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일상 (5/8)

외전1. 일상

―사랑해요.

가 모닝콜이나 다름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재수가 없을 만큼 잘생기고 난리였다. 항상 그랬다. 채 씻지도 않았을 텐데도 저 인간은 대체 왜 말끔한 걸까.

늘 태주가 눈을 뜨기 전에 상진이 먼저 깨어 있었다. 그는 태주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다가 그가 깰 때 즈음에는 조금 거리를 벌렸다. 태주가 자는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천천히 눈꺼풀이 열리면 여지없이 건네는 것이다.

‘형, 사랑해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오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태주는 꺼먼 시야 너머로 점점이 비치는 빛들을 갈무리했다. 느긋이 눈꺼풀을 열고 흐릿하게 비추어지는 얼굴을 더듬는다. 다부진 턱 위로 매끈하게 올라가는 선이, 그 안으로 자리 잡은 훤칠한 이목구비가, 특히나 깊은 물처럼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응?”

당황스러움에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눈이 희끄무레하여 잘 안 보인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뻗어 앞을 더듬었다. 그런데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없다, 계상진이.

어디를 가야 할 때면 반드시 일정을 알리곤 했다. 물론 그가 태주의 곁을 비우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나 아주 간혹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꼭 미리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몇 월 며칠 무슨 요일, 심지어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무슨 볼일로 어디를 들렀다 온다거나.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대신 태주 역시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을 경우 미리 알려 주기는 했다.

‘어디 갔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간밤의 흔적이 잔뜩 남은 몸을 가운으로 대충 가리고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침실에도, 거실에도, 주방에도,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새벽까지는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거실에 놓인 테이블에도 주방에 있는 식탁에도 그 흔한 쪽지 하나 없었다.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집이 춥게 느껴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다른 방들도 모두 확인을 하고 나서야 다시금 침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늘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태주의 침대에서 밤새 뒹굴다가, 혹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까무룩 잠에 드는 것이다.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고 또 함께 눈을 뜨는 그 일상들이 태주에게는 여상스러운 일이 되었다.

‘메시지도 없고.’

침실로 돌아온 태주는 먼저 핸드폰을 확인했다. 거실이나 주방에 쪽지가 없다면 메시지나 전화라도 남겼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핸드폰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렇게 그가 이야기도 없이 자리를 비운 적은, 처음이었다.

“연락이나 좀 해 놓고 가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서였다.

아마도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고작해야 집 근처의 약국에 간다거나 아니면 편의점에 갔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가능하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는데, 뭐 급히 살 것이라도 있었나.

핸드폰을 들고 거실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꼬르륵, 기다렸다는 듯 배에서 신호를 보내 왔다. 왜인지 머리도 띵하게 아파 왔다. 속도 좀 거북한 것 같고. 그러나 그냥 무시했다. 챙겨 주던 사람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으니 딱히 끼니든 약이든 챙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핸드폰으로 못 봤던 영상도 보고 인터넷도 들여다보았다. 괜스레 여기저기에 들락날락거리다가 결국 전화 버튼을 눌렀다. 상진에게로 통화연결음이 울린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귀를 의심했다. 전, 전화,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어찌나 당혹스러운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적도 처음이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는 상황도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하지 않은가. 상진으로서 그를 다시 만나고 지내 온 시간 동안 이런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걸까. 혹시 상진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거듭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다. 별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도 조금씩 불안이 쌓이고 있었다.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태주 역시 그랬다. 그와 지낸 이후로 많이 달라지긴 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온 자신을 스스로 칭찬해 주기도 했고 자신감도 더 붙었다. 또 최악의 상황을 미리 가정하여 걱정하는 일도 여간하여서는 없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나 금세 또 이 꼴이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도 못한 채 몸을 옹송그렸다. 저도 모르게 손톱 끝이 입술에 닿았다.

하루아침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기억은, 그 상처는 단숨에 낫지 않는다. 한꺼풀을 벗기거나 혹은 덮는다고 해서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좀 나아졌나 싶다가도 그림자처럼 발끝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태주는 숨을 들이켰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혹시, 혹시나 사고라도 당한 거면 어쩌지.’

발끝을 휘감고 뒤꿈치에 머물렀던 그림자가 스르르 움직였다. 뱀의 머리처럼 서늘한 촉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소름이 돋았다. 잠시 벌어진 틈을 놓칠세라 또 다른 공포가 주둥아리를 벌렸다.

한 번 있었던 일이 두 번은 없으리란 법이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가운을 벗고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주워 입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근처 파출소, 아니, 상진이 갈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말이다.

―띠, 디, 디디, 디.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였다. 낯익은 버튼음이 들렸다. 귓가에서 치대는 심장 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울린 후에 문이 열렸다.

“형?”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상진이 서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단숨에 현관으로 들어섰다. 덜컥, 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걸리는 금속음이 연이어 들렸다. 찰칵, 찰칵, 철컥. 세 번 정도가 이어지고 나서야 그가 뒤를 돌았다.

사색이 된 태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상진이 입을 열었다.

“형, 어디 가요?”

그의 목소리가 숨통을 트이게 했다. 쏟아지듯 내리꽂히는 안도감에 그만 다리가 풀리고야 말았다. 현관에서 주저앉는 태주를 그가 급히 부축했다.

“형!”

엉망으로 걸친 옷이, 씻지도 못한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는 것이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대번에 태주를 들어 안은 상진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아니, 아니야.”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은 태주를 그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았다. 얼굴 가득 담긴 걱정을 숨기지 않고 말이다.

“너, 너 어디 다녀왔어?”

“잠깐 편의점에 다녀왔어요.”

“핸드폰은?”

“네? 가지고 갔는데, 어라.”

그가 외투 주머니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나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은 고장이라도 난 건지 먹통이었다. 조금 당황한 기색의 그가 이리저리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내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전화했었어요?”

“응, 두 번.”

그의 입이 떡 벌어진다. 동공이 급격히 확장된 채로 말이다.

“두, 두 번이나요?”

“응.”

“미안해요, 형. 잘못했어요.”

고작, 두 번이다. 그러니까 그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몇 번이고 잘못했다며 태주의 양손을 꼭 붙들었다. 무릎 위로 그의 얼굴이 닿는다. 성적인 접촉이 아닌, 그저 주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금방이라도 낑, 끼잉, 소리를 낼 듯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태주 형, 화났어요?”

“아니. ……아니, 응, 조금. 메모라도 남겨 놓고 가지 그랬어.”

“저 없어서 놀랐어요?”

“핸드폰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저 걱정했어요?”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대화는 계속되었다. 종잡을 수 없는 질문과 답변이 연잇고, 점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무릎에 올린 태주의 손 위를 덮은 그의 손이, 그리고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이 차츰 더 겹쳐진다.

이윽고 틈새를 매우는 숨결까지 먹어치운 그가 입술을 더듬었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혀를 섞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에 내내 목을 비틀던 불안감이 옅어진다. 턱턱 막히던 숨이 뚫리면서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응, 걱정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잠시 떨어진 새, 그에게 답했다. 그러자 그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휜다. 감출 수 없을 만큼 기뻐 보였다.

“좋냐? 웃기는.”

“형이 절 걱정했잖아요.”

“그래서, 그게 좋냐고.”

“네, 정말 좋아요. 행복해요, 형.”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금은보화를 가진 사람처럼, 그가 웃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월급날에는 자신도 저렇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배시시 웃던 그가 쪽쪽 볼에 입을 맞추었다. 왼쪽, 오른쪽, 입술까지. 귀엽긴 하다만 그 잠깐 동안 속이 타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자면 조금 얄밉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볼을 꽉 꼬집어 버렸다.

“윽, 으, 으프으!”

“아파?”

“으프, 으프으.”

“다음부터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 알았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린다. 찹쌀떡처럼 늘어진 그의 볼을 놓아주고 옅게 미소를 지었다.

“편의점은 왜 갔어? 웬만한 건 주문하잖아.”

“평소에 주문하지 않는 걸 사러 갔으니까요.”

“평소에 주문하지 않는 거……?”

그런 게 있었던가. 음식은 물론이고 식재료까지 배달되는 세상인데. 그리고 생필품이든 간식거리이든 똑 떨어지는 일이 잘 없었다. 바닥이 나기 전에 바로바로 채워졌으니까. 태주에게 필요한 것들은 상진이 직접 주문하기도 했고 또 그 외의 물품들은 관리인이 사 가지고 오기도 했다.

“어제 기억 안 나요?”

“응?”

그가 반대쪽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더니 병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꿀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숙취해소제였다.

“아.”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회식이 있었는데. 어, 어떻게 됐지. 우리 팀 인원끼리 술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퍽 왁자지껄 놀았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상진은, 표면적으로는 퇴사 처리가 되었으니 올 수가 없었고.

제일 신난 건 오 대리를 포함한 팀원들이었다. 팀장으로 승진한 뒤로 전체 회식은 몇 번 있었지만 팀원끼리 자리를 마련한 적은 없었다. 그간 바빴기도 했고 이래저래 여유도 없었던 탓이다. 겨우 시간을 내어서 어울렸다 보니 다들 흥이 많이 올라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과하게 마셨다. 주말을 앞두고 있었던 데다가……. 아니, 아니야. 어차피 다 핑계다.

“기억나요?”

방금 전까지는 그가 태주의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태주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음, 어떤 기억을 말하는 걸까. 하하,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무, 무슨 기억?”

“새벽까지 술 마신 거요.”

뜨끔했다.

“그― 건 기억이 나지.”

“그럼 내 전화 다 거절한 건요?”

마른기침이 나왔다.

“거절? 수, 수신 거절을 하진 않았을 텐데. 핸드폰이 고장 났나.”

새벽에 고장이 났다가 아침에 기적적으로 고쳐졌나 보다. 자연치유, 뭐 그런 거.

“전화하는 족족 다 끊어 버리고.”

움찔했다.

“오해 산다고 술자리에는 절대 오지 못하게 했으면서. 연락도 안 받고.”

무릎과 양손이 가지런히 모였다. 둘 곳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침대에 놓인 제 핸드폰을 집었다. 잠금 화면을 풀고 통화 목록을 켜 보니, 새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하나씩 세었다. 거절된 수신전화가 스물세 통, 부재중전화가 서른여섯 통.

……아까 두 번 전화해 놓고 화를 냈는데,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까. 양심이 쿡쿡 쑤신다.

“술자리 뒤엎고 빼내 오고 싶었어요.”

“크흠, 음.”

“술병으로 그 회식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내리치고 싶었는데.”

그가 섬뜩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내뱉었다.

아니, 왜 또 갑자기 장르 변경이냐.

“야, 야아. 장난이래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다시는 술 먹지 못하게 가둬둘까도 했어요. 회사고 뭐고.”

“회, 회사는 다녀야지. 그, 야, 현우야.”

“이런 거까지 살 정도로는 마시지 않았으면 해서요.”

손에 들린 병 두 개를 그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미리 사 두지 않는 거예요. 이걸 사 두면 형이 더 마실까 봐.”

“그, 그게.”

“형이 출근하고 나서부터 회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렸어요.”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1차, 2차, 3차, 자리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던 검은색 차량이.

“혀, 현우야.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오늘 아침처럼 연락이 잠깐 닿지 않아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아마 같은 기분이었겠지. 입장을 뒤바꿔 경험을 해 보니 알 것도 같았다. 도합 쉰아홉 통은 조금 너무한 것 같긴 한데.

“뭐가요?”

“술 많이 안 마실게, 앞으로는.”

“거짓말쟁이. 저번에도 많이 마시는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앞에서 아직도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그를 일으켰다. 바로 곁, 침대에 앉게 하고는 가운데 세 개의 손가락을 접고 엄지와 검지를 쭉 뻗어 내밀었다.

“약속.”

“진짜로요?”

“응, 진짜.”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새끼손가락에 그의 손가락이 걸리고 팔이 위아래로 살짝 흔들렸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가 어찌나 귀여운지.

“그렇게 좋아?”

“네, 좋아요.”

이런 약속 하나로 저렇게나 좋아하다니, 조금 더 양심이 아파왔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술을 줄이긴 해야 한다. 가볍게 먹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지만, 과한 건 독이니까. 다음 날 힘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조금만 과하게 마셔도 필름이 자주 끊기곤 했다.

“나 어제 두 발로 들어오긴 했어?”

“아뇨, 네 발로 기어서 왔어요.”

“진짜?!”

아오, 이게 무슨 추태람.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태주가 퍽 당황하자 그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농담이에요. 네 발로 기어오진 않았고, 제가 안고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형이 형 발로는 못 들어온 거네요?”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게…… 아니, 저거 돌려 까는 거 아니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말이지.

“그래도 좋았어요.”

“좋았다고? 술 많이 먹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지만, 어제는 좋았어요.”

“무슨 소리냐, 대체. 화가 났으면 차라리 화를 내라.”

아까는 싫다고 했다가, 이제는 또 좋단다.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겨보았다.

“형은 술에 취하면 솔직해지잖아요.”

“내가?”

“네, 어제도 엄청 솔직했어요.”

그의 입술 끝선이 둥글게 말아 올라갔다. 덩달아 곡선을 그린 눈썹 아래의 눈동자에는 빛이 아롱지었다. 단순히 조명이 반사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그러니까 확실히 행복해 보이기는 한데 어째 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무슨 의미야?”

“뭐가요?”

그가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귀여웠다.

“아니, 내가 솔직해진다는 거 말이야.”

“말 그대로인데.”

“좀 더 자세히 말해 주라.”

“흐음―”

잃어버린 기억을 남에게서 찾는 꼴이라니. 절로 한숨이 새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만, 짚을 건 짚어야하지 않겠냐.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도 싫고. 그런데,

“말 안 할래요.”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아, 왜!”

“저만 알고 있을래요.”

“너무하네, 진짜 이럴래?”

“와, 너무 설레요. 저만 알고 있는 태주 형이라니. 태주 형 본인도 모르는 거잖아요.”

이상한 놈이다, 정말.

“힌트라도 주면 안 돼?”

“힌트요?”

그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오른쪽에서 왼쪽,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허공을 더듬던 그의 시선이 이내 태주에게로 향했다. 온전히 그를 안에 담고서 음험하게 미소를 짓는다. 매끄러운 손끝이 엉망으로 걸친 태주의 옷깃을 스쳤다.

“형, 가까이 와요.”

어차피 둘만 있는데 목소리 낮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데도 그는 굳이 옷깃을 살짝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태주의 귓가에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낮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장애물도 없이 대번에 귀로 꽂혔다.

“거기 너무 좋아.”

“응?”

“상진아, 가득 넣어줘. 기분 좋아.”

“무, 뭐?!”

대낮부터 들리는 음담패설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화들짝 놀란 태주가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으나, 어느새 양쪽 어깨를 붙들리고 있었다. 뒤로 몸을 무를수록 그의 무게가 더해지고 사선으로 기울었다.

결국 털썩, 침대 위로 무너진 태주의 위로 그가 몸을 기대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에서 상진의 입술이 끈질기게 태주를 쫓았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좋아, 안에 가득 차서.”

“야, 야! 너,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상진아, 네 거 여기까지 들어왔어, 배 아파. 갈 것 같아.”

“야! 계상진!”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야 그의 말이 멎었다. 새빨간 홍당무가 된 태주가 씩씩거리며 성질을 내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상진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왜요? 힌트 달라면서요.”

“그, 뭐, 그게 무슨 힌트야!”

“맞아요, 사실 힌트라기에는 다 드린 거죠. 그대로 읊은 거니까.”

“하! 어이가 없다, 정말. 거짓말도 정도껏 해라.”

평소에도 그런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그와 평범하게 관계를 할 때에도 말이다. 그래서 억울했다. 저런 야하고 난잡한 소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상진이 더 채근해 대었으니까.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는지 모르겠다.

“흐음―”

그런데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진짜인데.”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형은 원래 술 많이 마시면 기억을 하나도 못 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니야. 그래도 그럴 리가 없다고.”

“형은, 형을 너무 몰라요.”

“내가 날 왜 몰라.”

상진이 작게 웃었다. 선이 굵은 목울대가 넘실거렸다. 짙은 눈썹이 까딱거리더니 은근한 눈빛을 보내온다.

“형이 얼마나 야한지 모르잖아요.”

“야, 너 쓸데없는 이상한 헛소리할 거면―”

“현우야.”

상진이, ‘현우야.’라고 했다. 마치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처럼. 그러고는.

“네 거 좋아.”

“응?”

‘네가 좋아.’로 들었다. 그, 그렇겠지. 잘못 말했나 보다. 아무렴, 물론 ‘네가 좋아.’는 충분히 했을 법한 말이다. 상진이든 현우든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암, 그렇고말고.

그러나 이어서 들리는 말은 전혀 달랐다.

“현우야, 네 거 좋아. 흥분돼, 안까지 들어와 줘.”

정수리에서부터 이마로, 이마에서 콧대로, 콧대에서 입술 너머로 서서히 창백해졌다. 핏기가 사악 가시면서 머리가 핑핑 돈다. 그냥 부정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절대로, 저 인간한테, 아니, 상진이라고 불렀다면 모를까, 현우라고 부르면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한 적이 절대로. 저, 절대로.

‘계상진, 그거 좋아. 거기, 아, 으응, 읏, 하아!’

‘윽, 안 돼요. 형, 너무 좁아요. 아무래도 형이 다칠 것 같아서.’

‘상관없어, 현우야. 더 박아줘, 네 거 좋아.’

‘네?’

‘현우야, 으읏, 응, 안까지 들어와, 안에 싸 줘.’

‘형…….’

하나씩 떠오르던 지난 새벽의 일이,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처럼 뇌리에 맺혔다.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걸까. 자신을 안고 온 상진, 아니, 현우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렸던 것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상스러운 말을 하고, 너무 취한 자신을 두고 머뭇거리던 그에게 아래를 비비며 난잡한 소리를 내질러 대었던 기억이.

미쳤지,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성태주.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보살펴야 할 동생에게 바, 박아 달라느니 싸 달라느니. 양심은 도떼기시장에 갖다 팔아먹었냐. 이제 쟤 얼굴을 어떻게 봐야…….

“기억이 났어요?”

태주의 변화를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얼굴에 미소를 띤 그가 여유 있게 물어온다. 느긋이 올라간 입 꼬리에는 행복감이 묻어 있었다.

정말 환장하겠다.

“아니, 음, 저기, 아뇨?”

“형이 기절하기 직전에 한 말도 기억이 났으려나.”

“으음, 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아직 형이 한 말에 답을 못해 줘서요.”

답? 그럼 뭐, 질문이라도 한 건가.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또 저렇게 미끼를 던져 버리니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최대한 기억이 났다는 티를 내지 않고 물어보았다.

“진짜,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거든?”

“그래요?”

“응, 진짜. 머리를 뭐로 맞은 것처럼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짜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래서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냐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설마 뭐, 더 심한 헛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살짝 초조하고 불안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의 입술만을 보고 있었다. 그가 이내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사랑해요, 태주 형.”

매일매일 속삭이는 그 말을 건네고서, 마치 그게 특별한 일이라도 되는 듯 그가 웃었다. 조금도 지탱하지 않은 채 그대로 태주의 위로 몸을 누이자 민망할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런 녀석을 앞에 두고 헛것이나 상상한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게, 답이야?”

“네, 형.”

태주는 눈을 감았다. 슬그머니 웃음이 흘러나온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의 볼을 양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답에 대한 답을 했다.

“나도 사랑해.”

붕어처럼 불룩 튀어나온 입술이 꿈질거린다. 금세 달라붙어 쪽쪽거리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둥글게 휜 그의 눈매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행복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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