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내가 깽판이 취미야.”
태국영은 농담 같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나도 필요에 따라서는.”
남강우가 진지한 낯짝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 옆의 여은태 역시 못마땅한 투로 거들었다.
“나도 껴도 돼?”
창가에 선 셋의 시선은 저택 뒤편에 자리한 온실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는 유모가 취미로 원예를 하던 곳이 었지만 지금은 짐승 우리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승도가 이 사를 오면서 데리고 온 동물들이 겨울을 날 곳이 필요했 기 때문이었다.
일이 많아 식물들까지 돌볼 시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던 유모는 흔쾌히 온실을 내어주었고,태국영은 이승 도가 원하는 대로 온실을 확장해서 개조해 주었다. 초식동 물을 따로 모아 완벽히 격리해 두고,개와 고양이도 공간 을 나누어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꾸며준 상태였다.
“원가 우리만 배고 다 행복해 보이잖아? 기분 나빠.”
고운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잡으며 여은태가 투덜거렸다. 다 큰 성체 둘은 차마 그 정도로 솔직해질 수가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시선을 느낀 이승도가 얼핏 고개를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를 따라 태이경 이,송재희가 해맑게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 인사를 건네 왔다.
셋은 별수 없이 대강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반응했다. 허나 관심은 그들에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셋 다 자 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개와 고양이들에게 금방 신경을 배앗겨 버리고 만 것이다. 크리스마스 테마복을 개와 고양 이들에게 입힌 것이 그리도 귀여운지 입들이 죄 귀에 걸렸 다매알이 뒤틀린 태국영은 가장 먼저 창가에서 떨어져 나 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강우는 혀를 차며 그의 맞 은편으로 다가가 앉았고,여은태만 그 자리에 남아 속으 로 무한 반복 중얼거렸다.
몸살 나게 끼고 싶다. 나도 크리스마스 테마복 입어줄 수 있다. 나도 선생님한테 귀여움받고 싶다. 예쁘게 눈을 반짝이는 이경이 업고 둥개둥개 어르고 싶다.
이승도가 태이경을 데리고 지능 낮은 동물들과 놀아줄
때만큼은 접근금지였다. 제가 다가서기만 해도 애들이 겁 을 먹어 바닥에 오줌을 지리기 때문이었다.
여은태가 부러운 눈으로 제가 끼어들 수 없는 곳을 갈 망하는 사이,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 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재희가 잘 적응해서 다행이네. 낯가리는 성격 인 것 같아서 승도랑 어색해 하면 어쪄나 싶었는데.”
“요즘 영애랑 어울리면서 많이 밝아졌지.”
“영애? 一아,전에 나한테 손수건 준 아가씨.”
반사적으로 물었던 태국영은 바로 신영애를 기억해 냈 다. 저번 모임 때만 해도 남강우에게 약간의 관심이 있었 던 듯했는데,지금은 완전히 손을 턴 모양이었다. 태국영 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눈매를 갸름하게 좁 혔다.
“다시 말해두지만,내가 허락한 건 너랑 재희 둘이야. 내가 없을 때는 너도 안 돼. 네가 네 모가지 걸면서 괜찮다 고 장담해도 나 안 믿어. 내 집 난민촌 아니고,아무나 드 나들 수 있는 데도 아니야.”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 재희가 외출할 때에는 내가 됐 건 가드가 됐건 정문 앞에서 미리 대기해서 실어갈 거니 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문제의 연놈들 갈아 마신 뒤에는 바로 데려가
고.,,
“물론이지. 아무튼 고맙다. 난 솔직히 네가 거절할 줄 알았거든.”
태국영은 담뱃불을 붙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전략적인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재희가 죽기라도 하면 나도 곤란해. 네가 눈 뒤집혀서 다 된 밥에 동칠하면 내가 무지 화날 것 같거든.”
박해인이 살해당한 뒤부터 남강우는 일이 손에 잡히지 가 않았다. 그날 당장 송재희의 거처를 제 본가로 옮겼지 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 만 여홍재는 제법 여 가의 피를 잘 타고난 남자였고,제 가 문은 그리 혈통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제 가솔들이 여홍 재의 은폐를 과연 얼마나 발리 알아챌 수 있을까,하는 문 제에 대해 남강우는 긍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태국영에게 부탁했다. 적어도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송재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의외로 태국영은 별다른 말없이 그러라고 했다.
말로는 전략적인 것이니 뭐니 해도 사실 그가 온정을 베푼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막말로 송재희가 죽어도 그는 손해날 것이 없었다. 남강우 자신이 분을 못 참고 최
명욱과 여홍재를 죽여주면 도리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 이다. 다만 윤봄이가 남아 찝찝하긴 하겠지만,사실 그녀 는 가드만 충실히 달아놓으면 크게 위협이 되는 수준도 아 니었다.
“재희한테 아직 애기 못 했지?”
그를 따라 담배를 물었던 남강우가 그대로 인상을 구겼 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태국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뭐. 일단 다 정리될 때까지는 그냥 비밀로 해 둬. 정신 적인 충격도 충격이지만,박해인이 죽었다고 하면 재희도 엄청 불안해할 거야. 우리 승도 다정하고 따뜻해서 재희 도 금방 친오빠처럼 잘 따르게 될 테니까,그때 애기해. 빈 자리 채워줄 다른 오빠가 있으면 아무렴 더 발리 극복할 수 있지 않겠어?”
남강우는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저와 조금 편해지자마 자 박해인의 안부부터 살피던 송재희였다. 조금만 기다리 라고,일 정리 되면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던 것이 잊그제 같은데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다.
“잠깐만. 누가 죽었는데?”
태국영은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짓누르며 고개를 들 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창밖만 보고 있던
여은태가 다가와 있었다. 얼굴이 굳은 상태다. 태국영은 희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아 저 꼬맹이 새끼. 눈이랑 귀는 하여간 더럽게 밝아서 는 ■
“뭐야. 소리 단속도 안 했나?”
남강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태국영은 표정을 풀며 어 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재가 여 가에서 가장 좋은 피를 갖고 태어 났어. 이제 대가리 좀 컸다고 아무리 감춰도 감출 수가 없 고,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저 어린애가 네 공간을 뚫는다고? 나도 못 하는 걸?”
“그래서 여 가 놈들이 재수 없다는 거야. 아주 엿듣고 숨는 데에는 따라갈 자가 없어요.”
친위대가 뒤늦게 후보로 꿰어 넣을 만한 능력이라는 건 가.
남강우는 흥미로운 듯 여은태를 주시했다. 아직 성년식 도 치르지 못한 미성숙한 개체가 종주 후보가 된 것은 제 가 알기로 근 5백 년 만의 일이었다. 일대 파란이 인 것은 당연지사였다. 여은태는 현재 일족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이슈로 거론되고 있었다. 꾸준히 핫이슈의 소재로 소모되
었던 태국영마저 잠시 그 자리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도대체 누가 죽은 건데?”
여은태는 짜증을 내며 채근했고,태국영은 별수 없다 는 듯 대답했다.
“저기 밖에 여자애랑 친했던 등대가 하나 죽었어.”
여은태의 잘 빠진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쫓아갔다가 놓친 놈 있지. 개가 범인이야.”
여은태는 이제 숨마저 멈추었다. 태국영이 경고하듯 검 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비밀이야. 승도는 물론 이경이도 알아선 안 돼.”
“…왜 죽였는데?”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어른들 애기하는 거에 일일 이 관심 두지 말고 어린이는 어린이 나름의 고민을 하도 록 해.”
태국영은 슬쩍 턱을 치켜들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여은 태는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당했지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홍재는 태국영에 비하면 정말 별것도 아니었지 만,자신은 그런 그조차 놓쳐 버렸다. 어른들의 싸움에서 제가 얼마나 쓸모가 없는 존재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안 알려주면 선생님한테 다 말해 버릴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기죽을 거라 생각하면 크나 큰 오산이었다. 여은태는 눈을 치켜뜨며 당당하게 협박했 다. 태국영의 약점이라면 너무나 빤하고 자신은 그걸 매 우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한숨을 탁 쉰 태국영은 ‘아오 저걸’ 하며 위협적인 표정 을 지었지만,그분이었다.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 던 남강우가 피식 웃더니 태국영에게 말했다.
“네가 어떤 의미로 재수 없다고 했는지 알겠다.”
물론 여은태는 남강우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조금 도 없으므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승도는 고양이들에게 폭 둘러싸여 있는 송재희를 부 드럽게 응시했다. 수줍음이 많은 아가씨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던 터라 내심 긴장했는데,처음 잠깐 낯을 가렸던 것 을 제외하면 꽤 발랄한 면이 많아 보였다.
낯섦을 풀어주기 위해 온실로 데려갔을 때 송재희는 마 치 솜사탕을 처음 먹어 본 아이처럼 볼을 발갛게 붉히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누구부터 만져야 할 지 어지러운 눈을 뱅글뱅글 돌리다가 결국 제 발치에서 가
장 먼저 꼬리를 흔드는 백구부터 안아 들었다. 그 뒤로 한 쪽 눈을 잃은 코카스파니엘과 리본 핀을 예쁘게 맨 말티즈 가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고양이들도 제 마음을 잘 알아듣는 그녀에게 금방 호기 심을 가지고 슬렁슬렁 다가왔다. 애교가 많은 치즈태비는 아예 그녀의 다리에 기대 드러누워 골골거렸다. 그것을 시 작으로 다른 녀석들도 몸을 비비기 시작했고,그녀는 곧 고양이들의 등반 목표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 자주 좀와.】
이승도는 제 허벅지를 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대장이였다. 다른 고양이들이 송재희에게 한 번씩 관심을 주고 다가가는 동안 점잖게 이승도만 따라다닌 녀석이었 다. 이승도는 녀석의 부드러운 정수리를 손끝으로 살살 긁 어주며 웃었다.
“섭섭했어?”
【아니. 자주 보고 싶어서.】
“미안.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들를게.”
아무래도 이사를 온 뒤 동물들을 따로 돌봐주는 이들 이 많아 최근 조금 소홀해지긴 했었다. 태이경이 수시로 들이닥쳐서 강아지들 산책시키고 고양이들 아픈 데 없나 살펴봐 주기에 더 그랬던 것 같았다. 대장이는 만족스럽
게 나앙 하며 뒷다리로 눈가를 긁었다. “어. 우리 대장이,눈 아픈가?”
【아니.】
“어디 보자. 좀 부은 것 같아.”
【아니라니까.】
극구 괜찮다고 고개를 비틀던 녀석을 제압해 눈꺼풀을 슥 밀어 올리니 발갛게 충혈된 점막이 툭 튀어나왔다.
“이거 두면 더 가려워져. 안약 넣자.”
대장이는 오늘 처음으로 이승도를 피해 도망갔다. 물 론 이승도는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양보해 주는 법이 없었다. 온실에 기본적인 진료 도구와 치료 약들은 상비되 어 있는 상태였다. 대장이는 목덜미를 강하게 잡혔고 이 내 양쪽 눈에서 안약을 줄줄 흘리게 되었다.
【이 느낌 싫어. 완전 싫어.】
질색하며 고양이 세수를 하는 대장이를 보며 이승도가 픽 웃었을 때였다. 구석에서 10여 분을 홀로 낑낑거리고 있던 태이경이 밝은 목소리로 ‘됐다!’ 하고 소리쳤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녀석의 앞에는 실내화단에서 한 아름 꺾 어 온 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일회 이거 누나 갖다 주자!”
호명에 신난 일호가 태이경에게 달려갔다. 태이경은 녀
석의 입에 잘 엮은 화관을 물려주었다. 일호가 송재희에 게 다가가 그것을 내밀었다. 영리한 일호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어준 송재희가 화관을 머리에 쓰며 기쁘게 웃었다.
“고마워,이경아. 너무 예쁘다.”
송재희는 태이경이 직접 만든 화관이 몹시 마음에 들었 다. 화관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성스레 꽃들을 엮은 그 마음이 너무나 소중하고 예뼜기 때문이었다.
고용인이 와 점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송재희는 화관을 쓴 채로 온실을 나와 본채로 들어섰다. 여은태가 현관까지 달려와 태이경을 훌쩍 안아 들었다.
“이경아. 재밌었어?”
“응! 근데 역시 형아랑 노는 게 더 재밌는 것 같아.”
태이경은 눈치 빠르게 방실방실 웃으며 여은태의 등으 로 엉금엉금 이동했다. 꽁했던 마음이 단박에 녹은 여은태 는 반갑게 녀석을 업고서 앞장섰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송재희가 이승도에게 속닥거렸다.
“이경이는 좀 특이한 것 같아요. 은태 군한테 겁을 먹지 도 않고,애교도 많고,사려도 깊고. 저들과 우리의 혼혈 은 다 저런 아이로 나오는 건가요?”
“글쎄. 난 다른 혼혈 아이를 본 적은 없지만…… 그냥 개인차가 아닐까? 인간 아이들도 다 각자 개성이 있고 성
격이 다른 것처럼.”
이승도는 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이 차이로만 따지 면 거의 조카벌도 될 수 있는 터라 말 놓는 과정이 그리 어 렵지는 않았다.
“오빠는 행복하겠어요. 국영 오빠도 잘 해주고,아기도 저렇게 예쁘고.”
송재희는 조금 부러운 얼굴이었다. 아픈 역사를 극복 해 가며 이제야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는 젊은 아가씨에게 제 불행했던 과거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부러 운 표정에 얼핏 수심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오늘 처음 안면을 트고 친해지기 시작한 터라 이 승도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고,송재희는 노숙한 근심이 어렸던 얼굴을 애써 바로잡으며 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저도 나중에 이경이 같은 아기를 낳고 싶어요!”
“응. 재희도 심성이 고와 보이니까 분명 고운 아기가 생 길 거야.”
그렇게 긍정적인 대꾸를 해 주는 것밖에,지금으로써 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승도는 송재희의 어깨를 다 독이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어마어마한 진수성찬 이 흰색 테이블보를 배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이승도는 의 자에 앉으며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태야. 국영이랑 강우 씨는 어디 갔어?”
태이경을 먼저 앉히고 그 옆자리에 앉은 여은태는 일 순 조금 멈칫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아까전화 받더니 둘이서 나가 버렸어. 한두 시간 정도 면 된다고 했으니까 아마 곧 올 거야.”
“무슨 전화?”
여은태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두 남자가 등대들을 강간했던 놈들을 은밀하게 때려잡기 시작했다고 알릴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나븐 놈들. 죽어도 싸지.
박해인이 살해당한 뒤 남강우는 인내를 잃었다. 그는 더 기다릴 수가 없었고 하루라도 발리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길 원했다. 태국영은 동조했다. 이렇게 하세월 기다리 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압박해 들어가며 움직 임을 유도하는 것이 낫다고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매춘이라는 이름으 로 박해인과 송재희를 강간했던 놈들부터 제거하는 것이 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다 보면 최명욱과 여홍 재는 언제 자기 차례가 될지 몰라 조바심이 날 터였다. 느 긋하게 자기가 원하는 무대를 만들 여유가 박살 나는 순 간 분명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이었다.
여은태는 다 큰 수컷들의 그 피 튀기는 작업에 꽤 끼고 싶었지만,물론 그 속내를 까 보이진 않았다. 젖니도 안 빠 진 애송이 취급을 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조롱만 받 고 무시당할 게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속을 어떻 게 들여다본 건지,태국영이 느른하게 웃으며 사탕을 흔들 었다.
「야,꼬맹이. 나중에 네 눈이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끼 워줄 테니까 승도 옆에 잘 붙어있기나 해. 비밀 잘 지키고.
J
세상에!
내색은 안 했지만 미치도록 기뻤다. 마치 뭔가 어른들 만의 세계에 한 발 소심하게 담근 기분이었다. 여은태는 그 순간 제가 인간으로 변해 있음을 굉장히 다행으로 여겼 다. 꼬리가 나온 상태라면 저도 모르게 당장 흔들었을 것 이기 때문이었다. 태국영을 상대로 꼬리를 흔드는 것은 어 쩐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태국영과 남강우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 시간이 훌 쩍 지난 뒤였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을 때,두 남자는 멀끔한 낯으로 향긋한 향기를 풍기며 돌아왔다. 싸구려 클렌저 향기였다. 이승도는 이 시간에 왜 둘이 사우나를 다녀온 것인지 잠깐 의아했지만,늘 그
랬듯 대수롭지 않게 그 의문을 넘겼다.
간소한 티 타임이 끝난 두I,이승도를 비롯해 고용인들 까지 싹 다 크리스마스 테마복으로 갈아입었다. 테마복이 라고 해 봐야 그냥 발■간 색상을 기본으로 한 옷들이었지 만,그 상태로 모자만 맞춰서 씌워 놓으니 물씬 크리스마 스분위기가 났다.
유일한 초대객인 여군호 가족은 정시에 도착했다. 이승 도의 부드러운 부탁에 떠밀려서 내키지 않는 초대장을 보 내야 했던 태국영은 만사 포기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여군호와 한수연,그리고 여제운과 여진희까지 있었다. 여 제운은 늘 그랬듯 정중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승도에게 인 사를 건넸다. 이승도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에 게 웃어 보였다.
여은태는 저번에 비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부르며 한수연을 이끌었고,한수연은 그새 더 건강하게 살 이 오른 모습으로 제 아들의 손을 잡고 파티룸에 들어섰 다.
“세상에! 이렇게 모이니 마치 명절 때 사돈끼리 정답게 모인 것 같네요! 이 유모가 매우 들떠 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심지어 말렸는데도 자진해서 사 회를 맡은 유모가 마이크로 쩌렁쩌렁 웃었다. 그 호쾌하
고 밝은 웃음소리가 각자 자리 잡은 어색함이나 긴장을 단 번에 녹여냈다.
“자 그럼! 역시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가 있어야죠! 우 주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 도련님,등장하세요!”
유모가 대놓고 신호를 주자 입구에서 거대한 케이크가 뒤뚱뒤뚱 등장했다. 태이경이 잉챠잉챠하며 제 몸만 한 케 이크를 들고 입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겁지는 않은데 부 피가 커서 걸음이 느렸다. 대형 케이크가 중앙에 도착하 는 사이 고용인들이 나팔을 불고 폭죽을 터뜨렸다.
태이경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두었다. 태국영은 아무 생각 없이 호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끼내 들었다 가 유모에게 혼쭐이 났다. 촛불은 성냥으로 켜야 제맛이라 는 일장 연설이 지나가고 나서야 촛불은 따뜻한 불꽃을 품 게 되었다. 일렁이는 축복의 불꽃을 눈에 한가득 담은 유 모가 인자한 미소로 권했다.
“우리 모두 이 순간을 소중히 합시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달콤하게 속삭여 주세요. 메리크리스 마스.”
심드렁하게 선 태국영의 귓속에 이승도가 나직이 말했 다. 메리크리스마스. 태국영은 그제야 얼굴을 풀고 상단 케이크의 크림을 손가락으로 떠 이승도의 뺨에 슥 그었다.
그것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태이경과 여은태가 크림 을 두 손에 묻힌 채로 파티 룸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장난질에 금세 모두가 크림 범벅이 되었다. 짜증을 내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한때 신영애의 파티에 줄창 출석도장을 찍었던 남강우조차 이런 식의 들뜨고 정 신없는 파티는 처음이었다.
“뭐,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네.”
남강우가 느른히 웃으며 곁에 선 송재희를 내려다보았 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던 송재희가 고개를 꺾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이제껏 보았던 어떤 세 공품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다고,남강우는 머지않 은 미래에 곧 깨닫게 된다.
먹고 싶은 건 날 것이든 불량식품이든 먹으라고 권했 던 태국영이 유일하게 고개를 내저은 것이 바로 술이었다. 술을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태아가 바로바로 해독해 버 리려는 본능이 있어 쉽게 피로해진다고 했다. 그것이 바 로 모체의 피로와 연결되기에 권하지 않는 것이지,그것으 로 태아가 잘못될 위험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술 한잔 하고 싶다.’고 했던 이승도는 그 설명을 듣고 서도 그냥 무알코올 와인을 골랐다. 태국영이 과음만 안 하면 된다고 다시금 말했지만 어쩐지 술 생각이 사라져 버 린 뒤였다.
여군호 가족과 남강우가 집으로 돌아가고 송재희와 아 이들이 잠든 밤,이승도는 태국영과 노천탕에 몸을 담갔 다. 기대하던 눈은 오지 않았지만 새카만 밤은 칼날 같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늘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 는 제 몸이 신기하고 즐거운 이승도는 이 상태를 맘껏 즐 기는 데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겨울의 노천탕도 그 유희 중 하나였다.
이승도는 저를 뒤에서 감싸 안은 태국영의 가슴에 기대 어 있었다. 노글노글 풀어진 몸이 잔잔한 물살에 녹아내리 는 듯했다. 오늘 하루는 빠짐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정서 적인 충만함에 도취되어 뒤를 돌았다. 태국영은 팔을 벌렸 고 이승도는 그의 허벅지를 타고 앉았다.
달콤하고 얄은 키스가 여러 번 오고 갔다. 별빛이 그들 을 하얗게 비추었다. 물 젖은 어깨를 태국영이 쓸어내렸 다. 이승도는 무알코올 와인에도 흠뻑 취해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국영아.”
이승도는 마치 졸린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태국영은
머리에 입 맞추며 대답했다. 응,하고.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취했나.”
“그런가 봐. 아주 조금?”
“괜찮아. 난 너 취하는 거 꽤 좋거든.”
“왜 좋은데?”
“술김을 핑계로 우리 승도는 솔직해지는 티켓을 씹어 먹거든. 정체되어 있는 나를 과감하게 이끌어 주기도 하 고.,,
“내가 그랬나…….,,
“응. 주정뱅이 이승도는 엄청 박력 있고 멋있어. 우리 별이도 너 취해있을 때 생겼잖아. 밖에다 싸지 말라고 울 먹울먹하는 바람에 내가一”
이승도는 재발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길게 눈 웃음을 지었다. 어린애처럼 무구하면서도 색정적인 미소 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승도는 손을 거두어 다시 그 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말만좀 조심하자.”
태국영은 습관처럼 응,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못 지킬
약속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냥 넘어갔다.
“아까 강우 씨랑은 사우나 다녀온 거야?”
깊이 없이 물은 질문에 태국영은 잠시 침묵했다. 이승 도가 의혹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물렀을 때 그가 무표정 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같이 뭐 좀 했는데 잡내가 배서 씻어내느라.,,
“무슨 잡내?”
“약간 비린내 같은 거?”
이승도는 물고기라도 잡았냐고 농담처럼 말했고 태국 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진실 속에 숨긴 원가가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승도는 솔직히 물었다.
“내가 더 물어보면 너 말 돌릴 거야?”
태국영은 의뭉스레 웃었다.
“아마도?”
“그럼 됐어.”
이승도는 깨끗하게 물러났고 태국영의 미소는 더 깊어 졌다. 무시나 방치가 아닌 신뢰가 그 부리임을 알기 때문 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쇄골을 깨물었다. 깨문 자리 를 입술로 덮었고 곧 그곳에는 자줏빛의 진한 영역표시가 남았다.
“네가 원했던 것처럼,강한 남자가 아니라 현명한 남자 가 되려고 늘 노력하고 있어.”
그가 기습적으로 고백했다. 아주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 였다. 이승도는 찰방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가끔 진짜 좆같아서,아,씨발,앞뒤 안 재고 다 엎어버 리면 편한데,그렇게 끓어오를 때 꼭 네가 떠올라. 가끔 네 가 울기도 하고 울음을 참기도 해. 혼내고 야단치는 너는 익숙한데 그런 너는 익숙하지가 않아. 넌 아무리 힘든 순 간에도 내 앞에서 대체로 울음을 삼켰으니까. 그래서 나 는 그 울음을 참는 얼굴에 너무 약해. 나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어.”
취한 것은 이승도 자신이 아니라 마치 태국영 그 같았 다.
“약해진다는 것은 결국 약점을 드러낸다는 거야. 누군 가 그걸 겨냥해서 내 목을 물어뜯고 나를 죽일 수도 있다 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그게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아. 나 는 어릴 때부터 늘 너한테 최고의 남자가 되고 싶었어. 그 게 유일한 꿈이었던,보잘것없는 놈이었어.”
이승도는 그의 머리를 소중히 보듬어 안았다. 아기처 럼 다소곳이 안겨오는 태국영에게서는 포악했던 어린 날 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나한테 신뢰를 보내주는 한,나는 언제나 네가 보 지 않는 곳에서도 노력하고 있을 거야. 나를 믿어 줘.”
그의 고백은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심금을 울렸다. 온 세상이 저로 가득 차 버려서 다른 것에는 눈을 돌릴 기회 조차 없었던 그가 안쓰러웠을 때가 있었다. 너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나만 보고 살아가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지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 다.
“국영아. 네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니까 하나 부탁할 게.,,
이승도 역시 곪아 왔던 가슴 속 응어리를 그의 앞에서 풀어헤쳤다.
“네가 용서를 빌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꼭 내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태국영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이승도는 뜨겁게 굳어진 그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이경이가 생겼던 그 순간의 일은 강간이 맞아. 앞으로 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야. 다만,나는 그때의 네가 불가피한 상황에 있었다는 걸 지금은 이해해. 너는 참으 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밀었어. 나는 늘 그랬어. 마지막 순 간에 모질지가 못해서,방황하는 너를 자꾸만 난폭하게 만
들었어. 무시하려면 끝까지 했어야 했는데 나는 너에게 연 민을 가졌어. 너를 가끔은 품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 무런 정보도 없이 나와 단둘이 갇혔던 너는,그 어릴 때부 터 나만 보고 살아온 너는,옳고 그른 걸 분별할 수 없었 고 나도 그걸 금제하는 법을 몰랐어.”
이승도 역시 고백했다.
“지금의 나는 너를 사랑해.”
태국영의 눈동자는 정적으로 멈춰 있었으나 그 안의 동 요를 채 다 숨기지는 못했다.
“너를 용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
이승도는 그의 뺨에 이를 세웠다. 그가 하는 것처럼 잇 자국도 키스 마크도 남지 않았지만 제가 묻혀 놓은 숨결 은 참으로 오래갔다.
“미안하다고 말해. 잘못했다고 말해. 언제든.”
태국영은 그 말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훌쩍 덜어낸 기분 이었다. 별빛이 쏟아졌다. 캄캄하지만 눈이 부신 밤이었
“어머나? 진짜? 태국영이 정말 그 정도로 애처가였어?
송재희는 신영애를 만난 이래로 그렇게 부담스럽게 눈 을 반짝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태국영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신영애는 그간 궁금했던 질문들을 폭탄처럼 쏟아 붓기 시작했고,결국 쇼핑은 시작 도 못 한 채 카페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 고 태국영을 대상으로 했던 그녀의 질문 공세는 당연하게 도 이승도를 중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둘을 보면 꼭 베테랑 조련사랑 잘 길들인 맹수를 보는 것 같아요. 국영 오빠는 겉보기와는 달리 되게 다정하고 어리광이 많구요,승도 오빠는 오나오나 잘 받아주는 편이 에요.”
“…어리광?”
신영애의 청초한 민낯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표 정이긴 한데 뺨이 불규칙하게 꿈틀거렸다. 송재희는 그녀 의 얼굴에 비치는 열은 감정의 표동을 읽지 못한 채 고개 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네. 국영 오빠는 하루 종일 승도 오빠 뒤꽁무니만 졸 졸 따라다닐 때가 많은데요,그게 진짜 제가 보기에도 엄
청 귀찮겠다 싶을 정도거든요? 그런데 승도 오빠는 자기 할 일 다 하면서 용케도 그걸 다 포용해 주더라고요. 얼굴 내밀면 쓰다듬어 주고 입술 내밀면 보보해 주고,등에 달 라붙어 있는 국영 오빠 간간이 어르는 동시에 애들이랑 퍼 즐도 맞추면서 잘 놀아요. 완전 멀티 플레이어. 짱짱.” 송재희는 양 엄지를 아낌없이 들어 보였다. 신영애는 못 들을 것을 들은 마냥 귀를 털어내고,팔뚝을 삭삭 비벼 댔다. 소름이 올라와 있었다. 의외로 로맨티시스트일지도 모르겠다,그렇게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실제 증언을 들 은 것은 천지 차이였다. 송재희의 말만 들어보면 태국영 은 정말 조련사에게 예붐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린 짐 승 같았다.
“어 디 잠깐 외출할 때는 늘 양손에 승도 오빠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 가득 싸 들고 들어오고요,오빠 낮잠 들면 다 리도 주물러주고……
“아니. 됐어. 그만해.”
신영애는 해쓱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송재희의 말을 막 았다. 왠지 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제가 아는 가장 강하고 매력적인 남자에게 ‘말도 못할 애처가’ 도장 을 찍어놓는 것에서 그치기로 했다. 더 들었다가는 소름 돋을 만큼 부러운 일상에 괜히 흙탕물을 튀기고 싶은 심술
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일어나. 우리이제 진짜 쇼핑가자.”
신영애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송재희는 어리 둥절해하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남강우가 붙여 놓은 경호원들이 몇 발자국 뒤에 따라붙었다. 기존 경호원들은 남강우가 스파에 쳐들어온 다음 날 바로 주변에서 사라졌 다. 신영애가 ‘그 오빠들 뒤지게 맞고 다들 제 집으로 쫓겨 났어. 죽진 않았으니까 걱정 마.’라고 귀띔해 줘서 조금 안 심했다.
“너 속옷들 다 작아졌다고 했지?”
“네. 살이 쪘더니 좀 죄어요.”
“속옷은 몸에 딱 맞는 걸로 입어야 도?. 오늘은 브라 사 이즈도 다시 재고 속옷부터 싹 골라 보자. 슬립은 입어?”
“아뇨. 전 그냥 잘 때 반바지에 민소매 티가 편해서요.”
“그래. 그럼 잠옷은 패스.”
신영애는 한 속옷 매장에 들어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경호원들이 조금 난처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 디까지 들어가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신영애 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입구에 있어. 괜히 따라다니다가 오해받지 말고.
남자들은 매장의 크기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강우는 거리를 유지하는 기본 척도로 가장 상대하기 까 다로운 여홍재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가 살기를 드 러내고 습격했을 때 곧장 막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거리 는 반드시 남겨두어야 했다. 이 정도 반경이라면 가능했 다.
찾는 것이 있냐며 직원이 다가왔다. 신영애가 송재희 의 등을 떠밀며 대답했다.
“여기,이 아가씨 치수부터 좀 재 주세요.”
송재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윗옷 을 모두 벗어야 한다는 말에 쭈뼛거리며 브래지어까지 끌 러 놓았다. 직원은 줄자를 들고 윗가슴과 아랫가슴을 쟀 다.
“많이 마르셨네요. 그래도 저희 매장에는 65언더 사이 즈도 예븐 속옷이 많으니까 한 번 쭉 둘러보세요.”
송재희는 매장으로 나와 디자인을 골랐다. 신영애는 무 난한 것들만 집중적으로 보는 그녀를 조금 타박했다.
“애는. 옷도 다 스타일마다 필요한 것처럼 속옷도 마찬 가지야. 기왕 온 거 이것저것 다양하게 좀 보?. 어,이거 괜 찮네.”
신영애가 권한 것은 훅이 앞에 달린 망사 세트였다.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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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라색과 핫핑크의 중간 정도인 것이 딱 눈에 띄어 그 것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신영애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 를 갸웃했다.
애 좀 늦네?
속옷 피팅이라는 것이 원래 조금 오래 걸리는 작업이 긴 했다. 그러나 이전의 남강우 대폭발 후로는 만사에 조 심을 기하는 중이었다. 신영애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경 호원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별 낌새는 없었지만 그들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경호원 중 하나가 신영애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 했다.
“확인해 봐.”
신영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송재희가 들어가 있는 탈의 실로 다가가 노크했다.
“재희야?”
그러자 잠시 뒤 ‘네.’하고 작은 반응이 돌아왔다. 원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목소리가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신영 애는 희미하게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언니 들어가도 돼?”
“…아,괜,괜찮아요! 속옷 훅이 너무 낯설어서,조금
헤맸어요! 금방 나갈게요!”
후다닥,안에서 송재희가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 다. 알게 모르게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아도 옷을 다시 입는 기척밖에 잡히지 않았다. 괜한 생각이었네,신영애는 안심 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송재희가 곧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입어보니까 어때?”
“아…… 네. 예뻐요. 이거 살게요.”
직원이 재발리 다가와 송재희의 손에 들린 속옷을 포장 대로 가져다 놓았다. 신영애는 좀 더 보라고 했지만 송재 희는 점심 먹은 것이 얹힌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 지 않아도 낯빛이 조금 창백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신 영애는 더 권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송재희는 경 호원들이 이끄는 차의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잘 쉬고 괜찮아지면 연락해.”
신영애가 차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었다. 밝 게 웃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송재희는 그냥 명하니 앉아있었다.
표적을 찾는 것은 꽤 신중하게 진행되었으나 그리 어려
운 일은 아니었다. 인간을 타락게 하는 것은 무궁무진했 고 이미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또한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표적이 된 남자는 규모가 제법 큰 동물병원을 운영하 고 있었다. 이원표가 그를 점찍은 계기는 사치가 심하고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는 성향 때문이었다. 낮에는 신사처 럼 가운을 입고 동물들의 자비로운 의사 행세를 했으나, 밤이 되면 그럴싸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냈다. 유부남이면서도 룸살롱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것은 애교 에 불과했다. 간혹 별식을 먹듯 나이트클럽에서 여자들에 게 약을 먹여 겁탈까지 일삼던 놈이었다.
이원표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생각했다. 그는 룸살롱 촌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매춘부를 물색했다. 한 달에 기천은 우습게 벌면서도 빚에 시달리던 여인이었다. 이원표는 그녀의 억대 빚을 탕감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표 적을 불법 하우스에 끌어들이도록 주문했다. 그녀는 충실 하게 그 약조를 이행했다.
표적은 전문 타짜들의 병 주고 약 주기 식 작업에 금방 걸려들었다. 그는 곧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라 병원을 처 분하게 되었고,그도 모자라 도박장에 딸린 사채업자들에 게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
을 저주하면서도 그의 발버둥은 늘 도박으로 끝이 났다. 사채업자들의 험악한 협박에 궁지에 몰렸을 즈음,이원표 는 구원자의 날개를 달고 표적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빚을 모두 없애주겠다고 말했다.
빚. 빚. 그놈의 빚. 표적은 기괴하게 빛나는 눈을 번쩍 이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시켜만 달라며 발밑에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제 빚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할 눈이었다.
「저,정말…… 정말 그렇게만 하면 되는 겁니까? 정말, 그거면 됩니까? 더,더 할 것은 없나요?」
그는 몇 번이고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어마 어마한 빚을 없애는 조건으로는 너무 쉽고 위험부담이 없 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였다. 세상에 눈먼 듯이 굴러들어온 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사채로 통감할 법 도 되었건만,참으로 어리석은 작자였다.
허나 구태여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기에,이원표는 자애 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밑그림이 완벽하게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여홍재는 숨통이 트인 듯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이렇게 수완 좋은 아군이 있어 다행이야. 웬 명청하고
성질 급한 것들이 주위에서 장알거리니 나도 이러다 신경 증에 걸릴 참이었거든. 네 존재가 이렇게 고맙게 느껴질 줄은 처음에는 정말 몰랐지.》
“고마워할 필요 없다. 난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문 의 명예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원표는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냉랭한 대꾸에도 여홍 재는 불편한 기색 없이 호쾌하게 웃을 분이었다.
《역시 너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한 게 참 마음에 든다니까. 그럼 미끼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된 건가?〉〉
“말했듯이 언제든 상관없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네 쪽 일 텐데. 난 그리 재촉하는 성미가 아니지만 넌 지나치게 늦는군. 태국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상 끌었다가 는 도리어 우리가 위험해질 수가 있어.”
《아아. 알아. 안다고.〉〉
한숨 섞어 중얼거린 그가 돌연 희한한 웃음을 흘렸다. 마치 악랄한 장난질에 맛을 들인 몹쓸 사내아이가 내뱉을 법한 웃음소리였다. 지금쯤 여홍재도 압박감을 느끼고 한 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반응 이 영 딴판이었다. 이원표가 흐리게 미간을 좁혔을 때였 다.
《걱정할 것 없어. 태국영이랑 남강우가 아주 화끈하게
나온 것이 우리에게 도리어 득이 됐거든.》
“무슨 말이지?”
《불안에 덜덜 떨던 최명욱이 결국 가진 패를 다 털어놨 거든. 놈이 그간 비장의 카드를 꽁꽁 감춰두고 있었지 뭐 야.》
“비장의 카드?”
《그런 게 있어.》
이원표는 여홍재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조금 거슬렸 으나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 일 처리만 확실하면 뭐가 됐건 상관없겠지. 단,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물론이지. 너에게도 복수의 기회가 있어야 할 테니까. 내가 설마 그 정도 약속도 못 지키겠나.》
여홍재가 내민 손을 잡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이원표가 내건 조건은 단 두 개였다. 첫째는 이승도의 신변이었고 둘째는 제 가솔들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여홍재는 은밀하게 오고 간 약조를 공고히 다졌다.
《태국영의 암컷을 처리하는 건 오롯이 네 몫이야. 어떻 게 망가뜨리건,어떻게 죽이건 너 좋을 대로 하라고.》
열흘 사이 무려 여덟이나 살해당했다. 그중에 제 모습 을 보전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하나같이 능지처참 을 당한 토막 상태로 심장이 뽑혀서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로 발견이 되었다.
일족들 사이에서 전쟁의 형태가 아닌 이런 식의 은밀 한 학살은 드문 편에 속했다. 그 적은 예도 그나마 알력다 툼이나 상권 다툼이 심했던 시기에 벌어진 일로,각자 분 야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거의 없다고 봐 도 좋았다. 평화로운 시절이 일족들에게 출혈을 피하게끔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불화가 곧 큰 싸움으로 번지 고 이것이 가문의 멸망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누적 된 역사가 명료하게 밝히고 있었으니,제가 가진 것들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들로 하여금 자연히 몸을 사 리게 만든 것이었다.
이 괴이한 연쇄살해 사건은 당연히 여은태의 이름도 덮 을 만큼 큰 화제가 되었지만,큰 동요까지 동반하지는 못 했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희생자들 모두 연회장에서 한 번쯤 최 가의 편을 들었 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최 가의 편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그 더러운 매춘에 동참했던 놈들이라는 건 굳이 증거가 없
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것은 그 매춘 사건에서 파생된 표적 살 해였다. 희생자들의 피를 묻힌 손이 누구인지는 유추해 볼 필요도 없었다. 증거는 없이 심증만 가득한데,그 심증 이 저를 가리킬 것을 빤히 알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 는 남자가 둘이나 있었다.
태국영과 남강우,강력한 동기마저 가지고 있는 둘 중 누구이나가 모호할 분이었다. 둘 중 하나거나 둘 다일 것 이다. 그 의혹을 부정하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최 가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들은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 다. 여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비난 여론은 일족 전체를 휩쓸어 버린 상태였다. ‘좀 불쌍하네.’ 정도의 한마디 편이 라도 들었다가는 도매금으로 잡쓰레기 취급받을 것이 빤 해 모두 방관하는 중이었다.
남은 매춘 동기 놈들끼리만 발을 동동 구르다 두려움 을 못 이기고 여군호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여군호는 그들 의 간곡한 요청들을 모조리 불허했다.
태국영을 조사해 달라 하는 말에는 ‘태국영이 범행했다 는 증거부터 가져오라’며 일침을 놓았고,저희들을 보호 해 달라는 말에는 ‘친위대가 제 잘못에 제 발 저린 놈들이 나 지키려고 있는 줄 아나’며 호통을 쳤다. 소득 없이 돌아
간 이들 중 두 명이 또 사흘 안에 같은 방법으로 살해되었 다-
이쯤 되어 일족들 사이에는 괴상한 의문들이 싹트기 시 작했다. 여군호는 매춘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건가,여은 태를 키워주고 있다는 태국영의 등대를 보호하기 위해 벌 써부터 반석을 깔고 있는 건가,여군호가 여은태 때문에 태국영의 짓을 일부러 묵인해주고 있는 건가,등등의 의문 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여군호는 태국영과의 빚잔치와는 별개로 굉장히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판단한 것에 불과했다. 아 무 증거도 없이 한 가문의 가주를 살해범으로 특정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살해의 법칙이 발견되었다 한들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당위성이 조금도 없었기 때 문이었다.
보호를 요청했던 이들이 평소 행실이 좋아 평판이 괜찮 았던 이들이라면 충분히 고려를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 나 쾌락에 눈이 멀어 같은 일족들에게도 손가락질 받고 있 는 놈들을 위해서는 조금의 호의도 아까웠다. 제 자식들처 럼 귀하게 여기는 친위대를 그런 일에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여군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친위대
를 소환해 이르기를,‘살해자가 남긴 증거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지만,이것이야말로 여군호가 태국영을 싸고돌기 위한 말장난이었다.
여군호는 친위대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장 잘 알 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제가 ‘살해자를 밝혀내라.’라고 말 하면 친위대가 필시 그 명을 수행해낼 것이었기에 다른 표 현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친위대는 조사 끝에 살해자가 남긴 증거는 무엇도 없었다고 고했다. 그들이 훤히 읽고 있는 진실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역사서에만 활자 로 기록되어 있을 분이었다.
그리고 최명욱은 제 이전 고객들이 줄줄이 죽어나감에 따라 불안증에 시달렸다. 그는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 일어나길 반복했고,그것은 자연스레 수면부족 으로 이어져 신경이 바늘처럼 돋아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여홍재를 닦달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조 급증 묻어난 어투로 계속 들볶으니 여홍재도 덩달아 점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여홍재는 대보름 때까지 참으려 했었다. 그때가 되면 태국영이고 여은태고 만월의 폭발적인 음기에 시달려 반 착란 상태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역 시도 기다림을 더 지속할 수는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 가끔씩 소름 끼칠 만큼 뒷골이 싸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살기 어린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 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는 제 집 안에서도 그런 써늘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여홍재는 그것이 공포로 인해 제가 불러온 착각임을 몰 랐다. 그래서 그 역시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고,마침 들려 온 희소식에 과감하게 계획을 앞당길 용기가 생겼다. 최명 욱이 송재희를 뒤흔들 결정적 무기를 끼내 들었기 때문이 었다.
여홍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왜 진작 그 애기를 하지 않 았나 추궁했다. 최명욱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했지 만,여홍재는 곧장 깨달았다. 이 명청한 놈이 나름 예전부 터 박해인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작 그런 사사로운 정 때문에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여기 까지 끌고 오다니,정말 한심해서 다시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최명욱도 윤봄이도 제 손아귀에 쥐고 있어야만 했다. 신경증에 반쯤 미친 그 들은 무모한 방패로 소모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속이 터질 만큼 답답하다고 이제 와 버릴 수는 없
“오늘 송재희는 반드시 약속장소에 나타날 거야.” 최명욱은 며칠 사이 거멓게 죽은 얼굴로 나타나 그렇
게 자신했다. 여홍재는 가면 같은 미소를 뒤집어쓰고서 그 를 격려했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 곧 모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될 거야.”
“형수는?”
“네 형수는 보호 속에 잘 지내고 있어. 언제라도 내가 부르면 달려와서 우리를 지원사격해 줄 거야.”
“그래. 형수라면 태국영이 무너지는 꼴을 보기 위해 목 숨이라도 걸겠지.”
여홍재는 간사한 눈의 이채를 숨기며 그럴 일은 없다 고 말했다. 최명욱은 불신의 눈으로 여홍재를 노려보았으 나 그분이었다. 여홍재가 최명욱 자신과 윤봄이를 어떤 식 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 나 그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건 저와 목표가 같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집안 단속은 잘하고 있나?”
여홍재의 물음에 최명욱은 싸늘하게 답했다.
“내 가솔들은 가주를 무참하게 잃은 상처를 채 씻기도 전,다음 대 가주인 내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마저 위
협당하고 있는 것에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 내 삼대 직계 까지는 어차피 싫어도 이미 나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 는 상황이기도 하지. 불쾌하니 남의 집안일은 그만 신경 써 주면 좋겠군.”
최명욱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산장을 벗어났다. 본가 도 버리고서 이 첩첩산중에 은거한 지 벌써 보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태국영의 발톱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르 니 도리가 없었다.
최명욱은 산 중턱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거니 시리게 얼어 버린 엔진이 힘겨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는 예열 없이 액셀을 밟았다. 비포장도로에 차체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차도에 접어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나서야 최명욱은 꽉 막아둔 숨을 쉬었다. 그는 닷새 전 송재희를 찾아갔던 날 을 떠올렸다. 탈의실과 연결된 직원 통로를 확보하는 것 은 쉬웠다. 제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면 마음의 평정을 유 지해야 했는데,그것이 조금 까다로웠을 분이었다.
그는 송재희가 탈의실에 들어오고 막 윗옷을 벗었을 때,문 아래로 메모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밀어 넣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 기를 쓰고 단속했던 제 정체가 조금이라 도 누군가의 감각에 걸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직
원 통로를 벗어나며 송재희가 목 졸린 듯한 들숨을 마시 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접촉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송재희가 가드들을 어떻게 따돌릴 것인지는 제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제가 정한 장소에 나타날 것이 었고,저는 그녀에게 주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최명욱은 속도를 올렸다. 탁한 구름이 오늘도 건조한 빛을 부리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나,그는 스치듯 생각했다.
종가 모임에서 제 피붙이들이 도륙되는 꼴을 보고 돌아 온 윤봄이가 문제였을까. 그것에 힌트를 얻은 제 형이 등 대를 찾아내 매춘을 벌일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몇 번 안았던 박해인에게 마음을 주 기 시작했던 제 탓일까.
고개를 털어 상념을 날렸다. 어차피 답은 없다. 파국만 이 남았을 분이다. 최명욱은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해 비상 계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다. 송재희와 신영애 가 단골로 다니는 스파 클럽이었다. 그는 글러브박스에 넣 어둔 앨범 하나를 들고 차에서 내려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평평한 계단이 춤을 추었다. 웃기는 소리지만 현기증 이 났다. 보름 넘게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었다. 괜찮았 다. 이 지독한 불면증도 곧 해결이 될 것이었다.
끼이이이이一
녹슨 철문은 소름 끼치는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최
명욱은 환풍구 통로를 탔다. 여홍재처럼 완벽한 은폐의 능 력이 없는 그로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분함이 끼어 들 자리는 없었다. 그는 먼지가 가득한 좁은 곳을 불만 없 이 기어갔고 이내 송재희가 예약한 스파 룸에 도달했다.
그는 환풍구 덮개를 뜯어내고 아래로 훌쩍 내려섰다.
룸 안은 인위적인 향과 수증기로 가득했다. 욕조에 걸린 수도꼭지가 뜨거운 물을 콸콸 토해내고 있었다. 비치체어 끝에 걸터앉아 잔뜩 굳은 낯을 한 송재희가 있었다. 힐긋 입구를 곁눈질한 최명욱은 뜯어낸 환풍구 아래에서 더 나 아가지 않았다. 비상시 언제라도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가져온 앨범을 가볍게 던졌다. 송재희는 망설이 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앨범 안에는 일 년 동안 아기가 자 라는 과정들이 배곡하게 담겨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딱딱한 로봇 같았던 그녀의 얼굴이 무너졌다. 실금 이 갔던 방어형 민낯이 완전히 일그러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재희는 앨범의 중간에 끼어 있는 글귀 를 읽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 앨범을 보고도 이 아기가 네 아기가 맞는지 의심한 다면 지금 당장 나를 밀고해도 좋아. 하지만 내 먼지 같은
양심을 걸고 말하건대 이 아기는 네가 낳은 박해인의 아기 가 맞다. 나는 박해인에 대한 일말의 애정으로 형과 형수 의 이목을 속여가면서 이 아기를 배돌렸어. 믿기지 않겠 지.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나조차도 알지 못했으니까.』
송재희는 울었다. 죽은 줄 알았던 제 아기가 살아있음 에 기뻐하고,이 아기가 저를 찌를 칼이 됐음에 가슴 아파 했다.
『뒷장을 넘겨 보?. 태국영이 박해인을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놈은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너도 죽일 거야. 물론 남강우도 죽겠지. 너희들은 결국 태국영이 제 암컷을 위해 구축하려는 세상의 희생양일 분이다.』
최명욱은 이브를 꾀던 뱀처럼 송재희를 유혹했다. 그 의 말은 너무나 신빙성이 있었다. 박해인의 안부를 묻던 제 질문에 남강우가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돌렸 던 것도 최명욱의 삿된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태국영이 라면 이승도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부숴서 무로 돌리고 깨 끗한 기반을 만들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남자였다.
『명심해,송재희. 네 아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분이야.』
송재희는 서러운 얼굴로 최명욱을 바라보았다. 최명욱
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앨범을 배앗아 들었 다. 그리고 환풍구를 통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겨진 송재희는 혹시라도 남았을지 모르는 그의 흔적 을 지우느라 온갖 짙은 향을 욕조에 풀었다. 바깥에서 노 크 소리가 울렸다. 송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가장 해 아직 목욕 중이라고 대답했다. 발가벗은 몸을 뜨끈한 물에 담근 그녀는 그냥 울었다.
너무나 슬프고 외로웠다. 끝인 줄만 알았던 악몽이 다 시금 희망을 좀먹고 있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렇게 눈부신 바깥세상에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고,시궁창의 역 한 냄새가 길게 찢은 아가리를 벌린 채 웃고 있었다.
이승도는 간간이 전 직장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중에서 특히 제 후임으로 왔던 수의사 이재혁이 가장 빈 번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 는 화제는 영웅이였다.
퇴직한 이후 영웅이는 툭하면 단식투쟁을 했고 또 한 차례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녀석을 보러 가면 대놓고 등을 돌리며 싫은 티를 팍팍 낸다며 이재혁은 매우 서운해
했다. 이승도는 제가 너무 오나오냐 품 안에서만 키워 미 안하다고 사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아. 이번에 진료팀에 수의사 한 명이 더 들어왔어요.
그간 혼자 애들 다 돌보느라 뼈가 갈리는 느낌이었는데 이 제야 숨통이 트이네요. 그간 이 선생님은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혼자 다 하셨어요.』
근 2주 만에 연락해 온 이재혁은 문자메시지만 봐도 몹 시 들뜬 상태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승도는 픽 웃었다.
그 고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규모가 큰 시립동물원은 수의사만 10명이 거뜬히 넘지 만,소규모 사설동물원의 자금난과 인력난은 심각했다. 제 가 있던 동물원은 연구와 복지 담당 수의사 한 명과 동물 병원에 한 명,그리고 진료를 총괄하는 이승도 자신,이렇 게 셋이 전부였다. 서로 워낙 바쁘다 보니 하루에 한두 번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아무리 수의사 좀 늘려달라고 호 소해도 동물의 수가 많지 않다는 걸 핑계로 바븐 시기에 만 잠깐 임시고용 수의사를 보충해 주는 정도였다.
『잘됐네요. 정규직은 늘릴 계획 없다고 못을 박았었는 데.』
『요즘 사정이 꽤 좋아졌나 봐요. 겨울인데도 궂은 날 아 니면 관람객들이 꽤 많이 보여요. 이게 다 이 선생님이 귀
한 새끼동물들을 많이 받아 주고 가신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아가들은 다 건강하게 잘 크고 있죠?』
『어휴. 말도 마세요. 다들 천방지축이에요.』
대화의 마지막은 늘 같았다. 어디 아프거나 구름다리 건년 아이들은 없는지,새로운 아기들이 태어나는 경사가 있었는지,뭐 그런 것들이었다.
『저,그런데 이 선생님. 영웅이 말입니다.』
나름 아기들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나 싶었던 차에 이재 혁이 다시금 문자메시지를 보내 왔다. 이 녀석이 또 사고 를 쳤나 싶어 ‘영웅이가 왜요?’하고 곧장 물으니 그가 답 했다.
『영양실조가 심한데 계속 섭식을 거부해요. 제가 보기 에 이대로 두면 진짜 애가 굶어 죽을 기세거든요. 윗선에 서는 이 상태가 계속되면 그냥 포기할 분위기고요. 이미 우리에 내보내지 않은 지도 며칠 되었어요. 관람객들 보 는 앞에서 죽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소문이 좀…… 아시잖 아요?』
이승도는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울음을 참게 만들었던 원숭이 한 마리를 끄집어 올렸다. 새끼를 잃고 우울증에 빠진 어미 원숭이가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결국 자살한
그 사건을 말이다. 꽤 지난 일이었으나 녀석의 슬픔에 잠 긴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승도는 고민하다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웅이는 원래 저한테 의존도가 심했어요. 그게 지금 와서 타이르고 야단친다고 고쳐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원장님께 말씀드려서 입양할 수 있는 방 법을 강구해볼 테니까,죄송하지만 그동안 선생님께서 애 좀 써 주세요. 영웅이가 사람 말을 제법 알아들어요. 가셔 서 제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주세요. 이를테면 ‘이승도 선 생님 집에 가.’ ‘이승도 선생 집.’ ‘가자.’ ‘곧 가.’ 이런 말 들이요.』
이재혁은 알겠다고 당차게 답을 보내 왔다. 이승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 곧바로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복직할 생각이 없냐며 닦달부터 해 댔다. 수의사가 바뀐 뒤로 몇은 죽어나가고 몇은 병으로 앓아눕기 일쑤라며,이번에 인원 충원을 한 것도 그것 때 문이라고 하소연했다.
“원장님. 그건 이재혁 선생님 잘못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네가 있을 때는 문제없던 아이 들이 자네 퇴직한 뒤부터 갑자기 아프거나 죽거나 아주 난 리가 아니라니까!》
원래 동물들은 갑자기 아프거나 죽는 일이 태반이었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아픈 것을 참는 동물들을 알아채지 못 하고,그걸 모르고 지나쳤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 에 가서 발견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수의사는 원래 동물들에게 수의(壽衣)도 입힐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떠나서 눈물을 흘릴 틈 도 주지 않는다. 그것이 동물들을 다루는 수의사의 숙명이 었다. 다만 이승도 자신은 조금 특별한 재주가 있기 때문 에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분이었다.
“어쨌든 제가 지금 복직은 힘들고요,일단 영웅이 입양 을 좀 하려고 전화를 드렸거든요.”
《영웅이? 一아,그 골칫덩어리 원숭이 녀석. 아주 배짝 말라서 어디 내놓지도 못해. 관람객들이 동물 학대니 어쪄 니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원장은 혀를 끌끌 찼다. 이승도는 동물원 자체가 사실 은 동물 학대의 온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관두 었다. 표현이 거친 것은 성격이라 그런 거고,원장은 다른 사설 동물원에 비해 꽤 동물들이 쾌적하게 살 수 있게 배 려해 주는 편이었다. 인건비 깎아서 동물들의 환경에 더 보태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기에 이승도 자신도 고된 업무 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던 거였다.
“분양비는 드릴게요. 다른 동물원에서 원숭이 한 마리 데려오실 수 있을 정도로요.”
《아,됐어. 고 녀석 어차피 사이테스(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 교역에 관한 국제협약. 1 급은 개인이 사육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이급인데다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 을지 골골하는 앤데 분양비는 무슨 분양비야. 안 그래도 저놈 콱 뒷산에 버려버릴 수도 없고 어쪄나 고민이었는데 잘됐네. 언제 데려갈 거야?〉〉
“일단 영웅이가 있을 곳을 대강 만들어 둬야 해서요,일 주일 내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알았어. 오기 전에 전화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고맙습니다,원장님.”
《간지럽게 왜 이래. 끊어.》
원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승 도는 헛바람 같은 웃음을 뱉어냈다. 처음 취직하고 원장 의 이 괴상한 성격에 당황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어휴. 저 망할 놈의 새끼들. 덥다고 입맛이 없어? 아 주배가 불렀지.」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결국 소고기나 한 덩이씩 처먹이 라고 특식 예산을 불려주던 원장이었다.
“너 내 집을 도대체 뭘로 아는 거야.”
태국영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뜨끔한 이승도는 슬쩍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태국영은 제가 걸터앉은 침대의 바로 뒤에서 팔베개를 한 채 모로 누워 있었다. 칼처럼 단 정한 그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너 진짜 내 집에 동물원이라도 차릴 셈이나. 원숭이 다 음은 뭔데. 호랑이? 표범? 낙타?”
“여기가 왜네 집이야.”
태국영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대꾸했다.
“나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 잃었어? 내가 지금 네 집에 얹혀사는 건가? 나 네 기둥서방이 꿈이었는데 그 거 실현된 거야?”
태국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줄줄이 내뱉었다. 이승 도는 몸을 틀어 그의 머리 아래 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 집이라는 말이지.”
“…오?. 애말하는 것 좀 봐.”
태국영은 실성한 것 마냥 연거푸 실소하더 니 고개를 저 었다.
“우리 승도 여우 다 됐네. 못 당하겠어.”
뒤통수가 얼얼했다. 한 방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이
승도는 다분히 꼬이는 식으로 태국영의 귀 뒤를 슬슬 어루 만졌다. 태국영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원숭이 우리 하나만 만들어 주라. 펜스 좀 넓게 쳐서 그 안에 큰 바위랑 굵은 나무 좀 심고,추울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작은 집 하나만 있으면 될 거야. 정원도 넓잖아. 응?”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개 너 보고 싶어서 징징거리 는 거잖아.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우리에 두면 달라질 게 뭐 가있어.”
“그래도 내가 주면 밥은 먹어. 동물원에서도 하루에 한 두 번씩 얼굴 보여주면 그래도 잘 버티던 애야. 살릴 수 있 는 애를 죽게 둘 수는 없잖아.”
태국영은 한숨을 지었다. 태생적으로 저희 수컷들은 제 집안에 다른 동물의 잡내가 배는 것을 굉장히 불쾌하 게 여겼다. 이승도가 거둬 먹이고 있던 애들이야 그놈들 을 두고는 절대 그 집을 버리지 않을 테니 어쩔 수 없이 받 아준 거였지만,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태국영은 진동하는 휴대폰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옆으 로 팔을 뻗어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이승도의 이마 를 검지로 툭 밀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후로 네가 늘려도 되는 식구는 네
가 낳는 내 아기분이야. 알아듣지.”
이승도는 기우뚱 뒤로 기운 몸을 오뚝이처럼 곧추세우 며 배시시 웃었다.
“응. 약속할게. 고마워.”
“다음엔 아무리 녹여도 안 넘어가. 진짜야.”
“알았다니까. 그런데 또 어디 가려고?”
이승도는 러닝셔츠를 벗으며 욕실로 걸어가는 그의 뒷 모습에 대고 물었다. 태국영은 대수롭지 않게 ‘응. 두어 시 간이면 될 거야.’ 대답하며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요새 저렇게 바본지 모를 일 이었다. 늘 한량처럼 제 곁에 딱 붙어서 골골거리던 남자 가 갑자기 바깥으로 나도니 점점 원가 의심스러워졌다. 집 에 들어올 때마다 샴푸 냄새를 풍기는 것도 몹시 수상했 다-
재 요새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건가.
저 결벽적인 성격에 바람피울 일은 없고,남은 방향성 은 그쪽분이었다. 하지만 이승도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제 믿음이 그를 현명한 남자로 만드는 필수적인 조건이라 면,자신은 그냥 신뢰를 보내주고 싶었다.
뭐가 되었건,그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
고 있을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영웅아. 선생님이야. 그거 자꾸 건드리면 또 꺼져.》
이재혁은 매우 드문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견 우와 직녀를 연결해 주었던 오작교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그와 다른 게 있다면 제가 연결해주고 있는 게 사람 둘이 아니라 사람 하나와 동물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영웅이는 이승도의 얼굴이 떠 있는 휴대폰을 들이대자 마자 이산가족 상봉한 마냥 광분해서 달려들었다. 녀석이 꺄악꺄악 울어대며 손으로 자꾸만 만 치는 바람에 벌써 네 번이나 끊어졌고,다섯 번째 영상통화에서 이승도가 차 분하게 달래자 영웅이는 그제야 손을 거두고 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만 흘렸다.
《우리 영웅이 선생님 집에서 같이 살까? 여기 너 말고 다른 동물들 많은데 무섭거나 싫어도 잘 참을 수 있어?》
영웅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끼이끼이 울었다. 이승도 가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이 영웅이 살 집 만들고 있어. 다섯 밤 자고 나
서 데리러 간다고 약속해 놨으니까 그때까지 맘마 잘 먹 고 있어야 돼.》
끼잉. 끼이잉.
《수의사 선생님이 주는 밥 안 먹으면 없던 일로 할 거 야. 선생님 갈 때까지 착하게 있어. 알겠지?》
영웅이는 머리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기웃거렸다. 마 치 그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여,녀석이 정말 이승 도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는 건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영 웅이가 참지 못하고 또 액정을 건드리는 바람에 통화는 또 끊어졌다. 곧장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음성통화였다.
“예,선생님.”
이재혁이 전화를 받자 영웅이가 팔을 휘적이며 휴대폰 을 뺏으려 안달했다. 이재혁은 녀석의 손이 닿지 않게 자 리에서 일어났지만 영웅이는 기어이 그의 몸을 타고 올라 어깨에서 난리를 쳤다.
《닷새 뒤에 영웅이 입양하는 걸로 원장님이랑 정했어 요. 그때까지 좀 부탁드릴게요.》
“아휴. 정말 다행이네요. 몇 시에 오세요?”
《한 일곱 시쯤 될 것 같아요. 원장님이 저녁 같이 하자 고 해서요.》
“아하. 그럼 온 김에 사육사들도 다 보고 가요. 다들 선
생님 보고 싶어 하는데.”
《음…… 제가 지금은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인사만 한 번씩 하고 바로 돌아와야 할 것 같아요. 내년 봄쯤,대 충 4월 이후면 다 나을 테니까 그때쯤 회식 날 맞춰서 꼭 놀러 갈게요.〉〉
“아……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하십니까?”
이승도가 큰 개복수술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 이재혁 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승도는 이제 잘 먹고 잘 쉬는 일만 남았다며 웃음을 흘렸다.
“네,알겠어요. 그럼 사흘 뒤에 뵙시다. 잘 쉬어요.”
전화를 끊은 뒤 이재혁은 머리를 등반 중인 영웅이를 책상에 내렸다. 수액만으로 간간이 버티고 있는 녀석은 삐 쩍 말라 있는 상태였다. 이재혁은 냉장고에서 바나나를 꺼 내 곱게 갈아 건네 보았다. 영웅이는 기운 없는 몸을 책상 에 늘어뜨린 채 눈만 끔뻑거렸다.
“이거 안 먹으면 승도 선생님한테 이른다.”
영웅이는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슬쩍 눈을 피하며 딴 청을 부렸다. 이재혁은 반복해서 이승도의 이름을 언급한 뒤 억지로 한 수저 떠서 녀석의 입에 갖다 대었다. 잠깐 머 뭇거리나 싶더니 그 고집스런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재혁 은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릇을 통째로 쑤셔 넣을 뻔했다.
오랫동안 섭식을 거부했던 터라 갑자기 많은 음식물을 넘겨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인내를 가지고 반절 정도만 천천히 떠먹여 주었다. 됐다고 엉덩이를 두드리자 영웅이 는 미적미적 간이 펜스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잠들었다.
동물원 수의사를 오래 했지만,참 저 녀석만큼 까다로 운 경우는 보지 못했다. 사람을 못 잊어 말라죽는 걸 택하 는 원숭이라니.
픽 웃으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벌써 퇴근 시간이 가까 워져 있었다. 가운을 벗고 퇴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 동물 병원에 볼일이 있어 갔던 신입 수의사가 진료실로 돌아왔 다. 약속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말하자 그는 흔쾌히 고개 를 끄덕였다.
이재혁은 진료실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몸을 실 었다. 레스토랑 예약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도 로사정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랐다. 집에 들러 식구들을 태울 생각에 그는 조금 마음이 급했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을 때였다. 뒷좌석에서 검은 형 체가 시야를 불쑥 침입해 왔다. 검은색 장갑을 낀 누군가 의 팔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팔뚝에 목을 강하게 눌린 뒤였다. 어마어마한 힘에 숨이 끼익 넘어갔 다. 따끔한 통증이 목덜미에 꽂혀 들었다.
이재혁은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차체가 거세게 흔 들릴 정도였으나 마치 바위에 짓눌린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공포로 인해 비명을 질렀지만 목이 눌려 기이한 소리만 흘러나올 분이었다.
“쉬一,,
귓가로 오싹할 만큼 냉정한 음성이 번졌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집 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그의 말은 몽롱하게 뭉그러져 있었다. 이재혁 자신이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어둠에 완전 히 잠식되었다.
『모레로 날이 잡혔습니다. 오후 한 시입니다.』
이원표는 수신된 문자를 일별한 뒤 여홍재에게 알렸다. 여홍재는 때가 되었다며 들뜬 음성을 흘렸다. 실수가 없어 야 한다 누차 강조하는 그에게 이원표는 걱정 말라 일렀 다-
여홍재는 곧장 윤봄이와 통화를 연결했다. 이제 그녀 를 불러들여야 할 때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을 이
제야 써먹을 수 있게 되어 그것마저도 즐겁기 그지없었다. 흐린 웃음을 섞어 알겠노라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농 몽했다. 약에 의존해서라도 긴장과 공포를 떨어낼 수 있다 면 제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면 내가 보낸 이들을 따라 이동하십 시오. 그들이 당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여홍재는 간사하게 거짓을 늘어놓았다. 그녀를 맞으러 가는 이가 누구건 간에 제 수하는 분명 아니었다. 그녀에 게 일말의 호의도 베풀지 않을 자들이 될 것이었다. ‘고마 워요.’하는 윤봄이에게서 의심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는 없 었다.
《그런데,태국영의 등대는 어디서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나요?〉〉
윤봄이의 이승도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그야 태국영 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니 그 마음 이해 못 할 것도 없었 다. 어차피 혼자서는 길거리도 나다니지 못할 터라 여홍재 는 너그럽게 이원표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좋아요. 그럼 모레 뵙는 걸로.〉〉
“쉬십시오.”
여홍재는 끊긴 휴대폰을 폭죽처럼 허공에 날렸다. 투박 한 디자인의 대포폰이 아닌 스마트폰이 매트리스를 나뒹
굴었다. 여제운이 여진희와 짜고 제 폰을 도청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버려둔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안배였다. 정작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배돌린다는 것 을 그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태국영이 이제껏 남강우와 합세해 자신들을 조이기만 했던 것은 바로 이 윤봄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를 제거하기 전까지 그들로서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 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이제 윤봄이가 긴 도피생활 을 접고 이 땅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태국영의 귀에 전해 질것이다.
그녀를 잡기 위해 태국영이 몸소 움직인다면 더할 나 위 없이 좋을 것이다. 태국영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그 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아니더라도 큰 차질 은 없었다. 어쨌건 여러 군데 시선을 분산시킬 수만 있다 면 윤봄이의 쓰임은 다하는 것이었다.
“형. 진짜 괜찮겠어?”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형제 여홍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태국영의 가족을 직접 건드리는 것이 못내 끼림칙했다. 만에 하나 실수가 생겨 뭐라도 틀어진다면 여 럿 죽어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 그런 불안감이 뇌리를 떠나
지 않았다.
“걱정 마라. 계획은 완벽해. 놈의 아들놈이나 놈의 등대 만 내 수중에 떨어지면 그때부터 태국영은 끈 떨어진 연 신세다.”
“만약 태국영이 인질들을 포기하면?”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놈이 지금껏 벌인 쇼가 다 뭘 위 해서였다고 생각하나. 남강우는 송재희 년 복수해 주고 태 국영은 지 마누라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주기 위한 거였잖 아.,,
맞는 말이긴 했지만 여홍원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여 홍원은 뒷감당이 계속 걱정이라 연이어 말했고,여홍재는 이번에도 역시 태평하게 대답했다.
“이원표 쪽은 걱정 없어. 그는 자기 가문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일을 처리해 줄 거야. 최명욱이랑 윤봄이 는…… 개들은 어차피 죽을 것들이라 상관없잖아?”
“홈……그래. 어차피기왕여기까지 온 거.”
일도 이미 다 벌여놓은 상태에서 계속 부정적인 말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여치영,여현덕,그리고 여홍원 자신 까지 충분히 승산이 있기에 여홍재의 배에 올라탄 것이었 다.
그래. 태국영만 없애면. 그 무서운 놈만 없어지면…….
내가 네놈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고?
윤봄이는 싸늘히 웃으며 눈을 빛냈다. 목적을 위해서라 면 저 혼자 똑똑한 척하는 놈의 장기판 위에서 얼마든지 춤춰줄 수 있었다. 단,그가 바라는 마지막이 저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감쪽같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수개월 만에 조우한 시동생은 기이한 안광을 빛내며 혼 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윤봄이는 빙그레 웃으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조금 부자연 스러웠지만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끔찍한 시간들을 견더낸 데에 대한 보답이겠지. 오늘 오전에 들어오자마자 하루 종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는 데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
최명욱은 못내 신기한 듯 자꾸만 윤봄이의 낯을 살펐 다. 냄새도 나지 않는데다가 성형수술까지 가능한 동족이 라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조금의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방법이 과연 태국영에게도 통할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윤봄이가 그의 머릿속 을 들여다본 마냥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오후에 여제운의 회사를 찾아가 봤어. 열한 시부터 한 시까지 로비 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지. 여제운은 물 론 여홍재,심지어는 여군호까지 내 앞을 스쳐 지나갔지 만 날 돌아보는 기색도,의아하게 여기는 기색도 없었어.”
“여군호의 호위들까지?”
“명청한 질문이잖아. 그들은 평소에도 늘 실체를 숨기 고 다니는데 내가 그들의 반응을 어떻게 볼 수 있겠어.”
“하긴. 그도 그렇군. 아무튼 숨기와 찾기의 귀재인 여 가 놈들도 형수를 못 알아보다니…… 놀랄 일이야.”
“태국영이 아무리 강한 종자라고 해도 그 부분에선 여 제운을 능가하지 못해. 태국영의 눈을 속이는 것은 더 쉽 겠지.”
최명욱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봄이는 힘없는 날숨을 부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극도로 만족스 러운 몸 상태에서 유일하게 홈이 있다면,재생력이 없어 쉽게 지친다는 거였다. 몸을 보양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 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야겠어. 내일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해. 그동안 귀찮더라도 날 좀 챙겨 줘.”
그녀가 말했다. 최명욱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군호의 본가에는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떠돌이 감시 자들을 제외한 친위대 전원이 그 만찬의 초대객들이었다. 이십여 년이 넘게 여군호를 종주로 모시며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친위대는 막연히 무언가를 예감했고 하나도 빠짐없 이 정시가 되기 전에 별채로 모여들었다.
여군호의 그림자를 늘 따라다니던 영은 매우 우울한 낯 빛이었다. 호위대에 속해 있는 그는 가장 측근에서 여군호 를 보필하기 때문에 여군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무슨 결 단을 내리는지 항상 가장 먼저 눈치를 채곤 했다. 이번에 도 마찬가지였다.
“영아.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종주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연희가 다가와 따뜻하게 영의 등을 쓸어내렸다. 영은 그 냉랭한 이목구비에 어울리지 않게 울상을 지으며 그녀 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누이. 나는 아직 종주님과 헤어지기 싫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직 구 개월도 더 남았습니다. 그때까지는 곁에 있어 드리려 했는데……
“어쩌겠니. 이별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닌 것을.”
“만약 우리가 떠난 뒤 태국영이 딴마음을 품으면 어떻 게 하죠. 누가 종주님을 지켜드리죠. 친위대가 없는 여 가 의 전력만으로는 태 가를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걱정 마라. 종주님은 현명하신 분이야. 모든 것 을 계산하고 모든 수를 다 읽고 계시지. 만약 당신께서 왕 좌를 떠나는 순간 위협이 될 무언가가 있었더라면,반드 시 그에 대비한 장치를 해 두셨을 테다. 너는 가장 곁에서 보필하던 것이 아직도 그리 종주님을 모르니.”
핀잔이 섞인 말이었으나 근본은 따뜻한 위로였다. 영 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 며 여군호의 행적을 눈으 로 좇았다. 여군호는 장로들과 수장들을 시작으로 친위대 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은퇴하여 일선에서 물 러난 지 오래인 나이 든 자들부터 아직 임무에 투입되기 어려울 만큼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았다.
“누이는 이전 대 종주님과 어떤 이별을 하셨습니까.”
“웃으며 헤어졌다. 당신의 어린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따뜻하게 안아주시더구나.”
그녀가 처음으로 보필했던 종주는 여군호의 부친이었 다. 혼인을 늦게 한 탓에 그는 40대를 넘어서야 장남인 여 홍재의 부친을 보았고,여군호는 그 십여 년 터울의 차남 으로 태어났다. 당시 종주승계에서 여군호의 라이벌이었 던 자들은 모두 죽거나 사퇴를 표명했다. 여홍재의 부친 은 자진사퇴한 쪽이었다.
“은퇴하신 뒤로 몇 번이나 보았지요.”
“그분의 생신날마다 찾아뵈었지.”
“쓸쓸해 보이지는 않으시던가요.”
“전원생활이 몹시도 평화로워 보이셨다. 쓸모도 없는 과수원을 키우는 데에 취미를 붙이셨었지. 마지막으로 뵈 었을 때는 늦둥이나 하나 더 볼까 농을 하시며 웃으시더구 나.,,
영의 입술에 그제야 흐린 미소가 걸렸다. 은퇴한 종주 는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었다. 자리를 내준 가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태양이 뜨면 지난 시대를 비추었던 태양은 사라지는 것이 이 세계의 섭리였 다.
“자. 모두 들어라.”
불시였다. 여군호가 나직이 내뱉은 한마디가 잔잔한 파
동을 가져왔다. 모두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아마 내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여군호가 샴페인 잔을 허공에 가볍게 들며 말을 이었 다.
“그동안 고마웠다. 너희들이 어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 만,나는 너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부디 나보다 더 좋은 어버이를 맞이하길 진심으로 바라마. 마지막으로 다 같이 건배나 하지,
친위대의 모두가 일제히 잔을 들어 허공에 부딪쳤다. 가장 노쇠한 장로가 대표로 건배사를 옮었다.
“당신은 좋은 아버지셨습니다.”
여군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순식간에 짙어졌 다.
“최고의 이별 인사로군.”
그는 품 안에서 옥색의 비단 주머니를 끼냈다. 이미 예 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목격한 친위대의 눈에 가 지각색의 감정들이 스쳤다. 여군호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 차했다. 그가 말했다.
“날 위해서 수고를 좀 해 주었으면 해.”
“정말 종주님을 위한 일이 맞습니까?”
영은 다시금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그 음성은 애달 픔과 분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내 즐거운 노년을 위해서라고 해 두지.”
여군호는 묘한 말로 벽을 세우며 비단 주머니를 가볍 게 날려 보냈다. 낮은 포물선을 그린 비단 주머니는 연희 가 뻗어 내민 두 손 안에 가지런히 안착했다. 그녀는 그것 을 소중히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내 너희들에게 종주의 인장을 걸고 마지막 명을 내린 다.,,
“하명하세요,종주님.”
연희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친위대의 모두 가 그녀를 따라 경애의 절을 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엄숙 한 장관이었다.
여군호는 그들을 길게 둘러보았고,그의 시선은 마지막 으로 영에게 당도했다. 고개 숙인 녀석의 아래 어울리지 않게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식들을 타지로 보내는 어버이의 마음이 이러할까.
여군호의 단단한 입매에 쓴웃음이 스쳤다. 그는 느리 게 입을 열었고,곧 중후한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득 울렸 다.
현(現) 종주의 마지막 명이 친위대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