 이의 저택이고, 흥콩의 마지막 밤은 요트, 마지막 날은 마카오 호텔로 잡았지 요. 확실히 휴1法을 즐기고 싶으신 듯했어요. ”
“관광은 아예 없고?”
“트램이나 유적지 투어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으셨고, 홍콩 야경이나 카지 노에는 조금 흥미를 가지셨어요. 스케줄 표 대강 나온 걸로 아는데 안 보셨어 요?”
“볼 필요가 없어서 안 봤어. 그냥 승도한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했거
드 ”
“그렇군요. 또 뭐가 궁금하신가요? ”
태현리는 무슨 헛소리를 하건 다 받아주겠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하
고 있었다. 마치 철없는 사촌 오빠를 착하게 타이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새삼 심기가 불편할 까닭은 없었다. 그녀는 원래 태호연이 무수히 한탄하 듯 애늙은이 같은 면모가 있었다. 덤덤하고 간도 큰 편이라 태 가의 혈기 넘치 는 남자들이 무슨 사고를 쳐도 ‘그래,그래. 지랄은 적당히 하고 뒷수습만 잘 하렴’ 같은 태도를 보이곤 했다. 태국영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만 됐어.”
“네,그럼.”
태현리는 왔던 것처럼 도도한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태국영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역시 이승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말로 는 괜찮다고 하지만 노상 저만 찾는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이 힘들지 않을 리 가 없었다.
여행을 가면 절대 귀찮게 하지 말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이고 푹 재워야 겠다. 태국영은 그답지 않게 굉장히 착한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