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1/25)

13.

   공식적인 기록으로 첫눈은 이르게 11월 중순에 내렸 다. 그러나 진눈깨비가 잠시 홑날리는 수준에서 그쳐 순백 의 정취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바닥에 남아있던 알갱이들 마저 작열하는 태양 볕에 금방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이승도는 자다가 놀라서 앨 만큼 태아의 큰 태동을 감지했다. 맥없이 사라진 첫눈과 달리 아주 힘 차고 열정적인 발차기였다.

   수업 후 소식을 접한 아이들은 그날 내내 곁을 알짱거 리며 수시로 아랫배에 귀를 문질렀다. 하지만 태아는 하 루 종일 잠잠했다. 실망한 아이들이 제 방으로 돌아가 잠 들고 나서야 한 번 더 배를 뻥 찼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막말을 했다가 이승도에게 등짝을 후려 맞고 말았다.

   ‘‘찼에 찼어!”

   이제 육안으로도 살짝 솟아올라 있는 배에 귀를 딱 붙 이고 기다리던 태이경이 그대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소

리쳤다. 쿠션에 반쯤 누운 채 랩톱을 보고 있던 태국영은 혀를 차며 웃었다. 그간 고집스럽게 이승도가 홀로 있을 때만 발로 콩콩 차고 놀던 태아가 결국 태이경의 집요함 에 백기를 든 것이었다.

   “뭐가 기쁘다고 야단법석이야. ‘옜다. 발차기. 그만 좀 귀찮게 해’하는 말안들리나.”

   “안 들리거든요?”

   태이경은 약간 볼을 부풀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별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어젯밤 꿈에도 나와 서 생일 축하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치,별아?”

   아랫배에 속닥속닥 하고 간절하게 대답을 기다리지만 태아는 또 잠잠했다. 녀석이 실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 았던 이승도는 배꼽 아래를 다독이듯 톡톡 두드렸다. 별이 가 어떻게든 반응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기 위해 서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잠시 뒤 작게 콩 뱃가죽이 울렸다. 기 세등등해진 태이경이 허공으로 풀쩍 뛰어오르며 소리쳤 다.

   “이것 봐요! 별이도 내가 좋다잖아!”

   태이경은 주먹 쥔 두 손을 치켜든 채 와와 하며 온 방 안을 요란법석 뛰어다녔다. 동생에게서 받은 첫 대답이 그

리도 기븐 모양이었다. 유모가 이제 옷 입을 시간이라며 찾아오고 나서야 녀석은 흥분을 잠재웠다.

   “유모. 형아는?”

   “은태 군은 드레스 룸에서 도련님을 기다리는 중이에

요.,,

   “나를? 왜?”

   “커프스만 남았는데 그건 도련님이랑 같이 고르겠다고 하네요. 반짝반짝하는 거 좋아하는 도련님이 마음에 드는 걸로 하겠대요.”

   “응. 좋아. 내가 형아 머리 색깔이랑 꼭 어울리는 예븐 걸로 골라줄게. 어서 가자,유모!”

   태이경은 방긋 웃으며 유모의 팔을 끌었다. 자상하게 따라 웃은 유모가 문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며 통보했 다.

   “도련님 다음엔 가주님이랑 승도 군 차례예요.”

   인상을 구기며 침묵하는 태국영 대신 이승도가 네,하 고 대답했다. 둘이 사라지자 태국영은 기다렸다는 듯 투덜 거렸다.

   “내가 모임이라는 단어에 치를 떠는 이유가 있다니까.”

   “애처럼 굴긴.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유모가 그렇게 즐 거워하는데 좀 해 주는 게 뭐 어렵다고 그래. 그러지 말고

앞으로는 친척들끼리 종종 왕래 좀 하고 지내. 이경이가 유치원이나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그런 식으로라도 사회활동을 배워야지.”

   “네가 패션쇼 디렉터로 분한 유모를 직접 못 겪어 봐서 그래.”

   “저번에 너 하는 거 봤는데 뭘.”

   “너 아무래도 그날 딴 데 정신 팔고 있느라 잘 인지를 못 했던 모양인데,나 오전에는 초이스 하느라,오후에는 피팅하고 장착하고 생 쇼하느라 시달린 시간 다 합하면 총 다섯 시간은 되거든?”

   …그렇게 오래 걸렸던가?

   이승도는 둥그렇게 뜬 눈을 멀거니 깜박이며 중얼거렸 다.

   “이상하네. 난 두 시간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오전에 너 자고 있는 동안 내가 초이스 한다고 룸 들 돈 것만 해도 두 시간은 되겠다. 내가 장담하는데,너 지금 임신 중이라 그나마 유모가 손가락 발면서 인내하고 있는 거야. 별이 나온 다음에 한번 당해 봐라. 그런 말이 쏙들어갈 테니까.”

   태국영은 근사하게 눈가를 접으며 덕담 같은 악담을 건

넸다. 이승도는 그저 픽 웃고 말았다. 가까운 미래에 태국 영의 몸서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어 그의 모임 기피증 에 동참하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태였다.

   태 가에 이렇듯 큰 친목 모임이 이뤄진 것은 아주 오랜 만이었다. 성년식을 치른 태국영이 도주를 포기하고 정식 으로 가주의 인장을 받았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거의 4 년 만인 셈이다.

   유모는 자진해서 초대장을 대필했다. 그녀가 고른 문구 는 담백하고 간단했다. 태이경의 다섯 살 생일을 구실로 서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가볍게 식사자리를 마련했으 니 참석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긴다 는 내용이었다.

   강제적인 문구는 없었으나 태 가에 이름을 올린 이들 은 약속이나 한 듯 빠짐없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어떻 게 하면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참석을 강요할 수 있을 까 고심했었던 유모가 ‘이렇게 충실한 가솔들이라니!’하 며 매우 부듯해했다는 것은 그녀 홀로만 아는 비밀이었다.

   연회 시작은 7시,장소는 태일의 자회사인 UC 컨벤션

의 대규모 연회장이었다. 태국영 일가가 홀에 도착했을 때 는 그보다 30분 이른 시각이었는데,그때에도 이미 가벼 운 파티복 차림의 남녀가 장내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 었다. 일부러 일찌감치 먼저 와서 천천히 하객들을 맞으 며 적응해 갈 참이었던 이승도는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인사를 건네는 이들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그들의 축하인사는 하나같이 태이경의 생일로 시작해 서 어김없이 둘째 임신 소식으로 끝을 맺었다. 얼떨결에 장갑 낀 손으로 정신없이 그들과 악수를 하다 보니 처음 의 당혹스러웠던 감정은 자연스레 누그러져갔다.

   얼마 안 가 이승도는 침착하게 그들의 인사에 부드러 운 대꾸를 돌려주게 되었고,덕담에 미소로 반응할 수 있 을 만큼 편안해졌다. 이승도의 안색을 살피며 다 끼지라 고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던 태국영도 그래서 잠자코 상황 을 방관했다.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하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도착 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하객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무리 가 이뤄지고 다시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간 소원했던 친지 들을 찾아다니며 안부를 묻는 것만도 꽤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축하인사에 정신없이 휩쓸려 다녔던 이승도

는 주변이 한산해지자 조금 여유를 찾고 만족스런 한숨을 지었다. 원가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미션을 성공한 기분 이었다.

   “이제 좀 앉아서 쉬워. 배고플 때 됐잖아.”

   태국영이 이승도의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들이 그들에게 덕지 덕지 달라붙었다. 이승도는 그 시선 집중을 딱히 신경 쓰 지 않았다. 그냥 기이할 정도로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스 스로를 신기해하기 바빴다.

   직장을 관둔 뒤로 육체노동은 거의 하지 않아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 었다. 그간 다져둔 체력이 이럴 때 도움이 되나 보다.

   그러나 주기 짧은 허기는 여지없이 위를 쿡쿡 찔러왔 다. 이승도는 그제야 제 지정 테이블로 향했다.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한 번 앉아보지도 못 한 자리였다. 그곳 에는 여은태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앉아 주변 을 둘러보고 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녀석에게 이 장소는 아는 이가 없 는 것은 물론 낯선 성체들의 냄새까지 그득한 곳이었다. 홀로 집에 남아 소외감을 느낄 게 걱정되어 데려왔던 건 데 이렇게 방치해 두면 본래 의도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

   “왜 혼자 있어? 이경이 친척들이랑 인사하러 갔어?” 이승도가 옆자리에 앉으며 자상하게 물었다. 여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라고 내가 보냈어. 나랑만 있다 가면 아쉬워할 게 뻔하니까.”

   “왜. 같이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또래 아이들이랑 애기 도하고 그러지.”

   “나도 그럴까 하다가 그냥 관뒀어. 어른들은 괜찮은데 애들이 날 무서워하는 것 같아.”

   “애들이 널 무서워해? 왜?”

   “모르겠어.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거든.”

   웨이터가 서빙해 온 접시를 이승도의 앞으로 몰아놓은 태국영이 그 의문을 대신 풀어주었다.

   “일단 다른 가문 수컷의 냄새가 나니까 일차적으로 경 계. 그 다음은 네 본신이 보이지 않으니 이차적으로 경계. 당연한 반응이야.”

   “안보인다니? 난감춘적이 없어.”

   여은태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 몫의 미디엄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슥슥 자르며 대답했다.

   “감춘 적은 없어도 일부러 드러내지는 않고 있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네가 좋건 싫건 너는 여 가의 수컷이야. 여 가 놈들의 숨는 기질은 나조차 못 따라갈 정도로 천재적이지. 그중에 서도 가장 강한 피를 타고난 너는 아마 자연스럽게 익힌 걸 거야. 네 아버지,네 형이 늘 자신의 일부를 감추고 사 는 걸 무의식적으로 습득했겠지. 그러니까 네 또래 애들 이 널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여겨서 꺼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거야.”

   먹기 좋게 썬 고기를 찍어 이승도의 입에 물려준 태국 영이 ‘아참.’하며 곧장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명청하게 애들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나 이 런 놈이야’하면서 네 알맹이 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고.

   마침 그런 생각을 떠올린 참이었던 여은태가 뜨끔해서 눈시울을 키웠다. 태국영이 혀를 차며 신랄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내가 처음 보는 너한테 대뜸 내 속부터 뒤집어 까 보였 어 보?. 넌 무슨 생각을 하겠나.”

   “…싸우자?”

   “다행히 머리가 돌은 아니군.”

   방문 교수들에게 늘 ‘뜰뜰하다. 명석하다. 물론 우리 도

련님이 최고지만.’ 등의 소리만 들었던 여은태는 적잖이 불쾌했다. 그러나 ‘이경이가 다른 애들이랑 노는데 그냥 두고 보기 싫다’만 생각한 나머지 경솔하게 굴 뻔했던 것 은 사실이라 잠자코 있었다.

   “선생님 배 좀 채우고 잠깐 바람 쐬러 나갈까?”

   괜히 침울해져 버린 여은태에게 이승도가 제안했다. 여 은태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선생님 추우니까 안돼.”

   “기특한 생각이지만,선생님 요새 체온 아주 좋아. 별이 가 따뜻하게 해 줘서 점퍼 안 입고도 발코니 나가는데 춥 다고 느껴본 적 한 번도 없어. 은태 여기서는 할 것도 없 고 답답하잖아.”

   잠깐 고민하던 녀석이 ‘그래도 돼?’하고 물어 왔다. 말 은 안 했어도 섞일 수 없는 공간에서 녀석이 내심 많이 외 로웠던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투명에 가까운 은빛 눈동자 를 보며 다정하게 눈가를 접었다.

   “그럼. 당연히 되지. 한 바퀴 쭉 돌고 와서 선생님이 꼬 마 애들하고 조금씩 인사시켜 줄게. 지금은 다들 바쁘니 까 자기들끼리 놀라고 하고.”

   “응.”

   이승도는 등대라서 이렇듯 제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걸

까,아니면 그냥 그의 타고난 천성 때문일까. 하지만사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죽을 고비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안식처가 그의 집이라 다행이었다.

   “고마워,선생님.”

   여은태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이승도는 매끄러운 녀석의 머리칼을 살살 홑어놓았다.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뒤늦게 식욕이 돌아와 엄청난 양의 고기를 해치웠고,이승 도 역시 충분히 배를 채웠다.

   이승도는 식사 후 곧장 여은태를 데리고 나갔다. 추위 에 헐벗은 나무들이 많아 구경할 것은 딱히 없을 거라 생 각했는데,막상 맞닥뜨린 정원은 매우 근사한 풍경을 자랑 하고 있었다. 소담스런 눈송이가 하얗게 어둠을 뒤덮고 있 었던 것이다.

   “눈이다……

   이승도는 명하니 중얼거리는 여은태의 어깨를 한 팔로 감쌌다.

   “우리 은태 눈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지?”

""?■

   여은태는 주저하다 얼굴 앞으로 손바닥을 펼쳐 가져왔

다. 하안 결정들이 살갗에 닿자마자 미지근한 물방울로 변 했다. 그 간지러운 감각이 가슴까지 울렁거리게 했다.

   1 년 전만 해도,맨정신으로 이 눈발을 손 안에 담는 날 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을 뛰쳐나와 처음으로 횡단 해 본 불야성의 도시,본능적으로 어둠을 따라 걷던 자신 의 피투성이 발,시야를 가리며 쏟아지던 눈보라,고통과 한기가 스미던 뼈마디,그 모든 고통들이 난바다처럼 아득 하게만 느껴졌다.

   “선생님. 나 좀 안아줄 수 있어?”

   여은태는 젖어드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는 채로 청했다. 곁을 조용히 따르고 있던 태국영이 쯧 혀를 차며 휘휘 손 사래를 쳤다.

   이승도는 녀석의 등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 체격과 별다를 바 없을 만큼 발육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품 안에 갇힌 녀석의 등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 은태 아직 애기네.”

   부러 웃으며 말했다. 여은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리 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해하지 마. 우는 건 아니야.”

   “누가그렇대.”

   이승도는 여은태의 어깨에 편안히 턱을 내려 걸쳤다.

   “소소한 것에 감동할 줄 안다는 건 작은 것도 소중히 대 할 줄 안다는 증거야.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숨기려고 하

지 않아도 돼.”

   “방금 나,조금 남자답지 못한 거 아니었어?”

   “예븐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진짜 남자다운 거 아닐까?”

   여은태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감정의 깊이도,그 가치를 고찰할 줄도 모르는 나이였지 만 이승도가 그렇다고 하면 분명히 그런 거라 생각했다. 갓난아기처럼 따끈따끈한 그의 손을 꼭 붙들며 속삭였다.

   “발리 어른이되고 싶어.”

   이승도는 그 속뜻을 간파한 듯했다. 소리 없이 웃는 기 척마저 따스했다. 여은태는 그를 따라 빙그레 입술을 휘 며 고개를 들었다. 고즈넉하게 눈 오는 풍경을 말없이 눈 에 담았다.

   사아아아.

   수직으로 날려 오던 눈송이들이 아주 작은 미풍에 흔들 릴 때였다. 여은태는 미간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무의식적 으로 제 어깨를 감싼 이승도의 손을 잡아 뜯듯이 떨어내 뒤로 숨겼다. 은빛 홍채 안의 검은 동공이 일순 크게 확대 되었다가 바늘 끝처럼 작아졌다.

   그 순간,여은태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불식간에 전방 으로 쏘아져 나갔다.

   “은태야……?,,

   이승도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 했다.

   “쉬.,,

   귓전으로 뜨겁고 안전한 음성이 번졌다. 눈 깜박할 사 이 이승도는 어느새 거리를 좁혀 다가온 태국영의 품에 틈 없이 갇혀 있었다. 그가 느긋이 뺨을 맞대 비비며 속삭 였다.

   “꼬맹이가 감이 좋네.”

   태국영은 저편의 어둠을 쏘아보았다. 무언가를 기민하 게 감지하고 튀어 나간 여은태가 숨 가쁘게 달리는 기척 이 귀로 읽혔다. 도망자의 것은 너무 미묘해서 제대로 분 간이 가질 않았다.

   “은태 갑자기 왜 그래? 어디 간 거야?”

   이승도는 불안한 마음에 태국영의 팔뚝을 꽉 쥐며 물었 다. 이미 무언가를 예감한 눈치였고,능청스레 덮을 문제 는 아니었다. 태국영은 힐긋 시선을 내리며 짙은 눈매를 휘었다.

   “사냥감 찾으러. 아마 결국 놓치고 말겠지만,만에 하

나 잘 물고 오면 칭찬해 줘/

   느리다.

   여은태는 염탐자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느

꼈다. 염탐자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대로를 피해 비교적 좁은 골목만을 택했다. 빠른 발로 암흑을 밟는 솜씨가 보 통이 아니었다.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태국영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 큼 완벽한 자기 은폐였다. 이건 분명 제 가문의 피가 아주 짙게 섞여야만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네 눈에는 내가 신으로 보이나.」

아니 어린 나도 이렇게 쉽게 하는 걸 당신은 왜 못해, 하고 묻는 말에 태국영이 어이없다는 듯 끼낸 대답이었다.

   「예전에 내가 한 번 말한 적 있지. 네가 성체가 되건 삼 백육십오일 훈련에만 매진하건 년 죽었다 깨나도 날 못 이 긴다고. 그게 그냥 농담 정도로 들렸나. 너랑 나는 타고난 혈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가진 특기 분야도 한계점도 달 라. 너는 죽을 때까지 날 못 죽이고,나는 죽을 때까지 네 가 숨는 것처럼 완벽하게 숨지 못한다는 애기야. 친위대 놈들이 근친혼만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고.

J

   태국영은 귀찮은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

다. 그냥 이승도의 품 안에서 한량처럼 골골대며 노는 게 일평생의 꿈인 듯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언가 궁금한 것을 물을 때마다 면박을 주긴 해도 늘 상 세하게 가르쳐 주곤 했다.

   제가 아는 일족에 관한 지식들은 거의 전부라 할 만큼 그에게 얻은 것들이었다. 각 가문의 특징,종주와 친위대 의 역사와 변화 등 큰 줄기에서부터 성년식,발정기,임신 과 출산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그의 가르침이 있었기 에 습득한 것들이었다.

   너무 느리다. 이대로라면 놓치고 말 거야.

   자꾸만 벌어지는 거리를 좁히려면 지금 이 몸으로는 불 가능했다. 염탐자의 냄새가 흐릿해 기척마저 놓치면 끝이 었다.

   여은태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저 층 빌딩의 벽을 타고 정상을 점령하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 였다. 하살처럼 솟아올라 단전에 힘을 주었다. 체내를 휘 돌던 원기의 흐름이 기형적으로 휘돌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일었다. 가느다란 눈발을 집어삼켜 새하얗게 빛나는 돌풍 안에서 거대한 짐승이 뛰쳐나왔다. 은빛 털의 물결이 밤을 가르며 긴 포물선을 그렸다.

   강하고 아름다운 맹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날

았다. 그 장관을 눈에 담을 수 없는 인간들은 낮은 곳에서 때아닌 눈 폭풍에 몸을 사릴 분이었다.

   여은태는 전속력으로 염탐자를 뒤쫓았다. 거리는 점차 좁아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사방은 어둠에 뒤덮 여 있었고,추위에 떠는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온 천지에 그득했다. 적막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분이었다.

   지나치게 어둡다.

   염탐자는 일부러 이 산속에 숨어들었다. 있는 힘껏 달 아나려던 의도가 무산되자 신중한 은신으로 완벽하게 빠 져나가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여은태는 쉬이 기척을 잡 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 적막한 공간 의 소음을 구분해내는 것인데,어찌나 발소리를 잘 죽이는 지 욕이 나올 정도였다.

   당황해서 같은 자리만 멤돌던 여은태는 우뚝 멈춰 섰 다. 뇌리로 어떤 기억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은신의 기본은 현혹이다,그렇게 가르쳐준 지 겨우 하 루가 지났을 때였다. 태국영은 그날 완벽하게 숨었다고 자 신했던 제 뒷덜미를 잡아챘다. 너무 놀라고 기가 막혀 어 떻게 찾은 거나고 캐묻자 그가 말했었다.

   「아주 귀찮고 무식한 방법이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지. 예고 없이 공기의 흐름을 바꿔 보면 도?. 네가 숨은 자리에는 분명 그에 역행하는 흐름이 나타날 테니까.」

   신은 왜 그 게으른 남자한테 그리도 많은 능력을 주었 을까.

   그것도 모자라 이승도까지 안겨주지 않았나. 신이 공평 하다는 말은 태국영만 봐도 개소리였다. 새삼 혀를 찬 여 은태는 그때부터 염탐자의 예상 도주 방향을 미친 듯이 파 헤치고 다니며 짧은 기합을 산발적으로 홑부렸다. 하얗게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때아닌 돌풍을 만나 몸살을 앓았다.

   그렇게 1 분인지 10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조급함이 서서히 가슴을 물들여 오고 있었을 때,여은태 는 뒤틀리는 눈보라 속에서 기이할 정도로 정적인 공간을 발견했다.

   찾았다!

   여은태는 광기처럼 눈을 빛내며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 다.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들이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숨을 죽이고 있던 염탐자가 다급히 도약한 것과 거의 동시 였다.

   쪄억.

   여은태의 머리에 들이받힌 굵은 나무기둥이 허리가 꺾 인 채로 저만치 날아갔다. 눈가루가 먼지처럼 허공을 에워

쌌다. 맹렬하고 집요한 눈동자는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목 표물을 조준했다. 살기로 빛나는 험악한 발톱이 뒤틀린 공 간을 찢었다.

   아주 짧게 목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곧장 이발을 가져다 댔을 때,겨우 잡았다고 생각한 실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쿠응!

   전력을 다했던 도약의 힘을 고스란히 떠안은 바위가 거 미줄처럼 쪼개졌다. 꿈틀대는 발가락 사이에는 성인의 손 바닥만 한 옷감이 열은 핏자국과 함께 깃발처럼 나부꼈다. 여은태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곧장 추격을 개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런!

   여은태는 황급히 뒤를 돌며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제 머리 위를 짓눌러 오는 괴기한 덩어리를 보았다. 찰나 본 것은 그의 찢어진 소매와 그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탁한 은빛 털,그리고 온전히 성숙해 있는 손톱이었다. 인간과 짐승의 일그러진 집합체였다.

   여은태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그의 손톱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너무 관심을 둔 나머지 반응은 조금 느렸고,직후 휘둘러져 온 구듯발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

   뜨끔한 고통에 흥분한 여은태가 섬뜩하게 목을 울렸다. 온 힘을 다해 앞발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옷자락조차도 걸리지 않았다. 성체가 작정하고 휘두른 일격은 대번에 뱃 가죽을 찢어 놓았다. 내장까지 꿰뚫지는 못했지만 움직임 이 굼떠질 수밖에 없었다.

   놈은 지체 없이 그곳을 떠났다. 정체를 감춰야 하는 입 장에서 시간을 끈다면 불리해질 것이 누구인지 영리하게 알아챈 탓이다.

   여은태는 그쯤 해서 추격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둥글 게 몸을 말았다. 열심히 할아보지만 찢어진 뱃가죽은 더디 게 아물고 있었다. 새빨■간 핏물이 갈라진 바위틈에 스며들 었다.

   완숙하지 못해 재생이 느린 몸뚱이가 못내 분했으나 도 리가 없었다. 이제 겨우 13살을 바라보고 있는 저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일단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앞뒤 안 보고 쫓아오느라 주변을 볼 틈이 없었다. 이 산 이 어디에 박혀 있는 산인지,어느 방향으로 가야 익숙한 길이 나올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승도는 길 잃은 아이의 행동강령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대로 실행하기엔 곤란한 처지였다. 인간으로 변하면 분 명 알몸이 될 거다. 그러고 택시를 잡는다 해도 아무도 안 태워줄 게 뻔했다. 그러나 그건 인가로 숨어들어 옷 한 벌 만 훔치면 어찌어찌 해결될 문제였다. 저를 이렇게 뭉그적 거리게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분명 비웃을 거야. 완전 알밉게 비웃을 거라고.

   여은태는 하얗게 눈발 홑날리는 하늘을 침울하게 응시 했다. 돌아가면 태국영이 그거 하나 못 잡고 놓쳤냐며 필 시 속을 긁어댈 것이었다. 제 어린 나이를 무기로 내세워 도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폭 한숨을 지으며 느릿느릿 일어났을 때였다. 여은태 는 무심코 고개를 내렸다가 제 발톱 사이에서 여직 나부끼 고 있는 천 쪼가리를 발견했다. 제가 뜯어 놓은 염탐자의 소맷자락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코끝으로 낯선 수 컷의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그 냄새는 옷감에 묻은 피에 서부터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은태의 은빛 눈동자에 반가운 이채가 스쳤다.

   애송이 새끼가.

   여홍재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고도 한참을 더 달려서야 멈추었다. 산소부족으로 뇌리가 얼얼하게 울리고 있었다. 헐떡이는 스스로의 숨소리가 거슬렸다. 폭설과 러시아워 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차를 훔쳤을 것이었다. 그는 지친 몸을 벽에 기대며 이를 갈았다.

   그게 여제운의 동생 놈인가.

   소문만 무성한 여군호의 차남은 단 한 번도 외부에 노 출된 적이 없었다. 가까운 친인척들 또한 여은태를 만나 본 자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은태를 직접 목격한 이들은 광희와 절망을 함께 노래 했다. 우리 가문에서도 드디어 제왕의 피가 태어났다고 기 뻐하면서도,그를 키워줄 등대가 없어 단명할 수밖에 없으 니 동시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뱀 같은 늙은이가 운도 좋군.

   여홍재는 추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귀국하기 전부터 여은태의 소식은 따로 알아볼 것도 없이 이미 파다 한 상태였다. 여군호가 기어이 제 차남의 명을 끊어놓았다 고 말이다. 여군호의 저택에 수시로 들락거렸던 주치의가 완전히 발길을 끊었다는 사실이 그런 헛소문을 매달고서 역병처럼 퍼져나간 것이었다.

   살아 있었다니 . 그것도 소문대로 진짜 왕의 피를 가진

   여홍재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불길한 불씨가 초조함을 양분으로 빠르게 전신을 점령해 갔다. 그 는 혼란스러웠다. 태국영보다 더 위협적인 라이벌이 생겼 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5년 뒤 여은태는 성 체가 되어 가솔들의 짙은 추앙을 받을 것이었다.

   그 완전한 몸으로,빌어먹게 위용 넘치는 모습으로!

   절대 좌시할 수 없다. 턱까지 차오른 숨이 완전히 잦아 들었을 즈음,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었다. 하안 눈 으로 뒤덮인 번화가가 휘황찬란한 빛을 붐어내고 있었다. 러시아워가 지났음에도 꼬리를 물고 다니는 차량들이 신 경질적인 경적들을 울려댔다.

   그는 걸었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금방 안정을 되찾았 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발은 더 거세졌다. 손을 뻗어 택시 를 잡았다. 운전기사는 가는 내내 궂은 날씨를 불평했다. 한마디도 돌아오지 않자 그는 이내 묵묵히 핸들만 돌렸다.

   여홍재는 스산한 눈으로 차창 너머를 노려보았다. 번화 가를 빠져나온 택시가 기다렸다는 듯 속력을 올렸지만 시 속은 60km를 채 넘지 못했다.

   1 시간도 넘게 걸려 집에 도착한 그는 옷도 갈아입기 전,혹시나 싶어 휴대폰 하나를 찾아들었다. 폴더형의 구

형 전화기에는 예상외로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여홍재는 재발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침묵도 없이 수화부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홍재 씨.》

   하. 여홍재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던 여자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동안 어디서 뭘 했던 거

죠?”

   《그냥 저도 저 나름의 준비를 좀 했어요.》

   여자는 묘한 말을 내뱉었다. 여홍재는 어차피 큰 전력 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그녀의 말을 흘려보냈다. 시키는 대 로면 하면 제 몫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을 괜한 짓을 벌 여 일을 망칠까 그것이 우려될 분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뉴욕이에요. 지금은 당신이 잡아줬던 호텔에 와 있어요.》

   여홍재는 피로에 젖은 날숨을 길게 뱉어냈다.

   “은밀한 루트로 가드를 보낼 테니 내일부터는 달고 있 도록 해요.”

   《아뇨. 필요 없어요. 난 혼자로도 완벽해요.》

   “…윤봄이 씨. 지금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닙

니다.,,

   《쓸데없는 고집은 누가 부리시는지 모르겠네. 난 혼자 있겠다고 의사를 밝혔고,당신은 날 감시할 자격이 없죠. 받아들이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내 손을 놔요. 간단하잖아 요?〉〉

   여홍재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 계집이 뭘 잘못 처먹었나.’하고 생각했다. 윤봄이는 가시 돋친 말 투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변모해 있었다. 늘 병자처럼 떨 리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고,사무 치는 공포가 선연히 느껴지던 말투도 이제는 빙설 같은 오 만함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처음 최명욱을 통해 연락을 시 도했을 때만 해도 세상의 끝에서 구원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던 것이 마치 제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여홍재는 끓는 속을 다스리며 차분히 목소리를 낮췄다.

   “좋아요. 하지만 앞으로 연락은 반드시 되었으면 합니 다. 여럿이 얽혀 있으니 손발이 잘 맞아야 하니까요.”

   《그건 걱정 말아요. 이제 연락 두절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네. 그럼,또 연락을一”

   드리죠,하고 끝을 맺으려던 여홍재는 문득 떠오른 생

각에 눈을 치떴다.

   “윤봄이 씨. 궁금한 게 있는데,당신들이 발견한 등대 는 태국영의 애인과 박해인,송재희,이렇게 셋이 전부입 니까?,,

   《그래요. 산골까지 탈탈 털어가며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 외에는 없었어요.〉〉

   “혹시 더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마도요.》

   “어떻게 자신하죠. 아무리 철저하게 했어도 모든 인간 들과 다 접촉해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 니까.”

   《접촉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슈퍼문을 끊은 상태에서 는 등대를 알아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들에게서는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히 우리를 잡아끄는 냄새가 나요. 아마 당신은 겪어본 일이 없으니 모르겠지 만.))

   생각보다 간단한 수색 방법이었다. 여홍재는 느리게 고 개를 끄덕였다. 생존해 있는 등대를 찾으려 혈안이었던 이 들이었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 뒤졌을까 싶었다. 제 정신건 강을 위해서라도 그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의혹을 갖지 않기 로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예요? 혹시 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죠?》

   “뭘 의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지금 내 고민이 당신이 우려하는 종류는 아닐 겁니다.”

   《여홍재 씨. 우리는 의리가 아니라 각자의 영리를 위해 손을 잡았어요.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그게 내 목적을 망친다면 당신 역시 무사 하지 못할 거라는 걸 명심해 둬요.》

   “잘 알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우린 한배를 타지 않았 습니까.”

   《잘아신다니 일단 믿겠어요.〉〉

   “쉬십시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여홍재는 긴 날숨을 뱉어내며 몸을 늘어 뜨렸다. 정신적 피로를 짊어진 허기가 득달같이 몰려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7시간 가까이 무언가를 먹지 못 했다.

   그는 취객처럼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일단 배를 채운 뒤 얼음장 같은 물을 가득 채운 욕탕에 들어앉아 느긋이 다 시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그는 사이드테이블의 인터폰 으로 팔을 뻗었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소매를 발견한 것 은 막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이건…….

   여홍재는 다급히 몸을 곧추세우며 팔을 가져왔다. 여은

태에게 물렸던 곳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끈했으나 섬유조 직이 불규칙하게 뜯긴 곳은 거뭇한 피로 너저분했다. 아 마 뜯겨나간 쪽에도 분명 제 혈흔과 신체 조직이 묻어 있 을 것이었다.

   눈가가 경련했다. 여홍재는 심호흡을 하며 차분해지려 애썼다. 오랜만에 피를 보아 괜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 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냥 같은 종주 후보로서 염탐에 불 과한 행동이었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자신은 누구에 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여은태가 괜히 날 선 반응으로 자신을 추격해온 것일 분이니,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암시처럼 반복하는 와중에도 불안함의 부 리까지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여은태는 거지꼴을 하고서 돌아왔다. 머리는 봉두난발 이고 도자기처럼 깨끗했던 피부도 흙먼지가 덕지덕지 말 라붙어 있었다. 그 꼴을 발견하고 기함한 유모는 애를 당 장 깨끗이 발아야겠다며 여은태를 현관에서 홀딱 벗겨 욕 실로 데려갔다.

   여은태는 내심 기뻤다. 덕분에 태국영이 저를 조롱할 틈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뭐라 한마디 쏴 주려고 일발 장전했던 태국영의 입술은 유모의 호들갑에 잠잠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야?”

   이승도는 호기심 찬 눈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의 눈길 이 붙박인 곳은 태국영이 엄지와 검지로 손잡이만 살짝 집 어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였다. 여은태가 욕실로 끌려가 기 직전 태국영에게 넘긴 것이었는데,입구가 꽉 묶여 있 어 내용물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보긴 봐야겠지만,너무 더러워서 확인하고 싶지가 않 네.,,

   태국영은 농을 섞어 말했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비닐봉 지는 어디 한 군데 멀정한 곳 없이 잔뜩 구겨져 있었고,태 생과 나이를 알 수 없는 오물들이 배곡히 끼인 상태다.

   여은태가 굳이 이걸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온 꼴을 보 면 원지 안 봐도 뻔했다. 염탐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 같은 걸 테다.

   “피 냄새가 나는데요?”

   까치발을 들고서 봉투 언저리를 킁킁거리던 태이경이 말했다. 이승도는 깜짝 놀라 ‘피?’하며 태국영을 바라보았

다.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이가 사냥감을 물긴 물었었던 모양이야.”

   태이경조차 감지해냈을 만큼,온갖 퀴퀴한 냄새 속에서 도 다 끼져가는 피 냄새와 체향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 았다. 그리고 태국영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까지도 알아 챘다. 놀라울 것도 의외일 것도 없었다. 다만 조금 어리둥 절할 분.

   도대체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이지?

   태국영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상대가 너무 명청하거나 상식 밖이면 도리어 예측이 힘들 다. 여홍재가 그런 편에 속했다.

   원한관계가 있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그러나 놈과 저 둘 사이에서 원한이 있다면 차라리 제 쪽이었다.

   그럼 남은 가능성은 그 종주 자리 때문이라는 건 데……

   태국영 자신이 그 감투에 조금도 관심 없을 거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홍재가 그걸 모르는 극소수 중 하나인가 보았다.

   만약 제가 여홍재의 입장에 있었다면 여제운이나 이원 표부터 작살냈을 거다. 제멋대로 사는 것에 익숙한 저 같 은 놈보다 그 둘이 종주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 말이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망각한 채 제 홈이나 찾으려고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며 시간 낭비를 하고 있으니 적 이 한심했다. 저를 라이벌 보듯 하던 때부터 알아봤지만 삽질하는 거엔 도가 튼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자격지심이라는 감정을 겪어본 바가 없는 태국영에게 있어 여홍재의 머릿속은 그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태국영은 비틀어진 자존감으로 뜰뜰 뭉친 남자가 사소한 계기로도 충분히 악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지 못했 다.

   “엄마. 형아 목욕하고 나오면 같이 잘래. 졸려요.”

   태이경은 작은 주먹으로 눈두덩을 슥슥 비비며 말했다. 평소 수면패턴을 기준으로 보면 아직 잠들기엔 한참 이른 시각이었지만,파티장에서 또래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다 니며 시끌벅적하게 놀더니 그새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 었다.

   “그래. 가자.”

   이승도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욕실로 향했다. 목욕 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했던 터라 간단히 씻기만 하면 되 었다.

   태국영은 다시금 여은태가 물어다 준 더러운 봉투를 응

시했다. 일단 이것의 처리법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 제였다. 그는 고용인을 시켜 종이상자를 가져왔고,그 안 에 봉투를 넣어 서재에 보관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이승도는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또 주전부리를 하고 있었다. 간식이라고 하기 엔 여전히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태국영은 은근슬쩍 다가 가 이승도의 곁에 앉았다. 분명 오늘 일에 대해서 물을 거 라 생각했고,그에 대한 대답들도 충분히 생각해 둔 상태 였다.

   “왜 그렇게 보?? 뭐 하나 줘?”

   하지만 잠시 먹을 것에 심취해 있던 이승도가 끼낸 질 문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육식동물 태국영이 먹을 만한 것은 닭 가슴살 스테이크분이라 그것을 한 점 찍어 건네기까지 했다.

   “아니. 너 다 먹어.”

   태국영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다가 더 참지 못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 승도,오늘 일은 걱정 안 돼?”

   염탐자가 있었다. 여은태가 놈을 추격하러 가서는 거지 꼴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입혔던 정장은 온데간데없이 사 라지고 몸에도 안 맞는 넝마를 걸친 채였다. 아무리 덜 여

물어 있다지만 여은태가 변이까지 해 가며 추격했는데 결 국 물고 돌아온 것은 피 묻은 천 조각 하나분이었다.

   이승도는 그 단순한 인과를 추리하지 못할 만큼 머리 가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궁금 한 것조차 없다는 것이고,그건 아마 일련의 상황을 대강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렇게 평온한 것이 도리 어기이한 것이다.

   “걱정할게 뭐 있어.”

   이승도는 견과류 바를 터프하게 씹어 넘기곤 말을 이었 다.

   “이승도 스토커 태국영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태국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얼었다. 이승도는 숨을 멈추 고 저를 빤히 보는 눈길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매끈하 게 닦인 체리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던 탓이었다.

   이승도는 체리 꼭지를 집어 들었다. 자줏빛으로 잘 익 은 열매가 그의 새발간 혀에 휘어 감겼을 때였다. 태국영 은 기습적으로 다가가 이승도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이 승도는 활어처럼 펄쩍 튀어 올랐다. 막 입 안으로 발려 들 어가려던 체리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국영,■■■아!,,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밀어내려던 손이 그대로 붙들렸다.

단번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이승도는 눈 깜짝할 사이 뒤로 떠밀려 소파에 파묻혔다. 피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목이 깊이 발렸다. 그 위로 잘근잘 근 씹는 호흡은 불처럼 뜨거웠다.

   “승도야.”

   태국영은 열기로 홧홧한 뺨을 턱에 비벼댔다. 마킹 같 은 키스가 목에 부려졌고 그것은 더운 날 역병처럼 그 근 방을 빠르게 점령해 갔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난폭 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거친 숨 결이 귓가를 씹어 물었다.

   위험스레 발기한 성기가 허벅지에 부대껴 왔다. 언뜻언 뜻 마주치는 눈은 이미 몽롱한 화마에 집어삼켜진 채였으 나 그는 거기에서 멈춰 있었다. 옷 안을 파고들어온 손은 자유롭지 못했고 입술을 짓누르는 키스는 더 깊어지지 않 았다.

   “승도야.”

   그저 어린애가 엄마를 찾듯이 그 이름만 애타게 부를 분이었다. 그것은 각인 같은 것이었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 빗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황하며 저를 부르던 그의 몸부림이었다. 이렇게 사이가 발전한 지금도 그것만 큼은 떨쳐내지 못하는 거다.

   당황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승도는 손을 내밀어 그 의 뺨을 어루만졌다. 태국영은 허겁지겁 그 손바닥에 뺨 을 비볐다. 축축한 입맞춤이 손금을 배곡히 메웠다. 이승 도는 젖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쉬이. 국영아. 착하지.”

   이승도는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찰나 그의 눈동자에 날짐승의 난폭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 는 탁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심호흡을 하 며 몸을 일으킨 그는 잔뜩 경직된 어깨를 들썩였다. 충동 을 압살하려 애를 쓰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거칠게 굴면 아기 다쳐.”

   이승도는 차분하게 타이르고 일어나 바닥에 섰다. 그대 로 티셔츠를 벗었고 허리를 가볍게 졸라매 둔 고무줄 허리 띠도 끌러냈다. 두통이 이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 던 태국영이 찡그린 눈을 들었다.

   “이리 와.,,

   이승도는 소파 옆의 벽에 손을 짚고 서서 돌아보았다. 태국영은 미심쩍게 눈만 깜박이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 썼다. 이승도가 웃으며 뒤로 팔을 뻗었다.

   “괜찮으니까 이리 와.”

   태국영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거절한 거아니었어?”

   탁성이 심하게 섞인 음성이었다. 어쪄면 조금 토라진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승도는 속으로 한숨을 지으며 골 반에 걸려 있던 바지를 팬티와 함께 끌어내렸다. 그대로 상체를 숙이자 돌돌 뭉친 옷 위로 숨어 있던 구명이 드러 났다. 붉은 주름은 이미 미끈한 액으로 젖어 있었다.

   태국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큰 들숨을 마셨다. 야릇하 지만 풋내가 섞여 있던 유혹의 향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농 염하게 폐부를 들쑤셨다. 태국영은 소파를 훌쩍 넘어가 이 승도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너,냄새가 더 짙어졌어.”

   태국영은 짐승처럼 정신없이 냄새를 맡았다. 이제 주저 할 것 없는 손은 단번에 이승도의 예민한 부분부터 더듬 기 시작했다. 이미 발기해 있던 성기는 금세 프리컴을 흘 렸고,비틀린 젖꼭지는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승도 는 손끝으로 벽을 긁으며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국영아. 진정하고,천천히……

   “애 상태 내가 제일 잘 알아. 받아줄 거면 확실히 받아.

   태국영은 묘하게 강압적인 어투를 썼다. 그가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증거였다. 요 근래 많이 애를 태우긴 했다.

이승도는 잠자코 그에게 엉덩이를 내주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눈이 돌아서 그래. 깜짝놀랐…… 아!,,

   무심결에 또 밀어낼 뻔했다. 예고 없이 엉덩이를 벌리 고 구명 사이를 툭툭 건드리는 이물감 때문이었다. 태국영 이 귓바퀴를 씹었다.

   “달리 이유가 있나.”

   당연히 네가 환장하게 예뻐 보여서지,그는 날카로운 잇자국과 달리 녹을 듯 속삭였다. 이승도는 어깨를 움츠리 며 허리를 떨었다. 흐으,하고 길게 늘어지는 탄식을 그의 혀끝이 훔쳐갔다.

   “바로 넣어도 될 것 같아. 너 지금 엄청 젖었어. 흘러내 려.,,

   부드러운 손끝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끈끈하게 눌어붙는 마찰음이 울렸다. 목덜미를 물렸을 때부터 이미 다리 사이가 간질거리기 시작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승도는 열 오른 얼굴을 벽에 기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흥분해도,배는 누르면 안 돼.”

   당부를 잊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의 태국영 과는 절대적으로 정상위는 피해야 했다. 엉덩이가 명들 정

도로 들이받으며 몸을 비벼오는 터라 압박의 위험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글쎄. 우리 둘째 그렇게 약하지 않대도.”

   태국영은 픽 웃으며 말했다. 미끈하고 단단한 귀두가 구명을 벌리고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이승도는 날카롭 게 신음했다. 마른 장작에 불씨가 옮겨 붙은 것처럼 심장 이 격동했다.

   즈윽,하고 살덩이가 점막을 벌렸다. 숨이 멎었다. 혼절 하는 것처럼 일순 블랙아웃이 왔다. 그리고 곧 그 반동으 로 눈알이 시릴 정도의 빛 폭죽이 찾아왔다.

   “아,…아아!”

   이승도는 본능적으로 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내벽을 짓이기듯 벌리고 들어온 것은 그보다 더 치밀하게 따라와 마침내 한계까지 박혀 들었다.

   “흐…의 국여…아옷!,,

   너무 깊어. 너무 깊어. 이승도는 그 말만 반복하며 질 끈 눈을 감았다. 미지근한 눈물이 속눈썹을 흠뻑 뭉쳐놓았 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눈꺼풀을 할짝거렸다. 미각이 마비 된 것처럼 그것마저도 달았다.

   축축하게 젖은 점막이 흡착기처럼 성기를 쥐어짰다. 태 국영은 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동그마

니 말리는 어깨 아래 쇄골을 씹었다. 여린 살갗은 대번에 잇자국이 났고 피가 배어 나왔다.

   이승도는 자지러지게 울면서도 제지하지 않았다. 잔혹 해지려는 본성을 그렇게라도 분산시키지 않으면 서로가 상처 입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윽,홋! 구,국영아! 저기…나……!,,

   태국영은 번들거리는 눈을 눈꺼풀로 덮었다. 절정은 금 방 찾아왔지만 오기로 내리눌렀다.

   ‘‘응. 승도야 왜.,,

   대답은 부드러웠으나 허리 놀림은 야만스러웠다. 태국 영은 이승도의 골반을 양손으로 쥐고서 오랜만에 마음껏 그 속살을 만끽했다. 단단한 굴곡을 이룬 복근이 꿈틀거렸 다. 그것은 이승도가 본능적으로 내벽을 오물거리는 움직 임과 그 리듬을 같이 했다.

   “아……! 으응!”

   이승도는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 잊은 듯했다. 그 저 격통이 지나간 자리를 뭉근하게 메우는 쾌감에 고개를 젖혀 들었다. 뒷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아,아,이승 도는 일그러진 눈으로 열락을 헤매었다.

   키스해,이승도가 울먹이듯 말했다. 태국영은 온순하 게 그의 입술을 물었다. 시작은 순종적이었으나 살결을 무

는 것은 곧 탐욕스러워졌다. 용광로의 증기처럼 뜨거운 숨 결들이 얽혀들었다.

   이승도는 핏 핏 정액을 흘리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 했다. 처음부터 급격하게 오르가즘 근처로 다다라 신체기 능이 마치 망가진 상태에 놓인 듯했다. 그는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태국영의 머리를 갈고리처럼 휘어 감았다. 떠밀 리듯 받아들이던 키스는 어느새 쌍방이 서로를 미친 듯 갈 구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승도는 매달리는 것을 넘어 집어삼킬 듯했다. 벽 쪽 으로 달아나기 바빴던 엉덩이는 어느새 태국영의 아랫배 를 쫓아오기 바빴다. 깊이 찔러 넣었다가 뒤로 뺄 때면 안 달하듯 따라와 내벽을 조였고,짧게 깎은 손톱으로 팔뚝 을 긁어댔다.

   태국영은 이때만큼 제 재생력이 쓸모없다 여긴 순간이 없었다. 그 집요한 성애의 흔적들이 금방금방 사라져 버리 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더 할퀴어 달라 말했고 더 거칠게 다뤄 달라 말했다. 이승도는 물막 어린 눈을 깜박 이며 헐떡였다.

   “이상해……이상해,이런 거……

   그것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태국영은 용 케 알아듣고 이승도의 아랫배를 크게 펼친 손으로 감쌌다.

손 안에서 심장 고동 같은 울림이 진동했다. 태아가 움직 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날뛰듯 힘찬 발길질이었지만 그 것이 불만을 표하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 아기가 좋아하고 있어.”

   태국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이 좋았 다. 태아는 모체가 느끼는 환희를 고스란히 훔쳐갔고,굉 장히 들뜬 상태로 양수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뺨을 이로 긁으며 물었다.

   “좋아해……?,,

   “응. 네 감정을 공유하고 있어. 아주 기뻐해. 몽롱한 기 분이야. 엄마가 행복하니까 아기도 행복해.”

   탐색을 질색하던 녀석이 지금만큼은 그것마저도 반기 는 기색이었다. 태국영은 시험하듯 허리를 부드럽게 돌렸 다. 성기를 물어뜯듯 조이고 있던 내벽이 물결치듯 그 움 직임을 따라왔다. 그리고 아기는 아마도 드러누운 것 같았 다.

   “새끼고양이가 골골거리는 것처럼 아기가 목을 울려. 우리 승도,그렇게 좋아?”

   태국영은 하느작거리는 눈웃음과 함께 물었다. 물기 어 린 눈으로 헐떡이던 이승도는 그의 달콤한 미소에 입을 맞 췄다. 그의 매혹적인 눈가에 입술 모양의 숨결이 찍혔다.

   “좋아. 국영아……■,,

   그리고 어깻죽지에 뺨을 기대며 속삭였다.

   “침대로 가자.”

   태국영은 지체 없이 허리를 물렀다. 귀두가 간신히 들 락거리던 것마저 온전히 봅혀나가자 이승도는 무너져 내 렸다. 오금에 힘이 풀린 것이었다. 태국영은 어렵지 않게 그 몸을 추슬러서 안아 들었다. 이승도는 옮겨지는 동안 태국영의 근사한 흉근을 손끝으로 덧그리며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오해하면 안 돼. 그간 내가 너랑 하는 거 싫어서 밀어 냈던 거 아니야. 그냥 그랬어. 죄책감이,그냥 그런 마음 이……■,,

   “알아.”

   알고 있어,다 알고 있어,태국영이 뇌까렸다. 이승도 는 태이경을 태중에 품고 나서 더 날카로워졌었다. 틈만 나면 울었고 틈만 나면 독한 말을 내뱉었다. 그랬기 때문 에,아기의 태중 기억이 생각보다 명확하다는 걸 알게 되 었을 때 이승도가 받았을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었다.

   “내 일편단심 순정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이경이는 널 원망하지 않았어. 단 한 순간도.”

   ‘‘……조금도?”

   “아주 조금도.”

   태국영은 단언하며 조심스레 이승도를 침대 위에 눕혔 다. 이승도는 폭신한 시트에 뒷머리를 비비며 허벅지를 활 짝 벌렸다. 동물적인 근육으로 감싸인 몸뚱이가 그 사이 를 메웠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끝이 다가와 뺨을 쓸어내 렸다.

   눈이 마주쳤다. 정적은 짧았다.

   “이경이는 널 많이 사랑해. 그 애한테 중요한 것은 네 가 곁에 있는 지금 이 순간분이야.”

   “좋은 부모가 되어 주고 싶었어.”

   “년 지금도 백 점짜리 부모야.”

   이승도는 생각했다. 제게 엄마라는 존재는 곧 부서질 듯 작고 여렸으나 한편으로는 바다처럼 넓고 큰 존재였다. 그녀 역시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제게는 백 점짜리 엄마였 다.

   태국영이 번들거리는 성기를 구명에 물렸다. 이승도는 허공에 두 다리를 들어 그의 삽입을 반겼다. 난폭함을 다 소 깎아낸 수컷의 상징이 속살을 벌리고 꾸역꾸역 밀려들 어왔다.

   백열등이 휘청거렸다. 취객의 움직임처럼 불규칙한 스 펙트럼을 보였다. 이승도는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안구

에 떠돌던 눈물 가루들이 눈꼬리에 번졌다.

   “널 원망하지 않아.”

   이승도는 불시에 중얼거렸다. 조여드는 내벽을 음미하 며 아랫배를 탁탁 올려치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결 거친 숨결이 허공에서 교미하듯 뒤엉켰다. 이승도는 무거 운 눈꺼풀을 느리게 들었다.

   “괜찮으니까,국영아. 이제는 용서해 달라고 말해 봐.”

   “난 이제 널……■,,

   태국영은 키스했다. 씹어 삼킬 듯이 험악하고 배려 없 는 키스였다. 내리꽂히는 눈빛은 음울하고 깊었다. 이승도 는 입술을 열어 그의 혀를 감싸 안았다.

   아직 아니야?

   눈으로 물었고 그는 반쯤 눈을 내리감으며 대답을 회피 했다. 그 어떤 예고도 없이 그가 사납게 아래를 들쑤셨다. 깊이 숨어 있는 쾌락의 포인트를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이승도는 그 열락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내맡 겼다. 축축하게 젖은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조였다. 태국 영은 그것을 기점으로 온전히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온몸을 짓누르며 비벼오는 짓은 하지 않았다.

   가엾은 남자다.

   이승도는 흐느낌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태국영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모른 척했다. 그는 허공에 서 흔들리는 발목을 잡아채 잇자국을 남겼고 활짝 펴진 발 가락을 하나하나 발아댔다. 콱콱 박혀 들어오는 성기 끝 은 어김없이 전립선을 강하게 비볐다.

   이승도는 자각 없이 두 번째의 사정을 했다. 우윳빛 액 체가 선단에서 툭툭 흘러내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을 깍지 껴 그것을 만지게 했다. 그 뒤엉킨 손은 아랫배를 훑 고 난잡한 교미를 이루고 있는 접합부에 닿았다.

   이승도는 무거운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약에 취한 듯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동공만큼은 선명해 모든 것을 담아갔다.

   이승도는 중지와 약지로 교접부를 슥슥 매만졌다. 노골 적인 섹스어필에 태국영은 폭주했다. 그것은 마치 새카만 과거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 승도는 비옥한 대지처럼 그를 품었다.

   다시 발기하지 않을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성기는 금 세 꼿꼿하게 되살아났다. 비명이 팝콘처럼 허공에 튀었다. 이승도는 맘껏 교성을 내질렀고 태국영은 억눌린 신음을 깊은 곳에서 울리며 깊이 입술을 맞물렸다.

   절실한 타액이 목 안을 흘렀다. 이승도는 한껏 입을 벌

려 그것을 삼켰다. 무슨 맛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그 향기는 너무나 짜고 달콤했다.

   그의 마음이다. 태국영의 심장이 뱉어내는 소리였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등을 겁박하듯 조여 안았다. 그 매 끈한 살갗에 선홍빛 손톱자국이 환상처럼 머물다 사라졌 다. 통각이 고장 난 것처럼 태국영이 그것을 기꺼워했기 에 이승도는 그의 등을 마음껏 할퀴었다.

   “아……! 하아…앗!”

   청결한 햇빛이 녹아든 시트가 뺨에 뭉그러졌다. 이승도 는 한껏 입을 벌리며 둔부를 치켜들었다. 낮게 갈라진 신 음을 쏟아낸 그가 턱을 젖혀 들었다.

   이승도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그를 느꼈다. 그의 심장이 움직이는 모양을 투시했고,제 점막에 부려지는 그 의 정액을 감지했다. 배앓이를 할 것이 틀림없었지만 상관 없었다.

   빠져나가려는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아 끌어당겼다.

   “왜?”

   아랫배는 조심하면서 고분고분 안긴 태국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이승도는 가만 그를 올려다보다 고 개를 저었다.

   “이대로 잠깐만 있어.”

   태국영은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 다. 오고 가는 대화 없이 길게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명확 한 단어를 뽑아내어 주고받는 대화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짙은 감정의 교류였다.

   이승도는 이끌리듯 그에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표피가 맞닿는 순간 태국영은 혀를 내밀었다. 천천히 혀끝 을 마주 댔다. 볕에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덥고 달콤한 맛 이 미각을 잠재웠다.

   이승도는 정신없이 그를 부둥켜안았고,태국영은 그 뜨 거운 마음에 동화되어 늘어진 이승도의 다리를 끌어올렸 다. 그들은 다시 뒤엉켰다. 농밀한 체향이 침실을 가득 채 웠다. 딱히 누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태국영은 반듯이 누워 있었고 이승도는 그의 치골에 엉덩이를 퍽픽 내리며 잦은 신음을 띠고 있었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둔부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흘 러내리는 정액들이 흰 거품을 피워냈다. 태국영의 가슴을 짚은 채 요사스럽게 허리를 놀리는 이승도는 본능 따라 움 직이는 짐승 같았다.

   바짝 발기한 성기는 만져주지 않아도 알아서 묽은 액 을 토해냈다. 태국영은 제 하복부가 더럽혀지는 광경이 몹 시도 만족스러웠다. 그 자국은 금방 사라지는 흉터와 달

리 오래 머물 것이기 때문이었다. 볼록한 아랫배와 유연하 게 휘는 허리를 애무하며 올라간 손이 젖꼭지를 비틀었다.

   아앗,이승도가 크게 입을 벌리며 몸을 비틀었다. 바들 바들 떨며 쓰러지는 상체를 받아 안은 태국영은 그대로 토 정했다. 뜨끈한 액이 울컥울컥 붐어져 나오자 이승도는 본 능적으로 둔부를 조이며 입구를 막았다.

   태국영은 상체를 반쯤만 일으켜 경련하는 몸뚱이를 솜 사탕처럼 끌어안았다. 이승도는 오르가즘에 취해 오랫동 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흐으,흐윽,씹어 먹고 싶을 만 치 가녀린 울음의 여파가 길게 귓전을 채웠다.

   승도야,태국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으응,이승도가 불 분명한 대꾸를 보내왔다. 잔뜩 풀어진 내벽은 그 와중에 도 부드럽게 요동치며 사내를 홀렸다.

   태국영은 가볍게 맞닿은 아랫배를 느꼈다. 아기는 탈력 한 듯 잠들었고 이승도도 곧 드릉거리기 시작했다. 부리까 지 먹여 놓은 성기를 천천히 배내었다. 우윳빛 정액이 빠 끔거리는 구명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할아줄까,씻어줄까,잠시 고민하던 그는 순간적인 충 동에 이끌려 그곳에 다시 제 것을 물렸다. 이승도는 잠결 에서도 다리를 벌렸다. 허리를 비틀며 달콤한 비음을 흘렸

   하아…….

   태국영은 움찔거리는 이승도의 입술을 삼킬 듯이 덮어

눌렀다. 꽉 닫힌 눈꺼풀이 미세하게 열렸다. 흐리명덩한 눈은 제 위에서 짐승처럼 움직이는 남자를 확인하더니 다 시금 스르르 닫혔다.

   번들거리는 손은 다시 시트를 더듬었다. 태국영은 그것 에 깊이 깍지를 낀 채 마음껏 제 욕망을 분출했다.

   새벽이 깊어지고 달이 기우는 동안 이승도는 몇 번이 나 깨어났지만,그때마다 불만 없이 태국영의 폭주를 받아 주었다.

   여은태가 완벽하게 변이를 배운 후부터 이승도는 주말 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태국영은 그가 동행한 다는 조건만 있다면 평일에도 어디든 가도 좋다고 했지 만,이승도는 왠지 내키지가 않아 주로 집 안에 있는 편이 많았다.

   예전에는 식구도 별로 없는데 집이 쓸데없이 크다고 생

각했던 적도 있었는데,지금 와서는 이 낭비적인 규모의 저택이 참 다행이었다. 집안에만 있어도 생활에 제약을 받 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승도가 제 몸을 이상하다 느끼기 시작한 것은 체중 이 5kg 정도 늘었을 즈음이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들어가면 피트니스 룸이나 실내 풀에서 태국영과 함께 운 동을 하곤 했는데,교수가 수업을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 체력이 부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기운이 펄 펄 나고 몸이 개운하기까지 했다.

   태국영은 그것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태중의 아 기가 모체를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 모 든 것을 공유한다고 했다. 이승도 자신이 즐겁게 운동을 할 때면 아기도 그만큼 신나게 체력을 소비하고,제가 맛 있는 것을 먹을 때면 아기 또한 행복한 식사를 한다는 것 이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기의 정서발달에도 매우 좋다는 말이었다. 태국영의 설 명을 귀담아들은 이승도는 그 뒤로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즉각 실행을 하게 되었다. ‘무리한 운동은 안 좋다 고 했으니까’ ‘날생선은 안 먹는 거라니까’ 그런 일반적인 걱정들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심경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태국영이었다. 괜 한 우려들을 말끔히 떨어낸 이승도가 종종 굉장히 뜬금없 는 순간에 달뜬 숨을 흘리며 자진해서 품에 안겨 왔기 때 문이었다. 이미 젖어 있는 구명을 내보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하… 하아……

   이승도는 가쁘게 헐떡이며 어깨를 떨었다. 점막에 부려 지는 정액의 느낌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태국영은 이승 도의 뺨에 입술을 뭉개며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몽글몽글 한 정액 방울이 따끈한 물속을 유영했다.

   오늘은 함께 수영을 하다가 습격을 받았다. 물론 태국 영은 저항 없이 백기를 들었다. 이승도는 스스로 풀장 턱 에 팔을 대고 엉덩이를 내밀었고,태국영은 섹스 내내 이 승도의 등에 영역표시를 남겼다.

   “우리 승도,오늘은 왜 꼴렸어?”

   오르가즘의 여파가 서서히 잦아들 때쯤 태국영은 이승 도를 안아 들어 자쿠지로 옮겼다. 뜨거운 물에 몸이 담기 자 이승도는 기분 좋게 앓는 소리를 냈다.

   “네 등이 너무 예쁘고 근사했거든.”

   “등?,,

   태국영은 얼핏 어깨너머 고개를 돌렸다. 잔 근육들이

완벽한 모양을 갖추고 있긴 했다. 그러나 집에서 거의 상 의를 탈의하고 다니는 것이 버릇이라 조금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구명에서 정액을 긁어내며 조금 웃 었다. 이승도는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등. 동물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들이 굉장 히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고,그 말을 하려다가 말았 다. 그보다 더 노골적이며 야한 대화도 많이 오가는 사이 였지만,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설렘을 말하는 것은 도리 어 쑥스러웠다.

   “아. 맛있는 냄새.”

   이승도는 태국영의 가슴에 푹 늘어져 있던 등을 단번 에 곧추세웠다. 고기가 익고 버터가 그 안을 스며드는 냄 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태국영은 서둘러 샤워를 하 고 나가는 이승도를 따라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고 기 냄새를 감지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이승도가 그것을 따 라잡은 것이다.

   이건 좀 심한데.

   지금 이승도의 후각은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보 통 태중 아기가 강하면 모체가 그 영향을 받긴 하지만 이 렇게 강한 연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족의 임신에 관

한 논문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러다가 막 건물도 뛰어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몰라. 장난처럼 떠올린 생각은 곧 그대로 흘려보냈다. 허약해 지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건강해지는 변화이니 좀 유별나 다고 해서 나블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금 찝찝함은 남았다. 아기가 이승도에게 가지는 집착이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만 뇌리를 멤돌았기 때문이었다.

   차고 문이 열렸다. 최명욱의 차가 부드럽게 빠져나왔 다. 선팅 짙은 차창 안으로 검은 덩어리가 비쳤다. 안력을 바짝 돋워 살핀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미소를 띠는 매 우 기이한 표정이었다. 짜증을 내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어차피 그의 감정상태는 지금 조금 도 중요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꾼 차가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남자는 망원 경을 버리고 재발리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최명욱이 어디 로 갔는지,언제 돌아올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시간 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벽을 따라 내 달렸다.

   간혹 인간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으나 그들은 우매하게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했다. 발소리는 바람 소리에 섞 여 완벽하게 은폐되었고,친숙한 어둠이 머리카락 한 올까 지 그의 실체를 감추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열일곱…… 아니,열여덟인가.

   남자는 가까운 골목에 멈춰 서서 최명욱의 자택 안으 로 바짝 감각을 집중했다. 아직 밤이 그리 무르익지 않은 탓에 모두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중 인간에 가깝 게 느껴지는 고용인이 열둘 정도였고,나머지도 특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상대는 감지되지 않았다.

   한 가문의 가주가 애인을 위해 마련한 보금자리로는 너 무나 초라한 방비였다. 그럴 일은 없겠으나 제가 실수를 연발해도 충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로.

   명청한 놈. 의심만 많아서는.

   최명욱은 박해인에 관해서 만큼은 제 최측근조차 믿지 않았다. 포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와 버린 스스로의 변화 를 아마도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것이었다. 물론 제가 박해 인에게 빠진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굳이 이런 허름한 데 를 골랐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최명욱은 그 오판으로 인해 오늘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이었다. 남자는 번개처럼 뛰어가

위로 솟구쳤다.

   박해인은 오랜만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수시로 잠이 쏟아지고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상태가 만족스러웠다. 더 이상 모르는 사내들에게 억지로 남창 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제 불행을 주도했던 절 대자는 이제 길들인 짐승이 되어 제 품에 안기게 되었다. 제 자존감을 팔아가면서까지 거짓을 고했던 것은 지금 생 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최명욱은 나날이 부드러워져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찬 바람이 쌩쌩 날리고 말투도 여전히 거칠었지만,그의 손길 과 눈빛만큼은 그의 속마음을 날 것으로 내비쳤다. 조금 씩 온정이 짙어져 갔으며 그것은 얼마 전 들려온 기븐 소 식에 의해 좀 더 뚜렷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방금 전에도 그랬다. 순대가 먹고 싶어요,그렇게 말하 자 그는 ‘네 눈에는 내가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거나’고 불 같이 화를 냈다. 화를 내면서도 결국 차 키를 챙겨 들었다. 한 번에 말해,두 번은 진짜 가만 안 둬,마치 협박하듯 말 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비록 그 남자처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우리 승도 또 뭐가 먹고 싶어서 그래?」

   한 가문의 가주들을 쭉정이 취급하며 시종 방만하게 굴

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임신했다는 아내와의 통화에서는 배도 뒤집어 보일 것처럼 안면을 싹 바꾸지 않았던가.

   그것이 질투가 났다. 그가 제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저 주 같은 혈통 때문에 자신은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았는 데,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내는 여왕님처럼 대접을 받고 있으니 어찌 시기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지만 그 못난 마음,이제는 조금 가벼워졌다. 표현의 방식이 달라 그렇지 최명욱도 그 남자만큼 저를 아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명든 가슴은 고작 그 정도로도 행복을 느꼈다. 무더진 비참함은 감각을 건드리지도 못하 고 끼져버렸다.

   팟.

   박해인은 상념에서 강제로 벗어나며 몸을 일으켰다. 방 금 전까지 새하안 빛을 부리던 백열등이 끼지고 무시무시 한 암흑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가만히 눈을 깜박 이며 기다렸지만 빛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박해인은 걸 음을 옮겨 발코니로 나가 보았다. 제 방분만 아니라 온통 어둠 천지였다.

   정전이었다. 별일이네 하며 돌아섰다. 그때 박해인은 제 몸을 덮쳐드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놀라 서 비명을 내지를 사이도 없었다. 입이 틀어 막힌 것을 인 지했을 때는 이미 엄청난 격통이 가슴을 강타한 뒤였다.

   검은 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지체 없이 훌쩍 발코니를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박해인은 바닥에 쓰러진 채 툭툭 경련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소란이 뭉그러진 채 주변을 울렸다.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남자들이 절망적인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 모든 것이 물속에서 듣는 바깥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피거품이 역류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박해인은 창밖의 일그러진 달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몸서 리쳐지게 외롭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제 곁에는 서너 명 의 남자들이 있었으나 사실은 아무도 없었다. 비참한 생 에 어울리는 비참한 마지막이었다.

   박해인은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 한 손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그 순간 한 맺힌 눈동자에서 순식간에 생명의 빛 이 사라졌다.

   태국영이 쓸데없이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그는 태이경 의 목덜미를 붙들고 있었다. 태이경은 나름 변이를 한다 고 한 상태였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꼬리가 생기 고 검은 털이 등에 송송 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태 이경 역시 쓸데없이 심각하게 눈을 치켜뜨며 화답했다.

   “옙!”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태국영은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 다. 태이경은 꺄우 하고 신나는 소리를 흘리며 탁한 밤하 늘을 향해 대포알처럼 쏘아져 올라갔다. 대형트리를 감싼 꼬마전구의 화려한 빛을 가르며 솟구친 아이는 손톱만큼 이나 작아졌다. 유모가 봤다면 거품을 물고 기절했을 광경 이었다.

   이승도는 안전할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기겁해서 눈을 질 끈 감았다. 그때 마찬가지로 완전히 변이해 있던 여은태 가 바람처럼 달려갔다. 나날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녀석의 발소리는 그와 반비례하게 작아졌다.

   여은태가 날아올랐다. 그 도약의 소리에 이승도는 슬 쩍 실눈을 떴다. 은빛 털이 화려하게 물결쳤다. 정원 분수

대 근처를 장악한 대형트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빛의 파 동이었다.

   여은태는 막 포물선의 정점을 찍은 태이경의 엉덩이를 머리로 살짝 들이받았다. 추락하려던 속도가 줄은 아이는 허공에서 몸을 틀었고,익숙하게 여은태의 등에 탑승했다.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합체한 아이들이 바닥에 가볍게 내 려앉았다.

   “완벽해! 완벽해! 형아 최고!”

   태이경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까르르 웃었다. 여은태는 뻐기듯 턱을 치켜든 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이승도에 게 다가갔다.

   【선생님. 나 예뻐?】

   이승도는 허리를 굽혀서 여은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 다.

   “그럼. 우리 아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예브지.”

   흐흥,기분 좋은 듯 목을 울린 여은태가 태국영에게 등 을 내밀었다. 애 좀 다시 발사해 줘,그렇게 말하자 태국영 은 튕기는 법 없이 다시 태이경의 목덜미를 쥐고 들어 올 렸다. 그건 인간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굉장히 아동학대적 인 행동이었다.

   “이경이 숨 안 막혀?”

   이승도는 새삼스럽지만 괜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목 뒤를 저렇게 잡히면 울대가 당연히 조여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이경은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구명 을 뚫은 바지 밖으로 삐죽 나온 까만 꼬리도 허공에서 부 드럽게 흔들렸다.

   “아니. 하나도 안 막혀요. 나 완전 편해.”

   태국영은 혀를 차더니 찡그린 눈으로 이승도를 돌아보 았다.

   “야. 설마 내가 너 보는 앞에서 애 아프게 하겠나.”

   “나 안 보는 앞에서는 할 수도 있단 소리야?”

   이승도는 똑같이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태국영은 기 세를 한층 죽여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히 아니지. 어쨌든 이건 클립노시스라고 보면 도H. 애가 허약하게 태어나서 지금 이 모양이지만 어쨌든 내 피 를 받은 내 아들이야. 우리 종족의 본능만큼은 가지고 있 다고.”

   “응. 응. 나 이거 좋아.”

   태이경은 손발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기분 좋게 눈가 를 접었다. 여은태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지극히 원론 적인 질문을 던졌다.

   【클립노시스는 엄마고양이가 새끼고양이 목을 무는 거

잖아. 이소 하거나 훈육할 때 하는 행동이라 새끼가 그걸 기억하고 나중에 목을 잡히면 안정감을 찾는 거라고 선생 님한테 배웠어. 그런데 그걸 이경이가 알 리가 없지 않아? ]

   대놓고 ‘네가 그런 아빠였을 리가 없어’라고 하니 태국 영은 기가 차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아이를 방치했던 것이 사실이기에 반박할 말은 없었다. 때문에 그 역시 원론적인 대답을 끼내 들었다.

   “그래서 본능이라고 안 하나,본능이라고. 엄마한테 목 안 물려본 새끼고양이가 클립노시스에 전혀 반응 안 할 거 라는 편견은 버려.”

   【하지만 난 형이 목덜미 잡을 때마다 죽이고 싶었는데?

]

   여은태는 천진한 눈망울로 그렇게 살벌한 말을 했다.

그 직후 앗,하며 실수라고 정정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 지는 않았다. 깜짝 놀란 태이경의 동그래진 눈과 애매하 게 웃을 듯 말 듯한 이승도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본 여은 태는 슬쩍 눈을 내리며 공연히 땅바닥을 앞발로 파헤쳤다.

   【아니,뭐…… 형이랑 나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으니 까…….】

   “그래. 네 머릿속에 네 형이나 네 아빠나 안정감을 주

는 가족이 아니었으니 당연하지.”

   태이경은 태국영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진 않았다. 그 러나 그가 자신의 아빠이고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버팀목 임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빠 백 믿고 겁 도 없이 최명욱의 앞을 가로막던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 었다.

   “자. 어쨌든 이번에는 더 높이 간다.”

   개과천선해서 요새는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태국영이 선언했고 여은태와 태이경은 반갑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태국영이 조금 더 힘을 실어 더 높은 곳으로 태이경을 던 졌다. 여은태는 낮게 웅크린 몸으로 하늘을 주시하며 낙 하 직전을 계산했다. 그리고 막 녀석이 튀어 올랐을 때였 다.

   태국영은 진동을 느끼고 호주머 니를 뒤적였다. 짧게 울 리다 멈춘 휴대폰은 문자메시지가 와 있는 상태였다. 그 는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여 확인 버튼을 눌렀다.

   텍스트를 읽어갈수록 그의 눈가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느리게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가장 첫 문장을 다시금 입 안으로 곱씹었다.

   『오늘 여홍재가 박해인을 죽였다.』

   여홍재가 박해인을 죽였다.

   박해인이 살해당했다.

   남강우가 박해인의 부고를 전해 들은 것은 막 서울로 진입하는 톨게이트를 지날 때쯤이었다. 핸즈프리 이어폰 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담담했다. 물론 그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기에 딱히 이상하다 여기진 않았다.

   《내가 도저히 이 새끼는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가 서 오늘 참다못해 여제운한테 직접 물어봤어. 여홍재 그 새끼가 박해인을 죽였는데 왜 그랬을 것 같냐고. 그랬더 니 여제운이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

   “원데.”

   관심 없다는 투로 반문했던 남강우는 다음으로 이어진 상대의 말에 정신이 번득 들었다. 그는 무심결에 급브레이 크를 밟았다. 끼이이익,타이어가 지면에 거칠게 마찰했 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급선회를 하며 찢어질 듯 경 적을 울렸다. 그 모든 소리들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 는 노랫말처럼 하느작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남강우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해할 순 없지만 여제운의 판단이 아마 가장 정확할 거야. 여홍재한테는 아주 좋은 선례도 있지. 과거에 등대 들을 말살해서 제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던 제 가문의 조상 놈들의 선례.》

   여홍재는 물론 여 가의 역사서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었 다. 그러나 그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는 가문 내에서 쉬쉬 하는 비밀을 모조리 꿰고 있을 터였다. 여군호에게 거의 압살당한 지경으로 패배했던 그 남자가 저와 꼭 닮은 아들 에게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지금 재희는 네 곁에 안전하게 있어?》

   고속으로 회전하던 두뇌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지했다. 남강우는 예고 없이 통화를 종료했고 즉시 액셀을 밟았다. 급발진한 차가 광분한 들소처럼 도로를 내달렸다.

   강철심장이 전시를 알리는 북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피 가 흐르는 모든 기관에서 용광로 같은 열기가 들끓었다. 마치 만월의 밤 아래 맨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남강우는 두려웠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는 그 랬다. 막연히 몸이 떨렸다. 볼품없이 깡마른 여자애가 가 슴이 뚫려 싸늘하게 식어있을 장면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

   소심해서 늘 깜짝깜짝 놀라던 송재희. 먹기 싫은 보양 식을 내밀면 입을 삐죽이면서도 억지로 씹어 넘겼던 송재 흐I. 보름날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손끝을 가만히 쥐어 오 던 송재희.

   「믿을게요. 저 무서우니까,움직이면 안 돼요.」

   남강우 자신은 그때 가소로운 듯 웃었더랬다. 내가 그 런 저급한 충동도 절제 못 할 애송이로 보이냐고,너처럼 살집 없는 계집아이 덮칠 만큼 굶주리지 않았다고 괜히 무 안을 주었었다.

   송재희는 조금 기분 나븐 듯이 미간을 좁혔었다. 그러 나 얼굴이 새발개진 상태로도 제 팔과 다리를 열심히 주물 렀었다. 저 이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해 본 적은 없어요, 그냥 주사 맞으면 안 되나요,그거 되게 효과 좋다던데,고 시랑거리던 바짝 마른 입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재희야.,,

   남강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놀라움 에 입술이 굳고 말았다. 이렇게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이 름이라는 걸 이제야 안 까닭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조 작했다. 지금 송재희와 한창 어울리고 있을 신영애의 번호

를 찾아 통화를 연결했다. 다이얼은 한참이나 울리다가 결 국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적인 멘트가 귓전으로 쏟아 졌다. 불안감은 건조한 날의 바싹 마른 장작처럼 더 거세 게 타올랐다.

   불안감.

   그랬다. 그건 불안감이었다. 남강우는 핸들 쥔 손이 간 헐적으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탈한 웃음이 비틀린 입술 위를 뒤덮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해인 오빠가 거짓말한 거예 요. 최명욱이 원가 약점을 잡고 협박을 했을 거예요.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걸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평범한 여 고생이었어요. 내가,남자도 모르던 내가 왜 스스로 몸을 팔겠다고 하겠어요.」

   가주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송재희는 그 어떤 징 조도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렇게 열변했다. 솔 직히 말해 남강우는 송재희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 을 변호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슨 말 을 해 줘야 할지 몰라,결국 그는 그의 방식대로 대답했었 다.

   「뭐 그렇게 장황해. 그냥 원하는 걸 말해. 들어줄 테니

   그때 송재희의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치 기이 했다. 그것은 마치 조금 안심한 듯했으나 한편으로는 크 게 상처받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바랐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남강우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시금 신영애에 게,그리고 송재희를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연락을 시도했 으나 모두 응답이 없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씨발. 진짜 좆같네.”

   남강우는 싸늘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냥 다 귀찮은데,그 새끼 쥐도 새 도 모르게 죽여 버릴까.’하던 태국영을 만류하는 것이 아 니었다.

   여홍재를 제거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운 작업이 되겠지 만 굳이 분석해보자면 무리일 것도 없었다. 명분만 제대 로 그려 두면 여군호가 그것을 방관하고 묵인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저와 태국영 이 그를 두고 보았던 것은 윤봄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스 토킹을 해도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지 알아낼 수 없는 그녀 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여홍재와 최명욱은 윤봄이와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최명욱은 그녀의 시동생인데다가 같은

원한을 공유하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여홍재로 말할 것 같으면 최명욱보다 먼저 발 빠르게 해외에서 체 류 중인 윤봄이를 숨겨준 놈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준 것은 바로 여진희의 지지를 받고 있 는 여제운이었다. 여진희는 여홍재의 일회성 대포폰까지 캐내지는 못했지만 여홍재가 주로 쓰는 휴대폰을 바꿀 때 마다 용케 도청 프로그램을 심어 두는 데에 성공했다. 그 작은 기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여제운의 귀로 들어갔고,그것은 태국영에게,그리고 남강우 자신에게 전 달되어 왔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남강우는 부서뜨릴 듯 핸들을 쥐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출장이라니,참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그는 다시 금 머릿속을 장악해 오려는 송재희의 주검을 애써 떨쳐냈 다. 속력을 올린 차체가 경적 사이를 찢었다.

   그는 본가가 아닌 송재희가 머무는 곳으로 차를 몰았 다. 미친 듯이 질주해 도착 시간을 훌쩍 끌어당긴 남강우 는 다급히 현관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섰다. 송재희의 기척 은 느껴지지 않았다. 판단력을 잃은 뇌가 버벅거렸다. 그 때 상주 고용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어머,가주님. 오늘 안 오신다고 전해 들었는데 어쩐

일이세요?’

   “재희는?”

   남강우의 채근에 고용인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 하며 대답했다.

   “아가씨는 오늘 영애 양과 아간 스파에 다녀오신다던 데. 모르셨나요?”

   “경호원들도 동행했나?”

   “물론이지요. 영애 양이 가주님 카드 흔들면서 오늘 다 같이 피로를 풀어보자고 악마 같이 웃으시던 걸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몇백쯤은 거뜬히 썼을 거예요,고 용인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남강우는 휴대폰을 끼내 들 고 카드 결제 알림이 오는 문자메시지를 찾아 들어갔다. 고용인의 말대로 백 단위의 결제 내역이 있었다.

   “여기 어디지?”

   “위치 말씀인가요?”

   “그래. 당장 찾아가야 하니까 주소나 약도 같은 거 있으 면 좀 줘.”

   고용인은 어렵지 않다는 듯 남강우의 휴대폰으로 업체 이름을 검색해서 건네주었다. 남강우는 다시 밖으로 나와 차를 몰았다. 고작 20분 거리였지만 마치 2시간은 걸린 듯했다.

   “송재희. 혹은 신영애로 예약된 명단이 있나.”

   남강우는 인폼 데스크로 가 대뜸 물었다. 물론 정갈한

용모를 한 인폼 직원은 영업용 미소를 띠며 그런 건 알려 드릴 수 없다 고개를 저었다. 남강우는 웃는 낯짝으로 당 당하게 협박했다.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면 아가씨가 책임질 겁니 까.,,

   인폼 직원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원 말씀이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내 여자가 위험한 상태고 내가 개를 직접 봐야 안심하겠다는 소리지.”

   “하지만,그건 개인의 신상정보와도 연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一,,

   콰앙!

   남강우는 그대로 데스크를 내리쳤다. 인폼 직원의 눈높 이에 딱 걸쳐 있는 원목 판자가 날카로운 단면을 드러내 며 쪼개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직 원은 벽에 등을 딱 붙인 채로 오들오들 떨었다. 남강우가 살벌하게 웃으며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지금,당장,개들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

   겁먹은 직원은 고분고분 남강우의 말을 따랐다. 직원

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지금 모두가 전신 마사지와 스파 가 패키지로 묶인 풀코스에 들어앉아 있는 상태였다. 남강 우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고,그는 금방 직원 이 알려준 층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 발 내디디고 나서야,남강 우는 송재희의 냄새를 옅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다른 잡냄새들이 강하게 섞여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상태였지 만 제가 그것을 혼동할 리는 없었다. 그는 룸 이름을 잊은 채로 그 냄새를 따라갔고,노크조차 없이 문을 열었다.

   꽃향기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후각이 아릴 만큼 짙 은 향내였다. 남강우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물에 흠뻑 젖어 묵직해진 수건이 표창처럼 날아왔다. 남강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했 다. 철썩,물 먹은 수건이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져 내 렸다. 귓가로 앙칼진 추궁이 들려왔다.

   “이 좆매너 변태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여자들 탕에 들 어있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니?”

   신영애였다. 그 낭랑한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반가 웠다. 남강우는 탈력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바 로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에 들어앉아 있던 신영애 가 뾰족하게 눈가를 세웠다.

   “뭐 하는 거나니까? 당장 끼지라구!”

   알몸을 내보이는 부끄러움 따위 신영애는 장착한 역사 가 없었다. 그녀는 남강우의 매너를 지적하며 아무렇지 않 게 손을 휘둘러 물을 튀겼지만,그 옆에서 노글노글 늘어 져 있던 송재희는 두 손으로 어디를 먼저 가려야 할지 우 왕좌왕하는 상태였다.

   꽃잎이 한가득 떠다니는 수면이 사실상 몸을 가려주었 지만 손은 내리 부산했다. 저 종족의 남자들이 눈이 얼마 나 밝은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혈색 좋게 익어 있던 송재희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발갛게 물들었 다-

   신영애의 타박을 귓전으로 무시한 남강우는 서슴없이 그리로 다가섰다. 찰방이는 꽃잎을 뒤덮는 그림자에 송재 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영애는 원가 이상한 낌 새를 뒤늦게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남강우는 지금 그답지 않게 지극히 흥분한 상태였다. 여체를 갈구하며 느끼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 치 살기와도 닮아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송재희는 머뭇대며 물었다. 남강우는 그 질문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하염없이 송재희를 응시 할분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망가진 곳은 없는지.

   관찰의 눈빛은 집요하고 뜨거웠다. 송재희는 어깨를 움 츠리며 신영애를 곁눈질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눈빛 공격에 신영애는 한숨 을 폭 쉬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 변태가 지금 눈깔이 정상이 아니네.”

   신영애는 젖은 몸에 그대로 커다란 배스 가운을 걸쳤 다. 실크 재질의 가운은 관능적인 몸의 굴곡에 피부처럼 착 달라붙었다. 헐겁게 묶인 매듭 위로 젖가슴도 반쯤 드 러났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송재희분이었다.

   “둘이 할 애기 있는 것 같으니까 난 먼저 샤워하고 돌아 갈게. 재희야,다음에 또 봐.”

   신영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자리에서 한시라도 발 리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상큼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탕을 나가 는 발걸음은 재발랐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불발로 돌아 갔다. 불같은 기세로 돌아선 남강우가 그녀의 손목을 덥 석 잡아 돌렸기 때문이었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아. 원지 모르겠지만 일단 좇 된 것 같네?

   신영애는 애먼 불똥을 맞을 위기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그러나 평소처럼 표독스레 대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남강우가 카드를 선뜻 내주며 걸었던 단 하나의 조건을 제 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안. 내 실수야. 탕에 들어갈 때 휴대폰은 안 챙기는 버릇이 있어서.”

   신영애는 깨끗하게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붙들린 손목 을 힐금 눈짓했다.

   “오빠야. 이러다 부러지겠다.”

   남강우는 긴 날숨을 뱉어내며 속박을 풀었다. 신영애 는 새발갛게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휘휘 돌리며 내심 혀 를 찼다. 잠깐의 연락 두절도 못 참고 이렇듯 부리나케 달 려올 정도라니 조금 신기하다 여기기도 했다. 진짜 뭔가 위협이 될 만한 일이 있었건 그의 과민반응이었건,이 길 들지 않은 야생짐승이 정말 단단히 빠졌다는 말이었다.

   “다음번에도 이런 일생기면一”

   “그럴 일,없습니다. 됐나?”

   남강우가 섬뜩한 눈으로 뱉어낸 말허리를 신영애는 대 담하게 동강 잘라냈다. 남강우는 무서운 남자였지만 그의 살기는 연약한 여자를 향하는 법이 없었다. 기껏 해 봐야

뒤지게 욕을 먹는 정도에서 그칠 분이었다.

   “못 믿겠으면 카드 도로 받아가든지.”

   송재희는 요즘 많이 밝아졌다. 말수도 많아지고 미식 을 즐기게 되었고 요즘은 조금씩 운동도 시작한 참이다.

그 반가운 변화가 신영애 자신의 큰 공이라는 것을 모르 는 이는 없었다. 비록 오늘 약간의 실수가 있긴 했으나 남 강우는 제 발밑에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신영애가 배짱 좋게 나오자 남강우는 졌다는 듯 짧게 실소했다.

   “됐다. 가봐.”

   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지은 신영애는 재발리 룸을 빠져나갔다. 문밖에는 남강우가 송재희에게 붙여놓은 남 자들이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주님 화 많이 났나,하고 묻는 말에 신영애는 애석하다는 듯 혀 를 차면서도 잔인하게 사실을 말했다.

   “응. 제대로 빡돌았어. 오빠들 다 죽을지도.”

   신영애가 홀가분하게 총총 사라지는 사이,남강우는 맨 바닥에 주저앉아 욕조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었다. 욕 조 밖으로 넘쳐흘렀던 물이 옷가지로 스며들었다. 젖은 옷 이 불쾌할 법도 하건만 남강우는 그저 말없이 숨만 쉬었

   그와 벽 하나 두고 등을 맞대고 앉은 송재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남강우가 이따금씩 그 자신의 머리 를 헤쳐 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그의 불꽃 같은 체취 를 조심조심 들이마셨다. 발가벗은 몸이 부끄러운 것을 제 외하면 마음은 평온했다. 송재희는 사나운 기세로 들이닥 친 그의 모습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스스로를 신기 해하며 먼저 침묵을 깼다.

   “저를 걱정했나요.”

   물 먹은 천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송재 희는 조금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깨끗하게 머리를 틀 어 올려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간질간질한 머리칼이 닿아 왔기 때문이었다. 욕조 턱에 뒷머리를 기댄 그가 나직이 대답했다.

   “걱정했지.”

   “되게 잠깐이었어요.”

   “나한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남강우는 굽혀 올린 무릎에 느슨하게 올려둔 제 손을 응시했다. 송재희의 얼굴을 다 덮고도 남는 손은 간헐적으 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의지를 배반하고 허공을 헤집는 손 끝은 좀 더 실체화된 무언가에 닿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남강우는 솔직했다. 그는 팔을 굽혀 올렸고,어깨너머

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잡아줄래?”

   송재희가 숨을 멈춘다. 연약한 심장이 고동을 울린다. 물결이 찰랑이고 그녀가 돌아앉는다.

   천장을 향해 있는 손바닥 위로 젖은 살결이 얹혔다. 접 촉부에서부터 청량한 한기가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뜨겁 게 달아올라 있던 몸이 몽롱하게 젖어 들어갔다.

   남강우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먼 곳을 헤매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듯한 아늑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최명욱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박해인의 주검을 안고 한 참을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박해인은 단번에 늑골이 뚫리 며 심장이 터졌다. 고통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습격당해 금방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살기를 느끼고 뛰어왔을 때 이미 놈은 사라지고 없었 습니 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솜씨가 좋은 자라면 단 1,2초의 여유만으로도 충분히 그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그것도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물론 제가 붙인 경호원들의 능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 다. 조금만 더 감각이 예민한 자가 있었다면 놈이 그렇게 유유히 숨어들어올 수도,대놓고 살수를 써서 정체가 노출 될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젖빛 여명이 커튼과 함께 나부꼈다. 동이 트고 해가 중 천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최명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해인의 시신을 안아 들은 채였다. 그의 낯은 감정 없이 굳 어 있었다.

   그는 직접 화장터에 가 박해인의 주검을 태웠다. 장례 는 생략했다. 의미가 없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납골함 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인 크기 하나와 갓난아기 주먹보 다 작은 크기 하나였다. 그저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 정도 는 해 주고 싶었다.

   최명욱은 납골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자신의 집이 아니라 박해인에게 내어주었던 그 집이었다. 납골함 은 박해인의 방에 있는 유리장 안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이제 쓸 일이 없어진 배냇저고리와 손 싸개도 그 안에 처 박아 두었다.

   최명욱은 말라붙은 핏자국 앞에서 한참을 명하니 서 있 었다. 박해인의 냄새는 어느새 더 옅어졌다. 어느 날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긴 진동소리가 들려 왔다. 한참을 울리다 끼지고,또 한참을 울리다 끼지 길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최명욱은 그 근원지가 제 휴대 폰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박해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전 화를 받았다.

   《가주님. 급하게 알려드려야 할 것이 있어 전화 드렸습 니다.》

   “뭐지.”

   《인근 상가 CCTV를 수집하는 동안 이상한 것이 발견 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날은 저물어 발치로 석양이 떨어졌다. 최명욱 의 쇠스랑 같은 눈동자가 황금빛 노을을 갈랐다. 그는 직 감적으로 눈치챘다. 살인자를 특정 지을 만한 증거가 나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방은 말끝을 흐렸고 최명욱은 얼굴을 일그러뜨렸 다.

   “뭐나. 빨리 말하지 못해?!”

   격렬한 노호성에 창문이 파르르 떨렸다. 상대방이 뜨끔

하며 재발리 입을 열었다.

   《베를리네타가 잡혔습니다.》

   “…베를리네타?”

   최명욱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페라리 베를리네타 말입니다.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워낙 눈에 띄는 차여서 혹시나 하고 번호판을 자세히 확인 해 보았는데,태국영 소유의 베를리네타 번호와 윤곽이 매 우 흡사해 보입니다. 시간도 딱 박해인 씨가 죽은 직후에 찍혔습니다. 분명 뭔가 연관이一》

   최명욱은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메마른 그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까드득,그는 어금니 가 으스러져라 턱을 악물었다.

   여홍재는 약 한 달여 전 즈음 제 소유의 베를리네타를 팔았다. 태국영의 것과 마찬가지로 잡다한 튜닝이 없는 멀 끔한 차였다. 인수자는 여홍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간 남자였다. 여홍재는 일을 꾸미던 날 차량 소유주에게 수면 제를 먹여 재우고 그의 차를 훔쳤다. 번호판을 조작해 잠 시 바꿔 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최명욱이라면 고작 그 정도에 눈이 뒤집힐 거야. 더 조 사해 볼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겠지.”

   여홍재는 마치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말했다. 차를 따르 는 손놀림은 흠 잡을 곳 없이 격식을 갖추고 있었으나,늘 씬하게 찢어진 눈은 뱀처럼 교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원한이 있던 차에 제 암컷까지 죽였다고 확 신할 테니 그 성미에 어디 물불 가리겠나. 아마 가문을 말 아먹는 한이 있어도 복수하려고 들 거야.”

   물론 그 복수는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을 것이다. 최명 욱이 아무리 눈깔을 뒤집어도 가문 간의 전력 차를 감안하 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그는 최대한 야비해질 것이고 불 나방처럼 대범해질 것이었다.

   “박해인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안 그래도 최명욱은 태국영에게 원한이 있는 상태였다. 굳이 그런 방법이 아니 더라도 잘만 구슬리면 쉽게 넘어왔을 텐데.”

   여홍재는 백자 다기를 들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지금 날 비난하는 건가?”

   “비난으로 들렸다면 그건 네 오해고. 난 그저 복잡한 공 작을 거치면서까지 박해인을 죽였어야 할 이유가 있었는 지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분이다. 게다가 실수가 있었을 때 의 위험부담도 있었지. 저항능력이 없는 남의 암컷을 죽이

는 짓은 그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한다. 종주님 역시 그 걸 두고 보실 분이 아니고.”

   여홍재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원표 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그러나 그 특유의 무표정한 가면 은 이번에도 너무나 견고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면 이 마음에 들어 그와 손을 잡긴 했으나 마주할 때마다 웬 조각상과 대화하는 듯하니 그것은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군. 실수할 것 같았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숙부님이 안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어. 최 가 따위 전쟁을 걸어오면 깨부수면 그만인데,고 작 잠깐의 비난이 무섭다고 나를 내치면 결과적으로 가문 에 손실이 너무 크거든.”

   여홍재는 온기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이 원표는 미미하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런가.’하고 감흥 없이 대답했다. 조금 공감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군호의 번드르르한 언행에 취한 일족들은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얼마 나 간교한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작자인지 제대로 알고 있 는 이도 별로 없는 판국이니 이원표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했다.

   “숙부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족의 안위 따위가 아니

야. 여 가의 명예,여 가의 번영,자기가 얻게 될 실리. 고 작그런 것들이지.”

   “보통 다 그렇지 않나. 일족의 안위보다는 내 가문이 가 장 소중한 법이다. 나 역시도 그러하고.”

   “그러니까 네 그릇이 작다는 거다. 적어도 종주의 인장 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일족 모두의 평화도 생각해야 하 는 법이 아니겠나.”

   “그게 너의 소신인가?”

   “그래. 내가 종주가 되면 우리 일족은 역사상 가장 평화 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이원표의 입술이 미묘한 굴곡을 보였다. 그가 오늘 처 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허면 너는 왜 무고한 인간의 피를 보면서까지 그렇게 집착적으로 태국영을 무너뜨리 려 하지? 그것도 일족을 위 한 일이라는 말인가?”

   “물론.”

   여홍재는 매우 당당하게 즉답했다.

   “태국영은 우리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암 같은 존 재야. 강하게 태어난 것을 무기로 툭하면 동족들을 죽이 고 협박하지. 종주마저 손을 쓸 수 없는 상대라니,이건 너 무 기형적인 상태지 않나? 누군가는 나서서 그를 제거해

야 해. 그래야 종주를 중심으로 한 권력구도가 다시금 견 고해 지고 우리는 평화를 찾을 거야.”

   여홍재의 자기중심적 논리는 유수와 같았다. 이원표는 일견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 한 번 지적했다.

   “그래도 네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는 군. 나는 여전히 무의미한 살상이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고 생각해.”

   이원표는 고집 있게 제 의견을 말했다. 무조건 아부하 는 쪽보다는 그편이 더 대하기 편했지만 은근히 신경을 거 스르는 말투였다. 여홍재는 박해인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인내를 고아 말 문을 봉했다.

   태국영이 끝이 아니다. 여은태가 성체가 되기 전에 등 대들의 씨를 말려야 했다. 그 암 덩어리들을 깨끗하게 제 거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과거 선조들은 얼마나 현명했는가.

   여홍재는 비밀을 은닉한 채 찻잔을 입술에 붙였다. 잠 시 뒤 여홍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최명욱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세밀하게 세워둔 계획이 차곡차곡 아귀 를 맞춰가고 있었다.

   여홍재는 자신이 마치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신이라도 된 듯했다. 자아도취적 미소가 길게 울려 퍼졌

다-

   종가의 친위대는 마치 해저에 잠긴 전설 속의 고대 도 시와도 같았다. 지금은 누구도 그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없 었지만 그들은 늘 물밑에서 존재해 왔고,흘러가고 변화하 는 역사를 묵묵히,그러나 아주 집요하게 지켜보아 왔다.

   각 가문의 역사서에 기술된 모든 문장은 친위대의 기록 에서 단 한 줄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비밀을 알 고 있었다. 그 비밀이 그들의 왕에게 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한 모든 것을 묵인해 왔다. 심지어 그들의 왕에게도 말이다.

   친위대에게 있어 일족의 역사란 어항 속의 물고기들이 노니는 세계와도 같았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감시자들 의 공이었다. 감시자들은 모두 여 가의 순혈을 받아 태어 난 이들로,어둠을 벗 삼아 흘러 다니며 친위대의 눈과 귀 가 되어 주었다.

   요즘 그들의 주요 임무는 바로 다음 세대 종주가 될 후 보들을 관찰하는 것이었고,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

다. 후보들은 어쪄면 친위대의 눈을 완벽하게 떨어낸 순간 이 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그것은 완벽한 착각이 었다. 치밀하게 연계된 감시자들은 이제껏 단 한 차례도 타깃의 행방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여홍재의 행동이 조금 지나친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 다.,,

   “글쎄. 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네만.”

   “무고한 생명이었습니다. 또한 아직 세상 빛도 보지 못 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상태였고요.”

   “감정적인 판단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의에서 꼭 필요 한 살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영아. 길게 보아라. 우리는 후보들이 무엇을 가 장 중하게 여기는지,그것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그 와중 에 벌어지는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것을 보면 된 다.,,

   영은 불만을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친위대가 종주를 선택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의 주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문제는 여홍재가 아니라 태국영이다.”

   달갑잖은 이름에 영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태국영이 왜요?”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도통 나오지를 않으니 뭐 들어오 는 자료가 없지 않으나. 좀이 쑤시지도 않나. 어찜 그리 바

깔에 코배기도 내비치지 않아.”

   장로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감시자들도 집안에 들어앉은 후보들만큼은 어찌할 방도 가 없었다. 태국영은 태이경의 생일파티와 주말에 가족들 을 동반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감시 자들로서도 매우 답답한 상황이었다.

   영은 콧방귀를 끼며 신랄한 목소리를 쏘아 보냈다.

   “자료 모아서 뭐한답니까. 어차피 때 되면 하나 남기고 다 사퇴시킨 다음 저도 사퇴할 것이 빤한데요. 여기서 태 국영 꿍꿍이 모르는 분도 계십니까?”

   그러자 유일한 여성 수장인 연희가 영의 머리에 꽁 알 밤을 먹였다.

   “아휴. 이 철없는 것아.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넌 어찌 그리 내내 어린애 같이 굴기만 하니. 철 좀 들어 라.,,

   “아픕니다,누이……■,,

   저를 업어 키운 연희에게 약한 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 리로 항의했다. 연희는 쯧 혀를 차며 태도를 바꿔 밤톨 같 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애가 능력은 참 나무랄 곳이

없는데 아직 감정적이고 말랑말랑한 이 속 알맹이가 홈이 었다.

   “편견을 버리고 지켜보렴. 그 다섯 명이 후보로 지명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네,누이.”

   “옳지. 착하다.,,

   연희는 어린애 대하듯 오구오구 했다. 까까 줄까,장난 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장로들과 수장들이 왁자하게 웃음 을 터뜨렸다. 영은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리 면서도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은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충호가 다들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켰다. 모여 있던 이 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불규칙한 눈빛들 이 오고 갔다. 여전히 영의 턱 아래를 살살 쓰다듬으며 생 각에 잠겨 있던 연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꼬마가 감시자를 발견했다고 보는 게 맞긴 맞나? 그게 가장 중요하잖아.”

   “그게 좀 미묘하긴 한데……

   다들 확언을 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감시자들의 보고 에 의하면,태국영이 가족 외출을 할 때 그를 주시하는 이 들은 간혹 여은태의 눈초리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감시자 가 숨어 있는 근처를 유심히 보다가 마는 정도라고 했다. 단박에 여홍재를 추격해갔던 행동력을 감안해 보면 아주 완벽한 인식은 아직 없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뭐가 됐건 너무 어리잖아요.”

   주름진 눈가를 검지로 슥슥 문지르고 있던 최고령 장로 가 나직이 물었다.

   “여은태가 다음 달에 열셋이 되나.”

   “네. 열셋이지요. 성체가 되려면 다섯 해나 남았군요. 종주의 자리에 앉을 만큼 사회성을 키우려면 적어도 몇 해 는 더 걸릴 테고.”

   “역대 최연소 종주가 스물둘이었던 걸 기준으로 해도 자그마치 십 년이네요.”

   “이런 경우가 예전의 세대교체 때는 흔한 일이지 않았 습니까?”

   “그랬지. 등대들이 어련히 잘 키워주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던 때라 대리자를 세우는 일도 종종 있었지.”

   “그럼 여은태도 함께 관찰해 보는 건 어때요? 어차피 종주님 은퇴까지 구 개월이나 남았잖아요.”

   최고령 장로는 생각에 잠겼다. 여은태의 성장에 관한 정보들은 많이 알려진 바가 없었고,그나마 요즘에 들어서

야 조금씩 수집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전의 녀석이 어찌 되었든 간에,등대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의 여은태 는 몹시 매력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잘 타고난 혈통도 그러했지만 역시나 지금의 성장환경 이 굉장히 비옥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여은태는 다정 하고 헌신적인 등대의 보살핌 속에서,현존하는 일족들 중 가장 강한 수컷을 곁에서 보고 자랄 것이다. 끈끈한 애 정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태국영 가족의 모습을 가슴에 품 을 것이고,사랑스러운 아이에게 깊은 정을 나누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도 배울 수 있을 터였 다.

   성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여은태가 적어도 네 살 정도만 더 많았더라면,그는 누구보다 가장 강력한 후보 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뭐,후보는 많을수록 좋겠지. 더욱이 태국영이 판을 엉 망으로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니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되고.”

   “그럼 감시자들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참모 수장 연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로들이 이 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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