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예? 이재혁 선생님이 실종이요?”
이승도는 아무 생각 없이 동물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 았다가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니까. 그제 약속 있다고 퇴근한 뒤로 사라져 버 렸어. 그 선생 식구들도 지금 경찰에 신고하고 전단 부리 고 난리가 났다고.》
“세상에…… 어떡해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나 말이야.〉〉
어디 가서 원한 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굉장히 밝 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가정에도 성실했던 남자가 갑자 기 이틀이나 연락 없이 잠적을 했다니 온갖 안 좋은 상상 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 동물원도 지금 난리야. 진료팀에 이재혁 선생이랑 갓 들어온 신입 선생 딱 둘 분이잖아. 신입 선생 은 동물원 근무가 처음이라 지금 혼자 엄청 버거워해. 그 래서 말인데…….》
그 뒤에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승도 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무심결에 시선을 아 래로 내렸다. 편한 고무줄 반바지 안으로 살짝 나온 배가 보였다. 인간 아기보다 훨씬 작게 태어나는 종족이라 5개 월이 넘은 지금도 그다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딱 하루에 네 시간 정도만. 응? 수술이나 검진 같 은 거는 다른 선생이랑 동물병원 담당 선생이랑 분담하고 회진이랑 애들 진료 보는 정도만. 중간에 시간 날 때는 낮 잠을 자든 소파에서 뒹굴든 절대 터치 안 할게. 오늘 당장 임시직 채용공고 냈으니까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 어떻게 안 될까?〉〉
품이 넓고 큰 후드를 입으면 가려지긴 할 터였다. 이승 도는 잠시 생각해 보고 금방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더니,아니나 다를까 태국영이 엎드린 채로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 다. 통화내용은 이미 다 훔쳐 들었을 게 분명해 따로 설명 하진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가.,,
이승도는 순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진짜? 나 정말 가도 돼?”
“너 지금 가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야. 안 보내주면 우
울증이라도 걸릴 것 같네. 가. 대신 내가 따라다니는 거 당 연히 감수해야 돼.”
“응.”
이승도는 곧장 원장에게 승낙의 말을 전한 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아마 하루나 이틀 정도면 될 거다. 이재 혁은 분명 멀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간 피치 못할 사정 이 있었노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그의 신변에 큰 변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배 나온 거 별로 티 안 나지?”
이승도는 기모가 들어가 두껍고 품이 넉넉한 후드 티셔 츠를 골라 입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도는 폭신한 패딩을 덧입고 거울을 보았다. 감쪽같았다. 만족스럽게 돌아선 그는 아이 들에게 다가가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한 네다섯 시간이면 될 거야. 둘이 착하게 잘 놀고 있 어.,,
“응. 내가 이경이 잘 돌볼게. 걱정 말고 다녀와.”
여은태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치 애 보는 것이 사명인 양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녀 석이 조금 이상하다 여겼으나 뒤이은 태이경의 질문에 그 얄은 의혹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엄마. 그럼 오늘 올 때 원숭이도 데려와요?”
“아. 맞아. 집도 다 만들어졌으니까 간 김에 업어오면 되겠다.,,
원래는 내일이 데리러 가기로 한 날이었지만 그때까지 그대로 둘 이유는 없었다. 이재혁이 내일 당장 돌아올지 도 모르니 두 번 걸음 할 것 없이 오늘 바로 데려오는 것 이 낫겠다 싶었다.
유모가 이승도에게 따뜻한 목도리를 둘러주며 말했다.
“어휴. 하여간 승도 군 식구 늘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 까.,,
“이전이 너무 적막했잖아요. 지금은 복작복작한 게 좋 지 않아요?”
“뭐 나쁘지는 않지만,저는 역시 원숭이보다는 우리 가 주님 아기씨가 더 느는 쪽이 훨씬 좋네요.”
“두 달만 기다려요.”
이승도는 콧등을 찡긋하며 말했다. 예정일이 3월 초이 니 이젠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태아는 이제 태이경의 주 먹 크기만큼 자라 있었고,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또렷 해졌다. 주변에 대한 자각이 평균보다 훨씬 일찍 트인 경 우라고 했다.
그 쪼그만 게 어찌나 좋고 싫은 게 분명한지,직접 교감
을 나누는 이승도 자신도 가끔 실소가 나왔다. 태국영이 배를 만져 안을 느끼려고 들면 여지없이 가장 깊숙한 곳으 로 도망쳐서 버둥거리고,고기 냄새가 나면 잔뜩 들떠 양 수 속을 활기차게 헤엄치고,졸리면 여기저기 툭툭 차며 자장자장 해 달라고 보채기까지 할 정도다.
현관에서 다시금 아이들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는 사이,태국영은 검정색 스니커즈의 끝을 단단히 동여 맸다. 고용인이 육중한 현관문을 열어 주었고,이승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태국영은 그를 따라 나가다 문득 멈 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야,꼬맹이.”
여전히 태이경을 업고 있던 여은태가 이승도의 꽁무니 만 좇던 눈을 돌렸다. 여은태는 그 꼬맹이란 말을 몹시도 싫어했지만 지금은 불만을 내뱉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 자 태국영이 의미심장하게 일렀다.
“잘 붙어 있어.”
태이경은 어리둥절하게 태국영과 여은태를 번갈아 응 시했다. 태국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른하고 권태로 운 얼굴이었는데,여은태는 다소 굳은 낯이었다.
“걱정 마.,,
여은태가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말투였다. 태
국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이승도를 따라 밖으로 나 갔다. 앞서 걷는 이승도가 발리 오라며 재촉했다.
태국영은 큰 보폭으로 그를 따라잡으며 언뜻 하늘을 보 았다. 잿빛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분위기였다.
“좋은 건지 나븐 건지 모르겠군.”
무심히 중얼거린 말에 이승도가 응? 하며 돌아보았다.
“별거 아니야.”
태국영은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유모는 조리실에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최소 6시간 분 의 식재료가 덩그러니 남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신선한 핏기가 감도는 소고기였다. 소고 기 파이가 먹고 싶다는 이승도의 말에 평소보다 훨씬 많 은 양을 주문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다 어쩐담. 온실 애들 주고도 엄청 남겠는데.” 유모는 재료의 신선도에 매우 집착했기에 이 집에는 냉 동고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손을 거친 재 료들보다는 직접 키우는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재료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승도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결정되자마자 과수원 과 논밭은 물론 온갖 농장부터 사들인 것이 대표적인 예 다. 별로 들여올 일 없었던 과일과 곡식,채소들이 이승도 를 위해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피가 짙은 태이경 조차 식성만큼은 육식 위주라 그저 가끔가다 믿을 만한 곳 을 이용해 들여오는 수준이었는데,이승도는 주식이 한식 이고 육류를 크게 선호하진 않았다. 태중 아기까지 있으 니 식재료에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에 통 크게 질러버 렸다. 물론 그에 따른 지출은 유모 자신이 생각해도 좀 어 마어마했다.
「유모. 혹시 나 몰래 살림 차렸어?」
웬만해서는 집안 살림에 토를 안 다는 태국영이 월말 결산서를 짚고 넘어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다분히 농담 섞인 질문이었다. 그는 유모가 정말 살림을 차렸다 고 하면 그보다 더 크게 한 몫 떼 주고도 남았을 남자였다. 유모는 쿨하게 다 이승도를 위한 지출이었다 대답했고 태 국영은 잘했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허브 농장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녹차 밭은 오버야. 개 커피 녹차 입에도 안 대. 카페인 들어가면 두통 온댔어.
녹차 밭은 쓸모가 없어져서 팔아치웠다. 커피 농장도 살까 즐겁게 고민만 하다가 잠시 보류해둔 건 참 다행이었
다.
유모는 주방 직원에게 남은 소고기 일부를 가져다주고 잘게 자르라 시켰다. 온실 동물들의 특별식으로 나갈 것들 이라 굳이 그녀가 손볼 이유는 없었다. 남은 고기는 이승 도에게 전화를 걸어 동물원에 가져다 드릴까 물었다. 이승 도가 반갑게 그렇게 해 달라고 해서 남은 것들은 전부 고 용인을 시켜 실어 보냈다. 그리고 때마침 제 앞을 우다다 뛰어가는 태이경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도련님. 온실 애들 소고기 줄 건데 도련님이 주시겠어 요?”
‘‘응! 내가 할래!”
태이경이 다시 우다다 뛰어왔다.
“내가 줘야 잘 먹는 애들이니까 나 줘. 어디 있어?”
“주방에 있어요.”
“응. 가져갈게. 형아는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아가들 밥 주고 금방 올게.”
여은태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꽁했다. 태 이경이 온실 간다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따라가 지도 못하는데 금방 온다 하면서 한 시간 내로 돌아오는
꼴을 못 봤기 때문이었다.
아가들은 무슨,제일 나이 많은 놈은 네 두 배도 더 살 았다더라.
물론 꼬인 속을 그대로 내뱉을 만큼 내숭 스킬이 없진 않았다. 여은태는 재밌게 놀다 오라고 어른스러운 척 손 을 흔들었다. 태이경은 주방에서 커다란 대야를 머리에 이 고 온실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일호야! 대장아! 소고기야,소고기!”
가면서부터 소리치는 바람에 태이경이 온실에 도착했 을 때는 모두 입구 근처에 모여 있었다. 선반에서 깨끗한 그릇들을 끼내 고기를 나눠 담고 각각 구역에 놓아 주었 다. 개고 고양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릇에 머리를 박고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가장 먼저 그릇을 비우고 다가온 대장이는 작게 나옹거 리며 티가 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족이 아닌 짐승들 과는 말이 안 통해 정확히 뭐라 하는지 태이경은 알 수 없 었지만,이승도를 찾는 눈치였다. 엄마는 동물원에 갔어, 그렇게 말을 해 주려던 때였다.
“승도 오빠는 동물원에 갔어.”
반가운 목소리에 태이경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입구 문을 열며 송재희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라며 방에서 쉬겠다고 했던 그녀였다. 안색은 여 전히 안 좋은데 원래도 혈색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괜찮아 진 건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누나,이제 안 아파?”
“응. 진통제 먹었더니 이제 좀 괜찮아.”
태이경은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피 냄새 가 나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그건 다 큰 여자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출혈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애들 소고기 먹어서 신났구나.”
“응. 역시 고기가 제일 좋은가봐.”
부듯하게 웃으며 말했을 때,대장이가 다가와 앞발로 툭 쳤다. 내려다보자 녀석이 나아아아 하고 울었다. 송재 희가 ‘더 없냐고 하는데?’하고 대변해 주었다. 태이경은 대장이에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돼. 오늘은 이만큼이야.”
대장이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가버렸다. 태이경은 에 휴,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와서 몸도 비비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더 줄 수도 있는데 녀석 은 참 제 마음을 몰라준다.
“이경아.”
송재희가 조심스레 부르자 태이경이 응? 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은태 생일이라며? 선물 샀어?”
“선물? …아니,안 샀는데. 생일이면 그거 사야 돼?”
태이경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물었다. 생일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개념이 조금 낯선 것이었다.
송재희는 머뭇거렸다. 깨물어 주고 싶은 복숭앗빛 뺨 에 댕그랗게 뜬 눈이 마냥 천사 같았다. 이런 아이에게 거 짓을 말해야 하는 거다. 죄책감이 머리를 치켜들었지만 제 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제 이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은 생일파티 할 때 작은 거라도 하나씩 마음을 담 아서 주는 건데…….,,
“그래? 난 몰랐어. 그럼 유모한테 사다 달라고 할까?”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려면 남의 손에 부탁하는 것보 다 손수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오오,그렇구나!”
태이경은 주먹 쥔 손으로 반대편 손을 탁 내리치며 크 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간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어 송 재희는 무심결에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누나. 그럼 선물은 어떻게 사? 유모한테 카탈로그 달 라고 하면 되겠지? 그건 내가 직접 고르는 거니까 괜찮은
거지?”
드디어 말할 기회가 왔다. 꽉 닫힌 입술이 부들부들 떨 려 왔다. 일호가 기이한 목울음을 내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태이경의 티셔츠 소매를 물어 당겼다. 태이경은 ‘응, 응.’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 다.
송재희는 흔들리는 눈으로 일호를 보았다. 마주친 눈빛 은 생소했다. 의젓하게 맞아주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낯선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일호는 감이 좋은 개였다. 전 주인에게 종종 학대를 당했던 경험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의사는 전해오지 않았지만 녀석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내 소중한 주인의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고.
“몰래 나가서 사 오자. 은태가 알면 안 되니까 누나랑 둘이 재발리 다녀오면 아무도 모를 거야.”
도리어 일호의 경계 가득한 눈이 뒷말을 부추겼다. 길 게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 돈 없는데? 유모한테 카드 받아서 가야 도H.” “내가 있어. 강우 오빠가 필요할 때 쓰라고 줬거든.”
“음. 아빠가 알면 왜 네 돈 놔두고 남의 돈 쓰냐고 뭐라
고 하지 않을까?”
“아빠가 오면 돈 받아서 갚아주면 되지.”
“그렇지! 그러면 되겠구나!”
태이경은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일호가 당황해 서 녀석의 허리띠를 물었다. 송재희는 먼저 일어나 온실 문을 열어두고 손짓했다. 태이경은 일호의 만류를 다정하 게 부리치고 달려왔다.
“가자,누나. 형아가 뭘 좋아할까? 장난감? 책?”
“은태는 이경이 마음이 담겨있는 건 뭐든 좋아할 거야. 너를,굉장히 아끼니까.”
태이경이 폴짝폴짝 뛰며 송재희의 손을 꼭 쥐어왔다. 송재희는 움찔 손끝을 떨었으나 금세 그 작은 손을 꽉 감 싸 쥐었다. 등 뒤로 일호가 사납게 짖는 소리가 멀어졌다.
하늘이 나를 돕는군.
최명욱은 증식해 가는 먹장구름을 올려다보며 생각했 다. 여 가의 남자들처럼 완벽하게 숨는 재주가 없는 그로 서는 빛이 없으면 없을수록 유리했다. 자연광을 집어삼킨 하늘은 시시각각 검어지고 있었다. 폭설이라도 쏟아져 주 면 금상첨화였다. 눈과 비는 모든 자취를 빠르게 감춰주
기 때문이었다.
최명욱은 백화점에 들어서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 후 2시가 조금 넘은 상태였다. 당초 약속했던 시점은 대 략 4시 전후. 상황에 따라 얼마든 앞당겨지거나 미뤄질 수 있는 터라 일부러 일찍 움직였다.
그는 기척을 감춘 채 비상계단을 올라가 남성복과 골프 용품이 집결해 있는 층에서 멈췄다. 구석에 주저앉아 몸 을 기대고 수족들과 연락을 취했다. 다들 준비가 끝났다 며 언제든 신호만 달라고 대답해 왔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만이 남았다.
활짝 열어둔 귀로 이름 모를 부부의 다툼 소리가 들어 찼다. 최명욱은 사나운 말들이 오고 가는 그들에게서 뜬금 없이 윤봄이와 최경엽을 떠올렸다. 권태에 빠진 일족이 흔 히 겪는 증상 중 하나가 바로 수집병,즉 쇼핑중독이었다. 그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일가족을 잃은 뒤 윤봄이는 모든 일에서 의욕과 즐거움 을 잃었다. 그러나 쇼핑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그 습관 만 남아 틈만 나면 백화점이나 명품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식으로 떨어낼 수 있는 화병이 아 니었다. 당연히 그녀는 빠르게 곪아갔다.
「살아서 보자.」
오늘 나오는 길을 배웅하던 윤봄이가 인사랍시고 한 말 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푹 끼진 눈이 기괴하게 빛나던 모 습은 오랜 병환에 시달린 인간 같은 모양새였다. 작은 상 처도 스스로 재생하지 못하는 몸이 되자 마음의 병이 겉으 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스스로 지옥에 걸어가게끔 했나.
한때 부질없이 여겼던 그 증오와 원한에까지 생각이 미 쳤을 때였다. 최명욱은 휴식을 취하듯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언뜻 동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들어왔다. 넷이 다. 기척을 죽이고 있길 다행이었다. 예민한 고양이처럼 바짝 정신을 집중했다.
… 여자?
한 명은 여자가 분명했고,동행인들은 모두 남자였다. 여자와는 손을 섞을 일이 없으니 남자들 쪽을 기민하게 살 펐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그리 강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원래 별 볼 일 없는 놈이었거나,전성기가 예전에 지나 노년을 훌쩍 넘은 남자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혈관을 저리게 퍼져나갔던 긴장감이 일시에 느슨해졌 다. 그러나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된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소란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진행될 계획이었지만 변수는
언제나 존재했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하게 충돌이 발생 할 경우,여자가 그 안에 휩쓸려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전쟁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얼마나 큰 가문인지 그것을 우선 알아봐야……
고속으로 달아올랐던 머리가 일순 식었다. 최명욱은 쓰 게 실소했다. 뒷수습 따위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 다. 어차피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은 태 가의 표적 이 될 것이었다. 저를 노리는 놈들이 좀 더 늘어난다고 달 라질 것은 없었다.
최명욱은 평정을 되찾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두 남녀 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마침내 그들은 제가 은신 해 있는 층에 다다랐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여자는 쾌 활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신영애.
최명욱의 낯이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그 드센 여자가, 하필이면 유동인구가 가장 적어 택한 이 층에 온 것이었 다. 이쯤 되니 저 자신이 지독하게 운이 나븐 것인가 의심 이 들었다.
지금 와서 약속된 장소를 바꾸면 무언가가 틀어질 염려 가 있었다. 이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마주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분이었다.
“영애야. 아빠가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신영애의 부친 신종남은 이 쇼핑 지옥을 벗어나고픈 마
음에 슬쩍 말을 꺼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빠 비서실에 이미 확인 다 했거든? 오늘 회의도 없 고 외근도 없는 거 알아.”
“…내이놈자식들을 그냥.”
신종남이 입 안으로 칼을 갈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편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수행비서 둘이 전혀 모르는 일 이라는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신영애는 답답하 다는 듯 팔자 눈썹을 만들며 그의 팔짱을 끌어 당겼다.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 줘. 요즘 엄마 갱년기 오는지 통 의욕도 없고 신경질도 늘었단 말이야. 이럴 때 아빠가 노력해야지 누가 해? 젊은 시절 때처럼 근사하게 입고 같 이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좀 가고,쯤!”
“…니 엄마가 갱년기야?”
“이것 봐,이것 보라고. 남자들이 다 이래요. 아니 어떻 게 살 맞대고 사는 부부끼리 그런 것도 눈치를 못 채?”
“따님아. 말은 바로 하자. 느 엄마는 갱년기고 뭐고 원
래부터 그랬어.”
신종남이 어깨를 으쓱이며 지적했다. 신영애는 가만히 눈을 끔뻑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일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가 좀 예민한 성격이긴 하지. 그래도 요즘은 확실 히 미묘하게 달라졌어. 우울해 보이는 것 같더라고,엄마 답지 않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의 채근에 신종남은 두 손 을 들고 말았다. 안 그래도 요새 부쩍 가시 돋친 아내 눈 치 살피느라 힘겹긴 했었다. 그게 갱년기 때문이라면 남편 인 자신이 특별히 신경을 써 주는 것이 맞았다.
“그래. 가자,가. 내 네가 원하는 거 다 입고 다 해 주마.
신종남은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활짝 웃는 딸의 얼굴 에 그 역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그저 신영애가 이 끄는 대로 흘러갔다. 이미 한 시간이 넘게 남성복 매장들 을 털고 털었는데 또 털 것이 남아있다는 게 점차 신기해 져갈 분이었다.
‘‘응? 저게 누구야?”
막 에스컬레이터 정면을 지나칠 때였다. 신영애의 한
손을 허공에 번쩍 치켜들며 반갑게 소리쳤다.
“재희야! 재희야!”
덩달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린 신종남은 막 에 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한 여자와 한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신종남이 주목한 것은 여자 쪽이 아 니라 여자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기 쪽이었다.
저 얼굴,저 냄새,저 인간적인 표정,확실히 기억에 남 아있었다. 신종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는 분명 태국영 의 장남이었다.
“어…… 언니?”
송재희는 조금 당혹해서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예기 치 못한 만남이었다. 이러면 일에 원가 차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신영애는 활짝 핀 얼굴로 빠르게 다가왔다가 뒤늦게 아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신 영애의 짙은 눈매가 둥그렇게 커졌다.
“엥? 앤 태국영 아기잖아?”
태이경은 ‘저 예븐 누나를 어디서 봤더라?’ 하며 고개 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기억해 냈다. 이전의 연회장에서 보았었다. 먼저 알은 척을 해 줬으니 인사를 하는 것이 도 리였다. 태이경은 두 손을 배꼽에 가지런히 놓고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태이경입니다. 절 기억하세요? 저도 저
번 연회장에서 새파란 드레스 입고 있던 예븐 누나 기억해
요.,,
신영애는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 앤 원데 이렇게 귀 엽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 며 아이답게 입을 조금 벌리고 있는 모습이,원가 더 굉장 한 반응을 돌려주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만 같았다.
“어,어. 그랬니? 기억해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누나가 먼저 기억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누 나 이름은 뭐예요? 저 계속 누나라고 불러요? 일단 재희 누나가 언니라고 해서 호칭 그렇게 했는데…… 실례는 아 니죠?”
“그럼! 누나 말고 또 뭐가 있겠니. 난 신영애야. 영애 누 나라고 계속 부르렴.”
“네. 영애 누나. 우리 악수해요.”
아이가 방긋 웃으며 자그마한 손을 두 개 다 쭉 내밀었 다. 신영애는 막연히 감격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꼭 쥐 고 흔들었다.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세상에. 넌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쁘니. 모진 바람 쌩쌩 휘날리고 있는 너희 아빠랑은 참 다르구나.”
“다들 저더러 엄마 닮았댔어요. 성격도 좀 그렇구.” 아이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부끄러움과 부듯함이 동
시에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신영애는 어깨를 꼬며 그 사랑 스런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애 좀 봐,애 귀여운 것 좀 봐! 울 엄마가 갱년기만 안 왔어도!”
“…느 엄마 갱년기 안 왔어도 저런 애는 안 나온다. 헛 꿈은 접어 두거라.”
신종남이 냉정하게 현실을 지적했다. 신영애는 요염한 눈꼬리를 치켜뜨며 부친을 슬쩍 흘겨보았고,신종남은 헛 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태이경을 내려다보 며 생각하던 중이었다. 등대와의 혼혈은 돌연변이가 많이 나온다더니,그게 사실인 모양이라고.
“저는 재희 누나랑 친한 형아 생일선물 사러 나왔는데, 누나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응. 누나는 아부지 변신 좀 시켜주러 왔어. 엄마한테 예쁘게 보여야 할 일이 있거든.”
“오외 변신! 저도 동물 옷 입고 변신 자주 하는데 반응 되게 좋아요! 아저씨도 변신하면 분명히 예쁘게 보일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아저씨는 그런 거 입으면 민폐예요. 그냥 이 누나 의 세련된 안목으로 멀끔한 양복이나 골라주러 온 거야. 워낙 패션센스가 없으셔서 말이야.”
농락당하는 기분이군,신종남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으 나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태이경은 눈이 다 파묻힐 만큼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모든 아빠들은 옷을 못 입나 봐요. 우리 아빠 도 그래서 유모한테 툭하면 구박당하거든요.”
“…태국영이 구박을? 그것도 유모한테?”
“네. 거의 운동복 바지만 입고 여기저기 활보하다가 걸 리면 잔소리 엄청 들어요. 날짐승도 아니고 그게 무슨 꼴 이냐구.”
거긴 천국이구나?
신영애는 장난처럼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누나는 볼일 다 끝났는데 너랑 재희 쇼핑에 동행해도 되겠니?”
신종남의 눈이 번뜩 뜨였다. 한참은 더 지속될 것 같았 던 쇼핑 지옥이 어이없는 종말을 맞아 기쁘기 그지없었다.
“고맙다,꼬마야. 다음에 또 보자.”
그는 재빠르게 비서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뜬금없는 고 맙단 말에 태이경이 어떤 반응을 할 시간도 없었다. 신영 애는 친근하게 아이의 한 손을 쥔 채 앞장섰다.
“선물 사야 된다는 형아는 몇 살이야?” “이제 열세 살 돼요.”
“그럼 아동복 매장에 가야 하지 않아? 여긴 아웃도어 말고는 그 나이 대 맞는 옷이 별로 없을 텐데.”
“형아가 무지 크거든요. 이번 대보름 지나면 더 큰다고 해서 아동복은 안 맞을 거예요.”
“아. 발육이 좋은 아이구나.”
송재희는 어두운 낯빛을 억지로 감추며 신영애를 따라 갔다. 제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 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이경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신영애는 제게 따라붙은 경호원이 없 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마 그 사 실을 인지하면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집으로 돌려 보낼 것이었다.
“어? 그런데 왜 경호 오빠들이 안 보여?”
송재희는 떨리는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안심하 자마자 위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 소리를 내보내려 애썼다.
“아…… 숨어 있겠다고……
“웃겨. 뭐하러?”
송재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느라 고개를 내렸 고,그때 저를 올려다보는 태이경의 눈빛을 딱 맞닥뜨리 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이경은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지 의아했으나 그 속내를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어떤 내막이 있는지 는 몰라도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송재희가 곤란해질 것을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문 것이었다.
“누나. 우리 형아 멋진 은발인데 어떤 색 셔츠가 어울릴 까요?”
신영애가 더 추궁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팔을 자연스레 잡아끌기까지 했다. 신영애는 별 의심 없이 관심을 돌렸 다. 키는 어느 정도나,체격은 어떠나,자상하게 물으며 데이터를 모은 그녀는 젊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브랜드 위 주로 매장을 돌았다.
송재희는 묵묵히 그 곁을 따랐다. 1분 1초가 숨을 죄어 왔다.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 고되어 이대로 도망치고 싶 다 생각했을 때였다.
파앗一
기습처럼 어둠이 쏟아졌고,곧이어 화재경보기가 요란 하게 허공을 울렸다. 당혹스런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산 발적으로 터졌다. 송재희는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불났나?”
신영애는 심드렁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비 상등이 살아남지 않았어도 그녀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후각을 집중해 봐도 주의를 요할 만큼 큰불 냄새는 나지 않는다.
“화재경보기는 오류일 거야. 애들아. 어디 가서 잠깐 기 다릴一”
그 순간 신영애는 번쩍 눈을 치떴다. 미묘하지만 공기 가 변했다. 등줄기로 써늘한 소름이 내달렸다. 뜨겁게 덩 어리진 바람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허공을 찢고 튀어나 왔다.
이쪽으로 온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신영애는 태이경이 젖먹이처 럼 죔죔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어 뒤로 크게 휘둘렀 다. 엇,하고 놀란 태이경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아무 리 인간의 피가 짙게 섞였어도 그 정도면 충분히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거고,적어도 저것에게 당하는 것보다 덜 다 칠 것이었다.
악귀처럼 일렁거리는 덩어리는 태이경을 따라 방향을 선회했다. 신영애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이를 갈았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놈은 지금 아이를 노리고 있는 것 이었다.
“야! 너 거기 안 서? 어떤 호로 새끼야!”
신영애는 망설임 없이 놈의 진로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태이경을 날려 보낸 뒤쪽에서 쇼윈도가 박살 나며 요란한 파열음이 들려 왔다. 아이가 걱정스러웠으나 뒤돌 아볼 경황이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인간들은 유리가 부서 지는 소리에 크게 놀랐고,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앞다 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 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재희야! 이경이 데리고 도망쳐!”
놈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마치 위협하듯 몸을 부풀 리며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고 뭐고 뵈는 게 없 는 놈인 모양이었다. 그따위 것에 겁먹을 줄 알았다면 저 를 단단히 잘못 보았다.
충돌한다!
신영애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그대로 놈을 향해 내리찍 었다. 두 팔은 한동안 쓰지 못할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어 떻게든 시간을 벌어서 틈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틈만 생긴다면 조용히 뒤따라왔다는 남강우의 경호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었다.
부웅一
그러나 휘두른 팔은 허공만 베었다. 신영애는 급작스 레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부유감을 일순 혼동했다. 고통 이 너무 큰 나머지 뇌가 어떻게 된 것인가 싶었던 거였다.
그러나.
“곧 우리 가문 남자들이 올라올 거야. 그때까지 애들 부 탁한다.,,
귓가에 나직이 울리는 익숙한 저음.
“그리고 역시 넌 최고야,신영애.”
그를 정확히 인지하는 순간 몸이 바닥에 닿았다. 남강 우는 땅에 발끝을 대자마자 반대편으로 튀어 나갔다. 몸서 리쳐질 정도로 강한 사내의 향기가 검은 깃털처럼 잔상을 남겼다. 이 변태가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 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신영애는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아,씨발! 그딴 소리 자꾸 하니까 네가 나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이 변태 새끼야!”
남강우는 웃을 틈이 없었다. 신영애를 구하느라 잠깐 지체한 사이 최명욱이 태이경의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이경은 이마에 피를 묻히고서도 기특하게 송재희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거리와 속도를 계산했으나 아무리 해도 시간이 닿지 않 았다. 이대로라면 놈의 손이 더 빠를 것이었다. 낭패감이 가슴을 그을렸다.
설마 따라붙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것은 기우였다. 초조 깃든 남강우의 눈으로 기다렸다
는 듯 섬광이 비쳤다. 태이경의 뒤편에서 솟아난 짐승은 돌풍을 일으키며 바닥을 도약해 뛰어올랐다. 만년설처럼 시린 눈동자가 살기를 머금어 섬뜩하게 번득였다.
역시 녀석이 놓쳤을 리가 없었다. 남강우는 넉넉한 반 경으로 기의 벽을 쳤다. 가까운 건물 외벽의 창문들이 급 작스런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우왕좌왕하며 남아 있던 인간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죄다 졸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을 가른 짐승이 최명욱을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쩌억!
묵직한 유기체들이 천둥처럼 부딪쳤다. 어마어마한 공 기의 파동이 어둠을 장악했다. 충격의 여파는 남강우의 공 간 안에서 태풍이 되어 몰아쳤다. 행거와 마네킹들이 우수 수 쓰러지고 부서졌다.
“형아?”
태이경은 한데 뒤엉켜 날아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명하 게 중얼거렸다. 제 느린 눈으로는 정확히 어떻게 된 상황 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솟 아올라 제 앞을 막아 준 짐승의 모습이 누구인지 모를 리 가 없었다.
【응,이경아.】
여은태는 바븐 와중에도 충실히 대답했다. 그리고 곧 장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입을 벌렸다. 목표는 딱히 없었 고 그저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을 물었다. 콰드득,근육 을 뚫은 이발이 뼈까지 닿는 느낌이 선명했다. 여은태는 물어뜯을 듯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앞발을 휘둘렀다.
쨍!
발톱과 발톱이 교차로 얽혀들었다. 변이를 마친 상대 의 발톱은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여은태는 무른 제 발톱 이 갈라진 모양을 찡그린 눈으로 힐금 내려다보았다.
고작 이딴 놈한테도. 기분 나쁘게.
“이 젖비린내 나는 새끼가……!,,
최명욱은 뒤늦게 분에 차서 고함을 쳤다. 본능적으로 얼굴 앞을 막은 팔뚝은 짐승이 너덜너덜하게 뜯어 놓아 선 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일순간에 피를 뒤집어쓴 얼굴이 기 괴하게 일그러졌다.
함정이었나.
최명욱은 스치듯 떠올렸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직 전이었다. 얽힌 발톱을 앞으로 깊이 찌르며 몸을 틀었다. 그대로 깔아뭉개 내장을 박살 내줄 심산이었지만 여은태 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역시 여 가 놈답게 정말 신묘한 술수였다.
최명욱은 몸을 굴러 바닥에 착지한 뒤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다음으로 쇄도해 올 공격을 대비해서였다. 그러 나 물결처럼 흐리게 날리는 은색의 털은 저만치 멀어져가 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태이경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때,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쑤시고 들 어왔다.
“뭐. 여자장사나 하는 놈이 어린애라고 봐줄 거란 생각 은 안 했다만.”
최명욱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희번덕거리는 안광을 쏘 아 보냈다. 거친 날숨이 어둠 속에 산란했다.
“남강우.”
최명욱이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유리한 고지를 깨끗 이 포기하고 가 버린 여은태의 행동이 이제야 납득이 갔 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결국 어린애는 어린 애. 접전이 길어질수록 미성숙한 개체가 당연히 불리했다.
“그래. 애들은 놔두고 이제 어른들끼리 이차전 해야지.
남강우가 싸늘히 비웃으며 말했다.
“아,넌 저 은색 애기한테도 맞기만 했지,참.”
남강우가 서 있던 자리는 어떤 징조도 없이 텅 비었다. 최명욱은 등줄기로 순식간에 식은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
공기의 흐름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완벽한 어 둠 속에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무작정 바닥을 박차 아 무 곳으로나 튀어 오르는 것이 방어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50센티도 채 뜨기 전에 허공에서 기이하게 몸이 꺾 였다. 남강우가 그의 등허리를 가차 없이 후려 찬 것이었 다.
최명욱은 피를 토하며 다시 바닥에 쑤셔 박히고 말았 다. 참을 수 없는 경련이 전신에 몰아닥쳤다. 불규칙하게 부러진 뼈가 내장을 찔러 왔다. 그는 일말의 자존심으로 비명을 참았다.
최명욱은 손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흐릿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광택 없는 검은 셔츠와 블랙진 차림의 남강우 는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 자체로 어둠 같았다.
“쪽팔리면 어디 가서 나한테 두드려 맞았다고 해.”
유령처럼 기이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발끝으로 최 명욱의 발목을 툭 차올렸다. 낌새가 이상하다 느낀 최명욱 이 발악하듯 몸을 비틀었으나 발목을 옥죈 손아귀의 힘은 더 거세지기만 할 분이었다.
“물론 네가 내 손아귀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말이야.
남강우는 그의 발목을 불시에 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허공에 휘둘러 사정없이 바닥에 메다꽂았다. 쿠응,희부 연 먼지 바람이 진동했다. 최명욱은 온몸이 으깨지는 듯 한 고통에 결국 참고 있던 비명을 쏟아내고 말았다.
“크의 아악!”
남강우는 연이어 그를 바닥에 짓이겼다. 순식간에 끔찍 한 몰골이 된 최명욱은 고개를 젖혀 들고 기이한 소리를 냈다. 역류한 피거품이 윗입술을 타고 내려 눈동자에 새발 갛게 고여 들었다.
그가 껄떡껄떡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남강우는 손 을 털었다. 털썩 쓰러진 피투성이 몸뚱이는 잘 다져진 고 깃덩이 같았다.
남강우는 그의 재생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틈을 벌리 고 있던 늑골이 닫히고 심장조직이 다시 제 모양을 갖추 는 것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읽혔다. 싱싱해진 심장이 펌 프처럼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흘려보내는 순간,남강우의 기다림은 끝났다.
그는 한쪽 무릎으로 최명욱의 복부를 내리누르며 앉았 다. 최명욱은 끄윽끄윽 힘겹게 호흡하며 초점 풀린 눈을 들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강우의 얼굴은 멀끔하니 냉랭한 미남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큼은,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씹어 먹을 것처럼 잔혹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주마.”
남강우는 아주 느리게 한 팔을 들어 올렸다. 마치 일부 러 필름을 늘린 것처럼 굼뜨게 치켜든 팔이 정점에서 잠 시 멈추었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 다.
“년 죽고 싶다고 애원하게 되겠지만 결코 쉽게 죽진 못 할거다.,,
빠각!
남강우의 주먹이 최명욱의 왼쪽 안면을 바스러뜨렸다.
【이경아,다친 데 없어?】
여은태가 물었다. 태이경은 명하니 눈만 끔뻑이다 활 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유리에 조금 긁혔는데 금방 다 나았어.”
여은태는 고운 이마에 남은 핏자국을 못마땅하게 응시 했다. 이마분만이 아니라 목과 팔,다리도 붉은 자국이 덕 지덕지 달려 있었고,조금 겁을 먹었는지 미세하게 숨을
헐떡이는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이거 하지 말쟀는데!
화가 난 여은태는 속으로 불평을 내뱉었다. 아무리 안 전장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 아들을 전쟁터에 떨어뜨리 는 태국영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었다.
여은태는 제가 어른이 되어 속할 그 세계에 단 한 번도 환상을 가진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십수 년 동안 자 식에게 끝없이 비정해질 수 있는 부친을 보아 왔기 때문이 었다. 갖은 변수에 대비해 안전장치들을 세워둔 태국영이 차라리 양반일 정도로 말이다.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은 태국영과 남강우의 방식에 동의 해서가 아니었다. 태이경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지켜 주기 위해서였다.
여은태는 태이경에게 다가가 조심조심 혀를 내밀어 혈 흔을 할아냈다. 간지러울 법도 하건만 태이경은 얌전히 몸 을 맡기고만 있었다. 제가 물었던 놈의 피 맛은 비리고 불 쾌했는데 이건 참 묘하게 단 느낌이 들었다.
“아! 누나는? 괜찮아?”
온몸을 검열하듯 할아대는 여은태를 내버려두고 태이 경은 고개를 돌렸다. 주저앉은 제 뒤에서 똑같이 주저앉 아 있는 송재희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
고 있었다. 험한 꼴을 목격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여은태가 앞발로 태이경의 몸을 돌려놓았다. 찢 어진 티셔츠 안에 남은 피를 마저 할아내기 위해서였다. 태이경은 손을 내밀어 송재희의 뺨을 슥슥 문질렀다.
“누나 무서웠지? 이제 은태 형아도 오고 강우 아저씨 도 왔으니까 괜찮아. 안심해도 돼.”
저도 놀라고 무서웠을 텐데 그런 내색은 전혀 없다. 송 재희는 짓씹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아주 잠시나마 이 아이를 저 악마 같은 놈의 손에 고스란히 바쳐야 하나 고심했던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미안해,이경아. 누나 때문에…… 나 때문에……
제 아기를 살리고 싶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할 분이라 는 것을 안다. 이승도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최명욱을 만나고 온 뒤로 시름시름 앓는 자신을 걱정스 레 지켜보던 이승도는 제가 틀어박혀 있는 방으로 찾아왔 었다.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그런 것만 에둘러 묻는 그에게,자신은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 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었다.
「오빠는 이경이를 위해서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어요?」 이승도는 의표를 찔린 마냥 눈시울을 키웠지만 답은 고
민할 것 없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야,뭐든.」
「…그게 정상인 거겠죠?」
「응.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 을 각오도 할 거라고 생각해.」
「그럼 만약에요…….」
떨리는 손끝을 마주 잡았다.
「오빠가 다른 누군가를 해쳐야 이경이가 살 수 있다면, 오빠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작게 끼져 들어가는 음성은 제가 들어도 험한 파도 위 를 표류하는 배처럼 불안정했다. 아마 그때 이승도는 직감 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것이 요 며칠 동안 자신을 말라가게 만들었던 문제라는 것을.
이것이 자신이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구조 신호라는 것 역시.
「좀 어려운 문제네.」
이승도는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묻는 거나고 추궁하지 않은 채로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숙고 를 거듭하는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마치 친동생의 난해 한 고민을 진실하게 걱정하며 함께 풀어주고자 하는 것 같 았다.
「그 난제를 준 것이 누구나에 따라 조금 다르지 않을
그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대답을 꺼내 들었다. 「만약 신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면,나는 아마 고민 끝
에 누군가를 해치고 내 아이를 살렸을 거야.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이길 수가 없는 상대니까. 하지만 살아있 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그 업보가 다시 나를 찾아 올 테니까.」
업보. 그 단어를 입 안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신은 그렇게 고약한 난제를 주지 않아. 신을 가 장한 악마가 내게 하나의 길만 보여 주고 이것만이 네 길 이라고 속삭일 분이지. 그 악마는 나를 손쉽게 억누를 수 있는 다른 누군가일 수도,나 자신일 수도 있어. 그걸 스스 로 깨닫지 못한다면,결국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 면서도 내 발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야.」
「하나의 길만 보게끔…….」
「그래.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꾸며진 길 말이야.」
과부하 걸린 머리는 뜨거웠고 그 안은 아주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말들을 소화하기 버거운 것이 이상 한일이 아니었다.
「재희야. 만약 내가 그런 문제에 부딪혔더라면,국영이
하고 의논할 거야.」
「……네?」
「나는 내 아이를 위해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도 않고, 내 아이가 다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혼자서 그걸 다 이루기에 내가 너무 약한 존재라면 방법이 없지 않겠니? 국영이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해. 나 를 위해 뭐든 할 수 있고,이경이의 부모이기도 하지. 국영 이가 해결 못 할 일이라면 정말 방법이 없는 거니까,선택 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난 그렇게 생각해.」
어깨를 토닥이며 지나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사고 가정지해 있었다.
오래 고인 하수구처럼 새카맣게 엉켜 있는 머릿속으로 광명이 비쳐 들었다. 정리할 엄두가 안 날 만큼 얼기설기 꼬인 타래가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두려울 정도로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텅 비었다.
백야에 눈을 뜬 장님처럼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 다. 그러다 떠올린 것은,제가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는 소식에 미친 듯이 달려와 주었던 한 남자의 얼굴이었 다.
“누나 때문이 아니야. 누나가 가자고 했고,내가 간다 고 했어.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누나,울지마.”
태이경은 제 작은 손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닦 아내고 또 닦아내도 송재희의 뺨을 하염없이 적시는 것을 말끔히 지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아니야……내가,나 때문에,내가 널……■,,
【이경이가 괜찮다잖아.】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 지켜보던 여은태가 중도에 끼어 들었다. 송재희는 젖은 눈을 들어 태이경의 어깨 위를 응 시했다. 엉덩이만 바닥에 붙여 앉은 여은태는 태이경의 어 깨 위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은태가 그만하라는 듯 콧등을 찡그렸다.
“응. 나 진짜 괜찮아,누나. 다친 거 금방 낫는걸 뭐.”
송재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래,이경아. 이제 다 끝났어. 정말 다 끝난 거 야.,,
그날 남강우를 만나 모든 것을 다 실토했다.
최경엽과 최명욱은 겁박으로 박해인과 송재희 자신을 억지로 관계하게 만들었다. 인간과의 사이에서 나오는 아 기보다 등대끼리 교접해 나오는 아기가 등대로 태어날 확 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강압적 시도 끝에 임신을 했고 아기를 낳게 되
었다. 아기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했고 최명욱이 직접 처리 했다고 들었다.
혼절했다 깨어나 그 소식을 들었을 때,송재희는 울었 다. 제 인생이 고달파서인지,빛을 보자마자 죽은 아기가 가여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최명욱은 최경엽과 윤봄이마저 속이고서 그 아기를 배 돌려서 지금껏 아무도 모르는 집에 사람들을 고용해 아기 를 돌보았다. 이유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놈이 뒤 늦게 박해인에게 연정을 느꼈다 해도 코웃음만 나올 분이 었다.
태국영이 박해인을 죽였다는 말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 태국영은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지만,적어도 이 승도를 위한 일에서만큼은 칼같이 굴었다. 그에게는 박해 인을 죽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남강우는 이전에도 그랬듯 조금은 무심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단 한 번의 동요 없이 잔잔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나 위액까지 토한 것처럼 헐떡 이던 저를 한참이나 지켜보던 그는,말했다.
「난 이럴 때,원하는 걸 말하라고,그게 뭐든지 들어주 겠다고,그렇게 말하는 방법밖에는 알지 못해.」
송재희는 큰 들숨을 마셨고,다음 순간 그대로 정지했
다. 무심해 보였던 그의 겉모습은 그저 볼품없는 껍데기 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짐 승처럼 거칠었고,담담하다고 착각했던 눈동자는 밑바닥 까지 침잠해 있어 그 흐름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 다. 그때의 그는 그녀가 꽃향기 가득했던 탕 안에서 목격 했던 최초의 격렬함보다 더 격렬했다.
「이게 내 방식이야.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뜯어고쳐. 최 소한 노력은 해 볼 테니까.」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품 안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끔찍했던 고?거,응어리진 서러움,상처받은 육신과 너덜너 덜해진 정신까지 모두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그런 온도였 다.
“병아리들,여기 주목.”
서늘한 음성이 그들 사이로 똑 떨어져 내렸다. 모두가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신영애가 또각또각 하이 힐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여자랑 애들은 썩 꺼질 타이밍이야. 발리들 일어나.”
그녀의 뒤로 남 가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그 시각 태호연은 젊고 혈기 넘치는 태 가의 청년들과 관광버스 안에서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 나같이 물 빠진 블랙진에 검정색 티셔츠 차림이었는데,야 구 모자에 턱까지 내려놓은 마스크까지 맞춘 것처럼 똑같 았다. 마치 ‘시정잡배란 이런 유니폼을 입어라.’하고 광고 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모두 가 미모들이 뛰어나다 못해 눈이 튀어나올 정도라 정말 화 보의 한 장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제 패션이 제일 멋진 것 같습니다.,,
운전석에 팔을 걸치고 삐딱하게 선 태준호가 코끝을 슥 치켜들며 말했다. 그러자 중간 좌석쯤에서 땅콩 과자 가 한 주먹 날아왔다. 태준호는 한 손을 휘 휘둘러 그것들 을 모두 쳐냈다. 과자를 날린 남자가 좌석에서 벌떡 일어 나 말했다.
“웃기고 있네. 야,내 모델 핏을 보란 말이야. 너 따위랑 은 비교도 안 되거든?”
“저 형은 또 뭐래. 그 웃기지도 않는 모자부터 벗고 말 하쇼!”
“이 모자가 어때서? 다들 무슨 공장에서 찍어낸 마냥 똑같은 너희들보다야 개성을 가진 내가 훨씬 낫지.”
태준호는 한심하다는 듯 갸름하니 눈을 떴다. 아버지
의 미친 작명 센스로 태왕자가 되어버린 저 남자는 이 중 에서 조금 튀어 보겠다고 ‘나는 왕자’라고 한가운데 새겨 진 모자를 쓰고 왔다. 물론 그로 인해 모두의 놀림 집중포 화 대상이 되었지만,그는 이 사이에서 월등히 주목받았다 는 것으로 매우 만족해했다.
“아니지,왕자 형. 개성 하면 나지. 이 중에서 내 티셔츠 가제일 귀여워.”
태건욱이 합세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부듯하게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개구리 캐릭터가 명청한 뱅 뱅이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자신의 개성 있음을 과대 포장하는 말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 구는 광택 있는 바지 소재를 자랑했고 누구는 멋진 레이어 드 패션을 자랑했으며 누구는 모자에 징을 박아 왔다 자랑 했다.
태호연은 맨 뒷좌석의 중간자리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 보며 한숨을 삼켰다. 너무 어린 애들을 뽑아 왔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혈기를 억누르는 요령을 잘 모르는 애들에 게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였는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감당이 안 됐다. 리더 역할 하라고 데려온 태왕자마저 태준호와 짝짜꿍이 잘 맞아 망나니도
이런 망나니가 따로 없을 만치 대책 없이 굴었다.
태호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도대체 신호는 언제 오 는 거나 속으로 불평했다. 벌써 대기만 세 시간째였다. 그 세 시간 내내 고삐 풀린 망아지들 속에 있었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발리 끝내고 이놈들 해산시키고 싶은 마음 이 굴뚝같았다.
“아. 하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큰형님이 가장 베이직하고 패셔 너블하네요.”
태준호는 장난질 화제의 끝에서 항상 태호연을 끌어들 였다. 태호연은 손목시계만 노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 큰형님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아구창 날아간다,준 호야.”
“아니,큰형님을 큰형님이라 부르지 못하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호연은 스산한 눈빛을 들었 다. 스트레스가 쌓인 나머지 진심 어린 살기가 서슬 퍼런 안광에서 춤을 추었다. 태준호가 찍 입을 다물더니 두 손 을 합장해 허리를 굽실굽실해 보였다.
“잘못했습니다,대장님.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대장님.
■■왜요? 이것도 별롭니까?”
“혼자 있고 싶다.”
순식간에 전투력을 잃은 태호연이 유언처럼 중얼거렸
다. 버스에 탑승해 있던 어린놈들이 전등 빛 본 바퀴벌레 처럼 우르르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소원대로 홀로 남겨 진 태호연은 재들을 데리고 과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무 리 지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심했다.
一넌 왜 이렇게 명청하고 눈치가 없나! 칠 때 치고 빠 질 때 빠져야지,이 등신아!
一아니 그럼 뭐라고 불레 작업 들어가기 전에 호칭 정 리는 해야 할 거 아나? 늘 큰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와 서 부르지 말라고 하시니까 나도 혼란스럽다고.
一……그건 그러네. 뭐 좋은 거 없나? 오늘 콘셉트대 로 조폭 단체 같으면서 큰형님 맘에도 들 수 있는 그런 거. 의견들 좀 내 보h
一……엉아?
一미친 새끼! 죽어! 왜 사나,죽어!
태호연은 밝은 귀를 저주하며 괴롭게 눈을 감았다. 세 간에서 왜 태 가를 두고 야만적이고 무식한 놈들이라고 칭 하는지 소름 끼칠 정도로 절감하고 마는 이 현실을 인정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그러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지압하듯 꾹 눌렀 다. 이쯤 되니 태국영더러 철없다 철없다 했었던 것이 미 안해질 정도다. 이놈들에 비하면 태국영은 지성과 미모를 경비한 양반집 자제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설마 나도 어릴 때 저랬나.
태호연은 순간 든 자아 성찰적 의문에 곧장 고개를 흔 들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호주머니가 진동했다. 드디어 이 지옥에서 벗어 날 기회가 왔다. 태호연은 휴대폰을 꺼내며 벌떡 일어났 고,밖에서 또 저들끼리 투닥거리던 녀석들이 낌새를 맡 고 꾸역꾸역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나다!”
반가운 마음에 태호연은 액정도 확인 안 하고서 전화 를 받았다. 태 가의 어린양들이 뒷좌석으로 우르르 몰려들 어 서로 귀를 더 가까이 댔다. 마치 시체를 발견한 하이에 나 떼들 같았다. 그러나 수화부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태국 영의 나른한 저음이 아니라 낭랑한 아가씨의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고객님. 이번에 저희 리엔 코스메틱에 서 신상품 라인이 출시되어 우수고객님들을 대상으로 샘 플 증정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신상품 라인 중 삼십만
원 이상으로 사신 분들께만 특별히 삼십 미리짜리一》
에에이이. 어린양들이 실망하며 돌아섰다. 태호연은 실 망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하필이면 이 타이밍 에 이런 쓸데없는 전화를 건 여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복수 를 하기로 결심했다.
《결제는 나중에 물건을 받으셨을 때 하셔도 좋으니,한 번 먼저 써 보시는 게 어떠십 니까? 주소를 알려드리면 오 늘 바로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소. 잘 받아 적으십시오.”
각자 자리를 찾아 앉던 어린양들이 일제히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설마 이 타이밍에? 진짜사는 거야? 라 고 묻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울릉도.”
《예,고객님 울릉一 네? 울릉도 말씀이십니까,고객님?
>
“울릉도!”
?……네,네에,고객님. 계속 불러주십시오.〉〉 어린양들이 서로서로 혼란스런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 형님이 언제 울릉도로 이사를 가셨나. 눈빛이 닿는 대로 물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며 고개를 흔들 분이었다. 태호연이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깔았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거기로 보내주십시오.”
그가 제 할 말만 하고서 전화를 끊어버리자 어린양들 의 눈동자에 충격과 감동이 흔들렸다. 저렇게 참신하게 홍 보전화를 잘라 내다니,역시 소싯적 한 가닥 하셨다는 큰 형님은 뭐가 달라고 다르지 않은가. 그들은 선망의 눈빛 을 쏘아 보냈고 태호연은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다.
태호연은 고개를 젖혀 뒷머리를 의자 위에 걸쳐 놓았 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자,그렇게 다짐하는데 옆 좌석에 던지듯 놓아둔 휴대폰이 재차 울렸다. 그는 또 눈을 번쩍 뜨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발신번호는 모르는 것이었 다. 그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
《독도는 우리 땅!》
한마디를 남기고 통화는 끊어졌다. 그것을 고스란히 엿 들은 어린양들은 강적을 만났다고 수군댔다. 그러다 태호 연의 표정이 정말로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버스 안 은 곧 정적으로 잠겼다.
다행히 세 번째 전화는 진짜 태국영에게서 걸려왔다.
태호연은 저도 모르게 여보세요 대신 할렐루야를 외쳤다 가 태국영에게 무슨 미친 짓거리나는 독설을 듣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마냥 행복했다.
《방금 남강우가 최명욱이 죽사발로 만들어서 채집해 놨 어. 어디 마음껏 벌집 쑤시러 가 봐.》
“알았다.”
짧은 통화가 끝나자 버스 안은 환호로 요동쳤다. 드디 어 지루한 기다림의 끝이 왔다는 사실은 모두를 들뜨게 했 다. 콧노래를 부르며 직접 운전석에 앉은 태준호는 블루투 스 마이크를 켜 출발을 알렸다.
“안전벨트 꽉 매시고요.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기사님 출발!”
어린양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태준호는 대형버스 운전이 처음이라 약간 동작이 어색했지만 당연 하게도 버스 안의 남자들은 겁을 먹지 않았다. 급회전과 급발진에도 놀이기구 타듯 넉넉하게 웃어넘겼다.
“아참. 근데 큰형一 홈홈. 그러니까 태호연 님.”
소풍 가듯 어깨를 실룩거리며 운전을 하던 태준호가 느 닷없이 입을 열었다. 스피커로 쨍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태호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 매우 너그러워져 있 는 상태였다.
“우리 말입니다. 다 합해 봐야 스무 명인데 왜 이렇게 후진 관광버스를 가져오셨습니까. 가주님 카 컬렉션에 아 주 쎄끈한 미니버스도 있지 않습니까?”
태호연은 하찮은 것을 보듯 태준호의 뒤통수를 응시하 며 차갑게 대답했다.
“야. 이 철없는 놈 시키야. 영화 안 봤냐. 조폭들은 원 래 단체로 원정 갈 때 후줄근한 승합차나 이런 관광버스 타고 가는 거야.”
남자들이 입을 모아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태호연 은 녀석들을 휘둘러보며 못쯧 혀를 찼다. 다시금 ‘내가 미 쳤지. 왜 이런 놈들이랑.’하고 한탄하는 그는,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개구리가 바로 저를 가리키는 말임을 조금 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도는 동물원에 도착하자마자 원장실과 사육사실 에 들러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모두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사라진 이재혁에 대한 걱정으로 활짝 웃지
는 못했다. 기쁘게 서로 안부를 물을 때는 아니었던 터라 이승도는 곧장 진료실로 돌아와 회진 나갈 채비를 했다.
새로 온 수의사가 따라나서 려는 것은 요령 좋게 거절했 다. 겉으로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동물들에게까지 어디 아 픈 곳이 없는지 거듭 묻는 제 모습이 기이하게 여겨질 것 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겠다고 하며 그의 진료실로 돌아 갔고,이승도는 진료 도구들을 챙겨 회진을 돌았다.
몇 달 만에 보는 것인 만큼 초식동물사부터 시작해서 꼼꼼하게 살펐다. 검진이 필요해 보이는 녀석들을 체크해 차트에 기록했고,당장 엑스레이 촬영을 찍어봐야 할 것 같은 동물은 사육사실에 전화해 바로바로 알렸다.
면역이 약한 새끼 동물들은 아파도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대화보다는 직접적인 진찰을 했 다. 숨소리,심장박동,눈물이나 콧물 등의 작은 분비물까 지 면밀하게 살펐다.
그것만 했는데도 3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짧아진 해 는 이미 거의 다 기울어서 금방 지평선 아래로 폭삭 꺼질 기세였다. 진료실로 돌아오자마자 피로가 전신을 짓눌러 왔다. 간만에 느끼는 탈력감이었다.
육체적으로는 그저 나른한 정도인데 머릿속이 매캐했 다. 소파에 한 번 누웠더니 몸이 쿠션을 뚫고 푹푹 가라앉
는 느낌이었다.
《아마 별이가 다른 짐승들의 냄새를 많이 맡은 걸로 잔 뜩 예민해져 있어서 그럴 거야. 발리 떨어져서 쉬고 싶은 데 네가 쉴 틈을 안 주니까 징징거리는 거지. 조금 쉬면 괜 찮아져. 한숨 자. 자도 된다며.》
별이가 웬일로 이렇게 대놓고 피곤해하는 거냐 물은 말 에 태국영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대로 한숨 잘 까 고민하던 건 집어치우고 그냥 도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만나 신이 나 있던 태산이에게 다른 애들 돌 봐 주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제 갓 한 살이 되어 몰라보게 덩치가 커졌지만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 는 것은 여전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단 10 분이라도 눈을 맞추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승도는 태산이에게 가기 전 새로 온 수의사에게 들렀 다. 차트를 넘겨주며 검진을 권유하자 그는 알겠다고 고개 를 끄덕였다.
“선생님. 피곤해 보이시는데 조금 쉬었다 가시죠.” 이승도는 남자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려 했다. 그러 나 그보다 먼저 남자가 뒷말을 덧붙여 왔다.
“제가 맹수들을 다뤄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많이 부족해
서 말이에요. 이 선생님이 엄청나게 잘 해주셨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한데 말씀 좀 듣고 싶어서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냉정하게 돌아설 수는 없었 다. 이승도는 흐리게 웃으며 1 인용 소파에 앉았다.
“커피 드릴까요?”
“아뇨. 저는 카페인이 안 받아요. 유자나 율무,뭐 그런 카페인 없는 걸로 아무거나 주세요.”
남자는 곧 율무차 두 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건네는 종이컵을 받아들며 이승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연장자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동물원 쪽으로 전향하셨어요? 얼핏 들어 보니 되게 큰 동물병원 하셨다던데.”
“아…… 그게,제가 갑자기 집안에 일이 생기는 바람 에 병원은 매각한 지 꽤 됐습니다. 그 뒤로 다시 동물병원 을 작게라도 차릴까 하던 중에 원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여기 T.0가 났다 고 해서 재발리 지원을 했죠.”
“타이밍이 좋았네요.”
“타이밍보다는 운이 좋았지요. 얼마 전에 우리 동물원 을 크게 후원해주셨던 분과 친분이 있어서요.”
“아,그러셨구나.,,
이승도는 율무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 지 저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데 전혀 경험 없는 분을 신 입으로 채용한 게 조금 어리둥절했는데,뒤로 그런 내막 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입사 과정 구린 거야 저도 떳떳할 게 없었기에 이승도는 말을 아꼈다.
“안 뜨거우세요? 천천히 드시지.”
남자가 실소하며 물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가 깜짝 놀랐다. 고소한 견과류 냄 새에 끌려 꼴깍꼴깍 넘기다 보니 율무차는 금세 바닥을 드 러내고 있었다. 남자가 웃으며 일어나 빠르게 한 잔을 더 타 왔다. 얼마든지 더 있으니 마음껏 마시라고 손짓했다. 이승도는 조금 민망했지만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원 생활을 여러 가지로 물어 왔고,그때마다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알고 싶은 것이 무척 많은 걸 보 면 동물들에게 좋은 의사가 되어줄 것 같았다.
“아,잠시만요. 저 전화 좀.”
남자가 호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고 일어섰 다. 막 율무차 속 땅콩 조각을 오독오독 씹으며 시계를 확 인하던 차라 이승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볼게요. 전화 받으세요.”
“아,예. 살펴 가십시오.”
이승도는 빈 종이컵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남자의 진 료실을 나왔다. 닫힌 문 너머로 ‘예,선생님. 예. 예.’하는 소리가 얼핏 들려 왔다. 이승도는 지체한 시간만큼 서둘 러 걸음을 옮겼다. 졸음이 쏟아지는 속도가 점점 발라지 고 있었다. 얼른 태산이를 보고 와서 한숨 자든지 퇴근을 하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끼익一
철이 부대끼는 소리에 이재혁은 이제 능숙하게 귀를 틀 어막는 정도가 되었다. 처음엔 저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구석에서 몸을 말고 긴장한 눈을 움직였더 랬다.
철문 아래 작은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불쑥 튀 어나온 것은 차갑게 천장 조명을 반사하는 비닐봉지 하나 였다. 식사 때가 된 모양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타이밍 좋 게 배가 꼬르륵거렸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곧 자물쇠가 잠 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재혁은 터덜터덜 걸어가 비닐봉 지를 주워 왔다. 안에 든 것은 일회용 도시락 통과 1.5 fl 생수병이었다.
종이 도시락의 뚜껑을 열자 제법 괜찮은 한 끼 식사가 보였다. 돈가스와 밥,양배추 샐러드와 김치,단무지까지 참 고루 잘 갖춰졌다.
“확실히 올드보이보다는 낫네.”
군만두만 먹으며 미친 세월을 갇혀 산 영화 속 인물에 비하면 참으로 호사스런 처지긴 했다. 이재혁은 억지로 플 라스틱 수저를 들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번에 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여기에 있고,납치범은 왜 식사까지 꼬박꼬박 줘 가며 저를 여기에 방치해 두는 가말이다.
처음에는 ‘혹시 장기밀매?!’하며 의심했다. 이렇게 잘 먹여가며 마냥 살려두는 게 너무나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는 물론이고 난방도 잘 되는 방 안에는 작은 화장실 과 푹신한 침대,거기에 대형 TV까지 있었다. 고시원보 다 훨씬 나은 환경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기절 직전 들었던 말만 주야장천 뇌리를 멤돌았다. 죽 이진 않는다고,며칠 뒤에 보내준다고. 지금으로써는 그 남자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걱정할 텐데.”
그저 제 실종소식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찾아다닐 가족 들이 걱정이었다. 동물원 경력 없는 새로 온 수의사도 마
찬가지였다. 혼자 공황상태에 빠져 있진 않을는지,동물들 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이재혁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 그렇게 남 걱정을 하 며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데 뭐 이렇게 멀리 왔어? 태국영 본가 근처에는 백화점 없어?”
신영애는 고속화도로에 진입하며 불쑥 물었다.
“아… 거긴 좀 작고…… 아,언니가 전에 몇 군데 추천 해 주셨잖아요. 명품 매장 많고 좋은 브랜드 많이 입점한 곳들이요. 그게 생각이 나서요.”
신영애는 얼핏 송재희의 어투가 무언가 석연찮다 느꼈 다. 그러나 특별히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대수롭 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야 워낙 수집병이 있으니까 무조건 매장이 많은 데가 좋지만,너는 아직 몸도 약하니까 일일이 큰 데 찾아 다닐 필요는 없어. 특히 젊은 남자 의류 같은 경우에는 생 각보다 선택 폭이 좁아. 그냥 브랜드 이미지만 쭉 봐도 견 적이 나오니까,다음부터는 몇 군데 정해 두고 그 매장들
이 입점해 있는 데로 가.”
“네. 그럴게요.”
신영애는 능숙하게 핸들을 움직여 차량들 사이를 파고 들며 간간이 룸미러로 송재희의 안색을 살펐다. 그녀가 자 진해서 운전석에 앉은 이유는 송재희 때문이었다. 저희들 과 밀접한 곳에 있는 등대라고 해도 결국 인간에 불과했 다. 애써 속으로 숨기고는 있지만 많이 놀랐을 것이었다. 실제로도 주저앉아 평평 울지 않았는가.
그럴 때는 역시 친숙한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어주며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게 훨씬 좋은 법이다. 남강우 가 붙여 놓은 경호원들은 그런 면에서는 영 광이니까 말이 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최명욱이 습격했을 때 경호원들은 어 디서 뭘 하고 있었지?
남강우가 조금만 늦게 나타났어도 지금쯤 자신은 두 팔 과 몸뚱이가 작살나서 골골대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저 를 낚아챈 남강우도 경호원들의 부재를 알고 있는 듯이 말 했다.
설마 강우 오빠는 최명욱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 었던 건가?
“어,눈 온다!”
태이경이 차창에 달라붙으며 신나게 소리치는 바람에 신영애는 길게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태이경을 품에 안 고 둥개둥개 어르며 놀고 있던 여은태도 창에 얼굴을 가까 이 가져갔다.
“많이 올 건가봐. 이경아,오늘도 형아랑 눈사람 만들 자.,,
“응! 아빠만큼 크게 만들자!”
신영애는 픽 웃으며 룸미러를 훔쳐보았다. 예븐 아이 둘이 알콩달콩 잘 노는 걸 보니 저 집 부모들은 한 끼 굶어 도 배가 안 고프겠다 싶었다.
그런데 설마 여 가 둘째가 정말 제왕의 피를 타고났을 줄은 몰랐네.
친위대가 뒤늦게 녀석을 점찍은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잘 타고난 능력에 비해 성격이 심하게 하자인 태국 영에 비해 저 애는 정말 훌륭하게 잘 클 싹으로 보였다.
아. 나도 결혼이나 할까.
신영애는 농담처럼 웃으며 생각했다. 그간 수많은 혼담 이 들어왔지만 출가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모조리 거절 해 왔다. 이미 아들 셋 장가보내고 손자손녀 본 지 오래인 그녀의 아버지도 내심 제가 오래 가문에 남길 바라는 눈치
그래. 일단 연애부터 해 보자.
그간 저에게 추파를 던졌던 남자들을 머리로 죽 나열
해 보는 동안,전면유리로 하나둘 안착하는 눈송이는 삽시 간에 그 수와 몸집을 늘려갔다. 갓난아기 주먹만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신영애는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돌리며 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슬슬 정체가 심화되려는 징조가 보였다. 중앙선 너머 차선들은 이미 거북이 릴레이가 한창이었다.
문득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신영애는 힐긋 사이드를 보았고,구급차가 같은 차선에서 달려오고 있음 을 보았다. 1 차선에 있던 차들이 속속 옆으로 비켜나고 있 었다. 신영애도 핸들을 돌려 차선을 변경했다.
“어? 엠불런스다. 나 저거 실제로는 처음 보?,형아.”
여은태는 태이경을 따라 고개를 쭉 배서 뒤를 돌아보았 다. 아이의 말대로 멀리서 요란하게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 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바로 한 여은태는 불현듯 미간 을 꿈틀거렸다.
이 느낌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의 솜털이 기립했다. 여은태 는 완전히 몸을 돌려 후면 유리 너머를 노려보았다. 빠르 게 가까워지는 구급차의 운전석을 노려보던 눈이,일순 크
게 뜨였다.
‘‘젠장! 피해!”
여은태는 달리는 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뒷좌석의 문 레버를 당겼다. 그러나 잠겨 있는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신영애가 물었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여은태는 태 이경을 꽉 안은 채 한 손을 휘둘러 차창을 부쉈다. 그곳으 로 아이를 데리고 뛰어내려 잠시만 시간을 벌어 두면 뒤따 라오고 있을 남강우의 경호원들이 놈들을 상대할 것이었 다-
여은태는 무심결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것이 실수였을 까,아니면 다행이었을까. 하얗게 공포에 질린 송재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작은 교통사고에도 크게 다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빌어먹을……!”
여은태는 탈출을 포기하고 송재희의 몸도 끌어와 제 몸 으로 덮어 눌렀다. 태이경은 옆구리로 감싸 보호했다. 그 순간,전속력으로 달려온 구급차가 사선으로 차 후미를 들 이받았다.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거센 진동이 차체를 강타
콰아아아앙!
신영애는 추돌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 체 한쪽이 지면에서 붕 떠올랐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짓이겨지는 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 다.
“뭐야,저 새끼……!,,
송재희는 정신이 아득한 찰나에도 제 목덜미를 타고 흐 르는 액체를 느꼈다. 검붉은 그것은 여은태가 흘리는 피였 다. 여은태는 저를 보호하는 대신 우그러진 판금에 정통으 로 몸을 부딪쳤다.
구급차는 속력을 줄이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액셀을 밟 았다. 중형세단은 눈 뒤집힌 황소에게 들이받힌 투우사처 럼 속절없이 가드레일로 떠밀려갔다. 빌어먹을,속으로 욕 설을 씹는 순간이었다. 다시금 거센 충격이 쏟아졌다.
콰아아아_
가드레일을 뚫고 차량이 추락하는 순간,신영애는 운전 석 쪽 차창을 팔꿈치로 부쉈다. 시리게 흔들리는 강물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모두를 태운 차가 게걸스럽게 눈을 집어삼키고 있는 수면 속으로 발려 들어갔다.
깨진 차창으로 세차게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뼈마디
를 조이고 살을 엘 듯 차가운 강물은 순식간에 차 안을 그 득 채웠다. 신영애는 뚫어 놓은 차창으로 빠져나와 뒷좌석 으로 헤엄쳤다. 유리는 이미 일부 파손되어 있었고 그 바 로 안에는 셋이 한데 뒤엉켜서 구겨져 있었다.
신영애는 맨손으로 남은 유리들을 깨끗이 부수고 그 안 쪽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태이경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찌 그러진 문에 끼어 있는 여은태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형 아,하는 애처로운 부름은 하안 기포가 되어 그대로 사라 졌다. 송재희는 혼절한 상태였다.
눈을 감고 있는 여은태를 중심으로 불그스름한 물결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추돌 순간 머리를 세게 부딪친 듯했 다. 신영애는 팔을 뻗어 좌석 아래 끼어 있는 태이경을 가 장 먼저 끄집어냈다. 겨우 배놓았더니 다시 들어가겠다 고 집을 부렸다.
정신 차려!
신영애의 고함도 기포 속으로 사그라졌다. 허나 태이경 은 그것을 들은 듯 신영애를 돌아보았다. 울먹이는 눈동자 가 물속에서도 선명했다. 가차 없이 녀석의 목덜미를 잡 아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남강우가 붙여 준 경호원들이 빠 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신영애는 안심하며 여은태를 깨우기 위해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경호원들의 뒤로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오는 검은 덩어리들을 발견했다. 잠 수부처럼 온몸을 가린 괴한들이었다.
신영애는 다급히 뒤쪽을 손가락질했다. 막 차 문을 통 째로 뜯어내고 있던 경호원들이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 다. 그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일제히 괴한들을 향해 헤 엄쳐갔다.
두 무리가 격돌했다. 물보라가 온 사방을 흐려 놓았다.
신영애는 다급히 여은태의 뺨을 후려쳤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송재희와 태이경을 둘 다 책임질 수 없었다. 송 재희는 연약한 인간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한겨울의 강물 은 독이었다. 금방 폐에 물이 차고 저체온증이 덮쳐들 것 이었다. 속히 물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서너 번 거세게 뺨을 후려치자 여은태가 찡그린 얼굴 로 기침을 뱉어냈다. 쿨럭쿨럭 기도에 찬물을 뱉어낸 녀석 이 몽롱하게 눈을 떴고,가늘어진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一정신 차려! 놈들이 왔어!
그러자 오락가락하던 여은태가 번득 정신을 차렸다.
一이경이 데리고 도망가! 난 재희를 데려갈게!
신영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뒤를 돌았다. 송 재희를 옆구리에 낀 채 전속력으로 물을 향해 헤엄쳐갔다.
여은태는 차 밖으로 나와 곧장 변이했다. 태이경이 잽싸 게 두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눈앞은 온통 어둑했고 피 섞인 물보라가 쉼 없이 들이 쳤다. 여은태는 태이경을 태우고서 신영애와 다른 방향으 로 물살을 꿰뚫었다. 부옇게 시야를 채우던 공기 방울들 이 완전히 사라지자 여은태는 수면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푸하!”
태이경이 숨을 충분히 들이마시는 걸 확인하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여은태는 눈을 홉뜨며 다급히 몸 을 틀었다. 그러나 발밑에서 불쑥 올라온 검은 그림자는 이미 피할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푸욱!
여은태는 제 살가죽이 찢어지는 것을 선득하게 느꼈다. 정확히 제 배를 노렸던 칼날 같은 손톱은 등허리 옆을 꿰 뚫었다. 여은태는 몸부림치며 다리를 휘둘렀다. 괴한이 움 찔 뒤로 몸을 물렀고,툭 튀어나온 발톱이 놈의 옷깃을 찢 었다.
아차!
목덜미가 허전했다. 여은태는 제가 괴한을 떨어내는 동 안 태이경이 튕겨 나간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이경아! 이경아!
당황해서 물속이라는 것도 잊고 고함을 치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제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붉게 주위에 녹아 들었다. 형아,환청이 찾아온 순간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여은태는 미친 듯이 헤엄을 쳐 그들을 쫓아갔다. 거리 는 좀체 좁혀질 기미가 없었다. 태이경의 작은 손이 물살 을 자꾸만 움켜쥐려 하는 것만 어슴푸레 어른거릴 분이었 다.
그들이 먼저 물으로 튀어 올랐다. 뒤늦게 지상을 밟은 여은태는 곧장 태이경의 냄새를 찾아 뛰었다. 어떤 폭설 도 그 아이의 냄새를 제 후각에서 들어내지는 못했다. 살 가죽은 이미 아물었다. 여은태는 사력을 다해 그들을 추격 했다.
여홍재는 어둠 속에서 낱낱이 지켜보았다. 최명욱이 여 은태의 저지로 태국영의 아이를 납치하는 데에 실패하던 순간도,남강우에게 곤죽이 되어 피눈물을 흘리는 순간 도,비참하게 목숨만 붙은 채 끌려가는 순간도,모두 다 목 도했다.
역시 실패할 줄 알았지.
여홍재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충분히 실패할 것 을 감안하고 2차,3차 트랩까지 완벽히 준비해 놓은 상태 였다. 여정이 어찌 되었든 그들은 결국 모두 제 손 안에 들 어올 것이다.
도리어 여홍재는 기이하게도 매우 의기양양해져 버렸 다. 제가 이 상황을 손 안에서 들여다보듯 훤히 예상했던 것이 그대로 들어맞자 없던 자신감까지 황량한 싹을 틔운 것이었다.
여홍재는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조용히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영문을 모르는 인간들은 패닉에 빠져 모두 대피 한 뒤였고,의문의 폭발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경찰들이 쫙 깔린 상태였다. 사고 현장에서 졸도해 있던 몇몇 시민 들은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여홍재는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겨 둔 뒤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그는 낭비 없는 동선으로 목적지를 향해 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태이경과 이승도,둘 중 하나만 제 수중에 붙들면 게임 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둘 다 사로잡아 태국영이 개처 럼 비는 순간을 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도로는 다급히 번화가를 벗어나려 애쓰는 차량들로 분
주했다. 가느다란 눈발이 하늘하늘 내려오기 시작하며 정 체는 급속도로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번화가를 벗어나 고속화도로를 밟은 그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카 오디오의 볼름을 높였다. 끈적한 재즈의 음률 이 얼어붙은 차 안의 공기에 쩍쩍 눌어붙었다. 홑날리는 눈과 함께 기가 막힌 조화였다.
그리고 여홍재는 잠시 뒤 걸려온 한 통화에 더더욱 만 족했다.
《형. 성공했어. 치영이가 지금 그놈 애새끼 포획했다 고!》
여홍재의 눈동자 안에는 폭주하는 희열로 광휘가 돌았 다. 드디어 태국영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는 무기가 제게 쥐어진 것이었다. 놈이 죽고 못 사는 이승도의 아기다. 놈 으로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아기였다.
《그런데 형. 중간에 좀 문제가 생겼는데…….》
여홍원이 말끝을 흐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상태 인 여홍재가 뭐든 말해보라며 부드럽게 채근했다. 실수로 벌써 콱 죽여 버렸다는 애기만 아니면,어떤 실수도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게,그 애새끼가 탄 차에 신영애가 있었네.》
신영애.
여홍재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신영애는 국내 굴 지의 호텔왕을 조상으로 둔 신 가의 고명딸이었다. 위협적 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코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가문이었다.
어떤 가문의 여자를 다치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불화의 씨앗이 된다. 여홍재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 를 문지르다가 한숨을 지었다.
“얼마나 다쳤지?”
《크게 다친 데는 없고,그냥 사고에 휘말린 게 좀.〉〉
“그럼 일단 둬. 내가 선수 쳐서 종주님한테 알리고,일 다 마무리되면 직접 정식으로 신 가를 찾아갈 테니까.”
《가서 뭘 어쩌게?》
“어차피 다음 종주는 나야. 신 가에서도 종주를 상대로 라면 사돈을 맺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다 생각하겠지. 정 식으로 혼담을 넣으며 사과를 하면 신종남도 못 이기는 척 수락할 거다.”
여홍재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여홍원은 조금 미적 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골빈 계집은 왜 자꾸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여홍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도 예상치 못하게 혼담이 오고 가게 되었지만 신 가 정도면 처가로 삼기에
크게 빠지지는 않았다. 더욱이 신영애는 청초함과 요염함 을 동시에 갖춘 대단한 미인이었다. 가시가 심하게 돋친 장미를 꺾어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여홍 재는,신영애와 신 가의 성향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또 헛 생각만 곱씹었다.
〈〈미안하다.〉〉
남강우가 말했다. 태국영은 대답 없이 싸늘한 동상처 럼 벤치에 앉아 있었다. 꾸역꾸역 쏟아져 내리는 눈은 그 의 몸에 닿자마자 미지근한 물로 변했고,그 물기는 그의 옷을 눅눅하게 적셨다.
《지금 내 쪽 애들이 여은태가 곳곳에 강하게 마킹한 자 국을 따라가고 있어. 하지만 따라잡기는 힘들 것 같다.》
남강우는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내 대꾸하지 않 고 가만 듣고 있던 태국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여 가 꼬맹이가 놈들 꼬리로 붙은 건 확실해?”
《안타깝지만 확신은 못 하겠다. 그저 정황상 꼬마가 쉴 새 없이 뛰어가고 있어서 그렇게 추정하고 있을 분이야.
그래도 녀석이 이경이를 놓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겠지.
여은태는 그런 방면으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뢰할 수 있다. 꼬리만 잡아 두었다면 놓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네가 하라는 대로 하마. 정말 미안하다.〉〉
남강우는 그 고고한 자존심을 꺾어 진심을 담아 사죄했 다.
“일단 계속 쫓아. 생각 좀 하고 오 분 내로 전화 줄게.”
태국영은 전화를 끊은 뒤 이승도의 진료실로 찾아갔다.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승도는 소파에 누워 세 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태국영은 다가가 티 테이블에 앉 았다. 슬쩍 아랫배에 손을 대니 그 예민한 녀석도 함께 쿨 쿨 꿈나라를 여행 중인 것이 느껴졌다.
승도야. 미안해. 이경이를 놓쳤어.
여홍재를 너무 만만히 보았다. 설마하니 놈이 간도 크 게 여 가 놈들을 직접 움직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 했다. 종주 자리만 노리는 게 아니라,아마도 제 목숨까지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기 에 태국영 자신도 남강우도 태호연도 조금의 낌새를 못 느 낀 거였다.
그쪽 일을 남강우에게 전적으로 맡겨둔 이유는,태 가 의 젊은이들이 그런 섬세한 작전에 투입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숨어서 때를 보는 것보다 무식 하게 때려 부수며 없던 길도 만들어내는 쪽이 더 적성에 맞았다. 혈기를 주체 못 하는 놈들이라 진득하게 몸을 숨 기고 기다릴 줄을 몰랐다. 십중팔구 발각되었을 것이었다.
완벽하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이 화를 불러 왔다. 그쪽 머리싸움의 패인(敗因)은 그 누구도 아닌 태국영 자신이 었다.
“무사히 데려올게.”
태국영은 몸을 숙여 이승도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 다. 제 오판으로 인해 아이가 잘못되면 이승도는 정말 제 앞에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니,어쪄면 꿋꿋이 살아 서 평생 용서해주지 않는 걸로 벌을 줄지도. 뭐가 됐건 견 딜 자신이 없었다.
그는 아까까지 앉아있던 벤치로 가 손가락을 튕겼다. 태성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표정도 납을 바 른 듯 잔뜩 굳어있었다.
“성문아.”
나직한 부름에 태성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형님.”
“승도 곁에서 일 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그 누구도 믿지 말고,절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 면안 돼.”
“염려 마십시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태성문의 낯은 마치 가뭄에 갈라진 논밭 같았다. 실금 으로 깨진 듯한 얼굴을 태국영이 가볍게 어루만지며 지나 갔다.
“그래. 믿는다.”
태국영의 기척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응급실로 옮겨진 송재희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저체온 증이 심화되기 전에 신영애가 계속 제 더운 손으로 그녀 의 몸을 어루만져준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의사는 안정을 취하면 금방 제 컨디션을 찾을 거라고 말했다. 신영애는 미리 잡아둔 1 인실로 송재희가 이동하자 바로 작별을 고 했다.
“잘 쉬고 있어. 절대 혼자 어디 나가지 말고.”
송재희는 불안한 눈빛으로 신영애를 올려다보았다. 차 마 무서워 묻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모든 게 다 저 때문인 것만 같았다. 신영애가 부러 빙긋 웃어 보이며 송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 내일 병문안 올게.”
신영애는 병실 안을 듬성듬성 채운 남자들을 지나쳐 밖 으로 나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이 곧장 따라붙 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셋째 오빠인 신의재도 끼어 있었 다. 신의재가 비서처럼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며 물 었다.
“영애야. 괜찮아? 많이 놀랐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동생이 급습을 당했다는 소식 에 신 가는 발칵 뒤집혔다. 부친이자 가주인 신종남은 불 같이 화를 내며 종주 여군호에게 항의를 하러 뛰쳐나갔 고,모친은 생애 처음으로 졸도를 했다. 신영애와 나이 차 가 크게 나는 삼형제들은 모두 회사를 비울 수가 없어 서 로 동생을 데리러 가겠다고 다투다가 가위바위보로 에스 코트 대표자를 선출했다.
“오빠는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
신영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병실에 딸린 욕실에서 미 리 샤워를 하고 부친의 비서가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 지만 여전히 몸에 더러운 강물이 눌어붙어 있는 듯했다.
그 불쾌감이 계속해서 모공 하나하나에 틀어박혀 떠나지
않는 이유는,역시 분노 때문이었다.
신영애는 대기해 있던 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잔뜩 눈치를 살피는 신의재가 옆에 타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 다.
폭설은 그 기세가 절정에 올라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러시아워는 시작도 안 했는데 꽉 막힌 차도는 거북이 릴레 이가 한창이었다. 신영애가 창틀에 팔을 걸고 턱을 괴며 물었다.
“아빠는 뭐라셔.”
“어. 지금 종주님 만나러 가셨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 강 대화가 끝나셨을 텐데 아직 소식이 없네. 조금 길어지 는 것 같아.”
“연락 오면 나한테도 바로 알려 줘.”
“알았어.”
신영애는 차창 밖의 새하안 풍경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 다. 송재희를 데리고 물으로 나온 그녀는 주변에 지나가 는 사람에게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요청했고,곧장 응급처 치를 했다. 인공호흡으로 숨을 되살리고 전신마사지로 체 온을 올렸다. 물속 난투극에 휘말린 남자 중 하나가 올라 온 것은 구급차가 오기 직전쯤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나 묻자 그는 귀엣말로 결과를 알렸다.
「여가 놈들이야.」
「여가……? 설마여제운이?」
「여홍재다. 놈이 중심에 있어.」
「여홍재? 뭐야,그 듣보잡 새끼는.」
「……뭐,나름 이름은 좀 있지만,아마 넌 모르는 게 당 연할 거야. 네 스타일에 부합하는 조건이 단 하나도 없거 든-」
「아,됐고. 근데 왜 오빠 혼자야. 다른 오빠들은 셋 다 죽었어?」
「아니. 우리 쪽은 나랑 정웅이 둘이 살았고 상대는 넷 이 죽고 하나는 도망쳤다. 정웅이가 뒷수습하고 있어. 놈 들 목만 잘라 수거해갈 거야. 강우…… 아니,가주님은 전 쟁까지 불사하고 이 일을 크게 터뜨릴 생각이시다. 나중 에 영애 네가 증언 하나만 보태 줄래?」
「즈응어언?! 증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그렇 게 얌전하게 있을 줄 알아? 오늘 일에 관련된 새끼들 다 조져버릴 거야!」
이 새끼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나지.
신영애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심각하게 고뇌했다. 어차 피 가만 놔둬도 태국영이 알아서 잘 다져주겠지만,강 건 너 불구경하듯이 그 꼴을 구경만 하고 있기에는 도무지 창
자가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아버지 전화다.”
신영애는 민첩하게 몸을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신의 재가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부에서 거친 노호성이 터져 나 왔다.
《여홍재 이 새끼가 우리를 농락하다니!》
신의재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멀찍이 놓았 다. 신종남이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차 안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사돈을 맺어? 영애랑 결혼해 줄 테 니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이런 육시랄 놈! 쳐 죽일 놈!〉〉
신의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영애의 눈치를 살펐다. 신영애의 요염한 눈매가 빙설처럼 얼어붙어 있었 다. 그 안에 맑은 눈동자는 살기 돋는 광기가 휘몰아쳤다. 급기야 신종남이 전쟁까지 운운하며 난리를 칠 때,신영애 가 휴대폰을 낚아챘다.
“아빠,지금 뭐라고 했어.”
《…아,영애니?〉〉
“뭐라고 했냐고. 여홍재인지 여홍어인지 하는 놈이 나 랑 뭘 해줘?”
신영애는 분기 어린 어투로 물었고,신종남 역시 분에
찬 날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종주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침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빌려 여홍재의 입장을 요약해보자면 이랬다. 태국영과의 종주 싸움 도중 예기치 않게 신영애가 휘말렸 는데,그것은 명백히 제 불찰이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혼약으로 마무리를 짓겠다. 종주님께서 중매를 잘 좀 서 달라.
신영애는 당연히 눈이 돌았다. 불같이 치민 분노가 화 병으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 이 새끼 안 되겠네. 좆 부리까지 뽑혀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네.
《내가 갔을 땐 이미 여홍재가 종주님께 그렇게 연락을 해 온 상태라고 하더구나. 나한테는 사죄 한마디 전해오 지 않은 놈이 말이야. 놈이 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으 면!》
이대로면 부수고도 남지 싶어 신의재는 도로 휴대폰을 뺏어 왔다. 그는 슬쩍 차 문 쪽으로 몸을 무르며 입을 열었 다.
“그래서 아버진 어떻게 하셨어요?”
《뭘 어떻게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거절했 지. 영애가 남자들 싸움에 휘말린 것도 천불이 나 미치겠
는데 혼담이라니,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단 말이나! 이 모 욕은 내가 잊지 않고 꼭 갚아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종주님은 뭐라시고요?”
그러자 활화산이 폭발한 듯 분기탱천해 있던 신종남이 딱 말을 멈췄다. 신의재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였다.
《그게 말이다. 나도 종주님 반응은 매우 의외라…….》 그리고 신종남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뜻밖의 애기 를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