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깜짝 손님
“와, 밥을 이렇게 여유 부리면서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진짜요. 이제 좀 살겠네.”
보안팀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료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재광은 “그러게요” 하고 가볍게 호응하며 건물 로비로 발을 들였다.
서버 확장과 보안 시스템 재정비 이슈로 폭풍이 몰아친 다음이었다. 상황이 정리되고 처음 맞는 금요일.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다 죽어가던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그득했다.
휴식시간 90분을 꽉 채워 쓰고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늘어지게 잠을 자겠다, 쇼핑몰을 한바탕 휩쓸겠다…. 기대에 부풀어 이번 주말 계획을 터놓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이다. 턴을 넘겨받은 황 주임이 착실히 대답하다 말고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저는 주말 내내 게임… 어? 안녕하세요.”
홀수 층 운행 엘리베이터 앞에 낭만인 주요 인사들이 서 있었다. 황 주임을 따라 고개를 숙이는 동료들 틈에서 재광도 같이 묵례했다.
“식사하고 오는 길인가 봐요.”
“네. 대표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인사치레로 시작된 대화는 어색하지 않게 이어졌다. 선호가 먼저 최근 바빴던 보안팀 사정을 언급하며 격려의 말을 건넸고, 직원들 또한 한 차례 격무가 마무리된 근황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조만간 제가 회식비 거하게 한 번 쏠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저희는 뭐든….”
“대표님, 소고기요!”
화제가 회식 메뉴로 바뀔 무렵에는 전에 없는 활기가 돌았다. 단순 메뉴에 그치지 않고 특정 식당까지 지목하며 열변을 토하느라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모두가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조용한 이들은 의주와 재광 둘뿐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눈길만 주고받던 중, 의주가 문득 입술을 뻐끔댄다.
이따 커피?
볼륨은 0이었으나 재광에게는 주변의 어느 말소리보다 또렷하게 들리는 한마디였다. 작게 고개를 저은 그는 똑같이 입 모양으로만 답했다.
회의 있어.
저쪽에서도 어렵지 않게 해석한 게 분명했다. 아쉬운 기색을 내비친 의주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딱 그 타이밍에 황 주임이 끼어들었다.
“두 분은 무슨 비밀 얘기를 그렇게 하세요?”
딱히 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니지 싶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다기보다는 둘만의 세계를 정립한 행위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뉘앙스였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당사자들이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또다시 말이 날아든다.
“가만 보면 이사님은 김 대리를 엄청 예뻐하시는 거 같아요.”
재광은 괜히 뜨끔해 시선을 내리깔았으나 의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들켰네. 제가 원래 잘생긴 사람 좋아하거든요.”
“이사님이랑 닮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요.”
여의주표 자신감에는 일순 웃음이 터졌다. 의주는 제가 틀린 말을 했느냐며 여전히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졸지에 민망해진 재광만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머지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나, 둘씩 발을 떼며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환기된다. 재광은 그제야 평소의 덤덤한 낯빛을 되찾았다.
????
오후 세 시. 재광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평범한 금요일이었다면 의주와 인근 카페로 마실을 나갈 시간이지만 일정상 그렇게 됐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근무 중 밀애는 어디까지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를 전제로 하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주 평균 2-3회 가량을 밖에서 따로 만났지만 근 한 달은 보안팀의 빡빡한 스케줄로 인해 각자 업무에만 몰두했다.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다시 잠깐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회의가 바빴던 지난 1개월을 정리하는 시간인 탓이다.
각자 맡아 처리한 업무를 보고하고 마무리하는 게 주목적이라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틈틈이 농담이 오가고 웃기도 하는 가벼운 무드라 모두가 부담 없이 임하는 중이었다. 회의는 적당히 여유를 부리면서도 늘어지지 않게 진행됐다.
“이번에 업무 조정하면서 인수인계 받은 건은….”
그런데 막 순번을 맞은 직원이 운을 뗀 찰나, 돌연 흐름이 끊기고 만다.
유리문을 두드리는 단단한 노크 소리가 원인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열린 문틈으로는 의주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님, 여긴 어쩐 일로….”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도하던 팀장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사무실도 아니고 유동적으로 이용하는 회의실이건만 의주가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몰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아, 지나가다가 1팀이 회의실 잡아놓은 거 보고 잠깐 들렀어요.”
의주는 늘 그렇듯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고생했는데 커피라도 한 잔씩 하시라고.”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는 캔으로 실링 된 커피들이 담겨 있었다. 의주가 책상 위로 캔들을 줄 세워 올려놓자 사방에서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하는 인사가 터져나온다.
“커피 안 드시는 분들은 생과일 주스 있으니까 그거 드세요.”
일사불란하게 음료를 챙기는 손들을 보며 덧붙일 때는 누군가가 “와 이사님 센스” 하며 감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의주는 사양 않고 우쭐거리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직원들을 훑어봤다.
방황하던 눈길은 재광을 찾아내고서야 멎었다. 막 캔을 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켠 재광이 가만히 시선을 맞춘다.
“….”
“….”
건네는 말없이 쳐다만 보던 재광은 곧 가볍게 웃어버렸다. 의주도 그를 따라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재광이 의주에게 사무실 출입금지령을 내린 것도 벌써 반년은 지난 이야기였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부가 흐지부지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융통성이 생겨났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의주는 요즘처럼 회사에서 재광을 보기 힘들 때 한 번씩 보안팀에 방문했다. 격려와 응원을 빙자해 간식거리를 사 들고서였다.
그리고 정말로 대외적인 명분에 충실하게 굴었다. 스릴을 즐긴답시고 대범한 스킨십을 행하지도 않았고, 사심을 그득 드러내며 재광의 곁만 맴돌지도 않았다. 딱 지금처럼 눈도장이나 찍는 게 다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재광도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의주를 내심 반가워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웃어버리고 마는데, 팀장이 불쑥 의주에게 음료를 권한다.
“이사님도 드시죠.”
“아, 그럴까요?”
의주는 마다하지 않았다. 곧장 남은 생과일 주스 하나를 집어 들더니 경쾌하게 캔을 딴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재정비 건은 이제 마무리된 거죠?”
“네. 오늘 진행 사항들 다 체크해서 다음 주에 최종 보고 올릴 예정입니다.”
“그래요. 다들 수고 많았어요.”
“아뇨, 뭘요.”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다. 제법 의젓한 상사의 모습으로 몇 마디 주고받던 의주는 별안간 “근데 그러면…” 하고 말끝을 흐렸다. 잘린 말허리는 조금 뒤 이어졌다.
“금요일이고, 고생하던 것도 다 털었는데 오늘 회식해요? 아니면 각자 휴식?”
“그동안 야근하면서 질리도록 봤는데 이제 좀 거리를 둬야죠. 오늘은 무조건 해산이에요.”
아마 처음부터 이걸 확인하러 왔지 싶었다. 팀장의 확고한 대답에 의주의 얼굴이 활짝 핀다. 그는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걸 보여주듯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탁월한 선택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 테니까 회의 마저 하시고,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오늘은 꼭! 정시 퇴근들 하시고.”
인사를 건네며 팀원들을 둘러보던 시선은 마지막으로 재광에게 머물렀다. 재광은 가벼운 미소를 걸고 묵례하며 보통의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때, 의주가 불시에 윙크를 날렸다.
그가 문을 향해 돌아서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재광이 눈 한 번 감았다 떴다면 놓치고 말았을 만큼 재빠른 시그널이었다. 순식간에 열렸다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재광은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영영 적응이 안 될 줄로 알았던 행동이었으나 이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재광은 질색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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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의 당부대로 정시 퇴근을 한 금요일 저녁은 평화로웠다.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오붓한 식사를 했고, 얼마 전 개봉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영화도 봤다.
집에 돌아와서는 감자칩을 안주 삼아 시원한 캔맥주도 마셨다. 딱 기분 좋게 열이 오를 무렵의 샤워가 얼마나 개운한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 좋다.”
침대에 막 눕는 재광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편한 자세를 찾으며 몸을 들썩일 때마다 갓 말린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부드럽게 흩어진다. 한 차례 부스럭대던 소리는 재광이 천장을 보고 누워 온몸을 이완한 뒤에야 잦아들었다.
“나도.”
한 박자 늦게 침대 위로 올라온 의주에게서도 막 씻은 티가 역력히 났다. 그는 반듯하게 몸을 뉘는가 싶더니 곧장 옆으로 돌아누워 재광을 봤다. 기척을 느낀 재광도 슬쩍 눈동자를 굴려 의주와 시선을 맞췄다.
이후의 움직임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긴장이라곤 없이 사지를 늘어뜨렸던 재광이 의주 쪽으로 빙글 돌아 단박에 품을 찾아 들어가고, 의주는 재광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같은 회사 다니니까 좋긴 하더라. 그렇게 바쁜데도 틈틈이 얼굴 챙겨 볼 수도 있고.”
재광의 머리 위를 맴도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예전 같았으면 통화나 겨우 했을 텐데” 하고 덧붙이는 말에는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재광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한동안 만나기도 힘들었을 텐데 같이 살기까지 하니까 못 볼 걱정은 안 했네.”
“역시 여의주. 좋은 것만 권한다니까.”
바쁜 와중에도 짬 내 볼 수 있었던 공을 본인에게 돌리는 말투가 의기양양했다. 그러면서도 “결정은 내가 했는데?” 하는 재광의 반박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빨랐다.
“아 그치. 우리 김 대리 결단력도 칭찬해줘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을 감싸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잘했어, 잘했어” 하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자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만 재광이 고개를 든다. 의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낚아챘다.
장난기 어린 눈길이 두 얼굴 사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간간이 터지는 웃음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멎을 즈음에는 어느덧 장난스러운 빛도 자취를 감췄다.
“고생 많았어.”
의주는 한결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까지도 눈을 마주하고 있던 재광이 슬며시 입매를 올려 웃었다.
“형도.”
짤막한 대답 끝에는 곧장 입술이 따라붙었다. 의주가 눈가에 키스하자 재광이 반사적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가 뜬다.
간지러워서 그렇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광은 의주를 향해 고개를 들고서 두 눈을 모두 감아버렸다.
이 이상을 해도 좋다는 뜻이다. 빠르게 의미를 해석한 의주의 손이 재광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닿을 때, 재광의 팔이 제 앞의 단단한 상박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나른하기만 하던 이전의 분위기와 달리 조급한 키스였다. 살갗의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입술을 가른 의주가 혀를 깊숙이 밀어 넣고 예민한 점막부터 훑기 시작한다. 재광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모아 제 입안을 헤집는 살덩이를 빨았다.
재광의 호응에 의주가 빠르게 반응했다. 목 뒤를 감싸던 왼손이 포슬포슬하게 잘 마른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거칠게 헤집는다. 깊게 파고드는 움직임에 혹여 재광이 밀려날까 봐 뒤통수를 고정하는 힘이 상당했다.
다른 한 손도 아주 부지런히 움직였다. 혀끝으로 축축한 점막을 건드리고 혀를 얽는 동안 오른손은 지체 없이 티셔츠 안을 파고들었다. 옆구리에서 시작해 미끄러지듯 등허리로, 그리고 날개뼈까지.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 넓게 마찰했다.
“….”
“….”
빈틈없이 맞물린 입술은 조금 뒤 떨어졌다. 재광의 등을 꼼꼼하게 매만지던 의주의 손이 다시 옆구리를 타고 넘어와 가슴께로 향할 무렵이었다. 차오르는 숨에 크게 부푸는 흉부를 고스란히 느낀 의주가 잠시 호흡을 가눌 시간을 준다.
의도를 알아차린 재광은 곧게 시선을 맞추면서 가쁜 숨을 토했다. 그러고는 안정된 호흡을 찾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급해?”
몰아붙이는 대로 받아주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급하다 싶었던 모양이다. 냅다 밀어 넣는 혀라든가, 옷 안으로 들어가는 손길에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라 당사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주는 웃음기 어린 물음에 단호히 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조금의 공백도 두지 않고 빠르게 받아치는 말이었으나 목소리만은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게, 꼬박 한 달이었다. 낭만인 서버 확장과 그에 따른 보안 시스템 재정비로 바빴던 기간이 말이다. 재광이야 실무진이니 더 얘기할 것도 없고, 의주 또한 총괄 책임자로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더랬다.
다행히 한집에 살고 한 회사에 다니는 터라 얼굴 볼 걱정은 없었던 게 맞다. 하지만 그 이상을 시도할 엄두를 못 냈던 것도 맞았다.
지난 한 달간은 늦은 시간 침대에 누워 나누는 키스가 전부였고, 거기서 더 해 봐야 체력 소모를 최소화해 손으로 급히 한 발을 뽑아내는 정도가 다였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으나 섹스에 인색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쉬워 마땅한 공백이었다. 다급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낸 의주는 재광의 등을 더 당겨 안았다.
“나만 급해?”
코앞에서 들끓는 눈빛을 하고 묻는 말에는 재광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아니. 나도.”
이렇게 된 이상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마침표가 떨어지기 무섭게 의주가 재차 입술을 맞댔다. 도톰한 살이 눌리도록 꾹 붙였다가 떼며 아랫입술 할짝이자 재광이 주춤 고개를 물린다.
“…그래도, 좀만 천천히 해.”
속삭이듯 하는 당부에 의주가 이마를 콕 부딪쳤다.
입 밖으로 내는 대답은 없었지만 분명한 수긍의 표시였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도로 맞물리는 움직임이 직전보다 훨씬 유했다.
의주는 입술만을 이용해 재광의 살갗을 가볍게 물었다가 놨다. 탄력 있게 제자리를 찾은 아랫입술은 곧 다시 의주의 입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재광 또한 입을 작게 벌렸다가 오므리며 맞닿은 살갗을 감쌌다. 서로 물고 물리기를 몇 차례. 의주가 입술 바로 안쪽의 점막을 타고 매끄럽게 들어가 다시 한번 살덩이를 자극했다.
두 혀는 부지런히 얽히고설켰다. 두 사람이 맞붙은 경계를 마음껏 넘나들며 온기를 나눈다. 금방이라도 엇나갈 듯하던 혀끝이 뿌리를 감싸고 서로를 옥죄면서 수많은 돌기가 부딪혔다. 맞닿은 입술 새로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쉼 없이 샜다.
“응, 흐으… 읍!”
그리고 그 사이로 달뜬 신음도 함께 샜다.
혀로 온 입안을 헤집듯 집요하게 맨살을 탐하던 의주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찰나였다. 손끝이 가볍게 피부를 훑자 재광이 어깨를 파드득 떤다. 아랑곳하지 않은 의주는 더 깊게 혀를 처박으며 재광의 옷자락을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재광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의주는 마주 안던 몸을 바로 눕히고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탔다.
의주가 볼품없이 말린 옷자락을 쥐자 재광이 곧장 양팔을 든다. 머리부터 날개뼈 부근까지를 살짝 띄워 탈의를 돕는 동작이 능숙했다.
아랫도리도 마찬가지였다. 재광이 엉덩이 아래를 가볍게 들어준 덕에 바지와 속옷을 벗기기가 훨씬 수월했다.
“….”
빠른 속도로 나체가 된 재광의 위에서 의주는 잠시 침묵했다. 다급하게 옷을 벗겨내던 직전과는 다소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그 탓에 젖은 숨을 몰아쉬던 재광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제 위에 들어앉은 의주를 봤다.
의주는 별다른 표정 없이 재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찬찬히 반쯤 감기다가 도로 느릿하게 올라온다.
재광의 나신을 훑는 눈길이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재광이 마른침을 삼키자 그마저도 놓치지 않은 의주가 당장 상체를 낮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흣….”
“광아 너 되게 운동이 잘 받는 몸인가 봐.”
뜨거운 숨결을 불며 나직이 읊조리는 말에는 절로 눈살을 찌푸린 재광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고 받아쳤다. 의주는 울대 옆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 맞춘 뒤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한 달을 쉬었는데도 아직 탄탄하잖아.”
말을 마치고는 목선을 타고 내려가 쇄골 아래 피부를 가볍게 씹었다.
그렇다고 마냥 실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었다. 의주는 진심으로 재광의 몸에 감탄하고 있었다.
재광이 운동을 시작한 건 반년쯤 된 이야기다. 낭만인에 재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관계의 시작부터 체력을 지적하던 의주가 기어이 그에게 운동을 권했다.
이전에도 몇 번 권유한 적은 있었으나 귓등으로 흘리고 말던 재광이 어쩐지 그때는 덥석 물었더랬다. 아마 주변 환경을 바꿔 새 출발을 하는 김에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결심이 섰던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재광은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에 임했다.
그때도 꽤 빠르게 근육이 붙는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을 꼬박 쉬고도 군데군데 근육의 흔적이 남아 있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다 풀렸는데 뭘, …아!”
“그래서 더 좋아.”
빈말이 아니란 사실은 목소리, 말투, 눈빛, 손짓 모든 부분에서 알 수 있었다. 의주는 한 때 제법 단단했던 배를 손끝으로 섬세하게 쓸어 올렸다.
가슴팍을 가볍게 그러쥘 때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탄성 좋은 살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만족감이 마구 상승한다. 의주는 더 참지 않고 가슴께로 입술을 옮겼다.
윗가슴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불시에 유두를 물자 재광이 급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머리 위로 울린다. 의주는 꼭 그를 놀리는 것처럼 혀로 돌기를 튕겼다가 조금 세게 빨아올리며 가슴을 자극했다.
입술이 닿지 않은 쪽은 손으로 집요하게 매만졌다. 볼록 솟은 돌기 주변으로 손끝을 둥글게 굴리던 그는 점차 짙은 피부 안으로 들어가 유두를 가볍게 비틀었다.
“아… 흐, 으읏, 응….”
재광이 허리를 비틀며 신음한다. 목을 긁으며 쏟아지는 거친 숨을 잠자코 듣던 의주는 꼿꼿하게 선 유두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작게 벌어진 재광의 입술 새로 검지와 중지를 물렸다.
순간 재광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으나 그뿐이었다. 재광은 말캉한 입술을 누르며 들어오는 손가락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동그랗게 모은 입술 안 점막이 기다란 손가락을 매끄럽게 빨아들인다. 재광은 마치 다른 무언가를 담은 것처럼 이물을 삼켰다 뱉기를 반복했다. 종래에는 볼 안쪽을 조여 손가락이 드나드는 길을 더 빠듯하게 만들었다.
성심성의껏 손가락을 빨면서 두 손으로는 집요하게 의주를 찾았다. 가슴팍에 머무는 의주의 뒷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기도 했고, 잡히는 대로 쥔 그의 옷자락을 끌어 올려 넓은 등을 매만지기도 했다.
즉, 의주 또한 받는 자극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재광의 상박을 맴돌던 의주는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별안간 몸을 벌떡 세웠다.
“하아….”
재광의 입안을 들쑤시던 손가락이 불시에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젖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진 모습을 눈에 담은 의주는 엉망으로 구겨진 자신의 상의를 벗어 던지고 서둘러 협탁으로 팔을 뻗었다.
조심성 없는 손길에 콘돔 몇 개가 시트 위로 후두둑 떨어졌으나 그런 데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의주는 젤부터 듬뿍 짜내 곧바로 재광의 뒤로 손을 옮겼다.
“…아!”
잡아 벌린 볼기 사이로 손끝을 몇 번 문지르던 의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구멍을 파고들었다. 뒤로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이 오랜만이라 긴장했는지 비좁게 열린 내벽이 선명하게 꿈틀댄다.
의주는 서너 번 뒤를 오가다 이내 안을 꾹꾹 눌러 넓혔다. 손끝이 매끄럽게 밀려들어가며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손바닥이 닿도록 깊숙이 들어갔다 나올 때는 두 손가락을 크게 벌려 입구를 넓혔다.
조급하게 굴던 것치고는 용케 침착한 행동이었다. 의주는 천천히 손가락을 늘려가며 조심스럽게 재광의 뒤를 풀었다.
빠르게 성감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그는 오로지 무리 없이 삽입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느라 직접적인 자극이 늦었다. 손가락이 드나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흡사 물이 튀는 소리가 울릴 즈음이 되어서야 의주가 손끝으로 전립선을 눌렀다.
“아아… 아, 흐읏!”
강렬한 감각에 재광이 눈을 질끈 감으며 탄성을 터뜨린다. 여태 부드럽게 풀어놓았던 뒤는 물론이고 내벽 전체가 급격히 조여들었다.
부러 인근을 맴돌며 다시 한번 스팟을 짓누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훤히 벌린 다리 사이로 허벅지 근육이 길게 서고, 바짝 힘이 들어간 아랫배부터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11자 형태의 복근이 보다 선명하게 솟았다.
“야, 광아….”
홀린 듯 중얼거리는 의주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초점이 나간 눈동자가 진동하며 재광의 전신을 훑는다. 그러면서도 뒤를 비집고 들어간 손은 부지런히 소임을 다했다.
“흡! 흐으, 형, 너무… 아, 아아… 아!”
의도적으로 느끼는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재광의 몸 위로 근육이 솟았다가 사라진다. 의주의 눈에는 그 모습이 미치도록 음란하게만 보였다.
사실 지금의 몸매는 재광이 한창 운동을 하던 시기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원래 은근한 매력이 사람을 더 미치게 하는 법이었다. 손에 감기는 차진 감각은 여전하건만 온몸이 긴장할 때 잠깐 드러났다 풀리는 근육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
속절없이 앓는 소리와 솔직하게 느끼는 표정까지 어우러지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몰아치는 감각에 재광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트를 비틀어 쥐는 동작 하나까지도 의주에게는 엄청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뒤를 들쑤시는 행동에 더욱 속도가 붙는다. 굳은 표정을 한 의주의 눈은 재광의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칼부터 크게 부푸는 흉통을 지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복근, 잔뜩 긴장한 허벅지와 가볍게 곱은 발끝까지를 모두.
그러는 동안 녹은 젤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빠르게 움직이는 의주의 팔에도 힘줄이 선명히 드러났다. 의주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재광을 몰아붙였다.
“형, 잠…깐만, 아아! 나 할, 거, 흐, 할 거 같, 애, 하, 아아…!”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전립선을 눌러대는 통에 정신이 없는 건 재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미 전부터 발기해 아랫배에 바짝 붙어있던 성기가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재광은 강도 높은 자극을 이만 갈무리하고 절정까지 끓어오른 감각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의주는 고집스러웠다. 고개만 한 번 끄덕거리고는 되레 더 피치를 올려버린다.
“읏, 제발… 아, 흣, 아아, 아!”
스스로 앞을 쥘 생각도 하지 못한 재광은 손에 틀어쥔 시트만 비틀어 짜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이내 극렬하게 경련하는 아랫배 위로 농도 짙은 정액이 튀었다.
의주는 바르르 떨리는 아랫배 위로 극명하게 솟았다 가라앉는 두 줄의 선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그런 다음에야 꽉 물린 손가락을 모두 빼냈다.
“…씨발.”
흥분하다 못해 착잡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 틈새로 나직이 욕설이 샌다. 그는 괜스레 천장을 보며 긴 숨을 뱉었다. 다시금 내린 시선이 밭은 숨을 몰아쉬는 재광을 응시했다.
“광아, 엎드려 봐.”
긴장이 막 풀린 재광은 흐린 안색으로 의주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래 지나지 않아 요구에 따랐다. 볼품없이 구겨진 시트를 짚고 일어난 그는 별말 없이 뒤로 돌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일련의 과정이 순순했다. 연신 꿈결처럼 몽롱한 얼굴을 하던 재광은 뭉툭한 귀두가 막 다물린 구멍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감각을 느끼고서야 안광을 찾았다.
“아흑… 흐….”
손가락과 비교할 수 없는 굵기였다. 안을 꽉 채우며 밀고 들어오는 부피감에 재광이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미 한 차례 사정을 한 터라 압박감을 버티려면 평소보다 더한 힘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두 다리가 얕게 흔들리자 떨림을 알아차린 의주가 단번에 허리를 휘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재광은 손쉽게 의주의 뜻대로 움직였다. 의주가 무릎을 모으면 모으는 대로, 직각으로 세운 다리를 당겨 앉히면 앉히는 대로 따라갔다.
“아, 아아, 흣…!”
다만 앓을 뿐이었다. 직전 사정의 여운이 남아 한껏 예민해진 몸은 손길 한 번만 스쳐도 크게 반응했다. 그런 상태에서 의주의 하체가 온전히 맞붙을 만큼 깊게 삽입한 탓에 신음을 뱉으며 벌어진 아래턱이 달달 떨린다.
의주가 아래를 뭉근히 움직이면서는 간신히 매트리스를 짚고 버티던 팔이 그대로 무너졌다. 의주는 맥없이 나동그라진 어깨를 잡아 세우며 열이 들끓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마주 보면 자제 못 할 거 같아서 돌려세웠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해.”
뜻을 알아먹긴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타의로 허리를 세운 재광은 마냥 도리질만 쳤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말을 건넨 쪽에서도 답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재광의 어깨를 꽉 붙든 의주는 다시금 밑을 쳐올렸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자극이 상당한 자세였다. 다리를 빈틈없이 오므려 드나드는 길목이 덩달아 좁아진 탓이 컸다. 꼿꼿하게 선 살덩이가 밀고 들어가는 감각이 몹시도 선명했고, 겹친 하체 덕에 깊이감이 더해져 안을 가득 채웠다.
작은 움직임 한번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대단했다. 살짝만 찔러도 살 기둥을 콱콱 조여 무는 바람에 의주가 숨을 거칠게 내뱉는 빈도가 늘어난다.
달뜬 호흡에 비례해 뒤를 쳐대는 동작에도 점차 속도가 붙었다. 접합부가 맞물릴 때마다 찰박이는 게 녹은 젤 때문인지 땀이 밴 피부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흑, 흡. 아, 아, …아아!”
가속만큼 의주의 허리 짓도 점차 격해졌다. 뒤에서 치받는 힘이 강해지자 배 속을 깊이 찔릴 때마다 재광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그에 개의치 않고 몇 번 더 세게 아래를 박아 넣자 기어이 재광의 상박이 무너졌다.
의주는 풀썩 떨어지는 재광을 내버려 뒀다. 대신 늘어진 등 위로 제 가슴을 맞대고 보다 유연하게 하체를 놀렸다.
아래로는 자비 없이 안을 들쑤시면서 입술만은 상냥했다. 재광의 뒷덜미와 발갛게 손자국이 남은 어깨, 들숨이 가득 찼다 빠져나가는 등에 한없이 부드럽게 입술을 누른다. 손 또한 애꿎은 시트를 구기느라 힘이 들어간 팔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흐… 흐으. 형, 빨리, 흡… 빨, 리, 읏!”
그러나 온몸에 닿는 온기가 재광에게는 좀처럼 감당이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수그려 매트리스 위에 이마를 맞댄 그가 의주를 보채기에 이른다.
그냥 재촉만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팔을 매만지는 의주의 손을 잡아채 재차 피가 몰린 중심부로 이끌었다. 그에 의주도 괜한 심술을 부리지 않고 요구에 응했다.
손으로는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를 주무르면서 뒤로는 뿌리 끝까지 세게 박아 넣자 푹 숙인 재광의 고개 아래로 습한 호흡이 터진다.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에 눈동자를 반 바퀴 빠르게 굴린 의주가 조금 더 세게 뒤를 치받았다.
이제는 길게 빼내지도 않았다. 조금만 뒤로 물렸다가 더욱 깊숙이 밀어 넣기를 몇 번, 의주의 것을 온전히 감싼 내벽이 크게 출렁였다.
“하… 아아, 아, 흑!”
사인을 알아차린 의주의 손에 더한 악력이 실린다. 빳빳하게 허리를 굳힌 재광은 곧바로 두 번째 사정을 했다.
순간적으로 전신을 긴장하며 배 속을 꽉 조이자 한계까지 부풀었던 의주의 성기도 미약하게 꿈틀대며 체액을 뱉어냈다. 의주는 그제야 재광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숨소리가 한껏 습하더라니, 눈가가 온통 젖어 짓물렀다. 그는 발갛게 열 오른 눈꼬리에 입 맞추고는 제 아래 누운 몸을 품 가득 끌어안았다.
????
한바탕 정신없던 일을 쳐내고 맞는 첫 주말은 평화로웠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볕이 제법 진한 아침. 두 사람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몰아치는 스케줄을 정리하자마자 붙어먹느라고 너무 바빴다.
심지어 샤워가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며 다시 씻으러 들어가서는 또 배가 맞는 바람에 새벽 늦게서야 잠이 들었으니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탓에 고른 숨소리만이 평온하게 울려 퍼지는 방 안, 불쑥 소음 하나가 끼어들었다.
“….”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의주가 빠르게 반응했으나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거절하고서 기기를 엎어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재광 쪽으로 몸을 돌려 찰싹 붙는다.
이전보다 더 세게 재광을 끌어안은 그는 도로 잠을 청했다. 잠깐의 소란에 아득히나마 정신이 들었던 재광도 다르지 않았다. 금세 찾아온 정적에 금방 의식을 놓으며 의주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이후에도 의주의 휴대전화가 한 차례 더 울렸으나 그마저도 금방 끊고 나서는 줄곧 고요했다. 그렇게 잠깐의 방해를 뒤로 하고 꿀 같은 늦잠을 자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
“….”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 벨소리와는 다른 소음이 울려 퍼진다.
이번에는 누운 자리에서 해결할 수 없는 차원이었다. 온 집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에 의주가 판판한 미간을 구기며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구 왔어?”
“…더 자, 내가 나갈게.”
눈도 다 못 뜬 재광의 물음에는 가슴팍을 가만가만 도닥여주고 몸을 일으킨다. 크게 숨을 고르며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은 재광은 금세 다시 몰려오는 졸음에 쉽게 굴복했다.
아니, 정확히는 굴복하려고 했다.
“엄마?”
거실에서 넘어오는 의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바짝 들었을 뿐.
재광은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직전까지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눈빛, 졸음기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말끔한 안색으로.
전혀 예상 못 한 돌발 상황이었다. 택배 기사도, 관리실도, 하다못해 잘못 도착한 음식 배달도 아닌 의주 어머니의 방문이라니.
의문이 가득한 의주의 목소리로 추측건대, 그 또한 언질 한 번 들은 적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갑자기 왜 왔어? 연락도 없이.”
“근처 올 일 있어서 반찬 좀 주고 가려는데 전화를 안 받으니까 직접 왔지.”
“아, 그거 엄마였어?”
“그래. 늦잠도 안 자는 애가 이 시간까지 연락이 안 되니까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다, 얘.”
아니나 다를까, 열린 문틈으로 예고 없는 방문에 관한 대화 소리가 넘어온다. 재광은 “일은 무슨. 요새 종종 늦잠도 자고 그래” 하는 의주의 대답까지 듣고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급한 걸음이 방안에 딸린 욕실로 향한다.
의주의 집에서도 재광과의 동거 사실을 알고 있다고는 들었으나 직접 부모님을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친한 후배와의 하우스 쉐어 정도로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이렇든 저렇든 초면에 멀쩡한 꼴을 보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당장 방문만 넘으면 마주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더 급했다. 뻗쳤을 게 뻔한 머리카락을 손 틈새로 빗으며 욕실로 들어선 재광은 빠르게 물을 틀었다.
거의 나갈 시간 10분 전에 눈 뜬 직장인의 속도였다. 엄청난 스피드로 양치와 세수를 마친 재광은 붕 뜬 뒷머리를 마저 빗어 가라앉히며 방을 나섰다.
“묵은지도 조금 가져왔는데. 이거 들기름 넣고 볶으면 진짜 맛있다?”
“그거 재광이 되게 좋아해.”
모자는 식탁 위에 반찬을 늘어놓으며 담소 중이었다. 재광은 쭈뼛쭈뼛 다가서 끼어들 타이밍을 재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저… 안녕하세요.”
조용한 인사에 줄곧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돌아온다. 의주는 빙긋 웃었고, 그의 어머니는 “어머…” 하며 놀란 내색을 했다.
“재광이구나!”
물론 놀란 기색은 잠깐뿐이었다. 익히 들어 익숙한 이름을 불러 본 어머니는 바리바리 챙겨온 반찬도 팽개치고 한달음에 재광의 앞에 다가섰다. 아들과 쏙 빼닮은 생김새를 직접 보니 적잖이 신기한지 꼼꼼하게 얼굴을 뜯어본다.
“세상에, 너무 닮았다. 내가 낳고 까먹은 줄 알았어.”
빤한 눈길로 쳐다보며 내뱉는 목소리에는 감탄이 묻어났다.
하지만 재광의 심정도 다를 바는 없었다. 눈앞의 중년 여성은 누가 봐도 의주의 어머니 같았기 때문이다. 재광이 부모님의 합작이라면 의주는 어머니 혼자 낳으셨대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빼다 박았다.
“아, 말은 좀 편하게 해도 되지? 하도 얘기를 많이 들었더니 나 혼자 그새 정이 들어서 친근하네.”
샐쭉 웃는 표정은 물론이고 여유 넘치는 말씨까지도 모두.
재광은 “네, 저도 그게 더 편해요” 하며 의젓하게 대답했다. 퍽 미더운 태도에 어머니가 잔뜩 흐뭇한 미소를 띤다.
“어쩜. 말하는 것도 너무 착하다.”
아무래도 아들과 함께 산다는 후배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재광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거실 방향으로 한 걸음 크게 물러섰다.
“그럼 둘이 반찬 정리하고 있을래? 나는 집 구경 좀 하게. 인테리어 바꿨다고 한 뒤로는 한 번을 안 와봐서 궁금하다.”
“서재만 좀 바꿨지 다른 데는 그대로야.”
의주는 굳이 둘러볼 필요 없다는 양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둘이 사는데 집 분위기가 다를 거 아냐” 하고 받아친다.
“편하게 보세요.”
그에 흔쾌히 반응한 이는 재광이었다. 대답하며 식탁 쪽으로 다가가자 반찬통을 정갈하게 쌓아 올리던 의주가 그를 돌아봤다.
“씻고 나왔어?”
어머니께도 충분히 살가운 아들이지만 재광에게 건네는 말소리는 한결 더 다정했다. “어” 하는 짤막한 대꾸에 손끝으로 턱을 간질이는 행동에서는 다량의 애정이 묻어나왔다.
저를 만지든 말든 익숙하게 손길을 받던 재광은 정확히 3초 뒤에 흠칫거리며 물러섰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단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고개가 자동으로 손님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돌아갔다.
“어머….”
아직 자리를 지키던 어머니의 눈이 일순 크게 뜨인다. 그리고 이내 온화한 미소가 만면을 채웠다.
“사이가 너무 좋다. 진짜 형제 같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언사에 의주는 당당하게 가슴을 폈고, 재광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웃었다.
“그럼 난 아들들 집이나 좀 둘러봐야겠다.”
그제야 부엌 한편에 멎어 있던 걸음이 멀어졌다.
????
식탁 위에 한가득 늘어놓은 반찬통이 사라진 뒤, 거실에는 재광과 의주의 어머니가 단둘이 남겨졌다.
자다 막 깬 상태로 어머니를 맞이하던 의주가 씻으러 들어간 참이었다. 재광은 뒤늦게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손님 대접을 하며 빈 소파에 앉았다.
“아휴, 아들 집 온 건데 뭘 이런 걸 다. 어쨌든 잘 마실게.”
어머니는 웰컴 드링크를 민망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유리잔에 담긴 음료수를 바로 한 모금 들이켜는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기묘한 기류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생겨났다. 의주와 꼭 닮은 입매 주변에 잔잔히 남았던 미소가 가시고, 기다란 눈매 안으로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구른다.
촉각을 곤두세운 재광은 그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지레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침묵은 짧았다. 잠시간 갈등하는 기색을 비치던 장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문을 텄다.
“…재광이도 의주네 회사 다닌다고 했지?”
“아, 네. 맞아요.”
그는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흘긋 살피는가 싶더니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재광과 거리를 좁혔다. 이어지는 음성 또한 한 단계 낮춘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뭐, 회사 잘 된다고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는데….”
“네.”
“혹시 뭐 사정이 막 그렇게 좋지 않고 그런 거야?”
어쩐지 평범한 질문을 숙고하며 꺼낸다 했더니, 이걸 묻기 위함이었던 듯싶었다. 재광은 별안간 얼빠진 표정이 되어 “예?” 하고 되물었다.
“아니, 보니까 서재며 옷 방이며 빼고 남은 방이 하나뿐이어서 침실도 같이 쓰는 거 같은데….”
“…”
“그렇게 잘 나가는 회사 이사씩이나 되는 애가 방 한 칸 넓힐 여유가 없나 싶어서.”
근심 어린 목소리는 의심의 여지없는 진심이었다. 이번에 재광은 차마 얼빠진 소리로 되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입술만 벙긋거렸다.
어이없게도 여태 간과하고 있었다. 의주와 자신은 한 침대를 쓰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자식 보금자리 궁금해할 부모 마음을 이해한답시고 흔쾌히 집 구경을 허락한 게 얼마나 경솔한 행동이었는지. 재광은 이제야 깨달았다.
“직원들 월급 챙겨주면 남는 거 없어서 지 몫은 못 챙기고 그런 건 아니지?”
그래도 다행히 의주의 어머니는 성인 남성 둘이 한 침대를 쓰는 상황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순간 크게 뛰던 가슴을 애써 가라앉힌 재광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설마요. 형이 아무리 일 좋아한다지만,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걔가 워낙 어릴 때부터 뭐든 혼자 잘하던 애라 은근히 저 힘든 건 얘기 안 한단 말이야.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직원이라 잘은 몰라도 업계에서 되게 안정적으로 꼽히는 회사예요.”
그제야 어머니가 화색을 되찾는다. 그는 재광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물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진짜지? 그럼 다행이고.”
“네, 그럼요.”
“근데, 어른들끼리 한 방 한 침대에서 자면 안 불편해? 그냥 서재 빼고 각자 방 하나씩 해서 책상 넣지, 왜.”
“어… 불편하진 않아요. 그냥, 제가 나중에 들어온 거라 크게 건드리기가 번거로워서요. 되도록 그대로 두려다 보니까….”
이만하면 꽤 훌륭한 기지였다. 중간중간 고민하느라 말이 좀 늘어지긴 했어도 꾸며낸 얘기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상대방 또한 철석같이 믿었는지 꽤 애틋한 눈초리를 해 보인다.
“세상에나, 다 큰 어른끼리 한 침대 쓰면서도 불편하지가 않다니 내가 너무 맘이 좋다.”
“네?”
“나는 우리 의주가 외동이라 그게 항상 안쓰러웠거든.”
“아….”
“근데 또 지는 결혼도 안 하겠다고 못을 박아 놔서 평생 혼자 외로우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좋은 동생이 옆에 있으니까 한시름 놓이는 거 있지.”
재광은 조금 찜찜한 심정으로 웃음만 살짝 흘렸다. 만취해 배 맞고 눈 맞아 동거까지 하게 된 사연을 이렇게 포장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다.
하지만 내심 죄송해할 시간도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 “아, 동생은 결혼 계획이 있는 건가?” 하는 말이 금방 따라붙었다.
“아… 나중에 상황이 되면요. 구체적으로 계획은 없어요.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래? 그래,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상황 따라서 결정하면 되는 거지.”
“네, 뭐.”
“그래도 재광이는 융통성이 있다. 의주는 고집이 대단해서 그런지 스무 살 되자마자 자기는 결혼 안 할 거라고 딱 박아놓고 아직도 굳건해. 절대 기대하지 말래.”
재광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제게는 결혼이 별거냐며 프러포즈를 하던 의주가 집에는 그런 태도를 보였다니.
재광에게는 그 사실이 의외로 느껴져 신기한 건 물론이고, 하나뿐인 아들이 독신주의를 선언했다는데 태연한 어머니의 반응도 신기했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재광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조금 전 저쪽에서 회사 사정을 묻고 싶어 고심하던 것과 꼭 같은 양상이었다.
“왜, 왜.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아무래도 의주가 어머니께 물려받은 건 생김새만이 아니지 싶었다. 귀신같은 눈치 또한 유전인지 운을 떼기도 전에 용건을 들키고 만다.
여기서 굳이 아니라며 내뺄 이유는 없었다. 재광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 저기 그냥… 자식이라곤 형 하나뿐인데 결혼 안 한다고 하는 게 서운하시진 않나 해서요.”
“으음?”
“저희 집은 손주 보고 이런 거 많이 기대하는 분위기라서….”
물으면서도 혹시 실례되는 질문은 아닐까 고민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돌아오는 대답에는 조금의 침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주 닮은 손주 보면 귀엽긴 하겠지. 재광이도 알 거 아냐. 어릴 때 엄청 귀여웠잖아.”
“네? 아… 뭐, 그냥….”
“겸손은. 누가 봐도 귀여울 텐데.”
의주와 붙어 지내며 뻔뻔함이 많이 늘어난 줄로 알았건만 아직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칭찬에는 면역이 모자랐다. 재광은 “그런가요?” 하며 멀건 소리만 하고 말았다. 그러자 곧장 “그렇지” 하는 수긍이 돌아온다.
본론은 그다음 이어졌다.
“근데 손주가 귀여워 봐야 내 새끼보다 더 예쁘겠어?”
“아….”
“나는 내 새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저 좋을 대로 살면 그걸로 됐어. 그래야 행복하지.”
또다시 “아…” 하고 실없는 숨만 뱉는 재광의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스친다.
재광과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민광의 모습이다. 깜짝 독립 이후로는 명절 때 본가에 가는지, 부모님 생신 선물은 어떻게 할 건지 따위의 연락만 간단히 주고받으며 지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확히는 가족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는 민광의 모습이다. 1년에 딱 두 번, 명절 때나 겨우 보는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늘 “결혼은 언제 하냐”, “애 낳으려면 지금도 늦지 않았냐” 하는 말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인사치레 정도에 불과하긴 했다. 그러나 재작년, 집에 소개까지 한 사람과 결혼이 어그러진 뒤부터는 채근하는 성질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민광이 그렇게 부르짖던 장남의 무게이니 알아서 견디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결혼 압박을 다수 목격해온 탓일까. 재광으로서는 의주 어머니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저런 집에서 자랐으니 의주가 이런 어른이 되었구나, 싶으면서도 왜인지 얼떨떨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멍하니 감탄만 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공기를 가른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갓 씻고 나온 의주다. 어머니는 뭘 이렇게 오래 씻느냐며 장난스러운 타박을 하다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배 안 아프고 꽁으로 둘째 봐서 신나게 얘기 좀 했어. 인사하고 가려고 기다리던 건데 재광이 덕분에 재밌었네. 이제 갈게.”
“점심 먹고 가지, 왜.”
“밥은 우리 여보랑 먹어야지.”
“집으로 가? 태워다 줄게, 그럼.”
태워다 드리겠다는 의주의 말에는 재광도 그러라며 거들었으나 어머니는 강경했다.
“됐어, 나도 차 가져왔어. 평일 내내 일하느라 늦잠까지 잔 아들을 기사 노릇 시키면 되니? 쉬어들.”
어차피 반찬만 주러 잠깐 들른 거였다고 덧붙인 그는 혹여 두 사람이 따라 나올세라 서둘러 차 키를 흔들며 현관으로 나갔다.
“하여간 엄마 고집은.”
의주가 고개를 설설 저으며 하는 소리에는 재광이 혼자 작게 웃었다. 생긴 것도, 눈치가 빠른 것도, 고집이 센 것까지 영락없는 모자다 싶은 것이다.
“내 고집이 너보다 더하겠어? 아무튼, 둘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고. 다음에 또 보자, 아들들!”
그 웃음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쾌활한 마지막 인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현관문이 묵직하게 열렸다가 닫히고, 말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안이 일순 고요해졌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엄마가 뭐 이상한 얘기 했어?”
물론 오래가는 적막은 아니었다. 재광의 입가에 남은 미약한 미소를 알아차린 의주가 득달같이 묻는다. 괜히 골려주고 싶은 기분이 된 재광은 부러 묘한 눈빛을 띠었다.
“뭐 이상할 만한 얘기가 있나 보네?”
“이상하다기보단 비범하지, 내 얘기는.”
“아 그러세요?”
재광이 연달아 아리송한 태도를 보이자 의주도 더는 얌전히 답을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냅다 재광을 끌어안고는 등이며 허리를 마구 간질인다.
“뭔데 진짜. 왜 혼자 웃어, 같이 좀 웃자.”
이렇게 되면 재광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품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피해 보려 해도 여의치가 않다. 결국 그는 의주를 마주 안고 너른 등을 두드렸다. 다독여 진정시키려는 의미보다는 항복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아 그만, 그만!”
다급한 터치를 올바르게 해석한 의주는 간지럼을 태우던 손길만 멈췄다. 덕분에 재광과 괜히 포옹만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의주는 당장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서 태연히 물었다.
“말해줄 거야?”
여전히 웃음기 남은 얼굴을 한 재광은 대답보다 먼저 손을 들어 의주의 머리 위로 얹었다. 키보다도 높이 올라간 손이 부드럽게 뒤통수를 타고 미끄러진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를 몇 번. 재광은 뒤늦게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냥, 잘 자랐구나 싶어서.”
“누가. 내가?”
“응.”
예상을 빗나간 얘기였던지 순간 눈을 크게 뜨던 의주가 종래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수긍했다.
“맞지. 잘 크느라 힘 좀 줬는데 어때. 맘에 들어?”
물음표는 재광의 입술에 찍혔다. 입술이 짓눌리도록 꾹 붙였다 떼자 뒤늦게 “어. 맘에 들어” 하는 대답이 흘러나온다.
대답 뒤에는 재광의 온 얼굴에 입술이 닿았다. 의주는 몇 번이고 쪽쪽 거리다가 끝내 다시 돌아와 조금 더 부드럽게 입술을 맞댔다. 여태 어정쩡하게 의주의 등을 맴돌던 재광의 손이 미끄러지듯 허리춤으로 내려가 몸통을 단단히 감싸 안는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당황한 게 언제였는지 벌써 까마득할 만큼, 평온한 주말이었다.