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3)
에필로그
외전1. 일상
외전2. 김현우, 꿈
외전3. 커도 너무 커
외전4. 그림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3)
장례식장은 두 번째였다.
기억도 나기 전, 나는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아주 많이 울었다고 했다. 아빠는 딱 한 번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서 다시는 엄마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엄마는 많이 아팠고 그래서 일찍 가 버렸다고.
팔뚝에 하얀 띠를 두른 큰아빠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현이와 아빠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사진조차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갈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까. 나는 장례식장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찢어진 손등과 무릎에는 큰 거즈를 대었고 부딪친 머리통에도 붕대를 둘둘 감아 두었다. 장례식장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오는 사람마다 나를 걱정했다.
다친 곳은 괜찮니, 많이 아프지는 않니, 저 딱한 것을 어쩌나, 고아원에 가는 건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누가 저 아이를 데리고 가겠어. 작게 수군거리는 말들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서 괴로웠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되었구나. 아빠도, 현이도, 너무나 멀리 가 버렸다.
큰아빠가 틀어 둔 라디오에서는 앵커가 추워지는 날씨를 걱정했다. 수도관이 동파되지 않도록 대비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현이도, 아빠도 추울 텐데. 땅 속은 더 춥지 않을까. 나는 현이와 아빠의 사진을 보며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라디오에서는 이제 날씨가 아닌 다른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최근 해외 불법 입양을 알선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불법 입양 브로커 장 모 씨 일당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습니다. 한 익명의 제보로 수사는 시작되었으나 불법 입양에 대해 이를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 경찰 측의…….]
어른들은 텅 빈 테이블 구석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식은 편육을 새우젓에 찍어 먹으며 저들끼리의 고단함을 전시하고 한탄했다.
“그런데 그 회장님은 안 오셨나 보네.”
“오실 리가 있겠어? 그 집 아들이 지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데.”
“그래도 사고였잖아. 성 실장도 가고 딸도 이렇게 됐는데, 탓을 하면 안 되지.”
그들의 대화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누군가 들을까 염려하는 듯했으나 결코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성 실장이 회장댁 아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던 건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그래? 회장님이나 사모님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는 소리야?’
‘그렇다던데. 성 실장이 요즘 빚 때문에 힘들어 했으니까.’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 치가 그럴 사람인가. 협박이라니.’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 작은 마음 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그날 숨바꼭질을 하던 내가 들었던 대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였을까. 왜 아빠와 사모님이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그날 아빠는 우리를 차에 태우고 어디로 가던 중이었을까. 큰아빠 댁에 간다고 했었는데, 그랬는데.
눈에서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는 발갛게 부은 눈가가 짓물러 아팠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잘 멈추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소매로 다시 눈을 비벼 닦고 있을 때, 장례식장의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사모님,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아빠와 숙모가 허리를 반쯤 접으며 꾸벅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곳에는 새까만 정장 윗옷과 긴 치마를 입은 사모님이 서 있었다. 그녀의 파리한 얼굴에는 참담함과 비통함이 짙게 묻어났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어서 돌아온,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었다.
사모님은 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함에 넣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하게 내게로 다가왔다.
“태주야.”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곳은 병원이었다.
그곳에서 회장님과 사모님은 내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더랬다. 방금 온 가족을 잃은 아이였지만 그들에게는 아들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현우를 중환자실에 두고 내게는 손찌검을 했었다.
“태주야.”
그녀가 두 번 정도 더 입을 열었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사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고 가만가만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장례식장에 있던 어른들은 차마 근처에 오지도 못한 채 수군거렸다. 누구는 그녀가 안 되었다며 눈물을 훔쳤고, 또 다른 누구는 소름이 끼친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아까보다도 더 작은,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휴. 안 됐어, 정말.’
‘악어의 눈물이지. 어차피 현우가 제 친자식도 아니면서.’
‘차라리 잘된 일이죠. 현우가 깨어나지 못하면 이복형제들에게 재산이 더 갈 테니.’
‘눈엣가시였을 텐데. 회장님이 현우를 가장 아꼈잖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제 배 아파 낳지 않았더라도 호적상 아들인데.’
점점 커져 가는 대화들을 아마 그녀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품에 안긴 나는 정작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어찌할 도리 없이 무릎 위에 올려 두었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내 등을 토닥이는 걸 느끼며,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태주야, 이제 현우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비통함에 얼룩진 얼굴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그녀가 내 귓가에,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아마 평생 눈을 뜨는 일은 없겠지. 담당의사도 가망이 없다고 하더구나. 몇 년이 지나면 생명 유지 장치를 떼야 할 거야.”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애써 참는 울음 때문에 치아가 타닥탁 마주 닿았다.
‘그쪽에 얌전히 넘겼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삽시간에 싸늘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나를 보았다. 그다음 순간, 그녀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을 때 나는 흠칫 놀라 굳었다. 그녀가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현이에게 미안하구나, 그리고 네게도. 안쓰러운 우리 태주. 그런데 어떻게 ‘너만’ 살아남았을까.”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작게 속삭이는 이야기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현우가, 현우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다 제 탓이라고만 생각이 되었다. 현우에게 자리를 양보해줬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현우는 살았을 텐데. 온가족이 죽은 나보다 차라리 그 아이가 사는 것이 나았을 텐데.
“네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면 좋았겠지.”
아래로 내리깐 눈꺼풀 위로 그녀의 그림자가 졌다. 어둑해진 시야 밑으로 꽉 쥐고 있는 작은 주먹과 거즈를 댄 무릎이 보인다. 아팠다, 정말 많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현우도 깨어나지 못하고 너도 가족을 잃었지 않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거렸다. 등을 토닥거리던 손이 떨어지고 그녀가 눈물을 훔쳤다. 이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처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그렇지만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태주야.”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애통함이 가득 담긴 흐느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안에서 오로지 나만 울지를 못했다.
벌겋게 부어 따끔따끔한 눈동자가 그녀를 좇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손가락을 겨우겨우 쥐었을 때,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감정조차 남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 * *
그래, 저런 눈이었다. 애정도, 미움도, 분노도, 실망도. 그 어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눈동자였다. 건조하고 메마른 동공이 새까맣게 가라앉는다. 그 안에 어른거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게만 보였다.
“형.”
태주는 눈물을 후두둑 떨구었다. 동그란 눈동자 안에 가득 고인 눈물이 자리를 찾지 못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어린 날로부터 내내 참아 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는 것처럼 말이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입술이 볼썽사나울까 손으로나마 입을 가려 보았다.
“형.”
멀어져 있던 그의 손이 태주의 손바닥을 가렸다. 입술을 막은 손등 위로 상진이 손을 겹치며 말했다. 차갑게 식은 손 너머로 다시금 그의 체온이 전해지고 있었다.
“형, 왜 울어요.”
태주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던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따뜻함과 다정함에 길이 들어 버린 동물은 쉬이 살아남지를 못한다. 이전에 차가운 길바닥을 전전하였더라도 그것이 익숙할지라도,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함을 알아 버렸다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에. 태주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네가, 간, 다고.”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 덕분에 말이 툭툭 끊겼다. 한 음절을 겨우 내뱉고 나면 히끅거리며 떨리는 어깨가 이어질 목소리를 막아 버렸다.
“형이 가라고 했잖아요. 아니에요?”
여전히 서늘한 투로 그가 말했다. 그는 태주의 손을 잡았지만, 이전처럼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이리도 쉽게 돌아설 거였다면 왜 다정하게 대해 준 걸까. 태주는 그가 자신을 안아 주기를 바랐다. 품에 껴안고 장난이었다고, 울지 말라고 다독여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흐윽, 아니, 아니야, 그런, 윽.”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친구도 사귀라면서요. 그리고 내가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랐잖아요, 형은.”
“아니, 흑, 그게, 아니, 하윽.”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그저 가만히 두고 볼 뿐이었다. 손을 쥐었던 온기도 어느새 떨어진 채였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태주의 어깨를, 그는 더 이상 안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나 서러운지. 뺏길까 두려워 양손에 꼭 쥐고 있던 사탕을 기어이 빼앗기고 만 아이처럼 울음이 터졌다. 내 거라고, 딱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내 것이라고, 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저 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태주는 더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엉엉 울어 버렸다. 입을 가렸던 손도 떨어트린 채로 고개를 들고 바보처럼 울고야 말았다. 그에게 가라고 한 것도, 다른 사람을 사귀어 보라고 한 것도, 너무 붙어 있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짐짓 어린 동생에게 조언을 하는 어른처럼, 그렇게 몇 번이고 말했었다.
“형. 왜 울어요? 내가 가는 게 싫어요?”
상진이 물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과 긴장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태주는 볼 수가 없었다. 계속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번지게 했다. 잔뜩 고인 눈물은 이내 후두둑 떨어졌으나 금세 다시 눈앞이 흐려져만 간다. 소매로 닦아도 또 닦아 내어도 끝을 몰랐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소맷자락을 소파에 내려놓자 상진이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응? 말해 봐요. 내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래요?”
싫었다, 너무나. 그가 건네는 애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지만, 귀찮은 척했지만. 언제라도 그의 곁을 떠날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말이다. 시나브로 젖어드는 빗방울을 피할 수 없듯 결국엔 흠뻑 젖고야 말았다.
“나는 착한 ‘동생’이니까, 형이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착한 동생처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가 울기만 하는 태주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디든 가려고요. 그래도 되죠?”
태주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살랑거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내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꽉 다문 입꼬리로 흘러내린 눈물이 고였다가 흩어진다. 막무가내로 흔들리는 얼굴을, 상진이 멈추게 했다.
“형.”
“흐어앙, 안 돼, 안 돼.”
“안 돼요?”
“응, 흑, 안 돼.”
마침내 쏟아진 진심이 단단히 쌓았던 둑을 허물며 터져 나왔다. 태주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냥 다 거짓말이었다. 그에게 좋은 형인 척, 당장 그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흉내를 내었다. 감춰 둔 진심 위로 차곡차곡 올린 거짓의 방패가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되었다.
“저, 가지 마요? 아무도 만나지 말까요?”
“흐윽, 응, 가지 마. 흐흑, 아무도 만나지 마.”
“그럼 형하고만 있어요?”
상진은 파르르 떨리는 태주의 눈꺼풀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오싹한 감정이 깊은 곳으로부터 피어오른다. 발끝이 욱신거릴 만큼의 만족감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손을 붙잡은 태주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가지 말라며 애원하는 그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 눕히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못 이기는 척 벌리는 그의 입술 새에 혀를 밀어 넣고 안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 제 것으로 채우고 싶었다.
“응, 흐으윽, 나하고만 있어. 나만.”
태주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몸을 껴안고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따뜻한 체온이 겹치면서 다시 몸이 달구어진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도 그랬다. 바닥에서 나뒹구는 맥주 캔들을 곁눈으로 보았다가 팔에 힘을 주었다. 멀어진 줄만 알았던 그와 다시 마주 닿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울음으로 흔들리던 어깨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왜요?”
“어?”
그가 태주를 밀어내었다. 단단히 감긴 팔이 너무나 쉽게 풀어지면서 상체가 뒤로 물러졌다. 양팔을 그에게 속박당한 채 뒤로 밀린 태주가 황망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평소처럼 입꼬리가 올라간 상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형, 지금 취했잖아요.”
“아, 아니.”
“술 깨면 또 기억 못 할 거면서. 싫어요.”
“아니야, 아니……. 그런 게 아닌데.”
“나만 기억하는 거 싫거든요.”
그가 토라진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태주는 그것이 너무나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그에게 매달리듯 달려들어 양손으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자신을 보도록 말이다.
“기억, 할 거야.”
“정말요?”
“응, 정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물기가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그 안에 담긴 상진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코앞까지 맞붙은 그의 숨결이 살갗에 닿는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의 입술과 태주의 것이 살포시 비비어졌다. 말캉거리는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그곳에서부터 피어나는 열감이 몸을 움찔 떨게 만들었다. 그가 혀를 내어 태주의 입술을 핥았다. 짭짜름한 눈물 자국을 그가 천천히 핥고 있었다.
“……으음.”
부드러운 입술부터 말려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볼이며 귀에 이르기까지. 태주의 턱을 손으로 쥔 채 말랑한 혀가 이곳저곳을 훑으며 지나갔다.
“너도, 날 두고 갈 거야?”
태주가 물었다.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가 겨우 꺼낸 목소리였다. 진정되었던 눈물이 다시금 눈가에 맺히는 것을 태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묻고 싶었지만, 그만큼 묻는 것이 두려웠다.
“아빠처럼, 현이처럼, 현우처럼. 날 두고 떠날 거지?”
가슴 속으로 사무친 그 말을 심장 구석에서 꺼내야 했다. 피로 얼룩져 끈끈해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서자, 몸이 싸늘하게 굳는 것만 같다. 가시가 박혀있던 상처에서 그것을 빼내면 구멍이 뻥 뚫리게 되는 것처럼. 징그럽게 벌어진 상흔으로 바람이 밀려 들어오는 듯했다.
태주가 답을 기다리는 동안, 상진이 그의 입술을 재차 머금었다. 보들보들한 입술을 몇 번이고 핥다가 떨어지며 답했다.
“아뇨, 저는 떠나지 않아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차갑던 태도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고 다시 예전의 그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언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태주의 편에 서 주었던 그 계상진처럼.
“상진아.”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마를 즈음 그가 태주를 끌어안았다. 너른 품 안에 태주를 담고 숨이 막힐 정도로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형, 저는 형밖에 없어요.”
순간 목소리가 떨린 듯도 했다. 그에게 삼켜지듯 안긴 태주가 양팔로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겹친 몸 아래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태주도 그랬다.
“형도 나밖에 없는 거죠?”
귓가에 울리는 그의 말이 달콤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는 따끔거리는 가시가 들은 것만 같았다. 달지만 아픈, 그런 말이었다. 태주는 눈을 감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들을, 그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모두 묻어 버렸다. 그를 곁에 두고 싶었다.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결코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으며 답을 했다.
“응, 너뿐이야.”
고민하지 않았다. 실상 태주에게 남은 것은, 그뿐이었으니까. 아주 짧게 답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붉어진 눈가가 따끔거려서 눈을 크게 감았다가 떴는데 상진이 이미 웃고 있었다. 태주의 답에 그는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실실 웃더니 장난스레 말을 걸어왔다.
“붕어 같아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제가 형을 울렸다는 소리예요?”
“응.”
이제 숨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태주는 더 이상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이제 감출 수가 없었다. 밑바닥까지 탄로 난 감정은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를 붙잡으려 했던, 꼴사납게 울었던 자신이 떠오른다. 그건 분명 ‘욕심’이겠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것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최악이다. 내가 형을 울리다니.”
상진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차갑게 밀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조금 심술이 났다.
“응, 너 쓰레기네.”
그의 가슴에 고개를 비비며 눈물 자국을 다 닦아 냈다. 하는 김에 옷 아래의 살가죽을 이로 꽉 깨물려고 했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죄다 단단한 근육 덩어리인가 보다. 에이, 재수 없어.
“맞아요, 난 쓰레기예요. 형, 잘못했어요.”
비비적거리던 태주의 볼을 그가 양손으로 감쌌다. 꽉 안았던 팔을 풀고 조금 거리를 둔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할 수 있도록.
“잘못했어?”
“네, 형. 잘못했어요. 다시는 눈물 나게 하지 않을게요.”
“정말로?”
“네, 절대로요. 죽어도 형한테서 안 떨어질게요.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갈래요.”
“그건 내가 싫은데.”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볼 게 있고 안 볼 게 있지 않냐. 조금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반성하고 있는 거지?”
“네, 그럼요.”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양처럼 그가 답했다. 얼굴 가득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감정이 메말랐던 눈동자와는 너무나 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감정의 파편들이 어느새 그 안에서 넘치고 있었다. 태주는, 그 조각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것도 욕심일까, 욕심이겠지.
“당분간 키스 금지.”
“네?”
“못 들었어? 당분간 키스 금지라고.”
“네????????”
숨 쉬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걸까. 차라리 그냥 숨을 쉬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다, 아니야. 역시 그건 너무했지. 이 생각은 안 한 걸로.
“아, 제발요. 형, 잘못했어요.”
“우는 소리 하지 마. 날 울린 건 너잖아.”
“형…… 제가 쓰레기예요, 잘못했어요…….”
성진이 울상을 지으며 태주에게 매달렸다. 흥, 됐거든. 물론 말을 꺼낸 건 태주 본인이지만, 진짜로 간다고 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그것도 막 그렇게 차갑게 보면서 말이다. 가라고 했어도 저 인간은 가면 안 된다. 방금 그렇게 정했다, 땅땅.
“아아, 형. 키스만 금지인 거예요? 그럼 다른 곳은 막 빨아도 돼요?”
“이 미친놈이. 절대 안 돼.”
“아, 왜요. 키스랑 빠는 건 다른데.”
“안 돼. 키스도 빠는 것도 뽀뽀도 핥는 것도 다 안 돼.”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죽는 것도 절대 안 돼. 죽기만 해 봐, 아주 죽여 버릴 거야.”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그 큰 몸을 태주에게 기대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덩달아 눕게 된 태주의 허리로 그의 팔이 감겼다. 능구렁이 같은 놈이다.
“형, 그럼 언제까지요? 당분간이라는 게 언제까지인데요. 저 오래는 못 참아요.”
“얼마나 참을 수 있는데?”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잠시 고민을 했다.
“10분?”
“장난해? 정신 못 차렸네, 정신 못 차렸어. 반성이 하나도 안 되지?”
그에게 말을 툭 내뱉다가, 이어 나오려던 말은 안으로 삼켰다. 하마터면 또 짐을 싸겠다고 할 뻔했다. 입버릇처럼 습관이 되었나 보다. ……이제 그 말은 하지 않을 거니까.
“그럼 얼마나요? 네? 형, 제발요.”
슬금슬금 그의 팔이 올라왔다. 뽀뽀는 안 된다고 했더니 이제는 몸을 더듬고 난리였다. 허리에서 머무르던 손이 등으로 쑥 들어왔다. 소파와 태주의 몸 사이에서 등골을 타고 기어 올라온다. 간지러워서 그만 움찔거리고 말았다.
“너 반성하고 있는 거 맞아?”
“네, 엄청 반성하고 있어요. 차라리 때려 주면 안 돼요?”
“싫어. 내 손만 아프잖아.”
어디를 때려도 손만 아프다. 자신이 저 인간을 때리는 게 아니라, 저 인간의 몸이 자신을 때리는 느낌일 거다.
“정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아, 그만 징징거려. 뽀뽀 못 하는 게 뭐 어떻다고 난리야.”
“모닝 키스도 못 하잖아요.”
“모닝 키스를 했었어? 우리가? 아니, 너? 나한테?”
“아.”
들켰다는 표정 짓지 마라. 이 자식이 남이 잘 때 또 이상한 짓거리를. 가만히 보면 정말 변태가 따로 없다.
“혀어엉.”
그가 애교를 부리며 안겨왔다. 어느새 태주의 몸 위로 그가 길게 누운 채였다. 무거웠다.
“야, 무거워.”
“으으응, 혀어엉.”
“은근슬쩍 목에 입술 비비지 마라.”
“혀어엉.”
“귀에도 비비지 마라.”
몇 번을 더 지적했다. 그게 영 마음이 상했는지 이제는 툴툴거리며 삐진 티를 잔뜩 내었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보고 붕어래. 그가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보니까 쟤도 붕어 같다.
“현우한테도 이랬어요? 막 하지 말라 그러고.”
갑자기 그 아이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걸까. 눈썹을 까딱거리며 그의 뒤통수를 탁탁 쳤다. 그랬더니 아야, 저 인간이 목덜미를 깨물었다. 자기가 개인 줄 아나.
“현우는 왜 꺼내.”
“현우가 좋아요, 상진이가 좋아요?”
“무슨 이상한 소리야.”
비교가 되질 않았다. 현우는, 지금 없으니까. 그리고 쟤는 여기에 있고. 그렇다고 현우가 덜 좋다는 건 아니다. 그 아이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모님에게 받은 그 선금으로 빚의 일부를 갚았을 것이다. 그건 그 아이의 목숨값이었는데.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내려가.”
“왜 대답은 안 해 줘요? 역시 현우가 더 좋은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거.”
“현우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형은 현우한테 가 버릴 거죠?”
상진의 몸이 더욱 바짝 붙어왔다. 천장을 보며 누운 태주의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가 맞추어졌다. 소파의 등받이와 시트에 손을 대고 그가 태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또 저런다. 또 저렇게 외롭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안 가.”
“정말요? 안 가요? 현우가 살아 있어도, 나랑 있을 거예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겠지. 그 아이를 볼 낯이 태주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도 아마, 자신이 미울 것이다. 분명히.
“응, 너랑 있을 거야.”
“그럼 현우가 슬퍼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없어.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방으로 갈래.”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급히 몸으로 막으며 입술에 뽀뽀를 퍼붓는다. 아, 하지 말라니까. 이 자식 역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알았어요, 이제 마지막. 약속해요.”
“뭔데.”
“만약 현우가 나라면 어떨 것 같아요?”
“뭐?”
이게 무슨 헛소리일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들어서 휘이 저었다. 몇 개인지 구분은 하려나.
“진심이야?”
“그냥 궁금해서요.”
태주가 그를 빤히 보았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바보 같지 않은가.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설마 저 인간, 현우에게 질투라도 하는 걸까. 이미 유명을 달리한 그 아이에게 질투를 해서 뭐 하려고. 그리고 왜 하필 그 아이를 걸고넘어지는 거지.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럼, 너한테 이런 짓 못 하겠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당겨 내렸다. 그러자 그도 순순히 태주에게 몸을 기대어 왔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벌어진 그의 입술 새로 혀를 섞었다. 따뜻한 그의 안을 부드럽게 핥으며 따뜻한 살덩이를 얽어 작게 소리를 내었다. 쪽, 쪽, 부끄러운 마찰음이 조용한 공간에 울린다. 그의 뒷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겨 더욱 깊게 밀어 넣었다. 뜨거운 호흡이 입술 사이로 흩어진다.
“하아, 하, 형.”
잔뜩 흥분한 그가 태주의 상의를 벗기려 했다. 다리 사이에 두었던 그의 허벅지 부근이 슬슬 중심을 문질러 온다. 상진의 바지 안쪽이 더욱 빳빳해지더니 오른쪽으로 누인 그것이 형태를 잡아 갔다.
“이런 짓 못 한다고.”
재차 입술을 맞추려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분명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듯, 그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만약 네가 현우라면, 이런 짓 못 한다고.”
“네에?”
상진이 퍽 놀란 얼굴로 몇 번이고 ‘네?’ 소리만 반복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말이다. 태주는 그것이 무척 의아했지만 저 인간이 이상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니까 그러려니 싶었다.
“왜, 왜요? 왜 못해요?”
“왜냐니.”
너무나 당연한데. 어릴 때부터 봤던 동생이었다. 현이와 마찬가지로 태주에게는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그때보다도 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복형제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현우를 보살핀 건 태주였다. 밥을 먹여 주고 놀아 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씻겨 주기도 했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낮잠을 재워 주기도 했었다.
“동생이니까. 현우는 거의 내가 키웠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하겠냐. 내가 양심도 없는 쓰레기도 아니고.”
“저도 동생이잖아요.”
“너랑은 다르지. 현우는 완전 아기로 보이거든, 나한테는.”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태주와 태주의 아버지를 용서했다면. 예전처럼 형과 동생으로 지낼 수 있었을까. 현우는 분명 잘 컸을 것이다. 예의바르고 올곧게 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개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럼 태주는 그 아이의 결혼식에서 아마 펑펑 울었을 것이다. 현우가 잘 커 준 것이 대견하고 행복해서.
그러나 상상 속의 일일 뿐이다. 자신과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용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회장님이 그랬듯 현우가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 저주를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짐은 자신이 죽더라도 덜지 못할 거라고, 태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현우는 형하고 이런 짓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잖아요.”
“뭐? 야,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소름 돋는다.”
“아니, 뭘 또 소름까지 돋아요. 뽀뽀나 키스 정도는 괜찮…….”
으, 저 인간이 대체 왜 저래. 동생이랑, 그것도 친동생이라고 여기는 아이랑 키스라니. 누구를 파렴치한 변태로 만들려고 하는지. 순간 발끝에서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어 버렸다.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하하하, 완전 죽고 싶어질걸.”
현우를 상대로 이런 생각이라니, 차라리 지금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질겁했는데 상진은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했다. 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며 한참을 눈동자만 굴려 대었다. 상당히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주인 몰래 사고를 쳐 놓고 눈치 보는 멍멍이처럼.
“그런데 이런 건 대체 왜 궁금해?”
너무 뜬금없는 개소리였다. 왜인지 모르게 굳어 버린 상진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답을 하질 못했다. 그냥 입술만 우물거리면서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지. 아마도 괜히 현우 이야기를 꺼낸 것을 미안해하는 듯했다. 상처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눈치 볼 일은 아니었는데.
“그럼, 나랑은요?”
“응?”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나랑은 이런 짓 할 수 있어요?”
“응, 너랑은 하잖아.”
이런 짓뿐인가. 이런 짓에 저런 짓에 그런 짓까지 다 하지 않았던가. 먼저 부추겨서 쪽쪽거리던 게 누구였더라.
“저도 동생이잖아요. 그런데 왜 나랑은 해요?”
“어? 아니, 그거야……. 그건…….”
훅 들어온 질문이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태주에게 동생이었다. 제멋대로지만 다정하고 돈도 많고 잘난 동생. 무작정 편을 들어주는 좋은 동생 말이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동생과의 스킨십에 거부감이 사라졌다.
그가 입을 맞춰 오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가끔은 태주 스스로 먼저 매달리기도 했다. 그 이상의 것을 할 때도 시작은 그가 하더라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행위가 싫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럼 동생이 아닌 거예요?”
“음, 어? 아니…….”
“형.”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상진의 시선이 오로지 태주에게로 향한다. 지그시 내리깐 목소리가 태주의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듯했다. 이미 그의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를 챘으면서. 그 알고 있는 것을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것이냐며 추궁하는 것만 같다. 그의 아래에 누워 있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올곧은 눈동자였다.
“그게, 음, 너는…….”
“저는요?”
“너하고는, 그러니까…….”
“태주 형.”
상진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의 눈과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붙는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태주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랑해요.”
이번에는 그가 아닌, 태주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리는 듯했다. 뭐라고, 지금 쟤가 뭐라고 한 거지. 몇 번을 곱씹어도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나 단출하고 간소하지만 농익은 그 말이 심장을 퍽 치고 지나갔다.
“제게는 형밖에 없어요. 형은요?”
“……어? 아, 나, 나도, 너밖에…….”
기름칠을 제때 하지 못해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답했다. 완전 볼품없어 보였을 것이다. 저 인간은 이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왜 저런 눈으로 하는 거냐고. 대체 누구를 꼬시려고! 그런 시커먼 속셈에 호락호락, 어? 세상이 그렇게 쉽게, 아니, 그러니까.
“형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고 있었어요.”
대가 없는 애정이란 없듯이 그가 퍼붓는 다정함이 결국 이렇게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생각’이었을 뿐이다. 저렇게 가질 거 다 가진 인간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겠는가. 곁에 있던 이들을 한순간에 잃었던 태주는 그런 생각들을 ‘주제에 넘치고 허황된’ 일이라고 여겨 왔다.
“사랑해요, 정말로.”
상진이 태주에게 안겼다. 그가 태주의 목선에 입술을 맞추며 비비적거렸다. 답이 없는 태주를 향해 계속 사랑한다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애정을 구걸하는 아이처럼, 그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태주 형.”
대체 왜일까. 자신이 뭐라고, 이런 절절한 고백을 들을 자격이나 있을까. 그가 내뱉었던 말이 태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꼭 다른 세계의 말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렇지만,
“계상진.”
생각을 놓기로 했다. 이해와 논리로 따질 수 있는 선은 이미 예전에 넘었던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주가 상진의 뒷목을 상냥히 어루만졌다. 울퉁불퉁하게 돋은 상처들이 손끝에 만져진다. 그래, 어쩌면 그날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쓸쓸해 보였던, 마음에 쓰였던 그날로부터.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빠른 법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양팔을 그에게 두르고 몸을 바짝 붙여 갔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상진의 입술을 한껏 머금고 핥았다.
지금 귓가에 들리는 이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타액을 섞고 몸을 섞었다. 허벅지로 뻗은 그의 중심에 대고 다리를 꾸욱 눌렀다. 이미 단단해져 있던 것이 더욱 부피를 넓혀 갔다.
“흐읍, 음…….”
소파가 덜컹거렸다. 태주가 몸을 옆으로 틀어 제게 매달려오는 그를 소파에 눕혔다. 끊임없이 얽혀 오는 살덩이를 깊게 받아들이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달았다. 맞붙은 몸 사이사이가 열감으로 적셔졌다. 숨길 수 없을 만큼 삽시간에 퍼지는 감정이 그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상진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꼬리에서 질질 흘렀다.
“하아, 하, 형. 태주 형.”
“……상진아.”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호흡을 나누었다. 벌써 묵직해진 아래를 그의 몸에 바짝 붙이고 허리를 흔들었다. 가려진 옷 너머로 그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너는 달라, 그 아이와.”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원한 적도, 욕정을 표현한 적도 처음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인 감정이 손쓸 틈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인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내내 감추기에 바빴던 지난날들이 너무나 아쉽게만 느껴진다.
“전 달라요?”
“응, 넌 달라.”
그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촉촉하게 젖어 오는 그의 눈가에는 무엇이 어리고 있는 걸까. 이내 환한 웃음을 지어오는 그를 시야 가득 담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고개를 숙여 다시금 그와 입을 맞추었다. 허리에 감겨 오는 그의 팔이 낯설지 않다. 앞으로는 더욱 익숙해지겠지. 스스럼없이 제 옷을 벗기는 그의 위에서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핥았다. 고양감으로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살갑기만 하다.
* * *
그가 자신을 이토록 원하고 갈구하기까지 몇 년이나 기다렸던가. 자신의 생에서 다시는 그가 사라질 수 없도록, 사라지지 못하도록 묶어 둘 것이다. 설령 몸이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 * *
창밖으로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창문은 잘 닫았던 것 같은데 꼭 바로 근처에서 우는 듯했다. 지금 몇 시지. 얼마나 잔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닫힌 눈꺼풀 너머는 이미 밝았던 것 같다. 좀처럼 눈을 뜨기가 싫어서 자리에서 뒤척거렸다.
“으윽…….”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어디에 크게 박기라도 한 것처럼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고 쑤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분만은 상쾌했다는 거다.
“형, 조금 더 자요.”
어깨 아래로 내려갔던 이불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목 부근까지 꼭꼭 눌러 덮인 포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태주가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앞으로 손을 더듬어 두툼하게 만져지는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인간 난로가 따로 없네.
“일어났어?”
눈도 뜨지 못한 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태주의 볼에 입술을 맞춰 왔다. 일어났다는 대답인가.
“네가 말한 모닝 키스가 이런 거였어?”
작게 웃으며 물었다.
“음, 아뇨. 조금 더 진했죠.”
그가 다정히 웃으며 답했다.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다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맞붙었다. 살짝 틈을 내어준 사이로 혀가 얽혀 왔다. 밤새 핥아 대었는데도 또 기분이 좋네. 참 신기할 지경이다. 이거 입술 다 부르트는 거 아닌가 싶다.
“남이 자고 있을 때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냐.”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요.”
“침 흘리고 잤을 텐데.”
“맛있었어요.”
눈을 번쩍 떴다. 저 인간은 진짜 비위라는 게 없나. 으으,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야, 더러운 짓 좀 하지 마.”
“왜요? 형도 키스할 때는 내 침 맛있게 먹잖아요.”
“어? 아니,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다르지.”
아니다, 아무튼 달라. 다르다. 전혀 다르다. 침을 먹자고 키스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키스를 하고 싶어서 하다 보니 침을……. 아……. 아침부터 비위 상하게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지금 몇 시야?”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아직 눈꺼풀을 열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꾹 감은 채로 그에게 물었다.
“음, 열한시네요.”
“벌써? 꽤 오래 잤네.”
“뭐 어때요. 조금 더 쉬고 있어요.”
그의 손가락이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헤집어 놓더니 다리를 태주의 위로 턱 올려 두었다.
“무거워.”
“기분 좋아요, 형.”
발가벗은 태주의 둔부에 갈고리처럼 걸치더니 스윽 당겨갔다. 모로 누운 그의 골반에 하체가 마주 닿았다. 어제 내내 서 있던 그것이 아직도 꼿꼿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야, 아래 좀 어떻게 해봐.”
“어쩔 수 없어요. 아침인 데다가 형하고 붙어 있잖아요.”
“그건 알겠는데 너무, 너무…….”
너무 크지 않냐. 날만 안 섰지 저건 완전 흉기였다. 그를 꽉 끌어안았더니 아래에 있는 그것이 몸에 툭툭 닿다 못해 눌리고 있었다. 어휴, 저게 사람이냐. 설마 또 하자고 하지는 않겠지. 덜컥 겁이 났다. 절대 못 한다. 각방이라도 써야 할 판이다.
“형, 저 자꾸 심장이 뛰어요.”
“어제 커피 많이 마셨나 보네.”
“……그런 뜻이 아닌데요.”
“커피도 너무 많이 마시면 독이래.”
슬쩍 한쪽 눈을 떴더니 그가 입술을 쭉 빼고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안다, 알아. 설마 이 와중에 그 의미도 몰랐을 리가 있나. 그냥 조금 부끄러웠다.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좀 무섭지 않을까. 적어도 태주에게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아, 회사 가기 싫다.”
“벌써 출근 걱정을 해요?”
직장인이란 그런 것이다. 뼛속 깊이 직장인의 피가 흐르는 태주 역시 그랬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눕는 순간에도 ‘아, 출근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 휴일이긴 했지만. 연휴 최고다.
“회사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형.”
“뭐?”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참나.”
아침부터 기분 째지게 하고 난리다. 물론 팀장 직급을 코앞에 둔 마당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생긴 것 같다. 소문에라도 의지하려 했던 지난날이 벌써 아득히 멀어져 간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형, 배는 안 고파요?”
“응? 괜찮은데, 아직.”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쪽으로 들린 이불 밖으로 쩍 갈라진 근육이 눈에 들어온다. 운동도 따로 안 하는 것 같던데 몸은 왜 저렇게 좋은 거야. 괜히 부러웠다.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을 가려두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별로 생각한 건 없어. 너는?”
“아, 저는.”
결국 눈을 떠서 그를 보았다.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의 뒷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조금 머뭇거리는 듯 보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저는 오늘 본가에 가 봐야 해요.”
“본가에?”
말과는 달리 영 가기 싫은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했고, 저번에 왔던 그 여성분은…… 종종 들러서 돌봐 주시는 분이라고 했고. 가정사가 복잡한 것 같아서 더 묻지는 않았었다.
“네, 원래 잘 안 가는데.”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 그런 건 아니고. 반년에 한 번 정도, 가족끼리 식사자리가 있어서요.”
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그가 바로 시무룩해졌다. 태주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럴 수 있지.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화목하란 법은 없다.
“괜찮아, 다녀와.”
“사실은 가기 싫어요, 형.”
“그래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네, 가야 해요.”
그가 웅얼거리더니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불 안으로 꾸물럭 기어들어 와서는 태주의 몸을 더듬었다. 따뜻한 팔이 다시금 몸에 감긴다.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가능하면 그와 조금 더 부둥켜안고 싶었지만.
“어리광부리지 말고.”
“어리광부리면 안 돼요?”
“아니, 돼.”
안 될 게 뭐람. 그가 그 큰 덩치를 구기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형 혼자 두고 가기 싫은데.”
“그렇다고 내가 같이 갈 수는 없잖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게다가 모두가 다 초면일 텐데 말이다.
“같이 갈래요?”
“아니, 싫어. 다녀와.”
“왜요. 같이 가요. 금방 나올게요.”
“그러면 네가 너무 시간에 쫓기잖아. 그런 건 싫어. 오랜만에 가는 거일 텐데 천천히 있다가 와.”
기다리는 입장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보아하니 집에 자주 들르지도 않았을 거고, 모처럼 볼일이 있어 가는 듯했다. 괜히 밖에서 사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뭐가 문제인가. 자신은 이곳에 있을 텐데.
“빨리 올게요, 형.”
“천천히 오라니까. 집에서 쉬고 있을게.”
집에서, 말이다. 그래, 이제 이곳이 태주의 ‘집’이었다. 상진이 있는 이곳이, 곧 자신의 집이다.
“혀엉.”
그가 재차 입술을 마주하며 매달렸다. 다 큰 놈이 왜 이러냐, 귀엽긴 하다만. 그를 토닥거리며 쪽쪽거렸다. 칭얼거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비벼대었다.
“자, 얼른 일어나. 씻고 준비해야지.”
“형은 밥 안 먹어요?”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 내가 애냐.”
“그래도요.”
“괜찮아. 너나 잘 먹고 와.”
불퉁한 얼굴을 한 상진의 볼을 꾸욱 찔렀다. 좀처럼 일어나지를 않아서 양손으로 등을 밀다시피 했더니 쿠당탕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에고, 아프겠네. 다행히 그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침대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형.”
“응.”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귀여웠다. 한번 귀엽기 시작하면 답도 없다는데 큰일이네, 벌써.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묶어 두고 가면 안 될까요?”
“……누구를?”
“형을요.”
“어디에?”
“침대에요.”
귀엽다고 한 건 취소다. 저 변태 자식이 한 대 맞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보다. 입가에 어른거리던 미소를 싹 거두고 손바닥을 공중으로 들었다.
“맞을래?”
“알았어요…….”
그가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씻으러 갔다. 저렇게 시무룩할 일인가. 빨리 올 거면서 그 잠깐을 못 참고 말이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 * *
벌써 점심때여서 뭘 먹을지 고르고 있었다. 집에 반찬이나 먹을 것들이 있긴 했는데, 오늘따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싫었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형.”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몇 번이나 잔소리를 했더니 금세 준비를 마친 뒤였다. 정말 가기가 싫은지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았기에 등짝을 세게 후려쳤었다.
“다녀와.”
“형, 진짜 여기 있을 거죠? 아무 데도 안 가죠?”
“아, 그렇다니까.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냐.”
“아무 데도 가면 안 돼요. 알았죠? 여기 있어야 해요.”
“알겠어.”
걱정도 팔자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인데 굳이 다른 곳에 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짐도 여기 있고 필요한 것들도 여기 있었다. 음식이야 주문하면 되고, 결제는 개진상의 카드로 하면 되는데.
“맛있는 거 먹어요, 형. 카드 가지고 있죠?”
“응, 가지고 있어. 엄청 맛있는 거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꼭 챙겨 먹어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현관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해야 했다.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태주를 끌어안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품에 쏙 안긴 채 그의 등을 토닥거리는 건 태주의 몫이었다.
“형, 빨리 올게요. 어디 가지 마요.”
“아, 좀! 알았다고!”
어제 분위기 좋았는데. 뽀뽀도 키스도 잔뜩 했고. 이쯤 되면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 조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화딱지가 나려는 걸 꾸욱 눌러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본가에 가기 싫어하는데 괜히 화를 내서 찝찝하게 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안 가냐?!”
“갈 거예요…….”
현관문을 열고 내보냈다. 그런데 문 앞에 서서 머리만 집 안으로 내밀고 있었다. 어휴, 저 진상. 역시 개진상 짬은 어디 가질 않네.
삐뚜름하게 그를 보던 태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양 볼에 손을 대고 입술에 쪽쪽 연이어 뽀뽀를 해 주었다.
“자, 불안해하지 말고 가.”
“형…….”
꽤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가 말끝을 아련하게 흐리면서 입을 열었다.
“진짜 묶어 두고 가면 안 돼요……?”
“나가.”
인내심이 바닥남과 동시에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 *
곰탕을 먹고 있었다. 어제 기가 빠져서 보양식이라도 챙겨 먹어야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는 걸 보니 당분간 계속 챙겨 먹어야겠지. 뽀얀 국물을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성태주 씨 맞으시죠?]
처음 보는 번호였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투의 남자가 다소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네, 맞습니다. 누구세요?”
[×× 파출소 오순태 순경이라고 하는데요. 성봉구 씨 아시죠?]
순간 대답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누구였지. 왠지 낯이 익긴 한데. 그러다 문득 그 이름의 주인이 큰아버지라는 걸 깨달았다.
“아, 저희 큰아버지 같으신데.”
파출소에서 왜 연락이 왔는지 의아했다. 왜냐하면 큰아버지는 아빠와 현이의 제사 즈음에나 이곳을 찾곤 했었다. 그 이외의 날에는 태주가 생활하는 곳과는 거리가 꽤 있는 지역에서 사셨기에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이번 제사일은 이미 지났다. 그래서 그즈음에 한번 얼굴을 보지 않았었나. 예전의 그 집으로 찾아오셨었는데.
[이쪽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성봉구 씨가 여기 계시거든요.]
“네? 거기에요? 지금 그 파출소에요?”
[네, 지금 성봉구 씨 보호자가―]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뚝뚝 끊겨 들렸다. 뒤에서 누군가 소동을 피우는 듯했다.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우당탕탕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 거 조용히 좀 하세요!]
앞에 들린 목소리는 분명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들린 음성은 그 순경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큰아버지가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술을 드신 건가. 워낙 다혈질이긴 했는데 목소리가 술에 취한 듯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화상으로 묻기는 그른 것 같아서 대답만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잠시 고개를 내렸다. 뽀얀 곰탕 국물이 어느새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상진의 온기가 묻어 있는 안락한 이곳에서 지금까지 뒹굴어야 했던 차디찬 현실로 강제 소환된 느낌이었다. 어쩐지, 요즘 일이 좀 잘 풀린다 싶었는데.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아직 반 이상이 남은 곰탕을 가만히 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전화가 왔던 파출소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도, 예전에 살던 집과도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 지역의 파출소에 큰아버지가 있다는 건지 추측조차 어려웠다. 우선 부리나케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상진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서 메시지만 보내 두었다. 집에 있으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갔는데 좀 미안하네.
[상진아, 나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 금방이면 돼.]
평소라면 바로 읽었다는 표시가 떴을 터였다. 그런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쁜지 응답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역시나 묶어 둘 걸 그랬다고 징징거리는 거 아닐지. 불룩 튀어나올 입술과 서운함이 뚝뚝 떨어질 눈동자가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이왕이면 답장을 받고 출발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근처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파출소로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대로변에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주변의 길들이 매우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묘한 기시감이 들어 파출소의 근방을 이리저리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전에 이 동네를 왔던 적이 있었던가. 눈에 띄는 가게며 집들은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길목 자체가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 받은 성태주라고 하는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 앉아 있던 경찰이 다가왔다. 그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더니 뒤쪽에 놓인 기다란 의자를 엄지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긴 의자 위에 누군가 널브러져 있었다.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
그를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근처에 가기도 전에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술을 거나하게 마신 듯했다.
“큰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주 인사불성입니다. 여기서도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참나.”
뒤에서 경찰관이 잔뜩 신경질이 난 말투로 말했다. 예전부터 술만 마셨다고 하면 성격이 달라지셨던 분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얼마나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을지 알 만했다. 친아버지도 아닌데 왜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큰아버지는 웬일인지 위아래로 검정색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비록 셔츠는 다 풀어졌고 겨우 잠긴 바지 벨트가 흉하게 벌어져 있었지만. 어디 들르기라도 하신 걸까.
“숙모, 그러니까 이분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하신 건가요?”
비록 지역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보통은 가족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던가. 주위에는 큰아버지와 경찰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성봉구 씨가 성태주 씨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우겨서요.”
“아, 제게요?”
“네, 이유는 모르겠고. 아무튼 정신 차리면 빨리 데리고 가세요.”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할까. 그렇다고 상진의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집을 큰아버지에게 보여 주게 되면 뒷일이 귀찮아질 뿐만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곳을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난감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아까의 그 경찰관에게 물었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원래 이분이 이곳에 사시질 않거든요. 미리 연락을 받은 것도 없어서요.”
답답해서 물어보긴 했는데 솔직히 민망했다. 실내 상황만 봐도 얼마나 진상이었을지 눈에 빤했기 때문이다.
“후, 잠시만요.”
키보드를 두드리던 경찰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내면서 커피를 한 잔 타 주었다. 뭐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차라리 음료라도 사 가지고 왔으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겠는데. 일단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를 옮겼다. 파출소 구석에 놓여있는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후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일이 커질 뻔했어요.”
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근처가 보면 알겠지만 부촌입니다. 저 위쪽에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알 만한 회장님 댁이 있어요. 그런데 성봉구 씨가 그 집 앞에서 난동을 피워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아.”
그제야 태주는 깨달았다, 이곳이 어디였는지. 다시는 꺼내지 못하도록 잠근,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빛바랜 기억이 상기되었다. 비록 건물과 집들은 바뀌었지만 길목의 배경은 그대로였다. 왜 금방 깨닫지 못한 걸까.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 위로 올라가면 그 집이 있다. 회장님과 현우가 살던 집이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대문 안으로 큰 정원이 있었지.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면 허름한 반지하가 있던 쪽방이 있었다. 그곳이 그와 아빠, 현이가 살던 집이었다. 지금도 있으려나, 아마 허물어졌을 것이다. 부촌 사람들, 특히나 회장님이 그 집을 그대로 두었을 리가 없다.
“거기 사모님하고 약속이 되어있다고 막무가내로 굴어서. 그 집 경호팀들까지 호출되고 난리였어요. 결국 쫓겨났는데 갑자기 술까지 마시고 나타나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니까요. 하마터면 가택침입으로 일이 커질 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사죄를 구하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비록 태주의 잘못은 아니어도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태주가 보호자였으니까. 게다가 그가 그 집까지 찾아간 이유는― 아마도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강 짐작이 갔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지? 너희 아버지가 그 댁의 사모님에게 받을 게 있어.’
‘네가 한번 연락을 해 보는 게 어떠니. 내가 할 수는 없잖아.’
‘그 집 아직 그대로 있을 텐데, 찾아가면 돼.’
마지막으로 큰아버지를 보았을 때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그 댁의 사모님과 어떠한 거래를 했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 현우와 관련된 일이겠지.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 그는 염치도 없이 그깟 돈에 눈이 멀어 그녀를 찾아갔을 터였다. 너무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죽어서 현우를 다시 만나더라도 그 아이와 얼굴을 마주할 낯이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일 커지지 않게 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듭 사과를 건네자 그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이 가득했던 눈빛이 온순해진 뒤였다. 경찰관이 태주의 등을 토닥거리며 과일 음료를 건네고는 말을 이었다. 말투도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드세요. 어차피 저 사람 깨어나려면 기다려야 하잖아요.”
“아, 감사합니다. 뭐라도 사 와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괜찮아요. 고생이 많네요, 어려 보이는데.”
눈앞에 있는 경찰관을 흘끗 보았다. 아무리 봐도 또래인 것 같은데 그는 마치 손아랫사람을 대하듯 굴었다. 자신이 좀 동안이긴 하다만. 뭐,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다시는 저분 이쪽으로 못 오게 하세요. 잘못 걸리면 콩밥 먹습니다.”
“네, 주의할게요.”
태주가 못 오게 한다고 안 올 사람이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그의 불같은 성미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태주냐?”
그때, 긴 의자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 태주가 과일 음료가 담긴 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새빨간 얼굴의 중년 남성이 반쯤 풀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허공에 팔을 휘젓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큰아버지, 괜찮으세요?”
“허으…….”
그에게서는 아직도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가 벽에 등을 기대고 깊게 한숨을 쉬자 알코올 향이 코끝에서 흩어졌다.
“태주야.”
“큰아버지, 술 많이 드셨어요? 몸도 안 좋으시면서.”
“지금 나랑 거기로 가자.”
“네? 어디를요?”
“그 회장댁으로 가자고. 내 억울해서 못 살겠다.”
큰아버지가 두툼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후려쳤다. 퍽, 퍽, 둔탁한 파열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고 말리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끝내는 다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 내 동생이 죽었잖아! 어?”
“거참, 아저씨. 거 조용 좀 해요. 또 시작이네.”
그가 입을 열자마자 지켜보던 경찰관들이 짜증을 내었다. 아마 아까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주는 그들처럼 짜증을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동생은, 태주의 아버지였으니까.
“내 동생이! 그 사모님이 하라고 한 일 때문에! 죽었다고! 어?”
“큰아버지. 진정하세요.”
“야, 태주야. 내가 너무 억울하다. 그 사모한테 내가 뭐 없는 소리하디? 걔가 빚 갚겠다고 모진 일 하다가 그렇게 가 버렸는데.”
그 일을 ‘모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태주에게는 ‘모진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속죄해도 갚을 길이 없는 ‘죄’였다.
“내가! 내 동생이 못 받은 그 남은 돈을 좀 찾겠다는데. 그게 뭐 그리 문제냐. 안 그러냐? 네가 못 받으니까 내가 받아 준다 이거 아니야.”
“아버지가 남긴 돈은 없어요. 제발 잊으세요. 빚은 제가 갚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도 갚고 있고요.”
애초에 받았으면 안 될 돈이었다. 선금도, 아니, 그 부탁 자체를 들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너도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내가 똑똑히 아는데, 중간에 사고는 좀 있었지만 어찌 됐든 해 달라는 대로 된 거 아니냐. 그럼 나머지 금액도 주는 게 맞는 거지! 걔 죽었다며, 태주야. 네가 그랬잖아.”
“큰아버지…….”
더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저런 인간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도, 큰아버지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것도 싫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그를 말리던 손을 내리고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꾹 쥐었다. 상진이 보고 싶었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성봉구 씨. 거 말조심 하세요. 자꾸 무슨 그 집 사모님이 자기 아들 죽이려고 사주한 것처럼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증거 있어요? 어? 그거 명예훼손이라고요.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큰일 나려고 저러네, 저분이.”
뒤쪽에 앉은 경찰관 중 한 사람이 크게 고함을 쳤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양쪽 허리에 팔을 올리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이 파출소에서 꽤 높은 사람인 듯 보였다. 큰 소리로 억울하다 외치던 큰아버지마저 기세가 한풀 꺾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결국 사과는 태주가 했다.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을 향해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증거는 없다. 증거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증거는 결국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증거가 있을 리가 없었다. 태주조차도 그저 추측만을 할 뿐이었으니까.
“태주야. 내가 그 집에서 개처럼 끌려 나왔다. 어? 내가 내 동생 억울한 거 풀어 주려고 찾아간 건데 개처럼 끌려 나왔다고. 나보고 미친놈이란다.”
태주는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미친놈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상진에게 미친놈이니 개진상이니 해 댔는데, 그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진짜 돈에 미친놈이자 개진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태주가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그 집 사모는 만나지도 못했어. 아주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느라고.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사모에게 말을 하면 알 거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라. 그게 사람이냐? 인간도 안 돼, 그 집 새끼들은.”
“큰아버지, 그만하시고 이제 집에 가세요.”
말이 툭 나왔다. 너무나 지친 탓이었다. 남은 힘을 겨우겨우 짜내서 ‘큰아버지’라고 불러 주었다. 사람도 인간도 아닌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후벼 파지는 것만 같다.
역시 상진의 말을 들을 것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집에서 나오지 않는 건데. 그 집이 태주에게는 부적 같은 걸까. 그 안에서는 늘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 같다.
“그거야 댁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게 술을 곱게 마셔야지.”
방금 전 소리를 질렀던 경찰관이 말했다. 스스로는 작게 중얼거렸다고 여겼던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실내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자 개진상 아니, 성봉구 씨가 발작을 하듯 펄쩍펄쩍 뛰었다.
“이봐요! 당신 알지도 못 하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마쇼!”
북과 장구가 어우러지듯 먼 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벌떡 일어섰다. 그 역시 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쳤다. 그의 앞자리로 나란히 앉은 남자들이 귀를 막았다. 그들 중에는 아까 태주를 안내했던 순경도 있었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모를 줄 알아? 돈 좀 있는 집이니까 이상한 헛소리 해 대면서 협박하려는 거 아니야! 그러다가 콩밥 먹습니다, 성봉구 씨!”
“뭐가 이상한 헛소리라는 거야! 내 동생이 걸린 일인데 내가 왜 헛소리를 하고 거짓말을 하냐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 시끄럽고 불결한 대화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씩 가빠지는 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성봉구 씨의 어깨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말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저 뒤쪽에서 소리를 지르던 경찰관이 이상한 말을 했다.
“그 집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자꾸 죽었다고 하니까 그렇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뿌린 듯 몸이 굳어 버렸다. 뭐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태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살아 있다고? 누가? 그 집 아들이라면, 아, 그래. 그 집에는 현우 말고도 이복형제들이 더 있었다. 아마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당신이야말로 거짓말하지 마. 그 집 아들이 살아 있다고? 죽었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해. 당신 뭐야? 어? 그 회장님 댁 꼬붕이야?”
“참나, 살다 살다 무슨 저런.”
그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나오려 했다. 앞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청년들 여럿이 그를 막으며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나 기세가 등등한지 그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성봉구 씨가 있는 앞까지 다가왔다. 그를 코앞에서 보니 풍채가 상당했다. 덕분에 성봉구 씨의 기세는 세 풀 정도 꺾이고야 말았다.
“뭐라고 했습니까? 꼬붕? 아니, 사실을 말한 걸 왜 꼬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이봐요, 좀 알 거면 제대로 아세요.”
태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질어질한 이마를 손으로 짚다가 그와 성봉구 씨의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무시무시한 기세의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진정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집 아들이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깨어난 걸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를 올려다보던 태주의 눈동자가 움찔 떨렸다. 방황하던 동공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그 집 막내아들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서 한동안 이 동네가 얼마나 시끄러웠는데. 이제야 겨우 잘살고 있는 집에 가서 무슨 난동을 부리고 말이야.”
“저, 기.”
“뭐요!”
말이 잘 이어지질 못했다. 그가 내뱉은 말이 귀에 들어와서, 그리고 그 들어온 말이 뇌를 거쳐 결국 그 의미를 해석하기까지가 뚝뚝 끊기는 듯했다. 오래된 컴퓨터가 멈추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던 반응들이 갈기갈기 찢긴 것만 같았다.
“태주야! 나 정말 억울하다. 네가 그랬잖냐. 현우가 죽었다고.”
태주의 뒤에 서 있던 성봉구 씨가 소리쳤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도 억울한지 계속 본인의 가슴 위쪽을 주먹으로 치고 있었다. 뒤에서는 퉁, 퉁, 소리가 났고 앞에서는 크게 내쉬는 콧소리가 났다.
“아이고, 억울해. 억울하다고.”
“뭐가 억울해요. 그 집 사모님이 유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당신 벌써 콩밥이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분명히 그랬다. 그건 사실이었다. 현우가 죽었다고, 몇 년이나 식물인간인 채로 누워 있던 그 아이가 결국에는 죽었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다. 분명 그렇게 들었다. 몇 번이고 찾아갔던 그 병원에서 현우가 사라졌고 부리나케 찾아간 그 집에서 말이다. 정확히는 그 집 대문 앞에서 들었다. 차가운 버저음 뒤로 더욱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했었다. 그러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도 했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저기, 현우가, 살아 있다는 말씀이세요?”
“응? 그렇다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요.”
“현우, 가요? 현우 말씀하시는 거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왜 사고로 누워 있던 그 아들 말입니다. 오 순경, 맞지?”
“분명, 세상을 떠났다고, 그랬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아니, 뭐 주민등록등본 조회라도 해 드려야 믿으려나.”
그는 정말 무척 답답한 듯 보였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내 자리로 돌아갔다. 뒤에 서 있던 성봉구 씨와 마찬가지로, 성태주 역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바보가 되었다. 이곳에서 딱 이 두 사람만이 바보에 멍청이이자 파렴치한이었다.
‘아, 그 집 아들이 식물인간이었어요?’
누군가 소곤거렸다. 젊은 경찰관 몇 명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였다. 태주는 귓가가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숨이 가빠지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접한 충격에 몸이 곤두서고 있었다.
왜 거짓말을 한 걸까. 왜 살아 있는 아이를 죽었다고 한 걸까. 그리고 만약 현우가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왜 자신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태주는 깨닫고야 말았다.
그들이 자신에게 진실을 알릴 의무가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현우 역시 자신을 찾아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실은 그들의 그 간단한 말 하나에 ‘현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쉬이 믿어 버린 자신도, 어쩌면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쉽게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도리어 그 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자신을 찾아왔다면 어땠을까. 기쁘게 맞아 줄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다음은? 그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현우를 볼 때마다 떠오를 죄책감이 온몸, 온정신을 좀먹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현이에 대한 그리움이 뒤섞여 매일이 괴로워진다면.
지금까지 버텨 낼 수 있었을까.
“아니, 태주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 거냐.”
혼란스러운 건 태주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씩씩거리던 성봉구도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약 현우가 살아 있다면 성봉구가 바라던 그 돈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까. 아마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두려운 상황일 것이다.
“일단, 일단 집에 가 계세요.”
더 이상 그를 챙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머리부터 손끝까지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열렸다. 빛이 번쩍번쩍 스며들었다가 금세 깜깜해진다. 너무나 어지러웠다. 어른거리는 눈앞으로 시야가 흔들려 저도 모르게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부축해 주었다. 팔 아래로 들어온 그의 손이 따뜻했다. 상진인가, 상진이 보고 싶었다. 그에게 몸을 기대고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고 있었다. 허리로 팔이 쑥 들어오더니 기다란 의자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감, 사합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아까의 그 오 순경이었다. 그가 창백해진 태주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진짜 괜찮으십니까?”
“조금 어지러워서요. 괜찮습니다.”
뒤에서 쭈뼛거리던 성봉구도 다가왔다. 아, 지금 내 얼굴이 심각하긴 한가 보네. 저 인간도 걱정하는 걸 보니 말이다. 이제야 술이 깼는지 아니면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얌전한 말투였다.
“태주야, 괜찮냐?”
“네, 괜찮아요. 큰아버지, 제가 연락드릴게요. 우선 돌아가세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에 적금을 타면 일부를 갚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라고 할 생각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나머지 금액은 계속 갚아야겠지만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전에 없이 싸늘한 태주의 태도에 그도 흠칫 놀란 듯했다. 알겠다며 옷을 추스르더니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맥이 탁 풀렸다.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근데 그 집 사모님이 저번에 오신 그분인가?’
‘여기 왔었어?’
‘아, 왜. 지난번에 과일이랑 잔뜩 가지고 오셨던…….’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들 힘조차 사라져 버린 듯했다. 시각이 차단되자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이 더욱 선명해진다. 저 앞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분이 그 집 사모님이셨어?’
‘그럴걸요.’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이 나네.’
‘이름까지 기억나세요?’
‘아니, 왜 성이 특이했잖아. 계, 연진이었나.“
“성이 ‘계’라고요? 진짜 특이하네.‘
태주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한쪽 눈썹이 일그러지면서 미간이 좁혀진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들렸다.
‘잘못 발음하면 ’개‘로 들리기 십상이네.’
‘그러게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웃겨요.’
순간, 태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절대 아무 관련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웃고 있는 그들의 앞까지 비척거리며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이 앉은 채로 태주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아직도 창백한지 그들과 웃고 떠들던 오 순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앉아 계시지.”
“저기, 선생님.”
“네네, 말씀하세요.”
“방금 그 사모님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하셨죠?”
“아, 그게.”
그들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뒤쪽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한 경찰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저 인물과 그 회장님 댁이 꽤나 친밀한 관계였나 보다. 방금 전에 성봉구와의 설전에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걸 보고 대강 추측은 했었지만.
“성태주 씨, 일단 병원부터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뇨, 괜찮…….
“이쪽으로 오세요.”
그를 따라 파출소 문을 나섰다. 바깥의 찬 공기가 피부에 닿자 새삼 이곳이 현실이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꼭 악몽을 꾼 것만 같다. 아침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텐데. 아, 상진이한테 연락은 왔을까. 아까 보낸 문자를 읽긴 했을까. 보고 싶다.
“안쪽에서 말씀드리기는 좀 그래서요. 개인정보라.”
“아, 네. 그렇죠.”
“그 사모님 성함이 계연진 씨입니다. 혹시 잘 아시는 분이세요?”
잘 안다고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모님과 마주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으니까. 회장님이나 현우는 잘 알았지만 그녀와는 예전에도 이렇다 할 왕래가 없었다. 만약 사모님에 대해 잘 알았다면 이름 정도는 기억했을 것이다.
“그 주변 분들을 조금 아는 정도라서요. 혹시 성이 기역에 여이인가요?”
“네, 맞습니다. 흔하지는 않은 성이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흔하지는 않은 성이지. 주변에 그런 성씨를 가진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계상진과, 계연진. 우연의 일치일까. 사모님에게 다른 아들들이 있기는 하지만 회장님을 따라 성을 바꿨을 테고 무엇보다 이름이 달랐던 것 같은데.
순간 상진과 처음 통성명을 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성이 특이하네요.’
‘좀 그렇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느낌인데.’
‘그래요? 잘 없을 텐데요.’
그 당시에도 얼핏 낯이 익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이상하게 예전 기억들을 되뇌긴 했었지만 술을 마신 탓이라고 여겼었다.
“얼굴이 많이 안 좋으신데.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냥 조금 어지러웠다. 어디가 특별히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닌데, 그가 재차 물어왔다. 안색이 그렇게 안 좋나. 혹시나 싶어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손끝도, 그곳에 닿는 살갗도 너무나 서늘했다. 핏기가 싹 가셨던 모양이다.
“아, 네. 여러모로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도 마주 인사를 건네고는 파출소 안으로 돌아갔다. 태주는 잠시 그 앞에 선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가 살아 있었구나.’
사실,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현우가 살아 있다면 그건 분명 기적이다. 마땅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현우를 찾아가 사죄를 하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아이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못 들은 것처럼 지내도 될까. 이제 자신은…….
태주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반응이 없는 검은 화면에 제 얼굴이 비추어졌다. 지나간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괴로웠던 만큼 이제는 다 털어내도 되지 않을까. 달콤한 유혹에 젖어 든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파출소를 중심으로 위쪽,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그 집이 있었다. 그곳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것이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숨을 차분히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비록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그 사실을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솔직한 마음은, 당장 상진의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TV를 보며 소파에 눕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서성거리던 발걸음을 다잡았다. 겨우 선 결심이 쓰러지기 전에 위쪽 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설령 현우와 만나지 못할지라도 이대로 모르는 척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만난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꼭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게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기요!”
회장님 댁이 있었던 길을 따라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파출소를 지나쳐 윗길로 따라 올라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불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의 그 경찰관이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태주의 얼굴이 창백했는데, 지금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네?”
“어디 가세요?”
“아, 위쪽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건 왜 묻는 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단숨에 태주를 뒤쫓아 와 몸으로 위를 막아서고는 말을 이었다. 꼭 바리케이트를 치듯이 양팔을 벌리고 말이다.
“안 됩니다.”
“안 된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 그게, 그러니까.”
조금 전과 동일인이 맞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손아랫사람을 보듯 여유 넘치던 그의 태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의 관자놀이에 땀이 주룩 흐른다. 태주는 그것이 매우 이상해 보였다. 왜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것일까.
“지금 가시면 안 된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왜요? 그리고 제가 어딜 간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 저기 위에 있는 큰 집에 가시려던 거죠?”
‘위에 있는 큰 집’은 아마도 회장님 댁을 지칭하는 거겠지. 굳이 숨길 이유는 없으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도시에 길이 깔린 곳이라면 얼마든지 지나쳐도 되지 않던가.
“지금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어, 그게 말이죠.”
무시하고 가려다가 일단 말이나 들어 보자 싶었다. 양팔을 겨드랑이에 넣어 팔짱을 끼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그가 자신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 성호구 씨가―.”
“성봉구 씨겠죠.”
거참, 남의 큰아버지 이름을 막 부르고 그러네. 나름 통쾌하긴 합니다만.
“아, 네. 죄송합니다. 성호, 아니 성봉구 씨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네.”
“지금 그쪽에 비상이 걸렸어요. 괜히 가셨다가 잘못 걸려서 신고당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 집에 가서 무슨 짓을 한다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가는 것만으로도 신고를 당하나요?”
아무리 회장님이고 아무리 부자라도, 그냥 근처에 왔다고 신고를 할 수도 있는 건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백보양보해서 성봉구 씨가 난장판을 쳐 두었으니 그와 관련이 있는 자신이 근처에 가는 게 싫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사람을 막 신고하나? 이유도 없이? 그가 하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물론 무슨 짓을 안 하면 그렇긴 한데요.”
“네, ‘무슨 짓’도 안 할 겁니다. 그냥 근처에 가기만 할 건데요.”
“그러니까 왜 가시냐고요.”
내가 내 발로 길을 따라간다는데 이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공권력의 힘이란 참으로 무섭구나. 방금 전만 해도 상냥하게 사모님 이름까지 알려 줬으면서,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혹시 파출소 안에 가장 높아 보이던 그 경찰관에게 혼이라도 난 걸까.
눈앞에서 초조한 티를 팍팍 내던 그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보고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다시 양팔을 벌린 채로 막는다.
“오늘은 돌아가시죠.”
“오 순경님.”
“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태주가 말을 툭 내뱉자, 오 순경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누군가 시켰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혼났거나 둘 중 하나인 듯했다.
“혹시 파출소 안의 그 목소리 큰 분한테 혼나셨어요?”
“아.”
파리하게 질렸던 그의 안색에 다소 생기가 돌았다. 아주 미묘한 변화였지만, 신경이 곤두섰던 태주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하하, 네. 이런 말씀드리기는 좀 그런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혼났습니다. 아까 제가 사모님 성함 알려 드린 것도 그렇고요. 성봉구 씨 일로 지금 위쪽이 어수선하다 보니.”
“네.”
저 인간, 방금 안도하지 않았나. 태주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파출소 안의 그 목소리 큰 분’이 틀린 걸까. 아니면 ‘혼나셨어요?’가 틀린 걸까.
“그럼 오늘만 가지 말라는 말씀이신 거죠?”
“아.”
법을 위반해서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닐 테니까, 당연히 갈 수야 있겠지만. 슬쩍 한번 떠 보았다. 만약 오늘만이라면 정말 성봉구 씨의 탓일 거고, 그게 아니라면…….
“그게, 음.”
그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애착인형이라도 되는 듯 힐끔힐끔 시선이 검은 화면으로 꽂혔다.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에 대한 답도 스스로 내릴 수 없는 상황인 건가. 아무래도 수상하고 이상하다.
“알겠습니다.”
더 물어봐야 답은 하나인 것 같았다. 어차피 저 사람이 막고 있다면 이 길로는 가기 힘들 거고, 만에 하나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이래저래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난감한 일은 없게끔 해 주고 싶었다.
“돌아갈게요.”
“아,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가 양팔을 벌린 채로 다가왔다. 그래서 등을 획 돌렸더니 그대로 밀듯이 내려 보내졌다. 무슨 불도저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럼 들어가십쇼.”
“네,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은근히 말을 흘렸더니, 그가 또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와, 저 사람 연기 진짜 못한다. 누가 봐도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는 행동이지 않은가. 대체 누가 시킨 걸까. 사모님? 회장님? 아니면, ……현우?
“네? 아, 네.”
우물쭈물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답을 했다. 태주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파출소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는데, 그가 아직도 파출소 앞에 서 있었다.
‘감시하는 것 같네, 기분 나쁘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서 만져지는 핸드폰을 건드리면서 지하철역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내려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그 대신 생각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나름 호의적이었던 그 순경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 이상했다. 함께 파출소에서 나왔을 때와 그가 혼자 뛰쳐나왔을 때의 모습이 너무 달랐으니까. 선심을 베풀 듯 알려 줘 놓고 나중에야 잘못을 깨달은 듯도 보였다. ‘아차’라는 글씨가 이마에 대문짝하게 쓰여 있었다고나 할까.
그의 말대로 성봉구 씨의 난동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하긴 했을 터였다. 경비도 강화되었겠지. 그래도 아예 가는 것까지 막을 정도로 난리였던 건가. 여기서 또 의문이 들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인 성봉구 씨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술의 힘을 빌렸다 해도 강한 사람 앞에서는 이성을 차리는 유형이었는데. 하물며 회장의 집이었다. 경비도 있었을 테고.
“응, 상진아.”
전화가 왔다. 상진으로부터였다.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인사도 건너뛴 채였다.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쏟아졌다.
[형, 어디예요?]
“지금 볼일 보고 들어가려고.”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약속했으면서…….]
“미안. 좀 급한 일이 생겼었어.”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피식 웃음이 나옴과 동시에 ‘계연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관련은 없겠지만 괜히 신경이 쓰인다.
[그럼 지금 어딘데요?]
“이제 지하철 타려고. 내려가는 중.”
[데리러 갈게요.]
“어? 아니야. 나 이제 곧 지하철 탄다.”
[나와요. 저 출발해요.]
“괜찮다니까. 왜 이래.”
평소에도 막무가내였지만 오늘따라 더했다. 어차피 지하철 타면 금방이라서 데리러 올 것도 없었다. 괜히 기다리느라 시간만 더 지날 뿐이다.
“오지 마, 지하철 탔어.”
[왜요? 저도 출발해요. 바로 앞인데 금방 도착해요.]
“됐어. 집에서 봐. 바로 갈게.”
[……알았어요. 대신 빨리 와요, 알았죠?]
“네네,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화면 위쪽에 표시된 부재중전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넣어두고 미처 진동을 못 들었던 것 같았다. 아까부터 경황이 없어서 말이지. 알림을 지우려고 통화 메뉴를 클릭했다. 그런데 상진으로부터 부재중전화가 무려 스무 통이나 와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이 미친놈이. 무슨 스토커인가. 작게 웃음이 새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며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내 메시지를 보고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잠깐 볼일이 생겨도 금방 다시 돌아갈 텐데 뭐가 그리 불안한 걸까.
지하철 개찰구 앞에 다다라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데리러 오겠다며 징징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이런 거까지 귀여우면 안 되는데, 솔직히 귀엽다. 걔도 걔지만, 자신도 중증인 듯싶다. 그냥 데리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바로 앞이라고 금방 올 수 있다고 했는데. 금방 올 수 있다고……
순간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려던 몸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바로 앞이라고 한 거지.
* * *
오래된 기억 속에 이 거리가 남아 있었다. 비스듬한 오르막을 올라가면 나란히 놓인 큰 주택들이 보였다.
어떤 집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고 또 다른 집은 목재로 지어진 티가 났다. 대부분은 개별 주차 시설도 있는 터라 큰 창고 같은 문이 따로 있었다. 누군가는 너른 잔디 정원에서 책을 읽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바비큐를 하기도 했다. 태주는 어린 시절, 가끔 그들의 집을 멀찍이서 구경했었다. 어린 마음에 그들의 삶이 조금은 부러웠던 것도 같았다.
태주의 삶은 그때와 달라졌으나 이 거리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새로 지어진 건물들도 있었고 그대로인 곳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니 새록새록 그때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하겠냐, 내가.’
순순히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긴 했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좀 찝찝했다. 딱히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현우를 찾아갈 거고, 그게 오늘이 아니란 법은 없지 않은가.
개찰구에서 돌아서서 파출소와는 정반대의 지하철역 출구로 나왔었다. 비록 꽤 오랜만에 오기는 했지만 대략적인 길은 알고 있었다. 정 안 되겠으면 검색해 보면 되니까. 최대한 파출소 쪽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조심조심 나아갔다. 왜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조금 서글퍼져서 한숨이 푹 나온다.
파출소를 중심으로 빙 돌아서 나왔더니 다행히 오 순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 앞에 서 있는 건 아니겠지.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사고만 치지 않으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올 생각이었다.
‘혹시나 현우와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기나 할지 모르겠다. 사실은 태주 스스로도 현우를 알아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채였다.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로부터.
만약 마주친다면 우선 인사를 건네야겠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것이다. 자세한 상황은 말하기 어렵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자신을 기억하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이가 멀쩡하게 잘 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정말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버지와 현이와 함께 살았던 쪽방이었고, 여기서 이 골목만 돌면 그 으리으리한 저택이 보일 것이다.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 근처까지 왔는데도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경비가 삼엄해졌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골목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역시 성호구 씨로 인한 소동은 금세 잠잠해졌던 모양이었다. 그 경찰관은 괜히 왜 겁을 줬던 걸까.
골목 어귀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발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막상 근처까지 오니 그 앞을 지나갈 용기가 나질 않았던 탓이다. 그냥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보기만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지. 후, 후, 이번에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셨다.
‘그래, 잠깐만 보고 가자. 상진이도 기다리는데.’
이렇게 조용한 걸 보니 아마 집 앞을 지나가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현우에 대해 물어보고 갈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이지 욕심이다. 큰아버지가 들쑤시고 간 마당에 자신까지 그러면 정말 사달이 날지 모른다.
게다가 집에 풀어 둔 개진상에게는 그다지 인내심이랄 게 없었다. 무척 기다리고 있을 터라 신경이 쓰인다. 계속 울려 대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금방 간다고 문자를 넣어 두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이번에는 그 성호구 씨가 아니라 개진상이 난동을 피우겠지.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떼었다.
골목을 돌자 예전 모습 그대로인 저택이 보였다. 정말 그대로였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꼭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들이 달라졌는데 이곳만은 그대로인 것만 같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큰 현관문 근처로 다가섰다. 그냥 지나치기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정문까지 다가가 버렸다. 이 안에서 당장이라도 현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어린 날의 현우가 활짝 웃으면서―.
“누구세요?”
“악!”
갑작스레 느껴진 기척에 그만 소리를 질러 버리고 말았다. 놀란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뒤를 돌자 중년의 여성분이 서 계셨다.
“어?”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기울이며 눈만 깜빡거리자 그녀가 먼저 말을 붙였다.
“저번에 그분이시네요. 과장님, 이라고 하셨던가.”
“아! 안녕하세요.”
기억이 났다. 상진이 쓰러졌던 날, 그의 집에 방문했었던 사람이다. 새우가 들어간 죽도 한 솥 끓여 주었고 피가 나던 머리도 치료해 주었었다. 왜 먹지 못할 죽을 끓여 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끔 돌봐 주러 오시는 분이라고 그가 말했었다.
“잘 지내셨어요?”
“네, 뭐.”
잔뜩 긴장했던 차에 낯이 익은 사람을 만나니 왜인지 반가웠다. 그래서 살갑게 말을 건넸는데 그녀는 역시나 처음 봤을 때처럼 시큰둥한 태도였다. 조금 머쓱해져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아, 그게…….”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대문 앞에서 훔쳐보듯이 서성거렸으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고 있었는데, 대답이 늦어지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의심을 받는 분위기여서 급히 입을 열었다. 경찰이라도 불렀다가는 큰일이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오 순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여기, 그.”
“네.”
“잠깐 보러 온 거예요!”
“이 집을요?”
“네,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 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들이 반가워하거나 달가워하지 않을 게 문제지만. 굳이 이 부분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손으로 무덤을 파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왜 하필 저 사람을 이 앞에서 만나게 된 건지도 궁금하긴 했는데. 그렇지만 뭐, 여러 집을 돌보는 게 업인 분이시면 그럴 만도 했다. 상진이네도 부자고, 이 집도 부자였으니까.
“아, 이 집 도련님 보러 오셨나 보네.”
“도련님이요?”
“네, 이 집 막내 아드님이요.”
이 집의 막내아들이라면 현우였다. 그 후에 현우의 동생이 생기지 않았을 경우 말이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냥, 정말 그냥 근처만 보고 가려던 건데. 막상 그 아이를 알고 있는 듯한 말을 들으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너무 궁금했다. 정말 살아는 있는 건지, 살아 있다면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현우를 아세요?”
“누구요?”
“현우요, 이 집 막내.”
“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디서부터, 아니 대체 뭐부터 물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모습을 빤히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현우는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네? 여기가 현우 집인데. 방금 이 집 막내아들이라고.”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표하더니 그녀가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꼭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황당한 건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이 집이 아닌가.
하지만, 이사를 갔을 리는 없었다. 오전에 그 난리가 났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게 아니면 정말 그 후에 현우의 동생이 태어나기라도 한 걸까. 당최 들은 이야기가 없으니 그녀와 스무고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집 막내아들, 잘 아시잖아요.”
“잘 알긴 하죠. 그렇지만 현우와는 어릴 때 이후로 보질 못해서요.”
“네? 아니, 대체 무슨 말씀이시지. 저번에 그 아드님 집에서 저랑 만났잖아요. ……혹시 술 드셨어요?”
“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분명 같은 나라 말을 하고 있는데, 꼭 외국어로 대화하는 듯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녀도 답답해 보였고 나도 답답했다.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는 터라,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진 골목길로 장소를 옮겼다. 계속 그 앞에서 토론을 펼칠 수도 없으니까. 이 와중에도 주머니 안의 핸드폰에서 계속 불빛이 번쩍거린다.
“저랑 만난 곳이 분명…….”
상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태주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얼른 대화를 끝낼 요량인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랑 ××동 오피스텔에서 뵀었죠?”
“네, 그랬죠.”
“그 오피스텔 주인이 계상진 씨 아닌가요?”
“아, 맞아요.”
“그러니까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왜 아직도 이해를 하질 못하느냐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저도 답답한데요. 지금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요.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달아 들이닥치자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던 탓이다. 결국 그녀가 참다못해 말을 툭 내뱉었다.
“그 계상진 씨가 저 집 막내아들이잖아요.”
태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전부 다 이상했다. 그 계상진이, 저 회장님 댁의 막내아들이라고? 아니, 어째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가 도리어 수상쩍게 보였다.
“네? 상진이가 저, 저 회장님 댁의 아들이라고요?”
“네. 지금 그분 만나러 오신 거 아닌가요?”
“아뇨,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상진이가 회장님의 아들이라니, 애당초 성립이 되지 못할 공식처럼 보였다. 만약 그가 정말 회장님의 아들이라면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을 터였다. 태주도 한때는 이 집에 살았었으니까. 하지만 계상진이라는 이름은 그 시절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혹시 잘못 아신 거 아닌가요? 저 댁의 회장님은 김 씨인데요.”
맞아, 무엇보다 ‘성’도 다르잖아. 개진상은 계상진이었고, 저 집의 회장님은 김 씨였다. 그러니까 현우도 김현우였고.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이름을 바꿨다고 들었어요.”
잠시나마 돌아왔던 정신이 금세 빠져나갔다. 이름을, 바꿨다고? 머리 위로 큰 바위가 쿵 떨어지는 것처럼 시야가 아득해진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뜰 때마다 무거운 어둠이 찾아오고 이내 새벽안개처럼 눈앞이 희뿌옜다. 저릿저릿한 손끝으로 벽을 짚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전에 말씀드렸었죠, 사고가 있었다고. 저도 그 당시 일은 자세히 모르지만.”
“네, 들었어요.”
“그 일 이후에 이름을 바꿨다고 하던데요. 성도 이름도 전부.”
“혹시…… 그 전의 이름이 뭐였는지 아시나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오 순경이 그랬듯 말이다. 아주 느릿하게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그 잠깐의 시간 사이 온몸의 신경이 둔감해지는 듯했다. 과도한 긴장 상태여서일까. 끔찍한 전기 자극에 바짝 구워진 것처럼 전신이 따끔거렸다.
“모르겠네요.”
몸에 깃들어 있던 숨이란 숨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것이 아쉬움의 의미인지 혹은 안도의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곧 들이닥칠 풍랑을 잠시나마 비껴간 것에 마음을 놓은 것일 터였다.
“괜찮으세요?”
“아뇨, 아니.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안색이 안 좋은가 보다. 오늘따라 여러 사람에게 괜찮냐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게, 정말 왜 하필 오늘인 걸까. 지난밤 그와 보냈던 행복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하필, 하필 오늘이지.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뒤를 돌았다. 한 걸음씩 발을 떼며 아랫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느릿한 채였다.
실은, 사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졌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지금 자신은 무척 행복한데, 자신이 안 사실들이 이 행복을 산산이 부서 버리지는 않을까. 그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하지. 이 짐작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에게 말을 꺼내야…….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제복을 입은 남자의 형태가 어른거렸다. 땅에 박혔던 시선을 들자 그것의 형태가 더욱 확실해진다. 오 순경이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어슬렁 올라오고 있었다. 설령 볼일이 있어 위쪽으로 오더라도 이 길을 따라올 리가 없는데. 파출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으니까.
순간 태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내려가던 길가에서 벗어나 옆쪽의 좁은 골목으로 재빨리 피했다. 다행히 그는 태주를 보지 못한 듯했다. 숨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설명하기도 성가셨고 변명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나 어지러웠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알고 있던 사실과 너무나 다른 진실들을 알게 되어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이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숨죽인 상태로 살금살금 다른 길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 순경이 있을 골목 쪽을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발아래에 밟히는 죽은 이파리들이 사박사박 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이 정도 소리면 절대 들킬 리가 없―
―텁.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에 벽이 있었나, 분명히 쭉 뚫린 길이었는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형.”
“……계상진.”
그 미친놈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넌 여기서 뭐 해?”
태주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형 찾으러 왔어요.”
“날?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그는 태주의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시선을 회피하며 눈을 아래로 굴린다. 잠시 주변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다시금 태주를 찾았을 때, 그 안에 담긴 남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까만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은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형, 집에 있을 거라고 약속했잖아요.”
“계상진, 너―.”
이 상황에서도 저런 소리였다.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처럼 그가 낑낑거리듯 이야기했다. 무척이나 억울한 얼굴이다. 진짜 억울하고 황당하고 두려운 게 누군데.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전화도 계속 안 받고.”
“날? 대체 왜 걱정했어?”
“왜라뇨, 나는 형을 사랑하니까. 혹시 다른 곳에서 나쁜 짓을 당하지는 않는지, 누가 형을 괴롭히는 건 아닌지―.”
“내가 이곳에 올까 봐 걱정한 건 아니고?”
상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인의 집에 대해서는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말하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말할 수 없었던 건지, 대체 어느 쪽일까. 답이 없는 그를 향해 시선을 마주했다. 늘 당당하고 뻔뻔스럽던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동요를 하고 있었다, 명백히.
“형.”
그는 오늘 본가에 간다고 했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도 하필 오늘이었고.
“……상진아, 나 지금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형, 이리 와요.”
그가 태주에게 다가섰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그를 태주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있을 자리에 돌아간 것처럼 상진이 태주를 부축했고 그 품 안을 내주었다.
태주는 생각했다, 따뜻하다고.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안락하다고 말이다.
* * *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상진의 차에 타자마자 말했다. 먼저 말을 뱉고는 안전벨트를 하면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쥐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 버린 양말처럼 쪼그라든 듯도 보였다.
“어디를요?”
“내가 주소 찍을게.”
“거기가 어딘데요?”
“가 보면 알아.”
핸드폰으로 주소를 검색했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을 켜고 찾아 둔 주소를 입력한 뒤 거치대에 폰을 걸어 두었다. 이 일련의 과정 동안 상진의 얼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주지 못했다. 볼 자신이 없다. 행여 그가 저를 보고 웃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감정이 금세 녹아 버릴 것이다. 그리 쉽사리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지 않은가.
“형, 나 좀 봐요.”
“싫어.”
“형, 제발요. 네? 제발…….”
상진의 손이 태주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가 몸을 기대며 허벅지 위에 올린 태주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서서히 파고들던 그 손길을 태주가 이내 뿌리쳐 버렸다. 날카롭게 탁 쳐 내자 그가 꽤나 놀랐는지 숨을 헉 들이켰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출발이나 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짓은 사절이다. 몰랐다면 넘어갔겠지만, 알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 불안한 짐작들이 차라리 다 거짓이었다면 좋겠다. 그렇지만, 역시 계상진이 태주에게 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일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 * *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한쪽에 여전히 꽃다발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예뻤던 그 꽃다발도 이젠 시들어 있었다. 시들지 않을 리가. 어떤 것이든 시간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다. 입안이 쓰다.
“형, 여기는 왜 왔어요?”
꽃다발들이 놓인 단상 옆에는 다양한 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태주는 그곳에 스치듯 시선을 흘리고는 상진에게 답했다.
“따라와.”
태주는 상진과 함께 납골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빽빽이 줄지은 납골함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그 작은 공간 안에 여러 삶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태주는 익숙하게 그 많은 함 중 한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현이, 현우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태주는 그 앞에 오도카니 서서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상진 역시 태주의 곁에 서서 그 함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 앞에 꽂힌 사진 또한 보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동자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형…….”
“할 말 없구나. 그럼, 현이한테는 할 말 없어?”
태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진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맥없이 풀린 손이 꽉 주먹을 쥔다. 입도 열지 못하고 색색대는 숨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애처롭게 떨리던 상진의 목소리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너, 말 잘하잖아.”
태주는 여전히 상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사진에만 향해 있었다. 이제 더 묻지 않아도 상진이 현우라는 걸 깨닫고 만 것이다.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 왔던 상진에 대한 실망감과 원망,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안도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낡은 사진 속의 저 어렸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나 자란 걸까. 살아 있었다면 왜 진작 찾아오지 않은 걸까. 왜 현우라는 걸 숨겼을까. 나는 어째서 그를 금방 알아보지 못한 걸까. 그리고, 멍청하게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현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형, 사실은.”
결국엔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삽시간에 눈가를 가득 메운 눈물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진다.
“―잘못했어요.”
상진이 말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태주의 눈물을 본 그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내려던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뭘?”
“형,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울지 말아요.”
“뭘 잘못했냐고.”
태주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진은 태주를 보고 있었다.
굳은 얼굴 아래로 움찔대는 상진의 손가락이 태주의 손목을 잡을 듯 말듯 배회했다. 태주는 그런 상진이 안쓰러우면서도 미웠다. 지금까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제게 애정을 갈구한 걸까. 태주의 눈물을 보고 있는 상진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그득했다.
“상진아.”
좀체 답을 하질 못하는 모습을 보며, 태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마주한 시선 사이로 틈이 벌어지고 있다. 눈물로 흐릿해진 눈앞에는 그가 있었다. 좁아진 미간과 끝으로 기운 눈썹이, 슬픔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보고 말았다. 다시금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그의 말대로 할걸, 괜히 집 밖으로 나섰던 거다. 몰랐다면 넘어갔을 일이었다. 차라리 평생 몰랐다면.
“너, 누구야?”
태주의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저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우연히 가까워진,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계상진인 걸까. 아니면, 어린 시절의 그 귀엽고 사랑스럽던 동생, 김현우일까.
“형, 저는…….”
상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리어 그것이 무척 두려웠다. 태주는 그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바로 뒤편에서 상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순간, 태주는 피식 웃었다. 별난 일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우스워서였다. 그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게 우습기만 하다.
“저거 보이지?”
태주는 납골당 출입문 옆의 나무 거치대, 각양각색의 카드며 편지가 걸린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태주는 지난번 상진과 이곳에 왔을 때 함께 카드를 썼었다. 그때 분명 그가 쓴 카드는 이 거치대의 꼭대기에 걸어 두었다. 태주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거 꺼내.”
그러자 상진의 손이 태주의 손목을 덥석 잡아 왔다. 이번에는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잠시 살이 닿은 그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가 그에게로 눈을 치켜떴다.
“형.”
“왜, 못 꺼내겠어? 그럼 내가 뺄게.”
손이 닿을 높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기가 생겨서 그렇게 말했다.
태주가 나무 거치대의 아래로 가서 까치발을 들었다. 뒤꿈치를 들고 손을 쭉 뻗으니 카드 밑 부분이 달랑달랑 닿았다. 조금만 더. 간신히 툭툭 건드렸다. 휘청거리면서도 발끝을 높이 들었다.
그런데, 태주의 머리 위로 팔이 쑥 들어왔다. 상진이 한쪽 팔로 흔들리는 태주의 허리를 받치고 다른 쪽 팔로는 카드를 잡아 내렸다. 얼결에 상진의 몸에 기댄 채로 뒤를 돌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카드를 쥐고 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놔.”
태주는 잠시 머뭇거리던 상진에게 재차 말했다.
“달라고, 그거.”
그에 상진이 입술을 꽉 물었다. 태주는 뒤로 손을 감추려던 그의 손목을 쥐고 억지로 카드를 빼앗았다. 예상과 달리 상진은 태주를 말리지도, 도망가지도, 카드를 찢어 없애지도 않았다. 그저 꿀 먹은 사람처럼 있을 뿐이었다.
태주는 손에 들린 카드를 천천히 펼쳤다.
반으로 접힌 그것을 활짝 펴기까지 시간이 더디게만 가는 듯했다. 까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보였다. 끝의 마침표에서부터 앞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그리고 현아.]
어쩔 도리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카드 위로 떨어진 태주의 눈물방울이 잉크를 번지게 했다. 손끝이 덜덜 떨려서 카드의 모서리가 팔랑팔랑 흔들린다. 태주는 어깨를 떨며 울었다. 간간이 터지는 울음 섞인 신음이 싫어 팔로 입술을 짓눌러 막았다.
“……형, 태주 형.”
상진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태주는 그럴수록 발을 뒤로 물렀다. 그가 다가올수록 더 멀어졌다. 상진과 사이에 둔 간격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팔을 뻗어 태주의 어깨를 잡으려던 그가 이내 자리에서 멈추었다.
“무슨……, 생각했어?”
태주는 히끅거리며 넘쳐흐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랫입술을 짓뭉개듯 깨물며 말이다.
지금, 다 토해 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이 지나면 언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까. 저는 상진을 찾지 않을 생각이고, 그렇다면 그도 저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진은 언젠가 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될 순간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듯,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연극이 끝날 그 순간을.
“내가, 현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넌 무슨 생각을 했어?”
태주의 입에서 악에 받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모진 말을 현우에게 하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재밌었어? 내가 현우 이야기를 하면서 울 때, 우리 아빠와 현이에 대해 말해 줬을 때, 재밌었어? 이 납골당에 왔을 때도 모르는 척하면서 내 반응을 즐겼어?”
“……형, 아니에요.”
“다 거짓말인 거잖아. 너, 아버지가 안 계시다며. 나한테 그랬잖아, 처음 만났을 때.”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일까. ‘계상진’이란 사람은 애당초 존재하기나 한 걸까. 최 팀장이 했던 이야기부터 ‘계상진’이 했던 말들까지 모조리 다 떠올랐다. 쓸데없이 말이다. 그 기억의 조각들은 날선 칼날이 되어 태주의 폐부를 꿰뚫었다.
‘김현우 대표말이야. 진짜 모르냐?’
‘계상진은 정식으로 서류 지원을 하지도 않았고, 면접도 본 적 없어.’
참 희한한 일이다. 우연하게도 대표의 이름은 ‘김현우’였고, 태주의 곁에 있었던 부사수는 ‘계상진’이었다. 그때에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태주는 그저 우연일지라도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이 기뻤을 뿐이었다.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대체 왜 속였어? 내가 그렇게 미웠던 거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이나 내 앞에서 연극을 할 정도로?”
“잘못했어요, 형…….”
상진이 고개를 숙였다. 변명도 핑계도 대지 않았다. 그저 잘못했다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 큰 덩치의 남자가 한순간에 작아진 듯 보였다. 마치, 어린 시절의 그 아이처럼.
“이제 내가 어떻게 널 볼 수 있겠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상황이. 치미는 억울함이 눈물로 새어 나온다. 원래는 현우를 보면, 만약 마주하게 되면 사과를 건네려고 했다. 지금 저는 그 아이에게 상처 주고 있구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잘 있어, 상진아.”
태주에게서 나온 말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고 더는 없었다.
* * *
겨울의 바다는 처음이었다.
그를 만났던 것이 초가을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되었다. 멀리서 쏜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들이다. 그 찰나의 날들 동안 태주는 충분히 행복했고, 충분히 기뻤고, 충분히 위로 받았다고 생각했다. 태주는 그가 제게 쏟아부었던 그 까닭 모를 애정들이 어째서였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형, 새우 못 먹잖아요.’
그때에는 가벼이 넘겼던 말들이 새록새록 상기되었다. 그는 태주가 어릴 적에 새우를 못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진에게는 한 적이 없던 말이다.
‘사고였어요.’
‘그래서 머리를 다쳤어요.’
‘큰 수술도 여러 번 받았는데, 다행히 회복을 했죠.’
그가 남긴 여러 파편이 하나씩 떠올랐다. 태주는 얼기설기 엮인 그것들을 내내 곱씹고 곱씹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모래를 집어삼켰다가 다시 토해 냈다. 벌써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수평선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무섭게 넘실거리는 저 먼바다 위로 하얀 부표가 떠다니고 있었다. ‘붙잡아 두지 않겠다던’ 상진의 말에 툭 터졌었던 감정들이 속속들이 되살아났다. 그날 밤 그에게 울며 매달렸던, 그가 태주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그날 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그가 말했던 대로, 그는 태주를 붙잡지 않았다. 납골당에서 그를 뿌리치고 나왔었다. 무작정 걷는 태주의 뒤로 그가 계속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가 세 발자국을 앞서가면 그가 세 발자국을 걸었고, 한 걸음을 앞서갈 때면 한 걸음 따라왔다.
태주는 귓가에 들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에 무심코 안심을 했던 스스로가 싫었다. 그래서 비명처럼 화를 냈다.
‘따라오지 마. 소름 끼치니까.’
날카롭게 뻗어 나간 말이 어쩌면 그의 마음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말 뒤로, 그의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태주는 그길로 가까운 터미널로 향했다. 아무 계획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짐은 모두 상진의 집에 있었고 그걸 가지러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달랑 지갑과 핸드폰 하나만 손에 쥔 채로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은 복잡해져만 갔다. 태주는 알림 하나 없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상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몇 번이고 텍스트를 썼다가 다시 지우길 반복했다.
왜 속였는지,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홀로 찾다가 그만두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지 않은가. 이때까지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데.
그렇게 태주가 내린 곳은 바다와 가까운 터미널이었다. 걸음이 닿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긴 흔들의자가 있는 해변에서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검은 바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해안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까마득히 검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옅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형, 저 사실은…….’
태주가 상진과 처음으로 함께 납골당에 갔던 날. 상진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었다. 그러나, 태주는 그가 꺼내려던 말을 자세히 묻지 못했다. 당황과 부끄러움에 그를 밀치고 자리를 떠나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때 만약 그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
태주로서는 그가 현우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속았다는 배신감만으로 눈물이 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계상진’이라는 사람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아 감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제게 사랑한다 말했던, 오로지 제 곁에서 편을 들어 주었던 상진이가 사라진 듯했다. 물살과 파도를 막은 채 든든히 서 있던 댐이 무너지고 단번에 모든 것이 수몰당한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계상진, 개새끼.”
태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개새끼였던 개진상이었다. 설마, 그 개진상이 현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애당초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답안은 태주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내주었던 티끌 같은 단서들을 읽을 수 있었을 리가.
태주가 주머니에 둔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었다. 메시지도 전화도 전혀 없었다.
‘정말 이렇게 끝인 거겠지.’
고개를 들어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위에서 어슬렁거리던 부표가 저 멀리 떠내려간 것이 보였다. 잡아 주는 이 하나 없이 요동치는 물결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과 제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했다.
‘괜찮아.’
그러나, 태주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늘 각오하던 일이지 않은가. 생각보다 조금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호기심과 동정심을 거두고 곁을 떠났던 사람들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록 그때와는 조금 더, 아니, 아주 많이 더 슬프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짐도 챙겨 와야 하는데. 회사는 또 어떡하지.’
한숨이 푹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태주의 삶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집이며 회사며, 벌써 골치가 아팠다.
그렇지만, 하나씩 떠오르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제쳐 두고 우선 몸을 돌려야 했다. 겨울의 바다는 무척 추웠다. 태주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손을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죄송하지만, 방이 없습니다.”
벌써 열세 번째였다.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여관이며 모텔, 민박집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이 성수기라면 모를까, 연말도 아닌 데다가 길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질 않았다. 이보세요, 지금 여기에 사람보다 갈매기가 더 많거든요? 그런데, 이 많은 숙박업소가 전부 예약이 꽉 찼다니 말이 되냔 말이다.
“정말 없어요?”
“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닷가가 아니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른 펜션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바다가 바로 보이는 거리의 많은 숙박업소를 놔두고 굳이 안쪽으로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분도 우울하니 바다를 보며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던 건데. 카운터의 작은 구멍에서는 연신 빈방이 없다는 소리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없다는데 어쩔 수 없지.’
결국, 그 모텔도 빠져나와야 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진 바람이 옷깃을 때렸다. 소금기 어린 공기 덕분에 온몸이 찝찝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소금물을 먹은 솜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태주는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해변 맨 끝의 언덕 쪽에 있는 큰 건물로 눈을 돌렸다. 누가 봐도 호텔이었다. 숙박비가 너무 비쌀 것 같아서 시도조차 해 보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가 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잘 곳이 없다고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바닷가에서 잘 수는 더더욱 없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막상 들어서 보니 과하게 부담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예전에 진상 놈과 처음 만났을 때에 갔었던 호텔처럼 휘황찬란할 줄 알았는데.
‘아, 그곳은 별이 여러 개 달려 있었던가.’
다행히 이곳은 그곳처럼 고급 호텔은 아닌 듯했다. 호텔의 탈을 쓴 모텔보다 조금 더 시설이 좋아 보이는 일반 호텔 정도랄까.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겠지만, 한동안 그 개진상의 기준으로 살았다 보니 이 좋은 곳도 그냥 평범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한 명인데요. 혹시, 방 있나요?”
“아, 잠시만요.”
프론트에 있던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름대로 유니폼도 갖춰 입고 있었다. 그가 앞에 놓인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체크하더니 금세 답을 주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해 드릴까요?”
다행히 방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만약 없었다면 옵션도 물어보질 않았겠지. 안도감이 들어 미소가 흘러나왔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해 주세요.”
“그럼―.”
그가 각 층의 카드 키가 들어 있는 네모난 케이스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카운터 뒤쪽의 문을 누군가 열고 들어오더니 직원에게로 달려왔다.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네? 아, 아, 네.”
상냥하던 직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태주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대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든다. 태주는 카운터 앞에 서서 우선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정말, 죄송합니다만’을 열세 번째. 아니, 이제 열네 번째 듣고 있습니다만. 이어 나올 말은 아마도 ‘방이 없습니다’겠지.
“지금 현재 빈방이 없습니다.”
역시나.
이쯤 되면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성수기도 아닌 비수기에 이 지역 숙박업소들이 꽉 찼다니. 게다가, 방금 분명히 카드 키를 꺼내 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의 작당일지 짐작이 갔다.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그 미친놈이 나를 바보로 아는 걸까.
“아까 제게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갑자기 방이 없다고요?”
“아, 그게…….”
“카드 키를 꺼내 주시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예약이 꽉 찼어요?”
“……죄송합니다.”
“납득이 되질 않아서요. 이 근처는 더 갈 곳도 없는데, 정말 빈방이 하나도 없을까요?”
“조, 조금 전에 단체 예약이 잡혀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도착한 이후에 잡힌 거라면 제게 우선권이 있지 않나요?”
“결제를 그쪽에서 먼저 하셨거든요.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꽤나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직원도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들이 무슨 죄라고, 괜히 진상 고객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고객님, 그럼 저희가 다른 숙박업소를 알아봐 드릴까요?”
그들이 태주에게 내놓은 대안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 근처는 전부 돌아다녔는데 허탕만 쳤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빈방이 없다는 말만 계속 듣고 있거든요.”
태주가 카운터에 기대서 머리를 굴렸다.
아마 어딘가의 미친놈이 바라는 건 다시 제집으로 돌아오는 일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쁜 놈. 개새끼. 이유가 무엇이든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연락도 한 통 안 했으면서 뭐 하는 짓인지.’
정말 그렇게 걱정이 되면 연락이나 하던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이 근처의 모든 방을 다 예약이라도 한 건가. 진짜 초등학생이냐, 미친 진상 놈.
“네, ×× 호텔입니다.”
그때, 카운터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네, 안녕하십니까. ……아, 지금요? 아, 그게.”
수화기를 든 직원이 태주가 서 있는 쪽을 힐끔 보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기요.”
통화 중인 직원에게 말을 걸자, 그가 한 손으로 수화기의 아랫부분을 막고 답했다.
“네, 고객님.”
“지금 전화 건 그 미친놈한테 전해 주실래요?”
“……네?”
직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모든 상황을 알지 못할 테니 그에겐 오히려 자신이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태주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해변에서 자다가 입 돌아가기 전에 방 하나 비워 두라고요.”
“아, 아……. 아? 네, 자, 잠시만요.”
미친 듯이 흔들리는 동공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직원이 “크큼.”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통화 중인 상대에게 천천히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태주의 눈치를 보는 것도 빼먹지 않으면서.
“저, 고, 고객님. 지금 말씀하신 분께서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하시는데. 아, 그, 해변에서 자다가, 입…….
“입 돌아가기 전에.”
“네, 입 돌아가기 전에…….”
“방 하나 비워 두라고요. 아니면, 바다에 퐁당 빠져서 죽게 내버려 두던가.”
“방 하나 비워 달라고 하셨……. 그, 바다에 퐁……, 당 빠져서 죽겠다고 하시는데요.”
죽겠다고 한 건 아닌데. 조금 와전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 전달한 셈이니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곧, 전화를 끊은 직원이 쭈뼛거리며 태주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재차 헛기침을 하더니 각방들의 카드 키가 담긴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꽤나 머쓱한 듯했다. 그가 조심스레 태주에게 물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해 드릴까요?”
그의 질문에 당당하게 답했다.
“네.”
그래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미친놈이.
객실은 크고 넓었다. 집에 있는 것만큼이나 널찍하고 부드러운 침구가 아주 만족스럽다.
손으로 침구를 쓸었더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착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만 같다. 오랜만의 호텔인 데다가 시설도 꽤나 좋았고, 무엇보다 테라스를 통해 보이는 바다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태주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눈에 담았다. 갈매기가 하늘을 배회하며 우는 소리와 파도가 해변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합주하는 악기처럼 말이다. 덕분에 여러 생각이 엉켜 있던 머리가 단순해졌다.
홀로 서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역시나 추웠다. 활짝 열어 둔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해변을 거닐어서 옷이 축축해져 버렸다. 일단 한쪽에 벗어서 개켜 두고 샤워 가운을 걸쳤다. 달랑 핸드폰과 지갑만 들고 온 터라 갈아입을 여벌 옷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배는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식욕이 뚝 떨어진 채로 계속 굶기만 해서 그런지 배가 고픈 것보다는 얼른 씻고 싶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으니까.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어 내고 싶다. 가운을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전신이 따뜻하게 데워지자 곧 노곤해진다.
태주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가서는 머리도 다 말리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벼락같이 내리꽂는 손바닥이 뺨을 후려쳤다. 어린 태주가 뒤로 나자빠지며 데구루루 굴러갔다. 사고로 온 가족을 잃은 태주에게 사모님이 악에 받친 비명을 질렀다.
‘네가 무슨 염치로 살아남았어!’
사모님의 뒤에 있던 회장님도, 그 뒤에 있던 현우의 형제들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린 태주는 벌겋게 부은 볼을 손으로 가린 채 훌쩍거리며 울어야 했다. 아무도, 태주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 살인자의 자식새끼! 너희 때문에 현우가, 현우가…….’
그들에게 태주의 아버지는 살인자였다. 그들은 태주의 아버지가 빚을 갚기 위해 고의적으로 현우를 납치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그럴 분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이 참담했다. 동그란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현우가 살았어야 했는데.’
회장님이 낮게 읊조렸다. 중환자실에 있는 현우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님은 ‘염치없이’ 살게 된 태주의 운명이, 실은 현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차라리 대신 죽었다면 자신도 좋았을 텐데.
병원 복도, 구석으로 내몰린 어린 태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곁에 있던 이들을 모조리 잃은 태주를, 그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지나쳤다. 하필 그날 비가 왔던 것도, 도로가 미끄러웠던 것도, 사고가 일어난 것도 어린 태주는 모두 다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웅크린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악몽은 태주를 끊임없이 옥죄었다.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또 아무도 없다고. 마치 주제를 알라는 것처럼 경각심을 일깨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태주는 스스로를 깎고 잘라 제 주제에 맞는 크기로 만들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더라도 말이다.
그건 어쩌면 태주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였을 것이다. 그날 그 병원에서처럼, 장례식장에서처럼, 곁에 아무도 없더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 * *
‘아…….’
베개가 축축했다.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베갯머리가 젖어드는 감각에 태주는 눈을 끔뻑거렸다. 갓 잠에서 깬 터라 눈앞이 흐려진 상태였다. 희뿌연 시야가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 방 안이 마치 한밤중처럼 어두워서 더 그랬을 것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악몽을 꾸는 바람에 눈물이 났다.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데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정말 싫었으니까. 정말 다행이다. 아무도 없어서. 정말로, 정말 다행이다. 아무도…….
울컥 터지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개새끼, 나쁜 새끼.’
혼자서도 괜찮았는데, 지금까지 잘 버텨 왔는데 이제는 괜찮지 않아졌다. 이게 다 그 진상 놈 탓이다.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거였다. 그가 보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다. 절대 아니었다.
“형.”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태주의 볼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았다. 그것이 축축하게 젖은 볼과 눈가를 어루만지며 닦아 내 주었다.
“형, 몸이 뜨거워요.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참으로 뻔뻔했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다른 스페어 키가 있었던 건가. 태주는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흐렸던 시야가 차츰 밝아진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리고, 왜인지 서늘했다.
그러나, 눈앞에 그가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태주의 눈앞에서 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이다. 그가 태주의 이마에 올린 물수건을 가져다가 눈가와 볼을 닦아 주었다. 방금 적신 것인지 수건이 적당히 차갑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나 봐요. 일단, 병원에―.”
태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의 팔을 잡았다.
“……너.”
그에 그가 그대로 멈추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동자에 태주가 오롯이 담겼다. 그 안으로 투영된 자신의 모습은 지금 어떨까. 화가 난 것처럼 보일까, 아니면 불안에 떠는 것처럼 보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너, 누구야?”
“형…….”
그가 손을 뻗어 태주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 몸보다 그의 손이 더 뜨거웠다. 내내 얼어붙었던 몸이 그 체온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형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담담한 말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태주의 손을 꽉 잡은 채 말을 이었다.
“계상진이든 김현우든 아무 상관 없어요. 형이 원하는 대로 살게요.”
그의 눈동자가 젖어들었다. 삽시간에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입가에 머무른다. 태주는 그가 소리 하나 없이 우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형이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어요. 계상진이 좋다면 계상진으로 살게요. 만약, 김현우가 좋다면 김현우로 곁에 있을게요.”
“내가 다 싫다면?”
그가 우는 모습이 왜 이다지도 마음이 아픈지.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인데, 슬퍼할 사람 역시 자신인데. 그런데도 그가 더 슬퍼 보였다. 절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무거워진다.
“형이, 형이 다 싫다면…….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괴로움과 슬픔으로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눈동자가 흔들린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이불을 적셨다.
“형이 다 싫다면, 다른 사람으로 다시 올게요.”
“다른 사람으로?”
“네. 형의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계상진도 김현우도 버릴 셈이야?”
“형이 싫다고 하면 다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곁에만 있게 해 주세요.”
눈물로 얼룩진 그의 볼이 태주의 손등에 닿았다. 꽉 잡은 손을 놓지 않고는 손등에 볼을 가져다 댔다. 미세하게 경련하는 그의 얼굴이 느껴진다. 겨우겨우 참고 있는 울음이 이내 넘쳐흐르는 듯했다.
“형, 저는 형밖에 없어요. 정말이에요.”
“상진아.”
“의식이 돌아왔을 때도 형 생각만 했어요. 빨리 보고 싶었어요.”
손등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태주는 애원하는 그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자신이 뭐라고.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대체 뭘까.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상진아.”
“처음부터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상진아, 진정해.”
“형, 김현우가 싫으면 그날 죽은 거로 해도 돼요. 저 때문에 형이 힘든 건 싫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태주는 자리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정말 열이라도 나는지 어질어질했다. 삐걱거리며 상체를 들자, 그가 태주를 부축했다. 훌쩍거리며 우는 그의 모습이 어릴 때의 현우와 닮아 있었다. 아니지, 이 상황에서는 닮았다고 하면 안 되는 거겠지. 그가 현우니까.
“야, 김현우.”
태주는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의 정수리 부근을 꽝 내리찍었다. 꽤나 둔탁한 파열음이 세게 났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상체가 침대 위로 무너졌다.
“악!”
싱싱한 비명은 덤이었다.
“아파?”
“아, 아파요……. 형, 아파요.”
“너, 내가 뭐라고 했어.”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채로 그가 태주를 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뭐, 뭐라고……. 했죠?”
“재수 없게 죽는다는 소리 하랬어, 하지 말랬어.”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닦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하지 말랬어요.”
“그런데 죽는 게 낫다니. 죽을래, 진짜?”
“잘못했어요, 형.”
그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태주는 덩달아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스스로를 버리고 죽여 가면서 곁에 있겠다는 놈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저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진상이 가엾고도 고마웠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자신의 곁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남겠다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건……. 태주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형도, 형도 바다에 퐁당……, 빠져서 죽겠다고 했으면서…….”
빠져서 죽겠다고는 하지 않았거든. 억울해라. 말이 와전된 것뿐이었다. 굳이 정정하지 않은 건 태주의 마음이었지만.
“그게 무서워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네…….”
“그럼, 내가 죽겠다는 소리 안 했으면 안 왔겠네.”
“아니에요, 이미 여기로 오고 있었어요.”
태주는 도리질을 치며 해명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나만 더 묻자. 정말 처음부터 속이려던 게 아니었어?”
“네, 형. 정말이에요. 형이 날 바로 알아볼 줄 알았는데 못 알아봐서…….”
“야, 널 마지막으로 본 게 몇 년 전인데. 그리고 난 네가 죽은 줄만 알았어.”
만약 현우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든 찾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든가. ‘계상진’은 또 뭐고 진상 짓은 왜 했어.”
“김현우라는 이름이 명이 짧다고……. 아버지가 사 온 이름이에요.”
“그래서 이름을 바꾼 거야?”
“아직 바꾸지는 않았지만, 집에서는 그렇게 불러요.”
참나. 웃긴 노릇이다. 멋대로 지은 이름인가 했는데 결국 본인의 이름이 맞긴 했던 거였구나.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회장님이 사주까지 보고 이름을 지어 오다니 상상 밖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만약 현이가 그랬다면……. 자신도 당장 더 좋은 이름으로 지어다 주었을 것이다.
“……형, 잘못했어요.”
“뭘?”
“슬프게 한 거, 울게 한 거, 괴롭게 한 거 전부요…….
지금 얼굴만 보면 나보다 댁이 더 슬퍼 보이고 괴로워 보이는 데다가 눈물범벅입니다만. 태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자, 그가 놀란 눈으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게, 빨리 좀 오지.”
“이미 근처에 있었어요.”
태주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그가 쭈뼛거리며 답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위치……, 추적 프로그램으로…….”
“……설마, 내 핸드폰에 깔았냐?”
“…….”
“이 미친놈이!”
차라리 부정이라도 좀 해라. 꽉 쥔 주먹을 다시 허공에 들고 부들거리다가 다시 한번 정수리를 가격했다. 계속 때렸더니 이제는 제 손도 아팠다. 그래도 몇 대 때리고 나니까 답답했던 울분이 가시는 느낌이 들어서 개운했다.
“예전의 현우는 이런 짓 안 했는데.”
상진인지 현우인지 하는 놈이 움찔거렸다.
“우리 현우는 엄청 귀엽고 착해서 이렇게 음침하고 스토커 같은 짓은 절대 절대 안 했는데 말이지.”
“……형. 저, 현우인데요.”
그가 불만이 묻은 얼굴로 씰룩거리더니 중얼거리며 반박했다. 그래서 옳다구나, 쏘아붙여 주었다.
“뭐? 너, 개진상이잖아. 네가 현우일 리가 없지. 우리 현우는 엄청 착하고 귀엽고 거짓말도 안 하고 얼마나 순수한데. 누구처럼 스토커 짓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거나 숨긴다거나 그러지 않거든.”
“…….”
“우리 현우는 허락도 없이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하거나, 나 잠 못 자게 하려고 온 동네 숙박업소 다 예약하는 미친놈이 아니거든.”
“…….”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지금 저 인간 표정이 너무 웃겨서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싶었다. 태주는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이불을 끌어당겨서 가려 버렸다.
“……그럼, 현우로 할게요. 형이 현우를 더 좋아하니까.”
얼굴에서 서운함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은 계상진에 가까운 거겠지. 아무리 이름이 두 개래도 이중인격도 아니면서 왜 본인 어린 시절에 질투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별난 놈.
“그래? 현우로 할 거야?”
“네, 그럴게요.”
“그러면―.”
이불을 내리고 그의 볼에 손바닥을 대었다. 쥐고 당기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끌려 온다. 태주는 지척까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고개를 틀었다. 그러곤 무방비하게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눈물이 고였던 입꼬리가 짭짜름하다.
그의 입안을 부드럽게 핥으며 부러 소리를 내었다. 쪽, 츄웁, 츕. 얌전하던 혀뿌리까지 감아 올리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태주는 자연스레 침대 위로 올라오려던 그의 어깨를 양팔로 막아서 밀어 버렸다.
“말했잖아. 현우랑은 이런 거 못해.”
“에?”
“김현우로 한다며. 그럼 나는 너랑 이런 거 못해.”
솔직히 지금도 조금 위험했다. 아직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현우는 어리디어린 아이인데, 현우와 키스를 한다고 생각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 돋았다. 예비 범죄자가 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혀엉.”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매달려 왔다. 태주로서는 피한다고 몸을 뒤로 물렀으나 그의 팔이 너무나 길었다. 어느새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게, 어디서.
“야.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까불지 마.”
“혀엉, 그럼 계상진으로 할게요.”
“계상진? 그 스토커? 그 미친놈?”
“아니, 아니. 그럼…….
거머리처럼 붙어 오는 그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그런데도 놈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자신의 힘으로는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태주는 그가 밀려오는 대로 침대에 풀썩 넘어졌다. 덕분에 흐트러진 샤워 가운이 벌어져 조금 추웠다. 어깨를 살짝 떨자, 상진이 옷깃을 여며 주었다.
“빨리 좀 오지.”
“정말 근처에 있었…….”
“아니, 이 멍청아.”
침대에 눕혀진 위로 그의 얼굴이 보인다. 그가 자신의 위에 엎드린 채 얌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주는 상진을, 아니,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컸네, 진짜. 의식하고 나니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 있는 것도 같다.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오지 그랬어.”
“……형.”
좀 더 일찍 오지, 빨리 오지. 그랬다면, 네가 곁에 있었다면 행복했던 기억들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텐데.
“현우야, 내가 보고 싶었어?”
“네, 형.”
“그런데, 왜 더 빨리 오지 않았어.”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재활이 오래 걸렸어요. 미안해요, 형.”
상진의 몸이 무너지듯 태주의 품에 안겼다. 태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상진이 비비적거리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닿는 살갗이 다시금 축축해진다. 태주는 손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깨가 경련하며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형, 늦게 와서 미안해요. 저도 빨리 오고 싶었어요.”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그건.
“형은 제 전부예요. 깨어나자마자 형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형이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태주에게 왜 살아 있느냐고 질책했는데, 그만은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저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눈 끝으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따뜻한 것이 관자놀이를 타고 귓바퀴를 적셨다.
“현우야.”
태주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는 태주의 모습을 본 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다. 자신이 우는 모습만 보면 저런 표정이다. 상진이도 현우도 똑같았다.
태주는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던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점점 차오르는 숨이 가슴을 들썩이게 만든다. 태주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많이 컸다, 우리 현우. 언제 이렇게 컸지.”
“형…….
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어이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눈앞을 가로막는 눈물이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든다. 태주는 몇 번이고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어 그것들을 떨쳐 내려 했다. 그에게 할 말이 있다. 꼭 해야 할 말이.
“현우야.”
그가 태주의 말을 기다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미 엉망이 된 그의 얼굴에서 태주에게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태주의 볼에 그의 눈물과 제 것이 뒤섞여 온통 젖게 되었다.
“현우야, 미안해.”
“왜 미안해요, 형이.”
“우리 아빠가, 너를…….”
울음이 말을 가로막는다. 천천히 이어 가던 말이 드문드문 끊기고야 말았다. 그래도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태주는 마구잡이로 날뛰는 숨을 달래 가며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낮아지더니 곧 태주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게 마주 닿은 입술이 달래듯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부드러운 살갗이 마주 붙었다가 떨어진다. 숨을 뱉어 내며 헐떡이는 태주의 입술 위로 상진의 입술이 닿았다. 따뜻했다.
“형.”
감았던 눈을 뜨니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매가 둥글게 휜 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사고였어요.”
“……현우야.”
“아저씨의 잘못도, 형의 잘못도 아니에요. 누구의 탓도 아닌걸요.”
태주가 내내 짊어졌던 모든 죄책감과 마음의 짐이 툭, 어깨에서 풀어졌다.
“형, 그건 사고였어요. 빗길에 차가 미끄러졌잖아요.”
맞다, 사고였다. 비가 많이 왔고, 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우리가 탄 차는 으스러지고 말았다.
“형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우연한 사고였는걸.”
현우는 마치 자신을 다독이듯이 계속 말을 반복했다. 그 일은 사고였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자장가를 불러 주듯 되풀이했다. 기어이 자신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까지.
“맞아, 그건 사고였어.”
“네, 맞아요.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현우야.”
그래도, 태주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미안해, 현우야.”
“형, 저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와는 달리 그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저는 아저씨가 밉지 않아요. 아저씨와 현이, 그리고 형이 없었다면 저는 진작 망가졌을 거예요.”
현우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 일은 모두 사고였어요.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누군가는 태주의 아버지 탓이라고 했다. 돈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태주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현우도 깨어나지 못하고 가족들도 잃게 된 것이라고.
그런데, 오직 그만은 자신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다. 그 사고로 인생의 반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그를 볼 낯이 없어 태주는 그만 눈을 꾹 감았다.
“태주 형. 저는 형만 있으면 돼요.”
태주의 뺨 위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가 닦아 주었다. 현우가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섞어 왔다.
“……읏. 하지 마.”
“왜요? 저 지금은 상진인데.”
“웃기고 있네.”
저 좋을 대로 우기고 난리다. 태주는 자꾸만 입을 맞추려 다가오는 그를 막아 내었다.
“읍……. 잠, 깐. 나 아직 현우한테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댔다. 그런데,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내내 알고 있던 계상진의 얼굴이었는데 가만 보니 현우도 있는 것 같아서. 뭐야, 이게. 정말 혼란스럽다.
현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만약 만나게 된다면 이 말도 해 주고 싶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되었네, 이게 다 개진상 덕분이지. 조금 심술이 나서 놈의 정수리를 한 번 더 내리쳤다. 그러자 그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자 더 쉽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서서히 들리는 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술에 미소가 그려지고 눈동자에는 반사된 빛이 어른거렸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더니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었다. 손등 위로 연거푸 입술을 내리던 현우가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버텨 줘서 고마워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그만 엉엉 울었다. 꼴사납게도 말이다. 바보처럼 울고 있는 자신을 그가 품에 안았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꽤나 오랫동안 떨어지질 못했다.
* * *
해변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멀찍이서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어제와는 달리 춥지 않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날이 개었는지 창밖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붕어.”
언제 깼는지 현우, 아니, 상진이 태주를 보고 있었다.
“누구보고 붕어래.”
“형, 눈 엄청 부었어요.”
“누구 때문인데. 그래서 싫어?”
“아뇨, 완전 귀여워요.”
태주는 배시시 웃는 그에게로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랬더니 여지없이 감겨 온다. 상진이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태주의 몸을 더듬었다. 입술을 쪽쪽 맞추면서도 자연스레 엉덩이로 손이 가고 있었다.
“야, 김현우.”
“저 계상진 할래요.”
“까분다. 안 돼, 손 떼.”
단호하게 말하자 슬금슬금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근처에서 맴돌 뿐 완전히 떼어 내지는 않고 있었다. 잔머리 굴리기는.
“방금 뽀뽀는 하게 해 줬으면서…….”
“뽀뽀할 때는 상진이로 보였어.”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현우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 마음이야. 토 달지 마.”
태주가 엉덩이 부근에서 배회하던 그의 손목을 낚아채 이불 밖으로 빼 버렸다. 옛날에는 귀여웠는데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을까. 지금까지 그와 했던 스킨십들을 떠올리기라도 하면 얼굴이 화끈했다. 어휴, 현우랑 그런 짓이라니.
“형, 일부러 저 놀리는 거죠…….”
“아닌데.”
사실은 맞다. 놀리는 거였다. 몇 개월 동안 속은 게 조금 억울해서 이렇게라도 놀리고 싶었다. 앙금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이 재미로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매달려 오는 게 어찌나 재미있는지.
“상진아, 나 배고파.”
“배고파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어제 첫 끼니였던 곰탕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고 그 후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질 못했다. 입맛이 없기도 했고……
“뭐 먹고 싶어요? 형이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우리.”
뭘 먹으려면 침대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 이불 안으로 겹쳐진 그의 온기가 따스해서 태주는 외려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귀를 대자 쿵, 쿵,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형?”
“잠깐만.”
정말 살아 있었구나. 꿈이 아니었어. 어찌나 다행인지. 그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태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또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나 입을 옷이 없는데.”
어제 짐도 챙기지 않고 내려왔던 터라,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속옷은 물론이고 상하의도. 어제 입었던 옷가지가 있긴 하지만 거센 바닷바람에 축축해져서 입고 싶지가 않다.
“옷 챙겨왔어요.”
“어?”
그가 손가락으로 방의 한쪽 구석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저건 또 언제 챙겨 왔대. 하여간 준비성 하나는 철저한 놈이다.
“더 자고 싶어요? 쉬다가 나갈까요?”
“아니야, 나가자. 배고파.”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 방도 분명 공기가 훈훈했는데, 그의 품에서 떨어지자 춥게만 느껴졌다. 흐트러진 샤워 가운을 여미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 먼저 씻을게.”
태주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욕실 앞에 섰는데 상진이 뒤에 딱 붙어 있었다. 그러더니 너무나 당연하게 욕실로 함께 들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같이 씻어요, 형.”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기대감에 한껏 들뜬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딜 감히. 분명 샤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를 노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나가.”
“혀엉…….”
“귀여운 척 해도 소용없어.”
“귀여운 척 안 했는데.”
“말꼬리 늘였잖아.”
“말꼬리 늘이면 저 귀여워요?”
그가 배시시 웃었다. 아, 자존심 상하는데 좀 귀엽긴 했다. 현우라는 걸 알고 나니 더 귀엽게 보이는 듯도 했고. 태주가 애써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내려는데 그럴수록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야! 좀!”
“형, 같이 씻어요. 네?”
“싫어!”
한참 동안 실랑이를 했다. 대체 힘이 어디서 나는지 조금도 밀리지를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좀 적당히 져 주면 안 되냐, 이 나쁜 놈. 손을 버둥거리다가 그의 팔을 낚아채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여유롭게 피하더니 도리어 태주의 손을 움켜잡았다. 태주는 그에게 양쪽 손목을 잡힌 채 한쪽 벽으로 몰리고야 말았다.
“야! 김현우!”
그가 오른손으로 태주의 오른 손목을 잡고, 왼손으로는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벽에 가져다 대자 태주의 손등이 벽에 마주 닿았다. 순식간에 결박당한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다정하게 불러줘요, 형.”
“너 같으면 지금―.”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왔다. 엄지와 손 전체를 감싸 쥐고 서서히 올라오더니 금세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요?”
저건 분명 계상진이다. 우리 현우가 이럴 리가 없어. 능글맞게 웃고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척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들야들한 손가락 사이를 그의 손가락이 은근슬쩍 비벼 대었다. 뭔데, 깍지는 대체 왜 끼냐고!
“야, 계상진.”
“네, 형.”
“이거 놓으라니, 읏!”
마주 닿은 손바닥 사이로 그의 엄지가 파고들었다. 손끝을 세워 중앙을 세로로 긋자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터졌다. 간지럽기도 하고 야릇한 느낌이었다.
“형, 여기 기분 좋아요?”
“그거 하지 마! 으읏, 이상하다고.”
“귀여워요.”
이때다 싶었는지 상진이 아래를 슬쩍 붙여 왔다. 태주의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가 들어오더니 중심을 지그시 누른다. 몸을 흠칫 떨며 피하려 해도 뒤로는 벽에 막혀 있었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질어질한 시선 아래로 그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단단해진 그의 것이 그 허벅지 부근에서 도드라지고 있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처음이 어렵고 그다음부터는 쉽다고 하더니 전혀 아니었다. 역시나 그것이 파고들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금세 몸이 달아오를 것만 같다.
아니, 남은 기껏 참고 있는데 왜 이렇게 건드리냐는 말이다. 그가 현우라는 걸 알게 된 게 고작 어제였다. 그러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지금 여기서는 하고 싶지 않다고!
“개짜증나, 계상진!”
태주는 순간 성질이 확 나서 발뒤꿈치로 그의 발등을 꽝 찍어 버렸다.
“악!”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발등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정말 세게 찍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통 떨어지질 않으니까 말이지. 그가 엉덩방아를 찧고 데굴데굴 구르는 동안 욕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 *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횟집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바다까지 왔는데 회는 먹어 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간 일에 치여서, 빚을 갚느라 여유가 없어서 여행도 하질 못했었다. 바다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와서 내내 울기만 했던 것 같지만.
해변에서 조금 걸으면 포장마차들이 쭉 늘어선 곳들도 있었다. 그곳에 갈까 했는데 상진이 한사코 그곳은 안 된다고 우겨서 그냥 이곳으로 왔다. 포장마차와는 달리 무척 고급스러운 횟집이었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인원수를 묻고 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각 테이블은 개별 공간처럼 꾸며져 있었고 자리에 앉으면 유리창을 통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이런 거 자꾸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익숙해져서 큰일이다.
“새우 들어간 건 다 빼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미리 골라 둔 메뉴를 상진이 주문했다. 둘 다 새우를 못 먹는 터라 아예 주문하면서 요청을 해야 했다.
“나 새우 못 먹는 건 어떻게 기억했어?”
“형에 대한 건 다 기억해요.”
“말도 안 돼.”
“정말인데.”
먼저 나온 반찬들을 집어 먹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다른 거 기억하는 것도 있어?”
“네, 형―”
“아, 감사합니다.”
회도 금방 나왔다. 빛깔만 봐도 신선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회는 제철에 먹어야 한다. 군침이 돌아 침을 꿀꺽 삼키는데, 테이블에 자리가 모자라서 직원분이 반찬들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형,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점 있잖아요.”
“어? 아, 야, 그런 거 말고 다른―”
“그리고 왼쪽 엉덩이 바로 아래에도 점이 있어요.”
“아니, 야!”
직원분에게 그런 쓸데없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냐고! 태주는 목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은 채로 그에게 도리질을 쳤다.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었는데. 테이블을 세팅해 주던 직원도 퍽 민망했는지 대충 회를 놓고 금세 자리를 떠났다.
“야, 계상진.”
“지금은 김현우인데.”
“사람들 있는 앞에서는 말 좀 조심해. 창피하잖아.”
“뭐가요?”
“아니, 이상하게 볼 거 아니야.”
“뭐가 이상해요?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랬던가.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랬던 것도 같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그냥 계상진이었으면 모를까, 현우와는……. 아, 모르겠다. 머리가 또 복잡해지고 말았다.
태주가 답이 없자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흐른다. 너무 길어지지 않을 즈음에, 상진이 회를 세 점 집어서 태주의 접시에 올려 주고는 말을 건넸다.
“형이 저한테 사랑한다고 했어요.”
접시에 오른 회를 먹다가 사례 들려서 컥컥 기침을 했다.
“뭐? 내가?”
그런 적 없는데. 언제 했지. 술에 취해서 했었나. 아무튼 기억에는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언제? 그런 적 없는데.”
“형이 제 머리를 세 번 쓰다듬었어요.”
“내가?”
그런 적 없었다. 정말 억울하다. 한 번 정도는 쓰다듬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쓰다듬은 적은 없었고 사랑한다고 한 적도 없었다. 이래서 술을 끊어야 한다. 도통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말이다.
“형이 제 머리를 세 번 쓰다듬으면 꼭 사랑한다고 해 줬어요.”
그가 전복을 태주의 접시에 올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울면 항상 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해 줬어요.”
이번에는 밑반찬 몇 개를 집어다가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가 태주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 가득 태주가 담겼다. 그것이 어렸던 현우의 전부였다. 부모도 가족도 그 누구도 아닌, 태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그의 전부였다.
“내가 그, 그랬었나.”
태주는 마주쳐 오던 시선을 무심코 피했다. 곧바로 뻗어 오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한 듯했다. 그때는, 현우를 정말 친동생으로 여겼었으니까. 매번 그 집에서 겉돌던 아이였다. 우는 일도 잦았고 무척이나 소심했던 기억이 난다. 사랑 받는 법도 배우기 전에 밀려나는 법부터 배웠던 아이였다. 그런 어린 동생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도 먹어요, 형.”
상진이 팔팔 끓는 매운탕을 덜어서 앞에 놔주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있었다. 회도 신선하고 반찬들도 다 정갈하다. 역시 비싼 곳이 좋긴 좋네.
“너도 좀 먹어.”
“저 많이 먹고 있어요. 전 형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네가 내 엄마냐.”
“형도 저한테 그랬었는데. 나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맨날 양보해 주고.”
고사리 같은 그의 손을 잡고 동네 구멍가게에 자주 들렀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조금씩 모아서 현우와 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곤 했었다. 나는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차가운 건 싫다고 둘러대고 동생들에게 먼저 맛있는 것을 사 주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전인데 그걸 또 기억하는구나.
“그럼 내가 네 엄마네.”
장난으로 툭툭 던졌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확 굳어 버렸다.
“아니에요.”
“왜 아니야?”
“자꾸 가족으로 묶지 마세요.”
“왜?”
아니, 뭐가 또 불만인 거냐.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매운탕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칼칼하니 좋네.
“전 형이랑 애인하고 싶어요.”
“큽, 크흡, 쿨럭.”
매운탕이 코로 나올 뻔했다. 매운 음식이 코로 나오면 황천길 직행하는 거라고. 그런 고통 따위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너무 추하잖아. 급히 물을 마시며 목을 달래야 했다.
“왜 놀라요? 우리 이미 할 거 다 했―”
“야! 야!! 너 좀!!”
“……형, 계상진 몸은 잘만 더듬으면서…….”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어제 잘 때도 계속 더듬으면서 상진이만 찾고……. 현우는 안 찾고…….”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계상진이 나고 김현우도 나인데, 언제까지 내외할 거예요?”
“시끄러워!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나는 아직 혼란스럽거든?! 분리가 덜 됐으니까 좀 기다려!”
밖으로는 들리지 않게 최대한 조용조용 소리를 질렀다. 입만 빠끔거리는 수준이니 홀 직원들에게 들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그가 얌전히 답했다. 그렇지만 태주는 저 진상 놈의 인내심이 그리 길지 못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내일쯤 되면 합체되었냐고 재촉할 게 뻔하다. 아니, 그리고 아직 뭐 사귀는, 어? 그런 사이도 아닌데, 왜 저렇게 마음이 급한 걸까. 웃기는 놈.
바글바글 끓고 있는 매운탕을 몇 숟가락 더 먹는데, 홀 직원이 접시를 하나 들고 왔다. 아까 주문을 받고 음식을 세팅했던 직원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옷이 조금 더 고급스러운 걸 보니 그보다 높은 사람 같아 보였다.
“서비스입니다.”
지금 차려진 상만 다 합쳐도 돈깨나 나올 듯했다. 그래서 서비스를 주시는 거겠지. 일단 감사하다며 접시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접시에 담겨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대하였다. 접시를 건네받은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직원이 말을 덧붙였다.
“제철인 대하로 만든 대하전입니다.”
기껏 준비해 주셨는데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그렇지만 받아놓고 먹지 못하는 것보다는 아예 물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에게 새우를 먹지 못한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가 이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냥 받자마자 괜찮다고 거절할걸.
“맛있어 보이긴 하네.”
이 시기에 대하가 제철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새우를 먹지 못해서 별 관심이 없었던 탓이었다. 접시에는 고운 빛깔의 전이 여러 장 담겨 있었다. 맛있어 보이긴 하지만 먹을 수가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어쩌지, 우리는 못 먹잖아. 다시 말씀드릴까? 가져가시라고.”
“괜찮아요. 받자마자 도로 가져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나가면서 설명하죠, 뭐.”
하필 또 둘 다 새우를 못 먹는 바람에 서로 민망하게 되었다. 새우 알레르기는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갑자기 없어지기도 한다던데. 나는 대체 이놈의 알레르기가 언제 사라지려나. 대하도 먹어 보고 싶긴 했다. 맛있다던데.
“현우야.”
“네?”
밥을 한 숟갈 뜨며 물었다. 접시에 담긴 대하를 보니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그에게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전에 집에 오셨던 분 말이야. 가끔 돌봐주러 오신다던.”
“아, 네.”
“너 새우 못 먹는 거 아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새우도 못 먹는 사람한테 왜 굳이 새우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해 주는 걸까. 그때에도 꺼림칙했지만 곱씹을수록 더 그랬다. 지난번 회장님의 저택 앞에서 만났을 때는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너무나 덤덤하게 답하는 그를 보며 태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새우가 들어간 죽을 해서 주시는 거야? 못 먹는 건 피해서 주셔도 될 텐데. 어차피 버릴 거 아깝잖아.”
회를 한 점 집어먹던 그가 젓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혹시 괜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지 뒤늦게 후회가 되긴 했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 말을 꺼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시잖아요, 형. 저 미움 받는 거.”
“어?”
“예전이랑 똑같아요. 제가 사고를 당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촉촉해진 눈망울이 태주의 주위를 맴돌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투명한 물이 투둑 떨어질 듯했다.
어린 현우와 겹쳐지는 상진의 얼굴이, 그의 처량하고 슬픈 얼굴이 마음을 들쑤시는 것만 같았다. 죽다가 겨우 살아난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설마 일부러 해다가 주시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몇 번 말씀은 드렸었는데…….”
“그분에게 말했었어?”
“말했었죠. 그런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모님이 관리한다고 들었다. 아주 예전에 들은 이야기긴 했다만. 어릴 적의 단칸방에서 아버지가 종종 투덜대던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너도 좀 더 강하게 나가.”
“저요?”
“응.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 이제 어린아이도 아니잖아.”
“…….형, 화났어요?”
상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검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모아진다. 그는 순수하게 놀라고 있는 듯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며 태주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태주는 그 모습이 꼭 어릴 때의 현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응, 화났어.”
“저한테요?”
“아니, 네 주변 사람들한테!”
그는 어쩌면 조금씩 격앙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낯설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화가 났다. 대놓고 차별 대우를 하거나 밀어내려고 애를 쓰는 사모님이나,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회장님이나 다 똑같다. 결국 피해는 온전히 그의 몫인 거다.
“회장님도 사모님도 다들 너무하신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네. 새우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새우 먹으면 큰일 나는 거 모르신대?”
태주는 몸이 간지러운 정도였지만 정도가 심한 사람은 기도가 부어서 호흡곤란이 오기도 한다. 잘못 먹었다가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지경이란 말이다. 그걸 모르실 분들도 아니고, 알면서도 매번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앞으로는 새우 죽 보내지 마시라고 해! 그리고 그 돌봐 주시던 분도 그만 오시라고 하고.”
“그렇지만…….”
상진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미적지근하게 굴었다. 그걸 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가족이란 인간들이 얼마나 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데에 혈안이었으면 저럴까. 본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축 처지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현우와 겹쳐졌다.
어릴 때도 눈칫밥 먹던 녀석이 다 커서도 저러니까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계상진은 진상에 뻔뻔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는데 그가 현우라는 걸 알고 나니 지금 그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그 꼬마 시절부터 내내 무시와 차별을 당했으니 오죽할까.
“뭐가 ‘그렇지만’이야. 그분 없어도 되잖아, 이제.”
“……네? 왜요?”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 안에 태주가 비추어진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빽 소리를 지르듯 입을 열었다.
“내가 있잖아!”
“……형이요?”
“고구마 먹었냐? 어차피 이제 내가 너랑 같이 사니까 굳이 오실 이유도 없잖아. 혹시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케어해 주면 되고. 밥 먹는 것도 같이 해 먹으면 되고!”
그가 쭈뼛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저랑 같이요?”
“응, 너랑 같이. 지금도 같이 살잖아, 우리.”
“아, 그렇네요. 우리 이제 같이 사니까요.”
내내 시무룩해 있던 그가 마침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겨우내 시들었다가 봄볕에 피는 화사한 꽃처럼 말이다. 그의 해사한 웃음을 보고 나니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당장 말해. 알았어?”
“네, 형. 그럴게요. 오늘 연락해서 오지 말라고 할게요.”
“아니, 지금 당장! 나 화장실 다녀올 동안 해 놔.”
“알았어요. 천천히 다녀와요.”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주가 화장실을 찾아 나가는 동안, 그 뒷모습을 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태주의 뒷모습이 곧 사라지고. 그러고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그의 말대로 토독톡 메시지를 전하는 중이었다.
간략한 텍스트를 적어 둔 채로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이제 태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오피스텔을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단둘이었다. 태주와 자신, 딱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된 셈이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들린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에는 햇볕이 보석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예쁘다, 고 생각했다. 제 인생에 빛을 뿌리는 태주처럼 말이다.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술과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다.
창밖으로 던졌던 시선을 거두고 서비스로 받았던 접시를 바라보았다. 노르스름한 빛깔의 대하전이 먹음직스럽다. 그는 가장 아래에 깔린 대하전 하나를 조심히 뒤적여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안에서 사르르 녹는 식감과 풍미가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그것을 꿀꺽 삼키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대하전이 담겼던 접시는, 누군가 손을 대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대로였다.
* * *
겨울의 바다는, 이제 처음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처음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혼자 거닐던 해변을 둘이서 함께 걸었다. 어제는 바람도 짜고 추웠는데 오늘은 뽀송하고 따뜻했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날씨 좋다.”
태주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겨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쨍한 햇볕이 바다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두고 그와 함께 걷고 있었다. 자박자박, 신발이 고운 모래 알갱이를 스치며 간지러운 소리를 내었다.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바로 옆에서도 자박자박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하루 전만 해도 다 끝난 것만 같았는데.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고독과 외로움에 사무쳤는데 말이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이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가 곁에 있었다.
“형, 기분 좋아 보여요.”
“그래?”
“네. 그래서 저도 기분이 좋아요.”
“내가 기분이 좋으면 너도 기분이 좋다고?”
“네.”
뭐야, 그게. 하고 웃었다.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개수작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현우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 혹시 아픈 곳은 없지?”
“없어요.”
“어디가 이상하면 바로 말해. 알았어?”
“알았어요, 형. 걱정하지 마요.”
저번에 쓰러졌던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뒤통수 쪽에 만져지던 상처들도 모두 그 사고로 인해 생겼을 터였다. 손끝에 아직 그 우둘투둘한 감촉들이 남아 있었다. 속이 쓰리고 아팠다. 그 못지않게 마음이 타 들어가는 듯했다.
“형, 무슨 생각해요?”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바로 눈치챘는지 그가 물어왔다. 눈썹을 기울이며 걱정을 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걸까, 조그만 게. 조금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가 찼다.
“너 건강해지려면 뭘 챙겨 줘야 하나, 이런 생각 했지.”
“내가 애도 아니고. 걱정 말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불만스레 입술을 툭 내밀었다. 요즘 하루에 한 번씩은 입술이 댓 발 나오네. 또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내 눈썹까지 찡그렸다.
“대체 왜 그러는데? 걱정을 해도 난리냐, 넌.”
“형이 너무 걱정하니까 그렇죠.”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
“저를 너무 아기 보듯이 보잖아요.”
“아.”
그랬, 던가. 허를 찔린 기분이라 나오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려 버렸다. 확실히 그가 현우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자잘한 잔소리들이 부쩍 늘긴 했다.
“바다 진짜 예쁘다.”
“말 돌리지 마세요, 태주 형.”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자연스레 깍지를 끼며 당기기에 흠칫 놀라 버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이다. 황급히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상진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형은 내가 싫어요?”
“어? 아니, 무슨 소리야.”
“징그럽다는 듯이 손을 뿌리쳤잖아요, 방금.”
뿌리친 것처럼 느껴졌을까. 살짝 미안해졌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절대 아닌데, 순간 너무 당황했던 탓이다.
“아니야, 그런 거.”
나란히 걷고 있던 간격이 좁혀졌다. 그가 내 앞을 막아서며 한쪽 팔을 부드럽게 쥐었다. 똑바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뜻하는 바는 노골적이었다. 붙잡힌 팔도 그의 시선도, 감히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할 만큼.
태주의 눈길도, 몸도,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야가 상진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전 아기 같은 거 싫어요.”
“갑자기 왜 그래.”
“형에게 아기처럼 보이기 싫다고요.”
또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표현해 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러한, 오로지 애정뿐인 감정은 태주에게는 조금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계상진에게도 완벽히 녹아들지를 못했는데, 현우까지 겹쳐지니 더욱 마음이 복잡할 따름이다. 조금 더 시간을 주면 좋겠지만…….
“태주 형.”
팔에 닿은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팔꿈치를 거쳐 천천히 소매 자락을 잡고 이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움찔거리며 닿아 오는 그의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
“열다섯 해를 넘겼어요.”
태주는 순간 제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입에 시간이 담긴다면, 태주로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까맣게 타들어 갔을 그의 속내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형을 다시 만나기까지, 그 기다린 시간이 열다섯 해를 넘어서 올해로…….”
“열여섯 해네.”
“네, 형.”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병상에 누워 보낸 열 번째 해와 재활과 치료로 보낸 다섯 번째의 해를 넘어서 올해로 열여섯. 그 긴 시간동안 내내 기다렸다고 한다면 차마 그의 얼굴조차 볼 낯이 없었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해요. 조급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형.”
천천히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나의 조각이었던 것이 툭, 떨어져 나가듯이 말이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온기 역시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가 걸음을 뒤로 물렀다. 바짝 다가섰던 틈이 금세 벌어진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소리 없이 빙긋이 웃는 그의 입가가 왜 슬프게만 보일까.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언제까지나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표현해 온 그 감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기다릴 수 있겠어?”
툭, 던졌다. 어느새 나란히 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열여섯 해를 기다렸는데, 그 이상도 기다릴 수 있어요.”
“미친놈.”
“아, 왜요.”
“내가 뭐라고 그렇게 기다려. 너 정도면 다른…….”
―까지 내뱉었다가 바로 말을 바꿨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었으니까.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아니, 어떻게 내내 기다릴 수가 있냐는 말이야.”
“말했잖아요, 제겐 형뿐이라고.”
“그게 이유야?”
“네.”
누군가의 단 하나가 된다는 건 참 낯간지러운 일이구나. 하늘을 보던 시선이 곧 땅으로 떨어졌다. 사부작 밟히는 모래알을 괜스레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그, 뭐냐. ……나도, 너밖에 없긴 한데.”
거의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냐면 바닥에 있는 개미나 들었을 법한 정도였다. 고개를 푹 박고 소곤거렸으니 옆에서 걷고 있는, 심지어 키 차이도 나는 저 덩치가 들었을 리가 없었다.
“뭐라고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거짓말, 방금 나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너무 정확히 듣지 않았냐. 조금 소름이 돋았다. 초능력자인가.
“그, 그런 적 없는데?”
“또 거짓말. 형은 맨날 거짓말해요, 저한테.”
“웃기지 마. 나는 누구처럼 거짓말한 적 없어.”
“저 좋아하면서 안 좋아한다고 맨날 거짓말하잖아요.”
“하! 누, 누가 좋아한다고! 그 자신감은 대체 뭐냐?!”
“저는 형 눈빛만 봐도 알아요. 사랑하니까 알 수 있는 거예요.”
“무슨―”
“사랑해요, 태주 형.”
태주의 목에서 꽃이 피었다. 쇄골부터 천천히 퍼지는 열꽃이 이내 턱을 넘어 얼굴을 삼킨다. 흰 도화지에 물감이 번지듯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온 얼굴을 차지한 홍조가 귓불마저 물들이고 귓바퀴까지 넘어갔을 때에서야 깨달았다.
“이것 봐요. 형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네,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사랑한다는 게 왜 이상한 소리예요? 그럼 매일 말할게요, 이상하지 않도록.”
“미치겠네.”
태주는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해서 물결치는 파도 근처로 다가갔다. 넘실거리던 바다가 해변으로 가까워지며 하얀 거품을 일으킨다. 발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형.”
그가 비틀거리던 태주의 팔을 잡았다. 깊은 곳도 아니고 얕은 곳보다도 더 얕았다. 모래가 바닷물을 머금었다가 뱉는 정도의, 파도의 흔적만 남은 땅이었는데.
“위험해요.”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바다에 빠질까 봐?”
“네,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와요.”
그가 팔을 끌어당기자 태주는 맥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그의 가슴에 잠시 기대었다가 조심스레 떨어졌다. 살짝 닿은 귓가로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이 자신의 안에서 나는 소리인지 그에게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뭐가 위험해. 바닷물이 닿지도 않는데.”
“그래도 위험해요. 멀리 가지 마세요, 형.”
아직 멀지 않은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고작해야 세 발자국 정도 떨어졌을 뿐이다. 손을 뻗으면 닿고도 남을 간격이었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초조함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늘 뻔뻔하게 굴었던 그는, 잠시라도 나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상진아.”
“네, 형.”
“내가 멀리 갈까 봐 불안해?”
한 발자국,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와의 거리는 고작 두 발자국 정도였다.
“네, 불안해요.”
“뭐가 불안해. 내 짐도 전부 네 집에 있잖아.”
“……그래도 불안해요. 언제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요.”
다시 한 발자국, 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제 딱 한 발자국의 간격만이 남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네 곁에 있는데, 그래도 불안하다고?”
“……형은 몰라요.”
“뭘?”
그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눈을 감기 전에는 분명히 곁에 있었는데…… 눈을 떴을 때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그 순간을요.”
그는 담담했다. 어쩌면 지금, 처음으로 그가 제 속내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깊은 절망감이 그의 눈에 어른거렸다. 결국 내내 맞추어 오던 눈동자를 피하며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지금도 눈을 떼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요.”
그가 느꼈을 그 절망감과 비참함을 알고 있었다. 그걸 자신이 왜 모를까.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비단 현우만이 아니었다. 태주 역시 한 순간에 사랑하던 이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와 현이, 현우와 함께 지냈던 찰나가 지나고, 남은 것은 태주뿐이었다. 그때 겪었던 그 참혹한 슬픔을 재차 떠올리기만 해도 아직 온몸이 저릿했다.
“알아, 현우야.”
그렇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더욱 두려웠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뛰어넘어야 했으니까. 무려 열 해였다. 열 해가 지나고 나서 다시 눈을 뜬 아이이다. 그에게 어제의 기억이란 10년 전의 일이었을 테고 눈을 다시 뜬 해에는 열 번의 달력이 바뀌었을 때였다.
시간의 공백이 주는 그 두려움을, 나는 차마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래도 불안해하지 마.”
그를 보며 태주는 미소를 지었다.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였다. 그가 예전의 자신처럼,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지 않기를, 스스로를 도려 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젠 함께 있으니까.
“노력해 볼게요, 형.”
“흠,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네.”
노력은 무슨. 그게 노력한다고 될 일인가.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터득해 왔다. 그를 흘겨보며 혀를 쯧 찼다. 자꾸 불안하다고 하니까 말이지.
“그럼 불안하지 않게 해 줘?”
“어떻게요……?”
“이렇게.”
태주가 그의 팔을 잡아 쭉 끌어당겼다. 방심했는지 그대로 몸이 딸려온다. 앞으로 기우뚱거리며 상체가 숙여진 그의 입술에 쪽, 입술을 맞대었다. 가벼이 부딪힌 입술 새로 그가 숨을 멈출 동안 양쪽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그에게 대롱 매달린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기다렸다는 듯 얽혀왔다.
혀와 혀를 휘감고 질척한 타액을 섞었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살포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속살거렸다.
“사랑해.”
천천히 고개를 떼고 그를 바라보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목에 둘렀던 팔을 서서히 풀며 상진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혀, 형.”
“이제 돌아가자.”
그를 두고 휙 뒤돌아섰다. 그러자 상진이 후다닥 내 곁으로 뛰어왔다. 그러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대번에 내 손에 깍지를 끼며 꼭 그러잡았다. 조금의 공간도 없이 마주잡은 손 안으로 그의 온기가 묻어났다.
“현우가 좋아요, 상진이가 좋아요?”
“뭐? 또 시작이냐.”
“현우를 사랑해요, 아니면 상진이를 사랑해요?”
“아, 또 시작이네. 한번 해 보자 이거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가 환히 웃고 있었다. 밝은 햇살을 담은 그의 웃음이 만면에 퍼지고 있었다. 그걸 눈에만 담아 두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형, 왜 대답 안 해요? 누가 좋아요? 누구를 더 사랑해요?”
“야, 그건―”
태주는 금세 답을 내어주려다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진의 얼굴로 현우가 겹쳐졌다. 그리고 또, 현우의 얼굴에 상진이 겹쳐진다. 김현우도 계상진도, 자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존재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이 한 사람이었구나.
눈꺼풀을 깜빡이자 눈부신 햇살이 수면에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물결에 반사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에게, 그리고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