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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2) (2/8)

목차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2)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2)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하늘이 돌고 땅이 돈다. 제가 도는 건지 얘들이 도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 속 아파. 대충 위장 같은 것이 있을 부근이 너무 따뜻했다. 장기에 핫팩을 붙인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았으나 어지러웠다.

“죽겠네, 진짜. 팀장님은 왜 또…….”

박 부장은 어찌저찌 퇴치를 했는데 이어서 최 팀장이 문제였다. 그는 아예 태주를 옆에 끼고 술을 마셔 대었다. 건배를 거절할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옆에 앉았던 상진을 다른 테이블로 보내 버렸다.

상진은 최 팀장의 지시에 금방이라도 대들 듯했다. 그렇지만 회식 자리에서 싸움이라니. 태주가 일단 어르고 달래서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괜찮아요?”

상진의 목소리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답했다.

“아니…….”

회식은 끝났다. ‘이번 주의 회식’은 말이다. 최 팀장은 마지막 건배 제의를 하면서 ‘다음 주에는 다음 주의 회식이 있다.’며 마무리를 지었다.

정말 끔찍하다. 회식 때문에 퇴사하고 싶어진다는 말, 이제 이해가 된다. 그래도 절대 퇴사를 할 수는 없지만.

“그러게 내가 나가자고 할 때 나가지.”

“나가고 싶었지, 나도.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중간에 도망치려다가 붙잡혔다. 평소에는 서로에게 관심도 없다가 회식 자리만 되면 아주 동료에 대한 사랑이 불타는 듯했다. 누구 하나 빈자리는 어찌 그리들 잘 아는지.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응…….”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섰다.

그런데 순간 보도블록이 내 이마에 박치기를 할 기세로 올라온다. 흠칫 놀라 휘청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다행히 상진이 잡아 주었다. 휴, 이마 안 깨져서 다행이다.

“좀 더 기대요.”

“죽겠다, 진짜……. 넌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전 많이 안 마셨어요.”

“거짓말하네. 너도 꽤 마셨잖아, 나 대신…….”

“그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회식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다. 이런 날에는 유독 귀소 본능 하나는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태주는 늘 그랬듯 모든 인원을 체크하고 한 명 한 명 택시를 잡아 보냈다.

대중교통을 타는 사람들, 누군가 데리러 온 사람들은 보내기가 한층 수월했다. 그리하여 남은 인원은 상진과 태주, 단둘이었다.

“넌 집에 어떻게 가? 택시 잡아 줄까?”

“그런 일을 왜 과장님이 해요. 됐어요.”

이 회사의 모두가 당연하게도 태주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저 인간만 내 할 일이 아니란다. 이거 누구의 말이 맞는 거야, 대체.

취기가 오른 태주가 꼬부랑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떨어지니까 그렇지…….”

“뭐가 떨어져요.”

“학교도, 중학교 졸업도 못 했고…….”

“대신 과장님은 일을 했다면서요. 그게 더 대단한 거죠, 그 어린 나이에.”

그의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는데, 진짜 특이한 녀석이다. 태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특이한 녀석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서였다.

“야, 너는…….”

“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상진이 조금은 놀란 얼굴을 했다. 저런 표정을 해도 잘생겼네, 이기적인 자식.

“형이 좋아서요.”

참 간결한 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 ‘형’이라고 하더니. 혹시 외동인가. 외동이어서 형을 갖고 싶었나.

“내가 좋아? 왜?”

“그냥 좋아요. 이유가 있어야 해요?”

“진짜 희한한 놈이네. 너 취향 이상한 거 알지? 나이도 어린데 그러지 마.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먼저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비록 지금 술에 취해서 그에게 기대고 있지만, 사실 난 저 진상보다 훨씬 형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형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이어야 좋지. 그래야 배울 점이 있잖아.”

“형으로 삼으려는 생각 없는데.”

속에서 알코올이 더 올라왔다. 이제는 서 있기조차 힘들다. 눈앞의 저 잘생긴 놈의 얼굴도 잘 보이질 않았다.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지고 귀도 멍멍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키스 안 해요. 섹스도 안 하고.”

“으응…….”

그가 무어라 말을 했는데 귓구멍이 윙윙거렸다.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다. 상진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비틀비틀 길가로 나갔다. 택시, 택시를 잡아야…….

“형은요?”

덜컥, 손이 붙잡혔다. 뭔가 기다란 게 손목을 잡았는데 뭔지 모르겠다. 그 기다란 게 말을 하는 것 같다.

“형은 그냥 동생하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해요?”

“으응……?”

점점 눈이 풀린다. 눈꺼풀 위에 무거운 추라도 얹어 놓은 듯 자꾸 떨어졌다. 태주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와중에 길가에서 차도 쪽으로도 손을 흔들흔들 흔들었다.

“태주 형, 오늘 우리 집에 가요. ……나, 형에게 할 말이 있어요.”

상진이 말했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태주를 붙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주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이미 머리끝까지 취한 상태였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야, 계상진.”

태주가 말했다. 거나하게 취한 채로 말이다.

상진이 그에게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가 상진의 양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상진아. 너 가끔 그런 눈을 하더라.”

“네? 무슨 눈이요?”

“아니, 너 많이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요?”

때때로 말이다. 상진은 때때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태주보다도 더 쓸쓸한 눈을 했던 것 같다.

“외로우면 언제든지 말해. 형이 다 들어줄게.”

태주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품에 다 안지는 못하지만, 도리어 태주가 안긴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안아 주었다.

그를 토닥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태주는 어쩐지 이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했었던 것도 같았다. 누구에게 했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형.”

상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태주를 품 안에 가두었다. 차가운 옷가지 너머로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럼 형, 지금 나랑 우리 집에…….”

“아, 택시다, 택시~!”

퍽!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그가 상진을 확 밀쳤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뒤로 밀린 상진이 그를 붙잡으려 쫓아갔다. 이미 택시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의 몸은 반쯤 택시에 탄 뒤였다.

차 문을 열어 잡으려는데 그가 상진을 보고 베시시 웃었다. 앳된 얼굴의 남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계상진, 아니다. 개진상이지……. 아무튼 가끔 귀엽다, 너.”

그러고는 갑자기 택시에서 내리더니 상진의 옷깃을 붙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졌다. 그에게 이끌려 내려간 목덜미로 차가운 공기가 닿을 즈음, 입술과 입술이 부딪혔다. 부드럽게 겹친 입술 사이, 몇 번이나 쪽, 쪽,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상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껏 설렌 얼굴로 태주의 허리를 더듬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더 깊게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기사님, ××동으로 가 주세요오.”

분명 앞에 있었던 감촉이 사라졌다. 번쩍 눈을 뜬 상진의 눈에 보인 건, 어느새 택시에 타서 문을 닫는 태주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주 미련이라고는 1미리그램도 없는 얼굴로 상진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여운 개진상아, 안녕~!”

“어? 형, 잠깐……!”

택시 기사님에게도 주저함이라고는 1미리그램도 없었다.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출발한 택시는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아무도 없는 휑한 거리에 쓸쓸하고 외롭지만 기엽다는 개진상만이 오롯이 남겨져 있었다.

* * *

입 안이 텁텁했다. 아직도 입 안에 술이 남아 있는 듯했다.

태주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뒤척거렸다. 사각사각한 이불이 솜털처럼 몸을 감싸 안는다. 부드럽고 포근해서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으으…….”

그러나 속은 아직도 쓰리고 아팠다. 이번 주 내내 쌓인 숙취가 제대로 폭발을 한 모양이었다. 깊게 숨을 내쉬고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천천히 기억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죽을 것 같다…….’

겨우겨우 눈을 떴다. 게슴츠레 눈꺼풀을 뜨고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해가 중천에 떴는지 방이 밝았다.

팔로 눈을 가렸다가 또 잠깐 잠에 들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깼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일어난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눈을 비빈다. 희끄무레했던 시야가 차츰 선명해졌다. 태주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핸드폰을 찾았다. 얌전히 충전이 되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확인한다.

“응?”

부재 중 전화가 열한 통이나 와 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계상진이었다.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혹시 어제 상진에게 실수라도 했던 건가? 다급하게 다른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문자를 확인했다. 어젯밤에 그와 주고받은 문자들이 있었다.

[형, 이러기예요?]

[[ㅉ쵸심히 들어가~]]

[도착했어요? 지금 집 앞으로 갈게요.]

[[옺지마나잙ㄱ거야]]

[사람 가지고 장난쳐요? 그러고 가는 게 어디 있어요. 무조건 갈 거니까 당장 나와요.]

[[갲진상왜저래난잔ㅎ다]]

그리고 밑에는 그가 일방적으로 보낸 문자뿐이었다.

[집 앞이에요. 전화 받아요.]

[진짜 자요?]

[문 두드릴 거예요.]

[문 열어 줘요.]

[와, 진짜 자나 보네. 사람 미치게 만들어 놓고 진짜 자네.]

[성태주 가만 안 둬.]

마지막의 ‘가만 안 둬.’가 뇌리에 박혔다.

어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식은땀이 났다. 계상진이 아무리 진상 놈이었대도 자신에게 저런 격한 단어를 쓴 적은 없었는데. 혹시 어제 술 취해서 주먹으로 때리기라도 한 걸까. 비록 만남의 시작은 별로였으나 최근에는 친하게 잘 지냈었는데 정말 주먹다짐이라도 했던 걸까.

차마 전화를 걸어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쾅쾅쾅!

전화를 걸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설마 계상진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 아무도 없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진은 아니었다. 태주가 부리나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어, 안에 있었구먼.”

집주인 할아버지였다. 태주가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이 다세대 주택의 주인이다. 그가 태주를 보고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세월이 빚은 주름이 곱게 접힌다. 태주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분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어제 회식 때문에 좀 늦게 일어났어요.”

“아니, 아니. 괜찮어.”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집주인이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태주가 인사드리러 간혹 가고는 했었는데……. 무언가 용건이 있는 듯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그게 말이지…….”

태주의 질문에도 좀처럼 시원한 답을 꺼내질 못했다. 그는 난감한 얼굴을 한 채 팔을 긁적이고 있었다.

“아, 할아버지. 일단 들어오세요. 날이 추워요, 감기 걸리시면 안 되니까.”

“그, 그래. 그럼 그럴까?”

그를 집 안으로 들이고 투명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채웠다. 집주인은 비좁은 집 안에 있는 거대한 침대를 구경하는 듯했다. 침대가 워낙 크다 보니 앉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에 편히 앉아 계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 장만한 접이식 소파 테이블을 펼쳐서 할아버지가 걸터앉은 자리 앞에 놓았다. 테이블에 주스를 담은 컵을 올려놓고 태주는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잘 지내셨죠? 아, 오늘 토요일인데 병원 가시는 날 아니에요?”

“으응, 잘 지냈지. 병원은 오늘 못 간다고 얘기했어.”

할아버지는 매주 토요일마다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시곤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래저래 아픈 곳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 있잖아. 우리 아들 알지?”

“아드님이요? 몇 번 뵀었죠.”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때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아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태주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유난히 얼굴에 핏기가 없고 파리했던 기억이 있었다.

“으응, 내가 얘기했었지. 그놈의 자식이 속 썩인다고.”

“아, 네. 들었어요.”

할아버지는 간혹 태주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할머니를 보내고 남은 가족이라고는 아들뿐이었는데, 그 아들이 도박에 빠져 있다고 말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쓸 거 안 쓰고 아껴 가며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갔다고 했다.

게다가 이 건물까지 저당 잡으려고 한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한 번은 술에 취한 그가 할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을 태주가 말린 적이 있었다.

“……아드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죠?”

“한동안 안 보이더니 며칠 전에 와서는 이제 마음을 잡았다고 하더라고. 이 동네에서 정착해서 일도 구하고 한다고.”

분명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태주도 잘된 일이 아니냐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집주인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그의 탁한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런데 그놈이 그 나이 먹도록 여직 있을 곳이 없어서 말이야.”

태주의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슬로라도 건 듯 천천히 들렸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평소와는 다른 할아버지의 태도, 미안해하는 눈빛. 그것만으로도 왜인지 뒤에 나올 말들이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방을 좀 써야 할 것 같다고…….”

“아…….”

바닥에 앉아 있던 태주가 양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이 방이라고 하시면…….”

“응, 미안하게 됐네. 다른 집을 알아볼 시간은 줄 수 있으니까 천천히 알아봐. 한 달이면 되겠지?”

기간이 문제가 아니다. 이 집은 집주인의 배려로 보증금이며 월세가 오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보증금을 빼고 태주가 가진 돈을 합친다고 해도 요즘 시세의 다른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뜻이다.

“하, 할아버지. 정말 죄송한데, 아시겠지만 제가 갈 곳이 마땅치가…….”

“알어, 알지. 미안하게 됐어.”

“혹시 이 건물에 다른 빈 방은 없나요? 저번 주에 1층 짐 빼던 것 같은데.”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라 시설도 낙후된 데다가 역세권이 아니어서, 태주처럼 오래 지낸 사람은 없었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삿짐을 빼는 걸 봤었는데……. 왜 굳이 이 방이어야 할까. 다른 집은 그새 다 계약이 된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 아, 아니, 그게.”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낌새가 이상했다. 어쩌면 단순히 한 가지 이유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주가 바닥에 앉은 몸을 일으켜 할아버지의 까슬까슬한 손을 잡았다.

“혹시 그……. 이 방의 보증금이나 월세가 적어서 그러신 거면, 올리셔도 돼요. 더 낼 수 있어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맞춰 볼게요.”

돈을 더 내더라도 이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집주인 할아버지가 많이 배려를 해 주셨던 거다. 그러니까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더 낼 수 있었다. 생활비를 더욱 졸라매면 될 일이었다. 손에 닿는 그의 손등이 움찔거린다.

“아니야, 아니야. 미안해. 미안하게 됐어. 나도 아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 자네 딱한 사정을 내가 왜 모르겠어. ……그래도 미안허네. 자네가 나가 줘야 우리 아들이 제 구실을 하겠다니.”

그가 태주의 손을 뿌리쳤다.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서둘러 일어선다. 태주가 잡을까 두려운지 절뚝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할아버지.”

“나오지 마, 나오지 마.”

문밖까지 나선 태주에게 집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차마 태주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흔든다.

태주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 계단에서 발을 잘못 디디실까 걱정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한 계단, 두 계단……. 내려가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곧 문이 닫히고 주위가 적막해졌다. 그제야 현실이 민낯으로 다가온다.

그가 매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있을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자신의 혈육을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감히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단지 태주에겐 그런 혈육이 없을 뿐이다. 그저 그 차이였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촉박하다. 통장 사정에 적합한 집을 구하는 것에는 발품이 필수였다. 매일 부동산에 들러서 집을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때때로 야근도 해야 했고 회식에도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괜찮은 집을 구했다 하더라도 이사 날짜며 이삿짐을 싸는 것도 골치였다. 겉으로는 짐이 없어 보이지만 한번 꺼내기 시작하면 늘어나는 것이 또 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달에는 챙겨야 할 일들이 많은데……. 이래저래 속이 말이 아니었다.

“휴…….”

두통이 일었다. 집은 집대로, 또 회사 일은 회사대로 복잡했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무슨 일이 터지면 또 다른 일도 터지기 시작했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안과 밖으로 괴롭히고 난리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꾸욱 눌렀다. 아, 머리 아파.

―탁.

태주의 책상 위에 커피가 한 잔 놓였다.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상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그는 요 며칠 통 말을 하질 않았다. 그러면서 또 챙길 건 다 챙겨 주고 있었다. 잘해 주든지 아님 무시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지. 대체 왜 저래.

“상진 씨, 점심시간인데 밥은 안 먹어요?”

“…….”

“난 생각이 없어서……. 방금 다들 식사하러 나갔는데 따라가지.”

“…….”

“지금이라도 가서 먹고 와요. 나는 그냥 좀 자려고요.”

“…….”

“……이제는 대답도 안 해요? 나 이래 봬도 과장인데.”

“…….”

조금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다가 그제야 시선이 마주쳤다. 상진이 누가 봐도 불만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아마 ‘네.’라고 입모양만 뻐끔거린 듯했다. 악, 속 터져!

“아, 진짜 나랑 말 안 할 거야?”

아예 옆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대놓고 그를 바라보며 채근했다.

“진짜 말 안 할 거냐고.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회식을 했던 그날에 무언가 실수를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을까. 분명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아, 물론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세 살짜리 아기도 아니고 말이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날 좀 과음하는 바람에 기억이 안 나서……. 무슨 실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 응?”

상진이 애절하게 말하는 태주를 곁눈으로 힐끔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모니터 화면으로 눈을 돌려 텅 빈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다. 키보드는 왜 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입력도 안 되고 있는데.

“나 진짜 큰 실수했어요? 차라리 말해 주면 안 돼? 그래야 제대로 사과를 하지.”

가뜩이나 집을 구하는 문제 때문에 우울했다. 그런데 항상 곁에서 조잘거리던 녀석이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더욱 우울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저 인간에게 익숙해졌나 보다. 어쩔 수 없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존재를 마다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태주는 늘 그런 존재에게 목말라 있었다.

“상진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성은 떼고 이름만 불렀더니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가만 보면 저 인간도 표정을 참 못 숨긴다.

“알았어. 상진아. 형이 잘못했어.”

그의 눈꺼풀이 두 차례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린다.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진짜 기억 안 나요?”

“응? 응…….”

“진짜로? 조금도?”

“으응……. 미안…….”

“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상진은 실망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떨어질 것처럼 기울인 눈썹도 쭉 나온 입술도. 괜히 양심이 콕콕 찔린다. 그의 손을 붙잡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무슨 일인데. 그냥 말해 주면 안 돼?”

“알았어요. 무슨 일이었냐면요.”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태주는 아예 그를 마주 보게끔 몸을 완전히 틀어 앉았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운다.

“과장님이 저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했어요.”

“뻥치고 있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안 믿을 거면서 왜 말해 달라고 해요?”

“아니, 뻥도 정도껏 쳐야지. 내가 왜 너한테 고백을 하냐.”

“할 수도 있지.”

“전혀 아니거든. 가서 밥이나 먹고 와.”

난 또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누웠다. 아주 속이 답답했던 게 쑥 풀리는 느낌이었다. 시원해진 태주와는 달리 그는 태주를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과장님이 저한테 키스했어요.”

그가 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태주가 어깨를 떨며 웃고는 말을 잇는다.

“미치겠네. 상진아, 거짓말을 하려면 좀 재미있게 해 봐. 전혀 재미없어. 좀 더 연구해.”

“진짜라고요.”

“그래도 내가 네 덕분에 웃는다. 그래그래, 그런 걸로 하자.”

“과장님이 나한테 귀엽다고 했어요.”

“그래그래, 그랬어? 알았어. 그럼 그런 걸로 해.”

“진짜라고요!”

진짜 계상진이 대체 왜 저러는지 아는 사람 있으면 물어보고 싶다. 거짓말도 믿을 수 있는 수준으로 해야지, 참나. 어지간히 귀여움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태주가 그를 보며 웃다가 손을 뻗어 상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귀엽다.”

원하는 대로 귀여워해 주었는데 상진의 표정은 전혀 풀리질 않았다. 도리어 조금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태주가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죠.”

상진이 볼멘소리를 하더니 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태주의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그리고 밀쳐 낼 틈도 주지 않고 훅 거리를 좁혔다. 단정하게 입은 니트 위에 상진의 입술이 닿았다. 그 따뜻한 감각에 흠칫 어깨를 떨 즈음, 말캉한 혀가 흰 목을 핥았다.

“읏, 야!”

츄웁, 쯉. 노골적인 입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다.

야릇한 기분이 들면서 이상한 신음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정말 곤란하다. 사무실이 비어 있더라도 보안 카메라는 설치되어 있을 터였다.

그의 어깨를 밀어 낼 생각으로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의 손이 허리를 더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그 능숙한 손짓에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상진이 이끄는 대로 온 신경이 들뜨기 시작했다. 안 돼, 절대. 간신히 이성의 끈을 잡고 그를 밀어내려는데,

“악!”

목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큰 개한테 물린 것 같은……. 그런 아픔이었다. 물려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 정도로 아플 것 같았다. 그만 눈물이 찔끔 났다. 몸을 파닥파닥 떨며 상진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그러자 비로소 그놈이 떨어졌다.

“야! 너 지금 내 목 문 거야?”

“그러게 왜 기억을 못 해요.”

“아니, 이 미친놈아. 네가 무슨 개야? 강아지야? 왜 사람을 물어. 아파 죽겠네.”

“과장님이 저한테 키스한 건 기억을 못 하시니까, 대신 제가 과장님을 문 건 절대 잊지 마시라고요.”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정말 미친놈 같다.

너무 황당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인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으로 아마 상처가 났을 목덜미를 쿡쿡 건드리기까지 했다.

“아파! 건드리지 마!”

“잘 어울리는데요. 빨갛게 부어서.”

핸드폰 액정 화면에 목 부근을 비추어 보았다. 오늘 하필이면 니트를 입고 와서 목이 휑하니 아주 잘 보였다. 물린 곳이 벌써 부어서 발갛게 올라왔다. 잇자국 난 거 아닌가. 가릴 것도 없는데 큰일이네.

“너 때문에 오해받게 생겼다. 어쩔 거야.”

“그냥 얘기하면 되죠. 사귀는 사람 있다고.”

“사귀는 사람 없는데 왜 거짓말을 하냐.”

“사귀는 사람 있다고 하고 나랑 사귀면 되겠네요.”

“또, 또 까분다.”

어휴, 말이나 못 하면. 멀쩡하게 생겨 놓고는 저런 농담을 곧잘 던졌다.

장난도 통할 사람에게나 해야지. 백날 장난쳐 봐야 얻을 거 하나도 없는 태주한테 저런다. 아마도 자신이 만만해서인 듯했다. 하긴, 어딜 가도 성태주는 만만한 상대 1호였으니까.

* * *

어영부영 점심시간이 끝났다.

뒤늦게 1층의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사다가 함께 먹었다. 내려간 김에 약국에 들러 밴드도 샀다. 괜한 지출은 삼가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목의 상처가 잘 가려지도록 붙여 놓았다.

“다음엔 누가 잘리려나.”

“그러게. 무섭다, 무서워.”

복도를 지나쳐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커피 자판기 앞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그들은 최근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김현우 대표이사가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날 이후로, 회사는 빠르게 변해 갔다.

그는 마치 오랜 숙원 사업을 이루는 사람처럼 그날 뱉었던 말을 지켜 나갔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기대했던 연월차 체계의 개선이 가장 빨리 이루어졌다. 연차에 따라 달랐지만 개인당 더 많은 휴가를 쓸 수 있도록 개수가 늘었다. 모두 입을 모아 새 대표이사를 칭찬했다.

그리고 동시에 몇몇 사람들에 대한 인사조정도 있었다. 이 차장이 잘리고 나서 두 번째로 회사를 나간 사람은 김 과장이었다. 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미루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물론 태주에게도 여러 번 일을 미룬 전적이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그를 비난하며 뒷담이 오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전(前) 대표인 본부장과 인연이 있던 사람인지라 비난한들 별 타격도 없었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바뀌고 나자 인사 조정의 칼바람에 추풍낙엽처럼 잘려 나가버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라인 타령을 하나보다 싶다.

“성 과장, 잠깐만!”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영업 1팀의 류 차장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태주를 불러 세웠다. 평소에 말을 많이 섞어 본 인물은 아니다. 가끔 사내 회식에서나 얼굴을 보곤 했었다.

“아, 차장님. 안녕하세요.”

“잠깐 시간 괜찮아?”

무슨 일이지. 선뜻 괜찮다고 말하기가 겁이 났다. 이런 분위기라면 대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태주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럼 잠깐만 이리로.”

그는 태주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갔다.

1층 카페도 아니고 탕비실도 아닌, 비상계단이라니. 어지간히 은밀한 이야기인가 싶었다. 조금 의아했지만 시간을 내기로 했으니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 비상구로 나가는 철문을 꽉 닫은 뒤에야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말이야, 성 과장…….”

“네, 말씀하세요. 차장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일까. 지금까지 본 류 차장의 모습 중 가장 정중하고 차분했다. 조금 지나치게 생각한다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이 회사에서 가장 만만한 성태주한테 누가 눈치를 본다고.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없지?”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지금 ‘서운한 거 없냐’고 ‘성태주’한테 물은 건가? 영업 1팀과 2팀을 통틀어서 영업팀 실세라고 불리는 류 차장이?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분명 잘못 들었거나 또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인 줄만 알았다.

“혹시 나한테 서운한 거 없는지 궁금해서.”

“제가, 차장님께요?”

“응. 내가 평소에 성 과장한테 실수한 적은 없었지만……. 그냥 혹시 서운한 거 있으면 마음 풀라고.”

서운한 게 있을 리가. 많이 마주친 적도 없거니와, 기껏 만나도 인사 정도만 했었다. 물론 술자리에서 조금 지나친 장난을 치는 바람에 껄끄러웠던 적은 있었다만. ……그런데 그게 장난이었나. 태주의 입장에서는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장난이라고 했었다.

“내가 지난번 술자리에서 그런 거는…….”

뭐라고 했더라. ‘가방끈 짧은 건 아무 상관없다.’고 했었던가. 그리고 ‘우리 성 과장을 봐. 가방끈이 짧다 못해 거의 없어도 이렇게 일만 잘하지 않냐.’고 했었지.

“친밀감의 표현으로 그런 거야. 알지? 성 과장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남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우습게 만드는 걸로 친해질 수 있다면, 태주는 그냥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아, 네.”

“알지? 혹시나 오해하고 있을까 봐 신경이 쓰이더라고.”

그게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상진이 입사하기 전이다. 머리로 수를 헤아리던 태주가 흠칫 놀랐다. 왜 하필 그 미친놈의 입사를 기점으로 생각했을까. 으, 머릿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그놈을 급히 밀어냈다.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하시는 건가요?”

그날은 장난이라고 하더니. 왜 지금에서야 오해하지 말라며 사과조로 말하는 건지.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그가 태주에게 절절매고 있었다.

“아니, 난 정말 장난이었거든. 그런데 혹시, 혹시…….”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네. 누구누구 씨가 ‘막말에 참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의 말과 표정이 생각나 실없게 웃음이 나려던 것을 간신히 참는다.

태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도르래라도 달린 듯 자동적으로 류 차장의 고개가 내려갔다.

“제가 그걸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으시잖아요, 차장님.”

“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그런가요……?”

대체 왜 섭섭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응?”

이런 사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막말을 한 자와 막말을 들은 자? 평소에는 서로 관심도 없지만 술자리에서만큼은 안주로 씹는 자, 그리고 씹히는 자?

그렇지 않아도 집 문제로 골치가 아픈 마당이다. 사회생활로 다져진 태주의 정신도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다시 표정을 추스르고 그에게 웃어 보였다.

“……아무튼 이미 지난 일인걸요. 다 잊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 그래, 잘 지내자고. 나는 성 과장이랑 잘 지내고 싶거든.”

억지로 미소를 지었더니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대화를 끝낼 작정으로 차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너무 불편하다.

* * *

[월세 2,000 / 40]

★주방 분리형★

☆넓고 깔끔한 방☆ 인터넷, 와이파이 완비☆

[월세 4,000 / 50]

▷ ××역 도보 5분 거리

▷ 조용한 주거환경! 보안 시설 有! 편의시설 많아요

▷ 지정 주차 1대 가능 (7만원)

부동산 사이트에 접속하자, 넓게 펼쳐진 지도 위로 다양한 조건의 집들이 표시되었다. 각 지역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을 집중해서 보았다. 이렇게나 집은 많은데 왜 내 집은 없을까. 그런 심심한 하소연을 하면서.

그중 몇 개의 게시물을 클릭하자 사진이 주르륵 뜬다. 집의 위치며 주변 시설에 따라 비용이 천차만별이었다. 조금 괜찮다 싶은 조건을 보면 반지하, 혹은 지하였다. 물론 사진상으로는 엄청 넓어 보인다. 옵션으로 놓인 소형 냉장고가 대형 김치 냉장고 크기처럼 보이긴 하지만.

“뭐해요?”

옆에 앉은 상진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니까 화면을 내릴 수도 없었다. 자리가 너무 붙어 있어서 불편하다. 아무래도 모니터에 사생활 보호 필름이라도 사다가 붙여야겠다.

“깜짝이야. 왜 남의 모니터를 마음대로 봐?”

“아까부터 엄청 집중하길래. 뭘 그렇게 보나 궁금해서요.”

사실 요즘은 일이 많지 않았다. 월요일이나 금요일처럼 문의가 몰리는 날에는 종종 야근을 했지만 다른 때에는 여유가 있었다. 대표가 바뀌고 나서 달라진 점들 중 하나였다.

그가 업무분장에 대한 안건을 제시한 뒤로,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미루는 일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 덕에 태주도 조금 일이 수월해졌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다른 짓을 하기도 했다. 직장인에게도 숨 쉴 틈은 있어야지.

“몰라도 돼.”

“무슨…… 방 보는 것 같던데.”

“알면서 왜 물어보냐.”

“과장님 입으로 듣고 싶어서요.”

그러면서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대체 쟤는 왜 저러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신경 쓰지 마시고 본인 할 일이나 하세요, 계상진 씨.”

“우리 과장님 일인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요.”

“누가 ‘우리’ 과장님이야. 나는 성 과장이거든.”

“그러니까요, ‘우리’ 성 과장님.”

저놈이랑 말싸움 붙어봤자 이길 승산이 없었다. 그냥 무시가 답이다.

그에게 던졌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드륵, 드르륵, 마우스 휠이 아래로 굴러간다. 사이트에는 많은 집이 있었지만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조건에 맞추면 환경이 열악했고 환경이 좋은 집은 조건에 맞지 않았다.

“하, 머리 아파.”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 문제로 신경을 쓰느라 매일매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처럼 류 차장이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나. 집이고 회사고 갑자기 일어나는 변화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납작 엎드려서 잘 살아왔는데.

“집 알아보는 거예요?”

상진이 두통약과 따뜻한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머리 아프다고 중얼거린 지 10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꺼내왔다.

아무래도 저 인간에게는 마술 주머니가 있나 싶었다. 사실 이사에 대한 부분은 그에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정확하게 짚으니까 부인하기도 좀 그랬다. 그래서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집에서 평생 살고 싶다더니.”

“그러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더라.”

말하면서도 입 안이 씁쓸했다.

뭐, 생각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태주는 그런 쪽으로는 매우 담담했다.

“어느 지역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상진이 아예 마우스를 가져가서는 대놓고 화면을 보았다.

“××동이면, 회사에서 너무 먼데. 지금 사는 곳이랑 아예 다른 지역을 보고 있네요?”

“응, 좀 멀어져도 그쪽은 월세가 싼 편이라서.”

“이러면 통근 시간도 더 걸릴 텐데. 차 사려고요?”

“차 살 돈이 어디 있어. 그냥 오래 걸려도 뚜벅이로 다녀야지.”

이런 대화를 할 때면 그와 자신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느껴지곤 했다. 으이그, 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으니라고. 통근 시간이 길어진다고 냅다 차부터 사는 사람이 어디 있……. 아, 있을 수도 있겠다. 이 세상 모든 청년의 삶이 태주 같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제 말 시키지 마. 집을 빨리 구해야 해서 스트레스 최고조니까.”

그의 시선이 책상에 놓인 두통약에 꽂혔다.

“그래서 요즘 머리가 자주 아픈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스트레스 과다로 쓰러지겠어.”

태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쓰러진다니.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요.”

“그러니까 너라도 좀 협조해줘. 나 마음이 엄청 급하거든.”

“힘들게 알아보지 말고 제 오피스텔로 들어오면 되잖아요.”

“싫어.”

저 인간은 매번 오피스텔 타령이다.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하자 그의 입술이 불퉁불퉁 튀어나왔다.

“고집쟁이.”

“까분다. 아무튼 지금부터 말 시키지 마. 알았죠, 상진 씨?”

상진은 태주에게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애꿎은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말꼬리를 더 잡고 늘어졌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신경이 쓰여서 태주가 힐끗 옆을 보았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조금 머쓱해하는 듯하다. 왜 그러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고 도통 예상을 할 수가 없는 인간이니까.

* * *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짐을 챙겼다.

오늘은 부동산에 발품을 팔아야 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이곳저곳을 들러보았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 기한을 넘기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태주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익숙한 사람이 말을 건다.

“성 과장.”

최 팀장이었다.

“네, 팀장님.”

“오늘 뭐 바쁜 일 있어?”

너무 정각에 나왔던가. 마음이 급해서 좀 빨리 나오긴 했다. 혹시 정시 퇴근을 하는 게 보기 싫었나.

“죄송해요. 오늘 좀 일이 있습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세세하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이사 가는 건 확정이지만 아직 어디로 갈지도 정하질 않았으니. 괜히 말 꺼냈다가 이래저래 참견만 받기 딱 좋다.

태주가 머뭇거리자 최 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오늘 시간 있나 해서.”

“오늘요?”

“응. 할 말도 있고. 시간 좀 내 봐.”

정말 곤란한데. 하루라도 빨리 옮길 집을 정해놓고 싶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말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당장 집이 더 급했다. 태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팀장님. 제가 오늘은 정말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뭐가 그렇게 급한데.”

조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지금까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었으니, 조금 충격을 받았으려나. 살짝 신경이 쓰였다.

“그게……. 집에 좀 일이 있습니다. 다음에 시간 되실 때 말씀 주시면 그때는 꼭 시간 내겠습니다.”

최대한 공손하게 답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분위기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할까. 사회생활 얼른 그만두고 싶다. 태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까 눌러 둔 엘리베이터가 올 때가 되었는데…….

“야, 성 과장.”

최 팀장이 태주를 불렀다.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태주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잡히면 꼼짝없이 그에게 붙들릴 것이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마침 발랄한 기계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최 팀장의 표정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분명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 바쁜 와중에 그 사람의 기분까지 신경 쓰려면 정말 쓰러지고야 말 것이다.

* * *

‘이 예산으로는 이 근방에서 집 구하기 힘들어요.’

‘사이트는 보고 오신 거죠? 이 조건으로는 힘든데.’

‘딱 이 정도 수준으로만 보시려고요? 물건이 있긴 해요. 그런데 대출이라도 좀 받아서 해 보시지.’

‘죄송해요, 이 근처는 없네요.’

요 며칠간 태주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조건을 많이 달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가까운 거리를 고집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없을 수가. 당장 마음은 급한데 진척되는 건 없으니 속만 탔다.

설상가상이라고 살짝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감기 기운이 있는 듯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탓이다. 칼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그런 거겠지. 콧물이 찔끔 나는 걸 휴지로 닦았다. 어휴, 추워.

“아,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곳이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부동산이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부동산에서 이곳을 소개해 줬다. 잘 아는 동생이라며 이야기를 해 놓겠다고.

물론 지금 예산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열악한 곳에서 살 거라면 차라리 회사라도 가까워야지 싶은 생각도 들었고.

“예산이 이 정도 맞으시죠?”

부동산 실장으로 보이는 분이 계산기를 들며 말했다. 태주가 계산기에 찍힌 숫자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비웃는 건 아니겠지. 조금 위축되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이 정도로 이 근처에서 월세 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 군데 정도 있어요.”

“이, 있어요?”

“네, 그럼요.”

실장님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확신에 찬 말이 태주에게 희망을 주었다. 요 며칠 우울했던 마음이 그 웃음으로 환히 밝혀진 것만 같다.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서 보실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네, 잠시 기다리시면 준비할게요.”

“네!”

날씨가 추운 것도 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쌩쌩 부는 칼바람도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들뜬 심장이 쿵쾅거려 볼에 발갛게 열이 오른다. 몸이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지 아니면 흥분과 기대감 때문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처음 방문한 집은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었다. 이 동네에도 이런 건물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대부분이 재개발되어서 오피스텔이나 원룸이 들어선 지역인데도 이곳만은 오랜 향취가 녹아 있었다. 겉으로만 봐도 내부가 예상될 정도라고 해야 할까.

“많이 낡았죠.”

“아, 네.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회사와 바로 근처라서 출퇴근하기도 좋아 보였다. 뭐, 집이 좀 낡으면 어떠랴. 누워 쉴 공간만 있으면 됐지. 한껏 기대에 부푼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부동산 실장님이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열쇠를 꺼냈다. 보조키였다. 이 건물도 아직 비밀번호가 아니라 열쇠를 쓰는 것 같았다. 탈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이곳은 지금 비어 있어요.”

끼이익, 음산한 배경음이 귓가를 때렸다. 지난여름에 인기를 끌었던 공포영화에서 들은 소리였다. 흉가 체험 동아리의 대학생들에게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태주는 그걸 다 보지도 못했다.

절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날따라 너무 피곤했었다. 도저히 끝까지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피곤해서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회사에서 단체로 갔던 것이라 아무리 피곤해도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정말 맹세코 무서웠던 건 아니었다.

“조금 허름하죠?”

아마 실장님이 말하는 ‘조금’의 의미와 태주가 이해한 ‘조금’의 의미가 달랐던 것 같다. 태주의 눈에 비친 그곳의 전경은 뭐랄까. 당장 공포영화 세트장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밥을 해 먹고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여름마다 세트장으로 대여해서 돈을 버는 게 낫지 않을까.

분명 예전에는 평범한 원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러운 것을 넘어서서 무서울 정도로 조금도 관리가 되어 있질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정체모를 짐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건드리면 벌레가 우수수 떨어질 듯했다. 구석마다 처진 거미줄은 옵션이었고 작은 싱크대에 왜인지 모르겠는데 빨간색의 무언가가 튄 흔적이 남아 있다. 꼭 빨간 물감…… 이 튄 것 같은…….

그래도 꾸욱 참았다. 이 정도로 겁을 내다니 지나가던 개진상이 웃을 소리였다. 지금껏 이 험한 세상을 혼자 아득바득 살아온 깜냥이란 것이 있다. 태주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눈에 빡 힘을 주고 방 안에 들어섰는데 후두두둑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가 발밑으로 지나갔다.

“흐익!”

호다다닥 소리를 내며 태주가 뛰쳐나갔다.

“괜찮으세요?”

부동산 실장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 왔다.

절대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그 방의 기운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수맥이 흐르는 것 같았는데 내 사주에 불(火)이 많아서 물하고는 영 안 맞는다. 여름에 워터파크도 안 가는 사람이 바로 나다. 거기로 들어가면 시름시름 아플지도 몰랐다.

집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괜히 아팠다가는 병원비가 더 나온다. 역시 성태주, 정말 이성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실장님, 아무래도 저 방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저랑 안 맞을 것 같고.”

“역시 그렇죠? 물론 청소하면 좀 나아지긴 할 텐데…….”

“아뇨, 아뇨. 청소해도 저긴 안 될 것 같아요.”

분명히 그 방에는 무슨 사연이나, 혹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이 도심에 왜 그 방만 비어 있겠는가. 태주는 외국 공포영화에 나오는 외국 부부가 아니었다. 앞뒤 사정 다 덮어 놓고 고택에 들어가는 건 영화에서나 하는 짓이다.

“음, 그럼. 이제 한 곳 남았네요. 진정되셨으면 가 볼까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태주도 따라서 웃긴 했는데, 처음의 그 설레는 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 * *

두 번째로 방문한 집은 실질적으로는 마지막 집이었다.

이제 이곳이 아니면 이 근방에는 태주가 원하는 조건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제발 이번에는 괜찮은 집이기를,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수석에 탔다.

아까 갔던 그 흉가…… 아니, 그 집보다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물론 그래도 회사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버스로는 두, 세 정거장이었고 걸어서 가기에도 충분했다.

차가 대로변을 따라 조금 이동하더니 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마 꽤 깊게 들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골목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차했다.

“내리세요.”

“어, 여기서요?”

쭈뼛쭈뼛 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위치가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이 정도면 지하철역도 가깝고 버스 정류장도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편의점이나 기타 편의시설까지 보였다.

“이쪽입니다.”

그녀가 앞장서는 것을 따라 걸었다. 주차한 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축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도 아니었고 빌라도 아니었다. 폐가나 흉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건물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었다. 아파트도 아닌데 경비실이라니…….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멀쩡한 지하주차장도 있는 데다가 건물의 공동현관에 비밀번호 보안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저기, 실장님.”

“네?”

“이 집이 맞나요?”

태주가 가진 돈으로는 절대 이런 집에서 살 수 없다. 지나가는 어린 아이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네, 맞아요.”

그러나 너무나도 확신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녀는 전혀 망설임도 없이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아, 혹시 이 건물 지하 5층이나 4층에 원룸이 있는 거였나. 아니면 이 건물의 옥상에 작은 옥탑방이 있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태주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떤 미친 인간이 불우한 사회이웃을 도울 마음으로 아주 싸게 내놓은 걸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시세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곳이죠.”

“아, 네.”

“여기 집주인 분이 월세로도 엄청 싸게 내놓으셨어요. 그래서 오늘만 해도 벌써 스무 팀이 넘게 보고 가셨네요.”

“그런데 아직 안 나간 건가요?”

“네, 아직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 앞에 도착했다. 실장님이 손에 들린 카드키를 문고리에 대자 문이 덜컥 열린다. 오, 최첨단. 뒤에서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여기는 신발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오세요.”

“네.”

실내 역시 기대와 다르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신발장과 수납장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아늑한 조명과 신발장 맞은편의 벽을 차지한 거울이 반짝반짝 깨끗이 닦여 있었다.

“와…….”

“좋죠?”

지금까지 본 집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태주가 살고 있는 집과도.

이 예산으로 갈 수 있다고, 이 집을?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큰 거실은 한 면이 유리창이어서 시내가 아주 잘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방은 총 3개였다.

조심히 각각의 방을 구경했다. 가장 큰 방 하나는 비어 있었고 다른 방에는 누군가 살고 있는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방은 드레스 룸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드레스 룸에는 들어가 보진 못 했다, 잠겨 있어서.

“아직 집주인이 살고 있어서 짐은 안 뺐어요.”

“저기 실장님. 제가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데요.”

“네, 말씀하세요.”

“정말 이 집이 제가 말씀드린 그 금액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요?”

“네, 안 믿기시죠?”

네, 안 믿겨요……. 라고 말하려던 걸 꾸욱 참았다.

“그런데 왜 계약이 안 되었을까요? 이렇게 좋은 집인데.”

“그게……. 집주인이 조금 까다로워요. 아무래도 세입자를 들이는 일이다 보니 직접 신원 확인을 하거나 만나서 결정하길 원하시더라고요.”

“아…….”

하긴 그럴 만했다. 이렇게 좋은 집에 아무나 들여서야, 집이 망가지면 어쩌겠는가. 그 집주인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그래도 정말 미친놈이 아닐까. 왜 이렇게 싸게 내놨지.

“다 보셨으면 다시 부동산으로 가실까요? 마음에 드세요?”

“네, 물론이죠. 엄청 마음에 들어요. 사실 다 거짓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이 집 보신 분들은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태주도 마음이 한껏 들떴다.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현관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으로 간질거리더니 결국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한번 나온 기침이 잘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눈물이 맺힐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다. 거실이 커서 그런가 기침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린다.

“콜록, 콜록, 콜록.”

현관에 서서 태주를 기다리던 부동산 실장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아이고, 괜찮으세요?”

“아니, 큽, 쿨럭, 콜록.”

“물이라도 있으면 드릴 텐데. 일단 엘리베이터 잡고 있을게요. 진정되면 천천히 나오세요.”

몰아치는 기침에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띠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 물 어디 없나. 남의 집이었지만 당장 급했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더듬었다. 자꾸만 뛰쳐나오는 기침을 간신히 참고 천천히 주방 쪽으로 이동했다.

냉장고의 홈바를 눌러 그 안에 있는 음료를 꺼냈다. 대충 과일 음료로 보였다. 컵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일단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막 마시려고 입을 벌렸다. 그때.

―탈칵, 끼익.

잠겨있던 드레스 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태주는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미친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미친놈의 입에서 들숨과 함께 얼빵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핫!”

“…….”

태주를 보자마자 숨도 못 쉬고 얼어붙은 그 인간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태주는 그 인간을 본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저 자식이 왜 저기서 나오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그 사이에 빼꼼 열린 문 틈 사이로 녀석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문을 다시 닫으려는 게 아닌가.

“야, 개진상!”

덜컥!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행히 문고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힘으로 승부를 본다면 이길 수가 없겠지만, 태주가 온 몸의 무게를 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어깨가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아니, 왜 저렇게 힘이 센 거야?!

“너, 너 이 개진상! 이거 안 열어? 힘 빼!”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서고 싶지가 않았다. 이 집에 저 인간이 있는 것도 이상한데 지금 이 상황도 너무 수상쩍었다. 왜 저승사자라도 본 듯 피하냐는 말이다. 방금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 ‘들켰다.’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겨우겨우 다시 만들어 낸 문과 문틀의 틈 사이에 발을 끼어 넣었다. 일단 뭐라도 우겨넣으면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또다시 너무나 쉽게 문이 닫히려는 게 아닌가.

이러다가 발 부러지는 거 아니야?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결코 발을 빼진 않았다. 발에 무슨 일이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식, 아주 오늘 혼쭐을 내줄 거다.

“아! 아, 아파! 내 발! 발 부러진다!”

결국 몸이 뒤로 밀리고 틈에 밀어 넣은 발이 콱 끼었다.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아픔이었다.

이러다가 발등이 반으로 접히면 어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빼액 비명을 질렀다. 눈물은 덤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문을 미는 힘이 약해졌다.

빈틈을 놓칠 수는 없지. 다시 문에 몸을 확 밀쳐 보았다.

“아!”

“윽!”

―쾅, 퍽!

서로 밀고 당겼던 힘이 한쪽으로 휙 쏠렸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태주가 상진을 덮친 꼴이 된 것이다.

쿵! 하는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몸이 기울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제 허리에 그의 팔이 감겨 온다.

“아으……. 아파…….”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후에 눈을 떴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살살 풀리면서 욱신거렸다. 태주가 눈꺼풀을 깜빡이며 팔꿈치를 바닥에 대었다. 그리고 상체를 슬그머니 들었는데, 몸이 개진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야, 계상진.”

한쪽 허리에 올라붙은 그의 팔을 떼어냈다. 웬일인지 순순히 떨어진다.

“안 일어나? 기절한 척하지 마.”

놈이 또 수작을 부릴까 싶어서 아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의 복부 부근에 올라타서 허벅지로 몸통을 꽉 졸라매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아주 갈수록 까불어. 야, 빨리 일어나.”

답이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져 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왜 숨었어? 왜 들켰다는 표정이었냐고!”

놈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이쯤 했으면 일어날 만도 한데.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조금 불안해졌다.

“야, 계상진. 대답 좀…….”

혹시 기절한 건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 같긴 했다. 그의 멱살을 쥔 손을 풀지 않고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 그의 몸에 딱 붙인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소리를 들으려던 것이었다.

“……형.”

다행히 심장 소리도, 숨소리도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마침 그가 깨어난 듯했다. 아주 작게 들리는 음성이 희미했다.

“놀랐잖아. 이게 어디서 아픈 척이야.”

“……형, 여기 어디예요?”

“하, 참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얼굴은 뭐야. 아주 웃기고 있네, 깜빡 속겠어.”

“……어지러워요.”

그는 눈도 잘 뜨지 못했다.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움직인다. 이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는 계상진은 처음이었다. 개진상의 순한 맛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도 묻고 싶다. 여기가 네 오피스텔이야?”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오피스텔이 여기인가 싶었다.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몇 번을 말하더니, 설마 일부러 집을 월세로 돌린 건지. 자신이 급히 집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조건으로.

저 계상진이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지도 궁금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냥 좀 특이하게 얽힌 직장 동료일 뿐인데. 물론 일반적인 동료와는 훨씬 더 친밀하다고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래도 어찌됐든, 가만 보면 저 인간은 좀 수상쩍은 면이 있었다.

“아! 야!!”

“형…….”

상진이 태주를 양 팔로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그의 몸 위에 딱 눌어붙었다.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말이다. 간신히 몸을 비틀면서 빠져나오려는데 뒤에서 무언가 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

“앗, 실장님!”

“저, 저기, 엘리베이터 잡았는데, 너무 안 오시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 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놀란 태주가 상진의 팔을 뿌리쳤다.

“오해입니다. 실장님, 방금 이건…….”

“죄송해요, 제가 방해를…….”

“아니, 예? 아닙니다. 아니에요. 오해입니다.”

비록 제가 방금 저 인간 몸에 들러붙어 있었지만 정말 오해입니다. 절대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올라타 앉았지만 옷도 멀쩡하게 입고 있었고요. 오른쪽 아래에 무슨 굵은 가지 같은 게 닿기는 했는데 이상한 생각은 추호도 안 했습니다. 진짜입니다. 쓸데없이 큰 저 인간 잘못입니다.

“방 천천히…… 보시고…… 연락 주세요…….”

“아뇨, 다 봤는데요. 선생님, 아니, 실장님. 왜 도망가세요.”

친절했던 부동산 실장님은 마귀에 쓰인 존재를 본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자리를 피했다.

* * *

“네, 실장님. 아까 집 본 사람인데요. 네. 그, 정말 오해하신 거니까요.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출발하면 연락드릴게요. 네.”

전화를 끊고 나서 거실에 놓인 소파에 편히 기대어 앉았다. 어찌나 폭신한지 한번 앉으니 일어나기가 싫었다. 이 큰 거실에 있는 거라고는 소파와 테이블뿐이었다. 집은 좋은데 어째 썰렁했다.

텅 빈 집을 가만히 둘러본다. 앞쪽에 있는 테이블을 보다가 작은 리모컨을 집었다. TV용 리모컨도 아닌 듯했다. 뭐지? 궁금해서 버튼을 눌렀는데 거실 유리창에 달린 커튼이 스르륵 닫혔다. 와, 신기하네. 이거저거 만지작거리다가 태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진아.”

작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붙박이장 정도. 집은 좋은데 너무 휑했다. 사람이 산 흔적이 있긴 했으나 온기는 전혀 없었다. 그냥 전시용 모델하우스 같은 느낌. 혹시 여기도 수맥이 흐르나?

일단 그 안에 있는 이불을 꺼내서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영 정신을 못 차리는 진상 놈을 질질 끌어다가 그 위에 두었다. 어휴, 무거워.

“정신 좀 차려. 혹시 정말 다친 거야?”

처음에는 집에 혹시 각목이나 골프채나 뭐 회초리 같은 게 있는지 찾다가 그만두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안 된다. 그래, 이것도 오해일 수 있었다. 정말 굉장한 우연의 우연으로 하필 자신이 찾는 조건으로 나온 집의 주인이 우연의 우연의 우연하게도 개진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집은 왜 월세로 놓은 거야? 아니, 애초부터 월세로 돌릴 생각은 있었어?’

‘…….’

‘이 집 보러 온 사람들 여럿 있었는데 네가 퇴짜 놓았다며.’

‘…….’

‘너 내가 집 알아보는 거 알고 있었잖아.’

‘…….’

‘내가 미친 건지 네가 미친 건지 모르겠는데. 혹시 나 때문에 일부러 집을 부동산에 내놨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퇴짜 놓고?’

‘……네.’

미친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개진상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아직 화를 내지도 않았다만. 그리고 사실 이걸 화를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래저래 사정상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나와야 했고, 그걸 안 상진이 본인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을 월세로 내놓았다. 그것도 태주에게 딱 알맞은 조건으로.

‘대체 왜?’

너무 딱딱 들어맞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태주의 마지막 질문에, 상진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어지럽다며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래서 일단은 이불 위로 옮긴 것이다.

불 꺼진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펼쳐둔 이불 위에 계상진이 누워 있었다. 그는 정말 어딘가 아파 보이긴 했다. 처음에는 그냥 꾀병인 줄만 알았는데. 병원을 데리고 가야 할까. 영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태주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붙박이장의 문을 열었다. 베개와 덮을 것을 찾았다. 침구도 단출했다. 뭐야, 남한테는 좋은 꿈 꾸라고 침대랑 침구까지 줘 놓고. 자기는 침대도 침구도 별게 없었다.

“상진아, 머리 들어봐.”

그의 짙은 눈썹이 한껏 찌푸려졌다.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끙끙거리며 앓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뒤통수 쪽에 손을 넣었다. 억지로 들게 해서 밑에 베개를 넣으려고.

손바닥을 쑥 밀어 넣고 바닥에 닿은 뒤통수를 조심스레 들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베개를 우겨 넣는다. 푹신한 베개에 그의 머리가 놓이고 태주는 손을 뺐다. 왜인지 손이 좀 축축하다. 식은땀을 흘린 건가. 방이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질 않았다.

이불까지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두고 가기는 좀 그렇고……. 물이라도 한 잔 옆에 두려고 주방으로 갔다. 주방도 별게 없었다. 음식을 해 먹기는 하는 건지, 제대로 된 그릇도 식기도 없다.

주방 선반에 놓인 유리컵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붓는다. 그런데 유리컵에 비친 태주의 손이,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태주는 눈을 의심했다. 컵을 내려놓고 손을 보니 핏자국 같은 것이 묻은 채였다.

순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널을 뛴다. 다급히 상진이 누운 방으로 달려갔다. 그의 뒤통수에 다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역시, 피가 조금씩 묻어 나온다.

“야, 상진아. 계상진. 정신 좀 차려 봐.”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면서 패닉에 빠졌다.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아까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건가.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바로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응급실, 구급차라도 불러야 해.

1, 1, 9,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누군가가 태주를 툭툭 건드렸다.

“누구세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어른거리는 태주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힐끗, 곁에 누워 있는 상진을 본다. 그 사람은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패닉 상태인 태주를 더 이상하게 보는 눈치였다.

“네? 아, 저기.”

“누구시냐고요.”

처음 본 인물에 대한 경계심일까. 그녀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태주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자유롭게 집에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상진의 가족일 확률이 높았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 있으니 놀랄 만도 하다. 그녀에게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간략히 밝혔다.

“저는 계상진 씨 회사 사수입니다. 성 과장이라고 합니다.”

“……회사 사수요? 성 과장?”

영 믿지 못하는 말투였다. 그래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태주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상진 씨 머리에서 피가 나서요. 아까 넘어졌는데.”

“네.”

“그래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구급차를 부르려던 참이거든요.”

“네.”

왜 저렇게 차분하지.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이 없었다. 예삿일이라는 듯 태주의 어깨를 툭툭 다시 쳤다. 나오라는 의미였다.

“저기……. 이럴 때가 아니라 지금 병원에 가 봐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알아서 한다고요. 나가세요.”

쭈뼛거리는 태주를 그녀가 직접 내보냈다. 너무나 확신에 찬 얼굴이어서 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고압적인 표정과 말투였다.

결국 방 밖으로 쫓겨난 채 문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문득 손바닥에 시선이 꽂혔다. 굳어 버린 핏자국이 아리다.

아니, 왜 저렇게 건조한 걸까. 가족이든 아니든 사람이 다쳤다는데……. 문 앞에서 힐끔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상진의 뒤통수가 잘 보이도록 돌아 눕히는 듯했다. 그리고 머리에 무언가 처치를 하는 것 같다. 정확히는 그녀의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근처 바닥에 병원에서 쓰는 도구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야. 번거롭게.”

태주는 귀를 의심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린다. 이 공간에는 태주와 상진, 그리고 그녀뿐인데. 걱정하는 투도, 우호적인 투도 아니었다. 명백히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광경은 왜인지 모르게 불편했다. 태주는 마치 보아서는 안 될 남의 일기장을 열어 본 것만 같았다. 상진에 대해서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몰래 들추어 본 듯했다. 이곳에 자신이 있어도 되는 건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면 어서 자리를 떠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그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 *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거실의 소파에 앉았던 태주가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그녀는 태주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두었던 짐을 싱크대에 올려서 푼다. 태주가 조심스레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다.

“저, 이제 상태는 괜찮은 건가요?”

“네, 괜찮아요. 그냥 두시면 돼요.”

역시나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분명 아까 ‘몇 번째’냐고 했었다.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건가. 그저 몸싸움 비슷한 걸 하다가 뒤로 넘어졌을 뿐인데. 평소 남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 태주였지만 꽤 큰 용기를 내서 다시 물었다.

“혹시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그녀의 눈빛이 서늘했다. 말없이 태주를 바라보기에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그, 회사에 보고를 드려야 해서요. 아무래도 직원 몸 상태가 어떤지……. 근무는 가능할지 보고를…….”

대충 대답이 되었을까. 삐질삐질 식은땀이 났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요. 최근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만.”

그녀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가지고 온 짐에서 음식들이 나왔다.

간단한 밑반찬과 투명 들통에는 죽이 들어 있었다. 흰죽이다. 양이 꽤 많았다. 혼자 먹으려면 거의 한 달은 먹을 양이다. 저렇게 한 번에 많이 가지고 오면 음식이 상하지 않나.

“예전에 머리를 다친 적이 있어서, 발작 같은 걸 가끔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일도 있고요. 잦은 일이라 웬만한 처치는 제가 해요.”

잦은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회사를 거른 적은 없었는데.

“아, 네. 그럼 의식은 아직 없는 거죠?”

“좀 진정되면 돌아올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가슴 한편이 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상진을 겪으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평소의 그 또라이 같은 면만 봐서 그런가. 아직 와닿지가 않았다. 그 인간의 이런 어둡고 쓸쓸한 면을 알아도 되는 걸까. 조금, 아니 많이 씁쓸했다.

“여기 계실 건가요?”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그녀는 이미 갈 채비를 마쳤다. 가지고 온 짐들은 모두 냉장고와 싱크대에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아, 지금 가시는 거예요?”

“네, 가야죠.”

볼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오는 건, 보고 가야 하지 않나. 어쩌지.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가는 건 찜찜하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그럼 제가 상진 씨 깨는 거 보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네.”

그녀가 떠나자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깜빡이던 현관 조명등까지 꺼지니까 여기가 꼭 감옥처럼 느껴졌다. 모델하우스, 감옥, 어떤 쪽이든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다.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또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태주는 타박타박, 앞으로 나아갔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더니 발이 보인다. 아주 작은 발이었다. 그리고 손도, 아주 작았다. 등 뒤에는 책가방이 있었다.

아, 태주는 깨달았다. 그날이구나.

희뿌연 안개 속을 덤덤하게 걸었다. 그리고 곧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짙어졌다. 매캐한 느낌이었다. 안개와 연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 더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아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래선 안 됐다. 꽁꽁 얼어붙은 다리가 그대로 바닥에 눌어붙었다. 요란한 고함소리와 비명, 응급차가 오는 기계음이 들린다.

어린 태주가 뒷걸음질을 쳤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가 뒤로 기울어진다. 콰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가 온 터라 척척한 바닥이 태주의 옷을 검게 물들인다. 그리고 그 물에 섞인 빨간 액체가 앞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꿈이야. 진정해.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러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어린 몸이 울음을 터트린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태주가 아꼈던 이들이 뒤엉켜 있었다. 아빠, 현이, 그리고 현우. 반파된 자동차 앞에서 어린 태주가 달달 떨었다. 발로 바닥을 밀어 슬금슬금 뒤로 도망쳤다.

꿈이야, 이건 꿈이야.

어느새 끈적한 핏물과 비가 섞이며 고여서, 큰 웅덩이가 되었다.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 그 안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냥 그 안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 * *

팔이 저렸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팔 한쪽을 마비시킨다.

태주가 부스스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소매로 닦았다. 한동안 꿈은 꾸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꿈을 꿨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잔 걸까. 상진은 죽은 듯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머리 뒤쪽을 슬그머니 들어 보니 거즈가 대어져 있었다. 피가 더 스며 나오지는 않은 듯했다. 떼어 봐야 알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을 그의 코 아래로 가져갔다. 호흡은 멀쩡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 오래 잠들지는 않았네. 두 시간 정도 잠들었던 모양이다. 잠결에 눈물을 펑펑 쏟았는지 얼굴이 붓는 것 같았다. 그길로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퉁퉁 부은 얼굴을 찬물에 넣고 숨을 참았다. 일렬로 놓인 세면용품을 사용했다. 눈물이 굳는 느낌은 딱 질색이다.

세수를 하고 다시 방으로 갔다. 어두컴컴해서 그런가, 귀신이 나올 것 같다. 누운 상진의 곁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어서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그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크고 길었다. 원래 키가 크면 다 길쭉한가 보다.

“……형.”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기운 없는 소리가 났다. 태주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는 상진이 보인다. 조금 울컥했다.

“야, 이 미친놈아!”

욕이 쏟아져 나왔다.

“이 미친놈이 쓸데없이 걱정을 시키고 난리야! 죽을래?”

상진은 말없이 태주를 보고 있었다.

“너 때문에 다른 부동산도 못 가고 이게 뭐야! 덩치는 산만 해서 왜 이렇게 약해. 아주 평소에 네 멋대로 굴 때부터 알아봤다. 남 살살 약 올리는 짓 하기 전에 네 몸부터 챙겨, 멍청아.”

그가 실없이 웃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입술이 말라붙어 아주 꼴보기가 싫다. 차라리 까불까불하던 그 얄미운 얼굴이 나을 지경이다.

“남의 침대 챙길 시간에 네 침대나 챙겨라. 무슨 집이 이래. 귀신 나오겠다. 밖에서는 있는 대로 성질부리고 다니면서 왜 집에서는 이렇게 맥을 못 추고. 야, 이 집 팔아. 아무래도 터가 안 좋은 것 같거든?”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집이 이렇게 어두우니까 몸에 병이 나지. 한참 동안 잔소리를 퍼부었다. 상진은 별 대답도 안 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내내 미소 띤 얼굴이었다. 마지막엔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뭐가 웃겨? 재밌어? 아주 뭘 잘했다고 웃어.”

“좋아서요.”

상진의 말에 태주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더 많았는데 갑자기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말을 잇는다.

“눈을 떴는데 형이 있어서. 너무 좋아서요.”

아, 할 말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서 주저 없이 뱉었다.

“……미친놈.”

‘욕을 못 먹어서 환장을 했지, 네가.’라고도 덧붙였다.

게다가 저 비실비실한 꼬락서니를 보자니 화딱지가 났다. 나이를 먹으면 괜히 눈물이 많아진다. 오늘 하루를 통으로 날린 게 억울해서 그런 거다. 절대 다른 게 아니었다. 또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머리는 안 아파? 아까 어지럽다며.”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 뭐라도 먹어야지.”

“형은요? 형은 뭐 먹었어요?”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일까. 몇 시간 동안 의식도 없이 쓰러진 인물이 본인이라는 걸 까먹었나 보다.

“먹긴 뭘 먹어. 배 안 고파.”

“안 돼요. 밥은 챙겨 먹어야지.”

상진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가 바닥에서 몸을 떼자 등 뒤가 검게 젖어 있었다. 의식이 없던 와중에 끙끙거리며 앓더니…… 식은땀이라도 났나.

“일어날 수 있으면 일단 씻고 와. 따뜻한 물로.”

머리카락도 조금 젖었다. 뒤통수에 거즈 붙은 건 어쩌지. 누가 왔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쩐지 아는 척을 하기가 조금 그랬다. 그 사람의 태도를 보아하니 평소에도 별로 사이가 안 좋았을 것 같아서.

“혹시 누가 왔었어요?”

말 꺼내기가 난감했는데 다행히 상진이 먼저 툭 던졌다. 그래서 태주도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했다.

“응, 누군지는 모르겠고.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이셨어.”

“아…….”

“네가 넘어지면서 다치는 바람에 내가 놀랐는데, 그분이 머리도 치료해 주셨고.”

상진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자신이 치료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분위기를 바꿔 볼 겸 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일으켜 세웠다.

“일단 얼른 씻어. 뭐라도 먹어야지. 걸을 수 있어?”

“못 걷겠어요.”

갑자기 상진이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태주에게 몸을 기대고 벽으로 몰아세운다. 부축한 건 태주였는데 또 상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태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비비적거린다. 괜히 그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일단은 그냥 두었다. ……많이 외로울 것 같았다. 이래서 괜히 남의 비밀 같은 걸 보면 안 된다. 물론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다만.

“야, 계상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조금 안 되었다 싶었더니 손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툭 하면 남의 허리를 더듬고 난리다. 확, 그냥. 걱정했던 마음이 깡그리 녹았다. 망설이지 않고 그의 귓바퀴를 꽉 잡아서 당겼다.

“아, 아아, 아파요.”

“장난치냐? 또 이상한 짓거리 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빨리 가서 씻어.”

“진짜, 악, 아, 어지러웠, 아아, 아파요.”

당연히 아플 것이다. 귀를 아예 떼어 낼 각오로 당겼다. 그가 끙끙거리며 앓자 일단은 놓아 주었다. 그리고 으름장을 놓는다.

“빨리 안 씻으면 나 집에 갈 거야.”

태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진이 욕실로 뛰어갔다. 욕실 안에서 물을 트는 소리,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와장창, 다 깨부시네. 성질도 급하다. 누가 바로 집에 간댔나. 적당히 빨리 씻으면 될 것을.

* * *

주방에 놓인 들통에는 흰 죽이 한가득 있었다. 맛을 보지는 않았지만 향은 고소하니 좋았다. 먹을 만큼만 덜어서 냄비에 넣고 데웠다. 천천히 숟가락으로 저어 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다 씻었어요.”

상진이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앞에 서 있었다. 뭐 이렇게 빨리 나왔나 했더니, 물을 제대로 닦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야. 제대로 닦고 와.”

“빨리 씻으라면서요.”

“그래도 닦기는 해야지. 감기 걸린다,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 슬쩍 뒤통수를 보았는데, 붙어 있던 거즈를 떼어냈나 보다. 아니면 씻다가 떨어졌을지도.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감기 걸려도 괜찮다고?”

“감기 걸리면 형이 간호해 줄 거잖아요.”

말이나 못 하면. 친절하게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게 진정한 마미손이다.

몇 대를 얻어맞고 나서야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고 오는 동안 수저를 놓았다. 따뜻하게 데운 죽을 두 그릇 담아 식탁에 두었다. 슬슬 허기가 지긴 했다. 아까 아침에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먹자.”

“형, 이거 가지고 돼요? 뭐 맛있는 거 배달시킬까요?”

“이거면 돼. 너도 지금은 죽 먹는 게 나을 거야.”

수저를 들고 죽을 크게 떴다. 하, 배고파. 그대로 입 안으로 넣으려는데 상진이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뭐야. 놔. 나 지금 배고픈데 왜 못 먹게 해.”

“형, 이거 혹시…….”

상진이 그릇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죽을 휘이 젓는다. 바닥에 깔려 있던 건더기들을 몇 개 건져 냈다. 그가 하는 짓을 빤히 보다가 못 참고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아까 누가 왔다고 했죠.”

“응.”

“이거 그 사람이 가져온 거예요?”

“응.”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일단 수저를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신경이 쓰인다.

“먹지 마요.”

기껏 준비해 놨더니 그릇 두 개를 가져가서 싱크대에 버렸다.

아니, 아무리 그 사람이랑 뭐 별로 사이가 안 좋더라도 왜 음식을 버리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사람은 미워하되 음식은 죄가 없지 않나. 지금 배고파서 이러나.

“야, 그렇다고 버리냐. 아깝게.”

“형, 새우 못 먹잖아요.”

“응?”

상진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했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과 싱크대에 엎어진 죽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죽 안에 있는 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잘게 썰려서 무엇인지 구분은 하기 어려웠다. 저게 새우인가.

태주는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 그래서 새우를 먹지 못했다. 기도가 부을 정도의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거나 몸이 간지러웠다.

그런데……. 저 인간에게 새우를 못 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아, 죽에 새우가 들어가 있었어?”

“네, 늘 그래요.”

“그럼 너라도 먹지. 아깝잖아.”

“저도 새우 못 먹어요.”

순간 싱크대 한쪽에 놓인 큰 들통이 보였다.

“그럼 저건 어떡하지. 엄청 많이 해 오셨던데.”

“버려야죠.”

미리 알았으면 저렇게 준비하지 않으셨을 텐데. 버리는 사람도 고생이고 요리 하는 사람도 고생이지 않은가. 설거지를 끝내고 상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마 음식을 주문하려는 모양이다.

“너도 알레르기야? 그분께 말씀드리지 그랬어.”

핸드폰 화면에 다양한 음식점들이 보였다. 상진이 태주가 볼 수 있도록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분도 알아요. 저 새우 못 먹는 거.”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았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다. 그냥 대수롭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태주로서는 그게 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형,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다 주문해요.”

“아무거나 빨리 오는 거.”

“그래도 먹고 싶은 거로 골라요.”

“그럼 삼계탕 먹을까? 너 몸이 안 좋으니까.”

사실 삼계탕이 먹고 싶었다. 보양식은 먹을 일이 좀처럼 없었다. 회사 근처에서 잘 안 팔기도 하고, 은근히 비싸다. 삼계탕 먹고 닭죽 해 먹으면 딱인데.

“그래요. 여기에 주문할게요.”

“응, 그래.”

자연스레 그가 주문을 했다. 까짓거 사 줄 수도 있지만, 뭐. 굳이 산다는 것을 말릴 이유는 없으니까. 배달이 빨리 와야 할 텐데. 정말 배가 고팠다. 꼬르륵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이제는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식탁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거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것이 싫어 조명이란 조명은 다 켰다.

이래야 사람 사는 집 같지. 거실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TV라도 보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 저 인간은 대체 평소에 뭘 하고 사는 걸까. 취미도 없나.

주방에서는 물소리가 들렸다. 들통을 닦고 있는 모양이었다. 죽 꽤 많던데, 아깝다. 그래도 못 먹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분도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먹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많이 주는 걸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이 집은 왜 내놓았는지. 대체 왜 자신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머리를 다쳤는지, 왜 발작을 하는지, 그 사람과는 무슨 관계인지.

그런데 하나같이 묻기가 조심스럽다. 특히 방금 전의 일들은. 괜히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태주에게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나누지 않은, 그런 기억들. 그걸 알기에 상진에게도 스스럼없이 묻고 싶지가 않았다.

“형.”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상진이 태주의 발밑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 닿은 태주의 발과 종아리를 끌어안고 허벅지에 고개를 기댄다. 부드러운 볼을 몇 번이고 비비적거렸다. 어리광을 부리는 동물처럼.

“형, 고마워요.”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태주를 보았다.

그윽한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은은하게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져 이내 환한 웃음이 되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밀어낼 수가 있을까.

태주는 입을 열어 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향기가 난다. 손가락에 닿는 머리칼을 만지다가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뜨거웠다.

“열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뭘 맨날 괜찮대. 밥 먹고 얼른 누워서 쉬어.”

“형은요?”

“나는…….”

‘집에 가야지.’라는 말이 선뜻 나오질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혼자 두고 싶지가 않았다.

“가지 마요.”

망설이는 태주를 향해 상진이 말했다.

“형이 하라는 건 다 할게요. 오늘은 가지 마요.”

그의 팔이 깊숙이 들어온다. 그가 동아줄에 매달리는 아이처럼 태주의 종아리를 부여잡았다. 허벅지에 닿는 그의 볼이 뜨겁다.

* * *

다행히 상진이 발작을 한다거나 쓰러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며칠 정도 조금 열이 나기도 했지만 금세 털어 냈다. 그러고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해져서는 내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무슨 개도 아니고. 게다가 씻는다는 소리만 하면 욕실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같이 씻겠다고 우겨서 몇 대 때렸더니 얌전해졌다.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다.

실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서 집을 구해야 해서 마음만 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욕실이 현관과 가까운 편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바로 나갈 수는 있다. 그래도……. 그렇게 도망치듯 나갈 이유는 없으니까.

“여기에 두면 될까요?”

“네. 선은 그쪽에 있어요.”

아무리 집이 크고 깨끗하고 따뜻하다고 한들 내 집보다 좋을 수는 없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니까. 그래서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비록 비좁고 춥고 낡았지만 집이 최고다.

“설치는 다 되었고요. 바로 보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긴 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깨끗하고 넓으면 뭐해. TV도 없고 거실에 있는 거라곤 소파 하나뿐이다. 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큰 방은 텅텅 비었고 상진이 지내던 다른 방은 침대도 없었다. 침구도 내 집에 있는 것보다 못하다. 영 불편해서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형.”

이불에 돌돌 말린 채 소파에 누워있던 태주에게 상진이 말을 걸었다.

“콜록, 콜록……. 왜…….”

“몸은 좀 어때요? 목소리가 더 안 좋아요. 아까 약 먹었는데.”

저 개진상이 또 쓰러지는 일은 없었는데 열이 났다, 며칠간. 그래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아픈 사람 두고 가 버리는 건 인간의 도리도 아닌 것 같고. 최대한의 휴머니즘을 발휘해서 곁을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저 인간이 낫자마자 이번엔 태주가 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감기몸살까지 더해서. 매일 부동산을 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서 그런가. 조금 감기 기운이 있긴 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이제 TV 볼 수 있어요. 여기, 리모컨.”

“굳이 왜 설치를 했어. 어차피 나는 집에 갈 사람인데.”

그냥 TV가 없어서 심심하다고 투덜거렸는데, 바로 설치할 줄은 몰랐다. 일단 리모컨을 주니까 받긴 했다. 요즘 재미있는 TV 프로그램 채널이 뭐더라.

상진이 설치 기사님들을 배웅하고 나서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누워 있는 애벌레에게 다가와서는 바닥에 앉았다.

“열 좀 재 볼게요.”

큰 손이 태주의 이마를 덮었다.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지금의 제 체온보다 서늘한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요란스러운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 잠이 올 것만 같다.

이마에 머무르던 손이 차츰 내려간다. 미끈한 손끝이 볼을 타더니 지근거리에 있던 그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부들부들한 입술이 맞닿는다. 아주 가벼이 몇 번을 맞대었다가 떨어졌다. 살포시 벌어진 입술 새로 촉촉한 살덩이가 밀고 들어온다.

“으읍, 으윽……. 으! 댬깐, 댬깐!”

개수작을 부리기에 혀를 꽉 물어 버렸다.

“이건 어느 나라 식 열재기 방법이냐. 이상한 짓 할래?”

“으으, 아파. 혀에서 피 나는 것 같아요.”

“사람이 가끔 피도 먹고 해야 건강해져.”

동의보감에 있다던가. 아니면 말고.

돌돌 말린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아, 따뜻해. 귤만 까먹으면 완벽한데. TV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상진을 보았다. 갑자기 말이 없는 게 이상하다. 바닥에 앉아 있던 그가 얼굴을 붉히더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곳 물어 줘요.”

“물어서 잘라 버려도 돼?”

“간직해 줄 거면 그래도 돼요.”

“악! 내가 그걸 왜 간직해! 이 미친놈아!”

팔뚝에 소름이 송송송 났다. 아마 지금 몸에 있는 솜털이란 솜털은 죄다 섰을 거다. 상상하면 안 되는데 상상해 버렸다. 뇌야, 제발 생각을 하지 말아 줘. 안 그래도 열이 나서 어지러운데 아찔하다. 역시 저 인간은 통 도움이 안 된다.

“……이상한 짓 할 거면 나 간다. 쿨럭…….”

애벌레가 꿈지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냅다 소파에 다시 눕혀 버린다. 왜 아예 묶어놓지 그러냐. 간호를 하겠다는 건지 사육하겠다는 건지 구분이 어렵다.

“안 돼요. 지금 일어나면 쓰러질지도 몰라요.”

“안 쓰러져. 그냥 병원 가면 나을 것 같아.”

“병원 가면 또 감기 걸려요. 요즘 병원에 감기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감기 환자도 많지만 의사 선생님들도 많잖아.”

“제가 약 사 왔어요. 아까 먹었으니까 점심 먹고 먹으면 돼요.”

말은 바로 해라. 약을 사 온 게 아니라, 약을 배달시켰다. 저 미친놈이. 살다 살다가 약을 배달시키는 사람은 처음 봤다. 코앞에 약국이 있는데 그걸 안 나간다.

“병원에 데려다 줘. 주사라도 맞게.”

“안돼요. 주사 맞다가 이상한 거 옮으면 어떡해요.”

“아니, 이상한 게 왜 옮아.”

“기사도 못 봤어요? 병원에서 주사 잘못 맞았다가 이상한 병 옮은…….”

“아! 알았다! 알았어! 안 가, 병원 안 가!”

말싸움으로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게 신경질이 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기침이 나와서 목이 아프다. 주사 한 대만 맞으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 병원은 안 된다며 성화였다. 혼자 병원에 갈 힘이 없어서 일단 얌전히 굴었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저 인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이래저래 일이 겹친 덕에 회사도 못 나갔다. 다행히 대표이사가 바뀐 이후로 연차가 늘어서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연차를 길게 붙여 썼더니 직원들에게 좀 미안했다.

“너 진짜 회사 안 나가?”

“저도 휴가 냈어요.”

“새파란 신입이 어디서 휴가야. 너 그러다가 잘린다.”

“아저씨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정 안 떨어지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다. 아무래도 한번 쓰러지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어린 나이에 벌써 어쩌려고 저럴까.

회사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태주의 업무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객 응대와 홈페이지, 쇼핑몰 관리도 해야 하고 곁다리로 걸쳐 있던 마케팅 업무도 해야 했다. 그리고 영업팀 업무 보조와 출고팀 재고 파악까지.

모두 태주에게만 맡겨 두고 있던 터라,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사람 한 명 빠진 걸로 이렇게 우왕좌왕해서야 되겠나 싶지만, 각 부서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한 사람에게 조금씩 미루다 보니 이 사달이다. 그래도 대표가 바뀐 후로는 조금 정리가 되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며칠 전에 오 주임이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다. 곁에 있던 상진이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부술 표정으로 노려보기에 길게 통화하지는 못했다. 그가 언제 출근하는지 물었는데 확실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몸 상태가 더 안 좋았기 때문이다.

“멜론 왔어요.”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오랜 기간 회사를 비워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남의 집에서 이불에 둘둘 싸인 채로 멜론이나 먹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형 지금 손 없잖아요. 먹여 줄게요.”

가족들을 떠나 보낸 후로 쉬는 시간 없이 일만 했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남의 돈으로 이렇게 먹고 놀기만 해도 괜ㅊ, 아―, 음, 냠, 맛있당.

* * *

“이상하게 연락이 없으시네.”

“누가요?”

“우리 집주인 할아버지.”

집에 안 들어간 지 수일째다. 태주가 이렇게 집을 오래 비운 적도 없거니와 사정상 이틀 정도 집을 비워도 할아버지가 연락을 하곤 했다. 태주를 보살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신경을 써 주셨다. 아마 걱정을 해 주셨던 거겠지.

벌써 며칠째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데……. 혹시, 나 할아버지께 뭐 잘못했던가. 괜히 우울해졌다. 태주의 인생에 몇 남지 않은 감사한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께 뭔가 미움을 산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바쁘신가 보죠.”

“응, 그런가. 그래도 집을 비우면 연락을 주셨거든.”

찹쌀죽을 쑤던 상진이 뒤를 돌았다. 검남색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조금 웃기다.

넓은 어깨에 그린 듯 착 붙은 끈이 묘하게 어울렸다. 그 아래로 탄탄한 가슴 라인을 타고 툭 떨어진 앞치마가 팽팽하게 몸을 감싼다. 앞치마가 저렇게 작은 경우도 있던가. 태주가 걸쳤으면 헐렁헐렁했을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걱정돼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혹시 할아버지께 뭐 실수했나 하고.”

“실수요? 형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단호하게 말해서 조금 쑥스러웠다. 나도 실수합니다, 해요.

“기분 상하신 게 있어서 이제 나랑 연락도 안 하시는 건가 싶고.”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냥 좀 우울하네.”

식탁 의자 아래로 내린 다리를 올렸다. 의자에 꾸깃꾸깃 쭈그려 앉아서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어쩐지 이런 자세를 했다. 추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것 같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좀 아파서 예민한가 봐.”

“죽 먹으면 기분 나아질걸요. 거의 다 됐어요.”

상진이 인덕션의 전원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부스럭거리더니 이불을 들고 돌아온다. 쪼그려 앉은 태주의 몸을 이불로 감싸고 다시 주걱을 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모락모락 김이 났다. 고소한 찹쌀의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운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서걱거리는 주걱 소리. 태주는 눈을 감았다.

어릴 적, 동생이 아팠을 때 이렇게 죽을 쒀 준 적이 있었다. 발밑에 박스를 두고 그걸 밟고 올라가 죽을 쑤었다. 분명 맛이 없었을 거다. 간을 하는 법도 몰랐고 그저 옆집 아주머니께 들은 순서대로만 만들었었다. 그런데도 그 맛없는 죽을 동생들은 맛있게 먹어 주었다. 현이도, 현우도, 입가에 허연 죽을 묻혀 가면서 말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제인 것처럼 떠오르는데, 다들 어디 갔지.

“형.”

눈을 떴다. 태주의 눈동자에 오롯이 상진이 담겼다.

“다 됐어요. 조금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어야 해요.”

“응, 잘 먹을게.”

깨끗하고 넓은 식탁 위에 정갈하게 담긴 죽이 놓였다. 양손을 그릇에 대었다.

따뜻했다. 왜인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에서 누군가 해 준 음식을 먹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십 년도 넘은 일이구나. 그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저를 들어 조금 입에 머금었다.

정말 맛이 없었다.

“어때요?”

“음……. 응……. 죽이네.”

“죽여요? 정말? 그 정도로 맛있어요?”

아니, 그냥 ‘죽’이라고. 사전적 의미의 ‘죽’.

너무 기뻐하니까 그냥 말하지 않았다. 다시는 저 인간이 하는 음식을 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 준 정성이 있으니 일단 입에 밀어 넣었다. 이것도 다 영양분이고 식량이다. 농부들이 땀 흘려 일한 귀한 노동이었다. 괜찮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먹는 중이다.

[♬♩―]

흐린 눈으로 죽을 먹고 있었다. 식탁에 놓인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또 회사인가. 수저를 내려놓고 화면을 확인한다.

[혹시무슨일잇나]

할아버지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무슨 일 없어요. 저 몸이 조금 아파서 그…….”

상진을 힐끗 보았다.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친한 동생네 집에 와 있어요.”

[그래그래. 무슨 일이 있나 했어. 요즘 안 보이기에.]

“아녜요. 아무 일도 없어요. 할아버지도 별일 없으시죠?”

[응. 별일 없지, 그럼. 목소리가 많이 안 좋네.]

“괜찮아요. 많이 좋아졌어요. 아,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감기가 많이 독해요.”

맞은편에 앉은 상진에게서 시선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태주야.]

“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서 그만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응어리졌다.

할아버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이다. 태주에게도 그런 것처럼, 할아버지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맹세코.

[태주야.]

“네, 할아버지.”

[그…….]

수화기 너머에서 더는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어쩐지 좀 망설이는 듯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려는데 상진이 끼어들었다.

“형, 무슨 일 있으시대요?”

“어? 아니. 잠깐만, 상진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다.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었다. 상진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어 입술에 미소를 머금는다.

“할아버지?”

[……아, 아니다. 얼른 병원 다녀오고.]

“네, 그럼요. 병원 다녀올게요. 할아버지도 감기 조심하세요. 날씨 추운데 골목 앞에 쓰레기 정리한다고 나가지 마시구요.”

[그래, 알았다. 들어가마.]

“네, 들어가세요.”

전화가 뚝 끊겼다.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어서 마음이 놓였다. 마침 오늘따라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는데, 어쩜 이리도 잘 통했을까. 아마 할아버지도 자신을 생각한 모양이다.

분명 맛이 하나도 없었던 죽인데 다시 먹으니 맛이 있는 것도 같았다. 우울했던 감정이 싹 사라진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좋아요?”

“응?”

“아니, 표정이 확 밝아져서.”

“그랬나. 걱정했는데 별일 없으신 것 같아서 안심했어.”

“다행이네요.”

쭈그려 앉았던 몸을 폈다.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편히 앉는다. 들썩거렸더니 이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상진이 일어나 다시 어깨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고마워.”

“뭘요. 저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의 미소 중에 가장 해맑고 순수해 보였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정말로, 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 * *

몸이 아팠다. 새벽부터 다시 열이 난 것 같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뜨겁다. 혀뿌리 쪽에 큰 불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기침을 토해 내며 손을 더듬었다. 누구라도, 누가 좀 도와줬으면.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 그래.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지.

뜨겁게 열이 오른 눈동자에서 물이 질질 흘렀다. 너무 아파. 아팠다. 어질어질한 의식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하아, 하아, 숨을 겨우겨우 토해 가며 살고자 했다. 언젠가는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세상에서 사라져 있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살고 싶었다. 대체 왜일까. 스스로를 경멸했다.

어쩌면 혼자서 눈을 감기가 싫었을지 모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두렵다. 그래, 차라리 그때 같이 눈을 감았어야 했는데. 그랬는데.

“형.”

누군가가 불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열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시야가 어지럽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물결에 어린 형태처럼 파도를 쳐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형, 열이 많이 나요. 괜찮아요?”

그 누군가가 ‘형’이라고 했다.

누굴까. 누구였지. 새하얗게 질린 의식이 자꾸만 흐트러진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 위에 차가운 것이 올려졌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뜨거운 볼을 부들부들한 것으로 닦아 주었다. 아, 그래. 기억이 났다.

“현우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곁을 지켜 주었다, 그 아이가. 지독한 감기에 들었을 때, 아빠와 현이가 약을 사러 나간 사이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무서웠던 그때. 현우가 곁에 있었다.

그 작은 손이 내 손을 움켜잡았다.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도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었었다. 형, 아프지 마. 형, 죽지 마. 엉엉 울면서 내게 안기곤 했다.

“현우야.”

앞에 있던 현우가 말이 없었다. 불투명한 시야 너머로 그의 어깨가 떨리는 듯도 했다.

울고 있나. 또 우는구나, 이 울보. 너무나 마음이 여렸던 아이. 현이가 현우를 놀리면 금세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러고는 내게 달려와서 뒤에 숨었다. 귀엽고 어여뻤던 두 동생은, 내게 보물이자 선물이었다.

“현우야, 울지 마.”

현우는 좋은 집에 살았지만 늘 외로워했다. 그 아이는 그 넓고 큰 집에서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래서 비좁고 추운 우리 집에 자주 와 있었다.

나는 현우의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 가곤 했다. 용돈을 모아서 현우가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종종 사 주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마치 나를 영웅처럼 보곤 했다. 반짝거리던 그 눈동자가 내겐 어떤 보석보다도 예뻐 보였다.

“형, 안 아파. 형은 괜찮아.”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목이 멨다. 내가 울면 안 되는데, 형이 되어서는. 그런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잔뜩 고인 눈물이 옆으로 흘렀다.

사실은 알고 있다. 현우는 이제 없다.

이것 역시 꿈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죽었으니까.

* * *

“차가워.”

“조금만 참아요.”

얼음주머니가 이마 위로 올라왔다. 시베리아의 얼음을 가져다가 올려놨다고 해도 믿겠다. 적당히 차가워야지. 작게 투덜거렸다.

“열이 조금 내려서 다행이에요.”

“병원에 갈 걸 그랬어.”

“병원에 갔어도 아팠을 거예요.”

“아주 악담을 해라.”

아니, 병원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왜 못 가게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지끈지끈 머리가 울리는 통에 인상을 썼다. 그랬더니 상진이 작게 웃었다.

“새벽에 엄청 아파 했는데, 기억나요?”

“아니, 전혀. 해롱해롱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형이 엄청 울어서 놀랐어요.”

“내가 울었어?”

“네.”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울었구나. 어쩐지 눈이 좀 부은 것 같았다. 이불 안에 있던 손을 꺼내 눈꺼풀을 비볐다.

“기억 안 나는구나.”

“응, 기절했나 봐.”

상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혹시 감기가 옮았나. 계속 붙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걱정이 돼서 말을 건넸다.

“너 감기 옮은 거 아니야? 이렇게 안 붙어 있어도 돼. 많이 아프면 내가 문자 할게.”

“괜찮아요. 안 옮았어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말을 잇다가 기침이 나왔다. 코도 막히고 기침도 나오고 열도 나고. 아주 죽겠다. 추잡스러운 짓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아까 약을 먹었는데도 아직 효과가 들지를 않는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차가운 물. 너무 목구멍이 뜨겁다.

“……상진아, 나 찬물 좀.”

“지금 입 안이 너무 말라서 갑자기 마시면 안 될 텐데.”

“목이 너무 뜨거워.”

“잠깐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를 달그락거리며 가지고 왔다.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자 투명한 통 안에 동그란 얼음이 들어 있었다.

“형, 나한테 기대요.”

상진의 손이 등 뒤로 쑥 들어왔다. 그의 팔에 기대어 상체가 살짝 들렸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툭, 그의 가슴으로 머리가 기울었다. 그가 자세를 조금 바꾸자 목이 뒤로 넘어가면서 입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차가운 것이 닿는다.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 입 안을 적셔 주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습기를 마시려고 숨을 흡 들이마셨다. 너무 달았다. 태주가 정신을 놓고 그것을 쪽쪽 빨았다.

“……흐읍, 으응…….”

좀처럼 가까이 오지 않아 애가 탔다. 힘이 없는 팔을 들어 앞을 더듬는다. 상진의 목덜미를 잡고 앞으로 당겼다. 그가 머금은 동그란 얼음이 더 깊게 들어온다.

츄웁, 츕. 습기 찬 소리가 둘 사이에 퍼졌다. 섞이는 것이 얼음에서 녹은 물인지 타액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핥고 또 핥았다.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혀과 겹쳐 금세 작아졌다. 으응, 조금만 더. 칭얼거리며 그를 끌어당겼다.

“으음, 응, 흐으읍…….”

조금씩 녹아 버린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얼음이 작고, 또 작아져 흔적만 남았다. 아쉬워, 더 머금고 싶었다.

아직 서늘한 그의 입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목에 두른 팔을 더 깊게 끌어안고 당겼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얼음 대신, 차가운 그의 혀와 타액을 나누었다. 부드러운 것이 점막을 훑으며 파고든다. 태주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조금의 거부도 없이.

“……하아, 으읍, 형.”

상진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숨이 모자라 헐떡거리는 태주의 볼을 어루만진다. 열이 오른 볼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태주가 상진에게 매달렸다. 아직도 목이 마른지 발간 혀가 입술을 천천히 핥는다.

“으응, 가지 마.”

약 기운이 올랐나. 그랬을 것이다. 감기약에 유독 정신을 못 차리곤 했다. 이미 풀린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좋았다. 상진이 빙긋이 웃는다.

“아무 데도 안 가요, 형.”

* *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그러니까 애당초 그날 그 집에 가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고시원에 들어갈걸. 조금 욕심을 부린다고 이 부동산 저 부동산 발품을 팔았던 것이 잘못 아니었을까.

“어어, 그거 깨지는 거니까 조심해.”

“그릇인가?”

“상자에 쓰여 있잖아, 잘 보고 해.”

감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누가 알았나. 하필이면 지독하게 아플 줄이야.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고 말았다. 최근에는 그렇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이제 박스 몇 개 남았어?”

“어, 한 여섯 개요.”

“이야, 이 집도 짐이 은근히 많구먼.”

겨우 몸이 나아서 부동산에 가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봤던 집들은 몽땅 계약이 된 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나도 남김없이 계약이 되었을까. 확실히 이사철이긴 한가 보다.

“다 실었지?”

“네, 출발하면 됩니다.”

열심히 짐을 포장하던 남자가 태주에게로 왔다. 그가 어느새 텅 빈 집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장님. 안에 한번 확인해 보세요. 짐 다 뺐는데 혹시나 남은 물건 있으면 챙기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제는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아늑한 내 공간이었는데 짐이 다 빠지고 나니 낯설었다. 오랜 시간 정을 들인 곳이라서 많이 섭섭하다. 주방부터 화장실, 그리고 좁은 방까지 확인했다. 남은 물건은 없었다.

“짐 다 챙겼어요. 더 챙길 건 없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일단 그 오피스텔 가서 점심 먹고 한 시쯤에 시작할게요.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이따 봬요.”

벌써 열두 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서둘렀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행히 포장 이사를 해서 힘이 들지는 않았다. 텅 빈 방을 조금 더 둘러보다가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집주인 할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할아버지.”

“태주야.”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아, 울면 안 돼.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주야, 미안하다.”

“아이, 할아버지. 왜 자꾸 그러세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주름진 그의 목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려 하늘을 본다. 아, 오늘따라 하늘도 맑네.

“이제 저 안 보실 거예요? 아니잖아요. 저 엄청 자주 찾아올 거예요. 진짜예요.”

“내가 널 어떻게 봐야 할지…….”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까지 저 데리고 있어 주셨잖아요.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아요, 할아버지.”

세월에 굽어진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제 이렇게 작아지셨지. 예전에는 커 보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어른이 된 태주가 아이가 되어 가는 그를 안았다. 그와 부둥켜안고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저 멀리 가는 거 아닌걸요. 정말 착한 동생이 있는데, 그 친구네 집에 가요. 여기보다 훨씬 넓고 좋아요. 더 좋은 집에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그래, 태주야.”

“네, 할아버지.”

그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태주의 손을 꼭 잡았다. 꼬깃꼬깃한 봉투를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거, 가지고 가.”

“아녜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이거로 맛있는 거 사 드세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너무 주고 싶어서 그래.”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그가 준 봉투를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까슬까슬한 손이 어깨를 어루만진다.

“태주야. 마음 굳게 먹고 잘살아야 한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참지도 못하고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바보처럼 엉엉 울며 할아버지에게 안겼다. 할아버지의 작은 어깨가 다 젖을 때까지 울어 버렸다.

* * *

“금붕어 같아요.”

“죽을래?”

상진은 주차된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다가가자 얄밉게 말했다. 그에게 쏘아붙이고는 차에 탔다.

“차는 언제 바꿨어?”

예전에 본 차와는 달랐다. 그 휘황찬란하고 누가 봐도 값이 비싼 차가 아니었다. 문이 위로 열리던 그 무시무시한 자동차 말이다.

“얼마 전에요.”

“전에 타던 거는?”

“팔았어요.”

검은색의 평범한 세단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래도 이 차도 좋구나. 소음이 하나도 없었다. 시트도 편했고. 안전벨트를 매고 편안하게 기댄 채 물었다.

“팔았어? 왜?”

“형이 전에 타던 차 싫어했잖아요.”

상진이 태주를 보며 말했다. 아, 그랬었나. 조금 머쓱해졌다. 너무 눈에 띄는 터라 몇 마디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이 골목 사람들이 자꾸 의식하는 것도 좀 불편했고. 그런데 그렇다고 멀쩡하던 차를 팔 것까지야 있나. 자신이 뭐라고.

“아니, 그렇다고 파냐.”

“형이 싫어하는 건 하기 싫어요.”

아주 무해하게 웃음 지으며 그가 말했다. 참나 누가 보면 깜빡 속겠네, 내 말을 잘 듣는 온순한 양인 것처럼 굴다니. 제멋대로 날뛰는 망아지면서.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내가 싫어하는 걸 언제부터 하기 싫어했어? 그 반대 아니었나, 청개구리.”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럼 조금 더 노력하도록.”

힐끗 옆을 보니 그가 입술이 댓 발 나와서는 툴툴거렸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요즘 들어 상진은 제 나이를 찾아가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최근에는 딱 그 나이 또래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마냥 동생 같아서 귀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형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뭔데?”

잠시 신호에서 차가 정차했다. 상진이 고개를 돌려 태주를 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 차는 조수석 시트가 뒤로 완전히 넘어가요.”

“그래서?”

“형이 훨씬 편할 거예요.”

“내가 시트를 넘길 일이 뭐가 있어.”

“있을 텐데. 잘 생각해 봐요.”

“모르겠는데?”

그럴 일이 뭐가 있나. 어차피 이 차를 자주 타는 것도 아니고, 가끔 이렇게 얻어 타는 정도다.

그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휙휙 지나치는 풍경들을 구경하며 잠시 고민했다. 다음 신호에 차가 다시 멈추었을 때, 답을 찾지 못하고 그를 보았다.

상진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있었다. 핸들의 중심에는 자동차 브랜드의 마크가 새겨져 있고, 그걸 기점으로 양옆에는 여러 버튼들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마크 아래 부분은 둥근 핸들과 이어져 지지대의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핸들에는 총 세 군데가 뚫려 있었다.

그 인간은 그 뚫린 부분 주위를 손가락으로 스윽 슥 문지르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를 가지런히 모아서 그 안으로 까딱거린다. 안쪽으로 천천히 밀어 넣다가 빼더니 무언가를 벌리는 시늉을 했다. 그의 길고 미끈한 손가락이 말하는 바를 그제야 눈치를 챘다.

태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

“오늘 저녁에 드라이브 가요. 괜찮은 곳 알아 놨는데.”

“야! 이 미친놈아! 어쩐지 한동안 좀 잠잠하다 했다, 내가.”

“거기 가면 우리밖에 없을 거예요. 뭐, 다른 사람 있어도 괜찮고요.”

“뭐라는 거야. 절대 안 가.”

“저 다 나을 때까지 도와주기로 했잖아요.”

그가 엑셀을 밟으며 말했다. 저 여유로운 낯짝을 좀 보라지. 아주 사람을 갖고 놀고 난리다.

물론 그런 약속을 하긴 했다만, 그게 차에서 그 짓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게다가 그 이후에 약물치료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았고. 또 가끔……, 할 때는 아무 문제도 없는 듯했다. 사실 이제 괜찮아졌는데 거짓말하는 건 아닐까.

“미안한데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야? 너 아주 잘만 세우잖아.”

“형한테만 서는 거예요.”

몸이 움찔했다. 아니, 저건 또 저거대로 문제 아닌가. 왜 자신한테만 반응을 하는 걸까. 무어라 받아치지도 못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더 말을 붙여온다.

“그러니까 형이 책임져요.”

“그걸 내가 왜 책임져.”

“책임 회피하는 거예요? 예전 일들부터 다시 꺼내기 싫은데.”

그건 좀 곤란했다. 괜히 과거 이야기 들먹거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태주도 뭐,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네가 요즘 나하고만 붙어 있어서 그래. 좀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이성 친구도 사귀어 보고. 이성 친구가 싫으면 동성 친구도 좀 사귀고 그래라. 여러 사람을 만나야 빨리 나을걸.”

이제는 감기도 다 나아서 굳이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 비록 사정상 그의 집에 들어가는 처지이긴 했으나 각자의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그처럼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고 돈도 많은 청년이 집에만 붙어 있으면 국가의 낭비다. 소비도 좀 해 줘야 국가 경제가 살아나고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야 경험도 쌓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자연스레 치료가 될지도 모른다.

“진심이에요?”

“응?”

상진이 나직이 물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는데 전에 없이 싸늘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도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태주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옴짝거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추욱 처진 얼굴이다.

“나는 형만 있으면 되는데.”

어느새 그의 오피스텔 근처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사위가 어두워진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입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마치 큰 뱀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태주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상진에게서 건네받은 카드키로 현관을 연다. 상진은 차를 주차하고 뒤늦게 그를 따라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뚜벅, 뚜벅.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 번 더 넘어질까.’

그럼 또 내 곁에 있어 줄 텐데. 상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 * *

이사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장 이사여서 크게 힘이 들지도 않았지만 웬만한 건 다 버리고 들어왔다.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다 보니 버리지 않고 쌓였던 물건들이 꽤나 많았다. 하나둘씩 잘 쓰지 않는 짐을 정리했다.

“근데 이 방을 내가 써도 돼?”

“물론이죠.”

상진의 오피스텔은 방이 총 3개였다. 하나는 드레스룸, 하나는 작은 방, 하나는 큰 방. 태주는 자신이 작은 방을 쓰겠다고 했는데 큰 방을 내줬다. 그 큰 방 하나가 예전에 살던 집과 실 평수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래도 되나. 좀 미안했다.

“그냥 네가 큰 방을 써. 나는 어차피 집 구하면 나갈 거니까.”

“집을 또 구해요?”

“그래야지. 언제까지 여기 얹혀서 살 수는 없잖아.”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삽시간에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곧 입꼬리를 떨어트렸다.

“얹혀서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거죠, 나랑.”

“언제까지 같이 살아. 너도 언젠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잖아. 나는 눈치 없이 방해하고 싶지 않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의 연애를 방해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렇게 가진 거 다 가진 놈들은 금방 질려 한다. 아마 이렇게 잘해 주는 것도 그냥 신기해서일 것이다. 본인이 살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한정판 구질구질, 성태주이올시다.

“그리고 월세는 낼 거야. 보증금까지는 뭐,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까 넘어가 주면 좋고.”

“월세를 낸다고요? 왜요?”

“당연히 내야지. 부동산 통해서 계약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너도 월세로 내놓았던 거잖아.”

“아니, 그건……!”

그를 빤히 보았다. 그래, 이것도 궁금한 내용 중 하나였는데. 뭐라고 말하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건……. 그……. 그…….”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다. 뭔가 구린 구석이 있긴 했나 보다. 하긴 아주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집이 나오는 게 이상하다 싶긴 했다.

“형이 내 오피스텔로 들어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냥 여기로 오면 돈도 안 내도 되는데 굳이 다른 곳을 찾았잖아요.”

“내가 거지도 아니고. 공짜라고 남의 집에 막 들어가냐.”

“그게 아니고…….”

너무 기를 죽였나.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울 지경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타박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그의 어깨를 툭툭 토닥거렸다. 이제 당분간은 같이 살 텐데 마무리는 좋게 지어야겠다. 위로해 줘야지.

“괜찮아. 네 딴에는 날 생각해 준 거잖아. 그 방법이 조금 스토커 같기는 했지만.”

“스토커라니…….”

“조금 징그럽긴 했는데, 날 위해 준 거라고 생각할게.”

“징그럽다니…….”

나니까 이런 짓을 참은 거지. 한 끗만 더 어긋났으면 경찰서행이다. 은근히 좀 집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연애할 때 저러면 차일 텐데. 저 인간에게 중도(中道)란 없는 것일까.

널찍하고 깔끔한 방에 침대가 놓였다. 상진이 사 준 그 어마어마한 침대였다. 방은 거실과 비슷한 무드였다.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의 벽지와 천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가구를 들여놔도 잘 어울렸다. 한쪽에는 침대를 두고 반대편에는 책상을 두었다. 붙박이장까지 있어서 다른 가구를 굳이 들여올 필요가 없었다.

옷과 침구는 붙박이장에 모두 정리해서 넣었고 자질구레한 짐들은 사다리 책장에 두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아, 그릇은 어쩌지. 이대로 박스를 뜯지 않고 둬야 하나.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미뤄 두고 있었다.

“형, 쓰레기 버리고 왔어요.”

“응, 고마워.”

“짐은 다 정리되었네요.”

“얼추 되었지. 방이 넓어서 공간이 많이 남아.”

“이제 사고 싶은 가구들 사서 넣으면 되죠.”

그가 빙긋 웃었다. 돈 많은 자의 미소란, 늘 부러운 법이다.

“사고 싶다고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야, 가구라는 건.”

“사고 싶으면 사야죠.”

“무슨 편의점 가서 종이컵 사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뭐가 걱정이에요. 제 카드로 긁으면 되는걸.”

상진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블랙 카드가 눈이 부셨다. 뭐야, 저거. 저거 뭔데. 뭔데 이렇게 눈이 부시냐고. 부처님 머리 뒤에 있는 후광처럼 상진의 손가락 사이가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내가 네 카드를 어떻게 긁어.”

“우리 신혼 카드예요.”

“너 갈수록 뻔뻔해진다. 어디 가서 그런 아저씨 같은 농담 하지 마라.”

귀엽다고 한 거 취소다, 취소. 아주 백 년 묵은 뱀처럼 능글맞았다. 저런 소리를 대체 왜 저한테 하는지.

바닥에 둔 그릇 박스를 들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상진이 냅다 들어 버렸다.

“이거 어디다 두게요?”

“내가 들게.”

“괜찮아요. 이거 그럼 주방에 정리해요.”

“어? 아니, 너도 그릇 있는데 뭐하러. 그냥 박스째로 뒀다가 내가 나중에 집 구해서 나갈 때 가지고 가려고.”

“저 그릇이 몇 개 없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 인간이 아팠을 때가 떠올랐다.

죽을 덜어서 상을 차리려고 보니, 주방에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침대도 없고 침구도 시원찮고 TV도 없고 그릇도 없고.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상진과 그릇을 정리했다. 주방에 나란히 서서 접시는 접시대로, 밥그릇은 밥그릇대로 차곡차곡 쌓았다. 주방의 수납장도 텅텅 비어 있다. 그곳에 태주가 가지고 온 식기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외에도 국자 같은 요리기구라던가 밥솥, 에어프라이어, 토스트기. 다 자기 자리를 찾아 정리됐다.

“형,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말하지 마. 무슨 소리할지 알 것 같은데 말하지 마.”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신혼부부 같아요.”

“아, 말하지 말라고. 진짜 왜 그래.”

지금 상황이 좀 그렇게 보이긴 했다.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살림을 합친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필 주방 그릇을 같이 정리하는 바람에 더 그랬다. 그걸 알아서 더 민망하다. 귓바퀴에 열이 올랐는지 따뜻했다. 그에게 들킬까 양손으로 귀를 문질렀다.

“오늘 저녁은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합방 기념으로.”

“합방은 무슨 얼어 죽을 소리야.”

“합방이죠. 저 오늘부터 침대에서 잘 건데.”

“야, 침대 기어 올라오지 마. 절대 안 돼.”

“머리를 다쳐서 바닥이 불편해졌어요.”

상진은 꼭 자기가 불리해지면 아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태주가 아픈 사람에게 매몰차게 굴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침대를 사. 네 그 멋있는 카드로.”

“어차피 형 침대가 있는데 뭐 하러 또 사요.”

“아까는 사고 싶은 건 사야 한다며.”

“전 지금 침대는 별로 사고 싶지 않아요.”

태주의 입장에서는 마냥 거절하기가 좀 난감했다. 어찌 됐든 이곳에서 신세를 지는 입장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된 마당에 거절을 한들 저 인간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다.

또 한편으로는 같이 자는 게 뭐, 그렇게 나쁘거나 불쾌하거나 싫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면서도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곤 했으니. 정 안 되겠으면 거실 소파에서 자면 되고.

“마음대로 해라.”

반쯤 포기 상태로 말을 하자, 상진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가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는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오늘 형 뭐 먹고 싶어요? 우리 와인도 마셔요.”

“순대국밥.”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와인이랑 어울릴…….”

“순대국밥.”

“네…….”

괜히 심술이 나서 순대국밥을 먹자고 해 버렸다. 와인에 스테이크까지 썰었다가는 정말 신혼 첫날밤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와인 마시고 취해서 저 인간하고 또 그렇게 되어 버리면, 어휴, 저 큰 거를 어떻게……. 어휴! 겁부터 난다.

* * *

어느덧 해가 졌다.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 아래로 하나둘 야경의 빛이 켜진다. 태주가 거실의 큰 창 너머로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출근을 해야 한다. 연차도 거의 다 썼고, 매일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나오냐며 우는 오 주임이 안쓰럽기도 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사실은 나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태주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야경 예쁘다.”

하늘에는 이제 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 별들이 모두 땅으로 쏟아져 내린 것만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건물에 수를 놓는다. 항상 저 수많은 별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그 별들을 감상하고 있다.

상진을 만나고 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곤란했던 적도 많았지만, 사실은 좋았던 일들이 더 많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그가 곁에 있는 것에 자꾸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굴러 들어온 인연은 언제라도 굴러 나갈 수 있는 법이다. 태주는 그때 감내해야 할 상실감이 덜컥 두렵기만 했다.

이런 걱정을 할 정도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익숙해져 버린 것이겠지만.

“왜 창가에 서 있어요. 추운데.”

상진이 양손 가득 요리를 나르고 있었다.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접시들이 놓인다.

“그냥, 야경이 예뻐서.”

“아……. 그래요?”

저 무미건조한 반응은 뭐람. 눈에 가득 담긴 별들을 지워내고 뒤를 돌았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준비되었다. 그가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꺼내는 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매일 보는 풍경이라 넌 감흥도 없나 보다.”

툭 말을 건네자 그가 손에 들린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온다. 태주가 말한 그 풍경을 확인하려는 듯 말이다.

“예쁘네요.”

태주가 곁에 선 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키는 커서 가끔 뒷목이 욱신거린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네.”

대체 저 인간은 무슨 재미로 사는 걸까. 그는 종종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것도, 즐기는 것도, 취미도, 관심을 가지는 것도. 빈껍데기만 남은 듯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내면서 그의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꼭 시간을 도둑맞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텅 비어 보였다.

“상진아.”

“네, 형.”

“이건 정말 내가 형으로서 말하는 건데.”

다른 사람에게 위한답시고 조언하는 걸 혐오했다. 그렇지만 이번엔 딱 한마디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태주는 상진이 어딘가 모르게 안쓰러웠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조건을 가진 사람인데, 왜 그걸 누리지 못할까. 이번 생에만 주어진 특전일지도 모른다. 다음 생에는 얄짤없을지도 모른다고! 만약 태주가 상진과 같은 환경이었다면 비싼 취미 생활도 해 보고 친구도 맘껏 사귀고 인생을 즐겼을 터였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취미든 일이든.”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어요, 저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뭐 취미 생활 같은 거라도 하는 거야?”

다른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하긴, 요즘은 몸도 안 좋았고 계속 신세를 졌으니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는 하루종일 붙어 있질 않았으니까 모를 일이고.

“취미라고 해야 하나. 뭐, 비슷해요.”

“뭐야, 그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요즘 정말 행복하거든요.”

상진이 태주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 안으로 태주가 담긴다. 그의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덮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가 제 동생 또래여서 그런가. 자꾸만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것 같다.

그를 보면 왜인지 현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매몰차게 굴지 못했던 거겠지. 겪어 보니 또 그렇게 미친놈은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감기에 걸려서 많이 아팠을 때도 그가 곁에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혼자 살면 그게 문제다. 아플 때 너무 서러운 것.

“맛있겠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위에는 여러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태주는 와인보다는 소주를 즐겨 먹었기 때문에, 좀 낯선 안주들도 꽤 보였다.

스테이크는 적당히 구워져 윤기가 흘렀고 그 옆의 아스파라거스도 먹음직스러웠다. 연어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에도 눈길이 간다. 바게트 위에 발린 하얀 치즈 위로 잘게 썬 토마토와 자색 양파, 피망이 올려 있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는 견과류나 잼, 앙금도 있었다. 종류 별로 다양하네. 슬라이스 된 과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

“무화과예요.”

“아, 이게 무화과구나.”

들어본 적은 있는데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저렇게 잘라 놓으니까 느낌이 또 다르다. 바게트에 발린 하얀 치즈도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날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는데, 상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리코타 치즈인데 담백해서 좋아요.”

“넌 이런 거 자주 먹어?”

“자주 먹는 편은 아닌데 형 입맛에 맞을 것 같아서요.”

참치김밥은 내 입맛에 맞는데. 이런 게 입에 들어가려나 모르겠다.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내 입맛에 맞을지 어떻게 알까.

“순대국밥은 내일 꼭 먹어요. 제가 사 올게요.”

“됐어, 농담이야.”

순대국밥이나 먹자고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이사한 날이니까. 조금은 특별한 메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저 인간이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라 좀 배려한 것도 있었다.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상진이 와인 잔에 레드와인을 따랐다. 짙은 포도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소주만큼은 아니겠지만 꽤 도수가 있어 보였다. 그를 기다리며 바게트 카나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 맛있다.”

“맛있죠? 형이 좋아할 것 같았어요.”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입맛에 딱 맞았다. 우물거리며 그를 보았다. 상진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와인 잔을 들었다.

아, 좀 쑥스러운데. 쭈뼛거리다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살짝 그 끝을 부딪친다. 영롱한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소주는 단둘이 마셔도 부끄럽지 않지만 와인은 좀 다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까 저 인간이 합방이니 신혼이니 이상한 소리를 해 대서 그런가 싶었다.

“형, 벌써 얼굴이 붉은데. 열나는 거 아니죠?”

“어? 응? 어, 아니, 전혀.”

상진의 손이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레 태주의 이마에 안착한다. 그가 천천히 이마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럴 거야.”

사실 술 때문은 아니지만. 왜 이렇게 덥지. 자꾸 얼굴이 화끈거린다.

“천천히 마셔요. 무리하지 말고.”

그가 태주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깊게 자리 잡은 눈꺼풀이 곡선을 그린다. 자로 잰 듯 똑 떨어지는 비율의 이목구비가 화려했다.

그의 입술이 당겨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형.’ 하고 툭 터진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태주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잔에 담긴 와인을 단번에 비우고야 말았다.

“형?”

상진이 놀란 눈으로 태주를 보았다. 말릴 새도 없이 들이켠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내려가고 있는지 알리는 것처럼.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평소에는 뭐 괜찮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저 인간이 잘난 거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이게 다 분위기 탓이다, 분위기. 이래서 와인은 먹기 싫었다. 게다가 살림을 합치고 처음 갖는 술자리라……. 응? 아니, 살림이 아니라! 이사를 하고 나서 처음 갖는 술자리라 좀 감성적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은 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

* * *

TV에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은은한 조명만 켜 둔 채로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깨끗하게 비운 빈 병과 음식들을 그가 치우는 사이, 태주는 따뜻한 물로 씻고 거실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술을 마시고 목욕을 했더니 확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다. 살짝 알딸딸한 상태로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형.”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씻고 거실로 왔다. 은은한 향이 촉촉한 살갗 너머로 느껴졌다. 그 역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미끈거리는 실크 소재의 잠옷이다. 카키색보다 살짝 옅은 녹색에 체크무늬가 그려진 홈웨어인데……. 어라? 저거.

“너! 그 잠옷!”

“잠옷이요? 왜요?”

예전에 처음 상진을 만났을 때다. 술에 취해 자세한 기억을 하지 못했는데, 다음날 처음 보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태주가 스스로 그런 브랜드의 잠옷을 샀을 리도 없었고 카드나 현금 내역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개진상에게 직접 묻기가 좀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태주가 입고 있는 파자마와 그가 입고 나온 옷이 똑같았다. 이거 꼭…….

“커플 잠옷이네요.”

“뭐야. 그때 이거 그럼 네가 샀던 거야?”

으악! 커플 잠옷이라니! 무슨 짓이야, 대체! 지금까지 그 누구하고도 커플 잠옷이란 걸 입어 본 적이 없는데!

“네, 그랬죠.”

“그럼 나를 집까지 데려다 놓은 것도 너였고?”

“네, 그럼 누가 데려다주었겠어요.”

“아니, 집 문은 어떻게 열었…….”

“재킷 주머니에 열쇠가 있던걸요?”

“아.”

오래 묵힌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 당시에는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인데,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또 이해가 되었다. 하긴, 번호 키가 아니라 열쇠니까 주머니에 있던 걸 찾았을 수 있다.

“그럼 잠옷은 뭐야?”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상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 괜히 물어봤나. 별로 좋은 답은 안 나올 것 같은데.

“형이 그날 토하고 난리가 나서.”

“아.”

“그래서 갈아입힌 거예요.”

“아.”

“더 말해 드려요? 그날 대체 무슨 짓을 했는…….”

“아니, 아니! 말하지 마! 미안해, 고마워.”

호기심을 이유로 굳이 기억 못 하는 흑역사까지 캐낼 필요는 없다. 그때 시간이 늦어서 아마 잠옷을 사러 가진 못했을 거고. 우연히 본인이 입을 잠옷을 가지고 다니다가 자신에게 줬나 보다. 그래, 그랬을 거다. 상진이 들고 있던 가방이 컸으니까 맨파워맨 제품과 파자마 정도는 충분히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 그런 거여야 한다.

“그런데 너도……. 꼭 이거랑 똑같은 거로 입어야 했니?”

“왜요. 똑같은 거 입으니까 귀엽잖아요, 우리.”

“함부로 ‘우리’라는 단어 쓰지 말기로 하자.”

당분간은 ‘우리나라’라고도 하지 말아야지. 자꾸만 ‘우리’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저 인간이 뻔뻔하게 나오니까 점점 그 자극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형, 취했어요?”

“어. 아니.”

살짝 졸렸다. 이사한다고 이거저거 신경 쓰기도 했고, 이제 막 감기가 나은 데다가 술까지 마셨다.

집은 따뜻했고 조명은 은은했다. TV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까지 감미로웠다. 몸이 노곤하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상진을 보았다. 그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 너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요?”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어.”

“물어봐도 돼요. 형이라면 다 돼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이걸 물어봐도 될까.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계속 궁금했고 마음에 쓰였다. 자신이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겠지만.

“그, 전에 오셨던 분 말이야.”

상진이 쓰러진 날. 이 집에 왔었던 중년의 여성분에 대해서였다. 그날 이후로 태주도 굳이 묻지 않았고 상진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분이 어머니, 는 아니지?”

태주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뱉은 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야. 번거롭게.’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진에게, 그녀가 한 말이다.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그 말을 직접 들은 태주로서는 모른 척하기가 힘들다.

“네, 어머니는 아니에요.”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다. 단어를 고르는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상진이 말을 이었다.

“제가 혼자 나와 있으니까 돌봐주러 종종 오는 분이에요.”

“아, 그렇구나.”

“왜요?”

“응? 아니, 그냥 궁금했어.”

더 궁금한 것들이 있었지만 구태여 꺼내지는 않았다. 단순히 일을 해 주시는 분이라면 그 퉁명스러운 태도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 집이 그녀에게는 직장이라면 때때로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을 테니까. 아주 백보양보해서 억지로 이해를 하려 노력하자면 말이다.

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터벅터벅 소파로 다가온다. 비스듬히 누워 기댄 태주의 곁에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궁금한 게 더 있잖아요, 형.”

……일부러 물어보지 않으려고 한 건데. 속내를 꿰뚫었는지 그가 재촉해 왔다. 어깨에 닿은 그의 얼굴이 따뜻하다.

“……어쩌다가 다쳤어? 머리.”

잠시 고민을 이어 가다가 결국 질문을 던졌다.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라고도 덧붙였다.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태주는 잘 알고 있었다.

“사고였어요.”

덜컥, 심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태주의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굳는다. 사고, 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소파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머리를 다쳤어요.”

어깨에 기대었던 그의 머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태주의 어깻죽지에서 쇄골 아래쪽으로. 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이 잘 들리는 곳으로.

“큰 수술도 여러 번 받았는데, 다행히 회복을 했죠.”

눈을 감아도 펼쳐지는 그 악몽 같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지나간다. 태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고통을 겪은 사람이 차라리 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살이 저미는 죄책감에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형.”

태주가 상진을 보았다. 그 역시 눈가가 붉게 번져 있었다. 그렁그렁 거리는 눈물방울들이 아롱진다.

“왜 울어요. 이젠 괜찮아요.”

“으응.”

“평생 후유증이 있겠지만.”

“응…….”

어깨에 기대었던 상진이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소파의 천을 그러모아 긁는 태주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훑으면서 똑바로 응시한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는 흐르지 못한 눈물이 고였다.

“누굴 생각해요?”

희미하게 걸린 미소가 태주를 향했다. 상진은 생각했다.

누굴 생각하고 우는 걸까. 지금의 계상진? 아니면, 그때의 김현우?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비록 상흔일지라도 그의 가슴에 남을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많이 아팠겠다.”

“네, 형. 많이 아팠어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기억. 평생 아물지 않을 상처가 벌어지는 것만 같다. 태주가 눈꺼풀을 닫았다. 식지 않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상진의 온기가 느껴졌다.

“형, 저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체온이 살에 닿았다. 부드러운 잠옷 속으로 말이다.

“이제 제가 있으니까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태주가 숨을 들이켰다. 서서히 그와 몸이 맞닿는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비스듬히 틀어진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태주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입술에서부터 퍼지는 열감이 전신으로 흩어진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아래로 침잠할 즈음, 벌린 입술 새로 그가 밀려 들어왔다.

* * *

긴 휴가가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이 정도 쉬었으면 월요병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씀을. 월요병은 불치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똑같은 아침, 똑같은 출근, 똑같은 일, 똑같은 퇴근. 대다수 직장인이 그렇듯 평일의 시간은 예사롭게 흘러갔다. 다만, 태주에게는 달라진 것들이 조금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알람 소리가 사라졌다. 태주를 깨우는 건 알람이 아닌, 상진이었다. 그는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곤 했다. 작은 방에서 자기도 했지만 때때로 침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가 있었다.

그건 매우 묘한 기분이었다. 잠에서 덜 깬 부스스한 얼굴조차 잘나서 뉘 집 아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났어도 침대는 좁았다. 침대가 이 정도로 컸기에 망정이지 더 작았으면 아마 발로 차서 내려보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앉아 간단히 식사를 했다.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아침에 아침 식사를 챙겨 먹을 시간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회사와 집이 가까워졌고, 상진의 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 터라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과장님, 보고 싶었어요오.”

태주가 회사에 나타나자마자 오 주임이 달려와서 안겼다. 정확히는 태주가 안긴 모양새이긴 했는데, 뭐 심정적으로는 그가 매달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고생했어요, 오 주임. 많이 바빴죠? 미안해요.”

그에게 안긴 채로 등을 토닥거렸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태주의 일을 백업함과 동시에 본인의 업무도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그에게 정말 미안했다.

“오 주임님.”

뒤에 서 있던 상진이 오 주임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그가 휘청거리며 끌려가더니 상진의 품에 안긴다. 당황한 오 주임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응? 뭐야, 상진 씨. 왜 이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 주임님.”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근데 왜 안냐고.”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태주의 웃음이 터졌다. 입을 가리고 최대한 숨을 죽였는데 끅끅거리는 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상진이 태주를 불만어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출근을 하기 전, 태주는 상진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첫째, 회사에서는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말 것(마음에 안 들어도 예의를 지킬 것).

둘째,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말 것.

셋째, 우리가 같이 사는 것을 절대 티 내지 말 것.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집을 나갈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다.

아마 오 주임이 자신에게 한 행동 중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었겠지. 자신과 약속을 했으니 벌컥 화를 내진 못하고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다. 뭐, 나쁘진 않네. 서로 부둥켜안고 노고를 위로하는 신입 사원과 주임. 눈물 나는 동료애다.

오 주임은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내내 하소연을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며 우는 소리였다. 애초에 영업팀과 마케팅팀, 출고팀에서 가져가야 할 일을 왜 과장님이 다 했느냐며 성토를 했다. 그걸 이제라도 깨달아 줘서 참 고마웠다.

“그래도 이번에 대표님이 업무분장해 주면서 많이 덜어진 건데.”

“네? 정말요? 말도 안 돼. 남은 업무도 빨리 이관해 달라고 해야겠어요.”

“천천히 해야겠지. 대표실에 달려가서 징징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시간을 갖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이 정도로 정리된 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엄청 많았어요, 과장님.”

“왜?”

오 주임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최근까지도 몇몇 직원들이 정리되었다는 사실부터였다.

각 부서마다 한두 명 정도가 해고 대상이 되어서 마지막 근무일을 받아 놓았다고 한다. 이 회사의 규모로 치자면 꽤 많은 인원이었다. 오 주임이 거론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전(前) 대표인 본부장과 친밀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최 팀장하고도 당연히 연이 있었다.

“아니, 갑자기? 이유가 뭐라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는데, 대부분 업무 태만이래요.”

업무 태만. 해고 사유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겠지만. 실상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본부장과 최 팀장 라인 쪽의 인물들이, 그 둘을 등에 업고 얼마나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넘겼는지.

“솔직히 잘됐다는 말들도 많아요. 그 인간들 맨날 일 미루고 자기들끼리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사우나 다니고. 일은 엄한 사람이 하고 있고.”

그 엄한 사람 중 하나가 태주였다. 아니지. 하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그 엄한 사람이 태주라고 해야 하나. 어찌됐든 태주로서는 시원섭섭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차장이 갑자기 잘렸을 때하고는 스스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만 해도 그다음 사람으로 자신이 지목될까 봐 전전긍긍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꽤 담담해졌다. 만약 여기서 잘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왜인지 좀 마음에 안정감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는데, 상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태주를 보더니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보여 준다. 저건 또 언제 샀대. 그가 웃기에 나도 따라 웃었다. 믿는 구석까지는 아니고, 믿는 자투리 정도는 생긴 것 같다.

“그럼 빈자리들은 충원하고 있대?”

“네. 어제도 새 직원들 출근했어요.”

복도에서 못 보던 얼굴들을 몇 번 마주쳤는데, 그들인 듯했다.

“새 직원들도 와서 곧 회식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으, 또 회식이야?”

오 주임과 성 과장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회식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점심 회식을 하면 좋을 텐데.

“몇몇 빈자리들은 일단 충원은 하지 않는 분위기예요.”

“왜?”

그가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태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뭔가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될 이야기인가 보다.

“내부적으로 업무 평가해서 승진될 사람들이 있대요.”

“아, 그래서 비워 두는 건가.”

“네, 근데 이건 아직 확실하지는 않고요. 떠도는 이야기가 그래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회사에서 도는 소문들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지금 오 주임이 한 이야기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도는 거겠지. 태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든 말든, 어차피 태주와는 상관이 없는 소문이었다.

* * *

최근 회사에서 벌어진 일 때문인지 최 팀장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태주가 조심스레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아침에 인사를 건넬 때도 눈치가 보였는데, 지금도 그랬다. 회사에서는 연일 칼바람이 불고, 또 하필 칼질을 당하는 당사자들이 최 팀장과 친밀한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태주와 상진은 병가로 긴 휴가를 냈고.

“과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아, 네.”

상진이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약속의 효과가 확실히 있긴 하네. 진작 이럴 걸 그랬다. 말로 해도 알아먹는 인간인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가 가리킨 화면에는 엑셀과 파워포인트가 열려 있었다. 엑셀에는 오전에 지시한 업무가 띄워져 있었고, 파워포인트에는…….

[형, 오늘 저녁에 드라이브 갈까요?♥]

침착하게 파워포인트 창을 닫았다.

저장? 그런 거 안 한다. 데이터를 단 1킬로바이트도 남기지 않고 삭제해 버렸다.

“앗.”

“아침에 준 업무, 오늘 퇴근 시간 전까지 다 끝내세요.”

“네…….”

잔뜩 시무룩해져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린다. 곁눈으로 힐끗 보았는데 또 입이 툭 튀어나왔다.

드라이브는 무슨. 또 이상한 짓거리나 하려는 수작이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내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계상진 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하고 장 보러 가자.]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예상되었다. 너무 실실 웃고 있어도 안 되는데. 요즘 회사 분위기가 영 안 좋아서 오해받을 수 있다. 다시 옆을 힐끔 보았다. 역시나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렇게나 좋을까.

* * *

혼자였으면 야근을 했을 텐데, 확실히 상진이 있어서 편하긴 했다. 깔끔하게 정시에 업무를 마치고 가방을 챙겼다. 같이 장을 보러 가기로 했으니까, 상진에게 먼저 나가서 차를 빼라고 했다.

같이 나가서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피곤해진다. 왜 두 사람이 같이 다니느냐부터 시작해서 금세 말이 퍼지게 될 것이다. 함께 사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정말 싫다.

“오늘 형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나? 글쎄.”

“제가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아냐, 그냥 같이 하자.”

저 인간에게 요리를 완전히 맡길 수는 없었다. 사람이 완벽한 법은 없는지, 저 인간은 희한하게 간을 못 맞춘다. 그 문제의 죽 이후에도 음식을 해 주곤 했는데, 태주가 중간중간 간을 봐 줘야 했다. 그래도 이제는 좀 손에 익었는지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오늘 맛있는 거 해 먹고 영화 볼까?”

“영화요? 좋아요. 미리 예매할게요.”

“아니, 그냥 집에서. 뭐 하러 영화관까지 가냐. 집에 TV도 큰데.”

마트에서 팝콘을 사야겠다. 따끈따끈하게 해서 먹어야지. 최근에 흥행했던 영화의 VOD가 나왔다고 했다. 보고 싶었던 건데 기대가 된다.

태주는 상진과 지내면서 스스로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점이 있었다. 자신이 의외로 외로움을 탄다는 것이다.

혼자가 되고 나서 쭉 홀로 사는 동안 외로움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이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할 때도 공감하지 못했다. 혼자인 게 뭐가 어때서? 혼자이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걱정이 컸다. 십여 년을 혼자 살다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집을 구해 나올 생각이었는데…….

―♬♪♩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소리가 울렸다.

전화였다. 액정 화면을 확인했는데, 전 집주인 할아버지였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

[어어, 태주냐.]

“네! 잘 지내셨죠? 안 그래도 한번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으응, 잘 지내지. 그럼.]

옆에서 상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랬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무슨 일은 무슨. 그, 태주야.]

“네, 말씀하세요.”

[누가 찾아왔어.]

“네? 저를요?”

[응, 그 왜. 매년 이맘때쯤 찾아오던 그 사람 말이다.]

순간, 태주의 눈동자가 까맣게 내려앉았다. 할아버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밝았던 조명이 탁, 꺼지는 듯했다.

아, 왜 잊고 있었지. 잠시 자신이 있던 자리를 잊고 구름 위에서 놀고 있었던 것 같다.

“형……?”

잠시 말을 멈춘 태주에게 상진이 말을 걸었다. 그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할아버지. 지금 찾아왔다는 거예요?”

[응, 지금 지나가는 걸 내가 봤어. 너 살던 방에 들를 모양인데. 따로 연락은 없었고?]

“네, 따로 연락 없었어요.”

[어찌할까. 너 없는 걸 알면 날 찾아올 텐데. 너 이사 갔다고 내가 말해도 되는가 해서.]

“제가 전화해 볼게요.”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핸드폰에 저장된 달력을 확인했다.

흰 칸 사이로 동그랗게 표시된 일정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방금까지 들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시내를 달리던 자동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버스 정류장 앞 부근에 잠시 정차한다. 상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주 역시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어.”

태주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티가 나겠지. 이 거짓말을 그가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상진아. 나 잠시 들를 곳이 있는데 먼저 집에 가.”

“같이 가요.”

“아냐.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어.”

“같이 가요.”

“안 된다니까.”

“가서 얌전히 있을게요. 약속해요.”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또 다른 대답이 따라붙는다. 무슨 분리불안증도 아니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못 참는 듯했다. 물론 아까 제대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만.

“우겨도 안 돼.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오늘 같이 장도 보고 드라이브도 가고 영화도 보기로 했잖아요.”

“드라이브는 간다고 한 적 없어.”

은근슬쩍 끼워 넣지 마라.

“오늘 하기로 한 건 내일 하자.”

“그럼 약속 장소 앞까지만 데려다줄게요.”

“야, 누가 보면 내가 어린앤 줄 알겠다. 나 너보다 여섯 살 많거든? 내 다리로 충분히 갈 수 있어.”

대체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지. 너나 쓰러지지 마라. 라고도 덧붙였다. 이어서 또 말꼬리를 잡는 상진을 두고 차에서 내렸다. 계속 상대하다 보면 끝이 없다. 인도에 서서 그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개진상, 빨리 출발해라. 눈치 보지 말고.”

검은색 세단의 차창을 탕탕 쳤다. 그러자 서서히 차가 출발한다.

선팅이 되어 있어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뻔했다. 또 입술이 삐죽 나와 있겠지.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온다. 누군가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게 이런 건가. 감개가 무량하다.

* * *

오랜만에 다시 찾은 옛집은 여전했다. 골목길에 빼곡하게 주차가 된 차들도 그대로였고, 집 앞마다 쌓인 쓰레기들도 그대로였다. 오늘이 쓰레기 내놓는 날이던가. 그런 걸 제대로 지키는 동네는 아니긴 하지만.

색이 바란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수명을 다한 쇠가 삐거덕거리며 벌어졌다. 빨간 벽돌의 외벽에는 세월을 알리듯 오래된 낙서들이 남아 있었다.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낯설게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계신 주인집의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문 앞에서 서성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태주는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태주를 찾는 그 사람에게.

[여보세요.]

“큰아버지, 안녕하세요.”

[어, 그래. 태주구나.]

“잘 지내셨죠?”

[응, 잘 지냈지. 그런데 너 지금 어디냐?]

“저 지금 집 앞이에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고개를 돌리니, 현관문이 열린 방이 하나 보인다. 태주가 이전에 살던 그 집이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큰아버지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너 이사 갔다며.”

“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물었다.

“모른 척하지 마. 여기 할아버지한테 다 들었어.”

귀찮게 됐네.

태주가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어차피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매년 이즈음에 연락도 주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곤 했으니까.

텅 빈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집에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들어온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가구며 짐 같은 것이 없었다.

아직 이사를 하지 않은 건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작았구나, 이 방. 고작 몇 주 동안 상진의 오피스텔에서 살았다고 눈이 높아진 것 같다.

“어디로 이사 갔어?”

“아, 여기 할아버지가 급히 집을 빼 달라고 하셔서요. 근데 돈은 없어서 그냥 친한 동생네 집에서 같이 살고 있어요.”

그의 눈이 번뜩 빛이 났다. 뭐 뜯어먹을 게 없는지 탐색하는 눈초리다.

“동생네 집이 큰가 보네. 좁으면 남자 둘이 같이 사는 거 답답하잖아.”

“그냥 그래요. 제 사정을 대충 알아서 도움 받고 있어요.”

상진을 먼저 보내길 정말 잘했다. 이전에 타고 다닌 차보다는 못했지만, 지금 몰고 다니는 세단도 값이 좀 나가는 종이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는 말이 길어졌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에게는 최대한 빈곤한 척을 해야 했다. 사실 ‘척’도 아니다. 상진과 달리 태주는 본래 빈곤한 인간이니까.

“큰아버지. 그, 남은 돈은 제가 적금 타면 드릴게요. 이제 세 달만 있으면 적금 만기거든요.”

“에이, 태주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그깟 돈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냐. 우리 조카 잘 지내는지 얼굴도 볼 겸 해서 온 건데.”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호탕하게 웃는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면 종종 저렇게 웃곤 했다. 아버지를 닮은 얼굴을 하고서 저러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많이 못 챙겨 줘서 미안하지.”

챙겨 줄 필요 따위는 없다. 아니,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로 자신을 걱정하는 작자라면, 이 사람이 큰아버지라는 자각이라도 있다면, 아버지가 그에게 진 빚을 갚으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는 생전에 큰아버지에게 빚을 졌다. 태주가 어릴 적, 그러니까 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흔한 사연이었다.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완전히 무너졌고 친형인 큰아버지에게 큰 액수의 돈을 빌렸다.

이자 없이 원금만 갚는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정도의 금액이었다. 사업이 망한 뒤로 아버지는 인연이 있던 회장님의 수행기사로 일을 했다. 그리고 꼬박 빚을 갚았다. 그러나 그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큰아버지란 작자는 한순간에 고아가 된 태주에게 잘도 말했었다.

‘이자는 됐고, 원금이라도 좀 갚아 줘라. 나도 살아야지 않겠니.’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역시 가족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동생에게 빌려 준 큰돈을 돌려받지 못한다면,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어린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학교도 다 마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해서 받은 돈의 일부를 조금씩 모아서 큰아버지에게 보냈다. 그게 벌써 십 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혹시 그 집 하고는 연락이 되니?”

“네? 어느 집이요?”

“그 왜. 네 아버지가 모시던 회장님 말이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래서 태주도 대수롭지 않게 답해야 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찢겨 벌어지는 것만 같다.

“아뇨, 연락 안 돼요.”

“그래? 그 회장댁의 사모님하고도 연락이 안 돼?”

“그 집에서 저와 연락을 하고 싶어 할까요?”

회장님이 끔찍하게 아끼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 태주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현이의 장례식에서 태주를 보고 욕설을 퍼부었던 사람들이, 그 집의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네 아버지가 그 집에서 오래 일했잖니.”

큰아버지는 그날의 사고를 잊은 걸까. 태주에겐 아직도 생생한데. 어린 태주를 대신해 가족의 장례식을 도왔던 그는, 이미 그날을 잊었나 보다.

“태주야,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말이다.”

그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굵고 짧은 손가락이 뒷목을 벅벅 긁는다. 그답지 않게 주저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지? 너희 아버지가 그 댁의 사모님에게 받을 게 있어.”

“네, 기억나요.”

“그래, 그 사모님에게 그걸 받으면 네가 힘들게 돈을 갚지 않아도 돼.”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큰아버지에게는 모른 척을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집의 사모님과 은밀하게 나누었던 대화를 듣고 말았다. 듣고 싶지 않았는데, 알고 싶지 않았는데. 태주는 지금도 그 오랜 기억을 지우고만 싶었다.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한번 연락을 해 보는 게 어떠니. 내가 할 수는 없잖아.”

“연락처를 몰라요.”

“그 집 아직 그대로 있을 텐데, 찾아가면 되잖아.”

태주는 이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싫었다.

“큰아버지, 그 돈 제가 갚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가 다 갚을게요.”

“태주야.”

그의 뭉툭한 손가락이 태주의 손을 잡았다. 꾸욱, 강하게 들어간 손아귀의 힘이 지나치다 못해 억셌다. 당장이라도 잡힌 손을 빼고 싶었다.

“내가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그 집에서 받아야 할 건…… 네 아버지가 남긴 목숨 값이야. 네게 권리가 있어.”

태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안다면, 차마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건 아버지의 목숨 값도 아니고, 현이의 목숨 값도 아닌, 현우의 목숨 값이었으니까.

* * *

벌써 밤이 밀려 왔다. 어둑해진 골목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까만 하늘이 자신과 꼭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큰아버지는 결국 성을 내고 나서야 돌아갔다. 앞뒤가 꽉 막혔다며 태주를 타박했다. 생소한 일도 아니다. 그는 매해 그렇게 불쑥 찾아와서는 그 일을 꺼내고 타박을 하고 나서 돌아가곤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데, 앞이 좀 흐릿해졌다.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밤은 이래서 좋다. 남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 시간만큼은 그 누구도 태주를 비난하지 않는다.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계속 걸었다. 까만 도화지처럼 빛이 하나 없다.

‘저 하늘도 혼자구나. 나만 혼자가 아니라서 위로가 되네.’

태주는 속으로 되뇌었다.

“형.”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태주의 앞에 서 있었다. 적막한 골목길에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보인다. 까만 밤하늘에 별빛을 담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형, 데리러 왔어요.”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말을 한다.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더 다가서지 않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아까 할아버지랑 통화했잖아요.”

“아, 그랬지.”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덥석 손을 잡는다.

“뭐야, 징그럽게. 이거 안 놔?”

“네, 안 놓을 건데요.”

“다 큰 성인끼리 손잡고 다니는 거 꼴불견인 거 모르냐.”

“뭐 어때요. 그러거나 말거나.”

잡힌 손이 따뜻했다. 조금 걸었다고 체온이 내려갔나. 이래서 뚜벅이는 감기에 잘 걸리는 거다. 저 인간처럼 차가 있으면 늘 따뜻할 텐데.

“형, 지금 피곤해요?”

“아니, 괜찮아. 왜?”

“그럼 우리 같이 장 보러 가요. 오늘 너무 가고 싶었어요.”

그에게 이끌려 갔다. 앞장서서 걷는 그의 뒤로 천천히 걸었다. 왜일까, 상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조금 더 걷다가 몇 발자국을 성큼성큼 뛰었다. 그러자 결국 그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좋네.”

“네?”

상진이 옆을 보았다. 태주와 눈이 마주친다. 꽉 붙잡은 손 위로 찬바람이 스몄다.

“이렇게 같이 걷는 거 좋다고.”

“네?”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바로 앞의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그의 차가 보였다.

아, 추워. 빨리 타고 싶었다. 서둘러 가려는데 잡힌 손이 당겨 오질 않았다. 그가 제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이다.

“형,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응? 뭐가?”

“방금 사랑한다고 한 거죠.”

“뭐?”

“형, 방금 저한테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저 인간 또 왜 저래. 대체 뭘 어떻게 들은 걸까. 그냥 걷는 게 좋다고 한 것뿐인데.

“귓구멍이 막혔어? 내가 언제 그랬냐.”

“방금 분명히.”

“개진상 씨, 빨리 안 갈 거면 나 그냥 지하철 탈래. 추워 죽겠어.”

“아니, 방금.”

“나 간다.”

주차된 차 앞에서 몸을 획 돌렸더니, 그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꽁지 빠진 새처럼 후다닥 달려오는 모습이 귀엽다.

* * *

아주 작은 단칸방 안에 아이 셋이 있었다.

과자 봉지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옹기종기 앉았다. 누구 하나 서둘러 먹으려 하지 않았다. 한 명이 먹으면 그 후에 다른 한 명이 먹었다. 미리 정해 두기라도 했는지 욕심을 부리는 아이가 없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 놓인 오래된 TV에서 시그널뮤직이 흘러나왔다. 화면에는 이제 막 시작한 드라마가 틀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어려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런 거 보면 안 된댔어, 아빠가.’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싫어, 난 볼 거야. 보기 싫으면 넌 보지 마.’

양 갈래 머리를 한 현이가 현우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현우가 볼을 부풀리며 태주를 보았다.

‘형아, 저런 거 어른이 보는 거잖아. 나는 보면 안 되잖아.’

잔뜩 주눅이 들은 아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태주가 현우를 토닥이며 품에 안았다. 그 나이 또래보다 더 작은 아이가 태주의 품에 쏙 안겼다.

‘그럼 잠깐만 보고 끄자. 현이랑 형이랑 같이 나가서 놀까?’

형을 꽉 끌어안은 남자아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실토실한 볼을 태주의 얼굴에 비비며 웃었다. 해사한 아이의 미소에 태주의 얼굴에도 미소가 머금어졌다.

오래된 TV에서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들은 단풍이 흩날리는 길가를 천천히 걸었다. 사박, 사박, 마치 눈이 밟히듯 죽은 이파리가 밟혔다.

‘형아,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느리게 걸어?’

‘바보야, 저 사람들은 서로 좋아하잖아.’

현이가 현우를 타박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로 남자아이를 흘겨보더니,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서로 좋아하면 저렇게 걷는 거야? 왜?’

‘몰라, 원래 그런 거래.’

태주는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짜고 단 과자가 금세 입 안에서 녹는다.

‘형아, 좋아하면 저렇게 천천히 걷는 거야?’

현우가 태주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태주가 가득 담긴다.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그 이유를 알 리가 있나. 태주도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래도 형이니까. 조금은 아는 척을 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짐짓 아는체를 했다.

‘응,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면 저렇게 걷는 거야.’

‘왜?’

‘같이 걷는 게 좋으니까.’

‘같이 걷는 게 좋아?’

‘응,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같이 걷는 거야.’

그 아이의 작은 세계에는 많은 것이 있지를 않았다. 아빠, 형아, 현이, 아저씨. 그래서 현우에게 태주는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현우가 그 빛바랜 화면을 다시금 보았다. 사박, 사박. 흩어지는 단풍잎 아래에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가만히 눈에 담는다.

* * *

결국 그날이 왔다.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말이다.

장소는 회사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설마 돼지고기일까 했는데 다행히 소고기였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회식이라면 가서 안줏발이라도 세워야 한다. 태주는 굳게 다짐했다. 적어도 세 판은 먹어야지.

이번 회식은 퇴직일을 받아둔 사람들을 위한 송별회 겸 새로 출근한 직원들을 위한 환영회였다. 사실 송별회와 환영회를 같이 한다는 게 좀 꺼림칙했는데, 최근 회사에 여러 일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미 결정된 사안을 왈가왈부하기도 좀 그렇고.

“과장님, 아까 면접은 잘 보셨어요?”

맞은편에 앉은 상진이 숙취 해소제를 건네며 물었다. 아니, 술은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약부터 주는 걸까. 놀리는 거냐.

……라고 하기에는 그의 앞에서 심하게 취한 적이 많아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잘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봤을 거예요.”

오늘은 태주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이전에 오 주임이 말한 소문은 역시나 제대로 땐 굴뚝에서 난 연기였던 것이다.

회사 내에서 꽤나 많은 사람이 해고 통지를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본인의 손으로 직접 짐을 쌌고, 또 다른 일부는 통지받은 날까지 꿋꿋하게 근무를 했다. 그래서 회사에는 드문드문 빈자리들이 있었다.

그 빈자리를 보는 시선들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쉽게 직원을 자른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잘릴 사람이 잘렸다고 소곤거렸다. 회사를 나가게 된 이들이 하나같이 농땡이 대마왕들이었으니까.

“과장님, 술 한 잔 받으세요!”

“아, 고마워요.”

같은 팀의 조 대리가 잔을 채워 주었다. 그 모습을 영 탐탁지 않게 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어허, 또 눈 그렇게 뜨지. 태주가 상진에게 눈썹을 까딱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납던 눈빛이 온순해졌다. 아무래도 나 조련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이참에 회사 때려치우고 애견훈련소에 들어갈까.

“오늘 승진 면접은 어떠셨어요? 누가 들어왔어요? 너무 궁금해요.”

“맞아요, 궁금해요. 설마 대표님도 들어오셨어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팀원들이 들썩거렸다.

궁금할 만도 하지. 태주가 속한 팀에서는 유일하게 태주만 승진 면접 대상자였다. 왜냐하면 다른 팀원들은 아직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오래 근무했던 직원은 이번에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대표님은 못 뵈었고, 새로 오신 인사부장님하고…….”

솔직히 면접 자리가 있다고 해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전까지는 말로만 면접이지, 실상 내정자가 있었으니. 전(前) 대표인 본부장, 혹은 최 팀장과 친밀한 사이부터 승진이 되었다. 태주도 그들과 오래 일하기는 했지만 학력과 스펙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늘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 면접은 조금 달랐다. 회사에 새로 입사한 직원들로 인사팀이 신설되었는데, 그 팀에서 직접 면접을 진행했다. 그들은 기본적인 학력, 스펙 등의 정보가 담긴 이력서는 꺼내 보지도 않았다.

질문 대부분은 업무와 직접 관련이 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태주로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CS 업무를 비롯하여 영업팀, 출고팀, 마케팅팀에 이르기까지 밀린 업무를 도맡아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이번에 우리 성 과장님 승진하실 것 같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과장님은 사내 평가도 좋을 테니까.”

면접에서 진행된 내용 이외에, 사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도 항목에 있다고 했다. 사실 이 부분은 크게 걱정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회사생활을 하면서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냈지. 아마 크게 나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탁!

건너 테이블에 앉은 최 팀장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내렸는지 소리가 실내에 울릴 정도였다.

회식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벌써 붉었다. 그의 주변은 분위기가 암울했다. 퇴사 날짜를 받아둔 직원들이 그와 함께 앉았다. 아마 속이 쓰릴 것이다. 대표가 바뀌면서 본인이 예뻐하던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져 버렸으니.

“과장님, 건배해요!”

“미리 축하의 의미로 건배!”

눈치가 살살 보였다. 아니, 그리고 아직 결정된 것도 없는데 다들 왜 이렇게 들떴지? 태주가 멋쩍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비 퇴사자들도 있는 자리였다. 그들의 기분도 배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위 팀원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오늘은 조용히 마셔요, 우리.”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고기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휴, 한시름 덜었네. 속으로 숨을 깊게 내쉬고 앞을 보았다. 상진은 여전히 얌전했다. 요즘에는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문제다. 예전처럼 좀 까불어도 괜……. 아,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상진 씨, 고기 좀 먹어요.”

“네, 과장님.”

적당히 잘 익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상진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오 주임이 대뜸 묻는다.

“와, 보기 좋네요. 과장님이랑 상진 씨는 술자리 자주 하세요?”

순간 뜨끔했다. 술자리를 자주 한다기보다는, 아예 같이 삽니다만. 방금 고기를 덜어 준 게 너무 자연스러웠나. 매일 집에서 같이 밥을 먹으니까 말이지. 잠시 회식 자리라는 걸 잊어 버렸다.

“아니, 뭐, 자주는 아니고. 가끔 해요, 가끔.”

하하, 웃으며 둘러대었다. 얌전히 고기를 우물거리던 상진이 태주를 잠자코 바라본다.

“뭐예요, 우리도 술자리 끼워 주세요.”

“치사해요, 두 분만 마시고.”

정말 오해였다. 술자리라고 해도 집에서 간단히 반주 정도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사실은 쟤랑 같이 삽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토라진 듯 툴툴거리는 팀원들을 달래며 술잔을 기울였다.

아, 오늘은 진짜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내일 일찍 서둘러야 했다. 달력에 동그랗게 표시해 둔 날이 벌써 내일이다. 꼭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천천히 마셔요.”

상진이 태주의 잔을 뺏어 들었다. 아직 그 잔에는 다 마시지 못한 술이 남아 있었다. 찰랑거리는 소주를 그가 꿀꺽 입에 털어 넣는다.

왜 남의 술을 뺏어 먹고 난리야. 소주 알레르기 있다던 건 순 뻥인 모양이다. 저 인간, 설마 입만 열면 거짓말인 건 아니겠지.

“상진 씨, 내가 조절해서 마실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매번 그러면서 취하시잖아요.”

“아니, 오늘은 내가 진짜 조절할 거예요.”

“숙취 해소제는 마셨어요?”

“응, 먹었어요.”

“술 못 먹겠으면 마시지 마세요. 속 버려요.”

“걱정도 팔자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아무튼 알았어요.”

그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상진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를 태주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태주도 익숙하게 그것을 집어 먹었다. 음, 맛있네. 역시 남의 돈으로 먹는 고기가 제일 맛있다.

“…….”

“…….”

소주잔에 탄산음료를 몰래 따르고 있었는데, 주위가 조용해졌다. 설마 술 버리는 거 들킨 건가. 눈치를 슬쩍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테이블에 함께 앉은 동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그들은 일제히 상진과 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요?”

상진은 평소와 같았다. 그들이 쳐다보든 말든 관심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태주는 다르다. 일평생 눈치를 보고 살았던 짬이 있었다.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인다.

“두 분 대화하시는 게 꼭…….”

“그러니까요, 나만 느낀 거 아니죠?”

“약간 묘한…….”

“아니, 상진 씨가 과장님 보는 눈빛이 좀 다르지 않아요?”

한 사람이 화두를 던지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태주는 그 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어라? 어? 잠깐?

분위기가 희한하게 돌아간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지금 이상한 생각들 하시는 것 같은데.”

“평소에도 좀 그렇잖아요.”

“맞아 맞아. 상진 씨 매번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뚝뚝하면서…….”

“두 분이서 늘 붙어 다니는 것도…….”

“저번에 보니까 퇴근도 같이 하시더라.”

“어? 난 아침에 같이 출근하시는 거 봤었는데.”

한 번 퍼지기 시작한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출근과 퇴근을 할 때 가능하면 시간차를 두고 나가기도 했고 주차도 일부러 멀리에 대놓고 다녔는데, 어떻게 알았지? 이래서 사람들의 눈이 무서운 거다. 역시 완전범죄란 없다. 이 경우에는 ‘범죄’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겠지만.

“아니,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니거든요?”

뭔지는 몰라도 절대 아닙니다.

“제가 저희 성 과장님하고 벌써 3년을 넘게 일을 했는데요. 저렇게 막 고기 집어 주고 사적으로 친하게 지낸 사람 못 봤어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 진짜. 성 과장님 평소에 사생활 절대 오픈 안 하시는데, 상진 씨랑은 출퇴근도 같이 하시고…….”

“언제 그렇게 가까워지신 거예요? 엄청 친하신가 보다.”

회사에서 사적으로 친해져 봤자 끝내는 말만 돌기 마련이다. 그래서 회사 안에서는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질지라도,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개상진은…… 좀 특별한 케이스이긴 하지.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아주 신이 났다. 그들은 태주와 상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질문을 쏟아내었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주 곤란했다. 대충 웃음으로 때우려고 하는데 쉬이 넘어가지를 않는다.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흘깃 상진 쪽을 보았다. 이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는 인간처럼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부정이라도 좀 해야지. 그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자, 상진이 얼굴을 붉혔다. 아, 뭔데, 왜 그러는데!

“와, 과장님이 쳐다보니까 상진 씨 얼굴 빨개졌어.”

“장난이었는데 진짜인가.”

“아니, 다들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그만들 하세요.”

하여튼 저 인간은 도움이 안 된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손으로 주위를 제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탁!

―끼이익

최 팀장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가 비척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쯤 눈이 풀린 상태로 터벅, 터벅, 태주가 있는 테이블까지 걸어온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최 팀장을 말렸다. 그의 팔을 잡고 ‘팀장님, 진정하세요.’라며 만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 팀장은 그들을 단번에 뿌리쳤다. 누가 봐도 노기를 가득 띤 얼굴로 말이다.

“이게 누구야, 우리 성 과장님 아니셔.”

“팀장님.”

그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비아냥거림이 섞인 어투가 주위를 싸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입을 다문다.

“엄청 비싼 몸이잖아, 우리 성 과장님.”

“팀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아, 나 취했어? 그래서 왜, 말도 막 못 섞겠어? 취한 새끼랑은 말도 안 섞어?”

최 팀장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태주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는 식당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내가 왜 나가야 하는데. 뭐 찔리는 거 있냐, 성 과장?”

“팀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한창 집을 알아보느라 바빴던 때에, 최 팀장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날이 아마 허름한 폐가와 상진의 오피스텔에 들렀던 날일 것이다. 부동산 실장님과의 약속이 급해서 정시 퇴근을 하던 날, 그가 시간을 내달라고 했었다. 그때에 결국 시간을 내주지 못했었다.

그 후에는 휴가의 연속이었다. 상진이 아팠고, 또 태주가 아팠고. 이사를 했고.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고 나서 출근을 했을 때는 최 팀장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태주가 괘씸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야, 성태주. 이상하지 않아?”

“네?”

상진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가 최 팀장을 보는 눈빛은 전혀 조용하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번뜩이며 빛나는 안광이 서늘하다. 아마 태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고 있는 것이리라.

“왜 너만 빼고 내 사람들 다 잘리는지 안 궁금해?”

그가 이를 씹으며 말했다. 으드득 하는 소리가 귓가를 할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태주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우리 이 차장, 김 과장, 영업팀의 류 차장. 그리고 여기 있는 저 녀석들, 다 잘렸어.”

최 팀장의 손가락이 그의 주위에 있던 일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태주를 대신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최 팀장을 말렸다.

“팀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과장님께 왜 그러세요, 팀장님.”

“진정하세요.”

그는 주위의 그 누구도 눈에 담지 않았다. 오로지 태주만을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태주로서는 그가 왜 이렇게 격앙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그때 시간을 내지 못해서 화가 난 줄만 알았는데.

“네가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잖아, 그 사람들. 안 그래?”

“제가요?”

“그래. 성태주 바로 너.”

기가 차서 실없이 헛웃음이 났다. 그들에게 원한을 품어서 무엇 하겠는가. 앙심을 가질 이유조차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굳이 이유를 꼽아 보자면, 그들이 자신에게 ‘중학교도 졸업 못 한 과장’이라며 웃었던 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가방끈이 짧다’며 회식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일을 말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업무를 미룬 일? 혹은 ‘도움’을 핑계로 사적인 일들까지 돕게끔 했던 일일까.

그중 어느 하나이거나, 혹은 전부일지라도. 태주는 그들에게 앙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태주는 그런 존재였다. 아니, 회사뿐만이 아니고 태주의 인생에서도 태주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맞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전 그분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팀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웃기고 있네. 그럼 걔들이 왜 제일 먼저 잘린 건데, 설명해 봐.”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설명까지 해야 하나.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그건 저도 모르죠. 그리고 설령 제가 그분들을 미워했더라도 제가 뭐라고. 왜 저 때문에 그분들이 잘리나요? 팀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제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

매번 상기시켜 주었으면서. 네 스펙에 이 정도 회사도 감지덕지라며, 나니까 널 데리고 있는 거라며. 왜 이제 와서 마치 자신더러 대단한 무언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걸 이유로 이렇게까지 탓하는지.

억울함이 울컥 쏟아진다. 태주는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원망을 꾹 삼켰다. 괜찮아, 취하신 거야. 금방이라도 토할 듯한 감정을 내리누른다. 태주가 삶에서 터득한 것들 중 가장 능숙한 일이었다.

“너한테 아무것도 없다고? 그 순진한 척 좀 그만해라. 내가 모를 것 같지?”

최 팀장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태주에게서 벗어나, 태주의 뒤, 그러니까 맞은편의 자리로 향한다. 그곳에는 계상진, 그가 있었다.

“네가 여기 대표랑 무슨 관계인…….”

팀장의 시선을 따라서 태주의 고개가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덜컹!

상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 쿠당탕, 큰 소리를 내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태주와 최 팀장 사이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쥘 것처럼 기세가 살벌하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제는 최 팀장이 아닌 계상진을 말려야 했다. 그의 손이 최 팀장의 어깨까지 올라갔을 때, 태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계상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가 멈칫, 동작을 멈춘 틈을 타 팔을 잡아당겼다.

“왜 네가 껴. 저리로 가 있어.”

“과장님.”

상진을 밀어내며 태주가 말했다. 그러자 그가 태주의 손목을 잡았다. 한층 수그러든 말투였지만 격앙된 감정을 좀처럼 숨기질 못했다.

“그래, 그래. 이것 좀 봐라. 씨발. 아주 신났네.”

상진과 실랑이를 하는 태주에게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 식당 안에 있는 모두가 놀라 귀를 의심했다. 그건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최 팀장이 가래침을 바닥에 툭 뱉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듯 태주를 바라본다.

“야, 성태주, 너 아주 많이 변했다. 응? 씨발, 옛날에는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설설 기더니.”

이제는 차마 그 누구도 최 팀장을 말리지 못했다.

말릴 수 있는 싸움에나 끼어들 수 있는 법이다. 지금 그는 그 선을 넘었다. 최 팀장의 팔을 잡고 있던 사람들조차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쌍욕이 난무하는 이 판에 끼고 싶지 않은 거겠지.

“이제는 내 말은 개무시하고. 아, 내가 이제 끈 떨어진 것 같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씨발, 거둬 준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너처럼 중학교도 못 나온 고아 새끼를 말이야, 내가 씨발 지금까지 가르쳐놨더니.”

태주의 손목을 붙잡은 상진의 팔이 덜덜 떨렸다. 분노에 못 이겨 이를 아드득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태주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쏟아내는 욕설과 비방을 그대로 감내했다. 바로 주먹질을 하려는 듯 부들거리는 상진을 다시 꾹 밀어내면서.

“네 처지가 불쌍해서 내가 잘해 준 거 모르지? 하도 인생이 후지길래 잘해 준 거야, 내가. 고맙지 않냐? 너 같은 새끼한테 누가 이렇게 잘해 줘. 어? 근데 은혜를 모르고, 씨발.”

그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그 말대로였다. 중학교도 못 나온 고아 새끼에 불과한 태주에게, 그는 회사에서 알아야 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태주의 인생은 그가 보기에 후져 보였을 것이고,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그건 그의 감정이니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태주는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다시 울컥, 상진이 나서려 했다. 그래서 다시 그를 밀쳐내었다. 그가 나설 일이 아니다.

“대표한테 무슨 짓거리를 해서 구슬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아, 씨발 후장이라도 빨아 줬냐?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싫어도 좋은 척, 화가 나도 좋은 척. 무슨 기계도 아니고, 그럴 때마다 소름 끼친다고.”

그가 조소를 퍼부었다. 한번 터진 입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를 않는다.

“하긴, 네가 몸으로 때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냐. 배움이 모자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안 그래? 그래서, 뭐 몸이라도 대줬어? 방법 좀 알자. 나도 좀 해 보게. 씨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네 부모가 하늘에서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냐.”

툭, 터진 감정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태주가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상진을 부여잡았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말이다.

왜 한 적도 없는 일로 그에게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할까. 그는 왜 이러한 말을 하면서 조금의 죄책감도 없을까. 그에게 자신은 딱 이 정도의 인간인 것이다. 부모를 욕되게 하는 말도, 수치심을 주고 조롱하는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인간. 그가 보는 수준은 불쌍한 인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양이다.

태주가 식당을 뛰쳐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술 냄새를 풍기며 욕을 퍼붓던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무작정 뛰쳐 나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걸었다. 새하얗게 질린 머리가 생각하기를 거부한 듯했다.

“형!”

앞으로 나아가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 상태로 뒤를 돌았다.

“형.”

상진이 태주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찡그린 미간이 서서히 풀린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눈썹 끝이 아래로 기울었다.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태주보다도 슬픈 얼굴을 한 그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형, 이대로 그냥 갈 거예요?”

그럼, 그럼 어떻게 할까. 뭘 어쩌라는 걸까. 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이든 그의 말대로 ‘기계적으로’라도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이 그 정도의 인간이라는 것을. 단꿈에 빠져 허덕이는 아이처럼, 내 시궁창 같은 인생을 잠시 잊고 그에게 의지했던 거다.

“내가 뭘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원래 있을 곳으로 돌아가듯이, 떨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말꼬리를 이번에는 그가 부디 잡지 않기를 원했다.

그를 보기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설령 그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무참하게 망가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자존감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단 한 톨도 남김없이.

“형.”

눈물로 얼룩진 볼에 따뜻한 온기가 와 닿았다. 양 볼에 닿은 그의 손이 얼굴을 감싸고도 남았다. 그는 태주를 탓하지 않았다. 답답하다며 성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태주의 얼굴을 따스한 손으로 감싸고 바닥에 꽂힌 그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래서 자신과 마주하게 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그가 말했다.

“나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이 말을 몇 번이고 태주에게 해 주었다. 자신이 뭐라고.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나 한가? 쓸데없이 살아남은 놈이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다른 새끼가 형을 상처 입히면, 내가 그 새끼를 죽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나는.”

분노에 일렁이던 그의 눈빛이 삽시간에 슬픔으로 물들었다. 참담함과 비참함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태주에게로 내려갔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갔다.

“나는……. 형이, 형을 상처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화가 나는데 너무 슬퍼요, 형.”

태주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덕분에 상진의 손가락도 축축해졌다. 그는 태주를 잡은 손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놓치면 사라질까 겁을 내는 것도 같았다.

왜 서로가 이 길거리에서 이렇게 울고 있어야 할까. 그는 왜 이렇게까지 울어 주는 걸까.

“화가 나면 화를 내요. 슬프면 울어도 돼요.”

눈동자 안에 다 담기지 못한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상진은 태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태주를 끌어당겼다. 마주하던 시선이 교차된다. 상진의 넓은 어깨가 태주를 감싸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얼어붙은 몸을 녹인다.

“형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걸 형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등을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태주는 그에게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가 내뱉는 말, 단어, 하나하나가 달았다. 영원히 그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불안해하지 말아요. 형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태주 형을, 형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상진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가 태주의 귓가로 고개를 묻고 작게 속살거린다. 달콤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며, 희미하지만 또렷한 음성이 몸 안으로 들이닥쳤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저릴 만큼 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절대 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 죽어서도, 절대로.”

마치 그는 내내 참았던 것을 토해 내듯 말을 이어 갔다. 그건 꼭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인 것도 같았다. 주문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처럼. 상진은 마지막 단어를 몇 번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야, 계상진.”

태주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아직 눈가에 일렁이는 눈물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는 재수 없게 죽는다는 소리를 하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죽는다는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동그란 눈동자 아래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응, 중요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 전에 했던 말들, 듣긴 한 거죠?”

“아니, 잘 안 들렸는데.”

태주가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둥글게 접히는 눈꼬리에서 투명한 물이 넘쳐흐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에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안 들렸다고요? 거짓말.”

“전혀 안 들렸거든.”

“아! 왜 중요한 말을 안 듣고!”

“지금 너 표정 진짜 웃기다.”

상진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답답해 미치겠다고. 그가 자신을 품에 안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을 구경하며 작게 웃었다.

“갑자기 뭐예요! 남의 말은 제대로 안 듣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그의 말이 안 들렸을 리가. 다만 너무 진지했으니까 패스다. 안 어울리게 왜 진지하고 난리야. 고맙긴 하다만.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겠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사이에 너무 어색하지 않은가.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팔을 그의 허리에 둘러 꼭 끌어안았다. 아, 따뜻해. 인간 난로네. 방금 전까지 들었던 나쁜 말들이 따뜻함에 못 이겨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아, 형!”

“아, 왜. 찡찡거리지 마라, 머리 울려.”

지금 딱 좋은데, 자꾸 발 구르면서 몸 흔들지 마라.

“상진아.”

“네.”

이번엔 그의 입술이 댓 발 나왔다. 뭐가 그렇게 서운할까. 말 좀 못 들은 척한 거 가지고 말이다.

“나 보면 답답해?”

답답하겠지. 아마 누가 봐도 답답하게 볼 것이다. 아닌 것에 왜 아니라고 말을 못 하는지, 호구처럼 싫은 일도 괜찮다고만 하는지. 모욕을 당해도 왜 맞서지 않는지. 알고 있다. 알고는 있었다. 다만, 겁이 났으니까. 자신에게 남은 아주 작은 것들마저도 놓쳐 버릴까 봐.

“네, 답답해요.”

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금세 삐친 티를 팍팍 내면서 얼굴이 불퉁했다. 그렇게 화가 나면 안고 있는 거나 놓든가.

“엄청 답답해요. 그리고 과장님, 엄청 눈치 없는 거 알죠?”

“내가?”

“네, 눈치라고는 진짜.”

“뭐? 너 방금 한숨 쉬었냐?”

진짜 어이가 없다. 자신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한 회사에서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다 눈치가 있었던 덕분이다. 모르면 말을 하질 말지.

“상진아.”

“네.”

“나도 내가 답답한데,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가볍게 물어서 그런가, 그의 대답도 가벼웠다. 고민할 일도 아니라는 듯 팔에 들어간 힘이 조금은 풀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건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들도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무서웠다. 오늘보다 내일이 두렵고, 내일보다 1년 후가 더 겁이 났다.

“화내도 돼?”

“화내도 돼요.”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겹쳤던 몸이 서서히 멀어진다. 태주가 그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내가 뒷감당을 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그럴 용기가 있을까. 아니라고, 싫다고, 화가 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미래의 성태주가 지금의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하거나 비웃지는 않을까.

“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상진이 손을 올려 태주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며 위로하듯이. 흐트러진 머리칼이 한 올 한 올,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다시 돌아가자.”

언제까지 겁만 집어먹을 수는 없겠지.

예전의 성태주였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일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은 더 용기를 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상진을 밀어내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었다. 양손으로 볼을 짝짝 치고 눈을 크게 깜빡거린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성태주.

“여기요.”

그를 두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빠져 나왔던 고깃집으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그가 불러세운다.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상진이 무언가를 건네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들고 있는 건, 예전에 보았던 그의 블랙카드였다. 저거로 방에 둔 책상과 의자를 다시 샀었다. 한사코 됐다고 됐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사고야 말았다. 정말로 거절은 했었다, 정말이다. 그나저나 다시 보아도 눈이 부시네.

“카드요.”

“이걸 나한테 왜 줘?”

그가 싱긋 웃는다. 미끄럽게 올라간 입술에 그 뻔뻔함이 묻어났다.

“부적이에요.”

“부적?”

“네, 형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뭐야, 그게.”

참나! 저 인간, 부적이 뭔지는 알고는 있는 걸까. 황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고작 이러하신 걸로 불안하지 않을 리가 있지 않은가. 아니,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아무튼 겨우 이런 카드님 덕분에 지금까지 불안하던 게 싹 없어질 리가 있었다.

그래도 일단 성의니까 받아 두긴 해야겠다. 저렇게 카드를 들고 있으면 팔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많이 무거워 보였다, 진짜 많이.

“그럼 잠깐만 빌릴게.”

아주 잠깐만이다. 아주 잠깐 동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카드를 받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고급스러운 단면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쓸었다. 벌써 용기가 난다.

“그냥 형이 써요.”

“이보세요, 계상진 씨. 이런 거 잘못 가지고 있다가 큰일 나는 겁니다.”

“무슨 큰일이요?”

“물욕에는 끝이 없는 거야. 갑자기 내가 이거로 비싼 노트북 사면 어떡할래?”

“겨우 그거였어요?”

“겨우? 아니면 이거로 엄청 비싼 TV 사면 어떡할래?”

상진이 작게 웃었다. 식당에서의 그 사납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태주의 손목을 잡더니 손등에 입술을 맞대었다. 차갑게 식은 그의 입가가 태주의 체온으로 물든다.

“얼마든지요.”

“그러다 큰코 다친다.”

그와 태주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주변은 적막했다. 검은 밤하늘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까맣다. 그러나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별 두어 개가 반짝거렸다.

* * *

식당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화가 잔뜩 난 사장님이 직원 몇몇을 붙잡고 따지고 있었다. 밖에서 곁눈으로 보기에도 테이블이며 의자가 박살이 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분위기가 흉흉했다.

태주와 상진이 그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울먹거리던 오 주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과장님!”

“오 주임,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태주에게 설명했다.

“말도 마세요. 과장님 가시고 나서, 그 최 팀장님 사람들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완전 싸움 났어요. 그냥 싸움도 아니고 개싸움이요.”

“뭐라고요? 싸웠다고요?”

아니, 다들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개싸움을 했다고?

정상적인 회사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남자들끼리 치고박고 싸운 모양인데 역시 맨파워맨,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으이그.

“그래서 지금 정리는 된 겁니까?”

“네, 일단 대충은요. 가게 사장님이 화가 많이 나셔서 싸운 분들은 밖에 나가 있어요.”

싸움의 이유는 예상이 되었다. 각각의 팀 내부에서도 잡음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 팀장 쪽 인간들과 평소에도 쌓인 것들이 많았을 터였다. 그들이 농땡이를 피거나 인맥으로 승진할 때, 그 공백을 채웠고 고배를 마신 사람들이 그 자리에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저쪽이에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고깃집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의 골목에서 여럿이 모여 있었다. 특별히 고성이 오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도 않았다.

“알았어요.”

“헉, 과장님! 저기로 가시려고요?”

“네.”

뒤에서 붙잡는 오 주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두었다. 싸우러 가는 거 아니니까, 괜찮다. 그리고 뭐 하러 싸우겠는가. 싸워 봤자 이기지도 못할 것이다. 아, 물론 이 인간이 끼면 이기겠지만.

“넌 또 왜 따라와.”

“당연히 따라가야죠.”

“나 혼자 잘 말할 수 있거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 강인한 성격인데, 이상하게 저 인간 앞에서는 유독 자주 울었던 것 같다. 자존심 상한다.

“너나 울지 마.”

얄밉게 대답하는 그에게 툭 쏘아 대었다.

* * *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바다가 갈라지듯 자리를 비켜섰다. 힐끗거리며 태주의 눈치를 보았다.

언제부터 자신의 눈치를 그리 보셨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아까 최 팀장이 한 폭언이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태주와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팀장님.”

한 무리가 갈라서자 그 뒤에 있던 최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술에 잔뜩 취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제는 거뭇거뭇하게도 보였다. 간이 많이 안 좋으신가. 그렇게 술을 마셔 대니 남아날 리가 없지.

태주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역시나 조금의 죄책감, 혹은 미안한 감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야, 성태주. 왜, 뭐 할 말 있냐?”

할 말은 너무 많았는데 대체 무엇부터 꺼내야 할까. 차분히 감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사과하세요.”

일순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태주의 말에 꽤나 놀란 듯 보였으나 오로지 상진만이 덤덤했다. 그는 태주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사과하시라고요.”

“뭐?”

“팀장님께서 제게 하신 폭언, 욕설, 모두 포함해서요.”

최 팀장은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흐느적거리는 몸이 당장이라도 태주의 얼굴을 후려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차라리 맞는 게 낫지, 다른 식의 보복이 더 두렵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을 거야.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내가 왜 너 같은 거한테 사과를 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폭언하셨잖아요. 욕도 하셨고요. 저는 팀장님께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건가요?”

“있지도 않은 일?”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주워 담지 못할 거라면 다 쏟아내기라도 해야 했다. 슬그머니 재킷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손끝에 닿는 카드의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팀장님이 그렇게 예뻐하시는 분들이 잘린 이유, 업무태만이라고 하던데요.”

“뭐? 너 방금 뭐라고―.”

“여기 있는 다른 직원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본인들이 매번 업무를 미루고, 업무 시간에 담배 피우러 나가서 한참을 안 들어오고. 술 마시는 건 예삿일에 사우나까지 가시잖아요. 아닌가요?”

“야, 너 방금 ‘본인들’이라고 했냐? 이게 진짜.”

당장이라도 한 대를 후려칠 기세였다.

그래. 쳐라, 쳐. 이 기회에 깽값이라는 것도 한번 받아 자. 이제는 태주도 두려울 게 없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카드 모서리를 살살 만졌다. 마음의 안정, 이너피스다!

“회사에 있는 전 직원들이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팀장님이나 뒤에 계신 분들도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죠.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과연 제 탓일까요? 제가 뭘 했다고 제게 욕을 퍼부으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너―.”

이번에는 태주가 그에게로 더 다가섰다. 말을 막으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꼬리를 잡아챘다.

“‘너’라고도 부르지 마세요. 저는 ‘너’도 아니고 ‘야’도 아니고, 성태주 과장입니다. 개인적으로 뵙는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셔도 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함부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존중은 저만 해야 하나요? 저는 늘 팀장님을 존중해 드렸는데요.”

최 팀장의 동공이 점점 넓어졌다. 그는 마치 ‘지렁이도 꿈틀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리고 제 과거를 쉽게 들먹거리지 마세요. 팀장님께서 그렇게 막 말씀하셔도 좋을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제게는 아직도 상처예요. 사고로 일가족을 잃은 제 마음을 다 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고아라는 사실로 팀장님께 폐를 끼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자꾸 입에 담으시는 건가요? 그저 저를 폄하할 작정이로요?”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렇지만 꾹 참았다.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절대 울어서는 안 된다.

“야, 너 내가 몇 번이나 그랬다고. 아주 꼬투리 잡았다 이거지?”

“몇 번이나 그랬냐고요? 글쎄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하셨는데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제 개인사를 모르는 분들이 있을까요? 저는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다들 어떻게 알게 되었을지 참 궁금하네요.”

“너, 너…….”

최 팀장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앵무새처럼 ‘너’, ‘야’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조차 숨죽은 듯 조용했다.

일부는 소곤거리며 최 팀장을 비난하고 있었다. 남의 개인사를 들먹거리며 조롱하는 일, 본인들의 업무태만에 대해 인정하지 않은 일. 회사 안에서 패거리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배척했던 일. 비난할 거리는 차고 넘쳤으니까.

“너 잘리고 싶냐? 어?”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반론이란 이런 것이었다. 태주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에 할 수 있는 치졸한 협박 같은 것이다. 아직도 본인의 손에 태주의 밥줄이 걸려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 밥줄, 떠나간 지 오래입니다만.

심장이 떨릴 때면 재킷 주머니 안에 카드가 잘 있는지 다시 또 손을 집어넣었다. 음, 아주 잘 있군.

“팀장님께서 저를 자를 수 있으신 거면 그렇게 하세요. 물론 팀장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저를 조롱하거나 모욕하신 것들을 계속 감내할 수는 없어서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태주가 했던 말들 중 가장 용기를 낸 말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에게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눈에 더 힘을 주었다. 괜찮아, 태주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너 지금 내가 끈 떨어졌다고, 씨발. 우습게 보는 거냐?”

이 언쟁은 무의미했다. 태주와는 달리, 그는 이 이야기를 끝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으니까. 그저 분풀이를 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만만한 성태주에게.

도돌이표처럼 최 팀장의 말이 다시 돌아가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일행들이 대놓고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그만 좀 하세요.”

“과장님 말씀이 다 맞잖아요. 언제까지 했던 말씀 또 하실 겁니까.”

“사과하세요. 아무리 팀장님이셔도 이건 아니죠.”

이 회사에서 오래 굴러먹은 그마저도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전(前) 대표인 본부장과 함께 회사의 핵심 인물로 지내온 세월이 있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직원들부터 시작해서, 자신과 오래 일을 했던 이들까지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있었다. 뒤에서 몰래 하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앞에서 말이다.

꽤나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만만한 인간을 잡아 그를 비난하고 탓하면, 설령 뒤에서 씹을지언정 앞에서는 제 편을 들어줬으니까.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더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지적하는 눈초리로 태주를 노려보았다. 그가 너무나 모양 빠지게도 소리를 질렀다. 삑사리도 잊지 않고.

“야! 너 재킷에서 손 안 빼?! 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손을 집어넣고!?”

이건 좀 오해였다. 지금 당신을 무시해서 재킷에 손을 넣고 있는 게 아닌데.

“이거 봐. 이거 보라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 지금!”

아뇨, 아닙니다. 재킷 주머니에 제 부적이 있어서 그래요. 카드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카드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주기도문은 너무 길어서 패스해야겠다.

“말 돌리지 마세요, 팀장님.”

“너 주머니에 뭐 있어! 어? 녹음기 넣어 둔 거 아니야?!”

그가 억척스럽게 팔을 뻗었다.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는 태주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그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몸을 뒤로 빼면서 눈을 꾸욱 감았다. 안 돼, 이 카드는 뺏기면 안 돼. 제 거 아니에요.

“팀장님! 왜 이러세요, 진짜!”

“김 대리, 팔 꽉 잡아!”

“어서 들어가세요, 팀장님.”

“빨리 택시 태워서 보내!”

상진이 태주를 뒤로 당기며 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팀원들이 팀장의 양쪽 팔을 꽉 붙들었다. 아마 손찌검을 할 것 같았나 보다. 이제는 피곤과 짜증, 신경질로 범벅이 된 얼굴로 최 팀장을 연행하듯 끌어내었다.

“야! 이거 안 놔?”

“아, 팀장님. 좀 적당히 하세요.”

“사과 안 하실 거면 집에 들어가세요. 택시 잡아 드릴게요.”

“진짜 진상이네.”

아예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짜증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그가 여럿이서 당기는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얌전히 질질 끌려갔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 잡힌 택시 안으로 구겨 넣어졌다. 진작 좀 말리지.

최 진상 놈이 떠나고 난 자리가 고요했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이 멋쩍어하며 주위 눈치를 본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중 몇몇이 태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성 과장.”

대답도 하기 싫었는데, 그래도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그만두면 안 볼 사이지 않은가.

“네.”

“우리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최 팀장님이 많이 취하셔서.”

‘취했다는 이유’는 참 볼품이 없었다. 술을 모든 일의 방패로 쓸 거라면 아예 마시지 않아야 할 텐데.

“네, 알겠습니다.”

예전의 성태주였다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뭘 그런 걸 사과하느냐며, 술에 취해서 그런 거니 괜찮다고, 했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사과를 쉽게 받아 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아주 짧게 답을 하고 돌아섰다.

“다들 시간이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세요.”

“과장님, 괜찮으세요?”

팀원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괜찮아요.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네. 다들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습니다.”

한바탕 쏟아냈더니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어서 사람들을 들여보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어휴, 피곤해. 남은 힘을 쥐어짜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하철은 아직 있죠? 다들 어떻게 가요?”

“아, 저는 택시 타려고요.”

누군가 말을 꺼내자, 곁에 있던 오 주임이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더니 그를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저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과장님. 걱정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네, 저희가 알아서 갈게요.”

진작 이랬어야 했나. 이전까지만 해도 마지막까지 남은 인원들을 챙기는 일은 태주의 몫이었는데. 지렁이가 꿈틀한 것에 놀란 이들이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요? 알았어요. 먼저 들어갈게요.”

이거저거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한껏 흥분을 해서 그런가, 술이 다시 올라오는 듯도 했다. 다 큰 성인들이니 알아서 가겠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을 뗐다.

* * *

소파에 편히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물소리가 끊긴 것을 보니, 상진도 곧 나올 것 같았고. 대충 걸친 샤워가운이 자꾸 벌어졌다. 뭐 어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었다.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맥주를 한 캔 땄다.

“형, 내일 괜찮겠어요?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응, 그렇지.”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서둘러서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준비도 미리 해야 했고. 상진에게는 어떤 볼일인지 자세히 말해 두지는 않았다. 그저 가야 하는 곳이 있다고만 말했는데도 유독 신경을 쓴다.

“그만 마셔요.”

“이것만 마실래.”

그가 곁에 앉았다. 소파도 크고 넓은데 왜 또 굳이 바로 옆에 앉는지. 허벅지에 그의 다리가 닿았다. 따뜻했다.

“아까 멋있었어요.”

“그랬어?”

“네, 속이 다 시원하던걸요.”

“나도.”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났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게 살았는지를 깨닫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또다시 걱정이 밀려온다.

아……. 무슨 짓을 한 거지. 자를 수 있으면 자르라니. 그런 말을 뱉었다니.

“상진아.”

“네, 형.”

“나 괜찮겠지?”

그에게 묻는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저 묻고 싶었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상진은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있잖아요. 괜찮아요, 형.”

알싸한 맥주 향이 코끝에 묻어났다. 한 모금 더 들이킨 후에 벗어 둔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에 잡히는 네모난 부적을 그에게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

“부적 잘 썼다. 고마워.”

“그냥 형이 가지고 있어요.”

“내가 이걸 뭐 하러 가지고 있어. 부담스럽거든, 그냥 가져가.”

“형이 써요. 원래 주려고 했었어요.”

“거참, 말 많네. 됐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이야.”

그가 받으려고 하질 않아서 그냥 테이블 위에 두었다. 이런 달콤함은 한 번이면 족하다. 더 젖어 들었다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얼른 들어가서 자라.”

“형은요? 형이랑 같이 잘래요, 침대에서.”

“또? 네가 애냐.”

괜스레 툴툴거렸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조금 부끄러웠기도 했고, 그와 껴안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도로록 굴러간 시선이 대충 걸친 그의 가운에서 멈추었다.

“……거기는 애 같지도 않으면서, 왜 애처럼 굴어.”

“아직 애기예요. 쓰다듬어 주세요.”

“환장하겠네. 아, 야! 가운 열지 마, 너 속옷 안 입었어?!”

그가 슬쩍 가운 사이를 열었다. 튼실한 아랫도리가 무방비하게 노출이 되어 있었다. 다시 봐도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크기를 가지고서 작다며 울다니. 그때의 상진이 떠올라 화딱지가 났다.

“너 설마 항상 속옷 안 입고 다녔어? 내 침대에 있을 때도?”

“네.”

“그, 그럼 내 다리에 막 비빈 거. 설마 속옷도 안 입고…….”

“네.”

와, 왜 저렇게 당당하지. 저거 진짜 변태네.

“말을 말자. 내가 너랑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이상하지.”

“왜요? 난 더 하고 싶은데.”

“됐거든, 개변태 씨.”

“형, 저 흥분돼요.”

“웃기고 있네! 너 고자 탈출했잖아. 이제 그런 신호 보내지 마.”

상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불만 어린 눈초리로 한참을 보더니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빼앗아 갔다.

“아! 왜!”

“그만 마셔요.”

네 돈으로 사긴 했지만 너무 치사한 거 아니냐며 항변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한다, 저 인간. 좀 약이 올라서 그가 가지고 간 맥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놔!”

“싫어요.”

상진이 팔을 저 뒤로 보낸 탓에 닿지도 못했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리며 실랑이를 했다. 이제는 더 상할 자존심도 없었다. 이내 태주가 그에게 달려들 듯 몸을 던졌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맥주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아! 야!”

상체의 무게를 실어 몸을 기울였다. 닿을 듯 말 듯 이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차이뿐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발악을 한 끝에 겨우 손에 캔이 닿았다. 냅다 그것을 낚아채서 손에 들었는데 가슴 쪽에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으윽?!”

정신을 차려 보니, 거의 상진의 몸 위에 올라탄 채였다.

몸싸움을 하는 도중 풀어진 샤워 가운이 헐렁해져 있었다. 그 사이로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헤쳐진 옷깃 사이를 더듬어 볼록하게 솟은 태주의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야, 잠, 읏!”

간질거리는 촉감이 가슴에서부터 발끝으로 퍼져나갔다. 몽글몽글했던 유두가 그의 혀 아래에서 꼿꼿하게 서서 더욱 예민해졌다. 그는 그것을 마치 사탕을 굴리듯 쪽쪽 빨아 대었다.

“읏, 자, 잠깐……! 하지 마, 이상해…….”

위태롭게 허공에 들린 손에는 반쯤 남은 맥주가 담긴 이 들려 있었다. 떨어트리면 안 되는데. 소파며 바닥이 더럽혀질 것이었다. 그것을 차마 놓지도 못하고 점점 젖어가는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태주의 몸 아래에 깔리다시피 한 상진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의 긴 속눈썹이 태주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태주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상체를 뒤로 물렀으나 그의 손이 태주의 등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의 허리에 올라탄 몸을 뒤틀었다.

“으응, 읏……. 하…….”

차츰 더해지는 자극이 겹겹이 쌓여 아래로 침전되었다. 할딱거리는 호흡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내내 파르르 떨어야만 했다. 점점 저려 오는 팔을 소파로 내리고는 상진의 머리를 껴안았다. 이어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찌르르 씹히는 통증을 잇새로 삼켰다.

“흣! 아, 깨물……. 앗……!”

쪽, 츄웁, 아래에서 퍼지는 노골적인 소리가 전신을 달아오르게 한다.

태주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감싼 허벅지를 조였다. 지끈지끈한 열감이 그곳에서부터 전해져 단단한 형태로 잡혔다. 분명 그는 느꼈을 것이다. 그의 복부에 비벼지는 태주의 그곳을.

“……형, 좋아요?”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태주에게 물었다. 웃음기가 가득 담긴 말에 태주의 얼굴이 홧홧하게 상기되었다.

“……흐윽, 하아…….”

그가 소파에 누인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도로 빼앗아 테이블에 놓고는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태주의 엉덩이를 팔로 받쳤다.

그에게 몸이 이끌려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허벅지 위에 서로 시선을 맞추며 말이다. 그의 몸에 막혀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겨우 가슴 좀 빨았다고 이렇게 돼요?”

상진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벌써 단단하게 발기된 태주의 것을 눈에 담으며 웃었다.

“……윽, 요즘 안 해서 그런 거야. 쌓였으니까.”

“그럼 말하지 그랬어요. 얼마든지 박아 줬을 텐데.”

“야! 됐거든? 너 아니어도 얼마든지―.”

말이 끝나지도 않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지더니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양손으로 둔부를 쥐고 벌려 당겼다.

“읏, 야!”

“나 아니어도? 그럼 누가 있어요? 여기 만질 수 있는 사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빨리 말해요. 어떤 새끼냐고.”

겨우 트인 숨이 다시 흩어졌다. 매끄러운 손가락이 애널 깊숙이 파고들며 내벽을 자극했다. 그것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안을 쑤셔 대었다. 메마른 입구가 빠듯하게 들어찬다. 태주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였다. 흠칫 떨리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신음을 흘리며 떨었다.

“하윽! 읏, 아! 아파, 아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강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들썩거려 호흡이 흐트러졌다. 새된 비명을 그의 귓가에 토해 내며 뜨거운 숨이 입 안에서 터져 나온다.

“형, 말해요. 나 말고 또 누가 있어요? 화내지 않을게요.”

“흐읏! 으응……!”

한번 뚫린 입구는 어쩔 도리 없이 그것을 꽉 조여 물었다. 어느새 세 개까지 늘어난 손가락이 좁은 아래를 벌리며 크기를 넓혀 갔다. 그는 그것을 강하게 박아 넣고 서서히 빼내며 사이를 벌렸다. 아직 그 자극에 익숙하지 않은 애널이 움찔거리며 다시 좁혀졌다.

“하, 너무 좁아요. 좀 더 벌려 봐요, 응?”

“미친,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그가 태주의 등에 한손을 받치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테이블의 상판을 들어 올리더니 그 안의 수납공간에서 튜브 타입의 젤을 꺼냈다. 케이스의 입구 부분이 길고 얇은 형태였다.

등을 받쳤던 손을 아래로 내려 태주의 엉덩이 한쪽을 옆으로 당겨 벌렸다. 벌름거리는 입구가 붉게 물들어 있다. 그는 젤을 잡은 손가락 끝으로 입구를 더듬었다. 그 부근을 누를 때마다 태주의 허리가 흠칫흠칫 떨렸다.

“야, 잠, 너 뭐해? 응? 상진아.”

마침내 찾은 그 구멍 안으로 젤 케이스의 입구 부분이 쑥 밀려 들어왔다. 차갑고 딱딱한 것이 안으로 밀려오자 짧게 비명이 터졌다. 그에게 매달린 채 찔끔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머리를 끌어안고 흐느끼자 그가 달래듯 말을 걸어왔다.

“형, 흘리면 안 돼요. 알았죠? 참는 거 잘하잖아요, 우리 예쁜 태주 형.”

“흐윽, 흑, 으응…….”

빠직,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구멍으로 차갑고 질척한 액체가 단숨에 쏟아졌다. 체액과는 다른 생경한 느낌에 숨을 꾹 참아야 했다. 짧게 짧게 들어오는 공기가 신음과 함께 섞이며 터져 나왔다.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구멍 안을 가득 채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채워지는 감각은 묘한 수치심을 자극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태주의 것이 꺼떡대며 흔들렸다. 이미 그 끝에는 투명한 액체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볼썽사나운 이 꼴을 상진이 고스란히 눈에 담으며 미소를 짓는다. 그는 행복감에 몸을 담근 듯 눈매가 둥글게 접힌 채로 태주의 입술을 찾았다.

“울지 마요, 형.”

“하앗, 흑, 이상해, 이거, 읏…….”

“내 좆물이라고 생각해요. 형 그거 좋아하잖아요, 응?”

통이 텅 빌 때까지 짜낸 케이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긴 입구가 다시 쑥 빠졌지만 허전했던 안에는 미끈거리는 액들이 가득 들어차 버렸다.

태주가 숨을 들이키며 아래를 조였다. 질금질금 흐르는 차가운 촉감이 너무나 소름이 끼친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그 감각이 예민해진 살갗을 살살 간지럽혔다. 마치 실금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심과 오싹한 쾌감이 맞물렸다.

상진이 입을 벌려 태주의 입술을 삼켰다. 꾹 감은 눈가에 어린 물기도, 구겨진 미간도,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입술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를 파고들며 안을 내주기를 재촉했다. 아래도, 위도, 모두 제 것으로 가득 차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흐읍, 으응…….”

마침내 열린 구멍 안으로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점막을 휘젓고 긴장으로 굳은 태주의 것을 훑는다. 결코 아름다운 입맞춤은 아니었다. 발정기의 동물이 본능에 못 이겨 교미를 하듯 게걸스럽게 안을 핥아 대었다.

“흡, 응……. 하아……. 읍…….”

“읍……. 으응…….”

느슨했던 의식이 드나드는 그의 것에 바짝 날을 세운다. 내내 울며 매달렸던 태주 역시 고개를 비스듬히 틀며 더욱 깊이 그를 받아들였다.

상진을 끌어안은 팔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와 세밀한 등 근육을 훑었다. 탄탄하고 부드러운 살갗을 손끝으로 느끼며 이내 다시 그의 볼에 안착한다. 물을 마시듯 벌어지는 턱을 양손으로 어루만지고 끌어당겼다. 위에서부터 차오르는 쾌락이 물감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다.

“……형.”

“……으응, 좀 더…….”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태주가 말했다. 더운 숨을 노골적으로 흘리고는 그를 유혹하듯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이미 눈이 반쯤 감겨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알싸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설마 또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죠?”

상진이 눈썹을 까딱이며 태주의 목을 핥았다. 그리고 질척하게 젖은 그의 구멍으로 손가락을 재차 밀어 넣고 벌렸다.

간신히 닫은 구멍에서 따뜻한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상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그 안으로 쑤셔 넣었다. 찌걱, 츄걱거리며 철벅거리는 내벽이 기꺼이 그 이물질들을 받아 물었다.

“으읏, 아, 잠깐, 갑자기……!”

“이 정도로 놀라면 어떡해요. 익숙해져야 할 텐데.”

뻐근해지는 아래로 열이 몰렸다. 당장이라도 처박고 허리를 튕겨 대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내일은, 보내줘야 했다. 그에게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상진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열기로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아쉬움을 숨기려 애를 썼다.

“상진아, 흐아……. 읏……. 천천히…….”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다. 이제는 마디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밀어 넣고는 촘촘하게 좁혀진 내벽을 더듬었다. 뜨거운 체온으로 녹은 젤이 손가락과 뒤섞이며 야살스러운 소리를 낸다.

“흐앗! 으응! 앗!”

태주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가 파르르 떨림과 동시에 수축된 허벅지 안쪽이 조여졌다. 상진은 아주 능숙하게 태주의 안을 탐했다. 내벽 안쪽의 불룩한 그곳을 찾아내어 곧바로 쑤셔 대며 희롱했다.

“하아, 형. 그렇게 좋아요? 허리가 흔들리잖아요, 야하게.”

“으응! 읏, 하, 거기 안, 안 돼! 그만, 그마안……!”

“너무 꼴려요, 형 너무 야해요. 더 매달려 줘요, 응? 그럼 좋은 곳 만져 줄게요.”

손가락을 그곳에 비비며 박아 대자 태주의 허리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상진을 끌어안고 엉엉 울며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다 풀어헤쳐진 가운이 상체에 간신히 매달려 하늘거렸다.

“흐윽, 하아, 아으읏, 좋아, 으흑, 흐으윽……!”

“울지 마요, 아니, 더 울어 줘요. 예뻐요, 형.”

상진이 손가락을 넣었다 빼며 안을 더 넓혀 대었다. 단숨에 들이닥친 손가락들이 내벽을 긁고 사이사이를 벌린다. 충분히 길을 들여놓아야 했다. 상진의 다리 사이에서 곧추선 페니스가 흉흉한 크기로 붙어서 있었다.

“상……. 아흣, 상진, 아, 아읏, 제발, 거기……. 흐으읏, 으응!”

한 번 맛들인 쾌감은 쉽사리 가라앉질 못했다. 태주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감각을 좇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안에서 부피를 키우면서 머물 때면 그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내벽에 그것을 비벼 대었다.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구멍이 한계까지 늘어나 안을 채우던 젤이 후두둑 흘러내린다.

“갈, 것, 아읏, 갈 것 같……. 하아, 상진아……. 으읏……!”

“하아, 흣, 가도 돼요. 괜찮아요.”

검지와 중지로 안을 쑤셔 대자 이내 태주가 바르르 떨며 신음을 토해 냈다. 꽉꽉 조여 물던 내벽이 급격하게 수축하더니 짧은 숨을 터트린 그의 몸이 허물어진다. 상진에게로 온몸을 기댄 채 다리 사이가 질척하게 젖어 버렸다.

복부에 바짝 붙었던 태주의 것에서 불투명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상진의 복부는 물론이고 가슴께까지 적셔 놓았다. 꽤나 참았던 것인지 퍽 오래 파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태주의 몸이 가쁜 호흡으로 들썩거린다.

“형.”

“하아, 하…….”

상진이 그의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제 품에 안았던 그를 소파에 눕히고 정액으로 엉망이 된 그곳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흐앗, 으읏, 만지지 마, 아직…….”

“아직도 민감해요? 귀여워요, 형.”

움찔거리며 정액을 쏟아 내는 그것을 손으로 쥐고 천천히 뿌리부터 선단까지 훑어 올렸다. 그러자 태주가 몸을 파르르 떨며 상진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쾌감이 그곳에 머무른 채였다. 그것에 따듯한 살갗이 닿자 허리가 들뜨며 비틀어졌다.

“상진아, 으앗, 계상진. 그만…….”

“잘 먹을게요.”

“흐아, 으응……!”

상진이 혀를 내어 페니스를 핥았다. 두툼한 혀의 단면이 선단을 쓸고 이내 입 안으로 크게 머금어졌다. 씁쓰름하고 짠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는 그것을 거부감 없이 삼키고 핥았다.

목구멍까지 밀려 들어간 페니스를 힘을 주어 쭉 빨았다. 그러자 태주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신음을 쏟아내었다.

“아으응! 아, 제발, 아! 아읏! 으읏, 상진아, 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더듬었다. 아직도 물기가 가득한 입구를 찾아내어 다시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법 풀어진 애널이 이제는 기다렸다는 듯 상진의 것을 꾹 조여 문다. 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일었다.

“그만, 가, 아읏, 그마안……. 흐아읏, 흐윽, 으읏……!”

태주의 안이 야금야금 수축하며 안을 좁혔다가 넓히기를 반복했다. 흐느끼는 교성이 높아질 때면 상진의 혀와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위로는 볼이 움푹 팰 만큼 빨아 대고 있었고 아래로는 거칠게 쑤셔 대며 박기 바빴다. 손가락이 밀려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자 안을 채운 젤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벌써 다시 발기한 태주의 것이 상진의 입 안에서 쭉쭉 빨아졌다. 팔을 퍼덕거리던 태주가 상진의 어깨를 더듬으며 밀어내려 했다. 극심한 쾌감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비례한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울음으로 감춰 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아, 으응! 아읏……. 아! 아아!”

둔부 아래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경련이라도 인 듯 태주의 숨이 툭, 툭, 끊어졌다. 겨우 잡은 상진의 어깨를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어 보지만 이미 끝에 다다른 뒤였다. 뒤로 넘어간 고개 아래로 미끈한 목선이 움찔거린다.

“……맛있어요, 형.”

태주의 음부에 고개를 파묻었던 상진이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 묻은 정액이 그의 머리카락이며 코끝에 흥건했다. 그는 태주가 쏟아낸 체액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힘이 빠진 페니스에 입술을 비비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또 기절했네.”

안을 쑤셔 대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상진이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태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연속된 사정의 여파로 그는 눈을 감고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쉬워라. 조금만 더하면 할 수 있었는데.

상진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태주를 끌어안았다. 그를 품에 안고 눈물로 얼룩진 속눈썹을 혀로 핥아내었다. 그가 남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았다. 정액도 눈물도 무엇이든지.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키고야 말 것이다.

그로서 그가 자신의 곁에 존재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 * *

현이와 현우는 숨바꼭질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꽤나 자주 그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술래는 현우였다. 현우가 허름한 집의 현관문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가린 채 숫자를 셌다.

현이는 마당으로,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에는 숨을 곳이 많지 않았지만 딱 하나, 고동색의 낡은 옷장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옷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면 아이들은 나를 찾지 못했다.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러다 몇 번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를 찾다 지친 아이들은 울며 아빠를 찾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밖이 유난히 조용했다. 까만 시야 너머로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옷장 문을 열었다. 끼익, 녹슨 이음새가 저들끼리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낸다.

“……그렇게만 해 주면……. 아이를 넘기고……. 얼마든 줄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는 건……. 위험할…….”

드문드문 대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옷장에서 나온 나는 왜인지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대화 소리는 방 밖으로 이어진 좁은 주방에서 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방의 사각지대에 몸을 웅크리고 숨겼다.

“……는 태주가 같이 가면…….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회장님 댁의 사모님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이는 아빠였다. 어린 태주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에 더 귀를 기울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일수록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법이었다.

“회장님이 아시면…….”

“이번 출장은 꽤 길게 다녀온다고 했어요. 그러니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 이런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성 실장이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돼요. 나는 어떻게든 그 아이를 보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성 실장에게는 돈이 필요하지 않나요? 어린 태주와 현이를 데리고 언제까지 빚에 허덕일 생각이에요. 그 아이들이 무슨 죄라고.”

어렸던 나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렸으며 순수했고, 그때에는 그저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거리고 있었다.

“나쁜 일이 아니에요, 성 실장.”

“…….”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거니까요.”

“……네.”

“이 일만 잘 처리해 주면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할게요.”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금이에요.”

“감사합니다.”

기억은 언덕 너머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흐릿했다. 그때의 성태주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막연한 불안함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때의 순수했던 자신은 그들이 나눈 대화가 어떠한 불행의 전조였다는 것을 알아채질 못했다.

모든 일이 닥친 뒤에야, 조각조각 났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제야 후회했다. 스스로를 비난했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은 자학이란 칼날로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 칼로 자신을 베고 쑤시고 자르면서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기억을 잊으려 했다.

나는 그때, 왜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그때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말려야 했다.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어야 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건네는 그녀에게 화를 냈어야 했다.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 * *

또다시 꿈을 꿨다.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는 그날의 기억을 오늘도 어김없이 꿈으로 보고 말았다. 그 꿈은 이 시기에는 꼭 한 번씩 찾아왔다. 정기적으로 전송되는 고지서처럼 말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빚을, 마음의 짐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처럼.

“……윽.”

왼쪽 관자놀이를 누군가 송곳으로 쑤시듯 통증이 일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걸까. 날카로운 고통에 눈을 찡긋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서서히 열리는 시야 너머로 그가 있었다.

“…….”

검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아직 씻기도 전인데 왜 아침부터 잘나고 난리인지. 곧게 뻗은 콧대와 매끄럽게 올라간 입술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와 같은 베개를 벤 채로 잠이 들었나 보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어제, 그러니까 최 팀장과 한바탕 하고 나서 집에는 잘 도착했었다. 깨끗하게 씻고 맥주를 마셨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가 맥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조금 실랑이를 벌였었다. 음, 또 그리고. 그리고…….

“……형.”

어느새 눈을 뜬 그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초승달처럼 곱게 휜 눈매에서 다정함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흠칫 놀라 눈꺼풀을 깜빡이던 태주에게 슬그머니 입을 맞추었다. 아주 상냥하지만 가볍게, 금세 쪽 입술을 맞대었다가 떨어진다.

“잘 잤어요?”

“……어, 응.”

어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파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저 인간의 손에다가 좋다고 허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이런, 미친. 왜 갑자기 기억이 나지?! 왜?! 술만 마시면 기억을 제대로 못 하는 일이 태반이었는데, 대체 왜. 신이시여, 제 머리통을 갈기고 기억을 뺏어가 주세요.

“형, 어제……. 기억나요?”

그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물었다.

아니, 저 미친놈이. 게걸스럽게 키스를 퍼붓고 잡아먹을 듯 손가락으로 쑤시던 놈과 동일인이 맞다는 것인가. 할 짓은 다 해 놓고 새삼 얼굴은 대체 왜 붉히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

알아도 몰라야 했다. 모르면 더 몰라야 했다. 그냥 아예 어젯밤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생각이었다. 길바닥에 그 기억만 버리고 가면 자연스레 잃어버린 게 될 테니까.

“기억 안 나요?”

“응.”

상진이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또 튀어나온 입술과 비스듬히 기운 눈썹을 보니 양심에 쿡쿡쿡 찔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저 인간에게 휩쓸려 몇 번이나 관계를 맺었지만 어제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스스로도 좋아서 매달렸던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돼. 자신은 절대로, 절대로…….

“형은…… 정말…….”

태주와 마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태주에게 등을 돌려세운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쓰레기예요.”

“무, 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운한 티가 팍팍 났다.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베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깨를 살짝 떠는 것도 같았다.

야, 설마 우냐?!

“정말……. 형은…… 개새끼예요.”

“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맨날……. 나만 기억하고…….”

아니, 이번에는 나도 기억을 하긴 하는데.

“맨날…… 내 몸만 낼름 먹고 자기는 기억 잃었으니까 땡이죠……? 쓰레기……. 성태주 쓰레기…….”

“아니, 누가 누구 몸을 먹었다는 거야.”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누가 보면 아주 저 인간을 가지고 놀다가 몸만 홀랑 먹고 버린 천하의 상놈 새끼로 보게 생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먹었다기보다는 먹혔……. 아니, 미친! 이런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한 도움이 아니었던가. 뭐, 이제는 무의미해지긴 했다만.

“어제…… 좋다고 허리 흔들어 놓고……. 못 참고 내 얼굴을 난장판 만들어 놓고……. 자기는 기억도 못 하고…… 쓰레기……. 태주 형 쓰레기…….”

“미치겠네, 개진상. 너 울어? 이쪽 좀 봐.”

“됐어요…….”

저렇게 등 돌린 채로 어깨를 떨고 있으니, 정말 천하의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았다. ……이 경우에는 정말 나쁜 놈인 건가. 아는 척하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말이지.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등을 세우고 앉았다. 등을 돌린 상진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건넸다. 좀 미안하긴 했다.

“상진아.”

억지로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던 그의 등판이 휙 돌아가며 정자세로 눕혀졌다. 그런데 눈물은 무슨. 아주 태연자약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야. 너 우는 척했어?”

“거의 울 뻔했어요.”

“이게 아주, 사람을 가지고 놀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건 형이잖아요. 언제까지 날 가지고 놀 거예요? 이제 슬슬 알아 줄 때도 되지 않았나.”

그가 자리에서 느긋이 몸을 일으켰다. 헐벗은 그의 몸이 이불 밖으로 드러나자 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또 속옷 안 입고 있네, 저거.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슬쩍 이불을 끌고 와 일단 제 몸부터 가렸다. 나는 또 왜 옷을 안 입고 있는 건데.

“내가 뭘 가지고 놀아.”

“와, 너무 나빴다. 형이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데.”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형은 큰 거 좋아하잖아요.”

“……큰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넌 규격 외야.”

툴툴거리며 답을 했더니 그가 빙긋이 웃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단숨에 가까워져선 부드러운 혀로 태주의 입술을 핥았다.

“읍, 야!”

“거짓말을 하려면 입술에 침이나 바르라고요.”

“내 침을 발라야지, 왜 네 침을 발라. 그리고 거짓말 아니거든?”

“내 몸에 닿기만 해도 자지러지면서 무슨 소리신지. 기대해요. 다음에는 절대 안 봐줄 테니까.”

“우, 우, 웃기고 있네. 까불지 마라.”

안 봐 준다고? 진짜 웃기는 소리였다.

뭐, 안 봐 주면. 뭐, 뭐, 어떻게 할 건데. 설마 저거를 막 손가락처럼. 그렇게 막, 멋대로 어? 그럼 자신이라고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절대로 못하지 않게 막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태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체 기대를 왜 한다는 말인가. 기대가 전혀 되지 않지 않았다.

“형, 왜 얼굴 빨개졌어요? 어제 일 기억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빨갛다고. 어제 술 마셔서 그런 거야. 비켜.”

그를 확 밀치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몸을 가린 이불을 간신히 부여잡고 바닥으로 넘어지려는데, 그가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요? 이리로 기대요.”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던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얼른 옷이라도 입고 싶었지만 씻는 게 우선이다. 욕실로 데려다 달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태주를 너무나 쉽게 안아 들었다. 창피하게.

“씻겨 줄까요?”

“됐습니다. 내가 애냐.”

치근덕거리는 그를 퍽퍽 치며 밀어냈다. 그러고는 세면대에 기대어 앞에 놓인 칫솔을 쥐었다. 치약을 쭈욱 짜놓고 고개를 들어 무심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목이며 어깨, 쇄골에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어라? 이건 기억에 없는 일인데.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 양쪽에는 누군가 양손으로 붙잡은 듯한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었고 손목에도 무언가로 묶인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다.

“야, 개진상.”

욕실 입구에 서 있던 그가 느물스럽게 웃고 있었다. 눈이며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니 전혀 숨길 생각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누가 누구보고 개새끼래! 이 발정난 개새끼,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네? 뭐가요?”

“손목이랑 내 허리는 대체 뭔데. 그리고 목에도 그렇고.”

“그거야 어젯밤에 형이랑 나랑―.”

또 거짓말이다. 어제 일만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잠에 들기 전까지는 손목이나 허리를 세게 붙잡힌 일이 없었다. 화가 잔뜩 난 태주가 그의 뒷말을 잘라먹고 소리를 질렀다.

“웃기고 있네. 어제 손목 묶인 적 없거든?”

“아― 그래요?”

“당연하지. 그리고 허리도 이렇게 잡힌 적은 없―.”

우다다다 쏟아져 나오던 말을 손으로 텁 막았다. 손바닥으로 입술은 가렸는데 이미 터져 나간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흐음.”

그가 눈썹을 까딱거리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한쪽으로 비스듬히 당겨진 입꼬리가 그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난다더니 꽤 상세하게 알고 있네요, 형.”

“어……. 응? 아니…….”

“그 뒷일도 정말 기억이 안 나요? 형이 얼마나 졸라 댔는지 말해 줄까요?”

그가 문턱을 지나 욕실 안으로 성큼 들어서려 했다. 뭐야, 몰라, 무서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치약을 그의 얼굴로 던졌다. 딱―, 그놈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했다.

* * *

준비는 간단하게 할 생각이었다. 미리 재워 둔 고기와 신선한 과일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떡은 미리 예약해 뒀으니 출발하면서 찾으면 되고, 술은 미리 가방에 챙겨 두었다.

일단 꺼낸 고기를 팬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채우고도 남았다. 환풍기를 켜둔 채로 과일을 비닐 팩에 담고 깨끗한 과도와 가위를 챙겼다. 그리고 늘 챙겼던 작은 술잔을 키친타올로 둘둘 말아 가방에 넣어 두었다.

고기만 완성이 되면 끝이다. 항상 혼자서 챙기다 보니 과하게 상을 차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준비하면 될 일이다.

“다 챙겼어요?”

이마가 불룩한 개새끼가 말을 걸었다. 아직도 부어 있네, 언제 가라앉으려나. 그를 빤히 보다가 고기를 마저 뒤집었다.

“뭐, 대강은.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차에 실어 두려고요.”

“차? 나 차 타고 안 갈 건데. 그리고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제사 음식 아닌가.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아, 맞다. 쟤 혼혈 아니랬지. 제사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얼추 맞긴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제사 음식 맞아.”

“데려다 줄게요.”

“됐어.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이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가겠다고요?”

“아,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렇지 않아도 허리는 후들거리고 아래가 욱신대는 통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슨 짓이든 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위하는 척 뻔뻔스레 말하는 그에게 성질을 냈다.

“미안해요, 형. 그러니까 저도 가게 해 주세요.”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됐다니까.”

“가서 얌전히 있을게요. 저 약속 잘 지키잖아요, 요즘.”

태주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그가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태주를 뒤에서 끌어안고 애교를 부리며 말끝을 늘인다.

“운전도 제가 하고, 그리고 짐도 제가 다 들게요. 제발요, 형.”

“아, 거길 네가 왜 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형 몸도 안 좋잖아요. 형이 하라는 거 다 할게요. 약속해요.”

“참나.”

남의 가족 제사에는 대체 왜 가냐는 말이다. 별로 좋은 일도 아니고, 어차피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고집을 부리는 그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딱 달라붙었다. 어휴, 저 진드기.

“알았다, 알았어.”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그러자 상진의 얼굴에 한 아름 미소가 피었다. 저렇게 기쁠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으며 서둘러서 짐을 챙기고 있다.

어느새 적당히 익힌 고기를 접시에 담아내었다. 찬장에서 통을 꺼내 옮겨 담고 상진이 들고 있는 가방에 삐뚤어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았다.

이제 가는 길에 떡만 찾으면 된다. 쫀득한 꿀떡과 백설기로 주문해 두었다. 현우와 현이가 아주 좋아했던 음식 중 하나였다.

* * *

수개월 만에 다시 찾은 납골당은 벌써 새로운 꽃다발과 편지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이곳은 추모를 위해 가지고 온 꽃이며 편지들을 한곳에 모아 둘 수 있었다. 그곳에는 가지각색의 사연들이 담긴 편지들이 있었다. 태주는 이곳에 올 때면 잔뜩 쌓인 꽃다발과 편지들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매월 세 번, 열흘에 한 번꼴로 추모의 흔적은 정리가 된다. 또 새로 쌓일 추모의 마음들을 위해서였다. 할머니에게 보내는 글,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엄마, 혹은 아버지, 또는 자식에게 보내는 눈물 어린 인사까지. 홀로 우두커니 서서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형, 여기요.”

“응?”

그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꽃다발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복숭앗빛의 장미와 은은한 살구색을 띤 라넌큘러스가 다발 안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놀란 눈으로 상진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형이 준비 못 했을 것 같아서요.”

“아니, 이런 건 또 언제…….”

“제가 눈치가 좀 빠릅니다, 누구랑은 달리.”

태주는 꽃다발을 건네받고 멀뚱히 서 있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혀서일까, 마음이 뭉클해졌다. 십여 년 동안 이곳을 찾으면서 단 한 번도 꽃다발은 준비한 적이 없었다.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하지 못했다. 혼자 꾸려야 할 남은 시간은 늘 녹록치 않았고 꽃다발을 준비할 돈으로는 빚을 갚아야 했다.

“여기 편지도 쓸 수 있네요.”

“응.”

“쓴 적 있어요?”

“아니, 없어.”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겨우 숨겼다. 꽃다발로 얼굴을 가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얼른 건조해져라, 얼른 건조해져라.

“그럼 오늘은 써요, 형. 나도 쓸래요.”

“뭐? 네가 왜 써.”

“나는 쓰면 안 돼요? 아버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려야죠.”

예쁜 꽃다발을 추모의 공간 한쪽에 올려 두었다. 파스텔톤의 꽃송이들이 어찌나 풍성한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얼른 가라.”

편지를 쓸 수 있게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상진은 이미 준비된 편지지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어차피 쓰지 말라고 해도 쓸 거면서 괜히 물어보기는. 내용이 궁금해서 흘끗 보려는데 그가 팔로 편지를 가려 버렸다.

“왜 못 보게 해?”

“사적인 편지인데 왜 보려고 해요.”

“참나, 알았다. 안 본다.”

사적인 편지 좀 보면 안 되나. 이미 공적인 사이는 지나치고도 남은 것 같은데.

그에게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펜을 들어 편지를 써 내려갔다. 편지지는 짧은 메모 정도의 글씨만 쓸 수 있는 크기였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그렇지만 천천히 편지를 적었다.

“야, 개상진.”

“네?”

그는 벌써 다 쓴 편지를 나무 거치대에 걸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볼까 봐 그런지 아주 위쪽에다가 말이다.

자기가 키 크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손을 뻗어도 잘 닿지 않을 자리였다. 에이, 치사해서 안 본다. 어차피 볼 생각도 없었다. 거의 거치대의 꼭대기에서 달랑거리는 편지가 약을 올리는 듯했다.

“꽃, 고마워.”

“우리 사이에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우리 사이? 아까는 사적인 편지 보지 말라고 선 긋더니.”

조금 아래쪽에 편지를 걸어 두었다.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이 좋으니까.

“선 그어서 서운했어요, 형?”

“아니, 전혀.”

이번에도 그가 옆에서 치근거리며 계속 말을 걸어 왔다.

서운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괜찮은 집만 계약하면 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와도 멀어지겠지. 지금은 같이 먹고 같이 자고, 출퇴근도 같이 하니까 이렇게 붙어 다니는 것일 터였다. 동정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선 그은 거 아닌데. 오히려 형이 더 그러면서.”

“내가 언제 선을 그었어.”

“형, 진짜 눈치 없는 거 알죠?”

“아, 눈치 완전 있거든? 내가 사회생활 짬밥이 몇 년인데.”

납골당 안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빈공간이 몇 개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우선 들고 온 짐을 그곳에 내리라고 말해 놓고 잠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사실 예약했는데요.”

“아, 네. 성태주 님이시죠? 예약하신 곳에 준비는 되어 있고요. 바로 지내시면 됩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나 혹은 명절에 들렀을 때도 그는 늘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쉬는 날도 없는 건가. 그에게 과일 음료를 건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제사실 안에서 상진이 짐을 풀고 있었다. 짐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단출한 차림이었지만. 그의 곁에서 고기와 떡을 상에 올리고, 과일은 꺼내어 위아래를 칼로 도려 내었다. 그리고 미리 챙겨 둔 술병의 뚜껑을 열어 잔과 함께 두었다.

태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제사상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절을 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반절까지 마친 후 멀뚱히 서 있는 상진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먹자, 별로 차린 건 없지만.”

나무젓가락을 가방에서 꺼내 그에게 건네주고 가위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서 반찬통 뚜껑 위에 덜어 주었다. 일부러 간을 하지 않았는데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다.

“형은 늘 여기에 혼자 왔어요?”

“응.”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같이 올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덤덤하게 대답하며 꿀떡을 하나 집어 먹었다.

“아, 맛있겠다.”

“꿀떡 좋아해?”

“네, 엄청요.”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보면 볼수록 그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알게 된 지 고작 몇 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람인 것만 같았다. 현이도 현우도 이 떡을 정말 좋아했는데. 동생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와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도 식성도 비슷했으니까.

고기를 우물거리던 태주가 그를 빤히 보았다. 문득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아무것도 묻지를 않는 걸까. 남의 가족 제사에는 따라오면서 자세한 일은 전혀 묻지를 않았다.

“상진아, 넌 안 궁금해?”

“뭐가요?”

“내가 고아라는 말, 너도 들었을 거잖아.”

회사에서도 공공연한 소문처럼 돌았고, 특히 상진에게는 집주인 할아버지가 아마 말했을 터였다. 전에 상진이 집 문을 열고 들이닥친 그때 사정을 들었다고 했으니까.

“……그냥 어릴 때 사고를 당했다고만, 그때 집주인이 말해줬었어요.”

젓가락으로 집었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이곳에 다른 누군가와 온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일까, 그냥 말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말해 주고 싶었다, 왜인지 모르게.

“교통사고였어.”

입술에서 단어가 툭 떨어졌다. 한번 내뱉고 나니 그 뒤를 잇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빠랑 나랑 동생들이랑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어. 빗길이었거든. 아버지는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사고를 내신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참 이상한 게 말이지. 그날따라 내가 심술을 좀 부렸다? 조수석에 앉으려고 했는데 현이가 자기가 앉겠다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그냥 양보했을 텐데 그날은 내가 떼를 썼었지. 그래서 결국 내가 아빠 옆자리에 앉았어.”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이 어린 마음에 스며들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그 대화 때문이었겠지. 어렸던 나는 그 당시 아버지가 그녀와 나눈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사고가 난 거야.”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데굴데굴 굴렀다. 기억이 나는 건, 무섭게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와 고개가 꺾인 채 눈을 감은 아빠의 모습. 그리고…….

“나만 빼고 모두 하늘나라로 갔어. 내가 그렇게 우겨서 아빠의 옆자리에 앉았는데,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 앉은 나만 살게 되었더라.”

“형.”

상진이 태주를 불렀다.

괜히 이야기했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소 어두워진 것만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 말이나 꺼냈다.

“상진아. 그런데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정말 아무 말이었다.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질문이었는데 너무 뜬금없었을지도 모른다.

“형, 설마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죠?”

“내가 불쌍해서?”

“형이 왜 불쌍해요?”

“다들 그렇다던데.”

계상진과 비슷했던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태주의 사연이 불쌍하다며 동정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다큐 프로그램에 나오는 주인공을 대하듯 바라보곤 했었지만 설령 동정이라고 할지라도 태주는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생긴 동정심과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이유 아니거든요.”

“그럼 왜?”

반찬 뚜껑을 닫으며 상진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단어를 고르는 것인지 대답이 늦었다.

평소와 달리 선뜻 나오지 않는 답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태주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의 대답을 전혀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굴며 차렸던 과일과 술, 떡이 들었던 통을 치우고 있었다.

“……뭐 놓고 가는 건 없죠?”

기다리던 답은 나오지 않고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래서 태주가 그를 흘끗 보았다.

“응, 다 챙겼어.”

지금까지 대화를 회피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었나. ……그래, 그랬을지도 모른다. 굳이 더 답을 재촉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왜인지 모를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마저도, 단순한 동정심과 호기심 때문에 곁에 있었던 거라면……. 이번에는 마음이 조금 아플 것 같다.

“우리 아빠랑 동생, 보고 갈래?”

“네, 보고 싶어요.”

그를 데리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태주의 머리보다 조금 위쪽에 위치한 자리였다. 나란히 놓인 아버지의 유골함과 그 옆 칸에 놓인 현이의 유골함이 보였다.

각 칸에는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현이가 웃고 있는 사진이 오른쪽 구석에 꽂혀 있었고, 양쪽 칸 모두에는 아버지와 현이, 현우, 그리고 태주가 웃고 있는 사진을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아빠랑 현이가 놀라겠다. 내가 누구를 데리고 온 적이 처음이라.”

벌써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유골함을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시기는 지난 후였다. 아무렇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태주는 담담한 얼굴로 유골함을 보며 말을 했다.

“인사해.”

“네.”

상진이 고개를 숙이며 양 손바닥을 마주 대었다.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랑 많이 닮았지? 내 동생.”

조금 머쓱해져서 가볍게 말을 이었다. 사진에 남은 현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태주와도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다. 정말이지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딱이다.

“형, 이 아이는.”

“아.”

상진이 손가락으로 사진 속 현우를 가리켰다.

똑 잘린 일자 앞머리를 한 현우가 빛바랜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은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어린 태주와 손을 꼭 붙잡은 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 그 아이는 태주의 앞에서는 곧잘 웃었더랬다. 태주보다 가진 것은 많았지만 늘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아이였다.

“내 동생이야. 현우라고.”

“동생이 두 명이었어요?”

동생이 몇 명이라고는 말한 적이 없는데. 아까 ‘동생들’이라고 했었던가. 굳이 되묻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대답했다.

“아, 현우는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가까이 지냈던 동생이야. 엄청 귀엽고 착했었는데. 내가 많이 예뻐했었거든. 신기하게 이름도 현이랑 비슷하지? 현이랑 현우, 둘이 맨날 싸우고 다퉈도 사이가 좋았었어.”

상진은 그 오래된 사진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어딘가 쓸쓸하게 보였다. 이제는 담담한 태주보다도 그의 얼굴이 더욱 슬픔에 잠긴 듯했다. 느릿하게 눈을 껌뻑이며 막혀 있는 유리 칸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기억해요?”

“응? 당연히 기억하지.”

“많이 아꼈어요?”

“아, 현우? 응, 많이 아꼈지.”

태주와 상진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상진이 유리 칸에서 손을 떼고 태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요? 그런데, 왜―.”

그가 숨을 멈추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까, 태주는 생각했다. 그가 말을 멈춘 사이 고개를 돌려 유리 칸 안의 유골함을 보았다. 아, 이걸 묻는 건가. 별로 숨길 이야기는 아니니까.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왜 여기에 현우는 없냐는 거지?”

상진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들이켰다.

“현우는 그날 다행인지 불행인지 숨은 붙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의식이 없었대.”

“그럼…….”

온전히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의 사고 이후, 태주는 현우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 아이가 있는 병원에도, 살던 집에도. 몇 번이나 찾아가고 몇 번이나 보게 해 달라고 빌었지만 누구도 허락하질 않았다. 돌아오는 건 저주가 섞인 악담과 욕설, 손찌검이었다.

“의식이 없는 채로 꽤 오래 병원에 있었던 것 같아. 사실 몇 번이고 찾아갔었는데 보질 못했어.”

“왜요?”

“그거야,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했거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회장님이 지극하게 아끼던 자식이었으니까. 그렇게 귀한 아이를 망가뜨린 것이 태주와 태주의 아버지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고가 났던 그 차를 운전한 건 태주의 아버지였으니 일부는 맞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왜 그녀마저도 아버지를 비난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었음에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는 병원도 옮겼더라. 그래서 집으로 갔는데,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가슴 깊은 곳이 울컥했다.

결국 그 아이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참지도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었다. 너무나 미안해서, 차라리 현우 대신 제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슬펐어요?”

눈동자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내고 있었다. 시큰해진 콧등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상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응, 아주 많이 슬펐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가 성큼 다가왔다. 상진의 너른 어깨가 태주를 품에 감싸 안았다. 짙은 그림자가 태주를 삼키고 두 사람의 몸이 하나라도 된 듯 겹쳐졌다. 그날 밤처럼 따뜻한 체온이 옷 너머로 스며들었다.

“야, 뭐야. 갑자기 왜 이래.”

“형…….”

꽉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태주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짧게 숨을 토해 내었다. 흐느끼는 것도 같았고 그저 웅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계상진, 너 또 어지러워? 저번에 쓰러졌을 때처럼?”

혹시나 그가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다. 멀뚱히 아래로 떨어져 있던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툭 떨어트리더니 태주의 어깨에 기댄 채 낮게 속삭였다.

“형, 저 사실은…….”

“엄마! 여기 맞지?”

“아니, 이쪽인데. 여기로 오면, 아이고, 깜짝이야!”

상진에게 안겨 있던 태주가 그를 퍽 때려서 밀어냈다. 그의 어깨 너머에서 장난기가 가득한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꽤나 놀랐는지 서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저쪽에서 너무 놀라는 모양새라 괜히 양심에 찔렸다. 뽀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포옹이었는데도 말이다. 아, 혹시 나 너무 저 인간과의 스킨십에 익숙해진 건가.

태주가 상진의 손목을 잡고 부리나케 납골당을 빠져나왔다.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사는 건 질색이었다. 저곳에 앞으로도 몇십 년이나 더 다녀야 할 텐데. 따지고 보면 저들은 이웃주민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번 유골함을 들이면 적어도 십 년은 넘게 보관하니까. 태주는 빚을 다 갚고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납골당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

“야, 아무데서나 막 안지 마.”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밀어요? 막 남보다 못하게?”

“또, 또, 입술 나오는 거 봐라. 삐쳤냐?”

“아니, 무슨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좀 껴안은 거 가지고.”

상진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계속 투덜대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내내.

“사람들이 보니까 그렇지.”

“그럼 사람들이 안 볼 때는 막 껴안아도 된다는 말이네요. 키스도 해도 되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해도 되고?”

“뒷말은 내가 안 했거든? 말 만들지 마라.”

태주는 딱 잘라 말하고는 납골당의 사무실에 들렀다 오겠다며 인사를 건네었다.

그래도 오래 본 사이라서 오갈 때 인사는 꼭 전하는 편이었다. 상진은 짐을 싣고 차를 빼러 이미 납골당에서 나간 뒤였다. 태주도 서둘러서 걸음을 옮기며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모의 공간에 놓인 화려한 꽃다발을 다시 눈에 담았다. 정말 예뻤다.

‘뭐라고 쓴 거지.’

못내 궁금해져서는 각양각색의 편지가 걸린 메모 거치대를 힐끔 쳐다보았다. 맨 꼭대기에 건 상진의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글씨를 어찌나 깨알같이 썼는지 내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줄의 길이가 매우 짧았다. 거의 한 줄 정도인 것 같다.

‘한 줄이면 별 내용 없겠네.’

남은 미련을 털어 버리고 납골당을 나섰다. 그냥 명복을 빈다거나, 간단한 인사말 정도나 썼을 터였다.

마침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진의 차가 보였다. 태주가 출입문을 열고 상진이 있는 곳으로 뛰어나갔다.

* * *

병실은 늘 고요했다.

나는 간헐적으로 들리는 기계음과 작게 틀어진 라디오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의식이 있었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인가 외부의 소리와 몸에 닿는 감각들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베드의 오른편에서는 창밖에서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왼편에서는 진중한 목소리의 앵커가 최근에 일어난 여러 사건 사고들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의식이 아직 사고가 일어난 그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해외 불법 입양을 알선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불법 입양 브로커’ 사건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만 10살 이하의 청소년이나 신생아를 해외로 넘겨 돈을 챙긴 혐의였죠. 당시 장 모 일당에 대한 익명의 제보로 수사가 시작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텐데요. 지난 18일 경찰의 집요한 추적 끝에…….]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난파선처럼 시간을 헤아리기가 두려웠다. 마침내 내가 긴 고독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띠, 띠, 띠― 나의 심장 박동을 알리는 기계만이 내 존재를 알려 주고 있는 듯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하지 못한 채, 무겁게 들린 눈꺼풀 너머로 흰 천장이 보였다.

기억이 멈춘 그날로부터 눈을 뜬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저씨는, 형은, 현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를 두고.

* * *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는지 모른다. 회사 출입구에 오도카니 서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형, 뭐해요?”

태주의 속마음도 모르고 상진이 뒤에서 재촉했다. 지난 회식 때 그런 난리가 났었는데 어떻게 안 떨릴 수가 있을까. 그 당시에는 일단 지르긴 했었지만 다시 출근을 하려니 긴장이 된다. 전날 새벽에 어찌나 잠이 안 오던지.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고 새벽 내내 잠도 설쳐서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여기서 형이라고 하면 돼, 안 돼.”

“안 돼요.”

“회사에서는 조심해. 괜히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자기야.”

“야 인마!”

한동안 말을 잘 듣나 싶었는데 역시나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또 슬금슬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 인간이 없었으면 아마 날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자꾸만 뒤척이는 태주를 상진이 품에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러느라 쟤도 아마 못 잤을 텐데.

“장난으로라도 그러지 마라.”

그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태주에게 인사를 건네는 팀원들은 마치 그 소란들을 다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일상적으로 오고 가는 인사와 업무적 대화는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정중해졌다는 것이다. 태주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때 꿈틀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진작 이럴걸.

“과장님, 이거 한 번만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잠깐만요.”

“과장님, 보고서 송부 드렸는데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과장님, 이 부분은 어떻게…….”

팀 내에 인력 충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무자 중 업무 이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태주이다 보니 질문이 몰리기 시작했다.

팀원들로부터 쏟아지는 질문과 보고서를 하나씩 차근차근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옆에 앉은 개진상도 무언가 돕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사고나 치지 마라.

“과장님, 커피 드세요.”

“아, 고마워요. 상진 씨.”

혼자 컴퓨터를 들여다보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커피를 사 왔다. 진한 원두의 향이 사무실에 퍼진다.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의 아메리카노는 너무 진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자주 사다 주곤 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받아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그랬더니 상진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또 저러네, 몸이 안 좋은 것인지 병원에라도 보내야 하나.

* * *

오전 시간이 꽤나 지날 때까지, 최 팀장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종종 늦게 나오기도 하는 사람이라 굳이 연락을 하지는 않았는데 해야 할까. 그날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전화를 걸기가 좀 껄끄러웠다.

“오 주임.”

“네, 과장님.”

“혹시 최 팀장님께 따로 연락받은 건 없었어요?”

조심스레 오 주임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역시 공유받은 것은 없다고 했다. 조금 난감한 얼굴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

상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내내 잠도 들지 못하고 긴장했던 걸 아는 터라 더욱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태주는 그를 안심시키려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좀 억울하기도 했다. 애당초 실언을 한 사람은 그쪽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해야 하는 건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나오겠거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탁.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최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서 제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가 나타나자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반사적으로 눈치를 보았다. 데구르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성 과장.”

모두가 얼어붙은 사이 파티션 너머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마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태주 역시 바삐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드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싸늘한 침묵 속에 최 팀장이 태주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이미 상진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미간 아래로 험한 눈빛이 일렁거린다.

이거 잘하면 물겠는데. 일단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손으로 그를 툭툭치고는 고개를 좌우로 움찔거렸다.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파티션 너머에 서 있는 최 팀장에게 답했다.

“여기서 말씀하시죠, 팀장님.”

따로 불러내서 또 무슨 막말을 하려고. 이제 더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성태주’는 이제 없다. 이제는 적어도……. 한 명의 누군가에게는 확실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말하기는 좀 곤란해서.”

“공적인 용무시라면 이곳에서 말씀해 주세요.”

“사적인 용무라면?”

“만약 사적인 용무시라면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사적인 용무’라는 것이 남아 있던가. 직원들이 있는 회식 자리에서 그 난리를 피워 놓고 말이다. 이제 사적으로 그와 얽히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하는 변명이나 핑계도 물론 듣고 싶지가 않았다.

“성 과장.”

한층 물러진 말투였다. 그가 파티션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눈썹을 기울였다. 조금은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불안한 듯도 보였다. 태주로서도 최 팀장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존심이 워낙 세서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투도 잘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부탁할게. 잠깐만 시간 좀 내줘.”

잘못 들었나. 툭 서류철을 던지고는 ‘부탁 좀 할게.’라며 업무를 미루던 그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태주는 생각했다. 설마 최 팀장이 자신에게 저리도 정중하게 부탁을 하다니.

“네, 알겠습니다.”

파티션 앞에 계속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간의 미운 정을 생각해서 승낙했다. 그러자 그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서 최 팀장이 먼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나가려는데 상진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같이 가요.”

“뭐? 네가 왜 가. 가만히 있어.”

아주 이러다가 화장실까지 따라오게 생겼다. 잠깐 떨어져 있는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는 했다.

자신이 그렇게 미덥지 못한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것이 보여서 말이지. 저 인간, 가끔은 자기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까먹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겠어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따라가서 근처에 있을게요, 조용히.”

“됐거든.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지난번처럼 최 팀장이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오늘은 제정신인 데다가 멀쩡해 보였다. 아무리 그가 개차반이래도 맨정신에 남에게 위협을 가할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고 했으니, 주위에 보는 눈들도 많을 테고. 뭐가 걱정이라는 건지.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남들에게는 눈길 한번을 안 주면서 고작 이런 일로 전전긍긍하다니. 사내에서 무뚝뚝하다고 소문이 난 걸 알기는 할까. 그는 보면 볼수록,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의문투성이였다.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마음을 써 주는지.

“괜찮습니다, 계상진 씨.”

불만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이 문득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야 말았다. 다행히 파티션으로 가려져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이상한 오해를 받을 뻔했다.

당황한 태주가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후다닥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 정말 자리 배치를 빨리 바꾸던가 해야지. 영 불편하다. 좀처럼 비켜 주질 않는 그를 밀어내고 겨우겨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 *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는 늘 혼잡했다. 커피로 수혈을 하는 직장인들답게 단체 주문들도 많았다. 특히 오늘처럼 바쁜 날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태주가 소속된 팀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대다수 팀에서 결원이 생긴 데다가 승진 면접의 결과가 아직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빈 자리가 완벽히 채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눈 밑이 푹 꺼진 채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구석에 앉은 최 팀장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말했다. 그날 밤에는 분명 사과를 하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대뜸 들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태주가 대답이 없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날 밤에 한 말들, 미안하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너도 알잖아, 요즘 내 주위가 어떤지.”

최 팀장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 있던 선배며 후배들은 이미 잘렸거나 잘릴 예정이었다. 전(前) 대표인 본부장을 제외하면 실상 남은 인원이 없다고 봐야 했다. 그도 사람이니까, 본인이 아끼던 인물들이 잘려 나가는 걸 지켜보는 것이 참담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날의 막말과 욕설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제가 그 사과를 받아야 하나요? 죄송하지만, 이제 더는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태주야.”

“그리고 그날도 말씀드렸지만 회사에서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불편합니다.”

“성 과장, 제발.”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를 들먹거린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남의 아픈 곳만을 그렇게 쑤시고 찔러 놓고는 이제 와서 취했던 거라니. 변명에도 성의가 없지 않은가.

“팀장님께서 왜 제게 용서를 구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하시면 되잖아요. 언제부터 제 눈치를 그렇게 보셨다고.”

“내가 그동안 네게 잘해 주지 못한 건 아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쉽게 구걸한 사과였고 진심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아 보였다. 그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지금까지 무시만 했던 ‘성태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었으니까.

“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제게 심한 말씀을 하신 건 팀장님이셨고요. 그 말을 듣고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게 저로서는 큰 용기를 낸 겁니다. 그날 하신 말씀들, 기억이 나긴 하세요?”

또박또박 따져 물었더니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실언했어.”

“사과하지 마세요. 받을 생각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그날 하루뿐이었다면, 아마도 못 이기는 척 그의 사과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태주가 참아왔을 뿐이다. 그의 비위를 맞추며 허허실실 그런 험한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날도 말씀드렸지만, 팀장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가르쳐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무직이라곤 해 본 적도 없었고 사무실이란 공간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 태주에게, 최 팀장은 사무실 내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엑셀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태주로서는 그가 선생님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더 군말 없이 따랐던 것이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그의 조롱과 험한 말도 참아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제는 사적으로 팀장님을 뵙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공적인 용무로만 불러 주세요.”

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신뢰와 애정을 얻어 내려고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는, 이제는.

“하, 성 과장.”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태주를 그가 재차 붙잡았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그의 입매가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불안한 느낌이 든다.

“사적으로만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공적으로도 이제 볼 일 없잖아.”

그의 눈썹과 눈꺼풀이 위로 치켜떠지며 흉흉한 인상을 자아내었다. 태주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 아래로 식은땀이 스며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나 오늘 짐 싸러 나왔어, 태주야. 정말 몰랐니?”

그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태주를 관찰했다. 어떠한 표정으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헤아리는 듯했다.

“짐을 싸러 나오셨다고요?”

“진짜 몰랐나 보네.”

황망한 표정을 띤 태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그 살벌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가 이내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 참나.”

“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짐을 싸러 나오셨다니요.”

“말 그대로야. 나 그만둔다고. 아니, 잘린 거지.”

아무리 체계가 없는 회사라고는 해도 지켜야 할 ‘절차’라는 것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적어도 그 절차를 최소한의 단계별로 지켜오긴 했었다. 설령 해고 통지를 받았더라도 한 달 정도 자리를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당연했다. 이 최소한의 순서마저도 지켜지지 않은 사람은 예전의 이 차장과, 그리고 지금의 최 팀장이다.

“갑자기요?”

“아침에 본부장이 전화해서는 나한테 그러더라. 출근하면 아마 해고 통지 받게 될 거라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태주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최 팀장 정도 되는 인물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잘리다니. 대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발로 나오려고 짐 싼다는 거야. 더럽고 치사해서 말이지.”

“아직 결정된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본부장 입에서 이야기가 나온 거면 결정된 거나 다름없어. 지금까지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들도 본부장이 직접 공지했었고.”

너무나 차근차근 정리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본부장과 최 팀장의 라인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축출해 간다고 해야 하나. 지금 최 팀장까지 이 회사에서 나가게 된다면 남은 것은 본부장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야.”

“네.”

그가 입을 여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솔직함’을 가장한 막말이 아니길.

“나는 네가 대표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제가요?”

“응.”

그러고 보니 그가 술에 취했을 때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는 화풀이를 하기 위해서 지어낸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건가.

“대체 왜요? 제가 뭐라고, 제 상황은 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그런 떠도는 말은 믿지 않았는데. 혹시 너 기억 나냐? 이 회사가 새 대표한테 넘어갔을 때 너한테 물어봤었는데.”

“아.”

벌써 몇 개월도 더 전의 이야기다. 지금의 본부장이 대표였을 때, 그가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서 막무가내로 쉬라고 했던 날이 있었다. ‘우리 태주’라며 친한 척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었던가. 출근한 자신에게 최 팀장이 물었었다, 혹시 빽이 있냐고.

“그때도 말했지만, 본부장이 나한테 입조심하라고 했었거든. 특히 너한테.”

너무나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여서 단박에 오해라고 답했었다. 지금까지 빽은 무슨, 든든한 뒷배 하나 없이 살아온 성태주였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최 팀장과 본부장이었는데.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무슨.”

“그래, 네가 아니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었긴 했지.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좀 이상하더라고.”

“뭐가요?”

그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최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김현우 대표 말이야. 진짜 모르냐?”

“대표님이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가까이 다가오자, 태주도 덩달아 목소리를 작게 낮추었다. 거의 속닥거리는 수준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김현우 대표라면, 이 회사를 새로 인수한 대표이사를 말하는 거겠지. 이름도, 그리고 그의 얼굴도 지난번 세미나실에서 처음 봤었다. 아마 한 번이라도 봤다면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을 텐데, 그런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초면이었다.

“정말 모릅니다.”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이 처음 이 회사를 인수할 생각으로 미팅 왔었을 때. 너에 대해 물었다고 하던데.”

“네?”

“그래서 본부장도 나도, 네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왜 나에 대해 묻는다는 말인가. 설마 내 이력서를 보고 이런 스펙의 직원도 근무할 수가 있는지 물어본 건 아닌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에 대해서 뭘 물으셨대요? 저는 정말 모르는 분인데.”

“그냥 뭐, 여기서 얼마나 근무했는지. 근무 조건은 어떤지. 같은 팀원들과의 사이는 어떤지.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제가 오래 근무한 직원이니까, 궁금해서 물어보신 거 아닐까요?”

“아직 내부 직원들에 대해 소개도 하기 전이었대. 꼭 너에 대해 미리 알고 온 사람인 것 같았다고 하더라.”

조금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김현우, 김현우 대표이사. 태주가 아는 김현우라고는, 이미 세상을 떠난 현우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김현우’라는 이름은 꽤나 흔하니까, 이름만 가지고는 안다고 하기가 힘들다.

“너무 의미를 두신 거 아닐까요? 대표님이 바뀌고 난 후에도 저는 달라진 게 없는데요. 만약 정말 그 대표님이 저와 아는 사이이고 저를 챙겨 주려고 하셨다면 뭔가 달라진 게 있어야 하잖아요.”

최 팀장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꽤나 오래 고민한 듯 머뭇거리기도 했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더 작아져 있어서 이젠 아예 책상에 상체를 납작 엎드린 것처럼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달라진 거 있잖아.”

“네?”

“네 부사수.”

“네? 상진 씨요?”

아니, 이 시점에서 왜 갑자기 계상진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할 뿐이다.

“상진 씨가 왜요?”

“계상진은 정식으로 서류 지원을 하지도 않았고, 면접도 본 적 없어.”

“그럴 리가요. 팀장님께서 소개해 주셨잖아요. 상진 씨가 첫 출근 한 날.”

“나도 그날 본부장에게 갑자기 들은 거야. 신입사원이 갈 거라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확실히 너무 갑작스럽게 출근을 하긴 했었지만 딱히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와 컴플레인 건으로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어도 회사에서는 몰랐을 테고. 아, 경력이 없는 신입사원을 과장인 자신에게 붙여 준 것이 조금 희한하기는 했었다만. 자리 배치도 그랬지.

“만약 네가 김 대표와 아무 관련이 없다면 계상진이 의심스럽네.”

“상진 씨가 대표님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갑자기 출근한 것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상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노려보질 않나.”

댁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거나 노려보는 건, 아마도 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역시 남들이 보기에 좀 티가 많이 났나 보다. 이따가 조심하라고 다시 말을 해야겠다.

“근데 성 과장은 별로 놀라지를 않네?”

“그냥 뭐, 그 인간이라면 여기저기 끈이 닿을 만도 해서요.”

“그래? 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인간이 완전 비싼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고 설명해야 하나. 아니면 그 어린 나이에 자가 오피스텔이며 아파트에 건물까지 몇 채씩이나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VVIP에게만 준다는 블랙 카드를 막 쓰고 다닌다고 해야 하나.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던 좀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워낙 발이 넓은 것 같더라고요. 집안도 꽤나 잘 사는 것 같고. 그러니까 김현우 대표님과도 어쩌면 부모 간에 아는 사이였을지도 모르죠.”

“그거야 뭐 그럴 수 있다고는 쳐도. 왜 하필 네 밑으로 들어갔을까?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태주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은 하나였다.

“제가 만만해서?”

“아.”

……팀장님, 그렇게 납득하는 표정 짓지 마십쇼. 진짜 오늘 한 판 더 싸워? 어? 아주 오늘 끝장을 봐? 나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

“갑자기요?”

“미안하다.”

“이렇게 쉽게 납득하실 일이었냐고요. 저 화내도 됩니까?”

최 팀장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야 조금은 홀가분해진 듯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진작 물어보기나 할 것이지, 왜 혼자 소설을 쓰고는 성을 내고 난리를 피웠는지 좀 많이 한심했다.

“뭐, 아무튼 정말 미안했다. 성 과장.”

“됐습니다. 사과 안 받을 거라고요.”

“네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욕해도 된다. 진심이야.”

“자꾸 그러시면 저도 욕합니다. 저도 욕할 줄 알거든요.”

그를 흘겨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세상에 욕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정말 험한 소리도 할 수 있었다.

“그래, 너한테 욕이라도 들어야 내 미안함이 좀 풀릴 것 같다.”

최 팀장이 멋쩍게 웃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표정조차도 꼴 보기가 싫었는데, 그의 발아래에 있는 짐 가방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라는 게 있으니까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복잡했다.

“욕 안 할래요. 팀장님하고 똑같은 사람 되기 싫습니다.”

“성 과장아, 차라리 욕을 해 줘라.”

“싫습니다. 굳이 제 입을 더럽히고 싶지도 않고, 저는 이제 팀장님하고 볼 사이도 아닌걸요.”

“너 진짜 나 안 볼 거야? 다시는?”

“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이제 뵐 일이 없겠네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이야 많았지만 어차피 나갈 사람이지 않은가. 지금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험한 소리를 한다고 해서 태주가 받았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입만 더러워질 뿐이지.

“태주야.”

“그리고 제가 욕을 하면, 결국 팀장님 마음만 편해지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은 아니더라도 불편한 기억은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제 부모님을 욕되게 한 말씀, 저를 조롱하신 말씀들 모두요.”

내 입을 더럽혀 가면서 그에게 면죄부를 줄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다시 볼 일도 없을 사람이다. 예전의 나라면 이렇게 쉬이 털어내지는 못했겠지. 눈물콧물 쏟아가면서 못난 스스로를 자책하고 험한 말을 쏟은 그를 미워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감정을 쏟고 싶은 이가 따로 생겼으니까.

“팀원들에게 인사는 하지 않으실 건가요?”

“뭐 좋게 나가는 거라고 인사를 해. 그냥 가려고.”

“네, 들어가세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그에게 묵례를 했다. 그러자 팀장도 의자에서 일어나 태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또다시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나도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다, 성 과장. 그리고 혼자 오해한 것도 미안하고…….”

말이 길어진다. 그냥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저러다가 우시는 건 아니겠지, 그런 어색하고 불편한 장면만은 피하고 싶은데.

교장 선생님 훈화처럼 길어지는 마무리 인사를 애써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상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주머니 안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니.

[☎개진상 010―××××―×××× 수신 중]

이렇게 반가울 수가.

세상 사람들, 우리 부사수가 이렇게 눈치가 빠릅니다! 키도 크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났고 그냥 다 큰데 눈치까지 빨라요! 동네방네 자랑할 만큼 기뻤다.

“저, 팀장님. 지금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서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너무 붙잡았네. 들어가.”

“네.”

대략 7년간의 인연이 이렇게 끝이 났다. 실로 담백하고 건조한 이별이 아닐 수가 없다.

* * *

대기업이든 소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모든 회사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비밀’이다.

태주가 속한 이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최 팀장이 잘려 나갔다는 소식이 각 층마다 전해진 것 같았다. 그와 1층 카페에서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다른 팀의 직원들이 힐끔힐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리 비밀이란 게 없대도 너무 빠르지 않나. 수군거리는 걸 보아하니 이미 말이 다 돈 모양이었다.

“과장님.”

다른 팀들도 이러한데 최 팀장이 맡았던 이 팀은 오죽할까. 이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최 팀장의 자리만 보아도 짐작을 했을 것이다. 태주 역시 텅 빈 그의 자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헛헛했다.

“과장님, 혹시 최 팀장님은…….”

팀원들 중 한 명이 총대를 메고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솔직하게 그만두셨다고 말을 해야 할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어차피 곧 정식으로 공지가 내려올 테니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긴 하지만.

“네, 방금 배웅해 드리고 왔어요.”

텅 빈 자리 옆에 기대어 선 채로 그들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몇몇은 정말 놀란 얼굴이었고, 몇몇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요?”

“와, 뭐지.”

“분위기 살벌하다.”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충격을 받긴 했을 것이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태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이 팀에 남은 사람들이라고는 자신과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들뿐이었다. 최 팀장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뽑기야 하겠지만 그전까지는 이대로 꾸려가야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양손을 부딪쳐 짝짝 소리를 내었다.

“다들 놀란 건 알지만 일단 집중합시다.”

마음 같아서는 일이고 뭐고 퇴근하고 싶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한 것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중간 관리자까지 빠져 버린 상황이다. 이런 걸 바로 개판 오 분 전이라고 하던가. 그래도 태연한 척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조차도 동요한 걸 팀원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불안해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과장님,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상진이 물었다. 표정은 또 왜 저래.

“응?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그래서 바로 올라왔잖아. 덕분에 잘 빠져나왔다.”

태주가 그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아니, 정말 다른 뜻은 아니고 고마워서 그런 거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눈을 깜빡거려요?”

“왜. 싫어?”

“아뇨, 엄청 좋은데 더 해 줘요.”

상진이 모니터로 향해 있던 몸을 틀어서 태주를 빤히 본다. 싱글벙글, 입이 귀에 가서 걸리게 생겼다. 눈 좀 찡긋거렸다고 너무 행복해하는 거 아니냐.

“그래? 옜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나중에는 어느 쪽인지도 몰라서 그냥 양쪽 눈을 다 꾹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아, 너무 귀여워요. 미쳤다, 진짜.”

“뭐라는 거야. 인상은 왜 찌푸려. 입은 왜 틀어막냐.”

“더 해 주세요.”

“싫어. 경련 올 것 같아. 마그네슘 좀 챙겨 먹어야겠다.”

“마그네슘 백 통 사 줄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런 일에 돈 막 쓰지 마라.”

그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으려는 걸 겨우 막았다. 대체 뭐가 귀엽다는 건지.

내일모레가 서른인데 저 어린놈한테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 걸까. 사진을 못 찍게 했더니 포털 사이트에서 ‘마그네슘 대량 구매’를 검색하고 있었다. 저게 대놓고 루팡질이다. 일 안 하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마그네슘 대량 구매’를 검색 중인 상진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태주가 아는 ‘계상진’은 저런 인간이었다. 막무가내에 제멋대로고 한없이 가벼워도 보이지만, 보잘것없는 ‘성태주’를 조건 없이 응원해 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징그럽네. 어찌 됐든 저 인간이 지금의 김현우 대표와 알든 말든 낙하산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뭐 어떤가. 오히려 태주는 상진을 붙여 준 대표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요즘은 외로울 새도 없이 행복했으니까.

“왜 그렇게 빤히 봐요? 나한테 반했어요?”

“루팡질 하시는 부사수님을 감시 중입니다만.”

“거짓말. 그런 눈빛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말해요.”

“여기 회사인데요. 한 번만 더 선 넘으시면 오늘 밤에 짐 쌉니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짐 싸겠다는 소리만 하면 불퉁한 얼굴을 하곤 했다. 이게 협박이 되는 건가. 이게 왜 협박이 되지? 아무튼 요즘 자꾸 저 인간이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다.

“그럼 집에서는 선 넘어도 돼요?”

“이미 선 위에 앞구르기 하고 계시잖아요, 계상진 씨.”

“앞구르기 해서 넘어가도 되죠?”

“이미 한참 전에 넘어가지 않았나.”

태주의 말에 그가 싱긋 웃었다. 은근슬쩍 손을 더듬어 태주의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그것도 모자라 슬금슬금 안쪽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맨들맨들한 면바지 너머로 그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두툼하고 넓은 바닥이 차갑게 식은 허벅지를 탄 채 사이를 벌리려 했다. 가지런히 모인 태주의 무릎이 이내 순순히 벌어졌다.

“형…….”

공기를 반쯤 머금고 아련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치켜뜨고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며 중심을 건드려댄다. 기다렸다는 듯 뒤꿈치를 들어 개진상의 발가락 쪽을 꽝 찍었다.

“악!”

으, 아프겠다. 그가 자리에서 팔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감히 어디서 끼를 부리는 걸까. 여기는 회사라는 걸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지나가는 개도 몇 개월을 말했으면 알아는 듣겠다.

“아이고, 상진 씨 괜찮아요?”

개진상의 비명 소리에 다른 팀원들이 주위를 기웃거렸다. 태주가 짐짓 상냥한 척 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어깨를 떨고 있는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흐……. 아으……. 아, 아으파…….”

“많이 아픈가 보네. 조퇴할래요?”

손가락 사이로 뻗치는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안으로 깊숙이 손가락을 넣었더니 울퉁불퉁한 것이 만져졌다. 두피에 나 있는 상처 자국 같기도 하고. 순간 상진의 집에서 만났던 그 중년 여성이 떠올랐다.

‘예전에 머리를 다친 적이 있어서, 발작 같은 걸 가끔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일도 있고요. 잦은 일이라 웬만한 처치는 제가 해요.’

그때 그녀가 말한 상처가 이런 걸까. 생각보다 많은 듯한데. 상진에게 물었을 때에도 ‘사고’로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수술도 여러 번 받았고 그래서 후유증이 생겼다고 했지. 대체 어떤 사고였을까. 그가 자세하게는 말해 주질 않았다.

“저기, 과장님.”

“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파티션 너머에서 태주를 불렀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옆쪽을 흘끗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가 굴러갔다. 망할! 책상에 엎드린 채 얼굴을 붉힌 상진의 머리카락을 망할 자신의 손이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

“…….”

아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할까. 그냥 강아지 털 골라 주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저쪽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원래 강아지들이나 고양이들한테는 자동적으로 손이 가잖아. 새우깡처럼. 아니,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자꾸 얼굴을 붉히고 난리야. 안면홍조는 갱년기 증상 중 하나인데 갱년기냐.

태주는 결국 그 손을 빼지도 멈추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대화를 하면서 슬그머니 빼는 수밖에 없다.

“네, 왜요?”

“아, 아까 자리 비우셨을 때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었거든요. 제가 전달 드린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사팀에서요?”

“네, 4층으로 올라오시라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가 차분히 묵례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 부스스 책상에서 일어난 상진이 태주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과장님, 얼른 가 보세요.”

“으, 으응.”

얼떨떨했다. 분명히 승진 면접의 결과를 통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결과에 대한 공지도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고 하는 건가. 하긴, 승진 면접 대상자가 팀당 한두 명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하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4층에 가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예전에 상진의 손에 이끌려 4층 구석의 화장실에서 파렴치한 짓을 했을 때 말고는 올 일이 잘 없었다. 맹세코 그 후에는 그런 짓을 안 했다. 정말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그냥 계단으로 올라갔다. 기대를 전혀 안 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긴장감을 털어내고 싶었다.

4층에는 원래 있었던 대표실 이외에, 최근에는 인사팀이 추가로 자리를 옮겼다. 대표실은 가장 안쪽에 있던 그대로였고 바깥쪽의 빈 곳으로 인사팀이 들어갔다. 승진 면접도 인사팀 사무실 안의 미팅룸에서 봤었으니 결과에 대한 공지도 그곳에서 보려나.

“아, 과장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사무실 입구에서 기다리던 인사팀의 직원이 태주를 안내했다. 당연히 인사팀의 사무실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복도를 따라 구석으로 가기 시작했다.

설마 대표실에서 면접 결과를 듣는 건가? 심장이 펄떡펄떡 뛰며 긴장이 되었다. 아직 대표가 바뀐 사실에도 완벽히 적응을 못 했는데 설마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안에서 대표님과 인사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넵.”

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진짜냐, 이거 진짜냐고. 승진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공지를 뭐 이렇게 엄숙하게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그냥 하얀 종이에 궁서체로 ‘성태주 승진 떨어짐’ 이렇게 인쇄해서 붙여 놔도 되는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냐는 말이다.

자신을 보고 있는 인사팀 직원에게는 티도 못 내고 여유 있는 척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내렸다.

대표실의 문을 열자 피톤치드의 목재 향이 담뿍 묻어나왔다. 이곳에서 7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사옥으로 이전하고 나서 대표실에 들어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무척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본부장은 사옥으로 이전 후에 본인이 대표라는 사실에 굉장히 무게감을 드러냈었고, 태주는 물론 팀장 직급 아래의 사람은 그를 ‘알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성태주 과장. 어서 와요.”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대표는 가장 안쪽의 큰 의자에 앉아 있었고 인사부장은 그 앞쪽에 마련된 1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사부장이 손짓으로 맞은편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하필이면 대표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삐거덕삐거덕 다리를 움직여 소파에 가서 앉았다. 너무 푹신해서 그만 등을 쏙 기대었다가 재빠르게 자세를 고쳐야 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는 성 과장도 잘 알고 있죠?”

대표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의 표정과 행동에는 범접할 수 없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평생을 고생 한번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탄탄대로만을 걸었을 듯한 인상이었다.

“아, 네.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요. 짐작한 대로 오늘은 승진 면접에 대한 결과를 공지할 겸, 얼굴도 보고 싶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바빴을 텐데 미안해요.”

딱딱하게 굳은 태주와는 달리 대표는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서류 하나 가져가지 않아도 은행에서 바로 대출을 해 줄 것 같은 묘한 신뢰감이 묻어나는 웃음이다.

사기꾼 같다기보다는 엄청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님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역시나 초면이었다. 뒤로 굴러서 보고 앞으로 굴러서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최 팀장님은 왜 그런 이상한 의심을 하신 걸까.

“아닙니다, 직접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가 인사부장에게 손짓을 하자,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철이 건너갔다. 아마 그 안에는 태주의 이력이나 당시 면접에서 나왔던 내용이 적혀 있을 터였다. 꿀꺽, 태주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켜 버렸다.

“이 회사에서 7년 정도 있었죠?”

“네, 맞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근무한 분이시네요.”

“네.”

결과만 딱 공지하고 내려보낼 줄 알았는데, 대표와의 일대일 면담처럼 느껴졌다. 그는 서류 안에 적힌 내용을 꼼꼼하게 읽으며 태주에게 확인을 받았다.

“팀 내의 직원 평가도 좋고 전체적인 회사 내에서의 평가도 좋아요. 인맥 관리를 잘했나 봅니다.”

“관리라기보다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입니다.”

“그건 큰 장점이죠.”

그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잠자코 있던 맞은편의 인사부장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성 과장의 경우 제품의 히스토리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각 부서 간의 업무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고요.”

아니, 그거야 그 각 부서의 인간들이 하나같이 일을 미뤄서 말입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부인을 해야 하나. 이 회사가 작은 소기업일 때는 부서의 구분 없이 일을 했기에 당연히 알게 되었던 것도 있다.

“그럼 최 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현재 성 과장이 속한 팀은 중간 관리자가 부재인 상황입니다. 그 점을 감안하시는 건 어떨까요.”

기가 팍 죽어 있던 태주가 자세를 다시 고쳐 잡았다.

어라, 분위기가 좀 좋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당장 벌떡 일어나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안 돼, 안 된다. 자신이 개진상도 아니고 말이지. 절대 들뜬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원래는 차장급으로 생각을 했었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팀 내에서 팀장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요. 외부 인사를 영입한다고 해도 제품의 이력을 자세히 모르니 적응 기간이 꽤나 필요할 겁니다.”

인사팀의 최 부장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은 태주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이나 그의 인성 됨됨이나 업무 평가, 사내 평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표정으로 앉아 있기에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대놓고 칭찬을 듣는 일이 이렇게 당황스러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성 과장의 의견도 궁금하네요.”

“아, 네.”

“만약 팀장으로 승진을 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저, 저는…….”

승진은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과장을 단 것도 감지덕지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차장도 아니고 팀장이라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걸까. 그동안 열심히 하긴 했지만,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래 일했던 최 팀장도 본부장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잘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는데. 자신을 안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저 두 사람은 지금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성 과장,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팀장이라는 직급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최 부장이 딱딱하지만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제가 지금, 조, 조금 당황해서요. 죄송합니다.”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태주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을 하자 더욱 머리가 핑핑 돌았다. 까무룩 기절을 할 것만 같은 긴장감에 호흡이 커질 정도였다.

“만약 팀장으로 승진을 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급여 인상도 있을 겁니다.”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리고 최근 직원들의 복지와 상여금 등에 대해서도 개선 중이니, 중간 관리자로서 받을 혜택도 더욱 커지겠죠.”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물론 그만큼 책임이 따르겠지만, 지금까지 성 과장이 해 온 대로만 한다면 큰 무리는 아닐 겁니다.”

“승진을 한다고 해서 시간 외 근무를 할 필요도 없죠. 이전까지는 몇몇 직원들이 근무 시간 내에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사우나를 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을 미뤄 왔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행동을 적극적으로 적발할 생각입니다.”

아예 대놓고 저격을 하는 듯했다. 그들의 말대로 그런 인간들만 없으면 시간 외 근무를 할 일이 없었다. 이미 꽤 대다수의 ‘그런 인간들’이 회사에서 잘리긴 했지만.

“성 과장이 만약 팀장 직급을 승낙한다면.”

대표가 책상 위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멋들어진 각인이 새겨진 만년필의 뚜껑을 열더니 서류 위에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그 서류를 인사부장에게 건네고 그가 확인한 뒤에야 태주가 볼 수 있도록 내려놓았다.

“이 정도의 연봉까지 맞춰 줄 수 있습니다.”

서류에는 아름다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아름답고 화려한 숫자였다.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귓가에 환청처럼 들렸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천사의 나팔 소리가.

* * *

‘당연히 명함도 새로 나올 겁니다. 내부적으로 공지도 빠르게 될 예정이고요.’

‘현재 승진 면접 대상자들에게 결과를 전달 중이니, 아직은 함구해 주세요. 면접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통보된 후에 전체적으로 공지할 예정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입을 싹 닫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태주의 걸음걸음마다 시선들이 들러붙었다. 아마 다들 승진 면접에 대한 결과가 나왔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눈치만 보고 묻는 사람은 없기도 했지만 퇴근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괜히 입 밖으로 나갔다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상진아, 뭐 먹고 싶어?”

“형이 먹고 싶은 거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오늘은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 형이 사 줄게.”

“왜요? 괜히 돈 쓰지 말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된다. 참는 일은 태주에게 매우 쉬운 것들 중 하나였다. 애당초 주위에 말할 사람도 없거니와, 입이 무거운 거로는 태주를 당해 낼 인물이 없었다.

“형 오늘 팀장됐당.”

―끼이익!

안전하게 주행하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안전 벨트를 했으니 망정이지 전면 유리를 깨부수고 앞으로 튀어나갈 뻔했다.

“악! 깜짝이야!”

“뭐라고요? 팀장 됐다고요?”

“조심해! 명함 나오기도 전에 요단강 밟고 싶지 않거든?!”

“아니, 정말이에요?”

상진이 급하게 깜빡이를 켜고 인도 근처에서 정차했다. 그리고 완전히 태주에게로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재촉했다.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기분이 더욱 들뜬다.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응, 팀장됐당.”

결과를 함구하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건 회사 안에서의 일이 아닌가. 이제 상진은 태주에게 있어 단순히 회사 안에서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더욱 소중한 인연이지. 아직은 이 감정의 정확한 의미를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와! 정말요? 너무 축하해요, 형!”

“왜 네가 더 기뻐 보이냐.”

“당연히 기쁘죠. 형이 해낼 줄 알았어요.”

“뭘 또 그렇게까지. 아무튼 오늘은 내가 산다! 뭐 먹고 싶은지 말해 봐.”

태주를 따라 그가 웃었다. 뚜렷한 눈매가 둥글게 휘며 입꼬리도 시원스레 올라갔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상진이 태주를 지긋이 응시했다.

“형.”

뭐야, 왜 갑자기 아련해지는 거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그에게서 슬슬 멀어졌다. 그래 봤자 안전 벨트로 묶여 있어서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눈동자에 아련함을 장착하더니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왜 은근슬쩍 뽀뽀를 하고 난리인, 읍.

“……읍, 으음.”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태주의 것을 머금었다. 살살 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지고, 그리고 또다시 가까이 붙어왔다.

살갗이 마주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쪽, 쪽, 소리가 터진다. 그의 코와 콧등이 부딪쳐 살짝 고개를 틀어주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가 더욱 깊게 들어왔다. 촉촉한 살덩이가 입 안에서 얽히며 타액이 섞인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출발해야 하는데, 출발해야…….

“……형.”

“……웅?”

지그시 감았던 눈꺼풀을 열고 앞을 보았다. 그러자 언제 떨어졌는지 그가 태주를 보며 웃고 있었다.

“더 하고 싶어요?”

“……에?”

목부터 얼굴까지 드러난 태주의 흰 피부가 홍당무처럼 변했다. 도화지에 물감이 번지듯 삽시간에 퍼진 열기가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한다.

아니, 언제 떨어졌대. 아무튼 절대 아니었다. 그와 키스를 하는 게 좋아서 입술을 벌리고 있었던 게 아니다. 정말이다. 그냥 그, 공기를 조금 더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다. 요즘 미세먼지가 심해서 공기 마시는 게 시원찮아서 그런 거다.

“아니거든. 전혀 아니거든.”

“정말요? 솔직해져도 되는데. 혹시 부끄러워요? 귀엽게.”

“야, 자꾸 귀엽다고 하지 마라.”

“귀여운 걸 어떡해요.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요?”

그리고 하려면 끝까지 하던가, 왜 하다가 말아. 장난이 심하잖아. 시작은 자기가 먼저 했으면서 말이다. 누가 댁이랑 뽀뽀하는 게 좋아서 쪽쪽거렸겠냐. 아니거든. 그냥, 거, 뭐냐. 그냥…….

“일단 출발할게요. 키스하다가 설 것 같거든요.”

“고자 탈출하더니 아주 시도 때도 없이 서네.”

“뭘요. 다 형 덕분인데요.”

그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핸들을 꺾었다. 팔꿈치까지 걷은 소매 아래로 우뚝 솟은 혈관이 파랗게 도드라졌다. 두꺼운 팔뚝을 타고 시선이 내려가자 긴 손가락이 보인다.

왜인지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가 브레이크의 동그란 부분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핸들을 마주 잡았다. 그제야 그의 손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요즘 욕구불만인가. 별거에 다 흥분되고 난리다. 성태주,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스킨십에 너무 익숙해지다 못해 이제는 보기만 해도 반응이 왔다. 혈기왕성한 청소년도 아니고. 게다가 저 인간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시도 때도 없이 서는 건 진상 놈만이 아니었다.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큰일이다, 정말.

* * *

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다 같이 파티도 한다던데. 그런 기분을 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늘은 태주도 홀가분했으니까. 오래 묵은 인연을 털어내기도 했고 또 좋은 소식도 있지 않은가. 긴 겨울 내내 두르고 있던 갑갑한 웃옷을 벗어낸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뜯는다고. 파티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리가 없지. 결국, 집 앞에서 치킨 한 마리와 맥주를 사다가 간소하게 차렸다. 거실에 둘러 앉아 TV를 보면서 치킨을 먹었다. 맥주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셨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TV에서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지는 언제 한대요?”

“아직 몰라. 승진 대상자들한테 결과 알리고 나서 한대.”

“명함도 그럼 그 후에 나오겠네요.”

“그렇지.”

상진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축하해요. 이제 과장님이 아니고 팀장님이네요.”

“아직 좀 어색하다. 팀원들이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나쁘게 볼 게 뭐가 있어요. 형은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요.”

“그런가…….”

연봉을 보고 덜컥 승낙하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최 팀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마치 그 빈자리를 덜컥 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최 팀장과 본부장 선에서 이상한 오해가 있었다면 분명 그 이야기들이 다른 곳으로도 샜을 것이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형.”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틈을 타, 그가 내 볼에 손을 대었다. 얌전히 올라간 손바닥이 원을 그리듯 움직인다.

“또 쓸데없는 생각했죠.”

“쓸데없는 생각?”

“다른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지금까지 형이 잘 해왔으니까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다른 쪽 볼에도 손바닥이 올라왔다. 따뜻하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가 이럴 때면 마음의 불안감이 깨끗하게 씻기는 듯했다. 그래서 가만히 두었다. 그러자 상진이 태주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전에는 만지기만 해도 질색하더니.”

뭘 또 질색까지 했다고.

“그래서 싫어?”

“아뇨, 좋아요.”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가 정말 행복해 보여서 신기할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좋을까.

“맨날 뭐가 그렇게 좋아, 넌?”

“형이 곁에 있으니까요.”

상진의 눈에 태주가 담겼다.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잔상처럼 남는다. 상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의 눈동자에 비친 태주가 어질러졌다. 물결치는 시야 안에 갇힌 그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보였다.

“그럼 나 알기 전에는 우울해서 어떻게 참았냐.”

조금 부끄러워서 톡톡 쏘듯 답했다. 그런데도 상진은 그저 작게 소리를 내어 웃기만 했다. 별다른 답은 없었다. 때때로 그랬듯 사연 있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을 뿐이다.

“형, 술 많이 먹지 말아요.”

“맥주잖아, 안 취해.”

“거짓말. 또 얼굴 빨개졌는데.”

맥주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취하지 않으면 언제 취하겠는가. 조금 알딸딸하다. 그래서 딱 좋다, 아주 기분 좋은 수준이었다. 실실 웃으면서 상진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얼굴 단속 좀 해.”

“뭐가요?”

“너 막 얼굴 빨개지고 그러잖아. 맥락도 없이.”

“아, 그랬어요?”

저 반응은 뭐지. 회사에서도 그렇고 회식 자리에서도 그렇고, 이상한 타이밍에 홍조 띠던 걸 몰랐다는 건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라 도리어 태주가 당황했다.

“설마 몰랐던 거야?”

“네, 몰랐는데.”

“너도 참 둔하다.”

“형이 할 소리예요?”

상진이 태주를 노려보았다. 흘겨보는 정도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노려보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퍽 사무친 표정이다.

“왜, 왜 그래.”

“하아, 내가 말을 말지.”

“기분 좋은 날인데 한숨 쉬지 마, 복 떨어져.”

“할아버지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정 안 떨어진다고 내가 말했었죠.”

눈에서 레이저 나오게 생겼다. 아까는 눈웃음치면서 뽀뽀하고 그러더니, 이제는 뭐 갑자기 전쟁에서 만난 원수지간이냐고. 오래된 수도꼭지도 아니고 뜨거운 물이랑 찬 물이랑 조절이 잘 안 되나 보다.

“할아버지 같은 소리가 뭐 어때서 그래. 너랑 나랑 나이 차이를 생각해라.”

할아버지까지는 아니겠지만. 태주가 스무 살 때 저 핏덩이는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공장에서 일할 때는 초등학생이었겠네. 따지고 보니 정말 어린 동생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우와 그의 나이가 같다는 게 다시 실감이 난다.

“으이그, 누가 누구보고 귀엽다는 건지.”

취기가 살살 올라서 그런지 그가 더욱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뭔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살결이 딱 아기 같다.

“복덩이.”

“네?”

“너랑 알게 되고 나서 좋은 일만 생기거든, 나.”

처음 만났을 때에는 겉만 멀쩡한 미친놈인 줄만 알았다. 누가 봐도 큰데 작다고 울지 않나,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도와달라고 남의 몸을 더듬지를 않나. 남의 집에서 그런 짓을 해 놓고 말도 없이 사라지기까지 했었다. 아니, 돌이켜 보니 저거 완전 미친놈이었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곁에 있은 뒤로 매일이 더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외롭지 않았고, 이렇게 행복한 일에 함께 기뻐해 줄 이가 생겼으니까. 악몽을 꾸는 일도 줄었고 눈물을 흘리는 일도 사라졌다.

이러한 행복과 즐거움에 시나브로 젖어들까 걱정했는데 말이지. 물먹은 휴지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이미 늦어 버린 것 같다.

“저 귀여워요?”

“응.”

“저 멋있어요?”

“응, 멋있어.”

“저 복덩이에요?”

“응, 복덩이야. 귀여워.”

“저 사랑해요?”

“응, 사―.”

멈칫, 말을 멈추었다. 아주 저 조그만 게 또 슬슬 시동을 걸고 있었다. 틈만 보이면 훅 들어오곤 했다. 태주는 자연스레 열리던 입을 꾹 다물고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툭툭툭 쳤다.

“까분다.”

“쳇.”

“아무한테나 그런 말 막 하지 마. 어디 가서 오해받기 딱 좋거든. 특히 너처럼 눈에 띄는 사람들은 더 조심해야 해.”

맥주 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서 살짝 절뚝거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실에 놓인 소파에 올라가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형은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뭐, 그런가. ……그래?”

“당연하죠.”

그가 너무나 단호하게 말해서 어깨가 으쓱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무것도 없던 인생에 저런 복덩이가 굴러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는요?”

어느새 소파로 올라온 그가 곁에 딱 붙어 앉았다. 술 덕분에 속이 따뜻해졌는데 그의 살까지 맞닿자 몸이 훨씬 더 훈훈해진다. 그래서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너?”

“네, 저는 형한테 뭐예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러니까, 좋은 동생이자 복덩이인 데다가 부적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보통의 형과 동생은 키스를 하거나 뽀뽀를 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몸을 섞지도 않는다.

……뭐지, 뭘까.

“너― 는, 동생이지. 일단은.”

“일단은요?”

“아니, 응.”

대답이 좀 많이 애매했다. 역시나 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얼굴이 불퉁해져서는 입술을 삐죽거린다. 미간까지 좁히기에 손가락으로 주름을 쭉쭉 펴 주었다. 사실은 그가 조금 서운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를 않아서 말이지.

“잘생긴 얼굴 막 쓰지 마. 주름 생긴다.”

“형은 진짜…….”

“뭐, 내가 뭐.”

“진짜 나빴어요.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이제 나도 헷갈려요.”

“응? 동생이 뭐가 어때서 그래. 뭐, 뭐가 헷갈린다는 거야.”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그가 정말 크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한껏 기운 눈썹과 눈망울에서 섭섭함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아, 저러다 우는 거 아닌가.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그를 달래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곤란하다. 매우 곤혹스러웠다. 쟤도 취했나. 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동생’이 싫다면 ‘친한 동생’ 정도로 말을 해야 할까. 이것도 아닌가. 그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친, 아니, 엄청 친한 동생.”

“결국 동생이잖아요.”

“음, 가족?”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끝쪽으로 기울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입가가 씰룩거린다. 조금 들뜬 듯 가까이 몸을 맞대며 그가 물었다.

“가족이요?”

“으응, 가족.”

“어떤 가족이요?”

“가족이 가족이지, 뭐가 어떤 가족이야.”

“일촌, 사촌, 뭐 이런 거요.”

갑자기 촌수까지? 이러다가 족보까지 따지는 건 아니겠지.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상세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태주가 잠시 우물거리는 사이에 그가 끼어들었다.

“역시 0촌인 거죠?”

“어? 야, 0촌이 말이 되냐. 그럼 너랑 나랑 부부인 건데.”

“그러니까요.”

상진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다. 쟤가 왜 저러지, 정말. 그렇지 않아도 술기운이 돌아서 어지러운데 촌수까지 계산하려니 누워서 자고 싶어졌다. 태주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핑핑 도는 시야 너머가 까맣다.

“또 이상한 소리 하지, 너.”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닌데.”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그와 지냈던 시간이 꿈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연히 엮이게 되었던 때부터 말이다. 그가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더 가까워졌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그러다 살던 집을 나와야 했고 마침 빈방이 있던 상진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지. 제사까지 같이 갔었구나. 그와의 추억을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나누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상진아. 넌 친구 없어?”

“네, 없어요. 필요도 없고요. 형이 있잖아요.”

그러고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어 보였다. 함께 지낸 몇 개월 동안 그가 다른 볼일로 밖에 나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매일 껌딱지처럼 곁에서 떨어지지를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친구 사귀고 싶지는 않아?”

“왜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서서히 오른 취기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흐릿하게 보이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상진을 보았다.

약간의 책임감이 느껴져서일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딱히 묶어 둔 건 아니었지만 너무 곁에 두려고 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너, 너무 나랑만 붙어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아니, 나가서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래.”

그는 태주에게 대가 없는 애정을 주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말이다. 가끔은 그 이유가 궁금했고 또 어떨 때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에게 묻기도 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좋아서’였다. 그 두루뭉술한 답에 대해 태주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혹시나 그의 입에서 다른 이유가 나올까 겁을 먹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 보면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뒷말이 쉽사리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 좋은 사람 만나야지. 쟤도 사람을 많이 만나 봐야……. 그게 맞는 건데, 왜 속 안에 큰 짐이 들어찬 것처럼 묵직할까. 스스럼없이 터져 나오던 말이 잦아들면서 멈추고야 말았다.

“형, 내가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

마저 맥주를 들이켠 상진이 물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오지 않을 새벽처럼 서늘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그와는 다른 사람인 듯 보였다. 그래서 낯설게만 느껴진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사뭇 진지한 그의 얼굴이 조금 가까이 다가오면서 태주가 상체를 뒤로 물렀다. 지근거리에 놓인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어쩐지 두려웠다. 모조리 들킬까 봐, 밑바닥에 감춘 감정마저 탄로날까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야, 왜 갑자기 진지해졌어.”

싸해진 분위기를 모면하려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진지해질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왜 저래. 그저 형으로서 걱정이 되어서 했던 말이다. 언제까지나 서로 붙어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를 계속 곁에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다른 집을 찾으면 나갈 계획이었다. 아직 집을 알아보지도 않았지만.

“형.”

상진이 태주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몸과 몸 사이에서 따스한 체온이 나누어졌다. 소파에 놓인 태주의 손등 위로 그의 손이 덮인다.

그가 다시 태주를 부르고 있었다. 태주는 마주치지 않으려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렸다, 그에게로.

서로 마주한 까만 눈동자 안으로 태주 자신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잔잔한 수면 위로 번지는 파문처럼 그 속의 태주가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태주는 문득 궁금했다. 지금 자신은 어떤 얼굴이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왜 여태 이 집에서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를 않았지. 곁을 붙잡고 있었던 건 혹시 그가 아니라 태주 자신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태주는……. 그것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가 되묻는 말에는 쉬이 답을 하지를 못했다.

“형이 원한다면 그럴게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고 자신도 모르게 되물어 버렸다.

“뭐라고?”

“형이 원한다면 사람도 많이 만나고 그중 좋은 사람을 찾아서 데리고도 올게요.”

손등 위로 맞닿았던 그의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태주의 손을 완전히 덮었던 그가 느릿하게 손을 뒤로 빼내며 말을 이었다.

“소개도 해 줄게요. 그렇게 되면 형과 붙어 있는 시간이 점점 줄겠지만.”

점점 뒤로 물러나던 그의 손바닥이 마침내 서로의 손가락과 손끝이 간신히 마주 닿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가 손가락으로 태주의 검지를 꼬옥 잡으며 어루만졌다.

“그게 형이 원하는 거니까.”

끝에 매달렸던 온기마저 너무나 쉬이 흩어졌다. 기어이 태주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체온이 차츰 더 멀어져만 갔다.

태주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에서 느껴졌던, 그의 온기로 따뜻했던 손등 위로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다. 아주 잠깐의 달콤했던 꿈이 싸늘한 현실에 곤두박질쳐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바라던 일이 아니었던가.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지내라고, 언제라도 나갈 것처럼 말을 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상처받을 이유도 없었고 슬퍼할 까닭도 없었다.

“형을 붙잡아 두지 않을게요, 이제는.”

그런데, 왜.

그의 말이 이리도 사무치는 건지. 몸 어디에도 남지 않은 그의 체온이 매정하게만 느껴지는 건지. 까마득한 바다를 떠도는 부표 위에 홀로 남겨진 듯했다.

태주는 원래 혼자였고 그로 인한 슬픔도 외로움도 익숙했다. 그러나 왜 덜컥 겁이 나는 걸까.

“다녀올게요.”

상진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앉았던 자리의 쿠션이 다시 올라오기도 전에 태주는 그만 그를 붙잡고야 말았다. 차갑게 식은 내 손끝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건 흡사 매달리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그가 아닌, 태주가.

동아줄에 매달리는 아이처럼 그를 붙들고야 말았다.

“형.”

“아, 아니.”

상진의 내리깐 시선이 태주의 떨리는 손끝을 응시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 태주를 보았던 것 같다. 눈동자에 가득했던 감정이 한 조각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저 태주만이, 오롯이 태주만이 그의 안에 남은 파편을 헤아리고 있는 것만 같다.

“상, 진아.”

“왜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꽉 깨문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차마 서늘한 그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어, 어디 가려고? 이 시간에.”

“형이 바라는 대로―.”

그가 끝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안으로 삼켜지는 말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미간이 좁혀졌다. 구겨진 미간 아래로 몇 번이나 껌뻑이던 눈꺼풀 안에 태주가 있었다. 그 속에서 태주는, 꼴사납게도 울고 있었다.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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