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 그림
이삿날이 코앞이었다. 이사를 결정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니. 하마터면 짐을 정리할 시간도 놓칠 뻔했다.
“나는 대충 정리 끝났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도 내게는 충분히 좋았다. 그런데 상진은 회사와 조금 더 가까운 곳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대강은 짐작이 가지만.
최근에는 함께 출근하지 않는 데다가 그가 회사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걸 내가 사양했던 탓이다.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괜히 누구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테니까.
여하튼 며칠을 그렇게 지냈더니 이제는 내가 출퇴근하는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뭐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보고 싶다나? 참나, 남사스럽게 무슨 그런 애 같은 소리를 하나 모르겠어.
“……형, 정리를 다 했다기에는. 거의 버린 게 없지 않아요?”
결국 회사와 더욱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결정했다. 상진은 타운하우스같은 주택도 이야기했지만, 둘 다 젊은데 굳이 그런 곳에서 살기에는 아직 부담스러워서. 단칼에 거절했다.
“버, 렸는데. 꽤 버렸어. 이것 봐라.”
바닥에 놓인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흔들었다. 음, 반도 안 차긴 했지만 더 버릴 게 없단 말이지.
“형, 이거 안 쓰잖아요.”
상진이 머플러 하나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이미 색이 바래 누더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한 삼년은 안 두른 것 같지만, 그래도 내년 겨울에는 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버리지 않았던 건데.
“야! 그거 할 거야.”
“이런 건 버려요. 더 좋은 거로 하고 다니면 되죠. 내가 사 준 거 있잖아요.”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됐어요. 버려요.”
그가 머플러를 매몰차게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 그래도 한때 열심히 하던 건데, 좀 아까웠다. 이따가 저놈 없을 때 슬쩍 꺼내서 숨겨 둬야지.
“맘대로 버리지 마라. 다 두면 쓸모가 있는 것들이거든?”
“적어도 2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거면 평생 안 쓸걸요.”
“아냐, 다 두면 쓸모가 있다니까.”
“이건 또 뭐야. 이것도 버려요.”
내 짐을 뒤적이던 상진이 낡은 플라스틱 통을 쓰레기봉투에 던졌다. 빈 통이긴 했지만 언젠가는 뭘 담아 둘 용도로 쓰게 될 것 같아서 둔 건데!
“야! 그것도 나중에 쓸 거야!”
“그때 새로 사요, 그럼.”
“이 자식이 아주 아까운 줄을 몰라요.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두는 게 좋다고.”
“이왕 정리하자고 한 거면 제대로 해야죠, 형.”
어차피 대부분의 짐들은 이삿짐센터에서 잘 옮겨 주겠지만 그래도 이사인데. 필요 없는 짐들은 정리도 하고, 또 이사 기분도 내고. 그래서 내가 짐을 같이 정리하자고 했었다.
……이제야 조금 후회가 된다만. 그냥 혼자 정리할걸. 아오, 아까운 내 짐들.
“그만, 그만!”
이제는 아주 대놓고 내 물건들을 쓰레기봉투에 담고 있는 상진에게 손을 휘이 저었다. 이러다가 빈 몸으로 이사하게 생겼다고.
“이제 내 짐은 됐고, 네 짐 정리나 하자.”
“형, 아직 형 거 하려면 멀었어요. 저거도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만 버려! 다 쓸모가 있다니까!”
“……아무래도 형은 그냥 몸만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마뜩찮은 눈빛을 보내 오는 상진을 일으켜 세웠다. 이대로 두면 기껏 가지고 온 짐들이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그의 몸을 뒤에서 밀며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뭐야, 네 짐은 이게 다야?”
“네.”
정말 단출했다. 드레스 룸에 있는 상진의 옷은, 하나같이 버릴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옷은 건너뛰고 다른 짐들을 살펴보는데…… 아니, 이건 짐이라고 하기도 민망하잖아? 옷이나 신발 말고 개인적인 짐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음, 본가에서 별로 안 가지고 나왔어?”
본가에서는 아예 독립했다고 들었는데, 혹시나 두고 온 짐들이 있나 해서 물었다.
“아뇨, 다 가지고 나왔어요.”
“그런데 이거밖에 없다고?”
“네.”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산건지. 사람 냄새 나는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 오피스텔에 처음 왔을 때에도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정말 이렇게나 짐이 없을 줄이야.
있는 거라고는 조금 묵직한 종이 박스 하나였다.
“열어 봐도 되지?”
“그럼요.”
사적인 물건일지도 모르니, 우선 허락을 받았다. 상진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겉면이 두텁고 단단한 박스 뚜껑을 손쉽게 열었다. 안에는 앨범과 스케치북, 그리고 또 스케치북이 있었다.
“뭐야, 사진? 그리고 이건, 그림노트네. 너 미술에 관심 있었어?”
“조금은요.”
우선 빳빳한 앨범 커버를 열었다. 꽤 낡은 앨범이었으나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평소에 자주 꺼냈었는지 종이의 모서리 부분이 조금 닳은 채였다. 그 앨범 안에는 사진이 여러 장 꽂혀 있었고,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얼핏 봐도 스무 장 이내였다.
“별로 없네.”
손에 집히는 장을 펼쳐보자 그 안에는 현우의 어린 시절 사진이 테이핑 되어 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 손에는 어릴 때 좋아했던 오리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아, 귀여워. 미쳤다, 옛날엔 이렇게 귀여웠는데.”
“지금은요?”
“기억이 나네. 이 오리 장난감 진짜 좋아했거든, 너.”
“형, 지금은요? 지금은 안 귀여워요?”
“표정 봐, 너무 귀여워. 아, 혹시 이거 내가 찍어 줬던 건가?”
“형…….”
팔락거리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드문드문 꼽힌 사진들 중에는 어린 시절의 나도 있었다. 나와 현이, 아버지가 같이 지냈던 단칸방의 모습도. 현이와 현우가 찍힌 사진, 내가 현우를 안고 있는 사진, 아버지가 현우를 업고 있는 사진.
……드문드문이 아니라, 대부분이 우리 가족과 현우가 함께 있는 모습들뿐이었다.
“사진이 몇 장 없네.”
“네, 저도 가지고 있는 사진이 별로 없어서요. 형은요?”
“나도 있긴 한데 많지는 않아.”
사고가 나고 급히 이삿짐을 챙기는 바람에 잃어버린 앨범들도 있었다. 그 난리 통에 앨범부터 챙길 정신머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도 그때에는 어렸고.
“현우야.”
“네?”
“이사 가면 가지고 있는 앨범 모아다가 같이 두자. 어때?”
그럼 좀 많아 보이겠지. 너랑 내 어린 시절도 풍족해 보일 테고.
그를 보며 웃음 짓자, 그가 마주 웃어 보였다. 어릴 때처럼 해맑은 얼굴로.
“나머지는 다 스케치북이야? 그러고 보니 너 어렸을 때 미술 과외 받지 않았던가?”
“그랬을걸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 기억은 잘하면서 왜 그 기억은 안 나냐.”
“형에 대한 거니까 잘 기억하는 거죠.”
너무 당연하게 맞받아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스케치북 몇 개를 꺼내다가 펼쳐 보았는데, 펼치자마자 바로 닫았다.
“못 본 걸로 할게.”
“왜요?”
“아니야, 못 본 걸로 할 테니까.”
“잘 못 그렸어요? 나름 최선을 다 한 건데.”
못 그리지 않았다. 아주 잘 그렸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대충 펼쳤던 스케치북 안에는 온통 내가 그려져 있었다. 음, 그러니까, 나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이거 봐요, 형. 형이랑 똑같죠?”
“……야, 이게 어딜 봐서 나랑 똑같아. 이 그림에 있는 사람은 연예인 아니냐?”
백보 양보한다고 해도 내가 아니었다. 뭐, 내가 다시 태어나서 조금 더 잘난 외모를 가진다면 저렇게 생겼을까. 아무리 제 눈에 콩깍지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다. 누가 볼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아닌데, 형이랑 똑같아요. 저 이래봬도 그림은 좀 소질 있어요, 형.”
“……그림은 잘 그리는데, 아무래도 네 눈이 좀 고장이 난 것 같다.”
입을 삐죽거리는 상진을 그냥 두고 다른 스케치북을 꺼내보았다. 이건 조금 낡아서 시간이 지난 듯했는데, 이번에도 안에는 내가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지금 모습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어린 시절의……. 이때는 상진과 만나기도 전이었는데.
“……뭐지?”
“아, 그건 형이 조금 더 어릴 때.”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어릴 때의 모습인데, 그게 왜 여기에 그려져 있지. 너 그때는 나 본 적 없잖아.”
상진이 조잘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고장이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너 설마 나를 스토킹이라도 한 거냐?”
“형! 저 그때는 병원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걸요.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그냥, 상상해서 그린 거라고요.”
“아, 하긴 그렇네.”
사람이 컸다고 해서 갑자기 얼굴이 확 변하지는 않으니까. 예전 모습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는 있을 듯했다. 게다가 저 녀석은 그림도 잘 그려서 말이지. 그림에 소질 있는 사람들은 상상력도 풍부하다고 들었다.
내가 금방 납득하자 상진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풀며 활짝 웃었다.
“그럼, 이거는.”
이제 가장 안쪽, 제일 낡아 보이는 스케치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끝이 너덜거리는 종이는 이미 색이 바래 누렇게 변해 있었다. 정말 시간의 흔적이 가득 담긴 듯했다.
“아, 이거 너 어릴 때 그린 거잖아.”
“기억나요, 형?”
“응, 기억하지. 이거 나랑 같이 그린 그림인데.”
너절한 종이는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지만 그림이 있는 부분만은 멀쩡했다. 그 안에는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파란색, 검은색, 노란색으로만 그려진 그림.
어릴 적 우리 가족은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셨지만 사업으로 갖게 된 어마어마한 빚은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다. 그래서 학교에 가져가야 할 문구들도 잘 사질 못했다.
이때에도 그랬다. 크레파스를 나와 내 동생이 함께 쓰다 보니 남은 색은 오직 파랑, 검정, 노란 크레파스뿐이었던 탓이다. 그 몇 개 남지 않은 크레파스로 현우와 함께 그림을 곧잘 그렸었다. TV와 옷장 하나 있는 단칸방에서 할 놀이는 그리 많지 않다. 숨바꼭질이나, 기껏해야 그림 그리기 정도.
“근데 대체 무슨 그림이지?”
큰 집이 하나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나무. 위에는 해, 그리고 집의 양 옆에는 사람이 두 명. 집의 위쪽에는 또 다른 사람이 두 명.
“꿈을 그린 거잖아요.”
“꿈?”
“네, 형이 나한테 꿈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내가 밑그림을 그리고 형이 색칠을 해 줬어요.”
“꿈, 이면 장래희망을 말하는 건가.”
“대충 그렇죠.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으니까.”
그런 자세한 상황까지 기억을 하다니. 어린 시절로부터 열 해간 시간이 멈췄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현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조금 입 안이 씁쓰름해졌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야?”
나는 집의 양옆에 그려진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하고 나예요.”
“아, 그럼 집 위에 그린 이 사람들은 현이와 아빠인가?”
“네, 그건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내가 그린 거야?”
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형이랑 나만 그렸는데. 형이 아저씨랑 현이도 그렸어요. 다 같이 살자고.”
같이 그림을 그렸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것도 그저 흐릿한 정도였다. 그가 나보다는 더 잘 알겠지. 그렇구나, 하고 웃어넘겼다. 어차피 모두가 모일 일은 이제 없으니까.
“그럼 나랑 같이 사는 게 어릴 적의 꿈이었어?”
“물론이죠.”
그가 바보처럼 웃었다. 입을 헤 벌리고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내가 뭐라고, 뭔데 이렇게까지 중요한 존재인 건지. 그에게 있어서 나는,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듯했다.
“그랬구나. 그럼 넌 꿈을 이뤘네.”
“그래서 요즘 매일 행복해요, 형.”
“다행이다, 네가 행복해서.”
“형은요?”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지.”
“키스해도 돼요?”
“갑자기?”
쪽, 쪽, 살포시 입술을 대었다가 진득하게 혀가 얽혔다. 점점 바닥으로 기우는 몸을 뿌리치고 그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야, 짐 정리 아직 안 끝났어.”
“내일 제가 할게요. 지금은―”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는 상진의 앞으로 스케치북을 들이밀었다. 이대로 또 엎어지면 한나절은 금방 간다.
“그거 말고, 이거 하자.”
“뭔데요?”
막상 말을 꺼내려니 조금 부끄러웠다. 이 나이 먹고 이런 말 하기도 좀 쑥스럽고.
“어릴 때처럼, 꿈 그리기.”
“네? 꿈이요?”
“응, 이 그림처럼 말이야. 같이 그려 볼래? 추억도 생각나고 좋잖아.”
그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던 스케치북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손으로 종이를 잡고 아래로 내리더니 바닥에 펼쳐 놓는다. 여전히 색이 바랬지만 그래도 그림은 없는 빈 종이 부분으로.
“좋아요.”
“좋아! 그런데 우리 크레파스는 없지?”
“잠깐만요, 여기요.”
“……이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냐.”
투명 비닐로 싼 노랑, 파랑, 검정색의 크레파스가 박스에서 꺼내졌다. 대체 이건 어디서 난 건지, 아니면 어릴 때 이미 집으로 가져갔던 건가. 당최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좋아. 이번에는 밑그림을 같이 그리고 색칠도 같이 해 볼까?”
“네, 저는 집을 그릴래요.”
“뭐야, 또? 변한 게 없구만.”
상진이 검정색의 크레파스로 집을 크게 그렸다. 예전과 그다지 달라진 형태는 아니었다.
“그럼 나는 사람을 그려 볼까.”
이어서 나도 사람을 두 명 그렸다. 상진과 나, 나름대로 머리카락도 표현해 봤지만 크레파스의 끝이 뭉툭해서 쉽지는 않았다.
“이제 뭘 그릴 거야?”
“고민 중이에요. 형은요?”
“나도 고민 중.”
우리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서리에는 뭘 그릴지, 집은 무슨 색으로 칠할지.
함께 만들어 나갈 새로운 꿈을 상상하며, 이번에는 노란색의 크레파스를 손으로 집었다.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 외전> 마침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