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승도는 보통 정해진 일과 외에도 특별히 할 일이 있 다거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몸 상태가 아니면 진료실을 자주 비우는 편이었다. 아프거나 다친 동물들은 없는지,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이 있는지,출산 징후가 보이는 암컷이 있는지 등등,미리 살펴보고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인공포육실은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살펐다. 아무래도 다 큰 녀석들보다는 아가들 이,그중에서도 어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가들이 좀 더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보름 전 귀한 새 끼 백사자 한 마리가 태어난 뒤 이승도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짬을 내 인공포육실을 찾게 되었다.
“어우,선생님 발 닳으시겠다. 또 오셨네.”
젊은 여자 사육사가 애교 있게 웃으며 반겼다. 이승도 는 꾸벅 인사하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백설이는 별일 없죠?”
“네네. 분유도 잘 먹고 트림도 잘하고 잘 놀아요.”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안 될 거 있나요.”
사육사는 안내를 해준 뒤 다른 아이 이유식을 먹이러 갔고,이승도는 꼼꼼하게 손을 소독하고 나서 백설이를 보 러 갔다. 녀석은 따뜻한 담요에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 었다. 동그마니 몸을 말고 있는 것이 너무 예뻐 넋을 놓고 보다가 깨우지 않고 조용히 나가려던 때였다. 녀석이 그 때 천천히 눈꺼풀을 들더니 저를 빤히 보았다. 이승도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백설아. 선생님 기억해?”
어기적어기적 아주 느리게 다가온 녀석은 킁킁 몇 번 냄새를 맡더니 신발을 갉작였다. 아무래도 알아보는 모양 이었다. 이승도는 보안 정수리를 조금 쓰다듬어주었다.
“아픈 데는 없지?”
[응.]
“그래. 가서 얼른 더 자.”
도도한 꼬마 아가씨는 손끝을 한 번 할짝이고는 다시 자리로 가 누웠다. 이승도는 녀석이 잠드는 걸 확인하고 나와 아기호랑이들 방을 찾아갔다. 실내는 텅 비어 있었 다. 시계를 보니 딱 외부에 새끼호랑이들을 공개할 시간이 었다. 이승도는 다른 새끼 동물들부터 한 번씩 살펴본 뒤
사육장으로 나갔다.
인공포육실로 옮긴 태산이의 룸메이트는 저보다 서너 달 먼저 태어난 다른 수컷 호랑이 두 마리였다. 덩치 차이 가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나 형들에게 얻 어맞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녀석은 지 나치게 적응을 잘했다. 그 왕성한 혈기로 절대 주눅드는 법 없이 잘 지내는 중이었다.
사육장 잔디 위에는 태산이를 구조했던 사육사가 나와 있었다. 그의 태산이 앓이는 여전했으나 태산이의 반응은 아직까지 냉랭하기만 했다. 인공포육실로 옮기면서 도리 없이 사육사가 먹이를 갖다 주기 시작했는데,자기 앞에서 는 절대 입도 안 댄다고 그는 매우 한탄을 했었다.
태산이는 잔디밭에서 다른 수컷 한 마리랑 왕왕 싸우 고 있었고,나머지 한 마리는 멀찍이서 태평하게 자고 있 었다. 재들 왜 싸워요,하고 물으니 공놀이를 하다가 시비 가 붙었다고 했다.
“근데 태산이 저거 아주 성깔이 보통 아니에요. 한 번 을 안 져요.”
‘‘…음. 확실히 태산이가 당찬면이 있죠.”
이승도가 웃으며 애매하게 대꾸했다. 사육사는 그 정도 가 아니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힘의 차이가 상당해서 항상 더 많이 맞는데 요,그 와중에도 어찌나 끈질기게 반격을 하는지 백두랑 한라가 한 편 먹고 패다가 질려서 결국 도망갑니다. 보세 요,또 그러네요.”
사육사의 말대로 방금 전까지 우위를 보였던 백두가 저 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태산이는 어설프게 으르렁거리며 백두의 뒤꽁무니를 죽자 살자 쫓아갔다. 백두는 얼마 안 가 다시 화가 나 태산이를 앞발로 후려쳤고,태산이는 마 치 오늘만 살 것처럼 악착같이 달려들어 백두의 앞발을 물 고 늘어졌다. 아무리 아가라지만 이발이 다 나 있는 터라 부상이 걱정됐다. 이승도는 목청을 높여 녀석을 불렀다.
“태산아! 선생님 왔어!”
그러자 눈에 독기를 품고 온갖 난리를 치던 녀석이 껑 충 뛰어올랐다. 백두가 깜짝 놀라 움찔한 사이 태산이는 신나게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왕! 선생님! 선생님!]
이승도는 무릎을 굽혀 앉아 팔을 벌렸다. 녀석이 품 안 으로 훌쩍 날아들었다. 발톱이 가슴을 긁어 따가웠다. 보 보,보보,저를 보자마자 아양부터 떨고 보는 녀석의 주둥 이에 쪽쪽 입을 맞췄다.
“우리 태산이 형아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재가 먼저 덤볐어! 혼내줘야 돼!]
녀석도 참.
이승도는 픽 웃으며 녀석을 안아 들고 백두에게 다가갔 다. 녀석은 토라진 듯 불손한 눈초리였다. 백두는 불만스 럽게 앞발을 탁탁 구르며 신경질을 부렸다.
[선생님 미워.]
아무래도 늘 태산이부터 안아주는 것에 녀석은 불만이 많은 듯했다. 물론 제가 늘 셋 중에 태산이부터 살펴보는 것은 사실이지만,녀석이 오해하는 것처럼 편애의 의미는 아니었다. 조금 더 어린 새끼들부터 손이 먼저 가는 것분 이었다. 태산이가 으르렁거리며 파닥거렸다.
[재가 욕했어! 내가 혼내줄게!]
[넌 조용해! 쪼그만 게!]
[덩치만 큰 게!]
이승도는 쉬수I,하며 다른 손으로 백두의 궁둥이를 툭 툭 어루만졌다. 녀석들 덩치가 커서 두 마리를 한끼번에 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자꾸 싸우면 둘 다 선생님한테 혼나.”
서로를 바라보며 크릉크릉 목을 울리던 녀석들이 일제 히 눈을 댕그랗게 떴다. 이승도는 태산이를 바닥에 내려두 고 화해하라고 강요했다. 녀석들은 서로를 노려보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팩 돌렸다. 억지로 앞발들을 끌어와 악수 를 시켰는데 둘 다 싫다고 난리를 피웠다.
아무래도 화해는 요원해 보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유혈 사태가 일어난 게 아닌 걸 보면 완전 원수지간처럼 지내 는 것은 아니라 일단 더 두고 봐야할 것 같았다. 맹수들이 니 싸우면서 크는 것이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공개 관람 시간이 끝나고 사육사가 녀석들을 인공포육 실로 옮겼다. 녀석들 하나하나를 다 안아주고 작별인사를 한 다음 임신 중인 나래에게도 들렀다.
나래는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임신을 한 암컷 치타였다. 국제적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된 치타는 자연 번식이 매우 힘들기로 유명했다. 사파리까지 있는 대형동물원도 아니 라 나래의 수태는 사실 모두가 기대하지 않고 있던 상태였 다.
그러나 이승도는 젊은 암컷인 나래에게 꾸준하게 정성 을 쏟아 왔다. 예민한 동물이라 조금씩 말을 걸고 조금씩 친해지며 녀석이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였다. 수컷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호기심을 자극하며 열심히 중매도 섰 다. 그 결과 얼마 전부터 드디어 확실한 임신 징후가 보이 기 시작했다. 산일은 아직 한참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사 육사들의 긴장은 말이 아니었다.
내실 이중문을 살짝 열고 이승도는 잔뜩 예민해져 있 는 나래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아픈 데는 없는지,불편 한 것은 없는지,아가는 잘 움직이고 있는지 물을 때마다 녀석은 불룩하게 부른 배를 벽 쪽으로 감추면서도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나래를 살펴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진료실로 돌아왔다. 실내는 바깥 못지않은 찜통이었다.
이승도는 에어컨부터 켰다. 6월 중순을 갓 넘었을 분인 데 태양 볕이 말도 못하게 뜨거웠다. 오늘 일기예보 상으 로 낮 최고기온은 34도였다. 그야말로 불볕더위가 일찌감 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덕분에 저번 주말이 바빴다. 사람을 불러 대청소를 한 뒤 1 층 방에 나눠 둔 동물들을 모두 2층으로 옮겼다. 제 침실도 2층에서 1층으로 바뀌었다.
무더운 날씨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여은태를 위해 1층 방 하나를 에어컨만 남기고 텅 비워 뒀다. 직장에 있는 동 안 더워지면 이 방으로 들어와 에어컨을 켜면 된다고 가르 쳐 줬다. 그 이후로 퇴근해서 돌아갈 때마다 녀석은 에어 컨을 강하게 틀어놓은 방 안에서 여지없이 늘어져 있었다.
알뜰 싱글남 이승도는 전기세 폭탄을 여 가에 떠넘길 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청구하기엔 액수가 좀
애매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여제운에게 연락을 취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열흘도 더 지났건만 아직까지 급작스레 돌변하던 그의 눈빛이 생생했다. 순식간에 밝은 은색으로 투명하게 물들 던 홍채,바늘처럼 작아지던 동공,미친 듯 속도를 올리던 심장 박동까지.
「전에 말했다시피 슈퍼문을 꾸준히 접종하면 널 알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여제운 같은 경우에는 출혈이 너 무 심했던 게 원인이 됐겠지.」
슈퍼문이 완성되고 상용화된 건 등대들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랬기에 이승도 자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 부작용이 있다는 것조차 아무도 몰랐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 부작용을 발견한 건 태국영의 부친이 최초라 할 수 있 었다.
「정 불안하면 시집오?. 내 아내가 되고 내 아기의 엄마라 는 걸 밝히면 누구도 섣불리 네 곁을 기웃거리지 못할 거 야. 이렇게 정부처럼 숨어 사는 것과 내 곁에 당당하게 서 는 건 인식 자체가 다르니까. 우리 세계 수컷들은 정식으 로 호적에 오른 암컷들을 귀하게 대해. 특별한 이유가 있 지 않으면 다른 수컷의 암컷을 절대 상처 입히지 않아. 즉 결로 죽임을 당해도 전쟁조차 걸 수 없을 만큼,그건 명확
한 불문율이거든.」
태국영은 말하는 중간중간에도 섹스 뒤의 다정한 연인 처럼 자꾸만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한 번 풀어놔 주니 대놓 고 연인 행세였다. 결혼의 장점을 적극 피력하면서까지 자 꾸만 아쉬운 듯 엉덩이골을 더듬었다.
단지 저를 보호하기 위해 결혼이란 굴레를 들이미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얼른 제 걸로 만들어 언제 어느 때고 교미하고 싶어 안달하는 수컷의 흑심이 너무 선연하 게 보였다.
삽입했다가 배냈던 그 짧은 순간의 희열이 그를 조금 초조하게 만드는 듯했다. 문제는,밀어내면 놈이 상처받을 까 하는 걱정이 계속 뇌리를 멤돌아 저도 어정정하게 응해 버리고 말았다는 거였다.
이승도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그 간지러운 스킨십을 시작으로,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날의 난잡했던 행 위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탓이었다. 살색의 향연 에서 벗어나고 싶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조금도 효 험이 없었다.
미쳤어. 미쳤다고.
이승도는 귀까지 새발개져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내가 왜 그렇게 홀랑 넘어갔을까,안 된다고 하면 끝날
것을 왜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다 그 꼴까지 가 버렸을까.
제 손으로 다리를 훤히 붙잡아 벌리고 치부를 드러낸 채 정액 샤워를 자처하다니,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 다. 이승도는 자다가도 이불을 찰 만큼 부끄러워 뜨거워지 는 낯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 얼굴에 약해. 분명 그래서야. 이 속물.
이승도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참을 발만 버둥거렸다.
ffl|0|0|?
진탕된 머리가 겨우 회생의 기미가 보였을 때,키폰이 울렸다. 타는 목을 찬물로 축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승도입니다.”
이승도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 어컨 바람에 얼굴을 정면으로 내맡겼다. 여전히 열꽃의 잔 재가 남은 피부를 식히면서 반응을 기다렸으나 넘어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여보세요. 전화 받았습니다. 말씀하세요.”
한마디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이승도는 한동안 명하 니 눈만 깜박였다. 먹통이 된 전화기 속 정적이 꾸역꾸역 귓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로써 저를 괴롭혔던 상념은 말 끔히 사라졌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힘없는 음성이 목 구명을 비집고 나왔다.
“인사라도 할 것이지.”
수화기 든 손이 툭 떨어졌다. 이승도는 책상에 걸터앉 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안녕,하면 나도 안녕,할 텐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목소리만 듣고 끊는 전화가 걸려온 지는 꽤 되었다. 정확히는 태국영의 종가모임 이후부터였 으니 보름이 다 되어가는 듯했다. 하루에 한두 번씩,많게 는 서너 번씩,그렇게 숨죽인 신호는 누적되어 갔다.
이상하게도,이승도는 그 전화를 처음 받았던 날부터 어떠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틀리지 않 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도는 고개를 들었다. 이마 위쪽에서는 오래된 벽걸 이 에어컨이 소음과 함께 찬바람을 붐어내고 있었다. 이르 게 찾아온 폭염을 여은태는 힘겨워했다. 분명 또 에어컨 을 세게 틀어놓고 바닥에 눌어붙어 헥헥거리고 있을 터였 다. 이틀 뒤면 또 보름이니 컨디션은 바닥을 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제 아이도 다르지 않을 거 였다. 긴장한 손끝을 마주 얽으며 생각에 골몰했다.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태국영과 알몸으로 유사성행위까지 갔다. 생식기를 맞 댔고 서로의 몸에 정액을 쏟아냈다. 그 열락 속에서 참혹 했던 과거의 조각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자신은 분명 그 에게 완전히 빠져들어,날짐승처럼 음욕에 날뛰는 그의 아 래 깔려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분명 자신은 그의 향기에 취했고 그의 뜨거운 몸에 녹 아내렸다. 그저 가엾은 마음에 엉덩이 사이를 내 주며 넣 어보라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승도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 았다.
「내가 조금은 좋아졌어?」
一아니야. 사실 난이전부터……
이승도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두고 휴대폰을 찾아 들었 다. 외우지는 못해도 낯설지는 않은 번호를 띄워둔 채 한 참을 망설였다. 불규칙한 심장울음이 불안함 때문인지 설 렘 때문인지 가늠이 안 됐다.
빈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새 서늘하게 식은 손끝이
복잡한 머리를 더욱 차게 식혔다.
이윽고 결심한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딱 다섯 번째 울리던 도중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늘 그랬 듯 낭랑하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승도 군! 어찐 일이에요?》
“…잘 지내셨어요,유모?”
《나야 항상 잘 지내지요! 우리 철없는 가주님이랑 어른 스런 도련님 돌보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 승도 군 은 어때요?〉〉
“예. 저도 늘 똑같죠.”
《어머나. 종가모임 이후로 우리 가주님 얼굴이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활짝 피셨던데 정말 똑같아요? 아닐 것 같 은데. 이 유모 촉 좋은데.》
…태국영 이 명청이가.
이승도는 다시금 뜨거워지는 귀를 성의 없이 문지르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유모.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네. 뭐든 말씀하세요. 승도 군 부탁이라면 뭐든 못 들 어드릴까요.》
짧은 안부를 끝으로 대화는 한동안 단절되었다. 머뭇거 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닫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동안 유
모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 기다려 주었다. 이승도는 손끝 에 힘을 주며 수화기를 꽉 붙들었다.
“유모. 오늘부터 이경이 슈퍼문 접종 좀 멈춰 주세요.”
《■■■네?》
뜻밖의 애길 들은 것처럼 유모는 어리둥절해했다.
《우리 도련님은 원래 대보름이 아니면 주사 안 맞으시 는데요?〉〉
이번엔 이승도가 놀랄 차례였다. 순식간에 땅바닥에 곤 두박질친 듯한 가슴이 세차게 고동을 울렸다. 그는 책상 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어 바닥에 곧게 섰다.
“무슨 말이에요? 그 어린애가 그럼 매달 약 없이 버텼 단 말이에요?”
《갓난아기 때는 가주님 명령으로 맞추긴 했죠. 그런데 도련님이 맞기 싫다고 하신 뒤로는 안 맞춰요. 저도 도련 님 아픈 건 싫어서 말려 봤는데 워낙 뜻이 완강하시고,가 주님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고. 중간에서 이 유 모 속만 새까맣게 타는 거죠.》
“그런…… 힘들어하지는 않던가요?”
《왜 아니겠어요. 아무리 체질이 가주님과는 달라도 그 래도 한창 클 아기 땐데요. 그래도 그간 지켜본 결과는 잘 참으시는 것 같았어요. 네 살 되고 난 뒤부터는 잘 울지도
않으시고요.》
이승도는 차갑게 굳어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왜,맞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그렇게 아파하면서.” 《그야 당연히,보름마다 가주님과 저택을 찾는 승도 군 때문이죠. 제가 악착같이 승도 군 나갈 때마다 쫓아가서 안겨드리잖아요. 우리 도련님,그때 제 몸에서 생리적으 로 생기는 거부 반응을 굉장히 싫어하세요. 한 살도 되기 전에 주삿바늘만 보면 빽빽 울면서 저리 치워라 난리를 치 셨어요. 그 순한 도련님이.〉〉
무너진 가슴이 산산이 부서졌다. 순식간에 뜨거워진 눈 을 한 손으로 강하게 눌렀다. 고작 해 봐야 한 달에 하루 이틀,그중에서도 십여 분가량 제 품에 안기고 싶어 수많 은 밤 아픈 몸을 참아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더 안아 달라 보채지도 않고,가지 말라고 붙 잡지도 않고……
“국영이한테 말해둘 테니까,오늘 보내주세요.”
이승도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한 살도 되기 전에 주삿바늘만 보면 빽빽 울면서 저리
치워라 난리를 치셨어요. 그 순한 도련님이.”
태이경은 소파에 올라서서 유모의 어깨에 딱 달라붙은 채 휴대폰에 귀를 붙이고 있었다. 짧은 다리를 초조하게 버둥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들으려고 자꾸만 돌진 했다. 그 바람에 유모는 거의 소파에 넘어지기 직전이었 다.
《국영이한테 말해둘 테니까,오늘 보내주세요.》
잠시 뒤 맥없이 늘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속삭 이듯 작은 볼륨이었으나 열심히 훔쳐 듣던 태이경의 귀에 는 마치 천둥처럼 커다랗게 꽂혀 들어왔다.
태이경은 동상처럼 굳은 채 눈을 크게 떴다. 그와 거의 동시에 유모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눈 역시 화등잔만 했다. 유모가 손을 떨며 휴대폰 을 가리켰다.
一드,들으셨어요?
입모양으로 묻자 태이경은 잠시 명하니 있다 빠르게 고 개를 끄덕였다. 보들보들한 뺨 위로 삽시간에 홍조가 번졌 다.
一발리,발리! 알았다고 해! 얼른!
태이경은 잔뜩 흥분해서 유모를 재촉했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다시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의 얼굴은 조급
함이 가득했다. 얼른 대답하지 않으면 엄마가 그 말을 후 회해서 철회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모 는 그 기대에 부흥해 재발리 입을 열었다.
“네,네! 알겠어요. 이 유모가 꼭! 보내드릴게요!”
《…부탁해요. 늘 고마워요,유모.》
“고맙긴요! 제가 다 고맙죠!”
통화는 그렇게 결말을 지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꿈같 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뒤 둘은 일제히 환호 성을 질렀다. 유모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안절부절못했 고,태이경은 소파에서 만세를 외치며 팡팡 튀어 올랐다. 한참을 방방 떠 있던 끝에 유모는 태이경을 얼싸안은 채 울먹였다.
“드디어 우리 도련님 엄마 품에서 잘 수 있게 됐어요. 세상에,이런 날이 오다내 이 유모 감격해서 울 것 같아 요.,,
“나,나 자고 오는 거야? 엄마랑 자?”
“그러믄요! 물론이죠! 혹시라도,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 에 하나라도 엄마가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고 보내려고 하 면 꼭 아픈 척하세요. 이마를 이렇게 짚고 폴싹 쓰러지시 는 거예요.”
유모는 태이경을 바닥에 내려두고 악성빈혈을 앓는 가
엾은 여인처럼 소파에 무너지는 시범을 보였다. 태이경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 모습을 열렬히 관찰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바닥에 픽 쓰러졌다. 자그마한 몸 이 바닥에 힘없이 늘어지자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겁해서 팔을 뻗은 유모를 태이경이 힐 긋 실눈을 떠 올려다보았다.
“어때,이 정도면 될까?”
“완벽해요! 우리 도련님 배우 해도 되겠어요!”
유모는 기립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태이경은 환하게 웃 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그녀의 팔을 성급하게 잡아끌었다. “유모,나 예븐 옷! 예븐 옷!”
“가요! 얼른 가요!”
두 사람은 질주하듯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겨우 정오가 지났을 분이고,이승도가 퇴근하려면 최소 7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한 시간 전에 출발한다고 해도 6 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둘은 그 사실을 조금 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간 간간이 목소리 훔쳐 듣는 걸로 야금야금 채우고 있던 용기주머니가 순식간에 만 수위가 되었다. 태이경은 기븐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잠잘 수 있다. 꿈
을 꾸는 것 같았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아 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승도는 점심에 무 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내내 넋을 배고 있었다. 진료실에 앉아있으면 자꾸 안절부절못해 초식동 물 우리를 돌았는데,가다가 몇 번이고 바닥에 걸려 넘어 질 뻔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그는 2시간 가까이를 인공포육 실로 가 새끼호랑이들 방에 드러누웠다. 녀석들이 우다다 몰려와 올라타고 옷을 물어 잡아당기고 같이 놀자고 난리 를 피우는 걸 받아주다 보니 그나마 시간이 훌쩍 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태국영에게서 문자메시지 가왔다.
『주차장이야.』
태국영은 딱히 아이를 데리고 왔다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이 초조함을 그도 훤히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이승 도는 아주 오랜만에 직원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동물 냄새가 나지 않게 꼼꼼히 비누칠을 한 뒤 출근할 때 입었
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혹시 몰라 탈취제까지 꼼꼼하게 부 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료실로 돌아와 젖은 머리를 선풍기로 대강 말린 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녀석에게 상처를 주고,저 역 시 상처받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뇌리에 선연히 남아 있는 탓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 테다. 이승도는 단단히 결심하 며 눈을 내리깔았다. 두려워하지 말자고 거듭 되뇌었다. 아무리 씩씩하고 의젓해도 아이는 아이라,그 약한 가슴 에 명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제 닫힌 마음이 열릴 때까지 순하게 기다렸던 아이였다. 이제껏 무 책임하게 도망친 것으로 충분했다.
이승도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가방을 챙겨 일 어났다. 그는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것도 받 는 둥 마는 둥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다채로운 붉은 색이 몽 환적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아직 식지 않은 지열을 쓸고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습풍에 섞인 강렬한 향기가 땀 처럼 피부에 맺혀들었다.
이승도는 주차장 입구에서 멈춰 섰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 석양을 등진 두 인영이 서 있었다. 뜨끈 한 대지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아이는 태국영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이승도는 가쁘게 올라온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다가갔 다. 작았던 두 개의 덩어리가 점점 시야를 크게 채웠다. 저 렇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이승도는 제 아이 의 키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간 제 무심함 을 탓하듯,품에 쏙 안겼던 작은 아이는 훌쩍 커 있었다.
아이의 입술이 헤에 하고 벌어져 있었다. 웃으려다 실 패한 듯 조금은 맹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반팔에 반바지,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이승도는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조심히 바닥에 무릎 을 꿇고 앉았다. 망설이면 어쪄지 우려했던 것이 거짓말 인 것처럼,두 팔이 스스럼없이 활짝 좌우로 벌어졌다.
태이경은 고민 없이 제 아빠의 소매를 매정하게 놔 버 렸다. 태국영은 기가 찬 듯 실소하며 머리를 기울였다. 약 간 가늘어진 그의 눈이 막 이승도에게 달려가 안겨드는 태 이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나로 엉킨 둘은 오고 가 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고만 있었다.
태국영은 불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만 지그시 물고 있
었다. 흐트러져 가는 석양이 그의 담배 끝에서 텅 빈 불꽃 처럼 타들어 갔다.
태국영은 말없이 차를 몰았다. 두 모자가 뭉치니 저는 안중에도 없고 운전기사 취급이었으나 그의 심기는 꽤 괜 찮은 편이었다. 이승도가 과거의 성적 트라우마를 어느 정 도 극복했다는 증거를 재차 확인한 셈이니 나블 이유가 없 었다.
태국영은 룸미러를 움직여 뒤에 앉은 둘을 묵묵히 응시 했다. 이승도는 제 가슴에 딱 붙어 안긴 태이경을 내려다 보며 작은 등을 어루만져주느라 바빴다. 친애 깊이 다정 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주 귀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눈빛과 손길이었다.
태이경은 평소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잘 놀던 녀석답 지 않게 조용했다. 그저 아주 신기한 것에 닿은 마냥 작은 손으로 톡톡 이승도의 얼굴 여기저기를 건드리는 것에 심 취해 있었다.
“다 왔어. 문열어.”
태국영이 침묵 쌓인 공기를 밀어냈다. 이승도는 가방
을 뒤져 리모컨을 끼냈고,오늘은 말썽 없이 차고 문이 열 렸다. 태국영이 차고로 진입하는 동안 이승도는 태이경에 게 일러두었다.
“전에 집에 왔을 때 반짝반짝 연한 은색 털 가진 형아 봤지?”
“응. 봤어요.”
“형이랑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돼. 몸이 많이 아파 서 내가 많이 돌봐줘야 하니까 섭섭해 하지 말고.”
“그럼요! 그 형도 아빠 어릴 때처럼 엄마 없으면 죽는다 고 들었어요. 저는 다 이해해요.”
엄마.
이승도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적응하려면 꽤 오래 걸릴 법한 호칭이었다. 그래도 애한 테 아빠를 둘이나 만들어줄 순 없으니 뭐라 바로 잡아 줄 말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형은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친구가 없어. 우리 이경이 가 동생이지만 친구처럼 잘 대해 줘. 그럴 수 있지?”
“응! 내가 형아 잘 챙겨줄게요! 맛있는 거 있으면 나눠 먹고,많이 아플 땐 제가 간호도 도울게요.”
태이경은 힘차게 대답했다. 맑고 고운 눈에 반짝이는 활기가 넘실거렸다. 우리 이경이,엄마가 처음으로 제 얼
굴을 마주 보고 불러준 따뜻한 호칭이 없던 의욕도 세차 게 불어넣을 판이었다.
둘이 그러고 있는 동안 주차를 마친 태국영은 운전석에 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는 이승도의 품에서 태이 경을 안아 올렸고 이승도는 그 뒤를 이어 차에서 내렸다.
평소 용건이 없으면 말 한마디조차 안 걸던 아빠가 제 게 이렇듯 친근하게 구니 태이경은 요상하다 생각했다. 마 치 늘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하 지만 좋은 아빠인 척하려는 노력도 가상하고,어차피 엄마 가 안아 들기에 저는 꽤 무거워져 있었기에 모른 척해주기 로 했다.
“역시 이 녀석 방에 있나 봐. 국영아,이경아. 나 일단 애 상태 먼저 볼 테니까 고기 봉투 들고 천천히 와.”
오늘도 마당은 텅 비어 있었고 여 가에서 던져두고 간 고깃덩이만 가득했다. 보름에 가까워지는 이 시기에 홀로 더위를 견디며 찬 방바닥에 늘어져 있을 녀석이 걱정되었 다-
급한 마음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테라스 문을 열어 실 내로 들어갔다. 여은태는 예상대로 방바닥에 축 늘어져 있 었다. 색색 가슴을 들썩이는 녀석의 주변으로 핏덩이가 흥 건했다. 녀석은 화급히 다가오는 이승도를 실눈으로 올려
다보며 맥없이 인사했다.
[이 정도는 이제 괜찮아,선생님. 그렇게 울상 짓지 마.]
“우리 은태 어른 다 됐네. 어디 보자. 어디가 제일 아 파?”
여은태는 대답 대신 몸을 뒹굴 굴려 배를 까 보였다. 이 승도는 그대로 주저앉아 여은태의 머리를 허벅지 위에 베 게 했다. 열기로 어른대는 눈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며 뜨거 운 배 위를 문질러 주었다.
“우리 은태 보름마다 이렇게 아파서 어쪄지.”
[괜찮대도. 잠깐만 참으면 선생님이 다 낫게 해주는데 뭐가 걱정一]
헥헥거리면서도 꽤 의젓하게 말하던 녀석이 대뜸 벌떡 몸을 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무언가를 빤히 보고 있었 다. 이승도는 의아해하면서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 방 문 너머 아이를 품에 안은 태국영이 서 있었다. 이승도는 여은태의 배를 다시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태이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경아. 와서 형아한테 인사해야지.”
태국영이 태이경을 바닥에 내렸다. 태이경은 종종걸음 으로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 나 기억해? 저번에 왔다 갔던 태이경이야. 형
아이름은 뭐야?”
여은태는 멀거니 눈만 깜박이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 다.
[응. 기억해. 나는 여은태야.]
“많이아파? 이거다 형아가 흘린 피야?”
태이경은 걱정스런 낯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은태 는 화들짝 놀라 재발리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니야. 저건…… 아니,내 피가 맞긴 한데 내가 허약 해서 골골대는 건 절대 아니야.]
“정말 괜찮아? 엄마가 없을 때마다 이렇게 혼자 아픈 거야?”
[절대 그렇지 않아. 보름 때만 좀 그렇고 평소에는 안 이래. 진짜야. 거짓말 아냐. 그렇지,선생님?]
여은태는 괜스레 가슴을 졸이며 이승도에게 고개를 돌 렸다. 이승도는 이상하리만치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어리둥절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바로 긍정해 주었 다.
“맞아,이경아. 형아는 원래 되게 튼튼해. 나중에 어른 이 되면 아마 국영이하고도 호각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 를 만큼. 강하고 의젓하니 아주 좋은 새싹이지.”
“우와! 정말? 우리 아빠는 다들 벌벌 떨 만큼 되게 센
데 이 형아가 우리 아빠만큼 세지는 거야?”
태이경이 초롱초롱 선망의 눈으로 여은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귀여운 아가 앞에서 힘센 형이 되고 싶었던 여 은태는 그제야 깊이 안도하며 기세등등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들었지?’라고 맞장구를 치려던 순간 태국영이 초 를 쳤다.
“우리 승도,내가 오늘은 웬만하면 착한 남편 착한 아 빠 노릇 좀 하려는데 헛소리로 기분 나쁘게 하네.”
태국영 역시 이승도 앞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 어 하는 철없는 수컷에 불과했다.
“딱 봐도 견적 안 나와? 저건 다 커도 한계가 있어. 나 한테는 절대 안돼.”
“…넌 애한테 그렇게 이겨 먹어야 직성이 풀려?”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는 애한테 너무 큰 희망을 주는 것도 잘못된 교육이 아닐까,선생.”
이승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여은태의 목을 살살 주물렀 다.
“은태 속 괜찮아? 털에 피 묻어서 원래 은태보다 안 예 쁘다. 동생도 왔는데 다른 데는 씻으면서 만져 줄까?”
여은태는 응,하며 쏜살같이 욕실로 튀어갔다. 새 친구 가 생기니 아팠던 것도 말끔히 잊었는지 잔뜩 활기가 넘쳤
다. 그간 친구 하나 만들어 줄 수 없음에 가슴이 아팠던 이 승도 역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뒤를 따라붙었다.
미리 샤워기를 틀어놓고 욕조에 들어앉아 있던 녀석은 미친 듯 꼬리를 흔들며 발리 씻어 달라 안달했다. 또래 아 이의 등장에 녀석이 잔뜩 들떠 보여 이승도도 덩달아 마음 이 급해졌다.
재빠르게 손을 놀려 순식간에 샴푸를 끝냈다. 타월드라 이를 했는데도 푹 젖은 털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여은태 는 몇 번이고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 뒤에야 바깥으 로 뛰쳐나갔다.
태국영은 막 응접실의 소파를 마당으로 끌어내고 있었 다. 저게 무슨 짓인가 싶어 이승도가 황망하게 눈을 끔뻑 였다. 그는 일단 여은태에게 태이경의 집 구경을 도와주라 는 특명을 내렸다.
여은태는 화색 돋은 눈으로 냉큼 태이경의 허리띠를 물 어 허공에 툭 던졌다. 붕 떠오른 녀석은 잠시 앗 하며 당황 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몸을 틀었다. 투응,태이경은 본의 아니게 여은태의 등을 타고 앉게 되었다. 태이경이 어리둥 절하게 고개를 갸웃하자 여은태는 새침하게 말했다.
[아무나 태워주는 거 아니야. 선생님 아가니까 특별히 내가 신경 써 주는 거야. 떨어지면 안 되니까 꽉 잡아.]
태이경이 바짝 몸을 숙이며 여은태의 목을 세차게 끌어 안았다. 여은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2층 계단을 나 는 듯이 뛰어올라갔다.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흐뭇 하게 바라보던 이승도가 막 테라스 문으로 들어오는 태국 영을 바라보며 정색했다.
“멀쩡한 소파는 왜 배?”
태국영은 그 무거운 가죽 소파를 홀로 옮기고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이승도 역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 지 않았다.
“여기 매트리스 두 개 들어올 거야.”
“침대 매트리스 말하는 거야? 그건 왜?”
“왜긴 왜야. 셋이 누워도 원래 꽉 찼던 침대에 이경이까 지 넷이 누우면 네가 가장 먼저 누굴 쫓아내겠어.”
그야 너지. 애들을 품에서 떼 놓을 수는 없으니까. 이승도는 죄책감 없이 생각했다. 태국영의 미소 띤 눈 초리가 은근 사나워졌다.
“그래. 당연히 나지. 그래서 내가 임시방편으로나마 큰 침대 하나를 만들려고. 주문제작 맡겼는데 시간이 좀 걸린 다니 그전까진 이렇게 버텨야지 별수 있나.”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난 양옆에 아
픈 애들 끼고 자야 할 텐데.”
설명을 하면서 이승도는 뒤늦게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 었다. 그래서 태국영은 짜증 나게 기분이 조금 풀어지고 말았다. 그는 성큼 다가와 이승도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 안았다.
“밤은 길어,승도야. 그리고 어린애들은 일찍 잠들지.”
“…그래서?”
“애들 잠들면 나도 예뻐해 달라는 소리야.”
태국영은 희미하게 눈웃음을 쳤다. 이승도는 귓바퀴를 붉히며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예전 같았다면 이 시점에 서 따귀를 날리고도 남았을 텐데,이제는 슬쩍 시선을 피 하는 게 다였다. 미는 건 못해도 세차게 끌어당길 시점은 잘 아는 남자 태국영은 망설임 없이 이승도의 입술에 가볍 게 입을 맞췄다.
이승도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눈만 찔끔했다. 태국 영의 눈길이 이승도의 내리깔린 눈끼풀에 고정되었다.
“설마 내가 애새끼들한테 너를 마냥 벳기고 있을 거라 고 생각한 건 아닐 거 아냐. 우리 승도,그 정도로 명청하 지는 않지?”
물론 놈이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렇다고 이렇게 유순하게 반응할 거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
었다. 이승도의 기준에서 태국영의 이런 반응은 꽤 의외였 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태국영은 가늘게 뜬 눈을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건 이따가.,,
원가 굉장히 찜찜해서 더 추궁하려는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승도의 팔을 잡아채 두고 태국영이 인터폰을 받았다. 그는 ‘그래.’하고 짧게 대 답한 뒤 대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커다란 매트리 스를 짊어진 남자들이 등장했다. 곧 거실에는 두 개의 침 대 매트리스가 안착했고,그 위로 폭신한 이불이 여러 겹 깔렸다.
남자들이 사라지고 원가 막연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2층 탐험을 마친 아이들이 계단을 구르듯 뛰어내려왔 다. 둘은 하나같이 생기 반짝이는 눈으로 신이 나 보였다. 태이경을 등에 태운 그대로 달려온 여은태가 이승도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선생님. 나 뼈마디 좀 만져줘. 조금이면 도?. 아주 조금 만. 그리고 우리 밥 먹자. 선생님 아가 배고프대.]
“그래. 우리 이경이 배고팠어?”
“응. 근데 괜찮아요. 형 치료해주고 먹어도 돼요.”
이승도는 여은태의 앞발을 두 손으로 쥐고 자리에 앉 아 등을 보였다. 태이경은 냉큼 업혀 목에 팔을 둘렀다. 앞 뒤로 어린아이 둘을 돌보고 있는 사이 식사량이 가장 많 은 태국영은 이미 부엌에 가서 제 몫의 생고기부터 식탁 에 올려두고 있었다.
‘‘우리이경이,혼자 밥 잘 먹어?”
살짝 어긋난 뼈가 맞춰지자 이승도가 물었다. 태이경 은 두 주먹을 꽉 쥐며 활짝 웃었다.
“응,나 혼자 완전一”
그러나 태이경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여은태가 깜짝 놀 란 기색으로 우렁차게 짖었다.
[선생님! 나 이제 괜찮아! 우리도 밥 먹자,응?]
“그래. 그럼 식사 준비하는 동안 둘이서 좀 더 놀고 있 어.,,
이승도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핏물이 말끔히 빠진 고기 를 여은태의 자리에 두고,태국영의 집에서 보보내온 제 저녁 찬거리를 데워 마찬가지로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그 동안 여은태는 태이경을 마주 보며 훈계하느라 바빴다.
[그 순간에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
‘‘왜? 나 혼자 밥 잘 먹어. 엄마도 내가 혼자 잘하는 걸
좋아할 거야:
[후우. 이 아가,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잘 생각 해 보?. 선생님이 너한테 왜 그런 걸 물었겠어.]
태이경은 영문 모르는 얼굴로 잠시 고개를 갸웃갸웃했 다.
“내가 그간 혼자 착한 아이로 잘 자랐나 그게 궁금한 거 아나?”
여은태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게 아니지. 네가 혼자 밥을 잘 못 먹으면 선생님이 무릎에 앉혀두고 직접 떠먹여주려고 하는 거잖아. 엄마랑 친해지고 싶다며. 그럴 땐 무조건 나 혼자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시치미를 딱 떼야지. 혼자서 알아서 다 잘하는 아 가를 누가 보살펴 주겠어. 안 그래?]
“…하지만,아직까지 밥도 혼자 못 먹는다고 하면 엄마 가 나를 모자란 애로 보지 않을까?”
[우리 선생님은 그런 성격 아니야. 미숙한 부분이 있어 도 인내를 갖고 세심히 가르쳐 주는 것에 익숙해. 선생님 다니는 동물원에 지능 떨어지는 애들이 되게 많거든. 그러 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에 태이경은 다소 충격받 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역시나 그 말간 눈동자에는 동경의 빛이 반짝거렸다. 여은태는 태이경의 등을 코끝으로 꾹꾹
밀어 주방으로 가며 재차 당부의 속삭임을 남겼다.
[알겠지? 처음엔 일단 완전 아가처럼 굴어야 도?. 그래 야 선생님이 너를 계속 주시하고 보살펴줄 대상으로 생각 한단 말이야.]
“으,응! 형아 말 들으니까 진짜 그런 것 같아. 그러니 까 어리광을 부리라는 거지?”
[맞아. 처음부터 너무 어른스럽게 굴면 애는 혼자서도 잘하는구나 싶어서 뭐든 혼자 하게 시킬 거라고. 년 아직 아가니까 아가 행세해도 돼.]
여은태의 내숭 전수에 홀랑 넘어간 태이경은 의자에 앉 은 이승도의 허벅지에 기어 올라갔다. 왜? 하고 묻는 그에 게 폭삭 안기며 대답했다.
“엄마. 나 아직 젓가락질 잘 못해서 혼자 먹는 거 미숙 해요.”
“아아. 그랬어? 난 또,아까 잘할 수 있다고 하는 줄 알 았어. 그럼 우리 이경이는 먹여주면서 젓가락질부터 가르 쳐줘야겠다.”
역시나 이승도의 반응은 여은태의 예상과 한 치의 오 차 없이 들어맞았다. 둥그렇게 뜬 눈으로 힐긋 돌아보니 여은태는 의기양양하게 ‘거보?,내 말이 맞지?’하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 바짝 귀를 세우고
꼬리를 느리게 흔드는 그에게 태이경은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모든 꼴을 알게 모르게 주시하던 태국영만이 홀로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그는 마뜩찮게 여은태를 흘겨보 았다. 선천적으로 영리하고 눈치가 좋은 녀석이라 마음만 먹으면 누굴 상대로건 내숭을 떠는 거야 어렵지 않을 터였 다. 문제는 이 자식이 남의 집 귀한 아들한테 요사스런 술 수를 가르치고 있다는 거였다.
여은태는 태국영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전혀 신 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승도의 무릎에 새끼코알라처럼 안 긴 채 음식을 받아먹는 태이경을 부듯하게 바라보기만 했 다. 그때 애처롭게 울먹이며 돌아서가던 모습이 내내 가슴 에 무겁게 남았는데,이제야 그 빚을 조금 갚은 것 같아 마 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은태는 저와 같은 종족의 동생이 생긴 것이 좋았고, 그 동생이 착하고 예뻐서 더 좋았고,이승도가 그렇게 어 여뻐하면서도 다가가길 주저했던 아이를 품에 안는 모습 을 보게 되어 그것도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조 금,정말 조금,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도 했다.
아가는 좋겠다.
여은태는 부러운 마음을 감추고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 다.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축 늘어진 녀석의 두 귀에 태
국영의 무료한 눈이 잠시 머물렀다.
신영애는 파티를 여는 걸 좋아했다. 신년파티부터 크리 스마스 파티까지 한 달에도 몇 번씩 초대장을 돌리느라 바 빴다. 일족의 미혼남녀라면 누구나 이 초대장을 받지만, 결국 모이는 멤버는 늘 거기서 거기였다. 각기 노는 성향 이 다른 것은 인간들이나 그들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 다.
“그 좋은 구경을 놓치다니. 너무 아깝네,진짜.”
“나도. 도착했을 땐 여 씨 놈들이 입구를 물 샐 틈 없이 막은 뒤였어.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종가모임은 추 후로 미룬다는 말만 앵무새같이 반복하는데 감이 왔지.
아,원가 대형사고가 터졌구나.”
초저녁부터 모여든 이들은 얼굴을 맞대자마자 무산되 어버린 종가모임 애기에 열을 올렸다.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태국영이 다시금 그 잔혹한 본색을 드러냈으니,그 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많은 아가씨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영규 애가 태국영 아들한테 너희 엄마 창녀 운운한
게 맞긴 맞아?”
“아니면 종주님이 가만히 있었겠어? 명분 없는 학살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닌데.”
연회장에서 태국영과 충돌했던 남 가의 일원들은 그 자 리에서 비참하게 도륙당했고,남영규 일가는 그보다 더 잔 인한 결말을 맞았다. 남영규 집안은 풀 한 줌 남지 않고 폐 허가 되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생명의 징후가 꺼져버렸 다-
일족의 전쟁은 이처럼 무참하다. 이 사달을 낸 어린아 이도,그 어린아이의 죄에 묶인 그의 어미와 아비도 이번 피바람에 휩쓸렸다.
남 가의 가주를 포함해 남영규의 방계는 모두 명분을 들어 침묵을 택했다.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수컷들 을 다섯이나 잃은 것으로 그들은 혈족에 대한 의리를 최대 한 지켰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그러한 선택은 너무 나 당연했기에 누구도 이상타 여기지 않았다.
“태국영이 의외로 로맨티스트였나. 같이 살지도 않는 본처 때문에 미쳐 날뛰기도 하고.”
“설마. 그냥 구실이 필요했겠지. 한동안 너무 잠잠하게 살더니만 몸이 근질근질해진 거 아니겠어?”
신영애는 흥 코웃음을 치며 태국영 로맨티스트 설을 단
호하게 부정했다. 물론 다른 이들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하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묘한 표정으로 무알코올 칵테 일을 마시고 있던 여자 한 명이 관점을 달리해 물었다.
“그런데 그 애 엄마는 도대체 누구지? 애는 있는데 어 째 낳았다는 여자가 안 나타나.”
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이들은 일제히 입 을 다물었다. 난다 긴다 하는 일족의 미녀들이 그에게 추 파를 던졌다가 줄줄이 수모를 당하고 얼굴을 붉혔었다. 남 의 눈치 안 보는 놈답게 거절하는 것도 어찌나 상스러운 지,그 전례를 아는 여자들은 쉽게 그에게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물론 그와 밤을 보냈다는 증언 역 시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죽었겠지. 애 엄마가 살아있다면 종가모임 같은 데에 혼자 보낼 리가 없잖아. 태국영 벗겨 먹을 틈만 보는 여자 들이 한둘이 아닌데.”
“헤어진 걸 수도 있잖아?”
“헤어져?”
픽 웃은 신영애가 신랄하게 지적했다.
“너 같으면 그 남자랑 헤어져 주겠니? 나 같으면 절대 안 놔 줘. 손찌검 바람 버릇만 없으면 말이야. 하지만 태국 영은 여자 때리는 놈도 아니고 어디 온갖 군데 씨 부리고
다니는 놈도 아니잖아?”
“…죽었겠네.”
“그러네. 죽은 게 확실해.”
다들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납득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가 있는 걸 보면 여제운 같은 목석은 아닌 것 같은 데. 혹시 죽은 여자를 못 잊고 지금껏 그러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가설을 내놓았으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신 영애는 가만 미간을 모으고 있다가 한순간 뇌리를 스치는 사실에 눈가를 좁혔다.
“가만. 그 아들이 다섯 살이 된다고 했지? 십이월 생이 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응. 맞아. 그게 왜?”
“태국영이 성년식 치른 건 사 년 전 삼월인데,그럼 그 때는 이미 애가 나와 있었다는 말 아나? 애가 들어선 건 열일곱 살 때라는 거고.”
모두 하나같이 손가락을 꼽아보다 감탄했다. 아기는 모 체의 태중에서 약 30주간 있으니 이미 성년식 전에 관계 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일족의 수컷이 성체가 되기 전에 발정이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사례에 속했다.
“세상에. 그 태국영이 성년식 전에 발정이 왔다고?”
“와,이건 이슈네. 정말 안 믿긴다.”
“그럼 죽은 애 엄마 못 잊었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잖 아?”
이승도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확실시되었다. 다시금 대 두된 태국영 로맨티스트 설에 물이 오를 무렵이었다. 통째 로 관심 밖에 내던져져 있던 남자들 무리에서 하나가 소 리 높여 비아냥거렸다.
“야,그놈의 태국영,태국영. 너희 언제까지 그럴 거나? 그러지 말고 여기 끝까지 현장 목격한 놈한테 물어보고 끝 내지 그래?”
남자는 까닥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가 가리킨 끝에는 늘 그랬듯 홀로 폭탄주를 말아 마시고 있는 남강우가 있었 다. 한껏 수다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여자들이 힐금 그를 보 았으나 그분이었다.
이제껏 남강우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해서 캐묻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료한 생애가 지긋지긋해 가십에 목말라하는 그녀들이었지만,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지도 모르는 남자를 들쑤실 만큼 경우가 없진 않았기 때문 이었다.
“야. 우리 아가씨들이 궁금해 미치겠다는데 좀 알려주
남강우는 대꾸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왜. 실려 나가느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신영애가 ‘그만해.’하고 만류했으나 남자는 연이어 이 죽거렸다.
“우리 투견이 복날 개 맞듯이 맞았다기에 한동안 꼬리 내리고 두문불출할 줄 알았더니,되게 멀정하게 잘 돌아다 니잖아? 정말 괜찮은 거면 썰 좀 풀어 보r
남강우는 열은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직후 그의 인영 이 하살처럼 그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싱글거리던 남자 의 낯 색이 일순 굳어들어 막 옆으로 몸을 날리던 때였다.
남강우가 남자의 등 뒤에서 나타나 그의 등허리를 무릎 으로 찍어 날렸다. 남자는 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었으나 견갑골이 박살 난 채 벽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콰앙!
굉음이 폭발하며 격한 바람이 일었다. 마치 지진이 인 것처럼 벽에 걸린 것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오 른팔을 순간이나마 쓰지 못하게 된 남자가 왼팔을 휘둘러 남강우의 턱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발악은 남강우의 매 끈한 얼굴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남강우는 섬뜩하게 이를 드러내며 남자의 손목을 두 손 으로 붙들어 으스러뜨렸다. 고통에 찬 비명이 피고름처럼
끓어올랐다. 남자는 발작하듯 두 다리를 허공에서 휘돌아 남강우의 등을 노렸다. 그러나 예리하게 눈치챈 남강우의 자비 없는 무릎으로 그의 골반을 박살 냈다.
“아악,나가서 싸워!”
신영애가 슬리퍼를 집어 던지며 성을 냈다. 남자는 내 장이 상했는지 핏덩이를 힘겹게 뱉어냈다. 그리고 붉게 핏 줄 터진 눈을 홉뜨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씨발.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발광하고 지랄이야. 너 랑 여제운이 태국영한테 개 박살 났다는 거 여기서 모르 는 놈도 있나? 왜,이제 와 새삼 쪽팔려?”
남강우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머리카락 을 그러쥐고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 이 터지며 붉은 선혈이 튀었다.
한두 번에서 그치지 않고 타격음이 멈추지 않자 슬슬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나?’하고 누군가 물었고,신영애 역시 신경질적이었던 얼굴에서 서 서히 표정을 지웠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전투 의지를 잃은 남자는 무력하 게 피떡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자의 함몰된 턱이 벌어지 며 피와 타액이 진득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생각 좀 하려는데,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남강우는 흉기 같은 주먹을 멈추지 않으며 싸늘한 어투 로 중얼거렸다. 저를 찌르던 비아냥보다 생각을 방해받은 것에 적잖이 화가 난 듯했다. 그답지 않은 음습한 광기가 불길처럼 깃털을 날름거렸다. 그런 남강우를 관찰하던 신 영애는 한숨을 폭 쉬며 손톱을 빼냈다.
아무리 이 세계에 싸움이 빈번하다지만 별거 아닌 일 로 생명이 끼진다면 설렁설렁 수습될 단계를 넘어서는 거 였다. 그 책임의 무게는 이 자리의 주최자인 그녀에게도 건너올 게 분명했다. 그녀는 긴 이브닝드레스의 치맛자락 을 길게 찢어냈다.
“내가 우리 남 변태 때문에 못 살겠다니까.”
신영애는 낭랑하게 웃으며 허공을 훌쩍 날았다. 사태 를 방관하던 이들이 일제히 검지를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 다.
“우리 여장부! 가라!”
신영애는 범처럼 날아 나비처럼 사분히 내려앉았다. 그 녀의 손톱이 가장 먼저 남강우의 등을 노렸다. 그러나 희 게 빛나는 손톱의 날은 허공만 아슬아슬 벴을 분이었다. 남강우는 검은 그림자를 잔상으로 남기고 홀연 사라졌다. 그럴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던 터라 신영애는 놀라지 않았
뜨거운 열기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몸을 돌리 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들어 고정한 남강우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우리 신 가의 아가씨는 수컷을 너무 험하게 다룬다니 까.,,
“흥! 그거야 조련 안 된 망나니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야.”
“그래서 네가 나를 예뻐하는 거 아닌가? 조련이 안 돼 아직 야생 상태니까.”
신영애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손등에 손톱을 박았다. 남강우는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을 방치하며 신 영애의 뺨에 친애 깃든 키스를 찍어냈다.
“분위기 망쳐 미안하군. 사라져 줄 테니 재밌게 놀아.”
남강우는 큰 보폭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발을 따 라 핏방울이 떨어졌지만 그것은 금세 멎었다. 깨끗하게 아 문 손등을 혀로 길게 할은 남강우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훤히 열린 창문에 토실한 달이 희게 떠 있었다. 그는 가 볍게 달려가 창틀을 밟았다. 거친 도약으로 어둠에 몸을 던진 그는 사분하게 지상에 착지했다. 또 사고 칠 거면 다 신 오지 말라고 신영애의 냉랭한 핀잔이 등 뒤를 따라붙었
남강우는 제 차에 몸을 실었다. 정적이 가득 고인 차내 에 그의 느리고 거친 숨결이 일정하게 쏟아져 내렸다. 차 창을 모두 내린 그는 시동을 걸고 한참을 가만 앉아 있었 다-
어디로 가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명청한 자문에 돌아오는 대답 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운전대를 꽉 쥔 제 한 손을 스 산하게 응시했다. 꿈틀거리는 핏줄에서 열기가 끓고 있었 다. 피비린내 같은 갈증이 목 안에서 멤돌았다.
갈 곳이 없다.
남강우는 생각과 달리 충동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어둠 에 잠긴 도로를 달빛 같은 헤드라이트가 갈라냈다. 빠르 게 몰아간 차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문득 지독 한 두통이 몰려왔다.
남강우는 잇새로 욕설을 뱉어냈다. 달아오른 숨이 인중 과 입술에 흘렀다. 그의 눈동자는 간헐적으로 사나워졌고 몇 초 간격으로 초점이 나갔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는 고속도로를 벗어나자마자 거칠게 도롯가에 정차했다.
끼이이,타이어 밀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몸이 텅 앞으로 쏠리고 그는 한참 동안 사납게 호흡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남강우는 뜨겁게 울렁이는 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달아오른 살갗들끼리 접촉하자 해갈되어 본 적 없는 갈증 이 도리어 불기둥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목에서 손을 떼 내어 이마를 감쌌다.
다시금,제 화염 같은 온도와 상극을 이루던 차가운 피 부의 느낌이 뇌리를 울렸다. 달이 둥그렇게 여물어갈수록 그 기억의 진폭은 점점 좁아졌으며 격렬해져가고 있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갈증은 이제 불덩이 같은 기갈 로 번졌다. 타는 목은 가뭄에 마른 논두렁 같았으며 텅 빈 것 같은 위장이 피라도 채워 달라는 양 극렬히 요동쳤다.
「여기 횡단보도예요.」
환청인지 이명인지 불분명한 소리가 달팽이관을 들쑤 셨다. 가만히 감고 있는 눈가로 경련이 끓어올랐다. 사연 깊어 보이는 그 깊은 눈이,그리고 그가 제 손에 남기고 간 그 기이한 느낌이 자꾸만 혼란의 탕에서 되살아났다. 이것은 이상하다. 좋지 않은 징조를 느낀 육감이 경고했 다.
그것은 위험하다.
남강우는 그의 손목을 휘감았던 제 손을 바라보지 않으 려 인내를 거듭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몸부림 을 칠수록 사방에서 가늘고 질긴 포박이 조여 오는 느낌이
도대체 그게 뭐였기에.
새삼 묘사해 보려 했으나 차마 두어 마디 말로는 형용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저 닿는 순간 눌어붙는 듯 했고 손 안을 휘돌던 열기가 소용돌이를 만난 양 그에게 로 발려 들어갔었다. 조금 더 길게 접촉했더라면 과연 어 떤 일이 일어났을까 새삼 궁금증이 일었다. 이 안에서 폭 발할 듯 소용돌이치는 화염이 말끔하게 사라질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영이 성년식 전에 각인한 상대가 있다,라고…… 그렇다면 그를 단 한마디로 진정시킨 그 인간 남자는 정부 일 분인가.
남강우는 오늘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들을 되는대로 섞 어 보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온통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분이었다. 일족의 수컷이 발정기까지 앞당겨 가 며 암컷에게 각인한다는 것은 생의 끝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헌데 고작 몇 년 사이 그 열렬한 구애의 상대가 바뀌었 다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무분별하게 정을 남발할 놈이라면 이렇게 염문설이 전무할 리가 없었다.
끝없이 꼬리를 무는 의문들은 무엇 하나 명쾌한 답을 내지 못했다. 남강우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들 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스스로도 의아해하 면서도,그는 알고 싶었다.
《남강우? 우리가 사적으로 통화를 할 만한 사이였던 가?》
남강우는 전면유리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연회장에 나타나서 태국영과 함께 나간 인간. 누군지 너는 알고 있나.”
한두 마디씩 오고 간 끝에 대화는 꽤 오래도록 경색되 었다. 남강우는 흐린 달을 올려다보며 부러 머리를 비웠 다. 더운 숨결이 수십 초의 시간을 소각시켰다.
《태국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여제운은 그 어떤 단서도 없이 기습적으로 대답했다.
저녁식사 후 아이들은 한참을 악동처럼 뛰어다니며 놀 기 바빴다. 그러고도 더 놀고 싶다며 안 자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살살 달래어 자장가를 불러주니 태이경은 그새 가
슴에 달라붙어 콜콜 잠이 들었고,여은태도 그 졸음에 전 염되어 금방 축 늘어져 버렸다. 앞뒤를 점령한 아이들은 아주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내내 둘의 뒤를 쫓아다니 며 몸 상태를 봐준 터라 숨소리도 체온도 안정적이었다.
이승도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봐주던 도중 깜박 잠이 들 었다. 품 안에는 태이경이,등에는 여은태의 따끈한 몸이 푹 감싸고 있으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눈이 감긴 것 같았 다-
아…… 무거워.
이승도는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흘렸다. 노글 노글 늘어진 몸을 뒤척이려 했으나 마치 바위에 짓눌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겨우 움직이는 것은 머리분으로,이 승도는 턱만 겨우 젖혀 들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목울대 위로 축축한 것이 닿아 왔다. 마치 점액질 이 풍부한 연체동물처럼 뜨끈하게 살갗을 쓸었다. 척척한 마찰음이 연달아 이어지자 어설프게 깨어나 있던 의식이 느릿느릿 상황을 파악했다.
잘 때는 늘 잠옷 대신 짧은 반바지 하나만 입는 터라 헐 벗은 상체가 뜨끈한 살결에 노긋하게 비벼지고 있었다. 이 승도는 이 무게감과 더불어 오는 끈끈한 스킨십의 감촉을 알고 있었다. 사실 애초에 그가 아는 남자가 단 하나분이
긴 했지만,그렇다고 낯섦과 낯익음을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승도는 반도 뜨지 못한 눈을 가물가물 깜박이였다. 흐리명덩한 시야로 새카만 머리가 매끄러운 동선을 그리 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실이 아닌 제 침실이었고, 등에는 익숙한 매트리스가 느껴졌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태국영이 멋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국영아…… 나 피곤해.”
이승도는 탁하게 잠긴 목소리를 흘리면서도 태국영의 머리카락 속에 한 손을 깊이 묻었다. 아이들을 보듬어줄 때처럼 살살 매만져주자 목을 멤돌던 입술이 귓불로 옮겨 왔다. 웅크린 어깨 위로 자잘한 소름이 스쳤다. 그가 열게 웃음 섞인 목소리를 내보냈다.
“더자. 누가 뭐래.”
“…너 무거워. 간지럽고. 그런데 어떻게 자.”
“우리 승도 매정하기가 짝이 없어. 난 이 시간만 기다리 면서 애새끼들한테 너를 고스란히 내 줬는데 말이야.”
그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오늘 태국영 은 놀라울 정도로 얌전히 굴었다. 시비도 안 걸고 틱틱대 는 법도 없었다.
“알아. 고마워.”
이승도는 여전히 조금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국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은 흐린 곡선 을 그리고 있었다.
“맨입으로 넘어가려 들면 쓰나. 착한 아이에겐 상을 줘 야지.”
“뭘 바라는데.”
별거는 아니고,하며 태국영은 이승도의 곁으로 몸을 미끄러뜨려 반듯이 누웠다. 그가 아주 대수롭지 않게 말했 다.
“나좀 벗겨 봐. 팬티까지 전부.”
이승도는 졸음이 싹 달아나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대로 도주하려는 속내를 훤히 꿰뚫은 태국영은 이승도의 손목을 어렵지 않게 낚아챘다. 살짝 힘줘서 끌어당기는 것 만으로 이승도는 풀썩 태국영의 가슴으로 스러지고 말았 다-
한 팔로 안은 허리는 가늘고 연약했다. 인간들의 기준 에서 이승도는 보통 수준의 체력과 근력을 가지고 있었지 만 태국영의 눈에는 늘 병아리처럼 작고 가녀리게만 보였 다.
“다른 거 안 해. 그냥 벗겨보라고. 오늘은 그거면 돼.”
망설이듯 머뭇대는 눈을 고요하고 집요하게 올려다보
았다. 태국영은 느리게 끌어온 이승도의 손목에 입술을 묻 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찔 곱아들며 흰 뺨에 열은 홍 조가 피어올랐다.
“정말 그거면 돼?”
이제야 겨우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우리 승도.
예민하고 상처 많은 이승도에게 스며들기 위해 오랜 시 간을 돌아왔다. 종종 엉망으로 범하고 싶은 음험한 욕구 를 꺾어가며 마치 타인이 접근하듯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그야말로 인내의 연속이었다. 심장을 움켜쥐는 달콤한 향 기를 혀끝에 맘껏 감아보지도 못한 채 가슴만 태우길 몇 해인가.
태국영은 사지를 편안히 벌린 채 늘어졌다. 가만히 올 려다보자 이승도는 무표정을 가장하고 손을 뻗었다. 차갑 고 냉랭한 척하지만 저렇게 예쁘게 귀까지 발개져서야 귀 엽기만 했다.
태국영은 수시로 발정이 올 만큼 혈기왕성한 수컷이었 다. 여유로운 가면을 쓰고 주변을 멤돌면서 그가 스스로 배낸 정액이 얼마만큼인지,아마 이승도는 꿈에서도 상상 치 못할 것이었다.
이승도는 태국영의 허벅지 위에 어정정하게 앉은 자세 로 먼저 러닝셔츠에 손을 대었다. 밑단을 살짝 쥐고 살살
끌어올리는 것도 어색한지 사슴 같은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당연했다. 이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
태국영은 요즘 봉인 풀린 조급함에 자꾸만 압도당하고 있었다. 평생을 기약한 암컷을 품에 안고도 아무것도 못하 는 수컷의 마음이 마냥 평온할 리가 없었다.
납작한 뱃속에 작게 들어 있는 아기집에 제 정액을 채 워 넣고 싶었다. 한시도 마를 새 없이 가득 채우고 싶었다. 이승도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제 은밀한 향기를 풍기 고,앉을 때마다 제 씨가 새어 나오게 하고픈 음욕이 제 일 상을 지배했다.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심장이 말랑말랑 녹아 내리는 기미가 보이자 초조함은 도리어 기승을 부렸다.
러닝셔츠가 느리게 벗겨져 나갔다. 떨림을 억누른 손 이 운동복 바지의 고무 밴드에 닿았다. 태국영은 시트 위 에 늘어뜨린 손끝을 자연스레 감아 주먹을 쥐었다. 아직 제 성기에는 이승도의 아기집에서 뱉어낸 애액의 느낌이 선연히 남아 있었다. 다음엔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흠뻑 문지르고 싶었다.
이승도는 밴드를 끌어내리려다 난감하게 눈을 들었다. 딱히 말은 없었으니 곤란해 하는 것이 역력했다. 태국영 은 허리를 살짝 띄워주었다. 이승도는 기회를 포착한 듯 재발리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붙잡아 끌어내렸다. 골반
아래까지 옷 뭉텅이가 내려갔을 때,새발갛게 발기한 것 이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솟았다. 이승도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순식간에 목까지 붉어졌다.
“왜 세워!”
이승도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렀다. 태국영은 여유롭 고 나태한 가면을 능숙히 뒤집어쓰며 눈매를 휘었다.
“너야말로 왜 질겁해. 내 하나분인 암컷이 내 갑옷을 벗 기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인데. 아무 짓 안 한다니까. 그냥 놔두면 알아서 수그러들 테니 신경 쓰지 마.”
이승도는 원가 따지고 싶은데 따질 말이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랫도리에서 애써 시선을 피한 채 마 치 미션을 수행하듯 태국영을 마저 나체로 만들었다.
“해 달라는 거 해 줬으니 난 간다.”
냉담하게 일어나 문까지 걸어가는 동안 태국영은 붙잡 지 않았다. 당연히 조금 더 치근댈 거라 생각했던 이승도 는 내심 어리둥절해 뒤를 돌아보았다. 태국영은 굽힌 팔 을 뒷머리에 벤 채 가만히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흠 없이 아름다운 미소가 걸린 그의 입술이 자꾸만 시선을 앗아갔 다-
이승도는 몇 번이나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길 반복했다. 차라리 따라 나오면 그대로 달고 나갈 텐데 저러고 있으
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 리고 뒤를 돌았다.
오H,하고 묻는 눈을 한 태국영에게 손짓을 했다. 태국영 은 그 근사한 육신을 나른하게 일으켜 걸어왔다. 아프지 않을까 싶을 만큼 여전히 발기해 있는 그의 성기를 의식하 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 착하게 군 상이야.”
이승도는 멋대가리 없이 말하고 태국영의 얼굴에 두 손 을 감쌌다. 그대로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겹쳤다. 태국영 은 놀란 기색조차 없이 살짝 입을 벌렸다. 가볍게 교차로 맞물린 입술이 그대로 살짝 다물렸다.
저는 그의 아랫입술을,그는 제 윗입술을 가볍게 문 채 눈빛이 오고 갔다. 잔잔했던 맥박이 완만한 능선을 타고 올랐다. 짙게 일렁이는 눈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이승도의 눈동자가 가볍게 미동했다.
이승도는 그의 얼굴을 감쌌던 손을 느리게 뒤로 뻗었 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하아,떨리 는숨 한줌을 뱉어내며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태국영은 이승도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끌어 오며 빠르게 고개를 꺾었다. 세차게 떠밀린 이승도가 나무 문에 뒷머리를 부딪치기 전,그 위로 커다란 손이 감싸 왔
다. 쿵,작게 충돌음이 일었다. 태국영은 활짝 열린 입술 사이를 거칠게 가르고 들어갔다.
“하악……!”
태국영은 볼 안쪽을 강하게 혀로 비볐다. 타액이 금세 솟아 고였고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목구멍을 타고 내 리는 타액은 기묘하게 달콤했다. 눈가로 열이 몰리며 몸서 리가 바늘처럼 돋아났다.
달게 내뱉는 신음을 태국영은 뺨이 홀쭉하게 팰 정도 로 발아 삼켰다. 점막이 헐 것처럼 세게 당겼다. 그는 맥없 이 끌려간 혀를 어미젖 문 갓난아기처럼 물고 발았다. 그 에게 꽉 동여매진 허리가 파들파들 떨리며 곧 무너질 듯했 다.
태국영은 탄탄한 허벅지로 이승도의 가랑이를 파고들 었다. 흐으,정신없이 신음하는 이승도의 눈에 반들반들 물기가 흘렀다. 달달 떨리는 손이 그의 어깨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입 안에서 신음과 탄식이 덕지덕지 뒤엉켰다.
이승도는 갑작스레 들불처럼 일어나는 쾌감에 조금 당 황했다. 질끈 감은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묻어 나왔 다. 이승도는 제 다리가 완전히 풀려있음을 자각하지 못했 다. 교접처럼 느껴지는 키스를 감당하느라 머리가 중탕 된 마냥 음울하게 출렁거렸다.
태국영의 혀는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다. 그의 몸을 배 곡하게 수놓은 자잘한 근육들처럼 단단하고 동물적인 움 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아주 깊이까지 침입했고 모든 부위 를 낱낱이 점령했다.
질끈 닫힌 눈꺼풀 위로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 다. 눈을 뜨기가 겁이 났다. 자신은 언젠가부터 그의 진정 한 얼굴을 보고 싶어 했으나 막상 그의 가면이 뜯겨나가 는 순간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율배반적인 갈 등은 이 순간의 충동 앞에서 무기력하게 산산조각 났다.
이승도는 헐떡이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눈을 떠서 그 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홀린 듯 시선을 배앗기 고 말았다.
속눈썹이 풍성하게 박힌 그의 눈매는 반쯤 감긴 채 느 리게 깜박였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그늘이 드리운 눈동자 엔 어둑한 빛 가루가 배곡히 부유했다.
이승도는 숨이 넘칠 만큼 타액을 삼키고 있으면서도 기 이한 갈증을 느꼈다. 가슴이 아플 만큼 숨이 찼다. 그럼에 도 본능에 이끌려 더 열렬히 매달렸을 때였다.
고개가 사납게 젖혀졌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아쥔 그의 손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위에서 찍어 누르듯이 키스를 이어갔다. 아슬아슬하게 끄덕이는 목울대가 타액
을 다 삼키기 버거웠다. 입가로 미끈한 액이 치덕치덕 흘 러내렸다.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을 즈음,태국영 이 급작스레 입술을 뗐다. 이승도는 막혔던 숨을 다급히 몰아쉬었다. 전신이 무섭도록 떨렸다. 까맣게 점멸하는 시 야가 점차 제 자리를 찾아갔다.
태국영은 짐승처럼 목 안으로 거친 날숨을 내뱉었다. 잔뜩 등허리를 굽힌 채 귓바퀴를 깨물고 있었다. 후끈하 고 위협적인 숨결이 귓구멍에 습하게 들어찼다. 이승도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서 쌕쌕 가슴 만들썩였다.
“키스만 했는데 젖었어.”
태국영이 탁하게 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승도는 단번 에 알아듣지 못하고 명하니 눈만 깜빡였다. 제가 그의 허 벅지에 걸터앉아 있고,그의 긴 손가락이 팬티 속으로 들 어와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느리게 문지르고 있다는 걸 천 천히 깨달았다.
그의 손끝에서 뭉개지는 은밀한 부위는 그의 말처럼 축 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승도의 어깨가 설핏 굳어들었다. 태국영은 고개를 떨어뜨려 그 경직 위에 진득하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네 입장에서는 정말 개소리라는 거 아는데,나 나름 착
실히 수절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좀 예브게 봐 줘.”
“우리 승도 조강지부 인기 많아. 종가모임만 가면 날 통 째로 삼키려는 것들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애쓰는데.”
‘‘…어쩌라고.”
“그러니까 기다리다 지쳐서 딴생각 못하게 발리 내 것 좀 품어달란 말이야. 자꾸 피 말리면 나 진짜 한눈판다.” 이승도는 괜스레 기분 나빠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도 정신없이 홀려 있는 게 되도 않는 협박은.”
저도 모르게 뇌리에 떠오른 말을 날 것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이승도는 태국영이 기묘한 눈으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순식간에 당황한 낯을 하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쏟아 진 물이었다. 태국영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와. 우리 승도 말하는 거 봐. 요부가 따로 없네. 그걸 뻔히 알면서 이제껏 시큰둥하게 모른 척했어?”
“…그걸 모르면 뇌세포 없는 바보지,명청아!”
이승도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데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물론 그걸 모르면 아메바라 불려도 억울하지 않을 터
다. 태국영은 성년식 이후 이승도를 찾아갔을 때,무릎 꿇 고 빌지는 않았으나 그보다 더 약자처럼 매달렸었다. 이승 도가 곱절로 가중해 지우던 죄의 무게조차 선선히 받아들 일 만큼 절박했다.
태국영은 부드럽게 눈가를 허물며 뜨끈하게 열 오른 이 마에 입술을 눌러 왔다. 허리를 감싼 팔도 조금 더 깊은 포 옹을 얽어냈다.
“그래서 이제 너 하나만 보고 사는 조강지부 받아줄 마 음이 슬슬 생겨?”
“…자꾸 너,너 하지 마.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게 건방 지게.”
태국영은 퉁명스레 말 돌리는 이승도의 장단에 맞춰줬 다.
“그럼 뭐라고 불러 줄까? 이경이가 여 가 꼬맹이 부를 때처럼 형아一할까? 그럼 우리 승도가 예쁘다고 쓰다듬 어 주려나?”
“승도 형아. 국영이 좆이 너무 아파요. 젖은 구명 좀 벌 려 주세요.”
태국영은 빤히 눈을 맞춘 채 칭얼대듯 중얼거렸다. 이 승도는 급격히 혈색이 나빠진 얼굴을 빠르게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냥 너 하던 대로 해.” 태국영은 녹아내릴 듯 미소를 지으며 이승도의 눈꼬리 곁에 입을 맞췄다.
“우리 승도,역시 이게 좋지?”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잠겨 침 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정갈하게 울렸다.
“아빠. 전화 왔어요.”
태이경이 문밖에서 졸린 목소리로 고하고 있었다. 이승 도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머리 를 부드럽게 감싸 다시 끌어왔다. 이승도는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그대로 당황한 시선을 올려 보냈다. 태국영 이 웃으며 말했다.
“이 안에 소리는 못 들으니 걱정 마.”
“그럼 발리 옷부터 입어. 애가 부르잖아.”
태국영은 뭐 어떠냐며 그대로 문고리를 돌리려 했다. 이승도는 기겁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억지로 바지를 입 히고 나서 얼른 방문을 열었다. 태이경은 자다 깨서 졸린 눈을 비비다 활짝 웃어 보였다.
“엄마. 아빠랑 놀아주고 있었구나.”
“…으응. 이경이 전화소리 때문에 깼어?”
“네.아빠 전화가 계속 울려서요.”
태국영이 다가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가서 누워 있어. 통화하고 바로 나갈 테니까.”
이승도는 군소리 없이 태이경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나 갔다. 태국영은 방문을 닫은 뒤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걸었다.
《형님. 성문입니다. 주무셨습니까.》
“아니,괜찮아. 무슨 일이지.”
《방금 형수님 집 CCTV에 이상한 게 찍혀서 보고 드리 려고 전화했습니다.》
이승도가 알아서 잘 처신하며 살아왔기에 태국영은 딱 히 사생활까지 터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되도록 자유롭게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저로 인해 잔뜩 망가 진 삶을 그 정도 선에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승도가 묘연한 존재와 접촉이 있은 뒤로는 가드의 범위를 대폭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승도는 잠자코 수긍했다. CCTV 감시도 그 확장된 범위 안에 속했다.
“그래서. 뭐가 찍혔는데?”
《약 오 분쯤 전에 남강우의 차가 이삼 분 정도 담벼락
옆에 정차했다가 사라졌습니다. 특별한 행동은 없었지만 유심히 대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남강우?”
《네. 확실히 남강우였습니다.》
태국영은 굽힌 무릎에 팔을 걸치고 손끝을 느리게 까닥 거렸다. 그의 살얼음 낀 눈이 허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영상 추출해 두고 남강우 얼굴 잘 나온 사진 구해서 나 한테 보내 둬.”
《놈에게도 따로 꼬리를 붙일까요?》
“아니. 투견은 감이 좋다. 의미 없는 짓이야. 따로 지시 내릴 때까지 그냥 둬라.”
태국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남강 우가 하필 공교롭게 이승도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빤 히 주시했다니,어느 모로 보나 우연일 리가 없었다.
잠시 뒤 남강우의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태국영은 응 접실로 나가 이승도에게 화면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애 본적 있어?”
침대에 앉아 태이경을 품에 안아 재우며 여은태도 동시 에 만져주고 있던 이승도는 고개만 쭉 배서 휴대폰을 내려
다보았다. 빤히 액정을 보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아! 이 남자야. 전에 과일 사 오다가 마주쳤던.”
태국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왜? …안 좋은 거야?”
이승도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태국영은 건성으로 휴대폰을 저 멀리 굴리며 이승도의 곁에 앉았다. 더운 숨 결이 목덜미에 닿아 오자 이승도는 어깨를 움츠렸고 태국 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네 곁에 있는데 안 좋을 게 뭐가 있나. 신경 끄고 얼른 자. 졸린다며.”
이승도는 잠시 찝찝하게 물들었던 마음을 쉽게 떨어내 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태국영이 옮기기 전과 똑같이 등 뒤로는 여은태를,품 안에는 태이경을 안은 자세였다. 태 국영은 쯧 혀를 차며 아쉬운 대로 태이경의 곁에 누워 눈 을 감았다.
남강우라.
일단 지켜봐야 알겠지만,그 잠깐의 접촉으로 이승도 가 등대라는 것을 눈치챘을 리는 만무했다. 또한 남강우 는 순간의 이끌림에 눈을 뒤집고 불길 속에 달려들 만큼 애송이는 아니다. 방심할 생각은 없으나 지나치게 예민하 게 굴 이유도 아직은 없었다.
태국영은 모로 누운 채 손을 뻗었다. 1 분도 안 돼서 잠
든 이승도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완전한 신로I,어떤 상황에서건 누구로부터건 태국영이 지켜줄 거라는 그 신 뢰가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겨주었다. 순하게 잠든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이처럼 보얗게 빛났다.
서른넷을 바라보는 주제에 아직도 이렇게 마냥 예뻐서 야,온갖 놈들이 꼬인다 한들 이상할 게 없지 않나 싶었다. 태국영은 팔불출처럼 깊이 눈웃음을 지었다. 키스의 여파 로 붉게 솟은 입술을 손끝으로 비볐다.
“걱정 마,형아. 국영이가지켜줄게.”
태이경의 말투를 따라해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저와 이승도의 중간에 낀 태이경이 잠꼬대처럼 ‘으응.’하고 대 신 대답했다.
여군호가 여제운을 유심히 주시하기 시작했던 것은 대 략 보름쯤 전부터였다.
종가모임이 거하게 파토가 났던 날,여제운은 의외로
부상이 적었음에도 오래도록 앓았다. 그는 하루를 꼬박 침 대 위에서 뒤척이며 괴로워했다. 주치의가 그를 살폈으나 재생은 예전에 끝나 있었고 몸 어디에서도 이상을 발견하 지 못했다. 여제운 스스로도 괜찮으니 내버려두라 딱 잘 라 말했었다.
주치의는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조심 히 추측했다. 태국영에게 무참히 제압당한 것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군호는 평소 여제 운의 성격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그 외에 는 딱히 그럴싸한 가설을 내놓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 다.
그 후로 며칠간 여군호는 여제운을 철저히 방관했다. 그는 이 악재를 계기로 여제운을 시험코자 했다. 제 능력 의 한계를 깨달아 짙은 패배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한 다면,차기 가주로 낙점되어 있는 여제운은 그것을 현명하 게 극복하는 모습을 제게 보여야만 했다. 어떤 상황에서 도 냉철하게 손익을 판별해 내고,단호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군호의 기대와 달리 여제운의 앓음 증세는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벌써 20날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관념을 상실해 일과가 엇나가는 것은 다반사
였고,칼같이 단정했던 눈동자는 종종 초점을 잃어 명하 게 침잠해 들어갔다.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곁에서 하는 말도 가끔 놓치기까지 했다. 자잘한 실수 역시 늘었다.
“제운이는 아직도 그 상태인가.”
여군호가 묻는 말에 그의 수석비서는 깍듯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침음하는 여군호의 얼굴은 늘 그랬듯 단단한 성벽처럼 무표정했다. 여군호는 여제운의 자질을 다시 세심히 검증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개좀 호출해.”
수석비서가 조용히 물러갔다. 정적 속에서 여군호는 의 자의 팔걸이만 소리 없이 두드렸다. 생각을 거듭했으나 달 리 뾰족한 수 없이 갑갑함만 겹겹이 쌓여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미 그 밖에 있는 것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여군호는 딱 딱하게 응대했다.
“들어와.”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여제운이 차분히 걸어와 앞에 섰다.
“가주와 차기 가주가 아닌,부자 사이에서 묻자. 제운
아,도대체 뭐가 문제나/
“아무 문제없습니다.”
여제운은 같은 대답을 내놓았고 여군호는 짙은 한숨을
붐어 냈다.
“누가 보더라도 너는 지금 문제가 있어 보여.”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까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그것이 도대체 뭐지?” 여제운은 사색에 잠긴 듯 눈길을 바닥으로 내렸다. 돌 아온 것은 침묵분이었다. 그 태도가 더욱더 기이해 여군호 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인내하다 못해 기어이 터지 려던 참이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거짓입니다.”
여제운은 마침내 담담히 고뇌를 토해냈다.
“사실은 고민 중입니다. 극복하려 노력 중이니 큰 걱정 은 안 하셔도 됩니다.”
“뭔지는 털어놓지 않을 테나.”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말씀 을 드릴 거고요.”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어쩌면,아주 적은 확률로는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여제운은 그저 의연해 보였다. 그러나 여군호는 여제운 의 정적인 눈동자 깊은 곳의 혼란을 읽었다. 냄새도 미묘
하게 달라져 있는 것이 어쩌면 여자 문제인가 싶기도 했 다. 여군호는 혀를 차며 조언했다.
“무슨 선택을 하건 간에 너는 현재 여 가의 차기 가주라 는 걸 잊지 마라. 내가 널 내치지 않는 이상 모두가 널 지 지할 것이나,그건 네 선택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오래전 부터 굳어져 있는 내 가솔들의 충성이 내 후계인 너와도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했기 때문이지.”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현명한 가주를 만나느냐에 따라 가문의 흥망성 쇠가 결정된다. 너를 향한 내 신뢰를 맹신하지 말아라. 만 약 네가 그 무거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면 나는 너를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가주 자리를 딱히 원한 적은 없었다. 만약 저보다 한참 어린 여은태가 저보다 그 자리에 어울린다면 자신은 깨끗 이 물러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제가 가져야만 마땅한 것을 허무하게 잃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봐.”
여제운은 목례를 끝으로 여군호의 집무실을 나섰다. 여 군호의 비서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 다. 여제운은 반응하지 않고 곧장 옥상으로 올라가 탁 트
인 바람을 쐬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했다. 여름 한복판의 직사광 선이 살갗에 스몄다. 체온은 급속도로 상승곡선을 탔다.
인중에 쏟아지는 숨결이 셔츠 깃을 뜯어내고 싶을 만큼 뜨 거웠다.
여제운은 호주머니에 틀어박혀 있는 담뱃갑을 꺼냈다. 비닐은 예전에 뜯어 놓았지만 아직 피워본 적은 없었다. 그는 조금 망설였으나 이번에도 결국 주머니에 도로 넣고 말았다.
「내 체온에 무슨 관심이 그리 많아. 신경 끼. 내가 널 품을 일은 없으니까 너완 상관없잖아?」
여제운은 깊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으로 다시 담배를 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부싯돌을 튕기는 것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텁텁하고 자극적인 연기가 폐부를 채웠다. 해로운 것 이 몸속에 침투하자 예민한 세포들이 일제히 들끓기 시작 했다. 화끈한 열기가 가슴에서부터 격렬한 파동을 만들며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마그마 같은 혈액은 정화를 위해 혈관을 바삐 돌았다.
이렇듯 펄펄 끓는 몸으로 수많은 밤 그 차가운 몸을 품
에 안고 뒹굴었을까.
머리를 비워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태국영의 뜨거운 품에 안겨 음탕하게 신음하는 이승도가 자꾸만 머릿속을 헝클어놓았다. 수줍게 열린 비부를 흉기 같은 성기가 야만적으로 드나들 때마다 이승도는 달콤하 게 울며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르는 이름은 태국영이 아니었다.
여제운의 입가에 걸린 비구름 같은 미소가 깨끗이 증발 했다. 공허가 허기처럼 몰려와 배를 그득하게 채웠다.
미친 생각이다.
밀랍을 바른 듯 얼굴이 굳어들었다. 동요를 감추지 못 한 눈동자만 세차게 흔들렸다. 여제운은 고통스러운 신음 을 삼키며 이마를 감쌌다. 입술 사이에 아슬아슬 걸려있 던 담배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여제운은 기묘하게 목을 울렸다. 한 차례도 대면해본 적 없는 낯선 괴로움이 심장을 좀먹고 있었다. 제가 짊어 진 의무감과 제 가슴속을 들불처럼 태우는 욕망 사이에서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었다. 방황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 다-
여제운은 핏발 선 눈을 움직여 광명에 번쩍이는 도시
를 내려다보았다.
「연회장에 나타나서 태국영을 데리고 간 인간. 누군지 너는 알고 있나.」
남강우는 도대체 왜 이승도를 궁금해했나.
급작스레 솟구친 궁금증이 어지러운 머리를 해일처럼 쓸어갔다. 여제운은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끼내 남강우 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사적으로 통화할 사이였던가?》
남강우는 느른한 목소리로 이전 제 반응을 흉내 내며 전화를 받았다.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여제운은 저 스스로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 다. 그러나 이성이고 논리적 사고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 하고 스러졌다.
“너는 연회장에 나타난 인간을 왜 궁금해했지.”
여제운은 너무나 외롭고 절망스러웠다. 공감해줄 수 있 는 이가 씨가 말라 외로웠고,무슨 수를 써도 얻지 못할 것 을 탐하고 싶기에 절망스러웠다. 태국영의 가드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도가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파고들 여지조차 없는 냉랭한 거절이었다. 얼음처럼 차
가웠던 심장이 녹아내리자마자 부서졌다.
《궁금한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그저 알고 싶었을 분이 야. 도대체 그건 뭐고,원데 태국영을 길들여진 짐승처럼 온순하게 만들고,뭔데 한두 번의 만남으로도 나를 이렇 게 뒤흔드나.〉〉
남강우는 아주 평온한 어조로 털어놓고는 가볍게 웃음 을 터뜨렸다.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군. 너는 왜 그걸 궁금해하는 거 지.》
여제운은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명한 머릿속에 그 물음을 거듭 되풀이했다. 도대체 왜.
“가질 수 있을까 싶어서.”
제어할 사이도 없이,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진 심이 쏟아져 나왔다.
남강우는 무거운 실소를 터뜨리며 몸을 빙글 돌렸다. 제 체중을 가분하게 받고 있는 의자가 반 바퀴를 느리게 돌았다.
“이거 재밌어지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낮게 몸을 웅크린 도시는 방금 전까지 번쩍이던 빛을 잃 고 차춤 숨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건 도대체 뭔데 잊을 만하면 자꾸 나타나지.”
남강우는 가볍게 입술을 휘며 혀를 찼다. 기계음 섞여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던 여제운의 어투는 평소처럼 냉담하 고 고요했다. 그러나 선득하게 느껴지는 그 속내가 너무 나 격렬해서 조금은 껄끄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제가 무 턱대고 그를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저 역시 알 수 없는 감정적 동요에 이끌려가지 않았던 가.
남강우는 신영애의 파티를 망쳐 놓았던 날,이승도와 마주쳤던 장소를 정확히 찾아갔다. 그 주변을 서행하며 태 국영의 강렬한 냄새를 찾아 헤매었다. 여긴 내 구역이니 까 다들 썩 꺼져,그렇게 태국영이 메시지를 남겨놓은 듯 했던 집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허무가 밀려왔다. 이렇게까 지 찾아내서 뭘 하고자 하는 것인지 저 자신도 알 수가 없 었기에.
헌데 여제운이 그걸 갖고 싶어 한다고.
정말 놀랄 일이었다. 그 돌부처 같은 게 이 세계의 불문 율도 어기고 탐욕을 보이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
“하지만,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하지.”
남의 암컷을 탐한다는 것만큼 파렴치한 것이 없긴 하 나,정당하게 한 암컷을 두고 경쟁하는 모양새라면 적어 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 인간은 아직 태국영의 호 적에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그저 정부에 더 가 까우니 가로채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남강우는 무표정한 얼굴을 기울이며 관자놀이를 긁었 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인간의 얼굴을 뇌리에서 되살 려 보았다.
단 한 번분이었다. 그것도 마주 본 순간은 아주 잠시였 다. 그런데도 남강우는 놀랍도록 선명히 그 인간의 얼굴 을 그려냈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심지어 눈썹 한 올 한 올이 뻗어 나가는 방향과 깨끗한 눈동자에 비치던 제 얼빠 진 모습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손길을 묻히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는 되었지만,미인 이라면 차고 넘치게 많은 저들 세계에서 특출 난 미모라 고 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그 인간의 무엇이 그리 고 특별해서 이 세계 암컷들의 로망인 태국영과 강대한 권 력을 상속받을 예정인 여제운을 동시에 휘어잡았나. 정말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만져보면 알 수 있으려나.
그렇게 미묘한 고심에 빠져들려던 차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거세게 진동했다. 남강우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상념은 산산조각 났으나 그는 도리어 그 것이 반가웠다. 모르는 사이 의식이 끝없이 매몰되어가던 그 느낌이 자못 섬뜩하기까지 했다.
남강우는 몸살 앓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는 번호만 덩그러니 떠 있어 발신자를 알 수 없었다. 낯선 숫 자의 조합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남강우입니다.”
《오랜만이에요,강우 씨. 저 기억하세요?》
“내가 기억해야 하는 아가씨던가?”
《섭섭하네요. 그래도 종가모임에서 인사도 따로 몇 번 나눴었는데.》
남강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귀찮다 여겼다.
“그래서 누구라는 거지?”
《저 윤봄이예요.》
아,그제야 남강우는 상대의 윤곽을 어렴풋이 허공에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흐릿한 잔상에서 그쳤다. 윤봄이는 태국영에 의해 몰락한 윤병섭 가문의 유 일한 직계로 유명했다. 남강우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미지 도 그 외에는 달리 없었다.
“그래. 기억은 하는데. 우리가 사적으로 통화를 할 만
한사이였던가?’
남강우는 여제운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오늘 은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소식 들었어요. 종가모임에서 태국영과 부딪치셨다 고.》
남강우는 심드렁하게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더 부연 하지 않아도 이 접점 없는 여자가 저에게 갑자기 접근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셨다면서요. 바깥출입을 삼가 는 제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면…….》
“그래서.”
기이한 감정의 격류를 보이던 그녀의 숨이 멎었다. 남 강우는 웃는 낯으로 번득 이를 드러냈다.
“용건만 말하지 그래. 네 예상대로 그리 좋은 기억은 아 닌데 굳이 불쏘시개로 들추는 이유가 뭐야.”
《…기분 나쁘셨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후려친 다음에 사과한다고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 니지.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윤봄이는 조금 당황한 듯 굳은 숨을 심호흡으로 걸러내 며 망설였다. 날카로운 반응이 예상외라고 생각한 듯했다.
남강우가 서늘하니 웃었다.
이 계집애가 나를 뭐로 보고.
“아니. 말 안 해도 알아. 사적으로 말 섞어본 기억도 거 의 없는 네가 태국영 운운하며 전화했을 땐 그 더러운 속 내가 뻔하지. 안 그런가?”
남강우의 혀는 칼처럼 신랄한 춤을 췄다.
“이봐,윤봄이 양. 출가했단 이유로 겨우 목숨 건졌으 면 죽은 듯이 살아. 이제 와 네 가문 복수한다고 설쳐 봤 자 웃음거리만 될 분이니까. 그나마 목숨 부지한 너와 네 시댁까지 말아먹을 참이야? 아이는 있나? 없으면 낳지 마 라. 그 야만적인 태국영 손에 갈가리 찢기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신! 말이 심하군요!》
윤봄이는 울컥해서 뭐라고 더 소리칠 기세였으나 남강 우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제발 충고하는데,머리가 나쁘면 아무것도 하지 마. 누 울 자리도 구분 못 하는 년하고 더 이상 할 애기 없다.” 《내가 가진 카드를 알게 되면 후회하게 될걸.》
“네가 가진 카드가 뭐건 난 관심 없어.”
《투견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네.
피떡이 되었다더니 겁이라도 먹었나?》
남강우는 야멸치게 비웃었다.
“남자의 자존심을 고작 그딴 잣대로 재다니,너 정말 형 편없는 년이구나. 아니면 네 주변 수컷들이 죄다 그렇게 저열한 놈들분이거나.”
윤봄이가 분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으나 남강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있다면 바로 너 같은 년이 날 이용할 속셈을 품었다는 거야.”
《이 모욕 잊지 않겠어요.〉〉
“부디 바라건대 네 복수 명단에 나도 포함되었으면 좋 겠군. 내가 또 매너는 잘 배워서 레이디라고 불러줄 가치 도 없는 계집년이라도 찢어 죽이는 건 꽤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네 남편에게 당장 고해바치도록 해. 네가 오늘 투 견에게 수작질을 걸려고 했다가 가차 없이 까였다고. 기꺼 이 기다려 주지.”
남강우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홧김에 부술 뻔했 던 휴대폰은 소파에 던져졌다. 끓어오른 분노를 잔잔히 달 래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집무실에 버젓이 놓은 주류 진열장에 가 손에 가장 먼저 닿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남강우는 뚜껑을 따며 창가에 걸터앉았다. 석양에 젖 은 풍경이 가느다란 빗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병을 기울
였다. 독한 술이 그대로 목구멍을 쓸어내리며 위장을 채웠 다. 삽시간에 체온이 올랐다.
웬 쌍년 하나 때문에 기분 참 개 같네.
남강우의 주변엔 자기애가 강하고 당당한 여자들분이 었고,그는 그녀들을 퍽 예뻐했다. 제 앞가림도 못해서 여 기저기 민폐나 끼치고 간 보고 다니는 것들은 남녀를 불문 하고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그 머리 나븐 계집애가 저를 꼬드길 대상으로 삼았다니 그 자체로 말도 못하게 불쾌한 일이었다.
남강우는 술병에 입술을 붙인 채 고개를 꺾었다. 세차 게 움직이는 목울대 위로 입술에서 흐른 술이 턱과 목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단숨에 반병 가까이 비 운 술병을 창턱에 내려두었다.
일정수준 이상으로 취기가 돌지 않는 몸은 알코올을 해 독하기 위해 바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전차처럼 뛰어대 는 심장을 익숙하게 방치해 두며 그는 문득 미간을 좁혔 다셜마.
남강우는 단비가 홑날리는 창문 너머를 가늘게 좁아진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참 쓸데없 는 생각이었다. 그 냉정하게 사리판별 잘하는 여제운이 고
작 저런 수에 넘어갈 리가.
그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아주 없지는 않으려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혀를 찼다.
태이경은 보름이 지난 뒤에도 내내 부록처럼 태국영을 따라 이승도를 보러 왔고,이승도는 너그럽게 아이의 응석 을 받아주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써늘하니 한기 돌던 집에 혈기왕성한 사내아이 둘이 있으니 말도 못하게 시끌 벅적해졌다.
처음엔 혼이 쏙 빠지게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적응하 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니,사실은 적응하 고 말고 할 문제도 아니었다. 이승도는 금방 친해진 아이 들이 떠들썩하게 뛰어노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 다.
그간 엄마 품에 안기고 싶어 속만 끓이던 아이가 한 맺 힌 듯 자꾸만 안겨 와도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다만 이 사 랑스러운 아이를 이제껏 뭐가 그리 두려워서 방치해 뒀던 것인지,바보 같았던 스스로의 과오를 자책하며 가끔 가슴
이 쓰릴 분이었다.
“이따 엄마 퇴근할 때 아빠랑 또 데리러 와도 돼요?” 함께 자고,동물원까지 따라와 출근길을 배웅하고,퇴 근 시간에 맞춰 같이 집에 돌아가는 생활이 내내 이어지 고 있었다.
“그럼. 우리 이경이가 그러고 싶으면 얼마든 그래도 되 지.,,
“그래도 이렇게 매일매일 오면 엄마가 귀찮지 않을까
요?”
“아니야. 선생님…… 아니,엄마는 좋아. 이경이가 엄 마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좋고,이렇게 귀엽게 안겨오는 것 도 좋고,잘 먹는 것도 좋고,은태 형이랑 잘 노는 것도 좋 고,다 좋아. 그러니까 일일이 묻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 로 해도 돼.”
태이경은 방긋 웃으며 이승도의 목에 매달려 작별 키스 를 했다.
“알겠어요. 그럼 이따가 봐요.”
“그래. 집에가선아빠 말잘 듣고.”
“응. 약속.”
이승도는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굳게 걸어준 뒤 아 이를 좌석에 내려 앉혔다. 그리고 사실은 그대로 차에서
내리고 싶었으나,운전석과 보조석 사이로 돌아보며 살벌 하게 웃고 있는 태국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이 와 차별당하는 걸 유난히 못 견더 했다. 한 아이가 보는 앞 에서 애 아빠를 무시하는 것도 좋지 않았기에 핀잔을 줘서 도 안 되었다.
“엄마 아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전 안 볼게요!”
태이경은 눈치 좋게 두 손으로 눈을 꾹 가린 채 발랄하 게 외쳤다. 이승도는 별수 없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태국영은 감질나게 닿았다가 얌체처럼 떨어져 나가는 이승도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당겼다. 그는 잇새로 이승도 의 입술을 깨물었고,움칫 벌어진 틈을 타 그 안으로 거침 없이 혀를 넣었다. 세차게 발아들이는 힘에 의해 이승도 는 제 속살을 무력하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태국영은 짧으나 열렬히 입 안을 약탈해 갔다. 고작 해 봐야 2, 3초였을 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족스럽게 그의 입술을 할으며 떨어져 나갔을 때,이승도는 마치 폭풍우 에 휘말린 듯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一아쉬우면 한 번 더?
태국영이 매혹적인 눈매를 접으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이승도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마치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듯 젖은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더
니 도망치듯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태국영은 차창을 완전히 내린 도어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달콤하게 웃는 눈이 기분 좋게 사이드미러를 응시 했다. 이승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작게 비틀대며 걷고 있 었다.
“넘어올 듯 애간장만 녹이면서 안 넘어오네. 비싸게 구 는 우리 승도.”
좌석 사이로 요령 좋게 넘어와 보조석에 앉은 태이경 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국영은 눈만 힐긋 돌리며 눈썹을 꺾었다.
“재밌나.”
“네. 무서운 아빠가 엄마한테 쩔쩔매는 거 구경하다 보 면 재밌어요.”
녀석은 무구하게 대답했다. 태국영은 쯧 혀를 차며 차 를 출발시켰다.
“나는 승도 집에 다시 갈 일이 있는데,넌 어쩔래. 집에 데려다줘?”
“갔다 금방 다시 집에 가실 거예요?”
“아니. 좀 걸려. 네 당숙부도 좀 봐야 하고.”
태이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수업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태국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태이경은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능력 있 는 어른이 된다고……
“놀고 싶으면 놀고,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해. 난 네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다.”
태국영은 꽤 단호하게 말했다.
“자유롭게 살아. 네 엄마가 너에게 바라는 건 능력 있 는 남자가 되는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해지는 거니까.”
태이경은 앞뒤로 느리게 다리를 흔들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제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했으나,사실 저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눈을 뜨면 엄마가 보 이고,엄마를 사랑하는 아빠가 엄마 곁에 있고,강한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형도 생기고,저를 귀한 아들처럼 대해주 는 유모도 있다.
“공부가 싫은 건 아니에요. 전 책 보는 것도 좋구,집에 찾아오는 선생님들한테 뭘 배우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오 늘은 아빠 따라가고 싶으니까 유모한테 전화해 둘게요. 오 늘 못한 거는 다른 날 조금씩 더 해서 보충하면 될 것 같아
태국영은 픽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태이경은 유모에 게 전화해서 뜰뜰하게 계획을 설명했고,유모 역시 별말 없이 알았다고 수락했다. 전화를 끊은 녀석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뒤늦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엄마 집에는 왜 가는 거예요? 뭐 두고 오셨어 요?”
“두고 온 건 아니고.”
태국영이 묘하게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꺼내 줘야 할 놈이 하나 있긴 하지.”
태이경은 영문을 몰라 연방 고개만 갸웃거렸으나 태국 영은 더 이상 첨언하지 않았다.
태국영이 이승도의 집에 들른 이유는 바로 여은태 때문 이었다. 그는 셔츠를 벗어 던지고 건조대에 널어둔 제 운 동복 바지로 갈아입었다.
여은태는 아침부터 에어컨 가동한 방에 늘어져 있었다. 태국영은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채 마당으로 끌어냈다. 짜 증을 내려던 여은태는 한 손에 얼음 채운 주스 잔을 든 채
형아,하고 달려오는 태이경을 보곤 순식간에 날카로운 기 색을 지웠다.
태국영이 말했다.
“잔말 말고 따라오?. 하루라도 발리 인간으로 변이하고 싶다면.”
귀찮다는 듯 머리를 털어내던 여은태도,‘이거 같이 마 실래?’하고 묻던 태이경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 다보았다. 잠시 명하니 있던 여은태가 미심쩍게 미간을 좁 히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제약 산업이 가업이라더 니 나한테 약이라도 팔려고 그래?]
“성년식 전까지 그 모습으로 있고 싶은 거라면 굳이 강 요하진 않아.”
[누가 그렇대? 무슨 수로 날 변이시켜줄 거나는 말이 지.]
태국영은 짜증스럽게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군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그냥 간다.”
여은태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협박에 응한 게 아니 라 그가 꽤 진지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태국영이 긴 바지의 밑단을 허벅지까지 돌돌 말아 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한순간도 딴 생각하지 말고,내 속을 투시해.
뭐가 보여야 투시를 하건 말건 하지,그렇게 불만을 터 뜨리려던 때였다. 빈틈없이 꽉 닫힌 채 속 알맹이를 단단 히 가리고 있던 그의 빗장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은빛 속 눈썹이 박힌 여은태의 눈매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태국영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 나 그의 뒤로 숨어있던 큰 그림자가 웅장하게 기지개를 켰 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소리 없이 포효하며 훌쩍 뛰어오 르는 것만 같았다. 일전에 한 번 태국영이 의도적으로 내 비친 그림자,강하고 아름다운 금수의 모습이었다.
원시적인 본능이 공포의 싹을 틔우며 강렬히 경고해 왔 다. 여은태는 저도 모르게 바짝 몸을 낮추며 털을 세웠다.
“이 정도면 보이지?”
[잘…… 보여. 굉장해.]
여은태는 딱딱한 긴장을 조금씩 풀어내며 순수하게 감 탄했다. 그 대답에 태이경은 덩달아 열심히 미간을 모으고 서 태국영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저 평소에 늘 보던 훤칠한 남자가 있을 분이었다.
“내가 걸어 다닐 때 내 속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그것 을 보는 거야. 관절,근육,피,원기,하여간 기억할 수 있
는건 다기억해.”
[어느 몸?]
“인간 쪽.”
태국영은 마치 산책하듯이 느린 걸음으로 마당을 한 바 퀴 돌았다. 여은태는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그 모 습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의 말은 어찌 보면 굉장히 막 연했으나 일일이 어렵다고 투정할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 다.
태국영은 이런 몸뚱이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만 이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이가 있다면,기실 그것은 태국영분이었다. 과연 이 런 걸로 변이를 앞당길 수 있을지 확신하진 못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싶었다.
여은태는 요즘 들어 유독 간절하게 인간이 되고 싶었 다. 이승도와 손을 잡고 거리를 나가고 싶었고,귀엽고 사 랑스러운 태이경과 더 다양하게 즐거운 놀이를 하고 싶었 다-
이 담벼락 안의 좁은 세상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 다. 지금도 안락하고 행복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때 때로 친근한 이들과 장해물 없이 탁 트인 곳에 서서 바람 을 맞으며 수많은 것들을 눈에 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밤손님처럼 어둠 속에 숨어들려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그 렇게 하면 저와 동행할 누군가도 저를 발견할 수가 없었 다. 함께 나가도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의미가 없는 것이었 다.
“당연히 이게 기본이야. 사실 이것만 알면 뛰게 되기까 지는 순식간이고,너 같은 경우라면 이렇게 순간적으로 거 리를 좁히는 것도一”
태국영은 저 멀찍이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눈 깜박 할 시간보다 더 찰나에 그는 여은태의 앞에 나타났다. 그 가 나태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가능할 테고.”
여은태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걸 기억해 둬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당연히 그걸 네 몸에 대입해야 하는 거지. 인간으로 변 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풀어서 설명하기 곤란해. 그건 보 통 스스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거니까.”
[보여줄 수 있어?]
“지금 보여주고 있잖아.”
[아니. 당신의 진짜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이하는 그 과
정 말이야. 지금은 솔직히,좀 어려워. 뭘 어떻게 익히라 는건지감이 안와.]
지금껏 보아 왔던 중에서 가장 진중한 태도였다. 태국 영은 잠시 껄끄러운 듯 고개를 비틀었다. 성년식 이후 한 번도 돌아가 본 적이 없었다. 그 새까만 짐승은 늘 이승도 를 고달프게 했고,이승도가 그 짐승을 바라볼 때는 공포 나 증오,동정,그런 감정들분이었다.
버리고 싶은 것이 과거인지 이승도의 그 어두운 감정인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이승도와 저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의 결정이라는 것은 확고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한 번만이다.”
태국영은 그렇게 전제를 달며 바지를 벗어 휙 던졌다. 태이경이 그것을 얼른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태국영의 몸에서 용암 같은 열기가 장대하게 폭발했다. 태이경에게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 었다. 그러나 여은태는 그의 몸 안에서 관절이 부풀고 뒤 틀리며 뼈와 근육이 변화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어색하네.]
태국영은 짧게 감상을 표출했다. 그리고 정말 새삼스러 운 듯 제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비잉 돌았다. 매끈하고 짧은 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었고,그의 전신을 둘러싼 근육 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강인한 탄력을 자랑했다. 길
고 숱 많은 속눈썹이 박힌 눈시울은 크고,그 안에 들어앉 은 눈동자는 흑백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 마치 성스러운 신광을 붐어 내는 것만 같았다.
겉모습은 예전에 느꼈던 것과 같이 흑표범과 매우 흡사 했는데,귀는 그보다 뾰족했고 콧등은 조금 더 날렵하고 매서워 보였다. 매끄럽고 윤기 나는 털,우아한 곡선의 등 허리,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물결치는 근육의 움직임까 지,그 어느 하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머,멋지다! 아빠 정말 멋져요!”
처음으로 태국영의 본신을 목도한 태이경은 온몸을 부 르르 떨면서 발작적으로 외쳤다. 여은태는 몽롱하게 그 생 각에 동의했다. 환영처럼 엿보았던 것과 이렇게 실체로 대 면한 것은 정말이지 천지 차이였다.
여은태는 태국영이 마치 거대한 성채 같다고 느꼈다. 고풍스러우며 아름다우나,한편으론 짓눌러 오는 그림자 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위압감이 그의 전신을 스산하 게 감싸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꼬맹이. 넋 놓고 있지 말고 다 시 집중해.]
태국영이 냉랭히 말했다. 여은태는 흠칫 놀라 눈을 크 게 떴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땅을 디디고 섰을 때를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 변한다는 건 사실 그것과 일맥상통해. 앉아있는 것이 한계였던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무릎을 펴고 일어 나고,앞으로 발을 내디디면 그때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잘 걸어 다니게 마련이야. 변이라는 것도 결국 똑같아. 서 는 법만 알면 돼.]
[그 서는 법이라는 건,아까 말했던 그거 말하는 거지? 몸 안의 흐름을 바꾸는 거.]
[맞아. 가령 이런 거야.]
태국영은 그 큰 몸집을 날렵하게 움직여 좁은 마당을 돌아다녔다.
[지금 내 몸의 흐름을 보면 아까 인간의 껍데기였을 때 와 확연히 다른 걸 알겠지. 자 그럼 여기에서 내가 다시 인 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텐데,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뇌 리에 똑똑히 박아 둬. 다시 말하지만 두 번은 없으니까.]
[응. 잘 기억할게.]
태국영은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여은태를 심드렁한 낯 으로 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 한으로 시간을 늘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근 골이 어떻게 변화해서 자리를 잡는지,몸 안을 휘돌던 피 와 원기가 어떤 식으로 흐트러져 다시 모이는지,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여은태는 숨마저 멈추고 관찰했다.
“이런식이야. 쉽지?”
태국영은 매우 담백하게 말했다. 여은태는 그 무도함 에 놀라 내심 저놈을 물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단지 생각에 그쳤을 분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저는 저 강철 같은 근육에 이발 구명도 뚫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태국영은 속옷도 없이 테라스 의자에 걸쳐 놓은 운동 복 바지만 덜렁 입은 채 여은태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굽 혀 앉은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상처를 재생할 때 그쪽으로 피를 보내지. 그런 식으로 네 몸 안을 컨트롤해야 돼. 한 번 해봐.”
여은태는 뒷다리를 움찔거리며 그의 다리가 움직이던 것을 흉내내보려 애를 썼다. 허나 당연한 말로 그것이 단 번에 될 리가 없었다.
“아니.,,
태국영이 집게손가락으로 발등을 가리켰다.
“우선 순서는 가장 작은 근육부터야. 이를테면 손가락, 발가락처럼 섬세한 운동이 필요한 근육들. 거기만 조절할 수 있으면 장딴지처럼 큰 근육들은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태국영은 오늘 약 잘못 먹은 놈처럼 이해 안 되는 다정
함을 내리 보였다. 낯설어하면서도 착실히 알았다고 대답 하는 여은태의 정수리 위로 커다란 손이 가볍게 덮여 왔 다.
“혼자 있을 때 자빠져있지만 말고,연습 많이 해서 발 리 해치워 버려. 우리 승도가 이경이 때문에 네가 소외감 느끼진 않을까 내리 속 끓이며 좌불안석이니까.”
그의 이해 안 되던 다정함의 속사정은 참 발리도 그 정 체를 드러냈다. 여은태는 명하니 눈시울을 키웠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태국영은 그것을 훤히 느꼈을 것임에도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덧붙이는 말없이 뜨겁 게 달아오른 관절을 이리저리 풀며 시원한 실내로 사라졌 다션생님이…… 날 걱정했어?
가슴 속 어딘가가 돌 맞은 호수의 수면처럼 세차게 일 렁거렸다. 명하니 시큰한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태이경 이 조심스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짚었다.
“형아. 들어가자. 내가 양푼에다 얼음 막 넣고 시원한 주스 타줄게.”
여은태는 명하니 바닥에 처박아 놓은 시선을 느릿느릿 움직여 태이경을 보았다.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 높이는 저보다 한참 낮았다.
[난 네가 부러웠어. 사실은 지금도 부럽고.]
‘‘왜? 형은 나보다 훨씬 세잖아.”
[너와는 달리 내 엄마는 선생님이 아니니까.]
태이경은 조금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이내 무슨 말인 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엄마는 형아도 많이 좋아해. 많이 예뻐하고.” [알아. 하지만 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지금처럼 선생님 하고 지낼 수 없게 되겠지. 난 선생님 아기가 아니고,선생 님 가족도 아니니까.]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던 태이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형아는 집에 돌아가면 밖에 나갈 수가 없어?”
[…그건 아닌더니
“그럼 보고 싶을 때마다 보러 오면 되잖아. 우리 엄만 형아가 오면 언제든 두 팔 벌리고 안아줄 텐데,뭐가 걱정 이야?”
참으로 아이다운 접근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차마 의문 을 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게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부탁할 수 있는 여 씨 집안의 누군가가 있다면,그것은 은태분이다.’ 그렇게 말했던 이 승도의 차가운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승도라면 제가 성체가 되어도 언제든 아이처럼 안아 줄 게 분명했다. 지금처럼 ‘우리 은태 왔어?’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반겨줄 것이었다.
난 이제껏 왜 그렇게 바보처럼 침울해져만 있었을까. 여은태는 토닥토닥 제 어깨를 두드리는 작은 손을 일별 하고 태이경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의 작은 어깨에 턱을 기대며 속삭였다.
[나중에 형아가 먼저 어른이 되면,다정한 우리 선생님 이랑,작고 예븐 너랑,꼭지켜줄게.]
태이경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으나 이 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아는 아빠만큼 세질 거니까 든든해. 고마워.” 여은태는 살구처럼 탐스러운 아이의 뺨을 길게 할아 올 렸다.
“네 예상이 맞았어.”
태호연은 혀를 차며 종이 파일을 건넸다. 태국영은 테 라스 문을 열어두고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마당에 서는 더위도 잊은 두 사내 녀석들이 정체 모를 공놀이를
하느라 시끌시끌했다.
“약 반년 전부터 남강우는 투약을 중지한 것 같아. 딱 한 놈 분이 그때부터 비거든.”
태국영은 건성으로 파일 커버를 넘겼다. 최근 1 년간 각 가문에 납품한 슈퍼문의 내역이 깔끔히 문서로 정리되 어 있었다. 태호연이 이미 확인했으니 특별히 수치를 자세 히 볼 필요는 없었다. 건성으로 한 번 훑어만 본 태국영이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별 변태 같은 새끼를 다 보네.”
“동감이야.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약 없이 버티는지 그 속을 모르겠다.”
“알아서 뭐해.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깔끔하게 흘러 테라스로 빠져나가는 담배 연기를 가만 히 보던 태호연이 조금 심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놈이 눈치챈 것 같아?”
“아닐 가능성이 높아. 접촉은 한 번분이었고,아주 잠깐 이었으니까.”
이승도는 경계심이 아주 높았고,짐승들의 냄새에 민감 했다. 절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놈과 다시 접촉이 있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굳이 제수씨 집 앞까지 기웃거린 걸 보면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쩔 생각이야?”
“글쎄. 지금 와서 종가모임 때 일을 다시 걸고넘어지기 엔 남영규 직계도 아니라 애매하고. 그렇다고 얌전히 있 는 놈에게 찾아가서 너 내 마누라한테 흑심 품었나 묻는 것도 좆같고.”
태국영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것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뭉개 끈 그가 돌아와 앉았을 때,태호연이 내심 찝찝해하던 것 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 차트 뽑으면서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슈퍼문 공급이 기이할 정도로 적은 곳을 몇 군데 더 발견했어.”
태국영이 눈썹을 휘었다.
“또 있다고? 그게 누군데?”
“일단 그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최성열 직계 중에 최 경엽인데,그 집안에 납품하는 양이 머릿수 대비해서 상당 히 적어.”
다른 가문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태국영은 최성열이고 최경엽이고 알지 못했다. 묻는 시선을 던지자 태호연의 미 간이 깊이 파였다.
“다른 건 알 필요 없고,하나만 알면 돼. 최경엽 아내가
윤봄이라는 거.”
“그 윤봄이는 누군데.”
태호연은 막연히 암담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태국영은 무구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분이었다. 어 찜 저렇게 무신경할 수가 있나 신기할 지경이었다.
“네가 첫 종가모임에서 작살낸 윤가 놈 딸 말이야.”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태국영이 뒤늦게 아,했다.
“그랬지. 윤가 놈한테 출가한 딸이 있었지.”
저들 세계는 부계 중심으로 돌아갔다. 전면전이 벌어졌 던 당시 태국영은 철저하게 윤 가에 속한 수컷들의 씨만 말렸다. 다른 성씨를 쓰는 방계 가족들과 이미 다른 가문 의 남자와 결혼을 한 윤봄이는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이게 좀 우연의 일치라기엔 여간 찝찝한 게 아 니란 말이지. 윤봄이야 뭐,그렇게 피가 짙은 것도 아니고 너랑 철천지원수지간이나 다름없으니 우리한테 약 사는 게 싫을 수도 있다고 치는데. 윤봄이 말고도 접종을 안 하 는 놈들이 더 있는 것 같아. 적어도 윤봄이 합쳐서 셋 정 도.,,
“그래서 가장 그럴싸한 가정이 원데?”
“나도 머리를 굴려 봤는데 딱히 명쾌하게 떠오르는 게
“고민해도 답 안 나오는 건 그냥 둬. 시간 아깝게 뭐하 러 머리를 싸매고 있어.”
태국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태호연은 혈압이 올 라 잠시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너,그렇게 사고 쳐 놓고 무심한 거 좋은 버릇 아니다. 너한텐 그저 본보기용이었고 하찮은 놈들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혈족이 존재했어. 네가 구족의 구족까지 멸해도 널 향한 원한은 불안한 씨앗처럼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그럼 내가 그거 무서워서 참아야 돼? 그 씨발새끼는 죽을 만한 짓을 했어. 그건 우리 형님도 잘 알지 않나?”
“물론 그 새끼는 죽을 만했지. 응징을 가한 널 탓하려 는 게 아니라 적어도 기억은 하고 있어야 훗날을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야.”
윤 가의 차남은 첫 등장 때부터 이목을 끌던 태국영을 유난히 질시했고,그의 약혼녀가 태국영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자 대놓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온갖 루머들 을 끌어와 빈정거 리는 말투로 추궁하며 집요하게 따라붙 었다.
태국영은 내내 무료한 낯을 하고서 무시로 일관했다.
어쪄면 그의 눈엔 태국영이 대꾸할 말이 없거나 헛소문이 들통 날까 무서워 입을 다문 걸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꼴을 구경하던 다른 이들도 슬슬 ‘태국영 별거 아니네.’라 고 조금씩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거의 모두가 그 둘을 흥 미롭게 주시하느라,태 가의 가솔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 회장 벽에 딱 달라붙어서 언제든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만 발의 준비를 하고 있단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렇지 않나? 내가 알기로 제왕의 피를 타고났으면 등 대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데.」
그리고 태 가의 모두가 한마음으로 ‘제발 그것만은’하 며 조마조마했던 역린마저 건드렸다. 태국영은 그 순간,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며 싸늘한 눈초리를 치켜떴다. 윤가 놈은 그에 더 즐거워하며 그 주둥이를 더 나불거려서 결 국 제 묏자리를 팠다.
「혹시 정말로 네 전용 창녀를 숨겨두기라도 했어? 있으 면 너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좀 나눠 쓰지?」
윤가 놈이 태국영의 속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 다. 그는 단지 태국영의 속을 긁고 싶어 했었다. 여기저기 서 중매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태국영은 ‘나 아들 있어.
’라고 거절했고,그 말을 꼬투리 잡아 그 자리에 대동하지 못한 아이 엄마를 모욕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 장렬한
헛다리로 인한 모욕의 대가는 매우 컸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피곤해.”
태국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난 우리 승도 평생 정부처럼 꽁꽁 숨겨둔 채 살 생각 없어. 어차피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면 언제고 거슬리게 튀 어나오는 것들이 생기겠지. 쓸데없는 의미 부여할 필요 없 이 그때그때 건수 잡힐 때 밟아주면 도?. 그분이야.”
“설마 제수씨를 네 마누라라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 서 등대라는 것도 밝히겠다는 말이나?”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사실 이야. 이경이는 승도를 많이 닮았어. 내가 승도를 내 아내 라고 소개하는 순간 모두들 의심의 눈으로 우리를 보게 되 겠지. 그리고.”
매우 경악스럽게도,태국영은 조금 쑥스러운 듯 미소 를 지으며 뒷말을 엮어냈다.
“우리 승도 둘째라도 가지면 그 뱃속에서 아기 심장 뛰 는 소리가 훤히 들릴 텐데 그걸 어떻게 숨겨. 임신하고 있 을 때는 집에 얌전히 모셔둔다 해도 아기 나온 뒤에는 어 쩔 거야. 그거 내가 밖에서 낳아 왔다고 거짓말할 순 없잖 아. 놈들이 우리 승도를 남편 벳기고 항의도 못 하는 놈으 로 알고 우습게 볼 게 뻔한데,그럼 나 못 참아.”
태호연은 전율처럼 몸을 떨었다. 감동해서가 아니라 두 드러기가 전신을 뒤덮어 온 탓이었다.
“미친놈. 아직 넘기지도 못한 주제에 둘째 생각이나. 아 니,무엇보다 제수씨가 둘째를 바라긴 해? 안 그래도 첫 째 트라우마 장난 아닌데.”
“우리 이경이가 오죽 잘하고 있어야지. 아기 공포증은 지금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아. 남은 문제는 나랑 둘 사이고.
“물론 우리 이경이는 아주 사랑스러우니까 그럴 만도 해.,,
태호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사탕 같은 꼬맹이가 녹일 수 없는 상대라면 그건 사형시켜야 마 땅했다. 그놈은 아주 잔악한 말종이 분명할 테니.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 그렇게 생각이 확고하다면 아예 다음 종가모임에 제수씨를 데리고 나가 는 건 어때? 정식으로 네 짝이라고 공표해 두면 그 다음부 터는 누구도 섣불리 접근하긴 힘들어지겠지. 지금이야 네 말처럼 꼭 정부 같은 모양새니 흑심 품기도 더 쉽지 않겠 어?”
“맞는 말이긴 하지만,근본적인 게 해결이 되지 않았어. 승도는 아직 내 아내가 아니고,안 그래도 짐승 냄새에 예
민한 우리 승도한테 거짓말까지 하라고 하면 펄펄 뛸 거
야.,,
“하긴.”
태호연은 깊이 한숨지으며 새삼 핀잔했다.
“집안에만 들여놔도 가드가 좀 쉬울 텐데. 넌 도대체 사 년이 넘게 뭘 하고 있는 거나.”
“온몸 바쳐 만년설 녹이느라 정신이 없었지. 부숴서 녹 일 수는 없잖아.”
“미친,순정파 납셨어.”
태국영은 태호연과 함께 맥없이 실소하다 말했다.
“어쨌든 남강우는 굉장히 신경 쓰이지만 크게 걱정하 지 않아도 돼. 적어도 아직까지는.”
“왜?”
“남강우 그 고고한 자존심 이 바닥에서 유명하잖아. 소 식에 어두운 나조차도 알 정도면 캐릭터 빤하지. 물론 ‘아 직까지는’이라는 전제하에. 앞으로야 좀 두고 봐야 알 거 고.,,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확실히 말하라고 추궁하려던 때 였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당탕 실내로 뛰어 들어왔 다. 대화 도중에도 마당을 힐긋힐긋 내다보길 반복하던 태 호연이 대번에 반가운 낯을 했다.
안 그래도 그는 저 솜사탕 같은 아이를 언제나 무릎에 앉히고 물고 발 수 있을까 초조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뭐라 말을 걸어보기도 전,반짝이는 은빛 털을 한 손으로 꼭 움켜쥔 태이경은 검지로 위쪽을 가리키며 씩씩하게 소 리쳤다.
“형아! 이층,이층! 담비 찾아서 놀자!”
[그래,가재]
여은태는 늘 그랬던 것처럼 태이경의 허리띠를 물어 허 공에 던졌고,태이경은 이제 능숙하게 자세를 잡으며 여은 태의 등에 안착했다. 작은 두 손이 뜨끈한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는 순간 여은태가 2층으로 나는 듯이 뛰어 올라갔 다.
“담비야아아아아!”
두 사내아이가 어울려 놀며 내붐는 에너지가 참으로 어 마어마했다. 태풍이 지나간 듯 순식간에 1 층은 정적에 휩 싸였다. 태호연은 두 아이가 사라진 계단을 명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찌 보면 조금 충격을 받은 것도 같았다.
“재들…… 뭐야?”
태호연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미 이 집에 온 궁극적 인 목적 따위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저 재들 도대체 왜 저 렇게 친하나는 물음을 온 얼굴로 표현할 분이었다. 태국영
은 기꺼이 그 의문에 답을 내주었다.
“아무래도 저 꼬맹이가 이경이한테 반했나 싶어. 우리 승도 쏙 배닮아서 덩달아 예브니까 흑심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하긴 하지.”
“…뭣?!”
태호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릅뜬 채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 모습이 자못 비장 할지경이었다.
“절대 안 돼! 어디 갖다 붙일 데가 없어서 여 가 놈을!”
“형님이 원데 남의 아들 신붓감 후보에 감 놔라 배 놔라 야. 아빠인 나도 가만있는데.”
태호연은 마치 충정을 바친 왕에게 배신당한 신하 같 은 얼굴을 했다.
“너 설마,저 둘이 좋다고 하면 허락이라도 할 셈이야?”
“나는 내 아들 의견을 존중해. 어디서 막 굴러먹던 매춘 부 데려와도 내가 그 과거 깨끗이 지워주고 살림 차려줄 용의도 있어.”
“야,이 미친놈아! 그런 일 생기면 내가 네 목부터 조를 거야!”
태호연이 절규했다. 태국영은 물론 콧방귀도 뀌지 않았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