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백야 (광야 외 전) 1
1. 같이 살아남아 볼까
「안녕하세요,도련님. 안녕하세요,이승도 군. 제가 오늘부터 두 분을 모시 게 되었어요. 앞으로잘 부탁드립니다.」
낯선 여자는 한 달 전 이 저택에 상주 메이드로 왔노라 자신을 소개했다. 오래도록 들어보지 못한 상냥하고 활기찬 목소리 였다. 나는 대답할 기운도 의 지도 없었다. 생기 없는눈으로 그녀의 발치만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태국영은 내 눈치를 살폈다. 반응 없는 나를 힐긋 살핀 뒤 역시나 입을 굳 게 닫고 그녀를 본체만체했다. 마치 그녀에게 작은 호기심이라도 가졌다가는 내게 더 심한 냉대를 당할 것처럼.
「오늘 우리 도련님 열일곱 번째 생신이라고 해서 제가 이것저것 챙겨와 봤어요. 특히 승도 군은 식사를 대부분 남긴다고 해서 좀 더 신경을 썼어요.」 내 식사라고 오는 건 통조림 반찬들과 찰기 없는 쌀밥뿐이 었지만 딱히 그 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 었다. 생에 애착이 없으니 먹는 즐거움도 함께 잃어버 린 것뿐이었다.
「혹시 육류보다 해산물을 좋아하나 싶어서 아까 장 심부름 갔다가 물 좋 아보이는 것들 몇 개 집어 왔어요. 다행히 저는 이 집의 다른 메이드들과는 달리 해산물 요리도 잘하거든요.」
트레이 카트에 담아 온 음식들이 하나둘 식탁에 올라왔다. 세팅을 하는 와 중에도 끊이지 않는 수다가 낯설고 신기해 처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 이 마주치자 그녀는 방긋 웃어 보였으나 곧장 표정을 흐리며 다가왔다.
「세상에,이 마른 것 좀 봐. 이게 뭐예요. 뼈밖에 없잖아요.」
걱정 가득한 얼굴에 얼핏 진심이 보였다. 그 측은지심이 의아했다. 왜 날 걱 정하지,아니,정말 날 걱정하는 게 맞나,그런 생각들이 무료하게 뇌리를 스 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바위처럼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태국영이었 다. 녀석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 렸다.
「승도한테 손대지 마.」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따가운 눈초리를 정면에서 받고 있음에도 두려운 기색은 없어 보였다. 조금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요,도련님.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실까요.」
태국영의 말을 무리 없이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짐승의 피가 섞 여 있을 터였다. 그러나 행동과말투가마치 어릴 적 옆집 살던 빵집 아주머니 를 떠올리게 했다.
늘 버터 냄새가 나던 그녀의 품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줌마,하고 안기 면 푸 근하게 웃으며 달콤한 소라빵과 크림빵을 한아름 안겨 주던 따뜻한 인간의 온 기 역시.
「승도야. 밥 먹어.」
태국영이 허릿단을 물고 조심히 끌어당겼다. 나는 침대였는지 소파였는지 에 늘어져 있었는데,늘 그랬듯 녀석의 권유를 뿌리쳤다. 대답 없이 돌아눕는 내 뒤로 아픈 침묵이 흘렀다.
당시 나는 긴 감금 생활로 잔뜩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혀를 깨물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였 고,목표지점을 잃은 증오를 연료로 불태우며 교활한 생존을 이어갈 뿐이었 다.
내 증오의 대상은 물론 태국영이 었다. 그가 미움 받아 마땅했기 때문이 아 니라 미워해도 좋을 만큼 만만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해치지도 못하고, 늘 상 처받으면서도 늘 애정을 구걸하며 내게 치대던 그는 미워하기에 참으로 손쉬 운 상대였다.
「승도 군, 등에 상처가 있네요. 지금 당장 식사하실 거 아니 면 제가 좀 봐 도 될 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침묵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녀가 다시금 다가오려 했고, 이번에는 태국영도 가로막지 않았다. 따스한손끝이 헐벗은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도련님 발톱이 몹쓸 짓을 한 모양이네요. 소독 좀 하고 연고 발라 드릴게 요. 조금 차갑고 따가울 거 예요.」
곧이 어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퍼 졌다. 그녀 가 가볍 게 처치를 하는 동안 나 는 계속되는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드디어 깨달았다.
처음이었던 거다. 이 안을 드나드는 이들중 내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준 것은,그녀가 처음이었다.
고용인들은 대부분 말수가 없었지만 무언가 허락을 구해야 할 때에는 태국 영에게 말을 걸었었다. 내 식사나 내 잠자리 같은 사소한 것들도 내 의견을물 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한낱 태국영의 부속물이나 소유물에 불과했 기 때문이었다.
「승도 군, 올해 몇 살이에요?」
「한 열일곱? 열여덟? 그쯤 됐을까? 한창 자랄 땐데 입맛 없어도 삼시 세 끼는 꼭 먹어요. 섭식 상태가좋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다친 게 잘 안 나아요. 도련님도 그래요. 승도 군이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예쁘다 예쁘다 못 해 줄망정 이게 뭐예요? 여기저기 많이도 긁어놨네.」
그때 검열관처럼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국영이 발끈했다.
「난 예쁘다고 해. 내가 얼마나 승도를 예뻐하는데. 이 상처는,이건.」 태국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쏟아져 나온 음성은 우울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어제 보름이었잖아. 난 정말상처 입히고 싶 지도 않았고, 잘참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신이 들어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그건 정말 내 의지가 아니었어,태국영은 변명하듯 몇 번이고 그 말을 뇌까 렸다. 그와 함께 수많은 보름밤을 고문처럼 함께 견뎌온 나는 그의 말이 순결 한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지가 남아있을 때의 그는 내게 날카로운 발톱 끝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도리어 한 열서너 살 때부터였나. 지나치게 내 눈치를살피기 시작해서 가 끔 거북함을 느낄 정도였다. 발작이 오면 안아달라고 난리를 피우다 물거나 할퀴던 행패도 그쯤 해서 많이 사라졌다.
그는 대부분 홀로 몸을 찢는 고통의 밤을 이겨냈고,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야 만신창이 몸을 이끌고 와 조심조심 내 발등에 고개를 묻어오곤 했다.
전날도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듯했지만,그는 잠든 상태에서 작은 발작 을 일으켰다. 꿈을 꾸는 건지 그저 고통에 허덕이는 건지 몸부림을 치다 발을 휘둘렀다. 그렇게 할퀸 자국들이 었다.
「미안하다면서 핥아주기는 하셨어요?」
「어떻게 핥아줘. 내가 건드리기만 해도 질색하는 앤데.」
태국영은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유모는 혀를 차며 한숨을 지 었 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대강 이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싶었다. 그 녀가 부드럽게 어깨를 짚어 왔다.
「승도 군. 일어나서 밥 한술만 떠 봐요. 내가 두 시간 동안 주방에서 갖은 정성을 다 들여서 이것저것 만들어 왔단 말이에요. 전복죽도 있고,대게찜도 있고,푹 곤 곰탕도 있어요. 딱 하나만이라도 들어 봐요.」
그 순간 신기하게도 기억 속에 까마득히 묻힌 냄새가 허기를 자극했다. 요 리 솜씨가꽝이었던 엄마의 싱거웠던 국, 질었던 밥, 모양이 이상했던 달걀말 이 같은 것들이 차근차근 머 릿속을 채웠다.
못 이기는 척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내 얼굴에서 협조의 기미를 발견한유 모가 나를 얼른 부축했다. 식탁 위에는 그녀의 자랑대로 진수성찬이 나를 반 겼다.
그렇듯 정성스런 밥상을 몇 년 만에 보는 걸까.
나는 억지로 수저를 들어 곰탕부터 떠먹었다. 잡내 없는 고소한 맛이 미각 을 잃은 혀를 깨우고, 들춰보기 아파 애써 묻어둔 기억들도 헤집어 놓았다.
엄마는 한 번 사골을 고면 거의 이삼 일을 끓여서 들통 두 개를 가득 채웠 다. 그렇게 한 번 고아두면 거의 한달이 넘게 거의 매 끼니 그걸 먹어야했 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반찬 투정을 해본 적은 없었
다. 내가 착한 아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엄마가 특식이랍시고 만드는 요리들마저 죄 실패작이 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보다 훨씬 더 밍밍했던, 엄마가 끓인 곰탕이 그리웠다.
빨갛게 충혈 올라오는 눈에 억지로 힘을 줘 봤지만 결국 독하게 눌러놓은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장마기를 힘겹게 버티고 있던 댐이 무너지듯이 순식간 에 눈물이 범람했다.
곰탕에 밥을 말아 천천히 씹어 넘겼다. 담백하고 고소했던 탕에서 짠맛이 감돌았다. 뻠을 타고 흐른 눈물이 국그릇 안으로 쉼 없이 추락했다.
흐리게 울렁거리던 시야로 들어차던 얼어붙은 침묵을 기억한다. 유모도 태 국영도 숨소리조차 섣불리 내지 못한 채, 묵묵히 식사를 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덟… 이에요.」
반의반도 못 비운 그릇들을 챙겨 나가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나는 처음으 로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태국영이 열일곱 살이면…… 저는 스물여덟 살일 거예요.」
세월을 세는 것은 무의미했기에, 나는 그날 내가 이곳으로 끌려온 지 12년 이나 지나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어느새 서른을 바 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 스물이 된 다는 것도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몸은 자랐으나정신 상태는열여섯에서조금도 자라지못했다. 나는 성숙해 야 마땅할 스물여덟이었지만 아이처럼 어렸고,어리석었고, 나약했고,비겁했 다. 벼락처럼 정수리를 강타한 그 성찰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유모는 말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어깨에 떨어지던 그녀의 뜨거운 눈물방울 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따뜻한 체온은 해묵은 가시도 녹일 듯 달콤하기 그 지없었다. 사는 것이 의미 없으니 외롭지 않다고,그렇게 세뇌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근근이 살아왔던 날들이 무색해졌다. 나는 그 따스함이 사무치게 그리 웠음을, 가까스로 인정했다.
한 달 뒤, 우리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던 보름밤이 다시금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태국영을,나는 여느 때와 달리 고요히 지 켜보았다.
숨 가쁜 정적 속에서 태국영이 부서지는 소음들만 간간이 울렸다. 울고, 화 내고,애원하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었다. 피가 튀고 뼈가부서지는동안에도 비명은커녕 신음 한 조각 없는 그였다.
참아낼 수 있을 만한 고통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일 곱 살의 그는 그렇게 혼자 감내하고 있었다.
지독하고 지독했다. 그의 의지건, 순정이건.
나는 그날에야 비로소 그가 홀로 참아내었던 수많은 밤들의 정체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보이는 외면의 등 뒤에서 그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외로운 밤 을 견뎌냈던 거였다.
죽음 같은 시간을 모두 이겨낸 태국영은 기듯이 걸어와 내 곁에 쓰러졌다. 그는 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내 발등에 겨우 머리만 얹어 두고혼절해 버린 그에게서 시체 같은 냄새가 났다. 썩어 문드러진 것이 그의 몸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이끌리듯 그의 몸을 덮어 안았다. 품 안의 그는 열병 앓는 태아처럼 뜨거웠 고,두 팔로 안기 버거울 만큼 거대했다. 그러나 이상히■게도,그때에는 그가 너무나작게 느껴졌다. 마치 나와똑같이 몸만 커져 버린 어린아이를 안고 있 는 느낌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애달픔이 덮쳐왔다. 최초의 동요는 길 잃고 흐려지던 증 오를 압도하고 압살했다.
나는 내가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꽤 오래전부 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가 기어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시야가 어룽졌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그의 피투성이 몸에 번져갔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 렸다.
「우리,같이,죽을까…….」
그를 두고 나 혼자 죽는 것도, 나를 두고 그가 혼자 죽는 것도 상상할 수 없 었다. 곱건 밉건 이 참혹한 세상에는 오릇이 우리 둘뿐이 었으니까.
아니면.
「같이… 살아남아 볼까…….」
너무나 긴 밤이 었다.
젖빛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햇살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먹구름은 반대 로 옅어져 갔다. 유모는 젖은 잔디 위로 부서지는 빛의 방울들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간밤 내내 폭풍우처 럼 험상궂게 휘몰아쳤던 빗줄기는 이제 바늘보다 가는 몸집으로 지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말끔히 그칠 분위기였 다. 초조하게 꼬박 날을 새며 비가 그치길 염원한 보람이 있었다.
유모는 날듯이 움직여 기상 벨을 눌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으나 전 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당부를 들었던 고용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일어나움직였다. 세면 후 각자의 작업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홀에 모두 모이 자 유모가 엄숙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할 일이 많으니 다들 빠릿빠릿 움직이되,서두른답시고 허둥지둥해 서는 안 된다. 중요한 날이 니만큼 실수로 그릇 하나라도 깼다가는 그 자리에 서 맨몸으로 쫓겨날줄 알아. ”
“예,유모님!”
힘찬 대답은 바짝 군기가 든 신병들의 것 같았다. 유모는 만족스러운 미소 룰지었다.
“식재료 트럭이 한 시간 반 뒤,의류가 두 시간 반 뒤에 도착할 예정이다. 조리 시간 이십 분, 식사 시간 삼십 분, 설거지와 주방 청소, 저온창고 청소까 지 이십 분 내에 모두끝내도록. 그 뒤 각자 할 일은 어제 미리 알려주었으니 착오 없도록 하고. ”
그녀의 지시대로 시간은 칼 같이 지켜졌다. 식사후 물기 하나 없이 청소 해 둔 저온창고로 신선한 식재료들이 들어왔다. 유기농 재배로 키운 과일과 채소들,당일 새벽 도축한 육류,산 채로 대형 수조에 담겨 온 어패류 등등 모 두 최상의 상태를 자랑하는 것들이 었다.
유모는 전날 삶아서 말려 놓은 앞치마와 머 릿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꼼꼼하 게 식재료를 점검했다. 벌레 먹은 채소나 이동하는 동안 죽은 생선, 미묘하게 냄새가 다른 육고기 같은 것을 따로 분류하는 작업 이 었다.
유모는 손질이 필요한 육류부터 고용인들에게 분담해 준 뒤 가장 큰 수조 앞에 섰다. 유연하게 물을 가르고 있는 장어 다섯 마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제철이라 살도 잘 오르고 힘도 좋아 보였다. 낙지와 전복도 굉장히 실했다.
“오늘은 승도 군 주 메뉴로 장어구이와 연포탕이야. 두 개 다 해산물이니 잡채는 고기랑 버섯을 듬룩 넣은 일반 잡채로 가자. 식전엔 호박죽과 샐러드 룰,육류는 갈비찜과 채끝등심구이로 하고 다른 메뉴들은 탕평채와 해파리 채,전복초, 소갈비찜,구절판, 두부부침 정도 하면 되겠다. 후식은 매실차와 과일,간식거리는 애플파이,베이비슈, 오곡쿠키,견과류면 되겠고. 자,바로 준비하자꾸나.”
수첩에 열심히 메모를 하는 주방 보조 곁으로 고용인 한 명이 다가와 섰다. 그녀의 손에는 묵직한 들통이 들려 있었다. 유모는 들통 안에서 밤사이 불려 둔 콩 하나를 씹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 였다.
“딱 좋구나. 이제 두부는 많이 만들어 봐서 눈 감고도 할 수 있지? ”
“물론입니다. 맡겨주세요.”
“간수 붓기 전에 한 번 봐줄 테니 부르도록 해. ”
유모 역시 직접 조리대에 섰다. 간식거리에 필요한 반죽들을 섞어 휴지시 켜 두고 연포탕육수를 불에 올렸다. 주방을 돌아다니며 조리 준비가 잘 되어 가는지 착실히 확인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의상 차량이 도착한 것은 늙은호박과 단호박을 으깬 것에 찹쌀가루를 풀 어 농도를 맞추고 있을 때였다. 유모는 곧장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정원으로 튀어 나갔다. 양어깨에 궤짝 하나씩 짊어진 태성문이 밝은 얼굴로 그녀를 반
“안녕하십니까,유모님.”
“응. 성문이 좋은 아침. 그런데 왜 직접 왔어? 짐 나르는 것까지 직접 할 필 요는 없잖아?”
“그야 형수님의 퍼스트가드로서 한시라도 빨리 곁에 있어 드리고 싶어서지 요.,,
유모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흥. 내가성문이 시커먼 속모를까봐? 너도 가만보면 참끈질겨. 매번 그 렇게 후려 맞으면서 포기 안 하는 거 보면. ”
태성문은 궤짝들을 땅에 내려두고는 침울하게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게요. 별이에게 물린 손가락이 아직도 이렇게 아픔니다. 어찌나 이빨 이 맵던지.”
“그야 허락도 안 받고 손을 대니 그렇지. ”
“어차피 거부할 거니까그런 겁니다. 미리 ‘꼬리라도살짝만져 보면 안 되 겠니’ 했으면 절대 곁을 내주지 않았을걸요. 기왕 맞을 거 한 번 만져보고 맞 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 유모에게 태성문이 물었다.
“유모님은 별이 분유도 먹여 보셨겠지요? 자장가도 불러주시고,예쁘다고 쓰다듬어도 주시고. 아,부럽습니다. 저도 그 예쁜 아기 어화둥둥 해 보면 소 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유모는 꿈같은 소리를 읊는 태성문의 눈길을 슬쩍 피해버렸다. 그녀 자신 도 아직 마음껏 아기를 안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었다.
갓난아기 태은경은 대단한 고집불통이 었다. 먹고 씻고 자는 것을 모두 이승 도와 함께하려 들었다. 원래 고맘때의 아기가 제 어미만 줄창 찾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녀석은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그나마 그 둘 사이에 맘껏 끼어 들 수 있는 이는 태국영밖에 없었는데, 그건 특별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일족 의 동족의식과 비슷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짐이나들여. 식사준비 전에 완벽하게 진열해 둬 야하니까.”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성문은 그림처럼 웃으며 궤짝을 도로 짊어지고 앞장섰다. 그를 필두로 짐 꾼들이 속속 정원을 가로질렀다. 엄청난 양의 의상과 소품들을 이고 가는 이 들의 모습은 마치 부지런한 일개미들을 연상케 했고,유모는 여왕개미처럼 그 들을 맘껏 부렸다. 힘 좋은 남자들이라 짐을 나르는 것도 정리도 순식간에 이 뤄졌다.
“그런데요,유모님. 뭐가 이리 많습니까? ”
정리를 끝마치고 나서야 태성문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두 분이 드레스나 보석이 필요한 숙녀분들도 아니고,이경이를 동반하는 자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태 가사내놈 아니랄까봐 하는 소리 하고는. ”
유모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문이도 집에서 헐벗고 다니지? ”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리 친목 체육대회 같은 거 하면 다 팬티 한 장 만 입고 돌아다니면서 밥 먹고 시합하고 그럽니다. 얼마나 편하다고요.”
“…패션을논하기엔 너희들이 너무 미개하구나. ”
“미개함에서 오는 원초적 인 섹시미가 있는 법이죠. ”
“그래. 난 원초적 인 것보다 고급스러운 미를 더 좋아한다만, 그냥 취향 차 이라고 해 두자. 어쨌든 우리 가주님께도 그렇겠지만 나는 오늘이 너무 기쁘 단다. 그 멀고 험한 길을 돌아와서 이제야 결실을 맺는 두 분을 내 어찌 소홀 히 대할 수 있겠니. 아무리 반짝반짝 꾸며드려도 나는 아마 아쉬울 거야. ” 유모는 대꾸하면서도 진열장 위에 반듯하게 정렬해 둔 시계들을 극세사 천 으로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이미 올 때부터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한상태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쓸모없는 노동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매우 행복해 보 였다.
“하긴. 유모님은 감회가 남다르시겠네요. 두 분 갇혀 있을 때부터 보살펴드
리셨으니.”
“그렇지.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고, 상대의 상처를 보며 본인도 상처를 입던, 그 둘 의 아픈 과거를 기 억에 담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그녀였다. 특별히 잘 해준 것도 없었건만,그 작은 호의를 가슴에 품고서 기대어 왔던 이승도의 진 심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조금만 더 잘해 드릴 걸,아니,조금만 더 일찍 본가에 들어갈걸. 그럼 그 외 로웠던 분 더 많이 안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로 심장이 쓰라렸다. 순식간에 침울함에 잠긴 그녀의 분위기 에 태성문은 힐긋힐긋 곁눈질로 눈치만 살폈다.
괜한 얘기를 꺼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던 그는 슬쩍 창문으로 가 정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크게 소리 쳤다.
“우아,유모님! 바깥이 아주 바짝 말랐습니다! 우리 가주님 커플 걸음걸음 마다 빛 방울이 튀겠는데요! 이렇게 기쁠 데가 있나! ”
유모의 정적이 파삭 깨어졌다. 그녀는 빠르게 걸어가 창문에 바짝 몸을 붙 인 채 아래를 살펴보았다. 태성문의 말대로였다. 간밤에 쏟아진 폭우의 흔적 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짐을 들여올 때만 해도 축축하게 젖어 있던 잔 디와 풀잎들도 볕에 바싹 말라 있었다. 내도록 바랐던 청명하고 맑은 아침이 었다.
“정말이네! 경사에 참으로 어울리는 날이구나! ”
유모는 소녀처럼 상기된 뺨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사 로잡았던 우울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태성문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 리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일족의 혼인이란 인간들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복잡하지 않다. 종가에 혼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일 뿐 정해진 절차 같은 것도 없다. 다만 초 대되는 이들만큼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종주와 종가의 친위대들, 그리고 종가 의 명부에 등재되어 있는 각 가문의 가주들만이 초대장을 받는다. 예외가 있 다면 혼인 당사자가 특별히 요청한 도우미들 정도다.
태국영은 동행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본인이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나서서 말릴 이가 없었던 유모와 자칭 이승도의 그림자로서 장 소를 가릴 순 없다고 우기는 태성문은 떨어내지 못했다. 태국영은 그 둘을 가 리켜 거머리가 따로 없다고 지긋지긋해했지만 그 폭언을 듣고도 둘은 매우 흡 족해했었다.
“두분은 어찜 뭘 걸쳐 놓아도 이리 근사할까요. 이 유모 뿌듯하게. ”
유모는 이승도에게 플라워 패턴이 연하게 들어간 재킷을 입힌 뒤 매우 즐 거워했다. 모델이 좋으니 자칫 촌스러워질 수 있는 아이템들도 부담 없이 갖 다 붙일 수가 있었다. 태국영이야 뼈대고 근육이고 워낙에 나무랄 데 없는 체 형이었지만,이승도가 의외로 옷걸이가 좋다는 사실에 그녀는 새삼놀라고 있 었다.
“그런데 희한하네요. 승도 군 체형이 이 정도로 좋았었나? 저번에 도련님 생일파티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
유모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도 직접 치수를 재고 옷을 골랐던 터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출산 후 몸이 편해지고 살이 좀 붙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뼈대 자체가 미세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자라나는 청 소년도 아니고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아마 별이 때문일 거예요.”
기 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오자 유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가씨가 뭘요?”
“별이가 제 심장을 재생해주면서 다른 곳에도 영향이 간 것 같아요. 그때 자잘하게 남아 있던 흉터들도 완전히 없어졌거든요. 국영이가 그러는데 굽거 나 비틀려 있던 골격도 전부 바르게 잡혔대요. ”
“머리카락이랑 피부도 더 매끈해졌지. ”
태국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유모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 니, 정확히 말하면 태국영의 머리 위에 엎어져 있는작은 아기 짐승을 바라본 것이었다. 작고까만 아기 짐승,태은경은 이승도가 이 옷 저 옷 입어보느라 바빠서 엉겨 붙을 틈이 없어지자 아빠 머리 위에 올라가 함께 이승도를 따라 다니고 있는 중이 었다.
태국영은 정수리에 늘어져 있는 아기의 코를 톡 치며 말을 이었다.
“심장만 재생해주면 되는 거였는데 요 뿌스래기가 뭘 알겠어. 제 엄마 죽을 까봐 겁난다고 잉챠잉차 무식하게 피를 나눠준 거야. 그 덕분에 우리 승도도 굉장히 싱싱해진 거지.”
“세상에,별이 아가씨가 아주 기특한 일을 했네요! ”
태은경은 제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캬앙 하고 목을 울렸다. 물론 아직 3개월 을 갓 넘긴 아기라 무슨 말이 오고 간 것인지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 애칭이 불리고 뭔가 칭찬받는 듯해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어디 등좀 봐요. ”
유모는 기쁜 얼굴로 이승도에게 청했다. 이승도는 기꺼이 뒤를 돌아 러닝셔 츠 밑단을 끌어올렸다.
“세상에… 정말이네요. 정말 감쪽같이 흉터들이 사라졌어요. ”
러닝셔츠 아래 드러난 등허리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피폐하게 말라붙 어 있던 상흔들이, 그 처절한흔적들이 정말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유모는 합 장하듯 마주 댄 두 손을 입술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요. 어찐지 우리 승도 군이 요새 지나치게 매끈하고 근사해 보인다 했더 니,그게 다 아가씨 공이 었군요. ”
감격에 젖은 목소리에 울렁거 림이 있었다. 이승도는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일 뿐 정해진 절차 같은 것도 없다. 다만 초 대되는 이들만큼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종주와 종가의 친위대들, 그리고 종가 의 명부에 등재되어 있는 각 가문의 가주들만이 초대장을 받는다. 예외가 있 다면 혼인 당사자가 특별히 요청한 도우미들 정도다.
태국영은 동행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본인이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나서서 말릴 이가 없었던 유모와 자칭 이승도의 그림자로서 장 소를 가릴 순 없다고 우기는 태성문은 떨어내지 못했다. 태국영은 그 둘을 가 리켜 거머리가 따로 없다고 지긋지긋해했지만 그 폭언을 듣고도 둘은 매우 흡 족해했었다.
“두분은 어찜 뭘 걸쳐 놓아도 이리 근사할까요. 이 유모 뿌듯하게. ”
유모는 이승도에게 플라워 패턴이 연하게 들어간 재킷을 입힌 뒤 매우 즐 거워했다. 모델이 좋으니 자칫 촌스러워질 수 있는 아이템들도 부담 없이 갖 다 붙일 수가 있었다. 태국영이야 뼈대고 근육이고 워낙에 나무랄 데 없는 체 형이었지만,이승도가 의외로 옷걸이가 좋다는 사실에 그녀는 새삼놀라고 있 었다.
“그런데 희한하네요. 승도 군 체형이 이 정도로 좋았었나? 저번에 도련님 생일파티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
유모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도 직접 치수를 재고 옷을 골랐던 터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출산 후 몸이 편해지고 살이 좀 붙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뼈대 자체가 미세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자라나는 청 소년도 아니고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아마 별이 때문일 거예요.”
기 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오자 유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가씨가 뭘요?”
“별이가 제 심장을 재생해주면서 다른 곳에도 영향이 간 것 같아요. 그때 자잘하게 남아 있던 흉터들도 완전히 없어졌거든요. 국영이가 그러는데 굽거 나 비틀려 있던 골격도 전부 바르게 잡혔대요. ”
“머리카락이랑 피부도 더 매끈해졌지. ”
태국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유모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 니, 정확히 말하면 태국영의 머리 위에 엎어져 있는작은 아기 짐승을 바라본 것이었다. 작고까만 아기 짐승,태은경은 이승도가 이 옷 저 옷 입어보느라 바빠서 엉겨 붙을 틈이 없어지자 아빠 머리 위에 올라가 함께 이승도를 따라 다니고 있는 중이 었다.
태국영은 정수리에 늘어져 있는 아기의 코를 톡 치며 말을 이었다.
“심장만 재생해주면 되는 거였는데 요 뿌스래기가 뭘 알겠어. 제 엄마 죽을 까봐 겁난다고 잉챠잉차 무식하게 피를 나눠준 거야. 그 덕분에 우리 승도도 굉장히 싱싱해진 거지.”
“세상에,별이 아가씨가 아주 기특한 일을 했네요! ”
태은경은 제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캬앙 하고 목을 울렸다. 물론 아직 3개월 을 갓 넘긴 아기라 무슨 말이 오고 간 것인지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 애칭이 불리고 뭔가 칭찬받는 듯해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어디 등좀 봐요. ”
유모는 기쁜 얼굴로 이승도에게 청했다. 이승도는 기꺼이 뒤를 돌아 러닝셔 츠 밑단을 끌어올렸다.
“세상에… 정말이네요. 정말 감쪽같이 흉터들이 사라졌어요. ”
러닝셔츠 아래 드러난 등허리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피폐하게 말라붙 어 있던 상흔들이, 그 처절한흔적들이 정말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유모는 합 장하듯 마주 댄 두 손을 입술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요. 어찐지 우리 승도 군이 요새 지나치게 매끈하고 근사해 보인다 했더 니,그게 다 아가씨 공이 었군요. ”
감격에 젖은 목소리에 울렁거 림이 있었다. 이승도는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그녀는 아마도 셋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듯했다. 이승도 역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생생하게 기 억했다.
「안녕하세요,도련님. 안녕하세요,이승도 군. 제가 오늘부터 두 분을 모시 게 되었어요. 앞으로잘 부탁드립니다.」
그것이,지옥 같았던 삶속에 작게 볕을 쬐어주던 그녀의 첫인사였다. 그날 나눈 대화,밀실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따뜻했던 그녀의 손길과 품,그 모든 것은 아직까지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승도는 짧게 당시를 회상했으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해묵은 고름의 흔적 들이 그 시절의 아픔들마저 끌어안고 함께 휘발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유모. 그런데 아까부터 이경이랑은태가통 안 보이네요. ”
이승도는 말을 돌리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유모 역시 회상을 그쳤다. 그녀 는 이승도의 암묵적 제안에 응하며 젖은 눈가를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쓸어 내버렸다.
“아까둘이 풀장에 내려갔어요. 오늘 안 그래도 정신없을 승도 군 더 정신 없게 안 하겠다면서요.”
“기특하네요.”
“그렇지요. 도련님이 가주님 안 닮고 승도 군 닮아 어찌나 다행인지. 은태 군도종주님,아니지,전(前) 종주님 안닮아무척 다행이고요. ”
“왜 또 얌전히 잘 있는 나한테 불똥이야. ”
태국영이 입술을 비틀며 불만을 내뱉었다. 유모는 흥 콧방귀를 끼며 무시 해 버렸다.
“승도 군 재킷은 이게 젤 좋은 것 같네요. 원단이랑 무늬가 아주 고급스럽 게잘 빠졌어요.”
“너무화려한 거아닐까요?”
“어머. 그럼 어때요. 이렇게나잘 어울리고, 또 오늘은두분이 주인공이잖 아요. 좀 화려해도 괜찮아요.”
“네.그럼 이걸로 할게요.”
이승도는 더 빼는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워 패턴이 들어간 옷은
단한 번도 입어본 적 없지만 그것은 그리 상관없었다. 아니,도리어 반가워해 야할 일이었다.
일단 재킷 하나라도 고른 것이 어디 인가.
“자 그럼 드레스셔츠를 봅시다. 이건 가주님이랑 같은 디자인으로 해야 하 니 두 분 다 상의 다 벗으시고 이리 따라오셔요. ”
태국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이승도가 미친 듯이 옷을 입고 벗길 반복하 는동안 내내 따라다니며 놀고 있었는데 이제 그 여유도 끝이 난 모양이었다. 태국영은 머리 위에 배를 깔고 퍼져 있던 태은경을 바닥에 내려두며 나직이 속삭였다.
“별이. 엄마랑코 낮잠자고 싶지?”
네 발로 선 녀석의 눈이 둥그레졌다. 녀석이 ‘엄마. 코 낮잠.’ 하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태국영이 은밀히 지시했다.
“그럼 이제 유모 머리 위에 올라가서 정신을쏙 빼놔. ”
[유모오? 머리?]
“그래. 그래야 엄마랑 아빠가 빨리 너랑 놀아줄 수 있어. ”
[아빠됐어. 엄마. 엄마. 코오.]
이 자식이.
태국영은 대놓고 차별하는 아이를 힐긋 노려보았으나 그뿐이었다. 녀석이 저를 라이벌로 인식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었 다. 가끔 이승도를 흠쳐가서 꼭꼭숨어버릴 때마다 책책 울며 신경질을 부려 서 열 받게 하기는 하지만,뭐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
엉덩이를 톡 치며 재촉하자 녀석이 힘껏 달려갔다. 워낙 자그매서 뛰는 모 습이 뒤뚱뒤뚱 영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닥을 박차고 올라 진열장 을 거쳐서 훌쩍 유모의 머리 위에 안착하는솜씨는까다로운 제 눈으로 보아 도 꽤 제법이었다.
“가주감이네.”
태국영은 실소하며 혀를 찼다.
영은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순이 돋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도 끝물이 었다. 꽃잎은 거의 다 떨어졌고 싱싱한 잎사 귀들만 한가득했다. 피 냄새 짙었던 겨울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겨울은 참으로 시끄러웠다. 흉흉한 화젯거 리가 끊어질 않 으며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옭아매었던 혹독한 시간들이 었다. 여러 가문이 몰 락했고 여흥재를 비롯한 많은 여 가의 일원들이 몰살하지 않았는가.
지독했던 피바람의 진상은 친위대의 역사서에 날 것으로 기록되어 봉인되 었고,부풀려지고 왜곡된 소문들은 지금까지도 일족들 사이를 종횡무진 하고 있었다.
한때 종주 후보에까지 오른 여흥재는 왜 여군호에게 버림을 받았나. 여군호 가 제 가문의 살 같은 이들을 도려내 면서까지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이 었나.
장남 여제운의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한 일이었을까. 차남 여은태의 미래를 위함일까.
태 가의 야만스런 학살은 과연 어떤 명분을 가지고 정당화가 되었나.
의혹의 중심에 선 이들이 굳게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 소문들이 걷잡 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 즈음 이례적으로 친위대가 나섰다. 그들 역시 자세한 이야기는 함구했으나 가족들을 비 열한 방법으로 위협했던 이들을 피 로써 단죄했던 태 가의 정당성만큼은 정확히 공증해 주었다.
친위대의 공언은 그 무엇보다 파급력이 있었다. 진실을 은폐하는 한이 있어 도 거짓을 말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족은 친위대가 저들의 명예 와 역사를 걸고 천명한 말들을 신뢰했고, 그것으로 태국영을 중심으로 한 악 의적 소문들은 많이 소각될 수 있었다.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어?”
마지막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낮게 비행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영
은 갑작스레 다가온 기척에도 가만 미소를 지었다. 누구인지는 돌아보지 않아 도알수 있었다.
“누이가 좋아하는 꽃나무나 하나 더 심어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
“여기서 뭘 더 심어.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
“오래 있을 거 아닌데도 누이가 이 집에서 가장 먼저 한 게 정원 꾸민 거잖 아요. 나무도 사서 심고 화분도 놓고. ”
“정원은 무슨. 마당이 너무 삭막해서 미관상그냥 들여놓은 거지. ”
말은 그렇게 해도 연희는 정원에 꽤 공을들였다. 여군호의 집에서 살 때 도 틈만 나면 정원을 돌며 꽃구경을 즐겼던 그녀였다. 지금 집은 여군호에게 최소한의 독립자금만 받아 마련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매매도 아니고 2 년 계약의 전세였다.
여군호는 훨씬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호의를 정 중히 거절한 것은 친위대 본인들이 었다.
일족의 아이들은 독립하는 순간 부모의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법이 다. 두 번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서 도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리였다.
“누이,우리 요즘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돈이나 벌어 볼까요? 인간들처럼 막 돈 벌어서 큰 집으로 이사도 하고,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 데. 어차피 다음 대 종주님이 정해지기 전까지 우리 완전 널널하잖아요? ” 뜬금없고 황당하지만 귀여운 제안이었다. 연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영의 뺨 을 꼬집고 흔들었다.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산다. 아휴 깜찍해라. ”
“…또 꼬맹이 취급.”
영은 볼멘소리를 내며 턱을 비틀어 그녀의 손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연 희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쭈. 몸뚱이 좀 컸다고 이제 누이 손길이 싫다 이거야? ”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이것 봐,보라고. 또 피해?”
“이렇게 막무가내로 찌르면 당연히 피하죠! ”
연희는 영의 몸을 여기저기 찌르며 괴롭혔고 영은 구석에 갇힌 쥐 마냥 옴 짝달싹못했다. 제 맘대로 한참 장난치고 나서야 만족한 연희는 금세 까치집 이 된 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턱짓했다.
“나와. 갈 준비 해야지. ”
“몇 신데요?”
“두시.”
“아직 많이 남았네요. 그냥 샤워하고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데 준비랄 게 뭐 있어요.”
“그래? 충호는 머 리 한다고 거울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왁스 한 통을 다 써 가며 지랄 염병을 하고 있는데. 넌 그냥 그대로 가게? ”
“아니, 만질 것도 없는 짧은 머리에 뭐 할 게 있다고요? ”
“그러게 말이다. 그놈은 어릴 때부터 뭘 그리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어쨌 건 우리가 먼저 가 있어야 하니 너도 미리 준비해 둬. ”
영은 혀를 차며 연희의 뒤를 따랐다. 그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 린 뒤 정장을 갖춰 입었을 때까지도 충호는 여전히 전신거울 하나를 전세 내 고 있었다. 제일 긴 머리카락이 1센티도 안 되는데 뭘 그리 고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영은 기다리다 지쳐서 소파에 늘어져 있는 연희의 곁에 앉았다.
“누이. 저 요즘 좀 궁금한 게 몇 개 생겼는데요. ”
말문을 떼자 연희는 눈만 힐긋 돌려 영을 올려다보았다.
“응? 뭔데?”
“그 왜,태 가에 태어난 둘째 아기 있잖습니까. ”
영의 입에서 요즘 일족들 사이에 가장 핫한 이슈가 튀어나왔다. 그 아이의 탄생은 태국영의 결혼 소식도 거의 묻어 버린 대 사건이었다. 연희도 자연스 레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태은경이. 그 애가 왜. ”
“아기 모친이 등대이니 무사히 자랄 것은 분명하고… 그럼 그 애가 성체가
되면 태국영만큼 강해질까요? ”
연희는 쉽게 답을 내지 못하고 침음했다. 사실 아이의 존재 자체가 타국에 서도 큰 화제가 됐을 정도로 충격적이었기에 그 외의 것은 깊게 생각해 본 적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시각에서 보자면,태은경은 여아로 태어나 근력만 남성의 것을 가 진 상태였다. 그것도 월등히 강하고 우수한 남성의 신체능력을 타고난 것이 다. 자연의 섭리를 크게 빗겨간 돌연변이였다.
“글쎄. 쉽게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역시 제왕의 피를 타고났으니 신체적 능력은 당연히 최상위를 자랑하지 않겠니. ”
“하지만 여자들은 전쟁 중에도 당당히 생존권을 주장할 수 있잖아요. 우리 는 그것을 당연시하고요. 그런데 만약 그 애가 커서 전쟁에 휘말리면 좀 애매 해지지 않을까요?”
“그런 문제라면 간단하다.”
앞서 조금 고심했던 것과 달리 연희는 정말 주저 없이 답했다.
“그 애는 누구에게 생존을 주장할 정도로 약하지 않을 테고,또 그 태국영 의 딸이라면 자존심 또한 만만치 않겠지. 우리들의 제왕이라는 것은 전쟁을 위해 태어나고 제 신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다. 과연 그 애를 죽 일 수 있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목숨을 구 걸할 일은 없겠지. 또한 우리들이 여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신체적 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강한 자는 마땅히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애 초에 성별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
“그렇군요. 헌데 만약 제가 그 애와싸우는 입장이 되면 조금 망설여질 것 같기는 해요. 아무래도 몸에 밴 습성이 나올 테니까요. ”
진지하고도 철없는 대꾸에 연희는 쯧 혀를 찼다.
“아서라. 그런 상황이 되면 넌 그냥 죽어라 도망치거나 방심한틈을 봐서 급소를 노려야 해. 안 그럼 네가 죽는다. 저보다 강한 상대를 두고 그런 오만 방자한 짓거리를 했다가는 네 명줄이 날아갈 테니. ”
영은 ‘저도 나름 좀 합니다만’하고 항의하려다 말았다. 태국영은 이미 여 가 의 비기인 은신을 꿰뚫었다. 누구도 그의 앞에서 완벽히 숨을 수 없다. 그에
게 모든 것을 배울 그의 아이들도 그렇게 자랄 것이 었다.
“아직 다른 대륙의 일족들에서도 여자 종주는 없었지요? ”
영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연희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없었지. 왜? 그 애가 나중에 종주가 될까 걱정이냐? ”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태국영 닮았으면 보나마나 그 성깔머리도 어느 정 도 닮았을 텐데,권력욕까지 있으면 재앙 아닙 니까. ”
“걱정 마라. 태 가놈들은 피가 짙을수록 게을러 빠졌거든. 한량 같은놈들 이 왜 그리 힘만 센지. 하늘도 참 무심하고 불공평하다니까. ”
연희가 명쾌하게 영의 기우를 정리해 주었다. 거침없는 분석에 영은 내심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종가의 기록관인 저,주경이 이 혼인을공식적으로 역사서에 남길 것입니 다. 두분,이의 있으십니까.”
주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서 이승도는 약간 낯익은 냄새를 맡 을 수 있었다. 친한 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이원표였다. 아마도 그와 시조가 같은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느껴진 친근함 때문인지, 내리 뒷목을 뻐근하게 누르던 긴장의 무 게가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승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뇨.”
태국영 역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
이승도는 슬쩍 태국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외모지만 이 남자는 거의 아버지뻘에 가까워 보였다. 인간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이승도 로서는 예쁘다고 봐줄 수 없는 태도였다. 태국영은 귀찮다는 듯 미간을 한 번 찌푸렸으나 말 잘 듣는 남편 역이 좋기에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 없습니다.”
주경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역사서를 기록했다. 그리고 새로 기록된 문 구에 연희가 인장을 찍었다. 주례사도 축가도 없이 공식적인 혼인 절차는 그 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인장을 챙겨 품에 넣은 연희가 빙긋 웃으며 이승도에게 악수를 청했다.
“축하해요. 부디 행복하게 해로하길 바랍니다. ”
“고맙습니다.”
이승도는 연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었 다.
“그대가 우리 일족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아주 좋은 기운입니다.”
“기운이요?”
“우리들 일족이 다양하듯 등대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체취나 접촉의 느낌들 이 그 뿌리에 따라 다르지요. 과거에 왕가를 몰락시킨 등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의 교감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승도 씨는 매우 산뜻하고 청량하군요. 아마 당신의 조상들은 사심(邪 心) 없이 곧은 근본을 가지고 있있겠지요. ”
“아……
생각해 본 적 없는 화제였다. 살아남은 등대의 핏줄들은 이들의 눈을 피하 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이승도 역시 친척이라는 이들을 딱 한 번밖에 본적이 없었다.
당연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네가 승도구나. ’하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 길,그것에 진한 동정과 우려가 녹아 있었던 것만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을 뿐 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승도 자신이나 어머니처럼 병적으로 숨어 살 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지만,뿌리 깊은 불안감에 그들 역시 짙은 경계가몸에 배어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났다.
이승도는 그때 그 친척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리움 같은 감상적 인 이유
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부고가 그들의 귀에 들어갔을까.
만약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경찰이 그들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고, 그럼 그들 이 아마도 장례를 치러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태국영의 부친이 어머니의 시신 마저 흔적 없이 없애 버렸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승도 씨?”
차분한 부름에 이승도는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네.’하며 반응하 자 연희는 그제야 악수를 풀며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뭐 다른 생각 하셨나 보네요. 두 번이나 불렀는데. ”
“죄송해요. 혹시 무슨 말씀을……
“종가에서 진행되는 정식 혼인 절차는 끝이 났어요. 태 가주와 함께 돌아가 셔도 좋고,더 즐기다 가도 좋다고 말씀을 드린 참이에요. ”
“아… 생각보다 절차가 훨씬 간단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네.살펴가세요.”
연희는 가볍게 목례한 뒤 친위대를 이끌고 연회장을 나갔다. 눈으로 그들 을 배웅하던 도중, 이승도는 입구 근처에서 휴대폰으로 통화중인 이원표를 발견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승도는 반갑게 웃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고, 그 역시 빈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본격적으로 그에게 알은척을 하기 위해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 려던 때 였다. 태국영이 한 팔로 어깨를 감싸 곁으로 끌어당겼다.
“승도야. 방금 뭐였어?”
이승도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뭐가?”
“새신랑 옆에 놔두고 열심히 딴 생각하느라 아무 소리도 못 들었었잖아. 그 거 뭐였는데?”
태국영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들리에 조명의 빛 가루를 바래
게 할 만큼 근사한 미소였다. 그러나 가볍게 휜 눈매 속 눈동자는 짙은 정적 에 잠겨 있었다.
“별거 아니었어.”
저에게 아픈 기억은 그에게도 독이었다.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 러나 긴 눈칫밥 세월을 살아온 태국영을 완전히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 다.
“연희 씨가 옛날 얘기하니까 예전에 한 번 본 친척들 생각이 나더라고. 뭐, 잘지내겠지.”
그래서 적당히 사실을 섞어 대답했다. 태국영은 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기 울였다. 역시나 조금은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찾고 싶어?”
그가 적당히 받아쳤다. 이승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평범하게 잘살고 있을 텐데 뭐하러. 딱히 그립거나한 것도 아니고. ”
“생각 바뀌면 말해. 전국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줄게. ”
“괜찮대도 그러네. 아,원표 씨 통화끝났나 보다. ”
때마침 이원표가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어서 이승도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아까 눈인사를 나눈 것 때문인지 먼저 다가가기 전에 이미 그의 걸음이 이쪽을향하고 있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처럼 표정이랄 게 별로 없는,잘 세공된 유리 가면 같은 얼굴이 었다.
“건강해 보여서다행입니다.”
“네,덕분에요. 제가 그날 정신이 없어서 고맙단 말씀도 제대로 못 드렸네 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공치사같은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잊으셨더라도상 관없습니다.”
“그럴 수 있나요. 원표 씨 덕분에 저도 제 둘째 아이도 살 수 있었는데요.
-아참,얼마 전에 원표 씨 댁에도 경사가 있었다면서요. 아내분이 임신하셨 다고.”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시월에 태어날 예정입니다.”
“이제 두 달 남짓 되었겠네요. 아기 태어나면 소식 꼭 전해 주세요. 별건 아
니지만 출산 선물이라도 보내 드리고 싶어서요. ”
“네.그렇게 하겠습니다.”
“아하, 우리 이 가주 아빠 되는 건가? ”
대화에 불쑥 끼어든 것은 내내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남강 우였다. 그는 양손에 양주가 가득 든 샴페 인 잔을 들고 있었다.
“딸? 아들?”
“아직.”
“그래. 뭐,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 건강하게 나오면 되는 거지. ”
남강우는 들고 있던 잔 두 개를 태국영과 이승도에게 내밀었다.
“식은따로 안 하나?”
둘은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아 들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태국영 이 했다.
“식은 무슨. 그냥 다음 주말에 친척들 모아 놓고 밥이나 먹기로 했어. ”
“지인 초대는 안하고?”
“뭐, 그 자리에 내가누구를 부르건 토 달놈은 없겠지만, 이원표는 몰라도 너는 안돼.”
“뭐냐. 은근히기분 나쁘네.”
“우리 가문 애들 혈기가좀 심하게 넘치거든. 너는 시비 붙기 딱좋은 타입 이고. 네가 걸어오는 싸움 마다할 놈도 아니잖아? ”
“흠. 아니라곤 못하겠군.”
여흥재 패거리와 붙었던 날, 이틀 내내 가문의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다녔 던 태호연은 후에 보고를 하며 치를 떨었었다. 그 무식한새끼들,머리에 든 것도 없는 새끼들,피에 미친 악귀 새끼들등등 얼마나 많은폭언이 쏟아졌었 던가. 다 스러져 가는 불씨 하나만 던져 줘도 온몸을 불태울 바보 놈들만 모 인 자리에 투견을 데려다 놓는 것은 꽤 큰 리스크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대신 우리끼리 자리 한번 만들어요. 강우 씨도 그렇고 원표 씨랑 재희,영 애 씨, 제운 씨까지 다 초대하고 싶은데… 국영아, 괜찮지? ”
“그런 거라면 안 될 거 없지. 여제운이한테는 내가말해 볼게. ”
새로운 여 가의 가주로서 참석했던 여제운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내내 군 중 속에 있다가 친위대가 사라질 때 함께 연회장을 나갔다. 축하 인사를 받느 라 바쁜 와중에도 종종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면 그가 건조한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짧고 강렬했던 열병은 지나가고 남은 것은 흐리게 남은 상흔 뿐이었다.
그는 마음의 정리가 끝이 난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냉정한 머릿속에서는 말이다.
“건배할까?”
태국영이 콧등을 껑긋거리며 잔을 내밀었다. 멀리서 대포 같은 카메라로 열 렬히 현장을 담고 있던 유모가 낌새를 눈치채고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승도는 그에게 건배하기 전 태성문에게 축사를 청했다. 그림자처럼 조용 히 곁을 지키던 태성문이 기꺼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 형수님. 오래오래 건강하게,행복하게 사십쇼. ”
“그래.”
“고마워요,성문 씨.”
쨍.
잔이 부딪쳤다. 레몬 빛깔의 샴페인이 조명을 머금고 찰랑거 렸다. 유모의
카메라가 그 모습을 생생히 담아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