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둑한 하늘에서 낙뢰가 번쩍였다. 곧이어 육중한 먹구 름이 몸을 부대끼며 맹수처럼 그르렁거렸다. 빗줄기는 세 찼다. 장마전선이 뒤덮은 대지는 송곳 같은 장대비로 몸살 을 앓고 있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연일 쏟아져 내렸다. 정전과 침수 사 고도 잇따랐다. 비와 함께 돌풍까지 몰아치는 터라 우산 을 아무리 큰 걸 써도 옷가지를 사수하기 힘겨울 정도였 다. 사흘 내내 쏟아진 장맛비는 극심했던 불볕더위를 한 층 가라앉혔으나 높은 습도로 인해 불쾌지수는 정점을 찍 었다.
궂은 날씨임에도 이승도는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우산 에 우비까지 갖춰 입고 느긋한 걸음으로 순찰을 했다. 우 산이 뚫릴 듯한 빗방울의 폭격으로 인해 동물원은 텅텅 비 어 있었다. 관람객은 씨가 말랐고 동물들도 거의 비를 피 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한산한 실외를 한 번 둘러본 뒤 인공포육실에 들러 아
이들 건강상태를 살펐다. 백설이와 태산이를 비롯한 아기 동물들은 사육사들이 얼마나 잘 먹이는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대부분 볼록한 배를 작게 들썩이며 꿀 같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늘 저를 열렬히 반겨주는 아기 호랑이들과 잠깐 놀아주 고 나서 초식 동물사를 돌아볼 때였다. 이승도는 토끼장에 서 발을 멈추고 유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금실 좋은 라 이언헤드 부부의 새끼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승도는 곧장 담당 사육사를 찾아갔다.
“어머,선생님. 저는 왜 찾으셨어요? 뭐 문제 있나요?”
이직한 지 얼마 안 되어 조금 낯선 얼굴의 젊은 아가씨 였다. 통통하고 혈색 좋은 뺨이 꽤나 애교 있어 보이는 인 상이었다. 붙임성 좋게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가볍게 눈가 를 접으며 물었다.
“알콩이랑 달콩이 부부네 새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서요. 어디 따로 두셨나요?”
“…아.”
다정다감한 성격에 곱기까지 한 젊은 수의사 앞에서 은 근히 뺨을 붉히고 있던 사육사의 낯빛이 순식간에 가라앉 았다. 그녀는 눈치 보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 로 털어놓았다.
“오늘 오전에 보니 다 죽었더라고요……
“다섯 마리 전부 다요?”
사육사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도는 안타깝게 얼굴을 흐렸다. 토끼의 가장 큰 적은 습기였다. 장마철만 되면 이렇게 심심찮게 죽어나가는 게 이상한 일 은 아니지만,무지개다리 건넌 아이들의 소식은 늘 마음 이 아팠다.
“어쩐지 다 큰 토끼들 상태도 안 좋던데,검사부터 해 봐야 알겠지만 전염병일 가능성이 크니까 애들 일단 격리 좀 부탁드릴게요. 한동안 습한 먹이는 절대 주시면 안 되 고요. 검사 후에 다시 올게요.”
사육사는 꾸벅 인사해 보였고 이승도는 토끼들의 피를 봅고 배설물도 가져와 진단실에서 검사를 해 보았다. 예상 대로 배설물 안에는 콕시듐(소,돼지,양,토끼,닭 등의 장에 기생하여 출혈성 설사,빈혈,영양 장애를 일으킴.) 균이 가득했다. 구충제를 처방하고 건강한 아이들은 그 안 에서 또 한 번 격리해 두었다.
“선생님! 혹시 이따 오세요?”
사육사실에 들러 다른 쪽은 문제가 없는지 애기를 나 눈 다음 돌아가려던 때였다. 뒤를 돌아보며 ‘어딜요?’하 고 묻자 여자 사육사들이 상기된 얼굴로 우르르 몰려왔다.
“아,모르셨구나. 오늘 저희 회식해요. 같이 가요,네?”
“매번 말씀드려도 한 번을 안 오시고. 너무 섭섭해요.”
“맞아요. 유부남도 아니고 선생님 내일 휴무인 거 빤히 아는데 왜 그렇게 배요. 방은 달라도 한솥밥 먹는 식군데 단합도 하고 그래야죠.”
그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양팔에 매달려 왔다. 도망치지 도 못하게 어찌나 강하게 붙드는지 마치 연행되는 범죄자 가 된 기분이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투정에 정신을 차 릴 수가 없었다. 이승도는 곤란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요새 집에서 돌보고 있는 아이가 있어서 좀 곤란한
“두 시간만! 딱 두 시간!”
“그래요. 일차로 삼겹살에 소주,이차는 비 오니까 부침 개에 막걸리!”
이승도는 진땀을 배며 쩔쩔맸다. 그때 태산이 덕분에 조금 친해진 맹수 사육사까지 나직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 었다.
“이 선생님 인기 좋네요. 그러지 말고 한 번 같이 가세
요.,,
여은태를 집에 들여 키우게 된 뒤로,퇴근 후 회식은커
녕 따로 밥 한 번 같이 먹어본 적 없었다. 벌써 그렇게 반 년 가까이 되어 가니 이승도 역시 내심 그들이 저를 어려 워한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참이긴 했다.
사육사들이 동물들의 아침 사료를 손질하고 있을 시간 에 가보면,가끔 숙취에 젖은 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 다. 피로로 거뭇하게 눈 밑이 죽어 있는 서로를 보며 웃기 도 하고,숙취해소 음료를 정답게 나누기도 하고,힘들다 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들이 특별히 저를 외면하거나 따돌리는 것도 아니었 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 었다. 섣불리 말을 걸기가 어색해 쭈뼛거리다가 그냥 돌아 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 오늘은 보름도 아니고,조금 늦게 들어가도 내일 은 휴무니까 괜찮겠지.
“저,오래는 안 되지만 그럼 잠깐이라도 참석할게요. 정 말 오래는 안 되고요,제가 술을 잘 못 하니까 이해해 주시 면.,,
“당연하죠!”
까아,아가씨들이 기붐의 함성을 지르며 서로 하이파이 브를 했다. 맹수 사육사가 이따 보자고 어깨를 툭 두드렸 다. 이승도는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진료실로 돌아
갔다. 휴대폰부터 찾아 들어 태국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일까. 우리 승도가 근무하다 말고 전화를 다 하 고.》
“나 오늘 회식 있어. 넉넉히 세 시간이면 될 거야. 은태 혼자 두지 말고 이경이랑 놀고 있게 이경이 데리고 먼저 집에 가 있어. 애들 밥 잘 챙겨주고. 씻기는 건 하루 안 해 도 되니까 그냥 둬도 돼.”
다짜고짜 용건을 말하니 태국영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나 왠지 워킹맘 아내 둔 백수 남편 된 기분인데? 늦게 들어온다는 말을 하려면 애교 좀 부리고 그래야 되지 않 아?》
“너 백수 맞잖아. 뭘 억울하다는 듯이 그래.”
《서방님이 백수라 싫어? 멋진 슈트 입는 직장인 되면 좀 더 상냥하게 대해 줄 거야?》
슬슬 말꼬리를 잡는 것이 원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 한 것 같았다. 이승도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정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요새 직장동료들이랑 너무 안 어울렸더니 서먹서먹해 져서 이번엔 빠지기가 좀 그래 술도 조금 마실 것 같으니 까이해해 주고. 부탁할게.”
나긋나긋하게 나가니 태국영의 따가운 기세도 조금 수
그러들었다.
《그래. 육아 분담해 줄 테니 대신 나도 상 줘.》
“응. 알았어.”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어차피 비밀이라고 잡아뗄 거잖아,너.,,
그건 그래,그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꼬맹이들 밥만 챙겨주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우리 마나님 술 마신다는데 직접 싣고 와야 안심이 되 지. 행선지 보고 확실히 해.》
“네가 직접?”
《백수 남편 뒀다 뭐에 써먹게. 밤일도 안 시켜주니 운전 기사 노릇이라도 충실히 해야지.〉〉
가드로도 모자라 직접 마중까지…….
문득 심장 박동이 불길하게 속도를 올렸다. 대답 없이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긴 태국영이 먼저 ‘왜 그래.’하고 물었다. 이승도는 공연히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시간을 끌다 입을 열었다.
“저기,국영아.”
《응.》
“혹시 나…… 요새 좀 위험해?”
《위험하다고 하면 내 집에 현모양처처럼 들어앉아 줄 생각 있어?》
“장난치지 말고.”
이승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태국영 이 소리 없이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뭘 새삼스레 걱정하고 그래. 서방님 눈에 우리 승도는 항상 연못가에 내놓은 아기 같았는데.》
평소처럼 농담 섞어 하는 이야기가 어쩐지 가볍게 들리 지 않았다. 불안감은 한층 짙어졌다. 태국영은 여제운과 그 사진 속 남자 중 누구를 더 의식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섣불리 묻지는 못했다. 어떤 이름이 나와도 이미 어지럽게 흐려진 머리를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 을 것 같았다.
“국영아.”
《응.》
이승도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휴대폰 쥔 손에 꽉 힘 을 주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는 열 오르는 기기와 달리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지켜줄 거지?”
태국영이 사는 세계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혹한 곳인 지,이승도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들의 탐욕은 때론 천륜
을 어기는 것마저 당연시할 정도였다. 태국영의 부모가 특 별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저를 상대로 간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다면,제 생애는 언제든 비참해질 수 있었다.
《부끄럽게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래.》
태국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기묘하게도 모든 불안이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제가 마지 막의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태국영 분이었다. 단 순히 그가 강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암컷인데 물론 내가 지켜 드려야지.
>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저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잠시 가늘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굵어 졌다. 우르르 몰려온 사육사들과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바 지는 무릎까지 젖었고 상의도 온전치 못했다. 다섯 명씩 나눠서 차에 탄 뒤 동물원에서 가까운 숯불 고깃집으로 이
동했다.
이승도는 어쪄다 보니 네 명의 여자 사육사들과 한 차 에 타게 되었다. 탑승 인원을 나누는 데에 제 의견은 조금 도 반영되지 못했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미리 짜 놓은 마냥 휩쓸려가고 있었다.
제가 운전을 하겠다고 나서 봤으나 청일점은 공주님처 럼 모시는 게 정석이라며 뒷좌석으로 밀쳐졌다. 그것도 뒷 좌석 중앙이라 양옆에 아가씨들이 앉아,이승도는 이동 내 내 계속 진땀이 나 곤란했다.
아가씨들의 수다 폭풍에 압사될 위기에 처했을 때쯤, 다행히도 차는 주차장에 진입했다. 뒤이어 도착한 동료들 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북적북적했다. 등받이도 없는 스 툴 식 의자에 둥그런 양철 테이블이 질서 없이 놓여 있어 다소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은 목청 높 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고,환풍 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건지 연기가 제대로 빠지지 않아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 다. 이승도는 정갈한 분위기를 좋아하긴 했지만,이렇게 사람 냄새 짙은 곳도 끼리는 편은 아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 여러 개를 붙이고 자리를 잡았다. 이승도는 이때에도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가씨
들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다.
숯불이 채워지고 고기가 불판에 놓였을 때 이미 다들 소주부터 깐 상태였다. 빈속에 한잔씩 털어 넣고 시작하 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의 행태가 낯설지는 않았다.
고기가 익기도 전에 순식간에 빈 술병들이 늘어갔다. 밑반찬으로 나온 달걀말이와 묵무침,당근과 오이 등이 그 들의 안주였다. 그들의 페이스를 맞추려 들었다가는 고주 망태가 되기까지 순식간이라 알아서 몸을 사렸다.
이승도는 술을 잘 못 했다. 보통 주량은 소주 반병 정 도,맥주는 500cc로 두 잔이면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 왔다. 그래서 남들이 세 잔 비울 때 겨우 한 잔을 홀짝이 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주량을 훌쩍 초과했다. 고깃집 을 나올 때 이미 조금 취한 상태였다.
“쌤. 오늘 회비 사만 원 주세요. 남건 모자라건 이차에 가서 정산할 거예요.”
“네.”
이승도는 냉큼 지갑을 꺼내 지폐 네 장을 끼내 내밀었 다. 그러자 회계를 맡은 아가씨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
“우리 쌤 좀 봐! 오만 원짜리 네 장 준다!”
“어찜. 고작 그거 마시고 취했어요?”
“쌤 지갑 되게 방방하네요. 누가 보면 재벌인 줄 알겠어
요.,,
다들 왁자하게 웃는 가운데 이승도만 얼굴을 붉혔다. 회계 아가씨가 돌려주는 지폐를 받아 넣고 만 원짜리를 찾 아봤지만,도리어 다른 칸에도 또 수표가 한가득이었다.
국영이가 또 채워놨구나.
흔한 일이었다. 이승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 만원 권 한장을회계에게 건넸다.
“거스름돈 안 주셔도 돼요. 어차피 중간에 일어날 거라 죄송하니까 그냥 회식비에 보태세요.”
그녀는 사양하지 않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동물원에 서 회식비가 따로 나오지 않아 늘 갹출로 충당하니 이런 선심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도보로 장소를 이동하던 도중,이승도는 문득 자극적 인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따라오는 그림자는 묘하 게도 형체가 불분명했다. 그것을 가늠해 보기에는 시야가 너무 흐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는 우산을 뚫을 듯 강렬했고,가로등 불빛마저 흐리게 한 꺼풀을 덮은 듯했 다.
낯설게 느껴지는 냄새는 둘 중 하나. 경호원이 바뀌었 거나 근방에 모르는 이가 있어서였다.
오늘만큼은 어쩐지 바람 한 점 없는 날의 호수면처럼 마음이 차분했다. 행선지 보고 착실히 하고 있으니 마음 을 졸이지 않아도 되었다.
이승도는 왁자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료들 틈에 섞여 막 걸리 집에 도착했다. 은은한 연등이 매달린 입구를 열고 들어가자 반죽을 기름에 지지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 다-
이곳 역시 정갈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자리는 훨씬 편 해 보였다. 테이블 식이 아닌 좌식 단체석에 들어가 앉았 다. 일행은 익숙하게 전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배가 불러 안주에는 더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이승도 는 톡 쏘는 막걸리를 몇 모금 마신 뒤 손목시계를 한번 보 고 태국영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 한삼십 분 뒤에 일어날 거야. 어디에 있어?』
답장은 금방 왔다.
『네가 돌아보면 보이는 곳에.』
이승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둘러볼 것도 없었 다. 단번에 시선이 그에게로 발려 들어갔다. 그 순간 미묘 하게 바뀐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태국영은 뻥 뚫린 단체석 밖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앉아 있었다. 조도 낮은 조명이 그의 주변을 광명처럼 밝
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볍게 윙크하며 관능적인 입술 을 느슨하게 휘었다.
이승도는 새삼 그의 미모가 가지는 파워를 깨달았다. 튼튼해 보이지 않는 테이블과 낙서가 가득한 벽,가죽이 뜯어진 으I자,그런 허름한 배경마저 마치 화보를 찍기 위 한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심장을 폭행당한 이승도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스 스로가 태국영의 휘어진 입술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 다는 걸 무섭도록 자각하고 있었다. 태국영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새발간 혀가 슬쩍 나와 시선 붙박인 입술을 가 볍게 훔치고 사라졌다.
이승도는 그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고 홱 고개를 바로 했다. 난타라도 당한 듯 심장 고동이 속도를 울렸다. 태국 영의 매혹적인 자태에 홀린 나머지,이승도는 그의 맞은 편 대각선에 앉은 낯선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의처증이나.”
남자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태국영은 뒷머리가 살 짝 덮고 있는 이승도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소주
병을 들었다. 막걸리 집에 와서 굳이 폭탄주를 말아 먹는 괴상한 취향의 남자에게 기꺼이 술을 따라주며 대꾸했다.
“가끔 너 같은 놈들이 기웃거리니까 방심할 수가 있어 야지.”
우리 승도 젖었네.
태국영은 이승도의 뒷모습을 찬찬히 쓸어보며 생각했 다. 흐리게 농몽한 기운을 띠던 눈은 취기가 가득했으나 이 순간에도 앉은 자세는 참 반듯했다. 사실은 그래서
??…■.
야하잖아.
태국영은 콧등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한여름에도 긴팔 만 고수하는 이승도의 셔츠는 군데군데 빗물에 젖어 있었 다. 러닝셔츠를 받쳐 입은 몸통은 괜찮았으나 어깨와 팔 은 젖은 옷감이 눌어붙어 속살이 훤히 비쳤다.
뱃가죽이 당겼다. 성적 흥분이 수위를 넘으면 이승도 의 구명은 저렇게 미끌미끌하게 변해 핑크빛 속살을 빠끔 거렸다. 온몸이 젖은 이승도는 온몸으로 흥분해서 저를 유 혹하는 듯했다.
태국영은 막걸리용 양은 잔에 소주를 부어 느리게 마셨 다. 싸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에 흘러드니 곧장 몸에 서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뜨거운 발열이 가슴을 채우고 이
내 단전까지 불을 지펐다. 심근이 달아오르는 건 알코올 을 해독하느라 그런 거고,꽉 조여진 아랫배를 달구는 것 은 아마도 다른 이유 같았다.
“우리 승도 뒤는 왜 밟았어? 나 변명 들을 자격 있는 것 같은데.”
태국영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찍어 턱을 괸 채,시선은 여전히 이승도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 는 소주와 막걸리를 섞은 술을 단번에 비웠다. 가벼운 양 은 잔이 테이블 위에 텅,소리와 함께 내려앉았다.
“궁금해서.”
남자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굳이 변명하려는 기색 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태국영은 이승도에게서 거둬낸 시 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성의가 부족한데? 내 애인 뒤꽁무니 쫓아다닌 새끼 좋 게 봐줄 정도로 내가 너그러운 놈으로 보였나?”
“글쎄. 딱히 그것밖에 설명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라.”
“뭐가 그렇게 당당해?”
“숨기는 것 없는 자의 여유랄까.”
남자는 짧게 깎은 머리를 느긋하게 쓸어 넘기며 대꾸했 다. 태국영은 픽 웃으며 두 개의 빈 술잔을 소주로 채웠다. “그럼 스무고개 해야겠네. 뒤만 밟을 거였어?”
“기회가 된다면 만져볼 생각은 있었다.”
태국영의 손아귀에서 양은 잔이 살짝 구겨졌다. 가득 채운 술이 넘쳐 그의 손과 테이블을 적셨다.
“나 불쾌해. 우리 승도 몸에 손댈 수 있는 건 나분이야.
“성적인 의도를 말한 건 아니야. 말 그대로,닿아 보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 ■월?,,
“내가 그 접촉을 잊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남자,남강우는 구질구질한 것들을 구태여 덧붙이지 않 았다. 태국영의 입술이 감정적 동요 없이 완만하게 휘었 다. 묘하게 외설적인 감응을 일으키는 입술은 피를 머금 은듯 붉었다.
“뭐야. 짝사랑하는 소년 같은 느낌이네.”
“일방적인 호기심을 짝사랑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
남강우는 모호한 대답과 함께 혀를 찼다. 무의식중에 이따금씩 파고들어오는 송곳 같은 기억이 문제였다. 그 날 카로운 끝이,놀랍게도 제 철옹성 같은 장벽을 자꾸만 홈 집 냈다.
그 순간들을 무감하게 응시하고 싶었다. 가치 없는 것
을 일별하듯 하천에 쉽게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무의 식은 의지를 번번이 배신했다. 자신을 배신하는 주체가 타 인이 아닌 본인일 때,그 기분은 참으로 엿 같았다.
“좀 됐지? 우리 승도 곁을 멤돈 지.”
“한 이주 됐나. 횟수로는 다섯 번인 것 같고.”
“그 와중에 한 번 줄이는 거 봐. 여섯 번인데.”
딱히 간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일이 세지 않았던 것분이었다. 태국영도 꿍꿍이를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 다.
“알면서 왜 묻지?”
“내가 지금 알다가도 모를 투견 속내를 좀 해부 중이라. 이것저것 찔러 보고 있는 중이야. 남의 애인 스토킹하다 가 현행범으로 잡혔으니 네가 감수해.”
태국영은 오만하게 통보했다. 이미 이승도의 뒤를 밟으 며 틈을 엿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게 발각되리라고 예 상은 하고 있었다. 출퇴근길을 꼬박꼬박 배웅하고 픽업하 는 태국영의 의외로운 정성을 발견하곤 차라리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도 같았다.
“좋아. 뭐든 대답해 주지.”
어쩌면 저조차 해부하기 힘든 제 내심을 태국영이 예리 하게 들쑤셔 줄지도 몰랐다. 그거야말로 제겐 기꺼운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우리 승도 쫓아다니다 기어이 만져보
고,결국 이유도 알게 되면 그 다음은 어쩔 셈이었어?”
“그건 솔직히,잘 모르겠군. 처음부터 원가 거창한 계획 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다만 석연찮게 갉작거리는 걸 그 대로 놔두고 싶지는 않았을 분이야.”
남강우는 솔직히 대답하며 다시 잔을 비웠다. 태국영 은 그새 또 빈 술병을 짐짓 놀란 표정으로 보며 한 손을 번 쩍 들었다. ‘여기 술!’하고 외쳤으나 영양가 없는 시선들 만 모았다.
왜 소식이 없냐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다시금 뒤돌아 본 이승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국영은 눈웃음을 치며 손 을 흔들었고 이승도는 괜히 당황한 낯으로 팩 고개를 돌렸 다-
이번에도 남강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그에게 동료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쌤! 저분 쌤 친구 아니에 요?’ ‘세상에,언제 왔었어요? 왜 온 거예요? 쌤 데리러 왔어요?’ ‘이리 오라고 하세요. 같이 마셔요!’ 시끄럽게 구 는 동료들에게 이승도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강 둘러대느 라 바빴다.
발갛게 물든 목덜미를 넋 놓고 보는 태국영을 대신해
서 남강우는 테이블에 붙은 호출 버튼을 눌렀다. 벨이 울 리고 나서야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소주 다섯 병하고 막걸리 하나.”
종업원은 비현실적인 미모의 두 남자를 얼떨떨하게 번 갈아 보며 ‘다섯 병이요?’하고 물었고 남강우는 귀찮은 듯 미간만 찌푸렸다. 화들짝 놀란 종업원이 번개같이 술 을 가져다 놓고 사라졌다. 그제야 태국영은 이승도를 훔쳐 보는 것을 관뒀다. 남강우가 병뚜껑을 돌려 따며 물었다.
‘‘한잔 줄까?”
“아니. 되게 별로야. 넌 그 맛없는 걸 왜 마셔?”
“네가 담배 피우는 거랑 비슷하겠지. 몸에 해로운 맛이 랄까?”
“아하. 이해했어.”
태국영은 ‘그럼 한 번 더 마셔볼까.’하며 잔을 내밀었 다. 괴상한 취미를 가진 두 남자는 술잔을 가득 채운 뒤 단 숨에 비웠다. 쓰고 비린 것이 위장을 채우자 화끈한 열기 가 다시금 심장을 데웠다. 여전히 좋은 느낌은 아니었으 나 첫 잔만큼 거북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약에 우리 승도 만져 봤는데 계속 만지고 싶어지게 되면 어쩔래?”
태국영은 입술에 맺힌 술 방울을 혀로 할아낸 뒤 잠시
중단했던 스무고개를 재개했다. 남강우는 팔짱을 낀 채 눈 꺼풀을 가볍게 내리깔았다.
글쎄. 그 상황이 되면 과연 나는.
잔에 따라 마시기 귀찮아진 남강우는 병째로 나발을 불 었다. 그렇게 고요히 두 병을 비운 다음에야 답을 내놓았 다.
“남의 암컷 뺏겠다고 정신을 놓는 일은 없을 테니 그건 안심해도 좋아.”
태국영은 슬쩍 턱을 비틀어 올렸다. 느슨하게 내려다보 는 먹색 눈이 얼핏 이채를 띠었다. 두 사내의 눈빛이 허공 에서 뱀처럼 얽혀들었다. 석상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 는 가운데,어느 순간 태국영이 웃는 듯 입매를 비틀며 혼 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희한하네. 왜 난 네가 맘에 들까.”
스스로도 조금 의아하다는 투였다. 물론 남강우는 그 에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도리어 떨떠름하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달갑지 않은 관심이군. 난 네가 싫다.”
“알아. 그렇게 피를 봤는데도 내가 좋으면 년 진짜 구 제 못 할 변태지.”
태국영은 농을 치듯 말하며 웃었다. 남강우의 낯은 본
래로 돌아와 냉랭한 미모를 봄냈다.
“내가 널 싫어하는 건 네가 나보다 강해서도 아니고,내 가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럼?”
“너한테서 투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지.”
태국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린 입술은 여전했다. 남강우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제왕의 혈통이라는 것에 일종의 동경을 가지고 있었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데 내가 본 너는 아니야. 그저 고작 암컷 하나에 홀려서 아 무것도 눈에 뵈지 않는 어리석은 수컷에 불과해.”
태국영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받 아쳤을 분이었다.
“우리 일족은 제왕의 재목에 너무 환상을 가지고 있어.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는데.”
“비참하다?”
남강우는 처음으로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태 국영은 그처럼 뚜껑을 딴 병을 입술에 붙였다. 마치 긴 질 주를 마친 마라토너가 냉수를 들이켜듯 내용물을 단번에 비웠다.
허술한 테이블 위에 내리꽂힌 병 바닥에 실금이 갔다. 태국영의 얼굴엔 엿물처럼 끈끈하고 질긴 미소가 완전히 증발해 있었다.
“네 눈에는 내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에 목을 매는 것 같을지도 몰라. 그래 뭐,재능 낭비 그런 관점이겠지.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겠어. 굳이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네가 본대로 난 내 암컷에게 단 하나의 수컷이면 족한 놈 이야. 이게 네가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던 놈의 실체지. 그 런데.”
칼처럼 매끈한 눈썹이 스르륵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 의 눈동자는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 맹수의 이발처럼 빛났 다.
“잘난 우리 투견에게는 생애를 불살라서라도 이루고 싶 은 무언가가있어?”
그때 테이블에 올려둔 태국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태 국영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피식 웃었다.
“피차 마찬가지겠지. 내 눈에 비치는 너의 투기는 허망 하고 쓸쓸할 분이야. 내 관점에서 본다면,너는 영원히 네 가 앓는 결핍을 채우지 못할 게 분명해. 네가 허상처럼 좇 고 있는 나 같은 놈들은 죄다 다른 곳을 보고 있고,년 그
걸 이해할 수 없을 테니.”
태국영은 작별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승도 가 일행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며 가방을 둘러메고 있었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내일 봐요,나긋한 목소리에 동료직 원들이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술집 입구에서 그를 업으려 는 태국영과 싫다고 버티는 이승도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 가 있었다.
남강우는 테이블 위로 늘어진 제 한 손을 한참 바라보 다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에 젖어 나른하게 풀린 제 애인 을 기어이 들쳐 업은 태국영이 한 손엔 커다란 우산을 쓴 채 멀어지고 있었다.
남강우는 묵묵히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소주 스 무 병을 들이부어도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분주하게 알코 올을 해독하는 몸뚱이만 불덩이처럼 열을 올릴 분이었다.
결핍.
남강우는 실소했다. 단 한 번도 말끔하게 해갈된 적 없 는 갈증에 새삼스레 목이 바짝 탔다.
태국영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늘 허망하고 쓸쓸했다.
여제운은 어둠이 삼킨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작은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이 폭주하듯 빗줄기를 퍼부었다. 유 리창 너머에는 간헐적으로 섬광이 터졌다. 언뜻언뜻 세상 을 밝히는 빛에도 불구하고 시야는 온통 검기만 했다.
널따란 룸에 있는 것은 그 혼자분이었다. 벗이라고는 검은색 트레이에 놓인 흑자색의 고급스런 다기세트분이었 다. 약속 시간은 아직 5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9시 정각 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금 같은 시간을 허망 하게 소모할 가치까지는 없는 자리였다.
여제운은 정갈한 손놀림으로 찻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 웠다. 실외의 습한 공기와는 달리 산뜻한 실내로 수국차 의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부러 생각을 비운 채 차를 음미했으나 미각은 마비된 듯했다. 평소 자주 즐겼던 수국 차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미각이 아니라 사고력 이 마비된 듯도 했다.
뭐가 됐건 막연히 알고 싶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려 한 잔을 겨우 비웠을 때였다. 반듯하게 등지고 있던 장지문이 열렸다.
“일행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종업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왔다. 여제운은 여전히 커다란 창문을 내다보는 채로 짧게 손짓만 했다. 또각또
각,하이힐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여 제운 혼자만 있던 공간에 낯선 기척이 스며들었다.
“반가워요,제운 씨.”
여자가 낭랑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제운은 고개 를 한 번 끄덕이며 한 손으로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학 처럼 길고 가는 다리가 외곽 시야에서 나타나 정면으로 이 동했다.
여자는 도톰한 방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두 다리 를 한 방향으로 모았다. 버건디 립스틱이 깔끔하게 칠해 진 입술이 요염한 곡선으로 휘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반가워요.
“반가운 만남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여전히 차가운 미남이셔. 식사는 하셨어요?”
“일행이 오면 준비해 오라 일러뒀습니다. 우리의 보편 적인 식성으로 주문을 해 뒀으니 봄이 씨 입맛에도 웬만하 면 맞을 듯합니다.”
“홈. 난 고기면 다 좋아요. 아,양고기만 배놓고.”
개는 냄새가 참 별로야,윤봄이는 눈동자가 완전히 파 묻힐 만큼 눈웃음을 지었다. 안부부터 묻는 그녀에게 여제
운은 냉랭하게 말했다.
“난 딱히 잡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날 보자고 한 용건
이 뭡니까.”
윤봄이는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이리 급해요. 아직 식사도 안 나왔는데.”
여제운은 생소한 이채를 띤 눈으로 윤봄이를 빤히 보았 다. 제가 일족의 모두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 도 윤봄이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기 억하고 있었다.
“변했군요. 내가 알던 윤봄이 씨가 아니야.”
그녀의 피붙이들이 태국영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 을 당하고,그녀의 가문이 처참하게 난도질당할 때에도 윤 봄이가 특별히 일족들의 입에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그만 큼 그녀는 튀는 법 없이 조용한 편이었다.
“인간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그것이 정당한 한인가 하는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태국영의 오만무도한 행패를 옹호하시는 건가요?”
윤봄이의 눈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이 자리에 나온 주제에 이제 와 점잔을 떨려는 속셈이나 책망하는 눈 초리였다. 그러나 여제운은 동요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내 목표를 위해서 사리판별마저 저버리는 자는
아닙니다.”
그 말은 즉,당신의 가문이 참혹하게 사라진 이유가 정 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윤봄이는 나직이 이 를 갈며 냉수를 들이켰다.
탕!
흑자색의 도기 컵이 테이블에 사납게 내려앉았다.
“그럼 나를 만나러 온 것은 그 잘난 사리판별을 충분히 거치신 건가요?”
“내가 그걸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고고한 척은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내가 기억하기로 제운 씨가 이 자리에 응한 건 태국영에 대한 반감 때문인 걸로 아는데.”
윤봄이는 입술을 비틀며 비아냥댔다. 물안개처럼 아련 하고 흐린 미소가 여제운의 입매에 걸렸다.
“원가 오해하고 있는 듯하군. 나는 태국영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사라지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탐났 을분이지.”
윤봄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무지 이 남자도 제가 예상했던 그림과는 영 딴판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석연찮은 한풍이 불어 닥쳤다. 과연 이 남자에
게 도박을 걸어도 좋은가,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손님. 음식을 들일까요.”
문밖에서 단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제운은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장지문이 열리고 곧 애피타이저치고는 과 한 것들이 상에 올라왔다. 하지만 여제운도 윤봄이도 그 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팅을 끝낸 종업원이 사라지 자 여제운이 다시 찻잔을 채우며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 뭡니까.”
윤봄이는 꿀에 절인 고기 경단을 젓가락으로 쿡 찔러 입에 넣으며 실소했다.
“글쎄요. 내가 지금 여기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중이라 서요. 딱히 말씀드려야 할 이유가 있나 생각 중이에요.” 역시나,여제운은 딱히 실망할 것도 없이 수긍했다.
“그럼 식사하고 가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 윤봄이는 처음으 로 당황했다. 표정이 흐트러진 그녀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 았다.
“잠깐만요! 뭐 이렇게 가요?”
“할 말 더 없는 거 아니었습니까?”
여제운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조롱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는 말간 무표정이었다. 윤봄이는 기가 막
혀 멀거니 눈을 깜박거렸다. 침묵이 짧게 차 향기를 내리 눌렀다. 잠시 기다리던 여제운은 그대로 등을 돌려 장지문 을 열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따라붙 었다.
“태국영의 약점을 알아요! 그에게 숨겨둔 등대가 있어 요. 그것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태국영을 무너뜨릴 수 있 을 거예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윤봄이는 진중한 고민의 기회를 스스로 부숴버렸다. 성급하게 내뱉고 나서야 아차 하며 혀 를 깨물었다.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주워 담을 수 없다면 결국 저 남자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여제운은 문틀을 잡은 채 소리 없이 숨을 멈추고 있었 다.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는 윤봄이는 그 최초의 동요를 미처 읽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태국영이 우리 가문을 짓밟은 이유는 놈이 등대를 숨 겨두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여제운은 능숙하게 동요를 감추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윤봄이 역시 초조했던 속내를 말끔하게 감춘 얼굴로 그를 당당하게 올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탐색의 시선이 서로 의 면면을 훑었다. 여제운의 눈매가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무엇으로 그것을 확신합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내가 당신의 말을 의아해하는 것은 의심 때문이 아니 라 합리적인 의문 때문입니다. 태국영은 미행을 허용할 정 도로 둔한 자가 아니니까요. 만약 당신이 그의 뒤를 캐려 고 했다면 벌써 발각되지 않있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윤봄이는 찬물로 입 안을 한 번 축이고 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대꾸했다.
“원가 오해하시는 모양인데,난 그를 미행한 적이 없어 요. 태국영이 얼마나 무서운 작자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아 니까요.”
손 안에 들린 물컵이 잔잔히 흔들렸다. 그녀는 문득 관 자놀이를 후벼 파는 두통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바늘 끝 처럼 예민해진 심장이 공회전하듯 으르렁거렸다.
버젓이 뜬 눈앞으로 아비규환의 환영이 울렁거렸다. 지 옥 불이 쓸어간 듯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분수처럼 솟구 치던 피,섬뜩한 광기로 휘광하던 야만적인 눈,눈 깜짝할 사이 코앞에서 나타나 목을 틀어쥔 손아귀의 힘까지. 너무 나 생생했다. 그 모든 것들이 불식간에 화염처럼 저를 집 어삼켰다.
「나는 쓸데없이 암컷들을 귀하게 대하는 게 문제란 말
피비린내 나는 이발을 번득 드러낸 그가 달콤하게 웃 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마치 자비로운 듯 선택을 권하 던 그의 목소리는 심판을 내리는 천사처럼 비정하고 무감 했다.
「죽는 게 두려워? 아니면 네 가족들의 참극을 기억한 채 홀로 살아남는 게 두려워?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말해 봐.」
윤봄이는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며 핸드백을 뒤졌다. 부산스러운 손짓으로 약통을 꺼내 내용물을 손바닥에 부 었다. 인간들의 정량은 1 회에 두 알이지만 그녀는 한끼번 에 반 통을 삼켰다. 그녀를 옭아맨 경련은 뭉근히 가열한 죽처럼 가늘고 오래 끓었다.
여제운은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동족을 처음 보았다. 희 한하다 생각했으나 그분이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녀의 병증이 아니었다. 찬물을 다급히 들이켜 약을 넘긴 그녀 의 눈은 시간을 두고 차춤 가라앉았다.
“일단 앉지 그래요. 애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녀의 제안에 여제운은 소리 없이 움직여 다시금 제자 리에 착석했다. 윤봄이는 찬물 한 컵을 느리게 더 비운 다 음 입을 열었다.
“내 남편의 집안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고 계신가요?
“압니다. 매춘사업이죠.”
최 가는 오래전부터 술과 여자를 팔았다. 황금을 미끼
로 인간 여자들을 유혹했고,섹스판타지를 미끼로 인간 남 자들을 유혹해 더 많은 황금을 착취했다. 윤봄이의 이야기 는 뜬금없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
“태국영이 미쳐 날뛰던 포인트를 기억하시나요.”
여제운은 대답을 아꼈다. 윤봄이가 무얼 얼마나 알고 있는지,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런 확신도 없 는 상태였다. 섣불리 대꾸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는 은근 한 심문과 관찰을 택했다.
“태국영은 내 동생이 등대 애기를 꺼내자마자 돌변했어 요. 다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제 남편은 조금 달랐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등대들은 과연 완전히 멸족했을까. 단 한 명도 살아남 지 못했나. 남편은 뜬금없이 그런 의문을 품었다고 하더군 요. 그리고 만약 모두가 과거의 유물처럼 잊고 지내던 그 미지의 존재를 자신이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고 요.,,
여제운의 미간이 희미하게 주름졌다. 윤봄이는 물컵 안
의 투명한 수면을 명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수족들을 풀어 시골 산천까지 다 뒤 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 년이 지나고,삼 년이 지나도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지요. 그렇게 허무하게 시간이 흐르 면서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고요.”
“찾아서,뭘 할 생각이었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여제운이 싸늘한 음성을 쏘아 보냈 다. 윤봄이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천천히 허공을 더듬어 올라왔다. 그녀의 탁한 눈가에 요염한 미소가 걸렸 다.
“순진하신가. 아니면 순진한 척하시는 건가. 제가 제 시 댁의 가업을 왜 언급했겠어요?”
차가운 눈빛이 전류처럼 그녀의 눈동자를 찔렀다.
“설마 당신의 남편이 등대를 찾아내 매춘의 도구로 이 용할 속셈이었다는 겁니까?”
“그럼 안 되나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군요. 등대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이 보호해야 마땅할 존재가 아닙 니까.”
“보호해야 마땅한 존재요? 누가 그러던가요?”
윤봄이는 코웃음 치며 매우 기이한 안광을 번쩍였다.
“하긴. 제운 씨는 아직 가주 자리를 물려받지 않았으니
등대의 진짜 얼굴에 관해서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진짜 얼굴?”
“아마 모든 가문의 역사서가 등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거예요.”
버건디 짙은 그녀의 입술이 차가운 곡선으로 찢어졌다.
“권력을 위해서 자랑스레 몸을 팔던 희대의 창녀들.”
여제운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는 동요하지도 않았으나 동의하지도 않았다. 윤봄이는 작게 웃음을 터뜨 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등대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 이네요. 안타까워서 어쪄지. 그래도 내 말은 사실이에요. 정 못 믿겠으면 종주님께 여쭤보세요. 등대가 멸족하기 전 부터 등대의 품을 거부했던 여 가의 역사서라면 더 신랄하 게 묘사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내 선조들이 등대를 거부했다는 말은 루머입니다. 다 른 가문에 비해 정신적인 의존도가 달라 비교적 교류가 적 었을 분입니다.”
“홈. 그래요. 루머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물증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어쨌든 등대들이 자 기들의 능력을 빌미로 금수들을 무차별적으로 홀리고 다
녔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에요:
“등대는 아무리 풍족해도 우리에 비해 늘 그 수가 부족 했습니다. 일대 다수라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밖에요.” 여제운은 고집스레 제 사견을 꺾지 않았다. 윤봄이는 애석한 눈으로 그 완강한 태도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이런 문제로 당신과 언쟁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말씀 드렸잖아요. 종주님께 가서 한 번 여쭤보시라고. 저도 궁 금하군요. 우리 종주님께서는 과연 등대들을 어떤 시각으 로 보실 것인지.”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했군요. 이런 식이라면 아주 쓸 모없는 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여제운은 냉랭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이 뱃속에서 끓어 오른 불쾌감이 어느덧 목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당신 남편이 우리 일족을 상대로 매춘사업을 벌이고 싶어서 등대를 찾아 헤맸지만 실패했다. 그 다음 은 뭡니까.”
“전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여제운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 꺾여 올라갔다. 그때 종업원이 다가와 기척을 부렸고,여제운은 음식은 잠시 됐 다며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는 언질을 주었다. 종업원이 사라지자 여제운이 곧장 추궁했다.
“그럼 찾았다는 말입니까?”
“네. 찾았어요. 이게 참 공교로운 일이었죠. 제 시댁에 서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땐 머리카락 한 올 건지지 못했는데,어이없게 제가 찾았지 뭐예요. 그것도 아주 우 연하게요.”
윤봄이는 그 과정을 짧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렇게 많은 수를 풀었음에도 어째서 찾아낼 수 없게 되었 는지,그 이유 역시 알게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녀는 슈 퍼문을 그 이유로 들었다.
“나는 태국영과 그 일이 있은 뒤로 약에 의존하지 않았 어요. 그 약만 봐도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나만이 느낄 수 있었던 거고요. 몇 년 동안 헛수고를 반복 했던 남편이 얼마나 허무해했는지.”
그쯤 되자 여제운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어졌 다. 어째서 이승도와의 첫 접촉에서는 제게 생리적인 거부 반응이 일어났는지,왜 죽음의 직전에서야 그를 인식했는 지 정확히 풀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것이 슈퍼문 의 부작용 때문이었다면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았다.
“못 믿으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직접 보여드릴 수도 있 어요. 처음부터 당신이 쉽게 저를 신뢰하리라 생각지는 않 았으니.”
윤봄이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원한 다면 당장 전화를 걸어 불러들이겠다는 태도였다. 여제운 은 그 얄팍한 술수를 부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계략대 로 태국영을 노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여제운은 궁금했다. 제가 다른 등대를 접하게 된다면 과연 또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부디 제가 이승도에게 가지는 이 음험한 감정이,단지 등대를 처음 인식한 일족의 당연한 본능이기를. 그리하여 다른 등대를 접촉했을 때 그 감정이 깨끗하게 씻겨나갈 수 있기를.
“부르십시오.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습니다.”
서슬 퍼런 그의 기색에도 윤봄이는 불투명한 눈동자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빠. 엄마 왜이래요?”
태이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통통한 입술을 빠끔거렸다. 엄마가 오면 그 품에 폭삭 안겨야지 다짐하며 쏟아지던 잠 을 참아냈는데,아빠의 등에 업혀 돌아온 엄마는 이미 회 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선생님 살아있는 거지?]
여은태는 걱정스럽게 곁을 어슬렁거리며 물었다. 코끝 으로 축 늘어진 이승도의 손을 툭툭 건드려 보았으나 반응 이 조금도 없었다.
“취해서 그래. 자고 일어나면 나아.”
태국영은 응접실 침대로 이승도를 옮겼다. 주문 제작해 서 들여놓은 특대형 침대는 매트리스 두 개를 어설프게 붙 여놓은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하고 푹신했으 며 또한 탄력적이었다. 태국영은 세상모르고 쿨쿨 자는 이 승도를 갓난아기처럼 품에 안은 채 여은태에게 눈짓해 보 였다.
“꼬맹이. 아픈 데 있으면 지금 발리 해결해. 우리 승도 오늘은 방에다 편히 재울 거니까 깨울 생각 하지 말고.”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목을 잡아 툭 내밀었다. 아주 큰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의 실신한 지경인 이승도에 게 칭얼댈 생각까진 없었던 여은태는 굉장히 불쾌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제 몸을 달래두어야 긴 밤을 버틸 수 있으니 됐다고 튕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여은태는 군 소리 없이 옆에 등을 깔고 누우며 퉁명스레 말했다.
[배부터 조금 만져줘. 다른 데는 조금씩 쓰다듬어주면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목을 잡아끌어 여은태의 몸을 대 신 쓸어주기 시작했다. 이승도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서 이 게 될까 내심 의심했는데,평소보다 시간이 배로 소요된
것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제 됐어.]
여은태는 팔팔한 몸놀림으로 발딱 몸을 일으켰다. 태국 영은 그새를 못 참고 상모 돌리듯 고개를 휘청거리는 태이 경을 눕혀주며 당부했다.
“참지 못하게 아플 정도 아니면 오늘은 우리 승도 찾지 말고 둘이서 다정하게 코 자. 보름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여은태는 흥 하고 돌아누웠다. 그리고 이미 잠에 취한 태이경을 앞발로 끌어와 가슴에 품었다. 아이가 색색 내뱉 는 달콤한 숨결에 연한 은빛 털이 하늘하늘 움직였다.
여은태는 태이경의 얼굴 크기만 한 앞발로 조심조심 등 을 토닥였다. 작은 손이 잠결에 제 목의 털을 꼭 움켜쥐자 풍성하게 늘어진 꼬리가 기분 좋게 매트리스를 탁탁 내리 쳤다. 설레는 눈빛이 지치지도 않고 녀석의 잠든 얼굴 곳 곳을 누볐다.
태국영은 그 광경을 힐긋 흘겨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걸 믿어야 도H,말아야 돼.
여은태는 요즘 아주 대놓고 흑심을 흘리며 태이경의 꽁 무니를 쫓느라 바빴다. 그 모습이 꼭 어릴 때 이승도만 오 매불망 보던 제 모습과 몹시도 겹쳐 보였다. 그러나 신기 하게도 심각한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여은태는 분명 그때 의 저보다 심적으로 훨씬 건강하고 깨끗했다. 몸도 마음 도 넉넉하게 품어주는 등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몸을 추슬러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축 늘어진 몸을 침대에 눕힌 뒤 그의 겉옷부터 벗겨냈다. 브리프 하나만 남겨둔 살결에는 온갖 잡내가 배어 있었다. 다른 짐승들의 냄새,술 냄새,그리고 음식 냄새까지 더해 져 본래의 달짝지근한 이승도의 향을 기분 나쁘게 희석시 켜 놓았다.
태국영은 수건에 물을 적셔와 이승도의 몸을 깨끗이 닦 아냈다. 젖은 수건을 발래바구니에 던져 넣고 나오니 이승 도는 모로 누워 동그마니 몸을 말고 있었다. 몸의 물기가 마르면서 체온이 금세 떨어진 모양이었다.
“추워……■,,
마치 어린아이처럼 잠결에 칭얼거리는 게 마치 유혹하 는 듯했다.
“어쩌라고,짜사.,,
태국영은 괜히 심술 맞게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꼬집
어 흔들었다. 그러자 이승도는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 니 허겁지겁 고개를 들이밀었다. 뜨끈한 체온을 본능적으 로 찾아드는 습성이 아주 고약했다. 제 손바닥에 얼굴을 온통 비비적거리는 이승도를 내려다보던 태국영은 픽 웃 으며 혀를 찼다.
“너 이 정도면 범죄야.”
태국영은 제 자제력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손을 빼냈다. 그리고 보송보송한 이불을 이승도의 어깨까 지 덮어준 뒤 잠시 몸을 도닥여주었다.
그런 기특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을 헤매는 이승 도는 자꾸만 이불을 걷어찼다. 태국영은 그때마다 꿋꿋하 게 다시 덮어주었다.
“제발 얌전히 좀 퍼 자라.”
마치 말썽쟁이 애한테 하듯 핀잔하는 태국영의 얼굴에 도 점점 난처한 기색이 깃들었다.
“자꾸 이러면 홀딱 벗겨서 먹어치운다.”
엄하게 목소리를 낮췄으나 돌아온 것은 우렁찬 발길질 이었다. 태국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렀다. 제 가슴 에 맞을 뻔했던 이승도의 다리가 이불을 엉망으로 감싼 채 옆으로 툭 떨어졌다.
“국영아-
이승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품 안에 뭉쳐 있는 이불을 꽉 쥐었다가 그대로 슥슥 밀어냈다. 불만족스럽게 목을 울 리며 마치 장님처럼 주변을 더듬어댔다. 그게 뭘 뜻하는 지 모를 리가 없었다. 태국영은 나직이 혀를 차며 겉옷을 벗었다.
“맨정신에서도 이렇게 예븐 짓 해 주면 오죽 좋아.” 옆으로 몸을 뉘이니 이승도는 기다렸다는 듯 품을 파고 들었다. 서늘하게 떨어진 체온이 살갗에 틈 없이 밀착했 다. 태국영은 한 팔을 세워 머리를 고이고 다른 손으로는 매끈한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이승도는 갓난아기처럼 태국영의 가슴팍에 두 손을 다 소곳이 모은 채 그제야 고른 숨을 내뱉었다. 태국영의 눈 가에 얼핏 장난스런 미소가 스쳤다.
“우리 승도,서방님 품이 그렇게 좋아?”
매달려 오는 것이 예뻐서 그냥 혼잣말을 한 것분이었 다.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예 상외로 이승도는 ‘으응.’하며 애매하게 목을 울렸다.
태국영은 갸웃 기울였던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발갛게 물든 눈꼬리에 입술을 묻고 다시금 물었다.
“서방님이 안아주는 게 좋아?”
“…응. ……좋아.”
태국영은 일순 숨을 멈췄다. 또렷이 들려온 대답 때문 이 아니라,녹아버린 초콜릿처럼 혼몽하게 풀어진 눈이 반 쯤 열려 있던 탓이었다.
무거워 보이는 눈끼풀은 끊임없이 내려앉으려 했고,이 승도는 그때마다 꿋꿋하게 밀어 올렸다. 빤히 저를 올려다 보는 습하고 애릇한 눈빛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태국영은 내심 당혹해서 멀거니 눈만 깜 박였다.
“국영아……
말끝이 늘어진다. 품에 안긴 몸뚱이는 한기를 몰아내 고 어느샌가 뜨거워져 있었다. 국영아,이승도가 다시금 속삭이며 머리를 움직거렸다. 태국영은 무심결에 마른침 을 삼키며 응,하고 대답했다. 왠지 싸늘하게 들리는 목소 리였다.
“국영아.”
“왜. 대답했잖아.”
이승도는 턱을 젖혀 올리며 앙큼하게 속삭였다.
“키스할까.”
“아니.,,
태국영은 단번에 냉정히 튕겨냈다. 달큼하게 일렁이던 흐린 눈으로 실망감이 가득 내려앉았다. 너무 양심 없는
짓거리라 아예 화도 안 났다. 태국영은 무뚝뚝하게 이승도 의 눅눅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키스로 끝낼 자신 없으니까 들쑤시지 마.”
깊이 일렁이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이승도는 굳 은 입술을 여러 번 혀로 축인 뒤 조심스레 속삭였다.
“조금 만져도 되는데.”
이승도는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가 발개졌다. 태국영 은 작게 코웃음 치며 매끈한 눈썹 끝을 꿈틀 올렸다.
“조금 만져도 된다고? 고작?”
‘‘……마,많이?”
당황해서 말을 정정하는 두 눈이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튀었다. 태국영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웃음기를 지 운 그가 예고 없이 몸을 일으켰다.
“책임져 줄 거 아니면 유혹하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덮쳐. 얌전히 코자.”
이승도는 가차 없이 멀어지는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국영아.”
태국영의 걸음이 멈췄다. 저와 똑같이 속옷 한 장만 입
은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한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숨 을 쉴 때마다 가만히 오르내리는 그의 근사한 등은 남자다 운 곡선으로 물결을 이뤘다. 동물적인 근육의 움직임이 아 련한 눈에 알알이 와 박혔다.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승도는 달귀진 듯 뜨겁 게 느껴지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할아냈다. 머리는 어지럽 고 뱃속은 울렁거렸다. 마치 평평 운 뒤처럼 화끈거리는 눈꺼풀을 깊이 감았다가 떴다.
새하얗게 터지는 현기증이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그 순 간 이승도는 몸을 일으켰다.
타악.
모든 감각이 진득한 물 안에 잠긴 듯 무뎠다. 이승도는 커다란 들숨으로 가슴을 채웠다. 그의 강렬한 체취에 호흡 기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의 등에 밀착한 가슴이 세차 게 박동했다.
이승도는 뒤늦게 얼이 빠져 입만 벌렸다. 단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분이었다. 정말 그것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팔은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인 뜻으로 그의 허리를 옥죄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는지 인지할 수 없었다.
소리 없이 초침이 움직였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두 손
을 차곡차곡 손아귀에 담고는 살얼음처럼 깔린 완벽한 정 적을 거둬냈다.
“우리 승도,주정뱅이가 되니 고약하게 구네. 서방님 인 내심 시험해?”
커다란 손이 강하게 한 번 깍지를 꼈다 풀어냈다. 그것 을 끝으로 아릿했던 접촉은 신기루처럼 홑어졌다.
이승도는 적막한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굳게 닫 힌 방문만 명청히 응시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태 국영이 저를 등지고 나가버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눈은 뜨고 있으나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 껴지지 않았다. 그의 뜨거웠던 몸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 는 싸늘함이 전신에 젖어들었다. 뱃속은 용광로처럼 뜨거 운데 벗은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웠다.
“국영아,이리 와.”
이승도는 망연하게 입술을 움찔거렸다. 속삭이는 수준 도 못될 만큼 작은 소리였다. 성대를 울리지 않은 숨결 같 은 부름이 다시금 허공에 흐드러졌다.
“국영아……
두 번이나 불렀음에도 바깥은 잠잠했다. 멀리에 있어 도 제 목소리는 귀신같이 훔쳐가는 그가 못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이건 명백한 외면이었다.
이승도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실망하지 말 자고 되뇌었다. 그와 저 사이에서 늘 우위에 서 있던 것은 그가 아니라 저였다. 태국영이 늘 그렇게 귀하게 저를 대 접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속죄와 후회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그러 나 그의 머릿속에 자리한 계산기가 사실은 아주 희미한 수 준이라는 걸 그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분이었다. 사랑하기에 더 상처 주고 싶지 않은 거였고,사랑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돌려받고 싶기에 미움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태국영은 생애 대부분을 고독하고 기이한 짝사랑으로 소모했다. 그에게는 저를 속박할 수 있는 무기가 무궁무진 했으나 그가 제게 부딪쳐온 것은 늘 진심 하나분이었다.
분명 이렇듯 취기를 핑계로 비겁하게 다가가려는 건 실 례일 것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맨정 신일 때에 이 싱숭생숭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기에 저 는 너무 굳어 있었다. 과민하게 몸을 웅크린 채 있던 세월 이 너무 길어 기지개 한 번 켜는 것도 용기를 소요했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그에게 저도 한 번 정도는 다가 가고 싶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 짝사랑,그거 끝난 지 조금 되었다고.
복잡다단한 상념들로 머리가 명명하게 울렸다. 작게 한 숨을 지으며 돌아서려던 때였다. 불현듯 방문 너머로 기척 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마자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다.
콰앙!
세차게 닫힌 방문을 뒤로 하고 그가 성큼 다가왔다. 사 납게 일렁이는 눈빛이 작살처럼 망막을 꿰뚫었다. 이승도 는 눈매를 크게 키우며 명하니 입을 벌렸다.
태국영은 당황으로 굳은 이승도의 얼굴을 두 손 안에 억세게 가두어 위로 쳐들었다. 턱이 바스러질 듯 거센 악 력이었다. 이승도는 일순 어깨를 떨며 무심결에 그의 가슴 을 떠밀었으나 그는 물러서는 법 없이 고개를 꺾어 내렸 다. 입술이 격렬히 맞물렸다.
‘‘…흐읍!,,
잔뜩 뭉개진 신음이 입 안에서 바스러졌다. 이승도는 한 걸음 뒤로 떠밀렸고 태국영은 그만큼 더 다가왔다. 속 절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를 그의 혀가 무자비하게 벌리고 들어왔다.
단번에 입천장을 긁어내리며 가장 깊은 곳을 점령당했 다. 오금이 풀려 무릎이 무너졌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를 단호하게 낚아챘다. 제 팔
에 안기기엔 가녀리기만 한 몸뚱이를 단단히 지탱했다. 제 한 손에 갇히기에도 그저 작은 턱이었다. 욕지기가 치 미는 것처럼 아랫배가 울렁거렸다.
이승도는 숨을 쉬듯 신음을 내뱉었다. 막무가내로 손 을 뻗어 휘적대다가 손끝에 걸린 것에 무작정 매달렸다. 머릿속이 소란스러워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쿨럭,목구명 깊이 고인 타액에 기침이 나왔다. 이승도 는 괴로움에 입을 한껏 벌린 채 할딱이면서 억지로 침을 삼켰다. 그것을 기점으로 거칠기만 했던 혀가 부드럽게 유 영하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세차게 들썩였다. 누군 가가 늑골을 꽉 조인 마냥 폐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한 껏 부족한 산소를 대신해 태국영이 불어넣는 것은 식도를 녹일 듯 뜨겁고 달콤한 타액이었다.
이승도는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형체가 물기 어린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커먼 덩어 리 안에서 날짐승의 비린내를 풍기는 눈동자가 형형한 안 광을 붐어냈다. 척추 한 땀 한 땀 저릿하게 만드는 눈빛이 었다.
그는 뺨이 홀쭉하게 팰 만큼 깊이 흡입했다. 그때마다
제 속 안에서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그의 안으로 발려 들어가는 듯했다.
검게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 뒤로 새하안 빛이 너울거 렸다. 백열등이었다. 등에 닿는 감각은 푹신하고 보드라웠 다. 그제야 제가 침대에 쓰러진 채 그에게 짓눌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게 젖은 입술이 조금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나갔다. 이승도는 짧고 밭은 숨을 색색 내뱉었다. 태국영은 머리 를 미묘하게 비틀어 뺨을 할아 왔고 그 뜨끈한 살덩이는 곧 귓바퀴를 휘감았다. 그가 맞닿은 가슴을 농밀하게 마찰 하며 사납게 탁성 끓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친절하게 경고까지 했는데 유혹한 건 너야.”
난폭하게 날뛰는 그의 숨결은 폭발 직전의 마그마 같았 다.
“그리고 네 서방은 줘도 못 처먹는 등신도 아니고.”
이승도는 경직된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활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그의 몸이 틈 없이 들어와 있었다. 마치 불 덩이를 품에 들인 것만 같았다. 크게 부푼 그의 성기가 팬 티 속에 수줍게 숨은 비부를 쿡쿡 쑤셔 왔다. 놀랄까 봐 미 리 알려줄게,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 승도 비싼 구명이 난잡하게 놀아난 창기처럼 흐
물흐물해질 때까지 내 좆을 물려줄 생각이야.”
“■■■국,아……!,,
이승도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근원 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인지, 천박한 음담패설이 주는 부끄러움 탓인지.
바들바들 경련하는 허벅지를 오므렸으나 그 사이에 단 단히 자리를 잡은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활짝 내 놓은 가랑이 사이를 그의 국부가 툭툭 밀고 올라왔다.
솜 인형처럼 몸이 위아래로 덜컥거렸다. 지천이 뒤집 힐 듯 울렁거렸다. 그는 하얗고 고른 이로 뺨을 깨물어왔 다.
“이렇게 흔들리면서 기분 좋게 엉엉 울게 해 줄게.”
그의 몸과 매트리스 사이에 납작하게 눌려 있는 엉덩이 가 강한 악력으로 틀어 잡혔다. 흑,이승도는 위기를 느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렸다. 발가락마저도 하얗게 질 려 곱아들었다.
“허락한다고 해.,,
그는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몸과 달리 초조하게 속삭였 다. 뒤틀리듯 아프게 턱이 잡혀 억지로 눈을 마주해야 했 다. 아무렇게나 벌어진 입술 선을 그의 혀끝이 뾰족하게 할다가 그 안쪽을 비벼댔다.
“으응…잠,깐…흐…….,,
숨 막히는 교접에 떠밀리듯 고개를 비틀었다. 그는 사 냥감의 뒤를 쫓는 맹수처럼 집요하게 따라와 입 안의 점막 을 모조리 헐어낼 듯 야만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타액이 넘쳐 입꼬리를 타고 뺨을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다.
맞닿은 심장은 터질 듯 급박한 리듬을 탔다. 음란하게 가랑이 사이를 유린하는 그의 숨겨진 남성에 혼이 빠져 헐 떡였다.
이승도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주는 모든 감각들은 면역 없는 이승도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 었다. 한계치를 꿰뚫은 오감이 일제히 바늘처럼 돋아나 정 복자에게 굴복했다.
저기,이승도는 주저하듯 말을 삼켰다. 태국영은 그 작 은 소리를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뜨거운 손으 로 아랫배를 더듬었다. 뱃가죽 안으로 뜨끔한 감각이 스쳤 고,물컹한 것이 팬티를 적셨다.
태국영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납작하게 내려앉아 경련하는 아랫배에 코를 묻었다. 찢어발길 듯 이를 세우 고 천 조각과 살갗을 동시에 긁어내렸다. 아래로 거침없 이 내려간 입술이 질픽하게 젖은 팬티 위를 짐승처럼 발았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절로 오므라드는 다리를 활 짝 벌린 그가 거칠게 냄새를 발아먹으며 달뜬 음성을 토해 냈다.
“우리 승도 아기집이 반응하고 있어. 내 씨를 받고 싶은 가봐.”
난파된 배처럼 시커먼 파도에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던 현실감이 소름 끼치게 등허리를 후려쳤다. 이승도는 겁에 질려 눈을 들었다. 파리한 눈꺼풀은 잠자리 날개처럼 빠르 게 깜빡거렸다.
“아,자,잠…나,난…….,,
이승도는 두려운 듯 입술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태국 영은 짙게 가라앉은 눈을 가만히 움직이며 표정을 할아갔 다. 그의 입술이 가까워졌고 곧 눈꼬리에 맺혀 왔다.
“아기 생길까봐 걱정돼?”
가슴을 옥죈 걱정만 머릿속에 가득해 재발리 고개를 끄 덕였다. 안구 위를 명울처럼 떠돌던 눈물이 눈가로 흘러 그의 입술에 스며들었다. 태국영은 희미하게 입매를 휘었 다.
“나랑 섹스하는 건 괜찮고?”
말문 막힌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팩 돌렸다. 집 요한 입술이 바로 따라와 눈꺼풀과 속눈썹을 마구잡이로
할아댔다. 추궁 같은 애무가 눈물샘까지 끈질기게 후벼 팠 다.
떠밀리다시피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얼굴이 타들어 갔다. 그는 더 짓궂게 굴지 않 고 새발갛게 뺨을 물들인 당혹감을 끈끈하게 할아갔다.
“마음 놓고 있어. 그건 내가 확인해 줄 테니까.”
확인……?
이승도는 불안하게 속눈썹을 떨었다. 태국영은 풀숲에 서 도사리던 짐승처럼 느긋하게 상체를 세웠다. 다음 순 간 아래를 간신히 가리고 있던 천 조각 하나가 허무하게 벗겨져 나갔다. 새하얗게 빛나는 허벅지가 가슴에 딱 붙 을 만큼 밀려 올라와 크게 벌어졌다.
“뭐…뭐하는……!,,
이승도는 소스라치게 놀라 두 손으로 어설프게 중심을 가렸다. 태국영은 뻔뻔하게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기 생길까봐 걱정된대서 먼저 확인해 주는 거잖아. 우리 승도한테서 배란 냄새가 나나,안 나나.”
등대는 남자의 몸으로도 잉태가 가능했지만,아기집 자 체가 매우 작고 불안정했다. 배란 주기도 천차만별이라 일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수태에 실 패해 탈락된 자궁내막이 출혈이 아닌 배설로 나타나기에
배란 테스트가 아니면 주기를 알 길이 없었다.
허나 테스트를 하지 않고도 배란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배란기를 맞은 아기집은 아주 미묘하 게 애액의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감각이 예민한 태국영 이 배란 상태를 판단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걱정 말고 서방님한테 맡겨. 비싼 승도가 이제 겨우 몸 을 열었는데,덜컥 둘째부터 생기면 나도 억울해 죽을 거 야.,,
태국영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혀를 내밀었다. 그 의 새발간 살덩이는 제 손가락 사이를 가르고 곧장 치부 에 닿았다. 축축하게 젖어 뻐끔거리는 곳을 거리낌 없이 혓바닥으로 지긋이 문질렀다.
거친 숨결이 골을 타고 흘렀다. 교접할 부위를 탐욕스 럽게 할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짐승 같았다. 그 얼굴이 비 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더욱더 얼굴이 불타올랐다.
이승도는 비음 섞인 교성을 삼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 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꽉 다물린 구명을 쿡 파고들자 다급히 턱을 비틀었다.
“아,싫어……!”
이승도는 무섭게 몸을 짓누르는 수치심에 그의 머리칼
을 움켜쥐었다. 버둥거리는 반항은 허벅지 안쪽을 딱 고정 하는 그의 손에 쉽게 틀어 막혔다. 시트에 비벼지는 뒷머 리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국영아,나 싫어. 그거 싫어. 하지 마.’ 아무리 애원을 해도 태국영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이승도는 너 무 깨물어서 피 맛이 느껴지는 입술을 벌린 채 울렁거리 는 눈을 내렸다. 그는 새발■간 입술을 모아 구명을 발다가 혓바닥을 붙여 문질렀다.
시선을 느낀 그가 물컹하게 가라앉은 눈을 슬쩍 올렸 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번들거리는 회음부를 혀끝으 로 긁어 올렸다.
오한 같은 소름이 등가죽을 비틀었다. 차마 더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틀고 말았다. 그는 사납고 거친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이승도는 높은 고지에서 멤도는 숨을 헐떡헐떡 뱉어냈 다. 기이하게 울렁거리다 세차게 고동을 높이는 심장을 주 체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은 무언가를 기대하 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시트만 잡아 뜯는데,홈 뻑 젖은 입구로 무언가 쿡 찌르고 들어왔다. 이승도는 낯 선 이물감에 허리를 휘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럽고 예븐 손가락이 한 마디 정 도 들어와 있었다. 고통은 놀라울 정도로 없었다. 감질나 게 쑤시고 들어온 곳이 빙글 움직이며 점막을 헤집었다. 이승도는 기묘한 감각을 견딜 수가 없어 벌어진 턱을 덜 덜 떨었다.
태국영은 끝까지 넣은 손가락을 안에서 빙글빙글 돌렸 다. 그의 혀가 손가락 문 구명을 할짝거렸다.
“완전히 젖었어,승도야. 바로 넣어도 될 것 같아.”
“아,안돼…….,,
태국영은 젖은 입술을 훔치며 곧장 손가락 세 개를 한 번에 삽입했다. 이승도는 몸부림칠 생각도 못 하고 돌처 럼 굳었다. 짧고 급박하게 끊어내 뱉던 호흡도 쏙 들어갔 다-
이번 것은 조금 아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더 크게 벌 어진 제 입구가 얼마나 미끌미끌하게 젖어있는지 소름 끼 칠 만큼 선득하게 깨닫고 말았다.
수컷의 성기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아기집에서 흘려보내는 애액은 이미 그의 타액을 뒤덮을 만큼 줄줄 흐 르고 있었다. 조각나서 흘러다니는 감정의 조각들을 논리 적으로 정립할 겨를이 없었던 이승도는 묘한 안도감을 느
적어도 혼란스러운 맘과는 달리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 다. 태국영의 얼굴은 지척에 와 있었다. 묵직한 그림자를 먼저 체감했다.
그의 입술은 제가 흘린 애액을 잔뜩 묻혀 번들거렸다. 물보다 점성도 무게도 짙은 것이 묘한 향기를 붐어냈다. 그는 몽환적인 표정으로 보란 듯이 제 입술을 혀로 훔쳐냈 다.
“먹어 볼래? 완전 돌 것 같은 맛인데.”
이승도는 고개를 저었으나 태국영은 그대로 고개를 내 렸다. 깊이 꺾인 채 맞물린 입술 사이로 탄력적인 혀가 뱀 처럼 안을 파고들었다. 점막에 비벼지는 살은 향기도 맛 도 잔뜩 음란하고 야릇했다. 막연히 역할 거라고 생각했 던 것이 무색할 만치 미묘하게 달큼했다.
태국영은 낮고 깊은숨을 내쉬며 나긋하게 혀를 움직였 다. 말랑한 설소대 주변이 낱낱이 그의 감각에 젖어들었 다. 어설프지만 적극적으로 혀를 마주 비볐다. 타액이 몽 글몽글 솟았고 그것은 모두 이승도의 목구멍을 가득 채웠 다가 꼴깍 넘어가길 반복했다.
혼몽하게 풀린 눈에 겨우 초점을 맞춰 그를 올려다보았 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은 세상에서 가장 귀
한 것을 보듯 황홀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탐미적인 시선 으로 보자면 그에 비해 저는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는 데도.
이승도는 괜히 민망해져 눈을 내리깔았다. 태국영의 이 가 조심스레 윗입술을 깨물어 우물거렸다.
“배란기미 없는데,이제 넣어도 돼?”
그의 묻는 목소리는 여유로웠고 눈빛은 짙게 내려앉아 조급해 보였다. 이승도는 그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한참 주 저했다. 이제와 망설이는 기미가 보이자 태국영의 미간이 조금 좁아들었다. 갸름하게 접힌 눈가에 서늘한 웃음을 걸 어둔 그가 갑자기 내벽을 휘저었다.
헉,이승도는 경직된 허리를 띄웠다. 갈고리처럼 굽어 든 것이 점막을 뚫을 듯 눌렀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그의 어깨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국영아,하지 마,애원하듯 입 술을 떨자 태국영은 하얗게 드러낸 이로 코끝을 깨물었다. 애액의 달큼함을 아직도 묻히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 게 쏟아졌다.
“뭘 망설여. 설마 여기까지 와서 끼지라고 할 셈이야?”
질퍽하게 젖은 내벽이 척척한 소리를 냈다. 온몸이 긴 장으로 바짝 조였다. 이승도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나,그런 건…… 흣……■,,
보복하듯 여린 점막을 자극하던 것이 조금은 부드러워 졌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금속가루처럼 떠도는 날카로 운 뜨거움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 승도도 내 좆에 뚫려서 흔들리고 싶지?”
손가락을 배낸 입구 위로 그의 성기가 마찰했다. 흥건 한 애액이 그의 살덩이로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승도 는 부끄러움에 무심코 고개를 저으려다 흠칫하며 참아냈 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아주 지독하게 변해버렸을 것이 다.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승도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억지로 그 얼굴을 가린 두 손을 착 착 걷어냈다. 한 손에 틀어쥔 양 손목이 머리 위 매트리스 위에 고정되었다.
“엉망으로 뚫어달라고 말해봐.”
이승도는 고집스레 눈을 감고 버텼다. 태국영은 그 꽉 닫힌 눈꺼풀을 여러 차례 할아 올리며 빈손으로 이승도의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충혈된 듯 발갛게 솟아있던 젖꼭지 가 엄지에 스쳤다. 이승도는 저릿한 쾌감에 결국 화끈거리 는 눈꺼풀을 들었다. 태국영이 기다렸다는 듯 코끝으로 콧 등을 비비며 속삭였다.
“해봐. 한 번만.”
능청맞게 웃고 있지 않았다. 태국영은 모처럼 능숙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 나이 또래에 맞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조금은 안달하고,조금은 애타 하고,조금은 초조해하 는 것 같았다.
제 품에 안겨들지 못해 애원하던 작은 짐승의 기억이 불현듯 선명하게 뇌리를 덮쳐왔다. 그 어린 아기가 완숙 한 성체가 되어 저를 벗겨 먹을 듯 구는 것도 잊은 채 마음 이 애릇해지고 말았다.
이승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벙긋 움직였다. 예민 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말을 했는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태국영은 바짝 얼굴을 맞대 었다.
“잘안들려.”
태국영은 귀두를 구명 위로 꾹꾹 눌렀다. 수줍게 벌어 진 은밀한 통로는 제 것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았다. 그러 나 우연인 척 굵은 성기 끝으로 그 속살을 조금 벌리고 들 어가면,그 좁게 다물린 입구는 먹어치우려는 듯 급박하 게 요동쳤다.
이승도는 미치게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얼굴을 하고서 도 꿋꿋하게 태국영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지긋이 애 릇한 눈빛이 오고 갔다. 태국영은 불현듯 눈가를 찌푸렸
“하아… 못 참겠네.”
그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제 성기를 단번에 삽입했다.
“아…아아!”
노글노글 늘어져 있던 이승도의 몸이 일시에 굳어들었 다. 태국영은 눈은 허공에 훤히 펼쳐 놓은 이승도의 둔부 사이에 고정되었다. 힘겹게 벌어지는 구명을 꿰뚫은 제 성 기가 그 안으로 발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부리까지 먹혀들어갔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이 승도의 고환이 제 아랫배에 짓뭉개질 정도의 완전한 결합 이다.
한계까지 벌어진 속살은 격렬하게 울렁거리며 달라붙 었다. 태국영은 어금니를 꽉 문 채 한껏 고조된 숨을 잘게 끊어 뱉어냈다.
달이 꽉 차오르면 이승도는 접촉부를 넓히기 위해 늘 팬티 하나만 입고 저를 품었다. 그때마다 가시덤불처럼 돋 아난 후각은 은밀하게 홑부려지는 향내를 고문처럼 받아 들였다. 이렇게 발가벗겨서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정도였다.
거기에 우연하게도 배란 때와 겹치기라도 하면 그야말 로 지옥이었다. 잠귀나 어두우면 사지를 벌려 놓고 그 위
에서 자위나 하는데 이승도는 예민해서 그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제가 미쳐 날뛰다 기어코 이곳을 범했을 때,그 기 억은 조각난 꿈처럼 불분명하고 흐릿했다. 차라리 다행이 었다. 이 황홀하게 이어지는 감각을 생생히 기억했더라면 참지 못하고 이 여린 몸뚱이를 또 부수고 말았을 테니.
“승도야. 서방님 좆 끊어지겠어. 힘 좀 배.”
이승도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원망스럽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태국영은 말분이 아니라 조금은 괴로운 듯 눈가 를 찌푸리고 있었다. 정말 아픈 듯이 보여 아래에 힘을 배 려 애썼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었다.
찢어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벌어져 있었다. 마치 골반 전체가 양옆으로 쪼개지는 듯한 압박감에 숨조 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비틀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 랐다. 안절부절못하며 끙끙거리는 뺨에 그의 팔뚝이 닿았 다. 얼굴 옆에 짚은 그의 팔엔 험악한 핏줄이 돋아나 있었 다. 이승도는 그의 팔을 부들거리는 손으로 더듬어 올라가 며 솔직하게 울먹였다.
“아파,국영아…… 아파.”
태국영은 심호흡을 하며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뇌가 온
통 녹아내린 듯 물컹거렸다. 깨지고 홑어지려는 이성을 억 지로 끌어모아 이승도의 한 손에 단단히 깍지를 얽었다.
꽉 쥔 손을 끌어와 손가락 끝을 하나하나 깨물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기분 좋게 해 줄게.”
뒤이어 충격으로 벌어진 채 굳어 있는 이승도의 입술에 도 조심히 키스했다. 깨물지 않고 가만히 비비자 이승도 는 울먹임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아기 새처럼 빠끔대는 것을 정성껏 발았다.
깍지 푼 손으로 톡 부풀어 오른 유두를 매만졌다. 아랫 배에 찰싹 붙은 성기도 다른 손으로 감싸 주물렀다.
고통으로 시들어있던 성기가 점차 힘을 받아 크기를 키 웠다. 그리고 그 쾌감이 척추에 찌릿찌릿 닿자 자연히 몸 에서도 차춤 힘이 빠져나갔다.
이승도는 완전히 발기했을 때 달짝지근한 비음을 냈다. 태국영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더 깊이 맞물렸다. 혀와 혀가 맞닿았다. 간질간질 비벼지던 젖꼭지가 자극적으로 이리저리 튕겼다. 입천장 깊은 곳을 혀끝으로 짓눌렀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설소대에 고였다가 밖으로 흘렀 다.
“하악…… 응……
이승도는 아직 살이 적나라하게 섞이는 것보다 키스와
애무에 더 느꼈다. 아직 성애의 지독한 쾌감을 모르는 순 진한 몸뚱이는 자극적인 키스에 다시금 애액을 붐어냈다.
점막을 꽉 채운 성기가 미끈거리는 액체에 아늑히 젖어 들었다. 하복부에서 저릿하게 솟은 쾌감이 일시에 정수리 까지 꿰뚫었다. 태국영의 미간이 경련하며 좁아들었다.
목 안으로 거친 신음을 삼킨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 였다. 반쯤 배낸 상태로 내벽을 진득하게 긁었다. 이승도 는 다시금 크게 뜬 눈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팔뚝 에 긁히는 손톱이 하얗게 질렸다.
언제까지 여유로운 척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오 래 기다렸던 만큼 열띤 흥분이 폭발할 듯 몸 안을 휘돌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짓눌러 그 안을 엉망으로 들쑤시고 싶 은 욕망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인내를 씹어 삼키는 관 자놀이로 퍼렇게 핏줄이 불거져 올라왔다.
참지 못하고 다시 부리 끝까지 쑤셔 올렸다. 그 순간 깊 은 곳에 숨어 있던 전립선이 강하게 눌렸다. 아랫배가 짓 눌릴 만큼 깊이 삽입해서야 그곳에 닿았다.
“흐윽!”
이승도가 예리하게 목을 울렸다. 시트를 비비며 고통스
레 휘젓던 뒷머리도 그대로 정지한 채 바들바들 떨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부서졌다. 찔끔 토해진 정액을 느끼지 못
하고 어깨만 떨었다.
“어찜 딱 여기에 있어. 내 좆 사이즈랑 꼭 맞잖아.”
태국영은 기묘하게 어두운 눈을 일렁이며 중얼거렸다. 더는 한계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거칠게 픽픽 쳐올렸 다-
이승도는 참을 수 없는 감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눈동 자에 덧입혀 있던 물막이 작은 물방울로 쪼개져 사방에 튀 었다.
그가 한 번씩 밀어 올릴 때마다 미지의 부스러기들이 소나기처럼 전신에 떨어져 내렸다. 바늘 끝처럼 살갗을 예 리하게 파고드는 감각이 두려웠다. 불쏘시개로 지져지는 고통 속에서 믿을 수 없게도 쾌감이 피어올랐다.
“아,아! 국,국영아! 아아…흑!,,
이승도는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렸다. 잠깐만,잠깐,다급하게 외쳤으나 태국영의 시선은 구명 사이를 드나드는 제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 다-
어둡게 물결치는 눈동자는 속살을 쑤시는 자신의 성기 가 음란하게 젖어서 나올 때마다 동요했다. 무섭도록 집중 한 그의 숨소리가 사냥 중인 맹수처럼 거칠게 고조되었다.
“하…아옷……홋! 국영아,나 좀……■,,
꼬리뼈부터 목덜미까지 절절한 불꽃이 튀고 있었다. 허 리 아래로만 미칠 것 같은 기류에 휩쓸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이리……흐으…이리 와.,,
이승도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태국영은 무의식적으로 그 명령에 따랐다. 연달아 취약한 부위를 짓이기면서도 착실히 고개를 내려 이승도의 어깨 를 깨물었다. 순식간에 잇자국이 벌겋게 올라왔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머리를 와락 안았다. 축축하고 다정 한 습지가 뱀처럼 유연하게 살결 위를 유영했다. 어깨에 서 목으로,목에서 쇄골로,그리고 가슴까지 배곡하게 붉 은 자국을 남기며 내려갔다.
또렷한 목적을 가진 동선이었다. 음란한 울혈은 이승도 의 상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잘한 생채기들을 빠짐없 이 덮어갔다.
늘 한입에 삼키고 싶었던 몸뚱이가 반항 없이 제 흔적 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퉁명스럽던 입술도 지금은 씹어 먹 고 싶을 모양으로 벌어져 있었다. 격렬히 흔들리며 본능적 으로 리듬을 맞추는 허리는 그저 꿈에서나 상상하던 것들 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젖은 눈꺼풀을 발았다.
“우리 승도 너무 예쁘게 우네.”
탁하게 갈라진 음성은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는 이 승도의 늘어진 다리를 들어 제 허리를 감싸게 했다. ‘꽉 안 아 줘.’ 그 말에 이승도는 녹아내리듯 엉덩이를 움찔거리 며 그의 허리를 꽉 옭아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열꽃 핀 뺨을 잘근잘근 씹었다. 허 리 놀림은 여전히 난폭했다. 그 아래 깔린 여린 몸뚱이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속수무책으로 덜컥거렸다 .
‘‘하,하아…….,,
이승도는 델 것처럼 뜨거운 숨을 힘겹게 헐떡였다. 초 점이 풀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귓바퀴를 채웠다.
그의 성기는 마치 온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어딘가가 찢어지고 부서지는 것만 같은 그 느낌이 무섭도록 가학적 인 쾌락을 가져왔다.
이승도는 두려웠다. 도착적인 쾌감을 감당키가 힘들어 제가 어떻게 변할 것만 같았다. 병자처럼 떨리는 팔로 그 의 단단한 등을 끌어안았다.
동물적인 근육들이 제 팔 안에서 역동적으로 숨 쉬고 있었다. 어쪄면 이 움직임을 상상하며 저는 얼굴을 붉혔을 까. 그의 등을 넋 놓고 보던 제 표정이 상상 됐다.
태국영은 정성스럽게 입술을 물어왔다. 이승도는 적극
적으로 그를 부둥켜안고서 혀를 얽었다. 조심스럽고 다정 한 키스는 야만적인 허리 아래와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그 간극이 전신을 달콤하게 했다.
그는 난폭하게 들쑤시던 리듬을 조금 낮추며 고개를 들 었다. 부리까지 들어찬 것이 안에서 묘하게 잔 진동을 일 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탐욕스레 번들거리며 진득한 눈빛 을 내리꽂았다.
“이제 내가 많이 좋아졌어?”
대답 대신 끙끙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신음 소리 는 제가 들어도 너무 끈적하고 나른했다. 억지로 벌어진 속살에 격통을 느끼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를 보면 설레? 그래서 요즘 자꾸 얼굴을 붉혔어? 오
늘은 술김에 용기 내서 나를 유혹했어?”
으 ”
?, ? ■
이승도는 젖은 눈을 내리깔며 애매하게 목을 울렸다.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굳이 묻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 야 할지 몰랐다. 젖꼭지를 부드럽게 비비던 손이 심장 위 를 크게 덮어 왔다. 그는 말을 잃은 입술 대신 날뛰는 심 장 고동을 훔쳐갔다.
“내 냄새를 맡으면 아기집이 반응해서 아래가 간질거렸 어? 내가 딱딱하게 세운 좆으로 네 구명을 꽉 채우고 흔들
어 줬으면 하고 바랐어?”
“그,그만해……■,,
이승도는 도저히 낯 뜨거워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태국영은 한 손으로 두 손목을 가분하게 낚아챘다. 내벽에 푹 파묻힌 성기가 얄게 들락거렸다.
이승도는 핀에 꽂힌 곤충처럼 무력했다. 부드러운 손끝 이 야속하게 다물린 입술을 덧그려 왔다. 풋내와 농익은 향을 동시에 풍기는 그것을 용기 내어 깨물었다. 손가락 은 부드럽게 더 밀려 들어와 아랫니 안쪽을 문질렀다. 이 승도는 혀끝으로 그것을 따라 열심히 할아갔다.
“나랑 이런 짓하고 싶었어?”
이승도는 할딱이며 그의 손을 깨물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내일 일어나면 다시 모른 척 비싸게 굴 거야?”
태국영은 흠뻑 젖은 손가락을 배내며 다시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속살을 빠듯이 벌린 채 둥글게 돌던 성기가 다시 쑥 빠져나갔다가 완전히 삼켜졌다.
이승도는 고개만 한 번 저었다. 그것으로 부족할 것 같 아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꽉 조였다. 가만히 올려다보 며 이 정도에서 끝내면 안 되겠나고 눈으로 묻자 그의 눈 가에 서서히 웃음이 맺혔다.
그가 기습적으로 젖꼭지를 발았다. 이승도는 할딱이며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피와 매끄러 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다음엔 말로 해줘. 응석 부리는 거 안 받아주면 난폭해 질 거야.”
""?■
이승도는 다시금 어물쩍 넘겼지만 태국영은 그것으로 일단 만족했다. 그는 다시금 뜨거운 허릿짓에 열을 올리 기 시작했다. 젖꼭지를 쓸어 올린 혀끝이 그대로 가슴골 을 타고 올라갔다. 그의 손짓은 뱀처럼 미끌미끌하게 늑골 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아아,이승도는 정신없이 헤매며 빠르게 눈을 깜박였 다. 나풀거리는 교성이 허공에 홑부려졌다. 그에게 가장 솔직하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이 목울음분이었다.
“우리 승도는 엉덩이도 참 예쁘네. 구명은 더 예쁘고.”
태국영은 이승도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벌렸 다. 퍽퍽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희고 매끈한 엉덩이가 발 갛게 변해갔다. 이승도는 손이 자유로워지자 다시 얼굴을 가렸다. 제발 그만해,흐느끼듯 애원했지만 원하는 대답 을 하나도 못 들은 태국영은 끈질기게 웃었다.
“체모도 별로 없어서 가랑이가 아주 부드러워.”
태국영은 이승도의 치골과 아랫배를 무례하게 쓰다듬 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회음부와 핑크빛 구명은 마치 사내 를 홀리기 위해 일부러 관리라도 한 것처럼 고왔다. 까슬 해야 할 음모도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고 그마저도 숱이 적 었으며,전립선을 콱콱 자극할 때마다 찔끔찔끔 정액을 흘 리는 성기도 씹어 먹고 싶을 만큼 예븐 빛깔이었다.
“제발…그만……! 하악!”
이승도는 몸서리를 치며 애걸하다가 번쩍 놀라 몸을 웅 크렸다. 태국영이 갑자기 강하고 빠르게 허리를 짓쳐 올리 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는 여유로움을 가장하지 못했다.
“한 번 쌀게. 좀 더 젖으면 좀 더 좋아질 거야.”
사실은 내가 더 못 참겠어,갈라진 목소리는 거친 날숨 이 섞였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귓불을 잡아 뜯을 듯 잇새 로 물고 귓구멍을 할았다. 내벽을 벌리고 온갖 곳을 쑤시 는 그의 성기는 난잡한 소리를 흘렸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다리가 붙들리고 양옆으로 크게 벌 어졌다. 잠시 잔잔해져 있던 쾌감이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 럼 거세게 타올랐다.
뱃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그의 성기를 꽉 물고 오 물거리는 제 구명 안이 광란하듯 꿈틀거리는 것이 선명하
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그저 낯설면서도 너무 가혹할 만 치 황홀해서,금세 울음이 터졌다.
“국영아…앗……! 흑,웃!,,
붕 뜬 허리 아래는 축축했다. 제가 흘린 애액이 그만큼 흘러넘친 탓이었다.
태국영은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불 투명한 눈동자에 집요한 시선이 여물었다. 그의 동공은 바 늘처럼 좁아졌다가 뭉근하게 퍼지길 반복했다.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착취해가고 있었다. 열락에 휩 쓸려 일그러진 표정을 할아갔고,달게 터지는 교성을 씹어 갔고,매달리는 손길을 끌어갔다.
불기둥처럼 단단한 열기로 맥박치는 성기가 내벽을 사 정없이 때렸다. 한 방향이 아닌 여러 곳이 정신없이 휩쓸 렸다. 그를 탐욕스럽게 삼킨 엉덩이는 잔뜩 수축한 채로 벌벌 떨었다.
어깨를 감싼 포옹이 깊어졌다. 뼈가 부대낄 듯 아팠다. 이승도는 그의 등을 할퀼 듯이 조여 안았다. 힘이 들어가 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그의 허리에 감아 매달렸다. 그렇 게 매달리지 않고서는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짐승처럼 날뛰는 그의 움직임에 침대가 버거운 듯 삐걱 거렸다. 눈이 고장 난 듯 시야가 번쩍거렸다. 이승도는 뜨
겁게 부딪쳐 오는 그의 입술을 허겁지겁 삼켰다.
교성과 신음과 탄식이 그 습지 안에서 뒤엉켰다. 귀두 까지 아슬아슬하게 나갔던 것은 자비 없이 곧장 끝까지 박 혔다.
공교롭게도 깊이 묻힌 쾌락점이 태국영을 더욱더 사납 게 만들었다. 가장 깊은 곳을 미친 듯이 파고들 때마다 이 승도는 묽어진 액체를 찔끔찔끔 토해냈다. 섬세하고 다정 하게 어루만져줘야 하는 이승도는,그렇게 지독하게 야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몸뚱이를 이제껏 용케 숨기고 있었 다.
“흐…으응,응…….,,
이승도는 그의 것이 깊이 박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구 명을 조였다. 빈 곳을 다시 꽉 채워주길 바라는 듯 몸은 솔 직했다. 아랫배가 얼얼하고 허리 아래는 무지근하게 감각 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샘솟는 날카로운 쾌 감만은 선명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세차게 입 안을 유린한 혀가 목구명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때부터 이승도는 그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비음 섞인 교성만 정신없이 내질렀다.
태국영의 손은 부산했다. 뺨을 억세게 어루만졌다가 팔 꿈치를 붙들고 그 안을 이로 긁었다. 겨드랑이 근처의 여
린 살을 씹히며 젖꼭지를 비틀렸다.
허리 아래 넣은 팔뚝은 단단했다. 그의 손은 엉덩잇살 을 물었다가 제 성기를 물린 구명을 세차게 문질렀다. 교 접부는 그것마저 삼키려는 듯 움찔거렸다.
잔인하게 속살을 벌리는 그의 것은 무자비했다. 그조차 도 어떻게 통제를 할 수 없는 듯 험악하게 날뛰었다. 엉덩 이뼈가 깨지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런 두려움도 거대한 쾌 감에 바스러졌다.
그의 입술이 지난 자리는 울혈도 모자라 피까지 맺혔 다. 태국영은 얄게 배인 핏물을 할으며 목 안을 울렸다. 뒤 엉킨 몸뚱이가 세찬 격랑에 휩쓸린 듯했다. 대화가 사라 진 공백엔 미개한 짐승들처럼 난잡하게 헐떡이는 숨결로 채워졌다.
깨진 거울 통해 보는 세상처럼 눈앞을 분간할 수 없었 다. 이승도는 어린아이처럼 울며 뺨을 시트에 정신없이 비 볐다. 이성은 날아갔고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섹스 하나로 몸도 정신도 빠르게 퇴화한 기분이었다. 눈물과 타액이 한쪽으로 줄줄 흘렀다.
태국영의 손이 턱을 잡아채 똑바로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정욕에 넘실대는 눈동자가 저를 빤히 노려보았다. 발정 온 날짐승
의 노골적인 향기가 일순 공기 중에 폭발하듯 퍼져갔다.
콰악.
입술이 물렸다. 목덜미가 그의 손아귀에 틀어 잡혔다. 새빨■간 혀가 명울진 시야 안에서 선명하게 움직였다. 그 의 혀는 얼굴에 흐른 물기를 남김없이 할아먹었다.
세차게 부딪쳐올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허벅지 와 종아리에 느껴지는 그의 허리가 돌처럼 경직되었다. 퍼 억,엉덩이가 징 울릴 만큼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절정에 다가선 그의 혀와 성기는 난폭하고 음탕한 동선 을 그렸다. 정신없이 떠밀린 끝에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 기 직전,그의 손이 정수리를 덮어왔다. 낮게 갈라진 그의 탄성이 진득하게 뭉개졌다. 이승도는 입을 크게 벌려 그 의 표정과 신음 소리와 호흡을 정신없이 삼켰다.
“으…흐으 ”
느껴졌다. 그의 정액이 가장 깊은 곳에 뜨끈하게 쏟아 지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강렬한 오르가즘이 전신 을 옥죄었다. 그의 방사는 그간 참았던 만큼 강렬하고 뜨 거웠으며,또한 길게 이어졌다.
태국영은 지고한 쾌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늘어지는 그의 신음이 입 안을 휘돌다가 허공으로 흐드러 졌다. 그가 키스를 멈추고 턱을 조금 젖혀 든 탓이었다.
“아…….,,
황홀하게 젖어드는 그의 얼굴에 완벽히 홀리고 말았다.
이승도는 제 아랫배가 무섭도록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파 정 뒤 서서히 크기를 줄이는 그의 성기를 아쉽다는 듯 쥐 어짜는 제 구명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낸 태국영이 긴 한숨을 지으 며 입술을 내렸다. 그는 이승도의 젖은 눈가를 훔쳐내고 가녀린 목을 잘근잘근 물었다. 체질이 냉하고 땀이 없는 이승도의 몸뚱이엔 모처럼 땀기가 배어 축축했다.
오르가즘의 여진에 흠뻑 취해있던 태국영은 한참 뒤에 야 뺨을 맞대 비비며 속삭였다.
“우리 승도,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죽여주네.”
이승도는 저속한 말에도 명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반 응할 힘이 없었다. 아니,무슨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 다. 온몸을 후려치는 오르가즘은 그보다 자신이 더 길게 이어진듯했다.
간헐적인 떨림을 보이는 몸뚱이를 그가 강하게 품어 안 았다. 마주한 가슴은 누가 더 발리 뛰나 내기라도 하듯이 세차게 고동쳤다.
“얼마나 더 싸면 우리 승도 아기집이 가득 차려나J “…더…더 해?”
이승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웅얼거렸다. 두려움도 설 램도 없는 백치 같은 표정과 말투였다.
“당연하지. 이제 시작인데.”
물론 오랫동안 수절하며 애만 태웠던 태국영은 이승도 가 눈물을 부리며 애원을 한대도 묵살할 생각이었다. 이 하룻밤만큼은 제게도 그럴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 다-
질퍽하게 젖은 교접부가 다시 아릿아릿 벌어지고 있었 다. 완전히 발기하기도 전에 그는 성급하게 허리를 움직였 다-
다시금 흐리게 끓어오르는 신음이 그의 입 안에서 뒹굴 었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여린 점막을 들쑤시며 진액 을 흘렸다.
하아,태국영은 기분 좋게 한숨을 지으며 이승도의 얼 굴에 남아 있는 눈물을 혓바닥으로 비볐다. 완전히 발기 한 성기가 전립선을 뭉툭하게 밀어 올렸다. 이승도는 기 력 없는 허리를 휘었다.
미끈미끈하게 풀린 구명 안에서 움직이는 그의 것은 참 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방금 전의 섹스가 날뛰는 짐승처럼 거칠었다면,지금은 욕구를 맘껏 풀어헤친 짐승의 농밀한 교미 같았다.
“하…아응……흑……
이승도는 정액으로 더럽혀진 몸뚱이를 바들바들 떨었 다. 붉은 자국이 낭자한 허리가 음란하게 뒤틀렸다. 태국 영은 한 손에 모아 쥔 이승도의 손목을 훌쩍 끌어올렸다.
이승도는 무지근한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다 싶더니 결합이 말도 못하게 깊어 졌다. 본능적으로 달아나려는 허리를 뜨거운 손이 포박해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았다.
“홋……! 아…국여…아,싫……으옷…….,,
이승도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날카로운 교성을 흘렸다. 몸이 붕 떠 있는 듯 불안정했고 마치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막연한 두려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어깨 에 얼굴을 기댔다.
태국영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이승도의 목덜미를 발 았다. 그는 침대 헤드에 베개 두 개를 겹쳐 놓고 그 위에 이승도의 상체를 걸쳐 놓았다.
푹신한 쿠션이 등을 지지하자 거칠었던 호흡이 조금은 돌아왔다. 그러나 반쯤 누운 자세로 그의 치골에 엉덩이 를 깔고 있는 자세가 너무 민망해 머뭇머뭇 다리를 모았 다. 태국영의 손이 느긋하게 허벅지를 붙들어 더 크게 벌 려 놓았다.
“부끄러워? 불 꺼줄까?”
불을 끼도 그의 밝은 눈은 어둠 속을 낱낱이 꿰뚫을 것 이다. 보지 못하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런 건 불 공평했다. 이승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태국영은 베개 위 에 조금 떠 있는 허리를 나긋하게 주무르며 속삭였다.
“한 번 뺐으니까 부드럽게 할게.”
“응 ■”
이승도는 젖은 뺨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그의 목에 팔 을 감았다. 입술을 내밀어 그의 윗입술을 머금었다. 작게 발다가 혀로 콕콕 누르기도 했다.
말뚝처럼 아래에 박혀 있던 성기가 다시금 부드럽게 내 벽을 쓸었다. 빠듯하게 들어찬 채 밀어 올리듯 속살을 탐 했다. 이승도는 헐떡이며 고개를 젖혀 들었다. 흐릿한 눈 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시야가 맑아졌다.
이승도는 그의 몸을 끌어와 뺨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속눈썹 짙은 눈시울이 스르르 벌어졌다. 블랙홀처럼 한없 이 깊고 어둡게 물결치는 눈동자였다. 이승도는 뱃속이 울 렁거리는 것이 술 때문인지 그의 눈빛 때문인지 분간할 수 가 없었다.
“국영아……
이번엔 이승도가 부르고,태국영이 대답했다. 아랫구명
을 틈 없이 막은 그의 성기는 안에다 쏟아놓은 정액을 흐 르지 못하게 했다. 조금씩 빠져나가 다시 밀고 들어올 때 마다 음탕한 소리가 비벼졌다.
사실은 이렇게 야한 짓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 저 조금 용기를 내서 그의 상처 많은 마음을 어루만져주 고싶었던 건데…….
이승도는 그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그리고 한 참을 망설이다 그의 눈을 빤히 마주 보며 고백했다.
“좋아해.”
그라면 아마 눈치채고 있겠지.
이제 제가 많이 좋아졌나고 확신처럼 물었던 것도 기억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국영은 일순 뒷머리를 후려 맞은 듯이 시원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승도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며 그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나 되게 비싸게 구는 거 알지? 동정 같은 거…… 분위 기에 휩쓸린 거,그런 거 아니야.”
허리를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뒤늦게 움직였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이 등허리를 느리게 훑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윽고 강하게 조여 안았다. 뼈가 조이듯 아팠으나 불평하 지 않았다.
“내가 너 좋아해서 끌려와 준 거야. 그러니까……
이승도는 수줍게 붉어진 눈가를 그의 목에 틈 없이 붙
이며 뒷말을 이었다.
“다 받아줄게. 오늘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남은 밤은 길었고,그 시간 동안 이승도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몸을 열어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싶었다. 마지막에 는 아마도 제발 그만하자고 엉엉 울게 될 것이 뻔했으나 두렵지 않았다. 그저 어수룩하게 굳은 혀를 대신해 그렇게 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태국영은 빈말로라도 괜찮다 하지 않았다. 그 는 역시 주는 것은 착실히 잘 받아먹는 남자였다.
부은 눈을 겨우 떴을 때,한여름의 태양은 이미 중천에 걸려 절정의 볕을 부려대고 있었다. 무심결에 더듬은 곁 은 온기만 남은 채 텅 비었다. 약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 바 람만 부드러운 손길처럼 머리칼을 간질였다.
몸은 놀랍도록 보송보송했다. 그가 기절한 저를 씻겨 준 기억이 났다. 푹 젖었던 시트도 새것처럼 포근했다. 아이들…….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치는 건 제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
니기 바븐 아이들이었다. 회식 후에 기절한 채로 옮겨진 터라 몸을 살펴주지도 못했다.
급한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 았다. 혹사당한 아랫도리가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라 무지 근한 동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간밤 태국영은 형상만 인간이었지 정 말 발정기 짐승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했더 니 정말 뼛속까지 발라먹으려고 들었다.
이승도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조심히 바닥에 발을 디 뎠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다행스럽게도 직립보행이 가능 한 상태였다. 거울 앞에 서서 보니 팬티만 입혀 놓은 몸뚱 이엔 외설스러운 붉은 자국이 배곡했다. 그것이 마치 의도 한 것처럼 흐린 흉터들을 완벽히 덮은 상태였다.
어제 그렇게 작정하고 온몸을 발더 니만.
그 자신의 눈먼 발톱들이 낸 자국들이 보기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이승도는 붉은 꽃가지처럼 아랫배에 남은 가 장 긴 자국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 았던 아이 태국영은 늘 제게 애정을 갈구했다. 제가 돌려 준 것은 거의 방치였기에,녀석은 애원하다가 화를 내다 가 마구잡이로 달려들기도 했다. 제 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흔들은 모두 그 꼬맹이 짓이었다. 깊이 팬 자국은
거의 없어 그저 희끗하게 남은 정도지만,태국영은 그조 차 싫었던 것 같았다.
근데 애는 어딜 간 거야.
사이드테이블에 곱게 개켜 놓은 옷을 입으며 새삼 의문 을 느꼈다. 잠결에 얼굴을 깨물고 몸을 더듬어 대는 통에 몇 번이고 잠에서 깼었다. 그때마다 태국영은 저를 가슴 에 품고 있었다. 어슴푸레 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들어 오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묵직하게 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방문을 열 고 나갔다. 거실에는 익힌 음식 냄새가 열게 흐르고 있었 는데 주방에는 식사를 한 흔적이 없었다. 태국영이 애들 식사를 살뚤히 챙겨주고 설거지까지 했을 리도 없었다.
이승도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 다. 그때 막 2층에서 콩콩거리며 누군가가 내려왔다. 반사 적으로 눈을 들었다가 흠칫 입을 벌렸다. 계단을 밟고 내 려오는 것은 거대한 이불 더미였다.
“누,누구세요?”
얼떨떨하게 물으니 발 달린 이불이 계단을 마저 내려오 며 반갑게 대답을 해 왔다.
“어머,승도 군! 나예요!”
“…유모?”
이승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모는 안고 있던 이불 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두고 환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가주님께서 오늘 저를 부르셨지 뭐예요. 승도 군 몸이 많이 안 좋으니 와서 집안일 좀 해 달라고요. 거동은 좀 괜 찮아요?”
“…아. 네에.”
이승도는 애매하게 웃으며 쑥스러운 듯 뒷목을 쓸었다. 축축하게 빛나는 눈꼬리 위로 야트막하게 홍조가 번졌다. 눈꺼풀도 입술도 모두 붓고 목소리는 갈라져 있고,티셔 츠 위로 훤히 드러난 목에는 울혈이 가득했다. 이미 유모 는 은밀하고 격렬했던 흔적들이 빼곡했던 시트까지 다 본 상태였으나,부끄러움 타는 이승도를 위해 말을 아꼈다.
“배는 안 고파요? 오늘 제가 아주 진수성찬을 준비했는 데.,,
“아뇨. 식사는 조금 있다가…… 그런데 국영이랑 아이 들은 어디에 있어요?”
“아. 세 분은 지금 마당에 나가 계세요.”
“마당에는 왜요? 날도 더운데.”
“제가 온 김에 승도 군 자고 있던 방만 배놓고 싹 대청 소를 했거든요. 기왕 하는 거 이불발래도 한꺼번에 하는 중이에요.”
이승도는 이불발래와 마당과의 상관관계를 명하니 짚 어봤으나 좀체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유모가 깔깔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끌려가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갔 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 뜨리고 말았다.
“장관이네요.”
지금 마당에는 한 남자와 한 아이와 한 마리가 열심히 이불발래 중이었다. 태이경은 고무대야 안에서 퐁퐁 튀어 오르며 즐거워했고,여은태는 손잡이에 앞발을 나란히 올 려두고 뒷말만으로 대야 안의 이불을 꾹꾹 밟느라 바빴다. 가장 먼저 이승도를 발견한 태국영은 이것이 기회다 싶어 대야에서 나오려다 따갑게 잔소리를 들었다.
“가주님! 농땡이는 애들 교육에 안 좋아요! 솔선수범을 보이셔야죠!”
태국영은 깊은 한숨을 지으면서도 유모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덩달아 ‘엄마!’ ‘선생님!’하며 달려오려던 아이들 도 찔끔하며 대야 안에 갇히고 말았다. 괜히 눈치가 보였 다. 저도 원가 도울까 고심하던 이승도는 유모의 편애로 파라솔에 앉게 되었다.
“평소에 일 많이 할 게 뻔한 승도 군은 이런 날 그냥 노 는 거예요. 자,화채 만들어 줄 테니 한 그릇 하면서 편히
있어요. 이 유모가 승도 군 좋아하는 과일 엄청 많이 싣고 왔어요.”
유모는 파라솔 옆에 둔 아이스박스를 열어 그 자리에 서 화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볼에 수박을 비롯한 과일들을 푹푹 떠내고 우유와 연유,체리가루를 섞으니 금 세 뚝딱 완성이 되었다. 유모는 큰 그릇에 몇 국자 퍼 담 은 뒤 얼음을 넣어 이승도에게 건넸다.
과일 향기를 느낀 순간부터 먹이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던 이승도는 냉큼 받아들었다. 마침 식욕은 별 로 없고 시원한 게 먹고 싶었던 참이었다. 완벽하게 반가 운 메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릇째로 일단 몇 모금 들이키 자 상큼한 맛이 목으로 넘어가며 정신이 번쩍 났다.
“와,엄청 맛있어요!”
이승도는 격하게 감탄했다. 유모는 눈동자가 깊이 파묻 힐 만큼 웃으며 그의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우리 도련님도 화채에 체리가루 넣으면 엄청 잘 먹거 든요. 승도 군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잘 먹을게요. 아,유모도 같이 먹어요.”
유모는 밥도 많이 먹고 과일도 많이 먹어 배부르다고 했다. 그녀는 거실에 들어가 아까 가지고 내려온 마지막 이불을 태국영의 앞에 마저 실어다 놓았다. 또 한 아름 늘
어난 일거리를 태국영은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허나 유 모를 보는 이승도의 눈이 마치 어머니를 보는 듯 아련하 니 불평을 내뱉을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난 그럼 승도 군 침실도 마저 청소하고 올게요. 빈속 에 찬 거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조금만 먹어야 돼요. 알 았지요?”
따뜻한 당부의 말에 이승도는 양순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고마워요,하고 말하니 그녀는 아주 상큼하게 ‘별말씀 을.’하며 총총 실내로 들어갔다. 이승도는 한 그릇을 순식 간에 비워내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이경아. 은태야.”
두 아이들의 귀가 일제히 쫑긋 섰다. 기대 가득한 녀석 들의 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잠깐이리오?. 이거 먹고 해.”
그치만,하며 두 녀석은 서로를 잠시 마주 보았다. 그러 나 이내 에라 모르겠다며 대야에서 훌쩍 뛰어나왔다. 여은 태가 몸을 세차게 흔들며 물기를 털어내는 동안 태이경이 먼저 우다다 달려와 안겼다. 이승도는 아이를 허벅지에 올 려 꼭 안아주었다.
“우리 이경이 꿀잠 잤어? 아픈 데는 없었고?”
“응. 형아랑 사이좋게 끌어안고 푹 잤어요. 아픈 데도
없었고요. 엄마는?”
나는 물론 지옥 같은 잠을 잤지.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적당히 ‘나도 잘 잤 어.’라고 대답해 주었다.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아 이에게 쪽쪽 입 맞춰주던 때,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 끝으로 목을 긁어 왔다.
“엄마. 모기가 물었어요?”
“응?,,
“여기 발개. 여기두.”
작은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여기저기 꾹꾹 눌러 왔다. 이승도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감쌌다. 태이경은 천진한 눈망울을 크게 깜박이며 가렵겠다고 걱 정했다.
“모기 나쁘다. 아빠가 자기 전에 다 잡아줬는데 어디로 들어왔지?”
“으응…… 그러게. 어디 문틈으로 들어왔나?”
굉장히 곤란해 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때였 다. 물기를 다 날려버린 여은태가 날 듯이 달려와 곤경에 처한 이승도를 구했다.
[선생님. 내가 아가 좋은 꿈꾸라고 폭 안아줬어. 잘했
“응. 잘했어. 우리 은태 몸 좀 볼까?”
이승도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태이경을 바닥에 두 었다. 여은태는 사양하지 않고 바닥에 누워 연분홍빛 배 를 까 보였다. 이승도는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몸을 어루 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여은태는 내 심 이승도의 목에 난 자국을 훔쳐보았다.
저게 그거구나. 사랑의 입맞춤.
여은태는 키스 마크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태국영은 언 젠가부터 조금씩 저를 마주 보고 꽤 험악한 투로 성교육 을 시작했다. 암컷과 수컷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아 기는 어떻게 생기는지,사랑하는 암컷을 어떻게 대해야 하 는지 등등.
그답지 않게 아주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들이었다. 그럼 에도 태국영에게 기이하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그때마다 원가 협박하는 말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특히나 문제의 그 발정기를 설명해 줄 때는 대 놓고 협박 질이었다.
저희들의 발정기는 보통 성년식 이후에 찾아오지만,드 문 경우 그 전으로 당겨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경우에 는 몸 상태가 불안정하기에 아주 큰 사고를 칠 수 있으니 반드시 제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었다.
「도움을 청하면 뭘 어떻게 해주는 건데?」
당연한 물음에 태국영은 싸늘히 웃으며 대답했었다. 「뭘 해주긴. 좆 세울 힘도 없게 뒤지게 패 줄 수밖에.」 물어뜯어버 리고 싶었다,진심으로.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맞게 된다면 자신은 기끼이 그를 찾을 것이다. 온몸이 부러지고 내장이 상한다고 해도 견 딜 자신이 있었다. 성체가 되기 전에 오는 발정기는 대보 름 때보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절제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만약 그럴 때 태국영 없이 이승도나 태이경이 제 곁에 있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써늘해졌다.
“어제 좀 아팠겠다. 그것도 모르고 선생님은 술에 잔뜩 취해서 돌봐주지도 못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이승도는 표정을 흐렸다. 가분해진 몸을 발딱 일으켜 앉은 여은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선생님 덕분에 이만큼 안 아프고 예 븐 동생도 생겼는데 뭐가 미안해.]
“우리 은태 다 컸네. 금방 어른 되겠어.”
여은태는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이며 이승도의 목 에 코끝을 비볐다. 이승도는 두 아이에게 화채를 나눠 먹
였고,공평하게 안아주고 만져주고 보보해 주었다. 애정 을 한껏 충전한 녀석들은 신이 나서 쪼르르 돌아가 다시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새 컵에 얼음물을 만들어 태국영에게 다가갔 다.
“덥지?”
태국영은 팔짱을 낀 채 퍽픽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눈빛이 불량하고 비틀린 입술의 곡선에선 비린내가 나는 것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는 내민 컵을 탁 낚아채 단 숨에 마셨다. 그리고 얼음만 남은 컵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왜. 애들이나 하루 종일 물고 발다가 네 서방은 아예 내일이나 아는 척하지.”
“그럴까?”
농담으로 받아치자 태국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했 다. 그는 웃는 낯으로 고른 치아를 드러냈다.
“한번 해 보?,어디. 꼬맹이들한테 마누라 벳긴 일편단 심 서방님이 밤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면.”
“…농담이야.”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이승도는 눈빛으로 핀잔했다. 태국영은 얼음 하나를 입 안에서 부숴 먹으며
모른 척 두 팔을 벌렸다. 이승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 며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고,태국영은 뻔뻔하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서로를 많이 아끼고 사랑해야 아이 정서 에 좋다고 했다. 그러니까 발리 네 서방도 예뻐해.”
“누가 그런 소리를一”
“유모가 그랬어. 그렇지,아들?”
저 좋을 때만 아들 타령인 아빠지만 태이경은 충실하 게 협조했다.
“응! 아까 유모가 그랬에 나 보는 앞에서 엄마 많이 예 뻐해 주라고 그랬어요!”
녀석이 두 주먹을 꼭 쥐고 힘차게 대답하자 이승도는 할 말을 잃었다. 짐승들이나 키울 줄 알지 육아 상식은 전 무하다시피 한 그였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 는 힘들었으나,부모가 다정한 모습이 아이에게 좋은 영향 을 줄 것 같긴 했다. 이승도는 결국 쭈뼛쭈뼛 다가가 태국 영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게 다야?”
태국영이 물었다. 이승도는 뭐가 더 필요하나는 듯 고 개를 살짝 기울였다. 태국영은 한숨처럼 혀를 찼다. 그리 고 다음 순간 기습적으로 몸을 숙여 이승도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간밤에 수도 없이 서로를 탐했던 입술이 맞닿는 순간, 태국영은 집어삼킬 듯 입을 벌려 깊게 발아들였다. 뺨이 홀쭉해질 정도의 흡입에 놀랄 사이도 없었다. 이승도는 헐 떡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말았다. 벌어진 틈을 짓 쳐들어오는 혀는 마치 화마처럼 격렬하고 뜨거웠다.
두 아이들이 동시에 헉,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승도 는 뒤늦게 당황해서 몸을 버둥거렸으나 그렇게 한다고 부 리쳐지는 힘이 아니었다. 능란하게 입 안을 점령하는 살덩 이 앞에서 이승도는 무력하게 끙끙거렸다. 결국 무릎이 후 들거려 주저앉을 뻔한 지경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시원한데 들어가있어. 얼굴이 발개.”
태국영은 눈웃음을 치며 혀로 제 입술을 훔쳐냈다. 제 몸을 순식간에 데워놓은 게 누구인데. 이승도는 뻔뻔하게 구는 태국영을 분한 듯이 올려보다가 아차 하며 당황한 시 선을 돌렸다.
두 아이가 들어간 고무대야는 나란히 붙어 있었다. 태 이경은 두 손으로 제 눈을 꼭 가리고 있었고,여은태는 그 것도 모자라다 느꼈는지 제 앞발로 태이경의 눈을 한 번 더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은태의 동그랗게 뜬 눈은 그 어떤 장해물도 없이 이쪽을 호기심 가득하게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를 확인하고 새겨두는 듯한 시선이었다.
녀석의 앞에서 키스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닌 데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이승도는 몹시 민망해 져서 덥다는 핑계를 대고 실내로 도망쳐 들어가고 말았다.
태일의 본사사옥은 고고하고 화려했다. 숨 막힐 듯 빽 빽한 빌딩 숲에서 유독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빌딩 은 아치형으로 완만하게 휜 부채꼴 모양이었다. 외벽의 대 부분은 푸른빛 통유리로 덮여 있었는데,태양광을 고스란 히 반사해 낼 때는 바닷물이 잔잔하게 흔들리며 반짝이는 듯 장관을 이뤘다.
마침 장마 기세가 잠시 주춤해 날이 활짝 개니 세련된 건물의 외형이 매끈한 몸체를 마음껏 봅내었다. 아무리 그 래도 미학 감각이 전무한 태국영의 눈에는 쓸데없이 화려 한 건물에 불과했지만.
“우아! 아빠,여기가 우리 빌딩이에요?”
정문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정차하자 태이경은 차창에 딱 붙어서 탄성을 흘렸다.
“완전 예쁘다. 벽 전체가 잉어처럼 반짝반짝해요.”
녀석이라도 맘에 든다니 다행이었다. 태국영은 키를 꽂 아둔 채 차에서 내렸다. 미리 연락을 받은 경비원이 다가
와 허리를 숙였다. 태국영은 대강 인사를 받으며 보조석 에 가차문을 열었다.
막 안전벨트를 푼 녀석이 폴짝 바닥에 내려섰다. 태국 영은 자연스레 제 손을 붙잡는 아이와 회전문을 지나치며 힐긋 시선을 내렸다.
「국영아. 이경이 발육이 정상인 거야?」
어느 날 이승도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인간 아기도 다섯 살 때 보통 일 미터가 훌쩍 넘는다 고 하던데. 이경이는 아직 구십 센티 정도밖에 안 되잖아.
J
태국영은 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인간 아기랑 비교하긴 조금 애매해. 보통 우리 애들은 어릴 때 좀 늦게 자라다가 열두세 살 정도부터 쑥쑥 크니 까. 뭐,평균보다 살짝 작긴 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마.」
칠백 년쯤 전부터였던가,등대들 사이에선 금수들의 아 기를 낳지 않는 걸 당연시하고 등대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 해 그들끼리만 교접하여 아기를 낳는 풍토가 생겨나기 시 작했다. 그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권력구도의 관점에서 봐야 했다.
보통 한 명의 등대는 평균 네다섯 명의 아기를 낳았는
데,이 중에서 많아 봐야 한둘이 등대로 태어나고 운이 나 쁘면 그마저도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귀할 수 밖에 없었고,한 명의 등대가 여러 짐승들을 거느리는 것 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저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던 것이 당연했던 양자 사이가 변 질될 것이라는 것은 그때부터 예견된 폐단이었다.
강한 금수들을 얼마나 많이 품에 들이느나,얼마나 많 은 등대를 낳느냐가 곧 권력이 되는 그들에게 금수들의 아 기를 낳는 것은 조금도 득이 되질 않았다. 둘 사이에서는 절대로 등대가 태어나지 않았고,심지어 대부분의 아기들 은 인간도 등대도 금수도 아닌 기이한 상태로 나왔다.
처음부터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금수의 피 가 흐르고,등대의 능력은 없으나 동물들과 기이한 친밀도 를 이룬다. 금수처럼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처럼 약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남자아기도 아기집을 가지고 태 어나거나,여자아기가 유선 없는 유방을 가지고 태어나기 도 했다.
소속이 불확실한 아기는 불길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리고 그들의 무소불위 권력에 그것은 오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지상에서는 등대와 금수들의 혼혈 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승도에게 말했던 것처럼 걱정스런 수준은 분명 아니 었다. 그러나 태이경은 일족의 아이들 중에서도 발육이 조 금 느린 편이긴 했다. 정확한 이유는 연구된 바가 없어 확 신할 수 없지만,태국영은 아마도 그것이 녀석의 뱃속에 있는 아기집 때문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내 녀석이 성장할 때 쓰는 에너지를 100으 로 본다면,그중에 10 정도는 쓸데없이 아기집의 성장에 허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뭐,어디까지나 그저 가설일 분이었다. 어차피 다 커봐 야 아는 거고.
“당숙부님!”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태이경은 밝은 목소리로 태호연 을 부르며 총알처럼 안으로 튀어갔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 나 있던 태호연이 싱글벙글 웃으며 녀석을 훌쩍 안아 올렸 다.
“아우,이 예븐 것. 당숙부 보고 싶었어?”
“응. 엄청 보고 싶었어요. 당숙부님 얼굴이 저번보다 조 금 살쪘다. 아빠가 요샌 안 괴롭혀요?”
“왜 안 괴롭혀. 괴롭히는데도 당숙부가 꿋꿋하게 우리 이경이 생각하면서 힘내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 때문에?”
“그렇지. 이경이 때문에.”
태호연은 태이경의 얼굴을 물고 발며 둥개둥개 하느라
같이 들어온 태국영은 안중에도 없었다. 태이경이 뺨에 보 보할 때마다 그의 눈에선 하트가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꼭 막둥이 본 팔불출 아빠 꼴이었다.
설령 키가 좀 작으면 어때,저렇게 다들 좋아 죽는데. 태국영은 스스로의 생각에 실소하며 소파에 몸을 묻었 다. 따라 들어온 비서가 차를 권했으나 아이가 마실 주스 와 얼음물만 달라고 했다. 비서가 잔 두 개를 놓고서 사라 지자 그제야 태호연은 아이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좆 같이 바쁘대서 왔더니 왜 이렇게 한가해 보여?” 태국영의 밉살맞은 질문에 태호연은 웃는 낯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래. 나 이십 분 뒤에 화성공단에 가야 된다. 누가 할 일을 대신 하느라 아주 발바닥에 땀이 나지.”
“유능한 남자 같아서 섹시한데 오?. 난 승도한테 백수 취 급받아서 요새 자존감 막 떨어지려고 그래.”
태호연이 아주 통쾌하다는 듯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 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방 잦아들고 도리어 부러운 눈을 했다.
“나도 하고 싶다. 돈 많은 백수는 전 일족의 꿈인데. 년
무슨 복이 그리 많아서 그 꼬라지로 잘 사나. 배 아프게.” 우리 형님도 다섯 살 때 버려져서 임상실험실로 끌려가 고 싶었어?
그렇게 받아치고 싶었으나 아이가 들을 만한 내용은 아 니라 넣어두었다. 태이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 로 태호연의 뺨을 삭삭 쓸며 씩씩하게 외쳤다.
“당숙부님! 내가 발리 커서 당숙부님 일 도와줄게요.
나 공부 되게 열심히 해. 선생님들이 뜰뜰하다고 매일 칭 찬해요.”
“어우 기특해. 이 당숙부가 이경이 때문에 살아요.”
태호연이 또 남의 집 아들에게 쪽쪽 입술 자국을 남겼 다. 그는 아이에게 주스 잔을 쥐어 주었고,태국영은 긴 다 리를 여유롭게 꼬며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가볍게 얹었다. 태국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왜 오라고 했는데.”
“아,그거.”
태호연은 슬쩍 태이경을 내려다본 뒤 키폰을 눌렀다. 기척 없이 들어온 비서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 아든 태국영은 비서가 나가자 고개를 갸웃하며 열어보았 다-
문서는 단 한 장이었다. 공문 형식이 아닌 짧은 보고 형
식으로,윤봄이와 여제운의 동태에 관해 적혀 있었다. 미 행은 윤봄이를 철저하게 따라붙었고,요령 좋게 휴대폰과 집 전화에 도청기까지 설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여제운과의 만남이 약속되었던 날 예약된 방의 이야기 들까지 낱낱이 긁어 보고되어 있었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 다.
태국영은 활자를 느긋하게 한 번 훑어본 뒤 결재판을 덮어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표정은 늘 그랬든 담 담하고 나른했다.
“그래서,있다는 거야,없다는 거야.”
태국영은 등대에 관해 물었다. 태호연은 기민하게 알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어. 분명 그날 그 자리에 윤봄이가 대동 한 인간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는 확인할 길이 없지. 미행에만 최적화된 녀석들이라 접근 까지는 불가능하니까.”
“그 인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최명욱 자택에 있어. 윤봄이의 남편인 최경엽 동생이 지.,,
태국영은 깍지 낀 손가락을 느리게 까닥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저 고혹적으로 풀어진 눈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걸 태호연은 알고 있었다.
한때는 본능에 이끌려 저 강한 수컷을 동경했던 시절 도 있었다. 그러나 최측근으로 몇 년 살아 보니 저 혼자 잘 난 놈을 곁에서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은퇴하고 싶다.
그는 겨우 마흔이 된 나이에 노인처럼 속세를 벗어나 고 싶은 욕망이 일고 있었다.
“자,봐라,국영아. 윤봄이는 일단 너를 절대 미행할 엄 두도 못내.”
“당연하지. 뒤지려고.”
일족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부리를 내릴 수 있 었던 것은,바로 암시라는 불완전한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들은 인간들의 머릿속에 왜곡된 기억을 심는 능력 을 가지고 있었고,그로 인해 그 긴 세월을 인간들 틈에서 평범한 인간인 양 살아올 수 있었다.
때로 한 번 쓰고 버릴 미행 카드 같은 경우 인간들에게 그런 암시를 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태국영은 그런 인간들에게 밴 짐승들의 향기까지 잡아낼 정도로 예민했 다. 그의 눈과 귀와 코를 속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의 감각에 잡힌 인간들이 제 곁을 멤돌았다면,단언하건대
단 한 명도 살려 보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승도의 곁에 붙여 놓은 태성문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태호연의 조카였고 태호연 만큼 강했는데 태호 연보다 더 가업에 몸담는 것을 싫어하는 놈이었다. 성체 가 되자마자 저를 찾아와 재밌는 일 시켜달라고 징징거려 서 이승도의 곁에 붙였다. 태성문은 이승도가 제대로 보고 만 하면 무엇이든 놓치는 법이 없는 놈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윤봄이는 이승도가 제 애인이라는 것 외에는 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거 라는 말이었다.
“그래. 미행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윤봄이는 굳 이 그 인간을 그놈한테 보여줬어. 이유가 뭘 것 같아?”
“뭐겠어. 당연히 꼬시고 싶어서겠지.”
“뭘 위해서?”
“개를 이용해서 나를 엿 먹이려고?”
“옳지.”
태호연은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 가는 완전히 멸망했고 최 가는 대항할 전력이 크지 않아. 네가 아무리 아니꼬워도 그간 참을 수밖에 없었겠 지.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자기들이 침몰할 판이 니까. 그런데 마침 좋은 소문이 들려온 거야. 너를 제대로
직격할 수 있는 패가 보인 거지.”
“등대의 향기에 홀린 놈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는 역사가 증명해 주잖아?”
어른들의 대화가 길어지자 태이경은 다 마신 주스 잔 을 테이블에 놓고 얌전히 발장난을 했다. 태호연의 가슴 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려니 심장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마치 그게 엄마가 재워주려고 도닥도닥하는 느낌이라 점 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관점이 잘못 됐어.”
잠자코 듣고 있던 태국영이 대화의 물꼬를 흔들었다.
“그 둘 사이에서 계략 판이 벌어진다면,그 주체는 그 여자가 아니야. 오히려 그놈이지.”
태국영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태이경을 힐긋 보더니 제 옆으로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태호연은 조심히 아이 를 소파에 눕히고 머리맡에 쿠션을 받쳐준 뒤 테이블을 돌 아와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 결벽적인 여제운이 매춘부처럼 들이밀어진 등대에 게 과연 손을 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혹여 여제운이 미 친 척 그거랑 떡을 쳤다고 해도,일단 윤봄이의 본래 계획
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어.”
“어떻게 확신해?”
“여제운은 이미 승도를 반쯤 각인했으니까.”
태호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종가모임 때?”
태국영은 고개를 끄덕였고,태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승도가 여제운을 살려 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국영이 칼 같이 틀어막은 공간 안에서 그런 일이 뒤따랐다는 사실은 몰랐다.
“지금쯤 아마 시름시름 마음을 앓으면서 승도한테 한 번 대시해 볼까,안아달라고 구걸해 볼까,나를 없애면 제 손에 떨어질까,뭐 그딴 고민을 하고 있겠지. 그런 상태에 서 다른 거랑 아무리 뒹굴어도 그 갈증이 채워질 리가 없 지 않겠어?”
태국영은 빙긋 웃었다. 뭐가 그렇게 여유롭나고 태호연 이 신경질을 냈다.
“여유롭지 않을 이유가 있나. 비싸게 굴던 우리 승도가 요새 나한테 홀딱 반해 있는데.”
태호연은 여물을 본 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명청한 반응에 태국영은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여제운이 꼬리를 치면 칠수록 승도는 겁을 먹겠지. 그
건 사실 나한테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니야.”
“…아니. 일단 제수씨랑 잘 풀리고 있다니 나도 완전 기 뻐서 춤을 추고 싶다만,여제운이 치근대면 득이 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안 그래도 불안하면 시집오라고 열심히 꼬드기는 중이 거든. 여제운이 제 주변을 돌면서 페로몬이나 부려대고 하 면,겁 많은 우리 승도 내 품에 뛰어들어서 결혼해 달라고 달달 떨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황홀하네,태국영은 나른하게 웃으며 턱 을 괴었다. 정말 즐거운 환각을 보듯 몽롱하게 풀린 눈이 가늘어졌다. 태호연의 낯 색이 대번에 나빠졌다.
“그냥 애지중지하기 바븐 팔불출인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속은 시커 멓잖아. 여제운이 무슨 짓 할까 걱정은 안 되나?”
“무슨 짓 했다가 미움받으면 어쪄려고. 우리 승도 쌀쌀 맞을 때 되게 무서워. 그리고 여제운은 그 냉랭함을 몇 번 이나 겪어 봤고. 자폭할 생각이 아니면 섣불리 손은 못 댈 거야. 그래도 감시는 철저히 하고 있지만.”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제수씨 일인데 네가 어설프게 할 리는 없지. 그럼 그건 걱정 할 일 없다고 넘겨두고,윤 봄이 쪽은 어쩔 거야.”
태국영은 홈,하고 팔짱을 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간
단히 대답했다.
“일단은 생각 중. 결정되면 알려줄게.”
할 말 다 끝났다는 듯 태국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태호연은 잠든 태이경을 품에 안아 작게 흔들었다.
“이경아. 아빠가신대. 당숙부랑 작별인사하자.”
“■■■으응?”
태이경은 졸린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하게 두 남자를 번갈아 보던 녀석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생긋 웃었다. 짧은 팔을 태호연의 목에 두르고, 통통한 입술이 그의 뺨에 꾹 짓뭉개졌다.
“당숙부님 다음에 봐요.”
태호연은 응,하며 아이의 살굿빛 뺨에 입을 맞췄다. 한 참을 둘이서 쪽쪽거리는 걸 기다리다 못해 태국영이 아이 를 배앗아 안았다. 태호연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 나 태국영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숨 막힐 듯한 폭염이 쏟아져 내렸다. 오늘 낮 최고기온 은 36도나 되었다. 축축하고 불편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더위에 강한 이승도조차 진이 빠질 정도였다. 동물원의 동 물들도 맥을 못 추고 그늘을 찾아 늘어지기 바빴다.
“쌤은 진짜 좋겠어요. 더위도 잘 안 타,땀도 잘 안 나, 햇볕에 그을리지도 않아. 완전 부러운 체질이에요.”
제가 키우는 펭권 자랑을 하러 왔던 사육사 아가씨는 소파에 늘어져 투덜댔다. 이승도는 그녀에게 얼음을 바짝 채운 아이스티를 한 잔 타주며 웃었다.
“여름에 괜찮으면 뭐해요. 겨울에 너무 힘든데요.”
“아. 쌤 추위 엄청 탄댔죠?”
“네. 특히 조금만 추워져도 손발이 금방 얼어요. 컨디 션 안 좋아도 그렇고.”
“흐음. 그래도 난 쌤이 부럽네요. 우리 남자사육사들 요새 종종 쉰내 풍기고 다니는데 선생님은 항상 산뜻한 냄 새가 나요. 그거 되게 신기한 일이에요. 보통 수의사들은 동물들 털이랑 배설물 냄새가 나거든요. 직원 샤워실에서 도 통 안 보인다던데 자주 씻는 것도 아닐 테고,도대체 비 결이 뭐예요?”
“글쎄요…… 저도 잘……
비결이라면 그냥 체질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동물병원을 오래 했지만 항상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었다. 후각이 예민한 태국영이 귀신같이 감지하
는 걸 보면 아예 다른 냄새가 배지 않는 것은 아닌데,적어 도 제가 느끼기에도 제 체취는 쉬이 덮이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제 체취가 완벽히 지워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태국영의 정액을 뒤집어썼을 때분이었다. 태국영 이 방사할 때 붐어내는 열기에는 아주 지독하게 야릇한 냄 새가 농도 짙게 녹아 있었다. 짐승의 가장 은밀한 체액은 제 강한 체취조차 압살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어머,쌤. 갑자기 얼굴이 발개졌네. 더워요?”
사육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체를 숙여 올려다보았 다. 이승도는 당황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그런가요. 제가 체온조절이 좀 안 되다 보니…… 에어컨을 좀 더 세게 켜야겠네요.”
적당히 얼버무리고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사육사는 더 눌러앉아 수다를 떨 기세였는데,휴대폰으로 온 전화 를 받더니만 미적미적 일어섰다.
“저 가봐야겠네요. 암튼 쌤. 시간 되면 조류사에 놀러 와요.”
“그래요. 꼭 갈게요.”
그녀가 나가고 잔을 치운 뒤 이승도는 거울을 보았다. 눈가와 뺨에 열꽃이 아주 소담스럽게 흐드러져 있었다.
“미치겠네,진짜.,,
이승도는 암담하게 중얼거리며 손등으로 뺨을 비볐다. 섹스 이후 일주일도 더 지났으나 제 일상은 여전히 망가 진 채였다. 아이들의 눈도 개의치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달 라붙는 태국영이 그 잔악한 주범이었다.
태국영은 지금 발정봉 맞은 짐승이었다. 한 번 봉인이 풀리니 제 냄새만 제대로 맡으면 그때부터 정신을 못 차렸 다.
받아줄 때까지 내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목덜미 에 얼굴을 비비는 건 예사였다. 아이들이 노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땐 아예 작정하고 옷 속에 손을 넣거나 엉덩이 에 치골을 문대며 귓속으로 거친 숨을 불어넣기도 했다.
냉정하게 발로 차서 떨어내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막 상 상황이 닥치면 그게 맘처럼 안 됐다. 태국영에게는 무 기가 너무 많았다. 그는 너무 매혹적이었고 그가 붐어내 는 유혹의 향기는 너무 자극적이었으며 키스는 지나치게 달콤했다.
체력이 안 따라 줘 미안하다고 겨우 밀어내 놓으면 심 지어 애교까지 피워댔다. 그게 자기 딴엔 애교가 맞는 것 같긴 한데,당하는 쪽은 심장에 명이 들어 코피가 쏟아질 지경이었다. 결국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번번이 다
리를 열어 주게 되고 마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었다.
태국영은 끊임없이 저를 원했고 저는 그런 그를 받아주 고 싶었다. 미친 것처럼 뒤엉키고 싶을 때 태국영은 그만 큼 난폭해졌고,나른하게 체액을 바르고 싶을 땐 또 녹을 듯 달콤하게 움직였다.
일단 제가 유혹에 나자빠지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여지 없이 몸이 재가 될 것 같은 열락이 휘몰아쳤다. 그와의 섹 스가 얼마나 기분 황홀한지 잘 알기 때문에 매번 속절없 이 녹아버리는 거였다.
개는 왜 그 짓까지 그렇게 잘해서 사람을 심란하 게■…".
야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그를 떠올리자 또 아랫배가 뜨 끔하게 아려왔다. 잠시 굳어 있다가 머뭇머뭇 허리 뒤로 손을 넣었다. 바지춤을 들추고 엉덩이골을 슬쩍 만져보니 미끈하게 젖은 팬티가 지문에 쩍 눌어붙어왔다. 이승도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배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 개를 탓할 거 없지. 내가 이 모양인데.
정신 차리자며 두 손으로 얼굴을 짝짝 두드렸다. 몸이 축나 괜스레 심란해지긴 했으나 사실은 징징거리는 생각 들도 다 진심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몸도 이어지고 마 음도 이어졌다.
태국영이 정신을 못 차리는 만큼 저 역시 그러했다. 좋 아하는 상대와 살을 섞는다는 것은 제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충만한 행위였다.
심장이 간질거려 괜히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고요히 잠자던 팩스기기가 수신 알림음을 울렸다. 이승도는 기기 옆에 서서 느리게 뽑혀 나오는 문서들을 차 례차례 집어 들었다. 총 7장의 문서는 환경부가 후원하는 세미나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야생동물의 건강세미나…… 야생동물……
이승도는 나직이 뇌까렸다. 요즘 수의과 관련 세미나 는 거의 동물병원 위주으I,그러니까 개나 고양이 같은 애 완동물의 건강에 대한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의 수의학도 들이 대부분 돈이 더 되는 동물병원 쪽으로 빠지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해외 전문가까지 초빙해 야생 동물에 관한 세미나를 여는 것은 꽤 드문 경우였다.
이승도는 잠시 고민하다 관리부장을 찾아가 참석 여부 를 의논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며 정식으로 결재서류를 올리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짧은 문건을 작성해 결재판 에 꽂아 가져갔다. 슥 훑어본 관리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세미나가 네 시에 끝나네. 동물원 돌아오면 다 섯 시도 넘겠는데? 이날은 그냥 바로 퇴근하도록 해.”
“아. 그래도 될까요?”
“이 선생이야 평소 근태가 너무 완벽하니까 안 될 거 없 지. 원장님도 그러라고 하실 테고. 아무튼 결재 올리면서 그렇게 전할게.”
고맙습니다,하고 꾸벅 인사하고 나온 이승도는 곧장 태국영에게도 알렸다. 날짜와 장소,일정을 대강 요약해 문자를 보내 두었다. 오래도록 답장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을 즈음 휴대폰이 진동했다. 태국영인가 싶어 무심히 확인 버튼을 눌렀다.
『엄마. 해 반짝 뜨니까 엄마가 더 발리 보고 싶어요!』
이승도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도 우리 이경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네. 공부 열심히 했어?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엄마라는 호칭이 이젠 어색하지 도 않았다. 녀석이 저를 엄마라고 부르는 어감은 너무나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엄마건 아빠건 형이건,사실 뭐라 고 부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응. 유모가 블루베리 쿠키 구워줬는데 너무 맛있어요. 이따가 엄마 주려고 많이 숨겨 놨어요. 오늘 오후 수업 두 개 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한 개만 하고 은태 형아랑 놀아주러 가려구요.』
아이는 제 일과를 보고하는 걸 매우 행복해했다. 매일 수시로 문자를 보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종알종알 늘어놓 는 것에 한참 맛을 들렸다. 아이의 응석이 그저 마냥 예븐 이승도는 그때마다 아주 충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우리 이경이 어찜 이렇게 예쁘고 착할까? 형아랑 잘 놀고 있으면 이따가 어부바해 줄게.』
『보보도 해 주면 안 돼요?』
『응. 다 해 줄게.』
팔불출처럼 싱글거리며 문자를 나누는데,진료실로 전 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백공작 두 마리가 피를 흘리고 있다 는 관람객의 제보전화였다. 이승도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진료 상자를 챙겨 나갔다.
짜악!
날카로운 타격음이 울렸다. 가느다란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깨끗하게 닦인 바닥에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졌 다.
“이 쓸모없는 놈! 벌써 한 달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그 놈 하나 못 꼬였단 말이야?”
윤봄이는 피가 흐를 듯 붉은 입술을 뒤틀며 소리쳤다. 박해인은 다시 쏟아질 폭력이 두려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러나 터진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겨를도 없이 거칠게 머리채가 잡혔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너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거니?
응?”
뇌가 뒤흔들렸다. 박해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쥐자 그녀가 거칠게 부리치며 발길질을 했다.
“어디다 손을 대!”
후려 맞은 가슴으로 격통이 스몄다. 박해인은 잠시 숨 조차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벌어진 입에서 피와 타 액이 진득이 얽혀 흘러내렸다.
“하. 정말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멀찍이서 그 꼴을 지켜보던 최명욱이 성큼성큼 다가와 윤봄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렇게 흥분해,형수.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작작 좀 하자.”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힘들게 찾은 건데 도 무지 쓸데가 없잖아. 젠장,역사서는 완전히 엉터리야. 저 런 게 도대체 어디가 타고난 창기라는 거야?”
“흐음. 해인이 타고난 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상하 네.,,
최명욱은 무릎을 굽혀 앉아 고개를 깊이 꺾어 내렸다.
“해인아. 너 제대로 한 거 맞긴 맞아?”
“…시도는,해봤어요.”
겨우 호흡을 되찾은 박해인이 피투성이 입술을 잇새로 물었다. 최명욱은 붉게 젖은 턱을 검지로 살짝 들어 눈을 맞췄다. 성별 모호한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경련했다. 흐 리명덩한 눈은 늘 그랬듯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최명욱은 충동적으로 그 새빨■간 핏물을 혀로 길게 쓸 어 올렸다. 혀끝에 묻은 피를 입천장에 비비자 짧은 황홀 경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런데…… 감응은 제대로 됐는데 흔들리질 않았어
요.,,
박해인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을 더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그를 품을 수 있고,그의 고통을 어루만져줄 수 는 있지만,그의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었어요. 제,제가 알기로 그런 경우에는 이,이미… 각인한등대가 있어서 예요. 제 어머니가,그렇게,그렇게 말했어요.”
박해인의 피를 할짝거리던 최명욱도,굴곡진 머리를 거
칠게 헝클어 놓던 윤봄이도 동시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일부러,제가 일부러 일을 망친 건,정말 아니에요. 믿 어주세요.”
윤봄이는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제운에게 이미 등대가 있다고?”
“확실히는 잘 몰라요. 다만,그 경우밖에 없다고 들었어
요.,,
“무슨 말이 그따위야? 확실하지도 않은 걸 변명이랍시 고했단 말이야?”
윤봄이는 신경증을 앓고 있어 한 번 분노하기 시작하 면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금방이라도 또 후려칠 기세에 겁을 먹은 박해인은 새파랗게 질려 최명욱의 품을 파고들 었다. 도와주세요,뭐든 다 할게요,바들바들 떨리는 여 린 몸을 최명욱은 혀를 차며 끌어안았다.
“이러다 애 잡겠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형수.”
윤봄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최명욱은 박해인을 들쳐 안고 자리를 옮겼다. 빽빽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뒤를 따 랐으나 그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박해인을 침대에 내렸다. 윤봄이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사시나무처럼 떨던 박해인의 어깨가 차츰 잦아들었다.
“어디까지 해 봤지?”
최명욱의 질문에 박해인은 솔직히 대답했다.
“처음엔 손을 만졌어요. 반응이 있어서 키스를 했는데 그가 피했어요. 거부반응인가 싶어서 슈퍼문 접종을 멈춘 거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긍정했어요. 그 남자는…… 모르겠어요. 왜 절 만나는지,왜 제가 만지는 건 가만히 내 버려 두면서 제가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피하는지.”
“섹스하자고 했어?”
“네. 하지만 그 남자가 거부했어요.”
“나한테 할 때처럼 다 벗고 개처럼 기면서 박아달라고 도 해 봤어?”
“다,다 해 봤어요. 하지만…….,,
최명욱의 손아귀가 박해인의 턱을 으스러뜨릴 듯 쥐었 다. 고통에 신음하는 얼굴이 도색적으로 일그러졌다. 그 는 입 안에 남은 피 냄새를 혀로 끈끈하게 짓뭉개며 비틀 린 미소를 지었다.
“괜히 열 받네. 몸 팔라고 보낸 창녀한테 애정을 주는 포주 꼴이잖아.”
박해인은 엉망이 된 입술을 떨며 눈을 피했다. 최명욱
은 끈질기게 박해인을 노려보다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그 의 혀는 상처 난 입 안을 거칠게 헤집고 비벼댔다. 마치 고 통을 되살리려는 듯 무자비한 혀 놀림이었다.
박해인은 신음을 삼키며 굳었던 몸에서 억지로 힘을 풀 어냈다. 윤봄이에게 맞은 곳은 너무나 아팠고 육신도 정신 도 너무나 지친 상태였으나 제게 거부권 같은 것은 없었 다.
최명욱은 옷을 찢고 곧장 삽입했다. 풀리지도 않은 입 구를 벌리며 최명욱의 거대한 성기가 순식간에 꿰뚫고 들 어왔다. 무시무시한 고통에 비명이 나올 뻔했던 것을 가까 스로 참았다. 제가 이를 악물고 있는 만큼 그의 턱도 하얗 게 도드라져 있었다.
격렬히 튕겨 올리는 허릿짓은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사 납고 거칠기만 했다. 박해인은 종이 인형처럼 허공에 팔락 거리며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절로 비틀리는 턱이 붙들려 억지로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벌건 핏줄이 서 있었다. 목석처럼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목덜미에 이를 세우기도 했다. 모든 정황이 그의 분노를 명백히 증명했 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감정인가.
싫다는 사람을 겁박해 억지로 창기처럼 길들이고자 했 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박해인의 눈이 어둡게 물결쳤다.
“아파요……
박해인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뱉어냈다.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살갗이 파인 몸 위로 뜨끈한 혀가 삭삭 비벼졌다. 비부 를 드나드는 성기의 움직임도 조금은 부드럽고 끈끈하게 변했다. 화염 같은 시선이 얼굴에 떨어졌다. 그 따가운 주 시에서 흘러들어오는 그의 감정은 너무도 선명했다.
박해인은 최명욱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그의 고개가 어 깨에 붙어 살갗을 잘근거렸다. 부러 눈을 피했으나 그의 감정은 접촉 부위에서 적나라하게 흘러들어왔다. 마치 귀 한 애첩에게 극락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탐욕스런 늙은이 처럼 야릇한 성애를 보였다.
박해인은 조소를 삼키며 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매만 졌다. 절벽 끝에 선 제가 굴복하듯 그에게 건네는 것이 애 정의 탈을 쓴 독약이었다. 그를 중독시키고 싶었다. 지금 의 생활이 너무나 고단해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 방법밖에 몰랐다.
박해인은 그런 제 속내를 놀랍게 여기지 않았다. 누구
라도 저처럼 할 것이었다. 누구라고.
다친 수컷 백공작 두 마리를 치료하고 돌아와 진료실 문을 열었을 때,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일순 덜컥 내려앉았던 심장이 다음 순간 세차게 고동을 울렸다.
익숙한 진료실의 공기가 일순 무섭도록 목을 졸라 왔 다. 이승도는 저를 보자마자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여 제운을 명하니 응시했다.
“놀라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이승도는 쭈뼛거리며 솔직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울렁거리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사념이 교차했 다-
저 남자를 경계해야 하나,믿을 만은 한가,만약 그가 나븐 마음을 품고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 근처에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는 있을까.
잔뜩 경계심 가득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의식을 흐름을 빤히 들여다본 것 처럼 여제운이 나직이 말했다.
“근처에서 태 가의 남자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제가 여기에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 하셔도 됩니다.”
조금 망설이다 실내로 발을 들였다. 여제운이 신뢰할
만한 남자인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직 성급한 단계였다.
이승도는 들고 있던 진료 상자를 책상 위에 두고 빠르 게 창가에 다가섰다. 흔들리는 눈을 몇 번 굴리자 편한 캐 주얼 차림의 태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근처 벤치에 앉은 그는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친 채 이쪽을 빤히 올려다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정 수리를 쿡 찍어 보였다. 난데없는 하트 공세가 어리둥절했 으나 지금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인 건 확실했다. 이승도 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불안하십니까.”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여기는 어찐 일이냐고 물으려던 말이 목에서 막히고 말았다. 이승도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 다 대답했다.
“불안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당신에 비하면 나는 너 무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걸요.”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평생을 막연한 공포에 떨다 숨을 거뒀던 어머니와는 달리,제게는 그 무 엇보다 든든한 보호막이 있었다. 불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 었으나 그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J
잠시 뒤 그의 입을 타고 나온 말을 이승도는 단박에 이 해하지 못했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가 불현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고작 눈매와 입매가 아주 흐린 곡선을 그렸을 분인데,지나치게 딱딱했 던 인상이 격변했다.
“차 한잔 주시겠습니까.”
이승도는 다소 얼떨떨한 나머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 다. 곧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수락한 걸 번복할 수는 없었 다.
“앉아 계세요.”
작은 진료실엔 커피와 녹차 티백과 유자차분이었다. 커 다란 머그컵 두 개에 유자를 한 스푼씩 넣고 뜨거운 물에 우려낸 다음 찬물을 채웠다. 상큼하게 올라오는 향기 때문 인지 날 선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이승도는 머그컵을 테이블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 다. 차가운 유자차를 조금씩 음미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 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직접 걸음 하셨어요.”
여제운은 이승도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느리게 들숨 을 마셨다. 호흡기를 가득 채우는 숨의 향기가 짙었다. 음 란한 기척이 너무 짙어서 코가 멀 것만 같았다.
두 달여 전 단정하고 반듯하고 차가웠던 이승도는 온데 간데없었다. 건조해 보였던 뺨은 윤기가 돌았고 복숭아 같 았던 입술은 붉게 물이 올랐다. 갑옷을 벗은 태국영의 은 밀한 체취가 그의 전신을 흠뻑 물들여 그를 꽃처럼 피운 것이었다.
깨달음이 심장을 후벼 팠다. 열정적으로 몸을 얽어 헐 떡였을 둘의 모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여제운은 가면처 럼 굳어졌을 제 얼굴을 다행으로 여기며 뒤늦게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었고,의논드려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누적되어감에 따라 미묘한 긴장도 함께 중 첩되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이승 도는 그의 두 눈 안에서 마그마처럼 육중하고 질퍽하게 일 령이는 것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구나.
이승도는 그의 급작스런 방문의 목적을 눈치챘다. 그 가 말한 궁금함이나 의논 같은 것은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 했다.
본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그들이 새삼 안쓰러웠다. 제가 등대가 아니었더라면 이 남자도,그리고 태국영도 관
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우울해져 눈을 내리깔았 다.
“과거의 등대들은 많은 금수들을 품에 들였다고 합니 다.,,
그가 무엇을 물을지 감이 왔다.
“제게도 당신의 품을 나눠주실 수는 없으십 니까.” 이승도는 차갑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그를 보았 다.
“미안해요. 저에겐 국영이분이에요.”
이번에는 여제운이 시선을 피했다. 그는 무릎에 얹은 제 주먹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리고 괴로운 듯 아주 희미 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은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뵙고 싶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알아요. 생리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천천히 괜찮아지실 거예요.”
“괜찮아지지 않으면 어쩌지요.”
“괜찮아지지 않으면,물건을 갈취해 가듯이 저를 훔칠 생각이신가요?”
정곡을 찔린 그의 눈빛은 도피한 채로 움직임이 없었
다. 이승도는 한숨을 지었다.
“남의 걸 탐하는 게 나븐 짓이라는 건 네 살배기 제 아 기도 잘 아는 사실이에요. 저를 둘러싼 성벽을 모두 다 부 수면 알몸이 된 제가 당신 품에 안길 것 같은가요?”
“당신이 가엾은 짐승에게 약한 걸 압니다.”
여제운은 속삭이듯 대꾸했다. 아련한 과거가 물밀 듯 이 밀려왔다. 이승도는 물끄러미 그를 들여다보며 미묘하 게 웃었다.
“하지만 날 무는 짐승에겐 가혹해요.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요.”
멀찍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승도는 고민 없이 자리 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휴대폰은 액정에 태국영의 이 름을 품고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양이 뜬금없이 왜 이 렇게 야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승도는 기이하게 피 어난 생각을 황급히 홑어내며 전화를 받았다.
“왜,
《우리 승도,바람피운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짜해.》
역시 알고 있었구나.
오늘만큼은 그의 스토커 짓이 반가웠다. 이승도는 쓸데 없는 소리 말라고 퉁을 줬고,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속삭 였다.
〈〈미안해요. 저에겐 국영이분이에요.〉〉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너무 예븐 목소리였어. 목소리보단 내용이 더 예뻤고. 운전하다 좆 서 가지고 참느라 혼났잖아.〉〉
“너…너……도청도 해?”
《오늘처럼 웬 외간남자가 우리 승도 업어갈까 봐 걱정 돼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내 사생활은!”
《사생활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해. 바람피울 것도 아닌 데 왜 그렇게 정색해.》
그래도 그렇지.
이승도는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서방님도 우리 승도분이야. 이따 봐.》
태국영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새 달궈진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손 안이 괜히 뜨끈거렸다.
여제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 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는 어느새 생각보다 가 까운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국영과의 통화를 고스란히 읽어갔을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은태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괜찮으신 시 간을 알려주시면 저희 쪽에서 맞추겠습니다.”
이승도는 조금 더 그와의 거리를 벌리며 대답했다.
“그럼 이번 주는 제가 휴일근무를 서야 하니까 다음 주
일요일에 오세요. 열두 시쯤 아이들 밥 먹이고 씻기면 대 강 한 시쯤 되니까,넉넉히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 오시 면 딱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이요?”
“요새 제 집에 제 아들이 매일매일 오고 있거든요. 은태 랑 많이 친해져서 둘이 굉장히 사이좋게 잘 놀아요. 아마 어머님께서도 보면 좋아하시겠네요.”
여제운은 마치 인간 아이 같았던 태이경을 문득 떠올리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 시에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그가 문을 열었다. 막 나가려던 그가 반쯤 몸을 틀었다. 이승도는 왜요,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으나 그는 잠시 머물렀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그대 로 진료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공간에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이승도는 무거운 마음으로 짙은 한숨을 지었다.
올해는 평년에 비해 강수량이 유독 적었다. 원래는 장 맛비가 쏟아져야 할 시기임에도 여제운과 약속을 잡은 주 말 역시 뙤약볕이 내렸다. 쩍쩍 갈라지는 논밭에 힘겨워하 는 농촌 마을처럼 아이들도 몹시 힘들어했다. 특히 아직 제 기혈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여은태는 매번 초주검 같은 상태로 저를 맞았다.
여은태가 그렇게 녹초가 되는 것에는 사실 다른 이유 가 덧대어 있긴 했다. 혼자 덩그러니 집안에 남겨졌을 때 변이를 위해 고군분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까 맣게 모르는 이승도는 녀석의 더위를 어찌 식혀주어야 할 지 내리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떠올린 것이 바로 이동풀장이었다. 태이경이 넓 은 바다 가서 수영하고 싶다고 했던 것에서 힌트를 얻었 다. 그날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 꼼꼼하게 제품을 둘러보았 다.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한 작은 튜브형은 모두 걸러냈 다. 최소 마당의 반은 채울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 했다.
마침 맘에 쏙 드는 풀장이 있어 주문제작을 의뢰했고, 오늘 오전 도착해서 설치도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주말 인 오늘이 첫 개시일이었다. 이승도는 괜히 설레었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이를 닦아주 는 동안 태국영은 마당에 뚝딱 쇠기둥을 세워 방수포로 차 양을 만들었다. 그분 아니라 이동풀장에 물까지 가득 채워 두었다.
이미 집에 엄청난 크기의 야외 풀장이 있는 태이경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옷을 벗고 퐁당 뛰어들었다. 물놀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여은태는 발로 거대한 이동 풀장을 툭툭 차며 물었다.
[선생님. 오늘은 이걸로 목욕하는 거야?]
“음. 목욕은 아니고 물놀이라는 거야. 우리 은태 더위 많이 타니까 물놀이 좋아할까 싶어서 선생님이 사 왔어. 어서들어가 봐.”
여은태는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안으로 몸 을 담갔다. 이런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해 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앞발을 걸치고 뒷발로 파닥 파닥 물결을 차기만 했다.
그때 녀석의 뒷다리를 태이경이 냉큼 붙들어 당겼다.
앗 하며 풍덩 빠진 녀석은 허우적거리다 고개를 뺐다. 눈 부신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걸 보며 태이경이 기분 좋 게 웃음을 터뜨렸다.
“형아,이렇게! 이렇게!”
태이경은 능숙하게 수영 시범을 보였다. 여은태 역시 곧 익숙하게 개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최대한 큰 사이즈 로 주문제작을 했던 터라 아이들이 아기자기 놀기에는 부 족해 보이지 않았다.
이승도는 부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주방으로 가 과 일주스를 듬뿍 만들었다. 아이스박스에 주스와 얼음과 잔 을 가득 채운 뒤 들고 나가자 차양이 걷혀 있었다.
더울 텐데 왜 걷어뒀나 잠시 궁금했으나 물을 필요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바로 그에 대한 대답이었 다-
아이들은 그새 물놀이에 익숙해져 있었다. 여은태가 태 이경을 등에 태우고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무슨 바람이 불 었는지 태국영도 그 놀이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세찬 물줄기가 붐어져 나오는 호스가 그의 손에 쥐여 있었다. 여은태가 허공에 튀어 오를 때마다 물줄기가 녀석 의 몸통을 맞추었다. 비딱하게 담배를 문 태국영의 입술 은 즐거운 듯 휘어있었다.
내가 아들만 셋을 키우네.
주스를 마시며 셋이 잘 노는 걸 부듯한 눈으로 얼마나 지켜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태국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를 이어 여은
태가,그리고 태이경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문 쪽을 빤 히 보았다. 이승도는 조금 당황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그 러나 약속 시간까진 아직 40분이나 남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승도에게 태국영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젖은 러닝셔츠를 한쪽에 벗어둔 채 대문으로 걸어갔 다. 아이들을 풀장에서 건져 놔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 잠 깐 갈등하는 사이 태국영은 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와. 전화라도 미리 해 주든가. 우리 승 도 당황하게.”
“전화했는데 받질 않더군.”
대답한 여제운의 뒤로 여군호와 그의 아내가 있었다. 태국영은 뭐 이리 다 몰려왔나 싶어 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 돌아섰다.
“들어와. 얼마나 있다 갈 생각이야?”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태국영은 어정정하게 서 있는 이승도의 곁에 섰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제운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승도 역시 목례를 하 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오셔서 애들이 저러고 있는 데……■,,
그때 태이경이 풀장에서 훌쩍 나와 달려왔다. 별 반응 없이 물속에서 빤히 이쪽을 바라보던 여은태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움직였다. 태이경은 녀석의 탐탁잖은 시선을 눈 치채지 못하고 이승도에게 방긋 웃으며 청했다.
“엄마,나 닦아주세요. 어른들한테 인사하게.”
“아,그래. 우리 이경이 만세.”
“만세!”
이승도는 두 팔을 번쩍 드는 아이의 몸에 타월을 감아 대강 물기를 닦아주었다. 속옷이 젖어 있었으나 녀석은 개 의치 않고 겉옷을 꿰입었다. 그리고 여제운의 뒤쪽에 조 금 떨어져 서 있던 여군호에게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태이경입니다. 혹시 은태 형아 아버지세 요?”
여군호는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 다보며 무뚝뚝하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태이경은 곧바 로 그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한 한수연에게도 꾸벅 인사했 다.
“안녕하세요. 은태 형아 어머니세요?”
한수연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응. 내가 은태 엄마란다.”
태이경은 헤에 하고 웃다가 문득 표정을 달리했다. 녀
석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더니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조심조심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한 그녀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태이경은 고개를 쭉 꺾어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살이 너무 없어요. 혹시 형아 보고 싶어서 잘 못 먹어
요?”
“…아…응.,,
“그럼 안 되는데…… 몸 아프면 마음도 더 아프다고 우 리 유모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도 엄마 보고 싶으면 더 잘 먹었어요. 나중에 엄마 만났을 때 이렇게 말라 있으면 엄마가 미안해서 울지도 모르니까……
한수연은 명하니 아이와 눈을 맞췄다. 낯가림 없고 천 진한 아이가 예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속상한 표정을 짓 고 있던 아이가 잠깐만요,하고 뒤돌아 달려갔다.
녀석은 여태 풀장에 있는 여은태를 끌고 나와 이승도에 게 데려갔다.
“엄마. 형아도 닦아주세요.”
이승도는 새 타월을 들어 여은태의 머리와 등허리를 슥 슥 닦아내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은태 만세.”
여은태는 말없이 앞발을 이승도의 어깨에 걸쳤다. 배
도 문지르고 다리도 문지르며 속삭였다.
“우리 은태 선생님이랑 약속한 거 기억하지?”
[…응.]
“이경이 말처럼 엄마가 너무 마르셨다. 걱정 안 하시게.
응?”
[알았어.]
대강 물기를 말려준 뒤 이승도는 여은태를 데리고 여군 호 부부에게 다가갔다.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여은태의 궁둥이를 톡 두드렸다. 녀석은 굉장히 내키지 않아 했으 나 도리 없이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기억하시죠? 인사하는 거예요.”
여제운에게도 아는 척을 끝낸 태이경이 또 쪼르르 달려 왔다. 녀석은 한수연의 손을 잡아 여은태에게 내밀었다.
“형아,이것 봐. 형아 엄마 너무 말랐어. 어떡해?”
뭘 어떡해,아빠가 알아서 챙겨 주겠지. 여은태는 속으 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딴소리를 뱉어냈다.
[그러게.]
“형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잘 못 드신대.”
[그러니까.]
“난 엄마 보고 싶어도 씩씩하게 잘 먹었는데 형아 엄만 그게 안 되나봐.”
[그것 참 큰일이네.]
영혼 없는 대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여은태의 머릿속엔 발리 가족들이 돌아가서 태이경과 다 시 풀장에서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분이었다.
차 안에서 여군호는 내리 침묵에 잠겨 있었다. 심약한 아내가 눈치를 살피며 그의 팔을 감았으나 무언가에 골몰 해 있는 그는 온기 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을 분이었다. 심 상치 않은 기세에 한수연은 잠자코 있었다.
집에 도착해 현관을 들어서며 여군호가 나직이 말했다. “따라와.”
여제운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숨겨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통찰력 좋은 그가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잠 자코 뒤를 따르자 서재로 들어간 그가 곧장 뒤를 돌았다. 험악하게 번득이는 눈이 장남의 얼굴을 들쑤셨다.
“접어라.”
여제운은 고요히 그 눈길을 받아내며 침묵을 지켰다.
한 대 후려칠 것처럼 꽉 쥔 여군호의 주먹이 가늘게 흔들
“태국영의 암컷이라서가 아니야. 그자에게 이미 가정 이 있다는 게 중요해! 이미 아이까지 있는 상대를 그런 눈 으로 보다니,제정신이나?”
“제가 그를 어떤 눈으로 봤습니까.”
“닿지 못해 안달하는 눈이었다.”
“뺏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던가요.”
여군호는 모호하게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통째로 씹어 삼키고 싶어 하지는 않던가요.”
여제운은 늘 그랬듯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이었으나 전 에 없이 생기 빛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맑게 정제된 생 기가 아닌,엉망으로 헝클어져 섬뜩하게 번들거리는 성질 의 것이었다.
“그랬다면 태국영이 가만있지 않있겠지.”
여군호는 나직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평온하고 냉랭한 낯을 하고 있었으나 실상 그의 속내는 매우 바삐 돌아갔 다. 기이했던 하루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수많은 고뇌를 떠 안을 처지에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막내아들은 전혀 다른 놈이 되어 있었 고,돌부처 같았던 장남은 세차게 일렁이는 눈으로 내리 이승도를 좇았다. 그리고 이승도는 그걸 훤히 들여다보면 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어 선을 그었다. 너무 냉랭하지도
않았으나 파고들 여지 역시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은 여군 호에게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제가 활자로 알고 있는 등대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역 사 속에 사장된 그들은 값싼 사탕을 흔들며 금수들을 유혹 해 제 사치와 향락에 생을 소비했다. 권력의 구도에서 정 점에 서 있던 것은 제왕의 피가 아닌,그를 가진 등대였다. “내내 넋을 배놓고 있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군.”
여군호는 싸늘히 대꾸하며 소파에 앉았다.
“미리 못 박아 말해 두마. 남의 여자나 벳겠다는 아들 놈 편들어 줄 생각은 없다.”
“이미알고 있습니다.”
“앉아.”
여군호가 손짓했고,여제운은 그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여군호는 고용인을 불러 차가운 차를 내오게 했다. 곧 종 이 냄새 가득한 서재에 은은하고 청량한 향기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분명 제 입으로 그럴 일 없다고 딱 잡아떼던 게 잊그 제 같은데,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나.”
여제운은 깊이 눈을 내리깔며 이 비틀린 일의 전말을
털어놓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종가모임이었고,그것은 어 느새 물처럼 흘러 윤봄이와의 만남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게 생명의 위기에서 나타난 기현상일 거 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됐습니 다. 윤봄이라는 여자가 접근해서 그러더군요. 슈퍼문에 부 작용이 하나 있는데,그것이 등대와의 접촉에서 생리적인 거부반응이 나타나는 거라고. 제가 처음에 이승도 씨의 손 등을 쓸었을 때 느꼈던 게 바로 그거였던 모양입니다.”
“슈퍼문에 그런 부작용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 애기에 반사적으로 의문이 튀어 나갔으나, 그는 이내 납득했다. 아마 이승도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태 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부작용을 알았다 해도 덮을 수밖에 없었겠지. 어차피 지금 와서야 큰 문제점이랄 것도 아니었으니. 헌 데 윤봄이라는 여자는 그걸 어떻게 알았고,왜 너에게 접 근을 했지?”
“윤봄이는 태국영에 의해 몰락한 윤병섭 가문의 유일 한 생존자입니다.”
뒤늦게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여군호의 표정이 미묘하 게 찌푸려졌다. 그는 마치 그 단서 하나로 이미 많은 정황 을 파악한 듯싶었다. 그의 추궁이 떨어지기 전에 여제운
은이실직고했다.
“그 여자가 절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태국영에게 원한 이 깊은데 본인 힘으론 방법이 없으니 절 찾은 거였습니 다.,,
“그래서 너는 그 계집의 속셈을 알면서도 쫄래쫄래 유 인당해 주었고?”
“…그렇습니다.”
여제운은 태어나 가장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조아렸다. 마시려 손에 들었던 찻잔이 여군호의 손아귀에서 거칠게 부서졌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보았나!”
쩌렁쩌렁한 일갈에 은은한 차향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 르며 사방으로 홑어졌다.
“내가 널 단단히 잘못 봤구나. 이렇게 어리석은 놈일 줄 이야. 여 가의 차기 가주라는 놈이 고작 간교한 혀 놀림에 흔들려 자존심마저 버릴 생각이었더나.”
무릎을 쥐고 있는 여제운의 손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 다. 그는 뒤늦게 모멸감을 느끼며 턱을 경직시켰다. 그것 은 지금 생각해도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가지고 싶었습니다.”
여제운은 꽉 다물었던 잇새를 천천히 열었다. 그의 눈
빛은 조금 더 늦게 여군호에게 당도했다. 여군호는 드물 게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더 이어지는 변명 없이 담백한 자백이었다. 겹겹이 쌓이던 침묵을 깬 것은 여군호였다.
“그래서 그 계집은 거둬간 네 자존심에 비견할 만한 칼 을 주었나?”
“녹슬고 쓸모없는 칼이었습니다.”
“어째서지. 그 계집 역시 수년을 웅크려 살면서 독기를 칼처럼 갈았을 터. 어쭙잖은 패기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 았을 게아니나.”
여제운은 잠시 고심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침잠한 표정 은 마치 응급환자를 개복한 집도의 같았다. 배를 갈라보 니 예상보다 더 심각하게 퍼진 암 덩어리를 어디서부터 긁 어내야 할지 판가름하는 듯한.
“그 여자가 태국영의 약점으로 이승도 씨를 꼽았습니 다.,,
최가 형제가 등대를 찾아 헤맨 일,윤봄이가 등대를 찾 아낸 일,그리고 그녀가 백화점에서 이승도와 우연히 스 쳐 지나가던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잠깐.”
여군호는 한 손을 허공에 들어 끊어냈다. 고요히 가라
앉은 눈에 기괴한 안광이 시퍼렇게 일렁였다.
fek] l?S wlolfe 긍론 로?믈곰 급昆 相造昆 te륜 1?곰 냠 IY뮨 __bG롬k)邑 로?足按D R 류 긍lk)^fy^ _伯液움民 트로ta k^lr? feg 표昆 llofe ^r^mn 登 to登 to 꾿? 눈i느눈i느 극吉社作 IPiH? 로 k 쫄곤 to
Jfek)름 按名 ifei와?,,
_1]卷商 hfengg쑈믈ktel古 롬 lk)l古 系長 곰?? 倍몬 극In 궁?기 _ 相유 kkm ? 긍높k 다昆 中]液름# INDIO l?u 쑈옴 IM k fek)g fcSta 相浴足 IYUIY 모곡 관향 lY^in 긍공Ik to _1]浴_1?류 臣쑈kt H? [와Y吉 1?금k ii^ kS 制스 Ik)궂 l?u __|]第롬It 릉룸 \umf? 극꼴곤k) ?곰fe JMY Hsfn l?”
_l]浴I기 kdY吉 lok)k kloM 표름롬 lk)l러0궂 l?u _相第k를몬 lo#法 긍른 品 로I古 음국 1石굴곤to __b쑈옾 를I古切 k)tefe끅 _프 loirnir 극1싀?믓 묻往롬昆Hfl __bif내2로 I근조5 릉름浴 극花 또昆 mm 1내우民놀 를feK 此 긍공Ikk) __b餘_1?呈 로?S뭉 긍昆 긍技h] 1? 끝곤to 相造k믈류 를?우 1?훈롬 ?昆롬 Mk)쑨 ?늗切
?■bh믓液며t &fe ‘ir곱 로?곡 Ik Nih^iu,,
止군切?이?後 를H]음 Mk)k I? '\m [lEfe 믄lx,
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여진희가 조용히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가주님.”
“기록을 남길 것이다.”
여군호는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하게 응고 된 용건을 말했다. 주저 없이 호주머니에서 콤팩트형 녹음 기를 끼낸 여진희가 여군호의 곁에 무릎 꿇어앉았다.
“지금 이 시간부터 여제운의 차기 가주 직위를 박탈한 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여제운의 직통 명 령에 응해서는 아니 되며,나의 직계 가솔들은 여제운이 그릇된 행동을 한다고 판단되면 모두 내게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차기 가주는 내가 누군가를 특정하기 전까지는 공석으로 둘 것이다. 이상.”
여진희의 얼굴에 일순 동요가 스쳤다. 그녀는 적잖이 당혹한 눈으로 여제운을 바라보았으나 여제운은 묵묵히 순응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늘에 잠긴 그의 낯은 굴욕감도 비참함도 없었다. 여군호는 그런 그에게 시선 한 자락 나눠주지 않고 물었다.
“할 말이 있느냐.”
“아닙니다. 명령은 따르겠습니다.,,
군소리 없이 복종하는 그에게 여군호는 마치 축객하듯
가차 없이 나가라 명령했다. 여제운이 서재를 나가고 여진 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속내를 애써 숨기며 말했 다.
“당장 가솔들에게 알리겠습니다. 더 지시사항은 없으십 니까.”
여군호의 시선이 느리게 굴러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일족의 여인들과 비견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미모를 자 랑하는 여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없다.”
여진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뜨끈 한 손이 그녀의 뺨을 친애 깊이 어루만졌다.
“제운이를 위로해 주지 않겠니.”
“자존심이 강하니 원하지 않을 겁니다.”
“위로가 어렵다면 호통을 치렴. 너 그거 잘 하지 않느 나.,,
여군호는 어슴푸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무거운 마 음을 애써 털어내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여진희는 잠시 망 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제운 오빠가 큰 잘못을 했습니까.”
“아주 큰 잘못을 했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만큼,가주님 눈밖에 완전히
날 만큼의 잘못을 했습니까.”
“제운이는 여전히 차기 가주 후보에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그 애에게 이토록 무거운 자리를 너무나 일찍 물려주 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분이지.”
여군호는 그답지 않게 착실히 답을 주었다. 여진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따사롭고 온화했다. 잠자코 고개 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여군호는 부러 눈가를 접어 보였다.
“집사람은 어떠하나. 내가 오는 내내 머리가 복잡해 신 경을 써 주지 못했는데 시무룩해 있지는 않더냐.”
여진희는 보안 얼굴에 보조개를 만들며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이모님은 지금 모처럼 기분이 좋은지 매우 바쁘십니다.”
“바빠? 무얼 하는데?”
“재봉틀에 앉아 아기 옷을 만들고 계십니다.”
“아기 옷?”
“네. 아기의 정장을 만드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모자 도 함께요.”
“그걸 누구 주려고?”
“오늘 다녀오신 태 가 가주의 아이에게 줄 거라고 하셨 습니다.,,
“…태국영의 아들에게? 왜?’
“참 어여쁘고 사려 깊은 아이라 다음에 만날 때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디자이너였던 그의 아내는 결혼 후에도 유일한 취미가 직접 옷을 짓는 것이었다. 장남인 여제운의 옷을 거의 지 어 입힐 만큼 솜씨도 활력도 넘쳤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에도,태교처럼 아기의 배냇저고리와 잠옷,손 싸개까 지 직접 지으며 꽃처럼 웃었더랬다. 여군호는 방금 전까지 의 화염 같은 분노도 일시적으로 잊었다.
물오른 복숭아처럼 보안 뺨에 가늘게 접히는 그 보조개 를 얼마나 보지 못했나.
여군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아내의 작업실로 향했 다. 여진희 역시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여군호가 소 리 없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그의 아내는 상 기된 얼굴로 미완성된 바지를 고용인에게 보여주고 있었 다.
“밑단을 한 번 접어서 이 양쪽에 주름을 살짝 잡아주면 예블 것 같지?”
“아휴. 제가 뭐 옷을 보는 눈이 있나요. 사모님 눈에 예 쁘면 그게 진짜 예븐 거지요.”
“옷을 만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감이 잘 오지 않네.
생기 깃든 눈동자가 낯설었다. 여군호는 그렇게 느끼 는 제 감상 또한 낯설다 느꼈다. 아내는 여은태가 태어나 기 전까지는 저렇듯 갓 꽃을 피운 소녀처럼 늘 청초하고 발랄했다.
노화가 더딘 자신과 달리 아내는 이제 눈가에 주름도 지고 피부에 탄력도 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군호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싱그러운 얼굴을 쓰린 눈으로 물끄러미 보았다. 그때 막 다시 재봉질을 하려던 아내가 그를 발견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일어나 그에게 달려왔다. 깡말라 뼈가 도드라 지는 손에는 미완성인 바지가 여전히 들린 채였다.
“군호 씨. 이것 좀 보세요. 승도 씨 아기 말이에요. 이 거 입히면 참 예블 것 같지 않아요?”
“감각 좋은 당신이 예쁘다면 분명 예블 거야.”
아내는 설레는 눈으로 그의 품에 안겨들며 눈을 반짝였 다.
“셔츠는 좀 도톰해서 주름이 잘 안 가는 재질로 하려고 요. 제일 윗단추랑 커프스는 그 아이 눈처럼 예븐 블랙다 이아몬드로 포인트를 주면 심플하고 세련될 거예요. 벨벳 재킷도 괜찮을 것 같은데,그 아이도 몸에 열이 많을 테니 그건 잘 안 입겠죠?”
“나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잘 안 입을 것 같긴 해.”
“그럼 재킷은 내버려두고 잠옷을 만들까요? 저번에 티 브이를 보니까 작은 아기가 동물 잠옷 입고 있는 게 그렇 게 예브더라고요. 아기한텐 토끼나 양처럼 순하고 예븐 게 잘 어울릴 거고…… 우리 은태랑 세트로 입혀 놓으면 정말 예블 텐데.”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원단들이 너무 오래된 것들이 많아서 그런데,나 내일 쇼핑하러 나가도 돼요?”
“몸도 약한데 뭐하러. 샘플 원단 붙은 카탈로그 구해 줄 테니까 집에서 고르는 게 편하지 않겠나.”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던 아내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힘들면 당신이 업어주면 되잖아요. 우 리 모처럼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해요.”
여군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돌 아선 아내는 작업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크림색 펄지 발 린 슬라이드 형 벽 문이 레일을 타고 그 뒤의 공간을 드러 냈다. 원단과 단추,장식 등을 보관해 두는 룸이었다.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먼지 한 톨 없이,그녀 가 원래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방대 한 원단 더미 앞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잔뜩 들떠
보였다.
「제운이는 다정한데 너무 목석 같아서 둘째는 애교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아들이건 딸이건 엄마 좋다고 폭폭 안 기는 아기 말이에요.」
장하게 들어앉은 아기를 소중한 듯 배 위로 쓰다듬으 며 아내가 옮조린 소박한 꿈,그것에 꼭 들어맞는 아기를 그녀가 오늘 본 것이었다. 낯가림 없이 어른들에게 방긋방 긋 잘 웃고,시름에 좀 먹혀 마른 그녀를 살갑게 걱정해 주 고,제 엄마에게는 애교 있게 잘 안기는 그런 아기를.
여군호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거뭇한 안개 낀 그의 음영을 미처 살피지 못한 여진희가 뒤를 따랐다.
“잠시 혼자 있겠다. 머리가 복잡하구나.”
여진희는 네,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재로 돌아간 여군 호는 지문인식과 다이얼의 이중 잠금을 풀어 비밀 금고를 열었다. 특수 제작한 무쇠 문이 묵직하게 열리며 그 안을 까 보였다. 여 가의 가주만이 향유할 수 있는 금고 안에는 단 하나의 현금등가물 없이 오로지 문서만으로 배곡했다. 이 문서들이 바로 문자가 생긴 뒤부터 이어져 온 무구한 역사의 산물들이었다.
여군호는 그 안에서 종주의 인장을 끼낸 뒤 소파에 깊 이 몸을 묻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
은 흔치 않은 두통이었다.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짚어보지 만 두통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싸늘한 정적이 서재에 거대하게 움텄다. 박제동물처럼 한 자세로 앉은 여군호는 손아귀에 들어찬 인장만 간혹 매 만질 분,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다.
생명력 없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분침이 세 바퀴 반쯤 돌았을 때였다. 생각을 매듭지은 그의 낯은 차 가운 이성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동상처럼 정지해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백 에 공기가 세차게 뒤흔들렸다. 그가 짊어진 가솔들의 무게 만큼 무겁고 웅장한 파동이었다.
여군호는 창가로 걸어가 잠시간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 덧 석양이 짙게 깔려 잘 깎인 정원수들이 황금빛에 물들 어 있었다.
“영아.”
여군호가 나직이 입을 연 순간,영이 소리 없이 그 존재 를 드러냈다.
“네,종주님.”
“굴에 틀어박힌 호랑이를 투전(圖戰)판으로 유인해야 겠다.,,
영은 창백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움터있는 눈으
로 여군호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군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태국영의 감각마저 속일 수 있을 만큼 은신과 미행에 완벽한 자들을 정리해서 가져와라. 접근해야 할 일을 맡기 진 않을 것이니 전투능력은 전무해도 좋다. 다만 그의 동 태는 완벽히 기록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내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으되 여 씨 성을 쓰는 자가 아니라야 하고,입이 무거우며 내게 충성할 수 있는 방계 쪽을 샅샅이 훑어라.”
“왜 대답이 없지. 혹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나.
여군호는 어깨너머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영의 안면 은 늘 그렇듯 유약을 바른 도자기 인형 같았다. 마치 빚은 듯 곱게 생겼으나 활력이 느껴지지 않아 그 미모가 누군가 에게는 소름 끼칠 법한 인상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조금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 봐 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게 뭐지.”
“굳이 방계를 훑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런 임무 라면 저희 친위대 내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 텐데요.”
“내가 그것을 몰라서 이럴까. 과거 종가 왕실 암행조의
부리를 일군 것이 여 가의 순혈이 아니나. 당연히 누군가 를 미행하는 데엔 최적격이겠지.”
“허면 왜……
“혹여나 노출될 위험에서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다. 친위대는 곧 내 수족이니 만에 하나 그가 감시를 눈치 챈다면 수습이 곤란해.”
“노출이 될 거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영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얇은 눈꺼풀에 어둑한 음영이 내렸다. 여군호는 영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서운함을 감지했으나 방조했다. 지금은 아이처럼 다독여 괜한 틈을 주는 것이 나쁘다. 여군호는 이미 결정을 내렸 다. 이 인장은 다시 금고에 틀어박힐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정리되는 대로 보고를 올리라 일러두겠습 니다.,,
“그래. 부탁하마.”
영이 사라지자 여군호는 손 안에서 뜨끈하게 변한 인장 을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육중하게 닫히는 문이 역사의 기록들과 함께 종주의 인장을 암흑으로 밀봉했다.
황금빛 물결은 어느새 말끔히 걷혔다. 멀리서 몰려온 땅거미가 짙은 어둠으로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는 소파
에 몸을 늘어뜨리며 짙은 한숨을 지었다.
친위대는 몇 해를 살아도 자라지 않는 아이들이다. 육 체가 아닌 정신이 그저 미성숙한 채로 머물러 평생 ‘종 주’만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각인 끝낸 새끼오리들에게 제 영달만을 위해 위험한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죄 없는 아이들의 피 또한 아까워해야 마땅치 않은가.
너희들 역시 내 아이들이니.
여군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물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은 해가 질 때까지 이동풀장 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인간 아이들이라면 벌써 나가떨어 지고도 남을 시각인데,녀석들은 그대로 두면 탈진할 때까 지 놀 기세였다. 땅거미가 성큼 다가왔을 때,이승도는 아 이들을 불러 저녁을 먹였다. 둘 다 평소보다 식사량이 확 늘었다.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한 것만은 분명했다.
양치를 끝낸 태이경은 지치지도 않았는지 개들과 놀아 주겠다며 여은태의 등을 타고 2층으로 가 버렸다. 이승도
가 거둬 먹이고 있는 개들은 제일 어린 녀석이 족히 10살 이 넘게 추정되는 나이였다. 일호를 제외하곤 모두 거리 를 떠돌던 녀석들이라 기대수명도 짧아,인간으로 치자면 다들 노인에 속했다.
태국영과 여은태만 보면 꼬리를 마는 늙은 개들은 태이 경의 곁에만 꼭 붙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말년에 고생 중 인 녀석들에게 새삼 미안한 감정이 들었으나 어차피 이 집 에서 사는 녀석들이 거의 그런 처지였다.
버려지고 방황하던 아이들이었다. 모든 유기동물들을 거두고 싶다는 원대한 꿈은 애당초 없었다. 다만 그중에 서 특별히 마음이 가는 녀석들이 생기면 혹여 잘못될까 걱 정이 되었고,그렇게 하나둘 데려온 것이 이렇게 늘어났 을분이었다.
후우.
이승도는 소리 없이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마음 한구 석에 덜 박힌 못이 단단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내내 저를 따라붙는 여제운의 시선은 정말이지 난감하고 곤란했다. 최대한 무감각한 척하려 했으나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당신이 가엾은 짐승에게 약한 걸 압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는 원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
었다. 제가 거둬들인 짐승들은 거의 동정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되었다. 태국영과 태이경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여 은태가 조금 독특한 경우일 분이었다.
그러나 각별한 애정을 가진 녀석이라 할지라도,녀석 이 아무리 근사한 남자로 자라난대도,제가 녀석에게 느끼 는 감정의 최대치는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에서 벗어 날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만약 여제운이 발정기가 오기 전의 덜 여문 수컷이었더 라면,어쩌면 자신은 그를 가엾이 여겨 가끔 돌보아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건강한 정서를 구축하게 도와주는 것 은 얼마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저는 무엇 도 해줄 수가 없는 처지였다. 제가 동정으로 내민 손이 그 에게는 순간의 황홀감과 동시에 지리멸렬한 절망감을 줄 것이니.
“우리 승도,다른 남자 생각하는 것 같아.”
불쑥 치고 온 목소리가 상념을 쪼겠다. 쪼그리고 앉은 매트리스 옆이 푹 끼져들었다. 이승도는 명한 눈에 초점 을 맞추고 돌아보았다. 산뜻하게 샤워를 하고 돌아온 태국 영은 반라의 모습으로 젖은 머리를 손끝으로 느긋하게 쓸 어 넘기고 있었다.
“귀신같기는.”
부정하지 않는 말에 태국영은 싱긋 웃었다.
“너무 당당하네. 나는 아주 보수적이라서 정신적인 외 도도 바람으로 치는데.”
“…보수적. 네가?”
“서방님은 보수 중에서도 극 보수파지. 안 그랬으면 내 내 우리 승도만 바라보면서 수절했겠어? 보름 때마다 여 기저기 씨 부리고 다녔지. 물론 정신적인 외도도 하늘에 맹세코 없었고.”
반박할 말은 없었다. 괜히 양심이 찔려 관자놀이를 긁 적이던 이승도는 마침 궁금하던 것이 있어 말을 돌렸다.
“은태 아버님 말이야. 아까 유모 보니까 종주님이라고 부르던데.”
“응. 그게 왜.”
“가주는 가문의 수장이라는 뜻이잖아. 그럼 종주라는 건 인간들의 대통령 같은 거야?”
“뭐,미묘하게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하긴 하지.”
“그럼 너희들도 대선 때처럼 후보들 선정해 놓고 투표 해? 후보들은 공약 같은 거 걸고?”
태국영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매끈하게 뻗 은 눈썹의 한쪽 끄트머리가 삐죽 올라갔다. 참으로 어이없 는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동족 간 혼인이 많기 때문에 서너 다리 건너면 다 연결돼 있어. 투표권 같은 거 줘 봐야 보나 마나 자기 가문 놈 아니면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놈들이나 뽑겠 지. 그렇게 되면 결국 가문 머릿수 싸움이랑 다를 바가 없 지 않겠어?”
“그럼 어떤 식으로 뽑는데?”
“다음 세대의 종주를 선택하는 건 오로지 종가에 소속 된 친위대의 권한이야. 종주가 은퇴를 해야 할 시점이 오 면 친위대가 다음 대 종주의 재목에 어울릴 것 같은 이들 에게 초대장을 보내. 그에 응하고 싶지 않으면 거부 으I사 를 밝히면 되는 거고.”
이승도는 대꾸 없이 더 바짝 붙어 앉았다. 커다랗게 뜨 인 눈동자 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이런 모습은 영락없 이 태이경과 판박이였다. 녀석도 원가 바라는 것이 있으 면 채근하기에 앞서 딱 저런 눈을 하고서 저를 빤히 올려 다보곤 했다.
태국영은 그 낯선 호기심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강박증 처럼 피해 다니며 무엇도 묻지 않던 이승도가 점차 이쪽
세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니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는 가.
“친위대가 후보들을 어떤 식으로 검증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 다만 딱 하나,그게 인간들이 우두머리를 뽑는 기준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예를 들 면…… 여군호가 어떻게 종주가 됐는지 알려줄까?” 이승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마치 어린애 를 대하듯 이승도의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달콤하게 눈 매를 접었다. 그러나 그 천진한 미소와는 달리 그 입술에 서 흘러나온 뒷말은 참으로 험악했다.
“그때 후보는 총 여섯이었는데,여군호를 제외한 모두 가 죽었어. 왕권이 무너진 이후 후보들이 그렇게 무더기 로 죽은 건 아주 드문 사례야.”
이승도는 놀란 다람쥐처럼 동그란 눈을 했다.
“죽어? 왜?”
“빤하잖아. 왜일 것 같아?”
태국영이 되물었고,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이승도는 잠 시 뒤 꽤 합리적인 답을 내놓았다.
“설마은태 아버님이……?”
“설마라니. 당연히 그 작자짓이지.”
“그렇게 경쟁자들을 죽인 남자인데도 종주가 될 수 있
단 말이야?’
“당연히 보통의 경우에는 후보에서 그 즉시 제외돼. 게 다가 후에 전쟁 날 각오까지 해야 되지. 하지만 여군호의 경우에는 그의 정치적인 처세술이 빛을 발했다는 평이 많 아. 후보자들과 갈등이 벌어지고 싸움이 나고 하는 과정에 서 거의 모든 책임소재가 상대방에게 있었다고 하거든. 자 기가 책잡히지 않는 선에서 상대에게 먼저 싸움을 걸도록 유도했다는 말이야. 그리고 다 이겼지. 그래서 아무도 그 를 책하지 않았던 거고.”
여군호는 이기는 싸움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존경하 고 싶은 능력은 아니었으나 그가 유능한 책략가라는 데에 이견은 없었다.
“내친김에 친위대에 대해서도 알려줄까?”
이승도는 이번에도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국영은 고대의 왕을 위해 생겨난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러 변화해 온 친위대라는 집단에 대해 꽤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었 고,이승도는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하다 막판에 는 희미하게 혀를 찼다.
“왕은 이미 사라지고 시대도 변했는데,친위대는 여전 히 자신들의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거구나.”
“개들은 너무 오래전부터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을 굳
게 닫고 있었어. 그 폐쇄적인 성향이 너무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낯선 자극이 들어오면 더 깊은 곳으로 숨 어들어가게 되었던 거고. 결국 지금은 그렇게 완전히 겁먹 은 거북이마냥 등껍질 안에만 갇혀버리게 된 거지.”
“일생의 목표가 종주를 지키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는 삶이라니…… 왠지 짠하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반응이었다. 태국영은 헛웃음을 흘 렸다.
“우리 세계에서 친위대라고 하면,보통은 가장 껄끄럽 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해. 종주의 발언이 힘을 갖는 건 종 주가 대단해서가 아니야. 그를 비호하는 친위대 놈들을 절 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승도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 작스런 정보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적응이 더뎠다. 그를 눈치챈 태국영이 덧붙였다.
“친위대는 기본적으로 우리 종족 가운데에서 가장 월등 한 피를 섞어 만든 집단이야. 쉬운 예를 들면 은신이 필수 인 암행조에는 여 가의 피가,강력한 살상능력이 필요한 암살조에는 우리 태 가의 피가 그 근원이란 말이지. 각 조 마다 그렇게 임무에 맞게 피를 가져갔어. 그리고 개들은 그 특화성을 계승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근친혼만으로 대
를 이어가고 있고. 거기에 더해서 종주를 중심으로 강력하 게 뭉쳐있으니 강할 수밖에 없지. 종주의 의지만 있다면, 아마도 중산 규모의 가문 정도는 사흘 내로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어린 씨앗 하나 안 남기고 완벽하게. 물론 그 뒷날의 불안요소는 명령을 내리고 왕좌에서 물러난 종 주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는 하지만.”
이승도는 명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잃고 있었다. 그리 고 느린 이해 끝에 식은땀 섞인 소름이 등골을 내달리는 것을 선득하게 느꼈다. 가까운 과거의 급박했던 어느 날 이 불화살처럼 뇌리를 갈랐기 때문이었다.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그땐 왜 그랬어.”
“음?”
“제운 씨를 죽일 뻔했잖아.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면 분 명히 죽었을 거야.”
여 가와의 전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이승도 는 이제야 비로소 그 무게를 절감했다. 귀하게 여기던 아 들의 죽음에 분노한 여군호가 과연 누구를 노릴 것인가 하 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너무나도 빤한 것이었다.
태이경이다. 그 작은 아기는 일단 손에 넣기만 하면 꽃 을 꺾는 것처럼 쉽게 제거할 수 있을 만큼 연약했다. 여군 호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더 효율적인 복수가 되는 것이다.
분노와 공포로 살이 떨렸다. 이승도는 버럭 소리쳤다.
“우리 이경이가 그 무서운 집단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 다는 말이잖아! 넌 어떻게 그런 간단한 생각도 못 해? 너 바보야? 지능이 낮아? 사고를 쳐도 뒷일은 생각했어야지! 우리 이경이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어!”
태국영은 뒤늦게 아차 했다. 모처럼 눈 반짝거리며 저 들 세계를 궁금해하기에 다정한 남편처럼 굴어보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머릿속에 저보다 아이가 먼저인 이승도 가 이렇듯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승도야. 잠깐 진정하고 내 말을 더 들어봐.”
태국영은 당장이라도 멱살 잡고 한 대 후려칠 기세인 이승도의 어깨를 짚으며 타이르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 나 이승도는 당연히 그 손을 매섭게 떨어내며 서슬 퍼런 눈길을 쏘아 보냈다.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모양 을 힐긋 훔쳐본 태국영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무리 내가 막 살아도 내 아들 안전까지 헐값으로 취 급하지는 않아. 이경이 손가락 하나만 부러져도 네가 날 잡아먹으려 들 텐데 내가 설마 그러겠어?”
“그게 아니면 뭔데.”
너 말 잘해. 아니면 진짜 죽어.
이승도는 도끼눈을 뜨며 협박 어린 안광을 번쩍였다.
정말 말 한마디 잘못 끼내면 집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태 국영은 생애 가장 큰 위협을 지금 순간 느끼고 있었다. 쥐 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려가며 단어를 골라내 뱉어냈다.
“종주는 제 안전 외의 사유로 친위대에게 살생을 지시 하는 순간 종주의 자리를 박탈당해. 친위대는 종주의 마지 막 명령을 수행하지만 이후 더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 이야. 그 말은 곧 평범한 가주로 돌아간다는 뜻이지. 그런 데 만약 놈들 손에 이경이가 죽었어. 그럼 나는 가만히 있 겠어? 내가 그 가문 놈들 씨가 마를 때까지 쫓아다닐 텐 데 여군호가 섣불리一”
철썩!
태국영은 말도 다 못 맺고 기어이 등짝을 후려 맞고 말 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변명이었지 싶은데,저 로서는 그 이유를 도통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도는 무 릎걸음으로 일어나 인정사정없이 손을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이경이 잘못된 뒤에 네가 다 시 복수해서 뭐하는데! 이 나븐 놈! 너 같은 게 아빠라고! 명청한자식!”
“야,승도야. 잠깐만,끝까지 들어보라니一”
“듣긴 뭘 들어! 네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이 다 거기
서 거기지!”
이승도는 극도로 치솟아 오른 분노를 도무지 주체하지 못했다.
“너 때문에 우리 이경이 잘못되면 난 네 앞에서 죽어버 릴 거야,이 멍청한 놈아!”
태국영은 말려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묵묵히 폭력 세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솜방망이보 다 안 아픈 정도였고,무엇보다 이 이상으로 이승도를 완 전히 납득시킬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세계에는 이승도가 납득하지 못할 일들이 아주 많 이 산재해 있었다. 이승도는 자식을 잃은 모든 부모가 나 라를 잃은 것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질 거라고 속단하고 있었다. 과거 태국영 자신이 부모로부터 어떤 학대 속에 방치되어 있었는지는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아이들은 성체가 될 씨앗이다. 상하고 썩은 씨앗은 심 지어 조기에 버려진다. 그것이 이 세계의 생리다. 여군호 는 분명 여제운의 죽음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은 인간들이 자식을 잃은 거대한 상실감과는 전혀 다른 성 질의 것이다.
여군호는 계산적이고 정치적인 남자였다. 아끼던 후계 자를 잃었다는 것에서부터 복수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가
고작 어린아이 하나 목숨을 두고 친위대를 움직일 일은 없 었다. 그가 평범한 가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그는 그 자 신의 가문에 어마어마한 피바람이 부는 것을 목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종주가 인장을 사용하는 데에 감수해야 할 불안요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이승도를 만족시킬 수 없는 해 명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태이경의 안전 을 보장할 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이승도는 제 손이 벌겋게 변할 때까지 등짝을 후려갈기 다가 결국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얼굴이었다. 차마 붙잡을 여지도 없었다.
태국영은 깊이 한숨을 끌어올리며 가라앉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거하게 터진 부부싸움에 놀라서 내려온 아이들 이 구석에 나란히 앉아 눈치를 살피느라 바븐 것이 보였 다.
태국영은 거실의 대형침대에 비딱하니 앉은 채 지친 손 짓을 했다. 태이경이 여은태의 털을 한 손으로 꼭 쥔 채 미 적미적 다가왔다.
“가서 네 엄마한테 아양 좀 떨어 봐.”
태이경의 오동통한 입술이 삐죽 나왔다.
“엄마 화나면 무서운데……
“내가 네 엄마 눈치 보는 건 안 무섭나.”
“그것두 무섭지만……
“알면 가서 뭐라도 좀 해. 꼬맹이,너도 그 잘난 털로 승 도좀 폭 파묻어서 기분 좀 풀어주고.”
태국영은 당연하다는 듯 여은태에게 의뢰했다. 여은태 는 눈꼬리를 삐죽 올리며 투덜거렸다.
[내가 무슨 기붐조야?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별 이상 한걸 시키고 있어.]
“내가 내 마누라 나눠주는 것도 용인하면서까지 참아주 고 있는데 빌붙어 사는 주제에 그 정도도 못 해? 너희 부 부싸움 오래가는 집에서 얹혀사는 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 인지 내가 경험하게 해 줘?”
[그러게 애초에 잘못을 하지 말았어야지. 선생님 말 틀 린 거 하나도 없더만.]
애처가 꿈나무가 따갑게 핀잔했다. 놀랍게도 태국영의 신랄한 혀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언쟁에서 이긴 여 은태는 기세등등하게 태이경을 등에 태우며 거들먹거렸 다.
[그렇게 좋아 죽으면서 왜 알아서 점수를 깎아먹나 몰 라. 다정하고 착한 우리 선생님 마음 움직이는 거 식은 죽 먹긴더니
“작작해라,꼬맹이.,,
심기 불편해진 태국영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여은 태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다음부터는 알아서 좀 잘해. 자기 애 어떻게 되건 말 건 무턱대고 다 때려 부수지 말고. 아휴,정말 야만적이 야. 선생님이 화낼 만도 하지.]
여은태는 도도하게 솟은 풍성한 꼬리를 느리게 살랑거 리며 2층 계단을 올라갔다. 태국영은 녀석이 사라진 자리 를 노려보다 이를 갈았다.
“아주 하나만 걸려 봐.”
뒤끝 긴 남자는 복수를 다짐했다.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여은태는 찌릿한 고통 에 움찔 몸을 낮추면서도 열심히 몸 안의 원기를 뒤틀었 다. 태국영의 변이 모습은 여전히 뇌리에서 건재했다. 하 루에도 수십 번씩 되새김질하고 있기도 했지만 충격적일 만큼 경이로운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핵. 핵.
[금방 될 것 같았는데,생각보다 되게 힘드네.]
결국 오늘도 큰 진전은 없이 몸만 녹초가 되었다. 대강 흐름은 알겠는데 가장 중요한 버와 관절이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하지 말자고 애써 되뇌며 아쉬움을 삼켰다.
시각은 어느새 일곱 시 가까이 되어갔다. 이승도의 집 은 텅 빈 채 고요했다. 여은태는 약간의 외로움을 느꼈으 나 우울해하지는 않았다.
태이경은 자기 나름대로 저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 기 위해 수업 스케줄도 자주 바꾸고 있었다. 그 정도로 노 력하고 있는 녀석이 마냥 예뻤으니 여기서 더한 걸 바라 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다.
여은태는 찌부듯한 몸을 앞뒤로 쭉 늘린 뒤 욕실로 어 슬령어슬렁 들어갔다. 마개로 수챗구멍을 막고 물을 채우 는 일련의 동작들은 어색함 없이 능숙했다.
촤아아.
욕조 밖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물을 너무 많이 채워서 가 아니라 이 욕조가 이제는 제 몸을 담아내기에 너무 작 아져버린 탓이었다. 혹사당한 몸을 냉기로 푹 절이고 싶었 으나 턱도 없었다. 결국 여은태는 5분도 안 되어 몸을 탈 탈 털고 제 전용 방에 틀어박혔다.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가동시키니 털에 남은 물기가 마 르며 열기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방바닥도 금세 냉골처 럼 서늘해졌다. 여은태는 마치 고기 굽듯이 그 큰 몸을 이 리저리 뒹굴거렸다.
그때,밖에서 기척이 들려 왔다. 누운 채 시계를 보니 제 몫의 고기가 마당에 날아들 때였다. 그냥 내버려 두고 찬바람 아래 가만히 눈을 감는데,오늘은 조금 낯선 소리 가그 뒤를 따랐다.
뭐지?
호기심을 느낀 여은태는 느긋하게 방을 나가 테라스 문 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묵직한 고기 봉투 옆 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상자가 추락해 있었다.
크기는 대략 양문 냉장고의 반만 했다. 추락의 여파로 상자 귀퉁이가 움푹하게 찌그러져 있었으나 터진 곳은 없 어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은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 곁을 빙빙 돌았다. 앞발로 툭툭 쳐봤더니 잘도 밀렸다. 크기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가벼운 무게감이었다. 홀로 심심했던 여은태는 상 자를 발로 굴리며 괜한 호기심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어 느 순간 상자의 한 면에 붙은 쪽지를 보았다.
『안녕하세요,승도 씨. 은태 엄마예요. 제가 옷을 짓는
재주가 좀 있어서 몇 벌 만들어서 보내요. 은태 예쁘게 잘 돌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곱고 반듯한 활자가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어쩐지 심 란해진 여은태는 그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 게 대놓고 냉대를 했는데도 이 일방적인 애정은 여전히 홈 집 하나 없었다. 심경이 복잡해졌다.
귀머거리 엄마는 10년도 넘게 제게 수많은 고통과 절 망을 안겨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의도치 않은 것이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제 친모가 저를 사랑하는 방식이 안 락사가 아니었기에 지금 순간이 있다는 것도.
그 이승도조차 제 아기를 방치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 스스로가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워서,애달게 사랑하고 있 음에도 도망치기만 했다. 이승도는 그런 자신과 제 엄마 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랑은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충만함만을 주는 것이 아 니라고. 가끔은 사랑하기에 상처 입히고,사랑하기에 떠나 려는 이를 붙들고,사랑하기에 떠날 수도 있는 거라고.
휴우.
여은태는 애늙은이처럼 한숨지으며 아예 그곳에 자리 를 깔고 드러누웠다. 뒷발로 성의 없이 상자를 툭툭 차고 놀며 시간을 죽였다.
얼마 안 가 반가운 엔진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고,반 가운 얼굴들이 차고에서 나왔다. 여은태는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가장 먼저 태이경을 등에 앉혔다. 그리고 이승도에 게 고개를 쭉 들이밀며 어리광을 부렸다. 무릎을 굽혀 앉 아 여기저기 매만져주던 이승도 역시 낯선 상자에 반응했 다.
“저게 뭐야?”
[엄마가 옷을 지어 보냈대. 열어보지는 않았어.]
“웬 옷?”
[몰라. 그렇게만 적혀있었어.]
여은태는 친모의 나이도 직업도 몰랐다. 여은태 모자 사이에 오고 갔던 것은 악에 받친 으르렁거림과 눈물 젖 은 고통이 대부분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태국영이 고기 봉투를 냉장고에 넣는 동안,이승도는 거실에서 박스를 뜯으며 조금 반성했다. 이제껏 아이들 옷 을 사본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자기가 너무 무심했다고 자책하면서도,한편으론 설레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옷들은 모두 각기 옷걸이에 걸려서 불투명한 커버에 담 겨 있었다. 커버 겉에 달린 넥타이 모양의 인식표에 이름 이 적혀 있어 옷 주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승도
는 가장 먼저 보인 태이경의 이름에 커버를 벗겨 냈다.
“어? 토끼다!”
빳빳하게 선 토끼 귀를 발견한 태이경의 큰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승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옷이라기 에 셔츠나 바지 같은 것일 줄 알았지,이렇게 깜찍한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이경이 입어 볼까?”
“응!”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은 이미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이승도는 상하의와 후드 모자까지 일체형의 연한 핑크색 옷을 태이경에게 입히고 꼼꼼하게 단추를 채웠다.
모자에 달린 토끼 귀에는 부드러운 심이 들어 있어 취 향대로 모양을 잡을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이승도가 양 옆으로 그 귀를 살짝 접어 놓고 떨어졌을 때,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은태가 명하니 중얼거렸다.
[미친 귀여움……■]
쓸데없이 고월리티였다. 태이경은 원래 그 자체로도 매 우 귀엽고 예뼜지만,저렇게 작정하고 깜찍함을 강조해 놓 으니 보는 이들을 죄 쓰러뜨릴 만한 파괴력마저 붐어져 나 왔다. 물론 이승도 역시 너무 귀엽다며 녀석을 품 안에 안 아 보보세례를 퍼붓기 바빴다. 태이경은 구부러진 귀를 쑥
스러운 듯 만지작거 리며 물었다.
“엄마,나 예뻐요?”
“응,응! 너무 예뻐서 숨넘어가겠어. 그렇지,은태야?” 여은태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벌렸다.
[응. 이제껏 상상해본 적 없는 수준의 미친 귀여움이야.
]
주방에서 나온 태국영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박스 안의 옷을 차례차례 끼내다가 어느 순간 눈을 빛냈다. 그가 꺼낸 커버에는 여은태의 이름표 가 붙어 있었다. 넋 나간 눈으로 태이경을 뜯어보느라 완 전히 정신 줄을 놓고 있던 여은태는 제게 다가오는 그림자 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방심한 사이 목덜미가 잡히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강 제로 무언가가 입혀졌다. 여은태는 격렬히 반항했으나 태 국영은 묵묵히 힘으로 제압해 기어이 제 뜻을 이루고 말았 다.
[뭐,뭐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은태는 바닥에 쓰러진 셋을 당황한 눈으로 번갈아 흘 겨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았다. 거 실은 마치 소리 없는 폭탄이 투하된 듯 미심쩍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태국영은 마치 예전 탁자에서 엎어져서 미친놈처럼 웃 던 때와 꼭 같은 모양이었고,태이경은 대놓고 숨넘어갈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이승도마저도 태이경을 품에 안고 태국영의 품에 안긴 채 웃다 못해 울고 있었다.
여은태는 불길함에 당장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 전신거 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석상처럼 굳었다.
이럴 리가 없어. 이게 나일 리가 없어.
망연한 현실부정이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여은태는 거 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분노 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몸통도 모자라 머리 위까지 찰싹 감싸고 있는 불경 한 천 쪼가리를 갈기갈기 찢으려던 때였다. 가장 먼저 빈 사 상태에서 헤어 나온 태이경이 바람처럼 달려와 등에 올 라탔다.
“형아,진짜 귀엽다! 나 이거 너무 좋아! 꿀벌이다,꿀 벌!”
여은태는 순간 욱해서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놀리 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얼굴은 너무나 예쁘게 방 긋 웃고 있었다. 좋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목덜미에 얼굴 을 마구잡이로 비비적거렸다. 그럴 때마다 녀석의 다리 옆 으로 삐죽 튀어나온 꿀벌 날개가 팔락팔락 움직였다.
쓸데없이 고월리티인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태이 경의 토끼 귀처럼 심이 박힌 반투명한 날개에는 무늬와 털 까지 매우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몸통을 감싼 검은색 과 노란색의 교차줄 무늬는 물론,후드에 달린 더듬이와 궁둥이 위에 박힌 독침은 차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 다.
찰칵.
차마 뭘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말을 잃고 있는데, 반갑지 않은 음향효과가 지척에서 울려왔다. 음울하게 올 려다보자 이승도가 휴대폰 카메라로 이 치욕적인 순간을 열심히 박제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이승도 역시 젖은 눈가를 닦을 새 도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느라 바빴다. 그 눈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을 보듯이 애정이 한껏 깃들어 있 어,여은태는 침울하게 불만을 삼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