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빅 이벤트
“자기야 왼쪽으로 좀만 더 당겨 봐.”
새 가구가 줄줄이 늘어선 아파트 안이 분주했다. 정확히는 부엌과 거실 사이, 식탁이 놓인 공간이었다.
“왼쪽? 내 기준 형 기준.”
“너 기준.”
두 사람은 2인용이라기엔 몹시도 큰 식탁에 보(褓)를 씌우는 중이었다. 상판 아래로 떨어지는 천을 대칭으로 맞춘 다음에는 낱개의 테이블 매트를 일정 간격으로 세팅했다.
이제 고작 커트러리를 놓는 단계건만 공기 중에 맴도는 음식 냄새 덕에 벌써 그럴싸한 식사 자리로 보였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문득 눈짓을 주고받으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초인종 소리는 바로 그때 울렸다. 낯선 멜로디에 생경한 표정을 하던 두 사람은 막 내려놓던 집기를 서둘러 정리하고 현관으로 나갔다.
익숙지 않은 기계음이 생소해 멈칫거렸을 뿐, 이후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누구세요, 묻는 말 한마디 없이 문을 여는 동작이 빨랐다.
“어, 빨리 왔네?”
“차 막힐까 봐 좀 서둘렀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어. 너무 빨리 왔나?”
현관 밖에는 도원과 연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재광이 “아니에요, 들어와요” 하며 비켜서자 두 사람이 차례로 들어온다. 둘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의주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서야 온전히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도원과 연우가 거실 소파에 앉는 것으로 잠시간의 어수선함이 정리되는 듯했으나 그렇지는 못했다.
“야, 집 엄청 좋다. 뭐야, 도원 오빠랑 연우 벌써 왔나 보네? 어! 오빠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초대 고마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내는 민주가 등장했고,
“민선호는 아직이야? 와, 진짜 유연우가 있네.”
다음으로는 마케팅팀장에서 마케팅 총괄이 된 유현이,
“내가 제일 늦었어?”
마지막으로 선호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부지런히 울리던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제법 친근하지만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초면의 손님들만 거실에 남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녁 자리를 세팅하느라 바쁘던 집주인들은 조금 뒤 나타나 이목을 끌어모았다.
“자, 자. 인사는 충분히 했지? 이제 식사들 합시다.”
의주와 재광의 이사 기념 집들이이자,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이벤트가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재광의 대학 동기들과 회사 상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경위를 설명하려면 한 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황금 같은 어느 주말, 재광은 한 식당을 찾았다.
늘 그렇듯 구석진 룸을 예약한 차였다. 대개는 유명인인 연우를 배려해 분리된 공간을 찾지만, 오늘만큼은 재광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고려해 정한 장소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홀로 4인용 룸을 지켰다. 그런데도 따분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광은 보는 눈 하나 없건만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오올 김재광, 웬일로 제일 먼저 왔어?”
두 번째로는 민주가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쾌활한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친근하게 짓궂은 언사를 던지며 옆자리를 차지했다.
“어? 어, 뭐, 왜. 나는 먼저 오면 안 되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어쩐지 받아치는 재광의 말투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말미로 가며 자연스러워진 탓인지 민주는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냥 생소해서 그러지. 갑자기 밥을 산다질 않나,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리질 않나.”
“그게 뭐라고 생소할 것까지야.”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한데 두 가지가 겹치니까 괜히 의심스럽잖아.”
대신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재광이 “의심은 뭔 의심이야” 하며 대충 넘기려는데도 민주는 꿋꿋하게 가는 눈을 떴다.
“비싼 데서 산다는 걸 보면 나쁜 쪽은 아닌데….”
다 들리도록 중얼거리며 재광의 안색을 유심히 살핀다.
“뭐야, 그냥 얘기해. 재입사 1주년이 이런 식으로 기념할 만한 건수는 아닐 거고. 뭐 승진이라도 했어? 김 과장이야 이제?”
“사준달 때는 제일 좋아해 놓고 인제 와서 뭘 물어.”
계속되는 의문에는 지레 긴장하던 재광도 끝내 질린 안색을 했다. 뭐, 민주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게슴츠레한 눈길을 유지했지만.
사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 좀 기다려라’ 하고 말 문제였다. 그랬더라면 민주도 얄궂게 기대하는 척을 할지언정 이토록 물고 늘어지진 않았을 테다.
하지만 평소처럼 굴기에는 재광이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데, 나머지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민주가 ‘김재광 오늘 빅뉴스 있대!’ 해버리면 이후의 상황을 멀쩡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장난기 그득한 민주의 시선이 유독 부담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재광은 어서 빨리 다른 동기들이 와서 분위기가 환기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먼저 와 있었네?”
재광의 바람은 너무 늦지 않게 실현됐다. 민주가 말 대신 눈으로 재광의 옆구리를 콕콕 쑤시던 찰나, 도원과 연우가 등장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재광이 제일 먼저 온 거 있죠?”
“아 그래?”
“그렇다니까요. 와, 근데 연우야 너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드라마 한다더니 이제 촬영은 다 한 거야?”
“어. 얼마 전에 끝났어.”
그리고 기대한 대로 됐다.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자 민주의 관심사가 빠르게 그쪽으로 향한다.
간단한 안부로 시작한 대화는 의식을 타고 멀리까지 흘렀다. 연우의 휴식기 계획으로 시작해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민주의 회사 생활과 다음 휴가 계획, 도원의 졸업 논문 진행 상황까지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오갔다.
“맞다. 얼마 전에 윤 교수님 뉴스에 나오시더라? 나 밥 먹으면서 채널 돌리다가 깜짝 놀랐잖아.”
식사를 마칠 즈음 민주는 재광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던 것도 다 잊고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도원과 연우도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화두에 말을 얹으며 자연스레 대화에 임했다.
그 틈에 낀 재광만이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따금 추임새처럼 맞장구를 치고 웃으면서도 어색함을 채 감추지 못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동기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봤어? 요즘에 교수님 섭외 때문에 연락 많이 온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꾸하는 도원의 얼굴과 그의 접시에 남은 음식량을 살피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재광은 때때로 마른침을 삼켜 가며 타이밍을 쟀다.
“…저기.”
재광은 모두가 제 몫의 음식을 비워갈 무렵 간신히 입술을 뗐다. 식사를 마치고 어디로 이동하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던 참이었다. 크지 않은 음량이었으나 오늘따라 소극적이던 재광이 입을 연 탓인지 쉽게 관심이 쏠렸다.
가장 크게 반응한 사람은 역시나 민주였다. 옆을 휙 돌아보는 그의 낯에는 ‘맞다, 요놈 왜 밥 사는지 물어봐야 되는데’ 하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겨우 말문을 튼 재광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 꾹꾹 참는 표정이다.
호기심 가득한 민주를 애써 외면한 재광은 영문을 모르고 순진무구하게 쳐다보는 도원과 연우를 번갈아 봤다. 그런 뒤에야 조금은 느릿한 속도로 말을 이었다.
“나 다음 달에 이사하는 건, 알지?”
“알지. 그거 땜에 요즘 계속 정신없었잖아.”
“그 선배랑 같이 이사한다며. 회사 가까운 데로.”
도원이 늘 그렇듯 다정한 말투로 먼저 답했고, 뒤이어 연우가 호응했다. 민주는 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무슨 말이든 얼른 해보라고 채근하는 눈길이 강렬하게 옆얼굴을 강타했다.
“어. 그래서 그때 다들 초대해서 집들이를 할까 하는데…. 형 친구들도 같이.”
이번에는 도원이 자신의 곁을 돌아봤다. 순간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연우가 고민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입술 새로는 “좋아” 하는 목소리가 확고하게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흔쾌한 반응이었으나 어쩐지 재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더불어 말꼬리도 길어진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저녁 한 끼 정도 먹는다고 생각하면 돼. 사람도 그렇게 막 많이 오는 자리 아닐 거고….”
“이거 봐, 김재광 오늘 진짜 수상하다니까. 나 되고 오빠도 되고, 연우까지 다 된다는데 왜, 뭐. 뭐가 문제야. 이사하고 대접할 테니까 급히 돈 좀 빌려주라 뭐 그런 거야?”
결국에는 민주가 더는 못 참겠다는 뉘앙스로 와다다 쏘아붙인다. 맞은편에 앉은 도원이 “민주야” 하며 그를 말렸다. 망설이는 이유가 있을 테니 충분히 시간을 주자는 의미였다.
다행스럽게도 민주는 도원의 제지에 순순히 따랐다. 덕분에 테이블 위로 정적이 감돌고, 모두의 눈길이 다시 재광에게로 쏠렸다. 잠시간 고민하던 재광은 결심한 듯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다시 입술을 뗐다.
“그냥 저녁 먹는 자리긴 한데, 그게 그….”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끝을 흐리고 말았지만.
이쯤 되니 재광도 쉽사리 본론을 못 꺼내는 자신이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그는 짜증이 묻어나는 손길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헝클었다. 그러고는 다소 충동적인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나 결혼하려고. 그 사람 소개해주는 자리야.”
겨우 물을 엎지른 재광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도원은 멍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렸고, 연우는 그러잖아도 큰 눈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크게 떴다. 그 사이에서 굳지 않은 사람은 민주가 유일했다.
“뭐, 결혼? 결호온? 야 너는 학교 다닐 때도 헤어진 다음에 얘기하더니 지금도 그러냐? 대체 연애를 언제 했어? 얼마나 만난 건데? 뭐 하는 사람? 나이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놀란 모습인데도 민주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경악한 표정을 하고서 물음표를 다다다 쏟아낸다.
궁금함이 앞서 정작 대답할 시간은 주지도 않았다. 물론 답할 틈이 있다 해도 재광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할 수 있을 리는 없을 터였다. 그는 괜스레 목덜미나 뺨 따위를 문지르며 식사의 흔적만 남은 테이블을 훑어봤다.
“그니까 그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식을 올리고 그런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어, 저….”
“….”
“세 사람이 와서 우리가 그런 사이라는 걸 알아주고, 또 뭐… 축하해주면, 그랬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초대하기로 한 거야.”
반쯤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버벅버벅 눈동자를 굴리던 재광은 말미에 도원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도원이 부드럽게 웃는다. 별말은 않지만 이 순간 긴장한 재광에게는 상당한 위안이 되는 미소였다.
“근데 있잖아, 결혼한다면서 왜 지금 이사….”
그러나 위안도 잠깐이었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정중하게 물음을 던지던 연우가 끝내 말을 먹는다. 질문을 던지면서 생각해보니 설마 하게 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층 더 놀라는 얼굴을 본 재광은 테이블 아래로 애꿎은 손끝만 잡아 뜯었다. 그러느라고 답을 미루는데, 민주가 진지한 투로 자신의 견해를 꺼내 놓는다.
“아아, 그러면 약혼식 같은 거야? 그날 소개해주고 결혼은 나중에? 아니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이렇게 미리 약속까지 해? 어디서 만난 사람인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으나 정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광은 이 모든 오해와 의문을 풀 수 있는 해답을 떠올려 보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다들 아는 사람이야.”
“뭐? 누구, 누구. 우리 학교 사람이야? 동기? 후배? 선밴가?”
“…선배.”
되는대로 내뱉어보던 민주가 무릎을 탁 치고 입을 틀어막는다. 아무 말이나 던진다는 게 얼떨결에 들어맞아 신이 난 듯싶었다.
“혜진이 언니는 결혼했으니까 아니고, 유미 언니? 세진 언닌가? 너랑 친했던 선배 또 누구 있지?”
“…의주.”
“뭐라고? 누구?”
“여의주라고. 나 만나는 사람.”
여태 쉬지 않고 떠들던 민주가 냅다 비명을 지르다가 입을 틀어막는다. 막연한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한 연우 또한 “히익” 숨만 삼켰으며, 도원은 살며시 시선만 내리깔았다.
한동안은 4인용 룸 안에 정적만이 맴돌았다. 눈 깜빡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착각이 들 만큼 묵직한 침묵이었다.
“여의주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오빠 맞아? 우리 선배 중에 동명이인 없었지?”
단단히 굳은 공기를 깨뜨린 이는 민주였다. 안광을 잃은 눈으로 재광을 보며 내뱉는 음성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의주 형 맞아.”
“의주, 형…. 그치, 그니까 지금 너 그러면…. 세상에.”
그새 또 입을 막은 민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맞은편을 살폈다. 저와 같이 놀란 연우를 지나 담담한 도원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뭐야, 오빠는 알고 있었어요?”
도원은 여부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대신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사실 도원은 지금껏 재광과 의주 사이를 아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재광이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만났을 때 솔직히 터놨기 때문이다.
이전에 놀랐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결혼’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꽤 진지한 마음으로 만난다는 것도, 여태 이어진 동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더한 결심을 했단 사실은 몰랐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커밍아웃과 중대한 결심을 한 번에 터뜨릴 줄은 몰랐기에 놀라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꾸준히 놀라는 척을 하는 편이 나았을 듯했다. 민주의 한마디에 연우의 커다란 눈이 덩달아 도원을 향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원의 낌새를 알아차린 재광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로 이목을 돌렸다.
“저기, 좀 됐어. 나 전 회사 입사하고 얼마 안 있어서 만나기 시작했으니까.”
“뭐어? 야, 대체 몇 년이야 그럼. 와, 미쳤다.”
득달같이 반응하는 민주 덕에 시선을 끌어모으려는 의도가 손쉽게 먹혀들었다.
그 대가로 언젠가부터 멋이라며 끼고 다니던 반지가 커플링이었다는 점, 둘만의 결혼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오갔다는 사실, 똑같이 생긴 사람을 상대로 마음이 생긴 계기까지 모두 털리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폭탄 발언 치고 수습이 괜찮은 편이었다.
????
재광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친구들을 소집한 반면, 의주는 아주 편안하게 두 사람의 소식을 알렸다.
재광처럼 한 달 전도 아니었다. 지난주 수요일, 따로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그냥 야근을 앞두고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툭 던졌다.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되냐?”
“누구 선호? 아님 나?”
“둘 다.”
부지런히 반응한 유현이 이번에도 빠르게 답을 줬다. 그는 “나는 별일 없어” 하며 바톤을 넘기듯 선호를 바라봤다. 선호는 휴대전화를 들어 캘린더 앱을 확인한 다음 대꾸했다.
“나도 괜찮아. 근데 왜?”
갑작스럽게 스케줄을 확인하는 이유가 뭔지 되묻기는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늘 그래왔듯 밥이나 권할 거라 예상하는 게 분명했다.
의주 또한 그랬다. 구태여 뜸을 들이거나 수상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고 예의 그 편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다음 주에 이사하잖아.”
“아, 집들이….”
“신혼집 오픈 파티 할 거야.”
“에?”
의도를 지레짐작하고 끼어들었던 유현이 답지 않게 새된 소리를 내며 굳었다. 밥을 한술 크게 뜨다가 타이밍을 놓친 선호는 한 박자 늦게 벙찐 안색을 하며 귀를 의심했다.
“신, 신혼 뭐?”
“신혼집 오픈 파티.”
“야.”
“그렇다고 케이터링에 합주단까지 불러서 스탠딩 파티 거하게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밥이나 먹으면서 ‘우리 이런 사입니다’ 공표하는 정도니까 부담은 안 가져도 돼.”
식사를 멈춘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으나 의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일 오전에는 회의가 있고 오후에는 미팅을 가야 한다 얘기하듯 태연한 낯으로 말을 잇는다.
“너희도 알겠지만 내가 우리나라에서 제도적으로 예식 올리고 이런저런 서류 내고 그럴 입장은 아니잖아? 그래서 의미 부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와서 증인이나 좀 서달라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설명이었으나 두 사람은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같이 뒤통수 거하게 맞은 안색으로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한없이 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사실 예식이나 증인 따위의 표현 정도는 이토록 놀랄 만한 사유가 되지 못했다. 의주의 성 지향성은 진작 알고 있었고, 그라면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혼집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여를 의주와 함께 살던 이가 누군지 잘 아는 탓이다. 조용한 주변 공기 사이로 선호와 유현의 머리가 바삐 굴러가는 소리가 섞여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너 이사 준비한다던 게….”
먼저 생각을 정리한 쪽은 선호였다. 그는 잔뜩 조심스러운 말투로 운을 뗐다. 비록 말끝은 흐렸으나 의미는 다 전달된 셈이라, 의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집으로 이사 갈 준비.”
“그래서 콕 집어 냉장고 사달라고 했던 거냐?”
“혼수 하나 정도는 해줄 사이잖아, 우리.”
실험 카메라 대본 같은 소릴 지껄이면서 세상 태평한 태도였다. 그에 선호가 말을 잃자 그 틈에 유현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 재광 씨랑 같이 살던 거 정리하고 새집으로 들어간다는 거지?”
그렇게 물으면서도 전혀 예상을 못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설마 하는 마음에 확실히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의주는 곧바로 사실관계부터 바로잡았다. 한 겹의 쿠션 장치도 없이.
“아니. 같이 들어가는 거지. 신혼집으로.”
‘새집’을 ‘신혼집’으로 정정하는 목소리에 은근한 힘이 실렸다. 비로소 다음 주말 일정의 내막을 알게 된 유현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고, 선호는 냅다 “미친놈아!” 하고 외쳤다.
“재광 씨도 원래 그쪽이었어?”
급히 정신을 차리고 묻는 말이 득달같았다. 유현도 말을 얹지는 않지만 눈길로 같은 질문을 쏴댄다.
아마 지금쯤 둘은 상당히 혼란스러울 거였다. 재광의 팔뚝을 조물대던 의주의 손길부터 만취해 실려 가다 대뜸 입을 맞춘 그날까지. 갖가지 영상이 머릿속에서 뒤섞일 게 뻔했다.
그저 건실한 청년, 미더운 직원으로만 알았던 재광이 본래 게이였다면 그간 자신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과 우려를 안고 있었나 싶어 허무하기도 할 터였다.
그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데, 의주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양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아니. 근데 내가 워낙 매력이 사방으로 뻗치는 인간이잖아. 그래서 결국 이런 해피엔딩을 만들어버린 거지.”
“너 이 새끼, 그래서 그때 재광 씨 데려와야 된다고 그렇게 우겨댔냐?”
직접 재광을 설득해 재입사를 이끈 선호가 두 번 뒤통수를 맞은 얼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있는 개발자가 필요한 김에 겸사겸사.”
받아치는 의주의 목소리는 한없이 당당했다.
덕분에 두 사람만 계속 롤러코스터를 탔다. 아무리 서류 절차가 없대도 절대 가벼운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며 설교를 하다가도 어떻게 지금까지 속일 수가 있냐며 버럭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잘살라고 덕담을 해주다가도 “아니 근데 진짜!” 하며 경악했다.
의주는 그 사이에서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속으로는 저 혼자 있을 때 얘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광과 다정하게 둘의 관계를 터놓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봤었지만, 실제로 그랬더라면 이상처럼 아름다운 그림은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충격을 다 해소한 다음 중요한 날에는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편이 서로의 체면에 더 좋을 거란 판단이었다.
의주는 두 사람의 질책도, 우려도, 격려도. 모두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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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다시 지금 아파트. 각자의 방식으로 한차례 당황을 넘긴 탓인지 저녁 식사 분위기가 꽤 좋았다.
“저희 처음 광고할 때 연우 씨한테도 제안했었는데. 알고 있었어요?”
“아… 네. 알았는데, 그때 영화 때문에 스케줄을 뺄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죄송은요. 저희도 안 될 거 아는데 그래도 말이나 해보자 했던 거예요.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서 한 얘기고, 일은 나중에 같이 할 기회가 또 생기겠죠.”
이곳에 모인 이유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중이었다. 유현과 연우의 대화를 듣던 민주가 불쑥 끼어들어 “개발자는 안 필요하세요?” 하고 묻는 바람에 말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민주의 어필에 관한 대답은 유현이 선호에게, 선호가 의주에게, 의주가 재광에게 턴을 넘기고서야 “회사에서까지 보지는 말자” 하는 말로 끝맺음 됐다.
민주는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돌연 질색했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한바탕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정리되는 듯싶었다.
“식사 끝낸 거 같은데 이제 정리하고 2차로 넘어가자. 와인 괜찮지?”
의주는 웃음소리가 막 잦아드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주의를 환기했다. 가장 먼저 수저를 내려놓은 연우는 물론이고 조금 전에 그릇을 막 비운 선호까지 모두가 긍정적인 사인을 보낸다. 그에 집주인들이 일어나 분주히 테이블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다들 손을 거든 덕분에 정리가 빨랐다. 빈 그릇이 즐비하던 식탁 위에는 어느새 카나페와 올리브, 과일 같은 안주들이 자리했고, 와인 잔이 테이블 매트마다 하나씩 놓였다.
의주는 꽤 그럴싸한 폼으로 손수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모든 세팅을 마친 뒤에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건배하기 전에 오늘의 하이라이트 예물 교환식 있겠습니다.”
금방 돌아온 그의 손에는 웬 상자가 두 개 들려있었다. 녹색 상자에 금장으로 박힌 로고는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유명 브랜드의 것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예물 덕에 이후의 식순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어떤 모델을 골랐는지 궁금해하느라 절로 관심이 모여들었고, 박스를 개봉한 다음에는 주변에서 먼저 서로 채워주라며 두 사람을 부추겼다.
먼저 시계를 집어 든 쪽은 의주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재광의 왼손을 당겨와 시곗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난해 나눠 낀 커플링을 지나친 시계가 금세 손목에 안착한다.
“….”
당연하게도 다음은 재광의 차례였다. 조금 전 자신의 손목에 걸린 것와 다이얼 색상만 다른 시계를 꺼낸 그는 슬며시 시선을 들어 의주를 봤다. 순간 눈이 마주친 의주가 장난기 없이 담백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김재광 눈빛 봤어요? 세상에 웬일이야.”
한쪽에서는 민주가 도원의 팔뚝을 찰싹 치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정도는 그냥 지나칠 만했다. 재광은 차분히 의주의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이제야 오늘 모임의 의미가 상기되는 듯했다. 시계를 나눠 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자 기다렸다는 양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다 같이 부딪치는 와인 잔의 소리도 유난히 영롱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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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늦지 않게 돌아가고, 뒷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거품을 풍성하게 푼 욕조에 몸을 담갔다.
의주가 직접 발품을 팔아 들여놓은 대형 욕조였다. 재광이 의주의 가슴에 등을 온전히 붙여 기대자 옆구리를 파고든 팔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어깨 위로는 턱이 닿고, 목덜미로 숨결이 흩어졌다.
“기분 어때?”
나직하게 속삭이는 의주의 목소리가 습한 공기 속에 잔잔히 울린다.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뜬 재광은 눈짓으로만 곁을 돌아보며 입술을 뗐다.
“솔직하게 아니면 듣기 좋은 말로.”
“둘 다. 대신 솔직한 거 먼저.”
“아무렇지도 않은데.”
“야.”
조금의 고민도 없이 쏟아지는 솔직한 소감에 어깨 위로 얹은 고개가 떨어져 나갔다. 실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반응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린 재광은 가볍게 떨리던 가슴을 진정하고 재차 운을 뗐다.
“솔직히 형이랑 몸만 부대끼기로 했을 때, 그때만 해도 나는 잠깐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랬어?”
“어. 이러다가도 내가 다시 여자친구 사귀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없던 일 되고 그럴 줄 알았지. 살다가 크게 한 번 하는 일탈 같은 건 줄 알았어. 근데….”
“응.”
“사귀기로 하면서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거 같애.”
“어떻게?”
“몰라. 사귀면서는 한 번도 내가 다시 여자 만나거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거나 그런 상상 해본 적 없어. 잠깐 이러다 지나갈 관계라고도 생각 안 해봤고.”
“확신이 있었어?”
“그렇다고 확 느낀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무의식중에는 그런 게 있었나 봐.”
짓궂은 기색을 지우고 조곤조곤 늘어놓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재광이 말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하는 틈에는 맑은 물결 소리가 끼어들었다.
의주가 재광의 허리를 더 단단하게 끌어안느라고 그랬다. 멋대로 흔들리던 수면이 다시 잠잠해질 즈음, 재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귀고 나서는 너무 자연스러웠어.”
“뭐가.”
“우리가 별일 없이 몇 년을 만난 것도 그렇고, 같이 살게 된 것도,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다. 그냥 다 때가 돼서 그렇게 된 거 같았어.”
“….”
“그래서 지금도 그냥 그래.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 같아서 특별히 흥분되고 그러진 않아. 오히려 맘이 편해.”
재광의 허리를 둘러 안고서 뒤통수만 지그시 내려다보던 의주가 기어이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표현에 박한 편이면서도 분위기를 타면 곧잘 속내를 터놓는 재광이 그의 눈에는 퍽 사랑스러웠다.
비록 소설이나 영화 속 대사처럼 유려하고 멋들어진 고백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꾸밈이 없어 더 진솔하게 들리는 맛이 있는 거다.
“솔직하게만 얘기할 줄 알았는데 듣기도 좋네.”
흘리듯 말한 의주는 물기 어린 목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뗐다. 재광이 온전히 고개를 돌려 돌아볼 때는 두 입술이 진득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축축한 마찰음이 들리고 나서는 일순 수면이 요동쳤다. 허리에 두른 팔을 풀어낸 재광이 뒤로 돌아앉은 탓이다. 무릎을 접어 의주의 허벅지 위로 올라탄 그가 지그시 눈을 맞춘다.
“고마워.”
맥락 없는 인사에 의주가 눈썹을 가볍게 달싹였다.
“뭐가?”
“오늘, 분명히 형이 바라던 것도 있었을 텐데 나한테 많이 맞춰 줬잖아.”
불과 몇 시간 전, 친구들 앞에서 시계를 교환하며 관계를 공고히 한 일련의 과정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편안한 식사 자리와 간단한 예물 교환은 어디까지나 재광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에 멎어 있었으니까.
오늘 일정을 준비하면서 딱히 의견 차이를 보이거나 갈등을 빚은 적은 없지만, 재광은 잘 알고 있었다. 의주라면 소수 정예만 초대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행사를 열 수 있었단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전적으로 재광을 배려하는 차원이었을 테다.
“어차피 이사 준비로 바빠서 뭐 더 하기도 어려웠어. 알잖아.”
가볍게 받아치는 대꾸 또한 그랬다. ‘광아 네 애인 배려심이 이 정도야’ 하며 으스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부러 한 수 접어주는 것이다.
재광은 그러는 속내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둘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을 일방적으로 한쪽에 맞췄을 때 기준이 된 사람이 느낄 미안함을 덜어주고 싶은 거다. 그렇게 짐작하면 물씬 밀려오는 감동은 물론이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의주가 좋았다.
“김재광 또 반했네, 또.”
채 감추질 못하고 드러나는 표정을 읽은 의주는 금세 여유를 부렸다. 지그시 눈을 바라보던 재광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입술에 먼저 입 맞췄다.
다리 위에 올라앉은 터라 재광이 위에서 의주를 짓누르는 모양새였다. 재광은 양손으로 의주의 뺨을 감싸고서 힘주어 입술을 눌렀다. 도로 고개를 물릴 때는 빈틈없이 맞물렸던 두 입술이 아쉬운 기색으로 떨어졌다.
“….”
“….”
들리는 소리라곤 재광의 움직임에 파동이 인 물소리뿐이었다. 잠시간 시선만 주고받던 차, 의주가 유연하게 눈썹을 달싹이며 시그널을 보낸다.
별다른 말이 없는 건 재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꼭 닮은 눈매를 접어 푸스스 웃기만 했다. 그러자 곧바로 젖은 뒷머리에 커다란 손이 파고든다.
제자리를 찾아가듯 맞물리는 입술 아래로 재광의 팔이 의주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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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부부가 되기로 선언하고 맞는 첫 아침이었다. 늘 그랬듯 먼저 눈을 뜬 의주는 곁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재광의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리고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곳곳에는 간밤에 재광이 남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가슴팍에는 불긋한 울혈들이, 등에는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욕실에 막 들어선 의주는 마치 훈장이라도 되는 양 뿌듯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몸을 훑어봤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물을 틀었다.
재광과 같이 산 지는 1년도 훌쩍 넘었지만 어쩐지 색다른 아침이었다. 어제를 기점으로 관계가 한층 깊어졌다는 생각 때문일까. 유난히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의주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샤워를 마쳤다.
“….”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멀뚱히 서 있었다. 천천히 굴러가는 눈동자가 생각에 골몰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려준다.
꽤 진지한 안색이었으나 심각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래도 둘 사이에 기념할 만한 아침인데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서로 좋아 죽겠는 상황이니 마음껏 물고 빨고 할 수 있는 집이 더 알맞은 데이트 장소가 될 것 같았다. 일단 재광을 깨우고, 그가 씻는 동안 멋들어진 식사를 준비하면 시간도 딱 들어맞을 듯했다.
결정을 내린 의주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매트리스 끝에 걸터앉았다. 의주가 막 눈을 떴을 때와 같은 자세인 재광은 기척도 못 알아차리고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중이다. 의주는 아까보다 더 진득한 손길로 재광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확실한 자극에 재광의 속눈썹이 작게 떨렸으나 그게 다였다. 곧바로 미동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의주의 손이 재광의 목 아래로 내려가 꼼꼼하게 덮은 이불을 확 젖혔다.
그 바람에 의주 못지않게 화려한 자국이 남은 상체가 훤히 드러난다. 눈동자만 굴려 재광의 몸을 살펴보는 의주의 얼굴에 언뜻 짓궂은 기색이 감돌았다. 선명한 자국을 따라 또다시 살갗을 물어볼까 한 거다.
하지만 이내 장난칠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춰 재광에게 다가갔다. 좀처럼 뜨일 줄 모르는 눈을 지나 귓가에 닿은 입술이 마침내 달싹인다.
“여보, 일어나.”
다정한 웃음이 어린 목소리가 나직이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Geek&Hot(긱앤핫)』외전 2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