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산장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태 가의 일원들은 그 때부터 꽤 진지해졌다. 더 이상 웃지 않았고 농담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표적들의 부리를 봅 아내기 위해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는 데에만 열성을 다했 다. 여 씨 놈들도 용서가 안 되었지만,그보다는 2차적으 로 밀려난 최 가 놈들 명패를 부수는 것이 더 간절했기 때 문이었다.
안 그래도 전투력이 바닥나 있던 사냥감들은 무력하게 몰락해 갔다. 여홍재가 저 혼자만 비밀을 간직한 채 사로 잡히는 바람에 대비하거나 도망칠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 이었다. 심지어 저들이 여군호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죽어가는 놈들이 하나같이 ‘종주님께 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여 가랑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등등의 갖가지 허황된 소리를 지껄여댔 다. 여유롭게 놀던 때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절망을 떠 안기며 즐기기도 했으나 신속과 정확함을 목표로 한 이후
에는 일언반구 없이 족족 머리를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여 가에서 강제 독립을 당한 이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일 족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태일에서는 CEO와 고위간부직을 포 함한 소속 직원들 모두에게 임시 휴무를 발표했다. 폭설 로 인한 통근버스 운행의 어려움,원활하지 못한 대중교 통,자차 운행자들의 빙판길 사고 등을 이유로 들었다.
물론 속사정은 그와 다르다.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떠나지 못했던 청년들이 극렬하게 반발하며 단체로 휴가 를 낸다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임시휴무를 발 표한 회사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요구는 쉽게 받아 들여졌다.
정오의 태양이 빙판길을 조금씩 녹이고 있을 무렵,깡 패를 자청한 젊은이들은 다시 모였다. 태호연은 그들을 위 해 관광버스를 4대나 대절했다. 피 냄새를 풍기는 이들이 완전히 해산하기까지는 고작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홍재를 위시한 여 가와 최 가는 그렇게 허무하게 스 러졌고,소문은 빛처럼 빠르게 퍼져 전 일족을 들썩이게 했다. 태 가에서 공식 발표를 내놓기 전까지 온갖 해괴한 소문이 포자처럼 떠돌며 증식해 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낭 설에 가까운 근거 없는 소문들이 대체로 진실의 과녁을 꿰
뚫었다는 것이었다.
“인장이 친위대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화제 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여군호는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그래?’하고 물었다. 별로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어차피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 었다. 여제운은 힐긋 여군호의 손에 들린 책의 표지를 훑 었다.
『패션디자이너의 첫걸음. 용어부터 알고 가자!』
그럴 줄 알았다. 여제운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지었다. 일주일 전 여제운에게 가주 승계를 발표한 이후부터 여군 호는 더 홀가분하게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바로 패션 상식과 의복 디자인에 관해 배우는 것이었다. 아내 가 좋아하는 취미를 화두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친위대가 더 많이 개입한 것으로 소문이 와전되어 있 는데 입장 발표는 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뭐하러. 이미 인장은 넘어갔고 나는 더 이상 종주가 아 니다. 그들의 오해를 정정해 줄 이유가 없지. 멋대로 떠들 라고 해라. 어차피 하나의 소문을 누르면 다른 하나가 반 발하듯 튀어 오르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이제 일어나시죠. 슬슬 나갈 준비 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여군호는 그제야 책을 완전히 내려두며 고개를 꺾어 올 렸다. 모르는 용어들을 굳은 머리에 집어넣느라 무섭도록 집중한 사이 2시간이 훌쩍 가 있었다. 여제운이 한 걸음 물러서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이미 한참 전에 한복을 다 준비해 둔 상태 로 기다리고 계시니 이만 가시죠.”
“그래. 가자.”
여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찾아갔다. 한수연은 이미 드레스룸에서 한복을 입은 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보느라 정신을 팔고 있었다. 광택 있는 진줏빛 저고리 에 짙은 남보랏빛 치마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마치 새 옷을 선물 받은 아이 같았다. 닷새 전에 완성 한 뒤 수도 없이 입어 봤으면서도 매번 싱글벙글이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한복이 기대보다 더 잘 나와 기븐 듯 했다.
“어메 군호 씨 왔어요? 이리 와서 얼른 입어요. 제운이
도.,,
여군호와 여제운은 각각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한수연
은 직접 두 남자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며 연신 부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남편이랑 아들 인물 참 훤하네. 뭘 입혀도 이렇 게 근사해.”
“저는 어머니만큼 어울리진 않네요. 영 어색한 것이.”
“그래도 이런 날 한 번씩 입어보면 좋잖니. 은태랑 이경 이 입은 것도 얼른 보고 싶네.”
한수연은 제 식구들과 이승도의 식구들 것까지 한복을 짓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배운 적 없는 자수만 따로 전문가에게 맡긴 것을 제외하고는 모 두 그녀가 손수 지어 돌렸다. 이승도는 늘 그랬듯 실제로 입은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그 사진들 모두 인화해서 예쁘다,예쁘다 마르고 닳도록 그리 들여다보더니만 그것 도 영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들 가족은 1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눈송이가 펄 펄 날리는 명절 당일이었다. 도로 위에서 얼마나 시간을 허비할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늦는 것보다는 빠르게 도 착하는 것이 나았다.
여제운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두 부부가 나란히 뒷좌석 에 올랐다. 교통정체는 예상대로 심각했다. 차량의 수가 많은 것보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탓이 컸다.
올해는 참 눈 소식이 많았다. 억센 결정들이 전면유리 를 수시로 덮어 시야가 지독히 제한적이었다.
느리게 굴러가는 차가 붉은 등 앞에서 멈추었다. 와이 퍼가 빠르게 닦아내는 시야 너머 저만치 희부연 담배 연기 가 어른거렸다. 여제운 자신이 최초로 샀던 담배는 반 갑 도 채 피우지 않고 버렸다. 그 이후로 다시 사본 적도 없었 다-
담배를 종종 피우던 태국영을 떠올렸다. 연기가 폐부 를 들쑤시며 차오르던 뜨거운 열기,그것은 제가 아니라 그에게 더 잘 어울렸다. 저는 그처럼 전 생애를 걸고 하나 만 보고 질주하는 사랑은 평생 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못 믿을 일이네. 여기저기 떠벌려 주 고 싶은데 아무도 안 믿어줄 것 같아.」
남강우의 뒤를 이어 산장에 도착했던 신영애가 혀를 차 며 말했었다. 그녀의 기가 찬 속내를 저도 충분히 공감했 다. 짝 잃은 짐승이 분노하고 비통해하는 것이야 특별할 것이 없지만,그가 아기처럼 온순하게 안겨 응석을 부리 는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언제 돌아갔는지는 잘 모른다. 여제운 자신은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신영애와 함 께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산 중턱의 정자에 포박
되어 있는 여홍재에게 신영애를 데려다주었다.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였다. 여홍재는 그 때 이미 정신이 무너져 헛소리만 내리 옮고 있었는데,신 영애는 그 모습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동정도 베풀지 않았 다.
그녀는 여홍재를 알몸으로 만들었고,신 가의 남자들 이 양쪽에서 그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 모양이 마치 겁 간당하는 자의 그것이라,여홍재는 그때 조금 정신이 돌아 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주를 방지하기 위 해 감시자들이 심하게 고문을 해 놓은 탓에 그것조차 벗어 날 수 없는 상태였다.
신영애는 장갑 낀 손으로 여홍재의 성기를 잡아 봅았 고,피가 튀자 더럽다며 가랑이를 구듯발로 짓이겼다. 발 악하는 놈의 혀를 자르고 재생해서 튀어나온 성기를 역겹 다며 다시 난도질했다. 여제운 자신조차 움찔해서 뒤로 물 러날 정도였으니,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더 기억하 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윤봄이의 마지막은 말로만 전해 들었다. 그녀는 혀가 잘린 상태로 열흘 동안 고문을 당했고,원한 깊은 태국영 이 직접 사지를 잘랐다. 재생력은 사라졌어도 인간처럼 쉽 게 죽지는 않아 그 상태에서도 바닥을 기며 피눈물을 흘렸
다 했다.
태국영은 그녀를 태호연에게 넘기고 손을 떼었다. 태호 연은 그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 다. 숨통을 끊어주는 것으로 안식을 주지 않았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일찍 나오길 잘했다. 금방도착하겠네.”
뒷좌석에서 넘어오는 모친의 목소리에 여제운은 상념 을 털어냈다. 그녀의 말대로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리 연락을 주자는 말에 핸즈프리를 켰을 때 였다. 때마침 태국영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와 받았다. 《혹시 오고 있는 중입니까?》
여제운은 힐긋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태국영의 휴대 폰 번호가 맞았는데,목소리는 태성문의 것이었다.
“넉넉히 십 분 정도 걸릴 듯한데.”
《홈…… 좀 아까우리 형수님 산통이 시작돼서 가주님 이랑 같이 별이 아기씨 낳으러 산실 들어가셨습니다. 죄송 합니다만 내일이나 그쪽에서 편한 다른 날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사로군. 그럼 저녁쯤에 다시 연락을 하도록 하지.” 《예. 형수님께서 미안하다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살 펴 가십시오.》
만남이 무산되었으나 그들 가족은 기븐 마음으로 차를
돌렸다.
등대인 모체와 짐승 아기는 궁합이 매우 좋았다. 진통 부터 출산까지 1 시간여가 소요되었는데,이는 일족의 출 산을 통틀어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태국영은 변이한 채로 이승도의 출산을 도왔다. 세상 빛을 처음 보는 아기가 저처럼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빠를 보며 안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승도는 꼼꼼하게 소독해서 더운물을 받아 둔 욕조 안 에서 출산을 했다. 태국영은 중간중간 이승도의 온몸을 할 아주며 격려했고,아기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는 직접 물어 더 수월하게 나오도록 살살 끄집어내 주기 도 했다.
별이는 태어나자마자 이승도의 품에 가장 먼저 안겼다. 태국영이 그 곁에서 아기의 양막을 까슬한 혀로 할아 벗겨 내고 탯줄을 자르는 동안,녀석은 잘 뜨지도 못하는 눈으 로 이승도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울지 않는 아기가 걱정이 되어 ‘별아.’하고 부르자 익숙한 목소리에 녀석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캬앙,작은 울음이 화답하듯 돌아왔 다. 그제야 이승도는 환히 웃었다.
“안녕,아가. 만나서 반가워.”
캬아,녀석이 다시 대답하며 꼬리를 톡톡 흔들었다. 아 기는 그의 주먹보다 작아 두 손으로 충분히 감싸졌다. 이 승도는 유모가 받아 온 깨끗한 물에 직접 아기를 씻겼다. 소독한 타월로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낸 뒤 새 담요로 돌 돌 감아 안았다.
이승도는 멀정한 모습으로 직접 산실을 걸어 나왔다. 뒤틀리고 벌어진 뼈와 근육들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와 있 었다. 제 어미 피 냄새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피비린내를 맡고 재생력을 나눠주었 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몸에 나 있던 자잘한 흉터들마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는데,이것은 좀 더 후에 알게 되는 일이었다.
태이경과 여은태는 아기를 안아보지 못해 안달이었지 만,예민해져 있는 아기에게 조용한 곳에서 분유를 먹이 는 게 우선이었다. 이승도는 아이들에게 나중을 기약하고 태국영과 함께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곧 유모가 젖병을 들고 들어왔다. 젖병 안에는 초유 분 말과 분유를 섞어 따끈하게 탄 아기 우유가 가득 담겨 있
“별아. 맘마 먹자.”
품에 안고 젖병을 물리는데,담요 밖으로 머리만 나와
있는 별이가 입은 안 대고 어리둥절 젖병과 이승도를 번갈 아 보았다. 비스듬히 앉아 지켜보던 태국영이 픽 웃었다.
“네 엄마 젖 안 나오?. 굶어 죽기 싫으면 그냥 먹어.”
느낌 탓인지 별이가 미간을 얼핏 찡그리는 듯했다. 이 승도도 한마디 거들었다.
“응.이거 먹어야 돼.”
별이는 조금 뚱하게 있다가 마지못해 혀를 내밀어 젖꼭 지를 할았다. 맛은 마음에 들었는지 얌전히 입을 벌려 젖 병을 물었다. 빠는 힘이 강하고 야무졌다. 분유를 뚝딱 해 치운 녀석은 금세 골골거리며 잠이 들었다. 이승도와 태국 영도 함께 낮잠에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축복의 가루처럼 눈꽃이 하얗게 날렸다. 평화 롭고 나른한 햇살이 오수에 젖은 방 안의 풍경을 비추었 다. 이때까지만 해도,이 아기가 훗날 유구한 일족의 역사 에 무시무시한 돌연변이로 기록될 것을 아무도 예상치 못
올해 정월 대보름은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오전부터 볕 한 줌 내리쬐지 않았고 내내 칼바람이 불었다. 송재희 는 구름 뒤로 숨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했다.
보통 남강우는 땀이 나더라도 체온이 더워 금방 마르 곤 했는데,그날은 마를 틈도 없이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괴로워했고,송재희는 그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싶 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접촉을 삼갔다. 간혹 송재희의 손을 잡았다가 떼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제 몸을 사납게 조여 오는 통증보다 여은태의 발작을 세심하게 주시하느 라 신경이 굉장히 곤두서 있었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이승도는 모두를 위해 여은태를 송재희에게 부탁했다. 대보름의 지독한 성장통을 처음 맞 는 신생 짐승은 등대의 품에 내내 안겨 있어도 고통을 다 떨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빚이 있었던 송재희 는 무사히 돌려받은 제 아기를 유모에게 맡기면서까지 기 끼이 수락했고,여은태 역시 그 결정에 수긍했다.
그래서 남강우는 지금 바닥을 치는 컨디션으로도 여은 태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여은태의 발작은 상상 이상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벽에 몸을 부딪치고 수시로 괴롭게 울어댔다. 송재희는 그 울음에 동화되어 몇 번이나 녀석에 게 다가가려 했지만,태국영이 그러했듯 남강우 역시 그것 을 제지했다.
“지금 상태에서는 손을 대도 소용없다. 어차피 그때분 이야. 계속 안고 달래주는 것이 최선이지만,그렇게 되면 네가 위험해져.”
“하지만 승도 오빠는 내내 아기를 안아준다고 하지 않 았어요? 아직 어려서 가능한 건가요?”
“그 아기는 이미 어미로서 이승도 씨를 완전히 각인했 다. 간혹 이성이 다 날아가고 본능만 남는 순간에도 제 어 미를 공격하지는 않아. 완벽하게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대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너는 저 애의 어미도,저 애의 등대도 아니다. 지금 네가 목숨을 걸고 저 애를 끌어안고 버티면 저 애가 너를 암컷으로 각인할 가능성도 있어. 그 러니 관둬. 나한테 새파랗게 어린놈을 라이벌로 붙여줄 생 각이 아니라면.”
남강우의 차분한 설명에 송재희는 침울해졌다. 괴로워 하는 아이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무기력해지는 것이었다.
“달이 넘어가면서부터 조금씩 발작은 하강 곡선을 그
릴 거다. 그때부터 조금씩 쓰다듬어주면 돼.”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남강우의 말대로 달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여은태의 몸부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 애는 영리하게도 제가 이성을 움켜쥘 수 있을 때가 되자 스스 로 다가왔다. 초점 흐린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녀석이 허벅지에 고개를 대고 풀썩 쓰러졌다.
“잘했어,은태야. 이제 누나가 옆에 있어 줄게.”
【응. 고마워,누나.】
가느다란 손이 머리부터 쓰다듬어 나갔다. 청량한 진통 제가 혈관을 타고 빠르게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여은태 는 느리게 깜박이던 눈을 완전히 닫았다. 젖빛 여명이 얼 어붙은 도시를 비추고 창가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남강우 와 송재호I,그리고 여은태는 실컷 흙장난한 아이들처럼 한 데 뒤엉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잠에서 깬 것은 해가 중천을 넘고도 한참이 지 나서였다. 여은태는 일어나자마자 씻고 옷을 입은 뒤 곧 장 그 집을 나섰다. 이제는 능숙하게 택시를 잡을 줄 알았 다. 카드로 요금을 지불하는 법도 배웠다.
여은태는 태국영 집의 대문을 훌쩍 뛰어넘을 때부터 안 의 기류가 몹시 요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재발리 달려가 현관에서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주
는 고용인의 얼굴에서도 혼이 나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여은태는 제가 없는 사이 무슨 변고가 생겼나 싶어 태 이경의 냄새를 찾아 뛰었다. 녀석은 태국영과 이승도의 방 에 있었다. 마음이 급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안 에는 태국영과 이승도,태이경분만 아니라 유모와 태호연 과 태호연의 가족들,태 가의 노인들,그 외 태 가 일원들 까지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이승도가 안고 있 는 별이를 넋 놓고 보는 중이었다.
“뭐,뭐야? 무슨 일 있어? 별이 아파? 뭐야,뭔데?”
여은태는 초조해하다가 태이경을 번쩍 안아 들었다. 녀 석을 직접 지목해서 무슨 일이나 채근하니,태이경은 크 고 말간 눈을 한참 소처럼 끔뻑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형아……
“응. 도대체 뭐야?”
“별이 있잖아……
여은태는 잔뜩 긴장한 채 태이경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대보름을 무사히 넘긴 아이도 훌쩍 컸는지 전보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는 녀석의 얼 굴에 차츰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녀석이 집 안을 패닉에 빠뜨린 사실을 크게 폭로했다.
“별이가,여자애래! 여동생이야! 형아,우리 별이 여자
애였어!”
여은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하여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대보름의 성장통을 무사히 견뎌낸 별이는 두 배로 커져 서 주먹 두 개만 한 크기가 되었다. 엄마의 손길이 아니면 젖병을 무는 것도 씻는 것도 거부하는 까다로운 녀석이 라,이승도는 밤을 지새웠음에도 땀 흘린 아기를 안고 욕 실에 들어갔다.
녀석의 전용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씻기며 틈틈이 귓속이며 항문이며 발가락의 상태를 살펴봤던 건 수의사 로서의 직업병이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가랑이를 보 았다가,그만 행동을 딱 멈추게 되었다. 생식기와 항문을 아무리 보아도 수컷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국영이 워낙 남자아이라고 장담을 했던 터라 걱정부 터 앞섰다. 혹시 생식기가 아예 없는 기형으로 태어난 것 이 아닌가 싶었던 거였다. 이승도는 혼이 나가 아기를 타 월로 감싸 안아 들고 태국영을 찾아 헐레벌떡 뛰어갔다.
이 아기가 생식기가 이상하다고,분명 수컷인데 암컷 같다고,떨면서 설명했다. 태국영은 눈썹을 꿈틀 올리더 니 아기의 목덜미를 잡아 눈앞으로 가져왔다. 아기가 칵칵 거리는 것도 무시한 채 그렇게 한참을 빤히 보던 그가 한 마디 툭 내던졌다.
「별일이네.」
태국영도 조금 기묘한 표정이었다.
「등대는 원래 돌연변이를 많이 낳았지. 이런 경우는 처 음이지만.」
「■■■설마 우리 별이 고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당연히 없지. 암컷이니까.」
이 나라분만 아니라 전 일족을 통틀어서도 처음이라고 했다. 이승도는 얼이 빠져서 별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별 이가 나아,하며 고개를 쭉 올렸다. 작은 앞발로 가슴을 톡 톡 치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역시 겉모습으로는 암수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크고 뜰 뜰해 보이는 눈을 친근하게 깜박이는 모양이 그냥 마냥 예 뼜다. 별이는 원래 예뼜다.
태국영은 태호연에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 크 게 놀란 태호연은 태 가 전체에 이 사실을 퍼뜨렸다. 그래 서 너나 할 것 없이 태국영의 집을 방문했고 일족 역사상
처음으로 제왕의 피를 타고난 여자아이를 눈에 담느라 바 빴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수십 쌍의 낯선 눈에 둘 러싸인 별이가 매우 짜증을 내며 자꾸 이승도의 셔츠 속으 로 숨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간 두I,이승도는 별이를 두 손으로 달랑 들어 올렸다.
“우리 별이 아가씨였구나.”
【으응!】
녀석은 그냥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꼬리가 허 공에서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승도 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기를 품에 안았다.
그날 이른 저녁,소식을 들은 남강우도 송재희와 함께 오랜만에 놀러 왔다. 송재희의 품에는 갓 돌을 넘긴 아기 가 안겨 있었다. 최명욱이 배돌려 두었던 바로 그 아기였 다-
남강우는 산장의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아기를 찾아 왔 다. 혹여 최명욱이 죽은 아기를 살아 있다고 거짓말을 했 거나 그 사이 변고가 생겼으면 어쪄나 싶었는데,의외로 아기는 건강하게 크고 있는 중이었다. 보모들도 고용인들 도 평범하고 착한 인간들이었다.
송재희는 이승도에게 다가가 아기의 손을 대신 흔들어
주며 별이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별이는 드물게 호기심을 보였다. 이승도가 녀석의 앞발을 잡아 아기의 작 은 손바닥에 대 주었다. 별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마 닿는 느낌이 이승도와 비슷해서였을 것이다.
“은경이 인사할까? 연주 언니,안녕.”
별이의 이름은 여은태와 태이경의 이름을 한 자씩 따 서 태은경으로 정해졌다. 원래 세 개 정도 남자아이 이름 이 후보로 올라 있었으나 당연히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 렸다. 이승도는 부드럽게 웃으며 태은경의 앞발을 대신 흔 들어 주었고,별이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작게 주둥이를 벌 렸다.
【앗녀엉.】
몹시 놀랐다. 별이가 순순히 낯선 이를 받아들인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말없이 지켜보던 여은태는 좌절했고 유모 역시 비틀거렸다. 손만 대도 싫다고 난리를 쳐서 여 직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까르르,아기 가 팔다리를 흔들며 웃었다. 어쩐지 별이도 웃고 있는 듯 했다.
두 아이는 그때부터 깊은 유대감으로 서로를 각인했다. 태은경은 언제나 남연주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고, 남연주는 따뜻하고 상냥한 성품으로 태은경을 돌보아 주
었다. 각자 가정을 이루고,서로의 아기들이 생기고,그 아기들이 독립을 하고 나서도 그들은 진한 우정으로 말년 을 함께 했다.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영웅이잘지내지요?》
“네. 요샌 심심함을 못 참았는지 개들이랑 조금 놀더라 고요. 애들이 다 순해서 영웅이가 마음을 조금씩 여는 것 같아요. 이 선생님은 어때요? 몸은 좀 괜찮아요?”
《아휴.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주 동물원에 뼈를 갈아 넣는 기분입니다.》
이재혁은 수더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말은 그렇게 하 지만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근 닷새 동안 실 종되었던 이재혁은 많은 사람들의 간절했던 바람대로 무 사히 돌아왔다. 그는 산속에서 눈을 떴다고 했는데,자신 이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는 닷 새 동안 무얼 했는지도 기억을 못 했다. 바람피우고 와서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의심한 아내와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는데,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아내의 걱정
섞인 분노는 풀렸다고 했다.
《발리 사람 좀 구해달라고 해도 원장이 영 시큰둥하네 요. 이대로 저 혼자 계속 뼈 빠지게 일하게 하려고 수작 부 리는 것 같아요.〉〉
“그 신입 수의사분은 아직도 행방불명인 건가요?”
《아,그게……■》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남자를 기억하며 묻자,이재 혁은 대답을 흐렸다. 왜 그러냐 묻자 그는 한숨을 푹 지었 다.
《행방불명이 아니라 도박장에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 원래부터 도박 중독이었다고 하더군요. 사채업자들 이 병원으로 쳐들어와서 어찌나 난장을 피우고 갔는지. 이 미 무단결근으로 해고 처리됐다고 말해도 도통 안 들어서 애 좀 먹었습니다.》
별일이 다 있다며 이승도는 혀를 찼다. 그때 배 위에 올 라와 꼬물거리고 있던 태은경이 캬앙,하고 앞발바닥을 비 벼댔다. 이승도는 검지로 톡톡 녀석의 정수리를 매만져주 며 이재혁에게 말했다.
“저 이만 할 일이 있어서요,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놀러 갈게요.”
《예. 꼭 오셔서 술 한잔 합시다. 미리 연락 주시면 사육
사들까지 싹 다 약속 비워 두고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전화를 끊고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엄마가 언제 제게 관심을 주려나 기다리고 있던 아기 짐승이 폴짝 뛰어 가슴 에 올라탔다.
【엄마아.】
“응,우리 별이 왜?”
【같이 코자. 코오.】
방금 분유를 먹였더니 금방 눈꺼풀이 무거워진 모양이 었다. 재워 달라 칭얼대는 아이는 그저 천사 같았다. 이승 도는 아기를 안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녀석은 금세 가르 릉거리며 콜콜 잠에 빠졌다. 24시간 중에 한 20시간은 이 렇게 자는 듯했다. 아기가 깊이 잠들고 나서야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여은태와 태이경이 살금살금 접근했다.
“아우 귀여워.”
태이경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검지로 살짝 아기의 등 허리를 쓸어내렸다. 여은태도 꼬리 끝을 살살 매만졌다. 깨어있을 때는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 꼬마 아가씨라 이렇 게 잠들었을 때가 아니면 만져볼 틈이 없었다. 그나마 태 이경이 지나치게 시무룩해 있으면 선심 써준다는 듯 안겨
주긴 하지만 그것도 채 1 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어디 애 떼놓고 결혼식은 가겠나.”
태국영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힐긋 뒤를 보니 그 는 돌아누운 채 데운 인절미처럼 푹 늘어져 있었다. 어쩐 지 삐친 것 같은 모습이라 조금 찔렸다. 이승도는 조심히 아기를 매트리스에 내려두고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젖먹이이니까 이해 좀 해줘.”
“좆같이 속 좁은 놈이라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 자나 깨나 별이 별이,옆에서 열심히 페로몬 풍기는 지 서방은 두 달 넘게 안중에도 없지.”
이승도는 미안함에 실없이 웃었다. 태국영이 눈썹을 꿈 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웃음이 나와?”
“아니. 그냥 귀여워서.”
그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지는데 좀체 웃음이 멈추지 않 았다. 태국영은 결국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진짜 화가 난 듯한 표정에 이승도는 그제야 당황해서 멈칫 상체를 세웠 다.
“어디 가?”
“알아서 뭐하게.”
태국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찬 바람이 휘날렸다. 크게 눈을 끔뻑인 태이경이 작게 중얼거
“아빠 진짜 삐쳤나 봐……
“그러게. 선생님한테 저렇게 싸늘하게 구는 거 처음 보 네.,,
이승도의 당혹은 깊어졌다. 심술궂게 옆에서 찌르면서 시선을 유도하는 게 태국영의 방식이라 이런 적은 처음이 었다. 이대로 두면 골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승 도는 얼른 일어났다.
“애들아. 별이 좀 보고 있어. 나 국영이 좀 달래 주고 올 게.,,
아이들은 착하게 잘 다녀오라고 했다. 이승도는 방문 을 열고 나갔지만 태국영이 어디로 간지 알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를 눈치채고 여은태가 나 와 친히 서재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발걸음은 급했다. 이 승도는 노크 없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태국영은 소 파에 드러누워 전투적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던 참이었다.
“국영아. 화났어?”
조심스레 묻는 말에도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심지 어 눈길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이승도는 다가가 태국영의 곁에 걸터앉았다.
“미안해. 너 토라진 거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태국영은 책을 노려보는 그대로 뭐라 중얼거렸다. 정확
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강 ‘씨발. 귀여울 게 따로 있 지.’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얼렁뚱땅 풀어줄 수 있는 범위 는 넘어서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승도는 잠시 고민하다 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나 막 닿으려던 입술은 그의 손가 락에 가로막혔다.
“가. 지금은 짜증 나니까.”
태국영은 가볍게 이승도를 밀어내고는 들고 있던 책으 로 얼굴을 덮었다. 벽을 세운 느낌이었다. 이승도는 밀쳐 진 그대로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스킨십이 거절당한 것 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운함보다는 미안함이 앞섰다. 그 간 의젓하게 잘 참아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던 거였다.
눈만 뜨면 엄마부터 찾는 갓난아기를 품에서 떼 놓을 수가 없어서 이해해 달라고만 말했었다. 그는 말없이 제 곁을 멤돌며 함께 있어 달라고 어필해 왔지만,아기가 보 채는 걸 그냥 둘 수 없다는 핑계로 모른 척만 했었다.
“국영아. 나 좀 봐.”
이승도는 부드럽게 책을 치워내며 다시금 말을 걸었다.
“많이 섭섭했어?”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용서해 줄래?”
태국영은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이승도는 주의를 기울여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 열심히 만져줘도 기분이 안 풀릴 것 같아?”
손끝으로 검은 머리칼을 살짝 홑어놓았다. 태국영의 눈 꺼풀이 조금 내려앉았다. 그에 용기를 얻어 다음으로 뺨 을 만졌다. 손목이 붙들렸다. 또 밀쳐지는 거라고 생각했 는데 그건 아니었다.
태국영은 고개를 비틀었고 푸르게 뛰는 동맥 위에 입술 을 묻었다. 뜨끈한 습지가 그 위를 힘껏 발았다. 그가 만 든 붉은 자국은 자상처럼 날렵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파헤친 그의 눈동자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 에게서 안 어울리게 옅은 우울감을 발견한 이승도는 적잖 이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의 외면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 나,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도 무의 식중에 방치된 그가 마음에 내내 걸리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그의 맨 상체에 아예 올라타서 그에게 키스했 다.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쳤지만 태국영은 거부 없이 입 을 열었다. 힘껏 혀를 섞고 떨어져 나갔을 때,그의 팔은 가볍게 둘러오고 있었다.
“국영아. 우리 섹스하자.”
태국영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그건. 또 동정이야?”
이승도는 그의 손을 가져와 팽팽하게 발기해 있는 중심 을 비볐다. 태국영의 눈길은 묘해졌다. 잠시 머물렀던 불 쾌감은 사라졌다.
“키스하니까 섰어. 국영아,하자. 응?”
훤히 드러나 있는 그의 유두를 손톱 끝으로 보챘다. 태 국영은 잠시 무언가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대뜸 이 승도를 벗겼다. 티셔츠는 위로 휩쓸려 나갔고 고무줄 바지 와 팬티는 한꺼번에 끌어내려졌다. 그가 상체를 일으켜 강 하게 허리를 감아 끌어갔다.
“중간에 별이 울면 어쩌려고.”
“…어. 빨리 끝내면……■,,
“발리 못 끝내.”
그는 단단히 작정한 듯 차갑게 대꾸했다. 이승도는 어 쩔 수 없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도 중요하지만,역 시 저는 이 남자를 조금 더 아껴주고 싶었다. 사실 누가 더 소중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갓난아기는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하기에 그간 거의 올인 하다시피 집중했던 것분이 었다.
“짜증나게.”
나직이 중얼거린 태국영이 기습적으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승도는 뒤로 밀려 넘어갔다. 허벅지에 걸려 있던 옷가지들이 순식간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다리 한쪽이 소파 옆으로 흘러내렸다. 이승도는 다른 한쪽 다리를 등받 이에 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농담아니고,미친놈처럼 쌀거야.”
그가 으르렁대듯 경고했다. 아랫도리를 모두 벗어던진 태국영의 성기는 곧장 구명을 비벼왔다. 급격히 숨이 가빠 왔다. 거의 석 달 만의 섹스라 불은 순식간에 붙었다.
“응. 다 먹어줄게.”
태국영은 전희 없이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처음은 언 제나 버거웠다. 애액이 고인 점막은 힘겹게 벌어졌지만 익 숙한 살덩이를 기쁘게 씹어 삼켰다. 이승도는 제 어깨 위 를 짚은 그의 팔에 손톱을 세웠다. 얼굴로 열이 몰렸다. 고 개를 젖혀 들었다. 그의 눈길이 할듯이 모든 것을 응시했 다-
가슴이 맞닿았다. 삽입은 얕게 풀렸다. 이승도는 그제 야 막혔던 숨을 크게 터뜨렸다. 안아 줘,그가 말했다. 그 의 등에 팔을 두르고 팔걸이에 올린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왔다.
처음부터 난폭했다. 태국영은 짐승처럼 움직였다. 땀난 피부가 소파 가죽에 쩍쩍 눌어붙었다. 그를 기억하는 점막이 버거운 허릿짓을 용케도 따라갔다. 죄일 때마다 꿈틀 거리는 그의 성기가 소름끼칠 정도로 잘 느껴졌다.
"미친.. 아.. 씹.."
태국영은 저속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고운 미간이 주름졌다. 이승도는 혀끝으로 그 얕은 골을 파먹었다.
"으윽.. 흣.. 아.."
소파가 버겁게 울음을 토해낼 때마다 이승도 역시 울음처럼 앓았다. 굵은 귀두가 요사스럽게 깊이 들어와 쾌락점을 거칠게 짓이겼다. 애액이 흘러넘쳐 꼬리벼 아래는 미끈미끈 했다.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를 찾고 있었다. 태국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승도는 초점 흐린 눈으로 그를 더 부둥켜 안았다. 아랫입술이 콱 물렸다. 여린 조직이 으드득 씹히는데도 고통이 없었다.
"국영..아.. 하읏.."
막 한계까지 부풀어 흔들리던 것이 터지려던 때였다. 제 속을 들쑤시던 뜨거운 살덩이가 쑥 빠져나갔다. 딸려 나가려 안간힘 썼던 점막이 잔뜩 오그라든 채 울렁거렸다. 이승도는 허리를 비틀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마.. 빨리.. 응... 다시 넣어.. 얼른.."
태국영의 새발간 혀가 제 입술을 빠르게 훔쳤다. 음습 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서 사나운 흥분이 일렁거렸다. 그 순간 천장이 뒤로 넘어갔다. 상체가 들려 등받이에 걸렸 다. 뒤로 떨어질 것 같아 황급히 그에게 매달렸다.
“아!,,
그는 아래에서 단번에 꿰뚫고 올라왔다. 목덜미가 씹혔 다. 그의 한 손이 둔부를 파고들어 제 것을 물고 있는 구명 을 긁었다.
그때부터는 무슨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신없 이 몰아치는 것에 무참히 휘말렸다. 교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짐승 같은 비명이 낭자하게 홑어졌다. 울부짖음에 가깝기도 했다.
그의 표정도 짐승에 가까웠다. 그는 무섭도록 흥분한 얼굴로 연신 살갗을 깨물었다. 잇자국을 넘어 피가 맺힐 정도였다. 따끔한 통증조차 쾌락의 불길을 지펐다.
아랫배는 어느새 축축한 정액이 엉겨 붙어 있었다. 두 번인지 세 번인지 알 수 없었다. 뜨겁게 달궈진 것이 으깨 먹을 듯 쑤셔 올 때마다 무력한 백치처럼 다리를 벌리며 흐느꼈다. 더,더 깊게,국영아,더 세게,무슨 말을 했는 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울고 있었고 그는 눈물을 할아주고 있었다. 그는 혀끝 조차 음란했다. 제가 싼 정액을 할아주는 수컷처럼 비린 욕망이 눈물을 죄 봅아먹었다.
휘적대던 손을 무심코 옆으로 짚었을 때,딱딱하면서 보드라운 것이 손끝에 느껴졌다. 카펫이었다. 어느새 바닥 에 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야는 눈물 수만큼 깨졌 고 그는 그 안에서 야만적으로 두 발목을 붙잡아 벌린 채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등허리가 죄 화끈거렸다. 이승도는 그가 입술을 물어오 자 울음을 터뜨렸다. 국영아,나,원가 말하려고 하자 붉 은 입술이 다가와 덮었다.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는 줄 알 았을까. 그런 건 아니었다.
폴더처럼 접힌 몸뚱이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몸 전체를 꿰뚫린 듯 감각이 절절 끓었다. 이승도는 다리를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발목을 배냈다. 허겁지겁 팔을 내 밀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안겼다.
사지로 그를 동여맸다. 그제야 막연했던 공허가 채워졌 다. 이승도는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혀 가 다시금 눈물을 훔쳐갔다.
“일단 한 번 싸.”
태국영의 허릿짓이 처음으로 속도를 늦췄다. 그는 묻
는 눈빛을 내리꽂았다. 이승도는 손끝으로 그의 척추를 더 듬어 올라갔다. 살갗에 닿는 등의 잔근육들이 배곡하게 물 결치며 그 동선을 따라갔다.
“일단 한 번만… 나 네 정액 냄새 맡고 싶어.”
태국영이 명청하게 굳었다. 소리를 주워간 그의 귀가 작게 꿈틀거리다 멈추었다. 이승도는 발갛게 젖은 뺨을 그 의 턱에 비비며 속삭였다.
“아니면 진짜 먹여 줄래?”
은밀한 유혹에 태국영은 또 미간만 움찔거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것이었다. 태국영은 침대 위에서 맹수처 럼 야만적이었지만,의외로 은근히 정도파였다. 전희나 후 희로 성기를 발아주는 적은 많았어도 그 자신의 것을 발아 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이승도는 그처럼 자주 정력이 넘쳐흐르지는 않았으나 드물더라도 더 다양하고 자극적인 관계를 시도해 보고 싶 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약간 성향은 다른 것 같았다. 머리 로는 이해해도 원가 얼떨떨해하는 태국영을 위해,이승도 는 직접 엉덩이에서 그의 성기를 배냈다. 이미 몇 차례나 쏟아낸 저에 비해 그는 아직 프리컴만 내리 흘리고 있을 분이었다.
이승도는 바닥을 짚은 그의 두 무릎 사이로 몸을 미끄
러뜨렸다. 불신의 눈길이 쭉 따라왔다. 조금 기대하고 있 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승도는 그의 가랑이 아래 얼 굴을 놓고 그의 것을 한 손으로 쥐어 보았다.
내가 이걸 계속 아래에 넣었단 말이지.
어쩐지 대견하다고 칭찬해 줘야 할 것 같은 크기였다. 깊이 삼켜야 기분이 좋다던데 얼마나 넣을 수 있을지는 모 르겠다. 이승도는 조심스레 혀끝으로 귀두 끝을 살짝 할으 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작 그것만으로 태국영의 눈매는 일그러졌고 목울대는 힘차게 끄덕였다.
이승도는 입을 벌려 귀두 전체를 물었다. 뜨거운 숨결 이 위에서 터졌다. 조심조심 입술을 움직이며 한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는 처음인데도 용케 알아들으 며 허리를 내렸다. 매끈한 귀두는 천천히 혀 위를 밀고 들 어와 목구멍에 닿았다.
순간 구역질이 났다. 깜짝 놀라 배려는 그를 제지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몇 번에 걸쳐 삼켰다. 상상보다 더 힘겹 고 고되었다. 특히나 삼킬 때마다 목구멍에 그의 귀두가 더 자극적으로 뭉치는 바람에 침은 계속 나오고 그것을 계 속 삼키는 것이 반복되었다.
결국 백기를 들고 고개를 비틀었다. 번들거리는 그의 성기가 입술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초보자가 너무 욕심
을 부렸다.
“국영아. 여기에 싸 봐.”
이승도는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태국영은 또 모호 한 표정을 했는데,이번에는 명청하니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는 원래 주는 건 잘 받아먹는 남자라 하지 않았는가.
태국영은 한 손으로 제 것을 쥔 채 이승도의 혀에 끝을 문질렀다. 이승도는 요사스럽게 혀를 움직여 끝을 자극했 고,이따금씩 입에 들어갈 정도로 물고 쭉쭉 발기도 했다.
씨발,태국영은 기가 찬 듯 욕설을 씹으며 웃는 듯 찡그 린 얼굴을 했다. 오심을 이겨낸 이승도의 속눈썹은 점막처 럼 축축했다. 그 아래 혼몽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도 할아 먹고 싶을 만큼 요염했다.
“우리 승도,요분질에만 소질 있는 줄 알았더니.”
이승도의 젖은 눈매가 시원하게 휘었다. 그는 더 입을 벌리며 목구멍을 보였다. 그 안에 가득 채워보라고 말하 는 순간 태국영은 완전히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 욕 끓는 마나님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하인처럼 제 것을 스스로 주물렀다. 쩍쩍 손 안에서 마찰하는 소리에도 이승 도는 음란하게 혈떡였다. 수컷의 성기를 이리저리 혀로 할 아가며 자위까지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요물이 따로 없네.
태국영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빠르게 손을 놀렸다. 침이 고이고 그것이 이승도의 목으로 넘어가는 것 만 보는데도 쉽게 절정에 올랐다. 하얗게 터진 정액은 그 간 참았던 기간만큼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반절은 탐스럽 게 달아오른 이승도의 얼굴에 튀었고,반절이 그 유혹적 인 늪지 안으로 발려 들어갔다.
꿀꺽,정액이 미끈하게 넘어가는 소리가 등줄기를 오싹 하게 긁어내렸다. 이승도는 상상보다 맛이 별로라면서도 입술에 튄 것마저 할아먹었다. 태국영은 그만 다시 실소 가 터져버렸다.
“이렇게 단순하면 안되는데.”
태국영이 실없이 중얼거린 소리에 이승도는 몽롱한 눈 을들었다.
“뭐가?”
“좀 더 화내려고 했는데,너무 황홀해서 차마 그럴 수 가없어졌어.”
이승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태국영은 부드럽게 입술 을 겹쳤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맞닿는 피부는 축축 하면서도 아늑했다. 깨물기도 아까운 듯 신중을 다한 키스 가 이어졌다. 서로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할았다. 혀는 몇 번이고 얽혔으나 격렬하게 변하지는 않았다.
“일단 씻자. 이제 별이 안아주러 가도 되지?”
이승도는 I[웃음토 치며 물었다. 어쩐지 잔뜩 말려든 것 같다고 깨달았지만 이렇게 나와서야 도리가 없었다. 태 국영은 이승도를 일으켜 주었다.
샤워는 간단히 거품을 묻혀 몸을 씻어 내는 정도로 끝냈 다. 열기가 잦아들자 이승도는 다시금 아기 걱정에 조급하 게 굴었지만 더 심술을 부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옷을 다 갖춰 입고 황급히 나가려는 이승도를,태국영은 뒤에서 가 볍게 한 번 안았다. 그리고 짧게 속삭였다.
“네 살 냄새가 고팠어. 너무. 너무 너무.”
사실은 이 투정을 하고 싶었다. 내내.
포옹은 금방 풀어졌고 태국영은 깨끗하게 물러났다. 그 러나 이승도는 등을 보인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목덜 미가 예쁘게 붉다. 손끝이 저절로 끌려가 그 위를 덧그렸 다. 이승도가 뒤를 돌았다. 그 뺨도 붉었다.
이승도가 두 팔을 뻗어 머리를 끌어갔다. 태국영은 선 선히 고개를 내려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피가 도는 경 동맥에서 달콤한 살 냄새가 올라왔다. 몇 번이고 깊이 들 숨을 마셔도 질리지가 않았다.
둘이 나란히 방으로 들어갔을 때,태이경은 혼자 쩔쩔 매며 엄마만 찾는 별이를 달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이승 도는 얼른 달려가 아기를 안았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칭 얼대는 아기를 둥개둥개 어르며 태이경에게 물었다.
“은태는 어디 갔어?”
“아. 형아는 갑자기 얼굴이 새발개지더니,창문 열고 휙 뛰어내렸어요. 그리고 정원 끝까지 전력질주를 해서 아 직 안 와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승도도 몰랐다. 태국영만 알았다. 그 귀 밝은 놈이 진 한 정사가 들리자 당황해서 내뺀 것이 틀림없었다. 발정 은 멀었어도 성교육은 착실히 해 둔 터라 둘이서 무슨 짓 을 하는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었다.
태국영은 민망함 따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는 뇌리 를 번득 스치는 생각에 서둘러 여은태의 냄새를 찾아갔다. 녀석은 정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야. 꼬맹이.”
여은태가 불그스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원가 한 껏 못마땅한 눈치지만 제가 불평을 늘어놓을 화제가 아님 은 알고 있는 듯했다. 태국영은 척척 다가가 협박했다.
“너 우리 섹스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귀 밝
은 거,승도가 알게 하면 죽는다J
싱숭생숭한 맘 애써 달래놨는데 굳이 와서 들쑤시니 당 장 달려가 고해바치고 싶어졌다. 여은태의 반항기를 엿본 태국영이 살벌하게 눈을 치켜떴다.
“알게 해 봐,어디. 평생 이경이 못 볼 줄 알아.”
여은태의 반반한 낯짝이 구겨졌다. 미련 없이 돌아서 는 태국영의 등을 향해 한껏 쏘아붙였다.
“이 치사한 놈! 툭하면 애를 미끼로!”
물론 태국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친위대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종주 후보들이 모조 리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영 이 이원표와 거래를 할 때부터 골머리를 앓게 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이원표마저 물러나는 상황을 맞닥 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원표의 사퇴 이유는 간단했다. 태국영과의 약속을 지 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승도가 살아나긴 했지 만,이원표는 그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부터 스스로 태국영 과의 거래를 무로 돌렸다. 처음부터 종주의 자리를 갈망하
여 시작된 일이 아니라 손을 떼는 것에도 미련은 없어 보 였다.
유독 지독했던 겨울이 물러가고 꽃 피는 봄이 왔건만, 친위대의 시름은 날로 깊어졌다. 당장 반년 뒤에 종가승계 를 마무리 짓고 새 종주를 맞아야 했다. 하겠다는 놈은 있 어도 믿고 맡길 놈이 없었다.
그들은 뾰족한 수 없이 여름과 가을도 그렇게 보내 버 렸고,결국 9월의 중턱에 서서야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만장일치는 아니었으나 의견을 통일시키는 데에 난항을 겪지는 않았다. 여은태가 종주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종가를 비워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연희는 친위대의 다른 수장들과 함께 태 가를 찾아갔 다. 그리고 태국영에게 그때까지 여은태의 보호자로 있어 달라고 정중하게 청을 넣었다. 혹 단번에 거절할 것을 우 려해 보호자에게는 종주의 권리도 책임도 없다는 것을 확 고히 전했다.
“그럼 그때까지 종가는 비워두나?”
태국영은 심드렁하게 물었다. 종가는 과거에 왕이 살 던 곳을 이르는 말이었고,현대에 와서는 종주가 있는 곳 을 뜻했다. 의미를 단번에 알 수가 없어 연희는 되물었다.
“친위대의 거취를 묻는 거나?”
“그래. 너희들 원래 종주한테 빌붙어서 살잖아.”
“빌붙어 살다니. 엄연히 호위하는 것이다.”
“너희 일도 안 하잖아. 종주가 주는 돈으로 먹고살고. 그게 빌붙어 사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다니까!”
연희가 드물게 고함을 치는 바람에 동행자들은 화를 낼 타이밍을 잃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 기 바빴고,태국영은 귀찮다는 듯 한 쪽 눈가를 찌푸렸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쨌든 내 집에 빌붙겠다는 것 만 아니면 괜찮아. 나한테 종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꼬맹이 시킨다는데 꼬맹이 의견이 중요하지.”
연희는 테이블 밑으로 일순 꽉 쥔 주먹을 떨었다. 이놈 은 정말 상대 속 긁는 데는 타고났다. 엄밀하게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격하된 표현은 자존심이 상했 다-
자신들은 일생을 종주를 위해 사는 이들이었다. 그래 서 친위대가 종주를 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어버이로서 의 덕목을 갖추었는가.’였다. 종주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만큼 충정을 다하는 친위대를 어버이로서 잘 보살 필 수 있는 재목 말이다.
과거 잠시나마 그를 종주의 재목으로 생각했던 스스로
의 뇌를 숟가락으로 파내 버리고 싶었다. 무뚝뚝한 듯 굴 면서도 제 아들을 꽤 잘 보살피는 그의 모습에 혹했던 게 잘못이었다.
“네가 종주에의 야망이 없어 다행이다. 아마 네가 되었 으면 전부 엉망이 되었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구나.”
연희는 차갑게 내쏘았다. 태국영은 나른하게 눈가를 접 으며 웃었다.
“내가 어쪄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종주가 되기라도 했으면,엉망이고 뭐고 될 것도 없어. 너희들은 그 즉시 해 산됐을 거야.”
“…뭐?”
“친위대 해산이라고. 난 너희들 먹여 살릴 생각이 조금 도 없거든.”
연희는 불같이 분노했다. 드물게 삿대질을 동반한 욕설 을 한껏 퍼붓고 나서 친위대의 임시거처로 돌아간 그녀는 하루 내내 태국영을 욕했다. 태국영을 매우 싫어하는 영조 차 조금은 질릴 정도였다.
“자자. 연희야. 진정하고,우리 할 일이 있지 않니.”
한 장로가 점잖게 달래자 연희는 겨우 분노를 잠재웠
다. 영이 얼음 가득 채운 찬물을 내밀었다. 그녀는 단숨에 들이켰다.
‘‘제가 좀 흥분했습니다.”
“괜찮다. 충분히 화날 만하지 않았느나.”
진정을 되찾은 그녀는 목에 걸고 있는 종주의 인장을 풀어 테이블에 내렸다. 다음 대 그녀의 후계로 지목된 보 조가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현 종주의 자리가 비어 있는 만큼 인장을 찍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헌데 장로님. 종가가 이리 일족에게 금제를 거는 것이 원래도 많이 있는 일이었습니까?”
영의 질문에 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속박보다 자유를 더 중요 시하지.”
“그럼 이번 일은 왜 직접 우리가 나서는 거죠?”
“누군가의 욕심이 누군가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 없도 록 하기 위해서다.”
간단한 질답이었으나 영은 무리 없이 납득했다. 확실 히 저도 윤봄이를 보았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 었다. 그것은 그때 함께 임무를 맡았던 다른 친위대들 역 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은 너무 잔악한 방법으로 만들 어졌고,너무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아무리 그녀 자신이 원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연희는 한 장 한 장 침착하게 종주의 인장을 찍어나갔
다. 특별한 경우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땅에 사는 많은 일족들이 이미 이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큰 희생을 치러 하나의 살수를 만들어내는 이 방식의 참혹 함과 그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들로 이미 큰 몸살을 앓은 뒤에야 강력한 금제를 걸었다.
“언젠가 누군가는 윤봄이처럼 복수에 눈이 멀어 그녀 가 걸어간 말로를 택할 것이다. 제 이득을 위해 제이 제삼 의 윤봄이를 만들어내는 말종도 피어나겠지. 그런 비극을 막는 것은 마땅히 종주가 해야 할 일.”
적어도 이 땅에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일은 없어야 했다. 연희는 마지막 장에 인장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종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음 날,각 가문에 종가의 금제사항이 적힌 한 장의 공 문이 집배 되었다. 공문 안에는 스스로나 다른 이의 신체 를 훼손해 가며 일족의 긍지를 버리는 자의 가문은 멸문 을 면치 못하리라는 완강한 협박 문구가 날 것 그대로 박 혀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아휴 참. 또 어디 가셨담.”
유모는 식사 때가 되어도 도통 나타나지 않는 태은경 을 찾아다녔다. 이제 갓 다섯 살이 될 꼬마 아가씨가 어찌 나 기척을 그리 잘 숨기는지 모르겠다. 태국영이 찾아서 뒷덜미를 잡아 데려오거나 이승도가 ‘은경아.’하고 부르 지 않으면 어디서 뭘 하는지 도통 찾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 집에는 이승도도 태국영도 없었다. 이승도는 1 년 전 셋째 아기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다시 동물원에 취직을 해서 현재 일을 하는 중이었고,태국영은 여은태의 성년식 을 치러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유모 왜? 은경이 또 없어졌어?”
2층 응접실을 부리나케 지날 때였다. 따뜻한 볕이 내리 쬐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태이경이 물었다. 유모 는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지었다.
“예. 또 꼭꼭 숨으셨네요.”
“또 숨바꼭질하는구나. 귀여워라.”
태이경은 빙긋 웃더니 책을 탁자에 내려두고 일어섰다. “흐음. 우리 별이 어디에 있을까? 오빠가 찾아봐야겠 네!”
태이경은 힘차게 외친 뒤 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태은
경이 정원 숲에 숨어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태이경이 뒷모습을 지그시 보던 유 모는 괜스레 가슴이 찡해졌다. 조그맣던 아이가 이제는 10살,140센티가 되어 가고 있었고,제 엄마만 졸졸 따라 다니던 아기 짐승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지나는 자리 마다 폐허를 만드는 악동이 되었다.
“엉아아. 나도,나도 누나 찾을래.”
바깥의 소란을 감지한 막내 태영도가 방에서 도도도 달 려 나왔다. 정원을 누비고 다니던 태이경이 ‘응! 얼른 내려 와!’ 하고 대답했다.
태영도는 형이 열어 둔 창문을 짧은 다리로 훌쩍 뛰어 넘었다. 유모는 기겁해서 창가로 뛰어갔다. 타고난 혈통 이 어찌 되었건 유모의 눈에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아기 에 불과했다.
“어휴! 문으로 다니시라니까요!”
태영도는 물론 멀정히 뛰어가고 있었다. 짧은 팔이 허 공에서 붕붕 휘돌았다.
“으응! 다음부터!”
“매번,매번 말만!”
“사랑해 유모!”
“■"에잇,저도요!”
유모의 속 터지는 핀잔을 애교로 녹인 뒤 태영도는 제 형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겨울 햇살이 녀석의 까만 머리 칼 위에서 새하얗게 부서졌다. 태이경은 녀석을 훌쩍 들 어 목마를 태웠다.
“우리 영도,누나가 어디에 있을 것 같애?”
“저기!”
태영도는 선장처럼 손가락으로 어느 한 군데를 척 가리 켰다. 태이경은 그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온통 헤집어 봤으 나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누나가 금세 어디로 내뺀 모양이다. 어디로 갔을까?”
“저어기!”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지만 그 작업은 몇 번이고 반 복되었다. 신출귀몰한 태은경 덕에 늘 있는 일이었다. 불 평 없이 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마구 쫓다 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말에 그제야 백기를 들었다.
“은경아! 맘마 먹을 시간이래! 안 먹으면 엄마한테 혼난 다?”
“혼난다! 혼난다!,,
태영도가 몸을 들썩이며 따라 외쳤다. 태은경은 그제 야 숨바꼭질을 관두었다. 녀석은 허무하게도 유모의 방에 있었다. 태이경은 식당으로 향하는 태은경을 보고 눈을 둥
그렇게 떴다. 유모가 곱게 땋아준 머리가 뭉텅뭉텅 잘려 쥐가 파먹은 모양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은경아,머리 왜 그래?”
태은경은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추장스러워서 잘랐어. 지금 완전 편해. 다시는 안 기 를 거야.”
“…유모가 보면 난리 나겠네.”
두 달 전 녀석이 처음으로 변이를 할 수 있게 된 이후 로 유모는 하루에도 몇 번씩 태은경을 앉혀두고 머리를 단 장해 주었다. 땋은 머리,올린 머리,묶은 머리,갈래머리 등등,여자아이의 머리는 선택의 폭이 넓다며 매우 행복해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행복은 이제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꺄아악! 아가씨,머리가 왜 그래요! 강도라도 들었나 요? 누가 우리 아가씨 머리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역시 유모는 거의 거품을 물 듯했다. 이제 배신을 당연 하게 받아들일 때도 되었는데 역시 포기를 모르는 여인이 었다. 태은경은 무심하게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이 집을 노릴 간 큰 강도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냥 내 가 잘랐어. 뛰어다닐 때마다 자꾸 팔랑팔랑 귀찮아서.”
유모는 충격으로 일시적 실어증에 시달렸다. 태이경은
막냇동생을 무릎에 앉혀 두고 함께 식사를 하다가,결국 10분 넘게 망부석이 되어 있는 그녀에게 년지시 말을 걸 었다.
“유모. 나라도 기를까?”
“음. 나보다는 영도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은경 이랑 많이 닮았으니까 말이야.”
이승도를 많이 닮은 태이경과 달리,밑의 두 동생들은 태국영과 판박이였다. 특히 태은경은 태국영이 여자로 태 어났으면 저런 모습이지 싶을 정도였다.
얼굴이 닮은 것만큼 하는 짓도 정말 똑같았다. 어지르 기 좋아하는 주제에 어질러져 있는 데는 절대 안 가는 괴 팍한 면이 있었고,유모의 치장 병을 질색하고 외모를 가 꾸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이승도한테만 봄날 햇살 처럼 살랑거리는 것 또한 고스란히 가져갔다.
때문에 5년 전만 해도 드디어 제 로망을 채워줄 아기씨 가 생겼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그녀의 행복은 나날이 파괴 되어 가고 있었다. 시즌마다 사 모으는 드레스는 한 번의 승은도 입지 못하고 고스란히 폐기되었고,머리핀이나 레 이스 달린 양말 등도 마찬가지였다. 더 파괴될 것이 있겠 느나 안심할 때쯤 이렇게 하나씩 터뜨려 주는 것도,태국
영을 그대로 배다 박았다.
그래서일까.
동족혐오라고,부녀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 다. 물론 둘 다 나름의 정당성은 있었다. 태국영의 입장에 서는 늘 이승도를 독점하려 드는 딸내미 때문에 혈압이 오 르는 게 당연했고,한창 엄마 품에 안겨 있고 싶을 때인 태 은경은 자꾸만 엄마를 살살 꼬드겨서 데려가는 아빠가 불 만일 수밖에 없었다.
“영도야,머리 길러 볼래?”
“응. 유모 내 머리 길러서 땋아도 돼.”
그나마 제 맘을 이해해주는 두 남자아이 덕에 유모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가 우리 도련님들 덕분에 삽니다.”
한숨을 폭 내쉰 그녀는 자리에 앉아 태영도를 허벅지 에 앉혔다. 태은경은 제 어미 품이 아니면 질색하는 터라 이렇게 밥을 먹여줄 기회도 없었다. 만약 막내아들이 태은 경의 성향을 닮아 나왔더라면 이승도의 복직 꿈은 또 한동 안 저 멀리 미뤄졌을 것이 분명했다.
“맛있다아. 유모 손 최고.”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유모는 감격해서 태영도의 뺨에 제 뺨을 맞대 비볐다. 그녀는 정말,두 도련
님 덕에 행복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이승도는 태은경의 짧아진 머리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 혼자 머리를 잘라보겠답시고 잉 챠잉챠 작은 손으로 가위를 움직였을 걸 생각하니 몹시 귀 여웠던 것이었다. 이승도는 옆에서 시무룩한 유모의 눈초 리를 느끼고 나서야 헛기침으로 웃음을 날려 보냈다.
“우리 은경이,짧은 머리가 좋았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묻자 품에 찰싹 안겨 있던 녀석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머리가 어깨랑 등에 안 닿으니까 되게 편해.”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은 너무 삐둘배둘하네? 조금 다 듬어야겠다.”
“엄마가 해?”
“엄마는 그런 거 못 해요. 내일 휴일이니까 아빠랑 오빠 들이랑 영도랑 다 같이 놀러 나가서 미용실에 잠깐 들르 자. 괜찮지?,,
“응. 엄마 보보:
쪽쪽쪽쪽. 난리가 났다. 유모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태 은경을 바라보았다. 제 어미 앞에서만 얼굴 탈을 싹 바꾸 는 게 참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태국영의 미모를 닮아 서 저렇게만 보면 아주 천사가 따로 없었다.
“엄마아. 나도 보보.”
누나에게 의젓하게 처음을 양보하고 다가온 태영도가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내밀었다. 이승도는 앉은 자리에서 차례로 안아주고 입을 맞춰주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이 렇게 아이들이 반겨 주니 참 행복했다. 막내아들을 등에 업은 이승도는 양손에 각각 첫째 둘째 손을 잡고서 일어났 다.
“유모. 국영이랑 은태는 아직이에요?”
“네. 성년식이 원래 그래요. 길면 거의 하루를 꼬박 새 우더라고요.”
어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아이들과 한참 놀아주고 샤 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뜬금없이 환풍구를 타고 날 짐승의 비린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냄새는 초가 다르게 짙어졌고 마침내 코가 마비될 정도로 심해졌다. 이게 무 슨 일인가 싶어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가 보니 태국영은 여은태를 이미 어깨에 짊어진 채 나갈 채비를 끝낸 상태였 다. 그는 여은태가 성년식 징후가 왔으니 지금 당장 나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도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20시간이 지났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더니 정말 하루를 꽉 채우고 돌아오 려는 모양이었다.
“식사 바로 하시겠어요?”
“오늘 사육사들이랑 힘쓸 일이 많아서 땀을 좀 흘렸어 요. 먼저 가볍게 샤워부터 하고 내려올게요.”
“그래요,그럼. 내려오기 전에 인터폰 해주시면 국 팔 팔 끓여 놓을게요.”
“고마워요.”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샤워실로 향했다. 그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따로 없었다.
태국영이 돌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아 이들을 재우고 방에서 스탠드만 켜둔 채 야생동물에 관한 논문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에게서 거의 다 도착했다 는 문자를 받고 이승도는 1 층으로 내려갔다.
처음부터 그를 마중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체가 되어 돌아올 자신의 피 안 섞인 아들도.
여은태가 얼마나 어른이 되고 싶어 했는지,그것은 이 승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
을 줄줄이 옮던 아이가 마침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살아 가는 출발점을 가장 먼저 지켜봐 주고 싶었다.
이윽고 현관이 열렸다. 다가와 뺨에 가볍게 키스하는 태국영의 뒤로 근사한 청년이 서 있었다. 겉모습은 상상했 던 만큼 홈 잡을 곳 없이 매끈했는데,문제는 표정이 영 썩 어 있다는 거였다.
막 손을 흔들어 반겨주려던 이승도는 얼굴이 왜 그러나 부터 물어야 했다. 녀석은 격렬하게 분노를 터뜨렸다.
“아,글쎄! 진짜 사정없이 줘 패더라니까!”
이승도는 멀거니 태국영을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어깨 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었다는 뻔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여은태는 더욱 분개했다.
“이미 움직이지 못할 정도인데 굳이 여기저기 더 밟았 잖아. 게다가 기분 좋게 실실 웃으면서!”
“그럼 뭐 울면서 패나.”
“와. 말하는 거 봐. 저 뻔뻔한 것 좀 봐.”
“어디 너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어른 만들어 줬다고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은혜도 모르는 놈.”
“웃계 딱 봐도 나 때리면서 스트레스 풀고 있더만! 선 생님. 이경이 성년식은 절대 태국영한테 맡기지 마. 애 잡 을 거야. 진심이야.,,
“내가 미쳤나. 이경이를 너 팬 것처럼 패게.”
“…저것 보라괴 진심이 나오잖아!”
“쉬,은태야. 아가들 자니까 목소리 좀 낮추자.”
더 놔두면 계속 싸울 것 같아 결국 이승도가 끼어들었 다. 여은태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그득했으나 지금 더 화내 봐야 의미가 없었다. 태 국영은 죽어도 뉘우치지 않을 테고 여은태 자신만 열불이 터질 게 뻔할 테니 말이다.
“고생했어,은태야. 이제 진짜 남자가 다 됐네.”
이승도는 가만히 여은태를 안아주며 말했다. 익숙한 품 에 안기자 빠르게 안식이 찾아왔다. 여은태는 어릴 때처 럼 뺨 키스로 어리광을 부리며 대꾸했다.
“응. 다 선생님 덕분이야. 고마워.”
이제는 고개를 한껏 숙여야 뺨 키스를 할 수 있었다. 고 개를 쭉 배고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던 스스로의 어린 시절 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야,내 덕분은 없나.”
태국영이 피식피식 웃으며 또 염장을 질렀고,여은태 는 끼지라고 막말을 했다가 이승도에게 살짝 꾸중을 들었
“은태야. 국영이가 그래도 큰형 벌인데 그렇게 말하면 못써. 이제 어른 됐으니까 말도 더 예쁘게 하자.”
여은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쯤에서 잠에서 깬 태이경이 아래로 구르듯이 내려와 여은태의 신 경은 그쪽으로 모조리 쏠렸다.
“와,형아. 골격이 엄청 커졌다! 진짜 멋져.”
“형아 짐승 모습은 더 멋져. 보여 줄까?”
“응!”
여은태는 그 자리에서 변이했다. 성체가 되니 시간 지 체 없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바꾸었다.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는 맹수가 더욱 풍성해진 꼬리를 흔들며 더 커진 몸집을 태이경에게 비볐다. 체격 차이가 어마어마했 다.
태이경은 입을 헤 벌린 채 여은태의 옆구리를 쓰다듬었 다.
“진짜 멋지다……■,,
【멋진 것분만 아니라 아주 많이 강해졌어.】
그리고 여은태는,오래 전 했던 약속을 다시금 곱씹어 녀석에게 건네었다.
【이제 정말 형아가 아무도 못 집어가게 지켜줄게.】
이젠 잃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서도 지켜줄 자
신이 있었다.
“응. 고마워.”
태이경은 햇살처럼 웃으며 여은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달콤한 향기가 날 것 같은 얼굴 앞에서,고단했던 하루 는 그저 가루처럼 홑어져 영영 날아가 버릴 분이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이승도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물었고,태국영은 묵비권 을 행사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에도 어리다는 이유 로 손찌검 한 번 못 했던 터라 이 기회에 줘 팬 것은 맞았 다. 그런데 그게 꼭 감정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실 제로 여은태는 꽤나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금방 재생하고 금방 숨어서 기회를 엿보기 일쑤여서 한 번 손을 댈 때 아 주 작살을 내놔야 조금 쉴 수가 있었다.
“이리 오?. 너도 고생했어.”
태국영은 대뜸 두 팔을 벌리는 이승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은태를 제 자식처럼 끔찍하게 아끼는 그라 서 뭐라고 한참 잔소리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매우 뜻밖이 었다. 그러나 태국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줘도 못 먹는
등신은 아니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를 감싸며 아늑한 품에 안겼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어깨를 꽉 조여 토닥여주었다. 그의 몸 에서는 옅게 겨울 냄새가 났다. 차가운 밤바람을 잔뜩 묻 혔지만 체온은 만족스럽게 뜨거웠다. 늘 냉증에 시달리는 저에게 꼭 맞는 남자였다.
태국영은 눈앞에 희게 드러난 목덜미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대었다. 곧은 어깨가 움찔 떨리다 부드럽 게 풀리는 모양이 선명했다. 긴 입맞춤이 머문 자리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내일이면 출근 준비를 하며 또 밴드 를 붙이게 만들었다고 툴툴거리겠지만 지금은 그저 얌전 히 받아들일 분이었다.
“승도야. 나씻겨줘.”
태국영은 이승도가 넉넉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작정 하고 꼬드기는데도 이승도는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은 함께 욕실로 갔고,얼마 안 가 샤워기의 따끈한 물줄기 아래서 서로를 어루만지는 것에 탐닉하게 되었다. 희게 거 품을 일으켜 놓은 샤워볼은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아…….,,
이승도는 태국영의 손가락이 꼬리뼈를 문지르고 내려 오는 순간 고개를 젖혀 들었다. 어깨에 닿는 물줄기가 고
기떼 같은 물방울을 한쪽 뺨으로 붐어댔다. 이미 흠뻑 젖 은 몸은 태국영의 한 팔에 강하게 안겨 움직이기조차 힘 이들정도였다.
헐떡이며 그의 입술을 찾았다. 도톰하고 관능적인 선 의 입술은 늘 물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갓난아기가 젖을 빨■듯 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발았다. 그의 눈매 가 매혹적인 곡선으로 휘었다. 어김없이 혼을 배놓는 미소 였다.
이승도는 오랜만에 적극적으로 매달려 키스를 했다. 혀 끝에 닿는 습지는 달콤하고 강렬했다. 느리게 안을 탐험하 던 혀가 어느 순간 강하게 휘감겼다. 허리를 감은 팔에도 잔뜩 힘이 실렸다.
태국영은 고개를 꺾어 내리며 더 깊이 혀를 얽었다. 이 승도의 상체는 점점 뒤로 기울었다. 어깨를 치던 물줄기 가 그의 등으로 고스란히 옮겨갔을 때,입구를 지분거리 던 손가락이 무례하게 속살을 벌리고 들어왔다.
“아!,,
무릎이 무너졌다. 발끝으로 오돌토돌한 타일이 쓸렸다.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는 신비한 힘으로 무리 없이 체중 을 받쳐주었다.
늘 느끼지만 참 강한 힘이었다. 거칠고 억센 몸뚱이로
늘 저를 뜨겁게 녹여주는 남자였다. 이승도는 급격히 달아 올라 성급하게 허벅지를 벌렸다. 한시라도 발리 야만적으 로 움직이는 그를 품고 싶었다. 그의 아랫배에 제 정액을 쏟아내 흰 자국을 남기고,제 안에 그의 정액을 받아 눅눅 하게 젖어들고 싶었다.
“대범한 우리 승도는 참 섹시한데 말이야.”
태국영이 웃음 섞어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벽 을 훑으며 빠져나갔다. 오싹한 소름이 척추를 꿰뚫었다. 이승도는 열기 오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은 그림 자 속에서 그의 눈은 어둑한 열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은 못 먹는 떡이네.”
태국영이 손가락을 비비며 웃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맑은 점액질이 그의 손끝에 엿물처럼 죽죽 늘어졌다. 잔 뜩 달아올라 있던 이승도는 굉장히 크게 실망했다.
“하필이면……어쩔 수 없지.”
콘돔은 어째 10번에 1 번은 꼭 찢어지고,셋째 태영도 는 체외사정을 했는데도 덜컥 들어선 터라 이제는 무엇도 못 믿게 되었다. 합이 너무 잘 맞아도 문제였다.
“남자 등대 임신 확률,그거 순 엉터리야. 무조건 수정 해야 돼.”
이승도는 어린애처럼 툴툴거렸다. 태국영은 농담인 듯
진담을 슬쩍 꺼냈다.
“넷째 각오하고 한 번 할까?”
“…안돼. 넷째는 정말 안돼.”
태국영은 아쉽다는 듯 입술을 혀로 축였지만 도리가 없 었다. 그도 네 명은 영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애들 치 대는 거 받아주느라 이승도는 퇴근을 해도 눈코 뜰 새 없 이 바빴다. 하나가 더 늘었다가는 그가 아니라 태국영 자 신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할 게 분명했다.
그는 이승도를 번쩍 들어 탕으로 옮겼다. 미리 물을 틀 어둔 터라 뜨끈한 물에 곧장 몸이 잠겼다. 둘은 서로 마주 안은 채 느긋이 탕욕을 즐겼다.
창문이 작게 흔들렸다. 시원하게 트인 창밖에 검은 바 람이 불고 있었다. 아주 작은 눈송이가 날리는 듯도 했다.
“우리 국영이 변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짐승이 탕 안에 늘어졌다. 크게 부푼 부피에 촤르르 물이 넘쳐흘렀다.
그는 익숙하게 동그마니 몸을 말아 배를 내주었다. 이 승도는 그의 옆구리에 상체를 기댔다. 매끈한 털이 기분 좋게 기댄 얼굴을 간질였다. 그가 고개를 내려 뺨을 할아 왔다. 더 둥글게 웅크린 그의 몸에 제 몸은 더 깊이 파묻혔
“예쁘다,우리 국영이.”
태국영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기분 좋게 눈매를 휘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제 앞에서 짐승의 속 알맹이를 드러내 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심장에 배곡히 박힌 날카로운 기억들을 말끔히 정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승도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승도 는 5년 전의 사건이 있었던 후로 한 가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바로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나중에 미뤄둔 일 이 후에 어떤 후회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승도는 어리석게 더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이후 자주 태국영에게 변이할 것을 청했다. 태국영은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들고 그 말을 따랐 다-
밀찍이 떨어져서 조심스레 눈을 깜박이던 그가 스스로 걸어오게 하기까지 또 많은 날을 소비했다. 경계심을 재우 고 편안히 늘어져 쉴 수 있게 되기까지 또 수많은 날을 소 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태국영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진해서
맹수로 변했다. 그가 등을 보이면 자다가도 일어나 몸을 실어 주었다. 그는 바람처럼 빠르게 달렸고 무서울 정도 로 힘껏 뛰어올랐다.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하늘을 날면 저절로 기븐 탄성 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그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따뜻한 볕 아래서 요를 깔아주듯 몸을 내주기도 했다. 그에게 폭 감싸여 낮잠을 자다가 먼저 깨는 날이면 평온하게 앞발을 베고 잠이 든 그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그 자신이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 은 뒤로 태국영은 그간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거리낌 없 이 쏟아 부어 주었다.
오래 살아,국영아,이승도는 뜬금없이 불쑥 솟은 과거 의 기억을 흐리게 흘려보내며 말했다. 널 두고 나는 어디 도 가지 않아,태국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지금에야 말해두는 건데.】
너 없이 나 혼자 살아가겠다는 약속은 한 적 없어.
그러니까 너 혼자 일방적으로 한 약속은 애초부터 무효 였다고,태국영은 말했다. 죽어가던 그 찰나의 순간에 무 슨 말을 했는지 이승도는 사실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의 말로 충분히 추론해 볼 수는 있었다.
“우리 넷째 낳을 각오 하고 한 번 할까??”
이승도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태국영은 잠시 귀를 솔깃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기집을 떼자. 낳을 만큼 낳았잖아.】
이승도는 싫다고 말했다. 태국영은 그 이유를 물었다.
“네가 젖은 내 거기 할는 거 좋아하잖아. 많이 젖을수 록 넣을 때도 더 좋아하고.”
【……뭐,네 뜻이정 그렇다면.】
태국영은 못 이기는 척 대꾸했다. 듣고 보니 큰 즐거움 이 사라질 뻔했다고 깨달음을 얻은 눈치였다. 덩치는 커다 래서 여전히 이렇게 가끔 귀여운 짓을 한다.
이승도는 그의 얼굴을 쓸어내린 자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기분 좋게 물살을 만들던 그의 꼬리는 어느새 허리 를 꽉 감고 있었다. 집착적인 그의 얽멤이 오늘따라 몹시 도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