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진희는 여 가의 역사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집 안은 물론,이 땅의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물건이 었다. 접촉이 허락된 자는 단둘,가주 여군호와 기록관인 여진희 자신분이었다.
그녀 역시 과거의 기록은 열람할 수 없었지만,흘러간 시간을 궁금해할 이유가 없었기에 탐하고자 하는 유혹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지금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여군호 이외에 저만 알고 있는 현재의 기록이었다.
현재. 바로 지금의 이야기.
여진희는 기록 끝에 가주의 인장을 찍었다. 역사서는 여군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기와 함께 다시 비밀의 방에 보관되었다. 그녀는 인주를 닦아낸 인장을 들고 한수연의 작업실로 향했다.
여군호는 그곳에서 아내가 옷을 만드는 걸 구경하며 시 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제오늘 자주 보았던 광경이었다. 부쩍 체력이 좋아져서 활기차진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만
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듯했다.
“가주님. 기록이 끝났습니다.,,
여진희는 손에 든 가주의 인장을 여군호에게 두 손으 로 내밀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래. 수고했다. 가서 쉬어.”
“네. 또 시키실 일생기면 불러주세요.”
“오냐.”
여진희가 공손히 인사하고 방문을 나설 때,여군호는 한수연의 부름에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 었다. 한수연이 막 시침질을 끝낸 패턴을 그의 몸에 가져 다 대더니 활짝웃었다.
“잘 어울려요. 역시 당신은 뭘 대도 근사하네요.”
“당신한테 외모 칭찬 듣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어머,내가 그랬나?”
한수연이 보얗게 웃으며 여군호의 몸을 돌렸다. 순순 히 돌아서는 여군호는 수려한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주의 인장을 손에서 놓은 지 만 이틀이 지났을 분인 데 여군호는 눈에 띄게 홀가분해 보였다. 오늘은 그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연차를 쓰고 종일 아내와 시간을 보냈 다. 가볍게 손을 잡고 눈 쌓인 정원을 걷는 부부의 모습이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간 여군호는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이고 있었 나-
여진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작게 한숨을 지었다. 이대로 제 방으로 돌아갈 것인지,아니면 다른 곳에 들러 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분명 이런 고민 자체가 여군호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 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자신은 확실히 기록관의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여진희는 결국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석에 올랐다. 출 발 전 여제운에게 짧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할 말이 있어요. 회사 근처 카페에서 잠깐 봬요.』
여제운은 별 의문 없이 알겠다고 답을 보내 왔다. 폭설 과 함께 찾아온 정체를 뚫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내려 입구로 들어섰다. 먼저 도착해 있던 여제운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여진희는 그쪽으로 걸어가 며 주변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다.
여제운은 시선을 많이 끄는 미남자였지만,안타깝게도 그의 시선은 그 누구에게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빗겨가 고 스쳐 지나가고 잠시 담는 것이 전부였다.
여진희는 그런 여제운의 냉랭한 눈동자가 아주 오래 담
고 있던 사람을 기억했다. 그답게 담담한 눈빛에 그답지 않은 집요함이 서려 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끈끈함 은 없었으나 누구도 끊어내지 못할 만큼 질긴 성질의 것이 었다.
“왜 밖에서 보자고 했지?”
막상 왔으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여진희에게 여제운이 먼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여진희는 여제운이 직접 가져다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물끄러미 그 를 응시했다.
여제운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채근할 생각은 없어 그저 묵묵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기다렸다.
“오빠.”
“그래.”
여진희는 기습적으로 말했다.
“이승도 씨 아기가 납치됐어요.”
잘그랑.
찻잔을 내려놓는 여제운의 눈매가 미세하게 커졌다. 쉽 게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남자가 아니라 고작 그 정도 로 충분히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 짓이지? 설마여홍재인가?”
“네. 여홍재가 벌인 짓이에요. 그를 중심으로 여홍원,
여치영,여현덕 이 넷이 움직이고 있어요. 여은태,태이 경,송재흐I,신영애,이 넷이 타고 있던 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강에 추락했고,그때 여치영이 자기 수하들을 이끌 고 그들을 급습했대요. 송재희 씨를 경호하던 남정웅 씨 가 여치영의 수하들 목을 가져와 그걸 증명했어요. 그 뒤 로 신 가의 가주께서 쳐들어오는 바람에 또 한바탕 난리 가 났고요.”
세상에. 이다지도 명청하고 부지런할 수가 있나.
여제운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실소가 나왔 다. 도대체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짓을 벌인 건 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태국영을 그토록 의식하며 저 혼자 자격지심을 불태운 것이 기본적인 판단력마저 흐릴 정도로 심각했던 걸까.
“잠깐. 그럼 태국영은?”
“그게……
여진희는 말을 흐렸고 여제운의 미간은 좁아들었다. 그 가 처음으로 추궁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진희야. 태국영은.”
“…자리를 비웠어요. 그는 아마 아이를 구하러 갈 거예
여제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놈은 이승도 씨 곁에 있어야지. 누 굴 믿어,지금 이 상황에!”
그는 등받이에 걸쳐 둔 재킷을 거칠게 잡아채곤 여진희 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여진희는 가만히 머그컵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일 로 인해 저는 여 가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 역시.
그럼에도 그를 찾아왔다. 생애 처음으로 가슴에 누군가 를 품어 본 그를 우I해,그가 후에 지금 이 순간을 곱씹으 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선택은 저 스스로가 한 것이었다. 제게 돌아올 대가는 아쉽지 않았다. 다만,조금은 슬프고 외롭다고,여진희는 생각했다. 미련한 외사랑이 슬프고,미련 없이 사라진 그 의 자리가 외로웠다.
“고맙다,진희야.”
여진희는 멈칫 고개를 돌렸다. 나간 줄 알았던 여제운 이 돌아와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강하 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 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늘. 내가 언젠가 너에게 진 빚들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면,내 모든 걸 걸고 그렇게 하마. 진 심이다.”
여진희는 흐리게 눈물 맺힌 눈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 다-
여홍재는 일찍이 본가에 돌아와 있었다. 여군호에게 패 배한 부친이 이곳을 떠나고,저도 쫓겨나듯 해외발령이 난 뒤로 먼지만 쌓여있던 집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은 채 세월의 무게만 견디던 소담스런 저택은 요즘 들어 전에 없 이 활기가 넘쳤다. 자신이 돌아와 다 죽어가던 곳에 심폐 소생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곧장 모니터실 로 향했다. 한쪽 벽 면을 배곡하게 채운 CCTV 브라운관 이 온도 없는 빛을 반사했다. 여홍재는 그 가운데 놓인 의 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아직 모니터들에 별다른 움직임 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20분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기다리던 것이 왔다. 모니터 중 하나에서 여치영이 기절한 태국영의 아들 놈을 어깨에 이고서 등장했다. 유약하게 태어난 어린 종자
는 쉴 새 없이 쏟아 부은 신경안정제를 이기지 못하고 완 전히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여치영이 씨익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엄지를 올렸다.
여홍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치영은 호주머니에서 휴 대폰을 끼내 들었고 곧 여홍재의 휴대폰에서 반응이 왔다.
“그래. 잘했다.,,
《하… 같이 작업 갔던 애들이 죽긴 했지만,그래도 소 득은 나쁘지 않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생각해. 여은태가 따라붙 었나?”
《응. 아,그 새끼 진짜 빠르고 끈질기더라. 막판엔 따라 잡힐까봐 정말 조마조마했다고. 아마 지금은 집 밖에서 똥 줄이 타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제가 아무리 근본을 잘 타고 났어도 성체들 이 그리 우글거리는 곳에 쳐들어올 수는 없겠지. 그래도 잠입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언제든 그 꼬맹이 멱 을 딸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도록 해. 배앗기면 끝이라는 거 알지?”
《잘 알아. 걱정 말라고.》
통화는 짧게 끝났다. 여치영은 화면 속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실실 웃고 있는 꼴이 태국영에게 한 방 먹
이는 게 못내 짜릿한 듯했다. 여홍재는 혀를 차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즐기라고.
그리고 그때,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여홍재는 별생 각 없이 작은 기기를 들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이승도 포획했다. 지금 산장으로 가고 있으니 대략 이 십 분쯤 뒤에 확인해 보도록 해.』
여홍재는 체면도 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짧 고 격렬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 었던 일이 이토록 쉽게 이뤄질 줄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 다.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여홍재는 이원표에 대한 평가 를 극도로 격상시켰다.
후에 종주가 되면 반드시 이 남자를 제 수족으로 부릴 것이었다. 이 남자의 일 처리는 제 오른팔이 되기에 충분 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여홍재는 흥분한 손으로 그에 게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고,잠시 뒤 그는 동영상을 하나 전송해 왔다. 그의 말대로 뒷좌석에 맛줄과 안전벨트에 단단히 매여 있는 이승도가 보였다.
제 아들놈이랑 똑같이 앞으로 다가올 제 운명을 모른 채 로 세상모르게 잠든 모습이었다.
“좋았어. …좋았어!”
여홍재는 이원표가 도대체 그 철벽 방어를 뚫고 이승도 를 납치했는지 궁금했지만,곧 도착한 보고에 의해 물어 볼 틈이 없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그의 동생,여홍원이
조금 딱딱한 낯빛으로 말했다.
“종주님에게서 전갈이 왔어.”
“무슨……?,,
여홍재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여홍원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말을 고르지 못했는지 척 척 다가와 한 손에 쥐고 있던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여가 주의 인장이 찍힌 한 장의 서신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여홍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처음에 제 눈이 잘못되었나 의 심해 한 번 더 읽었고,그 다음엔 이해가 안 가 다시금 읽 었고,마지막에는 분노에 차서 글자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 다.
“이 늙은이가……!”
여홍재가 사납게 종이를 구겼다.
“다 때려 부숴 r
태호연이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태 가의 어린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담장을 넘었다. 그 모습이 마치,이 미 백기를 든 성채를 굳이 유린하려 드는 저열한 침략자들 처럼 보였다.
기분 탓일 거다. 그래. 이건 그냥 기분 탓이었다. 이미 녀석들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져 있기 때문일 거다. 태호연 은 ‘애들이 아직 어리고 순수해서 그래.’하고 애써 합리화 를 하며 그 생각을 떨어냈다. 저렇게 단순해 보여도 다들 일은 곧잘 했다. 흔치 않게 피를 봅아내는 작업에 투입되 는 바람에 지나치게 들떴을 분이었다.
태호연은 녀석들과 달리 당당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 갔다. 그의 발에 차인 쇠문이 깊이 우그러진 채 덜렁거렸 다. 겨우 살아남은 경첩 하나에 몸을 지탱하던 쇠문은 다 시금 이어진 그의 발길질에 완전히 날아가 정원 한구석에 처박혔다.
그가 들어갔을 때 이미 안쪽은 아비규환이었다. 영문 모르고 끌려 나온 여자들이 정원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떨 고 있었고,집안에서는 피 끓는 고함이 멈추질 않았다. 태 호연은 차마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 는 여자들을 무감한 시선으로 내려 다보았다.
“저기요,태호연 씨!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남편은 정말
최명욱이랑 아무런 작당도 하지 않았어요. 이,이러는 건 너무 법도에 어긋나잖아요! 우린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 고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발악하듯 악을 쓰는 여자 에게 다가갔다. 태호연은 그녀 앞에 서서 한 손에 둘둘 말 아 쥔 종이 뭉치를 펴 들었다. 희었을 게 분명한 종이는 이 미 자줏빛으로 물든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잔뜩 구겨진 채였 다.
태호연은 가죽장갑 낀 손으로 세 번째 장을 찾아냈다. 지금 습격한 이 집의 가족관계도가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 는 페이지였다. 태호연은 그 안의 사진과 여자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주인이시군.”
“네. 제가 이 집의 안주인입니다. 여자를 이렇게 대하 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물론 이 세계의 불문율은 그랬다. 전쟁에서도 당당하 게 생존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자들의 특권.
그런데 그게 뭐 어깼다고.
“미안한데,우리 가주가 지금 완전히 눈이 돌았어. 예전 에 웬 미친 여자 하나 살려둔 덕에 지금 단단히 골머리를 앓고 있거든.”
“무…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
태호연이 악귀처럼 웃었다.
“이 집의 누구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다는 애기지.” 여자가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그녀는 다시금 이 상황 의 부당함을 소리치려 했으나 태호연이 더 발랐다. 그는 그대로 발을 휘둘러 고통 없이 여자의 숨통을 끊어냈다. 머리가 박살 난 시신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함께 끌려 나온 고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로 막 나 올 줄은 그들조차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폭설이 시체를 하얗게 뒤덮어 갔다.
태호연은 냉정했다. 최명욱과 같은 본의 최 씨를 쓰는 이의 가족들과 고용인들은 단 하나도 살려둘 계획이 없었 다.
화근이 될 것은 작은 씨앗 하나까지 말끔히 도려낸다. 태국영은 야만적인 방식의 필요성을 몸소 절감했고 다 시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 단언했다. 그저 연 인의 품에서 평온하게 노는 것이 꿈이었던 남자를 억지로 우리에서 끌어낸 이들은 의당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안쪽 정리 끝났습니다!”
태왕자가 바깥으로 나오며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의 매 끈한 얼굴에서는 갓 뒤집어쓴 피가 기괴한 곡선으로 흘러 내렸고,그의 손에는 이 집안 가장의 잘린 머리가 덜렁거 렸다. 몹시 보기 안 좋은 광경이었으나 태호연은 심드렁하 게 고개를 끄덕일 분이었다.
“여기도 다처리해.,,
우르르 몰려나온 태 가의 어린양들은 고용인들도 순식 간에 해치웠다. 산 채로 사지를 뜯고 심장을 뽑아내는 녀 석들의 얼굴은 즐거움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이 잔혹하고 야만적인 본성의 실체가 일족 사이에서 빛과 같이 퍼져 나갈 것이었다. 그들은 태 씨만 들어도 피비린내를 떠올릴 것이며,태국영의 아성 안 에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흠집 낼 엄두조차 내지 않으리라.
“자. 신속하게 피 닦고 이동한다. 다음은……■,,
쌓인 눈으로 피를 닦아내는 녀석들에게 지시하던 태호 연은 중도에 말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태국영 의 이름이 액정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무 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태호연은 입술 앞에 검지를 세 워 어린양들의 소란을 중지시켰다. 무용담 거리도 안 되 는 걸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던 입들이 딱 닫혔다.
“무슨 일이나.”
태호연은 전화를 받으며 무심결에 휴대폰에서 흘러나 오는 저 먼 곳의 소리를 긁어냈다. 그리고 제 직감이 맞았 음을 바로 깨달았다.
《일이 조금 잘못됐어.》
태국영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소음이 선명했다. 태호연은 꿈틀 미간을 좁혔고,
태 가의 젊은 남자들도 굳은 낯으로 두 남자의 통화를 주 목했다.
《예상외로 여홍재가 자기 꼬봉들 데리고 직접 움직였 네. 이경이가 지금 놈들 손에 있어. 나 애 데리러 가는 길 이야.〉〉
“이경이가……!”
태호연은 격노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살기가 불길처 럼 요동쳤다.
《그래서 계획을 좀 바꿔야겠어. 최 가는 조금 뒤로 미 뤄 두고 그 새끼들부터 쳐야 될 것 같아.》
“이경이는 어디에 있나. 내가 애들 데리고 그리로 가마.
《아니. 거긴 내가 가. 형은 따로 가 줘야할 곳이 있어.〉〉
“너 혼자 가서 뭘 어쪄려괴 뻔하잖아! 이건 너를 노린
함정인데 네가 순순히 가 주면 놈들 뜻대로 되는 거라고!”
《혼자는 아니야. 걱정 마. 실패 없이 데려올 자신 있으 니까. 그보다 형은 여홍재를 좀 맡아줘.》
태국영의 장담에 불안은 희석되었다. 그러나 새카맣게 가슴을 태운 분노까지 잦아들지는 않았다. 태호연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좋아. 뭐든 말만 해. 내가 그 새끼,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먹어 줄 테니까.”
《지금쯤 태일 비서실에서 띄운 공문 보고 힘쓰고 싶어 안달 난 놈들 모여들고 있을 거야. 형은 당장 회사로 가서 그 애들을 좀 지휘해 줘야겠어.》
“뭘 하면 되나.”
《오늘 아주 바블 거야. 씨를 말려야 할 곳이 한두 군데 가 아니거든. 난 이경이 구하고 곧장 승도한테 가야 하니 까,형은 회사로 가서 애들 데리고 여홍재 수족들부터 싹 다 조져.》
“여홍재는?”
태국영이 음산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보이면 밟고 아니면 굳이 찾지 마. 내가 직접 할 거니 까.》
“찬성이야. 다만 그 정도로 크게 일을 벌이면 여 가랑
전면전으로 번지게 될 거야. 그건 알고 있겠지?”
다른 가문은 몰라도 여 가와의 전쟁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물론 이전까지의 생각이었다. 태호연은 지금 여 가 아니라 일족 전체를 상대로라도 피의 전쟁을 치를 각오 가 되어 있었다.
《그럴 일은 없어.》
태호연은 의아한 듯 눈썹을 꺾어 올렸다. 태국영이 조 소를 섞어 뒷말을 이었다.
《개들 이미 여군호가 족보에서 깨끗이 파 버렸거든.》
‘‘……뭐?”
《못 알아들어?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이미 그놈들은 물론이고 놈들 계획에 가담해서 손 빌려준 놈들까지 싹 다 여 가 족보에서 지워버렸다고. 그것도 사흘 전에 말이 야.》
“사흘 전?”
태호연은 기가 막혀 허,하고 헛숨을 뱉어냈다.
《좆같은 건,다 알면서도 여군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 을 수가 없다는 거지. 씨발. 이번에도 뱉어낼 수 없으니 삼 킬 수밖에. 짜증 나지만 이번에도 그 늙은이 원대로 해주 자고.》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여군호가 여홍재를 제
후계자로 눈여겨볼 일이 없다는 걸 당연히 알 것이다. 능 력을 떠나 그 성품이 여제운에 비해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 문이었다. 친위대가 왜 그를 후보로 지정했는지 의아할 정 도로 말이다.
단순히 너무 얌전하고 정적(靜的)인 여제운을 자극하 기 위해 불러들인 줄 알았더니……
여홍재는 여군호가 키운 파리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 니었던 거였다. 은퇴를 선언하기 전부터 여군호는 이미 가 문에 해가 될 쓸모없는 해충들을 불태워 버릴 심산이었던 거다.
그는 여홍재에게 적절히 먹이를 던져주며 야망과 희망 을 부추겼다. 여홍재가 가면 속 얼굴을 서서히 드러내는 동안 그 주위에 어리석은 날파리들이 몰려드는 것을 가만 히 주시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음험한 계책 에 동참하는 이들이 절정으로 그에게 꼬여 들었을 때,단 번에 줄기를 쳐서 굶주린 짐승들에게 던져주었다.
태호연은 탄식했다.
놈들을 뼈째로 먹어치울 짐승들은 바로 저희들이었다.
신 가에도 때아닌 전시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귀하디귀 한 딸이 습격을 받은 일로 가주 신종남이 대노하여 여군호 를 찾아갔을 때부터 다들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시간을 보 냈다. 오늘 무언가 터져도 단단히 터질 것임에는 분명했 다-
자애롭고 따뜻한 가주 신종남은 유일하게 신영애와 관 련된 일에만 이성을 못 찾곤 했다. 누가 보더라도 신영애 는 여자의 몸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것들을 다 가지 고 태어났는데,그의 부친도 오라비들도 신영애가 마치 세 상에서 가장 가녀리고 연약한 생물인 것처럼 대했다.
손끝만 베도 난리가 나는데,남자에게 두드려 맞을 뻔 하고 차에 들이받혀 엄동설한의 강으로 추락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들로서는 그저 여군호가 중간에서 잘 중재하여 원만 한 방향으로 해결이 되기를 바랐으나,한편으로는 그 괘씸 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가문의 명예도 명예지만,무엇보다 믿는 구석이 탄탄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일의 기본적인 뼈대는 결국 태 가와 여 가의 마찰 이었다. 태 가로도 일단 한숨 돌릴 수 있는데 거기에 투견 남강우까지 합세해 있다는 소문이 이미 쫙 깔린 상태였다.
여군호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남자다. 그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이 난장판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 분 명했다.
그렇다면 역시 유리한 것은 태 가가 아니겠는가.
그들의 전력에 합세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굳 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긴장감은 있었으나 두려움은 없 는 상태로 시간이 흐르던 가운데,신영애와 그녀를 마중 간 신의재가 먼저 돌아왔다. 걱정이 태산이었던 모친이 맨 발로 달려가 신영애를 맞았다.
“세상에,우리 딸. 얼마나 놀랐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디 얼굴 좀 보자.”
“나 별로 안 놀랐고 무섭지도 않았어. 그보다 나 나갈 준비해야 되니까 이따가 애기해,엄마.”
‘‘응? 어딜?”
“자세한 애긴 나중에,응? 서두르지 않으면 태국영이 랑 강우 오빠가 다 끝내 버릴 거야.”
다급히 대꾸한 신영애는 바람처럼 2층으로 뛰어올라갔 다. 모친은 재가 저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나 애꿎은 신 의재를 닦달했고 신의재는 모친이 다시 졸도할까봐 차마 입을 못 떼고 머뭇거렸다. 그녀의 의문은 잠시 뒤 현관을 박차고 들어온 신 가의 남자들로 인해 풀렸다.
“아니. 너희는 여기 웬일이니?”
그러자 남자들이 대답했다.
“오늘 하루 영애를 호위할 힘 센 남자들 구한다던데요? “…그걸 왜 구해?”
“에이. 영애 성격 아시면서. 개 지 손으로 복수 못 하면 화병 나서 죽을 애잖아요.”
신의재의 우려대로 모친은 생애 두 번째의 졸도를 경험 했다.
이승도는 가수면 상태에서 문득 태동을 느꼈다. 처음 은 그저 잠투정을 부리듯 작은 뒤척임이었다. 어디가 불편 한 걸까,정신을 차리고 맑은 머리로 뱃가죽 위를 두드려 달래주고 싶었는데 어쩐지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끝없 이 까라지는 육신은 물먹은 솜이 아니라 물에 잠긴 솜 같 았다.
꿈틀.
태아가 조금 크게 몸을 뒤틀었다. 마치 몸을 조이는 쇠 사슬을 억지로 떨어내듯 날카롭지만 굼뜬 동작이었다. 그
리고 잠시 잠잠했다가 수 초 뒤 이어진 움직임은 폭발적으 로 격렬한 변화를 보였다.
이승도는 녀석이 극도의 분노로 흥분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전신으로 뻗어 가는 고열이 생생하게 신 경 줄을 당겼다. 더웠다. 아니,덥다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몸이 불덩이였다. 인중에 맺히는 숨결이 화염처 럼 피부를 벗겨낼 듯했다.
「그건 좋은 신호야.」
태국영의 나른한 음성이 흐린 안개처럼 뇌리를 채웠다.
「태아가 제 몸에 해로운 걸 스스로 정화했다는 뜻이라 고.」
그는 담배를 피울 때 제 체온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 다는 설명을 덧붙였었다. 괴롭게 전신을 지지던 고열이 정 점을 찍은 뒤 차춤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먼바다를 헤매던 의식이 점차 가까워지자 뒤늦게 의문을 느꼈다.
태아는 지금 제가 외부의 힘으로 인해 오래 잠들어 있 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고,그로 인해 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이승도는 태아의 발열 증상이 왜 제 몸을 강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딱히 해로운 걸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승도는 기억의 끝을 찾아 헤매었다. 해로운 걸 먹은 기억은 없지만 무리는 좀 한 것 같았다. 몇 시간을 거의 앉 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동물들의 건 강을 체크한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머릿속을 부옇게 채우는 안개가 확연히 걷혔을 때,태 국영과의 마지막 통화가 선명하게 귓전을 스쳤다.
「졸려.」
「퇴근하겠다고 말해 봐. 네 시간 다 돼 가잖아.」
「아니. 수술한 애 있어서 한숨 잤다가 개 보고 가야겠 어. 나 소파에서 잠깐 눈 좀 붙일게. 오래 안 일어나면 네 가와서 깨워줘.」
「응.」
국영이는 어디 있지? 난 얼마나 잔 걸까? 별이는 왜 화 가 났어? 내가 무리를 해서 화가 난 거니? 몸이 무거워. 여긴 어디야?
정체되어 있던 사고가 깨어나며 수많은 의문들이 두개 골 안을 채웠다. 그러다 그는 불현듯 소스라치며 눈가를 떨었다.
여기가 어디나고? 내가 왜 그런 걸 궁금해하지? 여긴 진료실이잖아.
눈끼풀은 여전히 무거웠고 그 안에 잠긴 눈동자만 분주
히 움직였다. 몸에 닿는 질감이 낯설었다. 진료실 소파의 싸구려 가죽 촉감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탄력 있고 폭신했으며 부들부들한 시트가 늘어진 손등에 닿아 있었 다. 이것은 침대였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누운 기억이 없었다.
이승도는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가장 먼저 입력 된 정보는 불 냄새였다. 마른 장작이 연소할 때 나는 특유 의 향이었다.
여긴 진료실이 아니다.
깨닫자마자 불안함이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혹시 제가 자는 사이 태국영이 저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까. 하지만 옮겨지는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데,그건 몹 시 이상한 일이었다. 별이는 꽤 민감한 녀석이라 태국영 이 뒤척이는 소리에도 곧잘 깨곤 했다.
손끝이 움직거렸다. 지금이라면 눈을 뜰 수 있을 것이 다. 헌데 엄두가 안 났다. 왜 이렇게 불안하고 무서운 건 지 모르겠다. 분명 태국영이 지척에 있었고,믿음직한 그 의 가문 남자들이 다섯이나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이승도는 가까스로 용기를 끌어모 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속도는 지루할 만큼 느렸다. 반면 흐릿했던 시야는 빠르게 초점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둑한 실내를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페치카였다. 장작이 타오르며 불길이 춤을 추 고 있었다. 그 위로 난 작은 창은 어둠이 덮었다.
낯선 풍경과 시간 차에 불안감은 짙어졌다. 소리 내어 태국영을 부르고 싶었는데,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입술을 붙였다. 이승도는 점점 가빠오는 숨을 애 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현대적인 느낌보다는 고풍스러운 감각이 돋보이는 인 테리어였다. 앤티크한 소품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바닥 은 짙은 색의 원목 재질이었고 벽은 자연스럽게 그러데이 션이 들어간 무채색의 벽돌로 이루어졌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여직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별이가 버둥거리 던 걸 멈추고 얌전해졌다. 아직 뭐가 원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정황들로 봤을 때 제게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고,그렇게 느꼈을 때였다.
“깨셨습니까.”
이승도는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앤티크 한느낌의 티 테이블 세트만 덩그러니 있던 곳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머리가 일순 명했다. 불시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담담한 얼굴에 불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 리고 그의 낯이 너무나 익숙하매,이승도는 더욱더 혼란스 러워지고 말았다.
“성문 씨……?,,
쉴 새 없이 눈발의 폭격을 맞은 도시는 금세 어둠으로 명들었다. 한파와 폭설이 동시에 내습한 밤이 적막을 향 해 달려가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거친 바람이 앙상한 나 뭇가지를 흔들었다. 짧은 코트 깃이 세차게 펄럭였다.
북악산 능선의 중간 즈음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태국 영은 젖은 코트를 벗어 던졌다. 희미한 물빛이 도는 셔츠 가 금세 젖어들어 살갗에 눌어붙어 왔다. 찬 것을 맞닥뜨 린 피부에서 쉼 없이 증기가 피어올랐다.
태국영은 가죽장갑의 손목을 더 단단히 끌어 올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여치영의 집은 북악산 전망을 한 아름 끌어안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 면 한눈에 들어올 위치였으나 지금은 그저 어렴풋이 윤곽 만 보이는 정도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움직일 시간이었다. 바위에서 훌
쩍 뛰어내린 그는 얼어붙은 흙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고개 를 쳐들고 암흑을 노려보았다.
시린 안광이 서슬 퍼렇게 번득였다. 그는 단단하고 넓 은 어깨를 뒤로 크게 젖히며 전신을 뜨겁게 휘도는 기를 방출했다. 그 순간,혈기 넘치는 맹수의 소리 없는 포효가 천지를 집어삼켰다.
칼날처럼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기류를 잃고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진동은 거미줄처럼 허공을 잘게 쪼개며 멀리 퍼져나갔다. 깊이 부리를 박은 나무들은 겁에 질려 땅으 로 누웠고,산새와 작은 짐승들은 부리나케 그에게서 더 먼 곳을 향해 달아났다.
태국영의 어깨가 느리게 오르내렸다. 그는 죽은 땅에 홀로 서서 가만히 숨만 쉬었다. 이제 이 근방의 예민한 짐 승들은 모두 제가 이곳에 당도해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 이었다.
온기 없는 모발에 하얗게 눈이 쌓여가고 있을 무렵이었 다. 눈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몸체가 불쑥 눈앞에 나타 났다. 여은태였다. 녀석이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며 투덜거 렸다.
【거 요란뻑적지근하게도 알리네. 소름 돋아 죽는 줄 알 았다구.】
여은태는 잔뜩 긴장한 채 여치영의 집을 염탐하고 있 던 중 그 맹렬한 기세에 치였다. 소리는 없고 오묘한 진동 으로만 전해져 왔는데도 펄쩍 뛸 만큼 놀라 그 자리에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침묵의 위협이 그토록 살기등등할 수도 있단 걸,여은태는 처음 알았다.
“적당히 했으면 네가 살기를 붐어내며 털을 바짝 세웠 겠지. 그럼 넌 바로 발각됐을 거고,지금쯤 쫓겨 다니고 있 을걸.”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한 번 눈에 띄면 그걸로 끝이다.
여 가의 눈은 너무 밝고 집요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 었다. 그러나 다행히一그리고 몹시 불쾌하게도 저는 태국 영의 기에 완벽히 압도당해 눌려버렸고,여치영의 집 안에 서 진을 치고 있던 놈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놈들은 그 짧은 순간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 본능적으로 더 어두운 곳 들을 찾아 숨어드느라 난리였다.
“상황은.”
【대충 서른 놈도 넘어. 내가 어떻게든 잠입해서 이경이 물어오고 싶었는데 감시가 만만치 않아서 시도할 수가 없 었어.】
“잘 참았어. 이경이는 어떤 상탠데.”
【자세히는 몰라. 혹시라도 누가 눈치챌까봐 아직 안까
지 들어가 보지는 못했거든. 근데 꼼틀꼼틀 움직이는 기척 을 읽어보니까 몸이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아. 어디 묶여 있든지 좁은 곳에 갇혀 있든지. 그래도 다행히 피 냄새는 안 났지만,놈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이경이 죽일까 봐 걱 정 돼서 미치는 줄 알았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걱정 마. 내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지 이경이가 죽을 일 은 없으니까.”
【죽이진 않더라도 막 구박하고 때리면 어떡해.】
“좀 맞는다고 안 죽어.”
태국영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뒤를 돌았다. 앞장서 걷 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여은태는 차가운 눈초리를 치떴다.
【말 진짜 예쁘게 한다니까. 당신은 정말 아빠 자격이 없 어.】
태국영은 흉기처럼 뾰족하게 날 선 나뭇가지들을 슥슥 헤쳐 가며 대꾸했다.
“아들 구하러 온 아빠한테 하는 말치고는 좀 짜네.”
【이럴 때 안 오면 진짜 말종이고! 좀 더 귀하게 대하란 말이야.】
“난 내 아들의 보호자 역할은 충실해 해 줄 생각이지만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키울 맘은 없어. 네 육아 신념은 나 중에 태어날 네 아이들에게나 적용해.”
【이경이 이제 겨우 다섯 살이야.】
“그리고 다섯 살이면 또래끼리 싸우다 서로를 죽일 수 도 있는 나이지. 실수로든,고의로든.”
따박따박 대답해 주던 태국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 아보았다. 여은태가 못마땅하게 눈을 부라리자 그의 미간 이 슬쩍 일그러졌다.
“근데 넌 왜 따라와.”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여은태는 눈을 끔뻑였다. 태국영 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왜 내 뒤만 졸졸 따라오냐고. 네가 먼저 가서 이경이 곁에 붙어 있어야 내가 개를 구하든 저 씨발 잡놈들을 패 죽이건 할 거 아나. 이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해야 할 정도 로 머저리나?”
여은태는 아차 싶어 뛰려다가 골이 나서 버럭 소리쳤 다.
【당신은 뭐 처음부터 어른들 싸움에 익숙했냐? 자꾸 나 한테 이렇게 나오면 선생님한테 다 이를 거야. 백화점에 최 씨 놈 올 거 알면서도 이경이 보냈다고!】
태국영이 눈가를 찌푸리며 반박했다.
“보낸 건 아나. 가게 내버려둔 거지.”
【그거나 그거나. 한 번만 더 화나게 해 봐. 진짜 가서
일러바칠 테니까.】
여은태는 훌쩍 달음박질치며 태국영의 곁을 스쳐 지나 갔다. 그러나 녀석은 막 어둠 속으로 녹아들기 직전 발을 멈추고 망설이듯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주둥이가 작게 움찔거렸다. 답지 않은 모습에 태국영 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
‘‘저기 뭐. 발리 말해. 시간 없어.”
【…나 실수하면 어떡해?】
이승도에게 약속했었다. 꼭 멋진 어른으로 자라서 선생 님도 지켜주고,선생님 아가도 지켜주겠다고. 큰 몫을 하 기에 저는 아직 너무 어렸지만 이럴 때 도움이 못 된다면 그딴 약속은 결국 허풍에 불과하게 되어버리는 거였다.
【나 겁나. 내가 실수하면 이경이 죽는 거잖아.】
여은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국영은 물끄 러미 여은태를 바라보았다. 이제 열셋,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싸워본 적이 없는 녀석이니 그 불안감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예쁘다고 물고 발고 틈만 나면 업 고 다니던 아이가 아닌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네가 못 지킬 상 대는 없어.”
태국영은 가죽장갑 낀 손으로 제 머리에 소복하게 앉 은 눈을 탁탁 털어내며 물었다.
“내 아들 목숨이 달려 있는 지금,내가 왜 굳이 성년식 도 아직 못 치른 너한테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고 생각해?”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게 나분이니까?】
“아니. 완벽할 필요는 없어. 지금 저기 떼로 몰려 있는 여 가 놈들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여제운 정도로도 충분 해. 여제운은 내가 도움을 청하면 당장 달려왔을 거야. 승 도한테 마음의 빚이 있으니까.”
여은태는 뜻밖의 말에 명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렇다 면 오히려 여제운의 손을 빌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지금 날 더 잘 도와줄 수 있는 건 개가 아니라 너야. 이런 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문제에서 좌우되니까.”
【…무슨 말이야?】
“네가 이경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내가 잘 안 다는 말이야.”
여은태는 온순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발등에 소복이 맺 힌 눈을 괜히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이경이 많이 아끼고 사랑해. 꼭 지켜주고 싶어.
]
태국영은 여은태에게 다가가 정수리를 꾹 한 번 눌러 짚었다.
“이경이는 연약해서 심장 한 번 뚫리면 아마 재생이 안 될지도 몰라. 유사시에는,정말 죽을 각오로 몸을 날려서 그 애를 지켜줘. 부탁할게.”
그래도 자기 아들 걱정은 되나 보네.
내심 꽁하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사르르 풀렸다. 태국 영은 신호를 주겠다고 말했고 여은태는 반드시 그 틈을 놓 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네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은 거의 없고,네가 속이지 못 할 눈은 거의 없다. 자신감을 가져.”
태국영은 여은태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찼다. 여은태는 신경질을 내면서도 바삐 어둠 속에 뛰어들었다. 계속 투닥 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태국영이 장담을 해 도 마음 한구석은 계속 초조했다.
여은태는 험준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장 빠른 동선 을 탔다. 짐승의 이발 같은 잔가지가 무수히 몸을 스치고 폭설은 시야를 방해했지만 튼실한 네 발은 충실하게 속도 를 유지했다.
산어귀쯤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은태는 별안간 멈추어 날카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푸드득,나뭇가지가 힘겹게 이 고 있던 눈덩이가 콧등에 쏟아졌다. 선득하게 차가운 그 느낌에도 여은태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어딘가를 노려보 았다.
요상하단 말이야.
여은태는 갸름하게 눈매를 좁혔다. 정확히 언제부터인 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찝찝한순간들이 더러 있 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들여다보면 아 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냄새,온기,소리,모든 방해물들 을 다 거둬 내도 수상한 먼지 한 톨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 었다.
이상하네. 내 감각을 속일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했는 데.
방금 전 태국영의 말을 상기하자 의문은 더욱 깊어졌 다. 여은태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뒤돌아 달렸다. 지금은 이런 사소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쉬 마려워.
태이경은 침울하게 생각하며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맘껏 몸을 비틀 수도 없었다. 차마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분위기가 아니라 계속 참고 있었지만,이대로라면 금방 한계에 부딪치고 말 거였다.
어쩌면 좋지.
태이경은 조심히 눈을 굴렸다. 방을 지키고 있는 남자 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숫자는 내리 세 명을 유지했는데 지금은 다섯 명으로 늘었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들 은 죄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마 저 흘렀다. 태국영이 작정하고 보낸 경고장이 그들에게 정 신적인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던 호랑이 무리처럼 기세등등했 던 남자들은 파동이 전해져오는 순간 거의 발작을 하며 사 라졌다. 그들은 아마도 코앞에서 집채만 한 맹수의 이발 이 제 머리통을 씹어 무는 환상을 보았을 것이었다.
태이경 자신도 보았다. 아빠 모습이라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아빠가 머리를 물려고 하는 걸 보면 어디 옮겨주 려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압 력 자체가 너무 세서 토악질은 조금 했다.
한순간 쑥대밭이 되었던 집안은 금세 정상 궤도로 돌아
왔으나 후유증은 여진처럼 남아 이들을 뒤흔들고 있는 듯 했다. 감시자가 늘고 그들 사이에서 대화가 말끔히 사라 진 것이 그 증거였다.
금방 나올 것 같은데.
아까 구토를 하며 배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요의는 더 심해졌다. 태이경은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무 사히 화장실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초조하게 생각했 다. 보통 어린애가 애교를 부리면 어른들은 곧잘 원하는 바를 들어주곤 했지만,이들에게서 그런 상식적인 반응을 바라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으니 쓸데없는 말은 모두 생략하고 본론만 전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저기…… 아저씨들. 저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요……
남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태이경은 말간 눈을 도로 록 굴리며 조심히 뒷말을 이었다.
“저는 여기서 쉬해도 되지만 아저씨들은 불쾌할 것 같 은데…… 어떡하죠? 참는 건 이미 다 했는데.”
잠깐의 침묵 끝에 서열이 가장 높이 보이는 남자가 밤 송이 같은 머리의 남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밤송이 남자 는 다가가 태이경의 사슬을 풀어내고 방에 딸린 화장실로 데려갔다.
“문 열어둘 거니까 헛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저린 팔다리부터 톡톡 두드리고 있던 태이경은 힘껏 고 개를 끄덕였다.
“네. …저기,그래도 지켜보시는 건 좀…… 돌아서 있 어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보나 안 보나 똑같은데…….
태이경 자체가 극도의 경계를 필요로 하는 대상은 아니 었기에 남자는 순순히 몸을 돌렸다. 태이경은 휴 한숨지으 며 재발리 바지춤을 풀어냈고,참았던 만큼 시원하게 쏟아 냈다.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지끈거리던 아랫배가 텅 비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태이경은 물을 내리고 돌아섰다. 손을 씻어도 되나 물 어볼까 고민하다 그냥 세면대로 향했다. 화장실도 가게 해 줬으니 이 정도는 왠지 봐줄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돌 리자 남자가 힐긋 한 번 뒤돌아보았다. 태이경은 비누를 두 손으로 든 채 눈을 끔뻑였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역시 괜찮은 모양이었다. 비누에 물을 적셔 손에 꼼 꼼히 적시고 있을 때였다.
응?
태이경은 일순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들었다. 거울 표 면에 맺힌 물방울이 자꾸만 외곽 시야에서 신경을 잡아당
긴 탓이었다. 원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는데 그 이유 는 정확히 몰랐다. 태이경은 비누칠 한 손을 물로 보독보 독 씻어내며 미간을 좁혔다.
움직이네?
물방울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중력을 무시 한 움직임은 작지만 선명한 하트 문양을 남겼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옆으로,그 위로,연이어 나 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들은 절대 착각일 리가 없 었다. 태이경은 눈을 크게 뜨며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형아……?
그것을 깨닫는 순간,태이경은 서둘러 물을 잠그고 화 장실 밖으로 나왔다. 더 지체했다가는 누군가가 의심을 할 지도 모른다.
“다 됐어요,아저씨.,’
태이경은 얌전히 팔을 내밀었다. 긴장 때문인지 안도 때문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밤송이 머리 남자가 손 목부터 시작해 몸에 다시 사슬을 감는 동안,태이경은 혹 여 무슨 낌새라도 챘나 싶어 남자들의 눈치를 살펐다. 다 행히 그 누구도 이쪽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태이경은 남자가 옮겨다 놓은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았 다. 주위를 연신 둘러보지만 남자들도 발견하지 못하는 여
은태를 제 눈이 잡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형아.
입 모양으로만 작게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뺨으로 온기 가 와 닿았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혀 를 내밀어 할고 있는 것인지 얼굴을 맞대 비비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여은태가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는 거였다. 어찐지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처음에는 미칠 듯이 화가 치밀었고,화가 가라앉기 시 작했을 무렵부터는 초조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만약 저 희들이 정말로 여 가에서 완전히 제명당해 다른 ‘여 가’로 서 독립된 가문을 가지게 된 것이라면 모든 계획이 수포 로 돌아갈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태국영을 비롯해 태 가의 주 전력들을 이번 기회로 솎 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후가 문제였다. 여 가라 는 큰 뒷배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태 가의 잔당들 은 복수를 하기 위해 필시 전쟁을 선포할 게 분명했다.
놈들 따위 무섭지 않아. 아무렴,명청한 주제에 힘 좀
세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쯤 다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짓밟아주면 그만이었다.
여홍재는 버릇대로 자기암시를 되풀이했다. 그 자신이 그토록 거침없이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 여군호라는 방패를 은연중에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 도,그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여군호를 어리석다고 비난했 다. 다음 대 여 가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을 자신을 내치다 니,그 늙은이가 노망이 나도 단단히 난 것이다.
여홍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모든 일이 순조로 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당당하게 경쟁자들을 제치고 종 주 자리에 오르려면 이런 사소한 위기쯤 슬기롭게 대처하 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명하니 서 있기만 하는 여홍원을 재 촉해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이원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태국영과 그의 주 수족들이 깨 끗하게 명줄이 끊어지는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 이 될 것 같았다. 본래 계획대로 모니터를 통해 느긋이 구 경만 하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었다.
“형. 지금이라도 다 철수시키는 게어때.”
이제껏 늘 제 결정을 따라오던 여홍원이 불안한 낯으
로 말을 꺼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여홍재가 벼락같은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되돌례 이 미 태국영의 암컷이고 그 새끼고 다 잡아 뒀다고 선전포고 를 한 마당에!”
“차라리 협상을 시도하는 게 낫지 않겠나고. 아직 아무 도 죽지 않았어. 곱게 돌려보내준다고 하면 태국영도 어 쩔 수 없이 협상에 응할 거야.”
“웃기는 소리. 그 새끼가 그걸로 끝낼 것 같아? 분명 겉 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했다가 급한 불 끄고 나면 다 잡아 죽이러 다닐 거야. 등대 매춘에 가담한 놈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여홍원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어 그만 그쯤에서 입 을 다물고 말았다. 태국영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남자 였다. 이제 후퇴할 길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분.
“여군호 이 뱀 같은 늙은이. 분명 여제운을 후계자로 앉 히고 싶어서 간계를 꾸민 거야.”
여홍재는 핏발 선 눈으로 핸들을 광 내리쳤다. 분해서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여군호는 처음부터 태국영을 끌어 안고 자폭시킬 셈으로 저를 불러들인 게 분명했다. 이미
태국영의 명줄을 틀어쥔 이때,퇴로가 완전히 사라진 이 때 제명 사실을 알려온 것이 그 확실한 방증이었다.
토사구팽이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그 누 구도 아닌 여군호였다. 그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서 가문 의 정적과 후계자의 정적을 동시에 제거할 기회를 챙겨갔 다-
울분이 차올랐다. 그의 계획을 온통 망가뜨리고 싶지 만,이제 와 태국영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분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조차 제거하지 못한다면 내일의 자신들은 태 가의 야만적인 포위망을 피해 다시 오랜 시 간 숨어 지내며 후일을 도모할 처지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현덕 형 쪽에게도 미리 언질을 줘야 하지 않겠 어?”
여홍원이 말했다. 태이경을 붙들고 한창 고무되어 있 을 여치영과 여현덕에게도 대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여홍재는 차갑게 일갈했다.
“아니. 알리는 건 그쪽이 깨끗하게 정리된 다음이다. 지 금은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밀고 나가야 해. 괜히 불안 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초조함 빈틈을 만들고 결국 일을 그르치게도 할 수 있으니까.”
“날 믿어라,홍원아. 이제껏 그래 왔듯 내가 잘 이끌어 줄 테니.”
여홍원은 침묵했다. 돌아갈 곳이 없기에 앞을 향해 나 아갈 분,이제 그가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태국영은 차임벨을 눌렀다. 마치 지인의 집을 방문하 는 듯 자연스럽고 담담한 태도였다. 대문은 쉽게 열렸고, 그는 열린 문 안으로 가볍게 걸어 들어갔다. 이미 변이를 마친 반인반수들이 예민하게 털을 세운 채 그의 일거수일 투족을 주시했다. 여은태의 말이 맞았다. 따라오는 눈은 어림잡아 서른 쌍은 되어 보였다.
이번에 여 가에서 강제로 독립을 당한 이들의 머릿수 는 거의 이백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중에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연령대를 최대치로 봅아내 봐야 오십 정도분이니,집 안에 있는 놈들까지 합하면 거의 다 이곳에 모여 있다고 보면 되었다. 아이의 기척은 실내에 서 느껴졌다. 태국영은 담담하게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 로 향했다.
“누가들어가도 된다고 했지?”
한 남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이를 드러냈다. 잿빛 털이 얼굴을 다 덮어 이목구비를 좀체 알아보기 힘들었다. 태국 영이 아는 낯짝은 오늘 일에 주체적으로 가담한 넷분이었 다. 그나마도 여홍재를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사진으로 익 혀둔 게 다였다. 태국영은 그를 빤히 응시하다 픽 웃으며 되물었다.
“누가 내 앞을 막아도 된다고 했어? 혼자 오지 않으면 네 아들놈 목숨 장담 못 한다고 유치하게 협박한 그 새끼 가 그래도 된다고 하던?”
남자는 미간이 일그러뜨리듯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배짱 좋게 나올 처지가 아닐 텐데?”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해. 어린애를 볼모로 잡지 못하면 내 앞에서 깨갱 소리도 못 낼 새끼들이.”
태국영은 싸늘하게 응수했다. 더 말을 섞고 싶은 생각 도,길게 끌 생각도 없었다. 그는 아무런 전조 없이 번개같 이 한 팔을 휘둘렀다. 대경한 남자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하며 두 팔로 가슴을 막았으나 태국영의 손바닥은 그 위 를 그대로 직격했다.
뻐억!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얗게 쏟아지던 눈보라가 한순간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예기치 못했
던 급습에 잠시 당황했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앞을 막 았다. 벽 같은 형국이었다.
이대로 뚫을까,아니면 더 자극할까,태국영이 느긋하 게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을 때였다.
“한 번만 더 멋대로 굴었다간 네 아들놈은 머리랑 몸이 분리된 채로 네 품에 안기게 될 거야.”
깨부수기 전에는 열릴 것 같지 않던 남자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섰다. 태국영은 하얗게 드러난 바 닥을 시선으로 길게 더듬어 갔다. 희게 흔들리는 시야로 한 남자가 묵직하게 걸어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태국영의 눈이 어둡게 번득였다. 여치영이었다.
“허풍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고 싶다면 내 몸에 흠집 하 나만 내 봐.”
여치영은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개처럼 기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다,태국영.”
그의 팔을 배곡히 덮은 은빛 털이 바늘처럼 일제히 일 어났다. 맹렬한 기세의 열기가 그의 몸 안에서 폭발하는 순간,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강풍에 휩쓸린 눈발 이 소스라치며 터져나가고,태국영은 정직하게 얼굴로 날 아오는 주먹을 한 손으로 턱 받아냈다. 여치영의 눈가가 꿈틀 경직했다. 태국영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서릿발 같
S 로昆롬 문 긍浴u 1=浴릉놓fe ^ 긍SI와? dl디]궁仁I Ikilo 長 fell
相浴류 또I근古to 릉技k] 남 1?놓
6k] 로?fe技공 긍Sl?k) __b造룽??슛 를몬 1?른 財곡 SI하? 相G롬 由1?눈相 릉곡 극송 1너악느吉 log논H]
McchWi 1 民借뉴닳 I디:I從1?높 크윳 극 Ik)뭉_b d^h?rs 切뮤 읒 5k)높 름切 Hi」어?,,
__b 滿 로 k 去보군^ 릉몬 te름711대 伯古Slk) IYHEU N]浴詩 k古 IY뭄 1?룬 u 긍S논曲 _1]浴1기_1? 긍浴 극찮 lYk 1?技民 比극?!:]I기 Ik ik TTrS i _ku 相造군由 릉뭉송 극# 눔 loSI와? JbOimJok) 론 플
吉 I바il_5去 5Mk)끊 I비Y 묵름?? R _1기花 kfe 1[” ?dlkh^ 治5 유 S irfeu,, ^okHel去 I스去to높 삐
Mk)瓦곡 lh ‘극끙1? 곰I리루 릉묵름?? lh 浴몬IY kHi?
__b滿B loSI하? 相浴去류 릉모운 I균류 릉뭄 로 냠 I?공공 긍S논曲 N]윤롬磨 릉룸 굳H][ 긍SI와? :곤1?治곱 S 格 lolota 녜Y ~5h\o i읗,, ?_k)높 5름feh 民?높 _klo§:lo,,
-\im 릉民民긍
설마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인가. 제 암컷과 새 끼가 동시에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나가야 되지? 일단 애새끼 목부터 따고 홍재 형이랑 합류를 해야 하나?
여치영이 고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 태국영의 얼굴 에서 빠르게 미소가 걷혔다. 태국영은 그에게 한 발자국 크게 다가가며 말했다.
“보아하니 여홍재가 너희들에게는 아직 알려주지도 않 은 모양이군. 너희들이 이발 빠진 호랑이라고 무시했던 여 군호가 너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거 말이야.”
‘‘……뭐?”
여치영은 의구심에 휩싸여 말을 잃었다. 여군호가 자신 들을 버리다니,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문 제는 곧 그의 문제,자신들의 결단은 곧 여 가의 결단,이 싸움은 여 가의 싸움이었다. 그는 태국영이 제 심기를 어 지럽히기 위해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하면 서도 한편으로 깊이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을 내리누를 수 없었다.
여치영은 동요했고,태국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 다. 태국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피부를 발라낼
듯한 살기에 다급히 정신을 차린 여치영 역시 그 자리에 서 훌쩍 사라졌다.
“막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넋 빠진 채 지켜보던 남 자들이 여치영의 한마디에 승냥이 떼처럼 태국영의 그림 자를 좇아 달려왔다. 태국영은 여치영이 있던 자리에 착지 하여 고개를 젖혀 들었다. 그를 뜯어 먹으려는 남자들이 짐승의 이발을 번득이며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지금이다,꼬맹이.”
태국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폭발 적인 기운이 그 일대를 집어삼켰다. 강한 살기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一지금이다,꼬맹이.
잔뜩 귀를 세우고 있던 여은태는 그 순간 태이경의 몸 을 꽁꽁 묶고 있는 쇠사슬에 이발을 박아 넣었다. 감시자 들은 창문 너머 바깥상황을 주시하느라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였다. 여은태가 막 실체를 드러내며 반대쪽 창문 으로 몸을 날릴 준비를 했을 때였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광풍처럼 밀려왔다. 생물이고 무생 물이고 할 것 없이 노도에 휘말렸다. 유리는 모조리 박살 났고 뻥 뚫린 창에서 눈보라가 기겁하듯 몰아쳐 들어왔다. 남자들은 거품을 물듯 괴롭게 고함을 쳤다.
여은태는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일순 머리가 쪼 개지듯 고통을 느껴 도약에 실패했다. 지금 건 진짜였다. 이게 태국영의 본성이었다. 아까의 것은 그저 위협에 불과 했던 것이었다.
이런 미친! 내 생각도 좀 하라고!
쿠응.
온몸에 진동이 느껴졌다. 여은태는 정수리 쪽에 강한 통증을 느꼈는데,그것이 환상통인지 실제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대지는 잠잠했으나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휘 청거렸다. 그때 먹은 것이 없어 위액을 토하던 태이경이 소리쳤다.
“발리!”
여은태는 그제야 중심을 잡았다. 왼쪽 눈에 보이는 것 들이 모조리 시벌겠다. 안구에 피가 고여 있다는 것을 그 제야 깨달았다. 여은태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이 경이 저만치서 초조하게 저를 보고 있었다. 감시자들도 뒤 늦게 낯선 기척을 감지하고 저를 돌아보았다.
여은태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 다시 태이경의 쇠사슬을 물었다. 감시자들이 벼락같은 노성을 터뜨리며 일제히 몸을 날렸다. 여은태는 온 힘을 다해 반대 방향으 로 튕겨 올랐다.
여현덕의 잔인한 손톱이 간발의 차이로 여은태의 몸을 스쳤다. 흐린 은색의 털이 눈발과 함께 뒤엉켰다. 여현덕 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잡아!”
여은태는 백골의 눈알처럼 뻥 뚫린 창틀로 빠져나가 눈 폭풍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늘과 땅이 흰 어둠으로 가 득했다.
시린 달은 바깥의 참상을 두려운 듯 내려다보고 있었 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은색 털을 듬성듬성 가진 불완 전한 짐승들이 먼지처럼 뒤엉킨 채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태국영은?
벽에 부딪힌 머리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감각 이 기이할 정도로 무더졌다. 단번에 태국영을 찾을 수 없 었던 여은태는 일단 급한 대로 무작정 눈밭을 뛰어갔다.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감시자들의 추격은 만만치가 않았 다. 여은태는 평소처럼 곧게 달리지 못했고 그마저도 미 처 자각하지 못했다.
“형아! 뒤!”
태이경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은태는 본능적으로 용 솟음쳤다. 쇠스랑 같은 손톱이 뒤쪽 대퇴부를 얇게 저미 고 지나갔다. 피가 부려졌다. 여은태는 허공에서 짧게 경 련했으나 그분이었다.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닥에 착지하는 동안 태국영을 찾았다. 그의 냄새보다 피 부를 경직시키는 살기를 찾는 것이 더 발랐다.
태국영은 막 한 남자의 머 리채를 손으로 잡아 뜯고 있 었다. 여은태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그에게로 달려갔 다. 머리 가죽을 산 채로 뜯긴 남자가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 뜨거운 선혈에 눈이 녹아내렸다.
태국영은 거죽 벗긴 머리통을 발로 짓밟아 으깨며 고개 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여은태는 그가 자신을 확인했 음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제 뒤를 덮쳐오는 섬광을 느꼈 다.
태국영이 여은태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에 젖은 그에 게 피에 젖은 남자가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어깨에 꽂혀 들었다. 태국영은 팔을 휘둘러 그 남자를 튕 겨냈다. 태국영의 팔뚝을 너덜너덜하게 긁어놓은 남자가 바닥을 굴렀다. 피가 솟구쳤다. 그가 말했다.
“던져.”
닿지 않는 것이다. 그의 판단이 정확할 거였다. 여은태 는 바닥을 투웅 차고 오르며 태이경을 그에게 날려 보냈 다. 그때였다.
서걱.
여은태는 허공에서 자신의 옆구리를 뚫는 날을 느꼈 고,그것이 깊이 들어오기 전에 몸을 틀었다. 막 뼈를 절 단 낼 것처럼 근육을 찢어낸 날이 비스듬히 빗겨갔다. 여 은태는 앞발을 휘둘러 남자의 머리에 발톱을 박았다. 살 기 어린 눈빛이 눈의 장벽을 뚫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크옥!”
공격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한 남자는 그 대로 관자놀이를 뚫렸다. 남자가 고개를 비트는 순간 한 데 뒤엉킨 덩어리가 바닥에 추락했다. 여은태는 남자의 몸 을 짓밟고 곧장 일어났다. 세 명의 남자가 핏발 선 눈으로 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여현덕도 있었 다.
피할 수 있을까.
그 짧은 순간 여은태는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 다. 열기가 온몸을 휘돌아 머리가 몽롱했다. 거의 도려내 지듯 썰린 옆구리의 살점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형아,뭐 해! 도망체5
태이경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 소리마저 물속에서 듣 는 듯 명명했다. 태국영의 도움을 바랄 상황은 아니었다. 한 팔에 아이를 안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극도로 제한적 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피할 방법이 없다. 여은태는 냉철하 게 판단했다. 이 몸으로는 뒤돌아 달리는 것이 도리어 독 이었다.
“하나만 뚫고 내 곁으로 와.”
태국영의 조언이 귓전으로 꽂혀왔다. 여은태는 그의 말 을 두 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곁으로만 가면 안전 하다.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
그는 여은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못 지킬 대상이 없 다고 했지만,그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태국영 그 였다. 자주 알밉고 종종 열 받게 하고 가끔은 진짜 물어뜯 고 싶게 만들지만,그만큼 믿을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여은태는 셋 중 가장 변이 상태가 약한 놈을 겨냥해 그 대로 돌진했다. 급소인 배의 노출을 최소한으로 하며 그대 로 아가리를 벌렸다. 뜻밖의 습격에 당황한 놈이 허리를 숙였다. 여은태는 그대로 놈의 목덜미를 물었다.
콰드득.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비린 피가 입 안으로 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정체를 가늠키 힘든 빛살이 빠르
게 쇄도해 왔다. 여은태는 목덜미를 뜯긴 채 발악하는 남 자를 휘둘러 그에게 던졌다. 그 둘이 얽혀들었고 그 순간 여현덕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여은태의 몸을 후려쳤다. 아직 채 아물지 못한 자상으로 충격이 직격해 왔다.
크릉!
여은태는 작게 신음을 지르며 깊은 눈밭에 파묻혔다. 검은 그림자가 살기 어린 안광을 붐어내며 하늘을 덮었다. 몸을 틀어 그에게 등을 내주었다. 급소만 피하자는 생각분 이었다.
“형아아아!”
태이경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사아악一
기이한 소리가 하안 어둠을 갈랐다. 마치 잘 드는 칼날 이 짐승의 뼈와 살을 통째로 베어내는 듯한,그런 소리였 다. 여은태는 순간 ‘설마 내 몸이 잘렸어?’라고 생각했고, 곧이어 찾아드는 고통이 없음에 의아해졌다. 처절한 비명 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여은태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힐긋 눈만 돌렸다. 방
금 전까지 저를 산 채로 도륙할 기세였던 여현덕이 허리 가 반쯤 잘린 채로 옆을 뒹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여은태는 태국영이 용케 달려왔나 싶어 다시 눈을 굴렸 다. 그러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전혀 모르는 얼굴들 이 있었다. 얼음으로 빚은 것처럼 차가운 미모를 봄내는 어린 청년을 중심으로 십여 명의 낯선 남자들이 떼를 지 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외향이 매우 독특했다. 그들 중 셋은 제 가문의 피가 흘렀고,그 나머지는 모두 짧고 검은 털이 전 신에 가득했던 것이다. 분명 태 가의 피를 계승한 이들이 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유독 인간보다 짐승에 매우 가 까워 네 발로 서 있었는데,일부 기관을 제외하고는 정말 태국영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뭔데 이건. 누구야,당신들……?】
여은태가 명하니 물었다. 얼음 인형 같은 남자가 막 대 답을 해 주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발리 여현덕 이 피를 토하듯 으르렁거렸다.
“친위대……! 네놈들이 왜 여기에! 왜 나를……!”
친위대?
여은태는 어리둥절했다. 친위대라면 종주를 졸졸 따라 다니며 그를 호위하고 보좌하는 집단으로 알고 있었다. 그 들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 알 길이 없어 멀뚱히 그들을 보
는데,태국영과 닮은 남자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푸르르 몸 을 한 번 털더니 여현덕에게 타박타박 걸어갔다.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여현덕을 짓눌렀다. 몸집도 태국영에 버 금갔다. 피거품을 물고 있는 여현덕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 었다.
【왜긴 왜나. 종주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지.】
심지어 언어도 짐승의 언어를 쓰는 남자가 냉혹하게 말 했다.
【종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하루 내 두 아들의 목숨 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모두 죽여라.’】
그러니 너는 여기에서 죽어줘야겠구나.
빙결처럼 싸늘한 목 울림은 마치 절대적인 심판자가 내 리는 선고 같았다. 여현덕이 경악으로 눈을 홉떴다. 그가 막 뭐라고 항의하려는 찰나였다. 남자의 앞발이 여현덕의 가슴을 그대로 부쉈다.
여진희는 두 손에 쥔 따뜻한 머그컵을 가만히 내려다보 고 있었다. 허브 향이 옅게 녹아드는 공기는 익숙했다. 나 무 냄새와 책 냄새,그리고 여군호의 체향이 강하게 녹아
든 공간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여군호의 부름을 받았다. 직 감적으로 알았다. 이제 자신이 이곳에 출입하는 일도,그 의 다정한 호명을 들을 일도 없게 될 거라는 것을.
“진희야. 내가 어린 너를 앉혀두고 기록관의 의무에 대 해 말해 준 적이 있다. 기억하느나?”
춥지는 않았는지,출출하지는 않은지,그런 것들을 묻 던 여군호가 처음으로 본론을 끼내 들었다. 충분히 예상했 기에 여진희는 당혹지 않았다.
“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군호는 찻잔을 내려두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이유 를 묻는 것도,변명을 바라는 것도 참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럼 내가 이런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릴 것 같으니.”
“저를 내치시겠지요. 저는 더 이상 여 가에 있을 자격 이 없으니까요.”
“나를 원망해도 좋다.”
“보고 싶어 할지언정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자초 한 일입니다. 무거우신 마음 내려두시고 원칙대로 해 주세 요.,,
여군호는 안타까운 시선을 전송했다. 여진희는 모든 것 을 각오한 듯 영민하고 맑은 눈동자를 담담히 맞추어 왔
“내가 너를 많이 아꼈다,진희야.”
“저도가주님을……
그러나 목소리는 평정을 가장한 낯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해,바람 앞 촛불처럼 세차게 홑날리다 힘없이 꺼져 버 렸다. 선하고 고운 눈매에 금세 눈물이 아롱졌다. 여군호 는 울렁이는 그녀의 눈물을 지그시 바라보다 등받이에 걸 어둔 재킷을 들었다. 손수건을 끼내 내밀자 여진희는 애 써 방긋 웃으며 받아들고 젖은 눈가를 찍어냈다.
“저도 가주님을 많이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안다. 알고 있어.”
딸 없는 집에서 딸처럼 키운 아이였다. 여군호는 테이 블에 놓인 녹음기를 부드럽게 집어 들었다. 여진희가 습관 처럼 제 부름을 받을 때마다 늘 챙기던 것이었다. 녹음 버 튼을 누른 그가 기기 안으로 기록의 메시지를 흘려 넣었 다.
“오늘부로 여진희에게서 기록관의 자격을 박탈하고 여 가에서 영원히 제명한다. 여진희가 이 집안에 들어온 것 이 열 살이니,그때부터 지금까지 헌신해 온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으로 환산해 그 대가를 치러줄 것이다. 다 음 기록관이 정해지기 전까지 임시 기록관은 나 여군호가 직접 할 것이다.”
여군호는 오늘의 날짜와 시각을 옮는 것으로 녹음을 마 쳤다.
“회사는 그만둘 필요 없다. 너처럼 똑똑하고 야무진 아 이를 구하는 것도 일이니 계속 직원으로 남아 주었으면 하 는구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비록 원칙대로 너를 여 가에서 제명했으나 너에 게 벽을 두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나를 아비처럼 따르 고 싶다면 그리해도 되고,언제든 사전 허락 없이 내 집에 방문해도 좋다. 네가 떠나면 가장 아쉬워할 것은 내 아내 겠지. 수연이도 너를 참 많이 예뻐했으니,일부러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했던 말이 그에게서 나오자 여진희의 수심 가득한 얼 굴에 그제야 빛이 돌아왔다. 내심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나 않았을지 걱정이었던 여군호도 그 수려한 얼굴 위로 빙 긋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짓궂은 농담마저 건넸다.
“제운이가 그렇게 좋으니.”
그가 여제운에 관해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은 것은 처음
이었다. 여진희는 당황해서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기뻐서 고였던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
“너한테 마음이 없는 남자에게 미련을 두지 마라. 언젠 가는 나를 보아주겠지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 다. 지금 이것이 한철 스치고 지나갈 열병일지,아니면 길 게 이어질 끈질긴 사랑일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네가 겪어봤지 않느냐.”
“아무리 보아도 네가 아까워서 하는 애기다. 제운이 그 놈은,내 아들이지만 너무 부족해. 너처럼 빠질 것 없는 아 가씨가 목을 맬 가치가 없는 놈이다.”
여군호는 차갑게 혀를 차며 찻잔을 들었다. 단순히 차 를 마시는 행동 하나마저도 기품이 흐르는 남자였다. 그 가 여제운을 평훼한 것이 여진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임을 모르지 않았다. 정 없는 것처럼 굴어도 그는 그의 자 식과 자식과도 같은 이들을 늘 그의 방식대로 사랑해 왔 다.
“가주님. 혹시 제가 제운 오빠에게 오늘 일을 알릴 것까 지 알고 계셨는지요.”
갑자기 든 의문을 날 것으로 뱉어내자 여군호는 쓰게 웃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
“그러셨군요……
알면서도 경고하지 않은 그를 원망할 생각은 들지 않았 다. 그는 늘 선택의 기회를 열어 두었다. 그가 가진 큰 그 림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제가 디딜 땅을 스스로 선택했 다. 이승도를 이용해 태국영을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승도 씨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으셨습니까.”
“그런 것도 아예 없지는 않다. 설마 그 치가 그때 하필 이면 태중에 아기를 뱄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으니,
그 찝찝한 마음 참으로 오래가더구나.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내 아이들이 가장 중하다. 나를 아비로 따르는 나의 충실한 아이들. 나를 아비로 여기지는 않아도 내 아내의 배를 빌려 나온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지.”
여군호가 찻잔을 완전히 내려두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 내 어찌 그놈들을 가만두고 볼 수 있겠느나. 충 성은 바라지 않아도 가문에 누를 끼치지는 말아야 할 터. 전쟁을 쉽게 알고 내 아이들의 피 값을 가벼이 여기는 놈 들은 내 품에 있을 자격이 없다.”
그의 눈가에는 시리도록 서슬 퍼런 냉기가 맺혀 있었
여은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턱까지 오른 숨이 잦아들
고 좀 살 만해지자 벌떡 일어나 따져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인간한테 짐승 언어 쏟아 붓는 소리 야? 날 구하려면 진작 구했어야지! 나 아까 물속에서도 다 치고 방금 전에는 배 속 내장까지 탈탈 털릴 뻔했다구!】
그러자 얼음 인형 같은 남자,호위대 조장 영이 냉정하 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종주님의 마지막 명을 따를 분이다. 네 개인적 싸움까지 관여할 이유는 없어. 우리는 너를 ‘죽이려는’ 자 를 멸하라는 명을 받았을 분,너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 는 의무를 지진 않는다.”
여은태는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 가 싶은데,따지고 보면 또 딱히 반박할 곳이 없이 논리적 으로 완벽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제 목숨만 건지 는 게 목표니까 그 외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이쪽이고 저쪽이고 아빠라는 것들이 제 아들 귀 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여은태는 속으로 뚱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어차피 부친 에게 뭘 기대한 적도 없었다. 한 번의 구명도 그저 달갑게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차. 이경이!
여은태는 화급히 뒤를 돌았다. 거친 눈발 너머 피로 얼
룩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이경은 어느새 쇠사슬이 풀 려 태국영의 가슴에 코알라처럼 사지를 벌려 안겨 있었 고,태국영은 태이경의 허리를 한 팔로 동여맨 상태로도 열심히 피 보라를 부리고 있었다.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 이 리치가 짧아져서인지 그는 이례적으로 한 손의 손톱만 아주 길게 뽑아낸 상태였다. 생물의 살점과 뼈를 그대로 썰어내고 있는 그의 손톱은 마치 티타늄으로 만든 살인 무 기 같았다.
다섯 살 아기가 섞여 있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이 었다. 여은태는 뱃가죽이 다 아문 것을 확인하고 힘차게 뛰어갔다.
【이경이 이리 줴】
태국영이 힐긋 눈길을 주었다.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그는 코웃음 쳤다.
“나대다가 또 뱃가죽 뚫리지 말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 어.,,
【…아 씨! 나 다 나았단 말이야. 머리도 안 아프고! 이 제 등에 업고 도망치면 아무한테도 안 붙잡혜 애 안고 싸 우기 불편하잖아!】
여은태는 가까스로 분함을 참고서 소리쳤다. 다 자기 생각해서一아니,사실은 연신 피 뒤집어쓰는 태이경을 위 해서였다一한 말인데 꼭 저렇게까지 어린 가슴에 흠집을 내야 직성이 풀리나. 하여간 싸움 잘하는 것 배고는 하나 도 쓸 데가 없는 남자였다.
“잡히지 않을 자신 있나.”
【자신 있어.】
태국영은 짧은 순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말 더 붙일 것 없이 태이경의 목덜미를 잡아 던졌다. 정원에서 심심하면 하던 놀이라 여은태는 그가 좋아하는 코스를 알고 있었고,곧장 그 궤도를 쫓아 뛰어올랐다.
【이경아! 형아 잡아!】
“응!”
태이경도 익숙하게 몸을 빙글 돌려 여은태의 등에 안착 했다. 녀석의 작은 손이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끄러운 털 을 움켜쥐었다. 여은태는 그대로 바닥에 착지해서 주변을 경계했으나 다행히 이쪽을 노리고 달려오는 놈은 없었다.
남은 몇몇은 태국영을 상대하느라 온 전력을 다하고 있 었다. 아이를 안고 싸우느라 팔과 등 쪽은 옷이 갈가리 찢 겨 나간 태국영은 이제 홀가분하게 날아다녔다. 지옥도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저기에 있었다.
여은태는 태이경의 정신건강을 위해 멀찍이 떨어져 처 마 밑으로 갔다. 눈이 안 쌓인 곳을 찾으려 했는데 바람이 너무 심해 온통 눈 천지였다. 아쉬운 대로 앞발로 슥슥 눈 을 치우고 태이경을 내린 뒤 그 앞을 가로막듯이 앉았다.
“형아……
태이경은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작은 몸이 조금 떨리 고 있었다. 여은태는 안쓰러운 마음에 녀석의 몸을 앞발 로 도닥이며 뺨을 비볐다.
【응. 이제 괜찮아. 형아 다친 데 다 나아서 이제 이경 이 업고 발리 달릴 수 있어.】
태이경은 내리 참았던 눈물을 찔끔 쏟아냈다. 차갑게 설얼은 은빛 털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나 솔직히 좀 무서웠어.”
코끝이 찡했다. 약하고 어린 것이 무식한 성체들 틈에 서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겠는가.
【형아가 미안해. 다시는 안 놓칠게.】
“으 으 ” o'- ■?-
여은태는 태이경을 소중히 품어 달랬다. 다시금 모습 을 감춘 친위대가 그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 다.
“너,너 이러고도 네 암컷이 무사할 줄,알……!”
여치영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태이경이 크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가슴이 다시금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엄마가 왜?”
누구에게랄 것 없는 물음이 허공에 홑어졌다. 따라 일 어난 여은태가 녀석의 어깨에 턱을 올려 그대로 다시 앉혔 다. 태이경은 불안한 눈으로 여은태를 올려다보았다.
“형아,엄마 붙잡혔어? 엄마 위험해?”
【절대 아냐. 지금 저게 명청한 소리 지껄이고 있는 거 야. 선생님은 무사해.】
“…진짜야?”
【응. 정말이야. 느 아빠가 누군데. 너 다치는 건 봐도 선생님 다치는 건 절대 못 보는 남자잖아.】
여은태가 긴장감 조금도 없이 뚱하게 장담했다. 태이경 은 ‘그건 그래.’하고 무리 없이 수긍하면서도 가슴이 조마 조마했다. 제 부친도 실수라는 걸 하는 법이었다. 태이경 은 여은태의 목에 매달려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태국영 은 막 신랄한 조소와 함께 여치영의 마지막 발악을 짓뭉개 고 있었다.
“승도 붙잡은 거 확실해? 내가 알기론 아닌데.”
“이,이원표가 분명,홍재 형이 영상까지 받았고,여기
가 이렇게 쑥대밭이 된 걸 알면……!,,
여치영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지금 당장 확인해 보라며 애써 독기 어린 눈을 치켜떴다. 태국영은 여치영 의 목을 한 손으로 감싼 채 픽 웃었다. 인질이 있어야만 큰 소리를 칠 줄 아는 졸렬한 놈들이었다. 조용히 살겠다는 데 왜 다들 가만두질 않는지,왜 화를 자초하고 스스로 명 을 단축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좋아. 네 눈앞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지.”
태국영은 다른 손으로 호주머니의 휴대폰을 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시벌건 핏물이 흐르는 여치영의 눈이 원독에 찬 안광을 번득였다. 이제 곧 태국영은 제 앞 에서 무릎 꿇고 빌게 될 것이었다. 제발 그를 살려달라고 발바닥을 할을 것이었다. 저희들이 당했던 것처럼 잔인하 게 짓밟아 주리라. 그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응,승도야. 깼어?”
태국영은 때아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수화부 에서 엄청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너 이 자식!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나! 깨 보니까 너는 없고,난생처음 보 는 이상한 데 와 있괴 또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잖아!》 태국영은 찔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귀에 붙였
“미안. 갑자기 일이 꼬이는바람에.”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성문 씨는 자세한 애 기는 너 만나서 들으라고 자꾸 다른 소리만 하고,난 계속 불안해 죽는 줄 알았다고.》
“금방갈게. 가서다 설명해 줄게.”
세찼던 바람이 한풀 꺾여 눈발은 이제 곧게 내렸다. 불 신으로 꿈틀거리는 여치영의 안면 위로 하염없이 눈송이 가 날아들었다. 희석된 피가 불그스름하게 흘러내렸다. 그 는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원표가 다 잡은 고기를 배앗긴 것인가. 여홍재 는 엉망이 된 작금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나. 왜 자신은 아 무것도 알지 못했나.
“자. 이제 네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
짧은 통화를 마친 태국영이 싸늘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치영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태국영 이 그의 목을 틀어쥔 손을 가차 없이 오그라뜨렸다. 컥컥 거릴 사이도 없이 부러져버린 목이 이내 완전히 뜯어져 나 갔다. 지옥을 목도한 표정을 간직한 머리가 눈밭 속으로 파묻혔다.
여제운은 하안 숲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원표의 산 장은 산허리를 넓게 깎은 부지를 홀로 차지하고 있다 들었 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지만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숲의 향기를 빙결 속에 가둔 눈발 너머 태 가의 남자들 이 있었다. 그들의 냄새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겨울을 힘 겹게 나는 산짐승들이 가엾게도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 버 려,마치 이 산 전체가 그들의 영역이 된 듯했다. 태 가의 남자들은 모두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요새처럼 틈이 없는 그 안에 그가 있었다. 여제운은 먼 거리와 험한 장애물들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그 미약한 냄 새를 감지해 내는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태 가의 남자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안위는 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제 역할은 없 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제운은 산을 올랐다. 산장 근처를 빙 둘러싼 남자들은 그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 했다. 그는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산장 가까이까지 다가갔 다.
창문이 있었다. 그는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승도는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식사를 하 고 있었다. 칠면조 요리를 중심으로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그는 복스럽게 칠면조 다리를 뜯어먹다가 결국 조금 화 를 냈다. 태국영이 도착하면 단단히 혼을 내 줄 거라고 투 덜거리는 걸 보니 태국영에게 불만이 쌓여 있는 모양이었 다. 그의 앞에서 살을 발라주며 연신 웃고 있던 푸근한 인 상의 여자가 호호 웃었다.
“너무 나무라진 마세요. 승도 군 깨어나면 맛있는 거 많 이 해 먹이라고 저까지 이렇게 보내주셨잖아요.”
이승도는 기름기 묻은 입술을 뚱하게 찡그렸다.
“하지만 아까는 정말 놀랐단 말이에요. 저는 성문 씨가 국영이를 배신하고 절 어디로 배돌린 줄 알았어요. …미 안해요,성문 씨. 의심해서.”
“아닙니다. 정황상 충분히 그럴 법했지요. 그보다는 소 문으로만 듣던 유모님 요리를 이렇게 배터지게 먹을 수 있 으니 저는 지금 무척 행복합니다.”
“많이 들어요. 어차피 저 혼자는 다 못 먹어요.”
“예.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그런데요 형수님,저 가 주님 본가에 취직 좀 시켜달라고 청탁 좀 넣어 주십시오. 집사든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매일 이런 스페셜요 리 먹으면서 일하고 싶습니다.”
이승도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제운 은 그를 둘러싼 이들을 찬찬히 훑어본 뒤 돌아섰다. 저 정 도 가드면 충분했다. 여홍재나 그에 버금가는 자가 침투하 더라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거다.
여제운 자신을 포함한 여 가의 일원들은 자기 은폐 능 력을 제외하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 전투능력은 일족 의 평균에서 조금 웃도는 정도에 불과했다. 육탄전으로 태 가를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렇게 강한 사내들이 밀착해 있으면 방법이 없다. 실 체를 노출하는 순간은 의외로 틈이 많아서,아마 제대로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목이 달아날 것이었다. 여제운은 얼어붙은 산길을 내려오며 짧게 혀를 찼다.
태국영이 어련히 알아서 잘 보호하련만,자신은 뭐가 그리 걱정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왔는가.
외길을 달려간 마음은 공연하다. 옅어진 지는 오래인 데 소멸하지를 않는다. 뜨겁지 않은 스스로가 뜬금없이 한 심해졌다. 어쩌면 자신은 애초부터 누군가를 가슴에 품을 그릇이 못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기세를 죽였던 바람이 다시금 세차게 일기 시작했 다. 나뭇가지가 휘청거리고 눈발은 여러 방향으로 휘날렸 다. 여제운은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눈보라를 주시했다.
이미 철벽방어선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궂은 날씨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달빛이 흐리고 시야도 불안전하며 소 음도 많다. 숨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어쩔 수 없나.
찝찝함을 남겨두고 돌아서서 후회할 바에는 조금 시간 을 낭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제운은 결국 태국영 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태이경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곳곳 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현덕의 본가는 태호연이 직 접 가솔들을 이끌어 덮쳤고,여홍재의 본가는 남 가를 중 심으로 태 가와 신 가가 합세한 무리가 습격했다.
주 전력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이미 여치영의 본가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두 군데 모두 저항 능력이 별로 없는 빈 껍데기들만 남은 상태였다. 제압은 쉽게 이뤄졌고 학살조 차 고요했다. 흥분해서 날뛸 겨를도 없었다. 미지근한 피 맛만 본 젊은 청년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불만이 컸던 것은 여홍재를 단단히 벼르고 있던 신영 애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신영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주 교활하게 숨고 내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새끼는 아무래도 구성물질부터가 잘못됐어. 저를 위해 목숨까지 건 동료들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저부터 살 길을 찾아 내배다니.”
듣자 하니 여치영과 여현덕은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서 야 진실의 겉만 할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라 동정할 가치는 없지만 그래도 여홍재는 그들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영애야. 난 이원표 산장으로 간다. 넌 어쩔래?”
남강우는 눈보라를 손에 담아 얼굴을 닦아내며 물었다. 신영애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다가 툭 고갯짓을 했다.
“앞장서. 나도 갈래. 혹시 알아? 거기서 여홍재 보게 될 지.,,
“그럴 줄 알았다. 너희들은?”
남강우는 태 가의 청년들에게도 물었다. 태호연의 지시 를 받고 이번에도 선봉을 맡은 태왕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 여 가에서 제명된 놈들 찾아서 다 잡아 죽 여야 해서 바빠. 아마 새벽까지는 호연 형님 지시를 따라
야할 거야. 너희끼리 가. 오늘 즐거웠다.”
“다들 다음에 봐.”
신영애도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누 군가가 다급히 ‘영애 양!’하며 붙잡았다. 등에서 덮쳐오는 그림자에 신영애는 무심코 뒤를 돌며 그의 팔을 잡아 꺾었 다.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남자는 ‘아픕니다,영애 양.’하고 엄살을 부렸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고스 란히 당해 준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뭐야. 놀랐잖아.”
신영애는 퉁명스레 그의 손을 놓았다. 남자는 팔이 꺾 여 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신영애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건성으로 슥 훑어보았 다. 태 가의 남자들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 고 있었다. 저들끼리 원가 속닥거리는데 그녀의 귀에는 들 리지 않았다. 묘하게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 슬슬 불쾌해졌다.
“나사 하나가 빠졌나. 왜 이렇게 실실거려?”
그러자 남자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전 태준호라고 합니다. 영애 양,오늘 함께 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기블 게 뭐가 있는데.’
“그야……
남자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불현듯 얼굴을 붉혔다.
“제가 영애 양을 사모하니까요!”
태 가의 남자들이 그를 외면했다. 이 그로테스크한 풍 경을 두고 사랑 고백이라니,정말 어지간히 모자란 놈이 아닌가. 신영애의 한쪽 뺨이 일그러졌다.
“분위기 파악 좀 해라.”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고 태준호의 첫 번째 고백은 그렇 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홍재는 악다문 턱을 떨었다. 여홍원이 괴롭게 목을 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숲을 장악한 맹수들의 냄새는 대설 안에서도 뜨거운 불길 처럼 일렁거렸다.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태 가 놈들이……!
여홍재는 평정을 되찾으려 애를 썼으나 이번만큼은 마 음처럼 되지 않았다. 전신을 감싼 떨림에 눈송이가 비웃듯 이 파르르 홑어졌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 이렇듯 궁지에 몰렸나.
여홍재는 허망하게 생각했다. 산장으로 오는 동안 여치 영과 여현덕에게 여러 번 연락을 취했으나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 뻔했다. 실패한 것이다. 이원표 역시 마찬가지였 다. 납치에 성공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도 연락 두절 상태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렇게 확실한 패를 쥐어 줬는데 도,명청하게!
그랬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여군호가 자 신을 함정에 빠뜨렸고,믿었던 수족들은 무능함으로 그 구 덩이에 더 깊은 암운을 드리웠다. 이원표 역시 다 잡은 고 기를 제 안방에서 내어주었다.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저 를 등졌을 분이었다.
“돌아가자. 지금은 때가 아니야,형.”
여홍원이 극도로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거의 바람 소 리에 가까워 먼 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 태 가의 귀에 들어 갈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여홍원의 그 속삭임이 여홍재 를 일깨웠다. 그의 안광이 광기를 담아 흔들렸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여홍재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분만 아니라 미래도 가루가 된다는
“태국영은 그의 성안에 소중한 것들을 보호하고 빗장 을 단단히 잠근 채로 끈질기게 우리를 찾을 것이다. 평생 기척을 숨기고 숨어서 살 셈이나. 나는 그렇게는 못해.”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아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태국영의 애인이 키야. 그것만 사로잡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여홍원은 참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번만큼은 무 슨 일이 있어도 그를 저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러나 그가 막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좋은 날씨지 않나.”
뜻밖의 목소리에 여홍재와 여홍원,둘 모두 잔뜩 경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매서운 눈보라 너머 흐릿한 인영이 연기처럼 굽이쳤다. 손가락만 한 그것은 무색무취했고 건 넨 음성 또한 묘하게 바람 소리와 섞여 일순 환청이 아닌 가 싶을 정도였다. 작았던 그것은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 럼 금세 주먹만 해 졌고,팔뚝만 해졌다 싶은 직후에 곧 제 크기를 되찾았다.
“내가 아무래도 너희들을 만나려고 이곳에서 떠나지 않 은 것 같군.”
여홍재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멈추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낯짝이었다. 여홍원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여제운……? 네가 왜여기에……
여제운은 늘 그랬듯 담담한 무표정을 고수하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너희들을 만나려고 내가 이곳 에 있었던 것 같다고.”
“…너였나.”
여홍재가 목 안으로 으르렁거렸다. 여제운은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래. 네놈이었어. 네놈이 중간에서 내 계획을 망친 데 일조한 거였어!”
여홍재는 이성을 잃고 분에 차 소리쳤다. 놈이 태 가 놈 들과 작당을 해서 이원표를 죽이고 이승도를 배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여홍재는 번개같이 다가가 여제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떻게 알았지? 도청되는 것은 모조리 구분해 두었다. 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너에게 단 하나도 흘리지 않았 어!”
여제운은 냉담하게 웃으며 여홍재의 손목을 붙잡았다. “진실이 뭐가 중한가. 뭐가 됐든 너의 모든 수작질이
다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을.”
여홍재의 눈에서 핏줄이 터졌다. 그의 미간을 시작으 로 은빛 털이 돋아났고 그것은 순식간에 목뒤까지 퍼져 나 갔다.
“네 자리를 내게 벳길 것 같아서 불안했겠지. 네놈은 늘 선비인 척 얌전을 떨면서도 속으로는 나를 항상 못마땅 해 했다. 가주 자리에 관심 없는 척했지만 태국영에게 몰 래 정보를 배돌리면서 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었재 정당 하게 경쟁해서는 이길 자신이 없었던 거나?!”
여제운의 미간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살기에 반응한 그도 변이가 끝나 있는 상태로,흉기 같은 손톱이 번득이 는 손으로 여홍재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이 죄었다.
“참 뻔뻔한 놈이군. 네가 어디 정당한 경쟁을 운운할 자 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뭐가 어째!”
여홍재가 버럭 노성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여제운은 그대로 그의 팔목을 꺾어 돌렸다. 그러나 조마조마하게 사 태를 주시하던 여홍원이 끼어들어 등을 덮쳐오자 그는 깨 끗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여제운은 물이 뚝뚝 흐르는 머 리칼을 쓸어 넘기며 싸늘히 한 쪽 눈꼬리를 올렸다.
“다섯 살배기 어린애 납치하고,그것도 불안하니 힘없
는 인간을 또 인질로 잡고,그렇게 태국영을 죽이고 태 가 를 뒤흔들려 했지. 그런 주제에 남에게는 잘도 정당함을 논하는군. 우리의 근본은 짐승에 가깝지만 인간의 육신 또 한 가지고 있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짐승이 되길 택했다 면 짐승 취급을 당연히 여겨라.”
또한 여제운은 드물게 분노해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너는 베풀지 못하는 정의를 감히 누구에게 가르치려 들어!”
지금 불어오는 혹풍과도 비견할 만한 일갈이었다. 그 는 여홍재가 반박할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투명한 은색 으로 빛나는 두 눈에는 전에 없이 폭발적인 투기가 이글거 렸다. 여홍재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여홍원을 부리치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번쩍,빛이 터졌다. 두 남자의 기가 충돌하며 폭사해 버 린 눈꽃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빛이었다. 여제운은 단번에 여홍재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그의 손톱은 살갗을 조금 찌르고 들어갔을 때 여홍재의 손톱 사이로 얽혀들었다. 여 제운은 팔꿈치를 비틀어 그를 완력으로 밀어냈다. 의지와 달리 조금씩 밀려나는 여홍재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기기기긱.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극에 달했을 때,여홍 재가 먼저 후퇴했다. 마치 물 위를 걷듯 가벼운 발놀림이
었지만 그는 금세 그림자를 밟혔다. 여제운의 무릎이 그 의 옆구리에 꽂혀들었다. 이번에는 정확한 가격이었다. 뼈 를 가르는 통증에 여홍재의 이마에 퍼렇게 핏줄이 올라왔 다-
여홍원이 다시금 둘 사이를 빛살처럼 가로질렀다. 여제 운은 또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짧은 격전으로 헐떡이 는 여홍재를 여홍원이 다급히 끌어당겼다. 멀리서 태 가 의 남자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오고 있었다.
여제운이 그것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뒷방 늙은이 취급하던 내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 운 남자인지 알지 못했고,야만적이고 무식하다고 무시하 던 태국영이 널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능력은 없고 야망만 그득한 네놈이 네 무덤을 판 것 이다.,,
여홍원은 있는 힘껏 여홍재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그 러나 눈이 뒤집힌 여홍재는 발악하듯 몸부림을 치며 그 구 명의 손마저도 거칠게 내쳤다.
“형!,,
여홍재의 귀에 여홍원의 비통한 부름은 들리지 않았다.
괴기스러운 비명이 동면 중인 산천을 깨웠다. 여홍재의 목 에서 울부짖듯 나온 소리였다.
강풍이 불었다. 여홍재는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부었지 만 여제운은 미꾸라지처럼 간발의 차로 모두 피했다.
“내가 여길 어떻게 알았나고 물었던가. 정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지.”
여홍재의 속사포 같은 공세가 뚝 멎었다. 굵은 눈바람 이 그들 사이에 정적을 가져왔다. 여홍재는 그것이 너무 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 궁지에 몰렸는지,왜 완벽했던 모 든 것이 이토록 모조리 실패했는지,이 패착의 근원에 누 가있는재
“이원표는 처음부터 네 편이 아니었다.”
여제운의 매서운 말이 사형선고처럼 여홍재의 등줄기 를 후려갈겼다.
“너는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나. 네가 방금 그리도 부르짖던 정으I,우리 일족들 가운데 그 까다로운 단어를 가장 먼저 붙일 만한 남자가 있다면 바로 이원표다. 모두 가 그걸 아는데 너만 무시했지. 평판은 하루 이틀에 만들 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는 모든 이에게 그랬 듯 그를 평가절하하고 너 좋을 대로 별 볼 일 없는 남자라 여겼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이광운의 불명예스런 죽음에 분노하지 않았다. 가주로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어떤 식
의 위로를 주어야 할지,태국영과 어떤 형식을 치러 서로 의 가문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해야 할지 그것을 고민했을 분.”
“…이원표가,처음부터……
“그는 네가 접근했을 때부터 너의 역겨운 속내를 경멸 했다. 힘없는 가족을 억류하는 것을 무기로 삼는 네 썩어 빠진 방식은 그의 성정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아. 모두가 당연히 예측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너만 몰랐다. 네가 모두 의 머리 위에 있다고 당치도 않는 자만에 빠져있었기 때문 에.,,
“또한 냉철하게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그는,노아의 방주 를 그럴싸하게 본뜬 네 배가 무참히 가라앉을 것도,이미 알고 있었다.,,
여홍재는 온몸을 경련했다. 그는 울음과 비슷한 침음 을 흘렸다.
이것조차 내 심기를 뒤흔들려 하는 수작이라고,저는 잘못되지 않았다고,발리 진실을 말하라고.
여홍원이 욕설을 내뱉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태 가의 남자들이 까만 짐승의 털을 푸르르 털며 눈보라를 뚫 고 나타난 것은 그 직후였다.
“너는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주제를 모르고 모든 이를 얕잡아 보는 너 자신으로 인해.”
여홍재는 심장을 꿰뚫는 격통 앞에서도 무력하게 눈만 깜빡였다. 내장 조각 같은 핏덩이를 쿨럭쿨럭 내뱉으면서 도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야. 내가아니야.
물론 그 뇌까리는 말을 귀담아들어 줄 이는 아무도 없 었다.
「난 개가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네 생각은 달 라?」
「죄가 있다면 후에 가렸어도 되었다. 네 즉결처분은 도 를 넘어섰고 그 방식 역시 지나쳤다는 게 내 생각이다.」 「뭐,내가 그때 여러 가지로 열 받아 있던 때라 이광운 이 독박 쓴 경향은 없지 않지. 그 점은 인정해.」
이원표는 제가 증거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태국 영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고,궁금하지
도 않았다. 다만 그가 왜 불쑥 찾아와 캐묻지도 않은 것을 자백했는지 의아했을 분이었다.
「설마 네가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게 사과하러 왔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고.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이 뭐 지?」
「나름 합의를 하기 위해서랄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일은 적당히 묻어두는 게 서로를 위해 좋다. 광운이의 부모 또한 그 애가 잔인하게 죽었다는 것을 슬퍼할 분,그 애가 오?,무슨 짓을 하다가 죽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혀지는 건 원하지 않는 상태지. 때문에 나는 너에게 합의를 빌미로 뜯어내고 싶은 게 없 다. 너 역시 그런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테고.」 「너는 역시 듣던 대로구나.」
태국영의 눈가에 흐린 미소가 매달렸다가 순식간에 사 라졌다. 그는 유연하고 방만하게 기대앉은 자세를 바로 세 웠다. 그의 전신에 흐르던 나른한 권태감이 사라졌다.
「줄 수 있는 거,있어. 네 이성적인 판단을 가솔 전체 가 불만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일부에서 는 네 이번 결정이 가문의 입장에서 불명예스럽다고 생각 하겠지. 내 말이 틀려?」
이원표는 그때 깨달았다. 이전까지 오고 갔던 대화는
영양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태국영은 지금 나 올 화두를 위해 자신을 계속 찌르고 파헤친 것이었다. 그 것이 묘하게 불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일족의 대부분이 태국영을 바라보는 시선은 본능적이고 야만적이며 지극 히 동물적인 남자였다. 이원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네 말이 틀리지 않아. 명예라는 것은 아주 미묘하다. 나는 광운이가 그 매춘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불명예라 생 각하지만,때론 독불장군처럼 힘 있게 가문을 위해 피를 흘리는 가주를 원하는 자들은 내 결정이 불명예라 생각할 테지. 심적으론 공감하나 동의할 수는 없다. 헌데 너는 설 마 지금 그들의 불만을 종식할 수 있는 명예라도 내게 주 겠다는 말인가?」
「맞아.」
그렇게 쉽게 긍정할 줄은 몰랐다.
「지금 불만 있는 이들이 원하는 가주와 가문의 명예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네가 종주가 되 면 돼.」
「그건 내가 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걸로 아는데.」
「네가 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맞아.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너에게 줄 수 있다면?」
합의. 이원표는 그가 언급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이것
이 바로 그가 합의를 위해 가져온 패였다.
「어때. 받을래?」
나쁘지 않은 합의점이었다. 흠집 난 명예一물론 이원표 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으나一는 명예로 회복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태국영은 이원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후보들을 사퇴시켜주겠다고 했고,그 준비도 모두 끝이 났 다고 했다. 대신 그는 여홍재를 잡기 위한 트랩에 협력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종가모임 날까지 시간을 주지. 그날 자정까지 연 락이 없으면 우리 사이 거래는 없는 걸로.」
태국영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시간은 넉넉히 남 겨두었으나,사실 이원표는 그때부터 이미 마음을 어느 정 도 정하고 있었다. 종가모임 승계를 알리는 모임에서 여군 호가 은근히 태국영의 손을 들어주던 것을 보지 않았더라 도말이다.
여홍재는 자신의 이 가를 우습게 알고 저 또한 우매한 종자로 보았다. 그 간사한 놈이 마치 영광스러운 간택이라 도 내리는 양 거들먹거릴 때,이원표는 드물게도 저 낯짝 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만큼 모욕적 이며 불명예스러운 경험이었다.
그게 바로 이원표 자신이 생각하는 명예였다.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밀약은 그렇게 맺어졌다.
“저기,밖에가 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요?”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이원표 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가볍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 에는 이승도가 눈을 끔뻑이며 미어갯처럼 고개를 움직거 리고 있었다. 키가 큰 이원표의 어깨너머를 보려고 그러 는 듯했다.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데 기이하다 여 겼으나 이원표는 선선히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이 승도가 어디까지 알아도 되나 자세히 알지 못해 힐금 태성 문을 바라보며 대답을 토스했다. 태성문이 눈치 빠르게 입 을 열었다.
“예. 그냥 잡것들 대장 놈을 잡아 놨는데 발악하고 있어 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실 것은 없습니다.”
‘‘…잡아 둬요? 왜요?”
“아. 가주님이 직접 추궁하실 것도 있고,영애 양이 직 접 놈의 좆 부리를 뽑겠다고 벼르고 있는 바람에……
태성문은 뺨을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
승도는 저도 모르게 움찔 아래를 가리며 몸서리쳤다.
“아…프겠네요……
“아픈 게 대숩니까. 개는 곱게 죽긴 글렀는데요. 영애 양이 아주 독하기로 유명합니다. 아마 남자로서 당할 수 있는 수치는 다 당한 뒤에야 저승 문 노크할 티켓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중에 영애 양을 건드려서,하며 태 성문은 끌끌 혀를 찼다. 송재희가 좋은 언니가 생겼다며 전해준 애기와는 전혀 달라 뭘 믿어야 할지 확신이 안 섰 다. 이승도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다가올 비극을 외면하 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폭설은 여전히 밤을 흰빛으로 뒤덮 고 있었다. 눈사람 만들기 좋은 날이었다. 얼른 집으로 돌 아가 아이들과 한바탕 눈 잔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았다.
“어디까지 보이십니까?”
태성문이 곁에 착 달라붙으며 물었다.
“일단 밝은 곳은 전부 다 보이는데 어둡고 먼 숲은 잘 안 보여요. 그냥 나무들 윤곽이랑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 습 정도. …뭐,이것도 역시 원래의 저라면 불가능하지만 요.,,
“밖에 시끄러운 건 다 들리시고요?”
“웅얼웅얼…… 무슨 말 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형수님께서 감지하는 소리가 여기서 대략 삼십 미터는 떨어진 곳입니다. 인간의 청력으로는 절대 불가능 한일이죠.”
태성문은 호기심 반짝이는 눈으로 이승도의 배를 힐끔 거렸다. 품이 큰 옷이라 티는 별로 안 났지만 저 안에 주먹 보다 작은 아기 짐승이 들어있다는 것이 못내 신기한 기색 이었다.
그때 대화를 유심히 듣던 이원표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 였다.
“태아가 당신과 유대감이 깊은 것 같습니다.”
눈 뜬 이후로 그가 말을 걸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 다. 이원표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무생물처럼 소파에 앉 아 책을 읽었다. 딱히 험악한 인상이나 분위기가 있지는 않은데 원가 말을 걸기 어려운 타입이라 이승도도 그냥 그 를 내버려 두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와는 처음으로 말 을 섞는 것이었다.
“네. 국영이가 그러는데,애가 저한테 집착을 좀 보인다 고 하네요.”
“그런 사례가 역사 속에 간혹 있긴 했었습니다만,실제 로 보는 건 처음이라 저도 신기하군요. 시력과 청력이 좋 아지고,뭐 또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한 몇 시간은 내리 조깅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
졌어요. 잠은 많이 오지만 몸이 힘들어서는 아니고요.”
“태아의 의지가 강한 편입니까?”
“네. 아주 강해요. 전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느껴져 요. 우리 첫째 아이가 열심히 말을 거는데 이제는 대답도 곧잘 해 줘요.”
“백 퍼센트 확률로 조산이 있겠군요. 미리 준비를 하시 는 게 좋겠습니다.”
“성장이 발라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는 들었어요. 보 통 막달 상태를 보아야 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렇 게 확신하세요?”
“제 가문에서는 제왕의 피를 타고 난 부체와 등대인 모 체가 결합했을 때,완벽한 호랑이 새끼를 밴 적이 세 번이 나 있었습니다. 다른 가문에서는 거의 없었던 일이지요. 그리고 세 번의 경우 모두 지금의 이승도 씨와 완벽하게 같습니다. 신체능력과 감각이 매우 뛰어나졌고 모체와 감 정의 교류도 깊었지요. 그 애는 삼 주에서 한 달 정도 더 일찍 나올 겁니다. 그러니 예상보다 더 빠르게 준비를 하 셔야 당황하지 않을 겁니다.”
“아아… 네. 고맙습니다. 꼭 참고할게요.”
이원표는 여전히 표정 없이 차가운 얼굴로 ‘별말씀을.
’하고 응수했다. 이승도는 호랑이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 을 들으니 그가 유독 친숙하게 느껴졌다. 제가 아기 때부 터 분유 먹여가며 키워준 태산이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 다-
이승도는 무심결에 아빠 미소를 지으며 이원표를 바라 보았다. 이원표는 부모에게서조차 그런 다정한 시선을 받 아본 적이 없었으므로,이승도가 왜 뜬금없이 저를 배냇 짓 하는 아기 보듯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독특한 인간이군.
이원표는 무심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어쩐지 계속이상하다 했어.”
위기를 잘 넘기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한 여은태가 불 쑥 말했다. 보조석에 앉은 녀석의 품에 폭 안겨 있던 태이 경이 고개를 쭉 올리며 ‘뭐가?’하고 물었다.
“우리 다 같이 밖으로 종종 놀러 나갈 때마다 자꾸 뭐 가 쳐다보는 느낌이 나는 거야. 아까 너희 아빠 만나고 내 려오는 길에도 그랬고. 그런데 아무리 빤히 탐색을 해 봐 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단 말이지. 그게 다 저 친위대 어쩌
고 하는 놈들이었나 봐.”
“우와. 그럼 저 아저씨들은 형아 눈도 속일 수 있는 거 야?”
“그런 것 같아.”
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태국영이 끼어들어 오류를 정 정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는 아니야. 저 중에서도 아마 너희 여 가 피를 받은 세 놈만 너한테 밀착해서 따라다녔겠지. 같이 왔던 나머지 놈들은 모두 태 가 쪽 혈통이야. 네 앞에 서 숨는 재주는 없어.”
“하긴 그렇겠네. 그런데 그 충호라는 아저씨 당신이랑 엄청 닮았더라. 완벽하지 않은 게 조금 아쉽지만.”
“반 쪼가리로 태어난 게 축복이지. 완벽했다면 죽었을 테니까.”
태국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여은태 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자신도 이승도를 만나지 못했 더라면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을 터였다.
여은태는 접어 올린 소매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차 트 렁크에 있던 태국영의 옷을 빌려 입었더니 소매고 바짓단 이고 너무 길어서 롤 업을 하지 않으면 입을 수가 없었다.
나도 크면 이 큰 옷이 꼭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더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 이경이도 더 큰 품으로 안아줄 수 있겠지?
빙그레 웃음이 맺혔다. 태이경은 어리둥절 고개를 갸우 뚱하면서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혈색이 돌아온 복숭앗빛 뺨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죽을 각오 로 구해내길 잘했다. 여은태는 녀석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얼굴을 맞대 비볐다.
앞으로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곁에 딱 붙어서 나븐 놈들이 물어가지 못하게 감시할 거다.
“응. ……여제운이?”
휴대폰을 받은 태국영은 조금 의외라는 목소리를 냈다. 여은태와 태이경,둘의 눈길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개는 또 왜 거기 있나. 하여간 신출귀몰이야.”
《그래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여제운이 길목을 딱 버티 고 있었던 덕분에 여홍재랑 여홍원을 조기에 잡을 수가 있 었습니다.〉〉
“빚은 다 청산한 걸로 아는데,개도 참 피곤한 성격이라 니까.”
때가 되면 종주 후보에서 자진사퇴하는 것으로 분명 두 가문 사이의 앙금은 깨끗이 털기로 했었다.
《어쨌든 이제 윤봄이만 잡으면 끝인데 이게 참 의외의
난관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여자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 으로 끼졌는지.》
“최명욱이는 아직도 버틴대?”
《전신에 대못을 박아 놓고요,재생되는 피부마다 손가 락 한 마디 정도씩 계속 포를 뜨는데도 끝까지 입을 다물 고 있답니다. 정신이 나갔는지 이젠 피눈물 흘리면서 웃기 까지 한다고 고문하는 애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답니 다.》
“더 해 봐야 안 불겠네. 그럼 그 새끼는 그냥 처리해 버 리라고 해. 썩은 피 냄새 길게 맡아 봐야 좋을 거 없다.” 《알겠습니다. 언제 오십니까? 형수님 굉장히 졸려 하시 는데 잠을 안 주무시네요.》
“개 원래 낯설거나 불편한 데서 잘 못 자. 한 십 분이면 되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해.”
전화를 끊은 뒤 태국영은 윤봄이에 관해 잠시 생각했 다.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 다. 어차피 조력자들도 모두 저승길 갔거나 앞으로 갈 마 당에 외톨이가 된 그녀가 큰 위협이 될 일은 없겠지만,일 망타진을 위해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결과로는 다소 실망 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만약 아직도 복수를 포기하지 못했다면,분명 승도를
노릴 거야.
둘째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는 이승도가 저로 인해 더 제한적인 삶을 살길 원하지 않았다. 24시간 감시와 같은 경호를 받는 걸로도 충분했 다. 그 외에는 최대한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고,가고 싶은 곳도 가고,그렇게 지내게 해 주고 싶었다.
태국영은 산 아래에 차를 세웠다. 비탈에 눈이 많이 쌓 여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곧 이 승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있었다. 태국영은 태이경을 한 팔에 안은 채 가볍게 산길을 뛰어올랐고,여 은태도 무리 없이 뒤를 따라 왔다.
곧 환히 불 밝힌 산장이 시야에 비쳤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젊은 청년들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걸음이 발라졌 다.
경사를 마저 오르고 평지에 접어들었다. 이승도는 마중 을 위해 산장의 현관 앞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폭설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으로 우산만 든 채였다. 그가 손을 흔들며 얼른 오라고 채근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따 라나서겠다고 하던 것을 기억해 태국영은 조금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 이승도는 빙긋 웃으며 유모가 끓여두고 간 수프가 굉장히 맛있으니 같이 마저 먹고 출발하자고 말했
태성문이 한달음에 달려와 꾸벅 인사했다. 제가 고이고 이 잘 지켜드렸습니다,부듯하게 웃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였다. 멀리 이원표가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여제운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그 둘은 이승도와 달리 곧 장 떠날 생각인 듯 마당을 가로질렀다.
태국영은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태이경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엄마아아,두 팔을 활짝 벌린 아이가 이승도에게 달려갔다. 매서운 눈보라가 시야를 흔들었다.
이승도가 달려오는 아이에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여은태가 찢어질 듯 고함을 질렀다. 태국영이 문득 환 영을 본 것은 그 직후였다. 그것은 마치 눈과 같았고 바람 과 같았다. 냄새도 기척도 없는 것이 이승도의 뒤에 백야 의 달처럼 드리웠다.
一분명,승도를 노릴 거야.
불과 십여 분 전에 했던 생각이 다시금 되살아나 뇌리 를 뒤흔들었다. 살기는 오래된 엿물처럼 끈끈하게 응어리 져 있었다. 칼날 같은 손톱의 창백한 빛 반사에 머리가 새 하얗게 비었다.
몸을 날린 것은 본능적이었다. 이승도와 가장 가까이
에 있던 여제운과 이원표도 뒤늦게 일변한 안색으로 숨 가 브게 날아올랐다.
그러나 태국영은,이성적 사고가 멈춘 가운데서도 하나 는 알고 있었다. 이 안의 그 누구도 먼저 닿지 않는 거리임 을. 이승도의 등 뒤를 귀신같이 점령한 그녀의 일격을,누 구도 막지 못할 것임을.
여제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땅으로 짓누르는 순간 이었다. 붉은 피가 눈꽃처럼 어둠을 수놓았다. 간발의 차 로 땅을 디딘 태국영은 무턱대고 팔을 뻗었다. 종이 인형 처럼 쓰러지던 몸은 그의 품에 안착했다.
바람은 한층 잦아들었다. 완벽한 정적이 사위를 메웠 다.
태국영은 이승도를 품에 안은 채로 얼어붙었다. 주변 의 모든 것들이 정지한 듯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 다. 그러지 않고서야 바로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승도 가 이렇게 많은 피를 쏟아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접근을 모두가 느끼지 못했다. 저는 물론 그 눈 밝다는 여은태와 여제운조차도.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꿈일 것이다.
겨우 대여섯 발자국 남은 거리에서,태이경은 망부석 이 된 양 이승도를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엄마…….,,
꿈이어야만했다.
“엄마아아아!”
아이의 발작 같은 울음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뒤흔들 었다. 그 소리가 먼바다의 수면에 내리꽂히는 천둥 번개처 럼 음음하게 들려왔다.
“국여……
피로 범벅이 된 이승도의 입술이 가느다란 소리를 흘렸 다. 태국영은 등허리에 가시 박힌 채찍을 후려 맞은 양 몸 을 한 차례 크게 경련했다. 주저앉은 채 다급히 그를 추슬 러 안았다. 이승도의 눈에는 물기가 차 있었다. 젖은 눈끼 풀이 너무나도 무거워 보였다. 태국영은 온몸을 떨며 그 의 눈꼬리에서 흐르는 물방울에 입술을 붙였다. 불규칙한 숨결이 하얗게 그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이경이,부탁…… 넌……
이승도가 작게 쿨럭였다. 쏟아져 나온 핏덩이는 두려 울 정도였다. 넌 죽지 마,그는 한숨 같은 한마디를 힘겹 게 이었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정지했다. 경련하는 손끝으 로 그의 뺨을 건드려 보았다. 따뜻한 살갗은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승도야.”
태국영은 숨을 불어넣듯이 이름을 불렀다.
“승도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태국영은 기능을 멈춘 이승도 의 심장을 덮어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새 나왔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한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눈가를 깨물고,콧등을 쓸어내리고,입술에 키스했다. 그러나 섞여드는 호흡은 없었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너도 이제 내가 살아온 지옥을 걷게 되겠지.”
윤봄이는 여제운의 무릎에 짓눌려서도 기괴하게 고개 를 꺾어 태국영을 노려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 게 끼진 뺨에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번졌다.
“길을 걷다가도,밥을 먹다가도,잠을 자다가도,이 순 간을 기억하며 고통의 비명을 질러라,태국영. 내가 그랬 듯이.”
유령의 숨결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관자놀이를 꿰뚫었 다. 혼돈이 걷히고 지독한 현실이 닥쳐왔다. 태국영은 더 이상 이승도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다시는 저를 보 아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 따뜻하고 다정한 손도,달콤한 품도,모두 영원히.
이제 영원히…….
이승도는 제 생애를 지탱해주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생애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없이 살아가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 없이 홀로 숨 쉬는 법도 모르는 머저리가 바로 자신이었다.
태국영의 전신에서 움튼 거대한 기의 폭풍이 주변으로 세차게 뻗어 나갔다. 괴물의 울음 섞인 포효가 산천을 까 마득히 뒤덮었다.
「승도야.」
열일곱 살 때였다. 아마 성년식 날짜를 한 이십 날 정 도 앞두고 있었을 때였을 거다. 세 번째 발정기가 지나자 잠깐 해동되었던 관계는 이전보다 더 극심한 빙하기에 접 어들어 있었다. 제가 본능에 굴복해 이성을 잃었고,그 상 태에서 그를 범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이승도는 구석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 웅크린 몸은 날 이 갈수록 말라가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제대로 몸조리 도 못 했던 터라 저는 늘 전전긍긍했지만,이승도는 모든 것에서 의욕을 잃어 저렇게 무생물처럼 시간을 흘려보내
다 까무룩 잠드는 것이 그때의 일상이었다. 그나마 하루 에 한 번 들르는 유모가 미역국이며 고깃국에 밥을 말아 직접 떠먹여 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정말 굶어 죽었을지 도 몰랐다.
「내가 죽으면 편해지겠어,승도야?」
그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그 동요가 더는 반갑지 않 았다. 사실은 그가 지쳐가는 만큼 저도 그랬다. 내키지 않 아 하면서도 동정으로 내미는 손에 희망을 갖지 않게 된 지는 좀 되었다. 그가 영원히 애착을 갖고 저를 바라보아 주지 않을 거라는 절망을,태국영 자신은 그때서야 인정 을 했던 것 같았다.
이대로 무사히 성체가 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지.
그는 자유를 찾자마자 저를 외면할 거였다. 살아갈 이 유가,생각나지 않았다.
「이상한소리 하지 마.」
이전에도 그랬듯 이승도는 그렇게,제가 정말 절벽에 서 있다고 느낄 때만 돌아봐 주었다. 그로 인해 무한히 희 망을 갖다 실망하길 반복해 왔던 거였다.
애정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애증에도 못 미치는 공허한 동정이었다. 어리석었다. 희망 고문이 그가 제게 내리는 형벌이었을까. 슬픔이 사무쳤다.
「정말이야. 죽어줄 수 있어,지금이라도. 네가 원한다 면.」
너무 힘들다,승도야.
그 말을 덧붙였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불 시에 뇌리를 가른 깨달음처럼,그렇게 훌쩍 뛰어 벽에 머 리를 들이받았다. 쿠응,단단한 방공호의 벽이 울리며 피 가 튀었다. 의욕 없는 충돌에 두개골은 버티고 있었다.
단번에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뒤로 한 껏 물러나 다시금 돌진했다. 그건 그 당시 제가 낼 수 있 는 최고의 속력이었다.
「하지 마!」
발을 멈추었다. 저는 적어도 이성이 남아있을 때 그의 의지를 등지는 법을 몰랐다.
「뭐 하는 거야,이 명청아!」
이승도가 달려와 깨진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뜨거 운 눈물이 핏물이 낸 길을 타고 제 안구로 흘러들어왔다.
「누가 죽으라고 했어! 네가 죽으면 내 망가진 인생이 돌 아와? 내가 무사히 풀려날 수 있대?」
불쌍한 우리 승도. 내가 널 위해서 뭘 해 줘야 할지 모 르겠다.
「죽기만 해. 죽기만 해!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이승도는 목 놓아 울었다. 잡혀 온 뒤로 저 혼자 가끔 등을 돌리고 손목으로 눈가를 찍기만 했던 그가 그렇게 울 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는 여전 히 어린아이에 그쳐 있었다.
「나 혼자 두고 죽지 마. 악착같이 살아. 용서하지 않는 내 곁에서 평생 괴로워해. 그게 내가 너한테 내리는 벌이 야.」
「나 죽은 다음에 죽든 말든 맘대로 해. 하지만 내가 살 아있을 땐 안 돼. 죽지 마. …나만 혼자 두고 가면 진짜 용 서안 할거야.」
어쩌면 그도 어른답게 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가 아 닐까.
「응. 약속할게.」
시야가 붉게 아롱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쿠우우융.
산 전체가 흔들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자세를 낮 추었다. 돌풍이 잦아들었으나 쓰러진 나무들은 도로 일어
나지 못했다.
괴괴한 정적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짐승이 피어났다. 짧고 검은 털에 뒤덮인 근육들이 세차게 꿈틀거리고,번들 거리는 눈에서는 광기가 눈물처럼 어른거렸다. 껍데기 안 에 꼭꼭 숨겨 있던 태국영의 알맹이였다.
맹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울한 살기가 전류처럼 주변 을 잠식해 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그를 넋 놓고 지켜보던 모두가 본능적으로 한계치까지 변 이했다.
“피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원표가 침착하게 말했다. 사 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친위대는 일제히 튀어나와 여제 운과 여은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신해 있는 여유를 부 릴 때가 아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대기조까지 빠짐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피해요. 철수합니다.,,
영은 여은태를 뒤로 밀쳐내며 말했다. 여은태는 이승도 의 곁에서 엉엉 울며 안 가겠다 버텼다. 똑같이 목 놓아 우 는 태이경을 끌어안은 채였다. 강제로 끌어내야 하나,그 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쪽이다!】
여제운의 앞을 지키던 충호가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 다. 태국영이 빠르게 달려와 허공을 날은 것과 거의 동시 였다.
좁은 간격으로 홑어져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과녁의 정 중앙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처럼 충호의 뒤를 받쳤다. 혼 이 나간 듯 서 있던 여제운은 영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저 만치 날아갔다. 충호는 앞발을 교차한 채 몸을 낮추었다. 태국영이 그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번쩍 빛이 터졌다. 발생한 소음은 지각이 흔들릴 만큼 둔중하고 무거웠다. 기의 충돌에 감전된 눈발이 분자처럼 작아져 소멸했다. 한 덩어리로 응집해 있던 친위대는 충돌 의 순간 반절이 튕겨 나갔고,버티어 낸 반절은 족히 10미 터는 뒤로 밀려났다. 얼음과 눈이 뒤엉킨 땅은 불길이 지 나간 듯 깊게 그을린 골이 생겼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충호의 이발 사이로 선혈이 흘렀 다. 그는 내색 않고 온 힘을 다해 다리와 허리에 힘을 주었 다. 태국영은 어떤 징조도 없이 훌쩍 사라졌다. 충호가 다 급히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짐승은 곧장 나가떨어진 여제 운을 노렸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태국영! 네 원수는 여제운이 아 니라고!】
태국영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위기를 감지한 여제운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옆으로 몸을 굴려 어둠 속으로 녹아 들었다.
태국영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느리게 한 바퀴 돌았다. 마치 놓친 사냥감의 흔적을 쫓는 듯이 집요한 눈길이었다. 비통한 울음이 걷힌 자리에는 싸늘히 정제된 숨결만이 홑 어지고 있었다.
【이때야. 영아,발리 제운이와 은태를……!】
그가 말을 마치기 전이었다. 태국영이 앞발을 들어 땅 을 내리쳤다. 눈을 품은 한풍이 쩍쩍 갈라지는 대지를 쓸 고 버섯구름처럼 희부옇게 솟아올랐다. 태국영의 젖은 눈 동자가 일순 어둠을 꿰뚫었다. 그는 느리게 도약했다.
“미친……!”
친위대 중에서 가장 눈이 밝은 영이 가장 먼저 뛰었다. 그가 여제운이 은폐된 자리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 으로 깨달은 친위대들이 또 한 번 결집해 크게 땅을 박차 며 튀어나갔다.
빠아악!
이번에는 엄청난 파열음이 사위를 진동했다. 간발의 차 로 영의 앞을 몸으로 막은 충호가 이번에는 기침 같은 신 음을 터뜨렸다. 그는 척추와 대퇴부가 작살난 채로 모든
이들을 끌어안고서 날아갔다.
뒤엉킨 일단의 무리가 산장에 정통으로 메다 꽂혔다. 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기둥 잃은 지붕이 내려앉았다. 먼 지 대신 눈이 날렸다.
【이… 허약한 꼬마 놈아. 넌 저거랑 부딪쳤다가는,단 번에 저세상이다.】
옆으로 누워 헐떡헐떡 피를 토해내면서도 충호는 킥킥 웃어댔다. 영은 다급히 그의 상태를 살펐다. 부상이 심각 하긴 했으나 용케도 급소는 모두 피했다. 심장이 멀정하 니 금방 돌아오리라.
영은 힐긋 무너진 벽 너머를 보았다. 태국영은 무슨 생 각인지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제운 씨. 더 있으면 당신도 우리도 위험합니다. 태국영 의 광기를 제어할 수 있는 이가 없어요. 우린 당신을 지켜 야 합니다.”
영은 태국영을 주시하는 채로 재발리 여제운에게 속삭 였다. 피와 물로 얼룩진 여제운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급기야 영이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고 암살조 원 하나가 그의 다른 팔을 부축했다.
“광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막 옮기려는 찰나에 여제운이 끼질 듯 중얼거렸 다. 영은 답답하다는 듯 ‘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제 운은 양쪽을 부축한 이들을 냉담하게 떨어냈다. 그리고 담 담한 걸음으로 태국영을 향해 걸어갔다. 기겁한 친위대 전 원이 그의 앞을 막았다. 영은 결단을 내렸다.
“끌고 갑시다.”
여제운은 죄인처럼 포박당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아 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태국영이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하나도 아니고 둘을 옮 기려니 골치가 아팠다.
“놔.,,
여제운이 말했다. 마치 그들의 주인인 양 고압적이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친위대는 무심결에 그의 몸을 억압하 던 힘을 풀었다. 여제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박에 뛰 어 태국영의 앞에 섰다.
“무슨 짓을……!,,
영이 소리쳤다. 여제운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태국 영만을 빤히 응시했다. 단 한 번 발을 구르면 닿을 거리, 금방 숨통을 끊어낼 거리에 있었다. 눈밭에 선 태국영은 그의 전신에 피어오르는 증기만 없다면 마치 온기 없는 동 상 같았다. 하얗게 홑어지는 숨은 아주 긴 간격을 보였고
물기 어린 눈 역시 지나치게 느리게 깜빡거렸다.
“죽을 셈이나,너.”
태국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짧은 털에 쉼 없이 내 려앉는 눈발이 그의 안구에 고이기 무섭게 줄줄 흘러내렸 다.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 였다. 지금의 태국영에게서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광기도,살기도,하다못해 생의 징조마저도.
“정말죽을 셈이구나.”
예상이 맞았다. 저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이 이상하 다 생각했다. 친위대 중에서 약한 자들부터 물어뜯을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 수상했었다. 여제운은 신음처 럼 중얼거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리석구나. 엄마도 모자라 아빠까지 죽는 모습을 네 아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거나.”
태국영의 초점 흐린 눈동자가 미동을 보였다. 그는 고 개를 젖혔고 더운 숨을 한 줌 허공에 부렸다. 목울대가 크 게 요동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싶더니만 결국 입을 다 물었다. 광야를 품고 돌아온 그의 눈은 차디찬 냉기로 가 득했다.
그가 냉혹하게 이를 드러내며 바닥을 박차고 올랐다. 그때 충호가 잽싸게 달려와 여제운의 위팔을 물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스으응,날카로운 발톱이 빈 허공을 찢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가 절단 날 듯한 공기의 파동이었다.
눈밭에 처박힌 충호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눈을 부 릅떴다. 연이어 다가올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 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너진 돌담 너머 허공을 가르 는 칠흑의 몸체였다.
태국영은 선회 없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육안으로 따라잡기 힘들 만큼 발랐다. 끝장을 볼 셈이었 다. 격전의 흐름이 순식간에 급물살을 탔다.
【이런,씹……!】
충호는 바닥에서 튕겨 올랐다. 친위대 전부가 서로의 팔을 옭아매며 무너진 천장을 뚫고 솟구쳤다. 태국영은 순 식간에 그들이 있던 자리에 도달했고 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아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흩어져라!,,
호위대가 깨진 얼음처럼 사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남 은 암살대 역시 부챗살이 퍼지듯 진형을 넓혔다. 그러나 귀신같이 따라붙은 태국영의 발톱은 그중 하나의 옆구리 를 찢었다. 위협적인 끝이 그의 내장을 파고들기 직전이었 다.
눈발 사이로 은빛의 빛살들이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낌새를 눈치챈 태국영이 발톱을 뽑아내며 바닥에 착지했 다. 그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으나 저를 꿰뚫으려던 살들 은 감쪽같이 없어진 뒤였다. 은신에 특화된 비기를 이용 해 전투에 임하는 호위대의 움직임은 혹독한 훈련 속에 핀 군사들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
태국영은 찰나 저를 향해 쇄도해 오는 암살대를 보았 다. 위기에 몰린 그들의 눈에 단호한 살기가 불길처럼 일 렁였다.
바람은 이제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라져 버 렸다. 굵었던 눈발이 몸집을 줄였고 눈앞은 온통 눈안개 로 뒤덮여 있었다. 길게 내봅은 날숨 한 줌이 창백한 결정 들을 녹였다.
“그만둬!”
피를 토하듯 외치는 소리는 여제운이었다. 그는 접전 의 중심지로 뛰어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언제 왔는지 모를 남강우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여제운을 더 먼 곳으로 날려버리며 남강우가 차게 쏘아붙였다.
“낄 데 못 낄 데 구분 못 하는 건 여전하군.”
격렬한 충돌의 여파가 일대를 휩쓴 것은 그 다음이었 다. 태국영은 뒤로 튕겨 나가며 전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을 선득하게 느꼈다. 충호는 피 냄새에 흥분해 으르렁
거렸다. 그의 이발은 태국영의 두개골을 뚫지 못하고 두피 만길게 찢어냈다.
피 냄새가 자욱하게 코를 찔렀다. 뜨끈한 선혈이 안구 에 고여 들었다. 시야가 불그스름하니 울렁거렸다.
데자뷔가 눈앞을 스친다. 아이처럼 울던 이승도의 따뜻 한 품이 고통을 말끔히 불식시킨다. 하필이면 우는 얼굴이 라 슬프고,따스하게 안겼던 기억이라 안온하다.
뻐억!
뱃가죽을 깊이 찔러 내장을 도려내려던 것이 사라졌다. 태국영은 묽어진 피가 흐르는 눈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남강우가 온몸을 던져서 복부를 점령한 암살대를 튕겨내 고 있었다. 무리 없이 훌쩍 뒤로 날아 피한 충호가 격렬하 게 숨을 헐떡였다.
“아무리 돌았어도,네 애인 숨소리는 좀 들어라.”
남강우는 은색의 홍채를 음산하게 빛내며 영문 모를 말 을 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 무엇도 무의미했 다-
마지막 순간 이승도는 죽지 말라고 당부했다. 저는 약 속해주지 않았다.
태국영은 대꾸 없이 남강우를 후려쳤다. 그의 몸을 배 곡히 덮은 털이 무른 가시처럼 뻣뻣하게 너울거렸다. 잔영
을 남기고 사라진 그를 내버려 두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국영아……
잔뜩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뜨거운 혈관을 가지고 있는 모든 유기체들에게서 시간이 달아났다. 자욱하니 날 리는 눈안개만이 평화롭게 그들을 젖어들게 만들 분이었 다-
이원표는 태국영이 이성을 잃은 순간 윤봄이부터 확인 했다. 그녀는 여제운이 제압하는 과정에서 옆구리를 깊이 파였는데,묘하게 그것이 잘 아물지 않았다. 고통이 상당 한 듯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그녀에게서 일족 특유의 냄 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일단 그는 재킷을 찢어 윤봄이를 포박했다. 상처가 무사히 재생되어도 그녀에게 는 이것을 끊어낼 수 있는 힘이 없을 것이었다. 그녀를 한 곳에 처박아 두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앞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국영은 여제운을 노리고 있었고 그를 막기 위해 친위대 전체가 필사적으로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그 전쟁통 속에서도 또렷하게 귀 를 파고들었다. 이원표는 가라앉은 눈으로 울음소리를 따
라갔다.
“엄마… 엄마…….,,
어미를 잃은 아이의 얼굴은 온통 엉망이었다. 절명해 버린 시신의 품을 파고들려 애쓰는 그 몸짓이 애달팠다. 여은태 역시 혼이 떠난 육신의 껍데기를 흔들며 일어나라 고 목 놓아 외치고 있었다. 그 두 아이를 태 가의 남자들 이 망연한 얼굴을 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였고 이원표 또한 그랬 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원표는 생애 가장 큰 막막함에 놓여 있었다. 이승도 를 무사히 인계해주리라 했던 태국영과의 약속은 한순간 의 방심으로 무참히 깨져 버렸다. 모든 것을 경계했어야 했다. 태국영이 이승도의 곁에 서는 그 순간까지 끝났다 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그 잠깐의 빈틈이 이 참극을 불 러 왔다.
“별아…… 우리 엄마 죽었나 봐. 진짜로 가 버렸나 보 h 형아… 엄마가 숨을 안 쉬어.”
태이경은 울음 범벅인 얼굴을 이승도의 배에 문지르며
아무 말이나 내질렀다. 엄마의 심장 고동이,따뜻한 체온 이,달콤한 냄새가,사라지고 홑어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별아,엄마 좀 살려 줘. 우리 아직,만나지도 못했잖 아…… 별아… 엄마아아……
그때였다.
이원표의 눈가가 차게 꿈틀거렸다. 그의 뇌리로 섬광 같은 빛의 화살이 꿰뚫었다. 그는 한걸음에 다가가 이승도 의 배에 손을 올렸다. 태아는 필사의 요동을 보이고 있었 다. 손에 닿는 온기가 제 체온을 잠식시킬 만큼 뜨거웠다.
녀석은 모체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자극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뒤를 따라 허무하게 스러져버 릴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작 은 생명은 분출구를 찾는 마그마처럼 극렬하게 뱃가죽 안 에서 날뛰고 있었다.
“이경이라고 했지.”
이원표는 침착하게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는 우느 라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어깨를 흔들어 일깨웠다. 이승 도는 태이경이 평소에도 별이에게 틈만 나면 말을 거노라 말했었다. 흥분해서 한껏 거칠어져 있는 지금의 태아에게 는 친숙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안정을 찾고 귀를 기울여 들을 만큼 친숙한 목소리가.
이원표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아이의 뺨을 쳤다. 말간 눈에 고인 눈물이 허공을 날았다. ‘무슨 짓이야!’하고 소리 치며 여은태가 달려들었다. 태성문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구기며 손목을 낚아챘다. 이원표는 둘 모두를 곧바로 떨어 내며 태이경을 곧게 내려다보았다.
“정신 차려. 네 엄마 살리고 싶으면.”
태이경은 순식간에 발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싸 쥔 채 눈을 크게 치켜떴다. 갑작스런 폭력에 정신은 돌아왔지 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인정하기 싫었을 분,엄마의 심장은 완전히 뚫렸고 숨도 피의 흐름도 멎었다.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네 동생만이 네 엄마를 살릴 수 있어.”
“…별…별이,별이가요?”
“네가 설득을 해야 해. 녀석이 네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 일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된다. 네 동생마 저 죽기 전에,얼른.”
태이경은 뭣도 모르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문 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제지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 에서 무엇을 해도 더 최악으로 치닫는 일은 없을 것이었 다. 이원표는 아이의 손을 가져가 태아의 격류 위에 올려
놓았고,제 말을 그대로 전하라 일렀다.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제 가 문의 기록에 근거하여,모체의 배에 난 상처를 복중 태아 가 재생시킨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 다.
“별아.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탯줄로 엄마한테 전해줘 야 한대.”
태이경은 연신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이원표의 말을 고 스란히 별이에게 전해 주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자 절규하듯 뱃가죽을 쿵쿵 몸으로 쳐대던 태 아의 발악이 점차 잦아들었다.
“네가 엄마 몸에 피를 많이 보내줘야 돼. 심장,엄마의 심장을 바로 찾을 수 있으면 더 좋대. 거기만 완벽하게 재 생되면 너도 엄마도 살 수 있어.”
태아와 모체는 한 몸과 같았다. 강한 재생력을 타고난 태아가 복중에서 살아있는 한 그것을 품은 모체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재생력의 기본조건은 의지를 가지고 신체기관에 명령을 내보내는 노I,그리고 전신에 피를 보내 줄 수 있는 심장이었다.
이승도에게 의식이 있었더라면 태아에게 직접 의사를 전해서 스스로 재생할 수도 있었을 터. 그러나 지금은 무
조건적으로 태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무서워할 거 없어. 우리 엄마는 등대야. 우리가 죽음의 강에 빠지기 직전에 빛을 밝혀주는 존재야.
엄마가 살면 너도 살아.
태이경이 울먹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 간,이원표는 손 안에서 세차게 맥동하는 혈류를 느꼈다. 피의 흐름은 가슴 저밀 정도로 처절하고 다급했다.
그는 뚫려 있는 이승도의 늑골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 열된 채 기능을 멈춘 심장이 막 미동을 보였다. 너덜너덜 하게 늘어진 점막이 조금씩,회복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 몹시도 낯설었다. 이승도는 미어지는 마 음으로 명하니 눈앞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곱게 빛나던 하안 백사장은 거멓게 죽었고,청명하던 하늘에 가득 들어 찬 먹구름이 태양광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파도는 거칠고 높게 일었다. 한 번 몰아칠 때마다 폐허 같은 백사장을 처참하게 부수었다. 별이가 그 작은 몸을 열심히 움직여 만들었던 집은 뼈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
이승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발 목까지 치고 저만치 물러간 자리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유 조선들이 떼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물의 입자는 검고 끈덕 거렸다.
풀 한 포기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이제 이 세계 는 무너지고 멸망이 우주처럼 드리울 것이었다.
一승도야.
이승도는 젖은 얼굴을 들었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 보니,오래전 제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가 보였다.
一엄마.
그리운 이를 부른 순간,소리를 말살했던 울음이 격렬 하게 터져 나왔다. 어머니가 안쓰러운 얼굴로 두 팔을 벌 렸다. 이승도는 물엿처럼 맨발을 휘감는 모래를 밟으며 정 신없이 뛰어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一엄마……우리 국영이 어떡해.
가느다란 손이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어 왔다. 이승도 는 목을 놓아 울며 매달리듯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一국영이는 나 없으면 안 되는데…… 우리 이경이도, 은태도…… 별이는 아직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어머니는 말없이 품을 내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마음
은 더 먹먹해졌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보던 눈빛들이 뇌 리에 그득했다. 그 가여운 이들의 눈물을 타고 자신은 이 제 영영 사라져야 했다.
쿠르릉.
천둥이 치는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져 바다를 갈랐다. 검은 안개가 짓누른 수평선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구름은 더욱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었고 마침내 밤처럼 어두워졌 다.
먼바다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물비늘이 공포에 떨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이승도는 직감했다. 저것이 이곳을 덮치는 순간 하늘 이 무너져 내리리라고. 까마득히 몰려오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때,어머니가 자신을 부 드럽게 다독여 밀어냈다. 그녀가 제 등 뒤를 고갯짓했다. 이승도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一엄…엄마아……
폐수에 털이 잔뜩 엉기고 뭉친 별이가 비척비척 힘겹 게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 었다. 이승도는 뒤돌아 녀석에게 뛰어갔다. 무너지듯 주저 앉아 숨을 깔딱이는 아기 짐승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一미안해,별아. 미안해. 미안해……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기. 이대로 저와 함께 해 일에 휩쓸려 먼지가 될 아기였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이승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멈추었던 눈 에서 뜨거운 눈물이 범람했다.
一같이… 같이가,엄마…….
별이가 할딱할딱 숨을 뱉어내듯 말했다 이승도는 젖 은 얼굴을 억지로 움직여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一그래. 같이 가자. 무섭지 않게 꼭 안아 줄게. 우리 별 이,엄마랑 같이가자.
이승도는 녀석을 안은 채로 일어섰다. 해일은 어느새 저만치 가까워져 금방이라도 이곳을 뒤덮을 듯했다. 불안 한 해안가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녀 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품 안의 아기가 몸부림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一그쪽,아니야,아빠가 있는,저쪽…….
이승도는 선득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통 스런 신음을 터뜨렸다. 새카만 털을 가진 거대한 짐승이 불바다에서 날뛰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들이 그의 이발 에 모두 난도질 되었다. 처참히 찢긴 사체 조각들은 화염 이 집어삼켜 재 한 줌 남기지 않았다.
一내가,데려가 줄게.
죽음에 다다른 가여운 생명이 여린 턱을 벌려 이승도 의 손을 깨물었다. 무른 이발은 살갗을 깊이 꿰뚫지 못했 다. 그러나 따끔한 그 감각은 마치 죽은 세포들을 깨워 일 으키듯 순식간에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이승도는 전기에 감전된 듯 숨을 들이켰다. 별이가 온 힘을 다 끌어모아 턱에 힘을 주었다. 뼈가 바스러졌다. 기 이하게도 통증은 없었다. 묘한 쾌감이 전류처럼 등허리를 후려쳤다.
거대한 해일의 그림자가 하늘을 가렸다. 그것이 머리 위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물들였다.
一조심히 돌아가렴,내아들.
파앗一
모든 것을 휩쓸고 몰려온 해일이,순간 머리 위에서 물 거품처럼 여린 입자로 터져나갔다.
이승도는 고통스럽게 가슴을 들썩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날숨 하나 뱉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비강에 무 언가 가득 고인 채로 숨구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코가 틀어 막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비틀었지만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입술을 덮었다. 크 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에는 격통이 잔열처럼 들끓었다. 뇌 가 삶아지는 듯했다.
기도를 억지로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숨은 독약 같았 다. 그러나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몸과 고개를 고 정한 힘은 단호하고 억셌다. 산소를 받지 못하는 뇌가 경 종을 울렸다. 감은 눈 안으로 잔 불꽃들이 하얗게 번져갈 무렵이었다.
쿨럭,이승도는 힘겹게 기침을 토해냈다. 인중과 코에 진득한 액체가 눌어붙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비리고 역한 피 냄새,그리고 온 사방을 뒤덮은 차가운 눈의 향기 였다. 한증막에 감금된 듯 전신을 휘도는 뜨거운 열은 그 다음에 자각했다.
“엄마…….,,
가녀리고 연약한 목소리. 이승도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 에서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마저도 힘겨 웠다. 팔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 다. 그 위로 차디찬 눈이 쉼 없이 엉겨왔다. 고열과 오한 이 동시에 찾아와 온몸이 덜덜거렸다.
“엄마… 엄마아-
으아아앙.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젖먹이 아 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이승도는 어깨에 기대오는 녀석 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차갑게 식은 보드라운 뺨이 손끝을 물들였다. 지나치 게 현실적인 감촉이었다. 여은태의 목소리도 들렸다. 녀 석 역시 목을 놓아 울며 연신 ‘선생님.’ 그 단어만 뇌까렸 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아이 다 목이 하얗게 쉬었다.
이승도는 아교를 발라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 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가느다란 빛이 바늘처럼 홍채를 찔러 눈이 아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죽은 게 아니었나……
현실감이 바닥을 기었다. 가슴을 꿰뚫던 격통을 기억했 다. 넋 빠진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던 태국영의 얼굴도.
아,국영이.
이승도는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은 온통 새하앴 다. 눈안개가 암흑을 밝혔다. 창백한 숨결에 작은 결정들 이 나풀나풀 홑어지고 있었다.
여은태가 엉망인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관절 잃 은 인형처럼 몸이 덜컥거리며 미묘한 고통이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이승도는 그 선명한 통증에 그제야 제가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태이경은 반대쪽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설움과 안도가 뒤섞인 아이를 내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국영이 는?’ 그렇게 묻자 여은태가 대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 리켰다.
이승도는 고개를 돌렸고 곧 쑥대밭이 된 산장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부서진 잔해 너머 뜨거운 기가 소용돌이쳤 다. 한때는 익숙했으나 이제는 조금 낯선,태국영의 맨몸 뚱이가 그곳에서 느껴졌다.
“국영아……
이승도는 마지막 숨을 쥐어짜내는 노인처럼 태국영을 불렀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가루처럼 날 렸다. 무너진 산장 너머의 움직임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정 지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고열이 판단력을 녹였다. 이승도는 제가 몇 살인지 순간 기억하지 못했다. 양옆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도 잊었다.
“국영아,이리 온.”
이승도는 다섯 살 태국영을 부르듯이 속삭였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남강우였다. 그는 뒤늦게 산장에 도착했다가 이 어이없는 광경을 맞닥뜨렸다. 도대 체 뭐가 어떻게 된 거나,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주위를 훑은 지 수 초 만에 사태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막 양 수를 토해내는 신생아처럼 불순물을 뱉어내는 이승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 해,가보지 않고.”
한 것은 별로 없으나 왠지 정신적으로 피로해,남강우 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무릎까지 쌓인 눈이 열 오른 몸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태국영은 석상처럼 한 자리에 붙박인 채로 간헐적인 경 련을 보였다. 강철 같은 근육이 울렁거리며 매끄럽게 빛 이 났다.
“국영아,이리 온.”
소리 없는 번개가 정수리에 꽂혀 왔다. 태국영은 일순 크게 몸을 떨며 뒤를 돌았다. 엉망이 된 산장이 시야를 가 렸다. 그러나 그 달콤한 살 냄새,세찬 심장박동,다정한 목소리는 이승도가 확실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할 사이도 없었다. 태국영의 눈에서 광휘가 몰아쳤다. 그는 돌진하듯 바닥을 박차고 튀 어 올랐다.
육중하고 강한 힘에 짓밟힌 산장이 또 한 번 와르르 무 너져 내렸다. 온 사방에 물 젖은 잔해가 튀었다. 그는 크 게 크르렁거리며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하찮은 먼지 처럼 날려버리며 뛰어갔다.
승도야.
빛 가루들이 안갯속을 배회하듯 흐드러졌다. 시야가 아 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태국영은 기지개를 켜듯 유연하 게 도약해 이승도의 앞에 섰다. 남은 거리는 고작 서너 발 자국,태국영은 그곳에서 멈춰선 채 숨을 멈추었다.
이거야말로 꿈이면 어쪄나.
그것이 두려웠다. 손을 대면 그대로 모든 것이 산산조 각이 나 차갑게 얼어붙은 현실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이 마에 맺혔던 핏물이 눈에 섞여 다시금 시야를 흐린 붉은 빛으로 뒤흔들었다. 눈을 깜박여도 그가 달아날 것만 같 아,태국영은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이리 와.,,
이승도가 여린 숨결을 뽑아내며 한 손을 내밀었다. 병 자처럼 떨리는 손이었다. 태국영의 안면 근육이 세차게 떨 렸다.
그는 이끌리듯 한 발 내디디며 ‘승도야’하고 으스러진 부름을 뱉어냈다. 그러나 그 순간,그는 제 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고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말았 다. 태국영은 용기 내 다가간 만큼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니까 이리 와.”
이승도는 급격히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복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등대 모체의 안에서 끊임없 이 재생하는 태아가 힘차게 피를 보내주고 있기 때문이었 다-
오한은 깨끗이 사라졌다. 차갑게 식었던 몸에도 기본 좋은 열이 펄펄 끓어올랐다. 별이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 며 간헐적으로 뱃가죽을 통통 울렸다. 마치 엄마가 무사 히 깨어났는지 확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국영아.”
이승도는 다시금 부드럽게 손짓했다. 여은태가 태이경 을 안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국영은 도리어 더 뒷걸음질 을 쳤다.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그 두려움이 뼈아프게 슬 펐다. 가슴이 다시금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배경만 다를 분,그 모습은 성년식을 갓 마친 태국영의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이대로 두면 그는 사라져 버릴 거다. 그 모습이 잊힐 때쯤 멀끔한 인간의 거 죽을 뒤집어쓰고서 저를 찾아오겠지.
“지금 도망가면 평생 안 볼 거야.”
그의 눈매가 조금 더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고여 있던
핏물이 흐리게 희석되어 눈밭을 수놓았다.
“이리 오라고 했어.”
단호한 채근이었으나 캐러멜처럼 달콤하고 다정한 목 소리였다. 태국영은 그의 유혹에 약했다. 홀린 듯 다가섰 다. 이승도가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이승도는 어느새 눈 물범벅인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고개를 쭉 내리자 따뜻한 손이 얼굴을 감싸 왔다.
“잘했어. 착하지.”
체온이 겹쳐지는 그 순간,태국영의 콧등과 눈가가 세 차게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에 온 세상이 침수 했다. 그는 고장 난 시야를 대신해 들숨을 크게 마셨다. 달 콤한 냄새는 건재했다. 이렇게 닿았는데도 사라지지 않았 다. 그는 제 연인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기었다.
이승도는 아기 짐승을 대하듯 조심조심 머리를 안아 쓰 다듬었다. 태국영은 그의 품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웅크 린 몸과 구부린 꼬리로 그의 몸을 최대한 감싸 품었다.
“예쁘다,우리 국영이.”
다정한 손길에는 두려움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태 국영은 오열을 삼키며 이승도의 심장 어림에 귀를 비볐다. 멈췄던 그의 고동이 세차게 울리며 뇌까지 진동했다.
살아있다. 내 생의 전부가…….
이승도가 젖은 눈가에 키스해 왔다. 가슴에 박혀 있던 아픈 과거의 조각들이 조금은 물러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