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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1) (1/8)

목차

프롤로그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1)

프롤로그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옛말은, 다 개소리였다.

그 진상 놈이 이렇게 클 리가 없어(1)

‘안녕하십니까, 성태주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각도기로 잰 것처럼 완벽한 90도의 각으로 허리를 접었다.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었다.

경계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그 빼곡한 파티션으로 가득 찬 공간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그래, 그랬었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그때의 태주는 정말 세상의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죽은 눈동자가 굴러간다. 뒤에서 밀리고 앞에서 낑겨 가며 겨우 지하철 문 앞을 사수했다.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작은 창에 얼굴이 비친다. 이게 사람이냐, 시체냐. 제 얼굴처럼 빛바랜 창문이 너무나 익숙하다.

“어휴, 회사 가기 싫어.”

한숨과 섞인 마음이 입 밖으로 툭 터져 나왔다.

* * *

“<더 크게, 더 세게, 더 굵게.>”

“음, 좀 진부하다.”

“<깨어나는 남자의 힘, 밤이 즐거워진다.>”

“너무 길잖아.”

“<청춘, 그때처럼.>”

“왜 귀에 쏙쏙 안 박히냐. 성 과장아, 일단 좀 쉬었다 하자.”

이거는 이래서 싫다, 저건 저래서 싫다. 그러면 본인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시든가!

태주가 소리를 질렀다, 물론 속으로.

상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나더니 곧 자리를 떠난다. 마음 같아서는 그 뒷모습에 가운뎃손가락이라도 쳐들고 싶었지만 어찌하겠는가, 자신은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인 것을.

“과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아, 네. 잠시만요.”

15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파티션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순환될 공기조차 없어 보이는 이 작은 공간에서 태주는 ‘과장님’이라고 불린다.

처음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았을 때는 행복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결국 그뿐. 이 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소기업과 중소기업의 사이 정도, 이렇다 할 체계는 없어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그런 급의 회사에서 버티고 버티는 중이다.

“이 미친 새끼!”

누군가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는 최 팀장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발을 쾅쾅 구른다. 아마 백이면 백 진상 고객 때문일 것이다. 어휴, 아는 척 하기 싫어.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성 과장. 이리로 좀 와 봐.”

동네 똥개처럼 쫄쫄 그 자리로 향했다.

정말 발이 천근만근 무슨 추라도 매단 듯이 떨어지질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자신은 자본주의의 아주아주 충실한 노예이니까 말이다.

“아니, 이 미친 새끼는 진짜 시간이 남아도나.”

팀장이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한숨을 또 푹 쉬었다.

아주 희미하게 풍기는 그의 입 냄새를 꾹 참으며 모니터를 응시한다. 화면에는 회사의 제품을 홍보하는 웹 발행 포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팀장의 화를 돋운 덧글이 하나.

상찐: 이거 완전 거짓말. 효과 전혀 없음. 커지기는커녕 아프기만 함. 병원 신세 지고 싶으면 구매해도 됨.

이런, 역시나.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인가.

문제는 이 덧글만으로 끝이 아니다. 이 짧은 글이 잠재적 고객들의 구매 욕구에 엄청나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거지.

상찐: 이거 완전 거짓말. 효과 전혀 없음. 커지기는커녕 아프기만 함. 병원 신세 지고 싶으면 구매해도 됨.

└dise88: 헐 이거 해보려고 했는데;; 효과 전혀 없나요?

└add12: 쪽지좀주세요

└똥구: 저도 효과 궁금. 쪽지좀요.

└싸나이: ㅋㅋ그럼그럿지 작게태어난걸어떳게크게해주냐. 쯔쯧, 난커서이런거안피료함.

└해병대1기: 참나; 크고 작고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런 덧글 달지 마시죠.

“야, 성 과장아. 이 자식한테 컨택 해 봤어?”

“해 봤는데 쪽지도 안 보고, 아이디로 찾아봐도 메일이나 기타 이력이 없습니다.”

“없다고 하면 끝이야? 이 새끼 이거, 악의적으로 계속 이러는데. 벌써 1년은 족히 넘었잖아. 여기저기 커뮤니티 들쑤시고 다니면서 네거티브 이슈 만들고. 게릴라도 아닌 게 잊을 만하면 또 이 지랄이고.”

팀장의 구두 앞코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바닥에 긁힌다.

“씨발, 내가 이런 거까지 하나하나 신경 써야겠냐? 너는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누구는 방치하고 싶어서 방치하겠는가. 매번 아이디를 바꿔 가며 작업을 하는 놈이다. 유일하게 동일한 건 그 닉네임뿐이고.

아이피가 표시되는 커뮤니티도 간혹 있다지만, 아이피 조회를 해 봐야 대략적인 지역 정도만 표시되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이런 건을 가지고 경찰서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게다가 애당초 태주는 CS팀이다. 눈앞의 팀장 놈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상황이 매우 화가 나고 짜증이 몰아치지만.

“죄송합니다.”

뭐 같은 사회 생활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상찐인지 찐상인지 상놈인지 찐따인지. 진짜 길 가다가 넘어져서 코나 쓸려라. 아니야, 길 가다가 넘어져서 코도 쓸리고 무릎도 쓸리는 데다가 손바닥까지 쓸려서 따끔따끔 지옥에나 떨어져라, 제발.

“누가 죄송하다는 말 듣고 싶대? 뭐가 불만인지 일단 뭐 연락이라도 돼야 달래든 소송을 걸든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시간만 끌 거야?”

“방법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든 만나서 얼굴 보고 무릎을 꿇든 영업 방해로 고소를 하겠다고 윽박을 지르든 다시는 이런 덧글 못 남기게 해.”

누구 무릎은 금은보화로 만들었고, 누구 무릎은 무슨 플라스틱인 줄 아나. 정말 더럽고 치사하다. 이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는 거다. 영업 방해로 고소를 하겠다고 윽박지르면? 그 이후의 법적인 지원은 하나도 해 주지 않을 거면서.

결국, 그냥 과장으로서 얼굴과 무릎 팔아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아, 진짜 열 받네. 그냥 이런 꼴 평생 안 보는 법 없나.

다 던져 놓고 퇴사하고 싶다.

* * *

“안녕하세요.”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맨파워맨 CS팀의 성태주라고 합니다.”

그래도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과 위장장애라는 질병에 발을 들여놓을 뻔한 그때, 겨우겨우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상찐입니다.”

이 망할 놈의 고객님 덕분에 생성한 포털 사이트와 각종 커뮤니티 아이디만 각각 대여섯 개씩은 된다. 어찌나 쪽지를 안 보시는지, 심지어는 태주가 보낸 쪽지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스팸으로 신고까지 하는 바람에 버린 아이디가 무려 다섯 개다, 다섯 개.

파워맨(power_man44558)……스팸 신고

맨파워(power998866628)……스팸 신고

파웡(manman7771) ……스팸 신고

남자힘(man7963) ……스팸 신고

플리즈맨(pmuuuu6) ……스팸 신고

cs성(power_stj) ……<<읽음

요즘처럼 개인정보가 귀한 시대에 이 고갱님 하나 만나 뵙겠다고 회원 가입과 탈퇴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답장을 받을 때까지는 핸드폰과 컴퓨터 곁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밥도 전자파 덩어리들 사이에서 먹고, 잘 때도 핸드폰을 꽉 쥐어야 했고. 아, 서글프다.

그리고 마침내 수신 확인 표시를 봤을 때는 정말 눈물 한 방울이라도 또르륵 흘릴 뻔했다. 그러나 맹세코 울지는 않았다. 이래 보여도 이 바닥에서 꽤나 굴러먹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남들 못지않게 튼튼한 멘탈은 물론이고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프로페셔널 아니겠는가.

“상찐 고객님. 저희 제품을 사용하시고 혹시 많이 불편하셨을까요……?”

“네.”

아, 물론 결국 답장을 받고 약속 시간을 잡았을 때는 울긴 했다, 조금. 진짜 쪼끔. 울었다고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습도가 높아진 수준 정도.

“어떤 부분이 불편하셨는지 말씀 주시면 최대한의 보상을…….”

“보상으로 입막음하려는 건가요?”

아, 지금 살짝 눈물이 맺히려고 하는데 하늘에 맹세코 연기다. 사실 이제야 깨닫는 거지만 어릴 적 꿈이 배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뇨, 그럴 리가요. 고객님께 불편을 드려서 정말 죄송한 마음에……. 순수한 사죄의 뜻입니다. 그럼요.”

“보상은 필요 없고. 덕분에 제 기능에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책임지실 거죠?”

“기능이요?”

“네, 성 기능이요.”

아, 지금 살짝 흘렀는데 이건 땀이다. 생각해 보면 가끔 눈에서도 땀이 나는 특이체질인 것 같다. 진짜 너무 덥네, 이 카페는 밀실인가. 아무래도 환기가 안 되는 것 같다.

“……눈물로 호소해도 소용없는데요.”

“운 거 아닌데요.”

“지금 볼이 축축해 보이는데요?”

“운 거 아니고 땀입니다.”

상찐이 태주의 당당한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동물원의 침팬지 보듯이 시선을 두다가 마침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는다.

“저기요, 이 사람 우는 거 맞죠?”

건너편의 자리를 치우려다가 무심결에 붙잡힌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손님, 냅킨은 저쪽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아니, 본인이 땀이라는데 다들 왜 이래? 자꾸 운다고 몰아가니까 땀이 더 나잖아. 왜 이렇게 덥지, 여긴?

“그러다 곧 오열하시겠어요. 성태주 씨.”

진짜 저 개새끼가.

“냅킨 가져다 드려요?”

감사합니다.

* * *

게임이든 채팅이든 인터넷을 통해 사람을 알게 되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랜선 너머로 실제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리는 상대방의 실제 모습은, 대체로 떠올리는 본인의 주관적인 상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태주는 상찐을 상놈과 찐따, 진상과 상놈, 그 사이의 어드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필 상대가 사용한 닉네임도 그렇고, 추잡스러운 덧글을 악의적으로 그것도 반복해서 쓰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다 우셨어요?”

그런데 실상 만나 보니 그는 찐따도, 상놈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상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달까. 주위에서 잘생겼다는 소리를 꽤 자주 들어볼 법한 외모에 키도 컸고, 혹시 수영 선수가 직업인지 궁금할 정도로 덩치도 볼 만했다. 나이도……, 많아 봐야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대학생이라면 학내에서 인기 좀 끌었겠네. 부럽다.

아니, 그러고 보니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런 놈이 왜 우리 제품을 사용했지?

이즈음에서 성태주 과장은 사용해 본 적이 없지만 저 상찐은 사용했다고 하는 그 제품. 맨파워맨을 설명하자면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실린더처럼 생긴 투명색의 원통에 그것을 넣는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켜고 시작 버튼만 눌러 주면 기계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남자의 그것의 혈액순환을 돕고 크기와 지속력이 증가하도록 도와주는, 뭐, 그런 제품이다.

이 나라 대부분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위해, 전문가의 고심 끝에 만들어진 아주 획기적인 아이템. 크기도 굵기도 지속력도, 이거 하나면 걱정은 남의 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한창 주가를 올렸더랬다.

다시 말해 지금 태주의 눈앞에 있는 저 상찐이라는 인간처럼, 가질 거 다 가진 듯이 보이는 인간들에게는 굳이 필요 없는 제품이란 거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그의 중심이 어떤 상태일지 확신하기에는 이르지만.

“저기요, 성태주 씨? 제 말 듣고 있나요?”

“아, 네.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그러니까…….”

“제가 그쪽 제품을 쓰고 발기부전에 걸렸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만.”

“네?”

아니, 이야기가 언제 그렇게까지 진행됐대?

태주의 동공이 확장되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뭐? 발기부전? 아까 성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발기부전을 말한 거였나.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발기부전을 해결하기 위한 제품을 사용하고 나서 발기부전에 걸렸다니? 잘못하다가는 제품은 고사하고 회사까지 말아먹기 딱 좋다. 솔직히 태주가 세운 회사가 아니니까 말아먹든 비벼 먹든 큰 상관은 없지만, 이 일 제대로 해결 못했다가는 단순히 해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회사 대표가 얼마나 악독하고 집요한데. 분명 ‘고객의 컴플레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과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로, 이 일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서 어느 회사에도 가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결국 길바닥에서 굶어죽을지도.

끔찍하다, 이 일은 여기서 확실히 맺음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고객님. 저희 제품은 발……, 아니 성기능을 개선시켜 드리는 거지, 성기능 장애를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사용법은 제대로 숙지하고 사용하셨나요?”

“물론이죠. 사용 방법은 확실히 숙지하고 사용했습니다.”

“사용하신 제품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하자 여부를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보여 드릴 수는 있지만, 여기서요?”

그것에 착용하는 기계이다 보니, 모양도 좀 거시기하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 다 있는 카페에서 보여 달라 하기는 난감했다.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면 저희 회사로…….”

“뭐, 좋습니다. 자리를 좀 옮기실래요?”

“네?”

* * *

호텔에 왔다.

그것도 그냥 호텔이 아니라, 도시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사성급 호텔이다. 로비에는 왠지 모를 금빛의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목에는 정말 왜인지 모르겠지만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진짜 진짜 왜인지 모르겠는데 자신이 상찐이랑 단둘이 호텔방에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는 지금 그쪽 제품 때문에 평생 해결되지도 못할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 안일한 태도 아닌가요?”

당신이야말로 제품 하나 확인하자고 이 비싼 사성급 호텔에 와야겠냐. 괜히 몸 둘 바를 모르겠잖아. 이런 곳 익숙하지 않다고, 나는.

순백의 눈으로 곱게 빚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침대 시트를 손으로 쓸던 태주가, 아주 조심스럽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앉았다가는 깨끗한 침대에 ‘성태주’ 묻을 것만 같다.

원래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수록 값비싼 환경을 불편해하는 법이다. 적어도 성태주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이 낯설게 번쩍번쩍한 조명과, 지나치게 좋은 실내 공기와, 넓디넓은 공간, 고급스러운 가구까지.

그에 비해서 찐상인지 상찐인지 하는 저놈은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마치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나이도 어리고 잘생긴 얼굴에 큰 키까지 다 가졌으면서 설마 금수저이기까지 한 건가? 아, 이건 진짜 불공평하다. 역시 신은 죽었어.

“그럼 이제, 보여 주시겠어요?”

“아.”

돈 자랑이나 하려고 이 비싼 호텔방을 잡은 건 아닐 테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솔직히 태주도 이쯤에서 적당히 새 제품으로 교환이나 해 주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고자세로 질질 끌어봐야 어차피 회사 손해만 커질 뿐. 게다가 어렵사리 만난 자리인데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한 채로 출근하면 대표, 본부장, 팀장까지. 아주 줄줄이 소시지처럼 과장 하나 까겠다고 혈안일 것이다.

―지익,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허공에 대충 때려 박고 있었다. 이거 해결하고 나서 바로 집에 갈까, 가는 길에 장을 볼까, 오늘 저녁은 뭐 해먹지,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는 와중에 상찐은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제품을 꺼내고 있겠지. 분명 지퍼가 움직이는 소리였으니, 저 녀석이 짊어지고 온 가방이 열리나 보다 했다.

그런데.

“여기요.”

“네, 어디 보…….”

대왕 가지.

“으아악!”

넓은 방 안에서 헤매던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한 순간, 처음 보는 물건이 등장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게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데 저렇게 생겨 먹은 건 처음 봤다는 뜻이다. 가지는 가지인데, 살색인 데다가 저걸 사람의 몸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탈착이 가능한 가지처럼 생긴 무언가로 봐야 할지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나?

아니, 그보다 저 미친놈은 왜 저걸 보여 주는 거냐고.

“씨발, 그걸 왜 꺼내!”

“보여 달라면서요.”

“아니, 이 미ㅊ……. 아, 고, 고객님? 저기요, 고객님, 저는 제품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요. 언제 그걸 보여 달랬냐고요!”

하마터면 뒤로 엉덩방아를 꽝 찧을 뻔했다. 뒤에 침대가 없었으면 그대로 자빠졌을 것이다.

미치겠네, 정말. 아무리 자신이 성인용 기능성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에 다닌다지만, 그게 남의 거시기를 막 보고 품평할 정도로 그거에 익숙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취업을 앞둔 입장에서 이 회사 저 회사 따져 가며 고를 수 있는 건. 남이라면 몰라도 결코 성태주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적당히 집에서 가깝고 타협 가능한 월급을 주는 수준의 직장을 찾다보니 이곳이었다. 고르고 골라서 일부러 성인용품과 의료기기의 경계에 걸쳐 있는 회사를 택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당장 옷 입어요! 당장!”

차마 눈을 둘 곳이 없어서 손바닥으로 앞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망할 놈의 인생 왜 이렇게 추잡스럽고 더러운지, 오늘은 무조건 술을 마셔야겠다. 누가 뭐래도 혼자서 소주 한 병은 비우고 자야겠다. 그래야 지금 눈꺼풀 아래에서 아른거리는 저 거대한 것을 잊을 수 있을 거다.

“입었어요?”

말이 없다. 사방이 조용했다.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확인 차 슬며시 눈을 떴다. 한쪽 눈만 게슴츠레 떴는데 어째 달라진 것 없이 눈앞에서 여전히 대왕 가지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진짜 울고 싶다.

“아, 옷 입으라고요! 당신, 미쳤어요? 이러려고 여기로 나 데리고 온 겁니까? 혹시 이상성애자? 아니면 변태성욕자인가? 제품이나 보여 달라고! 그거 당장 치워!”

“기다려요, 옷 추스르고 있으니까.”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이게 자꾸 빠져 나와서.”

중계하지 마! 죽고 싶냐!

아냐, 내가 죽고 싶다. 상상을 그만둬라, 내 뇌야. 제발, 저 새끼가 어느 쪽으로 수납하는지 상상하지 말라고!

뇌에도 전원이 있다면 꺼 버리고 싶다.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싶었다.

“됐으니까 눈 떠요. 무슨 사람 몸을 그렇게 벌레 보듯이.”

벌레 정도 크기였으면 귀엽기나 했겠다, 이 미친 새끼야.

태주가 이를 으득 갈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렇지만 아직 ‘제품을 확인한다.’, ‘적당히 새 제품으로 교환해 준다.’, ‘일을 마무리한다.’ 의 수순에서 첫 번째 단계도 진행하지 못한 터라,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님, 이런 식으로 장난치지 마시고, 얼른 제품이나 보여 주세요.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장난친 거 아닙니다. 그 제품의 결정적인 문제를 보여 드리려고 한 거니까요.”

“뭐라고요?”

결정적인 문제?

비록 남들에게 떳떳하게 밝히기는 다소 어려운 분류의 제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료기기로 심의도 받았고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판매된 스테디셀러였다. 이 나라에서 의료기기로 심의받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아느냐며 거들먹거리던 대표의 얼굴이 떠오른다.

으, 회사 밖에서까지 대표 얼굴 떠올리는 거 정말 싫은데.

“잘 보세요.”

진상 놈이 앞섶을 대충 추스르고는 들고 온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보는 디자인의 가방이었는데, 브랜드를 잘 모르는 태주가 봐도 알 만한 명품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 자식, 진짜 부자인가 보다. 정말 부럽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진짜.

“이게 그쪽 제품이죠?”

“네, 어디 봐요.”

그가 맨파워맨 상자를 꺼냈다. 태주는 그것을 건네받자마자 제일 먼저 혹시 타국의 모방 제품은 아닌지 확인했다.

그렇지만 역시 맨파워맨의 제품이 맞았다, 유감스럽게도. 행여나 제품 자체의 하자가 있던 것은 아닌지 체크해 봐야 할 테지만 이곳에서는 무리였다. 지금 당장 사용해 볼 수도 없고, 일단 회사로 가져가서 대표에게 보고도 해야 하니까.

“일단 외관상으로는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네요.”

기스가 나지도 않았고, 실린더 형태의 삽입 부분이 깨져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만에 하나, 제품 검수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제품에 이상이 없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까 진상이 말한 ‘결정적인 문제’는 눈에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태주가 되물었다.

“말씀하신 결정적인 문제라는 게 뭐죠? 제품의 작동 자체가 되지 않았던 건가요?”

“뭐, 말하자면 그렇죠.”

상대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잘생겨 먹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는 뭘까.

“자, 보세요.”

상찐이 태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태주의 손목을 감싸고도 남는다.

완전 자존심 상해, 어디 가서 체격으로 빠진 적은 없었는데. 태주도 보통 남성들과 비교해서 뒤처지는 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자식이 말도 안 되게 큰 거다. 손도, 몸도, 거기도.

꽉 잡힌 손이 천천히 이동했다. 그는 태주의 손을 끌어당겨 제품의 실린더, 그러니까 그것이 삽입되어야 할 원통 부분을 잡게 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꽉 잡아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인가, 내가 왜 이 짓에 어울려야 하는가. 아주 원론적인 생각에 다소 슬퍼졌다. 다시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건 또 왜!”

대충 추슬렀던 그의 앞섶 부분이 풀어헤쳐졌다. 거대한 성기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고, 태주는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이러다가 저거 백 퍼센트 꿈에 나올 거야.

“진정하고 보라고요.”

태주가 꽉 잡고 있던 실린더를 무언가가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턱턱, 치다가 또 꾹 밀다가, 무언가가 묵직하게 건드리고 있다.

설마, 설마…….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역시나. 발가벗겨진 남자의 성기 끝이 실린더를 짓누르고 있었다. 실린더 안에 넣기 위해서 애를 쓰는 듯했다.

아니, 저게 무슨 짓이야. 저 거대한 게 그 안에 들어가겠냐고! 아니 애당초 저건 왜 저렇게 큰 거야. 아무리 이 나라 표준이 조금 작다고는 해도 웬만한 크기들은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데.

“안 들어가잖아요. 여기 안에 넣어서 작동시키는 건데, 애초에 들어가질 않는다고요. 이게 바로 불량이죠.”

“…….”

“억지로 넣어 보려다가 아파서 혼났어요. 그래서 내가 느낀 그대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거고요.”

“…….”

태주의 사고가 멈췄다.

“……장갑 같은 거 있으세요?”

“없는데요.”

저걸 만지기는 죽어도 싫었지만, 노력은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태주가 실린더의 입구를 진상 놈의 그곳에 맞추고 말했다.

“그, 거, 그거 잘 좀 잡아 보세요. 이게 안 들어갈 리가 없거든요, 고객님.”

진상 놈이 그것의 기둥 아래쪽부터 뿌리 부근을 손으로 꾹 쥐었다.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한다, 성태주. 눈물을 머금고 실린더를 그곳에 끼워 맞추듯 힘을 주었다. 뭉뚝한 앞부분이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듯도 했다. 그래서 옳다구나 싶어 더 압력을 가했던 게 실수였다.

“아악! 악!”

찌직, 소리와 함께 실린더의 중간에서부터 입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태주가 손을 놓기도 전에, 진상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와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볼썽사나운 꼬락서니에 웃음이 터질 뻔도 했으나, 그보다는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세 조각으로 부서진 실린더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혹시나 부서진 조각이나 파편에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예민한 부위이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아이고, 괘,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아, 아윽…….”

허리를 숙인 채 끙끄응 신음을 흘리던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제 것을 이리저리 살피던 진상이 태주를 보며 말했다.

“……감각이 없어졌어요.”

“네?”

이 상황을 그대로 인터넷에 올리면 분명 인기글 베스트 10 안에는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인터뷰도 들어오려나, ‘실제로 그런 크기의 물건을 보신 것이 사실입니까, 성태주 씨?’ 이런 거 물어보려나. 돈도 좀 주겠지, 얼굴 나가는 거니까.

아니면 라디오 사연으로 보내 볼까? 이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크기의 남성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뭐, 이런 내용으로. 적당히 사실과 상상을 덧붙여서 돈 될 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한 손에는 초록색 고추를 들고 다른 손에는 유전자 변형이 된 가지를 들면 한눈에 비교가 될 테지, 이슈도 더 많이 될 거고. 아, 물론 이 땅의 형제님들에게 뭇매를 맞게 되겠지만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봐요.”

유전자 변형이 된 가지가 말을 걸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태주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반짝거린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부분이었는데 왜 갑자기 깨우는 거야. 좋다 말았다.

“혹시 상찐 님.”

“네?”

“혼혈이세요?”

“아니요.”

그렇다면 더욱 신기한 노릇이다. 저게 가능한 거였구나, 저 크기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저 감각이 없어졌다고요.”

“감각이요?”

“방금 당신이 억지로 넣으려고 하는 바람에 다쳤어요. 어떻게 책임지실 거죠?”

“아. 그, 그런데, 상처는 없어 보이는데…….”

보기 싫었지만 확인할 겸 힐끔 보았다. 마찰 때문에 조금 빨갛게 올라온 것 같긴 하지만 특별히 생채기는 없었다.

괜히 말려들면 더 곤란해진다. 여기서 저자세로 나가면 나중에 불리해질지도 몰랐다. 다친 곳 하나 없는데 정신적 피해보상을 운운하기 시작하면 견적이 안 나오니까. 한번 진상은 영원한 진상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성태주.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떼었다.

“일단 고객님, 제품의 하자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부분을 종합해 보면……. 저희 제품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맨파워맨은 마구잡이로 만들어 낸 제품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여러 설문과, 믿을 수 있는 모수를 바탕으로 낸 통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대표의 말에 의하면 말이다.

물론 대표가 밉상이긴 해도, 이 나라 남성의 크기에 관련되어서는 꽤나 정확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태주로서도, 지금까지 이런 일로 컴플레인을 건 고객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제품의 문제가 아니라니. 그럼 제가 문제라는 건가요?”

“네, 이런 말씀 드리기도 참 민망한데…….”

아니, 저 자식.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혼혈도 아니고, 말하는 것 보니 외국에서 살다가 온 놈도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뻔뻔스러운 얼굴로 되묻다니 정말 양심도 없다. 아무래도 은근히 칭찬을 좀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젠장, 이제 하다 하다 남의 물건 칭찬씩이나 해 줘야 하다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흠흠, 고객님의 그……. 부분이 참 다른 남성에 비해 많이 특출하셔서요.”

이 정도 했으면 그냥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헤어지자, 우리.

“그러니까, 이게 참 말로 풀자니……. 저희 제품은 국내 고객들을 대상으로 제작되었다 보니 사이즈가 좀…….”

대충 알아들었잖아.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는 거야.

태주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무리 고객이 왕이라지만, 태주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어린놈의 거시기를 몇 번이나 더 칭찬해 줘야 하는 건지 마음속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 크기가 뭐가 어때서요.”

“예? 아니, 그러니까 고객님은 좀, 다른 고객님들과 매우 다른…….”

도무지 끝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흐려지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본능적으로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웃음으로 무마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옆으로 굴러간 눈동자를 치켜뜨자 그의 얼굴이 시야에 담긴다. 희한하게도 놈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태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자, 좀처럼 믿기 어려운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알고 있어요, 제가 작은 것쯤은…….”

“……예?”

“평균보다 작아서 좀 커지고 싶으니까 제품을 구매했던 거라고요.”

“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태주의 미간이 우스꽝스럽게 좁혀지며 눈썹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건너편의 황망한 시선을 느꼈는지 눈앞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늘진 그의 낯빛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보이질 않아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지금이라도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역시 제가 좀 크죠.’라고 한다면 이 헛짓거리들을 용서해 줄 마음은 있었다. 그는 적어도 태주보다는 어려 보였으니, 인생의 선배로서 치기어린 장난을 한두 번 정도야 봐줄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초면이지만.

“고객님, 농담도 참…….”

굳어 있는 안면근육을 최대한 쥐어짜서 겨우 미소 비슷한 것을 내어 보였다. 억지로 입가를 끌어당겼더니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도 같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다.

태주는 이제 화를 낼 기력도 없었기에 그냥 이 시점에서 ‘네, 농담이었습니다.’라는 답이 오길 바랐다. 서로 한바탕 하하 웃고는 좋게 마무리 짓는 것이 희망사항이었으니까. 행복한 결말을 안고 이 비싸고 고급스러운 곳에서 탈출해 낡고 허름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일 초라도 빨리.

“……농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아서 콤플렉스였는데, 이제는 아예 감각조차 없어졌다고요.”

결국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참으로 기가 찼다.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생각하자면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세상의 이러저러한 실정이나 형편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개 이런 말은 나이가 어리거나 철이 없거나 사회 경험을 많이 해보지 못한 철딱서니들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였다.

그런데 눈앞의 저 남자는, 확실히 어려 보이긴 해도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나라에 대해 잘 모르는 놈 같지도 않았고.

더욱이 이십 대 초반 정도면 주위에 동성 친구들도 있을 거고, 이십여 년을 살면서 한 번쯤은 목욕탕에도 가 봤을 거다.

그런데 저런 말을 진담으로 한다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건 아무래도.

“지금 저 갖고 장난치시는 겁니까?”

“네?”

“아니, 당신이 고객이면 고객이지. 내가 왜 이런 장난에 놀아나야 합니까.”

“장난 아닌데요.”

“장난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사지 멀쩡하고 혼혈도 아니고 보아하니 한국에서 쭉 사신 것 같은데, 지금 하는 소리가 말이 안 되잖습니까.”

“저…….”

말을 하다 보니 더 열 받는다. 도대체 왜 이런 시답잖은 일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야 한단 말인가. 이 시간에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밥을 차려서 먹고 뒹굴뒹굴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해야 된다고. 내일 출근이라고.

“댁 그거 엄청 크다고요!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크기라고! 아주 친구들한테 부러움깨나 샀겠네, 됐어요? 이런 말로 칭찬해 주길 바란 거죠? 나 참, 유치하기 짝이 없네.”

“제가…… 크다고요?”

표정 연기 최고네. 아주 연기자 해도 되겠어. 마치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눈썹 끝이 떨어져서 눈꼬리에 닿겠다, 이 자식아! 가식적이기 짝이 없다. 뭐, 네 얼굴 잘났다고 내가 여기서 그만둘 것 같냐?

“네네, 크다고요. 엄청 크다고요! 가서 친구들한테도 물어보고 아버지한테도 물어봐요. 아주 잘나셨어!”

“아버지…….”

“그래요! 어릴 때 아버님이랑 목욕탕 한두 번은 가 봤을 거 아닙니까!”

“…….”

“나한테 자랑하지 말고 그 잘난 유전자를 준 아버님께―.”

“……아버지 안 계세요.”

“……에?”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어…….”

“얼굴도 기억 안 나거든요.”

쓰레기행 급행열차,

성태주 탑승합니다.

* * *

연어구이에 메로구이, 양갈비에 그릴 채소까지.

한 상 푸짐하게 차려졌다. 침실보다 더 큰 응접실도 있는데 굳이 침대 옆 테이블에서 먹어야 하나. 이 비싼 침구들에 음식 냄새라도 베면 어쩌려고.

“드세요.”

“네…….”

상찐과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태주는 당장이라도 이 숨 막히는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뭐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로할 입장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낸 건 사실이다. 물론 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슬픈 기억이 있었을 줄 알았겠냐마는.

어찌 됐건 조금 과하게 엇나간 부분은 미안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또, 이 비싼 호텔에서는 어떤 룸서비스가 나오는지도 조금 궁금했다. 지지리 궁상인 팔자에 언제 이런 걸 먹어 보겠는가.

‘저기…… 휴지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그것도 자기보다 덩치도 커다란 놈이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삼십 년 가까이 살면서 누군가의 그런 모습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기에 솔직히 태주도 많이 당황했다.

상찐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다부진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찌나 처연하고 안쓰럽던지, 흔히 드라마에서나 보던 ‘슬픈 과거를 가진 미남 배우가 우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기분일 정도였다.

차마 말을 걸 수조차 없어서, 작은 서랍장 위에 있던 고급 티슈를 건네주었더랬다. 그런데 그놈은 티슈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 젖은 눈동자로 말을 걸었다.

‘……술 한잔, 하실래요?’

태주는 천하의 호래자식이 아니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씹어 댈 만한 인물도 못되었다.

없이 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인성을 팔아먹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찐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소 불편하고 어색해도 겸사겸사 고픈 배도 채우고 음식 구경도 하면 되니까.

해서, 이 상황이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갖가지 요리들에 XO라고 대문짝만 하게 래핑된 술. 태주는 평소 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았다. 마셔도 소주나 맥주 정도였다. 양주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먹을 기회도 거의 없다시피 했고, 또래들이 클럽 가서 즐길 시간에 일을 했다.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이 한상차림만 다 합해도 얼마일까.

“왜 안 드세요?”

“아, 잘 먹겠습니다.”

수저는 들지 않고 셈만 헤아리던 태주를 향해 그가 말했다. 상찐은 고급스러운 트레이에 놓인 동그란 얼음을 집게로 집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잔에 얼음이 하나씩 자리 잡는다.

“저는 조금만 주세요. 술을 잘 못해서요.”

“그렇구나. 토닉 워터랑 섞어 드릴게요.”

양주는 저렇게 마시는 거구나. 처음 알았다.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탄산이 퐁퐁 올라오는 토닉 워터를 부었다. 비율은 잘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꽤 익숙해 보이니 그냥 하는 걸 구경만 했다.

잔 밑바닥이 투명한 액체로 살짝 찰랑거린다. 그리고 무슨 술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양주란 건 알 듯한 병이 움직였다. 그 안에는 주황색 물이 일렁였는데 대충 맡아도 향이 퍽 독했다.

“향 좋죠?”

“이거 몇 도예요? 독해 보이는데.”

“별로 안 독해요.”

잔의 나머지 부분이 술로 채워졌다.

비율, 저거 맞는 건가. 잘못 마시면 큰일 나겠는데. 태주도 폭탄주는 마셔 봤다. 물론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었지만, 대부분 독한 술을 조금 적게 넣지 않던가. 오히려 상찐은 그 반대의 비율로 술을 섞고 있었다.

솔직히 이 부분에 태클을 좀 걸어 보고 싶었는데, 양주는 원래 그렇게 먹는 거라고 할까 봐 그냥 있었다. 괜히 아는 척했다가 창피당할 것 같아서.

“여기.”

앞에 놓인 술잔이 가득 채워졌다. 코냑의 짙은 향이 훅 끼쳐 온다.

냄새만 살짝 맡았는데도 벌써 독한데?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마시겠다고는 했지만 조금 부담스러웠다. 역시 대충 마시는 척만 하면서 이야기나 들어주다가 자리를 떠야지.

“고맙습니다.”

“술을 못 하는 거면 술자리는 잘 안 가겠네요?”

“어, 네. 그렇죠.”

“그럼 친구들이 서운해하지 않아요? 같이 술도 마시고 하면 좋을 텐데.”

“전 그냥 회사, 집, 회사, 집. 친구들 잘 안 만나기도 하고.”

두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를 조금 이어 나갔다.

주로 묻는 사람은 상찐이었고 대답하는 쪽이 태주였다. 그래도 몇 번 예의상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반대편에 앉은 상찐의 눈가가 아직 빨갛게 물든 덕분이었다. 괜히 또 잘못 질문했다가 울릴까 봐서. 여전히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은 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의외네요. 주위에 사람 많을 것 같은데.”

상찐의 시선이 태주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태주 역시 그 못지않게 한눈에 봐도 눈길이 가는 인상이다. 흰 피부에 살짝 처진 눈, 긴 속눈썹과 속 쌍꺼풀이 서글서글한 강아지를 닮았다. 작지만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얼굴이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인기 많죠?”

“저요?”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태주를 쳐다보았다.

“전혀요.”

태주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콧방귀를 뀔 대답이다.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버럭 화를 내버리고 싶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등을 시원하게 얻어맞아도 싸다. 무슨 ‘누가 봐도 잘났지만 자기가 인기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시대 속 주인공도 아니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앞에 놓인 메로구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살살 녹는다. 그야말로 술이 당기는 안주였다. 매일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값비싼 술상을 덕분에 먹고 있으니 조금은 맞장구 쳐 줘야겠다.

“에이,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훤칠한데 인기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태주가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야말로 사회생활 11년차의 짬밥이랄까. 회식 자리에서 빛을 발하던 딸랑이 스킬이 체화된 탓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상찐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한입에 비워 버린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거 아니에요?”

저 독한 술을 한 번에 털어 넣다니. 보기만 했는데도 식도가 타 들어가는 것만 같다.

“괜찮아요.”

“내가 또 괜한 소리를 했나. 혹시 말실수한 거 아니죠? 워낙 스타일이 좋으니까 칭찬으로 말한 건데.”

“…….”

왜 또 대답이 없어, 불안하게.

이게 4성급이나 되는 안락한 호텔에서의 술자리인지 외나무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떨어지기 직전의 술자리인지 모르겠다. 술도 친한 사람들과 마셔야 맛있지, 오늘 처음 본 사람이랑 마시는 술이 잘 넘어갈 리가 없었다.

“미안하시면.”

그가 뜸을 들였다.

“잔 비워 주세요.”

* * *

이런 불편한 자리를 한두 번 겪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상황들이 종종 생기곤 하니까. 태주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잘 맞춰 주는 타입이라 선배들이 자주 찾았다.

간혹 짓궂은 선배가 일부러 술을 먹이려고 해도 아래로 술을 흘려 버린다거나 다른 잔으로 바꿔 치기 한다거나 잔머리를 써서 최대한 취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방면에는 나름대로 달인이랄까.

“……그래서 저는 항상 아버지가 그리워요.”

아무래도 술에 취하면 감정이 격해지기 마련이다.

태주는 딱히 주사가 있진 않았는데 취하고 나면 필름이 끊기기 일쑤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기억에 큰 구멍이 생기는 건, 무척 두려운 일이다. 그사이 큰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지만, 태주의 경우는 특히나 술 취한 다음 날 자신을 깨워 줄 사람이 없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게 참 신기하죠.”

여하간 이러한 이유로 술자리를 피하거나, 혹은 술자리에서 술을 피하거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에 의해 취해 본 적이 없다.

옆자리의 누가 술에 취해서 울고불고 콧물을 질질 짜더라도 그 뒤처리는 늘 태주의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아까는 갑자기 울어서 죄송해요. 감정이 올라와서…….”

이놈도 그랬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 울어 버리면 뭐 어쩌라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찌 됐건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요리와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그 정도는 잊어 주려고 한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것 같고,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흑, 흐윽. 흐끕, 괜찮아여, 뭐, 흑, 울 쑤도 있지.”

“정말요?”

“구러엄, 구럼. 끄흡, 딱 보니까 애기네, 애기. 괜찮아, 형은 다 이해한다.”

이상하게 자꾸 혀가 꼬인다. 발음이 똑바로 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볼이 축축했다. 뭐가 자꾸 흐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 태주는 늘 자신이 마실 수 있는 주량의 한계선을 잘 지켜왔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 당연하지. 흐윽, 흑, 형이라고 불러! 불러, 당장! 불쌍한 자식, 아부지 없이 을마나 힘들었냐. 내가 그 마음을 잘 알지, 그럼. 알지, 엄청 알지.”

부모 없는 설움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저 진짜 착한 아들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엄, 구럼. 너는 진짜 착한 놈이 됐을 거야.”

“이런 부끄러운 고민들도 아버지한테 털어놨을 텐데.”

“너 아직도 그런 소리 하냐. 자식아, 자신감을 가져! 너 커, 인마. 진짜 커!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큰 거는 처음 봤어!”

이상하게 자꾸 눈앞이 흐렸다. 뭔가 불투명한 막이 쳐진 듯했다.

답답한 마음에 볼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축축하다. 아무래도 비가 오나 보다. 여긴 실내 아니었던가,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모양이었다. 자꾸만 눈이 젖어서 휴지를 찾으려고 손을 휘적거렸다.

그런데 휴지는 손에 안 잡히고 무언가가 볼에 닿았다.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기다란 젓가락 같은 것이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뭐야, 이거.”

“잠깐만요.”

“흐윽, 됐어, 이거 놔 봐.”

그 젓가락은 순순히 떨어졌다. 그리고 앞에 놓인 잔 안으로 쑥 들어갔다.

뭐야, 더럽게. 태주가 중얼거리며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는 잔에 담긴 주황색 액체를 휘이휘이 젓더니 그것을 들어 태주의 앞에서 흔들었다.

“형, 잘 저어 마셔야죠.”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액체가 들어왔다. 이상하게 더 쓴 것 같았다. 방금 마셨었는데도, 그것보다 더 쓰게만 느껴진다. 태주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마셨다.

탈칵. 빈 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그 젓가락같이 길쭉한 무언가가 다시 볼을 쓰다듬는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게 좀 따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쓸면서 눈물을 닦아 낼 때도. 속눈썹에 맺힌 방울에 입을 맞출 때도. 자신의 입술 주위를 맴돌던 그의 손가락이 차츰 입안으로 파고들어 혀를 누르고 점막을 헤집을 때도.

“왜 이렇게 울어요, 속상하게.”

“안 울었는데.”

“그래요, 울지 않았다고 할게요.”

갑자기 몸이 붕 떴다. 비행기를 타는 것만 같다. 실제로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조금 어지러웠다. 멀미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시야가 조금 빙빙 돌았지만, 생각해 보니 구름 위를 날아가는데 멀미가 나는 건 당연했다.

“어지러워. 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지금?”

“침대요.”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태주의 몸도 흔들렸다.

머리 안에서 진동이 울린다. 난기류를 만났나 보다. 위험 상황에 대비해 비상 탈출구를 헤아렸다. 하나씩 수를 세며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런데 계속 장면이 하나씩 끊기는 듯했다.

처음으로 보인 건, 거나하게 차려진 술상이었다.

양주병이, 하나, 둘, 셋……. 왜 저렇게 많지? 언제 저렇게 마셨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위기를 타서 그랬던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잔 두잔 마셨던 것 같긴 하다.

그다음으로 보인 건 상찐의 등이었다. 단단한 선반 같은 거에 걸쳐진 줄 알았는데, 남자의 어깨에 짐짝처럼 둘러졌다. 머리가 대롱대롱 흔들릴 때마다 널찍한 등에 코를 박았다. 뭐가 이렇게 딱딱한지, 내일 코가 잔뜩 부으면 어쩌지 걱정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저렇게 큰 샹들리에를 달아야 했나 싶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이 보인다.

“형, 괜찮아요? 많이 취한 거 같은데.”

“휴우……. ……저기요, 내가 뭘 취해. 하나도 안 취했거든?”

말로는 으름장을 놓았는데 사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잔뜩 절인 무말랭이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

“이대로 잠들면 곤란해요, 형.”

태주도 잠들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후지더라도 집이 편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있고 레드카펫이 깔린 곳일지라도 여기는 집이 아니었다. 집에 가서 깨끗하게 씻고 편하게 잠들고 싶었다.

“으응……. 집……, 에…….”

뒷말이 삼켜진다. 아주 큰 모래지옥에 발을 잘못 디딘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눈을 떠 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풀이 붙었는지 도무지 떼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열었다.

상찐이 보인다. 그는 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투명하게 덧씌운 막 너머로 얼굴이 보였다. 아, 참 잘생겼네. 눈은 말할 것도 없고 코도 오뚝하고, 입술도.

“형.”

그가 태주를 불렀다. 조화롭게 자리 잡은 입술이 달싹거린다. 짧은 부름 뒤에 도톰한 입술이 모아졌다. 그러더니 곧 실로 당긴 것처럼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아, 그는 빙긋 웃고 있었다.

* * *

“흐…….”

몸이 간질거린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몹시 낯설었다. 물기가 있어 젖은 듯한 것이 천천히 팔을 쓸었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와 손목을 슬슬 훑는다.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뱀 같았다. 그 털북숭이 뱀은 매우 따뜻했다. 그것은 태주의 손가락을 핥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까지 손을 대었다. 남자는 움찔했다.

“으음…….”

묘하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던 여린 살이 간질거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이는 본능적인 거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태주의 의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젖은 털 같은 것이 가슴을 스친다. 잔뜩 민감해진 몸이 신경이 수축했다. 어느새 실내에 머무르던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옷을 벗었던가, 내가? 정신이 몽롱했다.

“추워요?”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차분한 어조였다. 의식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는 주문처럼 포근했다. 혼자 있는 게 아니구나, 나 지금 혼자 있지 않구나. 기이한 안도감이 든다.

잠시 마음을 놓은 사이, 따뜻한 돌기 같은 것이 가슴을 지나 아랫배를 문질렀다. 천천히 그 부근을 맴돌던 그것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속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만……. 나 갈아입을 속옷 없는데…….”

“미안해요.”

태주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거 뭔데에.”

“수건이에요. 따뜻한 물로 적셔 왔어요. 몸을 닦아 줘야 할 것 같아서.”

“나, 토했어……?”

“아뇨,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요.”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형.”

그가 태주를 불렀다.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인데, 마치 그리운 사람을 부르듯 그렇게 불렀다.

남자의 몸이 태주에게 바싹 붙는다. 축축하게 젖은 태주의 속옷이 그의 손가락에 걸려 내려갔다. 내내 옷 아래에 가려졌던 곳이 드러난다.

“으응, 뭐야. 왜…….”

왜인지 아래가 팽팽했다. 태주는 자신의 그것이 조금 단단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몸을 살짝 틀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발가벗겨진 몸에 그의 손이 닿는다. 그 큰 손이 허벅지를 더듬으며 무방비한 아래에 스쳤다. 태주의 몸이 움찔 떨린다.

“형이 말했잖아요.”

그가 이미 반쯤 선 성기를 부드럽게 쥐었다. 마치 크기를 가늠하듯 손바닥의 큰 면으로 쥐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뜨거운 살갗이 감싸며 천천히 문지르자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새었다.

아, 지금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깜빡깜빡, 탁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 크다고.”

손짓이 점점 빨라진다. 태주는 그 자극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누군가 자신의 것에 손을 댄 적이 없었으니 이런 행위가 익숙할 리 없다.

어느새 단단히 곧추 선 그것에 열이 몰린다. 온몸이 차츰 뜨거워지면서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뒤틀고 엉덩이를 뒤로 물려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으응……. 자, 잠깐.”

“그러니까, 형이랑 내 거 같이 보고 싶어서.”

지익. 무언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아래에서 끝까지 내달리던 감각이 잠시 멈춘다.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차오른 열이 툭, 끊겼다. 뜨겁게 달구어진 파이프에 찬물을 끼얹듯 바삐 오르내렸던 태주의 가슴께가 서서히 잦아든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못내 아쉬워 둔부가 들썩거린다. 아, 조금만. 조금만 더, 경험해보지 못한 오싹한 감각이 신경 끝에 곤두섰다.

“태주 형.”

낮게 울리는 목소리.

며칠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메말라 있었다. 건조한 음성이 목울대를 할퀴면서 갈라진다. 고요한 방 안에 퍼지는 그 음성이 무척 매혹적이게 들리는 건, 필시 술 때문일 것이다.

그의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선이 마침내 겹친다. 누워 있는 태주의 다리를 모아 자신의 무릎 사이에 가둔 채, 그는 무릎을 꿇고 하반신을 내렸다.

그 중심에 툭 불거진 살덩이가 흉측스럽다. 이미 빳빳하게 서 있는 물건이 툭툭 혈관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꺼떡꺼떡 움직인다.

곧 묵직한 성기가 태주의 것에 닿았다. 그것은 뜨거웠고,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혀와 혀가 섞이는 감촉과는 또 달랐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마셨다.

“하아…….”

더운 호흡이 귓가를 채우자 맞닿은 두 개의 물건이 부딪친다. 위에 자리 잡은 남자의 둔부가 곡선을 그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진은 태주의 귓가에 제 숨을 흘려내며 물건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살갗과 살갗이 비벼진다. 정신을 놓는 순간 쏟아 낼 것만 같은 열기가 몸 안에 가득했다. 아래에 깔린 태주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남자의 무릎 사이에 가두었던 다리가 덜덜 경련하고 있었다.

“흐앗, 읏, 아……!”

“……하아, 기분 좋아.”

움직임은 차츰 격렬해진다.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애처럼 굴었다. 발갛게 물든 태주의 귓바퀴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혀를 내어 핥는다. 침대가 요동칠 때까지 도통 멈추지 못했다.

“……넣고 싶어요.”

그가 속삭였다. 그는 태주의 안에 자신의 것을 우겨 넣을 작정인 듯 허리를 퉁겨 댔다. 거칠게 마찰되며 달아오른 살들이 한계점에 도달한다. 태주의 것은 이미 침윤하고 있었다. 선단의 끝에서 투명한 액이 지익 흘러내린다.

침대가 기울었다. 남자가 자세를 고쳐 잡는다. 족쇄를 푸는 것처럼 가둬 둔 다리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태주의 한쪽 다리를 세운다. 그러자 시트에 딱 붙어 있던 곳이 드러났다.

팽팽하게 부푼 고환을 그가 손으로 쓸어 올렸다. 지속된 행위에 기둥은 이미 벌겋게 부어 있다. 그의 손가락이 기둥을 슬슬 훑더니 차츰 아래로 내려간다. 손끝이 음낭을 지나 더 아래, 아래로 떨어졌다. 이상한 곳을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태주의 둔부가 흠칫 떨린다.

상진은 꽉 다물린 채 움찔거리는 입구를 슬슬 긁었다. 아프지 않은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자극이 큰지 허리 근육이 일순 수축한다.

“무리일까.”

몹시 아쉬운 투였다. 좀 더 하고 싶었으나 이 이상 건드린다면 태주가 깰지도 몰랐다. 태주를 씻기고 닦기기도 전에 안아 버렸어야 했나. 상진은 못내 후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많다. 무리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형?”

그렇게 그냥 놓아주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을 태주가, 정확히는 그의 다리가 천천히 벌어졌다.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며 주름이 접힌다. 차츰 멀어지는 양쪽 다리가 기어이, 완벽하게 세워진 채로 갈라졌다.

기대감에 부푼 듯, 노골적으로 드러난 태주의 구멍이 움찔거린다. 상진은 등줄기가 오싹한, 흥분감과 고양감에 젖었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음험한 시선에 태주가 가득 들어찼다. 태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술에 취한 모습 그대로였으나 볼과 귀가 붉어져 있다. 색색, 작게 내쉬는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원하고 있었네요. 미리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상진의 눈가와 입술에 미소가 걸린다. 이어진 행위로 반쯤 곧추선 페니스를 쥐었다.

바로 박아 넣고 흔들며 범하고 싶었으나, 무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는 태주의 아래를 문지르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꾸욱, 누른다. 그러자 촘촘하게 주름진 아래가 기다란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첫 마디가, 그리고 이어서 손가락 전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들이민다.

“……으읏…….”

태주가 신음 섞인 소리를 내었다. 이를 꽉 문 그 틈새로 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자극에 못 이겨 토해 낸 그 소리가 상진은 기껍다. 상진의 얼굴이 차츰 상기되고 있었다.

푹 밀려 들어간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인다. 어느새 늘어난 두께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매끄러운 그것이 태주의 안을 누르자 내벽이 급격히 수축한다. 허벅지 안쪽과 둔부가 긴장함과 동시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고통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쾌감에 물든 것인지 알 수 없이 달뜬 숨을 내쉰다.

“……형, 엄청 좁아요.”

젤 하나 없이 건조한 곳을 연신 쑤셔 대었다.

겨우 손가락 두 개 정도 들어갔을까, 그마저도 버거운 듯 인상을 찡그린다. 하아, 상진의 목구멍이 바싹 메말라 갔다. 이미 고개를 쳐들고 단단한 아래가 그의 안으로 파고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뻐근한 초조함이 더해졌다.

일순 태주의 가슴께가 얕게 부푼다. 여전히 발갛게 물든 얼굴과 무언가 부족한 듯 끝이 기운 눈썹이 보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상진의 속에서 더는 막지 못할 욕정이 치민다.

상진이 자신의 페니스를 쥐었다. 두툼한 선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그 끝을 태주에게로 겨눈다. 촘촘하게 다물린 입구를 상진의 페니스가 밀고 들어가며 강제로 벌어지게 했다. 이윽고 귀두 전체가 파고든 순간. 뚜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읏……!”

태주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고통 섞인 비명을 질러 댄다. 꿀렁거리는 울대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는 다리를 한껏 더 벌려 내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갑작스러운 격통이 온몸에 퍼져 허리가 둥글게 휜다.

“……힘 좀 빼요.”

들렸을까. 그가 듣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진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주름진 구멍이 강제로 벌려졌다. 매끈해진 아래를 손으로 쓸며 조금 더 허리를 가져간다. 한계까지 벌어진 애널이 조금씩,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선단을 삼켜 낸다.

그 끔찍한 고통과 압박감은 곧 쾌감으로 이어졌다. 상진 역시 더운 숨을 토해 낸다. 인상을 찌푸리고 더 욕심을 내었다. 그러자 겨우 적응이 될까 싶었던 아래가 갈라지고 태주의 몸이 비틀린다. 통증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읏, 아, 하……!”

“하아, 형…….”

두꺼운 선단을 지나, 겨우 기둥까지 허락한 내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의사에 반하는 침범을 밀어내려는 듯, 움찔거리며 조이고 뱉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진의 욕정을 부추기는 꼴이었다.

강해진 압박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상진의 허리가 움직인다. 등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근육이 유연하게 휘어지며 쩍쩍 갈라졌다.

겨우 절반쯤 박혀 있던 페니스를 선단만 걸치게끔 도로 빼낸다. 빠져나오기 무섭게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흥분으로 팽팽해진 그의 고환이 태주의 뒤에 부딪힌다. 탁, 탁, 낮게 울리는 파열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채웠다.

“하아, 읏……. 형…….”

“응, 으읏……!”

점점 높아지는 교성과 거친 호흡이 뒤섞인다.

상진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음대로 그 안을 휘젓고 짓이겨 다시는 누구의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조금, 만 더.”

삐걱거리는 몸이 험하게 비틀어졌다.

태주의 몸은 그와의 섹스를 폭력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빠듯했다. 팽팽하게 넓혀진 애널이 두꺼운 기둥을 간신히 물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일 때면 몸이 스르륵 딸려 내려간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헐떡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읏, 으윽.”

목덜미에 내려앉은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말캉한 촉감이 목덜미를 훑고 턱 선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신음을 토해 내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덩이가 들어온다. 상진의 혀였다. 그것은 뱀처럼 태주의 것을 핥고 점막을 훑으며 미끄러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을 겨우 흘리자, 기다렸다는 듯 따라 붙으며 제 것을 섞는다.

습한 소리가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상진은 태주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리고 느릿하게 허리 짓을 했다. 끝까지 닿지 못한 것이 그지없이 아쉽다. 허리를 뒤로 조금 빼내었다가 다시 박아 넣으면 빡빡한 내벽이 꽉 조여 왔다.

“……형, 좋아요.”

“읏, 아, 으응…….”

탁, 탁, 살과 살이 스친다. 상진의 아래와 태주의 둔부가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이었다.

그의 엉덩이에 까슬까슬한 음모를 비비고 채찍질을 하듯 쳐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래에는 여유가 없었다.

“안에 싸고 싶어요.”

“읏……. 응……!”

“안에 가득 싸서 내 좆물로 넘치게 하고 싶어요.”

“……아……. 읏…….”

“하아, 형, 아, 태주 형……. 좋아, 읏…….”

상진은 그렇게 몇 번을 더 채근했다. 끝내 다 머금지 못한 아래가 야속해서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내려다보았다.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이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 그의 안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싶어 하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이미 의식을 잃은 태주가 그것을 알아챌 리가 없었다.

“……으읏…….”

숨과 섞인 신음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편안하게 감긴 태주의 눈꺼풀 아래가 이내 촉촉해졌다. 긴 속눈썹이 물을 머금어 그림자가 짙어진다. 상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감상하듯 보고 있었다.

“형, 아파요?”

잔뜩 열이 오른 얼굴이 더욱 상기되어 간다. 태주의 몸을 당기자 맥없이 끌려왔다.

푹 처진 몸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물건을 눌러 본다. 겨우 입구에 맞물린 선단이 안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뜨거운 그것이 여린 내벽과 마찰이 될 때마다 태주의 몸이 들썩거린다.

상진의 어깨에 걸친 다리가 움찔, 떨렸다.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종아리가 달달 경련을 일으키며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어 갔다. 좁혀진 미간에 주름이 더해지고 꾹 감긴 두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흐른다. 호흡을 훅 들이키며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담아내던 양물이 기어이 멈추었다. 상진은 축축하게 젖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 상체를 약간 숙이며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을 만끽하다가 볼에 머무른다.

멈출 생각은 없었다. 도리어 그를 끝까지 몰아붙여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 들게 하고 싶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오롯이 자신만을 느끼도록 만들고자 했다.

태주가 이 행위를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그건 상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자체로도 충분히 고양되었으니까.

“…….”

꽉 맞물렸던 접합부가 느슨해졌다. 허리가 뒤로 물러나면서 입구를 틀어막았던 페니스가 빠져나왔다. 금세 허전해진 아래를 느꼈는지 태주의 눈썹이 기울었다. 자각도 없는 주제에 저런 표정이라니, 얄궂기 짝이 없다.

어쩐지 상진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굳어 갔다.

그렇지만 어쨌든 절정에 이르게는 해 줘야겠지. 그가 제 어깨에 걸쳐 있던 그의 다리를 얌전히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질척한 액을 흘리고 있는 태주의 성기를 입에 머금는다. 따뜻하고 물컹한 감각이 그것을 감쌌다. 상진이 목에 힘을 주며 숨을 들이키자 기다렸다는 듯 정액이 쏟아져 나온다.

“흐앗……! 아, 읏…….”

울컥울컥, 태주의 정액이 그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비릿했지만 달았다. 그렇게 한참, 분비물을 받아 마신다. 상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역시,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지 사정은 꽤 오래 이어졌다. 그것이 오히려 상진을 기쁘게 하는 듯 보였다.

모든 것을 쏟아낸 양물이 축 늘어진다. 상진이 손등으로 제 입가를 쓸었다.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성기를 움켜쥔다. 어설피 서 있던 그것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태주의 나신으로 꽂혔다. 그것만으로도 흥분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차츰 손짓이 빨라지며 호흡도 가파르게 올라간다.

“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파정했다.

상진의 정액이 태주의 몸 곳곳에 튀었다. 편안하게 숨을 고르는 가슴께에, 일자로 떨어지는 목에, 곤히 잠든 얼굴에까지. 그는 그 모습을 찬찬히 눈동자에 담고는 이내 충분히 만족하는 것처럼 웃었다.

그가 태주와 몸을 겹치며 끌어안았다. 더운 열기가 겹친다. 그지없이 아쉬운 마음에 쪽쪽, 한참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곧 태주의 입술과 볼에 묻은 정액을 살짝 핥는다.

“다음에는, 다 마셔 줘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소곤거렸다.

* * *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눈도 뜨지 못했는데 그냥 머리만 아팠다. 아오, 머리야. 지금 몇 시지? 머리맡으로 손을 뻗는다. 더듬더듬, 항상 그곳에 있는 알람시계를 찾았다.

―콰당탕!

손으로 잘못 친 걸까, 무언가 떨어지며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린다.

“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었지만,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다.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흐릿한 시야를 걷어 낸다. 익숙한 벽지, 그리고 천장. 집이었다.

“하암.”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 어디 갔지. 베개를 획 들춰 봤는데 없었다. 이불도 펄럭거리면서 찾았는데 침대 위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다. 잃어버렸으면 큰일인데,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여기 있네.”

오늘따라 잠버릇이 심했던 모양이다. 핸드폰은 침대 옆의 바닥에 고이 놓여 있었다. 박살이 나 있는 알람시계 옆에 말이다. 하, 저건 또 언제 치운담.

골치 아픈 것에서 시선을 돌렸다. 핸드폰을 잡고 다시 침대에 눕는다. 알람이 울리지 않은 걸 보니 분명 시간 여유가 있을 것이다. 역시, 핸드폰에 찍힌 시간도 오전 7시 10분. 딱 5분만 더 누워 있다가 준비해야지.

그런데 안 읽은 메시지가 있었다. 발신인은 회사 대표.

아, 왜 또 아침부터 문자질인지 모르겠다. 정말 보기 싫었지만 안 보자니 계속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 열어보았다.

[대표님: 우리 성 과장~^^ 잠은 잘 잤나? 오늘 날씨가 참 흐리기도 하고 오후에 비가 온다던데, 컨디션은 좀 어떤가 싶어서~ 내가 우리 성 과장 아끼는 거 잘 알지? 오늘은 그냥 집에서 푹 쉬어. 지지난주에 주말 출근 했었잖아,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서. 그거 대체 휴일이라고 생각하고. 내일 보자, 태주야~^^*]

“뭐야.”

잘못 봤나. 이거 지금 꿈인가?

잠깐 고개를 들어 방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꿈이라기엔 너무 실감이 나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볼을 꼬집어도 보았는데 아주 멀쩡하게 아팠다.

“뭐야, 이 인간 왜 이래.”

아오, 소름 돋아. 혹시 대표 핸드폰 해킹 당했나? 그런데 해킹 당했다고 해도 대체 왜 이런 문자를 보내지? 아, 혹시 나 잘린 건가. 권고사직의 친밀한 버전인가, 이거?

그러면 안 되는데. 당장 월세도 내야 하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도 해야 했다. 이직을 하면 되겠지만, 태주의 스펙에 과장 직급을 내주는 회사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역시 전화를 해 볼까?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통화연결음을 듣고 있었다. 한 10초 정도 흘렀을까, 대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어어, 성 과장. 아니, 우리 태주~ 무슨 일이야.]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죄송은 무슨~.]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뻑 하면 주말 출근에, 회사가 불리하다는 이유로 고객 앞에서 직원 무릎까지 꿇리는 악덕 대표와 선량한 직원 사이 아니던가.

“하하, 대표님. 다른 게 아니라 보내신 메시지를 제가 이제 봐서요.”

[어, 봤구나.]

“네, 그…….”

아, 뭐라고 하지. 해킹 당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갑자기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기도 좀 뭐하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태주가 뒷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왜왜, 말 그대로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근해.]

“그, 혹시 왜 그러시는지…….”

[에이, 왜긴 뭐가 왜야~. 너 인마. 요즘 이슈 때문에 계속 주말 출근하고 만날 고객들 컴플레인 듣고,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좀 많은 거 내가 모르겠냐.]

그럼 이때까지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거였냐? 그 진상 일만 해도 그래. 팀장 시켜서 결국 자신을 무릎 꿇릴 생각까지 했으면서.

[너 고생하는 거 내가 너무 잘 알지. 그래서 그냥 오늘 하루 쉬라고~. 최 팀장한테도 얘기해 놨어. 너 오늘 내가 하루 휴가 줄 거라고.]

“아, 대표님. 괜찮습니다. 딱히 아픈 곳도 없고 출근하겠습니다.”

이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친절을 베풀 리가 없다.

딱히 지금 회사의 대표가 특별하게 못되어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태주가 겪은 사회란 그런 곳이었다. 평소와 달리 친절하게 굴 때에는 결국 다른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다. 대가 없는 친절은 없었다.

[에헤이, 이거 왜 이래. 나 섭섭하다, 태주야.]

“예?”

아니,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남의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언제부터 ‘태주야’라고 불렀다고. 늘 호칭은 ‘성 과장’ 아니면, ‘야’ 또는 ‘어이’였는데.

[아무 생각 말고 오늘 하루 쉬어.]

“아니, 대표님.”

[형이 미안해서 그래.]

형? 혀엉?

아무래도 이 인간, 오늘 아침에 뭔가 잘못 처먹은 것 같다. 이럴 경우에는 어디에 신고해야 하지? 역시 119인가? ‘저희 대표님이 저한테 자꾸 형, 형 하시는데 아무래도 독버섯을 잘못 드신 것 같아서요.’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우리 태주 많이 못 챙겨 줘서 형이 진짜 미안하다.]

어라, 가만있어 보자. 형? 형이라. 그러고 보니 최근에 누가 자신더러 ‘형’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주위에 동생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데, 왜 갑자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까. 태주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기 대표님, 혹시 오늘 아침에 뭐 잘못…….”

[어! 아이고, 오셨습니까. 자자, 이쪽으로…….]

갑자기 수화기 너머가 소란스럽다. 무게감은 쥐뿔도 없으면서 늘 무게감을 주려고 애쓰는 대표답지 않게 상당히 부산스러운 듯했다. 중요한 손님이라도 왔나, 아니면 오늘 특별한 미팅이 있었던가.

[아, 우리 태주!]

“예?”

누군지 모를 손님에게 말을 건네던 대표가, 갑자기 수화기에 대고 ‘태주’를 찾았다. 정말로 이상하고 낯설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태주야. 손님 오셔서 이만 끊을게. 오늘 푹~ 쉬고, 응? 내일 보자.]

“어엇, 대표님. 잠…….”

―뚜. 뚜. 뚜.

알 수 없는 통화가 끝이 났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모처럼의 휴가를 받으니 정말 좋기는 한데,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바뀌면 무슨 일이 난다던데, 대표에게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사못 걱정이 되었다.

“갑자기 무슨 휴가냐.”

잠시 일으켰던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폭신폭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편안한 침대에 등이 닿는다.

아, 행복해. 이게 바로 행복이지. 별게 행복인가. 아무리 눈으로 빚은 것처럼 이불이 폭신하고 침대가 편안하고 넓어도,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 나는 타고난 집돌이…….

“……침대?”

또, 또 묘한 기시감이 든다.

‘눈으로 빚은 것처럼 폭신하고 새하얀 이불’을 어디서 봤었지, 분명 최근의 일이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속이 바싹 탄다. 태주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간의 경험 탓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감각들이 몇 번이나 겹쳐질 때는 대부분 기억이 날아간 직후였었으니까.

“헉!”

태주의 심장이 쿵 떨어져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문득문득 끊긴 기억들과 마음에 턱턱 걸리는 불안감들이 하나로 뭉쳐지더니 비어 버린 심장 부근을 채운다. 그래, 기억이 난다. 어제 자신은 분명 그를 만났었다.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들을 나란히 정렬한다. 상찐을 카페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가 가진 제품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었다. 옮긴 장소는 호텔이었고. 그곳에서 이래저래 실랑이를 조금 하다가 술을 한잔 기울였다.

거기까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술을 마시고 나서부터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 태주의 기억 속 필름을 싹둑 잘라가 버린 것처럼 말이다.

“미쳤다, 미쳤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양주를 두어 잔 마신 것까지는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지? 혹시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친 건 아닐까? 술을 못 이겨서 진상에게 하면 안 될 말을 했던 건 아니겠지?

게다가 더 불안한 건, 만약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호텔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난 지금 집이지?

상찐이 데려다주었다고 해도 조금 이상했다. 이 건물이 비록 현관은 허술하지만 그래도 각 집 문에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술에 취해 그에게 집 주소도 알려 주고 문 열쇠까지 다 건네준 걸까.

그럴 리가. 지금까지 술에 취해 기억을 잃더라도 누군가를 함부로 집에 들인 적이나 주소를 알려 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름이 끊기는 것 자체가 몇 번 없던 일이긴 했지만…….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근처 숙박업소에서 자거나 아니면 찜질방을 갔었으니까.

이는 살아오며 터득한 경계심 탓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타인을 집에 들이거나 개인적인 것들을 공유하지 않는 성격 자체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대표도 그렇고, 상찐도 그렇고. 아침부터 찜찜한 일투성이인데 희한하게 몸은 상쾌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대표의 말처럼 구름이 잔뜩 꼈다. 오후에 비가 오려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자 목이 말랐다. 침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방으로 향한다. 뭐, 그래 봐야 1.5룸이니 주방과 침실과 거실의 구분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늘 하던 대로 컵에 따라 마시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싱크대의 맞은편에 위치한 전신 거울이 보인다.

“어?”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띄었다. 카키색보다 살짝 옅은 녹색에 체크무늬가 그려진 홈웨어였다. 모기도 미끄러질 것 같은 부드러운 원단에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상하의가 무려 세트였다.

태주는 지금까지 살면서 잠옷을 세트로 사 본 적이 없다. 대충 입다가 헌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세트라고 굳이 말한다면 달라지겠지만.

어젯밤에 술에 취한 채로 잠옷을 샀나?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가 있을까. 태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기묘한 일이었다.

직접 산 게 아니라면, 이 옷 누구 거지?

* * *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단다.

정말이었다. 실제로 닭의 모가지를 비틀지는 않았지만 제발 내일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결국 오고야 말았다. 뜻밖의 휴가로 하루를 쉬고 나니, 그다음 날도 쉬고 싶고 또 그다음 날에도 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퇴사하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어제 쉬기도 했으니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 출근했다.

역시 이 시간에는 사무실이 조용하다. 아직 자리들이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다. 요 며칠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닌지라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천천히 자리로 향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하나씩 떠오르는 의구심들을 목록으로 만든다.

자, 그럼 먼저 첫 번째. 대표의 호의.

누군가의 호의가 의구심으로 직결된다는 게 슬프긴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인간이 대뜸 남의 이름을 ‘태주야.’ 하고 친밀하게 부르지를 않나, 주말에도 출근하라고 하던 입으로 하루를 쉬란다. 내일 당장 지구가 폭발하는 게 오히려 더 개연성이 있었다.

두 번째는 상찐과 만난 날 ‘결론이 어떻게 났는가’였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새하얀 도화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두 번째 고민에는 파생되는 여러 곁가지들이 있다.

그날 성태주는 어떻게 집에 왔는가. 두 발로 왔을까, 네 발로 왔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잠옷은 대체 뭔지.

혹시나 싶어서 카드 내역과 입출금 내역, 현금을 확인해 봐도 딱히 쓴 기록이 없었다. 그럼 결국 누군가 줬거나 사줬다는 이야기인데, 상찐이 그랬을 리는 없고.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막상 그 상찐에게 연락하기도 두렵다. 만약 그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어떡하나, 뒷수습을 하기도 전에 현실적인 공포가 앞선다.

“과장님!”

“아, 김 대리님. 좋은 아침이네요.”

책상에 가방을 두고 컴퓨터의 전원을 막 켰을 때였다.

목소리가 크기에 누군가 했더니 김 대리였다. 여기와는 반대편인 끝자리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다. 평소 이렇게 허둥대는 사람이 아닌데 의아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지?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살짝 불안해졌다. 역시 어제 쉬라고 했던 건, 권고사직을 위한 밑 작업이었던가.

“저희 회사, 넘어갔대요.”

“네?”

* * *

온종일 회사가 어수선했다. 아침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뒤통수를 세게 후려맞은 느낌인데 그 둔탁한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두통이 혈관을 타고 올라가 미간 사이에 자리 잡더니 이제는 이마 전체를 감싼다. 머리에 심장이 뛰는 것만 같았다. 두통약을 먹어도 가라앉지를 않는다. 딱 죽을 맛이었다.

“회사가 넘어가다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나도 몰라. 어제 갑자기 전체 조례를 하더니 회사를 넘긴단다.”

“대표님이요?”

“그럼 대표지 누구겠어. 큰 액수를 제시받았는지 아주 신났더라.”

미적지근한 바람이 분다. 최 팀장이 내뿜은 담배 연기가 태주에게로 향했다. 살짝 발걸음을 옮겨 피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바람이 사방에서 부는 탓이었다.

“원래부터 이야기가 오가던 거래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자세히는 모르는데 갑자기가 맞을 거야. 대표가 올 하반기에 계획한 것들만 몇 개인데, 어차피 넘길 회사였으면 그렇게 열심히 짰겠냐고.”

최 팀장 말대로, 대표는 손해 보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애초부터 넘길 생각이었다면, 굳이 자신의 품을 들여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어. 어디 회사와 합병되는 것도 아닌 듯하고 그냥 대표만 바뀌는 것 같아.”

“특이하네요.”

“그렇지. 인수합병이야 이런 소기업에 종종 들어오는 제안이기도 한데.”

“합병은 아닌 거죠?”

“응, 그냥 대표만 바뀐다더라. 자기는 대표에서 본부장으로 직함이 바뀌는 것뿐이라고. 다른 직원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니까 동요하지 말라대. 씨발, 아니 대표가 바뀐다는데 어떻게 동요를 안 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초조하고 불안한 건 태주만이 아니다. 나름 이 회사를 위해 분골쇄신했던 최 팀장도 혀가 바싹바싹 마르는 모양이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가 다시 담배를 빨았다. 태주도 그를 따라 커피를 목으로 넘긴다. 텁텁했다. 습하고 미지근한 여름의 바람처럼 그 캔 커피도 뒷맛이 영 별로다.

회사의 운명이 결정될 날, 대표는 왜 자신에게 쉬라고 한 걸까. 설마 인수되면서 대대적인 직원 물갈이가 있을 예정이었던 건가.

남들에 비해 이렇다 할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 마다하지 않고 휴일까지 반납해 가며 일했지만 늘 자신에 대한 확신은 결핍되어 있었다. 그러니 태주의 입장에서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이 정도일 수밖에 없다.

“팀장님, 혹시 인원 감축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까?”

“인원 감축?”

그가 되물었다.

시선이 태주에게로 꽂힌다. 게슴츠레 뜬 눈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지를 않는다. 고작 몇 초간이었으나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그런 이야기도 나오긴 했지.”

망했다.

이 회사에서 누군가가 잘린다면 그건 분명 자신일 것이다. 태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내 생각해 왔던 일이다. 철도 들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처지였다.

공부보다 생업이 우선이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욕심도 없던 아버지는 남긴 것도 없었다. 당장 내일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 게 당연했다. 남들이 공부할 시간에 공장에서 일을 했고 남는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중퇴를 한 처지에, 고등학교 역시 무리였다. 어린 나이에도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태주에게 있어 이 보잘것없는 회사는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퇴사를 꿈꾸지만 태주에게는 그저 푸념일 뿐이었다. 남들이 진심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 태주는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스펙 하나 없이 컴퓨터도 잘 못 다루던 자신을 어엿한 직장인으로 만들어 준 곳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정을 받아도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아마 이날을 예감하고 있어서겠지. 맛없는 커피를 옥상 난간에 올려두고 손등으로 눈을 쓸었다. 손등이 축축하게 젖는다.

“그런데, 그건 너랑 상관없잖아.”

매캐한 담배 냄새가 목구멍을 후벼 팠다. 태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척하면서 뒤로 돌아 눈을 닦는다.

“상관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비밀이었던 거 아니지? 어제 대표한테 들었는데.”

최 팀장이 거의 다 탄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흠집투성이인 구두 앞코로 그것을 짓이기더니 잠시 뜸을 들인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대표가 너한테 말조심하라더라.”

“저한테요?”

“어. 이유는 말 안 해 주는데 앞으로 너한테 말조심하래. 자기도 이제 성 과장한테 잘 보여야 한다나 뭐라나.”

“네?”

아니,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이상한 소리였다. 태주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잘못하다가는 이상한 오해나 소문이 생길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이야기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잘 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 너 혹시 뭐 빽 있냐?”

“제가요?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가진 것도 없는데 제가 무슨 빽이 있습니까.”

“그거야 그런데. 대표가 헛소리할 양반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단박에 그렇다고 할 일이냐. 에이, 자존심 상해. 아무리 나라도 아주 조금 자존심은 있단 말이다.

“대표님이 장난치신 거겠죠. 신경 쓰지 마십쇼.”

“그래?”

“그럼요.”

최 팀장의 눈동자가 의심스럽게 굴러간다. 구석구석을 훑는 그 눈초리에 마치 전신을 스캔 당하는 느낌이었다.

이어 태주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소리도 내보았지만 팀장의 경계를 풀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다. 가진 거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런 오해를 받다니. 뭐 진짜 뒷배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 필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제발 믿어 달라는 액션이다.

“성 과장, 믿는다.”

“넵.”

팀장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무언의 협박이었다. 평소라면 마음이 무거웠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믿거나 말거나, 어찌 됐건 태주가 숨기고 있는 일 따위는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표가 말한 대로 정말 뒷배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살면서 든든한 누군가가 있어 본 적이 없기에 차라리 이런 소문이 있는 편이 나으려나 싶기도 했다. 이대로 뜬소문이 퍼진다면 그 자체가 빽이 될지도 모른다.

하하, 픽, 헛웃음이 나왔다. 소문에 의지하는 인생이라니, 참 초라하기 짝이 없다.

* * *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이제 집에 막 가려던 참이었다.

지난번에 하루를 쉰 데다 그 뒤로 며칠간 뜬소문에 시달린 덕에, 밀린 일거리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아주 잠깐의 커피 타임조차 최 팀장의 푸념을 들어 주는 데 소비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됐는데, 오늘따라 화가 난 고객들이 어찌나 많은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렇게 전투적인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작지만 안락한 보금자리로 향하려던 때였다.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과, 과장님. 누가 찾아오셨…….”

정확히는 손님, 아니 손놈이 먼저 오고 그 뒤로 사원이 따라 들어왔다. 아무래도 손놈이 직원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마구잡이로 몸을 들이민 듯했다.

누가 손님이고 누가 직원인 걸까. 저놈은 자기 멋대로 남의 사무실에 쳐들어왔으면서 뭐가 저리 당당한 것인가.

“잘 지내셨죠.”

“어…….”

“접니다.”

“아…….”

미칠 노릇이었다. 태주는 ‘어’와 ‘아’를 반복하는 유령처럼 낯빛이 꺼멓게 질렸다.

눈앞에 등장한 손놈은 상찐이었다.

지난번에 조촐한 술자리를 가진 이후 연락 한번 없었다. 더욱이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태주도 연락하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네?”

“연락이 없으셔서요.”

“앗.”

이야기, 역시 안 끝났었나.

지난날의 성태주 자식아, 하여간 이놈의 자식은 영 쓸모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미래의 자신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다는 거다.

“지난번에는 아~주 신세를 많이 지셨죠.”

큰 덩치가 앞으로 슬며시 기울었다. 태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아니. 그게.”

급격하게 가까워진 얼굴을 피하려 걸음을 뒤로 물렀다.

그러자 시야가 넓어지며 상찐의 뒤에 있는 사원이 보인다. 그는 매우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안 돼. 이 자식이 그 유명한 진상 고객이고 아직 관련된 일이 마무리된 게 아니라는 걸 팀장이 알게 되면 시말서 감이다. 시말서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다짜고짜 이 일에 책임을 지고 퇴사하라고 종용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콱 숨을 조였다.

태주는 솔직하지 못했다. 잘 해결되었다고 거짓말로 보고를 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상찐과 만난 뒤로 그가 달았던 덧글은 모조리 삭제되어 있었고 새로 덧글이 달리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골머리를 썩이던 일을 잘 처리했다고 금일봉까지 받았었다, 그것도 꽤나 두둑이. 심지어 팀원들은 물론 다른 부서들이 다 모인 주간 회의에서 박수까지 받아 가면서. 받으면서도 이걸 받아도 되나 싶긴 했는데 한 푼이라도 아쉬운 처지에 안 받을 수가 있겠냔 말이다.

미치겠네, 설마하니 찾아올 줄 알았냐고.

“아이고, 우리 동생!”

“?”

태주는 냉큼 상찐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태주 입장에서는 어깨동무인데, 그놈 입장에서는 대롱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규격 외로 큰 상찐 놈의 탓이었다.

“우리 동생 이게 어쩐 일이야. 아이고, 반가워라. 응? 나도 아주 잘 지냈지.”

“아니, 지금 뭐하는―.”

가까스로 목에 두른 팔을 힘주어 당겼다.

그런데 꼼짝도 안 한다. 다시 한번 입술을 꽉 물고 확 당겨보았다. 찔끔 움직였다. 정말 도움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어깨동무를 풀고 상찐의 팔을 잡았다. 그림자가 겹칠 정도로 마주 서자, 그의 덩치에 완벽하게 가려진다.

“고갱님, 제발 한 번만.”

“뭐가요.”

“한 번만 그냥 좀.”

뒤에 서 있던 직원의 시야에서는 태주가 빈틈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언가 쑥덕쑥덕하는 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공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사정을 해 댄다.

“지금 엄청 곤란하다고요. 제가 다 설명할게요.”

거의 마지막 말은 입술만 뻐끔거린 수준이었다. 상찐은 그런 태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

갑작스러운 호형호제였다. 제발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또 너무 갑자기 사람이 변하니까 살짝 무서울 지경이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태주의 경계심이 삐죽삐죽 간격을 세웠다. 그럼에도 상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딱 그 나이에 맞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나 술 사 준다면서요.”

어깨에 팔이 턱 올라왔다. 하마터면 휘청거릴 뻔했다.

“수, 술?”

“네, 벌써 까먹었어요? 형이랑 술 먹고 싶어요.”

슬쩍 주위 눈치를 보았다. 아까까지 곁에서 지켜보던 사원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어느새 친한 동료도 부른 건지 서너 명이 모여서 흘끔흘끔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게 그렇게 쑥덕거릴 일이던가, 아주 자연스럽게 위기는 모면했으니 그냥 아는 동생이 찾아왔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요상했다. 눈동자를 굴려 보니 예상보다 그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조금 더 연기를 이어 갔다.

“어, 그래. 술 사 줄게. 우리 동생, 오랜만에 술 한잔 할까?”

“정말요? 와, 신난다.”

상찐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주변의 이목이 일제히 꽂힌다. 태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근처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던 건 딱히 자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상찐 때문이라는걸. 조금 안심도 되는 한편 씁쓸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눈 돌아갈 얼굴이긴 하다.

“그럼―.”

‘가자’라고 하려고 했다. 이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순간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눈앞에 선 상찐의 몸이 바짝 다가오는가 싶더니 태주를 꽉 끌어안는다. 그의 탄탄한 어깨에 얼굴이 닿자 머스크 향이 훅 끼쳤다.

“역시 형밖에 없어요.”

도와달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조금 과장되게 느껴져서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꼼짝을 안 한다. 오히려 몸에 힘을 주면 줄수록, 상찐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형이 최고예요. 사랑해요.”

낮은 목소리가 울림을 낸다. 하필이면 쥐죽은 듯 조용한 복도에 그의 음성만 남았다.

망했다. 아니 이 인간,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걸까. 상식적으로 세상에 어느 남동생이 형한테 ‘사랑해.’라고 말하겠는가.

낯이 확 뜨거워졌다. 거울을 안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볼이 화끈거린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한 소문만 나게 생겼다. 태주는 있는 힘껏 상찐을 밀어내었다. 아까보다는 쉬이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리라.

“가자, 가! 저 먼저 퇴근합니다.”

근처에서 괜스레 서성거리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소리쳤다. 볼에 열이 오른 태주가 상찐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니, 사실상 도망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태주의 마음과는 달리, 상진은 점점 멀어지는 무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한 손은 태주에게 내준 채 다른 손은 허공에 휘젓는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흔들흔들, 아주 경쾌한 인사였다.

* * *

다 떨어져 가는 간판에는 이미 녹이 슬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이 초라해 보인다. 두 사람은 개미 한 마리 없는 가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주인이 선홍빛의 고기를 쟁반에 담는다. 학교 급식에서나 쓸법한 배식 쟁반에 상추며 깻잎, 쌈장과 마늘, 부추무침이 올라왔다. 보기에는 초라했지만 꽤나 푸짐했다.

태주는 이 공간이 익숙하다. 오랜 세월을 말하듯 벽지에는 낙서투성이였고 목재로 된 테이블은 흠집으로 가득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드나들던 곳이었다.

“오랜만에 왔어, 왜.”

“바빴어요. 그런데 손님이 왜 이렇게 없어?”

“요즘 좀 한가혀. 그러니께 너라도 자주 와.”

두꺼운 돌판에 고기를 올리며 대화를 했다. 툭 던진 반가움에 살갑게 답한다.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태주는 잘 알고 있다.

태주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절, 여기서 신세를 졌었다. 그때도 할매는 무뚝뚝했다. 태주의 사정을 다 알고 나서 잠잘 곳도 내주었지만 대수롭지 않아 했다.

애새끼 몸 누일 곳 하나 마련해 주는 게 무어가 힘드냐며, 더럽고 지저분해도 잠자기에는 문제없을 거라고 했었다.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뚝뚝 떨구는 태주에게 왜 울고 지랄이냐고 그랬다. 어찌나 따스한 말인지.

그래서 태주는 이 할매를 자주 찾았다. 혹여 손님이 찾아오거나 회식을 할 때도, 그냥 오고 싶을 때면 꼭 이곳에 왔다.

“잘 아는 분인가 봐요.”

상찐이 말했다.

“우리 할매예요.”

“아, 친할머니?”

웬 호구조사람. 태주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뇨, 그냥 할매. 엄청 정 많은 우리 할머니.”

마침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서 상찐의 앞 접시에 올려놨다.

한상 가득 차려진 밑반찬과 된장찌개를 맛보니 마음도 위장도 풍족해진다. 별이 네 개나 달린 호텔 룸서비스와는 여러모로 다르겠지만 맛 하나는 뒤지지 않을 것이다. 태주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먹고 있었다. 정말 배가 많이 고팠는지 벌써 고기 한판을 벌써 해치웠다. 생각 외로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다. 딱 보기에도 곱게 큰 티가 나서, 이렇게 낡은 고깃집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술, 안 마셔요?”

“마실래요.”

“소주 가져올게요.”

초록색 병을 따자 특유의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른다.

일단 술을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얼마 전에도 과음하는 바람에 결국 필름까지 끊겼더랬다, 심지어 눈앞의 저 남자와 둘이 있었던 자리에서.

이번에는 절대 안 된다. 반드시 그때의 실수도 무마하고 컴플레인에 대한 것도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뭐해요?”

태주가 술병을 들고 머뭇거리자, 그가 냅다 낚아채 갔다.

상찐이 빈 잔에 술을 따른다. 투명한 잔에 위험한 액체가 가득 채워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을 앞으로 내밀어 태주의 것과 가볍게 부딪혔다. 짠― 맑고 고운 소리.

이미 이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참겠는가. 그래도 한잔 정도는 어울려 주는 게 예의이다. 태주도 그를 따라 술잔을 비워 냈다.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상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까지 상찐 님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고요. 제 이름은 알죠? 성태주.”

어찌 됐건 일을 좋게 마무리 지으려면, 일부분 정에 의지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운 정도 정이니까.

태주가 가방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상찐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안 줬던가. 그는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받아서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주에게는 대단할 거 하나 없는 명함인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으니 살짝 민망하다.

“이름, 안 가르쳐 줄 겁니까?”

벌써 두 번이나 물었지만 답이 없다. 상찐이 조금 뜸을 들였다. 꽤나 비싼 이름인가 싶었다.

“상진.”

짧게 뱉더니, 곧이어 말했다.

“계상진.”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정확히는 성씨를 듣자마자 왜인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계’라는 성씨의 사람과 안면이 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호기심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다가 그냥 두었다. 어릴 적 기억에는 그리 좋은 추억이 없었다. 끝에는 슬픈 기억뿐이다.

“계? 기역에 여이예요?”

“네.”

‘혹시 기역에 아이는 아니고요?’라고 말할 뻔했다. 아주 잠깐 개진상과 계상진이 비슷하게 겹쳐 보여서. 매우 농담이지만 괜히 미운털 박힐라.

“성이 특이하네요.”

“좀 그렇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느낌인데.”

“그래요? 잘 없을 텐데요.”

왜일까. 자꾸 예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 정확히는 직장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버지는 운전기사였다. 돈깨나 있는 집안의 운전기사.

말이 운전기사지, 그 집안의 여러 일을 도맡아서 하셨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단순히 운전만 하시지는 않았으니까.

그 당시 태주는 어렸고 태주의 여동생도 어렸다. 어머니가 안 계셨기에 아버지의 직장, 그 집 근처에 살아야 했다. 그래야 아버지가 오며 가며 우리를 봐줄 수가 있어서. 그래서 태주도 좋으나 싫으나 자연스레 그쪽 식구들과 얼굴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다 옛날 일이지만.’

소주가 쓰다. 방금까지는 달았는데 갑자기 텁텁해졌다. 빈 소주잔을 내려놓고 고기를 한 점 집었다.

“뭐야, 왜 혼자 마셔요.”

이어 상진의 잔이 비었다. 그는 한입에 술을 삼켜 버리고 빈 잔에 술을 다시 가득 채웠다.

“그냥요. 갑자기 추억 생각나서.”

“무슨 추억인데요?”

“아무것도 아닌 추억이요.”

솔직히 말하자면, 친했었다. 또래의 친구도 있었고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형도 있었다. 그리고 어린 동생도. 그 집안은 아들만 세 명이었고, 태주네 집은 태주와 어린 여동생, 둘이었다.

태주의 동생은 참 착하고 귀여웠다. 어린 것이 똘망똘망해서 주위 어른들이 무척이나 예뻐했었다. 아무래도 그 집은 아들만 셋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그랬던 것 같다. 태주도 동생, 현이를 잘 보살폈고 남매 사이의 우애가 좋았다.

물론 그건 어릴 때의 이야기이고, 왜 다들 어린 시절에는 남매든 형제든 우애가 좋지 않은가. 만약 현이가 태주만큼 컸다면, 혹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보냈다면 매일같이 싸웠을지도 모르겠다.

“또, 또 혼자 마신다.”

옛 생각이 나니까 자꾸 술이 들어간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따르고를 반복했더니 알딸딸했다. 이래서 추억이 안줏거리가 되면 위험하다, 여러모로.

상진이 태주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그의 입술 끝이 아래로 떨어지며 불만을 표한다. 그러고 보니, 현이가 살아 있었으면 딱 이 녀석 정도의 나이겠네.

“상진 씨는 몇 살이에요?”

“저 스물세 살이요.”

“와, 어리네. 애기네, 애기.”

“참나, 누구보고 애기래. 지금 그쪽이 더 애기 같거든요.”

어느새 연기가 자욱해졌다. 태주가 천장에 달려 있는 은색 후드를 잡아다가 돌판 가까이로 내렸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내 동생이랑 동갑이네.”

“동생이 있어요?”

“응, 엄청 예쁜 여동생.”

지금은 사진으로밖에 못 보지만.

“소개해 달라고 하지 마요.”

“안 하거든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픽 웃었다.

만약 현이가 그렇게 가지 않았으면 태주가 나서서 소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딱 봐도 얼굴도 괜찮고 집도 잘 사는 것 같으니까. 현이는 그 당시에도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을 좋아했었으니까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거다. 고 어린 게 아주 똑 부러져서 보는 눈이 있었지.

고기 다섯 판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 사이 술병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할매가 고기를 가져다 주면서 태주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이놈 새끼 술 좀 그만 처먹어.’라는 말은 옵션이었다. 등이 따갑고 간지러워 얼굴이 구겨졌다. 그렇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조금 칭얼대면서 볶음밥을 주문했다.

“상진 씨, 괜찮아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오늘따라 상진의 얼굴이 유별나게 붉었다. 사우나에 절여진 사람처럼 빨갛다. 지난번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실상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말이다.

“후.”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작은 한숨에 알코올 향이 섞여 있다. 아무래도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태주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만 갈까요? 집 어디에요, 데려다 줄게요.”

그러자 상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어 손사래까지 친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살짝 어지러워서.”

“저번에는 술 잘 마시더니,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인가.”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좀 마시긴 했다. 그래도 지난번에 마셨던 양주보다는 도수가 약할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이제 일어나요.”

“…….”

―쿵!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가방을 챙기려던 때였다.

테이블 위로 진상의 머리가 떨어졌다. 깨끗하게 손질이 된 상추 위에 놈의 이목구비가 파묻힌다. 바로 옆의 쌈장으로 떨어지지 않은 게 조금 아깝다.

“이봐요.”

태주가 진상의, 아니 상진의 몸을 흔들었다. 설마 기절한 건가? 등을 때리고 귀를 꼬집어 봐도 미동도 없었다.

“아니, 집이 어딘지는 알려 줘야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택시에 태워 보낸다고는 해도 집 주소를 알아야지. 이 인간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연락처랑 닉네임 정도. 이제 막 이름을 안 사이에 집 주소를 알 리가 없잖아.

요 며칠 계속 바빴어서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무작정 택시에 태우자니 이렇게 의식이 없는 인간을 혼자 보내기도 마음이 불편하다.

“이놈아, 그러게 술을 작작 마셨어야지.”

“아, 할머니. 아파요, 그만 좀 때려요!”

할매가 태주의 등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등까지 따끔거리고 쓰라리니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완전 억울했다. 이번이 두 번째 술자리였고 처음 같이 마셨을 때에는 퍽 잘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필름이 끊긴 건 태주였다. 저놈은 상태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다. 사실 생각해 보면 술을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다. 태주가 마시니 상진도 마신 거였다. 충분히 안 마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한잔 두잔 하다 보니 태주보다는 조금 더 마신 듯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의식을 잃을 정도였던가.

“미치겠네.”

태주도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럽다. 꿈쩍도 하지 않는 상진은 그대로 두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여기 어딘가 핸드폰을 두었던 것 같다. 상진의 것으로 보이는 핸드폰을 집었다. 어디로든 연락해서 데리고 가라 해야지.

역시나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지문인식이면 저 시체의 손가락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제발, 제발 지문인식이어라.

―패턴을 입력하세요.

“아, 진짜!”

짜증이 확 솟구쳤다. 아직도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진상 놈의 등짝을 갈겼다.

둘밖에 없어서인지 찰진 소리가 메아리라도 치는 것 같다. 꽤 아팠을 텐데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공기가 들락날락, 숨을 쉴 때 등이 더 팽팽해지기만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어떻게든 패턴을 풀어 보려고 했다. 실패였다. 30초 기다리란다. 혼자 열을 냈더니 취기가 더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있다가는 태주도 제 발로 못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얼른 집에 가. 뭐 하고 서 있어.”

“이놈이 안 일어나잖아요, 할머니.”

“네놈 집에 데려가야지 별수 있누.”

할매가 큰 쟁반을 가져오더니 접시와 된장찌개를 치운다. 기다렸다는 듯 빠른 몸놀림이었다.

아, 야속해라. 태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이 상황을 타개할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 * *

“아오!”

태주가 진상을 내동댕이쳤다, 물론 침대 위로.

진짜 상진이 아니라 진상인 거다. 계상진이 아니고 개진상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다. 물론 태주도 지난번에 (아마도) 추태를 보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제 몸보다 큰 덩치를 엎고서 낑낑거리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다.

자차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다. 자동차도 없이 저 거구를 끌어안고 엎고 어깨에 둘러매어도 보고.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오는 한밤중에 말이다.

택시는 또 왜 그렇게 안 보이던지, 한참을 기다렸다. 주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큭큭 웃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참 잘 들리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찌저찌 집까지는 데리고 왔는데 태주의 꼴도 말이 아니었고 상진도 그랬다. 비가 와서 습한 날에 몸을 썼더니 온몸이 땀투성이. 게다가 상진은 내내 다리가 질질 끌려다녀서 무릎 아래의 바짓단과 양말이 초코 색으로 물들었다.

“일단 씻어야지.”

너무 찝찝했다. 최근 들어 습도가 최고점을 찍은 날이어서 그런가, 빨리 씻고 싶었다.

일단 저 생선 같은 놈은 그대로 침대에 걸쳐 두고 보일러를 켰다. 서랍장에서 속옷과 잠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 자식은 의식만 돌아오면 바로 집에 보낼 생각이니까. 어차피 저 진상한테 맞는 속옷도 없고, 입고 잘 옷도 사이즈가 틀려먹었다.

화장실에 욕조라도 있었으면 넣어두기라도 할 텐데. 원룸에 욕조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샤워부스가 있는 것만도 사치이지 않은가.

쏴아, 시원한 물이 전신을 적신다. 그만으로도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아직은 알딸딸하지만 깨끗하게 씻고 한숨 자고 나면 멀쩡해질 것이다.

아, 아직 컴플레인에 대한 부분은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상하게 상진을 만나면 자꾸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지난번엔 그가 이야기를 했고, 이번에는 뭐에 홀린 듯 태주가 툭툭 털어놓았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고 속옷과 잠옷을 입었다. 저놈이 일어나면 컴플레인에 대한 것도, 이 잠옷에 대한 이야기도 물어볼 생각이다. 역시 찜찜한 건 딱 질색이니까.

“씻었어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상진이었다. 그는 언제 취했냐는 듯 매우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며 방 안을 관찰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뭐야. 벌써 술 깼습니까? 아주 인사불성이었는데.”

“침대에 얼굴을 세게 박아서 그런가 봐요.”

“어, 큼. 뭘 또 세게 박았다고…….”

침대로 던지다시피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분명 입장이 바뀌었으면 상진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머쓱한 마음에 태주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다가간다.

“저 좀 씻을게요.”

“뭐?”

“바지도 엉망진창이고. 갈아입을 옷 있어요?”

“뭐??”

아니, 집에 갈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자, 잠깐. 설마 자고 갈 생각은 아니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는데 집에 보내려고 했어요? 와, 태주 씨. 너무하네요.”

진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태주의 서랍장을 열었다. 그 안을 뒤적이며 말을 잇는다.

“우리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도 있고.”

태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뻔뻔할 일인가.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이에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는 남의 서랍장까지 뒤지고 있었다, 저놈이.

“뭘 찾아요.”

“수건, 속옷, 걸칠 옷?”

“그쪽 사이즈에 맞는 게 없다고요. 제품에 대한 건은 일단 다음에 다시…….”

제품이며 잠옷이며,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물론 제품 건은 급한 사안이긴 했으나, 그와 연락처도 교환을 했고 회사에는 해결된 것처럼 둘러대 놓았으니 시간벌이는 한 셈이었다. 혹시나 오늘처럼 상진이 회사까지 찾아오지만 않으면 말이다.

“왜 이렇게 다 작아요?”

태주의 속옷을 자기 가랑이에 대보며 그가 말했다.

“악! 당연히 작지! 당신이 어지간히 커야지, 이 진상아!”

홍당무 친구가 된 태주가 속옷을 획 뺏어들었다. 얼마나 뒤져 놓았는지 곱게 개어 둔 속옷들이 흐트러졌다.

“아, 제가 덩치가 좀 크긴 하죠.”

진상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저 뻔뻔한 낯짝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내고 달래 보았다.

“상진 씨한테 맞는 속옷도,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냥 벗고 있죠, 뭐.”

그렇게 말하고는 말릴 새도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연이어 물소리가 들려온다. 씻는 모양이다. 태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

덤벼도 상대조차 되지 않겠지만,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 주고 싶다. 저번보다 살짝 친근해졌는데, 그에 비례해 한층 더 밉살스러움에 넉살까지 더해졌다.

그가 나올 동안 시원한 물을 따라 마셨다. 혀에 아직 알싸한 술맛이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가실 것 같다. 몸과 머리의 열도 식힐 겸 보일러의 온도를 조금 낮췄다. 도시 가스비가 걱정이 된 건 절대 아니다.

“수건 잘 썼어요.”

상진이 나왔다. 싱크대 아래에 있는 작은 세탁기 문을 열더니 제 바지와 양말, 옷가지들을 던져 넣는다. 그 행동을 황당한 눈으로 태주가 바라보았다.

“왜요? 아, 빨래 있으면 줘요. 내일 같이 돌리게.”

“내일?”

태주는 기가 찼다.

“네. 지금은 너무 늦어서 세탁기 돌리면 민폐 아니에요?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에 반해 상진은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 순진한 얼굴에 자꾸 말리는 기분이다. 잘생기면 다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집에 안 가요, 진짜?”

“재워 줘요.”

“그리고 내일 세탁기 돌리면 대체 집에는 언제 가려고 그래요.”

“빨래 다 마르면?”

“나 주말에는 혼자 쉬고 싶다고요.”

“혼자 있지 말고 나랑 놀면 되겠네요.”

한마디를 안 진다. 저 뻔뻔한 언사에 혀가 내둘러졌다. 태주는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조차 없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머리 아파요?”

태주가 손을 이마에 대자 그가 곁에 앉았다. 걱정스러운 어투였다. 그의 손이 태주의 손과 겹쳐졌다. 아주 다정했다.

그런데.

“……아래는 좀 가리지?”

손은 다정한데 아래는 그렇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성기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속옷이 안 맞아서요.”

“그럼 이거로라도 둘러요!”

예전에 사 두었던 비치 타올을 서랍에서 꺼내 그의 얼굴로 던졌다.

저거 사 놓고 한 번도 안 쓴 건데, 설마 저놈 아래 가릴 때나 사용하게 될 줄이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저 변태, 역시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점점 취기가 올랐다. 요 며칠 피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 진상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차츰 시각도 촉각도 청각까지 둔탁해졌다.

나른해지는 몸을 더 늦기 전에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맥주가 생각이 났다. 아무래도 술에 완전히 취하기 전에는 오늘 밤 편히 자기 그른 듯해서였다.

“앗, 차가워.”

순간 볼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태주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여기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캔 맥주였다.

“마시고 싶을 것 같아서요.”

마음이 읽힌 것 같았다. 상진은 태주에게 맥주를 건네주고, 다른 하나를 까서 마시고 있었다. 방금까지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던 놈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술 더 마셔도 돼요? 아까 정신 못 차렸잖아요.”

“아, 그거. 저 사실 소주 알레르기가 있어서.”

“소주 알레르기?”

그런 알레르기도 있나. 술이면 술이지, 소주일 건 또 뭐람.

어째 영 수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이제는 미뤄 둔 난제의 정산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불을 껐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작은 TV만 켜 있다. 일반 컴퓨터 모니터 크기의 화면에서 벌거벗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스토리 안에서 움직였다. 차근차근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분위기가 고조된다. 태주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 아앗, 아! 더요, 더!

상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위가 어두워서 그의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그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주는 침대 위에 앉아 있다.

―기, 깊어. 너무, 앗!

―탁, 탁, 탁.

돌겠다, 정말.

한창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을 청소년들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그때 영상 속 여성의 허리가 휘었다. 다소 과격한 행위 속에 그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붉어졌다.

“아직?”

태주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란한 신음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는 동안, 벌써 맥주 세 캔을 비웠다. 아마 상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언제쯤 끝이 날까.

‘있었던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해요.’

‘아니,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게 아니라. 앞으로 악성 덧글을 달지 않겠다고 여기에 사인만 해 주면…….’

‘이러려고 오늘 저 술 사 준 거예요? 계획적이시네.’

‘이봐요, 솔직히 우리 제품 때문에 발기부전이 생긴 건지 확실히 증빙할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진짜 발기부전인지도 알게 뭡니까.’

‘만약 진짜면 어떡하시려고요. 보여 드려요?’

조금 언성이 높아지는 바람에 ‘그래요, 어디 봅시다!’라고 소리친 것이 화근이었다.

가지고 있는 야한 동영상이 없어서 영상 서비스 결제까지 하고 말았다. 피 같은 내 돈! 이런 시답잖은 일에 돈을 쓰게 되다니. 태주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딱히 계획적으로 미리 서류를 준비한 건 아니었다. 애당초 그가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었고 말이다. 그저 대비 차원에서 작성해 두었던 서류의 여분이었다. 마침 집에 있었기에 건네 줬고 일부러 술을 먹이지도 않았다.

외려 치밀한 것은 상진 쪽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태주의 서류를 낚아채 글을 써 내려갔다.

[―만약 계상진, 이하 갑의 성기능장애가 확인될 경우 성태주, 이하 을은 갑의 성기능장애가 치료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성심성의껏 돕는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갑은 피해 보상 및 손해 배상 등의 법적 청구를 할 권리를 가진다.

―반대로 갑의 성기능장애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추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갑은 을에게 지금까지의 물질적 피해 보상 및 정신적 피해 보상을 일괄 지급한다. 이 피해 보상 금액은 을이 지정할 수 있으며 갑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성기능장애의 확인은 본 서류에 날인 후 1시간 이내로 정한다.)]

추가된 두 개의 단서에 태주의 시선이 꽂혔다.

피해 보상 금액을 지정할 수 있다니, 아주 과하게 부를 일은 없겠지만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지막 괄호 안의 조건을 지적하자 상진은 ‘그럼 24시간, 아니면 몇 개월 동안 내내 자위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본인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뭐, 일리가 있는 것도 같았다.

사실 태주는 이미 두 번째 단서를 본 순간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킁킁, 갑자기 서류에서 돈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상진은 돈깨나 있는 집 자제 같았다. 피해 보상 금액의 한도를 정하지 않았으니 여차하면 꽤 크게 받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인 태주로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향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앞다투어 사인을 했다.

―앗! 아앙! 좋아, 하아!

―탁, 탁, 탁.

어느새 영상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주 희한한 자세로 성행위를 이어 가던 남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슬슬 끝이 날 때가 되었다.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상진은 미동도 없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영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손도 쉬지를 않았다. 시야가 어둑했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삐걱.

오래된 침대가 한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스프링이 휘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상진이 침대 위로 올라와 있었다.

“책임져요.”

화면은 이미 암전되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콧날과 입술, 그리고 눈동자만 선명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묻어난다.

그가 태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플 정도로 눌린 손목을 자신의 쪽으로 당긴다. 축 늘어져 있는 무언가에 손끝이 닿았다. 태주가 흠칫 숨을 들이켰다.

“마, 말도 안 돼.”

“당신 탓이에요.”

“일단 불을 켜고 다시―.”

“그러니까 책임지세요. 성심성의껏.”

물컹한 것이 겹쳐진다. 그것이 그의 입술이라는 걸 분간하기도 전에 혀가 밀고 들어왔다. 뒤늦게 입술을 닫아 보지만 한번 들이친 것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안을 촉촉이 적신다.

“―읍.”

상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태주에게 다가왔다. 그가 다가섬에 따라 점점 태주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어떻게 보였을까.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웠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방금 썼던 계약서의 내용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태주는 이 현실에서 회피하려는 것처럼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쉬이 뿌리쳤고 도리어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상진의 엄지와 검지가 태주의 턱을 꽉 잡아 눌렀다. 고개를 움직이기 힘든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힌다.

이어 그의 입술과 태주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서로의 타액으로 잔뜩 젖은 안이 난잡하게 뒤엉킨다. 고요한 방 안에 습한 소리가 가득했다. 태주는 그 소리마저 참기 힘들었다. 격정적인 행위에 아래가 지끈거린다.

“하아.”

긴 입맞춤 끝에 짧게 숨을 고르더니 태주의 턱을 잡았던 손을 내렸다. 단단히 묶인 밧줄이 없어져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곧바로 상진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더니 다시 포개어진다. 상진은 태주를 끌어안으며 그의 양팔이 제 목을 두르게 했다.

“으읍, 읍……!”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더 훑을 곳도 없을 만큼 가득 들어찬 살덩이가 뜨겁다.

태주는 헉헉, 호흡을 가까스로 이어 가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안쪽의 여린 점막을 물어뜯어 삼킬 기세였다. 살짝 겁이 나 고개를 뒤로 무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그가 드나든다. 태주는 그가 자신을 갈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 그것이 싫지 않았다. 늘 목을 매는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순간적인 쾌락이 비어 있는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마치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읍, 그, 하아, 그만…….”

태주가 고개를 획 돌리자 입맞춤이 멎었다. 덕분에 잠시간 호흡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섰네요.”

갈수록 태산이다.

그의 손이 태주의 아래를 쥐었다. 얇은 바지 위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어두워 다행이다. 키스 한 번으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태주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허공을 보며 답했다.

“……그, 그거야 아까 영상도 봤고.”

“그리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국부로 집중되는 강한 압박감에 몸이 일순 수축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손길이다.

“윽! 아, 아파요.”

“영상도 봤고, 또.”

널찍한 허리 밴드가 벌어지더니 그 안으로 무언가가 훅 들어왔다.

태주가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태주의 바지와 속옷을 단숨에 내렸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에 걸린 천 조각들을 완전히 벗겨 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또?”

상진이 대답을 종용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 태주를 가만 내려다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그림자가 속눈썹 아래로 내려앉았다. 묵직했다, 그 존재감이.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지만 쉽게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머무르던 그림자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아래를 다시 짓누른다. 완전히 노출된 성기를 그가 쥐었다. 그의 넓적한 손바닥이 기둥을 감싸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앗, 잠, 잠깐……!”

태주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손길을 피하려 허둥지둥 허리를 뒤로 물렀으나 딱딱한 벽에 막히고 말았다. 고요한 가운데 태주의 신음성만이 가득하다. 밭게 올라오는 호흡을 숨길 여력이 없었다.

“하아, 읏, 으윽―.”

상진은 태주의 것을 집요하게 유린했다. 억센 손아귀로 꾹 눌러 잡다가 태주의 몸이 부르르 떨릴 즈음 풀어주었다.

삭제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좀처럼 쉬지 않았다. 그는 태주가 아파 하기를 바랐다. 고통과 통증으로나마 그곳에 제 흔적을 남기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듯이.

“앗! 아흑!”

“빨리 말해 봐요, 응?”

“흣, 으응. 아, 안 돼…….”

“영상 때문에 꼴린 거예요? 아니잖아요.”

이 미친 새끼!

태주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이미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벽에 비벼진다. 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태주는 생각했다.

허나 겨우겨우 쥐어 짜낸 의식의 끝자락은 갈무리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타는 듯한 아래의 통증과 더불어 머리끝까지 치솟는 쾌락. 그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푼 성기에, 그 끝에 열이 몰린다. 들썩거리는 제 허리를 멈추기 버거웠다. 그의 손길에 따라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 움직였다. 교미를 갈망하는 동물처럼.

“대답해요.”

“아읏!”

축축하게 젖은 분출구를 그가 콱 짓눌렀다.

그의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투명한 액체가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아, 조금만. 조금만 더, 제발. 머리에 가득 찬 사고가 의식을 거치지 않고 입으로 터져 나왔다.

“흑, 아, 으응, 더, 더. 잠깐, 막지 마. 제발.”

“내 말 들어요.”

“흐윽, 읏, 아아. 만져줘, 아니―.”

“그래서요.”

방언이라도 터진 양 입에서 폭포가 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크게 부푸는 태주의 가슴께를 보며 입맛을 삼킬 뿐이다. 빨고 싶다. 혀로 핥고 물고 씹다가 빨갛게 부풀 때까지 입에 넣어 두고 싶다. 음습한 생각이 가득 찬 눈동자가 메말라 있었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욕정이 가학성을 부추긴다. 그가 다시 손에 힘을 주어 성기를 압박했다. 이제 머지않았다, 그는 결국 뱉을 것이다. 원하는 답을.

“윽, 조, 좋았어요……. 좋아서…….”

“그러니까 뭐가요.”

태주의 허벅지가 마주 붙었다. 이 아슬아슬한 선을 넘으면 실금이라도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바짝 긴장한 채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키스. 키스가.”

틀어 막힌 분출구가 비스듬히 열리려 했다.

“기분, 좋아―.”

결국 말을 채 뱉지 못하고 입 안에 도로 삼켜야 했다. 상진의 입술이 다시 포개진 탓이었다.

그가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며 아래를 압박하던 힘을 푼다. 벌어진 틈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혀와 혀가 뒤엉키며, 가려진 욕정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태주의 다리 사이가 한껏 젖는다. 비릿한 냄새가 침대 시트와 상진의 다리까지 적셨다. 이미 힘을 잃은 허벅지는 그것을 가리지도 못했다. 그저 부르르 떨었다. 마지막 한 방울마저 내보낼 때까지.

“흐읏, 아, 안 돼…….”

연한 회색의 침대 시트가 잿빛으로 젖어들었다.

스멀스멀 번지는 새벽 안개처럼 느린 선이 그려진다. 어둠이 삼킨 방 안에서 태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지금 자신의 아래가 울컥거리며 토해 내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왜일까,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른다. 한번 열리면 다시는 닫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잘했어요.”

상진이 말했다. 그는 여운에 잠긴 태주의 몸을 끌어안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태주를 벽에서 떼어내 바로 눕힌다. 창백해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폭신한 베개에 태주의 머리를 뉘이고 제 몸을 가린 수건을 푼다.

정확한 위치에 조각된 근육을 따라 스르륵, 타올이 흘러 내려갔다. 굴곡진 복부가 드러나고 툭 불거진 장골 아래로 무겁게 늘어진 성기가 보인다.

“하.”

태주가 탄식했다. 미친, 진짜란 말이야? 진짜, 정말 저 새끼 발기부전이라고? 그 긴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행위가……. 남자에 취미가 없더라도 아주 살짝,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예상했다. 태주 역시 자신이 그의 손아래에서 사정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1시간, 지났죠.”

그가 검지를 치켜들며 건너편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밖이 아예 깜깜했으니까. 어느새 깔린 어둠이 빚을 완벽하게 삼켰다.

“미치겠네.”

“성심성의껏, 도우세요.”

“뭐?”

간단하게 통보한 그가 태주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는 한쪽 발목을 잡고 옆으로 벌렸다. 이에 반사적으로 다른 쪽도 벌어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내내 닫혔던 아래가 열리자 상진의 몸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와 태주의 아래가 맞붙는다. 축 늘어진 성기가 태주의 것에 툭툭 부딪혔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게 거대했다. 차라리 저런 건 발기부전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가 저걸 안에 들일 수 있겠는가. 그건 고문이자 학대였다.

“자, 잠깐만.”

그때 상진이 태주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몸 쪽으로 손을 끌어당기고는 제 것을 쥐게 한다.

“야, 진상, 아니, 상진 씨. 이러지 마요. 지금 당신도 나도, 술에 취해서 판단이 흐려졌어.”

“뭐가요?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사인까지 했으면서.”

“아니, 그렇긴 한데. 아,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정확히 진단을 받아 보는 건 어때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태주는 마치 어른들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이 나쁜 짓을 멈출 수 있다면 지금이어야 했다. 직감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상진이 말했다. 아주 짧고 굵은 답이었다.

아래를 훤히 내놓은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태주의 모습을, 그리고 이미 축축하게 젖은 침대 시트를 느릿하게 훑는다. 그는 이 난장판을 지긋이 눈동자에 담았고 그것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동공이 향하는 목적지를 따라 태주의 시선 역시 움직였다. 상진의 눈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그제야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의 답이 뜻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다.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이미 홍당무처럼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가 뜨거웠다.

“형 말대로, 우리 취했잖아요.”

입술만 꾹 깨무는 태주를 보며 상진이 입을 뗐다.

그의 어투는 어느새 다정해져 있었다.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무게중심이 기울었다. 삐걱, 싸구려 침대가 작게 운다. 태주의 얼굴에 상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취했으니까 시험해 봐요. 혹시 또 모르잖아. 내가 형한테는 설지.”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태주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눈을 마주하게 되면 그 어떤 변명도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되면 형도 좋고, 나도 좋은 거니까.”

두 사람이 서명한 문서가 팔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사각거리는 그 작은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려온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긴장이 더해졌다. 태주는 상진의 말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꾹 다물린 입술은 벌어질 기미가 없다.

“……그러니까, 한번 세워 봐요.”

어설프게 닿아 있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가 더 다가오면서 축 늘어진 양물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흠칫 놀란 태주의 손이 그것에서 멀리 떨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상진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에 손바닥을 짚고 머리맡으로 더 올라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나 이내 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윽!”

짧은 비명을 토했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커다란 손이 훅 들어왔다. 상진은 태주의 멱살을 쥐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베개로 퍽 내팽개쳤다.

말과는 달리 꽤나 거친 몸짓이었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가 떨어져 다친 곳은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도망친 거리가 헛것이 되었다.

“잠……!”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의 몸이 들어왔다. 상진의 허리와 골반이 틈새로 자리 잡아 다리를 오므릴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벌린 다리를 수습할 새도 없이, 트인 입술이 가려졌다. 뜨거운 입김이 안으로 파고든다. 부딪히듯 겹친 입술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혀가 드나들었다.

흐읍, 읍, 애처로운 신음이 가늘게 샌다. 두터운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팔을 휘저었으나 허사였다. 틈을 내주지 않는 그 사이로 물컹한 혀가 비비어진다. 입술이 맞닿았다가 살짝 떨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들렸다. 그 농밀한 음이 귓가를 달아오르게 한다.

“으읍, 음……!”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상진의 턱이 태주를 잡아먹을 듯했다. 다소 거친 입맞춤으로 숨을 쉬기가 버거워, 이번에는 그의 가슴께를 밀어냈다.

그러자 조금도 밀리지 않는 주제에 더욱 몸을 가까이 당겨 오는 것이 아닌가.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의 양물이 닿았다. 태주의 살갗에 그의 것이 비비어지더니, 동시에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타액까지 천천히 받아먹어야 했다.

그야말로 위도, 아래도, 엉망진창이었다.

“하아, 하아……!”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축축해진 입 안을 제 혀로 훑었다.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태주가 팔로 입을 가린 채 상진을 올려다보았다. 사위가 어두워 그의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태주의 허벅지 안쪽에 페니스를 비벼 대고 있었다.

“읏, 아……!”

“하아, 형…….”

입을 가리고 있던 팔에 상진의 입술이 닿았다. 넓적한 혓바닥으로 천천히 핥아 올리더니 입술을 묻고 옅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흥분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흥분 장애는 아닌 것 같은데. 충분히 성욕은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아래는 아직 그대로인 걸까. 도리어 놈의 것에 비벼지는 태주의 아래가 서서히 부풀고 있었다.

“그, 만……. 아, 하아…….”

“섰네요, 형은 또.”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부러워요.”

또 그가 말했다.

뭐가 부럽다는 걸까. 상진은 그의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정말 발기부전이라고 한들, 어리고 잘생겼고 키 크고 돈도 많은 놈이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자신에게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우스웠다. 태주는 그깟 발기, 안 되어도 좋으니 돈이라도 많고 싶었다.

“……정, 말 안 서는 거야?”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태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상진은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겠지. 그는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를 일이다.

“조금만 더 도와줘요.”

“야, 뭘, 지금.”

상진의 손이 태주의 것을 쥐었다. 이미 단단해진 기둥을 선단부터 서서히 쓸어 내려갔다.

파정할 때 쏟아 낸 액체들이 아직 묻어 있었다. 절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질척한 액체며 분비물이 손에 닿는데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들을 손에 묻혀 가며 기둥을 흔들었다.

“하아, 아읏, 으응……!”

“엄청 쉽게 서네요. 예민한가 봐요.”

탁, 탁, 마찰음이 거세어졌다.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아 보지만 한번 시동이 걸린 움직임은 잦아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이 양물을 감싸고 아래로 쭉 내려간다. 팽팽하게 부푼 고환을 손에 담고 만지작거리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만 호흡이 터져 나온다.

아래를 굴리던 손이 기둥을 타고 위로 훑어 올라갔다. 빳빳한 페니스에 모든 열이 몰린다. 태주는 신음을 감추려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선단의 움푹 팬 곳을 긁듯이 찍어 누르자 허리가 벌벌 떨리고야 말았다.

“으아! 앗! 아, 안 돼……!”

“아, 여기. 여기 좋아하죠.”

마치 태주의 몸을 속속들이 안다는 듯 그가 말했다.

이제는 아예 엄지로 그곳을 살살 긁고 있었다. 상진의 지문이 민감한 곳을 쓸어 댈 때마다 태주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한번 터진 신음을 감출 여력도 없이 머릿속에 별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상진은 그저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흐아, 앗, 나, 나와, 제발……!”

“괜찮아. 싸도 돼요.”

“하아, 싫, 안, 돼……. 아읏!”

태주는 급히 무릎을 오므렸다. 그의 손 안에서 굴려지는 제 것을 감추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 사이에 들어앉은 몸통 덕분에 힘을 주는 게 고작이다.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태주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상진의 팔을 꾹 쥐었다가 탁탁 내리치며 항복의 의사를 내비쳤다.

“왜 참아요. 결국 못 참을 거면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낮게 큭큭거리는 울림이 전해진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태주는 피가 터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차라리 아픈 것이 나았다.

그러나 한계까지 다다른 사정감이 이내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상진은 좀처럼 페니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참고 있는 태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선단 아래의 예민한 곳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움찔거리며 수축하는 태주의 아래를 기껍게 내려다보며 말이다.

“아흣, 으읏!”

목이 뒤로 확 젖혀지며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결국 이겨 내지 못하고 그의 손에 다시금 토해 내고 말았다.

뜨거운 정액이 상진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꽉 조여 있던 무릎이 힘을 잃고 푹 처졌다. 오래 참았던 터인지 온몸으로 피가 퍼지며 힘이 쭉 빠진다. 긴장했던 머리가 멍해진 느낌이었다.

“건강하네요, 성태주 씨.”

희멀건 정액을 손가락에 덕지덕지 묻히고는 그것을 태주의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손가락에 힘이 있었으면 딱밤이라도 먹였을 것이다. 어찌나 얄밉고 재수가 없는지, 기운 없는 와중에도 욕이 절로 나왔다.

“……읏, 이, 미친……. 닥쳐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획 돌렸다.

정말 너무 창피했다. 저놈의 손에 가는 동안 저놈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건지. 이건 그냥 성태주 원맨쇼 아닌가 싶었다.

“부끄러워할 거 없어요.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참기 어려웠을 테니까.”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

가시지 않은 흥분감으로 가슴께가 천천히 부풀었다가 사그라든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상진은 그 어떤 반응도 없었으니까.

회사에 말해야 할까. 이미 아무 문제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고를 해 두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그날 바로 잘리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깜깜한 미래에 한숨이 푹 나왔다.

“저, 저기…….”

“네, 왜요?”

어차피 이미 창피해진 거 끝장을 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까 서명한 내용대로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

“네.”

“회사에는 말하지 않으셨으면…….”

구겨진 자존심은 이미 내다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역시 대놓고 말하자니 얼굴 전체가 홧홧했다. 이 꼬라지로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 자신의 처지가 참 한심하다. 좀처럼 울지 않는데도 이번엔 눈물이 핑 돌았던 것 같다.

“글쎄요. 형이 잘 도와주면 생각해 볼게요.”

매정한 놈. 그냥 알았다고 하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데, 설마 이걸로 끝인 건 아니죠?”

“응?”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도와줘요.”

“뭐, 뭘…….”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지…….

“으앗!”

그 순간, 아래에 무언가 질척한 것이 닿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태주의 페니스를 타고 내려가 다물려 있는 공간을 더듬는다.

그가 태주의 주름진 입구를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 주변을 살살 문지르더니 곧장 정액이 묻은 손가락을 안쪽에 밀어 넣으려 했다.

강제로 벌어지는 감각에 소름이 후두둑 돋았다. 어정쩡하게 벌어진 다리를 어찌할 수도 없이 태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술에서는 비명이 꽥 나왔다.

“지, 지금 뭐!”

몸을 펄쩍 뛰며 상진을 밀어내려는 태주와는 달리, 그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마치 이전에도 이런 일을 해 봤던 사람처럼.

“조용히 해요.”

그가 낮게 읊조렸다.

“아니, 그, 윽……!”

태주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입을 떼려던 그때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마치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 손가락이 단숨에 꽤 깊은 곳까지 침범했다. 축축하게 젖은 살이 안을 더듬는다. 한껏 예민해진 몸이 그 세세한 감각까지 찾아내었다. 알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음에도.

“싫, 아, 윽……. 이, 상해…….”

“긴장 풀어요, 태주 씨.”

한번 뚫린 구멍은 더는 침입을 막지 못한 채 차근차근 안을 점령당했다.

상진은 태주의 정액을 그 안으로 밀어 넣고는 빠듯한 입구를 천천히 벌려 대었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으나 태주에겐 버거웠던 모양이다. 긴장으로 굳은 다리가 달달 떨렸다.

상진이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이전에 호텔에서와는 매우 다른 반응이었다. 오히려 다리를 벌리고 유혹하던 그 모양이 떠올라서 아래로 열이 훅 몰린다. 상진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힘 빼요.”

“……흣, 윽……. 아, 그만…….”

허벅지 안쪽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긴장으로 잔뜩 수축한 터라 허벅지부터 둔부까지 꽉 조였다.

상진은 그 기분 좋은 압박감을 즐기는 중이었다. 힘을 꾹 준 채 바들거리는 태주가 작은 동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아래를 매만졌다. 조금의 틈이라도 내주면 ‘그때의 기억’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형, 괜찮아요.”

뻑뻑한 아래에 손가락이 푸욱 밀려 들어갔다.

겨우 입구만 깔짝거리던 손끝이 내벽 안으로 푹푹 쑤셔 넣어진다. 태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함부로 침입한 그것들을 밀어내려 둔부에 힘이 꽉 들어간 것이다. 침대 시트에 딱 붙어 있던 허리가 들썩거렸다. 고통도 쾌감도 아닌 기묘한 감각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다.

“흐읏, 아윽……!”

뜨거운 장벽이 통로를 좁혔다.

그러나 더는 무리였다. 몇 개인지 모를 형태가 안을 이미 꽉 채우고 있다. 태주는 가빠지는 호흡을 숨기지도 못하고 도리질을 쳤다.

툭 터진 입술 사이에 곧 상진이 다가왔다. 그는 아래에 제 손가락을 푹푹 쑤셔 넣으면서도 태주의 입술까지 핥아 대었다. 말랑한 입술이 입꼬리에 마주 붙었다가 안으로 파고든다. 퍼즐을 맞추듯 조각이 꽉 맞추어졌다. 이어 역시나 쪽, 쪽, 안을 빨아 댄다.

“흐읍! 으응……!”

덕분에 위도 아래도 화끈거렸다. 점막과 살갗을 통해 들어오는 자극들은 태주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달려드는 그의 입술을 겨우 받아 낼 즈음엔 어느새 아래가 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 흠칫 놀라기가 무섭게, 손가락이 내벽 안의 불룩한 곳을 꾸욱 쑤셔 대었다.

“으읏! 아!”

절로 몸이 들썩거려 맞붙은 입술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태주는 감았던 눈을 뜨고 알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처음 느끼는 자극이었다. 순간적으로 위험하다고 느꼈다. 침으로 범벅이 된 입 안에서는 쉴 새 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으, 응, 아니, 아……!”

“그렇게 좋아요?”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찌걱찌걱 이상한 소리가 새었다. 누구의 안에서, 누가 내는 소리인지 믿고 싶지가 않다. 태주는 상진의 팔을 붙들고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다.

“좋으면서.”

몸을 위로 올리려 버둥거리자 상진의 몸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던 것 같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왜인지 상기된 듯 휘어진 눈꼬리가 보였다. 가늘게 그늘진 낯빛이, 군데군데 명확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덕분에 쉬이 알 수 있었다.

다시 그의 손이 안으로 파고들며 어딘가를 집요하게 눌러대었다. 찐득하게 달라붙는 손길이 느껴질 때면 허리 아래에 찌릿찌릿 전기가 일었다. 태주는 헉,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비틀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안에서 그를 밀어내려는 움직임은 도리어 그의 손을 강하게 삼켜 갔다. 마치 쪽쪽 빨아 대듯이.

“하아! 읏. 아, 그만……!”

어느새 개수가 늘어난 손가락들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역시나 곱게 자란 티가 나는 그런 손가락이었던 것 같다.

그것들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내벽을 훑으며 안을 벌렸다. 여태껏 벌어질 일이 없었을 구멍이 그가 이끄는 대로 안을 넓히고 좁혔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던 듯 몸이 파르르 떨린다. 이후에 있을 일을 기대하는 것만 같았다.

“벌써? 빠르네요.”

흥분감에 곧추 세워진 태주의 것 위로 투명한 액이 맺히고 있었다.

더 가고 싶지 않은데, 야속하게도 이미 몸은 달아오른 채였다. 태주가 침대 시트를 손으로 꾸욱 쥐었다. 눈을 감고 복부에 힘을 준다. 참고 싶었다, 저놈은 한 번을 가질 않는데 자신만 농락당하고 있었다.

“참지 않아도 되는데.”

“……흣, 시, 끄러워…….”

안을 휘젓던 것들이 쑤욱 빠져나갔다.

숨을 조이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탁, 긴장이 풀린다. 태주는 경직된 몸의 힘을 빼었다. 자연스레 트이는 호흡을 서서히 정리해 나가는 참이었다.

갑자기 양쪽 허벅지에 상진의 손이 닿았다. 그는 태주의 허리를 접듯이 허벅지를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이런 자세는 어릴 때 체육 시간 이외에 해 본 적도 없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질 즈음, 숨길 수도 없이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세워 달라고 한 건 나인데, 왜 태주 씨만 자꾸 세워요.”

태주의 말문이 턱 막혔다.

‘미친놈아, 네가 세웠잖아.’라고 하려다가 꾹 참았다. 그건 저 진상과의 입맞춤이며 스킨십이 좋았다고 인정하는 꼴이지 않은가. 사실 이쯤 되니 뭐가 뭔지도 알 수가 없다. 왜 자신이 저놈과 뒹굴고 있는지. 왜 이렇게 성적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 태주는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마 술 때문일 것이다. 아주 좋은 핑계였다.

꿀 먹은 사람처럼 대답이 없자, 주위가 고요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상진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아직까지도 축 늘어진 페니스를 제 손으로 쥐었다. 태주의 아래에 그 뭉뚝한 끝을 비비며 자세를 잡는다.

“하아…….”

의외로 태주는 더 반항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입술과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상진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더 저항해도 되는데. 삐뚤어진 욕구가 꿈틀거린다.

좀처럼 서지 않는 성기를 태주의 입구에 대고 문질렀다.

미리 먹어 둔 약이 과했던 걸까,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태주를 믿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슬슬 약 기운이 떨어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읏…….”

상진의 허리가 서서히 흔들렸다. 제 페니스를 태주의 입구 위에 걸치듯 올려놓고 천천히 비벼 대었다.

두꺼운 기둥이 입구 주위를 쓸었다. 뭉뚝하고 기다란 끝이 살갗을 스치고 올라가 태주의 고환을 건드리자 주름이 움찔움찔 미약하게 움직였다.

툭 터진 태주의 입술 안에서 뜨거운 공기가 새었다. 그는 더 이상 호흡을 숨기지 않았다. 살과 살이 맞붙을 때마다 옅은 신음을 흘린다. 그건 상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치미는 욕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후…….”

상진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미 그 끝에서 질금질금 액을 흘리는 태주의 것을 내려다보니 더욱 침이 마른다. 단전에 모이는 열기가 못내 뜨거웠다. 아래의 홧홧함을 달랠 길이 없어 몸이 타오르는 듯했다.

손으로 제 물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직 남은 약 기운 덕분에 그것은 제 크기를 찾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감각이 돌아오도록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끌 수는 없다. 태주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야 했으니까.

상진은 한 손으로 태주의 것을 매만졌다. 빳빳하게 선 그것을 흔들며 제 것과 마주 비벼 대었다. 부들부들한 피부가 마찰하자 태주의 몸이 움찔거린다. 그리고 아주 작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온기가 식어가는 몸을 달구는 중이었다.

“흐읏, 응, 으읏…….”

“하아, 하…….”

유연하게 흔들리던 허리가 멈추었다. 상진은 숙였던 상체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욕구가 치솟았다. 그의 안에 자신을 들이고 싶다는 음습한 욕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는 제 페니스의 밑동을 꾹 눌러 잡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다행히도 선단부터 앞 부근은 여물어 있었다.

기둥을 쥔 채 끝을 아래에 겨누었다. 잠시 몸이 떨어진 사이, 긴장이 풀린 태주의 구멍은 닫힌 지 오래였다.

상진의 허리가 앞으로 당겨진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푸욱, 둥근 앞부분이 닫힌 입구를 열고 밀려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태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악! 아, 아앗!”

완전히 서지 못한 페니스가 힘겹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구멍이 꽉 조여 오는 통에 끝까지 밀어 넣기가 힘겨웠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깊은 곳까지 박고 멋대로 허리를 흔들고 싶었지만. 상진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흐앗, 으윽, 아, 아파……. 아, 아윽…….”

“후, 힘 좀, 풀어요.”

뜨거운 살덩이가 아래에 채워졌다. 말도 안 되는 통증이 태주를 덮친다. 그 감각은 잔잔한 파도처럼 천천히 밀려와 이내 알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상흔 같은 고통이었다. 그는 서서히 잠식되는 몸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번 허락된 아래는 도통 잠기지 않았다. 뚫린 그곳으로 끝도 없이 파고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남아 있는 것일까. 태주는 덜컥 겁이 났다.

“아, 싫, 아앗, 빼, 빼 줘요. 아파, 제발.”

벌어진 다리를 버둥거리지도 못했다. 조금만 허리를 들어도 꽉 들어찬 그것이 사방을 짓눌러 대었다. 내장이 사정없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다. 압박감을 참지 못한 태주가 팔로 상진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하아, 엄살은.”

상진의 삐뚜름한 대답과 함께 페니스가 푸욱 박혔다.

한껏 예민해진 내벽이 기둥과 완벽하게 들러붙는다. 아주 작은 틈조차 없이 철썩 맞물린 안쪽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그는 조금은 어정쩡한 자세로 혀를 쯧 찼다.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양물의 밑동이 노출된 채였다.

“아, 안 돼. 잠, 하윽! 아!”

푹, 푸욱, 찌걱, 쯔걱.

귀에 담기도 부끄러운 소리들이 연이어 들렸다. 기둥이 구멍을 파헤치고 난잡해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미 축축했던 장기가 그의 양물을 꽉 조이며 겨우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기둥이 푸욱 박힐 때면 그것을 밀어내려 했고 쑥 빠지는 순간에는 찌걱거리며 빨아 대었다. 상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태주와는 달리 탄력을 받은 허리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흐윽, 제, 아파, 아윽! 싫어, 그만……!”

“하아, 하, 거짓말. 제대로, 서지도 못했는데.”

겨우 공을 들여 시작된 추삽질에는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태주는 울부짖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붉게 타오른다. 헉, 헉, 겨우 숨을 몰아쉬며 토해 낸 신음들은 살려 달라는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침대 헤드와 상진의 몸 사이에 가로막혀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마구잡이로 들이박는 그 흉기를 몸 깊숙이 들여야만 했다.

“흐윽, 하, 으읏! 빼, 빼 주, 으흑……!”

상진의 것은 너무나 버거웠다. 그의 말대로. 제대로 발기한 것이 아니라면, 원래는 어떻다는 말일까.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제 위에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이 흐린 시야로 보였다. 침대와 몸이 흔들렸다. 끼걱, 끼걱, 푹 꺼진 매트리스가 덜컹거린다.

태주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안으로 침범할 때면, 아래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양쪽으로 벌어진 둔부로부터 찌릿찌릿 전율이 올라온다. 처음 느껴 보는 쾌감이었다. 마치 삐죽삐죽한 송곳으로 저 깊은 곳을 푸욱푹 난도질하는, 뾰족한 극치감이 몰아친다.

“하윽! 응! 으읏!”

“형, 하아, 하…….”

상진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태주에게로 몸을 완전히 기대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그는 부드럽게 혀를 내어 핥았다. 열기로 인해 촉촉해진 살갗이 달다.

하나로 겹쳐진 무게감은 고스란히 태주의 몫이었다. 그는 상진에게 가려진 채 파르르 몸을 떨었다.

상진이 얼굴을 내리고 가까이 다가붙자 숨이 턱 막힌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틀어막힌 구멍 안이 저리다. 상진의 양물이 굴곡진 내장을 짓눌렀다. 어쩔 도리 없이 신음성이 터진다. 뻐근한 고통과 더불어 오싹오싹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숨 쉬어요.”

상진이 짧게 말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태주의 입술을 깨문다. 잘근 씹어 올리자 태주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깨끗한 목덜미가 희게 드러난다. 상진은 그곳에 혀를 가져갔다. 단 사탕이라도 되는 듯 천천히 핥아 대었다.

“……허윽, 으읏……. 으…….”

겹친 몸 사이가 축축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가 싶더니, 태주는 파정과 동시에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발끝까지 굳어 있던 긴장감이 풀려 몸이 축 늘어진다.

“…….”

이제 겨우 넣고 흔들었을 뿐인데. 상진으로서는 매우 아쉬울 따름이었다. 시체처럼 늘어진 태주의 몸을 손으로 훑는다. 어느새 뜨거웠던 체온이 식어 가고 있었다. 정말 죽은 것 같네, 상진이 속으로 되뇌며 웃었다.

맞물렸던 아래에서 천천히 제 것을 빼내었다. 태주의 정액으로 젖었던 살덩이 끝에 투명한 선이 딸려 나온다. 선단에는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꺼운 페니스가 다시 아래로 축 처진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치미는 짜증에 미간이 좁혀졌다.

차라리 지금처럼 의식이 없다면. 몸뚱이라도 가질 수 있을 텐데. 검게 가라앉은 상진의 눈동자가 태주의 흰 목덜미에 그대로 꽂혔다.

* * *

악몽을 꿨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의 장면들이 반복되는 꿈이었다. 마음대로 꿈에서 깰 수도 없고,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두 다리는 진흙 속에 푸욱 박혀 있었다. 눈꺼풀을 닫아도 그 안에서 또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그것은 잊을 만하면 느닷없이 찾아오곤 했다. 마치 절대 잊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 * *

“성 과장!”

“네?”

모니터를 응시하던 눈길이 떨어졌다. 태주는 자신을 부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아,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팀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태주를 빤히 응시했다. 털이 숭숭 난 미간이 꿈틀거린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 송충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네? 뭐가요?”

팀장의 고개가 태주의 모니터 쪽으로 돌아갔다. 툭 튀어나온 눈이 태주를 한 번, 모니터를 한 번, 번갈아서 본다.

어찌나 붕어처럼 눈이 큰지 어디에서 어디로 굴러가는지가 아주 잘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대로 태주 역시 팀장의 얼굴을 보았다가 자신의 모니터를 보았다.

“아.”

흰 바탕의 문서 파일에 아주 일관된 글자가 적혀 있었다.

ㅗㅗㅗㅗ

ㅗㅗㅗ고ㅗㅗ

소ㅗ

ㅗㅗ조ㅗㅗㅗㅗ

ㅗㅗ

태주의 시선이 모니터 안에 갇히자, 뒤통수에서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성 과장, 너 뭐해. 무슨 일 있어?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을 빼놓고 있지를 않나. ‘ㅗ’는 왜 저렇게 쳐 놨어. 나한테 불만 있냐? 욕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나 봅니다.”

“주말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고? 영 안색이 안 좋은데.”

“주말에…….”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왁, 깜짝이야.”

태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짝 붙어 있던 팀장이 슬슬 뒷걸음질을 친다. 태주는 팀장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어, 그, 그래. 삼십 분 후에 전체 미팅이니까 그전까지 들어와.”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구둣굽이 매끄러운 바닥과 부딪힌다. 길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비상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무도 없는 계단이 오히려 편했다.

온종일 동료들의 관심과 걱정을 한 몸에 받았더니 피곤하다. 하기야 늘 웃고만 있던 인간이 내내 죽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궁금할 법도 했다만.

―끼익.

닫혀 있던 철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느껴져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바짝 말랐던 목구멍에 공기가 들어간다. 태주는 한층 경쾌해진 표정으로 양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 씨발, 개새끼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네모난 건물 사이로 메아리가 쳤다. 끼야, 끼야, 끼야……. 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진다. 너무 크게 고함을 쳤나, 목이 칼칼하게 아팠다. 비릿하게 피 맛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많이 부었던 모양이다.

“하아…….”

한 번 소리를 지른 정도로 목이 이렇게 상했을 리가 없었다. 태주는 지난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목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 원인은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개진상 개새끼.”

이가 으득 갈렸다.

나쁜 새끼. 개새끼. 그놈과 뒹굴었던 그날 밤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자질 못 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남은 거라곤 서명한 서류 한 장과 엉망이 된 침대. 벌거벗은 제 몸뚱이뿐이었다. 그놈은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고자 새끼. 발기부전 새끼.

허우대만 멀쩡했지 속 알맹이는 영 못쓸 놈이었다. 자기 좋을 대로 남을 이용해 먹고는 튀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놈만 떠올리면 아직도 허리며 아래가 지끈거린다.

그 망할 하룻밤 때문에 이쪽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몸은 여기저기 다 쑤시고 아픈 데다가, 침대 매트리스는 한쪽이 푹 꺼져 버렸다. 지갑 사정이 빈약한 터라 값싼 제품을 샀다고는 해도 십 년간 큰 문제는 없었는데. 이제는 침대에 누우면 삐거덕삐거덕하는 건 기본이고 누웠을 때 수평이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뿐이랴. 소중한 침대 시트와 이불도 전부 찜찜해졌다. 비록 태주 자신이 내보낸 체액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젖은 적이 없었으니까.

떠올리자니 새삼 더럽다. 결국 귀중한 주말에 코인세탁소까지 갔었다. 쑤시는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겨우겨우. 너무 속이 상했다.

―드르륵.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태주의 손가락이 급히 화면을 툭툭 친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확인하자, [늦지 않게 내려와.] 팀장의 연락이었다.

“후…….”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든다. 눈치 없게 덜컹대던 심장 박동이 금세 차분해졌다. 착 가라앉은 기분에 술 생각이 난다.

‘실망? 아니, 왜 실망을 했지. 뭘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 이후, 상진에게서는 연락조차 없었다.

꼭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의 도리라는 게 있지 않나. 애당초 따지고 보면 태주가 그놈을 고자로 만든 것도 아니고. 회사에 거짓말을 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잘 무마하려다 보니 이 지경이 되었다.

이런 걸 자충수라고 하는 걸까.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솔직하게 보고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입 안이 씁쓸해졌다.

코끝이 쌀랑해질 무렵, 옥상에서 내려갔다. 자리를 그리 오래 비우지도 않았는데 사무실은 갑자기 분주해 보였다.

“책상은 왜 옮겨요?”

팀원들이 태주의 자리 바로 옆에 책상을 하나 붙이고 있었다.

“아니, 파티션은 또 왜 해체합니까?”

원래 책상 양쪽에 파티션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쪽이 사라졌다. 방금 붙인 책상 때문인 것 같았다. 자리는 충분해 보이는데.

“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무슨 일입니까? 제 옆자리에 누가 와요?”

“신입 직원이 온다고 하던데요, 과장님.”

“신입?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갑자기요?”

“저희도 팀장님께 전달받기만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책상도 여기에 놓으라고 하셨고…….”

“파티션은 왜 떼요?”

“아, 신입이 업무 배우려면 과장님 모니터가 잘 보여야 할 것 같다고 하셔서요.”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 소리 없다가 갑자기 신입이라니. 그리고 왜 신입 교육을 과장이 하냔 말이다. 신입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건, 직속 사수가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누가요?”

태주가 조금 날카롭게 되물었다. 평소라면 웃으며 물었겠지만 오늘은 그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자 최 팀장이 서 있었다.

“팀장님. 저는 처음 듣는 내용인데요. 오늘 신입이 출근합니까? 게다가 아침도 아니고 이 오후 시간에요?”

“어, 그렇게 됐다. 오늘 첫 출근이니까 성 과장이 잘 가르쳐 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팀장님.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굳이 이렇게 바로 옆자리에 배치해야 하나요? 메신저로도 충분히…….”

솔직히 싫었다.

파티션을 치우는 것도 불편한데 책상까지 붙여 버리고. 업무에 바빠서 인터넷 서핑도 잘 못하는데 그 와중에 신입도 가르쳐야 한다니.

태주가 평소답지 않게 불만을 토로하자 팀장이 난색을 표했다. 지저분한 눈썹이 꿈틀거리며 말을 잇는다.

“성 과장, 마음은 알겠는데 이번만 넘어가자.”

그의 손이 태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위로와 격려의 의미를 담은 몸짓이었지만 아직 태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덕분에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태주로서는 너무 불편한 분위기였다.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것은 딱 질색이다. 내가 뭐라고. 나 하나 때문에 이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봐야 한다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로 내려간 시선 안에 어수선한 책상이며 컴퓨터, 주변기기들이 들어온다.

그래, 뭐 어쩌겠어. 사회생활이 다 제 마음 같을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말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오밀조밀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화사하게 핀다.

하루 내내 어두웠던 태주의 낯빛이 밝아지자 모두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중단되었던 작업이 다시 시작된다. 중간 파티션 없이 딱 붙여진 책상은 꽤 크고 넓었다. 두 책상은 한쪽 구석, 그리고 맨 뒷자리로 옮겨졌다. 태주의 책상이 안쪽으로, 신입의 책상이 바깥쪽에 놓였다.

“그런데 너무 구석 아닌가. 그리고……. 팀장님하고 같은 라인이네요, 제 자리가 앞쪽으로 가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뭐 같은 라인에 있음 안 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팀장의 태도가 요상하게 관대했다. 팀 내 서열에 대해 끔찍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본인은 팀장이기 때문에 자리 배치를 할 때도 항상 맨 뒷자리, 그리고 그 앞자리 라인에는 과장이나 차장. 서열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면 칼같이 잘라내던 인물인데.

“아, 네. 혹시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자리야 옮기면 되니까요, 팀장님.”

“하나도 안 불편해, 하나도.”

하하 소리 내어 웃는 팀장의 뒤로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웬만한 컴퓨터나 집기들은 팀원들이 옮기고 있어서, 태주는 본인 책상 위에 있는 자잘한 것들이나 챙겼다.

텀블러, 충전기, 약통. 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쌓이다 보니 잡다한 짐들이 늘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님, 설치는 다 완료됐습니다.”

“네, 고마워요.”

어느새 자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뒤로는 바로 창문이, 태주의 책상 옆에는 벽이다. 거의 유배지 아닌가. 구석에 처박혀도 너무 처박힌 것 같았다.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하면 신입이 자리를 비켜 줘야 할 정도였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두 책상 사이에는 파티션이 없지만 신입 책상의 바깥쪽에는 파티션이 설치되었다는 거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 보장은 되려나. 이렇게 된 이상 신입하고 잘 지내는 수밖에 없다. 루팡도 가끔 해 줘야 숨통이 트이지. 그 정도는 서로 양해해 주는 방향으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다들 회의실로 갈 준비합시다.”

“네.”

“네―.”

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파일철에 서류를 몇 장 챙겨 넣고 태주 쪽을 흘끔 보았다.

“성 과장도 늦지 않게 들어와.”

“네, 팀장님.”

회의 시간에 늦은 적도 없는데 왜 저러지.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태주의 눈초리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팀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거슬린다.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마치 연극을 보는 듯했다.

* * *

자리마다 과일 음료와 간단한 간식이 놓였다. 무슨 미팅인지 공유를 받지 못해서 짐작만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리 심각한 이슈는 아닌가 보다. 꽤 널찍한 회의실 안에 팀원들이 금방 자리를 잡았다.

“모두 모였나?”

상석에 앉아 있던 팀장이 일어났다. 조금 경직된 표정의 그가 작게 헛기침을 한다.

“그동안 다들 많이 바빴을 텐데 묵묵히 잘 따라와 줘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우리 팀끼리 오랜만에 티타임도 가질 겸, 자리를 마련했어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좋다던데. 태주가 힐끔 주변 눈치를 보았다. 이 자리에 모인 다른 팀원들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모두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타임을 가져 본 적도 없거니와 티타임이라는 명목의 ‘갈구는 자리’ 혹은 ‘혼내는 자리’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들 편하게 음료도 좀 마시고, 과자도 좀 들어. 나만 이야기하니까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 하하.”

경직된 분위기를 느꼈는지 팀장이 웃으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넵.”

다들 작게 대답하며 음료를 홀짝 마셨다. 영 입맛이 없는 태주도 어쩔 수 없이 과자 봉지를 하나 뜯어놓기는 했다.

먹지는 않았지만. 늘 먹던 싸구려 과자를 보고 있자니 저번에 먹었던 호텔 룸서비스가 떠오른다. 진짜 맛있었는데. 언제 또 먹어 볼 기회가 있기나 할까. 그 개새끼와는 별개로 호텔에 대한 기억은 정말 좋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호텔과 그 개새끼에 대한 기억을 물리치는 동안, 티타임은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내며 적절히 맞장구를 쳤다. 회사라는 사바나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생존법 중 하나인 ‘아, 진짜요?’이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대화들을 물리칠 때 아주 유용했다.

“그래서 저번에 제가 성 과장님께 소개팅해 드린다고 했는데.”

“아, 진짜요?”

“‘진짜요?’라뇨. 과장님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생각해 보신다더니.”

“아.”

언제 대화의 흐름이 여기까지 왔었지.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기억하죠.”

“그럼 바로 날짜 잡을까요? 제 친구가 과장님 소개해 달라고 난리인데.”

“아, 음,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괜찮아요, 제 친구가 낯을 안 가려요.”

팀원 모두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쏠렸다.

개중에는 ‘성 과장님이 소개팅을?’이라는 눈초리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부럽다. 나는 소개팅 안 해 주더니.’, ‘과장님마저 애인 생기면 안 되는데.’라는 시선도 있었다.

이 회사에서 성태주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기의 대상, 또 사무실 안의 ‘시력교정인물’ 정도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려 보이는 외모도 한몫을 했지만 흰 피부와 단정한 스타일, 서글서글하고 고운 이목구비가 눈길을 끄는 탓이었다. 본인은 모르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예쁜 호구라거나 호구꽃이라고도 불렸다.

이 별칭을 질투 섞인 빈정을 담아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쪽에서는 진심을 담아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에서 저 정도 외모를 보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얼굴이 복지라는 우스갯소리도 팀원들의 입을 타고 돌았다. 물론 대부분은 놀리는 의미로 사용하긴 했지만.

“네? 과장님, 언제로 잡을까요? 부담은 갖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밥 한 끼 한다고 생각하세요.”

태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저번에 아주 에둘러서 거절했던 것 같은데, 상대방은 거절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살짝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여전히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겨우 마주하면서 살짝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곤란하다. 그런 자리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워 지금까지 소개팅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오늘 시간 어떠세요? 저 저녁에 그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과장님도 함께―.”

―벌컥,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회의실 안, 전원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태주로서는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순식간에 거둬진 관심에 막힌 숨이 뚫리는 기분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했는데요.”

한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팀원들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서 있는 남자의 키며 덩치가 워낙 큰 탓이었다.

―뭐야?

―신입직원? 설마? 오늘 온다던?

―웬일이야.

―미쳤다.

너무 놀라 얼어 버린 팀장은 제쳐 두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수군거리기 바빴다.

처음 태주가 입사한 날, 그를 보는 모두의 시선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훤칠한 그의 모습에 대부분이 조금 들떠 있는 듯했다.

“아, 아아. 어, 그, 우리 오늘 출근하기로 한 신입직원.”

팀장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가 신입직원을 돌아보며 하하 웃고는 조금 떨어져 앉은 태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자, 성 과장. 아까 말한 신입직원이니까 앞으로 잘 챙겨줘. 응? 아니, 표정이 왜 그래.”

태주는 신입직원을 보고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차츰 구겨지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상진이라고 합니다.”

끝내 가슴께에 모여 있던 숨이 툭 터진다. 홧홧한 열기가 한숨과 섞여 웃음으로 나왔다.

“하, 하. 아니, 하…….”

짧은 감탄사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닥쳤을 때 왜 말을 더듬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날 그렇게 내팽개쳐 놓고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주제에, 저 뻔뻔스러운 얼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눈만 끔뻑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하는 태주에게 상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과장님이시죠. 팀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 팀장이 태주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왜인지 뿌듯한 얼굴로 헛기침을 해 대는데 별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태주는 오로지 저 철면피 같은 인간만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과장님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진이 허리를 구십 도로 꾸벅 숙였다.

“야, 성 과장, 뭐해.”

“…….”

“인사받아야지.”

“…….”

태주의 입술 한쪽이 어슷하게 올라갔다.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아무 의도도 없는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가늠을 하기가 어려웠다. 태주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상진은 허리를 들지 않았다.

팀원들의 눈에는, 신입직원의 인사를 받지 않는 과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팀장이 손을 뻗어 태주를 툭툭 건드렸다. 그가 눈치를 살살 살피며 태주에게 연신 눈을 찡긋거렸다.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상진 씨.”

태주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그 잘난 얼굴에 띤 가증스러운 미소가 아주 기가 막히다. 이미 이 회의실 안에 있는 팀원들의 대부분은 그의 첫인상에 넘어간 듯했다.

그렇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인간이 남을 붙잡고 서는지 안 서는지 알아보자며 덮친 후에 도망간 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무슨 표정을 지을까.

티타임은 그렇게 어영부영 끝이 났다. 애당초 무슨 목적으로 가진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상진이 나타나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지만 태주는 영 불편했다.

“과장님, 부럽다. 나도 상진 사원 옆에 앉고 싶은데.”

“맞아, 성 과장. 나랑 자리 바꿀래요?”

“일하다가 지치면 성 과장님 자리 쪽 보면 되겠다. 피로가 그냥 풀리겠어.”

“성 과장님이랑 상진 씨랑 친해지면 좋겠어요. 다 같이 저녁 먹게.”

“저녁도 먹고 술도 먹고?”

“그것만 먹어요? 다른 건? 아, 실례, 하하하.”

사람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태주에게 짓궂게 굴었다. 남자고 여자고 부사수이고 사수이고 가릴 것도 없이 말이다. 늘 하하 웃어 준 것이 화근인 걸지도 모른다. 개중에는 티가 나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하하……. 다들 농담도…….”

이번에도 그저 웃어넘겼다. 태주가 가진 최선의 무기는 이런 종류였다. 조금 무례하거나 조금 불쾌하더라도 살살 웃어넘기곤 했다. 사내에서 싸가지가 없다느니, 고지식하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다. 태주는 가늘고 길게 최대한 오래 이 회사에 붙어 있고 싶었다.

“과장님.”

곤란한 농담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태주를 잡았다. 어깨 위에 올라간 손이 묵직하다.

“어, 상진 씨다.”

“상진 사원, 앞으로 잘 부탁해요.”

태주에게로 향하던 시선과 말들이 상진에게로 옮겨 갔다. 상진은 그들에게 가벼이 목례하고는 태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지만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만족해하는 듯했다.

둥그렇게 모여 있던 팀원들 사이를 헤집고 나갔다. 태주는 그저 상진의 뒤를 따를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확 밀치고 싶었지만, 회사 사람들 앞에서 무작정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어 사무실과 가장 가까운 비상계단으로 나가고 나서야 태주가 입을 열었다.

“뭡니까, 이거 놔요.”

상진에게 잡힌 손목이 욱신거린다. 어찌나 손이 큰지 제 손목을 감싸고도 남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손아귀 힘이 과하게 거칠다. 게다가 손이며 덩치, 전신이 너무 다 커서 한번 붙들리면 빼내기가 어렵…….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에 겹쳐졌던 몸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저릿하게 울리는 몸 안의 감각 때문에 태주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 갔다.

“……얼굴이 왜 그래요? 열이라도 있어요?”

그의 큰 손이 태주의 이마를 덮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게 보인다. 태주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설핏 보이는 다정함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능구렁이처럼 어딜 넘어가려고. 태주가 곧 그의 손을 떼어내었다.

“이봐요, 계상진 씨.”

“네, 형.”

어디서 친한 척이람.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형?”

“네, 성 과장님.”

“뭡니까, 대체.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 놓고 갑자기 신입사원?”

“말도 없이 사라져서 많이 서운했구나, 우리 형.”

상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환히 웃는 그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장난치지 마세요. 당신 때문에 주말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내 집도 지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무슨 피해?”

“이불하고 침대도 다 젖어 가지고 세탁해도 찝찝하고…….”

씩씩거리며 말을 잇는데 상진이 말꼬리를 탁 잘라먹었다.

“말은 바로 해요, 형. 그거 내 정액 아니고 형 정액이잖아요. 아, 살짝 실금도 했던가?”

“뭐, 야!”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황급히 막았다. 비상계단 쪽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듯이.

“또 뭐 피해받은 거 있어요?”

“그, 그리고 침대 매, 트리스도 망가지고…….”

“그거 원래부터 스프링 나갔던데.”

“아니,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요. 전에는 그래도 잘 수는 있었는데 이제는 누울 때마다 삐그덕거…….”

말을 잇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는 하소연밖에 되지 않는다. 따질 부분은 확실히 따지자, 성 태주.

“당신! 내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그래도 되는 겁니까?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다음날 튀질 않나.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렇게 신입사원이라니? 뭡니까, 대체 정체가.”

“감동인데요.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았어요? 묻고 싶어서 주말 내내 어떻게 참았을까. 혼자 자위라도 하지 그랬어요. 내 손이다 생각하고.”

“무슨 개소리……!”

태주의 허리 뒤쪽으로 팔이 쑥 들어왔다. 상진이 태주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기자 맥없이 끌려가고야 말았다.

갑작스레 지척에 놓인 시선이 마주한다. 태주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닿은 얼굴 사이로 따스한 호흡이 묻는다. 꼴깍, 침이 넘어간다. 따지려던 뒷말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상진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찡그린 눈썹 아래로 깊게 파인 눈꺼풀에 그림자가 졌다. 자로 잰 듯 똑떨어진 이목구비가 화려하다. 태주는 무심결에 그의 얼굴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응?!”

허리를 감은 팔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상진의 손끝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 태주의 둔부를 더듬는다. 그는 흠칫 몸을 떨고 있는 태주를 보며 즐거이 웃고 있었다. 점점 내려간 손끝이 기어코 둔부 사이를 꽉 눌러 잡자 새된 비명이 절로 흘러나온다. 욱신거리는 안쪽에 남아 있는 고통과 다른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 잠깐……!”

점점 더 파고드는 그의 손이 노골적으로 아래를 더듬는다. 태주는 헉, 숨을 들이켜며 그의 어깨를 퍽퍽 쳐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상진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안 돼.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그때.

―끼이익,

비상계단의 문이 바닥에 긁히며 열렸다.

“어, 여기 계셨네요.”

태주와 같은 팀의 오 주임이었다.

“과장님, 한참 찾았습니다. 팀장님이 찾으세요.”

“아, 그, 그래요. 미안, 바로 갈게요.”

어쩐지 얼굴이 새빨간 태주를 유심히 보던 오 주임이 고개를 기울였다.

“두 분 대화 중 이셨나 보네요. ……그런데 어디 아프세요? 과장님 얼굴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태주가 아무 일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알 수 없는 표정의 상진이 서 있었다.

“계 사원도 얼른 나와요.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과장님 표정이 안 좋으시던데.”

“아무 일도 아닙니다.”

태주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싸늘했다. 첫인상과 다른 냉랭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오 주임이 상진을 지그시 바라보았으나 그뿐이었다. 상진은 그의 행동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주를 따라 바로 자리를 떠났다.

* * *

“방금 메신저로 보내준 파일에 최종본 있어요. 문서 형식은 수정 파일 참고하면 되고, 일단 기본적인 업무에 대한 인계 문서는 바탕화면에 깔려 있을 거예요.”

“네, 과장님.”

“아까 하라고 한 건 다 완료됐나요?”

“네, 다 했습니다.”

“파일 보내세요, 확인해 볼게요.”

원수 같은 놈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날지라도 회사의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러간다.

안 그래도 월요일이라 더 바쁜데 저 신입사원 놈 때문에 칼퇴근은 글러 먹었다. 회사 제품 설명부터 업무 교육까지,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에휴, 월요일부터 야근이라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성 과장. 신입, 아니 상진 씨 잘 가르쳐 줘. 알았지?’

팀장하고 저놈하고 가족관계라도 되는 건가. 따로 불러서는 또 부탁까지 하더란 말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사이라면 직접 가르칠 것이지, 애먼 부하직원을 들볶고 난리다.

[어차피 바로 옆자리인데 그냥 내 화면 보면 되잖아요.]

보내라는 파일은 안 보내고 메시지가 와 있었다.

“계 사원. 파일 보내세요.”

태주는 옆을 바라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시지가 연이어서 주르륵 뜨기 시작했다.

[과장님.]

[혹시 대표님 방이 어딘가요?]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저 불구된 거 말씀드려야겠어요.]

[이 나이에 평생 콤플렉스를 짊어져야 하는데 보상이라도 받아야...]

[과장님과 도의상 문서를 작성하긴 했지만 불안하네요.]

[말해도 괜찮죠? 설마 다 해결된 것처럼 거짓말하신 건 아닐 테니.]

심장이 두쿵, 내려앉았다.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 사이 메시지가 한 통 더 왔다. 이제는 언론 제보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저 자식, 이러려고 이 회사에 입사한 걸까?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대표가 바뀌면서 회사 안이 어수선했다. 아직 그런 일은 없지만, 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몇몇 직원을 정리할 거라는 소문은 여전히 횡횡하고 있기도 했다.

상진이 이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태주도 자리 보존하기가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일의 결과야 어찌 됐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데다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었으니까. 괜히 문제를 들추는 건 태주에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잘리면 안 돼. 나 같은 걸 어느 회사가 다시 써 주겠어. 가뜩이나 이 업계는 소문도 빠른데…….’

두 다리 건너면 물고 물리는 업계였다. 설령 아무 소문도 없이 퇴사하게 된다고 해도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자신을 누가 써 줄까.

속이 쓰렸다. 닥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가장 최악의 결과를 떠올렸다. 단전이 차갑게 식는다. 이는 분명 태주의 나쁜 습관 중 하나였지만, 그 습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주가 곧 계산을 마쳤다.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여러 결과들을 되뇌어 본다. 더 깎일 것도 없는 자존감이 모조리 다 갈린 후였다. 모니터만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옆쪽을 바라보았다. 목이 어색하게 돌아간다.

“저, 저기. 일단 나랑 얘기 좀…….”

상진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릴 뻔했다. 사무실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나서였다. 그런데,

“과장님,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봐주세요.”

상진은 자신의 모니터 쪽을 눈짓하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다행히 우려하던 그런 소리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 아, 네. 봐줄게요.”

속으로 한숨을 삼킨 채 몸을 옆쪽으로 기울였다.

모니터에는 여러 수식이 적용된 엑셀 화면이 켜져 있었다. 태주가 가르친 대로 서식이나 내용에도 문제가 없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체크하던 중간에, 마지막에 있는 표 하단의 텍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말했잖아요. 나을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주면 아무 말도 안 할게요. 약속해요.]

굵은 고딕체로 15pt. 누가 볼 새라 바로 지워 버렸다.

“……틀린 부분은 없네요. 잘했어요.”

“네, 과장님. 더 시키실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악마 놈의 새끼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병원에 가 보려고요.”

“큽, 쿨럭.”

악마가 말했다. 그것도 이제 좀 적응되었나 싶은 때에.

상진은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한동안은 별문제 없이 성실했다. 매일매일 주어진 업무를 무리 없이 처리해 냈고, 태주에게도 싹싹하게 굴었다. 주위 동료들과는…… 그저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태주도 마음을 놓았더랬다. 특별히 그가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 이렇게 조용히 묻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벼, 병원?”

“네.”

앞에 놓인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먹으며 그가 답했다.

“아무래도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감각이 없거든요.”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 볼 부분만 볼록해져서는 한참을 우물거린다. 태주는 곧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서였다.

“병원 같이 가실래요?”

우물쭈물하고 있는 태주에게 상진이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다음에 밥 한 끼 해요.’처럼 가벼운 인사치레라도 되는 듯.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는 태주를 두고, 그는 퍽 즐거워 보였다. 입으로는 자신의 장애에 대해 논하면서 눈으로는 다음에 먹을 반찬을 고르고 있었다.

“아, 여기 밑반찬이 정말 맛있어요.”

태주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상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대체 정체가 뭘까. 태주에게는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난 놈 같았다. 처음에는 악플이나 달고 다니는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 밥줄을 쥐고 있다. 악마 같은 놈이라고 해야 하나.

요사이 그에게 업무를 가르치느라 줄곧 붙어 다녀야 했다. 어쩌다 보니 업무상 사수가 되긴 했어도 따지고 보면 직속 사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팀장은 한사코 태주에게 상진을 떠맡기며 우겼다.

‘상진 사원은 아직 사회생활 경험도 부족할 테고. 우리 회사에서는 성 과장이 가장 사회생활도 잘하니까 가르쳐 주면 좋지. 안 그래? 그리고 둘 다 아주 잘생겨 가지고 같이 다니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응? 알겠지, 태주야?’

개소리였다.

팀장이 최근에 한 말 중에서 가장 개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그는 싱글벙글 웃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서 업무를 같이 하는 건 당연지사에, 점심시간에는 밥도 같이 먹어야 했다. 영 껄끄러운 문제가 끼어 있어서 당연히 불편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매일 체했었다.

가뜩이나 소화도 잘 못 시키는 체질인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다. 언제 그 이야기를 꺼낼까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런데 상진은 태주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태주의 낯빛이 사색이 되어있으면 약이며 뜨거운 물이며 수족처럼 대령했다. 그걸 본 주위 직원들이 그의 인간성을 칭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간 회사에서 겪어 본 계상진이라는 인간은, 생각보다 정중했다. 대표실에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협박 섞인 메시지를 보낸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출근한 뒤로 태주의 책상에는 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아침마다 커피와 간단히 먹을 만한 샌드위치가 있다거나, 그 외에도 소소하게 챙김을 받았다. 어느 날은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하라고도 했었다. 그런데 상진은 ‘사수에게 깍듯한 신입사원’처럼 말하며 ‘과장님께 많이 배우고 있어서 감사한 마음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과장님?”

“아, 네?”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아까 제가 병원 같이 가실 건지 여쭤 봤는데 답이 없으셔서요.”

어느새 그릇을 다 비운 상진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백반을 먹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먹어야 할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음, 증상이 많이 안 좋아……, 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 미안해……, 요. 아직 입에 잘 안 붙어서. 원래 부사수에게도 말을 잘 안 놓는 버릇이 있거든…… 요.”

원래 그런 버릇이 있기도 하지만, 저 인간에게는 쉬이 말을 놓기가 껄끄럽기도 했다.

“증상이 조금 더 심해졌어요. 이젠 아무 느낌도 안 나고, 뭐 서지도 않고.”

“으음.”

“처음에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그때 과장님이 억지로 기계에 넣으려고 한 날부터 계속 더 안 좋아지네요.”

태주의 양심이 쿡쿡 쑤셨다. 그때 당시에는 상처도 없어 보였고. 아파 하긴 했지만 실린더가 깨진 것뿐이라서 그냥 넘겼었는데. 만약 정말 이 문제에 자신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현실적인 문제에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저 인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사실이라면 말이다.

“정말 안……. 그……, 안…….”

“안 서냐고요?”

“아, 좀! 목소리 낮춰요!”

아주 동네방네 거기에 문제 생겼다고 소문낼 일 있나.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계산대로 먼저 가려는 상진을 제지하고 두 사람분의 밥값을 카드로 결제했다. 그래도 명색이 과장인데 자꾸 사원이 내려고 해서 곤란하다.

아직 업무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태주는 1층의 야외 벤치로 그를 끌고 갔다. 날이 조금 쌀쌀해져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차가운 벤치에 엉덩이 끝을 대고 살짝 앉았다.

“계 사원.”

“네.”

“저번에는……. 음…….”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려 애썼다.

‘저번에는 섰잖아요. 그래서 나랑…….’까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단호하게 말한다면. ‘저번에는 반쯤 서서 내 뒤에다가…….’ 아니, 이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아, 뭐라고 하지.

태주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망설였다.

그러자 상진이.

“저번에 과장님하고 섹스했던 거 말씀이시죠?”

“아니, 이 미친, 미친놈아! 조용히, 조용히 좀!”

“네, 그렇게 말 편하게 해 주세요.”

“그게 중요해?! 그리고 난 당신이랑 그런 거 한 적 없거든요.”

“왜 없어요? 그때 나랑 한 게 섹스가 아니면 뭐예요? 과장님은 그보다 더한 걸 하시나 봐요, 평소에. 누구랑 해요? 왜 나랑은 안 해요?”

“아니, 아니. 야!”

저 미친놈, 진짜.

태주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상진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상진은 태주가 노려보건 말건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입술이 댓 발이나 나와서는 눈썹 끝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말끔하게 잘난 표정만 보다가 저런 얼굴은 또 신선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어린 티가 났다. 평소보다 좀 귀엽다, 는 생각은 죽어도 하지 말아야지. 정신 차려라, 성태주.

“아무튼, 그날……. 어쨌든 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그……. 했잖아요. 근데 그때는 분명…….”

“안 섰는데.”

“안 섰다고? 느낌이 반쯤은 좀…… 있었는데.”

‘반응이 있었으니까, 그, 뭐냐, 그, 사, 삽입이 가능한 거 아닌가.’ 차마 그 말까지는 못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상진은 계속 말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태주를 빤히 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보듯이 내내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곤란한 화두를 던지고 나면 태주의 표정이 금방금방 변하곤 했다.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가 노려봤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끔은 어색하게 웃었다. 살짝 미안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그의 다양한 얼굴을 보는 것을 상진은 꽤나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느낌이 반만 있었어요? 거짓말. 엄청 느끼던데.”

예를 들어 이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주의 표정이 변할 틈을 주지 않고 상진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서 몇 번이나 갔으면서. 나중에 다 느끼게 되면 어쩌려고.”

아예 태주의 입술을 손으로 막아 버리고 재차 말을 이었다. 상진의 큰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도 남았다.

“그래도, 분명히 말하지만 그날도 서지 않았어요. 뭐, 살짝 반응은 있었지만 전 결국 한 번도 못 갔거든요. 과장님이 몇 번이나 가는 동안.”

“읍……. 으읍…….”

“앞으로도 이러면 어떡해야 하죠, 이 창창한 나이에. 과장님이 책임이라도 지면 모를까.”

“읍……!”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병원 같이 가시죠.”

“읍……. 푸하!”

태주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그놈의 손이 떨어지질 않았다.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다. 겨우겨우 떼어내고 나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약속했잖아요. 돕겠다고.”

“누가 안 간대?”

“근데 왜 대답을 빨리빨리 안 해요? 자꾸 의심하잖아요, 저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이상하긴 하잖아.’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제품 때문에 피해를 입은 악플러와 그 악플러를 설득하기 위해 떠밀린 직원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다소 특이한 관계이기는 해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그런 일이 한둘 정도는 있을 법도 하다.

중간에 조금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건……. 설명하기 어렵지만, 일단은 술을 마신 탓이라고 둘러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 인간이 우리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온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왜? 제품 때문에, 혹은 나 때문에 성불구가 되었다고 하면서 왜 여기로 입사한 걸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혹시 회사의 내부 기밀을 알아내서 어딘가에 신고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도 했었다. 충분히 앙심을 품을 수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저놈은 그저 열심히 일만 할 뿐이었다. 한 번은 술을 마시면서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그냥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는데 여기서만 연락이 왔어요.’

이런 식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그렇게 계약서까지 작성해 놓고, 그에 대해서도 일절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너무 관대하지 않은가. 이 회사에게도, 자신에게도. 저 인간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평생을 성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 일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사람과 밥을 먹으면서 꺼낼 만큼 가벼운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믿을 수가 있겠냐고. 그냥 안 서는 척만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척’한다고 감출 수 있는 종류였던가.

“과장님, 주말에 시간 많죠?”

상진이 재수 없게 말했다.

“없어요.”

그래서 태주도 재수 없게 답했다.

“이번 토요일 오후 2시. 과장님 집 근처로 데리러 갈게요.”

그는 이번에도 태주의 대답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이제야 조금 따뜻해진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를 따라 태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시간이 5분밖에는 남지 않았다.

먼저 건물 입구 쪽으로 앞장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태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지 마세요. 진짜 나 약속 있어. 진짜야. 와도 나 없으니까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요.”

* * *

삐거덕, 침대가 울렸다. 이제 자신의 쓰임이 다했다는 걸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태주에게는 아직 침대를 놓아줄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꾸며 다시 잠을 청한다.

―♬♪……. ♪♪♪…….

그러나 이번엔 전화기가 문제였다. 한번 울리기 시작한 벨소리는 도통 끊이질 않았다.

설마 진짜 온 건가. 비몽사몽 눈을 반쯤 뜬 태주가 핸드폰이 있는 곳을 더듬었다. 확 던져 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참았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여보세요.”

[과장님, 어디세요?]

“나 오늘 약속 있다고 했잖아. ××역이야.”

[목소리가 자다 깬 것 같은데요.]

“감기 걸려서. 전화 끊어요.”

망설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어째 귀가 간질간질하다.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밀려드는 잠이 먼저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의식을 놓고 있었다.

“××역치고는 너무 비좁지 않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이불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분명하게 들렸다. 감았던 눈꺼풀이 순식간에 확 떠진다. 화들짝 놀란 태주가 이불을 획 내리자, 그 앞에는 태연한 얼굴을 한 상진이 서있었다.

“약속 있다더니. 꿈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셨나 봐요?”

귀신이라도 본 듯 태주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허우적거리다가 침대 한 면에 붙은 벽까지 몸이 밀렸다. 등을 벽에 딱 붙이고 최대한 상진에게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뭐,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방금 전화로…….”

“현관문으로 들어왔고요. 방금 화장실에서 전화했죠.”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나 어제 문 잠갔는데.”

“친한 형이 며칠째 연락이 안 된다고 했더니 보조키로 열어 주시던데요, 집주인 할아버지가.”

아, 할아버지!

태주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집주인한테 잘하셨나 봐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과장님 신세가 어쩌고저쩌고. 요 며칠 못 봤는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흔쾌히 말이죠.”

이 건물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태주가 어릴 적, 일용직을 전전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때부터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태주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요즘 통 얼굴을 못 뵈었는데, 걱정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번호 도어락으로 바꿔 준다고 하셨을 때 순순히 바꿀 걸 그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월세를 많이 올리지 않아서, 감사한 마음에 수고를 덜어 드리려 했던 것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바꿀걸.

“빨리 준비하세요. 병원 예약해 뒀으니까.”

“아, 진짜?!”

“네, 진짜. 뭉그적거리면 제가 씻겨 드려요?”

상진이 정말 옷을 벗기려는 것처럼 확 다가왔다. 어느새 매트리스 위로 무릎을 기댄 진상 놈이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태주가 기겁하며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저놈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침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걱, 끼이걱.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귓불에 스친다.

결국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매트리스 한쪽이 움푹 들어갔다. 덕분에 상진의 몸이 옆쪽으로 휙 기울어진다. 푹 꺼진 매트리스 덕분에 중심을 잃은 것이다. 꼴사납게 풀썩 넘어지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웠다. 아, 정말 쌤통이다.

* * *

다행히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뭐 씹은 얼굴을 한 태주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이었다. 최근 본 하늘 중에 가장 예뻤던 것 같다. 하필 이렇게 좋은 날씨에 부사수와 비뇨기과에 가야 하다니…….

“이쪽에 주차했어요.”

“차 가지고 왔어요? 여기 주차할 곳 없을 텐데.”

“그냥 골목에 댔는데. 아무도 뭐라고 안 하던데요.”

“그랬을 리가. 여기 주차 공간이 없어서 매일 싸움 나는…….”

앞에 서 있던 상진이 빙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차가 눈에 들어온다.

“타세요.”

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모양새의 자동차였다. 어디서 많이 본 외관이다. 그러니까……. 영화나 외국 드라마 같은 곳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진상 놈이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렸다. 이상하게도 문이 위쪽으로 올라갔다, 평범하게 옆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이런, 미친…….”

그제야 태주는 이해할 수 있었다. 주말에 행사처럼 벌어지는 주차대란이 왜 이 진상 놈에게만 빗겨 갔는지. 고성은 기본이요 욕설은 옵션인 이 좁은 골목길에 왜 이 차만 멀쩡하게 주차가 가능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 자동차를 중심으로 멀리서부터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는지.

“안 타요?”

이 망할 놈의 차를 타면 아마 당장 내일부터 입방아에 오르내리겠지. 빠르면 오늘 오후부터일지도 모른다. 멍하니 서 있던 태주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는 팔자 좋게 값도 모를 만큼 비싼 차를 몰고 다니고, 누구는 그런 놈에게 끌려다니는 처량한 신세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제 팔자에 언제 이런 차를 타 보겠냐 싶기도 했다. 그는 결국 어색한 몸짓으로 차에 올라탔다.

“빨리 타지 뭘 고민을 해요. 이제 와서 가기 싫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얼른 차나 빼요. 여기 골목 사람들 상대적 박탈감 느끼기 전에.”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은 그저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가 이런 인간이랑 얽혀 가지고. 태주가 먼저 상대에게 옮겼던 시선을 거두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큰 대로로 진입했다. 돈이 좋긴 좋다. 차 시트부터 안락의자가 따로 없었다. 주행을 하는 중에도 그 흔한 소음 하나 들리질 않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좋은 차에 환장을 하나 보다 싶었다.

태주도 좋은 차를 타 본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 이야기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몰던 고급 외제차를 종종 얻어 타곤 했었다. 아버지가 모시던 회장님은 태주와 태주의 동생을 예뻐하셨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지.

그 당시 태주는 아주 가끔 그 차에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때면 꼭 부잣집 도련님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들떴더랬다. 태주가 방긋 웃으면 아버지가 상냥하게 따라 웃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도 태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는다.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요?”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끊어졌다. 아주 시기적절한 순간이다. 방해가 이렇게 고마웠던 적이 또 있을까.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굳이 인사치레를 건넬 필요는 없지만,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계 사원은 회사 왜 다녀?”

“네?”

차가 큰 건널목의 신호에 걸렸다. 잠시 정차 중일 때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말을 건넸다. 주말이라 그런가 거리가 번잡하다.

“아니,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그냥 궁금해서.”

암만 생각해도 돈깨나 있는 집안 자제가 확실한 놈이다. 굳이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집안 말이다.

“돈도 벌고.”

“돈? 우리 회사에서 쥐꼬리만큼 월급 받느니 이 차만 팔아도 연봉의 10배는 훨씬 넘겠는데.”

“사회경험도 쌓고요.”

“세상 사람들, 이 순진한 청년을 보세요. 사회경험 쌓다가 고운 성격 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부잣집 도련님이었으면 조용히 집돌이나 하면서 사고 안 치고 살 텐데. 인생은 가능하면 편하게 살아야 해. 안 그러면 늙어서 고생한다더라.”

태주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상진은 그런 태주를 보며 그저 웃고만 있었다. 한참을 이어 가던 말이 곧 멈추었다.

“미안. 꼰대처럼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이렇게 능력이 되는데 굳이 고된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신기해서.”

“고되지 않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하는데?”

“과장님하고 같이 하잖아요.”

멈칫, 이으려던 말이 툭 끊어졌다. 태주가 고개를 돌리자 상진이 살포시 웃었다.

그게 엄청 징그럽게 느껴졌다. 저 잘생긴 얼굴을 왜 자신한테 쓰는지.

“내가 야근하는 게 좋아? 막 짜릿해? 막 흥분돼? 그렇게 내가 죽도록 미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뜻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내가 실수로 너 다치게 한 건 미안한데. 나도 조금 억울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아니, 그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남의 야근을 그렇게 좋아라 하는 건 너무하지. 순진한 청년이라는 말은 취소. 이 악마야, 지나가던 사탄이 울고 가겠다.”

“…….”

태주의 타박에 상진의 입술이 또 댓 발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 * *

병원은 영 싫었다. 소독약 냄새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공기도.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태주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남에게 욕을 들었었다. 그냥 지나가는 욕설이 아니고 분노와 증오를 담은 저주 섞인 비명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울면서 태주의 뺨을 때리고는 ‘살인자의 자식새끼’라고 했다. 슬프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약하셨나요?”

“네.”

상진이 접수대로 가서 예약 확인을 했다.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하던 직원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분주해졌다.

설마 여기서도 진상을 부린 건 아니겠지. 태주는 대기석 소파에 기대앉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저 진상 놈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자존심 상하게도 눈길이 가긴 했다.

그는 베이직한 흰색 티에 네이비 계열의 스웨이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기럭지가 있어서 그런지 평범한 검은 바지도 잘 어울렸다.

확실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줄줄 흘렀다. 어쩌다가 저런 인간이 자신에게 일을 배우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을 정도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시 뒤를 돌아본 상진과 눈이 마주쳤다. 왜인지 창피해져서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안 봤는데요.”

“또 거짓말. 반했으면 반했다고 하지.”

“아, 뭐래.”

어느새 곁에 앉은 상진이 몸을 바짝 붙였다.

태주의 시야에 온전히 그가 담길 정도로 밀착해 온다. 두 눈에 담기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눈을 피하면 또 놓칠세라 따라붙었다.

태주가 고개를 앞으로 꿍 찧었다. 상진의 이마와 부딪히면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팠지만 꽤 침착하게 대응한 것이 아닌가. 이 진상 놈은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도통 신경 쓰질 않아서 곤란하다.

“이봐요. 계 사원.”

“아, 아파요. 아파……. 아, 아, 진짜 아파…….”

“비뇨기과 온 거면서 뭐 그렇게 꾸미고 왔어요. 시선 쏠리게. 중심에 문제 있다고 동네방네 광고하고 싶은 거면 말리진 않겠는데.”

“꾸민 거 아닌데. 평소처럼 입었어요.”

“아, 예.”

어휴, 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어!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

속에서 열불천불이 나서 그냥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사실 검사는 했어요, 미리.”

“했다고요? 오늘 한다더니.”

“알아보니까 검사를 여러 가지 해야 한다고 미리 오라고 해서요. 오늘은 검사 결과 들으러.”

대기석에 앉아 있는 환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거의 연인 혹은 부부끼리 왔거나, 아주 드물게 동성 친구끼리 온 사람들도 보였다. 대체로 일행 중 한 명은 표정이 좋지 않고 다른 한 명은 위로해 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금 신경이 쓰였다.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시선들도 느껴졌다. 태주 역시 그들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짜 큰일이면 어쩌지. 가라앉은 마음으로 자신의 일행을 쳐다보았다.

……걱정은 무슨. 이 병원에서 저 진상 놈만 표정이 밝아서 창피하다.

꽤 연륜이 있어 보이는 의사였다. 책상 앞에 놓인 명패에는 ‘ㅇㅇ병원 원장 ㅇㅇㅇ’이 새겨 있다. 그리고 그 근처의 투명한 장식장 안에 뭔지도 모를 상장이며 인증서들이 보였다. 이 부근에서는 이쪽 방면으로 꽤나 유명한 사람인 듯했다.

의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검사 결과로만 봐서는……. 특별한 외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니터에 각종 검사 항목에 대한 결과가 나타났다. 사실 봐도 알 수가 없다. 그냥 그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다만, 말씀하신 증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결과에도 나와 있고.”

영어가 가득한 종이를 한 장 팔락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외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정신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의심해야 합니다. 이럴 경우 상황이―.”

의사의 입에서 불길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략적으로는, 정신적인 요인이 원인일 경우 치료하는 데에 들어가는 기간이며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 환자의 의지와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정기적인 검진과 약물치료는 물론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심리상담도 권한다는 것.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태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검사 결과를 듣는 내내 의사의 얼굴은 심각했고 한숨을 섞기도 했다.

그는 상진의 증상을 몇 번이고 언급하면서 꾸준한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지 않으면 평생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간혹 호전될 수는 있으나 언제고 나빠질 수도 있다고 했다. 평생, 평생, 평생 관리해야 한다고. 그걸 세 번 정도 짚어서 말을 했다.

……이번만큼은 상진의 표정도 진지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 태주는 차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고 이 일이 별거 아닌 것이 아닌데. 자신이 정말 큰 잘못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평생, 평생 치료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어떻게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지금이라도 회사에 보고하고 함께 보상을 해야……. 불같이 화를 내는 본부장과 팀장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하다.

“저기 계 사원, 아니, 계상진 씨.”

병원을 나서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앞장서서 걷던 상진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상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과를 들은 게 의외라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태주도 가볍게만 생각했던 일이지만, 병원에서 마음이 너무 불편해졌다. 바스락거리며 손에 들린 약봉지조차 안쓰러울 정도다.

“진작 회사에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팀장님께 보고 드리고 회사 차원에서든 제 개인적으로든……. 확실하게 책임은 질게요.”

그냥 모른 척하고 잡아뗄 수도 있었다. 애당초 회사 제품과 태주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아마 회사에서는……. 원인이 불명확한 데다가 제품 하자가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보상을 받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렇지만 보고를 드리는 게 맞고, 회사 차원에서 처리가 어렵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성의 표시를 할게요.”

그렇지만 태주는 그런 위인이 되지 못했다. 책임이 100이 있든 1이 있든 크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저 1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게 마음의 짐이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게 하거나, 혹은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게 하거나…… 와 같은. 작거나 크거나 남의 인생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성태주는.

“아, 역시 보고 안 했구나.”

상진이 말했다. 화도, 짜증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음정의 높낮이조차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 보고하면 뭐가 달라져요? 과장님도 회사에 보고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건데.”

“음, 그게…….”

“없죠. 과장님의 미안함이 조금 덜어지는 것 외에는.”

상진이 태주의 팔을 덥썩 잡았다.

꽤 거친 손길에 태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기분을 상하게 했던 걸까. 일단 입을 꾹 닫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복도를 지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해 있는 기계에 올라섰다. 상진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층수를 눌러 놓고 태주 쪽을 돌아보았다.

“저번에도 말했었는데.”

그의 시선이 태주의 몸에 들러붙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몸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좁히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해 보였다. 태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마침내 막다른 곳에 가로막히자 상진이 더욱 다가선다.

“아니, 저기.”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8층, 7층……. 점점 낮은 숫자 버튼에 불이 들어온다.

동시에 상진의 그림자가 태주를 집어삼켰다. 그는 조금의 예고도 없이 태주의 둔부 아래를 양손으로 쥐었다. 단단히 동여맨 듯 붙들려서는 위로 휙 들어 올린다. 당황한 채 버둥대는 태주를 자신의 골반 즈음에 걸쳐놓더니 노골적으로 아래를 문질렀다.

“읏! 야! 뭐 하는……!”

태주가 상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떨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반사적인 행동을, 상진은 매우 즐거워했다. 그는 태주의 목덜미와 귓불에 낮게 속삭이며 입소리를 내었다.

“도와주면 되잖아요, 형이.”

“흣, 윽……. 내려놔, 미친놈아. 누가 타면…….”

“미안하면요.”

“읏, 으응……! 자, 잠깐…….”

빳빳한 천 너머로 그의 몸이 닿았다. 앞섶과 그 아래 부근이 꾹 눌리며 문대어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안에 스미는 듯했다.

태주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제 몸을 훑을지. 이보다 더 선을 넘으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탐할지. 한번 불붙은 상상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차츰 내려가는 숫자를 기다리며 소리를 꾹 참는다. 최저의 방어선이었다.

“도와줄 거죠?”

한쪽 손이 얌전히 떨어지나 싶었다. 그러나 둔부에서 슬금슬금 위치를 옮길 뿐이었다. 손끝이 허벅지를 둘러 서서히 옮겨진다. 상진은 태주에게 대답을 종용하며 그의 중심을 그러모으듯 비벼대었다.

“흐읏! 윽! 아, 알, 알았, 다고!”

“약속?”

“약속, 흐읏, 그만……. 제발……! 문, 열리, 면……!”

―띵.

기가 막힌 타이밍과 함께 손이 떨어졌다.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태주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과장님, 내리셔야죠.”

몰아치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발갛게 상기된 볼이, 태주의 흰 피부와 대조되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차분하게 엘리베이터 한쪽에 기대었던 중심을 세운다. 어느새 앞에 선 상진이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쿵, 쿵, 쿵. 심장박동이 귓가를 때려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어서요.”

상진이 태주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이 미친놈아, 제정신이야?”

주차된 차량 앞까지 가자마자 태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안 들켰잖아요.”

“그게 다야? 아무리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 할 거 아니야!”

“과장님, 화났어요?”

“당연히 화가 나지, 내가 안 나겠냐. 아까도 들켰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요즘 엘리베이터에 카메라 다 설치되어 있는데.”

“그래서 흥분되니까요.”

그의 대답을 들은 태주가 휘청거렸다. 순간 머리가 핑 돌은 것이다. 조수석 쪽의 문에 손을 대고 잠시 말을 참았다가, 곧 그에게 뱉었다.

“흥분?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분된다고? 너 변태야? 내가 왜 네 변태 같은 짓거리에 어울려 줘야 하는데?”

“그거야…….”

“너, 이러려고 나 만나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말을 또 툭 던졌다.

그러자 상진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진다. 왜 밝아지지? 살짝 움찔했다. 저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태주는 대부분 곤란했었으니까.

“우리 만나는 사이였어요? 사귀는 사이?”

“뭐, 뭐?”

상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방금 ‘이러려고 만나냐’고 했잖아요. 이거 완전 드라마에서 연인들끼리 하는 이야기인데. 연인들이 싸우면 이렇게 싸우는데.”

“아니, 무슨, 아니, 어?”

태주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야, 그, 그런 뜻이 아니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봐요, 계상진 씨.”

“네, 자기야.”

“미친, 돌겠네.”

“자기야, 일단 타요.”

“누가 ‘네 자기’야!?”

“응, 내가 과장님 ‘자기’예요.”

상진이 차 키의 버튼을 누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간결한 알림음과 함께 차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곳에 기대어 서 있던 태주의 허리로 팔이 쑥 들어왔다. 휘청거릴 틈도 주지 않고 이번엔 제 품에 태주를 끌어안는다.

매일 스킨십을 연구하기라도 하는 건지, 항상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이번에도 깨닫기 전에 품에 안겨 있다시피 했다. 태주는 그게 창피하고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바락 질렀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아직요?”

“당연하지. 앞으로 흥분된다는 이유로 아무 데서나 가까이 오지 마.”

운전석에 앉은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 봐도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계 사원,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소리야.”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냥 만지지 말라고 하면 될 일이다. 태주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타의에 의한 접촉이지 않은가.

그러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태주의 그 빈틈을 상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흥분이 될 때, 해야 해요.”

“뭐?”

“그래야 제 치료가 잘되고 있는지, 아니면 안 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태주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그래도…….”

“보통 상황에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좀 욕심을 부렸습니다, 죄송해요. 아까는 될 것 같아서.”

“아니…….”

“제게 이런 장애가 생겼다는 걸 아무도 몰라요. 과장님밖에는……. 그래서 제가 좀 의지했어요. 선을 넘어서 죄송합니다, 정말.”

“어…….”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입 안이 바싹 건조해진다. 분명히 저 인간이 잘못한 일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자기가 나쁜 말을 한 것만 같았다. 세상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린 저 얼굴 때문일까.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어차피 뭐…….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나을지 안 나을지도 모르는데……. 정확한 상태를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어느새 촉촉해진 눈망울이 태주를 보았다. 깊은 눈동자에 이슬처럼 맺힌 투명한 구슬들이 어른거린다. 아래로 뻗은 속눈썹에 걸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어…….”

“혼자 검사 결과를 듣기가 두려웠는데, 오늘 이렇게 병원까지 와 주셔서……. 기뻤어요. ”

그의 잘생긴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매가 접히자 끝에 맺힌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움푹 팬 입꼬리에 고인다. 서운함으로 살짝 찡그린 눈썹, 그와 반대로 부드럽게 올린 미소까지 밸런스가 완벽했다.

와, 이건 반칙 아닌가. 끝내주는 경치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특등석에서.

아니, 때와 장소를 가려 가며 스킨십하라는 말이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 저 얼굴만 보면 자신이 천하의 나쁜 놈이고 쓰레기가 된 듯했다. 씹던 껌처럼 단물 쓴물 다 빼먹고 저 진상 놈을 획 버리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만.

“알았어요, 알았어.”

“……네?”

못이긴 건지 못 이기는 척한 건지. 스스로도 머리가 복잡했으나, 태주는 그냥 두 눈을 꾹 감았다. 자꾸만 저 인간의 표정이 아른거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뒤에 벌어질 일들에 눈을 가려 버리고 싶었다.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어쨌든 도와주기로 했던 거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기도 싫고, 나도 좀 마음 불편해서요. 그런 이유라면 일단은 알았다고. 그래도 제발 좀 적당히…….”

뒤에 이어질 말들이 그의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기척도 없이 포개진 입술은 완벽하게 겹쳐 닿은 뒤였다. 비스듬히 틀어 공간을 채운다. 그 안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들이닥쳤다. 어느새 태주의 뒤로 쑥 들어온 손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훑는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흐읍, 음…….”

―쪽, 쪽.

입술과 입술이 살포시 떨어졌다가 이내 합쳐졌다.

숨을 내어주는 사이사이로 그의 열기가 느껴진다. 아주 조금의 틈새를 더듬고 타액을 섞었다. 습한 소리가 그 안에서 새자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조각을 하나로 맞추듯 점점 틀어지는 고개가 유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태주는 상진의 움직임에 또다시 이끌렸다.

“읍, 잠, 하……. 읏…….”

잠시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그의 손에 막혀 버렸다. 여지없이 몰아치는 입맞춤이 뜨겁다. 꽉 닫힌 공간 안에서 차츰 공기가 달구어졌다.

“으응…….”

꽤 길게 이어지는 접촉에 숨이 가빠진다. 태주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부드럽게 접합하는 촉감이 묘한 흥분감을 자아낸다.

태주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들썩거리고 말았다. 방금 애매하게 건드려진 아래가 오싹했다.

안 돼, 안 되는데.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혹여나 그에게 들킬까 위에 입은 니트 자락을 손가락으로 당긴다. 주욱 늘어나는 천이 간신히 앞섶 부근을 가리고 있었다.

“형.”

아주 조금의 틈새를 남긴 채, 상진이 말했다. 아직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에 태주가 담긴다. 발갛게 상기된 볼, 흥분으로 젖은 입술, 반쯤 풀린 눈꺼풀까지. 상진은 그의 모습을 차분히 감상했다.

그리고 답이 없는 그에게 이어 말한다.

“저 지금 흥분돼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위로 당겨졌다.

성적 욕망으로 그득한 눈빛이 일렁거린다. 태주의 허락이 없이도 그의 손은 움직였다. 팽팽해진 앞섶을 더듬고 지퍼를 지익 내린다.

태주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흥분된다’는 말 하나로 굳게 닫힌 빗장이 열린 셈이다.

속옷 안으로 그의 손이 쑥 들어섰다. 마침내 기다리던 것이 닿자, 태주의 숨이 터진다. 태주는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밀어닥치는 쾌감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상진에게 내맡긴 감각을 거두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꾹 감는다.

* * *

달력을 한 장 넘겼다.

빼곡하게 적혀 있던 지난달의 일정도 어느새 끝이 났다. 아직 텅 비어 있는 달력이 어색하다. 이 하얀 종이도 곧 온갖 메모로 빽빽해지겠지만……. 태주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펜을 들었다.

‘벌써 이번 달이구나.’

빨간색 펜으로 숫자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생각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더 추워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월차를 내려면 적어도 3주 전에는 보고를 해야 하는데. 까딱하면 늦을 뻔했다. 서둘러 컴퓨터에 저장된 연월차 보고 양식을 열었다.

“과장님, 어디 가세요?”

상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보일세라 일부러 창을 작게 띄워 놨는데……. 어떻게 본 건가 싶다.

태주는 그를 애써 무시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제발 자리 좀 바꿔 달라고 사정을 해도 팀장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이상한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무조건 우길 뿐이었다.

“알아서 뭐하게.”

“저도 같이 월차 쓰게요.”

“월차를 쓰고 싶으면 각자 쓰면 되지, 왜 거기에 ‘같이’가 붙어요?”

“같이 월차 쓰면 그 전날에 과장님 집에서…….”

태주가 진상 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구겨진 미간 사이로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둬.’의 뜻이 전해졌다. 저놈이 그 뒤에 무슨 말을 할지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상진 씨, 성 과장네 집에도 드나들어요?”

갑자기 눅눅한 장마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주가 구겨있던 미간을 풀고 고개를 위로 들며 웃는다.

모니터 앞을 가린 파티션에 누군가 팔을 올리고 서 있었다.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이 차장이다.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말을 더 이었다.

“두 사람 진짜 친한가 보네. 회사 사람하고는 아무리 친해도 집에 드나드는 일이 없는데.”

“아, 아뇨. 그렇진 않고 저번에 술 한잔 했을 때 저희 집에서 자고 갔거든요, 상진 씨가.”

“둘이서만 술 마신 적도 있어? 이야, 질투 난다. 나도 껴 주지.”

“그날 아마 차장님이 먼저 퇴근하셨어서 말씀을 못 드렸나 봅니다. 다음에 한번 같이 가시죠.”

이 차장이 너스레를 떨며 웃자 시궁창 냄새가 났다.

태주는 숨을 최대한 참고 자연스러운 미소로 응대했다. 겉으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속으로는 물음표를 띄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가운 잡담을 나누었던가. 이 차장이 여기까지 와서 말을 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 그러게. 다음엔 나랑도 같이 가자고. 근데 사실……. 요즘에 나도 너무 피곤해 가지고…… 술도 못 마셔.”

“무슨 일 있으세요, 차장님?”

“이번에 둘째 태어났잖아. 퇴근하자마자 애기도 봐야 하고 밤에는 얼마나 울어대는지 통 잠을 못 자.”

“아, 힘드시겠네요.”

“완전 힘들지. 어떨 때는 집을 나가고 싶다니까. 오늘도 새벽에 잠을 못 잤어.”

회사 내의 술자리에 매번 참석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씀하시지. 한 손으로 눈을 벅벅 비비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세요, 차장님.”

의미 없는 대화를 마무리 짓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차장의 눈빛이 갑자기 획 돌변한다. 이때다 싶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 있지.”

파티션 위에 두툼한 서류철이 턱 올라앉았다.

“저번에 네가 해 줬던 건데. 내가 오랜만에 하려니 손에 안 익더라고.”

“아…….”

당연했다.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정확하게는 이 차장이 한번 시킨 이후로 쭉 태주가 했었으니까.

“이거 오늘까지 다 처리해야 하는데, 내가 어제까지 붙들고 끙끙거리다가 말이야. 근데 또 오늘 와이프가 몸이 안 좋다네. 병원에 같이 가 줘야 해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아……. 네. 그럼 일찍 들어가셔야죠.”

“이해해 줘서 고마워. 난 성 과장이 부럽다, 진짜. 아직 결혼도 안 했으니 신경 쓸 가족도 없고. 이럴 때는 진짜 미혼이 훨씬 나아.”

신경 쓸 가족이 정말 하나도 없어서, 할 말도 없었다. 조금 속이 무거워졌지만 이내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제가 처리해 둘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파티션 위에 올린 서류철들을 양손으로 건네받았다.

꽤나 두꺼운 것을 보니 지난번 태주가 처리한 이후로 손도 안 댄 모양이었다. 오늘도 야근이겠네, 내적 한숨을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래. 그럼 내일…….”

이 차장은 아주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몸은 이미 반쯤 뒤돌아섰다.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 그 많은 짐을 덜어냈으니.

그의 걸음이 멀어지기 전, 옆자리에서 의자 바퀴가 바닥을 세게 긁으며 끼이익 하는 소음이 울렸다. 놀란 태주가 옆을 보자 상진이 일어서 있었다. 그는 태주의 손에 들린 서류철들을 낚아채고는 차장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가져가세요.”

말단 사원이 결코 정중하지 못한 어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차장은 눈썹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눈알을 굴려 상진의 발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훑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이었다.

“뭐야. 계상진 씨, 지금 뭐라고 했어?”

“가져가시라고요. 차장님이 해야 할 일이잖아요.”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차장과의 대화 내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더니 기어이 사고를 치는구나. 신입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는 말을 듣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태주 역시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 사이에 섰다. 상진에게서 다시 서류철을 뺏어 들고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 오해하지 마세요. 상진 씨가 다른 뜻이 아니라…….”

“아니,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진짜.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한대? 사정이 있다잖아, 사정이. 저건 뭔데 나서서 난리야. 야, 성 과장. 너 신입 교육 똑바로 안 시키냐? 어디 상사한테 저런 말투야.”

꼰대로 소문난 상사였다. 괜히 밉보였다가는 인사고과는 물론이고 회사 생활도 피곤해진다.

하필 같은 팀의 최 팀장과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여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 차장이고 최 팀장이고 게다가 지금은 본부장이 된 전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 태주로서는 그가 내리는 지시 사항에 불복할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제가 단단히 혼내 놓겠습니다, 차장님.”

서류철들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상진이 태주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래로 떨어진 태주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서는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가 여전히 차장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어쭈, 저 새끼 눈 좀 봐라.”

아니, 얘가 왜 이래. 이러다 진짜 싸움이라도 날 것 같다. 태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차장과 상진의 사이를 몸으로 막았다. 일단 시야를 가려 놓고 상진에게 눈을 맞추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덤으로 고개도 도리도리 흔들었다. 더 나서지 말라는 의미이다.

“성 과장, 내가 뭐 나쁜 짓이라도 했어? 왜 저러는 거야.”

“아닙니다, 차장님. 어서 들어가세요.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하 참……. 내가 이번에만 봐주는 거야.”

이 차장이 허세를 잔뜩 부리며 돌아섰다. 꼴사납게 손끝이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주의 뒤에 서 있는 남자와 진심으로 붙었다간 뼈도 못 추릴 수도 있으니. 강약약강, 아주 흔히 보이는 삶의 방식이다.

“그걸 왜 받아요?”

자리에 돌아온 태주에게 상진이 말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잔뜩 성이 난 채였다.

아니, 자기가 화날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어차피 이 일은 태주의 몫이 되었다. 그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 일을 왜 나서서 키우느냔 말이다.

“이봐요, 계 사원. 앞으로 언행 조심하세요. 없던 일도 만들어 내는 분이에요, 저 사람이. 괜히 밉보여 봐야 좋을 게 없다고. 다음에 꼭 사과드려요.”

“그걸 왜 받냐고요. 과장님 일이 아니잖아요.”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돈 좀 있는 집의 자식들은 다 저렇게…… 용기가 있는 걸까.

그래, 누군가의 삶이 강약약강이라면 그와는 반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어야지. 그래야 세상의 균형이 맞춰지는 거다. 아쉽게도 태주는 그중에서 ‘약’일 뿐이었지만.

“내 일이 아닌 일도 내 일이 되는 게 사회생활이고 회사입니다. 먼저 퇴근해요.”

“매번 받잖아요, 매번. 저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들 일까지도.”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들을 보았다.

이건 방금 이 차장이 넘긴 서류들, 저건 김 과장이 부탁한 서류, 또 그 아래에는 최 팀장이 미룬 서류들. 근무 시간은 똑같고 대우는 다른데 야근은 정해진 사람만 한다. 이 회사에서는 그게 성태주였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다들 이유가 있어서…….”

“김 과장 새끼는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이 차장 놈은 가족이 아프다고. 최 팀장 개자식은 아들 유치원 졸업식이라고.”

와, 저걸 어떻게 다 알았지. 메신저로만 나눈 대화도 있었는데. 한 명씩 집어서 말하니까 굳이 덧붙일 이야기가 없었다. 그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서류를 뒤적거렸다.

“계상진 씨, 입조심해요. 다들 상진 씨보다는 상사인데 놈이니 새끼니……. 그런 소리 입에 붙으면 큰일 나요.”

“다 말도 안 되는 핑계들인데, 설마 그걸 믿는 건 아니죠?”

“왜 안 믿어? 정말 집에 급한 일이 생겼을 거고, 정말 가족이 아팠을 거고. 최 팀장님은 유치원 졸업식 사진도 보내 줬는데.”

모르는 일이다. 만약 가족 중의 누군가가 정말 아팠다면, 정말 위급한 일이 생겼던 거라면. 그들을 대신해서 이깟 일, 해 줄 수 있다.

“그걸 대체 왜 믿냐고요. 그냥 다 핑계인데. 가족 핑계로 일을 미루는 건데 왜 다 받아 줘요.”

태주가 보고 있던 서류철을 탁, 덮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다. 울컥, 몰아칠 것 같아서였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진을 보았다.

“내가 지금처럼 양보하면 그런 일, 다시는 안 생길 수도 있으니까.”

사고는 항상 갑자기 찾아온다, 예고도 없이. 방금 전까지 웃고 이야기하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태주가 그들의 일을 받아 줌으로써 어쩌면 그들은 제 때에 도착했을는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게 들이닥칠 사고 직전에, 행복을 몽땅 잃어버리기 전에.

그 어린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태주가 양보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당당했을까. 적어도 부당한 일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뭐 하면 돼요.”

잠시 생각에 빠졌던 사이, 씩씩거리며 서 있던 상진이 곁에 앉았다. 여전히 미간은 성이 나 있었고 입술은 불퉁하기 그지없었다.

“가라니까요.”

그의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앉더니 서류철 몇 개를 빼앗아 갔다.

“아, 선배가 안 가는데 어떻게 가요.”

말문이 막힌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을 선배라고 생각하면서도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고?

“날 선배라고 생각은 해? 뚫린 입이라고…….”

“이렇게 도와주면 우리 선배가 그 뚫린 입으로 빨아 주겠죠.”

상진이 책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더니 싱긋 웃었다. 그의 다른 손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이 둥글게 말리더니 엄지 끝에 살포시 닿았다. 아주 파렴치한 동작을 한 채 앞뒤로 서서히 손을 흔들었다.

“야, 이 미친놈아!”

“왜요, 저번에 해 줬으면서.”

“이런 양심도 없는 새끼가!”

태주가 버럭 화를 냈다.

“아, 왜요.”

서류철을 책상에 탁 내려놓고 그 파렴치한 손목을 낚아채 버렸다. 뻔뻔스레 턱을 괴던 나머지 손도 낚아채서 그의 양손을 서로 깍지 끼게 했다. 네 손가락이 한마디쯤 교차되고 엄지끼리 맞닿았을 때, 태주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 크기지!”

“…….”

“양심 있냐? 한 손으로? 장난쳐? 야, 시력이 안 좋으면 가서 줄자로 좀 재고 와라.”

“…….”

“세탁기도 네 거는 안 빨겠다. 이럴 거면 집에 가. 도움 안 돼.”

‘양심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라는 말을 잇고 태주가 등을 돌렸다. 뭐 저렇게 뻔뻔한 놈이 있담.

곧 태주의 등 뒤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떤 의미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고요한 사무실의 적막함을 깨 주기에는 아주 적절했다.

* * *

그 뻔뻔한 놈은 기어코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었다.

상진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사코 집에 가라고 했으나 끝까지 고집을 부려 대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집중하는 태주의 허리를 은근슬쩍 더듬는다거나,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거나. 목이 마르면 물을 가져다 주고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태주는 일을 하는 내내, 무슨 커다란 강아지를 옆에 둔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들이는 걸까. 혼자 있는 것보다는 조금 위안이 되었던 것도 같다. 이러다가 터그 놀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 아닐지.

사실 태주로서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혼자 있는 시간보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래서 아주 조금 귀찮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것이다.

“이 시간까지 고생했어요. 다음에는 도와줄 필요 없으니까 일찍 들어가요.”

밀린 일들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느새 밖은 까맣게 내려앉았다. 선선한 밤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별빛 하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주가 상진에게 말했다. 인사치레였다.

그래도 덕분에 쓸쓸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는 기분보다 훨씬 좋았고.

이렇게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조금 걱정은 되었다만.

상진은 태주의 말에도 별다른 답이 없었다.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에게로 돌렸던 눈을 거두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지하철이 끊길 시간은 아니다. 상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역으로 가려는데, 그가 뒤에서 불렀다.

“집 앞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설마, 그 차로? 아뇨, 됐습니다.”

태주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상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요, 내가 부끄러워요?”

그 삐까번쩍한 차를 타고 그 좁은 골목길을 또 간다니. 동네 주차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사양해야 했다.

“아니, 너무…….”

“너무, 뭐요?”

“아니, 내 말 좀. 그러니까…….”

“너무 부끄러워요? 편하게 차로 데려다 준다는 것도 싫을 만큼?”

상진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태주가 말을 내는 족족 뒤를 잘라먹었다. 그러더니 이젠 아예 태주 앞에서 길을 막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분명 아까 ‘선배라고 생각은 한다’지 않았던가. 역시 선배는 개뿔,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시는 중이다.

“아니, 너무 눈에…….”

“아, 혹시 차에서 무슨 짓 할까 봐 그래요? 오늘은 안 할 건데. 시간도 늦었고, 할 거면 과장님네 집에서…….”

이럴 것 같더라니.

기어코 성질을 긁고야 만다. 태주가 상진의 등을 퍽 치면서 쏘아붙였다.

“아니, 너무 눈에 띈다고!! 당신 차도! 당신도! 무슨 머릿속에 그 짓 할 생각뿐이에요? 진짜 아픈 놈 맞아? 아무래도 진단서 다시 떼어 봐야겠어!”

“진짠데.”

“저번에도 그렇게 말해 놓고 아주 잘만 세…….”

텁, 갑자기 태주의 입술이 가로막혔다.

넓은 손바닥이 코 아래를 죄 덮어 버린다. 놀란 태주가 눈을 치켜뜨자 상진이 검지를 들며 고개를 저었다. 쉬이, 조잘거리던 말문을 막아 버린 채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회사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기둥 근처로 몸을 피했다. 으슥한 곳인 데다가 밤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기척을 느끼기 어려울 법했다.

“읍?!”

아니, 갑자기 왜 이래?!

태주는 무슨 영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 굴기 대회라도 있으면 이 인간 한번 내보내고 싶었다. 세계에서 10위권 안에는 들 수 있을 텐데. 그 김에 상금도 좀 타면 더 좋고. 아무튼 상진에게 따질 기세로 잡힌 팔을 탈탈 털어내려는데,

“저거, 이 차장 새끼 아니에요?”

“읍, 읍브브읍?”

상진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가로등 옆에 이 차장과 비슷한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가로등 조명 덕분에 인상착의를 가늠할 수는 있었다. 얼핏 보이는 얼굴이 이 차장을 꼭 닮았다. 그는 홀로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듯했다.

“진짜 이 차장님인가? 가족이랑 병원 다녀오는 길인 거 아니야?”

“……집 근처 병원을 안 가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요?”

상진이 건방진 말투로 대꾸하며 태주를 내려다보았다.

가뜩이나 올려다보는 거 좀 창피한데, 저놈은 뭔가 마음에 안 들 때면 꼭 고개를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더욱 시선 차이가 나도록 말이다. 이 와중에 그의 삐뚜름한 입술선과 눈빛이 묘하게 조화롭다. 차라리 연예인이나 하지, 왜 직장을 다니나 몰라.

“집이 이 근처이신가 보지. 그런데 왜 우리가 숨는 건데?”

굳이 숨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못 볼 장면을 본 것도 아닌데. 태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상진은 아직도 가로등 쪽에서 서성이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태주가 상진의 팔을 붙들었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지하철이 끊기고 말 것이다. 그를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려던 찰나, 저 멀리 보이는 장면에 몸이 굳어 버렸다.

이 차장의 곁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너무나도 건강해 보이는, 게다가 그에 비해 너무 어려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와 서로 껴안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태주는 그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차마 눈을 돌리질 못했다. 왜냐하면 이 차장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걸린 아내와는 영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저 개새끼가.”

“상진 씨.”

단숨에 뛰쳐나가려는 상진을 붙잡았다. 그는 장작에 불이 붙듯 거침이 없었다. 몇 번이나 뿌리치려는 것을 온몸으로 매달려 겨우 막았다. 상진의 허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고 뒤로 끌어당겼다. 전신의 무게를 실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 왜 말려요. 병원? 누가 아파? 웃기고 있네.”

“일단 진정해. 아직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친척이라거나, 어, 친척이라거나…….”

“친척이랑 입을 맞춰요? 그리고 알게 뭐예요. 어쨌든 거짓말로 속이고 일을 떠넘긴 건 사실인데.”

“……아직 몰라. 모르는 일이야.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 태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진은 전혀 달랐다. 그는 태주의 팔을 잡고 차마 떼어내지도 못하고 씩씩거렸다. 두 사람이 씨름을 하는 동안, 멀리서 보이던 인물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것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형.”

잔뜩 노기를 띤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태주 형.”

태주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가 서늘하다. 멈칫거리며 상진에게서 떨어졌다.

“형은 화도 안 나요? 저 인간한테 이용당한 거, 모르겠어요?”

성난 덩치가 성큼 다가섰다. 태주 역시 딱 그만큼 뒷걸음질 쳤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상진의 그림자가 태주를 집어삼켰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데 왜 형은 아무렇지도 않지.”

“상진 씨.”

“저런 한심한 놈한테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해요. 화도 내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자.”

“혹시 저 새끼 좋아해요?”

숨이 턱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코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태주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내가 저 인간을 왜 좋아해, 미쳤어?!”

너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확실해요?”

“아니, 뭐라는 거야. 당연히 확실하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저 새끼를 믿으려고 해요? 끝까지 사정이 있을 거라는 둥.”

“믿, 으려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모르는 일이라는 거야, 오해일 수도 있는 거고.”

질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으나 여전히 상진의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대체 어떤 사고방식이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난감한 태주가 말을 더 이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답답하겠지만. 나는…….”

굳이 말로 하자니 조금 씁쓸하다.

“나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 가진 게 없어.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괜히 저 사람들 눈 밖에 나서 이 회사에서 잘리고 싶지 않아.”

창피했다.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저가 형편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서.

“그리고 너는 겪어 본 적 없을지 몰라도 난 겪어 봐서 알아. 오해가 더 큰 오해를 불러와. 단순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는 없어. 사람에 대한 판단은 쉽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오해는 다른 오해를 낳는다. 그분들이 아버지에게 그러했듯이. 또 그분들이 제게 그러했듯이. 흰 천이 한번 물감으로 얼룩지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밭게 토해 낸 진심이 입김으로 사라졌다. 태주의 눈동자가 조금 발갛게 물든다. 그에게 들키는 것이 싫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둘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상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같은 성미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까. 속으로 숨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화를 삼키는 것 같았다.

“뭐 죄지었어요? 고개는 왜 숙여.”

상진의 양손이 태주의 볼에 닿았다. 그가 힘으로 태주를 당겨 고개를 들게 했다. 꾹 눌린 볼이 젤리처럼 불룩 눈 밑으로 올라왔다. 조금 촉촉해진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아무한테나 그렇게 관대하게 굴지 마요. 착하다고 누가 상 줘요? 그리고 그건 착한 게 아니라 호구 같은 거예요.”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볼이 꽉 눌려서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저 새끼 부탁을 들어준 거였어요? 그럼 딴 놈들 부탁 들어주는 것도 그 이유인가 보네요. 이 회사에는 온통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밖에 없어.”

놓으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듣고만 있었다. 살다 보니 성태주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여기 있네. 사실은 그게 좋았다. 그래도 볼에 닿은 손이 따뜻해서라고 핑계를 대보았다. 노곤해서 잠이 올 거 같다.

“일단 알았어요.”

볼에서 그의 손이 떨어졌다. 닿았던 곳에 금세 찬바람이 묻는다. 그게 더 춥게 느껴졌다.

“일단? 일단 알았다니, 대체 뭘.”

“얼른 집에 들어가요. 깜깜해졌네.”

상진이 태주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의 보폭을 따라잡느라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이 차장이 사라졌던 그 가로등 아래에서, 마침 도착한 택시를 잡는다. 상진이 택시의 문을 열고 태주를 구겨 넣어 버렸다.

“기사님, ××동 ×××―×번지, ××편의점 골목 근처에 빨간 벽돌집 앞으로 가 주세요.”

남의 집 주소는 언제 또 외운 거야.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거로 계산해 주시고,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상진이 지갑에서 지폐 여러 장을 꺼내어 조수석 쪽에 놓았다. 아니, 끽해야 이만 원도 안 나올 거리였다. 저렇게 돈을 흥청망청 쓰다니. 대신 가계부라도 써 주고 싶은 심정이다.

“어? 잠깐, 뭐야! 이렇게 가라고?”

그에게 인사를 마저 건네기도 전에 택시가 출발했다.

급히 차창을 열고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상진은 아무도 없는 까만 거리에서 어울리지 않게 서 있었다. 그를 두고 먼저 출발한 것이 태주로서는 좀 마음이 쓰인다.

태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진은 떠나는 택시를 보며 손 인사를 몇 번인가 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가 왠지 전화를 걸 것 같아서 태주도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태주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는 오지 않았다.

* * *

꿈을 꾸고 있었다.

태주는 가끔 이런 꿈을 꾼다.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스스로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자각했으나 깨질 못하고 있었다. 태주의 자각몽에는 대부분 동생인 현이와 아버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오빠.]

[태주야.]

그들은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태주만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꿈속에서 그들을 볼 때면 혼자 어른이 된 것만 같아 서글펐다. 염치없이 혼자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만 같아서.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쪼그려 앉았다. 웃으며 뛰어오는 동생을 끌어안고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예전과 같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으나 결코 태주를 쓰다듬어 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태주만이 알고 있다.

태주는 방긋방긋 웃는 현이를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어린 여동생은 차가웠다. 태주의 가슴도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사무치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이대로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성태주를 위해 진정으로 울어 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늘 거기까지였다. 태주의 생각이, 바람이 거기까지 미칠 때면 깨어나고야 말았다. 결코 다시는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 꿈에서 깨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동생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든다.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그 공간에, 저 멀리서 인영이 보였다. 아버지도, 동생도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점점 형태를 갖춘다. 그 아이를 알고 있다. 태주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현우야.’

* * *

눈이 번쩍 뜨였다.

고요한 방 안에 거친 숨소리가 퍼진다. 태주의 불안한 호흡이 공기 중에 섞였다. 그는 눈을 뜬 채로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했다. 쿵쿵 뛰는 심장이 눈동자를 흔들리게 한다. 눈꼬리 끝으로 닦아 내지 못한 눈물이 흘렀다.

오랜만이었다, 현우를 꿈에서 본 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푸석하고 건조한 공기가 아침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이불 위에 시체처럼 놓인 손을 더듬었다. 손끝까지 얼어 있었다.

“하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 제 입김이 닿는 것이 싫다. 오늘따라 유독 싫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멍하니 있었다.

―♬♪♩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아, 오늘 평일이구나. 태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가도 알람 소리를 들으면 삶을 생각하게 된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회사에 두고 온 일들이 생각난다. 끔찍해라.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이불을 걷었다. 이제 슬슬 공기가 차갑다. 간밤에 보일러를 껐던가, 벌써 올겨울 도시가스비가 걱정이다.

알람을 끄기 위해 폰을 집었다. 손가락으로 알람을 해제하고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일어나기엔 살짝 이르다. 5분만 더 잘까. 다시 누워서 핸드폰을 이리저리 보았다. 이상하게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 회사 단체 메시지 그룹이었다.

[※공지사항※]

회사의 전체 직원이 참여하는 메시지 그룹이지만 원래 자주 쓰는 일은 없었다. 정말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러고 보니 사실 이번에 회사 대표가 바뀐 것도 꽤나 중요한 일 아니었나. 그때는 잠잠하더니 무슨 공지사항이지. 태주가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내렸다.

[※공지사항※]

공지 드립니다.

금일 ××월 ××일은 ㈜맨파워맨의 창립기념일입니다.

대표님께서 창립기념일을 맞이하여 금일 ××월 ××일을 휴무로 지정하셨습니다.

전체 직원분들이 지금까지 애써 주신 노고를 치하하고자 함이니 하루 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고 명일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태주는 혹시 아직 자각몽을 꾸고 있나 싶었다. 핸드폰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두어 번 꾹꾹 감았다가 떴다. 화면의 내용은 똑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손으로 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러나 화면의 내용은 똑같았다.

“뭐야, 갑자기 창립기념일이라고?”

창립기념일 같은 걸 챙겨 본 역사가 없었다. 대표가 하나 바뀐 거로 이런 일이 있나. 핸드폰 화면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보았다. 만우절인가.

[?????]

[헉??? 네!]

[넵, 내일 뵙겠습니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진짜인가요?]

[넵? 아, 넵.]

[와,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 아래로 줄줄이 달린 답장들 역시 모두 당황한 듯 보였다.

공지를 한 사람은 본부장. 그러니까 전(前) 대표이고, 현 대표는 그 그룹방에는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었지만 일단 태주도 답장은 했다.

[네, 본부장님! 다들 푹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

보내 놓고도 찜찜하다. 태주가 보낸 메시지 밑으로도 다른 답들이 올라왔다. 거의 ‘네’, ‘넵’, ‘네엡’ ‘넷’ 등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답하는 걸 보면, 진짜이긴 한 것 같은데…….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최 팀장의 번호를 검색해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정말 창립기념일을 챙기려고 했던 거라면 조금 더 일찍 공지해야 했던 게 아닌가. 공지사항이 올라온 시간이 오늘 새벽이었다. 엄청 급하게 정해진 느낌이 든다. 뭐, 체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긴 하다만.

“아, 팀장님.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어어, 성 과장.]

“다른 게 아니라…….”

[창립기념일 말이지?]

역시 눈치가 빠르다.

“네네. 무슨 일인가 해서요. 오늘이 회사 창립기념일인가요?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들어서…….”

신입 햇병아리일 때부터 과장을 달 때까지 말이다.

[어, 그렇다대.]

“네?”

최 팀장도 뭔가 시원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그는 이 회사의 거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사람인데도.

[나도 따로 연락받은 건 없어. 그런데 대표……. 아니, 본부장님한테 확인해 보니까 진짜 맞다더라. 오늘 쉬래.]

“아, 정말요?”

[응, 정말. 대표님 지시사항이라고.]

“알겠습니다. 팀장님 쉬시는데 연락드려 죄송해요.”

[그래그래, 내일 보자.]

통화를 종료하고 다시 한 번 공지사항을 보았다.

진짜이긴 한가 본데. 뭐, 그래도 쉰다는 건 좋은 거니까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재차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이불을 코 밑까지 덮었다. 다시 자야지.

“아!”

순간 또 눈이 번쩍 뜨였다. 자고 싶었는데 혹시나 또 그 꿈을 꾸게 될까 조금 겁이 났다. 그리고…….

‘전화 안 왔네.’

상진에게서는 따로 전화가 없었다.

아니, 뭐, 전화를 기다린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어제 잘 들어갔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 잘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건장한 놈을 설마 누가 건드리기야 했겠어.

사실 어제 자기 전에 메시지라도 남길까 하다가 그만뒀다. 성질이 불같기는 해도, 어제는 태주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었던 거니까.

그게 고마웠다. 그런데 그걸 또 고맙다고 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가족 없는 거 티내는 것 같아서. 지난번에 집주인 할아버지가 얘기했다면 이미 알고야 있겠지만…….

생각이 또 꼬리를 물었다. 태주가 크게 숨을 내쉬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는 씻는 게 최고다. 공짜로 받은 휴일이니, 오늘은 일찍 씻고 맛있는 것도 해먹고 집에서 푹 쉴 계획이었다. 아직도 삐그덕삐걱끼그덕거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쾅쾅쾅!

―쾅쾅!

―쾅쾅쾅!

저녁에 먹을 찌개를 끓이던 중이었다. 온 집에 퍼지는 찌개 냄새 때문에 주방 환풍기를 틀었다. 우우웅―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리는 환풍기 소음을 알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쾅쾅!

“계십니까?”

얼추 완성된 찌개의 불을 내려 놓고 환풍기를 껐다.

누군가가 문을 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놀란 태주가 우선 대답을 하며 손을 닦았다.

―쾅쾅!

“네, 잠시만요!”

택배를 주문한 일도 없었다. 그리고 태주의 집에 찾아올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토끼눈을 하고서 부리나케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배달시키셨죠?”

“배달이요?”

문이 열린 틈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평소 택배를 배달해 주시는 기사님도 아니었고, 근처 마트의 배달원도 아니었다. 그 뒤에도 두 명 정도가 더 있었다.

“네, 배달이요. 여기 ××동 ×××―×번지 맞죠?”

“주소는 맞는데 저는 배달시킨 물건이 없어요.”

태주가 말하자 상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아니, 잠시만요. 성함 확인 좀…….”

그가 작은 단말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확인하는 동안,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 버렸다. 대체 무슨 물건이라는 거지. 아마 주소가 잘못 적혀 있거나 했을 터였다.

“성함이 성…….”

뒤에 더 서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뭘 주문했기에 사람이 이렇게나 왔나 싶다.

“저기, 성함이 ‘성자기’님 맞으시죠?”

“……네?”

“그러니까 성함이 ‘성자기’님이요.”

“…….”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아뇨, 전 성태주인데요.”

“어, 이상하다. 여기 분명히 ‘성자기’ 님이라고 주문해 주셨는데.”

“혹시 잘못 온 거 아닐까요?”

“핸드폰 번호가 010―××××―×××× 아닌가요?”

“아……? 네, 그건 제 번호가 맞아요.”

배달 기사가 부른 핸드폰 번호는 태주의 것이 맞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대로 돌려보내기도 영 꺼림칙하다. 태주가 그에게 확인차 단말기를 건네받았다. 그가 준 단말기의 액정 화면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신자: 성 자기♥]

“…….”

그 이름을 본 순간, 피가 차갑게 식었다. 누가……. 아니, 어떤 놈이 저렇게 써 놨는지 대략 감이 왔기 때문이다. 태주에게 이런 장난을 칠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 혹시 배달 온 물건이 대체 뭔가요? 정말 제가 주문한 건 아니거든요. 한번 확인을 해 봐야 해서요.”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애꿎은 기사님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 시간이 금인 분들이었다. 정말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건네고 고개를 숙였다.

“아, 네네. 침대하고 침구 세트입니다.”

“침대……, 랑 침구 세트요?”

“네, 주문은 ××월 ××일에 매장에서 해 주신 걸로 확인이 되거든요. 주문해 주신지는 좀 되었는데, 이게 물량이 없어서 배송이 늦었습니다. 해외 배송인 것도 있고요.”

침대라니, 설마……. 순간 예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상진이 이 회사에 입사한 날이었다.

‘또 뭐 피해 받은 거 있어요?’

‘그, 그리고 침대 매, 트리스도 망가지고…….’

‘그거 원래부터 스프링 나갔던데.’

‘아니,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요. 전에는 그래도 잘 수는 있었는데 이제는 누울 때마다 삐그덕거…….’

이 미친놈.

설마 그때 침대 망가졌다고 말한 것 때문에 이걸 주문한 건가? 침구 세트는 또 뭐야? 배달 기사님이 말한 ××월 ××일이면 그때보다는 좀 뒤이긴 하다만. 아, 입사했을 즈음이 아니라 같이 병원에 갔던 날이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입사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구나.

“저기 고객님.”

“아, 네.”

“정말 죄송한데. 저희가 침대 설치해 드리고 또 바로 다음 집에 넘어가야 해서요. 핸드폰 번호가 고객님과 동일하신 거면 확인하시는 동안 침대 놓아 드려도 될까요?”

“아…….”

대략 그놈의 짓으로 생각이 모아진 뒤였다. 기사님의 말대로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기에 태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기거기 모서리 조심해.”

“어어, 밑에 잘 잡고.”

기사님들이 끙끙거리며 침대 박스를 옮기고 있었다. 좀 크기가 큰 것 같은데……. 일단 박스가 옮겨질 동안 태주는 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번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받았으면서 이번엔 늦장을 피운다.

‘빨리 좀 받아라, 빨리 좀.’

태주의 뒤에서 박스가 해체되고 침대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나기 직전에, 그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쉬는 날 전화도 다 해 주고. 감동인데요.]

“감동이고 뭐고.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죠?”

[모르겠는데요.]

“진짜 몰라요? 나 지금 좀 급하거든요.”

[자꾸 그렇게 존댓말 쓰면 진짜 아는 것도 그냥 모를래요.]

“아, 정말! 저거 침대 대체 뭐야? 너지?”

수화기 너머로 아주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오, 저걸 진짜! 태주의 속이 뒤집어진다.

[우리 자기 주려고 준비해 봤는데. 마음에 들어요, 성 자기♥님?]

“누가 네 자기야!!”

부글부글 끓던 속이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안에서 기사님들이 침대를 설치 중인 것도 까먹고 소리를 바락 질러버렸다. 뚝딱, 드르륵, 탁탁, 온갖 기구 소리에 아마 듣지 못하셨을 것이다.

[좋아하시니까 뿌듯하네요.]

“귀 좀 파라. 누가 좋아했다는 거야. 그리고 네가 왜 내 침대를 사 줘. 부담스럽게.”

[우리 사이에 뭐가 부담스러워요? 저번에 보니까 침대가 영 못쓰겠더라고요. 이불이랑 베개도 그렇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알아서 안 하시잖아요. 그리고 그 침대를 과장님만 써요? 나도 쓰게 될 텐데.]

“…….”

[저는 이왕이면 좋은 침대에서 하고 싶거든요. 그래야 중심도 잘 잡히고 제 밑에 누울 과장님도 편하고. 그렇죠?]

“…….”

[설치 다 됐어요? 매트리스가 얼마나 좋은가 오늘 시험해 볼까요. 지금 집이죠?]

“끊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마 한마디만 더 했으면 한 대 쥐어박으러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저기, 성자기 고객님.”

“성자기 아니고 성태주입니다, 기사님. 제발요.”

기사님은 내막을 모르시겠지만 태주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저 미친놈의 장난질에 몇 명이나 놀아나야 한단 말인가.

“네? 아, 네. 성……, 태주? 고객님. 이쪽으로 와서 좀 봐주세요.”

일단 설치를 시작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저걸 안 받겠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나중에 그 개진상에게 도로 가져가라고 하는 수밖에는 없다.

“일단 침대 밑 부분을 설치해야 하거든요. 자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해서요.”

“아…….”

“일단 지금 있는 이 자리에 있었던 침대는 밖에 내놨습니다. 저희가 수거해 드리거든요.”

“이거…….”

“침대가 프레임까지 하면 크기가 커서 자리 놓기가 좀 애매하네요.”

“기사님, 이게…….”

한쪽 벽면에 세워진 박스 안에서 새 침대의 부속품들이 보였다. 대충 봐도 너무 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태주의 입에서 나와 버렸다, 야한 만화의 대사 같은 게.

“……이렇게 큰 게……. 들어갈까요?”

“……그, 그러게요.”

잠시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해졌다.

“일단 해 보는 데까지는 하겠습니다. 가구들을 좀 옮겨도 되겠죠? 최대한 면적 빼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금방 하겠습니다.”

왜 기사님들이 세 명이나 오셨는지 알게 되었다.

저 침대의 크기를 대충 어림잡아도 킹 사이즈 정도 되어 보였다. 거기에 프레임까지 설치하고 나면 면적을 더 차지할 것이다. 태주의 집은 1.5룸이다. 끽해야 8평에서 10평정도 나올까 한 크기였다. 이 작은 집에서 킹 사이즈 침대라니.

[자기야, 지금 출발할까요?]

“야, 이 미친놈아! 저렇게 큰 걸 주문하면 어떡해. 우리 집에 안 와 본 것도 아니고, 저게 들어갈 것 같아?”

결국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다시 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놈은 전화를 받자마자 뻔뻔하게도 또 성질을 긁어 놓는다.

[왜 안 들어가요. 충분히 놓을 수 있겠던데.]

“안 들어간다고.”

[에이, 형은 맨날 엄살이야. 저번에도 안 들어간다고 해 놓고 내 거 잘만 넣었으면서.]

이 자식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소리다. 순간 태주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결코 전화 너머로 티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들어가긴 하는데, 저거 놓으면 다른 걸 못 놔.”

[내 거만 들어가면 됐지. 누구 거를 더 넣으려고요? 안 돼요, 난 다른 사람이랑 같이 구멍 쓰는 거 못 참아요.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누구야, 이 차장 새끼예요?]

“야!”

괜히 전화했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를 않았다. 365일 24시간 그 머릿속에는 그 짓 할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자꾸 이 차장님은 왜 걸고넘어지는 거야. 미쳤나, 진짜.

“진짜 이럴래? 너 나 놀리려고 저거 주문했지.”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왜 이래. 기사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셔서 일단 설치하긴 하는데, 저거 도로 가져가. 안 받을래.”

[좋은 꿈꾸라고요.]

“……뭐?”

갑자기 상진의 톤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멋들어진 저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잠시 말을 잃은 틈에 그가 더 덧붙였다.

[좋은 침대를 쓰면 좋은 꿈을 꾼대요. 과장, 아니. 형이 좋은 꿈 꿨으면 해서 보냈어요.]

“…….”

불현듯 오늘 꿨던 꿈이 떠올랐다.

매번 꾸는 꿈. 태주에게는 그 꿈이 깨어나기 싫은 꿈이었다. 그러나 좋은 꿈이었나 생각하면 절대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늘 울면서 일어났으니까.

“뭐야, 갑자기. 그, 그런다고 내가 뭐…….”

태주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살짝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제게 잘해 주는 걸까. 그것이 고맙기도 기쁘기도 하면서 두려웠다. 어느 순간 상진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 빈자리를 견뎌 낼 수 없을까봐서.

[그리고 좋은 꿈을 꿔야 덜 피곤하죠. 맨날 피곤하다고 하잖아요.]

“아니, 그래도 뭘 이렇게까지…….”

[부담 느끼지 마세요. 아, 전에 쓰던 이불이랑 베개는 버려요. 그리고 침대는……. 일단 설치해 보고 정 안 되겠으면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면 되죠.]

“……이사가 뭐 쉬운 일도 아니고.”

아, 이 인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었지. 태주와는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난 평생 여기서 살 거야.”

[거기서 평생을요? 이해가 안 되네. 과장님네 건물도 아니잖아요.]

“……요즘 대부분의 청년들은 자기 건물이 없거든요?”

[아, 그래요? 그래도 왜 하필 그 집일까. 좁고 추운데.]

“집주인 할아버지가 보증금하고 월세를 거의 안 올리셨거든. 이 금액으로는 다른 집에 들어가지도 못해.”

태주가 새파란 청소년일 때부터 살던 집이다. 태주의 사정을 아는 할아버지가 다른 집들은 세를 올려도 태주에게는 더 받지 않았다. 세가 좀 덜 나가는 대신에 그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다.

물론 그 돈 대부분은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졌던 빚이 있었다. 도의적으로 갚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장례비며 납골당 비용들도 빌려서 치렀었다. 그 당시 태주와 태주의 집에는 남은 것이 없어서.

[왜 꼭 돈을 내고 들어가요? 내 오피스텔로 들어오면 되지.]

“이보세요. 내가 당신 오피스텔에 왜 들어갑니까.”

[몸만 오면 되는데.]

“됐습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또 모르죠, 그럴 일이 생길지도.]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데에는 선수였다. 여기서 더 따지고 들면 끝이 나지 않는다. 태주가 일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 침대랑 침구는……. 고, 고, 고마…….”

[네? 잘 안들려요.]

“고, 고맙……. 고맙습니다. 잘 쓸게. 그리고 꼭 갚을게요.”

[갚을 필요 없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아무튼 저도 그 침대랑 베개랑 이불 잘 쓸게요.]

“……그럼 끊는다.”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해도 꼭 저런 식이다. 그래도 고마웠다. 지금은 두려움보다는 기쁨이 더 크다.

태주가 상진과 통화하는 동안 벌써 침대 작업이 마무리 되어갔다. 침대는 정말 컸다. 원래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서랍장을 빼야 했다. 겨우겨우 자리를 잡긴 했는데 방을 거의 침대가 다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침구도 세팅해 드렸어요. 이미 세탁해서 온 거기 때문에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기사님들에게 자양강장제 음료를 하나씩 드렸다. 너무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것 같아 죄송했다. 게다가 집도 좁아서 설치도 힘이 드셨을 거다. 기사님들을 따라 나가면서 태주가 연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끝까지 배웅을 하려던 참이었다.

“아이고, 정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분이신가 봅니다.”

“네?”

“침구야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비싼 침대를 선물 받으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아.”

“그럼 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시끌벅적했던 오후였다. 조용히 쉬려고 했는데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

태주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요하고 쓸쓸한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침대가 놓여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네, 이렇게 비싼 침대를 선물 받은 적은 처음인데.’

조심스럽게 다가가 침대에 앉았다. 이전에 쓰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했다. 이런 물건에 성태주란 인간이 닿아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금 울컥했다.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휙 누워 버렸다. 사각사각한 이불이 몸에 착 감긴다. 태주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침대도, 이불도 흰 눈으로 빚은 것같이 보드라웠다.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다.

* * *

다소 갑작스러웠던 창립기념일 이후로 회사에는 여러 말이 돌았다. 팀장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새로 바뀐 대표에 대해 궁금해했다.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그 전까지는 대표가 바뀌든 말든 회사에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인해 새 대표에 대한 관심이 대폭 늘고 말았다.

“새로 바뀐 대표님 말이야. 대체 누굴까? 혹시 본 적 있어요?”

“아니, 모르겠는데. 따로 인사를 시켜 준 것도 아니고, 대표실도 항상 비어 있다던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엄청난 부자래요.”

“에이, 아니야. 저번에 누가 그러더라. 지금 본부장님의 친척일 거라고.”

“진짜? 우리 가족 회사 되는 거야?”

“근데 친척이면서 왜 돈을 받고 팔아요? 우리 회사 팔린 거라면서요.”

태주가 탕비실에 들어선 시점이, 딱 그때였다. 문을 열자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주에게로 꽂혔다.

“아, 성 과장님.”

“네, 다들 여기 모여 계셨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메리카노를 내리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해사한 미소는 덤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누구 꼬시려고. 우리 성 과장은 정말 경각심이 없어.”

“그러게 말이에요.”

“아, 하하…….”

사람들이 저런 농담을 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도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성 과장님은 혹시 아세요?”

“뭘요?”

“저희 바뀐 대표님이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알 리가. 최 팀장에게도 살짝 물어봤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본부장 정도는 되어야 알 것 같은데.

“전혀 몰라요. 뵌 적도 없구요.”

“그래도 과장님은 이 회사에 오래 계셔서 본부장님하고도 친하시잖아요. 한번 물어봐 주심 안돼요?”

“맞아요! 너무 궁금해요.”

같은 회사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다 친해지진 않는다. 게다가 본부장이라고 하면, 결국 전(前) 대표가 아니던가. 오히려 어려운 상대였다. 태주에게로 모이는 시선을 차분히 외면하며 말했다.

“하하, 노력은 해볼게요. 그런데 저도 여쭤보기가 좀 그러네요. 때가 되면 말씀해 주시겠죠.”

“에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곧 주제가 돌변한다.

“참, 성 과장. 소개팅은 했어?”

“네?”

곰을 피했더니 범을 만난 격이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한 유 팀장이었다. 아차 싶어서 얼른 커피를 가지고 나가려고 몸을 틀었으나 허사였다. 그는 이미 발동이 걸렸는지 아예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내 후배 중에 진짜 괜찮은 사람 있는데. 소개팅 해.”

“아…….”

“할 거지?”

“죄송해요, 팀장님. 그……. 저 지금 누구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안 돼. 해야 돼. 이미 성 과장 사진 보여 줬다고. 그쪽에서는 하고 싶댔어.”

“네?”

왜 남의 사진을 마음대로! 지금까지 유 팀장과 찍은 사진이 없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할 거지?”

다른 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팀장이라 거절하기가 좀 힘들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말을 좀 둘러대고 있었다.

“너무 뺀다, 성 과장. 솔직히 얼굴 반반한 거 말고는 별거 없으면서. 그냥 해. 엄청 좋은 사람이야. 돈도 많아.”

솔직함을 가장한 막말이었다. 태주의 학력이 변변찮은 것도, 가족이 없다는 것도, 가진 돈 역시 얼마 없다는 것도. 이미 회사에는 암암리에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소문의 출처는 역시나 본부장이다. 태주가 처음 입사했을 때, 당시 대표였던 본부장만이 태주의 이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입이 정말 가볍다.

“하하, 그게요. 팀장님…….”

그때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올 때 문을 꽉 안 닫았나 보다. 갑작스레 문이 확 열려 다들 놀란 눈으로 뒤를 보았다.

“깜짝이야.”

“어, 상진 씨.”

“상진 씨다. 이리 와요, 커피 한 잔 해요.”

계상진이었다. 왜인지 또 잔뜩 성이 난 표정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유 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저래, 또 불안하게.

“방금 뭐라고…….”

“와악! 계 사원! 뭐야, 하라는 거 다 했어요?”

태주가 상진과 유 팀장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정확히는 유 팀장에게 등을 돌리고 상진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살기등등한 상진의 표정을 가려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가려지기엔 체급 차이가 너무 난다. 급한 대로 아무 말이나 하면서 상진을 뒤로 밀어 보았다.

“……과장님, 말 막지 마세요. 유 팀장님, 방금 뭐라고 하…….”

“아직 다 안 했죠?! 가요, 알려 줄게요!”

상진의 팔을 잡고 뒤로 밀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마. 뭘 하려고 하든 제발 하지 마.’

태주가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큰 눈동자에 오롯이 그의 형태가 자리 잡았다. 상진은 구겨진 미간을 좀처럼 펴지 않았으나, 곧 태주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태주의 까만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앞의 사람은 무척 난감해하고 있었다. 상진이 미동도 없자 아랫입술을 깨물고 미세하게 도리질하고 있다. 물러서라는 뜻이었다.

“상진 씨.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유 팀장이 상진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부드럽게 풀렸던 상진의 눈매가 다시 사나워진다. 그 사이에서 태주만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힘을 줘 밀어도 순순히 물러서질 않았다. 앞을 올려다 본다. 상진은 당장이라도 그와 싸울 기세로 굴었다.

태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여기서 팀장과 싸워 봐야 무슨 득이 있겠는가. 제발, 제발!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던 태주가 상진의 손을 덥석 쥐고 소리쳤다.

“아픈 곳은 좀 괜찮아요?!”

모두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쏠렸다. 반쯤은 성공이다. 상진도 놀란 눈으로 태주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 계 사원……. 아픈 곳이요. 저번에 아픈, 아프다고 했던…….”

“……아픈 곳이요?”

“네, 거기……. 아프다고 했었는데……. 그, 내가 도와줄까요?”

탕비실 안이 고요해졌다. 다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미묘하게 어색해진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상상한 건지 순간 태주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실수를 깨닫기엔 조금 늦어 버린 감이 있었다.

“상진 씨 어디 아파요?”

“두통? 나 약 있는데 줄까요?”

확실하게 분위기는 전환되었다. 다들 상진을 걱정하며 말을 건네었다. 팽팽했던 공기가 느슨해진다. 유 팀장도 ‘저 자식 술 덜 깼나. 숙취라도 있었나 보네.’라는 식으로 넘긴 듯했다.

“뭐야, 상진 씨 어제 술 먹었나 보네. 숙취 약 있는데 줘?”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대로 잘만 넘어가면 성공이다. 태주가 안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상진을 보고 있다. 그래, 이제 이대로 자연스럽게 이 안에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상진에게 나가자는 신호를 보내려고 바라보았다.

마음이 맞았는지 태주와 상진의 시선이 곧바로 마주쳤다. 그런데 어째 불안하다. 상진의 입 꼬리가 위로 한껏 당겨져 있었다.

* * *

주식회사 맨파워맨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전체 직원 수만 생각한다면 중소기업과 소기업의 중간 정도로 해야 할까. 영업팀, 온라인팀, CS팀, 기획팀 등 주요 팀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규모였다.

하지만 회사를 이루는 인원수에 비해 매출은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 나이를 막론하고 성(性)에 대한 갈망은 마르지 않는 법이다. 이 제품 역시 다소 음지에 있기는 하나 그런 류일수록 입소문을 타는 법이었다.

태주가 입사하고 5년 정도 지났을 때, 허름한 사무실을 내놓고 작지만 깨끗한 사옥으로 이전했다. 물론 대기업들의 고층 빌딩까지는 아니었지만 4층 정도의 신축 건물이었다. 덕분에 깨끗하게 관리된 사무실과 화장실 등 직원들의 편의는 더욱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잠깐만, 거긴 왜!”

4층의 가장 끝, 구석에 있는 화장실이 오랜만에 소란스럽다. 대표실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으나 대표의 방에는 안에 화장실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건물의 층마다 화장실이 두 개씩 설치된 채로 매매되어서 굳이 철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진 씨!”

화장실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태주가 상진의 팔을 잡았다.

“왜요?”

“뭐, 뭐하러 여기 왔냐고!”

상진에게 억지로 끌려 들어오는 모양새였다. 최대한 몸을 뒤로 빼고 화장실 입구에서 버티고 서있다.

“도와준다면서요.”

“어?”

“내가 아픈 곳, 과장님이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아까 상진 씨가 팀장님하고 싸울 것 같아서……!”

“네? 제가요?”

“응, 방금 팀장님하고…….”

“제가 왜요?”

그의 답에 아차, 싶었다. 의아한 기색의 상진을 본 순간 태주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착각이었나. 왜 둘이 싸울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상진과 유 팀장이 다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어쩌면 본인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나, 왜 상진이 자신을 대신해서 화를 냈던 거라고 생각했지.

앞에 있는 상진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하하. 그게, 그게 아니고…….”

단전에서부터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와 귓불이 뜨거웠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가 조금 잘해주었다고 내심 들떴을까. 오랜만에 느낀 ‘나의 편’이란 호의가 판단을 흐리게 했던 모양이다. 체온이 가파르게 식는 듯하다.

“……음. 그냥 상진 씨가 표, 표정이 안 좋길래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래, 이쯤에서 깨닫는 것이 나았다. 더 깊게 관여되기 전에, 더 휘둘리기 전에 말이다.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그의 상태가 호전되면 끝나는…….

“지금은 과장님 표정이 더 안 좋은데요.”

태주의 앞머리가 살랑거린다. 상진이 허리를 숙여 고개 숙인 태주와 비스듬히 시선을 맞추었다. 지근거리에서 마주친 눈길이 숨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나? 아닌데. 나 아무렇지도 않아요.”

“서운해요?”

“응?”

“섭섭하냐고요.”

“뭐가 섭섭해요? ……아니, 전혀……, 서운하지 않은데.”

발그레한 볼에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상진이 양쪽 손바닥을 태주의 볼에 대고 문질거린다. 예의 그 장난기 어린 표정을 하고서 웃고 있었다.

“에이, 섭섭하다고 해 주길 바랐는데.”

“어?”

태주가 상진과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들었다. 흰 피부에 들은 붉은 물이 다 빠지지 못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사이를 이어준다. 상진은 예사롭게 말을 덧붙였다.

“제가 유 팀장님하고 왜 싸워요.”

“……그, 러니까 싸운다는 게 아니고.”

“상대가 되어야 싸움을 하지. 나는 그냥 유 팀장 새끼를 쥐어 패려고 한 거예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격한 표현에, 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 누굴, 뭐?”

“그 새끼를 쥐어 패려고 했다고요.”

“아니, 왜?

“그 새끼가 과장님한테 막말했잖아요, 재수 없게. 지는 뭐가 잘났다고. 건물도 하나 없는 새끼가.”

이걸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화를 내야 하나, 혼을 내야 하나. 태주는 혼란스러웠다. 사실은 그의 답이 기뻤고 좋았고, 왜인지 모르게 든든했고 의지가 되었으나 그래도…….

“한 번만 더 그 새끼가 소개팅하자고 조르면 저 불러요.”

“……널 불러서 뭘 어쩌게.”

“그리고 그 새끼가 막말하면 참지 마세요. 아냐, 어차피 과장님은 또 참겠지. 그냥 그때도 나한테 연락해요.”

“연락하면 찾아와서 뭐 어떡하려고.”

그와의 대화는 대체로 이상했지만 그게 재미있었다.

상진은 정말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그런 점이 싫지 않다. 조금 마음이 놓인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오밀조밀한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찬다.

“싸우게요.”

대답이 단호했다.

“참나, 무슨 불량배야? 조만간 건달로 데뷔할 거야?”

태주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장난을 걸었다. 상진은 그런 태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팔을 끌어당겼다. 조금 벌어져있던 두 사람의 거리가 다시 좁혀진다.

“건달로 데뷔하기 전에, 뭐 잊은 거 없어요?”

“잊은 거?”

“에이, 또 모른 척한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한 말을 왜 그새 까먹었지.”

“설마……. 야, 그건 그냥 네가 싸울까 봐 둘러댄 거라고.”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 없어요.”

“아! 잠깐!”

상진에게 이끌려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비좁은 그 공간에서 자연스레 몸이 부딪친다. 태주가 상진의 팔을 떼어내려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 설마 지금……. 지금, 하려고?”

“해도 돼요?”

“안 돼. 미쳤어? 여기 회사야.”

태주가 단칼에 거절했다. 아무리 미친놈이래도 회사에서 그 짓이라니. 누군가에게 들켰다간 끝장이다.

“절대 안 돼. 빨리 나가자, 괜히 오해 사겠다.”

평소와는 달리 두 번이나 강조하며 거부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상진이 웬일로 순순히 떨어졌다. 꽉 붙잡고 있던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난다. 그래, 이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어야지. 태주가 화장실 칸에서 나가려 잠금장치를 열었다.

“읏!”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상진이 엉겨 왔다. 뒤에서 팔을 둘러 태주를 품 안 가득 껴안는다. 그에게 꽉 붙들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야, 이 진상! 이거 안 놔?”

상진에게 끌어안긴 채 몸을 비틀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다면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틈새조차 내어주질 않았다. 태주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수록 더욱 압박이 더해졌다. 종국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갑갑했다.

“형.”

상진의 입술이 태주의 귓바퀴에 닿았다. 그는 나지막이 ‘형’을 불렀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마치 다 죽은 나뭇잎이 바닥에서 흩어지듯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처음 접하는 상진의 태도에, 그래서 태주도 조금 머뭇거렸다.

“……진짜 미쳤어? 여기 회사라고. 누가 네 형이야.”

이제는 아예 노골적이었다. 상진은 낮게 입소리를 내며 태주의 귀를 잘근 씹어대었다.

그의 말캉한 입술이 여린 살에 닿을 때면 태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따뜻한 호흡과 부드러운 살덩이가 맞붙는다. 촉촉하게 젖은 혀가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지며 자극적인 소음을 내었다.

“비, 비켜……!”

“……하아, 태주 형.”

태주의 귀가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달아오른다. 발갛게 부은 귓불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열이 올랐다. 그의 입술을 피하려 고개를 숙이면 그도 허리를 숙였다. 도리어 그의 앞섶과 태주의 둔부가 바짝 밀착된다.

“야, 앗, 그만, 이 변태 새끼, 진짜……!”

“하아, 형……. 지금 흥분돼요.”

신호였다.

태주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상진이 신호를 말하면 거부하지 않고 그와 몸을 맞대었다. 표면적으로는 치료의 확인을 위해서 말이다. 때로는 차 안에서, 또는 태주의 집에서도.

“……하필 지금 이러기야? 너……!”

제 허리를 붙들고 있는 그의 팔을 꾸욱 잡아 눌렀다.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떨어질 수가 있나? 무슨 진드기도 아니고.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귀가 화끈거렸다. 더 이상은 위험했다.

“으읏, 태주 형, 여기 기분 좋아요…….”

상진의 한쪽 손이 태주의 허벅지 앞쪽을 더듬었다. 살짝 안으로 미끄러지며 허벅지를 제 몸 쪽으로 지그시 누른다. 그러자 뒤에 와 닿는 그의 중심이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윽, 그렇게 누르지 마, 흐앗……!”

툭 불거져 나온 기둥의 굴곡이 천 아래에 비벼진다. 두꺼운 하의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그는 교묘하게 둔부 사이를 자극해 대었다.

“형, 저 정말 설 것 같아요.”

“읏, 뭐?”

“조금만 더 도와줘요, 그럴 거죠?”

허리를 감싸던 다른 쪽 손이 어느새 태주의 앞섶에 가 있었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태주의 바지 단추와 지퍼를 풀었다. 헐렁해진 바지 안으로 손을 넣는다. 벌써 속옷이 조금 젖어 있었다.

“으응, 아, 안 돼…….”

“맨날 싫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밝혀요? 대체 진짜 변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태주의 귓가에 상진이 속삭였다. 느물스러운 말투로 놀리더니 큭큭, 낮게 웃는다.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는 태주의 바지를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내렸다. 반쯤 걸쳐진 바지 때문에 다리를 벌리지도 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흐앗! 으읏, 응, 거기, 만지면……!”

속옷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상진의 길고 굵은 손가락들이 태주의 것을 천천히 쥐고 문지른다. 손끝에서부터 기둥을 타고 내려가 널찍한 손바닥으로 감싸 쥔다.

자신의 체온보다 더 뜨거운 온도가 합쳐지자 몸이 움찔 떨렸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듯 더욱 아래로 파고들었다. 기둥 아래에 팽팽하게 올라붙은 고환을 건드리고 문대었다.

“하아! 응, 아……! 그만, 읏……! 못 참, 흣…….”

“후……. 벌써? 그렇게 좋아요?”

“그만, 거긴, 아……!”

“회사 화장실에서, 부하 직원에게 만져지니까 흥분돼요?”

그의 말에 태주가 몸서리를 쳤다.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다가 다시 숨을 터트린다. 어느 틈에 풀어진 것인지, 뒤에서 느껴지는 상진의 것이 더욱 밀착되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떨어진 시선 너머로 헐겁게 풀린 상진의 바지가 보였다.

“읏, 아니……. 으응……!”

“하, 넣고 싶어요. 과장님 구멍에 내 좆 넣고 흔들고 싶어요.”

“으앗……!”

상진이 태주의 페니스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중심을 태주의 엉덩이 골에 천천히 문지른다.

얇디얇은 속옷 너머로 엄청난 크기의 기둥이 닿았다. 태주는 몸을 빼지도 밀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살덩이는 그 존재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상진과 병원에 다녀온 뒤로 그는 꼬박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종종 그와 둘이 있을 때, 그 효과가 보이긴 했었다.

그런데 예전엔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저번보다 더 크다고? 유일한 보호막이었던 속옷마저 내려가고 제 골 사이로 기둥이 들러붙었다. 설마 지금 저걸 넣으려는 건 아니겠지. 오싹 소름이 돋는다.

“그, 상진아. 아니, 안 돼. 지금은…….”

“넣을래요. 과장님도 제 거 먹고 싶잖아요. 좋아서 울 때까지 박아 줄게요.”

“아, 안 돼. 안 돼.”

태주의 몸이 번쩍 들렸다. 뒤에서 태주를 끌어안은 상진이 그의 허리를 감싼 채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화들짝 놀란 태주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어정쩡한 다리 사이로 허벅지가 들어왔다.

“읏!”

잔뜩 발기한 태주의 것에서 맑은 액이 새어나온다.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쾌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상진은 태주의 몸을 틀어 좌변기의 헤드 부분을 잡게 했다. 자연스레 허리가 숙여지고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 이미 흥분감에 잠식된 태주는 순순히 상진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발가벗겨진 둔부에 상진의 몸이 밀착했다. 그 역시 속옷이며 바지가 내려간 듯했다. 따뜻한 살이 맞닿자 얕게 신음이 터진다. 이어 태주의 다리 사이로 상진의 것이 닿았다. 고양감으로 팽창한 고환에 상진의 기둥이 문질러진다.

“하아, 으읏, 미친놈아, 대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네가 사람이냐! 라는 소리는 차마 내뱉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자 고환과 맞비벼지는 기둥이 보였다.

“빨리 넣고 싶어요? 저도요.”

“그게, 아니라! 으읏!”

상진의 손이 아래로 쑥 들어와 자신의 것과 태주의 기둥을 맞잡았다. 한 손으로 겨우 받치고 서서히 허리를 흔든다.

얇은 살가죽이 맞닿으며 예민한 곳에 비벼졌다. 이미 태주의 그 끝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옅게 앓는 소리를 내며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하으, 읏, 으응……!”

“하아, 하, 형…….”

“그만, 아, 나올 것 같……!”

뒤에서 몰아치는 숨소리와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아찔했다.

상진이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당기면 태주의 몸도 파르르 떨렸다. 변기 헤드를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금방이라도 내보낼 것만 같았다.

회사 화장실에서, 미친 짓이다. 그리고 이런 미친 짓에 금세 달아오른 자신도 미친놈이 아닌가.

상진의 한쪽 손이 태주의 골반께로 올라갔다. 그는 마치 피스톤질을 하듯 허리를 놀렸다. 단단하게 짜인 근육이 쩍쩍 갈라지며 유연하게 튕겨졌다.

“하아, 으응, 거기…….”

태주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비좁은 칸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그러나 상진은 못내 아쉬운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뒤로 빠진 태주의 둔부에 제 골반을 문대며 그를 내려다본다. 당장이라도 그 안으로 자신을 맞추어 범하고 싶었다. 바싹 마른 입 안에 흥분이 고여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의 뒤에서 움직이던 허리를 멈추고 살짝 뒤로 물렀다. 단단하게 올라붙은 자신의 페니스를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선단을 골 사이에 대었다. 부드러운 태주의 둔부를 벌리고 그 안으로 제 것을 쑤실 요량이었다. 차오르는 욕정에, 지끈 아래가 쑤신다.

“하, 자, 잠깐, 기다려.”

“못 기다려요.”

“미친놈아. 찢어진다고!”

잔뜩 겁을 먹은 태주가 몸을 벌벌 떨었다.

흰 피부가 긴장으로 움찔거린다. 아직은 다물린 그 입구에 뭉뚝한 끝을 비비자 태주가 숨을 헉 들이켰다. 서서히 힘을 주어 틈새를 벌리고 압박한다. 태주가 새된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그때.

“이 차장님이?”

“응, 아까 여기로 올라왔다던데.”

“그 마케팅팀의 이 차장?”

“응.”

화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태주의 몸이 얼어붙는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상진을 보았다. 상진 역시 하던 짓을 멈추고 밖으로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뭐냐, 이 차장님하고 대표님하고 무슨 관계지.”

“그러게. 팀장급이면 모를까, 차장급이 왜 대표랑 독대를 하지? 전체 직원들도 대표 얼굴 한 번을 못 봤는데 말이야.”

“의심스럽다. 그리고 대표 바뀐 지가 언제인데 왜 소개를 안 해줘? 궁금해 죽겠네.”

4층의 끝, 이 화장실은 늘 인적이 드물었다.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또한 이 작은 칸 안에 상진과 태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태주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 차장? 마케팅팀의 이 차장이라면 태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늘 태주에게 일을 넘기던, 그래서 그날 밤에 상진과 마찰이 있을 뻔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바뀐 대표를 독대했다고? 대체 왜지. 설마 그들도 대학 선후배 사이라거나 아니면 다른 인연이 있었던 걸까. 태주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찼다. 지금까지 밉보인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잠시 고민에 잠긴 사이 귀에 무언가가 닿았다. 말캉한 촉감이 귓바퀴를 타고 얼굴과 이어진 이음새를 핥는다. 태주가 흠칫 놀라 몸을 빳빳이 세우려 했다. 그러나 상진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태주의 턱을 꽉 쥔 채 놓아주지 않는다. 그에 의해 그대로 고정되어 다시 아래에 맞닿는 뜨거운 감각을 느껴야 했다.

제 턱을 쥔 상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에게 그만하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밖에 무슨 소리라도 들릴까 차마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뒤에 붙어 있는 상진에게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밖에 사람 있……!’

태주의 귓불을 잘근거리다가 이내 볼에 입을 맞추던 상진이 어정쩡하게 벌어진 태주의 허벅지를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자 그 허벅지 사이로 상진의 페니스가 제자리를 찾듯 끼워진다. 보드라운 살결이 흉기처럼 곧추 선 성기를 감쌌다.

“?!”

그건 매우 묘하고 색정적인 느낌이었다. 태주가 흠칫 놀라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의 다리 사이로 그의 기둥이 겹치고 여린 살갗 아래로 그것이 드나들었다. 두터운 성기의 끝이 허벅지를 가르고 벌린다. 긴 기둥이 아래에 스치며 태주의 고환에 문대어졌다. 이미 체액을 뚝뚝 흘리던 태주의 것이 재차 흥분감에 뒤덮인다.

‘흡, 흐읏……!’

그의 팔이 태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좌변기 윗부분을 잡았던 팔이 떨어진다. 연이어 태주의 몸이 상진에게 철썩 들러붙었다. 그는 태주가 움직일 수 없도록 제 품에 완벽히 안고서는 허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의 살갗이 비벼지는 소리, 그리고 꾹 참은 숨소리가 칸 너머로 들릴까 두렵다. 태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신음을 죽이고 있었다. 두려움과 동시에 송곳같이 날카로운 쾌감이 온몸을 잠식한다.

“근데 지금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태주의 심장이 쿵 떨어진 순간이다. 자신을 끌어안은 상진의 팔을 꼬집었다. 하지만 상진은 역시나 꿈쩍도 하질 않는다. 몰아치는 그의 행위는 잦아들 줄을 몰랐다.

태주가 최대한 상체를 웅크리려 움찔거린다. 제멋대로 드나드는 아래의 감각이 생경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눈물이 맺힐 즈음 투둑, 태주의 것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가파르게 올라가던 쾌감이 끝내 파정을 맞이한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긴장해 있던 신체가 이완되며 다리가 후들거린다.

“잘못 들었겠지. 이 화장실은 아무도 안 쓰잖아.”

“그런가? 아무튼 이제 내려갑시다. 대표실에서 이 차장님 나오는 거 보고 가려고 했는데, 허탕이네.”

화장실의 문이 닫히고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내내 숨을 참았던 태주의 입술이 겨우겨우 트였다. 동시에 참았던 신음이 단번에 쏟아져 나온다.

“하아! 하으, 읏, 흐윽……!”

“과장님, 이거 봐요. 엄청 많이 나왔네.”

상진이 태주의 페니스를 살살 쥐며 흔들었다. 끝에서 아직도 진득한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에 그것을 묻혀 가며 태주의 살을 쓰다듬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 상진의 몸이 닿자 안쪽이 간질거린다.

“흐윽, 읏, 그, 떨어져…….”

“넣어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아니야. 제발, 흐으읏……. 상진아…….”

살살 흔들리던 상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가 태주의 것을 어루만지던 손을 위로 올린다. 정액으로 잔뜩 젖은 손가락에 투명한 실선이 생겼다. 그것을 태주의 눈앞에서 흔들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입 벌려요.”

정말 장난이었다. 이 짓궂은 농에 태주가 어울려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밀쳐내려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놀리려 했을 뿐이었다.

“흣, 으응…….”

그런데 태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붉게 물든 입술이 떨어지면서 선홍빛의 혀가 살짝 드러난다.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꼭 감고 상진에게 몸을 기댄 채 말이다. 덜컥거리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상진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머뭇거리자 태주가 혀를 조금 더 내밀었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말랑한 혀가 훔친다.

“……이런 미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상진을 두고, 태주가 고개를 앞으로 움직였다.

질척한 정액을 핥고 상진의 손가락을 오물거린다. 그것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가 혀를 내어 핥아 올렸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움직임이 상진을 자극시킨다.

“형, 너무 야하잖아요. 이런 거 누구한테 배웠어요?”

상진이 태주의 입 안을 휘저었다. 정액으로 흥건했던 손가락이 이제는 그의 타액으로 흠뻑 젖는다. 마치 핑거링을 하듯 여린 점막을 헤집었다. 파르르 떨리는 혀를 짓누르듯 문지른다.

“흡, 으음……. 읍…….”

깊숙이 들어온 자극에 태주가 숨을 헉헉 내쉬었다. 반사적으로 맺힌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흐른다.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나가기가 버거웠다. 손을 올려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 진짜 귀여워요. 이제 얼굴만 봐도 설 것 같아요.”

상진이 속삭였다, 밭은 숨을 몰아쉬는 태주의 귓가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이어서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태주의 손을 쉽사리 떼어냈다. 그러고는 도리어 그의 손목을 낚아채서 아래로 당겼다. 태주의 손끝이 상진의 것으로 향한다. 더듬거리는 손길로 그 끝을 쥐었다.

“흐읍, 으으응……!”

“형, 만져 줘요. 응?”

태주의 한 손에 선단이 가득 들어찼다. 단단한 그것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상진은 아예 신음을 숨기지도 않고 허리를 튕겼다.

태주의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이어 손 안으로 안착한다. 탁, 탁, 맞부딪히는 마찰과 함께 끝에서 질척이는 정액이 태주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하아, 형……. 태주 형…….”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태주는 이제 그에게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아래로 떨어진 손에 질척한 액체가 묻어난다. 손바닥을 적시고도 모자라 손가락 사이사이로 후두둑 흘렀다. 그 뜨겁고 미끈한 촉감이 그가 내뱉는 신음과 난잡하게 섞인다.

“제발, 그만……. 흐읏, 상진 씨…….”

그가 내뿜는 욕정과 열기가 눈에서 어른거린다.

어지러웠다. 달구어진 놋쇠처럼 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안 돼, 이렇게 되면. 태주가 속으로 초조하게 되뇐다. 이성을 놓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간격에 서 있었다. 슬금슬금 발끝에서부터 다시 기어오르는 감각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윽……!”

상진이 짧게 숨을 토했다. 그리고 곧 그의 페니스에서 혼탁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꽤나 많은 양이 태주의 손바닥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흐른다. 고요한 공간에 두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남았다.

“하아, 하…….”

그는 태주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헐떡거렸다. 더운 숨 사이로 들릴 듯 말 듯 계속 태주의 이름을 불렀던 것도 같다. 잃어버린 장난감을 되찾은 아이처럼, 상진은 끌어안은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 * *

“두 사람, 어디 다녀와?”

살금살금 사무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데.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유 팀장이 불쑥 앞을 막아섰다.

“아, 그, 인수인계 관련해서 브리핑할 것이 있어서 잠시…….”

태주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괜스레 옷매무새가 신경 쓰인다. 영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태주와 그 뒤에 서 있는 상진을 훑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양심에 콕콕 찔리고 있었다.

미쳤지, 내가 미친놈이지.

식은땀을 흘리며 태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이서 브리핑을?”

“네, 상진 씨에게 알려 줄 것들이 좀 있어서요.”

“사무실에서 안 알려 주고?”

“말로 설명해 주다 보니……. 다른 직원들 신경 쓰일 것 같더라고요.”

제발 이쯤에서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어색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려 버리고 싶었다.

“팀장님, 혹시 저 찾으셨나요?”

“그건 아닌데.”

유 팀장이 뒷말을 흐린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 보였다. 사실 유 팀장은 태주와 상진이 소속된 팀과는 다른 팀이다. 그래서 태주를 급히 찾을 일도 거의 없을뿐더러, 저런 표정을 지을 일도 없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다. 태주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유 팀장의 뒤로 여러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두 사람은 마케팅팀 이 차장 나가는 거 못 봤겠네?”

“이 차장님이요?”

“응, 이 차장…… 방금 나갔거든.”

오늘따라 이상하게 이 차장의 이야기가 많이 들렸다. 아까 그 화장실에서도……. 분명 이 차장님이 새 대표와 독대를 했다고 하질 않나. 이번에는 유 팀장이 언급하지를 않나. 태주가 그에게 다시 되물었다.

“나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 방금 잘렸다고. 일방적으로.”

“네?”

“아까 짐 싸 가지고 나갔어. 참나 무슨 회사가 동호회도 아니고.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왜 갑자기…….”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성 과장은 이 차장하고 좀 오래 일했었으니까 혹시나 이유를 아는 줄 알았지. 아무튼 수고해.”

그가 태주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고 자리를 떠났다. 상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 상진 역시 그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진의 시선은 오로지 태주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태주는 숨을 툭 내려놓기라도 한 듯 힘이 없어 보였다. 살짝 숙인 고개와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팔이,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과장님?”

그가 태주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꿈에서 지금 막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어? 아, 응.”

“왜 그러세요?”

“아니, 조금. 아냐, 많이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뭐가요?”

대수롭지 않게 묻는 상진에게 태주가 놀란 눈을 했다. 방금 유 팀장과 나눈 대화를 못 들었나? 다시금 설명해 주었다.

“이 차장님 일 말이야. 유 팀장님이 말씀하신.”

“아, 그거요.”

“잠깐만.”

태주가 앞장서서 걸었다. 곧 걷듯이 뛰었다. 그는 부리나케 복도를 건너 마케팅팀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 입구에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저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잘리신 거래?”

“몰라, 그렇다고 하는데.”

“근데 이렇게 갑자기?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대표라도…….”

“그리고 이 차장은 여기서 오래 근무한 사람인데 너무 간단히 자르는 거 아니야? 진짜 무섭다.”

“조만간 칼바람 부는 건 아닌지 몰라.”

“새로 바뀐 대표 라인으로 싹 갈아치우는 거 아닌가. 인력들을 새로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력서 다시 제출하라고 할지도. 그러면 학력이나 스펙 모자라는 사람부터 모가지겠네.”

“그렇지, 이 차장이 잘릴 정도면.”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태주의 심장을 할퀴었다.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았는데. 눈앞이 깜깜하다. 창립기념일이랍시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던 거다.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는 사람들 틈새를 헤치고 나아갔다.

이 차장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던 액자도, 모니터에 붙었던 아기 사진도. 여기저기 쌓여있던 각종 문서들도 모두 정리가 되어 있다.

그 텅 빈 자리를 보자 실감이 났다. 그가 이곳에서 일한 오랜 시간마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던가? 매일 보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일이.

“과장님, 좀 같이 가요.”

뒤를 따라온 상진이 태주의 팔을 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렇게 갑자기 가 버리시다니. 아직 멀리 못 가셨을지도 몰라. 인사라도 드려야…….”

태주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당장이라도 뛰어갈 듯 몸을 틀었다. 그는 상진이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복도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매우 급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서 멈춰 있었다. 그 숫자를 확인하자마자 비상계단으로 향한다.

“과장님!”

상진이 태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바삐 움직이던 발이 멈춘다. 태주가 상진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몇 계단 위에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미간이 구겨진 채로.

“뭐가 그렇게 급해요.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인사라도 드려야지. 이야기도 좀 해야겠어, 이렇게 갑자기……. 아무래도 이상해.”

“전화로 하면 되잖아요.”

“얼굴 뵙고 하는 게 예의야.”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태주를 상진이 막아섰다. 그는 왜인지 불쾌한 얼굴이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요?”

“뭐?”

“인사하겠다고 이렇게 뛰어 내려갈 만큼?”

“아무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니까 그렇지.”

“예고가 있건 없건, 솔직히 그 인간이 과장님에게 잘해준 것도 없잖아요. 매번 일만 넘기고 부려먹기만 하고. 술자리에나 불러내고. 그러면 또 과장님은 싫어도 가서 뒤처리나 돕고.”

상진은 그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잘됐죠. 과장님을 괴롭히는 사람이 한 명 줄은 거잖아요.”

“야, 계상진!”

태주의 목소리가 계단 통로를 타고 울렸다. 어쩌면 처음, 진심으로 그에게 화를 낸 순간이었다. 그가 놀란 눈을 하고 태주를 보았다.

“왜 화를 내세요? 제 말이 틀렸나요?”

그래, 상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 인간은 자신을 괴롭히던 상사 중 한 명이었으니까. 몸이 아파도 그가 시킨 일은 해야 했고, 나가기 싫어도 그가 오라는 술자리에는 가야 했다. 그에게 태주는 이 회사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 중 하나였을 테니.

그와의 그런 일들이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아니. 정말 지치고 힘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인간관계란 그렇게 무 자르듯 탁 잘리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끔은 그에게 고맙던 순간도 있었고,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면서 가족보다도 오래 본 사이였다. 가랑비에 옷 젖듯 물드는 것이 미운 정이다.

“네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겠지만.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었어.”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상진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었다.

“비켜. 이미 가셨으면 1층에서 전화라도 드리게.”

“…….”

“뭐해, 비키라니까.”

여전히 앞을 막아선 상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단 한 걸음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어 상진이 말했다.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목소리로.

“……왜 그 자식 편은 들면서 나는 밀어내요?”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태주는 몹시 당황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듯,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아니, 뭐? 그런 게 아니라.”

“그 새끼가 그렇게 중요해요? 나보다?”

“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말 그 자식 좋아하는 거예요?”

이런 대화,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두통이 인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미쳤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정말?”

“그래, 정말.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짜증나니까.”

일순 상진의 얼굴이 태주와 비스듬히 겹쳤다.

그의 큰 손이 태주의 턱선을 훑으며 부드러운 입술이 태주의 것을 머금는다. 윗입술부터 포근히 감싼 열기가 아랫입술을 거쳐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짧지만 뜨거운 입맞춤을 뒤로하고 상진이 순순히 떨어졌다. 조금 쀼루퉁한 표정이긴 했다만.

“그럼 됐어요.”

“……하,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는 꼭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유치원생처럼 굴었다. 불퉁한 표정을 한 가운데 입꼬리가 미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또 황당하기도 했는데, 조금 귀엽게도…….

아니! 전혀, 전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정신 차려, 성태주.

“볼일 끝났으면 비켜.”

스스로에게 신경질이 나서 그만 그를 퍽 밀쳐 버렸다. 몸통 박치기 정도는 해야 꿈쩍하는 시늉이라도 한다, 저 인간.

* * *

역시나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 입구에도, 주차장에도. 항상 주차되어 있었던 공간 역시 비어 있다.

입 안이 착잡하다. 최 팀장은 물론 본부장과의 인연도 있었던 사람이다. 이렇게 쉽게 잘릴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배경도 스펙도 학력도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결국 연결이 되지 않는다. 태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운전 중이실지도 몰라.’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일단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당사자는 얼마나 더 마음이 상했겠는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해 볼 생각이었다.

―드르륵.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태주가 다급히 화면을 확인한다. 기다리던 이 차장의 연락은 아니었다. 최 팀장이다. 그의 간결한 메시지였다.

[15분 뒤 회의.]

이 상황에서 무슨 회의람. 가슴이 답답했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발걸음을 떼었다. 이제는 텅 비어 버린 주차공간을 뒤로 한 채로 말이다.

* * *

역시나 사무실의 분위기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태주 역시 말없이 자리로 가 앉으려고 했다. 아, 자리 진짜 불편하네. 모니터를 보고 있는 상진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상진이 비켜 줘야 태주가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왜 하필 구석이냐고.

“들어가게 잠깐만.”

그가 태주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는 척하더니 자리에 앉아서 다리만 벌린다. 그리고 자기 허벅지를 툭툭 치더니 태주에게 또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자기 다리 위에 앉으라는 뜻인가.

“…….”

느물스럽게 웃는 그에게 태주가 마주 웃어 주었다. 그리고 상진의 허벅지에 손을 대었다가 아주 세게 꼬집어 버린다. 확, 그냥! 이게 아주 오냐 오냐 했더니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난리다.

‘악!’

그는 차마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입만 뻐끔거리며 무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리에 쏙 들어갔다. 조그만 게 까불고 있어.

아직 회의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영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애써 서류를 뒤적거렸다. 홈페이지의 문의 게시판도 확인했다. 오전 동안 들어온 문의들이 좀 있었다. 하나씩 답변을 달고 있었는데 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세미나실에 자리 세팅 마무리되니까 슬슬 들어갑시다.”

이번 회의는 세미나실에서 하나? 같은 층에 있는 회의실보다 더 큰 곳이었다. 다른 층이기도 하고, 전 직원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기 때문에 쓸 일이 많지 않았다. 종무식에나 사용했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세미나실은 조금 추웠다. 오래 비워놔서 그런지 공기 자체가 싸늘하다. 팀별로 나누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딱 인원수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도 함께 놓여 있다. 미리 준비를 해 둔 모양이다.

태주와 상진을 비롯한 팀원들과 다른 부서의 팀원들도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작은 회사이긴 했지만 다른 부서 사람들은 볼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았다. 간혹 눈이 마주치는 구면들에게 목례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마 이 차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람 엄청 많네요.”

“새삼스럽다. 우리 회사가 그래도 아주 소규모는 아니야. 입사 지원할 때 그런 것도 안 봤어?”

“봤죠. 잠깐 깜빡했어요.”

상진이 허벅지를 만지면서 답했다. 아직도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는 과장을 건드리고 난리야. 쥐도 여차하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세미나실은 어수선했다. 축 처진 분위기는 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끼리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작은 문제의 창립 기념일부터였다. 쉬는 날을 받았을 때는 옳다구나 좋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약을 주고 병을 준 게 아니냐는 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 팀의 최 팀장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나마 최 팀장이 전(前) 대표인 본부장과 가장 친밀했었고 이 회사의 가장 오래된 인원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최 팀장도 그들의 은밀한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아마 모른다고 했겠지. 실제로 그조차도 모르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과장님,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약속 있어.”

“거짓말.”

“진짜거든.”

주말에 집에서 푹 쉬기로 침대랑 약속했다. 24시간 중에 12시간은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 약속했다. 진짜다.

“집에서 쉴 거면, 제 오피스텔 놀러오세요.”

“약속 있다니까. 그리고 싫어. 내가 왜?”

“집에서 쉬는 것처럼 놀러 와서 쉬면 되잖아요.”

“내 집이랑 남의 집이랑 같냐.”

“어차피 그 집도 과장님네 집 아니면서.”

그래, 아주 부자라서 좋으시겠다. 저 인간은 가끔 저렇게 속 뒤집히는 말을 하곤 한다. 태주가 손가락을 허공에서 꼼지락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꼬집히고 싶어서 아주 미치겠지? 이번엔 어디 꼬집어 줄까?”

“아파서 싫어요. 전 아파 하면서 느끼는 과장님하고는 다르거든요.”

상진의 옆자리에 앉은 오 주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최대한 조용히 소곤소곤 대화를 했으나 어쩌면 들렸을 수도 있었다. 일부러 상진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는데, 그러길 잘했다. 뭐, 평범한 대화처럼 들…… 리지 않았을까. 다소 과하게 친하다는 느낌은 받았겠지만.

그래도 역시 화가 난다. 태주가 타는 속을 누르며 상진의 발을 콱 밟았다.

“악! 아파!”

“쉿, 쉿!”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놈이었다. 태주도 이 회사에서 알음알음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상진은 더했다. 다른 부서들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눈길이 많았다. 겉으로만 봐서 그렇지 속은 엉큼한 놈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와 친한 태주에게 부럽다고 할 때면, 하하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테이블에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멍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미나실의 입구 쪽이 소란스럽다.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려나 보다 싶었다.

입구에서 성큼성큼 본부장이 걸어왔다. 그는 낮은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에 헛기침을 했다. 웬일로 양복까지 차려입었다.

“어, 흠. 모두 모이셨습니까?”

다소 경직된 분위기였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각 부서 간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갑자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아마 여러분들이 가장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서들에서도 알 만한, 회사의 오래된 인물이 하루아침에 잘려 나간 일이 그 이유였겠지.

“그간 회사 내에 여러 일이 있었음에도 미리 공유하지 못한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내부 체계가 바뀌면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제 우리 회사는 새로운 대표이사님의 비전을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규들이 수정 혹은 변경될 수 있지만 최대한 직원 여러분들의 불만 사항을 수렴할 예정입니다.”

직원들의 불만 사항을 듣지도 않고 어떻게 수렴하겠다는 건지. 여기까지는 그냥 예의상 하는 소리인 듯했다. 전 직원들이 본부장의 말에 집중한 가운데, 상진만 지루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의 자세가 흐트러지기에 허벅지를 꾹 누르자 다시 자세를 고쳐 잡는다.

‘지루해 죽겠어요.’

‘조용히 해.’

상진이 작게 소곤거렸다. 그래서 태주도 작게 소곤거리며 흘겨보았다. 그의 입술이 부루퉁해졌다.

“―해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아마 모두 궁금해하셨을 텐데.”

본부장의 말에 실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설마?!’하는 분위기였다.

“앞으로 저희 맨파워맨을 이끌어 가실 김현우 대표이사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본부장이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입구 쪽을 향해 정중히 손을 가리켰다. 아직 대표이사라고 불린 인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가 잠깐이라도 놓칠세라 그 방향을 향해 집중했다.

아주 잠깐의 간격을 두고, 한 남자가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깔끔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중후한 분위기의 사내가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선다. 모두에게 초면인 탓에 실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주식회사 맨파워맨의 대표이사, 김현우입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대표이사의 곁에 선 본부장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자자, 여러분. 대표이사님을 박수로 환영해 주시죠.”

그제야 박수가 나왔다. 짝, 짜작, 짜자작……. 다소 맥 빠지는 분위기였긴 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태주도 동참했다. 양손을 부딪쳐 박수를 치는데, 상진이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입 모양으로 ‘왜?’라고 말했는데 그가 이내 고개를 획 돌려 버린다.

‘왜 저래.’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무시했다.

“대표이사 김현우입니다.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조금 더 일찍 이런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일이 겹쳐서 늦어졌습니다. 너른 양해를 부탁합니다.”

인사치레 형식의 말들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빨리 공지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회사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비전은 무엇인지. 빠진 인력들에 대한 부분은 보충을 앞두고 있다든지. 그런데 말의 앞머리마다 본인의 직함을 강조해 대었다.

“저 대표이사 김현우는 앞으로 우리 맨파워맨을―.”

본인이 대표이사인 거 이제 전 직원이 다 알았는데 왜 저렇게 강조를 할까. 조금 모양 빠져 보였다. 다른 직원들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는 수군거리며 웃기도 했다. 태주는 그냥 속으로만 생각할 뿐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저 대표이사 김현우는 직원 분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대표의 말을 듣고 있는데, 또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이번에도 상진이었다. 그는 마치 태주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그리고, 직원 여러분들의 연차 등 복지 체계를 점검하여 삶과 일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을 과업으로 두고―.”

모두의 귀가 쫑긋 섰다. 아직 말만 꺼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뀐 대표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며 불만을 표하던 사람들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이런 걸 조삼모사라고 하던가. 어차피 잘린 것은 본인이 아니니까 금세 잊기 쉽다. 태주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외줄에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지만.

“또한 업무분장을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맡아야 할 일은 각자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다른 팀원에게 과한 업무를 지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태주에게는 저 말이 그냥 환심을 사기 위한 미사여구로 느껴졌다. 대부분의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에게 일이 많든 적든 신경 쓰는 일이 없었다.

“이상입니다. 앞서 공지했던 복지 체계에 대한 개선과 업무분장에 대한 내용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공유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대표이사 김현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환호성을 지르는 인물들도 있었고 어울리지 않게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도 있었다. 죽상을 하고 세미나실에 들어와서 나갈 때는 환호라니.

태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뻐하는 듯 보였다. 아직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전체 직원을 앉혀 놓고 공식적으로 약속을 한 셈이다. 그런데 최 팀장과 단상 근처에 있는 본부장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이 공간 안에서 그 두 사람만 어두웠다.

* * *

“―위하여!”

“―위하여!”

잔과 잔이 부딪친다. 넘실거리는 술이 테이블 위로 흘렀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른다. 태주도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 독한 맛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최근에는 회식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 세미나실에서의 일 이후로 유독 더 그랬다. 그 날의 일을 두고 회사 내부에서는 긍정적으로 말하는 부류와 부정적으로 비관하는 부류로 나뉘는 분위기였다.

물론, 태주는 그 둘 중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살아남기가 우선이니까.

“자, 우리 성 과장. 술 왜 이렇게 안 마셔? 더 마셔야지.”

“아, 네.”

“어허, 밑 잔 까는 거야? 얼른 비워.”

출고팀의 박 부장이 술병을 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는 몇 번 인사도 나누지 않았던 태주에게 항상 과하게 굴고는 했다. 태주의 잔에 술이 조금 남아 있자 그 꼴을 보지 못하고 다 비우라고 성화였다. 결국 억지로 비워 낸 잔에 다시 술이 채워진다.

“한 잔 더 해.”

쭉 들이키라며 그가 웃었다. 속이 영 말이 아닌데.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비워야 할 술잔을 들고 태주가 머뭇거렸다.

벌써 며칠째 이런 식이었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회식에 간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애당초 태주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집에 들어갈 때면 비틀거리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아주 끝장을 보자는 사람들처럼 부어라 마셔라 했기 때문이다. 마시지 않으면 대놓고 혼을 냈다. 원래 이렇게 심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술잔을 입술에 대었다.

단숨에 들이키려는데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가벼워진 느낌에 눈을 뜨고 옆을 보자 상진이 제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찰랑거리는 술을 단번에 삼켜 버렸다.

“어?”

놀란 태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주위에 앉은 사람들도 상진의 행동에 다소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는 일관되게 행동했으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저 기분이 좋은지 상진을 칭찬했다. 취한 탓도 있겠지만.

“와, 상진 씨. 괜찮아요? 과음한 거 같은데.”

“과장님 술 대신 마시는 거예요? 흑기사네.”

“저도 흑기사 좀 해 주세요, 부럽다.”

“성 과장님, 좋겠다.”

앞에 서 있던 출고팀의 박 부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상진을 탐탁지 않게 보는 듯도 했다. 큼, 크음, 헛기침을 하며 입술 끝을 아래로 내린다.

아무래도 저 인간은 어떻게든 먹이고 싶었나 보네. 태주가 생각했다. 저 인물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턱이 없다.

“흑기사면 두 잔 마셔야 하는 거 알지?”

굳이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상진이 그것을 거부하길 바랐겠지만 그는 보란 듯이 잔을 마저 비워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기분 나쁜 티를 낸다.

“아니, 무슨 남자끼리 흑기사를 해 줘. 징그럽게.”

“에이. 부장님, 보기 좋잖아요. 상진 씨가 과장님 위한다고 한 것 같은데.”

“맞아요. 그리고 성 과장님도 지금까지 많이 드셔서 좀 쉬셔야죠.”

주변 직원들이 상진과 태주의 편을 들었다. 요 며칠 태주가 시달린 것을 다들 아는 눈치였다. 그들은 웃으며 박 부장을 달래려 노력하고 있었다.

“보기가 좋긴 뭐가 좋아. 남녀 사이도 아니고. 그리고 상사가 마시라면 마시는 거지. 뭘 말이 많아, 이래서 요즘 사람들은……. 부장하고 과장이 건배하는데 사원이 중간에 끼어들고 말이야.”

분위기에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중년의 배불뚝이 남자는 영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주 욕을 못 먹어서 환장을 하셨나 보다. 지난번에 사내 필수 교육도 받으셨으면서……. 이런 것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 거 아닌가. 태주가 말을 고르고 골라 웃으며 답했다.

“하하, 부장님도 참.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너그럽게 봐주세요. 제가 요즘 좀 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속이 안 좋아서요. 죄송해요, 다음 회식 때는 빼지 않고 꼭 다 마실게요.”

탄산음료 병을 들어 주변의 빈 잔들에 조금씩 채워 주었다. 삽시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달래려는 노력이었다.

다들 여러 차례에 걸친 회식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주의 노력에도 박 부장은 여전히 비비 꼬인 말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면 혹시 둘이 사귀어? 아주 죽고 못 사는가 보네.”

1절만 하지, 왜 또 2절까지. 태주조차도 기분이 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 앉은 상진이 몸을 들썩거린다. 조금 불길했다. 음료를 내려놓고 상진을 힐끔 보았는데, 엄청 기뻐 보였다. 그가 입을 열며,

“ㄴ……!”

‘네’의 ‘ㄴ’을 꺼내기에 그의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어주었다. 아, 조금 뜨거우려나. 그러게 왜 이상한 대답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헛소리는 바로 차단해야 했다.

“상진 씨, 술 마시고 나면 안주를 꼭 챙겨 먹어야죠.”

“…….”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가 태주를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했다.

“저거 봐, 아주 고기까지 먹여 주네. 둘이 어디까지 갔어?”

박 부장이 또 딴지를 건다. 태주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박 부장의 입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조금 뜨거워도 참으세요.

“박 부장님도 고기 한 점 드릴게요. 속 챙겨 가면서 드세요.”

“앗, 뜨거!”

해사하게 웃는 태주의 모습에 다들 큭큭거리며 몰래 웃었다. 왜 자꾸 남의 팀에 와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박 부장은 투덜거리면서 자기네 자리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다시는 같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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