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25)

3.

   이승도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 가 그를 배에 품자마자 아버지의 곁을 말없이 떠났다는 사 실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난 이유는 그녀가 시간의 흐름에 서 빗겨 사는 등대였기 때문이었다. 등대들은 금수들과 마 찬가지로 청장년기가 길었다. 아예 늙지 않는 것은 아니 나 노화가 유독 더디게 진행되는 생체리듬을 가지고 있었 다. 보통 80세를 기점으로 노년기에 접어들고,비로소 급 속도로 노화가 오면 등대들은 삶을 마감할 준비를 시작한 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한창때의 아 가씨처럼 수수하고 아름다웠고,상냥하고 다정했다. 그녀 의 주변엔 끊임없이 사내들이 꼬였으나 어머니는 그 누구 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사랑은 제 아 버지였고,그녀의 남은 생애는 전부 이승도 자신으로 채워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변두리에서 작은 동물병원을 운영했다. 어머 니가 수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물론 동물들을 좋아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종족 들과 조금이라도 덜 마주치려는 의도가 큰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나갈 때에도 늘 노출을 최소화한 옷차 림을 했고,그들의 냄새가 옅게라도 나는 곳에는 절대 다 가가지 않을 만큼 신중했다.

   어머니는 어머니 집안에서 태어난 마지막 등대였다. 어 머니의 사촌 형제들은 모두 두 명이었는데 둘 다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그녀는 제 집안의 기구한 피를 제 대에서 끊 을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고백했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불임수술을 하러 온 어머니에게 의 사는 몇 번이고 후회하지 않겠느냐 물었다고 했다. 그러 나 그녀의 의지는 무엇도 흔들 수 없을 만큼 확고했다. 출 산은 여자의 특권이지만 그녀는 그 특권으로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수술 날짜 를 잡았고,수술 당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에 가 나팔 관을 절제했다.

   영구 피임.

   그녀는 바보처럼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희박한 확 률로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래

서 몇 달 동안 생리가 없어도 특별히 의심 없이 지내다가 뒤늦게야 불러오는 배를 보고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설마아니겠지. 설마,설마.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병원에 갔을 때,의사는 ‘축하 드립니다. 오 개월 됐네요.’라고 절망적인 선고를 내렸다. 그때 아기는 초음파로 보기에도 이미 사람의 형상을 모두 갖춘 뒤였다. 양수 속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태아의 모습에 어머니는 차마 중절 수술을 할 엄두가 나 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 희망으로 제 아이가 평범하게 태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으나,하늘은 그녀의 바람을 끝 까지 외면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 승도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 은적이 없어.」

   나도 엄마를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고맙습니다.”

   여은태의 어머니는 젖은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연신 이 승도에게 감사인사를 보냈다. 병환이 깊다는 여제운의 말 처럼 그녀의 몸은 폭신한 지방을 좀체 찾아볼 수가 없었 다. 고운 얼굴이었으나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했다.

   “정말고마워요.”

   이승도는 조금 명한 상태로 그저 네,네,할 분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저를 늘 걱정 어린 시 선으로 보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학교에 보내는 것조차 불 안해하던 어머니가,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라고 당부 하던 어머니가.

   “은태야…… 엄마 나중에 또 올게. 건강히 잘 있어야 해. 알겠지?”

   여은태는 대답 없이 시큰둥하게 앉아 뒷발로 귓등만 탁 탁 긁었다. 어차피 답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 서이기도 했지만,제 어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더 컸다.

   쉽게 발길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그녀가 다시금 울먹이 자 이승도는 마음이 아려왔다. 지옥에서 살아온 것은 여은 태분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남편이 제 아기를 죽이고 말 거라는 불안감,막을 수 없다는 절망 감,그것들을 저 연약한 몸으로 견더오기 쉽지 않았을 거 였다.

   이승도는 보다 못해 여은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은태야. 엄마 가신다니까 인사는 하자. 응?”

   여은태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엄마는 내 말 못 알아들어.]

   “말은 못 알아들어도 인사는 할 줄 알잖아. 선생님이 가

르쳐준거.”

   [■■■꼭 해야되1?]

   “당연히 그런 건 아니야.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 은태가 엄마한테 귀엽게 인사하는 거 보고 싶은데. 선생님이 가르 쳐준 거 아직 다른 사람한텐 한 번도 못해 봤잖아?”

   여은태는 이승도의 부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폭 쉬었다. 그리고 성의 없이 앞발 하나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이승도가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여은태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은태가 인사하는 법을 배웠어요. 잘 가시라고 흔드는 거예요. 귀엽죠?”

   “네……정말 예브네요.”

   건강하게 살이 올라 예쁘게 반짝이는 제 아이를 빤히 보던 그녀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여제운의 품에 안 기다시피 해서 돌아갔다. 이승도는 그 여린 뒷모습이 자꾸 만 눈에 밟혀 한참 마당에 명하니 서 있다 돌아섰다.

   그때,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2층 창가에 서 있는 태 국영과 눈이 마주쳤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그는 호 흡하는 기미도 없이 멈춰 있어 마치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내조명을 등진 눈은 어둡고 깊었다. 이승도는 여 은태가 허리띠를 물고 얼른 들어가자며 보채는데도 그 자

리에 버티고 서서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국영아. 너는 지금 내 속에서 잔잔히 들끓는 마음을 어 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이승도는 장승처럼 선 태국영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의 눈가가 일순 떨린 것 같았지만 거리가 멀어 확신할 순 없었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려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소 딱딱한 표정에 열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승도는 바로 앞에 와 선 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승도야. 그러지 마. 아직 한참 아가잖아.」

   너도 내 어머니를 기억할까. 네게 물려 놓고도 만신창 이가 되어 있던 너를 따뜻하게 품어 주던 나의 어머니를.

   「아들,울지 마. 엄마 병원 가면 나을 수 있어. 응?」

   다섯 살 아기였던 태국영은 그때 성체 고양이 두 마리 를 합해놓은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턱을 아무리 크게 벌려도 물 수 있는 범위는 그리 크지 않았고,이발조차 위 협적인 크기가 아니라 출혈이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 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의 숨을 끊어낸 것은 태국영이 아 니었다. 그를 회수하러 온 태 가의 남자들이었다. 그중에 는 태국영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 남자는 가장 먼저 태국영의 상태를 살폈고,그 다음

에는 어머니의 상처에서 피를 찍어 맛을 보았고,이승도 자신의 팔을 손톱으로 그어 그 또한 맛을 보았다.

   「여자는 처리하고 아이는 끌고 와.」

   남자는 제 어린 아들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돌아섰다.

   「죽이지 마! 아직 살 수 있어,살 수 있단 말이야!」

   태국영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애원했다. 그러나 누 구도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한 남자의 손 에 심장이 꿰뚫리면서도 저를 걱정하듯 바라보던 그 모습 이,이승도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국영아. 나 추워.”

   태국영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는 마치 이승도 의 머릿속을 투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뜯어보았 다. 한기가 세차게 뼛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차갑게 굳 은 손끝을 꽉 말아 쥐었다.

   “나 너무 추워.”

   거듭 말했으나 평소 눈치가 백단이었던 놈이 이번엔 영 반응이 없었다. ‘선생님. 내가 안아줄게.’여은태가 폴 짝폴짝 앞발을 띄우며 말하고 나서야 태국영은 묘한 표정 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조금의 텀을 두었고,미심쩍 어하면서 살짝 두 팔을 벌렸다.

   이승도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몸을 묻었다. 뜨거운

그의 몸은 늘 칼날도 박히지 않을 만큼 단단했기에,그 근 사한 근육 위를 쓸고 간 찰나의 경직 역시 확신하기 힘들 었다.

   이승도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빗장뼈 위에 얼굴을 묻었다. 서서히 움직인 그의 팔이 몸통과 팔을 한 번에 조였다. 그 힘은 이내 거세졌다. 뼈가 부대낄 만큼 억 센 포옹이었으나 이승도는 잠자코 떨리는 몸을 그에게 맡 겼다.

   태이경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졸린 눈을 비볐다. 아직 아침잠이 많은 아이는 졸음을 쉬이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하암,연신 하품을 흘리던 녀석은 작은 몸을 이리저리 비 틀어 보았다. 어디 아픈 곳 없이 가분한 몸 상태가 느껴졌 다.

   좋았어.

   태이경은 조심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테라스 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고 문을 열자 따뜻한 봄볕이 득달 같이 쏟아져 내렸다. 향긋한 냄새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유모가 테라스에 놓아 둔 울타리화분들에 꽃이 만개해 있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정원에 나와 있 는 이는 없었다. 태이경은 넓게 깔린 우드데크로 나와 고 개를 바짝 꺾었다.

   천진하게 빛나는 눈은 방황하는 법 없이 정확히 한 곳 을 노렸다. 태국영의 서재였다. 짤막한 다리를 한껏 구부 린 태이경은 반동을 이용해 훌쩍 뛰어올랐다. 작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타악.

   “옷차. 웃차.,’

   태이경은 창틀에 매달려 다리를 버둥거렸다. 턱걸이하 듯 팔에 힘을 주고 굽혀서 안을 훔쳐보았지만 커튼이 쳐 져 있었다. 그래도 생명의 기척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태이경은 한 손에만 체중을 옮겨 실은 뒤 다른 손으로 창문을 붙잡아 힘을 주었다. 잠겨 있으면 어쪄지 싶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창문은 아주 부드럽게 옆으로 밀려났다.

   태이경은 파닥파닥 몇 번 몸을 움직이다가 창문 안으 로 훌쩍 뛰어내렸다. 커튼이 나비의 날개처럼 팔락거리며 몸을 휘어 감았다가 멀어졌다.

   “휴우. 힘들다.”

   태이경은 자그마한 손으로 땀도 안 난 이마를 훔쳐내

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상상을 훨씬 웃도는 그 방 대한 크기에 놀라고 말았다. 한동안 망연히 주변을 둘러보 던 녀석은 문득 암담하게 울상을 지었다.

   “이건…… 너무 많은데……

   태국영은 제 개인 공간에 예민했다. 특히 침실과 서재 는 청소도 유모가 직접 했고,드나들 수 있는 가솔도 그녀 혼자분이었다. 물론 태이경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기에 들 어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국영의 서재에는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깔끔하게 분 류되어 꽂혀 있었다. 그냥 어림잡아 봐도 수천 권은 되어 보였다. 이 중에서 제가 원하는 걸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 막했다.

   태이경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곰곰이 머리를 굴렸 다.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제가 얼마 전 보았던 것의 또렷 한 모양을 뇌리로 불러왔다.

   색깔은 검정색,재질은 오돌토돌하고 딱딱했으며 두께 는 제 손바닥만 했다. 특별한 글귀 같은 것은 없는 명함첩 이었다. 유모는 어제저녁 거실에서 그것을 뒤적이며 여기 저기 전화를 돌리느라 바빴다. 명함첩을 어딘가에 두고 다 시 돌아온 그녀의 몸에는 고즈넉한 나무 냄새와 책 냄새 가 가득했다. 그래서 그것을 서재에 뒀구나 유추할 수 있

   一그렇지,냄새.

   냄새를 찾으면 된다. 그 명함첩은 태국영의 손길보다

유모의 손길이 훨씬 더 많이 닿아 있었다. 여기에서 유모 의 냄새가 많이 나는 것들을 뒤져보면 찾을 수 있을 거다.

   태이경은 벌떡 일어나 서재를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 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 다. 어느 곳을 보아도 태국영의 냄새가 가득했다. 유모처 럼 약한 여자의 희미한 흔적을 그 안에서 찾아낸다는 것 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하나 찾기와 다름이 없었다.

   태이경은 얼마 안 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글썽글썽 눈물 차오른 눈에 힘을 꾹 줘 버텼다. 아이는 터 덜터덜 걸어가 소파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폭신한 가죽 이 가벼운 몸을 무리 없이 감쌌다.

   상심은 거대했다. 그간 몇 번이고 이리 눈치 저리 눈치 를 살피던 끝에 겨우 묘수를 냈던 참이었다. 잔뜩 기대하 고 잔뜩 흥분했던 만큼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앞으로 또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서 따라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 았다.

   태이경은 쪼그리고 앉아 가지런히 모은 무릎을 끌어안 은 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짙은 시름이 나이에 맞

지 않게 무겁기 그지없었다. 태이경은 상심한 눈을 의미 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반짝.

   눈을 크게 뜬 태이경은 소파 위에서 발딱 뛰어내렸다. 어제저녁 제가 보았던 것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이 생 긴 것이 소파 앞 테이블에 반듯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찾았다! 찾았어!

   태이경은 묵직한 명함첩을 가슴에 안고 폴짝폴짝 뛰며 그 자리를 멤돌았다. 살구처럼 사랑스러운 뺨이 발그레 달 아올랐다. 연신 속으로 질러대는 기쁨의 비명이 혹여 입 밖으로 새어날까,작은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는 것을 잊 지 않았다.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야. 발리 찾아야 해.

   태이경은 다급히 달려가 태국영의 책상 아래 자리를 잡 았다. 한 가지에 정신이 몽땅 팔린 어린아이는 제가 어디 에 숨건 태국영이 금방 발견해낼 거라는 걸 까맣게 생각하 지 못하는 채였다. 편하게 주저앉아 명함첩을 펼친 녀석 은 눈을 부릅뜨고서 잽싸게 내지를 넘겨 갔다.

   이응. 이응. 이응.

   정렬은 지극히 간단하게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었다. 과 정이 어수선했던 것에 비해 탐색은 지극히 순조로웠다. 필

요 없는 앞부분을 휙휙 넘긴 태이경은 금세 원하는 걸 손 에 얻을 수 있었다.

   있었어,역시,역시!

   이승도의 명함은 투명한 비닐 안에 반듯하게 들어 있었 다. 별다를 것 없이 흰 종이에 딱딱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다였지만,제 눈에 그것은 빛보다 찬란하고 아름다 워 보였다.

   태이경은 열심히 이승도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 에 적힌 그의 이름,전화번호,직장 정보 등을 한 자도 배 지 않고 뇌리에 새겼다. 수많은 밤이 지나가도 잊지 않도 록,자다가도 깨서 기억할 수 있도록 몇 번이고 거듭해서 속으로 중얼중얼 옮조리고 있을 때였다.

   “나와.”

   헉!

   태이경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가 책 상 아래에 쿵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아야앗!,,

   겉보기와 달리 엄청나게 단단한 책상이었다. 눈물이 찔 끔 나게 아팠다. 다시 주저앉은 태이경은 아픈 머리를 손 으로 문지르며 젖은 눈을 들었다. 검정색의 헐렁한 운동복 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두 다리가 보였다. 태국영은 책

상에 비딱하게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 었다. 덜컥 내려앉은 가슴이 이내 빠르게 고동을 올렸다.

   “나오라고 했다.”

   큰일 났다. 태이경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재발리 명 함첩을 뒤로 슥 밀어 놓았다. 어떻게든 이것만은 들켜선 안 되었다. 태이경은 서둘러 책상 아래에서 빠져나갔다. 태국영의 다리 사이로 엉금엉금 기어나간 녀석은 단번에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지?”

   태국영이 온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요……

   태이경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변명할 말이 딱히 생각 나지 않아 얼버무렸다. 작은 두 손은 맞잡은 채 내리 꿈지 럭거렸다. 제가 들어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그 저 조마조마했다.

   태국영은 말없이 바닥에 온전히 내려와 무릎을 굽혀 앉 았다. 책상 밑을 슥 보는 모습에 놀란 태이경이 그의 팔을 붙들며 소리쳤다.

   “자,잠깐! 잠깐만요!”

   물론 부질없는 시도였다. 태국영은 아주 가분하게 태이 경의 허리를 팔로 휘감아 옆구리에 꼈다. 그의 손이 두끼

운 명함첩을 집어 들었다. 태이경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 럼 눈을 꾹 감았다.

   어쩌지? 들켰을까? 하지만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는 아 무리 아빠라도 알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작은 가슴이 초조함에 콩닥콩닥 날뛰었다. 이 미세한 변화마저 그의 귀에 읽힐 것이 분명했지만 도통 사그라질 기미가 없는 불안감 때문에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눈 떠.,,

   명령조의 말에 태이경은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 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모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책상 위에 오도카니 앉혀져 있 었다.

   태이경은 흔들리는 눈빛을 억지로 그러모아 그를 올려 다보았다. 그러나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술은 한 참이나 열리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진 짜예요. 그,그나앙,심심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 그래서 들어왔는데,나무 냄새도 좋구,이렇게 많 은 책은 또 첨 봤구……그래서……

   정적을 참지 못한 태이경이 황급히 살 붙인 변명을 내

뱉었다. 그러나 묵묵히 저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눈길에 짓 눌려,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다 곧 완전히 자취를 감추 고 말았다.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입술만 잘근잘근 물었 다. 무심한 태도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이렇 게 말 없는 주시는 당혹스럽기만 할 분이었다.

   “고개 들어.”

   그러나 낮게 건네 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 다. 태이경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그마한 제 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 큼 큰 남자가 제 앞에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눈이 마 주치자 그가 말했다.

   “태이경.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마.”

   태국영은 태이경이 앉은 양옆에 두 손을 짚어 누르며 상체를 숙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은 한 뼘 앞에서 멈췄고,늘 올려다보던 시선은 직선에서 마주쳤다.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얼굴에 퍼졌다. 당혹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태이경은 무심결에 고개를 꺾어 내리려다 태국영 에게 턱을 붙들렸다.

   “고개 숙이지 말라고,분명 말했다.”

   태국영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그었다. 처음으로 그 음 성에 노기가 묻어 나왔다. 태이경은 숨을 멈춘 채 얼른 고

개를 끄덕끄덕했다.

   “네가 고개를 숙여야 할 상대는 이 세상에 없어. 한 번 만 더 그 꼴 보이면 나한테 혼나.”

   “…아빠한테두요?”

   “그래. 나한테도.”

   태국영은 다시 몸을 일으켜 바로 섰다.

   “너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도 넌 당당해야 돼. 태 가의 남자는 그래야 하니까.”

   태국영은 마치 시험하듯 녀석을 잠시 노려보았다. 찔 끔 놀란 녀석은 물기 많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으나 당부대 로 고집스레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태국영의 커다란 손 이 녀석의 작은 머리통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져나갔 다.

   그 낯선 스킨십에 목을 움츠렸다 다시 바로 했을 때,태 국영은 말없이 서재를 나가려던 참이었다. 다급히 책상에 서 뛰어내린 태이경이 달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녀석 은 짧은 팔을 양옆으로 활짝 편 채 태국영을 똑바로 올려 다보고 있었다. 태국영의 눈썹이 묘하게 위로 치솟았다.

   “그럼 난,아빠 다음으로 가주가 될 거니까,내가 원하 는 걸 가질 수 있나요? 원하는 게 생기면 아빠처럼 당당하 게 말해도 돼요?”

   태이경은 당돌하게 물었다. 태국영의 입술 위로 열은 비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너처럼 허약한 놈을 가주 시켜준대?’ 그렇게 비둘어진 말이 나올 뻔했으나 그보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을 지적했다.

   “태 가의 가주는 신이 아니다.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순 없지.”

   크고 맑은 눈망울에 언뜻 상심이 깃들었다. 태이경은 시무룩해져 팔을 내렸다. 그럼 아무 소용이 없잖아,그렇 게 실망하는 내심이 고스란히 눈에 읽혔다. 태국영은 혀 를 차며 핀잔했다.

   “사내새끼 배포 하곤.”

   태이경은 의문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국 영은 지극히 충동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 상심에 잠긴 작 은 얼굴이 몹시도 불편했기에.

   “바라는 걸 왜 남에게 옮을 생각부터 하지? 누가 떠먹 여 줘야만 받아먹을 줄 아는 머저리나? 그러고도 벌써 가 주가 될 생각부터 해?”

   태국영의 말투는 평온했으나 그 말의 내용은 지극히 싸 늘했다.

   “원하는 게 생기면 온 몸을 던져봐. 사내새끼로 태어났 으면 일생을 걸고 무너뜨리려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가시가 돋아 있는 꾸지람이었 다. 그러나 태이경은 풀이 죽거나 울상을 짓지 않았다. 녀 석은 도리어 태국영을 빤히 올려다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아빠한테도 그런 게 있어요?”

   태국영은 한기 스민 표정을 탁 풀어냈다. 그는 적이 한 심하다는 눈초리를 했다.

   “태이경. 계속 바보 같은 소리 지껄일래? 태중 기억 없 어?”

   “…엄마 뱃속에 있을 때요?”

   “그래. 다 느끼고 다들었을 거아나.”

   태이경은 물론 태중 기억이 확실했다. 엄마 뱃속에서 제가 작게 들어앉아 귀가 생기고 뇌가 생겼을 때부터 세상 에 나오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태이경은 그의 말을 이렇게 풀어내고 저렇게 조합해보 길 반복하길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알 쏭달쏭했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피어올랐다. 촉촉한 뺨 에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왔다.

   “그,그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태국영은 픽 웃으며 녀석의 곁을 지나쳤다. 그의 커다 란 손이 작은 머리통을 한 번 꾹 눌러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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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해 끝없이 피를 원하는데,이 시간이 짧게는 한나절 에서 길게는 만 하루까지도 지속되었다. 이것을 압도적인 힘의 차로 억눌러주는 것이 교관이었다.

   현재의 성년식 교관은 여군호가 직접 지목한 남강우였 다. 여군호의 재종형제 쪽 핏줄인 남강우는 강하면서도 인 내심이 좋았다. 반면 괴짜로 유명하기도 해서 초기엔 약간 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 자리를 수락 한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은 누구도 그에게 제 아이를 맡 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날뛰는 아이들의 재생력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을 줄 알았고,그 한계치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두드려 패는 기술이 뛰어났다. 한마디로 죽기 직전까지 작신작신 밟아 놓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성년식 과정에서 지독하게 당한 녀석들은 성체 가 되자마자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결 과는 예외 없이 참담했다. 성체로서의 첫 출발을 재생하느 라 운신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성체가 된 아이들은 십중팔구 남강우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제 입에 그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끼 릴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남강우는 본인의 이 름보다 투견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씹…… 망할,투견…새끼……■,,

   남강우는 바위에 느슨히 올라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왼편에는 거대한 폭포가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며 까 마득히 포말을 만들었고,그의 오른편 물에는 깔딱깔딱 숨 을 들이켜면서도 독설을 중얼대는 애송이가 늘어져 있었 다. 남강우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경고했다.

   “욕지거리 한 번만 더 해라. 다음에 일어나면 그 건방 진 혀부터 뽑아줄 테니까.”

   아이는 더 말하기 힘든 건지 아니면 겁을 먹은 건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남강우는 아주 느린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습도 높은 바람은 반나체로 앉은 그의 몸에 무수 한 물방울을 새겼다. 그러나 평소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으로 인해 물기는 금방 증발했고,그의 전신에서는 아 지랑이 같은 증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그는 물안개에 자욱이 번진 물비린내를 오랫동안 들이마셨다.

   약 없이 밤을 견딘 지 넉 달이 넘었다. 남강우는 짐승 의 본성에 가까워지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으나,간헐적 으로 찾아오는 고통만큼은 인내심 좋은 그에게도 종종 버 겁게 느껴졌다. 태고부터 시작된 섭리를 받아들이는 대가 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절감한 것이 하나 있다면 태 가의 제약 산업이 신

묘한 수준이라는 거였다. 비록 반쪽짜리 백신으로 불리긴 했으나,그들이 ‘슈퍼문’을 개발해내지 못했더라면 지상 은 달이 차오를 때마다 아비규환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이 산천을 까마득히 뒤흔들었다. 심장 재생이 끝났을 즈음이니 이제 망가진 내장과 몸뚱이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거였다. 놈은 피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다 왈칵 죽은피를 토해 냈다.

   피 냄새가 물안개에 섞여 자욱이 허공을 수놓았다. 남 강우는 스산한 눈꺼풀을 깊이 감았다 떴다. 자극적인 냄새 에 혈관이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말초에 화염처럼 불이 붙 었다. 그는 기습적으로 허공에 튀어 올랐다.

   남강우가 꿰뚫고 들어간 수면을 중심으로 거센 물보라 가 일었다. 돌개바람처럼 물의 흐름이 휘돌았다. 봄볕이 짱짱할 시기이나 수온은 지극히 낮았다. 헐벗은 상체는 상 극의 온도를 만나 일순 통증을 느꼈다.

   폐 속에 차 있던 공기를 느리게 뱉어냈다. 작은 공기 방 울들이 그의 입술 사이로 몽글몽글 피어나 수면 위로 떠밀 려갔다. 느리게 가라앉는 몸뚱이는 그 어느 때보다 육중하 게 느껴졌다.

   남강우는 물속에서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명경

처럼 투명한 물살이 잉어의 비늘처럼 조각조각 흔들리고 있었다. 수면에 닿아 너울거리는 빛살이 점차 멀어져갔다. 이윽고 그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거친 모랫바닥에 등이 닿 았다.

   차가웠던 수온은 그를 중심으로 금방 미지근하게 변해 버렸다. 남강우는 짜증스럽게 눈꺼풀을 닫았다. 거멓게 죽 은 시야엔 먼지 같은 빛의 조각들이 넘실댔고 어설프게 한 기 스몄던 몸은 금세 도로 뜨거워졌다.

   이렇게 모두가 손을 뻗으면 부서지는 것분이다. 영원 히 가질 수 없는 것들분이었다.

   금단 증상은 탈출구 없는 갈증을 부추겼다. 피를 보고 자 하나 싶어 지칠 때까지 피를 보고,비린 정사의 향기가 그리운가 싶어 온 밤을 따뜻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짐승처럼 방사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 갈증은 단 한 번도 말끔히 해소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막연한 공허 속을 방황하길 수개월째였다.

   한참 숨을 멈추고 상념에 남겨있던 남강우는 별안간 번 쩍 눈을 떴다. 그 순간 난폭한 기백의 그림자가 하늘을 검 게 뒤덮었다. 그 새까만 덩어리는 곧장 수직으로 낙하해 수면을 뚫고 들어왔다. 무수한 포말이 시야를 뒤덮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한 쌍이 수중에서 선득한 살기를 붐으

며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강우의 입술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그가 사납게 팔을 휘둘렀다. 칼날처럼 깨끗하게 물을 베는 그의 손은 물의 저항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듯했다.

   퍼억一

   습격자의 고개가 떨어질 듯 옆으로 꺾였다. 단번에 머 리가 깨져 선혈이 붉게 퍼져나갔다. 습격자는 저도 모르 게 들이마신 물을 불처럼 새발갛게 내붐으며 둔중하게 으 르렁거렸다.

   남강우는 흔들림 없이 놈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거칠 게 그러쥐었다. 그의 무릎이 자비 없이 습격자의 옆구리 에 꽂혀 들었다. 살가죽이 움푹 파이고 뼈가 부러지며 붉 은 물길은 더 짙어졌다. 소리가 뭉개진 비명이 물속에 크 게 진동했다.

   큰 물기둥이 허공에 치솟았다. 거세게 휘날리는 물의 갈기 속에서 두 인영이 뛰쳐나왔다. 남강우는 놈의 머리카 락을 휘감은 손을 크게 휘둘렀다. 투명한 물방울이 온 사 방에 뻗어 나갔다.

   쿠응!

   온몸이 깨어질 정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놈이 괴로 운 비명을 터뜨렸다. 곳곳의 뼈가 단번에 조각이 났다. 놈

은 발작하듯 경련하게 피거품을 붐었다.

   놈의 몸은 성년식 전과 확연히 다르게 커져 있었다. 폭 발적으로 흐르는 열기는 여전했으나 그것은 상한 몸을 재 생시키는 데에 필요한 열 증상이었다. 이제 자신의 맡은 바임무는 끝났다.

   남강우는 멀찍이 걸어가 잠시 숨을 골랐다. 하안 김이 피어나오는 그의 몸은 아주 빠르게 말라 보송보송해졌고, 척척하게 하체를 휘감았던 블랙진 역시 다림질한 것처럼 뜨끈하게 말랐다. 그는 유일하게 축축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낸 뒤 반석에 펴둔 셔츠를 입었다.

   “고생했다. 종가모임에서 보자.”

   매정하게 산길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좆 까,이 개 새끼야!’하는 원한 섞인 외침이 쩌렁쩌렁 따라붙었다. 남 강우는 역시 저 혀부터 뽑아놨어야 했다고 반성하며 등 뒤 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원 없이 피 냄새를 맡았더니 술이 고팠다.

   “오빠야. 뭘 그렇게 퍼부어? 술 마시면 약 기운 떨어지 잖아.”

   늘어지듯 앉은 몸에 가벼운 무게감이 눌러 왔다. 아직 쌀쌀한 밤공기에 정면으로 대항하듯 탱크탑을 입은 여자 였다. 팔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랗지만,이 연약해 보이는 여자는 사실 독하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신 가 의 고명딸 신영애였다.

   남강우는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대답했다.

   “나 요새 약 안 한다.”

   짙은 눈 화장을 한 신영애의 눈이 동그랗게 홉떠졌다.

   “미쳤어? 왜?”

   “그냥 시기 맞춰서 챙기는 거 귀찮아서.”

   “귀찮아도 맞아야지. 약 기운 떨어지면 아프잖아!”

   “난 저번 대보름에도 약 없이 버텼는데.”

   “혈. 미쳤어. 돌았어.”

   신영애는 경악한 얼굴로 남강우의 가슴을 찰싹찰싹 내 리쳤다. 남강우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신영애는 헛 웃음을 지었다.

   “그게 참아지든? 난 대보름 전에 갑자기 징조 왔을 때 온몸이 아파 죽을 뻔했는데. 다들 그랬단 말이야. 느긋이 있다가 황천길 갈 뻔했다고.”

   “엄살들이 너무 심해.”

   남강우가 슈퍼문의 유혹을 참아낸 것은 그저 충동적인

짓에 불과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왜 그따위 것에 안달 복달해야 하는가 문득 불만이 생겼고,이윽고 이대로 견더 보자 했을 분이었다.

   뼈대가 자라는 어린애도 아닌 터라 가볍게 생각했던 것 은 확실히 오판이었다. 작신작신 습격해오는 통증은 생각 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그에 더 오기가 생겼고,그는 그대 로 견더냈다. 히스테릭하게 방안을 죄 부서뜨린 것 외의 부작용은 없었다. 도리어 다음 날 식은땀에 푹 절은 시트 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가분함마저 느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잖아.”

   남강우는 짙은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역시 변태라 며 혀를 끌끌 찬 그녀는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오자 미련 없이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현란한 조명이 난잡하게 떠다 니는 무대가 그녀를 삼켰다.

   남강우는 남은 양주를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약을 끊어서인지 미약하게나마 술기운이 돌았다. 그 느낌마저 나쁘지 않았다.

   “야,어디 가! 이제 초저녁인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남강우는 대꾸 없이 계산을 끝내 고 나와 차에 올랐다. 술 취한 무리가 주차장 입구에서 요 란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차 안에 앉은 남강

우의 귀에 거슬리게 박혀 들었다. 그는 곧장 시동을 걸어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았다.

   고속으로 흘러가는 불야성의 도시가 시야에 담겼다. 빠 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달 가루가 스러지는 것까 지 선명하게 보였다.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는 탓이 었다. 요즘 내내 이런 상태였다.

   남강우는 그런 자신의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 여 겼다. 그는 안락한 마구간보다 거친 황야가 좋은 야생마였 다. 아니,사실은 저희들 모두가 그렇게 빚어졌다. 다만 소름 끼칠 만큼 자연스럽게 진화의 탈을 쓴 퇴화를 거듭함 에 익숙해져 있을 분이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꺾인 본능 마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답 없는 고찰에서 남강우는 급히 빠져나왔다.

   끼이이이??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브레이크 걸린 타이어가 사나 운 마찰음을 일으키며 바닥을 긁었다. 몸 전체가 유리를 뚫고 나갈 듯 크게 들썩였다. 급정거한 차는 반 바퀴를 돌 아 보도블록을 조금 침범하고 나서야 겨우 멈춰 섰다.

   남강우는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짜증스런 한숨을 지었 다. 그는 기어를 옮겨 두고 차에서 내렸다. 방금 전 자칫

그의 차와 충돌할 뻔했던 남자는 얼빠진 얼굴로 주저앉아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이봐.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쪄자는 거야. 죽고 싶어?”

   남강우는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를 비난했다. 후 끈한 숨결이 밤공기에 진득하게 터져나갔다. 상대는 가만 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차분하게 대꾸했다.

   “여기 횡단보도예요.”

   남강우는 반사적으로 그의 발밑을 보았다. 남자의 말대 로 도로에 그려진 흰 선은 또렷하게 달빛 아래 빛나고 있 었다.

   “아무리 그래도 잘 보고 다녀. 그러다 사고 나면 네 손 해잖아.”

   남강우는 다가가 성의 없이 손을 내밀었다. 놀라서 주 저앉아 있던 남자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들었 다.

   “그쪽한테 술 냄새 나는데요. 음주운전은 하면 안 돼요.

   그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투였다. 성인 남자에게 쓰기 엔 부적절한 어투였으나 남강우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 질 못했다. 낯선 기분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

그는 홀로 일어났다. 내민 손이 무색하기도 하련만 남강우 는 그대로 멈춰선 채 미간만 좁혔다.

   남자는 대강 옷을 툭툭 털어내 정리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차도에 굴러다니는 사과와 오렌지 몇 알을 주섬주 섬 챙겨 봉투에 넣은 그는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남강우는 아직까지 허공에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 다. 무언가 기묘했으나 그 기묘함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남강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틀었다. 이것 또한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남자가 미처 챙기지 못한 사과 한 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는 변덕처럼 그 사과를 집어 들고 남자에게 빠르게 다가갔 다. 막 보도블록에 올라서던 남자의 팔목을 붙든 것은,그 저 멈춰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거 놓고一”

   이거 놓고 갔는데,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남강우 는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남자가 소스라치듯 놀라 거칠게 부리친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는 제 과민반응에 재차 놀란 듯 곧장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고맙습니다.”

   남자는 속눈썹이 촘촘히 박힌 눈을 내리뜨며 사과를 가

져갔다. 손가락조차 스치지 않게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럼 이만.”

   그는 좋지 않은 안색으로 밀쳐내듯 목례를 했다. 그리 고 더 지체하기 싫은 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남강우는 쫓 기듯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주시하다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건,방금 뭐였지.

   남강우는 그의 팔목을 휘감았던 손을 코앞에 가져와 유 심히 뜯어보았다. 파르스름한 냉기의 흐름이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바닥에 묘연한 형태로 휘돌고 있었다. 착각 이 아니었던 거다. 동공이 바늘처럼 좁아진 그의 눈동자 에 선득한 이채가 스쳤다.

   남강우는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활짝 펴 보았 다. 짓이기듯 으깬 냉기는 가루처럼 허공에 홑날리며 묘 한 향기를 붐어 냈다.

   장승처럼 정지해 있던 그는 한참 뒤에야 완전히 주먹 을 말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서늘한 역풍이 불어 왔다. 찬 공기가 이마를 훑어가니 안개가 걷히듯 머리가 맑아졌다.

   남강우는 불현듯 깨달았다.

   남자가 사라진 곳에는 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

은 태국영의 냄새였으며,또한 제가 모르는 다른 수컷의 강렬한 자취였다. 정면으로 충돌하는 두 남자의 기세가 동 시에 후각을 찔러 왔다.

   “뭐지,저 인간은.”

   남강우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채 남자가 사라진 자취 를 오랫동안 살펐다. 그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망연하게 바라보길 수 분,그는 문득 머릿속을 강렬히 울린 두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고가 강제로 홑어졌다.

   그는 빠르게 차에 다시 올라 카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불쾌한 바람이 살갗을 끊임없이 할아왔지만 관자 놀이를 후벼 파는 통증은 오랫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이승도는 거의 뛰듯이 걸었다. 늑골을 힘차게 울리는 거센 심장박동이 좀체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실수로라도 접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남자가 내민 손조차 무시했건 만,일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차가운 경직이 긴장한 몸 을 치밀하게 조여 왔다.

   집 앞에 당도하고 나서야 이승도는 머뭇머뭇 뒤를 돌아 보았다. 신중하게 눈을 굴리며 한참 어둠 속을 살펐다. 남

자의 기척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절로 실없 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겠지.

   그동안 이런 우연한 만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 니,사실은 꽤 자주 있는 편이었다. 당장 백화점만 가도 멀 정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사치스럽게 쇼핑하고 있는 그들 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제 쪽에서 먼저 피하곤 했지만, 어쪄다 살갗이 스치는 일이 있어도 이제껏 문제가 생긴 적 은 없었다. 저와 닿은 그들은 하나같이 불쾌한 낯짝으로 찬바람을 날리며 멀어졌고,다시 돌아본다 해도 태국영의 냄새에 의아해하는 기색분이었다. 하지만.

   이승도는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일순 옭아맸던 팔을 들 어 물끄러미 보았다.

   이번엔 확실히,원가가……다른 것같은데.

   그러나 홀로 고민을 거듭해 봐도 답이 나올 리가 없었 다. 이승도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지금 당장 태 국영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필요 없을 때 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놈이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 자리 를 비운 상태였다.

   오늘은 일 년에 단 한 번분인 유모의 생일이었다. 이런

날 섭섭하게 대했다가는 그 후환을 각오해야 했기에 제멋 대로 사는 태국영마저도 집에 붙어있어야만 했다. 유모는 세심하고 여린 여인이라 사소한 것에 어린애처럼 기뻐하 고 자잘한 것에 매우 집착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저 역시 그녀에게 오늘 꽃다발과 예븐 브로치를 선물로 보내둔 상 태였다.

   [선생님!]

   여은태는 마당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문 열리 는 소리에 폴짝 뛰어오른 여은태가 기세 좋게 바닥을 크 게 굴렀다. 허공을 유유히 가른 금수는 그렇게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승도는 코앞에서 가 볍게 안착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은태 훨훨 날아다니네.”

   [컨디션 아주 좋아. 선생님 좋아하는 과일 많이 사 왔 어?]

   “응. 은태 잘 먹는 사과를 제일 많이 샀지.”

   [좋다. 얼른 들어가자.]

   여은태는 손에 든 짐을 낚아채 가려는 듯 입을 벌리다 가 멈칫했다. 막 녀석의 아랫니 사이에 봉투 손잡이를 걸 어주려던 이승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 울였다.

   녀석은 축축한 콧등을 킁킁거리며 비닐봉투를 들고 있 는 손을 연신 탐색하고 있었다. 천진한 눈매가 어느 순간 슬쩍 가늘게 좁아들었다.

   [이건 뭐야?]

   “응?,,

   [선생님 손목에 낯선 냄새가 뱄어. 누구를 만났어?]

   “아아. 별거는 아니고,그냥 잠깐 스쳤을 분이야. 가끔 있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잠깐 스쳤을 분?

   여은태는 눈을 내리깔아 그의 손목을 뚫어져라 응시했 다. 질척하고 불순한 냄새가 하안 살결을 덮고 있었다. 희 미하지만 질기고 강렬하다. 단지 의미가 없었던 접촉이었 다면 이렇게 선득한 흔적이 남았을 리가 없었다.

   여은태는 뾰로통하게 있다가 예고 없이 입을 벌렸다.

   “어,잠깐……!,,

   이승도는 다급히 소리치며 몸을 뺐다. 그러나 피하기 는 이미 늦었고,여은태는 몹시도 재발랐다.

   봉투가 다시금 내동댕이쳐지고,알뜰히 주워 온 과일들 이 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승도는 황망하게 눈 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봉투를 들고 있던 손은 손목까

지 통째로 녀석의 입 안에 잠겨 있었다. 여은태는 그 상태 로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마치 낯선 냄새를 없앤 저를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 이.

   그러나 이승도는 매우 당황해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에 잠겨 들 분이었 다.

   태국영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오늘 있었던 일을 애 기해야 하는데,이렇게 되면…….

   이승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 을 방법을 강구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감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지,은태야……■,,

   여은태는 무구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승도의 낯이 걱정으로 잔뜩 흐려졌다.

   “너 태국영한테 혼날지도 모르겠어.”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온 태국영은 역시나 화가 머리끝 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그는 부서질 듯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실내를 울렸다. 1 층 응접실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이승도는 그 굉음 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태국영이 복도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왔다. 날 선 기세 가 무시무시했다. 그의 걸음은 묘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는데,늘 깔끔하게 정리하는 머리카락이 마치 폭풍에 휘날리는 듯했다.

   태국영이 아무리 눈이 돌아도 저에게 해를 입힐 리는 없었다. 놈은 여전히 위험한 짐승이었으나 어떤 순간에서 고 영리한 이성을 놓지 않을 만큼 단단한 남자로 자랐다. 이승도는 그의 표적이 된 여은태를 꼭 부둥켜안은 채 입 을 열었다.

   “때리지 마. 동물 학대 영구추방!”

   “어디 해봐. 이 부지 싹 밀어버리고 새 집 사줄 테니까. 비켜.”

   가까이에 선 태국영이 검지와 중지를 까딱해 보였다. 이승도는 고개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빠르게 흔들었다.

“아동 동물 학대는 더 중죄야. 접근금지 받고 싶어?” 태국영이 가소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이승도. 상황파악 못하지,지금.”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평화로웠다. 거친 열기가 알알이 박힌 눈과는 영 딴판이었다.

   “애를 그따위로 키우니까 기어오를 곳 끼어들 곳 구분 을 못하는 거야. 잘못했을 땐 두드려 패서라도 혼을 내야 지. 나한텐 그렇게 잘하는 거 그 새끼한텐 왜 못해.”

   “너 언제까지 그따위로 명청한 척할 거야. 온 동네방네 네 정체 다 드러나고 온갖 곳에서 씨발 새끼들이 우르르 몰려와 널 말려 죽일 때까지?”

   “…내가,이미 잘 알아듣게 타일렀으니까……■,,

   “뭘 잘 알아듣게야. 저 새끼 지금 반성은커녕 날 못마땅 하게 노려보느라 바본데. 一눈 안 깔아,이 새끼야!”

   태국영이 여은태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고함쳤 다. 마당이 내다보이는 유리벽이 일순 파르르 진동했다. 그것이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노성 때문인지,그의 전신에 서 폭발하는 살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여은태를 더 꼭 부여안았다. 손끝부터 체온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녀석 의 귓가에 ‘눈깔아,은태야.’하고 초조하게 속삭였다.

   이승도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사실 여은태는 슬그머 니 시선을 내리며 이승도의 품에 고개를 묻은 뒤였다. 놀

란 가슴이 세차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꼿꼿하게 솟아있던 풍성한 꼬리가 돌돌 말린 채 다리 사이에 숨어드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간 태국영이 원가를 못마땅해 하면서 한 대 쥐어박 을 듯 손을 치켜든 적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 서웠던 적은 없었다. 여은태는 그간 태국영이 나름 저를 꽤 봐주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잔뜩 겁먹은 스스로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할 겨를도 없 었다. 여은태는 두 번째로 그의 속 알맹이를 날 것으로 보 았다. 새카만 몸체는 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했고,그 의 광휘 도는 두 눈에서 붐어져 나오는 살기는 위협이 아 닌 진심이었다. 전신의 근육들이 따끔따끔 조여 왔다. 열 두 해 짧은 생애 동안 이렇게 눈조차 못 볼 정도의 존재감 을 가진 이는 처음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낯의 이승도를 발견한 태국영은 다시금 독초 같은 인내를 애써 씹어 넘겼다. 제어를 잃을 뻔했던 뜨거운 손끝을 말아 쥔 그가 겨우 목소리를 낮췄다.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 더 열 받게 하지 말고.”

   이승도는 그의 심기를 더 거스르기 전에 얼른 여은태 를 품에서 떼 놓았다.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잔뜩 기죽어 있던 녀석이 끼잉,하며 매달리려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응석을 받아줄 때가 아니었기에 허공을 머뭇대며 긁는 녀 석의 앞발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여은태의 몸을 가리 듯 막고 일어서자 태국영의 거친 눈동자가 여은태에게서 이승도에게로 넘어왔다. 이승도는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 갔다.

   “국영아.”

   작게 죽여 내뱉은 목소리에 태국영은 눈만 가늘게 떴 을 분이었다. 이승도는 생전 이렇게 다정하게 불러본 적 이 있었던가 싶을 만한 목소리로 다시금 ‘국영아. 나 좀 봐 보h’하고 말했다. 태국영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 다.

   “이미 보고 있잖아. 왜.”

   느낌 탓인지 바람 탓인지 그의 분노가 한층 누그러진 듯했다. 이승도는 슬쩍 눈치를 살피다 그의 이마를 가볍 게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화염 같은 열기가 드글드글 몰려 있었다. 이승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 았다.

   “우선 열부터 식히고 애기하면 안 될까?”

   태국영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같잖은 수작을 보는 듯 한 얼굴이었다. 이승도가 좀 더 뻔뻔한 용기를 내어 팔을 잡아끌었다. 태국영은 분노로 닳아 탁성이 흐리게 섞인 목

소리를 잘게 씹어 내뱉었다.

   “우리 승도는 좆 같이 눈치 없는 게 꼭 이럴 때만 여우 처럼 굴어.”

   이승도는 제멋대로 태국영의 불만을 기각했다. 그저 이 화를 잠재워야 뭐가 돼도 될 것 같았다. 흥분한 맹수는 격리가 최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수의사로서 의 소견이었다. 마냥 졸아서 떨고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 가아니었다.

   이승도는 다시금 낑,하는 여은태를 돌아보며 작게 손 짓했다. 지금은 보챌 때가 아니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이 었다. 귀가 축 늘어진 모습이 말도 못하게 애잔했지만 도 리가 없었다. 이승도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가까스로 떼 어내 태국영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이 2층으로 사라지자 여은태는 한참 시무룩하 게 앉아 있었다.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짐승 친 구라곤 태국영 하나분이고,저를 사랑해주는 것은 이승도 하나분이었기에 둘이 저를 외면하니 한없이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여은태는 귀도 꼬리도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겼다. 앞발로 테라스 문의 손잡이를 끌어내려 열고 나갔다. 어느 새 가느다란 봄비가 바람결에 홑날리고 있었다. 꽃나무 하

나 없는 마당은 물비린내로 가득했다.

   테라스의 우드 데크에서 허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타 박타박 발을 옮겼다. 가늘고 여린 빗줄기가 털 속으로 스 며들어왔다.

   여은태는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마당을 배회했다. 온몸 이 젖어드는 느낌은 우울한 기분과 맞닿아 마이너스 시너 지를 일으켰다. 여은태는 보슬보슬한 빗방울을 쏟아내는 하늘을 사색에 잠겨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훌쩍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한편 2층 침실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친 밀하게 침대 위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태국영은 비딱하게 앉아 짜증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펄펄 끓던 열기는 확연히 잦아든 상태였다.

   역시 흥분한 맹수는 격리부터 하는 법.

   그리고 다음 단계라면 역시 개별 맞춤식 달래기였다. 이승도는 그의 시선 아래 고개를 들이밀고 매트리스를 짚 은 그의 손을 은근히 쓰다듬었다.

   “우리 국영이,선생님이 안아 줄까?”

   조심스레 건넨 사탕을 태국영은 가차 없이 뱉어냈다.

그는 싸늘하게 입술을 휘며 비아냥거렸다.

   “놀고 있네. 뭐하나,너.,’

   …이게 먹힐 타이밍이 아닌가 보네.

   이승도는 말가니 올려 뜬 눈을 침울하게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저에게 한해서는 무르게 구는 놈이라 너무 얕잡 아 본 듯했다. 몸에 안 맞는 애교까지 투척했건만 처참히 실패하자 잠시 회의를 넘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좀 받아 주면 안 돼? 나도 평소에 네 꼬인 성격 다 참 아주는데.”

   물끄러미 이승도를 바라보던 태국영이 이내 짧게 혀를 찼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싶긴 했지만,이승도가 평소 제 패악을 유하게 넘기고 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국영은 나직이 한숨지으며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그래서,어느 쪽이야.”

   “응?,,

   “손목. 어느 쪽이나고.”

   이승도는 왼팔을 내밀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팔뚝을 잡아끌어 코끝을 가져갔다. 희미하게 미간을 모은 채 깊 이 숨을 들이마셨지만,물론 얻어지는 건 조금도 없었다.

   감시를 하건 손을 쓰건 미리 알아 둬야 가능한 일이었

다. 만약 그 미지의 놈이 무심결에라도 교감을 시도하려 들었다면 필시 접촉 부위에 강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을 터 였다. 헌데 이승도의 애정에 한껏 도취되어 있는 천둥벌거 숭이가 어설픈 질투로 그것을 덥석 지워버린 거다.

   “망할 애새끼 냄새만 진동을 하네.”

   태국영이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가장 큰 증거가 이미 깨끗이 증발했다. 곧장 뒤를 쫓아온 게 아니니 지금으로써 는 일단 큰 걱정을 한 단계는 아니겠지만,묘하게 계속 신 경이 쓰였다.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해 봐. 마주치기 전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할인마트에서 과일과 간식거리를 샀고,횡단보도 앞에 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고,초록색 불이 켜졌을 때 길 을 건넜다. 한 네댓 발자국 걸었을까,고속으로 달려오던 차가 급정거를 해서 보도블록을 조금 침범했다.

   “무슨 차.”

   태국영이 이승도의 말을 끊어내며 물었다. 이승도는 잠 시 기억을 더듬다 곤란하게 관자놀이를 긁었다.

   “차는 잘 못 봤어. 치이는 줄 알고 너무 놀랐거든. 그냥 검정색,얌전한 승용차는 아니었고 스포츠카 종류였던 것

   “우리 승도 놀라게 하다니,잡으면 내가 혼내줘야겠네.

   태국영은 습관처럼 헛소리로 받아치며 잠시 눈을 내리 깔았다. 이 바닥 놈들은 달이 차오를 때마다 욕구불만에 시달려 섹스나 쇼핑으로 푸는 게 일상이었다. 국내에 몇 대 없는 슈퍼카 정도라면 달라지겠지만 그저 검정 스포츠 카라면 암담하리만치 광범위했다. 열에 아홉은 가지고 있 는 게 색깔별 스포츠카였으니까.

   “단서가 너무 부족해. 내 차 정도는 돼야 차만 봐도 아 태국영 님이구나 하지.”

   태국영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승도의 손목에 자꾸 만 코를 비볐다. 얻어지는 것도 없다면서 그의 뜨거운 날 숨은 연한 살갗을 지리멸렬하게 뭉갰다. 은근슬쩍 입을 벌 려 혀를 비비기도 했다.

   간지러움에 손가락 끝이 자꾸만 곱아들었다. 눈에 뻔 히 보이는 수작질에도 이승도는 양순하게 침묵을 지켰다. 지금은 무엇보다 비위를 맞춰주는 게 우선이라 어깨만 움 찔거릴 따름이었다.

   문득 태국영이 고개 숙인 그대로 눈만 치켜떴다. 곤란 함에 내심 안절부절못하던 이승도는 순간 이유 없이 숨을 멈췄다. 속눈썹이 풍성하고 시원하게 트인 그의 눈시울이

한껏 위로 말려 올라가는 모습은,정말 기이할 정도로 매 혹적이었다.

   일순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이승도는 제 어이없는 감 상에 뜨끔 놀라 픽 시선을 피했다. 태국영은 조금 의아해 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금세 묘하게 입매를 휘었다.

   “종종 화내야겠네. 우리 승도 이렇게 양갓집 규수처럼 얌전하니 더럽게 예쁘잖아. 나도 모르게 품고 싶을 정도 로.,,

   태국영은 분명 이승도가 써늘하게 받아치리라 생각했 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이승도는 허공 어딘가를 배회하던 눈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지마. 너 화나면 정말무서워.”

   태국영은 드물게도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깊이 가라앉은 눈길이 시들시들한 이승도의 낯빛을 진득 이 할아갔다. 마치 정말로 겁을 먹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태국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명하니 아래를 보던 이승도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왜 이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치면 나 당황하잖아.” 태국영은 상체를 숙이며 낮은 자세로 이승도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평정을 잃은 태국영은 색욕이 강해지지.” 갑작스레 다가온 태국영의 얼굴을 턱 막아내며 이승도 는 도끼눈을 떴다. 하여간 방심하는 순간을 여지없이 치 고 들어오는 놈이었다.

   “갖다 붙이지 마. 언제는 졸릴 때 그렇다며.”

   냉랭한 핀잔에 태국영은 안도하며 눈매를 휘었다. 그 가 이승도에게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우는 얼굴도 찡그린 얼굴도 화난 얼굴도 아닌,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발리 막으면 섭섭하잖아. 난 승부욕이 강해. 막히면 더 뚫고 싶어지거든.”

   태국영은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승도는 당황해서 그 의 얼굴을 더 세게 떠밀었지만 뒤로 밀려난 것은 그가 아 니라 자신이었다.

   털썩 눕혀진 몸으로 태국영의 그림자가 육중하게 덮어 왔다. 반사적으로 일으킨 가슴을 그의 커다란 손이 내리눌 렀다. 꼼짝없이 그의 아래 깔린 이승도는 차게 눈을 치떴 다.

   “뭐 하자는 거야. 안 비켜?”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무슨소리야. 내가 뭘?”

   태국영은 이승도의 다리 사이에 몸을 끼운 그대로 고개 를 내렸다. 반항은 거세졌으나 태국영은 개의치 않고 이승 도의 한쪽 뺨에 제 얼굴을 가볍게 비비며 말했다.

   “우리 승도 선생님,국영이 안아주신다면서요.”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음영이 짙고 또렷한 이목구비는 늘 그랬듯 여유로운 웃 음을 매달고 있었다. 이승도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 한숨지었다.

   “그래. 이리와.”

   이승도는 두 팔을 벌려 태국영의 등을 감싸 끌어왔다. 태국영은 야살스럽게 눈가를 휘며 온전히 몸을 맡겨 왔다. 단단한 근육 덩어리에 깔린 이승도는 가쁘게 오르는 숨을 색색 내뱉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세찬 고동이 번졌다. 태국영은 마치 파고들듯 얼굴 옆으로 제 고개를 묻어 왔다. 뺨과 뺨이 맞 닿았고,눅진하고 뜨거운 숨이 목을 타고 흘러 목덜미까 지 흠씬 젖어들었다. 그는 제 양어깨를 가볍게 움켜쥔 채 온순하게 안겨만 있었다.

   정적이 사분히 내려앉았다. 태국영은 한 번 농지거리 를 걸 법한 순간들을 무수히 침묵으로 넘겼다. 소리 없는

숨결만이 뜨겁게 서로의 귓가를 스쳤다. 이승도는 모처럼 얌전하게 있는 태국영의 등을 편안히 조여 안은 채 부드럽 게 쓰다듬었고,아기를 재우듯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우리 국영이 많이 컸네. 예전엔 한 품에 쏙 들어올 정 도였는데.”

   이승도는 흐린 웃음 섞어 중얼거렸다. 대답 대신 보송 보송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부드럽게 간질여 왔다. 새카맣 고 윤기 흐르는 모발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또 그것이 떠 올랐다.

   음울하게 젖은 눈으로 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뒤를 돌 아 사라지던 그 거대한 짐승이.

   태국영이 조금 더 깊이 목에 얼굴을 묻어 왔다. 그의 높 은 콧대가 경동맥 위를 지그시 누르고,부드러운 입술이 살갗을 베어 물 것처럼 살짝 벌어져 비벼졌다. 내뱉는 숨 은 차춤 거칠어졌으나 들이마시는 숨은 신중했다. 다리 사 이를 파고든 그의 중심이 서서히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승도는 내색 않고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홑어놓았 다. 괜찮아,그렇게 달래는 것처럼 살살 쓰다듬으니 불안 정하게 차오르던 호흡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손아귀에 만 져지는 그의 허리는 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참고 있는 거였다. 그 어릴 때와는 다르게.

   “우리 승도 로비할 줄 아네. 뭐든 들어주고 싶게 만들

어. 짜증 나게.”

   불현듯 쏟아진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래. 몸 로비 확실하게 했으니까 너도 약속 지켜.”

   “내가 생각하는 몸 로비는 이것보다 더 진하고 더 격렬 한데. 더 확실히 남자를 녹이기도 하고.”

   “그래서 뭐. 홀딱 벗고 다리라도 벌려 줘?”

   “상상만 해도 황홀하군.”

   이승도는 한숨처럼 웃으며 그의 어깨를 슬쩍 옆으로 밀 어냈다. 태국영은 순순히 옆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모로 누워 손을 뻗었고 이승도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뜨끈한 열기가 뺨에 한참을 머물렀다. 태국영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이렇게 관대해? 까칠하게 후려칠 타이밍 한참 지 난 거 아니었나.”

   “네가 속 긁을 타이밍도 한참 지났어.”

   “아하.,,

   태국영은 묘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거래에 충실한 우리 승도. 제대로 몸 로비할 일 생기 면 주저 말고 벗어. 내가 기꺼이 역 로비도 해 줄 테니까. 밤새 달게 울릴 자신 있어.”

   이승도는 한숨을 쉬며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 다.

   “작작 해. 하여간 조금 풀어주면 끝을 몰라.”

   태국영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제야 완전히 몸을 일으켰 다. 이승도는 명하니 누워 있다가 돌연 쑥 들리는 몸에 순 간 어깨를 굳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태국영이 저를 어 린아이처럼 안아 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낯 뜨거운 포즈에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내리쳤으 나 이번에도 아픈 것은 애꿎은 제 손분이었다. 짜증스럽 게 미간을 좁힌 사이 태국영은 그대로 창가로 걸어가 한 쪽 어깨를 기대고 섰다.

   “다 좋은데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그가 말했다. 이승도는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해 보 였다. 태국영은 창문 너머 고갯짓을 해 보였고 이승도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아래에는 마당 에서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는 여은태가 저희들을 빤히 올 려다보고 있었다. 이승도는 기겁하며 버둥거렸지만 태국 영은 힘이 아닌 언변으로 그 반항을 잠재웠다.

   “잘 새겨둬,이승도. 꼬맹이가 낯선 수컷의 냄새에 반응 했다는 건,무의식중에 너를 제 암컷 후보로 인식하고 있

다는 거야.”

   허공에서 휘둘러지던 팔이 그대로 멎었다. 태국영은 고 개를 꺾어 이승도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지나친 몰입은 곤란해. 저 꼬맹이는 널 이미 어미로 완 전히 각인한 이경이가 아니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 야 돼. 그래야 비극은 반복되지 않아.”

   이승도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지진 이 인 듯 흔들리는 눈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여은태 는 처량하게 저를 올려다보며 한 자리만 뱅글뱅글 돌고 있 었다. 태국영의 설득에 납득해 버린 뒤라서 그럴까,다정 하게 붙은 둘을 투기 어리게 올려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저 녀석은 언제든 너를 제 암컷으로 각인할 수 있는 놈 이야. 네가 그 여지를 충분히 주고 있지. 너는 꼬맹이에게 헌신하고,꼬맹이는 너로 인해서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 어. 지금의 녀석에게 너는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야.”

   태국영은 이승도의 턱을 끈끈하게 할았다. 마치 눈만 마주쳐도 불꽃이 튀는 연인 사이에서만 오갈 수 있는,섹 스의 전조처럼 관능적이면서 다정한 스킨십이었다.

   “네가 녀석을 아들처럼 키우고 싶다면,지금부터 수컷 으로서 서서히 올라오는 그 독점욕을 미리 꺾어둘 필요가

있어. 어설픈 희망을 주는 건 못할 짓이라고.”

   하늘로 쭉 뻗은 여은태의 고개는 바닥을 보는 법이 없 었고,제게 들리지 않는 이 안의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긁 어내려는 듯 귀가 바짝 서 있었다. 초조한 듯 수시로 바닥 을 퉁 치고 오르는 앞발은,마치 허락이 떨어지면 금방 이 창문을 뚫고 쏘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이승도는 바짝 마른 입술을 무심 결에 혀로 축였다. 집요하게 위를 올려다보던 태국영의 눈 이 살짝 가늘어졌다. 허리를 옭아맨 그의 팔뚝에 거센 힘 이 실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이승도는 홀린 듯 그의 뺨을 한 손으로 감아쥐며 머뭇머뭇 물었다.

   “키스…하면 돼?”

   시야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태국영의 색기 짙은 입 술이 다가오는 것을 선명히 읽었다. 이승도는 나머지 한 손마저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꺾어 내리며 그에게 키스했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는 순간,태국영은 거칠게 입을 벌 리고 들어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천장을 길게 훑고 들어 왔다. 오싹함에 어깨가 움츠러들며 발끝 역시 오그라들었 다-

   윗입술이 그의 이에 으스러질 듯 짓눌렸다. 여린 조직

이 깨지며 아릿한 피 맛이 혀끝에 감겼다.

   아,아파.

   이승도는 잔뜩 뭉개지는 발음으로 거의 웅얼대듯 말했 다. 태국영은 용케도 그것을 알아듣고 입술을 모았다. 찢 어진 곳을 가볍게 혀끝으로 훔치고 입술 사이에 끼워 쭉 쭉 발아갔다. 경직되어 떨리던 허리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피 맺힌 표피를 발며 황홀히 눈꺼풀 을 내렸다. 겨우 키스였다. 섹스도 페팅도 아닌 그저 입술 을 엮어 혀를 섞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들불처럼 끓어오르 는 흥분이 주체할 수 없이 단전을 폭격했다.

   성년식 전에 온 발정기.

   이승도는 그 진정한 의미를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태 국영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 고 싶었기에.

   “부드럽게 할게. 입 더 벌려 봐.”

   태국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이승도는 부들 부들 떨리는 턱을 좀 더 벌렸고,뜨끈하고 물기 어린 혀가 입술을 느리게 더듬은 뒤 나긋하게 침투해 들어왔다.

   볼 안의 여린 점막이 갈고리 같은 혀에 긁혔다. 아무것 도 못하고 굳어있는 제 혀는 비벼질 때마다 움찔거리며 미 끈거리는 액을 흘렸다. 제 안에서 샘솟은 타액이 그의 입

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남자답게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 가 크게 꺼덕였다. 꿀끽 넘어가는 그 소리가 소름 끼칠 만 큼 음란했다.

   태국영은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열렬히 이승도의 입 안 에서 타액을 짜냈다. 마치 다디단 과육을 음미하듯 혀를 씹어대고,뺨이 홀쭉해질 만큼 음탕하게 발아갔다.

   이승도는 손끝에 닿는 그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 다. 손톱이 약하게 그의 피부를 긁고,따뜻한 스팀 냄새 가 득한 섬유가 손 안에서 일그러졌다. 현기증이 날 만큼 숨 이 부족해 고개가 뒤로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태국영이 이승도를 창턱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히고 강하게 몸을 밀어붙였다. 그의 손은 늘어진 이승도의 두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고,뜨거운 입술은 귓불 아래에 틈 없이 밀착했다.

   이승도는 차가운 창에 뒷머리를 비비며 고개를 젖혔다. 눈가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은 아까처럼 경동맥을 물었다. 딱딱한 이가 피를 짜낼 듯 깨물었다.

   “구,국영아……!,,

   이승도는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고 태국영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짝 굳은 몸이 바들바들 떨리자 난폭하

게 굴던 것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따끔한 잇자국 위로 그의 물기 어린 습지가 달콤하게 녹아들었다.

   둥글리듯 한참을 즐기던 그의 입술이 턱을 타고 올라왔 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단번에 깊은 곳을 점령한 그의 혀는 아주 느리고 농염한 리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승도는 다시 할딱였다.

   이상해. 이런 거……

   머리가 중탕한 초콜릿처럼 질척이게 녹아내리는 기분 이었다. 이승도는 그 감각에 짓눌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으로 될까. 겨우 이런 걸로,저 아이한테…….

   잡념에 혼을 끌어모으느라,이승도는 제 사지가 태국영 의 몸을 집요하게 휘어 감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 다. 그것을 느낀 태국영의 열기로 타오르는 눈동자에 묘 한 이채가 울렁거렸다는 것도.

   태국영은 단단한 손끝으로 이승도의 등허리를 녹였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그러모으던 이승도는 얼마 버티 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나락처럼 깊은 상 념에 매몰되었다.

   「나에게 암컷은 너분이야.」

   열일곱 살의 태국영은 핏발 선 눈으로 그 오만한 머리

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너분이야,승도야.」

   그는 이해해달라는 말도,받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 다-

   온전히 태국영과 저 둘밖에 없었던 그 암흑의 시기에, 태국영은 첫 발정기를 겪기 전부터 제 몸을 타고 올라왔 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행위인지도 모르면서 말랑말 랑한 성기를 사타구니에 비비고,온몸을 할으며 끙끙 앓 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녀석이 열일곱 살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첫 발정기가 찾아왔다.

   짐승의 발정기란 결국 방사가 목적이었다. 그것이 이뤄 지지 않는 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날카로워지기 마련 이었다. 첫 발정기가 오기 전부터 그 곁에 있는 것은 저 혼 자분이었다. 태국영은 자신을 처음부터 제 암컷으로 인식 하고 있었다.

   태국영에게 세 번째의 발정이 왔을 때,때는 탐스럽게 둥근 달이 어두컴컴한 하늘을 홀로 비추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홀로 싸웠다. 열일곱 살의 그는 제법 인내를 아는 수컷이 되었고,더는 저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비 명조차 내지 않고 자해를 했다.

   「구,국영아. 괜찮아……?」

   그래서였을 거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마음이 미어져 자신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그의 등허리에 손을 대고 말 았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발정과 폭주를 견더내던 태국 영은 그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자신은 그에게 강간의 혐의를 씌웠다. 태국영은 그마저 도 인정했다. 싫다고 울며 반항하던 것을 억압해 억지로 교미를 했으니 분명 맞는 말인데,이제는 자신 있게 그에 게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언제나 최선이란 없었다. 어떤 것 을 선택해도 최악만이 있었을 분.

   一국영아. 지금도 네가 발정하는 상대는 나분일까.

   이승도는 가물가물한 머릿속으로 중구난방 쏟아져 들 어오는 상념들에 완전히 집어삼켜졌다. 태국영이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고 애릇하게 저를 어루만지는 것도 느끼 지 못했다.

   새발개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가븐 숨을 내쉬는 이승 도를,태국영은 묵묵히 눈에 담았다. 발긋하게 오른 뺨 도,신뢰를 가지고 온전히 열린 몸도,그에게는 그저 낯설 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대로 발가벗겨 먹어치우고 싶다.

   태국영은 은근히 이승도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 안에

수줍게 다물려 있을 구명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길 반복 했다. 이승도는 완전히 넋을 놓은 채라 그것조차 눈치채 지 못하고 헐떡이기만 했다.

   그는 어느 순간 이승도처럼 눈을 감았다. 입술과 혀에 닿아 오는 축축한 점막을 느리게 유영했다. 태국영에게 이 승도의 입 안은 제가 넣고 싶은 구명이었고,그 안에서 움 직이는 혀는 맨정신에서 한 번도 이승도의 속살을 벌려본 적 없는 제 성기였다.

   섹스를 하듯 음탕한 키스가 이어졌다. 손끝에 스치는 엉덩이 사이에 얼핏 축축한 점성이 감겨 왔다. 이승도가 저도 모르게 흥분해 수컷의 생식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 고 있는 거였다. 태국영은 그 달콤한 애액으로 제 성기를 흠뻑 적시고 싶은 음험한 욕망을 애써 내리눌렀다.

   우리 승도 무서워하면 안 되니까.

   참자고 거듭 되뇌며 손을 떼어냈다. 태국영은 이승도 의 얼굴을 조심히 감싸 어루만졌다. 본래 목적이 이미 뇌 리에서 날아간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그는 이승도와 이 은밀한 살결을 맞대는 것에 흠뻑 취해 있을 따름이었다.

   “영웅이가 도통 먹이에 손을 대지 않네요. 이번엔 그 시 기가 너무 길어서 정말 우울증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요.”

   사육사의 얼굴은 풀 길 없는 근심으로 가득했다. 이승 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겁게 한숨지었다. 그 한숨은 사 육사의 걱정에 동화되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직접 살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녀석이 우울증일 리가 없었 다. 90% 이상의 높은 확률로 꾀병일 거였다.

   “며칠 됐죠?”

   “벌써 나흘쨉니다. 무리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요.,,

   “일단 가 봅시다.”

   이승도는 착잡한 마음으로 사육사의 뒤를 따랐다.

   “매일 하이톤으로 울기만 하는데 왜 그러는지 저희가 알 도리가 있습니까. 분명 선생님이 다시 데려왔을 때만 해도 화색이 돌았었는데,이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기력 을 팍 잃어버리더랍니다. 그 뒤로는 구석에 처박혀서 바닥 이나 긁어대고 있고요. 그러다 이제는 사료도 마다하고, 온종일 빽빽,뭐,그 상탭니다.”

   영웅이는 본래 작은 체구로 태어나 비실비실했다. 강인 함이 곧 상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녀석의 무리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하고 약한 녀석은 금세 배척되 었고,틈만 나면 저보다 작은 아이들에게도 두드려 맞곤 했다. 먹이를 줘도 늘 뺏기느라 바빴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매일 징징거리기만 하는 게 가여 워서 일단 제가 집으로 데려가 돌보며 체격부터 키워줄 생 각이었다. 헌데 도중에 여은태가 집에 눌러앉은 뒤 녀석 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이윽고 탈모까지 와 버렸다. 어차피 많이 건강해진 터라 다시 데려와 사육 사에게 인계했다. 그때만 해도 신이 나서 훨훨 날아다닐 낌새더니,얼마 안 가 수시로 꾀병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꾀병을 부리면 그냥 두라고 언질을 줬는데 단식이 길어지니 사육사도 방법이 없어 이 승도에게 알린 것이었다.

   “제 방식이 잘못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 문제로 친구가 화를 냈거든요.”

   자신 없는 투로 내뱉은 이승도의 말에 사육사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설마요. 애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따르는지 아시 면서. 영웅이 합사 과정에서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잖아요.

자기가 적응을 못한 거죠. 무슨 소리를 들으셨기에 그러세 요?”

   “제가 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이 잘못 드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랑을 못 받은 애들도 문제가 생기지 만,지나치게 사랑받은 애들도 문제가 생기네요.”

   이승도는 침울하게 한탄했고,사육사는 위로하듯 어깨 를 다독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면한 영웅이는 그의 예상 과 한 치 오차가 없는 상태였다. 녀석은 구석에서 쭈구리 처럼 몸을 말고 있다가 이승도가 ‘영웅아.’하고 부르니 냅 다 뛰어 왔다. 내실 우리 창살을 부여잡고 마구 흔들어대 며 낑낑 울어댔다.

   [선생님. 나 여기 싫어. 선생님이랑 있을래.]

   역시 꾀병이었다. 순식간에 활기를 되찾은 영웅이는 여 기서 내보내 달라 난동을 부렸다. 제가 떼를 쓰면 이승도 가 따로 격리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완전히 학습을 한 거였다. 수시로 예쁘다고 쓰다듬어주고,깨끗하게 닦아 주고,방해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녀석에게 그 런 환경은 꿀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일단선생님이랑 가자.”

   사육사는 문을 열어 주었고,이승도는 곧장 튀어나온 영웅이를 가볍게 추슬러 안아 걸음을 옮겼다. 사육사가 꾸

벅 인사했다.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마치 어미에게 안긴 듯 사지를 벌려 착 달라붙는 녀석 이 안쓰러웠으나 동시에 짙은 자책을 느껴야 했다.

   “너 꾀병이지?”

   이승도는 진료실로 향하며 영웅이를 흘겨보았다. 확신 을 갖고 묻는 말에 녀석은 몸을 움찔했다. 겁먹은 자라처 럼 목을 움츠린 녀석은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변 명했다.

   [밥 먹기 싫은 건 맞는데에…….]

   “너 일부러 단식투쟁한 거잖아. 친구들이랑 부대끼면 서 있기 싫어서. 그렇지?”

   […하지만 개네는 너무 시끄럽고 냄새나고 포악해. 난 선생님이랑 있는 게 더 좋은걸.]

   이럴 줄 알았다. 한숨이 나왔다.

   “내 잘못이다.”

   [응? 선생님,왜?]

   “난 자꾸만 너희들을 나에게만 기대게끔 만들어. 냉정 하게 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은 수의사였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경력도 그리 길

지 않았고,동물을 다루는 데에 만능이라 자만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녀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용해 동물들 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충족시켜 주며 조금 더 녀석들 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제 소명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심각한 부작용을 보 일 수 있다는 걸,이승도는 근래 들어 여실히 깨닫고 있었 다-

   이승도는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태국영의 조언을 따랐던 건 잘한 일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 다.

   그러나 여은태는 그 뒤로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의 기소침해져버렸다.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 뭘 해도 의욕이 없어 보였다. 늘 활기차게 따라다니며 껑충껑충 매달려오 던 녀석이 요즘엔 자주 창가에 앉아 먼 하늘을 보며 넋을 놓고 있곤 했다.

   크면 엄마랑 결혼할래,하고 철없이 굴던 아들이 어느 순간 현실을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약이겠거니 하고 있지만 마음이 짠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태국영은 옳은 말을 했다. 여은태의 세상에서 이승도 자신은 전부나 다름이 없었다. 녀석은 하루 온종일 그 좁

은 집에서 갇혀있다시피 했다. 자신이 직장에 있는 동안 아픈 몸으로 마당을 서성이며 혼자 놀아야만 하는 녀석이 었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오매불망 저만 기다리면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말썽쟁이 친구도 만들어 주고 귀여운 여 자 친구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을 어 디서 데려온단 말인가.

   [아냐! 아나! 선생님은 잘못하지 않았에 누가 그런 말 을 해? 내가 혼내줄 거야!]

   이승도는 힘없이 웃었다.

   “영웅아. 친구들이랑 잘 지내지 못하면 선생님이 뭘 어 떻게 해줄 수가 없어. 알잖아. 지금 선생님 집에는 은태가 함께 살고 있고,태국영도 자주 왔다 갔다 해. 우리 영웅 이 그 녀석들 싫어했잖아. 무서워서 구석에 콕 틀어박혀 서 나오지도 못했잖아. 막판에는 머리도 빠지고.”

   […개네 싫어. 무서워.]

   “알아. 싫겠지. 하지만 선생님 집에는 늘 그렇게 낯선 애들이 있어. 언제 늘어날지 모르고,언제 빠져나갈지 몰 라. 난 영웅이를 아주 예뻐하지만,영웅이 말고도 예뻐해 줘야 하는 아이들이 많아. 여기 보?. 선생님 진료실에만 와 도 네가 무서워하는 태산이가 있잖아.”

   이승도는 진료실 문을 열며 말했다. 영웅이는 이승도 의 목덜미를 부둥켜안은 팔을 바짝 긴장하며 눈을 끔뻑였 다. 펜스 안에서 발등을 날름날름 할아대던 태산이가 갸우 뚱 고개를 기울이며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저를 보자마자 펜스에 발톱을 걸고 ‘선생님! 선생님!’하며 토실한 엉덩이 를 실룩거렸다.

   [저 멍청한게…….]

   영웅이는 괜히 분한 듯 이를 갈았다. 태산이가 등허리 를 곧추세우며 칵칵 불만을 내뱉었다. 먼저 시비를 건 주 제에 잔뜩 졸아붙은 영웅이가 가슴팍에 얼굴을 폭삭 묻으 며 달달 떨어댔다.

   이승도는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철없 는 원숭이는 사회생활을 좀 더 따갑게 배워야 할 것 같았 다.

   “영웅이 얌전히 있어.”

   이승도는 일부러 영웅이에게 목줄 같은 것을 채우지 않 았다. 지금 당장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주변을 탐색하고 적응하는 능력이었다. 자신이 숙여야 할 상대와 억눌러야 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다른 원숭이들과 합사는 영 원히 불가능했다. 땅에 내려놓자마자 한쪽 다리에 매달려 오는 녀석을 내버려둔 채 이승도는 태산이에게 다가갔다.

영웅이가 기겁하며 떨어져 나가더니 구석으로 숨었다.

   “태산이는 사람들 많아지기 전에 선생님이랑 아침 산

책 가자. 괜찮지?”

   [응! 응!]

   이승도는 산책 준비를 서둘렀다. 사람들을 싫어하고 낯 선 사람들은 더 싫어하는 태산이가 마음껏 뛰어놀게 하려 면 지금 당장 나가야 했다. 녀석에게 점심 이유식을 먹이 고 저도 식사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꽃이 만발할 시 기에 맞춰 동물원은 봄 축제 프로그램을 내놓았고,덕분 에 요새는 점심시간만 지나면 사람들이 금세 북적거렸기 때문이었다. 휴대용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벌써부터 앞발을 탁탁 굴러 뛰려는 녀석을 냉큼 안아 들었다. [선생님 보보!]

   “응. 우리 이븐 태산이. 보보.”

   이승도는 태산이의 주둥이에 쪽쪽 몇 번 입을 맞췄다. 날름날름 턱을 할는 녀석을 품에 안고 진료실을 나섰다. 영웅이가 저도 데려가라고 떼를 썼으나 냉정해지기로 마 음을 먹은 이승도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오늘 날씨 엄청 좋아. 우리 태산이 이제 잘 뛰니까 선 생님이랑 달리기 시합할까?”

   [응! 이길 거야!]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것분 아니라,녀석이 무리 없이 형 들과 합사할 수 있게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것도 중요했다. 보통 그런 부분은 사육사들이 맡아서 해 주지만 태산이가 워낙 사람을 가리니 제가 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도는 건물 입구로 나오자마자 준비 땅을 외치고 달 려나갔다. 태산이는 승부욕 가득한 눈을 빛내며 짧은 다리 로 열심히 쫓아왔다. 그러나 아직 아기 짐승이라 대결이 될 턱이 없었다. 이승도는 녀석과 적당히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뛰었다.

   하악. 하악.

   조그마한 몸은 금방 할딱였지만 싫은 소리 없이 꽤 오 래 버텼다. 고집이 센 만큼 근성도 대단했다. 발육도 빠른 편이고 생긴 것도 매우 예쁘니 나중에 암컷들도 줄줄 따 를 것이었다. 훗날 분명 무리에서 왕좌를 놓고 다투지 않 을까 기대해도 좋을 법한 새싹이었다.

   “휴우. 선생님 힘들다. 태산아,쉬었다 가자.”

   이승도는 일부러 힘이 든 척 말했다. 저 쉬게 해 주려 는 건 까맣게 모르는 태산이는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면서 도 활기차게 크르렁거렸다.

   [난 아직 힘이 있어!]

   온 우주의 수컷은 어느 정도의 허세를 가지고 있게 마

련이었다. 이승도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벤치에 앉아 허벅 지를 툭툭 두드렸다. 태산이는 훌쩍 뛰어올라 다리 위에 동그마니 몸을 말았다.

   “목마르지? 물 마실까?”

   [응. 물.]

   이승도는 손에 쥐고 있던 물병 입구에서 호스를 배 냈 다. 녀석의 입 안에 호스를 물리고 물을 흘려 넣어 주니 녀 석은 분유를 먹던 때처럼 물병을 앞발로 꼭 쥐고 잘 받아 마셨다.

   양껏 목을 축인 녀석은 젖은 주둥이를 발로 삭삭 닦아 할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그 윽하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날씨 참 좋다. 그치?”

   [응.]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날이 풀리면서 동물원 특 유의 꿉꿉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꽃이 만개할 시기라 그리 기분 나쁘다 생각되진 않았다. 연분홍의 여린 벚꽃들이 훈 풍에 섞여 홑날렸다. 구름 없는 하늘에 꽃잎이 날리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승도는 태산이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가만 히 눈을 감았다. 태산이도 이승도를 따라하듯 고개를 위

로 쭉 뻗고 봄볕을 만끽했다.

   그때,불현듯 바람이 싣고 온 꽃잎 하나가 입술에 딱 붙 었다가 곧장 바람에 섞여들었다. 분명 촉감도 상황도 현저 히 다른데,기이하게도 그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이승도 는 가볍게 감은 눈꺼풀을 천천히 열었다.

   키스.

   이승도는 무심결에 한 손으로 제 입술을 매만졌다. 말 랑말랑하고 촉촉한 살결이 손끝에서 뭉개졌다.

   어릴 때부터 태국영은 제멋대로 제 입술을 할곤 했고, 성체가 된 뒤에도 마치 기습처럼 입술을 훔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녀석의 일방적인 육탄공세였다.

   말하자면,며칠 전의 그것이 제게는 첫 키스인 셈이었 다. 눈가가 확 달아올랐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국영 과,그토록 농밀한 키스를,합의하에 하게 될 줄.

   한 번 피어오른 눈가의 열기가 좀체 잦아들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도리어 얼굴 전체로 역병처럼 빠르게 번져갔 다. 이승도는 이제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차갑 게 식은 손으로 제 이마를 덮어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무서울 만치 거세게 뛰어댔다. 마치 아직도 그 의 혀가 제 입 안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칠게 시작

해서 나중에는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달콤하고 따스하게 변했던 그와의 키스.

   내가 왜이러지.

   이승도는 저를 일깨우듯 두 손으로 뺨을 짝짝 두드렸 다. 그러나 입술분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자꾸만 그때의 일을 떠올리려 기지개를 켰다.

   [선생님! 산책!]

   앙칼진 목울음이 들려오자 이승도는 가슴이 철렁할 만 큼 놀라고 말았다. 상념이 단박에 홑어져 바람에 쓸려갔 다. 이승도는 목에서 뛰는 심장 고동을 한 손으로 꽉 눌러 짚으며 시선을 내렸다.

   태산이가 바짓단을 물고 앙앙거리고 있었다. 그새 또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인지 얼른 놀자고 보채는 거였다.

   “으응. 그래,가자.”

   이승도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섰다. 환상은 부서 졌으나 그 잔재가 자꾸만 뇌리를 떠돌았다.

   [선생님?]

   태산이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뱅글뱅글 돌았다. 명하 니 서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승도는 얼른 녀석의 뒤를 따라 걸었다.

   능동적인 태산이는 앞장서서 궁둥이를 썰룩거리며 걷

다가 종종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제가 이끌고 있는 이승 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기의 허세 에 너그러이 응해주면서도 이승도는 내내 알 수 없는 동요 에 시달려야 했다.

   여은태는 퍼진 인절미처럼 몸을 뉘인 채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유히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은 그림처럼 깨끗하고 파란 빛깔이었다. 멀리서 꽃향 기가 밀려왔지만 시시때때로 목에서 피 냄새가 올라오는 통에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여의치 않았다.

   이승도의 정성스럽고 꾸준한 보살핌에 몸은 많이 익숙 해졌다. 이제는 달이 꽉 차오르는 시기만 아니면 거하게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신체의 고통 은 이승도가 오기까지 견딜 만한 정도였고,내장 쪽은 특 히 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지금 여은태는 간헐적으로 뚝뚝대며 아파 오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제게는 그 누구보다 귀중한 이 가 다른 수컷과 친밀하게 애정을 나누는 걸 보아버렸다. 그 둘은 매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 바늘 끝도 들어가

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은태는 자신이 그들의 사이에서 어느 정도 밀쳐진 상 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승도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했 으나,뻥 뚫린 가슴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슬프다…….

   여은태는 _가 뒤틀리는 것 같은 앞발을 삭삭 할으며 연거푸 한숨을 지었다. 이 다음에 성체가 되면 꼭 이승도 랑 결혼해서 그 옆에 착 달라붙어야겠다고 그렇게나 다짐 했는데,그 희망이 무참히 깨지니 그저 시름만 깊어갈 분 이었다.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까 더 서럽잖아.

   불만스럽게 꼬리로 땅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투덜거리 고 있을 때였다. 이상한 기척에 여은태는 앞발에 푹 파묻 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영리하게 쫑긋 솟은 귀가 툭툭 꿈틀댔다.

   이승도의 집 앞에서 차 한 대가 방금 멈췄다. 지나가다 잠시 빈 공간에 정차했다고 보기에는,그 안에 타 있는 것 들의 정체가 픽 의심스러웠다.

   여은태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건 우리 가문 놈들 냄새하곤 다른데?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굳이 따지자면 태국영

과 엇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여은태가 이제껏 만나 본 다른 가문의 수컷은 그가 유일했다. 그래서 확신할 수 가 없었다.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원가 작은 것이 담벼락을 훅 넘어왔다. 여은태는 기겁할 만큼 놀라 저도 모르게 털을 세웠다. 아무리 태 가 놈들이라 하더라도 이 렇게 무례하게 침입할 줄은 몰랐다.

   [누구야!]

   무심결에 소리친 여은태는 다음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막돼먹은 침입자가 제 생각보다 훨씬 작은 어린애 였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도 마찬가지로 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쌓여 갔다. 어린애는 커다란 눈을 느리 게 끔뻑거리다가 머뭇머뭇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저기,안녕…… 년 누구야? 왜 여기 있어?”

   여은태는 혼란스러운 듯 눈을 굴렸다. 막무가내로 담 을 넘어온 아이가 도리어 안에 있는 제게 왜 정체를 캐묻 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은태는 못마땅하게 가늘어진 눈으로 어린애를 노려보았다.

   [너 참 예쁘지만 예의가 없구나. 먼저 네가 누군지 밝혀

   “어…… 난 그러니까,태이경이야.”

   역시 태 가의 어린애였다. 그러나 이게 도통 무슨 상황 인지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년 누구야? 여긴 우리 아빠 집인데…… 년 우리 집 가 솔도 아닌 것 같아. 왜 여기에 있어?”

   [아…… 아빠?]

   여은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네 아빠가 태국영이야?]

   “응. 우리 아빠야.”

   여은태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잃었다. 설마 이승도에게 넋이라도 다 배줄 것처럼 굴던 그에게 아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짙은 분노가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자신은 태국영이 싫 었지만,그가 이승도를 배신하는 건 더 싫었다. 제 눈앞에 서 그렇게 애정을 과시해 놓고 뒤로는 딴 살림을 차리다 니,이 무도한 자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성체가 되면 태국영부터 없애버리고 내가 선생님 이랑 결혼할 거야. 나븐 놈. 나븐 놈!

   크르르르一

   여은태는 무심결에 위협적으로 목을 울리며 태이경을 노려보았다. 투명한 은빛으로 변한 금수의 눈동자 안에서

서늘한 불티가 튀었다. 섬뜩한 살기에 주시당한 태이경은 조금 뒷걸음질 쳤다. 두려운 것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컸 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발리 나오세요.”

   “저희들은 가주님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 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솔 두 명이 안에서 자욱하게 퍼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태 이경은 잠시 고심했다. 분명 눈앞의 은색 짐승은 저를 굉 장히 싫어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공격해올 수도 있겠다 싶 었다. 제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한 상대였다.

   태이경은 가볍게 달려가 대문을 열었다. 가솔 두 명의 놀란 얼굴을 담담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허락할게. 들어와도 돼.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지켜줘.”

   그들은 조심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태이경은 조금 안 심하며 다시 여은태를 돌아보았다. 여은태는 멀찍이에서 여전히 털을 세운 채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적대감이 의아하면서도,다른 가문의 어린짐승이 왜 여기에 있는가 가 더 궁금했다. 막 그것을 물으려던 차였다.

   [당장 나가! 년 여기에 있을 자격이一]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꽃향기 섞인 바람이 태이경의 뒤쪽에서 여은태에게로 하늘하늘 떠밀려갔다. 여은태는 화를 내려던 것도 멈추며 눈을 크게 떴다.

   비강을 가득 채우는 낯익은 향. 늘 그립고 애릇한 그 향 기.

   여은태는 놀라 숨을 멈추고 말았다. 위협적인 기세가 순식간에 꺼져들었다. 태이경은 작은 손으로 흐트러진 제 머리칼을 톡톡 정리하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크고 맑은 두 눈은 호기심인지 의심인지 모를 것으로 반짝거렸다.

   “년 우리 아빠 손님이야? 여기에 왜 있어?”

   태이경은 똑같은 질문을 재차 던졌다. 여은태는 한동 안 석상처럼 굳어 있다 불쑥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가 솔들이 기겁하며 달려들려 했고 태이경은 한 손을 뒤로 뻗 어 그들을 제지했다. 해치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타악.

   짐승은 한 번의 도약으로 바로 앞에 네 발로 우아하게 착지했다. 짐승이 쏘아 보내는 눈빛엔 불신이 가득했고, 태이경은 저도 모르게 목을 조금 움츠렸다. 짐승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이상해.]

   여은태는 고개를 움직여 아이의 목에 코끝을 비볐다.

다시 한 번 가솔들의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태이경 은 이번에도 그들의 소란을 손짓으로 막았다. 그리고 어리 둥절해 하면서도 간지러움에 여은태의 머리를 낑낑 밀어 냈다.

   “뭐 하는 거야.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작게 불이 난 듯 입술을 내미는 얼굴이,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사슴같이 고운 눈과 예쁘게 높 은 콧대는 이승도와 판박이였다. 여은태는 빤히 태이경을 주시하다 불쑥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너한테서 선생님 냄새가 나.]

   “선생님?”

   [승도 선생님.]

   설마,아니겠지. 선생님은 남자잖아. 남자는 아기집이 없는데.

   명하니 중얼거리는 여은태는 제 심장이 불길한 징조로 두근거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러나 태이경은 ‘아하!’하 며 주먹 쥔 손으로 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녀석은 무구 하게 웃으며 자랑스럽게 내민 가슴을 제 엄지로 쿡 찔러 보였다.

   “그야 당연하지. 내 엄마니까.”

   여은태는 막연했던 의심이 사실로 굳어지자 크나큰 충

격에 휩싸였다.

   영웅이는 집에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내 집에 무서 운 놈 있지 않느냐고 설득했으나 개는 어차피 저를 해치지 는 않으니까 괜찮다고 역설득까지 시도했다. 물론 냉정해 지자고 수도 없이 되뇐 이승도는 퇴근할 때 영웅이를 다 시 원숭이 사육장에 데려다 두었다.

   목청이 떠나가라 우는 녀석을 등져야 하는 마음이 쓰라 렸다. 저를 미워해도 좋으니 어서 발리 제 무리와 친해졌 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진료실로 돌아오는 도중 사육사실에 들러 태산이 의 이유식을 받아왔다. 분유와 이유식을 번갈아 주던 것 을 며칠 전부터 완전히 이유식으로 바꿨고,이가 더 튼튼 해지면 덩어리를 조금 크게 잘라 씹어 먹을 수 있도록 훈 련을 시킬 예정이었다.

   이유식을 다 먹이고 소화가 잘되었는지 꼼꼼하게 확인 했다. 녀석은 폭신한 담요에 몸을 말고 누워 그새 꾸벅꾸 벅 졸기 시작했다. 가운을 벗고 옷에 탈취제를 부린 뒤 진 료실을 나섰다.

   주차장엔 태국영의 차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오늘 새 삼스레 그와의 키스에 대해 고찰한 순간이 몇 번 있었던 터라 평소보다 조금 껄끄러웠다. 이승도는 동요한 내심을 숨기고 평온함을 가장해 보조석에 탔다.

   태국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 왔다. 이승도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잽싸게 막아내며 긴장한 목소 리를 흘렸다.

   “뭐 하는 거야?”

   태국영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휘었다.

   ‘‘왜이래,아마추어처럼. 체온 안 재?”

   “내가 키스라도 할 줄 알았나 보?? 우리 승도 음탕하네.” 이승도는 조금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체온계를 끼내 그 의 귀에 꽂았다. 물론 체온은 정상이었다. 태국영은 꽤나 엉큼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확 한 대 때려버릴까 하 다가 저 혼자 피워 올린 괜한 오해에 잘못이 있음을 인정 하며 그냥 넘어갔다.

   “출발.”

   체온을 잰 뒤 이승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태국영이

휘파람을 불듯이 대답했다. “명령 받잡은 대로.”

   차는 침묵을 실은 채 달렸다. 태국영은 중간중간 이승 도를 힐긋거리긴 했으나 웬일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 다. 이승도는 굉장히 불편한 마음으로 내내 자는 척을 했 다. 태국영이 말문을 연 것은 차고 앞에 다다라서였다.

   “우리 승도,자는 척 그만하고 문 열어야지.”

   이승도는 냉큼 일어나 안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그러나 말썽 많은 센서는 또 고장이 났고,되는 일이 없다 며 투덜거린 이승도는 차에서 내려 또 덮개를 뜯어 센서 를 조작해야 했다.

   “새집 큰걸로 하나 지어줄까?”

   차고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태국영이 아무렇지 않게 물 었다.

   “됐어. 이것보다 더 큰 집 가져서 뭐에 쓰려고.”

   “뭐에 쓰긴. 우리 승도 일하는 동물원만큼 큰 부지 사 서 집도 짓고,꽃나무도 심고,산책길도 만들고,너 좋아 하는 애새끼들 위한 우리도 따로 만들고,네가 애지중지하 는 어린 첩 맘껏 뛰어놀라고 풀어놓고 그러는 거지.”

   딴 건 몰라도 마지막 말은 조금 솔깃했다. 흔들리는 마 음에 거절을 보류한 이승도는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며 고 심에 접어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태산이를 산책시키며 꽃 바람을 맞을 때마다 늘 그런 아쉬움이 뇌리를 멤돌던 참이

   삭막하고 좁은 마당만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며 저만 기 다리고 있을 우리 은태도 이렇게 풍경 좋은 곳에 데려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꽃길도 걷고,풀밭에서 뒹굴거리며 애교를 부리 면 배도 쓰다듬어 주고,달리기 시합도 하고,이것도 하 고,저것도 하고……

   “그런데 은태 때문에 집 지을 거면 여 가에서 받아내야 지. 네가 그걸 왜 지어줘.”

   “우리 승도가 조강지부 마음을 모르네. 네 첩 가문에 손 벌리게 놔둘 만큼 내가 능력이 없어?”

   “마음도 넓다,태국영. 첩 잘 키우라고 대궐 같은 집 지 어주겠다는 조강지부라니.”

   이승도는 무심하게 받아치고 차에서 내렸다. 태국영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은태야.”

   마당에 들어선 이승도가 쪼그리고 앉아 녀석을 불렀다. 그러나 녀석은 반응 없이 네 발로 꼿꼿이 선 채 먼 하늘만 보고 있었다.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마중 나와 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마치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모습이 깊은 사념에 잠겨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승도는 걱정이 되 어 한달음에 녀석에게 다가갔다. 은태야,하고 부르며 녀 석의 머리를 붙잡아 억지로 눈을 맞추니 그제야 그 영리 한 눈에 반짝 초점이 돌아왔다.

   [선생님.]

   “그래. 선생님 왔어. 왜 그러고 있어? 오늘 많이 아팠 어?”

   이승도는 부산스레 손을 움직이며 녀석의 몸 곳곳을 어 루만졌다. 그러나 평소보다 딱히 큰 이상이 보이는 부위 는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 내가오늘이상한 걸 봤는데…….]

   “이상한 거? 뭐?”

   여은태는 기이한 눈빛으로 잠시 가만히 있다 고개를 디 밀었다. 축축한 코끝이 이승도의 목을 한 번 길게 덧그리 고 떨어져나갔다.

   [선생님을 많이 닮고 태국영은 조금 닮은 요정이 왔다 갔어.]

   이승도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 뒤에서 막 담배 한 대를 배물던 태국영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불을 붙이려다 말고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제 집에서 이승도의 집 주소를 아는 것은 유모분이었

다. 유모는 원래 태이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다가 이승 도와 어떻게든 가까이 엮어주지 못해 안달을 했다. 녀석 이 조금만 애교를 부려도 술술 대답해 주고도 남는 이였 다.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이제껏 저 혼자 끙끙대며 엄마를 볼 수 있는 실마리를 몰래 찾아다니던 녀석이 한심하긴 했 으나,태국영은 그것마저 이해 못할 만큼 각박한 남자는 아니었다. 태이경은 제 엄마가 왜 저를 외면하는지 그 이 유를 납득하고 있었고,미움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제 간절 함을 곧잘 참아내던 녀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 용기를 내 명함이나 훔쳐 외 우더니만 오늘 집까지 쳐들어올 정도로 결의를 다진 모양 이었다. 강하게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사리판별은 어느 정 도 갖춘 듯했다.

   그래도 그렇게 여려서야 가주는 무리지.

   태국영은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호스를 찾아 물을 틀 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마당을 쓸어내기 시작한 순간,여 은태가 막 ‘선생님 아기 말이야.’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태 국영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들을 내버려뒀다.

   [선생님 아들이라는 애가 오늘 담을 넘어 왔었어.]

   멈칫한 이승도의 눈이 전에 없이 커다래졌다. 가볍고

달콤하게 내뱉어지던 숨이 딱 멎었다. 그 반응만 보고도 여은태는 아이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나마 있던 활기마저 증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은태 는 소중한 것을 두 번 벳긴 마냥 바닥에 궁둥이를 털썩 내 렸다. 꺼질 듯 한숨을 폭 내쉬며 앞발로 바닥을 허망하게 내리쳤다.

   [진짜였구나…… 선생님은 정말 아기집이 있었어. 그것 도 태국영의 아기를 낳다니…….]

   여은태는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신세를 한탄했다. 이승 도는 혼몽하게 넋 나간 정신을 뒤늦게 추슬렀다.

   “그래서 이경이는? 그 애는 어디에 있어?”

   [아까 갔어.]

   “…그냥 갔단 말이야?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여은태는 마지막으로 후,크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벌 떡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이승도에게 걱정을 끼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살림도 차리고 아기까지 있다는 데 어린 제가 뭘 더 어쩌겠는가. 억지로라도 활기를 되찾 아야 했다.

   [응. 근데 선생님. 그 아가 좀 울 것같은 얼굴이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잘 모르겠어. 나더러 여기 왜 있냐고 자꾸 물어봐서 그

냥 대답해 준 것분인데. 아가가 갑자기 그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거야. 놀라고 당황한 내가 할아줄까 해 서 개 주위를 계속 멤돌고 있었는데,결국 그 눈물 떨어지 기도 전에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졌어.]

   “……뭐라고 대답했는데?”

   [내가 많이 아파서 나 어른 될 때까지 선생님이 키워주 기로 했다고 했어. …이거 혹시 우리 말고는 알면 안 되 는이야기야?]

   이승도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여은태는 제 목덜미에 가볍게 얹힌 그의 손이 차갑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코끝에 흐트러지는 호흡도 많이 불안정했다.

   여은태는 점점 당혹감이 몰려와 저도 모르게 태국영을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물러서서 마당을 씻어내던 그는 그 제야 고개를 돌렸다.

   一선생님이 이상해!

   눈빛으로 급박하게 도움을 요청하자 태국영은 웃는 듯 찌푸린 요상한 표정으로 물을 잠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승도가 먼저 벌떡 일어나 태국영에게 달려갔다.

   “너 발리 집에 가.”

   이승도의 낯은 유리처럼 굳어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태국영은 젖은 마당에 담배를 던져 끄고 짧게 한

숨을 삼켰다. 이승도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그의 등을 무작정 떠밀었다.

   “뭐 해! 얼른 집에 가서 이경이 달래고 안아주란 말이 야.,,

   몇 걸음 움직이던 태국영이 우뚝 제자리에 섰다. 이승 도는 태국영의 등을 주먹으로 퍽픽 후려치며 발리 가지 않 고 뭐하냐고 닦달을 했다. 태국영은 간지럽지도 않은 주먹 을 가만 방치하다 뒤를 돌았다. 막 허공에 든 손이 그대로 멈췄고,태국영은 그 손목을 가만히 쥐며 목소리를 낮췄 다.

   “그래. 우리 승도가 해달라면 해 줘야지. 그런데 말이 야.,,

   태국영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로 달래주라는 거지?”

   그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분이고,결단코 비난의 의도 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 승도는 암흑 같은 상처들이 가슴을 저며 오는 걸 느꼈다.

   말문이 막혀 명하니 입만 벌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 들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국영은 깊고 정적인 눈동자로 가만히 굽어보다 창백 하게 얼어붙은 이승도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이승도

는 입술을 깨물었고,태국영은 잇새에 짓눌린 그 가엾은 입술을 엄지로 배내주었다.

   격앙된 숨결이 손끝에 스쳤다. 태국영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승도야. 이경이는 나보다도 널 더 잘 이해하는 녀석이야. 그래도 어린 마음에 섭섭함 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 시 네 마음을 이해해 주겠지. 이제껏 쭉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니刀卜”

   태국영은 말을 멈췄다. 그의 시원한 눈매가 잔뜩 가늘 어졌다. 손가락 틈에 흐르는 이승도의 숨결은 조금 더 거 세지고 불규칙해져 있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뜨끈한 물 방울이 살갗을 빠르게 적셔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태국영의 냉랭한 표정도 무너져 내렸다. 그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나머지 손마저 이승도의 반대 쪽 뺨도 감쌌다. 습한 열기가 손가락 틈새에 한가득 넘실 거렸다.

   태국영은 두 손 안에 가둔 이승도의 뺨을 가만히 어루 만졌다. 꽉 쥐면 부서질 여린 세공품을 대하듯 신중한 손 길이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습기를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그는 백 마디 말을 대신해 이승도의 이마에 지그시 제 입

술을 눌렀다.

   오고 가는 호흡 없이 긴 입맞춤이었다. 태국영은 경련 하듯 심하게 떨리는 이승도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한 번 품 에 안았고,관자놀이쯤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대로 돌 아섰다.

   그는 다시 차고로 발을 옮기던 도중,어쩔 줄 몰라 안절 부절 앞발을 들었다 놨다 홀로 난리 법석 떠는 여은태의 엉덩이를 가볍게 발로 찼다. 뭐야,하고 날카롭게 돌아본 녀석에게 슬쩍 턱짓해 보였다.

   一뭐 해. 가서 위로해 주지 않고.

   이럴 때 밥값이나 해라,마치 그런 눈빛이었다. 여은태 는 불만스럽게 잠시 씩씩대다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정말 로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다급해진 여은태는 나는 것처럼 달려가 이승도의 앞에 섰다.

   땅을 구르고 튀어 올라 이승도의 어깨에 앞발을 조심 히 걸친 녀석은,침울하게 꼬리를 흔들며 이승도의 얼굴 을 신중하게 할아냈다. 그 짧은 사이에 그 고운 얼굴을 흠 뻑 적신 눈물이 혓바닥에 짜게 맺혀 왔다. 그 어떤 말도 건 넬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울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이승도는 소리를 죽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통한의 설움 이 가슴을 거뭇하게 뒤덮고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가 없었다.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고,끔찍한 기억들이 떠오를까 두 려웠다. 아이가 저를 사랑하게 될 것이 두려웠으며 그 아 이가 저를 원망하게 될까 그것조차 두려웠다.

   뒤틀린 시간들이 너무 길고 단단해,그 안에 갇힌 모두 가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 을 할 수 없게 만든 것. 그 주범은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이 었다.

   숨죽인 오열이 봄바람에 눅눅하게 젖어들었다.

   “이경이는?”

   태국영은 웬일로 저를 배웅 나온 유모를 의아한 눈으 로 내려다보았다. 보통 그녀는 태이경의 곁에 내내 붙어 있느라 그가 나가건 말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 다. 유모는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탄하듯 말을 뱉 어냈다.

   “도련님은 혼자 계시고 싶다 하십니다. 벌써 다 크신 걸 까요. 이 유모 매우 섭섭합니다.”

   태국영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유모는 여전히

기력 없는 얼굴로 터덜터덜 뒤를 따랐다. 왜 따라오?,하며 돌아보자 그녀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가주님 뒤를 따르는 것 이 이상합니까? 도련님도 그러시더니만 가주님도 이제 제 가 거추장스러우십니까? 부자가 똑같이 저를 외면하시니 제가 이 집을 떠날 때가 되었나 보군요. 저 짐 싸서 나갈까 요? 이제라도 새 인생 찾을까요?”

   태국영은 급작스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매 일 물고 발고 예븐 옷 입히고 좋은 것만 골라 먹여 가며 귀 하게 여기던 아이가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다니 섭 섭한 마음이야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그녀는 상식 범주 를 넘어서 꽤 심한 쇼크를 받은 모양이었다.

   유모는 마치 화풀이할 곳을 찾은 마냥 엉뚱한 곳에 섭 섭함을 토로했다. 태국영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내버려둔 채 태이경의 방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 려 봤지만 잠겨 있었다.

   “열어.”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 열면 부순다.”

   그제야 원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곧 문고리 가 돌아갔고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침울함을 숨기지 못

한 아이가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발갛 게 물든 채 퉁퉁 부어 있었다. 태국영은 깜짝 놀라 다가가 려는 유모를 한 손으로 밀어 놓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승도한테 등 떠밀려서 쫓겨 왔거

든?”

   태국영이 무심히 건넨 말에 아이의 말간 눈으로 희미 한 빛이 스쳤다.

   “왜요?”

   “너 안아서 달래 주란다.”

   태이경의 머리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태국영은 부 연 없이 몸을 숙여 작은 몸을 훌쩍 안아 들었다. 단단한 팔 뚝이 엉덩이를 받치자 녀석은 반사적으로 태국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태국영은 침묵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목덜미에서 맞잡은 채 꼬물거리는 작은 손이 느껴 졌다. 녀석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날 달래 주라고 아빠를 보냈어요?”

   “그래.”

   “내가 속상해하는 걸 이해해 줬어요? 못났다고 안 하 구?”

   “우리 승도가 같이 속상해했지.’

   “엄마가 날 걱정했어요?”

   “네가 그렇게 가는 바람에 그 자식이 아주 평평 울었다. 망할,내가 그거 안 울리려고 그간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태이경,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태국영은 녀석이 방금 전까지 찌그러져 있었을 게 분명 한 침대로 걸어가 가볍게 걸터앉았다. 태이경은 웃어야 될 지 울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태국영의 위로를 가장한 핀잔은 계속되었다.

   “기왕 간 거 얼굴이나 보고 올 것이지,꼬리를 말고 도 망치는 건 또 무슨 헛짓거리야. 너 내 아들 맞나.”

   “…하지만 거기 있으면 울 것 같았는걸요. 약하게 보이 면 안 된다고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이거 웃기는 놈이네. 그래서 그게 내 탓이라 이 말이 야?”

   권태로이 풀어져 있던 태국영의 눈썹이 마뜩찮게 휘었 다. 아이는 태국영의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 을 또 꼼지락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그런 얼굴로 엄마를 볼 수도 없잖 아요.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하니까 예쁘게 웃어 주고 싶 었는데. 겨우 용기 내서 갔는데 갑자기 엄마가 다른 애를 키우고 있다고 하니까……

   보들보들한 뺨이 살짝 부어올랐다. 태국영은 가늘어진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제 포기하려고?”

   “…그건 아니구. 충전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충전?”

   “용기주머니가 텅 비었거든요. 열심히 충전해서 가득 채워지면 그때 다시 도전할래요.”

   태이경은 어린애답지 않게 한숨을 폭 쉬고는 지친 머리 를 가슴에 살짝 기대왔다. 태국영은 쓰게 혀를 차며 고개 를 들었다. 유모가 곁에 귀신처럼 기척 없이 선 채 감격에 젖어 광휘 도는 눈을 하고 있었다. 태국영은 그 기괴함에 놀라지 않고 점잖게 눈짓해 보였다.

   一이거 좀 어떻게 해 봐.

   그녀는 놀랍게도 정확히 알아듣고 냉랭히 투덜거렸다.

   “아니,승도 군에게 애 달래기 사명을 받아 오신 분이 이 쓸모없는 유모에게 손을 벌리시는 겁니까? 언제는 왜 따라오나고 구박하시 더 니요?”

   태국영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피곤해졌다.

   여은태는 내리 뭐 마려운 것처럼 이승도의 눈치를 살폈 다. 언제 울음이 그칠까,언제 말을 걸어도 될까,언제 따 뜻한 제 몸으로 감싸 안아 주면 될까,그것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간 저를 의기소침하게 짓누르 던 모든 것들을 잊을 만큼 조마조마한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 후에야 이승도는 발갛게 열꽃 핀 뺨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고,울음기가 약간 남은 음성으로 미안하다고 사 과했다. ‘아니야,나 완전 괜찮아.’하며 극렬히 고개를 저 어 보이자 이승도는 그제야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평소처럼 목욕을 시켜주고 밥을 챙겨 준 뒤 이승도는 내내 뭐 마려운 듯 굴던 저를 데리고 침대 위에 누웠다. 온 몸의 수분을 모조리 눈물로 뽑아낸 듯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입맛이 없어 밥을 반공기도 먹지 못한 그가 걱정 이 됐다. 여은태는 앞발로 냉장고도 열고 과일 칸도 열어 사과 한 알을 물고 돌아왔다.

   이승도는 흐리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고,곧장 받아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마치 보여주려는 듯 과장된 몸짓이 었다.

   “우리 은태 착하네. 선생님 걱정해 주는 거지?”

   [응. 선생님 우는 거 처음 봤어. 걱정되고 나도 슬프고

   “미안. 이제 괜찮으니까 이리 와 누워.”

   이승도는 반쯤 먹은 사과를 사이드테이블에 놓고 다시 눕더니 제 옆을 툭툭 쳤다. 수분이라도 더 채웠음 싶었으 나 속에서 안 받는 듯해 더 권유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승도는 제게 밥을 먹일 때에도 늘 억지로 먹으면 탈이 난 다며 걱정해 줬다. 오늘은 제가 그를 세심히 보살펴 줘야 하는 날이었다.

   여은태는 컨디션이 나빠지면 체온부터 떨어지는 이승 도를 제 큰 덩치로 조심조심 품으며 누웠다. 배로는 그의 등을 크게 덮고 풍성한 꼬리로는 그의 차가운 발을 가볍 게 감쌌다. 얼음같이 차가운 체온이었다. 뜨거운 제 열기 가 얼른 그에게 옮겨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나 뭐하나 물어봐도 돼?]

“으 미드” o'- TH~-

   [혹시…… 내가 실수했어? 선생님 아가를 내가 울린 거 야?]

   여은태는 한참을 망설이다 물었다. 아까부터 내내 속에 서 찜찜하게 걸리던 문제였다. 제가 대답하자마자 울상을 짓던 작은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걱정 섞인 의심은 더 깊 어져만 갔다.

   “아냐. 아가를 울린건 나야.”

   [하지만…….]

   “우리 은태가 내내 그게 맘에 걸렸구나. 그런 거 아니니 까 걱정 안 해도 도?. 선생님이 아가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 아서 그래.”

   이승도는 제 옆구리를 파고든 여은태의 앞발을 가만히 매만지며 명에 진 과거를 떠올렸다.

   「저리 치워!」

   무심결에 날카롭게 소리쳤었다. 그 순간 아장아장 걷 는 게 전부였던 아기의 눈에서 삽시간에 빛이 끼지던 것 을 소름 끼칠 만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 했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허나 변명에 앞서 터진 것은 아기의 울음소 리였다. 섧게 우는 아기를 유모는 재발리 안아 달랬고,어 색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말뚝처럼 박혀 있었 다. 메마른 눈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영 원히 묻어두고 싶었던 상처를 헤집는 매개물이었다. 제가

그 사랑스러운 아기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 던 것분이었다.

   그 뒤로는 도망치기 바빴다. 이승도는 제가 아이를 사 랑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의심했고,죄 없는 아기의 마음을 할퀴었던 제 날카로운 반응이 또 나올까 걱정했고,그 아 이가 저 때문에 또 상처받을까 그 역시 두려웠다.

   “선생님이……겁쟁이라서 그래.”

   이승도의 손은 여전히 빙설처럼 차디찼다. 그 냉기는 여은태의 마음도 쓸쓸하고 쓰리게 만들었다.

   여은태는 발바닥으로 연신 그의 손을 부대껴 온기를 되 돌리려 애썼다. 그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했지만 무신경하 게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여은태는 속 깊게 궁금 증을 잠재우며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아가 참 예쁘더라. 선생님이랑 많이 닮았어. 눈 도 예쁘고,코도 예쁘고,입술도 예뼜어. 심지어 말하는 것도,뛰어가는 모습도 예뼜어.]

   축 늘어져 있던 이승도가 급작스레 돌아누웠다. 여은태 는 내심 놀랐지만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눈가에 언

뜻 반짝이는 생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승도는 아마도 제 아기를 칭찬하는 말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빤히 올려다보는 얼굴을 삭삭 몇 번 할아주 며 앞발로 그의 등허리를 더 깊이 품었다.

   이승도의 차가운 손이 제 목 언저리를 부드럽게 훑었 다. 마치 더 이야기해 달라는 듯 빤히 바라보는 눈은 정말 이지 아이와 똑 닮아 있었다.

   [내가 처음엔 바보 같은 오해를 했었어. 태국영의 아들 이라고 해서 선생님 놔두고 따로 살림 차려 낳은 아간 줄 알았거든. 그래서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살기를 붐어냈는 데,아가는 당황하지 않고 갑자기 귀엽게 뛰어가더니 대문 을 열어줬어. 자기 가솔들한테 무슨 일 생기면 자기를 지 켜달라고 당당하게 명령했어. 꽤 뜰뜰하고 당차 보였어, 선생님처럼.]

   이승도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옛날이야기 를 귀담아듣는 착한 아이 같은 태도였다. 언제나 고정되 어 있던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늘 일방적으로 위 로받고 보살핌을 받았으니 이런 순간에 조금씩 갚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예민한 귓속으로 서서히 발라지는 그의 고 동이 선연히 꽂혀 들었다.

   [너한테 선생님 냄새 난다고 했더니,아가가 되게 부듯

하게 대답했어. 선생님이 자기 엄마라고. 활짝 웃는 얼굴 이 꽃처럼 예뼜어.]

   그랬어? 이승도는 마치 그렇게 묻는 듯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또…….]

   여은태는 제가 본 아이의 모든 것들을 그에게 전해주었 다. 그것이 이승도에게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마 저 스스로 손을 내밀어 가져오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훔쳐갈 때마다 이승도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 웃는 눈이 참 그 아가와 많이 닮았다. 태국영을 배다 박 은 아이의 입술마저도 희한하게 예뼜던 아이를 떠올리니 또 가슴이 무거워졌다.

   여은태는 내내 후회하고 있었다. 그 고운 눈에 가득 차 올랐던 눈물을 눈치 보지 말고 할아줬어야 했다고.

   아무리 당황했어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랑 스럽게 가슴을 내밀던 아이가 홀로 주먹 쥔 두 손으로 눈 가를 훔쳐냈을 걸 떠올리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선생님 아가는 어딜 가서도 사랑받을 거야. 되게 눈 높 은 내가 장담할게.]

   진심으로 내뱉은 말에 이승도는 전에 본 적 없을 만큼

화사하게 웃었다.

   태 가 저택의 하루는 유모의 기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편의상 다들 유모,혹은 유모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녀 의 역할은 집안의 모든 안살림을 책임지는 총집사에 가까 웠다.

   전대 가주 땐 그저 상주 메이드에 불과했던 그녀가 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된 것은 태국영이 4년 전 성년식을 치 른 직후부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아비규환에 비견 할 만한 피바람이 태 가를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혈겁이 있던 그날 이 커다란 저택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녀와 이승도,그리고 태이경,이 셋분이었다. 그녀는 뜬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봤다. 분수처럼 솟구치던 피보 라,갈가리 찢긴 채 굴러다니던 살점과 내장들,온 천지에 뻗어 나갈 것만 같았던 짐승의 한 맺힌 포효소리,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기억했다.

   적막 속에서 바닥에 떨어지던 피 섞인 눈물 한 방울까

   어느 날 문득 제가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겨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가주님. 그날 저를 왜 살려주셨어요?」

   그때 태국영은 서재에서 약대생들이 공부하는 전공서 적을 읽고 있었다. 저택의 재건축이 끝나고 태국영도 안정 을 되찾아 천천히 가업승계를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가장 먼저 이경이를 품에 안은 승도가,그 다음에 유모 를 찾아 품에 안겨들었으니까.」

   궁금증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모는 그 뒤 기회가 닿았을 때 이승도에게 물었다.

   「승도 군. 우리 가주님 미치셨던 날 왜 나를 찾아 안겼 어요?」

   그랬더니 이승도는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이 집에서 유모만이 나를 유일하게 안아줬으니까요.」

   궁금증은 그렇게 풀렸으나 그녀는 내심 경악했다. 이 넓은 집에서,그 많았던 이들 중에서 이승도를 가엾게 여 긴 이가 저 혼자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 이었다.

   비극이 태 가에 휘몰아쳤던 당시 그녀는 메이드로 일하 게 된 지 꼭 일 년 째였는데,텃세 부리는 기존의 상주 고

용인들과 말 섞는 것을 싫어해 내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 다. 그래서 모두가 이승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했 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유모는 가슴이 미어졌다. 이승도의 부서진 인생과 태국 영의 방향 잃은 연심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녀 는 제 보살핌이 필요 없는 그 둘 대신,그들 사이에서 난 예븐 아기에게 제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언젠가 이 승도가 상처를 털어내고 용기를 내 두 팔을 벌렸을 때,아 기가 원망 없이 천진하게 그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랐다. 우는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로 어리광을 피우는 아기로 자 랄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아이참,유모님.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꼭두새벽 부터 뭐 하시는 거예요.”

   “시끄러워,이것아.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그야 알지요. 음력 사월 그믐,종가모임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우리 가주님하고 도련님 무 슨 런웨이에 올리실 생각이세요? 제 눈에는 다 거기서 거 긴데 뭘 그리 고르고 또 고르세요.”

투덜대는 고용인은 피로한 낯짝이었고 그것은 뒤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1 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유모가 벨을 울리는 바람에 모두 무거운 눈끼 풀을 드느라 애를 먹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의상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걸 보면서 미리 후보 소품들을 골라두 고 있는 거 아니니!”

   유모는 한 손에 든 카탈로그를 세차게 흔들어 보였다. 디자이너가 이번에 맞춤 제작할 옷의 샘플 사진들을 모델 에게 입혀 사진으로 찍고 엮어 보내준 카탈로그였다. 모두 가 한숨을 삼켰으나 유모는 열의에 넘쳐 하던 일에만 집중 했다.

   넓다 못해 광활할 지경인 태국영의 슈트 드레스 룸은 이미 발칵 뒤집혀 있었다. 답답한 차림을 싫어하고 간섭당 하는 건 더 싫어하는 가주 덕분에 유모는 그간 늘 손가락 만 발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멋진 옷이 이렇게나 많은 데,입혀 놓으면 눈이 튀어나오게 매력적일 것이 분명한 데,입혀보질 못하니 그저 한탄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태국영을 억지로 세워 놓고 세팅을 할 수 있는 연중 유일한 날이었다. 태이경에 게 온갖 예븐 옷을 입혀주는 걸로 만족해야 했던 그녀의 전투력이 끓어오르는 건 당연했다.

   태이경은 몹시도 귀엽고 예뻐서 그 자체로 행복하고 즐 거운 일이었지만,유모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오금 저 리게 매혹적인 사내를 보면 더 근사하게 꾸며주고 싶은 맘 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모는 카탈로그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옷에 어울릴 법한 소품 후보들을 열성적으로 골라냈다. 드레스 룸에서 는 커프스,넥타이,넥타이 핀,벨트,시계를 골랐고,곧바 로 슈즈 룸으로 옮겨 구두도 잔뜩 끼냈다. 그리고 태이경 전용 드레스 룸으로 가는 도중,유모는 잠에서 막 깬 태국 영을 발견했다. 태국영은 오늘도 달랑 운동복 바지에 맨 상체의 자유로운 차림으로 복도를 활보하며 얼음물을 마 시고 있었다.

   “가주님!”

   유모가 눈을 반짝 빛내며 그에게 달려갔다. 태국영은 ‘응?’하며 무심코 돌아봤다가 조금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입술에 잔을 붙인 그대로 유모를 포함한 고용인들의 양손에 바리바리 들린 구두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태국 영의 얼굴 위로 묘한 깨달음이 스치고 갔다.

   “잘 일어나셨습니다. 이 유모가 오늘 가주님 소품 후보 들을 벌써 다 골라 놨지 뭐예요. 어서 가서 같이 봐 주세

   “아니. 유모가 알아서 해.”

   태국영은 딱 잘라 거절했다. 유모는 천연덕스레 웃었 다.

   “어머. 저는 아무리 봐도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뻐서 더 줄일 수가 없는 상태예요. 지금 빠! 두지 않으시면 이따 가 한 번씩 다 해 보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좋지마는.”

   “……가.,,

   태국영은 탐탁잖음을 숨기지 않으며 유모의 뒤를 따랐 다. 세상에서 음력 4월 그믐을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표 정이었다. 유모는 제 손에 들린 구두들과 태국영의 물 잔 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뒤 희희낙락 태국영의 팔을 붙잡 아 끌었다.

   “저는 음흉한 중년 여자라 우리 가주님 이렇게 멋진 상 체 보는 것도 좋지만,매끈한 슈트를 입힐 때 무엇보다 희 열을 느낀답니다. 이렇게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왜 그 좋 은 걸 안 입으세요.”

   “좋긴 뭐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불편하다고 계속 안 입어 버릇하면 못 씁니다. 나중에 우리 가주님 종주 되시면 평소에도 이렇게 말끔한 옷 많 이 입으셔야 하잖아요. 정식으로 가업승계 끝나도 마찬가

지고요. 미리미리 익숙해지셔야죠.”

   “내가 종주가 되면 종가 정기 모임부터 없애버릴 거야.

   태국영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장난기는 조금도 섞지 않 은 진심이었다. 종주 자리 따위는 줘도 걷어차고 싶은 심 정이었는데,종가모임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 었다.

   “안 돼요. 전 크리스마스보다 오늘을 더 기다린다고요!

   유모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이 승도는 매번 알면서 속아 넘어가 주곤 했지만 물론 태국영 은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경이 있잖아. 개 잘 키워서 인형 놀이 실컷 해. 난 사 양할 테니.”

   “도련님 크려면 한참 멀었어요. 우리 도련님 몇 살인지 알기나 하세요?”

   “그 정도는 알아. 곧 다섯 살 되잖아.”

   “세상에나. 감격스러워서 무릎 꿇을 뻔했네요.”

   유모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말끔해진 눈을 가볍게 흘 겼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핀잔을 모를 리가 없었으나 태 국영은 피곤하다는 듯 눈살만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다

막 드레스 룸에 들어갔을 땐 짜증 섞인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도둑이 들었나 싶겠군.”

   유모는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후후 웃었다.

   “어느 간 큰 도둑이 이 집을 노린답니까. 그러지 말고 어서 와서 보세요. 제가 옷마다 어울리는 것으로一”

   “그거 이리 내.”

   태국영은 유모의 말을 매정히 절단해 내며 손을 뻗었 다. 유모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의 시선이 닿은 카탈로 그를 건넸다.

   카탈로그에 실린 샘플 의상은 총 스물다섯 벌이었다. 색은 블랙,그레이,챠콜,화이트 등 다양했으며 그 안에 서 또 광택이 있느냐 무늬가 있느냐 버튼이 몇 개나 따위 로 나뉘어 있었다.

   태국영은 비딱하게 선 채 건성으로 책자를 팔락팔락 넘 겨 갔고,한 번 짧게 둘러본 끝에 어느 한 면을 펼쳐 유모 에게 건넸다. 그는 은근 강압적인 어투로 무심하게 말했 다.

   “이걸로 해.”

   그가 고른 것은 광택도 무늬도 없는 투 버튼의 심플한 블랙슈트였다. 소리 없는 경악이 유모를 중심으로 파도처 럼 번져갔다. 새벽부터 일어나 들뜬 마음으로 날아갈 듯했

던 유모도,그 흐름에 휘말려 덩달아 고생했던 다른 고용 인들도 일제히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삼십 분 뒤에 아침 식사 할 테니까 준비해 두고.”

   태국영은 매정하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 가 한마디라도 더 건넬세라 연기처럼 드레스 룸을 빠져나 갔다.

   “유모님…… 어떡해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게 웬 난리나 투덜거리던 어린 고용 인도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실망감이 대단했다. 울상을 지은 그녀의 말에 석상이 되었던 유모가 화들짝 공황에서 깨어났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오늘이 어떤 날인데.”

   유모는 고속으로 머리를 굴렸고 이내 손가락을 딱 튕겼 다. 그래,태국영의 얼음 같은 속내를 녹일 수 있는 건 하 나밖에 없었다. 유모는 황급히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끼 내 익히 알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청 량한 음성이 수화부에서 건너왔다.

   《네,유모.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무슨 일 있나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다감한 목소리였다. 유모는 갑자

기 우는 시늉을 하며 대뜸 말했다. “승도군. 내가 너무 속상해.”

   〈?"예?〉〉

   유모는 수준급 눈물연기를 선보이며 자초지종을 설명 했다. 고요히 경청하던 이승도는 어느 순간 실소처럼 짧 게 웃었는데,그 웃음소리에서 부정적인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돼요?〉〉

   이승도는 결국 이번에도 도리 없다는 듯 속아주려는 모 양이었다. 유모는 급격히 화색이 돈 얼굴로 그에게 지령 을 내렸다.

   “간단해요! 오늘 유모 말 안 들으면 당분간 안 만나줄 거라고 문자 하나만 보내주세요!”

   이승도는 ‘안 먹혀도 전 몰라요.’하며 전화를 끊었고 유 모의 콧대는 다시금 하늘로 치솟았다. 실패할 경우의 수 는 애초에 머릿속에 들어있질 않았다. 그녀는 골라둔 소품 들을 괜히 또 반듯하게 정렬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태국영이 반쯤 열려있던 방문을 사납게 걷어차며 등장 했다. 운동복 바지에 양손을 찔러 넣은 불량한 자세였다. 잔뜩 짜증이 올라 입술을 비틀고 있는 태국영이 뭐라 한마 디 하려던 때였다. 유모가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선수를 쳤다.

   “그거 아세요,가주님?”

   말할 타이밍을 뺏긴 태국영은 한쪽 눈썹만 쓱 올렸다. 유모는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말을 이었다.

   “제가 작년에 가주님 옷 여러 벌 입히면서 사진을 찍어 뒀잖아요.”

   “그게 뭐.”

   “그거 승도 군한테 하나도 빠짐없이 전송해줬거든요.” 태국영은 이게 무슨 맥락 없는 소린가 싶어 흐리게 미 간을 접었다. 유모가 빙긋 웃으며 태국영의 팔을 잡아 안 으로 이끌었다.

   “그때 답장이 뭐라고 왔을까요?”

   태국영은 선선히 끌려갔다. 대꾸도 없고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가 적잖이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모는 방금 전에 찾아둔 문자메 시지 하나를 태국영의 코앞에 쭉 내밀었다. 관심 없다는 듯 딴청 피우던 태국영이 슥 눈만 움직여 액정에 뜬 텍스 트를 읽어 내렸다.

   『국영이는 역시 슈트도 잘 어울리네요. 그 더러운 성질 머리가 잠깐 안 보일 정도라 깜짝 놀랐어요. 내년에도 보 내주세요,유모. 고마워요.』

   태국영은 나직이 욕설을 씹어 뱉으면서도 군소리 없이

유모의 인형이 되어주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이 대지에 한가득 깃들면 온 대 지방의 초식동물들은 줄줄이 새끼를 낳았다. 올해도 순 산의 소식들이 속속 동물원에 퍼져 나갔다. 무플론이 스타 트를 끊은 뒤 많은 아기 동물들이 건강한 울음을 터뜨렸 고,며칠 전에는 기린도 건강한 새끼를 낳았다. 아기 동물 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얼굴에 웃 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승도는 면역 약한 새끼들을 주의 깊게 살피느라 굉장 히 바빠졌다. 피로가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었다. 점점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품에 폴짝폴짝 안겨오는 아가들이 점 점 늘어가는 걸 볼 때마다 부듯하고 행복했다.

   이승도는 오늘도 장장 두 시간을 꼬박 아기들을 살피 고 진료실로 돌아왔다. 펜스를 열어주고 의자에 앉아 부재 중 램프가 깜박이는 휴대폰을 들었다. 태산이가 기다렸다 는 듯 폴짝폴짝 달려왔다. 녀석은 이제 제법 익숙하게 이 승도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스킬을 터득했다.

   “태산아,선생님 아파. 내려와.”

   이승도는 문자를 확인하다 말고 웃음 섞어 말했다. 태

산이는 머리 위에 몸을 푹 늘어뜨리며 개구쟁이처럼 힝힝 웃었다.

   [선생님. 기다렸어.]

   “응. 우리 태산이 이제 아주 포동포동 커서 무거워 죽겠 네.,,

   [놀자아,선생님. 놀자아.]

   녀석이 밟은 어깨는 금방 결려왔고 버둥거리는 앞발에 긁힌 두피는 따끔따끔했다. 따끈한 녀석의 배에 뒷머리가 폭 눌렸다. 호랑이 모자가 따로 없었다. 이제 날고기도 잘 먹고 부쩍 컸으니 조만간 정말 거처를 완전히 옮겨야 할 듯했다.

   “조금 있다가 놀아줄게. 잠깐만 어른처럼 참고 있어.”

   그래도 인공포육실로 옮기기까지는 시간을 쪼개서라 도 녀석과 많이 놀아줄 셈이었다. 실내사육이라 근력 운동 도 많이 해 줘야 하니 겸사겸사 산책도 더 시키고 뛰는 것 도 더 시킬 생각이었다.

   태산이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다 컸어! 어른이야!]

   “옳지,옳지. 우리 태산이 어른 다 됐지. 그러니까 조금

만 기다릴 수 있지?”

   종을 망라하고 모든 아기 생물들은 제가 어른인 줄 착 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승도는 머리 위로 손을 뻗어서 다 컸다고 우기는 태산이의 콧잔등을 슥슥 문질러주며 다 른 손으로는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승도 군,이 유모가 완전 대박 아이템을 보내드려요! 코피 날지도 모르니까 휴지 준비하고 메일 확인하기!』

   이승도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늘 생각하는 바였지 만,그 무거운 집안의 살림을 이끄는 수장이라고는 상상 할 수 없는 밝은 에너지였다. 속은 깊으나 겉으로 보여주 는 행동은 항상 가벼운 듯 따뜻했고,무신경한 척 굴면서 도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녀였다.

   그래서 이승도는 그녀가 좋았다. 눈에 보이는 거짓 눈 물을 콕콕 찍어내면서 곤란한 부탁을 할 때에도 차마 거부 할 수 없는 건 그녀의 무구한 호의가 겉으로 선연히 드러 나기 때문이었다.

   이승도는 기하학무늬가 떠다니는 모니터를 깨우고 메 일함에 접속했다. 유모가 보낸 메일의 첨부 파일엔 무려 2 백 장이 넘는 사진들이 있었다. 작년과 같이 큼직하게 확 대해도 깨지는 법 없는 고화질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 태국영은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멀끔하 게 베스트까지 갖춘 슈트 차림을 보니 묘한 감상에 가슴

이 술렁거렸다.

   나 혹시…… 얼굴에 약한 타입인가.

   이승도는 새삼 스스로를 의심했다. 이 얼굴에 익숙해지 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도 가끔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대부분 무의식적으 로 시선을 배앗겨,한참 동안이나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되어버릴 때 그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국영을 상대로 말이다. 저도 참 대 책 없는 인간이었다. 이승도는 괜스레 싱숭생숭 물결치는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유모가 열성적으로 담아낸 태국영의 모습은 성장(盛裝)을 하고 선 모습만 있 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화보 촬영 현장의 스틸 컷처럼 중 간중간에도 셔터를 누른 듯했다.

   이승도는 반나체 차림의 태국영을 빤히 응시했다. 고개 를 옆으로 하고 뒤를 돌아있는 태국영은 곁에 선 누군가에 게 한 팔을 뻗고 있었다. 허리춤이 풀려 골반까지 느슨히 내려온 정장 바지 사이로 브리프 밴드가 훤히 보이는 것 이,막 옷을 갈아입던 도중인 듯했다.

   이승도는 방금 전의 자학도 깡그리 잊고서 태국영의 등 을 명하니 응시했다. 넓고 곧은 어깨 아래 촘촘히 밀집한 근육들,그 근육들이 이루는 남성적인 곡선,움푹 파인 척

추골과 단단하게 조여 있는 허리와 골반까지,그의 등은 찬사도 부족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의 신체에서 가 장 동물적인 부위였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이승도 자신은 태국영 의 동물적인 부분들을 몹시도 끼려왔었다. 그런데 어쪄다 가 그의 등에 머문 시선을 쉬이 떼기가 힘들게 되었을까.

   이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의 뒷모습에 가슴 이 묵직하니 눌리는 기분이 들었는지,그 자신도 알지 못 했다.

   기분이 이상하네.

   이승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고,그 뒤로 도 느리게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느 시점에 서 완전히 손을 멈추고 말았다.

   동요로 일렁거리는 눈이 모니터를 길게 응시했다. 그 안에는 어린이용 귀여운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있는 태이 경이 있었다.

   「유모,나 예뻐?」

   사진 속 태이경은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정장 이 어색한지 발끝을 살짝 든 채 아래를 힐긋 보고 있었는 데 마냥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갸우뚱한 고개도,입가에 살짝 걸린 미소도 아이의 천진함과 사랑스러움을 고스란

히 갖고 있었다.

   그래. 곧다섯 살이되니까…….

   그 시기쯤 가주는 아이를 종가모임에 대동해 첫선을 보 인다고 들었다. 아마도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었다.

   그 뒤로 서른 장 정도는 모두 태이경의 사진들이었다. 아이 역시 여러 옷을 바꿔 입으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깜찍한 보타이를 두 손으로 붙들고 방싯방싯 웃고 있는 녀 석을 보았을 때,이승도의 눈가는 부드럽게 풀려버리고 말 았다.

   “이경아.”

   이승도는 소리 내어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모니 터 속 박제되어 있는 아이는 여전히 사랑스런 얼굴로 웃 고 있었다.

   조금만 더 용기가 생기면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지,그렇게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벌써 몇 년째였다. 그 리움을 의젓하게 누른 채 그늘 없이 웃고 있는 얼굴이 기 특하면서도,꼭 그만큼 가슴 한쪽이 몹시도 시큰거려 왔

   “세상에,우리 도련님! 아기 천사 같아요!”

   유모는 극렬한 고민 끝에 마침내 코디를 완성한 태이경 을 보며 매우 부듯해했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고른 옷은 흰색 긴팔 셔츠에 검은색 니트베스트,줄무늬가 들어간 반 바지였다.

   “이제 우리 도련님 이만큼 컸으니 앞으로는 이런 정장 도 많이 입혀야겠어요. 너무 잘 어울린다!”

   오늘 당장 주문 제작을 의뢰해야겠다고 수선을 피우는 유모의 얼굴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태이경은 체크무늬 보 타이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면서도 방긋 웃었다.

   “응. 유모가 입혀주는 거 입을게.”

   “세상에. 착하기도 하시지.”

   유모는 깊이 감격한 얼굴로 태이경을 덥석 품에 안고 는 살굿빛 뺨에 입맞춤을 내렸다.

   “우리 도련님 없었으면 이 유모 어떻게 살았을까요? 무 심하고 냉랭한 가주님한테서 어찌 이리 축복 같은 아기가 나왔을까.”

   “나는 엄마 닮았으니까. 전에 엄마 집 담 넘어갔을 때 거기 있던 커다란 짐승도 그랬어.”

   “맞아요. 우리 도련님은 승도 군을 많이 닮았지요. 그래 서 이 유모는 참 행복해요. 가주님처럼 차가운 아기였으

면 전 매일 시무룩해져 있었을 거예요.”

   “나도 유모가 있어서 기뻐. 유모가 없었으면 난 매일 혼 자 심심했을 거야. 아빠는 늘 바쁘고 엄마는 보기 힘드니 까.,,

   태이경은 반타이즈 신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부모 품이 그리워 우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유모 는 새삼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아직 다섯 살도 채 안 된 아기가 의젓하게 받아들인 그 상실의 무게가 가슴 아팠 다.

   조금만 참으세요,도련님. 집요한 우리 가주님께서 승 도 군의 마음을 반드시 녹일 테니까요. 그럼 우리 도련님, 아빠랑 엄마랑 양손에 붙잡고 예쁘게 웃을 수 있을 거예 요.

   유모가 잠시 말을 잃고 통통한 뺨을 살살 매만져주고 있을 때였다.

   “이경아!”

   우렁찬 목소리가 저택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 크게 들 려오고 있었다. 태이경은 폴짝 자리에서 한 번 튀어 오르 며 반짝이는 눈으로 소리쳤다.

   “당숙부님이다 r

   그리고 곧장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막 안으로 들 어서 주위를 두리번거 리고 있던 태호연은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온 태이경을 발견하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태이경 은 그의 품에 폭삭 뛰어들어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당숙부님!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오오나,우리 이경이.”

   태호연은 아이의 엉덩이를 팔뚝으로 받치며 훌쩍 일어 섰다.

   “우리 이경이 그새 더 무거워졌네. 키도 많이 컸고.”

   “아플 때 배고는 잘 먹고 잘 자니까요. 그런데 당숙부님 은 살이 조금 빠지신 것 같아요. 뺨이 홀쭉해.”

   “이게 다 잘난 네 아빠 때문 아니겠니. 강제 다이어트 중이란다.,,

   태이경은 작은 손으로 태호연의 뺨을 살살 쓰다듬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속눈썹이 짙어 또렷한 눈매라서인지 감정 표현이 더 적나라하게 읽히는 아이였다.

   이 순수한 애정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기까지 태호연은 꽤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태이경은 낯가림이 없는 아이였다. 유모가 ‘당숙부님이세요,도련 님. 가주님 사촌 형님 되시지요.’하고 말했을 때,녀석은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대뜸 무릎을 꼭 안고 방싯방싯 웃었

다. 혀 짧은 소리로 꼬박꼬박 당숙부님,하고 부르는 녀석 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대대로 태 가는 부모 자식 관계가 그리 친밀하진 않았 다. 태중에서 어미에게 일차적으로 각인하고 나오는 경우 가 대부분이라 그나마 모친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나,그조 차도 그리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물며 남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친척 사이라면 더했다.

   어색해서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던 시간이 자그마치 1 년이었고,머뭇거리면서 안아주기 시작한 것이 재작년부 터였다. 지금은 이 집에 방문할 때마다 현관에서부터 태이 경을 소리쳐 부를 정도로 발전했다. 아이는 늘 웃는 얼굴 로 저를 반겨주었고,따끈하고 달콤한 우유 냄새를 풍기 며 안겨들었다. 이제는 태이경을 오래 보지 않으면 금단 증상이 올 것만 같았다.

   태호연의 손이 아이의 사랑스런 눈 밑을 어루만졌다.

   “사고는 제가 치고 나한테 떠넘기는 게 네 아빠 특기라. 이 당숙부가 수습하느라 허리가 휘어요.”

   “그래도 아빠 미워하면 안 돼요. 사이좋게 지내요. 난 당숙부님도 아빠도 좋으니까 싸우면 싫어요.”

   태호연은 오나오나 하며 아이의 엉덩이를 둥개둥개 얼 렀다. 나름 심각해졌던 녀석은 금세 다시 밝아진 얼굴로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도도하고 시큰둥한 성 체 딸내미만 보다가 이렇게 사탕 같은 아이를 보니 태국영 에게 쌓였던 울분마저 사르르 녹는 듯했다.

   “왔어?”

   아이의 통통한 뺨을 깨물며 놀고 있던 태호연은 낮게 울린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태국영이 재킷의 단추를 잠그 며 응접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베스트까지 갖춘 네이비색 슈트 차림의 그는 조금 졸린 듯 나른한 눈을 하고서 물었 다.

   “형수랑 현리는? 같이 안 왔나?”

   “따로 올 거야. 현리가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거든. 기다리다 질려서 먼저 나온 참.,,

   “말만들어도 질리네.”

   찌푸리듯 미소 지은 태국영에게 고용인 한 명이 큼지막 한 서류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가주님. 태호연 님이 가져온 서류들입니다. 유모에게 드릴까요?”

   “그래. 그대로 책상 위에 두라고 해.”

   상자를 든 고용인이 사라지기도 전에 드레스 룸에서 유 모가 나왔다. 그녀는 서류 상자를 내미는 고용인에게 잠

시 기다리라 말한 뒤 태국영에게 다가왔다. 태국영은 몹시 도 피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유모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 다. 그녀는 태국영의 넥타이를 다시 반듯이 정리해 주며 중얼거렸다.

   “역시 진회색이 나았을까요. 지금도 좋지만 그것도 참 좋았는데. 하아. 옷걸이가 너무 좋아도 고민이네요.”

   태국영의 잘난 낯짝이 미묘하게 비틀리는 걸 본 태호연 이 유모를 은근히 부추겼다.

   “유모. 우리 가주 넥타이도 보타이로 하지 그랬어. 아들 이랑 깔 맞춤으로.”

   “어머내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가주님,지금이라도 타이를 가져와 볼까요?”

   태국영은 짐승처럼 날 비린내 나게 웃었다.

   “옷 투정 부리면서 가출하는 가주 보고 싶으면 맘대로 해 봐,어디.”

   유모는 그 진지한 거부반응에 시무룩하게 한숨을 지었 다.

   “우리 가주님이 도련님 반만 닮았어도 이 유모가 참 행 복했을 겁니다. 도련님을 보세요. 늘 제 손길이 닿으니 저 리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태국영이 반사적으로 서늘한 눈을 돌렸고,태호연은 보

란 듯이 태이경을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깜짝 놀란 아 이가 앗,하며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꼭 움켜쥐었다. 태호 연은 고개를 들어 아이와 눈을 맞추며 헤벌쭉 웃었다.

   “어때. 네 새끼지만 예쁘지?”

   태국영은 짧게 고인 시선을 거둬내며 돌아섰다.

   “제 엄마를 너무 닮았어.”

   “예쁘단 소리네.”

   “나와. 지금 출발할 테니까.”

   애매한 시각이긴 했으나 그는 고민하지 않고 곧장 앞 서 걸음을 옮겼다. 괜히 집안에 더 붙어 있다가 여전히 갈 팡질팡하는 유모에게 붙들려서 더 곤욕을 치르고 싶진 않 았다.

   “가주님!”

   막 고용인이 건넨 구두를 신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대 기하고 있던 유모가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 보세요! 승도 군에게 답장이 왔어요!”

   태국영이 반쯤 몸을 틀어 전화기를 낚아채갔다. 그녀 의 말대로 액정엔 메시지 창이 떠 있었고,발신자는 이승 도였다. 태국영은 무심한 낯이었으나 마치 암기라도 하려 는 듯 그것을 몇 번이고 거듭해 읽었다.

   “나,나되 나도,나도!!

   태국영은 시선을 내렸다. 태이경이 두 팔을 위로 뻗은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녀석의 발치엔 신다 만 어린 이용 로퍼가 내팽개쳐진 채였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녀석은 그렇게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안달했다.

   태국영은 선선히 휴대폰을 녀석에게 건넸다. 태이경은 두 손에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누가 뺏어가기라도 하는 것 처럼 냅다 꽁무니를 뺐다. 응접실의 소파 옆에 숨바꼭질하 듯 몸을 숨겨 앉은 녀석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글자들을 하 염없이 보았다.

   『사진 잘 봤어요. 국영이는 근사하고,이경이는 참 예 쁘네요. 국영이한테 보는 눈 많은 곳에서는 아이 잘 신경 써 주라고 말해 주세요. 늘 고마워요,유모.』

   태국영은 한참 기다려도 아이가 나오지 않자 짧게 혀 를 찼다. 저건 어쪄자고 저렇게 날 안 닮았는지,그는 제 꼴은 망각한 채 잠시 옮조리다 태이경에게 다가갔다. 녀석 은 신줏단지처럼 휴대폰을 쥔 채 발긋한 얼굴로 활짝 웃 고 있었다.

   “엄마가나 예쁘대요.”

   태국영은 손을 뻗어 녀석을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녀 석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태국영은 말없이 걸어 현관으

로 갔고,그가 다시 구두를 신는 사이 유모가 아이의 발에 로퍼를 신겼다.

   “다녀오겠다.”

   “네. 배웅하겠습니다.”

   유모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아이가 손에 꼭 쥔 제 휴 대폰을 모른 척했다. 하루쯤은 전화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 다. 아마 급한 일이라면 저택으로 연락이 올 테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혹여 곤란한 일이 생기면 또 어떤가. 그녀의 작은 도련 님이 저렇게나 행복해하는 것을.

   고용인들이 움직였고 커다란 현관문이 소리 없이 양옆 으로 열렸다. 환한 봄 햇살이 실내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 어왔다. 아이의 엉덩이를 가분히 한 팔로 받친 태국영이 광명을 가르며 앞장섰다. 황금빛 띠가 흑표범처럼 우아한 그의 전신을 감쌌다.

   미리 시동을 걸어둔 차가 부드럽게 이동을 시작했을 때,태국영이 차창 밖을 년지시 내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여가 쪽 움직임은?”

   “…넌 회사는 안 궁금하나?”

   태이경을 물고 빠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태호연은 인상 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태국영은 가볍게 어깨를 떨며 실소 했다.

   “그거야 우리 능력 있는 형님이 잘 알아서 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나 너무 믿지 마라. 열 받으면 확 다 뒤집어서 먹고 튈 거니까.”

   “미리 알려만 줘. 주식 몽땅 처분해서 승도 주고 평생 얹혀살게. 나 승도 기둥서방이 꿈이거든.”

   “내가 미쳤나? 누구 좋으라고!”

   실없는 소리에 태호연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를 냈 다. 태국영은 더 그의 속을 긁어줄 셈이었지만 제 팔을 꼭 쥐어오는 손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슬쩍 눈 을 굴려 곁을 내려다보았다. 태이경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 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빠. 나도 데려갈 거죠?”

   “나도 데려가야 해요. 꼭.,,

   태국영은 내심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기둥서방이 꿈 인 아빠에게 당당하게 빌붙을 생각을 하는 아이는 억지로

새끼손까지 걸며 약속을 갈취해 갔다. 태호연이 실성한 것 처럼 웃으며 부자가 어찜 이리 똑같으냐고 한탄했다.

   “하긴 우리 제수씨가 갈 길 잃은 짐승들은 잘 거둬 먹이 지. 그래,차라리 불쌍한 척 들러붙는 편이 빠르겠다.”

   “알면 활약 부탁해.”

   끝까지 알밉게 한마디도 안 지는 태국영을 쏘아보던 태 호연이 불쑥 물었다.

   “너 싱가포르 제인릴 신약 연구팀에 쏟아 부은 투자금 이 얼만지는 아나?”

   “팔천칠백억.”

   기대치 않게 돌아온 정답에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 다. 태호연은 명하니 깜박이던 눈을 미심쩍다는 듯 가늘 게 좁히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기존 백혈병 치료제와 비교해서 신약 아멕트의 장점

은?”

   “황달 부작용이 사라지고,처방 환자 범위가 획기적으 로 넓어졌고,중증이상의 호중구감소증 및 혈소판감소증 의 발생이 한 차례도 보고된 적 없음.”

   “…폐암치료제 피네바의 작년 국내 매출은?”

   “칠백이십억 정도.”

   태호연은 그 후로도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고 태국영

은 번번이 기대를 뛰어넘는 대답을 했다. 특히 기업 내부 의 R&D 상황은 물론,제인릴을 포함한 타사와의 오픈 이 노베이션 진행 정도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경이로운 일이 었다.

   태호연은 평소 태국영에게 사업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실어다 나르면서도 내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저 이놈이 양심이 있으면 재무제표 정도는 보겠지 하는 정도 였다.

   “너 설마 내가 주는 서류들 다 보나?”

   “그럼 내가 집에서 뭐 하겠어. 때려잡을 놈은 없고,승 도는 출근해서 지능 떨어지는 짐승들 예뻐하느라 정신없 는데.”

   “반하겠다,태국영.”

   “반하라는 놈은 정작 반응이 없고 웬 산도적 같은 게 꼬 이는지 모르겠네.”

   태호연은 비틀린 소리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심적 여유 가 있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걸로 말하자면 사실 저희 종 족에서 자유로울 놈은 거의 없었다. 물론 태호연 역시 마 찬가지로,그는 어떻게든 가주를 회사에 들어앉혀서 제 일 을 줄이는 걸 소박한 꿈으로 삼고 있는 남자였다.

   “그래.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제발 그렇게만 해 줘. 오

년 내로 작업해서 내가 너 젊은 회장으로 만들어 줄 테니 까.,,

   “나 아직 스물둘 밖에 안 됐는데.”

   “그래서 뭐. 인간들처럼 대학가고 유학가고 다 해 처먹 게? 너 혼자 그렇게 팔자 좋게 살도록 놔둘 줄 알아? 난 스무 살 때 이미 호적 고쳐서 지금까지 내내 이러고 산다. 나니까 선심 써서 오 년이나 유예기간 주는 거야.”

   태호연의 눈이 불길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그는 성년식 이 끝나자마자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하며 가업승계를 강 요받았다. 그의 개인과외를 맡은 태 가의 교수들은 밥상머 리에서까지 곁에 딱 달라붙어 그를 달달 볶아댔다. 그렇 게 3년 가까이를 지옥에서 산 끝에 경영학과 약학 쪽 전공 교재들은 달달 외우게 되었고,곧장 신분과 학벌을 말끔 히 고쳐 실무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태국영도 그럴 운명이었다. 그러나 놈이 성체 가 되자마자 거하게 사고를 치는 바람에 모두가 그의 눈치 를 살피느라 학업의 학 자도 제대로 끼내지 못하는 상태였 다. 그래서 졸지에 태호연은 안달이 난 늙은이들에게 요즘 도 시달리는 팔자였다. 태국영을 발리 닦달해서 진짜 가 주 역할을 하게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자기들도 못하는 걸 왜 저한테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

다. 저라고 여벌 목숨 열 개쯤은 쟁여두고 사는 줄 아나.

   “내가 내일이라도 당장 교수들 붙여줄게. 박박하게 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시작해 봐.”

   “그건 됐어. 난 독학 체질이야. 누가 나 가르치려 드는 거 못 견딜 성미거든. 나도 모르게 손 날아가면 어쩔 거야.

   태국영은 여전히 만사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하겠다고 버티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마음 은 정한 듯해 내심 안심이 되었다. 잔뜩 설렘이 가득한 눈 으로 응시하고 있는데,태국영에게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 가 건너왔다.

   “그래서,여가 동태는.”

   …망할 새끼.

태호연은 속으로 욕설을 씹었다. 하여간 저 머릿속에 서 이승도를 배면 뭐 하나 제대로 남을는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다른 가문과 접촉하는 낌새는 없다. 아직 걱정 할 단계 아닌 거 알잖아. 네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 상 딴마음을 먹어도 무슨 짓을 하겠나. 그 꼬맹이가 여 가 에선 처음으로 나온 재목이니 이제 와 포기하기도 아까울 거고.”

   “어디까지 심었어?”

   “집은 뚫기 힘들 것 같아. 거기 보안이 네 집이랑 비슷 해. 드나드는 모든 것들,고용인이고 물건들이고 철저하 게 관리해. 하다못해 가계 인터넷도 사설망으로 물 샐 틈 이 없다. 여 가 주 사업 중 하나가 통신,보안 쪽이라 해킹 은 아예 꿈도 못 꾸고. 그래도 회사까지 다 가솔들로 채우 긴 무리니 그쪽에는 몇몇 넣어 놨어. 비서진은 가망이 없 다. 그야말로 배신의 여지도 없는 여 가 직계로만 채워놨 더군.”

   가만 듣고 있던 태국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결국 요충지는 다 놓쳤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하네.”

   뒤통수 맞은 듯 잠시 말을 잃었던 태호연은 결국 화 난 맹수와 같이 거칠게 포효했다. 차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바 람에 놀란 운전기사가 삐끗 차선을 벗어났으나 금세 정상 으로 돌아왔다. 다만 바로 곁에서 강력한 성체가 내붐은 짙은 살기에 태이경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떠는 바람에 태 호연은 아이를 달래느라 한참이나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오래전부터 태 가와 여 가는 그리 사이좋은 편이 아니 었다. 여 가는 태 가를 일컬어 야만적인 놈들이라 비하했

으며,태 가는 여 가를 음흉하고 가식적인 족속들이라 평 하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편견이 섞여 곡해된 점 은 분명 존재했으나,실상 두 가문을 냉정히 들여다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 가는 과거부터 수많은 종주를 배출해 낸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세력도 가장 방대했고 결집력도 뛰어났다. 그 러나 여 가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홈이 존재했다. 바로 그 유구한 역사에서 제왕의 재목이 태어난 적이 단 한 차례 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 가의 일원들에게 부리 깊 은 콤플렉스였다. 태 가와 얼굴만 맞대면 으르렁대기 바빴 던 것은 보통 여 가의 흉한 질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유 독 강한 개체가 많이 태어나 도리어 힘을 모으지 못하는 태 가를 질시해 조롱하며 자극했고,그에 발끈한 태 가가 머릿수만 많은 쥐새끼라 받아치면서 번번이 싸움으로 점 화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노골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여 가는 등대의 멸족에 가장 큰 의심을 받는 가문이기도 했다.

   처음 등대들이 하나둘 실종되거나 사체로 발견되기 시 작되면서는 사소한 심증에 불과했다.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리던 등대들의 뒤를 노릴 수 있을 만한 배짱을 보일 수

있는 건 당시 종주가 속해있던 여 가밖에 없다는 이유였 다. 거기에 더해 어둠에 은신하면 완벽한 금수조차도 냄새 를 맡지 못하는 그들의 능력,등대의 멸족을 가장 반길 만 한 가문,입이 무거운 가솔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수장 의 영향력,가솔들의 희생적인 충성도,종주가 거느리는 친위대의 존재 등등,그 모든 요소들이 땔감이 되어 소문 을 부추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의심에 쐐기를 박은 것은 마침 내 등대들이 씨가 마른 직후였다. 종가의 친위대들이 전 대 종주의 은퇴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다음 세대의 종주 자리를 두고 젊은이들이 경쟁을 치르는,이른바 ‘종가승 계’를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은퇴를 선언한 것이 종주 본인이 아닌 종가 소속의 친 위대였다는 것은 아주 유의미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바로 종주의 인장이 이미 친위대에게 넘어간 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논란이 되었는가 하면, 종주와 친위대,그리고 일족 전체를 강력하게 묶고 있는 하나의 협약 때문이었다.

   친위대는 오로지 종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독립적인 세력 이다. 종주가 왕으로서 절대 왕권을 가지고 일족을 다스리 던 까마득한 고대에서부터 존재했던 이들,왕을 보필하고

왕을 지키고 왕의 명령을 수행하던 역사의 유물들이다.

   종가에는 참모대를 비롯해서 호위대와 척살대 등의 세 력이 있었는데,그들은 오로지 종주의 인장을 정의롭게 물 려받은 자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그리고 세대의 흐름에 따 라 왕권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도 그들은 대를 이어 왕을 대하듯 종주를 섬길 것을 맹세했다. 바로 이들이 통칭 친 위대로 통합하여 명칭만 바꿔서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 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일족의 모든 불문율에서 벗어나는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절대 왕권 체계를 무 너뜨리면서 일족 모두가 만장일치 하에 종주에게 남겨둔 유일한 권한이었다.

   어느 집단이건 수장의 권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수장이 권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결국 부리가 부실하다 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들 일족처럼 힘의 논리가 팽배해 있는 조직이 라면 두 번 말해 입 아플 정도다. 수장이 적절한 시기에 권 력을 이용해서라도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십중팔구 붕 괴를 맞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일족은 단 한 가지 금제를 두었다. 친위대 전체가 호위 목적이 아닌 종주의 명에 살생을 감수해야 하는 경

우,반드시 인장을 수거해 가야만 하는 절대불가침의 규율 을만든 것이다.

   즉,종주의 마지막 명령을 대가로 친위대는 목숨을 건 다는 말이다. 이것은 종주가 제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친 위대를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방편이었다.

   그랬기에 당시 이미 종주의 인장이 친위대에게 넘어갔 다는 것은,바로 종주가 친위대 전체의 전력을 소모시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었다.

   과연 친위대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한 종주의 마지막 명 령은 무엇이었나. ‘등대를 말살하라.’가 아니었나. 一모두 가 그리 의심을 했다.

   그러나 아무런 물증도,또한 증언해줄 이도 없었다. 친 위대는 지금은 사라진 종가의 잔재이자 현신,종주를 지키 는 것을 사명으로 일족들과 유리되어 한평생을 사는 이들 이었다. 그들의 입은 천근보다 무거웠고 그들의 의지는 무 엇보다 견고했다.

   진실은 그대로 피의 폭풍에 휘말려 영원히 증발했다. 아마도 여 가의 역사서만이 그 비밀에 대한 해답을 품고 있을 것이다.

   반면,태 가는 백신 ‘슈퍼문’을 배놓고는 설명할 수 없 는 가문이었다. 등대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

들 일족은 주기적으로 심신을 조여 오는 고통을 그저 감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완숙한 성체들은 끓는 피 를 주체 못 해 포악해지는 것에 그쳤지만,아직 제 몸 하 나 건사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심심찮게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등대가 없으면 그저 이지를 잃은 괴물과 다를 바 없는 어린 제왕의 재목들은 어땠을까. 가설을 세워볼 것도 없이 빤히 결과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을 시기적절하게 구제해준 것이 바로 태일에서 개발해 낸 슈퍼문이었다. 슈퍼문은 등대들의 빈 자리를 메우는 획기적인 백신이었다. 슈퍼문으로 인해 그 들은 더 이상 달이 차오르는 것을 꺼려 하지 않아도 되었 다. 적어도 완전한 금수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은 말이다.

   안 그래도 강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던 태 가는 슈퍼 문 하나로 막대한 부마저 쌓았다. 모두가 그들에게 손을 벌리면서도 속으로는 질시했다. 처음 낭설이 싹튼 계기는 아마도 그 추한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약 분야에 임상 실험이 빠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여 많은 동족들이 그들에게 의문을 제기했 다. 슈퍼문을 개발하는 데에 필요한 동족들의 몸뚱이는 도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구했느나,하는 문제였다.

   태 가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그들 가문 에서는 유독 짙은 피가 많이 태어났는데,등대가 사라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아이들의 몸을 그에 사용했다는 것 이었다.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경악스러운 짓이었으나 일족은 무리 없이 수긍했다. 그들에게 아이는 그저 성체가 될 씨 앗일 분이었다. 야생의 짐승들이 약한 새끼의 숨통을 부 러 끊어놓아 나머지 새끼들을 더 돌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 었다.

   누구도 태 가를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발 빠르게 비정 한 길을 택한 그들의 결단력에 조금은 혀를 내둘렀을 분이 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아이들이 살아남게 되었으니 그 이상의 추문은 돌지 않게 되었다.

   집요하게 뒤를 추궁할 열정도 없는 이들은 그저 무료함 을 살라 먹기 위해 가십만 씹는 우민들처럼 의혹들을 잊어 갔고,그렇게 태 가와 여 가를 둘러싼 의혹들은 영원히 미 제로 남았다.

   이제 그 두 가문은 그들 일족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군 림한 지 오래였다. 그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 능한 지경에 이르렀고,이제는 거의 모든 가문이 그들과

사돈을 맺고 싶어 그저 안달할 분이었다.

   특히 여 가의 후계로 확실시되는 여제운과 태 가의 젊 은 가주 태국영은 늘 남녀를 막론하고 화제의 중심에 있었 다. 두 남자에게는 아직 아내가 없었다. 각 가문들은 줄기 차게 그들에게 혼담을 보냈으나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모 두 이제껏 반응을 보여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래서 태국영이 제 아이를 한 팔에 안고 연회장에 들 어섰을 때,활기찼던 장내는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 고 곧 무리 지은 이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소리죽인 웅성거림은 ‘진짜 애가 있긴 있었네.’로 시작해 서 대부분 ‘그럼 애 엄마는?’으로 끝났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맑고 커다란 눈 망울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마치 거대한 놀이동산을 처음 발견한 인간 아이처럼 무구하게 반짝이 는 눈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이에게 한동안 머물렀으 나,그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집요 하게 번득이는 짐승들의 눈은 곧 태국영에게로 완전히 고 정되었다.

   그는 늘 그랬듯 누구보다 시선을 끌었다. 그의 매혹적 인 껍데기는 실체의 한 자락도 훔쳐볼 수 없을 만큼 불투 명했기에 더 가치가 있었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

는 권태로운 눈매도,습관처럼 온기 없는 곡선을 그리는 그의 입술도,옷가지에 가리어진 그의 완벽한 몸뚱이도, 모두의 눈을 훔치고 마음을 홀렸다.

   특히나 파다하게 번져가는 여자들의 동요는 대단했다. 본능적으로 강한 수컷을 원하는 여인들은 탐욕스럽게 입 술을 할으며 그를 주시하느라 바빴으나,누구 하나 쉽게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태국영에게선 기이할 정도로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고,그것은 그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었다.

   결벽적일 만큼 꽉 틀어쥐고 놓지 않는 그의 진정한 체 취를 맡을 수 있는 여인은 누가 될까.

   여인들은 모두 열렬히 궁금해했다. 또한 그가 그 단단 한 빗장을 풀어줄 만큼 귀애하는 암컷이 제가 되기를 바랐 다. 원초적 욕망이 들끓으며 야릇한 향기가 순식간에 실내 를 가득 채웠다.

   여제운은 그 자욱한 페로몬이 거북했다. 희미하게 인상 을 찡그린 그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러다 곧장 제게로 다 가오는 태국영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꿈틀 올렸다.

   “오랜만”

   늘 있는 듯 없는 듯 어슬렁거리다가 모르는 사이 사라 지던 태국영이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여제운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겹쳐 악수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잠깐 시간 좀 내주겠어? 내가 할 애기가 좀 있는데.”

   태국영이 슬쩍 고갯짓을 해 보였다. 여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알코올 음료를 테이블에 내려두다 멈칫했다. 그는 막 태국영이 바닥에 내려놓는 어린아이에게 빤히 시 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난 나이 많은 며느리 싫으니까 눈독 들이지 마.”

   태국영이 또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으나 여제운은 그 아 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는 구겨진 옷매무새 를 톡톡 정리하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들었다. 그러다 아차 하며 배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 으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공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몸짓 이었으며,고개만큼은 빳빳하게 들고서 방긋방긋 웃고 있 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태이경입니다.”

   드물게 말문이 막힌 여제운은 느리게 태국영에게로 고 개를 들었다. 마치 도움을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태국 영은 여느 때와 같은 희미한 미소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

   “애가 인사하면 받아줘야지. 매너 좋은 여제운이 어디 갔어?”

   결국 여제운은 어색하게 한 손을 올리며 인사를 해야 만 했다.

   “그래. 나는 여제운이라고 한다.”

   “네. 반갑습니다.,,

   '"그래. 나도 반갑다.”

   태이경은 고개를 쭉 배든 채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그 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막연하게 얼어붙어 있던 여 제운의 어깨를 태국영이 툭 건드렸다. 그가 다시 고갯짓 을 했다. 여제운은 태이경을 뚫어져라 보면서 몇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고개를 바로 한 그가 중얼거렸다.

   “닮았군.”

   누구오?,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는 부연이었다. 태국 영은 그저 나태하게 웃기만 했다. 부정하지 않는 모습에 서 여제운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다시금 아이를 관찰했다. 아이는 갑자기 사라지는 아빠의 뒷모습을 조금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활기를 되찾고 바삐 주변을 두리 번거렸다. 아이는 제 또래의 아이를 발견하곤 화색이 돋 아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안녕.’ 아이가 천진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걸 누가 태국영의 아이로 볼까 싶었다. 엉뚱한 루머 가 또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갈 거라 예측할 때쯤,태국영은 발코니의 문을 밀어젖혔다.

   아직 초대객의 반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라 발코니는 텅 비어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전경 역시 지나치 게 한산했다. 여군호는 종가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 호텔 의 객실과 연회장을 통째로 예약했다. 인간들의 출입 없 이 자유로운 교류를 위해서였다.

   짧게 깎인 잔디 위로 황금빛 석양이 녹아내렸다. 혹한 겨울을 난 태양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일몰이 지척까지 기어왔다.

   두 남자는 잠시 나란히 서서 말없이 어둑해지는 하늘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어둠이 내렸을 때,태국영 은 안주머니의 담뱃값에서 담배를 한 대 빼 물었다. 암흑 을 살라 먹는 불꽃이 담배 끝으로 옮겨붙어 새발갛게 타올 랐다. 두 번째로 목격하는 그의 흡연 장면을 여제운은 약 간 신기하게 보았다.

   “년 담배를 왜 피우지?”

   태국영이 담배 문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몸 따뜻하게 하려고.”

   저희 일족의 재생력은 모두 피의 흐름이 근간이었다.

그래서 혈관이나 뇌 작용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것 은 본능적으로 끼리는 경향이 있었다. 체내에 침입한 독소 를 배출하기 위해선 필시 열이 오르기 마련이었고,그 느 낌은 마치 달이 차오를 때의 발열 증상과 비슷했다. 그래 서 저희 일족 중에 술이나 담배를 즐기는 자는 드물었다.

   “이유가 이상하군. 넌 안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 평균 체 온이 높을 텐데.”

   “내 체온에 무슨 관심이 그리 많아. 신경 끼. 내가 널 품 을 일은 없으니까 너완 상관없잖아?”

   여제운은 가볍게 실소했다.

   “여전히 싱겁긴.”

   깊게 몇 번 발아들인 담배는 금세 짧아졌다. 태국영은 불똥을 털어낸 꽁초를 쓰레기통에 가볍게 던져 버렸다. 여 제운은 그의 입술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는 마지 막 연기가 어둠에 녹아내리는 것을 감흥 없이 응시하며 물 었다.

   “그런데 할 말이라는 건 뭐지?”

   “별로. 정말 무슨 말을 하자고 한 건 아니야. 그냥 저 안 에 날 벗겨 먹으려 드는 눈빛들이 너무 거슬려서 핑계가 필요했을 분이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말 트고 지내는 놈 이라고는 별로 없거든.”

   “간택당해 기쁘군. 나도 네 덕분에 자극적으로 변한 공

기가 불편하던 참이었으니까.”

   “질투도 아니고 불편이라. 여제운이 돌부처인가. 그러 고 보니 그 나이 되도록 여자 끼고 다니는 꼴을 본 적도 없 고. 원래 네 나이 정도 되면 이미 정착하고도 남았을 때 아 닌가?”

   “아직 마음이 움직이는 상대가 없었으니.”

   “마마보이라 그런건 아니고?”

   여제운은 혀를 차며 짧게 웃음을 지었다. 이 불량한 어 투에 어느덧 익숙해진 건지,그 불투명한 속이 더는 껄끄 럽지 않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아이 엄마를 방치하지?”

   태국영의 매끈한 혀가 순간이나마 그 기세를 잃었다.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응,조금.”

   “사과하지.”

   여제운은 깨끗이 물러났다. 그러나 태국영은 의외로 넉 넉하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우리 승도는 극도의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초식동물과 도 같아. 성급하게 굴면 절대로 먼저 다가오지 않거든. 아 주 조금씩 스며드는 중이야.”

   …초식동물?

   이승도의 냉담한 작태를 좀 겪어 봤던 여제운으로서는 태국영 눈의 콩깍지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속내 를 훤히 들여다본 듯 태국영이 말을 이었다.

   “또 우리 승도는 거울과도 같지. 사나운 놈에겐 한없이 사납고,상냥한 상대에겐 녹아내릴 듯 상냥해지고. 장난 은 장난으로 받아치고 진심엔 진심으로 대해.”

   이승도를 떠올리는 태국영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짙 게 걸렸다.

   “그러니까 승도가 차갑게 군다고 소침해지지 말고 너 도 예붐받고 싶으면 네 동생처럼 내숭이라도 좀 떨어봐.”

   시커먼 속을 숨기고서 사냥감을 길들이고 있는 맹수가 그리 말했다. 여제운은 순간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무슨 말이지?”

   “내가 음욕 없는 짐승들에게는 예상외로 너그럽다는 말 이지. 지금의 네 동생처럼.”

   “도통 모를 소릴 하는군.”

   “모르면 됐고.”

   태국영은 마치 십년지기 친우를 바라보듯 편안하게 미 소 지었다. 그 친근한 태도가 거북살스러워진 여제운이 슬 쩍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려 할 때였다.

   평화롭던 공기의 흐름이 일변했다. 태국영이 먼저 바람 이 날리도록 몸을 돌려 유리문 너머의 홀을 주시했다. 여 제운도 아주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돌아섰다. 예민한 청각에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꽂혀 들고 있었다. 태이경이 었다.

   태국영의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그는 연기처 럼 몸을 움직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녀석의 서러 운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홀은 마치 정적과도 같은 상태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이들이 동작을 멈춘 채 녀석을 흥미롭 게 주시하는 중이었다. 태국영은 불쾌하게 혀를 차며 미세 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아직 일렀나.

   녀석은 제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았다. 그만큼 연약하고,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보통 저 나이 때부터 강한 상대에 겐 굽히고 약한 상대는 부리려드는 일족의 아이들과 극명 하게 달랐다. 강한 아빠에게서 태어난 약한 아이가 그 영 악한 꼬맹이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것을 염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녀석이 꽤 강단 있고 당찬 면모를 가지고 있어 괜찮지 않을까 판단했었다. 그러나 우 려했던 바가 이렇듯 현실이 되어 다가오니 속이 언짢아졌

   “태이경. 울음 그쳐.,’

   태국영은 이유를 묻는 것에 앞서 냉랭하게 말했다. 아 이는 두 손등으로 눈을 비비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울음 은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아빠아…….,,

   “말 들어.”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이 흥건했다. 태국영은 저도 모르게 그 뺨에 젖은 눈물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이 승도의 얼굴이 겹쳐 보여 무의식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따끔하게 혼을 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뒤늦게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손을 거두고 단 호하게 꾸짖었다.

   “더울면 혼나. 아빠 무서운 거알지.”

   태이경은 두 주먹을 꼭 쥔 채 애써 참으려는 듯 한참 끅 끅거렸다. 그러나 녀석은 이내 억누른 만큼 더 크게 울음 을 터뜨리고 말았다. 태국영은 혀를 찼다. 이번에야말로 싸늘하게 혼쭐을 내려던 참이었다. 녀석이 제 옆에서 조 금 당황한 듯 서 있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서럽게 소리쳤 다.

   “재가 엄마한테 창녀라고 했단 말이야!”

   태국영의 미간이 일순 사납게 꿈틀댔다. 벌어진 입술

이 천천히 다물렸다. 권태로운 짜증이 깃들어 있던 눈에 삽시간에 한기가 스몄다.

   그때 황급히 다가온 태호연이 태이경을 안아 들었다. 그의 곁엔 이제 막 도착한 아내와 그의 딸 태현리가 함께 였다. 따스한 품에 안기자 태이경은 이제 거의 목 놓아 울 며 그 단단한 목을 끌어안았다.

   “당숙부님. 우리 엄마 그런 거 아니지? 응?”

   “당연하지. 우리 제수씨가 얼마나 당차고 똑 부러지는 데.,,

   “그런데 재가 자꾸 우리 엄마 욕해. 엄마가 창녀라서 아 빠가 애기만 뺏고 버린 거라구. 내가 아니라고 막 그랬는 데,울 아빠가 엄마 얼마나 좋아하는데,내가 다 아는데.”

   “쉬이. 쉬이. 그래,이경아. 이경이 엄마 알지? 절대 그 런 거 아니야.”

   태호연은 적잖이 당혹해 있었다. 가족들을 마중 나간 차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또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 다. 그는 태이경의 엉덩이를 계속 추슬러 안으며 녀석을 달래라 태국영의 눈치를 보라 정신이 없었다.

   “이경아. 그렇다고 사내애가 울면 어쪄니.”

   태현리는 냉랭한 얼굴로 태이경의 뺨을 슥 훔쳐내며 핀 잔했다. 태이경은 한 맺힌 마냥 울먹울먹하며 사촌 누나에

게 두 팔을 뻗었다.

   “누나아.”

   ‘‘ … 동,,

' "-TT-

   태현리는 못 이기는 척 태이경을 작은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뚝 그쳐. 누가 너희 엄마 창녀라고 하면 니네 엄마는 창녀고 니네 아빠는 고자라고 받아쳐야지. 울면 지는 거 야. 싸워서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해. 이기면 끝이야. 다 음부턴 울지 말고 두드려 패.”

   잘한다,우리 딸. 잘한다.

   태호연은 옳은 가르침을 내리는 딸의 말에 열심히 고개 를 끄덕이며 태이경의 후끈한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래,이경아. 아빠 심기 불편하니까 이제 그만 뚝 하 자. 응?”

   태이경은 두 눈을 꽉 감고서 목 안으로 울음을 삼키려 애썼다. 엄마를 욕하는 말에 분하고 화가 났지만,그보다 더 서러운 것은 당당하게 제 엄마를 보여 주며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엄마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이유도,제게 다 가오는 걸 주저하는 이유도 태이경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아이였다는 것도,

엄마가 고통과 슬픔에 몸부림치던 것도,그럼에도 불구하 고 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엄마…… 엄마아……

   원통했던 아이는 결국 끄트머리에 가선 이 자리에 있지 도 않은 제 엄마를 섧게 부르짖었다. 태호연의 목이 뜨끈 한 눈물로 금세 젖어들었다. 그는 난감하게 미간을 찌푸리 며 태국영을 바라보았다.

   태국영은 장승처럼 선 채 한 손에 쥔 지포라이터의 뚜 껑을 달칵달칵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이고 턱이고 하얗 게 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전신에 일렁이는 사나운 기백 이 심상치가 않았다.

   “야,가주…… 일단 밖으로 가서 열 좀 식히고……■,,

   그러나 태호연의 만류는 그에게 채 닿지 않았다. 태이 경을 울린 아이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태국영은 몸을 돌 려 그 아이를 바늘 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푸르스름 한 살기에 직격한 아이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 무처럼 몸을 떨었다.

   태국영은 느리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엇비슷 한 높이에서 혹독한 냉기를 흠씬 뒤집어쓴 녀석이 숨을 깔 딱거리며 오줌을 지렸다. 싸늘한 술렁임이 주변에 파도처 럼 번져나갔다.

   태국영은 신중하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낯선 냄새였 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어쩌면 이전에 봤을지도 모르겠으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아이와 눈을 맞 춘 채 웃어 보였다. 솜사탕처럼 달콤해서 금방 녹아내릴 듯한 미소였다. 그가 물었다.

   “꼬맹이. 아빠가 누구야?”

   아이는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떨며 목울음 소리만 냈다. 대답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상태였다. 눈동자가 파 르르 경련하며 금세라도 흰자위를 까뒤집을 낌새였다.

   “엉덩이 팡팡해야 그 입을 열려나? 네 아빠 누구야. 도 대체 어디 처박혀 있기에 애가 우는데도 기어 나올 생각 을 안 해?”

   태연하다 못해 평온하게까지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러 나 태국영의 눈이 이미 한껏 돌아있다는 걸 태호연의 가족 들은 알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불안하게도 윤 가가 몰 살했던 이유와 아주 근접하게 닿아 있었다.

   이걸 말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고민 따위는 필요 없었다. 말린다고 말려지는 놈도 아니었다. 태호연은 또 한 번 피바람이 불겠구나 예감했다. 그는 슬쩍 뒷걸음질 을 치며 태현리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재발리 몸을 움직 여 거리를 두었다. 그때였다.

   “내 육촌 고종형제의 아들이야. 남 가 쪽 아이지.”

   담담한 목소리가 살얼음 같은 장내를 갈랐다. 봄조차 두려워하며 물러날 듯한 싸늘한 공기를 가르고 여제운이 아이 옆에 다가와 섰다.

   “네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일단 사과는 해야겠어. 진심 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정말 미안하다.”

   왜 하필!

   태호연의 눈가가 일순 경련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아 니,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고종형제 쪽 핏줄이라지 만 그래도 여 가의 피가 옅게나마 섞여 있다. 이 일에 여 가가 개입해도 문제,개입하지 않아도 문제였다.

   그들이 끼어든다면 일족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터질 것이고,모든 책임을 고스란히 남 가에 떠넘긴다면 여군호 가 태국영에게 꼬리를 말았다는 추문이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갈 것이다. 여 가의 분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여 가와의 전면전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는데.

   쥐가 나도록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태국영은 자리 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맹수 가 먹잇감을 정하고 제 몸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움직임이 었다. 새카만 분노가 그의 두 눈에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유감이네,여제운. 방금 전까진 우리 꽤 분위기 좋았는

데 말이야.”

   “나 역시 유감이다.”

   여제운은 끓는 속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잘잘못을 가 릴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건 명백히 태국영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사내놈 둘이 치고받고 한 것과는 완전 히 차원이 달랐다. 태국영이 어떤 식으로 분노하건 제 6촌 은 그것을 감내해야 할 판국이었다.

   “네 육촌…… 음,뭐랬지.”

   “육촌 고종형제의 아들. 쉽게 말해 내 고모할머님 쪽 후 손이야.”

   “아아. 육촌 고종형제. 거 촌수 참 좆 같이 복잡하네. 어 쩐지 여 가 냄새가 안 나더라니. 뭐,육촌이고 십이촌이고 다 필요 없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두 남자 사이에 화염처럼 타올랐 다. 태국영이 거칠게 미소 지었다.

   “다 긁어서 내 눈앞에 데려오!?. 이 꼬맹이한테 내 아이 의 엄마가 창녀라고 가르친 씹새끼들. 그 창녀 짓도 못하 게 내가 온몸을 찢어줄 테니까.”

   여제운은 잠시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 대꾸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한 말이다.”

   “데려와.”

   “네 아들보다 겨우 한 살 많을 분一”

   “닥치고 데려오라고 했어.”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으나 그것은 화난 짐승의 으르렁 거림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료함과도 닮아 있 던 태국영의 기세가 돌변했다. 우르릉 울리는 공기의 진동 이 그를 중심으로 화끈하게 터져 나갔다.

   여제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곧장 사고 친 꼬 맹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뒤로 집어 던지고는 팔을 들어 얼 굴 앞을 막았다. 태호연 역시 황급히 숨을 멈추며 뒤를 돌 아섰다.

   파티 테이블과 그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접시들이 주변으로 거칠게 휘돌며 날아갔다. 비명 소리가 메아리처 럼 번져나갔다. 실내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 저기서 불만 섞인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예고 좀 하고 터지라고 욕설을 내뱉고,누군 가는 옷이 망가졌다며 화를 냈다. 태국영은 그 어떤 소리 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날짐승처럼 스산하고 난폭 한 시선을 여제운에게 고정하고 있을 분이었다.

   저 미친 새끼.

   태호연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허공이 얼어붙은

듯 살갗이 따끔거렸다. 단순히 위협 수준이 아니라 진짜 끝을 볼 작정인 것 같았다.

   태풍의 눈처럼 홀로 고요한 태국영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우리 그간 쌓인 정도 있으니 넉넉히 십 분 주지. 그 안 에 책임질 놈들 내 앞에 갖다 놓지 않으면 네가 책임지는 걸로 알아들을게.”

   태호연은 멀찍이 서 있던 여군호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 다. 그는 마뜩잖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의외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제 직계를 빗겨나간 친척의 일 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一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태호연이 눈으로 물었다. 여군호는 음,하며 눈썹 한쪽 을 꿈틀 올리며 고심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一자네가 말려주지 않겠나.

   태호연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친 소리였다. 할 수 있으면 당신이 해 보라는 듯 노려보자 여군호는 쓰게 웃으며 태호연이 보호하듯 품고 있는 아이를 일별했다.

   여군호의 눈빛이 과연 예상했던 것처럼 기묘해졌다. 이 승도의 뒷조사를 끝냈을 그라면 이미 사진 정도는 그 뇌리 에 명확히 박아뒀을 터. 여군호는 단박에 아이의 엄마를

눈치챈 기색이었다.

   그것을 계기로,일순 태호연의 뇌리에 섬광 같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잽싸게 눈을 내렸다. 태이경은 이 순간에도 유모의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선생님,나도 인간으로 변하면 선생님 아가처럼 예블 까?]

   여은태는 별빛이 들어찬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 다. 모처럼 이승도는 일찍 퇴근했고 태국영도 없어서 둘 이 오붓하니 매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당연하지. 우리 은태는 지금도 얼마나 예본데.”

   이승도는 제 곁에 꼭 붙어서 누워있는 여은태의 머리 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녀석 은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도 이승도의 허벅지에 놓인 랩톱 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신기해. 선생님 무지 많이 닮았어.]

   여은태는 모니터 속에서 보타이를 매고 방긋 웃고 있 는 태이경을 신기하다는 듯 빤히 보다 고개를 올렸다. [선생님. 나 궁금한게 있어.]

   “그래. 뭐든 물어봐.”

   [응,있잖아…….]

   여은태는 잠시 머뭇거렸고,그것이 이상해 이승도 역 시 시선을 내렸다. 한참 눈만 깜박이던 녀석은 주저하며 물었다.

   [내가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되면,나 집에 돌아가야 돼?]

   이승도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로 내가 내 몸 상태를 잘 조절할 수 있게 되면 덜 아파진댔잖아. 선생님은 내가 많이 아프니까 보살펴주 고 있는 거고. 그럼 내가 안 아파지면 난 다시 집으로 돌아 가야 되는 거야?]

   여은태는 이승도가 직장에 있는 동안 딱히 홀로 할 것 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며 시간 을 보냈다. 겹겹이 누적되어 가는 그 상념들 속에 가장 불 안했던 것이 바로 그거였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덜 아파진다면,선생님은 나를 더 이상 보살펴주지 않는 건가. 더 안아주지 않고 더 예뻐해 주지도 않고 이제 됐으니 너희 집으로 가라고 할까.

   다른 무엇보다 저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이를 처음 겪어 봤다. 그의 품은 따스하고 안락했다. 힘도 덩치도 비

교할 것도 없이 제가 더 우월했으나 그의 품 안에선 늘 아 기가 된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아기처럼 애지중지 조심 스레 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진짜 가족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수컷이 있었고,그와의 사이에서 난 사랑스러 운 아기도 있었다. 아무리 예붐받으려고 노력을 해도 언젠 가는 남남이 되고 말 사이였다.

   뼈와 내장을 살라 먹는 고통도 그 막연한 미래에서 오 는 두려움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 아도 좋으니 이렇게 다정한 품에서 오래도록 어리광을 부 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은태는 인간으로 변할 시도조차 해 본 적 없이 그 고통을 감내했다.

   어차피 성체가 되기 전에는 어렵다고 했으니까,그렇 게 스스로 변명해 가며.

   “우리 은태는 선생님이랑 있는 게 더 좋아?”

   [당연하지.]

   “좁고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 내내 나를 기다리고 있 잖아. 외롭고 쓸쓸하지 않아?”

   [외로운 건 맞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건 괴롭지 않아. 기다리기만 하면 선생님은 항상 와 주니까.]

   이승도는 랩톱을 매트리스에 내려두고 여은태의 머리

를 당겨 안았다. 애릇함이 끓어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그럴 일 없어,은태야.”

   두툼한 앞발이 옆구리에 살짝이 걸쳐졌다. 마치 마주 안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이승도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 께 말을 이었다.

   “네 형하고 약속했듯이,선생님은 우리 은태가 먼저 가 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멋진 어른이 될 때까지 잘 키울 거 야. 네 집에는 널 보살펴 줄 가족도 없으니 불안해서 선생 님이 어떻게 보내겠어. 네 아버지가 와서 협박을 해도 절 대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정말?]

   “응. 정말.”

   여은태는 기분 좋게 목 안으로 그르렁거리며 꼬리를 세 차게 흔들었다. 축축한 코끝이 목을 연신 비벼댔다.

   [고마워,선생님. 나 꼭 멋진 어른으로 자라서 선생님 도 지켜주고,선생님 아가도 지켜줄게. 태국영이 어디 멀 리 가 있으면 내가 꼭 옆에서 지켜줄 거야.]

   언젠가 내 가족들이 선생님을 위협한다면,나는 내 가 족들과 싸워서라도 선생님을 지킬 거야.

   「최악의 경우 너는 너의 가문 전체와 이승도 둘 중 하나 를 선택해야 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몰라.」

   그게 왜 최악의 경우일까 여은태는 이해하지 못했다. 제게는 가족이나 가문 따위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고 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한겨울에 손이 발갛게 얼면서 도 불평 한 번 없이 저를 찬물로 씻겨주던 그를 택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특해라. 나도 고마워.”

   이승도는 여은태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여은태는 더 세게 꼬리를 흔들며 이승도의 뺨을 할짝거렸다. 앞발로 이 승도의 몸을 굴리기도 하고,등허리 아래 고개를 디밀어 폭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승도는 멋대로 움직이는 제 몸을 방치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우리 은태가 예븐 아이로 변할 수 있게 되면,밖으로 많이 놀러 다니자.”

   여은태는 발딱 몸을 일으킬 정도로 신이 나서 응! 하고 대답했다. 녀석의 연분홍빛 배에 푹 늘어져 있던 이승도 는 자연히 침대로 흘러내려 한 손을 뻗었다. 눈부시게 반 짝반짝 빛나는 짐승이 손바닥에 고개를 비비며 애교를 부 렸다.

   “한 손에는 우리 은태 손잡고,다른 손에는 우리 이경 이 손잡고,꽃잎 날리는 산책로 마음껏 걷자. 같이 바다도 보러 가고,산도 타고.”

   [선생님아가도 같이?]

   “응. 같이. 그러니까 꼭 노력해 보는 거야. 알았지?”

   [응. 열심히 노력해 볼게.]

   “약속.”

   이승도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여은태는 거기에 걸 손가락이 없기에 숨긴 발톱 사이에 꼭 쥐는 걸로 대신했 다. ‘약속. 꼭 약속하는 거야.’하고 신나서 활기차게 몸을 들썩이던 녀석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귀를 쫑긋 세웠다. [선생님. 전화 오는 것같은데?]

   이승도는 이 따사롭고 나른한 시간을 깨고 싶지 않아 조금 미적거렸다. 그러나 진동은 집요하게 이어져서 계속 무시하고 있기도 신경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내 려가 휴대폰을 가져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조금 의아 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유모. 무슨 일이에요?”

   《제수씨. 납니다. 태호연이에요.〉〉

   이승도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그와 자신이 따로 통화를 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 다. 명한 머리보다 먼저 불길함을 느낀 심장이 불현듯 고 동을 크게 울렸다.

   《미안한데,지금 잠깐 여기 좀 와 주셔야겠어요. 우리

가주 지금 눈이 돌아 있어서 제수씨 아니면 수습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태국영은 지금 종가모임에 간 게 아닌가요?” 《네. 지금 호텔연회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거길 가면 안 될 텐데요.”

   《상관없는 다른 가문 놈들은 모두 내보낼 테니 그건 염 려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마스크나 장갑 같은 거 있으면 꼭 착용하시고요. 다른 놈들 절대로 만지지도 마시고. 여 기 꽤 급박합니다. 잘못하면 여 가랑 전쟁이 벌어질 판이 에요.〉〉

   “전,전쟁이요?”

   이승도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편안히 늘어져 있 던 등허리가 순식간에 작살이라도 꽂힌 듯 꼿꼿이 섰다.

   “갑자기 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길게 애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 가랑 지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만약 여제운이 잘못되면 여군호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그 가솔들 다 떼로 덤빌 거고,그럼 오늘 바로 전면전이 시작될 거예요. 제수씨,서둘러 주세요.》

   “아니,잠깐. 그럼 전화를 바꿔주시면 제가一”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태호연은 답답하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우리 가주 지금 눈이 돌아서 제수씨 전화라면 절대 받 지 않을 거예요. 제수씨가 무슨 말을 할지 놈이 모르겠습 니까. 일단 제수씨 전화를 받으면 제가 작살 내고 싶은 놈 들 그냥 다 보내줘야 될 게 빤하니 애초에 듣지도 않을 거 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이승도는 그가 불러주는 위치를 기억한 뒤 전화를 끊 고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옷차림은 긴팔에 긴바지라 따로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지만,철 지난 옷들을 넣어두 는 박스를 끌어내 그 안에서 소품을 찾아내느라 조금 시간 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여은태는 통화 내용을 다 들었으면 서도 태평하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중얼거렸다.

   [걱정은 하지 마,선생님. 형은 태국영을 못 이겨.]

   “그래도 거긴 너희 가문의 성체들이 많잖아.”

   [태국영 쪽 성체들도 있겠지. 어차피 비슷한 조건이면 태국영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 서 운전 막 하다가 사고 나지 말고,가서 괜히 싸움에 휩쓸 려서 다치지도 마. 선생님 다치면 또 내가 태국영 물어버 릴 거야.]

   어느덧 그런 걱정까지 세심하게 할 줄 알게 된 녀석이 몹시 기특해서 안아주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여은태의 정수리를 슥슥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은태야. 혹시 그 안에 아프더라도 꼭 참고 있어. 미안해,금방 다녀올게.”

   [그믐인데 뭘. 착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염려 마.] 여은태는 현관까지 배웅을 나와 한쪽 앞발을 들어 흔들 어 보였다. 어느새 훌쩍 어른스러워진 모습에 이승도는 안 심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런 천박한 말을 누가 가르쳤지?”

   여군호는 남영규를 보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는 여군 호의 5촌 조카이자 오늘 거하게 사고를 친 아이의 아버지 였다. 남영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너희 집에선 아이에게 그따위 걸 가십거리랍시고 애한 테 옮어주는 거나?”

   “설마 아이가 저 혼자 그 헛소리를 입에 담진 않있겠지. 대답 안 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입 닫고 있으

면 다나?”

   “죄송합니다,종주님.”

   남영규는 다 죽어가는 낯빛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 에게 그런 말을 가르친 적은 없었다. 다만 무료함에 허덕 이는 집사람이 친척들과 모이기만 하면 이런저런 가십들 을 옮어대느라 정신이 팔리곤 했는데,아마도 그때 나온 이야기들을 아이가 들은 것 같았다. 그의 아내는 오늘 종 가모임에 불참했다. 평범한 인간이 이 강대한 종족들이 바 글거리는 곳을 견디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그에게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 다. 태국영의 시퍼렇게 날 선 안광이 이쪽에서 한 치도 벗 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귀가 이 모든 대화를 훔쳐갈 것 이었다. 남영규는 제 아내를 태국영에게 제물로 바칠 수 는 없었다.

   “애가사고 칠 때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군호는 한심하다는 듯 실눈을 뜨며 혀를 찼다. 남영 규의 고개가 더 아래로 꺼졌다.

   “그래서 이 일을 어찌 책임질 테나. 태국영이 제 아이 의 엄마를 모욕한 걸 그냥 참고 넘어갈 리가 만무하지. 나 같아도 다 잡아서 도륙해버렸을 테니 그를 비난할 수도 말

릴 수도 없구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내 네놈이 집안 단속 못해서 사고 를 쳐 놓고!”

   남영규는 초조함에 입술만 깨물었다.

   “네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네가 수습해라. 아니면 너 희 남 가 가주에게 도움을 청하고 전쟁이라도 치르던지. 난 이 일에 절대로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남영규의 눈에 얼핏 공포가 스쳤다.

   “그,그래도 종주님! 여 가의 체면도 있는一”

   “엄밀히 말해 넌 내 후손이랄 수도 없는 촌수다. 게다 가 내 체면은 네 천지 분간 못하는 아들놈이 이미 다 깎아 먹었지. 천박하게 입 놀린 애새끼 아비 하나 구하면 내 구 겨진 체면이 회복이 된다더나?”

   “매달리지 마라. 추하다.”

   여군호는 살벌한 기백을 부리며 단호하게 돌아섰다. 태 국영을 향한 그의 감상이라면 호보다 불호에 더 가까웠으 나,이번만큼은 아무리 편견의 눈으로 상황을 보아도 그 를 탓할 거리가 없었다.

   하필 아이 엄마에게 그렇게 모욕을 줄 건 무언가. 천하

고 저열하기가 짝이 없다. 무엇보다 그런 못마땅한 일을 감싸주려고 달려들기에는 흘려야 할 가솔들의 막대한 피 가 너무나 아까웠다.

   태국영은 집요하고 잔인한 남자였다. 고작 이런 명분 도 없는 일로 인해 계획도 없이 충돌하는 것은 기름통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제 직계도 아 닌 놈 하나 구하자고 종가의 친위대를 투입시킬 수도 없 는 노릇이었다.

   친위대를 투입시킨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이 좋게 풀 려 친위대의 무력 대응에 태국영이 한발 물러난다손 쳐도 남영규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필경 태국영 은 끈질기게 기회를 엿보다 그 명줄을 끊어놓고 말 것이 다. 무엇을 해도 남영규는 순간적인 면피 이외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여군호는 일족의 수장으로서,그리고 한 가문의 가주로 서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득 없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쓸모없는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 다.

   “종주님.”

   돌아선 여군호의 앞에 건장한 남자가 바람처럼 나타났 다. 태호연이었다. 존재감 없이 곁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

영이 태호연의 정면을 가로막은 것은 그 직후였다.

   영은 경고하듯 가슴께까지 한 손을 올려 태호연과 여군 호와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에 그쳤다. 태호연에게서 살기 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아. 물러나라.”

   기척도 거의 없이 순식간에 접근한 태호연에게 내심 놀 라 있던 여군호가 점잖게 명령했다. 영은 군소리 없이 비 켜섰다. 태호연이 성큼성큼 다가와 정중하게 청했다.

   “잠시 제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여제운,너도 잠깐보자.”

   이것도 만만치 않군.

   역시 태 가 놈들 핏줄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여군호는 새삼 태호연을 뜯어보다 그의 뒤를 따랐고,시종 침묵을 지키던 여제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멀지 않은 구석 에 멈춰 섰다. 태호연이 무형의 막을 쳐서 소리가 나가지 않게 단속한 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엿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여 가에서 개입하지 않기로 한 건 잘하셨습니다. 일이 커지는 건 저 역시 바라지 않으 니까요. 친위대를 움직이실 생각도 없으신 게 맞습니까?”

   태호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여군호가 남영규

를 위해 제 친위대를 소모시키면서까지 종주의 인장을 포 기할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 로 여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를 끼어들게 한들 불길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난 그런 무가치한 일에 내 수족들과 가솔들의 피를 낭비하 고 싶지는 않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헌데 연회장을 아무리 둘러봐 도 투견이 보이질 않는군요.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남강우 말인가? 그 녀석은 지금 위층에서 일찍부터 와 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태호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놈이라면 남 가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 래도 놈은 금수에 아주 가깝지 않습니까.”

   여군호는 태호연이 남영규의 사촌 형제인 그를 무슨 의 도로 찾는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의문을 눈치챈 태 호연이 지체 없이 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띄웠고, 문자를 찍어 내려갔다. 제가 쳐둔 선을 넘을 수 있는 귀는 태국영 분이었다. 이것은 태국영의 귀를 잠시 속이기 위 한방편이었다.

   『제가 승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도착하기까진 대 략 삼십 분,넉넉히는 사십 분. 투견을 중심으로 남 가 녀

석들에게 우리 가주 주의를 끌며 시간을 흘리라고 언질을 비쳐두십시오. 태국영은 승도 말을 아주 잘 듣습니다. 그 가 오면 상황은 바로 종료될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 쳐도 그 정도를 버틸 거라곤 자신 못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안에서 즉시 투입될 수 있는 남 가의 전력은 고작 네다섯밖에 되지 않지요. 불가능할 겁니다.,,

   이의를 제기하며 끼어든 것은 여제운이었다. 태호연은 틀리지 않은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금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건 남강우분이다. 네 말대로 지금 도착해 있는 남 가 놈들을 다 동원해도 우 리 가주를 상대론 십 분도 못 버티겠지. 하지만 남강우는 아주 노련해. 제 한계도 상대의 한계도 잘 꿰뚫는 놈이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 무슨 수를 쓰든 승도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 가주를 이 호텔에 묶어둬야만 해.』

   “만약,그 전에 태국영이 다 끝내 버리면.”

   『그땐 너랑 내가 시간을 끌어야지. 정 못 막겠으면 내 가 승도를 빌미로 협박을 하면 어떻게든 먹히긴 할 거야. 물론 그 후에 나는 엄청나게 괴로워지겠지만.』

후환이 암담하긴 했으니 태호연은 진심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은 상황이 오면 제가 몸을 던져 제지할 생각이었

고,그조차 먹히지 않는다면 결국 이승도의 이름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서 애기하기 창피하기 그지없는 사실이지만,

‘승도한테 이를 거야.’ 한마디면 일단 태국영은 머릿속으 로 주판을 튕기느라 손속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 이에 슥삭 더 시간을 소모하면 될 거라는 것이 태호연의 계산이었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몇 초 간 생각에 잠긴 여제운이 담 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예 제가 처음부터 남강우를 돕겠습니다.”

   “괜찮겠나.”

   “이건 우리 종주님 얼굴도 걸린 문제이니 구색을 맞추 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여군호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 장남 을 이런 하찮은 일의 수습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럴 필요 없다고 딱 자르려는 순간 여제운은 남강우를 찾아 오겠다며 곧장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여군호 는 죽일 듯이 남영규를 쏘아보았고,그런 그에게 태호연 이 조심스레 언질을 주었다.

   “종주님. 지켜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솔들과 함께 로비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네. 장남이 피 터지는 꼴 보면 내가 참을 자신이 없을 것 같으니.”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여군호에게서는 여전히 삼십 대처럼 젊고 강렬한 정력이 느껴졌다. 그의 냉담한 눈동자 에 시린 섬광이 스쳤다.

   “미리 말해두지만,제운이는 우리 여 가의 차기 가주다. 명분 없는 싸움에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나 만약 이 자리 에서 제운이가 잘못된다면 태 가 역시 내 가문과 종가의 친위대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할 거야. 그 점 꼭 명심 해 두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런 걸 원하는 건 아 니라고.”

   “그래. 난로비에서 기다리지.”

   여군호는 바짝바짝 타오르는 기세로 돌아섰다. 그가 남 영규에게 뭐라 몇 마디를 쏘아붙인 뒤 일단의 무리를 이끌 고 사라지자 초대객들의 대부분이 빠져나간 연회장은 더 썰렁해지고 말았다.

   태호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태국영의 곁으로 돌아갔다. 태국영은 마뜩찮게 태호연을 흘겨보았다.

   “내 앞에서 아주 대놓고 작당 모의를 하고 와?”

   “그래. 너랑 싸우는 팁 좀 알려주고 왔다. 너무 기우는

거 좀 별로잖아.”

   태호연은 낯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광기 잠재우려고 이승도가 출동했다는 말은 당연히 하 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놈은 이곳에 모인 남 가 놈 들을 빠르게 몰살시킨 뒤 튈 게 뻔했으니.

   “가주 잘 패라고 교육시키고 왔단 말이야? 내가 가솔 을 잘못 뒀나.”

   “너도 상대가 좀 강해야 팰 맛 날 거 아나. 서로서로 좋 은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

   “흐음…… 투견에 여제운이라. 재미는 있겠어.”

   태국영은 더 묻지 않았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 분 남았네. ……이상한데. 이거 고장 난 거 아나?

왜 이렇게 시간이 늦게 가지?”

   손목시계를 툭툭 쳐대며 투덜대는 목소리는 여전히 감 미롭고 울림 좋은 저음이었는데,너무 평온해서 그게 도리 어 공포스러웠다. 태호연은 혀를 차며 질린 듯 고개를 저 었다. 애들 어릴 때 교육이 이래서 중요한 거지 싶었다.

   첫 단추만 잘 꿰었어도 제수씨가 잘 품어줬을 텐데. 태호연이 속으로 한탄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흘러갔다. 약속 시간이 딱 10초가 남았을 때,태국영 은 느긋하게 손목시계를 풀어내 태호연에게 건넸다.

   “이거 잘 간수해. 유모가 아끼는 시계라 망가지면 피곤 해져.”

“난 자신 없으니까 다른 놈한테 부탁해.”

   “좆 같이 세고 성격도 좆 같은 나 혼자 해결하라며. 어 차피 갤러리로 있을 거면서 뭘 엄살이야.”

   “저쪽 너무 밀리면 내가 너 뒤통수칠지도 모르거든. 그 때 부서질지 누가 알아.”

   태호연이 장난인 듯 빈정대며 대꾸했으나 사실은 진심 이었다. 남강우는 제 알 바 아니었으나 정말로 여제운이 죽을 것 같으면 필사적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어 물을 흐려 놓을 셈이었다.

“내 시계 누가 맡아줄래?”

   태국영은 뒤를 한 번 쭉 돌아보며 물었다. 태 가의 남자 들은 하나같이 그의 시선을 피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태국영은 어쩔 수 없이 만만한 태호연의 손목을 강제로 끌 어왔다. 태호연은 격렬히 거부하며 온 힘을 다해 부리쳤으 나 금세 다시 잡혀서 강제로 시계가 채워지고 말았다. 그 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나 유모랑 척지기 싫은데.”

“갤러리로 착하게 있으면 척질 일 없으니 걱정 마.” 태국영이 알밉게 조언하고 뒤돌아섰다. 그럴 일이 생

길 것 같으니 문제지,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그가 말 했다.

   “자. 십 분 지났는데. 책임질 놈 정했어?”

   태호연은 재발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남강우가 여제운에게 끌려오다시피 연회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제 대로 설명도 해 주지 않은 건지 그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 색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태호연은 뒤로 훌쩍 날아 갤러리 무리에 합류했다. 그 리고 무심코 장내를 훑어보다 어 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어 째 가장 중요한 남영규가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태국영 역시 그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미묘 하게 낯을 일그러뜨린 채 태호연을 돌아보며 험악하게 눈 을 부라렸다. 태호연은 억울함에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 렸다.

   오H! 내가 뭘!

   태국영이 눈으로 대답했다.

   우리 형님이랑 애기하는 사이에 그 새끼 튀었잖아.

   태호연은 나도 몰랐던 일이라고 고개를 휘휘 저었고, 태국영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재킷을 벗었다. 어차피 누 가 먼저냐의 차이지 그깟 놈 하나 쫓아가서 육포를 만드 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셔츠의 손목 단추를 풀

어내는 그에게,대강 분위기를 눈치챈 남강우가 점잖게 청 했다.

   “미안한데,나 지금 알코올 해독 중이거든. 일 분만 기 다려 주지 않겠어?”

   태국영은 ‘저 변태가 또.’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이 어지간히 들이부은 모양이 었다. 그때 태호연이 뒤에서 야유했다.

   “치사하다,태국영. 술독에 빠진 상대를 겨우 일 분 기 다려 주는 거나!”

   저건 아군이야,적군이야.

   태국영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접고 돌아보았다. 태호연 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기꺼이 그의 자존심을 긁 어 놓으려 했지만,뜻밖의 방해가 있었다.

   “아니. 일 분이면 충분해.”

   그건 시간을 벌수록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남강우였 다-

   아 저 변태 새끼가 진짜.

   태호연은 정말 손발 안 맞고 재수 없는 새끼라고 속으 로 욕을 하며 혀를 찼다. 죽네 사네 피똥을 싸 봐야 정신 을 차릴 거다. 더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남강우가 아니라 여제운이었다. 여

군호의 경고대로 여제운이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그 뒤 는 양쪽 모두에게 재앙이 될 터였다. 여 가의 힘도 절대 무 시할 수 없지만,그보다는 종가에 귀속되어 있는 친위대 가 더 골치였다.

   아주,아주 골치 아픈 놈들이니까.

   그동안 충정을 다해 모시던 종주의 마지막 뜻을 이루 기 위해서라면 자살 폭탄 테러도 충분히 감수하는 것이 그 친위대의 특성이었다. 그래서 종주와 마찰을 빚는 것 은 아주 위험한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함을 뜻했 다. 어떻게 해서든 여 가와의 전쟁만큼은 반드시 피하려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생각하는 사이 빠르게 1분이 흘렀다. 와이셔츠까지 완 전히 벗어 던진 태국영이 가볍게 눈가를 허물며 말했다.

   “자,그럼. 시작해 볼까?”

   관능적인 곡선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얗게 드러난 이 가 섬뜩하게 번득거렸다.

   태국영을 둘러싼 소문은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지배적 인 의견이었다. 누구도 본 적이 없으니 그의 실체를 묘사

해 줄 이가 없고,그와 싸워 살아남은 자가 없으니 그의 강 인함을 증언해 줄 이도 없었다.

   성질머리가 나쁘고 지나치게 금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증명된 것이 없었다. 그럼에 도 그 낭설들을 맹신하는 자들은 있었으나,반대로 그 신 빙성을 의심하거나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깎아내리고 파 헤치려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종주인 여군호조차 반년 전 까지는 태 가의 조작극을 의심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 불 신이 꼭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남강우는 조금 특이한 경우로,그 둘 어느 곳에 서도 속해 있지 않는 부류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 만을 믿었기에 보이는 게 없으니 신뢰도 불신도 없었다. 알고자 하는 욕구도 일지 않아 관심을 끄고 살았다.

   아무리 날이 좋은 칼도 칼집에서 뽑혀 나오지 않으면 그 가치는 무의미했다. 그가 태국영을 우연히 눈에 담는 일이 있다면,그것은 쓸모를 잃은 칼을 바라보는 무심함 에 가장 가까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남강우는 내심 감탄을 연발했다. 지금 감상으로는 세간 의 소문들이 과대평가는커녕 도리어 과소평가되어 있다 고 봐야 했다. 태국영은 그를 대적하고 있는 이들과 달리

홀로 말끔한 인간의 외형을 유지하고도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폭발적인 광기는 오싹할 만큼 차가웠고,흥분으 로 일렁이는 두 눈은 자비 없이 계산적이었다. 이런 놈이 그간 왜 술하게 저를 갉아먹으려고 용을 쓰는 놈들을 모 른 척 내버려두고 있는 건지 의아해질 지경이었다.

   “너 왜 이렇게 버텨. 적당히 눈치껏 몸사리지.”

   태국영은 곤란한 듯 웃으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잠시 딴생각에 팔린 사이 조금 전 저만치에 있던 그가 불쑥 코 끝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남강우는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뒤틀었다. 칼날 같은 바 람이 눈썹 위를 스쳤다. 물리적인 접촉은 없었던 듯한데, 기이하게도 마치 칼에 벤 듯 깊은 자상이 남았다.

   뜨끈한 피가 한 줄기 주르르 흘러 안구에 고여 들었다. 상처는 평소처럼 금방 아물지 않고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눈을 깜빡일 여유는 없었다. 태국영이 그대로 손바닥을 펼 쳐서 위로 휘둘러 남강우의 턱을 후려쳤다. 남강우는 턱뼈 가 일부 함몰되는 와중에서도 태국영의 반대쪽 팔뚝을 감 아 아래로 꺾었다.

   “글쎄. 그건 내성미랑 안 맞아서.”

   뼈가 부러질 법한 각도가 되었을 즈음 태국영은 가분하

게 바닥을 굴러 허공을 돌았다. 남강우는 곧장 그 움직임 을 쫓아 몸을 틀었으나 그의 팔은 이미 유연하게 빠져나 간 뒤였다.

   남강우는 고민하지 않고 재발리 뒤로 도약해 그와의 거 리를 벌렸다. 남강우가 사라진 자리엔 태국영의 다리가 도 끼처럼 바닥 위를 횡으로 갈랐다. 아주 간발의 차이였다. 저것에 걸려 쓰러졌으면 그는 곧장 뒤꿈치를 찍어내려 가 슴을 부쉈을 것이었다.

   비록 신체능력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나 그의 동선은 읽 어낼 수 있었다. 무엇을 노리는지,다음에는 어디를 노릴 것인지,그 정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수한 경험으로 제련된 감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다만 알면 서도 피하기가 버거울 분이었다.

   “그냥 술 좋아하는 변태새낀 줄 알았더니.”

   태국영이 미묘하게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쪽 무릎만 바닥에 대고 앉은 방만한 자세였으나 도저히 뚫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무너뜨릴 방법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강 우는 그것이 조금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즐거웠다.

   “너,여 가 피가 짙구나. 냄새는 낯선데 겉모습이 딱 그 쪽이야.”

   태국영은 남강우의 본신을 느리게 훑어본 뒤 짧게 평했 다. 군데군데 인간 체형의 근육들이 남아있었으나 아주 짐 승의 모습에 가까운 몸뚱이엔 은빛 털이 그의 등과 다리 를 배곡히 덮고 있었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로,커다랗게 찢어진 짐승의 눈과 강인한 이발의 모양이 제가 아는 누군 가를 조금 닮아 있었다.

   “나는 네 진짜 모습이 궁금한데. 보여주지 않겠나?”

   남강우는 느리고 깊게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태국영 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볼일 없을 거야. 그 누구도.”

   그리고 그때 그의 뒤에서 육중한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남강우의 눈썹이 꿈틀 좁아졌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 고 재생 부위에 피를 쏟아 붓고 있느라 그것을 차마 막을 겨를이 없었다.

   멍청한 새끼.

   본의 아니게 웬 허약해 빠진 놈들을 구하느라 이리저 리 뛰어다녔던 남강우가 이번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늦었지?”

   남강우의 속마음을 훤히 옮은 태국영은 달콤하게 웃는

낯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상대가 있을까 싶었다.

   기습을 노린 남 가의 마지막 희생양이 그대로 태국영 의 손아귀에 목을 물렸다. 남자는 바닥에 거세게 얼굴이 처박혔다. 태국영은 남강우를 빤히 보는 채로 손가락을 오 그라뜨렸다. 손톱조차 빼지 않은 손가락 끝이 살갗을 뚫 고 들어갔다. 남자의 목에서 피거품이 솟구치며 뼈가 부러 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남강우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태국영은 또 순식 간에 사라졌다. 허망하게 빈 공간으로 여제운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텅 빈 땅만 짚은 여제운이 숨을 헐떡이며 고 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흐른 피가 그의 한쪽 시야를 가렸 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남강우는 태국영의 기척을 찰나 간에 찾아냈다. 태국영 과 여제운의 거리는 저와 여제운의 거리보다 더 벌어져 있 었다. 남강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닿을 수 있다.

   이 애송이 새끼야,좀 보고 달려들어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 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태국영은 허공에서 나타나 대각선 으로 여제운을 후려 찼다.

   픽,발끝에 묵직하게 걸려야 할 감각은 지나치게 가벼 웠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영은

여제운의 피가 쏟아진 자리에 묵직하게 착지했다.

   ‘‘크윽…흡,크윽……!,,

   그의 손엔 여전히 남 가의 수컷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 고기처럼 사로잡혀 생애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남 강우가 거칠게 낚아채서 던진 여제운은 저만치에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남강우는 태국영을 똑바로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잔뜩 굽힌 무릎과 탈력한 듯이 늘어진 두 팔,무게중심을 극도로 낮춰 탄력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좋은 자세였다.

   남강우는 처음부터 태국영의 전력을 저보다 한참 우위 에 둔 채로 방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유일하게 한 차 례도 잡힌 적이 없는 남자였다.

   태국영의 입술이 조금 더 부드럽게 휘었다.

   “마지막 경고야. 적당히 하지 않으면 이 다음은 네가 될 지도 몰라.”

   태국영의 팔이 군더더기 없이 야만적으로 움직였다. 이 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남자는 그대로 태국영에 의 해 갈기갈기 찢겼다. 말 그대로,사지가 종이처럼 찢어지 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비현실적으로 빚어진 얼굴에 뜨거 운 핏물이 눈꽃처럼 맺혔다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피에 젖은 맹수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두개골을 두 손으로 움켜

쥐어 바스러뜨렸다.

   투둑. 특-

   사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비참하게 부서진 조각 들이 그의 곁에 떨어져 내렸다. 역한 피비린내가 물안개처 럼 바닥을 휘돌았다. 태국영은 천진한 아이 같은 얼굴로 ‘이래도 더 할 거야?’하고 물었다. 그때 남강우는 비로소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좀 아네. 본보기는 그렇게 보여야지.”

   태국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대꾸 는 없었다. 다음 순간 옆구리를 노리고 은빛 섬광이 짓쳐 들어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모처럼 여제운이 좋은 타이밍을 잡았다. 내심 그를 칭 찬하며 남강우 역시 크게 바닥을 박차고 전방으로 솟구쳐 나갔다. 처음으로 허점이 보였으니 그를 놓칠 리가 없었 다.

   태국영은 짧게 혀를 차며 훌쩍 뛰어올랐다. 여제운의 손톱은 그의 뜨거운 상체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여제 운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연회 장의 높은 천장에 거의 닿을 만큼 솟았던 태국영은 그대 로 낙하하며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했다. 여제운은 이번에 도 공격이 무산되었음을 깨닫고 옆으로 방향을 틀어 피했

   태국영은 동요하지 않고 다시금 바닥을 내디뎠다. 처음 부터 목표는 여제운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여제운에게 서 빗겨나 있었고,그의 덫은 남강우를 기다렸다.

   남강우는 삽시간에 태국영의 등 뒤를 점령했다. 그가 태국영의 심장에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 손을 찔렀다. 길 게 뻗은 손톱이 섬뜩한 궤적으로 허공을 찢었다.

   퍼억.

   핏방울이 튀었다. 오른손의 손톱 네 개가 태국영의 팔 뚝에 박혔다. 빗나갈 거라곤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던 남강 우의 얼굴에 흐린 동요가 비쳤다. 남강우는 그 순간 깨달 았다. 최초의 빈틈은 저를 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빛처 럼 빠른 속도로 팔을 회수했으나 태국영이 조금 더 발랐 다.

   “너 잠깐 쉬고 있어.”

   태국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피가 점점이 튄 그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냉혹한 살기가 살얼음처럼 굳어 있는 무표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훅 가까워졌다.

   남강우는 그의 무릎이 늑골로 날아오는 순간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느긋하게 즐기던 사냥놀음은 끝났다. 저

를 제외한 남 가의 수컷들이 모두 폐기물이 된 지금 태국 영은 흥미를 잃었다.

   처음으로 피를 보면서까지 내준 그의 사정거리 안에 남 강우는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어느 곳으로 몸을 날려 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강우는 결국 두 팔을 앞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의 강 철 같은 다리는 팔 두 개를 부러뜨리고도 가슴까지 닿아 왔다. 다행이 부러진 뼈는 내장까지 닿지 않았지만 그 충 격에 뒤로 거칠게 내던져졌다. 그가 날아간 방향은 태 가 의 수컷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었다.

   태호연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파도에 휩쓸린 마 냥 날아오는 남강우를 향해 가볍게 몸을 띄웠고,허공에 서 그의 몸을 받아 충격을 완화했다. 낯선 접촉이 있었음 에도 태국영이 작정하고 휘두른 것에 너무 심하게 후려 맞 은 남강우는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를 짐짝처럼 두 팔에 받아든 태호연은 관성에 몸을 맡겨 뒤로 날아갔다.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벽까지 닿은 뒤 에야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남강우의 무게와 속도로 인해 벽에 부딪힌 등이 아팠다. 아픈 건 싫은데 그게 남을 지키기 위해 아픈 것이라 더 싫었다. 그는 정지하자마자 바로 놈을 바닥에 버리고 삿대질을 했다.

   “이 변태새끼야. 그러니까시간 벌어줄 때 좀 버티지.”

   남강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몇 차례 거칠게 심호흡을 했 다. 불덩이 같은 열기가 그를 중심으로 자작자작 일렁거렸 다. 부러진 뼈가 제 자리를 찾아가 반쯤 아물었을 때,그 는 한마디를 남기고 저만치 달려나갔다.

   “글쎄 그거 내 성미에 안 맞는대도.”

   태호연은 다소 질린 낯으로 남강우를 응시했다. 정말 징글징글한 새끼였다. 이 정도 됐으면 조금 몸을 뺄 법도 한데 그 배짱 하나만큼은 참으로 높게 봐 줘야 할 듯싶었 다-

   아차. 다른 생각을 할 때가.

   태호연은 정신을 일깨워 안력을 돋웠다. 불안함이 점 차 커져 초조해졌다. 이제껏 여제운과 남강우의 방해를 적 당히 부리쳐내며 남가 놈들부터 때려잡느라 바빴던 태국 영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제 발목을 잡 는 둘에게 슬슬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중이었다.

   태호연은 손목시계를 살펐다.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 지만 이승도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안 그래도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을 그를 재촉할 수도 없고 그저 속이 탔다.

   정작 우리 이경이 울린 새끼들은 어딜 가고.

   태현리의 품에 코알라처럼 안겨서야 겨우 울음을 그치

던 녀석을 떠올리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 귀여운 걸 평 핑 울게 만들다니,이승도가 이 싸움을 말려도 그놈 직계 는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그런데 재는 왜 저렇게 무모해. 뒤지려고 용을 쓰네.

   태호연은 여제운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남강우가 기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 여제운을 몇 번이나 건져주지 않았 더라면 이미 제가 한참 전에 끼어들었을 것이었다.

   태호연은 정말 내키지 않았으나 슬슬 제가 미꾸라지가 되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유모가 아낀다는 시계를 풀어 억지로 다른 이에게 떠넘겼다. 그리 고 언제 튀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몸을 긴장시 킨 채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오토바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쪄다 보니 익숙해진 케이스였다. 오늘 그가 몰고 나온 오토바이는 어 느 날 갑자기 리미티드 에디션 어쪄고 하며 태국영이 제 집에 박아둔 것이었다.

   처음만 해도 오토바이 하면 죽음의 스피드가 떠올랐다. 싫다고 기를 쓰고 버티다 억지로 끌려 나갔다. 그러나 막

상 태국영의 보호 아래서 긴장한 채 몰아보니 생각보다 느 린 스피드로도 안정적으로 나가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었 다-

   얌전히 허리에 두 팔을 감은 태국영을 뒤에 태우고 따 뜻한 바람을 맞으며 강변을 달리기도 했다. 둘 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 공기를 편안히 즐길 수 있어서 나름 즐기기 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의 이승도는 아슬아슬한 스피드로 차 사이 를 요리조리 잘도 헤쳐 나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가슴이 뜨끔거리는 순간이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이내 적응이 되 었다. 철렁했던 뱃속이 뜨겁게 올라오는 그 감각에서 묘 한 짜릿함이 있었다. 이런 맛에 비행청소년들이나 철없는 어른들이 중독되는 거구나 싶었다.

   이승도는 태호연이 알려준 호텔의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헬멧을 그립 바에 걸어둔 뒤 목도리를 눈 아래까 지 칭칭 감았다. 그리고 바로 입구를 향해 달려가려는데 낯익은 남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그를 맞았다.

   “저 기억하십니까? 태성문입니다.”

   “네. 알아요.”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상황이 급하니 일단 가시죠.”

   남자가 앞장서서 회전문을 밀며 이승도를 에스코트했

다. 로비는 심상찮은 기세로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이라 도 삐끗하면 폭발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정적이었다. 차 분하게 앉아 동상처럼 굳어 있는 남자들에게선 모두 숨 막 히는 열기와 투기가 느껴졌다.

   은태랑 비슷한 냄새 같다. 그럼 이들은 다 여 가의 가솔 들인가.

   낯선 기척에 남자들의 눈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향했 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 끝에 아프게 찔린 이승도는 홈 칫 몸을 떨었다. 목도리를 더 끌어올리며 고개를 숙이려 는 순간,태성문은 ‘잠시 실례를.’하며 이승도의 허리를 안 아 제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했다.

   태성문에 의해 엘리베이터에 태워지고 나서야 이승도 는 거친 날숨을 흘렸다. 아무리 태국영의 가드가 있다고 는 하지만 여전히 짐승들의 냄새는 껄끄러웠다.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췄다. 태성문은 문이 열리자 그대로 이승도를 안고서 연회장에 들어갔다.

   “그럼 저는 이만.”

   그는 깍듯이 인사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승도는 그 를 돌아볼 정신조차 없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뜬 눈으로 말을 잃고 있었다.

   시야가 흐렸다. 물리적 충격으로 망가진 스프링클러가

세찬 물줄기를 바닥에 부리고 있었다. 핏물이 강처럼 흘 러 신발을 적셔 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체의 조각 들이 부서진 집기들 속에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순식간에 흠뻑 젖은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피 냄새가 물안개에 섞여 역하게 콧속에 눌어붙어 왔다.

   그때 섬뜩하게 빛나는 검은 덩어리가 허공을 가로로 베 어내며 저만치 날아갔다. 퍼억,엄청난 충돌음이 일며 귓 가가 정 울렸다. 이승도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오한이 뼈 를 죄었다. 그는 유일하게 말끔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국영이었다. 그가 막 여제운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박 아 넣고 그 턱을 무릎으로 올려 치는 순간,익숙한 남자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호연 씨?

   이승도는 아연실색해서 명하니 입을 벌렸다. 너무 빠르 게들 움직여서 자세히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여제운의 얼 굴을 으스러뜨리려던 태국영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 태호 연이란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빠각,소름 끼치는 굉음에 떠밀려 이승도는 뒷걸음질 을 쳤다. 태국영이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후려친 팔뚝이 태호연의 정강이뼈를 부수는 소리였다. 잽싸게 저만치 몸

을 피한 태호연은 무섭도록 온기 없는 얼굴로 집중해 있었 다. 그간 몇 번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웃으며 시답잖은 농 담을 건네던 것과 천양지차였다.

   여제운의 손톱은 태국영의 심장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 움직임은 이승도에게도 빤히 보일 만큼 느렸다. 그는 이미 변이가 풀려 있었다.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하며 입술은 파리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의 손톱을 태국영은 맨 손가락 사이로도 무리 없이 막아냈다. 그의 피부에서도 선혈이 튀었으나 그는 맞물린 손을 그대로 꺾어 휘둘렀다. 여제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 그러지는 순간,은빛의 몸체가 태국영을 향해 하살처럼 꽂 혀 들었다. 짐승처럼 변한 그의 얼굴에서 기형적으로 크 게 찢어진 은빛 눈이 번쩍였다.

   태국영의 뒷덜미를 노린 칼날 같은 무기가 살갗을 베어 내기도 전,태국영은 홀연 자취를 감췄다. 여제운과 반 짐 승 상태의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태국영이 허공에 서 나타나 그대로 무섭게 포효했다.

   아니다. 포효라는 단어는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기합 과도 같은 짧은 소리를 흘렸을 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화염 같은 돌풍이 터져 나갔다. 여제운과 반 짐승은 저희들을 압사시킬 듯 쏟아져 나오는 기의 폭풍

에 황급히 주변으로 몸을 날렸다.

   “조심!”

   그때 어느새 다가온 건지 태호연이 이승도의 앞을 막아 섰다. 이승도는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주저앉고 말았다. 그 의 팔이 허리를 부러뜨릴 듯 감았고,그의 나머지 손은 이 승도의 뒷머리를 감싸 그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태호연의 등 뒤에서 거대한 바람이 위협적인 조각들을 몰고 왔다. 그것은 빗방울이 없는 폭풍우와 같아 이미 엉 망이 된 실내를 다시금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나무판과 유리조각들이 정처 없이 허공을 찢으며 날아 왔고,그것들은 모두 태호연의 뒤에서 부딪쳐 바닥으로 떨 어져 내렸다. 이승도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품 에 뒤덮이듯 안긴 채 얄은 공황에 빠져 몸을 떨기만 할 분 이었다.

   스프링클러가 꾸역꾸역 토해내는 물줄기는 태풍처럼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튕기듯 공중에 떴 던 반 짐승이 강한 여파에 휩쓸려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구겨진 깡통처럼 기이한 각도로 처박힌 그의 주변으로 또 새빨■간 피가 바닥에 고인 물로 섞여들었다.

   여제운은 곧장 따라붙은 태국영이 휘두른 팔꿈치에 가 슴을 맞아 날아갔다. 핏덩이를 토해내는 여제운의 몸이 부

서진 잔해들을 홍해처럼 가르며 요란하게 미끄러졌다. 그 는 고작 이승도의 한 발자국 앞에서 멈췄고 그대로 축 늘 어졌다.

   태국영은 제 복부를 노리고 달려든 반 짐승의 머리통 을 가차 없이 후려 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그에 게 태국영은 바람처럼 다가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어깨가 으스러졌다.

   “이런……!”

   이승도를 놓고 돌아섰던 태호연이 크게 당황했다. 그 는 여제운의 곁에 앉아 다급히 그 상태를 살펴보았다. 큰 일이었다. 태호연의 얼굴 위로 짙은 낭패감이 스쳤다. 이 승도를 보호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여제운이 치명 상을 입고 말았다.

   “야,여제운. 여제운! 정신 차려!”

   태호연은 여제운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으나 그는 반응 이 없었다. 이승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제가 넋을 놓 고 있던 것은 대략 10여 초밖에 되지 않았는데,그 사이 에 두 남자가 생사의 고비에 오른 것이었다.

   태국영은 싸늘하게 굳은 낯으로 뒤를 돌았다. 그의 머 리카락을 흠뻑 적신 물방울이 표창처럼 허공을 휘돌았다. 먹잇감을 찾는 그의 후각이 여제운을 단박에 찾아냈다.

   잔뜩 흥분해 있는 그는 여제운의 뒤편에 서 있는 이승 도를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매끈하고 아름다운 얼굴 에 상시 걸려 있던 미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짐승 처럼 날 비린내 나는 눈엔 오로지 파괴적인 살기만이 가득 했다.

   이승도는 저런 눈을 한 태국영을 알고 있었다. 태국영 은 어쪄면 이 자리의 누구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인지도 몰 랐다.

   자신은 그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 이 날카로이 저며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전신 이 떨려왔다.

   태국영이 물줄기를 베어내며 날아왔다. 칼날 같은 살기 가 해일처럼 떠밀려왔다.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한 발 앞 으로 튀어 나갔다. 그대로 주저앉아 바닥에 늘어져 있던 여제운을 끌어올려 품에 안으며 소리쳤다.

   “국영아,안 돼!”

   그 순간,시간의 흐름이 한 남자에게서 빗겨갔다. 태국 영은 저주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굳어듦을 느꼈다. 뜨겁 게 달아오른 몸뚱이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살을 에는 한 기가 피 대신 혈관을 콸콸 뒤흔들었다.

   몽롱한 정신에서도 어렴풋이 의문을 떠올렸을 때였다. 태국영은 여제운을 품에 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승도 를 뒤늦게 발견했다.

   크게 뜬 두 눈이 찰나 허공에서 격돌했다. 이승도는 새 파랗게 질려 겁먹은 표정이었고,흠뻑 젖은 얼굴에서 눈 물 같은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승도?

   태국영은 오늘 처음으로 크게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방향을 틀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충돌의 충격을 여제운에게 최대한 떠넘기는 수밖에 없 었으나,그것으론 부족했다.

   태국영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목에서 피고 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태호연!”

   그때 태호연이 덩치를 날려 온몸으로 부딪쳐 왔다. 태 국영은 머리가 뒤엉킨 나머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늑골이 부서졌으나 태호연은 신음 하나 없이 버 텨내며 나직이 속삭였다.

   “안 불러도 온다,이 새끼야.”

   다음 순간 태국영은 태호연과 뒤엉켜서 사선으로 빗겨

가 벽에 처박혔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하나로 뭉친 두 남자에 의해 더 작 은 조각들로 바스러졌다. 먼지는 작게 일어나다가 물줄기 에 모두 잠겨 들었다. 한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멈춰 있 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승도였다. 품 안의 몸이 놀라우리만치 서늘했다. 이승도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재생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망가 져 버린 것이었다.

   이승도는 여제운을 바닥에 눕히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의 코끝으로 후들거리는 손을 가져가 봤으나 숨이 나오 지 않았다. 넝마가 된 그의 셔츠 사이로 새발간 피가 역류 하고 있었다. 눈앞이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심장이 터졌다. 그는 죽을 것이다.

   그 순간 서럽게 울던 자신을 쩔쩔매며 위로해 주던 여 은태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이 남자는 제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의 형이었 다. 둘의 사이가 좋건 나쁘건 하나분인 형제였다. 여은태 는 제 형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을 테지만,그 모습을 보며 이승도는 저 스스로가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

가 이 남자가 죽으면,태호연이 우려했던 여 가와의 전쟁 이 기어코 발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 많은 이들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몰아갈 그 전쟁.

   그 안에서 국영이는 무사할까. 이경이는. 내 아기는 다 치지 않을까. 내 아기를 몹시도 예뻐한다는 호연 씨와 그 의 가족들은,국영이를 따르는 그의 수많은 가솔들은.

   망설임은 짧았다. 이승도는 팔을 걷어붙이고 늘어져 있 는 여제운의 가슴을 두 손으로 내리눌렀다. 손바닥에 그 의 뻥 뚫린 늑골과 벌어진 피부가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 히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죽지 말아요.”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송곳처럼 목덜미와 등허 리를 후벼 팠다. 전신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마치 제가 과 다출혈에 빠진 것처럼 현기증이 아득하니 머리를 채웠다.

   “죽지말아요,제운 씨.,,

   이승도는 거의 우는 것처럼 간절히 속삭였다. 회복은 여전히 더뎠으나 출혈은 점차 멎고 있었다. 여제운의 의식 이 깨어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이승도는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내리고 다시 여제운의 가슴을 압박했다. 박동은 약했지만 터졌던 심장이 점차

제 모양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누워 있어요. 심장이 손상됐어요. 더 늦었으면 큰일 났 을 거예요.”

   어차피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여제운은 숨을 몰아 쉬며 이승도를 올려다보았다. 명하니 뜬 눈 안으로 차가 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가,옵니까.”

   판단력도 인지력도 상실한 여제운이 뜬금없는 것을 물 었다. 날숨은 뜨겁고 거칠었으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 했다.

   “쉬. 가만히 있어요. 말도 하지 말고,움직이지도 말고.

   여제운은 이 상황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승도는 지금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량하고 깊은 눈으로 자신을 세 심히 굽어보고 있었다. 그가 이제껏 마주 봐 왔던 이승도 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그저 순수한 염려가 가득한 눈이 었다.

   혹시,이건 꿈인가.

   그 순간 오한이 든 듯 몸이 떨려 왔다. 형용할 수 없는 싸늘한 감각이 심장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여제운 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희열

에 가까웠다. 생애 처음 겪는 그 괴이쩍은 자극이 선득하 게 척추를 꿰뚫었다.

   여제운은 떨리는 눈꺼풀을 한계까지 열었다. 다음 순 간 이승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엉망 이 된 실내도 쏟아지는 물줄기도 까맣게 암막 속으로 홑어 져 버렸다.

   여제운은 충격으로 굳은 채 넘어갈 듯 숨을 헐떡였다. 한껏 무더져 있던 감각들이 소름에 기립하듯 일제히 바늘 처럼 돋아났다.

   여제운의 눈에서 광휘 같은 이채가 돌았다. 그는 이승 도의 얼굴에서 작은 솜털 하나까지 세세히 발견해 내고 있 었다. 젖은 속눈썹과 얄게 떨리는 입술까지 생생했다. 터 질 듯 울리는 맥동이 목까지 치고 올라왔다.

   “내 거야.”

   진득한 살기를 품은 음성이 도끼처럼 내리꽂혔다. 여제 운을 질식시킬 것 같았던 환영이 단박에 둘로 쪼개지며 사 방으로 홑어졌다. 비명 같은 이명이 귓속을 후벼 팠다. 눈 이 멀 것처럼 달려들던 암흑은 엿물처럼 느리게 녹아내렸 다-

   여제운은 더듬더듬 정신을 찾았다. 망가져 있던 시계

가 흐릿하게 돌아왔다.

   “이건 내 짝이다,여제운.,,

   태국영의 날 비린내 나는 눈은 광기의 잔재가 부스러기 처럼 떠돌고 있었다. 살을 벨 것 같은 경고의 시선이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뒤에서 바투 앉아 있었다. 그의 강 인한 팔이 이승도의 가슴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어깨를 쥐 고,다른 팔이 허리를 집요하게 옭아매고 있는 걸 선명히 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법을 잊은 것은 두 남자 모두 마찬가지 였다. 묘한 정적 속에서 이승도는 한 손으로 여제운의 두 눈을 가만히 덮어 눌렀다.

   “안 돼요.”

   이승도의 목소리는 다감한 눈빛과 달리 단호했다. 여제 운은 그 속뜻을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그가 나긋하게 품어줄 수 있는 수컷은 태국영 하나라는 걸.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스런 아기도 있다 는 것을.

   인위적인 암흑 속에서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 이 이승도의 손바닥을 스치는 그 감각까지 선명하게 말초 룰자극했다.

   여제운은 절망과 비슷한 무언가가 저를 무섭게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년 제수씨 챙겨.”

   온몸을 던져 태국영과 처박혔던 태호연은 부상당한 몸 을 돌볼 생각도 없이 한구석에 모여 있던 태 가의 수컷들 에게 날아갔다. 태호연이 빠르게 바리케이드를 쳐서 남강 우의 눈을 막는 동안에도,태국영은 마치 진득하고 불쾌 한 물의 흐름에 갇힌 것처럼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늘어지듯 앉은 자세로 으르렁거리듯 탁한 숨만 연 거푸 쉬었다. 흥분한 심장이 더 짙은 피를 요구하며 거칠 게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온통 명하게 젖어 이승 도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승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장갑을 벗어 던지고 바 닥에 늘어진 여제운의 가슴을 압박하고 있었다. 손상된 심 장에서 새빨■간 피가 튀어 올라 그 여린 손을 더럽혔다. 죽 지 마세요,죽으면 안 돼요,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패닉에 빠진 듯 어지러웠다.

   왜 저기에.

   마치 눈을 뜬 채 잠이 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 마

치 아둔한 그를 탓하듯 깨어진 유리창 밖에서 바람이 불 어 왔다.

   휘이이,마치 처녀 귀신의 치맛자락처럼 날리는 물바 람 속에 익숙한 향내가 섞여 있었다. 태국영은 번개를 맞 은 듯 얼굴을 굳혔다. 심해까지 불투명하게 까라졌던 현실 감이 순식간에 수면으로 솟구쳤다. 딱딱한 안면으로 짧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태국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여 제운이 이승도를 크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것을 발견하 고야 말았다. 태국영은 나직이 이를 갈며 바닥을 가볍게 박찼다.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이승도의 등 뒤에서 나 타났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아 사슬 같은 팔을 움직여 이승도의 상체를 얽었다. 이승도는 잠시 움찔하더니 한 손 으로 여제운의 두 눈을 가렸다. 안 돼요,그렇게 여러 번 말했다. 그리고 여제운의 출혈이 완전히 멎었을 때가 되어 서야 이승도는 조금 고개를 돌렸다. 어물어물 시선은 맞추 지 못한 상태였다.

   “미안해,국영아. 이것 말고는 방법이,떠오르지가 않아 서……■,,

   이승도는 속삭이듯 말하며 제 어깨를 꽉 쥐고 있는 태

국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흑풍 몰아치듯 싸늘히 얼어붙었 던 태국영의 눈가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독기 빠져나간 눈 빛은 물처럼 흘러 이승도의 옆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진 득하게 눈가를 접으며 물었다.

   “나한테 미안해?”

   이승도는 멈칫 눈을 들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태국영은 잠자코 바라보다 이승도의 목도리를 완전히 풀어냈다. 그리고 물에 젖은 뺨에 무겁게 입술을 누르며 낮게 잠긴 목소리를 흘렸다.

   “내가 웬만해선 막 감동하고 그러는 스타일 아닌데,방 금건 좀찡했어.”

   살다 보니 우리 승도가 다른 남자 자극했다고 사과하 는걸다 보고.

   태국영은 이승도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척척한 물기 와 함께 맺혀 드는 피부의 느낌이 이를 세우고 싶을 만큼 먹음직스러웠다. 이승도는 여전히 마냥 당혹스러워 어지 럽게 눈만 굴리기 바빴다.

   “그런데 우리 승도,다른 새끼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 려 놓고 하나밖에 없는 서방님 걱정은 안 해?”

   태국영은 미끼를 던지듯 은근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자 이승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표정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사슴처럼 고운 눈시울이 크게 벌어져 정신없 이 눈꺼풀을 깜박였다.

   “왜? 어디 다쳤어? 어디 아파? 안 좋아?”

   당황한 두 손이 태국영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스프링 클러가 토해내는 물줄기는 점점 약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멎었다. 흠뻑 젖은 태국영의 피부에서 따끈한 증기가 피어 올랐다. 매끈한 피부는 어디 홈 하나 보이지 않았기에 이 승도는 당황해서 그의 가슴과 배를 더듬어갔다.

   “속이 어디 망가진 거야?”

   우리 승도 이러다 울겠네.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모든 날 선 감정들 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태국영은 조심스럽게 이승도의 젖 은 뺨을 할아 올렸다.

   “다친 데는 없어. 그보다는 날 좀 진정시켜 줬으면 좋겠 는데. 흥분이 좀체 가라앉질 않거든.”

   태국영은 고개를 숙여 이승도의 목을 강하게 한 번 발 았다. 느리고 강하게 붐어내는 숨결에는 마그마 같은 열기 가 들끓었다. 세찬 포옹에 갇힌 이승도는 급작스럽게 붉어 진 얼굴로 헐떡이며 무심코 그의 허리띠를 꽉 부여잡았다.

   일순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지금 그가 쏟아내는 향기 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태국영이 의도적으로 흘려보내는

향인 줄도 모르고 홀딱 넘어간 이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하고 대답하자 태국영은 뒤로 돌아 등을 보였다.

   “업혀.”

   “…나 걸을 수 있는一”

   “우리 승도 좆 같이 예븐 얼굴 아직 아끼고 싶으니까 잔 말 말고 업히라고.”

   이승도는 얌전히 그의 등에 몸을 실었다. 쫄딱 젖은 옷 가지로 감싸인 몸이 그의 뜨거운 상체에 닿았다. 아랫배 가 기이하게 찌르르 울려 이승도는 눈가를 붉혔다. 그에 게 닿는 몸이 노글노글 녹아내리는 듯했다.

   국영이 냄새 좋다……

   이승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살짝 숨을 들이켰 다. 그간 컨디션이 나블 때 종종 맡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짙고 야릇한 향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홀짝홀짝 들이키길 수차례,이승도는 혹여 제 기행 을 그가 눈치 눈치챘을까 괜스레 걱정되어 슬쩍 그를 올려 다보았다. 그러자 곧장 고개를 꺾어 내린 태국영이 웃는 낯으로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얼굴 묻어.”

   이승도는 얼른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태국영 은 태호연이 앞서 길을 트는 대로 보폭 큰 걸음을 여유롭

게 옮겼다■

   “서방님 오늘 화 많이 났었고,피도 많이 봐서 지금 되 게 예민해. 그러니까 우리 승도,오늘 다른 놈들이랑은 눈 도마주치지 마. 나 화낼 거야.”

   응,이승도는 작게 대답했다. 태호연이 연회장을 나가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며 룸 키를 건넸다. 태국영은 젖은 슬 랙스 뒷주머니에 키를 꽂아두고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고개 를 들었다.

   “오늘 고생했어.”

   태호연은 눈썹을 휘며 의외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제수씨 부른 거 화 안 내나? 나름 대차게 시달릴 각오 중이었는데.”

   “내가 왜. 우리 승도가 나 있는 곳에 못 올 이유가 뭐가 있는데. 지가 싫다고 하니까 내가 못 데려와서 안달이지.”

   등에 착 달라붙은 이승도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움 찔 몸을 굳혔다. 태국영은 아이 달래듯 그를 추슬러 업으 며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만약 우리 승도 오는 길에 내가 모르는 다른 놈 이 인식했으면,우리 형님 나한테 혼쭐 날 각오해야 돼.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당연히.’

   태호연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정도 감당도 못 할 거였으면 손을 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 뒤치다꺼리 그만하고 싶으면 이제라도 늙은 이들 설득 좀 하고. 가주 자리는 언제든 넘겨줄 테니까.”

   태국영 자신은 미련할 정도로 하나만 보고 살아왔지 만,태호연은 늘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는 남자였다. 독단 적이고 괴팍한 저는 전쟁이 나건 그 사이에서 가솔들이 얼 마나 죽어나가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이 가문을 아끼고 태국영 자신도 아끼는 태호연에게 가끔 괴로운 고뇌를 안 겨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승도에게 급보를 친 이유도 십분 이해했다. 이 승도가 다쳤더라면 애기가 달라졌겠으나 지금 상태로 그 를 추궁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태국영은 그저 제가 모르는 곳에서 이승도가 노출되는 것을 걱정할 분,제 시야가 닿는 곳에서라면 딱히 지나치 게 의식하진 않았다. 이승도가 정식으로 제 아내가 되는 날부터는 무수히 부딪쳐야 할 일이 조금 일찍 벌어지는 것 분이니.

   감시가 가능하고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라면 걱정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제가 죽일 수 없는 상대는 이 세

상에 없다.

   “끔찍한 소리 말아라. 차라리 그냥 뒤치다꺼리나 하고 살지.”

   태호연은 단박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태국영 은 젖은 입술을 완만히 휘며 누르고 있던 버튼에서 손을 뗐다.

   “남영규 그 새끼는 놔둬. 내가 직접 찾아갈 거니까.”

   현장 정리를 하자마자 그 집구석부터 쳐들어갈 생각이 었던 태호연은 처음으로 못마땅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러 나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며 공간을 분리했 다. 태호연은 항의할 틈을 잃고 말았다.

   “여제운이 너를 인식하기 시작했어.”

   태국영의 호흡은 거칠었다. 잔뜩 피를 본 뒤 차오른 흥 분은 성욕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룸에 도착하자마자 태 국영은 전차처럼 이승도를 벽에 밀어붙였다. 흠뻑 물을 뒤 집어쓰고도 비린 피 냄새가 남은 손은 야만적으로 움직였 다. 티셔츠가 찢겨나가 걸레처럼 바닥에 스러졌다.

   헐벗은 상체에 닿는 그의 열기는 심장을 전기뱀장어처

럼 휘어 감아 강하게 똬리를 틀었다. 이승도는 벽과 그의 몸 사이에 압사할 듯 끼어 있었다.

   몰래몰래 들이마셨던 그의 향기가 최음제처럼 오장육 부를 들쑤셔 놓았다. 정신이 혼미하고 눈앞까지 흐릿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탄력적인 근육 들이 손 안에서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이승도는 무심결에 그의 축축한 살갗에 손톱을 박았다. 그때마다 치명적인 자극을 받은 것처럼 그의 목 안에서 탁 한 신음이 피처럼 맺혀 들었다. 그는 핏줄이 불거져 나온 이마를 이승도의 목에 거칠게 비비며 으르렁거렸다.

   “다시는 다른 새끼 몸에 손대지 마. 서방님 질투 많아. 알고 보면 독점욕은 더 지독하고.”

   “…응. 알았어.”

   이승도는 그의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세차게 끌어안 았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진정해,국영아.”

   가파르게 올랐던 태국영의 호흡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태국영은 여전히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내며 이승 도의 턱을 세게 깨물었다. 시원하게 찢어진 그의 눈매가 구겨졌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찢어진 날개처럼 팔락이 며 뺨을 스쳤다.

   “승도야. 서방님이 좀 만져도 돼?”

   태국영의 음성은 짙은 욕망에 낮게 갈라져 나왔다. 이 승도는 잠시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태국영은 그새를 못 참고 새발개진 귓바퀴를 입술에 끼워 비볐다. 헐떡이 는 숨결이 달궈진 송곳처럼 귓구멍을 찔러 왔다.

   “만지게 해 줘. 나 그동안 착하게 잘 참았잖아.”

   애원하는 말조차 참으로 당당한 것이 그다웠다. 그리 고 이승도는 그의 애원이 영 불편했다. 제 허리를 꽉 틀어 안은 그의 손을 끌어왔다. 태국영의 뜨거운 손바닥은 제 심장 위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응.”

   짧고 희미했지만 태국영의 청각은 그 미세한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허겁지겁 이승도의 가슴을 쓸어 올리 며 입술을 겹쳤다. 이승도의 눈시울이 찢어질 듯 벌어졌 다-

   이에 눌린 여린 표피가 찢어질 정도로 거센 부딪침이었 다. 절제를 잃은 손끝이 유두를 아프게 쓸었다. 이승도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숨을 들이켰다. 벽에 쿵 찧은 뒷머 리를 커다란 손이 크게 감싸 왔다.

   키,키스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딱 맞붙은 입술을 억지로 벌리려 애쓰는 혀는 그 안까

지 강압적으로 헤집지 못하고 그 주위만 어설피 멤돌았다. 경직된 입술선이 그의 혀에 비벼졌다. 태국영의 눈은 고통 을 감내하듯 가늘어졌다. 이승도는 당황한 듯 빠르게 눈 을 깜박이면서도 얼른 입을 벌렸다.

   그 순간 그의 혀가 습격하듯 밀고 들어왔다. 허리가 꺾 일 듯이 옥죄어지며 포옹이 깊어졌다. 은밀한 부위가 맞닿 았다. 온도 다른 불덩이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듯했다. 그의 성기는 채 마르지 않은 슬랙스 안에서 무섭도록 발기 해 있었다. 탄력적인 천 조각을 찢어낼 듯 팽팽히 부푼 그 의 중심이 가랑이를 벌리며 거칠게 마찰했다.

   이승도는 다리에 힘이 풀러 오금이 무너졌다. 태국영 의 단단한 허벅지가 벽 쪽으로 더 밀고 들어오며 그 체중 을 가분히 받아냈다. 불끈거리는 그의 흉근이 쓰린 유두 위에 화끈한 열기로 밀착했다.

   “흐으

   이승도는 여린 신음을 뱉어내며 저도 모르게 그의 목 을 부둥켜안았다. 딱딱한 살덩이가 노골적으로 아래에 비 벼질 때마다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국여…홋……!”

   이승도는 막연한 공포에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태국영 은 저를 거부하는 손목을 세차게 틀어잡아 벽으로 짓눌렀

다. 미약한 저항이 압살되고 이승도는 아예 그의 허벅지 와 골반뼈 사이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가 정신없이 휘저어대는 입 안이 아릿했다. 태국영 은 뺨이 홀쭉해질 정도로 혀를 발았고,이승도는 생을 갈 망하는 환자처럼 헐떡이며 타액을 흘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문지르다 아래로 쑥 미끄러져 내렸 다. 긴장으로 파들파들 떨리는 엉덩이가 그의 손에 우악스 레 잡혔다. 잔뜩 떨리는 아랫배는 기이한 전류를 흘리고 있었다. 이승도는 당황해서 엉덩이를 잔뜩 수축했다.

   그는 마치 교미하듯 허리를 움직였다. 옷가지를 사이 에 두고 그의 단단한 성기가 예민한 고환과 회음을 짓뭉개 듯 정신없이 비볐다.

   태국영의 눈은 반쯤 초점이 나가 흐릿했다. 그 와중에 도 무섭도록 집요한 관찰의 시선은 도깨비불 같은 궤적을 그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지진을 후려 맞은 듯 가슴이 떨렸다. 그 느낌이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것에 더 당황해 자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바닥이 늑골 하나하나를 세 세하게 짚어나갔다. 까치발로 겨우 바닥을 짚은 발마저도 오그라들었다.

   어느 순간 이승도는 숨이 막혀 그의 어깨를 퍽픽 내리

쳤다. 젖은 소리를 내며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져 나갔다. 이승도는 하악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직후 더 깊이 꺾인 그의 고개가 다시금 벼락처럼 내려왔다.

   이승도는 가까스로 턱을 비틀어 그의 입술을 피했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술이 뺨의 어중간한 부위에 거세게 부 딪혔다. 태국영은 그대로 입을 벌려 잇자국을 흐리게 냈 다. 그 위에 혓바닥을 붙여 둥근 리듬을 피워냈다.

   젖은 살결이 진득하게 마찰하며 열기가 샘솟았다. 그 열기는 흰 뺨을 붉게 물들였고 이내 목까지 번져갔다.

   태국영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 붉은 빛을 음미했다. 품 안에 쏙 들어와 있는 몸뚱이는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마 치 그날과 같았다. 제게 안겨 스스럼없이 입을 열어주고 수줍게 혀를 섞던 그날과.

   두려움에 찬 경련이 아닌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가날 픈 떨림이었다.

   태국영의 숨소리가 격랑처럼 거칠게 일어섰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꼬리뼈부터 목덜미까지 꿰뚫었다. 그는 이 승도를 아이처럼 훌쩍 안아 들었다.

   이승도는 갑자기 붕 뜬 몸에 놀라 저도 모르게 사지를 오그라뜨려 태국영을 휘감았다. 뜨거운 습지가 가슴을 덮 쳤다. 작게 솟은 유두가 순식간에 그 안으로 발려 들어갔

   이승도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며 날카롭게 신음했다. 그의 몸통을 뱀처럼 휘감은 다리가 주르륵 풀려 무너질 듯 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텅 비었다. 그저 헐떡이는 신음만 몇 차례나 내지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쳐 번쩍 눈꺼풀을 올 렸다. 탄력적인 매트리스가 뒤엉킨 두 남자의 육신을 힘겹 게 지탱했다.

   빠르게 깜박이는 눈에 애써 초점을 맞추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은은한 무늬의 천장과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상 들리에를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뜨거운 숨결 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승도는 멈칫 입을 열었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사 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결정치 못한 상태였다. 망설이 는 입술이 마치 유혹하듯 움찔댔고,태국영은 참지 못하 고 그것을 다시 물었다. 깊이 꺾은 만큼 깊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욕망에 허덕이는 살이 침투했다.

   거칠게 혀가 얽혀들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겨를이 없 었다. 이승도는 혀부리 쪽에 자꾸만 고여 드는 타액을 정 신없이 삼켰다. 괴로움에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바위처럼

잠시 버티던 강인한 상체가 일순 틈을 벌렸다.

   이승도는 막혔던 숨을 급박하게 몰아쉬다 뜨거운 손이 다시금 밋밋한 가슴을 쓸어 올리자 얼른 입을 열었다.

   “국영아. 잠깐만……

   태국영은 마치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호흡은 여 전히 광기 어린 듯 날뛰었고 단단하게 경직된 목에선 푸 른 핏줄이 꿈틀거렸다.

   귓바퀴가 깨물렸다. 귓구멍이 혀에 닿아 타액으로 홈 뻑 젖어들었다. 이승도는 유두를 비비다 내려간 그의 손 이 허리띠에 닿자 몸이 굳었다. 잠깐만,그렇게 말하며 손 을 뻗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힘을 주려던 순간이었 다. 경직된 등을 다른 손으로 바짝 끌어가며 태국영이 속 삭였다.

   “한 번만 벨게. 딱 한 번만.”

   태국영은 마치 조르듯이 뺨을 맞대 비볐다. 화끈한 열 기와 결 거친 목소리에 숨이 차올랐다. 오싹한 소름이 척 추를 관통했다. 그것이 성감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이승 도는 조금 겁을 먹었다.

   “어,어디다가……■,,

   불안하게 떨리는 손으로 태국영의 가슴을 떠밀며 물었 다. 태국영은 고집스레 버티며 이승도의 입술을 발았고,

두 무릎을 붙잡아 벌렸다. 슬랙스 위로 단단하게 부푼 성 기를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마구잡이로 비벼대며 대답했 다.

   “여기. 이 위에.”

   “…옷 위에?”

   “말고. 네 구명 바로 위에.”

   이승도는 부릅뜬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명하니 말 을 잃은 사이 태국영은 몰아붙이듯 이승도의 허리춤을 풀 어냈다. 두 발목을 한 손에 붙잡아 올려 팬티와 함께 빠르 게 벗겨 던졌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이승도는 덜컥 가슴 이 내려앉아 재발리 벌어진 가랑이 사이를 가렸다.

   “아,하지만 그러다 못 참으면…….,,

   “오 년 가까이 잘 참았는데 이제 와 못 참을 이유가一” 태국영은 어찐 이유에선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미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상체를 조금 세우더니 짙게 가 라앉은 눈으로 이승도의 알몸을 진득이 훑어보았다. 거죽 을 벗겨낼 것 같은 시선이 뜨거웠다.

   이승도는 제 국부를 가린 손이 그의 손에 가볍게 낚아 채져 머리 위에 고정되자 숨마저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 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 면 싫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온몸에 열기가 화끈하게 올랐다. 이승도는 제 온몸 이 발개지는 것을 두려울 정도로 선명히 느꼈다.

“뭐. 그럴 이유는 충분한데,믿어도 좋아. 약속할게.” 태국영은 이를 갈며 웃었다.

   남강우는 뒤늦게 도착한 부친에 의해 집으로 실려 왔 다. 몸이 성치 않은 것은 맞지만 누군가에게 온전히 의탁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최소한의 반항조차 할 기력도 없는 것처럼 군소리 없이 옮겨져 침대 에 늘어졌다.

   방 안은 무섭도록 적막했다. 남강우는 더디게 재생되 는 몸을 내버려둔 채 숨만 쉬었다. 출혈은 많이 양호해진 상태였으나 아직 완전히 멎은 건 아니었다. 비린 피에 눅 눅이 젖어든 시트가 살갗을 감쌌다.

   그는 내내 탈출구 없는 수많은 생각에 고립되어 있었 다. 그를 불가해한 상념으로 이끈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는 미친 듯이 날뛰는 태국영을 말 한마디로 잠재울 수 있 는 상대에 대해서였고,둘째는 재생능력의 한계치를 뚫었 던 여제운의 기적적인 소생에 관해서였다.

   남강우는 불청객의 등장을 매우 늦게 알았다. 모든 감 각은 태국영의 움직임을 쫓는 데에 쏟아 부어도 부족한 상 태였다. 찰나의 방심만으로 늑골과 심장이 꿰뚫릴 위기가 수도 없이 중첩되어 있었으니 주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있 을 리가 없었다.

   남강우의 눈으로 본 태국영은 목줄을 채울 엄두도 못 낼 만큼 오만하고 강한 금수였다.

   헌데.

   「국영아,안 돼!」

   한 인간이 다급하게 외친 비명이 어이없을 만큼 단번 에 소란을 불식시켰다. 그가 끼어든 순간 우리를 뛰쳐나 온 짐승처럼 날뛰던 태국영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는 몸 을 던진 태호연에 의해 처음으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남강우는 그때서야 묘한 향기를 붐어내는 인간의 등장 을 알아차렸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내내 구석 에서 구경만 하던 태 가의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 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주 익숙하 게 육탄 바리케이드를 치며 그 불청객을 가렸다. 태 가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것은 여제운과 저 하나분임에도.

   남강우가 불청객을 시야에 담았던 것은 아주 찰나였다. 불청객은 마치 오염 현장에 진입하는 듯 전신을 꽁꽁 숨

긴 차림이었다. 목도리 위로 드러난 두 눈과 이마를 제외 하곤 살결조차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남자들이 좁히던 틈으로 사라졌기에 자칫 알아볼 수 없을 뻔했다.

   어찌하여 그를 그렇게 단번에 알아봤는지 남강우는 스 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실은 그것을 크게 고민할 정신도 없었다. 남강우는 그 오만한 금수를 말 한마디로 잠재운 불청객보다 여제운을 향한 의구심에 더 쏠려 있었 다-

   여제운은 수도 없이 급소를 공격당했고 그의 심장은 누 적된 손상으로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수많은 녀 석들의 생사 갈림길을 정확히 판별해 왔던 제 눈이 틀릴 리가 없었다.

   여제운은 분명 그 자리에서 목숨이 끊어질 운명이었다. 그로 인해 일족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재앙 같은 전쟁 이 벌어질 거라 확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태 가의 남자들이 빠져나간 뒤 여군호가 연회장 으로 올라왔을 때,넋을 놓고 늘어져 있던 여제운의 심장 은 깨끗이 돌아온 상태였다. 피가 정상적으로 돌기 시작하 니 나머지 부분의 재생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지마세요,제운 씨.」

   「심장이 손상됐어요.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태국영이 공간을 나누기 전,불청객은 여제운에게 그렇 게 속삭였었다. 죽지 마세요. 죽지 마세요. 떨리는 음성으 로 되뇌던 말이 자꾸만 두개골 안쪽을 한가득 메아리쳤다.

   과연 태 가의 수컷들이 가리고 선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남강우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버 릇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이승도와 마주쳤을 때의 기이하게 일렁거리던 가슴을 기억해내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과거에 사장된 유물로 치부해 둔 등대를 이승도와 연결 짓지 못하는 것 도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맞닥뜨린 상상력은 그저 여제운에게 몰입하길 강 요했고,남강우는 그의 몸에 원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 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길게 상념에 잠긴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새카 만 밤의 음기가 절정을 이루었을 때 몸을 일으켰다. 통증 은 말끔히 사라졌고 흉터조차 남지 않은 피부가 어둠 속에 서 매끈하게 빛났다.

   그는 벌거벗은 채 옷장을 열었다. 이것저것 고를 것 없 이 잡히는 대로 속옷과 겉옷을 순식간에 꿰어 입고서 집

을 나섰다. 무작정 차를 몰아 가까운 호텔 바를 찾을 생각 이었다. 지독히도 술이 고팠고 살 냄새가 고픈 밤이었다.

   주차를 하고 막 내리려던 때였다. 남강우는 기가 막힌 사실 하나를 떠올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오늘 자신이 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남강우는 남 가의 가주인 그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오늘 도대체 왜 싸우게 된 거나 물었고,부친은 벼락 같은 노성을 터뜨리며 그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곤죽이 된 거나 호통쳤다.

   “여제운이 급하니까 일단 가자고 했고,그래서 따라간 것분입니다만.”

   《잘한다,잘해. 투견이라고 비아냥을 들어도 할 말이 없구나.〉〉

   부친은 신랄하게 코웃음을 친 뒤에야 이윽고 사건의 전 말을 알려주었다. 남강우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다 들 은 뒤 전화를 끊었다.

   “남영규,이씨발새끼가.”

   시동만 켜둔 차 안에서 남강우는 사납게 이를 갈았다. 오늘 태국영에게 맞섰던 남 가의 남자들은 저를 제외하곤 모두 수습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헌데 그 안에 남영규는 없었다.

   애새끼 교육을 잘못시켜 일을 그렇게 벌여 놓은 주제 에,저는 약하다고 쏙 빠져 있었다 이 말이지.

   그는 전방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거칠게 차를 출발 시켰다. 술 생각이 싹 달아나며 화염 같은 분노가 가슴을 태웠다. 온종일 저를 혼란스럽게 했던 상념들이 삽시간에 전소되고,그 허망한 잿더미 속에서 남은 건 단 하나였다.

   일단은 남영규를 조져놓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거였 다-

   이승도는 온몸이 녹아내려 마치 시트에 스며드는 것 같 다고 느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태국영의 검은 머리칼이 느긋이 흔들렸다. 그의 혀가 가슴에 돋은 작은 돌기를 굴 리고 있었다. 이미 새발갛게 부푼 유두를 사탕처럼 달콤하 게 발 때마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태국영은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짐승처럼 지치지도 않 고 이승도의 몸을 탐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 질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태국영은 온갖 곳에 피명울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잘근잘

근 씹어댔다.

   육욕이 일렁이는 눈은 위험수위 아래를 아슬아슬 멤돌 았다. 참지 못하고 넘쳐흐르기 직전이면 그는 늘 이승도 의 이름을 불렀다. 그 특별할 것 없는 이름 하나가 어떤 견 고한 빗장이 되는 것처럼.

   이승도는 제 아랫배를 흠뻑 적신 제 정액에 대해 생각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수 음에도 관심이 없었던 목석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달아올 라 허망하리만치 빠르게 절정에 올랐다. 심지어는 젖꼭지 가 비틀리며 키스를 당하는 것만으로도 파정했다. 농밀하 게 홑어지는 비릿한 향은 모두 제가 참지 못하고 쏟아낸 것들이었다.

   태국영은 의외로 평소처럼 밉살스레 굴지 않았다. 그 럴 때마다 더 뜨겁게 고양되기만 했다. 검붉게 발기한 것 은 지치지도 않고 낯 뜨겁게 벌어진 국부에 쉴 새 없이 마 찰했다. 훤한 불빛 아래 완전히 알몸이 되어 무수히 뒤엉 키는 두 맨몸뚱이는,삽입만 없다분이지 지독하게 음탕한 성애였다.

   “흐■…… 그만,국영아,이젠一”

   이어질 말은 고스란히 그의 입 안으로 발려 들어갔다. 이승도는 힘겹게 고개를 비틀어 봤지만 그의 긴 손가락이

턱을 고정하고 놔주지 않았다.

   “하으,잠……!,,

   뭉개진 말은 부스러진 채 맥없이 흘러내렸다. 돌덩이 같은 근육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승도는 헐떡이며 힘 풀 린 눈을 파들파들 경련했다. 북소리 같은 심장 고동이 살 결에 눌어붙어,더 이상 밀어낼 수가 없었다.

   기분 좋은 체념이 몰아닥쳤다. 이상하게도 조금 더 그 를 받아주고 싶어졌다.

   이승도는 태국영을 미약한 힘으로 조여 안았다. 두 팔 안에 갇힌 그의 허리가 오르가즘에 후려 맞은 양 떨렸다. 활짝 벌어진 엉덩이골에 그의 딱딱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다시 세차게 비벼졌다. 미끈거리는 액으로 뒤덮인 그의 것 은 길을 잃은 경주마처럼 온갖 곳을 난잡하게 찔러댔다.

   “흑,옥!,,

   태국영의 집요한 눈에서 온갖 감상들이 휘몰아쳤다. 이 승도는 코로 신음하며 젖은 눈을 피했다. 잠시 잦아들었 던 홍조가 그 얼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태국영은 묘한 감응에 휘둘려 눈을 가늘게 접었다.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태국영은 곧 장 이승도의 목을 물어 혀를 살결에 비볐다. 젖은 피부에 서는 더 짙고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짐승들을 잔뜩 홀리

는 냄새였다.

   태국영은 아주 탁하게 끓는 신음을 길게 뽑아냈다. 품 에 안긴 몸이 덩달아 파르르 경련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세우고 말았다.

   “옷! 아,아파.,,

   이승도가 겁먹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잇자국이 깊 이 남았으나 피가 맺히진 않았다. 태국영은 사과 대신 깊 이 살이 팬 곳을 혀로 뾰족하게 덧그렸다. 경동맥이 있는 자리에서도 이승도의 거센 심장 고동이 울렸다. 흥분한 것 은 저분만이 아니었다.

   “승도야……

   그르렁대듯 부르는 목소리에 이승도는 우는 소리를 냈 다.

   “밑에…… 아파.”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태국영은 천천히 고 개를 들었다. 발갛게 익어 헐떡이는 이승도의 얼굴이 미세 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태국영은 이승도의 두 다리를 넓게 벌리며 들어 올렸 다. 활짝 열린 무릎이 어깨에 닿았고 희부옇게 번들거리 는 비부가 훤히 드러났다. 이승도는 숨을 멈추며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국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발갛게 일어난 피부를 샅샅 이 주시했다. 과연 아프다는 말이 엄살로 보이진 않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마구잡이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차라리 이 좁은 구명에 제 것을 물렸다면 좀 덜 했을 것

   태국영은 아쉬움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상체를 완전히 세웠다. 그는 이승도의 두 손을 끌어와 수치스럽게 벌어 진 다리를 고정하게 했다. 싫다고 반항하던 이승도는 지 금 싸고 끝내겠다는 말에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럼 빨리 끝내.”

   이승도는 제법 침착하게 대답했다고 착각했다. 저도 모 르게 자꾸 눈을 피하느라 터질 듯 붉어진 제 얼굴을 할듯 이 응시하는 태국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태국영은 피가 몰려 끄덕이는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 느리게 훑기 시작했다. 이승도의 정액과 그의 프리컴으로 음란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손 안에서 마찰할 때마다 쩍 쩍 소리가 났다. 잠시 수그러들었던 뜨끈한 기류가 다시 잔잔히 끓어올랐다.

   증기 같은 흥분이 두 남자의 전신에 내렸다. 태국영은 타는 입술을 연신 혀로 훔치며 느긋하게 자위했다.

   그의 눈은 대부분 이승도의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고정

되었다. 맘껏 만져볼 수 없었던 연약한 부위는 온통 붉은 자국으로 낭자했고,다른 수컷을 품어보지 못한 구명은 타 락적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개폐를 반복하며 은밀한 액을 뱉어냈다.

   납작한 뱃속에 있는 작은 아기집이 이승도의 의지를 배 반하고 수컷의 정액을 기대하고 있는 거였다. 뇌리가 얼얼 해질 만큼 도색적인 광경이었다. 태국영은 저도 모르게 그 탐나는 구명에 손끝을 대었다.

   놀란 입구가 꽉 다물렸다. 그러나 미끌미끌한 액은 지 문을 지워낼 듯 울컥 샘솟아 손가락을 적셨다. 태국영은 그 유혹적인 감촉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매끈한 이마로 험악한 핏줄이 솟아났다.

   그는 마른침을 크게 삼키며 손 안에 쥔 성기를 점차 빠 르게 마찰했다. 단단하게 근육이 붙은 아랫배가 콱콱 수축 과 이완을 반복했다.

   고요히 타는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성이 부서 져 가루만 남았다.

   “하… 씨발. 좆 같이 예뻐서 참기 힘드네. 비비기만 할 게.,,

   머릿속에 든 말이 가감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태 국영은 젖은 귀두를 정확히 구명에 문지르며 날카롭게 눈

을 들었다. 안절부절 숨만 헐떡이며 눈을 굴리던 이승도 가 그 매섭고 뜨거운 시선에 사로잡혔다.

   이승도는 야금야금 제 욕심을 채우는 태국영의 무도한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싫다고 소리치면 그 는 떨어져 나갈 테지만,이상하게도 입이 밀랍으로 봉한 듯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눈이 다시 하반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이 승도는 막혔던 숨을 크게 터뜨렸다. 거친 호흡에 습한 공 기가 출렁거렸다. 몸이 떨려서 가슴이 떨리는 건지,가슴 이 떨려서 몸이 떨리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섹스하는 것처럼 신음해 보?,승도야.”

   태국영이 지독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승도는 미끈한 귀두가 구명을 긁어 대자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 를 꺾어 올렸다. 턱까지 차오른 숨에 가슴이 들썩였다.

   태국영의 성기는 금방이라도 입구를 꿰뚫을 듯했다. 조 금이라도 아랫도리에 힘을 풀면 쑥 차오를 것만 같았다. 이승도는 발갛게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고,태국 영은 울혈 낭자한 가슴을 다시 미친 듯이 깨물며 욕설을 씹어 밸었다.

   딱딱한 이가 살을 누르고 질척이는 혀가 그 위를 채웠 다. 미끌미끌 번들거리는 구명 위를 그의 손가락이 정신없

이 배회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끝이 우연처럼 다물린 살을 자꾸만 벌렸다.

   “내 좆을 꽉 품은 것처럼 울어 봐.”

   은근슬쩍 구명을 후벼 파고 들어온 손가락이 점막을 긁 었다. 그의 말이 목을 옭아매고 신음을 쥐어짜냈다. 참을 수 없는 극치에서 떠도는 감각들이 바늘 끝처럼 신경을 찔 러 왔다.

   “아,아아!”

   이승도는 고개를 틀어 뜨거운 뺨을 시트에 비볐다. 입 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크게 입을 벌렸다. 할딱이는 호흡 에 물처럼 녹은 타액이 보드라운 천에 젖어들었다.

   “국영아,국영아…… 흐웃……!”

   의미 없는 부름이 허공에 산란했다. 허우적거리다 걸 린 그의 팔을 꽉 틀어쥐었다. 무쇠처럼 단단한 근육이 손 안에서 경직했다. 그는 그 간절함을 뜯어내어 저 아래로 끌어갔다. 맥동하는 살덩이가 손금을 태울 듯 닿아 왔다.

   이승도는 불에 덴 듯 놀라 눈을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득 고인 눈물이 후드득 눈꼬리를 타고 굴러떨어졌 다. 뻣뻣한 손 안으로 미끌미끌한 불기둥이 드나들고 있었 다. 태국영은 아랫입술 안쪽을 씹어 물며 거친 숨을 터뜨

   “나 이거아무데도안 넣었어.”

   탁한 음성이 이마 위를 홑어 놓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옆구리를 쓸고 올라와 턱을 사로잡았다. 그는 혼미하게 풀 린 얼굴을 비틀어 내렸다. 신음과 탄식이 교차하는 그의 육감적인 입술과 깊이 맞물렸다.

   혀가 뒤섞이는 키스는 아니었다. 그저 젖먹이가 어미젖 을 찾듯 쭉쭉 발기만 했다. 얼얼한 입술이 다시금 눅눅하 게 젖어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쿨쩍이는 마찰음을 흘리며 구명 안을 탐 험했다. 밀어내질 않으니 그저 마냥 심취해 있는 듯했다.

   “아…국영……

   이승도는 움찔움찔 떨리는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조이 고 종아리로 휘어 감았다. 목 안에서 잔뜩 잠긴 소리가 밖 으로 좀체 터져 나오질 않았다.

   강압적으로 몰아가는 손길이 사라졌음에도 이승도는 그의 성기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무섭도록 부푼 성기는 그의 손가락을 문 구명 위에서 탄력적으로 휘어지고 비벼 지길 반복했다. 점액질에 젖은 표피가 손 안에서 즉즉 부 딪쳤다. 그 느낌이 말도 못하게 오싹했다.

   “내가 조금은 좋아졌어?”

   맞닿은 입술이 움직거렸다. 이승도는 헐렁하게 풀린 눈

을 겨우 짜 맞춰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국영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갈망과 간절함이 뒤엉킨 안광만 서슬이 퍼렜다.

   “이젠 내가 이렇게 아래를 다 까도 무섭지 않아?”

   이승도는 명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의 질문이 저 먼 허 공을 떠돌다가 뒤늦게 뇌리에 직격해 왔다. 무슨 말을 해 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랫입술을 잘근 물고 한참을 발아올린 그가 상체를 들 었다. 따끔따끔한 유두를 엄지로 빙빙 굴리며 그가 역광 에 잠겨 물었다.

   “이제 내가 무섭지 않아?”

   폐가 방방하게 부푼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렇게 몇 초 를 허비하고 나서야 콱 가둬둔 호흡이 허공으로 쏘아져 나 갔다. 시야가 물막에 갇혀 울렁거렸다.

   이제껏 그걸 신경 쓰고 있었나. 제가 겁에 질려서 구석 에서 웅크려 울던 기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가슴이 칼날에 스친 듯 저며 왔다. 이승도는 천천히 고 개를 흔들었다.

   “안무서워.”

   가까스로 토해낸 말이 대견했다. 흥분과 열망으로 들 떠 있는 그의 눈이 미미하게 요동했다. 뭘 더 어떻게 해야 그의 마음에 깃든 상처를 씻어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

다. 이승도는 손 안에서 흉악하게 꿈틀거리는 살덩이를 제 구명에 맞추며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만,넣어볼래?”

   젖은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태국영은 굳은 듯 기 이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이승도는 자수가 놓인 시트 를 괜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안에다가… 그,하지는 말고. 조금만,그러니까……아 앗!,,

   말이 맺어지기도 전 태국영의 성기가 젖은 내벽을 사납 게 벌리고 들어왔다. 이승도의 사지가 온통 바들거리다 힘 없이 흘러내렸다. 충격에 홉뜬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샘 솟았다.

   이승도는 이를 악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속눈썹을 흠뻑 적신 눈물이 온 사방에 영역을 넓혔다.

   툭툭 움직이는 그의 것이 세 차례에 걸쳐 부리까지 완 벽하게 박혀들었다. 그의 치골이 비부에 틈 없이 밀착했 다.

   “다 들어갔어.”

   태국영은 격앙된 숨결을 콧잔등에 부렸다. 그의 혀가 진득하게 눈가를 훔쳐내고 뺨을 눌렀다. 꽉 잠긴 신음이 그의 목에서 증기처럼 끓었다.

   “아,아파…… 국영아,아파.,,

   “…조금만.”

   금방 뺄게,태국영은 초조하게 속삭이며 늘어진 두 다 리를 잡아 제 허리에 감았다.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에 닿 는 그의 허리는 단단하게 굳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앞뒤 로 작게 피스톤 질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것을 갈취 해 가지는 않았다.

   이승도는 울먹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국영은 이 승도의 젖은 눈가를 발았다. 그리고 그 깊은 감각을 음미 하듯 아늑하게 묻은 것을 아주 느리게 빼냈다. 가장 굵은 귀두가 빠져나간 뒤 뻥 뚫렸던 입구가 세차게 다물리며 바 들바들 떨렸다. 태국영은 달래듯 그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 으며 다시 젖은 귀두를 문질렀다.

   “쌀 뻔했어. 우리 승도 구명 안이 완전히 젖어 있었거 든. 꼭 내 좆을 기다린 것처럼.”

   깊이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끊어 내뱉으며 그가 말했 다.

   “더 하면 내가 진짜 못 참을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이승도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 덕였다.

   태국영의 집게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꿰뚫고 볼 안을 더

듬었다. 어정정하게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검지와 중지가 잇새를 더 크게 벌렸다.

   구명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성기는 음란한 점액을 잔 뜩 묻힌 채 다시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졌다. 천천히 왕복 하던 것이 점차 빠르게 움직이며 깊은 골에 파묻혔다. 뜨 거운 손바닥이 허리 아래를 짓쳐들어와 둔부를 어루만졌 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갈라진 둔덕 사이를 거칠게 쓰다듬 었다.

   그의 입술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뒷골이 당길 정도 로 얼얼한 숨을 뱉고 있었다.

   이승도는 곧 잃어버릴 것을 보듯이 태국영을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제 것을 낯 뜨겁게 주물러대며 구명 위를 비비는 유사성행위에 심취해 있는 그는,너무 야하고 너 무 매혹적인 모습으로 제 탐미적인 감각들을 통째로 앗아 갔다.

   문득 아랫배가 뜨겁게 수축하며 파르르 진동했다. 다시 금 구명이 크게 요동치며 울컥 은밀한 점액을 쏟아냈다. 태국영은 묘한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이번엔 피하 지 않고 그 눈을 헐떡이며 마주 보았다.

   정적이 번개처럼 내리꽂혀 두 사람을 하나의 창으로 꿰 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까맣게 지워지고 오롯이 둘만

남은 듯했다. 그 순간 태국영이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절 정에 올랐다.

   투둑. 툭-

   이승도는 제 얼굴까지 튀어오는 정액을 빤히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칼처럼 남자다운 모양의 눈썹과 반 쯤 내려앉은 눈꺼풀을 동시에 일그러뜨린 채 살짝 입술을 벌린 그의 얼굴은 몹시도 낯설었다. 아,하고 뭉툭하게 갈 라진 신음이 느른히 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년 이런 얼굴도 하는구나.

   기묘한 오한에 축축한 솜털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습관 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미소 뒤에 감춰진 그의 날 것 그대 로의 덩어리를 본 듯했다. 황홀하게 무너진 완벽한 얼굴 이 뇌리에 강렬히 다가와 피 발자국처럼 짙은 상을 맺었 다.

   “키스해,국영아.”

   이승도는 무의식중에 그에게 말했다. 제가 내뱉은 말 은 물속에서 울린 것처럼 몽롱하고 눅눅했다. 몇 번에 걸 쳐 파정한 태국영의 눈매가 야릇하게 벌어졌다. 잔열이 드 글드글 떠다니는 짐승 같은 눈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는 순간 이승도는 눈을 감으며 한껏 입을 벌 렸다. 곧 세차게 꿈틀거리는 혀가 입 안을 점령했다. 그의

단단한 팔이 몸과 시트 사이를 뚫고 휘감겨 왔다. 이승도 역시 그의 몸을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회음부에 짓눌려진 그의 중 심이 다시 무섭게 부풀었다.

   목 안에 넘칠 듯 고인 타액을 꿀끽 삼켰다. 그 작은 진 동을 전해 들은 그가 끊어질 듯 탄식하며 팔을 조였다. 포 옹은 마치 구속복처럼 단단하고 치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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