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25)

   끈적끈적한 느낌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식은땀에 푹 젖은 시트를 짧게 뒤척거리다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떴다. 혼몽했던 의식은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하아. 하아……

   그악한 통증이 전신의 뼈마디를 조여 오고 있었다. 태 국영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반나체인 그의 몸은 말라붙기 무섭게 샘솟는 땀으로 번들 거렸고,강인한 근육이 감싼 곧은 어깨는 거칠게 오르내렸 다.

   그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견디기 힘든 갑갑함 이 목을 조여 왔다. 호흡을 내뻗으려할 때마다 목에서 피 비린내가 휘돌았다.

   비틀거리듯 창가로 걸어가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창문 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써늘한 바람이 득 달같이 밀려왔다.

   태국영은 그제야 폐에 가득 고인 숨결 한 줌을 봅아낼

수 있었다. 그는 열기로 홧홧한 눈을 치켜떴다. 일그러진 시야로 빛살 없는 도시의 풍경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 이 쏟아질 것 같은,탁하고 흐린 날이었다. 먹구름이 길게 이어진 뒤로 태양은 모습을 감췄다.

   아직 달이 뜨지도 않았다고.

   태국영은 숨을 몰아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널브 러진 파편 위를 밟는 그의 발바닥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 았다. 그는 핑 도는 현기증에 한 손으로 이마를 덮어 눌렀 다. 활짝 열린 오감이 쓸데없는 정보들을 뇌에 퍼 담았다.

   시끄러운 저택,부산히 왔다 갔다 하는 상주 고용인들, 아이의 울음소리,당혹감 가득한 유모의 목소리.

   一쉬이. 쉬이. 괜찮아요. 도련님,조금만 참으세요.

   유모는 신경질적으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냐고 고함을 쳤다. 주변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전화를 거는 소 리,어디까지 오셨나고 초조하게 묻는 목소리.

   저 홀로 기현상에 휘말린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징조’가 오고 있다고.

   그러나 너무 빠르다. 아직 날짜는 한참이나 남았다. 이 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나직이 욕설을 뇌까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할으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움직임 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침대 시트를 모조리 벗겨내고 소

파의 쿠션도 해체하듯 뜯어냈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던져 둔 휴대폰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그의 온도 높은 심장이 북소리처럼 거세게 울려댔다. 머리가 쪼개지듯 정 울렸다. 뇌리로 불호실처럼 경고의 문 구가 스쳐지나갔다.

   가자,그에게로.

   그는 휴대폰을 찾길 포기하고 방에서 나갔다. 정오처 럼 환하게 불 밝은 저택은 이미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웠다. 이미 예견했던 난장판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펼쳐져 있었 다. 고용인 한 명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가주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나갔다 오겠다.”

   어디로 가느나,어디로 가겠다,이런 물음은 애초에 그 들 사이에 필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순간에 태국영이 갈 곳이라면 한 군데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고용인 은 다급히 태국영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가시려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물수건 과 새 옷을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옷? 하며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본 태국영은 이내 고 개를 끄덕였다. 오일을 바른 것처럼 번득이는 상체,젖은 운동복이 휘감은 아랫도리,모두가 외출로는 부적격한 차

림새였다. 허리를 깊이 숙인 고용인이 발을 재게 놀려 사 라졌다.

   땀 흐른 이마를 어깨로 대강 훔치며 그는 1 층 가장 구 석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 역시 코를 찌르는 후끈한 열기 가 그득했다. 그때 어린아이를 필사적으로 어르고 있던 유 모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방금 전 들었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질문이었다.

   “가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유모는 혼이 나간 상태였다. 늘 고아하게 틀어 올리고 있던 머리는 자연스럽게 흐트러졌고,화장기도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그럭저럭 참을 만해. 아이는 어때.”

   태국영은 질문과 함께 힐긋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침 대에 누워 학학 밭은 숨을 내뱉느라 바빴다.

   “열이 너무 올라서 걱정입니다. 지금 김 교수님 오고 계 신데 한 이십 분은 걸릴 거라고 하네요. 설마 그 사이에 잘 못되지는 않겠지요?”

   “설마. 그 정도도 못 견디면 태 씨 집안 핏줄이 아니지.

   태국영은 냉정하게 말했다. 유모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 으나 그녀는 이윽고 태연히 웃는 낯을 해 보였다.

   “그래도 걱정되어 오셨지요? 한 번 안아주지 않으시겠 습니까?”

   태국영은 모호하게 침묵했다. 그것이 망설임과 닮아있 다는 것을 눈치챈 유모는 얼른 태국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도련님,아까부터 가주님만 찾습니다. 기의 흐름 도 잘 조절하고 있고요. 기특하지 않습니까?”

   “날 왜 찾아. 찾으려면 제 엄마를 찾아야지.”

   유모는 아이참,하며 그를 채근했다.

   “그러지 마시고 한 번 안아주세요. 어린 것이 따뜻한 품 이 그리워 매일 칭얼거리는데요.”

   “그건 유모가 잘하고 있잖아.”

   “그게 어디 피붙이 체온만 하겠습니까.”

   유모는 능숙하게 아이의 몸을 추슬러 태국영의 품에 떠 안겼다. 태국영은 어정정하게 아이를 받아들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작은 손 이 다가와 가슴을 꾹 눌러 왔다. 심장 근처에 닿아 사납게 뛰는 고동을 훔쳐갔다. 무의식적인 반응인 듯했다.

   태국영은 단 한 번,아이의 달아오른 뺨을 무심히 손끝 으로 둥글게 덧그렸다. 그리고 아이는 금방 유모의 품으 로 돌아갔다.

   “아이는 유모가 잘 돌봐. 난 나갔다 올 테니.”

   “■■■그래요,가주님.”

   유모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고용인이 돌아

와 그에게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과 옷을 건넸다. 태국영 은 그 자리에서 훌훌 옷을 벗어 던진 뒤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벗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조금의 어색함 이 없었다.

   태국영은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저택을 나섰다. 하늘 은 그새 더 흐려져 있었다.

   진료실 안으로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때 이승 도는 방금 전 막 팩스기기가 토해낸 공문을 거듭 읽어보 고 있던 참이었다.

   윗선에서 내려온 공문 제목은 ‘예산 삭감에 관한 알 림’이었다. 기실 읽어볼 것도 없었다. 그 제목만으로도 말 하고자 하는 바가 능히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설동물원의 형편이 다 그랬다. 위에서 아끼라면 아껴 야 하고 싼 걸로 바꾸라면 바꿔야 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이곳은 지방의 다른 사설동물원보다 예산을 꽤 후하게 쓰

는 편이었지만 애초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곳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헌데 그나마도 줄인다고 하 니,녀석들이 환장하고 달려드는 특별식부터 끊어야 할 생 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 선생님! 안에 계십니까?”

   쾅쾅쾅. 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자는 다시금 문을 두 드렸다. 이승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한 남자가 진료실 안으로 성큼 들 어왔다. 올해로 경력 14년 차가 된 베테랑 사육사였다. 이 승도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이곳 동물원에 취직한 지 1 년이 넘어가는 동안 그가 찾아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뛰어왔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에 어두운 표정 이 심상치 않았다. 사육사가 이곳을 다급히 찾을 정도면 대부분이 안 좋은 일,나머지 극소수가 아주 안 좋은 일이 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예,선생님. 호리가 새끼를 물어 죽였습니다.”

   “호리가요?”

   이승도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진료 상자를 챙겨 들고 곧장 그를 따라 뛰었다.

사육사는 앞서 달려가며 흥분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로 설 명했다.

   “하늘이랑 바다,둘 다 이미 숨이 끊어졌어요. 태산이 만 간신히 찾아서 일단 사육사 곁방에 보호해 둔 상태입니 다. 호리랑 다른 녀석들도 격리시켜두었고요.”

   “태산이는요?”

   “개는 적어도 외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냥 겁에 질려 발발 떨기만 해요. 사육사들 손도 거부하고 자꾸 구석으 로 숨어들기만 합니다.”

   얼마 전 태어난 세 마리 새끼호랑이들은 젖도 잘 먹고 힘도 좋던 녀석들이었다. 호리 역시 이번이 세 번째 출산 인데다가 그리 예민한 녀석도 아니었다. 며칠 살펴보던 와 중 이상한 낌새는 없어서,조금의 걱정도 하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자연포육을 시도하는 게 아니었는데.

   되도록이면 섭리대로 어미 품에서 잘 자라기를 바랐던 마음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 승도는 제 선택을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태산이 먼저 보시겠습니까?”

   “네. 아기 상태부터 살펴봐야겠어요.”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사육사실로 인도했다. 사무실

은 적막했다. 급작스런 비보로 인해 무거운 공기만 휘돌았 다. 올해 입사한 풋내기 사육사는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 어 있었다.

   이승도는 그들에게 간단히 목례만 한 뒤 곁방으로 들어 갔다. 경첩 소리가 들리자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태산이가 펄쩍 뛰며 벽을 긁어댔다.

   “태산아. 선생님이야.”

   이승도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조심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벽에 붙어 난리를 치던 녀석이 홱 돌아보았다. 까 만 눈망울에 눈물이 반들반들했다. 진료가방을 한쪽에 내 려두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리 와.,,

   이승도는 두 팔을 뻗으며 녀석을 불렀다. 그러자 녀석 은 망설임 없이 폴짝폴짝 뛰어와 품에 안겨들었다. 바들바 들 떠는 몸을 조심히 감싸 안아 어루만져주었다. 가슴팍 에 찰싹 붙어 낑낑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지긋이 보던 사육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손만 댈라치면 난리를 치더니만,역시 선생님 한테는 고분고분하네요.”

   이승도는 의례적인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구두를 벗

고 방바닥에 올라선 그가 사육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일단 애 진정 좀 시키고 있을 테니까 CCTV 확인 부터 자세히 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사육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이승도는 태산이를 안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발톱으 로 옷자락을 꼭 붙든 녀석의 궁둥이를 받쳐 차분히 얼렀 다.

   “많이 놀랐지?”

   유리구슬 같은 눈이 이승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핏덩 이에 불과한 녀석이었지만,이보다 지능이 낮아 단발적 사 고조차 불가능한 짐승들의 단순한 언어도 이승도가 알아 듣기엔 무리가 없었다.

   “선생님한테 말해 줄래? 호리가 하늘이 형이랑 바다 누 나를 물었어?”

   [물었어.]

   “엄마가 물었어?”

   [응. 물었어.]

   “그랬구나. 엄마가 왜 그랬을까. 어디가 많이 아팠나보 다. 우리 태산이는 어디 아픈 데 있어?”

   [안 아파. 무서워.]

   “아픈 데는 없다는 거지? 한 번 다시 뛰어볼까?”

   바닥에 내려두자 녀석은 불안했는지 곧장 다시 안겨들 려고 낑낑댔다. 이승도는 녀석의 궁둥이를 톡톡 두드려서 격려해가며 방 안을 한번 거닐었다. 걷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체온을 재보니 그도 정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없는 상태라,이대로 격리시켜 인공포육을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승도는 구석에 뭉쳐진 포근한 담요를 반듯하게 접은 뒤 녀석을 둘둘 감싸서 안아 들었다. 다른 한 손에는 가져 왔던 진료 상자를 챙겨들고 일어난 그가 다정히 미소 지었 다.

   “선생님이랑 같이가자.”

   [같이?]

   “응. 내 방에서 맘마도 먹고,같이 산책도 하고. 괜찮 지?”

   [응!]

   녀석의 혀가 까끌하니 턱을 할았다. 담요 속의 엉덩이 가 신난 듯 썰룩댔다. 이렇게 귀여운 새끼를 둘이나 물어 죽이다니,호리 이 녀석 아주 단단히 혼내야겠다.

   밖으로 나가자 사육사가 역시 예상했던 말을 늘어놓았 다. 호리가 갑자기 내실을 빙빙 돌다가 발치에서 거추장스 럽게 달려드는 새끼 하늘이와 바다를 물어 죽였다는 내용

이었다.

   이승도는 일단 진료실로 돌아가 낮은 펜스를 두르고 그 안에 담요를 깔아 태산이를 놓았다. 낯선 환경에 쭈뼛 거리긴 했지만 녀석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선생님 잠시 나갔다 올게. 금방 다시 올 거니까 울지 말고 있어야 돼. 알겠지?”

   [응!]

   이승도는 진료실을 나서 곧장 호리를 찾아갔다. 도착했 을 때 녀석의 히스테리는 극에 달해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어제오늘 먹이에 거의 손을 안 대어서 먹이려고 고생 은 좀 했습니다. 출산 후 스트레스 때문에 입맛이 없나 싶 었어요. 내일도 섭식을 거부하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오늘 이 사달이 날 줄이야.”

   호리는 지금 연신 아프다고 생난리를 치는 중이었다. 어디가 아픈 건가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사육사의 말이 이어졌다.

   “몸이 축나 있는 상태니 보양은 못해 줄망정 굶길 수는 없잖습니까. 매일 먹는 게 물려서 그런가 싶어 소고기도 넣어줘 봤거든요. 잠깐 입을 대나 싶더니만 걷어차 버리 는 겁니다. 도통 이유를 모르겠네요.”

   호리가 새끼를 물어 죽인 이유가 뭔지 자명하게 드러났 다. ‘한 번 더 넣어 줘 볼까요?’하는 사육사를 얼른 말렸 다. 그랬다가는 호리가 철창을 향해 물소처럼 돌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리가 때마침 우렁차게 포효하며 격분을 터뜨렸다.

   [이가 아파! 아파서 못 먹어! 배고프다고! 자꾸 맛있는 걸 줘!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먹고 싶어도 이가 아파 못 먹는데 사육사가 자꾸만 더 맛난 걸 들이미니 스트레스받을 만도 했다. 이승도는 침착 하게 진료 상자에서 블루건을 끼내 들었다. 마취액을 발아 들인 주사를 후 불어 호리에게 명중시켰다. 이발에만 온 통 신경이 가 있던 녀석은 주사가 엉덩이에 꽂히는 그 순 간의 따끔함도 못 느끼는 듯했다.

   한참 내실을 배회하던 녀석이 비슬비슬 바닥에 스러졌 다. 사육사들의 도움을 받아 호리를 수술실로 옮겼다. 심 각하게 썩은 충치를 봅아 치료를 하고 다른 부분도 간단 히 진찰한 뒤 사육사에게 인계했다.

   진료실로 돌아오자마자 태산이에게 젖병부터 물렸다. 어미에게 버림받고 축 처져 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 큼 분유를 잘 먹었다. 트림도 잘하고 똥도 잘 쌌다. 잠시 산책을 시켜줄까 했지만 이미 해는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

아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녀석을 푹신한 담요 위에 눕힌 두I,이승 도는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녔더 니 어깨가 뻐근하게 뭉쳐 있었다. 그는 석양이 몰려오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어 벽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각은 1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집에 가면 왜 이렇게 늦었냐며 난리를 칠 몰염치한 애 들이 빽빽거리고 울 게 분명했다. 이승도는 한숨을 쉬며 가운을 벗고 옷장을 열었다.

   그때,콜콜 잘 자고 있던 태산이가 벌떡 일어나 칵칵 울 어대기 시작했다. 이승도는 갑작스런 난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태산이는 전신의 털을 세운 채 ‘누 구야! 누구야!’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낯선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한 것 같았다. 이승도는 팔만 꿰입 은 코트의 단추를 잠그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괜찮아,태산아. 여긴 안전해.”

   [선생님! 선생님! 저 밖에! 무서운 게!]

   “쉬이. 선생님이 지켜줄게.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말을 다 맺기도 전,오늘 두 번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 다. 그러자 태산이는 더욱 심하게 날뛰었다.

   “들어오세요.”

   이승도는 ‘안 도H! 무서워! 선생님!’ 찡찡 우는 태산이를 가슴팍에 품고 일어섰다. 느리게 문이 열리고 있었다. 열 린 문밖으로 익숙하지만 의외인 얼굴이 서 있었다. 그제 야 태산이의 과민반응이 이해가 갔다.

   “여긴 웬일이야?”

   어리둥절한 물음에 의외의 방문자,태국영은 그저 희미 하게 웃기만 했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가볍게 접히고, 붉은 입술이 완만한 곡선으로 휘었다. 일순 코끝이 마비 될 만큼 야릇한 향기가 훅 다가왔다. 이승도는 얼굴을 찌 푸렸다.

   “너 상태가 왜 그래.”

   태국영은 성큼 다가와 열 오른 이마를 슬쩍 목에 문지 르고 떨어져 나갔다. 어깨가 필쩍 뛰어오를 만큼 가히 불 같은 체온이었다. 이승도는 발작하듯 몸을 떨어대는 태산 이를 펜스 안에 놓아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싸웠어? 다쳤어?”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손을 뻗자 태국영은 얌전 히 이승도의 손아귀에 얼굴을 기댔다. 이승도는 그의 이마 를 짚어보곤 재차 놀랐다. 그 화끈했던 열기가 손 안에 진 득하게 감겨 왔다. 태국영은 제 목덜미에 맺힌 땀을 나른 하게 훑었다. 그의 손바닥은 금세 번들거렸다.

   “얼핏 짐작이 가는 건 있는데,정확한 건 몰라. 뭐가 됐 건 대보름의 영향이겠지만.”

   “무슨 말이야. 대보름은 다다음 주잖아.”

   이승도는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대보름이라면 정확 히 다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연례행사처럼 태국영이 가장 위험해지는 그날을 제가 착각할 리가 없었다.

   “나분만이 아니야. 우리 가족들이 그렇고,근방에 살고 있는 다른 가문 녀석들도 마찬가지로 증상이 일찍 발현했 어.,,

   “…그럼 위험한 거아나?”

   “위험할 것까지야. 다들 급하게 약을 구하느라 바빠지 긴 하겠지만 개들이 나처럼 미쳐 날뛸 것도 아니고.”

   태국영은 천연덕스레 한쪽 눈을 슬쩍 찡긋해 보였다. 이승도는 혀를 차며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가볍게 찰싹 쳤 다.

   “내가 왜 다른 놈들 걱정을 해. 너 말한 거야,너. 너만 조용히 살면 내 인생은 영원히 평화로우니까.”

   “하긴. 우리 승도가 나 외에 다른 놈을 신경 쓸 리가 없 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평소처럼 헛소리를 잘하는 걸 보면 걱정할 만한 정도

는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애기해.”

   이승도는 코트 단추를 마저 채우고 가방을 들었다. 막 어깨에 걸쳐지려던 무게감이 사라져 돌아보자 태국영이 한 손에 가방 끝을 가로채 들고 있었다. 그는 땀이 배어나 와 반들거리는 안면을 움직여 그림처럼 미소를 지었다. 진 료실 문이 그의 손에 의해 열렸다.

   “서두르는 게 좋을걸. 죽은 듯이 잠든 나를 업어서 옮기 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승도는 대변한 낯으로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가 불길했다. 구름 뒤 에 반쯤 몸을 숨긴 달이 맹인처럼 탁한 동공을 번득이는 밤이었다. 먹구름 사이사이로 간간이 뻗어 나오는 시린 달 빛은 굶주린 맹수와 같이 은밀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지상 으로 내꽂았다.

   헐벗은 정원수들이 겨울바람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렸 다. 혹독한 겨울 여왕의 치맛자락에 휩쓸린 것이 아니었

다. 외딴 성처럼 키 높은 나무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거대 한 저택,그 안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운 때문 이었다.

   “뭐 하고 있에 당장 진정제를 더??!”

   고함치던 남자를 향해 칼날 같은 은빛이 스쳤다. 남자 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그것은 뺨을 긋고 지나갔다.

   빚어놓은 듯 매끈했던 피부에 붉은 자국이 길게 생겼으 나,그것은 채 1 초도 되지 않는 사이 금세 사라졌다. 거짓 말처럼 신속하게 아문 자리는 여린 핏방울 하나조차 맺지 못했다.

   “안 됩니다,가주님. 지금도 충분히 위험 수치를 넘었습 니다. 여기에서 더 투약량을 늘리면 도련님의 어린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주치의는 주름진 미간을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 역시 식은땀으로 창백하게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남자 는 눈가를 섬뜩하게 세우며 주치의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 대로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나?”

   “…면목이 없습니다.”

   “그따위 빈말은 필요 없으니까 진정제나 더 가져오K 이 대로는 위험하다. 부작용을 감수할 수밖에.”

   남자는 싸늘히 일갈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아귀에

는 거칠게 몸부림치는 짐승의 목이 있었다. 크르르 우는 목울음이 선득하게 손금을 스며들 때마다 남자는 이를 사 리물었다. 금방이라도 이 여린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충 동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내해야 했다. 적어도,이곳에 아내가 있는 이상.

   처연한 눈물로 얼굴을 흠뻑 적신 그의 아내,한수연이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주치의의 가운 깃을 붙들었다.

   “홍 교수님. 우리 아이가 너무 아파하는 것 같아요.”

   “…사모님.”

   “살려달라고는 안 할게요. 그러니까제발,저 아이 마지 막 가는 길까지 아프지만 않게 해 주세요.”

   사슴처럼 고운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어둠 깔 린 바닥을 수놓았다. 간헐적으로 떨리다 이내 바닥으로 추 락하는 몸은 생기 없이 깡말랐다. 막내아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생애 유일한 근심거리였고,그 깊은 시름 은 그녀의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 제 한 팔을 부축하는 것조차 느끼지 못 했다. 점점 더 거세지는 아들의 울음만이 화염처럼 가슴 을 태웠다. 이미 예전에 다 타버린 심장은 재만 남은 것 같 았다. 부서져 가루가 되어 홑날려도 저 아이의 고통을 나 눠 가지지 못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미인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 었다. 비참하리만치 무기력했다. 남편 여군호의 아래 깔 린 가엾은 몸뚱이만 망연히 눈물에 새길 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허공에 내쏘았을 때,모두가 말했었다. 이 아이는 성년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세 상을 떠나리라고. 저주받은 피를 유독 짙게 타고나,그 어 떤 약물로도 그 광기를 제대로 억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금수처럼 살아가다 금수만도 못하게 죽을 거라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인 그녀를 물어뜯었다. 무른 이발이었지만 약하디 약한 인간의 팔은 살점이 떨어지며 피를 붐어냈다. 그때 장남은 아기를 집어 던졌고,남편은 살기를 띠며 벌겋게 달아오른 한 손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를 막았다. 그와 저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기를 그의 손으로 비정하게 죽이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물어뜯긴 자리가 아니더라도 출산으로 인한 출혈이 심 해 당장 안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만 의 고통을 추스를 생각도 없이 수술용 침대에서 내려와 바 닥을 기어갔다. 대경하며 몰려드는 이들을 모두 부리치고 서,그녀는 내동댕이쳐진 아이를 다시금 품에 안았다. 힘 차게 울어대는 작은 핏덩이를 안아 들고서 부푼 젖을 물렸

다. 참담하게 굳은 남편을 바라보며 가날프고 애처롭게 웃 어 보였다.

   이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세요. 작지만 부산하지 않은 손을 보세요. 제 어미를 빤히 올려다보는 이 영리한 눈동 자를 보세요. 군호 씨,우리 아들은 당신보다 더 아름답고 견고한 지배자가 될 거예요.

   여군호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이 어미의 마 음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발톱 나온 앞발로 어미 의 젖가슴을 누르며 모유를 먹는 핏덩이는 역사가 증언하 는 괴물이었다.

   언젠가는,그것이 언제가 되었건,아이는 이지를 잃어 생존본능만 남아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생명을 적으로 간 주할 것이었다. 저를 낳아준 어미를 죽이고,아비를 죽여 강처럼 흘러가는 피 웅덩이에 한껏 코를 박으며 희열에 몸 을 떨 것이었다.

   길어 봐야 열여덟 해다. 그 사이 아이의 광증이 언제 정 점을 찍어 폭발할지 그것은 아무도 몰랐다. 혹여 그 이후 까지 살아있다손 치더라도 아이는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 다. 아이의 몸이 점점 성체에 가까워질수록 감당하기 힘들 어질 테다.

   여군호는 고요히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모두 나가라.,,

   흔들림 없이 견고한 목소리였다. 살얼음 같은 침묵이 공기에 자작자작 퍼져나갔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의 결의 는 모두에게 전해졌다.

   “아…아아!”

   짧은 침묵을 가장 먼저 찢은 것은 아이를 잃을 위기에 처한 어미의 비명소리였다. 비극에 짓눌린 그녀의 성대는 채 한 단어도 완성해 내지 못했다. 그저 여군호의 손아귀 에 목을 물린 아이처럼 이상한 울부짖음만이 허공에 나부 낄분이었다.

   안 돼. 제발,군호 씨. 내 아기,우리 아기,아직 열두 살 밖에 안 됐잖아. 열일곱까지는 살 수 있다고 했잖아. 너무 발라. 너무 발라요.

   “여제운! 내 말 안 들려? 당장 모두를 데리고 나가!”

   없는 사람처럼 모친만 부축하고 있던 장남 여제운,그 가 그제야 움직였다. 그는 모친의 헝클어진 머리와 눈물 젖은 얼굴을 가슴에 품었다. 나가지 않겠다 발악하며 버티 는 그녀의 귓가에 여제운은 조용히 속삭였다.

   “용서하세요,어머니.”

   여제운은 그녀의 뒷목을 감싼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질긴 몸부림이 순식간에 멎었다. 절망에 허덕이던

눈에선 급속히 생기가 빠져나가고,그 위를 파르스름하고 얇은 눈꺼풀이 덮었다.

   여제운은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일어섰다. 무게감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쓰린 속을 애써 외면하고 방문을 나서며,그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은태.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장을 지켜봐 온 아이.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그의 어린 동생은,기백 년 전이었으면 신처럼 떠받들어지며 제 자리마저 가볍게 위 협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아니,위협이고 뭐고 이미 가솔들 이 그를 추앙하고,저 역시 그 강인함에 매료되어 자연스 레 자리를 내 주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여은태가 필연적으로 내붐을 광 기를 제어할 수 있는 이가 없는 이상,그 아이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제운은 복도로 나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세심한 눈 으로 어미의 눈꺼풀을 주시했다. 불규칙한 호흡만이 파리 한 입술 새로 흘러나올 분,깨어날 기미는 없었다. 아득한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그녀의 영혼이 안타까웠다. 여제운은 조금 더 깊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즈즈즉一 굳게 닫힌 방문 안에서 질긴 섬유가 억지로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평범한 인간 인 홍 교수는 미처 잡아낼 수 없는 소음이었으나,급박한 상황에서 오감을 활짝 열고 있는 여제운의 귀에는 천둥소 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것은 여군호가 아이의 가죽을 가르는 소리였다. 길 게 뻗어 나온 손톱으로 그 여린 살을 벌리고,갈비뼈를 부 수고,그 안에서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터뜨릴 것이었 다-

   여제운은 분수처럼 솟구칠 피비린내를 기다렸다. 그러 나 뒤이어 그를 강타한 것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소 음이었다.

   쪄엉??!

   여제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기겁한 듯 몸을 물리며 입을 벌리는 홍 교수의 반응으로 보아,환청도 착 각도 아니었다. 두끼운 유리가 단번에 산산조각 나는 소리 였다. 그때 여군호의 억눌린 신음이 작살처럼 귓구멍을 파 고들었다.

   “여제운!”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여제운은 찰나 망설이며 홍 교수를 보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떨기만 하는 그 가 영 못 미덥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에 혼절한 모친을 눕

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홍 교수님.”

   ‘‘……아,네.”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혼이 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홍 교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덜덜 떨리는 두 팔을 뻗어 모친을 받아들자 여제운은 빠르게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가장 먼 저 인지한 것은 한 사람 분의 숨소리.

   하아. 하아.

   여군호가 몰아쉬는 숨결은 불규칙했다. 거칠게 오르내 리는 그의 어깨 너머 산산조각이 나 틀만 남은 창문이 보 였다. 작은 유리조각의 잔재조차 방 안에는 없었다. 내부 에서 터져 나간 거대한 무형의 힘이 창을 부순 탓이었다.

   “당하셨습니까.”

   나직한 질문엔 ‘설마 아버지가요?’라는 뒷말이 생략되 어 있었다. 뻥 뚫린 창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공기 속에 피 냄새가 자욱했다. 동생의 짙은 피 냄새는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다.

   여군호는 천천히 돌아섰다. 결벽처럼 깨끗하던 그의 흰 셔츠는 넝마와 같이 찢어졌고 피에 흠뻑 젖어 짙붉었 다. 미미하게 찌푸려 진 그의 얼굴이 불쾌한 심기를 대변

   “쫓아라.”

   깊이 팼을 게 분명했을 그의 상처는 벌써 반쯤 아물어 피거품만 열게 토해내는 중이었다. 경이로운 재생 속도를 보이는 그의 자상을 힐긋 본 여제운이 물었다.

   “쫓아가서,그 다음은요.”

   “숨만 붙여 데려와.”

   “피 보는 거 좀 별론데요. 그게 내 피면 더더욱.”

   “아직 성년식도 안 치른 어린 짐승을 상대로 징징댈 참 이나?”

   그 성년식도 안 치른 놈한테 늑골까지 긁힌 분이 할 말 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제운은 그의 신경을 돋우 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말씀처럼 어려울 건 없습니다. 발가락 하나하나 부러 뜨리고 척추도 부러뜨리려면 저도 여기저기 긁힐 각오는 좀 해야겠습니다만,못할 건 없지요. 그런데,그 후는 어 쩌실 겁니까. 놈 발톱이 아버지 급소 거죽까지 찢을 만큼 자랐다면 이제 방법이 없습니다. 다음엔 뼈가 아니라 내장 까지 발라먹으려 들지도 모르죠. 그때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요.”

   여제운의 마지막 말엔 열은 혐오가 섞여 있었다. 돌연

변이처럼 태어난 후유증인지,그놈은 어미에게 집착하는 저들의 본능조차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갓난아기 때에 도 젖을 발다가 배가 부르면 발톱을 세워 제 어미의 젖가 슴을 할퀴던 녀석이었다. 여리고 보드라운 살갗에 생채기 가 늘 때마다 여군호도 여제운도 살기를 삼키려 무던히 애 를 썼었다.

   여군호는 걸레보다 못한 꼴이 된 셔츠를 벗어던지며 대 답했다.

   “내게 생각이 있다.,,

   “어쩌시려고요.”

   여군호의 눈동자가 붉은 기 도는 은빛으로 번득였다.

   “놈이 짐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그에 걸맞은 짐승 우리에 가둬야지.”

   이승도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잠에서 깼다. 몽롱한 머 리를 손목으로 탁탁 치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집 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호화로운 방은 지긋지긋하게 낯익 었다. 커다란 쿠션에 상체를 기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 었던 이승도는 무심코 뻐근한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태국영이 제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쿠션과 몸 사이로 파고들어 허리를 꽉 부둥켜안은 팔의 힘 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 고 집요했다. 고스란히 체중을 싣고 있는 상태라 갑갑해 서 잠이 깬 듯싶었다.

   태국영은 겉으로 보기와 달리 꽤 체중이 나갔다. 불필 요한 지방이 한 군데도 없는 몸이었다. 전투를 위해 태어 난 것처럼 이상적인 근육으로 완벽하게 감싸인 몸은 작은 흉터는커녕 점 하나조차 없어,그 완벽한 미는 차라리 무 생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승도는 주위를 둘러보다 팔을 뻗어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체온계를 들었다. 죽은 듯 자고 있는 태국영의 귀에 꽂아 체온을 측정했다. 평소보다는 조금 높았지만 이 정도 는 안정권에 속했다. 안심하고 버려두고 가도 될 정도였 다.

   그러나 그는 곧장 일어서지 않고 태국영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모발은 눅눅했 으나 매끄러웠다. 그는 이어 그의 등허리에도 손을 댔다. 남자다운 곡선은 매혹적인 모양으로 지문과 손금에 스며 들어 왔다. 호흡할 때마다 작게 오르내리는 넓은 등을 달

래듯 한참을 어루만져주고 나서야,이승도는 제 허리를 옭 아맨 태국영의 팔을 가만히 떼어냈다. 그 움직임에 무의식 적으로 반응하는 근육이 험악하게 조여들었다. 그러나 살 살 토닥여주니 이내 잦아들었다.

   이승도는 늘어진 태국영을 편히 눕힌 뒤 욕실로 들어갔 다. 뜨거운 물을 붐어내는 샤워기 아래 몸을 맡기자 기다 렸다는 듯 근육통이 몰려와 전신을 물어뜯었다.

   하아……■

   한숨을 지으며 부러 빠르게 손을 놀려 샤워를 마쳤다. 젖은 머리를 털며 파우더 룸에 들어가니 포장도 뜯지 않 은 새 옷이 그를 반겼다. 비닐을 뜯어 옷을 갖춰 입었다. 사이즈는 늘 그랬듯 딱 맞았다.

   『지금 시각 새벽 1 시 20분. 간호 끝내고 감.』

   이승도는 간단히 휘갈겨 쓴 메모지를 사이드테이블의 전화기 아래 끼워 넣고 방을 나섰다. 태국영이 잠든 2층 은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으나,1 층은 여전히 부산스러 운 상태였다.

   귀신처럼 발소리를 죽인 고용인들은 이승도와 마주칠 때마다 소리 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승도는 그 인사 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동선의 낭비 없이 곧장 현관으로 갔다.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 한 명이 깨끗하게 닦은 구두

를 내밀었다. 이런 거 필요 없다고,새삼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낭비로 느껴졌다. 이승도는 묵묵히 받아들었다.

   “승도 군!”

   막 구두를 신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이승도는 조용히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지었다. 이 집에서 제 이름을 부를 이는 태국영과 유모분이었다. 유모는 다른 고용인들처럼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이승도는 내키지 않는 얼굴 을 하고서 돌아섰다.

   작은 몸을 부산히 움직여 다가온 유모의 품 안에는 열 병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 다.

   “승도 군. 매번 인사도 없이 가요. 이 유모 섭섭하게.”

   “…죄송해요.”

   이승도는 온순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유모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방긋 웃었다. 한 걸음 더 다가온 그녀가 한 손을 들어 이승도의 뺨을 서슴없이 어루만졌다.

   “아니에요. 늘 도망가는 승도 군 염치없이 붙잡는 내가 미안하지.”

   이승도는 그녀의 다정한 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유모 는 어설피 웃었다.

   “기왕 염치없이 구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하면 안 돼

   무슨 부탁이나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은,그녀가 끼낼 말 이 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도련님 한 번만 안아주세요. 이 유모가 이렇게 부 탁할게. 응?”

   “우리 가주님도 저렇게 힘들어하셨는데,이 아기는 어 떻겠어요. 그래도 이 집안 핏줄 어디 안 가서 의젓하게 잘 견디고는 계시지만,아직 아기잖아요.”

   “나 너무 뻔뻔하지요? 나도 알아요. 그래도 도련님 이 렇게 아파하는데,승도 군밖에 매달릴 곳이 없어서 그래 요.,,

   따뜻하고 달콤한 젖내가 나는 손,그나마 위안을 주었 던 손,그것을 부리칠 만큼 이승도는 매정하지 못했다.

   “주세요.”

   망설이다 팔을 벌리자 눈물까지 찍어낼 기세였던 유모 는 반색하며 얼른 아기를 그의 품에 떠안겼다. 어찐지 이 번에도 속은 기분이었지만,뭐 좀 속아준다고 해서 그녀 를 상대로 억울할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금 불편할 분이었

   이승도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얌전히 품에 안긴 아기는 발갛게 열꽃 핀 뺨을 수줍게 긁으면서도 열렬히 위 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작은 손을 뻗어 왔 다.

   토옥.

   뺨을 건드리고 떨어져 나간다.

   토옥.

   입술을 건드리고,그리고 다시금 폭 안겨 왔다. 이승도 는 심장 근처의 옷을 꼭 쥐어오는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 다. 아이는 이번에도 말없이 매달리기만 했고,이승도 역 시 아이의 고열이 잦아들 때까지 그 작은 몸을 잠시 품어 주었을 분이었다.

   여제운은 모든 감각을 후각에 집중시켰다. 동생 여은태 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쫓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 운 일이 되고 있었다. 옷깃을 적시는 작은 눈송이가 더 촘 촘하게 공기 중에 날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진한 습 기는 대기 중에 섞인 냄새들을 품은 채 바닥에 눌어붙고, 그곳은 곧 물이 되어 낮은 지대로 흘렀다. 여은태가 곳곳

에서 폭주한 흔적은 그렇게 서서히 옅어져가고 있었다.

   더 지체하면 여은태의 행방은 더 깊은 암막 속에 스며 들 터였다. 빠른 시간 내에 놈을 찾아 무력화해야만 했다. 만약 추적에 실패한다면 어딘가에서 큰 변고가 생길 때까 지 기다려야 했다. 그 말은 즉 큰 혼란이 야기되고 나서야 여은태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뒤처리를 하는 것은 까다로우나,굳이 따지자면 어려 운 일은 아니었다. 귀찮음을 감수하면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을 자신도 있었다. 다만 다른 가문들의 눈이 문제였다.

   그간 여은태의 실체는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각 가문의 공식적인 모임이 있을 때에도,부 친 여군호는 여은태를 대동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누 군가 여은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는 이유를 들었다. 그 변명은 강한 자만이 인정받는 이 세 계에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 중대한 결함을 캐묻는다 는 것은 여군호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다시금 일격을 가하 는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모두가 동정을 감추며 이제 껏 침묵했고,여은태의 실체는 이제껏 비밀에 부쳐질 수 있었다.

   여은태는 일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제왕의 재목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광기의 응집체

이기도 했다.

   먼 과거 어느 시절까지는 이 땅에도 그 금수의 제왕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고 한다. 제 일족의 세 계에 내려오는 역사서에 새겨진 활자에 의하면,그들은 폭 주하는 금수들을 보듬어 안아 그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살갗이 터지도록 고열에 시달려 오감이 전 부 망가질 정도가 되어도,그들의 품에 일단 몸을 맡기면 그 후로는 지고의 천국이 기다린다 하였다.

   날뛰는 감각들이 달콤하게 잦아들고,온몸의 솜털을 후 벼 파는 그 통증들이 극치의 쾌감으로 변한다는.

   여제운은 전설을 떠올리며 짧은 실소를 지었다. 그 역 시 이십여 년이 넘게 그 고통을 헤엄치고 극복해 왔다.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찬란히 도약하는 현대의학도 그 폭주 를 완전히 잠재우는 백신은 개발하지 못했다. 다만 감각 을 무디게 하는 것으로,살갗을 소금물로 재어 포를 뜨는 듯한 그 극심한 고통을 어느 정도 중화시켜줄 수 있는 정 도밖에는.

   여제운은 문득 더 굵어진 눈발을 느꼈다. 바람을 등에 업은 굵은 눈송이가 밤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어둠에 은 신한 채 이동속도를 올렸다. 동생 여은태의 체취와 아버 지 여군호의 피 냄새는 쉬이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종적

이 흐려질망정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여은태 의 흔적들이 어느 순간부터 완벽히 묻혀버린 것을 깨달았 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폭격처럼 쏟아지는 눈보라 때문 도,길어진 이동 거리 때문도 아니었다.

   아직 성체로 각성하지 못한 여은태의 풋내를 무언가가 압도하고 있었다. 이 맹렬하게 공격적인 것의 숨결은 보 통 가문의 가주들의 기세를 가분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놈의 정체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군호의 혈향조차 가분하게 침수시킬 만한 놈이라면,고민해볼 것 도 없이 하나분이었다.

   태국영. 태 가의 어린 가주밖에.

   여제운의 낯이 구겨졌다. 더 이상 사색에 잠겨 지체할 틈이 없었다. 여제운은 탐색에 박차를 가했다. 인두 같은 태국영의 체취는 빠른 이동을 거쳐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태국영 역시 이번 해에 갑작스레 이 일대를 뒤덮은 기현상 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기의 흐름이 불규칙하고 기이 할 만치 강렬했다. 이 일대가 온통 그 남자 냄새에 뒤덮였 다열마나 헤매고 다녔을까. 여제운은 나지막이 숨을 몰아 쉬며 한 곳을 주시했다. 지어진 지 오래되었을 한 전원주

택이 가로등 불빛에 고즈넉이 빛나고 있었다. 정원이 넓 고 담벼락이 높은 그 집은 갖가지 짐승의 잡내로 진동을 했다. 토끼,개,고양이,다람쥐,심지어는 원숭이와 담비 등의 냄새도 섞여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저 집의 주인은 뭐 하는 놈인가 싶은 생각이 들 겨를이 없었던 건,그 집 전체를 방어하듯 둘러치고 있는 태국영의 마킹 때문이었 다.

   태국영의 짝이다.

   여제운은 확신했다. 곤란함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 다. 저 정도로 확실하게 영역표시를 해둘 정도면,그게 누 구건 정중하게 방문을 청하는 것이 법도였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단 한 번의 무례한 방문으로도 전 쟁이 발발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고민에 빠진 사이 매끈하게 잘 빠진 흰색 차량 한 대가 눈길을 달려 그 집 앞에 섰다. 낡은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외제차였다.

   여제운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안력을 돋웠다. 바늘구 명처럼 작아진 그의 동공이 번득 빛을 발했다.

   익히 알고 있는 태국영의 차였다. 그러나 운전석에서 내린 인물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쏟아지는 눈발에 잔뜩 얼굴을 찌푸린 남자에게서 태국영의 냄새가 진동했다.

   “아. 이게 또 왜 이래. 무슨 고장이 이틀에 한 번 꼴로 나.,,

   남자는 손에 든 리모컨을 센서에 가져다 대며 투덜거렸 다. 버튼을 콱콱 눌러보지만 끝내 반응은 없었고,그는 이 내 포기했다. 수동으로 센서 덮개를 뜯어내서 차고 문을 열어둔 뒤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남자는 그렇게 집안으 로 사라졌다.

   여제운은 고뇌에 잠겼다. 동생 여은태의 마지막 흔적 이 저 앞에서 끊겨 있는 한,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만약 정말 여은태가 저곳에 침입해 들어간 거라면 저 남자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다. 여은태는 현재 본능만 날 뛰는 짐승이었다. 거기에 더해 발작으로 인한 육체의 통 증,그 스트레스가 지독히 누적된 상태였다. 홧김에건 본 능적으로건 제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을 말살시키려 들 가 능성이 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선택지는 두 가지분.

   하나는 이대로 저 남자가 죽기를 기다렸다가,모든 증 거를 인멸하고 여은태를 데려가는 것. 그러나 이 경우 태 국영이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물게 된다면 그야말로 전면 전은 예정된 일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 당장 여은태를 무력화시키고 태 가에 는 후에 일의 전말을 설명하는 것. 그러나 이 경우도 여은 태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태국영이 이쪽 의 입장을 곱게 이해해줄 가능성이 적기에 후폭풍은 감당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최악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최선을 택할 것인가. 도박 을 포기하고 차악을 택할 것인가.

   여제운은 선택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렸다. 그는 다음 대 가주가 될 인물이었다. 가솔들의 안위를 돌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도박은 위험하다. 그것도 태국영을 상대로라 면.

   여제운은 소리 없이 몸을 날렸다. 곧 은빛의 신형이 높 은 담벼락을 넘어 그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이승도는 얼얼한 턱을 문지르며 몸을 떨었다.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센서 덮개를 뜯는 그 짧은 시 간 동안 폭설에 두드려 맞았다고 이 모양이었다. 이마에 눌어붙은 머리카락도 설얼어 거칠었다. 그는 굳은 손마디 를 겨우 움직여 현관문을 따고 실내로 들어섰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어두웠다.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버리고 말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낯섦이 느껴진 탓 이었다. 실내엔 이상할 정도의 적막과 추위가 가라앉아 있 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온 사방에서 튀어나오던 녀석 들도 웬일로 잠잠했다.

   이럴리가없는데……

   그는 느리게 벗은 구두를 한쪽에 반듯하게 정리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 실내로 이어지는 복도는 폭이 1.2미터 가량에 길이는 4미터 정도였다. 복도 벽이 이어지는 왼편에는 세트형 주방이,복도가 끝나는 오른편 엔 응접실이 나타나는 구조였다.

   무겁게 끌리는 발을 억지로 끌어가던 이승도는,복도 끝의 모서리를 손으로 짚은 채 다시금 멈춰 섰다.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결을 느낀 탓이었다. 습기와 비린내를 잔뜩 품은 삭풍이었다.

   …바람?

   오늘의 눈 소식은 일기예보를 보아 알고 있었다. 집안 의 창문 모두 꼼꼼하게 잠근 뒤 출근했던 걸 똑똑히 기억 했다. 잠금쇠도 죄 오래되어 성인 남자인 자신도 꽤 힘을 줘야 돌릴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집에서 가장 똑똑한 동물 인 원숭이 영웅이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살짝 움직였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채 검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 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승도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검지 끝으로 그 것을 가볍게 한 번 문질렀다. 손끝에 차갑게 엉겨 오는 질 감은 물보다 훨씬 더 진득하고 불쾌했다.

   코끝에 가져와 가볍게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 순간 얼 음물을 뒤집어쓴 듯 짙은 오한이 척추를 꿰뚫었다.

   피다.

   바람에 섞인 비린내의 정체는 피 냄새였다. 소름 끼치 는 기시감이 뇌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느리게 뛰던 심 장 박동은 점차 거세졌다.

   혈관이 지나다니는 모든 자리가 기관차처럼 요란스럽 다. 사고는 멎었고 감각만이 바늘 끝처럼 살아 숨 쉬었다.

   ‘그것’은 지척에 있었다. 이승도는 덩어리진 열기를 느 꼈다. 가리어진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모호하게도 그 방향이 어딘지 인지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한 발 내 디딜 때마다 아그작,유리조각이 부서지는 소리만이 선명 하게 들려올 분이었다.

   벽 모퉁이를 짚은 손에 화염 같은 바람이 부서졌다. 그 것이 내뱉는 숨결이었다. 그 뜨거움의 농도는 점점 짙어

져 갔다. 녹아내린 눈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이 차갑게 뺨 위를 굴러 내렸다.

   이승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섰다. 그 순간.

   크르르르一

   그것의 머리가,앞발이,몸통이,뒷발이,꼬리가,차례 로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승도는 굳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네 발로 서 있는 짐승의 키는 그의 허리보다 조금 낮았 다. 거무죽죽하게 젖은 털은 본디 색을 알아볼 수 없었고, 걸음걸이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숨소리 역시 무언가에 막 힌 듯 거칠고 탁했다. 마치 아귀 같은 형상에 서슬 퍼런 안 광만이 강렬히 번들거렸다.

   짐승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섬뜩한 빛을 부리는 송곳니보다 덩어리져 흐르는 핏덩어 리가 더 먼저 보일 정도로.

   크륵,짐승이 다시금 목을 울렸다. 녀석의 등허리가 구 부러지며 앞발이 움츠러들었다. 낮은 곳에서 올려봐 오는 눈은 탁하게 흐려 있었으나,그 안에 가득 고인 것이 무엇 인지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위기감,적대감,살기였다.

   짐승의 발톱이 막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르려던 때였

   “죽였어?”

   이승도는 황망히 뜬 눈으로 짐승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짐승의 몸이 경련하듯 크게 멈칫거렸다.

   도약은 무산되었고 놈은 숨을 멈췄다. 크게 벌어진 눈 시울 한가운데로 초점이 아슬아슬 빗나갔다가 일순 돌아 오길 반복했다.

   “이 안에 살아있는 아이들 중 하나라도.”

   이승도가 이를 갈듯 말을 이었다. 그러자 짐승의 초점 이 순간이나마 완전히 또렷해졌다.

   “죽였나고,묻잖아.”

   이승도는 짐승을 노려보았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일말의 기대는 남겨둔 상태였으나 사실은 거 의 확신하고 있었다.

   짐승의 이발과 발톱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제 급소를 물 어뜯고 숨통을 끊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상에서 강 한 종족을 눈앞에 두고도 이승도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 의 전신을 소나기처럼 적셔오는 것은 공포가 아닌 슬픔 섞 인 절망이었다.

   [당신은.]

   짐승이 처음으로 주둥이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채 한마 디도 전하기 전에 핏덩이를 또 한 덩어리 토해냈다. 울컥 쏟아진 진득한 피는 이미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자국을 더 넓게 만들었다.

   이승도는 상황도 잊고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을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며 주먹 을 꽉 말아 쥐었다.

   경련하듯 떨리던 짐승의 몸은 크게 휘청거렸고,중심 을 잡지 못해 비척거리다가 한참 뒤에야 바로 섰다. 바닥 을 짚은 네 발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애처롭게 삐걱거렸 다. 그런 와중에도 짐승의 섬뜩한 은색 눈은 이승도에게 서 한 번 빗겨가는 법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야? 왜 날 보고도 놀라지 않아?]

   짐승,여은태는 이승도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어째서 그는 저를 눈앞에 두고도 공포에 떨지 않는지,어째서 울 지 않는지,어째서 화내지 않는지,어째서.

   어째서,도망치거나 죽이려 들지 않는지.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피어난 덧없는 호기심이었다. 여은태는 금세 제 어리석음을 자각하곤 나지막이 이를 갈 았다. 그가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저를 낳아준 어미라는 여자

도 듣지 못하는 것이 제 목소리인데.

   여은태는 섧게 체념했다. 체념하고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려던 차였다. 기대치 못했던 침착한 대답 이 돌아왔다.

   “난 이 집 주인이야. 이 집에 사는 아이들의 보호자이기 도 하고. 내가 놀라지 않는 건,너와 닮은 녀석을 알고 있 기 때문이고.”

   이번에야말로 여은태는 등허리가 펄쩍 뛸 만큼 놀라며 뒤로 크게 뒷걸음질 쳤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짐승의 눈 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여은태는 숨을 멈추고 이승도를 올려다보았다. 먹먹한 적막이 오고갔다. 무섭도록 굳어져서 도리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공기가 눈바람에 젖어들었다.

   그 한풍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여은태는 하안 입김만 연거푸 부렸다. 그는 떨리는 음성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내말이……들려? 아니면,그냥 우연이야?]

   여은태는 갈팡질팡했다. 또다시 실망하고,또다시 아파 질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 기만 했다. 짧은 생애가 온통 고단했던 탓에 울음조차 잃 어버린 어린 짐승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자신이 깨지고 부 서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잘 들려. 그러니까 너도 대답해.”

   그는 이번에도 제 목소리를 정확히 들었고,흐트러짐 없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 안에 있는 애들,하나라도 죽였어?”

   그러나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정확히 제 마음 이 건넨 음성을 들은 거였다. 여은태는 가슴이 세차게 울 렁거려 몸을 떨면서도 홀린 듯 대답했다. 조금은 급한 어 투로.

   [아니야.]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가 제대로 된 대답을 준 것처럼, 자신 역시 그러고 싶었다.

   [나는 무엇도 죽이지 않았어.]

   “정말,다들 무사해? 다치게도 하지 않았어?”

   [나,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여기 애들은 모두가 내게 해 를 끼칠 수 없을 만큼 작은 애들분이었어. 날 보자마자 다 들 도망갔는데,난 그냥 내버려뒀어. 정말이야.]

   “……그래.”

   이승도의 얼굴 위로 짧게 안도의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안면 근육들 역시 허물어지듯 풀어졌 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차갑게 성에가 고 인 듯했던 심장이 그제야 눅진히 녹아내렸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는 떨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가날피 흔들리는 한숨 을 털어냈다.

   “잘했어. …아주잘했어. 의심해서 미안해.”

   여은태는 열 오른 눈에 애써 초점을 유지했다. 눈앞의 남자는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현기증이 이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떨리는 숨을 연방 내뱉었 다.

   그럴 때마다 그의 흐린 숨결이 작게 작게 떠밀려 왔다. 그 향기가 가슴 속 가장 여린 부분을 자꾸만 창살처럼 찔 러 왔다.

   이상하다.

   여은태는 이끌리듯 이승도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걸 을 때마다 뼈마디가 으깨지듯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는데 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제 발들은 의지를 가지고 움 직였으나 마치 영혼 없이 끌려가는 듯했다.

   빤히 보고서도 피하지 않는 이승도에게 바짝 다가선 여 은태는 코끝으로 그의 늘어진 손을 툭,건드렸다. 반사적 으로 움찔거리는 그의 손가락에서도 기분 좋은 냄새가 났 다. 어쩐지 온몸을 날카롭게 발라내던 불의 날도 무더진 듯했다.

   이건 정말이상해.

   그의 향기는 달콤하고 매혹적이었지만,반면 기이한 기 갈을 부추겼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으나 무언 가를 해야 한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은태는 홀린 듯 입을 벌려 그의 손을 물었다. 날카로 운 송곳니가 그의 살갗에 아주 작은 생채기를 냈다. 그대 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 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했다. 고요하고 깊은 눈빛이 오고갔다.

   여은태의 목이 크르르르 떨려 왔다. 뱃속 어딘가에서 다시금 뜨거운 핏덩이가 치솟았다. 삼키려 애썼으나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역류하는 힘은 순식간에 거세졌다. 거친 토악질이 시작 됐다. 쿨럭쿨럭 진득하게 뭉쳐 올라오는 것들을 힘겹게 뱉 어내고 있을 때였다.

   “이런,아가야. 잠깐만 숨을 참아.”

   이승도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앉아 녀석의 콧등을 한 손으로 꽉 덮 어 눌렀다. 비강까지 핏덩이가 막아 버리면 호흡곤란이 더 심각해질 것이다. 손 안에서 뜨거운 혈류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도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코끝에 입술을 붙였다. 축축하게 젖은 코는 정체 모를 끈적한 액체들로 비린 향기 가 엉켜 있었다. 불결하게 느낄 법도 하건만 깊게 발아내 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은태는 이승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발작하듯 크게 한 번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숨을 불어넣을 때마 다 몸을 자꾸만 움찔움찔 낮추려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승도는 입 안으로 픽픽 쏟아져 오는 핏물이 멈추고 나서야 입술을 떼 냈다. 몇 번 반복해서 침을 뱉어낸 그가 고개를 들고 녀석을 보았다.

   “괜찮아? 이제 토기는 멈췄지?”

   여은태의 몸은 여전히 사체처럼 딱딱하게 긴장해 있었 다. 그의 말대로 괴롭게 목을 역류하던 것들은 잠잠해졌 다. 그래서 도리어 더 당황스러워졌다. 여은태는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뭐야. 이건 도대체 뭐지?

   마치 그 혼란스런 의문을 들은 것처럼,그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게 해주려는 거야. 내 눈을 보고,나한테 그 냥 몸을 맡기면 돼.”

   여은태는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헐떡였다. 당혹에 흔 들리는 눈이 연방 주변을 겉돌다 마침내 이승도에게 완전 히 안착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이승도는 안심시켜주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아,여은태는 신음했다. 그 시점부터 전신을 장악했 던 돌 같은 경직은 빠르게 풀어졌다.

   “어때. 머리가 아픈 것도 덜하지?”

   [이……이상해. 이럴리가없는,없는데……■]

   여은태는 혼란과 흥분이 엉망으로 교차되는 눈을 정신 없이 깜박였다. 믿을 수 없었다. 진탕이 되어 있던 머릿속 이 청량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모든 자극을 고통으로 받아들였던 뇌리로 눈이 멀 것 같은 광명이 비쳤다. 젖줄처럼 보얗게 터지는 시야엔 다정 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의 연 속이었다.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환희가 너무 눈부셔서 도 리어 슬픔이 사무쳐 왔다. 무언가 걷잡을 수 없이 서러웠 다.

   “속이 다 망가져 있구나. 숨 쉬기 힘들었지? 밥도 잘 못 먹었을 테고.”

   […응. 응.]

   귓가에서 따뜻하게 번지는 목소리에 여은태는 낮게 그

르렁거리며 울었다.

   [아파. 너무 아파.]

   “그래. 내 어깨에 머리 기대고 잠깐만 있어. 내가 다 알 아서 해 줄게.”

   [으응.]

   여은태의 꼬리가 처음으로 허공에 치솟았다. 녀석은 그 것을 세차게 한 번 흔들며 고개를 죽 들이밀어 왔다. 덩치 는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지만 매달려오는 모양은 자그마 한 태산이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이승도는 아래로 손을 뻗어 녀석의 배도 느리게 문질 러 주었다. 거칠고 잔인하게 요동치던 내장들이 잠잠해지 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에 다다른 노인처럼 탁하고 사나웠 던 호흡도 차분히 안정되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것은 임시방편일 분이었다. 수시로 깨 지고 부서지는 몸에 비해 그만한 재생력이 뒷받침되지 않 을 테니,얼마 안 가 상태는 금방 악화될 것이 뻔했다.

   이승도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을 때였다.

   “여은태!”

   순간 냉랭한 고성이 화살처럼 실내를 갈랐다. 휘날리

는 눈꽃들이 일제히 폭사하며 벽과 천장에 몸을 던졌다.

   여은태는 찰나 이승도를 보았다. 따뜻하고 여린 품성 의 그는 이 순간에서조차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피해.]

   여은태는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 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쉬 움을 뒤로 하고 여은태는 몸을 돌렸다. 이 기척과 이 목소 리는 익숙했다.

   오늘에야말로. 오늘은 반드시.

   여은태는 복도 모퉁이를 튀어 나갔다. 그 순간,제가 뚫 고 들어온 창문이 더 크게 박살이 났다.

   난장판이 된 거실을 훌쩍 날아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차게 가라앉은 눈이 형형한 궤적을 그렸다. 위협적인 그 의 손톱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왔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날려도 그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여은태는 무더진 발톱을 바짝 세워 눈앞을 가로막았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 흉기들이 맞부딪쳤다. 번쩍,낙뢰 같은 불꽃이 튀었다.

   째앵!

   한데 뭉친 덩어리가 붕 떠올라 왼쪽 주방으로 곤두박질 쳤다. 여닫이 유리문을 산산조각 낸 그들은 아일랜드 식탁

과 조리대를 차례차례 부수며 벽까지 떠밀려갔다. 위협적 인 파편들이 널브러지고 자욱이 먼지가 일었다.

   다시금 급소를 노리고 달려든 여제운이 크게 손을 휘둘 렀다. 그러나 그의 손톱은 허공을 베며 벽을 찍었다. 그가 주춤한 사이 여은태는 온 몸을 던져서 아가리를 쩍 벌리 고 가슴을 노렸다.

   여제운은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막았다. 세찬 힘의 반 동으로 그들은 다시 반대편 거실로 날아갔다. 낮은 포물선 을 그리는 둔중한 무게감이 허공에서 느리게 휘돌았다. 여 제운은 허공에서 몸을 돌려 여은태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세차게 메다꽂았다.

   쿠응!

   벚꽃처럼 휘날려 들어오던 눈보라가 온 사방으로 붐어 져 나갔다. 여은태는 흥분한 듯 길게 포효했다. 창틀에 남 아있던 유리조각들이 기의 폭발에 흔적도 없이 바깥으로 날아갔다.

   돌풍이 불었다. 여제운은 광속에 버티듯 몸을 낮췄다. 무릎을 굽혀 체중을 지탱한 그는 튕기듯 솟아오른 여은태 가 휘두른 발톱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휘청한 몸을 가까스로 바로잡았고 그대로 버텨냈다.

   끼기기기一

   맞물린 손톱과 발톱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여제운의 미간이 슬쩍 꿈틀했다. 일격에 나가떨어질 거라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받아치는 힘이 예상을 웃돌았다. 그의 뇌리로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던 여군호의 셔츠 자락 이 스쳐지나갔다.

   단순히 방심한 탓,만은 아니었다 이거군.

   그러나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났다 하여도 녀석 은 성체도 되지 못한 애송이였다.

   “조용히 따라나서라,여은태. 반항하면 척추를 으스러 뜨려서 데려갈 생각이니까.”

   여제운은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여은태의 눈에 서 열화 같은 울분이 폭발했다. 유일한 희망은 다시금 절 망으로 빠르게 부패해 갔다.

   [웃기지 마! 차라리 죽여!]

   여은태는 바닥을 단단히 지탱한 뒷발에 힘을 실었다. 그대로 솟구치며 그와 대립하고 있는 앞발을 휘둘렀다.

   여제운은 허공에서 몸을 틀어 가볍게 뒤로 날아 착지했 다. 그는 구부러진 무릎에 반동을 실어 곧장 날아올랐다. 최대한으로 뻗어 나온 손톱이 여은태의 등허리를 노렸다.

   여은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맨땅 을 짚은 여제운은 내심 크게 놀라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찾고 빙글 돌며 등 뒤로 팔을 휘둘렀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빛의 창살처럼 나타난 여은태의 쩍 벌어진 아가 리가 그것을 세차게 물었다. 여제운의 손톱은 여은태의 어 금니 위쪽을 꿰뚫었고,여은태의 이발은 여제운의 팔뚝을 뚫었다.

   여은태는 잇새에 들어온 것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고개 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제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혀 를 찼다. 우습게 보고 방심한 것은 부친이나 저나 다를 바 가 없었다. 뼈까지 닿을 듯 깊이 파고든 이발이 놀랍게도 근육을 조금씩 갈라내고 있었다. 그는 여은태의 주둥이를 꽉 붙들고 있던 손을 휘둘러 여은태의 턱을 후려쳤다.

   뻑,무시무시한 소리가 진동했다. 여은태는 일순 전신 을 떨었으나 악 다문 이발을 풀지 않았다. 일격에 턱뼈가 함몰되었다.

   여은태는 분이 치밀었다. 이것은 힘의 차이가 아니라 세월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제 뼈가,제 몸이 그의 나이처럼 단단히 여물었다 면 이깟 놈쯤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여은태는 생사를 건 것처럼 여제운의 한 팔만 집요하 게 노렸다. 선혈이 분수처럼 튀었으나 신음 한 자락 없는 싸움이었다. 이승도는 난데없이 벌어진 난투극에 꿔다 놓

은 보릿자루처럼 명하니 서 있었다.

   …어쩌지.

   이승도는 답 없는 고민에 망연히 눈만 깜빡였다. 두 짐 승의 혈투에 거실이 온통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집기 들은 죄 부서졌고 온 곳에 피 칠갑이었다.

   남자의 발길질이 짐승의 배를 가격했다. 구두 밖으로 칼날처럼 튀어나온 발톱이 뱃가죽을 가르자 그제야 짐승 은 뒤로 물러섰다. 쿵 내려앉은 몸은 잠깐의 쉴 새도 없이 다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자의 기세가 돌변했다. 까맸던 홍채는 은빛으로 바뀌 고,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야릇한 열기가 불길처럼 얼굴을 덮쳐왔다.

   그제야 이승도는 소스라치듯 정신이 들었다. 저 남자 는 지금 변이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저 어린 짐승 을 갈가리 찢어서 거둬갈 생각인 것 같았다. 당황해서 입 을 열었다.

   그때였다.

   “남의 구역에서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감미로운 저음이 소리 없는 폭탄처럼 전투장 한가운데 떨어졌다. 싸움을 멈춘 한 남자와 한 마리가 제 쪽을 돌아 보아서,순간이나마 착각할 뻔했다. 당황한 나머지 조금

언사가 거칠게 나갔나,하고.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엇나가 있는 상태임을 금방 깨달았다. 그들은 정확히 제 등 뒤 위쪽을 보고 있었 다.

   “여제운. 과연 네게 이 엿 같은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재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승도는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아오는 손길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살기등등한 안광을 홑부리는 태 국영이 서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맹렬히 머리를 굴려서 날 설득시킬 말 을 하나라도 더 긁어내두는 게 좋을걸.”

   그가 눈가를 허물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이승도는 단박에 눈치챘다.

   “아니면 내가 굉장히 화낼 거거든.”

   그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태국영은 정리정돈에 소질이 전혀 없는 주제에 어지르

기가 특기인 남자였지만,남이 어지른 공간을 극도로 싫어 하기까지 하는 괴팍한 성미였다. 불 밝힌 응접실과 주방 을 번갈아 노려보는 태국영의 두 눈은 좁은 곳에 꽉 채워 넣은 열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바늘구멍만 한 틈이 생기는 순간 터져버릴 것처럼 위험한 상태였다. 이승도는 일단 그를 진정시킬 방도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왔어? 내일 아침까지는 죽은 듯이 잘 것 같 았는데.”

   태국영은 여제운을 쏘아보는 상태로 호주머 니에서 원 가를 꺼내 가볍게 던졌다. 이승도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 다. 손바닥 안에 안착한 것은 제 휴대폰이었다.

   “잘 좀 챙겨. 왔다 갔다 귀찮게 하지 말고.”

   귀찮으면 퀵으로 보내든 할 것이지.

   이승도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으나 인내를 고아 먹 듯 한숨을 삼켰다. 태국영 성격 지랄 맞은 게 어제오늘 일 도 아니었고,지금은 일단 사탕 하나 쥐어주고 달래야 되 는 시점이었다.

   “그래. 고마워. 일단 여긴 너무 정신없으니까 올라가자.

   이승도는 태국영이 뭐라 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등을 떠밀어 억지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머지 한 남자와 한 마

리도 자연히 그 뒤를 따라왔다. 아래 난리통이 별천지인 것처럼 2층은 멀끔했다.

   “제가 낄 자리 아닐 테니까 말씀들 나누세요. 저는 잠 깐 일층에 다녀올게요.”

   여제운은 예의를 갖춰 목례를 하려다 이미 등을 돌린 이승도의 모습에 행동을 멈췄고,여은태는 이승도의 뒤를 쫓아가려다 태국영의 발을 밟아 서릿발 같은 눈초리를 받 았다. 안 그래도 잔뜩 화가 치밀어 있던 태국영의 살기에 반응한 여은태는 곧장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딜 발톱을 세우고.”

   한껏 기분이 나빠져서 한껏 썩은 미소를 지은 태국영 이 허공에 한 팔을 치켜세웠다. 여제운이 벌떡 일어나 그 를 제지하려던 순간,이미 낌새를 눈치챈 이승도가 도로 올라와 피곤이 겹친 얼굴로 경고했다.

   “태국영. 내 집에서 동물 학대의 죄는 영구추방인 거 알 지?”

   태국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짐승의 모습으로 변이 하려는 낌새를 보여 매를 벌었다.

   “죽을래? 당연히 동물끼리 싸우는 것도 금지야.”

   이승도는 태국영의 등짝을 후려쳤다가 제 손이 더 아파 서 인상을 찌푸렸다. 태국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리 승도 하는 꼴 좀 보?라. 어린놈 냄새 한 번 맡더니 나한테는 흥미 떨어져? 역시 너도 어린놈이 좋다 이거야?

   “너 애를 상대로 그런 농담이 나오나. 아직 솜털도 다 안 뽑힌 애기를 두고?”

   아기?

   태국영은 슥 눈동자만 굴려 여은태를 내려다보았다. 여 은태는 이승도의 다리 옆에 딱 달라붙어 얌전히 꼬리를 말 고 앉아 있었다. 참 조신하기 그지없는 자태였다. 방금 전 발톱을 한계까지 뽑아내던 게 환상이었던 듯 말이다.

   “놀고 있네. 눈 한 번 깜빡하면 금방 시커먼 사내놈이 되는 게 이 바닥 수컷들인데.”

   태국영은 도로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른하게 이승도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 알면서 왜 이래. 조심해라,승도야. 아차 하는 순간 에 목덜미 물려. 그때 가서 아 역시 태국영 님 말씀이 틀 린 것이 하나도 없다 후회하지 말고.”

   가볍게 눙치듯 하는 애기의 진의는 잘 알고 있었다. 다 만 평소처럼 받아치기엔 지금 이승도는 너무 지쳐 있었다. 네다섯 시간 동안 태국영을 품에 안고 간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작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쉼 없이 그 뜨

거운 몸을 어루만져 줘야 했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금방 열이 오르고 근육과 관절들이 고통스러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기 때문이었다.

   그 중노동 끝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돌아왔더 니 어디서 또 거창한 게 굴러들어와 있고,집은 쑥대밭이 되었으며,신경이 곤두선 태국영에 의해 2차전이 발발할 위험까지 겹쳤다. 수습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 다-

   이쯤에서 그냥 져 주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은 길이다. 이 승도는 태국영의 이마를 한 손으로 덮어 누르며 말을 돌렸 다.

   “기껏 꿀잠 재워두고 나왔더니만 또 열 오르잖아. 어질 러진 거 네가 치워줄 거 아니면 화 좀 가라앉혀. 안 그래 도 피곤해 죽겠으니까 제발 발리 애기 끝내고. 나 잠 좀 자 게.,,

   태국영은 그 특유의 느슨한 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나 화났으니까 화낼 거야.”

   “작작 하자. 안 그럼 나도 화낼 거야.”

   그의 이마에서 열을 앗아가는 동안 여은태가 다가와 코 끝으로 다른 손을 툭툭 쳐댔다. 이승도는 한숨을 삼키며 그 짐승의 정수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총명해 보이는 눈

이 기분 좋은 듯 가늘게 접혔다.

   한 마리도 버거운데 두 마리나…….

   태국영은 다 큰 놈이니 구박이라도 할 수 있는데 이 녀 석에게는 차마 쓴소리 하나 할 수가 없었다. 덩치는 커도 발톱이나 이발 상태로 보아 하니 아직 성년식 치르려면 한 참 남은 애였다.

   환한 조명 아래서 본 이 어린 짐승은 곱고 화려한 은색 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녀석 스스로가 토해낸 핏덩 이 위에서 수도 없이 구른 탓에 몸 대부분이 검붉게 떡이 져 있는 상태로,그 예븐 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아가야. 너도 여기서기다려.”

   여은태는 매달리는 눈으로 이승도를 올려다보았다. 거 부의 사인이었다. 이승도는 녀석의 미간을 검지로 톡 내리 눌렀다.

   “난 일층에 있는 애들을 돌봐주고 와야 도H. 네가 따라가 면 애들이 겁먹어서 안 돼.”

   여은태는 납득했으나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손끝 을 할으며 어리광을 부리니,잠시 흔들리는 듯하던 이승도 가 당근을 내밀었다.

   “올라오면 깨끗한 물로 씻겨줄게. 털도 빗어주고.”

   [정말?]

   “응. 정말.”

   여은태는 기분 좋은 듯 이승도의 한쪽 다리를 옆구리 로 스치며 왔다 갔다 했다. 유모가 열성적으로 준비해줬 을 새 옷이 핏물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승도는 짧게 웃 음만 터뜨렸다.

   “금방 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얌전히들 있어. 특히 태국 영,큰 소리 나면 너부터 쫓아낼 거야.”

   “너무하네. 내가 모든 악의 축이 된 느낌이야.”

   이승도는 태국영의 웃음 섞인 대꾸를 무시한 채 1 층으 로 내려갔다. 이승도가 사라진 공허에는 곧 가시 같은 침 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공기를 말없이 들이마시며 여제 운은 고심에 잠겨 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분이었다. 그에 게 있어 이승도는 미지의 안개에 뒤덮여 있는 인간이었다. 여은태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알아듣고 대답하는데다가, 저 태국영을 요령 좋게 다루기까지 했다. 제가 오늘 목도 한 것을 누군가에게 발설한다면 상대는 십중팔구 헛소리 로 치부할 게 분명했다.

   감이 좋아서 은태의 말을 짐작할 수 있다고는 치자. 하

지만 태국영은?

   태국영은 자존감이 지나쳐 오연함이 몸에 밴 남자였다. 출생 당시부터 그를 둘러싼 허황된 소문들이 겹겹이 누적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누구도 그에게 사실 여부를 추궁하 지 않았다. 태국영이 태 가의 가주로서 나타난 첫 종가모 임에서 한 남자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낸 뒤로 그의 신경 을 거스르려 드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아직까지도 고개를 갸우뚱 하곤 했다. 그는 아주 느리게 손을 휘둘렀고,모두가 밝은 눈으로 그 동선을 생생히 따라갔다. 태국영은 버르장머리 없는 청소년을 계도하듯 손바닥으로 후려쳤을 분이었다. 두개골이 박살나고 온 사방에 뇌수가 튀었을 때,동족들 이 아연하게 침묵을 지켰던 건 그 비정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믿어 달라고 하는 애긴 아닌데,죽일 생각까지는 없었 어.」

   태국영은 제 손을 곤란한 듯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상태였다.

   차남을 잃은 윤 가의 가주는 그 자리에서 전면전을 선 포했다. 정당하게 벌어진 전쟁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건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윤 가의 세력이 아무리 미비하 다고는 하나 있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것은 철저히 계획된 일이다. 여제운은 확신하고 있었 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태국영은 한량 기질이 다분했다. 가업승계에도 시큰둥해서 태 가의 늙은이들을 화병 나게 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실수로 누군가를 살해했다면 변명조차 없이 전쟁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이발을 드러내 윤 가를 난도질했을 리도 없었다.

   태국영은 그 일을 계기로 그의 불온한 계승을 의심하 는 뒷말들을 일거에 잠재웠다. 힘의 논리에 수그러드는 자 들의 뇌리에 공포라는 씨앗을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 후 로 지금까지 문제 하나 일으키는 법 없이 제 영역만 고요 히 지키고 있었다.

   내 영역을 존중해. 그러면 나와 부딪칠 일은 영원히 없 어.

   그는 마치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았고,이제는 모 두가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듯 침 묵을 택했다. 구두로 오간 것조차 없으나 그것이 태국영 의 유일한 조건이었던 것처럼.

   “생각해 봤어?”

   여제운은 태국영의 느른한 음성에 상념을 털어내고 고

개를 들었다.

   “말했잖아. 날 설득시킬 말을 하나라도 더 찾아두라고. 나 쫓겨나기 싫으니까 예쁘게 잘 말해봐.”

   여제운은 구겨지려는 안면에 힘을 줬다. 하나는 확실했 다. 태국영이 웃는 낯으로 상대의 속을 긁는 데에 일가견 이 있다는 거.

   이승도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폐허가 된 풍경이었다. 벽 에 걸려 있던 것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바 닥에 세워진 것 역시 멀정한 게 없었다. 뻥 뚫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눈보라와 핏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너무 암 담해서 한숨조차 안 나왔다.

   “보수공사 해야겠네.”

   이승도는 여기저기 금 간 바닥을 둘러보다 명하니 중얼 거렸다. 당연히 공사비 청구서는 혈투를 벌인 이들에게 떠 넘길 작정이었다. 그쪽도 돈이라면 차고 넘치게 많을 테 니 이 기회에 아예 대리석으로 깔아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 겠다 싶었다.

   치울 엄두가 나지 않는 거실과 주방은 내버려두고 1 층 의 방 네 개를 차례로 돌았다. 고양이 네 마리가 한 방,개

다섯 마리가 한 방을 썼다. 다른 방 하나는 파티션으로 나 눠 토끼를 포함한 초식동물들을 모아 뒀고,마지막 방은 동물원에서 데려와 잠시 보살펴주고 있는 담비 한 마리가 독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보이는 광경은 대개 비슷했 다.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하나같이 가구 틈새나 구 석에 숨어 달달 떨고 있었다. 태국영이 홀로 방문하는 일 이 있을 때에도 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녀석들인데,하물 며 그런 게 셋이나 쳐들어와 난장까지 피워댔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혹여 심약한 아이들이 심장마비는 안 걸렸는지 하나하 나 세심히 살폈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거실에 풀어놓 고 키우는 원숭이 영웅이가 경기하듯이 안겨 들어서 떨어 지지 않으려는 걸 달래느라 조금 애를 먹은 것 외에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이승도는 동물들 모두에게 사료와 물,간식까지 가득 챙겨준 뒤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여은태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녀석은 제 등 뒤에서 테이블 하나 를 사이에 두고 불편한 대치를 이루는 두 어른의 이야기 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사건의 빌미를 거하게 제 공해 놓고 참으로 뻔뻔한 작태였다. 그러나 녀석의 뻔뻔함

이 어찌 되었건,뒷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큰 남자 둘이 할 일이 맞았다.

   이승도는 저를 보자마자 주둥이부터 들이밀고 보는 녀 석의 전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뒤 욕실로 데려가 앉혔 다.

   “너도 차가운 물로 씻지?”

   확신을 갖고 묻는 말에 여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승도는 샤워기를 녀석의 몸에 갖다 대며 레버를 올렸다. 세차게 쏟아져 내린 물줄기가 털에 엉겨 붙은 핏물을 함 박 끌어안고 붉게 흘러갔다.

   “아픈 데는 이제 괜찮아?”

   [없어. 겉은 다 나았고 속도 신기할 만큼 괜찮아졌어.]

   이렇게 안 아픈 적은 처음이야,하며 여은태는 구슬처 럼 빛나는 눈을 이승도에게 맞췄다. 늘 아프다가 안 아프 니까 그게 조금 신기하고,많이 기뻐 보였다. 이승도는 녀 석의 뭉친 털을 살살 비벼가며 씻기다 물었다.

   “아가. 너 몇 살이야?”

   [아가 아니야. 열두 살이나 됐어. 여은태. 이름을 불러 줘.]

   “열두 살?”

   이승도는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서 다시금 녀석

을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확실히 몸의 크기를 살펴봤을 때 태국영도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 이만했지 싶기는 했 다.

   “생각보다 어리네. 난 네가 싸우는 걸 보고 열다섯은 된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아프니까 그런 것 같아. 평소엔 그렇게 못해.]

   “하긴…… 싸움은커녕 버티기도 힘든 상태일 테니까.” 여은태는 무리 없이 이해하는 이승도가 못내 신기했다. 제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다가 하나를 말하면 열 을 알아듣는 인간이라니.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어?]

   “글쎄.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 난 너 말고 다른 동물들 말도 알아들을 수 있거든.”

   [일층에 있던 작은 애들 말도?]

   “응. 다들을 수 있어.”

   [신기해. 당신……어,그러니까…….]

   여은태는 난처한 듯 잠시 말을 고르다가 귀를 살짝 늘 어뜨렸다.

   [미안해.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불 러야 해?]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이승도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물론 이 꼬마에게나 저에게 나 인간들이 세는 세월의 기준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녀석이 성체가 되고 나면 그 정도 차이쯤은 더더욱 의미 가 없는 정도다.

   그러나 태국영처럼 제멋대로 부르게 놔두기에도 적지 않은 차이였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제 직업 적 호칭을 들이밀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선생님?]

   “응. 난 수의사거든. 내가 돌보는 아이들 대부분이 나 를 그렇게 불러.”

[응. 선생님.]

   여은태는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받아들였 다.

   [나 선생님 같은 인간은 처음 보?. 내가 있는 집에서는 거의 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거든. 우리 엄마도 평범한 인간이라 마찬가지였고.]

“아빠가 인간 여자랑 결혼한 모양이지?” [그런 것 같아.]

“아빠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아?’

   [아빠도 형도 내 말을 이해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아프 다고 울어도 들은 척도 안 하니까 요즘엔 아무 말도 안 해. 둘은 엄마만 신경 쓰거든.]

   태국영은 다른 가문분만 아니라 제 가문 내의 이야기 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가문마다 어떤 특징이 있는 지,이승도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태국영의 가족은 여은태의 가족과 달랐다. 태국영의 아 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이종족이었고 철저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제각기 이득을 보고 움직이느라 그 들 주변에는 온기 한 줌 없었다.

   그들 사이에도 사랑이 있었으면 원가가 달라졌을까. 이승도는 덧없는 의문을 잠시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찬물에 닿는 손이 발갛게 얼어갔다. 뼈에 스미는 한기가 아릴 정도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스펀지를 들었다. 흐르는 물에 핏기가 많이 흐려졌으니 샴푸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어쪄다가 여기로 왔어? 너희들은 다른 가문의 영역 표시에 되게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여기 태국영 냄 새 엄청 나잖아. 다들 웬만하면 끼림칙하게 돌아갈 거라 고 녀석이 장담했거든.”

   여은태는 잠시 고심하다가 털어놓았다.

   [그건 잘 기억나지 않아. 그냥 너무 아프고 화가 나서

정신없이 헤매다 선생님 집을 보게 됐는데…… 그런데 이 상한 느낌이 들었어.]

   “이상한 느낌?”

   여은태의 몸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기 시작했 다. 다시금 말을 고르듯 잠시 침묵하던 녀석이 불현듯 고 개를 쭉 뺐다. 이승도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잠들 수 있을 것같은 느낌.]

   축축한 주둥이가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가볍게 쓸어내 렸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저곳에 가면,영원 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아프지도 않고,외롭지도 않 겠지.]

   그대로 떨어져가려는 녀석의 머리를,이승도는 붙잡아 가슴에 들였다. 손에 감긴 목덜미가 잠시 움찔 경직하는 가 싶더니 이내 다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물에 젖은 꼬리 가 또 허공에 솟아 팔랑팔랑 흔들렸다.

   셔츠가 젖어들었다. 위고 아래고 핏물로 얼룩져 버려 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이승도는 녀석을 안은 채 허공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심장 한구석이 시큰거려 왔다. 습한 공기 중에 피맺힌

고함 소리가 문득 진동하는 듯했다.

   「나더러 어쪄라는 거야!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죽으라 고 해! 그게 너도나도 편할 거 아니야!」

   수시로 습격해 오는 발작에 휩쓸릴 때마다,어린 태국 영은 지옥의 심해를 헤엄치다 돌아왔다. 피눈물을 흘려가 며 온 사방을 굴러다니고,부딪치고,깨어지고,그리고 울 부짖었다. 저를 외면하는 등대의 불을 밝히려 비참하게 매 달리고,애원하고,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오 열했다.

   「제발…… 승도야.」

   웅크려 모은 제 상처투성이 맨발,그곳에 젖은 얼굴을 겨우 기대오던 태국영.

   지금의 제가 그에게 끝내 모질게 굴지 못하는 것은,그 어린 시절 태국영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 처절 함이 가슴에 뜨거운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닿는 손길이 멎어 선홍빛 거품이 다 꺼졌을 즈음,이승 도는 천천히 쓰다듬던 녀석의 머리를 살짝 떼어내 눈을 맞 췄다. 매달리듯 올려다보는 어린 짐승의 눈동자는 깊고 그 윽했다. 열두 살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어 빚어낼 수 있는 눈이 아니다.

태국영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백 년 같았던 십 년,천 년 같았던 팔 년.

   그 말에 따르자면,열두 해를 홀로 버텨온 이 아이는 앞 으로도 그 천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시간들을 더 견더내 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제껏 혼자 견뎠어?”

   [응. 방법이 없었으니까.]

   “굉장하다. 보통 끝없이 자해를 하다가 정신이 먼저 부 서진다고 하던데 넌 용케도 견더냈구나. 견더낸 것분 아니 라 이렇게 얌전하고,의젓하기까지 하다니.”

   …얌전? 의젓?

   그런 말이 저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여은태가 잠시 혼란 스러워하는 사이,이승도는 멈춰있던 손을 다시금 움직였 다. 잦아들었던 거품이 다시 풍성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털의 숨이 죽어 맨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늑골의 굴곡 이 훤히 보일 만큼 마른 몸이었다.

   “괴롭겠지만 견뎌내야 돼. 성체가 되면 한결 나아질 거 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정도로 네 몸 안의 기운 을 네가 잘 다룰 수 있게 되면,좀 힘들어지는 때는 있어 도 죽고 싶을 만큼 아파지지는 않는다고 했어.”

   [알아. 그때까지만 버티면 희망이 있다고 했어. 하지 만……■]

   녀석은 담담해서 더 슬픈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어차피 난 그때까지 살지 못할 거야. 내가 커지면 커질 수록 나를 감당하기 힘들어진다고 했거든. 아버지든 형이 든 조만간 나를 죽이겠지. 그게 오늘이 될지도 모르고.] 녀석은 의연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승도는 복잡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제 겨우 좀 적응하고 살 만해졌나 싶었는데…… 예기치 못한 돌부리가 튀어나와 발목을 잡고 있었다. 걸려 넘어지지 않았으니 짓밟고 가거나 돌아가면 되는 문 제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게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승도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제 의지로 품에 안아준 적 없는 아이가 자꾸만 녀석 의 위로 겹쳐 보였던 탓이다.

   미워하는 것이 두려워 늘 매정한 등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그 가엾은 아이가……

   “그건 아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그게 정당하 고 옳은 건 아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생각을 했겠지. 그래도 참 나쁘고 밉다,그치?”

   […응. 미워. 아빠도,엄마도,형도. 날 죽일 생각만 해. 날 언제,어떻게 죽일까 그런 궁리만 해.]

   “그래. 미우면 미워해. 원망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너는 그래도 돼.,,

   여은태의 눈이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다 미워. 날 낳은 엄마도 내 마음을 들여다봐 주질 않 아. 엄마의 귀는 닫혔고,마음은 병들었어. 나는 날 죽이 려고 혈안이 돼 있는 아버지나 형보다 엄마를 볼 때 더 괴 로워. 자꾸만 날 살리려고 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워.]

   “…엄마가 더? 왜?”

   이승도는 멈칫하며 물었다. 창백해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리다 멈췄다. 여은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울분을 터뜨렸다.

   [나는 발리 죽고 싶었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인 데 엄마는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해.]

   [난 오늘에야말로 내가 죽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아빠 가 다들 내보낼 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단 말이야. 하 지만 그게 아니었어. 아빠가 노린 건 내 심장이 아니라 내 폐였어. 내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느라 아무것도 못하도록, 그 정도로만 나를 망가뜨려 둘 셈이었던 거야. 엄마가 슬 퍼하니까. 엄마 때문에. 그래서 도망친 거야. 난 죽고는 싶지만 여기서 더 아프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여은태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들부 들 떨리는 몸 위로 스산한 분노가 바늘처럼 돋아나 있었

다. 이승도는 저도 모르게 녀석의 몸에 닿았던 손을 흠칫 물렀다.

   원혼의 숨결이 닿은 듯 손끝은 차가웠다. 경련이 그 얼 어붙은 손끝을 휘감아 왔다.

   이번 것은 치명타였다. 이승도는 급소를 찔린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내가 이대로 이 아이를 저 남자의 손에 맡기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 망가뜨려서 숨만 붙여 두는 것. 그 누구도 아닌 아이 의 엄마를 위해.

   이 아이의 가족들 역시 비틀려 있었다. 그들의 습성은 제 상식으로 그저 불가해한 영역에 있었다. 영원히 닿지 못할 곳에 있는 것이다. 정작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를 두고 그들은 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보듬어야 할 아 이는 이렇게 곪은 채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이승도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의 기억과 경험 과 잘못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과거로 훌쩍 날아갈 수 있다면. 그때 극도로 불안정했던 아기 태국영을 만났더라 면.

   “아니야. 그런 말하면 못써.”

   이승도는 녀석의 머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어 끌어

올렸다. 자연히 딸려 올라온 눈이 조금 의아한 기색을 내 비쳤다.

   “년 아주 멋진 어른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여은태는 눈만 멀거니 깜박였다. 너무 비현실적인 소리 라 그저 고개만 갸우뚱하며 뒷발로 제 귓등을 탁탁 긁어대 기만 했다. 잘못 들은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혹시 눈치챘어? 태국영도 너처럼 저주받은 체질이라 는 걸.”

   여은태는 앉아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가볍게 숨을 들 이켰다.

   [나와 같은 게,또 있다고?]

   “그래. 저기 밖에.”

   이승도는 욕실 문 너머를 고갯짓 했다. 여은태는 충격 에 흔들리는 눈으로 이승도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홱 돌 렸다. 물리적인 벽이 있었으나 그 너머의 기운을 꿰뚫어보 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순간 기민하게도 시선을 느낀 태국영이 고개를 비스 듬히 꺾어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티 한 점 없이 미끈한 얼굴,나른한 어투 속에 품고 있

는 칼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껍데기가 아니었다.

   태국영은 문득 묘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오만하고 나 태하지만 언뜻 공허함이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눈끼풀에 반쯤 잠긴 그의 새카만 눈동자 위로 선득한 이채가 스쳤 다.

   그때 여은태는 비로소 태국영의 본신을 들여다볼 수 있 었다.

   그저 기이하다고만 여겼던 그 큰 존재감이 문득 소름 끼칠 만큼 강렬히 다가왔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원시 적인 공포가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 섰다.

   그는 흑표범처럼 매끈하고 짧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무늬 없이 온몸이 검어서 마치 밤의 사자(使者) 같은 형상 이었다. 제 몸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크기였으나 어디 한 군데 둔해 보이지 않는 날렵한 근육과 강골 같은 _대가 그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강할 분 아니라 고고하고 매혹적인 자태였다. 천지를 밝힐 듯 형형하게 빛나는 눈,강철처럼 번득이는 이발과 발톱은 위협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여은태는 홀연 깨달았다. 그가 이곳의 대화를 낱낱이 훔쳐가고 있으며,그의 실체가 불현듯 크게 기지개를 켠

것은 그가 의도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있었어,정말로. 나와 같은 게.

   부친을 포함한 제 주변은 모두 인간에 더 가까운 실체 를 가지고 있었다. 어디 한 군데 어그러진 곳 없이 완벽한 금수의 모습은 그와 자신분이었다.

   그러나 저 남자가 정녕 저와 같이 저주받은 몸을 가지 고 태어났다면,어떻게 저 남자는 완전히 성숙한 성체가 되었을까?

   [태국영은…… 그를 막아줄 강한 가족들이 있었던 거 야?]

   여은태의 의문은 당연한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흥분인 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으로 몸을 떨며 명하니 묻자 이승도 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태국영의 가족들도 그를 버렸어. 그 녀석이 다 섯 살 때.”

   너보다 한참 더 아기 때였지. 몸집은 훨씬 더 작았던 주 제에 더 포악하고 더 예민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버려진 태국영을 키운 건 나야.”

   여은태는 연이어 충격을 받았다. 바람 소리가 날 듯 빠 르게 고개를 돌린 녀석의 놀란 듯 크게 뜬 눈을 내려다보 며,이승도는 부러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키웠다는 말은 좀 안 맞네. 정성스레 돌본 적은 없 거든. 어쨌든 그 녀석을 성체로 만든 건 내가 맞아.”

   여은태는 말을 잃고 있었다. 사고가 답답할 만치 느리 게 흘렀다. 그의 말은 온전히 뇌에 전달되었으나,도저히 쉬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여은태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말문을 뗄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이승도는 욕조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흘 려보내며 기다려 주었다.

   [선생님이,가족들도 버린 태국영을 성체로 키웠다는 말이야?]

   “맞아.”

   [하지만 어떻게……?]

   一너희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귀 같은 어둠 속에서 빛 을 밝혀주는 존재. 너희들을 위해 태어났고,너희들을 위 해 희생하는 게 당연한. 내 의지 따위는 필요 없이 의당 그 렇게 살아야만 하는.

   “나는 ‘등대,니까.,,

   이승도는 비구름처럼 흐린 미소를 지었다. 태국영이 장

벽을 뚫고 그 처연한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등대?”

   여군호는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던 여제운의 말을 처음 으로 끊어냈다. 여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입으로 은태에게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태국 영도 부인하지 않았고요.”

   “헛소리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은태의 몸이 가장 확실한 증거죠. 어긋나고 뒤틀린 _가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왔고,짓무르 고 곪은 내장들도 아주 멀정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출혈 도 멎었고요.”

   여군호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스쳤다.

   “그렇게 오래 망가져 있던 걸,단 몇 시간 만에 정상으 로 되돌렸다?”

   “몇 시간도 아닙니다. 제가 녀석을 공격했던 당시에도 은태의 상태는 이미 놀랍도록 호전되어 있었습니다. 이상 하게 받아치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싶더라니,제가 밖에 서 고민하던 몇 분 동안 치유가 되어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래. 의심의 여지는 없다이거군.”

   이제 와 여은태가 그 만신창이 몸을 제 스스로 재생했

을 리가 없었다. 과연 제가 생각하기에도 불신이 끼어들 만한 틈은 없어 보였다. 여군호는 마침내 2백여 년 만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태국영이 제왕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도 사실 이라는 건가.”

   “사실입니다.”

   “이 또한 확신하나?”

   “제 눈으로 똑똑히 그의 본신을 봤습니다.”

   “어떻게?”

   “그가 스스로 드러냈으니까요. 은태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였을 겁니다.”

   여제운은 제가 목격한 그의 실체를 상세히 묘사했다. 여군호는 미간을 좁힌 채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껏 태국영의 속 알맹이를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밝은 눈으로 꿰뚫으려 노력했으나 그 누구 도 그의 견고한 껍데기를 벗겨내지는 못했다. 상대의 실력 을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극명한 힘의 차이 를 방증하는 것. 그래서 그를 둘러싼 뜬소문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거였다.

   여군호의 얼굴이 문득 냉담히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아귀가 딱딱 맞는 가운데,하나가 걸리는군.

   “무엇입니까?”

   “그 어릴 때부터 태국영의 곁에 등대가 있었다면,태 가 를 휩쓸고 간 몰살 사건이 설명되지 않지.”

   여제운은 아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족 전체를 발 칵 뒤집어 놓았던 태 가의 비극이라면 이 바닥에서 모르 는 이가 없었다. 태국영이 성체가 되던 시기였으니 아직 4 년밖에 흐르지 않은 일이었다. 저 역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때 이미 정신적으로 붕괴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 죠.,,

   미친놈의 행동을 이해하려드는 것은 헛수고다. 여제운 은 차갑게 평했으나 여군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태 가 늙은이들은 그리 만만한 것들이 아니다. 가주라 함은 모든 가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야. 그 꼬장꼬장 한 노인네들이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자를 그렇게 열렬히 추대했을 리가 없지.”

   “…하긴. 태국영이 가주 안 하겠다고 노친네들을 석 달 동안 뺑뺑이 돌린 건 유명한 일화긴 하죠.”

   여군호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들었으나 그런다고

해서 형광등이 반짝 켜진 것 마냥 머리가 맑게 정리되진 않았다.

   “태국영이 제왕의 피라……

   그것만으로도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인 것만은 분명했다. 태 가는 태국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 이었다. 이 나라 제약업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그들의 가업은 저희 종족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분야 였다. 이 땅에서 가장 큰 세력을 꼽자면 제 가문이었으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태 가 쪽이었다. 헌데 가주까지 그런 괴물이라니.

   여군호는 가만히 거듭하던 생각을 접고 본론으로 돌아 왔다.

   “그래. 계속해 봐. 그 뒤에는 어떻게 됐지?”

   여제운은 다시 기억을 되짚어 보고를 이어갔다.

   「애 두고 가세요.」

   이승도는 가타부타 부연설명 없이 그렇게만 말했다. 그 는 바깥의 두 남자가 욕실 안을 적나라하게 훔쳐보고 훔 쳐 들었다는 걸 이미 훤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일단 가주님과 상의를 먼저 하고一」

   「상의하세요,그쪽이랑 그쪽 아버지랑 둘이서. 어차피 애 의견은 듣지도 않을 거 데려가서 뭐하시게요. 굳이 끌

고 가서 상태 악화되면 사고 못 치게 또 어디 망가뜨려 두 시게요? 애한텐 못할 짓이고 그쪽 집안사람들도 피곤한 일 아닙니까.」

   「■■■여기는 그래도 태국영의 영역이고一」

   「태국영의 영역이기 전에 내 집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기 때문에 태국영의 영역인 거고요. 뭐가 먼저인지는 확실 히 아셔야죠.」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애 식량만 꼬박꼬박 보내 주 시면 돼요. 그 외엔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그쪽도 저 한테 뭘 더 바라진 마시고요. 저는 애를 잘 키우고,그쪽 은 식량만 조달해 주고,그것이 끝입니다. 그쪽 가주님께 도 그렇게 말씀드려 주세요.」

   「…그럼 일단 가주님과 상의 후에 연락을一」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고요. 사흘 동안 별말씀 없으시 면 수락한 걸로 알게요.」

놀랍게도 여제운은 그 언쟁에서 이승도에게 압도당했 다. 태국영 성격이 저 모양인 것에 그의 공헌을 심각하게 의심케 할 정도였다. 부친 앞에서도 제 할 말 꼬박꼬박 했 던 저로서는 조금 당황했고,그래서 더 말려든 것 같았다. 여은태가 그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이승도에게 선망의

눈빛을 쏘아 올리는 사이,여제운은 태국영을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태국영은 아무 말 없이 열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소파 등받이에 한 팔을 올린 채 꼰 다리를 까닥까 닥 움직이던 태국영은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 다.

   「어때. 우리 승도,나 같은 놈도 일생을 걸고 지킬 만하 지?」

   태국영은 빙긋 웃으며 난해한 소리만 지껄일 분이었다.

   “당돌한 녀석이군.”

   여군호는 흥미롭다는 듯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 웃음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헌데,태국영 그놈은 도대체 뭐야. 은태를 두고 가라는 데 그냥 그러라고 했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태국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 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만 봤을 분이죠.”

   “이게 제일 놀랄 일이군. 우리 종족의 수컷이 제 영역 을 대가 없이 나눠준다고? 그것도 그 태국영이? 다른 꿍 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는데.”

   “이승도 역시 단 한 번도 태국영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 았습니다. 마치 태국영의 의사는 애초에 상관없다는 태도 였고요.”

   그 태도가 너무 당연해서,그것을 받아들이는 태국영 의 눈길이 너무 고요해서,여제운은 도리어 위화감을 느 낄 정도였다.

   “관계의 우위가 그 등대에게 있거나,아니면 둘 사이에 원가 다른 것이 있거나.”

   여군호는 명쾌하게 정리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역시 윤 가는 희생양이었어.”

   고개를 끄덕이던 여제운이 불현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묻자 여군호는 소파에 조금 더 편히 몸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태국영이 힌트를 줬지 않나. 일생을 걸고 지킬 만한 가 치가 있다고. 한량 같은 놈이 기를 쓰고 지키려던 단 하 나,그의 영역. 그 안에 제 등대가 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다.,,

   “…너무 로맨틱하게 접근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태국영 이 그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뭐,나도 필요에 의한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싶긴 하군.

   당연히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그 괴물이 연정 에 목을 맨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어땠지?”

   “뭐가 말입니까.”

   “그 등대 말이야. 역사서에 적힌 기록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길이 없으니. 어때,그는 너에게도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던가?”

   인간들에게 족보가 있는 것처럼 저들에게도 그 비슷한 것이 있었다. 실록처럼 자세하진 않아도 모든 가문은 그 시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간단히 기록해 대대로 다음 대 가 주에게 넘겼다. 아주 은밀한 것,이를테면 가문의 치부조 차 기술되어 있기에 가주 외의 그 누구에게도 열람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여제운은 당연히 그 역사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다 만 여군호는 여제운이 알아도 무관한 것들은 평소에 흘러 가듯 애기해줄 때가 종종 있었다. 여제운은 그 모든 것들 을 기억했다. 특히나 그중에서 저희 종족과 등대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은 매우 흥미로운 만큼 믿기지 않기도 해 서,더욱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말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여제운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 툭 내뱉었다.

   “어른 같았습니다.”

   여군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잃었고,여제운은 스스로도 뭔가 마뜩찮아 미간을 좁혔다.

   “자꾸 혼나는 기분이라 좀 불쾌했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더군요. 생긴 건 안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만 묘 하게 박력이 느껴진달까. 하여간 원가 기이하긴 했죠.”

   빤히 닿는 시선이 느껴져서 여제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 어 보였다. 여군호는 마치 철없는 애송이를 보듯 슬쩍 비 웃는 입모양을 하고 있었다. 여제운은 불쾌하게 쏘아붙였 다.

   “뭡니까,그 눈빛은. 무슨 의미입니까.”

   “목석같았던 장남이 태국영 암컷에게 섣불리 덤볐다가 집안 말아먹을까 걱정하는 가주의 눈빛이지.”

   “그런 거 아닙니다.”

   억울한 오해에 여제운의 목소리로 힘이 실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여 군호가 픽 웃으며 화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닿아 봤나?”

   뭔지 모르게 찝찝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마지막에 모르는 척 손등을 쓸어 봤습니다만,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냥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저도 모르게 손을 뗐죠. 그 전에 태국영에게 팔목이 비틀리긴 했습니다만.”

   “역겨웠다고?”

   “역겨웠다기보다는…… 묘사하기 힘듭니다. 그냥 좀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여군호는 오리무중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기이 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 를 내저었다.

   “그건 참 이상하군. 역사서가 아무리 과거를 미화했다 고 쳐도 없던 사실까지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텐데.”

   여제운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 에게 실토한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꾸밈없는 진실이었 다.

   “하지만 은태가 그렇게 없던 내숭까지 다 긁어모아 꼬 리치는 걸 보면 아예 얼토당토않은 애기는 아니지 싶습니 다. 뭐,예를 들자면 제왕의 핏줄에 가까울수록 더 등대와 감화되기 쉽다거나.”

   여군호는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수차례 쓸며 고개를 저 었다. 그런 차이점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 었다. 만약 여제운이 말한 가설이 맞다고 하면,과거 등대 에게 미친 금수들이 써 내려간 피의 역사는 완전히 날조 된 거짓이라는 애기였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이 모두가 제왕의 피에 가까웠다면 그것은 차라리 재앙이었

다. 이미 예전에 멸족하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또 하나 미제로 남은 의문에 여군호의 표정은 더 딱딱 하게 굳어졌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은태가 무사히 성체가 되길 기다리 는 수밖에 없군. 태국영을 견제할 수 있는 건 그 녀석분일 테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양육비는 따로 요구하지 않던가.”

   “밥이나 제때 보내라고 하던데요. 아,망가진 일층 수리 비도 나중에 청구하겠다고 합니다.”

   “내일 당장 사람 보내서 처리해. 집기들 모두 최고급으 로 바꿔 주고,바닥도 튼튼하게 다시 깔아.”

   “알겠습니다.”

   “나가봐. 오늘 수고했다.”

   여제운은 깍듯이 허리를 굽혀 보이고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여군호는 다 식은 찻잔을 의미 없이 매만지며 끝없 이 사념의 바다에서 헤엄쳤다.

   오늘 하루는 무언가 지리멸렬했다. 하나의 의문이 풀렸 나 싶으면 또 다른 것이 물음표를 매달고 수면 위로 떠올 랐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해답이 없는 것들분이었

   가문의 골칫거리가 마치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해결 이 되었다. 여은태가 이승도의 손에서 무사히 자라 성체 가 된다면,이건 단순히 문제 해결 수준이 아닌 전화위복 이 되는 거였다. 어디로 보나 손 안 대고 코 푼 격.

   그럼에도 여군호는 근원 모를 불길함을 쉬이 잠재우기 어려웠다. 말 그대로,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내 리 가슴 한구석에서 요동을 쳐댔다.

   “등대라……■,,

   전설 속에 잠들었던 그 베일 속 존재가 세상에 다시 나 타났다. 그는 여은태의 일을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실마리이긴 했으나 그것만으로 반가워하기에는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너무나 위험천만했다.

   무엇보다 태국영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제일 답답했 다. 무던하고 게을러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바늘 끝처 럼 섬뜩한 끝으로 눈앞에 다가와 있고,헐렁하고 느슨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단번에 상대의 명줄을 끊을 기백 을 보였다. 실로 불편하고 끼림칙한 자였다.

   영원히 그렇게 숨겨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평화의 시대는 무료한 삶을 뜻했고,권태와 싸우는 이 들은 종종 치명적 자극 앞에서 무력해지곤 했다. 언젠가 되었든 이승도라는 인물은 저희 종족들에게 낱낱이 알려

지게 될 것이고,권태에 찌든 이들 중 일부는 그의 곁에 불 나비처럼 모여들 거다. 그들을 뒤흔드는 것이 호기심이건 절박함이건 그 계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누군가는,반드시 태국영의 철벽마저도 무너뜨 리려 할 것이었다. 변혁의 바람 앞에 생명의 위협은 코웃 음 한 번과 맞바꿔도 된다는 놈들이 쌓이고 쌓인 동네였 다.

   등대는 과거에도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 그들의 권세 는 하늘을 찔렀고 그것은 금수의 왕들도 부럽지 않을 정도 였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건 파란이 일겠군.”

   여군호는 한숨지으며 혼잣말했다.

   태호연은 자다 불려 나왔다. 열다섯 살이나 차이 나는 그의 어린 가주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로 그를 맞았 다. 폭설은 잠시 주춤하여 눈발은 많이 가늘어진 상태였으 나 와이퍼를 끈 차량의 앞 유리는 틈도 없이 하얗게 뒤덮 여 있었다.

   “나는 옷이 젖는게 참 싫다,가주.”

   태호연은 보조석에 타자마자 젖은 옷을 털어내며 투덜 거렸다. 태국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여 가 놈들을 감시해. 어딜 가고 누굴 만나는지. 뭘 처 먹는지 속옷은 뭘 입는지까지 샅샅이.”

   태호연은 말을 잃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운전대 에 한 손을 걸친 채 하안 장벽 같은 정면을 뚫어져라 노려 보고 있는 태국영의 옆모습은 얼음으로 빚은 조각물 같았 다. 냉랭하다 못해 시린 한기가 그의 얼굴을 배곡히 덮고 있었다. 늘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느른한 웃음기를 흔적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마 농담이나고 물을 수조차 없을 만치 꽉 조여진 분위기였다.

   “어,그러니까,왜?”

   “여 가 막내가 승도 집에 굴러들어왔어.”

   태호연은 잠시 관자놀이를 긁으며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 가 막내면,여군호가 한 번도 종가모임에 대동한 적 이 없는 꼬맹이잖아. 개가 무슨 일로?”

   “놈이 나와 같은 체질이라는군.”

   태국영이 담담히 내뱉은 말에 태호연의 눈은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그리고 승도가 품에 들였어.”

   태호연은 이제 숨마저 멎을 뻔했다. 입을 벌린 채 석상 처럼 굳은 그를 태국영이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러니까 여 가 놈들을 샅샅이 주시하라고. 무슨 방법 을 쓰던 간에 하나도 놓치면 안 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제정신이야?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넌 뭘 했어?”

   “방관했지.”

   태국영은 이번에도 무심히 대답하곤 다시 전방으로 시 선을 던졌다. 태호연은 기가 차다는 듯 실소했다가 애먼 제 가슴만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는 화가 난 표정으 로 태국영을 윽박질렀다.

   “미리 막았어야지! 사고는 제가 쳐 놓고 이제 와서 나한 테 무슨 짓이야? 여 가 감시가 어디 쉬워? 그 작자 현재 우리 종주야. 네 눈엔 그저 우스워 보이겠지만 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무슨 수로 그 집안 속옷 장까지 털어,이 망할 자식아!”

   종주(宗主). 봉건제가 살아있던 고대에는 제왕이라 불 리던 일족의 수장이 시대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달리한 것이 바로 그 종주다. 말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던 시절에 비하자면 비록 지금은 그 권력이 많이 쇠

하였으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태국영은 말없이 담배를 하나 배 물었다. 눈을 내리깔 고 담뱃불을 붙이는 얼굴이 일렁이는 작은 불길에 젖어들 었다. 태호연은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침음했다.

   “그러게 진작 집에 들어앉히라니까. 이제껏 뭐 하고 있 다가 이런 사달을 내고 지랄이야! 그 씨발 환장할 껍데기 가지고 아직도 못 넘겼어? 나가 뒤져라,새끼야! 아오 씨 발. 내가 너희 둘 보다 보면 복장이 터져!”

   태호연은 예의상 붙이던 가주 소리도 몽땅 상실한 채 결국에는 쌍욕으로 마무리했다. 운전석 차창을 완전히 내 리고 희끗한 담배 연기를 한 번 내뱉은 태국영이 픽 웃었 다.

   “아무튼 잘 감시해. 언제 태도가 바뀔지 알 수 없으니 까.,,

   “난 몰라! 네가 알아서 해!”

   태호연은 더 듣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 다. 광! 거세게 닫힌 진동으로 차내 공기가 퍼렇게 진동했 다. 저렇게 말은 하지만 그는 믿을 만한 남자였다. 태국영 이 믿는 몇 안 되는 가솔 중 한 명이었다.

   태호연은 이승도가 괜한 일에 휘말려 피를 보는 건 원 하지 않았고,하루 발리 이승도가 참하게 태국영의 품에

안기길 간절히 기도하는 쪽이었다. 그는 분명 지금부터 맹 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을 터였다.

   문제는 이쪽이다.

   태국영은 창 내린 문에 팔을 걸친 채 느긋이 담배 한 대 를 다 피웠다. 탁한 연기를 무너뜨리는 가느다란 눈이 비 스듬히 몸을 적셔 왔다. 회색 터틀넥이 검게 얼룩졌다. 여 린 눈꽃들이 뜨거운 몸을 만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광 경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젖어 있었다. 시야를 흐리게 하는 눈발이 꼭 누구 얼굴 같아 혀를 찼다.

   “우리 승도 그렇게 웃는데,맘 약한 내가 방법이 있나.”

   태국영은 싱겁게 웃으며 다 피운 담배를 밖으로 던졌 다. 눈 바닥에 닿은 불꽃이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차창을 올린 그는 와이퍼를 작동시킨 뒤 곧장 액셀을 밟았다.

   “한동안은 첩 들인 조강지처 감시나 하게 생겼네. 팔자 도참세다,태국영.”

   태국영의 입술이 묘한 곡선을 그렸다. 까마득히 검게 빛나는 눈동자는 정적처럼 고요하고 차가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