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0/25)

12.

   이승도는 동물원에서 일을 하긴 했었으나 동물원 그 자 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넓은 평야를 뛰어다녀야 하 는 야생짐승들을 좁은 우리에 가둬두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학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 으니,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최대한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싶었다. 제 가게를 내고 다른 이들의 애완동물 들을 보살피는 것보다 야생동물에 더 관심을 가진 것도 그 런 맥락에서였다.

   “범고래는 굉장히 똑똑해. 확실한 규범을 정해서 무리 를 통솔하는데,법을 어긴 동족은 무리에서 추방하기도 해. 심지어 유행가도 지어서 부르고,진짜 똑똑한 애들은 손짓 발짓 하면 그걸 따라한다고 하더라. 사람이 손을 흔 들면 녀석도 지느러미를 흔들고,사람이 한 바퀴 돌면 저 도 물속에서 한 바퀴를 비잉 돌더라고. 나중에 기회가 되 면 같이 국외로 나가서 보고 오자.”

이승도의 긴 설명을 여은태는 아주 세심하게 귀에 담았

다. 그가 들려주는 동물 이야기는 하나같이 지루하지 않 고 흥미로웠다. 첫날은 들꽃 핀 산책길을 걷다가 단풍나 무 아래에 피크닉 돗자리를 깔았고,그 다음날인 오늘은 이승도가 근무하던 동물원과 국내에서 가장 큰 아쿠아리 움을 돌아보고 온 참이었다.

   동물원에 갔을 때,이승도는 몇 번이고 눈물을 글썽였 었다. 퇴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간 돌보던 아이 들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짠하게 바라보 다가,언젠가는 선생님한테 작은 동물원을 지어주고 정든 아이들을 죄 훔쳐다가 안겨줄까 그런 생각마저 했더랬다.

   “선생님은 동물들을 참 예뻐하는 것 같아.”

   “응. 참예쁘지.”

   여은태는 제 배를 깔고 누워 낮잠을 자는 태이경의 작 은 등을 탁탁 토닥이며 물었다.

   “그럼 나도 짐승일 때가 더 예뻐?”

   이승도는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은태는 짐승일 때도 예쁘고 인간일 때도 예뻐. 선 생님이 동물들을 좋아하는 건,그런 것 같아. 한 번 마음 을 열면 배신 없이 올곧게 나를 바라봐 주는 느낌이 좋아 서?”

   “하지만 개들도 자기들끼리 왕 되려고 전쟁도 하고 배

신도 하잖아.”

   “음. 그런 의미랑은 조금 달라. 물론 네 말대로 사파리 에 사는 맹수들 사이에서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 하극상도 밥 먹듯이 일어나지만,인간들이 같은 인간들을 해치고 죽 이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할 정도라고 생각해. 순전히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동족을 살해하는 건 고등동물 밖에 없으니까. 우리 은태가 보기에는 말귀도 잘 못 알아 들을 만큼 지능 떨어지는 애들 천국이겠지만,선생님은 그 어수룩함이 좋아.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럼 선생님이 날 귀하게 대해주는 건 선생님을 배신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야?”

   “그건 또 아니야. 선생님이 우리 은태를 보는 시각은 부 성애 같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이 렇게 예븐 짓만 골라 하는 양아들을 안 사랑할 수가 있겠 어?”

   이승도는 옆구리에 꼭 붙어서 제 팔을 살짝 베고 있는 여은태의 머리칼을 살살 홑어 놓으며 미소 지었다. 인형처 럼 고운 안면을 살짝 움직여 웃는 여은태의 얼굴 위로 석 양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강할수록 아름다운 껍데기를 뒤 집어쓴다는 말이 녀석과 태국영을 보고 있자면 자연히 이 해가 되었다.

   “그럼 우리 승도가 날 예뻐하는 이유는 뭔데?”

   이승도는 힐긋 눈을 들었다. 제게 한쪽 가슴을 내주고 있는 태국영은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에 강압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 감동적이고 더더욱 감동적인 답변을 내놓 지 않으면 대차게 틀어질 기세였다. 넷이 톱니바퀴처럼 서 로를 베고 있는 형국이라 심장박동도 체온도 피부처럼 가 까워서 전해져 오는 감정들마저도 선연했다.

   이승도는 빙긋 웃으며 태국영의 머리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실크처럼 매끄럽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우리 국영이는 다 예쁘지. 그 어릴 때부터 일편단심 나 만 보고 살아온 것도 예쁘고,맘고생 많이 하면서도 포기 하지 않고 쭉 매달려온 것도 예쁘고,내 부탁은 다 들어주 려고 애쓰는 것도 예쁘고,우리 이경이랑 별이 생각해 주 는 것도 예쁘고.”

   태국영은 조금 만족한 듯 표정을 풀었다. 어느새 어렴 풋이 잠에서 깬 태이경이 졸린 눈으로도 저를 책망하듯 바 라보고 있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알면 서방님 관리도 좀 잘해. 말로만 예쁘다 하지 말

고.,,

   “지금으로는 부족해?’

   태국영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꺾어 올렸다.

   “우리 승도 미친 거 아나? 당연히 부족하지. 네가 애들 물고 빠는 시간이 나랑 단둘이 마주 보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데.”

   “그렇긴 하지.”

   그의 말대로 낮에는 거의 아이들 뒤만 따라다니게 되었 다. 특별히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어쪄다 정 신을 차려보면 시간이 훌쩍 소각되어 있었다. 그나마 그제 부터는 아이들이 자진해서 잠만은 편하게 따로 자라고 등 을 떠밀어 겨우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에게는 그마저도 아마 부족할 거였다. 수시로 잠이 쏟아 지는데다가 아이들 덕분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니 대 부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죽은 듯 잠에 빠져들기 일쑤 였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면 낮에 좀 많이 자 두고 밤에는 나랑도 좀 놀 아 줘.”

   이승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불현듯이 둔탁 한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태국영은 티 테이블로 걸어가 진 동하는 휴대폰을 받았다.

   “어,그래.”

   응답은 짧은 한마디로 끝이었다. 전화를 끊은 태국영

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천천히 준비해. 꼬맹이네 가족들 지금 출발한다고 하 니까.”

   이승도는 벌떡 일어나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외출했 다가 돌아와서 한 번 갈아입히기는 했지만,정원이며 카 펫 위며 되는대로 굴러다녔더니 꼴들이 말이 아니었다. 구 겨진 옷을 벗기고 바짝 다림질한 옷을 입혔다. 부스스한 머리도 물 묻힌 손으로 빗겨준 뒤 립밤도 발라주었다.

   “세상에. 우리 예븐이들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네. 이래 서야 누가 채갈까 봐 겁나서 어디 데리고 다니겠어?”

   이승도는 부듯하게 중얼거리며 두 아이들의 엉덩이를 번갈아 톡톡 두드렸다. 여은태는 태이경을 가분하게 안아 올리며 싱긋 웃었다.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일부 오싹한 소리를 했다.

   “걱정 마,선생님. 이경이는 아무도 못 채가게 내가 감 시할 거니까.”

   ‘‘……어?…어어. 그래. 당연히 그러겠지.”

   이승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반응이라 뭐라 지적하기도 애매했다.

   여은태는 이승도가 저를 힐금힐금 걱정스레 훔쳐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천진하게 웃고 있는 태이경을 허

공에 던졌다가 받았다가를 반복하며 놀아주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치,이경아? 형아 곁에 꼭 붙어 있을 거지?”

   “응!”

   “우리 이경이 쏙 들어가는 주머니 하나 만들까? 거기 예쁘게 넣어서 형아가 아기 캥거루처럼 데리고 다니게.”

   “아기 캥거루! 귀여워,나 그거 할래!”

   “예뻐 죽겠네. 이경이 보보.”

   “보보!”

   아이들의 입술이 쪽쪽 맞닿았다. 서로를 보는 눈동자 엔 깊은 애정이 한가득 넘실댔다. 여은태는 저도 모르게 태이경의 뺨을 할으려다 제풀에 깜짝 놀라 멈추고는,다 시 나사 빠진 애처럼 웃으며 돌아보았다.

   “선생님. 가족들 올 때까지 우리 선룸(Sun Room)에 있어도 돼?”

   “…응. 가 있어. 선생님도 금방 내려갈게.”

   허락이 떨어지자 여은태는 태이경을 금이야 옥이야 안 고서 방을 나갔다. 녀석들이 사라진 자리를 명하니 응시하 던 이승도는 불현듯 다급하게 태국영을 붙들고 물었다.

   “국영아. 은태 지금 괜찮은 거겠지? 이경이 아직 아가

   태국영은 심드렁하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쫓아낼 생각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뭘 물어. 발정만 안 오면 괜찮으니까 그냥 둬.”

   “…그런 말이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일단 내가 곁에 있는 한은 걱정할 거 없어. 혹시 내가 뭐 일이 있어서 나가 있더라도 성문이랑 애들이 알아서 커버해 줄 거야. 아직 이발도 다 안 자란 애송이 하나 상대하기엔 차고 넘치니까.”

   “전에 말했지. 성교육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 붙들 어 매라고. 뜰뜰한 녀석이니까 잘 알아듣고 잘 대처할 거 야. 너한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경이도 은근히 여기 저기 잘 휘두르고 다니는 타입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응? 우리 이경이가?”

   “그래. 우리 장남이 아주 살살 눈치 보며 상대방 녹이 는 데엔 타고났다 이거야. 여 가 꼬맹이 내숭은 그에 비하 면 아주 하찮을 정도지. 꼬맹이가 아무리 머리를 써 봐야 이경이 손바닥 안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엔 이경이한테 그런 영악한 면은 없는 것 같은데.”

   영악하다는 의미는 아니야,하며 태국영은 고개를 저었 다.

   “그저 누구를 상대로 하건 제가 최대치로 사랑받을 방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고 할까. 원 소린지 감이 잘 안 잡히면 좀 이따가 꼬맹이 가족들 왔을 때 한 번 자세히 살펴봐 봐.”

   이승도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생각을 정리하곤 한마디로 일축해 내뱉었다.

   “어쨌든 우리 이경이가 어딜 가서건 사랑받을 거라 이 말이지?”

   그거 참 좆같이 긍정적인 결론이네. 태국영은 내심 그 리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이승 도는 기분 좋게 웃으며 태국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가자,국영아.”

   까닥 고갯짓을 해 보인 태국영은 문득 콧등을 희미하 게 찡그렸다.

   “고기 파이 다 된 것 같은데 가져다줘?”

   이승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과 발견한 어린애처럼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태국영은 픽 웃으며 그의 뺨을 살짝 꼬집어 흔들었다.

   “가 있어. 파이랑 주스랑 잔뜩 실어다 줄 테니.”

   이승도를 선룸으로 보낸 뒤 주방에 들렀다. 오븐에서 끼낸 고기 파이들을 조리대에 옮겨둔 유모는 막 자몽에이 드를 만드는 중이었다. 태국영은 갖가지 모양의 파이들을 슥 훑어보며 물었다.

   “냄새가 다들 제각각이네. 도대체 뭐가 뭐야?”

   “아. 파이 윗면에 표식이 있죠? 동그라미는 소고기,세 모는 닭고기,네모는 돼지고기,별 모양은 새우가 주재료 예요. 지금가져다 드릴까요?”

   “내가 가져갈게. 우리 승도 또 출출한가 봐.”

   유모는 푸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믹서에 얼음을 갈아 잔 에 채웠다.

   “얼마나 튼튼한 아기씨가 나오려고 이렇게 잘 드실까 요. 덕분에 그간 할 일 없었던 베이킹 원 없이 하니 저까 지 기쁘네요. 나눠 드실 수 있게 잘라 드릴까요?”

   “놔둬. 승도는 손으로 찢어먹는 걸 더 좋아하니까.”

   “애처가시라니까.”

   유모는 커다란 사각 쟁반에 파이들을 담아 트레이 카트 에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자몽에이드와 얼음 통,그리고 접시를 비롯한 식기들은 카트의 제일 상단을 채웠다.

   태국영은 묵직한 카트를 한 손으로 밀며 걸어갔다. 온

실처럼 지붕과 벽을 모두 채광유리로 시공한 선룸은 한낮 의 볕이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함 께 맞는 일광은 더위를 싫어하는 아이들조차 하느작거리 게 만들었다.

   녀석들은 이승도와 함께 다인용 대형 선베드 위를 뒹굴 고 있었다. 마치 나른한 고양이 가족을 보는 듯했다. 데크 위로 카트를 밀고 들어가자 이승도가 벌떡 일어나더니 성 급하게 식탁 앞에 가 앉았다. 태국영이 세팅을 하는 도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을 일단 입에 넣고 봤다.

   ‘‘국영아,이거 진짜 맛있어.”

   이승도는 신세계를 본 것처럼 감탄했다. 소고기와 채소 들을 진득하게 품은 크림치즈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렸 다.

   “엄마. 나도,나도!”

   이승도는 쪼르르 달려온 녀석을 허벅지에 앉혀 두고 손 에 든 파이를 입에 대 주었다. 제 입 모양대로 동그랗게 뚫 린 파이 곁을 앙 물어서 꼭꼭 씹던 녀석의 눈이 일순 확 커 졌다.

   “우와! 이거 엄청 맛있다! 고기는 구워 먹는 게 제일 맛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막 섞은 것도 정말 맛있어! 형아 도 먹어 봐!,,

   여은태는 얼핏 내키지 않는 표정을 했으나 잠자코 입 을 벌렸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뭐가 그렇 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다. 풀떼기라면 질색하는 태국영도 이승도가 찢어서 먹여주는 것만 받아먹고 딱히 먼저 손을 대는 법은 없었다.

   카트를 가득 채워 왔던 파이들은 금세 동났다. 욕실에 나란히 서서 이를 닦은 넷은 휴게실에서 남은 시간을 흘려 보냈다.

   여은태는 흔들의자에 앉아 태이경을 허벅지 위에 앉혀 두고 함께 책을 읽었고,이승도는 원형 침대 위를 기분 좋 게 굴러다녔다. 태국영도 그 게으름에 기꺼이 동참했다. 팔베개를 해주고 등을 도닥이자 이승도는 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잘 먹은 뒤 단잠에 빠진 그의 뱃속에서 태아의 심 장도 평화로이 맥동했다.

   그는 이승도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신중하 게 정신을 집중하니 납작한 뱃속에 들어앉은 작은 것이 감 각에 사로잡혔다. 지난주에 초음파로 보았을 때에도 느꼈 지만 역시나 평균보다 컸다. 아주,심하게 컸다. 이제 막 석 달이 되어가는 녀석이 벌써 넉 달은 넘은 듯한 성장 단 계를 보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직접 체감 해 보니 슬슬 걱정이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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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연은 이틀 내내 잠을 설쳤다. 들뜬 마음과 근원 모 를 두려움이 자꾸만 꿈자리를 어지럽혔기 때문이었다. 그 럴 때마다 휴대폰을 닳도록 만지작거렸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찬란하게 자란 아들을 보고 또 보았다.

   여은태는 흰색의 단정한 반팔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녀가 상상했던 그대로 햇살 아 래 빛 가루처럼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통째로 잃어 버린 아이의 어린 시절이 더욱더 뼈아팠다.

   기쁘면서도 구슬펐다. 제 품 안에서는 늘 고통에 몸부 림치던 아이가 제 곁을 떠나서야 이렇듯 빛이 나고 있음 에 ■

   눈물이 차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울렁거리는 시야는 금세 절정에 치달았다. 범람 직전에 그녀는 황급히 고개 를 내려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어 눌렀다. 그러자 기다렸다 는 듯 뜨거운 눈물이 잇새에 일그러진 입술을 파고들어 왔 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제 든든한 남자의 가슴을 파고들었 다. 여군호의 팔은 단단하게 그녀를 지탱했다. 숨죽인 흐 느낌에 실내가 경직된 침묵으로 공명했다.

   이승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타

이밍을 잃은 인사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 힐긋 돌 아본 태국영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으나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반면 여은태는 고요하고도 정적인 정물화처럼 우뚝 선 채 묘한 감응에 젖어 있었다. 훌쩍 높아진 시선 때문일까, 제 어머니를 이제야 제대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또한 제 모친이 생각보다 훨씬 작고 가늘다는 것 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여은태는 불현듯 고개를 내렸다. 태이경이 잔뜩 안달 이 난 표정으로 제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왜 그러나는 듯 눈으로 묻자 녀석이 한 손으로 저편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 로 대답했다.

   一형아 엄마 울어. 달래줘야 돼.

   여은태는 이해하지 못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녀를 달 래줘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부친이었다. 저 애처로 운 울음은 익숙했다. 저는 늘 그녀에게 고통이고 좌절이 고 절망이었다. 그녀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태이경은 낑낑거리며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지만 여은 태의 발은 바닥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작은 손이 옷깃에 서 떨어져 나갔다. 예쁘고 고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샘 솟았다.

   여은태는 가슴이 뜨끔 내려앉아 두 팔을 뻗었다. 그러 나 황급히 안아 들려는 순간 녀석은 뒷걸음질 쳤다. 그리 고는 상기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형아 나빠! 못됐어!”

   여은태는 멈칫 손끝을 떨었다. 명해진 머리로 뒤늦게 충격이 강타했다. 늘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안겨들던 아이 가 이렇듯 날카롭게 반응한 것은 처음이었다.

   태이경은 찬바람 날리게 돌아서더니 다시금 한수연에 게 달려갔다.

   “아줌마. 울지 마세요. 저,저기 그러니까,제가 아줌마 주려고 어제 오르골 만들었는데 그거 보여 드릴까요? 어, 아니면 전에 아줌마가 만들어 주신 옷 되게 귀여운데 그 거 입고 나와 볼까요? 울 엄마는 토끼를 제일 좋아하는데 저는 다람쥐도 좋거든요?”

   태이경은 초조하게 발뒤꿈치를 들썩거리며 횡설수설했 다. 다급히 쏘아 보낸 질문 공세에 젖은 눈이 아래로 느릿 느릿 굴러떨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태이경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허리에 매달렸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엄마는 제가 동물 옷만 입으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쁘

다고 안고서 바닥을 뒹굴기 일쑤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 더라도 저 고운 얼굴에 미소 한 줌 정도는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엄마,나 옷 갈아입고 올게요!”

   누구의 허락도 떨어지기 전이었지만 일단 쏜살같이 드 레스 룸으로 튀어갔다. 그저 마음이 급했다. 눈치껏 따라 붙은 유모가 다람쥐 옷을 끼내 들었다. 발리,발리이,재 촉에 떠밀린 유모의 손길도 덩달아 다급해졌다.

   “꼬리는 어떻게 해 드려요?”

   등 쪽에 달린 지퍼를 올려주며 유모가 물었다.

   “그냥 막 귀엽게!”

   막 귀엽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유모는 적당 히 다람쥐의 꼬리를 S자로 휘어 놓았다. 태이경은 전신거 울 앞에서 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곧장 뛰어나갔다. 손님 을 맞았던 로비는 여전히 불편한 경직 상태였다. 태이경 은 ‘저,이경아.’하고 다가오는 여은태를 매정하게 피해버 렸다.

   “아줌마. 이것 보세요. 애는 꼬리가 막 풍성해서 더 귀 여워요.”

   태이경은 한수연의 앞에서 뒤를 돌아 엉덩이를 보였다. 귀여운 꼬리가 살랑살랑 허공에 흔들렸다. 한수연은 그제

야 조금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 다.

   “정말 예쁘구나.”

   ‘‘응! 여기,여기 만져 주세요.”

   태이경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 정수리에 올렸다. 애 교를 부리듯 고개를 움직거리자 정수리에 얹힌 가날픈 손 이 부드럽게 머리 위를 멤돌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낯섦 을 많이 떨친 기색이어서,태이경은 슬금슬금 아주 잰 보 폭으로 더 다가가 그녀의 가슴팍에 안겼다.

   “일층에 제 놀이방에 가면요,제 키 나무가 있거든요? 한 달에 한 번씩 키를 재서 표시해 두구 거기에 나뭇가지 도 붙이고,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서 열매 모양으로 걸어 두는데,어제부터는 형아도 거기에 들어갔어요. 엄마가 이 젠 형아도 같이 키 나무 만들어 줄 거랬어요. 형아 키가 너 무 커서 나무가 한 번에 훌쩍 자랐는데,저도 얼른 따라 크 려고 더 잘 먹고 있어요. 이따 제가 보여 드릴게요.”

   작은 손이 목에 둘러지자 허공을 배회하던 그녀의 팔 도 아이의 작은 몸을 가볍게 둘러 안았다.

   “응. 기대할게.”

   “그런데 제 열매가 위로 올라갈수록 기쁘긴 한데요,그 것 때문에 고민이 생겼어요.”

   “고민?”

   “네. 아줌마가 주신 옷이 금방 작아질 것 같아서 걱정이 에요. 여기서 한 뼘만 더 크면 작아서 완전히 못 입게 될 거예요.”

   시무룩하게 늘어진 입꼬리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눈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고 쑥쑥 크렴. 작아진 옷 대신 더 큰 옷을 지어줄 테니까.”

   “정말요? 오?,신난다! 약속하는 거예요.”

   태이경은 다람쥐 발톱이 말랑하게 튀어나온 새끼손을 내밀었다. 한수연의 손가락이 그 작은 것을 가볍게 얽었 다. 방긋한 미소가 살굿빛 뺨을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게 했다.

   “살 많이 붙어서 다행이에요.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요.,,

   “너랑 네 엄마 덕분에 즐거운 때가 아주 많아졌거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도 못 하고……

   한수연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연신 분위기를 살피 던 이승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깍듯 이 인사했고,여군호는 악수를 청했다.

   “자네 덕분에 아내가 활력을 많이 찾았어. 진심으로 고

맙게 생각해.”

   “저도 건강해지신 모습 보니 기쁘네요.”

   악수를 받으려 했을 때 태국영의 제지가 들어왔다. 싸 늘하게 낚아채진 손이 의아해 돌아보았다. 태국영은 희미 하게 인상을 쓰고서 여군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나운 시 선의 충돌은 일방적인 적대감 때문이었다.

   “이쪽은 상대할 필요 없어. 인사도 하지 마.”

   두 집안 사이가 딱히 좋지 않다는 건 대강 알고 있었으 나 이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안면을 눌어붙 게 만들었던 거추장스러움이 지금은 완벽한 적의로 돌변 해 있었다. 이승도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실례했군.”

   여군호는 예사롭게 말하며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조금 무안할 법도 하건만 딱히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는 태국영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먼저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네. 허나 지금 은 시기가 아닌 듯해 나중으로 미뤄둔 것이니,태가주가 이해해 줬으면 하는군.”

   이승도는 어리둥절해했지만 태국영은 여군호가 내뱉 은 말을 말끔히 소화해 냈다. 여군호는 지금 마지막까지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 거였다. 태국영

은 가시 돋친 시선을 회수하며 이승도의 어깨 위에 턱을 고였다. 여군호가 이승도를 부드럽게 응시하며 말했다.

   “태 가에 경사가 있다는 소식은 내 이미 들었어. 늦었지 만 진심으로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심장 소리도 느리고 큰 것이 아주 건강해 보이는군. 태 가주처럼 강하고 튼튼한 아기가 나오겠어.”

이승도는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건 강한 아기가 나올 거란 말보다 기븐 축하인사는 없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실까요? 사모님도 이제 안정을 찾으 신 것 같은데.”

   “그러지.”

   여군호가 고개를 까닥 끄덕여 보였다. 그림자처럼 이승 도의 뒤에 서 있던 유모가 재발리 대꾸했다.

   “다과를 내 오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홍차와 허브티 어 느 것이 좋으신지요.”

   “나는 종류 상관없이 연한 허브티로,당신은?”

   “저는 얼그레이로 부탁해요.”

   “쿠키와 케이크,다식과 모약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선한 제철 과일도 있고요. 특별히 사모님께서 선호 하는 간식이 있으신가요?”

   “아내는 아기 입맛이야. 달콤한 디저트 종류는 다 좋아 하니 까다롭게 고르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승도 군은요?”

이승도는 조금 망설이다가 슬쩍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는 다과보다…… 혹시 고기 파이 남은 거 있나요?”

   “이런. 만들어둔 건 아까 그게 다였어요. 반죽을 휴지시 켜야 해서 지금부터 준비해도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저 녁에 간식으로 드실래요?”

   “아아,그럴게요. 그럼 다과는 쿠키로 부탁해요.” 지시사항을 꼼꼼하게 듣고 있던 고용인이 재발리 사라 졌다. 유모는 테라스가 딸린 응접실을 향해 앞장섰다. 이 승도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 린 채 곁에 꼭 붙어오는 여은태의 등을 쓸어내렸다. 음울 한 눈이 허공을 가르고 올라왔다.

   “괜찮아. 곧 이해해 줄 거야. 우리 이경이는 체구는 조 그매도 이해심이 아주 큰 아이니까.”

   ""?■

   여은태는 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기 바빴다. 말은 안 해도 초조함이 역력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이승도는 어쩔 수 없 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제일 뒤편의 한수연 곁에 꼭 붙어

걷고 있는 태이경에게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님,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이경이랑 잠깐 이야 기 좀 하고 가겠습니다.”

   “아,그래요.”

   한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여군호의 팔에 팔짱 을 끼고 사라지자 이승도는 태이경을 훌쩍 안아 들었다.

   “우리이경이는 엄마 좀 볼까?”

   “비밀 애기예요?”

   “응. 우리 둘만 아는 비밀 애기.”

   태이경은 천진무구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목에 팔을 둘 러 왔다. 이승도는 녀석을 둥개둥개 얼러주며 창가로 걸어 갔다. 허공을 바짝 솟아오른 다람쥐꼬리가 통통 흔들렸다.

   이승도는 창턱에 가볍게 걸터앉아 쫑긋 귀가 서 있는 후드를 부드럽게 뒤로 넘겨주었다. 가늘고 까만 머리카락 에 황금빛 볕이 왕관처럼 둘렸다.

   “우리 이경이가 혼내서 은태 형아가 많이 풀이 죽어 있 네.,,

   “…하지만 형아가 나빴는걸요.”

   태이경은 볼을 부풀리며 미간을 좁혔다.

   “형아가 왜 나빴어?”

   “형아 엄마가 우는데도 모른 척했잖아요.”

   “형아가 왜 모른 척했다고 생각해?”

   “내가 위로해 주라고 잡아당겼는데 그냥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보기에 은태는 내내 자기 엄마를 보고 있었는 데,그건 모른 척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았어. 내가 잘못 생각했나?”

   태이경은 말간 눈을 깜빡거렸다. 그쯤에서 잠시 혼란 이 온 듯 동공이 이리저리 허공을 멤돌았다. 이승도는 결 좋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손가락 틈으로 빗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좀 어렵다. 엄마가 보기엔 안 그랬는데 우리 이경이가 보기에는 그랬다니 누가 맞을까?”

   누가 맞지?

   태이경은 나름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지만 해답을 낼 수 가 없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엇갈리는 의견이라는 건 아직 아이에겐 어려운 주제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이경이가 나중에 형아한테 직접 물 어봐 주는 게 어떨까? 속마음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 는 거니까. 괜히 오해한 상태에서 화를 낸 거면 우리 이경 이가 나중에 너무 미안해지잖아. 그렇지?”

   그건 정말 미안할 것 같았다. 태이경은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그럼 그때까지 다시 형아 예쁘다고 해 주면 안 될까? 다 듣고 나서도 정말 나빴다고 생각이 들면 야단쳐도 안 늦으니까?”

   태이경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은 것을 억 지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정말 차분하게 납득한 표정이었 다. 이승도는 녀석을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켜 로비를 가로 질러 걸어갔다.

   “형아는 우리 이경이가 참 좋은가보?. 우리 이경이도 형 아 좋지?”

   “응. 엄마 아빠 다음으로,유모만큼 좋아해요.”

   “엄마는 좋아하는 사이일수록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도 아주 많 거든. 그런데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면 서로 모르는 게 얼마나 더 많아지겠어. 그러다가 오해도 생기는 거고,서 로 미워하기도 하고,마음 아파 울기도 하게 되는 거거든.

   “…그런건 싫어요. 속상할 거야.”

   소침한 어투였다. 이승도는 녀석의 엉덩이를 가볍게 추

슬러 올렸다. 이전 같았다면 버거웠을 행동을 너무나 쉽 게 해내고 있었지만,대화에 열중하느라 이승도는 그를 미 처 자각하지 못했다.

   “맞아. 그리고 난 우리 이경이도 은태도,마음 아픈 일 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더 안 해도 이제는 알

겠지?”

   “응. 대화 많이 하기. 화내기 전에 물어보기. 오해했으 면 사과하기. 어…… 음,또 있나?”

   손가락을 꼽으며 대꾸하던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승도는 웃으며 덧붙였다.

   “많이 예뻐해 주기?”

   “아! 많이 예뻐해 주기. 응,응.”

   이승도는 복도를 돌며 얼핏 의아해했다. 응접실은 문 없이 아치형으로 상시 입구가 트여있는 구조로,이쯤 오 면 대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인데 지나치게 적막했다.

   이쪽이 진짜 비밀 애기라도 하는 중인가 싶을 정도였 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니 그냥 침묵이 짙게 깔려 있을 분이었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던 눈동자들이 소실 점에 모여드는 평행선처럼 제게로 집중되었다.

   이승도는 매우 부담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고서 태이 경을 품에서 내려주었다. 녀석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총

총 뛰어가 여은태의 허벅다리에 올라앉았다.

   “형아. 아까 안 물어보고 화부터 낸 거 미안해.”

   “…그럼이제 화안 내?”

   “그건 아직 몰라. 이따 또 화낼 수도 있어.”

   여은태는 이미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해 바깥의 대화 를 훔쳐 들은 상태였다. 물론 여은태 분만 아니라 태국영 도 여군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화안 내게 할게.”

   “응! 좀 이따가 유모가 쿠키 가져오면 평소처럼 같이 먹 자.,,

   “알았어.”

   여은태는 냉큼 태이경을 바짝 끌어와 한 팔로 허리를 둘러 안았다. 작은 등이 가슴에 폭 담겼다. 아직 가늘기만 한 어깨에 턱을 올린 여은태는 그제야 안심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귀여워라.

   이승도는 태국영의 곁에 앉아 웃음을 삼켰다. 참으로 귀여운 한 쌍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대로만 자라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티타임이 끝나자 이승도는 급격히 쏟아지는 졸음에 자 꾸만 눈이 감겼다. 마음은 조금 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수연에게 보여주고 팠는데 몸이 자꾸만 푹푹 까라졌다. 결국 보다 못한 태국영이 그만 자리를 파할 것을 권했고, 여군호 부부는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이경은 어제저녁 손수 만든 오르골을 한수연에게 선 물로 건넸다. 한수연은 그 자리에서 태엽을 끝까지 감았다 가 놓아 보았다. 발레리나가 천천히 돌며 청량한 음색의 자장가를 붐어냈다. 기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이제껏 보 았던 그 어떤 미소보다 환하고 아름다웠다.

   로비를 지나 현관에 선 그들이 구두를 신고 있을 때,여 은태가 처음으로 제 의지를 동원해 입을 열었다. 엄마,하 는 부름에 한수연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환청을 들었 나 싶은 표정이었다. 여은태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느리게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르골에 서 흘러나오는 자장가는 여전히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하 얗고 매끈한 여은태의 손이 허공을 여러 번 더듬었다. 그 러나 그것은 결국 그녀의 뺨에 닿지 못하고 완전히 떨어 져 내렸다.

   “고마워.”

   한수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여은태는 쑥스러운

듯 뒷목을 쓸어내리다가 툭 말을 뱉어냈다.

   “나 포기하지 않은 거,고맙다고.”

   아주 간절하게 죽고 싶었던 나날들이 있었다. 그때 누 적되어 응어리가 져 버린 미움과 원망은 화석처럼 단단했 다. 영원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도를 만나 고,그의 가족들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여은태는 처음 으로 그 끔찍한 시간들을 횡단하여 기어코 살아남은 지금 을 다행이라 여기가 되었다.

   “조심히 가. 다음에 볼 땐 살도 더 찌고.”

   여은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어색하고 민망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 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발라졌다. 그러나 뒤에서 터진 울음 소리가 결국 발목을 붙들었다.

   여은태는 작게 한숨을 지으며 돌아서야 했다. 이번에 도 외면해 버리면 나중에 태이경에게 혼쭐이 날 것이 분명 했다.

   녀석이 그런 건 은근 이승도를 닮았다. 아니라고 생각 하는 부분에서는 아주 단호해지는 것 말이다. 이승도에게 도 태이경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선택지는 하나분

이었다.

   여은태는 그날 처음으로 제 어머니를 가슴에 품었다.

   윤봄이는 흐느끼듯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 나 발악하는 본능을 밀치고 피비린내가 꾸역꾸역 몰려왔 다. 피에 젖은 남자가 잔인하게 이를 드러낸 그 모습이 목 을 조였다. 그것은 저를 찢으려 했고 저는 그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 치욕을 견디어 얻어낸 것은 이토록 죽음보 다 못한 삶이었다.

   「최경엽이 죽었습니다. 태국영에 의해 단번에 머리가 박살 났죠.」

   남편마저도 그 야만스러운 짐승의 발톱에 찢기고 말았 다. 제 친정은 오래전 풍비박산이 났으니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봄이는 악몽의 여파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 다. 축축하게 젖은 원피스가 피부를 휘어 감았다. 옷을 갈

아입을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로 약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는 술과 함께 빈 약통만 덩그러니 굴러 다녔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약이 필요했다. 그녀는 소파에 나뒹구는 핸드백을 낚아채듯 손에 쥔 채 무작정 거리로 뛰 쳐나왔다.

   불야성의 도시가 그녀를 반겼다. 지난주 헬러윈 축제 가 쓸고 지나간 뉴욕은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해가 지평 선 아래로 스러진 지 오래건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윤봄이는 두툼한 옷차림의 행인들 사이를 휘청대며 걸 어갔다. 보통은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낯선 이들은 종종 괴이쩍은 눈길을 그녀에게 보 냈다. 쌀쌀한 날씨에 안 맞는 민소매 원피스,그것도 눅눅 하게 젖어 육감적인 선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봄이는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의 눈은 정신없이 약국만을 찾아 헤맸다. 밝은 눈에 멀리 반가운 간판이 들어찼다. 발걸음이 발라졌다. 그녀는 약국 에 들어가 핸드백에서 처방전을 내밀었다. 약사는 힐긋 그 녀를 보더니 별다른 말없이 신경안정제를 건네주었다.

   값을 지불하고 나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그 자리

에서 알약 한 줌을 물 없이 씹어 삼켰다. 몽롱함은 여전히 초조할 정도로 서서히 혈관을 채웠으나 발열 증상은 점차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재 생능력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거기 예븐 아가씨.〕

   윤봄이는 무겁게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명하니 내려다 보던 눈을 들었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침침한 가로 등 아래 사내 셋이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셋 다 백인 남자였고 할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평범한 차림 이었다.

   〔왜 이런 곳에서 외롭게 혼자 있어?〕

   〔난 화끈한 여자를 잘 알아보?. 오늘 우리랑 어때?〕

   남자들이 다시금 말을 걸어 왔다. 밤새 뭘 싸게 해 준다 는 둥 저열한 음담패설이 섞여 있었다. 윤봄이는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대꾸하기가 귀찮았다. 지금은 너무 지쳤고 얼른 호텔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윤봄이는 농몽 한 얼굴로 남자들 사이를 지나쳐갔다.

   〔에이. 어딜가.〕

   한 남자의 손목이 팔에 휘감겼다. 역한 그들의 체취가 묽게 풀린 감각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윤봄이의 눈동자가 일순 싸늘히 내려앉았다. 잔혹한 본능은 고양이의 숨긴 발

톱과도 같았다. 언제든 순식간에 날카로운 끝을 드러낼 준 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윤봄이는 빈손으로 남자의 팔목을 쥐었다. 그대로 꺾 어 부러뜨리려던 참이었다. 그녀와 남자사이로 강렬한 체 향이 쑥 끼어들어왔다.

   〔어휴. 이게 무슨 몹쓸 짓들이람.〕

   이 지저분한 상황에는 안 어울리는 고급 슈트와 달콤 한 저음이었다. 윤봄이는 제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등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이 강렬한 냄새,거대하게 숨을 압박해 오는 강렬한 존 재감.

   다른 땅에서 부리를 일군 일족의 남자였다. 남자는 아 무 말 없이 그저 빤히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가끔씩 고개 를 비트는 것이 전부였으나 기이할 정도로 위압적인 기백 이었다. 양아치들은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본 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 한 채 허둥지둥 내배고 말았다. 인간들이 사라지자 남자 가 한숨을 탁 쉬며 돌아보았다.

   〔일족의 아가씨. 남의 동네에서 막 소란 피우고 그러면 못 써.〕

   근사한 구릿빛 피부에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오드아이를 반짝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혼자 여행 중인가 보네. 이 지역에 타국의 수컷이 들어 왔다는 소식은 없었으니까. 에스코트 필요해?〕

   일족의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제 영역에 민감했다. 그 본능은 지역 차원으로도 발휘되는데,그것 때문에 남자들 은 국경을 넘을 때 늘 해당 지역의 종주에게 미리 공문을 보내놓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심사를 받는 개념이 아니라 입국을 거절당할 일은 없지만,어디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자들에 비해 확실히 까다롭고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필요 없어.〕

   윤봄이는 차갑게 대꾸하고 남자를 지나쳐갔다. 골목을 빠져나와 충동적으로 가장 가까운 바에 들어갔다. 술을 마 시면 약효가 도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에 깨달았다. 뭐든 좋았다.

   그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만 있다면,이 도시에서 진 토로 부서져 홑날린대도 괜찮아…….

   윤봄이는 바가 아닌 테이블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의례적으로 말을 걸어올 바텐더조차도 귀찮았다. 침묵이 필요했다. 정적은 더욱 절실했다. 그러나 맞은편에는 제 가 허락하지 않은 남자가 멋대로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윤봄이는 눈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왜 쫓아오는 거지?〕

   〔위험한 차림으로 홀로 다니는 여자를 지켜주려는 기사 도정신이랄까.〕

   〔아무리 약해졌어도 인간들 따위 문제도 아니야. 아니 면 이 동네는 일족의 남자가 여자를 습격하는 것도 방치하 나?〕

   〔그럴 리가. 전쟁 나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그런 골 빈 짓을 할 놈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남자는 기이하게 눈을 빛내며 허리를 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너처럼 인간에 아주 가까워 보이는 여자는 방 심하지 않는 게 좋아. 힘은 곧 혈통을 뜻하지. 너는 지금 온 사방에 ‘나는 힘없는 가문에서 보잘것없이 태어난 계집 애예요.’하고 외치고 있는 꼴이라고.〕

   〔■■■내가,인간에 가깝다고?〕

   윤봄이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는 음? 하며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더니 몸을 바로 했다.

   〔무슨 질문이 그래? 설마 본인의 태생도 몰라?〕

   〔그런 말은 살면서 처음 듣는데. 나는 여자들 중에서도

평균 이상이었거든.〕

   〔으응? 아닌데.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

   〔한국.〕

   〔아하. 나 거기 알아. 등대가 멸족했다는 불쌍한 나라 잖아.〕

   남자는 콧등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그 덕에 슈퍼문이 개발돼서 등대 짝 없는 동족 들을 많이 구원해 주고 있지. 나도 그거 쓰고 있어. 등대 가 없거든.〕

   망할. 윤봄이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여기에 와서 까지 태국영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윤봄이 는 차갑게 굳어진 안면을 내려 잔에 술을 채웠고,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남자가 흥미롭게 웃으며 말했다.

   〔술 먹는 동족은 흔하지 않은데.〕

   윤봄이는 대꾸 없이 술을 비워나갔다. 남자는 돌아오 는 반응이 없어도 혼자 주절주절 잘 떠들었다. 수다 소음 은 생각보다 금방 적응이 되었다. 한 달이 넘게 홀로 타국 을 떠돌며 늘 홀로 있었기에,어쪄면 외로웠던 걸지도 몰 랐다. 윤봄이는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웠을 때 약을 몇 알 더 넘겼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정말 독특하네,이 아가씨.〕

   그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 원가 번득 스치는 생각

에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일부러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거야?〕

   〔일부러 망가뜨리다니?〕

   새 술병의 뚜껑을 따던 윤봄이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간만에 쌍방대화가 이뤄져 신이 난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그 왜,아,어디였더라. 아무튼 동양 어느 나라에서 예 전에 살수 키울 때 하던 방법 있잖아. 약하게 태어난 애들 몸을 일부러 망가뜨려서 암살자로 키웠다던데. 몰랐어?〕

   〔…그런 소린 처음 듣는데.〕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남자는 쯥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 다.

   〔하긴. 그거 되게 비밀도 아닌데 금지돼 있는 곳이 많 아 별로 안 알려지기는 했어. 나도 심심풀이로 여기 뒷골 목 가지고 노는 갱 친구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야. 당연하 잖아. 우리한테 힘은 곧 권력인데,그걸 억지로 약하게 만 들어서 살수로 키운다니.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완 전 최악이라구.〕

   〔자세히 말해 봐. 정확히 어떤 식으로 뭘 만든다는 거 야?〕

   〔나도 대강 들은 애기라 자세한 건 몰라. 그냥 혈통 안 좋은 애들을 일부러 퇴화시켜서 존재감도 안 느껴지는 이

상한 종자로 만든다는 것밖에는.〕

   〔아니. 그 정도로 약하게 만들어 버리면 애초에 살수 자 격이 없잖아.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는걸.〕 남자가 애석하다는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그건 아니야. 재생력을 바닥으로 만드는 거지 타고난 몸 자체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모두 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은폐의 속성을 타고나 잖아. 다만 그 완벽함의 정도가 차이가 날 분이지.〕

   〔무슨 말인지…….〕

   〔자. 예를 들어 보자구. 이 자리에서 네가 그림자를 찾 아 몸을 숨기고 나한테 찾아보라고 한다면,나는 아마 금 방 알아챌 거야. 난 네가 숨어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상 태고,네 고유의 냄새를 기억하니까. 하지만 너한테서 나 는 냄새를 완벽하게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몸뚱이라니,그런 게 가능 할까.

   윤봄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심각하게 상상에 잠겨들었 다. 만약 그것이 이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된 다면,그자는 어디든 숨을 수 있다. 상대가 의식하지 못한 장소라면 아주 완벽할 것이었다.

   윤봄이의 얼굴에 충격과 닮은 깨달음이 비쳤다. 그때

남자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바로 그거야.’하고 말했다.

   〔적어도 그 살수는 살기를 드러내기 전까진 아무도 찾 지 못해. 설사 완벽한 짐승의 피를 타고났다 하더라도 말 이야. 물론 그런 놈들을 죽이는 건 어렵겠지. 살수가 모습 을 드러내는 순간 은신이 풀리고,그 잠깐의 찰나에 방어 를 할 테니까. 그땐 죽는 거지 뭐. 그렇게 만들어진 살수 의 몸뚱이는 칼침 몇 방 맞는다고 픽 죽어버리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니까.〕

   〔그래서 최악이라는 거야. 그렇게 만들어지는 살수는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하거든. 겨우 한 놈 죽이자고 하나 를 키워내는 거니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신은 없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신의 구원이 손을 뻗어 오고 있었다. 윤봄이는 명하니 정지한 채로 날숨을 떨어댔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출구가 보였다. 이 지옥에서 탈 출할 수 있는 출구가.

   윤봄이는 광휘 도는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멈 칫 고개를 뒤로 물렀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윤봄이가 물 었다.

   〔그건,여자도 가능해?〕

   〔여자도 가능한 게 아니라 여자가 더 유리하지. 왜나면

생물학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약한 몸을 타고 나니까…….〕

   〔그것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가 맹한 표정으로 말을 잃었다. 윤봄이는 테이블 위를 한 팔로 쓸어 모조리 가장자리로 밀어두고 성큼 남 자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제발 알려 줘. 내 기약 없는 고통을 씻어낼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이야.〕

   남자는 뒤늦게 윤봄이의 의도를 깨닫고 눈가를 찌푸렸 다. 상세한 내막은 알 턱이 없지만 술과 약에 의존하던 기 행의 이유는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 여자는 아마도 복수 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족의 여자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타고나는 신체의 차이가 있 어 경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자들은 전쟁 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언제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 권이 있다.

   하지만 그런 특권보다는,역시 부당함에 당당하게 맞서 서 싸울 수 있는 강한 힘이 좋다. 지금 윤봄이의 앞에 있 는 남자도,많은 일족의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관둬.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거 진짜 못할 짓이야. 아까 스치듯 말했던 내 친구 있지? 개가 우리 세계에서도 진짜 사이코로 통해. 그런 놈들이나 할 법한 짓이야. 한 번 망가진 몸은 돌이킬 수 없어. 정말 일회용품,그것 말 고미래는 없다고.〕

   〔상관없어.〕

   윤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남자는 그녀의 눈물 젖은 얼굴이 희열에 떨리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내 몫의 목숨도 아니었는걸.〕

   구차하고 구차했다. 두려움에 얻은 여생은 무간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복수 따위 생각지도 못할 만큼 심신이 너덜너덜했다. 어차피 이렇게 살다 의미 없이 죽을 바에 는 놈의 가슴에 비수라도 한 번 꽂는 것이 나았다.

   남자는 긴 날숨을 뱉어내며 팔짱을 꼈다. 설득을 해도 못 알아먹을 얼굴이었다. 더 이상의 어떤 말도 건네 봐야 무의미했다.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데려다줄게. 살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네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 아마 그게 되고 싶다고 말한 너 스스로를 때려죽이고 싶어질걸.〕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목격하 게 함으로써 윤봄이에게 그 무서움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는 윤봄이가 사색을 띠며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 맹세컨 대,그녀가 그 불지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를 바란 것 이 아니었다.

   “재희 안녕.”

   제게 상큼하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 아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청초하게 빛이 났고,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에서는 나른한 섹시미가 풍겼다. 살구색의 화려한 치파오 형 롱 원피스가 당당하게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외투를 벗어 한 팔에 끼운 그녀가 맞은편에 앉으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 었다.

   “왜 그렇게 놀라. 오빠한테 미리 말하고 왔는데. 애기 못 들었어?”

   그녀가 두 번째로 말을 걸어오고 나서야 송재희는 정신 을 차렸다. 제가 얼마나 무례하게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 다. 황급히 벌떡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앗,네. 네,안녕하세요.”

   “왜 그래. 부담스럽게. 앉아.”

   송재희가 어색하게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한 남자가 슥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남강우가 송재희에게 붙여놓은 경호원이었다.

   “오랜만이다,영애야. 이 집구석에 네가 먹을 만한 건 딱히 없는데,차라도 줄까.”

   “응. 오빠 오랜만이네. 괜찮으니까 가서 볼일 봐.”

   “내 볼일이라면 여기 이 아가씨를 지키는 건데.”

   “그래서 내가 뭐 해코지라도 할 것 같으니까 바로 옆에 붙어서 감시하겠다는 거야 뭐야.”

   신영애가 날카롭게 미간을 구겼다. 남자는 어,음,하 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아니면 좀 안 보이는 데로 가 있어. 여자들 애기하는 거 구경해서 뭐하게. 변태야?”

   ‘‘야! 내가 왜 변태야!”

   “강우 오빠 직속이면 빤히 변태지,뭐.”

   “나는 아니거든!”

   그조차도 남강우가 변태가 아님을 부정하지 못했다. 결 국 말싸움에서 밀린 남자는 자리를 떠났고 그제야 신영애

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다시금 송재희를 바라보았다. 허 벅지 중간까지 트인 치마 밖으로 홈 없는 각선미가 드러났 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살이 좀 쪘네?”

   “예……요샌 좀 마음이 편해져서……

   “촌스럽게 웬 존대니. 그냥 언니라고 편하게 불러. 나 너랑 다섯 살밖에 차이 안 나.”

   송재희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나 워낙 낯가림도 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아 쉽게 말을 놓 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그래서 송재희는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신영애는 그 녀를 무안 줄 생각은 없었기에 제가 평범하게 대화를 봉합 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우 오빠가 너 집안에만 있어서 되게 심심할 거라고 너랑 친구 좀 해 주라더라. 나도 딱히 바븐 몸도 아니니 그 러겠다고 했어. 이거 보?. 오빠가 너랑 맘껏 쓰라며 카드도 줬다? 내가 오늘 몇천 정도 긁어버릴 거라고 했는데도 쿨 하게 오케이 하던걸?”

   완전히 사실은 아니었고 약간의 각색이 있었다. 제 애 인 챙기는 남강우의 팔불출 짓이 눈꼴사나워 ‘카드나 하

나 던져주면서 그런 말을 해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걸 남 강우가 그대로 들어준 것분이었다.

   “강우 오빠가 제 걱정을 하던가요?”

   송재희는 신영애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카드보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갔다는 대화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음?”

   신영애는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명하게 묻는 송재 희의 뺨은 열은 붉은 기가 돌았다. 마치 작은 설렘을 간직 한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신영애는 귀엽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뚝뚝하지? 그 남자.”

   “…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라구. 막 굴러먹던 놈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 봬도 연애는 완전 초짜거든.”

   송재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역시 몰랐구나,하며 신 영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얼핏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 의 집안에선 이 연애를 반기지는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는 다고 했다. 하나 있는 아들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꼴을 보 겠다 체념하고 있던 터라 마음에 안 차는 며느리라도 들 일 심산인 듯했다.

   “워낙 성향이 거칠고 사나워서 그렇지,그래도 여자 귀

하게 대할 줄은 아는 남자야. 말주변은 원래 없으니 뭐 달 달한 속삭임 같은 건 애초에 기대 안 하는 게 좋을 거고.” 신영애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 고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쇼핑부터 하러 가볼까?”

   화창한 겨울 햇살이 그녀의 등 뒤에서 반짝거렸다. 차 갑고 도도한 인상이지만 건네 오는 미소는 부드럽고 따사 로웠다. 연회장에서 불같이 화를 내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가족은커녕 친구 하나 없었던 삶이 이렇게 차츰 변하고 있 었다. 제게 뻗어오는 구원의 손길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송재희는 정말로 실감할 수가 있었다.

   타는 듯한 갈증에 박해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인중에 쏟아지는 숨은 뜨겁고 몸은 점성 짙은 물에 끈적하게 잠 긴 느낌이었다. 손을 뻗어 사이드테이블을 더듬어 보지만 텅 빈 주전자만 손끝에서 덜컹거렸다.

   한동안 명하니 눈만 깜박이다 삐걱대는 몸을 일으켰다. 사위는 소름 끼치도록 적막했다. 한기처럼 어깨를 둘러오 는 고요가 이제는 익숙했다.

   윤봄이는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의지는 아닐 것이었 다. 누구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지만,최경엽 이 죽고 감시자가 늘 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만 보아 도 그들 가문에 무슨 변고가 생겼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 었다.

   박해인은 느리게 다리를 끌어와 굽힌 무릎을 부둥켜안 았다. 의미가 묘연한 떨림이 어깨부터 시작해 전신으로 번 져갔다.

   최경엽이 죽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분이었다.

   그 남자가,천벌을 내리는 악독한 신처럼 제 의지를 묶 고 가차 없이 끌고 다니던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생의 끝 을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기묘하게도 그의 급사 소식 은 제게도 작지 않은 충격을 동반했다.

   박해인은 직감적으로 이 사건이 송재희의 실종과 연관 되어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종가모임에서 돌아온 최명 욱이 송재희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집기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던 것이 그 확신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송재희를 데려간 누군가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까. 도대체 누가 재희를 납치하고 최명욱을 죽이고,이 집

에 당당하게 감시자를 들여놓았을까.

   박해인은 무심결에 여제운을 떠올렸다가 실소하며 고 개를 흔들었다. 그 냉담한 남자가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답 없는 의문은 저편으로 미뤄두고 침대 아 래로 내려왔다. 시린 뼈마디가 기다렸다는 듯 비명을 질러 댔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윤봄이의 발길이 끊긴 뒷감당해야 할 폭력 역시 사라졌 다. 그러나 누적된 후유증은 독처럼 남아 시시때때로 살점 을 뜯어먹고 있었다.

   박해인은 빈 주전자를 들고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갔 다. 문 옆에 서 있던 남자의 눈이 고요하게 눌어붙어 왔다. 감정도 표정도 없는 얼굴은 얼핏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남자의 발걸음은 내내 제 그림자를 밟아 왔다. 처음에 는 이유 없이 두려워 절로 몸이 경직되었지만 이제는 이것 마저도 익숙해졌다.

   박해인은 다이닝 입구에서 멈칫했다. 불 끼진 어스름 속에서 최명욱이 방만하게 앉아 있었다. 단정치 못하게 위 에 단추를 풀어헤친 그의 앞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 가 루들과 위스키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왜. 너도 한잔줄까.”

   박해인은 한참 동안 명하니 눈만 깜박이다 빈 주전자

를 식탁에 올렸다.

   “그거,혹시 마약이에요?”

   최명욱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시선 한 자락 주지 않 은 그가 흰 가루를 술에 탔다. 잔이 입술에 붙고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단번에 비운 잔에는 부스러기 같은 잔 여물이 남았다.

   그들은 마약과 술의 조합에 멀정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그런 가설은 잠시 제 얼굴에 붙들렸다 떨어지 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깨어졌다. 괜찮을 리가 없었 다. 그들의 육신이 무적이 아닌 것처럼 그들의 재생력도 그러했다. 아무리 금방 해독이 된다 해도 순간적으로 마약 이 가져다주는 허무한 쾌락은 기억 속에 부리를 내릴 터였 다.

   최명욱이 다시금 약 탄 술을 들이켜려 했다. 박해인은 빠르게 달려가 그의 손에서 잔을 배앗아 던졌다.

   “그만해요!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크리스털 잔이 산산조각 나며 위 협적인 파편을 부렸다. 최명욱은 아예 술병 주둥이에 가루 를 쏟아 부었고,박해인은 그마저도 저만치 집어 던졌다. 짐승같이 번들거리는 눈이 그제야 허공을 찢어발기며 위 로 향했다.

   “지켜주는 놈 있다고 간덩이가 부었지. 꺼져.”

   “싫어요.”

   “꺼지라고 했다.,,

   “싫다고 했어요.”

   최명욱은 날카롭게 이를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절절 끓는 열기가 훅 코끝을 파고들어왔다. 익숙한 그의 체취는 비이상적으로 높은 온도였다. 몸을 혹사했다는 증 거였다.

   “저 새끼가 어느 가문 놈인지 알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그가 입매를 비틀며 곧바 로 말을 이었다.

   “네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도 마음 한 자락 얻어내지 못했던 여제운 가문 놈이야.”

   박해인의 눈시울이 크게 벌어졌다. 냄새가 얼핏 비슷하 단 생각은 했지만 그건 제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낸 환상 같은 것 말이다. 창백한 낯에서 선 명하게 보이는 감정의 변화를 고스란히 읽어낸 최명욱은 싸늘하게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어쪄나. 그 새끼는 여전히 너한테 관심은 하나 도 없던데. 형을 죽인 게 그 새끼 짓인가 궁금했겠지. 애석 하게도 놈은 아니야. 너완 달리 아주 고귀하게 대접받는

등대 아내를 가진 다른 놈이었지.”

   박해인의 동공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년 나 같은 놈한테 걸려들어서 매춘부보다 못한 삶을 사는데,태국영 그 새끼가 끼고 있 는 등대는 여왕님처럼 살고 있거든. 바람에 날아갈까 아 주 철저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말이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아낌없이 사랑받다가 지금은 둘째 아기까지 가졌 다더군.”

   “여제운이 백마 탄 왕자일지는 몰라도,년 숲 속에서 정 숙하게 잠들어 있는 공주님이 아니지. 몇 놈이 거쳐 갔을 지도 모르는 너 같은 거한테 진심 한 조각이나 줄 것 같 아? 꿈 깨.”

   신랄한 말은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 왔다. 어렴풋이 품 었던 기대가 바스러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밑바닥 인생을 가까스로 기어온 저와 달리,누군가는 저 하늘 꼭대기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비참함을 증폭시킨 탓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외로운 공 간에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여제운에게 연정을 느낀 적 은 없었다. 그저 그가 탐났던 순간이 있었을 분이었다. 그 의 마음을 파고들기만 한다면 고단한 하루를 가까스로 견

디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정말로 바랐을까.

   생명의 기척이 모조리 사라지는 깊은 새벽녘은 독이었 다. 불면에 시달리며 명하니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자각하 고 싶지 않은 것들이 칼날처럼 살갗을 저며 오곤 했다. 아 득한 것들은 안개에 파묻힌 듯 명명한 거리에서 옷자락만 어렴풋이 휘날리며 조롱했고,농락에 지친 정신은 어김없 이 가장 가까운 온기를 그리워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도 있 을 것같은…….

   미친 거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폐해진 몸과 맘은 이 미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했다. 영혼을 배앗긴 인형처럼 무 질서한 우주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심장에 시린 바람이 불어 닥쳤다. 늑골이 뻥 뚫린 듯했다.

   “왜 이렇게 폐인 몰골로 빌빌거리나 했더니만…… 결 국 싸움에서 진 개 신세가 되어서였군요.”

   최명욱의 전신에서 화염 같은 불꽃이 어른거리는 듯했 다. 이상하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그가 두렵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한참 전이다. 박해인은 가시를 품은 눈으로 그를 자극했다.

   “태국영인지 원지,형까지 죽인 놈한테는 찍소리 하나

못 했나 보죠? 내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무섭 고 잔인한 족속처럼 굴더니만 당신 세계에서는 아주 별거 아니었나 보네요. 당해 보니 어떤가요? 지금의 당신도 나 만큼 비참한가요?”

   “그래도 나보다는 낫잖아요? 당신은 고작해야 제멋대 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강탈당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나는 당신들 손에 최소한의 존엄성도 짓밟힌 채로 억지로 몸을 굴리면서 매일을 절망 속에서 살았어요.”

   “입 다물어.”

   “내 앞에서 괴로운 척할 거면,적어도 짐승 같은 놈들한 테 윤간이나 한번 당하고 와요. 그럼 기꺼이 동정해줄 테 니까!”

   최명욱의 눈가가 뜨겁게 경련했다. 그가 한 손을 치켜 세웠다. 상황을 주시하던 감시자가 돌풍처럼 튀어나와 박 해인의 허리를 낚아챘다.

   박해인은 입술을 깨물며 시린 눈에 바짝 독기를 세웠 다. 휘둘러지지 못한 채로 허공에서 멈춘 최명욱의 팔이 아주 희미하게 떨린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알알이 파도치는 색들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일그러진 시야 안에는 오롯이 그가 홀로 갇혀 있었다. 그

는 마치 무형의 사슬에 묶인 것만 같았다. 얼룩진 눈빛이 한참을 오고 갔다.

   허리를 감았던 감시자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안구를 가득 채웠던 물막이 뜨겁게 터져 뺨을 타고 흘러내 리기 시작했다. 저울추도 움직이기 힘들 눈물이 그 어느 때보다 육중한 무게로 속눈썹에 엉겨 붙었다.

   “네가한 짓이잖아…….,,

   발악하듯 끄집어낸 목소리는 한껏 잠겼다. 한 번 터진 울음은 폭포를 향해 말려가는 급류처럼 걷잡을 수 없는 흐 름을 타고 있었다. 박해인은 주먹 쥔 손으로 그의 가슴팍 을 되는대로 후려쳤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이잖아! 년 고작 그 일부를 돌려받 은 것분이야! 그런데 뭐가 그렇게 억울해?”

   “차라리 더 강한 척을 해. 네 형을 죽이고 너에게 모욕 을 준 놈들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너답게 굴어! 이렇게 병신 처럼 약 탄 술이나 마시면서 무너져 있지 말고!”

   팔뚝이 거세게 붙들렸다. 마치 달궈진 갈고리에 휘감 긴 듯 뜨거운 통증이 피어났다. 그 순간 다시 감시자가 끼 어들었다. 최명욱의 눈이 극점을 뚫은 듯이 이글거렸다. 그가 팔을 휘둘렀다.

   감시자의 턱이 충격으로 돌아가며 저만치 나동그라졌 다. 그 사이 최명욱은 박해인을 와락 끌어당겼다. 무심결 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입술을 물어뜯듯이 덮쳤다. 흠뻑 젖 은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최명욱은 박해인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결합을 더 깊이 했다.

   순식간에 충격을 회복한 감시자가 다시금 돌진했다. 아 니,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멈칫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박해인의 가느다란 팔이 최명욱의 목을 필사적으 로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군호는 폭력과 학대를 감시하라고 했지,박해인의 동 의가 있는 육체적인 행위까지 제지하라곤 하지 않았다. 계 기가 무엇이 되었건,저 모습은 누가 보아도 서로를 갈구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급한 최명욱의 손이 박해인의 셔츠 아래를 파고들었 다. 박해인은 끓는 숨을 토해내며 더 그에게 매달렸다. 튕 겨 나간 단추가 발치에 떨어졌을 때,감시자는 조용히 뒤 를 돌아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비명 같은 교성이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감시자는 흥미 없는 얼굴로 TV를 틀었다. 케이블채널이 버라이어티 쇼를 방송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도 교성은 가시처럼 돋아났다.

   감시자는 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군호의 본가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와 얹힌 한 옥 건물들이 대궐처럼 자리한 구조였다. 안채와 사랑채 외 의 집채들까지 모두 최고급 목제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 던 데다가,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가옥답게 귀한 골동 품들도 그득했다고 한다.

   여군호가 이 문화재급 한옥을 철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은 지금의 아내 때문이었다. 현대식 인테리어와 시설 들을 지나치게 사랑했던 그녀는 첫 방문하던 날부터 영 표 정이 좋지 않았고,그 속내를 꿰뚫어 본 그는 그녀가 부정 적인 말을 내뱉기 전에 선수를 쳐 약속했다.

   이곳에 당신이 원하는 집을 지어주겠다고.

   문화재급 한옥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 울시 측은 기겁했다. 그들은 철거 대신 매매를 해 주십사 끈질기게 부탁했고,여군호는 매매 조건으로 서울시 내에 천 평에 가까운 대지면적을 매입할 수 있는 방도를 요구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도 아닌 서울에서 그 정도 면

적을 한 번에 매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토지 주 인만 수백이고 그 위에 세워진 건물주들까지 합하면 그 몇 배에 가까운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멋들어진 한옥은 지상에서 영원히 지워졌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지상 3층에 지하 2층의 본채 하나 와 지상 2층의 별채 세 개였다. 건물 외관은 물론 인테리 어부터 작은 소품들까지 그의 아내가 세심하게 신경을 썼 다. 그러나 단 하나,별채 중 하나는 예외였다. 여군호가 다도를 즐기는 여 가의 풍습만큼은 이어가길 원했기 때문 이었다. 그녀는 물론 많은 것을 배려해 준 그의 청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태국영은 지금 그 한옥식 별채에 반쯤 누워 있 었다. 좌식 기반이라 금방이라도 방바닥에 붙을 기세였다. 힐긋거리는 시선들이 종종 그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개의 치 않고 연신 몸을 뒤틀었다. 이 답답한 곳에서 한시라도 발리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분이었다.

   “한 자세로 오래 못 앉아있는 것이 어린애가 따로 없군.

   맞은편에 앉은 남강우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스물아 홉 생일을 맞아 정식으로 가주에 오른 그도 물론 이 자리 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눈앞의 다기들에는 손 하나 안 대던 게 뭐 얼마나 어른 이라고 지적질이야.”

   “영 입맛에 안 맞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편식이잖아. 그것도 어린애 습성인데 뭘.”

   주변의 수많은 어린애 습성 편식쟁이들이 헛기침을 했 다. 다들 ‘이런 맛대가리 없는 차는 됐고 고기는 언제 나옵 니까.’하고 묻고 싶은 기색만이 역력한 상태였다. 상석에 앉은 여군호가 분위기를 읽고서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 았다.

   “지루하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하지. 어차피 다 도는 서로 느긋하게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회의가 끝난 뒤에는 자네들 입맛에 맞는 연회를 준비해 주 겠다.,,

   “연회고 뭐고 전 됐습니다. 그냥 집에 가서 마누라 살 냄새나 맡으며 낮잠이나 자고 싶네요.”

   태국영은 단박에 거절했다. 어차피 밥 먹자고 온 것도 아니었고,안 반가운 얼굴들 맞대고 억지로 자리를 지켜 야 하는 것은 종가모임으로 충분했다. 여군호는 유하게 고 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손목시계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제일 중요한 놈이 안 오니 진행이 안 되는군. 진희야, 최명욱은 아직 멀었다고 하더나.”

   “적어도 십 분 내로는 도착한다고 한 것이 약 오 분쯤 전입니다.,,

   여진희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늘 꽃처럼 화사했던 얼굴 이 오늘은 먹구름이 낀 마냥 영 흐리기 짝이 없었다. 늘 당 당하게 여군호의 곁에 앉아있던 여제운의 빈자리가 몹시 도 크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 애릇한 심정을 투명하게 들 여다본 여군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천성이 고왔던 아이라 참하게 키워 하고 싶은 일 하게 해 주고,어질고 푸근한 성품의 사내와 남부럽지 않게 결 혼도 시켜줄 생각이었다. 여제운을 보는 녀석의 눈에 점 점 연정이 깃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둘이 이어주어도 나 쁘지 않다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년식 이후에도 기이할 정도로 여자에게 관심 이 없던 여제운이 덜컥 애먼 곳에 마음을 배앗기고,그도 모자라 당연하게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도 허무하게 놓쳐 버렸으니,그를 지켜보는 녀석의 마음도 참 많이 곪았을 것이었다.

   “진희야. 피곤해 보이는구나. 이만 돌아가도 좋다.”

   “…괜찮습니다.”

   여진희는 약간 뜨끔한 듯 얼굴을 흐리더니 난감한 미소 를 지어 보였다. 여군호는 너그럽게 눈가를 접었다.

   “아니면 안사람하고 좀 놀아주지 않겠니. 오늘 새 옷감 이 한가득 들어와서 신이 나 있을 테니 가서 말동무도 해 주고 너도 옷 한 벌 지어달라고 해.”

   잠시 망설이던 여진희는 결국 부드러운 명령에 네,하 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 던 태국영도 결국 못 견디게 꼬이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 다.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태국영은 이미 품 안에서 담뱃갑을 끼내 든 상태였다. 여군호는 흡연공간이 따로 없으니 별채 뒤쪽에 가서 흔적 없이 해결하라 일렀고,멀찍이 병풍 앞에 서 있던 비서 하 나가 물을 약간 채운 종이컵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순 간 남강우가 기다렸다는 듯 재발리 따라서 일어났다.

   “같이 가지.”

   ‘‘응? 너 담배 해?”

   태국영은 의아한 기색으로 눈을 끔뻑였다. 남강우는 넥 타이를 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누구 덕분에.”

   남강우에게선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주 가끔 피 우거나 헛소리를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도 큰상관은 없었다.

   태국영은 고갯짓을 하며 몸을 돌리다가 문득 송재희를 보았다. 증인의 자격으로 참석한 그녀는 마치 버려진 아이 가 엄마의 등을 보듯이 애절한 표정으로 남강우를 응시하 고 있었다.

   정적 쌓인 복도를 어느 정도 걸어 나왔을 때,태국영은 넌지시 물었다.

   “재희는 안 데리고 나가?”

   남강우는 해괴한 얼굴이 되었다.

   “되도록 면적 넓게 노출하라고 했던 건 어디의 누구였 더라.”

   “그거야 물고기들이 천지 분간 못 할 때가 기회니 낚아 보려고 그런 거였고. 지금은 아니잖아?”

   “또 아나. 내가 자리 비운 사이 뭔 일이 생길지.”

   애는 원가 되게 비상해 보이는데 가만 보면 둔한 구석 이 있단 말이야.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다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협약에 관한 것을 제외 하곤 송재희에 관한 모든 일은 남강우에게 넘겨준 상태였 다. 제가 참견할 상황은 아니었다.

높게 지반을 올려 지어진 별채 뒤쪽은 작은 브리지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브리지 아래로는 잉어

들이 유유자적 물살을 가르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있고,끄 트머리의 휴식공간엔 팔각형 지붕이 얹힌 정자가 자리해 있었다. 잘 깎인 상록수가 둘러싸고 있어 제법 풍취가 좋 았다.

   브리지를 건너며 담뱃불을 붙였다. 희부연 연기가 잔 가루 없이 높은 곳으로 증발했다. 두 남자는 정자에 걸터 앉아 한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싸한 냄새 섞인 연기가 실뱀처럼 허공을 갈랐다. 가을 바람에 얇은 잎사귀가 치맛자락처럼 팔랑거렸다. 선선한 바람에 고스란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남강우가 불쑥 물었 다.

   “오늘 가주 회의가 궁극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 하나.”

   조금은 부정적인 어투였다. 적어도 남강우는 별로 기대 를 않는 듯했고,그것은 태국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자 리에서 무슨 큰 성과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태국영은 짧 아진 꽁초를 곁에 내려둔 종이컵에 떨어뜨렸다. 물에 닿 은 불씨가 타협의 여지없이 까맣게 빛을 잃었듯,쏟아져 나온 대답 역시 그러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직진으로 가냐 돌아가느나의 문제니

   그의 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대답이었다. 태국영은 언제가 되었든 이미 등대에게 중독된 동족들의 부리를 봅 기로 생각을 굳힌 지 오래였다.

   후환을 남겨두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울리지 않 게 값싼 동정을 부린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거였 다. 차라리 예전에 윤봄이를 그 자리에서 제거하는 게 좋 을 뻔했다. 안주인을 잃은 최경엽은 분명 격분하며 덤벼왔 을 테고,그랬다면 놈의 가문 역시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

   등대들이 납치당해 고혈을 발리는 일도,그 가랑이 냄 새에 눈 뒤집힌 동족들이 생길 일도,뒤늦게 머리를 써 가 며 수습의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 일도 물론 없었을 것이 었다.

   “없는 명분도 만들어서 싹 도려내야지. 그것조차 여의 치 않으면 뭐,어쩔 수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여야겠 지만.”

   그건 여 가의 방식이다. 남강우는 필터를 씹으며 픽 실 소했다. 태 가와 여 가가 앙숙처럼 살아온 기간이 하세월 이다. 무식하고 우직한 태 가의 방식을 포기하고 음습한 면모를 벤치마킹하기로 한 태국영이 현명하다고 해야 할 지 교활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너무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손

빌려줄 용의가 아주 충만하니까.”

   “왜. 너한테 내가 예븐 중매쟁이가 될 것 같아?”

   “멀리 나가지 마. 영원히 풀지 못할 문제에 해답지를 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니까.”

   태국영이 송재희마저 꽁꽁 숨겨두기로 결정했다면,아 마 남강우 자신은 죽을 때까지 궁금증에 잠을 설쳤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후련했다. 비록 제가 얻은 해답이 허무 하고 어이없긴 했지만 말이다. 태국영은 대답 대신 천천 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른하게 풀려있던 동공이 삽시간 에 또렷한 형태로 돌아왔다. 그는 별채로 다가오는 두 개 의 기척을 찌를 듯 노려보았다.

   최명욱과 박해인의 등장이었다.

   이승도는 벚꽃 휘날리는 모래사장을 기쁘게 뛰어갔다. 분명 이 장면은 태아를 처음 만났던 그 배경과 꼭 같았다. 급한 마음은 전력질주로 나타났다. 1 초라도 더 발리 보고 싶은 마음에 초조함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은 제가 동물원을 퇴직한 다음 날이었다. 그때에도 녀석은 낑

낑거리며 척박한 모래 위를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 다-

   은근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기대를 안고서 달려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다급했던 발걸음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 다. 멀리서도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 때문이었다. ‘저게 도대체 뭐지.’하는 걱정은 육안으로 그 형태를 자세 히 볼 수 있는 거리가 되자 ‘설마 저게 아기가 짓던 집인 가?’하는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소금 바람 속에서도 굳건 하게 버티고 있는 집은 제 키보다 훨씬 커다랬고,이따금 위협적으로 덮쳐오는 큰 파도도 거뜬히 이겨낼 정도로 견 고해 보였다.

   一멋지지?

   넋을 놓고 고개를 꺾고 있던 이승도는 아래서부터 들려 오는 목소리에 얼른 눈을 내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 기 짐승이 부듯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바짓단을 앙 물고 있 었다. 궁둥이를 실룩거리며 다짜고짜 끌어당기는 것이 얼 른 자랑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승도는 기꺼이 녀석 을 따라가며 물었다.

   一굉장히 좋은 집을 지었구나. 이거 다 네가 한 거니?

   一응. 얼마 전부터 집짓기가 쉬워졌어. 다시 땅이 마르 기 전에 얼른 만들었어.

   一다행이다.

   녀석의 집은 바다를 등지고 있었다. 아치형으로 뚫어놓 은 입구가 제 눈높이만 했다. 아마도 제가 언젠가 나타날 거라는 걸 알고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둔 게 아닐까 싶었 다-

   이승도는 입구 곁에 앉아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가 볍게 뛰어오른 녀석이 냉큼 그 위에 안착하며 물었다.

   一집 구경 안 해?

   一조금 있다가.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너 많이 안아주 고 싶어. 괜찮아?

   녀석은 빤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카만 털 사이에서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상아색과 물빛을 섞어놓은 듯 묘한 빛깔을 띠었다.

   이승도는 작은 아기를 두 손으로 가슴에 품고서 단단 한 모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작고 말랑말랑한 발이 심장 근처를 지그시 눌러왔다. 무의식적으로 박동을 훔쳐가는 습성은 이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 혔다.

   一먹을 게 부족하지는 않아?

   一응. 요즘은 맛있는 고기가 주변에 아주 많아졌어.

   一잠은 편히 자고?

   一응. 졸릴 틈도 없이 잘자.

   제가 꾸는 태몽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아직 아기는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을 만한 사고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 러나 태국영의 말에 의하면 이 꿈들이 꼭 무의미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일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태몽은 보통 태아의 본능 적인 움직임이나 감정 상태들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모체 가 자는 동안 그것을 이미지화시키는 것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아기는 아주 풍족하고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믿어도 될 것이다.

   一그래. 많이 먹고 건강하게 쑥쑥 커.

   이승도는 검지 끝으로 아기의 머리 위를 긁듯이 어루만 졌다. 녀석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접혔다. 기분이 좋 은 듯 목 안으로 그릉그릉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승도는 잠에서 깨고도 한참을 녹진하게 시트 위에 늘 어져 있었다. 달콤했던 꿈속 잔상들이 깃털처럼 전신을 간

질였다. 손바닥 위에 얌전히 앉아 빤히 올려다보던 아기 의 눈빛이 자꾸만 눈앞을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 아기를 실제로 품에 안으면 어떨까,상상하는 것만 으로도 몸이 떨렸다. 아마 귀여워서 까무러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참 여운에 취해있던 이승도는 불현듯 허기가 밀려와 상체를 일으켰다. 사이드테이블에는 플로랑탱과 쇼콜라 를 채워 놓은 쿠키 바구니,두유가 가득 든 유리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간식이 아닌 식사를 하고 싶었기에 허기를 달랠 정도로만 쿠키를 집어 먹은 뒤 방을 나섰다.

   “우리 예븐이들,어디 있을까?”

   귀 밝은 아이들이 요란하게 나타난 건 막 복도를 벗어 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엄마아아아! 이것 보?,이것 봐요!”

   태이경의 잔뜩 들뜬 목소리가 먼저였고,계단을 빠르 고 묵직하게 밟아 올라오는 소리가 그 다음이었다. 풀 냄 새를 묻히고 등장한 아이들은 여상치 않은 옷차림이었다.

   “오늘 형아 어머니가 또 옷 보내 줬어요.”

   태이경은 여은태의 등에 업힌 채로 한 손을 허공에서 붕붕 휘둘렀다. 어리둥절했던 이승도는 뒤늦게 아이들의 차림새가 아주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한

창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등장인물들의 모양새였 다. 이승도는 과장되게 입을 벌리며 호응했다.

   “세상에. 이경이 요정이네? 우리 은태는 기사님이고?”

   “응,응! 엄마,나 예뻐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예브지.”

   태이경은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며 바닥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등에 달린 투명한 요정 날개가 허공에서 팔락거렸 다. 녀석이 달려와 허리에 매달리자 여은태도 슬쩍 다가 와 물었다.

   “선생님,나는?”

   동물 옷을 질색하던 녀석이 이번에는 그래도 사람 옷이 라고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당연히 끝내주게 근사하지. 우리 은태 나중에 어른 되 면 엄청 인기 많겠네.”

   빈말은 조금도 섞지 않았다. 금사로 수를 놓고 금장이 된 흰색 제복은 포켓에 달린 훈장과 그 외의 장식까지 정 말 홈 잡을 곳이 없었는데,신기할 정도로 녀석에게 잘 어 울려 한 폭의 명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엄마. 아줌마가 보내주신 것들 중에 우리 가족 옷도 있 어요. 티셔츠랑 청바지 한 벌씩 형아 것까지 만들어서 보 내주셨는데 내려가서 그거 입어 봐요. 네?”

   숲의 요정으로 분한 태이경이 손을 잡아끌며 보챘다. 이승도는 부드럽게 눈가를 접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별이가 많이 배고파하니까 일단 밥부터 먹으 면 안 될까? 패밀리룩은 조금 이따가 아빠 오면 같이 입 어 보기로 하고.”

   “앗! 그래요. 별이 배고프면 안 되니까 저녁부터 먹어 요. 내가 먼저 유모한테 가서 상 차려 달라고 할게요. 엄마 는 형아랑 쉬다가 내려와요.”

   “우리 이경이 착해. 그래 줄래?”

   태이경은 활기차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유모오외 우리 엄마 바아아압!’하고 외치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 다. 이승도는 느긋하게 따라 내려가 햇살 드는 응접실 소 파에 앉았다.

   여은태가 곁에 슬쩍 엉덩이를 붙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 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나 배 만져 봐도 돼?”

   새 생명은 녀석에게도 매우 신비롭고 설레는 일인 모양 이었다. 이승도는 기끼이 허락했고,여은태는 조심스럽게 아랫배에 손바닥을 붙였다. 무언가에 열중하듯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 놀란 눈으로 감탄사 를 터뜨렸다.

   “아! 움직인다.”

   “그래? 난 안 느껴지는데. 어떻게 움직이고 있어?”

   “…별이가 나 발로 차는 것 같아. 내가 싫은 건가?” 세공품처럼 매끈한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승도 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별이는 국영이한테도 그래. 국영이가 잘 자라고 있나 보려고 너처럼 그렇게 손을 가져다 대면 되게 싫어하 면서 몸부림친대. 자기를 훔쳐보는 느낌이 영 별로인가 봐.”

   “선생님이 만지면 얌전하고?”

   “응. 난 아무래도 너희들이랑 좀 다르기도 하고,아기 랑 이어져 있기도 하니까 거부감이 별로 없는 것 같아.”

   거,꽤 까다로운 녀석이네.

   여은태는 베죽 튀어나온 생각을 그대로 잠재우며 손을 거두었다. 이승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포장했지만 아무 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건 아닌 듯싶었다. 요즘 이 집에 는 일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논문들이 해변의 모래알들 처럼 굴러다니곤 했는데,지식도 쌓을 겸 미래도 대비할 경해서 틈틈이 읽어본 바로는 그랬다.

   별이처럼 3개월이 지난 태아는 사고력은 다소 부족해 도 의지는 살아있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저를 튕겨내던 별

이의 움직임은 거부 사인이 분명했다. 말하자면,별이는 그냥 엄마만 좋은 거고 나머지는 다 귀찮아하는 것 같았 다.

   참으로 볼 만하겠다. 저 꼬맹이랑 태국영이 이승도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릴 것이 말이다. 태국영은 심보가 고 약하니 무슨 고초를 겪어도 쌤통이라고 비웃어줄 수 있었 다. 다만 하나,그 사이에서 일찍이 엄마 바보였던 태이경 의 등이 터지지나 않을지 그것이 걱정일 분이었다.

   뭐,선생님이라면 변함없이 이경이를 잘 챙겨 주겠지 만.

   금방 걱정을 접은 여은태는 문득 제 엄마도 등대였다 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망상을 해 보았다. 제 말을 알아들 어 주고,아플 때마다 어루만져 주며 고통을 불식시켜 주 는‘엄마’가있다는 건어떤기분일까.

   제가 기억하는 바깥세상의 첫 장면은 몹시도 시렸다. 창밖에는 솜뭉치 같은 눈발이 비스듬히 날렸고,피비린내 가 매우 짙었으며,힘없는 울음소리가 가득했었다. 포근 한 살을 가진 어미는 저를 보호하듯 끌어안고서 힘겹게 젖 을 물렸었다. 그때 목 안으로 넘어가던 달콤한 초유의 기 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춥고 두렵기만 했었다.

   태중에서부터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부친이 언젠가 저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걸.

   그러나 그는 결국 제게 결정적인 손을 쓰지는 못했다. 집착적으로 제 생사를 수시로 확인하던 모친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 운 채 제 곁을 지켰다. 밤을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집 안은 항시 따뜻했으나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십수 년을 그렇게 생활했으니,모친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 을 리가 없었다.

   “선생님. 별이 언제 태어난댔지?”

   “3월 중순쯤?”

   “아. 따뜻한 봄에 나오는구나. 선생님은 인간이라 아기 낳으면 몸 따뜻하게 하고 잘 쉬어야 된다던데,겨울 지난 뒤라니 다행이다.”

   “우리 은태 그런 것도 알아?”

   “응. 선생님 잘 때 이경이랑 출산 육아에 관한 책들 많 이 보고 있거든. 이경이는 언제 나왔어?”

   “아마 초겨울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승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은태가 이 화제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무심하게 지나칠 뻔했다.

   “잠깐만.”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유모의 방에 딸린 서재로 들어갔 다. 여은태는 영문을 몰라 어 리둥절해하면서도 졸졸 따라 왔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화이트보드에는 11월 일정이 배곡 하게 쓰여 있었다. 그중에 생일이라 쓰인 것은 없었다. 그 는 주위를 둘러보다 눈에 띈 벽걸이 달력으로 향했다. 한 장 넘겨 12월을 보니,역시나 앙증맞은 케이크 스티커와 함께 ‘도련님 생일’이라고 적힌 날이 있었다.

   12월 3일. 기억하기도 쉬운 이 날짜를 저는 이제껏 까 맣게 몰랐다. 아기가 나오던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도 그 뒤에는 따로 기억해 뒀어야만 했던 건데.

   이렇게나 무심한 부모라니.

   이승도는 조금 자책하다 고개를 돌렸다. 여은태 역시 눈치로 알아챈 듯 반짝이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달력을 보고 있었다. 녀석의 손가락이 막 12월 3일을 가리켰다.

   “이게 이경이 태어난 날이구나. 이날 다섯 살 되는 거 지?”

   “응. 다섯 살.”

   네 번의 생일을 지켜봐 주지 못했다. 태국영이 살뜰하 게 챙겨줬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멀정하게 살아있는 부모들이 축복해주지 않는 생일을

매년 맞아야 했던 아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 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을까.

   이승도는 식사 후 유모에게 이제껏 아이 생일파티는 어 떤 식으로 했냐고 물었다. 유모는 별다를 것 없이 케이크 와 풍선 등 파티용품으로 장식해서 기념해주는 것으로 끝 냈다며,아이는 생일을 특별하게 챙겨야 한다는 개념이 없 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가족이 다 모여서 맞는 첫 생일인데,뭐 특별하 게 할게 없을까요?”

   “홈. 글쎄요. 보통의 인간 아이라면 친구들을 불러 왁자 지껄하게 파티를 열어주면 될 텐데,도련님은 친구랄 것 이 없으니……

   이승도는 유모와 잠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뾰족 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아 둘 다 고개만 갸웃거리길 수 분, 유모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그럴싸한 의견을 냈다.

   “승도 군. 그러지 말고 아예 가주님께 가문 모임을 열어 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두 분 살림 합친 지가 벌써 두 달 인데 아직 현리 양 가족하고 교수님들밖에 못 보셨잖아요. 내년에 혼인식 치르기 전에 안면도 틀 겸,도련님한테 또 래 친척 아이들도 소개시켜 줄 겸. 어때요?”

   “이경이가 좋아할까요?”

   “그럼요. 우리 도련님 처음 종가모임 다녀온 다음 날 저 한테 내내 그 애기만 하던걸요. 자기가 바보처럼 울음이 터진 바람에 발리 오게 됐다고 너무 아쉬워하면서요. 아시 다시피 가주님께서 워낙 제 영역에 민감하신 분이잖아요. 친척들 왕래도 별로 없다 보니 그런 북적북적한 곳이 신기 하고 재밌었던 모양이에요.”

   저는 조금 불편하고 어색할 테지만,아이가 좋다면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네. 그럼 국영이 오면 제가 상의해 볼게요.”

   이승도는 또한 생각했다. 여은태의 어머니에게도 연락 을 해서 미리 녀석의 생일 또한 기억해 둬야겠다고.

   다도실 내부에는 살얼음 같은 공기가 흘렀다. 남강우 는 웃는 듯이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힐긋 맞은편을 살폈 다. 태국영은 다도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 불 량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감정을 읽기 힘든 모호한 표 정이었다.

   “그게,……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의외

로 송재희였다.

   “오빠. 그거 아니잖아.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그간 무 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협박당했어? 만약 그런 거라 면 겁먹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저기,상석에 앉아 계신 분이 오빠를 지켜준다고 했어.”

   이제껏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얼어붙어 있었던 송재 희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남자들의 존재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그녀는 박해인이 필시 무언가를 빌미로 협박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박해인이 자신의 자존 감을 부숴가면서까지 제 입으로 최명욱을 두둔할 리가 없 었다.

   “아냐,재희야. 난 사실만 말했어. 너야말로 왜 그렇게 변했니.”

   박해인은 거의 피골이 상접하달 만큼 뺨이 홀쭉하게 들 어가 있었다. 피부는 창백하고 거칠었으며 입술은 핏기없 이 바짝 메말랐다. 그러나 거멓게 죽은 눈동자에는 기이 한 열기가 응집되어 있었다. 그는 상석의 여군호에게 고개 를 돌려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분명 제 의지로 명욱 씨를 따라나섰고,그가 소개 시켜주는 분들과 관계를 가졌어요. 그 과정에서 강압은 결 코 없었습니다. 번식을 강요당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에

요. 저는 등대를 낳고 싶었고,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남자 들의 씨가 필요했습니다. 명욱 씨는 제 부탁으로 남색을 하는 인간 남자들을 연결해 줬을 분이에요.”

   송재희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손이 덜덜 떨렸다. 겨 우 2달이었다. 그 못 본 사이 박해인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빠 미쳤어? 우리가 스스 로 몸을 팔았다고? 저 악마 같은 놈에게 끌려왔을 때 나 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상태였어. 남자친구 한 번 사귀 어 보지 못한 채로 세 명의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했어! 다 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송재희는 악을 쓰다가 결국 눈물을 내비쳤다. 박해인 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늘 속 에 잠긴 죽은 눈동자가 찰나 미세하게 흔들리다 멎었다.

   “재희 양. 일단 진정하지. 강우야,재희 양 좀 달래주려 무나.”

   여군호가 격앙되어 있는 송재희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남강우는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송재 희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송재희는 순순히 딸려와 남강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에요. 정말 아니에요,난……

   남강우는 담담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 무뚝뚝한 위로 에 갈피를 못 잡던 음성이 잦아들었다. 필사적으로 억눌 러 보지만 울음소리는 새나가고 그의 셔츠는 젖어 들어갔 다-

   남강우는 제 재킷 깃을 꼭 틀어쥔 손을 일별하곤 고개 를 들었다. 박해인은 제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 끄트머리 에 앉아 있었다. 의연하려 애쓰던 것은 포기했는지 고개 를 푹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그 곁의 최명욱은 딱딱한 가 면으로 서슬 퍼런 독기를 숨기고서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다.

   “박해인 군. 한 번 더 물어보겠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 야.,,

   여군호가 움츠러든 박해인을 일깨웠다. 박해인은 흠칫 놀라며 한 박자 늦게 눈을 들었다.

   “자네는 최명욱에게 그 어떤 강요도 받지 않았고,지금 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태이며,내가 친히 자네를 그 안에서 꺼내주겠다고 하는데도 거부를 했다. 또한 최명 욱과 곧 혼인해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하고 있다고도 했 지. 내 말이 맞나.”

   박해인은 명하니 고개를 들었다. 여군호는 근엄하면서

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박해인의 불안한 눈빛을 포용했다.

   종주.

   최명욱의 집에 감시자를 보낸 남자다. 최명욱조차 고개 를 숙이고 그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남자다. 또한 제가 어 떻게든 품으려고 했던 여제운의 부친이기도 했다.

   여군호의 뒤에는 벽면 하나를 모두 덮은 병풍이 서 있 었다. 늑대 무리가 질서정연하게 우두머리를 올려다보고, 우두머리 늑대는 보름달을 보며 맹렬하게 울부짖는 그림 이 새겨진 병풍이었다. 경탄이 나올 만큼 생생하고 장엄 한 그 그림은 여군호의 배경으로 몹시도 잘 어울렸다. 그 는 그 우두머리 늑대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알맹이를 가지 고 있을 것이다.

   “맞습니다.”

   박해인은 대답했다. 여군호는 소리 없이 한숨을 흘리 며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그가 책망처럼 던지 는 눈빛은 너덜너덜해진 속을 꿰뚫는 창살이었다. 박해인 은 환상통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해인 군과 송재희 양의 진술이 완벽히 엇갈리는군.”

   여군호는 더 추궁하지 않고 이후를 논의하려고 했다. 태국영이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나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모두의 눈동자가 소실점처럼 태국영에게 모여들었다. 태국영은 대강 들어 올린 한 손을 까닥 움직여 보였다.

   “너 말이야. 등대 해인 군.”

   박해인은 저를 지목하는 말에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는 사내가 테이블에 거의 엎어져 있다시피 한 자세로 온기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 다. 그에게서는 완벽할 정도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 다. 보통은 약할수록 그 고유의 향이 옅어지는 경향이 있 지만,저 남자를 상대로는 그런 의심이 얼토당토않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나태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 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오연함은 약자가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박해인은 본능적인 공포감 에 얼었다. 그가 최경엽을 죽였다는 남자가 아닐까 의심했 다.

   “뭐,네가 그렇게 시궁창 속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말리 진 않겠는데. 네 아기가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을 아빠로 두 는 건 괜찮아?”

   박해인은 모범답안이 없었는지 조금 당황한 듯 최명욱 을 바라보았다. 최명욱은 태국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 신 입을 열었다.

   “네놈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신경 꺼.”

   “어우. 명청한게 말하는싸가지까지.”

   태국영은 조롱하듯 윙크 섞어 미소를 날렸다.

   “내 마누라 명예도 걸린 일인데 왜 관련이 없어. 지금 네놈이고 저놈이고 짝짜꿍해서 등대가 자진해서 몸 파는 것들이라고 인식을 못 심어줘서 안달인데. 너네 때문에 내 가 지금 좆같이 불쾌해. 그러니까 기어오르는 것도 눈치 봐 가면서 하지 그래.”

   태국영은 웃는 낯짝으로 상대를 깔아뭉갰다. 그러나 단 순히 깔아뭉개는 것에서만 그친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끓 어오른 살기가 파도처럼 주변을 덮쳤다. 낯짝은 평소처럼 번지르르했으나 그는 정말로 최명욱과 박해인의 광대놀음 에 적잖이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박해인과 송재희의 안 색이 대번에 새파래졌다.

   최명욱은 바들바들 떨며 매달리는 박해인 때문에 앞뒤 안 보고 쏴붙이려던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감싸 안았다. 남강우도 송재희를 챙기며 태국영에게 약과 하나를 투척했다.

   “거 힘자랑하는 건 좋은데 컨트롤은 좀 하지.”

   남강우가 핀잔했다. 태국영은 흥 콧방귀를 뀌며 흉험했 던 기세를 갈무리했다. 다시 테이블에 엎어지듯 턱을 괸 그가 곁눈으로 최명욱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주둥이 잘못 놀렸다가 대가리 터진 형 꼴을 봤으면 몸 좀 사려. 내가 너 따위 놈 머리통 하나 더 깨뜨린다고 여기 서 누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역시,저 남자였다.

   아직까지 살갗을 저미는 듯한 통증에 오들오들 떨면서 도 박해인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익숙한 체향에 얼굴을 묻은 채 조심히 눈을 움직였다.

   태국영은 흥미를 잃은 장난감 대하듯 최명욱을 외면하 고 있는 상태였다. 우아하고 예븐 손이 청옥색 찻잔의 테 두리를 의미 없이 덧그렸다. 그것을 또 의미 없이 내려다 보는 얼굴은 꿈처럼 아름다웠으나 지독하게 무료해 보였 다.

   그의 방만함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여군호는 그 냥 잠시 철없는 청년을 보듯 관대하게 넘어가는 기색이었 고,다른 이들은 매우 익숙하게 상황을 흘려보내는 중이었 다. 박해인은 그들의 반응을 미루어 이 자리에서 그가 가 장 강한 남자임을 확신했다.

   “박해인 군 본인의 뜻이 그러하다니 그에 관해서는 더 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여군호가 분위기를 환기해 다음 화제를 끼내 들었다.

   “태가주. 지난번에 애기한 증거라는 것은 가져왔겠지.”

   “아. 그야 물론.”

   태국영은 앞섶을 풀어헤쳐 놓은 재킷 주머니를 뒤적였

다. 그런데 그가 꺼내 든 것은 진동이 오기 시작한 휴대폰 이었다. 액정을 힐금 살핀 그가 ‘잠시만요.’하며 전화를 받 았다.

   “어,왜.,,

   《애기다 끝났어?〉〉

   “아직. 금방 끝나. 괜찮으니까 말해.”

   《국영아. 너 오는 길에서 나 다니던 동물원 근처 들렀 다오면 너무 멀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

   들렀다가 돌아가려면 족히 1 시간은 더 걸릴 테지만 태 국영은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이승도는 반색하며 말했다. 《거기 후문 쪽 보면 포장마차 거리 있잖아.》

   “있지.,,

   《그중에 철판요리 유명한 용구네랑 떡돌이라는 분식집 있거든. 거기 좀 들러주라.〉〉

   “응. 우리 승도 또 뭐가 먹고 싶어서 그래?”

   《용구네에서는 오돌뼈 사면 되고,떡돌이에서는 진수성 찬 세트라고 하면 알아서 이것저것 담아 줄 거야.》

   “용구네 오돌뼈랑 떡돌이네 진수성찬 세트. 알았어.”

   《고마워. 아. 올 때 유모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거 잊 지 마.》

   “알아. 미리 전화하고 바로 3층 발코니로 점프해서 갈 게.,,

   이승도가 기분 좋게 웃으며 먼저 통화를 끝냈다. 태국 영은 끊어진 휴대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나서야 손톱 만 한 마이크로 칩을 꺼내 들었다.

   “이게 내가 말한 증거라는 거예요. 여기 윤봄이가 그 뱀 같은 혀로 여제운이 찍어 넘겨보려고 속닥대는 게一”

   태국영은 미간을 좁히며 한쪽 눈썹을 꿈틀 올렸다. 제 주위로 매우 요상하고 기이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인 지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여군호만이 침착하게 저를 바라보 는 중이었다. 심지어 평소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던 송재 희는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귀신 보듯 보고 있었 다. 태국영은 픽 실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왜들 이래. 임신한 마누라 케어하는 남편 처음들 보시 나?”

   역겨워. 역겹다고.

   남강우는 모두의 뇌리를 뒤흔드는 생각을 그린 듯이 읽 었다. 그 역시 역겹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잘 길든 짐승마

냥 마누라한테 꼬리나 살랑거리는 태국영이라니,비위가 안 상하면 그건 강철 내장이었다.

   “계속하지.”

   보기 드문 강철 내장이 담담하게 턱짓하며 말했다. 여 군호였다.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을 튕겨서 손 안에 든 칩을 여군호의 비서에게 날려 보냈다. 반사적 으로 받아든 그는 여군호가 재생해 보라 지시하자 곧장 그 말을 따랐다.

   불이 끼지고 암막 커튼이 창문을 가렸다. 그리고 한 쪽 벽면에서 내려온 스크린 위로 위치가 고정된 영상이 떠올 랐다. 의심의 여지없이 깨끗하게 흐르는 영상 속에서는 윤 봄이와 여제운의 얼굴이 또렷하게 잡혀 있었다. 상을 사이 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녀의 표정까지도 선명하게 구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여군호는 그것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비록 제 기대를 저버린 못난 아들이었지만 그는 여제운의 자리가 여기에 서 더 위태로워지기를 바라진 않았다. 윤봄이는 집요하게 여제운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여제운은 시종 냉랭하게 그 유혹들을 부리쳤다. 이 정도면 누군가 뒤에서 수군거린다 해도 크게 책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최가주. 반박할 말이 있나.”

   최경엽이 죽으면서 자연스레 뒤를 이은 최명욱은 그 가 주라는 단어에 불현듯 속이 끓었다. 형에 대한 애정이 남 달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말로도 우애 좋은 형제 는 아니었다. 다만 제가 보는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피붙이의 모습이 눈앞을 스칠 때면 자다가도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격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이제야 윤봄이 의 강박적인 신경증을 조금 공감하고 있었다.

   “형수는 확실히 가족들의 죽음에 굉장히 정신적인 타격 을 받았고,늘 태국영을 원망했습니다. 복수할 거란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닌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형수 개 인의 생각이었을 분,저나 형은 괜한 싸움에 피를 자초하 지 말라고 늘 타일렀습니다. 저 날 형수는 저희에게 말도 않고 박해인을 데리고 나갔고,그걸 뒤늦게 알게 된 형은 형수를 크게 나무랐었습니다.”

   “박해인 군. 사실인가.”

   그저 절차상의 질문이었다. 묻지 않아도 그 대답을 짐 작할 수 있었다. 박해인은 최명욱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사실이건 아니건 최명욱 의 편을 들어줄 것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날 봄이 씨는 최경엽 씨 몰래 저를 데리고 나갔어요. 어디로 가는지,누굴 만나야 하는지 알

려주지도 않았고요. 제운 씨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최경 엽 씨 부부는 크게 부부싸움을 했어요.”

   “형수는 일을 크게 칠 생각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저 여제운을 이용해 태국영을 조금 괴롭히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여제운이 그 제안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형의 감시가 심해져서 형수는 한동안 거 의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습니다. 후에 박해인이 여제 운을 몇 차례 더 만나긴 했지만 그건 모두 여제운이 먼저 청한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 형수나 태국영에 관 한 이야기가 다시 출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건 여제 운 역시 증명해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제운의 확인이 필요하다면 불러 주마.”

   “전 괜찮습니다만,종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그래. 괜찮다니 생략하도록 하고,가장 중요한 걸 물 을 차례군. 윤봄이 양은 왜 같이 오지 않았지?”

   내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최명욱이 처음으 로 멈칫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속으로 혀를 쯧 차고는 고 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찾 도록 하겠습니다.”

   “곤란하군. 저 영상 속 일은 분명 실재했던 것이다. 윤 봄이 양이 뒤늦게 그 마음을 접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 르는 일이지. 그녀는 의당 이 자리에 왔어야 했고,너는 그 녀를 반드시 데려왔어야만 했어. 안일한 생각으로 그녀와 관련된 모든 일을 무마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닙니다,종주님. 저도 지금 백방으로 가솔들을 풀어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데려와 종 주님 앞에 세우겠습니다.”

   “대상이 잘못되었군. 그녀가 서야 할 곳은 내 앞이 아니 라 태가주 앞이다.”

   최명욱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여군호는 눈 하 나 깜박 않고 그의 눈빛을 튕겨냈다.

   “태국영은 그녀를 추궁할 자격이 있다. 이의 있는가.”

   아주 원론적인 문제였다. 자신의 영역,자신의 가족,그 것을 위협당한 자는 마땅히 그 상대를 재량껏 심판할 자격 이 있었다. 윤봄이가 여제운을 만나 이승도를 언급하며 복 수를 운운했을 때,이미 그녀는 태국영의 발톱 사이에 끼 인 것이나 다름없다.

   “맞는 말씀입니다.”

   최명욱은 도리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 틀어진 패배감에 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여군호는 속으

로 혀를 차며 곧바로 다음 문제를 짚었다.

   “다음으로는 죽은 이광운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야 할 때군. 자의였건 타의였건 송재희는 애초 최명욱이 데리고 있던 여자가 맞았고,김정구는 현재도 실종상태에 있으니 그에게 진위여부를 물을 수가 없는 상태다. 상황이 이러하 니 이가주가 남강우를 의심해도 무리는 아니지. 이가주,

네 의견은 어떤가.”

   이제껏 한마디 없이 고요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이원표 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에 관해서라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제 가솔들과 많은 논의 끝에 이 사건을 덮기로 했습 니다.,,

   뜻밖의 선언에 여군호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덮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번 모임이 끝난 직후 남강우를 찾아가 직접 대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남 강우에게 광운이가 죽임을 당한 날 무엇을 했냐고 물었습 니다. 날짜를 정확히 짚어 알려주자 남강우는 기뻐했습니 다. 그는 그날 마침 신영애 양이 주최하는 파티에 가 있었 다며 확실하게 혐의를 벗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신영애 양과 당시 함께 파티장에 있었던 이들 이십

여 명이 모두 남강우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파 티는 저녁 여덟 시부터 열두 시까지 열렸고,남강우는 자 리를 비우지 않고 내내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광운이가 최경엽의 별장에 도착한 것은 아홉 시,제가 살해 현장을 발견한 것이 열한시쯤입니다. 그러니 남강우는 그 현장 에 없었다는 게 명확하게 증명이 됩니다.”

   “그래. 깔끔하게 오해가 풀렸다니 축하할 일이군. 헌데 아예 덮겠다는 건,김정구가 나타나도 추궁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저는 애초에 광운이를 죽인 자에게 많은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광운이는 아주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다 그 현장에서 살해당한 처지이니까요. 그저 슬픔에 잠긴 광운이의 부모에게 위로금과 사과의 말을 전 하는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습니다. 비록 아직 김정구 의 짓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김가주는 광운이의 부모 를 직접 찾아가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밖에 내놓 기 부끄러운 아들들을 둔 두 부모가 서로를 위로하는 차원 에서 이야기를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원표는 냉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마쳤다. 가만 히 듣고 있던 여군호가 확인하듯 김정구의 부친을 바라보 았다. 남자는 깊이 고개만 숙여 무언으로 긍정의 뜻을 전

   “이광운의 부모도 그 사건을 봉합하는 데에 동의했나.”

   “그렇습니다. 살해범을 찾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기 는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모두 앙금이 남지 않은 상태라니 나도 더 묻지는 않겠다.,,

   여군호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심 조금 놀랐 다. 태국영이 제 예상보다 더 모사에 재주가 있다는 걸 확 인했기 때문이었다. 남강우,이원표,최명욱,송재호I,김 정구,이광운,이들을 엮는 수많은 관계도 사이를 완벽하 게 틀고 엮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

   “자. 그럼 논란이 되었던 일들은 일차적으로 다 마무리 가된 것같은데.”

   여군호가 이쯤에서 회의를 마무리를 하려고 했을 때였 다. 태국영이 할 말 있다며 한 손을 슥 들어 올렸다. 눈썹 끝을 조금 들어 올린 여군호는 고갯짓으로 허락했다.

   “나 종주님 인장 빌려서 각 가문에 공문 하나만 보내주 세요.”

   “공문? 무슨 내용으로?”

   “내가 우리 승도 꽁꽁 감추느라 이제껏 말 못 한 게 있 는데,슈퍼문에 반사 작용이 있거든요. 뭐,지금 와서 별

거는 아니지만 일단 밝혀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반사 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 자리에서 먼저 설명을 해 주는 편이 좋겠군.”

   사전에 합의된 바는 없었으나 여군호는 태국영이 유리 한 입장을 선점할 기회를 주었다. 마침 가주들이 다 모인 자리이니 먼저 그들을 설득시킨다면 그간 비밀로 해 왔던 것도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태국영은 스치듯 의미심장한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슈퍼문은 등대 없이 일족들을 살게 하지만,반대로 등 대와 접촉하면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을 느끼게 됩니다. 개 인차는 있는데 적게는 그냥 불쾌감 정도이고 크게는 오심 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네요.”

   “그 외로 신체능력에 지장을 주는 면은 없나.”

   “전혀요.”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므로 여군호는 거듭 확실하 나 물었고,태국영은 심드렁하게 턱을 긁었다.

   “정 궁금하면 약 끊고 실험해 보시면 되잖아요. 자기 몸 상태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게 이쪽 바닥 놈들인데 내가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게 무슨 소용이람.”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남강우가 끼어들었다.

   “저는 재희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슈퍼문을 끊은 상태 였습니다. 그냥 기일 맞춰 접종하는 것도 귀찮고,순리대 로 살아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요. 결론부터 말 하자면,접종 후 부작용이 아니라 접종 거부에서 오는 부 작용만 지긋지긋하게 겪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몸으 로 체험해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는데 그다지 추천해 드 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군요.”

   남강우의 지원사격에 태국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슈퍼문은 지금 국내보다 해외가 주 시장입니 다. 물 건너서도 등대 기근이 심화되고 있는 추세라 해마 다 수출량이 늘고 있는데다가 단가도 국내가의 1.5배 정 도로 더 비싸거든요. 개들 사이에서는 이미 슈퍼문의 반 사 작용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 까지 그 문제로 항의를 받거나 판매 금지 요청을 받은 적 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차피 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 신을 품어줄 등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니까,굳이 그런 것에 연연할 까닭이 없는 거죠. 뭐,정히 찝찝하시면 각자 알아서 불매하시면 될 일이고.”

   싫으면 사지 마,태국영은 슈퍼 갑질 같은 소리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을 따져 물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괜

히 들쑤셔 봐야 긁어 부스럼이었다. 태국영이라면 ‘오늘부 터 당장 안 팔게. 됐나?’하고도 남을 남자였고,유감스럽 게도 월하에 고통받을 것은 그가 아니었다.

   여군호가 마무리를 지었다.

   “이 문제는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게 좋겠군. 태가주 가 직접 공문을 써서 내게 보내면 내가 그것을 검토한 뒤 에 정식으로 각 가문에 보내도록 하지.”

   반대는 없었다. 여군호는 해산을 선언했다. 태국영은 다도실을 나가는 도중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홍콩면 발의 콩국수인지 칼국수인지가 그의 음식 셔틀 목록에 추 가되었다. 그 꼴을 끝까지 볼 수가 없었던 이들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여군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홍재는 일부러 먼 길을 택했다. 속력도 급작스레 올 렸다가 줄였다가를 반복했다. 희한한 곡예운전을 하는 그 를 향해 온 사방에서 경적이 날아들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 의치 않았다. 오로지 룸미러와사이드미러를 집요하게 번 갈아 주시할 분이었다.

   한참을 달려 그가 마침내 당도한 곳은 대규모 아파트단

지의 신축공사장이었다. 여홍재는 도롯가에 정차한 채 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부들이 모두 떠난 공사장은 정 적만이 그득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가림막 이 을씨년스럽게 펄럭거렸다.

   여홍재는 한참 뒤에야 차에서 내려 훌쩍 펜스를 뛰어넘 었다. 아직 반절도 올리지 못한 철골 뼈대가 둔탁한 빛으 로 그를 반겼다. 어둠 속에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늦었군.”

   여홍재는 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남자는 뻥 뚫린 2층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미행은 확실히 확인했나?”

   대뜸 묻는 말에도 남자는 담담하게 그렇다 대답했다. 남자가 까닥 고갯짓을 했고,여홍재는 그제야 그의 대각 선 뒤편에 다가가 섰다.

   “최명욱이 박해인을 아주 잘 구워삶았더군.”

   남자가 안부 인사를 건너뛰고 자연스레 운을 뗐다. 여 홍재 역시 남자와 잡담으로 정을 다질 생각은 없었기에 곧 장 대답을 주었다.

   “명청한 놈 둘이서 죽이 잘 맞으니 우리로선 좋은 일 아 닌가.”

   “물론 소모품은 명청할수록 좋지 J

   “태국영의 반응은?”

   “그 낯짝 속을 들여다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어쨌건 박해인이 최명욱 편을 들어줌으로써 그는 잠시 주춤할 수 밖에 없다. 뒤로 손을 쓰더라도 시간의 텀은 반드시 두어 야 할 거야. 최명욱이 그 사이에 제 몫을 제대로 할 수 있 을까가문제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단순한 놈을 자극하는 방 법이야 아주 무궁무진하니까.”

   황량한 어둠 안을 의미 없이 파헤치고 있던 남자의 눈 이 얼핏 뒤를 향했다. 남자의 온기 없는 옆얼굴은 먼지가 떠다니는 음침한 달빛 속에서도 배어난 선을 자랑했다. 표 정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궁금해하는 기색이 조금 엿보였 다. 여홍재는 선심 쓰듯 부연했다.

   “이미 놈은 최경엽의 일로 태국영에게 원한을 가졌지. 태국영을 더 증오할 수 있는 장작이라면 뭐든 덥석덥석 물 어서 더 타오르게 될 거야.”

   “최명욱은 지나치게 다혈질이다. 어떤 돌발행동을 할 지 예측이 되지 않아. 너무 얕보지 말고 신중하게 접근했 으면 좋겠군.”

   “겁나나 보지?”

   여홍재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남자는 여전히 가면

같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바로 해 정면을 응시했다.

   “가문의 명운을 걸고 발을 들인 일이다. 이 상황에서 대 범함만 봄내는 것은 어리석은 허세에 불과해.”

   여홍재는 순식간에 저를 허세 덩어리로 몰아붙인 그에 게 조금 울컥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괜한 다툼을 벌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화를 내리눌렀다.

   “뭐,좋아. 각자 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 그렇다고 치자 고. 너는 가문의 명예와 네 가솔들의 상처를 다독이고,나 는 정적(政敵)을 제거한다. 각자 실리만 챙기면 될 일이 지.,,

   남자의 뒷머리가 미동했다. 여홍재는 남자가 설마 자신 을 비웃고 있는 것인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 그러 나 금세 과민반응일 거라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 외에 회의에서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

   “태국영이 슈퍼문의 부작용을 밝히더군.”

   “부작용?”

   “슈퍼문을 접종하면 등대와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일으 키게 된다는 내용이다. 곧 종주님 승인하에 공문이 날아 갈 테니 자세한 것은 그것을 보면 될 거야. 그 외에 특별 한 것은 없었다.”

   남자의 전언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작별인사도 없

이 훌쩍 지상으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여홍재는 남자의 무 례함이 적잖이 불쾌해 미간을 구겼다.

   한 배를 탔다고 해서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착각하는 꼬락서니라니.

   여홍재는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알려진 이원표의 덕망 을 자체적으로 수정해서 뇌리에 입력했다. 그의 신중함은 그저 겁 많은 그의 성향이 와전된 것이고,그의 현명함의 실체는 숟가락 얹을 자리를 잘 보는 교활함에 불과했다.

   일족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역시나 믿을 것이 못 되었 다. 여홍재는 늘 그랬듯 자신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 않은 채로 먼지 바람 이는 공사장을 떠났다.

   남자는 매우 불편하고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거구의 스 킨헤드가 즐거운 듯 말을 이어감에 따라 그 매캐한 감정 은 더 짙어져 갔다.

   〔그 계집 아주 물건이야,로비. 어찌나 독한지 신음 한 번 내뱉은 적이 없어. 이러다 진짜 완벽한 작품을 볼 수 있

을지도 몰라.〕 〔…좋나.〕

   〔당연히 좋지! 너한테 키스를 백만 번쯤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좋다고!〕

   〔꺼져. 더러워서 그 키스 안 받아.〕

   남자,로비는 떨떠름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여자 는 생각 외로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마음 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잔인한 과정을 낱낱이 본 여자가 망설이지도 않고 몸을 던질 줄 알았더라면 애초 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어때,보고 갈래?〕

   〔됐어. 보면 토할 거야.〕

   딱 잘라 거절했던 로비는 막 문까지 걸어갔다가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결의를 다진 눈으로 돌아서서 말했 다.

   〔아니,보자.〕

   봐야겠다. 제가 빌미를 제공했으니 그냥 도망치는 건 원가 남자답지 않은 것 같았다. 스킨헤드는 실실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로비는 그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자마자 피비린내가 울컥 폐부를 채우며 성대 를 긁는 비명들이 귓전에 날아들었다. 절로 미간이 찡그려 졌다. 로비는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스킨헤드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쭉 이어지는 광

실에서 이제 갓 성년을 넘긴 녀석들이 지옥을 헤매고 있었 다. 스킨헤드가 다 쓰러져가는 가문에서 돈을 주고 사 온 녀석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가학은 역시나 불쾌함만 가져 왔다.

   〔여기야.〕

   스킨헤드가 샐쭉 웃으며 가장 끝 방의 문을 열었다. 링 거를 덕지덕지 꽂은 여자는 무쇠로 만든 쇠말뚝을 심장에 박은 채 붙박이 철제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사지가 고정되어 음부마저 훤히 드러나 있었으 나 그녀도 자신도 수치나 음욕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배설물 냄새와 온갖 비린내가 섞여 악취가 어마어마했 다. 로비는 새삼 충격을 받아 숨을 멈추었다. 한 걸음 안으 로 내딛는 순간 진득한 핏물이 신발 밑창에 엉겨 붙었다. 여자의 꿰뚫린 심장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였다.

   한 번 터뜨리고 끝날 생애를 위해 이 모진 고통을 감수 하는 이유가 뭘까.

   살수를 만드는 것은 심장을 꿰뚫어 놓는 것으로 시작된 다. 한 개체의 고유 체취와 체온,재생력 등의 근간이 되 는 심장을 퇴화시키는 단계였다. 단기간에 끊임없이 치명 상을 가해서 재생을 반복하도록 유도를 하다 보면 재생력 이 급속도로 저하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이때 체온이

나 체취,재생력도 함께 밑바닥을 향해 추락하게 되어 있 었다.

   보통은 이 단계가 길어지면 실험대상은 거의 쇼크사로 사망한다. 그래서 본디 타고난 신체가 약할수록 유리한 것 이었다.

   쇠말뚝을 제거하는 타이밍도 매우 중요했다. 재생력이 완전히 밑바닥 치기 직전에 곧장 제거해 주어야 파열부위 가 아물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출혈 과다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태어난 살수는 재생력을 완전히 상실한 대가로 완벽한 은폐가 가능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이기에 그 둘 다의 냄새도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타고난 근력은 이전과 같이 남아 있으니 일회용 살수로 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최악이야.〕

   로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스킨헤드는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로비는 다가가 여자를 내려다보았 다. 쉴 새 없이 투입되는 마약성 진통제로 인해 여자의 눈 에는 초점이 없었다.

   묽어진 눈동자는 긴 시간 허공을 헤맨 끝에 로비에게 고정되었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로비

는 돌아섰다.

   〔정말 최악이야.〕

   여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로비에게 이런 광경은 그저 역 하기만 할 분이었다. 스킨헤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 라 나와 광실 문을 잠갔다. 로비는 그대로 지상으로 올라 가 작별인사도 없이 그곳을 떠났다.

   一이 정도 지옥은,아무것도 아니야.

   여자가 무성으로 내뱉은 말이,오래도록 벌레처럼 뇌리 를 기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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