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4/8)

에필로그

승진 면접에 대한 결과는 지체 없이 공지되었다. 메시지와 이메일, 복도에 붙은 공문 등으로 말이다.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결과였다. 다들 입을 모아 승진 대상자들과 인사팀을 칭찬했다. 평소의 성실한 업무 태도와 사내 평가 등이 완벽하게 반영이 되어 있었으니 불만을 토로할 것도 없었다. 본부장을 등에 업고 농땡이를 피우던 몇몇의 사람들은 이번에도 역시나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성 팀장님, 말씀하신 자료는 메일로 송부 드렸습니다.”

“네, 고마워요.”

상진과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우선 비정상적으로 붙어 있었던 나와 상진의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뒤였다. 각각의 줄과 열에 딱 맞게 말이다. 돌이켜보니 저 자리 배치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구의 농간질이었는지 알 만하다.

“팀장님, 모니터링 파일은 저장해 두었습니다.”

“네, 고생했어요.”

최 팀장이 퇴사를 하고 나서 내내 비어 있던 그의 자리에는 태주의 짐이 놓여졌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다. 이 자리에 앉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꾸 원래 앉던 자리로 가게 되어서 팀원들이 장난스럽게 놀리기도 했다.

“티, 팀장님!”

“잠깐만요.”

비어 있던 자리들은 새로 입사한 직원들로 채워졌다. 경력직도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이 신입이어서 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이래야 할 것이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당연히 직접 할 노릇이다. 그래도 조금 하소연을 하자면, 여기저기서 ‘팀장님’을 불러 대느라 자리에 앉을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꽁으로 받는 월급이란 없다.

“아이고, 우리 팀장님 이러다 쓰러지시겠네요.”

“그러게요. 가뜩이나 부사수도 사라져서 더 바쁘실 텐데. 팀장님 선까지 올라가지 않도록 각자 사수가 컨펌 좀 미리 해 주세요.”

“넵.”

“네.”

오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에게 말했다. 아, 이제는 오 대리라고 해야 한다. 그 역시 이번 기회로 승진을 했으니까. 아직 이전의 직급이 입에 익어서 종종 실수를 하곤 했다. 조심해야지.

“팀장님, 뭐 도와드릴 일 없을까요?”

그가 태주의 근처로 와서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오 대리도 바쁠 텐데.”

“그래도 도와드릴 일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네, 고마워요.”

최근에는 그에게 많이 의지를 하고 있었다. 과장에서 팀장으로 이른바 고속 승진을 한 터라, 자리에도 적응을 해야 했고 업무에도 적응을 해야 했다.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위치가 바뀐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달라짐을 의미했다. 승진 면접에서는 연봉에 눈이 혹해 덜컥 승낙을 해 버렸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일들을 도맡아서 해 왔기에 업무적으로는 큰 무리가 없었다. 팀장으로서의 태도, 직원들을 관리하는 부분은 천천히 적응 중이다. 초반에 조금 헤매는 동안, 오 대리가 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사수가 없으니까.’

타닥타닥, 연이어 두들기던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 냈다. 작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문득 한쪽 구석으로 눈길이 갔다. 텅 비어 있는 자리, 상진이 앉았던 의자였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원래도 짐을 두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사람의 흔적 하나 없이 빈자리 그대로였다.

바로 옆 자리에 딱 붙어서 조잘거리던 것이 떠오른다. 조금만 헛기침을 해도 물을 떠다 주고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건네주곤 했었는데. 무슨 비서도 아니고 말이다. 막상 얼굴을 보기 힘들어지니 그에 대한 고마움이 와 닿았다.

‘그때는 오버하지 말라고 투덜거렸었는데.’

괜히 그랬다. 그냥 솔직하게 고맙다고 할걸. 이제까지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고 조금은 부끄러웠던 탓이다.

비어 있는 그 자리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대표가 바뀐 이후로 초과근무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업무 시간 내에는 집중을 해야 했다. 다시금 모니터 안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적어도 여기까지는 끝내야 내일 회의에서…….

―♬♪♩

사내 인터폰으로 벨이 울렸다. 오 대리의 자리였다. 그가 전화를 받더니 수화기를 내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대표님 호출입니다.”

“네, 알겠어요.”

팀원들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꽂혔다. 다들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부담스러운데. 아무래도 대표의 직접 호출이라는 게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눈초리가 신경이 쓰이는 건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본부장을 등에 업었던 것처럼 혹여 자신이 대표를 등에 업은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한번 도마 위에 오르면 잘게 썰려 흔적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니.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그게 말입니다, 여러분. 저도 엄청 부담스럽거든요.

* * *

4층의 복도에 들어섰다. 이제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회백색의 통로를 걷는 도중 고개를 틀었다. 바로 옆은 인사팀의 사무실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승진 면접에서 얼굴을 보았던 최 부장은 무언가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회사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자, 사내 분위기가 급속도로 뒤바뀌었다. 학연과 지연이 아닌 정당한 업무 성과에 따른 진급, 불필요한 초과근무 지양, 납득 가능한 연봉 협상, 그리고 연차를 포함한 사내 복지들도 하나씩 추가되고 있었다. 직원들의 불만이 차츰 해소되자 회사는 놀라운 속도로 안정화가 되어갔다.

“대표님.”

대표실의 문 앞에 다다랐다. 손등으로 살며시 문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끼익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문이 틈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이 쑥 다가왔다. 그것은 태주의 입을 막아 버리고 그대로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읍!”

숨이 막혔다. 한순간에 입술을 가로막힌 것이 무척이나 답답했다. 뒤에서 제 허리를 휘감은 팔과 입을 막은 손을 탁탁 두들겼다. 놓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상대는 바짝 붙은 몸을 쉽사리 떼어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악!”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세게 꼬집었다. 거의 살가죽을 감듯이 비틀었더니, 그가 새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드디어 풀린 손과 팔을 떼어내고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게 왜 까불어.”

“으윽. 아파요, 형.”

“아프라고 한 거니까 아파야지.”

“너무해…… 왜 이렇게 차가워요?”

“괜히 놀래는 짓 좀 하지 마.”

칭얼거리는 그를 두고 대표실을 둘러보았다. 중앙에 마련된 자리들 중 오른쪽에 있는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이 회사를 인수한 대표, 그 김현우 대표가 저 개진상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상진이 현우라는 걸 알았을 때에도 설마 했었다. 우연하게도, 바뀐 대표의 이름은 ‘김현우’이고 내 부사수는 ‘계상진’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예전에 알았던 형 하나 다시 보겠다고 회사 자체를 인수하느냔 말이다. 이 회사가 한두 푼도 아니고, 억 단위가 오고갔을 텐데.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전(前) 대표였던 본부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돈이 썩어난대도 나 하나 때문에 회사를 인수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자의식과잉이라고 느꼈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어떤 돌아 버린 놈이 대체……

“형이 보고 싶어서요.”

……세상에서 제일 돌아 버린 미친놈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봤는데 뭘 또 보고 싶어서야. 나 바빠.”

“매시간 매분 매초 보고 싶단 말이에요.”

“용건 없으면 나 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그가 매달려 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상진이 어리광을 부리듯 품에 안기려 했다.

“혀엉, 형은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아니, 저기요. 계상진 씨. 오늘 아침에 봤잖아. 우리 아침도 같이 먹었잖아.”

“출근하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봤잖아요. 인터폰은 왜 내려놨어요?”

“누구누구 씨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니까.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지, 일을. 그리고 퇴근하고 나서도 볼 거잖아.”

“형, 많이 바빠요? 누가 바쁘게 해요? 가만 안 둬.”

네가 이렇게 부르지만 않아도 좀 덜 바쁠 것 같다만.

“이사한테 말해서 형 안 바쁘게 해달라고 할 거예요.”

그가 수화기를 덥석 잡았다. 어휴, 저 초딩 자식이. 괜히 또 일 키울까 걱정되어서 그를 말렸다.

“현우야, 이사님 바쁘실 텐데 이런 거로 귀찮게 하지 마.”

이럴 때 보면 그가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다. 재활과 치료를 병행했던 시간 동안, 한순간에 뛰어넘은 열 해를 따라잡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어린이로 머물렀던 마지막 기억에서 깨어나니 갑자기 성인에 가까운 청소년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불안할 만도 하지. 그래서 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안쓰러웠고 또 속이 상했다.

계상진으로 처음 마주했었던 그가, 왜 그렇게 맹목적이었고 제멋대로였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얼마나 초조했을까.

“‘이런 거’라뇨. 제게는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형 바쁜 거 싫어요.”

“원래 팀장은 바빠야 하는 거야.”

팀장과 같은 중간 관리자가 바빠야 직원들이 편해진다. 태주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없어서 그런 거죠?”

“응?”

“역시 그만두지 말걸. 내가 있었으면 형이 바쁘지 않게 잘 도와줬을 텐데.”

“으음.”

그랬겠냐. 물론 마음으로는 의지를 했겠지만 업무적으로는 크게 도와줄 일이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대강 끄덕이는 척만 했다.

표면적으로 ‘계상진’ 사원은 퇴사 처리 되었다. 애당초 이력서를 내고 들어온 인물도 아니었고, 그러니 근로자로 등록이 되었을 리도 만무했다. 월급을 받지 않는 직원이라니. 이 부분을 누군가가 파고 들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인사팀의 최 부장을 포함하여 몇몇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던 거다. 저 개진상은 애당초 나 때문에 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이제는 굳이 있을 이유가 사라졌기도 했다. 매일 집에서 얼굴을 보는 데다가 본인이 대표인 회사니까 이렇게 대표실에 와 있어도 되고.

……아니, 그런데 진짜 생각할수록 골 때리네.

“너는 대체…….”

“네?”

“무슨 생각으로 이 회사를 인수한 거야?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

“저번에도 말했지만요. 형이랑 꼭 붙어 있고 싶어서요.”

“굳이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 방법이 가장 빠를 것 같았어요.”

그건 그렇긴 하다.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말이다. 만약 그가 현우라는 걸 진작 알아챘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까. 이미 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요?”

잠시 넋을 놓은 틈에 그가 불쑥 다가왔다. 지척까지 붙어온 상진에게서 익숙한 향이 났다. 같이 살다 보니 같은 샴푸를 쓰게 되고 같은 워시를 쓰게 된 탓이다. 내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의 입매가 느릿이 올라갔다.

“야한 생각했죠, 형.”

“아니거든. 내가 너냐?”

“아니라고요?”

“응, 전혀 아니야. 잘못 짚었어.”

“이상하다. 그런 눈빛이었는데.”

시원하게 뻗은 그의 한쪽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러더니 소파에 앉은 태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가죽 소파의 팔걸이를 꾹 잡고 무게를 기대자, 태주는 영락없이 소파와 그의 몸 사이에 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야, 너, 이상한 짓, 앗!”

말릴 새도 없이 안겨 온 상진이 태주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가장 윗단추까지 꼭꼭 잠가 두었는데도 그 위로 살짝 드러난 살결을 혀로 핥아 대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살덩이가 목에 감긴다. 목선을 타고 흐르듯 올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을 핥아 올렸다. 부러 쪽쪽거리는 입소리까지 내어가며 귓가를 자극한다.

“읏, 으윽.”

소파의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넘어가면 안 되는데, 이렇게 넘어가면…… 머리로는 이성을 찾았으나 몸은 본능을 따랐다. 그의 욕정에 익숙해지기가 무섭게 발끝부터 젖어 들어가는 것이다. 집에서도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 난잡한 일상들을 떠올리자니 차츰 아래가 뻐근해지고 있었다. 안 된다, 안 돼. 이곳은 회사니까, 그런 감각 따위 애써 무시해야 했다.

“으읏, 그만, 해. 언제까지 물고 빨 건데.”

“그렇지만…… 형이 제 거라는 표시를 남기고 싶은걸요.”

상진이, 아니, 현우가 배시시 웃었다. 너무나 순수한 얼굴을 한 채로 얼굴 가득 미소를 담는다. 그의 길고 고운 손가락이 거미처럼 옷깃에 들러붙었다. 윗단까지 잠갔던 단추가 하나씩 톡, 토독, 풀어졌다.

“……충분하잖아, 이제.”

셔츠 사이가 벌어지고 옷깃이 느슨해졌다. 그 안으로 드러난 태주의 흰 살결에는 온통 벌건 자국뿐이었다. 목선과 이어지는 목덜미에 잇자국과 열꽃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더는 남길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 그러네. 이제 남길 곳이 없네요?”

그가 손가락으로 한곳을 꾸욱 눌렀다. 바로 오늘 새벽에 남겨두었던 흔적이다. 아직 아릿한 감각이 남아 있어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윽. 너 진짜 악취미야, 그거.”

“아팠어요, 형?”

“당연히 아프지. 그렇게 뭘 깨물고 싶으면 껌이라도 씹어.”

이 갈이 하는 똥강아지도 아니고 남의 몸을 씹어 대고 난리다. 매우 곤란했다. 평소에는 니트도 자주 입고 꼭 셔츠만 입지는 않는데 말이지. 자꾸 흔적을 남겨 대는 통에 갑갑한 셔츠만 주구장창 입어야 했다.

“형이라서 좋은 건데.”

“너무 과하니까 문제야.”

“그러는 형도 내심 좋아하잖아요, 아프게 하는 거.”

그의 손을 뿌리치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태주가 움찔거렸다.

“아니, 아니거든?!”

세상에 아픈 걸 좋아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냐는 거다. 뭐, 개개인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아프게 한다고 더 흥분된다거나, 어, 막 설렌다거나, 어? 몸이 달아오른다거나 그런 적은 저, 절대, 절대 없었……

“형, 당황하면 말 더듬는 거 알죠?”

“시끄러워!”

태주가 기어이 역정을 내자 상진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야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정중앙에 놓인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너 오늘 약속은 잊지 않았지?”

언제 흐트러졌냐는 듯 깔끔해진 차림으로 태주가 물었다.

“물론이죠. 그런데, 꼭 그래야겠어요?”

“뭐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형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어서요.”

“내 걱정하지 마. 난 오히려 네가 상처받을까 걱정했는데, 이해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형.”

이내 상진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상냥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가끔 콕콕 심장이 쑤시기도 하고 엄청 빨리 뛰기도 했다. 아무래도 부정맥인가 보다.

“그럼 볼 일은 끝난 거지? 나 간다.”

“아니,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에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정확히 똑똑, 똑똑, 일정한 간격으로 네 번의 노크가 이어지고 문이 찰칵 열렸다.

“대표님.”

표면상으로 ‘김현우 대표’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김 이사님이 들어섰다. 현재 맨파워맨의 직원들은 그를 김현우 대표로 알고 있었다. 예전 세미나실에서 직접 얼굴을 보이기도 했었고 당시에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상진이 지시한 일이라곤 하지만.

저 개진상이 웃기게도 치밀한 점은, 김 이사님의 본명 또한 ‘김현우’라는 점이다. 혹여 이사님을 아는 다른 지인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게끔 최소한의 신경을 쓴 듯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아, 성 팀장도 있었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김 이사가 웃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상진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가장 상석에, 그리고 태주와 김 이사는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결정하신 겁니까, 이사님?”

“네, 아무래도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네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으실 텐데.”

“미리 결정을 하는 편이 서로 좋겠지요. 물론 본인이 승낙을 해야겠지만.”

두 사람이 뜻 모를 소리를 주고받았다. 태주로서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적임자? 결정? 승낙? 대체 무슨 일인 걸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조금 불길했다. 혹시 이사님이 회사를 그만두시려는 건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상진의 인맥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그만둘 계획은 아니었겠지. 그렇게 된다면 회사로서는 매우 큰 손실이 될 것이다. 현재 회사의 운영은 실질적으로 김 이사가 온전히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가 이 회사에 가능한 오래 있길 원했다. 본인의 회사를 운영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기존의 본부장보다 인성이며 능력적인 부분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건 그가 회사를 운영하고 나서 직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점이다. 사내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기간은 어느 정도로 보시나요?”

“글쎄요. 너무 늦어지지 않게 조절은 할 생각입니다만,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단계적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빠르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요.”

“네, 그렇겠네요.”

잡스러운 생각은 떨쳐 버렸다. 미리 걱정하는 것도 결국 의미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냥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보다 싶었다. 자리를 피할까 했는데 나가라는 말은 없어서 소파에 앉아 그들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현우가 김 이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대표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게를 잡고 있었다.

우리 현우, 많이 컸네. 괜히 뿌듯해진다.

“무엇보다 성 팀장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그러던 중 갑작스레 태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놀라서 그만 멍청하게 되묻고야 말았다.

“네? 저요?”

“네, 성 팀장.”

아니, 이 타이밍에 내 이름이 왜 나오는 걸까. 너무 당황스러워 상진과 김 이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대표님. 아직 말씀 안 하셨습니까?”

“확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보다는 이사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맞을 것 같네요.”

“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두 분.”

태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어째 돌아가는 상황이 요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주가 당장 설명하라는 눈빛으로 상진을 노려보았는데 그는 오히려 큭큭 웃기만 했다.

저 인간, 분명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아오, 얄미워 죽겠네.

“성 팀장, 지금 본부장 자리가 공석인 건 알고 있죠?”

“네, 이사님.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전(前) 대표였던 본부장 역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본인 말로는 스스로 떠나는 것이라지만 모를 일이었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도 결국 잘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양쪽 날개는 물론이고 손과 발까지 다 잘린 마당에 버텨 봐야 아무 의미 없지 않냐며 말이다. 그래도 회사를 넘기며 받은 돈이 있을 테니 남는 장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상진에게 자세히 물어볼 수 있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잘 살겠지.

“김 대표님의 요청으로 이 회사를 맡고 있긴 하지만, 저도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네? 이사님, 그게 무슨…….

“노후에는 해외에서 느긋하게 생활하고 싶거든요.”

기품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부드럽게 짓는 미소가 어찌나 자상한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간 살아온 세월들이 고스란히 남은 낯에는 교양과 품위가 서려 있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이긴 하지요.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제가 자리를 떠나게 된다면 후임자가 필요할 테니까요.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지요.”

“이사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흘끔, 상진을 바라보았다. 명색이 대표인데 당연히 저 인간이 맡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그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제삼자처럼 시큰둥했다.

“순전히 제 판단이긴 합니다만, 성 팀장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누가 어디에 적합하다고 하시는 거지. 눈만 깜빡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랬더니 가운데에 앉아 있던 개진상이 부리나케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 드는 것이다. 놈의 핸드폰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불퉁하게 입술 내밀지 마라, 귀엽게.

“저요? 제가요? 저, 네?”

“네, 현재는 본부장 자리가 공석이니 우선 팀장으로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아니, 아뇨. 잠시만요. 이사님, 저는 절대 그런,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런 자리는 더더욱 부담스럽습니다.”

팀장 자리도 감지덕지다. 이제 겨우 적응하고 있는데 본부장? 후임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그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성 팀장.”

“네?”

김 이사가 태주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온화한 눈매가 둥글게 휜다.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성 팀장이 이 회사에 계속 남아 있겠다면 언젠가는 갈 오퍼였어요.”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이해가 되질 않았다. 회사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 중에는 태주보다 더 좋은 스펙과 경력과 업무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업무 능력과 이 회사에서의 경력만 따지면 결코 밀리진 않겠으나 스펙은……. 비빌 상대조차 되질 못한다. 태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혹시, 혹시나 현우가 지시한 일은 아닐까. 그에게 부탁해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 달라고. 그는 내게 한없이 다정하니까, 그런 사람이기에 정당하지 않은 방법일지라도……

“억울하니까 미리 말해 두자면요.”

상진이 입을 열었다. 이어서 그의 손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전 이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성 팀장님의 승진부터 이번 제안까지요. 아, 물론 거슬렸던 사람들을 잘라 낸 건 제 의견도 반영이 되었지만.”

현우가 ‘성 팀장’이라고 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늘졌던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는데.

“방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셨죠? 이럴 줄 알았어요.”

그가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가. 어떻게 알았지. 조금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썰렁해진 공기 속에서 눈치를 보며 두 사람에게 눈길을 던졌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울상을 짓고 있는 그를 김 이사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아, 아닙니다. 이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응? 아니, 네?”

왜 말을 하다 마냐. 고개를 쭉 빼고 그를 향해 물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성 팀장, 대표님의 말이 맞습니다.”

맞은편의 김 이사가 말을 마저 이었다. 그는 조곤조곤하게 상황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회사를 맡게 된 것도 전제조건이 있었어요. 너무 긴 시간 동안은 할 수 없다고요. 물론 이곳을 인수한 대표님이 직접 후임자가 되는 게 맞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가 잠시 입을 닫고 상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다.

“전혀 생각이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외부 인사를 영입할까도 고민했습니다만, 굴러온 돌이 또 다른 굴러온 돌을 부른다는 건 위험요소가 상당히 많죠.”

상진에게로 보냈던 시선을 거두고는 내게로 눈길을 주었다. 김 이사는 마치 신입생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교수님처럼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내부 인사를 단계별로 올리면 반발심도 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기 좋은 예시가 되죠. 이 회사에서의 성실함과 노력이 대우받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아무나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딱 네 가지를 중시한다고 했다. 성실함, 직원들과의 소통, 업무 능력, 그리고 인성. 보통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물은 잘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

“성 팀장은 빠지는 부분이 없죠.”

온화한 그의 미소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막 칭찬을 들어도 되는 걸까. 그간 못 들었던 인정과 칭찬을 단번에 쏟아서 받는 기분이었다. 좋으면서도 민망하고, 또 쑥스럽고, 거짓말인 것 같고. 그런 거.

옆에서 내내 진지한 얼굴을 하던 상진이 움찔움찔거렸다. 아마 한마디 거들고 싶어서 저러겠지. 또 괜한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라, 부탁이다.

“물론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잘 해낼 거라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고려해 보세요. 당장 내일부터 모든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닙니다. 내 노후가 다가오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그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더니 작게 웃었다.

“이 자리를 염두에 두고 그에 맞게 차근차근 배워 나가면 됩니다. 당연히 내가 도울 거고요. 하나씩, 아주 천천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미소만 지었다. 째깍째깍, 벽에 걸린 시계가 단조로운 음을 울린다. 잠시 찾아온 정적 아래로 들리는 그 초침 소리 때문일까. 일순, 사람마다 시간이 달리 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는 저렇게 고저 없이 단조롭게 흘러가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명확한 고저로 요동치기도 한다고. 그중 후자가 나였다.

내 시간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바닥으로 치우쳤던 시간이 갑작스레 몸을 붕 띄우는 듯했다. 그러다 소파에 기댄 채, 나를 느긋이 응시하고 있던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 * *

“진짜 네가 꾸민 일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요.”

상진이 불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왜 그렇게 자기를 못 믿냐며, 이번에는 정말 아니라고 몇 번이나 덧붙였다.

“이상한데.”

“형, 의심하지 말아요. 형이 잘나서 그런 제안을 받는 거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매우매우 있거든요.”

신호에 걸려 정차한 틈을 타, 그가 태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은 좀 더 많이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그런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상진, 그러니까 현우가 곁에 있고나서부터는 자책하는 일도 없었고 내 능력에 대해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팀장으로 올라간 것도 그럴 만했기에 그랬던 거라고도 생각할 정도였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나아진 거다.

“너 하려던 말은 뭐였어?”

“뭐가요?”

“김 이사님과 같이 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이라고 했었잖아.”

“아, 그거요.”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고 그가 한쪽 손을 핸들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앞을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이 회사를 그만뒀으면 좋겠다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어찌됐든 본인이 대표이니 오래 다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대표실만 올라가도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으니까. 대부분 바빠서 그럴 수 없긴 했다만. 설마 이 인간, 벌써 마음이 식은 걸까. 자주 보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회사를 그만두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가? 왜?”

“그거야―”

그가 횡단보도 앞에서 깜빡이를 켜고 정차했다. 그리고 목이 바싹 타 들어가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회사 같은 건 그만두고 나랑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뭐, 뭐라고?”

“굳이 회사 안 다녀도 되잖아요. 이제 내가 있는데. 솔직히 근무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거 너무 괴롭거든요. 형이 회사를 그만두면 집에서 같이 놀고 뽀뽀하고 껴안고 있을 텐데.”

마음이 확 놓였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에 쏘아붙일 기력도 없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솔직히 안심도 되었다.

“그래서 이사님이 내게 먼저 말했을 때, 난 반대했어요.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면 지금보다도 더 바빠질 거 아니냐고요. 완전 싫어요.”

“뭐야, 그게.”

웃음까지 나왔다. 귀엽다. 왜 저렇게 귀엽지, 쟤는.

“예전처럼 형이 쫓기면서 돈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그만두는 것도 한번 고려해 보세요. 이건 저 김현우 대표의 부탁입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개인기냐.”

현우가 김 이사의 말투와 표정까지 따라하며 말했다. 자꾸 웃음이 샌다. 은근히 웃긴 구석이 있었다, 저 인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웬일인지 현우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 그도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뒤로 넘어가고 점점 익숙한 거리가 눈에 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다. 이제 쫓기면서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는데 신세를 지고 말았다. 현우는 내 아버지가 그의 형에게 진 빚을 갚아 주었다. 그와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그가 내건 조건이다.

어차피 파출소에서 큰아버지를 만났던 그 이후로, 차츰 연락을 끊으려던 참이었지만. 그래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랬기에 몇날 며칠 동안이나 고민을 거듭했었다. 빚이 적은 액수도 아니었던 데다가 그에게 미안한 건 당연했다. 그랬는데,

‘왜 미안해요?’

라며 현우가 되묻고는 도리어 서운한 얼굴을 했었다. 언제까지 내외할 거냐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다정함에 눈물을 쏟을 뻔 했었지. 겨우 참았지만.

그리고 적금을 포함해서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계좌를 확인했는데, 잊고 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갚아야 할 부채가 하나가 더 있었다. 그래서 이틀 밤을 더 고민하고 나서야 현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주에게는 그것 말고도 반드시 돌려줘야 할 돈이 있었으니까.

이제 그 빚을 갚으러 가는 길이다.

* * *

여전히 그 저택의 대문은 거대했다. 그 크기와 기세가 주는 위압감 역시 상당했다. 근처에 주차하고 상진과 함께 그 문 앞에 섰다. 무척이나 떨렸다. 그리고 아마 불안한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상진은 여기까지 와서도 태주를 만류했다.

“형, 정말 괜찮겠어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요.”

“현우야, 무서워?”

“네, 형이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요.”

“난 내가 혹시나 네 상처를 헤집을까 봐 무서워.”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이기적인 고집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를 당당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종종 죄책감이 뼛속에 스미고 마음에 그림자가 지곤 했다.

상진, 아니 현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바닷가의 그 방에서 자신이 울며 털어놓았던 일들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사실들도 모두 말이다. 흐느끼는 자신에게 그는 그저 다 사고였다고 했었다. 아버지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태주는 제 아버지를 원망했다. 받으면 안 될 것을 받고 말없이 스러져간 그가 원망스러웠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의 미소가 나를 다독였다.

“현우야, 나 솔직히 무서워.”

두툼한 흰 봉투를 양손에 쥐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큰아버지가 건네받았던, 그러니까 그녀에게 아버지가 받았던 그 액수만큼의, 딱 그만큼의 돈이었다. 지금까지 모았던 모든 돈을 탈탈 털어 마련한 것이다. 이걸 내어주면 태주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무서운 건, 제일 두려운 건, 그들이 자신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했던 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는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수중에 남는 돈이 한 푼 없게 되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단지 하나, 이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서. 그게 가장 두려웠다.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미안해, 현우야.”

“왜 미안해요?”

그 아이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서늘한 눈빛과는 달리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저씨는 나를 그곳에 보낼 생각이 없었어요. 넘길 생각이었다면 신고도 하지 않았겠죠.”

“그래도.”

“말했잖아요. 난 아저씨도 형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사고였으니까. 다만,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내게 미안해해야죠.”

입을 꾹 닫고는 이내 나를 보며 살갑게 웃어 보인다. 반짝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햇살을 맞은 바다와도 같았다.

“태주 형.”

벨을 누르려던 찰나, 그가 태주를 불렀다. 태주는 다가가던 손가락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아이가 태주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태주도 그를 향해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았다. 둘은 한쪽 손을 꼭 붙잡았다. 맞붙은 손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따스하다. 그 무엇보다 말이다.

이윽고 벨이 울렸다. 그리고 철옹성처럼 굳게 닫혔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녹슨 철문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태주를 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쿵쿵 부딪히는 심장이 요란했다. 그래도 괜찮다. 이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너와 함께라면 분명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주와 그는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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