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17/25)

2. 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됐네. 그래도 괜찮아. 이 신영애 님의 손길이 닿 으면 허허벌판도 순식간에 웨딩 촬영 스튜디오처럼 변하거든. ”

   신영애는 굉장히 화려한 차림이었다. 고데기로 공들여 웨이브를 넣은 머리 는 한쪽만 빗어 넘겨 보석 헤어드레스로 고정했고,새빨간 홀터넥 드레스는 육감적 인 그녀 의 몸을 그린 듯이 감싸고 있었다.

   “내가 안 그래 보여도 꽃을 좀 좋아해. 이거 센터피스로 놓을 건데 오빠가 보기엔 어때?”

   이승도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겪 는 타입의 여성이었다. 파티 룸장식을맡았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당당하게 등장한 신영애는 초면임에도 몇 년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하게 저를 대하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함께 일하던 여자 사육사들 중에 기가 센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이 화려한 아가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아… 예쁜 것같은……

   이승도는 이번에도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말을 놓은 신영애와 달리 이승도는 그 숨 가쁜 관계 진전을 따라잡을 주변머 리가 없었다. 급작스럽고 일방적으로 친해져 버린 듯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그녀의 오만한 사교성이 싫지는 않았다. 아마도 묘하게 태국영이 연상되는 분위기 탓 인듯했다.

그녀의 매혹적 인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나 결혼 축하 선물도 가져왔어. ”

   그녀는 수행원들이 잔뜩 실어온 꽃들 사이에서 어항같이 생긴 케이스를 가 져와 내밀었다.

“프리저브드 플라워야. 이미 애들까지 있다지만 그래도 신혼부부니까 특별

히 하트 모양으로 담아 봤어. 다른 건 다 주문 맡겼는데 이건 특별히 내가 직 접만든 거라구.”

   돔형의 유리구 속에는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화사하게 담겨 있었다. 생화라 고 믿을 수 없는 고운 색감이 었는데, 꽃잎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싱싱하 고 아름다웠다. 이승도는 조심히 그것을 받아들며 물었다.

   “이거,생화?”

   “응? 뭐 들었어. 프리저브드 플라워. 생화를 약품 처리한 거. 아마사오 년 정도는 이렇게 예쁜상태로 갈 거야. 더 오래갈수도 있고. ”

   “고마워. 정말 예쁘네. 유모,이거 침대 방에 두면 좋겠어요. 그쵸?”

   “영애 양 센스 덕에 방이 화사해지겠네요. 당장 갖다놓고 올게요. ”

   유모는 유리구를 받아 들고 총총 사라졌다. 신영애는 휑한 홀을 한 번 둘러 보더니 상큼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자, 그럼 선물도 다 전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파티 룸을 꾸며 볼까? 거 기,꼬맹이들! 그만 뛰어다니고 이리 와서 이 누님 좀 도와! ”

   “와아아아아! 돕자,돕자! ”

   태이경이 여은태와 함께 쪼르르 달려왔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선물 받은 천사 날개와 엔젤 링 머리띠가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 었다.

   “이경 천사입니다!”

   태이경은 다짜고짜 뒤를 돌아 어깨춤을 추었다. 깃털 풍성한 날개가 허공 에 새하얗게 흔들렸다.

   “은태 형아가 나 진짜 천사 같대요. 이거 어디서 샀어요? ”

   “사긴. 선물인데 직접 만들어야 의미가 있지. ”

   “진짜요? 누나가만든 거예요? 완전 짱이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고 그러니. 파티용품이라면 싹 꿰고 있는 이 몸에 겐 누워서 떡 먹기지. ”

   거짓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 나는 작업이었다. 손수 거위들 을 때려잡아 깃털을 뽑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걸 일일이 붙이는 동안

에는 내내 쌍욕을 달고 살았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고 화를 내며 집어 던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던 어제의 결심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깨끗하게 날려주었다. 정떨어질 정도로 셈 에 능하고 저보다 약한 것들은 죄 부리려고 드는 어린애들만 봐왔던 터라,이 생소한 아이의 존재가 그저 반갑고 즐거 웠다.

   “누나가 선물해 줬으니까,나도 보답으로 이따 화관 만들어 줄게요. 유모 온실에 예쁜 꽃들 되게 많아요. ”

“화관을 만들 줄알아?”

   “응, 재희 누나랑 놀 때 종종 만드는데 누나가 되게 좋아해요. 나더 러 손재 주 좋다고 칭찬했어요. ”

“그래. 파티 준비부터 다 끝내고 같이 놀러 가자. ”

“좋았어! 빨리빨리 끝내 버려요. 우리 뭐 도우면 돼요? ”

   지붕이라도 뚫을 듯 의욕 넘치는 태이경의 곁에서 여은태도 한마디 거들었 다.

“이경이랑 내가 다 할 테니까누나는 힘든 일 하지 말고 편히 앉아 있어. ” “응. 누나는 공주님처럼 앉아 있어요. ”

신영애는 어린이들의 허세 섞인 배려를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고마워,꼬마 신사님들. 그럼 꽃 장식 전에 테이블들부터 예쁘게 놓아 볼

까?”

   홀 구석에는 오전 일찍 옮겨 둔 파티 테이블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물론 테이블보 같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신영애는 힘쓰고 싶어 안달 난 여은 태에게 테이블을 옮기게 했고, 직접 구해 온 테이블보를 태이경과 함께 씌웠 다.

   이승도는 커튼을 화사한 레이스 재질의 것으로 바꿔 달던 도중 2층으로 불 려갔다. 태국영이 낮잠을 재우던 아기 짐승이 깨어난 탓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를 부르짖으며 떼쓰던 아기가 곧장 달려와 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별이 맘마! 맘마!]

   “응. 우리 별이 맘마 먹자. 유모,아기 식사 좀 갖다 주세요. ”

   뒤따라온 유모는 금방 준비해 오겠노라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이승도는

한손으로 아이의 궁둥이를 받쳐 안고서 침대로 걸어갔다.

   “별이 코잤어? 좋은꿈꿨고?”

   [엄마 없어. 안 코오.]

   “손님이 와서 내려가 있었어. 아빠랑도 코 자야지. ”

   이승도는 녀석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며 침대 곁에 앉았다. 까만 귀가 기분 좋게 뒤로 넘 어가고 보송보송한 목은 고롱고롱 울리기 시작했다.

   “승도야. 네 신랑도 안 코오.”

   애한테만 정신 파는꼴을 그냥 보아 넘길 태국영이 아니었다. 한량처럼 팔 베개를 하고 늘어져 있던 그도 덩달아 응석을 부렸다.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아 갔다. 이승도는 선선히 끌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느리고 강한 심장박동이 옆얼굴을 잔잔하게 울렸다. 머리칼 사 이로 그의 손가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저 녀석 저거,잠꼬대도 엄마만 찾아. 즈 아빠가 지루함을 참고 토닥토닥 해 주는데 조금도 고마워하질 않고 말이지. ”

   “그래도 넌 안물잖아. 그게 어디야.”

   “말하는 것 좀 봐. 너 그렇다 오냐오냐 키우다가 애 버릇없어져. ”

   “아직 애기잖아. 좀봐줘.”

   “애기니까 봐주는 거야. 요거 돌 지나서도 아빠한테 꼬리 치켜세우고 대들 면 혼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

   태국영은 검지로 아기의 정수를 톡 누르며 말했다. 녀석이 캬악 하며 앞발 을 파닥파닥 휘둘렀다. 말도 잘 못 하는 아기 니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모양새였 다. 이승도는 점잖게 아이의 발을 감싸 주물거렸다.

   “별이 아빠한테 발톱 세우면 안 돼. ”

   [발톱. 안돼.]

   아이가 얼마나 말을 알아듣는지는 잘 모르지만,어쨌든 눈치가 좋은 건 확 실했다. 녀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톱을 감췄다. 손 안에 든 작은 발

이 털 뭉치처럼 몽실몽실 꿈틀거렸다.

   “옳지. 착하다,우리 별이.”

   [별이 착해.]

   “오구 이삐라. 뽀뽀,”

   쪽쪽쪽쪽. 아주 난리가 났다. 태국영이 눈꼴시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실소 했다.

   “논다. 내숭이 아주 여 가 꼬맹이 뺨을 후려치네. ”

   “너도 애 앞에서 말좀.”

   이승도는 즉각 핀잔하며 태국영의 입술을 가볍게 때렸다.

   “아빠답게 좀행동해. 똑같이 애처럼 굴고 있어. ”

   “우리 승도,내가동족들사이에서 들 바보라고불리는 걸 모르나 보네. 개들 눈에는 나 완전 과보호하는 아빠아^ 이거 왜 이래. ”

   “웃겨.”

   “어쭈.안 믿네?”

   “말이 되는소리를 해야 믿지.”

   한 톨의 신뢰도 찾을 수 없는 반응이 었다. 굳이 더 설득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태국영은 그냥 한 번 픽 웃고 말았다.

   “태국영 들 바보 맞는데?”

   태이경 표 화관을 쓴 신영애가 증언했다. 진짜로 그런 답을 받을 줄은 꿈에 도 몰랐던 터라 이승도는 충격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재,재가?”

   “응. 딸 바보로 유명한 우리 아빠보다는 좀 못 하지만,재는 좀 심하게 들 을 싸고 돈다구. 애가 폭악폭악 안길 때마다 오냐오냐 안고 다니고, 여름철에 자기 전에는 손수 모기도 박멸해 준다며? ”

   신영애는 테라스 창밖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경대포 쏘기인지 뭔지 저 놀이도 자주 해 주고. ”

   종알종알 말이 많은 편인 태이경은 지난번 종가 모임에서 여기저기 돌아다 니 며 제 아빠 자랑을 쉼 없이 늘어놓고 다녔었다. 실제로도 태국영은 아이가 안겨들 때마다 품에 안아 올리거나 목말 태워 줬는데, 그 행동이 여간 자연스 러운게 아니었다.

   “애 아빠가그 정도 하는 건 되게 기본 아니야? ”

   “어머. 이 오빠무슨 헛소리를-”

   콧방귀를 끼던 신영애는 곧 깨달음을 얻은 듯 눈웃음을 지었다.

   “우린 인간들이랑은 많이 달라.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이나유대감은우리들 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어. 애는 성체가 될 씨앗에 불과해. 특히 사내애는 얼마 나 강하게 태어나느냐에 따라 가문의 명운이 달려 있지. 요즘에는 좀 덜하지 만,예전에는 비실비실한 사내애가 태어나면 일부러 도태시켜버 리는 일도 다 반사였다고.”

   동물원에서 일했던 이승도는 이해가 빨랐다. 짐승들의 세계에서는 흔히 벌 어지는 일들이었다. 건강한 새끼들을 더 잘돌보기 위해 병약하게 태어난새 끼는 가차 없이 버려진다. 그렇게 도태된 새끼들을 몇 마리나 업어 키웠는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신영애는 은밀하게 이승도의 귓가에서 뒷말을 덧붙였다.

   “오빠가 막 발을 들인 이 세계에서는 태국영이 이경이를 죽여도 전혀 이상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야. ”

   잊고 있었다. 태국영의 부모와 여은태의 부친이 자식에게 어떤 짓을 했었는 지. 살아남을 가망이 없는,그들의 눈에는 쓸모없었던 아이에게 얼마나 비정 하게 굴었는지 말이다.

   이승도는 햇살 가득한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활짝 열어 둔 창밖에서 는 태국영이 두 아이를 데리고 대포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구칠 때 마다 까르륵 웃는 태이경의 웃음소리와,녀석을 요령 좋게 물어 챈 여은태가 크릉크릉 목을 울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찌나 재밌게들 노는지 좀 체 이승도 곁에서 스스로 떨어지는 법이 없던 태은경까지 지척에서 그 모양

을 빤히 구경하고 있을 정도였다.

   “보면 볼수록 애들이랑 놀아준다기 보다는 자기가 놀고 있는 것 같긴 하지 만, 뭐 어때.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애를 행복하게 해 주는 아빠잖아. 그럼 된 거지 뭘.”

   생각해 보면,태국영은 아이들이 이승도 자신의 애정을 가져가는 것 자체 에 불만을 보인 적은 없었다. 다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를 조금이라 도 더 사랑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게 2순위로 밀려나는 것,그는 그걸 참 지 못했다.

   “어? 재희누나 차다! 누나아아!”

   태이경의 반가운 외침에 이승도 역시 시선을 멀리 보냈다. 막 닫히는 대문 안으로 익숙한 진주색 승용차가 서행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난 대보름을 송재 희의 보살펌으로 무사히 보냈던 여은태가 태이경을 등에 태운 채로 펄떡펄떡 뛰며 반가운 제스처를 보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강우는 아이들 앞에서 잠시 멈춰 송재희를 먼저 내려주었다.

   “연주 데려왔네. 오빠도 재희 아기 봤지? ”

   신영애가 송재희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끄 덕였다.

   “낯가림도 없이 방긋방긋 잘 웃고 순하더라. 은태랑 이경이가 아주 예뻐해. 별이도 먼저 가서 인사할 정도로 좋아하고. ”

   “아. 그거 들었어. 오빠 외엔 본체만체 냉랭한 쪼꼬미가 연주는 첫날부터 엄청 붙어 있었다고.”

   “응. 그래서 국영이가 요즘엔 나랑 놀고 싶을 때 재희 불러. 연주 있으면 별 이가 나한테 집착을 덜 하거든. ”

   “아휴. 이제 돌 지난 아기가 강우 오빠도 모자라 태 가까지 뒷배로 뒀네. ”

   남연주를무사히 다시 품에 안았을 때부터 송재희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래서 신영애는 남강우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타박 아닌 타 박을 했는데,남강우도 태국영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고 힘이 없어지지 않겠냐 며 송재희는 한숨을 꺼지게 쉬었었다.

   그 두 남자가 힘이 없어진다,라?

   지금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세월 앞에서 장사 없다고 틀린 말은 아 니었다. 언젠가는 저 무시무시한남자도 노년기에 접어들 거고, 지금은 한손 으로도 제압하는 여은태에게 힘으로 밀리는 날도 올 거였다.

   하지만 남연주와 동시대를 함께 살게 될 저 아이들이 있다면 문제될 것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특히나 저 돌연변이 아기 짐승이 곁을 지켜준다면 그 누 가 남연주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저 애는 훗날 이 세계에 태풍을 몰고 올 거야.

   흥미롭게 직감하며 태은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근데 재지금 뭐하는 거야?”

   신영애는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태은경이 송재희의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 오르며 아기의 이마며 등이며 닥치는 대로 제 머리를콩콩부딪치고 있었다. 이승도는 콧등을 껑그리며 아빠 미소를 지 었다.

   “별이가극도로 반가울 때 표현하는 인사법인 것 같아. 저번에 혼인식 때문 에 처음으로 집 비웠다가 돌아오니까 나한테도 저러더라고. ”

   “웬일! 웬일이니! 너무너무귀엽네! 미친듯이 귀여워! 이런건가까이서 구경해야지. 오빠,우리도 나가자! ”

   신영애는 어린애처럼 꺄아 웃음을 터뜨리며 이승도를 잡아끌었다. 위팔을 꽉붙든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자며 대답하기도 전에 이승도는 벌써 테 라스 밖으로 끌려 나와 있었다.

   “거기 숙녀분.”

   태국영이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둘은 반사적으로 멈 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달콤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중천에서 무 르익은 햇빛의 찬란함을 무색게 하는 미소였다.

   “승도는 인간이야. 조금 더 섬세하게 다뤄 줘. ”

   신영애는 미묘하게 고개를 비틀며 반응했다. 뭔가 떪은 것을 씹은 듯한 표

정이 었다. 태국영이 한 손을 내밀었다.

   “승도는 나한테 주고,영애 양은 가서 재희랑 인사해. ”

   신영애는 그제야 제가 꽤 세게 이승도를 붙잡고 있었음을 깨닫고 손아귀

힘을 풀었다.

   “아,오빠아팠어? 미안.”

   “신경 쓸정도는아니야. 괜찮아.”

   이승도의 귓바퀴가 붉었다. 겸 연쩍고 민망한 모양이 었다. 신영애는 그를 더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선뜻 물러났다.

   “응. 그럼 나 재희한테 가 볼게. 둘이 천천히 놀다 와. ”

   미련 없이 돌아서 가며 신영애는속으로욕설을 내뱉었다.

   나 방금 저새끼눈을 찌를 뻔했어! 찔렀어야 했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손끝이 아쉬움으로 부들거 렸다. 아마 많은 여자들이 그 랬겠지만,신영애 역시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태국영이 제 앞에서 그 견고 한 갑옷을 벗는 순간을 말이다. 그땐 황홀하게 무너져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 각했었다.

   그러나 역시 제 것이 아니면 아무리 강렬해도 이끌리지 않는다. 도리어 안 어울리게 러브 파워 마구 뿌려주시니 아니꼬워 죽는 줄 알았다.

   아,역시 찔렀어야 했는데!

   “언니. 일찍 오셨네요. ”

   불편한 심기를 애써 잠재우며 다가간 신영애를 송재희가 반갑게 맞아주었 다. 봄 햇살 아래 활짝 웃는 얼굴이 뒤틀린 속을 조금 잠재워주는 듯했다. 가 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신영애는 귀여운 동생 대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 다.

   “응. 파티 하면 이 신영애 님 아니겠니. 추레한곳에서는 놀 마음도 딱 떨어 지니까 아예 내가 바리바리 준비해 와서 다 꾸며 놓았지. ”

   “벌써 준비 끝났어요? 궁금하다. 저 먼저 구경해도 돼요? ”

   “안 될 거 없지. 그러자.”

   신영애는 매너 좋은 신사처럼 한쪽 팔을 벌렸고,송재희는 냉큼 팔짱을 끼 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분수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아기를 안

고 있는 태이경의 얼굴에 방실방실 웃음이 가득했다. 품 안의 남연주도 귀엽 고,이럴 때만 제 허벅지에 올라오는 친동생도 예뻐 죽겠고,곁에 딱붙어서 배를 깔고 앉아 있는 형아도 너무 좋은 얼굴이었다.

   매끄러운 은빛으로 물결치는 여은태의 꼬리가 허공을 툭툭 가르다 태이경 의 허리에 부드럽게 감겼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그림 같은풍경이었 다.

   “꼬맹이들. 어른들 없이 잘 놀 수 있지? ”

   신영애가 묻자 여은태는 별소릴 다 듣는다는 듯 쿵 하고 웃었다. 가서 볼 일 보라는 듯 턱짓하는 녀석 대신 태이경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나들도 재밌게 놀아요.”

   그녀들은 사이좋은 자매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태국영과 이승도의 모습은 테라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둘만 있기 참힘드네.”

   담담한 투정과 달리 머리칼을 얽는 손가락은 다정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팔을 벤 채 그의 빗장뼈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고 강인한 어깨를 지탱하는 뼈 두 개는 휘어진 곳 없이 일자에 가까웠고,티 없이 고운 피부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어찐지 잇자국을 내 보고 싶은 순간이다. 이승도는 갑작스 레 드는 충동에 무력하게 굴복하며 이를 세웠다.

   “우리 승도 이갈이하나.”

   태국영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떴다.

   “다른 데도 물어볼래? 벗어 줄까?”

   “자국을 내도 금방사라지니까 재미없어. 안 할래.”

   이승도는 실망한 듯 고개를 무르며 말을 이 었다.

   “그래도 벗어. 등이나 만지고 놀아야지. ”

   “등?”

   “응. 나네 등좋아하거든.”

   태국영은 멀뚱히 눈을 끔뻑이다 러닝셔츠를 벗어 던졌다. 굴곡이 또렷한 가 슴과 배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이승도는 그의 옆구리를 감싸듯 팔을 감아 그의 척추 근처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닿는 느낌은 여지 없이 단단하고 탄 력이 넘쳤다. 간지러운지 그의 가슴이 간헐적으로 툭툭 진동을 보였다.

   “서방님 좀 햇갈리는데,이거 지금 유혹하는 거야? ”

   태국영은 묻는 것과 동시에 이마에 입술을 붙여 왔다. 도톰하고 촉촉한 살 갗이 이마에서부터 콧잔등과 뺨,그리고 입술에까지 물처럼 흘러 다가왔다.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랫입술을 물어 올 때 이승도는 먼저 그의 윗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야.”

   미간을 찡그리며 엄살을 부리는 그의 얼굴을, 이승도는 이마로 숙숙 밀어냈 다.

   “당연히 아니거든. 손님들 있는데 어딜. ”

   “승도 나쁘네. 자기는 이렇게 막 만지면서 나는 아무 짓도못 하게 하고. ”

   그는 불평하면서도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승도는 그의 견갑골 아래 잔 근육을 하나하나 덧그리듯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와 고백하는 거지만,나 꽤 오래전부터 네 등을 좋아했었어. ”

   “특이한 취향이네. 이 얼굴을 놔두고 왜 등짝같은 거에. ”

   “글쎄. 아마 난 너를 마주 보면서 설레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에 거부감 이 있었던 것같아.”

   툭 던진 진심이 그의 입을 단숨에 틀어막았다.

   “난사실 네 몸중에 가장동물적인 곳이 네 등이라고 생각해. 네가 뒤돌아 서 고개를 꺾는다거나 팔을 휘두를 때 움직이는 근육들을 보면,금방이라도 어딘가 튀어 나가서 산짐승을 잡아올 것처럼 야성적인 느낌이 들거든. ”

   “그런데 난 아주 예전부터 그걸 보는 게 싫지 않았어. 네 속 알맹이가 실은

무자비한 맹수라는 걸 떠올리게 하는데도 말이야.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것이 특기인 태국영이 지금은 조용했다. 내려오는 시 선은 심 연처 럼 짙고 고요했다. 이승도는 그 잔잔한 호수에 가득 담긴 제 모습 을 빤히 응시했다.

   이 눈 안에 갇힌 세월이 벌써 스무 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까마득한 시 간 동안 태국영은 늘 이 렇게 이승도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이,가끔은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행 동했다. 이승도는 그것이 정교하게 굳혀 둔 가면임을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이승도는 잠시 갈등했다. 생각보다 더 굳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일렀나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도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 까지고 미뤄둘수 없었다. 내일이 아닌 오늘,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정 말 일상 이야기를 하듯이 차츰 다가가야 했다. 그의 오래된 경직을 풀어주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더 일찍 너에게 말했어야했어. 그게 나는,항상가슴이 아파. ”

   “바보 같은 소리야. 우리 사이에서 네가마음 아플 이유는 없어. ”

   “사랑해,태국영.”

   “더 일찍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

   그는 고개를 드는 것으로 시선을 피했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눌렀다. 이 승도는 순순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회피를 받아주었다. 첫술에 배부 를 수는 없는 법, 앞으로 시간은 무한히 많았다.

   열은 살 냄새가 머리를 몽롱하게 물들여 왔다. 맞닿은 가슴은 느리게 오르 내렸으나,전해져 오는 심장박동이 조금은 기분 좋게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국영아.”

   W ? ”

   ■?*.

   “우리 여행 가자.”

   “그래. 가.”

   “나물건너멀리가보고싶어. ”

   그 말에 태국영은 거리를 벌리며 다시금 눈을 맞춰왔다.

   “해외여행?”

   “왜? 안돼?”

   “안 될 건 없지만 해외 나갔다 오려면 최소 나흘은 걸릴 텐데. 그 기간 동 안 애들 안 봐도 괜찮겠어? ”

   태국영은 당연하다는 듯 반문했다. 여은태와 태이경은 물론, 태은경까지 조 심히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물어보려 했던 이승도는 속으로 조금 당 황했다. 완전 동상이몽이었다. 그는 단둘만의 오붓한 허니문을생각한 것 같 았다. 그 꿈을 깨고 싶지 않았던 이승도는 용케 일그러짐 없는 미소로 당혹감 을 감추었다.

   “은태랑 이경이는 알아서 잘 있겠지만 별이가 아직 아가라 좀 걸리긴 하네.

   돌봐줄 이는 차고 넘쳤으나 역시 녀석의 습성이 문제였다. 완벽에 가까운 우월인자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녀석은 아직 3개월을 갓 넘긴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사리분별도 못 하고 의사소통도 안 됐다. 부모의 긴 부재를 현명하 게 납득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럼 우리 한 5년 뒤로 미루자. ’라며 화제를 봉합하려고 했을 때였다.

   “재희더러 집에 와 있으라고 해 볼게. 다음 주에 종가 모임 다녀와서 가면 사 개월 차 들어설 거고,그 정도면 어미 고양이도 새끼들 슬슬 독립시킬 때 니 괜찮겠지.”

   …니 새끼가 고양이랑 같니.

   기막힌 타이밍의,저만 좋은 방향으로 분석해서 뽑아낸 대안이었다. 고양이 가새끼를 독립시키는 이유는 보통 영역과 먹이 문제 때문이다. 한정된 영역 과 먹이를 두고 새끼들과 경쟁할 수는 없으니 새끼들이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싶을 때 독립을 시 키는 것이 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이 환경에 그런 경우를 갖다 대는 건 정말 몰염치하기 그지없는 작태였다.

   항의할 말은 태산 같았지만 이승도는 몇 번 움찔거 리던 입을 그냥 다물고

말았다. 태국영은 나른히 눈을 깐 채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가 제안을 번복할 낌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끝내줬다. 눈 칫밥 먹여 가며 키운 게一사실 키워 주지도 않았지만- 저 자신이니 누구를 원망할 처지도 못 되었다.

   “일단 재희랑 얘기해 보고 정하자. ”

   이승도는 부디 송재희가 곤란하다고 거절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선 그것이 가장 탈 없는 마무리 였다.

   태국영은 상체를 일으켜 사이드테이블에 놓아둔 랩톱을 가져와 허벅지에 올렸다. 아직 결정 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대뜸 여행지를 검색해댔다. 익히 알고 있는 휴양지들이 차례로 검색창에 올랐다.

   이승도는 아끼던 물고기가 도마에 올라가는 모양을 지켜보듯 조마조마하 게 모니터를 주시했다. 그러다 태국영이 ‘유럽일X’까지 쓴순간 더는참지 못 했다. 이승도는상체를 일으키며 랩톱을 콱 닫아 버렸다.

   “장난해?”

   이승도는 미간에 힘을 주며 눈을 부리부리 떴다. 태국영은 힐긋 이승도를 살피더 니 능청맞게 허 벅지를 베고 누우며 눈웃음을 쳤다. 단단한 팔은 허리 에 감겨 옆구리를 은근히 쓰다듬어 왔다. 그가 말했다.

   “우리 승도랑 처음으로 여행갈 생각하니까들떠서 장난좀 쳐 봤어. ”

   태국영이 장난이란 말로 상황을 모면할 때의 99%는 진심이었다. 이번에 도 마찬가지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속눈썹 풍성한 눈시울이 시원하 게 휜 채 주렁주렁 교태를 달고 있는 걸 보자니,그게 뭐라고 참 더 할 말이 없었다. 지나치게 예쁜 얼굴이란 참 쓸모없다가도 이 럴 때만큼은 막강한 파워 를 자랑하는 법이 니까.

   “숙박은 어쩔래. 호텔,리조트,독채형 풀 빌라, 저택이나 별장 렌트,골라 봐.,,

   그가 갑자기 본격적으로 굴었다. 이승도는 무를 수 없는 상황임을 인정하 고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독채형 빌라가 좋겠어. 둘이서 먹고 자고 쉬고,같이 수영도 하면서 와인

도 마시고, 그게 재밌을 것 같아.

   “그래. 좋지. 오고갈 때는 뭐 타고 싶어? ”

   당연히 비행기지.

   국내 여행이 아닌 이상 당연한 거였다. 이승도는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태 국영은 픽 웃으며 이승도의 아랫입술을 살짝 잡아 당겼다. 그리고 웬 망나니 재벌 2세 같은 소리를 했다.

   “회사에 업무용 전용기 있어. 내가 좀 쓴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해. 편 하게 가고 싶으면 그거 타고 가. ”

   “그냥 비즈니스 좌석 정도면 충분해. ”

   “부담가질 필요 없어. 어차피 다 내 거고,내 거는 다 네 거고 그런 건데 뭐.

   아니. 미친 듯이 부담돼.

   이승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2주 전 태국영의 가족이 되었고 그의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이 집안에서 누리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래. 그럼 비즈니스 말고 퍼스트클래스 타자. 인간들 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거 별로야.”

   “알았어.”

   “휴대폰 줘 봐. ”

   이승도는 사이드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을 그에게 건넸다. 태국영은 전화 번호 하나를 저장해서 이승도에게 다시 건넸다.

   “현리 번호야. 개 취미가 케밥 먹으러 터키 가고,커리 먹으러 인도 가고, 베이글 먹겠다고 뉴욕 가는 거야. 아마 웬만한 미슐랭 쓰리스타는 거의 다 가 봤을걸. 휴양지에 맛집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으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전화해 서 물어봐.”

   “현리는다 잘 먹나보네.”

   “인간에 훨씬 더 가까우니까. 그래도 육식을 가장 선호하기는 해. 이경이

랑 비슷하지.

   그렇게 말한 뒤 태국영이 갑자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먼 곳으로 달려갔다.

   “여제운이 왔네. 내려갈까?”

   손님은 직접 맞아야 예의라고 생각하는 이승도는 당연히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여제운의 차는 대문을 지나 막 차도를 서행해 들어오는 중이었다. 송재 희는 정원 분수대에 남강우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남연주도 태은경도 함께였 다. 두 아기는한 덩어리처럼 엉켜 남강우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남강우혼 자 오면 대놓고 캬악거 리는 녀석이 참 대단한 태도 변화였다.

   그냥 맘 편히 다녀오는 것도 괜찮아 보이고…….

   하지만 저 혼자서 내릴 결정은 아니 었다. 이승도는 송재희를 손짓해 불렀 다. 그리고 여행 이야기를 꺼내며 그간 집에 머물러 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히 물었다. 송재희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별이가 오빠 심하게 찾으면 영상통화라도 걸어서 달래 줄게요. 그런데 어디로 가실 거예요? 유럽? 하와이? 몰디브?”

   “아,그렇게 먼 데 보다는 가까운 일본 쪽이 낫지 않을까……. ”

   이승도는 뒤를 돌아보며 말을 흐렸다. 어떻게든 여행 기간을 줄여보려는 노 력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태국영은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한쪽 빵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일본은 안 돼. 나 거기 애들이랑 사이 안 좋아. 가까운 데가 좋으면 차라 리 흥콩 쪽으로 생각해 봐. ”

   태국영이 누군가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국제적으 로 사이가 안 좋은 줄은 또 몰랐다. 이승도는 자연히 전말이 궁금해졌다. 그러 나 막 물어보려던 그때 여제운이 다가와 질문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어서오세요,제운 씨.”

   “또 뵙습니다.”

   “네. 반가워요. 오늘 멋지시네요.”

   여제운은 어리둥절하게 제 옷차림을 살폈다. 그냥 감색 슬랙스에 반팔 셔 츠,회사 밖에서 주로 입고 다니는 평상복 차림에 불과했다.

   이승도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검지로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제 머리에 손

을 가져갔던 여제운이 아,하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께서 신경 좀 쓰고 다니라며 직접 만져주셔서……. ”

   그답지 않게 어정껑한 말 맺음이었다. 그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멋을 낸 걸 들킨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왁스로 스타일링한 머리를 만 지지도 못하고 손을 떼지도 못하는 그가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제운 형아!”

   태이경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여제운은 멋쩍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 에 내심 반가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허리에 작은충격이 전해져 왔다. 아이가 두 팔을 허리에 감아 대롱대롱 매달려 온 것이었다.

   “형아,안녕! 반가워요.”

   “그래. 반갑다.”

   몇 번 봤다고 여제운은 그새 태이경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이 친근한 접촉, 반갑게 올려다보는 눈빛,상냥한 말투가 더는 당혹스럽지 않았다. 아이가 헤 햇 웃으며몸을 흔들었다. 여제운도 덩달아 흔들렸다.

   “형아. 우리 같이 프라모델 조립하러 갈래요? 영애 누나가은태 형아한테 선물해 준 건데 저쪽에서 같이 만들고 있거든요. ”

   여제운은 잠시 고민하다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 였다. 역시나 이승도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그편이 편할 듯싶었다. 와아,태이경이 기쁘게 폴짝폴짝 뛰며 앞장섰다. 여제운은 이승도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아이의 뒤를 따라 갔다.

   초대객은 조촐했다. 여제운,이원표,남강우와송재희,신영애 이렇게 딱 다 섯뿐이었다. 너 친한 이들도 다 초대하라고 질러놔서 내심 긴장하고 있던 이 승도는 맥이 조금 풀려버리고 말았다.

   넓은 홀 놔두고 굳이 룸을 선택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영애야. 혹시 국영이 왕따니.”

   이승도는 은밀하게 신영애의 귓가에 속삭여 물었다. 태국영은 남강우와 테

이블에 앉아 딱 한 병만 비우고 시작하자며 막 양주를 딴 참이었다. 신영애가 차갑게 진실을 말했다.

   “응. 재 왕따야. 완전 아무도 말 안 걸어. ”

   내 국영이가 왕따라니.

   이승도는 적잖이 충격 받았다. 재가 어디가 어때서, 가당찮은 원망은 합리 적인 뇌가 금방 흩어놓았다.

   재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제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군다고 해 서 태국영의 기본 구성 물질을 착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 었다. 이승도는 신영 애와 눈을 맞춘 채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 렸다.

   그래,왕따 당하고도 남을 성격이긴 했다.

   귀 밝은 태국영이 찡그린 눈으로 노려봐 왔다. 곁눈으로 그것을 발견한 신 영애는 코웃음을 치며 함께 눈을 부라려 주었다.

   뭐. 네가 노려보면 어쩔건데.

   “저 성질머리에 그나마 저만큼이라도 친구가 있는 게 기적이지. 강우 오빠 는 원래 투견,미친개, 남베로스,뭐 이딴 걸로 불렸거든? 워낙 줘 팬 애가 많 아서 처맞은 애들이 닥닥 이를 갈았단 말이야. 그런데 태국영이랑 절친 먹고 별명이 뭐로 바뀐 줄 알아? ”

   “뭐로 바뀌었는데?”

   “남보살.”

   와하하하하하하! 남보살이 래 !

   신영애는 목젖이 다 보일 만큼 파안대소했다. 다시 생각해도 저 남강우가 보살 소리를 듣다니 세상이 멸망해도 이상치 않았다. 미친놈들끼리라 역시 통 하는 게 있나 보군,하고 생각했던 저와 달리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 모양 이었다.

   “아나잠깐만눈물좀닦고.”

   한참을 웃어젖힌 신영 애는 클러치 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톡톡 눌러 닦

았다. 이승도는 애매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국영이도별명 같은거 있어?”

   “아니. 재는그 자체로 그냥 재앙 덩어리라 별명도 안붙어. 그냥 ‘이 태국 영 같은 놈아. ’ 같은 신종 쌍욕이 생기는 정도지. ”

   “아,혹시 내가 너무솔직했어?”

“아냐. 어차피 예상은 했지만 진짜 그렇다니까 그냥 조금 착잡하달까. ” 이승도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때 귀신처럼 싸늘한 미풍이 흑 불어왔다.

   “다 들리거든?”

   이승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태국영이 테이블로 돌아가 막 앉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번개같이 빠른 몸놀림이었다.

   “남의 얘기 엿들어 놓고 뭐가 저리 당당하고 난리람. ”

   신영애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두려 울 것 없이 도도한 태도였다. 이승도는 그런 그녀가 조금은 신기했다.

   “넌 국영이가무섭지 않아?”

   신영애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재 영역을 흠집 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면 태국영은 사 실 물보다 만만해. 다들 그걸 알면서도 벌벌 떠는 게 더 웃기지. ‘아이 씨팔 나 중에 싸우게 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 하면서 지레 경계하고 누르려고 하는 거,나팔 소리에도 전쟁 터졌나 깜짝깜짝 놀라는 거랑 똑같아. 심지어 재는 나 팔도 안 분다구. 그냥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다들 대놓고 왕따 시키는데도 그냥가만히 자리 지키다가 어느순간사라져 버리거든. 근데 괜히 가만히 있 는 애를 건드리 니까 재가 자꾸 돌잖아. 그것도 단둘이 있으면 아무 말 못 할 것들이 꼭 그래. 치졸하고 멍청한 종자들 같으니. ”

   신영애가 생각하기 에,짙은 피를 타고나는 이들이 그렇듯 태국영 또한 기본 적으로 광기를 타고났다고 본다. 폭발하듯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정적처럼 고요한 성질이다. 태국영은 그 광기를 억누르고 사는 법을 몸에 익히고 있을 뿐이다.

   여자들은 그걸 안다. 본인이 표적이 될 확률이 0에 수렴하기에 먼 곳에서 지켜보듯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근본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

워하지 않는다. 그 강인함에 뜨겁게 이끌리면 몰라도.

   “아,뭐야. 근데 나 지금 재 실드 쳐 준거야? ”

   속사포처럼 쏟아내 놓고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신영애는 고운 미간을 쟁 그렸다. 이거 완전 신영애 캐붕인데,하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그녀가 이 승도는 괜히 마음에 들었다. 거만하고 도도한 것은 태국영과 비슷한데 붙임성 도 좋으니 금방 정이 갔다.

   이승도는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한 것을 하나 더 물어보기로 했다. 솔직한 그 녀는 알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 사실대로 말해줄 것 같아서 였다.

   “근데 영애야. 혹시 국영이가 일본쪽이랑사이가 안좋다던데, 그 이유는 뭔지 알아?”

   “아하. 그거.”

   신영애는 단박에 알아들었지만 딱히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워낙 소문만 무성했지 진실을 아는 자가 없어. 태국영 때문 에 다들 일본 가기 애매해지면서 그냥 대강 추측들만 할뿐이지. ”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

   이승도의 그림자가 살짝 흔들리며 낮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왔다. 신영 애는움찔 뒤로 물러서서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건? 언제부터 뒤를 밟은 거야? ”

   “뒤를 밟……

   태성문은 낙담으로 말끝을 흐리다 정신을 차렸다.

   “저는 이승도 님의 특별 퍼스트 가드입니다. ”

   “뭐가 됐건 기척 좀 흘리고 다녀. 깜짝 놀랐잖아. ”

   “기척을흘리고 다니면 가드 실격입니다만. 놀라게 해드렸다면 그건 미안 합니다.”

   “…얘는 말투가 왜 이래?”

   태성문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 개성 하나 정도는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신영애는 얘 뭐냐는 듯이 이승도를 바라보았다. 별 희한한 걸 다 본다는 눈 빛이었다. 이승도는 애매하게 웃음만흘렸다. 원래 좀 독특한구석이 있노라 고 본인 앞에서 말하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말을 돌리기로 했다.

   “성문 씨,그래서 그게 어떻게 된 일인데요? ”

   태성문은슬쩍 태국영의 눈치를살폈다. 분명 제 목소리를 아무지게 흠쳐갔 을 것이 분명한 태국영은 이쪽을 보지 않고 있는상태였다.

   태성문은 태국영을 잘 알았다. 편안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암묵 적 허락을 의미했다. 이승도랑 말을 섞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던 태성문 은 맘 놓고 이야기를 풀기로 했다.

   “일본에도 와타나베 가라고,제약을 가업으로 하는 가문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가문과는 상당히 격차가 납니다. 개들은 슈퍼문도 없고 사업도 크게 확 장하지 못해서 근근이 벌어 먹고사는 수준이거든요. 일본의 유명 제약회사들 은 다 인간들 겁니다. ”

   태 가의 사업이 크게 번창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슈퍼문 덕분이 었다. 슈퍼 문은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국내를 휩쓸었 고,등대 기근이 서서히 시작되면서부터는 타국에서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심지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등대들이 씨가 마른상태였으니 생필품 보다 먼저 챙겨야 할 백신이 되었다. 슈퍼문은 일족의 세계에 한 획을 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태일에서 산업스파이가 적발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좀 전에 말했던 와타나베 쪽에서 심어놓은 거였지요. 그런데 참 운명처럼 하필 그때 우리 가주님이 호연 형님 보러 회사에 들르셨지 뭡니까. 고작 해 봐야 일 년에 한두 번 오시는분인데 딱 걸리다니,운도 참 더럽게 없 지요.”

   “그래서? 태국영이 줘 됐어?”

   신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성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산업스파이가 인간이라 딱밤 한 대라도 잘못 때렸다가는 바로

저 세상 갈 처지라 패지는 못하셨고, 자백은 받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또 그 와 타나베 애들도 참 운이 없지요. 그날 우리 가주님은 매우,아주 심각하게 심기 가 불편하신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됐겠습니까? ”

   “당장 날아가서 족쳐야지.”

   “영애 양이 뭘 좀 아시는군요. 네,미국이나 유럽 정도였으면 멀어서 귀찮 다고 안 가셨을 텐데 하필 엎어지면 코 닿을 일본이라니. 입국 신청서 보내자 마자 그대로 전용기 타고 날아가셨습니 다. 아시다시 피 우리 가주님 회사에 관 심 노노,망하지만 말고 자기 배당금만 꼬박꼬박 챙겨 주면 상관없는 분이신 데 화풀이 상대 제대로 건진 거지요. 제가추측하기로 아마 그때 이승도 님이 또 냉랭하게 구셨지 않을까 싶습니다. ”

   태국영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대부분 이승도였 다. 이승도가 착하게 대하면 태국영은 온화해졌고, 이승도가 못되게 대하면 태국영은 난폭해졌다.

   그래서 태 가의 어린양들 사이에서는 성년식 전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풍습이 있었다. 제발 이승도 님께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우리 가주님 상 냥하게 대해 주시라고.

   당시 이승도와 태국영 사이는 냉각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도가 통 한 자들은 매우 드물었다. 슬프게도 태성문 역시 기도에 실패해서 저승 문을 수도 없이 찍고 돌아온 쪽이 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핵심 인물 몇이 뒤지고 몇몇은 아주 작살이 났는데,그 와중에 일본 쪽 종가가 개입하면서 문제가 커졌습니다. 지네 나와바리니까 뭐 그쪽도 나름 명분은 있는 셈이었죠. 하지만 그들이라고 뭔 뾰족한 수가 있 겠습니까. 우리나 개네나 종가 힘 약해진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요. 반면 우 리 가주님은 어떠십니까.”

   “짱 세지.”

   “그렇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태어난몸이십니다. 싸움짱

잘합니다. 개들이 상대가 될 리 없습니다. 오호,통제라. 이 뒤는 대략 예상 가 능하시겠지요?”

   태성문은 구연에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어찌나 맛깔스럽게 당시 상황을 묘 사해 주는지 이승도와 신영애는 물론,어느새 송재희까지 다가와 잔뜩 집중해 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두 남자와 술잔에 관심 없는 두 남 자의 시선까지 태성문이 독차지했다.

   “예상 가능하지만 계속해봐. 그래서 뭐. 어떻게 됐는데.”

   신영애가 재촉하고 이승도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팍팍 끄덕였다. 태성문 의 말대로 상황이 어느 정도 그려지긴 하지만 역시나 생생하게 전해 듣고 싶 었다. 태성문은 기대에 부흥했다.

   “우리 가주님이 그래도 머리가 막 비지는 않아서 그쪽종가사상자는 없었 습니다. 그냥 좀 많이 맞았을 뿐이죠. 그런데 종가라는 집단이 동서고금 막론 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우리 쪽 종가에서 발 빠르게 개입해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거의 국가 간 전쟁 날 뻔 했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종가 능력 있네. 그 짧은 시간에 알아채고 중재까지 하다니. ”

   신영애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태성문은 검지를세워 좌우로 흔들며 고개 도함께 흔들었다.

   “노노. 우리 가주님 종가특별 감시 대상입니다. 당연히 미행 붙었습니다. 아마 가주님 출국 소식 듣자마자 여 종주님이 전용기 태워 보내셨던 것 같습 니다.”

   “하긴. 그림자 집단이 태국영을 놓칠 리가 없지. ”

   “네. 가주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밖에 나다니면 최소 네다섯이 거머리처 럼 붙어 다니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

   “어쨌든 그럼 태국영은 일본 입국 금지야? ”

   “당연히 강제로 못 오게 하지는못합니다. 가주님 입장에서는 가문의 우두 머리로서 응당한 처벌을 한 것뿐이니까요. 하지만 뭐, 그쪽 사정이야구구절 절 지저분할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 일 이후 로 우리 태 가는 물론 다른 가문들까지 일본에 가야 될 때는 꼭 떼거리로 움 직입니다. 언제 시비가붙어서 개싸움 벌여야될지 모르니 준비해 둬야 되거

든요. 한마디로 하루 만에 철천지원수 됐다 이겁니다. 다른 놈들도 그런데 우 리 가주님 본인은 어떻겠습니까. 못 가는 건 아니지만 안 가는 게 서로를 위 해 좋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 종가는 각 가문에 일본 입국 시 특별히 주의 를 요한다고 공문을 보냈었다. 사유는 일본 종가와 태국영 의 마찰이 라고 짧 게 축약되어 있었다. 모두가 ‘이 새끼가 또. ’ 하면서도 무리 없이 납득했다. 그 것 때문에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었다.

   “더 궁금하신 것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

   태성문은 보람 찬 시간이 었다며 손등으로 이마를 쓸더니 그대로 다시 모습 을 감추었다. 신영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겁나 특이하면서 재밌는 놈 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캐릭터였다.

   “이 자식 맘에 드네. 야,너 몇 살이냐? ”

   “얼마 전에만 스물 됐습니다.”

   “누님이라고 불러.”

   “싫습니다.”

   신영애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아니 이런 건방진. 왜?”

   “영애 양은 제 누이가 아니잖습니까. ”

   “얘는 뭐 이상한 데에서 이렇게 꽉 막혀 있어? 야,다들 그러고 살아. 자기 보다 나이 많은 여자는 누나라고 부른다고.

   “전 개성을 중요시해서 남들도 다 어쩌고 그런 말은 신경 안씁니다. 그러 니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야 너 할래? ”

   “영애 양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

   “아- 뒷목!”

   신영애는 그림자에다 대고 삿대질을 하며 더 시비를 걸었지만 태성문은 바 위처럼 꿈쩍도 안하며 소신을굽히지 않았다.

[엄마_?>.]

   이승도는 말싸움을 구경하다 고개를 내 렸다. 남연주와 낮잠을 재워 두었던 태은경이 잠에서 깼는지 파티 룸으로 내려와 있었다. 바짓단에 대롱대롱 매달

려 있는 아기를 훌쩍 들어 안았다.

   “우리 별이 깼어? 코 잘잤어?”

   [코오.]

   “배고프지? 맘마 줄게. 잠깐만.”

   [맘마.]

   이승도는 벨을 울려 유모에게 아기 식사를 부탁했다. 그때까지도 신영애와 태성문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한참 더 할 분위기 였다. 이승도는 아기를 안 고서 송재희와함께 태국영이 앉은 테이블로 갔다. 태국영이 제 옆의 빈 의자 를 빼 주었다.

   “옛날얘기 재밌게 들었어?”

   “응. 사고 참 크게도 쳤더라. 지난 일이니 맘 편히 들었지, 지금 벌어진 일 이었으면 어지간히 가슴졸였을 거야. ”

   태국영은 대꾸 없이 웃음만 흘렸다. 의자에 앉은 이승도가 혀를 차며 핀잔 했다.

   “빈말이라도 그럴 일 없을 거라고좀 해 봐. ”

   “나 빈말 싫어해. 그래도 사고는 작게 치도록 노력은 해 볼게. ”

   참 장하다. 이승도는 실소만 짧게 내뱉고 말았다. 지금은 제가 냉랭하게 그 를 대할 일도 없고, 누군가 그의 영역을 흠집 낼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큰 걱 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두분도 술 드시네요.”

   무알코올 음료를 마시고 있던 이원표와 여제운의 손에도 어느새 양주잔이 들려 있었다. 이원표는 픽 웃으며 잔을 흔들어 보였다.

   “안 죽는다고 한잔하라고 닦달하는 둘의 등쌀이 말도 못합니 다. 승도 씨도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럼 맥주로 할게요. 독한 술은 안 좋아해서요. ”

   “그래요.”

   이원표가 직접 냉장고로 가 맥주병을 꺼내 왔다. 뚜껑은 맨손으로 툭 따냈 다. 이제 저런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는 잔에 술을 가득 채워 건네며 이승

도에게 안긴 태은경을 바라보았다.

   “아기가 발육이 좋군요.”

   “그죠? 잘 먹고 잘 자고 잘 뛰어놀아요. ”

   이승도는 흐뭇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막 시선을 내렸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가문의 남자들을 유독 경계하던 아기가 웬일로 조용했던 것이다.

   녀석은 이원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정된 눈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적의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별이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싶어? ”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고 있던 태국영이 지나가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목소리 기억나?”

   태은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목소리?’ 녀석이 되물었다. 태국영은 느슨하 게 웃었다.

   “네 엄마한테 피 나눠주라고 말해준 게 저 아저씨야. ”

   [목소리.]

   “네 오빠랑 저 아저씨가 너도 살리고 네 엄마도 살렸어. ”

   […목소리!]

   녀석이 갑자기 풀쩍 뛰어 테이블에 올라섰다. 아기는 이원표를 다시금 빤 히 올려다보았다. 자그마한 몸을 단단히 받쳐주는 네 다리가 앙증맞게 귀여우 면서도 한없이 아무졌다. 이원표는 얼굴을 뚫을 듯 와 박히는 시선을 담담히 마주 보며 태국영에게 말했다.

   “인지능력이 좋군. 아직 태중 기억을 깨울 수 있는 시기가 아닐 텐데. ”

   “뭐,빠른 게 그뿐이겠어. ”

   “무슨 말이야? 별이가 원표 씨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

   이승도가 놀라서 묻자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 였다.

   “아마 태중 기억을 다 깨운 건 아닐 거야. 그때 애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 에서 제 능력 이상으로 집중을 했기 때문이겠지. ”

   송재희가 남강우에게 ‘세상에,완전 감동이에요. 그래도 은인이라고 기억하 고 있나 봐요. "하고 속닥거 렸다. 남강우는 그런 종류의 성질이 아님을 알고 있 었으나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 기 에 그냥 고개를 끄덕 여 주었다.

   “와. 우리 별이가아저씨 기억하는구나. 인사해. 아저씨, 안녕.”

   [앗녕.]

   세상에. 인사도 했어.

   태은경은 앞발 하나를 들어 열심히 흔들어댔다. 녀석이 이토록 열심히 반가 워해준 것은 이제껏 남연주밖에 없었다. 이원표는 이승도의 놀라움에 동화되 지 않고 차분하게 인사했다.

   “그래.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앗녕. 아저씨, 앗녕.]

   태은경은 흥분한 듯 앞발을 들었다 내 렸다 반복했다. 그 모1法을 신중하게 지켜보던 이승도는 작은 목소리로 이원표에게 말했다.

   “안아주시겠어요?”

   이원표는 선뜻 아기를 들어 품으로 가져왔다. 태은경은 반항하지 않고 얌전 히 안겼다. 느리게 움직이는 꼬리가 간헐적으로 이원표의 팔뚝을 탁탁 쳐댔 다. 기분이 매우 좋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구석에 처박혀서 프라모델 조립 막바지에 이르러 있던 여은태와 태이경도 어느새 곁으로 와 그 놀라운 광경 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세상에……!”

   막 아기 먹일 고기를 다져온 유모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여은태는 유모가 놓친 그릇을 재빨리 받아 사수했고,태이경은 그녀의 등을 ‘엇차’ 하며 받쳐주었다. 환상의 콤비네이션이었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나만 빼고 다 좋아해……! ”

   유모는 땅을 치며 곡을 했다. 태이경이 ‘별이는 나도 막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유모/하고 위로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물론 조금도 위로

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파티는 내내 신영애가 주도했다. 그리고 그녀의 열렬한 신봉자인 송재희도 덩달아 많이 떠들었다. 술을 처음 마신다는 송재희는 맥주를 야금야금 홀짝이 다가 양주에도 손을 뻗었다. 얼핏 본 것만 넉 잔을 들이켰는데 눈빛도 말투도 멀껑했다. 의외로 술이 센 체질인 듯했다.

   가장 말이 없는 것은 여제운이 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분위기 를 즐기는 것으로 허비했다. 태이경이 곁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말을 걸지 않 았더라면 아마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신영애가 그런 그를 가리 켜 ‘원래 사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 그런 쪽으로는 태국영보다 더한놈. ’이라고 혀를찼다. 여제운은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야. 그림자. 너도 나와서 한잔해. ”

   “저는 자학하는 취미 없습니다,영애 양. ”

   “너 지금 니네 가주더러 자학하는 취미 가졌다고흉보는 거니? ”

   잠시 조용하던 태성문은 훌륭한 임기응변을 보였다.

   “우리 가주님께선 본디 신실하신 분입니다. 다만 친구를 잘못 사귀신 것뿐.

   애먼 화살 맞은 남강우가 ‘지랄. "하고 실소했다. 태국영은 만족스럽게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얘만 아니었으면 술 입에 댈 일이 없었겠지. ”

   “나도 너만 아니었으면 담배 피울 일 없었다. ”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둘이 똑같아요. ”

   “와, 재희 자기 서방 편드는 것 좀 봐. 우리 승도는 뭐 없어? ”

   조출한 파티였지만 분위기는 이렇게 내내 화기애애했다. 나름 케이크 커팅 을 하고 촛불 장식도 깔아 두고서 브루스타임도 가졌다. 신영애는 술을 하지 않았지만술자리 게임에는 통달해 있었고,게임을 하며 왁자지껄 웃으며 놀기

도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들에 녹은 이들의 얼굴은 모두 근심 없이 즐거 움이 가득했다.

   취기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올라왔을 때 이승도는 술잔을 놓았다. 태국영 과 남강우는 폭음 대잔치를 하고 있었다. 후끈 달아오른 몸을 이기지 못하고 둘 다 윗옷을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10시가 넘은 시각 여은태와 태이경은 졸음을 못 이기고 위층으로 사라졌 다. 갓난아기 둘도 한 요람에서 새근새근 꿈나라를 유영했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손님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승도 는 그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배웅을 했다.

   파티가 끝난 저택은 고요에 잠겨 들었다. 이승도는 여은태와 태이경을 찾아 가굿나잇 키스를 해준 뒤,침대 방과붙어 있는 태은경의 방에도 들렀다. 오 늘 내내 유독 들떠 있던 아기도 마찬가지로 깊이 잠이 든상태였다.

   “좋은 꿈꿔.”

   이승도가 아기의 정수리에 조심히 입술을 붙였다. 아기가 잠결에도 앞발을 죔죔 하며 고롱고롱 목을 울렸다. 이승도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와 태 국영 의 허 리를 팔로 감아 당겼다.

   “국영아. 우리 자쿠지에서 와인 한잔 더 할까. ”

   태국영이 고개를 느리게 기곳거리더니 허리를숙였다. 이마에 닿는 그의 뺨 은 뜨겁고 매끈했다. 이승도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나안 취했어.”

   “긴가민가.”

   “정말 괜찮아. 그냥 잠들기 아까워서 그래. ”

   “섭섭하네. 이 서방님한테 기회만준다면 아깝지 않은 밤을 선물해 줄수 있는데.”

   태국영이 얼굴이 내려왔다. 뻠을 비빈 그의 얼굴이 목에 묻혔다. 이승도는 그의 머리카락에 깊숙이 손가락을 얽었다.

   “밤은 길단다,얘야.”

   태국영이 하, 짧게 웃었다.

   “승도 미쳤나봐.”

   연거푸 실소한 그는 유쾌한 표정으로 가까이에 있는 인터폰을 들었다.

   “유모. 실내 풀장에 물 채워 놨던가? ……어. 오늘? 그래. 잘됐네. 승도랑 좀 놀려고. 자쿠지에도 따뜻한 물 좀 가득 받아 놔. 와인 두어 병하고. …촛불 은 무슨. -아니다. 그냥 무드등 같은 건 몇 개 둬도 좋겠어. …그래. 샤워하 고 들어갈 거니까한 십 분에서 이십 분 정도. 응.”

   통화가 끝나고 둘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둘의 침대 방과 실내 풀장 중간 쯤에 자리한 욕실이 었다. 장난치듯 서로의 몸에 거품을 늘려가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중간에 몇 번은 뜨겁게 얽혀들기도 했다.

   등에 닿는 타일이 미끄러워 자꾸만 몸이 휘청거렸다. 어느새 이승도는 태국 영과 벽 사이에 끼어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둡게 일렁이는 눈빛에 뺨이 경 련했다.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승도는 오늘을 더 길게 쓰고 싶었다.

   “약속. 딱 한 시간 정도만 더 놀고. ”

   새끼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찔렀다. 태국영은 쯧 혀를 차며 잠시 고개를 떨 어뜨렸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그의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 채 느리게 오르내렸 다.

   몇 초의 시간이 그렇게 흘려보낸 뒤 그는 몸을 바로 했다. 그의 허벅지에 어정껑하게 걸터앉아 있던 이승도도 온전히 제 발로 땅을 디뎠다. 그의 새끼 손가락이 이승도의 아랫입술을 크게 훑고 떨어져 나갔다.

   그가 샤워기 레버를 돌렸다. 노즐이 고정되어 있는 천장에서 따뜻한 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넓은 샤워부스 안으로 순식간에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둘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벌거벗은 채 빗속에서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젖은 얼굴에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

   “약속 안 지키면 나 가출할 거야. ”

   “그래.”

   애다. 완전 애가 따로 없어.

   이승도는 혀를 차면서도 손을 뻗었다.

   “가만있어 봐,내가 뽀독뽀독 깨끗이 씻어줄 테니까. ”

   “소꿈놀이하는 것 같네. 착하게 있을게. 맘대로 갖고 놀아. ”

   태국영은 기꺼이 두 팔을 벌렸다. 이승도는 수압을 낮게 조정했다. 약해진 물줄기가 굴곡 또렷한 그의 몸을 쉼 없이 핥아 내렸다. 심혈을 다한 조각상처 럼 흠 없이 완벽한 몸이 니스를 칠한 듯 번들거렸다.

   이승도는 클렌저 거품을 잔뜩 낸 퍼프로 그의 몸을 닦아준 뒤 그의 머리카 락 깊이 두 손을 묻었다. 부드럽게 두피를 문지르자 태국영은 나른함에 푹 젖 어 눈을 감았다.

   기분좋은손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눈썹,콧날, 뺨과 입술이 차 례로 점령당했다. 어린애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럽지만,한편으로는 열 은 독점욕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강철 같은 갑옷도 순식간에 벗겨내는 부드 러움이 었다.

   태국영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은 달콤하게 젖어 있 었다. 입술을 눌러 오는 손끝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국영은 한없이 약 한 정복자의 손끝에 순종적으로 입을 맞췄다.

   입맞춤에서 멈춘 것은 아니 었다. 태국영은 구애에 능했다. 스치듯 다가온 기회를 물줄기와 함께 배수구에 흘려보내는 남자가 아니 었다.

   그는 떠나려는 손끝을 이로 물었다. 움찔,짧은 경련이 혀끝으로 흘러들어 왔다. 젖은 눈에 당혹감이 너울거 렸다. 태국영은 잇새에 가둔 손가락을 혀로 문질렀다.

   이승도는 눈을 내 리깔았다. 빛이 번진 뺨에 흥조가 번졌다. 붉은 것은 작게 할딱이는 입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스럼없이 흥분을 드러내는 그 붉은 징조 들을 바라보며 태국영은 새삼 실감했다.

   정말로,이제야,완전히 제 품에 안은 것 같다고.

   “안되는데……

   이승도는 망설이듯 중얼거렸다. 뭐가. 태국영은 태연하게 물으며 이승도의 허리를 끌어왔다. 이승도는 번득 고개를 들더니 다시 묘하게 눈을 피했다.

   “지금 하면 바로 잠들 것 같단 말이야. ”

   “자면 되지.”

   “그럼 오늘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질 것 같아. 아깝게.”

   이승도는 마치 단꿈에서 깨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정도로 좋았 나,태국영은 선선히 물러났다. 그에게는 시끌벅적하고 유쾌했던 파티보다 단 둘이 마주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 귀했지만,그 속내를 굳이 내보이지 않기로 했다.

   “새 친구들생겨서 신나?”

   태국영이 물었다. 그러자 어정껑하게 피하고 있던 시선이 또렷하게 돌아왔 다. 이승도는 열렬히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팍팍, 세게 끄덕였다.

   “어. 나 완전 신나. 형이라고 부를수 있는사람 처음 가져 보거든. 나중에 원표 씨랑 더 친해지면 형이라고 불러야지. ”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언젠가는 꼭 친근하게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국영아. 우리 팝콘 기계 하나사서 시어터 룸에 두자. 재희랑 영애가 팝콘 을 좋아한대. 둘이 영화관 가면 둘 다 큰 거 한 통씩 사서 다 먹는다더라. 다 음 주에 같이 영화 보기로 했으니까 그 전에 사두자. ”

   “그래. 사.”

   “시어터 룸 다시 꾸밀까? 생각해 보니까 넓기만 하고 되게 삭막한 것 같은 데.,,

   신영애는 자비 없고 앙칼진 면모가 있지만 은근히 로맨티스트 기질이 있 는 여자였다. 이승도는 그런 신영애를 염두에 두고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 였다.

   “유모가로맨틱하게 인테리어 하는 데 소질 있어. 내가 싫어해서 안 할뿐 이지. 내일 유모한테 말해 봐. 아마 하루도 안 돼서 동화처럼 예쁘게 꾸며 놓 을 거야.”

   신혼방도 웬 꽃 대잔치하려는 걸 겨우 만류했었다. 이승도는 그거 잘 됐다 며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레버를완전히 돌려놓았다. 물이 그 치고 정적이 찾아왔다. 거품은 모조리 씻겨나간 지 오래였다.

   태국영은 농담처럼 가볍게 물었다.

   “나도네 형 해줄까,승도야?”

   “웃겨. 완전어린 주제에.”

   이승도는 웃으며 주먹으로 태국영의 가슴을 퍽 쳤다. 태국영은 아야 엄살 을 피우면서 이승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승도야. 동물원 하나 차려서 너 줄까? ”

   태국영은 또 망나니 재벌 2세 같은 소리를 해댔다.

   “너 좋아하는 동물들 잔뜩 데려다 놓고, 너 좋아하는 사람들도 잔뜩 고용하 고,재밌을 것 같지 않아? ”

   “됐어. 난 애들을 가둬 두고 싶은 게 아니라 갇혀 있는 애들이라도 잘 보살 펴주고 싶은 것뿐이 니까. ”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아니면 복직할래? 너 원래 있던 동물원에서 지금도 다시 와줄 수 있냐고 종종 전화 오잖아. ”

   태국영은 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품에 안긴 이승도도 떠밀리듯 뒤뚱 뒤뚱 걸었다.

   “음…… 약간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그것도 패스. 별이 두 살 정도까지는 계속 곁에서 크는 거 보고 싶어. 아기한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기고, 또 다시 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니까. ”

   이승도는 요즘 갓난아기를 보며 종종,그 소중한 시간들을 통째로 잃어버 린 지난날을 후회하곤 했다. 그저 품에 안기고 싶어 했던 어린아이를 뭐가 그 리 두려워서 피하고 또 피했을까.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제가 자초한 상실이 그저 뼈아플 뿐이 었다.

   “이경이 잘 키워줘서 고마워. ”

   “내가 키웠나. 유모가 키웠지. ”

   “그래도 네가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아이가 지금 처럼 그늘 없이 크지는못했을 거야. 내 빈자리는유모가 채워줄수 있을지 몰 라도 네 빈자리는 누구도 채우지 못해.

   태국영 자신은 그저 아이가 필요로 하는 곳에 있어주었을 뿐이 었다. 다정

한 말 한마디 해준 기억이 없었다. 아이가 그런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인간 아이처럼 책을 읽어달라거나 안아달라고 보챘다면 귀찮고 어색해도 어쨌든 해 주었을 테지만 아이는 일정 거리 이상 감정적으로 부대끼려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친절한 아버지는 필요 없다. 제 영역을 안전하게 지켜줄 우두머리 가필요할뿐이다.

   뭐,요즘은 제가 만만해졌는지 절 놀이 상대로도 종종 이용하곤 하지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무는 다했지. ”

   칭찬에 멋쩍어진 태국영이 그냥 그렇게 무마해 버리며 욕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승도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태국영은 시선을 내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끈끈하고 질척거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살 짝 웃으며 물었다.

   “나 지금 고맙게도 잡아먹힐 시간이야? ”

   이승도는 윙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다짜고짜 입을 맞췄 다. 갑자기 웬 변심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태국영은 굳이 그 이유를 물을 생각 은 없었다. 그런 사소한 걸로 분위기를 쩔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태국영은 곧장 입을 열었다. 말랑말랑한 혀가 그 안으로 다급히 치고 들어 왔다. 태국영은 머리를 기울여 결합을 더 깊이 했다.

   이승도는 눈을 감았다. 젖은 살과 점막이 거칠게 비벼지고 있었다. 타액은 머리가 혼미해질 정도로 달았다. 금방 뱃가죽이 떨려 왔다. 단전에서부터 급 격히 끓어오른 열기가 정수리까지 다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태국영이 이승도의 허벅지 한쪽을 팔에 끼워 올렸다. 훤하게 벌어진 가랑이 로 그의 하복부가 피부를 뭉그러뜨릴 듯이 짓눌러 왔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 기가 둔부 사이를 비벼 왔다. 하복부 근육들의 꿈틀거림까지 지나치게 자극적 이었다. 까치발 하나로 겨우 버티고 있던 이승도는 목울음을 흘리며 무너지 고말았다.

   태국영은 주저앉으려는 이승도를 재빨리 받아 훌쩍 안아 올렸다. 훤히 벌

린 사타구니 가 그의 단단한 복근 위에 놓였다.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 상태로 태국영과 타일 사이에 끼어 불안정한 자세가 분명한데 의외로 안정 감이 있었다.

   그의 입술이 턱 끝에 맺혀 왔다. 이승도는 고개를 저으며 헐떡였다.

   “치,침대로……

   그가 귓불을 깨물었다. 그 상태로 속삭였다.

   “여기도 괜찮잖아. 이대로 서서 박아줄게. 꽉 껴서 기분 좋을 거야. ”

   낮게 갈라진 음성은 습한 공기와 섞여 더욱 음탕하게 들렸다. 이승도는 어 깨를 멸며 진저 리를 쳤다. 태국영은 소름 돋은 어깨에 입술을 문대며 손가락 을 움직였다. 꼬리뼈를 더듬고 구멍을 찾자마자 여유롭게 찔러 왔다.

   “미끄럽고 축축해.”

   이승도는 부둥켜안은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태국영의 숨결이 거칠어 졌다. 엉덩이가 더 벌어지며 손가락하나가 더 들어왔다.

   “맘껏 할퀴어 봐,승도야.”

   짧게 깎은 손톱이 그의 어깨에 붉은 자국을 그렸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는 그의 상완근이 만족스럽게 꿈틀댔다. 그러나 그 자국은 허공에 숨결이 녹아드는 것보다 빠르게 사라질 뿐이 었다.

   이승도는 금세 매끈하게 변한 그의 어깨를 물었다. 이를 세우려다 입술을 벌려 덮고 혀로 문질렀다. 반쯤 발기한 채 둔부 사이에 묻혀 있던 그의 성기 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아,그의 목 안에서 관능적 인 탄식이 울렸다. 이승도는 느리게 엉덩 이를 흔 들며 그의 뺨에 제 뺨을 눌렀다. 맞닿은 피부의 열기는 한 사람의 것처 럼 같 은 온도로 펄펄 끓었다.

   “왜 참아.”

   이 번에는 이승도가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엉덩이 벌리고 기다리는데. ”

   짤막한욕설이 귓가에 번졌다. 점막을 벌리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구멍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 더 뜨겁고 굵은 것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옷,이승도는 빠듯한 압박감에 숨을 멈추었다. 몸이 멋대로 굳어 들었다. 온 몸으로 경직을 느끼고 있을 그였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점막이 한계까지 벌어 지며 그를 꾸역꾸역 삼켰다.

   “호기롭게 교태 부려 놓고 숫총각처럼 왜 이렇게 못 받아먹어. ”

   태국영은 놀리듯 중얼거렸다. 이승도는 빨갛게 달아 오는 눈꼬리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목까지 넘어온 불만이 그대로 증발했다.

   짓궂은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그늘진 눈이 땀 젖은 피 부처럼 번들거 렸다. 사나운 충동을 이겨내는 짐승의 눈알을 하고서,그는 다 정함을 가장해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 왔다. 나긋한 리듬이었으나 여린 살갗 은 금세 발갛게 부풀었다.

   “흔들고 싶어.”

   애처럼 조르는 말이지만 선득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승도는 꽉 막혀 있 던 숨을 조금씩 쪼개서 천천히 뱉어냈다. 억지로라도 힘을 빼보려 노력했지 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대략 이 주 만의 삽입섹스였다. 쌓여가던 갈증이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폭 발해 둘 다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흔들게 해줘.”

   태국영은 빤히 눈을 맞춘 채 후끈한 뺨을 이승도의 가슴에 비벼댔다. 조금 더 풀어지길 기다리려던 생각은 단박에 물러갔다. 이승도는유혹에 흐물흐물 녹아 고개를 끄덕 였다.

   내벽을 짓이기며 그의 성기가끝까지 들어왔다. 단번에 전립선을 강하게 짓 이겨진 이승도는 울컥 프리컴을 흘리며 강한 비음을흘렸다. 다 삭아버린 허 물처럼 허리가 무너져 내렸다.

   태국영은 곧장 허리를 뒤로 뺐다가 강하게 다시 진입했다. 조급함을 내비쳤 던 만큼 여유라곤 찾을 수 없는 몸짓이 었다. 그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속적 으로 치고 올라왔다.

   이승도는 우박처럼 전신에 내리꽂히는 자극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그와 접촉해 있다는 감각들

뿐이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퍽퍽 박아 넣는 그 감촉만이 생생했

다.

   더 세게 박아도 돼? 더 울려도 돼?

   이상한 정적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새빨간 혀끝

이 눈가를 뭉겠다. 쾌감의 극치에서 눈물을 떨궜음을 뒤늦게 자각했다.

     w ? 으 ,,

   이승도는 그의 단단한 배에 고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 였다. 틀림 없이 핀 잔이든 투정이든 날아올 거라 생각했던 태국영은 의외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승도는 속눈썹에 작은 눈물방울을 매달고서 태국영의 복근 위로 뿌 연 정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더 세게.”

   그것도 모자라 안달 난 것처 럼 목에 매달려 허리를 흔들어 댔다. 너 할 수 있는 만큼 세게,조르는 목소리엔 망설임이 없었다.

   태국영은 눈가에 웃음을 매달고서 양손으로 이승도의 엉덩이를 비틀어 잡 았다. 그것만으로도 이승도는 하늘하늘 녹아내 렸다. 말랑하게 수그러든 제 성 기를 음란하게 비벼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너 큰일 나. ”

   “괜,괜찮……

   “진짜다쳐, 승도야. 쉬이.”

   토정의 쾌감에 잠식당한 이승도는 잠깐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제가 작정 하고 들이받으면 정말로 부서질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태국 영은 멋대로 움직이려는 허리에 강하게 힘을 주며 얕게 움직였다.

   “그간 어떻게 참았어.”

   점점 음란해져 가는 몸뚱이로 갓난아기만 챙기느라 참 고생 많았겠네.

   태국영은 아기가 잠이 들면 기다렸다는 듯 엉겨 붙었던 자신의 모습을 까 닿게 잊은 것처 럼 중얼거 렸다. 이승도는 태국영 의 귓바퀴를 콱 깨물며 잔말 말고 움직이라고 핀잔했다. 정신이 조금은 든 모양이었다.

     ;명령 받잡고.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태국영은 은밀하게 교접해 있는 곳을 한 손으로 받 치고 다른 손은 욕실 벽을 짚었다.

   “또무너져도돼. 잘받아줄게.”

   힘 좋은 애인이라는 건 의외로 쓸모가 많았다. 이승도는 흔들림 없이 받쳐 주는 그의 팔뚝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구멍을 들락거리는 그의 성기는 거칠지만 달콤했다.

   감각이 흐트러진다. 태국영의 속내가 저릿한 감각을 타고 신경을 떠돌았다. 그는 일단 그간 쌓였던 것의 일부를 빠르게 배출해낼 심산이 었다. 끝이 아니 라 긴 밤의 시작을 위해서 였다.

   이승도는 구멍을 조였다. 목덜미로 흐르는 그의 호흡이 피를 본 짐승처 럼 거친 결로 갈라졌다. 몸이 자꾸만 홀러내렸다. 마치 심지를 잃은 촛불 같은 나 약함을, 그는 장담대로 잘 추슬러 안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의 머리칼을손가락 사이에 감고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통렬 한 통증이 어깨에 머물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가 이를 세운 것이었다.

피 냄새가 나나,이승도는 제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어설픈 의문을 젖은 공 기에 흩뿌렸다.

   붉게 발기한 성기에 닿아 있는 그의 복부가딱딱하게 수축했다. 이승도는 몸을 움츠리고 싶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그의 몸뚱이를 담고 있는 사타 구니는 아플 정도로 활짝 벌어진 채 밀어붙여져서 조금 오므려지지 않았다. 그의 음란한 살덩이를 품고 있는 내벽만 잔뜩 오그라들었다.

   태국영이 짧게 탄식했다. 그의 정액이 몸 안에 뿌려지는 것을 선득하게 느 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에 지진 것처럼 달궈져 있는 점 막은 그저 얼얼한 쾌락의 파도가 머물고 있을 뿐이 었다.

   이승도는 숨을 헐떡였다. 잘게 떨리는 입술 위로축축한 것이 감싸왔다. 사 납고 다급하게 몰아붙인 맹수가 가증스럽게 달콤한 키스를 해 오고 있었다.

   얼얼하게 부푼 입술을 열어 그를 맞았다. 부드러운 혀가 입 안을 살살이 훑 고 빠져나갔다. 뱀처럼 요사스러운 살덩이는 뺨을 할고 올라가 눈가에서 또 오래 머물렀다.

   틈 없이 맞물린 아랫도리는 여전히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완전히 쏟아 낸 뒤에도 그는 저만을 삼키는 구멍 안을 즐겼다.

   “옮기자.”

   그의 목소리에 여유가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인 이승도는 가물가물한상태 로 옮겨졌다.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물 냄새가 짙어졌다. 젖은 눈을 몇 번 감 았다 뜨니 둥글게 굽어진 천장이 보였다. 동그란 전구가 듬성듬성 박힌 타일 천장이 었다.

   “여기가 어디야.”

   약에 취한 듯 휘청거 리는 뇌를 바로잡는 것보다 묻는 것이 더 빨랐다. 태국 영은 짧게 대답했다.

   “풀장.”

   “수영하게?”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승도는 컴컴한 덩어리의 윤곽을 시선으로 덧그렸다. 빛을 등지고 있는 그의 상체였다. 동물적인 만큼 음란한 선이 화려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아니. 섹스하게.”

   팔팔 끓는 그의 두 손이 탁 풀린 허 리를 감싸 쥐 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 승도 요분질 좀 볼까.”

   이승도는 그 말에 시선을 내렸다. 울퉁불퉁하게 왜곡되어 있던 시야가 어느 새 맑게 개어 있었다. 자신은 여전히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뿌리까지 삼 킨 제 구멍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승도는부드럽게 엉덩이를돌리려다가 희 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파. 등이 배겨.”

   그가 저를 옮겨 놓은 곳은 실내 풀 옆에 자리한 라운지체어였다. 딱딱한 표 면이 뼈를 눌러 불편했다. 자리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제가 누웠 던 곳에 그가 누워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하게 흔들어 봐.”

   그가 한 손으로 엉 덩 이를 탁 치며 주문했다. 이승도는 그의 가슴에 두 손

을 짚고 체중을 실으며 눈가를 접었다.

   “주문 받잡고.”

   태국영이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제법 한마디도 안 지려고 든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이승도도 좋지만 역시 그는 능란하게 저를 휘두르 는 지금의 그가 더 좋다.

   “우리 국영이 여유롭네. 기분 나쁘게.”

   이승도는 허세를 부리며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국영은 그 허세마저도 좋았다. 그는 이승도의 골반을 양손으로 감싸 더 깊이 끌어오며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승도 눈엔 안 보이나 봐. 서방님 지금 떨고 있는데. ”

   “안 잡아먹어.”

   “눈치 없긴. 이럴 땐 맛있게 먹겠습니다,해야지. ”

   “먹고 싶은데 자꾸 먹히는 기분이라. ”

   “아직요부되려면 멀었네.”

   “분발할게.”

   “미친다, 내가.”

   유치한 말이 몇 마디 오고 간 뒤 둘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이승도는 열 기와 안온이 섞인 채 휘어 있는 그의 눈매에 입을 맞췄다. 정말 별것도 아닌 데,그깟 혼인이 뭐라고 태국영은 그 이후로 좀 더 편안해진 것 같았다.

   가문의 명부에 한 줄 기여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사랑해,국영아.”

   이승도는 이마를 맞댄 채로 고백했다. 반달처럼 접혀 있던 그의 눈시울이 느리게 제 모앙을 되찾았다. 이승도는 그의 목을 두 팔로 두르고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완전히 붙였다.

   “너라서 정말다행이야.”

   너무 가까웠다. 빤히 보는 시선을 읽기 힘들어 이승도는 고개를 조금 물렀

다. 태국영은 무의식적인 듯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우리 엄마를물었던 게,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진심으로.

   이승도는 죽음에 이르렸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그날의 일을 대부분 명확 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하나,아름답고 거대한 짐승이 숨죽여 오열 하던 그 장면만큼은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 마 제 생에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일 당장 벌어질 일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지만,그 단순한자연의 법칙 이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 소름 끼치도록 절감했었다.

   “그때 기억나? 처음 그 집에 왔던 유모가 생일상 차려서 왔던 날. ”

   차곡차곡 쌓여가는 하루하루가 모두 소중하고 행복했다. 태국영의 매일도 늘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는 아마 이승도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 하고 있겠지만,아니 었다. 저는 알고 있었다.

   간혹 그가 엄마 손을 놓친 미아처 럼 악몽 속에서 헤매고 다닌다는 것을.

   “그다음 보름날,나 너 처음으로 안아 봤어. ”

   하루라도 빨리 해묵은 고통에서 그를 해방시 켜주고 싶었다.

   “널 안고서 조금울었어.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같이 죽어버릴까싶기도 했는데,또 생각해 보니 버틴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야. 그래서 한번,살아남 아보자 싶더라.”

   나직이 고백을 이어가는 동안 태국영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생존본능에 기거하는 절실함을 위협당한 듯 그 의 눈빛도 검게 굳어 있었다.

   이승도는 물끄러미 눈을 맞춘 채 그의 경직된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손 바닥에 더운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것이 그가 숱한 세월 가슴으로 묻어온 눈 물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아렸다.

   그의 입술이 멈칫 벌어졌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뱉어내지 못한 채 도로 스 르르 닫히고 말았다.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판 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그답지 않은망설임이 서글폈다.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하게 나오면 편하게

다음 말을 이어가 볼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은 너무 이른 시기인가 보 았다. 갈 길이 멀었으나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

다.

   “그때도 넌 예쁘긴 참 예뼜는데. ”

   이승도는 불시에 빙긋 웃으며 태국영의 등을 끌어안았다. 젖은 가슴이 부드 럽게 맞닿는 순간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듯 어깨를 감싸 안아왔다. 이승도는 그의 눈가에 입술을 붙였다.

   “우리 국영이 예전 같지 않네. 잠자리에서 다른 얘기 좀 했다고 이렇게 금 방죽다니.”

   엉덩이를 느리게 비비며 속삭이자 드디어 그의 가면이 깨졌다. 그는 미간 에 실금을 잡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서방님건재한거보여줘?”

   이래야 내 국영이지.

   빈정거 리는 말투가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보여주면 나야 고맙지.”

   이승도는 태국영의 어깻죽지에 뺨을 기대 비볐다. 단단한근육이 맥 빠진 듯 부드럽게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등허리를 쓸어내리던 그가 혀를 차며 몸을 물렀다.

   “너야말로몸이 너무 식었어. 따뜻한 데로 가자. ”

   수축한 내벽을 꽉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어릇한 감각에 절로 몸 이 부르르 떨렸다. 이승도는 저를 가뿐하게 안아 드는 그의 머리를끌어안으 며 침실이 아닌 자쿠지로 가자고 말했다. 유모가 이래저래 정성껏 준비해 뒀 을 것들을 그냥 썩히긴 아까웠다.

   태국영이 풀장 밖의 발코니로 가는 동안 이승도는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헐떡 였다. 바짝 조인 구멍 에서 힘 이 풀릴 때마다 물컹한 액이 새어 나왔다. 오 랜만의 섹스라 그런지 흐르는 양이 꽤 많았다.

   “아… 이상해. 안흐르게 해봐.”

   태국영이 작게 웃었다. 매끈한손가락이 벌어진 구멍을 메웠다. 붓고 젖은

입구는 그의 살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승도는 그의 손가락을 조이며 턱 을 젖혀 들었다. 헐떡임은 잦아들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그가흡혈귀처럼 목 에이를세웠다.

   “야해.”

   정작 야한 것은 낮게 잠긴 그의 목소리 였다. 이승도는 열게 앓는 소리를 내 며 허리를 떨었다. 정액이 흐르는 느낌에 반쯤 발기해 있던 성기가 단번에 꼿 꼿하게 부풀었다. 이승도는 물에 몸이 잠기자마자 욕조 바깥으로 한쪽 오금 을 걸어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이리.”

   젖은 입술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이었다. 태국영은 엉덩이 아래에 허벅지를 단단히 끼워 받치고 입술을 물어 왔다. 그는 위아래를 번갈아가며 정성스럽 게 빨았다. 달콤한 사탕을 문 어린애처 럼 느긋한 음미를 즐기는 키스였다.

   아랫니를 스친 혀가 깊이 들어와 입천장을 더듬었다. 이승도는 입을 벌린 채 그의 혀에 제 것을 얽었다. 그 순간뜨겁게 요동치는살덩이가구멍을 벌리 고 들어왔다. 아릿한 통증이 밀려들면 키스는 더 짙어진다.

   잠시 숨을 멈춘 입 안에서 타액이 흘렀고 태국영은 그것을 달게 빨아 마셨 다. 서너 번에 걸쳐서 꾸욱꾸욱 밀어 넣자마침내 조금 전까지 그를 받아들였 던 통로가 완전히 벌어졌다.

   엉덩이가 그의 골반에 짓이겨지며 결합은 완전해졌다. 그는 깊이 박아 넣 은 채 천천히 아랫배만움직였다. 느리게 물러가는통증에 비해 가학적인 충 만감은 빠르게 치고 와 단번에 심장을 움켜쥐 었다. 그의 성기를 꽉 물고 있는 점막에서 툭툭 뛰는 맥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리칼 너머 칠흑의 밤하늘이 비행 중이었다. 흐리게 빛나는 별들주 위는 뜨거운 적요가 함께 춤을 추었다.

   “아,좋아……

   취한 듯 중얼거 리는 이승도의 눈가에 태국영이 입을 맞췄다. 풀린 눈에 별 빛이 내리는 모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태국영은 열꽃 핀 빵을 아 프지 않게 잘근잘근 물며 몸을 더 밀착했다.

   “정확히 뭐가좋은데.”

   음탕하게 활짝 벌린 채로 박히는 게? 아니면 야외 플레이가?

   그는 마치 누군가 훔쳐 듣기라도 하는 듯이 희미하게 속삭여 물었다. 이승 도는 그의 질문에 멍하니 눈을 내렸다. 밤하늘을 삼킨 물 밖으로 제 양다리가 삐죽나와있었다.

   움직이는 시선을 따라 그의 손길이 포개져 왔다. 욕조에 걸려 있는 종아리, 물 밖으로 크게 벌어져 있는무릎, 물에 잠긴 허벅지의 깊은 안쪽…….

   자쿠지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낙낙하니 남는 크기 였다. 그 양옆으로 걸어 놓은 다리는 민망하리만치 노골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어찐지 사타구니 가 조금 당긴다 싶었다.

   “둘다.”

   야외라고 해 봐야 집안이었고, 저희들을훔쳐보는 것은 흐린 달과 별 몇 개 뿐이 었다. 그와 나누는 섹스는 장소에 상관없이 모두 황홀했다.

   이승도는 그의 가슴 근육을 노골적으로 쓰다듬어 올라가 그의 턱 끝을 쓸 었다. 속눈썹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그의 뺨 위로 느리게 굴 러 내렸다. 이승도는 태국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 물방울을 혀끝으로 핥아 올 렸다.

   “국영아.”

   W ? ”

   ■?*.

   “내가움직일래.”

   태국영은 연결된 채 이승도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별 어려움 없이 자세를 바꿨다. 이승도는 그의 아랫배를 타고 앉아 천천히 허 리를 움직 였다.

   날카롭게 내벽을 늘리던 통증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빠듯 하게 조인 구멍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승도는 상체를 조금 젖히며 그의 성기를 가장 깊은 곳까지 삼켰다. 귀두 끝에 딱 걸리는 전립선이 저릿하게 짓 뭉개졌다.

   “흐

   아랫배 깊은 곳에서 시작된 쾌감이 척추를 찌르르 울렸다. 순간 힘이 풀려

허리가 무너졌다. 태국영이 등을 받쳐 올리며 턱 끝에 이를세웠다.

   이승도는 그의 가슴을 짚은 손끝을 바짝 오므렸다. 짧게 깎은 손톱이 탄력 적인 피부를긁어냈다. 그의 귀두에 걸린 성감대에서 녹을듯 달콤한감각이 퍼져나갔다.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이승도는 발정 난 것처럼 빠르게 엉덩 이를 들썩였다.

   “홋,아,…아아! ”

   뜨끈한 물이 출렁출렁 벽을 뛰어넘었다. 적극적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 을할듯이 지켜보던 태국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는 허리가꽉조여졌다. 그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침 뱉듯이 사납게 뱉어냈다. 갑자기 흥분했을 때 나 오는 버릇이었다.

   느긋하게 기다려줄 것 같았던 태국영이 곧장 거칠게 쳐올렸다. 빠르고 강하 게 박혀 들어오는 성기가 수직으로 치고 들어오며 깊숙한 곳을 난자하기 시작 했다.

   숨 쉴 틈 없이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잔뜩 흥분한 말 위에서 허둥거리 는 꼴이었다. 이승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애처롭게 헐떡거렸다.

   “으,응… 아,국영… 내가,내가 한다고……. ”

   “못참아. 감질나돌아가시겠어. 넌 너무 느려. ”

   좋은풍경 속에서 느긋한섹스를즐기려 했던 이승도의 꿈은 저 멀리 내동 댕이쳐졌다. 본래의 의도가 합의 없이 박살 났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그래도……아,…아아! 너무 빨……!”

   입술이 먹혔다. 뜨거운 열기가 입술을 삼키고 그 안에 자리한 모든 것들을 쓸어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몰아붙이는 키스였다. 착취당하는 혀에서 침이 줄줄 흘러 자꾸만 목 안으로 고였다. 몇 번 기침을 하며 몇 번 삼키고, 그러다 그마저도 그에게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으…응……

   난폭한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적 응한몸뚱이는 어느새 그의 장단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이승도는 거의 물 에 잠겨가던 몸에 힘을 주며 그에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의 팔에만 의존하

던 허리에도 힘이 실려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의 어깨에 깊이 손톱을 박았다. 그러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 만 또 백옥처 럼 고운 피부에 붉은 줄이 갔다. 아,목 안으로 탄식한 태국영이 턱을 조금 젖혀 들었다.

   깊이 감았다 뜬 그의 눈에 엉망으로 흔들리는 제가 비쳤다. 이승도는 그가 찔러 올릴 때마다 난잡하게 엉덩이를 비비며 소리쳤다.

   “거기, 더,아……! 아아!”

   “여 기?”

   태국영은 알면서 애를 태웠다. 교묘하게 근처까지 들어왔다 빠르게 빠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아아,하지 마, 이승도는 엉덩이를 그의 아랫배에 힘차게 박 아 내리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골반과 엉덩이를 고정하듯 붙들고 있는 그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그의 허락 없이는 옴짝달싹못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드릴까?”

   그의 물음에도 격앙된 숨결이 묻어나왔다. 막돼먹은 손이 엉덩이를 세게 움 켜쥐고 비틀다 그 안쪽 더 은밀한 부위로 옮겨갔다. 정신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구멍 이 그의 손끝에서 기대감으로 떨 렸다. 이승도는 그의 등을 긁으 며 닥치는 대로 주문했다.

   “깊이,더 깊,으옷! 응,거,거기,아,더 세게……! ”

   태국영은 그때부터 흥분을 못 이기고 자꾸만 몸을 들이받았다. 맞부딪친 뼈 가욱신거릴 정도였다.

   자세가 불안했다.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것 외에 체중을 지탱한곳은 그의 팔에 얹힌 허리뿐이었다. 국영아,나눕혀줘, 이승도 는 사타구니를 파들파들 떨며 애원했다.

   태국영은 욕조 옆 낮은 선반에 곱게 개켜 있는 가운 한 쌍을 타일에 깔고 그 위에 이승도를 눕혔다. 이마에 써늘한 바람이 스쳤다. 이제 한 발자국만 가 면 여름이 다가올 테지만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그러나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은 불덩이처럼 들들 끓고 있었다. 이승도는 다리를 크게 벌려

비부를 훤히 노출했다. 가랑이 사이로 꽉꽉 들어오는 그의 단단한 몸이 육감 적으로 빛났다. 연한 불빛과 흐린 달빛이 그의 물 젖은 몸 위를 미끄러지고 있 었다.

   납작하게 조여 있는 아랫배와 구멍을 들락거리며 음란하게 번들거리는 성 기가 또렷이 보였다. 미치도록 야했다. 씹어 먹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태국영 이 몸을 숙였다. 흔들리는 머 리 옆으로 그가 한 손을 짚었다. 물소리 는 여전했다. 그의 하체는 아직도 물에 잠겨 있었다.

   “만져줄까.”

   그가 잔뜩 발기해서 프리컴을 흥건히 흘리는 성기를 손등으로 쓸며 물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열기로 그렁그렁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싫어. 네가 박아주는 대로 끌려가서 쌀래. ”

   연인 사이의 천박한 침대 매너는 때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태국영 은 이승도가 평소의 정숙함이나 상냥함을 버릴 때 극도로 흥분해 날뛰곤 했 다.

   이승도는 고개를 비틀어 얼굴 옆에 있는 그의 팔뚝을 혀끝으로 긁었다. 푸 른 핏줄이 꿈틀 혀끝을 간질였다. 태국영은 또 욕설을 잇새로 으깨며 이승도 의 발목 하나를 잡아 올렸다.

   그가 종아리 안쪽을 깊이 빨아들였다. 선명한 울혈이 피어났다. 이승도는 달콤하게 비음을 울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발끝이 쫙 펴졌다가 오그라들었다.

   태국영은 거침없이 허리를움직였다. 깊이 찔렀다가 빠르게 빠져나와 이승 도가 가장 좋아하는 전립선 깊은 곳을 힘껏 문질러 올렸다.

   이승도는 연신 자지러지며 눈을 감았다. 감은 속눈썹이 물이 아닌 다른 것 으로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태국영은 힘 빠진 이승도의 다리를 바닥에 내리고 이승도의 눈가를 정신없이 핥아댔다. 마치 숨을 깔딱이는 새끼를 깨우 는 어미 짐승처럼 애틋하고 격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승도는 그의 팔을 한 손으로 꽉 붙들고서 허 리를 흔들었다. 태국영은 허 리 아래를 거칠게 움직이며 제 아래 깔려 있는 이승도를 감상했다.

   깔딱깔딱 숨이 넘어갈 만큼 달아올라 있는 이승도의 몸엔 자극적 인 색감

이 낭자했다. 뺨과 입술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고,목과 어깨,가슴과 다 리 어느 한군데 제 입술자국이 없는곳이 없었다. 어디는 자줏빛이고 어디 는 핑크빛이었다. 배에 누운 성기 끝도 우윳빛으로 흥건했다.

   힘없이 늘어진 다리는 제가 밀어 붙을 때마다 덜컥거렸다. 사타구니가 아프 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큰 각도로 벌어져 있었다.

   태국영은 제 마킹이 진하게 남은 그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며 제 성기 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타구니 안쪽까지 어루만졌다. 그러다 손등에 살짝 성 기가 닿자 이승도는 싫다고 도리질을 했다.

   “만지지마. 그냥 해.”

   세게 주물러서 싸는 것보다 박히는 것만으로 싸는 게 훨씬 더 좋은 모양이 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 아래 손을 넣었다. 단단하고 탄력이 넘쳤다. 근 력운동을 하면 팔다리보다 코어에 더 신경을 쓰는 이승도였다. 손바닥 위에 서 이리저리 요분질을 치는 허리는 늘씬하면서도 단단했다.

   나올 것 같아,이승도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아니, 실제로도 생리적인 눈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목 하나를 끌어와 손금에 입술을 댔다. 입술을 문지르 며 깊이 빨아들였다. 이승도가 하지 말라고 손을 빼려는 순간 태국영은 끝까 지 삽입한 성기를 잘게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젖은 살이 빠르게 부딪치는 소리는 몹시도 음란했다. 절정에 다다른 쾌감 이 전신을 낭자했다. 정액으로 잔뜩 젖은 구멍 안도, 그의 아랫배에 빠르게 부 딪히는 고환도,그가 깨문 어깨도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흑,흐옷……! 아!”

   깊은 곳까지 꽉 들어찬 그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생각이 달아나 고 머릿속은 그저 하얀 빛만 터졌다. 미개한 교접을 이어가는 그에게서 짙고 자극적인 향내가 흑 끼쳐 나왔다.

   이승도는 가루약을 흡입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크게 부푼 가슴 안을 그

득 채우는 향기가 마약처럼 전신을 적셔 왔다. 몸 안의 모든 점막이 그를 위 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굴욕적일 정도로 미개한 황홀감이었다. 흐느끼듯 목을 울리던 신음은 금방 울음으로 바뀌 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목 두 개를 한 손으로 잡아 위로 눌렀다. 이승도는 난 잡하게 벌린 사타구니를 어떻게 오므릴 생각도 없이 온몸을 경련했다. 채집 당한 나비처럼 가련하게도 떨고 있었다. 태국영은 그 처연함에 흠뻑 현혹되 고 싶었다.

   태국영은 숨을 껄떡이며 울고 있는 이승도의 뺨에 제 빵을 포개 문질렀다. 거칠게 흔들리고 있어 상냥하고 애틋한 접촉이라 할순 없었지만,그래도 이 마음이 전부 그에게 전해지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사랑해,승도야.”

   불시에,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태국영이 고백했다. 이승도는 이제껏 그 토록 또렷한 사랑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폭풍우에 휩쓸린 돛단배처 럼 몸이 덜컹거 리는 와중에도 이승도는 큼지막하게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 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습윤하게 반질거리는 그 눈 동자에 가득 담긴 것은 혼란을 동반한 기쁨이 었다. 태국영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게 마주 보았다.

   “사랑해.”

   그리고 다시금 선명하게 고백했다. 이승도는 마치 깊은 각인이 새겨지는 바 위처럼 소리 없는 울음을 지었다.

   “응.나도 사랑해.”

   태국영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놓았다. 그 순간 이승도의 성기 끝에 서 탁한 액체가뿜어져 나왔다. 경련은 한사람몫이 아니었다. 태국영은 이승 도의 몸에 제 몸을 덮어 누르며 함께 몸을 떨었다.

   깊고 빠듯한 어느 곳에서 태국영 역시 파정했다. 몸서리쳐지는 쾌감이 별빛 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달이 구름 뒤로 완전히 숨었다. 소등에 잠긴 저택은 적막했다. 캄캄한 밤 가 장 밝게 빛나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보석 같은 눈동자였다.

   나른한 고요가 채 찾아오기도 전,헐떡이는 신음 소리가 다시금 밤공기에 흐드러졌다. 이승도는 태국영에게 정신없이 매달렸고, 태국영은 이승도에게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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